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연합
엘레나는 열흘 뒤 심야의 가면무도회장을 다시 찾았다. 뿔 가면 사내와 약속한 대로 아편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초대장은 스텔라 영애를 통해 구할 수 있었다. 영문은 모르지만 찔리는 게 있는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초대장을 구해줬다. 리아브릭에게는 예법에 대해 배울 게 있다며 마담 드 플랑로즈의 저택에 이틀간 머물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요.”
엘레나는 휴렐바드를 대동해 가면무도회장 홀에 입장했다. 엘레나는 아편을 유통하는 배후가 프리드리히 대공가라 짐작했다. 다만, 대공가라 확정 지을 결정적인 단서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움직였다. 아편 거래를 빌미로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서.
첫 번째 거래는 아편 10㎏. 두 번째 거래는 아편 20㎏.
차츰 거래량을 늘려가며 신용을 쌓은 뒤, 뿔 가면 사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까지 판을 키워 거물급 윗선들을 끌어내 배후를 밝힐 계획이었다.
“어?”
이 층에 올라온 엘레나는 복도 끝에 위치한 뿔 가면 사내의 방 앞에 귀족들이 몰려 있는 걸 목격했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며 욕을 하거나 이성을 잃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애원하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지?’
엘레나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저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돈은 얼마든지 있어. 두 배? 세 배 줄게. 그러니까 제발 줘. 어서.”
“그게 없으면 전 하루도 살 수가 없어요!”
“좋은 말로 할 때 문 열어라? 확 들어가서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약에 중독되어 반쯤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습에 엘레나는 기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귀족이란 자들이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귀족의 의무는 저버린 채 쾌락만을 좇는 저런 자들을 믿고 살아가는 민중들이 너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
그 순간 엘레나가 묘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금단증세에 횡포를 부리는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사자 가면남과 시선이 마주쳤다. 금단증세를 보이는 이들과 어울리기에 그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반듯하고 흔들림 없는 진중함이 느껴졌다. 너무 고귀하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날 보고 있어?’
처음엔 우연인가 했지만 사자 가면남은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쳐다보며 의식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가 서서히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휴렐바드가 슬쩍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경계했다. 지척까지 다가오면서 사자 가면남은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자 가면남이 엘레나의 한 발자국 앞에 멈춰 섰다.
‘누구지?’
덩달아 엘레나도 긴장했다. 사자 가면남은 적나라할 만큼 엘레나를 보고 있었기에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대가…….”
“……!”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엘레나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
엘레나는 그제야 사자 가면남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체형이라거나, 가면 아래로 드러난 턱선, 중저음의 목소리 톤까지……. 하나하나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작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와 가면 속 짙은 녹안을 보며 엘레나는 확신했다. 이 사자 가면남의 정체는 시안이라고. 엘레나는 한눈에 자신을 알아본 시안의 안목에 깜짝 놀랐다. 본래의 얼굴을 보인 적은 있지만, 가발까지 쓰고 있는 그녀를 알아본 까닭이다.
‘전하께서 왜 여기에…….’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이곳에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스윽.
휴렐바드가 앞을 막아섰다. 기도로 보아 대략 누군지 짐작은 했으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듯했다.
“경, 아는 사람이에요.”
그제야 휴렐바드가 뒤로 물러섰다.
“잠시 이야기를 하지.”
“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시안이 손을 뻗어 바로 옆 방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재빨리 엘레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막아서려던 휴렐바드가 멈칫했다. 놀란 기색은 있으나 그를 보는 엘레나의 눈빛은 더없이 차분했다. 마치 여기서 기다리라는 듯이.
‘짐작이 맞는다면 저자는 황태자 전하시다. 아가씨를 해코지할 이유는 없어.’
휴렐바드는 경거망동을 하기보단 엘레나와 시안이 들어간 방문 앞에 서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방문이 닫히고 시안과 엘레나 단둘이 방에 남게 됐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자 엘레나는 못다 한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말까지 잘라가며 시안이 묻자 엘레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아서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가? 그럼 묻지 않겠다.”
“…….”
“오해 또한 하지 않겠다. 사정이 있었겠지.”
엘레나는 뒤늦게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짐작하고는 피식 웃었다. 심야의 가면무도회는 귀족들의 은밀한 연회다. 겉으로는 고고한 척 굴며 뒤로는 문란하고 질펀한 생활을 즐기는 곳이었다. 가면무도회에 출입한다는 건 행실의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그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겠다고 했다. 제멋대로 의심을 해 오해를 키우지 않을 것이며 그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겠다고 한 것이다.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시안은 늘 이런 식이었다. 뭔가를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저보다 엘레나를 항상 우선에 뒀다. 과거와 너무도 다른 모습이기에 때론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그대는 묻지 않으나 내가 가면무도회에 온 이유에 대해 변명하겠다.”
심지어 시안은 엘레나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어 했다.
“아편을 쫓는 중이다.”
“……!”
생각지도 못한 시안의 고백에 엘레나의 동공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아편이라니. 시안의 행보가 엘레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그대는 말했지. 민중의 편에 서서 함께 나아가라고. 그 말을 새기고 눈높이를 낮췄다. 황태자의 시선이 아니라, 민중의 눈높이로 제국을 보고자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누가 뭐래도 시안은 제국의 황위를 이을 황태자다. 태생부터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가 권위와 특권을 버리고 눈높이를 민중에게 맞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걸 시안은 해냈다.
“그대의 말이었으니까.”
“전하…….”
확고한 시안의 믿음에 엘레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믿고 신뢰할 수 있는지. 이 남자는 제게서 뭘 보고 느꼈기에 이토록 맹목적인지 알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중의 눈높이로 제국을 바라보니 알겠더군. 귀족들이 얼마나 썩고 부패했는지. 대귀족이란 작자들은 대놓고 노예를 사고팔고 있었지.”
“제국에서 노예 매매라니.”
“법 위의 귀족이란 말을 들어보았나? 귀족들에게 법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시안은 감정을 죽이려고 노력했지만 귀족들의 행각을 입에 담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분노를 완전히 다스리지는 못했다.
“더 이상 귀족들의 불법행위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죄를 묻기에 황실은 너무 나약했지. 추궁한다 해도 교묘하게 빠져나갈 가능성이 컸다.”
시안의 비관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현실을 깨닫고 생각을 바꿨다. 법이 저들을 단죄할 수 없다면, 내가 법을 대신하겠다고.”
“……!”
이어지는 시안의 이야기에 엘레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린든 백작과 손을 잡은 시안은 귀족들의 부정과 불법행위를 근절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권위를 잃은 법으로 저들의 죄를 단죄할 수 없다면 그 역시 비합법적으로 그들의 행위를 단죄하여 그에 합당한 처벌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범죄행위에 대한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두는 치밀함도 보였다.
‘전하께서 이리 변하실 줄이야.’
시안을 보는 엘레나의 눈길이 미묘해졌다. 그가 너무 달라 보였다.
“아편은 존재해서는 안 될 물건이다. 그런 아편을 재배하고 유통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 난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고자 제국을 병들게 한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들?’
엘레나는 딱 꼬집어 누군가를 지칭하는 시안을 보며 뭔가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럼 전하께서 아편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계신 건가요?”
“그래.”
“혹시 대공가인가요?”
엘레나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배후에 대해 운을 뗐다. 그러며 시안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사자 가면 너머의 시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가 그걸 어찌?”
‘내 예상이 맞았어.’
엘레나는 그간 심증과 정황으로 아편의 배후에 대공가가 있음을 짐작했다. 이 정도 규모의 아편을 유통하면서도 법의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건 권력의 비호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저 역시 아편을 추적 중이었어요. 오늘 가면무도회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그대가 아편을 추적했다고? 어째서, 무슨 연유로. 하, 그대는 정말이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
시안은 놀라워하면서도 그녀를 인정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예측 가능한 부류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시안은 엘레나라는 고혹적인 꽃의 향기에 서서히 취해가고 있었다.
“전하,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보아라.”
“대공가가 배후라는 건 어떻게 알아내셨어요? 증거를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여러 경로를 통해 아편을 구매하는 데 지불된 금화를 추적했다.”
‘내가 생각한 방식이랑 같아.’
엘레나가 뿔 가면 사내에게 아편 거래를 빌미로 접근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아편 구매 대금으로 지불한 금화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파악하면 아편 유통의 배후를 밝혀낼 수 있었다고 믿었다.
“추적이 쉽진 않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세탁했으니까.”
그럴 것이다. 아편 사업은 큰 이윤을 안겨주지만 발각되면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리아브릭이 허술하게 일 처리를 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도 용케 알아내셨네요.”
“실수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여유가 없었던 건지. 노블레스 거리 개발 사업에 자금이 흘러들어 간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엘레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배후를 밝혀낸 건 시안이지만 그 이면에는 대공가를 자금적으로 압박해 돈세탁 과정을 건너뛸 수밖에 없게 만든 엘레나의 공로가 컸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는 아편의 배후에 대공가가 있음을 어떻게 짐작한 것이냐?”
“…….”
“이 또한 말해줄 수 없나?”
엘레나는 잠시 말문을 닫고 고민했다. 목적은 달랐지만 엘레나와 시안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대공가의 몰락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처럼 대공가의 끝없는 저력을 감안하면 손을 잡아 대적하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결론을 내린 엘레나의 입술이 열렸다.
“쫓고 있었으니까요.”
“그대가?”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시안과 눈을 맞췄다.
“아편을. 그리고 대공가를요.”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냐?”
“네, 전 그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엘레나의 회한에 찬 눈동자 속에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맺혔다. 죽어가는 엘레나를 보며 언젠가 이안을 죽이겠다 조롱하는 베로니카. 먼저 딸이 되라며 손을 내밀 땐 언제고 죽어가는 엘레나를 벌레 보듯 했던 프란체 대공. 그런 엘레나의 최후를 계획한 리아브릭까지. 엘레나는 자신을 속인 것도 모자라 비참하게 죽여 버린 그들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내게 이안은 전부였어. 그런 이안을 뺏어간 그들에게 진짜 절망을 느끼게 할 거야.’
시안은 엘레나의 눈에 서린 증오와 원한의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음을 알아챘다.
“그대가 그토록 증오심을 품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전하.”
“그대의 사무친 원한을 풀고자 돕겠다.”
시안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엘레나의 편에 서겠다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에 작은 파장을 남겼다.
꾸벅.
엘레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아한 예법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녀가 느낀 감사함을 가장 절절하게 전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전하께서는 그럼 아편의 유통 경로를 파악하고자 가면무도회에 오신 거예요?”
“그래. 유통 경로만 파악하면 아편의 주성분이 되는 피네치아의 재배지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편 제조소를 재기 불능으로 만든 시안은 좀 더 근본적인 재배까지 파헤쳐 뿌리 뽑으려 했다.
“아까 중독자들이 난리 친 게 아편 물량이 부족해서 그런 거였군요.”
“그래.”
엘레나는 턱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편 제조소 붕괴, 아편 부족, 그리고 피네치아 재배지. 시안을 만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정보들이 생각의 폭을 확장시켰다.
‘백지상태에서 다시 밑그림을 그려야 해.’
엘레나는 처음 구상했던 계획을 폐기했다. 시안을 통해 대공가가 배후임을 알게 된 이상 굳이 이전 계획을 고수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시안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하는 쪽으로 선회하는 게 나아 보였다. 고민을 거듭하던 엘레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잘하면 재배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정말인가?”
“네, 쉽진 않겠지만 전하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해요.”
엘레나는 떠오른 계획에 대해서 시안에게 설명했다. 성공 여부가 시안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의 동의와 역량이 필요했다.
“어떠세요?”
“그대는 늘 날 놀라게 하는군.”
시안은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이 준 정보와 상황을 조합해 이런 계획을 짜낸 엘레나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L로 활동하며 지성인으로 찬사를 받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계략까지 능할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해보지.”
“전하라면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시안과 엘레나가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엘레나가 계획을 짜고 시안이 수행한다. 상상도 못 했던 호흡에 퍽 기대가 되는 두 사람이었다.
* * *
시안이 먼저 방을 나간 뒤, 시간을 두고 엘레나도 방을 나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휴렐바드는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복도 끝 방 앞은 아편에 중독된 귀족들로 소란스러웠다. 금단증세가 심해졌는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애원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엘레나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곧 있으면 접촉하기로 약속된 시간이었다.
‘아편 10㎏이야. 그런 손님을 쉽게 포기할 리가 없어.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올 거야.’
저런 어중이떠중이와 ㎏ 단위로 거래하려는 엘레나는 체급 자체가 달랐다.
엘레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금단증세가 극에 달한 몇몇이 의자 같은 집기를 집어 들고 문을 부수려는 듯 과격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편 중독이 얼마나 인간의 이성을 마비하고 폭력성을 극대화시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였다. 뒤쪽에 서 있던 휴렐바드가 움직여 엘레나의 옆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엘레나가 고개를 돌리자 가슴이 파인 드레스에 나비 가면을 쓴 여성이 서 있었다.
“저 기억나시죠?”
“당신, 혹시 그때…….”
엘레나는 그녀가 뿔 가면 사내의 곁을 지키던 암살자인 걸 기억해 냈다.
“쉿.”
나비 가면의 여성이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서로 알아봤으니 굳이 자신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저를 따라오세요.”
나비 가면을 쓴 여인은 조용히 엘레나를 안내했다. 홀을 가로질러 반대편 모퉁이를 돌자 마찬가지로 계단이 나왔다. 인적이 드문 이 층 맨 구석진 방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췄다.
똑똑.
노크를 하자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기괴한 털 가면을 쓴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엘레나가 기억하기로 첫 방문 당시 입구를 지키던 남자였다.
“모셔왔어요.”
그는 나비 가면 여인과 그 뒤에 선 엘레나와 휴렐바드를 힐끗 본 뒤 문을 열어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뿔 가면 사내가 보였다. 여전히 상의를 걸치지 않고 상체를 드러낸 그는 독한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같이 한 잔 어때?”
“사양하죠.”
엘레나가 딱 잘라 거절했다.
“뻣뻣하게 굴긴. 크크.”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가루 10㎏은 준비되셨나요?”
“돈 먼저 보자고. 그게 이쪽 상도덕이거든.”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휴렐바드에게 눈빛을 보냈다. 휴렐바드는 경금속으로 만든 사각의 가방을 뿔 가면 사내가 볼 수 있도록 열었다. 가방 안에 빽빽하게 찬 금화를 보고 뿔 가면 사내의 눈길이 탐욕에 젖었다. 마음 같아선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갈취하고 싶단 욕망이 들었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험하기엔 엘레나의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너무 위험했다.
“이제 그쪽이 준비한 걸 보죠.”
“이리 가져와.”
그가 손짓하자 나비 가면의 여인이 작은 가죽 가방을 들고 왔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10㎏을 담기엔 턱없이 작았다. 그걸 보는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상대로야. 전하께서 제조소를 부순 바람에 물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판은 짜였다. 남은 건 엘레나가 뿔 가면 사내로부터 원하는 걸 얻어내느냐에 달렸다.
“약속한 물량에 턱도 없는 거 같은데요?”
“이쪽도 이쪽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3㎏도 싹싹 긁어 온 거야.”
“하, 3㎏요?”
엘레나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뿔 가면 사내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때론 무언의 압박이 상대에게 더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제대로 먹혔는지 뿔 가면 사내가 당황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한 달 뒤에 물량을 맞춰주지. 우리가 실수한 것도 있으니까 가격적인 측면에서도 조율을…….”
“지금 조율이라고 했나요?”
엘레나가 어처구니가 없단 얼굴로 휴렐바드를 보며 턱짓을 했다. 휴렐바드가 들고 있던 다른 가방을 눕혀 뿔 가면 사내를 향해 열어 보였다.
“……!”
뿔 가면 사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금화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높은 순도를 자랑하는 금괴가 가방 안에 꽉 차 있었다. 어림잡아 금화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제가 지금 돈 몇 푼 아끼자고 이러는 거 같아 보여요?”
“아까 말했지만 이쪽도 사정이란 게…….”
“제가 그쪽 사정까지 봐줘야 하나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그게 아니라…….”
엘레나의 계속되는 추궁에 뿔 가면 사내는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큰 고객인 건 알았지만 저런 금괴를 아무렇지 않게 융통할 수 있는 재력가일 줄은 몰랐다. 돈에 굴복한 뿔 가면 사내는 뻔뻔하게 나가기보단, 고개를 숙이는 쪽을 택했다. 그깟 자존심 때문에 놓치기엔 고객의 스케일이 달랐다.
“약속 못 지킨 건 사과하지. 하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었어. 빌어먹을.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제조소를 습격해서 초토화를 만들어놓는 바람에 정제를 못 하고 있다고.”
뿔 가면 사내의 변명에 엘레나의 눈초리가 살짝 좁아졌다. 앞서 매섭게 그를 추궁한 건 대화의 흐름을 여기까지 끌어내기 위한 계획이었다.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아요. 동이 트면 우린 제국을 떠날 거예요.”
“저기, 조금만 진정해 보라고. 물량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맞추라는 거야?”
“그럼 대책을 내놓으세요. 말귀 못 알아들어요? 당신네야 돈 몇 푼 손해 보는 게 다지만, 우린 본국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계획을 다 수정해야 한다고요.”
엘레나가 숨 쉴 틈도 없이 쏘아붙이자 뿔 가면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산다는 사람은 있는데 물건이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아편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주원료가 되는 피네치아 잎이 있다곤 하나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아편과 비교해 환각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잠깐만. 그냥 잎째로 팔아버려?’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뿔 가면 사내는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떠나잖아? 또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데 원료로 팔아버리면 그만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뿔 가면 사내는 결단을 내렸다. 이대로 고객을 놓치느니 그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럼 이건 어때?”
“뭐요?”
