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9/30)
  • 제22장 있어야 할 곳

    수도가 들썩였다. 문화의 중심지로 추앙받는 살롱 별관의 완공 기념식이 코앞으로 다가와서다.

    “너 살롱에서 초대장 받았어?”

    “아니, 못 받았어. 꼭 가고 싶었는데…….”

    “바이올렌 영애는 받았다더라.”

    “진짜? 대체 초대장을 받는 기준이 뭐래?”

    귀족 영애와 영식들은 초대장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특히 초대를 받지 못한 영애들은 애가 타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별관 완공 기념식은 귀족들이 주관하는 일반적인 연회와 성격이 많이 달랐다.

    엘레나는 살롱이 문화 중심지로 거듭나고 사교계에 영향력을 늘려가기를 바랐다. 가면을 써 이름과 신분을 숨기는 방식은 고수하되 문화와 예술을 소비하는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안배였다.

    엘레나는 살롱의 별관 기념식에 칼리프가 관리하던 거장들을 초대했다. 미술, 음악, 조각, 과학, 시, 의상 등 분야는 다 달랐지만 수도의 예술과 패션, 문학을 주도하는 시대적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역사적인 장으로 만들고자 함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별관 내에 거장의 작품을 공개하고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이들 대다수는 바실리카에 부티크, 숍, 연구실, 학관 등의 형태로 입점이 예정된 만큼 별관 기념식을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바실리카 개장 뒤 보여줄 문화 예술의 거리의 맛보기랄까.

    그러한 소문을 접해서일까? 초대장을 받지 못한 귀족들은 안달이 나다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기념식에 참가할 수 있는 귀족의 수가 한정적이다 보니 초대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조급한 몇몇 귀족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초대장을 구하려 혈안이 되었다.

    “어떻게 하지? 돈을 더 주고라도 사야 하나?”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아요. 초대장을 무조건 구해오세요!”

    “올해 유행할 드레스랑 구두가 거기 진열된다고요! 훔쳐오든 뺏어오든 초대장을 구해야 해요!”

    사교계를 잘 아는 엘레나는 의도적으로 초대장 대란이 일어나도록 분위기를 조장했다. 특권 의식이 강한 귀족들의 심리를 이용해 안달이 나도록 부추긴 것이다. 효과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그간 살롱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귀족들마저 대체 왜 저리 유난인 건지 의아해하며 살롱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엘레나의 바람대로 별관 완공 기념식이 제국을 강타할 만큼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살롱이라는 작은 세계가 천 년을 이어온 제국의 수도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게 문화 예술의 파급력이다. 그리고 중심에는 살롱의 여주인 L이 있었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기념식에서 시안이 하사한 작위를 받고 대외적으로 귀족으로 인정받는 좋은 그림이 그려졌다.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한 사람.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오기 전까지 말이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엘레나의 치장을 돕는 메이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지금껏 엘레나는 대공가의 눈을 피해 살롱을 왕래하느라 제약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오늘부로 L은 그러한 빗장을 벗어던질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억눌리지 않고 제국 문화를 선도하며 대공가를 압박하고자 했다.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셔.’

    L이 세간의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보면 메이의 가슴이 뛰었다. 가장 가까이서 엘레나가 해온 일들을 지켜봐 왔기에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 그거 아세요?”

    “뭐?”

    “아가씨는 제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이세요.”

    머리를 매만지던 엘레나가 고개를 돌려 메이를 쳐다봤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길 하느냐는 듯한 엘레나의 시선에 괜히 머쓱해진 메이가 딴소리를 했다.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어서 거울 보세요.”

    엘레나도 더는 묻기 애매해 몸을 일으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오늘을 위해 크리스티나가 공들여 만든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비록 가발이지만 올림머리를 했다. 그로 인해 드러난 목선과 드롭 귀걸이가 우아함의 극치를 뽐냈다. 품격은 한 끗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이 있듯이 엘레나의 면면에 기품이 흘러넘쳤다. 절로 우러러보게 하는 고귀함 속에는 경건함마저 묻어났다.

    “이게 정말 나야?”

    “네, 아가씨세요.”

    메이의 확답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륙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보석과 드레스로 치장한 황비 시절에도 논할 수 없었던 격조 높은 아름다움이 지금의 엘레나에게 배어 있었다. 간섭과 의무, 억압에서 벗어나 오롯이 이 제국에 홀로 선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였다. 마지막으로 드레스 코드에 맞춰 특별히 제작한 나비 가면을 착용하는 걸로 엘레나는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궁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라 하세요.”

    엘레나가 흔쾌히 허락하자 황실 예복을 입은 사내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는 격식에 갖춰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실 서기관 덴이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덴.”

    엘레나를 마주한 덴은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처음엔 미모에 눈을 떼지 못했고 그다음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품에 취했다.

    ‘여전하네요, 덴.’

    어수룩한 면이 있지만 충성심이 뛰어난 그는 시안의 심복이다. 이전 삶에서 시안의 말이나 의사를 대신 전달하는 모진 역할을 하느라 힘들어했었다.

    ‘내게 참 미안해했었지.’

    선천적으로 착한 심성을 타고난 덴은 제 잘못도 아니면서, 척을 지고 살아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랬던 덴을, 라파엘과 더불어 유일하게 악의가 없는 그를 다시 봤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뒤늦게 자신의 무례를 깨달은 덴이 얼른 시선을 거두고는 소파에 마주 앉았다.

    “전하께 얘기 들었어요. 아름다우시고, 현명하고, 속이 깊으신 분이라고요.”

    “과분한 말씀이네요. 그저 전하께 폐나 안 끼치면 다행이죠.”

    엘레나는 겸손하게 대꾸하며 본론으로 넘어갔다.

    “오늘 살롱에서 큰 행사가 있는 거 아시죠?”

    “알다마다요. 절차는 약식으로 하되, 수여식은 성대하게 열 예정이라고.”

    “네, 맞아요. 잘 부탁드려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윽한 미소를 짓는 엘레나를 마주하자 덴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뭐랄까,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경건함과 우아함이 그녀를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늘 처음 뵙지만…… 전하께서 왜 가슴앓이를 하시는지 알 것 같아.’

    덴은 자기도 모르게 시안의 옆에 선 엘레나를 그려보았다. 완벽한 한 쌍이 따로 없었다. 감히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시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전하께서 이것도 전해주시라고 하셨습니다.”

    “서신이네요.”

    황실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힌 봉투를 엘레나가 건네받았다. 금실을 풀어 헤치자 편지가 나왔다.

    직접 가보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기에 이렇게나마 기별한다. 그대는 제국에서 가장 빛나고 찬란한 여성이다. 그 빛을 잃지 않도록 언제까지고 도우마.

    무뚝뚝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애정을 읽은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전하다운 서신이네요.”

    “죄송합니다.”

    “네? 덴 님이 왜요?”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덴을 보며 엘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전하께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많이 어설프십니다. 황태자의 막중한 책임과 의무, 위협 속에서 살고 계시다 보니 자신을 억누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

    “감히 말하건대, 서신에 적힌 진심의 수십 배, 아니, 수백 배가 전하의 진심이실 겁니다.”

    “알아요.”

    엘레나가 나지막이 말을 받았다.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덴의 동공이 커졌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이렇게 노력을 하시는데…….”

    “L.”

    “딴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안답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마워요.”

    엘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가까이서 시안을 모시고 있는 덴보다도, 황제와 황후보다도 더 깊이 이해하는 이가 엘레나였다. 그랬기에 이 마음이 더 애잔했다.

    “다 아신다 하셨으니 주제넘게 한 말씀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전하께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꼭 지키고 싶은 게 생겼다고요.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제국을 바꿔야 한다고.”

    엘레나는 저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시안의 각오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단단했다.

    ‘어쩌면 전하께서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생각하지 말자.’

    조각나 있던 지난 삶의 기억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망으로 눈이 먼 황비 시절, 눈이 멀고 귀를 닫은 까닭에 보지 못했던 진실이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덴은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는 물러났다. 뭔가 놓치고 있단 기분이 자꾸 들었지만 곧 기념식이 시작되는 만큼 엘레나도 더는 상념에 젖어 있을 수가 없었다.

    막 응접실을 나서자 복도 저편에서 헐레벌떡 다가오는 칼리프가 보였다. 엘레나를 대신해서 일 층에서 손님을 맞이한 그는 잠깐 사이 몹시 고단해 보였다.

    “준비 다했어?”

    “보다시피요.”

    “아래 분위기 장난 아니야. 초대장을 어디서 구했는지 우리랑 연줄이 없는 귀족 영애랑 영식도 많이 왔어. 놀라지 마, 라인하르트가의 아벨라 영애도 왔대.”

    엘레나가 살짝 놀랐다.

    “아벨라가요?”

    “어, 그렇다니까. 내가 그 정도 눈썰미는 있잖아.”

    “기대했던 이상이네요. 아벨라까지 올 정도면 제국민이 우리 살롱을 주목하고 있단 얘기잖아요?”

    “바로 그거지.”

    엘레나의 바람대로다. 넉넉하게 초대장을 발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희소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특권 의식에 젖어 있는 귀족들은 살롱의 초대를 받았던 사실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 한 귀족들은 초대장을 구해서라도 오고 싶은 오기가 발동할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한 번도 살롱을 방문한 적이 없는 아벨라가 어디선가 초대장을 구해서 왔으니까.

    “그리고 아까 누구더라…… 음, 아니다.”

    뭔가를 이야기하려던 칼리프가 입을 다물었다. 워낙 경황이 없던 중 공개 홀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게 다인지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워낙 민감한 사항인 만큼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얘길 꺼내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뭔 얘기기에 하다 말아요.”

    “별거 아니야. 그보다 어렵게 초대장 구해서 온 사람은 앞으로 쭉 오겠지?”

    “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살롱에 안 오고는 못 배길 거예요. 살롱을 멀리하는 순간 사교계에서 뒤처지게 될 테니까요.”

    엘레나는 종종 초대장을 지참해야 출입이 가능한 행사를 열 예정이다. 초대를 받은 이들에게 지성인이자, 문화인, 패션 리더 등의 이미지를 부여할 생각이었다. 귀족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며 평민일지라도 자격을 갖춘 이들이라면 가감 없이 초대할 것이다. 남들과 차별되고 앞서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를 자극함과 동시에 살롱의 격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오늘만 보더라도 본관 메인 홀은 하나의 문화 예술 공간의 형태로 꾸며져 있다. 크리스티나의 미발표 신상 드레스가 걸려 있었고, 라파엘 작품의 모체가 되는 인체 공학도도 전시되어 있다. 또 사이비 취급을 받던 과학자 카밀의 별을 관찰할 수 있는 기구 망원경도 공개했다. 오늘 하루, 살롱 자체가 문화의 집대성이 될 것이다. 초대받은 이들은 자부심이 느껴질 수 있도록 성대히 준비했다.

