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5/30)
  • 제17장 균열

    엘레나는 진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혼란스러워하는 라파엘을 보며 괜히 얘기를 꺼냈나 싶기도 했지만 후회하지 않으려 애썼다. 몰랐다면 모를까 기왕 진실을 고백했다면 전부 밝히는 게 옳다고 여겼다. 다음을 기약하며 걸음을 뗀 엘레나가 약속 장소인 응접실 문 앞에 섰다. 손님 접대실로 특별 제작된 응접실은 식당과 조리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 형태였다.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굴자. 렌이 뭘 알고 있든 동요하면 안 돼.’

    재차 다짐한 엘레나가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긴 식탁에 놓여 있는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촛대가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긴 식탁 끝에 삐딱하게 턱을 괴고 앉아 있는 한 남자.

    “오랜만이에요, 선배.”

    엘레나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시크릿 살롱의 개장날, 대공가를 찾아온 렌과 만났다. 당시에는 베로니카의 신분이기도 했거니와 평소와 미묘하게 달라진 태도에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루시아로 활동 중인 지금이 그때보다 렌을 대하기 한결 편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 미운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주 건방져. 초대할 때는 언제고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어?”

    “여전하시네요. 보자마자 시비부터 거시고.”

    “시비 아니고 인산데? 그리고 오랜만은 아니라서.”

    렌은 의미심장한 말을 흘리며 씩 웃었다. 심야의 가면무도회에서 본 엘레나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내가 보고 있었단 걸, 쟤는 모르겠지.’

    알 리가 없다.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를 대신해서 수작질을 한 아벨라에게 경고를 날린 것도 엘레나가 몰라준다고 해서 렌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몰라서 더 좋았다.

    “왜 자꾸 웃어요? 실없는 사람처럼.”

    “네가 처음으로 날 초대했잖아. 아주 뜻깊은 자리예요, 이 자리가.”

    “별 뜻은 없는데, 너무 앞서가셨네요.”

    엘레나가 매몰차게 받아치며 식탁에 앉았다. 가로로 긴 식탁의 맨 끝에 착석하자 서로를 보는 게 참 멀게 느껴졌다.

    “벗지? 언제까지 쓰고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렌은 가면을 벗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무법으로 사는 렌이 살롱의 규칙을 지킬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벗으려고 했어요.”

    엘레나가 손을 머리 뒤로 보내 질끈 동여맨 끈을 풀었다. 정말 오랜만에 루시아의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거다 보니 낯설고 어색했다.

    “됐죠?”

    “아니, 되게 걸리적거려.”

    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안경, 단발머리 가발, 그리고 진한 변장까지. 모두 거슬렸다. 엘레나는 그런 렌의 뼈 있는 말을 괜한 시비로 받아들였다.

    “저 식사하지 말고 그냥 나갈까요?”

    “왜 이렇게 예민해? 시비 거는 거 아니니까 앉아.”

    렌이 실실 웃으며 진정하라는 손짓까지 했다. 엘레나도 처음부터 나갈 생각이 없던 만큼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안부는 그만 묻고 식사나 하죠. 기껏 차린 음식이 식으면 곤란하잖아요?”

    “오, 간만에 맘에 드는 말을 하네. 안 그래도 맛있게 먹으려고 아침부터 굶었거든.”

    렌은 씩 웃더니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애피타이저를 시작으로 메인인 거위 요리까지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만해. 입에 맞아.”

    “나름 신경 썼어요.”

    “그 말 듣기 좋네.”

    렌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나이프질을 멈춘 엘레나가 그런 렌을 빤히 쳐다봤다. 그 눈길을 즐기듯이 마주하던 렌이 피식 웃었다.

    “뭔 얘길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아? 기대되게.”

    “질문이 좀 아슬아슬하거든요.”

    “에이, 그걸 판단하는 건 나지. 그리고 아슬아슬한 질문은 너보다 내 쪽이 더 많은데?”

