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6/30)
  • 제18장 뿌리

    “뭐? 황태자비 선출식을 연다고?”

    집무실에서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리아브릭은 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공가를 따르는 귀족들이 입을 모아 황태자비를 빨리 들여야 황실이 안정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깨어나 상황이 변하자 리아브릭은 황태자비 선출식을 기약 없이 미뤘다. 베로니카가 건재한 마당에 굳이 서둘러서 엘레나를 선출식에 내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황실에서 온 공문에 적힌 바로는 다음 달부터 매달 황태자비 선출을 위한 경합을 열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경합을 끝낸 넉 달 뒤 황태자비를 발표한다고 적혀 있었다.

    “몸져누운 황제가 꾸민 일 같지는 않고, 황태자가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 같습니다.”

    “저희로서도 딱히 나쁠 건 없습니다. 공녀 전하께서는 오래전부터 마담 드 플랑로즈의 교육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아벨라 영애보다 경쟁에 우위에 있습니다.”

    아틸과 루미너스는 각자의 의견을 내며 앞으로의 전망을 이야기했다. 특히 루미너스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리아브릭은 그런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저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했는데 엘레나가 베로니카의 대역이라는 사실이었다.

    ‘하필 공녀가 돌아오려는 이 시점에 황태자비 선출식을 열다니.’

    베로니카의 건강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만큼 호전되면서 은밀히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로렌츠와 안가를 지키던 기사단을 동원해 엘레나와 휴렐바드, 메이를 처리할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황태자비 선출식 공표로 그 모든 게 어긋나게 생겼다.

    “대공 전하께서 어디 계시지?”

    “서재에 계십니다.”

    리아브릭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문 앞에 다다르자 프란체 대공을 수행하는 십여 명의 기사와 시녀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급한 일이다. 대공 전하께 아뢰어라.”

    직속 시녀가 노크하더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서재를 나와 몸을 낮췄다.

    “들어오시랍니다.”

    리아브릭은 빠른 걸음으로 서재에 발을 들였다. 고풍스러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프란체 대공에게 다가가 묵례했다.

    “급한 일이라고?”

    “네, 황실에서 황태자비 선출식을 열겠다고 공표했습니다.”

    리아브릭은 황실에서 받은 공문을 얘기했다. 사태의 심각성에 프란체 대공도 읽던 책을 덮어놓고 대화에 집중했다.

    “황태자비 선출식에 베로니카 대신 그 아이를 내보내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공녀께서 너무 긴 시간 주무시고 말았습니다. 라인하르트가도 아벨라 영애를 내세울 테니 차라리 황태자비 선출식까진 그녀를 내세움이 나을 거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프란체 대공은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바로 수락했다. 육체적인 성장에 비해 장시간 의식이 없던 만큼 베로니카의 정신적인 성장은 미숙했다. 황태자비 선출은 경합을 원칙으로 한 만큼 엘레나를 내세우는 게 그가 보기에도 일리 있어 보였다.

    * * *

    “지금쯤 리아브릭이 황태자비 선출식 얘길 들었을 텐데…….”

    엘레나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말이 티타임이지 저택을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개최하기로 공표하기로 한 날이 오늘이었고, 예정대로 황실 소속의 근위대가 다녀갔다.

    “좀 더 기다려 보자.”

    판은 이미 짜였다. 이제 저들을 함정 안에 몰아넣을 일만 남았다. 그러자면 마지막까지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된다.

    똑똑. 앤이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아가씨, 리아브릭 자작께서 집무실에서 뵈었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

    엘레나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리아브릭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리브, 무슨 일인가요?”

    엘레나는 자신을 왜 불렀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리아브릭을 마주했다.

    “우선 앉죠.”

    리아브릭이 권하자 엘레나가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오늘 보자고 한 건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예요.”

    “중요한 얘기요?”

    엘레나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참 가증스러울 만큼 능청맞은 연기였다.

    “오늘 황실에서 공문이 왔어요. 조만간 황태자비 선출식이 있을 예정이에요.”

    “어머, 정말인가요!”

    엘레나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공국을 떠나오던 날부터, 황태자비 자리를 노골적으로 탐하던 연기를 했던 엘레나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계획대로야.’

    모든 게 엘레나의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리아브릭이 저 얘길 그녀에게 꺼냈다는 건, 베로니카가 황태자비 선출식에 참가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 전하 덕분이야.’

    내심 시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시안이 아니었다면 살기 위해 몸을 먼저 내빼야 했을 것이다.

    “뭐부터 하면 돼요? 알려주세요, 리브.”

    “첫 경합은 두 달 뒤예요. 총 세 번의 경합과 심사를 거쳐 황태자비를 선발하게 될 거예요.”

    “저도 마담께 대략적인 얘기는 들어서 알아요. 첫 번째는 황태자비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지식 그리고 평판을 평가하는 거죠?”

    “맞아요.”

    “그런데 소양과 지식이야 그렇다 쳐도, 평판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엘레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소양과 지식은 문답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지만 평판은 그 잣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소양과 지식은 황실에서 초청한 사교계의 명망 높은 귀부인들이 평가할 거예요. 평판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를테면 마담 드 플랑로즈 같은 분이죠.”

    “만일 마담이 참관인이 되면 저한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겠네요?”

    “아뇨, 마담은 이미 대외적으로 공녀의 선생님으로 알려졌어요. 제외될 거예요.”

    엘레나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금부터 공녀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평판이에요. 절대 흠잡힐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행적을 남겨서도 안 돼요.”

    “새겨들을게요.”

