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6/30)
  • 제19장 사냥

    “저, 저런!”

    “정말이지 매너라곤 눈곱만큼도 없네요!”

    “곧 황태자비가 되실 분인데, 뒷감당을 어쩌려고 저러죠?”

    렌의 무례함에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간 사교계의 이단아로 치부하며 무시했지만 매번 저런 식으로 선을 넘으니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저, 저놈이.”

    반사적으로 거친 말을 내뱉은 스펜서 자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귀족 모임에 오면서 분명히 렌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절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그러나 렌은 그 말을 깡그리 무시하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자식 교육을 잘못시키는 바람에…….”

    스펜서 자작이 머리를 숙였다. 그 앞에는 샴페인 잔을 든 프란체 대공이 무표정하게 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 교육은 부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프란체 대공이 무심하게 경고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넘어가 주는 건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없다는 걸 명심하게.”

    “새겨듣겠습니다.”

    스펜서 자작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바닥을 향한 그의 눈빛은 렌 못지않게 반항적이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자식이다. 프란체 대공의 저런 말이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엘레나와 렌을 주시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리아브릭이었다.

    ‘렌과 무슨 사이지?’

    학술원 재학 당시 두 사람이 같은 수업을 들은 걸 알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그녀가 모르는 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좀 더 지켜보자.’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엘레나의 모든 언행이 수상했다. 더구나 리아브릭이 확인할 수 없는 관계이기에 더더욱 의심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아브릭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심증은 있지만, 당장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관망하고 파악해 볼 심산이었다.

    때마침 홀 안에 잔잔하면서도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봄의 왈츠가 울려 퍼졌다.

    “자, 손.”

    연주가 시작되자 엘레나를 안은 렌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마지못해 따르는 척, 그에게 호응했다.

    “꼭 이런 식으로 주목받아야 해요? 정중하게 신청해도 되잖아요.”

    “너랑 나 사이에?”

    렌이 이죽거리며 되묻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너랑 내가 다정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고.”

    “인정하기 싫지만 일리는 있네요.”

    엘레나가 마지못해 동의하자 렌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 고마워하라고. 이렇게 안 했으면 의심받았을 거야. 저기서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는 여자한테.”

    굳이 렌이 지칭한 곳을 보지 않아도 엘레나는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원형으로 돌며 렌이 서 있던 위치에 서자 리아브릭이 딱 보였다. 다시 스텝을 밟아 엘레나가 리아브릭을 등졌다.

    “독이 바싹 올랐어.”

    “그럴 만하죠. 심증은 있지만 증거는 없으니까.”

    “너, 사람 붙었어.”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을 뿐,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눈길로 돌아왔다.

    “어쩐지. 절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좀 다르다 싶었어요.”

    “더 놀라야 정상 아니냐? 뭘 그렇게 침착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엘레나를 보며 렌이 입맛을 다셨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엘레나의 표정이나 감정이 변하는 걸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 있어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그러다 보니 엘레나의 밋밋한 반응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말과 달리 엘레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안일했어. 렌이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야.’

    엘레나는 느슨했던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아흔아홉 번을 성공하더라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리아브릭은 그걸 가능케 하는 여자였다. 긴장해야 했다.

    “조심해. 안 그럼 쟤한테 잡아먹힌다?”

    “고마워요.”

    생색을 내던 렌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순순히 인정하는 엘레나의 태도도 이상했지만, 처음으로 자신에게 보인 호의적인 표현이 귓전에서 맴돌며 떠나질 않았다.

    “뭐라고?”

    “무슨 말이요?”

    “마지막 말, 그거 있잖아.”

    “……고맙다는 말이요?”

    “그래, 그거.”

    엘레나가 끄덕였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니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렌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참 어색한 표정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신나고 기뻤던 적이 없던지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몰랐다.

    때마침 홀 안을 울리던 연주가 변했다. 여름의 왈츠. 봄의 왈츠가 생명의 싱그러움을 표현한 것이라면, 여름의 왈츠는 좀 더 경쾌했다. 생명의 요동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나 할까.

    “오늘 회의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어요?”

    “그거? 아주 신나는 얘기였지.”

    “뜸 들이지 말고요.”

    엘레나가 다그치자 렌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백부님께서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상납금을 높이시겠단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엘레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예상했던 대로야.’

    피네치아 재배지의 소실과 노블레스 거리 사업의 방해 공작으로 대공가가 입은 손해가 막대했다. 그 와중에 비자금 격인 예술품의 가치마저 폭락했다. 투자 비용과 지출은 고정적인데, 수입이 줄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메울 방법을 찾으려 혈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상은요?”

    “예리한 거 보소. 보상 얘기 나왔지. 근데 그게 또 공수표예요.”

    “공수표요?”

    “노블레스 거리 사업이 성공하면 상납금 액수에 상응하는 수익금을 상정해서 돌려주겠다 이런 거지.”

    엘레나는 새어 나오는 실소를 꾹 눌러 참았다.

    ‘그 보상 못 해줄 텐데?’

    노블레스 거리는 망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노블레스 거리를 껍데기만 남기는 계획에 착수한지 지 오래다.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노블레스 거리가 완성되는 순간 불안 요소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침몰할 것이다.

    “귀족들의 반응은요?”

    “최악.”

    엘레나의 희미한 미소가 아주 조금 더 진해졌다. 대다수의 귀족은 영악하며 사리 분별이 뛰어나다. 황실을 저버리고, 대공가의 그늘 아래서 세를 누리는 귀족들이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러다 보니 상납금을 올리는 것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물며 대공가에서 내려놓은 보상이란 것 자체가 너무 모호하다 보니 더 그랬다. 

    심지어 대공가가 보유한 수도 내 부동산이나, 토지, 영지, 사업권은 매각하지 않은 채, 귀족들의 상납금만 높였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대공가의 권세와 비호를 벗어나지 못할 거란 걸 알기에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엘레나는 그 작고 미세한 균열을 파고들어 적절히 이용할 계획이다.

    “귀족들을 흔들어놓기 딱이네요. 구실도 적당하고”

    “눈빛 보소. 너 뭔가 저지르려고 안달이 난 눈이야.”

    렌은 그런 엘레나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픽 웃었다.

    “네가 또 뭔 사고를 칠지 벌써 설레네.”

    “기대하셔도 될 거예요.”

    엘레나가 자신만만하게 받아쳤다. 그런 엘레나를 보는 렌의 시선이 묘해졌다.

    “뭘 하는지 묻고 싶은데 참아야겠다. 이러다 네가 위기에 빠지면 또 그것도 즐겁거든.”

    “악취미네요.”

    “그래야 내가 구해줄 수 있잖아.”

    렌의 이죽거림을 마주한 엘레나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더 이상 적이 아닌, 같은 편으로 받아들여서 그런가. 저 꼴사나운 미소가 처음으로 싫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오가는 중에 여름의 왈츠를 지나, 가을의 왈츠마저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제 마지막 파트인 겨울의 왈츠만이 남았는데, 혹독한 추위를 표현한 만큼 동작이 격정적이다 보니 대화를 하며 춤을 추기 쉽지 않았다. 렌 역시 그걸 아는지, 일정 거리를 두고 춤을 추던 엘레나를 더 가깝게 당겼다. 가슴이 맞닿고 숨소리가 들릴 만큼 밀착했다.

    “이제 내 소원 들어주라고. 제대로.”

    렌은 매력적으로 웃더니 연주에 맞춰 스텝과 템포를 끌어올렸다.

    “춤추는 거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엘레나도 마찬가지로 합을 맞추며 동작을 이어나갔다. 렌이 작정을 하자 지금껏 건성으로 추던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격조 있는 춤사위가 이어졌다. 사교계의 춤에 이골이 난 엘레나가 깜짝 놀랄 정도로 렌의 춤 솜씨는 일품이었다. 동작에서 이어지는 몸짓, 그로 인해 표현되는 선부터 박자까지 흠잡을 게 없었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렌의 매너였다. 독불장군이나 다름없는 렌이 파트너인 엘레나를 배려해 호흡을 맞춘단 사실 말이다. 참 우스운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순간 렌이 달리 보였다. 마치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곧 겨울 왈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파트에 접어들었다. 파트너를 반대쪽으로 보내놓고 당겨 안는 동작이다.

    “헉.”

    엘레나가 헛숨을 들이켰다. 남자다운 박력 있는 동작이었다. 그러면서도 힘을 조절해 엘레나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작이 완성되었을 때, 제비꽃처럼 작은 엘레나가 렌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엘레나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춤인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동작의 연속일 뿐인데. 렌의 체온과 숨소리,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빛까지 모든 게 낯설어 그녀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교춤에 자신 있다고 자부하던 엘레나가 그만 연달아 동작을 틀리는 실수를 범했다.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곡이 끝나자 렌이 짧게 혀를 차며 입맛을 다셨다.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여느 때와 달리 우수에 찬 눈빛을 한 렌이 엘레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즐거워. 다음이 기다려질 테니.”

    “앗!”

    렌은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품에서 엘레나를 밀어냈다. 놀라서 휘청거리긴 했지만 가까스로 엘레나가 균형을 잡으며 서서 렌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악당은 악당답게 퇴장해야지 않겠어? 우리 공녀 전하를 위해서.”

    “……!”

    렌이 이죽거리더니 예의도 갖추지 않고 휙 돌아서서 홀을 가로질러 나가 버렸다. 귀족들의 불만 어린 시선과 손가락질이 쏟아지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으며, 스펜서 자작이 허둥지둥 쫓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

    그 뒷모습을 엘레나는 말없이 응시했다. 딴사람은 몰라도 엘레나는 알고 있었다. 렌이 자기 방식대로 그녀를 배려하고, 혹시 모를 의심의 여지마저 남기지 않으려 악당을 자처하고 있음을 말이다.

    만찬 내내 겉돌던 렌이 물러나자 다시 본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아니,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잔을 부딪치고 있지만 귀족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원치 않는 자리에 와서 억지로 웃고 있는 기분이랄까.

    ‘상납금을 올리는 게 불만스럽겠지.’

    그렇다고 대공가의 비호를 받는 입장에서 대놓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보니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이 파벌이지, 귀족들은 암묵적으로 이해관계로 묶여 있어. 근데 오늘 대공가가 그 규칙을 깬 거고.’

    귀족들이 불만을 가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상납금을 올릴 만큼 대공가의 형편이 좋지 않단 의미다. 이렇게 되면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수월하게 일을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는 자신에게 잘 보이고자 말을 걸어오는 영애와 영식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홀 안을 재빨리 훑었다. 이전 삶부터 안면이 있던 귀족이다 보니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전하네, 보로니 백작.’

    저 멀리 큰 키에 연미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보로니 백작으로, 서부 지역에서 대규모 밀 농장을 운영하여 제국 전체 밀 생산량의 일부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거부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서부 지역의 흔한 귀족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공가에 줄을 잘 선 덕에 일대의 평야를 규합해 제 땅으로 만들었다. 기름진 땅에서 생산되는 밀을 바탕으로 그는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으로 우뚝 섰다. 속된 말로 대공가가 공들여 키운 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보로니 백작도 자진해서 남보다 많은 상납금을 대공가에 바쳤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 고마움은 쉽게 잊히는 법이거든.’

    실제 보로니 백작은 다른 귀족과 비교해 몇 배나 더 많은 상납금을 내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지금의 성세를 누리는 데 있어 대공가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간 그 이상의 재물을 바쳤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생각 못 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엘레나는 지난 삶을 통해 보로니 백작의 그런 불만을 알고 있었다. 서부 귀족들을 앞세워 상납금의 부당함을 주장했다가 그만 대공가의 분노를 사 꼬리를 내린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흔들어볼까.’

    목표를 정한 엘레나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시늉을 하며 보로니 백작의 근처로 다가갔다. 우연을 가장해 엘레나가 눈을 맞추자 그가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반갑습니다, 공녀 전하. 작년 초대 가주 탄신연회 때 멀리서 뵈었는데 인사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요.”

    “저 역시 백작님을 멀리서 뵌 기억이 나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멋지시고요.”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칭찬을 섞어가며 대화를 유도했다.

    “하하, 공녀 전하의 칭찬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인걸요? 사교계에 백작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단 말이 이해가 된답니다.”

    보로니 백작의 만면에 미소가 만개했다. 보로니 백작을 향한 외모의 칭찬 역시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다. 그는 실제로도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자부심이 강했다.

    “특히 사교춤에 일가견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많은 영애의 선망이 되셨다고도요.”

