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24/30)
  • 제15장 칠흑

    “사교 활동이요?”

    리아브릭은 집무실에 찾아온 마담 드 플랑로즈 그리고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여기 공녀 전하께서는 예법과 몸가짐, 영애가 갖춰야 할 덕목을 충분히 숙지하시며 많은 발전을 이루셨어요.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사교 활동을 통한 배움이 필요합니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레이디가 성숙해지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사교 활동에 대한 중요성을 끊임없이 리아브릭에게 어필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엘레나는 홍차를 음미하며 느긋하게 마담 드 플랑로즈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잘하고 있어요, 마담.’

    엘레나는 미술품 매입을 핑계로 잦은 외출을 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다. 이대로라면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리아브릭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본격적인 사교 활동이었다. 원 역사대로라면 시안이 학술원 졸업을 하자마자 세실리아를 황태자비로 선임하면서 대공가의 계획이 틀어지고 만다. 그러다 보니 훗날을 기약하며 엘레나에게 본격적인 사교 활동을 허락했다.

    그런데 역사가 변해 황태자비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리아브릭 입장에서는 굳이 엘레나를 사교 모임에 내보내기보다는 조용히 교육을 시켜 황태자비로 만드는 게 손도 덜 가고 낫다고 여겼다.

    그래서 엘레나는 마담 드 플랑로즈를 이용했다. 예법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마담 드 플랑로즈와 내기를 해서 이긴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유치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엘레나는 내기에서 이겼고 마담 드 플랑로즈에게 요구했다. 보수적인 라이브릭에게 사교 활동을 허락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공녀는 곧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에요. 몸가짐을 바로 하며 구설에 오르는 일은 자제하는 편이 나을 거 같은데요?”

    리아브릭의 항변에 마담 드 플랑로즈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야말로 좁은 시야예요. 과거를 돌아보더라도 사교계의 지지를 받지 못한 황태자비와 황후들은 도태된 적이 많죠. 리아브릭 자작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여기 공녀 전하와 비슷한 또래에 바른 몸가짐과 여인의 덕목을 중시하는 영애들을 알고 있어요. 그녀들과 소통한다면 분명 도움이 되실 거예요.”

    마담 드 플랑로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리아브릭은 고민을 거듭했다. 베로니카가 깨어난 지금 굳이 무리해서 엘레나를 사교 활동에 내보낼 필요가 있나 싶어 망설여졌다.

    ‘왜 저러지? 이게 그렇게까지 고민할 문제는 아닐 텐데?’

    엘레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리아브릭은 득과 실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여자다. 황태자비 선임을 위해서라면 사교 활동을 통한 사교계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건 매우 중요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리아브릭이 왜 저렇게까지 망설이는 걸까.

    “……알겠습니다. 아직 공녀 전하께서 미흡한 부분이 많으니 마담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잘 생각하셨어요. 자고로 새장 안의 새는 결코 멀리 날지 못해요.”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데 성공한 마담 드 플랑로즈가 엘레나에게 눈빛을 보냈다. 마치 이제 됐냐는 듯. 엘레나는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함께 리아브릭의 집무실을 나왔다.

    저택 밖, 마차를 타고 돌아가려는 마담 드 플랑로즈를 배웅하고자 엘레나도 나섰다.

    “한 번 더 물을게요. 공녀 전하께선 아까 말한 영애들과 정말 첫 사교 모임을 하고 싶은 거예요?”

    “네.”

    마담 드 플랑로즈가 인상을 팍 썼다. 그녀가 리아브릭과 한 약속과 달리 엘레나는 직접 선별한 영애들과 사교 모임 주선을 부탁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행실이 바른 영애들이 아니에요.”

    엘레나는 픽 터져 나올 뻔한 비웃음을 참았다. 누가 누구의 행실을 지적하는지.

    “흙탕물을 겪어야 개울이 맑은 줄 안다고 했어요. 걱정 마시고 그리 주선해 주세요. 그게 거래의 조건이었잖아요?”

    “그리 얘기하니 더는 말하지 않죠.”

    거래라는 말이 나오자 마담 드 플랑로즈가 탐탁지 않은 낯빛으로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말이 요란하게 울며 마차가 출발하자 엘레나는 고개를 숙였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엘레나는 짚이는 구석을 파헤쳐 보고자 그 끼리끼리에 어울려 볼 생각이었다.

    사교 모임 일정은 예정보다 빠르게 잡혔다. 딴 사람도 아니고 마담 드 플랑로즈의 사교 모임 주선이다 보니 초대를 받은 귀족 영애들이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표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엘레나가 선별하여 모임에 초대하고자 한 영애들은 사교계 평판이 썩 좋지 않았다. 누군가는 문란하였고, 누군가는 무식했으며, 누군가는 사치스러웠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죽을 맛이었다. 주선자로서 근본도 없는 귀족 영애들을 자신의 저택에 불러들여 사교 모임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녀는 차라리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마담.”

    “마담의 초대라니.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가문의 영광이란 게 이런 게 아닐까요? 제가 마담께 드리려고 북방 지역의 여우 목도리를 가져왔어요.”

    세 영애는 스텔라, 아리아, 레아였다. 그녀들은 치맛자락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그 엉성하고 형편없는 예법에 마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래만 아니었다면 이런 형편없는 계집들이 대문을 넘는 일이 없었을 텐데.’

    마담 드 플랑로즈는 뒤집힌 속내를 미소로 감췄다.

    “실은 세 분 말고 특별한 손님을 한 분 더 모셨답니다. 괜찮다면 이 자리에 모실까 하는데, 괜찮겠죠?”

    “괜찮다마다요.”

    “마담께서 초대하신 분인데 당연히 모셔야죠.”

    “그럼 모시도록 할게요.”

    얼마 있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마담 드 플랑로즈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눈치껏 따라서 몸을 일으키던 세 영애가 응접실에 들어온 손님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 공녀 전하?”

    스텔라의 입에서 그녀의 신분이 튀어나왔다. 탄신기념연회에 참가했던 터라, 엘레나의 외모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덩달아 다른 두 영애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어서 와요. 이쪽으로 앉아요.”

    “고마워요, 마담.”

    엘레나는 마담 드 플랑로즈의 안내를 받으며 소파의 상석에 착석했다. 설마 이 자리에 베로니카 공녀가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세 영애는 얼떨떨해했다.

    “절 아시는 영애분도 계신 거 같지만 소개는 제 입으로 하는 게 예의인 것 같네요. 베로니카 폰 프리드리히예요.”

    프리드리히라는 성이 주는 권위에 눌려 잠시 멍했던 세 영애는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자신을 소개했다.

    “스텔라 메디치예요.”

    “아리아 루이제라고 합니다.”

    “레아 바덴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우연히 마담을 뵈러 왔다가 이런 영애분들을 소개받다니. 오늘은 참 뜻깊은 날인 것 같네요.”

    엘레나의 가증스러운 거짓말에 기가 찼는지 마담 드 플랑로즈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예의상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억지로 보낸 마담 드 플랑로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워야 할 거 같아요. 얘기들 나누고 계세요.”

    “네, 마담.”

    “이따 뵐게요!”

    마담 드 플랑로즈가 나가자 방 안에 다소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변변찮은 가문의 세 영애에게 있어 베로니카 공녀는 너무도 어려운 대화 상대였다.

    “혹시 홍차나 디저트 좋아하세요? 마담께 드리려고 가져온 건데, 영애들과 함께 즐길까 해서요.”

    “어, 엄청 좋아해요!”

    “저도요.”

