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30/30)
  • 제23장 몰락의 징조

    밤까마귀 소속 대원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저 1호나, 2호 등 숫자로만 불린다. 베일에 싸인 밤까마귀는 오로지 대공가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며, 목숨을 내놓는다.

    밤까마귀의 주 업무는 정보 수집이다. 수도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 암암리에 퍼진 대원들은 귀족들을 감시하며 움직임을 주시한다. 리아브릭이 집무실에 앉아 제국의 사정을 손바닥처럼 내려다볼 수 있던 것도 거미줄처럼 엮은 밤까마귀의 감시망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밤까마귀는 대공가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다. 대표적으로 암살을 들 수 있다. 그들 개개인은 살인 병기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암살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수를 구사하는 만큼 제법 이름난 기사들조차 당하기 일쑤였다.

    밀명을 받은 3호가 달빛 한 점 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수도의 건물을 가로질렀다.

    ‘저긴가?’

    3호가 수도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을 보았다. 야심한 시각이다 보니 일 층과 이 층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3호는 야음을 틈타 조용히 건축물에 접근했다. 도둑고양이처럼 민첩한 몸놀림으로 지붕으로 도약하더니, 몸을 낮춰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물감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다락방에 쌓여 있는 캔버스를 지나쳐 이 층 복도로 나왔다. 사전에 구조를 파악해 둔 만큼 곧장 라파엘의 침실로 직행했다. 운이 좋은 건지 침실 문도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무리 없이 침실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3호는 침대로 다가갔다. 한기 때문인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잠이 든 라파엘이 보였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작지만 예리한 단도가 들려 있었다. 3호가 단도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이질적인 감촉에 3호가 눈을 부릅떴다. 뼈와 살을 관통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솜을 꿰뚫은 기분에 이불을 치우자 베개가 눕혀져 있었다.

    “밤까마귀.”

    방 한편, 빛이 들지 않는 커튼 너머에서 고저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계심을 끌어올린 3호가 고개를 돌리자 눈과 코를 가린 은가면을 쓴 사내가 검을 쥐고 서 있었다.

    “일명 3호. 암살에 특화되어 있는 살인 병기.”

    3호는 뭔가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보가 샜어!’

    은가면의 사내는 밤까마귀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훤히 다 알고 있었다. 저 말은 곧 자신이 라파엘을 암살하기 위해 이곳에 올 거란 걸 알고 기다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임무는 실패다.’

    3호에게 남은 과제는 무사히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는 일이었다.

    “죽이진 않는다. 대신, 나와 같이 가줘야겠다.”

    그런 3호의 의중을 읽었는지, 은가면의 사내가 거리를 좁히며 압박했다. 존재감만으로도 움츠러들 만큼 지독한 기세였다. 그러나 3호는 노련했다. 3호의 양손에 쥐어져 있던 단도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챙! 은가면의 사내는 등잔불조차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단도를 정확하게 쳐냈다.

    “무의미한 짓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3호는 품에서 피뢰침을 꺼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피뢰침은 충격을 가하면 수십여 개의 바늘로 분산되어 적을 덮친다. 3호가 소나기처럼 내던진 단도들 사이에 피뢰침을 섞어 던졌다. 은가면의 사내가 피뢰침을 받아쳐 바늘이 비산하는 순간을 노려 빠져나갈 요량이었다.

    “피뢰침을 조심하라고 했지.”

    3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가면의 사내는 단도를 정확하게 받아치면서도 피뢰침은 몸을 틀며 흘려보냈다.

    ‘대체 정보가 어디까지 샌 거야?’

    상황이 급변했다. 피뢰침까지 알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간다.’

    3호는 품에서 연막탄을 꺼내 터뜨렸다. 안개가 사르르 퍼지며 주변의 시야를 가렸다. 반대편 창문으로 나가는 척 시선을 끈 뒤, 문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던 때였다.

    “컥!”

    3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왼쪽 어깻죽지에 박힌 검이 엄청난 힘으로 그의 몸뚱이마저 끌고 가더니 꼬챙이처럼 벽에 박아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반대편 팔도 강하게 억눌렀다.

    ‘틀렸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거기다 기술마저 알고 있으니 도망가기 요원했다. 3호는 고통을 참으며 혀로 어금니를 살살 긁었다. 어금니에 껴놓은 철제 클립 속에는 독단이 숨겨져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자살 장치였다.

    “웁!”

    그때 3호의 입속으로 헝겊이 말려들어 왔다. 입안을 가득 채운 헝겊 때문에 독단을 꺼낼 수도, 씹을 수도 없는 형국이 되었다.

    “아가씨께서 너의 죽음을 허락지 않으셨다.”

    ‘아가씨?’

    3호의 의식은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

    * * *

    “밤까마귀가 당했다?”

    “네.”

    “2호와 3호. 그리고 6호까지?”

    아틸이 고개를 끄덕이자, 프란체 대공의 표정도 자못 심각해졌다.

    2호, 3호, 6호는 밤까마귀에서도 암살과 살인에 특화된 대원들이었다. 만약 정식 기사가 되었다면 제1기사단에 속하고도 남을 만큼 빼어난 자질을 타고났다. 그런 암살자들이 당했다.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시신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프란체 대공은 뒷짐을 진 채 전면 창문 너머의 후원을 내려다봤다. 무심해 보이는 눈길 너머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후환으로 남을 가능성은?”

    “그마저도 확인이 어렵습니다. 자진했을 거라 짐작되나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손을 써야겠지. 밤까마귀, 해체해.”

    아틸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지금의 프리드리히 가문이 있기까지 밤까마귀는 온갖 궂은일을 해왔다. 그런 조직을 단숨에 없애라고 지시했다.

    “정보가 샌 이상 조직의 가치는 없다. 괜히 안고 가봐야 발목을 잡을 뿐이야.”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아틸은 내심 감탄했다. 그만한 조직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거늘, 프란체 대공의 결단은 칼 같았다.

    “후임 조직은 자네가 직접 맡도록 해.”

    “제가 말입니까?”

    “리아브릭에게 배운 게 있으니 그 정도 몫은 하겠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틸의 눈이 번뜩였다. 이건 기회다. 정보 조직을 손에 쥔다는 건 대공가의 실세가 된다는 의미와 같았다.

    “느낌이 썩 좋지 않아.”

    프란체 대공이 창문 밖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베로니카와 아셀라스에게 실무를 맡겨뒀지만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리아브릭 실각 이후, 대공가의 전반적인 사항들은 아틸을 통해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노블레스 사업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네, 조기 개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살롱의 위상을 넘을지 미지수인지라…….”

    “예술가들 제거마저 실패했으니 더더욱 그러겠군.”

    아틸은 자그맣게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황실마저 굽어보는 대공가의 재정이 눈에 띄게 악화됐다. 고가에 사들인 미술품의 가치는 폭락했고, 피네치아 재배지의 소실로 아편 사업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도 난관이 많아 예상보다 더 큰 금전적 손해를 입고 말았다.

    아틸은 불현듯 실각되기 직전 리아브릭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L을 주시해. 위험한 여자야.”

    그러고 보면 대공가가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도 L이라는 여자가 등장하고 나서부터다. 돌아보면 살롱이라는 것 자체가 노블레스 거리를 겨냥한 대척점이란 인상마저도 들었다.

    “베로니카가 살롱을 부숴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다지?”

    “네, 독주회 일로 꽤 감정이 상하신 듯합니다.”

    “여러모로 방해야. 살롱도, L도. 확실히 밟아두지 않으면 안 되겠어.”

    노블레스 거리와 살롱, 베로니카와 L. 어느 쪽도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웬만해서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 프란체 대공의 인내심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살롱을 폐쇄시키지.” 

    “묘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내일 폐하를 뵙지.”