    “그랬었던가요?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춤이라면 자신 있답니다.”

    계속되는 엘레나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보로니 백작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사실 엘레나는 그가 사교춤에 일가견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리아브릭의 감시를 떼어놓는 데 집중했다. 지금도 어디선가의 리아브릭이 엘레나를 주시하고 있을 게 뻔하다. 한번 의심을 시작한 이상 웬만해서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여자니까.

    엘레나가 사교춤을 언급하며 유도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앞서 렌과 접촉한 것처럼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춤만 한 게 없다. 공개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하세요. 최근 유행하는 왈츠도 다 출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제 입으로 말하긴 부담스럽지만 그런 셈이죠. 하하.”

    ‘다음 곡이 피리 부는 여인이지?’

    귀족 회의를 완벽하게 준비하고자 애쓴 리아브릭만큼이나 엘레나 역시 오늘의 만찬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사전에 별관을 찾아 곡 리스트를 확인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마침 홀 안에 울려 퍼지던 곡이 끝났다. 이윽고 엘레나의 예상대로 ‘피리 부는 여인’이라는 곡이 연주됐다. 사교춤의 정석과 같은 곡으로 사교계 신사로 통하는 보로니 백작 역시 잘 아는 곡일 것이다.

    엘레나가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 곡 아세요?”

    “모를 리가요. 제가 자신 있는 곡이랍니다.”

    아는 곡이 나오자 보로니 백작의 만면에 여유가 흘렀다.

    “곡의 음색이 중후한 백작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사교계를 대표했다는 백작님의 춤 솜씨를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이요?”

    엘레나가 순진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보로니 백작이 느끼한 미소를 머금더니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 위에 자신의 가녀린 손을 포갰다.

    “그래요.”

    보로니 백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 중앙으로 향하는 엘레나의 시선에 멀리 자신을 주시하는 리아브릭이 보였다.

    ‘명망 있는 귀족과 춤을 추는 건 사교계에서 흔한 일이지.’

    사교계에서 엘레나의 위치는 특별했다. 대공가의 후계자이자, 차기 황태자비로 유력했다. 그러다 보니 귀족들의 춤 신청이 쏟아지는 건 특별할 게 없었다. 유일하게 의심을 살 만한 상대가 렌이었는데, 스스로 악당을 자처하며 의심의 꼬리를 끊고 퇴장했다.

    ‘괜찮겠지?’

    엘레나는 홀에서 퇴장하는 렌을 쫓아가는 스펜서 자작을 봤다. 학술원 검술제 때도 그랬지만 렌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거 아십니까?”

    연주에 맞춰 스텝을 밟던 엘레나가 보로니 백작을 올려다봤다.

    “오늘처럼 제 나이가 원망스럽긴 처음입니다.”

    “원망이요?”

    “수십 년째 이 사교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공녀 전하처럼 아름다운 분은 처음 보거든요.”

    엘레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에 몸서리쳐지는 걸 감추기 위해서였다.

    ‘더는 못 맞춰주겠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접근에 성공한 이상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인간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더는 못 하겠다. 엘레나는 표정을 바꾸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운을 뗐다.

    “오늘 회의 얘기 들었어요. 귀족들에게 징수하는 상납금을 늘린다고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보로니 백작이 당황했다.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제를 대화에 녹여냈다.

    “너무한 거 같아요. 안 그래도 백작님은 다른 분들보다 더 많은 상납금을 내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대공가의 도움 덕분에 제가 이만큼 자리를 잡은 격이니…….”

    보로니 백작의 표정과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조금 전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깨진 지 오래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분명한 보상도 약속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상납금을 늘리라는 것 자체가 저는 부당하다고 보는데.”

    “……공녀 전하, 무슨 저의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보로니 백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다른 누구도 아닌 공녀가 직접 묻고 있었다. 마치 시험을 하듯이. 그러다 보니 어찌 대답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저의라니요. 전 순수한 마음으로 백작님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절 돕는다고요?”

    엘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보로니 백작과 시선을 맞췄다. 당황하는 그와 달리 엘레나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제 곧 황태자비 선임식이 열릴 거예요. 저는 그 자리에 제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님, 저는 욕심이 매우 많은 여자랍니다.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서 대공가를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게 가능합니까?”

    “왜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저 베로니카예요.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유일한 상속자죠. 못 할 거 같아요?”

    “…….”

    도발적인 엘레나의 발언에 보로니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황실마저 초월한 권세를 누리는 대공가가 작정하고 마음먹는다면 제국에서 못 할 일이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는 베로니카가 지닌 권위를 앞세워 그 점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백작님. 이제라도 줄을 잘 서야 하지 않겠어요?”

    “줄 말씀입니까?”

    “백작님이 잡고 계신 동아줄이 계속 튼튼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

    “아버지도 연세가 드셨는지 자꾸 리아브릭에게 의지하려고 하세요. 상납금만 해도 그래요. 그게 다 리아브릭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죠.”

    엘레나는 조곤조곤 리아브릭을 매도했다. 상납금 징수와 관련된 불만의 화살을 그녀에게 돌리며 흔들고자 함이다.

    ‘주사위는 던져졌어.’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던 엘레나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엘레나도 긴장됐다. 적잖은 세월을 대역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처럼 베로니카의 신분을 앞세워 노골적으로 대공가에 이빨을 드러낸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만큼 대공가의 몰락에 가까워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엘레나의 계획대로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대공가라 하더라도 쉽사리 회생이 불가능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난처하단 이유로 대답을 외면하려 했던 보로니 백작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엘레나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공녀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줄, 공녀님 본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얘기가 통하시네요.”

    엘레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애초에 리아브릭이 일 처리를 잘했으면 이런 사태가 오지 않았을 거예요.”

    “공감합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데, 리아브릭은 그러지를 않네요. 그러다 보니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귀족분들이 지게 되신 거고요.”

    보로니 백작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십분 공감하지만 아직까진 제 속내를 다 드러내기에 조심스러웠다.

    “보상만 해도 그래요. 노블레스 거리 사업이 성공하면 상납금에 상응하는 수익금을 줘요? 실체가 없는 공수표네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공녀 전하.”

    보로니 백작이 결국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반응에 엘레나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그녀가 원하는 방향대로 대화가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저라면 다를 거예요. 확실한 보상을 약속하겠죠.”

    “확실한 보상이라면?”

    “네, 노블레스 거리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나누는 거죠. 균등하게.”

    파격적인 제안에 보로니 백작의 눈에 탐욕이 스쳤다. 가진 놈이 더 하다고 딱 그런 격이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은 귀족들도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사업이다 보니 발을 걸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엘레나는 그 사업에 보로니 백작을 끼워준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무리고요. 백작께서 절 도와주신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이죠.”

    “돕는다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로니 백작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기 황태자비이자, 대공가의 후계자의 제안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손해 보지 않는 장사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엘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가 조급함에 애간장이 녹을 즈음 다시 입술을 뗐다.

    “리아브릭의 실각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리아브릭 자작을 말입니까?”

    “못 할 건 또 뭐죠? 백작님이 나서주시고 또 많은 귀족이 도와주시면 못 할 이유가 없잖아요?”

    꿀꺽. 보로니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에 비친 엘레나는 더없이 무서운 여자였다. 지척에 리아브릭을 두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실각을 언급하며 웃기까지 했다. 그런 엘레나의 본심도 모르고 칭찬에 우쭐했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나 창피함은 잠시일 뿐, 모골이 서늘했다.

    “피는 못 속이는군요.”

    엘레나의 미소가 진해졌다. 프란체 대공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인데 무슨. 진실도 모르면서 두 사람을 부녀지간으로 묶는 꼴이 퍽 우스웠다. 그러나 보로니 백작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은 분명 겹쳐 보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카리스마. 그것은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야만 지닐 수 있었다.

    “제가 뭘 도우면 되는 겁니까?”

    “서부 귀족들의 여론을 모아주세요.”

    “여론을요?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보로니 백작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했다. 엘레나가 내민 손을 잡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무작정 내민 손을 잡기엔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좀 더 대화를 통해 그럴싸한 계획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이거 하나 짚고 가죠. 리아브릭이 왜 상납금을 올리는지 아세요?”

    엘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보로니 백작은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블레스 사업에 문제가 생겼거든요.”

    “문제라니. 심각한 겁니까?”

    “그러니 리아브릭이 상납금을 올리는 거겠죠?”

    엘레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로니 백작에게 털어놓았다.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는 통에 불필요한 돈을 지불한 사실과 부주의한 실책으로 천연 대리석을 무려 시가의 다섯 배에 구매한 사실까지 모조리 다 얘기했다. 그간 대공가가 쉬쉬하고 있던 치부를 접한 보로니 백작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리아브릭의 실수를 귀족들에게 전가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참 부당하지 않나요? 본인의 실수 때문에 귀족에게 상납금을 걷다니.”

    보로니 백작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몰랐다면 모를까 진실을 알고 나니 더더욱 피해의식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흐름을 탄 엘레나가 쐐기를 박았다.

    “상납금 증세야 어쩔 수 없다지만…… 대공가의 일원으로서 가문의 위신을 떨어뜨린 그녀는 죗값을 받아야 온당하지 않겠어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공녀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한낱 자작 주제에…… 하. 기가 차는군요.”

    보로니 백작은 적잖이 분노하고 있었다. 처음의 미심쩍어하는 태도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거의 다 넘어왔어.’

    방점을 찍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엘레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했다. 연주 중인 ‘피리 부는 여인’이 막을 내리면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였다. 지금도 리아브릭이 쌍심지를 켜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니까. 괜히 욕심을 내서 보로니 백작과 한 곡을 더 추기라도 하면 리아브릭의 의심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이다.

    ‘서두르지 말자. 아직 시간이 있어.’

    시안을 설득해서 황태자비 선출식을 개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귀족들을 흔들어 리아브릭을 실각시키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다음에 뵐 때는 제 제안에 대한 대답을 듣길 바라겠습니다.”

    “다음이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로니 백작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엘레나가 가슴에 불을 지핀 까닭에 그는 뭐라도 저지를 것처럼 굴었다.

    “곧 비올라 백작의 생일연회가 있답니다.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서는 엘레나의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렸다. 저들이 쥐여 준 신분과 작위를 내세워 베로니카를 옥죈다는 사실이 더없이 통쾌했다. 이제 시작이다. 엘레나는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베로니카를 망가뜨릴 것이다.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연주가 끝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보로니 백작과 엘레나는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사교를 위한 관계.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혼자가 된 엘레나의 곁에 많은 귀족이 몰려들었다. 영식들은 장차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를 엘레나와 춤을 출 영광을 누리고 싶었고, 영애들은 어떻게든 잘 보여서 줄을 서고 싶어 했다. 엘레나는 개중에서 가장 잘생긴 영식을 골라 춤 신청을 받아줬다.

    ‘리브의 의심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어. 몇 곡 더 추는 수밖에.’

    리아브릭은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의심하고 있고 보로니 백작과의 접촉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만약 엘레나가 이후에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는다면 더더욱 보로니 백작과 엘레나의 관계를 깊게 파고들 것이다. 리아브릭의 의심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도 엘레나는 더 많은 귀족과 춤을 출 필요가 있었다.

    엘레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는 내내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대부분 영양가가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마저도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특정 누구와 접촉한 것이 아닌, 불특정 다수와 춤을 췄다는 사실을 내비쳐 리아브릭의 의심에 혼선을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엘레나는 다음을 생각했다. 반대편 귀족 무리에서 호쾌하게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노튼 자작.’

    올해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영주인 그는 신흥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제국 동부에 금광을 소유한 거부다.

    ‘호쾌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음흉하고 영악한 자지.’

    엘레나가 기억하는 그는 간사한 수완가다. 영지 내에서 금맥이 발견되자 제 발로 대공가를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금광을 개발하면 상납금을 낼 터이니 주변 영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길 청한 것이다.

    그런 발 빠른 조치 덕에 주변의 위협에서 벗어난 노튼 자작은 영지 내 금맥을 개발해 막대한 부를 손에 넣고 동부 지역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지닌 귀족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대공가의 그늘에서 힘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많은 상납금을 낸다는 현실에 점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동부 지역에서 손꼽히는 귀족이 되고 나니 받는 것 없이 대공가에게 내는 막대한 상납금이 아깝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엘레나는 귀족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척 노튼 자작에게 접근했다. 영지의 특산물인 금과 관련한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며 그의 호감을 쌓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의도대로 노튼 자작과 춤을 추는 데 성공하자 엘레나가 본론을 꺼냈다.