    엘레나가 끄덕이며 데려온 메이를 불러 새로 다과를 내오라고 시켰다. 얼마 있지 않아 메이가 쿠키와 케이크, 마카롱 등이 담긴 5단 디저트 트레이를 가지고 왔다.

    “와, 이런 건 처음 봐요.”

    세 영애는 생전 처음 보는 스케일의 디저트 트레이에 놀랐다.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깊은 달콤함에 두 번 놀라고 말았다. 입이 즐거우면 마음이 즐거워진다고 했던가. 디저트라는 공통된 화제로 대화를 나누자 어색함도 사라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엘레나는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세 영애가 좋아할 만한 관심사를 꺼내 물어보고 들어줌으로써 친근함을 쌓는 데 주력했다. 문란한 스텔라에겐 자유 연애의 필요성을 주제로, 사치스러운 레아에겐 새로 오픈한 보석 가게의 정보를, 배움이 짧은 아리아에겐 직관적인 외모의 칭찬을. 엘레나는 현란한 화술을 발휘해 세 영애의 호감을 샀다.

    “아, 다들 혹시 머메이드 드레스 보셨어요? 처음 딱 보는데 숨이 막히더라고요. 전설의 인어가 서 있는 느낌이랄까?”

    “저 봤어요.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게 또 매력적이에요.”

    “주문하려고 했는데 예약이 너무 밀려 있대요. 빨라도 내년은 되어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요.”

    엘레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홍차를 마셨다.

    ‘크리스티나가 이 얘길 들었어야 했는데.’

    세 영애의 의견이 절대다수를 대변할 순 없지만 어린 영애들 사이에서 머메이드 드레스는 천박하고 야하기보단 세련되고 여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드레스로 각광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L에 대한 소문 들었어요?”

    “소문이요?”

    “예, 이건 살롱 관계자한테 들은 얘긴데, L이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어서래요. 엄청 흉측한 흉터래요.”

    “저런!”

    남의 험담하기를 즐겨 하는 아리아의 발언에 레아와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한마디씩 보태며 동조했다.

    “어쩐지. 그것도 모르고 영식들은 L이 제국이 발칵 뒤집힐 미녀일 거라는 소리나 늘어놓더라고요.”

    “전 L이 지성인이니 어쩌니 하면서 신여성이라 불리는 게 너무 꼴불견이에요.”

    “맞아요. 레이디의 덕목은 첫째도, 둘째도 내조죠.”

    엘레나는 L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험담을 늘어놓는 세 영애를 보며 기가 찼다. 실체도 없는 소문과 근거도 없이 헐뜯는 것만 보아도 이들의 교양과 인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만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들을 부른 것이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드러나지 않은 귀족 세계의 은밀한 모임이라든가, 회합에 밝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치미는 조소를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따지고 보면 L보다 여기 계신 공녀 전하께서 더 고귀하지 않아요?”

    “맞아요. 신여성? 전 공녀 전하께 딱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진짜 기품이 넘쳐흘러요.”

    엘레나가 대화에서 계속 소외되는 느낌이 들자 스텔라가 일부러 그녀를 끌어들였다.

    “고마워요. 세 영애도 생기 넘치는 분들인 것 같아요. 수도의 사정에도 밝고요. 안 그래도 요새 고민이 많았는데, 영애들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고민이요?”

    엘레나가 운을 띄우기가 무섭게 세 영애가 눈을 빛냈다. 사교 모임에서 친목의 척도는 고민을 공유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조언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믿고 있단 방증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딴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 공녀의 고민이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일도 없거니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고귀한 신분의 베로니카 공녀에게 조언을 가장한 훈수를 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딴 데 얘기하면 안 돼요. 약속하실 수 있죠?”

    “그럼요. 가이아 여신께 맹세할게요.”

    “저도 신자로서 여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그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은 엘레나가 말을 꺼냈다.

    “요즘 들어 사는 게 싫더라고요. 의욕도 안 생기고. 매일 똑같은 삶, 반복되는 하루.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해요.”

    엘레나의 낯이 어두워졌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표정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공녀 전하께서 요새 힘든 일이 많으신가 보네요.”

    측은해하는 레아를 보며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이 없고 우울해요. 사는 게 무료하고. 왜 사나 싶기도 하고요.”

    스텔라가 껴들었다.

    “새로운 자극거리를 찾아보시는 건 어떠세요?”

    “자극거리요?”

    엘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그녀의 말을 물었다. 그러곤 정말 답답해 죽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게 뭐죠? 뭐든 좋으니 제게 알려주세요.”

    “심야의 가면무도회예요.”

    엘레나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띠었다. 바로 저거다. 이전 삶의 엘레나가 잘 알지 못했던 사교계의 뒷이야기를 파헤치고자 이 무지하고 허영심 많은 영애와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게 뭐예요?”

    엘레나는 그것이 뭐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영애처럼.

    “해가 져야만 시작되는 무도회예요. 아주 은밀한 무도회죠.”

    “어떻게 은밀한데요?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아리아가 껴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좀 농밀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머리가 비었기로 소문난 아리아가 도통 이해를 못 하자 스텔라 영애가 주변을 살짝 둘러보곤 부연 설명을 했다.

    “금기시되는 뭔가가 허락된 무도회랄까요? 가면을 쓴 상대의 신분과 이름을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에요. 묻는 순간 쫓겨나요.”

    “예? 대화도 안 될 텐데 뭘 해요?”

    “그런 말 있잖아요. 몸으로 대화한다? 아, 부끄러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어머!”

    스텔라가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싸자 두 영애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엘레나는 당장에라도 귓속을 닦고 싶은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한낱 욕망과 쾌락에 자신을 내던지는 수준에 진저리가 났다.

    “다들 가까이 붙어보세요. 제가 진짜 신기한 얘길 하나 더 해줄게요.”

    두 영애가 바싹 다가가자 엘레나도 불쾌함을 숨기고 저들과 마찬가지로 상체를 숙였다.

    “‘천상의 가루’라고 혹시 아시나요?”

    “그게 뭐예요?”

    “뭐랄까, 한번 흡입하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진 벅참이 밀려오는 가루라고나 할까요? 노곤해지면서 몽롱해지는데…… 아, 그 황홀함은 상상 초월이에요.”

    엘레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엘레나는 대공가 앞에서 죽은 남자를 떠올렸다. 횡설수설하며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 로렌츠에게 죽임을 당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천상의 가루는 아편이 분명해.’

    심야의 가면무도회에서 그것을 취급하는 게 분명했다.

    ‘조사해 봐야겠어.’

    확실한 단서를 얻고자 스텔라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스텔라 영애.”

    “네?”

    스텔라가 몽롱했던 표정을 지우며 엘레나를 쳐다봤다.

    “저 가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죠?”

    “그게 초대장이 필요한데…….”

    막상 말을 꺼내긴 했지만 스텔라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워낙 은밀하게 운영이 되는 만큼 섣불리 누군가를 초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좀 구해주세요. 제발.”

    엘레나가 애원에 가깝게 부탁하자 스텔라가 흔들리던 눈빛을 다잡고 끄덕였다.

    “제가 초대장 구해볼게요.”

    “고마워요, 영애!”

    엘레나가 손을 잡자 스텔라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딴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 공녀에게 빚을 지게 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해서 초대장을 구할 가치가 있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심야의 가면무도회 초대장이 도착했다.

    * * *

    마차 안. 스텔라가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 창밖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엘레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긴장되세요?”