“다그쳐 봐야 약은 이게 다야. 더는 못 구해.”
엘레나의 눈빛이 싸늘해지는 걸 느낀 뿔 가면 사내가 얼른 말을 이었다.
“이봐, 얘기를 끝까지 들으라고. 아편의 원료가 되는 식물이 있어. 정제하지 않아 환각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 아편 대신 이걸로 거래하는 게 어때?”
‘걸렸어.’
치맛자락을 쥔 엘레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쁘지 않다? 표현이 좀 애매하네요. 환각성이 어느 정도인데요?”
“절반 정도? 아편과 비교해 효능이 조금 떨어질 뿐이야. 대신, 양을 더 얹어주지. 어때?”
실제로는 다섯 배까지 차이가 났지만 뿔 가면 사내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어떻게든 엘레나와 거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빚어낸 발악이었다. 고심하는 척을 하던 엘레나가 정색하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동이 트면 떠날 거예요. 가면무도회가 끝나기 전까지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럼. 가능하고말고.”
뿔 가면 사내는 힘을 줘 대답했다. 제 딴에는 신뢰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엘레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가면무도회가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몇 시간에 불과해. 물건을 가져오는 시간을 고려하면 잎을 보관하는 창고나 재배지가 수도 내에 있을 가능성이 커.’
여기까지. 엘레나는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거래를 이끌어냈다. 이제 남은 건 시안의 몫이다.
“거래하죠. 환각성이 아편보다 떨어지는 만큼 최대한 많이 가져오라고 하세요.”
* * *
황궁 뒤 별관. 심야의 가면무도회가 절정에 달하는 시각이다 보니 출입문 쪽은 한산했다.
그때 별관의 후문을 통해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달빛이 닿지 않는 그늘만을 골라 몸을 움직였는데 도둑고양이처럼 동작이 기민하고 재빨랐다.
“전하의 말씀대로군요. 정말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반대편 지붕에 몸을 숨기고 있던 복면남 린든 백작의 시선이 어둠을 벗 삼아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를 좇았다.
“좀 더 기다렸다가 움직이도록 하지.”
“저도 그게 나아 보입니다.”
시안의 말에 린든 백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간 아편 조직을 파헤치면서 그들의 치밀함과 꼬리 자르기에 치를 떨었다.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섣불리 움직이기보단 신중하게 대처하길 택했다.
아니나 다를까, 별관에서 검은 그림자가 또 튀어나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앞서간 자의 뒤를 밟는 자들이 있나 살펴보더니 천천히 뒤를 따랐다. 혹여 미행이 붙을 것을 대비하여 2인 1조의 형태로 움직이는 것이다. 백작이 성급하게 앞서간 자를 쫓았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다.
“가지.”
“네, 전하.”
시안은 의욕적으로 몸을 날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레나가 구상한 계략이었다. 그녀가 믿고 맡겼으니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두고 은밀히 미행하면서도 시안과 린든 백작은 두 명의 복면인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말을 타지 않는군요.”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배지나 창고가 수도 내에 있단 얘기겠지.”
“허! 배짱이 있는 건지, 무모한 건지.”
“황실보다, 법보다 위에 서 있는 자들이다. 꺼릴 게 없을 것이야.”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위세와 권력은 제국의 하늘을 덮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실은 그들의 눈치를 보기 급급했고, 법마저도 제어의 수단이 되지 못했다. 비참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시안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부터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 첫발은 법을 대신해 대공가의 불법적인 아편 사업을 부수는 일이었다.
‘대공가를 무너뜨릴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시안은 아까 전 엘레나의 눈에 맺혀 있던 증오심을 떠올렸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나 사무친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고 미소 짓게 해주고 싶었다.
복면인들은 황궁 별관을 벗어나 수도의 동측으로 이동했다. 수도 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가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짝이군.”
시안이 모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황실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수도 한복판에서 제조 시설을 만들고 유통한 것도 모자라 재배지까지 갖췄겠는가.
복면인을 추적하던 시안과 린든 백작은 칠흑같이 껌껌한 어둠 속에서 살기를 느끼고 멈칫했다.
“……!”
아니나 다를까, 붉은 복면을 쓴 십여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앞을 막아섰다. 적의를 숨기지 않는 태도로 보아 시안과 린든 백작 일행을 노리는 걸로 짐작됐다.
‘들킨 건가?’
의문을 품던 시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복면인들은 뒤를 밟히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놓치고 맙니다.”
린든 백작에게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여기서 지체했다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시안은 적의 숫자가 적지 않음을 느끼곤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여긴 우리가 맡지. 벤을 붙여 계속 뒤를 밟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전하.”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게 따돌리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시안과 린든 백작이 저들을 상대하고 추적에 능숙한 기사들을 붙이는 게 더 효율적이다.
린든 백작이 막 명령을 내릴 때였다. 반대편 골목 모퉁이에서 다섯 명의 붉은 복면인이 나와 앞길을 막아섰다.
“미꾸라지 같은 놈들. 드디어 잡았군. 그간 여기저기 잘도 헤집어놓았겠다.”
성인 남성 두 배의 체구를 지닌 붉은 복면인이 검을 뽑으며 위협적으로 걸어 나왔다.
‘기사 월포드!’
시안은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봤다. 흉포하기로 소문난 라인하르트가의 기사단장 월포드였다.
초원 부족 출신의 그는 용병이지만 비상식적인 강함을 인정받아 라인하르트가의 기사단장이 된 특수한 경우였다. 그 때문인지 기사도와 거리가 멀었다. 난폭하고 무식했으며 손속이 잔인했다. 그런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검으로 군림했다.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압도적인 강함을 갖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난질도 오늘로 끝이다. 절반은 여기서 죽어 줄초상 치를 거고, 나머지 절반은 끌고 가서 사지를 하나씩 분질러 죽여주마.”
월포드가 거구의 체구를 앞세워 위협적으로 살기를 흘렸다. 사냥을 앞둔 맹수 같은 흉포함이 좌중을 압도했다.
‘하필 여기서 이자를 마주칠 줄이야.’
시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치하는 와중에도 앞서 가면무도회를 나온 복면인들은 멀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뒤를 밟지 않으면 꼬리를 놓치고 말 것이다.
‘실패하면 그녀를 볼 낯이 없다.’
엘레나가 짠 계략이니만큼 꼭 성공하고 싶었다.
“내가 저자를 제압하지. 나머지는 그대가 맡도록.”
“하, 하지만.”
린든 백작이 당혹스러워했다.
“명령이다. 그리고 벤.”
시안은 더 이상의 불복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뒤쪽에서 긴장하고 있는 기사 벤을 낮게 불렀다. 과거 학술원을 휴학한 루시아를 찾기 위해 북부 지역으로 보냈던 자로 린든 백작 수하의 기사 중 가장 시력이 좋으며 몸놀림이 날랬다.
“전투가 벌어지면 틈을 노려 쫓아가라.”
“알겠습니다.”
벤이 명령을 받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사이 월포드가 점차 거리를 좁혀왔다. 가까워질수록 흉포함이 더해졌다.
“뭘 그리 쑥덕거려? 저승길 누가 먼저 가나 순서라도 정한 거냐?”
시안은 바로 무릎을 굽혔다가 땅을 박찼다. 용수철처럼 탄력적으로 몸이 튕겨 나가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이 번개처럼 뽑혔다.
챙.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기습에 월포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세워 시안의 공격을 막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팔이 베였을지도 모를 예리한 공격이었다.
“너 예사 놈이 아니구나?”
“…….”
월포드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껏 만만하게 보고 있던 상대의 실력이 고강하단 걸 눈치채고 전력으로 상대하고자 마음을 고쳐먹은 듯했다. 그사이 린든 백작과 네 명의 수하는 붉은 복면을 뒤집어쓴 라인하르트가의 기사들과 맞섰다. 벤은 언제든 몸을 빼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하앗!”
월포드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용병 출신이다보니 검술의 정교함은 떨어졌지만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은 검술의 틀마저 무용지물로 만들 만큼 파괴적이었다.
‘기회는 한 번.’
시안이 다시금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속도로 우위에 서고자 함이었다.
“너 같은 쥐새끼를 내가 한두 번 상대한 줄 알아?”
월포드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묵직하게 대응했다. 속도가 아무리 빨라봐야 공격이 들어오는 건 한순간이다. 그때만 받아칠 수 있다면 승패가 난다. 시안 역시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승부는 월포드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빠르냐에 달렸다.
눈앞에서 달려들던 시안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월포드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며 검을 세웠다. 검에 진동이 전해졌다.
지이잉.
시안의 일격이 월포드의 검에 막힌 것이다.
“끝났다, 쥐새끼.”
월포드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속도와 힘의 대결은 한순간에 갈릴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시안은 공격을 했고 월포드는 막았다. 월포드가 맞물린 자신의 검에 힘껏 힘을 줬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괴력이 바위처럼 시안의 검을 밀어냈다.
“어? 어!”
그러나 시안의 검을 밀어내던 월포드의 눈에 당혹스러움에 서렸다.
그의 완력을 감당 못해 놓쳤어야 할 시안의 검이 어째서인지 월포드의 검날에 균열을 만들며 무를 베듯 가르고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월포드의 검은 명검이다. 라인하르트 공작가가 그를 기사단장에 앉히고자 유명 대장장이의 명검을 조건으로 회유했던 이야기는 유명했다. 근데 그런 명검이 무 베이듯 두 동강 나기 직전이었다.
“큭.”
월포드는 이대로는 틀렸다는 걸 직감하고 몸을 틀어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구의 몸집은 아무래도 둔할 수밖에 없었다. 시안이 힘을 줘서 검을 밀었다. 월포드는 악착같이 버텨보려고 했지만 그의 애검이 버티질 못했다.
“……!”
순간적으로 월포드의 눈이 커졌다. 착각이었을까. 시안의 검에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본 것 같았다.
이윽고 그의 검이 두 동강 나버렸다. 검날의 절반 이상이 힘없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무방비로 노출된 팔뚝에 시안의 검이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시안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월포드의 팔뚝을 베고 지나갔다.
“윽, 이, 이 자식!”
빗줄기처럼 핏방울이 팔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검에 베인 팔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치는 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검상으로 인해 월포드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시안의 속도는 더 빛을 발했다. 눈으로 좇기 힘든 동작으로 뒤를 잡더니 손잡이로 월포드의 목덜미를 세게 후려쳤다.
“컥!”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월포드의 거대한 몸뚱이가 털썩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시안이 월포드를 제압하자 기세 좋게 린든 백작과 수하를 공격하던 붉은 복면인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시안이 고개를 들어 린든 백작을 쳐다봤다. 눈빛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에 린든 백작은 수하들과 몸을 빼 의식을 잃고 쓰러진 월포드의 주변으로 이동했다. 월포드가 생포당하자 붉은 복면인들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몇몇은 경이로운 시안의 검술에 겁을 집어먹은 눈치였다.
“뒷일을 맡기지.”
“네.”
린든 백작의 대답에 시안의 시선이 벤에게 향했다. 몸을 빼려고 했으나 발이 묶인 나머지 그는 추적에 나서지 못하고 말았다.
“방향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동남부 방향 시계탑을 지나쳐 가고 있었습니다만…… 꽤 시간이 지나 버린지라.”
시안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벤이 일러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월포드의 신변을 확보한 이상 뒤처리는 린든 백작이 알아서 잘할 거라 믿었다.
‘서둘러야 해.’
벤이 일러준 시계탑 인근에 도착한 시안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샅샅이 주변을 훑었다. 수도의 동남부는 수도 귀족 중에서도 유력 가문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보니 호화 저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개중 자작 작위 이상의 몇몇 가문은 넓은 정원과 후원을 지녀 그 면적이 엄청났다.
“저건?”
아주 먼 시야에 새까만 점이 움직이는 게 포착됐다. 시안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오늘이 만월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달빛이 아니었다면 어둠을 따라 움직이는 복면인을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테니까.
꼬리를 밟긴 했으나, 시안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언제 시야에서 놓치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복면인과 거리가 먼 까닭이었다.
시안은 무리해서라도 거리를 좁히고자 몸을 날렸다. 그러나 거리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복면인들은 지리를 꿰고 있었으며 철저히 어둠에 몸을 숨겨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을 기해서 복면인들이 시안의 시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까진가.”
시안은 마지막으로 복면인들이 사라진 곳에 도착했다. 수도 동남부 귀족 밀집 지역에서도 제일 땅값이 비싼 곳이었다. 저마다 넓은 후원과 정원을 지닌 듯 담벼락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 근처라는 얘기인데…….”
마지막으로 복면인을 목격한 근처에 여섯 가문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저들 중 한 곳에 재배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섣부르게 굴 필요는 없겠지. 기다려 보자.’
엘레나의 계획대로라면 복면인들은 아편을 대신할 잎을 가지고 가면무도회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엘레나가 동이 트면 제국을 떠날 것이라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만약 복면인들이 다른 경로로 이동하거나, 이곳에서 잎을 수거해 가는 게 아니라면 꼬리를 놓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수상한 인기척을 느낀 시안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
시안은 귀를 의심했다. 새소리도 아닌 그것은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지를 보자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삐딱하게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 셔츠 단추가 풀려 훤히 드러난 가슴, 그리고 가면무도회서나 볼 법한 늑대가면을 쓰고 있었다.
“너는…….”
시안이 한눈에 늑대 가면남의 정체를 꿰뚫어 봤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오다가다요?”
시안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늑대 가면남은 히죽 웃으며 맞받아쳤다. 시안은 말장난하고 싶지 않은지 무미건조하게 그를 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왜 있긴요. 도와주려고 왔지.”
늑대 가면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턱짓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웬만한 담벼락 두 배 높이의 철창으로 이루어진 대문이 있었다.
“타노토스 백작가. 까마귀처럼 새카만 두 놈이 그리 들어가던데요?”
“……!”
놀라는 시안의 반응을 즐기듯 늑대 가면남이 어깨를 으쓱했다.
“인생 뭐 있나요? 팍팍한 세상 다 돕고 사는 거지.”
돌아서던 늑대 가면남이 멈칫했다.
“아, 그렇다고 착각은 하지 마시고. 그쪽 좋으라고 돕는 건 아니니까.”
“…….”
“그냥 좀 이 일로 웃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늑대 가면남은 손을 흔들며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참을 그가 떠나고 난 자리를 보던 시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대도 알고 있었던 것이냐? 렌.”
* * *
“지루할 텐데, 한잔하는 게 어때? 괜찮은 와인도 있는데.”
소파 건너편에 앉은 뿔 가면 사내가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며 술을 권했다.
“사양하죠.”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엘레나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무시했다. 아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버렸다.
‘전하께서는 잘하고 계실까?’
엘레나의 신경은 온통 시안에게 쏠려 있었다. 급하게 내놓은 계략이었지만 나름 치밀하게 준비했다. 훗날, 제국의 삼검이라 일컫는 렌을 이긴 시안의 실력이라면 복면인의 미행 역시 무난하다고 판단했다.
‘만약에 재배지라도 찾게 된다면…… 대공가에 치명타를 안겨줄 수 있어.’
엘레나는 아편 유통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대공가 전체 수입의 3할 정도로 추정했다. 길드를 통한 조사와 시안이 준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니 얼추 맞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좋아. 이럴 때 아편 유통을 막으면 엎친 데 덮치는 격일 거야.’
그간 엘레나는 지속적으로 대공가에 자금 압박을 주었다. 게다가 원 역사에서도 노블레스 거리 사업은 대공가가 휘청거릴 만큼 막대한 자본금이 투입됐다. 엘레나의 방해 공작이 없어도 그 정도였는데, 자금의 압박을 받는 지금은 어떠할까.
힘들 거라 예상이 됐다. 그 와중에 아편 유통 사업에 차질을 빚는다? 엘레나는 자신했다. 천문학적인 자산을 보유한 대공가라 할지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가면무도회장 밖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엘레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건물 밖에서 말 울음소리와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면무도회가 막을 내리고 귀족들이 저마다 돌아가는 걸로 짐작됐다.
“거래는 없던 걸로 하죠.”
엘레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뿔 가면 사내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
“잠깐, 진정하라고. 동이 틀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어. 곧 올 거야.”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출항 시간에 맞춰서 떠날 거라고.”
“알지, 왜 모르겠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빈손으로 가면 나도 그렇지만 그쪽도 그렇잖아?”
엘레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소파에 앉았다.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 해.’
시안이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계획한 일에는 늘 생각지 못한 변수란 게 생기게 마련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지만 엘레나는 계략의 실패 역시 계산에 넣었다. 실패할 경우 뿔 가면 사내와의 관계가 여기서 단절되면 곤란했다.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별관을 떠나는 마차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칠흑처럼 깜깜하던 어둠이 물러나며 동이 트고 있었다. 더는 기다림이 무의미하다고 여긴 엘레나가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일어나지 말고 다시 앉아. 따끈따끈한 물건 가져왔으니까.”
뿔 가면 사내가 손짓하자 잠시 방 안쪽에 들어갔던 미모의 여인이 자루를 질질 끌고 나왔다.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있던 뿔 가면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단단히 동여매어진 끈을 풀어 말린 잎사귀를 한 움큼 쥐고는 내밀었다.
“이게 아편의 원료인 피네치아 잎이야. 한번 맡아보라고.”
휴렐바드가 다가가 잎을 받아 와 엘레나에게 건넸다. 엘레나가 잎사귀를 손바닥 위에 얹어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약해.’
엘레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식물에서 난다는 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악취가 났다.
“정제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냄새야. 그래도 환각성과 중독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피가 크군요.”
뿔 가면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부피는 크고 환각성은 떨어진다……. 그래서 아편으로 정제해서 파는 거군요. 사업성이 떨어지니까.”
“뭐 그런 셈이지. 자, 피차 바쁜 거 같으니 이제 정산을 해볼까?”
