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8/30)
  • 제24장 새벽

    살롱 별관 최상층에 위치한 접대용 침실에 렌을 눕힌 엘레나는 노심초사했다. 엘레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렌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억지로 화살촉을 뽑으려다 상처가 덧나거나 다른 부위를 건드릴 위험성이 커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이 악물고 버텨요.”

    렌에게 목숨을 빚졌다. 살롱의 화재에 온 신경이 쏠려 있던 터라 저격을 예상하지 못했다. 렌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녀는 가이아 여신의 품에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내가 이 빚 갚을 거 아니에요. 진짜 죽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엘레나는 정말 렌이 죽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끊임없이 말을 걸며 타박했다.

    “나 따질 거 많아요. 나 괴롭힌 거 제대로 사과도 못 받았고.”

    렌이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마치 엘레나의 지적에 움찔한 것처럼. 그러나 현실은 등에 박힌 화살촉이 불러온 고통에 몸서리치는 것이었다.

    “은인.”

    렌의 머리맡을 떠나지 못하는 엘레나에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에밀리오가 말을 걸었다.

    “본관 쪽 불길 진화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피해는요?”

    “생각보다 크진 않은 거 같습니다. 곧 란돌 님이 당도한다고 하니 파악 후에 조치하겠습니다.”

    엘레나는 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살롱이 제아무리 소중하다고 한들 수리하면 그만이다. 최악의 경우 다시 지으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려낼 수 없다. 그것이 렌의 희생에 그녀가 가슴 졸이는 이유였다.

    “아가씨, 네빌 님 모셔왔어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

    엘레나는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던 공작새 가면을 착용했다. 아무리 경황이 없지만 아직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며 에밀리오가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분이십니까?”

    “네.”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체형의 네빌은 렌의 몸을 살폈다. 화살촉이 박힌 등과 체온, 동공 등을 확인하더니 들고 온 의료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외과 수술에 필요한 도구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화살촉 먼저 제거하겠습니다.”

    “살 수 있겠죠?”

    엘레나가 동요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의사는 환자 앞에서 생사를 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죠.”

    “부탁드릴게요.”

    엘레나의 간곡한 부탁에 네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물을 준비해 주세요. 제 곁에서 수발을 들어줄 분도 필요합니다.”

    “제가 할게요.”

    “L이 직접 말씀입니까?”

    네빌이 의외라는 듯 엘레나를 쳐다봤다.

    “저를 지키려다가 사경을 오가고 있어요. 제가 해야 해요.”

    “살을 째고 화살촉을 뽑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엘레나의 눈빛은 비장했다. 외과 수술은 신체를 열고 집도를 하다 보니 비위가 약한 사람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 남자가 대체 누구기에?’

    L이 이렇게까지 살리려고 하는 남자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의사에게 환자의 이름이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뜨거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여러 장 준비해 주십시오. 아, 용기도 필요합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욕실로 가 뜨거운 물을 떠 왔다. 메이가 자신이 하겠다며 나섰지만 엘레나가 한사코 거절했다. 딴 일도 아니고 그녀를 지키다 이리된 만큼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접대용 침실에 네빌과 엘레나 그리고 멜, 세 사람이 남게 됐다. 네빌의 집도 아래 렌의 화살촉을 뽑는 수술이 진행됐다. 등 부위는 척추와 맞닿아 있는 만큼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렌.’

    엘레나는 숨죽인 채 수술 과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또 네빌이 집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수발을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렌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한 시간 남짓한 집도를 끝내고 나서야 네빌이 수술칼을 손에서 놓았다. 텅 비어 있던 용기에는 피를 머금은 화살촉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고마워요, 네빌.”

    네빌은 가방을 챙기더니 침실을 나섰다. 제 역할은 다했다. 남은 건 환자의 의지다. 침대 머리맡에 앉은 엘레나가 렌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 오래 안 기다릴 거예요. 오래 기다리게 하면 확 내쫓을 거니까, 조금만 자고 일어나요.”

    “공자님은 반드시 깨어나실 겁니다.”

    말을 보탠 멜의 목소리와 표정에 맹목적인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가 보아온 렌이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었다.

    “저도 그렇게 믿어요.”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올 것 같은 인간이 렌이다. 그런 인간이 이렇게 죽는다니, 믿을 수 없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접니다.”

    휴렐바드였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가면을 쓴 휴렐바드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돌아선 엘레나는 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게 입술을 뗐다.

    “경, 다친 데는 없는 거죠?”

    “살짝 그을린 게 답니다.”

    “미안해요. 경을 위험에 내몰아서…….”

    결과가 좋아 망정이지, 살롱을 지키기 위해 휴렐바드를 사지로 몰아넣었단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위험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경.”

    “저는 말입니다. 아가씨를 위해 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로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렐바드는 진심으로 엘레나가 그러길 바랐다. 엘레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종 관계를 떠나서 그의 머릿속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도 오로지 엘레나로 꽉 차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조차 없었다.

    그런 휴렐바드의 시선이 힐끗 렌에게 향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아가씨의 곁을 지켰어야 했는데…….’

    휴렐바드는 자신의 안일함을 질책했다. 살수장치를 가동시킨 후 바로 엘레나에게 왔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살수에 노출되도록 잠시라도 방치해선 안 됐다. 만약 렌이 아니었다면 휴렐바드는 주군을 지키지 못한 불충에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아가씨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렌이 안정을 취하도록 최대한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초면인 멜을 보고 잠시 경계했으나 이내 엘레나에게 시선을 두고 말을 이었다.

    “홀에 숀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요?”

    앨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야간 파티가 없던 만큼 평소보다 일찍 폐장했다. 아무리 결벽증이 심한 숀이라고 하더라도 그 시간까지 홀로 내부 청소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왜 남아 있었는지 물어보셨어요?”

