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7/30)
  • 제20장 수확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날이 밝았다. 엘레나는 동이 트기 전부터 몸단장을 시작했다. 1차 경합과 마찬가지로 고전적인 패턴의 드레스를 착용하고, 화려한 귀금속과 구두는 최대한 자제했다. 앞서 1차 경합은 사교계의 평판과 영애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몸가짐을 점검하는 자리였다면, 2차 경합은 그보다 좀 더 심도 있게 진행된다.

    ‘2차 경합은 황실 어른들과의 대면이지.’

    황족들이 후보자들과 직접 대면해 황태자비에 적합한 자질과 안목, 지식, 인성, 품성 등을 갖췄는지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자리다. 일종의 면접이라고나 할까.

    “다 됐어요.”

    “수고했구나.”

    한껏 치장에 열을 올린 앤과 달리 엘레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황족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기 위해 전전긍긍하겠지만 이젠 그럴 마음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눈에 차든 차지 않든, 3차 경합에 진출하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돌아보면 지난 삶의 엘레나는 참 어리석었다. 황비로 선발된 게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결과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황족이란 작자들도 신분과 본분을 잊은 채 대공가에 빌붙어 연명했다.

    ‘황족마저 그럴진대, 전하는 오죽하셨을까.’

    이제야 시안이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해왔는지 짐작이 됐다. 시안의 사방엔 온통 적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악착같이 애썼지만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약하고 나약한 황제는 도움이 되지 못했고, 황족들은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그것도 모자라 엘레나의 황비 책봉과 이안의 출산까지…….

    엘레나가 사고를 멈췄다. 잠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황궁에 들어간단 사실에 심란해서인지는 모르나 자꾸 옛 기억이 떠올랐다.

    “답답하네. 창문 좀 열렴.”

    “네, 아가씨.”

    앤은 부담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뛰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녘의 스산한 바람이 살갗에 닿자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어? 못 보던 기사분이 또 오셨네요.”

    돌아서던 앤이 우연히 창가 아래에 도착한 기사를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못 보던 기사?”

    “네, 복장이나 문양이 다른 걸 보니 다른 가문의 기사분들 같은데 하루에 서너 분씩 꼭 찾아오세요.”

    “그래? 급한 용무가 있나 보네. 신경 쓰지 말렴.”

    엘레나는 관심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굴었다. 그러나 앤을 등지고 있는 엘레나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슬슬 탄원서가 쌓이고 있나 보네.’

    요 며칠간, 대공가의 파벌에 속한 귀족가의 가신과 기사들이 쉼 없이 오갔다. 일개 하인이나, 하녀가 아닌 가문의 문양을 가슴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기사들이 주군의 의사를 전달하고자 직접 대공가를 방문한 것이다.

    ‘리브, 많이 곤란하겠어? 귀족들이 이렇게 한뜻으로 들고일어나서 당신의 실각을 바라니.’

    이 순간에도 동부와 서부, 남부의 귀족들은 기사들을 보내 대공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리아브릭이 야심 차게 추진하던 노블레스 거리 사업으로 인해 입은 손실을 메우고자 상납금 증세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런 사태를 초래한 책임자인 리아브릭을 실각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처음 한두 통의 탄원서가 올라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리아브릭은 코웃음을 치며 넘겼을 것이다. 아니, 감히 대공가의 실권을 쥔 그녀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귀족의 이름을 기억하고 보복할 궁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탄원서가 빗발치자 리아브릭도 지금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껏 불만이 있더라도 대공가의 위세에 눌려 숨을 죽이던 귀족들이 조직적으로 들고일어나자 사안이 중대해졌다.

    ‘권위로 귀족들을 찍어 누르자니 마땅한 명분이 없겠지.’

    귀족 회의에서 정해진 대로 귀족들은 상납금 증세를 수용하겠단 의사를 밝혔다. 대공가의 요구대로 따르되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리아브릭의 실각을 탄원했을 뿐이다.

    리아브릭으로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대공가와 4대 가문의 알력 관계도 복잡하게 엮여 있었다. 만에 하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4대 가문에 붙기라도 하는 날엔 대공가의 위상에도 타격이다.

    엘레나는 그런 경우의 수까지 꼼꼼히 계산하고 리아브릭의 실각을 설계했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생각은 꿈도 못 꿨겠지.’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뒤, 진실을 분간할 줄 아는 안목이 생겼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보며 부족한 지식을 채웠다. 이 자리에 있는 그녀는 오랜 노력의 결과물이다.

    “아가씨, 이제 내려가셔야 할 시간이에요.”

    “가자꾸나.”

    엘레나가 침실을 나와 일 층으로 내려갔다. 홀을 지나쳐 저택을 나서자 황태자비 선출식 1차 경합이 있던 날과 마찬가지로 프란체 대공이 배웅을 나왔다.

    “가이아 여신의 행운이 너와 함께하길 기도하마.”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을 하며 다정한 부녀지간을 연출했다. 마차에 오르려던 엘레나가 주변을 둘러보다 의아해했다.

    “리브가 안 보이네요?”

    “급히 처리할 사안이 있어 보이더구나.”

    “그래요?”

    엘레나는 마차에 오르며 입맛을 다셨다. 빗발치는 탄원서에 시달리는 그녀의 고달픈 미소를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웠다.

    마부의 힘찬 채찍질에 마차가 지면을 나아갔다. 대공가를 나서 황궁으로 직행했다. 동궁에 도착한 엘레나는 1차 경합 때와 같은 응접실에 들러 2차 경합에 앞서 몸단장을 점검했다.

    “시간 됐습니다. 가시죠.”

    엘레나는 근위대원을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긴 복도를 따라 걷자 2차 경합에 참가한 영애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아벨라도 껴 있었다. 그녀는 1차 경합에 있었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지 얼굴에 냉랭함이 감돌았다.

    “잘 지냈고?”

    “네, 언니는요?”

    “나도. 못 지낼 이유가 없었잖니?”

    뼈가 있는 엘레나의 받아침에 아벨라가 얼굴을 굳혔다. 1차 경합식에서 간계를 부리다가 그만 엘레나에게 역공을 당하고 수석 자리를 내어줬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네요. 앞으로도 쭉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너도.”

    미소 속에 감춰진 날 선 사담은 여기까지였다. 근위대원의 호명에 맞춰 2차 경합에 진출한 12명의 후보자가 차례로 황족과 면담을 가장한 면접을 보게 될 것이다.

    “아벨라 영애, 릴리 영애, 아리아 영애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나머지 영애들은 옆 응접실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빈 응접실에 들어선 엘레나는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긴장감 때문인지 영애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베로니카 영애, 이드닌 영애, 리아 영애 드시죠.”

    호명을 받은 엘레나가 근위대원을 따라 면담이 진행될 응접실로 발을 들였다. 엘레나를 위시한 두 영애가 앉게 될 소파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 건너편으로 귀부인 둘과 중년 귀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개중 서열이 가장 높은 비올라 부인은 현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다.

    “앉으세요.”

    비올라 부인의 권유에 엘레나가 소파에 착석했다. 형식적인 겉치레도 생략하고 황족들은 곧장 영애들의 평가에 들어갔다.

    “이드닌 영애.”

    “네, 부인.”

    이드닌 영애가 우아하게 예를 갖추며 말을 받았다.

    “황태자비란 어떤 자리죠?”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리입니다.”

    “교과서적인 대답이군요.”

    짧은 문답을 주고받은 비올라 부인의 시선이 리아 영애에게 꽂혔다.

    차가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비올라 부인의 눈길에 그녀가 숨을 삼켰다. 황족을 상징하는 흑발이 주는 위압감에 주눅이 든 것이다.

    “리아 영애에게도 같은 질문을 드리죠. 황태자비란 어떤 자리 같나요?”

    “그, 그게…… 황실의 안위를 도모하며…… 또…….”

    “그만. 더 듣고 싶지 않네요.”

    “……!”

    비올라 부인의 서늘한 한마디에 리아 영애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질책이라고 느꼈는지 평정심을 아예 잃은 듯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비올라 부인이 엘레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베로니카 영애에게 묻죠. 황태자비란 어떤 자리죠?”

    지목을 받은 엘레나가 가볍게 묵례를 하며 대답했다.

    “포기하는 자리입니다.”

    “포기라. 더 얘기해 보세요.”

    “이름을 포기하고, 가문을 포기하고, 제 삶을 포기하고…… 제국의 국모로 살아갈 채비를 하는 자리가 황태자비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삶, 황비 선출식에서도 엘레나는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답했다. 사전에 준비한 대답이었다.

    ‘그때는 저 말의 무게를 몰랐지.’

    그저 황비로 선출되고 싶단 욕심에 눈이 멀어 외운 대로 읊었을 뿐이다. 황태자비 된다는 게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 자각이 없었다.

    ‘이젠 알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누군가 다시 그녀에게 황태자비가 되라고 권한다면 엘레나는 극구 사양할 것이다.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그녀보다 더 준비된 여인이 황태자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대답이네요.”

    비올라 부인은 이어서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황실 법도, 제국의 역사, 황태자비의 소관, 사교계 단속 등 그 주제도 참 다양했다. 단답이 아닌 주관적인 생각을 요구하는 만큼 영애들의 가치관을 깊이 들여다봤다.

    “근거 없는 소문으로 사교계에 황태자비에 대한 악소문이 퍼졌답니다. 영애들이 황태자비라면 어떻게 대처하실 건가요?”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게 첫 번째 순서 같아요.”

    “그…… 화, 황실로 영애들을 불러들여 호되게 질책하고…….”

    비올라 부인의 냉소적이 눈길이 이드닌 영애와 리아 영애를 거쳐서 엘레나에게 닿았다.

    “베로니카 영애.”

    “전제가 잘못됐다고 봅니다. 저라면 악소문이 도는 일이 없도록 처신할 거예요.”

    “영애의 대답은 논점을 벗어났어요. 어디까지나 가정이란 전제로 대답을 요구하는 겁니다, 영애.”

    비올라 부인이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무감각한 눈길을 마주했음에도 엘레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을 밝혔다.

    “그 역시 가정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황태자비의 흠은 곧 황실의 흠이죠. 그러한 자각이 있었다면 결코 그런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고집스럽군요.”

    비올라 부인도 더는 묻지 않았다.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심 엘레나의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이 더 오간 뒤에야 경합은 끝이 났다.

    “결과는 열흘 후, 영애들의 가문으로 통보해 드리도록 하죠.”

    엘레나는 2차 경합을 끝내고 응접실을 나서는 비올라 부인과 황실 어른들을 향해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세 사람이 나가자 이드닌 영애와 리아 영애는 맥이 탁 풀렸는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드닌 영애는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으며, 리아 영애는 긴장으로 면담을 망쳤단 사실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관심 없다는 듯 응접실을 나섰다. 굳이 값싼 위로나 건네며 시간 낭비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전하를 뵈러 가야겠어.’

    엘레나는 오늘 황궁 안에서 시안과 밀담을 나눌 예정이다.

    “동궁 후원은 이쪽인가요?”

    응접실을 지키던 근위대원이 눈을 깜빡였다. 동궁의 에드몽 후원은 방문객에 한해 출입이 자유롭다지만, 주로 외부 손님이 동궁에 머무는 동안 산책하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을 마치고 나온 엘레나가 유람이라도 하듯 후원을 찾는 모습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서요. 바람 좀 쐬고 싶어요.”

    지금도 응접실 안에서 꺼이꺼이 우는 리아 영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경합 과정에서 상처받을 일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셔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근위대원의 호의를 거절한 엘레나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형식적으로 후원의 위치를 물었을 뿐 황비로 살아온 그녀에게 황궁 안 구조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에드몽 후원에 다다른 엘레나가 그곳에 발을 들였다. 낙엽이 흩날리는 돌담길을 따라 걷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심신을 안정케 했다. 꼭 고향 집에 온 듯 안락했다.

    “이 길을 참 좋아했는데…….”

    황비 시절, 엘레나는 주로 반대편에 위치한 서궁에서 생활했다. 그곳에 황후와 황비가 기거하는 내궁이 있었다. 그 까닭에 서궁의 후원은 이곳 에드몽 후원에 비해 화려한 꽃들이 만개하고 잘 관리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인위적인 느낌이 싫어서 여길 자주 왔었지.”

    엘레나는 공국 내에서도 가장 변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자랐기에 에드몽 후원의 이런 자연스러움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외지인이나 다름없는 엘레나가 유일하게 고향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랄까.

    “넌 그대로구나.”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선 엘레나의 시선에 월계수가 보였다. 장정 서너 명이 달려들어서 겨우 양팔로 감쌀 수 있을 만큼 나무는 거대했다. 거목은 푸르다 못해 생기가 넘쳤고, 나뭇잎은 바람에 살랑거렸다.

    엘레나는 월계수에 가만히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그토록 황비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꿈꾸고 바라던 것과 달리 불행하기 그지없던 시절에 위로가 필요할 때면 월계수를 찾았다. 고요하지만 듬직하게 이 자리를 지켜주는 월계수야말로 엘레나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위로이자 위안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 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시안의 목소리에 엘레나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월계수 옆으로 펼쳐진 드넓은 잔디 위에 시안이 서 있었다.

    “전하를 뵈옵니다.”

    엘레나는 옛 기억에서 빠져나와 시안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 시절 황궁 안에서 시안을 마주했던 날을 떠올리며.

    “걱정 많이 했다.”

    린든 백작에게 괜찮다는 이야기를 매일 들었으나 시안은 하루도 그녀가 걱정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베로니카가 깨어난 시점부터 엘레나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황태자비 선출식이라는 변수를 만들긴 했지만 그마저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대공가의 모사 리아브릭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지 않나.

    또 의심까지 받고 있는 만큼 만날 방법도 요원했다. 순간을 이기지 못해 그녀를 만나는 일이 되레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가 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시안의 속마음은 까만 재밖에 남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엘레나는 고아한 미소로 그를 안심시켰다. 한 번도 따뜻한 말을 건네준 적이 없는 시안이 지금 누구보다 엘레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 상황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그렇다고 모르는 척 외면하기에는 저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전하께서는 잘 지내셨나요?”

    “못 지냈다.”

    시안이 단답으로 말을 끊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주제를 꺼냈다.

    “혹시 이 월계수를 본 적이 있나?”

    순간 움찔했지만 엘레나는 티를 내지 않고 부정했다.

    “아뇨, 처음이에요. 왜 그러신가요?”

    “신기해서.”

    “뭘 말씀인지요?”

    “의도치 않게 보고 말았다. 이 월계수에 손을 얹는 모습을…… 그대는 한 번도 내게 보이지 않았던 얼굴을 하고 있더군. 그 평온함이 마치 요람에서 잠이 든 아기를 보는 듯했어.”

    “제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군요.”

    생각도 못 한 제 얼굴에 대해 듣게 된 엘레나가 애잔한 손길로 월계수를 쓸어내렸다. 말 못 할 사연을 담은 그녀의 눈길이 아련해졌다. 참 우스운 일이다. 황궁에 들어와 좋은 기억이 없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안식을 주는 곳이 황궁 안이란 사실이.

    “계획에 차질은 없고?”

    “전하의 도움 덕에 조만간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레나의 밝은 모습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잘해내니 그 또한 아쉽군. 내가 나설 자리가 없으니.”

    “그럼 전하가 계속 아쉽길 바라야겠네요. 그게 수월하게 대공가를 무너뜨리는 일이니까요.”

    엘레나는 복수를 위해, 시안은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대공가의 몰락을 바랐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 렌 역시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시안은 그런 엘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 완벽하기에 자신이 도울 여지를 주지 않았다.

    “볼수록 그대는 빈틈이 없어. 뭐든 완벽해.”

    “완벽이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당장 전하의 도움이 없다면 대공가를 빠져나오는 일조차 요원한걸요.”

    엘레나가 본론으로 화제를 전환하자 시안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위험을 무릅쓰고 엘레나와 시안이 이 황궁 안에서 밀담을 가진 이유. 리아브릭을 실각시킨 엘레나가 무사히 대공가를 빠져나올 방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말해보라. 내가 뭘 도우면 될지.”

    “전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될 거예요.”

    엘레나는 머릿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계획을 얘기했다.

    결행일은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날. 아무래도 행동을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대공가가 아닌, 그나마 저들의 영향력이 적을 수밖에 없는 이 황궁에서 엘레나는 감쪽같이 증발할 계획이었다.

    엘레나의 계획을 전해 들은 시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가 그것을 어찌 아는 것이냐? 그건 나와 폐하, 황후 전하만이 알고 있는 황궁의 비밀인데…….”

    지금 엘레나가 언급한 얘기는 황족 중에서도 황위를 잇는 직계만이 아는 비밀이다. 한데, 황실 가족도 아닌 엘레나가 그러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니 경악스러웠다.

    ‘어떻게 아냐고요? 한때나마, 당신의 황비였으니까요.’