    “리아브릭의 실각이요?”

    엘레나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은 노튼 자작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게 이익이 되면 악마와도 손을 잡는 부류가 귀족들이니까.

    “동부 귀족들의 여론을 모아주세요. 파벌 내 귀족들이 입을 모아서 책임을 지라고 하면, 제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리아브릭을 싸고돌 순 없을 거예요.”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노튼 자작도 엘레나의 설득에 넘어갔다. 셈이 빠른 만큼 장차 대공가의 상속자인 엘레나를 따르는 게 장기적으로 낫다고 판단했다.

    “그럼 빌리온 자작 무도회에서 뵙겠습니다.”

    엘레나는 보로니 백작과 만나기로 한 날이 아닌, 다른 날에 있는 무도회에서 보기로 했다. 리아브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노튼 자작과 헤어진 엘레나는 심신의 피로함을 느꼈다. 리아브릭의 노골적인 감시 속에서 귀족들과 접촉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후안 남작만 끌어들이면 돼.’

    후안 남작은 수도 남부 일대의 대규모 염전을 일구던 상인 출신이다. 파산한 영지를 인수하며 황실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하사받아 귀족이 됐다. 그러나 태생적인 신분의 한계 때문에 귀족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무시받았다. 참다 못한 그는 대공가에 막대한 상납금을 바쳐 대공가의 인정을 받았고 그제야 귀족 사회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다.

    ‘저자만 끌어들일 수 있으면 동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 귀족들의 여론을 주무를 수 있어.’

    엘레나가 접촉한 세 명의 귀족은 수도를 중심으로 동부, 서부, 남부에서 영향력을 지닌 유력 귀족이다. 그들이 나서서 귀족들을 선동해 리아브릭의 실각을 요구한다면 제아무리 대공가라고 하더라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엘레나는 후안 남작에게 접근했다. 근본은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상인 출신의 후안 남작은 계산적이었으며 대놓고 잇속을 따졌다. 욕심이 많은 만큼 엘레나가 파고들 구석도 많았다. 앞선 두 귀족보다도 후안 남작은 더 적극적으로 엘레나에게 동조했다. 굳이 다음 만남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조급하게 굴지 마세요. 제가 그쪽에게 바라는 게 있듯이, 남작님도 많은 걸 얻을 수 있단 것만 명심하세요.”

    앞서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음 만남을 기약한 엘레나는 후안 남작과 작별했다. 목표로 한 귀족들과 접선을 모두 끝낸 엘레나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소기의 성과는 올린 까닭이었다. 마음을 내려놓은 엘레나는 춤을 신청하는 몇몇 귀족과 더 어울렀다.

    ‘이만하면 됐어.’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이룬 엘레나는 계속해 들어오는 춤 신청을 거절했다. 더 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분위기를 살피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이미 많은 춤을 췄고 귀족들과 충분히 사담을 나눈 만큼 엘레나의 퇴장을 만류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멀찌감치에서 자신의 퇴장을 주시하고 있는 리아브릭을 쳐다봤다.

    엘레나는 여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안 남았어요. 곧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 줄게요.’

    돌아선 엘레나가 홀에서 퇴장했다. 그리고 리아브릭은 오랫동안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인적이 드문 골목. 달빛마저 잘 들지 않아 칠흑처럼 컴컴한 골목을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걸어갔다. 골목의 맨 끝자락에 다다른 남자는 허름하다 못해 언제 부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나무판자를 열고 지하로 걸어 내려갔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원형 탁자에 앉아 있는 시안과 자칼린이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브를 벗은 사내는 린든 백작이었다. 최근 피네치아 재배지 소실로 인해 독이 바싹 오른 대공가가 기사단까지 움직였단 정보를 접한 뒤로는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며 몸을 사렸다. 전면으로 맞붙었다간 큰 피해를 피할 수 없어서다.

    “자네가 자칼린이가 하는 그 친구인가 보군. 전하께 얘기 들었네. 깨친 지식인이라지?”

    “과찬이십니다. 백작님이야말로 공명정대하시고 황실에 대한 충성이 대단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군. 어쩌다 코가 꿰어서 엮인 거야.”

    린든 백작은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누구도 그의 각오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시안이 입을 열었다.

    “요새 상황은 어떻지?”

    “최악입니다. 대공가가 저희를 찾으려 혈안이 됐습니다.”

    “독이 바싹 오른 모양이군.”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쉬운 마음도 커져갔다. 아편 사업이 붕괴된 지금이야말로 외부에서 대공가를 흔들 적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의욕만으로 움직이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하.’

    엘레나를 떠올리니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대공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녀만 생각하면 이러고 가만히 있는 게 맞는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시지요.”

    “그래야겠지.”

    시안은 꾹 참았다. 의욕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웅크릴 수밖에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도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성을 되찾은 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네, 전하.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제 삶의 낙이자 전부입니다.”

    L을 통해 시안을 소개받은 자칼린은 제국을 바꾸는 일에 동참했다.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시안을 만났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생각과 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포기하고 그 옛날 신성 제국 시절로 회귀하여 황실과 귀족, 그리고 시민으로 이어지는 세 집단이 협력하고 견제하는 정치제도야말로 자칼린의 사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러한 정치제도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배우고 깨우쳐야만 한다. 시민 대표를 선출해 황실과 귀족을 견제하려면 그만한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L의 도움을 받아 세운 학교는 그러한 시민을 배출하기 위한 통로였다.

    “전하,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하라.”

    시안이 허락하자 자칼린이 입을 열었다.

    “전하와 L은 무슨 사이십니까?”

    “…….”

    시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막상 질문을 받고 생각하니 마땅히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안이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늘 일방적인 사이였다. 엘레나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좀 더 용기를 내서 다가가면 손이 닿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건만, 어째서인지 닿지 않았다. 그녀는 밀어내지도 피하지도 않았는데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다.

    “그것이 왜 궁금하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이해라.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시안이 빤히 쳐다보자 자칼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전하와 L이 연인 관계라 짐작했습니다.”

    ‘연인이라.’

    시안의 입가에 알듯 모를 듯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전하가 아니십니까? 한데, L의 얘기만 나오면 눈빛부터 부드러워지십니다.”

    “내가 말인가?”

    시안이 정말이냐는 듯 대꾸하며 린든 백작을 쳐다봤다.

    “사실입니다. 어찌나 티를 내시던지 모른 척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랬군.”

    린든 백작까지 동의하자 시안은 순순히 수긍했다. 엘레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아마 그러한 감정이 의식하지 못한 새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해서, 무리하게 황태자비 선출식을 개최하는 전하의 심중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의 사이도 사이거니와 지금 시기에 황태자비 선출식을 감행하는 건 악수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시안은 왜 자칼린이 L과의 관계를 물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황태자비 선출식은 안 그래도 권세가 높은 귀족들을 외척으로 둬야만 하는 악수였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차라리 L을 황태자비로 맞이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꼭 그게 악수는 아니다.”

    “이유가 있는 겁니까?”

    자칼린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득보단 실이 많기 때문이다.

    “L은 대공가의 몰락을 계획하고 있다. 황태자비 선출식은 그 계획의 일환이다.”

    “몰락이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그녀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되도록 도울 것이다.”

    시안의 대답 속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확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L이 대단한 여자라는 건 동의하지만 대공가의 몰락을 가능케 할 수 있을 정도라고는…….”

    “그대는 잊고 있군.”

    “무엇을 말입니까?”

    시안이 무미건조한 눈길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

    “그대를 나에게 보낸 것이 누구인지.”

    “……!”

    자칼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해 낸 것이다.

    “신성 제국으로의 회귀를 처음 주장한 것이 누구인지 아는가.”

    자칼린이 시안을 바라보았다. 담담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시안이 말을 이었다.

    “바로 그녀이다.”

    “그, 그럴 수가.”

    “학교 설립에 L이 후원을 했다고 했지? 과연 그녀가 이유 없이 후원을 했을 거라 생각하나? 이미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

    “그녀는 긴 시간 준비했다. 내가 그녀를 알기 전부터. 난 믿고 있다. 그녀라면 대공가를 반드시 무너뜨릴 거라고.”

    자칼린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L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후원을 받으면서도 알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뜻이 맞는 사람이자, 깨친 지성인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시안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를 너무 과소평가했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첫 만남에서 학교 설립 후원을 결정한 것만 봐도 그렇다. 단순히 사상에 동조한다고 그럴 수 있을까. 아니다. 시안의 말처럼 L은 자칼린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았다면 학교 설립에 거금을 후원하면서도 일언반구 없을 수가 없으니까.

    자칼린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시안을 만나고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깨친 황족이라고 느꼈다. 이자라면 제국이 답습해 온 폐단을 끊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시안에게 영향을 주고 배후에서 대공가를 무너뜨리려 했단 얘기까지 접하자 새삼 그녀가 위대하다고 느껴졌다.

    “그런 여인이다. L은.”

    시안은 엘레나를 떠올렸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앞두고 그녀를 보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 * *

    대공가 내 응접실. 최고급 다기를 사이에 둔 엘레나와 마담 드 플랑로즈가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엘레나는 홍차의 품질을 초월할 만큼 훌륭한 다도를 보였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찻물을 따르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으며 찻잔을 들어 홍차를 음미하는 동작까지 매끄럽다 못해 품격이 느껴졌다.

    “흠잡을 게 없군요.”

    트집을 잡고자 매의 눈으로 엘레나를 지켜보던 마담 드 플랑로즈가 덤덤하게 얘기했다. 반년이 넘도록 대공가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실제로 엘레나에게 가르친 건 거의 없었다. 사소한 실수라도 있다면 트집을 잡아 체면치레라도 하고 싶었지만 엘레나의 소양은 그녀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한 게 없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마담.”

    엘레나가 싱긋 웃으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지금처럼만 하시면 1차 경합에서 최고점을 받으실 거예요.”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엘레나의 뻔뻔한 대답에 마담 드 플랑로즈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평판에만 신경 쓰시면 될 거 같습니다. 다행히 사교계의 여론도 공녀 전하께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있어 황태자비 선출식은 그저 시간 끌기용에 불과하다. 누구 좋으라고 곧 복귀할 베로니카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힌단 말인가? 실수는 어리석었던 지난 삶 한 번이면 족하다.

    “다음 수업은 1차 경합 이후가 되겠군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네, 마담.”

    티타임을 끝낸 마담 드 플랑로즈는 저택을 떠났다. 느긋하게 홍차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 저녁에 예정된 비올라 백작의 생일연회에 참석하려면 지금부터 치장을 해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엘레나는 드레스를 갈아입은 뒤, 화장과 머리를 손봤다. 마담 드 플랑로즈와 가졌던 티타임은 황태자비 선출식에 대비한 만큼 옷차림부터 장신구까지 1차 경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만큼 정숙하긴 했지만 연회에 입고 가기엔 밋밋한 감이 없지 않았다.

    “아가씨.”

    엘레나의 머리를 정돈하던 앤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니?”

    “그게…….”

    “편히 말해보렴. 너랑 나 사이에 가릴 게 뭐가 있겠니?”

    엘레나는 미소까지 띠며 그녀에게 편안히 물었다.

    “오늘 외출하실 때 제가 모셔도 될까요?”

    “네가 말이니?”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를 가까이서 모시는 게 제 낙인데, 저택에만 있으니 제 소임을 다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엘레나의 눈매가 미묘하게 가늘어졌다. 그간 엘레나가 외출하면 신뢰를 등에 업고 하녀장이라도 된 것처럼 저택 내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앤이다. 그걸 포기하고 굳이 엘레나를 따라나선다고 하니 퍽 수상했다.

    “그러렴.”

    “정말요? 감사합니다.”

    앤이 환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엘레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말했다.

    “뒷정리는 메이에게 맡기고 나갈 채비하렴.”

    “아, 네. 아가씨. 얼른 준비할게요.”

    앤은 들뜬 아이처럼 기뻐하며 침실을 나섰다. 그러자 엘레나와 메이 단둘만이 남게 됐다.

    “리브의 입김이 들어간 것 같지?”

    “네, 그래 보여요.”

    “지금에 와서 앤을 통해 뭘 알아낼 수 있다고.”

    엘레나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었다. 만찬 이후로 리아브릭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니,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엘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를 받고 있을 것이다.

    “메이, 휴렐바드 경을 불러주겠니?”

    “네, 아가씨.”

    메이가 방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휴렐바드를 불러왔다.

    “찾으셨습니까?”

