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8/30)
  • 제21장 전야 (1)

    수도 외곽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공가의 기사들이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사냥을 나갔던 황태자 시안이 사고 현장을 목격했고 직접 조사에 나섰다.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사고 현장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라인하르트가의 기사단장 월포트의 부러진 애검이 발견된 것이다. 심지어 죽은 대공가의 기사 루카스의 몸에 새겨진 상흔이 패도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월포트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증거와 정황이 대공가 기사들의 살해 사건의 흉수로 라인하르트가를 지목했다.

    라인하르트가를 이끄는 크롬 공작은 모함이라며 부정했다. 실종된 월포트는 몇 달째 가문에 돌아오지 않아 기사단장직에서 해임했다며 이 일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답답한 건 대공가도 마찬가지였다. 시안의 개입으로 인해 사건 현장 조사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다. 제국의 법에는 수도 인근 지역은 귀족들의 반란을 고려해 기사단을 움직일 시 반드시 황실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걸 대공가가 어긴 것이다.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 엘레나를 쫓으려던 리아브릭의 계획은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뒤늦게 조사에 착수했지만 흔적은 모조리 지워진 뒤였다. 더구나 엘레나의 배후에 라인하르트가의 개입이 의심되면서 상황은 미궁에 빠져들었다. 대공가 소속 기사의 죽음에 월포트가 관여된 것으로 알려지며 제국의 축을 이루는 두 가문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 현장을 조사하던 시안에 의해 리아브릭의 존재가 양지로 드러나고 말았다. 실각을 당한 그녀가 버젓이 대공가의 기사단을 통솔한단 얘기가 알려지자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리아브릭의 실각을 주도했던 서부와 동부, 남부의 수장 격인 보로니 백작, 노튼 자작, 후안 남작이 주축이 되어 대공가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결국 프란체 대공까지 전면에 나서서 성난 귀족들을 다독였다. 이번 사건은 리아브릭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일이며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또한 제멋대로 기사단을 움직인 그녀는 그에 합당한 무거운 책임을 질 거라고 해명했다.

    황태자비 선출식과 관련된 소문도 떠돌았다. 의문의 사고가 황태자비 선출과 관련된 두 가문의 대립일지도 모른단 뜬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엘레나는 자취를 감추었다.

    황태자비 선출식 최종 경합을 기점으로 베로니카 공녀가 며칠째 저택에 돌아오지 않자 대공가의 가신들이 의문을 가졌다.

    리아브릭의 후임으로 대공가의 실무를 맡은 아셀라스는 공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중이라며 둘러댔다. 베로니카가 두문불출하자 사실 병이 악화된 것이 아니라 내연남이 있어서 최종 경합을 포기했다는 등 근거 없는 악소문이 나돌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마차 한 대가 대공가에 입성했다. 백마 여섯 마리가 끄는 호화스러운 마차는 황실의 의전용 마차보다도 더 화려했다.

    주목을 받으며 저택 앞에 선 마차를 보고 제복을 차려입은 기사가 다가가 문을 열었다. 금발의 여인이 저택을 한 차례 올려다보고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마차에서 내렸다.

    “공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하녀와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베로니카가 무표정하다 못해 서늘함이 감도는 눈빛으로 그들의 면면을 훑으며 말했다.

    “거슬려.”

    “네?”

    “정원사에게 일러 튤립과 데이지를 다 뽑으라고 해.”

    집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분명 공녀 전하께서 생기 있는 튤립이나 데이지를 심으시라고…….”

    “난 그런 적이 없는데?”

    “…….”

    집사는 말문이 막혔다. 정원에 심어져 있던 백합을 없애고 튤립과 데이지를 심으라고 한 건 분명 베로니카 공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집사.”

    “네, 공녀 전하.”

    베로니카가 표정을 굳히자, 집사가 흠칫 놀랐다. 지독한 눈빛이 그를 후벼 팠다.

    “너는 내 말에 네라고 대답하면 돼. 네가 자꾸 토를 달면 내가 널 가만둘 수 없잖아.”

    “죄, 죄송합니다.”

    집사가 고개를 조아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베로니카가 표정을 풀었다.

    “난 정원에서 백합의 그윽한 향기가 맡고 싶어. 이틀 안에.”

    “이, 이틀 말씀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베로니카의 눈매가 가늘어진 걸 본 집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정정했다. 때마침 그녀를 에스코트했던 기사가 마차에서 새장을 꺼내 왔다. 베로니카는 지저귀는 파랑새를 내려다보며 시린 미소를 지었다.

    “가죠.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네, 공녀 전하.”

    * * *

    쏴아아아. 익숙한 잠자리가 아니라 그런가, 유독 크게 들리는 빗소리에 엘레나가 잠에서 깼다. 시크릿 살롱 본관에 위치한 이곳은 L로 살아갈 엘레나가 앞으로 생활할 보금자리였다. 아직은 낯설고 어색한 면이 있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긴장이 풀렸나 봐. 온종일 자는 걸 보니.”

    엘레나는 늦잠도 모자라 시시때때로 낮잠까지 자는 제 모습이 어색했다. 회귀한 이후에도 황비 시절의 습관을 놓지 못했던 엘레나다. 늦잠은커녕 일찍 일어나 몸단장하는 게 숨 쉬는 것만큼 당연했다.

    근데 웬걸. 살롱에 온 이후로 그런 습관이 싹 사라졌다. 오죽하면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엘레나를 칼리프가 걱정스러워할 정도였다.

    “이만 일어나야지.”

    엘레나가 이불을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인기척을 느꼈는지 누군가 노크했다.

    “아가씨, 저 메이예요.”

    “들어오렴.”

    메이는 하녀 차림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영애들이 입는 것에 비하면 단조로웠지만 하녀였을 적엔 꿈도 못 꿀 의상이었다.

    “또 밖에서 기다린 거야?”

    “네.”

    “내가 언제 깰 줄 알고 기다려. 그러지 마.”

    엘레나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타박했다. 더는 메이가 하녀 일을 하지 않길 바랐다. 더 이상 공녀의 신분도 아니거니와 그간 고생한 메이에게 더 나은 생활을 선물하고 싶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에요. 앞으로도 쭉 아가씨를 모시고 싶어요.”

    “고집하고는.”

    엘레나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이야 저 옹고집을 꺾을 수 없지만 얼마간일 뿐이다. 엘레나는 메이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언젠가 시크릿 살롱의 운영에 꼭 필요한 역할을 맡길 계획이다.

    “새로운 소식은 없고?”

    “……베로니카 공녀가 돌아왔대요.”

    “그래?”

    엘레나는 담담했다.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황태자비 선출식 최종 경합 불참과 장기간 부재까지 겹쳤으니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보고 싶네.’

    원수나 다름없는 베로니카를 떠올리면서도 엘레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지하 감옥에서 비참히 죽어가던 때와 비교하면 많은 게 달라졌다.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 L. 문화 예술을 선도하는 신여성. 수도의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부.

    엘레나가 지닌 명성에서 기인한 사교계 영향력과 인맥, 그리고 문화적 파급력은 한낱 대공가란 배경을 둔 게 전부인 베로니카를 발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앤은?”

    “지금쯤 공국에 다다랐을 거예요.”

    엘레나는 시녀 앤을 제국에서 추방했다. 대공가 기사들이 죽은 사고와 관련해 의심을 받는다고 하니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에밀리오는 살고 싶으면 제국을 떠나는 방법밖에 없다면서 좋은 말로 구슬려 배에 태웠다.

    목적지는 마리아나 군도. 구전동화에서 지상낙원으로 언급되나 실상은 해적이 들끓고 파도가 세서 어업조차 쉽지 않은 버려진 땅으로 보내 버렸다.

    “에밀리오 님을 보러 가자꾸나.”

    “네, 아가씨.”

    엘레나는 세안을 하고는 크리스티나가 디자인한 일상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 가볍게 치장한 엘레나가 침실을 나섰다. 원칙적으로 살롱 내부에서는 가면을 써야 하지만 본관 최상층은 예외였다. 살롱의 실무를 담당한 에밀리오와 칼리프 같은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똑똑. 엘레나가 노크하곤 집무실로 들어갔다.

    “저예요.”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서류를 검토하던 에밀리오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몸은 좀 괜찮으신 겁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여전히 잠이 쏟아지는 것만 빼고요.”

    “다행이군요. 북방 지역에서는 잠이야말로 최고의 휴식이라고 여긴답니다. 졸리면 꼭 주무십시오.”

    엘레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메이가 홍차를 내왔다.

    “제가 부탁드렸던 건 알아보셨나요?”

