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11/30)
  • 외전 1. 후애(後愛)

    “지금 후궁 선출이라고 했나?”

    건강이 악화된 리처드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시안이 대전 안의 귀족들을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태자인 내가 후궁이라니. 가당치 않은 얘기다.”

    시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딱 잘라 거부했다. 대공가나 4대 가문을 외척으로 두지 않기 위해 세실리아와 정략결혼을 올린 지 두 해가 지났다. 이제 와 저들의 요구대로 후궁을 들인다면 그런 노력이 허사가 된다. 그러나 시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요구를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고로 황실의 안녕과 번영은 후사에서 기인한다고 했습니다.”

    “폐하의 건강이 하루하루 악화되고 계십니다. 여러 해 황태자비께 후사가 없으시니, 마땅히 후궁을 들여 황실을 탄탄히 하는 게 옳다고 사료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황실을 위해 제 자식을 내놓을 귀족들이 줄을 섰습니다. 부디 간곡한 청을 물리지 말아주십시오.”

    시안이 무표정한 눈길로 귀족들을 내려다봤다. 가증스러운 작자들. 황실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포장하나 본심은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함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대공께서도 그리 생각합니까?”

    시안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프란체 대공를 지목했다. 그가 배후에서 귀족들을 쥐락펴락하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제 뜻이 중요하겠습니까? 귀족들이 한뜻으로 황실을 위한다는 게 제국의 홍복일 따름입니다.”

    시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프란체 대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귀족들을 앞세울 뿐, 본인은 나서지 않는다. 참 영악하고 무서운 자다.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나누도록 하지.”

    시안이 황좌 바로 아래에 임시로 놓아두었던 의자에서 일어날 때였다.

    “황태자 전하!”

    “제발, 소인들의 깊은 충심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전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면 후궁 선출과 관련된 사안은 심도 있게 논의하여 다시 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안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귀족들의 만류와 간청을 무시하며 대전을 나섰다. 집무실에 도착한 시안이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딱딱하게 굳은 낯빛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짐작하게 했다.

    “하루라도 빨리 황궁근위대를 개혁해야 해.”

    무심함 속에 감춰두었던 시안의 야성이 번들거렸다. 기필코 무너진 황실의 권위를 되찾고 황권을 강화시키고 말겠단 의지와 웅심이 그의 녹안에 담겨 있었다.

    “접니다, 전하.”

    집무실을 찾은 린든 백작이 가볍게 묵례하며 예의를 갖췄다. 제국의 유서 깊은 명가 출신으로 황태자비 세실리아의 아버지이자, 사적으로 시안의 장인이기도 했다.

    “귀족들이 별궁에 모여 논의 중입니다. 후궁을 황태자빈으로 높여 부르고 선출식을 밀어붙이려는 모양새입니다.”

    “정녕 그자들이.”

    시안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얼마나 황실을 얕잡아 봤으면 허락을 구하지도 않을까.

    “전하, 기왕 이리된 거 귀족들의 청을 들어주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시안이 빤히 쳐다보자 린든 백작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당면한 가장 큰 과제는 황궁근위대의 개혁입니다. 못 이긴 척 후궁 선출을 허락하여 저들의 시선을 돌리십시오. 지금은 숙이고 힘을 비축해야 합니다.”

    시안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공가를 외척으로 두지 않고자 린든 백작의 외동딸 세실리아를 황태자비로 앉혔다. 근데 이제 와서 후궁을 들이자니 린든 백작과 세실리아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시안을 보며 린든 백작이 담담히 말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나 저나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그대와 태자비를 볼 낯이 없군.”

    시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귀족들이 선출식을 거친다지만 유력 후보는 두 사람으로 압축됩니다. 아벨라 영애와 베로니카 공녀죠.”

    “아벨라 영애는 간특하고 베로니카는 권위적이며 악랄하지.”

    어렸을 적 본 베로니카의 첫인상이 잊히지 않는다. 일국의 황태자인 그마저도 아랫사람 대하듯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길, 한낱 미물일지라도 새나 동물 따위를 죽이는 잔혹함까지.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최후에는 베로니카 공녀가 낙점될 공산이 큽니다.”

    시안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가가 작정을 하고 달려든다면 베로니카의 입궁은 기정사실로 봐야 했다.

    “최악의 여인을 황실에 들이게 생겼군.”

    * * *

    치열한 선출식을 거쳐 베로니카 공녀가 황태자빈으로 선출됐다. 아벨라 영애와 호각을 이뤘지만, 기대 이상으로 출중한 베로니카의 예법과 대공가의 입김을 다른 후보자들이 넘지 못했다.

    황태자의 신분으로 후궁을 맞이하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혼인임에도 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기습적으로 국혼을 올린 세실리아와 비교하면 누가 황태자비고 황태자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안은 혼인을 치르는 내내 베로니카 공녀와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가치도 없어서다.

    그런 두 사람이 마주한 건, 뒤풀이 만찬 연회에서 형식적인 첫 춤을 추면서였다.

    “전하.”

    왈츠에 맞춰 스텝을 밟던 베로니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시안을 불렀다. 몇 번이나 불렀지만 시안은 대놓고 무시했다. 얼굴을 가까이하자 기억 속 그녀의 잔혹한 모습이 떠올라 되도록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두 곡을 추는 내내 말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두 사람이 멀어졌다. 몰려든 귀족들의 의례적인 축하를 받은 뒤, 좀 이르게 만찬에서 퇴장했다.

    첫날밤을 치르기 위해 시안은 몸을 깨끗이 하고 베로니카의 침실을 찾았다. 첫날밤은 부인이 머물게 될 황궁의 침소에서 보내는 게 의무였다.

    “어서 오세요, 전하.”

