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23/30)
  • 제14장 시크릿 살롱

    살롱의 주인 L의 정체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이름은 둘째 치고 성별이나 신분도 알려지지 않아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수도 중심지에 초대형 살롱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막대한 부를 지녔다는 점과 무명이나 다름없는 건축가 란돌에게 살롱의 건축을 맡겼다는 점에서 과감함과 결단력을 갖춘 남성 부호나 귀족이지 않을까 추정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다 보니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 추측에 불과했다.

    짝짝짝.

    엘레나의 등장에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도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살롱의 주인 L이 여인이라는 점. 저런 가녀린 몸으로 웬만한 남자 귀족이나 부호보다 더 큰 배포로 결단력 있는 투자를 보였다는 점에 경악했다. 동시에 L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더욱 증폭되었다. 살롱의 여주인 L은 대체 어떤 여인일까?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어서 빨리 그녀가 입을 열고 자신에 대해 소개해 주길 기다렸다.

    “오늘 시크릿 살롱을 찾아주신 귀빈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살롱의 주인 L입니다.”

    엘레나의 영롱하면서도 또박또박 떨어지는 소개에 다시 한번 살롱에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시크릿 살롱은 성별, 신분 간의 벽을 깬 토론의 장이자, 사교의 장, 지성의 산실, 중개소, 전시회 등을 여는 복합 문화공간을 표방하며 문을 열었습니다.”

    시크릿 살롱은 새 시대의 포문이자, 살롱 문화의 시발점이 될 것이고 종착역이 될 것이다. 아직 그 역할이 규정되진 않았지만 신분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지성인과 저명한 인사들을 초빙해 국제적인 사교장이자 문화 교류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살롱의 문턱은 낮습니다. 누구나 넘을 수 있죠. 늘 기억하세요. 이 살롱의 주인은 여러분이라는 걸.”

    엘레나는 유창한 언변으로 홀 안의 사람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특히 앞으로 살롱이 나아갈 방향을 얘기할 땐 그녀의 깊은 사고와 학식, 안목에 놀라며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L은 결단력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지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시크릿 살롱의 자랑이자, 시대를 초월한 화가 라파엘의 신작 ‘동경’을 공개하며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공개 토론회 때 뵙겠습니다.”

    엘레나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어 보이며 좌중에 인사하곤 계단을 올랐다.

    짝짝짝.

    모퉁이를 돌아 엘레나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L이 남긴 첫인상은 강렬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성상이 사람들 뇌리에 깊이 박혀 가시질 않았다.

    “루, 루시아?”

    홀 가운데 서 있는 한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가면으로 감춰지지 않는 생기로움과 붉은 머릿결을 간직한 그녀는 린드 백작가의 장녀 세실리아였다.

    “설마…… 네가 L은 아니지?”

    학술원 생활 내내 루시아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구석이 있는 후배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L을 보는 순간 루시아가 떠올라 버렸다.

    “나도 주책이네. 루시아일 리가 없잖아.”

    세실리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생각을 떨치려고 했다. 최근 들려온 소식으로는 루시아가 건강이 좋지 않아 학술원까지 휴학하고 고향인 3국 연합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 L과 루시아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게 우스웠다.

    그런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보면 볼수록 L과 루시아의 모습이 겹쳐졌다. 특히 시안의 앞에서 보여주던 격조 높은 말투와 너무도 유사해 그녀를 혼란케 했다.

    “하지만 만약 진짜 L이 루시아라면…….”

    세실리아가 침을 삼켰다.

    “난 엄청난 후배를 둔 건지도 몰라.”

    같은 시각. 비밀 통로와 이어진 방으로 돌아온 엘레나는 가면을 풀며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홀에서는 엘레나를 대신해서 칼리프가 지금쯤 라파엘의 신작 ‘동경’을 발표하고 있을 것이다. 미술상으로도 활동하고 있을 만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련히 잘해낼 거라 믿었다.

    “잘하셨습니다. 토론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쉬고 계십시오.”

    “그럴게요.”

    엘레나는 미소를 띠며 에밀리오가 준비해 놓은 따뜻한 차를 마셨다. 긴장했던 심신이 진정되자 얼떨떨해하는 메이를 불러 앞에 앉혔다.

    “에밀리오 님께 대략적인 얘기 들었니?”

    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할 정신도 없을 만큼 반쯤 넋이 나가 보였다.

    “내가 L이란 사실보다 베로니카가 아니란 사실에 더 놀란 얼굴 같구나, 맞니?”

    “저, 정말로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에요?”

    메이는 이미 에밀리오를 통해 진실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고 확인받길 원했다.

    “난 베로니카가 아니야. 대역이지.”

    “…….”

    엘레나가 원하는 대로 확인을 시켜주자 메이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자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제게 그런 말을 한 건가요? 진짜 자식이 아니라서?”

    “그래.”

    “대공을 암살하려고 하는 저를 말린 이유도?”

    “무모했으니까. 넌 실패했을 거고, 난 그걸 원치 않았어. 복수를 원한다면 정말 확률 높은 방법에 걸길 바랐으니까.”

    담담한 엘레나의 말에 메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가씨, 아니,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요?”

    “진짜 완벽한 복수는 대공가의 파멸이니까.”

    이제야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모두 풀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가지 않던 일련의 엘레나의 행동들이 하나의 궤로 맞춰졌다. 메이는 은밀히 살롱까지 준비해 대공가의 숨통을 조여가는 엘레나의 치밀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L은 정말 무서운 여자네요.”

    “메이만 할까?”

    메이도 만만치 않았다. 원 역사에서 프란체 대공을 암살하고자 무려 십 년 가까이 시녀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렸으니까. 메이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저도 아가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야.”

    엘레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메이의 손을 쏙 잡았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었다. 살롱이 개장하고 당당히 L의 이름으로 제국에 첫선을 보였다. 그리고 메이를 완전히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은인, 곧 있으면 토론회가 있을 겁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엘레나가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토론회가 뭐예요?”

    메이는 정체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라는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둘이 있을 때는 L이라고 부르도록 해.”

    “아뇨, 이게 더 편해요. 긴장을 놓으면 저도 모르게 실수할 수도 있어요.”

    엘레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단호했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성격이기에 암살 성공 직전까지 갈 수 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아가씨는 제가 본 어떤 귀족보다 더 귀족 같아요. 마담도 아가씨만 못했어요.”

    “메이.”

    엘레나는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메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덩달아 기대에 따른 부담감도 밀려와 메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까 토론회에 대해 물었지?”

    “네.”

    “살롱에선 매일 토론회가 열려. 신분과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자 가면으로 자신을 숨기고 토론을 하는 거지. 오늘 난 이 토론회에 참여할 거야.”

    “아, 아가씨가요?”

    메이는 깜짝 놀란 듯했다.

    “왜? 내가 참가하는 게 이상해?”

    “그게 아니라…… 제가 본 대부분 귀족 영애들은 토론 같은 걸 끔찍이 싫어했어요. 책도 멀리했고 그들은 꾸미길 좋아하고 사치를 낙으로 삼았죠. 모여서 떠드는 수다도 뻔했어요. 시시콜콜한 남편에게 사랑받는 법 같은 것들이나…….”

    제국은 타국에 비해 여성의 인권이 높은 편이긴 하나 그 한계는 명확했다. 귀족 영애들은 혼기가 차면 정략혼을 하는 게 다반사였으며 사교계 활동을 하거나 남편을 내조하는 게 덕목으로 여겨졌다.

    ‘모를 리가 없지. 나 역시 그렇게 살았으니까.’

    베로니카 공녀 행세를 하며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리고 허영심을 채웠다. 황태자비가 된 이후에는 시안의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리고 발악했다.

    “난 그런 뻔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

    엘레나는 주도적으로 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그녀의 삶을 살고자 했다.

    “은인, 이제 슬슬 가셔야 합니다.”

    “지체했네요. 가죠.”

    엘레나는 벗어두었던 가면을 다시 쓰고는 방을 나섰다. 에밀리오의 안내를 받아 홀이 있던 곳과 반대 방향의 복도로 나아갔다. 복도 끝에 이르자 아래쪽으로 응접실을 옮겨놓은 듯 소파나 가구들이 놓여 있는 토론장이 보였다. 특이한 건 그러한 개방형 토론장을 중심으로 원형의 관람석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바람대로 잘 지어졌네요.”