    현 황제 리처드는 프란체 대공이 옹립한 황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가에서 대공가로 격상이 된 만큼 황실에 미치는 영향력도 절대적이다.

    ‘살롱도 곧 문을 닫겠군.’

    리처드 황제는 허울뿐인 허수아비 황제다. 제국의 실권을 쥐고 흔드는 프란체 대공의 청을 거절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런 황제를 앞세워 프란체 대공은 살롱을 규제하고 폐쇄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베로니카한테도 얘기해 둬. 불장난은 나중으로 미뤄두라고.”

    * * *

    황궁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시안의 발걸음에서 조급함이 묻어났다. 프란체 대공이 기별도 없이 황궁에 들이닥친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였는데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는 사실을 듣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치챈 것인가?’

    침착하려고 했지만 시안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가가 상납한 과징금과 엘레나가 보태준 자금을 바탕으로 비밀리에 황궁근위대의 개혁에 착수했다. 실력도 떨어지고, 황실을 향한 충성심조차 없는 썩어빠진 근위병들을 도려내고 실력은 출중하지만 신분의 한계에 부딪치거나, 여러 이유로 낙오된 자들로 대신할 생각이었다.

    본궁에 도착한 시안을 보며 시녀와 근위병들이 고개를 숙였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폐하께서는?”

    “프란체 대공 전하와 독대 중이십니다.”

    시안이 늦게 소식을 접하고 어전에 온 시간을 감안하면 한 시간이 넘도록 독대 중이란 얘기다. 생각보다 대화가 길어지고 있는 셈이다.

    “모처럼 대공께서 오셨으니 인사라도 올려야겠구나. 아뢰어라.”

    “하오나…….”

    시안이 빤히 쳐다보자 근위병이 알겠다는 듯 끄덕이며 고할 때였다.

    때마침 굳게 닫혀 있던 어전의 문이 열렸다. 외알 안경에 외투를 걸쳐 입은 프란체 대공이 독대를 마치고 나온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자 전하. 못 보신 사이에 더 늠름해지셨습니다.”

    “……대공께서도 여전하십니다.”

    형식적인 안부를 묻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서로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눈을 떼지 않았지만 어느 쪽도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소리 없는 부딪침을 먼저 그만둔 쪽은 프란체 대공이었다.

    “성숙해지셨군요.”

    “과찬이십니다. 폐하와 독대를 하셨다고요? 저도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진작 그럴 거 그랬습니다. 폐하께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지금 제 기분이 매우 불쾌하거든요. 전하께서는 좀 다르시겠죠?”

    “…….”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안은 굉장한 모욕을 느꼈다. 일개 귀족 주제에 감히 황제를 능멸하는 것도 모자라 황태자인 시안마저도 깔보고 있었다. 시안이 입을 다물고 대답이 없자 프란체 대공의 만면에 주름이 진해졌다.

    “폐하께 전해주십시오. 오늘 일은 잊지 않겠다고.”

    시안이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프란체 대공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웬만한 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저런 경고까지 할 정도면 리처드 황제가 단호하게 얘기를 잘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서둘러 안으로 들자, 황좌에 앉아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최근 부쩍 악화된 건강 때문인지 기침하는 그의 몰골은 수척해 보였다.

    “콜록콜록, 왔느냐?”

    “네, 폐하.”

    “대공과 마주쳤고?”

    시안이 끄덕이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저리도 감정적인 대공은 처음 봅니다. 오늘 일을 잊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아비 노릇을 조금 했을 뿐이다.”

    시안은 빤히 리처드 황제를 바라보았다. 생전 입 밖에 내지 않던 아비란 말이 시안의 가슴을 짠하게 울렸다.

    “내게 그러더구나. 황명을 내려 살롱을 폐쇄하라고.”

    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롱을 폐쇄하라니. 직접 황제에게 요구했다는 건 프란체 대공이 노골적으로 살롱을 노리고 있단 말과 다름없었다.

    리처드 황제가 지친 기색이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거절했다.”

    “아버지.”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그곳만은 지켜야 한다고. 네가 만들고자 하는 새 제국의 시작점이 될 곳이라고.”

    시안에게 있어 살롱은 나침반이었다. 방향을 제시하고 나아갈 곳을 일러주는 상징이었다.

    ‘작은 제국.’

    시안은 살롱을 보며 미래의 제국을 그렸다. 창과 칼이 아닌, 문화를 앞세워 제국민이 계몽되고 인식이 변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시안이 추구하는 새로운 제국의 축소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었다. 그곳을 프란체 대공의 마수로부터 리처드 황제가 지켜주었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기에 시안은 고마우면서도 걱정됐다.

    “대공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겠지. 성에 안 차면 황제마저 갈아 치우는 인간이 아니더냐?”

    제게 닥칠 후환이건만 리처드 황제는 남 얘기하듯 덤덤했다.

    “아들아. 넌 이 일에 나서지 말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아니, 그래야만 한다. 네가 황궁근위대를 개혁하는 데 성공해야, 내가 프란체 대공의 이목을 끈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

    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 아들을 보는 리처드 황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병약해 보이지만 강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원치도 않았던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네게 막중한 부담과 책임을 주었지.”

    “한 번도 제 자리가 부담이라 생각한 적 없습니다.”

    시안이 단호하고 확고하게 대답했다. 황태자라는 지위를 인지한 이후로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한 의무를 쥐여 준 리처드 황제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높은 어전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리처드 황제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국의 건국사가 담긴 벽화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했다. 의문조차 품지 않고 당연하게 황태자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간 아들이 딱해서, 황제답지 않은 스스로의 무력함이 한심스러워서.

    “부끄러웠다.”

    “…….”

    “너는 그토록 애쓰는데, 아비인 나는 눈치만 보며 저들에게 휘둘렸으니까.”

    황제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헛되이 보낸 시간을 후회했다. 비록 그는 늦었지만, 시안은 늦지 않았기에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화살받이는 나로 족하다.”

    “아버지.”

    “너는 외면해라. 보고도 못 본 체하라. 그리하여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 것 같구나. 콜록 콜록.”

    시안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이토록 강경하게 얘기를 한 적이 없던 아버지였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시안은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것이 아버지의 희생에 대한 유일한 보답의 길이라 믿었다.

    “L이라고 했더냐?”

    기침이 잠잠해지자 리처드 황제가 화제를 돌렸다. 시안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 아이를 한 번쯤 보고 싶구나.”

    “아버지.”

    “웬만해서는 웃지 않는 너다. 그런 네가 그 아이에 대해 얘기할 때면 웃고 있으니 아비로서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

    “부담 주는 건 아니다. 지금 그 아이가 황궁에 온다면 표적이 되겠지. 난 그걸 원치 않는다. 그저 훗날의 작은 바람일 뿐이니라.”

    리처드 황제 역시 그러한 현실을 잘 알기에 여지만 남겨두었다.

    ‘네가 그 아이를 놓칠까 염려되는구나.’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가 삼켰다. 황제를 떠나서 아비로서, 시안이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 또한 욕심이겠지.’

    황좌의 무게란 그런 것이다. 희생을 요구하고, 포기를 강요받는 자리라는 걸 언젠가 시안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때가 오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은 어렵지만…… 훗날, 꼭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안은 그런 리처드 황제의 청을 외면하지 못하고 나중을 기약했다. 지금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었다.

    “그거면 됐구나.”

    * *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엘레나와 살롱의 상황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말일 것이다. 대공가가 암암리에 추진해 오던 거장들의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공가의 어둠을 자처하며 정보 공작과 암살을 자행하던 밤까마귀는 모든 행적이 드러났음을 시인이라도 하듯 조직을 해체했다.