    “예, 은인의 말씀대로 제국 북부 도시 카디프에 그런 이름과 성을 지닌 귀족 내외가 살고 있었습니다.”

    찻잔을 쥔 엘레나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웬만한 일로는 평정심이 깨지지 않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생활을 묻는 거라면 사업이 번창한 덕에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말로는 부부 금실도 좋고, 참 사람이 바르다고 하더군요.”

    “…….”

    “혹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 엘레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제 부모님이세요.”

    엘레나는 그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두 분을 떠올렸다. 무사히 탈출하셨는지, 살아 계시는지, 잘 지내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가슴속에 묻은 말이 응어리처럼 맺혀 있었다.

    살롱을 열고 작게나마 영향력을 가졌을 때 당장에라도 두 분을 찾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그녀는 꾹 참았다. 자칫 그녀의 복수에 부모님마저 화를 당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워서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미루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에밀리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제라도 만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당장에라도 만나러 갈 듯 보이던 엘레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엘레나는 붉은 눈시울을 뒤로하고 감정을 추슬렀다.

    “살아 계셔서 좋고, 잘 지내신다니 더 바랄 게 없어요.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때 찾아뵐게요.”

    “은인.”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하게 굴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대공가는 아직 건재해. 리아브릭이 정말 실각되었는지도 의문스럽고, 프란체 대공은 이제 겨우 전면에 나섰어. 참아야 해. 자칫 나 때문에 부모님이 위험에 처할 수 있어.’

    엘레나와 대공가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대공가가 건재하다. 부모님의 존재가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럴 바엔 상봉을 미루는 편이 낫다. 이 복수가 끝난 뒤 찾아뵈어도 늦지 않는다.

    ‘그래, 그편이 나아.’

    지금은 좀 아프지만, 가시에 찔린 듯 욱신거리지만…….

    “두 분은 제가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에밀리오 님께서 그래 주신다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혹시 두 분에 대해 더 들으신 얘기 있나요?”

    에밀리오는 전해 들은 얘기를 빠짐없이 해주었다. 북부 지방에 정착한 그들은 와인 사업에 손을 댔다고 한다. 발효 중인 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해 주정 강화 와인을 개발했는데, 소규모 상점에서 시작해 이제는 북부 귀족들에게 납품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했다.

    엘레나는 연고도 없는 이국땅에서 자리를 잡으신 두 분이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포트 와인의 주조법은 엘레나가 준 편지에 적혀 있었지만, 그걸 성공시킨 건 두 분의 역량이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때, 외출했던 칼리프가 돌아왔다.

    “저 왔어요. 어? 너도 와 있었냐?”

    칼리프가 건너편 빈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지친 몰골에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선배, 얼굴이 반쪽이네요. 그날 일 때문에 그래요?”

    “어, 겁이 많아서 그런가?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날 본 피랑 시체들이 아른거려서 잠들기가 영 쉽지 않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엘레나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목격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의 공포를 겪었으니 장성한 남자라 할지라도 정신적으로 이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과받으려고 엄살 부린 건 아닌데.”

    머쓱해진 칼리프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지난 얘긴 그만하고. 다음 계획은 뭐냐?”

    “숨 고르기요.”

    엘레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한동안 L로 활동하면서 살롱의 내실을 좀 다질까 해요. 대공가의 썩은 부위가 곪을 시간도 필요하고요. 그러면서 함정을 팔 생각이에요.”

    “덫을 놓겠다?”

    “지금까진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상황이 변했어요. 사냥은 제가 할 거예요.”

    그간 엘레나는 제약이 많았다. 리아브릭의 감시를 피해 계략을 획책하다 보니 선택의 폭이 좁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대공가의 감시와 억압에서 벗어난 지금 엘레나는 주도적으로 판을 짤 수 있게 됐다.

    “에밀리오 님이 주신 재무제표랑 사업서 확인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부동산 투자 수입이 제 기대를 웃돌더군요.”

    “네. 비싸게 매입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비싸게 매입하려는 귀족이나 상인들이 줄을 서더군요.”

    “전염병이나, 극심한 가뭄이 들지 않는 한 부동산은 배신하지 않는단 말이 맞나 봐요.”

    엘레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최근 살롱 일대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본관보다 더 웅장하고 고아한 별관이 미관을 점점 드러냈고, 장방형 다목적 거대 건축물인 바실리카가 그 위용을 뽐내자 일대 땅값이 요동쳤다.

    ‘여력이 되는 대로 주변 땅과 건물을 매수해 두길 잘했어.’

    엘레나는 대공가가 노블레스 거리 사업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이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헐값에 사들인 빈민가의 땅들이 금싸라기가 되는 과정을 보며 부동산 투자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리하여 L의 이름으로 수도에 사들인 땅과 임야, 건물만 백 채가 넘는다. 그 외에 되팔아서 얻은 차액만 하더라도 새로 살롱을 짓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명실공히 제국 최고의 재력가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았다.

    “선배.”

    “왜 또 그렇게 불러. 나 일 많다. 딴 애 시켜.”

    “남들이 보면 악덕 고용주로 오해하겠어요. 딴 게 아니고 거장들하고 자리 좀 주선해 주세요.”

    소파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져 있던 칼리프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왜? 너 진짜 나 해고하려고?”

    “넘겨짚지 말고요. 교분 좀 쌓으려고 그래요.”

    “교분?”

    “제게 후원을 받았다곤 하지만 언제까지 그것에 연연할 순 없잖아요.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거장의 마음인데, 지금부터라도 가깝게 지내보려고요.”

    학술원 시절부터 아트 중개사 칼리프를 통해 시대적 거장들을 후원하고 그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대적 거장들의 보금자리, 시대를 선도하는 예술 거리,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 중심지.

    엘레나가 그리는 그림이 완성되면 노블레스 거리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예술적 안목을 중요시하는 귀족들은 살롱을 중심으로 생겨난 이 거리를 찾아오게 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일정 잡아볼게.”

    “빌렘 백작가랑 바스타슈 가문에 기별도 좀 넣어주세요. 같이 봤으면 한다고요.”

    칼리프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전하랑 렌을 같이?”

    “네, 의논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엘레나가 살롱으로 도주한 사이에 시안과 렌의 합작으로 라인하르트가를 끌어들였다. 덕분에 엘레나에 대한 관심을 돌리는 데도 성공했으며 황실에 보고 없이 기사단을 움직인 대공가는 꽤 곤란해졌다. 엘레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좀 더 대공가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싶었다. 그러자면 그 두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듣다 보니 서운하네. 전하야 그렇다 쳐도 렌하고도 상의하는데 나하고는 안 하냐?”

    “굳이…….”

    “얘 말하는 거 보소. 일단 얘기나 해봐. 아까 말하던 그…… 맞아, 함정. 그래, 함정 얘기부터 다시 해보자고.”

    팔짱을 낀 칼리프가 눈을 부릅떴다. 상의하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기미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엘레나가 말을 꺼냈다.

    “대공의 야망을 부술 거예요.”

    “좋지, 좋아. 야망 부숴야지. 근데 대공의 야망이 뭔데?”

    엘레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는 프란체 대공의 진짜 목적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섭정이요.”

    “뭐?”

    “황제를 대신해서 통치권을 맡아 제국을 다스리는 일이요.”

    “딸꾹!”

    심장이 철렁할 만큼 놀란 칼리프가 딸꾹질을 해댔다.

    * * *

    베로니카가 떠난 안가는 을씨년스러웠다. 입구의 호화 마차가 아니었다면 버려졌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스산했다.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음침한 지하 감옥에 프란체 대공의 발소리가 울렸다.

    “사,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잘할 수 있어요!”

    “제발, 꺼내주세요. 대공 전하! 뭐든 다 불게요. 네?”

    쇠창살 안에 갇힌 이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프란체 대공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이곳에 갇혀 있다는 것 자체가 대공가에 대항하거나, 쓸모가 없는 자들 또는 불복한 자들이란 의미였다. 복도 끝에 멈춰 선 프란체 대공이 쇠창살 너머를 내려다봤다.

    “꼴이 우습게 됐군.”

    감금으로 인해 반쪽짜리 몰골이 된 리아브릭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단정했던 드레스는 더럽혀져 있었다. 대공가의 브레인으로 제국을 뒤흔들던 여장부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쯧쯧, 한낱 공국의 근본도 모를 계집애에게 그 꼴을 당하다니.”

    “…….”

    “음모의 리아브릭이란 명성에 거품이 많이 끼었던 모양이야. 아니면 알량한 성공을 맛보더니 오만해졌던지.”