뿔 가면 사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탐욕스럽게 눈을 빛냈다. 시선은 노골적이다시피 금괴가 든 가방에 꽂혀 있었다.
“아무래도 그쪽이 바라는 정산과 제가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른 거 같은데요.”
“무슨 말이지?”
뿔 가면 사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엘레나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미묘했기 때문이었다.
“뭔가 착각하는 거 같아서요. 정해진 아편 물량을 맞추지 못한 건 그쪽일 텐데요?”
“잎으로 대체하는 거 아니었나?”
“대체해야죠. 근데 이런 부피라면 밀수가 어려워서요. 왕국의 통관이 좀 깐깐하거든요.”
뿔 가면 사내가 엘레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앞뒤 자르고 본론만 말해. 결론적으로 얼마큼 사겠다는 거지?”
“아편 3㎏에 나머지는 잎으로, 딱 이 가격만큼이요.”
엘레나가 제시한 가격은 직각 가방에 담긴 금화였다. 금괴는 애초에 잎을 구입하는 데 쓸 생각이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금괴까지 지불하며 잎을 사?’
아편 유통의 배후가 밝혀진 이상 잎을 구입하는 데 들어간 이 금괴 역시 대공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엘레나는 그걸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딱 금화까지만.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 뿔 가면 사내와 접점을 남겨두는 건 딱 그 정도가 적당했다.
“장난쳐?! 아까까진 다 산다고 했잖아!”
뿔 가면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을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혀 깨진 유리병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신경질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하게 맞받아쳤다.
“부피가 이렇게 클 줄 몰랐거든요. 그쪽에도 사정이 있는 것처럼, 저희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요.”
“또 오기 힘들다며? 내가 압축해서 밀봉해 줄게. 그럼 감쪽같다니까.”
뿔 가면 사내는 어떻게든 잎을 처분하고자 엘레나를 회유하려 애썼다.
“전 분명히 말했어요. 필요한 만큼만 사겠다고. 이 이상의 강요는 불편하네요.”
“이, 이!”
엘레나의 단호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뿔 가면 사내가 이를 갈았다. 사실 금화만으로도 사전에 거래하기로 한 아편 10㎏의 값어치는 충분했다. 물량을 맞춰주지 못한 걸 감안하면 충분히 성공적인 거래라고 봐도 무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뿔 가면 사내가 분노하는 이유는 탐욕 때문이었다. 그는 잎을 가져오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할 만큼 금괴가 욕심났다. 거래의 성공 뒤에 따라오는 추가적인 보수와 은밀히 금괴의 일부를 빼돌려 얻을 수익에 눈이 먼 것이다.
“결정하세요. 이 거래 할지 말지. 아시다시피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으으.”
뿔 가면 사내는 마지막까지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눈앞의 두 연놈을 제압하고 저 금괴와 금화를 탈취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뿔 가면 사내가 나비 가면을 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의도를 알아챈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짓 하지 마요. 우리 둘 다 죽어요.’
그녀라고 해서 기회를 노리지 않았을까. 호시탐탐 저들을 죽일 기회를 노렸지만 좀처럼 틈을 찾지 못했다. 우연히라도 휴렐바드와 눈이 마주칠 때면 맹수를 마주한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지금 벽 뒤에 숨겨놓은 암살자들까지 합세한다고 해도 제압할 자신이 없었다. 나비 가면을 쓴 여인이 만류하자 뿔 가면 사내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거래하지.”
“잘 생각했어요.”
엘레나는 금화가 든 직각 가방을 건넸다. 뿔 가면 사내는 아편 3㎏에 나머지 아편 7㎏에 버금가는 잎을 따로 천 자루에 담아서 주었다. 그마저도 부피가 꽤 나갔다.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 오늘 거래로 다음이라는 여지를 남겼으니까.”
흘리듯 던진 엘레나의 말에 뿔 가면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또 거래를?”
“다음에 보죠.”
엘레나는 여운을 남기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휴렐바드는 양손 가득 아편과 잎을 집어 들고는 뒤를 따랐다.
가면무도회장을 나오자 빼곡하게 늘어서 있던 귀족들의 마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이 되자 다들 저택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차에 올라탄 엘레나는 마부에게 인적이 드문 외곽으로 가라고 일렀다. 수도 내에 위치했지만 도심과 멀어 노숙자나 부랑아들만 간간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엘레나와 휴렐바드가 마차에서 내렸다.
“경, 맨홀 덮개를 열어주세요.”
“덮개를 말씀입니까?”
“네.”
휴렐바드는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하수도 맨홀을 열었다. 제국 수도의 지하 하수시설은 경이로울 만큼 위생적으로 정비가 잘되어 있었는데, 이 아래로 생활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퀴퀴하고 역겨운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엘레나는 냄새 따위는 개의치 않은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안에 있는 거 다 꺼내 부으세요.”
그제야 휴렐바드는 왜 엘레나가 맨홀 덮개를 열라고 한지를 알아채고는 행동으로 옮겼다. 가방 안에 있던 아편 3㎏을 꺼내 하수구 아래로 던졌다. 자루는 거꾸로 잡고 그대로 부어버렸다.
“…….”
엘레나는 아편과 잎을 처분하면서도 조금의 흔들림이나 아까움도 느끼지 않았다. 지불한 금화가 상당하긴 했지만 더 큰 타격을 주기 위한 투자쯤으로 여겼다.
“돌아가죠.”
“네.”
엘레나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 * *
“시크릿 살롱으로 가세요.”
엘레나가 외출을 한 건 무려 닷새 만이다. 근래 마담 드 플랑로즈의 저택에서 자주 외박하며 리아브릭의 눈 밖에 난지라 두문불출하며 몸을 사렸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눈치만 볼 수도 없는 노릇, 닷새째가 되는 오늘 리아브릭에게 허락을 구하고 외출을 나왔다. 특별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해. 이쯤 되면 외출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허락해 줬을 텐데…….”
엘레나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리아브릭의 태도였다. 원 역사를 기준으로 지금 시점의 엘레나는 딱히 외출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세실리아가 황태자비에 선임되면서 황비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사교계 활동을 적극 권장하기까지 했었다.
“방심하지 말자. 분명 뭔가가 있어.”
아직은 느낌에 불과하지만 엘레나는 그걸 가볍게 치부하고 넘기지 않았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주시하고 대응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살롱에 도착한 엘레나는 가면을 쓴 메이와 휴렐바드를 대동해 이 층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엘레나가 벽면 옆의 발판을 밟아 비밀 통로를 개방했다.
드르륵.
“……!”
가면 너머의 휴렐바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살롱 내부에 이런 비밀스러운 통로가 숨겨져 있을 거라 짐작도 못 했던 터라 놀라움은 더욱 컸다.
“경, 놀라긴 아직 이르답니다.”
엘레나는 놀리듯 옅게 웃으며 비밀 통로로 발을 들였다. 휴렐바드가 느끼고 있을 당혹감을 먼저 경험한 메이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뒤따랐다. 비밀 통로를 통해 시크릿 살롱의 메인 응접실로 들어서자 휴렐바드의 놀라움은 배가 됐다.
“왔어?”
소파에 앉아 있던 칼리프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집무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에밀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했다.
“어? 이분은?”
“선배도 안면이 있을 거예요. 저의 수호 기사, 휴렐바드 경이에요.”
예술품 거래차 엘레나를 종종 만났던 칼리프가 인사를 건넸다.
“왜 모르겠어?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제대로 소개할게요. 아트 중개사 칼리프입니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살롱의 여주인 L의 오른팔이죠.”
“오른팔?”
휴렐바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오른팔이란 단어가 묘하게 그의 심기를 거슬렸다.
“저쪽은 대륙 십 대 상단인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 님이세요. 살롱의 전반적인 운영과 관리까지 저분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죠.”
에밀리오는 이번에도 가벼운 묵례로 인사했다. 원래 말수가 적기도 했거니와 엘레나가 나서서 소개한 이상 굳이 나설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메이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은 절 돕고 있어요. 이분들이 없었다면 L은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세 사람을 보는 엘레나의 눈길이 따뜻해졌다. 진심으로 그녀를 믿고 따라주는 사람이 있어 든든하고 고마웠다.
“…….”
엘레나와 끈끈한 듯한 세 사람을 보며 휴렐바드는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가 엘레나를 돕고 있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일찍 말하지 않은 엘레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휴렐바드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엘레나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리고 경이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됐네요.”
“공녀 전하.”
“다행이에요. 경이 저를 선택해 줘서. 더는 경을 속이지 않아도 돼서. 진짜 제 사람이 되어줘서.”
엘레나의 옅은 미소를 마주하자 서운하던 감정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오랜 시간 엘레나의 곁을 지켰음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만큼, 지금부터라도 더 간절히 그녀를 돕고 싶었다.
칼리프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대뜸 말했다.
“아, 맞다. 전하께서 아까부터 오셔서 기다리고 계셔.”
“어서 내려가 봐야겠네요.”
엘레나는 내심 궁금했다. 꼬리를 잡는 데까지 성공했는데 그 이상으로 어떤 진척을 얻어냈을지.
“경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
휴렐바드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따랐다. 살롱은 엘레나의 안방이나 다름없거니와 만나는 상대가 황태자 시안이라면 동행하지 않아도 괜찮다 판단했다.
“메이와 칼리프 선배는 휴렐바드 경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알았어. 친절하게 설명해 줄게.”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아가씨.”
엘레나는 소파에 앉을 새도 없이 메인 응접실을 나섰다. 비밀 통로를 통해 살롱 내의 모든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개중 217호 응접실은 시안에게 L임을 처음 공개한 뜻깊은 방이었다.
드르륵.
책장이 밀리며 엘레나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뒷짐을 지고 창가 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엘레나가 예를 갖췄다.
“전하를 뵈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부드럽게 변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장해제가 되는 느낌을 받다니.
“부탁이 있다.”
“부탁이요?”
“나와 함께 있는 동안은 그 가면을 벗어줄 수 있겠나?”
잠시 망설이던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면을 벗었다. 루시아 시절부터 쓰던 갈색 단발머리 가발을 제외하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인 셈이다.
‘언제까지 감출 순 없어.’
엘레나는 스스로의 민낯을 보였다. 베로니카를 쏙 빼닮은 제 모습을.
“이제 되셨는지요?”
“그래.”
빤히 쳐다보는 시안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그러한 동요를 알면서도 엘레나는 모르는 척 넘겼다. 지금 중요한 건 그날의 성과였다.
“가셨던 일은 어찌 되셨나요?”
“재배지를 찾았다. 타노토스 백작가더군.”
“……!”
엘레나의 눈가에 서렸던 놀라움이 점차 환희로 바뀌었다. 피네치아 재배지는 아편 사업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배지를 발견했다는 건 다시 말해 대공가의 자금 사정에 치명타를 줄 수 있단 얘기였다.
“쉽지 않은 일을 해내셨어요.”
“그대의 덕이다.”
시안과 엘레나는 서로에게 공을 돌렸다. 어느 한쪽의 힘만으로는 이런 결과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기뻐하긴 일러.’
엘레나는 긴장의 끈을 더욱 단단히 동여맸다. 재배지를 찾은 건 큰 성과이나 그것만으로는 대공가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의 행동이 정말 중요하다.
“이제 재배지를 찾으셨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세요?”
“우선 대공가가 연관되었다는 증거를 찾고자 한다.”
시안은 정론을 내세웠다. 아편 사업은 인신매매와 더불어 제국에서 금기시하는 불법이다. 시안의 말대로 대공가가 아편 사업의 배후라는 증거만 확보할 수 있다면 위상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찾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할 거야. 리아브릭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리아브릭은 소름 끼치도록 치밀한 여자였다. 처음부터 아편 사업이 발각될 경우 대공가에 손톱만 한 피해도 가지 않도록 꼬리를 자를 수 있게 설계해 뒀을 것이다.
‘타노토스 백작가가 다 뒤집어쓰겠지.’
그럴 바엔 대공가에 시간을 주기보다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는 게 낫다. 엘레나가 말을 아끼고 있자 시안이 먼저 물었다.
“그대는 다른 생각이 있어 보이는군.”
“조금요.”
시안은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말해보아라.”
“재배지를 없애야 해요.”
엘레나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대공가를 옥죌 명분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아뇨, 증거를 남길 만큼 대공가는 어수룩하지 않아요. 꼬리에서 자를 거예요. 몸통은 보지도 못할 공산이 커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
“네, 아편 사업의 몰락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공가에 치명적이니까요.”
엘레나는 그간 L의 신분으로 해온 일에 대해서 시안에게 털어놓을 때가 온 걸 직감했다. 그래야만 재배지를 없애는 것이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대공가를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이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는 내가 베로니카의 대역이란 걸 감출 이유가 없어.’
대공가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엘레나와 시안이 마음을 터놓고 협력한다고 해도 버거운 상대였다. 지금이라도 쥐고 있는 카드를 공개하고 좀 더 긴밀하게 협조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대의 말대로 하지.”
“전하의 현명한 판단에 존중을 표합니다.”
엘레나는 고민 끝에 자신의 뜻을 받아준 시안에게 치맛자락을 들어 보이며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그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 고백할 게 있어요.”
“고백?”
“놀라지 마시길.”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엘레나가 손을 머리 뒤로 보내더니 단단히 고정해 뒀던 가발의 핀을 풀었다.
딱! 고정이 해제된 가발을 벗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꾹 눌러두었던 금발이 폭포수처럼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항상 느끼지만 엘레나는 이 순간이 가장 떨렸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지금껏 그녀를 가려주던 가면을 벗고 자신을 밝히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베로니카 공녀.”
놀랍도록 담담한 시안의 답변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엘레나였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꼭 놀라야만 하나?”
“그건 아니지만…….”
되레 시안이 묻자 엘레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끝을 흐렸다. 그런 엘레나에게 시안은 평소와 다름없는 애틋한 눈길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
“그대가 베로니카 공녀일지도 모른다고.”
당혹스러움에 엘레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간 완벽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알아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어, 언제부터요?”
“학술원에서. 벨라도나의 발표 날 그대를 보자마자.”
“…….”
엘레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우연히 시안과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기는 했다.
‘한눈에 날 알아봤다고?’
항상 변장하고 다녔던 만큼 시안이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게 착각이었을 줄이야.’
진실을 밝힌 건 엘레나인데, 되레 엘레나가 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안의 말은 그런 엘레나에게 경악을 주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었을 뿐, 확신할 수는 없었지.”
“…….”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가면무도회 직후였다. 그대는 베로니카이면서 대공가를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엘레나는 시안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이해가 됐다. 시안이 보기에 엘레나란 인간은 앞뒤가 맞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다 보니 엘레나에 대해 알아갈수록 미궁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나요?”
“그대가 곤란해할 것 같았으니까.”
시안은 맹목적으로 엘레나를 신뢰했다. 따지고 보면 엘레나는 그간 시안을 속여온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항상 지켜보았고 기다렸다.
‘이젠 내 차례야.’
그녀가 기다림에 보답할 차례였다. 엘레나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술을 뗐다.
“전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에요.”
“무슨 의미지?”
시안이 턱을 살짝 당기며 엘레나와 시선을 맞췄다. 베로니카 공녀가 맞는데, 이제 와서는 또 아니라고 하니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전 대역이에요.”
“대역?”
“모종의 이유로 모습을 감춘 베로니카 공녀를 대체하고자 대공가가 세운 대역이죠.”
“……!”
엘레나는 모든 진실을 시안에게 털어놓았다. 대공가라는 공공의 적을 둔 까닭도 있었지만, 지금껏 그녀에게 보인 시안의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보답이자 솔직해지고 싶은 진심도 깔려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엘레나는 재촉하지 않고 시안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고 기다렸다. 워낙 충격적일 수도 있는 얘기인 만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렇군.”
“네?”
긴 정적을 깬 시안의 첫마디에 엘레나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문하고 말았다. 묻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지금 시안의 반응은 너무 무덤덤하다 못해 무미건조했다.
“그게 다인가요?”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저 측은할 뿐. 그대가 이리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음이.”
“…….”
엘레나는 빤히 쳐다만 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시안의 저 한마디가 빗장을 해제하고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이자, 신여성 L로 불리며 많은 명성과 평판을 쌓으면서 엘레나는 늘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베로니카 공녀의 행세를 할 때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랬기에 시안의 저 말이 훅 치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깊숙이 꽁꽁 숨겨두었던 엘레나의 가장 나약한 곳을 건드렸으니까.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시안은 그 와중에도 제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엘레나를 안타깝게 여기며 걱정하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동정받는 게 싫지 않다니.”
“동정이 아니라 위로다.”
“어느 쪽이든 저를 위한 말이잖아요.”
엘레나는 웃었다. 저 진심 어린 마음이면 족했다.
“전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제가 베로니카일지도 모른다는 걸 오래전부터 짐작하셨다고 했죠?”
“그랬지.”
“황실과 대공가는 양립할 수 없는 사이잖아요. 짐작이라고 해도 제가 베로니카라 생각하셨다는 건데…… 왜 절 밀어내지 않으셨나요?”
엘레나는 꼭 묻고 싶었다. 원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지금 역시 황실과 대공가는 앙숙이다. 지난 삶에서 그는 베로니카의 황태자비 책봉을 막기 위해 세실리아와 기습적으로 약혼하면서까지 대공가를 배척했다. 선발식을 거쳐 엘레나가 황비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공가의 여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엘레나는 애정 대신 시안의 경멸 어린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내가 아는 전하라면 관계를 끊으시고도 남으실 분인데.’
그랬던 시안이 엘레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베로니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으면서. 시안은 담담히 의문에 대한 답을 줬다.
“짐작은 짐작일 뿐, 확실치 않은 일로 그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진짜 베로니카였다면 어쩌시려고…….”
