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22/30)
  • 제13장 졸업

    학술원에 종강이 찾아왔다. 2학기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으며 학술제와 예술제, 검술제에서 재능을 뽐낸 재학생들은 각 분야로 발탁되었다. 또한 4학년은 졸업식을 끝으로 학술원을 떠나게 된다. 로이에르 제국의 아카데미가 방학 이후 졸업식을 하는 것과 달리 제국의 학술원은 종강 후 곧장 졸업식을 진행한다. 다만, 매년 반복되는 행사임에도 올해 졸업식은 예년보다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기적적인 검술제 우승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황태자 시안. 제국을 진동시키고 있는 작품 벨라도나의 화가 라파엘. 비록 검술제에서 시안에게 졌지만 제국의 검이라 불릴 촉망받는 검사 렌 바스타슈까지. 수백 년간 이어온 학술원 졸업식을 통틀어서도 올해처럼 뛰어난 자들을 한 번에 배출한 해는 드물었다.

    졸업식 하루 전. 엘레나는 변장한 뒤, 라파엘의 화실을 찾았다. 라파엘이 미술용품을 정성 들여 포장하고 있었고, 세실리아가 그 일을 돕고 있었다. 엘레나는 정리를 하고 있는 둘을 보며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선배들이 졸업이라니.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그러게요.”

    “여기가 비다니. 굉장히 쓸쓸할 것 같아요.”

    화실에 정이 깊게 들었는지 공허가 느껴졌다.

    “우리 다 떠나면 후배님 어쩐다? 애인이라도 사귀어보는 게 어때?”

    “생각 없어요.”

    “그래? 이상하네. 생각 있는 사람은 많아 보이던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세실리아가 눈웃음을 치며 엘레나를 놀렸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나와 그녀가 이런 관계가 될 줄은.’

    지난 삶과 비교해 모든 게 새로웠고 낯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정립되어 있던 관계들은 하나같이 뒤틀렸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세실리아도 그중 하나다.

    “루시아 양, 이 그림 어떻게 할까요?”

    라파엘의 앞에는 엘레나가 그린 이안의 그림이 놓여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겠지만 이젠 엘레나의 눈에 따스함이 스몄다. 마음 같아선 가져가고 싶지만 당장은 그럴 처지가 못 됐다.

    “한동안만 선배가 보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요. 가져갈 수 있을 때 언제든 말해요.”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을 종이로 겹겹이 싸며 포장했다. 화실 안 물건들을 전부 정리했을 무렵 칼리프가 보낸 짐꾼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조심조심해서 짐들을 별관 밖 마차로 옮겼다. 짐을 먼저 실어 보낸 라파엘도 텅 빈 화실을 보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기숙사로 가서 마저 짐을 싸야겠어요.”

    “후배님은 내일 졸업식에 올 거지?”

    엘레나가 끄덕였다.

    “갈게요. 축하도 해주고 작별 인사도 하고.”

    “작별 인사라니 뭔가 영영 헤어지는 거 같잖아. 축하만 해줘.”

    세실리아의 농담 어린 말을 끝으로 라파엘과 엘레나는 헤어졌다. 다음 약속 장소로 엘레나는 이동했다. 학술원 출입구에서 외출증을 받아 에밀리오가 매입해 운영 중인 레스토랑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지난번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종업원이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오늘도 영업하지 않는지 레스토랑은 조용했다.

    “어서 와.”

    엘레나가 이 층 테라스 방에 들어가자 칼리프가 반갑게 인사했다. 에밀리오는 칼리프 모르게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축하해요, 선배. 무사히 졸업장 받게 된 거.”

    “솔직히 졸업할 수 있을 거라 기대 안 했는데…… 운이 좋았어. 교수님이 좋게 봐줬지 뭐야.”

    칼리프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내일 졸업식 올 거지?”

    “가야죠.”

    “그럼. 안 오면 서운하지.”

    엘레나는 말없이 웃으며 칼리프를 쳐다봤다. 첫 만남은 거래로 시작했지만 이젠 신뢰라고 할 만한 끈끈한 유대감이 생겼다. 든든한 사업 파트너의 느낌이랄까.

    “왜 그렇게 보냐? 기분 나쁘게.”

    엘레나가 픽 웃고는 고개를 돌려 에밀리오와 눈을 맞췄다. 엘레나의 눈길에서 부녀지간을 연기하던 철부지 느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차분함이 남았다.

    “경과 보고서 받았어요. 에밀리오 님이 아니었으면 대공가의 견제를 피해 이만큼 세를 갖추지 못했을 거예요. 감사해요.”

    “은인께 입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밀리오는 깍듯이 존대했다. 갑작스러운 호칭의 변화에 칼리프가 눈을 깜빡였다.

    “너 그 어색한 호칭 뭐냐? 그리고 에밀리오 님은 얘한테 왜 존대를 하세요? 은인은 또 뭐고요.”

    “선배.”

    칼리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지금 오가는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있잖아. 나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거든? 이해가 되게 설명 좀 해줄래?”

    “안 그래도 그럴려고요. 이젠 좀 솔직해질 때가 된 거 같고.”

    “뭔 얘길 하려고 그래. 불안하게.”

    엘레나가 검정 뿔테 안경을 벗었다. 화장했다고는 하나 워낙 이미지를 좌지우지하는 용품이다 보니 안경만 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나 본연의 얼굴선이 드러났다.

    “너 무섭게 안경은 왜 벗고…… 어? 어!”

    혼란스러워하는 칼리프를 뒤로하고 엘레나는 손을 머리 안쪽으로 넣어 단단히 고정해 뒀던 가발의 핀을 풀었다. 뒷머리에서 엘레나가 손을 뗐을 때는 단발의 갈색 머리 가발이 들려 있었다. 동시에 엘레나가 머리를 흔들자 돌돌 말아 눌러두었던 긴 금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 순간 칼리프가 경악에 찬 말을 내뱉었다.

    “베, 베로니카 공녀?”

    “……!”

    옆에 있던 에밀리오 역시 그 말에 깜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내심 엘레나의 정체가 대귀족이나, 황족이지 않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대공가의 베로니카 공녀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 자주 봤잖아요, 선배.”

    엘레나는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칼리프의 반응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너…… 아, 아니. 고, 공녀 전하가 왜…… 그, 그럼 루시아는?”

    “에밀리오 님이 설명해 주실래요? 진짜 루시아가 어디 있는지.”

    엘레나의 부탁을 받은 에밀리오가 대신 대답했다.

    “내 딸 루시아는 지금 3국 연합의 일원 벨칸 왕국의 수도에 있단다.”

    “벨칸이면 저 북방이잖아요! 그, 그럼 이제까지 공녀 전하께서 루시아 행세를 하신 거예요? 말로만 듣던 일인이역?”

    “그런 셈이죠.”

    “이, 이건 꿈이야. 말도 안 돼. 안 된다고!”

    칼리프는 지금 상황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루시아로 믿었던 여자가 베로니카 공녀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연신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칼리프를 보며 엘레나가 입가의 미소를 싹 지웠다. 더없이 귀족적인 눈매를 하고선 고상한 언어로 얘기했다.

    “저 예술 작품 두고 흥정하지 않아요. 그건 예술에 대한 모욕이죠.”

    “그, 그 말은…….”

    엘레나가 첫 거래에서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이 읊었다. 칼리프는 머리를 쥐어 잡고 뜯었다. 엘레나가 루시아이며, 베로니카 공녀라는 사실을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간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루시아란 이름은 제게 숨통이었어요. 대공가의 감시가 심하다 보니 제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거든요.”

    “자, 잠깐만. 잘 이해가 안 가는 게 너…… 아니, 공녀 전하께서 왜 대공가의 감시를 받아요?”

    엘레나가 베로니카란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간 엘레나가 해온 일을 돌아보면 대공가를 겨냥한 계획이 많았다. 칼리프가 가져온 미술품을 웃돈을 주어 구매했고, 빈민가 토지 매입이나 천연 대리석 광산 독점 계약도 엄밀히 따지면 대공가가 벌이는 사업의 이권을 뺏어오는 것이었다. 대공가의 후계자나 다름없는 베로니카가 왜 대공가를 상대로 제 살을 깎아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레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라파엘과 에밀리오를 번갈아 보았다. 다짐을 하고 이 자리에 나왔음에도 망설여졌다.