    하늘하늘한 속옷 차림의 베로니카가 수줍게 앉아 있었다. 다소곳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말투에 시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본성을 감춘 베로니카의 가증스러움에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시안은 당장에라도 침실을 나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한 공간에 마주 앉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베로니카가 용기를 내서 말문을 텄다.

    “와인 괜찮으세요?”

    “…….”

    시안은 건너편 창문에 시선을 둔 채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한기를 풀풀 풍기는 냉랭한 태도에 당황한 베로니카가 와인 병을 잡으려던 손을 냉큼 회수했다. 어색하다 못해 불편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시안은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베로니카가 입술을 옴짝달싹하며 말을 걸려고 시도했으나 시안의 냉담함에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덧없이 흘렀고 동이 텄다. 커튼 틈으로 햇살이 스며들 즈음 시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밤새 베로니카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그의 표정에선 일말의 미련이나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사도 없이 매정하게 방을 나서는 시안을 따라 베로니카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공손하게 작별의 말을 건넸다.

    “살펴 가시길.”

    시안은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베로니카의 작별 인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앙갚음하겠단 소리로 들리는군.’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그녀다. 결단코 오늘의 모욕과 수모를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시안이 상상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짓을 저지를 것이다.

    ‘그 또한 감수해야겠지.’

    그것이 베로니카와 몸을 섞는 일보단 더 나을 테니까.

    * * *

    “전하, 그 얘기 들으셨어요?”

    황실 공식 행사를 마친 시안과 세실리아는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략적인 혼인이다 보니 부부 사이임에도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빈이 다도를 배우고 있대요.”

    “베로니카가?”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던 시안의 손이 멈췄다.

    “네, 마담 말로는 꽤 열심히인가 봐요. 재능도 있대요.”

    “의외군.”

    황실에 들어온 베로니카는 조용히 지냈다. 첫날밤에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난리 칠 법하건만 잠잠했다. 심지어 다도라니. 어울리지 않는 걸 떠나 그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더 불안했다.

    “앗, 차가 쓰네요.”

    “마실 만하다.”

    “죄송해요. 노력하고 있는데 좀처럼 나아지질 않네요.”

    세실리아가 민망해하며 쓰게 웃었다.

    다도는 그녀에게 쥐약이었다. 귀족 영애답지 않게 소탈하고 활발한 그녀에게 황태자비로서 갖춰야 할 의무, 관례, 예법, 소양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늘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리고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걸요.”

    세실리아가 찻잔 손잡이를 매만지며 애써 웃었다. 그녀의 미소엔 감출 수 없는 아픔이 배어 있었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시안은 동궁의 베르사유 후원에 들렀다. 복잡한 심사도 정리할 겸 베르사유 후원을 거쳐 본궁 쪽 후원으로 넘어가기 위함이다. 후원 경비병이 예정에 없던 시안의 방문에 놀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시안이 그개를 끄덕이며 후원에 발을 들였다. 그러자 경비병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빈께서 계십니다.”

    “베로니카가?”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안은 어렸을 적부터 종종 동궁의 후원을 찾았다. 규모가 작고 협소한 본궁과 서궁에 비해, 드넓은 자연을 담은 동궁을 거닐 때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책임과 의무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곳에 베로니카가 있다고 하니 시안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소중한 곳이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돌아가지.”

    몸을 돌린 시안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을 따라 본궁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우연히 베르사유 후원에 시선이 닿은 시안의 발길이 멈췄다.

    수백 년의 세월을 황궁과 함께한 월계수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베로니카가 서 있었다. 한참을 뭔가에 홀린 듯 올려다보더니 월계수를 쓸어내리며 빙그르르 돌았다. 초인적인 오감을 지닌 시안의 눈에 그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시안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를 깊이 그리워하는 베로니카의 쓸쓸한 눈길과 사연 있어 보이는 처연한 미소.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여인이 정말 베로니카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시안은 그런 거슬림을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스쳐 가는 의문일 뿐이다. 시안에게 그녀는 상종하지 못할 무시의 대상에 불과했다.

    * * *

    “하아.”

    지방 귀족들로부터 올라온 재정 보고서를 탐독하던 시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근위대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출중한 기사만큼이나 재정적인 안정도 중요하다. 녹봉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충성을 강요할 순 없었다.

    “전하, 좀 쉬세요. 요 며칠 잠도 거의 주무시지 않았잖아요.”

    보좌관 겸 시종 덴은 행여 시안의 건강이 상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는 프란체 대공이 심어놓은 간자들로 가득한 황궁 안에서 시안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였다.

    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불안해서다. 성공에 대한 불확실이 미련하리만치 그를 일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눈을 매만지며 다시 검토에 열중하는 시안을 보는 덴의 우려가 깊어갈 때였다. 중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조용히 들어와 덴에게 속삭였다. 깜짝 놀란 덴이 시녀를 무르고는 곧장 보고했다.

    “전하, 빈께서 전하를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빈이?”

    서류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던 시안이 반응했다. 일그러진 눈살이 불편한 심기를 보여줬다.

    “네, 공사가 다망한 전하께 따뜻한 홍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돌려보내.”

    시안은 차갑게 대꾸하며 시선을 다시 서류로 옮겼다. 티타임이라니. 황실과 대공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가당찮던가. 부부이기 이전에 두 사람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다시 집중해서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데 시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방해를 받아서인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에 월계수에 손을 얹고 있던 베로니카가 아른거려서다. 그 처연한 미소와 사연 있어 보이는 눈길이 시안이 알고 있던 베로니카의 본모습과 너무 달랐기에 자꾸만 심중을 어지럽혔다.

    며칠 뒤, 국정을 살피던 시안을 보고자 베로니카가 찾아왔다.

    “빈 마마께서 뵙기를 청한다고 합니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해라.”

    시안은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베로니카를 돌려보냈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볼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베로니카가 다시 방문했다.