엘레나는 말을 흐리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대체 자신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신경 쓰이지 않게 되더군.”
“…….”
“처음엔 그 이유가 그대의 현명함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시안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유 따위는 없었다.”
“네?”
“그냥 그대였기에 좋았을 뿐.”
“……!”
시안의 예고 없는 고백에 엘레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과거에 그랬으니까 지금도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시안은 사적인 감정을 드러냈고 엘레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연했다.
“나 역시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세요.”
엘레나는 미묘하게 떨리는 감정을 숨기고자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렌, 그자와는 어떤 사이지?”
“렌이요?”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안을 쳐다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렌의 이름이 시안의 입에서 나온 것도 이해되지 않는데, 질문을 던진 시안의 눈길이 여느 때보다 무겁고 진중했다.
“딱히 규정할 순 없지만 좋은 사이는 아니에요. 베로니카 행세를 할 때는 원수진 육촌지간이고, 전하께서도 보셨겠지만 학술원에서는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망나니였으니까요.”
“그게 다인가?”
“네, 다예요.”
문득 검술제에서 패배하고 스펜서 자작에게 뺨을 맞던 렌이 떠올랐다. 엘레나가 본 렌은 자기 상처마저 어쩌지를 못하는 남자였다. 알량한 선심일 수도 있지만 엘레나는 렌의 상처를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날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변하기도 했고.’
시크릿 살롱의 개장 날, 대공가로 돌아간 엘레나는 대낮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렌을 보며 바짝 긴장했었다. 또 무슨 빌미로 시비를 걸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근데 웬걸. 자신을 보러 왔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더니, 정말 얼굴만 실컷 보더니 돌아갔다. 어울리지 않게 뭐라도 잘 챙겨 먹으란 말까지 하고.
“그렇군.”
순간 착각이었을까. 시안의 눈빛에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을 읽은 것 같았다.
“렌 선배에 대해서는 왜 물으신 거예요?”
“가면무도회가 있었던 날, 상대를 미행하던 도중 그자를 만났다.”
“렌을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그날 렌과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엘레나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재배지의 위치까지 알려줄 정도면 우연이 아니네요.”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다.”
“아편을 쫓고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저를?”
이쯤 되면 엘레나는 그간 렌이 보인 이해하지 못할 언행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엘레나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
“무슨 말을요?”
“자신의 도움으로 웃어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나는 아니니, 그대일 것이다.”
“……!”
엘레나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멍했다. 렌이 재배지를 가리켜 주며 한 말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엘레나와 시안이 손을 잡고 계략을 짰다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이었으니까. 그건 엘레나가 해온 일과 L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단 말과 다름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하,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엘레나가 L이란 것까지? 아니면 베로니카라는 것까지?
‘그 이상일 수도…….’
엘레나는 연이은 의문의 꼬리를 잘라냈다. 뭔가를 단정 짓기엔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다 그렇다 쳐. 내 정체에 대해 알았다면 왜 지금까지 침묵하는 거지?’
지난 삶의 렌은 악마였다. 엘레나가 대역인 걸 알아낸 뒤로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괴롭히고 이용했다. 근데 왜 이번엔 그러지 않은 걸까? 그리고.
‘……웃어줬으면 좋겠다니?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다. 왜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 그리고 무슨 꿍꿍이인지. 그냥 모른 체하기에 렌은 예측이 불가능한 위험한 남자였으니까.
“렌 선배를 만나볼게요. 몰랐다면 모를까, 다 알고 있다니 신경이 쓰여 가만있을 수가 없네요.”
이젠 감춘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엘레나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대가 부담이 된다면 내가 만나지.”
“아뇨, 제가 할게요. 그래야 해요.”
이건 시안이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사자인 엘레나가 직접 해결해야만 했다.
‘최악도 대비해야 해.’
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류의 인간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에 따라 계획 수정도 불가피했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던 시안이 회중시계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야겠구나.”
엘레나가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배웅하고자 함이었다.
“살롱을 나서면 그대는 베로니카로 돌아가는 건가?”
“네.”
“자칫 L이란 게 발각되면 위험한 거 아닌가?”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시안을 안심시켰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껏 잘해왔고, 오지랖인 걸 알지만 신경이 쓰여.”
엘레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누군가의 걱정이 이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느꼈다.
“아직 베로니카 대역으로 할 일이 남아 있어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빌렘 백작가로 기별을 넣도록.”
“귀찮을 정도로 기별 넣을게요.”
장난스러운 대꾸와 달리 엘레나의 머릿속에는 대공가를 차츰차츰 무너뜨리기 위한 다음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초기에는 베로니카 대역으로 대공가의 뿌리를 흔들고, L의 신분으로 대공가의 외부를 압박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시안과 손을 잡게 되면서 엘레나가 계략을 짤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예전 같지 않다지만 황실을 움직여 대공가에 압박을 가할 수도 있고, 피네치아 재배지를 밝혀낸 것처럼 시안의 무력과 행동력을 앞세울 수도 있었다.
“꼭 그대가 내가 귀찮을 만큼 기별을 넣었으면 좋겠군.”
“노력해 볼게요.”
시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연해서 엘레나조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웃었단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오늘 자정에 살롱에 머물러 줄 수 있을까?”
“오늘이요?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 거예요?”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 보여준다는 건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강요는 아니다. 그저 바람일 뿐.”
“남을게요.”
엘레나에게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리아브릭의 태도가 원 역사와 달라진 만큼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그래도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만큼 늦게 귀가하는 건 어느 정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마침 오늘 살롱에서 연회가 있어서 핑곗거리도 있고.’
또 시안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남는다 하더라도 후회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고맙군.”
“그냥 살롱에 있으면 되는 건가요?”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날이 바뀌는 자정에 살롱 제일 높은 곳에 올라 동남쪽을 봐주면 된다.”
“난해한 바람이네요. 뭔지 모르지만 기대해도 되는 거죠?”
엘레나의 작은 투정에 시안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실망하는 일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 * *
시안이 떠나고 난 뒤, 엘레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메인 응접실로 돌아왔다. 자리를 비운 사이, 휴렐바드는 소설에서나 볼 법한 엘레나의 성공 스토리를 칼리프를 통해 전해 들었는지 제 주인을 향한 선망과 존경심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떨어질 줄 모르는 눈길에 부담을 느낀 엘레나가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칼리프를 추궁했다.
“대체 휴렐바드 경에게 무슨 얘길 한 거예요?”
“나? 있는 그대로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얘기한 게 다인데?”
칼리프의 능글맞은 대꾸에 엘레나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메이.”
“사실이에요. 저도 옆에서 들었지만 딱히 과장된 얘기는 없었어요.”
메이까지 나서서 거들자 엘레나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 계속 그런 눈으로 볼 거예요? 저 부담스러워요.”
“죄송합니다.”
입은 그러지 않겠다고 하나 휴렐바드의 눈길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런 주인을 모시고 있음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폈다. 엘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선배, 크리스티나 님에게 연락해서 드레스랑 구두 좀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
“어? 어! 연회에 참석하게? 일찍 들어가야 한다며?”
칼리프가 뭔가 짐작한 듯 쳐다보자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귀가해야 할 이유가 생겨서요.”
엘레나는 모처럼 살롱의 여주인 노릇을 톡톡히 할 생각이었다. 칼리프와 에밀리오가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지만, 살롱의 정신적 지주는 엘레나다. 살롱이 더 유명세를 타기 위해선 L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진작 그래야지! 너 보려고 온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핑계 대며 돌려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엘레나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엄살이라기보다 하소연에 가까웠다.
“그 정도였어요?”
“오죽하면 너보고 신비주의자래. 일부러 신비주의 조성하느라 얼굴도 안 비치는 거라고.”
살롱을 찾는 고객 중에 L을 보고자 방문하는 이들은 절반이 넘었다. 감출수록 상상력을 자극하듯이 가면 너머 그녀의 미모가 궁금해 찾아온 이들도 있었고, 토론회에서 보여준 엘레나의 지적인 매력에 매료된 지식인들도 살롱의 문턱을 넘었다. 보이지 않는 L의 존재감이 살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나쁘지 않네요. 이유야 어쨌든 간에 저의 부재와 별개로 L의 영향력은 더 커진 셈이잖아요.”
“야. 그거 때문에 죽어나는 나는 안 보이냐?”
엘레나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왜 모를까. 안살림을 책임진 에밀리오와 대외적 활동을 도맡은 칼리프가 없었다면 단시간에 살롱이 이만큼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엘레나는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다만, 칼리프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티를 내지 않았다.
“오늘 공개 토론회도 있지 않아요?”
“조금 있으면 시작해. 참관하게?”
“네, 혹시 참가자 명단 좀 볼 수 있을까요?”
칼리프가 서랍에서 토론회 참가 명단을 꺼내 엘레나에게 건넸다. 명단에 적힌 자칼린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엘레나가 눈을 빛냈다.
“크리스티나 님을 모셔오는 데 오래 걸릴까요?”
“부티크에 계신다면 바로 오실 수도 있긴 한데…….”
“언제쯤 도착하나 확인 좀 해주세요. 웬만하면 공개 토론회 참관하고 싶네요.”
엘레나의 시선이 명단에 적힌 자칼린이라는 이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비운의 연설가 겸 사상가 자칼린.’
그 역시 엘레나가 후원하던 시대적 거장 중 한 사람이다. 말이 후원이지 틈틈이 굶어 죽지 않게 메이가 식량을 챙겨준 게 다다. 그러다 보니 은혜라고 할 게 없었고 관계가 더욱 발전하지 못해 접점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조만간 자칼린이 뭘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딱 나타날 줄이야.’
자칼린은 계몽주의를 주장한 새 시대의 축이다. <통치론>의 저자로 과거 고대 신성 제국으로 회귀하여 시민에게 주권을 주어 시민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엘레나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계몽사상의 주체는 평민들이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래야만 시민 대표가 황실과 귀족의 일방적 정책과 횡포를 억제하고 그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칼린의 계몽사상은 라파엘의 작품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걸로 아는데…… 원 역사와 사상이 달라지진 않았겠지? 그러면 곤란한데.’
엘레나는 그 점을 살짝 우려했다. 평민 출신의 자칼린은 학술원에 재학하다 귀족 자제들의 권위 의식과 특권 의식에 질려 자퇴를 한 뒤, 골방에 박혀 폐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더는 살아봐야 의미가 없다며 거리를 나왔다가 우연히 라파엘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미술 작품들이 수백 년간 발전이 없이 획일적인 기법과 표현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면, 라파엘의 작품은 그러한 틀과 구조를 완전히 부쉈기 때문이다. 그날이 전환점이 되어 자칼린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귀족 중심의 사회를 탈피해야 한다고. 변화가 아니라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의 밑바닥인 민중들의 계몽이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공개 토론회에 참가하는 거 봐선 별문제 없을 거 같긴 한데…… 확인은 해봐야겠지.’
엘레나가 라파엘의 작품에 영향을 끼쳐 원 역사와 다른 라파엘의 작품을 보고 자칼린이 어떠한 영향을 받았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때마침 자리를 비웠던 칼리프가 돌아왔다.
“지금 옆방에 크리스티나 님 오셨어. 어서 가봐.”
“벌써요?”
엘레나가 놀라서 반문했다. 사람을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빨리 도착한 것이다.
“뮤즈가 찾는데 만사 제치고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더라.”
유쾌한 크리스티나를 떠올리자 엘레나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언제 만나도 유쾌하고 반가운 사람이었다.
“전 일어나 볼게요. 아, 선배. 토론회 끝나면 자칼린 님과 자리 좀 마련해 주세요.”
“자칼린? 그게 누군데?”
생소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칼리프가 공개 토론회 참가 명단을 확인했다. 소개 글에는 최근 수도 광장에서 빈번하게 모이는 집회의 연설가로 평민들의 지지를 받는다고 적혀 있었다.
“오, 연설가. 이 사람도 섭외 들어가는 거냐?”
“섭외라니요. 극단도 아니고. 학식이 출중하다기에 얘기나 좀 나눠보려고요.”
“그게 그거지. 얘기를 나누다 보면 맘도 통하고, 그러다 보면 계약서 서명하고. 자리는 마련해 두마. 그보다 크리스티나 님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메인 응접실을 나가 옆방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화려한 공작새 가면을 쓴 크리스티나가 손뼉을 치며 반갑게 엘레나를 반겼다.
“L! 이게 얼마 만이에요? 나 너무 반가워서 심장 멎을 뻔했잖아요.”
“잘 지내셨고요? 무리해서 와달라고 한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엘레나가 미안해하자 크리스티나가 손사래를 쳤다.
“무슨 섭섭한 소리예요. L이 부르는데, 만사 제쳐놓고서라도 와야죠. 급하단 얘기 들었어요. 보세요. L을 위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제작한 신상 드레스예요.”
마네킹에 걸린 신상 머메이드 드레스를 위아래로 살펴보던 엘레나가 감탄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선이나 패턴, 라인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
신상 드레스의 퀄리티와 세련됨이 엘레나가 황비 시절 입던 것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엘레나의 후원으로 디자인 외적으로 신경 쓸 일이 사라진 만큼 재능이 만개하는 시기가 앞당겨진 것이다.
“예뻐요. 제가 입기 아깝단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런 말 마세요. L이 아니면 누구도 소화 못 해요!”
낯부끄러운 칭찬에 엘레나가 수줍어했다.
“크리스티나 님은 절 민망하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는 거 같아요.”
“사실인걸요. 어서 입어봐요.”
크리스티나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은 엘레나가 거울 앞에 섰다. 이전보다 더 슬림하게 몸에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살렸다. 그러면서도 문양과 패턴으로 한껏 고급스러움을 살려 품격을 더했다.
“어쩜, 이 핏 좀 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 있죠? 몸에 군더더기가 없어. 아, 감탄만 나와요.”
“죄송한데, 좀만 자제해 주시면…… 남들이 들을까 부끄러워요.”
“내가 없는 말 지어냈어요?”
크리스티나의 낯부끄러운 얘기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엘레나가 치장을 끝내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 독수리 가면을 쓴 칼리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지금 토론이 한창이야.”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공개 토론장에 입장했다. 타원형 구조의 토론장에서는 가면을 쓴 열 명의 사내가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엘레나는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자 사각지대 관람석에 앉았다.
“저기 L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근데 드레스 정말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여요. 자꾸 눈길이 가네.”
“오늘 연회 참석했으면 하네요. 귀족 여성의 덕목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토론에 방해가 될까 조심한다고 했는데 몇몇 관람객이 그런 엘레나를 알아보고는 수군거렸다. 다행인 건 토론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기 박쥐 가면을 쓴 남자가 자칼린이야.”
명단을 확인한 칼리프가 속삭이자 엘레나의 시선이 자칼린에게 고정됐다. 첨예한 주장과 반박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자칼린은 차분했다. 자칫 감정적으로 변질될 수도 있음에도 그는 차갑게 이성을 유지했다.
“인간보다 신을 우선시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현재의 소망과 행복이 더 귀하다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나흘을 굶은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뭐가 우선인지를.”
“신이 있기에 인간이 있는 거요. 궤변은 그만두시오!”
“궤변이라뇨. 그 또한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신앙과 인간은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저, 저런 불경한!”
자칼린의 주장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백조 털 가면남이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신앙심이 강한 그에게 신학과 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떼어놓는 건 성서에 위배로 여겨졌다.
‘위험해.’
말수가 많진 않지만 똑 부러지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자칼린을 보며 엘레나는 조마조마했다. 시대적으로 앞서 나간 사상가이자, 민중의 마음을 울린 연설가임에는 분명하나 한 가지 결점이 있었으니, 너무 급진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가 비운의 사상가이자 연설가로 불리게 된 것도 그러한 급진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이 컸다. 민중들의 계몽에 이바지했지만 과격하게 신학을 비판하고, 시민의 권리와 주권을 주장하며 귀족과 가이아 교단의 미움을 사고 만 것이다.
‘결국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고 말았지.’
엘레나는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대공가를 몰락시키기 위해서는 자칼린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더 나아가 그의 사상은 제국을 바꾸려는 시안에게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그를 살려야 해.’
엘레나는 오래도록 그를 눈에 담았다.
절정으로 치달은 토론은 예상외로 맥 빠지게 끝이 났다. 절실한 신앙심을 지닌 백조 털 가면남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이성적인 비판이 아닌, 감정을 앞세운 비방을 한 까닭이었다. 결국 토론의 중재를 맡은 이가 파장을 고했다.
“경고하는데,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신격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니까.”
토론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백조 털 가면남은 씩씩거리다가 돌아갔다. 그 역시 학식과 지식을 두루 갖춘 지성인이자 학계에서 명망 높은 철학자였다. 그런 그가 저런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제국민에게 가이아 교단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참관인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 이교도가 분명해. 저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다니.”
“살롱에 따져야 하는 거 아닐지 모르겠군. 저런 자를 토론장에 올리다니.”
“충격적이네요. 신이 있기에 우리가 있는 걸 부정하는 말이나 다름없잖아요?”
수군거리며 삼삼오오 공개 토론장을 나가는 참관인들도 자칼린을 비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신앙만큼은 불가침 영역이었다.
‘사람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저런 사상을 드러내다니. 저러니 밉보일 수밖에.’
객석에서 일어난 엘레나가 토론장을 빠져나왔다. 몇몇 이가 엘레나에게 말을 걸고자 다가왔지만 미소를 지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사전에 약속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 사이의 다탁에는 끓인 물과 홍차 잎이 구비되어 있었다.
똑똑.
찻물을 우려내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연 칼리프가 검정 가면을 쓴 자칼린을 들여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각이 진 턱과 가면 사이로 설핏 드러난 우직한 눈빛이 눈에 띄었다. 그의 고집스러움을 우회적으로 보여줬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길.”