    세실리아가 독살당한 뒤 공백인 황후의 역할을 황비였던 엘레나가 모두 소화했다. 또 황위를 이을 이안까지 출산함으로써 황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때 듣게 되었다. 임종을 앞둔 현 황제이자, 시아버지로부터.

    “여기까지가 제 계획이에요. 왜 전하의 도움이 절실한지 아시겠죠?”

    시안이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계획에 감탄한 눈치였다.

    “그대의 끝을 모르겠군. 아니, 끝이 있기는 한 건가?”

    시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물끄러미 엘레나를 쳐다봤다. 그가 이 순간 엘레나에게 품은 감정은 경외였다. 잠시간 눈을 떼지 못하던 시안이 제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마음을 그녀에게 내비쳤다.

    “그대를 만난 건 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다.”

    “과찬이세요.”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축복이라. 시안은 절대 알지 못할 사연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 * *

    톡, 톡, 톡.

    리아브릭이 초조하게 손톱으로 집무 책상을 두드렸다. 어두운 표정과 평소보다 빠른 두드림을 통해 그녀가 지금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자작님…….”

    아틸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지금 리아브릭의 책상 위에는 동부와 서부, 남부의 귀족들이 보낸 탄원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하나같이 리아브릭의 실각을 요구하는 내용들이다.

    “누군가 배후에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배후를 찾아야 합니다.”

    루미너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주장하자, 아틸 역시 거들었다. 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합심해서 움직인다는 건 분명한 구심점이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자가 누군지는 알고?”

    “그, 그것이.”

    반쯤 추궁에 가까운 리아브릭의 물음에 아틸과 루미너스가 입을 다물었다.

    “배후가 있다는 것도 너희 추측일 뿐이야. 원인을 기점으로 결과를 도출해. 그러면 배후는 절로 알게 될 거야.”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리아브릭은 이성과 냉정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조바심을 내거나,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대처법을 찾아야 했다.

    “최근 한 달간, 외출이 가장 잦았던 귀족이 누구지? 연회든, 뭐든 상관없어. 확인해 봐.”

    “네, 자작님.”

    아틸이 돌아서더니 귀족들에게 심어놓은 간자로부터 보고받은 사항들을 뒤적거렸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순식간에 그것들을 종합하여 보고했다.

    “찾았습니다. 서부의 보로니 백작, 동부의 노튼 자작, 그리고 후안 남작입니다.”

    루미너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셋 다 대공가를 등에 업고 성공한 귀족들이잖아?”

    “그런 셈이지. 덕분에 남보다 많은 상납금을 내고 있으니 불만도 많을 수밖에 없고.”

    “이 작자들이 은혜도 모르고…….”

    리아브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한 가지가 뇌리에 스쳤다.

    “그자들은 아니야.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는 밝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인 감각은 전무해. 기껏해야 하수인일 뿐이지 주동자는 못 돼.”

    “하, 하지만.”

    “세 사람을 움직인 배후가 있어. 그것도 가까이에.”

    리아브릭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직 배후로 명확한 정황도 증거도 없건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자꾸 걸렸다.

    귀족 회의 때, 저들 세 사람과 접촉해 춤을 췄던 유일한 여인. 또 황태자비 선출식에 필요한 평판을 쌓고자 방문한 여타의 연회에서 저들과 추가로 접촉한 자. 리아브릭의 이성은 그녀를 이 배후의 주동자로 가리키고 있었다.

    “공녀.”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공녀 전하라고…….”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아틸과 루미너스는 흘려듣지 않았다. 결코 실언하지 않는 리아브릭의 성정을 고려하면 허투루 한 말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엘레나가 대역인 걸 모르는 상황에서 아틸과 루미너스의 추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실수로 말이 헛나왔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

    “…….”

    리아브릭답지 않은 변명에 아틸과 루미너스가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뿐, 더는 그에 대해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우선 탄원서가 올라오지 않도록 조치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배후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버티셔야 합니다.”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자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야.”

    리아브릭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지금 저들의 탄원이 무서운 까닭은 조직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을 분산시키면 그만이었다.

    “동부와 서부, 남부의 귀족들을 분열시켜.”

    “과연.”

    “묘책입니다.”

    리아브릭이 화두만 던졌는데도 아틸과 루미너스는 단숨에 그녀의 뜻을 파악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수십여 가지의 계략 중 가장 확실하고 성공 확률이 높은 것으로 추려 나갈 때였다. 노크 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로렌츠입니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렌츠가 들어왔다. 설핏 보기에도 다급함이 느껴지는 모습의 그는 아틸과 루미너스를 힐끗 보더니 리아브릭에게 보고했다.

    “지금 별채에 노튼 자작이 와 있습니다.”

    “……!”

    놀람에 추켰던 리아브릭의 눈썹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노튼 자작은 작위는 낮지만 광산으로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동부 귀족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이다. 그리고 아직 심증에 불과하지만 노튼 자작은 엘레나와 접촉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노튼 자작이 아무런 기별 없이 대공가를 찾아왔다.

    “노튼 자작의 행적은?”

    “어제 볼프강 백작 영애의 결혼식에 참가하고자 수도에 오긴 했습니다만, 이곳으로 올 거라고는…….”

    아틸은 노튼 자작의 행적을 놓치지 않았고 빠짐없이 확인했다. 그러나 오늘 영지로 돌아갈 거란 예상을 벗어나 대공가를 직접 방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침 대공 전하께서도 부재중이시니, 자작님께서 직접 만나보심이 좋을 거 같습니다.”

    루미너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우연히 수도에 들른 김에 대공가를 방문했다고 보기에는 시기상 적절치 않았다. 노튼 자작의 성정으로 미루어 볼 때, 갑자기 대공가를 찾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 별채에 있다고요? 가죠. 만나봐야겠어요.”

    “그게 말입니다. 대공 전하를 알현할 때까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뭐라고요?”

    리아브릭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니. 이건 리아브릭을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한 것과 다름없었다.

    “만나지 않겠다면, 만나줄 때까지 찾아가야겠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더운물, 찬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정말 무서운 건 지금의 자리를 잃는 것이지, 순간의 자존심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 앙갚음은 위기를 모면하고 해도 늦지 않다. 

    리아브릭은 곧장 별채로 향했다. 외부 귀족들이 방문할 때 머무는 별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대공가에 걸맞은 품격을 갖춘 곳이었다.

    “고하세요. 리아브릭 자작이 뵙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리아브릭이 말하자 별채의 호위를 맡은 노튼 자작의 기사가 얼굴을 굳혔다.

    “분명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요. 이 무슨 무례입니까?”

    “무례인 걸 알면서도 찾아올 만큼 다급한 일이랍니다. 리아브릭이 봤으면 한다고 고해주세요.”

    귀족인 리아브릭이 예를 갖춰서 정중하게 부탁하니 기사도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 잠시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긴 그가 별채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한 번 더 여쭤주세요. 금광의 세율과 관련된 일이라고. 절대 손해 볼 일 없을 거라고.”

    “하오나.”

    “고하라고요.”

    리아브릭이 목소리를 깔고 싸늘하게 말하자 흠칫 놀란 기사가 다시 별채로 들어갔다. 별채 안에서 고성이 오가더니 기사가 똥 씹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더는 절 곤란하게 만들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한 소리 들었는지 기사의 태도와 말투에서 냉랭함이 묻어났다.

    “기어코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리아브릭이 시선을 돌려 별채의 이 층을 올려다봤다. 꼭 만나야 그 속을 읽는 건 아니다.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나지 않겠다는 건 그녀의 실각에 깊이 관여하고 있단 방증이기도 했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고 전하세요.”

    “오지 마십시오. 다시 오셔도 뵙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노튼 자작이 단단히 주지시켰는지 기사가 조금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리아브릭이 이 층 별채를 잠시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별채에서 멀어지자 동행한 아틸에게 명했다.

    “다른 귀족들 동향 찾아서 보고해. 특히 보로니 백작과 후안 남작의 동선 놓치지 말고.”

    “네, 자작님.”

    집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리아브릭의 표정은 어두웠다. 총명하다 못해 비상한 머리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그녀가 이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긴 처음이었다.

    ‘여기서 무너지지 않아. 절대로.’

    리아브릭은 믿었다. 아직 시간은 있다고.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서 귀족들을 분열시키면 최악은 피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런 믿음이 깨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서부의 보로니 백작과 남부의 후안 남작이 예고도 없이 대공가를 기습 방문했다.

    * * *

    이 층 테라스에 앉은 엘레나는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 최고급 홍차, 특별히 신경 쓴 디저트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러나 진정 엘레나를 즐겁게 하는 기쁨은 따로 있었다.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는 엘레나의 시선에 대공가를 방문한 보로니 백작이 보였다.

    “오늘이네요, 리브.”

    엘레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앞서 방문한 노튼 자작과 지금 방문한 보로니 백작, 오후에 대공가에 도착할 예정인 후안 남작까지. 치밀한 엘레나의 안배였다. 리아브릭의 여론이 좋지 않은 이때, 동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 귀족의 수장 격이나 다름없는 세 사람이 방문해 프란체 대공과 담판을 짓기 위함이다.

    “당신이 내게 그랬지?”

    엘레나가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그러니 시간을 주지 말고 목덜미를 물어야 한다고.”

    리아브릭은 생각은 신중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엘레나는 그 말대로 따랐고 단시간에 아벨라가 쥐고 흔들던 사교계 주도권을 뺏어왔다. 서서히 리아브릭의 숨통을 조이는 엘레나의 계략도 다 그녀의 가르침에서 기인했다.

    “아가씨, 오늘 기분이 좋아 보여요.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막 구워서 따스한 쿠키를 내온 앤이 눈을 깜빡였다. 가까이서 엘레나를 모셨지만 오늘처럼 부드러운 표정은 처음이었다.

    “티가 나니?”

    앤은 진심으로 얼떨떨하고 이상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꿈을 꿨거든.”

    “꿈이요?”

    “그래. 설레고 좋은 꿈이지.”

    엘레나가 홍차를 마시며 더욱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호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앤이 뭔가 딱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혹시 아가씨께서 3차 경합에 진출한다는 길몽 아닐까요?”

    “그런가?”

    “그게 맞을 거예요! 어쩜 좋아. 저 미리 축하드려야 할까 봐요.”

    앤은 제 일처럼 좋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엘레나가 황태자비에 가까울수록 그녀의 황궁 입궁날도 멀지 않았다. 그리된다면 그토록 바라던 황궁 하녀장도 꿈이 아니다.

    “사자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황궁에서 사람이 온 모양이구나.”

    테라스 아래에서 황궁근위대원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은 기사가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예전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의 결과를 가져온 근위대원이었다.

    “저, 정말 결과가 나왔나 봐요. 내려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떨려서 일어날 수가 없네. 네가 대신 가서 리아브릭에게 물어보고 오렴. 그래 줄 수 있지?”

    “제가요?”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그래, 너 말고 누구한테 이런 부탁을 하겠니?”

    “그, 그건 그래요! 금방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뻔히 결과가 예상되는 만큼 엘레나는 굳이 번거로운 일에 심력 소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들떠 있는 앤을 보냈다. 앤이 방을 나서자 테라스에 남아 있던 메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그러게.”

    매일 밤, 리아브릭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막연하기만 했던 상상이 점차 현실로 변해가고 있자 기쁘면서도 얼떨떨했다.

    “별 탈 없이 계획대로 흘러가면 좋으련만.”

    “너무 염려 마세요. 부족한 제가 보기에도 리아브릭은 외통수에 걸렸어요. 성급할 수도 있지만 아마 버텨내지 못할 거예요.”

    “나도 그랬으면 해. 하지만 리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메이의 말도 일리 있었지만 엘레나는 성급히 속단하지 않았다. 모든 게 확실해질 때까지 방심하지 않고 사태를 주시했다. 만에 하나 리아브릭이 올가미를 빠져나온다면 그에 맞춰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실각되어 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 * *

    “보로니 백작이 여길 왔다고?”

    리아브릭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틸에게 일러 그의 행적을 파악하라고 명령한 게 어제다. 여기서 이틀 거리에 있는 파빈 영지를 방문한 보로니 백작이 하루 사이에 수도에 도착한 것도 놀라운데 한발 앞서 대공가를 찾아온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또 뭐?”

    “후안 남작도 곧 도착한다는 기별입니다.”

    리아브릭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수장 격 귀족들이 영지를 비우고 이렇게 기습적으로 대공가를 방문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방문 목적은 파악했고?”

    “노튼 자작과 같습니다. 대공 전하의 알현이라고 합니다. 후안 남작도 아마 같은 이유일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

    설마 이런 식으로 허를 찔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귀족들을 분열시켜 탄원서를 무마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저들의 행동이 리아브릭의 조치보다 더 빨랐다.

    “대공 전하께 부탁드려야겠어. 최대한 알현을 미뤄서 시간을 벌어달라고.”

    리아브릭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다.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무마하고 와해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게…… 이미 알현을 허락하셨습니다.”

    “뭐?”

    리아브릭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프란체 대공은 한 번 신뢰하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대공가의 전반적인 운영 사항에 대해서만 간략히 보고받을 뿐 리아브릭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던가.

    ‘숱한 모함과 음해에도 흔들리지 않던 분께서 왜…….’

    리아브릭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가 실권을 잡은 뒤, 많은 이가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녀를 끌어내리기 위한 간악한 술수가 끊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흔들어대도 프란체 대공은 태산처럼 굳건히 그녀를 신뢰했다. 그 맹목적이다시피 한 믿음에 리아브릭은 실적으로 보답했다. 지난 노블레스 거리 사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실각당했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한 번 더 기회를 받을 수 있던 것도 그러한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줬기 때문이다.

    그랬던 프란체 대공이 변했다. 당연히 그녀와 상의를 하고 알현 여부를 결정할 줄 알았건만 독단으로 허락했다. 리아브릭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대공 전하를 뵈어야겠어.”

    리아브릭은 초조함을 느꼈다. 한 번 더 기회를 받은 뒤, 지난 실수를 만회하고자 뼈가 으스러지도록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는 올리지 못했지만 분명 전보다 빠른 속도로 대공가의 재정이 안정화되고 있었다.

    “말려야 해. 알현을 늦추고 내가 여론을 분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그냥 손을 놓고 있자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다못한 리아브릭이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막 나서려던 때였다.

    “리아브릭 자작님을 뵙습니다.”

    복도 밖에 서서 노크하려던 황궁근위대원과 마주쳤다. 원 과거에서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 결과를 통보하기 위해 방문했던 그 기사였다.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 결과에 대해 알려 드리고자…….”

    “나중에.”

    리아브릭은 그를 매몰차게 무시하며 복도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다급하게 느껴지는 구두 소리로 그녀가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멀어지는 리아브릭을 보며 당황하는 근위대원에게 루미너스가 대신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 그럴 수 있죠.”

    “이쪽으로 오시죠. 황궁 소식을 전하러 오신 것 같군요. 공녀 전하께서 기뻐하실 만한 소식이었으면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루미너스가 대신해서 리아브릭의 빈자리를 메웠다.

    그 시각. 리아브릭은 구두 굽으로 바닥에 구멍을 낼 듯 빠르게 걸었다. 아틸이 바싹 그 뒤를 따랐는데 표정이 그녀 못지않게 심각했다.

    저택 내에서 가장 수려한 무늬와 문양으로 장식된 문 앞에 리아브릭이 멈춰 섰다. 제복을 걸친 기사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리아브릭에게 인사했다.

    “대공 전하를 뵈러 왔어요. 아뢰어주세요.”

    “죄송합니다만, 자작께서 오시면 조용히 돌려보내라 하셨습니다.”

    “……돌려보내라고 했다고요?”

    리아브릭의 심상치 않은 불안감은 점점 현실이 되어갔다. 낭떠러지에 몰린 만큼 그녀는 지금 물러날 데가 없었다.

    “기다린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지 말고 돌아가심이…….”

    조심스럽게 기사가 권했지만 리아브릭은 묵묵부답이었다. 문 앞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서서 눈을 감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억누르고 어떻게든 프란체 대공을 만나 이성적으로 협조를 구할 방법을 궁리했다.

    오늘 프란체 대공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리아브릭은 더 악착같았으며 필사적이었다.

    * * *

    “뭐? 리브가 복도에 서 있다고?”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의 결과를 알아보러 갔던 앤이 가져온 소식에 엘레나가 되물었다.

    “네, 대공 전하께서 만나주시질 않아서 기다리고 있대요. 분위기가 얼마나 무섭던지…… 오싹할 정도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한 엘레나의 속마음은 묵혀뒀던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간 듯 통쾌했다.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에서 수석을 차지해 3차 경합에 진출했다는 얘기에 앤 앞에서 좋은 척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먹었다.

    ‘어쩌죠, 리브? 대공의 마음이 떠난 것 같은데?’