    “전하, 동대륙에서 구한 최상급 찻잎을 구해 빈께서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얼굴을 뵙고 싶다고 전해달라네요.”

    “후원에서 기다릴 테니, 시간 되실 때 언제라도 찾아달라고 하세요.”

    베로니카는 이틀 간격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시안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위 의식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베로니카는 결코 밑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 상대가 황태자 시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베로니카가 연이은 문전박대에도 불구하고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다. 항상 공손했고 저자세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원하는 게 뭐냐고.’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베로니카의 존재가 거슬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녀의 언행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베로니카를 되돌려 보내는 게 시안의 하루 일과로 자리 잡은 어느 날이었다.

    “지치는군.”

    시안은 푸석해진 피부만큼이나 피로해 보였다. 최근 들어 은밀히 황궁을 나가 황궁근위대원으로 뽑을 만한 자들을 만나다 보니 수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깨를 주무르며 피로를 쫓던 시안의 시선이 회중시계로 향했다.

    딱 이맘때다. 집무실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업무를 보며 피곤함이 정점을 찍을 즈음 베로니카가 찾아왔었다.

    “베로니카가 날 만나러 온 지 얼마나 됐지?”

    “첫 방문 일을 기점으로 딱 석 달이네요.”

    “석 달이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문전박대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꿋꿋했다. 정말 자존심이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만큼 한결같았다.

    ‘거슬려.’

    베로니카가 와야 할 시간이 지나자 시안의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토록 귀찮고 문전박대를 했던 사람인데, 막상 오질 않으니 신경이 쓰이다니. 이보다 더한 희극이 또 있을까.

    “올 때가 지났는데 안 오시네요. 무슨 일이 있으시나.”

    “알아봐.”

    “네?”

    “베로니카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시안의 퉁명스러운 명령에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덴이 잽싸게 움직였다. 덴이 나가고 집무실에 홀로 남은 시안이 볼을 실룩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베로니카가 오지 않은 이유를 알아보라고 한 건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덴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빈께서 지금 폐하와 독대 중이시래요.”

    “뭐?”

    순간 시안의 짙은 녹안이 깊게 침전됐다. 독대라니. 그간 저를 찾아오는 모습에 방심했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 폐하를 뵈어야겠다.”

    시안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그 베로니카가 리처드 황제를 만났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 불안했다. 본궁에 도착하자 시안을 알아본 대전 시녀들이 묵례했다.

    “폐하를 뵈러 왔다. 고하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께서는 대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본궁 정원에서 빈마마와 티타임을 갖고 계십니다.”

    “티타임?”

    반사적으로 시안은 반문했다.

    ‘아버지와 베로니카가 티타임을 갖는다니?’

    이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믿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본궁 정원으로 간다.”

    시안은 확인을 위해 서둘러 본궁 정원으로 향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에 리처드 황제가 종종 찾는 곳이었다. 시안이 잘 꾸며진 침엽수와 꽃밭을 거쳐 안쪽에 이르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 참으로 유쾌한 얘기구나.”

    웃음의 근원지에 다다른 시안이 눈을 의심했다. 건강이 악화되고 귀족들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자 웃음을 잃어버린 리처드 황제다. 그런 그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아닌가.

    “태자가 아니냐?”

    “네? 폐하, 지금 누가 오셨…… 저, 전하를 뵈옵니다.”

    “…….”

    리처드 황제의 찻잔에 차를 따르던 베로니카가 얼른 찻주전자를 내려놓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시안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예법에 절로 눈길이 갔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무턱대고 찾아왔습니다.”

    “태자가 이리 온 걸 보니 꽤 급한 일인 모양이군. 이리 앉아라.”

    시안이 가볍게 묵례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며 힐끗 베로니카를 쳐다봤는데, 그녀는 죄 지은 사람처럼 양손을 포개곤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폐하,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허허. 벌써 가려고?”

    “종종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

    시안은 양해를 구하며 일어난 베로니카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돌아서던 베로니카의 눈빛과 마주쳤다. 서로를 의식하듯 시선이 부딪치자 베로니카가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도망치듯 정원을 빠져나갔다.

    ‘뭔가를 숨기고 있어.’

    시안은 치부라도 들킨 듯 쩔쩔매는 베로니카를 보며 심증을 굳혔다.

    “한잔하겠느냐? 저 아이가 우려냈는데, 솜씨가 일품이구나.”

    시안은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입술만 살짝 적셨을 뿐인데 시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그윽한 향과 맛은 시안이 살아생전 먹어본 어떤 차보다도 깊었다.

    “놀랍지 않느냐?”

    시안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귀족 영애들이 다도를 기본 소양으로 배운다지만, 이 정도로 고절한 솜씨를 보이려면 몇 년은 갈고 닦아야만 가능했다.

    “급한 일이라니. 어여 말해보아라.”

    “실은 베로니카가 폐하와 독대하신단 얘기에 찾아왔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얘길 하더구나.”

    리처드 황제의 말에 안 그래도 무표정했던 시안의 얼굴이 서늘하게 식었다. 제 얘길 리처드 황제에게 했단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제 얘기라면?”

    “네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더구나.”

    “하소연이요?”

    시안이 멍해졌다. 만약 저 얘길 리처드 황제가 아닌 다른 이가 했다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무시했을 만큼 맥락이 없었다. 하소연이라니. 딴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심성이 착한 아이더구나.”

    “…….”

    시안은 말없이 리처드 황제를 응시했다. 리처드 황제의 안목은 인정하지만 저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어떤 심성을 지녔는지 시안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물며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공의 딸입니다.”

    “그래, 대공의 딸이지. 그건 부정할 수 없을 게야. 허허.”

    “저는 그녀를 믿지 않습니다.”