    렌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엘레나의 눈길이 더없이 차분해졌다. 대화의 뉘앙스만으로도 렌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정신 똑바로 차려.’

    엘레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대화의 주도권을 잃어서는 곤란했다. 지금까지 렌이 보인 수상쩍은 행적과 시안으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를 토대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전하와 만났단 얘기 들었어요.”

    “그게 질문이야?”

    “질문으로 가는 과정이죠.”

    렌이 픽 웃었다.

    “만났지. 그걸 너한테 얘기한 거 보니 전하께서 입이 좀 가벼운 모양이야.”

    “이럴 때는 가벼운 게 아니라, 가까운 사이라고 표현하죠.”

    “가까운 사이?”

    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딴 사람도 아니고 엘레나의 입을 통해서 시안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자 굉장히 거슬렸다.

    “뭘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웠다고.”

    “먼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럼 중간이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말장난은 그쯤 하죠.”

    엘레나는 차갑게 말을 잘랐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농담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제 적인가요?”

    엘레나는 빙빙 돌리지 않고 노골적이다 싶을 만큼 직접적으로 의중을 떠봤다. 한때, 제국의 날고 긴다는 명사들을 제치고 사교계를 평정한 엘레나다. 때론 단순한 화법이 어느 때보다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해.’

    그러자면 렌을 자극해 원하는 감정적인 대답을 끌어내야 했다.

    “어이, 뭘 그리 대놓고 물어. 적이라고 하면 어쩌려고?”

    “적이면…… 선택을 해야겠죠.”

    “선택? 네가 아니면 내가?”

    “둘 다요. 분명한 건, 지금 이 자리가 마지막 식사 자리가 될 거라는 거예요.”

    렌이 겁을 집어먹은 척 팔뚝을 부여잡고는 떠는 시늉을 했다.

    “어휴, 살 떨려. 너 나 협박하냐?”

    “재미있는 농담이네요. 선배가 협박했으면 했지, 협박당할 사람인가요?”

    “야, 넌 맞는 얘기를 면전에서 하냐? 무안하게.”

    렌이 픽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장난스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말 돌리지 말고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네 눈에는 내가, 적 같냐?”

    되레 질문을 받은 엘레나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와, 상처받았어.”

    렌이 앞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낮게 웃었다. 상처받았단 느낌보다는 마치 이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신이 나 보였다.

    “웃겨요? 전 진지한데.”

    “나도 진지해.”

    “그럼 대답해 보세요. 적인지, 아닌지.”

    엘레나는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화법으로 렌을 다그쳤다. 대답 여하로 어디까지 렌이 알고 있는지를 파악해 볼 요량이었다.

    “적은 아니지.”

    “그러면요?”

    “어둠 속 수호천사?”

    순간 이성의 끈을 놓을 뻔한 엘레나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새빨갛고 도톰한 입술 사이로 무슨 단어가 튀어나갈지 그녀조차도 가늠하지 못했다.

    “뻔뻔하시네요. 그런 말을 입에 담고.”

    “진짠데? 어둠 속 수호천사.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없어요.”

    렌은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박수까지 치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잠시간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엘레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믿을 만해야 믿죠.”

    “쯧, 이봐, 이봐. 사람이 그러면 못 써. 서로 믿고 신뢰하고 그래야지.”

    “그러는 선배는 절 믿어요?”

    엘레나는 거미줄처럼 사전에 치밀하게 짜놓은 대로 대화를 유도했다.

    “나? 안 믿지.”

    “그러면서 저보고 믿으라고요?”

    “응.”

    렌은 팔짱을 낀 채 당연하다는 듯이 되받아쳤다. 그 밑도 끝도 없는 행각에 엘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원점이네요.”

    엘레나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도돌이표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어디 가. 아직 식사 중인데?”

    “의미 없는 대화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요.”