    ‘진실을 밝힌다는 게 큰 용기가 필요하구나.’

    대공가를 상대로 고독한 복수극을 펼치는 엘레나에게 있어 두 사람은 유일하게 신뢰를 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생과 현생을 통틀어 한 번도 밝힌 적 없는 비밀을 털어놓는 일인 만큼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저는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에요.”

    “농담하는 거죠? 공녀 전하가 아니면 누가 공녀란 말인데.”

    혼란스러워하는 칼리프를 보며 엘레나가 진실을 고백했다.

    “제 이름은 엘레나.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이에요.”

    “……!”

    칼리프뿐만 아니라 웬만한 일로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에밀리오조차 혼란스러워했다.

    ‘시간을 두고 밝힐 걸 그랬나?’

    잠시 후회가 밀려왔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아니야,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내 진심을 먼저 보여야 해. 나에겐 이 두 사람이 꼭 필요해.’

    엘레나는 이 두 사람과 많은 걸 해냈고 이뤘다. 칼리프와 에밀리오가 없다면 리아브릭을 상대로 이만한 성공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자신이 베로니카의 대역이라는 진실을 얘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침묵이 흘렀다. 엘레나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그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때까지 기다렸다. 오랫동안 이어진 정적을 깬 건 칼리프였다.

    “제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데…… 아까 대역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진짜 베로니카 공녀는 어디 계세요?”

    “저도 몰라요. 다만, 머지않아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는 건 알아요. 그때가 되면 대역인 저는 필요가 없어지겠죠. 버림받을 거예요.”

    “버, 버려진다고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쪽같이 속아서 살다가 맞이한 비참한 죽음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대공가에게 전 한낱 인형일 뿐이에요. 쓸모가 다하면 처분해야 할 인형이요.”

    “…….”

    칼리프는 말을 잃고는 입만 뻥긋거렸다. 마치 자신의 비참한 결말을 알고 있는 듯한 엘레나의 표정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인.”

    엘레나가 고개를 돌려 에밀리오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은인께서 준비하신 모든 것은 베로니카 공녀가 돌아올 때를 대비하신 겁니까?”

    “비슷하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대비는 아니에요. 제가 바라는 건 대공가의 몰락입니다.”

    “그렇군요. 몰락이라. 결코 쉽지 않은 일이군요.”

    에밀리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상대는 제국의 기둥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대공가다. 지금까지야 거래를 통해 대공가에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지만 그 정도로 몰락할 대공가가 아니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지금까지 잘해왔고요.”

    숨을 고른 엘레나가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대공가도 방관하지 않을 거예요. 대공가의 모사 리아브릭은 잔인한 여자예요. 두 분이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어요.”

    엘레나는 어느 때보다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지만 부탁드려요. 지금까지처럼 절 도와줄 수 있을까요?”

    “은인.”

    “……루시아.”

    엘레나는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이 두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알기에. 목숨을 내놓을 만큼 위험한 일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손을 잡아달라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레나의 진심 어린 고백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칼리프였다.

    “안 도울 리가 없잖아.”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목청을 높여 얘기하는 칼리프를 봤다.

    “너 염치라고 했냐? 나도 염치라는 게 있지.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난 변변찮은 영애를 꼬셔 데릴사위로 들어갈 궁리나 했을걸? 그런 쓸모없는 놈을 네가 이만큼 만들었어.”

    “선배.”

    “그런 네가 도와달라는데. 가만히 두면 죽게 생겼는데. 모른 체할 수 있겠냐?”

    칼리프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를 믿으라는 시늉을 했다. 썩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엘레나를 미소 짓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런 의미로 나 반말하면 안 될까? 내가 나이도 한 살 더 많잖아. 아, 아닌가? 혹시 실제 나이가 나보다 많니?”

    “제가 어려요.”

    이 와중에도 발랄함을 잃지 않는 칼리프를 보며 엘레나가 실소를 머금었다.

    “은인.”

    “말씀하세요.”

    “기억하십니까? 은인을 처음 뵌 날 루시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게 해달라고 했던 말을요.”

    “어떻게 잊겠어요?”

    엘레나는 그날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에밀리오는 자식을 구해준 은혜를 갚고자 평생 쌓은 걸 내놓겠다고 했다. 그 진심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지금 발을 빼면 딸을 볼 면목이 없을 거 같습니다.”

    “에밀리오 님.”

    엘레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루시아도, 베로니카도 아닌 한낱 대역에 불과한 그녀를 위해 이리 나서주는 칼리프와 에밀리오가 너무 고마웠다.

    ‘처음으로 느껴봐. 혼자가 아니란 기분.’

    지난 삶에서 엘레나가 믿었던 앤과 로렌츠는 그녀를 배신했다. 그들은 리아브릭의 명령을 받아 엘레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감시를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마음을 터놓고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

    “좋아! 까짓것 대공가든 뭐든 몰락시키자고. 이제부터 뭘 할까? 뭐부터 하면 돼?”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칼리프를 보며 엘레나도 환하게 웃었다.

    “지금 하시는 일을 잘하시면 돼요. 꾸준히.”

    * * *

    학술원 졸업식은 여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졸업생 대표로 시안이 졸업사를 읽어 내려갔고 마지막 문장을 읊음으로써 학술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개중에는 루시아로 변장한 엘레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졸업 축하해요, 선배.”

    엘레나의 축하를 받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이 실감 나지 않는지 얼떨떨한 얼굴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학술원이 새장처럼 답답했는데, 막상 떠난다니 서운하네요.”

    “칼리프 선배가 잘 챙겨줄 거예요. 저도 종종 찾아갈게요.”

    막 작별을 고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확 끼어들었다. 칼리프였다.

    “뭐야? 방금 내 얘기 한 거 같은데?”

    “귀는 참 밝아요.”

    엘레나의 귀여운 비꼼에 라파엘이 피식 웃었다.

    “세실리아 선배도 졸업 축하해요.”

    “고마워, 후배.”

    세실리아는 밝은 미소로 고마움을 표하고는 라파엘과 칼리프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때, 엘레나가 등 뒤에서 시선을 느끼고 돌아봤다. 그녀는 지척에 서 있는 시안을 볼 수 있었다.

    “졸업 축하드려요, 전하.”

    “고맙군.”

    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어색함으로 바뀔 즈음 시안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얼마간은 정신이 없을 것 같다.”

    “네?”

    “시간이 나면 그대를 보러 오지.”

    “……!”

    시안은 눈인사를 하곤 돌아섰다. 자신으로 인해 루시아가 주목받는 걸 막기 위해서다.

    “잠시만요!”

    멀어지는 시안의 뒷모습을 보며 멍해 있던 엘레나가 서둘러 시안을 불렀다. 그러나 저만치 가버린 시안은 북적거리는 인파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전하께서 오셔도 절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엘레나는 어제부로 학관에 휴학계를 제출한 상태였다. 벨라도나로 인해 얼굴이 너무 알려진 바람에 루시아의 신분으로 활동하기 어려워진 까닭이다.

    라파엘은 졸업하며 학술원을 떠났다. 굳이 루시아로 변장하지 않더라도 칼리프를 통해 접촉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더는 루시아로 활동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시안이 보러 온다 하더라도 루시아는 학술원에 없을 것이다. 그건 엘레나가 행세 중인 베로니카도 마찬가지다. 조만간 리아브릭은 교수들을 포섭해 그녀를 조기 졸업시킬 것이다. 그리되면 엘레나와 시안의 접점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말하려고 했는데. 찾지 말라고, 여기 없을 거라고. 이 말을 꼭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시안이 찾아와도 볼 수 없기에 엘레나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하한테 인사도 못 드렸는데, 가버리셨네.”

    “급한 일이 있으시대요.”

    이미 가버린 시안을 붙잡을 길이 없기에 엘레나는 시선을 거뒀다.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자꾸만 돌아봤다. 그런 엘레나에게 라파엘이 다가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렌, 그자가 오지 않았군요.”