    “조금 되네요.”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요. 또 가발까지 쓰셨잖아요. 장담하는데 공녀 전하이신지 아무도 못 알아볼걸요? 다 내려놓고 즐기세요. 답답함 확 날려 버리게.”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달래는 모습이 퍽 우스웠지만 엘레나는 티 내지 않았다.

    “초대장 구해줘서 고마워요. 쉽지 않았을 텐데, 두 장이나.”

    엘레나는 두 장이란 말에 힘을 줬다. 스텔라가 구해준 첫 번째 초대장은 사정이 있어 분실했다고 둘러댔다. 결국 스텔라는 어렵게 한 장을 더 구해 엘레나에게 줬다.

    “우린 친구잖아요. 무리하긴 했지만 사정해서라도 꼭 구해주고 싶었어요.”

    스텔라는 친구를 운운하며 생색을 냈다. 엘레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저속하기 짝이 없는 스텔라와 웬만하면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초대장만 아니었다면…….’

    엘레나는 모임 전 길드를 통해서 마약이 암암리에 귀족들 사이에 유통되었단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아편은 대부분 고위 귀족과 엮여 있다 보니 길드는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돈이라면 뭐든 하는 길드라도 신분 사회가 뿌리 깊게 내린 제국에서 귀족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은 꺼렸다.

    또한 아편의 매입도 워낙 은밀하고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꼬리를 잡아도 잘릴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결국 엘레나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직접 가면무도회에 가기로.

    ‘위험을 감수한 만큼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엘레나는 가면무도회에 참가하고자 직접 움직이는 위험을 감내했다. 아직은 심증에 불과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아편의 유통에 대공가가 개입해 있단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엘레나는 가면무도회에 참가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마담 드 플랑로즈를 앞세워 그녀의 저택에서 외박하며 사교 모임을 하기로 했다. 리아브릭은 외박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담 드 플랑로즈의 지원으로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엘레나는 스텔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마담의 저택을 은밀히 빠져나와 심야의 가면무도회장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엘레나와 스텔라가 가면을 썼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린 엘레나는 무도회장을 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여, 여긴?”

    엘레나가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스텔라가 그런 반응을 즐기듯이 말했다.

    “공녀 전하가 짐작하는 곳이 맞아요. 황궁 뒤 별관이에요.”

    “여기서…… 그동안 가면무도회가 열렸다고요?”

    “네, 쭉. 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건 엘레나로서도 충격적이었다. 황비 시절 내내 황궁 생활을 했었건만 별관에서 이런 추잡한 가면무도회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황실의 권위가 이 정도로 바닥일 줄이야.’

    그러니 시안이 고군분투하며 어떻게든 황권을 회복하고자 발악을 한 거겠지.

    “이제 갈까요?”

    스텔라가 앞장서서 갔다. 엘레나는 돌아서서 마차 옆에 서 있는 휴렐바드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기사 복장이 아닌 깔끔한 슈트를 입은 휴렐바드는 가벼운 묵례로 엘레나의 눈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휴렐바드를 남겨둔 채 엘레나는 저만치 앞서가는 스텔라에게 다가갔다.

    “가요.”

    다정한 친구를 연기하며 팔짱을 낀 엘레나와 스텔라가 가면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휴렐바드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는 진한 향수를 뿌리고 과감하다 못해 천박하게 가슴을 노출한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과 반쯤 눈이 풀려 그런 영애들을 보며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니는 영식들 사이로 조용히 섞여 들어갔다.

    가면무도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마찬가지로 사자 가면을 쓴 건장한 사내들이 앞을 막아섰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요.”

    위조된 것인지 아닌지 꼼꼼하게 살핀 사내들이 길을 텄다.

    “근사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엘레나는 스텔라와 함께 입구를 지나 무도회장에 입성했다. 일찍 온 게 아닌 듯 이미 무도회장 안에는 어림잡아도 백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귀족이란 자들이 어떻게…….’

    말로 듣던 것과 별개로 눈으로 목격한 가면무도회의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귀족, 아니, 인간이 아니라 쾌락과 욕망에 눈이 먼 짐승이었다. 끈적끈적한 눈길을 주고받는 건 예삿일이고,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회장 곳곳에서 난잡한 행위를 일삼았다. 엘레나는 그들을 보며 역겨움을 느꼈다.

    “영애, 천상의 가루가 필요하다고 했죠?”

    “네. 영애가 말한 황홀함이 뭔지 저도 알고 싶어요.”

    신분의 노출이 우려되는 만큼 두 사람은 서로를 영애라고 부르며 이름과 호칭을 생략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스텔라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엘레나는 추잡하기 짝이 없는 귀족들의 행각에 끼고 싶지 않아 구석으로 빠졌다. 그러나 그쪽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거나, 남녀가 부둥켜안고 몸을 더듬고 있었다. 역겨움을 참고자 엘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최악이야.’

    아편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 시각. 스텔라는 화려한 공작새 가면을 쓴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 시키는 대로 데려왔어요.”

    와인 잔을 쥔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잔에 담긴 붉은 와인만큼이나 불그스름한 머리 색을 지닌 여인의 눈길이 엘레나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수고했어요.”

    “그, 그럼 이제 괜찮은 거죠?”

    스텔라는 잔뜩 겁에 질린 듯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다.

    아벨라 영애. 엘레나의 가면무도회 초대장을 구하던 그녀는 아벨라에게 포착이 되었다. 아벨라는 베로니카 공녀가 가면무도회에 관심을 갖는다는 걸 알고는 음흉한 간계를 세웠다. 그녀를 망가뜨리기 위해. 그래서 초대장을 얻고자 고군분투하는 스텔라에게 접근했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녀의 아버지가 벌인 사업을 망치겠다며 협박했다.

    아벨라가 싱긋 웃었다.

    “걱정 마요, 영애. 설마 내가 영애에게 화가 미치는 걸 두고 보겠어요?”

    “그, 그럼?”

    “자, 선물이에요.”

    슬쩍 다가선 아벨라가 스텔라의 손에 실크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스텔라는 뽀드득거리는 실크 주머니 너머의 감촉에 그것이 천상의 가루임을 확신했다. 스텔라는 아편이 불러올 희열에 젖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준비는?”

    아벨라가 혼잣말처럼 말을 던지자 곁을 지나가던 토끼 가면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성격이 급한 자이니 바로 움직일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곰 가면을 쓴 한 영식이 콧숨을 내쉬며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벨라의 눈에 띄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엘레나를 발견하고는 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아벨라가 음흉하게 웃으며 와인을 음미했다.

    “흐흐, 영애.”

    창밖만 보고 있던 엘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곰 가면을 쓴 영식에게서 악취가 흘러나왔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편을 한 눈이야.’

    술에 취한 것과 확연하게 달랐다. 쾌락에 한껏 흥분한 티가 났다.

    “날 애타게 찾았다고? 흐흐.”

    ‘찾아?’

    엘레나는 곰 가면 사내를 아편 중간 판매자로 오해했다.

    “당신인가요? 천상의 가루를 취급한다는 사람이.”

    “뭐? 아, 이거?”

    곰 가면의 남자는 횡설수설하며 주섬주섬 실크 주머니를 꺼내더니 열어 보였다. 그 속에 담긴 것을 본 엘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편!’

    그런 엘레나를 보며 곰 가면의 영식이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우람한 몸을 앞세워 성큼성큼 다가왔다.

    “흐흐. 여기 말고 위로 가서 즐기는 게 어때. 어?”

    “뭘 즐겨?”

    엘레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날을 세웠다.

    “당신 누구야? 천상의 가루를 취급하는 거 맞아?”

    “그래, 그거. 여기 있잖아.”