    엘레나는 몸을 빼더니 가면을 다시 쓰는 시늉까지 했다. 그러자 렌도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앉았다.

    “우리가 앞으로 나눌 대화가 너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고 가려고 하냐? 너 그러다 후회한다?”

    “너무 앞서가시네요. 저한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제가 판단해요.”

    엘레나가 끈까지 동여 묶고는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내가 졌어!”

    렌이 항복 선언을 하듯 양팔을 들어 올리곤 히죽히죽 웃었다.

    “뭘 졌다는 거죠?”

    “전부 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지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데 너한테 지는 건 싫지가 않아.”

    엘레나는 바로 의자에 앉지 않고 렌을 지그시 응시했다.

    “안 앉을 거야?”

    “제가 앉을지 말지는 얘길 들어 보고 판단하죠.”

    렌이 들고 있던 양팔을 조용히 내리더니 엘레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

    “이거보다 확실한 게 있나?”

    너무도 태연스럽게 얘기하는 렌과 달리 엘레나는 저 말을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지금 렌이 지칭한 적의 적이란 존재가 쉬이 유추 가능했기 때문이다.

    ‘대공가.’

    딴사람은 몰라도 엘레나는 알고 있다. 렌이 대공가를 향해 품고 있는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지난 삶에서 베로니카 행세를 하던 엘레나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협박한 데는 대공가를 향한 악감정이 절대적이었다. 즉, 두 사람이 공공의 적을 둔 게 맞다면 렌은 엘레나의 정체에 대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 된다.

    “반응을 보아하니 확실한 증명이 된 거 같지?”

    렌이 더욱 짙은 미소를 띠며 얄밉게 이죽거렸다.

    “어디까지 아는 거죠?”

    “꼭 이런 식이지. 확인을 받으려고 들어.”

    “확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 렌은 쥐고 있던 패를 다 공개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하려는 건, 좀 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엘레나의 바람이었다.

    “까짓것 얘기 못 할 것도 없지.”

    “…….”

    “어디부터 얘기할까? 진짜 루시아는 북부 지방에 살고 있다는 거? 아니면, 지금 이 살롱의 주인이 너라는 거? 그것도 아니면 그 가발을 벗는 순간 폭포처럼 쏟아지는 금발이 매력적이라는 거?”

    “그거면 됐어요.”

    엘레나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덤덤했다. 더는 변장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는 안경을 벗었다. 가발 속 금발까지 알고 있다는 건 베로니카의 신분도 알고 있단 의미였다. 적의 적이 아군이라고도 했으니 대역이란 사실도.

    “거 봐,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니 훨씬 보기 좋네.”

    “…….”

    렌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엘레나는 가면을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걸리적거린다고 했던 렌의 말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해가 안 가. 다 알고 있다면 왜 모르는 척하는 거지? 원래 안 그랬잖아.’

    지난 삶의 렌은 집요하다 못해 소름 끼치도록 엘레나를 괴롭혔다. 한데, 현생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좀 전만 돌아보더라도 뭔가 양보하고 물러서는 인상까지 줬다. 어쩌면.

    ‘뒤틀린 건 전하만이 아닐지도 몰라.’

    엘레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의 상황이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왜 말이 없냐? 난 다 공개했는데.”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쉽게 가자고, 쉽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렌은 지금의 이런 상황과 대화가 너무도 즐거운지 연신 미소가 입가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나 엘레나는 지난 삶 속 렌의 그림자가 계속 겹쳐 대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그러죠, 선배.”

    “그래, 후배.”

    렌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그러고 보니 시비를 거는 말투와 달리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지는 꽤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규정해야겠네요.”

    “오. 우리 이제 같은 편 되는 거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엘레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렌이 정말 진심으로 엘레나를 도와 대공가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반대로 렌이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렌은 양날의 검이다. 렌의 저력은 대공가를 무너뜨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지만, 엘레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만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위험 요소도 분명 존재했다.

