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10/30)
  • 제26장 태양의 노래

    사열식. 열과 행을 맞춰 기립한 황궁근위대가 절도 있게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의식을 치렀다.

    리처드 황제가 정렬한 황궁근위대원들 앞을 지나며 그들의 상태나 장비를 확인하며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고작 산적 토벌에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새롭게 개혁한 황궁근위대의 첫 출정이란 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출전한다.”

    황궁근위대의 단장 시안이 백마에 올라타며 앞서 나아갔다. 그 뒤를 오십여 명의 근위대원도 열을 맞춰 쫓았다.

    뿌우우우우! 성곽에서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에 맞춰 성문이 열렸고 황궁근위대가 황궁을 나섰다.

    수도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황궁근위대의 그 늠름한 행렬은 제국민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간 능력 없고 문제 많은 귀족 자제들로 선발되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모습과 사뭇 다른 기강과 절도가 느껴졌다.

    “폐하께서 근위대 물갈이를 했다더니 정말인가 봐.”

    “그러게. 진짜 기사님들 태가 나네.”

    “그 망나니들 하곤 분위기부터 다르네. 괜히 시비 걸려서 죽을 뻔한 걸 생각하면 이가 갈려.”

    “아무렴. 황태자 전하께서 단장으로 계신데 허투루 하시려고?”

    황궁근위대의 행렬을 보는 제국민들의 눈빛에 일말의 기대가 서렸다. 귀족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고단해진 건 평민들이다. 귀족들에게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고 착취를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이제라도 황권을 회복한 리처드 황제와 시안이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북문에 다다른 황궁근위대의 행렬을 지켜보는 한 대의 마차가 있었다.

    “다치지 마세요.”

    마차 안, 엘레나는 황궁근위대를 통솔하며 북문을 나서는 시안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이번 계획은 누구 한 명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긴밀하게 움직여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시안의 출정은 그 첫발을 내디딘 것과 다름없었다.

    “가이아 여신께 기도할게요. 다들 무사하기를, 꼭 성공하기를요.”

    대계(大計)를 설계한 건 엘레나지만 성공 여부는 렌과 시안, 휴렐바드 세 사람에게 달렸다. 중간은 없다. 죽느냐, 사느냐. 잡아먹느냐, 잡아먹히느냐뿐이다.

    “살롱으로 돌아가죠.”

    엘레나가 마부석에 말하자 멈춰 있던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할 일이 있듯이 엘레나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평상시처럼 살롱을 지키는 것. 그것이 지금 엘레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 시각. 북문을 나선 황궁근위대는 수도 북쪽을 감싸고 있는 카즈베기 산자락에 발을 들였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하더라도 북부 지역을 왕래하는 상단과 행인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근래 들어 인적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산적 두목 휴가 산기슭에 산채를 세우고 상단들을 습격해 모든 품목을 강탈한다는 소문이 나돈 까닭이다. 특히 산적 두목 휴가 흉악하고 살인을 즐겨 한다는 소문까지 곁들여지면서 아예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부득이 북부 지역으로 오가는 상단이나 행인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카즈베기산을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워워.”

    산의 초입에 이르자 시안은 말에서 내렸다. 가도를 제외하면 산세가 험준해 말을 타고 이동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반나절은 더 가야 한다. 서둘러라.”

    시안은 앞장서서 숲길을 헤쳐 나갔다. 숲이 우거지고 산세가 험해 길이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했다. 주로 약초꾼들이나 이용하는 외진 길이었지만 시안은 자주 왕래하던 길인 것처럼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여기서 왼쪽으로.’

    시안의 머릿속엔 한 장의 지도가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산세에 정통한 약초꾼들이 오가는 오솔길을 토대로 산기슭을 따라 산채로 이어지는 숲길은 휴렐바드가 새롭게 닦아놓은 것이다. 메이가 그 산길을 지도로 그려 엘레나에게 전달했고, 엘레나는 그 지도를 다시 시안에게 건넸다. 굳이 이런 번거로움까지 감수한 이유는 혹시 모를 대공가의 감시자를 따돌리기 위함이다.

    제법 고되고 긴 행군이 이어졌다. 산세가 험해 자칫 발을 헛디디면 추락할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곳도 있었다. 그러나 시안이 엄별해 선출한 근위대원인 만큼 낙오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인가.”

    그렇게 한참을 더 들어오자 산채가 보였다. 산채라고 해봐야 넓은 공터에 허름한 오두막 몇 채를 짓고 목책을 세워둔 게 다였다.

    시안이 홀로 산채를 향해 걸어갔다.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주 왕래하는 곳인 듯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근위부대장 휘긴이 손을 들어 올려 근위대원들을 대기시켰다. 사전에 언질이 있었던 듯 시안의 위험천만한 행동에도 근위대원들은 조바심을 내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막 산채에 시안이 다다랐을 즈음이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목책 사이로 봉두난발에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걸어 나와 예의를 갖췄다. 거칠고 험악한 외형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순박해 보이는 눈동자를 지닌 그는 흉흉하기 유명한 산적 두목 휴, 즉 휴렐바드였다.

    “채비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산채로 들어오시죠.”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을 쳐다봤다. 눈빛만으로도 그 맘을 알아챈 부근위대장 휘긴이 수하들을 통솔해 산채로 들어섰다. 이맘때쯤 도착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던 듯 산적으로 위장한 용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체구가 비슷한 산적들과 짝을 짓는다. 그리고 제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실시.”

    휘긴의 명령이 떨어지자 근위대원들은 체형이 비슷한 용병들이 주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말 그대로 눈에 띄지도 않고 평범한 제국민의 복장이다. 거기에 검을 숨길 만한 짐을 등에 메니 근위대원의 모습이 싹 가셨다.

    시안도 예외는 없었다. 화려한 제복 대신에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시안이 입고 있던 제복은 휴렐바드가 따로 고용한 용병이 입게 되었다.

    “다 되셨습니까?”