    엘레나는 성실한 학생처럼 리아브릭의 말을 가슴에 새기는 척 굴었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베로니카도 아닌데.’

    엘레나가 갖은 고생을 해서 사교계에 평판을 쌓으면 그 공은 온전히 대공가에 복귀할 베로니카가 가져가게 된다.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을 한단 말인가? 엘레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난 삶에서 베로니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엘레나의 모든 걸 앗아갔다. 이안까지도.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베로니카가 돌아왔을 때 사교계가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게 만들 것이다. 베로니카가 그녀의 전부를 앗아갔듯이, 엘레나 역시 그녀가 돌아왔을 때 베로니카란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두 번째 경합은 티타임이에요. 티타임이라고 해서 영애들끼리 갖는 흔한 티타임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어디까지나 황실에 어울리는 예절과 예법을 익혔는지 확인하고자 함이니까.”

    지난 삶, 황비 선출식에 참여했던 엘레나는 두 번째 경합인 티타임이 갖는 의미와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후뿐만 아니라 황실 어른들이 선출식에 참가한 영애들의 몸가짐을 눈여겨보며 황태자비에 걸맞은 몸가짐을 익혔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자만하지 않고 마담께 미진한 부분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할게요.”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경합이자, 최종 선출은 두 번째 경합이 있고 난 후부터 한 달 뒤예요. 말이 경합이지 앞선 평가를 바탕으로 황태자비를 간택하는 거죠.”

    “그, 그럼 제가 아무리 잘해도 황실의 선택을 못 받을 수도 있는 건가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네? 하지만 좀 전에 분명히…….”

    엘레나는 의문을 표했지만 리아브릭의 방금 저 말이 뭘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종 경합까지 올라온 영애들은 하나같이 가문, 예법, 소양, 평판 등 빠지는 게 없다. 결국 최종 경합에서 가장 크게 좌지우지되는 건 가문의 힘이다. 당연하게도 대공가의 권위와 위세를 앞세운 입김이 작용할 것이다.

    리아브릭은 그러한 사실을 숨긴 채 오히려 엘레나를 다그쳤다.

    “공녀는 1차와 2차 경합만 생각하세요. 1차 경합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3차를 걱정하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나요?”

    “죄송해요, 리브. 제가 마음이 급했어요. 꼭 황태자비가 돼서 리브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대공가에 보탬이 된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그 마음가짐이에요. 기대할게요.”

    리아브릭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엘레나를 독려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황태자비 선출식에서 엘레나가 잘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비에 선출되더라도 네가 황태자 전하의 옆에 서는 일은 없을 거야.’

    어쩔 수 없이 엘레나를 황태자비 선출식에 내보내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선출식이 끝나고 입궁하기 전에 엘레나를 처리할 것이다.

    “저 가볼게요. 경합 준비에 사교계 평판까지 쌓으려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요.”

    “아, 잠시만요. 받으세요.”

    “이게 뭐예요?”

    엘레나가 눈을 깜빡이며 리아브릭이 건네는 편지 봉투를 받았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까닭에 내용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보면 알 거예요.”

    엘레나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맨 위 첫 줄을 보는 순간 엘레나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떨렸다.

    “리, 리브. 이거 정말 저희 아빠가 보낸 거예요?”

    보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묻는 엘레나를 보며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읽어보세요.”

    “아빠…….”

    엘레나는 찬찬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에 쓰인 필체와 말투는 프레드릭 준남작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똑같았다.

    ‘그땐 이 편지를 아버지가 보낸 줄 알고 깜빡 속았었지.’

    돌아보면 참 어리석었다. 지난 삶의 이맘때는 부모님께서 살아 계시지도 않았을 텐데. 이 편지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며 리아브릭의 가증스러운 장난에 놀아났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속아줄게요, 리브. 그래야 당신이 나를 믿고 안심할 테니까.’

    엘레나는 편지를 끝까지 읽고 나자 감정이 복받쳤는지 울먹거렸다.

    “많이 걱정했어요. 잘 지내고 계시는지, 건강한지. 고마워요, 리브.”

    “꼭 황태자비가 되세요. 아니, 되셔야 할 거예요.”

    리아브릭의 눈빛이 매몰차다 못해 시리도록 차가워졌다.

    “그게 공녀의 가치를 증명하고 모두가 잘 사는 길이에요.”

    “리, 리브.”

    “아니면 저희가 부모님을 굳이 돌볼 필요가 없잖아요?”

    리아브릭은 부모님을 언급하며 엘레나를 협박했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황태자비에 선임되지 않으면 부모님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석상처럼 굳어 입도 뻥긋거리지 못하는 엘레나를 보며 리아브릭이 쐐기를 박았다.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세요, 공녀.”

    * * *

    안가. 베로니카가 요양 중인 그곳을 리아브릭이 직접 찾았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부터 황태자비 선출식, 귀족 회의 등 산더미처럼 쌓인 사안들을 뒤로 밀어두고 직접 발걸음 한 건 베로니카에게 대공가의 복귀가 미뤄졌음을 직접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안가의 울타리로 접어든 마차 안에서 로렌츠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 전하의 성미로 짐작건대 가만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이에요.”

    최근 벌어지는 일을 보며 리아브릭은 참 답답했다. 뭔가 외통수에 몰린 듯 한 가지 선택만을 강요받는 상황에 자꾸 빠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른 타개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로렌츠가 먼저 내려 리아브릭을 에스코트했다. 저택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홀을 지나쳐 이 층 베로니카 침실에 다다랐다.

    “고하도록.”