엘레나가 다탁 건너편 소파를 권하자 자칼린이 다가와 앉았다. 마침 딱 마시기 좋게 우러난 홍차를 찻잔에 따라서 그에게 건넸다.
“기호를 모르기에 홍차로 준비했어요.”
“뭐든 괜찮습니다. 차를 즐길 만큼 넉넉지 않게 살아서.”
자칼린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L이에요.”
“자칼린입니다.”
시크릿 살롱은 신분과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 L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자칼린은 스스로를 밝히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제 정체를 토론의 주최측에서 모를 리도 없거니와 나름의 인연이 L과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의 말씀을 이제야 드릴 수 있게 됐군요. 덕분에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 앞에 음식을 쌓아놓는데…… 굶어 죽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더군요.”
“그러라고 가져다 놓은 거예요.”
엘레나가 찻물을 한 모금 음미하고는 찻잔을 내려 놓았다.
“오늘 토론 참 뜻깊게 봤어요.”
“저 역시 L의 토론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엘레나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깊어 보이는 그 눈길을 자칼린도 피하지 않았다.
“저는 우리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요.”
“목적지가 같다고 가는 길이 같지는 않죠.”
엘레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누구하고도 섞이지 않고, 섞이길 바라지 않는 사내였다. 원 역사에서도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들고, 고독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엘레나는 그런 그가 변하기를 바랐다.
“당신이 오래 살았으면 해요.”
“길고 가늘게 사느니, 불꽃처럼 살다 가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면 되겠네요. 심지와 기름은 제가 제공하죠.”
검은 가면 너머 자칼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렇게까지 그의 목숨에 연연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말했잖아요. 오래 살았으면 한다고.”
“그 이유를 묻는 겁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으니까요. 자칼린 님이 오래 사셔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바뀌지 않겠어요?”
원 역사에서 자칼린이 화형을 당한 뒤에도 계몽사상의 정신은 이어졌다. 그러나 주체를 잃은 만큼 그 동력과 힘이 많이 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제가 뭐라고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명대로 살다 가렵니다.”
자칼린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엘레나는 그런 그의 심지를 흔들 만한 말을 던졌다.
“수도에 학교를 세울 거예요. 그리고 평민을 대상으로 한 무상교육을 실시할 예정이에요.”
“……!”
자칼린의 눈이 커졌다. 교육은 계몽사상의 가장 큰 과제이자, 난제였다. 제대로 배우고 깨우쳐야만 부당함을 부당함이라 말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하물며 먹고사는 게 우선순위인 평민들에게 학비를 바랄 수도 없다. 이러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혀주겠다고 엘레나가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저는 수도에 다섯 개의 학교를 더 설립할 계획이에요. 후원은 제가 하니, 자칼린 님은 초대 학장이 되어주셨으면 해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저 역시 바라니까요. 세상이 변하기를. 그러자면 자칼린 님이 사셔야 하고요.”
엘레나는 몰락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성장했다. 선택권이 없는 삶, 거절할 수도 없는 삶, 일방적인 삶을 사는 평민들은 귀족들의 인식에 가축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죠. 신앙 비판, 신분제 타파, 다 좋아요. 하지만 이 시대가 자칼린 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
“불나방처럼 의미 없이 죽고 싶진 않잖아요? 의지로만 세상을 바꿀 수 없어요. 사세요. 사셔서 세상을 관철시키세요.”
자칼린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사상을 이렇게 깊숙이 이해하고 동조한 이는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엘레나는 동요하는 자칼린을 보며 결정타를 날렸다.
“헛되이 죽지 않겠다 약속하시면 후원을 약속하죠. 나아가 시대의 변혁을 앞당길 수 있는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변혁을 앞당기는 분? 그게 누구입니까?”
자칼린이 반응하자 엘레나가 백옥처럼 희고 얇은 검지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제국의 태양이 되실 분이죠.”
* * *
시크릿 살롱의 메인 홀은 가면을 쓴 신사 숙녀들로 넘쳐났다. 주기적으로 연회 겸 음악회, 전시회, 공연을 하는 만큼 많은 이로 북적거렸지만 유독 오늘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인파가 모였다. 공개 토론회에 모습을 드러낸 L이 오늘 있을 연회에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많은 귀족 영식과 영애들이 살롱을 찾았다.
메인 홀로 내려가는 계단 옆 모퉁이에 선 칼리프가 북적거리는 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여? 다 너 보겠다고 온 사람들이야.”
“제가 뭐라고 저렇게 모인 걸까요.”
엘레나는 홀 아래 모인 사람들을 보며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살롱 개장일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린 듯했다.
“네가 살롱 활동을 안 하니까 더 안달이 난 거야. 괜히 신비주의자라고 하겠냐?”
“재미있네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은 절 가만두질 않으니.”
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교향곡이 변했다. 대양처럼 잔잔하면서도 파도처럼 거친 기운을 품은 곡이 연주되자 엘레나가 발을 내디뎠다.
칼리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층계참에 등장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시크릿 살롱의 주인 L이 귀빈분들께 인사 올립니다.”
엘레나가 상체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갖추자 더 힘찬 박수가 그녀를 환영했다.
“그간 자주 인사를 드리지 못한 걸 사과드리며, 오늘만큼은 여러분께 다가가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음악과 예술, 사교와 사람이 어우러진 오늘 연회를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환영사를 마무리한 엘레나가 메인 홀로 걸어 내려왔다. 카펫에 구두 굽이 닿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L,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꼭 뵙고 싶었어요. 요새 학술원에 L처럼 되고 싶은 여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실 거예요.”
“살롱의 규칙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레이디에게 말을 걸며 저를 소개할 수 없다니요. 오늘도 예외일 순 없겠죠?”
지난 삶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연회에 참가하며 사교에 잔뼈가 굵은 엘레나였지만 오늘처럼 정신이 없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노련했다. 과거의 경험을 살려 특정인에게 편중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다수와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맥을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받아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신없이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시간이 늦어졌지만 엘레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줄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맘때쯤 파장을 했어야 할 연회장에 엘레나와 한마디라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칼리프가 슬쩍 다가와 시간이 됐음을 알렸다. 엘레나는 대화를 나누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묵례를 하며 층계참에 올라간 엘레나가 모퉁이에서 돌아 퇴장했다.
“지치네요.”
긴장이 풀렸는지 엘레나의 얼굴은 고단해 보였다.
“말이 안 나오네. 옆에서 떠드는 입이 몇 갠데, 그걸 다 듣고 상대해 주냐?”
“별로 어렵지 않아요. 목소리로 기억하고, 대화의 레퍼토리는 특정 몇몇을 제외하고 비슷하니 상황에 맞게 대답하면 돼요.”
별거 아니라는 듯 구는 엘레나를 보며 칼리프가 고개를 저었다.
“몇 시예요?”
“날 바뀌기 십 분 전이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피곤할 텐데 가서 쉬세요. 저 혼자 올라가 볼게요.”
“그래도 괜찮겠어?”
“애도 아니고 뭐 어때요. 어차피 여긴 출입 통제구역이고 첨탑은 높아서 외부 침입도 못 해요.”
“그럼 가서 쉴게. 요새 무리했는지 너무 힘들다.”
칼리프를 돌려보내고 홀가분하게 혼자가 된 엘레나가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살롱의 돔 형태 지붕 위에는 옥상 역할을 하는 첨탑이 존재했다. 수도에서 황궁을 제외하면 손에 꼽을 큰 건축물이다 보니 전경이 훤히 보였다.
“여기구나.”
옥상 첨탑에 도착하자 청량하고 시원한 밤바람이 엘레나를 맞이했다. 힘들다는 생각도 잊은 채 달빛 아래로 비치는 수도의 광활한 야경에 한동안 넋을 놓았다.
‘뭘 보라고 하신 거지?’
난간에 살짝 걸터앉아 시안이 일러준 방향을 응시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도 별다른 일이 없자 의아함을 가질 때였다.
“자정은 아까 지난 거 같은데…… 어? 어!”
저 멀리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 * *
시안은 밤마저 몰아내고 대낮처럼 사위를 밝히며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들어온 백작가 내 재배지의 면적은 시안이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넓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대규모 피네치아 재배지를 갖춘 것도 대단했지만, 교묘하게 사각을 이용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방법은 더 대단했다.
“잘도 타는군.”
시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엘레나를 떠올렸다. 대공가에 대한 엘레나의 증오심은 진짜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대공가의 몰락을 바랐으며 그러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치열했다. 이 불길은 그런 엘레나를 향한 시안의 작은 선물이었다. 날이 건조한 까닭인지 손톱만 한 불씨가 순식간에 번지며 집채만큼 커졌다.
“재배지에 전부 불을 놓았습니다.”
린든 백작은 백작가 내에 분산된 열한 군데 재배지에 불을 질렀다.
“피해는?”
“세 명이 죽고, 한 명이 팔을 잃었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잃었군.”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시안은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철저히 준비하고 기습했지만 적들의 저항이 예상외로 거셌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이 우월했고 죽음도 불사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시안이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진두지휘했지만 전부를 챙길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빌렘 백작가 소속의 기사 셋이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다른 한 명도 불구가 되었으니 기사로서 삶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시신을 잘 수습해 장사 지내주어라.”
“물론입니다. 그보다 잘도 타는군요.”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며 린든 백작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불어난 불길은 재배지를 활활 태우며 재로 만들었다.
“두 번 다시 이 제국 땅에서 아편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불길을 바라보며 시안은 다짐했다. 썩은 뿌리는 도려내서는 안 된다고. 뿌리째 뽑아 다시는 이런 일을 재발시키지 않겠다고.
“너무 지체했습니다. 물러나시죠.”
“불길이 더 번지지 않겠지?”
시안은 재배지를 불태우는 와중에도 불길이 잘못 번져 무고한 거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우려했다.
“네, 바람도 없고 불이 옮겨붙을 만한 건 싹 다 치웠습니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뺐다. 린든 백작도 수하들을 추슬러 뒤를 따랐다. 시안 역시 몸을 날리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재배지의 불길을 빤히 보았다. 이글거리는 불꽃 너머로 엘레나의 얼굴이 맺혔다.
“그자가 그랬지. 이 일로 그대가 웃어주길 바란다고.”
시안은 렌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어떤 감정인지 알 거 같아서. 표현의 방식은 달랐지만 엘레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았기에.
“감히 약속하마. 그대의 미소를 지켜주겠다고. 언제까지고.”
웃게 하는 것보다 그 미소를 지켜주는 게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 고단하고 힘든 일을 시안은 감수할 생각이다. 렌보다는 조금 더 많은 걸 해주고 싶었다.
시안이 담 너머로 몸을 날렸다. 인기척이 사라진 백작가엔 활활 타오르는 불길만이 남았다.
* * *
“불이…….”
엘레나는 동남쪽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며 얼이 나갔다. 저 불길의 근원지가 어딘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피네치아 재배지였다. 시안이 그곳을 습격했고 불을 놓아버린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어요, 이런 거…….”
엘레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시야의 답답함을 없애고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엘레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거세지는 불길만큼이나 진해졌다. 너무 후련하고 통쾌해서.
지금쯤 보고를 받고 일그러질 리아브릭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또, 프란체 대공의 안색이 어두워질 걸 상상하니 꽉 막힌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엘레나는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불길을 지그시 바라봤다. 도무지 질리지 않았다. 저 불꽃을 더더욱 키워 대공가를 싹 다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건국일에 본 폭죽놀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건국일은 제국의 축제였다.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놀이는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그 황홀하고 찬란한 광경의 여운이 오늘부로 희미해졌다.
“내 생에 최고의 불꽃놀이예요.”
엘레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저 불길이야말로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불꽃 세례였다.
아.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지난 삶부터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는 게. 그간 여러 루트를 통해 대공가의 자금에 타격을 줬지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결과물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재배지가 활활 타며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모습이 더 통쾌하게 느껴졌다.
엘레나가 반쯤 걸터앉아 있던 엉덩이를 난간에서 떼며 일어섰다.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단정히 하고는 더욱 거세지는 불길을 향해 몸가짐을 바로 했다.
꾸벅.
머메이드 드레스의 선이 무너지지 않게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며 품위 있게 인사 올렸다. 그건 그곳에 있을 시안을 향한 예의였다.
“감사드립니다, 전하. 이 밤을 잊지 않을게요.”
그날. 엘레나는 꼭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꺼지지 않는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쭉. 동이 틀 때까지. 오랫동안.
* * *
“뭐, 뭐라고?”
새벽녘,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집무실로 온 리아브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공가의 실무를 맡은 이래 오늘처럼 사색이 되고 목소리가 떨리는 건 처음이었다.
“다시 말해봐.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그, 그것이…….”
“그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똑바로 말 못 해!”
리아브릭이 악쓰듯 추궁하자 아틸이 움찔했다. 그럼에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건 보고할 면목조차 없어서다.
“재배지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고 합니다.”
“…….”
초점을 잃은 리아브릭의 눈동자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늘 이성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성을 유지할 재간이 없었다.
“차분하게 다시 얘기해 봐. 지금껏 있던 일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지난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재배지를 습격했습니다.”
“설마 그자들이?”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리아브릭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실수했어. 라인하르트가의 월포드 경이 실패했을 때 직접 나섰어야 했는데.’
한순간의 판단 실수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피해는?”
“정확한 건 불길이 잡혀야 알겠지만, 더 이상의 재배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아틸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흐렸다. 재배지가 불에 타버렸으니 장기적으로 아편 유통으로 인한 수입은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리아브릭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재배지는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후속 대처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했다. 문제는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림자 기사단원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화가 재배지를 사수하는 그림자 기사단에게 향했다. 그림자 기사단은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제1기사단과 제2기사단과 달리 음지에서 암묵적으로 대공가의 명령을 이행하는 기사단이다. 실제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랄까. 공식적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강함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목격자의 말로는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고…….”
“하.”
리아브릭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수습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재배지의 소실로 인해 장기적으로 대공가가 입을 피해 액수가 머릿속에 아른거려 떠날 줄 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이야.’
안 그래도 L의 알 박기로 인해 빈민가 땅 매입에 예상외로 막대한 지출이 발생했다. 또 천연 대리석 공급 계약을 무려 시가의 다섯 배에 맺으며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엘레나가 사들인 예술품의 지출 비용이 리아브릭의 예상을 훨씬 웃돌 정도로 많았다. 물 만난 고기처럼 돈을 펑펑 쓴 것이다. 리아브릭은 이를 악물고 봐줬다. 프란체 대공이 허락한 일이거니와 예술품이란 게 시간에 비례해 가치가 오르기 때문이다.
한데, 최근 들려오는 예술계의 동향은 불안했다. 라파엘이 벨라도나를 발표한 시점부터 예술계에 지각변동이 왔다. 정형화를 깬 예술품들이 유행하며 과거의 예술품을 배척하는 형상이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팔려는 사람은 많은데 사려는 사람이 없어 가치가 쭉쭉 하락하고 있었다.
‘너무 안일했어. 믿고 맡겼으면 안 됐는데.’
뒤늦게 엘레나의 작품 매입을 막았지만 이미 막대한 손해를 입은 뒤였다.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
마땅한 타개책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리아브릭이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습을 드러낸 프란체 대공은 가벼운 옷차림새였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다 보니 따로 보고를 받자마자 리아브릭을 찾아온 것이다.
“대, 대공 전하.”
“내가 들은 얘기가 사실은 아니겠지?”
“재배지와 관련된 얘기라면 사실입니다.”
리아브릭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꾸하자 프란체 대공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부들부들 떠는 손이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죄송합니다.”
리아브릭은 머리를 조아렸다. 아편 사업은 리아브릭이 직접 관리한 만큼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용서받지 못할 수도.’
프란체 대공은 믿고 맡기되, 한 번 눈 밖에 나면 거들떠보지 않았다. 또한 실수를 용납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리아브릭은 숨을 죽였다. 어쩌면 오늘이 대공가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몰랐다.
“죄송? 실망스럽기 짝이 없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말을 네 입에서 들을 줄이야.”
분을 삭인 프란체 대공이 치켜들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는 더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리아브릭을 노려보더니 접대용 소파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놀라운 인내심으로 분노를 다스린 그의 눈길은 여느 때보다 차가웠다.
“십 년 전인가? 근본도 알 수 없는 계집애가 어찌나 당돌하던지 참 눈이 가더군. 또 머리는 어찌 비상하던지, 얘가 크면 어떨지 기대가 컸어.”
‘위험해.’
과거 얘기를 꺼내는 프란체 대공을 보며 리아브릭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프란체 대공을 가까이서 모셔왔기에 지금 그가 어떤 심리로 옛이야기를 꺼내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어쩌면 살지 못할지도.’
차라리 뺨을 맞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순간의 분노가 아닌 냉정함으로 돌아간 프란체 대공의 머릿속엔 리아브릭의 쓸모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만약 쓸모가 없단 결론이 나면 내쳐지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리아브릭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될 대공가의 치부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전임자가 그랬듯 입막음 때문이더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계집은 내 기대 이상으로 성장했고, 한 번도 날 실망시키지 않았지. 바로 어제까지. 아, 가슴 아프게도 과거형이 되어버렸군.”
“제발, 용서를…….”
리아브릭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땅에 쿵쿵 박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이마에 피멍이 들고 핏자국이 카펫에 묻었다.
“용서라. 십 년간 공들인 재배지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는데 살길 바란다?”
“……살아서 만회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리아브릭은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자고 그간 악착같이 살아온 게 아니다. 그녀가 바라는 욕망을 손에 쥐려면 무조건 살아야만 했다.
“참 무책임한 말이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의 궤변이기도 하고.”
“부디 용서를…….”
“인간에겐 타고난 그릇이라는 게 있지. 어쩌면 자네의 그릇은 여기까지일지도 몰라.”