    프란체 대공의 모욕적인 언사에 리아브릭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이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비참한 건 저 말에 한마디 부정도 할 수 없을 만큼 엘레나에게 처참히 짓밟혔다는 사실이었다.

    “……죽여주세요.”

    “죽여달라?”

    프란체 대공이 픽 하고 비웃었다.

    “이거 곤란하군. 날 너무 자비롭게 본 것 아닌가?”

    “…….”

    “황실에서 무단으로 기사를 움직인 걸 두고 막대한 과징금을 내라는군. 그뿐인가? 자네가 기사단을 지휘한 걸 두고 귀족들이 말이 많아.”

    리아브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책이었고 실패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보며 프란체 대공이 비아냥거렸다.

    “이 안을 둘러봤나? 여기 갇힌 자 중에 절반은 자네의 솜씨지.”

    “저, 전하.”

    “계속 이 안에서 썩게. 매일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된 자신을 돌아보며 절망하라고, 리아브릭.”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자 안 그래도 파랗게 질려 있던 리아브릭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프란체 대공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이죽거렸다.

    “또 모르지 않나? 세월이 흘러 내 마음이 변할지. 그때 알량한 자네의 재능이 생각나서 꺼내줄 수도 있지.”

    “제발…….”

    프란체 대공은 들릴 듯 말 듯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돌아섰다. 이윽고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깔려 있던 정적이 죄수들의 울부짖음에 깨졌다.

    “너, 너 리아브릭이었어?!”

    “네가 날 여기 가뒀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죽여 버리겠어! 널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으아!”

    쇠창살 안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광기를 부렸다. 프란체 대공의 말대로 이들 중 절반은 리아브릭의 음모에 속거나, 적대시하다가 끌려와 이곳에 갇힌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해.”

    리아브릭이 다리를 끌어당기고는 몸을 굼벵이처럼 말았다.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공포와 절망을 겪고 있는데, 원한을 가진 죄수들의 욕설, 모욕, 비하, 멸시가 쏟아지자 정신적으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리아브릭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악에 받친 죄수들을 더 자극할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작정했는지 그녀의 정신을 부숴 버리려는 듯 더욱 격렬해졌다. 아주 오래도록.

    * * *

    대공가의 공기가 변했다. 대외적으로 시끄러운 사건도 한몫했지만 꼭 그 때문은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베로니카의 변덕에 다들 숨을 죽였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기점으로 베로니카는 다른 사람이 됐다. 행여 그녀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다들 설설 기었다.

    “아가씨, 커피 내왔습니다.”

    커피를 내오면서도 시녀는 항상 의문스러움을 떨치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홍차를 즐겨 마셨다. 오죽하면 대공가의 진상품 중에 홍차가 꼭 껴 있었을까. 한데, 어느 날부터 베로니카는 홍차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쓰다고 여겨질 만큼 진하게 우려낸 커피만 마셨다.

    침실과 응접실의 인테리어도 싹 바꿨다. 후원의 튤립과 데이지는 뽑아버리고 그곳에 모조리 국화를 가져다 심었다. 그 과정에서 시일을 맞추지 못한 정원사가 해고됐다.

    베로니카는 전신 거울에 비친 신상 머메이드 드레스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더라도 날 위해 존재하는 드레스 같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쩜 이리도 매력적이신지 모르겠어요.”

    시녀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다. 베로니카는 그러한 찬사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이 드레스를 처음 디자인한 자가 크리스티나라고?”

    “수도에서는 혁명적 디자이너라 불리며 영애들의 주문이 줄을 잇는다고 해요.”

    “대공가로 오라고 해.”

    “네, 아가씨.”

    베로니카는 복귀 후 처음 접한 머메이드 드레스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몸매의 선을 살리며, 적절한 노출까지 곁들여 자신의 미모를 한껏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류작이 아닌, 머메이드 드레스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크리스티나의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단 열망에 휩싸였다.

    치장을 마친 베로니카가 소파에 앉아 시녀가 내온 커피를 음미할 때였다.

    “어? 어!”

    구석에서 새장 안에 쌓인 새똥을 치우려던 막내 시녀가 그만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낯선 손길에 불안감을 느낀 파랑새가 새장 밖으로 나온 것이다.

    파랑새는 그간 새장 안 생활이 답답했었는지 요란하게 지저귀며 응접실 곳곳을 배회하며 날아다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막내 시녀는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키보다 높게 날아다니는 새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얼른 잡아서 도로 넣어둘게요.”

    막내 시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새를 잡으려 발악했다. 이 일로 체벌이 내려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베로니카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뗐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근데 내 시녀는 안 돼.”

    “아, 아가씨.”

    안 그래도 창백했던 막내 시녀의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질렸다.

    “장롱 문 열어.”

    베로니카의 한마디에 옆에서 긴장하고 있던 시녀들이 후다닥 장롱을 열었다. 주로 외부인들이 겉옷을 걸어놓는 용도로 쓰이다 보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집어넣어.”

    “아,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신 이런 실수 안 할게요.”

    “다시 안 할 짓을 왜 했니? 가둬.”

    베로니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녀들이 달려들어 애걸복걸하는 막내 시녀를 장롱 안에 욱여넣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자물쇠로 잠가. 한 사나흘 갇혀 있다 보면 정신이 좀 들겠지.”

    장롱 안에서 들려오는 막내 시녀의 애원을 무시하며 베로니카는 몸을 일으켰다. 파랑새를 잡아두라 일러놓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복도를 가로질러 그녀가 도착한 곳은 리아브릭 대신 대공가의 실무를 맡고 있는 아셀라스의 집무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 전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베로니카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셀라스가 마주 앉았다.

    “아버지께 얘기 들었죠?”

    “네, 실무는 공녀 전하와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상의라니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베로니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남작은 의견만 제시하면 돼요. 판단은 제가 하고요.”

    “제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네요.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셀라스는 비굴하게 웃으며 철저히 베로니카에게 복종한단 뜻을 보였다. 베로니카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처세술에 능하시네요.”

    “주제 파악을 잘하는 거지요.”

    아셀라스가 비실비실 웃었다. 비대한 몸집에 걸맞지 않게 간사함이 묻어났다. 리아브릭의 실각 이후 가장 유력한 후임자는 아틸이었다. 리아브릭 못지않게 분석 능력이 뛰어나며 결단력과 행동력을 갖췄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정작 후임자로 아셀라스가 내정됐다. 그 이유가 상대에 따라 숙일 줄 아는 유연함 때문이었다.

    “왜 아버지가 제게 실무를 맡긴지 아세요?”

    “제가 어찌 대공 전하의 깊은 속을 다 헤아리겠습니까. 그저 믿고 따를 뿐입니다.”

    “내가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이에요. 이 생각이.”

    베로니카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쿡쿡 찌르는 시늉을 했다.

    “누구도 못 하는 일이죠. 아버지가 그랬듯이, 고귀하게 타고난 저만이, 대공가의 후계자만이 가능한 생각들이거든요. 천한 것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그런 생각이요.”

    베로니카의 만면에 미소가 진해졌다. 그 의미심장함이 아셀라스는 어째서인지 꺼림칙했다.

    “리아브릭이 왜 실패한 줄 아세요? 간단해요. 끼리끼리 논다고, 제대로 밟을 줄 몰랐던 거죠.”

    “…….”

    “나라면 눈도 못 마주치게 밟아놓았을 거예요. 무자비하게. 인간의 공포심이란 게 그렇거든요.”

    아셀라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입술을 핥는 베로니카의 행동과 눈빛에서 일반적인 귀족가의 영애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기가 보였다. 그것도 잠시, 베로니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로 돌아왔다.

    “그러고 사탕을 줄 거예요. 더 발악하게. 주인의 칭찬을 갈구하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요.”

    “…….”

    “제 말 알아들으셨죠?”

    “알다마다요. 공녀 전하의 말씀이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바람직한 자세예요.”

    베로니카는 본격적으로 대공가의 실무와 관련된 논의를 시작했다.

    “노블레스 거리의 완공 시점이 언제죠?”

    “일부 공개 가능 시기까지 반년 예상하고 있습니다. 완공까지는 일 년 정도 남았고요.”

    “앞당겨요.”

    “예? 그건 현장 사정상…….”

    “판단은 내가 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요.”

    이미 시기를 앞당겨 공사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그래서 반년 뒤, 일부 개장이 가능하도록 맞췄거늘 베로니카는 그조차도 앞당기라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아셀라스는 그리하겠다고 했다. 제 안위를 위해서라도 아랫것들을 더 다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앞당겼으니 준비도 서둘러야겠죠? 노블레스 거리의 품격을 상징할 만한 거장도 데려와야겠어요.”

    “생각해 두신 자라도 있으신지?”