    엘레나는 매우 흡족했다. 설계 과정에서 란돌에게 요구한 몇 안 되는 시설이었는데, 공개 토론회 시에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석에 앉아 토론을 경청하고 때때로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를 갖추길 바랐다. 엘레나가 토론장과 이어진 대기실로 들어가자 이미 참가자들이 와 있었다.

    쿵. 홀과 연결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관람석이 시끌벅적해졌다. 공개 토론회를 참관하고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엘레나가 제일 먼저 대기실을 나섰다.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참가자들도 뒤를 따라 토론장에 올랐다.

    ‘쏟아지는 시선이 많아. 웬만한 담력으로는 관람석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의견도 못 내겠어.’

    엘레나의 판단대로 긴장한 몇몇 참가자가 보였다. 공개 토론회는 처음이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게 부담스러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살롱의 첫인상이나 다름없는 이 공개 토론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싶었다.

    쨍.

    엘레나가 소파에 앉아 테이블 벨을 눌러 좌중을 집중시켰다.

    “살롱이 개장하고 갖는 첫 공개 토론의 주제를 공시하겠습니다.”

    참관객들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쏠렸다. 토론 참가자들은 사전에 주제를 전달받지만, 첫 토론인 만큼 참관객들은 토론의 주제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오늘의 주제는 인간의,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한…… 인문주의입니다.”

    “……!”

    관람석을 차지한 이들도 깜짝 놀랐다. 지금 엘레나가 언급한 주제 자체가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운 파격적 주제인 까닭이다.

    “그럼 제 의견을 먼저 말해보겠습니다. 저는 인문주의가 인간의 행복과 결부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엘레나의 주장이 이어질수록 토론 참가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름대로 토론 주제에 관련한 주관과 주장 그리고 근거와 반론을 철저히 준비했다. 한데, 인문주의에 대한 엘레나의 접근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인간성의 옹호를 목표로 휴머니즘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주장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인문주의란 단어를 훨씬 초월할 만큼 진보적이었다.

    그날, 공개 토론을 참관한 한 남성은 그런 엘레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신여성.”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지성을 갖춘 여인들이 꾸준히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냉대와 차별, 편견 속에 외면당했다. 감히 엘레나만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 * *

    “지쳐.”

    살롱을 나온 엘레나는 마차를 타고 대공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살롱의 주인 L로 처음 사람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치열한 공개 토론까지 벌였으니 기진맥진할 법도 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하루였어.”

    더 이상 베로니카의 대역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고생하셨어요, 아가씨.”

    “메이, 너도 피곤하잖아. 안 주물러 줘도 돼.”

    메이는 온종일 구두를 신고 움직이며 피로해진 엘레나의 발과 다리를 주물렀다. 베로니카의 대역이란 사실을 밝힌 이후 오히려 엘레나를 더 끔찍이 챙겼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아가씨께서 고단하셨죠.”

    “고마워.”

    엘레나도 그 마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긴장했던 몸이 좀 나른해졌고 문득 부모님 생각이 났다.

    ‘엄마, 아빠 잘 지내시죠?’

    엘레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3국 연합에 터를 닦고 자리를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만큼 낯선 타국에서 얼마나 잘 지내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우리 꼭 다시 보기로 약속했잖아. 조금만 기다려 줘요. 복수가 끝나면 모시러 갈게요.’

    살롱의 여주인 L로 성공적인 하루를 보낸 까닭인지 오늘따라 유독 엘레나는 감성적으로 변하는 걸 느꼈다.

    달그닥, 달그닥.

    갑자기 마차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더니 멈췄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슬쩍 창문 밖을 보니 대공가 영내로 들어가는 정문 앞에 웬 남자가 단도를 위협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마부와 동석하고 있던 휴렐바드가 마차에서 내리더니 창문을 두드렸다. 엘레나가 창을 내리며 그에게 물었다.

    “경, 무슨 일이에요?”

    “누군가 행패를 부리는 거 같습니다. 문 잠그시고 마차 안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렐바드가 시키는 대로 잠금장치를 걸었다. 만에 하나 있을 위험을 고려해서 한 조치지만 솔직히 무섭지는 않았다. 지척이 대공가이기도 했고 제국의 검이라 불리던 휴렐바드가 옆에 있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취객인가?”

    엘레나는 눈매를 좁히고 행패를 부리는 남자를 주의 깊게 살폈다. 낡고 지저분하긴 했지만 최고급 재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신발 역시 가격이 꽤 나갔을 거라 짐작이 되는 게 귀족이지 않을까 추측됐다.

    “으아아악!”

    사내는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에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저리 가! 이 괴물!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사내는 침을 뚝뚝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단검을 휘둘렀다. 그 무자비함에 혹시 큰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뚝.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던 단검을 멈추더니 사내가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헤, 많이도 안 바란다니까. 헤헤. 내가 돈이 없어서 그래요. 네? 헤헤. 달라고! 이 쳐 죽일 새끼들아! 안 줘? 계속 안 줘? 내가 다 알고 왔다 이거야. 너희가…… 컥!”

    사내의 마지막 발악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타난 로렌츠의 검이 사내의 등을 사선으로 가르며 베어버린 것이다.

    “……!”

    피가 튀기자 엘레나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지난 삶에서 로렌츠에게 죽임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아요.”

    “어? 어, 괜찮아.”

    엘레나는 마차 내부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로렌츠가 사내의 등 뒤에서 검을 휘둘러 자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걸 봤다면 충격으로 의식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정리됐으니 출발하겠습니다.”

    휴렐바드는 상황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고는 마부 옆에 동석했다. 차마 바닥을 피로 흥건하게 적신 시체를 볼 용기가 없는 엘레나는 창문 밖이 보이지 않게 내부 커튼을 쳤다.

    “아가씨,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좀 놀라서 그래. 쉬면 괜찮아.”

    되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메이를 안심시킨 엘레나는 눈을 감았다. 호흡에 집중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사내가 죽기 전 했던 말과 모습이 떠올랐다.

    ‘이상해.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꼭 약에 취한 사람…… 아!’

    눈을 뜬 엘레나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아편 중독자.’

    엘레나는 과거에 아편 중독자를 본 적이 있었다. 유명 백작가의 차남이었는데, 번듯하게 생기고 화술이 뛰어나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어떠한 계기로 아편에 손을 댔고 중독이 심해져 백작가의 자산을 몰래 처분해 아편을 구매하다가 쫓겨났다. 자신을 쫓아낸 것에 억하심정을 품은 영식은 4대 가문이 주선한 연회장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다가 기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때 영식이 보였던 환각이나 조울증 증세가 조금 전 죽임을 당한 사내의 증상과 매우 흡사했다.

    ‘아편 중독자가 대공가 앞에서 행패라.’

    엘레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걸 느꼈다. 아직 뭐라 확실히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대공가가 이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뭔가를 달라고 했어. 분명히.’

    엘레나는 사내가 죽기 전에 했던 말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섣불리 단언하긴 이르지만, 조사를 해보면 기대 이상의 뭔가를 찾을지도 모른단 기대감이 커졌다.

    생각을 정리한 사이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휴렐바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엘레나의 안색은 처음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좋지 않았다. 죽음을 겪으며 생긴 트라우마다 보니 쉽게 잊히지 않았다.

    ‘쉬고 싶어.’

    엘레나가 침실로 향하는데 저 멀리서 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아, 하아, 아가씨.”

    “왜 그러니?”

    앤이 거친 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으, 응접실에 렌 영식께서 와 계세요!”

    “뭐?”

    “아까 대낮부터 오셔서는 오늘 꼭 보고 가야겠다며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세요.”

    “하아.”

    엘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렌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리브는?”

    “그게 자작님은 낮부터 급한 공무가 있어 출타 중이신지라…….”

    하필이면 리아브릭이 자리를 비웠을 줄이야. 프란체 대공마저 부재중인 상황이다 보니 렌을 제재할 사람이 대공가에 마땅히 없었다.

    ‘한동안 조용하게 지내나 싶더니, 또 뭔 시비를 걸려고 온 거지?’