    “경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부탁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명령하십시오.”

    엘레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얼음의 기사라고 불렸지만 엘레나가 보기에 아직 앳되고 귀여운 구석이 남아 있는 휴렐바드였기에 이런 모습이 어색했다.

    “우리 사이에 명령이라니요. 너무 딱딱하잖아요.”

    “……네?”

    우리 사이라니. 휴렐바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엘레나의 은유적인 놀림에 어찌 대처할지를 모르고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반응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리며 엘레나가 본론을 꺼냈다.

    “오늘 외출 시에 미행이 붙을 거예요.”

    “미행이면 혹시.”

    “짐작하시겠지만 리아브릭이 붙인 것 같아요.”

    휴렐바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행이 붙었다는 건 이미 의심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엘레나의 신변을 보호해야 할 휴렐바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자에 대해서 파악해 주세요. 최대한 은밀히. 제 말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네, 알겠습니다.”

    누가 미행으로 붙을지는 모르겠지만 대공가 내에서 얼음의 기사라 불린 휴렐바드를 상회하는 실력을 지닌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칫 휴렐바드가 그를 실력으로 제압이라도 하는 날엔, 지금까지 꽁꽁 감춰두었던 휴렐바드의 검술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꼴이 되고 만다.

    엘레나는 그걸 원치 않았다. 원 역사에서 제국의 삼검이라 일컬어졌던 휴렐바드를 리아브릭이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대공가의 숨통을 끊는 검으로 활용하고 싶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미행을 당한다는 걸 안 이상 그냥 넘어가긴 아깝잖아?’

    엘레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한 수가 아니라 두 수 앞을 내다본 엘레나는 미행을 역이용해 리아브릭에게 혼선을 줄 계획이었다.

    채비를 마친 엘레나는 저택을 나섰다. 외출 시 늘 함께하던 메이를 대신해 앤을 대동했지만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감시자라곤 하나 엘레나의 손바닥 안이었으니까.

    수도의 가도를 내달린 마차가 비올라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중후함이 물씬 풍기는 저택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비올라 백작가는 정통과 명망을 두루 갖춘 명문가였다. 이젠 황실파로 돌아선 린든 백작과 마찬가지로 귀족파가 대두하는 제국 내에서 몇 안 되는 중립 귀족이자 유력 가문이다.

    잠시 손님용 응접실에서 들러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엘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경도 같이 가시죠.”

    “네, 공녀 전하.”

    근사한 제복 차림의 휴렐바드가 뒤를 따랐다. 초원을 연상케 하는 짙은 녹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는 휴렐바드를 시녀들이 힐끗거리며 훔쳐봤다. 수려한 외모도 외모지만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매료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휴렐바드를 연회에 대동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그간 휴렐바드를 숨기고자 대동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연회에 오지 않은 리아브릭이 어딘가 심어놓았을 감시자를 찾으려면 휴렐바드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앤, 쉬고 있으렴.”

    “네, 아가씨.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앤에게 더없이 자상한 미소를 지어 준 엘레나가 응접실을 나섰다. 비올라 백작의 생일연회가 열리는 메인 홀에 들어서자 귀족들이 엘레나의 등장을 성대히 맞아주었다. 사교적인 미소를 머금은 엘레나가 비올라 백작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드려요, 백작님. 아버님께서도 축하한다는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고맙네. 대공과 공녀의 앞날에도 가이아 여신의 영광이 함께하길 빌겠소.”

    비올라 백작 내외와 짧은 담소를 나눈 엘레나가 인사를 하곤 물러났다. 등 뒤로 축하 말을 전하고자 줄을 선 귀족들이 빼곡하기도 했거니와 그녀의 관심사 역시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공녀 전하가 아니세요? 저 기억나세요? 만찬 때 인사드렸던 비욜 영애예요.”

    “기억하다마다요.”

    엘레나가 미소를 띠며 인사를 나눴다. 당연히 기억에 없지만 이런 식으로 아는 척을 해주는 것 또한 사교계의 예의다. 홀의 분위기를 익히고자 엘레나가 몇몇 영애와 여담을 나눴다. 원래 같으면 엘레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을 떨어야 할 영애들이 유독 조신하게 굴었다. 뒤에 선 휴렐바드를 힐끗거리며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다.

    “죄송한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요?”

    “아, 제 기사인 휴렐바드 경이에요.”

    “기사요?”

    기사이지 않을까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영애들은 실제 엘레나의 입을 통해 확인하자 더더욱 놀라웠다. 대다수의 기사는 야외에서 검술을 수련하는 만큼 피부가 그은 경우가 많았다. 또 검을 수련하다 보면 어깨가 벌어져 우락부락한 체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서 휴렐바드는 귀족가 영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귀하고 곱상한 외모를 보유하고 있었다. 기사보단 학자에 더 가까운 인상이랄까.

    “휴렐바드라고 합니다.”

    휴렐바드가 절도 있게 묵례를 하자 몇몇 영애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낮게 깔리는 중저음 목소리는 그녀들을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 영애들의 반응을 엘레나도 은근히 즐겼다. 저들이 반한 이 남자가 바로 그녀의 기사라고 생각하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보다 보로니 백작이 안 보여.’

    어찌 된 영문인지 홀 안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오지 않은 건가?’

    그 말은 곧 엘레나의 제안에 대한 거절을 의미한다. 내심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엘레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서부의 보로니 백작을 제외하고도 아직 동부와 남부의 유력 귀족과의 만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휴렐바드에게 관심을 보이는 영애들을 뒤로하고 엘레나는 한동안 귀부인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눴다. 이만하면 연회장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감시자의 의심을 피하기에 충분하다 싶었다. 막 몸을 빼려는데, 보로니 백작과 비올라 백작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왔어.’

    엘레나 입가의 미소가 진해졌다. 슬그머니 보로니 백작 옆으로 다가가 제 존재를 드러냈다. 그런 엘레나를 발견한 보로니 백작이 반갑게 아는 체했다.

    “또 뵙습니다, 공녀 전하.”

    “반가워요. 백작님은 오늘도 멋지시네요.”

    “어디 공녀 전하의 아름다움만 하겠습니까?”

    가벼운 여담을 주고받던 보로니 백작이 정중하게 춤을 권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만큼 엘레나도 그의 손을 잡았다.

    “생각해 보셨어요?”

    연주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엘레나가 본론을 꺼냈다. 지금 이 순간도 리아브릭이 심어놓은 누군가가 엘레나를 감시 중이었다. 곡이 끝나기 전에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네, 충분히 했습니다.”

    “대답은?”

    “그 전에 조율하고 싶습니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의 수익 분배에 대해서.”

    엘레나의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역시 보로니 백작은 영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다. 분명 자신에게 득이 되는 거래인 걸 알면서도 선뜻 응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실리를 챙기려는 게 눈에 보였다.

    “어려울 게 있나요? 수익 분배야 백작님 하기에 달린 건데요.”

    “제게요?”

    “네, 투자금에 비례해서 분배율이 달라지는 거 아니겠어요?”

    “투자요?”

    보로니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으로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 엘레나가 내건 투자금이란 말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투자도 없이 수익 분배를 받으실 생각이셨어요?”

    “그건 아니지만 전에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

    “그러기 위해 우리가 다시 만난 거 아니겠어요?”

    시종일관 엘레나의 만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런 인간은 여유롭게 찍어 눌러야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해가 있을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대공가에 투자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저한테 투자하시라는 말이에요.”

    “공녀 전하께요? 무슨 차이인지.”

    “리아브릭이 실각되면 대공가의 실권을 누가 잡겠어요?”

    엘레나는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카는 명실상부한 대공가의 후계자였다. 그녀의 존재가 바로 대공가인 셈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면, 차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공증 절차를…….”

    “백작님.”

    엘레나가 목소리를 깔고 그를 불렀다. 그녀가 얼음장처럼 한기를 풀풀 풍기자 보로니 백작의 어깨가 움찔했다.

    “저 베로니카 폰 프리드리히예요.”

    “아, 압니다.”

    “지금 그걸 아시는 분이 제 앞에서 계약서와 공증을 운운한 거예요?”

    엘레나는 표정을 굳히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 어느 때보다 권위적인 눈길로, 그녀가 회귀 이후에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제 얼굴이, 제 이름이, 제 지위가 신용이고 담보예요.”

    “…….”

    “그리고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백작님을 대신할 분은 많답니다.”

    엘레나가 강하게 몰아붙이자 보로니 백작은 입만 뻥긋거릴 뿐 기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베로니카라는 이름과 얼굴, 지위는 제국 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까닭이었다.

    ‘베로니카, 네가 돌아왔을 때 감당해야 할 게 많을 거야.’

    황태자비 선출식이 끝나고 나면 제 발로 대공가를 나갈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L이 가진 명성과 평판, 위상을 앞세워 대공가에 잠재되어 있는 위험 요소들이 폭발하도록 도화선에 불을 놓을 것이다. 리아브릭을 실각시키고 일부 귀족들로부터 막대한 투자금을 받아 빼돌리는 건, 베로니카의 대역으로서 엘레나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정 원하시면 서명이 들어간 친필 증명서 정도는 남겨줄 수 있어요.”

    “증명서요?”

    “네, 약속의 증표죠.”

    엘레나는 증명서 작성을 통한 최소한의 여지는 남겨뒀다. 어차피 책임 소지는 베로니카의 몫이다 보니 걸릴 게 없었다.

    보로니 백작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꾸만 스텝이 꼬이고 발을 헛디디는 게 그가 얼마나 생각이 많은지 짐작케 했다.

    “곡이 끝나가네요.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엘레나가 대답을 재촉하며 그를 촉박하게 내몰았다. 그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공녀 전하의 편에 서겠습니다.”

    “현명하신 선택이에요.”

    그토록 바라던 대답이었기에 엘레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리아브릭의 실각과 관련한 서부 귀족의 여론은 제가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럽네요.”

    엘레나가 짓고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모든 건 계획대로다. 이 추세라면 엘레나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대공가의 몰락도 머지않았다.

    “조만간 백작가로 대리인을 보내죠. 그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마시길.”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이제 남도 아닌걸요.”

    거래가 성사됐다.

    * * *

    엘레나는 시간 차를 두고 노튼 자작, 후안 남작 순으로 접촉했다. 투자금을 언급하자 그들 역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대공가의 후계자가 될 엘레나의 편에 서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노블레스 거리는 성공이 기정사실화된 사업이다 보니 손해는 보지 않을 거란 나름의 계산이 섰을 것이다. 구두계약이란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엘레나의 서명이 들어간 친필 증명서를 써준다는 말에 수긍했다. 그 이면에는 고압적인 자세로 언제든 다른 귀족들로 대체할 수 있다는 엘레나의 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이해관계가 엮여 엘레나는 원하는 바를 이뤄냈다.

    세 귀족은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동부와 서부, 남부의 귀족들과 접촉하여 여론을 끌어모았다. 지금은 수면 아래에서 잠잠하지만 여론이 집중되면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이 끝날 시기에 맞춰 터뜨릴 계획이었다.

    비밀리에 투자금을 받아오기 위해 에밀리오가 움직였다. 소형 상단을 인수해 투자금을 끌어올 구색을 갖췄다. 굳이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한 건 언제든 상단을 파산시켜 꼬리를 끊기 위해서다. 상단을 대표하는 대리인으로는 칼리프가 움직였다. 믿고 일을 맡기기에 그만한 수완가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절 감시하는 영애가 있었군요.”

    앤이 없는 사이, 엘레나는 홍차를 마시며 휴렐바드와 이야기를 나눴다. 연이은 연회 때 리아브릭을 대신해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한 영애에 관한 얘기였다.

    “네, 항상 공녀 전하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휴렐바드의 말에 따르면 워낙 조용하고 평범한 영애였다고 했다. 그 평범함 덕에 언제 어느 때든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고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만일 휴렐바드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감시자를 발견하는 건 요원했다.

    “누군지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또 볼 일이 있겠죠.”

    엘레나는 감시자의 존재를 인지해 둔 걸로 만족했다. 정작 신경을 써야 할 건 외출 시 엘레나를 미행하는 자였다.

    “경, 혹시 누가 우리 뒤를 밟고 있는지도 알아내셨어요?”

    “네, 알아냈습니다.”

    휴렐바드의 대답에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던 엘레나의 손길이 멈췄다.

    “누구죠?”

    “로렌츠 경입니다.”

    엘레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입꼬리가 뒤틀리며 냉소가 흘러나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발목을 잡으려 드네요.”

