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9/30)
  • 제25장 전면전

    “아버지한테 고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베로니카는 해가 뜨자마자 프란체 대공의 집무실을 찾았다. 밤새 열이 뻗쳐 한숨도 못 잔 베로니카의 눈에 시뻘건 핏줄이 도드라졌다. 제 성질대로 엘레나를 밟아놓지 못했단 사실에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프란체 대공의 직속 시녀장이 저자세로 양해를 구했다. 그마저도 심사가 뒤틀린 베로니카의 눈에 거슬렸다. 제 앞에서 기죽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를 하는 게 엘레나를 떠올리게 했다.

    지체 없이 시녀장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시녀장의 고개가 돌아가는 동시에 균형을 잃은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베로니카가 덜덜 떠는 시녀장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니?”

    “소인은 그저…….”

    시녀장의 머리를 내던지다시피 한쪽으로 밀쳐 버린 베로니카가 집무실로 들어갔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언행이었지만 누구도 그런 그녀를 제지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아버지, 저예요. 긴히 드릴 말씀이…… 지금 뭐 하시는?”

    집무실에 들어선 베로니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셔츠를 느슨하게 푼 프란체 대공이 집무실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고, 그 앞에 커다란 가죽 포대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기사 홀랜드가 서 있었는데, 의아하게도 검이 아닌 쇠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전 아버지 딸이니 논외죠. 그보다 이자 누구예요?”

    베로니카는 뻔뻔하게 대꾸하며 가죽 포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코에 맴도는 비릿한 피비린내와 포대 곳곳에 묻어 있는 핏자국, 그리고 쇠방망이로 보건대, 체벌 중이지 않을까 싶었다.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프란체 대공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아셀라스다.”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하니 대공가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아셀라스가 저 가죽 포대 안에서 피떡이 되도록 맞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 공녀 전하.”

    “……!”

    아니나 다를까, 가죽 포대 속에서 아셀라스의 고통에 찬 음성이 들렸다.

    “살롱 일은…… 제, 제가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 공녀 전하께서 시키셔서…… 욱! 사, 살려…… 컥!”

    아셀라스의 애원이 고깝게 들렸는지 기사 홀랜드가 쇠방망이를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아셀라스가 실신한 듯 미동하지 않자 그제야 몽둥이질이 멈췄다.

    “키우는 개 주제에 주제넘은 짓을 저질러서 벌을 주는 중이었다.”

    “주제넘은 짓이요?”

    “그래. 살롱의 귀족들을 독살하려고 했더군.”

    프란체 대공이 무심한 눈길로 입을 다물고 있는 베로니카를 응시했다.

    “너도 알고 있던 일이냐?”

    “아뇨, 모르는 일이에요.”

    베로니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잡아뗐다. 프란체 대공도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 그와 관련한 얘기를 더는 묻지 않았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과연 프란체 대공이 베로니카가 시킨 일이란 걸 몰랐을까? 안다, 알지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지탄받을 중죄를 저지르더라도 그들은 고귀한 혈통이란 이유로 면죄부를 갖는다. 감히 누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책임은 늘 가신들의 몫이다. 부당하다고 한들 상관없다. 성공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대공가에 발을 붙이고 싶어 하는 인재들은 차고 넘쳤다.

    “자중하라 일렀거늘.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인간을 밑에 둘 필요는 없지.”

    “제 생각도 같아요. 주어진 자리에 비해 능력이 출중하진 않더라고요.”

    베로니카가 나 몰라라 한 것도 모자라 무능력하다며 지적하자 아셀라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할 말이 많았으나 몽둥이질이 두려워 속으로 삼켰다.

    “긴히 할 얘기라는 게 뭐냐?”

    “L이 누군지 아세요?”

    프란체 대공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 대역이겠지.”

    “얘기 들으셨군요.”

    프란체 대공은 매사에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제국 안팎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다. 다만, 자질구레한 일은 가신들에게 맡기고 개입을 하지 않았다. 대공가라는 거대한 가문을 운영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너와 닮은 외모. 지금까지 L이 우리에게 보인 적대적인 행보. 더는 의심할 이유가 없지.”

    “아신다니 대화가 빠르겠네요. 이대로 놔두실 거예요?”

    베로니카의 눈이 증오심으로 번들거렸다. 어제의 일은 베로니카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수모를 남겼다. 그 울분은 엘레나를 잘근잘근 씹어 죽여도 풀리지 않을 만큼 깊었다.

    “가만 놔두지 않으면?”

    “제거해야죠.”

    베로니카가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때가 아니다. 손을 대기엔 너무 컸어.”

    “아버지!”

    프란체 대공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쳐다봤다. 무심함의 뒷면에는 독에 중독되어 생사를 넘나들던 딸을 향한 측은함과 지난 삼 년 동안 의식이 없어 성장하지 못한 그녀의 정신연령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길게 말하지 않으마. 너는 노블레스 거리에만 신경 써라.”

    “이해가 안 돼요. 같잖은 명분 하나 붙여서 살롱을 쓸어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 명분이 없다.”

    프란체 대공이 딱 잘라 말했다.

    “L은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다. 껍데기만 남았더라도 황실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추장스러운 대상이다. 그리고 L이 사교계에 쌓아온 평판과 지지는 그리 녹록지 않아.”

    “평판이요? 제가 뭉개 버릴게요. 소문 좀 퍼뜨리고, 트집 좀 잡으면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어요.”

    “베로니카.”

    낮게 깔린 프란체 대공의 눈길을 마주한 베로니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빙하처럼 무심해 보이는 눈에 담긴 섬뜩함은 핏줄인 베로니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L은 네 손을 떠났다.”

    “하, 하지만!”

    베로니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혹여 프란체 대공의 노여움을 살까 봐였다. 그녀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프란체 대공이지만 한 번 선을 그으면 그 이상의 반항은 허락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아틸입니다.”