    “아직 깨어나지 못해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구했을 때는 이미 연기를 많이 마신 듯했습니다.”

    “수상하군요.”

    엘레나는 뭔가 의심쩍단 인상을 받았다. 아직 단정 짓기는 일렀지만 조사해 볼 필요성은 있어 보였다.

    “저 역시 아가씨의 의견과 같습니다.”

    “네빌 님께 치료를 부탁드리세요.”

    “안 그래도 환자가 더 있냐고 물으시더니 가셨습니다.”

    그거면 됐다는 듯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난 건 우연이 아니야.’

    화재의 시발점은 살롱 본관 내부였다. 자연적인 발화의 가능성보다는 누군가 내부에서 불을 질렀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방화일지도 몰라.’

    이건 음모다. 불이 난 살롱에서 엘레나가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격을 노린 것 자체가 그걸 증명했다. 그런 와중에 살롱 본관 홀에서 쓰러진 숀을 발견했다? 그 말은 곧 숀이 화재와 관련이 있거나, 화재와 관련된 단서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L.”

    입을 꾹 다문 채 경청하던 멜이 입을 열자 엘레나가 돌아봤다.

    “숀이라는 남자, 제가 조사해 봐도 되겠습니까?”

    “숀을요?”

    “L께서도 아시겠지만 그쪽은 저희 전문입니다.”

    그쪽. 뒷조사와 정보 분석 분야에서 마제스티는 제국, 아니, 대륙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렌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전해 들었기에 엘레나도 수긍했다.

    “부탁드릴게요.”

    “그럼 공자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보살필게요.”

    엘레나의 확답에 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섰다. 걱정이 됐는지 나가는 그 순간까지 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L을 도와야 해. 공자님께서도 그걸 원하셨을 거야.’

    렌은 죽지 않는다.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올 남자다. 그러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멜은 다음을 준비하고자 했다. 흉수를 찾아 갈기갈기 찢어놓는, 되갚아주는 복수를 말이다.

    휴렐바드도 내보낸 엘레나는 렌과 단둘이 접대용 침실에 남았다. 의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렌의 표정이 반복해서 일그러지며 고통에 신음했다.

    “엘레나.”

    그때, 인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나가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복면을 벗은 시안이 창틀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전하.”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앉아 있으라는 듯 시안이 손사래를 쳤다.

    “렌은 어떻지?”

    “의식이 아직…….”

    시안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엘레나의 앞에 섰다. 엘레나의 눈가는 촉촉해져 있었다.

    “저를 지키려다 렌이…….”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라.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테지.”

    시안은 전말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 렌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그러며 말을 덧붙였다.

    “깨어날 것이다. 의심치 마라.”

    시안의 위로가 무너질 것 같은 엘레나를 다독였다. 엘레나도 눈물을 꾹 참았다. 그리고 믿었다. 살 거라고. 지금도 살아 있고, 그러니까 울지 말자고. 엘레나가 감정을 갈무리하는 듯하자 시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대를 노린 궁사는 슈타인이었다.”

    “설마 프란체 대공의 호위 기사인 슈타인 경을 말하는 거예요?”

    “그대도 알고 있군. 그자가 맞다.”

    잠시 충격에 멍해 있던 엘레나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으나 방화라고 의심되는 불길부터 저격까지. 대공가의 소행임이 거의 확실시되자 엘레나의 눈빛이 폭발 직전의 용암처럼 들끓었다.

    “쫓았으나 생포에 실패했다. 자진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내 부주의다.”

    “아뇨, 전하께서 제때 그자를 제압해 주셨기에 이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엘레나는 늦게라도 와준 시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시안이 제때 막아주지 못했다면 슈타인의 화살에 렌뿐만 아니라 다수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안일했어요. 상대는 대공가인데, 이런 상황마저 대비했어야 했는데. 제 실책이고 불찰이에요.”

    “엘레나.”

    “이제 여지조차 안 주려고요.”

    엘레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먼저 치지 않으면 당한다. 그 말이 뼈저리게 피부로 와닿았다.

    * * *

    아침 첫 끼부터 스테이크를 썰며 육식을 즐기던 프란체 대공의 칼질이 멈췄다. 그는 무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보고해 봐.”

    쫙 깔린 프란체 대공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차가웠다. 아틸은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슈타인 경이 팔이 잘린 채로 죽었습니다.”

    “허!”

    프란체 대공이 기가 찬 듯 탄성을 내질렀다. 슈타인이 누군가? 그가 초원 부족과의 전쟁 때 거둔 뒤, 스무 해 가까이 그의 곁을 지키던 고절한 기사다. 대륙 최고의 궁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그가 죽었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의 소행이지?”

    “……파악 중입니다.”

    “와인.”

    프란체 대공이 툭 내뱉자 식당 맨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레드 와인을 내왔다. 와인 애호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프란체 대공은 물처럼 와인을 들이켰다.

    “계속해.”

    “방화도 실패했습니다. 살롱 안에 화재에 대비한 장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다고…….”

    보고하는 내내 아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건물 안에 살수장치가 존재한다는 얘기는 살다 살다 처음 겪었다.

    “L의 저격 역시 제삼자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실패했습니다.”

    “개입?”

    “바스타슈 가문의 렌 영식이 몸을 던져 L 대신 화살에 맞았다고 합니다.”

    프란체 대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기서 렌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도 놀라운데, L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건 더 충격적이었다.

    “렌이 L을? 몸까지 던져서 지켜줄 만한 사이였던가?”

    “그런 것 같습니다.”

    최초로 보고받은 아틸도 깜짝 놀랐다. 사교계의 이단아로 취급받는 렌은 어디서도 섞이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런 렌이 L과 돈독한 사이였다니. 심지어 제 목숨마저 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란 점에 프란체 대공은 경악했다.