    “로렌츠 경 말씀입니까?”

    사연이 느껴지는 엘레나의 혼잣말에 휴렐바드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네, 질긴 악연이죠.”

    “그자가 아가씨께 실수라도 한 겁니까?”

    “실수라. 고의였으면 모를까, 실수는 아니었던 거 같네요.”

    깊이 침전된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로렌츠가 복부에 검을 찔러 넣던 그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떠오르며 복부가 욱신거렸다.

    “경이 아니었다면, 로렌츠가 제 직속 기사가 됐을 거예요. 거짓된 충성을 맹세하고 끝내 절 배신했겠죠.”

    “…….”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경이 제 곁에 있어줘서 이만큼 버티고 준비할 수 있었거든요.”

    휴렐바드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만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 제 곁을 지키는 휴렐바드를 보니 그날의 비참한 기억 따위는 먼지처럼 흩어졌다.

    “저는 결코 배신하지 않습니다.”

    “알아요.”

    엘레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제가 있는 한, 누구도 공녀 전하께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 또한 믿고 있어요.”

    휴렐바드의 저 말이 허언이 아니기에. 엘레나는 대공가 안에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이렇게 웃을 수 있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든든했다.

    “시간이 됐네요. 이제 슬슬 나갈까요?”

    “네, 공녀 전하.”

    찻잔을 내려놓은 엘레나가 방을 나섰다. 앤을 대동해 저택 앞에 대기 중이던 최고급 사륜마차에 발을 들이던 엘레나가 멈췄다.

    “존.”

    “네, 아가씨.”

    엘레나의 호명에 마부 존이 머리를 푹 숙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샹젤리제 거리를 우회해서 퀴리 부인 전시장으로 가렴.”

    “네? 네. 알겠습니다.”

    존은 의아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수도 중앙에 위치한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가면 목적지를 빙 돌아가게 된다. 납득이 되지 않는 주문이었지만 존은 토를 달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반은 간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대공가 저택을 나선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섰다. 시크릿 살롱이 개장하며 과거의 활기를 되찾은 샹젤리제 거리는 수도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이는 유명 거리로 변모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하던 거리의 모습이 조금씩 보여.’

    엘레나는 차창 밖에 펼쳐진 샹젤리제 거리의 전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 역사에서 란돌과 마찬가지로 천재 건축가로 추앙받던 디아즈를 포섭해 지은 대형 건축물 바실리카가 샹젤리제 거리의 좌우로 그 위용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극장이나 집회장, 밀집 상가 등이 몰려 있는 이 장방형 대규모 상업 건축물은 기둥과 아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미적 외관도 훌륭해 벌써부터 샹젤리제 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과연 이 거리가 완성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샹젤리제 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시크릿 살롱을 중심으로 바실리카가 지어지자, 귀족이나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나서서 건물을 증축하거나 새 단장을 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엘레나는 이 샹젤리제 거리를 노블레스 거리의 대척점에 서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 바람은 점점 현실로 되어갔다. 그 중심에는 시크릿 살롱이 있었다. 특히 본관을 훨씬 상회하는 규모의 별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대형 홀과 극장, 그리고 공연장으로 이루어진 별관까지 들어서게 되면 살롱은 한 번 더 문화 중심의 공간으로 도약할 것이다.

    그뿐이랴. 수도 외곽에 L의 후원으로 학교가 설립됐다.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시설로 자칼린이 초대 학장을 맡아 운영 중이었다. 차후에 바실리카가 완공되면 일부 공간은 학교로 이용할 계획이다. L의 영향력이 문화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국의 시민이 될 아이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이 껍데기를 버리고 L로 사람들 앞에 서게 될 날이.’

    엘레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오길 학수고대했다. 샹젤리제 거리를 우회하여 도착한 곳은 화려한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이 층 건물이었다. 귀족들의 별장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엘레나가 살롱을 열기 전까지 예술가가 작품을 발표하거나, 전시회를 여는 장소였다.

    그러나 시대를 선도하는 대다수의 명장이나 거장들이 시크릿 살롱으로 몰리게 되면서 이곳 전시장은 그보다 수준이나 격이 떨어지는 예술가들이 주로 몰렸다. 최근 들어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지 귀족들이 취미 삼아 그리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대가로 운영비를 충당하는 수준이었다.

    ‘오늘이 그런 경우지.’

    전시장을 찾은 엘레나는 벽면에 걸려 있는 형편없는 그림의 수준에 혀를 찼다. 오늘 전시회를 연 퀴리 부인은 레몬드 자작의 아내로 예술적인 열망과 동경, 허영심이 굉장히 강한 여자였다. 학술원에서 미술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는 그녀의 그림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찾은 이유는 퀴리 부인이 나름 사교계에서 평판과 명망이 높은 만큼 눈도장을 찍고자 함이다.

    “축하드려요, 부인.”

    엘레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는 반갑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머, 공녀 전하께서 와주실 줄 몰랐어요. 어서 와요.”

    퀴리 부인은 엘레나의 손을 잡으며 격하게 반겼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태자비로 유력한 공녀가 전시회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그녀의 격이 한 단계 올라간 기분이었다.

    “부인의 예술적인 소질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과찬이에요.”

    겸손한 척 구는 퀴리 부인의 만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정말 걱정되는걸요. 부인 때문에 예술가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면 어떻게 해요.”

    “공녀 전하께서도 참…….”

    부채 너머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퀴리 부인을 보니 너무 한심스러웠다. 엘레나는 좀 더 그림을 감상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녀의 비위를 더 맞춰주다간 속이 뒤집힐 것 같아 감상을 핑계로 전시장 가장 구석으로 피했다.

    “하아. 정말이지.”

    여기에도 수준 이하의 그림이 걸려 있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것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곤욕이지만 퀴리 부인을 상대하며 맘에도 없는 찬사를 늘어놓는 것보단 나았다.

    “도무지 못 봐줄 수준이네. 이것도 그림이라고 여기다 걸어놓네.”

    ‘뭔 욕을 저리 대놓고 해?’

    엘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문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후미진 구석이라고 하나 신랄하게 제 속마음을 떠드는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귀족들은 예술을 몰라요. 자고로 그림이란 지하에 처박혀서 그려야 제맛이지. 기왕이면 초상화로. 모델은 단발머리 여자애가 좋겠어.”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 돌아보지 않고 있던 엘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시감이 느껴진 목소리와 말투, 위화감을 주는 단어들이 그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뒷모습만 봤을 때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나쁘지 않은 옷태에 외알 안경을 쓴 그는 경박한 말투와 달리 점잖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엘레나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예고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잘 지냈냐?”

    “……!”

    외알 안경으로 가릴 수 없는 붉은 눈동자와 이죽거리는 미소, 렌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미칠 거 같은 표정이네?”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엘레나를 보며 렌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렌의 등장이 엘레나로서는 마냥 반갑지 않았다.

    “선배가 여기 왜 있어요?”

    “그림 보러 왔지.”

    태연한 렌의 대답에 엘레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럼 그림 보다 가세요.”

    “어디 가?”

    “그림 보러 왔다면서요. 괜히 선배랑 있다가 리아브릭한테 들키면 저만 곤란해져요.”

    우려를 떨치지 못하는 엘레나와 달리 렌은 태연자약했다.

    “그래서 변장했잖아. 감쪽같이.”

    “그걸 말이라고!”

    엘레나는 욱 치미는 감정을 참았다. 제 딴에는 변장했다곤 하나 어딘지 모르게 엉성했다. 엘레나가 한눈에 알아본 것만 해도 그렇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말지? 참다 참다 오죽 힘들었음 왔겠냐.”

    “하.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데요?”

    렌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낮췄다. 숨소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대며 시선을 맞췄다.

    “뭐, 뭐하는 거예요, 지금.”

    항상 똑 부러지는 그녀였지만 훅 들어온 렌의 예상 밖 행동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엘레나의 반응을 즐기듯 렌이 이죽거렸다.

    “그런 게 있어. 애는 몰라도 돼.”

    엘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노려보다가 렌을 밀어냈다. 힘껏 민 것도 아닌데 렌이 과장된 시늉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아. 부러지면 어쩌려고 막 대해?”

    “안 가실 거죠? 그럼 제가 가고요.”

    더는 곤란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엘레나가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그날은 괜찮으셨어요?”

    “언제?”

    “……귀족 만찬이요. 퇴장할 때, 스펜서 자작님이 뒤따라 나갔잖아요.”

    엘레내는 내내 그날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자작은 검술제에서 졌단 이유로 렌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렌이 렌답게 굴어야 리아브릭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단 말에 동의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냐?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세게 맞을 걸 그랬네. 오늘까지 시퍼렇게 부어 있게.”

    렌이 밸도 없이 히죽히죽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지. 걱정이나 시키고.

    “괜한 걸 물었네요. 저 가요.”

    “야. 적당히 해라.”

    양손을 삐딱하게 바지 주머니에 꽂은 렌이 멀어지는 엘레나를 빤히 보며 말을 던졌다.

    “뭘요?”

    “황태자비 선출식. 어차피 눈속임이잖아? 대충해. 뭘 그리 최선을 다하려고 해.”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리아브릭이 어쭙잖은 눈속임으로 속아 넘길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이제 와서 저런 얘길 하는 렌의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엘레나는 묵례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고는 돌아섰다. 알 만한 사람이니, 굳이 나서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멀어지는 엘레나를 보며 렌이 중얼거렸다.

    “알지, 아는데……짜증 나잖아. 꼭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같고.”

    전시장을 나온 엘레나는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건너편 건물 으슥한 골목 어귀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로렌츠가 나오더니 말을 타고 뒤를 밟았다.

    잠시 후. 변장한 렌이 시간을 두고 전시장을 나오더니 유유자적 거리를 걸으며 사라졌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엘레나와 렌을 훔쳐보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 * *

    동이 트기 전부터 대공가는 분주했다. 황태자비 선출식 1차 경합이 오늘 황궁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그 때문에 시녀들은 숨 돌릴 겨를도 없었다. 전날부터 엘레나의 목욕을 돕고 선출식 기준에 부합하는 치장과 화장을 하느라 열과 성을 다했다. 앤도 평소보다 잔뜩 긴장했다. 흐트러진 레이스를 단정히 하고,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펴며 혹여 놓치는 부분이 없나 신경을 바싹 세웠다.

    “앤, 진정하렴. 누가 보면 네가 선출식에 나가는 줄 알겠구나.”

    “중요한 날이잖아요. 전 아가씨가 황태자비가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의지를 불태우는 앤을 보며 엘레나는 실소를 지었다. 그게 과연 엘레나를 위해서일까. 황태자비가 된 엘레나를 따라 황궁에 들어가려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겠지.

    몸단장을 마친 엘레나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한 듯 안 한 듯 옅은 화장기에 정숙함을 강조한 벨 라인 드레스. 그리고 고리타분한 디자인의 목걸이와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평가를 맡은 귀부인들의 눈에 경박하게 비치지 않고자 신경을 쓴 스타일이다.

    “아가씨,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엘레나는 마지막으로 귀 옆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 방을 나섰다. 일 층 홀을 가로질러 저택을 나서자 마차 앞에 프란체 대공과 리아브릭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나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우아한 예법에 프란체 대공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비로 전혀 손색이 없는 자태로구나.”

    “과찬이에요. 아직 많이 배워야 해요.”

    겸손하게 대답한 엘레나가 시선을 리아브릭에게 돌렸다.

    “리브, 다녀올게요.”

    “긴장하지 마시고 실수만 하지 마세요.”

    엘레나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1차 경합에서 떨어질 일은 없단 얘기다. 마중을 나온 가신들의 격려를 받으며 엘레나가 마차에 올랐다. 앤과 메이가 동승했으며 호위를 맡은 휴렐바드가 말을 몰며 호위했다. 바퀴가 굴러가며 마차에 속도가 붙었다. 대공가의 대문을 지나치더니 잘 정비된 가도를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황궁이 보였다. 몇 차례 증축과 보수를 거치며 웅장함을 더한 황궁은 천년 제국의 심장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위엄이 느껴졌다.

    “와.”

    앤은 황궁의 전경에 감탄사를 흘렸다. 멀리서만 보던 것과 달리, 가까이서 본 황궁의 모습에 압도된 것이다.

    ‘나도 저랬지.’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황궁 담벼락 너머의 별궁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길이 아련해졌다.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황궁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궁에서 지낸 세월이 적지 않았건만 좋은 추억이나 기억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 이제 와서 옛일을 들춰 뭐 할 건데?’