    칼리프가 뭐가 그리 좋은지 낮게 큭큭 웃었다.

    “역시 넌 대단해.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냐?”

    “……겪어봤으니까요. 상대와 비교하고, 더 낫단 우월감을 느껴야 안도하는 욕망덩어리들을요.”

    엘레나의 의미심장한 말에 칼리프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가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엘레나의 표정과 말을 들으면 주눅이 들 때가 있었다.

    “에잇, 어려운 얘기는 그쯤 하고 이제 내려가자. 시간 다 됐어.”

    “그럴까요?”

    엘레나가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발을 내디뎠다. 본관 메인 홀로 내려가는 계단 앞 모퉁이에 서자, 살롱을 방문한 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를 돌아 칼리프가 손짓하자 악단이 곡을 바꿔 연주했다. 부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방문객들의 시선이 절로 계단으로 향했다. 느릿하지만 흠잡을 수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엘레나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한 계단씩 걸어 내려왔다.

    “와.”

    “L은 여전히 신비스럽네요. 드레스 때문이려나?”

    “그러게요. 말로는 설명 못 할 묘한 분위기가 있는 거 같아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엘레나를 향한 감탄과 동경만 있을 뿐, 적의를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보인 엘레나의 행보는 단순히 허영심을 좇는 영애나 부인들과 차별적이었다. 살롱이 문화 공간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묘령의 여주인 L 역시 그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층계참까지 내려온 엘레나는 고상하고 기품 있게 인사를 올렸다. 귀빈들 역시 성대한 박수로 그런 엘레나의 등장을 반겼다.

    “오늘 별관 개장 기념식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드리며, 우선 살롱의 설계와 시공까지 총책임을 맡아주셨던 위대한 건축가 란돌 님께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계단 아래,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멀끔한 연미복을 차려입은 란돌이 좌중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별관이 탈 없이 완공되었으며, 많은 귀빈분께서 찾아주셨으니까요. 그리고…….”

    여유롭게 말을 이어가던 엘레나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족한 제게 있어서도 매우 뜻깊은 날이에요. 제국을 위해 더 애쓰라는 의미로 황실에서 작위를 내려주셨거든요.”

    엘레나의 발언이 끝나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지금 작위라고 하지 않았어요?”

    “잘못 들은 거 아니지? L은 여자잖아?”

    아무리 권위가 떨어졌지만 천년 제국이다. 사람을 보내 축하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작위까지 하사했다고 하니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덴이 그런 귀빈들 틈바구니에서 나와 엘레나가 있는 층계참으로 걸어 올라왔다. 안 그래도 황실 예복 차림의 덴을 주시하고 있던 귀족들은 눈이 커졌다. 덴은 엘레나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좌중을 향해 돌아섰다.

    “황실 서기관 덴 프로스트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황가의 명을 받들어 약식으로나마 작위 수여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엘레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예를 차렸다. 그러며 상체를 비스듬히 굽혀 황실의 명을 받들 준비가 되었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덴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쥐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나 클라디오스 데 시안은 제국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를 한 그대의 업적을 높이 사는 바이다. 고로 그대에게 준남작의 작위를 내리니 이를 명예롭게 여겨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

    엘레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몸을 숙이며 황실에 감사의 뜻을 보였다. 거리를 두고 있던 칼리프가 악단에 눈짓하자, 지휘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더없이 경건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을 연주하며 한층 더 상황을 고조시켰다.

    덴은 두루마리를 접어 양손으로 엘레나에게 건넸다.

    “받으세요.”

    “전하께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해주세요.”

    엘레나가 임명장을 받아 드는 순간 칼리프가 박수를 쳤다. 멍하니 보고만 있던 귀빈들은 그제야 축하를 해주고자 박수 대열에 합류했다.

    “혹시 제가 잘못 들었나요? 분명 황태자 전하의 존함을 들은 것 같은데.”

    “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죠?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작위를 내린 것은 처음이지 않나요?”

    귀빈들은 임명장 전면에 등장한 시안의 이름에 주목했다.

    “L과 황태자 전하께서 아는 사이가 아닐는지요?”

    “여성이 작위를 받은 것도 놀라운데, 이례적으로 황태자 전하께서 하사하신 작위예요. 모르긴 몰라도 친분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죠.”

    “허! 정말이지 L은 볼수록 놀라운 것 같아요. 황태자 전하와도 연이 닿아 있다니요.”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내내 귀빈들의 머릿속에서는 시안과 엘레나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떠나지 않았다. 몇몇은 혹시 연인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한 만큼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임명장을 받아 든 엘레나가 층계참 아래에 운집해 있는 귀빈들을 보며 예의를 갖췄다. 귀빈들은 그런 엘레나를 향해 박수를 치며 인사에 답했다.

    ‘성공적이야.’

    엘레나는 현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오늘 살롱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수도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는 고위 귀족들이다. 이들의 앞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박수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인정의 의미가 담겨 있기에 유독 선별에 신경을 썼다.

    ‘이제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겠어.’

    엘레나가 이 자리를 빌려 노린 건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대대적으로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

    두 번째는 별관을 공개해 살롱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

    마지막으로 노블레스 거리를 겨냥해 예술가들의 숍, 부티크, 가게 등이 조만간 바실리카에 입점한다는 걸 알리는 데 의의를 뒀다.

    오늘 살롱 본관 홀에 거장들의 비공개 작품을 공개한 것도 귀빈들의 시선과 호기심을 끌기 위함이다. 사실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대공가가 노블레스 거리의 개장을 앞당기고 거장들의 섭외에 나선 만큼 엘레나는 한발 앞서 귀족들의 이목과 관심, 기대 심리를 집중할 계획이다.

    “귀빈들께서는 오늘 살롱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거장들의 비공개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종합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꾸며보고자…….”

    홀 어디선가에서 들린 유리 깨지는 소리에 모든 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등이 푹 파인 머메이드 드레스 차림에 은하수처럼 촘촘히 보석이 박힌 부엉이 가면을 쓴 영애가 도도하게 서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을 구두 굽으로 지르밟으며 그녀가 계단 바로 아래로 걸어 나왔다. 남에게 피해를 준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귀빈들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 저 여자는…….”

    칼리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스쳐 지나가듯 홀에서 본 그 여자였다. 부엉이 가면 때문에 확실치는 않았지만 살짝 드러난 턱선이나, 입술, 눈동자가 묘하게 엘레나와 흡사해서 기억에 있었다. 다만, 초대하지 않은 그녀가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가벼이 넘겼다. 그게 오판이었다.

    “본의 아니게 L과 귀빈께 폐를 끼치고 말았네요.”

    부엉이 가면을 쓴 영애의 목소리에 엘레나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목소리다. 죽어가는 그녀를 비웃던 악마의 저주와 같은 음색. 귓가에 맴돌 만큼 여전히 생생하다.

    ‘설마?’

    엘레나의 온 신경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가면을 쓰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벗도록 하죠.”

    부엉이 가면 영애가 가면을 벗으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독수리 가면 영식이 만류했다.

    “저 레이디, 살롱에서 가면을 벗으면 안 됩니다. 규칙입니다.”

    “제가 지금 허락받는 걸로 보이세요?”

    가면 너머로 싱긋 웃는 그녀의 미소에 영식은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충고를 무시한 영애는 부엉이 가면을 고정한 끈을 풀었다. 끈 위로 올려 묶었던 수려한 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가면 속에 숨겨져 있던 본연의 얼굴이 드러났다. 오뚝한 코와 순백의 피부, 큰 눈망울과 미묘하게 치켜진 눈꼬리. 사람을 기죽게 하는 권위적인 눈빛과 고고한 분위기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베, 베로니카 공녀?”

    “정말이야. 진짜 공녀 전하야.”

    베로니카가 흐트러진 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살롱의 규칙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얼굴을 드러낸 그녀가 개운하게 웃었다.

    “다들 왜 이런 걸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스스로 그렇게 자신이 없나요?”

    베로니카의 신랄한 비판에 귀빈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면전에서 대놓고 깔아뭉개자 자부심 강한 귀족들이 모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베로니카가 픽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면 살롱 주인이 영 별 볼 일 없어서 이런 규칙을 만들었나? 그런 거예요, L?”

    베로니카는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겨냥한 듯 빤히 쳐다보며 조소를 지었다.

    * * *

    베로니카가 살롱을 방문한 건 일종의 유희였다. 점점 거슬리기 시작한 L을 부숴 버리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볼까 했다. 그래야 L이 벼랑에 몰려 일그러진 표정으로 절망할 때 쾌감이 배가 될 테니까.

    한데, 살롱을 방문한 순간 기분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면을 쓰는 것쯤이야 작은 유흥이라고 여길 수 있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기념식에 초대받은 귀빈들이 살롱에 북적이는 것도 우습게 넘겼다. 노블레스 거리가 개장하면 살롱을 뒤로하고 다 넘어올 테니까. 부스의 거장들은 신경 쓸 가치조차 없었다. 일류를 모조리 죽이고, 그 자리를 일류가 될 이류로 채우면 그만이다.

    정작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건, 그 무엇도 아닌 L의 존재였다. 살롱을 찾은 귀빈들 대다수가 L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낯부끄러울 만큼 찬양하거나, 경외심마저 보였다.

    ‘하찮은 족속들. 근본조차 없는 여자를 저리 찬양하다니.’

    베로니카는 기가 차다 못해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근본도 알 수 없는 천한 여자를 저리 우대하는 꼴을 보니 한심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베로니카는 생각을 바꿨다. 그냥 죽이는 건 재미가 없다. 더 심각하게 L을 망가뜨리고 싶어졌다. 공개적으로 부숴 버려서 L에게 호감을 가지던 귀족들이 근본을 찾을 수 있도록 본보기로 삼고 싶었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홀 계단에 모습을 드러낸 L을 보며 베로니카는 조소 어린 박수를 쳤다. 제 미래에 절망적인 그림자가 드리웠는지도 모르고 웃는 모습이 퍽 우스웠던 까닭이다. 그런 베로니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 건, 작위 수여 때문이었다.

    “하, 작위를 내려?”

    심기가 불편해진 베로니카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귀족이란 제국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지배 계층이다. 그런데 근본 없는 L을 귀족에 포함시킨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족의 가치는 핏줄에서 오는 법이다. 태생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작위를 내린다고 미천한 핏줄이 바뀌던가.

    주변의 반응도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귀족이란 특권 의식과 우월의식으로 뭉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저 인간들을 보라. 귀족이란 작자들이 L의 작위 수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스로 부여받은 귀족이란 특별함을 지우고 저 근본 없는 년과 동등한 취급을 받으려고 들었다.

    “질 떨어져.”

    베로니카가 부엉이 가면 아래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길 때였다.

    “나 클라디오스 데 시안은 제국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

    서기관 덴이 낭독하는 임명장의 구절을 들은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클라디오스 데 시안. L에게 작위를 내린 장본인이 황태자 시안이란 사실에 분노했다.