    휘긴이 확인차 돌아보니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복 대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근위대원들은 확실히 눈에 띄지 않았다. 관심을 두지 않으면 지나가던 행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평범했다. 다만, 고운 피부결에 우수에 찬 흑안과 황족을 상징하는 흑발을 지닌 시안만큼은 그 고귀함과 기품을 감출 수 없어 로브를 쓰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바로 움직이시죠.”

    휴렐바드는 시안을 위시한 황궁근위대를 이끌고 걸음을 뗐다. 시안이 온 정반대 방향이었는데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 왔던 길보다 험했다.

    좀 더 이동이 편안한 길도 있었지만 그쪽으로 가게 되면 빙 돌아가야 했다. 수도까지 반나절 거리인 걸 감안하면 서둘러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산 중턱에 내려오자 나무에 묶여 있는 말과 짐수레 등이 보였다. 카스톨 상단을 비롯해 산적 행세를 하며 빼앗은 물자들이다. 의심받지 않고 수도에 잠입하기 위해서 이곳에 보관 중이었다.

    휘긴의 주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근위대원들이 움직였다. 누군가는 말을 타고, 누군가는 짐수레를 끌고, 누군가는 도보로 시간 차를 두고 산을 내려갔다.

    “경은 가지 않는 건가?”

    말에 올라탄 시안이 물끄러미 휴렐바드를 내려다봤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비록 검을 맞댄 적은 없지만 엘레나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는 이 수호 기사의 검술이 자신과 비교해 큰 격차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대공가에 비해 전력이 열세인 걸 감안하면 휴렐바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가씨께서 시키신 일이 남았습니다. 처리 후, 늦지 않도록 합류하겠습니다.”

    시안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말을 몰아 내려갔다. 엘레나가 시킨 일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굳이 재촉하지 않더라도 제시간에 도착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안을 비롯한 황궁근위대원 전부를 보내고 나서야 휴렐바드는 산채로 복귀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사이 산적 두목 휴의 아내 행세를 하던 메이가 자기 멋대로 제복을 입고 있는 용병들의 옷차림을 단속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산기슭의 공터에서 야영할 겁니다. 경고하겠는데, 독단 행동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휴렐바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카스톨 상단의 기사와 대결해서 보여준 휴렐바드의 압도적인 무위에 그들은 경도되었다. 지체할 겨를도 없이 휴렐바드가 용병들을 대동해 산채를 떠났다. 그도 당장 수도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떠나지 못했다.

    “분명 대공가에서 붙인 감시자가 있을 거예요. 그들의 눈을 속인 뒤 움직여도 늦지 않아요.”

    엘레나는 수차례 신신당부했다. 대공가가 황궁근위대로 위장한 용병들이 산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고. 자칫 황궁근위대가 사라졌다는 게 프란체 대공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사에 완벽하신 분이지.’

    엘레나를 떠올리자 휴렐바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한없이 여리게만 보이는 엘레나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제국은 망해도 대공가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성세를 누리던 대공가를 혼자 힘으로 이 지경까지 만든 건 누구도 해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제 삶이 다할 때까지 아가씨를 모시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엘레나는 세상을 바꿀 위인이다. 그런 엘레나를 위해 여생을 바칠 수 있다면, 휴렐바드는 기사로서 그보다 더한 영광과 명예는 없을 거라 자부했다.

    그러자면 이번 계획이 성공해야 했다.

    * * *

    “오늘이려나?”

    쇠창살 안, 서늘함이 감도는 벽에 등을 기댄 리아브릭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에 있다 보면 시간 개념이 사라진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불과 며칠 전, 아틸이 다녀가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L, 아니, 엘레나. 네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걸 인정할게. 난 널 넘지 못했어. 그래서 여기 갇힌 거고.”

    패배를 시인했으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건만 리아브릭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넓어. 넌 죽어. 이건 변하지 않아.”

    리아브릭은 이죽거렸다. 패배자의 억하심으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를 찝찝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어쩌면 넌 다 예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넌 항상 상식을 초월했으니까.”

    리아브릭이 미친 사람처럼 풀어 헤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피골이 상접하고 만신창이였지만 눈빛은 죽지 않았다.

    “그런데 있잖아.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마치 엘레나가 옆에 있는 듯 말을 건네는 리아브릭의 목소리에 의미심장함이 실렸다.

    “너나 나나 머리만 써서는 프란체 대공을 절대 넘을 수 없어. 그 남자는 말이야.”

    여운을 남기듯 말을 끊었던 리아브릭이 엘레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 괴물이거든.”

    리아브릭이 깔깔 웃어댔다. 소름 끼칠 만큼 기괴한 웃음소리로.

    * * *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를 더없이 낭만적으로 만들었던 노을이 지고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해가 지자 생기가 넘치고 분주하던 수도의 거리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홍등가나 야시장에 인파가 몰리긴 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긴 밤의 시작이군.”

    프란체 대공은 집무실 창문 너머로 깜깜해진 사위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매사에 두려울 게 없는 그였지만 거사를 앞둔 오늘은 미묘한 긴장감이 보였다.

    “보고드립니다. 황궁근위대가 카즈베기산에서 야영 중인 걸 올빼미가 확인했습니다.”

    아틸은 시시각각 올라오는 정보들을 추려서 프란체 대공에게 전달했다.

    “황궁에 남은 황궁근위대는 총 네 명입니다. 그 외에 황궁수비대 서른 명이 남았다고 합니다.”

    “…….”

    “살롱에서는 성대한 무도회가 진행 중입니다. 대다수의 수도 귀족이 참여한 걸로 파악됩니다.”

    프란체 대공은 뒷짐을 진 채,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심한 눈길로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쩜, 하늘이 우릴 도우나 봐요. 안 그래요?”

    소파에 오만하게 앉아 있던 베로니카가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평소 즐겨 입는 머메이드 드레스가 아닌, 몸에 딱 밀착하는 승마복 차림의 그녀는 거사에 동행할 준비를 모두 마친 뒤였다.

    “방심은 금물이다.”

    “방심이랄 게 있나요? 저들이 우리의 계획을 알았다면 저리 안일하게 움직이지 않았겠죠. 하다못해 황궁에 절반의 근위병을 남겨뒀어야 맞잖아요?”