    엘레나는 쓸데없는 잡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중요한 건 지금이지, 과거가 아니지 않나. 황궁 안을 내달리던 마차가 동궁에 도착했다. 황제가 거주하는 본궁의 우측에 위치한 동궁은 국가의 행사나 의식을 치르는 궁이다. 엘레나가 마차에서 내리자 황궁근위대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예를 갖췄다.

    “베로니카 공녀십니까?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을 따라 응접실로 이동한 엘레나는 1차 경합에 앞서 마지막으로 몸가짐을 점검했다.

    ‘1차 경합은 티타임이지.’

    총 36명의 황태자비 후보를 6명씩 묶어 티타임을 하게 되는데 사교계에서 명망이 높은 귀부인 세 명이 참관인으로 참가한다. 참관인은 황태자비 후보로 참가한 영애들의 몸가짐과 예법, 언행 등을 평가한 뒤, 사교계 평판을 점수로 산정한 뒤 합산해 1차 경합의 당락을 결정한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근위병이었다.

    “아가씨, 곧 이동해야 합니다.”

    메이가 근위병의 말을 전하자 엘레나가 몸을 일으켰다.

    “가야겠구나.”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그래도 더 잘하고 오세요!”

    호들갑 떠는 앤과 달리, 황태자비 선출식 자체가 시간 끌기라는 걸 알고 있는 메이와 휴렐바드는 담담히 머리를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엘레나가 복도로 나오니 마찬가지로 1차 경합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 중인 영애들과 마주쳤다.

    “공녀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영애들의 인사에 엘레나는 가벼운 묵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스치듯 보고 말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황태자비 선출식에 참가한 36명의 영애 중 정말 황태자비가 될 자질과 품성, 가문을 지닌 영애는 한 손가락에 꼽는다. 나머지는 혹시 모를 요행을 바라거나, 황태자비 선출식에 참가한 이력을 갖고자 참가한 경우가 많았다.

    “언니.”

    반대편 복도에서 다가오는 무리의 선두에 선 영애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했다. 짧은 웨이브의 단발머리에 진한 은발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라인하르트가의 여식 아벨라였다.

    “아벨라.”

    엘레나가 가볍게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했다. 복도 정중앙에서 마주치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을 맞잡았다.

    “못 본 새에 더 예뻐졌구나.”

    아주 찰나였지만 아벨라의 시선이 엘레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훑어 내려갔다. 나름의 견적을 내린 아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언니야말로요. 드레스가 언니의 미모를 소화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너무 아쉬워요.”

    엘레나는 저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숙함을 강조하기 위해 입고 온 투박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지적한 것이다. 특히나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벨라 뒤에 선 영애들이 하나같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뻔한 수작질에 엘레나가 미소를 띠며 받아쳤다.

    “그러게. 난 네가 참 부러워. 드레스가 예쁘니 이런 걱정 안 해도 되잖아.”

    “…….”

    아벨라와 엘레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불똥을 튀겼다. 사이좋은 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고 웃고 있지만 속내는 원수를 마주한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너한텐 갚아줄 빚이 있지.’

    이번 생의 엘레나에게 있어서 아벨라는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황비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던 지난 삶과 달리 황태자비 선출식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학술원에서의 일로 엘레나는 아벨라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루시아로 변장한 엘레나가 시안과 가까이 지내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고 해코지를 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을 놓고 나란히 선 엘레나와 아벨라가 근위병을 따라 걸어갔다. 서른네 명의 영애가 긴장된 얼굴로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동궁의 정중앙에 위치한 복도에 이르자 앞서 걷던 근위병이 돌아봤다.

    “지금부터 호명되신 영애께서는 옆 응접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바실라 영애, 니즈 영애 그리고…….”

    호명을 받은 6명의 영애가 지정받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사전 예고 없이 무작위로 티타임에 참여할 영애를 배정한 건 나름 경합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같은 방식으로 다섯 번을 반복하자 복도에 여섯 명의 영애만이 남게 되었다.

    ‘1차 경합부터 나와 아벨라를 붙인다고?’

    황태자비 선출에 가장 유력한 후보가 엘레나와 아벨라다. 그런 두 영애를 1차 경합의 주제인 티타임부터 붙일 거라곤 엘레나도 예상치 못했다.

    “영애들께선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근위병의 안내에 따라 엘레나를 위시한 다섯 영애가 응접실로 발을 들였다. 평가를 맡은 귀부인들이 건너편 소파에 앉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영애들.”

    엘레나가 치맛자락을 들며 우아한 동작으로 그들의 인사에 답례했다.

    ‘퀴리 부인, 딜롱스 부인…… 한 명은 모르겠어.’

    퀴리 부인의 전시회에도 다녀왔을 만큼 그녀와 엘레나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에 반해, 딜롱스 부인은 라인하르트가와 밀접한 관계인 걸로 알고 있다. 아쉽지만 마지막 귀부인은 기억에 없었다.

    “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두 개의 원형 탁자에 세 명씩 나눠 앉았다. 고급 탁자포 위로 여인이 갖춰야 할 덕목 중 으뜸으로 치는 다도를 평하기 위한 찻잎과 다기가 놓여 있었다.

    “티타임에 차를 빼놓으면 서운하겠죠? 디저트는 제가 준비할 테니 영애들께서 차를 준비해 주세요.”

    ‘시작이군.’

    본격적인 1차 경합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티타임의 기본 소양은 차. 다도를 보면 여인의 소양과 품위를 알 수 있단 세간의 말처럼 빠지지 않는 평가 요소다. 엘레나는 익숙하지만 절제된 동작으로 찻물을 데워 찻잎을 우려냈다.

    세 명의 귀부인은 엘레나의 다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엔 놀라움이었다면 차츰 그녀의 고아한 손놀림에 감탄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몸의 선까지 흠잡을 게 없이 훌륭했다. 다도의 표본으로 삼고 싶을 만큼 완벽했다.

    아벨라도 분발했지만 엘레나와 비교하면 한참을 미치지 못했다. 딱히 지적받을 것도 없었지만 칭찬받을 만한 부분도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격차가 벌어짐을 인지했는지 아벨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간에 불과했다. 그녀가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맺혔다.

    ‘웃어?’

    엘레나와 달리 아벨라는 필사적이었다. 지난 삶에서도 그랬지만 아벨라는 제국의 국모가 되겠단 야망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엘레나와 맞붙은 몇 차례의 경합에서도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랬던 아벨라가 저런 태도를 보이니 엘레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빈 찻잔에 영애들이 직접 우려낸 찻물이 담겼다. 때마침 황궁 시녀들이 디저트가 담긴 트레이를 내왔다. 귀부인들도 합석하며 본격적인 티타임이 이어졌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들이 오갔고 간간이 웃음소리도 흘렀다. 노련한 귀부인들은 의도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영애들의 언행을 매의 눈으로 살폈다. 긴장이 풀릴 때 실수가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영애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말실수를 저질렀다.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사소한 실수였지만 귀부인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티타임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찻잔을 든 아벨라가 건너편에 앉은 벨라 영애에게 눈빛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벨라 영애가 엘레나를 보며 맘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역시 공녀 전하세요. 동작 하나하나 어쩜 이렇게 완벽하신지.”

    “그런 말씀 마세요. 레이디 중의 레이디라 일컬어지는 분들 앞에서 민망하네요.”

    엘레나는 겸손하게 대응하면서 은근슬쩍 귀부인들을 치켜세웠다. 슬쩍 표정을 보니 아무렇지 않은 척 굴지만 내심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듣기로는 삼 년간 요양을 하셨다는데, 정말 대단하세요.”

    “어머, 요양을 하셨어요? 전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몰랐어요.”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벨라 영애가 의도를 갖고 꺼낸 화제를 데이지 영애가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물고 늘어졌다. 사전에 모의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삼 년 동안이나 모습을 뵌 적이 없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예, 몸이 좋지 않아서 쉬었답니다.”

    엘레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고작 한다는 수작이 지난 삼 년의 일을 걸고넘어지는 거라니 퍽 우스웠다.

    “저런,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상한 말이나 하고. 공녀 전하께서 많이 속상했겠어요.”

    “어머, 소문이라뇨? 공녀 전하께 소문이 있었나요?”

    같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영애가 껴들어 장단을 맞췄다. 벨라 영애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소문이었지 뭐예요. 당연히 전 믿지 않았어요. 이렇게 반듯하고 품위 있으신 공녀 전하신데. 격이 있지, 누구랑 눈이 맞았다고 가져다 붙이는지, 원.”

    “실체가 없는 소문이라 더 과장되고 부풀려진 거 같아요. 소문이란 게 다 그렇잖아요?”

    “…….”

    벨라 영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옆자리에 앉아 있던 데이지 영애가 맞장구를 쳤다. 교묘한 화술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당시의 악소문을 끄집어내 엘레나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꽤 머리 썼네.’

    하찮은 수작으로 보이지만, 황태자비는 장차 황후이자 국모가 될 여인으로 완전무결해야 했다. 조금의 흠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지난 삼 년간의 공백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소문이란 게 실체가 없을수록 더 부풀려지고 곡해되게 마련이니까.

    ‘저들이 이런 일을 꾸밀 배짱은 없을 거고. 아벨라 짓이군.’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3차 경합에서나 맞붙어야 할 아벨라와 엘레나가 1차 경합인 티타임부터 한 조로 배정된 것 자체가 수상스러웠다. 황실에서 개최하는 황태자비 선출식에 이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4대 가문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니까.

    엘레나가 슬쩍 귀부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귀부인들 모두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대공가에게 호의적인 퀴리 부인은 난처한 얼굴로 대화를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인하르트가와 가까운 딜롱스 부인은 말릴 의사가 없는지 부채로 입을 가리고는 방관했다. 나머지 한 명의 귀부인 역시 그저 지켜볼 뿐 나서지 않았다.

    “그만들 하세요. 이런 일을 언급하는 게 실례인지 모르시나요?”

    아벨라가 적절한 시기에 껴들어서 엘레나를 걱정하는 시늉을 했다. 싸움을 말리는 시누이처럼 그 가증스러운 연기에 엘레나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열성적으로 흠을 내는 건 베로니카지, 엘레나가 아니다. 아벨라가 죽기 살기로 베로니카를 걸고넘어져 망가뜨려 놓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리아브릭을 실각시키기 전까진 베로니카의 대역으로서 충실할 필요가 있었다. 또 당하고만 있는 것이 그녀의 성미에 안 맞기도 하고.

    엘레나는 되레 웃었다. 한때 사교계를 주름잡던 그 시절처럼.

    “고마워, 아벨라.”

    “아니에요, 언니. 이런 얘기 불편하셨죠?”

    “불편하긴. 말 그대로 소문에 불과한데.”

    엘레나는 동요하지 않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평온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항간에 떠돌던 소문이 정말 거짓처럼 느껴졌다.

    “……언니가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뭔가 기대하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아벨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당시, 리아브릭이 대역을 내세울 결심까지 했을 정도로 베로니카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하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다느니, 문란한 생활로 사생아를 낳았다느니 별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 지나간 시간을 확인하거나 증명할 방법도 없는 만큼 그 삼 년이란 시간은 베로니카에게 유일한 치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간계를 짜고 흔들었는데 지금 엘레나가 보인 반응은 아벨라의 기대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엘레나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무사히 넘겼으니 이제 되돌려 줄 차례다.

    “혹시 심야 무도회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

    엘레나가 운을 떼기가 무섭게 영애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심야의 무도회는 귀족들만 아는 은밀한 파티였다. 결코 수면 위로 드러나서는 안 될 문란함과 아편 같은 불법적인 행각들이 만연하던 연회다. 그러한 얘길 딴 데서도 아니고 황태자비 선출식에서 엘레나가 언급했으니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저는 잘…….”

    “저도 처, 처음 들어요. 심야의 무도회요?”

    당황하던 벨라와 데이지가 표정을 싹 바꿔 모르는 척했다. 그러나 말거나 엘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엘레나의 목표는 송사리가 아니었다.

    “저도 들은 얘긴데 얼마 전까지 수도에 심야 무도회가 열렸다고 해요. 거기서 가면을 쓴 귀족들이 입에 담기도 좀 그런 일을 벌인다던데.”

    “마,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에요.”

    데이지의 부정에 엘레나가 다시 물었다.

    “소문인가요?”

    “그, 렇죠. 소,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니까요.”

    껄끄러운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벨라가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이 생크림 케이크 드셔보셨어요? 입안에서 살살 녹네요. 다들 드셔보세요.”