    시녀가 가볍게 묵례하고는 노크를 하더니 베로니카에게 리아브릭이 왔음을 알렸다.

    “들어오시랍니다.”

    리아브릭이 시녀를 지나쳐 침실에 발을 들였다. 창틀 옆에 쭈그려 앉은 베로니카는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파랑새 한 쌍을 빤히 보고 있었다.

    “잘 지내셨는지요, 공녀 전하?”

    “잘 지냈을 것 같아요?”

    베로니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새장의 자물쇠를 풀었다. 그러더니 새하얀 손을 새장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자 한 쌍의 파랑새가 새장 안을 배회했다. 그러나 워낙 협소한 공간이다 보니 수컷 파랑새가 잡히고 말았다. 베로니카는 한 손으로 움켜쥔 수컷 파랑새의 머리를 검지로 쓰다듬었다.

    “저는 새가 참 좋아요. 날개가 있어서 어디로든 훨훨 날아갈 수 있고,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잖아요.”

    베로니카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에 쥐고 있던 힘을 풀자 수컷 파랑새가 새장이 없는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여기서 더 있다간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요.”

    리아브릭은 참 난감했다. 파랑새를 자유롭게 놓아준 행위가 빨리 안가를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녀 전하 복귀에 관한 얘길 나누고자 왔어요.”

    “얘기하세요. 언제 돌아가면 되죠?”

    베로니카가 또 새장에 손을 넣더니 암컷 파랑새를 손에 쥐었다. 수컷 파랑새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예뻐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리아브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 전하의 복귀 시기를 늦춰야 할 것 같아요.”

    우득. 베로니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아귀에 잡혀 발버둥 치던 암컷 파랑새가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즉사한 것이다.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요? 다시 얘기해 볼래요, 리브?”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리며 암컷 파랑새의 사체를 창밖에 던져 버렸다. 창밖을 배회하던 수컷 파랑새의 울부짖음이 들렸지만 베로니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물의 죽음 따윈 애초에 관심 밖이라는 듯 그녀는 여느 때보다 싸늘한 눈길로 리아브릭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가 뭔가요? 제 복귀를 미뤄야 하는 이유가.”

    베로니카의 날카로운 눈빛에 리아브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함이었다.

    “……생각보다 지금 대공가의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그건 리브가 아버지를 잘 보필하지 못한 탓 아닌가요?”

    베로니카는 면전에서 리아브릭을 질책했다. 삼 년이 넘도록 의식이 없었던 만큼 신체 나이보다 정신연령은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꺼릴 게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히 그렇게 해왔으니까. 대공가의 실권을 쥐고 흔드는 리아브릭이지만 결국 대공가의 가신에 불과했다.

    “공녀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제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죠.”

    “그럼 더 잘하시면 되겠네요. 전 예정대로 돌아갈 거예요.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베로니카는 물러섬이 없다는 듯 강한 의사를 표현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온 그녀에게 이 안가는 너무 비좁고 답답했다.

    “대공 전하의 뜻이에요.”

    “아버지가 미루라고 했다고요?”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 베로니카를 보며 리아브릭이 작게 끄덕였다. 베로니카가 눈매를 찌푸렸다.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명을 쉬이 어길 순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이번뿐이에요. 내가 기다리는 만큼 제대로 정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황태자비 자리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일순 베로니카의 눈에 이채가 띠는 걸 리아브릭은 놓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베로니카는 공공연하게 얘기했다. 그녀의 격에 맞는 남자는 이 제국에 한 사람, 황태자밖에 없다고. 그건 시안을 열렬히 사모해서가 아니다. 고귀한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유일한 혈통과 핏줄을 지닌 남자가 바로 시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반응은 어쩐지 시큰둥했다.

    “그 자리는 원래부터 제 거였어요. 당연한 걸 선물이라고 내놓다니.”

    “…….”

    “하, 그만하죠.”

    그제야 리아브릭이 속으로 안도했다. 계속 반발했으면 난감했을 텐데, 다행히 베로니카가 쉽게 수긍한 까닭이다. 용무를 마친 리아브릭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리브.”

    “예, 공녀 전하.”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지만, 당신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 거 다 알아요.”

    “…….”

    베로니카의 말에 리아브릭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노련하게 수습하고는 부정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오해세요.”

    “오해?”

    베로니카가 반문하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오해라고 생각할게요.”

    “…….”

    “대신, 확실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돌아갔을 때 흠이 남는 건 용서하지 않을 거거든요.”

    베로니카의 싸늘한 경고에 리아브릭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리아브릭이 떠나고 난 뒤, 베로니카는 텅 빈 새장을 한 번 보고는 창문 밖 하늘을 올려다봤다. 짝을 잃은 수컷 파랑새가 배회하며 구슬프게 우는 모습이 보였다.

    “슬퍼도 조금만 참으렴. 조만간 새 짝을 찾아줄게, 알았지?”

    베로니카가 홀로 남은 파랑새를 보며 읊조렸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녀의 눈동자에는 티끌만 한 안타까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황태자비 선출식이 공표되면서 엘레나의 일정도 빡빡해졌다. 리아브릭은 마담 드 플랑로즈에게 부탁해 엘레나의 수업 횟수를 늘렸다. 엘레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충실히 황태자비 선출식을 준비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건 마담 드 플랑로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엘레나에게 더는 가르칠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업에 나왔다. 이유는 뻔했다. 그녀가 보기에 엘레나는 차기 황태자비로 유력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수업을 빙자해 시간만 보내도 미래의 황태자비이자 황후가 될 여인을 가르쳤다는 명예를 거머쥐게 될 테니까. 

