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12/30)
  • 외전 2. 후일(後日)

    “……또 꿈인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엘레나가 눈을 떴다. 잠깐 선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새 꿈을 꿨나 보다.

    “또 그 시절의 꿈이네.”

    최근 들어 지난 삶의 꿈을 꾸는 빈도가 늘어났다. 회귀 이후 복수만 좇던 시절에도 꿔본 적이 없던 꿈을 왜 근래 들어 자꾸 꾸는지 의아했다.

    “심란해서 그런가?”

    며칠 전 엘레나의 부모님이 북부 지방으로 떠났다. 엘레나는 남길 바랐지만 북부 지방이 고향 같다며 부모님은 그곳에서 살길 바라셨다. 엘레나는 서운했지만 두 분의 뜻을 존중해 드렸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자 허전함이 찾아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두 분이 떠나고 나니 어수선했다.

    “일어나야지.”

    엘레나가 침상에서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자 밖에 있던 메이가 들어왔다.

    “밖에 있었어? 힘들게 뭐 하러 그래. 일정 소화만 해도 힘들 텐데. 시중은 다른 시녀에게 맡기면 된다니까.”

    엘레나는 항상 메이에게 미안했다. 외부 일정이 늘어나면서 엘레나의 전반적 스케줄 관리를 메이가 도맡았다. 그러다 보니 엘레나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할 경우가 부기지수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못 말려.”

    엘레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한사코 시중드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쪽으로는 고집이 셌다.

    몸단장을 마친 엘레나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홍차와 빵과 샐러드를 아침으로 먹으며 일과를 체크했다.

    “오전에 학교 개교식이 있는데, 총장 칼리프 님을 대신해 개교사를 맡기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오후에는 노블레스 거리 활용 방안을 위한 간담회가 잡혀 있고요. 수도의 유력 귀족들과 상인들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엘레나가 느긋하게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공가 몰락의 시발점이 된 노블레스 거리는 방치되어 있었다. 살롱과 바실리카 일대가 수도의 중심가로 거듭나면서 귀족들조차 발길을 끊으며 운영이 힘들어진 것이다. 대공가의 자산을 압류한 황실에선 노블레스 거리가 계륵과 같았다. 허물자니 아깝고, 활성화하자니 쉽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메이는 수첩에 적힌 스케줄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이후에 학술원에서 계몽주의 관련 특별 강의가 예정되어 있으시며, 저녁에는 살롱에서 레니에 님의 시 낭송회에 참여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빡빡하네. 아, 오늘 선배랑 점심 약속 있지 않았어?”

    “예, 레스토랑 피에타에서 칼리프 님과 케이트 영애와 선약이 있습니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신기해.”

    “네?”

    “……인연이란 거 말이야. 그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질 거라곤 꿈에도 몰랐거든.”

    처음 칼리프를 통해 케이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 삶에 칼리프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가문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엘레나의 개입으로 칼리프가 자퇴하면서 케이트와의 접점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내심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칼리프가 시간을 쪼개 케이트와 교제하고 있었고 다음 달 백년가약을 맺기로 했다.

    오늘 식사는 결혼식 전, 엘레나가 그간의 고마움을 담아 결혼 축하 선물을 미리 전달하기 위한 자리였다.

    엘레나는 신문을 집었다. 신문은 사교계를 통해서는 접할 수 없는 제국 내외의 소식까지 담고 있다. 더구나 사심이나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사실 위주로 적혀 있어 시대의 흐름을 읽기 적합했다.

    “폐하의 국혼으로 제국이 떠들썩하네.”

    신문의 일면을 장식한 시안의 국혼 기사에 엘레나의 눈빛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시안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황후를 맞이하고 후사를 봐 황실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 지극히 옳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하나, 시안이 황태자 시절에 이미 황태자비 선출식을 거쳤다는 게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황태자비로 유력했던 베로니카는 무단으로 선출식에 불참한 것도 모자라 역모로 처형을 당했다. 중간에 엘레나의 개입이 있었다고는 하나 결론적으로 황태자비 선출식의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렇다고 선출식 당시 근소한 차이로 베로니카에게 뒤지던 라인하르트가의 아벨라 영애를 황후로 올리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국모의 격에 떨어진다는 인상을 준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귀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게 나뉘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시안이 황태자 시절부터 호감을 보이던 L의 이름도 오르내렸다. 신여성이라고 불릴 만큼 기품과 지식을 갖추고 막대한 문화 사교계의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황후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L의 황후 추대에 딱 한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신분이었다. 북부 지방 3국 연합의 귀족 출신이라고 알려지긴 했으나 수도 귀족들은 그마저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핏줄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대대로 긍지를 갖고 순혈을 지켜온 여인이 황후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귀족은 황제 시안이 황후로 앉히겠단 의지를 보인다면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입장을 보였다. 귀족들의 수장격인 대공가와 버킹엄 공작가가 역모로 몰락하며 황권이 강해지자 귀족들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시안의 비위를 맞추려고 든 것이다.

    그러나 시안은 황후 선임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시안과 L의 관계에 의문을 갖는 귀족도 차츰 늘어났다. 어쩌면 시안과 L이 사교계에 알려진 것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그 와중에 제국과 더불어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로이에르 왕국으로부터 국혼 제의가 들어왔다. 상대는 무려 라시드 왕의 삼녀인 아멜리아 왕녀였다.

    제국민들도 한 번쯤은 이름을 접했을 만큼 수려한 미모와 고귀함을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국혼을 추진하기 위해 로이에르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세자 에드먼드까지 제국에 보낼 만큼 열의를 보였다.

    “나비효과인가?”

    엘레나가 기억하기로 이 시기의 에드먼드는 무능력하고 방탕한 왕세자인 형을 대신해서 왕세자로 임명되었어야 한다. 그런 에드먼드가 아직 왕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고 제국의 사절로 온 것부터가 원 역사와 비교해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이 국혼으로 왕국이 얻으려는 건 뭘까?’