프란체 대공의 무덤덤한 저 말이 리아브릭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그녀의 한계를 규정하며 필요 가치가 없음을 명시한 까닭이다.
‘틀렸어. 이대로는 살 방법이 없어.’
당장이야 리아브릭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이 대공가의 후원을 받으며 학술원에서 수학한 천재가 빈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리아브릭은 결심했다. 전부를 잃기 전에, 일부를 내려놓기로. 그 첫 번째는 자존심이었다.
“대공가의 개로 살겠습니다.”
리아브릭은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비굴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건 헛소리다. 살아야 한다. 살아 있어야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다.
“때리면 맞고 짖으라면 짖으며 살겠습니다.”
“…….”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리아브릭이 간절히 애걸했다. 남은 건 프란체 대공의 선택이었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프란체 대공이 작게 실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개라.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표현이야.”
‘목소리가 누그러졌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아브릭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살 수 있단 희망을 본 까닭이다.
“고개를 들라.”
리아브릭이 머리를 들자 삐딱하게 턱을 괴고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프란체 대공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리아브릭은 피하지 않았다. 단호한 결의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대책은?”
“……!”
프란체 대공이 툭 던진 물음에 리아브릭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살았다. 후속 대책을 요구하는 건,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는 방증이었다.
“그마저도 없이 용서를 바란 건 아니겠지? 저기 앉아서, 대책을 말해봐.”
프란체 대공이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리아브릭은 그가 시키는 대로 마주 앉았다.
“냉정하게 아편 사업은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로 인한 지속적 수입의 3할이 줄어든 만큼…….”
“분석 말고 대책.”
리아브릭이 어렵게 입을 뗐다.
“징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징수?”
프란체 대공의 눈썹이 꿈틀했다. 썩 만족스러운 대책이 아닌 까닭이었다.
“우선 대공령의 세율을 높여 징수할 계획입니다.”
대공령은 제국 동부에 있는데, 수도를 제외하면 제국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기름진 토양, 상업적 발전을 이룬 항구도시다.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해상 거래를 통한 관세의 수입도 상당했다. 그곳의 각종 세율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대공가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개돼지들의 고혈이야 쥐어짜도 마르지 않으니까. 근데 그걸로 해결이 될까?”
“부족합니다. 해서, 귀족들과 가신들에게 상납금을 높여 징수할까 합니다.”
“상납금? 내놓은 대책이란 게 고작 이건가?”
프란체 대공은 대책이 탐탁지 않았다. 귀족파의 수장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파벌에 속한 가문 수만 해도 서른에 육박한다. 4대 가문을 따르는 귀족의 숫자가 쉰 명이란 걸 감안하면 대공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법하다. 그런 대공가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석 달에 한 번씩 상납금을 낸다. 황실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물과 세금마저도 미루면서 대공가에 충성을 보이고자 자진해서 상납했다. 대공가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도 영지 간의 마찰이나, 분란이 생길 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아브릭은 그런 귀족들의 상납금의 징수액을 늘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그로 인해 착취당하는 건 평민이겠지만 그것은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현물이 필요한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이에요.”
“뒷감당은?”
대공가가 건재하고 프란체 대공이 파벌을 확 휘어잡고 있다지만 귀족들은 사갈같이 음흉하고 제 이득을 위해서는 박쥐보다 더한 작자들이다. 상납금의 징수액을 올린다면 그에 대응하는 뭔가를 바라거나, 불만을 토로할 가능성이 컸다.
“노블레스 거리가 개장하면 일부 부동산을 매각하여 보상하거나, 양도할 생각입니다.”
“쉽지 않을 텐데? 눈에서 먼 이익을 좇는 자들이 아니야.”
프란체 대공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귀족들은 장기적인 투자보다 단기적인 수익을 더 추구했다. 안정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이 아무리 사업성이 좋다지만 저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저 역시 공감합니다. 하여, 대공 전하께 청이 있습니다.”
“말하라.”
리아브릭은 초강수를 뒀다.
“귀족 회의를 소집해 주세요.”
* * *
“귀족 모임이라…….”
엘레나는 창틀에 걸터앉아 분주히 오가는 하인과 하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원 역사에 이런 행사는 없었어.”
이틀간 꼼꼼히 되짚어봤지만 이런 대대적인 귀족 모임을 가진 기억은 없었다. 혹시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상기하려고 애썼지만 가닥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이 귀족 모임 역시 뒤틀린 역사의 결과물이라는 소린데…….”
엘레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원 역사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주의 대상이다. 엘레나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늘 예의주시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 앤이에요.”
“들어오렴.”
시녀 앤이 들어와 깍듯이 인사했다. 엘레나는 창틀에서 내려와 소파에 가 앉았다.
“무슨 일인지는 알아봤고?”
“저도 건너 들은 얘기인지라 확실하진 않아요. 그래도 말씀드릴까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앤이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아가씨께서 늦게 들어오신 날 기억나세요?”
“그럼.”
“그날, 새벽녘에 난리가 났었나 봐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대공 전하께서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는 리아브릭 자작을 찾아가셨대요.”
“아버지가? 대체 무슨 일로?”
엘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재배지의 소실을 추궁하기 위해서겠지. 리브, 꽤 곤란했겠어.’
프란체 대공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리아브릭을 상상하니 자꾸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정확한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녀들이 수군거리기로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고 해요.”
“그래?”
‘이러면 안 되는데.’
엘레나는 자꾸만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볼을 실룩거렸다. 앤 앞에서는 그런 티를 내면 안 되기에 퍽 곤혹스러웠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진심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비웃음만 담겨 있었다.
‘이 일로 대공의 리아브릭에 대한 신뢰에 실금이라도 갔으면 좋겠는데.’
단단한 바위도 작은 실금에서 시작된 균열이 커져 두 동강이 나버린다. 프란체 대공과 리아브릭의 관계가 삐걱거릴수록 엘레나가 파고들 틈은 더 많아지게 마련이다.
“잠시 딴생각을 했구나. 딴 소식은 없고?”
“네, 이게 다예요. 아, 또 뭔가 있긴 한데…….”
“말해보렴.”
엘레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앤의 말을 기다렸다.
“이건 확실한 건 아닌데, 나중에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좀 더 알아보려고요.”
“그러렴.”
엘레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여유가 앤으로 하여금 딴생각을 하지 못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엘레나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화장대로 걸어갔다. 내심 보상을 바라고 있던 앤의 눈에 탐욕이 담겼다. 보석함에서 반지를 하나 꺼낸 엘레나가 그걸 앤에게 건넸다.
“받으렴. 날 위해 애써줘서 고맙단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앤은 반지를 손에 쥐고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침실을 나섰다. 홀로 남게 된 엘레나는 소파에 앉아 사고에 잠겼다. 어쩌면 이 귀족 모임은 피네치아 재배지의 소실에 따른 대책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재배지 소실 이후 프란체 대공과 리아브릭의 밀담이 있었고 갑작스럽게 귀족 모임이 결정 났으니까. 물론 추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쪽으로 생각의 추가 실리는 건 그만한 정황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이어가던 엘레나가 결단을 내린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리브를 만나봐야겠어.”
침실을 나선 엘레나는 곧장 리아브릭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저예요, 리브.”
노크하고 기다리자 집무실 안쪽에서 리아브릭의 대답이 들렸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메이가 얼른 다가가 문을 열었다. 엘레나는 표정 관리를 하고는 반갑게 안부를 물으며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리브, 그간 잘 지냈어요?”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리아브릭이 고개를 들었다. 엘레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튀어나오려는 실소를 꾹 참았다.
‘맘고생이 심했나?’
오늘처럼 엉망인 리아브릭의 몰골은 처음이었다. 눈동자는 퀭하고 눈밑 그림자가 짙게 내려왔다. 살도 빠졌는지 볼이 해쓱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시체 같달까.
“리브, 어디 아파요? 안색이 말이 아니에요.”
정작 리아브릭을 시달리게 만든 원흉인 엘레나는 가증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굴었다.
“좀 피곤해서 그래요.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요?”
“그간 적적했던 것 같아서요. 어떻게 지내나 싶기도 하고, 궁금한 것도 있어서 뵈러 왔어요.”
“앉죠.”
엘레나와 리아브릭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리아브릭의 몰골은 더 처참했다. 늘 단정함을 유지하던 평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엘레나는 자꾸만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꾹 참으며 말을 붙였다.
“요새 일이 많아요? 지쳐 보여요.”
“용건만 얘기할래요? 보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
리아브릭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만큼 압박감을 느끼며 쫓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다음 달에 귀족 모임이 있단 얘기 들었어요. 지방 귀족들도 올라오는 큰 모임이라면서요?”
“네, 그래서요?”
리아브릭의 태도는 여느 때보다 까칠했다. 네가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뉘앙스였다.
“명색이 공녀인데, 제가 해야 할 일이라도 있을까 해서요.”
“…….”
“해서, 모임에 대해 물어보려고요. 아무래도 드레스나 장신구를 맞추려면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엘레나는 교묘한 화법으로 리아브릭의 속내를 떠봤다. 공녀의 신분을 적절하게 내세우면서, 분위기에 맞춰 드레스와 장신구를 맞춘다는 핑계로 모임의 이유에 대해 파악하고자 했다.
“귀족 회의가 주목적이니 연회 때처럼 너무 화려하게는 입지 마세요.”
“알았어요. 화려한 건 되도록 피할게요.”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엘레나는 그걸 바탕으로 추론했다. 귀족 회의, 화려함 자제. 단 두 가지 단서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엘레나에게는 큰 수확이었다.
‘귀족 회의의 주제가 꽤 무겁다는 얘기네.’
내심 짐작했던 대로 귀족 회의가 피네치아 재배지의 소실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대책 회의인 듯했다. 지방의 중소 귀족들마저 불러들인 걸로 보아 귀족 회의를 통해 양해와 협조를 구하는 식의 주제가 오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다 가정에 불과했다. 리아브릭을 통해서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영악한 리브가 날 귀족 회의에 끼워주진 않을 텐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거지만 리아브릭이 허락지 않을 것이다. 지난 삶에서도 그랬지만 얼굴마담으로 엘레나를 내세울 뿐, 대공가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일에는 철저히 배제했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아직 시일도 넉넉한 만큼 핑곗거리야 충분히 만들 자신이 있었다.
“저도 공녀께 할 말이 있네요.”
“할 말이요?”
엘레나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간 공녀가 해오던 예술 작품 매매를 금지시켰어요. 지불 대금도 저번 거래부터 끊었고요.”
“어째서요? 아버지한테도 허락을 받은 일인데…….”
엘레나는 원망스럽게 리아브릭을 쳐다보며 억울해하는 시늉을 했다.
‘예상했던 일이야.’
사전에 칼리프를 통해 대공가가 계약 파기를 통보한 사실을 전해 들은 터라 딱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손실을 입혔으니 그걸로 족해.’
돌아보면 프란체 대공의 직권으로 예술품 매매를 허락받은 건 생각도 못 한 기회였다. 그 권한 덕에 리아브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웃돈을 주고 예술품을 사들일 수 있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뭘…….”
리아브릭의 눈길이 표독스러워졌다. 안 그래도 재배지 소실로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엘레나가 미술품 매매를 한다며 날린 거금이 더 아깝게 느껴졌다.
“하, 지금 미술 시장이 어떤 줄 알아요? 예술품의 가치가 폭락하고 매매가 되지 않아요. 판다는 사람은 줄을 잇고, 사겠다는 사람은 없다고요.”
“일시적인 현상이에요, 리브.”
“일시적이요? 무슨 근거로요?”
리아브릭의 질문을 받은 엘레나가 당황한 척 버벅거렸다.
“그거야, 예술품은 장기적 안목으로 접근하고 투자를 하면 오를 수밖에 없는…….”
“누가 책에 적힌 얘길 듣고 싶다고 했죠?”
“전 그냥…….”
가시처럼 뾰족한 리아브릭의 태도로 보아 그간 얼마나 이를 갈고 있었는지 알 만했다. 예술품의 가치가 오를 때야 상관이 없지만 대공가의 재정이 악화되고 가치마저 떨어지는 지금 엘레나가 더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리브. 내가 너무 경솔하게 매매를 했나 봐요.”
엘레나는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러나 카펫을 내려다보는 시선 아래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리아브릭을 비웃고 있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화내는 건 리아브릭이고, 사과하는 것도 엘레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더 할 얘기 없으면 나가보세요.”
“저 리브,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될까요?”
엘레나가 표정 관리를 하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꼴도 보기 싫어하는 리아브릭의 눈길을 받는 게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마담이 그러더라고요. 예법은 어디 가서도 흠잡힐 수준이 아니라고. 그러니 황태자비가 되려면 저보고 사교계의 평판을 신경 쓰라고 했어요. 리아브릭의 생각은 어때요?”
엘레나는 원 역사와 달리 자신을 황태자비로 만들고자 리아브릭이 왜 조급해하지 않는지가 의문이었다. 늦어도 이맘때쯤이면 공식적으로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한데 웬걸, 왜 공석이 된 황태자비 자리를 방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레나는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마담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런데 아직까지 황태자비 선출식과 관련한 공식 일정은 예정되어 있지 않아요. 굳이 서두를 필요 없어요.”
‘예정에 없다고?’
엘레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황실 행사는 늦으면 석 달에서 빠르면 일 년 전에 공표한다. 리아브릭의 말은 아예 계획에 없단 얘기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럼 나를 황태자비로 앉힐 생각 자체가 없다는 거야?’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엘레나는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렸다. 프란체 대공이나 리아브릭은 절대 황태자비 자리를 포기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제국을 집어삼키기 위한 야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 황태자비 선임과 차기 보위를 이을 2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분명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어. 알아내 대비해야 해.’
엘레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황태자비 선임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자, 차후에 대공가를 몰락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몸가짐을 바로 하고 황태자비에 어울리는 자질을 갖추도록 하세요.”
“그러면 사교계의 평판은 어쩌죠? 마담은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활동해야 한다던데…….”
마담 드 플랑로즈를 언급하며 한 번 더 리아브릭의 반응을 떠봤다.
“평판 중요하죠. 근데 사교계라는 곳이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곳인 만큼 굳이 서둘러 활동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
“그러니까 쭉 해오던 대로 해주세요. 아셨죠?”
어휘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 실린 어투는 꽤 강압적이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인상이었다.
“네, 리브. 그럴게요.”
“안 그래도 그 얘기 나온 김에 하나 더 얘기하죠. 최근 외출이 잦고 귀가가 늦던데 웬만하면 자제하세요. 행실에 흠잡힐까 봐 염려되네요.”
엘레나의 평판을 신경 써주는 척 염려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잦은 외출을 하는 게 꼴 보기 싫은 것이다.
‘너무 날 구속해. 왜지? 이쯤에는 풀어줬었는데.’
원 역사와 비교해 볼 때, 현재 엘레나에게 주어진 자유는 너무도 제한적이었다. 대외적인 활동은 금지한 채, 대공가 내에 감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행실에 신경 쓸게요, 리브.”
“나가봐요. 제가 처리할 일이 많아서 더는 시간을 빼기 어렵네요.”
먼저 소파에서 일어나 집무 책상으로 간 리아브릭을 뒤로하고 엘레나도 조용히 집무실을 나왔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를 대동해 침실로 오는 내내 엘레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침실에 도착한 엘레나는 홍차를 마시며 잠시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너무 한 가지에만 몰입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한발 물러나 다른 시점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생각의 전환을 가졌음에도 엘레나가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란 쉽지 않았다. 주어진 정황과 단서가 너무 적기 때문이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앤이에요, 아가씨.”
“들어오렴.”
침실로 들어온 앤은 어딘가 모르게 상기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무슨 일이니?”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앤은 살짝 들뜬 듯 얘기하며 메이를 힐끗 쳐다봤다. 엘레나는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눈치 빠르게 대응했다.
“메이, 앤하고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나가 있으렴.”
“네, 아가씨.”
메이는 서운한 척 굴며 돌아서 침실을 나섰다. 이미 엘레나가 앤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 이런 식으로 연기해 줄 필요가 있었다.
“흥.”
앤은 연기에 속은 줄도 모르고 득의양양 웃으며 엘레나를 보고 말했다.
“아가씨, 아까 제가 좀 더 알아보고 말씀드린다고 했던 얘기 기억하세요?”
“그럼. 네가 좀 더 확실히 알게 되면 얘기해 준다고 했잖니?”
엘레나는 무덤덤하게 홍차를 마시며 대꾸했다. 그러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이채를 띠고 있었다.
“네, 그랬죠. 그걸 제가 알아냈지 뭐예요!”
“그래?”
한껏 들뜬 얼굴로 떠드는 앤을 보며 엘레나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설마 이렇게 빨리 앤이 반지값을 톡톡히 할 줄은 엘레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저도 창고지기 잭한테 들은 얘기예요. 잭과 제가 동기거든요. 걔 말로는 최근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별관 지하 창고에 꾸준히 쌓이고 있대요.”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
엘레나가 귀를 쫑긋하며 관심을 보였다. 간과하기에는 수상스러움이 물씬 느껴졌다.
“네, 야밤에 은밀히 들여오는지라 물건이 쌓이는지도 잘 모르더라고요.”
“흥미롭네. 계속 얘기해 보렴.”
“잭이 너무 궁금해서 물건을 보려고 했는데 상자가 밀봉되어 있어서 못 봤대요. 행여나 뜯어서 봤다가 경을 칠까 봐 무섭다고.”
엘레나는 앤이 지금 떠드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야심한 시각을 틈타 밀봉된 상자들을 들여온다는 건 외부적으로 공개가 꺼려지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귀족 모임에 참가하는 귀족들에게 줄 선물은 아니고?”
“그건 아닐 거예요. 귀족분들 선물로 준비하는 건 촛대라고 들었어요.”
“그래?”