    “렌뿐이 아니야. 황태자도 L에게 작위를 내렸었지?”

    “그랬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살롱의 방화도 실패, L의 저격도 실패. 슈타인은 죽고…… 최악이야.”

    “죄송합니다.”

    프란체 대공의 냉소적인 반응에 아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L이라는 여자, 알면 알수록 대단해.”

    “…….”

    “늑대를 길들이고, 그 얼음을 녹였다 이 말이야. 베로니카를 모욕하고, 슈타인을 제압할 만한 실력자도 데리고 있어. 아! 리아브릭의 실각도 그녀의 작품이라고 봐야 하나?”

    프란체 대공이 시녀가 다시 채워놓은 와인 잔을 들고 빙그르르 돌렸다. 늘 권태로움에 젖어 있던 그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치워 버릴 계집쯤으로 여겼는데 오판이었다. 대공가를 향한 불온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그녀가 서 있을 거라 짐작됐다.

    “쯧쯧, 제국을 오시하는 대공가에 이렇게 인재가 없다니.”

    프란체 대공은 면전에서 아틸의 무능력함을 지적했다. 언급하지 않았지만 살롱의 화재를 계획한 아셀라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틸은 꽉 깨물고 있던 입술에 힘을 빼며 말했다.

    “좀 더 시간을 주시면 대책을 세워서…….”

    “놔둬.”

    프란체 대공은 남의 일처럼 말을 던지며 목을 적셨다.

    “하, 하오나 대공 전하. 곧 노블레스 거리 조기 개장입니다. 이대로 두면 피해가 극심합니다.”

    “그래서?”

    되묻는 프란체 대공의 말투는 냉랭했다.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는데? 이쪽의 암수까지 들통난 마당에 L이 손 놓고 있을까?”

    “하오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바람이 다시 우리 쪽으로 불 때까지 기다려.”

    프란체 대공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틸은 쉬이 납득하지 못했다. 지금 대공가의 사정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이 실패한다면 누적된 부작용들이 일시에 터져 나올 게 뻔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이군. 그럴 거야. 머리 쓰는 놈들은 죄다 그러거든.”

    “…….”

    “경고하겠는데, 독자적인 행동은 용서치 않아.”

    프란체 대공은 손발을 묶어버렸다. 아예 자신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말라 으름장을 놓은 격이었다.

    ‘모르겠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

    대공가의 실정을 모르는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업무에 손을 놓고 일임하는 것처럼 보이나 프란체 대공은 모든 사항을 일일이 보고받는다. 자신이 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모를 리가 없었다.

    “베로니카에게도 전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아틸이 마지못해 복종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카님 상처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했고?”

    “등에 두 대를 맞았다고 합니다. 심복의 말로는 살기 힘들 거라고…….”

    프란체 대공이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며 고심하더니 이내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

    “슈타인의 활을 맞고 살아난 이는 드물지. 스펜서한테 기별해. 내가 봤으면 한다고.”

    * * *

    엘레나의 조치는 신속했다. 길드와 접촉하여 휴렐바드가 직접 선출한 믿음직한 용병들을 고용해 살롱과 바실리카 일대에 배치해 교대로 경비케 했다. 곧 노블레스 거리의 조기 개장을 앞둔 대공가에서 어떤 옹졸한 수단으로 방해 공작을 펼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화재로 소실된 살롱의 본관 복원 작업에 전력을 쏟았다. 별관이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고 한들 본관이 갖는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다. 고무적인 건 우려했던 것보다 복원 작업이 훨씬 더 빠르게 진척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석재가 주를 이룬 건물의 골자보다 주로 치장이나 단열재에 목재가 많이 쓰였다. 그러다 보니 교체 작업이 수월했다. 물론 그을린 대리석이나 불길에 일그러진 조형물 등 손댈 게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걸 만회하고자 란돌은 칼리프의 주선 아래 바실리카를 설계한 디아즈와 협력했다.

    건축공법적인 측면에서도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도 달랐지만 란돌과 비교해 건축 속도가 빠른 디아즈의 공법은 소실된 본관의 재건에 적합했다. 그런 두 사람의 노력이 빛을 본 것일까? 본관의 복원에 탄력이 붙었다.

    엘레나는 별관 최상층 침실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본관 쪽에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건너편 바실리카도 개장을 앞두고 마지막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고 있던 것도 잠시, 엘레나는 몸을 돌려 침대의 머리맡으로 갔다. 물수건을 짜고는 렌의 이마를 닦았다.

    “벌써 나흘째예요.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니에요?”

    타박하는 것처럼 보이나 엘레나의 눈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천재 외과 의사 네빌의 말로는 깨어나는 시기가 늦어질수록 뇌에 손상이 심해진다고 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엘레나의 수심이 깊어졌다.

    엘레나는 여간해서 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급하게 처리할 사안이 있을 때만 잠깐씩 자리를 비웠을 뿐 소파에서 잠을 청하며 밤새 렌을 간호했다. 그것이 사경을 헤매는 렌을 위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었다.

    “그거 알아요? 우리 참 오래 알고 지낸 거.”

    의식이 없는 렌을 보며 엘레나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렌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가 참 미워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 딱한 생각이 들게 하더니, 이젠 절 고맙고 미안하게 만드네요.”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인연이라더니. 렌과 엘레나가 딱 그렇지 않나 싶었다.

    엘레나의 시선이 그윽해졌다. 흐트러진 그의 곱슬머리를 이마 위로 넘겨주는 손길에 애잔함이 묻어났다.

    “제발 죽지만 마요.”

    살아만 주면 된다. 그거면 족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렌의 반응은 묵묵부답이었다. 들리는 건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뿐.

    “베로니카한테 초대장을 보냈어요.”