    “아침부터 손님이 많군.”

    프란체 대공이 턱짓하자 기사 홀랜드가 대신해서 문을 열었다. 어찌나 급한 일인지 아틸은 집무실의 분위기를 파악할 여유도 없이 고했다.

    “대, 대공 전하, 큰일 났습니다.”

    “요새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큰일이 터지는 기분이야.”

    프란체 대공은 삐딱하게 기대어서 눈을 치켜떴다. 무슨 얘기인지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황궁근위대가 해산당했다고 합니다.”

    “뭐?”

    프란체 대공의 눈동자가 일순이었지만 가늘게 흔들렸다.

    “지난밤 황태자가 기습적으로 근위 본부를 장악하고 사열식을 빙자해 입궐하는 근위대원의 작위를 모조리 박탈했다고 합니다.”

    “계속해.”

    “황제 폐하가 손수 뽑은 새 근위대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임명식도 약식으로 끝마쳤으며, 새로운 근위대장 자리에는 황태자 전하를 임명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프란체 대공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황궁근위대는 황실의 힘을 상징한다. 황실을 무력화하기 위해 프란체 대공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도 황궁근위대다. 실질적인 무력 집단의 의미보다, 명예직의 이미지를 부각해 무능한 귀족 자제들을 입단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존재는 하되 유명무실한 집단으로 전락시키고자 함이었다.

    한데, 그런 황궁근위대를 해산시키고 새로 창설했다고 한다. 심지어 차기 황위를 이을 황태자 시안을 근위대장으로 임명했다. 이건 황권을 강화하겠다는 명백한 의지였으며, 이 모든 일을 주도하던 대공가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프란체 대공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외알 안경을 올려 썼다.

    리처드 황제, 참으로 나약한 황족이었다. 그리 현명하지도 않고 결단력도 없으며 몸도 약했다. 허수아비로 내세우기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 예측은 적중했고 황위에 있던 수십 년간 프란체 대공의 말 한마디면 죽는시늉까지 할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조금씩 프란체 대공의 말에 불복할 기미를 보이더니 결국 숨겨놓았던 송곳니를 드러냈다.

    “당장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귀족들의 여론을 모아 부당함을 주장해 황실을 압박하고…….”

    “그쯤 하지.”

    프란체 대공은 딱 잘라서 아틸의 의견을 묵살했다.

    “이제 와 움직여도 바꿀 건 없다.”

    “하지만요, 지금이라도 뭔가 대비를 해야 하잖아요.”

    베로니카까지 걱정이 되는지 나서서 얘기했지만 프란체 대공의 반응은 남 일 대하듯 무관심했다.

    “흐르는 물길을 바꿀 순 없는 법이지. 흘러가게 둬.”

    “…….”

    “아버지!”

    아틸은 침묵으로, 베로니카는 목소리를 높여 프란체 대공의 뜻에 반발했다.

    “혼자 있고 싶군. 다 나가.”

    프란체 대공이 몸을 돌려 창가 쪽 통유리로 걸어갔다. 뒷짐을 지고 선 모습은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단 의미였기에 아틸과 베로니카는 집무실을 나갔다. 기사 홀랜드도 가죽 포대를 메고 조용히 나갔다.

    홀로 남게 된 프란체 대공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그 긴 세월이 사람을 바꿔놓을 만한 충분한 시간 같군요, 황제 폐하.”

    수려했던 그의 금발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얗게 셌다. 고양이 앞 쥐처럼 프란체 대공의 눈치만 보기 급급하던 리처드 황제가 꾹 참고 있던 반항심을 드러낼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폐하.”

    프란체 대공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조금만 더 참다가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리처드 황제의 선전포고는 수십 년간 권태로움에 젖어 있던 그의 야성과 본성을 일깨웠다.

    제국 역사를 통틀어 최악이라 불리던 남자, 프란체 대공.

    그 위험한 남자가 다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 * *

    “하.”

    사륜마차를 타고 노블레스 거리를 가로질러 포럼으로 향하는 베로니카의 만면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어제의 일로도 폭발하기 직전인데, 조기 개장 행사가 끝나자마자 방문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드문드문 쇼핑 중인 영애들이 보였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소비한 흔적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베로니카가 포럼에 위치한 집무실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가 다가왔다. 노블레스 거리의 총 관리를 맡고 있는 올덴 준남작이었다.

    “공녀 전하를 뵙고자 보로니 백작, 노튼 자작, 후안 남작이 아침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세 사람이?”

    베로니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귀족이 무슨 용무로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인지 의아했다.

    ‘마침 잘됐어. 아버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저 세 사람을 앞세워서 L을 찢으면 돼.’

    빠르게 생각을 전환한 베로니카가 입가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세 귀족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베로니카의 만면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이 세 사람은 황금 동아줄이다. 잘만 이용해서 제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프란체 대공의 도움 없이 L과 살롱을 압박할 수 있다. 문제는 저들이 그녀를 도울 거냐는 건데…….

    ‘머리가 있다면 돕지 않을 리가 없잖아?’

    베로니카는 자신했다. 그녀의 뒤에 따라오는 프리드리히라는 성과 유일한 후계자라는 직함이면 저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고. 지금이야 프란체 대공이 건재하다지만 세월은 비켜 갈 수 없다. 그 전에 베로니카의 줄을 잡을 기회를 놓칠 만큼 세 귀족은 아둔하지 않을 것이다.

    “앉으세요.”

    베로니카는 지금껏 지어본 적 없는 호의적인 미소로 그들을 맞았다. 세 귀족은 머리를 숙여 예를 다하고는 소파에 일렬로 앉았다.

    “어렸을 때 뵙고, 못 뵌 지 한참인데 세 분의 얼굴은 용케 기억이 나네요.”

