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7/30)
  • 제21장 전야 (2)

    논의는 땅거미가 지고 거리에 짙은 어둠이 깔렸을 때 끝이 났다. 괄목할 만한 성과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스케치는 완성됐다. 세세한 부분을 보완하고 좀 더 기민하게 협조한다면 더 의미 있는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됐다.

    “어렵게 모인 보람이 있네요.”

    엘레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안과 렌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적으로 행동하던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 한뜻으로 움직이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렌이 주도적으로 계략을 짜던 엘레나를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넌 나랑 척지지 말자. 애가 음흉해.”

    “이제 아셨어요? 눈 밖에 안 나게 조심하세요. 확 어떻게 할지 몰라요.”

    “야. 그 말 들으니까 더 눈 밖에 나보고 싶잖아.”

    삐딱하게 구는 렌을 보며 엘레나가 픽 웃어넘겼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 장난마저 이제는 정겹다.

    “전하도 같이 가죠? 혼자 가는 거 쓸쓸해.”

    “아, 전하는 잠시…….”

    “그대 먼저 돌아가라.”

    엘레나와 시안의 동시다발적인 말에 렌이 멈칫했다.

    “이거 뭐야?”

    렌이 마치 둘이 짰냐는 듯 시안과 엘레나를 번갈아 보았다. 사전에 약속된 건 아닌 듯 엘레나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전하와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단둘이?”

    “네, 둘이서요.”

    렌이 입맛을 다셨다.

    ‘아, 좀 별론데.’

    뭔가 개운치 않았다. 꼭 자기만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시안의 감정을 빤히 아는지라 영 못마땅했다. 근데 뭐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나눌 얘기가 있다는데.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줘야지.’

    “그렇다니 방해꾼은 사라지지. 또 보자고. 전하께서도 일 보고 얼른 가시길. 황궁을 너무 오래 비우면 의심받지 않겠어요?”

    시안을 향해 삐딱한 인사를 남긴 렌이 휘적휘적 걸어 나갈 때였다.

    “아! 이걸 놓고 갈 뻔했네.”

    뒤돌아선 렌이 소파에 걸쳐져 있던 담요를 집어 들었다. 엘레나가 덮어줬던 그 담요였다.

    “이건 기념품. 소원에 얹어주는 걸로.”

    ‘소원?’

    시안의 눈빛이 번뜩이는 걸 본 렌이 히죽 웃더니 응접실을 떠났다. 엘레나는 흔해 빠진 담요를 굳이 가져가는 렌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기념품이라니. 소원도 그랬지만 렌의 속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엘레나를 지그시 보던 시안이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소원이라. 무슨 말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아. 별거 아니에요. 절 도와주는 대신,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거든요. 소원이라기엔 민망할 만큼 허무하게 써버렸지만요.”

    “…….”

    어이가 없는지 엘레나가 설핏 미소를 보였다. 그녀의 웃음이 알게 모르게 그를 서운케 했다.

    “그랬군.”

    시안이 입술만 옴짝달싹하다 꾹 다물었다. 무슨 소원이었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속으로 삼켰다.

    “그보다 할 말이 있다고…….”

    “그대는 무슨 용무로…….”

    우연의 일치로 말이 겹치자 시안의 표정이 좀 누그러졌다.

    “그대 먼저 말하도록.”

    엘레나가 옅게 웃더니 고급스러운 무늬의 봉투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시안이 이게 뭐냐는 듯 쳐다봤다.

    “열어보세요.”

    그녀와 봉투를 번갈아 보던 시안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놀라움과 경악, 혼란스러운 눈길이었다.

    “어음이에요.”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지?”

    “황궁근위대 개혁에 보태 쓰셨으면 해요. 대공가에서 거둬들이는 배상금으론 부족하잖아요.”

    엘레나는 다 안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황궁근위대야말로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근원이었다. 그들의 개혁 없인 새로운 제국도 없을 테니까. 대공가가 휘청거리는 이 시기는 시안이 황궁근위대에 칼을 대기에 적기였다.

    ‘지난 삶에서는 귀족들의 반발과 자금적인 문제로 실패하셨지.’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날, 어쭙잖게 위로하고자 시안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 보고야 말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시안이 울고 있는 모습을.