    엘레나가 거장들을 무사히 지켜냄으로써 노블레스 거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살롱은 격차를 벌리며 앞서가는 입장이 됐다. 이류의 작품은 일류가 있는 한 영원히 주목받지 못하는 법. 거장들이 엘레나의 살롱에 소속된 이상 노블레스 거리는 경쟁이 될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격차에 만족하지 않고 별관의 개장과 동시에 장방형 거대 건축물 바실리카가 조만간 선보인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아직까지 위장막이 씌워져 있어 외형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황궁에 버금갈 만큼 웅장한 위용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대 심리를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엘레나는 베로니카가 주관한 피아노 독주회를 망쳤다는 사실을 사교계에 흘렸다. 그러며 같은 날 있었던 살롱의 패션쇼의 대대적인 성공을 알리며 비교되게끔 여론을 몰아갔다.

    그 일의 파급력은 컸다. 예전 같으면 사교계에 영향력이 지대한 베로니카나 아벨라에게 줄을 대고자 발악하던 영애들이 잠잠해졌다. 가문을 위해 희생하고자 파벌에 들어가길 원하는 소수의 영애를 제외하고는 굳이 잘나가는 영애에게 줄을 댈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에 살롱이 있었다. 살롱은 일 년 365일 중 하루도 문을 닫지 않는다. 문턱을 넘으면 신분을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거기다 엘레나는 바실리카를 체계화되고 전문화된 쇼핑 공간으로 만들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혁명적 디자이너라 일컫는 크리스티나의 부티크가 대표적이다. 지금껏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광범위한 평수로 바실리카의 일 층에 문을 열게 될 부티크는 그녀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도제들의 작품까지 함께 진열되며 하나의 브랜드로 발돋움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하루 노블레스 거리 조기 개장일이 다가올수록 엘레나는 설렜다. 모든 준비가 완벽하리만치 철저하게 갖춰갔으니까. 그러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노블레스 거리의 조기 개장일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대공가가 조용한 게 자꾸 신경이 걸렸다. 그러한 마음을 아는지 대공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렌에게서 기별이 왔다.

    밤까마귀 생존자들이 수도를 이탈했으며 어떠한 움직임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소식이었다. 그제야 엘레나도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었다. 전적으로 렌이 주는 정보를 신뢰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엘레나가 복수의 그날이 점차 현실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베로니카는 온종일 짜증을 달고 살았다. 별것도 아닌 일을 트집 잡아서 시녀들을 장롱에 가두거나, 잔혹한 방식으로 학대했다. 사교계 모임에 나가 한껏 주목을 받고 와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그녀를 우러러보면서 죽는시늉까지 할 만큼 매달리던 영애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녀를 보며 숙덕거리는 영애들을 보면 부아가 치밀어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의 시달림에 살이 쪽 빠진 아셀라스가 힘겹게 말했다.

    “내일모레, 살롱을 불태우겠습니다.”

    “또 실패한다면 그 자리 보존하기 어려울 거예요.”

    베로니카가 으름장을 놓았다. 노블레스 거리 조기 개장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롱에 타격을 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야심 차게 추진해 온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 실패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것이다.

    “걱정 마시길. 이중으로 공을 들였습니다.”

    “들어보죠.”

    “살롱의 안과 밖, 양쪽에서 불을 놓을 생각입니다.”

    아셀라스는 철저하게 살롱에 대해서 조사했다. 석재와 대리석이 주를 이룬 만큼 목조가 적어 불이 번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셀라스는 성공을 자신했다. 외부에서는 불길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겠지만 내부는 다르다. 장식과 치장을 위해서라도 목재가 많이 쓰이는 만큼 불길을 키우기 용이하다.

    “살롱의 출입이 자유로운 자를 포섭해 뒀습니다. 그자가 내부에서 불을 지르고, 밖에서도 불을 놓아 단숨에 살롱을 집어삼킬 겁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아셀라스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조사한 바로 L과 그 측근들은 살롱의 최상층에서 생활한다고 합니다. 거기가 좀 높습니까? 제가 장담하죠. 불이 일 층에서 일어나면 못 내려옵니다. 창문으로 추락하든가, 연기에 질식사할 겁니다.”

    “흥미롭네요. 추락사도 나쁘지 않겠어. 떨어져서 병신이 되고 난 뒤, 살롱이 망해가는 걸 봐야 더 절망적이지 않겠어?”

    “그, 그렇고말고요.”

    한술 더 뜨는 베로니카의 얘기에 아셀라스가 얼떨떨하게 동조했다. 항상 느끼지만 베로니카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베로니카는 실수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남기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곧장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오르더니 안가를 찾았다. 독에 중독되어 몸을 추스르던 이곳을 다시 찾은 베로니카는 지하로 내려갔다. 음침하고 스산한 기운이 맴도는 지하 감옥의 한편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고급 식탁에 촛불, 노릇노릇하게 익은 스테이크와 와인이 놓여 있었다.

    “분위기 좋네. 시작해.”

    베로니카가 의자에 앉아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 때였다. 베로니카가 앉아 있는 곳 건너편 창살 안으로 남자가 걸어 들어가더니 감금되어 있던 죄수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악! 으아악!”

    “사, 살려줘…….”

    고통에 찬 비명에 맞춰서 베로니카가 스테이크를 씹어 삼키더니, 와인을 들어 음미하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더없이 훌륭한 만찬이야.”

    베로니카의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 *

    “살롱을 전소시키기로 했다고?”

    “네, 대공 전하. 내부의 측근을 포섭하여 안팎으로 불을 키울 계획입니다.”

    아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 빠짐없이 프란체 대공에게 보고했다. 대외적으로는 아셀라스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지만, 프란체 대공은 언제부턴가 그를 가까이 두고 수족처럼 부렸다.

    “실패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입니다만…… 밤까마귀 일로 보건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함이 좋을 듯싶습니다.”

    아틸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했다. 솔직히 말해 살롱의 전소 계획은 딱히 흠잡을 게 없었다. 아셀라스가 기회주의자적인 측면이 강하긴 하나, 계략이 허술하다면 절대 리아브릭의 후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L이 걸려.’

    그에게 있어서 리아브릭은 하늘과 다름없었다. 한낱 고아에 불과했던 그의 총명함을 개발해 모사로 키운 게 그녀였다. 그랬던 리아브릭이 L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밤까마귀 일도 그렇고 L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그 대비라는 거, 생각해 뒀겠지?”

    “물론입니다. 해체한 밤까마귀의 대원들을 변방으로 보낸 것도 저들의 시선을 돌려 방심을 끌어내기 위함입니다.”

    밤까마귀는 이미 존재가 드러나고 말았다. 어차피 버릴 거면 그마저도 유용하게 이용하는 편이 옳았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 한 가지 수를 더 내놓을까 합니다.”

    집무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프란체 대공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한 눈길이었다.

    “근처 건물 옥상에 궁수를 배치해 놓을 계획입니다.”

    “궁수라.”

    “최악의 경우, 불길을 뚫고 나온 L을 저격할 겁니다.”

    리아브릭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계략의 실패란, 새로운 계략의 시작이라고. 이중으로 계략을 짜느냐, 삼중으로 계략을 짜느냐에서 그 모사의 역량이 결정 난다고. 자신의 뒤를 잇고 싶다면 삼중은 짜야 할 거라고 말이다.

    프란체 대공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의 의중을 모르는 아틸이 긴장했다.

    “이제야 제구실을 하는군.”

    “가, 감사합니다.”

    “슈타인을 붙여주지.”

    아틸이 눈을 부릅떴다.

    “슈, 슈타인 경을 말씀입니까?”

    “그래. 실수 없게 처리해.”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아틸이 가볍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L도 명을 다했군.’