    엘레나는 노블레스 거리 조기 개장일과 바실리카 개장일을 겹치도록 조종했다. 그것도 모자라 베로니카에게 초대장을 보내 노골적으로 기만했다. 그녀에게 당한 걸 고스란히 되갚아주기 위해서.

    “아마 올 거예요. 렌 말대로 미친년이잖아요.”

    “…….”

    “보고 싶어 했잖아요. 베로니카의 일그러지는 얼굴. 제가 보여줄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꼭 일어나요.”

    그 뒤로도 엘레나는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이렇게라도 렌의 의식에 목소리가 닿기를 기도하면서. 

    그런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렌의 손끝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하나, 아쉽게도 엘레나는 그러한 미동을 보지 못했다.

    * * *

    “하.”

    베로니카는 짜증과 불만으로 폭발 직전이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살롱의 방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일부 소실은 있었지만 충분히 재건이 가능할 수준이었다. 결정적으로 엘레나는 티끌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녀의 뜻대로 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저도 답답합니다만, 대공 전하의 뜻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베로니카가 눈을 치켜뜨고 노려봤다. 당장에라도 아셀라스의 목을 조를 듯 살의가 넘실거렸다.

    “똑바로 일 처리를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

    “죄, 죄송합니다…….살롱에 살수장치라는 게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셀라스가 얼른 머리 숙여 사죄했다. 프란체 대공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방화의 실패를 빌미로 베로니카가 제 가족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베로니카는 치미는 짜증에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원하는 걸 가져보지 못한 적도,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은 적도 없었다. 한데, 최근 들어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 와중에 베로니카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했다.

    “천한 년 따위가 날 능욕해?”

    초대장을 쥔 베로니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엘레나가 보낸 초대장은 안 그래도 기분이 상해 있던 베로니카의 신경을 박박 긁어놓았다.

    노블레스 거리의 개장일인 걸 뻔히 알면서도 초대장을 보낸 것 자체가 베로니카를 비꼬고 모욕하는 행위였다. 초대장을 보낸 속마음에는 어차피 노블레스 거리는 망할 테니, 살롱에 와서 축하나 하라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 무시하십시오. 최후에 웃는 자는 어차피 공녀 전하십니다.”

    아셀라스가 진땀을 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러나 굴욕감에 일그러진 베로니카의 표정은 꼭 무슨 사고라도 칠 듯 위태로웠다.

    ‘L, 무서운 여자야.’

    우연하게도 노블레스 거리와 바실리카 개장일이 겹쳤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개장을 기념하며 사흘간 이어질 연회 일정마저도 같았다. 감히 제국의 황실보다 위에 있다는 대공가의 숙원 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이런 대범한 짓거리를 벌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모자라 대공가로 초대장을 보내 베로니카를 도발했다.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보네요.”

    뭔가 결심한 듯한 베로니카의 눈빛에 아셀라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공들여서 초대장까지 보내줬는데 안 갈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네? 재고해 주십시오. 공녀 전하께서 가시는 것만으로도 손해입니다. 굳이 저들에게 좋은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셀라스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베로니카가 그곳으로 간다는 것만으로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안 그래도 살롱과 바실리카와 비교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노블레스 거리다 보니, 남의 집 잔치만 더 성대하게 돋보여주는 꼴만 날 것이다.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려 만류하는 아셀라스를 쳐다봤다. 그 지독한 눈빛에 아셀라스가 움찔했다.

    “아셀라스.”

    “네, 공녀 전하.”

    아셀라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쥐고 있던 부채로 그의 머리를 툭툭 쳤다.

    “머리는 장식이에요? 왜 자꾸 착각을 하죠?”

    “…….”

    “노블레스 거리? 망하라고 해요. 손해 좀 본다고 치죠. 그런다고 대공가가 무너질 거 같아요?”

    “그, 그건…….”

    아셀라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노블레스 거리가 망하면 그 타격은 대공가에도 치명적이다. 피네치아 재배지 소실로 인해 아편 사업을 접게 되면서 부수적인 수입이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들 이 일로 말미암아 대공가가 무너질 거 같으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다’였다. 제국의 건국부터 지금까지 무려 천 년을 존속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대공가가 이렇게까지 위태로운 적이 없었을까. 있었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가는 건재했다.

    베로니카가 부채의 끝을 세우더니 아셀라스의 머리를 꾹 눌렀다.

    “그깟 돈? 없어도 그만이에요.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걸 시간이 채워주니까.”

    “…….”

    “그깟 돈보다, 사업 실패보다,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해. 그게 내 몸에 흐르는 고귀한 핏줄의 긍지니까. 내 말 알아들어요?”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아셀라스는 말려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베로니카는 요지부동이었다.

    “초대에 응하는 건 예고편일 뿐이야. L,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년은 쉽게 안 죽여. 뼈마디를 분지르고 살을 발라 죽일 거니까.”

    아셀라스도 더는 말리지 못하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일개 가신에 불과한 그로서도 베로니카의 고집을 꺾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 날, L이 가면을 벗는다죠?”

    “그렇다고 하더군요.”

    베로니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야겠네요. L의 썩은 얼굴을 봐야 이 분이 좀 풀릴 거 같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그 속내를 꺼내지 않는 베로니카를 보며 아셀라스의 속이 타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제발, 이 일로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가 없길 바라고 또 바랐다.

    * * *

    베실리아 제국의 수도로 들어서는 마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제국 최고의 행사인 건국절조차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귀족이 수도를 찾은 것이다. 개중에는 타국의 귀족도 적지 않았다. 출입국 절차가 간단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국의 젊은 귀족들은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해 수도를 방문했다. 유행과 문화가 젊은 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덕분에 수도는 둘도 없는 호황을 누렸다. 빈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몇몇 수도 귀족은 자신들의 별관과 응접실을 개방해 귀족들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기도 했다.