    ‘곁에 두는 게 나아.’

    여기서 적으로 돌아서거나, 모르는 척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더 불안했다. 그럴 거면 벅차더라도 안고 가는 편이 더 나았다.

    “합시다. 같은 편.”

    “빙고.”

    렌이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일까.

    “표정 관리 좀 해. 난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 네가 울상이면 되겠니?”

    “감정을 못 감추는 편이라서요.”

    “같은 편이라고 네 일에 간섭하거나 그러진 않을 거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가는 거지. 지금까지처럼.”

    “…….”

    “왜 대답이 없어? 내가 간섭하길 바라는 거야? 그럼 뭐, 후배가 바라는 대로 해줘야지.”

    “필요 없어요.”

    엘레나의 퉁명스러운 말에 렌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건 그렇고 기념비적인 날인데, 샴페인 어때?”

    “사양하죠.”

    “뭘 그리 매몰차게 거절해? 맘 상하게.”

    맘 상했다는 말과 달리 렌은 실실 웃으며 멈췄던 식사를 재개했다. 그새 차게 식은 요리들이었지만 방금 막 해온 것인 양 맛있게 먹으며 말을 툭 던졌다.

    “길어야 석 달, 짧으면 두 달이야. 그 안에 대공가에서 나와.”

    “그게 무슨 의미예요?”

    건성으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장난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렌의 표정과 말투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안에 베로니카가 돌아올 거야.”

    “……!”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이미 여러 가지 정황으로 베로니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시기를 렌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시기를 놓치면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네요.”

    “뭐야. 너 베로니카가 깨어난 걸 알고 있었어?”

    엘레나는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렌이 혀를 찼다.

    “그런데도 대공가에 남아 있다? 무모한 건지, 배포가 큰 건지.”

    “언제 돌아올지 몰랐으니까요.”

    “서둘러서 나와. 네가 데리고 다니는 기사가 세긴 해도 혼자서는 무리야. 머릿수에 장사 없어. 걔도 너 못 지켜.”

    엘레나가 물끄러미 렌을 쳐다봤다. 착각인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얘기하는 렌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자신을 향한 근심과 걱정이 느껴지는 건.

    “고마워요.”

    엘레나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신기했다. 살면서 개자식 렌에게 고맙단 말을 할 날이 올 줄이야. 렌 역시 지금껏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저 먹자고.”

    * * *

    그 시각. 리아브릭의 집무실에서는 무거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복면인들을 처리해.”

    그녀의 양옆에 앉아 있던 아틸과 루미너스가 우려를 보였다.

    “월포트 경이 당했습니다. 용병들로는 한계가…….”

    “제2기사단을 움직여.”

    “……!”

    단호한 리아브릭의 말에 두 사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제2기사단은 대공가의 핵심 전력 중 하나다. 제1기사단에는 근소하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 무력은 대공가의 검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분은 어찌할지요?”

    “수도 내 치안 유지. 근래에 수도 내에서 일어났던 흉악 범죄행위를 모아서 뒤집어씌워.”

    제2기사단은 뼛속까지 긍지 높은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군의 명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지만 그들은 될 수 있다면 명예로운 일에 검을 들길 바랐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집단으로 범죄행위를 벌이는 의문의 복면인 처단은 제2기사단을 움직이게 만들 최고의 명분이었다.

    “조치하겠습니다.”

    “하나 더.”

    “말씀하십시오.”

    리아브릭이 싸늘하게 말했다.

    “가면무도회에서 피네치아를 거래하겠다고 찾아온 남녀를 찾아.”

    “저 역시 그들이 수상합니다.”

    아틸 역시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브릭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네치아 재배지가 발각되었다는 건 어디선가 꼬리를 잡혔다는 얘기다. 시기적으로 볼 때 재배지가 소실되기 며칠 전, 수상쩍은 남녀가 가면무도회를 찾은 날이 유력했다.