    얼마나 조급했으면 천하의 리아브릭이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리아브릭을 보러 가고 싶었다. 걱정해 주는 척 가식을 떨며 일그러지는 리아브릭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만큼 신이 나는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인내심을 발휘해 꾹꾹 눌러 참았다. 아직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일렀다. 엘레나가 가까이서 보고 경험한 리아브릭은 뱀같이 사이하고 지독한 자였다. 전권을 잃고 실각이 되어 대공가를 떠나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보다 3차 경합에 진출하신 거 정말 감축드려요, 아가씨.”

    “그래. 우리 꼭 같이 황궁으로 가자꾸나.”

    “꼭이요! 1차도 수석이시고, 2차도 수석이시니, 3차에서 꼭 황태자비가 되실 거예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들떠 있는 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였다. 나지막이 들리던 말발굽 소리가 잦아들더니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방패 모양에 창대가 11자로 꽂힌 문양을 보며 엘레나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왔네.”

    옆 사람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에 맞춰 마차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 수도 남부의 ‘소금 왕’이라 불리며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를 축적한 후안 남작이었다. 앞서 도착한 보로니 백작, 노튼 자작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기별 없이 도착한 그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엘레나는 새로 우려낸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손짓과 표정에서 여유로움이 듬뿍 묻어났다.

    “더 치열하게 발악해요, 리브. 그래야 더욱 절망스럽지 않겠어요?”

    항상 리아브릭의 음모 속에서 허우적대다 비참한 죽임을 맞이한 엘레나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체스판을 휘젓는 퀸이었다.

    * * *

    리아브릭이 서 있는 복도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체 대공의 집무실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쉽게 만나줄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어.’

    리아브릭은 결의에 찬 각오를 다졌다.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프란체 대공을 만나야 했다. 오늘이 안 된다면 내일, 내일이 안 된다면 모레…… 그래야 살 구멍이 생긴다.

    째깍째깍.

    복도 어딘가에 있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때였다.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있는 터라 무슨 내용인지 불분명했지만 그것은 분명 누군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였다.

    “리아브릭 자작?”

    낯익은 목소리에 리아브릭이 고개를 스윽 돌렸다. 보로니 백작, 노튼 자작, 후안 남작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리아브릭과 눈이 마주치자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쯧, 꼴 보기 싫은 얼굴을 이리 보는군.”

    “무시하시죠.”

    “그럽시다.”

    세 귀족은 노골적으로 경멸에 찬 시선으로 리아브릭을 보고는 대공의 집무실 앞에 섰다. 그러자 방문 앞을 지키던 기사가 고했다.

    “보로니 백작, 노튼 자작, 후안 남작이 알현을 청합니다.”

    “들이도록.”

    프란체 대공의 허락이 떨어지자 세 귀족은 약속이라도 한 듯 리아브릭을 힐끗 보곤 비웃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리아브릭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저 세 귀족은 대공가의 후원을 받아 급격히 성장한 신흥 귀족이었다. 그 이면에는 실권을 쥔 리아브릭의 입김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한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딱히 인간적인 교감이나 뭔가를 바란 건 아니지만, 저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당할 만큼 떨어진 자신의 위상이 비감스러웠다.

    ‘난 안 죽어. 네놈들 기필코 밟아버리겠어.’

    리아브릭은 독기를 품으며 이를 갈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가만있진 않을 것이다.

    또 시간이 흘렀다. 담담한 척 서 있었지만 리아브릭에게 이 시간은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리아브릭의 실각에 관한 얘기가 오간다고 생각하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끼이익.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대공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리아브릭이 고개를 들자 알현을 마치고 나오는 세 귀족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무능한 것들이 꼭 고집이 세지.”

    보로니 백작이 혀를 차자, 노튼 자작과 후안 남작이 입꼬리를 비틀며 동조했다.

    “또 볼 일은 없을 테니 인사 정도는 해주지. 수고 많았네, 자작.”

    “……대공 전하만 아니었어도 확실하게 책임을 묻는 건데. 하.”

    리아브릭의 면전에서 모멸감을 심어준 세 귀족이 돌아섰다.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리아브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리아브릭은 멀어지는 세 귀족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자리를 보존할 수 있다면 언제든 되갚아줄 수 있다. 지금 리아브릭의 머릿속은 프란체 대공을 어떻게 설득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대공 전하께서 안으로 들랍니다.”

    생각보다 이른 허락에 리아브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선 것이다. 리아브릭이 대공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책상을 등지고 선 프란체 대공이 전면 유리창 너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아브릭은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의 매정함에 서운함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냉대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건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리아브릭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프란체 대공은 뒷짐을 진 채 창밖만 바라볼 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였다. 리아브릭은 숨을 죽이고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무거운 정적이 그녀를 오래도록 짓눌렀다. 프란체 대공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그녀를 방치했다.

    “대공 전하.”

    결국 리아브릭이 용기를 내 그를 불렀다. 지금 다급하고 초조한 건 그녀인 만큼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프란체 대공의 입술 사이로 드디어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물러나.”

    “……!”

    짧지만 거역할 수 없는 프란체 대공의 한 마디에 리아브릭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하, 하오나.”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할 말이 남았나 보지?”

    여전히 프란체 대공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거리감이 리아브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간을 주세요. 보름, 아니, 열흘이면 돼요.”

    “시간을 주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귀족들을 분열시킬 계획이에요. 탄원서 얘기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어요.”

    리아브릭은 필사적으로 대공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날고 긴다고 하는 음모의 리아브릭이지만 그녀도 결국 대공가의 가신에 불과하다. 프란체 대공의 한마디면 그녀가 당연하게 누리던 권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라. 차고 넘칠 만큼 충분히 준 것 같은데.”

    프란체 대공이 몸을 돌리더니 리아브릭을 마주했다. 외알 안경 너머의 눈빛에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감정해질 만큼 마음이 떠났다는 의미였다.

    “대공 전하의 말씀이 맞아요. 제 탄원서는 작은 소란일 뿐이에요. 대공가가 안정화에 접어들기 위한 과정이죠. 그러니…….”

    “구차하군.”

    프란체 대공의 냉소 어린 한마디에 리아브릭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틀렸어.’

    리아브릭이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프란체 대공의 맘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어 보였다. 이미 한 차례 기회를 줬던 프란체 대공이었기에 이런 잡음에 휩싸인 것만으로도 그녀를 지워 버린 듯했다.

    “갈수록 실망이야. 상납금 증세를 시행할 때, 이런 반발은 예상했어야지.”

    “그, 그건.”

    반발하려던 리아브릭이 뒷말을 삼켰다.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당연히 예상했다. 그래서 귀족들의 행보에 더 촉각을 기울였으며 몇몇 요주의 인물은 사람을 풀어서 밀착 감시까지 했다. 그러나 저들의 반발이 리아브릭의 예상보다 조직적이었고 거셌다. 여론을 모아 탄원서를 빗발치게 한 것도 모자라 기습적인 방문으로 프란체 대공을 알현할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실망이 커, 리아브릭.”

    “…….”

    리아브릭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어떤 변명조차 무의미하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물러나.”

    ‘끝났어.’

    프란체 대공의 입에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란 말이 두 번이나 나왔다.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볼 때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 순간 리아브릭의 실각은 결정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약한 놈 밟고, 강한 놈 물어뜯으면서…….’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는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물러나겠습니다.”

    리아브릭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공가, 아니, 이 제국 땅에서 프란체 대공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전무했다.

    “그렇게 해.”

    프란체 대공은 형식적인 위로의 말이나 격려도 없었다. 그는 명령을 내렸고 리아브릭은 따른다. 그게 다다.

    ‘서운할 것도 없지.’

    대공가의 실권을 틀어쥐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각오했다. 백 번을 잘하더라도 한 번의 실수를 용서받지 못하는 자리였으니까.

    “후임자로 아틸을 추천하겠습니다.”

    “고려해 보지.”

    프란체 대공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더 이상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심하게 구는 태도가 알게 모르게 상처가 됐다. 프란체 대공의 태도가 변한 것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한 기분이 들었다.

    “급한 사안을 마무리 지으려면 나흘 정도 걸릴 거예요.”

    “이틀 안에 끝내.”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프란체 대공의 말에 리아브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 증세, 피네치아 재배지 소실 범인의 추적, 황태자비 선출 등 당장 떠올린 사안만 하더라도 수십여 가지가 넘었다. 산술적으로 이틀 안에 인수인계를 하기엔 턱없이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 와 무슨 미련이 남는다고.’

    리아브릭이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버려진 마당에 책임을 내려놓지 못하는 제 모습이 처량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스러운 의심을 그녀가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가짜 공녀가 수상합니다.”

    “공녀가?”

    지금까지 건성으로 일관하던 프란체 대공이 관심을 보였다.

    “저와 대공 전하께서 본 공녀의 모습은 가짜입니다.”

    돌아보면 엘레나가 해온 모든 행동과 표정, 말투 등 어느 것 하나도 의심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너무 완벽해서,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래서 의심스럽다고나 할까. 리아브릭은 그간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프란체 대공에게 고했다. 처음엔 흥미롭게 듣던 그도 점차 그녀의 추리에 신빙성을 가지며 동조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서 주워온 인형이 사실은 우릴 속이고 있다?”

    “제 생각은 여기까지입니다. 판단은 대공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리아브릭은 마지막까지 도리를 다했다. 그녀의 의심을 합당하게 여기고 조치를 취하는 건 프란체 대공의 몫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손을 쓸걸.’

    명확한 증거와 정황을 찾지 못해 진즉 엘레나의 목을 비틀어 버리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랬다면 모든 걸 내려놓는 지금 이 순간 조금이나마 홀가분했을 텐데.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리아브릭은 양손을 포개고 서서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프란체 대공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일개 가신을 바꾸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일일이 작별 인사까지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서운하긴 하지만 어차피 떠날 몸, 리아브릭도 미련을 두지 않고 대공의 집무실을 나섰다.

    이틀 뒤, 대공가는 음모의 리아브릭이 실각됐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 * *

    “아가씨, 얘기 들으셨어요? 리아브릭 자작이 오늘 대공가를 떠난대요.”

    호들갑을 떠는 앤을 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어두웠다.

    “들었단다.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리브를 실각시키다니, 너무한 처사야.”

    “……아가씨께서 말리셔도 소용없겠죠?”

    앤은 주제넘은 말까지 지껄일 만큼 리아브릭의 실각을 원치 않았다. 감시라는 명목으로 매달 리아브릭에게 지급받던 금액이 적지 않았는데, 이제 그 돈을 못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니? 아버지의 뜻이니 따라야지.”

    마지못해 따르는 척 구는 엘레나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정말 오래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에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드디어.’

    오늘 프리드리히 가문의 이름을 걸고 리아브릭의 실각을 공식 발표했다. 번복은 절대 없을 것이며 귀족들의 공분을 산 리아브릭이 다시 대공가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못 박았다.

    엘레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제국을 뒤흔들던 그 음모의 리아브릭을 실각시키다니. 그녀의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낸 결과이기에 더더욱 값졌다. 자리를 비웠던 메이가 돌아와 곧 리아브릭이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다.

    “배웅을 해주고 싶은데 볼 면목이 없구나.”

    엘레나는 핑계를 대며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리아브릭의 면전에서 안타까워하는 시늉을 하며 그녀를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겨우 반절 왔을 뿐이야. 알량한 승리에 도취되기엔 일러.’

    대공가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간 엘레나가 내외에서 끊임없이 흔들고 타격을 줬지만 그 뿌리는 깊고 단단했다. 그리고 베로니카 공녀와 프란체 대공 부녀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리아브릭의 실각은 작은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엘레나가 바라는 대공가의 몰락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앤과 메이를 내보낸 엘레나가 난간에 기대어 서서 저택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침 저택을 나오는 리아브릭이 보였다. 단색 드레스에 심적인 고생을 했는지 야위어 보이는 그녀가 짐 가방을 먼저 마차에 실었다. 대공가의 실세로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걸 감안하면 그녀의 짐은 예상외로 소소했다. 그런 리아브릭을 배웅하고자 나선 사람도 아틸과 루미너스가 다였다.

    엘레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아브릭이 반사적으로 턱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사 층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엘레나와 시선이 부딪쳤다.

    엘레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더는 리아브릭을 속이고자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잘 가라는 말은 못 해주겠네요, 리브.’

    엘레나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선명한 미소가 걸렸다.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그녀의 본심이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요. 당신은 더 심한 나락으로 떨어질 거예요.’

    복수는 이제 시작이다. 대공가에서 쫓겨난 그녀가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할 것이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절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테다.

    ‘물론, 대공이 당신을 살려둔다는 전제하에.’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실권을 쥐고 실무를 책임진 만큼 리아브릭은 대공가의 치부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엘레나가 대역이라는 비밀도. 프란체 대공이 그녀를 살려둘 리가 만무했다.

    리아브릭은 서서 엘레나를 노려보다가 마차에 올랐다. 그녀를 태운 마차가 서서히 저택에서 멀어졌다. 제국을 뒤흔들던 음모의 리아브릭이란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작은 고비를 넘겼어.”

    엘레나는 피어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대공가의 몰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로 볼 때 리아브릭의 실각은 소기의 성과에 불과했지만, 막상 떠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대견했다. 하지만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 훼방을 놓았다.

    “로렌츠 경이 여긴 무슨 일이시죠?”

    지난 삶, 엘레나의 복부에 검을 박아 넣은 배신의 기사. 그가 리아브릭이 떠나자마자 엘레나를 찾아왔다.

    “대공 전하의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지시요?”

    엘레나의 눈매가 좁아졌다.

    “공녀 전하께서는 곧 황태자비가 되실 몸. 휴렐바드 경과 더불어 저를 직속 기사로 임명하여 보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

    엘레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의심을 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리아브릭이 실각당한 시점에서 이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리아브릭의 소행이야.’

    떠나기 직전까지 그녀는 엘레나를 의심했다. 대공가에서 쫓겨난 주제에 마지막까지 엘레나의 앞길에 훼방을 놓았다.

    “아버지는 참 속도 깊으시지. 휴렐바드 경 홀로 호위하기에 버거운 감이 있었는데 경이 와주니 기뻐요.”

    엘레나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로렌츠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호감과 호의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부족하지만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경.”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는 로렌츠의 뒤통수를 엘레나가 차갑게 노려봤다. 얼음장보다 시린 엘레나의 눈길 속에 로렌츠를 향한 경멸과 분노가 깔려 있었다.

    리아브릭과 프란체 대공, 베로니카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러웠지만 로렌츠도 그에 못지않았다. 로렌츠가 엘레나의 복부를 찌른 그 검은…… 엘레나가 그에게 직접 하사한 검이었으니까.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순간도 자신을 진짜 주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위선의 기사를 위해 엘레나는 제국의 명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검을 어렵게 구해 하사했다. 한심할 정도로 지난 삶의 엘레나는 우둔하고 안일했다. 안목도 없어서 가까이 둘 사람과 멀리해야 할 사람도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내 곁엔 휴렐바드 경이 있어.’

    엘레나의 시선이 묵묵히 서 있는 휴렐바드에게 닿았다. 초원을 연상케 하는 녹음 머릿결과 차가운 외모가 왜 이리 듬직해 보이는지. 과거 얼음의 기사라는 위명에 걸맞게 감정을 갈무리하는 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 그는 표정으로 그 속을 읽을 수 없는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엘레나의 앞에서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마저도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배신의 기사 로렌츠와 달리 휴렐바드는 제국이 두 쪽 나고, 세상이 그녀에게 돌아서더라도 곁을 지켜줄 거란 강한 신뢰가 있었다.

    로렌츠가 물러가자 엘레나는 메이와 앤을 불러 몸단장을 했다. 레이디 중의 레이디라고 일컬어지는 마담 드 플랑로즈가 주관한 연회에 참가하기 위함이다.

    똑똑. 막 몸단장이 끝날 즈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어느 영애나 마찬가지겠지만 외출을 앞두고 치장 중일 때가 가장 민감한 법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하녀나 하인들이 조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누가 왔는지 나가보렴.”

    “네, 아가씨.”

    문밖을 다녀온 앤이 깜짝 놀라서는 엘레나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누구니?”

    “리아브릭 자작님 후임이시라고…… 공녀 전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대요.”

    “그래? 들어오라고 하렴.”

    엘레나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리아브릭이 실각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후임자가 내정되다니, 과연 대공가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리아브릭의 후임이라, 누굴까?’

    짐작되는 인물은 있었다. 그간 리아브릭의 손과 발이 되어 대공가 안팎의 일을 돌보던 아틸과 루미너스 중 한 명이리라.

    “어서 오세요.”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엘레나가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섰다. 그렇게 마주한 후임자는 엘레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공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늘부터 대공가의 실무를 책임질 아셀라스 남작이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건 아셀라스의 비대한 몸집이었다. 후덕하다 못해 터질 듯한 얼굴과 축 처진 뱃살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한 번 보면 쉬이 잊기 힘든 인상이었다.