    프란체 대공은 침묵을 지킬 뿐 대꾸하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만약 반란을 눈치챘다면 저리 무방비에 가깝도록 황궁을 비워놓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과민한 건가? 누군가 날 부추기는 기분이야.’

    리처드 황제와 시안의 대처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기습적으로 황궁근위대를 개혁했을 때와 너무도 다른 행보였다.

    “황궁근위대와 관련된 다른 보고 사항은 없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다. 역모의 실패는 삼족의 멸문이다. 프란체 대공이라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 딱히 의심되는 정황은 없었습니다.”

    아틸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프란체 대공을 보며 베로니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니에요?”

    “과민 반응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프란체 대공이 픽 웃어넘겼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거사가 실패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황궁은 텅 비었고, 황궁근위대는 수도로부터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에 있는 카즈베기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이 소식을 접하고 황궁으로 부랴부랴 온다 한들 거사는 끝나고 난 뒤일 것이다.

    ‘나도 늙었군.’

    젊은 시절 프란체 대공은 거칠 게 없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결단을 내리면 제국의 황제를 갈아치우는 일조차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런데 변했다. 나이를 먹으니 어려운 상황에서 몸을 사리게 된다. 신중한 것과 별개로 젊은 시절의 패기가 사그라진 것이다.

    “아틸.”

    “네, 대공 전하.”

    “기사단을 집합시켜라.”

    프란체 대공의 말이 떨어지자 아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드디어 그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틸을 내보낸 프란체 대공이 벽장으로 걸어갔다. 유리 찬장 문을 여니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명장의 손길로 제작된 보검에는 대공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음각과 양각의 절묘한 조화로 새겨져 있었다.

    “플랑베르쥬.”

    프란체 대공이 검의 이름을 가볍게 읊조렸다. 젊은 시절부터 그가 애용하던 애검이다.

    “내가 이 검을 꺼낼 때마다 세상이 바뀌었다. 오늘도 그럴 것이다.”

    손끝으로 검신을 쓸어내리던 프란체 대공이 검집에 검을 넣더니 허리춤에 찼다.

    “가자꾸나.”

    “네, 아버지.”

    프란체 대공은 베로니카를 대동해 연병장으로 향했다. 국외 임무를 수행 중인 기사단원을 제외한 제1기사단과 제2기사단이 전원 열과 행을 맞춰 기립해 있었다. 비공식 수행 기사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무려 백여 명에 육박했다.

    프란체 대공의 등장에 맞춰 기사단 전체가 절도 있게 검을 뽑아 이마에 가져다 대며 예의를 갖췄다. 단상에 오른 프란체 대공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근엄하게 연설했다.

    “오늘 밤, 그대들과 황궁으로 갈 것이다.”

    충격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기사단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대상은 황제도 국가도 아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주군 프란체 대공뿐이었다.

    “황궁을 점거하고 무능한 황제를 폐위시킨다. 그 자리에 유능한 황제를 옹립할 것이다.”

    기사들은 비장했다. 주군의 명에 살고, 명에 죽는다. 그것이 기사의 명예이고 충성이며 삶이다.

    “가자, 대공가의 기사들이여. 제국의 새 역사를 쓰도록 하자.”

    “존명.”

    프란체 대공의 선언에 기사들이 검을 사선으로 높이 치켜들며 승리의 의식을 치렀다. 단상을 내려온 프란체 대공이 기사단을 사열하며 모든 준비를 끝냈다. 이윽고 야음을 틈타, 프란체 대공을 필두로 한 기사단이 후문을 통해 신속하게 대공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황궁, 목표는 리처드 황제다.

    * * *

    “전하, 저길 보십시오. 대공이 움직였습니다.”

    대공가 인근 여관에 은신 중인 휘긴이 상황을 보고했다. 은밀히 후문을 통해 나선 프란체 대공과 기사단은 말을 몰아 신속하게 황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속전속결.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단숨에 거사를 성공시키려는 듯 기민했다.

    시안이 그런 프란체 대공과 기사단의 행동을 주시하며 말했다.

    “준비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평민으로 위장하고 카즈베기산을 내려온 황궁근위대원들은 대공가 저택 근처의 여관과 건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무려 오십 명에 달하는 건장한 사내들이 모이면 의심을 받을 법도 하건만 들키지 않았다. 엘레나가 사전에 대공가 근처의 여관과 건물 몇 채를 매입해 황궁근위대원들이 몸을 숨길 공간을 마련해 뒀기 때문이다.

    시안은 새삼 엘레나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인지 그는 따를 수조차 없었다.

    “황궁을 내어주고 대공가를 점거할 거예요.”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생생했다. 프란체 대공의 역모를 부추긴 뒤, 황궁을 습격하게 만들어 역모의 증거로 삼자고 했다. 그사이 시안으로 하여금 대공가를 점거해 실리를 취하라고 했다. 그뿐이랴. 황궁에 홀로 남게 될 황제 리처드를 비밀 통로로 도주시키는 것까지 완벽했다.

    “우리도 움직인다.”

    시안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휘긴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원들이 일제히 건물 밖으로 몰려나와 도열했다. 옥상에서 내려와 황궁근위대 앞에 선 시안이 로브를 벗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밤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오늘 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시안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보검의 검끝이 대공가를 향했다.

    “대공가를 제국에서 지운다.”

    * * *

    살롱의 개장 이래 가장 성대한 무도회가 열렸다. 본관만으로 부족해 별관까지 꽉꽉 들어찬 방문객들로 무도회는 성황을 이뤘다. 이번 무도회는 방문객이 취향에 맞게 즐길 수 있도록 별관, 본관, 극장 등에 주제가 다른 음악과 장식, 술 등을 제공해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좀 더 소통이 가능하게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나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양함을 존중하고 추구한 살롱의 무도회는 까다로운 귀족뿐만 아니라 편협하고 획일화된 취향을 지닌 방문객들까지 모두 수용 가능한 문화의 장이 되었다.

    “저 먼저 올라갈게요. 뒤를 부탁해요.”