    “우승 못 한 게 상처였나 봐요.”

    렌은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검술제 준우승 상패 따위는 거부한단 의미였을까.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던 엘레나가 고개를 돌려 라파엘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근데 선배가 그 사람 얘기를 다 하네요? 사이 안 좋으셨잖아요.”

    “그랬죠. 그랬는데 미운 정이 들었나 봅니다. 신경이 쓰이네요.”

    씁쓸하게 웃는 라파엘을 보며 엘레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 * *

    졸업식 이후, 엘레나는 방학 동안 학점을 이수하고자 정신이 없었다. 남는 시간엔 미술상의 신분으로 칼리프가 가져온 예술품을 구매했고, 나머지 시간은 도서관에 들러 부족한 지식과 학식을 쌓는 데 할애했다. 살롱과 관련된 일 역시 엘레나가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해줬다.

    에밀리오는 대상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천연 대리석 매각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무려 원가의 다섯 배를 받고 대공가에 천연 대리석을 공급하는 계약을 해낸 것이다. 그 덕에 살롱의 증축에 들어간 비용과 바실리카 건축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칼리프는 맡고 있는 거장의 숫자가 늘자 엘레나의 조언대로 건축과 미술 분야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만한 후임자를 뽑았다. 그들을 데리고 다니며 아트 중개사로서의 역할을 각인시키고 교육하며 선임 노릇을 톡톡히 했다.

    가장 흥미로운 건 라파엘의 소식이다. 칼리프는 작품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다. 학술원 시절의 퀴퀴한 지하 화실과 차별되는 경치와 전망이 좋은 작업실을 제공해 그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그런데 웬걸. 보름도 채 가지 못해 라파엘이 화실을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학술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실로. 칼리프가 진심이냐고 물어보니 햇빛이 밝은 것도 적응이 안 되고,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꽃가루 때문에 나오는 재채기도 싫다고 했다. 칼리프는 어이가 없었지만 라파엘의 요구대로 살롱 근처를 수소문해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화실을 구해줬다고 한다. 그제야 좀처럼 진척이 없던 작품 활동에 라파엘이 발동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렌과 관련된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검술제 이후 받은 충격이 컸는지 가문 내 연병장에 박혀 검술 수련에 매진한다고 했다. 하루는 가문 내 기사들과의 대련을 빙자해 그들을 초죽음으로 만들었단 얘기도 들려왔다.

    황궁으로 돌아간 시안은 그곳에서 두문불출했다. 귀족들의 견제 때문인지 별다른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는 걸로 짐작됐는데, 그 점이 엘레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뭔가에 쫓기듯 바빠 보이셨어. 그런 분이 가만히 황궁에 계실 리가 없는데…….’

    시안은 원 역사와 비교해 많은 점이 변했다. 또한 새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했다.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지금쯤 움직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주 은밀하고, 위험하게.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해내실 거야. 워낙 빈틈없는 분이시잖아.’

    엘레나뿐만 아니라 다들 각자의 삶에 충실하게 살았다. 학술원에서 지냈던 시간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러던 중 방학이 끝났다. 리아브릭의 요구대로 엘레나는 계절학기 동안 목표한 학점을 이수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새 학기가 시작되며 교수들의 강의가 시작됐다. 별다를 게 없는 학술원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지루해할 틈이 없었다.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고사를 얼마 앞두고 학관에서 엘레나를 불렀다. 학술원 총장과 부총장 그리고 몇몇 교수가 한데 모인 자리였다.

    “공녀가 제출한 논문이 몹시 훌륭하더군. 예술계의 흐름을 읽는 눈이 탁월했어.”

    예술계의 흐름? 논문? 엘레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 낸 적도 없는 논문을 극찬하는 모습이 퍽 우스운 까닭이다.

    “나 역시 감탄했네. 이토록 예술계의 허와 실을 정확히 짚어낼 줄이야.”

    “예술계에 평판이 자자하더군. 예술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탁월하다고.”

    엘레나는 자신이 제출했다는 논문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싶었다. 대체 뭐라 쓰여 있기에 저리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건지. 그러고 보니 지난 삶에서는 제국의 의류 문화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이 논문을 보고 고민이 많았네. 공녀와 같은 인재를 학술원에 묶어두는 게 옳은 것인가에 대해.”

    “과거 학술원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수학점이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논문으로 학점을 대체해 조기졸업을 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

    ‘참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지금껏 조기졸업을 한 역대 졸업생은 열 손가락에 꼽는다. 그들의 면면을 돌아보면 검술학부 소속으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거나, 대학자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천재들이다. 냉정하게 보면 엘레나는 그 기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도 생전 본 적 없는 대리 논문을 극찬하며 조기졸업을 추진했다. 학술원의 총장부터 부총장, 교수들까지 하나같이 대공가의 지원을 받거나 영향력 아래 있단 말이었다.

    ‘그게 대공가의 정말 무서운 점이지. 제국 곳곳에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단 말이니까.’

    지금도 보라. 논문의 진위 여부는 관심도 없다는 듯 조기졸업을 강행했다.

    “해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걸쳐 심사숙고한 끝에 공녀의 조기졸업을 결정했네.”

    총장의 통보나 다름없는 발언에 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결정인 것 같다며, 학술원이 품기엔 너무 큰 그릇이라는 등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베로니카 폰 프리드리히, 학술원의 결정에 존중을 표합니다.”

    엘레나가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결정을 받아들였다. 학술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조기졸업 명단에 베로니카의 이름이 오르게 된 날이다.

    * * *

    학술원 생활을 마무리 지은 엘레나를 태운 사륜마차가 대공가의 문턱을 넘었다. 숲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자 저 멀리 저택 본관이 보였다.

    히이잉.

    요란한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들썩이던 진동이 멈췄다. 이윽고 닫혀 있던 마차의 문이 열렸고 엘레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지면을 밟았다.

    “수고 많았다.”

    사전에 올 거란 소식을 접했는지 프란체 대공이 손수 나와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엘레나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자 프란체 대공이 다가와 가볍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누가 보더라도 애틋한 부녀지간처럼 보이기 위한 연기였다. 엘레나는 목 끝까지 치미는 역겨움을 참으며 예쁘게 웃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리브, 이게 얼마 만이에요?”

    프란체 대공의 뒤에 서 있던 리아브릭을 보며 엘레나가 반가운 척을 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리브가 했죠. 신경 써준 덕분에 학술원 생활이 수월했어요. 고마워요.”

    일여 년 만의 재회인 만큼 마음에도 없는 친근한 안부가 오갔다. 상투적이지만 이런 대화 역시 귀족의 삶이었기에 빼먹을 순 없었다.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자꾸나. 차라도 마시며 그간 못 나눈 얘기를 나누도록 하자.”

    “네, 아버님.”

    프란체 대공의 권유에 엘레나가 응하며 저택 안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리아브릭도 함께했다. 시녀들이 최고급 다과를 내놓고 물러나자 세 사람만의 대화가 시작됐다.

    “학점을 취득하느라 학술원에서 고생이 많았다지?”

    “아니에요, 모르던 걸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힘들지 않았어요.”

    엘레나는 과거 대공가에 처음 왔을 때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는 편이 저들로 하여금 엘레나의 이용 가치를 높이고 신뢰를 줘 방심을 유도케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제법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그래, 미술 쪽에서 조예를 보였다고?”

    프란체 대공은 이미 리아브릭을 통해 보고를 받은 듯 대화의 물꼬를 텄다.

    “조예라고 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난해한 예술 작품을 보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안목이 생긴 것 같아요.”

    “사들인 작품들의 가치가 꽤 올랐다고?”

    리아브릭이 대신 대답했다.

    “장기적으로 봐야 할 작품들도 많지만 개중 몇 개는 공녀가 매입한 가격보다 두 배 가까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정말요? 그렇게 많이 올랐어요?”

    “얼마 전 다녀간 감정사들이 그러더군요. 작가의 명성이 올라 작품의 가치가 크게 올랐다고.”