    “……네년 따위가 감히 전하의 가치를 훼손시켜?”

    베로니카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녀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최악의 감정이었다.

    베로니카에게 시안은 특별했다. 개인적인 친분이나, 호감 또는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다. 황태자. 제국, 아니, 대륙을 통틀어 가장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시안이야말로 베로니카의 남자가 될 유일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부터 그녀의 짝은 시안이었고, 한시도 흔들리거나 변한 적이 없었다. 고귀한 혈통과 핏줄의 성사. 무슨 의미가 더 있을까?

    베로니카는 고고한 별처럼 빛나길 원했다. 지금보다 더 까마득한 위에서, 저 태양의 빛마저 가려 버릴 만큼. 그러기 위해서는 시안과의 결합이 필수적이었다. 황가의 혈통만이 베로니카를 더 빛내게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L이 껴들었다.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귀족들은 임명장에 언급된 시안의 이름을 근거로 L과의 관계를 의심했다.

    “하.”

    베로니카는 오물을 뒤집어쓴 불쾌감과 감당할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

    ‘제까짓 게 감히 시안과 한 세트로 묶여?’

    주제도 모르는 년 하나가 시안의 격을 떨어뜨리는 꼴에 인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베로니카는 의도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버렸다. 처음 살롱에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벼운 유희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베로니카는 진심으로 L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단 욕망이 치밀었다.

    * * *

    층계참에 선 엘레나는 시선을 내리깔고 베로니카를 내려다봤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상식을 깨버리는 베로니카의 도발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안을 뺏어간 증오의 대상을 눈앞에 두고서도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아니, 오히려 베로니카가 반갑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를 거야, 베로니카.’

    회귀한 이후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거울을 보듯 쏙 빼닮은 저 베로니카를 보니 복수의 시간이 머지않았음이 실감이 났다. 간절히 바라던 결실이 점점 현실로 가까워지는 걸 느낀 엘레나가 긴장의 끈을 더 바싹 조였다.

    예측이 불가능한 여자. 렌의 말을 빌려 미친년이란 표현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베로니카는 상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지금도 보라. 예고도 없이 살롱을 방문하더니, 가면까지 벗어 던지며 엘레나를 도발했다. 수도 내에서 살롱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상황을 고려하면 정말이지 파격적인 언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돼. 훼방을 놓고 싶다고 해도 이런 식이면 평판이 나빠질 텐데?’

    엘레나의 생각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살롱 문화 역시 넓게 보면 사교계 활동의 영역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베로니카의 이런 무례한 언행에 대해선 차후 사교계에서 계속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건 대공가의 공녀라 할지라도 사교계에서 도태될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아니면, 다른 노림수가 있는 건가?’

    엘레나는 가면을 쓰고 신분과 이름을 숨긴 채 토론하고, 문화 예술을 교류한다는 살롱의 규칙을 걸고넘어진 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의식하지 마. 살롱은 내 구역이야. 내게 유리하게 끌고 가면 돼.’

    살롱의 여주인 L은 다름 아닌 엘레나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며 맞대응할 필요가 없다. 주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살롱의 규칙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공녀 전하께서 불편을 끼쳐 드렸나 보군요. 살롱의 대표로서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엘레나가 층계참 아래의 베로니카를 보며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오늘 초대받은 귀빈 중 절반 이상은 귀족들이다. 베로니카의 무례한 언행을 이용해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차차 L이 사교계의 영향력을 늘려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요량이다.

    “더불어 감사의 말씀도 드립니다. 부족한 제가 작위를 받은 것도 모자라 공녀 전하께서 손수 오셔서 이 자리를 빛내주셨으니까요.”

    엘레나는 재빨리 말을 이어서 베로니카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해 자신을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한때, 사교계의 정점에 섰던 그녀였기에 이런 교묘한 화술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베로니카의 볼이 실룩거렸다. 설핏 웃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미소가 더없이 살벌했다. 엘레나의 수작질이 거슬려서였다.

    “L이 그렇게까지 절 생각해 주는 줄 몰랐네. 그럼 저도 그냥 갈 순 없죠. 개국공신의 후예이자, 귀족들을 대표해 축사를 해드리지요.”

    “축사요?”

    가면에 가려진 엘레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요? 싫으세요?”

    “그럴 리가 있나요? 부탁드려요.”

    엘레나는 찝찝했지만 거절하기 어려운지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뭘 하려고?’

    종잡을 수 없는 베로니카였기에 엘레나의 불안감이 커졌다. 베로니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계단에 몇 발자국 걸어서 올라왔다. 높은 눈높이에 선 그녀가 좌중을 돌아봤다. 가면을 쓴 귀빈들을 보는 눈길에 경멸과 조롱이 맺혔다.

    “L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 같아요. 살롱을 세우더니, 말도 안 되는 가면을 씌워 제국의 기틀인 신분제를 어떻게 이렇게 모욕할 수 있죠?”

    “……!”

    “그래서 여기 L이 그랬듯이, 제가 여러분의 우매함을 깨우쳐 주려고요.”

    베로니카의 공개적인 모욕에 귀빈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우매함이라니. 제아무리 대공가의 공녀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귀족들을 비하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베로니카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런 귀족들의 반감 어린 반응마저 그녀에게는 즐거움에 불과했다.

    “당신.”

    오만한 눈길로 홀 아래를 둘러보던 베로니카가 한 사람을 손으로 지목했다. 소를 형상화한 가면을 쓴 남자였다.

    “저요?”

    “그래, 당신. 귀족이야?”

    질문을 받은 소 가면을 쓴 남자가 당황했다.

    “갑자기 그건 왜…….”

    “내가 질문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

    “묻고 있잖아, 귀족이냐고.”

    날이 선 베로니카의 질문에 소 가면남은 입술만 옴짝달싹할 뿐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했던가. 당혹해하는 소 가면을 내려다보던 베로니카의 만면에 조소가 번졌다.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건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번 돌려 입은 듯 색이 바랜 연미복과 풍기는 분위기에서 그가 평민임이 묻어났으니까.

    “왜 말을 못 할까?”

    “그게…….”

    대놓고 비아냥거린 베로니카가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멍하니 샴페인을 들고 서 있는 영애에게서 잔을 빼앗은 베로니카가 소 가면남에게 다가갔다.

    ‘설마?’

    엘레나는 눈을 의심했다. 동시에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길한 예측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샴페인 잔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베로니카가 그것을 소 가면남의 머리 위에 부어버렸다. 아주 천천히, 머릿속부터 얼굴까지 젖어들도록.

    고요함 속에서 베로니카의 웃음소리가 살롱 안에 낮게 퍼졌다. 그녀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어찌나 스산하고 섬뜩하던지 당하는 사람도, 그걸 지켜보는 사람도, 엘레나조차 말을 잃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정신을 차린 소 가면남의 언성이 올라갔다. 굴욕적인 상황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화나?”

    “…….”

    “화가 나면 뭐가 달라져?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천한 평민 주제에, 안 그래?”

    베로니카의 언사에 소 가면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지만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신분의 벽. 베로니카와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 그는 절망했다.

    “여러분.”

    베로니카의 광기 어린 눈빛에 귀빈들이 숨을 죽였다.

    “가면을 쓴다고 평민이 귀족이 되나요?”

    “…….”

    “어처구니가 없는 규칙 때문에 귀족의 대우마저 포기하고, 평민일지도 모르는 인간한테 존대하다니요? 아, 생각만 해도 굴욕적이군요.”

    광기에 찬 베로니카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신분을 뛰어넘어 문화 예술의 교류를 중시하는 살롱 문화의 근본을 흔듦과 동시에 귀족이 가진 특권 의식을 상기시켰다.

    “귀족은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에요. 수대에 걸쳐 핏줄로써 고귀함이 완성되죠. 그런 귀족이 평민과 동등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베로니카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층계참의 엘레나를 올려다봤다. 오늘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된 그녀를 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아.”

    “내가 뭔가에 홀렸나? 난 귀족인데 왜 여기 와서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

    “왜 그딴 규칙을 따랐지? 속은 기분이야. 생각할수록 불쾌해.”

    베로니카의 말에 현혹된 몇몇 귀족이 동요했다. 그간 살롱 문화에 길들여져 귀족의 특권 의식을 잊고 있었건만, 베로니카가 다시 불씨를 지펴놓은 것이다.

    의기양양한 베로니카를 내려다보는 엘레나의 눈빛에 한기가 흘렀다. 베로니카는 살롱의 근간을 흔들었다. 엘레나가 내세웠던, 신분을 초월한 문화 예술 교류의 장이라는 공간을 뿌리부터 걸고넘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엘레나가 아니었다. 엘레나는 계단을 따라 우아한 걸음걸이로 내려왔다. 그런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베로니카의 말에 동조하던 귀족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롱의 규칙이 부당하다고 떠들려고 했는데 엘레나를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엘레나에게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베로니카를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엘레나가 소 가면남에게 다가갔다. 손수건을 꺼내 젖어 있는 그의 얼굴과 목을 손수 닦아주었다.

    “살롱의 주인으로서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엘레나의 진심 어린 마음에 소 가면남이 고개를 저었다.

    “따로 마련해 둔 곳으로 모실게요. 새 옷과 가면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조용히 엘레나의 뒤를 따라왔던 칼리프가 소 가면남을 데리고 홀을 나섰다. 엘레나는 허리와 고개를 숙여 예로써 그에게 사죄의 마음을 표했다. 뻔히 평민인 걸 알면서도 엘레나의 태도는 더없이 공손했다.

    엘레나가 돌아서서 베로니카와 마주했다. 거울을 보듯 놀랍도록 닮은 저 얼굴로 이런 몰상식한 짓거리를 하는 베로니카에게 감당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반대로 베로니카는 더없는 상쾌함을 느꼈다. 시안의 격을 떨어뜨린 그녀의 것을 무너뜨릴 때마다 희열이 밀려왔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굳이 가면까지 쓰면서 이런 취급받을 이유 없지 않아요?”

    베로니카는 좌중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권위적이지만, 그렇기에 사람을 따르게 하는 묘한 미소에 망설이던 귀족들이 하나둘 동조하며 가면을 벗었다. 그 수가 무려 십여 명을 훌쩍 넘겼다.

    베로니카가 의기양양하게 엘레나를 쳐다봤다. 보란 듯이 가면을 벗고 그녀에게로 몰려든 귀족들은 그녀의 목을 빳빳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곤란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어째서인지 엘레나의 표정에 점점 여유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비마저도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걸 암시하는 미소였다.

    ‘웃어?’

    엘레나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굉장히 거슬렸지만 베로니카는 애써 무시했다. 규칙이 깨져 버린 엘레나의 허세쯤으로 여긴 까닭이다.

    “추하군요, L.”