    무도회장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며 방문객들과 형식적인 소통을 나눈 엘레나가 뒷일을 칼리프에게 맡기고 퇴장했다. 사교계에 이골이 났다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이 시각, 어디선가 생사를 건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경이 쓰여 평소처럼 있기 어려웠다.

    휴렐바드를 대신해 호위를 맡은 기사 벨을 대동해 집무실을 올라온 엘레나는 소파에 앉을 틈도 없이 책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제스티 정보원이 전서구를 통해 받은 쪽지들이 시간대별로 쭉 놓여 있었다.

    휴렐바드가 열 명의 용병을 대동해 수도로 이동 중.

    무도회에 참가하기 직전, 엘레나가 마지막으로 본 쪽지였다.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엘레나가 우려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난 삶, 제국의 삼검이라 일컫는 휴렐바드의 전력은 절대적이다. 수백 년간, 황궁근위대보다 더 강하다고 여겨진 대공가의 기사단을 맞상대하려면 휴렐바드가 제때 꼭 도착해야 했다.

    렌, 배신자 제거 및 가문 장악 중.

    프란체 대공, 황궁으로 이동 중. 기사단 숫자 백 명으로 추정.

    황태자 시안, 대공가 공격 개시.

    린든 백작, 기사단 대동하여 바스타슈 가문으로 이동 중.

    엘레나는 차분한 눈길로 마제스티 정보원이 수집해 놓은 정보들을 탐독했다. 이성을 바탕으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철저히 분석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주시하고, 때에 맞춰 대응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다. 살롱에 남아 무도회에 참가한 건 눈속임이다. 지금 수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긴박한 사건을 일일이 보고받고 통제하고 있는 건 그녀였다.

    “하나도 놓쳐선 안 돼. 내가 놓치는 순간 다 끝이야.”

    때마침 활짝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정보 조직 마제스티에서 통신으로 이용하는 전서구다. 비둘기가 서서히 날갯짓을 멈추더니 엘레나의 책상 옆에 놓인 받침대에 앉았다.

    엘레나가 손을 뻗어 비둘기의 양다리에 묶여 있던 쪽지를 풀어 확인했다.

    “어, 어째서!”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엘레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동요하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왜 제 말을 안 들으신 거예요? 저랑 약속까지 하셨으면서 어째서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살길까지 일러주고 그리하겠단 약조까지 받아냈건만 끝내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때, 그녀에게 더없이 자상했던 시아버지였다. 대공가가 없는 제국을 보여주고 싶었거늘, 이런 선택을 한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사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왜 그러신 거예요? 네? 폐하?”

    복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엘레나가 고개를 푹 떨궜다. 힘이 풀린 듯 엘레나가 손에서 놓아버린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황제 리처드, 황궁 안 대전에서 대공을 기다리는 중. 도주 거부.

    * * *

    황궁 안, 대전.

    제국의 건국기가 그려진 천장 밑, 리처드 황제는 황좌에 앉아 있었다. 곧 닥칠 상황을 알면서도 그는 생사에 초탈한 듯 편안해 보였다.

    쿵! 천장에 닿을 듯 높은 대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무장한 대공가의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오더니 대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메웠다.

    좌우로 도열한 기사들 사이로 프란체 대공이 백발을 휘날리며 걸어왔다. 그 뒤를 딱 달라붙는 옷을 입은 베로니카가 조롱 섞인 미소를 짓고 따라왔다.

    “폐하를 뵈옵니다.”

    프란체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왔는가.”

    위협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지우를 대하듯 리처드 황제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절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왜 아니겠나?”

    리처드 황제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위협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묻어났다.

    “무려 삼십 년 하고도 삼 년이네. 긴 세월이야. 그대란 사람을 알기에.”

    프란체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역모를 일으킨 그를 보고서도 리처드 황제의 태도가 너무 태연자약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께서 절 존중했다면 우리의 동행이 더 길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게 싫어서 지금 이러는 거 아니겠나?”

    눈은 웃지만 입은 웃지 않았다. 리처드 황제는 삼십 년간 억눌려 있던 감정의 칼끝을 프란체 대공에게 겨눴다.

    “입심이 느셨습니다, 폐하.”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다고 감정을 묵히겠나? 할 말은 해야지.”

    프란체 대공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도대체 뭘 믿고 저리 당당한지 알 수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저 여유로운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다.

    “시대가 변했네, 대공. 자네나 나 같은 늙은이들은 물러나야 해.”

    “물러날 땐 물러나더라도 근간은 바로 세워야겠죠.”

    “근간이라. 제멋대로 황궁에 기사를 끌고 와 황제를 핍박하는 게 자네가 말하는 근간인가?”

    리처드 황제의 노여움 가득한 꾸짖음에도 프란체 대공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노망난 황제를 폐위하고 제국의 성세를 이끌어줄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 그것이 제국의 충신이자, 귀족의 수장인 제 역할입니다.”

    “하하. 올해 들어본 말 중 최고의 궤변이구먼. 자네에게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네.”

    무엇일까. 리처드 황제의 언행에서 뭔가를 감추고 있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폐하, 황태자와 황궁근위대는 오지 않습니다.”

    “아네.”

    “해가 뜬다 하더라도 귀족들은 폐하의 편에 서지 않을 겁니다.”

    “그 또한 알지. 그대의 역모로 황제에 오른 내가 그걸 모르겠는가?”

    33년 전 그날, 역모를 일으킨 프란체 대공은 귀족들을 규제하려는 선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그 후, 일개 황족에 불과했던 리처드 황제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황제가 되길 원치 않았으나 그에겐 거부권이 없었다. 그 과정을 몸소 겪은 리처드 황제였기에 앞으로 프란체 대공이 어떻게 황궁을 장악하고,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일을 처리할지 훤히 알 수밖에 없었다.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폐위되실 때까지 충실한 개가 되셨으면 합니다. 처음 황위에 오르셨던 그때처럼 말이죠.”