    “얘야, 타고난 핏줄이 죄는 아니란다. 난 볼수록 대공의 딸이란 생각보다, 그저 착한 며느리로 보이는구나. 콜록콜록.”

    찬 바람을 쐬며 무리한 까닭인지 리처드 황제가 격한 기침을 했다. 각혈한 것인지 입을 막고 있던 손바닥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하루가 다르게 병이 깊어지는 리처드 황제를 보는 시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한테 면목이 없구나. 네 어깨에 의무와 책임만 얹어주고. 사랑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가르치지 못했어. 콜록.”

    “들어가셔야 할 거 같습니다.”

    시안은 직접 리처드 황제를 부축하며 정원을 나섰다.

    사랑이라.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의무와 책임에 짓눌려 사는 시안에게 이보다 사치스러운 단어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리처드 황제가 승하했다.

    * * *

    가이아 교단의 주관으로 대성당에서 리처드 황제의 장례가 치러졌다. 수도는 시름에 잠겼고, 석 달간 연회나 축제 등의 행사는 엄히 금지되었다.

    시안은 영면에 든 리처드 황제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공허해 보였다. 황제라는 직위를 떠나 시안에게는 아버지였다. 꼭두각시라 손가락질받는 황제라 할지라도 시안에게 있어선 소중하고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그런 리처드 황제의 마지막을 눈에 담고 돌아서는데, 베로니카가 보였다.

    “…….”

    시안은 잠시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처드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베로니카의 모든 게 경건했다. 연기라고 치부하기에 그녀의 촉촉한 눈망울엔 진심이 묻어났다.

    가이아 교단의 교리에 따라 열흘간의 장례식과 석 달간의 애도 기간이 끝났다. 황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빠졌다. 시안의 황제 즉위식 준비 때문이었다. 석 달여의 준비를 끝내고 시안이 황제에 올랐다. 황태자비 세실리아는 정식 황후가 되어 내궁의 주인이 되었다. 빈의 직위를 갖고 있던 베로니카는 황비로 격상되었다. 대륙 각국에서 보낸 축하 사절들이 내방했고, 지방 귀족들도 모처럼 진상품을 들고 수도로 상경했다. 황궁에서는 무려 열흘간 기념연회가 개최됐다.

    시안은 기념연회를 귀족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한 중립 귀족들과 교분을 쌓을 기회의 장으로 여겼다. 황궁근위대를 개혁하고 제 편에 설 귀족들과 친분을 쌓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세실리아 황후와 베로니카 황비도 동행했다. 황실의 일원으로 손님들을 맞이할 의무가 그녀들에게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연회장 한쪽에서 황실 개혁에 도움이 될 법한 귀족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시안이 잠시 단장실에 들렀다 나오던 때였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홀로 가는데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자꾸 이럴래? 맘 상하게.”

    “죄, 죄송해요. 저도 애썼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시안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 목소린 베로니카와 렌인가?’

    괜히 부딪치고 싶지 않아 돌아가려는 시안의 발길을 그들의 대화가 붙잡았다.

    “확 다 불어버릴까? 네 정체가 들통나면 어떻게 되려나? 대공가가 널 버리려나.”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드릴 테니 제발요.”

    시안이 멈칫했다.

    ‘무슨 말이지? 정체가 들통나는 건 뭐고, 대공가가 베로니카를 버리다니?’

    가벼이 넘기기엔 둘의 대화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특히 베로니카가 쩔쩔매는 모습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렌이 한 살 더 많고 대공가로부터 독립했다지만 직계와 방계의 서열은 여전하거늘, 지금 대화는 너무 일방적이었다.

    “이런, 육촌끼리 그간의 안부를 나누려 했더니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있네?”

    “…….”

    “못다 한 얘기는 담에 나누자고.”

    렌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복도 건너편으로 휘적휘적 사라졌다.

    “아.”

    맥이 풀린 베로니카가 쓰러지듯 벽을 짚었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은 지금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위태로웠다. 겨우 숨을 돌리고 있는데 모퉁이 너머에서 시안이 나타났다.

    “폐, 폐하!”

    “…….”

    시안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게 치장한 외모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마치 맹수에 쫓긴 사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시안이 고개를 돌리더니 못 본 척 지나쳐 버렸다.

    “폐하, 잠시만요!”

    베로니카가 변명이라도 하고자 시안을 붙잡아보려 했지만 그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버려지듯 홀로 남게 된 베로니카가 고개를 떨궜다.

    자리를 피한 시안은 홀이 아닌 야외 테라스로 나왔다. 황궁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걸어 나온 시안이 난간을 잡았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베로니카를 보는 순간 시안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되기에 시안은 충동을 이겨내고 그녀를 매정하게 외면했다.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마음이 흔들릴까 더 독하게 무시했다.

    그런데 머리로는 잘한 일이라는 걸 알겠는데,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찬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질까 싶어 테라스로 나왔지만, 수상쩍은 두 사람의 대화도 자꾸만 귓전에 맴돌며 혼란을 가중시켰다.

    “폐하, 여기 계셨군요.”

    “그대는 로만 자작이군. 영지의 얘기는 들었네. 최근 석탄 광산을 발견했다지?”

    시안은 그를 테라스에 들여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느니 그편이 훨씬 더 나았으니까.

    * * *

    “폐하, 한동안 외출을 자제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시안의 집무실을 방문한 린든 백작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감시자들 때문인가.”

    “네, 외부의 일은 저와 휘긴 경에게 맡기고 정사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린든 백작의 충언에 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로 즉위한 지 어언 몇 달, 부쩍 대공가의 감시와 견제가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은밀히 추진 중이던 황궁근위대의 개혁과 귀족들 포섭도 지지부진했다.

    적잖은 시간 동안 개혁 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린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후는 보고 가지 않는 건가?”

