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20/30)
  • 제11장 벨라도나

    “그림에 담긴 의미가 좋네요. 채색은 좀 떨어지지만 작가적 해석이 좋으니 감상의 여지를 주고요. 좋아요. 매입하죠.”

    엘레나는 홍차를 음미하며 칼리프가 가져온 그림을 평가했다. 이 순간은 루시아가 아니라 베로니카 행세를 해야 하는 만큼 말투 하나부터 어휘까지 격에 맞춰 구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늘도 가져온 그림 여섯 점과 조각상 하나를 매각하는 데 성공한 칼리프가 기분 좋게 말했다.

    “과연, 공녀 전하의 작품 보는 안목은 일품이십니다.”

    “귀족이라면 모름지기 누구나 이 정도 안목과 식견은 갖춘답니다.”

    엘레나는 자신을 낮추며 옅게 웃었다. 그 미소에 그만 시선을 빼앗겨 버렸던 칼리프가 얼른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와, 숨 막혀서 똑바로 못 쳐다보겠어.’

    눈앞의 베로니카 공녀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미인이었다. 웬만한 귀족 영애가 모두 다니는 학술원에서도 저만큼 청초하고 치명적인 미모를 지닌 영애를 본 적이 없다. 근데 그걸 떠나서 베로니카에게서는 감출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공녀 전하 앞에만 서면 왜 이리 경건해지는 건지.’

    칼리프는 우연히 연이 닿아 황태자 시안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예정에 없던 다소 격한 토론이 오가며 체하고 말았지만 그날 처음으로 황족의 기품을 체감할 수 있었다. 베로니카 공녀가 그랬다. 그녀의 고상한 품격은 불경스러운 마음마저 정화시켰다. 동경하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여겨진달까.

    “아, 최근 미술계에 공녀 전하에 대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거 아시는지요?”

    “제 얘기요? 궁금하네요. 무슨 얘기일지.”

    엘레나는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면서 흥미를 보였다. 이 얘기는 루시아로 변장하고 활동하던 때에는 듣지 못했던 거라 궁금했다.

    “아뢰옵기 송구하게도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공녀 전하께서 매입하신 미술품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자가 많았답니다. 작품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에 매입했다는 거였죠.”

    “어리석네요. 예술을 한낱 돈으로 평가하려 들다니.”

    “근데 또 재미있는 게, 근래 들어서 공녀 전하께서 매입하신 작가의 작품들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재평가요?”

    “정확히는 저평가받던 작품들을 공녀 전하께서 그 가치를 발견하시고 매입하셨다고 감정사들이 판단을 내린 거죠.”

    엘레나는 손을 뻗어 다시 찻잔을 입가로 가져왔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되어가고 있어.’

    처음 미술품 매입을 시작할 때부터 이런 평가를 받게 될 거라는 걸 예상했다. 다만 그 시기가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늦은 걸 보면 예술계가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해서, 요새 공녀 전하의 안목이 화제입니다. 제게 공녀 전하께서 매입한 그림이 뭔지, 화가가 누구인지만 알려달라는 청탁이 들어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알려주셨고요?”

    “아뇨, 알려주지 않더라도 어떻게 알았는지 다 알고 있더라고요.”

    엘레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옅게 미소를 띠었다.

    “참 안타깝네요. 예술 작품을 투자가 아닌 작품 그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돈이 따를 텐데요.”

    “그걸 못 하니 다들 공녀 전하의 안목을 으뜸으로 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안목이랄 것까지 있나요. 전 그저 예술가의 혼이 깃든 예술 작품에 대해 존중을 표할 뿐이랍니다.”

    한순간도 품위를 잃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엘레나를 보며 칼리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술을 대하고 누릴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로 학술원 예술제에 가시어 유망한 예술가를 발굴해 내심이 어떠신지요?”

    “그럼요. 예술가의 보고라 일컫는 예술제에 과연 어떤 작품들이 출품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답니다.”

    예술제는 학술원에서 주관하는 3대 축제 중 하나다. 3대 축제는 저번 주에 끝난 학술제와 이 주 뒤 열리는 예술제, 졸업을 앞두고 대망을 장식하는 검술제를 칭한다. 그중에서도 예술제는 학술원에 재학 중인 무명이나 다름없는 졸업생들에게는 화려하게 예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현 예술계가 스승의 명성과 인맥을 기반으로 도제의 위치도 정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니 학술원 예술학부 졸업을 했다고 한들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도태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예술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미술상과 감정사들이었고 그들은 긴밀하게 맺어져 자신들의 영향력 밖에 있는 예술가들이 명성을 쌓는 걸 견제했다.

    ‘썩을 대로 썩었어.’

    그게 현 미술계의 실상이었다.

    “오늘도 좋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네요. 항상 수준 높은 예술품을 소개해 주시니 저 역시 만족하고 있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따가 봐요, 선배.’

    엘레나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대할 때와 달리 친근감이 느껴지는 미소에 칼리프는 멍했다.

    ‘어라? 저 미소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칼리프는 착각한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응접실 기숙사를 떠났다. 메이와 앤을 시켜 미술품을 대공가로 보내라고 지시한 엘레나도 기숙사를 나섰다.

    중앙 도서관 기록실에 들러 루시아로 변장을 마친 엘레나는 학술원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야, 저기 봐. 저기.”

    “쟤야? 아벨라 영애를 물 먹였다는 애가?”

    “정확히는 쟤가 아니라 전하가 먹이셨지.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이해를 못 하겠네.”

    “그러니까. 렌 선배도 쟤 찍었다는 소문 돌던데. 부럽다.”

    아벨라의 일로 얼굴이 팔린 엘레나는 학생들이 몰리는 중앙 대로를 지나치는 내내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네.’

    결국 엘레나는 학술원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말았다.

    ‘웬만하면 도서관이랑 화실만 왕래해야겠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학술원은 가십이 끊이질 않는 곳이라는 거다. 지금이야 가십의 중심에 있지만, 더 큰 가십거리가 발생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엘레나도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다.

    물론 황태자 시안과 망나니 렌이라는 희대의 삼각관계로 엮인 만큼 웬만한 일로는 가라앉지 않겠지만.

    뒤통수가 뜨거울 만큼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학술원 문주 근처에 도착하자 외부 출입을 통제하던 기사가 막아섰다.

    “외출하시는 겁니까?”

    “네.”

    “여기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시고 저쪽에서 외출증을 발급받으시면 됩니다.”

    엘레나는 절차를 밟아 발급받은 외출증을 상의 주머니에 넣고는 학술원을 나섰다. 루시아로 변장하고 외출을 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학술원 근처 거리는 앞마당처럼 훤히 꿰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 뻔질나게 외출을 해대며 레스토랑과 숍, 상점 등을 오가며 디저트를 즐기고 쇼핑하며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엘레나가 향한 곳은 거리의 끝자락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이곳은 스테이크가 맛있기로 정평이 나 평상시에 귀족 출신 학생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입구부터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유는 화려한 입구에 걸려 있는 문패를 보면 확인이 가능했다.

    Closed.

    영업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원칙적으로는 손님을 받지 않을 테니 발길을 돌리는 게 맞지만 엘레나는 명패의 적힌 글자를 무시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영업하지 않습니다.”

    “루시아예요. 아버지를 뵈러 왔어요.”

    정중하게 돌아갈 것을 권하는 종업원에게 엘레나가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싹 바뀌었다.

    “아가씨를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위층에 와 계십니다.”

    종업원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앞장서 엘레나를 안내했다. 어르신, 아가씨……. 싹싹한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레스토랑은 카스톨 상회의 소유였다. 학술원을 오가는 칼리프와 긴급하게 엘레나가 나올 일을 대비해서 마련한 은신처였다.

    “여기입니다.”

    이 층 복도 끝 방에 도착하자 종업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왔어?”

    엘레나가 안으로 들어서자 칼리프가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헤어진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그걸 모르는 칼리프는 퍽 반가워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엘레나가 인사를 받으며 시선을 돌렸다. 창가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 속지가 너풀거렸다. 그 앞에 에밀리오가 앉아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내 안부가 L의 안부지. 너무 잘 지냈단다.”

    엘레나와 에밀리오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부녀 관계를 연기했다. 아직 정체를 공개할 수 없는 엘레나 입장에서는 칼리프를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왜 서서 있어? 어서 앉아. 할 얘기 많다.”

    엘레나가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뤘다.

    “셋이 모인 건 처음인 것 같네요.”

    “말을 마라. 네가 학업에 전념하는 사이, 나나 에밀리오 님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공사가 다망했다고.”

    칼리프가 작게 투정을 부렸다. 엘레나가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에밀리오를 쳐다봤다.

    “대공가 쪽 반응은 어때요?”

    “아직은 빈민가 철거에 열을 올리는 것 같긴 한데, 며칠 내로 알지 않을까 싶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대리석 광산 쪽과 독점 공급 계약을 맺은 걸 알면 난리가 나겠네요.”

    엘레나는 빈민가 토지를 매입할 시점에 에밀리오로 하여금 천연 대리석을 취급하는 제국 일대의 광산들과 독점 계약을 맺게 했다. 일반 건축물이면 대리석을 쓰지 않고 지을 수 있지만,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노블레스 거리는 천연 대리석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했다. 노블레스 거리 자체가 귀족적인 우아함과 품격을 강조한 차별적 거리인 만큼 천연 대리석 시공은 필수였다.