    슈타인이 누구던가? 초원 부족 출신으로 프란체 대공을 곁에서 모시는 직속 호위 기사다. 누구보다 충성심이 뛰어난 그는 마술과 궁술에 능했다. 바람이 센 초원에서 백 보 넘는 곳에 세워져 있는 깃대를 활로 맞혀 쓰러뜨린 일화는 아직도 회자될 정도다.

    턱을 괸 프란체 대공의 깊은 눈은 아틸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L의 죽음은 좋은 본보기가 될 거야.”

    “…….”

    “주제도 모르고 망아지처럼 구는 우리 폐하께 말이지. 아,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어대는 개 한 마리한테도.”

    프란체 대공의 눈길에 야수의 광기가 넘실거렸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틸은 숨이 턱 막혔다.

    ‘황제뿐이 아니야. 황태자에게도 선을 긋고 있어. 넘지 말라고.’

    L에게 작위를 내린 당사자가 황태자 시안이라는 걸 수도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L과 시안이 매우 친밀한 사이이며, L이 차기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마저 맴돌았다.

    프란체 대공은 L을 주목했다. 사사건건 대공가의 일을 방해한 것도 한몫했지만 황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L을 죽임으로써 황제 리처드와 시안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줄 요량이다. 너희의 주인은 나라고, 항상 그걸 잊지 말라고.

    “실수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아틸은 머리를 푹 숙이며 굴종을 보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마저 갈아 치우고도 남을 남자. 누가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 * *

    “다들 수고하셨어요.”

    엘레나는 가면을 벗으며 응접실에 모인 측근들을 격려했다.

    “저희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다 은인께서 하신 일이지요.”

    “너야말로 진짜 고생 많았어. 독서 토론회만으로도 녹초일 텐데 시 낭송까지 주관하니 지치겠다.”

    에밀리오와 칼리프가 손사래를 치며 도리어 엘레나를 치켜세웠다. 자신들이 한 일은 그저 살롱의 행사를 거들거나 돕는 일에 그쳤지만 엘레나는 주관자의 입장이 되어 파악하고 이끌었다. 아무래도 책임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는 고단함을 뒤로하고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이 도와주신 덕이죠. 메이도 고생 많았어. 네가 옆에서 챙겨준 덕에 실수하지 않을 수 있었어.”

    메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 묵묵함처럼 항상 엘레나의 곁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사소한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체크해 준 덕에 엘레나가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 무사히 넘겼네요. 푹 쉬도록 해요. 내일 오전에 바실리카 시찰하고, 오후에 오페라 공연 준비하려면 정신없을 거예요.”

    “하,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쉬는 날도 안 주고. 너 악덕 아니냐?”

    “쉬고 싶으세요? 아예 푹 쉬게 해드릴까요?”

    엘레나가 싱긋 웃으며 묻자 칼리프가 주춤거리며 발을 뺐다.

    “얘는 웃는 얼굴로 말을 살벌하게 하더라.”

    “제가 뭘요? 쉬고 싶어 하시길래, 쉬라고 말씀드린 건데 뭐가 잘못됐나요?”

    “말을 말자, 말을.”

    이런 식의 말싸움에 손해를 보는 건 늘 칼리프였기에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은인께서도 건강에 신경 쓰십시오. 더없이 중요한 때입니다.”

    “그러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의욕은 앞서고 할 일은 많고…….”

    고단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엘레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살롱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살롱의 심장은 엘레나다.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 살롱의 위상이 달라진다. 그러니 엘레나는 도저히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더, 더. 욕심은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제는 어엿한 살롱의 주인 L로서 살아가게 만들었고 살아 있다고 느끼게끔 했다.

    “그럴 때일수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몸이란 무리를 하다 보면 꼭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에밀리오 님 말씀 새겨들을게요.”

    엘레나는 진심 어린 그의 조언을 아로새기며 휴렐바드를 돌아봤다.

    “경도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휴렐바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곤 엘레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지켜본 게 다다. 휴렐바드의 눈에는 저 제비꽃처럼 작은 몸뚱이로 제국의 문화를 이끄는 엘레나가 대단하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엘레나가 미소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지으며 자리를 파했다.

    “얘기가 길어졌네요. 진짜 가서 쉬도록 해요.”

    엘레나는 살롱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메이의 도움을 받아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 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이마에 손을 얹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겨우…… 나답게 사는 것 같아.”

    피로에 지친 엘레나의 눈길이 아련해졌다. 베로니카의 대역이 아니라, 온전히 제 삶을 사는 것 같아 뿌듯하고 기뻤다.

    “지킬 거야, 내 삶을.”

    그러려면 대공가를 몰락시켜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엘레나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피곤했던 까닭인지 생각이 깊게 이어지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그 시각. 살롱의 메인 홀을 비추던 샹들리에의 불이 꺼졌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의식으로 완전한 폐장을 의미했다.

    창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폐장과 동시에 철저하게 외부의 출입이 통제되다 보니 내부에 사람이 없었다. 물론 살림과 허드렛일을 도맡은 이들이 남아 있긴 하나,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들마저도 별관 쪽에 마련된 숙소에서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텅 빈 홀에 모습을 드러낸 외간 남자의 존재는 더 낯설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흑.”

    주어가 빠진 사과를 반복하며 작게 흐느끼는 남자의 이름은 숀. 그는 살롱 개장 초기부터 살롱 내부의 청소와 관리를 도맡았다. 하루에도 수십에서 백 명이 넘는 손님들이 왕래하고, 일 년 내내 문을 닫지 않는 살롱의 특성상 금방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숀은 그러한 살롱을 새집처럼 유지하는 일등 공신이었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먼지 한 톨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결벽증 때문이었다. 그러한 병적인 집착이 결국 전화위복이 되어 살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정받고 있었다.

    “제가 이러면 안 되는데…… L이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더더욱 이래선 안 되는데…….”

    뜨거운 사죄의 눈물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과도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금방 쫓겨나기 일쑤였다. 스스로의 강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였다. 그런 오갈 데 없는 그를 받아준 사람이 L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건강이 좋지 않아 수도 외곽에서 요양하고 있는 아내와 딸의 연락이 끊긴 건 보름 전이다. 실종되었단 소식에 눈이 뒤집힌 그에게 정체불명의 남자가 찾아와 협박했다. 아내와 딸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다시 가족을 보고 싶다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허튼수작을 부리거나, 도움을 청하면 그 즉시 아내와 딸을 죽이겠다고.

    숀은 삶의 이유나 다름없는 소중한 가족을 잃을 수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결국 가족의 안위를 위해 L의 살롱에 불을 지르기를 택했다.

    “……죽어서 사죄할게요.”

    자신 역시 분신(焚身)함으로써 L에게 속죄하리라. 숀은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일 층의 응접실을 찾아 들어갔다. 구석진 책장 밑을 보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기름통이 보였다.

    뚜껑을 열어 정체불명의 사내가 언급한 벽장 옆 목조 장식물에 기름을 부었다.

    “용서해 달라는 말도 안 할게요. 아니, 죽어서도 용서하지 마세요, L.”

    숀은 품 안의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지금이야 손톱만큼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숀의 손을 떠난 성냥이 기름에 닿자 불길이 순식간에 커졌다.

    숀이 흐느끼며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정체불명의 사내는 최소 세 군데 이상에 불을 놓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살롱이 대리석과 석재로 지어져 불에 강한 까닭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사람의 탈을 쓰고 해서는 안 될 짓인데.’

    알면서도 숀은 멈추지 못했다. 그럴수록 불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며 살롱을 재물 삼아 활활 타올랐다.

    * * *

    “왜 그러십니까?”

    멜이 마제스티가 취합한 정보를 토대로 분석하는 렌을 보며 물었다. 렌의 표정에서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껴서였다.

    “이상해서. 대공가가 원래 이렇게 만만했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가문입니다.”