    곰 가면의 영식이 실크 주머니를 흔들며 실실 웃었다.

    ‘이자는 판매자가 아니야.’

    저런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로 은밀한 거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더 이상 말을 섞을 이유가 사라지자 엘레나의 눈길이 싸늘해졌다.

    “비켜.”

    “그래. 같이 비키자. 저 구석으로, 흐흐.”

    남자는 뭔 상상을 하는지 역겹게 콧숨을 내쉬었다. 엘레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인 걸 깨닫고는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러자 사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는데? 왜 이제 와서 앙탈이야. 흐흐.”

    “하.”

    엘레나가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의미심장하게 경고했다.

    “후회할 텐데?”

    “네가 나 좋다며. 후회는 무슨. 흐흐. 나도 너 좋아.”

    이미 아편에 취한 것도 모자라 흥분할 대로 흥분한 곰 가면의 사내는 인내심을 잃었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게 당장에라도 뭔가를 저지를 듯 보였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흐흐. 가자. 내가 천국에 데려다줄게.”

    곰 가면의 사내는 실성한 소리를 지껄이며 엘레나의 팔뚝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자 손을 뻗었다. 위협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엘레나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말했지.”

    솥뚜껑만 한 무지막지한 곰 가면의 사내의 손이 엘레나의 몸에 닿으려던 순간이다.

    휙. 엘레나의 눈앞에 누군가 껴들었다. 기민한 동작으로 곰 가면의 사내의 앞을 막아섬과 동시에 그를 세게 밀쳤다.

    “컥!”

    “후회한다고.”

    거구에 체중까지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곰 가면을 쓴 영식은 나가떨어졌다.

    “너 이 새끼 내가 누군 줄 알고…… 웁웁!”

    독수리 가면남이 손수건을 곰 가면 영식의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더니 곰 가면 사내의 목덜미를 잡아 내리눌렀다.

    “……!”

    너무 아팠는지 그가 비명을 질렀지만 손수건만 깨물 뿐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독수리 가면남은 그걸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곰 가면의 영식을 잡아 일으켜 벽 쪽으로 박아버렸다. 곰 가면 영식의 이마가 깨져 피가 벽을 타고 흘렀다. 너무 한순간에 일어난 일에 곰 가면의 사내는 꿈인지 생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엘레나는 독수리 가면남의 개입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태연했다.

    “경.”

    독수리 가면남의 정체는 휴렐바드였다. 엘레나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분실을 이유로 두 장의 초대장을 받았다. 한 장은 그녀가, 다른 한 장은 휴렐바드에게 줘 지금과 같은 예상 밖의 사태에 대처하고자 했다.

    “우, 우우웁!”

    곰 같은 사내가 발악을 하자 휴렐바드가 손으로 옴짝달싹 못 하도록 억압했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사내는 거구의 덩치를 부르르 떨 뿐 꿈쩍도 하지 못했다.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한다면 이 이상의 위압은 없을 거예요.”

    휴렐바드의 무력 앞에 엘레나를 강제하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내는 온순한 곰이 되어 간이든 쓸개든 다 빼줄 듯 순종적으로 굴었다.

    “천상의 가루, 어디서 구매했죠?”

    “위, 위층…… 복도 끝…… 방.”

    얼굴 한쪽이 벽에 짓눌린 상태라 그런지 곰 가면 사내의 말은 어눌했다. 그러나 엘레나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엔 그걸로 충분했다.

    “경.”

    엘레나의 한 마디에 말뜻을 알아들은 휴렐바드가 제압을 풀었다.

    “허, 헉.”

    겨우 몸을 가눌 수 있게 된 곰 가면의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휴렐바드가 살기를 흘렸다.

    “히익!”

    등골이 서늘하다 못해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위압감에 겁을 집어먹은 사내가 뒤도 보지 않고 도망갔다. 이마에 흘러내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그럼 올라갈까요?”

    엘레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앞서 걷자 휴렐바드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 * *

    그 시각.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엘레나와 휴렐바드를 빤히 보는 시선이 있었다. 늑대 가면을 쓰고 와인보다 진한 붉은 눈을 지닌 사내였다.

    “얘가 여길 왜 왔을까나?”

    엘레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늑대 가면남의 정체는 바로 렌이었다. 검술제 결승전 패배로 인한 충격으로 연병장에 처박혀 검술 훈련에만 매진하던 렌은 나름의 진전을 보여 얼마 전부터 바스타슈 가문의 후계자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물론 그 행보라는 것이 워낙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만큼 대외적으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엘레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렌을 보며 하이에나 가면을 쓴 마제스티의 수장 멜이 물었다.

    “이런저런 생각. 쟤가 날 보러 온 건 아닐 거고. 왜 왔을까? 나가서 아는 척을 할까, 말까 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 그녀가 여기에 온 겁니까?”

    멜은 이미 렌의 명령을 받아 정보 조직 마제스티를 동원해 루시아를 조사한 전력이 있다. 또한 그녀의 얘기가 나오면 렌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루시아는 아니고. 비슷한 거긴 한데, 오늘은 좀 다르네?”

    렌은 곰 가면을 쓴 사내를 쫓아내고 홀 구석의 계단으로 사라지는 엘레나를 아쉽게 쳐다봤다. 엘레나를 발견한 건 그야말로 운이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썰미를 가진 렌이라 하더라도 가면을 쓴 상대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이런 저속한 무도회에 어울리지 않는 걸음걸이와 가면으로 감출 수 없는 금발 그리고 바다색 눈동자를 보고 확신했다. 그러다 곰 가면의 사내가 잔뜩 흥분해서 엘레나에게 가는 걸 목격했다. 하늘이 또 나설 기회를 만들어준 건가 싶어 짠 하고 나서려는데, 예전에 본 호위기사로 짐작되는 독수리 가면남이 한발 앞서 사내를 제압하며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완전 짜증 나게.’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좀 알기 쉽게 알려주십시오.”

    “싫은데.”

    렌의 단호한 대답에 멜은 깊은 뜻이 있나 싶어 눈을 맞췄다.

    “뭘 그리 꼬치꼬치 알려고 해? 난 나만 아는 게 그렇게 좋더라.”

    “…….”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뻔뻔함에 멜은 침묵했다.

    “아! 오늘 만남은 취소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항상 느끼지만 렌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직 확정적인 건 아니지만 대공가의 기둥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단서를 찾아 가면무도회에 왔는데 그냥 돌아가자고 한다.

    “냄새를 맡은 게 우리만은 아니라는 거지. 우리까지 움직이면 의심받을 거야.”

    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가끔 이해하지 못할 쓸데없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긴 했지만 렌의 말엔 뼈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황태…….”

    “쉿.”

    렌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란 시늉을 했다.

    “누가 멋대로 추측하래?”

    “죄송합니다.”

    멜은 재빨리 실수를 인정했다. 정보를 다루는 자가 가장 경계할 것이 정황과 증거 없이 상황을 추측하는 것이다.

    “마제스티를 베로니카한테 붙여.”

    “베로니카 공녀에게 말씀이십니까?”

    루시아와 베로니카 공녀가 동일 인물인 걸 멜은 몰랐다. 그러다 보니 뜬금없는 명령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 L한테도 붙이고.”

    “L한테도요?”

    “어.”

    “알겠습니다.”

    멜이 생각하기에 세 사람은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그러나 의문을 갖지 않고 그대로 명을 받아들였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먼저 가. 난 놀다 갈 거니까.”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예정된 만남이 취소된 이상 멜은 여기 있을 이유가 더 없었다. 가볍게 묵례하고는 가면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떻게 된 애가 가만히 있지 못해. 위험하게.”