    거리에도 활기가 돌았다. 제국의 수도를 둘러보며 관광하는 외국 귀족들이 소비를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많은 귀족이 몰린 이유는 내일 개장할 두 거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첫 번째로 노블레스 거리. 제국의 하늘이라 일컫는 프리드리히 대공가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어 만든 귀족 거리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리석 건물들이 밀집한 구역으로 귀족들만 출입이 가능한, 귀족들을 위한, 귀족들에 의한 거리다. 특권 의식과 차별을 중시하는 귀족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두 번째는 바실리카. 건축가 디아즈가 시공한 바실리카는 노블레스 거리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살롱을 중심으로 11자로 마주 보며 건축된 장방형 대형 건축물이었는데 총 3층으로 되어 있었다. 총면적으로 치면 노블레스 거리보다 턱없이 작았지만 건물 내부에 입점한 상점과 문화시설, 숍, 부티크는 조기 개장한 노블레스 거리와 비교해 상점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심지어 입점한 상점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머메이드 드레스를 디자인한 크리스티나의 부티크를 필두로 대륙 최고의 세공사가 운영하는 보석 숍, 14대에 걸친 구두 장인 바클리의 구두점, 외교관 출신이 운영하는 번역 서점, 그리고 10대째 이어져 온 장인의 악기점, 북부 지방에서 이름을 날린 목수의 가구점 등 장인의 집합소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동시 개장이 예정된 두 거리는 유행에 민감하고, 문화에 갈증을 느끼며 새로운 걸 추구하는 귀족들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귀족에게 있어 사치와 치장, 그리고 문화, 지식의 충족은 귀족 삶의 질을 결정짓는 더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하, 불안해. 잘되겠지? 잘돼야 할 텐데, 잘 안 되면 어쩌지? 아니야, 잘될 거야. 잘될 거라고.”

    칼리프는 비 맞은 수도승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바실리카 개장을 앞두고 불안감이 극에 달한 것이다.

    “잘될 거예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건데 진정이 안 되네.”

    엘레나도 가슴 졸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노블레스 거리를 압살하고도 남을 만큼 빈틈없이 준비했다고 자부했지만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지 않나.

    “개장 첫날에는 밀릴 수 있습니다. 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수십 대에 걸친 대공가의 인맥과 영향력은 귀족 사회에서 절대적일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밀리오의 의견에 엘레나도 동의했다. 노블레스 거리의 주체는 프리드리히 대공가다. 제국에서 프리드리히라는 성이 갖는 특별함은 독보적이다. 살롱의 문화 영향력이 크다곤 하나, 수십 대에 걸쳐 건재한 대공가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단 하루뿐이에요. 다음 날이면 우리가 앞설 것이고, 마지막 날은 모든 수도 귀족이 바실리카와 살롱을 찾을 거예요.”

    엘레나는 자신감을 보였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살롱을 와본 적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어.’

    그게 문화를 선도하는 살롱의 영향력이다. 바실리카는 그런 문화가 빚어낸 결과물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형태로 저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나 진짜 힘들어 죽을 거 같아. 살롱 복구에 뮤지컬부터 패션쇼, 연주회…… 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선배한테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해요.”

    “그걸 이제 알았냐?”

    모처럼 엘레나가 노고를 알아주는 것 같자 칼리프가 우쭐했다.

    “그래서 부탁 하나 더 하려고요.”

    “뭐? 야, 나 지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에밀리오 님.”

    칼리프의 투정을 듣는 체 마는 체하며 엘레나가 눈빛을 보내자 에밀리오가 봉투를 꺼내 건넸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칼리프가 이게 뭐냐는 듯 쳐다봤다.

    “노블레스 거리의 예상 재무제표예요. 총투자 비용부터 시작해서 향후 운영에 필요한 지출과 그에 필요한 최저 수익, 방문객 대비 필요 매출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거예요.”

    “아직 개장도 안 했는데 이걸 어떻게 알아?”

    칼리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에밀리오 님이 계시잖아요.”

    “아.”

    엘레나의 짧은 답변만으로도 설명이 됐는지 칼리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대륙 십 대 상단으로 일컫는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라면 이런 예상 재무제표를 파악하고 작성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근데 있잖아, 이걸 왜 나한테 줘? 나 숫자랑 친하지도 않은데.”

    “그걸 선배가 전해줄 사람이 있어요.”

    “누구?”

    엘레나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보로니 백작, 노튼 자작, 후안 남작.”

    각각 제국 서부와 북부, 그리고 남부를 이끄는 귀족의 수장이나 다름없을 만큼 영향력이 절대적인 세 명의 귀족이었다. 그들 세 귀족은 베로니카의 대역으로 활동하던 엘레나에게 속아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 돈은 에밀리오를 통해 세탁되어 살롱으로 통용됐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세 귀족은 모른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 돈을 투자한 만큼 돌려받고 싶어 할 뿐이다.

    “세 귀족도 이젠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노블레스 거리의 실태를요.”

    “베로니카 당황하겠는데? 자긴 투자받은 적도 없는데 귀족들이 난리를 치는 거잖아? 흐흐.”

    칼리프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 기회에 대공가와 귀족들을 확실히 분열시켜 놓을 거예요.”

    노블레스 거리의 완성에는 대공가를 따르는 귀족들의 상납금이 적잖이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불만스러운데, 상납금 외에도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낸 세 귀족은 노블리스 거리가 망하고 투자금이 회수되지 않으면 그 불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아무리 대공가라고 하더라도 재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귀족들의 외면은 감당하기 힘든 우환이 될 것이다.

    “이해했다. 이건 세 귀족에게 내가 확실히 전달해 두마.”