    베로니카는 비아냥거리더니 더없이 도도한 몸짓으로 돌아섰다. 그 뒤를 가면을 벗은 귀족들이 따랐다. 머뭇거리다 동조한 귀족들을 합치면 그 수가 무려 스무 명에 육박했다. 멀어지는 베로니카를 보며 엘레나가 말했다.

    “또 보게 될 거예요.”

    걸음을 멈춰 선 베로니카가 돌아섰다.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엘레나가 자꾸만 그녀를 긁었다.

    “착각하지 마. 또 볼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로니카와 그녀에게 동조한 귀족들이 홀에서 퇴장했다.

    살롱을 나온 베로니카는 승리감에 도취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녀를 따르는 스무 명의 귀족은 베로니카를 빤히 볼 뿐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막상 베로니카의 뜻에 동조해 살롱을 나오긴 했지만 다음 행동까지 생각하지 않은 까닭이다.

    베로니카가 그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 여러분은 귀족의 긍지를 지키셨어요. 자랑스러워하셔도 돼요.”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아니에요. 귀족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공녀 전하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저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 거예요. 끔찍해.”

    “이게 다 공녀 전하 덕분입니다.”

    베로니카의 만면에 맺혀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L의 살롱에 타격을 준 것만으로도 통쾌한데, 본의 아니게 자신을 추종하는 영애들마저 얻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나.

    ‘들러리는 많을수록 좋지.’

    베로니카는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면 현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아벨라를 견제하기 위한 파벌이 필요했다. 이들은 그중 일부가 될 것이다.

    “귀족의 긍지를 잃지 않은 여러분은 제 초대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단 생각이 드네요.”

    “초, 초대요?”

    잘한 짓인지 몰라, 갈등하던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공가의 후계자인 베로니카의 초대라는 말이 그들의 기대심을 자극했다.

    “전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긴답니다. 한 분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대공가로 초대할게요.”

    베로니카가 도도하게 돌아서자, 뒤쪽의 귀족들이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와 연이 닿아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가진 것만으로도 그들은 날아갈 것같이 기뻤다.

    “조심히 가세요.”

    “초대 기다릴게요. 꼭 잊지 말아주세요.”

    “오늘 일 두고두고 감사할게요. 살펴 가세요.”

    베로니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륜마차에 올랐다. 바퀴가 굴러가며 마차가 나아갔다.

    베로니카가 밖을 보자 귀족들은 마차를 향해 예를 갖추며 배웅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베로니카의 눈에 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공녀였고 당연한 일을 고맙다고 느낄 이유가 없었다.

    “개운한 하루였어.”

    마차 밖, 멀어지는 살롱을 보는 베로니카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 * *

    폭풍이 휩쓸고 간 살롱 안은 무거운 정적만이 가득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고,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아무래도 베로니카가 훼방을 놓은 만행의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네요.”

    툭 하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곰 가면을 쓴 그는 목소리로 보아 젊은 영식으로 짐작됐다.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기분이 나쁘질 않아요.”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곰 가면남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저도요.”

    “굳이 저래야 하나 싶을 정도예요.”

    엘레나는 애정 어린 눈길로 좌중을 돌아봤다. 곰 가면남은 소신껏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꺼냈다.

    “사소한 소란이 있었고 몇몇 분이 살롱을 떠나셨죠.”

    “…….”

    “그런데 떠나신 분들보다, 살롱에 남으신 분이 훨씬 많으시네요. 저처럼요.”

    그의 말대로였다. 스무 명 남짓 되는 귀족이 베로니카를 따라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백여 명 가까이 되는 귀빈들이 여전히 메인 홀에 남았다.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되자 엘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저들의 믿음과 호응에 보답할 차례였다.

    “살롱의 규칙은 깨지지 않았어요.”

    “……!”

    “오히려 살롱 문화를 많은 귀빈께서 존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엘레나는 인식에 변화가 있음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계몽사상으로 배우고 깨우치는 평민들뿐만 아니라, 기득권인 귀족들 역시도 살롱을 통한 문화, 예술, 학문의 교류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다. 베로니카를 따라가지 않은 다수의 귀족은 신분의 우월성을 드러내며 과시하거나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다. 살롱을 인정하고, 규칙을 존중하며,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였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니 다들 평소대로 우리의 문화를 즐겨주세요. 작은 분란조차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미덕이 우리에게는 있잖아요?”

    엘레나는 은근슬쩍 우리를 강조했다. 우리라는 테두리로 결속력을 끌어냄과 동시에 긍지를 심어주기 위함이다.

    그녀는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혁명적 디자이너의 신상 드레스를 접할 수 있으며, 위대한 교향곡을 즐길 수 있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지성인임을 일깨웠다.

    엘레나의 미소와 목소리에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런 벅찬 감정은 고스란히 귀빈들에게 전달됐다. 귀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초월해 살롱 문화를 누릴 줄 아는 스스로가 남보다 깨우친 지성인이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L의 말이 맞아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옛말이 있죠. 문화를 모르니, 그걸 즐길 줄도 모르는 거예요.”

    “살롱은 제게 행복이에요. 살롱이 없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토론회를 참관할수록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귀족이라고 해서 고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귀빈들은 저마다 속마음을 꺼내며 엘레나의 말에 호응했다. 살롱 문화를 이해하고 누릴 줄 아는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여기 모인 사람들과 우리라는 테두리로 엮이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특별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느낌이랄까.

    엘레나는 시녀가 내온 샴페인 잔을 손에 쥐었다. 귀빈들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

    “시크릿 살롱과 누릴 줄 아는 당신을 위하여.”

    건배사를 끝으로 꽁꽁 얼어 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아버렸다. 베로니카의 행패 따위는 머리에서 잊어버리듯, 모두 살롱 문화를 즐기며 근사한 시간을 보냈다.

    엘레나는 얼마간 귀빈들과 어울려 인사를 나누고 소소한 담화를 나눴다. 그것만으로도 살롱 안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생기가 넘실거렸다.

    적잖은 시간을 보낸 엘레나는 귀빈들께 양해를 구하고 홀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별관을 귀빈들에게 공개하고, 오페라극장에서 위대한 음악가 첸토니오의 신곡을 발표하는 일정을 소화하자면 점검해야 할 일이 남아서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최상층에 이르자 메이가 시중을 들기 위해 마중을 나왔다.

    “렌?”

    그런 메이의 뒤에 늑대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삐딱한 옷차림과 특유의 곱슬머리를 보니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괜찮아?”

    “지금 저 걱정하신 거예요?”

    렌이 심각한 얼굴로 끄덕였다.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요?”

    “센 척하지 말고.”

    “저 진짜 괜찮은데. 미친년을 길들이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요?”

    “뭐? 길들여?”

    순간 렌이 멍해졌다. 사실 오늘은 조용히 축하만 해주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 베로니카가 행패를 부리는 걸 목격하고 엘레나가 걱정돼서 올라와 봤다. 근데 웬걸. 렌의 걱정이 무안하리만치 엘레나는 담담했다. 아니, 상처는커녕 여유로운 모습까지 보였다. 생각보다 안정적인 눈빛과 말투에 렌은 픽 웃으며 안도했다.

    “그럼 됐고.”

    “렌.”

    엘레나가 낮게 부르며 렌을 쳐다봤다. 입가에 맺힌 희미한 미소가 더없이 의미심장했다.

    “왜?”

    “저 렌하고 너무 오래 붙어 다녔나 봐요. 전염된 거 같아요.”

    “내가 기생충이냐? 그리고 내 기준으론 너하고 보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요.”

    엘레나는 그런 렌을 빤히 보며 말했다.

    “줬다가 뺏으려고요.”

    “뭘 줬다가 뺏는다는…… 너 혹시?”

    “오늘 베로니카가 데려간 귀족들이요.”

    엘레나의 의미심장한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렌이 박수를 쳤다.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야, 제대로 열 받겠는데? 걔가 빼앗고 짓밟는 건 익숙해도 뺏기는 건 면역이 없거든. 근데 빼앗은 걸 도로 빼앗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되갚아주지 않겠어요? 몇십 배로.”

    엘레나는 단순히 앙갚음하는 걸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번 일은 계기다. 베로니카를 끄집어내서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에는 이. 네가 살롱을 건드렸으니, 나도 대공가를 부숴줄게.’

    오늘 일은 엘레나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단순히 미친년으로만 규정되어 있던 베로니카를 안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수익이었다. 남은 건 어디서부터 베로니카를 자극해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냐다.

    “렌이 도와줄 일이 있어요.”

    “말해. 신나는 일에 내가 빠지면 서운하지.”

    “오늘 베로니카를 따라간 귀족들을 조사해 주세요. 특히 자주 시간을 갖고 어울리는 주변 귀족들을 중점적으로요.”

    한 사람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주변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 리아브릭마저 당할 만큼 고절해진 엘레나의 계략이 빛을 발할 때였다.

    “그야 어렵지 않지. 그다음은?”

    “차별하려고요.”

    때때로 단순한 게 더 명확한 법이다. 이런 일일수록 복잡하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우선 베로니카를 따라간 영애들과 교분이 있는 주변인들에게 보란 듯이 많은 혜택을 줄 요량이다. 곧 살롱에서 새롭게 시작할 패션쇼에 초대할 것이고, 그날 장신구나 의상, 구두 등을 우선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권한도 줄 생각이다.

    “살롱과 교류하지 않는 자신이 얼마나 유행에 뒤처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줘야겠죠.”

    “안달 나게 만들겠다는 거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래도 수도에서 문화 중심지는 살롱이다. 베로니카를 따라가면서 살롱을 멀리한 만큼 유행에 뒤처지고 있단 인식을 심어줄 생각이다. 패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귀족들에게 똑같은 돈을 지불하고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처지는 인상을 받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건 없었다.

    “베로니카를 따라간 영애들이 안달이 나서 발만 동동 구를 때, 초대장을 보내려고요. 우연의 일치로 베로니카가 티타임을 열거나, 파티를 연 날에요. 영애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베로니카 얼굴이 볼만하겠는데?”

    렌과 엘레나는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졌다. 유행에 뒤처져 도태되어 가며 초조해진 이들이 제 발로 살롱으로 걸어 들어오고, 버림받은 베로니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다.

    렌과 작별한 엘레나는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별관으로 이동했다.

    귀빈들은 웅장함을 자랑하는 오페라극장의 규모에 입을 떡 벌렸다. 앞으로 이곳에서 연주회와 오페라, 뮤지컬 등을 볼 수 있단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화룡점정으로 첸토니오의 신곡 ‘겨울새’가 귀빈들의 귀와 마음을 훔쳤다. 연주가 끝나자 오페라극장에서는 기립 박수가 오 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 * *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교계 활동이 뜸하다고는 하나, 존재감만으로도 영향력이 절대적인 베로니카와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 L이 부딪친 사건은 수도의 이목과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그래서 누가 이긴 건가요?”

    “굳이 손을 들자면 베로니카 공녀 전하가 아닌가요? 추종자들까지 데리고 나갔잖아요.”