거침없는 앤의 대답에 엘레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우리 앤이 생각보다 유능하네?’
그간 꾸준히 앤을 구슬리고 타이르며 보상을 준 보람이 있었다.
‘그런다고 널 온전히 믿지는 않아.’
앤은 그저 이용 대상일 뿐이다. 지난 삶의 실수를 답습할 만큼 엘레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알고 나니 더 궁금하구나.”
“그죠? 저도 그래서 잭을 닦달했더니 걔가 짜증 내면서 툭 한마디 던지더라고요.”
“뭐라고 말이니?”
“밀봉된 상자는 못 뜯어봤는데, 천으로 싸서 들어온 것들은 가구 같대요.”
“가구?”
엘레나가 반사적으로 반문을 했다. 정말 뜻밖의 물건인 까닭이다.
“네, 가구요. 잭이 창고지기를 맡기 전까지 목공소에서 일했거든요. 걔 말로는 나무 향을 맡았는데 최고급 흑단나무로 제작한 거 같대요.”
“흑단나무면 이것들과 같은 재질이란 거니?”
“아, 이게 흑단나무로 만든 거예요? 나무는 제가 잘 몰라서…….”
앤의 대답을 한 귀로 흘린 엘레나의 시선이 침실 안, 흑단나무로 제작된 로코코 양식의 가구들에 향했다. 명장이 공을 들여 만든 가구들로 웬만한 귀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고가를 자랑한다.
‘누구 걸까? 대공의 취향은 아닌데.’
프란체 대공은 애쉬목으로 제작된 가구를 선호했다. 기호라는 게 여간해서는 쉽게 변하지 않는 만큼 프란체 대공이 쓰고자 들인 건 아닐 것이다. 쓸 사람이 없는데 그것들을 대공가에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귀족들에게 줄 선물이라면 야밤에 은밀히 들여놓을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내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누구 거지?’
엘레나는 대공가에 오자마자 베로니카가 쓰던 가구를 치워 버렸다. 그 역시 흑단나무로 제작된 고급 가구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엘레나가 공녀 행세를 시작한 이상 베로니카가 쓰던 방의 주인은 이제 엘레나이기 때문이다.
학술원을 졸업하고 돌아오자 엘레나의 취향대로 제작을 의뢰한 가구들이 침실을 메웠다. 같은 흑단나무로 만든 가구였지만 그 양식이 확연히 달랐다. 화려함을 중시하던 베로니카와 달리 절제미를 중시하는 엘레나의 침실은 더 고아했다.
“저, 아가씨.”
“말하렴.”
“실은 잭이 실수로 도박에 손을 댔는데 빚을 좀 많이 졌나 봐요.”
엘레나가 시선을 맞췄다. 우물쭈물하는 앤은 할 말이 더 있어 보였다.
“저런,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인데. 어쩌다가 그랬대.”
“그러니까요. 그런데 걔가 제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더니 어디서 난 거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아가씨가 줬다니까 부러워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래서 제가 슬쩍 운을 떼봤어요. 너 그러면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뜯어볼 수 있냐고. 그러면 내가 아가씨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했더니, 얘가 딱 무는 거 있죠!”
엘레나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느라 애를 썼다. 탐욕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다. 감시자나 다름없는 앤이 이렇게까지 애쓰는 건 당장 리아브릭이 약속한 금액보다 엘레나가 줄 보상이 더 크고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꾀가 많기도 하지. 사정이 딱한데 도와줘야겠구나.”
“정말요?”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색했다. 모르긴 몰라도 엘레나가 잭의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앤 역시 일정 부분 보상을 받기로 약속했을 가능성이 컸다. 앤은 누구보다 탐욕스럽고 영악한 계집이니까. 그걸 뻔히 알면서도 엘레나는 모른 척 넘겼다. 그마저도 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 빚이 얼마라고?”
“정확한 액수는 저도 잘 몰라요. 얼핏 말하기로는 아가씨가 준 반지값 정도 된다고 했어요.”
엘레나가 끄덕이면서 일어나더니 보석함에서 사파이어가 촘촘히 박힌 팔찌를 꺼내 왔다. 앤에게 준 반지보다 가격이 더 나가면 더 나갔지 결코 가치가 떨어져 보이진 않았다.
“이거면 되겠지?”
“되고말고요! 아가씨, 제가 바로 가서 잭한테 말하고 올게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앤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
“네? 아, 죄송해요.”
앤은 재빨리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딴 건 몰라도 엘레나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몸소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있잖니, 앤. 나야 널 믿지만, 잭이란 아이는 못 믿겠구나.”
“네? 그렇지만 제 친구이기도 하고…….”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의심이 좀 많은 성격이잖니? 너라면 모를까, 잭이란 아이에게 선뜻 주자니 망설여지네. 이 팔찌의 값어치가 꽤 나가거든.”
엘레나는 손을 뻗어 앤의 손목을 잡더니 팔찌를 채워주었다. 손목을 감싼 사파이어의 영롱함에 앤의 눈망울이 황홀해졌다. 그 눈길 너머의 탐욕을 엘레나는 놓치지 않았다.
“앤, 잭에게 가서 전하렴.”
“뭐, 뭐라고 전할까요?”
앤은 사파이어 팔찌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반문했다. 엘레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직접 물건들을 확인했으면 한다고 해.”
앤도, 잭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공가 내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그녀 자신뿐이었다.
‘비밀리에 휴렐바드 경을 대동해야겠어.’
엘레나는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도 계산에 집어넣었다. 사소한 한 번의 실수로 전부를 잃을 수도 있기에 방심은 허락지 않았다.
* * *
대공가 저택에 기거하는 시녀와 하인들이 모두 곯아떨어졌을 늦은 시간. 엘레나의 침실을 찾은 앤이 조용히 노크했다.
“아가씨, 저예요.”
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실 문이 비스듬히 열리더니 엘레나가 걸어 나왔다. 가벼운 드레스를 입어 어느 때보다 몸놀림이 경쾌해 보였다.
“안내하렴.”
앤은 야간에 일하는 시녀와 하인들의 교대 시간에 저택이 텅 빈다는 걸 이용해 엘레나를 별관 쪽으로 안내했다. 본관과 별관은 복도식 통로로 연결이 되어 있는 만큼 근무하는 시녀와 하인들을 피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이동이 가능했다.
“저 앞에서 잭이 기다릴 거예요.”
별관의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자 더벅머리에 앙상하게 마른 주걱턱의 청년이 인사를 했다. 잭이었다.
“고, 공녀 전하를 뵙습니다.”
창고지기인 잭은 엘레나와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엘레나를 대하는 게 꽤 긴장되고 어려웠다.
“앤에게 얘기 들었단다. 도박 빚에 시달린다고?”
“어, 어쩌다 보니.”
엘레나가 인지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놓으렴. 일이 끝나면 섭섭지 않게 챙겨줄 터이니.”
“가, 감사합니다, 공녀 전하.”
어쩔 줄 몰라 허리를 숙이는 잭을 보며 덩달아 앤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이만큼 엘레나에게 총애받고 있음을 과시하는 기색이랄까.
“창고는 어디지?”
“여기입니다.”
잭은 옆으로 물러서며 자신이 서 있던 뒤쪽을 가리켰다. 나무판자 문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저 문을 통해 별관 지하로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열어보렴.”
엘레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잭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뒤적거렸다. 개중 열쇠 하나를 손에 쥐더니 창고의 자물쇠를 땄다.
잭이 손잡이를 잡더니 있는 힘껏 나무판자 문을 당겨 열었다. 그러자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창고 안에는 제가 등을 켜뒀어요.”
엘레나는 끄덕이며 계단 아래로 발을 디뎠다. 너무 음습하고 어두워 살짝 걱정이 들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별관 근처에 휴렐바드가 은신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창고로 들어온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창고가 큰 까닭이었다.
“저 물건들이에요.”
잭은 창고 한쪽 구석으로 엘레나를 안내했다. 처음 앤이 말했던 대로 밀봉이 된 상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먼지가 앉을까 흰 천으로 싸둔 가구들도 보였다.
“좀 전에도 누가 다녀갔어요. 저 검은 상자를 두고 갔는데 깨질 수도 있으니 조심히 다루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그래?”
엘레나가 상자 몇 개를 지목하며 앤에게 턱짓을 했다.
“뜯어보렴.”
“네? 이, 이걸 다 보시려고요? 분명 한두 개만 보신다고…….”
잭이 적잖이 당황했다. 창고지기인 그가 만약 임의로 이 많은 상자를 들춰봤다는 게 들키는 날엔 경을 칠 게 분명했다.
“걱정하지 말렴. 앤이 감쪽같이 원래대로 해놓을 거야.”
“그, 그래도…….”
엘레나는 머뭇거리는 잭에게 사파이어 팔찌를 내밀었다.
“자, 받으렴.”
일렁이는 촛불에 사파이어가 반사되자 잭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밑천 삼아 도박판에서 크게 한탕 챙길 생각을 하자 눈이 뒤집혔다. 탐욕에 눈이 먼 잭을 내버려 두고 엘레나가 상자를 열라며 턱짓을 했다. 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들어왔다는 상자부터 조심스럽게 밀봉을 벗겼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을 개봉했다.
“아, 아가씨. 유리 구두인데요?”
“나도 보고 있단다.”
“저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유리 구두는 처음 봐요.”
순수하게 감탄을 하는 앤과 달리 엘레나의 표정은 심각했다. 유리 구두는 발이 불편해 연회나 파티에서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영애들이 선호하지 않았다.
‘딱 한 사람 고집스럽게 유리 구두를 신던 여자가 있었어. 하지만 그녀일 리가 없는데.’
엘레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을 지웠다. 단순히 유리 구두만 보고 그녀라고 추정하기엔 무리였다.
“딴 것도 뜯어보렴.”
“네.”
앤은 머뭇거리지 않고 가져온 상자들의 밀봉을 뜯고 뚜껑을 열었다.
“머메이드 드레스 같은데요? 이거 등이 엄청 파여 있어요. 민망해서 이걸 어떻게 입죠?”
“…….”
“이건 커튼이네요. 근데 이 헤링본 무늬 낯이 익는데. 내가 이걸 언제 봤지?”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확인할수록 엘레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유리구두, 등부터 허리까지 파인 머메이드 드레스, 헤링본 무늬의 커튼…… 이것들은 엘레나가 기억하고 있는 한 여자의 취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가씨, 이 그림이요. 예전에 아가씨 침실에 걸려 있던 그림하고 비슷하지 않아요?”
“……!”
엘레나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새장 속, 죽어가는 파랑새가 그려진 기괴한 그림. 회귀한 엘레나가 대공가에 오자마자 베로니카의 흔적을 지우고자 처분하라고 시킨 기분 나쁜 그림이었다. 기법과 표현이 미묘하게 달라졌을 뿐 그때 그 그림의 후속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흡사했다. 동일 작가가 그렸다는 말이었다.
엘레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지금껏 꺼낸 물건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부정하려고 해도 이런 취향을 지닌 자는 엘레나의 기억 속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폰 프리드리히.’
베로니카의 이름을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엘레나는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째서 베로니카의 물건들이 여기 있는 거지?’
엘레나는 공황에 빠진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단언하긴 이르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물건들은 베로니카의 것이 분명했다. 사교계에서도 이런 독특한 취향을 지닌 영애는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머메이드 드레스와 유리 구두는 베로니카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지하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던 엘레나를 만나러 왔던 날도 베로니카는 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등이 파인 머메이드 드레스와 영롱한 빛깔의 유리 구두를 신고 있었다.
새장 속, 죽어가는 파랑새 그림도 마찬가지다. 누가 이런 기괴한 그림을 방 안에 걸어놓고 싶겠나? 오직 베로니카뿐이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새를 좋아해서 유독 새와 관련된 그림이나, 장식품을 모았다. 또 작은 새장에 예쁜 새들을 키우는 취미도 있었는데 수틀리면 그것들을 손으로 움켜쥐어서 죽이는 악취미를 가졌단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구석에 놓인 가구도 마찬가지였다. 천에 싸여 직접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잭의 말대로 흑단나무 냄새가 물씬 풍겼다.
‘베로니카가 돌아오려면 아직 삼 년이나 남았는데…….’
엘레나는 그 점이 가장 이해되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등장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일렀다. 딴 사람은 몰라도 회귀한 엘레나는 그녀가 돌아올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자니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가구도 가구였지만, 머메이드 드레스나 유리 구두는 삼 년 뒤에 돌아올 베로니카를 위해서 벌써 준비를 해뒀다고 보기에는 너무 일렀다. 그때쯤이면 유행에 뒤처진 구닥다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잭.”
“네, 아가씨.”
엘레나는 동요하는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차분하게 물었다.
“이 물건들이 처음 들어온 게 언제라고?”
“맨 처음 상자가 들어온 게…… 대략 보름 전인 거 같아요.”
베로니카의 것이라 짐작되는 이 물건들은 하나같이 명장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들이 아닌 만큼 그 이전부터 주문을 의뢰했다는 얘기였다.
‘최소한 한 달, 어쩌면 그 이전에 주문을 넣었다는 얘긴데…….’
엘레나는 기억을 되돌려 봤다. 혹시 놓친 게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들을 들춰봤다.
잠시 후, 엘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때쯤이야. 내가 마담을 앞세워서 사교 모임을 주선했을 때.’
엘레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편을 추적하고 자유롭게 살롱을 출입할 핑계를 만들던 엘레나는 리아브릭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부딪혔다. 원 역사에서 평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교계 활동을 권하던 것과 사뭇 달라진 모습이었었다.
‘리아브릭은 내가 외출하는 걸 극히 꺼렸어.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혹시 그 이유랑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
아침에 리아브릭을 만나 황태자비 선임에 대해 운을 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비 선임에 사교계의 평판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학술원에 재학 중인 아벨라가 평판을 쌓고자 파벌을 만들고 주말마다 외출하여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리아브릭이 엘레나를 구속하다시피 하여 사교계 활동을 막으려 들었다. 구설에 오를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게 낫겠다며 돌려 말했지만 엘레나에겐 잠자코 조용히 있으라는 얘기로 들렸다.
‘황태자비가 공석인 지금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에 날 앉혀야 하는데 되레 나를 강제한다?’
엘레나는 깊은 사고에 잠겼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간 베일에 싸였던 의문과 수상함, 단서, 정황을 하나의 궤로 엮어보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 끝에 엘레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베로니카가 깨어난 거야.’
무려 삼 년이나 일찍. 스스로 내린 결론에 엘레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밀려왔다. 베로니카가 돌아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안 가. 어떻게 원 역사보다 삼 년이나 일찍 깨어날 수 있지?’
결론은 났지만 지난 삶의 기억과 너무 동떨어진 어긋남이 그녀를 혼란케 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너무 그쪽에 치우쳐 생각이 함몰되는 걸 경계했다.
‘깨어났다면 왜 바로 돌아오지 않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레나는 섬뜩했다. 정말 베로니카가 돌아올 채비를 하고 있다면 엘레나가 진행하고 있던 모든 계획을 앞당기거나 바꿔야 한다.
불현듯 차가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보며 비웃던 베로니카의 이죽거림이 떠올랐다. 덩달아 복부에 박힌 검의 차가운 촉감과 불로 짓이기는 통증까지 떠올라 식은땀이 흘렀다. 리아브릭이 작정하고 음모를 짜서 엘레나를 음해하려 들면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음모에 규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가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괜찮단다. 걱정하지 말렴.”
엘레나는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잭이 그러는데 이제 돌아가셔야 한대요. 다시 밀봉도 해야 하고 해 뜨기 전에 들어올 물건이 있대요.”
“내 생각만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구나.”
엘레나는 그제야 너무 생각에 빠져 있단 걸 자각했다. 노심초사하는 잭의 사정도 있거니와 이미 원하는 정보를 얻은 이상 더는 창고에 머물 이유도 없었다.
“이거 받으렴.”
“저, 정말 주시는 거예요?”
엘레나가 내민 사파이어 팔찌를 보는 잭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거렸다.
“그럼. 이건 네 거란다.”
“감사합니다!”
사파이어 팔찌를 받아 든 잭이 기쁨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이걸 처분하면 빚을 갚는 건 물론이거니와 크게 한탕 할 도박 자금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잭의 탐욕에 찌든 눈빛을 읽은 엘레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앤도 그랬지만, 욕심에 눈이 먼 사람만큼 다루기 쉬운 사람은 없다. 리아브릭의 감시 속에서 대공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엘레나에게 잭은 앞으로도 이용 가치가 높았다.
창고를 나온 엘레나는 홀로 침실로 돌아왔다. 약속한 대로 앤은 창고에 남아 잭과 함께 뜯어진 밀봉을 다시 봉합했다. 침대에 몸을 눕힌 엘레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철저히 대비해야 해. 안 그러면 내가 잡아먹힐 거야.”
베로니카가 돌아온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러한 긴장감에도 엘레나는 웃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냉소를.
“어서 와, 베로니카.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잡아먹을지언정 잡아먹힐 생각은 추호도 없는 엘레나였다.
* * *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고자 저택을 방문한 멜은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는 렌을 보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
“서신 아닙니까?”
“누구에게서 온 건지 맞춰봐.”
장난스럽게 렌이 묻자 멜은 나름대로의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했다.
“단조롭다 못해 밋밋한 편지지군요. 영애들이 쓴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르는 디자인이지만…… 영식께서 기뻐하시는 걸로 보아 그분께서 보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답. 역시, 마제스티의 수장다워.”
“별로 칭찬받을 만한 분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렌은 피식 웃으며 다시 서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눈길이 더없이 애틋했다.
“나보고 식사나 한 끼 하재.”
“그렇습니까?”
“약속 장소랑 시간도 제멋대로야. 동의도 없이 일방적인 통보인데 기분이 나쁘지 않아.”
“…….”