    엘레나는 홍차를 음미하며 사고에 잠겼다. 이정표가 없는 현실을 살아가며 나름의 안목으로 정세를 읽고 파악하는 건 그녀에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신경 쓰이세요?”

    “신경이라니?”

    질문의 의중을 읽지 못한 엘레나가 반문했다.

    “국혼이요.”

    “국혼은 국가의 문제고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걸? 신경 쓰이든, 쓰이지 않든 달라질 것도 없고.”

    한때 시안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악연이었지만 두 사람은 분명 부부였고 슬하에 이안이라는 아들도 두었다. 그런 시안에게 국혼이 들어왔고 새로운 배필을 맞이할지도 모르게 됐다. 심란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지난 상처는 그녀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내 바람은 딱 하나야. 누굴 만나시든지 폐하께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어.”

    회귀한 순간 엘레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시안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없는데, 왜 이렇게 뒤숭숭한지 모르겠다.

    ‘어젯밤 꿈자리 때문에 더 그래.’

    엘레나는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사고를 멈췄다. 꿈은 꿈이다. 심란한 건 맞지만 그 때문에 감정을 소비하는 것만큼 한심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엘레나가 방을 나섰다.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려면 게으름을 피울 시간이 없었다.

    “언니.”

    문을 나서자마자 다정한 호칭에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에 수줍음 많아 보이는 영애가 서 있었다.

    “안녕, 루시아.”

    엘레나는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엘레나의 도움으로 열병을 치료한 루시아는 학술원에 복학했다. 엘레나보다 한 살 어린 그녀는 방학 동안 기숙사가 아닌 살롱에 머물고 있었다.

    “벌써 외출하시는 거예요?”

    “그럼.”

    “어제도 늦게 주무셨잖아요. 안 힘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인걸. 힘들어도 재밌어.”

    미소를 짓는 엘레나를 보며 루시아가 눈을 빛냈다. 동경의 눈빛이었다.

    “근데 왜 나와 있던 거야?”

    “그게…… 그…… 언니 안 바쁘면 같이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서요. 근데 괜찮아요. 방해하면 안 되죠!”

    “어쩌지? 지금 나가봐야 하는데…… 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갈래?”

    “가, 같이요?”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엘레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지루할 수도 있긴 한데 힘들면 살롱에 먼저 데려다줄게. 마침 오후에 학술원에서 강의도 있거든.”

    “저 같이 갈래요! 꼭 데려가 주세요.”

    “그럼 같이 가자.”

    엘레나는 흔쾌히 웃으며 루시아와 동행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학술원에 재학 시절 루시아의 이름과 신분을 빌렸던 고마움 때문에라도 이 정도 배려는 일도 아니었다. 살롱을 나와 사륜마차에 탄 루시아는 한껏 들떠 보였다.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런 루시아의 생기는 엘레나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앗! 언니, 저거 뭐 짓는지 혹시 아세요?”

    마차 밖, 엘레나의 시선에 온통 천으로 뒤덮인 공사 현장이 보였다. 규모가 큰 건물은 아니었지만, 부지는 꽤 넓었다.

    “아니. 공사한 지 넉 달이 다 되어가는 거 같은데 여전히 저러네.”

    “왠지 평범한 건축물은 아닐 거 같아요.”

    “짐작 가는 게 있나 봐?”

    “아뇨. 없어요. 그냥 느낌이랄까요?”

    “느낌? 뭐야, 그게.”

    엘레나가 픽 하고 웃었다. 나이는 한 살 차이에 불과했지만 루시아는 자유분방한 소녀 같았다. 활달하고 따뜻했으며 그 나이대만 가질 수 있는 감성으로 세상을 대했다.

    ‘나와 너무 달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엘레나는 그런 루시아가 좋았다. 베로니카의 대역으로 살아오느라 놓친 시간을 그녀를 보며 대신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뭘 짓는 거지? 에밀리오 님 말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지가의 소유라던데…….’

    살롱의 인근이다 보니 엘레나도 건축물에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근처 땅값이 워낙 비싸다 보니 건축을 서두르는 게 일반적인데 유독 저곳이 진척이 더뎠고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루시아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목적지인 수도 남부의 학교에 도착했다. 개교식을 앞두고 마련된 단상 근처에는 입학을 앞둔 학생과 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셨습니까, L.”

    자칼린을 대신해 개교식 행사를 진행하는 교장과 교사들이 뛰어와 엘레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총장이란 직함은 자칼린이 달고 있지만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건 엘레나인 만큼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제가 늦진 않았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정확히 오셨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뒀으니 이쪽으로 가시죠.”

    교장의 안내를 받으며 가는 엘레나의 뒤를 루시아가 바싹 쫓았다. 눈동자를 굴리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루시아가 감탄했다. 학교의 규모와 환경이 학술원 못지않아서다. 덩달아 엘레나를 향한 존경심도 커졌다. 수도에만 무려 일곱 개의 학교를 짓고 무상교육까지 실시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든 걸 L은 보란 듯이 해냈다.

    엘레나가 학교를 둘러보고 오자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학부모까지 합치면 그 수가 무려 수백에 이를 만큼 많았다. 개교사를 매끄럽게 진행하던 교장이 엘레나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엘레나가 단상 가운데 서자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와, 평민들이 귀족을 이렇게 반기는 건 처음 봐.”

    열광하는 제국민을 보며 루시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신분제도가 명확하다 보니 평민은 귀족을 꺼리고, 귀족은 평민을 가축처럼 취급했다. 그런 편견을 깨고 엘레나는 위인처럼 존경받고 있었다.

    “귀빈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L이에요. 오늘 총장 자칼린 님을 대신해 개교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서 제국의 인재로 거듭날 아이들을 보니 너무 설레고 든든하네요.”