    엘레나는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마치 그 정도로 가치가 뛸 줄 몰랐다는 듯 놀라는 시늉을 했다.

    ‘두 배라고? 지금이야 그렇겠지. 폭락이 오기 전이 원래 제일 비싼 법이니까.’

    쉬쉬하고 있지만 라파엘의 벨라도나 발표 이후 예술계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백 년간 발전은커녕 정체하던 터라 발표되는 그림들이 죄다 비슷한 기법과 화풍을 지니고 있어 뭐가 낫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결국 작품의 가치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 예술가의 명성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명성을 조작해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앞장선 이들이 미술상과 감정사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어렵게 됐다. 벨라도나의 발표로 그간 웃돈을 주고 그림을 매입하던 몇몇 수집가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예술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담합으로 예술 작품의 가격 조정이 쉽지 않아진 것도 모자라 생존에 직격타를 맞은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벨라도나를 본 신예 화가들이 라파엘의 화풍과 기법에 영향을 받아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로 인해 예술계 종사자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새로운 풍의 그림이 쏟아지면 백 년간 정체되어 있던 그림들은 그 희소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미술상과 감정사들의 말에 속아 지금껏 비싸게 매입되었던 그림들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고, 수집가들은 분노할 것이다. 그걸 알기에 미술계 종사자들은 필사적으로 가격을 담합하고 거짓 감정으로 수집가들을 안정시켰다. 지금을 모면하고자 언젠가 더 큰 파도가 올 걸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아, 다행이에요. 손해를 입히면 어쩌나 했는데 가치가 올라서.”

    “공녀의 안목이 훌륭한 덕이죠.”

    어쩐 일인지 리아브릭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엘레나의 안목을 나름 높게 봐준 것이다.

    ‘벌써부터 보고 싶어지네. 내가 매입한 예술품 가격이 폭락하면 당신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엘레나는 생각을 고쳤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신뢰를 바탕으로 좀 더 많은 타격을 주는 게 낫다 싶었다.

    “아버님과 리브가 절 인정해 주니 너무 기뻐요. 그래서 말인데, 좀 더 공격적으로 예술 작품 매입을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공격적으로 매입하고 싶다?”

    프란체 대공이 되묻자 엘레나가 시선을 바닥에 두고는 눈치를 보며 말했다.

    “눈여겨보던 작품이 몇 개 있는데 매입가가 너무 높아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공녀, 이미 지금도 적잖은 돈을 매입에 쓰고 있어요.”

    리아브릭이 정색했다.

    “저도 알아요. 아는데…… 가치가 올라갈 게 뻔히 보이는데 사지 못하니까 미치겠어요. 제가 눈여겨보던 작품 중 하나는 매입가와 비교해 일 년 새에 두 배나 높은 가격에 경매장에서 낙찰됐대요.”

    “그렇다 하더라도 안 돼요. 위험부담이 커요.”

    “리브, 정말 안 될까요?”

    엘레나는 애원하듯 리아브릭을 보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프란체 대공에게 돌렸다. 단둘이 있을 때는 리아브릭이 결정자였지만, 프란체 대공이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나 리아브릭도 일개 가신에 불과하다. 프란체 대공이 결정하면 따를 수밖에 없다.

    “음, 공격적인 매입이라…….”

    프란체 대공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자 엘레나가 자신 있게 얘기했다.

    “저 잘할 수 있어요. 늘 신세만 졌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고요.”

    “자신은 있고?”

    “그럼요. 앞서 매입한 예술품의 가치 상승을 보셨잖아요. 자신 없었으면 이런 말 꺼내지도 않았어요.”

    지금껏 수동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엘레나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프란체 대공의 허락을 구하고자 애썼다.

    ‘잘만 하면 대공가의 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수 있어.’

    엘레나가 매입하고자 하는 건 초고가의 예술품이다. 대부분 수집가가 팔 의향이 없는 경우가 많기에 매입을 하자면 수배에서, 수십 배에 가까운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엘레나는 그러한 작품 중에서도 어설픈 작품을 위주로 매입할 계획이다. 그러면서 향후 일이 년 뒤에 그 가치가 폭락할 만한 그림들로 말이다. 이미 노블레스 거리 개발 사업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동원한 대공가 입장에서는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엘레나는 간절한 눈길로 프란체 대공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허락하지.”

    “대공 전하!”

    리아브릭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단 한 번도 프란체 대공 앞에서 큰 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떠할지 짐작이 갔다.

    “재고해 주십시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닙니다. 예상치 못하게 추가적으로 들어간 사업비만 하더라도…….”

    “그건 그대의 실책이고.”

    프란체 대공의 질책이나 다름없는 추궁에 리아브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레나는 목 끝까지 치미는 조소를 참았다. 요점을 피해 두루뭉술하게 얘기하고 있지만 리아브릭이 왜 저런 취급을 받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빈민가 땅 매입. 천연 대리석 광산 계약.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란 하나같이 엘레나가 훼방을 놓은 사업과 관련이 있었다. 그 피해 액수가 크다 보니 프란체 대공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탐탁지 않게 여기던 기색을 드러낸 것이다.

    ‘대역이라고 해도 난 공식적으로 베로니카 공녀야. 매입한 예술품의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날 버리지 못해.’

    베로니카가 돌아오기 전까지 엘레나는 대공가에 꼭 필요한 존재니까.

    “감사합니다, 아버님. 꼭 기대에 부응하도록 할게요.”

    엘레나가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더 할 얘기가 남았나?”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리아브릭을 보며 프란체 대공이 눈치를 주자 꾹 다물고 있던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내일부터 공녀를 지도해 줄 선생님을 초빙했어요.”

    “선생님이요?”

    “마담 드 플랑로즈.”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마담 드 플랑로즈가 그녀의 선생님이 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녀와 접점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 말은 엘레나의 개입과 행동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 된다. 엘레나는 정신을 바싹 차리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맞받아쳤다.

    “마담이야 귀족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분이시니 저야 영광이죠.”

    “예법의 근간부터 다시 배우게 될 거예요. 다도, 사교춤, 미소를 짓는 법, 발음, 문화 등 사교계를 이끌 레이디 중 레이디로 새로 태어나는 거죠.”

    리아브릭이 말하는 뉘앙스가 뭔가 묘했다.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까지 쓰는 걸로 보아 엘레나를 완벽히 탈바꿈시켜 놓으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제가 부족한 건 잘 알아요. 마담에게서 겸허히 배우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공녀가 잘 해내지 못하면 황태자비의 자리는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아벨라 영애의 것이 될 테니까요.”

    “……!”

    엘레나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황태자비 선임을 준비한다고? 벌써?’

    원 역사에서는 시안이 졸업하고 얼마 있지 않아 기습적인 혼인 공표로 세실리아를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대공가와 4대 공작가조차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빠른 조치였다. 결국 엘레나를 황태자비로 만들려던 계획에 실패한 대공가는 후사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비선발식을 강행한다. 그 결과 엘레나는 황비로 봉해지게 된다.

    ‘또 뒤틀리고 말았어.’

    엘레나가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변화가 커다란 파도가 되어 많은 걸 바꿔놓고 말았다.

    ‘후회는 하지 말자. 지금만 보는 거야. 그리고 전하를 믿어야 해.’

    그 작은 변화는 시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시안의 행보가 그 증거다. 뚜렷이 드러난 성과는 없었지만 엘레나는 원 역사보다 그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한, 비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 * *

    다음 날. 마담 드 플랑로즈는 약속을 중시하는 귀족답게 예정 시간보다 일찍 저택에 도착했다. 선생으로 초빙한 만큼 엘레나는 예의를 갖추고자 저택 입구에 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마담.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오랜만에 뵙니다, 공녀 전하. 못 뵌 동안 품행이 더 단정해지셨습니다.”

    형식적인 마담 드 플랑로즈의 안부 인사에 엘레나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감사의 표시를 보였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 리아브릭이 찾아왔다.

    “마담,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리아브릭 자작.”

    홍차와 가벼운 인사치레로 포문을 연 세 사람은 주요 화제로 넘어갔다. 주로 리아브릭과 마담 드 플랑로즈가 대화를 나누면 엘레나가 경청하는 식이었다.