    “솔직히 저라도 좀 그랬을 거 같아요. 언감생심 평민이 귀족에게 맞먹는다니. 전 용납 못 해요.”

    “그런데 꼭 그렇진 않은가 봐요. 살롱에 남은 귀빈들이 훨씬 많았대요. 지인 말로는 오페라극장 연주회가 그렇게 인상 깊었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라고요.”

    사교계는 L과 살롱의 규칙에 우호적인 여론과 귀족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베로니카에게 동조하는 여론으로 양분됐다. 살롱을 문화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부류와 귀족다움을 내세우자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부풀려지고, 왜곡될수록 동률을 이루던 이러한 여론은 점차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사교계를 지탱하는 근원은 귀족이다. 특권 의식에 젖어 있는 귀족들은 문화를 떠나 평민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사실에 반발했다. 지금처럼 살롱을 향한 반감이 커진 것은 베로니카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열렬한 어필도 한몫했다. 막 파벌에 들어간 그들은 어떻게든 베로니카의 눈에 들고자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더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솔직히 L이 작위를 받은 것도 못마땅해요.”

    “내색 안 해서 그렇지 불만 있는 귀족 많을걸요?”

    “맞아요, 제국에 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 작위라니요? 너무 과했다고 생각해요.”

    베로니카의 추종자들은 대놓고 엘레나를 음해하고 비난했다. 그거로도 모자라 살롱에 항의하며 베로니카의 눈도장을 받고자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크릿 살롱의 반응은 고요했다. 별관 개장 이후, 보수공사를 이유로 휴장한 이래로 쭉 그랬다. 부정적인 여론이 사교계에 일파만파 퍼져 나감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공식적인 발표도 없었다.

    “야,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돼? 살롱이랑 네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아지고 있어.”

    엎친 데 덮친다고 보수공사로 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소문까지 좋지 않으니 칼리프의 속이 타들어갔다. 엘레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홍차를 음미했다.

    “나만 걱정해?”

    “그러라고 하세요.”

    “그걸 말이라고. 네가 사교계를 몰라서 그러나 본데 이대로 있다간…….”

    “선배.”

    엘레나가 픽 웃으며 말을 잘랐다. 칼리프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제국에 그녀보다 사교계를 잘 아는 사람이 있던가? 단언컨대 없다. 엘레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사교계는 생물이에요.”

    “생물이라니?”

    칼리프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도통 이해되지 않는단 표정이다.

    “사교계는 살아 움직여요. 스스로 유지하고 증식하고, 돌변하죠. 좀 더 기다려 보세요.”

    “야, 그러다가…….”

    “불안한 거 알아요. 하지만 참고 인내해야 할 때도 있어요. 바로 지금 같은 시기죠.”

    엘레나의 설득에 칼리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걱정됐지만 엘레나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믿는 구석이 있구나?”

    “그런 거 없는데요?”

    “야, 불안하게 왜 그래. 있지? 있다고 말해. 있어야 한다고.”

    “쉿, 조용히 절 믿고 재개장 준비에 힘써주세요. 그날, 개장 이래 최고로 붐빌 예정이니까.”

    엘레나는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소문이나 여론에 좌지우지될 필요가 없었다.

    ‘올 거야. 역대 최고로 많은 입장객이.’

    그리고 엘레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살롱의 재개장날.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든 귀빈들로 살롱의 메인 홀이 가득 찼다. 예상 방문객을 넉넉하게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 살롱을 찾은 것이다.

    덕분에 칼리프는 진땀을 뺐다. 일 층과 이 층의 모든 응접실을 개방하고 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 층 복도와 몇몇 방까지 출입을 허용하고 나서야 겨우 수용할 수 있었다.

    ‘아직도 있어?’

    입구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귀빈들을 보며 칼리프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 시각. 엘레나는 살롱 최상층에 위치한 응접실에서 밀려드는 귀빈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그랬죠? 사교계는 생물이라고.”

    어제의 악녀가 오늘의 레이디가 되는 곳이 사교계다. 그렇게 험담하고 음해할 땐 언제고 재개장을 하자마자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솔직히 살롱을 대체할 만한 문화 공간이 제국에 없잖아?”

    귀족들은 늘 새롭고 자극적인 걸 찾아 헤맨다. 먹고사는 게 급선무인 평민들과 달리 대다수가 여유가 있는 만큼 우월감이나 못 해본 경험 등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결국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살롱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면을 쓰면 자신이 온 걸 숨길 수도 있으니,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겠지. 원래 가식적이고 위선으로 똘똘 뭉친 게 귀족들이잖아?”

    가면으로 얼굴을 숨기고, 이름과 신분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규칙이 오히려 귀족들의 이중적인 행태를 숨겨주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엘레나는 여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살롱의 메인 홀.

    “어머, 정말 지적이시네요. 그런 얘기 오늘 처음 들었…… 어? 어!”

    “너, 너는? 릴…… 헙!”

    카린 영애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이 튀어나오려고 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릴리라고 불릴 뻔한 앞선 영애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러는 너는? 평민들하고 어울리면 격 떨어진다면서.”

    “그거야 그냥 해본 말이고…….”

    분명 엊그제 있었던 티타임 때만 하더라도 카린과 릴리는 살롱의 규칙을 지적하며 다시는 방문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한데 웬걸, 약속이 무색하리만치 그 둘은 살롱에서 마주쳤다. 우스운 건,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살롱은 신분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며 폐쇄 조치를 시킬 수 있게 황실에 안건을 올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던 자들조차 살롱을 방문했다.

    누구도 그러한 모순적인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모르는 척 감싸 안고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가식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는 귀족 아니던가.

    엘레나는 그조차도 과도기로 받아들였다. 특권 의식과 우월감에 젖어 있는 귀족이 살롱 문화 사이에서 괴리감을 겪는 건 당연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귀족들의 인식이 변화할수록 평민들과 화합하게 될 것이다.

    ‘전하께서 바라는 제국이지.’

    평민이 아닌, 시민이 지탱하는 국가의 축소판이 이 살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살롱과 관련된 험담과 비난은 눈 녹듯이 사교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번쯤이야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지만 지속적인 모순은 결국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살롱은 다시 제 궤도에 올랐다. 아니,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는 말처럼 오히려 이전보다 위상이 급등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살롱은 항상 화제의 중심에 있어야 해요. 끊겨서는 곤란하죠.”

    대공가는 원 역사보다 빨리 노블레스 거리의 일부 개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살롱의 영향력이 커지고 바실리카까지 완공이 임박하다 보니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사교계에 소문 흘리세요. 제가, L이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한다고요.”

    다시 또 수도가 들썩였다. 신비의 여성 L의 미모를 드디어 볼 수 있단 것에 사교계뿐만 아니라 제국민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과연 그녀는 소문대로 미녀일까? 흉터가 있어서 가면을 썼단 소문은? 나이는? 스무 살 아니면 서른 살? 그것도 아니면 십 대?

    그간 베일에 싸여 궁금증을 자아냈던 L에게 모든 이목이 몰리면서 덩달아 사람들의 입에 살롱도 다시 오르내렸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 * *

    엘레나는 베로니카를 따라간 추종자와 가깝게 지내는 주변 귀족 영애들을 살롱으로 초대했다. 개중에는 추종자들의 소꿉친구도 있었고, 언니같이 의지하는 존재도 있었으며, 지기 싫어하는 경쟁자도 있었다. 추종자들과 관계는 다양했지만 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장 가깝고 영향을 많이 주는 이들이라고 명시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많이 놀라셨죠?”

    나비 가면을 쓴 엘레나가 부드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솔직히 좀 놀랐어요. L하고 딱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저도요. L이 초대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전 살롱을 방문한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

    엘레나는 여유롭게 홍차를 음미하며 잠시 시간을 가졌다. 우아한 손짓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여기 모신 분들은 하나같이 사교계 평판이 좋으시더라고요.”

    “저, 저희가요?”

    “젊고 아름다우며 행실은 귀족 영애의 모범으로 삼아도 될 만큼 뛰어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엘레나의 칭찬에 영애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형식적인 칭찬인지라, 초대의 이유로 여기기에 모호한 까닭이다.

    “패션 안목과 감각이 탁월하시다고요. 오죽하면 수도 유행의 중심에 계시다는 정평까지 제가 들었답니다.”

    그제야 의구심이 사라진 귀족들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거라면…….”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요.”

    “남들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꾸민다는 게 그만…….”

    귀족 영애라면 나이를 막론하고 치장에 공을 들인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개성이자, 남과 차별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다 보니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거나 남보다 잘 꾸민다는 말을 모두 다 좋아한다. 남들이 외면해도 본인 스스로는 개성 있다고 착각한다. 엘레나의 초대 이유에 저들이 반색한 이유다.

    “오늘 초대를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수도의 패션을 이끄는 선구자격인 여러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고 교류하고 싶었거든요.”

    “저도 바라던 일이에요.”

    “L과 소통을 할 수 있다니 기대돼요.”

    엘레나는 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에밀리오를 통해 북방에서 들여온 진귀한 보석들을 보여주고, 쌀쌀해진 날씨 탓에 하나둘 찾기 시작한 스카프를 종류별로 가져다 놓고 원단과 색감에 맞는 매칭도 해보았다.

    “약소하지만 스카프는 선물이에요.”

    엘레나는 적절한 선물까지 곁들여 그들의 호감을 샀다. 영애들도 매우 기뻐했는데, 실크와 캐시미어가 적절히 섞인 이 스카프가 올해 수도를 강타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드는 신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스카프에 어떤 드레스를 매치해야 할까?’

    ‘아, 너무 예뻐. 보기만 해도 설레.’

    ‘이건 유행할 거야. 너무 세련됐어!’

    엘레나는 스카프를 매만지며 저마다의 욕망을 드러내는 영애들을 보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저 표정이야말로 홍차에 어울리는 최고의 디저트가 아닐까.

    “여러분께 살짝 귀띔해 드릴 말이 있어요.”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영애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스카프 하나에 마음을 뺏긴 그들의 눈길엔 L을 향한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조만간 살롱에서 패션쇼를 열 거예요.”

    “패션쇼요?”

    “그게 뭔가요?”

    영애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눈을 빛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나 L과 살롱이 추진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대심이 차올랐다.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님이 새 작품을 발표하는 장이라고 보시면 돼요.”

    “일종의 신상 드레스 발표회네요?”

    “비슷하지만 좀 달라요. 이제껏 옷걸이나 마네킹에 입힌 드레스를 선보였다면, 모델분들이 직접 착용하고 선보일 거예요.”

    “모델들이요?”

    생소하지만 새로운 패션쇼의 언급에 귀족들은 감출 수 없는 설렘에 젖었다. 심지어 혁명적 디자이너라 일컫는 크리스티나의 패션쇼다 보니 그러한 기대감은 더더욱 컸다.