    제국의 삼검에 버금가는 검술, 뛰어난 머리, 귀족들을 감쪽같이 속이는 연기력까지 두루 갖췄음에도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면 엘레나도 착잡했다. 이 남자가 짊어진 무게를 그녀가 덜어줄 수 없음에 항상 안타까웠고 애달팠다.

    “대공가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궁지에 몰릴수록 제국을 전복하려고 들 거예요. 선대 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 폐하를 세운 것처럼요.”

    “…….”

    “그러자면 전하만의 전유물인 황궁근위대가 필요하실 거예요. 이 돈은 그 밑거름으로 써주세요.”

    시안은 손에 들린 어음을 내려다봤다.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대공가가 낼 배상금의 무려 다섯 배가 넘는 금액이다.

    “정녕 이걸 내게 주는 것인가?”

    “저보다는 전하께 더 필요한 돈이니까요.”

    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 어음에는 그를 돕고자 하는 엘레나의 진심 어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 아는데, 왜 이리도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이 어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처지가 너무도 비감스러웠다. 거절할 수 없기에 더더욱.

    “고맙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음을 쥔 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엘레나에게 신세를 지는 건 이번뿐이다. 이 어음을 종잣돈으로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날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각오를 다진 시안이 자신이 살롱에 남은 이유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나 역시, 그대에게 줄 것이 있다.”

    엘레나가 눈을 깜빡이며 빤히 쳐다봤다.

    “작위를 하사할까 한다.”

    “저, 전하?”

    “그대가 전에 말했지. 북부 3국 연합의 벨칸 왕국의 작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도 못 한 얘기에 엘레나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가 활동할 L의 신분은 에밀리오가 운영하는 카스톨 상회의 본거지인 벨칸 왕국에서 돈을 지불하고 사들인 작위다.

    시안이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공가를 나와 본격적으로 활동하려면 제국에서 하사받은 작위가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아니에요. 전 이대로도 족해요.”

    엘레나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작위를 하사할 수 있는 권리는 황실 고유의 권한이다. 황태자인 신분의 시안에게 크게 어렵진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외다.

    ‘문제는 내가 여성이라는 거야.’

    제국 역사를 통틀어 여자가 작위를 하사받은 경우는 손에 꼽는다. 개중 상당수도 아버지나 남편의 작위를 세습받은 경우지, 단독으로 작위를 하사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제국 내에서 L의 평판과 명망, 그리고 명성은 높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고지식한 중립 귀족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기득권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귀족들에게 명분을 줄 수 있어요.”

    “그대가 뭘 우려하는지 안다.”

    “물러주세요. 전하의 마음을 받은 것만으로도 전 족해요.”

    엘레나는 정중하지만 단호히 고사의 뜻을 밝혔다. 그녀로 인해 비난의 화살이 시안에게 돌아가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 또한 감수할 것이다.”

    “전하.”

    시안의 눈빛이 고집스러워졌다.

    “귀족 시해는 중죄지. 그대에게 내린 작위가 최소한의 안정장치 역할은 할 거라 믿는다.”

    대공가라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작위를 하사받은 귀족들을 멋대로 핍박하거나 살해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귀족 회의에 상정되어 작위 박탈에 가까운 논의가 이루어진다.

    시안은 제 역량이 닿는 한 엘레나를 지켜주고 싶었다. 귀족들이 제 것을 지키기 위해 만든 이 법을 역이용해 공작가가 엘레나를 핍박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대가 날 우려하는 것 이상으로 그대를 걱정하고 있다. 거절은 허락지 않겠다.”

    시안의 진심 어린 마음에 엘레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집을 부려 이 작위를 거절한다면 시안 역시 어음을 받지 않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받겠습니다, 전하.”

    “작위는 준남작. 수여식은 외부에서 약식으로 진행하는 걸로 조치하겠다. 살롱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제국이 떠들썩하도록 성대히 맞을게요.”

    기왕 작위를 받기로 결정한 이상 L이 명실상부한 제국 귀족이 되었음을 떠들썩하게 알릴 생각이다. 그것이 시안의 호의에 대한 그녀의 유일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명망과 평판으로 하여금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다음은 사교계야.’

    안 그래도 베로니카를 자극하기 위해 사교계로 나아갈 참이었다. 시안이 하사한 작위는 그녀의 유일한 오점인 신분을 베로니카와 같은 출발선에 서게 해줬다. 이젠 정말로 웅크리고 있던 몸과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할 시기였다.