    “……못 뵌 지 한참이라고 하셨습니까?”

    보로니 백작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과 몇 달 전에 봤거늘, 베로니카는 몇 년을 못 본 것처럼 얘기했다.

    베로니카는 그들의 미묘한 감정을 읽지 못하고 제 할 말만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노블레스 거리는 둘러보셨어요?”

    “네, 안 그래도 그 일로 공녀 전하를 뵙고자…….”

    조심스럽게 꺼내는 노튼 자작의 말을 베로니카가 잘랐다.

    “아직 미완성된 거리라 아쉬움이 남지만 차차 나아질 거예요. 그보다 세 분이 절 찾아오신 게 무척 마음에 드네요.”

    “네? 그거야 당연히…….”

    “시대를 읽는 안목을 지니신 거죠. 그래서 그런지 세 분과는 가까이 지내고 싶네요.”

    베로니카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자신을 찾아온 세 귀족의 행동을 치하했다. 세 귀족은 그런 베로니카의 대응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지 서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실례합니다만, 공녀 전하.”

    “네, 후안 남작. 편히 말씀하세요.”

    “노블레스 거리를 쭉 둘러보니 일부 개장 거리 면적이 생각보다 적더군요. 자금이 부족하진 않으셨을 터인데, 왜 이리 더딘 겁니까?”

    질문을 받은 베로니카의 표정이 굳어졌다. 면적을 얘기하고, 자금 부족까지 언급하는 투가 마치 책임을 추궁하는 뉘앙스로 들렸다. 때마침 포문이 열리길 기다렸다는 듯 보로니 백작과 노튼 자작도 질문을 쏟아냈다.

    “실례가 아니라면 매출 추이에 대해 알 수 있겠습니까?”

    “전체 개장은 언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한다면, 상황을 반전할 만한 계획이 있으신 거고요?”

    “그만.”

    베로니카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짜증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지금 주제넘은 질문이란 생각이 안 드세요?”

    베로니카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세 귀족의 태도는 바뀌질 않았다.

    “불편하게 들리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저희는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녀 전하께서도 저희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책임을 추궁하는 게 아닙니다. 대책을 마련하려는 거죠. 이렇게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다고 보이는데요?”

    베로니카가 정색했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지금껏 귀족들에게 이런 추궁을 당한 기억이 없었다. 대체 이 자들이 뭘 믿고 이리 구는지 신경질이 났다.

    “말 좀 가려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공녀 전하야말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움을 받으실 적은 언제고, 이제 와 태도를 바꾸신 겁니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 인간들이 단체로 미쳤나?’

    베로니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만하면 알아들을 만도 하건만 눈치도 없이 맞먹으려고 드는 행각은 도를 한참 넘었다. 대공가의 그늘에 있는 것들에게 주제 파악을 확실히 시켜놓아야겠단 생각이 들 때였다. 좀 전에 도움을 받을 땐 언제냐는 노튼 자작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잠시만요, 제가 도움을 받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허! 정말 이러시깁니까?”

    “너무하십니다. 공녀 전하의 부탁으로 저희가 리아브릭의 실각까지 주도했던 걸 벌써 잊으신 건가요?”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발언이 후안 남작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그게 무슨 얘기죠? 누가 알아듣게 설명 좀 해주세요.”

    베로니카가 답답함에 미칠 것 같았다면, 세 귀족은 다른 의미로 미칠 것 같았다.

    “저희야말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공녀 전하께서 저희에게 접근해서 리아브릭을 실각할 수 있도록 여론을 모아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요? 난 그런 적이…….”

    순간 짚이는 게 있는지 베로니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멈칫하는 베로니카의 태도에 보로니 백작이 열불이 난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그뿐이십니까? 노블레스 거리의 수익의 공유를 약속하며 투자금을 받아가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것도 모른다고 잡아떼실 참입니까?”

    베로니카는 멍했다. 그만큼 세 귀족이 하는 말은 그녀조차 감당하기 벅찰 만큼 어마어마한 것들이었다.

    “그러실 줄 알고 친필 증명서를 가져왔습니다. 눈으로 보십시오.”

    후안 남작이 상의 속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봉투를 꺼냈다. 개봉해 최고급 양피지 종이를 꺼내더니 글자가 보이도록 베로니카에게 내밀었다.

    “이리 줘봐요.”

    베로니카는 빼앗듯이 그걸 가져가고는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베로니카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받는 조건으로 노블레스 거리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나누고 상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네, 네년이 감히…….”

    낮게 중얼거리는 베로니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년, 감히 내 행세를 하면서 이런 짓을 저질러?’

    증명서에 적힌 필체를 본 베로니카는 눈을 의심했다. 정말 그녀가 쓴 게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필체가 흡사했다. 특히 서명란에 쓰인 사인은 그녀의 사인과 똑같았다.

    누가 보더라도 베로니카가 사인했다고밖에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증거가 명확한데 베로니카가 아니라고 한들 저들이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억울했다. 베로니카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그녀를 더욱 열불 나고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만. 그만하라고.”

    베로니카가 낮게 경고했으나, 눈이 뒤집힌 세 귀족은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이래도 계속 모르는 척하실 겁니까?”

    “저희 세 사람은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했습니다. 매출을 알아야 할 권리는 있다고 봅니다.”

    “대체 그 큰돈을 어디에 투자하신 건지 말씀을 해보십시오.”

    “이…… 이.”

    분을 이기지 못한 베로니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억울한 건 찰나였다. 대공가의 도움 없이는 지금의 권세도 누리지 못했을 한낱 변방의 귀족 나부랭이에게 추궁당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참을 수 없었다.

    “나가.”

    “나가라니요? 저희는 대화를 나누려고 온 겁니다.”

