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21/30)
  • 제12장 검술제

    “뭐라고요? 다시 말해봐요. 전하께서 검술제 준결승에 올랐다고요? 예선도 아니고 본선에?”

    그간 루시아로 활동에 제약을 받던 엘레나는 겨우 칼리프와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사정을 전해 듣던 엘레나는 우연히 나온 시안의 소식에 깜짝 놀랐다.

    “너 속고만 살았냐? 준결승에 올랐다고 몇 번을 말해.”

    “거짓말.”

    “정 못 믿겠으면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 내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칼리프가 억울하다는 듯이 강하게 항변했지만 엘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엘레나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 시안은 학술원 재학 동안 단 한 번도 검술학부 순위에서 상위권에 들거나, 두드러지는 실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학술원 시절 내내 시안의 곁을 맴돌았던 그녀였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준결승이면 웬만한 가문의 기사들과 동등한 실력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엘레나는 기억과 너무도 다른 결과에 혼란스러웠다. 요행이 따랐다기엔 검술학부 재학생들의 검술 실력은 만만치 않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엘레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혹시 어떻게 이겼는지 들으셨어요? 요행이 따랐다거나…….”

    “야, 전하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칼리프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결과만 들었어.”

    “꼭 이런 식이죠. 앞뒤 다 자르고 토막만 아는 거.”

    눈을 흘기는 엘레나를 무시하며 칼리프가 대화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거 말고. 내가 준결승 직전에 우연히 전하와 만났다고 그랬잖아.”

    “그랬던 거 같긴 하네요.”

    “삐딱하게 굴지 말고. 전하가 너한테 말 좀 전해달라더라.”

    “저한테요?”

    엘레나가 반응을 보이자 칼리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뭔지 궁금해 죽겠지?”

    “저 평생 안 보고 싶으세요?”

    시안의 얘기다 보니 순간적으로 엘레나가 정색했다. 평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서슬 퍼런 모습인지라 되레 칼리프가 당황했다.

    “노, 농담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살벌하게 굴어.”

    “얘기하세요.”

    “결승전에 올라가면 꼭 보러 와달라고. 너한테 꼭 좀 전해달래.”

    “……정말 그리 말하셨다고요?”

    엘레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분명히 얘기하는데 토씨 하나 안 빼고 다 얘기했다. 그러니까 의심 금지야.”

    “…….”

    엘레나는 순간 사고가 정지한 듯 머리가 멍해졌다. 꼭 좀 와달라니.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검술제는 검술학부의 최종 성적을 가리는 대회다. 검술제 참가자는 가족이나 연인을 초대하는 게 오랜 전통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다. 기껏해야 친분이 있는 후배다. 그런데도 시안은 엘레나를 지목해서 꼭 오란 말을 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외면하려던 엘레나의 뇌리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혼란스러워하는 엘레나를 지켜보던 칼리프가 장난기가 발동했다.

    “전하께서 왜 널 초대했을까? 난 알 거 같은데.”

    “…….”

    “설마 나도 알고 남들 다 아는 걸, 너만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만 놀리시죠?”

    엘레나가 찌릿 쳐다봤음에도 불구하고 칼리프는 봇물이 터진 듯 말을 쏟아냈다.

    “가끔 보면 넌 전하께만 엄하더라.”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랄까. 꼭 선을 그어놓고 대하는 느낌이랄까. 전하가 너한테 무슨 큰 죄라도 지었어?”

    “그, 그…….”

    순간 엘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제대로 허를 찔린 듯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칼리프의 말이 구구절절 옳기 때문이다. 칼리프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네가 왜 그러는지 짐작은 가. 신분 차이 때문이지?”

    “…….”

    “그래도 있잖아. 한 번쯤은 솔직해져 보는 건 어때?”

    ‘솔직해지라고?’

    그러고 보면 엘레나는 한 번도 시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 적이 없다.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지금의 시안이 전혀 다르다고 인지했지만 그게 다였다.

    ‘……싫진 않아.’

    이건 확실하다. 더는 시안은 밉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불쑥 마주쳐 말을 건네는 것도 좋았고, 가끔 생각나는 것도 괜찮았다. 분명한 건 더 이상 시안은 엘레나에게 밀어내고 외면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배, 혹시 준결승은 언제인지 알아요?”

    “갑자기 적극적인 거 보게. 내일모레야.”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에 날짜와 시간을 기억해 뒀다. 시안의 준결승행이 요행인지 아니면 정말 실력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원 역사가 자꾸만 뒤틀리는 것이 못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선배, 이거 받아요.”

    “아, 주지 마. 네가 주는 건 다 불안하다고.”

    칼리프가 엄살을 부리며 엘레나가 건넨 서류를 넘겨받았다. 맨 윗장부터 한 장씩 넘겨보는데 그간 메이를 통해서 L의 이름으로 후원하고 뒤를 봐주던 미래 거장들의 신상명세서였다.

    “아, 보지 말걸. 야! 나 지금도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란다고.”

    “저도 선배한테 다 맡길 생각 없어요. 이 사람들을 혼자 다 관리하는 건 욕심이죠. 사람을 두세요.”

    지금 건넨 신상명세서에 적힌 예술가와 앞서 소개를 해준 자들을 다 합치면 그 숫자가 거의 서른 명에 육박한다. 칼리프가 아무리 용쓰는 재주가 있더라도 각기 다른 분야의 거장들과 소통하며, 한평생 그들이 공들이고 매진한 작품 활동을 깊게 이해하고 돕는 건 무리였다.

    “유능한 사람은 자신이 일을 처리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밑에 유능한 사람을 둔다고 했어요. 아직 선배도 배울 게 많긴 하지만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셨을 테니,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쓸 만한 아트 중개사를 양성하도록 하세요.”

    “나한테도 후임이라니. 눈물 날 거 같다. 그간 너한테 치이고, 에밀리오 님한테 잔소리 듣고, 란돌의 술주정 받아주고, 디아즈가 친 사고 수습하며 내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넌 모를 거야.”

    정말 기뻐서 울 것처럼 구는 칼리프를 보고 있자니 엘레나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좀 쉬엄쉬엄하세요. 후임도 생겼으니, 개중 잘난 애도 있을 거고 선배 자리까지 치고 올라올 만한 애가 한 명 없겠어요?”

    “너는 나 쉬는 게 싫지?”

    악마를 보듯 쳐다보는 칼리프의 시선에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그만큼 믿는단 얘기죠. 신상명세서 목록에는 없지만 선배가 따로 만나볼 분이 계세요.”

    “누군데?”

    “들으면 깜짝 놀라실걸요? 최근 예술계를 뒤집어놓은 화제의…….”

    한껏 분위기를 고조하며 엘레나가 소개하려던 찰나, 칼리프가 찬물을 끼얹었다.

    “라파엘 말하는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라고 뭐 맨날 놀라냐? 벨라도나 모델이 너라고 소문 쫙 퍼졌잖아. 나도 내 두 눈으로 봤다. 빼도 박도 못하고 너던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안 그래도 이 얘기하고 싶었는데, 네가 말할 기회를 안 줘서 놓쳤잖아. 라파엘 만나보라는 거지? 언질은 네가 해뒀을 테니, 알았다. 좀 이따 만나볼게.”