    그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덕에 엘레나는 마담 드 플랑로즈의 수업 시간 중 일부를 자유 시간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건 뭐지?”

    마담 드 플랑로즈를 옆방에 보내놓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갖고 있던 엘레나가 제 앞에 놓인 쿠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전 처음 보는 초승달 모양의 쿠키는 외관상 보기에 어딘지 밋밋했다. 향도 여타의 쿠키들에 비하면 부족해 썩 먹음직스럽단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쿠키를 구워온 디저트 전문 요리사 쿠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포춘 쿠키라는 것으로, 북부 지방에서 행운을 불러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맛이 담백하며 쿠키 안에 행운을 불러주는 문구가 적힌 쪽지가 들어 있답니다.”

    “행운을 불러주는 쪽지라니 관심이 생기네요.”

    요리사 쿠일이 직접 쿠키를 가져온 건 처음이다 보니 엘레나로서도 없던 경계심이 생겼다.

    ‘갑자기 왜 이런 걸 가져온 거지? 수상해.’

    엘레나가 포춘 쿠키를 집었다. 초승달처럼 휜 쿠키의 양 끝을 잡고는 아래쪽으로 잡아당겼다. 두 동강이 나며 부러진 포춘 쿠키 사이로 돌돌 말려 있는 쪽지가 보였다. 엘레나는 쪽지에 흥미를 보이며 관심을 뒀다. 수상한 쿠키다 보니 선뜻 먹기에 망설여진 까닭이다. 엘레나가 빈손으로 쪽지를 꺼내 펼쳤다.

    안녕, 나의 후배. 아니, 이제는 동지인가?

    ‘렌?’

    엘레나는 몇 마디 되지 않는 글자만으로도 이 쪽지를 쓴 장본인이 누군지 금세 짐작해 냈다. 정체를 숨기지 않고 티를 팍팍 냈기에 어렵지 않았다.

    “참 좋은 문구네요. 이런 문구는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아는 분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가씨께 더없는 행운을 불러올 거라 확신하시더군요.”

    ‘이자, 렌과 연관이 있어.’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요리사 쿠일은 렌이 심어놓은 정보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포춘 쿠키를 만들어 메시지를 전달할 이유가 없으니까. 의심이 누그러진 엘레나는 관심을 두지 않던 쿠키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쿠키 맛이 강하지 않아서 좋네요. 고소해서 질리지도 않고 계속 먹고 싶어지는 맛이에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종종 쿠키를 만들면 가져다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가씨.”

    요리사 쿠일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더니 방을 나갔다. 그러자 시중을 들던 앤이 포춘 쿠키를 힐끔힐끔 보며 관심을 보였다.

    “앤, 혼자 조용히 차를 마시고 싶구나. 잠시 나가 있으렴.”

    “네, 아가씨.”

    혼자 남게 된 엘레나는 바구니에 담긴 포춘 쿠키를 집어 두 동강을 낸 뒤 쪽지를 꺼냈다.

    황태자비 선출식이 우리 고리타분한 전하의 생각은 아닐 거고. 네 계략이지?

    “눈치는.”

    딴 사람은 몰라도 엘레나는 안다. 렌의 두뇌가 비상하다는 것을. 다만 그걸 삐딱하게 사용해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비상한 두뇌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정말 무서운 남자가 될 것이다.

    엘레나는 혹시 몰라 다른 포춘 쿠키도 깨보았다. 그 안에도 렌의 쪽지가 적혀 있었다.

    끼니마다 스테이크라니. 그러다 드레스가 꽉 낄 텐데?

    “이런 쓸데없는 말은 왜…… 하, 내 성격을 긁으려고 쓴 건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의도를 알 수 없는 얘기에 엘레나의 볼이 실룩거렸다. 이럴 때는 같은 편이고 뭐고 아예 무시하고 싶었다.

    “다 이런 내용인 건 아니겠지?”

    엘레나가 손을 뻗어 남은 두 개 중 하나를 집었다. 거창하긴 했지만 막상 개봉하고 확인한 쪽지 내용 중 별거 아닌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크게 기대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쪽지는 예외였다.

    귀족 회의의 안건 궁금하지? 기뻐해. 나도 초대받았거든.

    “렌이 귀족 회의에 참가한다고?”

    이건 엘레나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안 그래도 귀족 회의에서 무슨 내용이 오가는지 알아내기 위해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터였다. 엘레나의 입가에 모처럼 미소가 지어졌다.

    렌이 같은 편이 된 것이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그리고 적으로 뒀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든든함이 느껴졌다. 밉상이었던 그가 조금은 가깝고 듬직하게 느껴진달까. 엘레나가 손을 뻗어 마지막 포춘 쿠키를 두 동강 냈다.

    같은 편이라고 날로 먹을 생각은 말고. 궁금하면 소원 하나.

    “그럼 그렇지. 사람이 쉽게 변하겠어?”

    엘레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 쪽지를 쓰지 않았다면 렌을 이전보다 좋게 보았을 텐데. 이래저래 조건을 다는 렌을 보자니 한 줄기의 좋은 감정마저 다시 눈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제 살 깎아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예전만큼 싫진 않아.’

    참 신기한 일이다. 적극적으로 엘레나를 도와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렌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서인지 렌의 시비나, 장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됐다.

    엘레나는 포춘 쿠키에서 꺼낸 쪽지를 다 모았다.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는 증거물들은 아예 없애 버리는 게 좋다. 찻잔에 쪽지를 넣은 엘레나가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쪽지를 재물 삼아 피어오른 불길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까만 재로 변했다.