    “이렇게 저희를 대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베로니카가 재차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가요. 지금 당장.”

    “공녀 전하!”

    세 귀족의 얼굴에도 노기가 피어올랐다. 상대가 베로니카다 보니 대놓고 몰아세우지는 못했지만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단 불쾌함이 역력했다.

    “너무하십니다. 한배를 타셨다고 할 때는 언제고, 어떻게 이렇게 입을 닦을 수 있죠?”

    “저희가 언제 책임을 지라고 했나요? 현 상황을 알 권리조차 없는 건가요?”

    “책임이요?”

    베로니카가 눈을 부라리며 세 귀족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갖고 책임을 지라고 하니 울분이 뻗쳤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격앙된 베로니카의 입에서 좋은 말이 안 나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뭘 책임지란 거죠?”

    “정녕 이게 공녀 전하의 뜻이십니까?”

    세 귀족 중 가장 연장자이자, 영향력이 큰 보로니 백작이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내 말 안 들려요?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잖아요.”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베로니카가 기가 찬다는 듯 비웃었다. 같잖은 것들이 후회를 운운하며 자신을 압박하려는 꼴이 속을 뒤집었다.

    “지금 절 협박하는 거예요?”

    “공녀 전하께서, 저희를 좀 더 존중해 달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로니 백작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러나 베로니카에게 좋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누구 덕에 그러고 살고 있는데.”

    “…….”

    “내가 세 분께 해드릴 수 있는 존중은 딱 하나네요. 제 발로 나갈 수 있을 때 나가세요.”

    베로니카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단 의미였다.

    “그리 말씀하시니 더 드릴 말씀이 없군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세요. 제가 내일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로니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말은 곧 와도 만나주지 않겠단 말과 다름없었다.

    “정녕…… 알겠습니다. 그게 공녀 전하의 뜻이라면 그리 알고 물러나죠. 갑시다.”

    보로니 백작이 예의상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노튼 자작과 후안 남작은 못마땅한 눈으로 베로니카를 노려보더니 매몰차게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L! 내 행세를 하며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제 성질에 못 이긴 베로니카가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싹 쓸어버리듯 내동댕이쳤다.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갑자기 가위를 거꾸로 쥐었다.

    베로니카는 가위로 소파를 미친 듯이 내려찍었다. 이 순간 베로니카에게 난도질을 당하는 건 소파가 아니라 L이었다.

    “L! 죽어! 죽으라고! 죽으란 말이야!”

    가죽이 찢어지고 그 안에서 거위 털이 숭숭 빠져나와 흩날렸다. 눈이 돌아간 베로니카에게 그것들은 L의 살점이자 피였다.

    그 시각. 보로니 백작의 사택으로 장소를 옮긴 세 귀족은 오늘 일을 두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백작님, 이대로 손 놓고 있으실 겁니까?”

    “공녀의 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저렇게 입을 싹 닦는단 말입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보로니 백작이 침울한 어조로 입을 뗐다.

    “투자금을 받아간 상단이 없어졌더군.”

    “뭐라고요?”

    “그 말 정말이십니까?”

    보로니 백작이 끄덕였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사람을 시켜 알아봤더니 그 상단, 돈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

    “그 말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우리를 이용할 생각이었단 얘기가 아닙니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요.”

    노튼 자작과 후안 남작은 기가 찼다. 돌아가는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베로니카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단 생각에 무게가 실렸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상단이 사라진 지금 친필 증명서로는 투자했단 사실을 증명하기 어렵네. 위조라고 우기면 그만이니까.”

    “그건…….”

    노튼 자작과 후안 남작은 저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베로니카 공녀의 인장이 찍히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증명이 어렵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서명인데, 이 시대의 필체 감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터라 효력이 없었다.

    “하, 살다 살다 공녀한테 이 꼴을 당할 줄이야.”

    후안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쓸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당했단 생각에 허탈했다.

    보로니 백작도 침묵했다. 성격 같아선 뒤엎고 싶지만 상대는 대공가의 후계자 공녀다. 괜히 날뛰어봐야 뭇매를 맞을 수 있기에 속으로 삼켰다.

    그때 영악하고 음흉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노튼 자작이 토로했다.

    “전 말입니다. 이렇게 당하고는 못 있겠습니다. 이 기회에 제대로 따져야겠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는가?”

    보로니 백작이 조심스럽게 떠봤다.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성격 급한 후안 남작이 재촉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노튼 자작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비장하게 대답했다.

    “더는 대공가에 상납금을 내지 않는 겁니다.”

    “상납금을요?”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솔깃한 제안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자칫 대공가를 향한 반발로 여겨져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을 맞을 우려가 컸다.

    “대책 없이 움직이면 그렇습니다만, 우리에겐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친필 증명서를 말하는 건가? 말했다시피 이건 크게 효력이 없네만.”

    보로니 백작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효력은 없죠. 근데 명분으로 삼기엔 충분합니다.”

    “명분이라.”

    “도통 뭔 얘기인지 모르겠네요.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노튼 자작.”

    후안 남작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지 재차 물었다.

    “친필 증명서를 앞세워 각 지역 영주들의 여론을 모으자는 겁니다. 솔직히 상납금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게 우리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이 기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겁니다. 상납금만으로도 벅찬데, 이런 식으로 우리 귀족들을 우롱하고 능멸하면 안 된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자 이거죠.”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요? 프란체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후안 남작이 말을 흐렸다. 본래 상인 출신인 그는 대공가의 비호로 염전을 일궈 수도 남부의 유력 귀족으로 성장했다. 그만큼 재물과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는데, 자칫 대공가를 상대로 반발하다가 지금까지 쌓은 걸 잃을까 망설이는 듯했다.

    “흐흐, 설마 대책도 없이 말을 꺼냈겠습니까?”

    “대책이 있다?”