    봉투를 흔들던 칼리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응접실을 나갔다. 베로니카의 일그러질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인.”

    에밀리오의 낮은 부름에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공녀 말입니다. 정말 올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올 거예요.”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있다고 자신하던 에밀리오였지만 베로니카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형이랄까.

    “확언하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미친년이니까요.”

    “네?”

    항상 품위 넘치던 엘레나와 어울리지 않는 말에 에밀리오가 당황했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엘레나가 수습했다.

    “……라고 렌이 그러더라고요.”

    “어쩐지, 은인께서 그런 말을 쓰시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게요. 닮아가나 봐요.”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렌이 마음에 걸려서다.

    “공녀가 은인을 보면 기겁하겠군요.”

    “그러라고 가면을 벗는 거니까요. 벌레처럼 무시하던 대역에게 밟히는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지 느껴보라고요.”

    엘레나는 바실리카 개장 연회 마지막 날 가면을 벗겠다고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살롱에서 발생한 화재 때문에 생긴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안배이자, 노블레스 거리에 쏠려 있는 화제성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었다.

    ‘더 이상 움츠려 있을 이유도 없고.’

    엘레나가 가면을 벗기로 결심한 건 가면을 계속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살롱을 운영하는 그녀의 명성은 대공가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드높아졌다. 그리고 시안에게 받은 작위로 인해 제국의 명실상부한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더 이상 엘레나는 대공가의 말에 끔뻑 죽던 대역이 아니다.

    살롱을 운영하는 묘령의 여주인 L. 대공가는 인정할 수 없을지 몰라도 세간은 그렇게 그녀를 본다. 그게 현실이고 그녀의 현 위치였다.

    그녀의 얼굴이 신분이고, 그녀의 이름이 증명이며, 그녀의 존재가 평판이다.

    대공가 입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목을 분질러 놓을 수 있는 말 잘 듣던 인형이었겠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대공가는 결단코 엘레나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다. 대공가가 안하무인,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린다지만 귀족 사회의 룰이라는 게 있다.

    제국민에게 인정받는 여인을 대낮에 해코지할 수도 없으며, 귀족 시해는 제국에서 금기시하는 중죄다. 대공가라고 하더라도 질타를 피할 수 없으며 위기의식을 느낀 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네요. 이만 렌에게 가봐야겠어요.”

    “곧 깨어나실 겁니다. 상심하지 마십시오.”

    “상심 안 해요. 못 일어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엘레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렌이 머무는 방에 돌아왔다. 아이처럼 잠들어 있는 렌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제 몰골 안 보여요? 사람들이 반쪽이래요. 내가 그토록 바라던 베로니카의 앞에 서는 날인데.”

    미동도 없는 렌의 손을 엘레나가 꼭 잡았다.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그만 자고 일어나요. 베로니카의 일그러지는 얼굴 보고 싶잖아요.”

    하루라도 빨리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엘레나가 기도할 때였다. 착각이었던 건가? 방금 엘레나가 꼭 움켜쥐고 있던 렌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렌! 제 목소리 들려요? 네?”

    미세했지만 분명히 전해진 생동감에 엘레나가 희망 서린 눈길로 렌을 불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렌은 미동도 없었다. 거짓말처럼 눈을 뜨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꿈 같은 이야기는 현실로 이뤄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이게 처음이 아닌 듯 낙담한 티를 내지 않고자 쓰게 웃었다.

    “이게 몇 번째인지……. 깨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고 생각할게요. 꼭 이겨서 일어나 줘요.”

    어제 다녀간 외과 의사 네빌은 말했다. 의식불명 상태는 깨어나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라고, 그만큼 곁에 있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말이다.

    “접니다, L.”

    그때,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엘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렌의 수하이자, 정보 조직 마제스티의 수장 멜이었다. 잠복과 잠행에 능한 그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오셨어요?”

    “공자님은 아직이시군요.”

    침대맡에 다가온 멜의 표정은 어두웠다. 깨어날 거라 믿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L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엘레나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렌이 의식불명에 빠진 이후 마제스티가 수집하고 분석한 정보들은 대부분 엘레나에게 보고됐다.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멜은 그것이 렌의 뜻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숀과 관련된 일을 보고드릴까 합니다.”

    엘레나는 살롱의 화재와 숀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짐작했다. 해서, 멜이 그와 관련해 조사했다. 숀은 살롱에 불을 낸 게 본인임을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며 죽음으로 속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미안한 마음에 자진까지 선택한 사람이에요. 방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L의 짐작대로입니다. 협박을 당하고 있었더군요.”

    엘레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짚이는 게 있는 까닭이었다.

    “대공가군요.”

    “네, 가족을 인질로 잡은 까닭에 숀이 살롱에 불을 지폈다고 합니다.”

    “하, 정말 지독하네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다니.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엘레나를 저격하려고 했다. 살롱의 전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태워 죽이려고 했다고 봐야 했다.

    “숀의 가족들은 무사하나요?”

    “딸은 무사하나, 저희가 구출하러 갔을 때 부인은 이미…….”

    멜이 말을 흐렸다. 덩달아 엘레나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숀의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아 수도 외곽에서 요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저의 부주의가 그의 행복을 앗아가고 말았네요.”

    엘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을 예상했다고 하면서 대공가가 내부 사람에게 접근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숀이 이런 일을 겪은 건 전적으로 안일하게 대처한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 엘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했다.

    “부인의 시신은 가이아 교단으로 모셔서 성대히 장례를 치러준다고 전해주세요. 숀이 원하면 딸과 정착할 자금도 준다고요. 방화도 없던 일로 해준다고 하세요.”

    엘레나를 지그시 쳐다보던 멜의 눈빛이 깊어졌다. 숨이 막힐 정도의 고고함과 우아한 외면 못지않게 그녀의 성품 역시 자애로웠다.