    “……만나봐야 가슴만 아플 뿐입니다. 전하께서 많이 들여다봐 주십시오.”

    린든 백작은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자유분방한 세실리아에게 황궁 생활은 감금과 다름없었다. 그걸 알기에 린든 백작은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가 떠나고 급한 사안들을 마무리 지은 시안도 집무실을 나섰다. 원치도 않은 정략혼의 피해자가 된 세실리아만큼은 시간이 될 때마다 찾았다. 도의적인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황궁 내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제 편이기도 했다.

    황후 궁으로 향하는 시안의 눈길에 일말의 무리가 보였다. 가까워진 시안을 발견한 무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베로니카 황비를 모시는 시녀들입니다.”

    뒤를 따르던 덴이 얼른 말을 덧붙이자 시안이 대리석으로 치장된 문을 쳐다봤다. 그러자 눈치 빠른 시녀가 얼른 고했다.

    “베로니카 황비께선 궁정 화가 라파엘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습니다.”

    “황비가 그림을 배운다고?”

    시안은 린든 백작의 추천으로 희대의 명화 <천사의 타락>을 발표한 라파엘을 궁정 화가에 임명했다.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세실리아와 친분이 있는 만큼 그녀를 위로해 주려는 배려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돌려 황후 궁으로 향하는 시안의 표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잔인한 베로니카가 그림을 그린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어.’

    며칠 뒤, 시안은 따로 사람을 시켜 라파엘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앉지.”

    학술원 시절, 세실리아를 통해 종종 마주친 적이 있던지라 낯설진 않았다.

    “얘기 들었다. 황후의 말동무가 되어준다지?”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황후 전하는 제 오랜 지우입니다.”

    “오해하지 말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보자고 한 거니까.”

    시안은 찻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비도 그림을 배운다던데?”

    “황비 전하께서 거듭 부탁을 한지라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황비가 부탁했다니. 그거 참 의외군.”

    무관심한 척 대꾸했지만 시안의 신경은 베로니카에게 쏠려 있었다.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지.”

    “그림은 인간의 잠재된 내면을 끌어내고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감추려 해도 그림을 그릴수록 내면의 응어리진 뭔가가 표출되게 마련이죠.”

    “생소하지만 흥미롭군. 계속하게.”

    “……베로니카 황비 전하는 지독한 고독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고독이라고?”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공가의 후계자로 세상을 발아래 두고 오시하던 베로니카다. 그런 베로니카가 고독에 시달린다니 당혹스러웠다.

    “저는 한낱 그림쟁이일 뿐 정적 관계는 잘 모릅니다. 오로지 그림에 담긴 내면을 들여다보고 느낀 바를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

    “제가 판단한 바로 황비 전하는 결코 악한 분이 아니십니다.”

    라파엘을 물린 시안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베로니카에 대한 주변인들의 말이 그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도 달라 방황하고 있었다.

    “알아봐야겠어.”

    시안은 생각을 고쳤다. 그간 베로니카를 철저히 무시로 일관했다. 그녀와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다. 문제는 그럴수록 베로니카에 대한 의구심만 커졌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녀에게 신경이 쓰였다. 어떤 게 진짜 그녀의 모습인지, 그가 모르는 시간 동안 베로니카가 변한 것은 아닌지. 직접 확인하고 나야 이 의문이 풀릴 것 같았다.

    시안은 황궁 외부에서 활동 중인 휘긴에게 사람을 보내 베로니카의 조사를 맡겼다. 황궁근위대 개혁 임무까지 겸하고 있다 보니 조사의 진척은 더뎠지만 개의치 않았다.

    베로니카가 사교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지난 삼 년. 렌과 베로니카가 나눴던 이해할 수 없던 대화.

    이해할 수 없던 베로니카의 그 눈빛.

    이 해답을 찾아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면 참고 기다릴 의향이 있었다.

    그사이 계절이 바뀌어 무더위가 물러나고, 북쪽에서 밀려온 찬 바람이 불더니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수도에 눈이 내렸다. 너 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눈을 보며 신기해하던 그날, 세실리아 황후가 죽었다.

    * * *

    “독이라고?”

    외부에서 초빙한 의원의 부검 결과에 시안이 정색했다.

    독살이라니. 시안이 고개를 돌려 힐끗 린든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소중한 딸을 잃은 분노에 린든 백작은 세상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부 밀림에 서식하는 거미의 독입니다. 외관상 심장마비로 보이나, 여기 정수리를 보면 독이 타고 올라와 시퍼렇게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한가?”

    “제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의원의 확언에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린든 백작이 침상으로 다가왔다. 체온을 잃고 싸늘해진 딸의 손을 잡는 그의 심정은 창자가 끊어질 듯 참담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아비가 무능해서 널 이렇게 보내고 말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곤히 잠든 듯 인형처럼 누워 있는 세실리아를 보는 린든 백작의 억장이 무너졌다.

    “네게 약속하마. 널 이렇게 만든 놈과 한 하늘 아래서 살지 않으마. 기필코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네게 용서를 구하마.”

    “백작.”

    린든 백작은 시안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쌩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안이 고개를 돌려 창백한 세실리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빛이 후회로 점철됐다.

    “황후, 나의 그릇된 고집이 결국 그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구려.”

    시안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 삶을 강요한 것도 모자라 지켜주지도 못했으니까.

    흉수는 뻔했다. 세실리아의 죽음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보는 가문, 프리드리히 대공가다. 그들이 아니라면 황궁 안에서 이런 독살을 꿈꾸지도,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독살을 어떻게 밝혀내느냐다. 심증과 정황은 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면 복수는 요원하다. 시안의 눈길에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맹세하마. 반드시 복수해서 그대의 넋을 달래겠다.”