    * * *

    사교계의 평판은 귀족들에게 있어 체면이나 자존심만큼 중요하게 여겨진다. 태생적으로 귀족 자체가 타인의 눈에 비치는 모습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렸던 엘레나는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평판을 쌓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매처럼 찍어 누르거나, 학처럼 고고해지거나.

    지난 삶의 엘레나는 사교계를 압도적인 위세로 찍어 눌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영애가 있으면 리아브릭에게 배운 심계로 궁지에 몰아넣은 뒤 복종하게 만들었다. 자존심 강한 귀부인들마저 엘레나의 눈 밖에 나는 순간 도태된다는 걸 알기에 알랑방귀를 뀌며 잘 보이려고 애썼다.

    반대로 고고함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품위를 뜻한다. 만약 L이 사교계에 데뷔한다면 그와 비슷한 평판을 얻을 수 있다. 사교계의 영애들과 섞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하게 빛나는 별.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으며, 음해당해도 누구도 믿지 않는 무결점의 평판을 지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베로니카가 그 평판을 얻는 일은 없겠지만.’

    엘레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손에 들린 와인을 들이켰다. 넬 백작의 생일축하 파티. 리아브릭이 황태자비 선출식에 필요한 평판을 쌓고자 엘레나를 보낸 첫 연회 자리였다.

    ‘리브의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홀에 입장한 엘레나의 미소가 진해졌다.

    “어서 오시오, 공녀.”

    넬 백작과 백작 부인이 환한 미소로 엘레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딴 사람도 아니고 대공가의 후계자이자, 황태자비로 거론되는 엘레나가 직접 축하해 주러 왔다는 거 자체가 의미 있었다.

    “축하드려요, 백작님.”

    “하하, 고맙소. 공녀께서 친히 축하해 주시니 더없이 기쁩니다.”

    엘레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형식적인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고는 돌아섰다. 다른 객과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시간을 오래 빼앗지 않는 게 예의였다. 인사를 마친 엘레나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연회장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었다.

    ‘사교계에서 영향력 좀 있다는 귀부인들은 다 온 모양이네?’

    참석자들을 보니 리아브릭이 신경을 써서 보낸 파티다웠다. 마담 드 플랑로즈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녀에게 버금갈 만큼 사교계에서 명망 있는 귀부인이 여러 명 눈에 띄었다. 황태자비 선출식 1차 경합의 참관자로 초청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레이디들이다.

    ‘리브의 바람대로 눈도장을 좀 찍어볼까?’

    엘레나가 움직이려 하자 그보다 한발 앞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귀족들이 말을 걸어 왔다. 그간 사교계에 두문불출하던 엘레나가 모처럼 모습을 보인 만큼 인맥을 쌓고자 함이다.

    엘레나는 그들을 교묘한 화술로 상대했다.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대화를 길게 끌 여지를 주지 않았다. 방해물들을 치운 엘레나는 기억 속 귀부인들의 정보를 떠올렸다. 나이와 명망, 평판, 위상 순으로 파티에 참가한 귀부인들의 서열이 순식간에 매겨졌다.

    결단을 내린 엘레나가 제일 먼저 인사한 건 레베카 부인이었다. 귀부인 중 최고 연장자인 만큼 사교계에서 오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이였다. 엘레나가 다소곳이 인사를 하자 레베카 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쟁쟁한 사교계의 귀부인들을 제치고 대공가의 공녀가 가장 먼저 인사를 한 것이니 모르긴 몰라도 기분이 좋았을 게다.

    “그간 마음으로만 흠모하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부인을 뵙게 되어 너무 기뻐요.”

    엘레나는 사교계의 명망 있는 귀부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칭찬하되 과하지 않게.’

    노련한 귀부인들은 자신을 향한 칭찬과 찬사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귀신같이 구분해 낼 줄 알았다.

    ‘떠들기보단 경청하고.’

    말이 많으면 실수가 늘게 마련이다. 조심한다고 해도 대화를 하다 보면 거슬리는 말을 할 수밖에 없고, 그리되면 오해의 소지를 남길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갓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들이 시일이 지날수록 평판이 떨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뭣도 모르고 조심스러웠던 데뷔 때와 달리 사교계에 적응하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입이 화근이라고 개중에는 좋지 않은 말도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오해가 쌓이다 보면 평판이 깎이게 마련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엘레나는 제 얘기를 하기보다는 가르침을 청하고 그것을 배우려는 열의를 내비쳤다. 하물며 공녀라는 지위를 감안할 때 이런 겸손한 엘레나의 자세는 큰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 제일 중요한 한 가지가 남았다.

    ‘귀부인들이 날 보고 자신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도록 해야 해.’

    명망 높은 귀부인들은 대부분 서른을 훌쩍 넘긴다. 제국의 평균 혼인 연령이 스무 살 이전임을 감안하면 자식을 둔 경우도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귀부인들은 막 데뷔를 한 영애들의 생기 넘치는 젊음을 알게 모르게 부러워한다. 그녀들 역시 한밤의 별처럼 그리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쑥스러움을 많이 타고 수줍음을 느끼는 영애를 흉내 내며 귀부인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너무 예쁘고, 생기 넘치고, 사교계를 알아가는 사슴 같은 눈동자마저 귀엽게 느껴질 테니까. 자신으로 하여금 그녀들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귀부인들의 눈도장을 가장 확실하게 찍는 방법이었다. 엘레나의 시선이 한쪽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아브릭에게 향했다.