    “대공가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겠지. 적은 양도 아니고 원가의 세 배 이상은 줘야 매입할 수 있을 테니 손해가 막심할 거야.”

    “겨우 세 배요? 이쪽도 독점권을 따내려고 돈 많이 썼잖아요? 네 배는 받아야 수지가 남죠.”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리아브릭이 이 얘기를 들었다면 당장 엘레나를 죽이고 싶다는 살의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야 싶은데, 거래 상대가 대공가다 보니 아무래도 조심스럽구나.”

    카스톨 상회를 대륙 십 대 상단의 말석에 올려놓기까지 에밀리오는 숱한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그중에서 가장 위기였을 때를 뽑으라면 거래 도중 귀족의 심기를 건드린 때였을 것이다.

    “너도 알겠지만 대공가는 일반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다. 그들이 작정하고 칼을 들이밀면 우리 카스톨 상회는 제국에서 철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어요. 한 번 악감정을 품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거든요.”

    엘레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아브릭의 집요함과 치밀함, 그리고 음흉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천연 대리석 가격을 원가보다 무려 네 배나 부른다면 권력을 이용해 상회를 압박하거나 억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칼리프가 기겁하며 걱정했다.

    “진짜 그럼 큰일 아니야? 우린 이미 두 배나 주고 독점권을 계약했잖아.”

    “걱정할 거 없어요. 대공가는 네 배를 주고 매입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묘책이 있구나? 그지?”

    칼리프는 엘레나가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리 여유로울 수가 없을 테니까.

    “아버지께서 해주실 일이 있어요.”

    “말해보아라.”

    “소문을 좀 내주셨으면 해요.”

    “소문?”

    엘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이아 교단 본단, 교황청에서 역사에 남길 만한 대성당을 건축하려고 한다고요.”

    “……!”

    에밀리오의 동공이 커졌다. 웬만한 일로는 놀랄 일이 없을 만큼 삶에 무뎌진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만큼 방금의 소식은 파격적이었다. 대리석 광산 독점권을 딴 이유가 대공가 때문이 아니라, 교황청에 납품할 자재를 미리 사들였단 명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칼리프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얘기에 말을 더듬었다.

    “미, 미쳤어. 너 그거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다른 건 몰라도 교황청을 잘못 건드리면 훅 가. 그런 거짓 소문을 내서 어쩌자는 건데?”

    “누가 거짓 소문이라는데요?”

    “뭐?”

    “교황청은 이미 수도 외곽 본단 근처의 부지 매입까지 재작년에 마쳤어요. 장차 가이아 교단의 총본산이자 새로운 진원지가 될 대성당이기에 내실을 다지느라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을 뿐이죠.”

    이 모든 게 막연한 추정이 아닌 앞으로 실제 벌어질 이야기였다. 최근 백여 년간 가이아 성단은 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성세를 맞이했다. 귀족들은 사후의 행복을 보장받고자 어마어마한 돈을 교단에 기부했고, 그런 귀족들의 수탈로 삶이 팍팍해진 평민들은 종교에 의지했다. 그런 성세 속에 교황청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교단의 총본산이자 진원지가 될 대성당을 건설할 웅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원 역사에서는 건축가 베르나가 교황청의 선택을 받아 1대 건축가로 산타마리아 대성당 건축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건축 시작 삼 년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2대 건축가가 란돌이지.’

    우연한 기회에 교황청에 방문했던 엘레나는 그곳에서 아트 중개사 칼리프와 만난 적이 있다. 그렇기에 란돌이 어떤 과정을 통해 산타마리아 대성당 건축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2대 건축가로 임명이 되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줄기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백번 양보해서 성당을 건설한다 치자.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그게 궁금해요?”

    “어, 미치게 궁금해!”

    엘레나는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에밀리오 님, 정말 이 말 믿으실 거예요? 너무 도박성이 짙어요. 자칫 잘못하다간 교황청 눈 밖에 날 수도 있어요. 그럼 끝장이에요!”

    “선배. 장담컨대 그런 불상사는 없을 거예요.”

    칼리프의 우려에도 엘레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엔 결코 흔들리지 않을 확고함이 깃들어 있었다.

    “교황청을 끌어들임으로써 우린 두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어요. 첫째는 명분. 대공가가 아니라 대성당 거래에 들어갈 천연 대리석을 확보하기 위해 미리 구비해 놓은 게 되는 거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에밀리오가 동의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제시할 천연 대리석 매입가의 네 배가 전혀 싼 가격이 아니게 돼요. 당장이야 독점 계약을 체결하며 두 배로 매입하는 게 부담이 되지만, 대성당 건축에 착수하면 그 손해는 다 메우고도 남겠죠.”

    엘레나는 그간 도서관을 오가며 상업과 시장 원리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기억을 제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려면 그에 걸맞은 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력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하나의 기억을 바탕으로 많은 계획을 파생했고 대공가의 계획을 역이용하여 판을 흔들고 많은 부를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에밀리오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들을수록 놀랍구나.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인지. 경이로울 정도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남들 아는 것보다 한 번 더 생각했을 뿐이에요.”

    엘레나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에밀리오는 안다. 그가 평생 상행하면서 겪은 경험과 연륜을 다 합쳐도 지금 엘레나의 영민함을 좇지 못할 거라는 걸.

    칼리프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놀라는 일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하. 주변에 천재가 너무 많아. 나 같은 놈은 도무지 쫓아갈 수가 없다고.”

    “저 천재 아니에요.”

    “그 멘트도 똑같아! 천재들은 자기가 천재인 걸 왜 모르지? 전염병이냐?”

    열등감에 열불이 났는지 칼리프가 성을 내듯 목소리를 키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아트 중개사를 자처하면서 본격적인 관리에 들어간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시대의 획을 그을 거장들이다. 그들의 천재성은 범인이 좇을 수 없을 만큼 우월했다. 그런 천재적인 거장들을 상대하다 보니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거 알아요?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이 선배를 더 빨리 성장하게 만드는 걸.’

    칼리프의 성장을 볼 때마다 엘레나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칼리프는 원 역사보다 일찍 시대의 거장들과 소통했다. 그 영향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일찍 깨닫고 악착같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 에밀리오와 교류하며 사업적인 감각까지 겸비하게 되며 칼리프는 빠르게 원 역사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선배는 선배가 잘하는 게 있잖아요.”

    “됐거든. 위로가 전혀 안 되거든.”

    저런 모습까지도 엘레나의 눈에는 예뻐 보였다.

    “이걸로 천연 대리석 문제는 해결된 거죠? 남은 일은 아버지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말거라.”

    더없이 든든한 대답이었다. 에밀리오의 일 처리는 흠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완벽했다. 인연을 맺게 해준 렌에게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을 정도로 에밀리오는 보배였다.

    “이 일 때문에 아버지와 선배를 보자고 한 건 아니에요. 진짜 중요한 안건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뭔데?”

    칼리프의 눈이 금세 이채를 띠었다. 아까 투정을 부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깊은 관심을 보이며 배우고자 했다.

    “살롱이 지어지고 바살리카가 완공되면 그 주변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거예요. 새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는 거죠.”

    “그걸 구상 중이긴 하지. 그래서?”

    “노블레스 거리도 마찬가지예요. 귀족의 특권 의식을 위한 최상류층의 거리가 그 목적이죠. 살롱 거리와 노블레스 거리는 다른 듯하면서도 추구하는 게 비슷해요.”

    “네 말의 요지는 노블레스 거리와 경쟁이 불가피하다, 이거지?”

    “네, 맞아요.”

    “불리할 거 같은데? 제국 내 대공가의 영향력도 그렇고 노블레스 거리에 쏟아붓는 돈만 해도 천문학적이잖아. 살롱을 아무리 키운다고 해도 이건…….”

    아무리 생각을 해도 경쟁에서 이길 만한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빈민가 땅을 헐값에 매수해 백 배의 가격에 되팔고, 천연 대리석을 독점 계약해서 많은 이득을 취해 재투자하더라도 애초에 대공가와 비교해 초기 자본금의 규모가 달랐다.

    하물며 여긴 제국의 수도다. 대공가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보니 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윗선에 청탁해 각종 규제와 단속으로 꼬투리를 잡아 압박을 가하면 막막했다. 하지만 엘레나의 표정엔 한 점의 불안감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놓은 게 있는 눈치구나.”

    “그래 보여요?”

    “심각하게 말을 꺼냈으나 눈에 여유가 보인다.”

    “눈치도 빠르시다니까.”

    엘레나의 긍정에 좀처럼 나서지 않던 에밀리오가 말을 꺼냈다.

    “사람이더냐.”

    “…….”

    “맞나 보구나.”

    “역시 아버지세요.”

    에밀리오의 혜안에 엘레나는 적잖이 놀랐다. 말이 동업이지 에밀리오는 이유조차 묻지 않고 엘레나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도왔다. 파트너보다는 조력자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알아, 내게 다 맞춰주고 계신 걸.’