    “…….”

    엘레나가 빤히 칼리프를 쳐다봤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척척 이해하고 진행하는 칼리프의 성장에 흡족하면서도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져서다.

    “그 눈빛 뭐냐? 묘하게 기분 나쁜데.”

    “……어미 새의 마음을 이해하는 중이에요.”

    칼리프의 이마에 신경질적인 힘줄이 돋은 건 그 직후였다.

    * * *

    검술제 준결승 날. 엘레나는 베로니카 신분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잠잠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루시아의 신분으로 인파가 몰릴 검술제 시합장을 찾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베로니카의 신분은 운신이 자유로웠다.

    “경도 같이 가죠.”

    엘레나가 동행을 권했다.

    “저도 말씀입니까?”

    “검술제잖아요. 학술원 내에만 계시느라 답답하셨잖아요. 또 겸사겸사 좋은 자극도 되지 않겠어요?”

    엘레나는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휴렐바드의 호승심을 읽었다. 그건 기사의 본능 같은 것으로 준결승까지 오른 강자들의 대결을 지켜보고 싶은 간절함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가죠.”

    엘레나는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랐다. 휴렐바드가 마부의 옆자리에 오르자 마차가 움직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창문 밖 전경을 보며 엘레나는 생각했다.

    ‘경이 가줘야만 전하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

    엘레나는 검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준결승에 진출한 시안이 요행으로 이긴 것인지, 실력으로 이긴 것인지 판단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만약에 전하께서 결승전에 오르면 그 상대는 렌이 될 거야.’

    원 역사에서 검술제의 우승은 렌의 차지였다. 딱히 놀랄 것도 없는 게,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이니 제국의 삼검 중 일인인 황약의 늑대라 불렸겠지. 엘레나가 준결승 참관을 결정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매사에 신중한 시안이 결승전 참관에 초대한 것 자체가 내심 결승전에 진출할 자신이 있단 말과 다름없었다.

    ‘전하는 결코 허언하실 분이 아니셔.’

    엘레나가 기억하는 시안은 결코 말이 앞서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가 무엇 때문에 뒤틀렸는지, 아니면 그녀가 시안의 본모습을 몰랐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명확하게 해답을 찾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워워어어어!”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요란하게 굴러가던 마차의 바퀴가 멈췄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휴렐바드가 노크를 하고는 절도 있게 문을 열었다. 치맛자락을 살짝 든 엘레나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공식적으로 검술제 기간에는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만큼 단출하지만 싱그러움이 감도는 드레스 차림을 한 엘레나에게서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예술제에서 품위 넘치는 모습에 넋을 놓았더라면, 야외에서 진행되는 검술제에 걸맞게 생기가 넘치는 분위기에 넋을 놓고 말았다.

    “공녀가 여길 왜 온 거지?”

    “예술제야 그림을 좋아한다고 쳐도. 혹시 전하를 보러 오신 거 아냐?”

    “그런 거 같아.”

    “아벨라 영애는 전하한테 찍혔다고 소문 쫙 났잖아. 저 걸음걸이 좀 봐. 인정하기 싫지만 황태자비로 제격 같아.”

    엘레나는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예전이었다면 황태자빗감은 그녀라는 얘길 은근히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 자리가 제자리가 아님을 아니까.

    검술제 준결승전이 치러지는 시합장은 직사각형의 결투장을 중심으로 원형 관중석이 계단 형태로 쭉 이루어져 있었다. 그 규모가 꽤 크고 웅장했다. 엘레나는 관중석 중에서도 황족과 고위 귀족, 개국공신 후손들에게만 배정되는 특별석에 자리했다. 단독 기숙사도 그랬지만 대공가라는 이유만으로 학술원에서는 어마어마한 혜택과 차별을 누릴 수 있었다. 테라스 형태로 이루어진 특별석에 자리를 잡은 엘레나는 시합장을 내려다봤다. 한눈에 들어오는 시합장에는 준결승에 진출한 렌이 결승전 진출권을 두고 시합 중이었다.

    챙.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렌의 매서운 검 놀림에 우왕좌왕하던 상대가 손에서 목검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목검이 내동댕이쳐지기가 무섭게 렌의 검 끝이 상대의 목에 닿았다.

    “승자 렌 바스타슈. 결승전 진출!”

    검술학부 교수의 외침에 따라 렌이 목검을 어깨에 메며 히죽 웃었다. 상대는 눈을 감고 패배의 분함을 삼켰다.

    “보셨어요, 방금?”

    엘레나가 뒤에 서서 시합을 관전하던 휴렐바드에게 해설을 부탁했다.

    “네, 렌 영식은 찌르기를 하는 척 속임수를 주고 빠르게 목을 노리며 검로를 꺾었습니다. 당황한 상대가 목검을 회수해 막았지만 이미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렌 영식이 좌우로 번갈아 공격하며 흔든 뒤, 결정적인 베기로 검을 날렸습니다.”

    “지금 말한 게 전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고요?”

    “그렇습니다.”

    “…….”

    엘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같은 순간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나가 보기엔 렌이 목검을 한 번 휘두르자 상대가 쥐고 있던 목검을 내동댕이친 게 다였다.

    “경이 보기에 렌의 검술은 어느 정도인가요?”

    “강합니다.”

    “제2기사단장 제임스 경과 비교하면요?”

    “렌 영식이 더 강할 겁니다.”

    곤란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휴렐바드는 솔직히 느낀 바를 얘기했다. 엘레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제국을 수호하는 세 자루의 검에 뽑혔겠는가. 렌의 강함은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 경께서 렌 영식과 붙는다면 어떨까요?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얘기하지 않으셔도 돼요.”

    엘레나도 안다. 이런 질문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는 이유는 앞일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럴 일이 없지만 나중에 렌과 부딪칠 때를 고려해 대비하기 위함이다. 휴렐바드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시합장에서 퇴장하는 렌을 보는 눈길 너머에는 렌과 가상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반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반이라. 과연 경이에요.”

    엘레나가 매우 만족스럽게 웃었다. 원 역사의 평가도 그랬다. 공식적으로 딱 한 번 대련할 기회가 있었는데, 렌과 휴렐바드는 반나절을 싸우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

    만약 휴렐바드가 자존심 때문에 본인이 렌보다 강하다고 말했다면 좀 더 그가 성숙해지길 기다렸을 것이다. 반대로 승산이 적다고 얘기했다면 좀 더 수련이 필요한 격이니 동기를 심어줄 생각이었다. 근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처럼 쭉 성장하세요, 휴렐바드 경.’

    엘레나는 기숙사를 비울 때면 휴렐바드가 개인 훈련을 하도록 허락했다. 아무리 잘 벼린 검도 쓰지 않으면 무뎌진다고, 한창 성장기인 그가 훈련에 매진해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 시각. 노골적으로 패배한 상대를 향한 비웃음을 이어가던 렌이 특별석에 앉아 있는 엘레나를 발견했다. 거리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금발과 대동한 기사의 인상착의로 어렵지 않게 분간해 낼 수 있었다.