    엘레나는 솔직 담백하게 개교사를 이어나갔다. 학교를 찾은 대다수가 평민인 만큼 굳이 유려한 화술을 구사하기보단 배움의 필요성에 대해 어필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제 얘기는 여기까지랍니다. 꼭 훌륭한 어른이 되길 바라며 저는 이만 인사드릴게요.”

    엘레나가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마무리 인사를 했다. 제국민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너도나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이 평민에게 예의를 갖췄다는 이야기는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눈으로 본 것도 처음이라 당황한 것이다.

    단상에서 내려오던 엘레나의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비쳤다. 셀 수 없이 많은 인파 속에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사내를 정체를 알아봤다.

    “렌?”

    시선이 마주친 걸 렌도 의식한 것일까. 엘레나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더니 휙 몸을 돌려 사람들 틈바구니로 사라졌다.

    “고생하셨습니다. L!”

    “아,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행사를 준비하신 여러분께서 더 고생하셨죠.”

    엘레나는 교장과 교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 기회에 식사를 대접하겠단 약속을 한 엘레나가 루시아를 대동해 마차에 올랐다. 당연하게도 휴렐바드가 마차의 호위를 하며 학교를 떠났다.

    마차 밖 멀어지는 학교를 보며 엘레나가 혼잣말을 했다.

    “또 저러지. 왔음 아는 척이라도 하든가.”

    “누구요?”

    “그런 사람이 있어. 말 지지리도 안 듣는 고집불통.”

    엊그제였던가? 가이아 교단의 주례 의식에 갔던 엘레나는 그곳에서 렌과 마주쳤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하려는데 렌은 사람들 틈바구니로 섞여 들어가더니 금세 자취를 감춰 버렸다. 엘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숨바꼭질하는 것도 아니고 매번 이런 식으로 꽁꽁 숨어버리다니.

    루시아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더니 나름의 답을 내놨다.

    “그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수줍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수줍다고?”

    “네, L 앞에 서기 부끄러운 거죠!”

    “그 인간이?”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딴 사람도 아니고 렌이 수줍음을 타고 부끄러워하는 상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와 버린 것이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다음 목적지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네 얘기를 선배랑 케이트 영애한테 못 했어.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물어보고 합석하도록 하자. 괜찮지?”

    “앗,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자고로 식사는 혼자 먹어야 제맛인걸요.”

    “어떻게 그래.”

    씩씩한 루시아의 모습에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 층 전망 좋은 룸에 도착하자 말끔히 차려입은 칼리프가 방정맞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엘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케이트 영애가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케이트 크라이시스예요.”

    “L이에요. 선배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참 예쁘신 분이라고. 마음은 더 예쁘고. 이렇게 보니 선배가 반한 이유를 알겠어요.”

    엘레나의 칭찬에 케이트 영애가 민망함에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L에 비하면 전 발에 치이는 들꽃도 안 돼요.”

    “진짠데. 안 꾸미셔서 그렇지 저보다 나아요. 선배, 잘해야겠어요?”

    엘레나가 눈매를 좁히며 칼리프를 흘겼다. 그런 핀잔이 싫지 않은 듯 칼리프가 애틋한 눈길로 케이트 영애를 바라봤다.

    “죽을 때까지 잘하려고.”

    “죽어서는요? 보셨죠. 선배가 이런 분이에요. 초장에 확 휘어잡아야 해요.”

    “네, 노력해 볼게요.”

    처음보다 편해진 표정으로 케이트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윽하게 칼리프를 쳐다보는데 눈길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선배, 루시아도 같이 왔어요.”

    “뭐? 근데 왜 혼자 올라왔어?”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 같아서요.”

    “야야. 루시아가 남도 아니고. 올라오라고 해.”

    칼리프의 허락에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시아가 합석했다. 네 사람은 학술원이란 공감대를 두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근사한 코스 요리로 슬슬 배가 불러올 즈음 케이트 영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L한테 고맙단 얘길 하고 싶었어요.”

    후식으로 나온 차를 음미하던 엘레나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눈을 맞췄다.

    “드레스요. L이 크리스티나 님께 직접 부탁드렸다고.”

    “부탁이라니요. 제가 해주고 싶어서 한 건데. 선배는 왜 이상한 얘길 해서 무안하게 해요.”

    “사실이잖아. 크리스티나 님이 좀 바빠? 신상 개발에, 주문에, 패션쇼에. 너니까 들어주지, 내가 부탁해도 어림없을걸.”

    패션쇼가 흥행하면서 크리스티나의 명성도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머메이드 드레스는 제국뿐만 아니라 로이에르 왕국을 비롯한 3국에까지 전파되어 유행을 선도했다. 그 까닭에 타국 왕족과 귀족들의 주문까지 쏟아져 크리스티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식장도 고마워요. 이 사람이 L이 살롱에서 결혼식을 치르라고 했다는데…… 제 주제에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은 거 있죠.”

    “저한테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다 선배가 유능해서 그래요.”

    “그래도요.”

    귀족이긴 하나 케이트 영애의 가문은 지방의 그저 그런 가문에 불과했다. 언감생심 혁명적 디자이너라 일컫는 크리스티나의 드레스나, 살롱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내가 좀 도움이 되긴 했지.”

    칼리프가 밉상 맞게 한마디 보탰다. 평소 같았으면 뭐라 받아쳤겠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미소를 지으며 넘겼다.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뭘 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이요.”

    엘레나가 말을 흐리더니 가져온 파우치에서 자그마한 함을 꺼냈다.

    “이게 뭐예요?”

    “열어보세요.”

    엘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케이트 영애는 얼떨떨한 얼굴로 함을 열어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바, 반지잖아요?”

    “세공사 콜튼 님의 작품이에요.”

    “어, 어떻게 이런 걸……아! 당신이 반지를 안 맞추고 미룬 것도 혹시?”