    차라리 루시아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면 좀 더 상대하기 편했을 것이다. 나름 미운 정은 쌓였으니까. 하지만 베로니카 공녀 역할을 하는 지금은 천적 관계였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베로니카를 향한 렌의 증오는 심해보다 깊었다. 방계라는 이유로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한 것에 대한 피해의식도 엄청났다. 그러다 보니 베로니카의 신분으로 렌과 부딪치면 날이 선 대화가 오갈 수밖에 없었다.

    “찾는다니 가야겠지. 안내하렴.”

    “네, 아가씨.”

    엘레나는 앞서 걷는 앤을 뒤따랐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면 렌 성격상 그냥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자면 어떤 식으로든 조치가 필요했다.

    똑똑.

    노크한 엘레나가 문을 열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렌이 손을 들며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사촌 누이 얼굴 까먹겠어.”

    “그냥 잊지그래? 서로에게 반가운 얼굴은 아니잖아.”

    엘레나가 뾰족하게 맞받아치자 렌이 픽 웃었다.

    “아닌데? 난 네 얼굴 보는 게 좋은데?”

    “그럼 실컷 보든가.”

    “그럴까.”

    엘레나는 상대할 기력도 없는지라 소파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드니 렌과 시선이 마주쳤다. 삐딱하게 턱을 괴고 앉은 렌은 정말 엘레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런데? 괴롭히는 방법을 바꿨나?’

    렌은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 아니었다. 같잖은 트집을 잡아서 엘레나에게 시비를 걸어도 벌써 걸었어야 했다. 근데 웬걸, 조용했다. 몇 분째 엘레나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아, 이게 더 불안하고 불편해.’

    차라리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게 마음이 편하다 싶어 엘레나가 뭐라 입을 열려던 때였다.

    “얼굴이 창백한데?”

    “…….”

    “어디 아프냐?”

    렌의 뜬금없는 질문에 엘레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능적인 시비인 건가 싶어서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뭔데? 얼른 얘기하고 가.”

    “아까 말했는데?”

    “기억에 없는데?”

    렌이 이죽거렸다.

    “잘 생각해 보든가.”

    “…….”

    아. 차라리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던 렌이 더 상대하기 쉽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피를 말리듯 괴롭히는 게 더 힘겨웠다.

    “아, 상쾌해. 실컷 봤으니 이제 가련다.”

    “뭐?”

    엘레나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렌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봐, 아침부터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한테 식사 한 끼 하고 가란 말을 안 하네.”

    “체할까 봐 배려해 주는 건데?”

    “배려 고맙고.”

    엘레나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손끝만 갖다 대도 피가 날 만큼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웠던 렌이었다. 근데 지금은 손이 베이지 않을 만큼 무뎌 보였다.

    “나도 너 배려 하나 하지.”

    “…….”

    “뭐라도 먹고 자. 창백한 거 별로 안 어울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간 렌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쿵.

    응접실을 나가고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렌이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엘레나는 앤을 통해 렌이 말을 타고 저택을 떠났단 얘길 듣고서야 믿을 수 있었다.

    “진짜 갔다고? 정말로?”

    “네, 아가씨. 마구간에 들렀다가 가는 걸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엘레나는 오늘 렌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밑도 끝도 없이 찾아와선 해가 질 무렵까지 기다리더니 고작 만난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일어나서 가버렸다. 실컷 봤으니 됐다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침실로 돌아온 엘레나는 받아놓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가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은 여전히 아까 전 렌의 이상행동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설마 내가 루시아인 걸 알아챈 건 아니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고민을 이어가던 엘레나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게 아니고서야 변해 버린 렌의 행동이 납득되지가 않았다. 느낌이 싸했지만 학술원에 있을 때만큼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루시아로 활동할 일이 없어진 만큼 의심받을 일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속단하지 않고 좀 더 렌을 관찰하는 쪽을 선택했다. 워낙 요주의 인물이니까.

    * * *

    “제길!”

    수도 외곽, 골목 사이에 쏟아지는 달빛을 피해 한 사내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공포에 물든 사내의 옷에 묻은 핏자국이 그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절박한지를 짐작하게 했다.

    “무조건 알려야 해. 꼬리가 잡혔다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눈을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골목 지리를 그가 꿰고 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그들이 날고 긴다고 해도 도둑질로 연명하며 이 거리에서 나고 자란 자신보다 이곳 지리를 잘 알 수는 없었다.

    “헉.”

    그러나 그런 사내의 자신감이 무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암암리에 운영되던 노예 경매장을 습격한 흉수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검술로 경비병들을 제압하던 사내가 저 앞에 서 있었다.

    “제국은 노예법을 금지하고 있다. 수백 명이 넘는 무고한 자들의 삶을 짓밟고도 살기를 바라는가?”

    검은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더없이 차갑게 빛났다.

    “빌어먹을.”

    이미 흑의인의 무용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내는 맞서길 포기했다. 자존심 따위는 개나 주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을 쳐서 윗선에 보고해야 했다.

    막 몸을 틀어 전력으로 도망을 치려던 때였다.

    “포기하시게.”

    “……!”

    노예 경매장을 습격한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을 통솔하던 두 남자가 도주로를 막아섰다.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던 사내가 감히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제길. 일수가 사납더라니. 똥을 밟아도 푸지게 밟았네. 퉤.”

    사내는 죽음을 각오했다. 수도 노예 경매장 우두머리인 자신이 생포되면 뒤를 파기 위해 더한 고문이 기다릴 것이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모아놓은 돈이나 실컷 쓰는 건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돌려 검날이 바닥을 향하게 고쳐 잡았다. 단도를 양손으로 꽉 쥐고는 힘껏 자신의 복부를 향해 끌어당겼다.

    퍽.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단도가 복부를 꿰뚫기 직전, 목덜미를 강타하는 묵직한 통증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대에게 죽음이란 안식을 허락한 적이 없다.”

    사내는 인기척도 없이 등 뒤에 선 흑의인에게 급소를 가격당하고 쓰러졌다. 이러면 안 된다며 발악했지만 의식은 이미 잃고 난 뒤였다.

    “생각보다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흑의인을 통솔하던 남자가 코를 가리고 있던 복면을 내렸다. 점잖게 생긴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는 중후함이 느껴졌다.

    “증거는 찾았나?”

    “라인하르트 공작가가 상단까지 만들어서 인신매매를 한 모든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사내를 기절시켰던 흑의인이 끄덕이며 복면을 벗었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마저 삼킬 듯한 흑발의 남자는 황태자 시안이었다.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4대 가문마저 이리 썩고 곪았을 줄은.”

    “처음 전하가 저를 찾아와 수상하다 얘기했을 때까지도 전 믿지 못했습니다.”

    “백작은 고집이 세지.”

    “지금 질책하시는 겁니까?”

    중년 사내의 정체는 명망 있는 가문의 중립 귀족 빌렘 백작가의 린든 백작이었다. 그간 황실과 귀족파 어느 쪽의 손을 들지 않던 그가 시안의 편에 섰다.

    “그대가 지금껏 중립에 서서 날 외면한 시간이 야속한 것이다.”

    “……세실리아의 일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큰 아이입니다. 답답한 황궁 생활을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영애가 원치 않았다. 그뿐. 대신, 백작을 얻지 않았던가.”

    시안은 그간 대공가와 4대 공작가와의 정략결혼을 피하고자 중립 귀족인 린든 백작의 여식 세실리아를 황태자비로 책봉하고자 했다. 그런 시안의 제안에 린든 백작은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비록 권위를 잃었다지만 황실의 뜻에 따르는 건 제국 귀족의 의무라 여겼다. 그랬던 시안이 어느 날 갑자기 정략혼을 철회했다. 세실리아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많이 변하셨습니다.”

    “그런가.”

    담담하게 말하는 시안을 린든 백작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빛에 조급함이 사라졌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을 감추기 급급했는데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루시아란 영애 때문입니까?”

    “…….”

    “전하를 변화케 한 영애 말입니다.”

    시안은 침묵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린든 백작은 그것이 긍정임을 알고 있었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보고 싶군요.”

    “그대 역시 반할 것이다. 그런 여인이다.”