    “대공 전하께선 여기 베로니카 공녀께서 황태자비가 되길 바라고 계세요.”

    “저 역시 공녀 전하야말로 황태자 전하의 곁에 어울리는 유일한 영애라고 생각해요. 하면 황태자비 선임식이 결정된 건가요?”

    “아직요. 그러나 언제까지 비워놓을 수는 없는 자리죠.”

    “시간적 여유는 있단 얘기시군요.”

    리아브릭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곤 응접실을 나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렸다. 느긋하게 홍차를 마신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놀랐어요. 마담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거든요.”

    마담 드 플랑로즈의 부덕함을 빌미로 엘레나는 시녀 메이를 소개받았다. 수족이 된 메이는 엘레나의 명으로 학술원 밖을 오가며 시대적 거장들을 보살폈다. 만약 메이가 없었다면 살롱의 기반을 다지지 못했을 것이다.

    “공녀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마담 드 플랑로즈는 모르는 척 일관했다. 굳이 얘기를 나눠봐야 좋은 꼴을 못 볼 터이니, 형식적인 선생님과 제자 관계로 지내고 싶어 했다.

    엘레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비밀스럽게 문란한 사생활을 가질지언정 대외적인 평판은 귀족의 표본이라 일컬어질 만큼 흠잡을 게 없는 여인이었다. 치부를 알고 있는 엘레나와 부딪치는 일이 불편한 걸 알면서도 교사의 초빙에 응한 건, 엘레나가 황태자비에 가장 가까운 여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차 엘레나가 황태자비를 거쳐 황후에 오르면 그녀는 제국의 국모에게 가르침을 준 여인이라는 평판과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된다면 역사에 한 줄 정도 남기는 마담으로 세간에 기억될 가능성이 높았다. 엘레나와 마주하는 게 탐탁지 않으면서도 이 일을 수락한 이유는 그런 욕망 때문이었다.

    “저는 프란체 대공 전하의 부탁을 받고 공녀 전하를 가르치러 온 입장입니다. 사적인 얘기는 이쯤에서 거두고 공손히 가르침을 받았으면 하네요.”

    “뻔뻔하시네요. 흔적을 다 지우셔서 그런가?”

    치부를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당당할 수 있는 건 나름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리라.

    “흔적이라니요? 무슨 흔적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마담 드 플랑로즈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태연한 연기였다.

    “정말 모르시는 건지,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세상에 완벽은 없는 법이죠. 과연 모두 지웠다 생각하시나요?”

    엘레나는 싱긋 웃으며 눈을 직시했다. 그러자 마담 드 플랑로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분명 흔적을 지운 건 맞는데, 뭔가 자신이 놓친 게 있나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게 왜 당신의 명성과 평판을 쌓고자 나를 이용하려고 들어요.’

    마담 드 플랑로즈가 뻔뻔하게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엘레나도 지난 일을 과거에 묻었을 것이다.

    “왜 말씀이 없으세요, 마담?”

    “그…… 그게…….”

    여전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녀를 보며 엘레나가 미소를 지었다.

    “마담의 곤란한 얼굴을 보니 제가 괜한 얘길 꺼낸 거 같네요. 그렇죠?”

    “…….”

    “자, 그럼 우리 이제 수업과 관련된 얘길 해볼까요?”

    엘레나는 적당히 몰아붙인 후 아무렇지 않은 척 발을 뺐다. 굳이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기보단 여지를 둬 스스로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게 낫단 생각에서다.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요?”

    “……예법의 근간부터 다시 잡아 나갈 생각입니다. 안 좋은 버릇은 버리고 공녀 전하의 성숙해진 신체에 맞게 동작의 선을 다시 잡을 거고요.”

    “그래요? 그 방법도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엘레나는 그 귀찮고 번거로운 예법을 다시 배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담이 가르치려는 예법을 제게 말하세요. 바로 해 보일게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부족한 게 있다면 지적하는 식으로 진행하죠.”

    “뭐, 뭐라고요?”

    “만약 마담이 원하는 동작을 보였음에도 지적할 게 없다? 그러면 이 시간은 제가 의미 있는 시간으로 쓰도록 협조해 주세요.”

    단언컨대 현 제국에서 엘레나보다 고절한 예법을 구사하는 이는 없었다. 그건 레이디 중의 레이디라는 마담 드 플랑로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담 드 플랑로즈의 생각은 달랐다. 지적해도 괜찮다 했으니 제대로 트집을 잡아 수업을 핑계로 분풀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택을 나선 마담 드 플랑로즈의 낯빛은 창백하다 못해 넋이 나가 있었다. 엘레나가 선보인 동작에 한 번의 지적도 하지 못한 까닭에 그녀는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돌아갔다.

    * * *

    “꽉 조이렴.”

    “네, 아가씨.”

    앤은 있는 힘껏 코르셋을 조이고는 단단히 묶었다. 새로 맞춘 블루 사파이어 계열의 드레스를 입은 엘레나는 특별히 주문 제작한 진주 목걸이를 착용해 우아함을 더했다.

    “너무 예뻐요. 옷이 날개가 아니라, 아가씨가 드레스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아요.”

    앤은 거울에 비친 엘레나를 보며 침이 마르도록 아첨을 떨었다. 루나린은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그런 앤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보석함을 닫던 제인의 눈빛도 썩 곱지 않았다. 구두를 가지런히 놓는 미사도 마찬가지였다. 장롱 안 드레스를 정리하는 메이를 제외한 나머지 시녀들은 한결같이 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이도 어린 게 엘레나의 옆에 찰싹 붙어서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못 봐줄 정도였다.

    “손님을 맞이하기엔 부족함이 없구나.”

    “그럼요! 미술상이 오신다고 하셨죠? 그분은 무슨 복이에요. 아가씨의 이런 아리따운 모습을 매번 볼 수 있고.”

    앤은 엘레나의 옆에 찰싹 붙어서 슬쩍 조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루나린, 제인, 미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나이와 경력도 제일 적은 주제에 세 사람을 아랫사람처럼 보는 눈길에 불쾌함을 느낀 것이다.

    엘레나는 그러한 앤의 오만함과 방자함을 알면서도 방치했다.

    ‘쭉 그러렴, 앤. 내 총애를 받고 있다고 착각해야 감시가 느슨해질 테니까.’

    앤이 우월감을 느끼며 우쭐거릴수록 본연의 임무인 엘레나의 감시에 소홀해질 테니까.

    “슬슬 응접실로 가자꾸나.”

    “네, 아가씨.”

    엘레나는 시녀들을 대동하고 본관 이 층에 위치한 응접실로 향했다. 앤이 재빨리 튀어나가 문을 열자 엘레나가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고, 공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째서인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인사하는 칼리프를 보자 반가운 마음보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긴장 풀고 평소처럼 해요.’

    엘레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입 모양으로 작게 얘기했다. 그러자 칼리프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엘레나는 안심을 시키려고 한 말인데 뭐가 그리 불안한지 갑자기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장소가 학술원 기숙사거나, 엘레나의 정체를 몰랐다면 몰랐을까 대공가라는 점이 꽤 부담으로 작용했나 보다. 

    엘레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에요. 매입한 그림을 볼까요?”

    “네? 네, 그러면…… 딸꾹.”

    엘레나가 소파에 앉자 세 폭의 그림이 나란히 이젤에 놓였다. 그간 방문 때마다 열 점 이상의 화폭을 가져온 걸 감안하면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에 속했다.

    “다 알 만한 작품들이네요. 이건 ‘월계수’고, 가운데 건 ‘천 년의 영광’ 마지막은…… 맙소사. ‘시인의 노래’군요. 이걸 가져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엘레나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칼리프가 가져온 그림들을 보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선배의 수완은 인정해야 한다니까. 시인의 노래를 어떻게 구했지?’

