〈 13화 〉13편
높고 듣기 좋은 목소리.
멋모르고 다가서다 급히 물러섰다.
방심했다. 사람 소리에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시체같이 창백한 피부.
입술에 붉게 묻은 액체.
인간처럼 생겼으되 인간은 아닌 존재. 혈귀. 아마도 여성.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단정지어왔다. 충격적인 참극을 겪고 혈귀는 짐승같은 놈들이라 생각했던 거다. 인간의 말을 한다고? 상상도 못했다.
그 결과 옴짝달싹 못하게 돼버렸다.
위험하니 일단은 도망친다. 최소한 도주 가능성이 더 높을 밖에서. 맘먹고 슬쩍 돌아보곤 낙담한 것이다.
쥐떼가 거기 있었다.
출구쪽 바닥은 물론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창가 언저리 구석마다 빼곡하다. 나이든 나무 껍질 위 담쟁이 덩굴처럼 무성하게 돋아난 쥐들.
공기가 팽팽하다. 식은 땀이 난다.
무슨 술수를 부리는지는 모른다. 다만 저 여자 혈귀가 의도하면 곧 죽음에 도달한다. 명확하다.
쥐떼를 다루고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팔걸이가 달린 고풍스런 의자에 앉은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무언가 집는다. 의자 옆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덩어리. 꾸물대는 그 형체의 꼭대기에 맺힌 핏덩이. 그걸 입에 던져넣는다.
쥐떼가 시중을 드는 모습.
또 하나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던져버린다.
날아드는 물체를 피한다. 머리카락이 돋은 살덩이였다.
"흉측한 건 먹기 싫단 말야."
숨이 가빠진다. 떠오른다. 혈귀의 습격. 날아가는 그 아이의 머리. 절망.
두려움에 몇 걸음 비틀거린다.
쐐액
뺨이 화끈하다. 더듬은 손가락에 피가 묻어있다. 쿵 소리가 난 뒤편에서 금방이라도 덮쳐들 것처럼 쥐들이 움찔거린다.
"도망은 안 돼."
단호한 표정의 혈귀는 곧 빙긋 웃었다.
"지금부터 시험을 할 건데"
다리를 꼬며 고쳐앉는 그녀.
"저 치들처럼 금방 죽진 않았으면 좋겠어. 칼은 없으니 살짝 해볼까?"
실내에 널브러진 유골의 주인들은 아마 그런 거다. 저 녀석의 쥐떼에 속절없이 당해서 죽고 만 거지.
살자. 살아야한다.
"후우우"
깊게 숨을 뱉고 집중한다. 파문의 호흡.
전신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하나"
목소리와 동시에
쿵
피했다.
쏘아진 그것은 한 마리의 쥐였다. 아까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녀의 손가락 까딱임에 따라 화살처럼 매섭게 도약한 쥐는 바닥에 처박혔다. 스스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가루가 되어버린다.
다행이다. 비교적 떨어진 곳에서 날아든 덕에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둘"
퍽
하나는 터뜨리고 하나는 피한다.
돌진 경로를 주먹으로 가로막는 식으로. 손이 아리다.
까진 피부에 핏방울이 맺혀있다.
파문의 힘을 두른 주먹인데 다쳤다. 아직 미숙한 탓이다.
"셋"
다다닥
내리꽂히는 쥐들.
되도록 피한다. 못 피할 것만 때린다. 어떻게든 하자.
이를 꽉 물었다.
그녀가 일곱을 외쳤을 때.
좌 우 우상단 셋은 쳐내고 셋은 피했다.
"윽"
다리가 아프다. 오른쪽 허벅지 위를 깊게 파고 지나갔다.
"열아홉"
퍽
뒤를 놓쳤다. 등짝이 찍혔다. 핏물이 눈을 가린다. 재빨리 훔쳐낸다. 다리가 떨려온다. 이리저리 바쁘게도 뜀박질한 때문.
"스물다섯"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다. 피하고 쳐내지 못한 공격은 고스란히 타격으로 남는다.
"서른 셋"
혈귀가 그리 말했을 때, 장내 한가운데에는 피칠갑을 한 소년이 서있었다.
"하악..하아악..."
숨쉴 때마다 바람새는 소리. 멈춰버린 몸뚱이. 간신히 서있는 게 전부.
피투성이가 되버린 채 정신마저 어지럽다.
"..왜...사람을...공격.."
넘어가기 직전의 숨통을 붙잡고 띄엄띄엄 내뱉었다. 도대체. 어째서.
"인간은"
운을 뗀 그녀는 손가락을 빙글 돌리며
"맛있고"
비릿하게 미소짓는다.
"재밌으니까"
괴롭히는게. 갖고 놀다 잡아먹는 일이.
눈 앞이 뿌옇게 흐리다. 분하다.
이곳에 발을 들이고 방심해 다가갔던 그 때 결정났다. 개미지옥에 삼켜진 개미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다 쓰러진다.
애초에 저 놈은 살려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혈귀의 취향따라 단숨에 죽는지, 천천히 죽느냐의 차이일 뿐.
다음은 못 넘긴다.
처참한 장면이 눈에 선하다.
죽는다.
한순간 느려졌다.
혈귀가 입을 벌리고 손을 휘젓는다.
쥐 수십 마리가 뛰어오른다.
쥐 하나하나 또렷하다.
날카로운 이빨, 발톱, 찌꺼기 붙은 주둥이.
들이치는 빛줄기 아래 떠있는 먼지 알갱이들.
모두 보였다. 정지해가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