    매사에 신중한 보로니 백작까지 관심을 보이자, 노튼 자작이 입을 열었다.

    “대공가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듣긴 했네.”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으로 안 좋습니다.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최악입니다.”

    “그 정도인가?”

    보로니 백작도 바보가 아니다. 귀족들의 불만을 감수하면서까지 상납금을 올렸다는 건 대공가의 실정이 그만큼 좋지 않단 방증이다. 심지어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은 노블레스 거리의 개장 반응이 저조했다.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살롱과 바실리카와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었다.

    “제가 장담하죠. 넉넉잡아 석 달만 상납금을 내지 않아도 대공가는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허허.”

    보로니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노튼 자작은 음흉하긴 해도 경솔한 사람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토록 단시간에 동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장담했다는 건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단 의미다.

    “귀족들의 여론을 모은 뒤, 친필 증명서를 대대적으로 공개하는 거죠. 그리고 선언하는 겁니다.”

    “선언이요?”

    “우리가 낸 천문학적인 투자금은 포기하겠다. 대신, 투자금의 액수만큼 귀족들이 내야 할 상납금을 공제해 달라 요구하는 겁니다.”

    “……!”

    노튼 자작이 내놓은 묘책에 보로니 백작과 후안 남작의 안색이 환해졌다.

    “투자금을 빌미로 귀족들의 상납금을 내지 않게 하니 귀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대공가는 재정에 큰 압박감을 느끼겠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거군요!”

    노튼 자작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급한 쪽은 저희가 아니라 대공가니까요. 곧 대공가의 자금은 씨가 마릅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다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겁니다.”

    보로니 백작과 후안 남작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무모하다고 여겨지던 처음과 달리 얘기를 거듭할수록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질 수 없는 싸움이 되겠어.”

    “대단하십니다. 그리만 된다면 그 잘난 프란체 대공도 어쩔 수 없겠네요.”

    세 귀족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 * *

    수도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신흥 귀족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강한 바스타슈 가문의 후계자 렌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렌이 눈먼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목격자까지 등장하며 실체 없는 소문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 와중에 렌을 마음속 깊이 사모하던 한 영애가 꿈속에 죽은 렌이 나왔다며 오열했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한낱 꿈이었지만, 시기와 정황과 맞물려 렌의 죽음을 뒷받침하는 얘기로 받아들여졌다.

    거기다 대공가로 끌려간 스펜서 자작이 돌아오지 않자 바스타슈 가문이 크게 흔들렸다. 자작가를 이끌어 나갈 정신적 지주인 두 사람의 부재가 길어져서다.

    “역시. 노리고 있었군요.”

    엘레나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질 않는지.

    “집사부터 시작해 가문 내 요직에 앉은 이들은 대공가에 모두 매수된 것 같습니다. 몇몇은 저도 모르는 새에 교체가 됐더군요.”

    멜은 침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엘레나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한데, 돌아가는 정황을 보니 확실했다.

    “스펜서 자작님의 행방은 파악됐나요?”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멜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마제스티라는 정보 조직의 수장을 맡은 지 십 년이 넘도록 이토록 무기력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공식적으로 대공가에 방문을 한 뒤, 증발이라도 한 듯 자취를 감춰 버렸다.

    “계속 찾아봐 주세요. 스펜서 자작님의 신변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요. 렌이 깨어날 때까지 바스타슈 가문은 제가 어떻게든 지켜낼게요.”

    멜을 안심시킨 엘레나가 고개를 돌려 의식이 없는 렌을 내려다봤다. 예전보다 안색이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재 의사 네빌은 이 이상 혼수상태가 지속되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렌의 신체가 일반인과 달라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랐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정신적인 손상이 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똑똑. 칼리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 출발하자. 더 지체하면 늦어.”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렌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애처로운 손길에는 렌을 향한 애잔함이 담겨 있었다.

    “저 다녀올게요. 멜 님이 곁을 지켜주세요.”

    멜에게 렌을 부탁한 엘레나가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사전에 외출 준비를 끝낸 엘레나가 별관 밖에 나오자 황실에서 보낸 의전용 사륜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그 옆으로 근위대원들이 절도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L. 황궁근위대 부기사단장 휘긴입니다. 황실까지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엘레나가 싱긋 웃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휘긴이 헛기침을 했다.

    “저기 봐요, L이에요!”

    마침 바실리카를 찾은 귀족들이 황실에서 보낸 의전 마차 앞에 서 있는 엘레나를 발견하고는 수군거렸다. 그녀가 공개적으로 민낯을 드러낸 후 살롱 밖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 미모를 갖고 왜 지금까지 가리고 다녔는지 모르겠네요.”

    “듣기론 베로니카랑 닮은 외모 때문에 색안경 끼고 볼까 봐 그랬다더라고요.”

    “하긴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런데 너무 우아하지 않아요? 저 고급스러움은 진짜…… 돈으로 살 수 없는 거 같아요.”

    “기품은 타고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봐요. 처음엔 베로니카 공녀와 닮은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달라 보여요.”

    “근데 황실에서 마차는 왜 보낸 거래요?”

    “몰랐어요? 오늘 황제 폐하께서 L이 제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해 문화표창을 하사하신대요.”

    엘레나가 황실에서 파견한 의전 마차에 올라탔다. 백마를 탄 근위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 바퀴가 굴러갔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황궁으로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엘레나는 옛 생각을 떠올렸다.

    “여전히 어여삐 봐주시려나.”

    기억 속 황제 리처드는 황궁에서 라파엘과 더불어 좋은 감정으로 남은 사람이다. 그는 황실과 적대적인 대공가의 여식임에도 불구하고 늘 그녀를 따스하고 온화하게 대해주었다.

    “건강하셨으면 하는데.”