    “화가 라파엘,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음악가 첸토니오.”

    베로니카가 고려해 둔 자들을 읊었다. 귀족 사회에 오르내리는 거장들은 귀족만이 출입이 가능한 노블레스 거리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접촉해 보겠습니다.”

    “돈이 아니라, 명예를 약속하세요. 예술가들은 습관처럼 배부르면 꼭 명예를 바라더라고요, 버러지처럼.”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대공가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넣어준다고 하면 당연히 올 거예요. 아니, 자존심마저 버리고 몰려오겠죠.”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셀라스를 보며 베로니카가 생각난 게 있는지 말을 덧붙였다.

    “아, 만약 그래도 오지 않는다?”

    베로니카의 눈빛이 더없이 싸늘해졌다.

    “부숴 버리세요. 대체품은 또 구하면 그만이니까요.”

    * * *

    “선배!”

    살롱 최상층에 위치한 응접실 문을 연 엘레나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지난 삶과 현생을 통틀어 엘레나에게 가장 편안한 안식을 주는 남자와의 만남이 주선되었다.

    “오랜만이에요, 루시…… 아니, L.”

    라파엘은 아직 L이란 이름이 입에 잘 붙지 않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비단 이름뿐이 아니었다. 루시아로 변장하지 않은 채 마주한 엘레나는 미묘하게 낯설었다.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고귀함과 품격은 그간 기억 속 모습과 달라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하고 싶은 말 많은 거 알아요. 묻고 싶은 것도 많을 거고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 얘기해 드릴게요.”

    엘레나는 지금 라파엘이 느끼고 있을 혼란을 이해했다. 몇 달 전, 살롱에서 만났을 때 넌지시 베로니카의 대역이란 사실을 밝혔다.

    ‘그땐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

    렌과의 선약으로 해명할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못 볼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후회도 들었다. 엘레나는 이제라도 라파엘에게 못 한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베로니카의 배역이 된 계기, 루시아로 위장한 이유, 살롱을 세우고 L이 되어 복수를 준비한 일까지. 참 할 이야기가 많았다.

    “좀 더 일찍 얘기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얘기해서 미안해요.”

    “아뇨, 말 못 할 상황이었고 이유가 있었잖아요? 이제라도 얘기해 주셨으니 전 됐습니다. L의 진짜 이름이 뭐든, 신분이 뭐든 제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라파엘은 특유의 안온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엘레나의 심신은 편안해졌다.

    “선배는 늘 한결같아요. 그래서 선배랑 함께하는 시간이 편한가 봐요.”

    라파엘이 쓰게 미소를 삼켰다. 편안한다는 저 말이 그에겐 상처로 다가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떨어져 있다 보면 엘레나를 향한 마음이 식을 줄 알았다. 한데 웬걸, 오늘 보자마자 뭉클한 감정이 처음 그때처럼 되살아났다.

    그날, 진짜 공녀가 아닌 대역이라는 말에 라파엘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했다. 신분의 벽이 사라진 지금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해보고 싶었다. 거절하더라도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막상 엘레나를 보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멀어질까 봐. 불편해할까 봐. 실망할까 봐.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에서 방해했고 결국 라파엘은 지금껏 해왔던 모습으로 엘레나의 앞에 서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가에서 제게 사람을 보냈더군요. 후배가 보낸 건가 싶어서 만나봤는데 아닌가 보네요.”

    “저 아니에요. 대공가에서 무슨 얘길 했죠?”

    라파엘이 대공가를 언급하자 엘레나의 태도가 변했다.

    “노블레스 거리에 저보고 들어오라더군요.”

    “……!”

    “혹시 후배가 보낸 게 아닌가 싶어서 생각해 본다고 하고 돌려보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거부할 걸 그랬군요.”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노블레스 거리의 개장까지 아직 일 년 반이 남았다. 초기 계획은 일 년 뒤 완공이겠지만, 재개발 사업이라는 게 막상 진행하다 보면 연기가 되는 경우가 잦거니와 엘레나의 방해도 한몫했다. 그걸 감안해서 반년 뒤쯤에야 거장들에게 접촉할 거라 내다봤는데, 대공가는 그녀의 예상보다 한참 앞섰다.

    “이상하네요. 아직 완공까진 멀었는데 벌써 섭외하려 들다니.”

    “그날 들은 얘기로는 시일을 앞당겨 일부 공개를 한다고 했어요.”

    “일부 공개요?”

    대공가가 일부 공개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을 거라 생각했다. 살롱과 그 일대 거리의 발전, 자금의 압박.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자된 만큼 노블레스 거리는 대공가에게도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다. 그 와중에 야심 차게 사업을 추진하던 리아브릭이 실각되는 불화마저 겪었다. 또한 시크릿 살롱을 중심으로 그 일대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자 노블레스 거리가 설 자리를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예, 그러며 저보고 노블레스 거리로 들어와 사업에 일조하라더군요. 대공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라고. 더없는 명예가 될 거라면서요.”

    엘레나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쳤다. 라파엘은 문화와 예술의 부흥기를 이끈 시대의 거장이다. 그런 라파엘에게 대공가의 역사를 운운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참 보는 눈도 없지. 선배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대단한 거장이에요.”

    “…….”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 화나.”

    엘레나는 정말 화가 난 것인지 손부채까지 만들어서 흔들었다. 자신을 위해 열을 내는 그녀를 보는 라파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엘레나가 그를 빤히 보다가 말을 던졌다.

    “그럼 위대하다고 하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네요.”

    “왜요? 진짠데. 저 거짓말 안 해요, 아니, 못 해요. 시대가 거듭할수록 선배는 더 대단한 예술가로 기록될 거예요. 제 말 믿으세요.”

    엘레나의 눈빛에는 정말 그런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싶은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그 진심을 알기에 라파엘이 악의 없이 웃었다.

    “그랬었나요? 전 늘 속기만 해서. 저한테 다 비밀로 하셨잖아요.”

    “그건…… 아, 꼭 양치기 소녀가 된 기분이네.”

    지은 죄가 있는 까닭에 엘레나는 뭐라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옴짝달싹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라파엘의 미소가 진해졌다.

    “농담입니다. 이런 저를 알아봐 주고 믿어준 게 후배인걸요. 그러니 안 가요.”

    엘레나가 미묘한 표정으로 라파엘을 바라봤다. 더없이 진지한 눈동자로 라파엘이 말했다.

    “가지 말라고 말해줘요.”

    “……가지 마세요.”

    엘레나는 자신의 진심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단순히 좋은 선배이자, 시대를 이끄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를 잡는 게 아니다. 복수만을 보고 달린 엘레나에게 라파엘은 과거와 현재를 잇고 안식을 주는 존재였다.

    엘레나의 만류에 라파엘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애초에 떠날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간 대공가와 엘레나의 악연을 다 듣고서도 갈 만큼 그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안 가요.”

    “선배.”

    “이 살롱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맘껏 복수하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 말하고요.”

    라파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 미소에 엘레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고마움을 느꼈다.

    “선배, 무르기 없어요.”

    “더 좋네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 * *

    본격적으로 살롱의 업무에 손을 대기 시작한 엘레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장들을 만나 소통하고 별관 개장을 준비하는 일만 하더라도 벅찰 정도였다. 차후 살롱 내 발표회나, 토론회에 참가까지 하면 몸이 두 개라도 버텨낼지 미지수였다.

    “아가씨, 즐거워 보이세요.”

    “그래 보여?”

    “예, 대공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에요.”

    메이의 말대로 엘레나는 하루하루가 정말 보람차고 즐거웠다. 빡빡한 일정 탓에 몸은 비록 피로했지만 활력이 넘쳤다.

    엘레나는 혁명적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크리스티나와 만났다. 엘레나에게 호의적인 그녀는 대공가가 살롱을 나오라 제안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제가 거길 왜 가요? 제 뮤즈인 L이 여기 있는데. 내 작품의 영감 그 자체인데 미쳤다고 거길 가요?”

    크리스티나는 여지조차 주지 않고 대공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다른 두 거장도 마찬가지였다.

    “병이란 게 치료 시기를 놓치면 영영 고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 귀가 먹을 때까지는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엘레나의 후원 덕에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교향곡의 아버지 첸토니오는 그 은혜를 무엇과도 갚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외의 거장들을 따로 만났지만 추가적으로 대공가에서 접촉을 시도한 예술가는 없었다. 그 말은 대공가가 라파엘, 크리스티나, 첸토니오 세 사람을 제일 높게 평가하고 접촉했단 의미였다.

    “지금쯤 꽤 곤혹스러워하겠네. 한낱 예술가한테 대공가가 거절당했으니 오죽 자존심이 상할까?”