    그가 떠나고 나자 렌은 손에 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잔을 내려다보는데 투명한 화이트 와인에 엘레나의 얼굴이 맺혔다.

    렌은 이미 엘레나가 왜 이런 행보를 보이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지금이야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으로 많은 걸 누릴 수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대역은 대역일 뿐. 진짜가 될 수 없다. 정말 만에 하나 베로니카 공녀가 돌아오기라도 하는 날엔 그녀는 비참한 결말을 피할 수가 없다.

    “뭐, 잘 대처하고 있는 거 같긴 하다만. 너무 공격적인 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와.”

    렌은 그녀가 L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성인이자, 신여성이라 주목받는 시크릿 살롱 여주인 L의 신분으로 여러 차례 대공가의 사업에 찬물을 끼얹으며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단언하긴 이르지만 시크릿 살롱과 건축 중인 바실리카만 하더라도 대공가가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는 노블레스 거리를 겨냥한 거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L은 정확히 알고 있다. 대공가를 몰락시키는 길만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그래도 이건 너무 무모하다, 아니, 위험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온단 말인가. 물론 휴렐바드는 믿을 만한 기사다. 하지만 때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도 생기게 마련이다.

    “적당히를 몰라요, 애가. 이 오라버니가 막 껴들고 싶어지게.”

    렌은 이미 그녀의 위험천만한 행동을 지켜볼 수가 없어 마제스티를 엘레나에게 붙였다. 명목상 감시지만, 만일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사전에 나서서 차단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정의의 악당이 나서볼까?”

    렌의 고개가 돌아갔다. 반대편 테라스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공작새 가면을 쓴 영애가 토끼 가면남에게 눈을 부라리며 뭐라 쏘아붙이고 있었다.

    탁. 와인을 한 번에 마신 렌이 잔을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그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어이, 아벨라.”

    “……!”

    렌이 사람들이 다 알아듣게끔 대놓고 공작새 가면을 쓴 영애의 이름을 불렀다. 귀족치고 라인하르트 가문의 아벨라 영애를 모르는 자가 없는 만큼 그녀를 향해 시선이 쏟아졌다. 신분이 드러나자 가면 사이로 얼핏 드러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장차 황태자비를 노리고 있는 그녀로서 이런 곳에 출입했단 게 공공연히 드러나면 평판에 심각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한 토끼 가면남이 위압적으로 렌에게 다가갔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다 뒷감당을 어찌…… 헉!”

    토끼 가면남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렌이 땅을 박차며 갑자기 거리를 좁히더니 그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 넣은 것이다. 어찌 대처할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해 쓰러진 토끼 가면남을 뒤로하고 렌이 성큼성큼 아벨라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겁에 질린 아벨라가 뒷걸음질을 쳤다. 간계한 머리도 지금 이 순간은 제구실을 못 했다. 눈앞의 저 인간은 그런 상식이 통하는 놈이 아니다. 미친놈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또라이다.

    툭. 아벨라의 등이 무도회장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다. 더 이상 갈 데가 없게 되자 아벨라가 발악했다.

    “겨, 경고했어요. 다가오지 말라고.”

    “싫은데?”

    렌이 이죽거리며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러더니 손을 쭉 뻗어 아벨라 귀 너머의 벽을 짚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했지. 내가 찍은 거 건들지 말라고. 말귀 못 알아듣나?”

    “서, 선배.”

    “그런 짓궂은 장난을 하면 내 육촌 누이가 불편하잖아? 안 그래?”

    은연중에 렌이 살기를 흘리자 아벨라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이미 다 알고 온 이상 잡아뗀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

    렌이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이야기가 대공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참 재미있겠지?”

    “…….”

    “잘하자.”

    렌은 아벨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돌아갔다. 아벨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걸 겨우 벽에 기대어 버텼다.

    * * *

    “여기군요.”

    엘레나는 곰 가면남이 일러준 대로 이 층 복도 맨 끝 방 앞에 섰다. 다른 방들에 비해 유독 대리석 문이 큰 걸로 보아 그 용도가 확연히 달라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각진 얼굴의 사내가 기괴한 털 가면을 쓰고 물었다.

    “천상의 가루를 사고 싶어요.”

    사내가 엘레나와 휴렐바드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대리석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한 뼘쯤 열리더니 웬 미모의 여성이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누구? 손님?”

    “예, 손님입니다.”

    문틈으로 살짝 드러난 여인의 옷차림은 천박했다. 주요 부위를 제외한 허벅지와 골반, 가슴골까지 그대로 드러냈다. 여자는 힐끗 엘레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관심 없다는 듯 휴렐바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끈적끈적한 눈길로 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머, 근사한 오라버니도 계시네. 들어와요.”

    여성이 비켜서 손짓하자 엘레나와 휴렐바드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눈길을 끈 건 각종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박제와 장식들이었다. 괴기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것들로 방 주인의 취향이 어떠한지 짐작이 됐다.

    “손님이 오셨다고?”

    이윽고 구역을 나누는 듯 커튼 너머에서 뿔이 달린 기괴한 가면을 쓴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엘레나와 휴렐바드를 번갈아 보더니 널찍한 소파에 털썩 누웠다. 엘레나의 눈길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자가 아편을 취급하는 중간 유통자.’

    엘레나는 가면 사이로 사내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기괴한 가면은 둘째 치고 몸가짐이 경박하다 싶을 만큼 거침없었다. 지금도 상체를 드러낸 채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야만적이었다.

    “……약쟁이처럼은 안 생겼는데, 천상의 가루를 사고 싶다?”

    뿔 가면 사내의 질문에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여길 왔죠.”

    “왜?”

    “이유가 중요한가요?”

    엘레나의 반문에 뿔 가면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금세 웃음을 지우고 매서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중요하고말고. 여길 남녀가 같이 온 경우는 당신들이 처음이거든. 누구랑 같이 오는 것들은 꼭 뒤가 구려.”

    “편견이에요.”

    “그러니까 대답을 해봐. 왜 사려고 하는지.”

    뿔 가면 사내는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아편 조직의 중간 유통자로 저 자리에 앉은 것이다. 엘레나는 사전에 준비한 대로 얘기했다.

    “좋아요. 이야기하죠. 귀족들 상대로 쓸 일이 있어서요.”

    “귀족? 에이, 그럼 못 팔지. 고객이 겹치는데?”

    “걱정하지 마요. 제국 귀족은 아니니까.”

    뿔 가면 사내가 턱을 괴고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문을 열어줬던 야한 옷차림의 여성이 과일을 입에 넣어주자 그걸 우악스럽게 씹어 삼켰다.

    “좋아. 그렇다 치고. 양은? 귀족들이라는 거 보니 한둘은 아닌 거 같은데.”

    “10㎏.”

    “……!”

    엘레나가 거래량을 제시하자 뿔 가면 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현재 유통되는 천상의 가루의 경우, 10㎏이면 천 명이 일시에 흡입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가 중간 유통 역할을 맡은 이래 이렇게 많은 양을 사겠단 사람은 처음이었다.

    “진심이냐?”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뿔 가면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불할 돈은 있고?”

    “없다면 애초에 오지 않았겠죠.”

    엘레나는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듯이 받아쳤다. 뿔 가면 사내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거래하러 왔다는 것을 알리며 그에게 얕보이지 않고자 함이다. 잠시 말이 없던 뿔 가면 사내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런 이런! 이거 내가 큰 고객을 못 알아봤군. 자, 그쪽에 편히 앉으라고.”