    “그지? 내 생각도 그래.”

    보고서를 휙휙 넘겨보는 렌의 눈이 깊어졌다.

    “너무 쉬워. 그래서 이상하단 말이지.”

    “짚이시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거.”

    렌이 보고서를 내밀며 한 대목을 지목했다. 그걸 본 멜이 소리 내어 읽었다.

    “휘트 공작이 주최한 사냥에 프란체 대공의 직속 기사 슈타인이 오지 않았다,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파악해 보겠습니다.”

    멜은 의심의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은 그의 몫이지만, 판단하는 건 렌의 몫이다. 렌의 예리한 촉은 지금껏 빗나간 적이 없었다.

    “밤까마귀의 행적도 묘하게 거슬린단…… 저, 저건?!”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렌의 눈이 멍해졌다.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정신이 나간다는 기분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멜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저쪽은 살롱 방향인데, 혹시 살롱에 불이 난 게 아닙니까? 공자님!”

    렌은 상황을 파악하고 말 것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갔다. 미친놈처럼 살롱을 향해 질주하는 렌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엘레나. 그녀가 무사한지, 위험한 것은 아닌지. 온통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 따위는 없었다.

    * * *

    엘레나는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행복한 꿈도 꿨다. 가족이 케이크 주변에 모여 단란한 생일을 보내는 꿈이다.

    “아가씨!”

    숙면에 들었던 엘레나를 깨운 건 방 밖의 휴렐바드였다. 얼음의 기사라고 불리는 그답지 않게 매우 동요하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경?”

    잠이 깬 엘레나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몽롱한 정신을 몰아낸 건 코를 찌르는 독한 연기였다.

    “아가씨,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던 휴렐바드가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메이의 모습도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에요?”

    “살롱에 화재가 났습니다. 어서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불이 났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엘레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에게 살롱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의 이유이고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다. 불이 나 살롱을 잃을 수도 있단 불안감이 그녀를 야금야금 좀먹었다.

    “어서 나가셔야 합니다, 아가씨. 일 층부터 불길이 번지고 있습니다.”

    휴렐바드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요지부동이었다.

    “아가씨, 위험해요! 연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어요.”

    옆에 있던 메이도 다급하게 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의 침실이 있는 곳은 살롱의 최상층이다. 일 층에서 시작된 불이 번지면서 검은 연기가 위쪽으로 타고 올라왔다. 자칫 잘못하다간 가스 중독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침착해, 엘레나. 이대로 살롱을 잃을 수는 없어.’

    넋을 놓고 있던 엘레나가 자신의 양손을 들어 뺨을 세게 쳤다.

    “아가씨!”

    “잠깐이면 돼. 나한테 시간을 줘.”

    정신이 번쩍 든 엘레나가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뛰어갔다. 창문 밖에 머리를 내밀고 내려다보자 본관 안팎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보였다.

    ‘불길이 일 층에 머물러 있어.’

    살롱의 주재료는 석재와 대리석이다. 불에 약한 목재와 달리 석재와 대리석은 불에 강한 성질을 띠고 있다. 덕분에 불길이 빠르게 번지는 걸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이 있어. 불길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엘레나는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조급하고 당황해 봐야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조치해야 한다. 결심을 굳힌 엘레나가 물을 묻힌 손수건을 입에 대며 단호히 말했다.

    “불을 끄겠어요.”

    “아가씨!”

    “방법이 있어요.”

    엘레나가 힘을 줘 말했다. 그러나 휴렐바드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기사의 본분은 제 주군을 지키는 일이다. 언제 어느 때든,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엘레나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알겠습니다. 하나, 그 전에 우선 살롱을 빠져나가신 다음에…….”

    “그때는 늦어요.”

    엘레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야 불길이 일 층에 국한되어 있지만 곧 있으면 건물 전체로 번질 것이다.

    ‘본관의 불이 별관까지 번질 수 있어.’

    엘레나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살롱이 무너지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파도 앞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만다. 노블레스 거리를 견제하기 어려워지는 만큼 대공가의 복수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살롱에는 살수장치가 있어요.”

    “살수장치요?”

    메이가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화재가 나면 천장에서 물을 뿌릴 수 있도록 설치한 장치야. 밸브를 해제하면 불길을 잡을 수 있어.”

    “……!”

    “그런 게 존재한단 말입니까?”

    엘레나가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불을 끄려는 것은 아니다. 천재 건축가 란돌은 설계 당시부터 살롱의 화재를 대비해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단순히 외형에 치우친 게 아니라, 건축의 기본과 내실까지 다졌다. 밸브를 열어 살롱 내부에 살수한다면 불길이 번지기 전에 잡을 수 있다.

    “야! 쿨럭, 괜찮아? 빨리 나가야 해. 연기가 올라오고 있어!”

    “은인.”

    때마침 칼리프와 에밀리오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뛰어왔다.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화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엘레나가 비장하게 말했다.

    “선배, 살수장치를 열어야 해요.”

    “뭐?”

    “더 늦으면 안 돼요. 당장 밸브를 열어야 불을 잡을 수 있어요!”

    촌각을 다루는 상황인 만큼 엘레나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화마는 살롱을 양식 삼아 불길을 더욱 키워가고 있었다.

    “야, 밸브는 각 층 끝 방에 있다고. 위층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 이 층은 지금 연기가 자욱해! 불길도 커지고 있고 잘못하다간 타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가야 해요.”

    엘레나는 비장하게 말하더니 욕실로 들어가 물을 온몸에 뒤집어썼다.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불길을 죽이고 밸브를 열 시간을 마련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모험을 감행하려는 엘레나의 앞을 휴렐바드가 막아섰다.

    “아가씨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비키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휴렐바드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엘레나를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칼리프 님, 아가씨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 걱정 마요. 제가 무사히 데리고 나갈게요.”

    칼리프가 얼떨떨함을 지우며 비장하게 대답했다. 평소 사내다운 면이 없는 그였지만 저런 부탁을 받고도 가볍게 굴 만큼 책임감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경.”

    엘레나가 나지막이 부르며 휴렐바드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무얼 말하려는지 알기에 휴렐바드가 말을 덧붙였다.

    “세상 어디에도 불 속으로 주군을 보내는 기사는 없습니다. 그거야말로 제게 가장 큰 불명예입니다.”

    “…….”

    “제가 밸브를 열 테니 나가십시오. 칼리프 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아가씨를 밖으로 모셔가세요.”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여기에 남아 고집을 부리는 것 자체가 방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온몸에 물을 뒤집어쓴 휴렐바드가 위치를 확실히 인지한 후 침실을 막 나서려고 했다.

    “경, 꼭 무사해야 해요. 그럴 거라고 맹세하세요.”

    “맹세하겠습니다.”

    그제야 엘레나도 마음이 놓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휴렐바드가 침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리프가 재촉했다.

    “어서 가자.”

    칼리프를 따라나선 복도에는 연기가 가득했다. 시야마저 뿌예져 분간이 쉽지 않았지만 늘 생활을 하던 곳인 만큼 어렵지 않게 복도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아, 여기 있다.”

    벽면을 더듬던 칼리프가 장식되어 있던 그림을 떼어냈다. 그러자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러났는데, 그 안에 손을 집어넣어 스위치를 힘껏 잡아당겼다.

    끼이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던 벽면이 열리며 비상구가 드러났다. 미끄럼틀 형식으로 최단 시간 안에 살롱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 탈출구였다.

    “어서 나가자. 연기가 계속 올라오고 있어, 콜록.”

    칼리프의 재촉에 엘레나, 메이, 에밀리오 순으로 미끄럼틀에 올랐다. 원형 구조인 미끄럼틀은 살롱 본관과 별관 사이에 위치한 배수구로 이어져 있었다.