    “날 보러 왔을 리는 없고, 우리 전하를 보러 오신 건가?”

    렌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준결승전에서 이겼다는 기쁨보다 모처럼 루시아가 아닌, 베로니카에게 어떻게 시비를 걸까 하는 생각으로 즐거워졌다.

    “렌, 내려가도록.”

    이미 상대는 시합장을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렌이 떠나지 않자 심판을 보던 교수가 재촉했다.

    “시합보다 더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깜빡했네요.”

    “뭐야?”

    렌의 노골적인 무시 발언에 대결에서 지고 먼저 시합장을 내려갔던 상대가 발끈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러나 렌은 네가 어쩔 거냐는 듯 비웃고는 휘파람까지 불며 경기장을 나섰다.

    “이게 누구야? 우리 전하시잖아?”

    저 앞에서 준결승전 두 번째 시합에 출전하고자 걸어오는 시안과 마주쳤다.

    휙.

    시안은 대놓고 없는 사람 취급하며 렌을 지나쳐 버렸다. 무시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렌은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싱글벙글 웃었다.

    “꼭 이기세요, 전하. 기왕 지실 거, 저한테 지는 게 그림이 괜찮지 않아요?”

    시안은 도발 섞인 렌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하며 시합장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빤히 보던 렌도 돌아서서 복도 밖으로 나왔다. 검술제 참가자와 그 지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인적이 드물었는데, 렌이 반대편 담벼락 쪽으로 가 기대섰다.

    “멜.”

    담벼락 너머로 렌이 나지막이 호명하자 멜의 대답이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목소리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렌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암살과 추적에 특화된 조직 마제스티에만 내려오는 구어법이다.

    “좀 알아냈고?”

    “아예 성과가 없진 않았습니다.”

    “얘기해.”

    짧지만 굴종하게 만드는 힘을 느끼며 멜이 보고했다.

    “안가를 감시하던 중 과거 베로니카 공녀를 치료하던 의사가 정원에 나온 걸 확인했습니다.”

    “그자가 아직도 거기에 있다?”

    렌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에 쓰지 않던 영민한 두뇌가 멜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조각들을 빠르게 조합해 나갔다.

    “예. 의아한 건, 독의 해독에 사용되는 약초가 여전히 안가로 들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양도 심지어 예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뭐?”

    순간 렌의 눈에 힘이 팍 들어갔다. 이윽고 놀라움은 참을 수 없는 기쁨으로 번졌다.

    “뭐야, 그랬던 거야?”

    멜이 보고한 정보는 딱 두 가지에 불과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렌이 내내 갖고 있던 의구심에 확신을 심어줄 만한 확증이었기 때문이다. 좀 전과 미묘하게 변해 버린 렌의 말투에 의아함을 느끼며 멜이 물었다.

    “짐작 가시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냐, 큭큭. 없어.”

    렌이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낮게 웃었다.

    “더 이상 안가를 감시하는 건 의미 없으니까 다 철수시켜.”

    “알겠습니다.”

    뭔가 알아챈 거 같긴 한데, 묻지 않았다. 렌이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더 할 얘기 있고?”

    “늦었지만 결승 진출 축하드립니다.”

    “모욕적인 축하가 따로 없네. 애들 장난 같은 시합에서 이긴 게 단데.”

    “영식께서는 그러실지 몰라도 가주님께서는 매우 흡족해하고 계십니다. 결승전은 직접 참관을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멜이 끄덕였다.

    “꼭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싶단 말도 덧붙였습니다.”

    “알았다고 해.”

    렌의 무미건조한 대답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멜의 인기척이 먼저 자취를 감췄다. 그가 떠난 것을 인지한 렌이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그것도 모자라 실성한 사람처럼 벽을 잡고 웃어젖히기까지 했다.

    “진짜…… 뭐냐고, 이게. 가짜 주제에 날 속인 거야? 감쪽같이?”

    렌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탄신기념일 첫 만남에서부터, 화실에서 눈을 흘기던 루시아의 모습까지 주마등처럼 훅 스쳐 지나갔다. 매 순간, 어느 순간을 떠올려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꼭 바보처럼. 렌은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너무 신기했다.

    심지어 엘레나가 가짜 베로니카란 사실을 이용해 대공가에 타격을 주겠단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마냥 좋았다. 루시아가 베로니카가 아닌 게. 베로니카가 가짜인 게. 그래서…… 더 이상 사촌이 아니라는 게.

    “아, 미치겠네. 근본도 없는 가짜 주제에 베로니카보다 더 베로니카같이 굴고.”

    뭘 믿고 렌 앞에서 그리 당당했었는지. 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던 그 가증스러움을 떠올리자 입술이 실룩거렸다.

    “가짜 루시아 주제에 태연하게 딸 행세를 해?”

    렌은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와 다정한 부녀를 연기하던 엘레나를 떠올리자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루시아는 시대의 명화로 칭송받는 벨라도나의 모델이다. 심지어 벨라도나를 그린 화가 라파엘이 그녀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다. 그뿐이랴. 심증에 불과하지만 대공가에 칼을 겨누는 정신 나간 인간인 L이 그녀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렌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전하의 마음도 훔쳤고.”

    딴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속일 수 없다. 황실의 부흥이란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똘똘 뭉친 시안이 루시아의 앞에만 서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많은 가짜 신분을 내세워 그 많은 사람 속에 자리를 잡다니. 치명적이다 못해 관능적인 여인이지 않나.

    “아, 실수. 훔쳐간 게 전하의 마음만은 아니네?”

    렌이 히죽 웃었다.

    * * *

    “와아아아아!”

    함성이 시합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결승행 한 자리를 두고 벌어진 치열한 결투 끝에 시안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시안에게 패배한 상대는 넋이 나가 보였다. 검술학부 내내 시안은 한 번도 그를 이긴 적이 없었다. 하위권에서도 바닥이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시안에게 졌기에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경이 보기엔 어때요?”

    엘레나는 시합 내내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다. 상대 역시 검술제 준결승에 진출한 만큼 검술 실력이 출중했다. 시안은 몇 번의 고비를 맞이한 끝에야 한 뼘 차이로 검끝이 먼저 상대의 심장에 닿으며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한 끗 차이에서 승부가 갈린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 허공에서 부딪치는 목검이 너무 빨라 눈으로 좇기 버거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가까스로 승부가 나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누가 이기더라도 하등 이상할 바가 없는 치열한 승부였다.

    “제가 보기엔 전하께서 아슬아슬하게 이기신 것 같은데 맞는 건가요?”

    엘레나가 재차 묻자 휴렐바드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제게 물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렌 영식과 맞붙어 이길 자신이 있느냐고.”

    “그랬죠.”

    “질문을 바꿔서 제가 지금 황태자 전하와 맞붙는단 가정하에 이길 수 있냐에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엘레나는 냉정했다. 휴렐바드는 그냥 일반적인 기사도 아니고 제국의 검이라 칭송받던 천재다. 검술제 결승까지 시안이 올라온 건 분명 대단한 일이고 박수를 받을 만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필사적으로 이겼단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그에 반해, 휴렐바드와 동등한 수준인 렌은 상대를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그 온도 차는 컸다.