    대공가란 지위를 앞세우면 너 나 할 것 없이 머리를 조아리니 그 콧대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대공가가 보기 좋게 까였다. 엘레나로서는 속이 뻥 뚫리듯 통쾌했다.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살롱 별관이 개장하고 한 달 뒤면 바실리카의 완공이야. 거장들의 부티크나 가게 배정을 서둘러야겠어.”

    엘레나는 바실리카의 로얄층과 구역을 거장들에게 내어줄 계획이었다. 건축가 디아즈에게 바실리카 건축을 의뢰할 때부터 준비했던 일이다. 거장들이 그곳에 부티크나 가게를 열면 귀족들이 살롱 일대의 거리에 몰릴 수밖에 없다. 유행과 희소성에 민감한 귀족들이 아닌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안과 렌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서신을 뜯어서 본 엘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일이구나.”

    셋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됐다.

    엘레나의 일과는 이른 아침에 신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도의 사정을 파악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기 위함이다.

    엘레나는 신문 일 면을 장식한 집회 얘기에 주목했다. 최근 수도의 광장을 찾은 연설가들이 제국민을 대상으로 사상을 전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들 대다수는 학술원 출신의 평민이나, 몰락 귀족 자제들이었다. 자칼린과 교류하며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그들은 끊임없이 계몽사상을 주장했다. 신분을 떠나서 누구나 배워서 알아야 하며, 깨달아야 한다. 타인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라.

    너무도 당연한 듯 보이지만 귀족을 제외하고 제 의지로 살아가는 제국민은 많지 않다. 쳇바퀴 돌듯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먹고사는 게 우선이다 보니 배움은 사치였고, 뼛속까지 뿌리박힌 신분제도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하기보단 영주나, 귀족들의 선택에 복종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문제는 귀족들이야. 그들은 평민들이 배우길 원치 않을 테니까.”

    귀족들의 인식에 평민들은 가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 평민은 수탈의 대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평민들이 배우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느끼고,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내게 된다.

    기득권이 깨지지 않길 바라는 귀족들은 그러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배움은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다. 스스로의 삶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귀족들은 평민들이 가축으로 남길 바랐다. 그러다 보니 계몽사상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은 당연했다.

    “전하께서 알게 모르게 애쓰시는 게 보여.”

    시안은 광장 집회를 장려하고 단속을 완화시켰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집회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 빌렘 백작가를 앞세워 신문사를 압박해 귀족들을 자극할 만한 내용은 대거 삭제했다. 신문의 주 소비층이 귀족이란 사실을 고려한 것이다.

    딴 사람은 몰라도 엘레나는 알았다. 마차를 타고 집회 현장을 지나쳐 가면서 연설가들이 떠드는 내용을 직접 들었으니까. 개중에는 급진적인 성향을 지닌 연설가도 많았다. 그들이 구설에 오르지 않는 이유 역시 알게 모르게 시안이 힘을 쓴 덕이었다.

    “시민 의식은 성장해야 하고 귀족들은 변해야 해.”

    엘레나는 이 작은 바람이 태풍으로 변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은 균열이 끝내 바위를 두 조각 내는 것처럼, 더디고 느리게 변하고 있지만 종국엔 인식의 변화가 대공가의 파멸에 정점을 찍게 될 것이다.

    “저, 아가씨.”

    수프와 간단한 빵과 샐러드를 가져온 메이가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왜 그러니?”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홍차를 음미하던 엘레나가 눈을 깜빡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님이라니. 이 이른 아침에.

    “렌 공자세요.”

    “뭐?”

    “초대를 했으면 손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란 말도 전하라고.”

    “이 인간이 정말…….”

    엘레나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시안과 렌과 만나서 앞일을 논의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예정된 약속 시간은 오후에 잡혀 있었다. 일찍 왔다고 보기엔 방문 시간이 일러도 너무 일렀다. 마치 엘레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찍 온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엘레나는 서둘러서 비밀 통로를 통해 응접실로 내려갔다. 책장이 옆으로 움직이며 열리자 엘레나가 치맛자락을 들고 응접실 안에 발을 들였다.

    “어서 오고.”

    가면을 소파에 벗어 던진 렌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했다. 엘레나는 그런 렌을 걱정 어린 눈길로 빤히 쳐다봤다.

    ‘천만다행이야. 다친 데는 없어 보여서.’

    대공가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치던 날, 내심 홀로 남았던 렌이 걱정됐었다. 시안이 들이닥쳤을 때, 사고 현장에 없었던 걸 보면 무사히 도망쳤을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눈으로 보고 나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하…… 약속 시간에 맞춰서 왔다고 보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요?”

    “내가 좀 부지런한 성격이라서. 넌 좀 게으른 편 같네?”

    “선배가 너무 빨리 온 거거든요?”

    엘레나의 뾰족한 대답에 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소원.”

    “…….”

    “약속대로 소원 들어줘야지?”

    렌이 앞뒤 자르고 본론을 툭 던졌다. 엘레나의 도주를 돕는 조건으로 들어주기로 한 소원. 렌은 그걸 요구했다.

    “얘기해 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제 역량 이상의 것은 못 들어줘요.”

    “그런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아.”

    “그래서 뭔데요?”

    엘레나가 빤히 보자 렌이 히죽 웃었다.

    “네 시간을 나한테 써.”

    “뭐, 뭘 써요?”

    엘레나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시간이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긴가.

    “보자.”

    렌이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침이 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 전하가 오시기 전까지 대략 여섯 시간 정도 남았네.”

    “…….”

    “그 시간 동안 나랑 있자.”

    엘레나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렌을 빤히 응시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 남자는 모호한 말로 엘레나의 잔잔한 여울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같이 있자고요?”

    “어.”

    “뭐 하고요? 아시겠지만, 저 살롱 밖으로 못 나가요.”

    “누가 나가재? 여기 좋은데. 여기서 있자.”

    “여기서요?”

    무리한 부탁을 하면 어쩌나 난감했었는데 렌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소소하기까지 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들어주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이상 무리한 요구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대신, 무르기 없어요.”

    막상 수락하긴 했지만 한 공간 안에 단둘이 있자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말을 걸게 됐다.

    “식사했어요?”

    “넌?”

    오히려 렌이 되물었다.

    “아직요.”

    “끼니를 거르면 쓰나?”

    “누구 덕분에 아직 못 먹었는데요.”

    막 아침을 드려는 중 렌이 왔단 소식에 급히 치장하고 내려왔다.

    “좋아. 안 먹어도 배부르긴 한데, 큰맘 먹고 같이 먹어줄게. 내 속이 이렇게 넓어요.”

    “대단히 고맙네요.”

    엘레나가 헛웃음을 짓더니 응접실 한쪽의 끈을 흔들어 종을 울렸다. 머지않아 비밀 통로를 통해 메이가 내려왔다.

    “찾으셨나요.”

    “식사 좀 준비해 줘. 여기서 먹을 테니 간소하게.”

    아침부터 고기를 써는 게 영 부담스러웠던 엘레나가 부드럽고 담백한 연어로 부탁했다.

    그때 렌이 불쑥 껴들었다.

    “연어 말고 소로. 생선 별로야. 부위는 샤토브리앙. 소스는 베어네이즈.”

    까다로운 주문에 엘레나는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얼굴로 렌을 흘겨봤다. 그런 시선을 즐기듯 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메이가 식사 준비를 위해 비밀 통로로 다시 사라졌다.

    삼십 분 남짓 지나자 다시 비밀 통로 문이 열렸다. 카트를 끌고 온 메이가 그것들을 응접실 한편에 놓인 테이블에 세팅했다.

    “드세요.”

    엘레나와 렌은 테이블 끝에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배가 안 고프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렌은 스테이크를 슥슥 썰어 먹었다.

    “아깐 안 먹어도 배부르다면서요?”

    “음식 남기면 벌 받아.”

    히죽 웃은 렌이 스테이크를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그 모습이 알게 모르게 얄미워 엘레나의 볼이 실룩거렸다. 그런 엘레나의 표정 변화마저 렌에겐 작은 즐거움이었다. 사실 렌은 든든히 아침 식사를 먹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맛있게 먹어야 엘레나가 조금이라도 더 먹지 않을까 싶었다.

    식사가 끝나자 메이가 뒷정리를 하고 돌아갔다. 엘레나가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약속까지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차 한 잔, 안 줘?”

    “지금 드리려고 했거든요?”

    렌의 뻔뻔한 요구에 엘레나가 맞받아치며 일어섰다. 메이에게 일러 준비해 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찻잎에 부어 우려냈다.