    엘레나가 생각하는 그림 중 가장 거품이 많이 끼고 고평가를 받는다고 추측되는 게 바로 시인의 노래라는 작품이다. 반세기 전 그림으로 화풍이나 기법도 특별할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델이 된 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회자되며 명작의 반열에 오른 특수한 경우다. 딱 엘레나가 바라던 그림이랄까? 현재의 가치는 높지만 예술계가 뒤집히면 가장 먼저 가치가 급락할 그림이 바로 이 시인의 노래라는 작품이었다.

    “아,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질 않아요. 이런 명화들을 제가 품을 수 있다니. 얼마든 상관없어요. 세 작품 다 매입하죠.”

    “혀, 현명하신…… 딸꾹! 선택이십니다. 딸꾹!”

    엘레나는 도무지 딸꾹질이 진정되지 않아 애먹는 칼리프를 보며 남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괜찮으세요?”

    “네,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 딸꾹.”

    “특별히 매입했으면 하는 작품이 있는데,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구하기 힘든 작품이라서요.”

    칼리프가 딸꾹질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주렴.”

    시녀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질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응접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엘레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잔에 물을 따라 칼리프에게 내밀었다.

    “기가 막혀서 진짜. 무슨 딸꾹질을 이런 상황에 해요? 일단 물부터 마셔요.”

    칼리프가 유리잔을 받아들고는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엘레나가 기겁하며 잔을 뺏었다.

    “아니, 천천히 마셔야죠. 내가 진짜 못 살아. 심호흡해요. 숨 들이쉬고 뱉고.”

    “후…… 하.”

    엘레나의 노력이 빛을 본 것이지 딸꾹질의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좀 진정돼요?”

    “어, 이제 좀 살 거 같다. 딸꾹.”

    엘레나가 한심스럽게 쳐다보자 칼리프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곤 볼을 긁적였다.

    “야, 쳐다보지 마.”

    “꼴사나운 건 알겠어요?”

    “그게 아니라…… 아, 적응 안 돼. 넌 왜 본판이 쓸데없이 예뻐서 사람을 힘들게 하냐?”

    적반하장이라고 오히려 성을 내는 칼리프를 보며 엘레나는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서요. 지금 이게 내 탓이라는 거예요?”

    “뭐 다 네 탓이란 건 아니고…… 여기가 대공가다 보니 나름대로 긴장도 되고 그래서.”

    칼리프가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하는 것 자체가 꼴불견 같아서였다.

    “됐고, 앉아서 얘기해요.”

    엘레나가 자리를 권하며 소파에 마주 앉았다. 딸꾹질이 완전히 가라앉았는지 칼리프의 안색도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미안.”

    “이제 와서요? 진행 상황이나 알려줘요. 저 오래 얘기 못 해요. 리아브릭이 의심할 거예요.”

    이미 엘레나를 통해 리아브릭이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에 대해 못이 박히도록 주입당한 칼리프였기에 바짝 정신을 차렸다.

    “다음 주면 살롱 본관이 완공될 것 같아.”

    “벌써요?”

    “너도 알잖아, 란돌만의 독특한 공법 때문인 거. 지금 그거 때문에 밖에 난리도 아니야. 건축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도 모자라, 건축 기술의 최대 난제 돔을 구현해 냈다며 발칵 뒤집혔다.”

    엘레나의 만면에 화색이 감돌았다.

    ‘내가 바라던 대로야.’

    살롱의 건축을 란돌에게 맡겼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첨두아치와 늑재 궁륭 공법 그리고 이중벽 구조로 대변되는 란돌의 건축물은 건축사의 획을 긋고 다시 써 내려갈 만큼 혁명적 공법이었다.

    “주변 반응은 어때요?”

    “미쳤지, 뭐. 아직 별관 공사도 남았는데 구경 온 사람들로 공사에 차질이 갈 정도야. 대체 살롱이 뭐 하는 곳이냐고 난리도 아니다.”

    엘레나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롱은 새 시대를 대변하는 문화 중심지로 거듭날 것이다. 그에 걸맞은 상징성을 갖고자 희대의 건축가 란돌에게 살롱 건축을 의뢰했고 보다시피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공식적인 살롱 개장만 남은 셈이네요.”

    수확의 시기였다. 그간 숨죽이며 씨를 뿌리고 물을 준 것들을 세상에 공개할 때다.

    “네 말대로 라파엘의 차기작 ‘동경’을 살롱 개장에 맞춰 공개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난리야.”

    “예술계가 뒤집혔겠네요.”

    “안 그래도 미술상이랑 감정사들 죄다 죽을상이다. 예술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면서 폭락은 없을 거라고 발악하고 있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뭐.”

    엘레나가 예상했던 전개다. 남은 일은 살롱을 어떻게 정착시키고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지가 관건이었다.

    “맞다, 살롱 이름은 정했어?”

    “시크릿 살롱.”

    “오호, 그럴싸한데? 요새 살롱의 주인인 L이 누구냐고 다들 궁금해하는데. 시크릿이라, 비밀스러운 느낌 좋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크릿 살롱이란 이름은 단순히 그런 비밀스러운 느낌을 간직하기 위해서 명명한 건 아니다. 비밀을 의미하는 시크릿은 살롱의 본질과 맞닿아 있었다.

    “선배, 살롱의 개장일에 맞춰 공고해 줄 게 있어요.”

    “뭔데, 말해봐.”

    “시크릿 살롱은 신분을 감춰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 의무적으로 가면을 써야 하며 자신을 밝혀서는 안 된다.”

    “가면무도회냐? 꼭 그래야 해? 난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이는데.”

    칼리프는 굳이 가면까지 써가며 신분을 감추고 살롱을 출입하게 만들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살롱 안에서는 신분의 벽을 없앨 거예요.”

    “뭐?”

    “그 일환으로 라파엘 선배의 작품 발표가 끝나면 토론회를 열 거예요.”

    갑자기 토론이라니? 칼리프는 지금 말하고 있는 엘레나의 계획을 전혀 쫓아가지 못했다.

    “난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아까 말했죠? 신분의 벽을 깰 거라고. 살롱에서 주관하는 토론의 참가자는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생각이에요.”

    “아무리 가면을 썼다지만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야?”

    “또 있어요. 살롱의 문턱을 낮추고 신분에 상관없이 토론을 참관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참관할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엘레나는 살롱의 토론 문화를 새 시대의 분수령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평민들은 지금껏 귀족들에게 수탈당하고 시달리면서도 큰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확고한 신분제도가 자리 잡은 제국에서 귀족에게 대든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니까. 그 당연함에 엘레나는 의문을 갖도록 할 생각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귀족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

    귀족이 귀족다움을 잃으면 그건 귀족으로 대접받을 자격을 잃는 것이다. 엘레나는 그 사실을 일러주고 싶었다. 더 나아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핍박받고 수탈당해야 하는 존재가 아님을 자각하게 하고 싶었다.

    ‘민중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야 해.’

    그러고자 살롱에서 주관하는 토론회에 누구나 참관이 가능하도록 공개할 예정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삶에 쫓기는 평민들이 토론회를 보러 오기도 버겁거니와 그 말을 다 이해하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토론회를 참관한 소수의 평민 계몽가나 연설가, 문호 등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전파할 것이다.

    “다는 아니지만 뭔 말인지는 알겠어. 그럼 토론 참가자는 어떻게 할까?”

    “총 열 명. 우리 쪽에서 다섯 명. 릴 푸치니 같은 거장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해 주세요.”

    “연락해 두마.”

    “외부에서도 명망 있는 지식인을 선별해 초대하세요. 네 명 정도가 좋을 거 같은데, 나중에 뒷말 나오지 않게 규칙에 대해 잘 설명하고 기밀 유지 서약서도 받아두세요.”

    엘레나가 하는 말을 빠짐없이 기억해 두던 칼리프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만. 그러면 토론 참가자가 총 아홉 명인데? 한 명이 비어.”

    “안 비어요. 제가 갈 거니까.”

    “네가?”

    직접 온다는 말에 칼리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레나는 그런 반응을 즐기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옆머리를 넘겼다.

    “기대하세요. 의문의 살롱 주인 L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될 테니까.”

    * * *

    “외출하겠다고요?”

    예고도 없이 리아브릭의 집무실을 찾아온 엘레나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네, 수도에 살롱이 개장한다고 해요. 거기 다녀오려고요.”