    “응. L이 꼭 해주고 싶다고 해서 사양할 수가 있어야지.”

    감동한 케이트 영애를 바라보는 칼리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반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다.

    “껴보세요.”

    케이트 영애가 망설이며 칼리프를 쳐다봤다. 칼리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가락에 껴보았다. 엘레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딱 맞네요.”

    “L, 어떻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행복하게 잘 사세요. 그거면 돼요.”

    진심이었다. 지난 삶의 인연을 현생까지 이어온 두 사람이지 않은가. 더 단단해진 인연의 고리를 잡고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다.

    반지를 껴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던 케이트 영애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곧 L의 생일이라면서요?”

    엘레나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 뒤면 그녀의 생일이다. 부모님도 북부 지방으로 가시고 조용히 생일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L의 평판과 살롱의 위상 때문에라도 꼭 파티를 열어야 한다는 주변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꼭 가서 축하할게요.”

    “고마워요.”

    더 얘길 나누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있는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곧 생일이고 다음 달이면 결혼식이다. 볼 기회가 얼마든지 있기에 다음을 기약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엘레나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시시각각 풍경은 변하는데 엘레나의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아.”

    자꾸 한숨이 나왔다. 온종일 기분이 묘하고 이상했다. 지난 삶과 확연히 달라진 현생을 살면서도 변하지 않는 칼리프와 케이트를 보니 더더욱 심란했다.

    “언니.”

    “응.”

    “언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니?”

    루시아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언니는 예쁘고 지적이잖아요. 제가 남자라도 언니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을걸요? 근데 보면 항상 남자를 멀리하더라고요.”

    “멀리하는 건 아니야. 그냥 조심스러울 뿐이지.”

    상처가 아물었다고 해도 흉터는 남아 있었다.

    루시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조심해요? 남자는 많이 만나볼수록 좋다고 했어요! 그래야 누가 진국인지 알 수 있다고.”

    “누가 그러니?”

    “책에서 배웠어요!”

    소소한 얘길 나누는 사이 마차가 노블레스 거리에 당도했다. 대공가가 몰락하며 황실로 소유권이 이전된 노블레스 거리는 낮임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살롱과 바실리카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버리자 입점했던 예술가나 상인들이 모조리 나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얘기가 길진 않을 거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경.”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휴렐바드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루시아를 돌봐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애예요? 혼자서도 잘 있을 수 있다고요.”

    엘레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노블레스 거리의 처리를 두고 황실에서 파견된 인사들과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엘레나가 착석하고 얼마 있지 않아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참으로 처치 곤란입니다. 처분한다고 해도 헐값에 내놓을 수밖에 없고요.”

    “다른 활용 방안이 없겠습니까?”

    황실에서도 노블레스 거리는 애물단지였다. 분명 활용 가치가 있을 텐데, 마땅한 방책이 없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L, 좋은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기대 어린 주변의 시선에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블레스 거리를 호텔로 바꾸는 거예요.”

    “숙박업을 하자는 겁니까?”

    “하나 그래선 수지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엘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최근 수도를 방문하는 귀족의 수가 적지 않아요. 연고지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머물게 돼요. 문제는 귀족들이 머물 만한 숙박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죠.”

    “동의하오. 조카 녀석도 수도로 와 머물 데가 없다며 우리 저택에서 머물다 갔소.”

    “저는 노블레스 거리를 하나의 호텔로 개조하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고딕 양식은 제국 건축물의 상징과 같으니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우리의 위상을 알릴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엘레나는 차분하게 뜻을 피력했다. 호텔로 개조하게 되면 노블레스 거리의 건축양식을 살리며 황실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애물단지 취급은 받지 않을 것이다.

    ‘살롱을 찾는 방문객의 숙박에도 안성맞춤이고.’

    이러한 아이디어는 엘레나가 살롱을 운영하며 겪은 고충에서 비롯됐다. 살롱의 명성이 대륙 전역에 퍼지면서 제국 내의 귀족뿐만 아니라 제3국의 왕족과 귀족들까지 방문하게 되며 수도 내 숙박업이 마비되어 머물 곳이 부족했다. 엘레나의 안건을 두고 회의가 이어졌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이가 없는 건 반대를 하면서도 다른 대안은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폐하께 직접 고할 걸 그랬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차를 밟는 게 맞아.’

    엘레나가 직접 고하면 이런 난관 없이 속전속결로 일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뒷말이 나올 공산이 크다. 청탁이라느니, 어쨌느니. 시안과의 관계를 이용해 제 배를 불린다는 터무니없는 얘기 말이다. 엘레나는 그런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번거롭지만 이런 수고스러움을 감수했다.

    회의가 끝나자 모처럼 황실에서 파견된 인사들이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앓던 이를 뺀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차에 오른 엘레나는 학술원으로 이동했다. 회의가 길어진 까닭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여긴 그대로네.”

    몇 년 만에 찾은 학술원의 풍경에 엘레나가 감상에 잠겼다. 돌이켜 보면 이곳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 하루였는데, 과거의 발자취가 묻어난 곳에 이르자 마음이 더 어수선했다.

    “와, 사람 좀 봐요. 누가 보면 학술제인 줄 알겠어요.”

    “이따가 보자, 루시아.”

    “네, 언니. 저도 강의 열심히 들을게요!”

    엘레나가 강단에 올랐다. 그녀의 등장에 재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과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학술원 학생들이 선정한 롤모델로 삼고 싶은 인물. 신여성, 지식인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화제의 여인. 제국민을 위해 학교를 개교하고 제 돈을 들여 무상으로 가르치길 마다치 않는 위인.

    그런 엘레나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건 재학생들에게 있어 너무나 큰 자산이자 영광이었다.

    “늦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제시간에 도착했네요. 잠시 숨 좀 고를게요.”