    에밀리오가 엘레나의 계획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면 대공가를 상대로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수완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세상사란 다 같은 것이지. 권력 싸움도 전쟁도 한낱 상행의 승패도 사람에서 갈리는 법이고.”

    엘레나가 말없이 웃었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아니, 사람이 뭔데. 두 사람만 알고 있지 말고 저도 알기 쉽게 얘기 좀 해주세요. 네?”

    칼리프는 좀처럼 감이 오지 않는지 답답해했다.

    “차이를 두려고 해요. 노블레스 거리에는 없지만, 바실리카에는 있는 무언가로.”

    “그러니까 그 무언가가 사람이라 이거잖아. 거기까진 나도 알겠고 그게 누구냐 이거지. 속 타니까 빨리 얘기해 봐.”

    “선배요.”

    “나?”

    지목받은 칼리프가 눈을 크게 깜빡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밀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동의를 표했다. 그러나 칼리프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지 당혹스러워했다.

    “그 차이가 지금 나라고 말하는 거야?”

    “네.”

    “네가 잘못 생각한 거 같은데. 난 그런 역량이 없어요.”

    엘레나가 옅게 웃었다.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칼리프의 모습이 대견해서다.

    “선배는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에요.”

    “너 갑자기 왜 그래? 내가 그럴 일이 없잖아.”

    “노블레스 거리에 없고, 우리에겐 있는 것. 그리고 선배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

    엘레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시대의 거장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거죠.”

    “너 설마…….”

    뒤늦게 감이 잡힌 칼리프의 눈빛이 변했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대공가와 경쟁이 안 된다며 말하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새 시대를 연 화가, 천재 건축가, 혁명적 디자이너, 천재 마에스트로, 시대를 앞서간 과학자, 악마의 세공사……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거장의 성장이 아트 중개사인 선배의 손에 달렸어요.”

    “……!”

    칼리프는 전율을 느꼈다. 아트 중개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저들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한데 이게 웬걸, 엘레나는 이미 그 이상을 내다보고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다 돋았다.

    “살롱은 저들의 작품을 공개하는 장이 될 거고, 바실리카는 작품을 판매하는 곳이 될 거예요. 노블레스 거리를 아무리 잘 만든다 한들, 시대를 선도하는 거장들이 우리와 함께하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너란 애는 정말…….”

    “이제 아셨죠? 선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엘레나의 웅대한 계획에 동화된 칼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무거운 고갯짓에서 그가 느끼고 있는 책임감을 읽을 수 있었다.

    “어. 부담 팍팍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엄살을 부리고 있지만 칼리프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빛났다.

    “미치게 부담은 되는데…… 막 심장이 뛰는 거 있지? 나 딱 미친놈 같다.”

    * * *

    렌은 엘레나와 칼리프, 에밀리오의 밀담이 이루어진 레스토랑 건너편 건물 이 층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내리깐 렌의 눈길에 레스토랑을 나와 학술원으로 돌아가는 엘레나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숨어서 지켜보는 렌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레나가 떠난 뒤 시간 차를 두고 칼리프가 레스토랑을 떠났다. 이윽고 도착한 마차를 타고 에밀리오가 마지막으로 레스토랑을 떴다.

    “저렇게 수작질을 대놓고 하는데, 관심이 안 생기고 배겨?”

    렌은 이 순간이 너무 흥미로웠다. 다른 건 몰라도 베로니카가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피해 루시아로 변장하고 대륙 십대상단 카스톨 상단주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또 미술계에 급부상한 아트 중개사와도 깊은 인연이 있어 보였다.

    “멜, 저 칼리프라는 놈이 베로니카의 단골 미술상이라고?”

    렌이 창밖을 보며 던진 질문에 뒤에 서 있던 점잖게 생긴 멜이 고개를 들었다. 올해 서른 초반의 멜은 바스타슈 가문의 특수 조직 ‘마제스티’의 리더다. 마제스티는 주로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거나 때에 따라 암살도 서슴지 않는 집단으로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대공가의 최고 전력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러던 중 바스타슈 가문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함께 분리해 나오게 되었다. 마제스티의 뿌리가 바스타슈 가문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마제스티’는 렌의 아버지이자 현 바스타슈 가문의 가주 스펜서 자작의 직속 명령만을 따라야만 한다는 철칙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렌은 그러한 철칙을 깨버렸다. 아버지인 스펜서 자작 모르게 마제스티의 리더 멜과 접촉을 시도했고 그를 복종시켰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마제스티의 정보력을 렌이 사적으로 이용하는 게 그 증거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미술계에는 갓 발을 들인 햇병아리이나, 베로니카 공녀와 독점 거래를 하게 되면서 단숨에 주목받는 미술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신기한 일이네? 가문도 별로에 능력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데 어떻게 베로니카 같은 거물을 물었을까?”

    “그 부분은 저도 미스터리입니다.”

    “양다리인가?”

    “네?”

    렌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마제스티의 정보력은 높이 살 만하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학술원 내부에서만큼은 렌에게 미치지 못했다. 특히 루시아와 베로니카가 동일 인물이라는 건 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양다리 몰라?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아니지. 주체가 바뀌어야 하니까,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는 거라고 봐야 하나?”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렌이 픽 웃었다. 누군가의 치부를 혼자 알고 있다는 건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 게 있어. 카스톨 상회에 대해선 알아봤고?”

    “네, 깜짝 놀랄 만큼 발칙한 짓을 저지르고 다녔더군요.”

    “뭐야, 그 표현. 완전 기대되게. 뭔 짓을 했는데?”

    렌이 눈을 빛내자 멜이 대답했다.

    “대공가가 추진하는 빈민가 재개발 사업에 끼어들어 꽤 큰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와우. 대단하네? 리아브릭이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여자가 아니잖아.”

    “대공가가 매입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빈민가 땅 일부를 매입해 뒀다고 합니다. 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천연 대리석 광산과 독점 계약을 맺었는데 이 역시도 대공가를 노린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짝짝. 렌은 만족스럽단 얼굴로 힘차게 박수를 쳤다.

    “이야, 기막히네. 몇 년간 이렇게 대공가의 속을 뒤집어놓은 경우가 없지? 리아브릭의 똥 씹은 얼굴을 직접 못 보는 게 아쉬울 지경이야.”

    “또 있습니다. 대공가로부터 받은 매매 대금의 세탁 과정을 추적해 봤는데 이 모든 일의 뒤에 L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L?”

    “서류상에는 분명 존재하는데 대부분의 일에 대리인을 내세우는 바람에 실체를 보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직은 심증에 불과하지만 이 L이라는 자는 대공가에 반감을 지닌 걸로 보입니다.”

    “L이라. 우리 말고 대공가에 칼을 겨누는 미친 인간이 또 있다는 거지? 이야, 완전 흥미진진한데.”

    렌은 생일을 맞은 아이처럼 신이 나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다. 대공가라는 공통된 적을 둔 이상 L은 여하에 따라 아군이 될 수도 있었다.

    “난 왜 이렇게 L이 남처럼 안 느껴지지?”

    웃음기를 싹 거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렌의 시선이 엘레나가 떠나고 행인들이 오가는 거리에 머물렀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지만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익숙함이 자꾸 든다.

    “짚이시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멜, 네가 만약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딸로 태어났어. 그래, 외동딸이 좋겠네. 네가 후계자인 거지.”

    “제가 말씀입니까?”

    멜이 질문의 요지를 찾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뭔가 마음에 안 들어. 가문도 싫고, 아버지도 싫고, 막 다 싫은 거야.”

    “전혀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어느 누가 대귀족 후손으로 태어나는 걸 싫어할까.

    “가정이니까 토 달지 말고.”

    “…….”

    “하여간 그래서 공작 모르게 일을 벌이는 거야. 사업도 하고 다른 사람 신분의 행세도 하고…… 왜 그럴까?”

    “꼭 대답해야 하는 질문입니까?”

    “그냥 편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마음 편히 머리에 딱 떠오르는 대로 대답해 봐.”

    꼭 대답을 들었으면 한다는 말이다. 멜은 억지로 주어진 상황에 맞게 상상을 하고는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사랑 아닐까요? 그 나이대 영애들은 간혹 사랑에 눈멀어 가문도 버리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너무 로맨틱하잖아. 좀 센 느낌으로 이건 어때?”

    애써 물은 멜의 생각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렌이 본인 생각을 얘기했다.

    “사실 공작가의 친딸이 아닌 거지.”

    “소설치곤 상투적인 전개군요.”

    “근데 뭔가 심한 학대를 받았어. 그래서 복수하려는 거야. 양아버지한테! 어때? 그럴싸하지 않아?”

    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도도 파악이 안 되거니와 무슨 의미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멜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렌이 히죽 웃었다.

    “반응하고는. 그냥 그러지 않을까 해서 한 말이니 담아두지 말라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백부의 동향은 어때?”

    “여전히 저택보다 안가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은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베로니카 공녀의 복귀 이후에도 그러는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파악이 어렵습니다.”

    “베로니카 복귀 전후로 해서 안가를 찾는 주기에 변동은 있었고?”

    “없었습니다. 쭉 일정했습니다.”

    “이상해.”