    “서 있는 게 편해요.”

    엘레나가 거절 의사를 보이자 문을 열어주었던 미모의 여인이 휴렐바드에게 다가갔다.

    “거기 서 계신 오라버니, 그러지 말고 앉아요. 굳이 다리 아프게 뭐 하러 서 계세요.”

    “다가오지 마라.”

    휴렐바드는 경고했다. 그러나 여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웃음을 흘리며 추파를 던졌다.

    “어머, 어색해서 그래요? 그럼 제가 앉혀 드릴게요. 그러니까 편히 앉아서…… 헉!”

    “두 번은 경고로 그치지 않는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휴렐바드의 경고에 여인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휴렐바드가 흘린 살기에 여인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며 다가오지 못했다. 뭔가 의아함을 느낀 엘레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휴렐바드를 올려다봤다. 그가 이처럼 단호하고 무섭게 여인의 접근을 막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휴렐바드가 더없이 냉철한 눈길을 여인에게서 떼지 않으며 말했다.

    “저 여인은 숙련된 암살자입니다.”

    “……!”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그저 시중을 드는 여인인 줄 알았는데, 그런 비수를 품고 있는 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커튼 너머에 두 명의 암살자가 더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엘레나가 뿔 가면 사내를 돌아봤다.

    “사실인가요?”

    “…….”

    뿔 가면 사내는 벙어리라도 된 듯 말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엘레나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재미있네요. 손님을 이렇게 대하다니.”

    “어이, 오해라고. 오해. 여긴 약에 미친놈이 넘치다 보니까 나도 내 한 몸 건사하려면 사람 몇은 둬야 하지 않겠어?”

    언제 딴생각이라도 했냐는 듯 뿔 가면 사내가 둘러댔다. 그 뻔뻔함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엘레나는 더는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당장의 감정이나 기분보다는 이 거래를 성사시키는 게 더 중요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죠. 제가 보기보다 참을성이 강하지 않아서요.”

    엘레나가 가벼운 경고에서 그치자, 뿔 가면 사내가 옳다구나 싶었는지 얼른 대화를 이어갔다.

    “아까 10㎏이라고 했었나?”

    “가능한가요?”

    “툭 까놓고 얘기하지. 그 정도 양은 여기 없어.”

    “없다?”

    “여기 약쟁이들이 그렇게 대량 구매를 할 것 같아? 따로 날을 잡는 게 어때. 어차피 지금 당장 그 정도 물량을 지불할 돈도 없어 보이는데. 넌 돈을, 우린 가루를 준비해서 보는 거지.”

    뿔 가면 사내의 제안에 엘레나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장소는 열흘 뒤 여기, 시간도 이 시간대로 하자고.”

    “그러죠.”

    용건을 마친 엘레나는 이 추잡한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은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뿔 가면 사내가 뒤에서 엘레나를 불렀다.

    “아, 중요한 걸 말 안 했군.”

    뿔 가면 사내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이 거래에 장난질이 있다면…… 끝이 좋진 않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엘레나가 뒤를 돌아보더니 똑같이 받아쳤다.

    “그쪽이야말로요. 아, 노파심에 하는 얘긴데 미행 붙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 옆에 계신 분도 그리 썩 너그러운 성격은 아니라서.”

    엘레나는 차갑게 몸을 돌리더니 방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쳐 일 층에 내려온 엘레나는 이 지저분한 무도회장에 일 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마차로 돌아오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부가 보였다. 휴렐바드는 그를 깨워 출발 준비를 시키고는 엘레나에게 돌아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타시죠.”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 위에 탄 엘레나가 그를 돌아봤다.

    “경도 타세요.”

    “저도 말씀입니까?”

    “여기 경 말고 또 누가 있나요?”

    가면 너머로 엘레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며 마차 안쪽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죄송합니다.”

    깜짝 놀란 휴렐바드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기사는 연인을 제외하면 레이디와 함께 마차를 타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마차라는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레이디의 지조가 의심을 받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왜요? 보는 사람도 없는걸요.”

    “그래도 안 됩니다. 제 행동으로 인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엘레나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가면을 쓴 걸 잊으셨어요? 그리고 경과 절 오해할 사람도 여기 없답니다.”

    엘레나의 발언에 휴렐바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레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타세요. 안 그러면 출발 안 할 거예요.”

    “…….”

    “어서요.”

    난처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휴렐바드가 엘레나의 강권에 못 이겨 결국 마차에 올라탔다.

    달그닥, 달그닥.

    이윽고 마부가 채찍질하자 사륜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속도로 새벽녘의 한적한 수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엘레나의 건너편에 경직된 자세로 앉은 휴렐바드는 큰 키 때문에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 가까웠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정수리가 천장에 쿵쿵 소리를 내며 부딪혔는데, 아플 법도 하건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엘레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경, 자세 좀 풀어요. 보는 제가 다 불편해요.”

    “전 이게 편합니다.”

    “불편해 보이는데.”

    엘레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휴렐바드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몇 번 더 얘기를 해봐도 말을 듣지 않자 엘레나도 설득을 포기했다.

    “이럴 때 보면 경은 참 고지식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은 또 아닌데.”

    엘레나가 옅게 웃으며 손을 머리 뒤로 뻗었다. 그러곤 매듭을 풀어 가면을 벗었다. 올려 묶은 머리도 등 뒤로 풀어 헤쳤다.

    “뭐 하세요?”

    머리를 쓸어내리며 정돈하던 엘레나가 앞에 앉아 낑낑대는 휴렐바드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이게 잘 풀리지 않아서…….”

    “제가 도와드릴게요.”

    작게 웃은 엘레나가 팔을 뻗어 휴렐바드의 뒷머리에 단단히 동여맨 독수리 가면의 끈을 풀었다.

    “……!”

    가면이 벗겨지고 드러난 휴렐바드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갰다. 본인 스스로도 얼굴이 후끈거리는 걸 인지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 못했다. 엘레나가 자신의 가면 위에 독수리 가면을 올려두며 휴렐바드를 쳐다봤다.

    “대화의 시작은 서로를 마주 보는 거에서 시작이에요. 고개를 드세요.”

    “…….”

    “자꾸 이러면 곤란한데. 제가 오늘 깊은 주제로 대화를 나눌 예정이거든요.”

    그제야 머뭇거리던 휴렐바드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빤히 보는 엘레나의 눈길이 당혹스러웠지만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짐을 느낀 엘레나가 말했다.

    “경은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왜 가면무도회에 가는지, 왜 아편을 사들이는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죠? 분명 궁금할 텐데. 참기 힘들 만큼.”

    휴렐바드가 곧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기사는 주군의 명에 따를 뿐. 의심하거나, 의문을 갖지 않는 걸 덕목으로 여깁니다.”

    “교과서 같은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에요. 경을 마차에 태운 건 좀 더 진심 어린 대답을 듣고 싶어서예요.”

    휴렐바드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엘레나의 진중한 태도에 그 역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묻지 않는 건, 공녀 전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입니다.”

    “헤아릴 수 없다?”

    “제가 본 공녀 전하는 항상 두 수, 세 수를 내다보고 움직이십니다. 지금 한 수 앞을 묻는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휴렐바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이유로 그를 호위기사로 선임했던 날을. 하지만 그것은 눈속임이었다. 그녀는 외모를 이유로 감쪽같이 남의 이목을 속이더니 휴렐바드의 검술 실력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한 번도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적도 없으면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편을 취급하는 자와 사사로이 접촉하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다. 휴렐바드의 걱정 어린 조언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경이 있잖아요.”