    “그날 가면무도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초대장을 파악해. 참석자를 추리다 보면 흔적이 나올 거야.”

    “알겠습니다.”

    “찾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버려.”

    리아브릭은 실패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절박했다.

    ‘낭떠러지에 몰렸어. 더 이상의 실패는 허락지 않을 거야.’

    프란체 대공은 인내심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리아브릭 정도는 되니까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지 다른 수하였다면 더 유능한 자로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꼭 밝혀내겠습니다.”

    명령을 받는 아틸도 비장했다. 리아브릭의 실각은 그의 끝을 의미했다. 갖은 수단과 역량을 총동원해 이번 일의 배후를 밝혀내는 길만이 그가 대공가에 필요한 인재임을 증명하는 길이었다.

    “루미너스.”

    “네, 자작님.”

    “아편의 공급이 끊긴 이상 가면무도회를 더 유지할 이유가 없어. 없애 버려.”

    심야의 가면무도회는 지금껏 대공가가 주최했다. 귀족들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해 끌어들인 뒤, 아편을 취급하고 판매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편 사업이 재기 불능에 처한 지금의 상황에서 가면무도회를 계속 주최하는 건 무의미했다.

    “네, 자작님.”

    루미너스도 어느 때보다 무겁게 명령을 받았다.

    * * *

    “별일 없으셨습니까?”

    렌을 보낸 뒤, 메인 응접실로 돌아온 엘레나를 보며 휴렐바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보다시피요.”

    “다행입니다.”

    엘레나의 평온한 대답에 그제야 휴렐바드가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응접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눕다시피 몸을 기댄 엘레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렌과 내가 손을 잡다니.”

    딴 사람도 아니고 렌이다. 세상이 두 쪽이 나고, 다시 태어나더라도 절대 친해질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렌과 조금 전까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정상적으로. 그것도 충격적인데 공공의 적을 두고 같은 편이라 규정했다.

    같은 편.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방심은 금물이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잖아.’

    엘레나는 여전히 렌을 신뢰하지 않았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옳은 일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강렬하게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엘레나는 더 이상 렌을 적으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굉장히 안도했다.

    “……의외로 든든하기도 하고. 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너무 터무니없잖아.”

    엘레나는 무의식적으로 불쑥 든 생각에 실소를 흘렸다. 본인은 외면하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렌의 존재가 크게 와닿았다. 적일 때는 진저리가 났지만, 막상 같은 편이라고 하니 묘하게 의지가 됐다. 물론 사람이 쉽게 변하는 게 아닌 만큼 방심은 금물이지만.

    마침 살롱 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칼리프가 돌아왔다. 가면을 벗기가 무섭게 그는 엘레나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렌이 허튼수작을 부리진 않았어?”

    “예. 별 탈 없이 넘겼어요.”

    “그럼 다행이고. 네가 원하니 자리를 만들긴 했지만 대체 왜 만난 거야?”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려고 해요.”

    엘레나는 방금 전까지 렌과 식사를 나누며 했던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차후 대공가의 몰락 과정에서 협업할 수도 있는 만큼 렌과 한배를 탔음을 명확히 알려줘야 했다.

    “그렇게 된 거예요.”

    “…….”

    “선배?”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칼리프가 근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겠냐? 렌은 길들여지지 않는 부류 같던데.”

    묵묵히 경청하고 있던 휴렐바드도 거들었다.

    “저 역시 같은 의견입니다. 예의가 없고 난폭한 잡니다. 가까이 두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웬만해서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는 휴렐바드가 말을 보탤 만큼 불안해했다. 엘레나도 같은 마음이지만 내색하지 않고 좋은 말로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역시 렌의 위험성은 인지하고 경계하고 있으니까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에이, 난 널 믿고 말련다.”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칼리프는 엘레나의 선택을 존중했다.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그녀가 아닌가.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휴렐바드는 말을 아끼는 걸로 수긍의 뜻을 보였다. 어디까지나 엘레나의 선택이고 여차하면 자신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 렌과 관련된 대화가 일단락되자 칼리프가 품에 넣어뒀던 서신을 내밀었다.