    “사 할. 어쩌면 그 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전하가 경을 이길 확률이 그 정도로 낮다는 얘기인 거죠?”

    “아뇨, 제가 전하를 이길 확률이 사 할, 어쩌면 그 밑이란 얘기입니다.”

    엘레나는 귀를 의심했다. 원 역사에서도 시안은 늘 학부 하위권을 맴돌았고 검술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근데 웬걸. 휴렐바드의 평가는 그런 엘레나의 생각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경이 밀리다니요.”

    “……공녀께서는 이상하시군요. 렌 영식과의 승률이 오 할인 건 쉬이 인정하시면서, 전하는 인정하시지 않으려 드는군요.”

    휴렐바드가 정곡을 찌르자 엘레나는 아차 싶었다. 과거의 기억을 맹신한 폐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떠한 계기로 인해 시안이 강해질 수도 있는 건데, 자꾸만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경향을 버리지 못했다.

    “경의 말이 맞아요. 하나, 압도적으로 상대를 제압한 렌에 비해 전하께서 실력이 뒤처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 않나요?”

    “상대의 수준에 맞춰주고 계시니까요.”

    “맞추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휴렐바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실력을 감추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지금의 전하는 저나 렌 영식보다 강하십니다.”

    “……!”

    엘레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뭔가 놓친 게 있음을 자각했다. 원 역사의 시안은 권위를 잃은 황실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시안의 자질이 빼어날수록 대공가를 위시한 4대 가문의 집중 견제를 받아야 했다.

    ‘전하는 웅크리고 계셨던 거야. 반격할 기회가 오길 기다리면서.’

    그녀가 알고 있었던 시안이 껍데기란 생각이 들자 소름이 쫙 끼쳤다. 더 나아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안이 과거와 다른 결단을 내린 걸로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숨겨놓은 검술을 만천하에 공개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엘레나는 박수를 받으며 시합장을 떠나는 시안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저는 여전히 전하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시합장을 나서는 시안에게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 * *

    학술원 3대 축제 중 검술제는 단연 최고의 인기였다. 치열한 검술을 겨루는 승부인 만큼 당연하게도 볼거리가 많은 까닭이다. 또한 검술제 결승전 역시 외부인에게 공개되다 보니 외부인들도 구경차 많이들 찾았다. 하물며 올해 검술제 결승전에는 제국의 황위를 이을 황태자 시안과 신흥 귀족의 필두 바스타슈 가문의 후계자 렌이 맞붙게 된 만큼 기대가 고조됐다.

    특히 시안의 결승전 진출은 호사가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재학 내내 하위권을 맴돌던 시안이 황태자답지 않게 몸을 사리지 않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결승전에 오른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아야 한다며 박수를 보냈다. 

    더구나 결승전에서 맞붙는 상대는 학술원 입학 이래 검술학부 1위를 놓쳐본 적 없는 천재 렌. 두 사람의 결승전은 노력과 재능의 대결 구도로 비쳤다. 귀족들은 당연하게도 범상치 않은 렌을 응원했다. 귀족 출신 렌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나약해진 황태자 시안이 패배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즐기고 싶은 간사한 마음이 깔려 있었다.

    반대로 시안은 평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엘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먼저 평민들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안은 학술원에 재학 중인 평민들의 토론에 종종 참여했다고 했다. 처음엔 꺼리는 분위기였지만 권위 의식을 버리고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시안의 모습에 평민 출신 재학생들이 감동했다는 후문이다. 그 외에도 시안은 황태자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학술원 근처의 상점이나, 식당을 찾으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하위권을 맴돌던 시안이 검술제 예선부터 치열한 결투를 벌여 결승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평민들은 기적과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시안에게 열광했다. 평민이란 신분을 떠나서 시안이 노력으로 결과를 바꾸는 모습을 보며 불운한 삶을 버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생각도 못 했어. 민중들이 이렇게까지 전하의 승리를 바랄 줄은.”

    베로니카가 아닌 루시아로 변장한 엘레나가 시합장을 찾았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교복이 아닌 야외용 드레스를 입어 벨라도나의 이미지를 지우고자 했다.

    엘레나는 시합장을 가득 메운 평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앞서 학술제와 예술제도 마찬가지였지만 귀족들에 비해 평민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그러나 결승전 시합장에 몰린 평민의 숫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원 역사 검술제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엘레나였기에 그 격차가 피부로 와 닿았다.

    “전하께서 이기시겠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귀족 놈 콧대 좀 꺾어버리게.”

    “근데 상대가 천재라며? 재학 내내 한 번도 1위를 놓쳐본 적이 없다더라.”

    “재능? 노력이 최고다. 잘 봐라. 전하께서 자근자근 씹어 드실 거야. 속 시원하게.”

    평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귀족 출신의 렌을 적으로 규정하고 시안을 응원했다. 귀족들에 대한 반감도 있지만 그만큼 시안과 가까워진 것이다.

    ‘승패를 떠나서 민중들이 전하의 편에 섰어.’

    엘레나는 눈을 빛냈다. 고작 검술제에 응원 온 평민들의 반응을 보며 과대 해석을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엘레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변화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마련이니까.

    “어이!”

    저 멀찌감치에서 엘레나를 발견한 칼리프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런데 그 뒤로 라파엘과 세실리아의 모습도 보였다.

    “어? 어떻게 라파엘 선배랑 세실리아 선배와 같이 있어요?”

    라파엘에게 칼리프를 소개해 준 건 불과 며칠 전이다. 그 며칠 사이에 셋이 같이 결승전을 관람할 만큼 친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뭐긴, 친구 먹었지.”

    칼리프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하자 엘레나가 정말이냐는 듯 라파엘과 세실리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결승전은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고 어찌나 조르던지.”

    “덩달아 나도 끌려왔지 뭐야.”

    세실리아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라파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세실리아는 시안과 황태자비 내정 이야기까지 오간 사이다.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데 전후 사정을 모르는 칼리프가 억지로 데려왔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칼리프를 소개한 입장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 엘레나가 대신 사과했다.

    “선배가 오지랖이 좀 넓어서 그래요. 선배가 이해해 주세요.”

    “어? 아니야. 난 괜찮은걸.”

    황후 때와 마찬가지로 세실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언제나 느끼지만 자기 자신의 기분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속 깊은 여인이다.

    “야, 내가 겨우 모셔왔는데 넌 왜 돌려보내려고 그래?”

    “정말 모르면 말을 마시지.”

    “내가 뭘 모르는데? 야, 얘기해 봐. 말을 해야 알지!”

    엘레나가 칼리프의 말을 무시하고 라파엘과 세실리아를 대동해 경기장으로 향하자 칼리프가 뒤처질세라 쫓아왔다. 일행이 시합장에 들어가려 하는데 웬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고고학부의 루시아 영애가 맞으신지요?”

    엘레나가 긴장했다.

    “그런데요?”

    “못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한눈에 알아보겠습니다. 초상 벨라도나와 똑 닮았다는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었군요.”