    “패션쇼는 매우 특별한 행사가 될 거예요. 격에 걸맞게 소수의 귀족만 초대할 생각이고요.”

    “그럼 저희도 혹시…….”

    한 영애가 기대감을 갖고 말을 흐리자 엘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1순위로 초대해야죠, 여러분은 특별하잖아요.”

    엘레나의 찬사에 영애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신여성이라 일컬어지며 여성의 신분으로 작위까지 받은 L에게 특별하단 찬사를 듣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을까. 하물며 패션쇼라니. 벌써부터 설렜다.

    “그러니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세요.”

    엘레나는 속으로 뒷말을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카가 볼 수 있게.’

    * * *

    수도 귀족 빌리 자작가의 여식 슈발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처럼 지인들을 초대한 티타임이건만 좀처럼 대화에 끼지 못했다. 주선자이자, 오늘의 주인공인 그녀가 화제에서 뒤처진다는 인상을 받은 탓이다. 그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스카프 진짜 너무 예뻐요. 대체 어디서 구한 거예요?”

    “아마 못 구할 거예요. L이 선물로 주었거든요.”

    “L이 스카프를 줬다고요?”

    “예. 한번 만져보세요. 실크와 캐시미어가 혼합된 원단이라 너무 고급스러운 거 있죠?”

    “…….”

    슈발츠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롱의 별관 준공 기념식이 있던 날, 베로니카를 따라 나간 이 중 한 명인 그녀는 L과 살롱을 언급하는 게 매우 불편했다.

    “아무래도 이 얘기는 이쯤 하도록 해요. 너무 스카프 얘기만 한 것 같아.”

    “그러게요. 딴 얘기해요, 우리.”

    슈발츠의 불편함을 읽은 눈치 빠른 영애들이 다급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레오나 영애, 못 보던 팔찌를 차고 있네요?”

    슈발츠가 직접 화제를 돌렸다. 관심사는 쭉 그녀의 시선을 끈 예쁜 팔찌였다.

    “정말이네요?”

    “어디 봐요.”

    갑작스레 영애들의 주목을 받은 레오나가 당황한 듯 손목을 내밀었다. 로즈골드를 잘게 엮어서 만든 뒤, 푸른빛이 감도는 사파이어를 박은 팔찌는 한눈에 보기에도 세련되었다.

    “와, 가까이서 보니 너무 아름다워요.”

    “명장의 솜씨인 게 틀림없어요. 어디서 구매하신 거예요?”

    “저도 알려주세요. 꼭 갖고 싶어요.”

    주변의 재촉에 못 이긴 레오나 영애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둘러댔다.

    “서, 선물 받았어요.”

    “누구한테요?”

    “혹시 제르가디스 영식은 아니죠?”

    “아, 아뇨. 영식과 저 그런 사이 아니에요.”

    레오나가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제르가디스 영식은 평소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던 사내였기에 언급만으로도 수줍어했다.

    “그럼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어서요. 혼자만 알고 있으려는 건 아니죠?”

    “레오나 영애가 자기 같은 줄 알아?”

    “내가 뭐?”

    결국 레오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게 누구한테 받았다기보단 살롱에 갔다가 우연히 당첨이 되어서…….”

    “…….”

    레오나의 대답이 침묵을 불러왔다. 영애들은 힐끗힐끗 슈발츠 영애의 눈치를 살폈다. 정보를 교환하고, 관심사와 취미를 공유하는 티타임에서 언제부턴가 살롱을 빼놓고는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만큼 수도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살롱의 문화적인 영향력과 파급력은 컸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마지막은 꼭 살롱 이야기로 이어졌다.

    “…….”

    억지로 웃고 있지만 슈발츠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베로니카의 파벌에 들어간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티타임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보다 더 짜증이 나는 건, 지금 티타임에 온 영애들보다 유행이나, 패션 등 나름 자부심을 가졌던 분야에서 뒤처진단 것이었다.

    “아, 맞다. 공녀 전하께서 개최하시는 티타임에 초대받으셨다면서요?”

    “네, 그러고 보니 이틀 후네요.”

    아까의 일로 눈치를 보던 레오나가 화제를 바꿨다. 그러자 영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씩 보탰다.

    “와, 부러워요. 공녀 전하께 초대를 받다니…….”

    “대공가 저택이 황궁보다 더 으리으리하다면서요? 다녀오면 꼭 얘기해 주세요.”

    덕분에 슈발츠의 입가에 진짜 미소가 걸렸다.

    “티타임에 북방에서 온 상인도 초대했다고 하나 봐요.”

    “정말요?”

    “네, 제국에서 유일하게 대공가와 거래를 한다더라고요.”

    “와, 그런 상인이면 진귀한 보석도 많이 갖고 있겠어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해서, 저도 기대 중이에요. 제국에서도 보기 힘든 것들을 구할 기회가 흔치 않잖아요?”

    대화의 중심에 선 슈발츠가 베로니카와의 관계를 과시하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고 영애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장구를 치며 시샘 어린 눈길을 보냈다.

    ‘아무렴 그깟 살롱보다 대공가가 더 낫지 않겠어?’

    내심 베로니카를 따라간 게 잘한 행동이었을까 후회하던 슈발츠가 마음을 다잡았다. 황실 위의 대공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겠나. 자신감을 되찾은 슈발츠는 생기롭게 티타임을 이끌었다. 믿는 구석이 생기니 더는 망설이거나, 주눅 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자신감이 깨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베로니카의 티타임에 초대받은 슈발츠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황궁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으리으리한 저택의 규모에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고딕 양식은 고아한 맛은 있지만 눈길을 끄는 멋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롱의 별관이 훨씬 더 웅장하고, 우아하게 지어진 거 같아.’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도 거대 돔 형태로 지어진 살롱이 워낙 인상 깊었던 만큼 감흥이 없었다.

    ‘응접실의 가구들도 좀…….’

    고즈넉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주긴 했지만 너무나 예스러웠다.

    ‘그에 비해 살롱은…….’

    제국 최고의 목수로 추앙받는 가프와 제자들이 살롱에 비치된 모든 가구를 제작했다고 들었다. 세련되면서도 앤티크 특유의 화려함을 담은 그것들은 정말 멋졌다.

    그때였다. 유독 몸매의 선을 살린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베로니카가 미소로 손님을 맞이했다. 기호에 맞게 차와 커피를 주문하고, 디저트 전문 요리사가 내온 케이크를 먹으며 대화의 장이 열렸다.

    ‘불편해.’

    슈발츠는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이 자리가 편치 않았다. 그 이유는 베로니카에게 있었다. 

    슈발츠는 내심 이번 기회를 베로니카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베로니카는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그녀 일신의 안위뿐만 아니라 혼사, 가문을 위해서도 긍정적이라 여겼다. 근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도 제대로 못 붙이겠어.’

    권위적이다 못해 고압적인 베로니카의 분위기는 함부로 쳐다보는 것조차 거북스러웠다. 명확한 수직 관계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비단 슈발츠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베로니카의 추종자 대다수가 시크릿 살롱을 출입하며 나름 자유분방한 사고방식과 문화에 물든 귀족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식의 수직 관계가 강요되고 형식에 구애받는 티타임에 큰 흥미를 못 느꼈다.

    ‘재미없어.’

    ‘살롱에 가면 훨씬 유익하고 좋은 정보도 많은데…….’

    ‘살롱 얘길 꺼낼 수도 없고 말조심해야 하니 너무 답답해.’

    ‘내가 이러려고 여기 온 건 아닌데.’

    내색하진 않았지만 영애들의 속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대공가와 백 년이 넘도록 거래한 북방의 상인이 왔답니다. 그자가 취급하는 고귀한 귀금속과 보석을 아래층에 진열해 놓았으니 같이 보러 가요.”

    반쯤 죽어 있던 영애들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오늘 티타임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는 시간이 드디어 온 것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베로니카를 따라 일 층 응접실에 들어섰다. 유리 진열장 안에 든 귀금속과 장신구를 본 영애들은 홀린 듯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거…….”

    진열된 물건들을 살피던 영애들의 눈빛에 실망스러움이 번졌다.

    ‘이 목걸이 몇 달 전에 살롱에서 본 거 같은데?’

    ‘사파이어는 좋은데, 세공이 촌스러워.’

    ‘내 눈이 잘못된 건가? 눈에 차질 않아.’

    살롱에서 취급하는 북방의 보석은 카스톨 상회를 통해 들여온다. 그러다 보니 항상 최고급만 취급했고, 그것들은 살롱에 속한 최고의 세공사들의 손을 거친다. 살롱에서 우선순위로 취급하고 남은 품목을 외부에서 판매하는 만큼 수준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북방의 상인이라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당분간 티타임을 갖지 말아야겠어.’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영애들의 속마음도 모른 채 베로니카가 싱긋 웃었다.

    “어때요?”

    “너, 너무 예뻐요. 이 목걸이 펜던트는, 와, 감탄이 절로 나와요. 북방의 루비는 역시 최고 같아요.”

    “마음에 들면 구매하세요. 가격면에서 신경 쓰라고 상인에게 일러뒀어요.”

    “네? 네…… 그, 좀만 생각해 보고요. 맘에 드는 게 너무 많아서…….”

    한 영애가 당황하며 둘러댔다. 이미 더 세련되고 값진 목걸이를 살롱에서 봤는데 그보다 뒤처지는 걸 목돈을 들여 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베로니카의 권유와 의무감에 못 이긴 몇몇 영애가 마지못해 제일 저렴한 반지나 팔찌 따위를 구매하는 걸로 끝났다.

    베로니카는 티타임을 마무리 지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조만간 저택 내 별관에서 피아니스트 루프스키를 모시고 독주회를 열 예정이에요. 귀족적인 교양을 갖춘 여러분은 당연히 초대할 거고요.”

    “어쩜, 독주회라니요. 공녀 전하께서는 너무 고상하세요.”

    “루프스키라는 이름 들어봤어요.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면서요?”

    영애들은 양손을 모으며 기대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겉과 달리 속마음은 달랐다. 지루하다 못해 고루한 피아노 독주회는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 그저 형식적인 맞장구에 불과했다.

    “초대장을 보낼 테니, 그날 보도록 해요.”

    베로니카는 통보와 다름없는 작별의 인사를 건네더니 쌩하니 응접실을 나섰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배웅하는 법도 없다지만 베로니카의 권위적인 모습에 내심 실망한 이도 적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슈발츠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렇게 숨 막히고 의미 없는 티타임은 처음 겪어본 까닭이다.

    “하.”

    불현듯 살롱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영애들이 부러워졌다.

    속 깊은 한숨이 깊어져 가던 어느 날. 그녀의 저택으로 두 장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결국 왔네.”

    베로니카가 보낸 초대장을 뜯어본 슈발츠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기대도 설렘도 없는 초대장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슈발츠가 다른 초대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 시크릿 살롱에서 보낸 거잖아?”