    ‘어때요, 리브? 이 정도면 만족해요?’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리아브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엘레나 역시 그녀에게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녀를 안심시키듯이.

    ‘날 믿어요, 리브. 그래야…….’

    고개를 돌린 리아브릭이 중년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대공가의 실세나 다름없는 그녀였기에 주변에 항상 귀족들이 넘쳤다.

    ‘내게 등을 보일 거 아니에요?’

    엘레나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등을 보인 그녀를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릴 그날을 말이다.

    리아브릭은 멀찌감치 서서 귀부인들을 상대하는 엘레나를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귀부인들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교계 활동 경력이 거의 전무하다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적응력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 완벽해.’

    엘레나의 시선 처리, 손짓, 노련한 화법 등 뭐 하나 흠잡을 것 없이 완벽했다. 굳이 그녀가 이 자리를 올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왜지?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왜 오히려 위화감이 드는 거지?’

    늘 이런 식이었다.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교묘하게 비켜 나갔다. 리아브릭의 기대를 적절히 충족시키면서도,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것만 보면 엘레나는 제 가치를 충분히 해내는 인형이다. 애초에 리아브릭의 기준에 들지 못했다면 황태자비 선출식에 베로니카를 대신해 그녀를 내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상하단 생각이 든 걸까? 진짜 베로니카 공녀보다, 더 공녀답게 사교계에 녹아드는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이질감이 머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리아브릭은 공국에서 엘레나를 처음 만났던 시절을 떠올렸다. 엘레나가 공국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완전한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엘레나의 부모를 놓쳤지.’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직속 기사 선임만 해도 그래.’

    감시자의 역할로 로렌츠를 붙여두려고 했던 리아브릭의 계획은 생각지도 못한 휴렐바드의 선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리아브릭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도 리아브릭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건, 고분고분 따르는 엘레나가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착각이라는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담 드 플랑로즈의 일만 해도 그렇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깐깐한 여자가 먼저 시녀를 소개시켜 준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했다.

    예술품 매입도 마찬가지다. 일견 대공가에 득이 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시대가 급변하면서 어마어마한 손해를 안겼다. 과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노린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나둘 아귀가 짜 맞춰지자 리아브릭이 품고 있던 의구심이 점점 짙어졌다.

    ‘어쩌면, 정말 만약…….’

    리아브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나를 속인 거라면?’

    예전 같았더라면 허황된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리아브릭은 지금껏 엘레나에 대해 내렸던 판단을 전부 머릿속에서 지웠다. 편견으로 엘레나를 다시 오판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리아브릭이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이어가는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모습을 눈으로 담고, 머리로 기억하며 리아브릭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 나갔다.

    ‘앤을 다그쳐야겠어.’

    리아브릭은 처음부터 다 뜯어볼 생각이었다.

    * * *

    “너 지금 말대꾸했니?”

    팔짱을 낀 앤이 물걸레질을 하는 또래의 시녀 둘을 세워놓고는 혼을 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너희 요새 거슬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똑바로 처신해. 알았어, 몰랐어?”

    “조심할게요.”

    앤이 노려보자 시녀들은 겁에 질려 고개도 들지 못했다. 고작 청소 도중에 물이 튀겼을 뿐인데. 같은 시녀 주제에 앤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가 서글펐다.

    앤은 엘레나의 신뢰를 등에 업고 다른 시녀들을 아랫사람처럼 부렸다.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지라, 엘레나가 준 귀금속을 처분한 돈으로 시녀들을 제 편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시녀장이나 집사와 같은 윗사람들이 아닌 이상 저택 내에서 앤의 오만방자함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런 앤이 은밀히 리아브릭의 호출을 받고 불려갔다.

    “차, 찾으셨다고요?”

    조금 전까지 시녀들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굴던 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자세를 취했다. 전형적으로 강자에 약한 그녀는 꼭 고양이 앞의 쥐 꼴을 하고 있었다.

    “뭘 그리 놀라지? 보고를 받을 주기가 된 것 같은데. 특별한 점 없고?”

    “어, 없었어요. 마담의 수업을 듣고 연회에 나가는 게 전부예요.”

    “따라 나간 적은?”

    “학술원 때는 제가 모시고 다녔는데, 최, 최근에는 메이를 데리고 다니시느라…….”

    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엘레나가 외출할 때 그녀를 동행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대로 보고할 수는 없었다. 감시에 소홀했다고 질책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건조하게 되묻는 리아브릭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사전에 저택 내에 심어두었던 다른 시녀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엘레나가 학술원을 졸업한 뒤로 앤을 대동해 외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리아브릭이 말이 없자 앤이 불편한 듯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침묵으로 고문하던 리아브릭의 눈에 앤의 루비 반지가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한 세공으로 만든 것이 귀족 영애도 아니고 일개 시녀가 끼고 다니기에는 과해 보였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루비 반지가 참 예쁘구나. 어디서 났니?”

    “이, 이거요?”

    리아브릭은 무표정하게 앤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주눅이 든 앤이 어깨를 흠칫 떨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 아가씨께서 주셨어요.”

    “공녀가?”

    “네. 공녀께서 절 신뢰하세요. 그, 그래서 주셨어요. 진짜예요!”

    눈치를 보던 앤이 강하게 주장했다. 혹여 오해를 살까 봐 조마조마했다.

    “잘하고 있구나. 공녀께서 널 신임한다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거라.”

    “네? 그, 그럼요! 절대 자작님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만 믿어주세요!”