    시안이 고개를 들어 건물들 사이로 뜬 만월을 올려다봤다. 오래도록 보지 못해 그리워진 루시아의 얼굴이 달에 겹쳐 보였다.

    “많이 아픈 게 아니어야 할 터인데…….”

    시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간 귀족들의 감시를 피해 황궁을 나온 시안은 린든 백작과 협업해 썩고 부패한 귀족들의 뿌리를 찾느라 열중했다. 귀족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황실이 저들과 맞서기 위해 가장 필요한 명분을 쌓고자 함이다. 그러다 한 달 전 루시아를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린든 백작을 시켜 학술원으로 사람을 보냈다.

    근데 웬걸. 지병이 악화되어 아버지인 에밀리오가 운영하는 카스톨 상회의 본거지인 3국 연합의 일원 벨칸 왕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시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학술원에서 마주할 땐 전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는데 학술원을 휴학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단 얘기에 걱정됐다. 얼마나 아픈 건지, 잘 먹긴 하는지, 볼 수가 없으니 더 애가 닳고 신경이 쓰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더 답답한 건 황궁에 발이 묶인지라 저 먼 북방에 위치한 3국 연합까지 달려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3국 연합으로 간 벤이 소식을 가져올 겁니다.”

    “좀 더 기마에 능한 자로 보낼 걸 그랬어. 후회가 되는군.”

    “……벤은 초원 부족 출신으로 저희 가문에서 가장 말을 잘 타는 기사라고 수어 번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린든 백작이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으나 성에 차지 않는 시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늘 열려 있는 자세로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시안이 루시아의 얘기만 나오면 어쩜 저리 고집불통이 되는지.

    “상황도 정리됐으니 이만 철수하시죠.”

    “그러지.”

    곧 동이 틀 것이다. 그 전에 시안은 황궁으로 돌아가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을 해야 하는 만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복면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린 두 사람이 몸을 뺄 때였다. 저 앞쪽에서 매를 팔뚝에 얹은 흑의인 한 명이 앞으로 달려와 예를 갖췄다.

    “벤이 보낸 전서구입니다.”

    린든 백작은 입을 가렸던 복면을 다시 내리고는 시안을 돌아봤다.

    “보셨습니까? 벤이 전하의 조급함을 알고 이리 영특하게 소식을 보냈네요. 직접 보십시오.”

    수하에게 건네받은 서신을 시안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 든 시안은 루시아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드디어 소식을 들을 수 있단 기대 섞인 눈길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

    시안의 눈길이 흔들리는 걸 느낀 린든 백작이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은 겁니까?”

    시안은 말이 없었다. 서신을 몇 번이나 읽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지 한참을 서 있다가 이걸 가져온 흑의인에게 물었다.

    “이 서신은 벤이 보낸 게 확실한 거겠지?”

    “네, 전하.”

    시안은 침묵했다. 그토록 궁금해하던 소식이건만 기뻐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대체 뭐라고 쓰였기에 그런 겁니까?”

    “백작, 나 먼저 돌아가지.”

    “전하?”

    시안은 서신을 고이 접어 가슴 품 안에 넣고는 달빛마저 들지 않는 골목의 사위에 몸을 맡겼다. 황궁으로 돌아가던 시안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루시아 영애가 가짜라고?”

    서신에 적힌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의 딸 루시아는 북방 열병에 걸려 학술원 입학 수속을 밟자마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지금은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되어 잘 지내고 있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간 시안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던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정말 아프기는 한 건가? 아니면 그마저도 거짓인 건가? 모르겠다. 도대체 뭐가 뭔지. 꼭 유령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안은 황궁으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서신에 적힌 바로는 루시아의 아버지이자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가 일 년 넘도록 제국의 수도에 머물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시안도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에밀리오가 카스톨 상회를 상징하는 문양이 박힌 마차를 타고 학관을 찾아 루시아가 건강상의 이유로 강의에 자주 빠지고 기숙사에서 지내지 못한다고 해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자라면…….”

    에밀리오는 루시아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시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면 시안은 루시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마음속에 그녀의 존재가 이리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그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하지만 시안이 지금껏 알고 있던 루시아가 가짜든, 진짜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구애를 받으며 확인을 하려고 에밀리오를 찾아가려는 게 아니다.

    “……보고 싶구나.”

    * * *

    수도가 시크릿 살롱 얘기로 들썩였다. 특히 살롱의 여주인 L은 화제의 중심 그 자체였다. 공개 토론에서 L이 보여준 학식과 지성은 학계의 고명한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둔 엘레나의 인문주의를 가리켜 시대를 앞서간 사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뿐이랴.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 L이 지척에서 공사 중인 대형 건축물 바실리카의 실소유주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됐다.

    지성인. 투자자. 확인되지 않았지만 실루엣으로 짐작되는 미모까지. 제국의 역사상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여인에 사람들은 L을 가리켜 신여성이라고 입을 모았다. 뭇 영식들은 묘령의 L을 보고자 하루가 멀다 하고 살롱을 찾았다. 미모를 떠나서 지적이고, 결단력 있는 투자를 선보인 L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신비스러운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중년 귀족들은 그런 L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제국에 뿌리내린 여성관을 바꿔놓아 그들의 가부장적인 기득권을 흔들 수 있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사교계의 몇몇 영애들도 L을 험담하고 비꽜다. 수백 년간 남편을 내조하고 가정을 평온케 하는 게 여인의 덕목이라 믿고 배워왔던 그들은 L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보다 배척하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그러며 L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은 보기 흉측한 흉터가 있는 것이라며 근거 없는 험담까지 늘어놓았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깨어 있는 영애들은 신여성이라 평가받는 L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며 열광했다. 그간 여성이란 한계를 뛰어넘고자 노력했음에도 편견과 외압으로 그 한계가 명확했었다. 한데, L은 오랫동안 제국에 뿌리내려 온 관습의 틀을 깨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는 굉장히 컸다. 여성들은 그런 L의 뒤를 따라 자신들의 분야에서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인정을 받아 우뚝 서길 바랐다.

    “전하께서 찾아오셨다고요?”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린 신동 첸토니오의 교향곡 ‘천상의 아리아’의 발표에 맞춰 엘레나는 살롱을 찾았다. 비밀 통로를 통해 살롱의 몇몇 특정인만 출입이 가능한 응접실에 다다르자 에밀리오가 충격적인 얘길 털어놓았다.

    “네, 은인. 야심한 시각에 절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아는 전하는 결코 그런 무례를 범할 분이 아닌데…….”

    엘레나가 아는 시안은 누구보다 점잖고 신사다운 남자였다. 야심한 시각에 무턱대고 찾아가는 모습이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멀리서나마 전하의 용안을 뵌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하가 맞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왜?”

    “은인을 찾고 계셨습니다.”

    “……!”

    엘레나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너무 놀라서. 그리고 엘레나를 보고자 그답지 않은 행동까지 저지른 게 싫지 않아서.

    “3국 연합까지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신 모양입니다. 제 딸이 멀쩡히 그곳에서 지낸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또 정말 아픈 게 맞느냐고, 어디 있냐고 추궁하더군요.”

    “그렇게까지…….”

    엘레나의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병을 핑계로 휴학하는 바람에 시안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나이 먹도록 겁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는데…… 생전 처음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시안의 강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검술제에서 제국의 검이라 불릴 렌을 제압했으며, 얼음의 기사 휴렐바드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그런 시안이 대놓고 살기를 흘렸다면 에밀리오라 하더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전하께서 열흘의 말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백작가로 은인에 대한 기별을 주지 않으면 자기가 어떻게 나갈지 스스로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감정적으로 구시다니. 믿기지 않아요.”

    얼떨떨해하는 엘레나를 보며 에밀리오가 낮게 말을 이었다.

    “은인, 전하는 제게 은인이 누구인지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제 친딸이 아님을 분명 아실 텐데요.”

    “…….”

    “진심이셨기에 그토록 화를 내셨던 겁니다. 너무 걱정돼서요.”

    엘레나는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걱정을 끼친 시안에게 미안해서, 염치가 없어서. 그러면서 이름이나, 신분을 떠나 시안이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엘레나를 찾고 있음이 미치도록 고마워서.