    “시간이 늦었군.”

    시안은 귀족들이 심어둔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나왔다. 황궁을 너무 오래 비워둘 수도 없는 일이기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게요. 본의 아니게 얘기가 길어졌네요, 전하.”

    “시안.”

    “네?”

    “그리 부르도록.”

    이름을 허락하자 엘레나가 까무러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하의 존함을 어찌 감히…… 전 이대로가 좋아요.”

    “…….”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발, 물러주세요.”

    한때 황비였기에 엘레나는 이런 예법에 민감했다. 시안의 이름이 허락될 수 있는 여자는 오로지 평생을 함께할 반려뿐이었다.

    “그리하지.”

    “네?”

    엘레나가 사슴처럼 눈을 뜨고는 깜빡였다. 매사에 신중한 시안이다. 이리 쉽게 무를 거였으면 말조차 꺼내지 않는 게 옳았다.

    “단, 조건이 있다. 아니, 부탁이라고 해야 옳겠지.”

    “부탁이요?”

    “그대의 진짜 이름을 허락해 줄 수 있겠나?”

    너무 뜬금없는 화제 전환에 어안이 벙벙해진 엘레나가 시안을 멍하니 쳐다봤다.

    ‘설마 내 진짜 이름이 알고 싶으셔서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안을 보자니 확신이 깊어졌다.

    “죄송해요.”

    “어려운 것인가?”

    “진작에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서요.”

    엘레나의 눈길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시안은 지금껏 한 번도 재촉하지 않았다.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엘레나가 먼저 알려주길 묵묵히 믿어주고 기다려 줬다. 이제는 그 기다림에 보답할 차례다.

    “엘레나예요.”

    “엘레나라…….”

    나지막이 읊조리는 시안을 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에게 처음으로 진짜 이름을 알려주는 일도, 그의 목소리를 통해 진짜 이름을 듣게 되는 것도 다 감회가 새로웠다.

    시안은 각인이라도 새기듯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이름 오래도록 간직하도록 하지, 엘레나.”

    * * *

    혁명적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그녀는 제국을 울리는 명성만큼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운영 중인 부티크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영애나 부인들이 찾아왔다. 타국에서도 그녀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금 예약해도 1년 뒤에나 드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을 만큼 밀려 있었다.

    그녀는 일에 쫓기면서도 디자인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머메이드 드레스의 열풍을 만든 건 그녀였지만, 그걸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다른 디자이너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다.

    “아, 멍해.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부티크가 위치한 건물 이 층에서 스케치하던 크리스티나가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정신이 들지 않는다.

    “좀 씻어야겠어. 꼴이 말이 아니야.”

    거울에 비친 제 몰골을 본 크리스티나가 꾀죄죄한 모습에 혀를 찼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눈 뜨고 보기 민망할 만큼 엉망이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 피로감이 싹 가셨다.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머리를 말리며 작업실로 나왔다.

    “어?”

    수건을 구석에 던져놓고 의자에 앉으려던 찰나, 그녀는 디자인 노트 위에 한 장의 쪽지가 붙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욕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쪽지는 없었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씻는 사이에 누군가 작업실을 다녀갔다는 말과 다름없기에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쪽지의 내용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똑똑.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때마침 작업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크리스티나는 흠칫했다. 그녀는 바로 쪽지를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얘기했다.

    “아, 벌써 시간이……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나갈게요.”

    크리스티나는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는 작업실을 나섰다. 그러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거한이 고개를 숙였다. 용병 길드에서 고용한 용병 필이었다.

    “가죠.”

    부티크를 나오자 마부가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 막 오르려던 크리스티나가 발 받침대에 반쯤 걸쳐 놓았던 발을 다시 내렸다.

    “모처럼의 모임인데 마차가 좀 그러네요.”

    “네?”

    크리스티나의 변덕에 마부가 눈을 깜빡였다.

    “요 앞에 마시장 가서 새 마차를 사오세요.”

    “지, 지금 말씀입니까? 약속에 늦으실 텐데요.”

    “늦으면 뭐 어때서요? 저 바쁜 거, 제국민이 다 아는데.”

    “알겠습니다.”