    앤이 기뻐하면서 떠들더니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고요한 정적이 휩싸인 집무실에 혼자 남게 된 리아브릭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앤을 매수했군.”

    리아브릭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겉으로는 앤을 신뢰하는 것처럼 하고는 귀금속을 주어 매수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외출할 때는 철저히 앤을 따돌렸다. 단순한 앤은 엘레나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나, 리아브릭의 눈까지 속일 순 없었다.

    “앤을 감시자로 붙여놓은 걸 알고 있었단 건데…….”

    엘레나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막연한 의문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갔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허영심 많은 한심한 여자로 오판해서는 곤란하다.

    “만약, 정말 만약에…… 내게 보인 어설픈 모습이 날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면?”

    리아브릭의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대공가의 실권을 쥐고 흔들며 포식자로 군림하던 그녀가 두려움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 * *

    이른 새벽부터 대공가는 분주했다. 소집 명령을 받은 파벌의 귀족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공가에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엘레나는 창틀에 서서 쉴 새 없이 오가는 마차들을 주시했다. 원 역사에서 없었던 모임이다 보니 엘레나 역시 대공가를 따르는 귀족들을 한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특히 저들을 분열시키는 게 엘레나의 목표인 만큼 그들을 빠짐없이 살필 필요가 있었다.

    “대공가의 저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제국의 귀족 사회를 꿰고 있는 엘레나는 마차의 문양만으로도 가문들을 분간할 수 있었다. 소집된 귀족의 숫자도 숫자지만, 가문들의 면면이 대단했다. 개중에는 엘레나가 생각지도 못한 가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베론 후작을 들 수 있다. 국경 지역을 사수하는 그가 영지를 비우고 왔다는 것만으로도 대공가의 영향력이 엘레나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게 느껴졌다.

    “무리해서라도 남길 잘했어. 베로니카가 무서워서 몸을 뺐다면 대공가는 금방 재기했을 거야.”

    대공가의 저력은 대단했다. 엘레나가 내외부에서 아무리 타격을 줘도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런 대공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남지 않았던가. 엘레나는 대공가의 문턱을 넘는 한 대의 마차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기억을 더듬어 영향력이 강한 귀족들을 추리고 추렸다. 동시에 저들의 신상명세를 떠올려 접근 방법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귀족 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야 했을 텐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네.”

    엘레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렌이 없었다면 지금쯤 엘레나는 귀족 회의에 참석할 궁리를 했을 것이다. 귀족 회의에서 다뤄질 안건을 알아내야만 그걸 기반으로 엘레나가 귀족들을 분열시킬 계책을 획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똑똑. 대공가의 문턱을 넘는 귀족들의 마차가 뜸해질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 앤이에요.”

    “들어오렴.”

    엘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방으로 들어온 앤이 묵례를 했다.

    “이 층과 삼 층 응접실에 부인과 영애들이 모여 있어요. 몇몇 분은 후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곧 돌아오실 것 같아요.”

    “그래?”

    귀족 회의라고 해서 가주들만 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모처럼 많은 귀족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부인이나 장성한 영식 또는 영애를 대동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귀족 회의가 끝나고 나면 이어질 만찬 자리에서 괜찮은 정략결혼의 상대를 물색하고자 함이다.

    “티타임 준비는 차질 없고?”

    “네.”

    “그럼 가자꾸나. 잠시라도 얼굴을 비쳐야 예의니.”

    원칙적으로 초대받은 부인이나, 영애를 맞이하는 건 대공가 안사람의 역할이다. 그러나 프란체 대공의 부인은 명을 달리했고 지금 대공가 내에 그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건 엘레나가 유일했다.

    엘레나가 응접실을 찾자 부인이나 영애들이 일시에 소파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사교계가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나이보다 남편의 작위나 권세, 평판, 명망으로 서열이 갈린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엘레나는 단연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들 많으셨어요.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티타임에 신경을 썼어요.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마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엘레나는 그 와중에 만찬에서 접촉할 귀족의 부인들을 눈여겨봤다. 아내의 입김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저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엘레나는 몇몇 영향력 있는 귀부인을 콕 집어서 맘에도 없는 칭찬과 말을 늘어놓으며 호감을 샀다.

    차후에 영지로 돌아간 귀부인들은 엘레나의 제안을 받고 고민하는 남편에게 긍정적인 조언을 해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엘레나는 몸을 뺄 구실을 만들었다.

    “아쉽지만 저 먼저 일어날게요. 만찬 준비를 해야 해서요.”

    “공녀 전하께서 손수 신경을 쓰시는 건가요?”

    “네, 손님들이 오셨는데 뭐 하나라도 허투루 대접할 수 없지요. 이따 뵙겠습니다.”

    엘레나는 가볍지만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인사를 마무리하고는 돌아서서 응접실을 나왔다. 지금부터 부인과 영애들은 엘레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이다. 짧은 티타임이었지만 권위적이지 않고 저들을 배려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분명 그녀를 두고 긍정적인 말들이 오갈 것이다.

    침실로 돌아온 엘레나가 앤을 불렀다.

    “아직도 회의 중이니?”

    “네, 그런가 봐요.”

    앤이 대답에 엘레나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앤, 회의실 앞에 가서 기다리렴. 그러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귀족들의 표정을 살펴 내게 얘기해 줘.”

    “네? 표정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명령을 받은 앤이 반문했다.

    “분위기라는 게 있잖니? 회의가 좋게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무 화려한 드레스를 입기 그렇지 않겠어?”

    “아, 알겠어요!”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앤이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는지 앤은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더 늦어지다간 만찬에 늦을 수도 있단 생각에 서둘러 치장을 시작할 즈음 앤이 돌아왔다.

