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9/30)
  • 제10장 위기

    “선배, 대공가에 L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내주세요.”

    엘레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칼리프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눈을 빛냈다.

    “드디어 협상에 들어가는 거야?”

    “아뇨. 전에도 말했지만 협상은 없어요. 땅을 가져가고 싶으면 제가 원하는 돈을 지불해야만 할 거예요.”

    엘레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끙, 대체 얼마를 부르려고 그러는데?”

    “매입가의 백 배.”

    “뭐, 뭐?”

    놀란 나머지 칼리프가 말을 더듬었다. 기껏해야 열 배, 정말 많아도 스무 배는 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아니, 현실적으로 그것도 비싸다고 여겼다. 근데 백 배라니. 엘레나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지만 이번만큼은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너 팔 생각 없지? 대공가가 미쳤냐? 그 가격에 매매하게?”

    “살 거예요. 아니, 살 수밖에 없어요.”

    “너 무슨 자신감인데?”

    칼리프가 인상을 썼다. 늘 상식을 초월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엘레나였기에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저 가격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엘레나는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서신을 하나 내밀었다.

    “대공가에 보내는 초안이에요. 아버지에게 대필가를 고용해서 필체 추적당하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는 말씀도 전해주세요.”

    “나 읽어봐도 되지?”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칼리프는 서신을 열어봤다. 지금까지 엘레나의 행적을 볼 때 근거 없이 저 가격에 팔려는 건 아닐 거다. 마지막 글자까지 읽고 난 칼리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가 매수한 땅의 값어치가 이 정도로 오른다고?”

    “네, 노블레스 거리가 완성되면 수도의 나머지 땅값을 다 합쳐도 그보다 가치가 떨어질 거예요.”

    “모, 못 믿겠어. 아니, 안 믿겨.”

    “때론 현실이 더 비이성적일 때도 있죠.”

    “정말 이렇게 되면 대공가의 부로 제국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실제 그랬다. 지금도 황실 위에 대공가란 말이 나돌 정도인데, 이러면 대공가는 노블레스 거리 완공 이후로는 나머지 4대 가문이 힘을 모아도 견제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재력을 갖추게 된다.

    ‘그 전에 막아야 해.’

    재력은 곧 힘이다. 리아브릭은 노블레스 거리에서 얻은 수익을 제3기사단과 제4기사단을 창단하는 데 투자하며 황실조차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까지 갖추게 된다. 저때가 되면 엘레나가 날고 길며 용을 써도 복수는 요원하다. 그걸 알기에 엘레나는 사사건건 개입해 피해를 주며, 노블레스 거리에 타격을 줬다. 빈민촌 토지 매매도 그 일환이었다.

    “이제 알겠죠? 왜 저들이 제가 제시한 가격에 살 수밖에 없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받아들이기에 스케일이 좀 크네.”

    칼리프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서신을 고이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아버지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절대 꼬리가 밟혀선 안 된다는 말 전해주세요.”

    “알았어.”

    “매매 대금도 마찬가지예요. 대리인을 거래 중인 타 상단 인물로 보내서 금화와 제국의 화폐 프랑, 왕국의 센텀 등으로 나눠 받아야 한다고 해주세요. 이 정도만 언급해도 아버지가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시겠지만.”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에밀리오가 그녀를 돕게 된 건 천운이었다. 칼리프가 능력이 있는 건 맞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분야가 한정적이었다. 대공가를 상대로 이런 거래를 성사시키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그건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인 판을 읽을 수 있는 눈은 있지만 직접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실무적인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에밀리오의 존재는 더없이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거래만 하더라도 그렇다. 대공가에게 받을 대금의 추적을 막으려면 세탁이 필수적이었다. 대리인을 내세워 타 상단을 이용해 대금을 받고 카스톨 상회를 통해 세탁하면 리아브릭이라도 추적이 어려웠다.

    전화위복. 렌으로 인해 위험에 빠지긴 했지만, 그 덕분에 에밀리오 같은 조력자를 얻었으니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어? 어쨌든 이건 거래잖아. 문제 될 소지도 없어 보이는데.”

    “…….”

    “왜 그렇게 봐?”

    “이럴 때 보면 참 순진한 거 같기도 해서요.”

    칼리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무시를 당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야. 넌 가끔 날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알아?”