    “은인께서도 좀 더 솔직해져 보는 게 어떠실지 싶습니다.”

    “…….”

    “전하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분 같지 않았습니다.”

    에밀리오의 뼈가 있는 말을 곱씹던 엘레나가 설마 하는 생각에 되물었다.

    “그거 혹시 농담이신가요?”

    “안 웃겼습니까? 전 웃겼는데.”

    뻔뻔한 에밀리오의 태도에 되레 엘레나가 실소를 터뜨렸다.

    “아뇨, 덕분에 웃겼어요. 에밀리오 님 말이 맞아요. 전하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죠.”

    이전 삶의 시안은 다가가려고 해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인 남자. 시안의 그런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엘레나였기에 변해 버린 지금의 관계가 신기하고 얼떨떨했다.

    “빌렘 백작가에 서신을 보내주세요. 살롱으로 오시라고. 그날 전하를 뵐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은인.”

    결단을 내린 엘레나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설렜다. 지금까지와 달리 거짓 신분과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본연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음이 기뻤다. 이전 삶에서도 현생에서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만으로도 한없이 들떴다.

    “그러고 보니 은인, 지금 살롱에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마리누스 양이 은인을 뵙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 양이 저를요?”

    혁명적 디자이너 크리스티나 마리누스. 제국의 의복 수준이 그녀의 등장 전과 후로 바뀐다는 평이 있을 만큼 역사적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칼리프 역시 그 자질을 눈여겨보며 특별히 관리 중인 한 명이었다.

    “살롱 개장식 때, 은인을 보고는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며 거듭 사정을 했습니다. 칼리프가 천상의 아리아 발표로 바쁜지라 대신 제가 전달해 드리는 겁니다.”

    지금 응접실 밖에서는 은은한 교향곡 연주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천상의 아리아. 원 역사대로라면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일찍 귀가 먹어 자살한 첸토니오의 유작이 되었을 곡이 칼리프의 주도 아래 살롱에서 발표 중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만나보죠.”

    엘레나는 가면을 쓰고 에밀리오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복도 끝 또 다른 응접실에 도착한 에밀리오가 노크를 하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엘레나보다 한 뼘 가까이나 큰 키에 파도처럼 웨이브가 진 붉은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성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L? 진짜 L 맞죠?”

    “반가워요,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는 치맛자락을 들고는 뛰어와 엘레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돌발적인 행동에 엘레나는 놀라긴 했지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그대로 뒀다.

    “꼭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어요. L이 아니었으면 전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엘레나의 손을 꼭 쥔 크리스티나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본인이 디자인한 드레스에 자신이 있던 그녀는 빚을 내서 부티크를 차렸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나머지 귀족들에게 외면을 당했다. 결국 부티크는 문을 닫았고 빚에 허덕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 크리스티나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그녀가 의상 디자인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한 게 엘레나였다. 덕분에 크리스티나는 제국을 뒤흔들 새로운 스타일의 드레스를 완성했고 조만간 살롱을 통해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 말 마세요. 전 빚 때문에 크리스티나의 재능이 빛을 잃어가는 게 싫었을 뿐이에요.”

    “어쩜 말도. L, 여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그 화신일지도 몰라요.”

    “그런 말 마세요. 여신님께 실례예요.”

    엘레나는 낯부끄러운 얘기를 재치 있게 받아치며 소파에 앉길 권했다. 소파에 앉자 흥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차분하게 말이 오갔다.

    “이번에 살롱에서 론칭할 드레스의 모델이 되어달라고요? 저한테요?”

    생각지도 못한 부탁을 받은 엘레나가 당황스러워했다.

    ‘라파엘 선배도 그랬지만 크리스티나도 내 어떤 모습을 보고 모델이 되어달라는 거지?’

    지난 삶에서 베로니카 공녀의 행세를 하며 사교계를 위시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냈지만 단 한 번도 예술가들의 제안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런 제안은 여전히 어색했다.

    “개장일에 L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어요. L이 내 드레스를 입어주면 진짜 더 바랄 게 없을 거 같더라고요.”

    “…….”

    “부탁드릴게요, L. 제 뮤즈가 되어주세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엘레나가 잠시 고민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닌 만큼 수락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크리스티나는 엘레나가 고민하는 모습에 속이 탔는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번에 발표할 드레스 먼저 보여드릴게요. 아마 보시면 L도 생각이 바뀌실 거예요.”

    “저기, 안 봐도…….”

    “아뇨, 제가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가만히 앉아 계세요.”

    크리스티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응접실 한쪽 벽면에 천으로 덮어둔 마네킹을 조심조심 소파 앞까지 끌고 왔다. 그러더니 엘레나가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작품에 대해 어필했다.

    “이번 드레스는요, 반인반어인 전설의 인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어요.”

    엘레나는 이미 그녀가 어떤 라인의 드레스를 발표할지 알고 있었다.

    “고전적인 벨 라인 드레스을 탈피하고 인어의 라인을 살리는 데 치중했어요. 이름하여 머메이드 드레스! 제 회심의 역작이죠.”

    “인어를 형상화하다니. 기대되네요.”

    “보여드릴게요. 백 마디 말로 떠드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느낌이 잘 오실 거예요.”

    크리스티나는 마네킹에 씌워두었던 천을 벗겨냈다. 그러자 인어의 꼬리와 지느러미를 연상케 하는 슬림한 스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실크와 촘촘히 박은 보석까지 더해지자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우아함을 자아냈다.

    “어때요, L?”

    “이런 드레스의 라인은 처음이에요. 전설 속의 인어가 두 다리를 얻어 걸어 다니면 이런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우아해요.”

    엘레나의 칭찬에 눈치만 보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저 자신 있어요. 사교계 영애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이 앞으로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게 될 거라고 믿어요.”

    “그리될 거예요.”

    “그러니까 L이 이 드레스를 입어줬으면 해요!”

    크리스티나는 밑도 끝도 없는 결론으로 몰아갔다.

    “저도 알아요. 벨 라인에 익숙한 귀족들이 보기에 머메이드 드레스는 자칫 천박하고 야해 보일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외면받았고 빚만 진 채 부티크 문을 닫았어요.”

    “아니에요, 크리스티나. 야하다고 느끼는 건 보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전 이 머메이드 드레스가 기품 있고 훌륭한 드레스라고 생각해요.”

    엘레나는 좋은 말로 크리스티나를 달랬다. 실제로도 머메이드 드레스가 처음 발표되고 회자됐을 때, 너무 몸매를 드러낸다는 이유로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걸 즐기는 젊은 영애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고 시간이 흐르자 언제 그런 논란이 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역시 L은 생각이 남다르세요. 그래서 꼭 이 머메이드 드레스를 L이 입어줬으면 해요.”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

    또 밑도 끝도 없이 모델이 되어달라는 결론으로 밀어붙이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크리스티나는 왜 엘레나가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밝혔다.

    “옷이라는 건 입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 다르게 보여요. L은 신여성이라 불릴 만큼 지성인의 상징처럼 여겨지잖아요? 그런 L이 이 드레스를 입으면 누구도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육감적이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겠죠.”

    그제야 크리스티나가 왜 그토록 모델이 되어달라고 애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시대를 잘못 앞서간 까닭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모든 걸 잃었던 그녀였기에 또 그런 실패를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엘레나는 더더욱 크리스티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살롱의 여주인 L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크리스티나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모델, 꼭 하고 싶어요.”

    “L!”

    크리스티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엘레나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고 나중에 예쁜 드레스로 꼭 갚을게요!”

    “최고의 선물이네요.”

    엘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 * *

    “기별이 왔다?”

    시안과 린든 백작은 황궁 안 정원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족과 황족이 허락한 자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이곳은 황궁 안에서 귀족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대체 무슨 사고를 치신 겁니까?”

    “사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시안이 시치미를 뗐다. 특유의 무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은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능청스러웠다. 그러나 린든 백작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그럼 카스톨 상회의 에밀리오 상단주가 전하와 제가 연이 닿아 있는 걸 어찌 알고 보냈을까요?”

    “언질을 주었을 뿐이다.”

    린든 백작이 인상을 팍 썼다.

    “전하, 자중하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그 또한 새겨듣도록 하지.”