    ‘공자께서 반하실 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보통의 귀족이라면 숀의 사정을 헤아리기보다 방화한 것에 대해 추궁할 것이다. 그러나 엘레나는 살롱에 큰 피해를 입힌 숀을 감싸고 염려했다. 애초에 그릇이 달랐다.

    ‘꼭 깨어나십시오, 공자님. 주무시느라 이런 분을 놓치시면 평생 땅을 치고 후회하실 겁니다.’

    멜이 잠들어 있는 렌에게서 시선을 거둬 엘레나를 쳐다봤다.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지…… 알고는 계셔야 할 거 같아서요.”

    “뭐죠?”

    “스펜서 자작님께서 대공가로 소환되셨습니다. 말이 소환이지 끌려가셨습니다.”

    “스펜서 자작님이 끌려갔다고요? 왜요?”

    “저도 의문입니다. 지금도 대공가에 감금당해 계십니다.”

    모든 일엔 원인이 있고 결과가 따르는 법. 스펜서 자작이 대공가에 불려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이유가 뭘까?’

    엘레나는 이 일을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혹시 렌과 나의 관계 때문에?’

    엘레나를 지키기 위해 렌이 희생했다. 만약 그들이 렌이 몸을 던져 엘레나를 지키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이 같은 사실에 의심을 품었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보더라도 엘레나와 렌의 사이가 가까워 보였을 테니까. 대공가 입장에선 L과 시안의 연대만으로도 못마땅한데 렌까지 한통속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지금 바스타슈 가문의 가주직은 공석입니다. 제가 급한 처리는 도맡아 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한계입니다. 렌 공자께서는 아직 의식이 없으시고 이대로는 가문이 와해될지도 모릅니다.”

    “스펜서 자작님께서는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요?”

    “가주님께서는 렌 공자께서 모종의 이유로 자리를 비운 걸로만 알고 계십니다. 공자께서 가문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만 남기고 대공가로 가셨습니다.”

    엘레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딘가 찝찝했다. 뭔가를 놓치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는데 그게 뭔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긴 한데…….’

    단순 추정만으로 접근하자니 아직 정황이나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아무래도 손을 써야겠다.

    “멜 님이 해주실 일이 있어요.”

    “뭐든 편히 말씀하시길. L의 말씀은 제게 공자님의 말과 같으니까요.”

    엘레나가 힐끗 렌을 보더니 결심을 굳히며 얘기했다.

    “렌이 죽었다고 수도에 소문을 내주세요.”

    “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엘레나의 부탁은 그의 상식을 아득히 넘어설 만큼 파격적이었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스펜서 자작님을 대공가로 소환해 감금한 이유. 그걸로 프란체 대공이 노리는 계략이 뭔지 알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렇지만 렌 공자께서 죽었단 사실이 알려지면 가문이 혼란에 빠질 겁니다.”

    스펜서 자작과 렌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가문 내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렌의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면 가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엘레나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대공가의 꿍꿍이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야 다음을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예요. 가문이 혼란스러울 순 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확인해야 할 만큼 불안해서 그래요.”

    “그렇게까지. 실례지만 뭘 우려하고 계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던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생각을 꺼냈다.

    “프란체 대공이 바스타슈 가문을 노리는 거 같아요.”

    감정을 제어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멜이었지만, 이 순간 떨리는 눈동자를 감출 수 없었다.

    “지, 진담이십니까?”

    “아직까진 추측에 불과해요. 하지만 렌이 절 지키려다 화살을 맞은 걸 목격했다는 전제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엘레나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이성으로 메워진 눈동자에는 감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없었다.

    “제국의 귀족법 7항. 직계혈족이 모두 화를 입거나, 상속인이 없을 경우…….”

    멜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엘레나가 그런 그를 보며 못다 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사촌 내지 육촌까지 확대하여 가문을 잇도록 한다.”

    멜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백년조약을 맺고 독립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대공가가 바스타슈 가문을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그래서 확인이 필요한 거고요.”

    프란체 대공은 무서운 남자다. 여간해서는 전면에 나서지 않아 엘레나도 맞상대한 적은 없지만 가벼이 볼 수 없는 사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어쩌면 그가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공자께서 죽었다고 소문을 내는 것도…….”

    “대공가가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려는 거예요. 그래야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엘레나의 시선이 렌에게 머물렀다. 얼음장처럼 차갑던 눈빛이 잠시 녹은 듯 보였으나 금세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만약에요, 정말 집어삼킬 계획이라면…… 바스타슈 가문은 제가 지킬 거예요.”

    * * *

    안가의 지하 감옥. 햇빛 한 점 들지 않아 으슥하고 을씨년스러운 그곳에 리아브릭이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쯤 풀려 있었다.

    “어디서부터였을까? 내가 놓친 게…….”

    리아브릭의 손가락이 바닥을 따라 선을 그었다. 낙서처럼 보이는 선들이 겹쳐질수록 리아브릭의 눈길이 점차 또렷해졌다.

    “혹시?”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리아브릭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침전된 눈빛에 생기가 돌며 빠르게 사고의 전환이 이뤄졌다.

    “그래, 그럼 말이 돼. 그럼 처음부터…….”

    리아브릭이 마른침을 삼키며 뒷말을 흐렸다. 그러더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가짜가 L이었던 거야.”

    리아브릭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수백, 수천 번을 넘게 고민하고 되새김질을 통해 나온 결론이었다.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엘레나가 증발하듯 사라진 것도, L이 대공가의 내부를 제집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던 것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런 신분을 만들었던 거지? 제국에 연고조차 없던 주제에?”

    조금 전의 확신이 무색하리만치 논리적인 벽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리아브릭은 사고를 멈추지 않았다.

    “학술원!”