    “좋은 의미였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할게요. 대공가는 선배가 아는 것만큼 공명정대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엘레나가 저렇게까지 얘기하니 칼리프도 더 뭐라 타박할 순 없었는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기 적힌 리아브릭은 누구냐? 처음 듣는 이름인데.”

    “대공가 브레인.”

    아직까지 리아브릭의 존재감은 귀족 사회에 국한되어 있었다. ‘음모의 리아브릭’의 명성이 제국에 진동하는 건 노블레스 거리 개발 사업이 성공하고 대공가를 절대적 위치까지 앉혀놓은 후다.

    “이 사람이? 근데 이름이 좀 독특하네. 리아브릭, 리아브릭. 남자야?”

    “여자예요.”

    “정말?”

    “네. 아주 교활한 여자죠.”

    엘레나는 슬쩍 창밖을 보며 리아브릭을 떠올렸다. 이 서신을 받고 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르긴 몰라도 꽤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 늘 주도권을 쥐고 흔들던 입장이었을 테니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휘둘리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쾌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질 공산이 컸다. 그리고 엘레나는 서신에 노골적으로 리아브릭이란 이름을 거론했다. 당신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단 티를 내 흔들기 위함이다.

    ‘난 당신을 속속들이 알아. 하지만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지.’

    이 차이는 크다. 리아브릭이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 한들 적을 알지 못하니 대처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당신에 대해 많이 알수록, 당신은 주변을 의심하겠지. 어디선가 계속 정보가 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엘레나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고도의 심리전을 벌였다. 미래를 알고 있는 엘레나가 사사건건 개입해 훼방을 놓다 보면 리아브릭이라 해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측근들만 알고 있는 비밀을 엘레나가 꿰뚫어 보고 선수를 치니 정보가 유출됐다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한테 그랬지. 누군갈 부수려면 주변 사람을 먼저 쳐내라고. 그래야 눈이 멀고 귀를 닫고 이기적이게 된다고.’

    자랑은 아니지만 엘레나는 리아브릭의 심계를 고스란히 배웠다. 그 심계를 기반으로 사교계의 정점에 오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리아브릭에게 배운 방식으로 그녀의 근간을 흔들 때다.

    ‘올가미.’

    리아브릭은 모르겠지만 이미 엘레나는 덫을 쳤다. 어쩌면 지금쯤 그 덫에 빠져 수족들을 쳐내는 우를 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이 서신을 받고 일그러질 얼굴을 직접 못 보는 게 아쉽네. 좋은 구경거리였을 텐데.’

    엘레나는 옅게 웃었다. 면전에서 볼 수는 없지만 찌푸려진 리아브릭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 * *

    L이 보낸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리아브릭의 표정이 굴욕감으로 일그러졌다. 감정을 철저하게 숨기는 데 능숙한 그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통제가 되지 않는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새로이 리아브릭의 수족이 된 루미너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합니까?”

    “직접 봐.”

    리아브릭은 서신을 던지다시피 주곤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냉정하기로 정평이 난 그녀답지 않게 꽤 격앙되어 보였다.

    “제까짓 게 감히 날 협박해?”

    리아브릭이 분을 삭이는 동안 L에게서 온 서신을 읽은 두 청년이 그것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L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해야겠습니다. 이자,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대륙 공용 화폐인 금화와 제국의 프랑, 왕국의 센텀, 3국 연합의 화폐까지…… 매매 대금을 받는 방식이 더없이 치밀합니다. 이런 식의 세탁이면 추적도 불가능합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L이 제시한 가격이 리아브릭의 예상 매입가를 훨씬 초월했다. L이 보유한 토지를 제외한 나머지 빈민가 전체 토지 매입 비용을 넘어설 만큼 큰 액수였다.

    “추가 협상은 없어? 매매하지 않겠다면 영원히 팔지 않겠다고?”

    리아브릭은 서신에 적힌 말을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그냥 일방적 통보라면 이렇게까지 분을 이기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리아브릭이 이토록 흥분한 것은 그다음 문구 때문이었다.

    “그러니 잘 생각하고 처신하라고, 리아브릭? 하, 감히 날 들먹여?”

    엘레나는 서신에서 대놓고 리아브릭의 이름을 언급했다. 마치 대공가 내에서 이번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주체가 그녀라는 걸 노골적으로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아틸이 눈치를 보며 생각을 밝혔다.