    엘레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학생들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L이에요.”

    성대한 환영 인사에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서두르느라 몰랐는데, 강당을 가득 메우다 못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모인 재학생들을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너무 극진하게 환영해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부담도 되네요. 제 얘기가 여러분에게 특별한 얘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엘레나는 유려한 화술로 강당 안 분위기를 제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계몽주의라는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를 내세워 억지로 설득을 시키기보단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시대상과 연결해 위트 있게 풀어냈다. 그러다 보니 재학생들의 반응도 좋았으며 강의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제 지루한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마지막으로 질문 세 가지만 받을게요. 거기 앞에 계신 여학생분.”

    엘레나가 자신의 눈에 들고자 손을 높이 들고선 점프까지 하는 여학생을 지목했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답니다.”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허락을 구한 여학생이 자신감을 얻었는지 목소리에 힘을 줘 말했다.

    “지금 공식적으로 왕국과 폐하의 국혼이 오가고 있잖아요? L은 폐하의 국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요.”

    “국혼이라. 첫 질문부터 민감한 주제네요?”

    반문하는 엘레나의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다분히 엘레나와 시안의 관계를 의식한 질문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조심스럽네요. 국혼은 국가의 중대사예요. 제가 감히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는 얘기기도 하고요. 그래도 제 의견을 물은 거니 대답은 해야겠죠?”

    재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무례한 질문에 원론적인 대답을 줄 거란 예상과 달리 엘레나가 주관을 밝혔기 때문이다.

    엘레나가 담담히 입술을 뗐다.

    “아멜리아 왕녀께선 명성이 자자할 만큼 기품 넘치시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 미모 또한 수려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다고요.”

    말을 이어가는 엘레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침전된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지난 삶의 상흔을 훑어 내려갔다.

    “그분께서 폐하가 쓰고 계신 왕관의 무게를 덜 수 있고.”

    한때, 시안에게 무거운 짐이었고.

    “폐하의 고단함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줄 수 있다면.”

    그토록 애썼음에도 단 한 번조차 시안을 웃게 해준 적이 없었기에.

    “저는 이 국혼을 응원하고 싶네요.”

    엘레나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시안의 행복을 바랐다. 그녀로 인해 불행했던 삶을 다시 반복하기보다 시안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비록 시안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몫까지 엘레나의 가슴속에 흉터로 남아 있었다. 아문 듯 보이나 언제든 덧날 수 있는 흉터였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였기에 홀로 짊어지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제 대답은 충분했다고 생각이 드네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네? 네.”

    의미심장한 엘레나의 대답에 넋이 빠진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거기 두 번째 줄에 앉은 남학생 질문해 주세요.”

    “앗, 네. 저는 최근 화두가 된 광장 연설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앞선 무례한 질문과 달리 이어지는 질문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지금은 황제로 즉위한 시안의 측근이 된 자칼린의 영향으로 수도 광장에서는 매일같이 연설가들이 모여 사상에 대해 역설했다.

    “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봐요. 연설은 곧 소통의 시작점이거든요. 비슷한 관점에서 볼 때, 라파엘 님의 작품 <벨라도나>를 들 수 있어요.”

    엘레나는 본인이 느끼고 있는 시대의 변화상을 설명했다. 시대의 변화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둔감하게 마련이다. 후세의 관점이 아닌 이상 제대로 흐름을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 답변이 너무 어려웠던 것 같네요. 부족한 건 시간이 답을 해주겠죠?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을 받을…… 어?”

    좌중을 둘러보던 엘레나가 말끝을 흐렸다. 빽빽하게 들어앉은 재학생 사이로 그녀의 시선을 단숨에 뺏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못 살아.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아까 개교식에서 보고 오늘만 벌써 두 번째 마주침이다. 우연은 아닐 것이고, 의도적으로 따라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여튼. 성격 참 유별나.’

    엘레나는 어이가 없는지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냥 그러려니 넘기곤 있었지만, 솔직히 렌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이해가 되진 않았다.

    “거기 뒤에 앉은 학생분. 질문해 주세요.”

    “저는 살롱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L께서는 무슨 계기로 살롱을 개장할 생각을 하게 된 건가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수도의 문화를 바꾸고 싶다. 그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엘레나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내내 시선을 렌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렌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예고도 없이 나흘 연속 불쑥 찾아올 때도 있었다. 저번에는 너무 연락이 없어 엘레나가 편지를 쓴 적도 있는데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엘레나를 따라다니며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저러다 금세 또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제 대답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참 유익하고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언제고 살롱에서 뵙기를 바라며 인사드릴게요.”

    엘레나는 고개를 숙였다. 번개처럼 지나 버린 강의 시간이 아쉬운지 재학생들은 기립 박수로 그런 엘레나를 배웅했다.

    “경.”

    단상에서 내려온 엘레나가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휴렐바드를 불렀다.

    “지금 강당에 가면 렌이 있을 거예요. 이 인간 못 도망가게 좀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얼음의 기사는 일언반구 없이 강당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사이 엘레나는 급히 오느라 인사를 나누지 못한 학술원 총장과 부총장, 그리고 몇몇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그간 L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기회가 닿지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뵙게 됐군요.”

    “저야말로 저명하신 총장님께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콧대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저들이 걸음을 한 것만 보더라도 현재 제국 내 L의 위상과 평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녀를 티타임에 초대했다. 이 기회에 엘레나와 인맥을 쌓고자 함이다. 엘레나는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강당 밖으로 나왔다.

    “어? 어! 저기 L 아니야?”

    “진짜. 이쪽으로 오는데?”

    “앗,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

    막 강당을 나가던 재학생들이 엘레나를 발견하고는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다가온 재학생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쳐다보기만 할 뿐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우아한 걸음걸이와 고상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엘레나의 기품을 마주하자 마치 격이 다른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렌.”