    마부가 서둘러 마시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요 건너편이 마시장이라, 새 마차를 구입해서 오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썩 맘에 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죠.”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마차를 골라온 마부의 안목에 경악한 크리스티나가 마지못해 마차에 올랐다. 출발한 마차가 수도의 가도를 달려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모처럼 만난 지인과 티타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 크리스티나가 부티크로 돌아왔다. 무사히.

    천재 음악가 첸토니오는 최근 지휘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과거와 달리 청력을 잃지 않은 그는 교향곡의 지휘자로 악단과 호흡하며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의 느낌과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지휘가 끝나자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첸토니오는 관객석을 향해 돌아서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 순간 첸토니오는 어느 때보다 설레고 벅찼다. 저 박수 소리를 들으며 서 있는 지금 살아 있다고 느껴졌다.

    연주회가 끝나고 회식을 하자는 단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첸토니오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에 올랐다.

    지친 몸으로 창밖을 보던 첸토니오는 창문에 붙어 있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를 떼어내 읽는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마차가 수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저택에 도착했다. 칼리프의 배려로 구한 이 저택은 인적이 드물고 조용해서 작곡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첸토니오가 도착하자 저택을 관리하는 시녀가 나와서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 크지 않은 소형 저택인 까닭에 한 지붕 아래서 첸토니오와 시녀, 마부, 얼마 전 호위를 위해 고용한 용병까지 총 네 사람이 함께 지냈다.

    연주회 때문에 피곤했던 까닭일까? 귀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택의 불이 꺼졌다.

    조금 더 밤이 깊어져 갈 무렵, 야음을 틈타 저택 밖에서 누군가 서성거렸다. 이윽고 저택의 사방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불꽃이 일어났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불길은 거셌다. 한쪽에 쌓아둔 장작들을 재물 삼아 타오르더니, 저택을 집어삼키듯 삽시간에 번졌다.

    저택의 지붕마저 불길로 타들어가기 직전, 후문을 통해 첸토니오와 용병, 시녀, 마부가 무사히 빠져나왔다. 놀라운 건, 각자 생활하던 공간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네 사람은 불에 타 스러져 가는 저택을 우두커니 지켜봤다.

    “하아, 하아.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불길을 보고 있자니 품에 간직 중인 쪽지의 글귀가 떠올랐다.

    저택 방화 예정. 불을 끄고 일 층에서 대기하다가 탈출.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저 타오르는 화염 속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 * *

    “죄송합니다,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했는데…….”

    아셀라스가 뻘뻘 땀을 흘리며 베로니카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라파엘을 제외하고, 대공가의 제안을 거절한 크리스티나와 첸토니오는 베로니카의 명령대로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어이없이 실패할 수가…….’

    비록 리아브릭과 비교해 한 수 정도 뒤처지는 아셀라스지만 그 역시 어려서부터 영재라고 정평이 자자했던 지자였다.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만큼 어수룩한 자는 아니란 의미다.

    크리스티나는 마차 사고로 위장한 사고사로 제거하려고 손을 써뒀다. 대형 사고로 이어지도록 마차의 바퀴에 나사를 빼뒀는데, 새 마차를 구매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천재 음악가 첸토니오의 생존에는 천운이 뒤따랐다. 저택이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불에 탔음에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베로니카가 나른한 눈길로 새장 속 새를 물끄러미 보았다. 붉은 털이 매력적인 서부 지역의 앵무새다.

    “실패했네요?”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콰직! 기괴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아셀라스가 흠칫 떨었다. 새장에 들어간 베로니카의 고운 손아귀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고하게 울어대던 앵무새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런, 죽어버렸네.”

    “…….”

    아쉬움이나 죄책감 따위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베로니카의 말투에 아셀라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며 베로니카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셀라스가 소파에서 쏜살같이 일어나 베로니카의 지척에 섰다. 허리를 굽실거리듯이 굽혀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삐딱한 눈길로 쳐다보며 아셀라스의 머리를 부채의 모서리로 툭툭 때렸다.

    “이거 장식이에요?”

    “…….”

    “왜 그거까지밖에 생각 못 해요?”

    베로니카가 손끝으로 아셀라스의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밀었다. 모욕적이다 못해 굴욕적일 만큼 비참함이 느껴졌지만 아셀라스는 그녀의 눈빛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제가 바란 건 본보기였어요.”