    무사히 빠져나온 엘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롱을 돌아봤다. 본관 입구 쪽에 솟구쳐 오른 불길이 안팎에서 호응하듯 살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직 이 층이나 지붕까지 불길이 번진 건 아니지만, 이대로 두면 언제고 살롱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아가씨, 이거로 얼굴을 가리세요.”

    메이가 치마를 쭉 찢더니 천 쪼가리를 내밀었다. 경황이 없다 보니 가면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녀의 얼굴이 노출될 우려가 있었다. 엘레나는 급한 대로 천 쪼가리를 이마와 턱 그리고 입에 감았다. 메이도 천을 돌돌 감아 얼굴을 가렸다. 임시방편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경.”

    불타는 살롱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살롱의 미래는 휴렐바드의 어깨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물을 끌어다 부으며 불길을 잡고자 노력 중이지만, 내부의 불길을 잠재우지 않고선 불을 끌 수 없다.

    “꼭 무사해야 해요.”

    엘레나가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살롱을 지켜줘요.”

    그 시각. 휴렐바드는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는 일 층으로 내려갔다. 발화 시발점인 일 층의 불길을 먼저 잡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일 층의 불길은 이 층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거셌다. 불은 온몸을 녹여 버릴 만큼 뜨거웠다. 휴렐바드는 사냥을 나선 맹수처럼 눈을 번뜩이더니 불길이 약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나비처럼 사뿐하지만 경쾌한 몸놀림으로 불길을 가로지르며 홀 우측에 위치한 복도 끝 응접실 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센 불길을 다 피할 순 없었는지 옷이 듬성듬성 타고 열기를 이기지 못한 피부가 화상을 입었다.

    참기 힘든 고통에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지만 휴렐바드는 멈추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복도 끝 밸브가 있는 곳에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 휴렐바드는 복도 끝에 멈춰 서서 작은 함을 열었다.

    “콜록콜록.”

    마시지 않으려고 해도 밀고 들어오는 연기에 휴렐바드가 기침을 토해냈다. 잠깐 있었을 뿐인데, 정신이 혼미하고 어지러웠다. 휴렐바드는 함 속의 밸브를 있는 힘껏 돌렸다. 빡빡하던 밸브가 돌아가자 천장에서 꿀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에 휴렐바드가 고개를 들었다.

    쏴아아아아.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천장에서 믈이 쏟아졌다. 복도를 시작으로 일 층의 응접실, 중앙 홀에 설치된 소화 장치들이 물을 흩뿌리며 불을 죽였다. 여유가 생긴 휴렐바드는 불길을 뚫고 중앙 홀로 나왔다. 이 층의 밸브도 열어 이 층 복도에 옮겨붙은 불씨를 죽이기 위함이다.

    불길을 헤치며 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가던 휴렐바드가 멈칫했다. 홀 구석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 까닭이다.

    “숀?”

    휴렐바드는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동시에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라면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화재의 시작점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을까. 휴렐바드가 숀 쪽으로 몸을 날려 그의 코에 손을 댔다. 미세하지만 숨이 붙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어깨에 둘러멨다. 급한 건 이 불을 잡는 일이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아가씨께서 걱정하실 거야.’

    휴렐바드는 서둘렀다. 엘레나가 이 일로 근심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 * *

    “아가씨, 저기 보세요.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어요!”

    “진짜야. 아까보다 덜해!”

    메이와 칼리프가 점점 사그라드는 불길을 보며 기뻐했다. 엘레나가 보기에도 거셌던 내부의 불꽃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게 보였다.

    ‘경이 해냈어.’

    엘레나는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살롱 외부의 치장과 전면을 이루는 종탑과 대리석, 청동 조각은 불에 강했다. 그러다 보니 살롱 내부의 불길을 잡는 게 급선무였는데 그걸 해낸 것이다.

    ‘제발, 무사하길.’

    엘레나가 양손을 모으고는 간절히 기도할 때였다. 한 남자가 반대편 건물에서 뚝 떨어졌다. 낯선 등장에 메이와 칼리프가 긴장하며 엘레나의 앞을 지켰다. 휴렐바드가 없는 지금 최악의 경우 두 사람이 엘레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내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급히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토해내는 그의 얼굴을 본 엘레나가 이름을 중얼거렸다.

    “렌?”

    그제야 메이와 칼리프도 경계를 풀었다. 누가 뭐래도 렌은 같은 편이었으니까. 렌이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에 메이와 칼리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너.”

    엎어지면 닿을 듯 가까이에 선 렌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엘레나의 무사한 모습을 보자 걱정과 우려로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탁 풀려 버렸다. 그 안도감을 이기지 못한 렌이 와락 엘레나를 껴안았다.

    “……!”

    엘레나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미처 반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런 포옹이었기에 발버둥을 치거나, 밀어내겠단 생각조차 못 했다. 멍하다 못해 영혼이 빠져나간 듯 넋을 놓은 엘레나에게 렌이 속삭였다.

    “걱정했어.”

    “렌.”

    “지금 내 스스로 감당이 안 되거든? 그러니까 조금만 이대로 있자.”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밀어내야 하는데.’

    머리로는 온갖 상상이 다 드는데, 엘레나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엘레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이 밀려오자 어안이 벙벙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진정되지 않아 터져 버릴 만큼 빠르고, 세게. 이러한 감정은 렌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상해. 도대체 왜…… 아! 이럴 때가 아니잖아. 정신 차려, 엘레나.’

    렌을 밀어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겠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렌이 그녀를 옴짝달싹하지도 못할 만큼 세게 안은 것도 아니었다. 밀어내자고 한다면 얼마든지 밀칠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렌의 무례함에 질색했을 텐데, 그런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미웠던 사람이었는데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좀 떨어질래요?”

    엘레나가 형용하지 못할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좀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

    “렌.”

    “내가 좀 놀랐거든. 잠깐만 이러고 있자. 부탁할게.”

    엘레나의 질책 어린 부름마저 렌은 무시했다. 평소의 짓궂은 농담이나 비꼼도 없었다. 렌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엘레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성과 사고를 마비시켰다. 아주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런 렌에게 엘레나의 온기는 진정제였다.

    “이제 좀 안정이 되네.”

    엘레나에게서 떨어진 렌이 히죽 웃었다.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

    엘레나는 그런 렌을 마주하자 좀 전의 포옹이 떠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색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그런 엘레나를 현실로 되돌린 건 살롱 본관을 집어삼키던 불꽃의 변화였다.

    “봐, 보라고! 불길이 잡히고 있어!”

    칼리프가 잠잠해진 불길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잡힌 불길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엘레나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만, 불길이 더 번지지 못하고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불이 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야.’

    휴렐바드 덕분에 일찍 불길을 잡은 게 주효했다. 정확한 피해는 확인을 해야겠지만 본관이 다 불타거나, 별관까지 불이 번지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

    “어? 어! 아가씨, 저기 휴렐바드 경이에요!”

    “경!”

    메이가 본관과 별관을 잇는 통로를 가리켰다. 통로 중간쯤의 창을 연 휴렐바드가 이쪽을 보며 안심하라는 듯 서 있었다. 그제야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도 잡고 휴렐바드도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메이, L을 데리고 별관으로 가. 에밀리오 님도 같이 가세요.”

    “선배는 어쩌게요?”

    “나야 얼굴 팔릴 대로 팔렸잖아? 남아서 상황 정리해야지.”

    칼리프는 어울리지 않게 듬직한 모습을 보였다. 목숨을 내걸고 살롱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달려들던 휴렐바드의 모습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알았어요.”

    엘레나도 순순히 따랐다. 이미 살롱 주변은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끄고자 몰려든 사람들과 불구경을 하는 방관자들로 북적였다. 아직도 대공가는 엘레나의 추적을 포기하지 않은 만큼 자칫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렌을 쳐다봤다. 아까의 여운이 남아 묘하게 어색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가.”