    제2기사단원들조차 잘 모르는 휴렐바드의 진짜 실력을 꿰뚫어 본 듯 엘레나는 무한한 신뢰를 했다. 대체 어떻게 알고서. 의문이 들었지만 휴렐바드는 개의치 않았다. 기사에게 있어 주군의 인정과 믿음보다 더한 명예는 없기에.

    엘레나는 그러한 휴렐바드의 말이 기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경은 절 너무 과대평가하세요.”

    “아뇨, 공녀 전하야말로 겸손하십니다. 전 말입니다. 공녀 전하를 모시게 된 게 제 삶의 가장 명예로운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축복이라니. 휴렐바드의 금칠에 가까운 고백에 엘레나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내,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설마 이렇게까지 휴렐바드가 가슴 깊이 따르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란 걸 알아도 날 따라줄까?’

    아직 잘 모르겠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기사에게 있어 엘레나가 대역이란 사실은 굉장한 불명예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라면.’

    엘레나는 지금이 아니면 휴렐바드에게 진실을 고백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엘레나는 한 호흡을 쉬며 마음을 다잡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고백 말입니까?”

    휴렐바드의 반문에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레나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는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에요.”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휴렐바드가 그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라니. 엘레나의 고백은 그가 곧이곧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말 그대로예요. 경이 보고 있는 저는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에요.”

    “농담이라면 지나치십니다.”

    “아뇨, 진실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엘레나의 표정에 휴렐바드가 입을 다물었다.

    “저는 대역이에요.”

    “대역?”

    휴렐바드의 반문에 엘레나가 끄덕였다.

    “대륙 변방의 몰락 귀족 출신인 저를 리아브릭이 대공가로 데려왔어요. 프란체 대공의 허락하에 절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으로 세웠죠.”

    “……!”

    얼음의 기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휴렐바드의 얼굴이 혼돈으로 일그러졌다. 딴 사람이 얘기했다면 묵살해 버렸을 만큼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한 말이다 보니 무시할 수 없었다.

    “못 믿겠습니다.”

    “경.”

    “제가 보고 겪은 공녀 전하는 누구보다 더 귀족다우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노력했거든요. 악착같이.”

    엘레나는 지난 삶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휴렐바드는 담담히 모든 걸 털어놓는 그녀를 보며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엘레나가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쓸쓸히 말했다.

    “진짜 베로니카 공녀는 살아 있어요. 일 년 후에 돌아올 수도 있고, 내일이라도 돌아와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어요.”

    “그런…….”

    “그때가 되면 전 어떻게 될까요?”

    휴렐바드는 저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초원 부족에는 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필요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인형극이 끝난 인형은 짐만 될 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마련이다.

    “경도 짐작하셨겠지만 제 끝은 정해져 있어요.”

    “…….”

    휴렐바드는 쉬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 죽음을 알고 있음에도 저리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대역이란 걸 고백하던 모습보다 더 충격적이고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차 안에 긴 정적이 깔렸다. 엘레나는 조바심을 내지 않고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실망하지 말자. 존중해 주는 거야.’

    기사는 명예를 중시하게 마련이다. 혈통도 불분명한 몰락 귀족 출신의 대역 엘레나를 주군으로 섬기는 불명예를 그가 감수하리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를 믿고 있지만 진실을 고백한 지금, 불안하고 초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공녀 전하는 참으로 잔인하신 분입니다.”

    긴 침묵을 깨고 휴렐바드가 고개를 들어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길이 여느 때보다 깊어 엘레나는 당혹스러웠다.

    “왜 제게 솔직히 말하지 않는 겁니까? 곁에 남아달라고.”

    순간 엘레나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휴렐바드가 이렇게까지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그녀에게 따지듯이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대의 선택을 존중하고자…….”

    “이기적이십니다. 저란 놈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가짜예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엘레나는 화를 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정말 그 얼음의 기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누르기 어려운 뜨거움을 보였다.

    “기사의 명예, 개나 주겠습니다.”

    “…….”

    “저를 손가락질하고 욕을 해도 감수하겠습니다.”

    엘레나는 저 밑에서 울컥하고 치미는 뭔가를 느꼈다. 그의 격정이 싫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게 너무 고마웠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고, 눈이 멀더라도 제 주인은 앞에 계신 한 분뿐입니다.”

    “경.”

    하나뿐인 주인이라니. 진심 어린 충성에 감동을 받은 엘레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손을 뻗어 휴렐바드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휴렐바드가 당황했다. 엘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끼고 있는 의전용 면장갑을 어루만졌다.

    “여기에 제가 새긴 글자 기억하시나요?”

    휴렐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L.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엘레나가 손수 면장갑 안쪽에 고대어를 수놓으며 늘 마음에 새기라 했으니까.

    “그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세요?”

    “어찌 잊겠습니까. 첫 만남부터 지금껏 제게 늘 진실하셨다고…… 설마?”

    휴렐바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간 손등에 늘 새기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일러주지 않았기에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자수를 놓아주며 엘레나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살롱의 여주인 L이…….”

    “네, 저예요.”

    “……!”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휴렐바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세간의 중심에 선 L과 엘레나가 연관이 있을 거라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L이란 이름이 주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수도를 들썩이게 만든 살롱의 여주인이자, 신여성으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경에게 감히 약속할게요.”

    “…….”

    “그대가 버리고자 한 명예를 지켜줄 것이고, 그대가 인내하고자 한 손가락질과 모욕을…… 존경으로 바꿔줄게요.”

    엘레나의 약속에 휴렐바드는 경건해졌다. 더 이상 엘레나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를 알아봐 주고 처음으로 선택한 것도 엘레나였다. 또 그가 본 어느 귀족보다 더 귀족다웠으며, 한 번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그런 그녀를 마음 깊이 경외했다. 한순간도 그녀를 모시게 된 게 명예로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건 대역임을 알게 된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그대는 앞으로도 쭉 절 지켜주세요.”

    엘레나의 미소를 마주한 휴렐바드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 * *

    “컥.”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깡마른 사내가 절명했다. 마땅히 탈출구가 없는 지하 밀실인 만큼 저항은 마지막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압했습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린든 백작의 보고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이군. 수도에서 버젓이 아편 제조 시설을 만들어 운영할 줄이야.”

    시안이 아편 제조 시설과 관련된 단서를 얻은 건 우연에 가까웠다. 라인하르트 공작가를 배후로 둔 노예 경매장을 습격했을 때 다량의 아편을 취급하던 유통자를 생포할 수 있었다.

    몸통을 잡기 위해 시안은 일부러 그를 놓아준 뒤 은밀히 사람을 붙여 미행했다. 행적을 좇은 결과 그가 아편을 유통하는 점조직의 맨 윗선인 걸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점층적으로 그와 접촉한 사람들을 추적한 끝에 수도 내 숨겨져 있던 아편 제조 시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꿇려.”

    린든 백작의 손짓에 수하들이 아편 제조소의 수장 격인 중년 남자의 무릎을 꿇렸다. 그는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는지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시안이 대형 솥에 담긴 꽃이삭과 잎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게 다 아편인가?”

    “…….”

    중년 남자는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후가 누구지?”

    “…….”

    중년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보다 못한 린든 백작이 눈짓하자 수하들이 중년 남자를 억압하며 대답을 강요했다. 끝끝내 입을 열지 않던 중년 남자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큭.”

    “혀를 깨물었습니다!”

    “뭘 가만히 보고 있어? 살려!”

    린든 백작이 다그쳤지만 어찌나 세게 혀를 깨물었던지 그는 곧 숨을 거뒀다. 축 늘어진 시체를 보는 린든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독한 것. 이래 가지고는 배후를 파악해 내는 건 무리입니다.”