    “아,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아셀라스도 대공가를 거절하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지 알려주기 위해 제거하려고 들었다.

    “아는데, 왜 그렇게 했어요? 방식이 틀렸잖아요.”

    베로니카가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그, 그건.”

    “그냥 죽였어야죠.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쳐다도 못 볼 만큼.”

    베로니카의 섬뜩한 말에 아셀라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셀라스는 비상식적인 베로니카의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이런 얘길 하는 베로니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다는 것이다.

    “공포란 그런 거예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들거든. 공포에 사로잡히면 대들 생각을 못 하죠.”

    “저, 저는 의심을 받을까 봐…….”

    너무나 뻔뻔한 그녀의 대답에 아셀라스가 고개를 들어서 쳐다봤다. 베로니카가 부채로 그의 뺨을 툭툭 쳤다.

    “그 머리로 어떻게 리아브릭의 후임이 됐나 모르겠네?”

    “…….”

    “의심?”

    베로니카의 표정에는 죄의식 따위 보이지 않았다.

    “의심이라는 건 약자가 강자에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를 의심한다고요? 감히 프리드리히 대공가를?”

    아셀라스는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증거가 나온다 하더라도 대공가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감히 누가 대공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똑바로 하세요, 아셀라스. 또 이런 실수를 저지르면 제가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잖아요.”

    아셀라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죽어 있는 새장 속의 새처럼 자신도 죽을 수도 있단 공포심이 밀려왔다.

    똑똑. 노크 소리에 베로니카가 가보라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셀라스는 머리를 크게 숙였다가 들고서는 건너편 소파로 가서 앉았다.

    “들어와.”

    베로니카의 말에 방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내는 루미너스였다. 한때, 리아브릭의 수족이었던 그는 아셀라스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실무를 돕고 있었다.

    “공녀 전하를 뵙습니다.”

    베로니카를 보곤 깍듯이 인사를 한 루미너스가 아셀라스에게도 가볍게 묵례를 했다.

    “무슨 일이죠?”

    “조금 전에 L이 대대적으로 공표했다고 합니다. 그걸 전해 드릴까 해서요.”

    “한낱 그런 얘기까지 공녀님께서 보고받아야 할 거 같아? 너 주제 파악 못 하지.”

    아셀라스가 인상을 팍 썼다. 남들에게나 신여성이고 묘령의 여주인이지, 그가 보기엔 한낱 마담에 불과했다. 베로니카가 관심을 두기엔 한없이 미천한 여자일 뿐이다.

    “저희가 접촉했던 예술가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뭐?”

    “그거 흥미롭네. 계속해 봐요.”

    옆에 앉아 있던 베로니카가 턱짓을 했다. 뭐라 말을 하려던 아셀라스는 입을 다물며 어서 말하라고 눈빛을 보냈다.

    “화가 라파엘은 L이 운영하는 시크릿 살롱에서 10년간 독점적으로 작품 발표를 하며 살롱에서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아셀라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긍정적인 대화가 오간다고 베로니카에게 보고했는데 보기 좋게 물을 먹은 까닭이었다.

    “크리스티나의 신작 드레스 발표 또한 살롱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L이 시공 중인 바실리카에서 부티크를 오픈하기로 했답니다.”

    “그, 그런.”

    “마찬가지로 음악가 첸토니오 역시 시크릿 살롱에서 추후의 곡을 독점적으로 발표할 예정임을 살롱을 통해 밝혔습니다. 또한 곧 완공되는 시크릿 살롱의 별관에 위치한 공연장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으로…….”

    “거기까지. 거슬리네요, 그 L이라는 자.”

    아셀라스는 보고야 말았다. 말을 자르는 베로니카의 입가에 걸린 섬뜩한 미소를.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그 말이 이토록 가슴에 와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리브가 꽤 애를 먹었던 여자라고?”

    “네, 노블레스 거리 사업 당시에 토지 매입과 천연 대리석 공급 문제로 지장을 준 적이 있습니다.”

    루미너스가 대답했다.

    “리브도 사람이 모질지를 못해. 밟을 때 확실히 밟아놓지 않으니 이런 사태가 오잖아.”

    루미너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삼켰다.