    린든 백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린든 백작이 본 시안은 황제의 재목이었다. 단순히 황태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황제로서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을 두루 갖췄다. 학술원에 재학해 있는 동안 내면적인 성장과 세상을 보는 시야까지 두루 갖추며 기득권을 쥔 귀족파의 판을 흔드는 추진력까지 보였다.

    ‘늘 사리 분별이 분명하고 결단력 있으신 분이 그 여인의 일에는 이리 냉정함을 잃으시니, 원.’

    그녀의 존재로 불과 일 년 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시안은 성장했다. 그러나 반발 작용으로 그녀와 관련된 일이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서신에는 뭐라 쓰여 있었지?”

    “전하를 시크릿 살롱으로 초대한다고 했습니다.”

    “시크릿 살롱이라. 최근 수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곳이군.”

    “네, L이라는 묘령의 여인이 수도에 세운 살롱입니다. 가면을 쓰고 신분을 감춰야만 출입이 가능해 시크릿 살롱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침착한 척 굴며 꽃을 감상하고 있었지만 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곳에 가면 엘레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구나.’

    에밀리오를 추궁했지만 엘레나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했다. 대륙 십 대 상단의 상단주답게 그는 지조가 있는 사내였다. 그 때문에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아프지 않단 얘기만 들려줬어도 한시름 놓았을 텐데 끝끝내 그는 대답을 주지 않았다.

    “마침 잘되셨습니다. 가신 김에 살롱의 여주인 L을 한번 보고 오십시오.”

    “L을?”

    “살롱의 출입에 남녀와 신분의 구애를 두지 않는 것도 그렇고, 공개 토론회에서 뛰어난 지성과 언변으로 인문주의에 대해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추구하시는 아래부터 시작하는 개혁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중립 귀족이었던 린든 백작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시안의 개혁에 찬성했다. 제국의 중앙집권화가 불러온 부작용과 귀족이 의무를 잊으며 오는 폐해를 겪으며 고통받는 민중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시크릿 살롱의 여주인 L이 추구하는 주장과 사상이 시안이 추구하는 개혁과 접점이 꽤 있어 보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린든 백작은 에밀리오가 서신에 적어서 보낸 살롱의 방문 일자도 일러주었다.

    ‘드디어 만날 수 있는 것이냐?’

    시안은 애써 기색을 감추고자 얼굴에 힘을 줬다. 제국을 샅샅이 뒤져도 만날 수 없었기에 더 애가 닳고 그리웠다. 어서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다.

    “전하.”

    “왜 그러지?”

    “저와 약속해 주십시오. 절대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으시기로. 시크릿 살롱이라 가면을 썼다 한들 완전히 감출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겠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못 영 미더웠지만 린든 백작은 믿을 수밖에 없기에 걱정을 속으로 삼켰다.

    * * *

    “L은 모를 거예요.”

    크리스티나는 공을 들여서 완성한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엘레나를 보는 내내 감동에 취해 있었다.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에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엘레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굴곡진 라인은 야하기보단, 육감적인 느낌에 더 가까웠으며 차분하고 지성미 넘치는 엘레나 특유의 분위기와 어울려 신비한 조화를 이뤄냈다. 머메이드 드레스에 어울리는 장신구와 구두, 가면까지 완벽하달까. 크리스티나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엘레나도 흡족했다.

    ‘역시, 크리스티나야. 어디 하나 흠잡을 게 없어.’

    지난 삶의 엘레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머메이드 드레스가 발달하고 세련된 장신구와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던 시대를 겪었다. 이미 눈높이가 올라갔으니 날고 긴다 하는 디자이너들이 드레스를 가져온다고 해도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디자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타고난 감각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 크리스티나의 머메이드 드레스는 초기작에도 불구하고 세련되었다.

    곧 발표 시간이 임박하자 칼리프가 응접실을 찾아와 크리스티나를 대동해 나갔다. 살롱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머메이드 드레스의 탄생 비화와 재단 과정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잠시 심호흡한 엘레나도 응접실을 나섰다. 살롱 홀로 내려가는 계단 앞 모퉁이에 선 엘레나는 머메이드 드레스에 대한 소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여러분, 축하해 주세요. 저의 뮤즈께서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으시고 모델로 이 자리에 서주시기로 했답니다. 제 뮤즈가 누구냐고요? 제국이 주목하는 화제의 여인, 시크릿 살롱의 주인 L입니다. 나와 주세요, L.”

    크리스티나의 노련한 소개에 맞춰 푸른 바다를 담은 듯한 관현악단의 선율이 살롱 안을 메웠다. 살롱을 찾은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크리스티나의 뮤즈인 L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기대와 곡의 연주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복도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메이드 드레스 특유의 라인 덕에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천박하다거나 야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육감적이지만 기품이 넘치고, 우아하지만 치명적일 만큼 고혹적이었다.

    가면? 이 순간 누구도 그녀의 가면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거나, 얼굴을 볼 수 없음에 아쉬워하지 않았다. 지금 계단을 내려오는 L 자체가 매혹적인 한 송이의 꽃이었다.

    넋을 놓은 채 엘레나를 보는 사람들은 박수마저 잊은 듯 보였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본 거 같다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기억하고, 가슴으로 품어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다고.

    * * *

    “루시아?”

    시안은 홀 정중앙의 반달형 계단을 따라 내려온 L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경건해지다시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도 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나, 눈빛, 분위기가 묘하게 기억 속 루시아와 흡사했다. 그러나 시안은 L이 루시아일 거라 짐작만 할 뿐 확신하지 못했다. 남보다 시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거리감이 꽤 있었다. 또 가면을 쓰고 있는 터라 입술을 제외한 이목구비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L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전하.”

    “……!”

    작지만 또렷이 들린 전하라는 호칭에 시안의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황궁 안 감시를 피해 은밀히 외출한 만큼 누구도 그가 이곳에 왔음을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저를 따라오세요.”

    시안의 정체를 꿰뚫고 말을 건 여인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L의 등장에 매료가 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뒤를 쫓으면서도 그녀가 누구일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시안을 데리러 온 여인은 메이였다. 거장들을 후원하고 돌보며 학술원 외출이 잦았던 메이는 오가다 시안을 본 적이 있었고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눈썰미가 좋은지라 몇 가지 특징만으로도 구분이 가능했다.

    시안은 살롱의 후미진 자리의 계단을 통해 이 층으로 올라왔다. 적지 않은 사람이 살롱에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 L에게 주목하고 있는지라 위층은 썰렁했다.

    “이 방에서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문고리를 잡아 연 시안이 반쯤 방 안에 들어간 때였다.

    “전하께서 들어가시면 전 밖에서 문을 잠그도록 하겠습니다. 보안상의 이유니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메이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뭔가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제 한 목숨 정도는 능히 지킬 능력은 있는지라 시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달그닥.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시안은 개의치 않고 방 안을 둘러보고는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릴 것이다. 그간 루시아를 찾고자 애를 썼기 때문에 잠깐의 기다림은 소소한 즐거움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렀다. 기다림이라 여겨지던 시간이 어느 순간부터 더디게 지나갔다. 시안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이 층임에도 불구하고 천장이 높다 보니 웬만한 건물 사 층 높이만큼 높았다.

    “이 살롱이 아까 그 L이라는 여인의 것인가?”

    참으로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듣자 하니 신여성이라 불릴 만큼 지성도 대단하다는데 그에 못지않게 재력과 건축에도 안목이 있어 보였다. 또 살롱의 정문을 기준으로 바실리카라는 대형 건축물이 한창 건축 중이었는데 그 또한 L의 소유라고 했다. 

    시안도 인간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공개 토론회를 통해 인간 중심의 사고와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도 많이 토로했다고 하니 린든 백작의 말대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 제국의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우웅.

    벽면의 서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함정?’

    시안은 방 안을 훑어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이대로 방을 나갈까 생각했지만 정말 함정이라면 문이 잠긴 순간 안에서 열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시안이 레이피어를 살폈다. 비록 날은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웬만한 적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에 움츠러들지 않았다.

    끼이익.

    서재의 진동이 심해지더니 책장이 옆으로 밀려났다. 시안이 온몸의 긴장을 곤두세우며 예상하지 못한 일에 대비할 때였다.