    ‘기억에 없어. 처음 보는 자야.’

    엘레나는 생김새로 상대를 얕잡아 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공가다. 대공가의 후원을 받는 비상한 재능의 인재들이 끊임없이 배출된다. 리아브릭의 후임이라면 결코 만만한 사내는 아닐 것이다.

    “공사가 다망할 텐데 번거롭게 인사까지 오시고 그러세요. 제가 찾아가도 될 텐데요.”

    “망극한 말이십니다. 당연히 아랫것이 인사를 드려야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요. 대공가를 잘 부탁드려요.”

    엘레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아셀라스란 인간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고자 눈을 빛냈다. 아틸과 루미너스를 대신해 실무를 책임진 후임자가 되었다는 건, 이자가 앞선 둘보다 더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즉, 대공가의 몰락을 바라는 엘레나와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다.

    “부탁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충성해야죠. 한데, 외출하시나 봅니다?”

    “네, 마담 드 플랑로즈께서 주최하신 연회에 초대를 받아서요.”

    엘레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이자는 어디까지 아는 걸까. 자신이 대역이란 사실을 알까. 안다면 어떤 조치를 하려는 걸까.

    아셀라스가 갑자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죄송한데, 오늘 외출은 좀 어려울 듯싶습니다.”

    “뭐라고요?”

    엘레나가 목소리를 키우며 뾰족해졌다. 리아브릭의 후임이든 뭐든, 엘레나의 신분은 공녀다. 제까짓 게 감히 그녀의 외출을 막을 권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게…… 대공 전하께서 황태자비 선출식이 마무리될 때까지 외출을 자제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아버지가요?”

    “그렇습니다. 3차 경합을 앞두고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 수도 있으니 몸을 사리는 게 낫다고 저택에 계시랍니다.”

    엘레나는 저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허울 좋은 둘러대기일 뿐 결국 엘레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통제하겠단 의미였다. 로렌츠의 선임부터 외출 통제까지 우연은 아닐 것이다. 프란체 대공이 내린 명령이지만  리아브릭의 의심이 빚어낸 조치일 가능성이 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버지 말씀이니 따라야겠죠.”

    엘레나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셀라스가 좋은 말로 위로했다.

    “답답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황태자비로 책봉되시면 모든 걸 보상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나가보세요.”

    눈 밖에 나기 싫은 아셀라스가 얼른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한껏 고생해서 몸단장을 끝냈는데 외출이 어렵게 되자 앤이 안타까워했다.

    “너무 아름다우신데…… 못 가서 서운하시겠어요.”

    “어쩌겠니? 아버지 말씀인데.”

    말과 달리 엘레나의 표정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외출이었을 뿐, 중요한 자리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서둘러 준비를 해두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손발이 묶였을 거야.’

    이제 와서 로렌츠를 직속 기사로 붙이든, 외출 통제를 하든 엘레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계획은 구축되어 있었다. 더구나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을 앞둔 상황에서 대공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감금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곧 모든 게 변할 거야.’

    그리고 시간은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흘러갔다.

    * * *

    “내일이구나.”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저녁 시간, 새벽부터 일어나 몸단장을 해야 하는 만큼 엘레나는 일찍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항상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하게 걸어온 엘레나에게도 내일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날이었다. 계획대로 무사히 탈출하지 못한다면 꼼짝없이 지난 삶과 같은 비참한 결말을 반복할 수 있었다.

    “결단코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엘레나는 스스로를 믿었다. 남들이 보기에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을 지금껏 해냈다. 황실마저 굽어보는 대공가의 뿌리를 흔들고 리아브릭을 실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에 불안감이 꽈리를 틀고 앉았다. 한순간의 실수가 그녀가 지금까지 쌓은 모든 걸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러던 그때, 문밖에서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긴 대화도 아니고 목소리도 작았지만 워낙 조용하다 보니 들릴 수밖에 없었다.

    대화 소리가 사그라지자 엘레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걸어갔다.

    “경, 거기 있어요?”

    나지막하다 못해 너무 작은 목소리였지만 일반인보다 오감이 발달한 기사가 듣지 못할 소리는 아니었다.

    “네, 아가씨.”

    문 너머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경직되어 있던 엘레나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남들에겐 빙하같이 차가운 남자지만, 그녀에게만큼은 한없이 따뜻하고 긴장감마저 녹여주는 남자가 밖에 서 있었다.

    “휴렐바드 경.”

    “주무시지 않으시고.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문 건너편 휴렐바드의 목소리에 수심이 서렸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경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오늘 휴렐바드도 대공가의 눈을 피해 잠적할 계획이다. 그리되면 대공가를 탈주한 불명예 기사로 낙인찍히고 손가락질당할 것이다. 지금처럼 얼굴을 드러내고 다닌다는 것도 쉽지 않다.

    휴렐바드는 그러한 걸 다 감수하면서까지 엘레나를 선택했다. 대공가가 무너지기 전까지, 기약 없는 세월을 숨죽이고 살아야 함에도 엘레나의 곁에 남기로 한 그에게 너무도 고맙고 미안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긴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무뚝뚝하지만 사려 깊은 한마디가 엘레나의 긴장을 녹였다. 마음의 안식을 얻은 덕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여느 때보다 깊은 단잠이었다.

    새벽녘, 앤과 메이의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깬 엘레나는 몸단장에 열을 올렸다. 황태자비가 결정 나는 마지막 경합인 만큼 하녀들은 성심을 다해 치장에 신경 썼다. 네 시간에 가까운 몸단장을 끝낸 엘레나가 저택을 나섰다.

    “긴말은 하지 않으마.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해라.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네, 아버지.”

    엘레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보이며 프란체 대공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겠습니다.”

    다신 돌아올 생각이 없는 엘레나.

    “축하 선물을 준비해 두마.”

    인형에 어울리는 비참한 죽음을 선물할 프란체 대공.

    본심을 숨긴 작별 인사를 마친 엘레나가 마차에 올랐다. 메이와 앤이 동석했으며 휴렐바드와 로렌츠가 말을 끌고 마차의 좌우에서 호위했다. 그렇게 엘레나를 태운 마차가 대공가를 떠났다. 저택에서 멀어진 마차가 점보다 작아질 즈음 프란체 대공이 말했다.

    “시행해.”

    좀 전 엘레나를 배웅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자리에 없었던 아틸과 루미너스가 어느 틈에 나타나 움직였다.

    그 시각. 대공가를 나서는 엘레나는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잠겨 있었다. 회귀 전과 달리, 제 발로 대공가를 찾았고 이제 제 발로 나섰기 때문일까?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지금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여전히 건재한 대공가를 몰락시키기 위해 갈 길이 많이 남았단 생각이 들었다.

    ‘절반.’

    엘레나는 딱 그만큼 왔다고 판단했다. L의 신분으로 돌아가면 잠재된 대공가의 뇌관을 건드려 터뜨려야 한다.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걸 알면서도 설렜다. 베로니카라는 신분을 탈피하고 온전히 그녀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게 어떤 건지 기대됐다.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공존했다. 과거에 살아보지 못한 삶. 미지의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하루빨리 완성하고 싶었다.

    대공가를 출발한 마차가 황궁에 입성했다. 앞선 1차와 2차 경합과 달리 3차 경합은 서궁에서 진행된다.

    ‘3차 경합에 나갔다면 황후 전하를 뵈었겠구나.’

    서궁은 황후와 황비, 황녀들이 주로 지내는 궁이다. 이곳에서 3차 경합을 치르는 이유는 플로렌스 황후가 직접 후보 영애들의 면면을 살피고 대화를 나누며 평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플로렌스 황후는 앙칼지고 야망으로 똘똘 뭉친 여인이었다. 시안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가 요절하자, 4대 가문 중 하나인 질링엄 공작가의 여식이었던 그녀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현 황제와의 나이 차가 무려 스무 살이 넘게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황후가 되길 마다치 않았다. 플로렌스 황후에겐 제 핏줄을 이은 아들을 낳아 황위를 잇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질링엄 공작가라는 외가를 두고 있는 만큼 황태자 시안쯤이야 언제든 갈아 치울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플로렌스 황후가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다. 십 년이 되도록 회임 소식이 없자 친가인 질링엄 공작가마저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정치적으로 그녀의 이용 가치가 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외톨이가 된 플로렌스 황후는 악만 남았다. 어린 시안을 쥐 잡듯이 잡았으며, 엘레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며 분풀이를 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어머니였지만 황실의 어른이다 보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황궁에선 좋은 기억이 별로 없구나.’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아가씨, 내리셔야 할 거 같아요.”

    “그래.”

    마차에서 내리자 근위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엘레나가 걷자 어느새 말에서 내린 휴렐바드와 로렌츠가 뒤를 따랐다. 메이와 앤도 뒤처질세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여기서 대기하고 계시면 따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서궁에 마련된 응접실로 안내받은 엘레나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경들, 문 앞에 계시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어줄래요? 오늘 좀 예민하다 보니 자꾸 신경이 쓰이네요.”

    “그러시다면 복도 끝에 물러나 있겠습니다.”

    엘레나의 부탁에 근위대원들은 두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앞두고 영애들의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작은 거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니 최대한 협조하라는 시안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응접실로 들어온 엘레나는 곧장 거울 앞에 앉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여기서 자칫 일을 그르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고 만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휴렐바드 경, 로렌츠 경.”

    “네, 공녀 전하.”

    뒤쪽에 서 있던 두 기사가 동시에 대답했다.

    “드레스가 영 불편한 게…… 경들이 거기 계속 있으면 곤란할 거 같네요.”

    “아, 나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휴렐바드와 로렌츠가 응접실을 나서자 엘레나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기왕이면 응접실에서 좀 떨어져 계세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오늘 제가 좀 예민해서요.”

    “그리하겠습니다.”

    휴렐바드가 나서서 그러겠다고 하자 로렌츠도 별다른 반발 없이 순순히 따랐다. 3차 경합을 앞두고 엘레나가 예민하게 구는 건 전혀 의심스러울 게 없으니까.

    두 기사가 물러나자 앤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많이 불편하세요?”

    “드레스가 너무 조이는구나.”

    엘레나가 불쾌함까지 드러내자 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안 그래도 중요한 날인데, 혹여 자신의 실책으로 드레스가 속에서 말린 게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제, 제가 다시 봐드릴게요.”

    “그래 줄래?”

    엘레나의 뒤에 선 앤이 드레스를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끈을 풀었다. 행여 엘레나의 살결에 자극이라도 갈까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벗겨지는 드레스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잡고 있던 메이의 손등이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앤의 뒷목을 강타했다.

    퍽.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당한 앤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의식을 잃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걸 메이가 재빨리 부축했다. 엘레나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앤을 제압한 메이를 보며 감탄했다.

    “숙련된 솜씨구나.”

    “아시잖아요, 한때 대공을 암살하려 했던 거요.”

    왜 모르겠나. 누구도 해내지 못한 프란체 대공의 암살을 성공할 뻔한 유일한 암살자가 메이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만약 프란체 대공이 조금만 더 방심했다면 그녀의 단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메이가 의식을 잃은 앤을 보며 의중을 물었다.

    “데려가실 거죠?”

    “그래야지.”

    메이가 천을 꺼내 앤의 입을 감았다.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 뒤 손과 발목을 단단히 포박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 두고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여의치 않았다.

    ‘흔적을 남겨선 안 돼.’

    엘레나는 수증기처럼 증발하기를 바랐다. 그러자면 여기 앤을 두고 가는 건 대공가가 그녀를 추적할 빌미와 단서를 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가자꾸나.”

    “네, 아가씨.”

    메이는 제 몸집보다 큰 앤을 아무렇지 않게 등에 업었다. 의식을 잃은 걸 감안하면 본래 체중보다 더 무게가 나갈 텐데도 거침없었다.

    엘레나는 응접실에 마련된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사계절 내내 온화한 기후를 가진 제국이다 보니 벽난로를 이용하는 시기는 극히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궁 안에 마련된 침실과 응접실에는 벽난로가 빠짐없이 설비되어 있었다.

    왜일까? 일 년에 보름밖에 쓰이지 않는 벽난로를 굳이 황궁이라고 해서 설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곧 나왔다. 엘레나가 벽난로 옆에 세워져 있던 촛대를 손으로 쥐었다. 있는 힘껏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일정 규칙에 따라 촛대를 움직였다. 일종의 잠금장치로 혹시라도 모를 추적에 대비하여 고안해 놓은 것이다.

    달칵! 뭔가 딱 들어맞는 소리가 나자 벽난로 안에 놓인 나무장작 뒤쪽의 벽면이 비스듬하게 열렸다.

    “아가씨, 이게 비밀 통로예요?”

    “그렇단다.”

    엘레나 역시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살롱에서야 설계 단계부터 엘레나가 요구하고 개입했지만 이 비밀 통로는 다르다. 오백 년도 더 전에 건축된 황궁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부터 기함할 만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서두르자.”

    “네, 아가씨.”

    엘레나는 미리 챙겨 온 호롱에 불을 켜고는 벽난로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곳곳에 묻어 있던 까만 재에 드레스가 더럽혀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을 줘.”

    앤까지 엎고 오느라 힘에 부칠 메이를 손수 나서서 도왔다. 사느냐, 죽느나갸 달린 이 순간 직위나 신분의 고하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비밀 통로에 앤을 업은 메이까지 들어오자 엘레나가 안쪽에 마련된 페달을 힘껏 밟았다.

    큰 소리가 나고 벽난로 안, 비밀의 문이 닫혔다. 동시에 응접실 안에 마련된 촛대도 제자리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느껴지던 온기와 인기척이 사라진 응접실 안은 고요한 정적만이 남았다.

    “이쪽이구나.”

    엘레나는 칠흑 같은 비밀 통로 안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고작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나아갔다.

    * * *

    황궁 정문 앞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마차인지라 거리를 오가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마차에 로브를 뒤집어쓴 외간 사내가 접근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안광을 번뜩이며 주변을 훑더니 쏜살같이 마차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가늘지만 심지가 느껴지는 여인의 물음에 사내가 로브를 벗었다. 쭉 찢어진 뱁새눈과 짧은 머리의 그는 대공가 소속의 기사 루카스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묵례한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대공가에서 실각이 되어 쫓겨났다고 알려진 리아브릭이 앉아 있었다.

    “포위는 어떻게 됐죠?”

    “지시하신 대로 제2기사단을 배치해 뒀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리아브릭은 대공가를 상징하는 제 2기사단까지 움직여 황궁 주변에 배치했다. 그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기필코 그 인형을 오늘 죽이겠어.’

    리아브릭의 눈가에 살기가 감돌았다. 공식적으로 실각이라고 발표되었지만 보다시피 리아브릭은 대공가의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했다. 그녀의 실각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했다. 그런 리아브릭의 눈치를 살피던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작님, 건방진 말씀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신 연유가 있으신지요? 로렌츠 경까지 가짜 공녀의 곁에 있지 않습니까?”

    “경이 보기에도 제가 과해 보이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 보입니다.”

    예상과 달리 리아브릭이 순순히 인정했다.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네? 그런데 어째서?”

    “불안해서요.”

    대공가를 나온 리아브릭은 안가로 들어갔다. 시간을 갖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체 뭘 놓쳤고, 어디서부터 어긋났으며, 종국에 왜 실패했는지 분석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대역 주제에…… 늘 제 예상을 뛰어넘었거든요.”

    리아브릭은 더 이상 엘레나를 얕잡아 보지 않았다.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자로 인정했다. 그러지 않다면 당대 최고의 모사라 일컫는 음모의 리아브릭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지금의 리아브릭에게 방심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제1기사단에서도 검술이 출중한 기사들을 선별해 황궁 주위에 잠복시켜 두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한 조치였다. 그간 엘레나에게 보기 좋게 당했지만 오늘부로 과거형이 될 것이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가 만들어가는 것.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이 끝나고 대공가로 돌아가면 모든 게 끝난다. 그때까지만 조심하면 된다. 기사 루카스의 말대로 과한 게 부족한 것보다 낫다. 결과만 좋다면 모든 게 용서가 되니까.

    ‘근데 왜지? 이렇게 불안한 이유가 뭐냐고.’

    리아브릭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불안감에 육체가 잡아먹힌 기분이랄까.

    “어? 어! 저기 보십시오!”

    잠자코 있던 루카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마차 밖을 가리켰다. 리아브릭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호화로운 마차가 황궁을 나오고 있었다.

    “가짜 공녀가 타고 갔던 마차입니다!”

    리아브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시간대면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이 시작할 시간이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마차도 황궁 안에 대기하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추적하세요! 왜 나왔는지, 안에 누가 탔는지 확인하세요!”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마차를 박차고 나갔다. 리아브릭은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마뜩지가 않았다.