    신분을 확인한 기사가 절도 있게 예를 갖췄다.

    “전하께서 영애를 특별석으로 모시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저를요?”

    “네, 뒤의 분들은 지인이신 것 같군요. 동행이 있으시면 함께 모시라는 분부도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

    앞서 걷는 기사를 따라 엘레나와 일행은 얼떨떨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안내를 받은 특별실은 며칠 전 베로니카의 신분으로 준결승을 관람했던 특별실 옆방이었다. 황족 전용으로 마련된 만큼 그 크기도 확실히 더 넓었다.

    “시합이 끝나시면 전하께서 루시아 양을 따로 뵈었으면 한단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면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귀빈을 대하듯 깍듯이 머리를 숙인 기사가 물러났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칼리프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떠들었다.

    “우리 전하께선 화끈하기도 하시지. 고맙다, 루시아. 너 아니면 내 생에 언제 이런 곳을 출입해 보겠냐. 안 그래, 라파엘?”

    “그러게요.”

    잔뜩 신이 난 칼리프와 달리 라파엘은 쓴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황태자의 신분으로 많은 걸 해줄 수 있는 시안과 달리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제 처지가 비감스러웠다.

    “덕분에 좋은 곳에서 응원할 수 있고 좋네.”

    세실리아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시안을 향한 일말의 불편함도 없어 보였다. 정략혼이 깨지긴 했지만 서로를 향한 감정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오히려 루시아를 향한 시안의 감정을 눈치채고 응원하고 싶었다.

    “…….”

    지금 이 순간 가장 혼란스러운 건 당사자인 엘레나였다. 과해도 너무 과분한 시안의 배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연했다.

    “어이. 내가 지금 무려 세 번째 말하고 있잖아. 저 안에 있는 애들하고 친구라고.”

    생각이 복잡해지는데 특별실 문밖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듯 소란스러웠다. 이윽고 고래고래 진상을 부리는 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친구들! 나야, 렌. 치사하게 너희끼리만 보면 안 되지. 같이 좀 보자고!”

    엘레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마지못해 밖으로 나왔다. 억지로 들어오려는 렌을 기사가 안간힘을 쓰며 막고 있었다.

    “기운도 참 좋죠. 시합 전에 여길 와서 행패 부릴 생각을 다 하시고.”

    “좀 다정하게 대해줄래? 친구잖아, 우리.”

    삐딱한 엘레나의 반응에 렌이 엉겨 붙어 있는 기사를 떼어내곤 히죽히죽 웃었다.

    “징그럽게 웃지 말고, 왜 왔는데요?”

    “오늘 우승하면 나랑 외식할래?”

    결승전을 앞둔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할 소리는 아닌지라 엘레나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선배랑 왜 외식을 해요?”

    “내가 하고 싶으니까?”

    “싫어요.”

    “싫으면 안 되지. 내가 너랑 식사 한 끼 하려고 이런 같잖은 이유를 다 붙이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렌은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곧 시합이라 내가 시간이 없거든? 난 승낙한 걸로 알고 간다.”

    자칫 시간패를 당할 수도 있는지라 렌은 제 할 말만 하고는 저 멀리 뛰어가 버렸다. 당황한 엘레나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누가 승낙했다고 그래요!”

    “레스토랑은 네가 잡아. 계산은 내가 할게.”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던 렌이 코너를 돌아서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저 개자…….”

    엘레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런 렌의 제안에 불안감이 밀려왔다.

    “저번처럼 또 뭔가를 눈치챈 거 아냐?”

    엘레나가 아는 렌은 그런 인간이다. 상대의 약점을 찾으면 그걸 죽기 살기로 물고 늘어지는 하이에나 같은 부류다. 계획적으로 에밀리오와 삼자대면을 시켜 엘레나를 곤란에 빠뜨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다 보니 웬만하면 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오자 라파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또 시비 거는 거 같던데.”

    “시비도 갈수록 창의적이네요. 오늘 우승하면 저보고 외식하재요.”

    “단둘이요?”

    “그런 거 같아요. 그리고 예약을 나보고 하라나? 어이가 없어서.”

    악의적인 괴롭힘의 연장선쯤으로 여기는 엘레나와 달리 라파엘은 좀 더 감정적으로 접근했다. 굳이 우승을 전제로 외식하자는 렌의 제안이 평소와 다르게 보여서다.

    ‘설마 아니겠지?’’

    라파엘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간 렌이 보여준 악의적인 행동들을 보면 아무래도 억측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어? 저기 전하예요! 전하! 꼭 이기세요!”

    칼리프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시합장에 모습을 드러낸 시안을 보며 연신 환호를 내지르면서 응원했다. 엘레나도 잠시 렌으로 복잡해진 마음을 밀어두고 시합에 집중하고자 했다. 호명과 함께 등장한 렌이 엘레나가 있는 특별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아는 척하기 전까진. 그런 렌의 돌발적인 행동에 칼리프가 되레 당황했다.

    “우린 전하를 응원하러 온 거잖아? 저 사람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원래 그런 인간이에요. 무시해요.”

    엘레나는 신경을 쓸 가치도 없다는 듯 싹 무시하며 시선을 시안에게 고정했다. 한순간이었지만 고개를 돌린 시안의 눈길과 엘레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바로 앞에서 시안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시안이 고개를 돌려 정면에 선 렌을 마주 보며 목검을 고쳐 잡았다. 렌 역시 자세를 낮추며 그에 맞대응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서 있던 교수가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던 손을 힘껏 내렸다.

    “결승전 시작!”

    정사각형 시합장에서 마주한 시안과 렌 사이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미동도 하지 않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단순히 기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빈틈을 찾고자 함이다.

    먼저 움직인 건 렌이었다. 지면을 박차며 단숨에 거리를 좁힌 렌의 목검이 상대의 몸통을 꿰뚫듯 쇄도했다. 숙련된 기사라고 하더라도 쉬이 대응하지 못할 만큼 기민하면서도 완벽한 찌르기였다. 그러나 시안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자세를 슬쩍 낮추며 상체를 비틀었다. 그러며 추진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눕혀진 렌의 목검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챙. 렌의 목검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렌의 신체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렸다. 시안은 재빨리 목검의 방향을 틀어서 렌의 어깨를 향해 휘둘렀다. 가벼운 갑주를 걸치고 있다지만 그걸 무시하고서라도 일격에 그를 제압할 위력이 실려 있었다.

    본능이 보내는 신호에 시안은 맘먹은 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오히려 검을 일자로 세워서 자신의 신체를 보호하는 데 이용했다.

    렌이 목검을 주워 다시 시안에게 쇄도했다.

    챙. 목검과 목검이 충돌하여 파공음이 퍼졌다. 렌이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허리를 비틀어 시안의 사각을 노리고 검을 휘두른 것이다. 만약 시안이 본능적으로 막지 않고 기회라고 여기고 렌의 어깨를 노렸다면 그보다 앞서 무방비 상태로 허벅지를 가격당했을 것이다. 겨우 막기는 했으나 목검에 실린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시안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주춤거리는 찰나에 렌은 지면을 손으로 짚더니 공중회전을 하며 다시 두 다리로 섰다. 고작 눈 깜짝할 사이에 주고받은 경합에 숨을 죽이고 있던 관람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

    수도에서 살아가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전쟁과는 거리가 먼 만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련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긴장감에 열광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정작 검을 맞대고 있는 렌에게서는 그런 긴장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깜짝이야. 제가 아는 전하가 아닌 거 같은데요?”