    프란체 대공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황궁을 장악하고 리처드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프란체 대공이 할 일은 그간 막혀 있던 국정 운영을 대공가에 유리한 쪽으로 처리하는 일이었다.

    “그간 미뤄뒀던 사안도 오늘 이 자리에서 처리하도록 하고요.”

    “바스타슈 가문 상속 건이겠군.”

    “진작 상속을 윤허했으면 이렇게까지 안 되셨을 거 아닙니까?”

    리처드 황제가 차가운 눈길로 그를 노려봤다.

    “그게 끝은 아니겠지. 내 칙명이라며 강제로 황궁근위대를 해산하고 황태자를 데려와 구금할 것 아닌가? 그리고 머지않아 같잖은 죄목을 붙여 사형시키겠지.”

    “이리 현명하신 폐하께서 어찌 그리 제 뜻을 외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죽거리던 프란체 대공 옆에 서 있던 베로니카가 껴들었다.

    “L도 죽여야죠. 불순한 사상을 내세워 제국의 기틀을 모욕한 년을 살려두면 안 되잖아요?”

    “그걸 깜빡했구나.”

    “그리고 새 폐하께 간청을 드려보아요. 반정공신인 아버지와 제 공로를 치하해 살롱과 바실리카를 달라고요.”

    죽이 잘 맞는 부녀지간을 보는 리처드 황제의 표정에 경멸이 서렸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란 말이 딱 맞았다. 황실을 업신여기는 것부터 이 제국이 제 것인 양 구는 오만방자함까지 쏙 빼닮았다. 만약 베로니카가 황태자비로 선출되어 시안의 반려가 되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와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베로니카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엘레나가 눈에 밟혔다.

    ‘그 아이가 시안의 곁에 머물러 주면 안심이 될 터인데…….’

    엘레나와 인연을 만들어두고자 브로치까지 주었다. 두 사람의 일이고 나서지 않고 싶었지만 그만큼 탐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나서는 건 주제넘은 일이었으며 결국 두 사람이 알아서 할 몫이었다.

    “베로니카였지?”

    “용케 기억해 주시네요, 폐하.”

    베로니카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소를 지었다. 곧 폐위될 마당에 여전히 황제인 척 구는 꼴이 우스워서였다.

    “살롱이 탐이 나는 모양이구나. 한데, 이를 어쩌면 좋누? 네가 L에 미치지 못하니, 살롱을 받는다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뭐, 뭐라고요?”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리처드 황제의 지적에 베로니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안 그래도 L을 향한 열등감을 심하게 느끼는 베로니카에게 황제의 말은 참을 수 없는 굴욕으로 느껴졌다.

    “뭘 안다고 함부로 그딴 말을 지껄여?”

    “그저 보고 느낀 대로 얘기할 뿐. L이 공작새라면, 베로니카 너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오리에 지나지 않는구나.”

    “다, 당신!”

    눈이 뒤집힌 베로니카가 당장에라도 하극상을 저지를 듯 거친 숨을 토해냈다.

    “진정해라, 베로니카.”

    프란체 대공이 팔을 뻗어 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베로니카를 통제했다. 그러고는 황좌에 앉아 있는 리처드 황제를 올려다봤다.

    “밤이 그리 길지 않아서 말입니다, 폐하. 잡담은 이만하시지요.”

    “대공, 내가 경고 하나 해도 되겠나?”

    “경고는 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폐하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자존심마저 프란체 대공은 깔아뭉갰다.

    “그대가 뭘 원하든 어느 것 하나도 그대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별로 와닿진 않는군요, 폐하.”

    “하, 주제에 황제라고 위엄 있는 척은.”

    프란체 대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로니카가 비아냥거렸다. 황제마저 갈아치우는 대공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인 베로니카에게는 리처드 황제의 경고가 우습다 못해 고깝게 들렸다.

    “황제를 데려와 꿇려라.”

    밤새 처리할 사안이 남은 프란체 대공이 지체 않고 기사들에게 명했다. 리처드 황제를 포박한 뒤, 강제로 문서에 인장을 찍게 만들어 명분과 실리를 다 잡으려는 계획이었다. 

    기사들이 성큼성큼 황좌가 놓인 단상으로 걸어갈 때였다. 리처드 황제가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황제에 오르기 전부터 그가 사용하던 애검이었다.

    “검을 버리시지요, 폐하.”

    “그럴 수 없다면?”

    “이제 와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의 옥체가 상하지 않게 배려해 드리고 싶은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정중함을 가장한 프란체 대공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강압이 실려 있었다. 이 이상 선을 넘으면 황제로서 최소한의 대우마저 하지 않겠단 경고였다.

    “난 보았네. 폐위를 당하신 선황께서 어찌 되셨는지를. 죽지 못해 사실 수밖에 없는 굴욕적인 나날이셨지.”

    리처드 황제가 검을 꽉 쥐더니 검날을 자신의 목젖에 가져다 댔다. 그의 돌발 행동에 다가가던 기사들이 멈칫했다. 프란체 대공의 눈빛도 흔들렸다. 최근 이빨을 드러내긴 했지만 수십 년간 숨죽이며 그의 눈치만 보던 리처드 황제가 저런 행각을 벌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폐하, 쓸데없는 짓 마십시오.”

    “정녕 그리 생각하나, 대공?”

    “…….”

    “야밤에 황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죽였단 오명은 그대도 감당키 쉽지 않겠지. 반정이 아닌 역모가 될 테니까.”

    “제가 분명 멈추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프란체 대공이 막으려 했지만 리처드 황제의 동작이 더 빨랐다.

    “안 돼!”

    프란체 대공의 절규 어린 외침과 동시에 리처드 황제의 목에서 핏빛 분수가 뿜어졌다. 황제는 비틀거리며 무너져 가는 몸뚱이로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지, 지옥에서…… 보…….”

    황좌를 피로 물들인 리처드 황제가 맥없이 축 늘어졌다. 서서히 감기는 그의 눈에는 일말의 미련과 후회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시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한없이 부끄럽고 무능한 아버지이자 황제였지만, 마지막만큼은 천장 벽화에 그려진 선대 황제들께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기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란체 대공이 이를 악물었다. 최악이었다. 여유를 주지 말고 제압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뭘 그렇게 신경 쓰세요? 어차피 죽여야 할 자였어요.”