    렌은 그런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예 턱까지 괴고는 차를 내리는 엘레나의 눈빛부터 손짓 하나까지 눈에 담았다. 저만을 위한 차를 내리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여기요.”

    엘레나가 맑고 그윽한 차를 렌에게 내밀었다. 잔을 받아 든 렌이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홍차 맛도 잘 모르고, 즐길 줄도 몰랐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더 드릴까요?”

    “줘.”

    엘레나가 빈 찻잔에 찻물을 부어 주었다.

    “이제 뭐 할까요?”

    “할 거 없는데?”

    렌은 진심인 듯 소파에 눕듯이 쭉 몸을 기댔다. 더없이 편안한 자세를 취하더니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엘레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렌의 눈길은 엘레나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엘레나는 신경이 쓰이고 부담스러웠다. 고개 한 번 안 돌리고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그게 거슬리지 않으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만 보면 안 돼요?”

    “왜?”

    “부담스러워서요.”

    렌이 피식 웃었다.

    “싫은데.”

    “…….”

    “넌 네 할 일 해. 난 내 할 일 하고.”

    소원이라고 해서 큰맘 먹고 들어줬건만 렌의 바람은 너무 소탈했다.

    ‘정말 이걸 원한 건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엘레나가 렌을 빤히 보았다. 눈앞의 렌은 감히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과거와 같은 사람이 분명한데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요. 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으니 진짜 그럴 거예요.”

    “해.”

    엘레나가 책장에서 두툼한 책 한 권을 집어 와 앉았다. <철학의 역사>라는 서적이었다. 힐끗 제목을 본 렌이 히죽 웃었다.

    “철학 좋지.”

    “선배도 한 권 드릴까요?”

    “아니, 너 봐. 복잡하고 머리 아파.”

    엘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대에 걸쳐 철학이 어떠한 관점으로 발전해 왔는지가 서술되어 있었다. 빼곡한 활자만큼 지루한 얘기였지만 한 번 몰입이 되니 엘레나는 책 속에 빠져들었다. 계몽사상이 대두되는 현 제국의 시기와 비교하며 보니 더더욱 흥미로웠다.

    “아.”

    집중해서 읽던 엘레나가 잠시 책을 덮었다. 한 자세로 장시간 책을 읽다 보니 어깨가 결린 까닭이다.

    “어?”

    어깨를 매만지며 기지개를 켜던 엘레나가 위화감이 사라진 걸 느끼고는 앞을 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소파에 눕다시피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렌이 보였다.

    “……잠들었네.”

    고요한 정적 때문인지 잠이 든 렌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엘레나가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행여 깨진 않을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벽난로 옆으로 걸어가 담요를 꺼냈다.

    “꼭 아기같이 자네.”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어준 엘레나는 잠이 든 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누가 이 남자를 제국 최고의 망나니로 알까? 저리 평온할 얼굴을 하고서는, 요람 속 아기처럼 곤히 자다니.

    “이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전생의 악연부터, 현생의 인연까지 적잖은 시간을 봐왔음에도 그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참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쭉 뻗은 눈썹과 오뚝한 코, 이마로 흘러내린 흐트러진 곱슬머리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턱선. 자유분방해 보이는 셔츠 아래로 슬쩍 보이는 단단함은 뭔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인생이란 게 참 모를 일이다. 딴 사람도 아니고 렌과 이런 관계가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악연도 인연이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닿았다. 지독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이렇게 한 공간에서 식사하고, 엘레나가 나서서 담요를 덮어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으니까.

    “어이.”

    “……안 잤어요?”

    “너무 가깝잖아.”

    꾹 다물려 입던 렌의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숨소리가 들릴 듯 서로가 가까이 있단 사실을 자각한 엘레나가 뒷걸음질 쳤다. 놀란 가슴에 다급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만 발목을 삐끗했다.

    “어? 어!”

    온몸에 힘을 줘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볼썽사납게 넘어지려는 순간, 렌이 팔을 쭉 뻗더니 엘레나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신속하고 빨랐지만 아프지 않게, 손의 온기가 전해질 만큼 다정하게. 그러면서도 엘레나를 잡아당기는 힘에는 거역할 수 없는 박력이 실려 있었다.

    “앗!”

    엘레나가 짧은 비명을 흘렸을 때, 균형을 잃었던 그녀의 몸은 안정을 되찾았다. 하필이면 렌의 무릎 위에서. 렌의 팔을 받침대 삼아 안기듯이.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터질 듯이 뛰는 심장과 혹여 그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지척에 와 닿는 렌의 눈길과 숨에 목부터 얼굴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너, 너무 가까워.’

    앞서 잠이 든 렌을 보며 경계심이 허물어진 까닭일까. 엘레나는 지금 이 상황만큼이나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당혹감을 느꼈다.

    “조심 좀 하지?”

    “…….”

    “또 구해줬잖아, 내가.”

    렌이 씩 웃었다. 더없이 담백하고, 매력적으로, 거짓 없이. 그 미소와 목소리, 온기에 잠시 넋을 놓았던 엘레나가 밀치듯이 렌의 다리에서 일어났다. 렌도 그런 엘레나를 잡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미소 지은 채 엘레나를 보고만 있었다.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엘레나는 되레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죄송한데요, 저 그렇게 실수하는 성격 아니거든요?”

    “그랬던가?”

    “그리고 구해주다니요. 제가 구해줬으면 구해줬지, 선배가 언제 절 구해줘요.”

    렌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벌써 구해준 게 몇 번인데.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듯 억지를 부리는 엘레나가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해서는.’

    엘레나는 렌에게 경솔하게 다가간 걸 후회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예상 밖의 사고에 흐트러져 당혹스러운 감정을 내비칠 일도 없었을 텐데. 서둘러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엘레나가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 엘레나를 보는 렌의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나 할 말 있는데.”

    “……하세요. 언제는 허락받고 하셨나요?”

    좀 전의 일 때문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레나의 말이 삐딱하게 나갔다.

    “에이, 이건 대화가 아니지. 날 봐야 할 거 아냐?”

    시선을 피하는 엘레나를 두고 렌이 짓궂게 이죽거렸다.

    ‘진정하자.’

    의지와 상관없이 고장난 것처럼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엘레나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말했다.

    “할 말이 뭔데요?”

    “이 얘기하면 네가 나 싫어하려나?”

    “지금도 썩 좋아하진 않죠.”

    “그럼 더 싫어하려나?”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렌답지 않게 질질 끌자 엘레나가 재촉했다. 도무지 예측이 안 되는 유형의 인간이다 보니 무슨 말을 할지 되레 긴장됐다.

    “네가 대역이 된 이유, 아니,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그 시작에 내가 있었다면?”

    렌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말투 이면에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진중함이 깔려 있었다.

    ‘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렌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공가로 오게 된 배경, 이유, 계기…… 그 중심에 렌이 있다는 말이 파문을 일으켰다.

    “베로니카가 왜 자취를 감췄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그 건강하던 애가?”

    “왜죠?”

    “독에 중독됐거든.”

    엘레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삼 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걸 고려해 정말 병마에 시달린 게 아닐까 싶었다. 한데 독이라니.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중독시켰다는 말인가.

    “설마.”

    생각에 잠겨 있던 엘레나가 싸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렌이 희미하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미소였다.

    “맞아. 내가 중독시켰어.”

    “……!”

    렌은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냥 숨겨도 될 얘기인데, 이상하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대공가는 대역을 세웠지. 그게 너야.”

    ‘그랬어. 그런 거였어.’

    엘레나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했다. 어림짐작만 했던 것과 실체를 아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그 시작에 렌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야.”

    심상치 않은 엘레나의 표정을 보며 렌이 퉁명스레 불렀다. 고개를 든 엘레나가 그런 렌을 쳐다봤다.

    “화났냐?”

    렌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늘 제멋대로에 세상 무서울 게 없던 그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 불안해하는 렌을 보는 엘레나의 눈빛엔 격정이 휘몰아쳤다.

    가족과 생이별을 겪고, 이안을 빼앗기고, 비참한 죽임까지. 만약 렌이 베로니카를 독살하지 않았다면 그런 불행 역시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엘레나가 침묵하자 렌의 입술이 말라갔다.

    ‘괜히 말했나?’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에 진실을 고백했지만 엘레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그는 이런 상황을 배운 적도, 겪어본 적도 없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때릴래?”

    “…….”

    엘레나의 고운 눈썹이 올라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어쩌면 이게 그다운 사과일지도 모른다는 게 느껴졌다.

    “사실 화나요.”

    “…….”

    “밉고, 원망스러워요.”