    “…….”

    “그간 실력을 숨기고 계셨던 건가요? 그럼 계속 숨기시지. 왜 이제 밝혀서 여러 사람 곤란하게 하세요.”

    렌이 이죽거렸다.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시안의 검술에 놀랄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최후엔 자신이 승리할 거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변해야 했으니까.”

    “변해요? 뭐 하러? 그런다고 전하의 상황이 달라질 거 같진 않은데.”

    렌은 면전에 대놓고 시안의 의지를 비꼬았다. 이미 황실은 그 권위를 잃은 지 오래였다. 시안이 발악하더라도 대공가를 위시한 4대 가문의 단단함과 견제 속에서 황실의 권위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나 역시 그대와 같았지. 내가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뭔 소리인지. 제가 배움이 얕아서 알아듣게 좀.”

    시안이 힐끗 시선을 돌려 특별석에 앉아 있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내게 그러더군. 시대는 변했다고. 세상을 바꾸는 건 내 역할이 아니라고.”

    “…….”

    “그 뒤로 생각을 바꿨다. 난 그저 시대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길을 트겠다고.”

    렌은 지금 시안이 하는 말의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안이 그간 숨기고 있던 검술을 드러내고 변화를 맞게 한 장본인이 누군지는 짐작이 갔다. 바로 엘레나다.

    “전에도 경고했을 텐데요. 쟤 좋아하지 말라고. 못 지킨다고.”

    렌은 턱짓으로 특별석에서 시합을 보고 있을 엘레나를 지칭했다.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왜 상관을 안 해. 내가 쟤한테 관심이 있는데.”

    “……!”

    렌이 대놓고 선언을 해버리자 시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하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인정할 줄은 몰랐다.

    “아, 말이 너무 길었네. 우승하면 쟤랑 같이 외식하기로 했는데. 져줄 생각은 없죠?”

    “최선을 다해 이길 생각이다.”

    “협상 결렬이네.”

    차분했던 시안의 눈빛에도 투쟁심이 깃들었다. 엘레나를 직접 결승전에 초대한 만큼 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물며 렌의 감정을 알았으니 더더욱.

    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앞의 시안을 꺾고 싶었다. 엘레나와 멋대로 해버린 그 약속이 렌으로 하여금 승리에 집착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탓. 먼저 움직인 건 렌이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좇을 수 없을 만큼 기민하고 빠른 쇄도였다. 시안은 이미 그런 공격이 올 거라고 예상을 한 듯 차분하게 목검을 눕혔다. 최소한의 힘으로 목검의 방향을 틀어버린 시안은 위협적으로 목검을 휘둘렀다.

    휙!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울렸다. 렌이 목검이 닿기 전 몸을 틀어 시안의 일격을 피했다. 기회를 잡은 렌이 공격에 기세를 올렸다. 벼락같은 찌르기가 위협적으로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시안도 만만치 않았다. 적절하게 회피와 반격을 해 렌의 흐름을 끊었다.

    일진일퇴의 공방. 누가 감히 우위라고 말을 할 수조차 없는 치열한 대결이 이어졌다.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듯 위협적인 공격이 쉼 없이 오가면서도 어느 한쪽도 물러섬이 없었다. 관중은 숨을 죽인 채 그런 두 사람의 대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안과 렌의 기세에 그만 압도당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무려 한 호흡도 쉬지 않고 공방을 이어가던 렌과 시안이 거리를 두고 소강상태를 가졌다. 거친 숨소리와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그들의 대결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짐작게 했다.

    “이야, 우리 전하 그간 나한테 지고 조롱당하면서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의미 없는 대련에 불과했으니까.”

    시안은 그간 철저히 자신의 검술 실력을 감췄다. 무려 열한 번이나 공식전에서 렌과 붙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능력이라는 탈을 쓰고 대공가와 4대 가문의 방심을 유도하지 않으면 파고들 틈마저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생각이 엘레나를 만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황제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보살피는 존재지. 그걸 이제야 안 것뿐이다.”

    시안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과거 황실의 권위와 영광을 찾고자 귀족들을 배척하는 데 온 열정을 쏟아부으려 했다. 그러다 엘레나를 만났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황제란 무언지.

    황제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귀족들의 부패와 수탈로 인해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수도를 조금만 벗어나면 배를 곪고 죽어가는 평민이 수두룩했다.

    엘레나는 말했다.

    새 시대가 올 거라고.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맨 아래, 바닥부터 변화가 불기 시작할 거라고.

    뒤늦게 그 말의 진의를 이해한 시안은 스스로 달라지고자 했다.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던 계획들도 수정했다. 그 시작이 그간 철저히 감추고 있던 시안의 천부적인 검술 실력을 공개하는 것이다.

    귀족의 견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안은 귀족과 척을 지고 대칭점에 섰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새 시대의 주역이 될 민중들의 편에 설 황태자. 그게 시안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밑그림이었다.

    “뭔 말이래. 황제가 어쩌고, 민중이 어째요?”

    “그대가 이해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렌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목검을 허공에서 위협적으로 붕붕 휘두르고는 어깨높이로 검신을 눕혔다.

    “슬슬 끝을 보죠. 식사 약속이 있는데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아서.”

    “그대의 찌르기는 일품이지.”

    시안도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거칠었던 숨소리는 검을 맞대기 전처럼 차분해져 있었다.

    “또한 검에 규격이 없다.”

    “학부 만년 하위권에게 평가나 받고 있다니. 내가 좀 우스웠나 봐요?”

    “무시할 의도는 없다. 그대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강하니까. 다만 나는 그대의 검을 보았고, 그대는 내 검을 보지 못했다. 그뿐.”

    시안의 말이 끝날 즈음 렌이 선공을 날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찌르기라는 같은 공격 방식을 너무 고집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알고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매서웠다.

    시안의 머릿속에는 렌의 가공할 만한 공격을 무너뜨릴 파훼법이 서 있었다. 야수의 본성과 같은 검술. 천부적으로 타고나지 않는다면 결코 구사할 수 없는 검술이다. 절제된 동작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현 검술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래서 더 상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단 말이기도 하다.

    ‘흐름을 끊는 게 순서.’

    렌이 야수와 같은 본능으로 한번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기세를 더하기 시작한다. 시안은 의도적으로 렌의 기세가 오를 즈음 맥을 끊었다. 두세 차례 공방을 주고받으면 거리를 벌려 숨 고르기를 하고, 또 목검을 부딪치며 치열하게 싸우다가 물러나길 반복했다. 수어 차례 흐름을 끊자 렌의 리듬이 뚝뚝 끊어졌다.

    ‘지금이야.’

    시안의 눈빛이 변했다.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췄다. 렌의 장기인 찌르기는 상대를 일격에 제압하기에 최적화됐지만 실패 시 빈틈이 많다는 약점이 있었다.