    L의 인장이 박힌 초대장을 본 슈발츠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요란을 떨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초대장을 보낸 L의 넓은 아량에 놀란 것이다.

    “패, 패션쇼에 날 초대한다고?”

    놀란 것도 잠시, 들뜬 설렘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먼저 초대를 한 건 L이다. 명분도 충분하거니와 어차피 가면을 쓰고 가면 그만이겠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 어! 잠깐만…….”

    살롱을 갈 생각에 들떠 있던 슈발츠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며 두 장의 초대장을 확인했다. 이윽고 그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날짜가 겹치잖아?”

    * * *

    “올까?”

    칼리프는 초조한지 오독오독 손톱을 깨물었다. 처음으로 개최하는 패션쇼에 대한 불안감보다, 베로니카의 추종자들이 오늘 살롱을 찾느냐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올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오늘 베로니카가 여는 피아노 독주회랑 겹친다면서!”

    칼리프의 징징거림에도 엘레나는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무조건 와요. 그녀들이 느끼는 결핍을 베로니카는 절대 채워줄 수 없거든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맨날 조마조마해서 제명에 살겠냐?”

    “선배는 패션쇼에 집중해 주세요. 앞으로 살롱을 상징할 대표적인 행사가 될 테니, 첫 단추가 중요해요.”

    엘레나는 오늘 열릴 크리스티나의 패션쇼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녀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준비된 패션쇼는 앞으로 살롱이 나아갈 길이기도 했다.

    ‘베로니카를 향한 선전포고이기도 하고.’

    오늘 일은 분명 베로니카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추종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핑계를 대고 피아노 독주회에 불참하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리허설만 무려 여섯 번이다. 이러고도 문제가 생기면 그건 하늘이 무너져도 생길 문제야.”

    “무슨 소리예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롱은 무너지면 안 돼요.”

    “오냐. 가서 한 번 더 점검할게.”

    엘레나의 잔소리를 이기지 못한 칼리프가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섰다. 안 그래도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이 임박한 만큼 지체할 수 없었다.

    혼자 남게 된 엘레나는 손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몇 명이나 오려나? 절반? 아니야, 조금 더 많이 쳐줘서 6할 내지 7할?’

    별관 개장식이 있던 날, 베로니카를 쫓아간 추종자들은 정확히 스물여덟 명이다. 엘레나는 개중에서 절반만 오더라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묵묵히 그런 엘레나의 뒤를 지키던 휴렐바드가 입을 열었다.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함께 적잖은 풍파를 겪은 휴렐바드는 얼음의 기사라는 위명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티 나나요? 그런데 긴장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

    “저 지금 설레요. 아주 많이.”

    엘레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적절한 긴장과 설렘이 섞여 여느 때보다 좋은 리듬을 유지했다. 이러한 리듬은 고스란히 현장에서 귀빈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오늘 패션쇼, 제 생애 손꼽는 최고의 행사가 될 거 같은 느낌이 드네요.”

    살롱 본관 입구에서 칼리프는 귀빈들을 맞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패션쇼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롱 밖까지 긴 줄이 이어졌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요.”

    곱게 차려입은 영애가 슥 초대장을 보였다. 그것을 받아 든 칼리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슈발츠 영애?’

    칼리프는 힐끗 눈을 치켜뜨고는 눈앞의 영애를 쳐다봤다. 초대장에는 고유의 번호가 매겨져 있다. 초대장 확인 시 베로니카의 추종자들이 몇 명이나 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낯짝도 두껍지. 깽판을 칠 땐 언제고 두 번째로 일찍 오냐?’

    슈발츠의 이중성을 속으로 비난하며 칼리프가 미소로 맞았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맘껏 즐겨주시길.”

    슈발츠는 턱을 들고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살롱에 입장했다. 그 뒷모습을 보는 칼리프는 어이가 없었다. 제 발로 살롱을 경멸하듯 쳐다보며 베로니카를 쫓아가던 그날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던 까닭이다. 칼리프는 고개를 돌려 다시 초대장을 확인했다.

    ‘또? 약속이라도 했니? 왜 이리 일찍들 와.’

    막 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베로니카를 따라간 추종자들이 열한 명이나 살롱에 입장했다. 무려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어지간히 안달이 났나 보네.’

    칼리프는 픽 하고 새어 나올 뻔한 실소를 겨우 참았다.

    ‘절반은 성공이야.’

    엘레나는 분명 온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내심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칼리프로서는 한시름 덜 수 있게 됐다.

    그 뒤로는 드문드문 열 명에 한 명꼴로 베로니카의 추종자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들어간 영애만 하더라도 별관 개장식이 있던 날 베로니카의 바로 옆에 서서 어깨에 힘을 주고 의기양양하게 나갔던 영애다.

    ‘얄미워. 뻔뻔한 얼굴 봐라. 가서 다 콱 쥐어박으면 속이 다 풀리겠네. 앗, 그보다 아까 몇 명까지 셌지?’

    가장 중요한 걸 깜빡 잊을 뻔한 칼리프가 얼른 상기했다.

    ‘스물네 명! 그럼 지금 들어간 쟤까지 포함해서 스물다섯이…… 잠깐, 스물다섯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숫자를 세던 칼리프가 까무러치게 놀랐다. 베로니카를 따라간 스물여덟 명의 추종자 중 무려 스물다섯 명이 살롱에 들어온 것이다.

    ‘대, 대박이야!’

    칼리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러한 소식은 메이를 통해서 엘레나에게 빠르게 전해졌다.

    “아가씨, 무려 스물다섯 명이 왔대요!”

    “생각보다 많이 왔구나.”

    덤덤한 척 굴었지만 엘레나의 입가에 걸린 회심의 미소가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기쁨을 짐작하게 했다.

    “안 기쁘세요?”

    “기쁘지.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잖니?”

    “너무 담담해 보이셔서…….”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만면의 미소는 여전했다.

    “여기서 만족하면 되겠니? 기쁨은 좀 더 나중에 누려도 늦지 않아.”

    메이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눈앞의 엘레나를 봤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순간도 틈을 내보이지 않고 대공가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옥죄어갔다.

    “이제 내려가자꾸나.”

    “네, 아가씨.”

    앞서 걷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메이의 눈에 자랑스러움이 맺혔다. 저 작은 여인의 뒷모습이 그 어떤 거인보다도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메인 홀로 내려가는 계단에 엘레나가 등장하자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오늘 패션쇼를 찾아주신 귀빈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L이에요.”

    엘레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체를 숙였다가 들었다.

    “아마 패션쇼가 생소하신 분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역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패션쇼는 살롱을 상징하는 행사로서 여러분께 다가갈 겁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엘레나는 지지부진하게 패션쇼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백 마디 말보다, 눈으로 한 번 보는 게 더 확실하니까.

    엘레나가 퇴장하고 샹들리에의 불빛이 꺼졌다. 깜깜한 메인 홀에서 유일하게 런웨이 주변에만 빛이 머물러 있어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악단의 협주가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런웨이 끝에서 가면을 쓴 한 쌍의 남녀가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왔다.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런웨이를 메운 귀빈들을 가로질러 맨 끝까지 걸어가더니 가볍게 포즈를 취하고 돌아선 뒤 무대 뒤로 들어가 버렸다.

    처음 겪는 생소한 풍경에 귀빈들은 눈을 깜빡였다. 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빨리 지나간 까닭이다.

    그러나 그러한 당혹감도 잠시뿐, 귀빈들은 순식간에 패션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눈을 뗄 수 없는 모델의 워킹. 감탄이 절로 나오는 크리스티나의 신상 의상. 마지막으로 이 패션쇼에 초대받았다는 특별함까지.

    귀빈들의 반응은 엘레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열광적이었다.

    ‘성공이야.’

    엘레나는 피날레를 위해 런웨이에 모두 오른 모델과 크리스티나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자칫 무모할 수도 있는 엘레나의 의견을 존중해 패션쇼를 수락하고 준비한 크리스티나의 노고에 감사하고자 함이다.

    “오늘 이 자리를 있게 해준 L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티나가 L을 지목하자 귀빈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리허설 때부터 예정된 상황인 만큼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런웨이에 올랐다. 오늘의 성공을 축하하는 축사로 입을 뗀 엘레나가 패션쇼에 담고자 한 의의를 꺼냈다.

    “패션쇼는 수도, 나아가서 제국의 유행을 선도할 거예요. 런웨이를 활보하는 모델분들, 너무 아름답고 멋지지 않나요?”

    귀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나의 신상품도 대단했지만, 그러한 작품을 더더욱 빛나게 만든 모델들의 공로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엘레나가 미소를 짓더니 런웨이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모델분 중에는 평민도 있고, 귀족도 있답니다. 신분을 떠나서 누구나 원한다면 런웨이에 오를 수 있죠. 살롱에서는 모델을 정식 직업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모델들의 신상에 관한 궁금증을 엘레나가 나서서 해소해 준 것이다. 동시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직업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나도 런웨이에 한번 서볼까? 다 날 주목하고 쳐다보면 완전 짜릿할 것 같은데.’

    ‘모델? 직업이라면 수익은 어느 정도일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의상을 살리려면 걸음걸이나 태에 전문성도 살려야 하고. 몸 관리도 해야 하니…….’

    저마다 생각은 다 달랐지만 생소한 모델이란 직업에 대한 첫인상은 호의적이었다. 엘레나가 바라던 신분을 초월한 화합과 정확히 일치한 반응이다. 이러한 살롱만의 자생력은 문화 중심지로 확고히 뿌리 내리는 기반이 될 것이다. 대공가조차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뿌리 말이다.

    ‘베로니카,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엘레나가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 * *

    “거기.”

    거울 앞에 서서 옆머리를 만지던 베로니카의 콧노래가 멈췄다. 덩달아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시녀들이 바싹 긴장했다.

    “드레스 자락이 접혔잖니?”

    “어, 어디…… 아, 얼른 펴겠습니다.”

    시녀는 사색이 되어 얼른 드레스 자락을 폈다. 그러나 한 번 진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 신경을 쓴다는 게 그만…… 아, 아니에요. 다 제 실수예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시녀가 곧 죽을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며칠 전, 한 시녀가 사소한 실수로 무려 나흘간 장롱에 갇혀 죽을 뻔한 걸 목격했기에 더 간절했다.

    “운 좋은 줄 알아. 오늘 같은 날 사소한 일로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베로니카의 용서에 시녀는 머리를 조아렸다. 주변에 있던 시녀들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베로니카의 관대함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베로니카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베로니카는 곧 열릴 피아노 독주회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지난 티타임 이후로 본격적으로 파벌 구성에 나선 만큼 이 기회를 살려 그녀가 주관하는 행사는 특별하다는 인식을 사교계에 심어주고자 했는데 그 결과물이 나름 만족스러울 듯했다.