    엘레나의 구두가 멈춰 서자 휴렐바드가 묵례하며 그녀의 뒤에 섰다. 제 임무를 마치고 그녀의 호위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건 반칙이지. 네가 와서 잡아야지, 저 괴물을 보내?”

    렌이 히죽 웃었다. 백작이라고는 보기 힘들 만큼 자유분방한 태도와 짓궂은 미소, 시비를 거는 건가 싶은 특유의 화법까지 그대로였다.

    “여기서 뭐 해요?”

    “뭐 하긴. 강의 들으러 왔다가 우연히 널 봤고. 네가 날 찾아서 기뻐하는 중이지.”

    넉살 좋게 둘러대는 렌을 보며 엘레나가 기가 찬다는 듯 얘기했다.

    “우연은 무슨. 아까도 봤잖아요. 엊그제도 봤고, 저번 주에도 봤네.”

    “야, 그걸 다 기억하면 곤란하지. 부끄럽게.”

    “부끄러운 건 알긴 아나 봐요?”

    엘레나가 툭 쏘아붙이자 렌이 피식 웃었다. 이런 잔소리마저 그에게는 종달새의 지저귐처럼 귀가 즐거웠다.

    “저기 봐. 렌 백작님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와, 가까이서 보니 실물 장난 아니다. 미남이야, 완전.”

    “어떤 선배가 별로래? 성격 좀 나쁘면 어때? 저런 분이면 내 영혼까지 다 바칠 텐데.”

    올해 입학한 듯 여학생들이 렌을 보며 숙덕거렸다. 학술원 내, 렌의 악명을 소문으로만 접한 터라 거부감보단 호감 어린 시선이 더 많았다.

    엘레나가 눈매를 좁히며 렌을 흘겼다.

    “인기 많네요?”

    “착각이 이렇게 무서워요. 쟤들은 내가 좋은 사람인 줄 아네?”

    “나쁜 사람도 아니죠.”

    엘레나의 툭 내뱉는 말에 렌이 실소를 흘렸다. 나쁜 사람이 아니긴. 누구 한정이란 사실을 그녀가 알고 떠드는 건지 싶었다.

    “아, 다시 본론으로 와서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왔으면 아는 척을 하든가. 휙 가버리기나 하고. 나한테 빚졌어요?”

    “야, 뭔 오해를 그렇게 살벌하게 해. 확 빚져서 쫓겨 다닐까 보다.”

    엘레나가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얘기할수록 도돌이표를 찍는 기분이다.

    “진짜 얘기 안 할 거예요?”

    “말했잖아. 우연이라고. 아, 저번 주는 너 보려고 간 거 맞아.”

    “…….”

    엘레나가 눈매를 좁히며 렌을 째려봤다. 진실이냐고 묻는 눈초리에 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어제랑 오늘은요?”

    “누가 널 보고 있어서 따라왔지.”

    “보긴 누가 보는데요?”

    “그러게. 누굴까?”

    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 장난스러움 너머에 감춰진 진지함을 엘레나는 놓치지 않았다.

    “위험한 자예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모호한 대답에 엘레나가 고개를 돌려 휴렐바드를 쳐다봤다. 혹시 짚이는 게 있느냐는 눈빛이다. 휴렐바드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엘레나를 노리거나, 사소한 위화감이라도 느꼈으면 그가 놓쳤을 리가 없다.

    “긴장 풀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쪽 장르는 아니거든?”

    “그럼 뭔데요? 제대로 말을 해줘야 알죠.”

    엘레나가 추궁했지만 렌은 히죽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얘기를 해주면 좋겠는데 그러질 않으니 답답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렌을 구워삶아 알아내야겠단 생각이 들 때였다.

    “실례합니다.”

    중저음이었음에도 귀에 쏙 박히는 목소리에 엘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상대의 기품에 깜짝 놀랐다.

    기품이란 건, 예법을 체득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자라난 환경 속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몸에 배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은발의 남자는 고귀함을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은발의 귀족이라…… 누가 있었지?’

    엘레나는 궁금증을 숨기고는 미소를 지으며 은발의 남자를 바라봤다.

    “에드라고 합니다. 항상 동경하던 L에게 짧게나마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에드? 기억에 없어.’

    그의 발음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특이점은 찾을 수 없었다. 대륙 공용어를 구사하는 외국 귀족 특유의 발음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 경이셨군요. 저야말로 반가워요.”

    엘레나는 약식임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인사를 받았다. 일부러 경이라는 경칭으로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

    에드가 그런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굉장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인지라 엘레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에드 경?”

    “아, 그만 실례를 범했군요.”

    “제 얼굴에 뭐가 묻은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소문엔 늘 과장이 섞이게 마련이라고 여겼는데, L을 가까이서 보니 그 생각을 고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엘레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선수네.’

    첫눈에 반한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시선 처리부터, 돌려서 칭찬하는 화법까지 절묘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 되는 남자가 이렇게 접근하면 열에 아홉 명은 호감을 갖지 않을까. 물론 그녀는 그 기준에 해당하지 않았지만.

    “아…… 이럼 안 되는 거 알지만, 혹 괜찮다면 레이디의 손등에 입을 맞출 영광을 줄 수 있을까요?”

    “여기서요? 보는 눈이 많은데.”

    저돌적인 에드의 요구에 엘레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알지만 L을 만난 오늘을 기억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주시길.”

    “…….”

    에드는 자신을 낮춰가면서까지 엘레나의 손등에 입 맞추길 바랐다.

    ‘왕국 출신인가?’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손등의 입맞춤은 로이에르 왕국에서 레이디를 향한 애정이나, 존경을 보여줄 때 하는 예법인 걸로 기억했다. 엘레나의 침묵을 허락의 뜻으로 오해한 에드가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지척에 서서 상체와 무릎을 굽히며 엘레나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멈추지?”

    “…….”