    챙! 렌의 찌르기를 시안이 정면에서 힘으로 받아쳤다. 순간 렌이 당황했다.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렌은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니, 취하려고 했다.

    “이런!”

    시안의 검끝이 매섭게 심장을 노리자 위기를 느낀 렌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피했다고 안심하는 것도 잠시 렌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더 깊숙이 들어왔어야 할 시안의 목검이 진로를 바꾼 것이다.

    ‘허초!’

    시안은 애초에 심장을 노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노리는 척 검을 뻗어 렌으로 하여금 무리해서 반응하도록 속임수를 줬을 뿐이다. 시안은 무너진 렌을 향해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급소만 노리는 절제된 공격. 시안이 보이는 모든 움직임과 검술은 기사들의 표본으로 삼고 싶을 만큼 완벽했다.

    끝내 제 페이스를 찾지 못한 렌은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고 시안의 목검이 목젖에 닿는 걸 허락하고 말았다.

    “시합 종료! 4학년 클라디오스 데 시안 전하 승리!”

    교수의 종료 선언과 동시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결투를 지켜보던 관중석에서 일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안은 목검을 거두고는 묵례를 하며 상대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좋은 승부였다.”

    렌은 예의 따위는 개나 줘버린 듯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목검을 내동댕이치고는 돌아섰다.

    “저, 저!”

    교수가 그런 렌의 무례함에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렌은 이미 시합장을 내려가 버린 뒤였다.

    “와아아아!”

    승자인 시안을 향해 시합장을 찾은 평민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시안은 손을 흔들며 그들의 응원에 답을 주었다. 그러던 시안의 시선이 특별석으로 향했다.

    “…….”

    함성이 잦아질 때까지 시안의 눈길은 엘레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전하께서 이겼어. 렌을 이겼다고.’

    엘레나는 직접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렌이 누군가. 제국을 수호하는 세 자루의 검 중 일인인 황야의 늑대였다. 얼음의 기사 휴렐바드를 제외하면 단신으로 상대할 자가 없다고 평가받던 제국의 정점에 선 초강자다. 그런 렌을 시안이 꺾었다. 학술원 재학 내내 검술학부 하위권을 맴돌던 시안이 기적을 쓴 것이다.

    ‘휴렐바드 경의 말이 맞았어. 전하는 실력을 숨기고 있으셨던 거야.’

    엘레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아가 시안이 달리 보였다.

    “전하가 이쪽 보신다. 손 흔들자!”

    칼리프가 테라스에 바짝 붙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라파엘과 세실리아도 앞으로 나서서 박수를 치며 승리를 축하했다.

    “루시아, 뭐 해? 빨리 이쪽으로 와.”

    “가요.”

    칼리프에게 끌려온 엘레나가 테라스 가까이에 서서 박수를 쳤다. 얼떨떨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것도 잠시 엘레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진심으로 우승을 축하했다.

    똑똑.

    특별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따라오십시오.”

    사전에 얘기가 된 대로 근위기사는 일행을 시합장 뒤편에 마련된 건물로 안내했다. 원칙적으로 참가자만 출입이 허락된 건물이지만 시안의 허락으로 특별 출입이 가능했다.

    막 건물 내부에 발을 들이려던 엘레나의 눈길이 우연히 건너편 담벼락 사이 문 너머로 향했다.

    멈칫!

    못 볼 거라도 본 것인지 엘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가고 뭐 해?”

    “……금방 갈게요. 먼저 올라가 계세요. 근위기사님, 잠시 급한 볼일 좀 보고 갈게요.”

    급한 볼일이라는 말에 근위기사도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을 먼저 올려 보낸 엘레나가 건너편 담벼락 쪽에 바싹 다가갔다.

    짝!

    담벼락 문틈 사이로 뺨을 맞은 렌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화들짝 놀란 엘레나가 자기도 모르게 담벼락에 몸을 숨겼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근위기사를 따라가던 엘레나는 우연히 문틈 사이로 렌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때였다. 곰처럼 두툼한 손이 렌의 뺨을 세게 후려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머지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담벼락으로 오게 됐고, 본의 아니게 도둑고양이처럼 몸을 숨기고 대화를 엿듣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기껏 여기까지 왔더니 지는 꼴을 보여? 이런 한심한 놈.”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중후했다. 마흔에서 쉰쯤 되는 중년 남자로 짐작됐다.

    “아버지는 참 만족을 모르시네요. 질 수도 있죠. 저라고 맨날 이기나요?”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짝! 엘레나가 몸을 움찔했다. 소리만 들어도 몸이 움츠러들 만큼 무자비했다.

    ‘스펜서 자작, 너무하잖아.’

    렌에 대한 엘레나의 감정은 좋지 않다. 아무리 뜯어보더라도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결승전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뺨을 때리는 스펜서 자작의 행동도 어른으로서 성숙한 행동은 아니었다.

    “황태자는 사 년 내내 하위권이었어. 넌 교내 순위 1위를 놓친 적이 없고. 그런데 졌어. 네가 나태하고 게을렀기 때문이야.”

    “네, 제가 나태하고 게을렀습니다.”

    렌은 여전히 삐딱했다.

    “머저리 같은 놈. 난 너한테 패배를 가르친 적이 없다. 이기는 것만 가르쳤어.”

    “참 확고하시네요. 그래서 어머니한테도 그리 가혹하게 군 거예요?”

    “뭐가 어째?”

    엘레나가 숨을 죽였다.

    ‘어머니?’

    그러고 보면 지난 삶부터 렌과는 악연으로 엮었지만 가정사나 개인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렌이 싫었고 무서웠으며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왜 모른 척해요?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어머니를 사교계에 내보내고 인맥 하나 제대로 못 쌓느냐며 쓸모없다고 욕했잖아요!”

    “네 엄마는 바스타슈 가문의 안사람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한다고 했잖아! 아버지가 증오하는 그 남자의 목을 내가 부러뜨리겠다고. 그러니까 어머닌 가만히 두라고. 근데 당신은…….”

    감정이 격해진 렌이 뒷말을 흐렸다. 그것만으로도 렌의 어머니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지 짐작이 갔다. 엘레나는 렌이 왜 그토록 베로니카 공녀를 증오하고 대공가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됐다. 렌은 가족사로 상처 입은 자신을 어쩌지 못했다. 자신의 상처가 버거우니 남을 괴롭히고 상처를 줬고, 그러는 사이 제 상처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곪아가고 있었다.

    “미련한 놈. 그깟 과거에 얽매여서! 내가 널 잘못 키웠다. 더 혹독하고 강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그럼 그러시지 그랬어요. 더 삐뚤어져서 제대로 돌아버리게.”

    “머저리 같은 놈.”

    렌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스펜서 자작이 매정하게 몸을 돌려 가버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식에게 모질었다. 

    “이만 나오지?”

    ‘나?’

    엘레나는 급격하게 당황했다. 렌과 스펜서 자작 사이에 너무 날이 선 대화가 오가는 바람에 조용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근데 지금의 부름은 마치 엘레나가 여기 숨어서 엿듣고 있었단 걸 처음부터 알고 있던 눈치였다.