    제국 황실은 공식적으로 세실리아 황후의 죽음을 공표했다. 사인은 지병으로 인한 심장마비. 시안은 은밀히 사람을 시켜 세실리아의 죽기 전 행적 추적을 지시하면서 대외적으로 무능력한 황제처럼 굴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래야만 비집고 들어갈 틈을 유도할 수 있었다.

    “…….”

    관에 안치된 세실리아를 보는 시안의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말이 없는 그녀를 보고 있자 리처드 황제가 죽었을 때 느낀 막막함이 다시 밀려왔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황궁 안에서 유일하게 제 편이었던 그녀의 죽음은 가슴이 뻥 뚫리는 상실감을 주기 충분했다.

    시안은 고개를 들어 건너편의 베로니카를 노려봤다. 세실리아가 독살당하기 하루 전, 베로니카와 차를 마셨다는 행적이 드러났다. 조사 결과 독이 혈관을 타고 폐부에 미치는 시간이 만 하루라고 했다. 아직 단정 짓긴 이르나 그녀도 유력한 용의자임은 분명했다.

    “황후 전하.”

    죽은 세실리아를 보는 베로니카의 눈가는 촉촉했다. 눈물을 쏟진 않았지만 슬픔을 삼키는 듯한 모습은 진심으로 애통해 보였다. 그러나 세실리아를 독살한 용의자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가증스럽다 못해 소름이 쫙 끼쳤다.

    그로부터 얼마 뒤, 시안이 독의 출처를 추적하던 의원과 은밀히 만났다.

    “알아보았느냐?”

    “여러 경로를 거치긴 했으나 구입처는 대공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시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로써 대공가의 소행이 분명해졌다. 문제는 누가 독살했느냐는 것인데, 황궁 안을 대공가가 장악하다시피 하다 보니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답답함이 밀려오는데 황궁 밖에서 시안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 주고 있는 방랑 기사 휘긴이 은밀히 시안을 찾아왔다.

    “오랜만이군, 경.”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시안과 휘긴이 얼굴을 맞댄 건 근 반년 만이다. 이마저도 덴이 침실에서 시안의 행세를 하고 있기에 겨우 암행에 나설 수 있었다.

    “진척은?”

    “추가로 네 명의 귀족이 뜻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약소하게나마 후원금을 보탠다고 하여 린든 백작에게 보냈습니다. 또 몰락 귀족 중 쓸 만한 자 셋을 포섭했습니다.”

    “고생이 많군.”

    “그리고 명하신 대로 황비에 대해 조사해 봤습니다. 보고할까요?”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황궁을 나온 이유에는 휘긴에게 직접 베로니카에 관한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 년 전, 열병에 시달리던 황비께서 사교계에 복귀하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답니다.”

    “이상한 소문?”

    “황비께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겁니다.”

    당시 시안은 학술원에 재학 중이었다. 세실리아와의 정략혼을 성사하기 위해 그녀를 설득하고자 부단히 애를 쓰던 시기다. 또한 무능한 황태자로 연기하느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학술원의 인맥이 사교계까지 이어지는 걸 감안하면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어리숙해졌다고 할까요? 사교계에서 도태될 뻔한 전력도 있다고 합니다.”

    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베로니카는 사교계를 부숴 버릴지언정 도태될 여자가 아니다. 그걸 용납할 만큼 좋은 성격도 아니고.

    “근데 재미있는 건, 그런 황비가 일 년 뒤에 사교계를 집어삼킨 여왕이 되었단 겁니다. 극과 극의 행보를 오간 셈이죠.”

    시안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규정이 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혹시 열병의 후유증이거나, 그런 건 아닌가?”

    “안 그래도 알아봤습니다만, 의원들 말로는 그런 후유증은 없다고 합니다.”

    “폐하, 사실입니다. 후유증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지적 능력이 저하될 순 있습니다. 하지만 황비께서 사교계에서 재차 이름을 날리신 걸 보면 그건 아닌 듯싶습니다.”

    묵묵히 경청하고 있던 의원도 그 말에 힘을 보탰다. 휘긴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런 소문이 돌았답니다. 베로니카 황비께서 실제로 열병을 앓은 게 아니라, 독에 중독되었다는 겁니다.”

    “독?”

    의원이 뭔가 떠오른 듯 독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다 말했다.

    “기억이 납니다. 당시 대공가에 불려간 의원들 대다수가 독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제 후배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 후배와 연락이 닿나?”

    휘긴이 불쑥 묻자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이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대공가로 불려간 거로 짐작되는 의원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부패 정도로 추정하건대 죽임을 당한 지 한 달쯤 되었던 것 같더군.”

    “그, 그런 일이.”

    의원이 사색이 됐다. 시안이 모종의 사고들을 곱씹으며 물었다.

    “하면, 그 의원들이 황후를 죽인 독에 관여했을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거미 독은 민감해서 인위적으로 조합하려면 독성이 죽습니다. 하물며 당시 대공가가 사들인 건 독을 해독시키는 약재였습니다.”

    “그렇담 베로니카가 독에 중독되었단 게 사실일 수도 있겠군.”

    시안은 지금까지의 정황을 토대로 정리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의문이 생겼다.

    ‘베로니카가 독에 중독되었다가 복귀한 건 몇 해 전이다. 근데 진료를 보던 의원을 이제 와 죽인다고?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대공가의 모사는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음모의 리아브릭. 매사에 소름 끼치도록 치밀한 음모를 짜는 여자가 굳이 의원들을 죽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확 불어버릴까. 네 정체가 들통나면 대공가가 널 버리려나?”

    순간적으로 시안의 뇌리에 렌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는 저 말의 저의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미약하게나마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베로니카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시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짐작하는 바가 맞는다면 어긋났던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월계수 아래에서 보인 그 처연했던 표정도, 리처드 황제와 라파엘이 본 베로니카의 본성도, 그리고 시안을 향한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했다. 