    베로니카는 별일 아니라는 듯 굴었지만 프란체 대공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이 생각 이상으로 중대해서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다. 뼈밖에 안 남은 제국의 황실이지만, 그 상징성은 작지 않아.”

    “그래서요? 이제 와서 죽은 황제가 살아나지도 않잖아요?”

    베로니카가 리처드 황제의 피로 붉게 물든 단상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올라갔다. 코를 찌르는 혈향마저 그녀에게는 향수인 듯 평온해 보였다. 단상에 올라 리처드 황제의 시신 앞에 선 베로니카가 이죽거렸다.

    “그러게 왜 입을 함부로 놀려요.”

    베로니카가 발을 들더니 주검이 된 리처드 황제의 얼굴을 짓이겼다. 아까 전, L과 그녀를 비교하며 모욕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베로니카는 시신이 들썩일 만큼 세게 걷어찼다.

    그사이 프란체 대공은 심각한 얼굴로 뒤처리를 고심했다. 베로니카의 말대로 죽은 리처드 황제를 되살릴 순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에 연연하느니 일단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황제의 인장을 가져오라.”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이 잡듯이 대전을 뒤졌다. 그러나 어디서도 인장을 발견할 수 없었다. 황제의 집무실을 포함해 본궁을 수색하고 돌아온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체 대공의 만면에 노기가 서렸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인장이 없단 건, 사전에 빼돌렸다는 의미다. 프란체 대공은 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의 문서에 죽은 리처드 황제의 지장(指章)을 찍었다. 리처드 황제가 죽은 마당에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의 명분을 앞세우지 않으면 반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로 바스타슈 가문으로 간다.”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리를 취하는 것이다. 바스타슈 가문을 흡수해 대공가의 건재함을 보일 수 있다면 리처드 황제의 죽음을 두고 함부로 대공가를 지탄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힘, 패도니까.

    ‘도움을 청하길 잘했군.’

    최악이라고 했지만 프란체 대공은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만한 보험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일 만큼 그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가 막 대전을 나설 때,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공 전하, 큰일 났습니다!”

    프란체 대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는 듯 눈짓을 주자 제2기사단장 제임스가 앞으로 나섰다.

    “너는 수습 기사 앤서니가 아니냐? 대공가에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 있지?”

    “그, 그게, 황태자가 이끄는 황궁근위대가 대공가를 기습했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황궁근위대는 지금 카즈베기산에 있다고 들었다. 그들이 대공가를 습격하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제임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윽박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해 질 녘까지 황궁근위대가 카즈베기산에서 야영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카즈베기산에서 대공가까지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황태자와 황궁근위부대장 휘긴 경이 분명했습니다.”

    “네가 잘못 본 게 아니고?”

    “아, 아닙니다! 제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제임스의 추궁에 수습 기사 앤서니도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 전하, 아무래도 사실인 듯싶습니다.”

    제임스가 침울한 목소리로 보고하며 입술을 물었다. 수습 기사라고는 하나 그의 절박한 태도로 보아 거짓을 보고하는 것 같지 않았다.

    “…….”

    프란체 대공은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그 시간이 길어져 대공가가 습격당했단 사실에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번질 때였다.

    “크크.”

    프란체 대공의 낮은 웃음소리가 대전에 퍼졌다. 정적을 깬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지?”

    베로니카가 그런 프란체 대공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봤다. 황태자 시안에게 허를 찔린 것과 다름없는데, 실성한 사람처럼 껄껄거리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제법이십니다, 폐하?”

    프란체 대공이 단상 위, 리처드 황제의 싸늘한 주검을 올려다봤다.

    “황태자를 앞세워 대공가를 습격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거 폐하께 제대로 한 방 먹었습니다.”

    어째서일까. 당했다는 말과 달리 프란체 대공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도 비웃음 가득한 조소였다.

    “근데 말입니다, 폐하. 아무래도 하늘은 폐하의 편이 아닌가 봅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에 베로니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폐하의 편이 아니라니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지금 대공가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런데요?”

    “재산이야 다시 불리면 되고 사람은 모으며 그만이다. 그러나 대공가의 고귀한 핏줄은 세상에 나와 너 둘뿐이다.”

    “아!”

    프란체 대공의 말뜻을 알아차린 베로니카가 이죽거렸다. 베로니카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고 대공가에 남았다면 시안과 황궁근위대에게 붙잡혀 인질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대공가의 적통 후계자인 베로니카가 인질로 잡히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으니까. 한데, 베로니카가 거사에 가담하며 위기를 모면했다. 천운이 따랐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래도 하늘이 우릴 돕나 봐요.”

    베로니카의 만면에 맺혀 있던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화위복이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황제가 먼저 우릴 죽이려 들었다는 명분을 얻게 됐으니.”

    결국 역사는 승자의 손에 쓰이는 법. 황제와 황태자가 먼저 칼을 뽑았고, 프란체 대공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리처드 황제를 죽일 수밖에 없었단 명분을 손에 쥐게 되었다.

    “더는 지체할 것 없다. 계획대로 바스타슈 가문을 흡수한다.”

    대공가를 잃은 지금 바스타슈 가문을 장악해 임시 본거지로 삼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리처드 황제의 시신 처리와 황궁 장악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곧 당도할 조력자가 대신할 테니, 그 부분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황태자만 처리하면 되겠군.’

    바스타슈 가문을 장악하고 오갈 곳을 잃은 황태자 시안과 황궁근위대를 척살하면 이번 혁명은 성공이다. 프란체 대공은 기사단을 대동해 대전을 나섰다.

    * * *

    라인하르트 공작가.

    개국공신 가문이자, 4대 가문으로 불리는 제국의 기둥. 그런 라인하르트 가문을 이끄는 수장 크롬 공작의 집무실을 딸 아벨라가 찾았다.

    “안에 계신 거 알아요. 들어갈게요.”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무 책상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보좌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크롬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아벨라,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냐?”