    * * *

    황궁 안, 네미네시아 정원. 본궁의 뒤뜰에 위치한 이곳은 황제만을 위한 공간이다. 잘 정돈된 정원 곳곳에는 과거 선대 황제들의 동상과 비가 세워져 있어 제국의 영광과 역사가 고스란히 기억된 곳이다.

    그곳에 현 황제 리처드가 앉아 있었다. 쉰 초반의 그는 앙상하게 마른 몸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병약한 까닭인지 황제의 위엄이나 기품은 보이지 않았다.

    “허허, 이리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려.”

    기운이 달리는 것인지 황제 리처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기가 놓인 원형 탁자의 좌우로 남녀가 앉아 있었다. 황제 리처드의 흑발을 물려받은 황태자 시안과 제국의 국모라 불리는 플로렌스 황후였다. 그녀는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을 치르기에 앞서 황제 리처드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불려왔다. 그건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참 모를 일이네요. 몇 년간, 절 찾지 않으시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차를 마시자니.”

    플로렌스 황후가 냉기를 풀풀 풍겼다. 부단히 후사를 가지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하지 못한 그녀는 이 모든 탓을 병약하고 심약한 리처드 황제가 사내구실을 잘 못 해서라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새 가족을 들이는 좋은 날이지 않소?”

    “가족이요?”

    플로렌스 황후가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찼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기엔 세 사람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플로렌스 황후는 책봉되자마자 어린 시안을 견제했다. 후사를 낳는다면 제거해야 할 1순위인 만큼 일말의 정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 어미의 정을 갈구하는 시안을 매몰차게 외면하고 별거 아닌 일로 트집을 잡아 질책하기도 했다. 나중을 위해 시안의 기를 죽이고 밟아놓기 위함이었다.

    그 모진 시간을 견뎌낸 시안이기에 형식적인 차원에서 황후를 향한 예를 다할 뿐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녀와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만큼 일그러진 관계였다. 그러한 사이를 모를 리가 없음에도 리처드 황제는 능청스럽게 대했다.

    “태자는 기분이 어떠한가? 곧 반려가 결정 날 터인데.”

    “황후마마께서 지혜로운 비를 간택해 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에 진출한 영애들은 최종 심사를 거쳐 플로렌스 황후의 간택을 받게 된다. 제국의 건국 이래 황태자비 간택은 내궁을 관장하는 황후의 몫이었다.

    “황후, 그렇다는구려.”

    리처드 황제가 쳐다보자 플로렌스 황후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못마땅하게 시안을 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태자가 저리 기다리는데, 황태자비 선출식을 더는 늦춰서는 곤란할 거 같네요. 일어나 보겠습니다, 폐하.”

    “허허, 황후가 태자를 이리 끔찍이 여기니 더는 바랄 게 없구려. 가보시오.”

    플로렌스 황후는 가볍게 예의를 갖추고는 돌아서서 정원을 나섰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비켜간 사이다 보니 더 할 말도 없었고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도 불편했다.

    “이제 되었느냐?”

    플로렌스 황후가 정원을 빠져나간 걸 확인한 황제 리처드가 물었다.

    “네, 아바마마.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게냐? 네가 하도 부탁해 황후를 묶어놓긴 했다만…… 콜록콜록.”

    말을 이어가던 리처드 황제가 기침을 해댔다.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데 정원에 나온지라 평소보다 기침이 심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고작 기침이다. 개의치 말거라.”

    “하나…….”

    시안의 만면에 수심이 깊어졌다. 근래 들어 리처드 황제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된 까닭이었다.

    “나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네게 큰 짐을 남기고 가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

    “가보아라. 할 일이 남지 않았더냐?”

    리처드 황제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손을 휙휙 저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는 시안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황실 치료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고칠 병이었으면 진즉에 고쳤겠지. 괜한 짓 말고 네 일에 신경 써라. 가거라, 어서.”

    리처드 황제의 재촉에 시안은 묵례하고는 급히 정원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본궁을 나선 시안이 별궁으로 이동했다.

    ‘계획대로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냐?’

    시안의 머릿속은 온통 엘레나 생각으로 가득했다. 리처드 황제에게 부탁해 예정에도 없는 티타임을 가진 것도 그녀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궁을 빠져나가는 동안 3차 경합을 최대한 미뤄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채도록 손을 쓴 것이다. 플로렌스 황후와 예정에 없는 티타임을 가짐으로써 시간 벌기는 성공했다.

    ‘너는 모르겠지.’

    다음 시안이 맡은 역할은 미끼였다. 오직 황태자 신분을 가진 시안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대공가의 신경을 분산시켜 놓는 역할이었다.

    ‘당장에라도 네게 달려가고 싶은 걸 참고 있는 내 심정을.’

    지금이라도 비밀 통로를 이용해 엘레나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달려가서 돕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이 간절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시안이 본궁 뒤에 위치한 별궁에 도착하자 황궁근위대가 도열해 있었다. 황궁근위대장이 먼저 예를 갖추자 근위대원들이 일제히 시안을 향해 인사했다.

    “준비는?”

    “다 끝냈습니다만, 정말 사냥을 가실 참이십니까? 이제 경합이…….”

    황궁근위대장 제라드의 물음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 황궁에 있어봐야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

    시안은 제라드 주변의 다른 기사들도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얘기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근위대원들이 윗선의 귀족들에게 시안이 떠든 말을 보고하라고. 갑작스러운 사냥을 나선 시안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가도록 하지.”

    “네. 전하를 따르라!”

    수려한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에 오른 시안이 앞장서서 별궁을 나섰다.

    * * *

    “공녀가 구두를 가져오라고 시켰다고요?”

    리아브릭의 반문에 마차를 추적하고 돌아온 루카스가 끄덕였다.

    “마부의 말로는 그렇습니다. 공녀가 발을 헛디뎌 구두 굽이 부러졌다며 서둘러 가져오라고 그랬답니다.”

    리아브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이 황태자비 선출식인 걸 감안하면 시중을 드는 앤이나 메이가 여분의 구두를 챙겨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데, 대공가로 가 새 구두를 가져오라고 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요.”

    리아브릭이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별거 아닌 일이라 가벼이 넘기다 낭패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닌 까닭이었다.

    “저도 석연치 않긴 합니다만…… 너무 조급해하시는 게 아닌지.”

    “아뇨.”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얄팍해 보이는 엘레나의 행동 너머엔 늘 리아브릭보다 한 수 앞서는 고단수 계책이 숨어 있었다.

    “황궁에 들어가 진위 여부를 파악해야겠어요.”

    리아브릭은 당장에라도 마차에서 뛰쳐나갈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진정하십시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당장 황궁으로 가세요. 사소한 것 하나도 넘겨짚으면 안 돼요. 하나도 거르지 말고 제게 보고하세요.”

    “알겠습니다.”

    리아브릭의 신신당부를 받은 루카스가 직접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대공가 소속의 기사단원 하나가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루카스가 문을 비스듬히 열고 묻자 기사단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금 별궁 쪽으로 황태자 전하가 나오셨다고 합니다.”

    “뭐가 어째?”

    표정을 굳힌 루카스가 리아브릭을 쳐다봤다. 리아브릭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전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시안의 외출은 예정에 없었다.

    “추적하세요! 어서!”

    “하지만…….”

    루카스가 말을 흐렸다. 상대는 황실이다. 기사단원을 대동해 추적한 사실이 발각되면 자칫 곤란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탈자가 있는지만 확인하면 돼요. 그마저도 못 해요?”

    리아브릭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막연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면서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기사단원이 서둘러 움직였다. 여기서 별궁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지체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에서부터 다급함이 묻어났다.

    “저도 움직이겠습니다. 황실 안 사정을 파악한 후 곧장 돌아오겠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루카스까지 떠난 뒤, 마차 안에 홀로 남은 리아브릭이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 시각. 나가 있으라는 엘레나의 명을 받고 응접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로렌츠와 휴렐바드는 곧 3차 경합이 시작될 예정이니 엘레나를 모셔오라는 말을 듣고는 문 앞에 섰다.

    “곧 경합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휴렐바드가 노크를 하며 고했으나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다못해 앤이나 메이가 나올 법도 하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아가씨.”

    휴렐바드의 몇 번의 부름에도 응접실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로렌츠가 거칠게 문고리를 돌리더니 방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텅 빈 응접실 안을 목격한 로렌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응접실 안을 뒤졌지만 어디서도 엘레나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달칵. 당황하던 로렌츠가 돌아보자 휴렐바드가 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엘레나가 감쪽같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휴렐바드를 보며 로렌츠가 경계의 날을 세웠다.

    “아가씨께서 말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휴렐바드가 찬찬히 검을 뽑았다. 얼음장보다 찬 표정에서 서릿빛 살기가 흘러내렸다.

    “배신의 기사 로렌츠 경에게 안식을 선물해 주겠노라고. 그것이 그대에게 주는 벌이라고.”

    로렌츠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까마득한 후배가 자신을 벌하겠다고 운운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모욕적으로 들렸다.

    “배신의 기사? 근본 없는 널 기사단에 받아들였더니, 사리 분별조차 제대로 못 하는 꼴이군. 아주 가관이야.”

    “…….”

    “내 말 똑똑히 들어라, 휴렐바드! 배신의 기사는 내가 아니라 너다. 제 주인이 가짜 공녀인 것도 모르는 주제에. 내게 검을 들이밀었다는 것 자체가 대공가를 배신하는 행위다!”

    로렌츠의 윽박에도 불구하고 휴렐바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되레 검을 들어 올리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이게 제 기사도입니다.”

    “뭐?”

    “내 레이디는 오직 아가씨뿐. 그녀를 배신하는 게, 내게는 가장 치욕적인 불명예입니다.”

    “너 이 자식…… 설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

    로렌츠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됐다. 3차 경합을 앞두고 예민하다는 핑계로 그와 휴렐바드를 응접실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부터 계획적이었다. 그는 엘레나가 사라졌단 사실에 놀라기는커녕 응접실 문을 잠그더니 기다렸다는 듯 적의를 드러냈다.

    로렌츠가 이를 아득 갈았다. 전임자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대공가의 기사단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던 초원 부족 출신에게 무시를 당했단 거에 분기가 치밀었다.

    “이래서 근본 없는 건 받아들이는 게 아닌데. 너나 그 천한 년이나.”

    로렌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애검을 뽑았다. 예리하다 못해 소름 끼치도록 스산한 기운이 검날에서 흘러나왔다. 살기였다.

    “널 고문하면 가짜 공녀의 행방을 좇을 수 있겠지.”

    리아브릭이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갔지만 로렌츠는 침착했다. 그는 대공가 내에서도 엘리트로 분류되는 제1기사단 소속이다. 검술 실력만 놓고 보자면 제1기사단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출중했다.

    “가짜 공녀가 실수한 게 뭔지 알아?”

    “…….”

    “널 여기 남겨둔 것. 넌 날 절대 이기지 못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렌츠가 지면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휴렐바드 앞까지 쇄도한 그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휙! 휴렐바드는 몸을 비스듬히 눕혀 공격을 흘렸다. 아슬아슬하게 가슴팍을 스치며 검날이 지나갔다. 선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휴렐바드의 자세를 무너뜨리는 것으로도 로렌츠는 만족했다. 가장 중요한 기세를 잡았기 때문이다. 로렌츠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파공음이 방 안 곳곳에서 터졌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지?”

    “…….”

    “그런 허접한 실력으로 날 벌줄 수 있나 모르겠는데?”

    기선을 제압하고 쉼 없이 몰아붙이는 로렌츠가 이죽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이 승부의 주도권은 로렌츠가 쥐고 있었다. 휴렐바드는 폭풍처럼 쏟아지는 로렌츠의 검 앞에서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피하는 데만 급급했다.

    “용케 잘 피하는데…… 다리를 잘라도 네가 그럴 수 있을까?”

    로렌츠는 기세등등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서 보여주듯이 휴렐바드를 제압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건 오만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휴렐바드는 밀리고 있었고 살얼음판에 서 있는 듯 아슬아슬했으니까.

    “고작 이 정도 실력입니까?”

    “뭐?”

    “그렇다면 실망이군요.”

    “건방진 새끼.”

    로렌츠는 픽 하고 비웃었다. 입만 살아서는. 궁지에 몰린 쥐가 허세를 부린다는 것쯤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툭. 소나기 같은 검날의 쏟아짐에 내몰린 휴렐바드가 벽에 몰렸다. 더는 휴렐바드가 몸을 뺄 수도 없을 만큼 공간을 선점한 로렌츠가 완벽에 가까운 동작으로 검을 그었다. 정확히 휴렐바드의 옆구리부터 우측 허벅지를 노렸다.

    “……!”

    순간 로렌츠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오싹함이 엄습했다.

    ‘뭐, 뭐지?’

    영문 모를 불안감을 느꼈지만 일격은 멈추지 않았다. 휴렐바드의 옆구리에 검이 거의 닿기 직전인 만큼 공격을 성사해 불안감을 떨치려고 했다. 하나, 그러한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로렌츠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봤다. 시리도록 찬 검날이 복부를 꿰뚫고 허리 뒤로 튀어나간 듯했다. 움직임조차 보지 못했는데 어느 틈에 검을 박아버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잔상?’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한 동작에 로렌츠의 눈에는 휴렐바드가 멈춰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저 근본도 없는…… 초원 부족 출신에게 내가…….’

    로렌츠도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아직까지도 그가 18세에 받은 최연소 기사 선임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휴렐바드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한 수 차이의 수준이 아니라, 압도적인 격차였다. 대공가의 제1기사단 기사단장이라 할지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실력이었다.

    휴렐바드는 무심한 눈길로 그런 로렌츠를 쳐다봤다. 승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휴렐바드의 모습이 로렌츠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 이 자식…… 컥.”

    차갑게 느껴지던 검날이 살과 복부를 파자 피가 역류했다. 입안 가득 역류하는 비릿한 피를 참지 못하고 각혈하려 할 때였다.

    “웁.”

    휴렐바드가 손수건을 로렌츠의 입안에 욱여넣었다. 역류한 피가 손수건을 붉게 물들였다. 죽음마저 비웃는 듯한 모욕적인 행위였지만 로렌츠에겐 저항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휴렐바드가 고저 없이 말했다.

    “아가씨가 내리는 벌은 안식입니다.”

    죽음이란 안식.

    “하나, 이게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아가씨를 모욕한 대가는 제가 치르게 할 겁니다. 당신이 무시한 초원 부족의 방식으로.”

    휴렐바드는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 자작님께 어서 이 사실을…….’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리아브릭에게 가야 한단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러나 죽어가는 육신은 그의 의지를 배신하며 축 늘어졌다. 숨이 끊긴 걸 확인한 휴렐바드가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몸을 한 손으로 받쳤다. 그러고는 여분의 손수건을 꺼내 검이 박힌 부위에 욱여넣었다. 피가 최대한 새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엘레나는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말라 지시했다. 로렌츠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휴렐바드가 맞상대를 하지 않고 빈틈을 노린 것도 그 때문이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파공음을 듣고 근위대원들이 몰려오게 된다면 그가 몸을 빼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직 멀었어.”

    휴렐바드는 수양이 부족한 제 실력을 질책했다. 의도적으로 접전을 피하며 로렌츠의 방심을 유도한 뒤 일격에 제압하는 건 좋았다. 워낙 실력 차이가 컸던 만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손속이었다. 엘레나를 천한 년이라 모욕한 것에 흥분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감정적인 영향으로 예상보다 많은 피를 보며 로렌츠를 죽이고 말았다.

    “날 모욕하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아가씨를 욕보이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로렌츠의 시신을 벽난로 쪽으로 끌고 갔다. 검이 박힌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로렌츠의 제복을 흥건히 적셨다. 손수건으로 조치를 취해두긴 했지만 지체했다간 피가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휴렐바드는 촛대를 움켜쥐고는 엘레나가 일러준 대로 조작했다.

    딸칵! 딱 들어맞는 소리가 나며 벽난로 안쪽의 벽면이 열리며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휴렐바드는 검이 박힌 로렌츠의 시신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비밀 통로로 옮겼다. 그러고는 응접실 안을 살피며 혹시라도 남겼을지 모를 흔적을 살피고는 비밀 통로로 사라졌다.

    쿵. 벽난로 뒤 석벽이 닫히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소란이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응접실은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 *

    음습한 비밀 통로를 따라 엘레나가 발을 내디뎠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것도 버거운데 내부가 미로처럼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다 보니 속도를 내기 쉽지 않았다.

    “메이, 조금만 참아. 곧 나갈 수 있어.”

    엘레나는 뒤에서 힘겹게 쫓아오는 메이를 다독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을 잃은 앤을 업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을 텐데, 시야도 확보되지 않은 좁은 비밀 통로를 따라 걸어야 하니 벅찼을 것이다.

    “전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씩씩하게 대답하는 메이에게 미안함을 느낀 엘레나가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끝없는 정적과 어둠이 서서히 답답함으로 그녀의 가슴을 옥죄어올 때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나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거의 다 온 거 같아.”