    심각한 얼굴로 시안이 골몰히 생각에 잠기자 휘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정리가 필요했네. 그보다 너무 지체했군. 황궁으로 돌아가야겠어. 휘긴 경은 베로니카에 대해 계속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네, 폐하.”

    시안은 로브를 뒤집어쓰고는 비밀 장소를 떠났다. 으슥한 골목 어귀를 걷는 그의 눈빛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 * *

    세실리아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국모의 죽음이었지만, 황실 행사에 참가한 베로니카가 흠잡을 것 없이 황후의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공식 스케줄을 소화하며 시안과 베로니카가 함께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우연히 눈길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베로니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 당황하는 기색을 볼 때마다 시안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짐작대로 베로니카가 대역이라면…… 대공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대공가라지만 친딸이 아닌 대역을 황비로 앉힌 건 정치적인 고립을 자초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일이다.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지만 황실을 능멸한 행위는 귀족들의 지탄을 피해갈 수 없다. 하물며 황태자빈 선발식에 아벨라를 참가시킨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이 일을 결코 가벼이 넘기지 않을 것이다.

    ‘반격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철옹성 같은 대공가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열릴지도 모른다. 와인 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시안이 외국 사절과 대화 중인 가짜 베로니카를 쳐다봤다. 가짜라는 의심이 점점 굳어지자, 놀라울 만큼 닮은 베로니카와 그녀의 외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쌍둥이라 말해도 믿을 만큼 쏙 빼닮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가짜 베로니카는 모범으로 삼고 싶을 만큼 훌륭한 예법으로 사절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었다. 우아한 손짓과 설핏 웃는 미소, 경망스럽지 않은 말투는 대역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뿐.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나 그녀가 대공가의 사람이라는 건 변치 않는다.

    시안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고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한 눈길의 시안과 달리 당황하던 기색을 보이던 가짜 베로니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순간 시안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저 미소를 마주하는데,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불쾌할 정도로 가슴을 흔들었다.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외면하고자 시안이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실망하는 가짜 베로니카의 표정을 시안은 보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빠르게 뛰는 심장과 이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에 시안은 퍽 난감했다.

    그날 이후 시안은 의도적으로 가짜 베로니카를 멀리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가 함께하는 행사가 많다 보니 가짜 베로니카를 마주칠 일이 더 잦아졌다. 최대한 눈을 맞추지 않으려 했지만, 본의 아니게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쿵. 그래, 저 미소다. 허락도 없이 불쑥 비집고 들어와 시안의 깊숙한 곳에 흔적을 남겼다. 눈을 감아도, 다른 일을 할 때도 불쑥불쑥 생각나게 만드는 미소였다.

    건국절 행사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순백의 황실 예복을 차려입은 시안이 막 응접실을 나오는데, 저 멀리서 치맛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던 베로니카와 마주쳤다.

    “느,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숨을 몰아쉬는 가짜 베로니카가 시안은 이해되지 않았다. 건국절 기념문을 발표하는 남문으로 직접 가면 될 일이지, 왜 굳이 본궁까지 와 돌아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시안이 처음으로 베로니카에게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지?”

    “폐하와 함께 가려고요.”

    “……!”

    수줍어하면서도 가짜 베로니카는 놀라우리만치 또박또박 대답했다. 수백 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면 시안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감각, 경직되고 경계로 가득했던 내면의 무언가가 느슨해지는 느낌이었다.

    시안은 대답조차 주지 않고 걸음을 뗐다. 이 이상한 감정이 행여 표정으로 드러날까 조마조마했다. 그 뒤를 가짜 베로니카가 바싹 따랐다. 시안은 보지 못할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기념식이 끝나고 수도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재정이 부족한 황실을 대신해 대공가가 건국절을 기념해 술과 고기를 풀었다. 의도적으로 황실보다 대공가에 더 고마움을 느끼게 하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그날 밤, 황궁에서 건국절 기념 만찬이 열렸다. 지방 귀족들도 상경할 만큼 황실 최고의 연회였다.

    “앗!”

    기분이 좋은지 만취한 귀족 하나가 시안의 예복에 와인을 쏟는 불경스러운 실수를 저질렀다.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폐하!”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개의치 말도록.”

    시안은 쓴소리 한마디 못 하고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질책할 만한 권위도 없는 황제를 향한 귀족들의 비웃음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저들이 업신여기고 얕볼수록 시안에겐 기회가 늘어나는 셈이었다.

    가까운 응접실에 들어선 시안은 와인에 젖은 웃옷을 벗었다. 몸에 냄새가 밴 걸 보니 아무래도 씻어야 할 듯싶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막 셔츠의 단추를 반쯤 풀어 헤칠 때, 가짜 베로니카가 들어왔다. 분명 시녀에게 여분의 옷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시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대가 가져오지?”

    상의를 탈의한 시안과 마주친 가짜 베로니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를 푹 숙이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가져다드리고 싶어서…….”

    “쓸데없는 짓이다. 뭘 바라든 그대가 기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안은 차갑다 못해 야멸차게 선을 그었다. 네가 아무리 다가오려 애써도 소용없으니 그만두라고. 아니, 그건 시안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다름없었다. 더는 자신을 흔들지 말라고 말이다.

    상처를 받은 가짜 베로니카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쓸쓸히 웃었다.

    “기대하는 거 없어요.”

    “뭐?”

    “그저 전하께서 한 번 보아주셨음 했고 드물지만 보아주셨고, 그걸로 좋았어요.”

    “…….”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가짜 베로니카가 예를 갖추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가짜 베로니카가 가져다 놓은 셔츠와 예복을 보던 시안이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뭐라고. 왜 이렇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흔들어대는지. 또 가짜 베로니카인 걸 알면서도 그녀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스스로가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제길.”