    렌과 휴렐바드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녀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살벌한 두 남자의 반응에 에드의 눈이 커졌다. 먼저 자신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구는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이런. L에게 그만 눈이 멀어 흑기사분들이 계셨단 걸 깜빡했군요.”

    에드는 손을 빼며 미소를 지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발에 맞닥뜨렸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니까.

    “우린 구면이죠?”

    에드가 고개를 돌려 렌을 쳐다봤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보면 우리가 친한 사이인 줄 오해하겠네?”

    “그런 오해라면 환영이네요. 렌 백작님 같은 분이라면 누구나 친구로 두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렌이 피식 웃었다. 이름을 알고 있다니. 처음부터 렌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단 말로 들렸다.

    “내가 사교성이 좋지 않아서 친구를 안 키워요.”

    “아쉽네요. 우리가 잘 맞는 부류라고 생각했는데.”

    “그쪽이랑 내가? 엮지 맙시다. 서로 불편하잖아.”

    분명 웃음을 띤 채 얘기하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에드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휴렐바드를 슥 쳐다보며 말했다.

    “흠잡을 곳 없는 훌륭한 기사를 두셨습니다. 탐날 정도로요.”

    “제게 과분한 기사죠. 늘 휴렐바드 경에게 감사하고 있답니다.”

    엘레나의 눈매가 좁아졌다. 대외적으로 휴렐바드의 실력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황궁근위대와 린든 백작의 기사단이 다였다. 기사의 명성보다 엘레나의 곁에 남는 걸 더 명예롭게 여기며 음지에 머물길 바라서다.

    ‘휴렐바드 경의 실력을 알아봤다고?’

    엘레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낱 살롱의 여주인이자, 준남작에 불과한 그녀의 기사를 보며 탐낸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을 테니까.

    “너무 시간을 뺏었군요. 조만간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L.”

    “또 뵙길 고대할게요, 에드 경.”

    에드는 담백하게 작별 인사를 남기곤 돌아섰다. 어떻게든 엘레나와 말을 섞고 질척거리는 귀족 자제들과 비교하면 깔끔한 헤어짐이었다.

    “렌, 나 좀 봐요.”

    에드가 사라지기 무섭게 엘레나가 렌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강당 뒤편으로 이동했다. 렌은 뭐가 좋은지 히죽거리면서 따라왔다.

    “지금 나 혼내려는 거야?”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저 사람 누군지 렌은 알죠?”

    엘레나가 팔짱을 끼고는 추궁하듯이 묻자 렌이 둘러댔다.

    “모르는데?”

    “렌.”

    “진짠데?”

    “좀 진지해지면 안 돼요?”

    “무시해. 이름이 에드라는 것만 알면 됐지. 뭐 하러 더 알려고 들어? 확 부숴 버리고 싶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렌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눈빛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긴요. 저 사람은 나에 대해 잘 아는데, 난 아는 게 없잖아요. 그게 얼마나 불안한지 알아요?”

    “네가 불안하면 안 되지. 그러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 건데.”

    렌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더니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엘레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절 지켜보고 있다는 사람이 에드 경이군요.”

    “정답.”

    “자꾸 제 옆에서 알짱거리니 눈에 거슬렸던 거고요.”

    “그렇지.”

    저 말은 에드라는 자가 은밀히 엘레나를 주시한 지 꽤 됐다는 얘기였다.

    ‘왜 나를 주시한 거지?’

    엘레나는 생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러한 의문을 갖기보다 상대에 대해 파악하는 게 순서였다.

    “이거만 말해줘요. 에드 경 있잖아요.”

    “경은 무슨.”

    “로이에르 왕국의 에드먼드 왕자 맞나요?”

    타고난 태생의 고귀함. 왕실을 상징하는 은발. 공기처럼 몸에 밴 왕국의 예법. 지레짐작을 싫어하는 엘레나였지만 몇 가지 정황으로 그렇게 추정했다.

    “모르겠는데?”

    “맞나 보네요.”

    렌의 시큰둥한 대답에 엘레나는 확신했다. 에드는 원 역사대로라면 지금쯤 로이에르 왕국의 왕이 되어야 할 에드먼드 왕자가 분명했다.

    ‘결코 가벼이 볼 인물이 아니야.’

    왕위에 오르고 불과 이 년 만에 그는 사자왕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었다. 차남이 왕위에 오르면서 발생한 어수선함을 무마하고자 북부와 남부의 친정을 승리로 장식하며 왕국을 상징하는 사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엘레나의 역사 개입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아직 왕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만 장담하건대 언젠가 로에이르 왕국의 왕위에 오를 인물이었다.

    “이해가 안 돼요. 에드먼드 왕자가 뭐 때문에 저를 주시하는 거죠? 굳이 이 먼 제국까지 와서, 그것도 직접요.”

    엘레나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단순한 관심이나 호감쯤으론 생각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고를 감수하면서 자신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걸까.

    “야.”

    사고에 잠겨 있는 엘레나를 렌이 깨웠다.

    “그 새끼 생각하지 말지?”

    “어떻게 안 해요. 무슨 의도로 접근했는지는 알아야죠.”

    이제 막 대공가를 파멸시키고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 엘레나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마.”

    “…….”

    “그냥 다 안 돼. 하지 마.”

    “아니, 내가 뭘 하려는 줄 알고 안 된대.”

    “그거까지 안 돼.”

    엘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볼을 실룩거렸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재수 없잖아.”

    “에드먼드 왕자요? 어째서요?”

    “재수 없는 데 이유가 있어? 걔 생긴 것도 싫고, 목소리도 싫고, 너한테 말 거는 것도 싫다.”

    엘레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속 얘기해 봐야 도돌이표만 찍을 것 같아 이쯤 해서 멈췄다.

    “됐고, 그간의 안부나 묻죠. 잘 지냈어요? 아픈 데는 없고요?”