    렌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프란체 대공이 안가를 잦게 찾기 시작한 건 베로니카가 독에 중독된 이후부터였다. 독이 해독되어 학술원에 복학한 지금에서는 굳이 안가를 자주 찾을 이유가 없을 텐데, 여전히 일정한 주기로 안가를 찾는다고 한다.

    수상하다. 냄새가 난다. 분명 뭔가를 놓치고 있는데 그게 뭔지 감이 잘 오질 않는다.

    “아, 뭘까. 백부, L 그리고 베로니카까지. 잘 엮으면 그림이 그려질 거 같은데.”

    아직은 정보가 부족했다. 앞서 렌이 장황하게 떠들던 맥락 없는 소설을 단숨에 엮어줄 연결 고리가 필요했다.

    “멜.”

    “네.”

    “마제스티의 정보력을 안가를 찾는 데 쏟아붓자고. 백부가 안가에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밝혀내.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정보 취합, 추적, 암살에 특화된 마제스티라 하더라도 프란체 대공을 깊게 파고드는 일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위험천만했다. 그럼에도 렌의 입에서 희생이란 단어가 나왔다는 건, 이 기회에 프란체 대공의 행적을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멜은 가족과도 다름없는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임에도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귀족적인 스펜서 자작과 달리 렌에게는 틀이 없었다. 이 년 전만 하더라도 귀족들이 몰린 연회장에서 베로니카를 중독시키는 과감함을 보였다.

    그뿐이랴. 검술학부 입학과 동시에 1위를 놓쳐본 적이 없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렌과 검을 겨뤄 이길 만한 자는 제국 땅에 없을 거라 자부했다.

    멜은 그런 렌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봤고 스펜서 자작보다 렌의 수하가 되길 자처했다. 렌만이 프리드리히 대공가와 엮인 악연을 끊어줄 적임자라고 믿었고 그 선택이 틀렸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 * *

    “뭐라고?”

    리아브릭은 서류의 결제를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올려 쓴 루미너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교황청에서 조만간 교단의 총본산이자 진원지가 되어줄 대성당 건축에 들어간단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걸 눈치챈 몇몇 상단이 천연 대리석 광산들과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결론만 말해. 현 시세는?”

    “매입가의 네 배를 원하고 있습니다.”

    쾅!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리아브릭이 순간 참지 못하고 집무실 책상을 내려쳤다. 쥐고 있던 만년필이 부러져 펜대가 나뒹굴었다.

    “언제부터 대공가가 이리 만만하게 보였지? 아니면 제국에서 더는 장사를 하고 싶지 않은 건가?”

    “당혹스럽긴 하나, 제재를 가할 확실한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을 만들어. 그게 네 일이야.”

    제국에선 대공가의 말이 곧 법이고 규칙이다. 상인들도 예외는 없다. 대공가의 눈 밖에 나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톡톡히 주지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재고해 주시는 게…… 따로 고위 성직자를 통해 알아본 바로 대성당 건축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내부적으로는 결정을 내린 지는 꽤 됐다고 합니다. 함구하고 있던 사안이 어떻게 유출됐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명성 있는 건축가와 접촉했고 진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대성당 건축이란 말도요.”

    리아브릭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 교황청 내부에서 이미 결정이 났다면 대성당 건축은 기정사실로 봐야 했다. 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대공사라면 투입될 석재와 천연 대리석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시장의 원리상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으면 가격은 무조건 뛰게 되어 있었다.

    “교황청의 유보금은 천문학적입니다. 교황청에서 대성당 건축에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천연 대리석 매입에 가격을 아끼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하.”

    리아브릭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미 L이 사전에 매입해 둔 빈민가 땅을 무려 시세의 백 배가 넘는 액수로 지불하고 매매했다. 그때 입은 손해도 적지 않은데 또 천연 대리석 매입에 무려 네 배의 웃돈을 얹어주게 생겼으니 기가 찼다.

    “그 일과 별개로 L의 꼬리를 찾았습니다.”

    “그래?”

    리아브릭의 눈길이 좀 누그러졌다.

    L의 정체만 파악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빈민가 땅 매매로 입은 손해를 고스란히 되찾아올 생각이다.

    “완벽히 파악한 건 아닙니다만, 수도 남쪽 대로 인근에 땅을 매매한 걸 확인했습니다.”

    “그 돈으로 땅을 샀어?”

    리아브릭은 L이 빈민가 땅 매매를 통해 갈취하다시피 가져간 돈으로 수도에 땅을 샀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대지 면적이 적지 않습니다. 건물의 용도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나 규모가 웬만한 대성당에 버금갈 만큼 거대합니다. 나머지 땅도 비슷한 크기의 대형 건축물을 올릴 계획인지 기초공사가 한참이었습니다.”

    위화감을 느낀 리아브릭이 말을 꺼냈다.

    ”마치 노블레스 거리를 겨냥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나만 그렇게 느껴지나?”

    “저희 역시 자작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대공가가 어지간히 만만하게 보였군. 그런 발칙한 생각을 다 하고.”

    리아브릭은 L의 사업을 대공가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른다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규모로 볼 때 고급 건축물이 될 공산이 커 보입니다.”

    “석재와 천연 대리석은 건축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 현 천연 대리석의 시세를 낮출 수 없다면 저희가 먼저 거래 물량을 확보해 L 쪽에 천연 대리석을 공급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 될 겁니다.”

    대공가라 할지라도 천연 대리석을 시가의 네 배가 넘는 가격에 매입하는 건 엄청난 손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그 손해액이 당장 대공가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치명적이진 않다. 또 노블레스 거리가 완공되면 손해액을 수백 배 상회하는 이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L은 다르다. L이 날고뛰는 재주가 있다 한들 백 년이 넘도록 성세를 누린 대공가에 비해 자금이 많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대공가가 천연 대리석 매입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그로 인해 천연 대리석 물량이 부족해져 더욱 가격이 상승하면 그 손해는 온전히 L이 부담해야 한다.

    즉, 똑같이 돈을 쓰고 손해를 입더라도 대공가는 휘청거릴지언정 쓰러지진 않지만, 대공가와 비교해 자금이 부족한 L은 폭삭 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정적으로 L은 치명적인 불안 요소를 안고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불안 요소?”

    “란돌이라는 무명에 가까운 젊은 건축가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총책임을 맡았는데 현장 경험이 일천합니다. 경력도 내세울 게 없고요.”

    아틸이 말을 받아 덧붙였다.

    “그 외의 부지는 디아즈라는 건축가가 설계부터 건축까지 맡는다고 하는데, 귀족의 의뢰를 받아 변변찮은 별장이나 지어주던 건축가라고 합니다.”

    “경험과 실력이 없는 자들에게 너무 큰 공사를 맡겼다, L이?”

    아틸과 루미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지어 란돌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공법으로 토목 작업을 진행한다고 현장 인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크다고 합니다. 단언컨대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자작님, L보다 한발 앞서 천연 대리석을 매입하시죠. 자금적인 압박만 주더라도 부담감이 클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좀 더 두고 본다라…….”

    리아브릭은 머릿속으로 천천히 정리했다. L은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건축가에게 대공사를 맡겼다. 그 과정에서 독특한 공법을 적용해 토목공사를 시행하는 바람에 현장의 우려가 크다. 천연 대리석 매입이 당장이야 손해겠지만, 대공가가 입는 손해보다 L이 입는 손해가 더 큰 만큼 감수할 만하다. 저들의 자본금이 무한하지 않은 한 자본금 싸움에선 절대 대공가를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아틸과 루미너스의 보고대로 대형 건축물은 무명의 건축가가 함부로 지을 수 있는 만만한 공사가 아니었다. 십중팔구 현장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스스로 무너지게끔 두는 게 나아.’

    L이 하는 모든 사업을 걸고넘어져 박살을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지금 시기는 노블레스 거리 사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때다. 시간이 대공가에게 유리한 이상 L 스스로 무덤을 파고 나락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천연 대리석 확보해.”

    * * *

    “완성했어요.”

    붓을 내려놓은 라파엘의 눈길이 초상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슬럼프를 겪으며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감을 잃었었던 적이 있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와서 볼래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 라파엘의 뒤에 섰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초상을 보는 느낌은 오묘했다.

    “이상해요.”

    “네? 어디가 이상하단 말씀인지?”

    “……다요. 거울을 볼 때랑 느낌이 달라서.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난 저렇게 웃고 있구나. 저런 분위기구나 싶은?”

    엘레나는 초상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완벽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훌륭하다.

    ‘감히 장담할 수 있어. 시대를 대표하는 명화가 탄생했음을.’

    완성된 초상을 보며 엘레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라파엘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일조한 것도 모자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명화의 모델이 그녀란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제가 본 루시아 양의 신비스러움을 고스란히 담으려고 노력했는데, 어때 보여요?”

    “여기서 제가 네라고 하면 염치없는 거겠죠?”

    엘레나가 재치 있게 맞받아치자 라파엘도 말없이 웃었다.

    “꼴값 떠네. 이거 사기라니까? 얘가 그림 속의 얘가 아니에요.”

    “…….”

    다리를 꼬고 앉아 졸고 있던 렌이 잠에서 깬 듯 어김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역사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렌의 행각에 엘레나가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선배한테 안 물었거든요?”

    “이게 무슨 예술이야. 진정성 없게. 화가 친구, 쟤 좋아해? 뻥을 쳐도 너무 세게 치잖아.”