    “어떠니?”

    “그, 그게 하나같이 표정들이 너무 안 좋아요. 무서워서 쳐다보기 힘들 정도였어요.”

    “그래? 알아오느라 수고했어. 아무래도 오늘은 차분한 드레스를 입어야겠구나.”

    앤의 보고를 받은 엘레나가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래도 무리수를 둔 모양이군.’

    귀족 회의가 예정되었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 대공가에 여력이 남아 있었다면 굳이 무리해서 파벌 귀족들을 소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어느 때보다 더 치밀하게 이번 일을 준비했다. 시안을 설득해 황태자비 선출식이라는 강수까지 둬가면서 대공가에 남은 만큼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렌과 접촉하기 이전에 귀족들의 동태와 분위기를 살폈다. 회의 결과에 따른 귀족들의 반응 여부를 파악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치장을 끝마칠 즈음 만찬 시간이 다 되었다. 침실을 나선 엘레나는 늦지 않게 별관에 도착했다.

    “베로니카 폰 프리드리히 공녀 전하 입장하십니다.”

    엘레나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가 쏟아졌다. 아무래도 황태자비로 유력한 엘레나다 보니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홀의 정중앙을 가로질러 프란체 대공에게 걸어가던 엘레나의 시선이 박수를 치고 있는 렌과 마주쳤다.

    피식.

    연미복 차림의 렌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런 렌을 지나친 엘레나가 프란체 대공의 옆에 서서 좌중을 보며 돌아섰다. 절도 있게 격식을 갖춰 인사를 올리자 다시 한번 박수가 쏟아졌다. 프란체 대공이 연설을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음악 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늘의 이 만찬은 저와 여러분이 걸어갈 앞날에 축배를 들고자 마련했습니다. 마음껏 마시고, 즐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무한한 성공과 영광을 약속하며 건배!”

    “건배!”

    프란체 대공의 선창에 맞춰 잔을 높이 치켜들었던 귀족들이 후창했다. 멈췄던 음악이 다시 연주되며 본격적인 만찬의 서막을 알렸다. 엘레나는 제게 몰려드는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 집중했다. 공식적인 행사다 보니 공녀로서 손님을 맞이하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의무였다.

    ‘슬슬 리브를 떨어뜨려야겠는데.’

    엘레나는 기회를 봐서 귀족들이 몰려든 틈을 노려 리아브릭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인형 놀이에 심취해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치를 보다가 제게 몰린 사람들에게 휩쓸린 척 몸을 빼려던 때였다.

    ‘이상해. 언제 옆에 온 거지? 분명 저쪽에 있었는데…….’

    그녀를 지켜보는 리아브릭의 감시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이만하면 떨어뜨려 놓았겠지 싶어 주변을 살피면 리아브릭은 어느새 그녀의 근처에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연이 반복이 되니 미심쩍었다. 느낌이 싸했다. 슬쩍 리아브릭을 훔쳐보는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화 내내 리아브릭은 이쪽을 한 번도 보지 않는다. 언뜻 보면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래서 더 수상스러웠다.

    “곧 황태자비 선발식이 있다던데 공녀 전하께서도 참가하시는 거예요?”

    “네,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엘레나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영애들이 동조했다.

    “역시. 황태자비에 어울릴 만한 분은 공녀 전하밖에 안 계시는걸요.”

    “전 선출식을 왜 여는지도 의문이에요. 꼭 길고 짧은 걸 대봐야 아는지 참.”

    “공정해야 하니까요. 전 선출식을 거쳐도 괜찮아요.”

    엘레나가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던 즈음, 홀에 퍼지던 잔잔한 연주가 경쾌한 왈츠로 변했다. 덩달아 홀의 정중앙에 달린 샹들리에 아래에서 남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점잖고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유일한 즐거움인 사교춤을 추기 위해서다.

    “좀 비키지?”

    “꺅!”

    엘레나를 에워싸고 아첨을 일삼던 영애를 밀치며 렌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영애가 그를 노려봤다.

    “뭘 그렇게 쳐다봐. 더 시비 걸고 싶게.”

    “……!”

    렌이 이죽거리자 영애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사교계의 법도를 무시하는 망나니인 렌은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고 피하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어쩌자고 또 저러는 거야?’

    엘레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그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도 됐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앞둔 지금 엘레나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가는 저번처럼 조용히 넘어가진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렌 오라버니.”

    엘레나는 저번 일로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이 안 좋은 육촌지간을 연기했다. 렌과 접촉하는 엘레나를 눈여겨보는 리아브릭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렌이 그런 엘레나의 바로 앞까지 걸어오더니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야, 나 소원 있는데.”

    ‘소원?’

    포춘 쿠키에 적혀 있던 말이 떠오를 때였다. 렌이 예고도 없이 엘레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춤추자. 이번에는 제대로.”

    “……!”

    엘레나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렌이 그녀를 홀 한가운데로 끌고 나갔다. 초대 가주 탄신연회 때처럼 무례하기 짝이 없게.

    ‘아니, 그때와 달라.’

    그땐 손목이 너무 아파 억지로 끌려 나갔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겉으론 세게 쥔 것처럼 보이나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앞쪽으로 당기고 있지만 엘레나가 넘어지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렌을 보는 엘레나의 시선이 묘해졌다.

    ‘어색해.’

    엘레나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상대는 렌이다. 딴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렌에게 이런 배려를 받는 것만큼 이상하고 어색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렌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건 온전히 엘레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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