    “그, 그래요? 저도 먹어볼게요.”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데이지가 기다렸다는 듯 케이크로 관심을 돌리려고 애썼다. 당황하는 기색을 보니 호기심이든 뭐든 심야의 무도회에 출입한 게 분명했다.

    “저도 이런 얘길 꺼내고 싶지 않아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불결해지는 기분이 드는걸요.”

    “같은 생각이에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는 벨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

    “근데 그냥 소문은 아닌 것 같아요. 황태자비 선출식에 참가한 후보 중에 심야의 무도회를 드나들던 영애를 누군가 봤다고 하더라고요.”

    엘레나가 빤히 아벨라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아벨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엘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고 늘어졌다.

    “아벨라, 혹시 들은 얘기 없어?”

    제 아비인 크롬 공작을 쏙 빼닮아 간계에 능한 아벨라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엘레나의 공격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게, 조용히 있는 날 왜 건드려?’

    아벨라가 심야의 가면무도회에 출입한단 사실이 알려진 건 우연이었다. 신분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할 그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늑대 가면남이 공개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깜짝 놀란 아벨라의 기사가 그런 늑대 가면남을 제지하려다가 되레 제압을 당한 우스꽝스러운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 가면남은 누구였을까?’

    아벨라의 호위 기사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라면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 무슨 얘기요? 전 들은 얘기가 없네요.”

    엘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 손짓마저 우아함과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랬구나. 사실 소문이길 바라. 황태자비는 훗날 제국의 국모가 될 경건한 자리잖아? 황태자비 선출식에 그런 곳을 출입하던 영애가 후보로 참가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렇지 않니?”

    엘레나는 미소를 머금고는 아벨라를 겨냥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찻잔을 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아벨라의 표정만큼 차에 어울리는 달달한 디저트가 또 있을까.

    잠시간 아벨라의 표정을 음미하던 엘레나가 여인의 몸가짐이란 주제로 화제를 전환했다. 황태자비에 어울릴 만한 덕목을 논하는 만큼 심야의 가면무도회에 출입했던 아벨라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그런 아벨라를 콕 집어서 몸가짐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며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양한 주제로 서너 시간 대화를 나누고서야 티타임이 끝났다. 귀부인들은 경합에 참가한 영애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조만간 결과를 가문으로 보내주겠다고 얘기했다.

    “2차 경합 때 보자꾸나, 아벨라.”

    응접실을 나온 엘레나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엘레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독기가 가득했지만 이제 와서 아벨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스텔라?”

    서류를 넘겨 보고 있던 리아브릭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수족인 아틸이 서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여식이라고 합니다.”

    “기억에 없는 가문인데?”

    리아브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수도의 웬만한 귀족들에 대해서는 꿰고 있는 그녀에게조차 생소한 가문이었다.

    “수도 귀족이긴 하나, 반쪽짜리 가문입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가문의 스텔라 영애가 가면무도회 초대장을 다수 구했다고 합니다.”

    그간 아틸은 피네치아 재배지 소실과 관련된 일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피네치아 잎사귀를 요구하며 접근한 남녀를 알게 됐고 그들의 정체를 쫓던 중 스텔라를 통해 다수의 초대장이 유포되었단 걸 밝혀냈다.

    “그래? 좀 더 알아보도록 해. 흔적을 찾으면 바로 보고하고.”

    “네, 자작님.”

    리아브릭은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재배지 소실과 관련된 복면인들을 추적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는데, 다른 쪽에서 꼬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저 보고 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경청하고 있던 루미너스가 손끝으로 안경을 올려 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부와 서부, 남부 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귀족들이?”

    리아브릭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안 그래도 상납급 증세 문제로 귀족들이 불만을 드러내지 않을까 촉각을 세우고 있는 터였다. 그런 와중에 귀족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공식적인 회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귀족 모임 직후와 비교하면 영지를 이탈하는 비율이 늘어났습니다. 확실한 움직임이 포착되면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계속 주시해. 시기가 안 좋은 만큼 확실히 단속할 필요가 있어.”

    귀족이란 작자들은 제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족속들이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납금 증세로 불만이 쌓여 있는 만큼 반기를 들 수도 있었다.

    ‘여차하면 본보기를 보이는 수밖에.’

    최악의 경우에 본보기로 가문 하나를 멸문시킬 생각도 갖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심만큼 제 이득에 눈이 먼 귀족들을 다스리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아틸과 루미너스를 내보낸 리아브릭이 다시 서류에 눈을 돌렸다. 대공가의 사정이 좋지 않은 만큼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맞물려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입니다.”

    “들어오세요.”

    리아브릭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복 차림의 기사가 들어왔다. 짧은 머리에 뱁새눈을 하고 있는 그는 오래전, 공국에서 엘레나를 데리고 올 때 마차를 운행하던 마부이자 기사였다. 로렌츠와 마찬가지로 엘레나가 대역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그간 개인적인 임무를 수행하고자 대공가를 비웠다가 돌아왔다. 제자리를 찾은 그에게 리아브릭이 내린 첫 명령은 로렌츠와 똑같은 엘레나의 뒤를 밟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찾아뵙습니다.”

    “얘기하세요.”

    리아브릭의 집무실 책상 앞에 선 루카스가 낮게 대답했다.

    “바스타슈 가문의 렌 영식과 공녀가 접촉한 것 같습니다.”

    리아브릭이 정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다시 말해봐요.”

    “퀴리 부인의 전시회에서 그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걸 목격했습니다.”

    루카스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평소의 복장과 거리가 있단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변장인지 아닌지는 리아브릭이 판단할 문제다.

    “대화 내용은?”

    “죄송하지만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리아브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테이블을 톡톡톡 두드렸다. 생각이 깊어질 때 튀어나오는 버릇이다.

    렌과 엘레나의 접촉을 목격한 건 두 번이다.

    초대 가주 탄신연회, 귀족 모임 만찬.

    과정도 렌이 강제적으로 엘레나를 끌고 나가 억지로 춤을 춘 게 다다. 둘 사이에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긴 했지만 딱히 수상스럽단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외에 엘레나가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렌이 대공가를 찾아온 적이 있다. 당시 리아브릭이 부재중이라 보고로만 들었는데 엘레나와 짧은 여담을 나누고 돌아갔다고 했었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시기에 두 사람 관계가 발전될 만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학술원.”

    리아브릭의 입술 사이에서 공백의 시간을 메워줄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면 학술원에 재학했던 이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관계가 진전이 되든, 악화가 되든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아.”

    사고를 이어가던 리아브릭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립해 있던 루카스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답답해서요. 꼭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네요.”

    최근 리아브릭은 몰라보게 야위고 말랐다. 프란체 대공에게 받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런데 뭔가 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리아브릭은 누구보다 이성적이라고 자부했다. 또 영민하고 빼어난 자신의 머리를 믿었다. 그런데 이젠 정말 모르겠다.

    ‘우연일까? 걔를 대공가에 들인 뒤부터 어긋났단 기분이 드는 건.’

    큰 틀에서 보면 그녀가 짠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미묘하고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한 게 지금의 결과를 초래한 게 아닐까.

    “계속 감시하세요.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시고요.”

    “네, 자작님.”

    루카스는 깍듯이 예를 갖추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홀로 남게 된 리아브릭은 가시지 않는 불안감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앤은 못 미더워. 학술원에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는지 알아봐야겠어.”

    * * *

    황태자비 선출식 1차 경합 닷새 뒤.

    리아브릭의 집무실에 황궁근위대원이 방문했다. 프란체 대공을 직접 대면하고 보고를 해야 할 사안이지만 근위대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리아브릭을 먼저 찾았다.

    “2차 경합에 진출하셨습니다. 귀부인들의 극찬을 받았으며 평가 점수에서도 압도적인 점수 차로 수석을 하셨습니다.”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리아브릭은 기뻐하는 내색 없이 담담했다. 심사에 참가했던 귀부인 중 라인하르트가와 연이 닿은 딜롱스 부인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을 사전에 포섭해 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황궁에 별다른 일은 없나요?”

    “폐하의 건강이 하루하루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리아브릭의 질문에 근위대원은 황실 내부 사정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애초에 검술 실력이 바닥인 그가 황궁근위대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공가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황태자 전하의 행적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리아브릭의 눈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시안은 그녀가 주의 깊게 관심을 갖고 있는 요주의 인물이다. 단순히 황위를 이을 황태자라서가 아니라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부류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황궁 시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말해보세요.”

    “아침마다 황태자 전하의 방을 치우는데 바닥에 모래나, 흙 따위가 자주 묻어 있다고 합니다.”

    “자주?”

    “네. 분명 오후나, 야간에 공식적인 외부 활동이 없었는데도 말이죠.”

    리아브릭의 눈빛이 침전됐다. 사소하지만 한 귀로 듣고 흘리기엔 뭔가 꺼림칙했다.

    “수소문을 해보니 그 외에도 의심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시중을 드는 시녀 말로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작은 흉터가 밤새 생겨 있어서 놀란 경우도 있답니다.”

    “뭔가 있군요.”

    리아브릭은 가벼이 흘려들어서는 안 될 사안이라고 여겼다. 아직 확신하긴 이르지만 시안이 뭔가 꾸미고 있음은 분명했다.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제가 조치하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궁근위대원이 예를 갖추고는 집무실을 나가 황궁으로 돌아갔다. 리아브릭은 따로 아틸과 루미너스를 불러 이와 같은 얘길 해주고 황실에 심어놓은 간자를 이용해 시안을 밀착해서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학술원 검술제 우승 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습니다. 만년 꼴찌였던 분이 렌 영식을 꺾고 우승했다는 것 자체가 요행은 아닐 테니까요.”

    “황태자비 선임식도 무언가 이상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실에선 서두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리아브릭은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가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처리할 사안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황실과 시안의 행보까지 신경을 쓰려니 힘에 부쳤다.

    “황실 일은 루미너스에게 위임하지. 이상한 낌새를 찾으면 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리아브릭의 시선이 아틸에게 닿았다.

    “알아보라고 한 건?”

    “학술원 재학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렌 영식이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었고, 공녀 전하께서도 받아치긴 했지만 당하시는 일이 잦으셨다고 합니다.”

    리아브릭의 눈빛이 변했다. 뭔가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래?”

    “네,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보기엔 아무래도…….”

    아틸은 뒷말을 삼켰다. 정황상 의심은 들지만 렌과 엘레나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리아브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섣불리 단정 지을 일은 아니야.’

    잠시 고민을 하던 리아브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심 걸리는 게 있었다.

    “공녀를 뵙고 오지.”

    집무실을 나선 리아브릭은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엘레나가 보였다.

    “리브!”

    엘레나가 아는 척을 하자 리아브릭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리아브릭이 의자에 앉기 무섭게 엘레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1차 경합 결과 나왔나요? 아까 황실에서 사람이 다녀간 것 같던데…….”

    “네, 나왔어요.”

    “어, 어떻게 됐어요?”

    리아브릭은 빤히 그런 엘레나를 쳐다봤다. 조마조마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얼마나 황태자비에 거는 기대가 큰지 짐작이 됐다.

    “네, 2차 경합에 진출하셨어요. 그것도 수석으로.”

    “수, 수석이요? 정말요?”

    엘레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눈빛과 표정에서 벅찬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긴장 푸시지 마시고 2차 경합을 준비하시면 돼요.”

    “걱정 마세요, 리브.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할게요.”

    엘레나를 보는 리아브릭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사실 저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보살펴 줄 이유가 없단 분위기를 은연중에 풍겼으니까. 그런 걸 감안하고 보면 엘레나는 참 말 잘 듣는 인형에 불과했다. 뭔가 수작을 부릴 만한 배짱도, 머리도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공녀와 긴 얘기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차 한 잔 주실래요?”

    “안 그래도 리브와 자주 못 만나서 서운한 참이었어요.”

    리아브릭은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여담을 나누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가자 그녀를 찾아온 본론을 슬그머니 꺼냈다.

    “만찬 때도 그렇고 렌 영식 때문에 많이 곤란했죠?”

    “아니에요.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억지웃음이었다.

    “학술원에서는 어땠어요? 종종 마주치고 했을 텐데.”

    “학술원에서요?”

    반문을 하는 엘레나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차갑고 이성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오감이 위험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나와 렌 사이를 의심하는 건가?’

    리아브릭은 의미가 없는 말을 허투루 뱉는 성격이 절대 아니다. 그녀가 말한 여담은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한 유도 질문일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얘기해도 돼요?”