    렌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휙휙 저었다.

    “같이 안 가요?”

    “무사한 거 봤으니 됐어.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이 일을 파헤쳐야 하지 않겠어?”

    “방화라고 생각하고 있군요.”

    “너도 마찬가지 아냐?”

    엘레나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마땅한 단서나 정황은 없지만 방화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했다. 굳이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렌하고는 말이 잘 통했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점이 묘하게 비슷하다고나 할까.

    “가. 가는 거 보고 갈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오늘 엘레나가 본 렌의 얼굴은 진짜였다. 진심으로 엘레나가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런 마음이 고마워서 렌을 보는 엘레나의 시선이 애틋해졌다. 한결 부드러워진 렌의 미소를 눈에 담으며 엘레나가 돌아섰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선 렌은 멀어지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말없이 지켜보는 것으로 그녀를 배웅할 때였다. 일순 오싹오싹한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렌을 자극했다.

    렌은 체계적인 훈련을 토대로 단련된 검술을 구사하는 기사가 아니다. 본능, 야성. 감각. 오히려 사자나 늑대 같은 맹수에 가까웠다. 구사하는 검술만 하더라도 상대를 물어뜯어 죽이는 맹수의 사냥법과 흡사했다. 후천적인 훈련을 통한 발달보다 맹수처럼 선천적인 본능과 야성, 감각으로 적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렌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금만 하더라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싸한 느낌이 드는 게 등골이 서늘했다.

    ‘살기!’

    렌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불분명하고 꺼림칙한 기운의 정체를 알아챘다.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며 불길한 살기의 근원지를 찾으려 애썼다. 몰려든 사람들, 이 층 건물 안, 옥상, 길거리, 골목…… 눈에 보이는 곳은 빠짐없이 훑어봤다.

    ‘없어?’

    렌의 눈이 다급함으로 물들었다.

    살기는 노골적이라고 할 만큼 위험했다. 그의 오감이 연신 위험하다는 경고를 보내왔다. 포기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던 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 백 보 이상은 떨어진 건너편 시계탑.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팽팽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슈타인!’

    어슴푸레 체형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렌은 한눈에 그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 백 보가 넘는 먼 거리에서, 달빛이 전부인 이 칠흑 속에서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는 경이로운 궁술을 지닌 자는 제국에 단 한 명, 기사 슈타인뿐이다.

    ‘저자가 왜 여기에…….’

    한시도 프란체 대공의 곁을 떠나지 않는 슈타인이 오늘 휘트 공작가가 주최한 사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에 나타났다. 그 이유를 알아채는 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엘레나!”

    렌이 황급하게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슈타인의 살기 가득한 화살촉은 엘레나를 겨누고 있었고 그걸 본 렌이 몸을 반사적으로 튕겼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렌의 부름에 엘레나가 인상을 쓰며 돌아봤다.

    “아무 때나 부르라고 알려준 이름이 아니잖아요.”

    엘레나는 눈을 흘기며 지적했다. 이름을 허락하긴 했으나 그건 단둘이 있을 때만 부르라고 허락해 준 이름이다. 그러나 촌각을 다투는 렌에게 그런 걸 따질 경황이 없었다.

    “피해!”

    엘레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눈을 깜빡거렸다. 핑! 슈타인이 시위를 놓았다. 달빛을 머금은 화살촉이 은은한 궤적을 뿌리며 번개처럼 날아갔다. 

    공기를 찢으며 화살이 엘레나의 심장을 노렸다.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던 엘레나는 달빛을 머금고 번쩍이는 화살을 보았다. 피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늦었단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 때였다.

    엘레나의 앞에 불쑥 렌이 날아들었다. 그는 부유하다시피 몸을 날려 엘레나를 온몸으로 감쌌다. 정확히 엘레나의 심장에 꽂혀야 할 화살촉이 렌의 등에 꽂혔다.

    “윽!”

    렌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엘레나를 껴안은 채로 지면을 굴렀다.

    “렌!”

    몸을 일으킨 엘레나가 렌의 등에 꽂혀 있는 화살을 보며 경악했다.

    “일어나지 마!”

    렌이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엘레나를 꽉 안았다.

    귓전에 울린 파공음이 채 가시기도 전 또 하나의 화살이 렌의 등에 꽂혔다. 엘레나의 심장을 꿰뚫지 못한 게 아쉬운 듯 화살이 부르르 떨렸다. 렌의 등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해졌다.

    “아가씨!”

    “은인!”

    메이와 에밀리오가 그런 엘레나와 렌의 주변을 에워쌌다. 지금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목숨을 걸고 엘레나를 지키는 게 고작이었다. 쓰러진 렌을 부여잡은 엘레나가 울먹거리며 소리쳤다.

    “렌, 정신 차려요! 죽은 거 아니죠? 렌!”

    “…….”

    “누가 구해달랬어요! 정신 차려! 죽으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렌은 그녀를 위해 몸을 던져 희생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렌을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혀와 도망쳐야 한단 사실조차 잊었다.

    “하아…… 하아.”

    렌이 거친 숨을 토해낼 때마다 상처 부위의 출혈이 심해졌다. 시체처럼 낯이 하얗게 질려감에도 시선은 시계탑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또 올 거야.’

    렌은 긴장했다. 엘레나를 작정하고 죽이기로 한 이상 여기서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통증에 몸부림치면서도 엘레나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일으킬 때였다.

    슈타인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너무 먼 거리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은 슈타인이 허겁지겁 받아치는 게 보였다. 렌은 그제야 긴장을 탁 놓았다. 그자가 개입했다면 더 이상의 암습은 없을 테니.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

    렌이 고개를 돌려 히죽 웃었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럼 우냐? 쪽팔리게.”

    렌은 지금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차가운 쇠붙이가 가져다준 통증도, 아득해지는 죽음의 공포마저도 아무렇지 않았다.

    엘레나의 품에 안겨 있어서 좋았고. 엘레나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서 좋았고, 그냥 좋았다.

    아쉬운 건 하나, 미쳐 버릴 만큼 좋은 이 순간을 오래도록 누릴 만큼 몸과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엘레나.”

    “말하지 마요! 출혈이 심해지잖아요.”

    “나 죽어도…….”

    엘레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죽다니.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은 인간이 죽는다는 말을 하니 렌의 죽음이 더 피부로 와닿았다.

    “잘 살아라. 지금처럼, 멋있게.”

    나 좀 멋있으려나? 그 와중에도 렌은 엘레나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뭐, 그래도 지켜줬으니까. 그거면 됐지.’

    렌은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더는 잡지 못하고 놓고 말았다.

    * * *

    시안이 시계탑에서 활을 겨누고 있는 슈타인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운이었다. 황궁을 나와 린든 백작, 자칼린과 접선해 황궁근위대 개혁을 논의하던 시안은 살롱에 치솟는 불길을 발견하고는 정신없이 달려왔다. 매사에 차분하고 이성적인 시안이었지만, 엘레나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감정적이었다.

    ‘제발, 무사해야 한다.’

    시안이 살롱 인근에 도착했을 무렵, 무사히 살롱을 빠져나온 엘레나를 볼 수 있었다.

    “무사했구나.”

    그제야 시안은 숨을 돌렸다. 엘레나가 다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시안이 찬찬히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엘레나의 얼굴을 보고 괜찮은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복면을 쓰고 있다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자신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해 그녀에게 피해를 줄까 봐 염려되어 나서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배려라고 여기며 돌아서려는데.

    “살기?”

    시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살기에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멀리 시계탑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힘껏 활시위를 당긴 그의 화살촉이 살롱에서 막 탈출한 엘레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자가!”