    * * *

    건국절 행사를 무사히 치른 시안이 몸져누웠다. 열이 펄펄 끓었고 의식은 몽롱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궁중 어의는 과로로 인한 몸살과 감기라며 푹 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겪어보지 못한 열병에 시안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초인의 반열에 들어선 뒤 건강을 맹신한 게 화근이었다.

    ‘덴이 쉬라고 할 때 쉬었어야 했는데.’

    열에 시달리며 죽은 듯 잠만 자던 시안이 눈을 떴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고 등은 축축했다. 열이 내리지 않았는지 아직도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

    초점이 맞지 않는지 시안의 동공은 흐릿했다. 몸이 안 좋은 것도 있지만 생각도 많아 보였다. 시안의 건강이 악화된 건 외부적인 요소보다 심적인 영향이 더 컸다. 리처드 황제가 죽고 난 뒤에 주어진 의무와 책임감, 세실리아의 죽음이 준 상실감, 그리고…….

    “폐하, 폐하. 정신이 드세요?”

    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몽롱했지만 눈앞의 여인이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허락도 없이 시안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더니 수백 년을 버텨온 월계수처럼 깊이 뿌리를 내린 여자. 가짜 베로니카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지?”

    “네?”

    가짜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대가 누구냐고 물었다.”

    “…….”

    한 번도 묻지 못했던 말. 그러나 천 번도 넘게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넌 누구냐고. 시안은 몽롱한 의식을 핑계 삼아 저도 모르게 그 질문을 꺼내고 말았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가짜 베로니카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내,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아프고 슬픈 미소를.

    “저예요. 황후 세실리아요.”

    “……!”

    세실리아라니. 세실리아일 리가 없다. 그녀는 죽었으니까. 그런데도 가짜 베로니카는 스스로 세실리아 황후라고 말했다.

    왜? 어째서? 그 대답은 가짜 베로니카의 슬픈 미소로 짐작할 수 있었다. 행여 베로니카라는 사실을 안 시안이 자신을 쫓아내지 않을까 싶어서, 거짓말을 해서라도 시안의 곁에 있고 싶어서, 아픈 시안이 미치도록 걱정돼 옆을 비울 수 없어서.

    시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 마음이 너무 아파 보여서. 제게 다가오려는 그녀의 진심이 애달파서. 그리고 가슴 깊숙이 넣어두었던 시안의 마음도 그녀와 다르지 않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그래서일까. 시안은 몽롱한 와중에도 처음으로 어깨에 얹고 있던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른 체할 자신이 없었다.

    시안을 단단히 에워싸고 있던 빗장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열병을 앓고 있는 몸조차 잊은 듯 그녀가 소중했다.

    시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폐, 폐하?”

    가짜 베로니카의 상체가 쓰러지듯 숙여졌다. 놀란 얼굴도 잠시, 그녀가 눈을 스르르 감았고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서로에게 상처로만 남을 슬픈 입맞춤을 나눴다.

    * * *

    “폐하?”

    “…….”

    “제 얘기 듣고 계십니까?”

    휘긴의 계속된 부름에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던 시안이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군. 계속 얘기하지.”

    “폐하께서도 아시는 자입니다. 궁정 화가로 지냈던 라파엘이라고. 그자가 황궁근위대 개혁을 위해 쓰라며 막대한 자금을 후원했습니다.”

    “…….”

    시안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도통 얘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안의 머릿속은 온통 가짜 베로니카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안은 지난밤의 일로 그간 외면하던 제 마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 열이 올랐고 정신이 몽롱한 건 핑계였다. 그녀의 손을 잡은 건 온전히 그의 의지였고 선택이었다. 시안은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이미 시안의 마음 깊숙이 그녀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폐하?”

    “라파엘은 세실리아와 가까운 사이였지. 헛되이 쓰지 않겠다고 전해주게.”

    집중력을 되찾은 시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폐하,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말하도록.”

    “대공가의 안가를 발견했습니다.”

    “안가를?”

    시안의 눈이 커졌다. 안가는 대공가의 숨겨진 보루라고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곳을 발견했다는 건 큰 성과다.

    “네, 수도 인근에 그런 저택을 보유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주변 경비가 삼엄해 가까이 갈 순 없었지만, 대공이 주기적으로 자주 왕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말해보라.”

    “조사한 바로는 그곳으로 희귀 약재나 약초가 주로 납품되는데, 최근 들어 품목들이 변했답니다. 귀족 영애가 좋아할 법한 드레스나, 장신구, 구두 같은 거로요.”

    “……!”

    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독에 정통한 의원들이 죽은 시기와 안가로 들어가던 품목들이 변한 것이 많은 얘길 해주었다. 주어진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시안은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만약 베로니카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돌아올 준비를 하는 거라면…….’

    대역에 불과한 그녀는 제거당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무조건 죽는다. 프란체 대공과 음모의 리아브릭은 후환을 살려둘 만큼 어수룩한 자들이 아니다.

    “이 얘길 린든 백작에게도 했나?”

    “아직입니다. 따로 찾아뵙고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시안은 속으로 안도했다. 뼛속까지 무골인 휘긴은 정보의 분석력이 떨어진다. 실제 베로니카를 본 적이 없기에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추측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린든 백작은 다르다. 이 정도 단서가 그에게 주어진다면 베로니카가 대역임을 알아챌 가능성이 컸다.

    ‘백작이 알아선 안 돼.’

    그리되면 린든 백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짜 베로니카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대역을 내세워 황실을 능멸한 행위는 대공가라고 하더라도 쉬이 용서받기 힘든 대역죄니까. 하나, 그리되면 가짜 베로니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방금 얘긴 린든 백작에게는 함구하는 게 좋겠군.”

    “네? 어째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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