    리처드 황제가 승하하게 되는 건 이즈음이다. 선천적인 지병이 노환과 겹쳐 악화되면서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만다.

    가도를 가로지르던 의전 마차가 황궁에 이르러 멈췄다.

    근위대 부단장 휘긴이 마차 문을 열어주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엘레나를 맞이했다.

    “전하?”

    엘레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자 시안이 손을 스윽 내밀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의 손바닥에 손을 얹은 엘레나가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중 나오실 줄 몰랐어요.”

    엘레나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얼떨떨했다. 아픔으로 가득했던 황궁이란 공간에서, 시안의 다정함은 그녀를 당혹하게 했다.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었다. 나 황태자 시안이, 황실이, 그리고 나아가 이 제국이 그대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 말이다.”

    카펫 옆으로 도열해 있던 새 황궁근위대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일자로 선 검을 천천히 사선으로 내리며 근사한 터널을 만들었다.

    “가지.”

    시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는 엘레나는 과분하리만치 성대한 환영식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과연 그녀가 이렇게까지 환영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본궁에 들어선 엘레나는 곧장 어전으로 향했다. 황궁 시녀가 아뢰고, 아득히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큰 문이 열렸다.

    엘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시안을 따라 왕좌까지 걸어갔다. 황제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 황궁 예법이기 때문이다. 황좌에 오르는 계단 앞에 이르자 시안이 옆으로 물러나 엘레나를 소개했다.

    “폐하, L을 데려왔습니다.”

    엘레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아한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고고한 별,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고개를 들라.”

    리처드 황제의 말에 엘레나가 숙이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그러면서도 몸의 선과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리처드 황제는 그런 엘레나의 예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살아오면서 보아온 어떠한 예법보다도 고절했으며 훌륭했다.

    고개를 들어 엘레나의 얼굴을 본 황제 리처드는 감탄했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기게 마련이다. 절대적이진 않지만 세월이 쌓아온 연륜이란 때때로 무시할 수 없는 영험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 아이는…….’

    수십 년 전, 리처드 황제는 한 남자를 만나 경악했고 절망했다. 바로 시대를 바꾼 남자, 프란체 대공이었다. 일개 황족에 지나지 않았던 리처드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면서도 권태로워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세상을 오시하는 걸로도 모자라 제국을 발아래 두고 군림했다. 거역할 수 없는 권위와 오만함은 갓 황위에 오른 리처드의 의지를 꺾고 절망하게 할 만큼 대단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엘레나를 보고 있으면 젊은 날의 프란체 대공이 떠올랐다.

    ‘믿기지 않는구나. 그와 닮은 듯 이토록 다르다니.’

    닮은 듯, 두 사람은 달랐다. 엘레나의 눈에 깃든 총명함은 어둠마저 빛으로 밝힐 정도였다. 또한 따뜻하고 부드러워 세상을 감쌀 아량과 배포를 지녔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그 둘을 동일 선상에 두는 이유는 시대를 좌지우지하는 거인의 품격을 지녀서였다.

    ‘이 또한 시대가 변하려는 징조인가?’

    단언컨대 엘레나는 꺼져가는 제국이란 촛불을 살릴 아이다. 철옹성 같던 대공가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대공가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었다. 그 어떤 서사보다 더 극적이고 말도 안 되는 행보가 그 증거였다.

    리처드 황제의 입안이 썼다. 그는 일평생을 프란체 대공의 그늘에서 살아왔다.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여겼고 감히 넘을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한데, 이 아이는 달랐다. 나약하고 한심했던 그의 젊은 날을 반성케 했다.

    “우리 태자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지.”

    “신세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늘 도움을 받는 처지입니다.”

    “허허,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엘레나를 내려다보는 황제 리처드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말 한마디를 해도 기특하고 정이 가는 아이다.

    “살롱에 관해 들었다. 타국 귀족들도 적잖이 찾는다지?”

    “네, 폐하. 문화 교류 차원에서 최근 방문 횟수가 느는 추세입니다.”

    시안이 말을 보탰다.

    “몇십 년 만에 수도 경기가 호황기를 맞이했습니다. 살롱과 바실리카가 개장한 뒤, 위축되었던 소비 심리가 녹은 걸로 사료됩니다.”

    “그래?”

    “그 외에도 L은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수도에만 세 군데의 학교를 열고 평민층을 대상으로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안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녀의 업적을 치켜세웠다. 한두 가지야 그럴 수 있다지만 팔불출처럼 계속 자랑하자 되레 엘레나가 민망할 정도였다.

    ‘왜 저러시는 거지? 이젠 그만하셔도 되는데…….’

    그녀의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언행인지라 엘레나를 더더욱 당혹하게 했다.

    “허허, 태자의 뜻은 충분히 알겠느니라. 하여, 그 공을 치하하고자 마련한 자리가 아니더냐?”

    리처드 황제가 나서고 나서야 시안도 아차 싶었는지 수긍하며 뒷말을 삼켰다. 그러면서 엘레나를 쳐다보는데 더 자랑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제국의 발전에 이리 이바지하였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지. 혹여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가? 있다면 무엇이든 가감 없이 말해보아라.”

    “없사옵니다.”

    “정녕 바라는 것이 없느냐?”

    “네, 폐하께서 하사해 주신 작위와 표창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엘레나는 호의를 베푸는 황제 리처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지난 삶에 받았던 과분한 온정, 따스한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욕심이 없는 아이로고. 내 친히 성의를 보이도록 하겠다. 이건 받아줬으면 하는구나.”

    “성의라 하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엘레나는 성의마저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태자.”

    “네, 폐하.”

    리처드 황제의 호명에 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내 친히 황실 보고에 준비해 두라 일렀으니, 태자가 가 가져오도록 하라.”

    “직접 말씀입니까?”