    마지막 몸단장을 마친 베로니카가 침실을 나섰다. 걸음걸이도 평소와 달리 가벼웠고, 콧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 독주회에 초대받았단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황홀해할 영애들이 떠들어댈 찬사가 벌써부터 귀에 맴돌며 그녀를 즐겁게 했다.

    “문 열렴.”

    추종자들이 모여 있는 별관 내 응접실에 도착한 베로니카가 턱짓을 했다. 그녀를 바싹 뒤따라온 수행 시녀들이 얼른 앞으로 나가서 문을 열었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리석 문이 열렸다. 베로니카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어서들 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흐려진 뒷말만큼이나 베로니카의 미소가 자취를 감추었다.

    “…….”

    텅 빈 응접실을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무려 스물여덟의 영애를 초대했다. 그런데 휑한 응접실에 앉아 있는 영애들은 고작 세 명에 불과했다. 소파에서 일어나 베로니카를 맞이하는 그녀들조차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한겨울에 맺힌 서리보다 차갑고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살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턱도 없거니와 괜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무슨 화를 입을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응접실을 잘못 찾아온 건가?”

    “…….”

    “내가 묻잖아. 귀먹었어?”

    “여, 여기가 맞습니다, 아가씨.”

    베로니카의 재촉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시녀 케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랫것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나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이 피부에 와닿았다.

    “초대장을 제대로 보냈겠지?”

    “지, 집사님이 신경 써서 보내는 걸 제가 확인했습니다.”

    초대장은 제대로 발송됐다는 의미다. 즉, 알고도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베로니카의 얼음장처럼 찬 눈길 아래로 불길이 솟구쳤다.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분노는 분출 직전의 용암처럼 콸콸 끓었다.

    “감히…….”

    소수가 오지 못했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급한 사정이 있겠거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세 명이라니. 초대장을 받고도 스물다섯 명이 무시했다는 의미다. 마치 짜고 베로니카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로 모욕적이다. 베로니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깟 년들이 날 능욕해?”

    그녀의 눈빛에 주체할 수 없는 광기가 번들거렸다. 꽉 깨문 입술에 맴도는 비릿한 피 맛마저 느낄 수 없을 만큼 이성이 간당간당했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년들.’

    그녀에게 있어 오늘처럼 수치스러운 날은 처음이었다. 벌레보다 못한 하찮은 년들이 초대를 받았으면 황송하다고 올 일이지 감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모욕감은 독주회에 불참한 영애들을 모조리 잡아 와 죽여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베로니카의 싸늘한 말에 세 영애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주눅이 든 까닭이다.

    “독주회는 취소예요. 돌아가세요.”

    “네? 이대로요?”

    개중 눈치 없는 영애가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내심 다른 영애들이 아무도 오지 않은 만큼 베로니카의 눈에 들 좋은 기회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라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

    그녀가 결국 안 그래도 예민한 베로니카의 신경을 긁고 말았다.

    “지금 제가 허락을 구하고 있는 거로 보이나요?”

    “아, 저는…… 아쉬워서…….”

    그제야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영애의 말이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물은 엎어진 뒤였다.

    “그래서요? 아쉬우니, 저한테 책임을 져라, 뭐 이런 말인가요?”

    “그, 그게…… 죄송해요. 제가 그만 실언을 했나 봐요.”

    영애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지면에 닿을 듯 푹 숙여 사죄했다.

    베로니카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영애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베로니카의 그림자가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바로 처신하세요. 입 함부로 놀리지 말고.”

    “…….”

    섬뜩한 경고에 영애는 대답조차 못 하고 고개만 반복적으로 끄덕였다. 허리를 바로 세운 베로니카가 겁에 질려 주눅 들어 있는 두 영애를 보며 차갑게 경고했다.

    “오늘 일은 무덤까지 함구하세요. 제 말 무슨 의민지 아시죠?”

    “네? 네, 알아들었고말고요.”

    “주, 죽을 때까지 입 다물고 있을게요.”

    영애들의 다짐을 받은 베로니카가 돌아서서 응접실을 나섰다. 살벌한 표정으로 별관을 나와 본관으로 들어선 베로니카가 도착한 곳은 아셀라스의 집무실이었다.

    “열어.”

    베로니카의 한마디에 시녀가 얼른 문을 열었다. 노크마저 생략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베로니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집무실에 들어오는 베로니카를 본 아셀라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별도 없이 공녀 전하께서 어인 일로…….”

    아셀라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돌아가는 상황과 베로니카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아셀라스가 권한 소파에 앉은 베로니카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세 시간.”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부터 차근차근…….”

    “피아노 독주회에 오지 않은 스물다섯 명의 영애가 어디 있는지, 뭐 하는지 알아오세요. 지금 당장.”

    “하지만…….”

    아셀라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가가 수도 내에 광범위한 정보망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세 시간 안에 스물다섯 명의 행적을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이자 베로니카가 재촉했다.

    “못 하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공녀 전하.”

    “제 인내심이 바닥났거든요. 무조건 알아오셔야 할 거예요. 만약에 늦는다?”

    베로니카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거든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아셀라스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의 자리에 그를 있게 만든 본능이 경고했다. 절대 베로니카의 눈 밖에 나지 말라고, 그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셀라스는 대공가의 정보 수집과 공작(工作)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 밤까마귀들을 모두 동원했다. 스물다섯 명의 영애들의 행적을 좇으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까닭이다.

    째깍째깍. 벽장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유독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베로니카가 명시한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세 시간 지났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아셀라스가 진땀을 빼며 사정했다.

    “당신에게도 아내와 자식이 있겠죠?”

    “고, 공녀 전하……!”

    아셀라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넌지시 돌려 말했지만 제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단 말과 진배없었다.

    ‘이 자식들은 서두르지 않고 뭐 하는 건데?!’

    베로니카는 허언하는 자가 아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가족들이 무슨 끔찍한 일을 겪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감이 고조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였다.

    “알아냈습니다! 알아냈어요!”

    아셀라스의 손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창문을 통해 밤까마귀들이 전달하고 간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운이 좋네요.”

    베로니카가 가늘어진 눈매로 아셀라스를 내려다봤다. 아셀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얘기해 봐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요. 한 년도 빼놓지 말고.”

    으름장을 놓는 베로니카를 보던 아셀라스의 시선이 양피지로 향했다. 스물다섯 명이나 되는 영애들의 행적이라기엔 취합된 정보는 썩 많지 않았다.

    ‘뭐, 뭐야?’

    양피지를 읽어 내려가던 아셀라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걸 말하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이 밀려올 거란 두려움이 강하게 들었다.

    “모두 같은 곳에 있다고…… .”

    “그러니까 어디요.”

    “사, 살롱에서 연 패션쇼에…….”

    “…….”

    일순 베로니카의 입이 다물어지며 대화가 끊겼다. 내심 각오를 하고 있던 아셀라스조차 그런 반응에 등골이 오싹했다.

    ‘무, 무슨 사람 표정이.’

    웃는 듯 마는 듯 뒤틀린 베로니카의 표정에 마른침을 삼켰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할 만큼 광기에 젖은 표정에 소름이 쫙 끼쳤다.

    “L.”

    베로니카가 나지막이 뱉은 한 마디에 증오가 실렸다. 베로니카가 개최한 피아노 독주회와 의도적으로 겹치게 살롱에서도 패션쇼를 연 게 분명했다. 마치 사냥감을 쫓듯이 대놓고 노린 것이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이 주제도 모르고 대들어?”

    대공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제국이 제 발아래 있다는 걸 인지한 이후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더 굴욕적이었다. 그것도 혈통조차 불분명한 천하기 짝이 없는 년한테 수모를 겪다니.

    살롱을 부숴 버리지 않고선 분이 안 풀릴 거 같았다. 그녀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이다. 가족이 있다면 대륙을 뒤져서라도 찾아와 그녀의 앞에서 죽일 것이다. 그리고 L을 끌고 와 살점 하나까지 떼어내 고통 속에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 것이다.

    “계획을 당기죠. 전부 죽여야겠어요.”

    “예?”

    “살롱에 소속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살롱의 요직에 있는 측근들도 모두 찾아 죽여요. 가족이 있다면 가족도 찾아내서 모조리 죽여요.”

    “아,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슬슬 손을 쓸 참이었다. 노블레스 거리 조기 개장을 준비하면서 살롱에 소속된 거장들은 눈엣가시나 다름없다. 그들 모두를 제거해 노블레스 거리에 소속된 이류 예술가들이 일류가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고 바실리카라고 했나요?”

    “네, 살롱 주변에 건축 중인 대형 건축물입니다.”

    베로니카도 살롱에 가본 기억이 있었다. 그 위압적인 존재감만으로도 노블레스 거리에 타격이 될 것이다.

    “태워 버려요.”

    “……!”

    “살롱 일대, 재건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죠.”

    베로니카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 * *

    “까마귀는 까맣지.”

    “그래서 어두울수록 눈에 띄지 않죠.”

    렌이 툭 던진 말을 멜 역시 의미심장하게 받았다. 대공가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건축물 옥상에 선 두 사람의 손에는 가늘고 긴 물건이 들려 있었다. 망원경이었다.

    “참 대단한 물건입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사람이 보이다니요. 덕분에 마제스티 조직원들의 정보 수집이 한층 더 수월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렌이 픽 웃으며 동조했다. 망원경은 정보를 담당한 렌의 편의를 위해 엘레나가 선물해 줬다.

    살롱 소속의 과학자 카밀의 작품이었는데, 육안으로 식별이 불가능한 먼 거리를 빛의 굴절을 이용해 가깝게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신비의 물건이었다.

    “선물을 받았으니, 응당 보상을 해야겠지?”

    “L에게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이미 충분히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멜이 보기에는 그랬다. L과 관련된 일이라면 렌은 발 벗고 나섰다. 귀찮은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가 실실 웃으며 제 일보다 더 열정적으로 앞장섰다.

    “부족해. 난 말이지, 걔한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고 싶거든.”

    “아낌없이 주다가 끝나실 수 있습니다.”

    “오, 그럴 수도 있네. 근데 그게 어때서?”

    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낌없이 주다가 내가 죽으면 걔가 나 영원히 기억해 줄 거 아냐?”

    “…….”

    “짜릿하네.”

    렌의 표정에서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 전해졌다. 상식적인 멜은 그런 렌의 방식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도, 납득되지도 않았다.

    ‘원래 그런 분이시긴 하지만…….’

    항상 느끼지만 정상적인 방식을 벗어난 렌이 안타까웠다. 렌이 망원경을 통해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밤까마귀 조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밤까마귀 놓치지 마.”

    “염려 마십시오. 마제스티의 모든 정보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멜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만큼 온 신경을 쏟고 있다는 의미다.

    “베로니카는 내가 잘 알아. 그 미친년은 자기 위주로 하지 못하면 다 엎어버리려고 들 거야. 걔가 무리수를 둘 때, 대공가를 무너뜨릴 명분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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