    “무슨 안부를 헤어질 때 물어.”

    “안 묻는 거보단 낫죠. 저 갈게요.”

    엘레나는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시 낭송회에 늦어질 게 뻔해서다. 렌과 헤어진 엘레나가 마차로 돌아오자 루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누굴 좀 만나느라.”

    “어쩐지. 저요, 오늘 결심했어요. 마음먹었다 이거죠. 언니처럼 멋있어지려고요!”

    “그게 뭐야.”

    루시아의 밝은 기운 때문인지 엘레나는 잠시나마 복잡한 심사와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살롱에 도착하자마자 엘레나는 시 낭송회에 참가했다.

    살롱은 시 낭송회뿐만 아니라 문학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가면을 쓰고 신분과 이름을 숨긴 채 문학작품을 발표하는 만큼 인기나, 명성이 아닌 작품 자체의 가치로만 평가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무명의 시인이나 작가, 문학가 등이 살롱을 통해 데뷔해 큰 인기를 끌었다.

    엘레나는 미리 외워온 시를 낭송하며 방문객들과 감성을 공유하고 문학적인 토론을 나눴다.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뜻 있고 깊은 시간이었다. 시 낭송회를 마치고 참가한 연회에서는 열흘 앞으로 다가온 엘레나의 생일이 주요 관심사였다. 시크릿 살롱의 주인인 엘레나의 첫 생일인 만큼 얼마나 성대한 이벤트가 열릴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기대하지 마세요. 살롱은 여러분 모두의 거랍니다. 고작 저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거예요.”

    엘레나는 생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L의 위상이 살롱에 미치는 영향이 없었다면 조용히 지나가고 말았으리라.

    “오늘도 무사히 끝났네.”

    스케줄을 마치고 침실로 향하는 엘레나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비록 지치고 고되긴 했지만 보람 있는 하루였다.

    “아가씨.”

    엘레나가 시 낭송회에 참석한 동안 먼저 올라와 있던 메이가 낮게 말했다.

    “왜 그러니?”

    “응접실에 폐하께서 와 계세요.”

    “이 시간에?”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다.

    “아까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폐하께 가자.”

    엘레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응접실로 향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뒷짐을 진 채 살롱 밖을 보고 있던 시안이 돌아봤다. 창문 너머의 밤하늘처럼 칠흑 같은 흑발과 우수에 찬 눈동자를 마주하는데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폐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시구나.’

    최근에 꾼 꿈 때문에 부쩍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며 엘레나가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뵈옵니다.”

    “왔군.”

    “오셨단 얘길 이제야 들었어요. 죄송해요.”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다. 불쑥 찾아온 것도 민폐인데, 방해까지 할 순 없지.”

    시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표정이 어두우세요.”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대의 눈을 속일 순 없군.”

    ‘……국혼 때문인가?’

    엘레나에게 있어 시안은 전 남편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무치도록 사랑했다. 그 끝이 비록 좋진 않았지만 부부였음은 변하지 않기에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기에 무심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엘레나.”

    낮은 호명에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안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었다.

    시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남동생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겠나?”

    “……!”

    시안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물음에 엘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학술원 재학 시절, 라파엘에게 도움되고자 이안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을 시안이 본 적이 있는데,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을 할 수 없던 엘레나는 남동생이라 둘러댄 적이 있었다.

    “제 남동생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는지요?”

    “그대의 부모님은 뵈었지. 하나, 남동생은 보이지 않더군.”

    “사정이 있어서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시안은 담담해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기색이었다.

    ‘왜 이안을…….’

    엘레나는 심하게 동요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아픔으로 남아 있는 이안을 딴 사람도 아닌 시안이 언급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를 흔들기 충분했다.

    “꿈을 꿨다.”

    “……꿈이요?”

    엘레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근래 들어 옛꿈을 꾸며 심란했는데, 혹시나 싶어서다.

    “한 여인이 울고 있었다. 월계수 아래 웅크리고.”

    “……!”

    “흐릿하여 얼굴은 보이지 않더군.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이 여인을 아프게 했구나. 그래서 나도 아프구나.”

    시안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찌릿찌릿 심장이 저려오는 듯 그의 얼굴은 아파 보였다.

    ‘어, 어떻게? 우연이야. 지독한 우연.’

    엘레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그녀에겐 다른 의미로 와닿았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누구요?”

    “이 얘길 들으면 그대가 날 욕할지도 모르겠군.”

    시안이 쓰게 웃었다. 고작 꿈인데. 그것도 허무맹랑한 꿈. 그 사실을 알면서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본 그림 속 아이가 여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엘레나가 무너졌다.

    ‘미, 믿을 수 없어.’

    이안의 언급에 엘레나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공황이 온 것처럼 머릿속이 아득했다. 한낱 꿈으로 치부하기엔 시안의 얘기가 너무 생생해서 그녀를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홀로 두고 온 이안이 딱하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엘레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서 있는데, 여인이 손짓으로 날 부르더구나. 난 끌리듯 다가갔고, 여인이 내게 우는 아이를 건넸다.”

    “……!”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엘레나가 시안을 올려다봤다.

    어째서일까. 시안의 표정이 낯설지가 않았다. 지난 삶, 그녀를 보던 눈빛이 아른거렸다.

    “이상하게도 아이를 안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게 너무 소중한 아이라는 걸.”

    “어, 어떻게…….”

    “그걸 깨닫는데, 아이가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치더구나. 그러며 날 보고 방긋 웃더군. 그리고 꿈에서 깼다.”

    시안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고작 꿈일 뿐인데. 왜 이리 애틋하고 가슴이 시린지 모르겠다.”

    “아.”

    엘레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이 메서, 깊은 곳에서 울컥 솟구치는 감정의 격랑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있잖니, 이안.’

    한 번도 다정하게 이안을 안아준 적도, 바라본 적도 없는 시안이다. 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