    비밀 통로를 통해 나갈 수 있는 탈출구는 총 두 군데다. 그중 첫 번째 통로가 이 지하 수로였다. 엘레나가 가까이서 보니 물살이 그리 세지 않았다. 수심도 그리 깊지 않아 성인 장정 한 명이 몸을 맡기고 실려 가기 딱 적합했다.

    ‘이 물살에 몸을 맡기면 단숨에 수도를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지.’

    황궁 밑에 이런 지하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안다고 쳐도 비상 탈출의 용도로 이용할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쉽지만 이 길은 아니야.’

    그러나 엘레나는 지하수에 몸을 담그지 않았다. 단숨에 수도 밖까지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으로 나갈지 파악이 불가능하다. 대충 짐작되는 강줄기가 있다지만 황궁이 세워진 지 수백 년이 지난 걸 감안하면 지하 수로가 망가지지 않았을 거란 확신도 없었다. 정말 무사히 나갔다 하더라도 의식이 없는 앤을 데리고 나가기에는 무리였다.

    “저쪽으로 가자.”

    엘레나는 두 번째 탈출구를 선택했다. 물살을 이용해 단숨에 수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 황궁 외벽과 내벽 사이의 틈을 이용해 동궁으로 빠져나가는 방법이다.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겠네.’

    아마 황궁이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3차 경합을 치르고자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엘레나와 시녀, 기사까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을 테니까.

    그게 다가 아니다. 엘레나가 타고 온 마차는 대공가로 돌아갔고, 황제 리처드가 예정에도 없는 티타임을 열어 경합을 늦춰지게 만들었다. 황태자비 선출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시안은 사냥을 나섰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이 연쇄작용처럼 일어나며 그녀를 주시하던 대공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다들 잘해줘야 할 터인데…….’

    엘레나는 불안감을 삼켰다. 공을 들여 치밀하게 계획을 짰지만 완벽한 건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변수란 게 있게 마련이니까.

    “여기구나.”

    비밀 통로의 끝, 막다른 벽 앞에 선 엘레나가 석벽을 더듬거렸다. 손끝에 닿는 이질적인 감촉의 벽돌을 있는 힘껏 밀었다. 조금씩 석벽이 열리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앤을 내려놓은 메이까지 나서서 거들자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 만큼 석벽이 열렸다.

    엘레나가 앞장서서 석벽 사이로 몸을 뺐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석벽 때문인지 어둡단 인상을 받았다. 까마득히 높은 황궁 외벽이 11자로 쭉 뻗어 있는데, 엘레나는 그 사이에 껴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좁은 골목 사이에 있는 기분이랄까.

    “가자.”

    비밀 통로만큼이나 좁은 외벽 사이로 엘레나가 걸었다. 좌우 폭이 워낙 좁다 보니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자나 노숙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득히 높은 담장 너머의 푸르른 하늘을 보며 엘레나가 얼마쯤 걸었을까. 멀리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달리는 마차의 진동, 행인들의 말소리, 과일 장수의 호객 행위 등 수도의 일상적인 소리였다. 골목이 거의 끝나간다는 걸 의미했다.

    엘레나가 모퉁이를 돌아 걸음을 재촉하자 11자로 이어지던 외벽의 끝자락이 보였다. 이제 외벽 사이 골목을 나서면 수도의 가도다. 안심하긴 이르지만 황궁은 무사히 빠져나온 셈이었다.

    “다 왔어.”

    엘레나가 발길을 멈췄다. 외벽은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의 골목도 없었다. 코앞이 가도였다. 하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엘레나의 앞을 이질적인 천막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진짜 조마조마해서…… 예상보다 늦어져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천막 뒤쪽으로 웬 남자가 투덜거리며 걸어 나왔다. 더벅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독특한 옷차림은 유색인종에 가까웠다.

    엘레나는 그런 사내를 경계하기는커녕 친근하게 대꾸했다.

    “비밀 통로가 생각보다 좀 복잡해서요.”

    “무사했으면 됐다. 이쪽으로 들어와.”

    사내의 정체는 집시로 변장한 칼리프였다. 황태자비 선출식에 참가했던 옷차림으로는 가도로 나가는 순간 주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가 사전에 골목 끝에 칼리프를 대기시킨 이유였다. 은밀하고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한 안배랄까.

    천막 안은 비좁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막은 유랑 민족 집시들이 애용하는 유랑 마차였다.

    “돌아 있을 테니, 어서 옷부터 갈아입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칼리프는 외부인이 보지 못하도록 바깥 천막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사이 엘레나는 드레스를 벗고는 칼리프와 마찬가지로 떠돌이 집시들이 주로 입는 허름한 전통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상황이 어때요?”

    “황궁 주변에 대공가의 기사들이 쫙 깔렸어. 조금이라도 수상쩍거나 황궁에서 나오는 마차들은 쫓아가서 다 검열해.”

    “그 정도예요?”

    “장난 아냐. 직접 보면 살벌해.”

    대략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전해 들은 엘레나의 눈빛은 예상외로 차분했다. 리아브릭이 실각된 이후, 대공가는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경계했다. 추가적으로 로렌츠를 배정하고 외출을 금지해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게 그 증거다.

    ‘예상은 했지만 과해. 꼭 작정하고 기다린 거 같잖아?’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공가의 조치는 과했다. 황궁 주변에 배치된 기사의 수만 보더라도 엘레나가 도망칠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촘촘한 포위망을 이루고 있었다.

    ‘정보가 샌 건가?’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의문을 지워 버렸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엘레나의 탈출 계획을 알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이 그녀의 사람이다. 그들이 한 명이라도 배신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납득이 가지 않아.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리아브릭은 실각을 당하고 대공가를 떠났다. 후임자로 아셀라스가 임명됐고 엘레나에게 인사까지 왔었다. 짧은 대화로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엘레나가 대역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밖의 상황은 신경 쓰지 말죠. 곧 있으면 휴렐바드 경이 올 거예요. 우린 계획대로 움직이면 돼요.”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엘레나는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금은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다음 변수가 생기면 그때 맞춰 능동적인 대처를 해야지, 사전에 겁을 집어먹고 계획을 바꾸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대화를 마친 세 사람은 천막 속에서 숨을 죽였다. 초조함 속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엘레나의 시선은 손에 쥔 회중시계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휴렐바드가 늦어지는 게 혹여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 마음 졸였다.

    “접니다, 아가씨.”

    외벽 사이 골목에서 들려온 휴렐바드의 목소리에 엘레나의 만면에 화색이 감돌았다.

    칼리프가 마차 옆 편의 천막을 들어 올리자 휴렐바드가 들어왔다.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한 그를 보고 엘레나가 안도했다.

    “뒤처리를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뒤처리.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에 엘레나는 묻지 않았다. 휴렐바드가 무사히 왔으니 그거면 족했다.

    “그런 말 마세요. 경을 다시 본 것만 해도 전 기쁘답니다.”

    이제야 엘레나는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아직 마음을 놓긴 일렀지만 지금까지는 엘레나의 계획대로 척척 흘러갔기 때문이다.

    “선배, 이제 가죠. 더 지체할 시간 없어요.”

    “안 그래도 그 말만 기다렸다.”

    칼리프는 유랑 마차 뒤 천막을 단단히 동여매고는 마차를 출발했다. 수레 크기에 비해 많은 사람을 태운지라 이동속도가 더뎠다. 그렇다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유랑 민족인 집시는 마차에서 생활하는 만큼 생필품이 많았다. 느리게 이동하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엘레나 일행을 태운 유랑 마차가 황궁에서 멀어졌다.

    * * *

    같은 시각.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에 참가해야 할 베로니카 공녀가 경합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입궁까지 한 베로니카 공녀가 오지 않자 플로렌스 황후가 근위대원을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베로니카 공녀에게 배정한 응접실을 찾은 근위대원은 아무리 노크를 해도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텅 빈 응접실을 본 근위대원들은 넋이 나갔다. 베로니카 공녀뿐만 아니라 수행원으로 따라온 기사 두 명과 시녀 둘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근위대원들이 다급히 플로렌스 황후에게 보고했다.

    플로렌스 황후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며 근위대를 다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태자 시안이 상당수의 근위대원을 대동해 사냥을 나선 까닭에 조사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뒤늦게 근위대원이 경비병을 통해 대공가의 마차가 사라진 걸 확인했다. 출입 명부를 확인하니 황궁을 빠져나간 게 확실했다. 근위대원은 그와 같은 사실을 플로렌스 황후에게 보고했다.

    “하! 그냥 돌아가? 황실을 이렇게 모욕하다니!”

    플로렌스 황후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더니 황태자비 선출식 3차 경합을 취소했다. 제국의 차기 국모를 결정하는 성스럽고 경건한 선출식이 모욕당했다고 느껴서였다. 아벨라 영애를 비롯해 최종 경합에 오른 네 명의 영애도 할 수 없이 가문으로 돌아갔다. 황태자비 선출은 내궁의 가장 큰 어른인 플로렌스 황후의 소관인 만큼 그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리아브릭은 마차를 타고 황궁 주변을 반복적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기사 루카스에게 황실 내부 사정을 알아오라고 보낸 동안 그녀는 황궁 주변을 배회하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다.

    “여기 유랑 마차가 있었던 것 같은데…….”

    황궁을 중심으로 번화가를 형성하다 보니 오가는 사람이나 장사치들이 많았다. 제아무리 리아브릭의 기억력이 좋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기억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수도 중심 지역까지 들어오는 일이 드문 유랑 마차의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너무 예민했나? 한낱 집시까지 신경 쓰다니.”

    리아브릭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실각 이후 부쩍 예민해져 있다 보니 그 피로가 누적된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네.”

    몇몇 예상 밖의 일이 터지긴 했지만, 아직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점은 없었다. 이대로 무사히 황태자비 선출식을 마치면 그녀의 불안감도 사라질 텐데…….

    “자작님, 루카스입니다.”

    “들어오세요.”

    리아브릭이 잠가뒀던 마차 문을 열어주자 루카스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황궁 내부 사정을 알아보러 갈 때와 딴판이었다. 덩달아 리아브릭도 긴장했다.

    “알아봤어요?”

    “큰일 났습니다. 가짜 공녀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너무 놀란 나머지 리아브릭의 어깨가 들썩였다.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다시 말해봐요. 사라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가짜 공녀가 최종 경합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근위대원들 말로는 타고 온 마차를 타고 황궁을 나간 것 같다고…….”

    “그걸 말이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에 리아브릭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이미 루카스를 시켜 알아봤지만 마차 안에 공녀는 없었다.

    “로렌츠 경은요? 가짜 공녀 옆에 붙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게 로렌츠 경도 함께 사라졌다고 합니다. 휴렐바드 경과 하녀들도요.”

    리아브릭은 믿을 수 없는 보고에 할 말을 잃었다. 구두를 핑계로 대공가로 돌아간 마차, 황태자 시안의 사냥, 엘레나 일행의 실종. 무얼 상상하든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결과였다. 더 무서운 건 일련의 사건이 우연이 아닌 필연의 연속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것이다.

    리아브릭은 최악을 가정했다. 우연을 가장해 엘레나가 짜둔 도주 계획이라면? 리아브릭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그렇다면 엘레나는 리아브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 된다.

    “도망친 거예요.”

    리아브릭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최악이라 가정을 했지만, 그 최악이 현실이 됐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오나 자작님, 가짜 공녀가 도망을 치려면 로렌츠 경을 떨어뜨려 놓아야 합니다. 휴렐바드 경에게 그럴 만한 실력이…….”

    “있다면요.”

    “네?”

    “그마저도 가짜 공녀의 계획이었다면요?”

    리아브릭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그녀가 대공가에 들인 것은 감당하지 못할 괴물이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로렌츠 경의 실력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차분히 다시 찾아보면 꼬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심각한 상황에도 루카스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돌발적인 상황이긴 하나 기사 로렌츠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신뢰했다. 그러나 리아브릭의 생각은 달랐다.

    ‘로렌츠 경은 당했을 가능성이 커.’

    리아브릭은 입술을 앙다물며 사고에 잠겼다. 엘레나가 자신과 동등하거나 한 수준 위의 지자라는 전제하에 오늘 벌어진 그 사건들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그 정도 능력이 없었다면 그녀를 낭떠러지까지 내몰 수 없었을 것이다.

    ‘실체는 하나야.’

    리아브릭은 미끼와 실체를 구분했다. 대공가로 돌려보낸 마차나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사냥은 그저 미끼에 불과하다. 무슨 마법을 부려 황궁 안에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계획적으로 엘레나가 도주했다는 게 중요했다.

    리아브릭이 잠시 접어두었던 수도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가짜 공녀를 태우고 갔던 마차가 어디로 나왔죠?”

    “정문입니다.”

    “그럼 황태자 전하가 나간 방향은?”

    “동궁 쪽일 겁니다. 황실 사냥터인 프라하 숲으로 간다고 했으니까요.”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황궁의 북문과 서문에 고정됐다.

    “북문은 아니야.”

    리아브릭은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별궁이 위치한 북문은 대공가가 황실에서 하사받은 황궁 내 직할령이다. 심야의 가면무도회를 별궁에서 개최했을 만큼 대공가의 영향력이 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나 대공가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험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서문뿐인데…….

    “유랑 마차!”

    뭔가 떠올린 리아브릭의 어깨가 들썩였다. 마차 안이 아니었다면 반사적으로 박차고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뭔가 짚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곧 찬 바람이 불 시기죠?”

    “네, 한 달 뒤면 서리의 계절이니까요. 한데 그게 이번 일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루카스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머리가 좋은 편이라 자부했지만 유랑 마차와 겨울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온화하다곤 하나 겨울은 겨울이죠. 유랑 민족인 집시들이 굳이 제국의 수도에서 겨울을 날 이유가 있을까요?”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집시들은 겨울을 주로 남부 지역에서 나는 걸로 압니다만.”

    리아브릭의 눈동자에 이지적인 이채가 감돌았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길 수도 있는 일을 리아브릭은 놓치지 않았다. 상식을 벗어나면 의심이 된다. 유랑 마차를 굳이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의 황궁 외벽에 세워둔 점. 유랑 마차가 사라지고 드러난 외벽 사이의 골목. 리아브릭은 유랑 마차에 엘레나가 타고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아니, 확신했다.

    “지금 당장 집시의 유랑 마차를 추적하세요. 대공가에 연락해 추가적인 지원 병력도 요청하세요.”

    “알겠습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브릭의 생각은 틀린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녀가 저리 단호하게 얘기했다면 엘레나는 집시 부족의 유랑 마차를 타고 도주한 게 분명했다. 촉각을 다루는 일인 만큼 루카스가 서둘러 마차를 나서려던 때였다.

    “경.”

    루카스가 돌아보자, 리아브릭의 눈빛에 진한 살기가 감돌았다.

    “가짜 공녀를 죽여도 좋아요.”

    “……!”

    “뒤처리는 제가 합니다. 감당도 제가 하고요. 그러니 반드시 죽이세요.”

    “그리하죠.”

    순순히 명령을 받은 루카스가 마차를 뛰쳐나갔다. 홀로 남게 된 리아브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원래 계획은 대공가로 데려온 뒤 조용하게 제거하는 거였다. 그편이 제국을 속인 대연극의 완벽한 끝맺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엘레나를 놓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것보다 차악을 선택하는 게 옳다.

    “루카스 경이라면 실수가 없을 거야.”

    리아브릭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안감에 스스로 최면을 걸듯 읊조렸다. 루카스는 로렌츠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훌륭한 기사다. 차기 기사단장이 유력할 만큼 문무를 겸비했다. 그런 그가 대공가의 정예 기사들을 데리고 추격에 나섰다.

    엘레나의 직속 기사 휴렐바드가 예상치 못한 무위를 지녀 로렌츠를 제거했다고 한들 그들 전부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꼬리를 밟은 이상 실패는 없다. 엘레나는 오늘 죽을 것이다.

    * * *

    수도 서쪽 외곽 지역.

    엘레나 일행을 태운 유랑 마차가 유유히 산길을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었다. 휴렐바드는 유랑 마차의 천막을 슬며시 걷고 뒤를 살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말과 달리 엘레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집시 차림으로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던 칼리프가 한마디 거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야. 거기서 마차를 갈아타고 살롱으로 들어가면 돼.”

    “그때까지 아무 일 없으면 좋겠네요.”

    작은 바람을 담아 얘기하는 엘레나의 표정은 무거웠다. 재빠른 대공가의 대처를 보고 있자니 리아브릭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유랑 마차가 산턱을 따라 올라갔다. 수도 서쪽은 숲이 험해 인적이 드물었다. 약초꾼이나 나무꾼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용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가도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엘레나는 이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은밀히 마차를 갈아타기도 수월하거니와 행적을 지우기도 용이했다.