    보좌관을 물린 크롬 공작이 다정하게 물었다. 자신을 쏙 빼닮아 간계에 능한 딸을 향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지금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이요. 모르시진 않죠?”

    “그 얘긴 어디서 들은 게냐?”

    아벨라가 꺼낸 주제에 크롬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취침에 들었어야 할 그가 이 시간까지 집무실을 지키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대공이 기사단을 움직여 황궁으로 간 게 사실이에요?”

    “사실이다.”

    크롬 공작은 순순히 시인했다. 마치 남 일 얘기하듯이 담담한 태도에 아벨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그걸 가만히 보고 계시는 거예요? 뭐라도 해야죠.”

    “뭘 하자는 것이냐?”

    “몰라서 그러세요? 이대로 황제가 폐위되고 대공이 새 황제를 옹립하면 대공가의 세상이 될 거라고요.”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아벨라는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답답함에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부족할 만큼 정치적 식견과 간계에 능한 아버지를 늘 존경했던 그녀다. 근데 오늘따라 왜 이리 까막눈처럼 구는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 기회를 노려야죠! 다른 4대 가문에 협조를 구하고 대공가를 역모로 몰아야 해요.”

    “역모로 몬다? 4대 가문이 합심해서?”

    “네, 안 될 게 없잖아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대공이 새 황제를 옹립하고 뒤에 서는 순간 평생 대공가의 꽁무니만 쫓다가 끝난다고요.”

    아벨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치적 입지와 재정 불안을 겪는 대공가가 무리해서 기사단을 움직였다. 이럴 때, 대공가를 압박해 그 힘을 꺾고 4대 가문을 중심으로 권력의 판도를 다시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가하다.”

    “왜요?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뭔데요?”

    크롬 공작이  말을 자르자 아벨라가 인상을 썼다.

    “이유라. 아벨라, 네게 물으마. 너는 4대 가문이 합심할 거라고 보느냐?”

    “안 될 건 또 뭐예요? 아버지가 구심점으로 나선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봐요.”

    얼핏 듣기에 아벨라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했다. 대공가의 권세에 눌려 그간 4대 가문은 기를 펴지 못했다. 그저 암묵적인 동조를 하며 대공가를 견제할 뿐,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4대 가문은 결코 힘을 모으지 않아.”

    “제가 모르는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아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크롬 공작은 절대 근거 없는 실언을 하지 않는 성격임을 알기 때문이다.

    “휘트 공작이 움직였다.”

    “……!”

    4대 가문 중 한 곳인 버킹엄 공작가의 가주가 휘트 공작이다. 4대 가문의 수장 중 가장 연장자로 적을 만들지 않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분이 왜…… 설마 아니죠?”

    “네 짐작대로다. 대공을 돕기 위해서지.”

    아벨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휘트 공작이 대공가와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형식적인 관계로 치부했다. 그런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두 가문이 어떤 관계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선황의 폐위 때도 그들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 그럴 수가.”

    아벨라는 절망감을 느꼈다. 이제야 대공가의 성세가 꺾이는가 싶었는데, 4대 가문 중 한 곳인 버킹엄 공작가가 암묵적으로 대공가를 돕고 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세력의 균형은 대공가로 기울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딸아, 가슴에 새기거라. 세상은 말이다.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아벨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야심으로 똘똘 뭉친 여인이었다. 남동생이 가문을 이끌고 자신이 황후가 되어 제국을 제 손안에 넣겠단 욕망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때가 오면 대공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아비가 왜 웅크리고만 있겠느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명심해라. 프란체 대공이 건재한 이상 대공가는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

    크롬 공작은 절망에 빠진 아벨라를 다독이기보단 매정하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이 주제도 모르고 발톱을 드러냈다가 가문이 멸문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제국에서 제일 강하고 위험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 * *

    엘레나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집무실을 서성거렸다. 심호흡하며 진정하려고 해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자꾸만 초조해졌다. 이러한 불안 심리가 커진 데는 황궁에 남은 리처드 황제의 돌발 행동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럴 때가 아니야. 놓치는 게 없나 체크해야 해.”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엘레나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전서구를 통해 받은 쪽지들을 끊임없이 탐독했다. 컨트롤 타워를 자처한 그녀만이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고 능동적인 대처가 가능했다.

    집무실에 들어온 비둘기가 천장을 빙그르르 돌더니 받침대에 앉았다. 엘레나가 손을 뻗어 새 다리에 묶여 있던 쪽지를 확인했다.

    시안, 대공가 점거. 베로니카 부재. 프란체 대공과 함께 황궁으로 갔다고 함.

    엘레나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공가를 제압하면서 베로니카를 인질로 잡겠단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실망하지 말자. 이 정도 변수는 예상했잖아?”

    엘레나는 차분하게 다른 쪽지를 확인했다. 상황을 마무리 지은 시안이 계획대로 황궁근위대원을 대동해 바스타슈 가문으로 이동한다는 얘기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계획대로 대공만 잡으면 돼. 그럼 끝나.”

    베로니카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황제 리처드가 죽은 만큼 프란체 대공도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결국 승패는 프란체 대공을 제압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연달아 전서구가 도착했다.

    프란체 대공, 기사단원을 이끌고 바스타슈 가문으로 이동 중.

    렌, 바스타슈 가문 장악 완료.

    린든 백작, 기사단을 끌고 바스타슈 가문으로 이동 중.

    휴렐바드, 수도 북문 인근 도착.

    변수가 있긴 했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행이야. 합류가 늦진 않겠어.”

    엘레나가 작게나마 안도했다. 바스타슈 가문에서 최후의 결전이 예상되는 만큼 엘레나는 전력을 한곳에 집중하고자 했다. 아무래도 기사단의 규모로 볼 때, 프란체 대공에 비해 열세인 만큼 화력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

    쪽지를 확인한 엘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앞서 온 소식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한순간에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리고도 남을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린든 백작, 휘트 공작이 이끄는 기사단과 전투 중. 압도적 전력 차이. 전멸 유력.