    ‘……밟지 않은 게 아니라, 밟지 못한 겁니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느라 대공가의 자금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또 살롱이 제국 문화의 중심지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L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평판마저 손에 쥐었다. 이런 이유였다고 얘기할까 하다가 관뒀다. 구차한 변명으로 들릴 게 뻔했다.

    “L이라는 자가 신여성이라고 불린다죠?”

    “세간에서는 그리 불린다고 합니다.”

    베로니카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우습네요. 얼마나 보잘것없으면 고작 그런 여자를 신여성이라 부르며 치켜세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아셀라스는 눈치 빠르게 베로니카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격하게 맞장구쳤다.

    “만만히 보시면 안 됩니다.”

    묵묵히 지켜보던 루미너스가 끝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리아브릭마저 곤혹스럽게 만든 L을 얕잡아 보는 두 사람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함이다. 그런 루미너스를 보며 베로니카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조소였다.

    “당신이나 리브의 수준이 L에 미치지 못하니 그런 얘길 하는 거예요.”

    “그, 그건.”

    루미너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베로니카의 신랄한 비판에도 할 말이 없었다. 리아브릭과 더불어 L과 수 싸움에서 패한 건 사실이니까.

    “L은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입니다. 실명도, 출생도 심지어 신분조차 파악이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스스로 무능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요?”

    “…….”

    “잘 들어요. 태생이 고귀한 자들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아요. L이라는 가명 뒤에 숨은 것만 봐도 내세울 만한 신분이 아니란 거죠.”

    신분을 논하는 베로니카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가 그랬고 그걸 당연히 여겼기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갖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눈빛이 변했다. 더없이 도도하고 오만한 눈길이었다.

    “다들 잊었나 본데, 제국의 심장은 대공가예요. 대공가를 중심으로 제국이 움직인다, 이 말이죠.”

    “물론입니다. 대공가야말로 진정한 제국의 태양이죠.”

    아셀라스가 격하게 동의했다. 그에 반해 루미너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작게 끄덕일 뿐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베로니카의 눈빛에서 서늘한 한기가 흘렀다.

    “아니, 당신들은 몰라. 그걸 알면 실패를 하지 않거든.”

    “네?”

    기괴한 미소를 지은 베로니카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예술가들이 노블레스 거리로 오길 거부하면 모두 죽여요.”

    “……!”

    “먹이사슬이란 게 그래요. 최상위 예술가들을 다 죽이면 상위 예술가가 최상위 예술가가 되어 자리를 메우죠. 벌레들이 꼭 그래. 죽이고 죽여도 또 다른 벌레가 그 자리를 대신하잖아.”

    아셀라스는 일반인에게서 볼 수 없는 광오함을 베로니카를 통해 느꼈다.

    ‘……알 것 같아. 왜 공녀가 대공 전하를 쏙 빼닮았다고 했는지.’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프란체 대공도 저리 광오했다. 현존하는 질서에 따르기보단 황제까지 끌어내리면서까지 질서를 만드는 사내였다. 기질은 달랐지만 베로니카는 그런 프란체 대공과 닮아 있었다.

    “머리에 새기세요. 질서는 따르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란 걸.”

    베로니카의 미소가 짙어졌다. 부드러움 속에 잔인함이 담긴 미소였다.

    * * *

    시크릿 살롱 내, 메인 응접실. 나비 가면을 쓴 엘레나를 중심으로 좌우에 칼리프와 라파엘, 그리고 크리스티나와 첸토니오가 일렬로 앉아 있었다. 모처럼 엘레나가 직접 우려낸 홍차를 마시며 티타임을 나누고 있었다.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와주셔서 고마워요.”

    엘레나는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했다. 대공가에서도 노블레스 거리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여겨 맨 처음 접촉을 시도할 만큼 위대한 거장들이다. 그런 그들이 살롱에 남아줬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자꾸 고맙다고 하니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누누이 얘기하지만 L이 살롱의 주인인 한 우린 떠나지 않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절 살게 한 건 L입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크리스티나와 첸토니오는 L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고마움을 드러냈다. 지금의 그들에게는 푼돈일지 모르나, 몇 년 전 엘레나가 베푼 후원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랐다.

    라파엘은 말없이 미소를 지어 제 마음을 내비쳤다. 그가 살롱에 남은 시작과 끝에는 엘레나가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엘레나가 본론을 꺼냈다.