    리아브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롱의 주인 L과 관계가 좋지 않은 만큼 굳이 그곳을 간다는 엘레나의 말이 탐탁지 않게 들렸을 것이다.

    “꼭 가야 할 이유가 있나요? 황태자비 선임식 이전에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게 우선인 것 같은데.”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화가 라파엘의 차기작 ‘동경’을 살롱에서 발표한다고 하더라고요. 가능하면 매입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은 꼭 봤으면 해서요.”

    엘레나는 예술품 매입을 핑계로 살롱에 다녀오고 싶단 의지를 어필했다.

    ‘얼마나 보내기 싫을까? 딴 사람도 아니고 L이 개장하는 살롱을 간다니.’

    살롱은 개장 전부터 수도의 명소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과거의 뾰족하고 높은 첨탑이 주를 이루는 건축물을 탈피하고, 거대한 돔 형태의 유연한 곡선과 조화를 강조한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세운 살롱의 외관에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예술계를 뒤집어 버리고 단숨에 시대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라파엘의 차기작 ‘동경’의 발표가 살롱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지방 귀족들까지 소문을 듣고 수도로 상경하고 있었고, 수집가들은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그림을 매입할 의지를 보였다.

    리아브릭 입장에선 L과 살롱의 존재가 눈엣가시였다. 빈민가 땅 매매를 통해 대공가의 돈을 강탈하다시피 해서 그 돈으로 살롱을 지은 것도 기가 찬데, 노블레스 거리가 누려야 할 유명세를 먼저 선점하듯 싹 가져가니 분통이 터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엘레나가 개장일에 맞춰 살롱을 찾는다며 허락을 구했다. 베로니카 공녀의 신분으로 살롱을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의 유명세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나 다름없기에 분통이 터졌다.

    “그러세요.”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리브.”

    엘레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리아브릭의 불편한 말투와 표정에 눈치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 되면 꼭 같이 살롱에 가봐요, 리브.”

    “……업무가 밀려 있어서요. 이만 나가보세요.”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 엘레나가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왔다.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엘레나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자 앤이 물었다.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있지.”

    딴 사람도 아니고 엘레나가 살롱의 개장에 맞춰 들러리나 서주러 간다는데 리아브릭의 입장에서 얼마나 분에 받칠까. 만약 프란체 대공이 예술품 매입에 관한 권한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못 가게 막았을 것이다. 

    방으로 돌아온 엘레나가 시녀들에게 살롱 방문 준비를 하라 일렀다.

    “앤, 모레 외출을 할 거니 준비해 두렴. 재단사에게 일러 신상 드레스도 차질 없이 가져오도록 하고.”

    “걱정 마세요, 아가씨.”

    엘레나가 콕 집어서 얘기하자 앤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시녀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 과시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그런 우쭐함은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메이는 나를 따라 외출할 거니 그리 알고 채비하고.”

    “네, 아가씨.”

    메이가 공손히 머리를 숙여 대꾸했다.

    그러자 자신이 아닌 메이가 외출에 동행한다는 사실에 당황한 앤이 건방지게 껴들었다.

    “아가씨, 저는 같이 가지 않는 건가요? 제가 도울 일이 많을 텐데요.”

    “넌 여기 남으렴. 수발은 메이면 족하단다.”

    엘레나가 여지조차 주지 않고 선을 긋자 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외출 시에 대동하는 시녀야말로 총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었다. 엘레나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전 삶에선 안이든, 밖이든 앤을 끼고 다녔으니까. 그러나 이젠 상황이 변했다. 살롱을 찾는 일이 잦아질 것이고 그럴 때마다 앤을 대동하는 건 이유 불문하고 위험했다. 그 점을 인지하고 엘레나는 다른 식으로 차별을 둬 앤을 길들이기 할 요량이었다.

    이틀 뒤. 살롱 방문을 위한 치장을 모두 마친 엘레나가 마지막으로 구두에 발을 얹었다. 신장이 훅 올라가며 가느다란 목선과 팔, 벨 라인 드레스의 자태가 조화를 띠며 고혹함을 자아냈다.

    “와, 너무 눈부셔요.”

    “아가씨의 미모에 살롱의 개장이 묻히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오늘따라 미사와 제인이 유독 엘레나에게 듣기 좋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원래대로라면 앤이 그 역할을 했겠지만 외출에 대동하지 않는단 말에 의기소침했는지 말수가 확 줄었다.

    “치장은 이쯤 하면 됐고. 앤하고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나가렴.”

    “네? 네, 아가씨.”

    엘레나가 콕 집어 앤을 지목하자 다른 시녀들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서둘러 방을 나갔다.

    “아, 아가씨, 저는 왜……?”

    앤은 혹시 이틀 전 일로 알게 모르게 토라진 티를 내던 자신을 엘레나가 질책하지 않을까 잔뜩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어제 많이 서운했지?”

    엘레나가 다정한 손길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앤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서운할 게 뭐 있겠어요.”

    “내 눈에는 서운해 보이던데?”

    “그게…….”

    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말을 흐렸다. 대놓고 서운한 티를 팍팍 냈으니 아니라고 했다가 혼쭐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앤, 내가 시녀 중에 널 가장 믿고 의지하는 거 알지?”

    “네? 네, 그럼요.”

    걱정과 달리 상냥한 말투에 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있잖니, 내가 황태자비가 되어 황궁에 들어가게 되면 딴 애들은 몰라도 앤 너는 꼭 데려갈 생각이야.”

    “저, 정말요?”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럼. 황궁에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 황후가 되겠지. 그럼 앤 네게 황궁 시녀장을 맡기고 싶어.”

    “시, 시녀장을요?!”

    앤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그래. 황궁 시녀장을 왜 꼭 몰락한 가문의 여식들이 해야 하는지 난 잘 모르겠어. 너를 보렴. 신분을 떠나 시녀로서 얼마나 유능하니?”

    “시녀장, 내가…….”

    앤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황궁의 시녀장이 될 수 있단 상상만으로 가슴 벅차 하는 게 보였다.

    “앤, 멀리 내다보렴. 외출할 때 널 데려가지 않는 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러면요?”

    “시녀장이 되려면 아랫것들을 다스리는 법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겠니?”

    “……!”

    엘레나의 말을 알아들은 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러니까……아가씨께서 안 계실 때 제가 하녀들을 다잡으라는…….”

    “그래야 시녀장이 되어서도 아랫것들 단속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메이가 정리해 놓은 보석함을 열어 영롱한 빛을 발하는 루비 반지를 꺼냈다. 엘레나는 그것을 앤에게 내밀었다.

    “받으렴.”

    “아, 아가씨.”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말투와 달리 앤의 눈빛은 탐욕으로 물들었다. 엘레나는 그러한 욕심을 놓치지 않고 더더욱 부채질했다.

    “이 반지를 어떻게 쓸지는 네가 판단하렴. 지니고 다녀도 좋고, 처분해서 아랫것들을 관리하는 데 쓰든 네가 현명하게 쓰길 바랄게.”

    “감사합니다, 아가씨! 저 다시는 이번처럼 아가씨를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기쁨에 젖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앤을 보며 엘레나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앤의 허영심을 이용해 외출 때마다 떼어놓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처리는 없을 것이다.

    엘레나는 메이를 대동해 저택을 나섰다. 휴렐바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금세 대문을 지나쳐 수도의 거리를 활보했다.

    “메이.”

    “네, 아가씨.”

    엘레나의 부름에 창밖을 무심히 보고 있던 메이가 공손히 대답했다.

    “살롱을 가게 되면 놀랄 일이 많을 거야.”

    “놀랄 일이요?”

    메이는 그간 L의 이름으로 뛰어난 인재들을 후원해 왔다. 그러나 칼리프가 아트 중개사로 자리 맺음을 하며 예술가들의 관리와 후원을 이양했다. 그러다 보니 L에 관한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너도 이제 알게 될 거거든. 왜 내가 아버지를 증오하는지.”

    “……!”