    지금쯤이면 가짜 L을 태운 호화 마차가 서부 순회 일정을 마치고 목적지 근교에 다다랐을 것이다. 엘레나는 가짜 L의 동선까지 계산에 넣었다. 엇갈리듯 만나 L의 마차로 갈아탄 뒤, 살롱으로 돌아오면 성공이었다.

    ‘얼마 안 남았어. 당당히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철이 들기 전, 대공가로 끌려와 베로니카 대역으로 살았다. 목적은 달랐지만, 이번 삶 역시 제 발로 대공가로 걸어 들어와 베로니카 대역을 자처했다. 이제야 지긋지긋한 껍데기를 집어 던지고 온전히 그녀의 삶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가씨, 몸을 숨기십시오.”

    “무슨 일이죠?”

    심상치 않은 휴렐바드의 발언에 엘레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산턱 아래에서 흙먼지가 일고 있습니다. 말을 타고 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추격자가 붙은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가요?”

    “네.”

    ‘하, 꼬리를 밟혔어.’

    엘레나는 좀 더 치밀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추격자가 붙었다는 건 그녀가 의식하지 못한 곳에서 흔적을 남겼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계획이 완벽하지 못했단 말이기도 했다.

    “곧 따라잡힐 겁니다. 안에 계십시오.”

    “조심하세요. 경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제 몸은 아가씨 겁니다. 부득이 상처를 입는다면 그때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휴렐바드의 충성스러운 말에 엘레나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토록 충성스럽고 명예로운 얼음의 기사가 곁을 지켜준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추격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휴렐바드도 마찬가지였다. 피어오르는 먼지로 짐작하건대 추격해 오는 기사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아가씨,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저 홀로 저들을 막기 버거워지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마시고 도망치셨으면 합니다.”

    휴렐바드의 눈길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가 아무리 제국의 삼검이라 일컬어지는 강자이긴 하나, 숙련된 기사를 상대로 수적 열세를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작정하고 아가씨를 노리면…… 지키기 버거울 수도 있어.’

    문제는 저들이 노골적으로 휴렐바드의 발을 묶어두고 엘레나를 노리는 경우다. 숫자 앞에 장사 없다고 휴렐바드라 한들 그땐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이 뭘 우려하는지 알아요.”

    엘레나가 시선을 맞췄다. 비장함이 느껴지는 휴렐바드의 눈을 보며 안심시키듯 말했다.

    “한데,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네?”

    “최악에 대처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거든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엘레나가 돌아서서 마차 안에 몸을 숨겼다. 그녀의 말을 곱씹던 휴렐바드는 마차를 모는 칼리프에게 추격자가 붙었다는 사실을 인지시켰다. 죽을지도 모른단 위기감에 칼리프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일단 내가 둘러대 볼게요. 직접 본 게 아니면 뭔 재주로 이 마차에 탄 줄 알겠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천막 안에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휴렐바드가 천막 안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지면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숲을 어지럽혔다. 기사 루카스를 선두로 제1기사단 소속에서도 정예로 손꼽히는 기사단원들이 턱밑까지 추격해 온 것이다.

    “멈춰라!”

    루카스의 외침에 칼리프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뒤쫓아 온 기사들이 유랑 마차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포위했다.

    “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지요?”

    칼리프는 겁이 잔뜩 질린 듯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것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실감 났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고, 천막에 뭐가 들었지?”

    “네? 그야 제가 먹고 자는데 쓰는 생필품이…….”

    “피미르!”

    루카스가 말을 자르며 호명했다. 그러자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수색해.”

    명령을 받은 기사 피미르가 말에서 내려 유랑 마차로 가까이 다가갔다. 외견상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자 천막을 찢고 내부를 확인하려던 때였다.

    번쩍. 찢어진 천막 사이로 쏟아지던 햇빛이 쇠붙이에 닿으며 빛을 반사했다. 피미르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리자 나무 상자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휴렐바드의 신형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헉!”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피미르의 심장에 검이 박혔다.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던 피미르가 유랑 마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즉사였다.

    “피미르!”

    당황한 기사들이 맹렬한 살의를 드러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아홉.’

    휴렐바드는 상대해야 할 기사의 숫자를 읊조리며 천막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료가 당했단 사실에 기사들이 죽일 듯한 살기와 적의를 드러냈지만 휴렐바드는 얼음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휴렐바드, 네 이놈! 암습을 가한 것도 모자라 동료를 베다니! 명예마저 잃은 네가 그러고도 기사라고 할 수 있느냐!”

    루카스가 눈을 부라리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일갈했다.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눈앞에서 죽자 반쯤 이성이 날아갔다.

    “나의 명예는 하나다. 나의 레이디를 지키는 것. 그러기 위해 벤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렐바드가 지면을 박찼다. 유랑 마차에서 가장 가깝게 서 있던 기사 아델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쇄도해 오는 휴렐바드를 상대하려는데 한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어디로…… 헉!”

    오싹한 기분이 든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휴렐바드가 말에 탄 그보다 더 높이 뛰어올라 벼락처럼 검을 내리그었다.

    챙! 숙련된 기사답게 본능적으로 검을 눕힌 후 머리 위로 치켜들어 휴렐바드의 검을 막았다. 두 쇠붙이가 충돌하며 듣기 싫은 굉음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기사 아델은 간담이 서늘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거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너 이 자식!”

    결과적으로 휴렐바드의 기습은 실패했다. 더구나 동작을 크게 가져간 까닭에 체공 시간이 길어져 틈이 생겼다. 이대로 검을 찌른다면 무방비인 휴렐바드는 피할 수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휴렐바드는 그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기사였다. 허공에서 몸을 탄력적으로 비틀어 원심력을 줘서 회전했다. 당황한 아델이 상체를 틀어 휴렐바드를 쫓았지만 이미 늦었다.

    휴렐바드의 검날이 희미한 궤적을 남기며 그어졌다. 기사가 어깨를 떨며 움찔했다. 민첩하던 반응이 점점 무뎌지더니 이내 낙마했다. 아델의 가슴에 새겨진 검상에서 피가 흘러나와 제복을 적셨다.

    “아델!”

    루카스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친애하던 동료를 눈앞에서 두 명이나 잃은 슬픔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앞으로 여덟.’

    휴렐바드는 서리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기습으로 두 명을 제압하긴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저들이 작정하고 엘레나를 노린다면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기습은 통하지 않아.’

    루카스는 제1기사단 내에서도 알아주는 강자다. 공공연히 차기 기사단장감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지휘력도 출중했다. 지금도 보라. 동료를 잃었단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기를 느끼면서도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내가 널 만만히 봤구나.”

    “…….”

    “초원 부족 새끼들이 얼마나 야비한지를 알았어야 했는데. 이런 실력을 숨겼을 줄이야. 로렌츠 경도 네 손에 죽었겠지?”

    휴렐바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했던가. 루카스의 살기가 더욱 맹렬해졌다.

    “오늘 널 죽여 죽은 기사들의 넋을 달래마.”

    “할 수 있다면요.”

    “뭐가 어째?”

    휴렐바드가 의도적으로 도발 어린 말을 날리며 루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마차 안에 숨어 있는 엘레나를 대신해서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우두머리를 노린다.’

    루카스를 제거한다면 기사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어진다. 당연히 엘레나를 노리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리되면 남은 기사들의 각개격파도 가능했다.

    “협공해!”

    루카스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명령했다. 공간이 협소한 숲속이다 보니 말을 타고 싸우는 건 불리했다.

    일 대 팔의 난투전이 벌어졌다. 어느 한쪽도 물러섬 없는 진검 승부였다.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살의가 넘쳤다.

    비등비등하던 승부의 추는 공방이 길어질수록 한쪽으로 기울었다. 점차 수세로 몰린 건 휴렐바드 쪽이었다. 한 몸처럼 움직이는 여덟 기사의 맹공에 뒷걸음질 치며 방어에만 급급했다. 

    위기에 몰아넣을수록 기가 산 기사들의 공격이 사나워질 즈음이었다. 휴렐바드는 버거운 척 굴며 의도적으로 빈틈을 보였다. 그걸 포착한 기사가 검을 찔러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보다 빠르게 휴렐바드의 쾌검이 궤적을 그렸다.

    “컥!”

    “브록!”

    복부를 베인 기사 브록이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워낙 출혈이 큰 까닭에 살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아, 하아.”

    휴렐바드가 거친 숨을 토했다.

    “앞으로 일곱…….”

    체력이 점점 고갈되었지만 휴렐바드의 안광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으으! 이런 괴물 같은 놈.”

    루카스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휴렐바드의 강함은 진짜였다. 어째서 이만한 검술을 지닌 기사가 지금까지 무명에 머물러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 이유는 엘레나에게 있었다. 휴렐바드를 곁에 두고자 직속 기사로 임명한 엘레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를 숨겼었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기에 비장의 수로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넋을 달랜다고 하더니, 위로할 넋이 늘었군요.”

    “이, 이!”

    휴렐바드의 비아냥거림에 루카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낱 평민 출신 기사인 휴렐바드에게 대공가 검이라 일컫는 제1기사단 소속의 기사 넷이 목숨을 잃었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네놈만은…… 아! 그런 거였나?”

    순간 든 생각에 루카스가 볼을 실룩거렸다. 뭔가 자꾸 위화감이 들었는데, 이제야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루카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턱짓으로 유랑 마차를 가리켰다.

    “일부러 날 자극하고 도발한 이유가 혹시 저 가짜 공녀 때문인가?”

    “…….”

    “그래서였어. 가짜 공녀에게서 우릴 떼어놓으려고……. 이를 어쩌지? 네가 강한 건 사실이지만 이제 알아버렸으니까.”

    정곡을 찔렸는데도 휴렐바드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카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또 이곳에 오기 전 리아브릭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제야 우선순위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다들 휴렐바드의 발을 묶어라. 죽이지 못해도 좋아.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게 해.”

    루카스가 치아를 드러내며 사이하게 웃었다.

    “난 그사이 가짜 공녀를 없애지.”

    휴렐바드가 재빨리 반응하며 저지하려고 했지만 남은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루카스가 비웃음을 띠며 유랑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네 상대는 우리다.”

    여섯 명의 기사는 길목을 차단하더니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루카스가 빠진 만큼 제압은 요원했지만 진로를 막는 정도라면 해낼 자신이 있었다. 공방이 오갈수록 침착함을 잃지 않던 휴렐바드의 눈빛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통에 좀처럼 떼어놓기가 쉽지 않았다.

    “아가씨, 도망치셔야 합니다!”

    휴렐바드가 소리치며 위급함을 알렸다. 그러자 마부석에 앉아 있던 칼리프가 있는 힘껏 고삐를 내려치며 내달렸다.

    “어딜 내빼려고!”

    유랑 마차에 가속도가 붙는 속도보다 루카스의 몸놀림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달려들더니 단숨에 도약해 유랑 마차 위로 올라탔다. 루카스는 검을 휘둘러 너덜너덜해진 나머지 천막마저 다 찢어버렸다. 빛이 들어오자 어설프게 쌓아둔 짐 더미가 보였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루카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였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짧은 단도가 짐 더미 사이에서 날아들었다. 하지만 숙련된 기사인 루카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몸이 닿기 직전에 검신으로 쳐낸 단도들이 떨어져 마차에 박혔다.

    “알량한 재주군.”

    더는 숨어 있어봐야 의미가 없단 걸 깨달은 엘레나와 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이의 손에는 조금 전 루카스를 노렸던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아 씨, 돌겠네!”

    더는 마차를 모는 게 의미 없다고 여긴 칼리프가 마부석 안쪽에 숨겨두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생전 검을 쥐어본 적도 없었지만 저항이라도 해볼 심산으로 대치했다.

    “공녀.”

    루카스는 제 앞에 고고한 학처럼 서 있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집시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감출 수 없는 고귀함이 느껴졌다.

    “큭, 많이 변했어. 공국에서 데려올 때만 해도 어리바리했는데, 이제 제법 귀족 티가 나.”

    “……기억나네요. 그때의 마부였군요.”

    엘레나는 한눈에 루카스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 그날 이후 보이지 않기에 기억에서 지웠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마주할 줄은 몰랐다.

    “눈썰미도 좋군. 하긴, 그러니까 남의 이목을 속이고 이런 과감한 계획을 짰겠지?”

    “당신인가요. 제 계획을 눈치챈 사람이?”

    “그럴 리가.”

    루카스가 히죽 웃었다. 엘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아브릭이군요.”

    “역시, 예리해.”

    리아브릭의 존재를 인정하는 발언에도 엘레나는 태연자약했다. 내심 그녀이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던 만큼 딱히 놀랄 일도 없었다.

    루카스는 그런 엘레나의 반응에 미간을 좁혔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주제에 엘레나는 초연했다. 죽음이 비켜간 듯 구는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리아브릭 자작님의 말씀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널 죽이라신다.”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엘레나가 딱 끊어서 단정적으로 얘기하자 루카스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그래? 그럼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자고.”

    루카스는 질질 끌 생각이 없는지 곧장 몸을 날렸다.

    옆에 서 있던 메이가 있는 힘껏 단도를 던졌지만 루카스는 가볍게 검신을 가져다 대서 튕겨 버렸다.

    “아가씨, 피하세요!”

    “물러나!”

    무방비나 다름없는 엘레나의 앞을 메이와 칼리프가 막아섰다. 위급한 상황이건만 엘레나는 몸을 빼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정면에서 달려드는 루카스를 무심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루카스가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한낱 계집의 눈빛에 움츠렸단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곤 더 매섭게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헙!”

    순간 루카스의 왼편에서 오싹한 살기가 느껴졌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본능이 피하지 않는다면 죽는다고 경고했다. 엘레나의 목에 검이 닿기 직전 루카스가 동작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제동으로 그의 몸이 볼썽사납게 미끄러졌다. 엘레나와 루카스 사이에 검 한 자루가 날아와 수레에 박혔다. 그 힘이 어찌나 셌던지 마차를 찢은 것도 모자라 수레가 부르르 떨렸다.

    “아쉬워라.”

    소리의 근원지이자, 검이 날아온 방향을 보며 루카스가 눈을 부라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나뭇가지 위에 검은 복면인이 서 있었다.

    “웬 놈이냐?!”

    검은 복면인이 제비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사뿐히 마차에 내려왔다. 그러더니 마차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어깨에 얹었다.

    “누구긴. 악당 잡는 악당이지.”

    * * *

    열흘 전, 대공가.

    리아브릭의 실각 이후 엘레나는 저택 내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단 걸 피부로 느꼈다. 외출을 막은 것도 모자라 외부인과 접촉도 차단했다. 기사 로렌츠는 한시도 엘레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발이 잘린 것처럼 어느 것 하나 그녀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의심의 수준을 넘어섰어.’

    엘레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손 놓고 있다간 잡아먹힐지도 몰라.’

    고심을 거듭하던 엘레나는 디저트 전문 요리사 쿠일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요리사 쿠일은 렌이 심어놓은 간자였다. 만약 손쓸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거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를 통해 연락하라고 했다.

    “최종 경합식 날에 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해주세요.”

    엘레나는 그날의 계획에 대해 차근차근 일러줬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억한 요리사 쿠일이 말을 덧붙였다.

    “공녀 전하께서 도움을 청하시면 그분께서 전하란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말해보세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요.”

    요리사 쿠일이 묵례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 * *

    “좀 일찍 나타날 순 없어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지켜줬다는 사실보다 이제야 나타난 렌에 대한 원망이 먼저였다. 조금 전에 느꼈던 목 끝의 서늘함을 생각하면 아직도 섬뜩하다.

    “너 나 보고 싶었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엘레나가 눈을 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면에 감춰진 렌의 눈은 웃고 있었다. 엘레나가 밉게 쳐다보거나, 자신을 노려볼 때면 왜 이리 기분이 좋아지는지. 진지하게 변태적 취향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루카스 경!”

    복면인의 등장에 휴렐바드를 상대하던 기사단원들이 잽싸게 마차 옆으로 뛰어왔다.

    “제길, 또 방해가 있을 줄이야.”

    루카스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합류한 휴렐바드가 지친 몰골로 엘레나의 앞에 섰다. 여기저기 옷이 뜯기고 핏자국이 묻어 있는 그를 보며 엘레나가 걱정했다.

    “경, 괜찮은 거예요? 상처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닙니다. 그보다 이자는…… 그자군요.”

    휴렐바드는 한눈에 복면인의 정체가 렌임을 알아봤다. 돌아가는 정황과 갈무리된 기세 그리고 형형한 눈빛만으로도 유추가 가능했다.

    “친한 사이도 아니니 인사는 생략하고.”

    “…….”

    렌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치 중인 루카스와 기사단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짝다리를 짚고 선 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을 지껄였다.

    “내가 우아한 인격으로다가 기회를 주지. 무릎 꿇고 빌어. 그럼 살려준다.”

    “저 자식이!”

    기사단원 중 하나가 발끈했다. 어려서부터 검술에 일가견이 있던 그가 엘리트 코스를 밟아 대공가의 기사가 된 이래 겪은 최고의 모욕이었다.