    “아, 진짜.”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렌을 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질 때였다.

    “예술이란 그런 겁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공감하고, 아는 만큼 이해하는 거죠.”

    “너 나 가르치니?”

    렌이 삐딱하게 대꾸하자 라파엘은 아리송한 말로 화답했다.

    “어른이 되시면 이 그림도 달라 보일 겁니다.”

    “뭐?”

    렌은 한 방 먹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엘레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항상 느끼지만 라파엘은 교묘한 화법으로 렌을 농락했다. 엘레나 입장에선 볼 때마다 통쾌했다.

    “아! 선배, 예술제 출품 신청했어요?”

    “그런 것도 해야 해요?”

    라파엘은 생전 처음 그런 얘기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오늘까지 예술제 참가 신청 안 하면 출품 못 한다고요!”

    “제가 그쪽엔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엘레나가 휙 고개를 돌려 렌을 쳐다봤다.

    “지금 몇 시예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회중시계 갖고 있는 거 다 알거든요?”

    렌이 이죽거렸다.

    “있지. 있는데, 좀 상냥하게 물어봐 줄래?”

    “몇 시예요, 선배? 이렇게요?”

    엘레나가 마지못해 억양을 순화해 억지로 시간을 물었다.

    “고거지. 보자, 어? 곧 학관 문 닫을 시간이네? 십오 분 정도 남았나?”

    “뭐, 뭐라고요?”

    “와! 이러다 출품 물 건너가겠네?”

    렌은 남 일 잘 안 되는 걸 즐기는 성격이다 보니 여느 때보다 잔뜩 신이 나 보였다. 예술제를 통해 라파엘을 단숨에 예술계가 주목하는 거장으로 만들어놓으려던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처한 엘레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씨, 선배. 저 가볼게요. 지금 뛰어가면 제시간에 맞춰 신청할 수 있어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제 탓이에요. 제가 갈게요.”

    엘레나가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게 미안했는지 라파엘이 앞치마를 풀며 일어나려고 했다.

    “안 돼요! 선배는 무조건 여기 계셔야 해요. 학관에는 제가 가면 돼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제가 가도 충분한데.”

    “누구 때문에 안 돼요. 시대를 진동할 명화를 해코지할지 누가 알아요?”

    날이 잔뜩 선 엘레나가 노골적으로 렌이 의식하게끔 쳐다보며 말을 툭툭 던졌다. 뉘앙스와 시선만으로도 그 인간이 렌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게 말이다.

    “어이가 없네. 내가 이 졸작을? 돌았니?”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렌을 뒤로하고 엘레나는 작별을 고했다.

    “제 말 알아들으셨죠? 출품 신청은 제가 할 테니, 선배는 그림을 지켜요.”

    “그럴게요.”

    라파엘은 대놓고 불만스럽게 렌을 쳐다보며 속을 뒤집었다. 이런 수고스러움을 대신해 줄 수밖에 없는 엘레나를 향한 미안함 때문인지 렌을 보는 눈길이 평소보다 원망이 깊었다.

    “와, 이런 일로 억울하긴 또 처음이네?”

    “저 갈게요, 선배. 제 초상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껏 제가 본 그림 중에서 최고예요.”

    엘레나가 양손으로 엄지까지 치켜들자 라파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엘레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실을 뛰쳐나가자 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것 봐, 도움을 준 나한테는 고맙단 인사 한마디 없잖아.”

    “안 가십니까?”

    라파엘이 덤덤히 물었다.

    “뭘 이리 대놓고 쫓아내?”

    “가셔야 제가 맘 놓고 루시아 양을 따라가죠.”

    본인의 일을 엘레나에게 맡긴 게 못내 미안한지 라파엘은 지금이라도 쫓아가고 싶었다. 그러자면 이 종잡을 수 없는 사내를 먼저 보내는 게 순서였다.

    “가긴 갈 건데,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거니 참견 말고.”

    “…….”

    “날 이렇게 악당 취급하니, 내가 제대로 시간을 알려주고 싶겠어?”

    “뭐요?”

    렌이 음흉하게 이죽거렸다.

    “쟤 저렇게 뛰어갈 필요 없다고. 학관 문 닫으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거든.”

    “하아. 당신이란 사람의 밑바닥은 대체 어디죠?”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어서 라파엘이 쳐다보자 렌은 그런 시선을 즐기는 듯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니 마음을 곱게 써야지. 큭. 수고하라고.”

    렌이 손을 흔들며 휘적휘적 화실을 나갔다. 그가 떠나고 덩그러니 화실에 홀로 남게 된 라파엘의 만면에 근심이 가득했다.

    “루시아 양은 어쩌다 저런 인간과 엮이게 되어서…….”

    라파엘이 보기에 렌과 엘레나의 사이는 너무 아슬아슬했다. 렌이 찌르는 가시에 엘레나가 언젠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마음이 쓰였다.

    “내가 귀족이었다면, 하다못해 평판이라도 있었다면 루시아 양이 저리 당하는 걸 손 놓고 보고만 있지 않아도 될 텐데.”

    비단 렌뿐만이 아니다. 화실에 처박혀 있는 날이 많았지만 전공 수업은 수강하는 만큼 라파엘도 듣는 귀가 있었다. 라인하르트 공작의 아벨라 영애가 공개적으로 엘레나를 괴롭혔고 그걸 황태자 시안이 물리친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싫다, 나만 멈춰 있는 게.”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움만 받았을 뿐 엘레나를 위해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싫어질 정도다.

    “성공하고 싶어.”

    예술제에 나가는 이유는 엘레나의 권유도 있었지만 라파엘 스스로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았다. 명성을 쌓고 귀족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예술계의 거장이 되어 엘레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꼭 자격을 갖추고 싶었다. 선후배 관계가 아닌 남자로 다가갈 수 있는 자격을.

    루시아의 초상을 내려다보는 라파엘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애틋했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그녀는 이미 삶의 전부라고 할 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끼익. 렌이 나가며 닫아두었던 나무 문이 열렸다. 그곳에 시안이 서 있었다. 라파엘이 의자에서 일어나 묵례를 했다.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대뿐인가?”

    시안은 화실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루시아 양이라면 조금 전에 갔습니다.”

    “그렇군.”

    시안의 무덤덤한 대답 속에 깔린 아쉬움을 라파엘은 놓치지 않았다.

    “그림이 완성된 것인가?”

    “네.”

    시안은 오래도록 초상을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본 루시아 영애는 이런 모습이었군. 볼수록 신비로움이 들어.”

    “전하께서는 달리 보셨다는 말로 들립니다.”

    “내가 본 루시아 영애는 참으로 이상한 여인이지. 또 신경이 쓰이고 그러다 불쑥 생각나는 그런 여인.”

    라파엘은 물끄러미 초상을 보며 엘레나에 대해 얘기하는 시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윽한 눈길과 담담하지만 그 안에 배인 애틋함을 라파엘은 알아챌 수 있었다.

    ‘설마 전하께서도 루시아 양을?’

    그 역시 저런 표정과 저런 눈빛으로 초상을 보았기에.

    라파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께선 혹시 루시아 양을 마음에 두고 계시는 건가요?”

    “…….”

    시안이 침묵하자 라파엘은 가슴이 허해지는 걸 느꼈다.

    “저는 좋아합니다. 제 작품이 세간의 인정을 받는다면 루시아 양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려고요.”

    “그 얘길 왜 나한테 하는 거지?”

    엘레나를 좋아하고 고백하는 건 라파엘의 마음이고 선택이다. 엄밀히 따지면 시안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전하는 장차 제국을 이끄실 분입니다. 세실리아에게 정략혼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시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제가 본 전하는 다른 무엇보다 제국과 황실의 번영을 우선순위에 두신 분입니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시안을 응시했다. 정면으로 시선을 두는 게 불경죄인 걸 알면서도 지금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감정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의무가 먼저시지 결코 책임이 먼저가 되실 수 없는 분이고요.”

    “그 얘기인가.”

    시안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곱씹듯이 라파엘의 말을 받았다.

    “그대도 내게 똑같은 말을 하는군.”

    똑같은 말? 또 누가 그런 말을 시안에게 했을까. 라파엘은 본능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렌.

    그간 라파엘이 지켜본 바 렌이 엘레나에게 품은 감정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분명히 악의와 적의로 엘레나를 괴롭히지만 적정선은 절대 넘지 않았다. 마치 악의와 적의로 빚어진 시비와 괴롭힘이 관심의 표현인 것처럼.

    시안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턱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다시 엘레나의 초상을 한참을 보고 나서야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대의 질문에 반박할 말이 없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 * *

    예술제가 열렸다. 무려 나흘간 예정된 예술제는 학술원 3대 축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성대했다.

    특히 수백 점이 넘게 쏟아지는 예술학부 재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중앙 도서관을 전시회장으로 탈바꿈했다. 나흘간 열람실을 이용하지 못하지만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시점이기도 하거니와 학술원 대표 축제인 만큼 불편을 토로하는 학생은 없었다.