    “안 나오냐?”

    ‘들켰어.’

    렌의 확인 사살에 엘레나도 모르는 척 지나가기에 글렀다는 걸 인지했다. 담벼락 사이의 통로 중앙에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내자 렌이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너 뭐냐. 뭘 그리 대놓고 엿들어? 아버지가 알아챌까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괜찮아요?”

    엘레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뭐가? 아, 이거?”

    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문하며 피식 웃었다.

    “맞는데 이골이 나서.”

    “…….”

    “왜? 아프면 와서 호? 라도 해주게?”

    렌은 장난스럽게 맞받아치며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는. 엘레나는 그런 렌을 안타깝게 보다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

    엘레나의 손길이 빨갛게 부은 렌의 뺨을 감쌌다. 서서히 부기가 올라오는 얼굴보다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 아팠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따지고 보면 렌의 삐딱한 성격 역시 스펜서 자작의 강요와 강압으로 인한 폐해였기에 이렇게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렌이 측은하고 딱했다. 

    생각지도 못한 엘레나의 행동에 렌은 당혹감을 보였다. 가슴 한구석이 아리면서 따뜻한 기분. 그 낯선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되레 엘레나의 손목을 낚아채며 날이 선 모습을 보였다.

    “이건 뭐지? 동정이냐?”

    “네, 동정이에요.”

    “……!”

    “바보같이 왜 맞고 다녀요? 몸집은 커 가지고. 여기저기 시비는 잘 걸면서 제대로 말도 못 해요?”

    “지금 나 위로받고 있는 거냐?”

    반문하는 렌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위로라니. 늘 책임감과 의무를 강요받으며 성장했다. 그에게 위로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그런 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엘레나가 어루만졌다.

    “조, 좀 놔줄래요? 아파요.”

    “아!”

    렌은 자기도 모르게 엘레나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단 걸 깨닫곤 재빨리 손을 놓았다. 실수였다. 근데 그 실수로 인해 빨갛게 부어오른 엘레나의 손목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더는 안 되겠다. 엘레나와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해질 것 같기에 렌은 몸을 휙 돌렸다.

    “약속을 못 지켰으니 외식은 다음에 하자. 그때까지 아쉬워도 참고.”

    “선배.”

    나지막이 부르는 엘레나의 저 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지. 렌은 돌아서서 두어 발자국 나아가다 걸음을 멈췄다.

    “경고하는데, 함부로 위로하지 마.”

    차마 엘레나를 볼 자신이 없기에 돌아보지 않고 속마음을 꺼냈다.

    “확 선을 넘어버릴지 모르니까.”

    “……!”

    놀라는 엘레나를 뒤로하고 렌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그대로 떠났다. 참 그다운 퇴장이었다.

    * * *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엘레나는 뒤늦게 시안과 일행이 있는 대기실에 도착했다.

    “왔어? 안 그래도 네 얘기 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칼리프가 분위기 메이커라는 게 느껴졌다. 붙임성이 좋고 성격이 유연하다 보니 어색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덕분에 엘레나가 늦게 왔음에도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았다.

    “왜 제 얘기를 해요. 축하를 드려야지.”

    “그건 이미 입이 닳도록 했거든. 너 빼고.”

    칼리프가 콕 집어 지목하자 엘레나가 눈을 흘기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시안과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러운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귀족보다 더 귀족스러운 기품 넘치는 영애가 되어 있었다.

    “전하의 승리를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고맙군.”

    시안은 이런 엘레나의 모습이 익숙했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고개를 든 엘레나가 칼리프 옆의 빈 의자에 앉으려 할 때였다.

    “루시아 영애와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네? 아, 알겠습니다, 전하.”

    엘레나를 결승전에 초대하는 정성까지 보인 시안이었다. 칼리프는 단둘이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분위기를 몰아주고자 직접 라파엘과 세실리아를 추스르며 대기실을 나섰다. 둘만이 남게 된 공간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시안이었다.

    “그대가 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다.”

    “네?”

    “시합장에 올랐는데 영애가 보였다.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리더군.”

    “…….”

    엘레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결승전에 초대한 것부터 긴장이 풀렸다는 말까지 기분 좋게 들리면서도 부담이 되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군.”

    “좀 놀라서요.”

    “이러는 내가 말인가? 아니면 렌을 꺾고 우승을 한 것이 말인가?”

    “둘 다요.”

    엘레나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시안이 턱을 괴더니 우수에 찬 눈길로 말했다.

    “그대 때문이다.”

    “……!”

    엘레나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초점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고 깊어 보이는 시안의 눈길에 시선을 어디에 둘 줄을 몰랐다.

    “그대가 그러지 않았던가. 새 시대를 이용하라고.”

    “아.”

    시안은 기숙사에서 엘레나가 한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듣고 나름의 판단을 내려 결단을 내린 것이다.

    ‘다 나 때문이었어. 원 역사가 뒤틀려 버린 게…….’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엘레나가 했던 말과 행동이 시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차후의 미래는 원 역사와 비교해 상당 부분 달라질 가능성이 컸다. 시안의 검술제 우승도 그렇지만 세실리아 역시 황태자비로 책봉되지 않았다. 나비 효과라는 말처럼 어디까지 변화를 일으킬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뭐가 됐든, 후회하지 않아.’

    어떤 변수가 발생하든 엘레나는 인내하고 감수할 생각이었다. 예정된 실패를 벗어나 엘레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집을 꺾고 성숙해진 시안이 너무 자랑스러워서다.

    “그대의 뜻을 받아들여 난 귀족의 대칭점에 서길 선택했다. 귀족들의 견제도 오롯이 버텨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야만…….”

    “민중들이 전하의 편에 서겠죠.”

    엘레나가 말을 이어받자 살짝 놀란 시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생생히 들리더군. 나를 응원하는 민중들의 뜨거운 외침이.”

    “전하.”

    “민중들이 내 편에 서는 게 아니다. 내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이다.”

    못 보던 사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시안은 의젓해졌다. 귀족에게 빼앗긴 황실의 권위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민중들을 위한 대의를 내세웠다.

    “그러한 각오를 증명하기 위한 출전이었지.”

    “결국 증명하셨네요. 렌 선배를 꺾고 우승까지 해내시고.”

    검술제 우승으로 그간 시안을 무능력한 황태자로 취급하던 귀족들의 시선이 바뀔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기사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 렌을 이겼으니까.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안을 견제하고 압박할 것이다. 반대로 민중들 사이에선 시안의 무용담이 퍼져 나가며 황태자라면 썩어빠진 귀족들을 도려낼 거라는 믿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렌이 그러더군. 날 이기면 그대와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고. 사실인가?”

    엘레나는 볼이 씰룩거렸다.

    “약속한 적 없는데.”

    “역시 일방적인 강요였나 보군.”

    착각이었을까. 시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기분이 든 건.

    “전후 사정은 몰랐으나 그자의 얘길 듣는데 화가 나더군.”

    “……전하께서요?”

    “그대가 그자와 만나는 게 싫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

    엘레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