    “그럼요. 저한테 솔직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솔직하겠어요?”

    리아브릭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가증스럽다 못해 역겨운 미소였다.

    “교양과목 대륙사 수업을 같이 들었어요.”

    “조용히 지내기는 쉽지 않았겠네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힘들었어요. 조금, 아니, 많이요.”

    “왜 제게 말하지 않았어요? 렌 영식이라 해도 공녀께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위치인데. 제가 손을 썼다면…….”

    “리브에게 계속 의지할 것 같았어요. 저도 잘해낼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엘레나는 무릎 위에 포갠 양손을 꽉 쥐며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그간 자신이 당한 고달픔과 서러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는 연기였다.

    리아브릭은 그런 엘레나의 옆으로 와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맘고생 많이 심했죠? 미안해요, 공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제가 부족해서 그래요. 리브의 잘못이 아니에요.”

    본심을 숨기고 친자매처럼 가깝게 굴었다. 이질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행동 너머에는 서로의 본심을 파악하려는 치열한 신경전이 있었다.

    ‘나와 렌의 관계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엘레나는 엘레나대로.

    ‘거짓말은 아니야. 하지만 뭔가 거슬려.’

    리아브릭은 리아브릭대로.

    첨예한 신경전을 이어가던 와중 먼저 칼을 뽑은 건 리아브릭이었다.

    “혹시 졸업 이후에도 렌 영식이 시비를 걸거나 그런 적이 있나요?”

    “예, 리브가 없을 때 저택에 절 찾아온 적이 있어요.”

    엘레나는 살롱의 개장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렌이 기다리고 있던 얘기를 털어놓았다.

    ‘대공가 내에서 벌어진 일이야. 리아브릭이 모를 리가 없어.’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숨기면 괜한 의심을 받을 것이다. 그러자면 솔직히 얘기하고 반응을 보는 편이 나았다.

    “그런 일이. 미안해요, 공녀. 제가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리브는 바쁜 사람이잖아요. 그런 일까지 어떻게 다 신경을 써요?”

    ‘뭔가 있는데.’

    당연히 알 법한 일을 리아브릭이 모른 체했다. 뭔가 의도가 있다는 의미였다.

    “최근에도 그런 적이 있나요?”

    “최근이라면?”

    “한두 달 사이요. 렌 영식이 접촉을 시도했거나, 따로 만난 적이 있냐고 묻는 거예요.”

    “…….”

    엘레나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지금 저 질문은 허투루 엘레나를 떠보기 위해 던진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렌이 만난 걸 알고 있어.’

    그러지 않고서는 엘레나를 실험하는 듯한 질문을 던질 이유가 없다.

    ‘퀴리 부인 전시회 때인가?’

    위기였다. 리아브릭은 최근이라는 단서까지 달며 엘레나를 떠봤다. 동시에 자신이 의심하고 있음을 내비치며 그녀를 압박했다.

    ‘외통수로 몰아가고 있어.’

    상대는 음모의 리아브릭이다.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만난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순간 엘레나를 향한 의심은 확신이 될 것이다.

    ‘인정해야 하나?’

    딱히 뾰족한 수가 없는 지금 둘러대기보단 순순히 인정하는 편이 나은 듯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하필이면 변장을 해서 나타나냐고!’

    누가 보더라도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법으로 살아가는 렌이 뭐가 아쉬워서 변장까지 하고 신분을 감춘 채 엘레나에게 접근한단 말인가. 그녀가 보기에도 수상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뭔가 의도가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부정을 하든, 인정을 하든 엘레나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제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드린 건가요?”

    리아브릭이 눈을 맞추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의심의 골이 깊어졌다. 이제 정말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인정하자.’

    엘레나는 감성을 죽이고 철저히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지금으로서는 그편이 낫단 생각이 들었다.

    ‘끌려가되 페이스를 잃어선 안 돼.’

    이대로 가면 리아브릭은 렌의 변장에 대해서 묻게 될 거고 엘레나는 우기거나, 변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릴 것이다.

    리아브릭이 바라는 그림이었다. 즉흥적인 대처에서 실수나, 논리적 오류가 발생하니까. 이 판을 뒤집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큰 화두를 던져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

    고개를 살짝 숙인 엘레나는 눈말울에서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숨죽여 울었다.

    “미, 미안해요, 리브. 저도 모르게 그만 서러움이 복받쳐서.”

    엘레나가 다급히 손수건을 꺼내 눈매를 훔쳤다. 조용하지만 구슬픈 슬픔에 젖어 있는 엘레나를 보는 리아브릭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엘레나의 눈물에 현혹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저와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절 버리지 않겠다고.”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엘레나가 리아브릭을 올려다봤다. 그윽한 눈길에 애잔함이 묻어났다.

    “공녀를 버리다니요.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약속해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대체 왜 이러지?’

    리아브릭은 장단을 맞춰주면서도 도무지 엘레나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뭔가 있는 거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 길이 없었다.

    리아브릭의 약속에도 선뜻 털어놓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엘레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리브에게 말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어요.”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하세요. 저 아니면 누구한테 얘기할 수 있겠어요?”

    리아브릭은 어르고 달래는 척 엘레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엘레나의 입술 사이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대역이란 걸, 렌 영식이 알고 있어요.”

    “……!”

    리아브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순간의 감정을 감출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얘기였던 까닭이었다.

    “언제부터요? 정확한 시점을 얘기해 봐요.”

    “그, 그게…… 학술원에 가자마자 저보고 가짜 아니냐고 물었어요.”

    “그게 언제 적인데! 그래서요. 뭐라고 대답했는데?”

    “아니라고 우겼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절 협박했어요. 난 네가 가짜 같은데 증명할 자신이 있냐고…… 그러면서 절 막 괴롭히고 협박하고…….”

    “하.”

    리아브릭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입을 다물고 있던 엘레나를 보는 시선이 더없이 냉랭했다.

    “진작 말했어야죠! 그랬다면 제가 어떤 식으로든 대처했을 거 아니에요.”

    “쫓겨날까 봐 말할 수 없었어요.”

    “그걸 말이라고.”

    “리브가 그랬잖아요. 대역인 걸 들키면 전부를 잃을 수 있다고. 그래서 이 악물고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어요.”

    교묘한 화술로 리아브릭의 탓으로 돌린 엘레나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떨궜다.

    손가락 사이로 리아브릭의 표정을 본 엘레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제대로 먹혔어.’

    엘레나의 생각대로였다. 리아브릭의 의심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더 큰 화두를 만들어 신경 쓸 여력이 없도록 만들었다. 즉, 엘레나의 바람대로 판을 다시 짠 것이다.

    비록 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멋대로 한 행동이지만 크게 미안하진 않았다. 그녀가 아는 리아브릭이라면 번거롭게 렌을 건들기보단 더 쉬운 길을 택할 것이다.

    ‘나를 제거하려고 들겠지.’

    엘레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바스타슈 가문은 대공가의 방계다. 백년조약으로 쓸모가 있는 만큼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아니다. 베로니카가 깨어난 시점에서부터 엘레나의 효용 가치는 다했다. 시안의 도움을 받아 황태자비 선발식을 개최하며 시간을 벌었다지만 그 역시 시한부에 불과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엘레나를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렌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번거로운 길을 자처할 만큼 리아브릭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거기까지 계산이 섰기에 엘레나는 망설이지 않고 렌을 걸고넘어졌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엘레나가 낮게 흐느꼈다.

    “그날도 그랬어요. 퀴리 부인의 전시회까지 찾아와서 절 괴롭힐 줄은 몰랐어요. 가짜 주제에 진짜 황태자비가 될 생각이냐며 협박했다고요!”

    “공녀,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리아브릭은 지금껏 침묵한 엘레나에게 치미는 짜증을 꾹 누르며 건조하게 물었다.

    “렌 말고, 공녀의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있어요?”

    “없어요.”

    “맹세코?”

    “네, 가이아 여신께 맹세할 수 있어요.”

    엘레나가 진심을 담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리아브릭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표정 너머의 속마음은 더없이 무서웠다.

    ‘더는 살려둬서 안 돼. 황태자비 선출식이 끝나는 대로 제거해야겠어.’

    두 달 뒤, 3차 경합이 끝나는 날. 예정대로 엘레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은 말끔히 종결된다. 렌이 대역임을 알고 있다곤 하나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역이라고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요원한 까닭이다.

    기껏해야 엘레나를 괴롭히는 게 다겠지. 여차하면 베로니카가 돌아오면 그만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렌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감당해야 한다. 대공가의 핏줄을 의심한 격이니 가문의 멸문까지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먼저 이빨을 드러내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위기를 기회로 이용해서 바스타슈 가문의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그럼 됐어요, 공녀. 그간 맘고생 많았죠? 이제 걱정하지 마요. 뒷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리아브릭의 같잖은 위로에 엘레나가 안도하는 척했다. 그러며 제 자리를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매달렸다.

    “앞으로도 쭉 공녀로 살게 해주세요. 꼭 황태자비가 되어서 리브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당연히 그래야죠. 공녀는 세상에 한 명뿐인걸요.”

    “리브.”

    엘레나가 감격에 찬 눈망울로 빤히 보더니 리아브릭을 껴안았다. 작은 흐느낌에 맞춰 잔잔하게 떨리는 어깨를 리아브릭이 감싸며 토닥였다.

    “황태자비 선출식에 집중하세요. 렌 영식은 제게 맡겨주고요.”

    “고마워요, 리브. 저 꼭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사선으로 맞댄 서로의 뺨 너머로 따뜻한 말이 오갔다. 누가 보더라도 진심으로 서로를 위한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온화함까지 있었다. 그러나 엇갈린 엘레나와 리아브릭의 시선은 언제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싸늘했다.

    * * *

    리아브릭의 명을 받은 로렌츠가 안가에 있는 베로니카를 찾아갔다.

    “공녀 전하, 로렌츠입니다.”

    창틀에 앉아 있는 베로니카를 보며 로렌츠가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이전 삶의 엘레나에게 보이던 가식적인 충심과 달리 진심 어린 존경과 충성이 묻어났다.

    “경이 여긴 어쩐 일로?”

    베로니카가 새장 속 파랑새를 빤히 보며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서 왔습니다. 인형이 황태자비 선출식 2차 경합에 진출했습니다.”

    “그래요?”

    “그것도 수석입니다. 리아브릭 자작이 공녀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로렌츠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 냉랭한 태도에 로렌츠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조만간 2차 경합이 열릴 예정입니다. 마찬가지로 공녀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거란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역시나 베로니카의 반응은 무미건조했다. 언뜻 보면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 그녀는 이런 보고를 받는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3차 경합식이 끝나는 날,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신다고 했습니다. 황태자비 선임식은 당연히 공녀 전하께서 가셔야 한단 말씀도 덧붙이시고요.”

    “그래서요?”

    “예?”

    “당연히 그래야 할 얘길 계속 떠드니 짜증이 나서 하는 얘기예요.”

    “죄, 죄송합니다.”

    로렌츠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베로니카가 독에 중독되기 전부터 곁을 지켰던 만큼 그녀의 성정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리아브릭에게 제 말 전하세요.”

    “네.”

    “인형 살려두라고 해요.”

    “……살려두란 말씀입니까?”

    로렌츠가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자 베로니카의 안광에서 한기가 흘렀다.

    “천한 년이 제 행세를 하며 주제에 과분한 걸 실컷 누렸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

    “대가라 함은.”

    “절망.”

    베로니카가 새장 문을 열더니 파닥거리는 수컷 파랑새를 손으로 쥐었다.

    “얘 보세요. 제 짝인 암컷이 죽고 슬퍼한 지가 언제라고…… 새 암컷을 붙여줬더니 새벽부터 재잘재잘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니 죽은 암컷 새만 딱하더라고요.”

    베로니카가 손아귀에 힘을 쥐며 발버둥 치는 수컷 파랑새를 그대로 질식사시켰다.

    그러자 홀로 남게 된 새 암컷 파랑새가 새장 안을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울어댔다.

    “절망이란 이런 거예요. 가장 소중한 걸 빼앗고, 짓밟고, 부숴 버리는 거죠. 누린 것만큼 공평하게.”

    “…….”

    “그걸 주려고요. 날 닮은 그 천한 년에게.”

    베로니카가 수컷 파랑새의 사체를 새장 안에 휙 던졌다.

    미동도 없는 수컷 파랑새를 보는 새 암컷 파랑새의 지저귐이 구슬프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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