    예술제는 3대 축제 중에서도 외부인이 가장 많이 찾는 축제였다. 이 주 뒤에 예정된 검술제는 재학생과 지인, 가족 등이 참관하며 손에 땀을 쥐는 대결을 구경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예술제는 해당 분야와 관련된 수집가, 감정사, 미술상, 투자자 등 외부인들이 많은 관심을 두고 찾았다.

    그만큼 예술제에 참가하는 예술학부 재학생들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예술제를 통해 구매 의사를 밝힌 수집가에게 작품을 팔 수도 있으며, 감정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예술계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었다.

    또 넉넉한 후원자나 투자자를 만나 졸업 후 안정적인 예술적 활동이 가능한 지원을 받는 것도 가능했다. 반대로 접근하면 예술학부 재학생뿐만 아니라 예술계 종사자들에게도 진흙 속 진주를 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떠니?”

    “황홀할 만큼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앤은 눈을 빛내며 찬사를 보냈다.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진심으로 엘레나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듣기 좋구나.”

    엘레나는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매만졌다. 잔머리를 정돈하고 마주한 거울에는 도도한 꽃이 앉아 있었다.

    예술제 동안은 교복이 아니라 사복 착용이 가능한 만큼 엘레나는 오늘을 위해 특별히 드레스를 맞추고 장신구를 구입했다. 모처럼 한껏 꾸민 엘레나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노출을 자제한 단아한 느낌의 드레스에 심플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일 정도로 고혹적인 한 송이 꽃 같았다.

    엘레나는 현숙한 기품과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의도치 않게 노출한 손목, 쇄골, 목선으로 인해 뇌쇄적인 자태까지 흘렀다.

    “빈말이라니요! 제가 사내라면 공녀 전하를 마주한 순간 숨이 멎고 말 거예요.”

    “메이, 너도 그리 생각하니?”

    뒷머리를 정돈하던 메이가 끄덕였다.

    “예, 아가씨보다 아름다운 영애를 본 적이 없어요.”

    “고맙구나.”

    엘레나는 흡족해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구두로 갈아 신고는 앤을 시켜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단정하게 펴도록 했다.

    완벽에 가깝게 채비를 마친 엘레나는 일 층으로 내려와 기숙사를 나섰다. 이미 도착해 있는 마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휴렐바드가 꾸벅 인사를 했는데 모처럼 치장에 힘을 준 엘레나의 미모에 그만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휴렐바드를 놀리듯 엘레나가 물었다.

    “경, 저 어때요? 오늘 예뻐 보이나요?”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저런. 눈이 멀면 곤란하니 조금씩 훔쳐보세요.”

    엘레나는 더없이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랐다. 여기서 중앙 도서관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한껏 치장한 만큼 마차를 타고 가는 편이 흐트러지지 않고 나을 거라 판단했다. 메이와 앤은 기숙사에 남겨두고, 엘레나는 휴렐바드만 대동한 채 마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예술제 첫날인 오늘 예술계 종사자가 가장 많이 몰릴 거야.”

    엘레나가 유독 힘을 줘서 꾸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선을 끌고 주목받기 위해서다.

    이미 예술계에서 베로니카 공녀의 작품을 보는 안목이 높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엘레나가 어느 작품을 눈여겨보는지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겠네. 수백 년 동안 지탱해 온 그림의 틀을 깬 작품이 등장했으니까. 난 가서 거들고 오기만 하면 돼.”

    라파엘의 작품은 굳이 엘레나가 나서지 않더라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작품이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놓고 보더라도 획기적인데, 그림의 한계를 넘어선 신비로움까지 담았으니 지금까지의 예술품과 궤를 달리하는 명화였다.

    엘레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얹을 참이다. 작품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베로니카 공녀가 눈여겨보고 한마디 거듦으로써 불러올 파장도 결코 적지 않을 테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마차가 중앙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미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 짐작하게 했다.

    휴렐바드가 정중히 마차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도 되냐는 신호였다. 엘레나가 안에서 똑같이 손등으로 마차 문을 두드렸다.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자 엘레나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가는 도서관이지만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마차를 타고 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저, 저거 베로니카 공녀 아니야?”

    “맞아. 와, 미모 좀 봐. 저게 사람이야? 인형보다 더 예뻐.”

    “안목이 좋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무슨 작품을 눈여겨볼지 궁금한데?”

    “이 상황에서 작품이 눈에 들어오냐? 난 걸어 다니는 천사만 보이는데.”

    엘레나는 중앙 도서관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었다. 수수하게 교복만 입고 생활하던 때와 달리 잔뜩 꾸미고 힘을 준 만큼 그 아름다움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경, 가죠.”

    “네, 공녀 전하.”

    엘레나는 도도함과 우아함을 두루 갖춘 걸음걸이로 발을 내디뎠다. 학술원 재학생을 제외하고서도 외부인들이 많이 온 만큼 휴렐바드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뒤를 따랐다.

    중앙 도서관 내부로 들어서자 가운데 놓인 조각상을 시작으로 벽면에 예술학부 재학생들의 그림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느긋하게 눈길이 닿는 작품부터 감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엘레나의 미모를 보려는 영식들과 그녀가 무슨 작품을 관심 깊게 보는지 주목하는 예술계 종사자들, 엘레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장신구에 흥미를 갖는 영애들까지, 셀 수도 없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속된 말로 예술품을 감상하러 온 게 아니라 엘레나를 보려고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엘레나의 눈길이나 휴렐바드와 나누는 말 한마디까지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천천히 예술 작품들을 구경하던 엘레나의 걸음이 한 작품 앞에서 멈췄다. 흐르는 강물을 담은 그림이었는데 세차게 흐르는 물살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물살에서 세파가 느껴지네요.”

    “세파 말씀입니까?”

    휴렐바드가 말을 받았다.

    “잘 보면 여긴 물살이 거칠지만 갈수록 잠잠해지죠. 우리의 삶이 이러지 않을까요? 이 물살처럼 거세게 부딪치며 바다로 가고 싶어 하는.”

    “바다.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기에 가고자 하는 겁니까?”

    “안식이요.”

    엘레나의 마지막 한마디에 뒤쪽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예술계 종사들이 한낱 흘러가는 강의 그림을 인간의 삶에 빗대어 해석하는 엘레나의 식견과 깊이에 깜짝 놀란 것이다.

    “작의는 좋으나 기법이 아쉽네요. 저 물살마다 높낮이가 있고 수심이 다 다른 만큼 명암을 살렸다면 더 좋을 뻔했는데요.”

    감상을 끝낸 엘레나가 돌아서자 뒤를 따르던 예술계 종사자들이 그림 앞에 몰려들었다. ‘흐르는 강물’이라는 작품 아래 적힌 작가 이름을 메모해 뒀다가 작품을 매입하거나 후원을 위해 만날 요량이었다.

    방대한 전시 작품 중에서 엘레나가 관심을 두고 감상평을 남긴 작품은 채 열 작품도 되지 않았다. 그것들도 전시 작품 중에서 그나마 나을 뿐이지 엘레나의 눈에 찰 만한 것들은 단 한 작품도 없었다.

    ‘지겨워. 선배의 작품은 어디에 있는 거지?’

    수준 이하의 작품에 지쳐갈 때쯤 저 앞쪽에 몰려 있는 인파가 보였다.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표정만으로도 저들이 어떤 작품을 보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기네.’

    엘레나는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지금까지 걷던 걸음걸이 속도 그대로 그곳으로 향했다. 작품을 보며 웅성거리던 이들은 엘레나를 보고는 절로 뒷걸음질 치며 피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엘레나가 갖는 권위와 기품이 그들로 하여금 절로 그리하게 만들었다. 엘레나 또한 저들의 물러남을 당연시하며 그림에 다가갈 때였다.

    “……!”

    그림을 지척에 두고 엘레나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초상화의 앞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를 뵈옵니다.”

    엘레나가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예의를 갖췄다. 그러자 초상화를 빤히 보고 있던 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

    정면으로 마주한 시안의 눈길은 그간 루시아를 보던 눈빛과 사뭇 달랐다.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은 과거의 엘레나를 보던 때와 같았다. 그러나 그 눈길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대는…… 베로니카 공녀인가?”

    먼저 입술을 뗀 시안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왜 저러시지?’

    엘레나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안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늘 베로니카 행세를 하던 그녀를 무시했던 것과 달리 먼저 말을 걸지를 않나, 특유의 무표정함을 잃고 당황하는 모습까지 과거의 기억과 거리가 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참 이상한 일이다. 불과 얼마 전에 화실에서 만났는데. 베로니카의 모습으로 만나니, 감정이 과거의 연장선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의 목소리…… 아니다. 내가 착각한 것 같군.”

    시안은 알 수 없는 말을 떠들더니 몸을 휙 돌렸다. 대놓고 엘레나를 무시하는 행위였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예전부터 그래 왔었으니까.

    멀어지는 시안에게 엘레나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했다. 예전 같았으면 서운한 마음이 복받쳤겠지만 시안이 왜 대공가를 배척하고 베로니카를 미워하는지 알기에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멀찌감치에 선 시안이 가지 않고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기에 시안의 이상행동에 엘레나가 적잖이 당황했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시안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시안의 표정은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치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설마 알아보신 건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엘레나는 바로 무시했다. 가발과 안경으로 변장한 루시아와 한껏 치장한 엘레나의 미모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밖에 안 보일 만큼 차이가 컸다. 또 목소리도 나름 변조한 만큼 알아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어쨌든 베로니카의 신분으로 가진 시안과의 첫 만남은 의아함만을 남겼다. 엘레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라파엘이 그린 초상 아래 적힌 작품명을 봤다.