    시안이 살짝 놀라 되물었다. 보통 이런 일은 아랫사람을 시키게 마련인데 손수 다녀오라는 말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황실의 귀한 물건이니, 태자가 가져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시안은 힐끗 엘레나를 쳐다봤다. 그에게는 피가 섞인 아버지이지만, 엘레나에게 황제 리처드는 어렵고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기에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시안의 마음을 아는지 엘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자긴 괜찮으니 다녀오라는 의미였다. 그제야 안심을 한 시안이 어전을 나섰다.

    드넓은 어전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리처드 황제의 목소리가 변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어 남으라 하였다.”

    엘레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뭇 달라진 리처드 황제의 말투에서 그가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조성한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대공은 위험한 남자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바스타슈 가문을 노리고 있다.”

    예상외의 화두에 놀란 기색을 보인 것도 잠시 엘레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아실 정도면 황실 쪽에도 정치적인 압박이 들어갔단 얘기야.’

    다시 말해 바스타슈 가문을 집어삼키기 위한 물밑 작업이 상당 부분 진척이 되어 있다고 봐야 했다.

    “허허, 거기까지 알고 있는 눈치군. 그래, 렌 영식 얘기는 시안에게 들었네. 의식이 없다지?”

    “아직요. 하나, 상처는 완치가 되었으니 곧 깨어날 거라 믿습니다.”

    엘레나는 조만간 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어나 제게 시비를 걸며 히죽 웃을 거라고 믿었다.

    “서둘러 깨어나야 할 터인데…….”

    “왜 그러시는지요?”

    “스펜서 자작이 얼마 못 살 것이야.”

    “……!”

    리처드 황제의 발언에 엘레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정보 조직 마제스티가 전력을 쏟아부어도 알 수 없었던 스펜서 자작의 소식을 접한 까닭이었다.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시는지요?”

    “그것까진 알지 못한다. 하나, 프란체 대공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

    “그 말씀은.”

    “스펜서 자작은 죽을 것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세월, 프란체 대공을 지켜봤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일 처리를 하고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 돼요. 제가 어떻게든 막을 거예요.”

    “늦었다.”

    리처드 황제의 단호함에 엘레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 말대로 스펜서 자작이 죽는다면 렌을 볼 염치가 없었다.

    “현명한 아이니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목을 매는 게 얼마나 미련한지는 너도 잘 알 것이다.”

    “…….”

    “내게 대공을 잡을 묘책이 있는데, 들어볼 테냐?”

    엘레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화의 흐름이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프란체 대공을 무너뜨릴 제안을 리처드 황제가 먼저 꺼낼 줄은 몰랐다.

    “들을게요.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허하마.”

    “전 일개 살롱의 주인에 불과하며 작위도 준남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대공가를 휘어잡을 기사단도 없고요. 그런 제게 이런 말씀을 꺼내시려는 이유가 뭔지 폐하의 의중이 궁금합니다. 하물며 황태자 전하마저도 없는 지금 말이죠.”

    시안이 단장으로 재임한 황궁근위대야말로 대공가의 기사단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이었다. 대공가를 무너뜨릴 묘책이라면 당연히 시안도 함께한 자리에서 의논해야 옳았다. 그런데 리처드 황제는 의도적으로 시안을 배제했다. 시안이 들어서는 안 될, 그녀에게만 할 얘기가 있다는 듯이.

    “그 얘기까지 해주마.”

    리처드 황제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일목요연하게 이어지는 리처드 황제의 이야기에 엘레나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경악을 넘어선 기함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대담했고 파격적인 계책이었으며 절대적으로 엘레나의 동의가 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까지다.”

    “…….”

    “이제 알겠느냐? 왜 시안을 배제했는지. 그대에게 말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고, 왜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

    엘레나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신이 얼얼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폐하, 뱃속에 칼을 숨기고 계셨군요.’

    누가 감히 리처드 황제를 가리켜 허수아비 황제라 손가락질을 했던가. 그는 단지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하나, 그리되면 폐하가…….’

    이 계책은 필연적으로 리처드 황제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 희생에 가장 슬퍼할 이는 다름 아닌 시안이었다. 엘레나는 슬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망설이는 엘레나를 보며 리처드 황제가 대답을 촉구했다.

    “아비로서 난 아들에게 해준 게 없다. 이렇게나마 아비의 도리를 하고 싶구나. 도와주겠느냐?”

    쉬이 말을 잇지 못하던 엘레나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희생을 피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조해 주세요.”

    “약조?”

    이어지는 엘레나의 얘기에 리처드 황제는 깜짝 놀랐다. 황실의 일원만이 알고 있어야 할 황궁의 비밀을 엘레나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마.”

    리처드 황제의 확답을 받은 엘레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거면 됐어.’

    타협점을 찾아내기가 무섭게 시안이 돌아왔다. 양손으로 받든 받침대 위에는 작은 함이 올려져 있었다.

    “폐하, 가져왔습니다.”

    “L에게 주도록.”

    엘레나는 머리와 허리를 가볍게 숙여 예의를 갖추고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태자는 함을 열어라.”

    시안이 손을 뻗어 함을 열었다. 그러자 숨 막히도록 화려한 세공으로 별을 형상화하고, 그 중심에 흑진주까지 박힌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이, 이건.’

    엘레나는 한눈에 그 브로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황실의 일원에게만 하사하는 물건으로 엘레나가 익히 알고 있는 한 여인이 이것을 착용한 걸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땐 그게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

    ‘세실리아 황후의 브로치구나.’

    저게 뭐라고. 마치 황실의 정통성을 지닌 황후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쯤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갖고 싶었고, 갖지 못해 애가 닳았다.

    “수 대에 걸쳐 황실에 내려온 브로치다.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며 앞으로도 황실의 등불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리는 바다.”