    시안도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살한 중년 남자는 마약 제조소의 우두머리 격이었다. 저항하다 죽임을 당한 자들을 제외하면 잡일을 하던 이들이 대다수였다. 저들을 추궁한다 한들 쓸 만한 정보가 나올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았다.

    “조급할 필요 없다. 이곳이 기습당했다는 걸 저들은 알지 못해. 누군가 아편을 가지러 오겠지. 분명 올 거야.”

    시안의 시선이 제조하다가 멈춘 아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솥에 있는 아편을 다 합치면 족히 5㎏은 넘어 보였다. 수요가 있으니 유통도 있는 법. 분명 유통자가 이곳을 찾을 것이다.

    ‘꼬리가 아니라 몸통을 밝혀내야 해.’

    시안은 제국의 수도에서 이렇게 공공연히 아편을 제조하여 유통하는 배후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수도에서 벌일 배포라면 그만한 배경을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하다. 최소 불법 노예 거래를 일삼던 4대 가문 라인하르트 공작가에 버금가는 대귀족일 공산이 컸다.

    “귀족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노예도 모자라 아편이라니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군. 제국에 귀족이 정말 필요한 존재인가.”

    린든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시안을 따르고 있지만 그도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죄가 있다곤 하나 귀족의 필요성마저 의심하는 건 과하게 느껴졌다.

    “어찌 귀족들을 다 동일 선상에 놓습니까? 그건 과대 해석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귀족들도 많습니다.”

    “정녕 그리 보는가?”

    시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 아편 제조 시설만 하더라도 수도에 몇 군데가 더 있을지 모르지.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이 많은 아편을 누가 다 소비할까?”

    “그건…….”

    “귀족들이지.”

    “…….”

    린든 백작도 저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편은 일개 평민들이 취급하기에 너무 비쌌다.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아닌 이상 구입은커녕 평생 구경조차 쉽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놀랍구나. 그대는 몇 수 앞을 내다본 것인지…….”

    시안은 엘레나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엘레나는 피라미드의 밑바탕을 이루는 민중들에 의해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은 곧 평민들의 인권을 끌어올려 신성 제국의 시민처럼 투표권을 준다는 의미와 직결했다.

    황제. 귀족. 시민 대표.

    이 삼권이 분립한 공화정 정치체제의 확립이야말로 망가진 제국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 본 것이다. 시안 역시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황실과 귀족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민중들을 대신할 시민 대표의 존재가 필요했으니까.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시안이 달라질 수 있었던 건 엘레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곧 동이 틉니다. 일단 물러나시지요.”

    “알겠다.”

    뒤처리를 마무리 지은 린든 백작의 말에 시안도 동조했다. 이젠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니까.

    “아직도 기별이 없는 것인가?”

    “누구 말씀…… 아. 네, 없었습니다.”

    “…….”

    린든 백작의 대답에 시안이 빤히 쳐다봤다.

    “지금 제가 숨겼을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그냥 봤을 뿐이다.”

    “정말 기별 한 통 없었습니다.”

    재차 린든 백작이 확인을 시켜주자 시안은 아쉽고도 서운한 마음을 감추며 돌아섰다.

    ‘기다리겠다, 참아보겠다 약조했거늘…….’

    그게 또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 시안이다.

    * * *

    “뭐라고?”

    서류에 서명하던 리아브릭이 펜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보고하는 루미너스를 보는 눈길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다시 보고해. 또박또박 다시!”

    리아브릭답지 않은 다그침에 루미너스가 안경을 올려 쓰며 조용히 대답했다.

    “제조소가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네 군데 다.”

    파직! 리아브릭이 쥐고 있던 펜이 그대로 부러지며 두 동강이 났다.

    “지금 그걸 보고라고 해?”

    “죄송합니다.”

    아틸과 루미너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편 사업은 대공가의 핵심 사업이다. 대공가의 재정이 천문학적이라 평가받는 데는 불법적인 아편 유통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대공가 전체 수입의 3할에 육박할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편 제조소는 그런 아편 사업의 심장이다. 아편은 재배와 정제, 유통의 과정을 거치는데, 제조소에서는 재배된 아편의 원료를 정제했다. 잎사귀를 증류하여 건조, 농축하는 과정에서 환각 효과가 몇 배 이상 증폭된다. 아편에 별 관심이 없던 귀족들이 호기심으로 한 번만 손을 대도 중독이 되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그런 주요 시설이 무려 네 군데나 피해를 입었으니 리아브릭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흉수는?”

    “라인하르트가의 노예장을 습격했던 자들의 소행으로 짐작됩니다.”

    리아브릭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짐작? 그마저도 확실치 않다?”

    “죄송합니다. 파악된 정보가 너무 한정적인지라.”

    “그걸 보고라고 해?”

    리아브릭의 날이 선 한마디에 아틸과 루미너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편은 대공가의 핵심 사업인 만큼 리아브릭의 수족인 아틸과 루미너스가 직접 관리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제조소가 습격을 당한 건 두 사람의 책임이 가장 컸다.

    “누누이 말했을 텐데.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폐쇄하고 발 빼라고. 그마저도 못 해? 네놈들 머리는 장식이야?”

    “지금 흉수에 대해 파악 중이니…….”

    “파악하면? 그다음은 뭔데. 기사단이라도 소집해서 소탕하게? 우리가 아편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고 소문낼 일 있어?”

    “…….”

    아틸과 루미너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보니 평소의 영민한 머리도 오늘따라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리아브릭은 반만 남은 펜을 쥐고 이를 갈았다.

    “꼬리는?”

    “잘랐습니다.”

    루미너스가 이 부분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편은 구매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최소 다섯 명에 가까운 사람을 거쳤다. 특정 몇몇 공급자를 제외하면 꼬리가 밟히더라도 추적을 당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보름 주지. 제조소 네 군데 모두 복구해.”

    “하지만 기술자들이…….”

    아틸이 자신 없다는 듯 말을 흐렸다. 솥이나 정제에 필요한 물건은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아편을 증류, 정제하는 과정을 담당하는 전문 기술자들을 양성하고 구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 거까지 내가 하나하나 일러줘야 해?”

    “아, 아닙니다.”

    리아브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이번 일로 입은 피해액수가 떠나질 않았다.

    ‘하필, 재정이 좋지 않은 이럴 때…….’

    현재 대공가의 자금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다 보니 마르지 않던 자금도 슬슬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정적인 고수입을 보장하던 아편 사업의 타격은 치명적이었다.

    ‘숨 고르기를 해야 하나?’

    리아브릭은 잠시 노블레스 거리 사업을 중단할까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재배지가 건재하고 유통망이 살아 있다. 사업을 정상화할 저력이 충분한 만큼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당장 융통해야 할 현금인데, 그것도 충당할 방법이 있었다.

    ‘예술품을 매각해야겠어.’

    대공가의 창고에 쌓인 예술품만 하더라도 이백여 점이 넘는다. 최근 엘레나가 웃돈을 주어 매입한 작품까지 합치면 이백오십여 점에 육박했다. 그것들을 매각하면 당장 급한 불은 끄고도 남으리라.

    “하면, 흉수는 어찌할까요? 방치하면 계속 문제가 될 텐데…….”

    “굳이 우리 손을 쓸 필요 없지.”

    “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틸에게 리아브릭이 알아듣게 부연 설명을 했다.

    “흔적만 찾아서 라인하르트가에 흘려. 피는 그쪽에서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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