    엘레나는 툭 터놓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쏟아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고 있지만 엘레나는 알 수 있었다. 렌이 상처받았다는 걸. 생전 본 적 없는 허탈함과 어색한 저 미소가 그 증거였다.

    “그런데 선배도 어쩔 수 없었잖아요.”

    “뭐?”

    “베로니카에게 화가 났을 거고, 미웠고, 원망스러웠잖아요.”

    렌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껏 누구도 그의 상처와 진심을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기에 타박은커녕 렌을 이해하는 엘레나의 저 말이 렌의 가장 얇고 약한 부위로 스며들었다.

    “그래서 이해해요.”

    ‘많이 아팠고, 지금도 아프지만…….’

    후회로 점철된 지난 삶이지만 결국 그녀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안을 만났다. 이안을 만난 것만으로도 축복이었고 세상에 둘도 없는 기쁨이었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베로니카를 중독시킨 덕택에 지금의 엘레나가 있을 수 있었다.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 L이 되었고.

    시대를 선도하는 신여성으로 불렸으며.

    지독한 악연을 인연으로 탈바꿈시켰다.

    엘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느 때보다 진하고 자신에 찬 미소는 지금 그녀가 걸어가고 있는 삶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뭐야, 쫄았잖아.”

    “선배가 겁을 먹긴 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그깟 걸로 쫄겠냐?”

    렌이 짐짓 허세를 부렸다. 조마조마하던 속내를 들키기 싫어 센 척했다.

    “렌이라고 불러.”

    “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엘레나가 이름을 불렀다.

    “뭐 이리 적응이 빨라?”

    “솔직히 선배라는 말, 입에 잘 안 붙긴 했어요.”

    엘레나도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렌을 선배라고 부르는 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부자연스러웠다.

    “너도 이제 알려줘.”

    “뭘 알려줘요?”

    “네 진짜 이름.”

    “…….”

    “계속 내가 널 야라고 부를 순 없잖아?”

    “L이라고 부르세요.”

    “야. 오늘 기쁜 날이잖아. 이런 날 우리 사이에 이름도 몰라서 쓰나?”

    엘레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우리가 무슨 사인데요?”

    “이름 튼 사이?”

    “아직 안 텄는데요?”

    “그러니까 터야지.”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엘레나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일까. 예전이라면 렌의 저런 말도 안 되는 요구와 강요에 진저리를 쳤겠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저 얘기가 우스개로 들리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그래서일까. 감출 수 있었는데도 베로니카와 독살에 연관되어 있단 걸 고백한 렌의 진심이 고마웠다.

    “……엘레나요.”

    엘레나는 이름을 말하면서도 어색했다. 제국에 온 이후로, 본명을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 상대가 렌이라는 게 난센스지만.

    “엘레나. 엘레나. 엘레나. 입에 쫙 붙고 좋네.”

    앵무새처럼 이름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렌은 신이 난 듯했다.

    “엘레나.”

    “왜요?”

    “엘레나.”

    “그만 불러요.”

    애도 아니고 이름 갖고 장난을 치는 렌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괜히 알려줬나 싶은 후회에 머리가 지근거렸다.

    “그보다 대공가 사정은 좀 어때요?”

    대공가를 나온 뒤, 내부 사정을 파악할 길이 요원했다. 그러나 저택에 렌이 심어놓은 간자들이 있어서 정보를 얻기 쉬웠다.

    “베로니카가 실무에 손을 대는 모양이던데?”

    “베로니카가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구는 렌과 달리 엘레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저택 내에서 아셀라스와 베로니카가 접촉하는 횟수가 늘었어. 그 둘이 오붓하게 시간 보낼 사이도 아니고 뭘 하겠냐?”

    “음모.”

    “머리 맞대고 같잖은 궁리나 하겠지.”

    엘레나가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베로니카가 실무에 손을 대?’

    대공가에 복귀한 베로니카는 공녀의 일에만 집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베로니카에 대해 아는 게 없네.’

    죽기 전, 베로니카를 마주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게 다였다. 그 잔인한 성품과 성정은 짐작이 됐지만, 정작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는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베로니카를 모르기에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이 어려웠다.

    “혹시 베로니카에 대해 좀 아시나요? 그래도 육촌지간이잖아요?”

    “알잖아. 사이좋은 육촌은 아니라는 거.”

    그건 렌의 말이 맞았다. 둘의 사이가 좋았다면 애초에 독살을 시도하지 않았겠지.

    “뭐가 궁금한데?”

    렌이 소파에 느슨하게 기댔다. 뭐든 물어보라는 듯 손을 까닥거리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영 못 미더운데.’

    투정과 달리 엘레나는 깊이 렌을 신뢰했다. 대공가에 첩자를 심어둔 것부터, 베로니카를 독살한 것까지. 체계적이고 충분한 정보 수집과 계획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로니카에 대해 알려주세요.”

    “미친년이야.”

    “장난치지 말고요.”

    “진짠데?”

    엘레나가 한 번 참았다.

    “걔 완전 제정신이 아니야.”

    “진지하게 대답해 주면 안 돼요?”

    “나 진지해. 네가 보기엔 내가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여?”

    웃음기를 싹 뺀 렌의 되물음에 엘레나가 입술을 핥았다.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정색까지 하는 모습에 더는 추궁하기 애매했다.

    “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새야.”

    “새요?”

    “정확히는 죽은 새지. 자기가 죽인 새.”

    “……!”

    엘레나의 뇌리에 베로니카 방에 걸려 있던 괴기스러운 그림 한 점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단면적이야. 좀 더 파악해야 해.’

    잔혹한 성품을 가졌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 이상은 파악이 어려웠다. 성품이 어떻고, 생각의 방향은 어떤지. 그 외적으로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렌은 미친년이란 말로 일관했다.

    “걔에 대해서 파악하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마. 그냥 받아들여.”

    “그게 무슨 의미예요?”

    “미친년을 네가 어떻게 이해하려고?”

    “…….”

    “제국, 아니, 대륙을 통틀어도 그런 미친년은 또 없을 거야. 상식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엘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껏 장난이라고 치부하며 넘기던 렌의 말들이 진정성 있게 와닿기 시작해서였다.

    ‘진짜 미친년이란 소리야?’

    엘레나는 기억 속 베로니카를 끄집어냈다. 감옥 안에서 죽어가는 엘레나를 보던 베로니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안의 손을 흔들며 잔인하게 웃는 모습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걔는 말이지.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믿는 년이야.”

    “오만하네요.”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 만약 제 부탁이나 요구를 거절해? 죽여. 죄책감 없이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잠깐만.’

    엘레나의 머릿속에 간과하고 넘어갈 뻔한 일이 떠올랐다.

    ‘혹시 세 사람을 회유하라고 시킨 게 베로니카인 건 아니겠지?’

    대공가에서 라파엘과 크리스티나, 첸토니오를 노블레스 거리로 데려가기 위해 접촉했었다. 엘레나는 당연히 후임자인 아셀라스의 소행이라고 예상했다. 한데, 렌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렌,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베로니카가 누군가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어요.”

    “그런데.”

    “안 가겠다고 거절했어요. 그럼 베로니카는 어떻게 나올까요?”

    아직까지는 짐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넘어간다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직 엘레나는 베로니카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아까 말했잖아, 미친년이라고.”

    “그럼…….”

    “죽일 거야.”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렌의 대답에 엘레나의 낯빛이 심각해졌다.

    ‘방심했어.’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로니카에 대한 정보 수집을 너무 소홀히 했다. 렌이 아니었다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로 소중한 사람을 자칫 잃을 뻔했다. 이제라도 방비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다 한들 베로니카의 존재가 까다로운 건 여전했다. 상식으로 상대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차라리 리아브릭 쪽이 상대하기 편했을지도 모르겠어.’

    이전 삶과 현생을 합쳐 리아브릭과 보낸 시간이 적지 않다. 또한 엘레나가 지닌 심계는 리아브릭에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아브릭을 실각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엘레나가 리아브릭의 생각을 읽고 한발 빨리 움직였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렌.”

    “뭘 이 정도 갖고.”

    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엘레나에게 도움이 됐단 사실에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엘레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렌은 턱을 괴고 앉아 그런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하나, 깊은 사고에 잠긴 엘레나는 그런 렌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세 사람의 신변을 보호해야 해.’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죽는다면 엘레나는 그 죄책감에 살지 못할 것이다.

    ‘휴렐바드 경이 혼자서 세 사람을 감당하기엔 무리야.’

    휴렐바드가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동선과 생활 방식이 다른 라파엘과 크리스티나, 첸토니오를 동시에 지켜주기엔 무리였다.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 신경 쓰이게.”