    ‘벨라도나(Bella donna)라니…… 선배는 날 너무 예쁘다고 생각해 주신다니까.’

    벨라도나는 제국어로 미녀를 뜻했다. 라파엘은 모델이 된 루시아의 이름을 제목에 붙이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거라는 걸 염려했었다. 아마 그걸 고려해 경칭의 의미를 담아 벨라도나라고 작품명을 붙인 듯싶다.

    “……라파엘? 왜 이런 화가가 지금껏 무명이었던 거죠?”

    한동안 초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엘레나가 벅찬 감정을 담아 토로했다. 자신의 초상을 보며 찬사를 쏟아내는 게 퍽 우스웠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경, 이 초상은 신비스러움 그 자체예요. 정숙하거나, 현숙하거나…… 레이디가 갖춰야 할 그런 걸 떠나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녹여냈어요.”

    엘레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림 자체의 완성도로도 흠잡을 게 없지만, 미술사에 획을 그은 기법을 적용했어요. 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림의 틀을 깨부쉈어요. 원근법과 명암을 표현한 기법은 정말이지…….”

    엘레나의 감상평에 귀 기울이던 예술계 종사자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들이 보기에도 미술사의 한 획을 긋고도 남을 만한 혁신적인 명화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엘레나는 그런 벨라도나에 날개를 달아주고자 호사가들에게 여지를 줄 만한 찬사를 남겼다.

    “감히 말할게요. 제가 화가라면 이 그림을 보고 나면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아요. 작품 해석이요? 무의미해요. 이 초상의 존재 자체가 치유예요.”

    * * *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선 라파엘은 벨라도나 앞에 서서 찬사를 이어가는 베로니카 공녀에게 그만 넋을 뺏기고 말았다.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취해서? 아니다. 겉모습보다는 좀 더 본질에 가까운 것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루시아 양?”

    베로니카를 바라보고 있는 라파엘의 입에서 루시아란 이름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생김새와 분위기부터 전혀 다른 두 여인이다 보니 공통점을 찾는 게 더 어려웠지만 라파엘의 눈엔 동일 인물로 보였다.

    “어, 어째서 루시아 양이 베로니카 공녀 행세를…….”

    라파엘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말을 더듬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파엘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초상을 그리기 위해 하루에도 몇 시간씩 루시아만 쳐다봤다. 남들은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사소한 외형적 특징도 자꾸 보다 보면 눈에 익게 된다.

    화장을 진하게 하든, 안경을 쓰든, 머리 색이 다르든 중요하지 않다. 눈가의 주름, 턱선, 눈매, 귀의 모양, 입술의 두께 등…… 오랜 관찰을 통해 라파엘만이 알고 있는 그녀만의 특징이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서, 설마 그녀가? 그럴 리가 없어. 없는데 어째서…….”

    라파엘은 자신이 잘못 본 거라며 끝끝내 부정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눈에 루시아와 베로니카가 겹쳐 보였다.

    베로니카는 벨라도나에 대한 호평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림에 감탄을 한 듯 살짝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단정한 어조를 유지했다. 친근한 말투를 구사하는 루시아와는 사뭇 다른 화법이었지만 본질적인 목소리의 톤과 발음을 낼 때의 습관은 빼박아 있었다. 더 이상의 부정은 무의미해 보였다.

    루시아는 베로니카다. 베로니카는 루시아다.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같은 사람이다. 충격에 휩싸인 라파엘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황에 이르렀다.

    몸을 돌려 도서관을 나왔다. 도망치듯 화실로 돌아온 라파엘이 이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의 현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멍했다.

    “겨우…….”

    용기를 내려고 했는데.

    라파엘은 그럴 각오마저 잃어버렸다. 베로니카 공녀는 아득히 먼 여자였다. 그가 시대를 주름잡는 거장이 된다 해도 손을 뻗을 수도, 뻗는다 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 그런 곳에 있는 여인이었다. 문득 시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정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저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라파엘의 심장에 쿡 박혔다. 비단 시안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감정의 책임엔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가짐도 필요했다. 감히 쳐다봐서도 안 될 사람이라면 감정의 강요를 상대가 어찌 느낄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난…….”

    라파엘은 씁쓸하게 말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지하 복도 창 너머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이 자취를 감추고 화실에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사위의 분간이 어려워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라파엘이 몸을 일으키더니 화실 안 랜턴에 전부 불을 붙였다. 그러더니 벽면에 걸어두었던 작업용 앞치마를 단단히 착용했다. 팔레트를 한 손에 쥐고 이젤 앞에 앉은 라파엘이 새하얀 캔버스를 응시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손에 붓을 든 라파엘이 유화물감을 적셔 캔버스에 찍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담아서.

    * * *

    이번 학술원 예술제가 불러온 예술계의 파장은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웠다. 수집가나 예술을 사랑하는 귀족, 화가들이 받은 충격은 그 이상이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원근법과 명암법은 여태까지 예술계에서 취급되던 그림들의 수준을 몇 단계나 뛰어넘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대단했다.

    반대로 몇몇 미술상은 이런 작품이 발표돼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림에 옮기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그림들이 주를 이뤘던 예술계에서 벨라도나의 등장은 이전 작품들의 가치를 떨어뜨려 폭락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우려를 표한 것이다. 썩어빠진 미술계의 종사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자들이었다.

    문제는 벨라도나가 지금까지 지탱해 온 미술계의 생태계를 파괴하고도 남을 명화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예술계에 영향력을 지닌 몇몇 미술상이나 감정사, 수집가 등은 하루라도 빨리 이 작품을 매입하여 발표를 막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벨라도나의 등장으로 기존 작품들의 가치가 떨어지고, 수집가들이 매입을 꺼리게 된다면 그 자체로도 큰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로니카 공녀 때문이다.

    나흘 연속 도서관을 찾은 그녀는 라파엘의 작품 벨라도나에 대한 찬사를 이어갔다. 가만히 보고 있어도 상처가 치유되는 신비로운 작품이라며 역사에 길이 남을 명화가 될 거라 장담했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이 지닌 예술계의 영향력과 지위는 그림에 관심이 없던 귀족들마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베로니카 공녀가 저리 극찬을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학술원으로 몰려들었다.

    암암리에 학술원과 접촉해 벨라도나를 서둘러 매입해 공식적인 예술계 발표 시기를 늦추려던 예술계 거물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첫날보다 둘째 날에 더 많은 인파가 몰렸으며, 마지막 나흘째 되는 날에는 앞선 사흘간 학술원을 찾았던 수보다 더 많은 귀족이 벨라도나를 감상하고자 찾았다. 수도에 거주하는 자라면 신분을 떠나 입에 오르내리고도 남는 화제의 중심에 오른 것이다.

    “계획대로야.”

    엘레나는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자 매우 흡족했다. 무명 예술학부 재학생에 불과했던 라파엘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예술계에 혁명을 이끌고 온 신예 거장을 잡기 위해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술상과 후원자 등이 접촉을 시도한 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선배가 딴 데랑 계약하면 안 되는데.”

    살짝 우려가 들긴 했지만 라파엘이라면 반드시 자기와 상의를 하고 결정하리라고 믿었다.

    “하, 예술제가 끝난 지 닷새나 지났는데 도통 수그러들지 않으니.”

    기숙사 창가에 걸터앉아 있는 엘레나의 표정에 답답함이 배었다. 벨라도나의 모델인 루시아가 하루아침에 학술원의 담장을 넘어 예술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아벨라와 일도 있고 시안과 렌이 엮이며 입방아에 올랐던 터였는데, 벨라도나의 유명세로 인해 신비스러운 여학생 루시아의 실물을 보고자 하는 자들이 늘어나며 엘레나의 골머리를 썩였다. 일개 시녀에 불과한 앤마저도 그 소문을 접할 정도였다.

    “아가씨, 그 소문 들으셨어요?”

    “소문?”

    “벨라도나의 모델이요. 글쎄, 학술원 유령이래요.”

    엘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자 앤이 얼른 말을 이었다.

    “학술원에 재학 중인 건 맞는데 강의를 들은 적이 없대요. 또 기숙사에서 잔 적도 없고. 그림에 담긴 신비스러움이 유령의 기운이래요. 무섭지 않아요?”

    엘레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수상스러울 수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와전이 되어 소문이 돌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한동안 루시아 행세하기는 힘들 것 같네.’

    주변의 관심이 최고조인 이럴 때 루시아로 활동하는 건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컸다. 반강제적으로 칩거에 들어간 엘레나는 소문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엘레나의 부탁을 받은 에밀리오는 카스톨 상회의 문양이 찍힌 사륜마차를 타고 학관을 방문했다. 루시아가 건강상의 이유로 그간 강의를 수강하지 못한 점과 기숙사에서 지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루시아가 유령이니 뭐니 하는 소문도 잠잠해졌다. 신비감이 사라지자 관심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몸을 사렸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인 까닭이다.

    쏴아아아아.