    리처드 황제는 은연중에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황실의 등불. 제국을 위해 애써달라는 말로 들릴 수 있겠으나, 브로치라는 물건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그렇지가 않다.

    ‘내가 황실의 사람이 되길 바라고 계셔.’

    과거의 사례를 돌아보면 황족이나 귀족들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제 가족이 되어달란 의미로 브로치를 선물하는 경우가 잦았다.

    ‘내가 받을 만한 물건이 아니야.’

    예전이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테지만 이젠 아니다. 엘레나는 더 이상 브로치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브로치에 담긴 의미와 무게를 알기에 부담으로 다가왔다.

    “감사하오나 폐하, 브로치는 물러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감히 받기엔 너무 귀한 물건입니다.”

    “그 귀함이 어찌 자네를 귀히 여기는 내 마음에 비하겠나? 받으라.”

    리처드 황제가 재차 권하자 엘레나는 퍽 난감했다. 이대로 계속 거절하자니 황제 리처드의 마음을 너무 매몰차게 외면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폐하께서 절 귀히 여긴다고 하시니 감사히 받을게요. 고이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리처드 황제가 헛웃음을 지었다. 엘레나는 브로치를 착용하지 않고 고이 간직하겠다고 했다. 여지를 주되 황실의 일원이 되겠단 약조는 하지 못하겠단 의미였다. 야속할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가 엘레나가 양보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엘레나는 힐끔 시안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한 그를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엘레나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고개를 돌린 시안과 눈길이 닿았다. 엘레나를 마주한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

    그가 이렇게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던가. 엘레나의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던 미안함과 부담감이 눈 녹듯 녹아버렸다.

    “그래, 그거면 됐다. 모처럼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기뻤구나.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으나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쿨럭쿨럭.”

    기력이 떨어졌는지 리처드 황제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데 장시간 어전에 머물며 무리를 한 까닭이다.

    “저야말로 폐하를 뵐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오래오래 사시길 바랄게요.’

    엘레나는 예의를 갖추곤 브로치와 문화표창장을 들고 어전을 나왔다. 시안 역시 황제 리처드가 쉴 수 있도록 자리를 피했다.

    “황궁에 온 것도 처음이니, 차라도 한잔하고 가겠나?”

    “처음이요?”

    시안의 제안에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깜빡였다. 황비 선발식에 참가하고자 베로니카의 신분으로 수차례 황궁을 방문한 적이 있지 않던가.

    “공식적인 L의 황궁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지.”

    “아.”

    “그러니 황궁에서 그대와 마시는 첫 티타임을 허락해 줬으면 하는데.”

    엘레나는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전하께 이런 말주변이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그대 앞이고, 거절할까 봐 조마조마하니까.”

    “거절할 리가 없잖아요?”

    엘레나의 호의적인 대답에 시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원래 이렇게 잘 웃던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인상이 달랐다.

    “이리 주거라.”

    “네?”

    시안이 손을 뻗더니 브로치가 담긴 함과 문화표창장을 가져갔다. 가녀린 엘레나의 손으로 들기엔 이마저도 무겁다고 생각한 배려였다.

    어전을 벗어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본궁 뒤편의 정원이었다. 본궁과 서궁, 동궁과 이어지는 후원과는 별개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곳으로 작고 아담하지만 요람처럼 감싸주는 편안함이 있는 곳이었다.

    홍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 잔을 내려놓는 엘레나를 보며 시안이 말했다.

    “브로치는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다. 그대가 부담을 느꼈다면 폐하를 대신해 내가 사과하지.”

    “사과라니요, 당치도 않아요. 폐하의 성의인걸요. 다만…….”

    엘레나가 아릿한 눈길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제 것이 아닐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울 뿐이에요.”

    “그런가.”

    시안은 생각을 곱씹으며 말을 아꼈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굳이 그걸 걸고넘어져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처럼 쭉 그는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두런두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던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네요. 폐하와 제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불편한 자리였던가?”

    “아뇨.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폐하가 어렵지 않아요. 좋으신 분이잖아요.”

    시안은 말없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찻잔에 가려진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려 제국을 이끄는 황제다. 말 한마디 섞는 것조차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 리처드 황제가 어렵지 않고 좋은 분이라고 얘기해 주는 여자를 시안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면 됐다.”

    “전하.”

    “난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곤란해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 내게 필요한 얘기라면 먼저 해주겠지.”

    엘레나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시안의 저런 모습은 쭉 봐왔지만 여전히 어색했다. 지난 삶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뭘 믿고 이토록 자신을 기다려 주는지 놀라웠다.

    “엘레나.”

    “네, 전하.”

    “그대에게 티타임을 청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복잡한 얘긴 접어두고 잠시나마 그대가 이곳에서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항상 느끼지만 시안은 저 자신보다 엘레나를 먼저 생각했다. 그 진심은 긴장으로 경직되어 있던 엘레나의 마음에 작은 진동을 전해주기 충분했다.

    * * *

    저택의 복도를 찍는 베로니카의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그녀의 눈 밖에 날까 수십 명이 넘는 시녀와 하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문 열어.”

    프란체 대공의 집무실에 도착한 베로니카가 용암처럼 끊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대공 전하께서 아무도 들이시지 말라고…….”

    시녀장이 이번에도 막아섰으나 베로니카는 막무가내였다. 시녀장을 밀쳐 넘어뜨리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전 하나도 모르는 일이라고요.”

    거친 숨을 토하며 들어온 베로니카를 보며 프란체 대공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는 실각된 아셀라스를 대신해 대공가의 전반적인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아틸이 서 있었다.

    “분명 자중하라 했을 텐데?”

    “제 일이에요! 그 찢어 죽일 년이 감히 제 이름과 신분을 갖고 몹쓸 짓거리를 해놨는데, 어떻게 잠자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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