    그때가 유일했다. 리아브릭이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고, 자유롭게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은.

    “그 말은…… 대공가에 온 그 순간부터 대공가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거야?”

    리아브릭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미련을 버리고 나서야 모든 게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만 해도 그래. 놓친 게 아니고 먼저 손을 써서 빼돌렸다면.”

    공국을 떠나기 전부터, 엘레나는 여기까지 내다봤을지도 모른다.

    “휴렐바드를 선임한 것도 얼굴 때문이 아니었어. 그는 강해. 로렌츠 경보다 훨씬. 그걸 알고 있던 거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팔뚝에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처음부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어.”

    그간 엘레나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를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지자로서 제국을 주름잡던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집에 가까운  자존심마저 내세울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짓던 미소, 눈물, 어리숙함, 허영심……. 리아브릭이 봐왔던 모든 게 가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쪽같이 그녀를 속였던 것이다. 리아브릭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손을 쓰면 돼. 반드시 죽여야 해. 그러지 않으면…….”

    리아브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가가 먹힐 거야.”

    제국이 망한다는 말을 믿을지언정, 제국의 하늘이라 일컫는 대공가가 무너진다는 건 쉬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이제는 대공가의 안위를 걱정할 시기에 이르렀다. 최후의 보루라 일컫는 프란체 대공이라 할지라도 과연 엘레나의 적수가 될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경비! 지금 당장 아틸을 불러와. 대공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일이라고!”

    리아브릭은 철창을 부여잡고 지하 감옥 입구를 향해 악을 썼다. 비록 대공가에서 버림받은 처지였지만 오기는 남아 있었다. 알량한 충성심이 아니라,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엘레나의 숨통을 끊고 살아남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닥쳐!”

    “그 주둥이 찢어버리기 전에 입 다물라고.”

    “미쳤냐? 네 처지를 잊었나 본데, 넌 끝났어. 그런다고 대공이 널 다시 써줄 거 같아?”

    죄수들이 비아냥거리며 리아브릭을 모욕했다. 그러나 리아브릭은 저들의 말을 무시했다. 지하 감옥을 책임진 경비원은 아틸이 심어놓은 사람이다. 조금 전 리아브릭의 외침은 경비를 통해 아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여전히 리아브릭을 따르는 아틸은 그녀의 부름에 만사를 제쳐두고 올 게 자명하다.

    ‘빨리 와야 해. 너무 늦으면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몰라.’

    바깥 사정을 모르는 리아브릭은 불안해졌다. 대공가가 몰락한다면 그녀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상실하기에 초조함이 더해졌다.

    * * *

    오늘 노블레스 거리가 조기 개장했다. 펜스를 걷어내자 대리석 건물이 밀집된 거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적절히 섞인 건축물들은 웅장하진 않았지만, 세련되고 고아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귀족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거리랄까.

    개장 시간에 맞춰 수백 명이 넘는 귀족들이 노블레스 거리를 찾으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밀려드는 터라 일부만 개장한 거리를 아예 뒤덮어 버렸다.

    “저기 귀족들을 보십시오. 공녀 전하, 기대 이상입니다.”

    중앙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노블레스 거리의 포럼(Forum)에서 베로니카와 아셀라스가 몰려드는 귀족들을 관망했다. 살롱의 명성이 높아지고, 장막에 가려진 바실리카의 위용이 워낙 으리으리하다 보니 귀족들이 그쪽으로 다 가면 어쩌나 내심 노심초사했었다. 근데 웬걸? 뚜껑을 열어보니 수도 귀족뿐만 아니라, 타국에서 관광 온 귀족들도 첫 번째 방문지로 노블레스 거리를 찾았다.

    “호들갑 떨지 마세요. 당연한 결과니까.”

    “그, 그런가요?”

    아셀라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돌렸어요. 근본 없는 L이 세운 살롱과 비교가 안 되죠.”

    말을 잇는 베로니카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에 대공가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공녀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게 다 대공가의 권세를 보여주는 대목 아니겠습니까.”

    아셀라스는 연신 맞장구를 치며 베로니카의 비위를 맞췄다.

    하지만 아셀라스의 속내는 달랐다. 성공한 듯 보이는 개장 행사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잠재했다. 지금이야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이 기대감과 거역할 수 없는 권위에 짓눌려 찾아왔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 불안 요소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소비였다. 아직까지 베로니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셀라스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사치스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귀족들이 돈을 안 써.’

    부티크나 숍, 상점을 들락거리는 귀족들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적잖은 시간을 둘러봤음에도 구매로 이어지지 않은 건 귀족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지 못했단 의미였다. 다시 말해 눈에 차는 물건들을 갖추지 못했단 얘기기도 했다.

    ‘돌아버리겠네. 예상은 했지만 훨씬 심각한 수준이야.’

    시대의 거장이나, 장인들의 가게는 대부분 L이 세운 바실리카에 입점했다. 그러다 보니 노블레스 거리에 입점한 장인이나, 예술가들의 가게는 그보다 수준이 한두 단계 떨어졌다. 이러한 격차는 매출의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고 그 결과 노블레스 거리에서 발생한 수익의 일부분을 챙기는 대공가로서는 직격탄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뭘 하고 있죠? 이런 날 얼굴이라도 비춰주시면 좀 좋아.”

    “대공 전하께서 오셔서 축사라도 해주시면 훨씬 모양이 살았을 텐데요.”

    부녀지간임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근래 프란체 대공의 속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살롱의 방화 실패 이후로 베로니카의 행동에 제약을 걸더니 본인은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저택 내에서도 프란체 대공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베로니카는 치미는 역정을 삼켰다. 가만히 있다가도 불쑥불쑥 L이 떠올라 찢어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걸 막은 것도 모자라 노블레스 거리도 나 몰라라 하는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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