    “빌렘 백작가에서 온 답신이야.”

    “벌써 답변이 왔다고요?”

    “나도 놀랐어.”

    엘레나는 빌렘 백작가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이 접어 넣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늦더라도 오늘 중으로 살롱을 방문할 테니 기다리라네요.”

    “전하께서?”

    “네. 사안이 급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바로 오시려나 봐요.”

    시안의 적극적인 대처에 엘레나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몰래 빠져나오기 쉽지 않으실 텐데…….’

    황실이 건재하다면 운신이 자유롭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했다. 황궁 곳곳에 시안을 감시하는 눈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황궁을 나오겠다는 진심이 엘레나의 가슴을 짠하게 울렸다.

    “선배, 저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요.”

    “알겠어. 삼 층엔 아예 누구도 못 올라가게 할게.”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두커니 서 있는 휴렐바드를 쳐다봤다.

    “경은 저와 함께 가도록 하죠.”

    “네.”

    “메이는 여기 남아서 칼리프 선배를 도와주렴.”

    “네, 아가씨.”

    엘레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삼 층 맨 끝에 위치한 응접실로 이동했다. 이 응접실은 유일하게 엘레나가 시안을 만날 때만 개방되는 곳이었다. 정중앙에 놓인 소파에 착석한 엘레나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귀족 회의. 베로니카의 복귀. 렌과의 협력.

    생각할 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것들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여 있는 처음의 계획안에 넣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소한 어긋남이 거미줄 전체를 헝클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이어지는 동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치형 창문 밖은 깜깜해진 지 오래고 고요한 달빛만이 요요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엘레나가 사고에서 깨어났다. 휴렐바드가 나서서 문을 열어주자 용 문양의 가면을 쓴 시안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엘레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그간 잘 지냈느냐? 아픈 곳은 없고?”

    시안은 보자마자 엘레나의 안부를 먼저 챙겼다.

    “네,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앉으세요.”

    엘레나는 소파의 앞자리를 권하며 휴렐바드에게 눈빛을 보냈다. 휴렐바드는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금장치를 걸고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자리를 피해줬다. 그제야 시안이 가면을 벗었다. 엘레나 역시 가면을 벗고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급한 일이라고 들었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냐?”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시안의 짙푸른 녹안이 더없이 진중해졌다. 가볍게 앞으로 숙여진 자세만으로도 그가 엘레나의 얘기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베로니카가 깨어난 것 같아요.”

    “……!”

    시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레나가 베로니카의 대역임을 알기에 저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했다.

    “대공가를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들은 결코 그대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저도 알아요.”

    “그렇담 지체할 필요가 없겠군. 한시라도 빨리 대공가를 나와라. 내일, 아니, 오늘 당장에라도.”

    시안은 제 일보다 더 초조해했다. 행여 대공가를 나올 시기를 놓쳐 엘레나가 해를 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아직 나올 수 없어요.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지?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나오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나오게 하겠다.”

    시안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엘레나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양보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전하께서도 아실 거예요. 대공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 전부를 쏟고 있다는 걸요.”

    “그렇기에 만류하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나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어.”

    그간 엘레나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저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이백 년이 넘도록 성세를 누리던 대공가를 뿌리째 흔든 것만으로도 존경받아야 옳았다.

    “그러니 더더욱 남아야 해요. 뿌리째 뽑지 못한다면 대공가는 금세 살아나고 말 거예요.”

    대공가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재정적인 손해가 누적된 지금 대공가의 근간을 흔들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더 남겠다고? 그 위험한 곳에?”

    “네, 그러자고 전하를 뵙길 청했어요. 부탁을 드리려고요.”