    마차가 황궁을 기준으로 수도를 일자로 관통하는 대로에 들어섰다. 창문 밖 전경을 보는 엘레나도 들뜬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노력한 결과물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단 기대에 심장이 벅찼다. 중앙 교차로는 인파로 북적였다. 칼리프의 말대로 명소가 되어버린 시크릿 살롱의 외관을 구경하고자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도착했어야 됐건만 마차는 더디게 나아갔다. 그 시간이 길다고 느껴질 즈음, 창문 밖 건물 너머로 돔 형태의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저기구나. 내 노력의 결실이.’

    마차가 나아갈수록 시야를 가리고 있던 건축물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웅장한 살롱의 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담은 듯한 거대한 돔 형태의 외형에 고대 신성 펠리시아 제국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은 유려한 미의 정석을 보여줬다.

    살롱의 정문 쪽은 귀족들을 태운 마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귀족들은 가면무도회를 즐기듯 입장했다. 철저히 신분을 숨겨달라는 살롱의 요구에 따라 마차에 박힌 가문의 문양을 천으로 가려둔 게 보였다. 귀족들은 살롱의 출입 요구 조건을 충실히 따라주었다. 

    귀족들은 가면무도회를 좋아했다. 신분을 감추고 상대를 만나고 알아가며, 누구일지 추론을 하는 색다른 재미 때문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귀족들이 마다할 리가 없다.

    ‘새로운 놀이터가 생긴 기분이겠지.’

    엘레나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전용 마차가 아닌, 일반 귀족이 애용하는 고급 마차를 타고 왔다. 출발 직전에는 휴렐바드에게 마차에 새겨진 문양을 감추라고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면을 주렴.”

    메이가 상자를 열어 나비 가면을 건넸다.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케 하는 가면은 꽃을 형상화한 엘레나의 녹빛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메이 역시 준비해 온 가면을 썼다. 엘레나가 신경을 써서 적당한 드레스까지 입혀놓은 터라, 부유하진 않더라도 가난한 귀족가의 여식이란 느낌이 들었다.

    끼익. 멈춰 선 마차의 문이 열렸다. 가면을 쓴 휴렐바드가 엘레나를 에스코트하고는 물러났다. 원칙적으론 호위기사로 엘레나의 곁을 지켜야 했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 없다며 살롱 밖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엘레나가 살롱의 입구에 발을 디디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한눈에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고가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치고 있는 묘령의 여인을 향한 궁금증이 한껏 커졌다.

    “누구지? 보통 귀족이 아닌데.”

    “낯이 익는데. 누구더라?”

    “딱 봐도 누군지 알겠네. 그분이잖아.”

    엘레나는 도도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걸음걸이로 계단을 밟아 살롱에 올라섰다. 몇몇 귀족은 그런 엘레나를 보며 정체를 파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개중 눈썰미가 있는 자들은 아 하며 금세 알아챘다.

    ‘실컷 알아보세요. 그러라고 이렇게 한껏 예쁘게 치장을 하고 온 거니.’

    애초부터 엘레나는 자신이 살롱에 왔음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이깟 가면으로 가릴 수 있는 미모도 아니었거니와 베로니카 공녀가 살롱을 찾았단 것만으로도 호사가들 사이에 살롱의 존재감을 알릴 기회였기 때문이다. 살롱에 들어선 엘레나는 안내를 받아 본관 홀에 입장했다.

    ‘와.’

    엘레나는 높은 천장과 거대 샹들리에에 압도됨을 느꼈다. 거대한 돔 아래로 큰 공간을 살림으로써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실외보다 더 큰 개방감을 선사했다. 무상한 듯 단순한 벽면의 패턴은 조화로움의 정점을 담고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어. 칼리프 선배도 란돌 님도.’

    엘레나는 흐뭇한 미소로 홀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방문객들에게 베로니카 공녀가 살롱에 왔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봤을 거고. 슬슬 몸을 빼볼까?’

    엘레나는 홀 안쪽의 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홀 안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복도엔 곧 홀에서 진행될 라파엘 작품 발표를 기다리는 방문자들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치자 대기실이라 쓰인 방 수십 개가 일렬로 이어졌다.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한 응접실이다. 그중 아무 빈방을 찾아 들어간 엘레나가 안에서 문을 잠갔다.

    “어디 마음에 안 드시는 데 있으세요? 제가 봐드릴까요?”

    어느 연회장을 가든 영애들이 몸가짐을 바로 하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메이는 내심 오늘 처음 신고 온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픈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런 거 아니니 이리 오렴.”

    창가 옆 책장 앞에 선 엘레나가 손짓했다. 메이가 의아해하며 다가오자 책장 아래의 대리석 바닥을 엘레나가 힘껏 밟았다.

    끼이익. 바닥이 진동하며 책장이 옆으로 밀려나더니 방과 방을 막고 있는 벽 사이로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났다.

    “아가씨, 이건…….”

    “내려가자꾸나.”

    당황하는 메이를 데리고 엘레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벽면의 일렁이는 촛불에 의지해 비밀 통로를 한참 걸어가자 막다른 벽에 직면했다.

    툭, 툭툭툭.

    엘레나가 손등으로 약속된 횟수로 벽면을 두드리자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젖혀지며 빛이 쏟아졌다.

    “어서 와.”

    반갑게 아는 척을 한 남자는 한껏 연미복으로 멋을 낸 칼리프였다.

    “가면을 쓰고 계시지만 그 미모는 감출 수가 없으니…… 저 아시죠? 제 손을 잡고 들어오세요.”

    “네? 저요?”

    미술상으로 기숙사와 대공가를 왕래하며 메이와 안면을 튼 칼리프가 느끼한 언행으로 그녀를 당혹하게 했다.

    “메이, 저 손 절대 잡지 말렴. 저 손이 여자를 불행케 하는 손이란다.”

    “넌 어쩜 미운 말만 그리 골라서 하냐?”

    칼리프의 타박을 무시하며 엘레나는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 가운데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은인.”

    에밀리오였다.

    “그간 뵙고 싶어도 여건이 안 됐어요. 일만 잔뜩 맡겨놓고 죄송해요.”

    “아닙니다. 은인 덕분에 젊을 때 열정을 떠올리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에밀리오의 눈에 생기가 넘실거렸다. 수도 내에서 엘레나에게 도움이 될 법한 부수적인 사업을 준비 중이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분야인 만큼 큰 흥미와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안부 인사는 나중에 하자. 작품 발표 전에 살롱의 주인으로 인사하려면 시간 없어. 서둘러. 어서.”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방으로 메이를 데리고 갔다. 이미 그곳엔 루시아로 변장할 때 쓰던 변장 도구뿐만 아니라, 레이스가 돋보이는 드레스, 의상에 어울리는 차분한 가면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메이, 좀 거들어줄래?”

    메이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엘레나의 변장을 도왔다.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드레스를 갈아입은 엘레나가 가면까지 쓰자 살롱에 들어선 엘레나의 본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히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루시아를 아는 사람도 동일 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지?”

    “네.”

    메이가 솔직하게 끄덕였다.

    “때론 백 가지 설명보다 눈으로 보는 게 더 빠를 때가 있지. 곧 알게 될 거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엘레나를 보며 칼리프가 재촉했다.

    “너무 지체했어. 지금 내려가야 해.”

    “가요, 선배.”

    엘레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설렘을 품에 안고 방을 나섰다. 메인 홀로 향하는 복도를 거닐며 엘레나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여기까지 왔어. 드디어.’

    이전 삶에도 지금도, 엘레나는 대역일 뿐 진짜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다. 루시아 역시 필요에 의해 변장을 했을 뿐 엘레나가 아니다.

    L.

    엘레나의 약자 L만이 그녀를 뜻하는 유일한 삶이었으며 이름이었다.

    “이 문을 열면 메인 홀이야. 자, 연다.”

    칼리프가 있는 힘껏 대리석 문을 열어젖혔다. 이윽고 메인 홀로 이어지는 곡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베일에 싸여 있던 시크릿 살롱의 주인을 맞이하는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엘레나는 저 높이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을 눈에 담으며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더 이상 남의 인생을 살지 않겠어. L이라는 이름으로, 잃어버린 내 삶을 되찾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