멜은 낯설었다. 손만 대도 베일 것같이 예리하게 날이 서 있던 렌이 그녀의 얘기만 나오면 신기하게도 둥글어졌다.
“실은 오늘 독대를 온 것도 그분에 관한 얘기 때문입니다.”
“걔 때문이라고? 무슨 일인데?”
엘레나를 언급하자 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처럼 그의 눈빛이 아슬아슬했다.
“보고를 드리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지금 대공가의 베로니카 공녀는 대역인 겁니까?”
멜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음에도 렌은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멜을 실험하듯이 되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부정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렇다면 말이 됩니다. 영식께서 마음을 주신 루시아라는 영애가 곧 L이고, 그녀가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이라면 말이죠.”
렌은 침묵했다. 애초에 멜로 하여금 마제스티를 베로니카 공녀와 L에게 붙인 이상 둘이 동일 인물이란 걸 알아내리라 예상했다.
‘뭐, 이리 쉽게 알아낼 줄은 몰랐지만.’
마음 같아서는 혼자만 간직하고 쭉 숨기고 싶었지만 망아지처럼 날뛰는 엘레나가 걱정되어서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L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꼭 베로니카 공녀가 살롱을 방문하더군요. 처음엔 우연이 아닌가 싶었는데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된 이상 필연이겠죠.”
“우연의 반복은 필연이다. 정보 분석의 기본이지.”
“결정적인 단서는 또 있습니다. 프란체 대공의 행적을 추적해 안가까지 따라갔던 조직원이 충격적인 걸 목격했거든요.”
렌이 물끄러미 멜을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산책을 나온 베로니카 공녀를 봤답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렌이 갑자기 손뼉을 부딪치며 격하게 박수를 쳤다.
“과연 멜이야. 드디어 거기까지 도달했군.”
“다 알고 계셨군요. 왜 미리 말해주시지 않은 겁니까? 그랬다면…….”
렌이 말을 자르며 히죽 웃었다.
“나만 알고 있고 싶었거든.”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이없어하는 멜을 보며 렌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자, 지난 얘기는 이쯤 하고. 정보에 대한 확신은 내가 줬으니 분석한 걸 얘기해 봐. 산책할 정도로 베로니카가 호전됐다면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렌은 사소한 정보나 단서도 소홀히 대하거나 흘리지 않았다. 하물며 엘레나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적어도 석 달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석 달?”
모호한 대답에 렌이 재차 되물었다.
“베로니카 공녀의 복귀 시기입니다.”
“근거는?”
퉁명스럽게 묻고 있지만 렌의 눈에는 깊은 관심이 묻어 있었다. 딴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의 복귀는 엘레나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이 가능할 만큼 호전된 건강상태. 안가로 납품되던 약재가 확 줄었다는 점. 중독되기 전 베로니카 공녀가 거래하던 명장에게 주문이 들어간 시점과 완성 요구 기일을 감안했습니다. 그리고 저택 내의 사람들을 교체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대역으로 대공가에 처음 오셨을 때처럼.”
“결정적인 게 하나 더 있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렌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간사한 리아브릭과 개 같은 백부가 베로니카의 황태자비 선임을 서두르지 않는 것.”
“정정해야겠군요. 길어야 석 달인 걸로. 어쩌면 그보다 이를지도 모르겠군요.”
멜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동조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이 학술원을 졸업한 지 반년이 넘었다. 결혼 적령기인 걸 감안하면 당연히 황태자비 선임과 관련하여 논의가 진행되어야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는 것이다. 엘레나가 아닌 진짜 베로니카가 돌아올 때까지.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이 추세라면 한 달 전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좋아, 식사 초대의 답례는 이거면 됐고.”
렌이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히죽히죽 웃었다. 렌만의 방식으로 엘레나를 돕고 생색을 낼 수 있단 사실에 벌써부터 설레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멜이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영식께서 그분 얘길 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신지.”
“실없이 웃어?”
“비슷하긴 합니다.”
멜의 냉정한 대답에 렌이 스윽 고개를 돌렸다. 방에 걸린 거울을 쳐다보자 미소를 띤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단 말이지. 나 렌 바스타슈가?”
‘내심 그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얼굴일 줄이야.’
꼭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품에 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해맑았다.
“멜, 놀랐겠는데?”
“첨엔 꽤 당혹스러웠지만 이젠 제법 적응이 됐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신기하네. 내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안다는 게.”
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스타슈가의 후계자로 늘 대공가의 그늘을 벗어나야 한단 압박과 책임에 시달렸다. 스펜서 자작의 강압적인 강요와 기대에 시달리다 보니 점차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랬던 렌이 이렇게 느슨한 표정을 지었다. 렌은 마치 거울에 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좀 더 솔직해지심이 어떠신지요?”
“지금 나한테 조언하는 거야?”
일 외적으로 멜이 먼저 사견을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보니 렌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그러자 멜이 헛기침을 했다.
“남녀 관계에 대해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멜은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저도 잘 모릅니다만, 영식께서 실수하셨다는 건 압니다.”
“실수?”
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수라니. 이보다 렌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있을까.
“피네치아 재배지를 발견하시고도 그 공을 황태자 전하께 넘기신 겁니다.”
“난 또 뭐라고. 소심하게 그걸 여태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렌이 픽 웃었다. 렌의 입장에선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기에 웃어넘겼다. 그러나 멜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영식 덕분에 황태자 전하와 그분이 각별해지실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하셨는지요?”
“했지.”
“……하셨다고요?”
렌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멜은 어이가 없단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렌은 남 얘기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멜은 도무지 이 어린 주인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말이 없는 멜을 보며 렌은 픽 웃었다. 그러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얘긴 그쯤 하고. 대공가에서 귀족 회의가 있다고?”
“피네치아 재배지 소실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기 위한 일종의 대책 회의 같습니다.”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벌에 속한 귀족이 전부 회의에 참가한다면 그 주제 역시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주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공가에 잠입시켜 둔 애들한테 베로니카에게서 눈 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만, 한 번 더 주지시키겠습니다.”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멜은 한마디도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딴 건 몰라도 렌에 대한 충성과 신뢰만큼은 맹목적이었다.
“그걸로 부족해. 목숨 걸고 지키라고 해.”
“지키라고요?”
반문에 장난기를 싹 지운 렌이 여느 때보다 싸늘하고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날엔…… 알지?”
“외람되지만 개인적인 이유인지, 대의적인 이유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멜의 입장에선 마제스티의 조직원 한 명, 한 명이 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렌의 명령에 반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렌의 솔직한 마음이 궁금했다.
“둘 다지. 뭘 묻고 그래, 당연한 걸.”
“알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렌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렌 역시 그에 대해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일일이 설명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이런 걸로 거짓을 말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잊지 마. 대공가 몰락의 열쇠는 걔가 쥐고 있다는 걸.”
* * *
시크릿 살롱으로 향하는 마차 안. 엘레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베로니카가 돌아올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까닭에 대공가의 생활이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해서다.
“시기라도 알 수 있다면 대비를 할 수 있을 텐데.”
“베로니카가 신경 쓰이세요?”
앞에 마주 앉은 메이는 그간의 사정을 엘레나에게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할 일은 많은데, 언제 돌아올지 예상이 안 되니까.”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그걸 궁리 중이야.”
최악의 경우 내일 당장 베로니카가 복귀할 수도 있단 가정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간 엘레나는 앤을 최대한 이용했다. 앤은 대공가 내부 사정에 밝아 이상한 낌새를 제법 잘 파악했다. 그러나 결국 앤은 리아브릭이 심어놓은 간자다. 언제 어느 때 그녀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을지 몰랐다.
“아무래도 시간을 벌어야겠어.”
“묘책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있어. 베로니카가 건재하더라도 나를 대역으로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발한 방법이.”
엘레나는 대공가의 허를 찌를 만한 재기 발랄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 방법이라면 베로니카의 복귀를 확실히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나 혼자서라면 무리겠지만,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 거 같아.”
“그분이요?”
엘레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시안을 떠올렸다. 그가 나서준다면 충분히 베로니카의 복귀를 늦출 수 있다.
‘전하께서 동의한다는 전제지만.’
계획을 세운 건 엘레나지만 실행에 옮길 수 있는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시안에게 달렸다. 여러 차례 엘레나에게 좋은 감정을 드러낸 시안이기에 더더욱 미지수였다.
‘그래도 말은 꺼내볼 수밖에.’
빌렘 백작가로 서신을 넣어야겠단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시크릿 살롱에 도착했다. 가면을 쓴 엘레나가 마차에서 내려 살롱으로 들어갔다. 비밀 통로를 통해 엘레나가 메인 응접실에 도착하자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칼리프가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와.”
“에밀리오 님은 안 보이시네요.”
“학교 설립 관련 일로 자리 비우셨어.”
자칼린과 협업을 결정한 뒤, 학교 설립과 관련된 부지와 건물 매입은 재무를 담당한 에밀리오의 몫이었다. 살롱의 안살림까지 도맡고 있다 보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렇구나. 그보다 선배, 제가 지금 서신을 적어줄 테니 빌렘 백작가에 기별 좀 해주실래요?”
“응. 써서 줘.”
엘레나는 오늘 또는 이틀 뒤에 급히 봤으면 한단 얘길 적어 서신을 건넸다. 칼리프는 따로 사람을 불러 그걸 전하라 일렀다.
그러는 사이,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두고 살롱에 입장한 메이와 휴렐바드가 응접실에 도착했다.
“선배, 메이도 왔으니 저 변장할게요. 늦지 않게 식사 준비해 주세요.”
“신경 쓰라고 일러두긴 했는데, 정말 괜찮겠냐? 위험한 인간이잖아.”
칼리프는 걱정스러움을 지우지 못했다. 학술원 재학 시절에 렌이 저지른 행각을 알기에 거사를 앞두고 접촉하는 게 우려스러웠다.
“위험하긴 해도 사리 분별 못 하는 인간은 아니니까요. 별일 없을 거예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모처럼 루시아로 변장하겠네? 오랜만이다. 단발에 안경이 잘 어울리던 아련한 추억 속의 여인이여.”
칼리프는 몽롱한 눈길로 학술원 생활을 하며 자신을 바꿔놓은 루시아를 떠올렸다. 신입생 주제에 당돌하고 똘똘하기까지 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후.”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빤히 보던 칼리프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던 후배는 사라졌구나.”
“저기요, 그 여인이 저거든요? 무슨 남 얘기하듯이 말해요.”
칼리프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내 추억을 깨지 마.”
“뭐라는 거예요. 그리고 선배는 제 본모습을 더 좋아하잖아요.”
“내가? 언제? 너 그거 대단히 큰 착각이다?”
강한 부정에 엘레나가 팔짱을 끼곤 코웃음을 쳤다.
“전 아직도 생생한데요? 절 보고는 부끄러워서 눈도 못 마주치고 그랬잖아요.”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안 그러셨다고요? 저한테 와서 그러셨잖아요. 저처럼 치명적인 여자를 처음 봤다고. 숨도 못 쉴 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라고…….”
칼리프가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엘레나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쉿, 그만. 넌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가서 변장이나 해.”
“본전도 못 찾으시면서 꼭 시비를 건다니까.”
엘레나가 메이를 대동해서 메인 응접실 옆에 따로 마련된 방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칼리프가 퉁명스럽게 말을 툭 던졌다.
“변장하고 나면 잠깐 건너편 응접실에 들렀다 가.”
“누가 왔는데요?”
“너 보고 싶어 하는 사람.”
“…….”
그간 쌓인 감정이 많았는지 칼리프는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추궁에도 불구하고 끝내 입을 열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옆방에 들러 메이의 도움을 받아 루시아로 변장한 엘레나가 거울을 응시했다. 그간 베로니카와 L로만 활동해서 그런지 학술원 시절 애용하던 단발머리 가발과 안경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변장을 마친 엘레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서둘러 준비한 까닭인지 렌과 약속한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남아 있었다.
엘레나는 가면을 쓰고 칼리프가 일러준 건너편 응접실에 들렀다. 노크를 하고 기다리자 문 너머의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오리 가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잖은 분위기에 단정한 주황 머리, 그리고 가면 너머 빛을 받아 반사되는 외알 안경까지, 엘레나의 기억 속 그 남자와 똑 닮아 있었다.
‘라파엘 선배?’
예상외의 만남에 엘레나가 얼떨떨할 때였다.
“루시아?”
라파엘도 한눈에 엘레나를 알아봤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엘레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저예요, 선배.”
엘레나의 긍정에 가면 속 라파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볼 줄 꿈에도 몰랐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반갑네요.”
“저도요. 그런 의미로 저 들어가도 돼요? 서서 얘기하면 다리 아픈데.”
“그만 실례했네요. 들어오세요.”
응접실 안, 소파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었다. 민낯 그대로를 마주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냥 얼굴만 봐도 반가운 사람이 있다고. 저한테는 선배가 그런 사람인가 봐요.”
“저도 그런가 봅니다. 마냥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지난 삶부터 지금까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엘레나에게 있어 라파엘은 진정제 같은 사람이었다. 요람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달까.
“칼리프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요. 볕 잘 드는 곳에서 우중충한 지하 작업실로 옮겼다면서요?”
“저도 모르게 지하실이 익숙해졌나 봐요. 태양을 안 보니 살 것 같은 게, 작품에도 진척이 좀 생기더라고요.”
“하여간, 독특하셔.”
엘레나는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부담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늘 긴장하며 살아가는 그녀에겐 단비와 같았다.
‘그러고 보니 선배한테는 아직도 내가 누군지 말하지 못했네.’
불현듯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술원에 입학한 엘레나가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라파엘이다. 그가 누구보다 믿을 만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기회가 닿지 않아 지금껏 비밀로 하고 말았다.
“저 선배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고백이요?”
순간 라파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말에 설레는 자신을 보니 아직도 엘레나를 향한 감정이 짙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제 이름은 루시아가 아니에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학술원에서는 신분을 빌려 쓸 수밖에 없었어요. 속여서 미안해요.”
“그랬군요.”
“저는 L이에요.”
항상 느끼지만 엘레나는 이 순간이 가장 기대되면서도 걱정되었다. 그간 속여온 상대가 어찌 받아들일지 조마조마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네? 알고 있었다고요?”
덤덤한 라파엘의 반응에 되레 당황한 건 엘레나였다.
“살롱 개장 날, L을 본 세실리아가 제게 와서 그러더군요. 딴 건 몰라도 자기가 감이 좋은데…… 어쩌면 L이 루시아 양인 것 같다고.”
“…….”
“그 얘길 듣고 저도 보러 온 적이 있어요. 역시나더군요. 한눈에 알아봤답니다.”
라파엘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엘레나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보다는 이제라도 말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컸다.
“알고 계실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어요.”
“잊으셨어요? 작품 벨라도나 속 모델이 누군지. 딴 사람은 몰라도 제 눈을 속일 수 없어요.”
엘레나가 아 하며 수긍했다. 초상을 완성하기까지 라파엘이 엘레나를 보고 있던 시간을 환산하면 결코 적지 않다. 누구보다 엘레나의 외모나 분위기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파악한 사람이 라파엘이다.
‘잠깐만, 그러면 혹시?’
그녀가 베로니카인 것도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변장했다곤 하지만 예리한 라파엘의 눈을 속일 자신은 없었다.
“선배, 혹시…… 베로니카 공녀를 본 적 있으세요?”
“…….”
“선배?”
엘레나의 연이은 질문에 라파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과 난감한 표정만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했다.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언제부터?”
“예술제 날, 오신 걸 보고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라파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보면, 그날은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신분의 벽 앞에서 감정을 삼킨 날이니까.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엘레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저 참 바보 같네요. 선배가 모르는 척해주는 것도 모르고.”
“티를 내지 않은 건 루시아 양이 저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 그랬어요.”
“알아요. 선배는 자상하고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건 그렇고 다 알고 계시다니 되레 후련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다 밝힐 걸 그랬어.”
엘레나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간 쭉 라파엘을 속였다는 죄책감이 있던 터라 좀 더 일찍 털어놓을 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딴 사람은 몰라도 라파엘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그녀에게 해가 될 만한 비밀을 발설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스한 미소를 짓던 라파엘이 소파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뭐 하세요?”
“모른 척할 때야 상관없지만, 이젠 격식을 갖춰야죠.”
“저 놀리려고 하는 거죠? 하지 마세요!”
엘레나가 목소리를 키우자 라파엘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들켰어요?”
“못 보던 새에 왜 이렇게 짓궂어지신 거예요.”
“그러게요. 내심 서운한 게 있었나?”
대화가 오가는 내내 엘레나와 라파엘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다음 약속이 있다는 걸 깨달은 엘레나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이를 어쩌죠? 할 얘기는 많은데, 시간이 없네요.”
“또 보면 되죠, 공녀님.”
아쉬워하는 엘레나를 보며 오히려 라파엘이 자상한 미소와 말투로 다음을 기약했다. 늘 이런 식이다. 그는 자신의 기분보다 엘레나를 먼저 생각하고 챙겼다.
“다 좋은데 뒤에 공녀라는 말은 빼주세요. 저 공녀 아니거든요.”
“장난으로 붙인 호칭인데, 불편했나 보네요.”
“아뇨, 진짜 공녀가 아니라서 한 말이에요.”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엘레나가 대역인 걸 모르다 보니 공녀가 아니라는 그녀의 말이 의아하게 들렸다.
‘더는 선배한테 감출 필요 없잖아?’
시간이 좀 더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엘레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해드릴게요.”
“기다리는 거야 익숙하지만 궁금하긴 하네요. 공녀가 아니라…… 귀띔이라도 주실래요?”
“혼란스러울 텐데, 괜찮겠어요?”
라파엘이 끄덕거리자 망설이던 엘레나가 결심한 듯 입술을 뗐다.
“글자 그대로예요. 저는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