    “그럼 센다. 하나, 둘, 셋…… 끝!”

    렌이 홀가분하게 검을 겨눴다.

    “이제 죽자.”

    “루카스 경, 잠자코 있으실 겁니까?”

    “명을 내려주십시오. 싹 정리하겠습니다!”

    루카스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굳이 검을 맞대지 않아도 눈앞의 복면인의 실력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최소 그와 비슷한 실력을 지녔거나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점검했다. 휴렐바드 한 명도 상대하기 벅찬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인까지 가세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걸 감안하면 승부의 균형은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작님께 도움을 청해야 해.’

    루카스가 굴욕감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서 피가 고였다. 루카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눈빛을 보냈다. 오랜 지우이자 전우인 기사 카이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을 보며 루카스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가 할 일은 저들의 발을 묶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오냐, 죽자. 근데 죽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루카스는 살기등등하게 나섰다. 그가 거칠고 세게 몰아붙여야만 카이드가 몸을 뺄 수 있는 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전면에 서 있던 렌이 손을 뻗더니 엘레나의 시야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눈 가려.”

    “왜요?”

    “뭐 좋은 구경도 아니고. 칼부림 봐봐야 정신 건강에 해롭다.”

    “…….”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엘레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늘 건방지고 막무가내처럼 굴다가도 꼭 이런 식으로 그녀를 챙겼다.

    “쳐라!”

    “절대 보지 마라.”

    마지막 순간 엘레나에게 당부한 렌이 움직였다. 휴렐바드 역시 지친 몸을 이끌고 적과 대치했다.

    생사를 오가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메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보지 않으심이…….”

    “아니, 봐야 해. 저 두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건 나 때문이니까.”

    엘레나는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낭자하는 피와 살육이 역겹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꽉 힘을 주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뒤늦게 합류한 렌도 그렇지만 휴렐바드는 목숨을 걸고 옛 동료들을 베고 있었다. 기사로서 가장 불명예라는 배신의 오명까지 감수하면서 엘레나를 선택한 휴렐바드를 위해서라도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엘레나의 동공에 비장한 결의가 엿보였다.

    “마지막까지 보겠어. 그리고 다 같이 새로 시작할 거야. 날 믿고 따라준 사람들과.”

    루카스와 기사들은 보수적으로 맞대응했다. 기회를 봐서 카이드를 이탈시켜 지원군을 불러오면 된다. 그때까지는 무리하지 말고 버티면 된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비, 빌어먹을. 괴물이 한 명도 아니고 둘이나…….”

    루카스와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제국의 삼검이라 일컬어지는 렌의 실력은 상식을 넘어섰다. 휴렐바드가 이성적으로 적을 상대하며 눈으로 좇기 힘든 쾌검을 구사한다면, 렌은 그 대척점에 서 있었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처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검을 휘두르는데 그게 숨이 막힐 정도로 맹렬했다.

    “제길.”

    루카스는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직감하고는 눈빛을 보냈다.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호시탐탐 몸을 뺄 기회만 노리던 카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벌하게 공방이 오가는 틈을 파고든 카이드가 애마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휴렐바드가 쫓아가려 하자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대로라면 카이드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반대편에서 루카스와 두 명의 기사를 실력으로 찍어 누르고 있던 렌이 이죽거렸다.

    “쯧, 눈 뜨고도 당하냐?”

    렌은 이미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다. 눈빛을 주고받는 루카스와 카이드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악당은 악당이 잘 알지, 암.”

    렌이 양손으로 손잡이를 쥐고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검에 실린 묵직함에 루카스가 뒤로 밀려났다. 렌은 땅을 박차 다른 두 명의 기사의 눈에 흙을 뿌렸다.

    “윽!”

    렌이 유랑 마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것 좀 빌리자.”

    렌은 다짜고짜 메이가 손에 쥔 단도를 빼앗았다. 그사이 말 머리를 돌린 카이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삐를 내려쳤다. 앞발을 높게 들어 올린 황마가 뒷발을 차며 나아갈 때였다.

    삭!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리며 쇠붙이가 번쩍였다. 빛을 반사하며 날아간 단도가 카이드의 등덜미에 정확히 꽂혔다.

    “카이드!”

    루카스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안장에 앉아 있던 카이드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거꾸러졌다. 렌은 히죽 웃더니 다시 루카스 앞으로 뛰어내렸다.

    “이봐, 같잖은 수작을 부리니까 저 꼴 나는 거야.”

    “이 새끼!”

    “소리 지르지 말지? 뒤에 놀라잖아.”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렌의 눈빛은 싸늘했다. 피가 낭자하고 시체가 즐비한 이곳에서 루카스의 돼지 멱따는 소리까지 더해 엘레나가 놀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 죽자.”

    더는 시간을 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렌이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규격 없이 쏟아지는 맹공에 루카스와 호흡을 맞추던 기사가 하나, 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휴렐바드는 지친 와중에도 전력을 다해 제 앞을 막아서던 기사들을 전부 베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렌의 폭격에 가까운 공격을 버티지 못한 루카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에 박힌 검날이 사선으로 그어져 내려오며 팔이 너덜거렸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유랑 마차의 근처로 휴렐바드와 렌이 다가왔다.

    “고마워요. 두 사람 덕에 살았어요.”

    피비린내에 속이 매슥거렸지만, 엘레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생사를 걸고 싸운 두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여겼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너무 지체했습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심이…… 아가씨!”

    엘레나가 휘청거리자 휴렐바드가 반사적으로 부축했다.

    “괘, 괜찮아요. 잠시 어지러워서.”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휴렐바드를 보며 렌이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보기 좀 그러네?”

    “뭐가 말씀입니까?”

    “괜찮다는데 계속 그러고 있잖아.”

    “경, 이제 괜찮아요. 혼자 서 있을 수 있어요.”

    현기증이 가셨는지 엘레나가 제 발로 다시 섰다. 그런 엘레나를 바라보는 휴렐바드의 눈빛에 걱정과 불안이 혼재했다.

    “어서 벗어나요. 더 있으면 추격대가 올지 몰라요.”

    리아브릭의 집요함과 대공가의 전력을 고려하면 언제 또 추격대가 올지 모른다. 그러니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칼리프가 다시 고삐를 잡고는 유랑 마차를 몰았다. 단 한 사람, 렌만이 함께하질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안 가요?”

    “먼저 가. 난 아직 할 일이 남아서.”

    “위험해요. 같이 가요.”

    엘레나는 진심으로 렌의 안위를 걱정했다. 렌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머릿수 앞에 장사 없는 까닭이었다. 렌이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먼저 가라는 거잖아. 걱정 안 되게.”

    “선배.”

    엘레나는 그런 렌을 빤히 쳐다봤다. 걱정 안 되게라니. 늘 이런 식이었다. 장난스럽게 굴지만 그 이면엔 생각도 못 한 섬세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그러다 불쑥 생각나 버리게.

    “눈 그렇게 뜨지 마. 꿈에 나올라.”

    “……죽지 마세요.”

    담담해 보이지만 엘레나의 말속엔 진심으로 렌을 향한 걱정이 배어 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렌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얘가 또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난리야?”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나 안 죽어. 나한테 빚진 소원값도 청구 못 했는데 억울해서 죽겠냐?”

    이런 상황에서도 소원을 걸고넘어지는 렌의 태연함 때문일까. 엘레나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알았어요. 소원 들어줄 테니까 살아서 다시 봐요. 약속한 거예요.”

    “가.”

    렌이 뒤돌아서더니 손을 휙휙 저었다. 빨리 가라는 손짓이었다. 엘레나도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렌이 걱정되긴 했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대공가의 추격대와 맞닥뜨릴 수도 있다. 너덜너덜해진 유랑 마차를 타고 멀어지는 엘레나의 시선은 렌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사람 일이란 게 참으로 묘하다. 이전 삶에서는 원수와 다름없는 관계였고, 회귀한 이후에도 썩 좋지 않은 사이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개자식이었을까.

    그랬던 렌이 변했다. 엘레나의 적이 아닌, 옆에 섰다. 그래서였을까? 렌을 의지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부정하고 있었는데,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랑 마차가 산비탈을 따라 빠르게 내려가자 렌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제국의 삼검이라 일컫는 강자였으니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아까도 보지 않았던가. 압도적인 검술로 대공가의 정예 기사들을 유린하는 그의 끝 모를 강함을.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렌을 향한 걱정이 옅어지질 않았다.

    “죽으면 가만 안 둘 줄 알아요.”

    그 시각. 엘레나 일행이 떠나고 홀로 남은 렌은 주변을 살폈다. 널브러진 기사의 시신들 주위로 치열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갔나?”

    숲엔 새의 지저귐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 무성했다. 유랑 마차의 바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단 뜻이다. 렌이 히죽 웃었다. 그녀만 생각하면 미소가 입가에서 사라질 생각을 않는다.

    “이거야 원, 설레잖아.”

    렌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는 온종일 엘레나를 생각하는 일이었다. 천재라고 불릴 만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렌은 엘레나를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녀의 모든 걸 기억했다. 초대 대공 탄신연회의 분위기, 엘레나의 머리 모양, 드레스, 눈빛, 싸늘했던 말투까지. 아카데미에서도, 졸업한 이후에도…… 기억 너머의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엘레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만큼 렌에게 의미 있는 일은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의미 있게 간직할 수 있는 기억이 늘었으니 좋아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바보처럼 웃고 있던 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혼자만의 유희를 즐기기엔 장소가 썩 훌륭하지 못했다. 렌은 자신이 죽인 루카스의 시신에 다가갔다.

    “미안해서 어쩌지? 깔끔하게 죽여줄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렌의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 싸움에서 렌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렌이 구사하는 검술의 묘체는 찌르기다. 아카데미 검술학부 결승전에서 시안과 싸울 때 보여줬던 찌르기야말로 렌의 주특기다. 본능에 의지한 야성적인 검술은 상대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찌르기를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한데, 렌은 루카스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찌르기를 구사하지 않았다. 그간 협공을 가해왔던 기사들을 맞상대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너무 모욕적으로 생각 마. 네가 좀 더 셌으면 나도 이러지 못했을 거니까. 다 네가 약해서 벌어진 비극쯤으로 치자.”

    교묘하게 루카스의 탓으로 돌린 렌이 찌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 제국에서 렌만큼 고절하고 완벽한 찌르기를 구사하는 기사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찌르기를 감추는 것뿐만 아니라 렌은 그 이상의 뭔가를 시도했다.

    “이야, 내가 봐도 그럴듯해. 누가 봐도 월포트 경의 검식이라고 하겠어.”

    렌은 주검이 된 루카스의 상처 부위를 확인하며 히죽 웃었다.

    라인하르트가의 기사단장 월포트 경. 초원 부족 출신의 용병이었던 그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력으로 상대의 몸을 두 동강 내는 거친 검술의 보유자다. 과거 아편 재배지를 쫓던 시안과 대결해서 패배한 그는 실종되어 행방이 묘연했다.

    렌은 예전에 견식한 경험이 있는 월포트의 검식을 흉내 냈다. 무식하리만치 힘을 앞세운 검술로 마치 월포트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꾸몄다.

    “검만 부러뜨려 놓으면 완벽하네.”

    렌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스윽 들어 올렸다. 라인하르트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명검으로 실제 월포트가 사용했던 애검이었다. 렌은 반대편 손으로 죽은 기사가 쥐고 있던 검을 뺏었다.

    “후.”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오른손에 쥐고 있던 월포트의 애검을 머리 위로 힘껏 집어 던졌다. 월포트의 애검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렌이 왼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떨어지는 월포트의 애검을 있는 힘껏 베었다.

    사각. 철과 철이 부딪쳤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소리가 나더니 월포트의 애검이 두 동강 났다.

    “좋아, 깔끔해.”

    렌이 두 동강 난 검날을 집어 반대편 나무에 휙 던졌다.

    푹. 힘을 들여 던진 거 같지도 않은데 나무에 박힌 검날이 부르르 떨렸다. 남은 손잡이 부위를 쥐어 루카스 옆에 내동댕이쳤다.

    “끝.”

    완벽한 은폐며 조작이었다. 오늘 일어난 사달은 행방불명된 라인하르트가의 월포트의 소행으로 완벽히 위장했다. 루카스의 몸에 난 검상이라거나, 부러진 월포트의 애검이 그 정황을 뒷받침할 것이다. 렌은 왼손에 쥐고 있던 검을 멀찌감치 집어 던지곤 손을 털었다.

    “뒷일은 우리 전하께서 마무리하실 테고. 악당은 슬슬 퇴장해 볼까나.”

    비밀리에 회동한 시안과 렌은 대공가에 감금당한 엘레나를 대신해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공작가와 4대 가문 라인하르트가의 관계까지 악화시키는 효과도 낳을 수 있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을 빌미로 황태자비 선출식도 무효화할 계획이었다. 마침 사건에 얽힌 두 가문의 영애가 최종 경합에 진출했기에 더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렌은 단숨에 나뭇가지 위로 몸을 날리더니 우거진 숲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래를 일으키며 제2기사단과 마차 한 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리아브릭은 처참한 현장을 보며 경악했다. 전멸.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결과에 괴리감이 밀려왔다.

    “루카스 경!”

    “카이드, 정신 차려!”

    기사들이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부여잡고 울부짖자 리아브릭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이성적이던 그녀의 눈동자에 절망이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최악을 대비해서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대처했다. 대공가의 검이라고 일컫는 제1기사단원 중에서도 정예를 뽑아 루카스와 함께 추적하게 했다. 불안하긴 했지만 실패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마주한 눈앞의 전경은 처참했다. 정예 중의 정예인 기사 열 명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개중에는 차기 기사단장감으로 여겨지던 루카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흔적을 찾아요. 흉수가 어디로 갔는지 밝혀내라고요!”

    리아브릭은 거의 놓을 뻔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악을 질렀다. 꼴이 우습게 됐다. 제국의 날고 긴다는 귀족들도 발아래 두던 그녀가 남의 뒤꽁무니나 쳐다보는 처지가 되었다.

    꽉 말아 쥔 리아브릭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 천한 계집에게 속은 것도 모자라, 만반의 대비를 했음에도 처참하게 지고 말았다. 이보다 더한 모욕이 더 있을까.

    어디선가 엘레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똑똑한 척 굴며 같잖은 협박이나 일삼던 그녀를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까.

    리아브릭이 입술을 물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텅 빈 하늘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열패감에서 시작한 비참함이 그녀에게 독기를 품게 만들었다. 엘레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이다. 황제를 바꿔서라도.

    “자작님, 이걸 보십시오!”

    기사가 부러진 검의 파편을 들고 와 내밀었다. 두 동강 난 검에 익숙한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라인하르트 공작가?”

    “네, 실종됐다고 알려진 라인하르트가의 기사단장 월포트 경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뭐라고요?”

    리아브릭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왜 이 검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인하르트가가 개입되었다면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이, 이건 월포트 경의 검에 당한 것 같습니다.”

    “이런 파괴적은 검상은 월포트의 것이 분명합니다.”

    “하.”

    기사들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공황이 찾아왔다. 실종 기사 월포트와 라인하르트가의 존재가 안 그래도 경황이 없는 그녀의 머릿속을 더 정신없이 헤집어놓았다.

    “왜 이 일에 라인하르트가가 개입을…….”

    어디서부터 연관성을 찾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정말 이 일의 배후에 라인하르트가가 존재한다면 리아브릭이 수습하지 못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자작님, 피하셔야 합니다!”

    기사의 외침에 놀란 리아브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경고가 무색할 만큼 산 건너편에서 모래가 일더니 황궁근위대원들이 들이닥쳤다. 단숨에 현장을 포위한 근위대원들 틈바구니에서 백마를 탄 청년이 말을 몰고 나왔다.

    황가를 상징하는 흑발과 우수에 찬 눈빛, 황실을 상징하는 블랙 드래곤이 새겨진 문양까지. 황제 다음으로 고귀한 황태자 시안을 알아본 리아브릭과 대공가의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시안은 그들의 인사를 보는 둥 마는 둥 현장을 훑어보더니 권위적인 말투로 통보했다.

    “수도 외곽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황태자의 직권으로 조사를 명하겠다. 프리드리히가의 기사와 가신들은 협조하기를 바란다.”

    리아브릭은 허망한 눈길로 시안을 올려다봤다.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한들 황명이다. 항명했다간 대공가에 정치적으로 크나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설마 여기까지 계산한 건 아니겠지?’

    사냥을 나갔던 황태자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이마저도 엘레나의 의도인 것인지, 그렇다면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던 것인지. 리아브릭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좌절감에 고개를 떨궜다. 계략에서 졌단 패배감보단, 어쩌면 평생을 노력해도 엘레나와 격차를 메울 수 없을 것 같단 절망이 야금야금 그녀를 좀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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