    보름이 넘도록 칩거를 이어갈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마. 계절이 변하면서 찾아온 굵은 빗줄기와 먹구름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야!”

    기숙사를 나서 기록실에 도착한 엘레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루시아로 변장했다. 사전에 메이를 시켜 가져다 놓으라 한 우비를 뒤집어쓰고는 도서관을 나섰다. 폭우 덕분에 거리는 한산했다. 서측 별관에 들어선 엘레나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화실에 도착했다.

    “선배, 저 왔어요!”

    나무 문을 연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눅눅한 냄새가 싹 가시고 싱그러운 꽃 냄새가 풀풀 풍겼다. 귀족, 미술상, 후원자, 수집가 등이 보낸 화환들로 화실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했다.

    “루시아 양?”

    이젤 너머의 라파엘이 아는 척을 할 때였다.

    “와, 선배. 이건 다 뭐예요?”

    벽면 쪽 나무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서신을 발견한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고급스러운 봉투에 애정이 듬뿍 담긴 글자들, 연서였다.

    ‘선배의 인기가 이 정도일 줄이야.’

    엘레나는 되레 얼떨떨했다. 귀족들이야 너 나 할 것 없이 관심을 갖고 접근한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이미 예술계에 라파엘이란 이름이 주는 영향력과 벨라도나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없으니까. 그런데 이 정도로 영애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구애를 받을 줄 몰랐다. 그것도 평민이 아니라 귀족 여학생들에게. 편지 대부분은 귀족 영애들이 보낸 것이었다.

    ‘수도에서도 알 만한 가문의 여식이 보낸 것도 있어. 그것도 꽤 많이.’

    제국 내 웬만한 가문의 문양을 다 기억하고 있는 엘레나였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귀족 영애가 일개 평민에게 이런 연서를 쓴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계산이 섰다는 의미였다.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남자로 여긴 거지. 예술 하는 남자는 매력적이기도 하고.’

    라파엘이 잘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어디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다. 궁정 화가로 있던 시절에도 종종 영애들이 라파엘에게 호감을 표하며 추파를 던졌다.

    “한 통 읽어봤는데 너무 낯간지러워서 아직 다 못 읽고 있어요.”

    라파엘이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엘레나도 옅게 웃으며 옆자리에 섰다.

    “뭐 그리고 계세요?”

    “신작인데, 한번 볼래요?”

    라파엘이 권하자 엘레나가 끄덕이며 뒤로 돌아가서 섰다. 그간 초상 벨라도나의 모델로 유명세를 치르는 바람에 엘레나는 루시아로 변장하지 못했다. 그사이 라파엘은 그림에만 몰두했는지 그림은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성스럽게 느껴져요. 그리고 경건해지네요.”

    신과 인간 주제로 다룬 신화적인 그림이었다. 현숙하고 자애로운 여신이 멀리 서서 돌아보고 있었고, 그 뒤를 서너 명의 인간이 쫓아가며 안간힘을 써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고 있었다. 엘레나는 곰곰이 작품을 들여다보다가 감상을 얘기했다.

    “왠지 신을 좇는 인간의 허망함을 담은 것 같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긴 힘든 그림이네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요?”

    “제 해석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대단해요. 인물들이 꼭 살아 있는 거 같달까? 생기로워요. 작품명이 뭐예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라파엘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경’이요.”

    간절히 그리워하며 그것만을 생각하는 의미다.

    “인간이 여신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리신 거구나.”

    “한낱 인간에게 여신은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요? 손을 뻗어 잡을 수도 없고,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대상.”

    그림 속 여신을 좇는 네 사내 중 여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남자에게 라파엘의 시선이 꽂혔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라파엘이 투영된 화자였다. 사내는 자애로운 여신을. 라파엘은 루시아를. 아니, 그녀의 진짜 이름이 루시아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못해 진짜 이름을 몰랐다면 용기라도 내봤을 텐데. 용기를 내는 것조차 무책임하다는 걸 알아버렸기에 그림 속 사내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씁쓸함마저 엘레나에게 부담이 될까 봐 라파엘은 억지로 웃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엘레나는 말갛게 웃으며 라파엘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그림이에요. 위대한 명화는 한 장면에 멈춰 있지만 감상하는 사람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딱 그래요. 이 그림이.”

    “근래 귀가 따갑도록 칭찬을 들었는데, 루시아 양의 칭찬이 가장 듣기 좋네요.”

    “정말요? 그럼 욕심내야겠다.”

    엘레나의 모호한 말에 라파엘이 갸웃거렸다.

    “욕심이요? 아! 드릴게요.”

    “네? 뭘요?”

    “동경이요. 완성되는 즉시 드릴게요. 벨라도나도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학관에서 돌려받으면 루시아 양에게 주려고 했어요.”

    말에 담긴 의도를 오해한 라파엘이 작품을 준다고 하자 엘레나가 당혹했다.

    “서, 선배, 전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에요. 선배가 고생해서 그린 그림을 제가 왜 받아요?”

    “루시아 양이니까요.”

    라파엘이 눈을 맞췄다. 당황한 엘레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루시아 양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이 그림도 없었을 거예요.”

    “제 얘긴 그게 아니라…… 하여간, 선배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엘레나는 피식 웃었다. 그제야 라파엘이 아차 싶었는지 되물었다.

    “제가 오해한 건가요?”

    “아뇨, 오해하게 들리게끔 말한 제 잘못이죠. 그보다요, 선배.”

    엘레나가 뜨스한 눈길로 라파엘을 바라봤다.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자 라파엘의 심장이 고장 난 듯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끊임없이 통제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심장박동은 더 빨라졌다.

    “우리 꽤 잘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아요?”

    “……!”

    라파엘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꽤 잘 어울리다니. 곡해해서 듣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사심이 담긴 쪽으로 해석이 기울다 보니 도무지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무, 무슨 말을.”

    라파엘은 떨리는 심장 탓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저랑 손잡으실래요?”

    “뭐, 뭘 잡는다고요?”

    되묻는 라파엘의 심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이요.”

    라파엘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저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라파엘이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생각한 엘레나가 그간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웅대한 계획을 밝혔다.

    “조만간 수도에 살롱을 열 계획이에요. 거기에 선배를 초대하고 싶어요. 첫 번째로요.”

    “……살롱에 저를요?”

    “살롱은 사상과 학문, 예술 등을 토론하고 거장들의 신작을 발표하고 전시하는 문화 중심지가 될 곳이에요.”

    “그런 곳을 루시아 양이 만든다고요?”

    “이미 짓고 있어요. 상당 부분 진척됐죠.”

    라파엘은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신분이 베로니카 공녀인 걸 알았을 때도 경악스러웠지만, 그 외에도 살롱 같은 엄청난 걸 계획하고 있단 게 놀라웠다.

    “저는 선배의 그림이 신호탄이라고 생각해요. 새 시대를 여는.”

    “새 시대요?”

    “선배가 벨라도나로 예술계의 고정관념과 틀을 깬 것처럼 민중도 많을 걸 깨닫고 변화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거예요.”

    솔직히 말해 라파엘은 지금 엘레나가 하는 말의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한낱 그림이 세상을 변화시킬 거라니. 엘레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허황된 자라며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낸 당사자가 엘레나이기에 달리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저 종달새처럼 작은 체구로 저리 커 보일 수 있을까?’

    라파엘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처음엔 베로니카 공녀라는 신분이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가장 큰 장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체로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거인이었다.

    “선배가 제 살롱에 와주셨으면 해요. 저와 함께하신다면 작품에 무한한 지원도 약속해 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아, 너무 제 얘기만 했죠?”

    엘레나가 너무 적극적으로 구애했나 싶어 잠시 눈치를 살폈다.

    “당장 대답을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절대 강요는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아셨죠?”

    “아까요.”

    “네?”

    “제가 첫 번째라고 했죠? 그 살롱에 초대된 거장 중에서.”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가 첫 번째예요. 그리고 제가 직접 초대하는 마지막 예술가가 될 거예요.”

    “마지막이요?”

    “살롱 내에 전문 아트 중개사분이 계세요. 아! 아트 중개사는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조력자라고 보시면 돼요.”

    대화할수록 엘레나가 오랜 시간 체계적으로 살롱을 준비했단 인상을 받았다.

    “갈게요.”

    “네?”

    엘레나가 놀라 쳐다봤다. 라파엘은 속마음을 숨긴 채 미소를 지었다.

    “두 번째면 안 가려고 했는데, 첫 번째라면서요.”

    “서, 선배?”

    이렇게 흔쾌히 답변을 줄지 몰랐던 터라 엘레나의 눈망울이 커졌다.

    “루시아 양의 살롱으로 갈게요.”

    “정말 괜찮겠어요? 제가 너무 강요해서 섣불리 결정을 내리시는 게 아니죠?”

    엘레나의 우려 섞인 말에 라파엘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시잖아요, 제 성격.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에요. 제가 포문을 열었다는 새 시대,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선배…….”

    라파엘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레나의 시선에 씁쓸해졌다. 저 눈길을 바란 게 아니기에. 하지만 이 이상의 감정을 바라는 건 욕심이라는 걸 알기에 그는 억지로 웃었다.

    “잘 부탁드려요, 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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