    상념에서 깬 엘레나가 렌의 말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베로니카가 돌아왔으니, 대책을 세워야죠.”

    “대책?”

    렌이 갑자기 콧방귀를 꼈다. 그러더니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세우면 질걸.”

    “무슨 말이에요?”

    “난 말이지, 한 번도 대책이란 걸 세워본 적이 없거든.”

    엘레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대책이 대책처럼 들리는 건 착각인가요?”

    “얘가 날 뭐로 보고. 난 항상 선제공격을 했거든.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너도 마찬가지야.”

    “무슨 의미예요?”

    “네가 유리한 상황을 먼저 만들어. 그래야 이긴다.”

    “……!”

    엘레나는 머리를 세게 맞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렌의 말이 맞아. 수동적으로 끌려갈 필요는 없어.’

    적진이나 다름없는 대공가와는 달리 아무런 감시나 제재가 없으니까. 엘레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대공가를 나온 지금에서까지 스스로를 제약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이 좀 트이네요. 선제공격이란 표현은 좀 그렇지만요.”

    엘레나의 긍정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렌이 히죽 웃었다.

    “기왕 돕기로 한 거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말해.”

    엘레나는 말없이 웃고는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의 위험부담은 낮추고, 대공가에는 타격이 가도록 계략을 짜야 해.’

    주도적으로 판을 이끌기로 결정한 이상 계략을 짜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엘레나는 머릿속에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잡한 선들로 이어진 스케치가 형체를 갖추더니 색깔이 입혀졌다.

    “저들의 계략을 역이용해야 해.”

    “애가 이렇게 똑똑해요. 하나를 알려주니 둘을 아네?”

    엘레나는 종을 쳐서 메이를 불렀다. 급한 일이니 내일 오전 중으로 라파엘, 크리스티나, 첸토니오 세 사람이 살롱으로 들어왔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또 에밀리오에게 일러 아직 답변하지 않은 라파엘을 제외한 크리스티나, 첸토니오에게 실력이 출중한 용병을 호위로 붙이란 말도 덧붙였다. 임시 조치였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고 구상 중인 계략의 허와 실을 메우다 보니 오히려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렌이 회중시계를 보더니 침묵을 깨며 말했다.

    “시간이 거의 끝나가네?”

    “후회 안 해요? 소원을 허무하게 쓴 거 같은데.”

    “그럼 또 들어주든지.”

    “아뇨.”

    렌이 키득 웃었다.

    “걱정 마. 뭐든 아쉬움이 남아야 더 뜻깊은 법이거든.”

    “하여간,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알다가도 모를 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즈음 비밀 통로 문이 열렸다. 메이가 걸어 나와 허리를 굽혔다.

    “황태자 전하를 모셔왔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렌은 몇 분 일찍 온 시안이 탐탁지 않은지 느릿느릿 소파에서 일어났다. 메이의 뒤에 있던 시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하를 뵈옵니다.”

    깍듯이 예를 갖추는 엘레나와 달리 렌은 대충 건성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런 렌을 보는 시안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렌이 탐탁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잘 지냈나?”

    시안이 엘레나를 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늘 감정을 죽인 채 무뚝뚝하게 살아가는 시안이었기에, 주변의 누군가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에 잘 지냈답니다.”

    “다행이군. 진작 오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내내 아쉬웠다.”

    훈훈한 안부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렌이 불쑥 껴들어 훼방을 놓았다.

    “저도 있습니다만?”

    시안의 시선이 렌에게 닿았다. 이내 시선을 거두더니 엘레나를 보았다.

    “앉도록 하지. 쌓인 얘기가 많아.”

    “저도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엘레나는 소파의 상석을 시안에게 권했다. 시안을 중심으로 좌우에 엘레나와 렌이 앉았다.

    “못 본 새에 좀 야위었군.”

    “그래요? 잠은 넉넉히 잤는데.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런가 봐요.”

    엘레나를 보는 시안의 눈매가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엘레나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그런 그녀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좋았다.

    “인사 좀 받아주시지요, 전하?”

    렌은 눈치 없이 대화에 끼며 존재를 알렸다.

    “인사는 받은 걸로 아는데?”

    “그랬던가요? 워낙 건성인지라 몰랐네요.”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렌이 시안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된 거 아닌가? 서로 반가워할 사이도 아니니.”

    “뭘 그리 대놓고 견제하세요. 악감정이라도 있으신 것처럼.”

    렌의 도발적인 언사에 시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시안과 렌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자 보다 못한 엘레나가 나서서 중재했다.

    “그만 좀 해요, 렌.”

    ‘렌?’

    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엘레나의 입에서 렌이란 이름이 다정하게 흘러나오자 이유 모를 열패감이 밀려왔다.

    “그만두라면 둬야겠지?”

    렌은 시안을 보며 승자의 미소를 짓더니 엘레나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반대로 굳어 있는 시안의 표정은 어딘지 심각해 보였다.

    “바쁜 사람 모아놓고 뭐 해? 앞일을 논의하자고, 어서.”

    렌의 재촉에 엘레나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살롱을 찾아와서 죽치고 있던 주제에 갑자기 서두르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차 한 잔 내릴 시간은 있어요.”

    선을 그은 엘레나는 메이가 새로 내온 다기에 찻물을 우려냈다. 응접실 안에 심신을 안정케 하는 그윽한 차향이 퍼졌다. 시안이 첫 모금을 맛보고 나서야 대화가 재개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 먼저 드릴게요. 두 분이 아니었으면 무사히 대공가를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대를 돕는 일이다. 감사의 말은 적절치 않다.”

    “나도 동감.”

    엘레나가 옅게 웃었다. 대공가라는 공공의 적을 둔 우군들이 더없이 듬직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찻잔을 내려놓은 시안이 입을 열었다.

    “황실에 보고 없이 기사단을 움직인 죄를 물어 대공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도록 했다.”

    “잘하셨어요. 강제할 수 없으니 실속을 챙기는 게 나아요.”

    시안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황실에 보고 없이 수도 인근에서 기사단을 제멋대로 움직인 죄는 크다. 명분이 황실에 있는 이상 제아무리 대공가라 하더라도 죗값에 해당하는 배상금은 피해갈 수가 없었다.

    “대공가가 움츠러든 지금 근위대를 개혁하고자 한다.”

    “현명하신 생각이세요.”

    엘레나도 동의했다. 근위대는 곧 황실의 권위이자, 위엄이며, 힘이다. 현 황실의 근위대는 귀족들이 자진해서 납부하는 후원금으로 운영이 되는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귀족 자제나 귀족들이 추천한 자들이 근위대원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다. 황실을 수호한다는 자긍심과 자부심은 옛말이 된 지 오래고 귀족들의 끄나풀 행위를 일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최근 수도 내 집회가 부쩍 늘어났어요. 전하께서 안팎으로 신경 쓰신 만큼 제국민들도 조금이나마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대가 세운 학교의 덕이다. 아이들이 배우며 부모들의 생각마저 바꾸고 있다.”

    시안은 새삼스럽게 엘레나를 만난 것에 감사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황권을 강화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대를 읽지 못하고 옛것에 얽매여 있었을 것이다.

    대화를 통해 돌아가는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한 엘레나가 본론을 꺼냈다.

    “두 분을 뵙자고 한 건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예요.”

    렌과 시안이 엘레나를 빤히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공가가 흔들리고 있어요. 하지만 그 뿌리는 깊고 단단해서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있죠.”

    “결정타가 필요하겠네. 한 방에 훅 보내 버릴.”

    “네, 맞아요.”

    엘레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고한 학처럼 앉아 있는 시안과 껄렁거리다 못해 불량스러운 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그래서 더 시너지 효과가 컸을지도 몰라.’

    엘레나는 대공가에서 도망을 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역량이 단합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눈으로 목격했다. 이제부터는 두 사람에 더해 엘레나의 역량까지 한곳에 집중해야 한다.

    “렌은 대공가의 동선을 파악해 주세요. 그들이 뭘 하는지, 뭘 하려고 하는지요. 사소하고 쓸데없는 거라도 빼놓지 말고 체크해 주세요.”

    렌이 히죽 웃었다. 뒷조사와 감시는 그의 주특기였다.

    “저는 대공가를 자극해 기회를 만들게요.”

    엘레나는 대놓고 베로니카를 노릴 계획이었다. 그토록 벌레 취급하던 엘레나가 L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표정이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전하께서는 명분을 앞세워 대공가를 압박해 주세요.”

    “그러지.”

    엘레나는 숨을 고르더니, 결의에 찬 표정으로 쐐기를 박았다.

    “프리드리히 대공가, 제국에서 지워 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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