    구두 굽 소리가 서재 안 통로에서부터 울리더니 가면을 쓴 여인이 걸어 나왔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음에도 그녀가 입고 있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마주한 순간 반사적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L?”

    시안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심히 흔들렸다. 홀에서 본 L에게서 느껴지던 익숙함이 그녀를 바로 앞에서 보자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전하.”

    “……!”

    늘 귀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L이 쓰고 있는 가면 사이로 흘러나왔다. 종달새처럼 떠들며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그 촉촉한 목소리였다.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L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시안에게 안부를 물으며 머리 뒤로 가녀리고 흰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단단히 고정해 두었던 가면의 핀을 풀었다. 그러자 엘레나의 희고 고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루시아로 변장하고자 얼굴선을 고친 화장도, 이목구비를 감추고자 썼던 안경도 없었다. 그렇게 사소한 차이가 모여 전혀 다른 여인으로 보이게끔 했다. 갈색 단발 가발이 아니라면 루시아의 이미지를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였다.

    “그대가 정녕 내가 알고 있던 루시아 영애가 맞는가?”

    “한때 학술원에서 교류하던 후배 루시아를 찾는다면 제가 맞습니다.”

    “…….”

    시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와 닮았으면서도 치명적인 미모를 지닌 이 눈앞의 여성에게 이질적인 낯섦과 익숙함이 교묘하게 공존했다.

    “L. 그게 그대의 진짜 이름인가? 아니면 그 역시 가짜 이름인가?”

    “L은 고대어로 제 본명의 약자입니다.”

    엘레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여기까지 와서 숨길 이유도 없거니와 시안에게는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영애의 진짜 이름이라 할 수 없군.”

    “…….”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모든 걸 털어놓지 못했다. 시안은 서운할 법도 하건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되레 엘레나가 물었다.

    “더 묻지 않으시는지요?”

    “꼭 물어야 하는가?”

    “미리 대답을 준비했거든요.”

    “그대답군.”

    시안은 옅은 미소를 머금더니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우수에 찬 눈길로 엘레나를 직시하며 집중하게 만들더니 긴 다리로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엘레나는 살짝만 숙여도 시안의 가슴에 머리가 닿을 것 같자 숨을 삼켰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 때였다. 시안이 예고도 없이 엘레나를 안아버렸다. 그의 넓고 안온한 품에. 자취를 감췄던 엘레나를 타박하듯 꽉, 그러면서도 험악하지 않게. 엘레나는 온몸의 근육이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걱정하였다.”

    “저, 전하.”

    “그리고 보고 싶었다.”

    “……!”

    보고 싶었다는 저 한마디에 엘레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심장은 의지와 상관없이 요동을 쳤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숙여 땅만 바라보았다. 시안이 팔에 힘을 빼며 엘레나를 놓아주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시간이 끝을 고하자 엘레나는 감당하기 힘든 어색함을 느꼈다.

    ‘어, 어쩌지?’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시안과 달리 엘레나는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뭐라도 해야 한단 강박이 생겼다. 그러다 시안의 손에 있는 장식용 레이피어를 발견했다.

    “저, 전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왜 들고 계신 건가요?”

    “이거 말인가?”

    시안도 그제야 자신이 쭉 레이피어를 쥐고 있단 걸 자각했는지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무표정하게 레이피어를 들어 살펴보며 대답했다.

    “장식용으로 두기에 아쉬움이 들어 꺼내 보고 있었다. 과연. 균형감이 훌륭하고 내구성도 좋아 보이는군.”

    “…….”

    “혹여 이 레이피어를 제조한 대장장이를 아느냐?”

    당황한 엘레나가 진심이냐는 듯 쳐다봤다. 그러나 시안은 정말 그리 생각했다는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뻔뻔함에 당황한 건 되레 엘레나였다.

    “……알아보고 알려드릴게요.”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 대화로 인해 엘레나가 느끼던 어색함도 많이 누그러졌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서로를 향한 거리감이 줄어들어 편안한 느낌마저 받았다.

    “궁금한 것이 있다.”

    “말씀하세요.”

    “그대가 L이었다면 굳이 루시아의 이름을 빌려 학술원을 다닐 필요가 있었나 싶더군. 왜 그런 건지 대답해 줄 수 있겠느냐?”

    “……!”

    시안은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다. 많은 대답을 준비했지만 저 질문만큼은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베로니카의 대역이란 전제가 깔리지 않는 한 납득되지 않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어쩌지? 전하께 다 털어놓아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엘레나는 금세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시안은 루시아가 병으로 휴학했다는 말에 심히 걱정하는 것도 모자라 야밤에 에밀리오를 찾아가는 돌발적 행동마저 보였다. 만약 엘레나가 베로니카 공녀를 행세하며 대공가 모르게 L로 위험천만한 활동을 한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말리려 들 것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가 보군.”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절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후에 꼭 얘기할게요.”

    진심을 전하고자 온 시안에게 진실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기다리마.”

    “전하…….”

    시안은 서운한 내색도 없이 담담히 그리 말했다. 재촉하기보다는 엘레나가 먼저 빗장을 풀고 진정으로 자기에게 가까워지길 바랐다.

    “기다릴 터이니, 이거 하나만 약속해다오.”

    “약속이요?”

    “나에게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라. 오래도록 어딜 가거든 꼭 기별해. 그래 줄 수 있나?”

    엘레나는 그 어떤 표현보다 그에게 소중히 여겨진다는 사실이 좋았다.

    “약속할게요.”

    “그거면 됐다.”

    시안도 대답이 썩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보고 싶으면 살롱으로 오면 되나?”

    “아뇨.”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제가 살롱에 오는 날이 많지 않아요.”

    “그대는 그동안…… 아니다. 괜한 걸 또 물을 뻔했군.”

    자기도 모르게 실언을 했다고 느낀 시안이 얼른 말을 물렸다.

    “그럼 언제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살롱에 오는 날이 정해지면 빌렘 백작가로 연락을 드릴게요. 괜찮을까요?”

    “빌렘 백작가라…….”

    시안은 말을 흐렸다. 졸지에 엘레나와 시안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취급을 받게 될 린든 백작이 노발대발하는 게 눈에 훤했다.

    “그러도록 하지. 더 자주 볼 수 없음이 아쉽지만…… 참아보겠다.”

    대공가에 적을 둔 이상 살롱의 왕래가 쉽지 않았다. 리아브릭이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명분을 갖추는 게 우선이었다. 시안의 마음은 고맙지만 엘레나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내가 없어도 살롱이 잘 운영된다는 거야.’

    엘레나가 살롱을 자주 찾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하는 이유였다. 아트 중개사로 성숙해진 칼리프가 시대의 거장들과 돈독하게 친분을 맺고 그들을 관리하며 전성기를 앞당겼다. 란돌, 첸토니오, 크리스티나까지 전부 칼리프의 손길과 정성이 닿아 원 역사보다 빨리 빛을 발했다.

    에밀리오 역시 믿음직스러웠다. 그는 카스톨 상회의 일보다도 살롱의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엘레나가 만류했지만 오히려 일하는 재미가 있다며 괜찮다 했다. 기약 없는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엘레나와 시안은 소파에 앉아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

    한마디의 말도 없는 침묵이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처음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적을 깨지 않았다. 때론 침묵이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대신 할 수 있음을 알기에.

    * * *

    수도 외곽의 정비되지 않은 가도를 따라 사륜마차 한 대가 미친 듯이 질주했다. 마부는 쉼 없이 달려온 터라 혀마저 말라 버린 말들을 더욱 다그쳤다. 바퀴가 돌멩이나, 움푹 팬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마차가 들썩였지만 그 속도는 줄지 않았다. 어느 순간 끊겨 버린 가도를 뒤로하고 숲을 가로지르듯이 나아간 마차는 인적이 드문 깊은 숲속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최후의 안가. 자연이라는 최고의 은신처에 위치한 이곳은 어느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대공가가 보유한 수십 개의 안가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었다.

    끼익.