    “4대 가문이 왜? 아니, 휘트 공작이 대공과 한패였다고?”

    엘레나는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돌발 상황에 반쯤 넋을 놓았다. 딴 가문도 아니고 버킹엄 공작가다. 대륙을 지탱하는 주춧돌이자 4대 가문으로 일컬어질 만한 대가문이다. 그런 그들이 프란체 대공의 역모에 협조하고 있었다니.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전멸 유력.”

    쪽지에 적힌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리는 엘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린든 백작이 이끄는 기사단은 프란체 대공을 잡기 위한 히든카드다. 렌이 가문을 장악하고 추스른 바스타슈 가문의 반쪽짜리 기사단과 황궁근위대가 합세해 대공가의 기사단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한데, 휘트 공작의 개입으로 일이 어긋나고 말았다. 린든 백작가가 고강한 기사단을 지니고 있다 한들 상대는 4대 가문 중 한 곳인 버킹엄 가문의 기사단이다. 실력이야 비등하다고 치더라도 머릿수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다.

    “내 실수야. 전혀 파악하지 못했어.”

    엘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책상 위, 꽉 말아 쥔 주먹이 떨렸다. 지금까지 차근차근 복수를 준비해 오면서 이토록 무기력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린든 백작님이 당하시기라도 하면…….”

    엘레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되면 세력의 추가 프란체 대공으로 급격히 기울고 만다. 렌, 휴렐바드가 제국의 삼검이라 일컫는 강자고, 그에 버금가는 시안도 있다지만 수적 열세를 피할 길이 없다. 프란체 대공이 이끄는 기사단과 휘트 공작의 기사단이 합류하는 순간 전력이 두 배, 아니, 세 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만다.

    “린든 백작님을 구하고 전력의 손실을 막아야 해. 그러려면 먼저…….”

    평정심을 되찾은 엘레나가 서둘러 타개책을 궁리했다. 그것이 컨트롤 타워를 맡고 있는 엘레나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휴렐바드 경밖에 없어.”

    마침 휴렐바드가 용병들을 대동해 수도 북문 인근에 도달했단 소식을 들은 직후다. 지금이라면 휴렐바드를 움직여 린든 백작을 구원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전제가 따랐다.

    “……렌과 전하가 버텨줘야 해.”

    이대로라면 린든 백작의 기사단과 휴렐바드의 합류가 지체될 수밖에 없다. 협공이 늦어질수록 열세인 시안과 렌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갈등은 됐지만 엘레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렌과 시안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부엉이분들, 제 얘기 들리시죠? 지금 당장 전하와 렌에게 전달해 주세요. 린든 백작님의 합류가 늦어질 거라고. 최대한 싸움을 지연해 달라고요.”

    엘레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남들이 보면 의아했겠지만 분명 그 얘길 듣는 사람이 집무실 안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어디서 대답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낮고 선명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렌이 이런 돌발 상황을 대비해 심어둔 마제스티 정보원들이다.

    “우리도 서두르죠.”

    인기척이 사라지자 엘레나가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그러자 벨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직접 가시려고요?”

    “여기서 수도 북문까지 지척이에요. 그리고 휴렐바드 경의 동선은 이 계획을 짠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엘레나는 마제스티 대원을 보내기보다 스스로 움직이길 택했다. 마제스티가 아무리 숙련된 정보원이라고 하더라도 머릿속에 모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엘레나보다 더 정확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땐 전서구의 한계가 아쉽다. 비둘기의 회귀본능을 이용한 전서구는 한정된 장소에 국한된다. 살롱으로 비둘기를 오게 할 순 있어도, 이동 중인 휴렐바드에게 연락하는 방법은 불가능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야. 지체할 겨를이 없어.’

    일분일초가 시급했다. 지금 이러는 와중에도 린든 백작을 비롯한 기사단의 생사가 오가고 있을 것이다.

    엘레나는 목덜미를 어루만지더니 머뭇거림 없이 드레스 끈을 내렸다. 원래대로라면 혼자 벗을 수 없지만, 메이도 없는 상황에서 쉽게 벗을 수 있도록 크리스티나에게 특별 주문한 드레스였다. 뱀이 허물을 벗듯 드레스를 벗자 몸에 딱 달라붙는 승마복이 드러났다. 엘레나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는 장화를 신으며 벨을 재촉했다.

    “뭐 하고 있어요? 어서 가요.”

    “아, 알겠습니다.”

    엘레나는 당황하는 벨을 대동해 움직였다. 비상 탈출구를 이용하여 이목을 피해 내려온 뒤, 말을 몰아 살롱을 뛰쳐나갔다. 수도의 밤거리는 한적했다. 수도 어딘가에서 죽고 죽이는 전투가 벌어진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몰면서도 엘레나의 머리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처음 전서구에 적힌 휴렐바드의 위치를 기준으로 비둘기가 날아온 거리와 시간, 엘레나가 살롱을 나서서 이동하는 동안 휴렐바드가 이동했을 거리 등을 계산했다.

    ‘지금쯤이면 빨라야 북쪽 가이아 성당 근처일 거야.’

    엘레나는 더 힘차게 말을 몰았다. 행여 엇갈리기라도 하는 날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당 근처에 도착한 엘레나가 말의 갈기를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아직인가?”

    숨죽이며 휴렐바드가 오길 기다렸다. 촌각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인 만큼 일분일초가 일 년처럼 더디고 길게 느껴졌다.

    “설마 지나간 건 아니겠지?”

    와야 할 휴렐바드가 보이지 않아 엘레나가 초조해질 때였다.

    “저길 보십시오!”

    벨이 손가락으로 성당 너머의 대로를 가리켰다. 자정 이후의 통행금지령을 무시한 채, 미친 듯이 말을 몰고 가는 건장한 사내들이 보였다.

    “휴렐바드 경이에요!”

    성당 처마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엘레나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경, 저예요!”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엘레나가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엘레나를 본 것인가. 질주하던 휴렐바드가 말의 고삐를 당겨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엘레나에게 다가와 머리를 푹 숙였다.

    “아가씨께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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