    “다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이에요. 절 믿고 따라주셨는데 그 때문에 화를 입으면 전 살지 못했을 거예요.”

    “욕실에서 씻고 나왔는데 제 책상에 쪽지가 올려져 있더라고요. 그래도 그 덕분에 큰 사고를 면했기에 망정이지 지금도 그 마차를 탔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요.”

    의문의 쪽지 덕에 크리스티나는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만약 평소대로 그 마차를 탔다면 바퀴가 빠져 대형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연주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마차 안에 붙어 있더라고요.”

    “그래요?”

    “쪽지가 아니었다면 전 불에 휩싸여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라파엘을 제외한 크리스티나와 첸토니오는 대공가의 위협을 받았다.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손을 쓴 만큼 제때 대처하지 못했다면 생명에 지장이 갔을지도 모른다.

    “근데 L, 대체 이 쪽지는 누가 가져다 놓는 거예요?”

    “저도 궁금했어요. 어떻게 알고 쪽지까지 남겨놓는지, 그분들이 더 대단해 보여요.”

    엘레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직접 본 적은 없답니다.”

    “L도요?”

    “네, 워낙 신출귀몰한 분들이라서요. 분명한 건 이쪽 분야에서 이분들보다 뛰어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엘레나의 머릿속에 히죽 웃는 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보 단체 마제스티.’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때 엘레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길드에서 취급할 수 없는 정보를 분석하는 데 경이로운 실력을 지닌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집단의 수장이 렌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학술원에서 엘레나를 의심하고 정체를 파악한 것도 어쩌면 그러한 촉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납득했다. 심지어 마제스티는 은신과 암행에도 탁월했다. 은밀하게 크리스티나와 첸토니오 곁에 머무르며 대공가의 수작을 파악해 낸 것만 해도 그렇다.

    새삼 엘레나는 렌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적일 때는 더없이 까다로운 존재였으나, 아군이 되니 이리도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 외출하실 때는 꼭 용병들을 대동하세요. 아직 마음 놓긴 일러요.”

    엘레나의 노파심에 크리스티나가 걱정 말라는 듯 얘기했다.

    “그러려고요. 대부분의 용병이 거친데, L이 보내주신 분들은 말수도 적고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더라고요. 꼭 저한테도 기사가 생긴 기분이에요.”

    “저도요. 같이 계시면 든든합니다.”

    “다행이네요.”

    엘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들에게 붙인 용병들은 휴렐바드가 비밀리에 길드로 찾아가 엄선한 자들이다. 까다로운 휴렐바드의 눈에 든 자들이니 더 얘기해서 무엇하겠나.

    “이거 받으세요.”

    세 사람은 엘레나가 건네는 금빛 무늬가 박힌 봉투를 받았다.

    “초대장이에요.”

    “초대장요?”

    “곧 살롱의 별관이 완공되거든요.”

    “드디어!”

    시크릿 살롱의 별관은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다. 본관과 비교해 네 배 가까이 큰 규모고, 제국에서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양식으로 지어진 만큼 기대도 컸다. 대공가의 노블레스 거리의 선공개에 발맞춰 움직였다. 원 역사대로라면 노블레스 거리가 가져갔어야 할 이목과 관심, 유명세를 뺏어오기 위함이었다.

    “또, 그날은 제게 의미가 있는 날이에요.”

    “의미요?”

    “영광스럽게도 황태자 전하께서 작위를 내려주시거든요.”

    전말을 알고 있는 칼리프를 제외한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그 말은 즉, 엘레나가 제국의 귀족이 된다는 말이었다.

    “L이 귀족이 되다니…… 왜 제가 눈물이 날 만큼 기쁠까요? 어서 돌아가야겠어요. L을 위해 준비한 드레스가 있는데, 그걸로 부족한 것 같아요.”

    “칼리프 님께서 신곡 발표를 준비하라고 한 게 이 때문이었군요. 걱정 마십시오. 이미 악단과 호흡을 맞추고 있었으니, 별관의 규모에 어울리는 최고의 연주회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

    엘레나는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크리스티나와 첸토니오를 보며 진한 감동을 느꼈다. 라파엘도 진심으로 축하했다. 개인적인 관계를 숨기고자 말을 아꼈지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에 담긴 진심은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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