    시안은 굳은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인내했다. 스스로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구는지 잘 알기에 엘레나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시간을 벌려면 이 방법뿐이야.’

    여하에 따라 시안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심으로 비칠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러나 곧 결심을 굳힌 엘레나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열어주세요.”

    “……!”

    시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무례하고 무모한 부탁인 거 알아요. 그럼에도 꼭 부탁드릴게요.”

    “…….”

    “제게는 시간이 필요해요. 또 이로 인해 대공가를 분열시킬 명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엘레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길로 황태자비 선출식을 열어야만 하는 필요성을 강조했다.

    “베로니카는 삼 년이 넘도록 사교계에 나오지 못했어요. 그 말은 황태자비 선출식에 참가할 만한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단 의미이기도 하죠.”

    시안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베로니카를 제외하면 4대 가문 라인하르트가의 아벨라가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가 되겠죠.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보니 경합을 벌이려면 절 내세울 수밖에 없어요.”

    즉, 황태자비 선출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공가는 엘레나를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간 황태자비에 필요한 자질을 갖춰온 엘레나를 내보내는 게 더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공가에서 무리를 해서까지 베로니카를 내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공정한 선출식을 거치지 않고 베로니카를 황태자비로 선임시키려고 했다가는 4대 가문의 반발에 부딪힐 공산이 컸다. 제아무리 대공가라 하더라도 4대 가문과 부딪치고 척을 지는 건 원치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황태자비 선출식을 구실로 엘레나는 대공가에 머물 시간을 벌게 된다. 그리고 황태자비 선출식에 필요한 평판을 쌓아야 한다는 핑계로 자유롭게 사교계 활동도 할 수 있다. 그리되면…….

    “대공가를 분열시킬 생각이에요.”

    “분열?”

    “공녀라는 제 지위를 이용해 귀족들을 돌아서게 만들 거예요.”

    그간 엘레나는 고분고분한 태도를 취했다. 때때로 돌발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했지만, 주로 허영심 많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리아브릭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몸을 사렸다. 아직은 좀 더 몸을 낮춰야 한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복귀가 임박한 지금 더는 지체할 이유가 사라졌다. 베로니카의 지위를 이용해 대공가를 분열시키는 것이야말로 엘레나가 쥐고 있는 최고의 패였다.

    “그대는…….”

    시안은 말을 흐리며 엘레나를 눈에 담았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황태자비 선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그녀에게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잔인하다고까지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의 무능력함에 화가 났다.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죄송해요. 곤란한 부탁을 드려서.”

    엘레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설득하면서도 맘속으로 머뭇거리고 망설이길 반복했다. 아무리 대공가를 몰락시킬 계략이라 하더라도 시안과 엮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비는 나의 반려다. 또 제국의 국모가 될 여자다.”

    “알고 있어요.”

    한때, 엘레나가 그 자리에 있었다. 비록 황태자비를 거쳐 황후에 오른 건 세실리아였지만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독살을 당했기 때문에 황비인 엘레나가 황후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대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다.”

    “…….”

    엘레나는 말을 아꼈다. 부탁한 건 엘레나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건 시안이다. 거절하더라도 존중해야 했다.

    “내가 왜 지금껏 황태자비를 공석으로 두었는지 아나?”

    “외척을 두지 않고자 함이 아닌지요.”

    “예전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아니다.”

    “아니라고요?”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시안과 시선을 맞췄다. 바다처럼 고요하던 그의 눈동자에 거칠게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주인이 있다.”

    순간 엘레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를 위해 황태자비 위에 조금의 흠도 남기고 싶지 않아.”

    그 자리의 주인이 누군지 시안은 정확히 지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애틋한 눈길과 말속에 담긴 뉘앙스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저토록 애절하거늘 어찌 모르겠는가. 애써 모르는 척하는 엘레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한결같이 제게 다가오는 그를 억지로 외면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감정의 동요는 불가항력이라 엘레나가 이성적으로 대처하려고 한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그게 그대의 부탁을 망설이고 있는 이유다.”