    하늘에 닿을 듯 나무보다 높은 쇠창으로 만들어진 대문이 열렸다. 철창 안쪽 안가 안으로 마차가 들어오자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아무리 자연이 천혜의 은신 수단이라지만 경비 인원이 턱없이 적은 만큼 한번 발각이 되면 안가의 구실을 할까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최후의 안가는 바스타슈 가문의 비밀첩보조직 마제스티조차 한 번도 침입하지 못했던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 이유는 프리드리히 대공가 최후의 전력이라 평가받는 제1기사단 중에서도 정예기사들이 항시 안가 주변에 상주하며 침입자를 처단하기 때문이다.

    “워, 워!”

    마부가 고삐를 당기며 마차를 세웠다. 그러자 마부의 옆에 동석해 있던 기사 로렌츠가 내려 마차의 문을 열었다.

    “내리시죠.”

    마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리아브릭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정평이 난 그녀였지만 유독 오늘은 다급해 보였다. 이미 수차례 안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 리아브릭이기에 걸음걸이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쿵.

    저택으로 들어선 리아브릭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는 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모퉁이를 돌자 복도 끝 방 앞에 서성거리는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대공가에 상주하는 주치의와 외부에서 초빙한 약초 전문가, 그리고 벙어리 시녀였다. 리아브릭이 다가가자 세 사람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에 계시나?”

    “예, 들어가 보시지요.”

    주치의의 말에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노크했다. 들려오는 대답이 없어 주치의를 보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리아브릭의 시선이 습관적으로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엔 흐트러진 이불만 있을 뿐이었다. 정작 있어야 할 이가 없자 놀라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커튼 너머로 창틀에 걸터앉아 있는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의식이 없어야 할 그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창밖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스윽 돌렸다. 아직 몸이 좋지 않은지 안색이 좋지 않은 여인은 창백한 입술을 열었다.

    “어서 와요, 리브.”

    그녀의 목소리가 작지만 또렷했다. 마치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이.

    “제가 좀 오래 잤나 봐요. 리브가 저보다 한참 언니로 보이니.”

    “공녀 전하.”

    리아브릭의 입에서 그녀의 신분이 짐작될 만한 말이 나왔다.

    베로니카 공녀.

    그녀가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참 신기하네요.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삼 년이 지나 있다니. 신기해요.”

    “긴 시간이었어요.”

    리아브릭의 말속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베로니카가 의식을 차리지 못한 동안 그녀에 대한 각종 추문과 음해, 악소문이 범람했고 대공가의 후계 구도가 크게 흔들렸다. 프란체 대공과 리아브릭은 국면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여 대륙 반대편에 위치한 공국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고 엘레나를 데려와 대역으로 내세웠고 지금에 이르렀다.

    “꿈을 꿨어요.”

    베로니카가 흐트러진 옆머리를 어깨 너머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꽃밭에 서서 화사한 꽃을 보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제 손등에 앉았어요.”

    “나비요?”

    “영롱한 에메랄드빛의 날개였는데 너무 신비로웠어요. 그 우아한 날갯짓에 전 넋을 잃고 쫓았어요. 그리고 꽃밭을 나올 때쯤 나비가 제 손등에 앉더라고요.”

    ‘나비는 희망의 상징.’

    리아브릭은 원칙적으로 미신이나 신앙을 믿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가이아 교단을 국교로 삼고 있는 제국의 문화는 신앙과 미신을 떼어놓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의식을 잃고 있던 베로니카가 깨어나는 데 그 나비의 공이 컸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나비가…… 제 손등을 물었어요.”

    “물어요? 나비가?”

    “가시로 찌른 듯 아프더라고요. 한낱 미물 주제에.”

    그때의 통증이 떠올랐는지 베로니카가 하 하고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나비를 꽉 움켜쥐었어요.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다가 한쪽 날개를 잡고, 다른 한쪽 날개를 쭉 잡아당겼어요.”

    “…….”

    베로니카가 손으로 마치 종이를 쥐어 찢듯 시늉을 해 보였다. 잔혹하기 그지없게.

    “너덜너덜해진 나비의 날개를 발로 짓이기고 나니 갑자기 어둠이 절 덮치더군요. 그리고 눈을 떴는데, 천장이 보였어요.”

    가이아 교단의 성경에서 나비는 신탁을 전하는 사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나비를 찢어 죽이는 건 신앙적으로 볼 때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꿈일 뿐이야.’

    리아브릭은 미신을 떨쳐냈다.

    “한낱 꿈은 꿈이에요. 그보다 밤바람이 차네요. 이만 누우심이 어떠신지요.”

    “아뇨, 찬 바람마저 좋네요. 꼭 살아 있단 느낌을 들게 해서.”

    베로니카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밤바람이 불며 그녀의 금발과 커튼의 속지를 흩날렸다.

    리아브릭은 걱정이 앞서 한 번 더 만류할까 하다가 참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에 중독이 된 베로니카는 생사의 고비를 수십 번도 더 넘겼다. 명의라 일컫는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갖은 방법을 고안해 냄에도 불구하고 해독제를 만들지 못했다. 겨우 숨을 붙여놓는 게 최선이었다.

    결국 리아브릭은 베로니카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독제독. 독으로 독을 없앤다는 과감하면서도 무모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천운이 따른 덕분에 베로니카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러더군요. 제 대역이 있다고, 꽤 쓸 만한 인형이라고.”

    인형. 베로니카에게 엘레나란 존재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조차 아까운 물건에 불과했다.

    “네, 생각보다요. 공녀 전하를 닮아서인지 귀족들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리브.”

    베로니카가 목소리를 깔며 낮게 그녀를 불렀다.

    “닮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줄래요? 그 천한 것과 절 동일 선상에 놓는 것 같아 굉장히 모욕적이네요.”

    “……실언했습니다.”

    삼 년 만의 만남인지라 리아브릭도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눈앞의 베로니카가 얼마나 권위와 특권 의식으로 똘똘 뭉친 여인인지를. 한 번 심기가 뒤틀린 베로니카의 말투가 변했다.

    “그 얘기도 들었어요. 무려 삼 년이나 지났음에도 흉수를 찾지 못했다고.”

    리아브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날의 일은 리아브릭의 삶에 있어 최초의 실수였고 실패였다. 흉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떠한 경로로 베로니카가 중독되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제가 미흡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전 남보다 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리브가 좋았어요.”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덤덤하게 말을 잇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머금은 베로니카의 눈빛이 싸늘했다.

    “근데 이번 일은 좀 그래요. 무려 삼 년이나 지났는데 밝혀진 게 없다니요.”

    “…….”

    “안 그래요, 리아브릭?”

    베로니카는 애칭이 아닌 본명으로 그녀를 차갑게 추궁했다. 리아브릭의 이독제독으로 기적적으로 생존했건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껏 리아브릭이 해온 모든 일은 가신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독에 중독이 되어 의식을 잃은 시점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베로니카는 여전히 그 일의 흉수를 찾지 못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리아브릭이 고개를 푹 숙였다. 베로니카는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리아브릭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실망은 한 번이면 족해요. 아버지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항상 가슴에 새기세요.”

    베로니카는 분명하게 경고했다. 지금이야 프란체 대공의 신임을 등에 얻고 리아브릭이 전권을 휘두르지만 언젠가 대공가는 베로니카가 물려받게 될 거다.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맞이하게 될 베로니카의 시대에 리아브릭의 자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대공가에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할 천재들은 넘쳐 나기 때문이다.

    “가슴에 아로새겨 두겠습니다.”

    “쉬고 싶네요.”

    아직 기력이 온전치 않은데 찬 바람을 오래 쐬며 말을 많이 했는지 베로니카는 힘에 부쳐 보였다. 힘없는 걸음걸이로 침대에 넘어지듯 쓰러지더니 잠이 들었다.

    리아브릭은 밤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닫고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공녀의 몸 상태는 어떻지?”

    “독이 완전히 중화되지 않고 체내에 남아 있습니다. 좀 더 시일을 두고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마음을 놓기 이릅니다.”

    주치의의 보고에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로렌츠를 대동해 복도를 따라 걷던 리아브릭이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생각보다 빨리 인형을 태워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인형이라면?”

    로렌츠가 눈을 빛내자 리아브릭이 서늘하게 얘기했다.

    “극이 끝났는데, 인형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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