    시안이 검을 뽑아 들고 화살의 궤적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시위에 얹혀져 있던 화살보다 빠를 순 없었다. 사냥감을 노리고 하강하는 매의 날갯짓보다 빠르게 화살이 쏘아졌다.

    사색이 된 시안의 반응보다 화살이 더 빨랐다. 시안은 머릿속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엘레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스스로에 대한 무력함.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과 끝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아득함에 숨이 턱 막혀왔다.

    목표에 적중한 화살 소리가 밤의 적막을 흔들었다. 절망하던 시안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렌이 가까스로 몸을 날려 엘레나를 대신해 화살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시안이 고개를 돌려 시계탑 위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슈타인.”

    경이로움에 가까운 궁술을 지닌 대공가의 기사. 그가 활에 다음 시위를 얹는 게 보였다.

    시안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기민한 동작이었지만 슈타인의 손에 얹혀 있던 두 번째 활시위를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눈으로 좇기 버거울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간 화살이 다시금 렌의 등에 박혔다. 렌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엘레나의 심장을 관통했을 것이다.

    “감히.”

    이성의 끈이 끊어질 듯 분노한 시안이 움직였다. 황족의 일원이자, 제국의 황태자로서 늘 감정을 죽이고 이성을 중시하던 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시안이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그는 검 손잡이를 고쳐 잡고는 창을 던지듯 시계탑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시안의 손을 떠난 검이 화살보다 더 강맹하고 매섭게 날아갔다.

    세 번째 화살의 시위를 당겨 엘레나를 겨냥하던 슈타인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하나, 둘, 셋을 세기 직전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초원 부족 출신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한 그는 본능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가까스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검은 그의 예상보다 더 빨리 몸에 닿았다.

    “큭!”

    슈타인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려서부터 극한으로 내몰리며 웬만한 고통엔 꿈쩍도 하지 않는 그였지만 겨드랑이와 어깨 사이에 꽂힌 검상은 생각보다 치명적이었다. 특히 팔과 상체를 이어주는 뼈와 근육을 찢어놓으며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활을 쏘지 못하게 만든 시안이 시계탑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슈타인은 지혈하며 굶주린 짐승처럼 거리를 좁혀오는 시안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저 거리에서 자신을 노렸다고? 슈타인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화살도 아닌 검을 던져 정확하게 자신을 노린 것만 보아도 저자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해야 해.’

    슈타인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엘레나의 저격이었다. 아쉽지만 임무는 실패했다. 실패한 임무에 얽매이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그러나 도주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 꽂힌 검날이 움직였다. 참기 힘든 통증보다도 날카로운 검날이 상처 부위를 넓혀 폐나 심장에 직격타를 줬다.

    슈타인은 결단을 내렸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더니 자신의 왼팔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툭. 몸에서 분리된 팔이 시계탑 바닥에 떨어져 움찔거렸다.

    “으윽.”

    지혈과 동시에 옷을 찢어 절단면을 감싼 슈타인은 시계탑 옆 건물로 뛰어내렸다. 무서운 속도로 접근해 오는 시안을 따돌리고 도망치려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서라.”

    부상으로 몸이 둔해진 것인지 슈타인은 금세 따라잡혔다.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시안이 시계탑의 창을 통해 빠져나오는 걸 보고 지척까지 따라잡았다. 결국 건물의 지붕 위에서 두 사람이 달빛 아래 마주했다.

    ‘나도 여기까지군.’

    슈타인은 냉철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돌아봤다. 지혈했다지만 격하게 몸을 움직이다 보니 출혈량이 생각보다 많았다. 벌써 현기증이 밀려와 어지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맞서봐야 눈앞의 복면인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런 죽음 예상하지 못했는데. 허망해.”

    “아니, 그대는 살 것이다.”

    “…….”

    “살아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시안이 목소리를 깔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사적인 이유로 이토록 살의가 치민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러나 암살자의 정체가 대공가의 기사인 슈타인인 걸 알아챈 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살의를 억눌렀다.

    ‘귀족 시해 죄는 중죄. 대공이라 하더라도 피해갈 수 없다.’

    슈타인을 생포하면 대공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가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지 않겠지만 고문을 해서라도 입을 열게 하면 그만이다.

    “할 수 있다면.”

    슈타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더니 뒷걸음질 쳤다. 지붕 끝에 다다르자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도망칠 곳은 없다.”

    “넌 날 잡지 못해.”

    슈타인이 히죽 웃더니 뒤로 누워버리듯이 지붕 아래로 몸을 맡겼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과 다리를 대자로 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쿵! 시안이 뒤늦게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붕에서 추락한 슈타인은 뒷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예상하지 못한 슈타인의 선택에 시안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자살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어야 한단 후회가 밀려왔다. 슈타인을 생포했다면 모를까, 죽어버린 뒤라면 대공가를 압박하기 쉽지 않았다. 단서나, 정황만으로 몰아붙이기에 프란체 대공은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 * *

    “정신 놓지 말라고요!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했잖아!”

    렌을 부둥켜안은 엘레나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미세하게나마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은인, 일단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아가씨, 렌 공자님은 저희가 모실 테니 어서 별관으로…….”

    지금이야 잠잠하다지만 언제 또 화살이 날아와 엘레나를 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렌의 목숨도 중요했지만 메이와 에밀리오는 엘레나가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렌이 먼저예요!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요!”

    엘레나는 절박했다. 딴 사람도 아니고 엘레나를 지키기 위해 렌이 희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맥박이 약해지고 출혈량이 늘어나는 걸 보면 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공자님은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엘레나가 긴장하며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도 없이 드러난 사내를 보며 메이와 에밀리오가 경계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시면 위험합니다.”

    차분한 듯 보이나 입안이 바싹 말라가는 사내의 정체는 멜이었다. 바람처럼 뛰쳐나간 렌을 쫓아왔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렌의 등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엘레나가 렌을 한 번 슥 보고는 멜을 쳐다봤다. 멜은 말없이 마제스티의 소속임을 상징하는 팔뚝의 문신을 보였다.

    “아뇨, 허락할 수 없어요.”

    “L!”

    생각지도 못한 거절에 멜이 인상을 팍 썼다. 시간을 허비하는 엘레나에게 분기가 치밀었다.

    “당신이나, 나나 같은 생각이겠죠. 렌을 살려야 한다고.”

    “그러니까 데려가겠다고…….”

    “제게 맡겨주세요. 최고의 의사에게 치료를 맡길 수 있어요.”

    멜은 최고의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엘레나의 말에 멈칫했다. 서둘러 렌을 살려야 한단 생각뿐이었지, 어느 의사에게 데려갈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엘레나는 침착하게 누구에게 치료를 맡겨야 할지까지 생각이 뻗어 있었다.

    “렌은 저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저요, 렌 죽는 꼴 죽어도 못 봐요.”

    “…….”

    “그러니까, 별관에서 치료받게 해주세요. 어서요.”

    되레 엘레나의 말투가 간절해졌다. 이러는 와중에도 렌은 죽어가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갈등하던 멜이 끄덕였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지금 바로 렌을 별관으로 옮겨주세요.”

    “네.”

    “그리고 메이, 당장 가서 네빌 씨 모셔와. 어서!”

    메이가 알겠다며 서둘러 달려갔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천재 외과의사 네빌은 오늘 있었던 토론회에 참석해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또한 엘레나가 후원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네빌 씨라면 렌을 살릴 수 있어. 살릴 수 있다고.’

    멜이 렌을 별관으로 옮기는 와중에도 엘레나의 시선은 한시도 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안색의 렌을 볼 때면 억장이 무너졌다.

    “약속할게요.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그러니 좀만 버텨줘요.”

    엘레나는 애타는 마음을 담아 가이아 여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렌이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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