    “전하.”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이 받아들이질 못해.”

    “…….”

    시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깊은 번뇌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엘레나는 그런 시안을 눈에 담으며 기다렸다. 시안이 눈을 뜨고 다시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황태자비 선출식을 열겠다.”

    “전하…….”

    엘레나가 말을 흐렸다. 어려운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큰 용단을 내려준 시안이 고마웠다.

    “그러나 이번 선출식으로 황태자비를 선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 역시 황태자비에 베로니카나 아벨라가 선임되는 걸 원치 않아요.”

    황태자비 선출식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고 대공가를 따르는 귀족들을 분열시키기 위한 계략의 일부였다. 만약 선출식을 거쳐 베로니카나 아벨라가 황태자비로 선임될 수밖에 없다면 애초에 이 계략은 실행에 옮겨서는 안 된다. 시안이 너무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그런 엘레나의 진심이 전달된 것인지 시안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대가 그리 말해주니 되었다.”

    “저야말로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려주신 전하께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엘레나는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거야.’

    베로니카의 조기 복귀는 생각지도 못한 큰 변수였다. 만약 시안이 없었다면 눈물을 머금고 대공가에서 몸을 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되면 엘레나가 외부에서 아무리 공작을 펼쳐 압박을 가한다고 해도 내부가 굳건한 대공가를 무너뜨리기 역부족이었을 게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단을 내린 시안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엘레나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결정이 났으니 시일을 결정하지. 그대가 원하는 날짜를 말하도록.”

    “지금으로부터 넉 달 뒤로 잡아주세요.”

    “넉 달 뒤라. 그대도 알겠지만 황태자비 선출식은 총 세 번의 경합을 거쳐 황태자비를 선출한다. 넉 달 뒤가 마지막 경합일이 되는 것이다.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어요.”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 역사에서는 학술원을 졸업한 시안이 기습적으로 황태자비로 세실리아를 책봉했다. 그 여파로 엘레나는 일 년간 사교계에서 평판을 쌓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시안과 세실리아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프란체 대공과 리아브릭은 이때다 싶었는지 황실의 번영과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황비를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엘레나가 치열한 선출식을 거쳐 제1황비가 되었다.

    “그리 공표하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그대도 나와 약조를 했으면 한다.”

    “말씀하시지요.”

    엘레나가 공손히 대꾸하자 시안이 말했다.

    “다치지 말라.”

    “…….”

    시안의 걱정 어린 눈길에 엘레나가 뭉클했다.

    “위험하다 느껴지면 다 내팽개치고 빠져나와. 대공가의 몰락, 그대가 못 한다면 내가 하면 돼. 그러니 다 짊어질 생각은 하지 마라. 약조할 수 있는가?”

    “전하.”

    뻔히 무리한 부탁인 걸 알면서도 들어준 시안은 마지막까지 엘레나만을 염려하고 걱정했다. 그 진실 어린 마음이 엘레나를 짠하게 만들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그 약조면 충분하다는 듯 시안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염려되고 우려스러운 건 오로지 엘레나의 안위였다. 그런 걱정 어린 마음을 잘 알기에 엘레나도 함부로 움직일 뜻이 없었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복수도 살아 있어야 가능했다. 엘레나는 저들에게 비참히 죽임을 당하며 그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다.

    ‘베로니카.’

    불현듯 죽어가던 자신을 보며 비웃던 베로니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안의 손을 잡고 흔들며 작별을 고하던 그 악마 같은 모습이.

    ‘더 이상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상황은 변했다. 베로니카가 돌아올 시기를 결정하는 것도 이제는 엘레나에게 달렸다.

    ‘이제부터 네 이름과 지위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기대해.’

    대공가로 돌아온 베로니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엘레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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