    “매매가를 높게 책정한 이유로 오 년 뒤 이 거리가 완성됐을 때 오를 땅값을 반영했다고 적었는데 이건 저희가 예측한 땅값과 얼추 비슷합니다.”

    이게 무서운 점이다. L은 서신에 터무니없을 만큼 비싼 값에 땅을 파는 게 아니라고 명시했다. 대공가가 빈민가를 개발한 다음 상승할 땅값을 반영한 매우 적절한 액수라고 덧붙였는데 대공가의 예측과 정확히 일치했다.

    리아브릭은 겨우 감정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사업 계획서를 기반으로 작성한 토지 예상액을 L이 앉아서 예측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건…….”

    “난 대공가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쪽에 더 마음이 기우는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고, 예측 요소도 다 다른데 오 년 뒤의 땅값을 리아브릭의 예상과 비슷하게 내다봤다? 리아브릭은 믿을 수 없었다.

    “저 역시 자작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아틸이 생각을 밝혔다. 잠자코 있던 루미너스도 말을 보탰다.

    “그렇다면 전임자들이 유출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리아브릭도 이 부분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증거가 없다. 또 대공가 내부에서 일하는 시녀부터 하인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점검했지만 외부와 접촉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 정보가 샜는데 범인을 알 수 없으니 리아브릭은 답답했다.

    “분명히 내부에 간자가 있어. 긴장을 풀어주면 꼬리를 드러낼 거야. 무조건 잡아서 끌고 와.”

    “네, 자작님.”

    리아브릭은 시선을 L에게서 온 서신으로 옮겼다. 분하고 짜증 났지만 L의 요구에 대한 답을 결정해야 했다.

    “생각들을 얘기해 봐.”

    “……굴욕적이겠지만 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L의 행동이나 말투로 짐작건대 매입을 하지 않으면 정말 팔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매입하셔야 합니다.”

    두 사람은 L이 제시한 가격에 땅을 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업 계획에 차질이 가는 것보다 그편이 손해를 덜 보는 일이라 판단했다.

    “하.”

    리아브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견을 묻긴 했지만 이미 리아브릭도 매입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리아브릭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L이 매입한 토지들은 노블레스 거리의 중심 지역이었다. 이미 L이 보유한 땅 이외의 빈민가 토지 매입도 끝난 상황이었다. 또 외적으로 투자된 액수 역시 막대했다. 여기서 사업을 엎는 게 손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매입해.”

    고민은 길었지만 결단은 빨랐다. 이미 프란체 대공은 그녀에게 노블레스 거리 개발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리아브릭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만큼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했다. 괜히 L이 가격을 올려 더 큰 손해를 입기 전에 거래를 성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 예상외의 지출이 너무 커져 버렸어.’

    천문학적인 자산을 지닌 대공가라 하지만 노블레스 거리에 쏟아붓는 돈은 제국의 한 해 예산에 맞먹을 만큼 엄청났다. 자칫 이번 사업이 실패할 경우 대공가의 근간이 휘청거릴 수 있다. 향후 오 년은 침체기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공가 입장에서도 사활을 건 사업이다.

    물론 성공했을 때의 반사이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투자 금액 대비 적게는 세 배, 많게는 열 배 가까이 대공가의 자산이 증식할 거라 내다봤다. 성공 가능성을 본 리아브릭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 과정도 순조로웠고 느낌도 좋았다. L이 찬물을 끼얹기 전까지.

    ‘L. 이 수모는 잊지 않겠어.’

    리아브릭은 가슴에 L이란 이름을 새기고 또 아로새겼다. 언젠가 오늘의 일을 꼭 되갚아줄 생각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당했던 수십, 아니, 수백 배 더 절망적으로 말이다.

    * * *

    “매매 끝났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대공가에서 받은 매매 대금 세탁 중이라신다.”

    칼리프의 경과보고에 엘레나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치명적인 타격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큰 금전적 손실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대공가에는 손실을, 난 막대한 이익을 얻었어.’

    리아브릭과 처음으로 맞붙은 전초전은 엘레나의 완승이었다. 전리품도 훌륭했다. 미술상 칼리프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나 에밀리오와 동업하며 쓸 수 있게 된 카스톨 상회의 자금 외적으로 L의 이름으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제 예상대로 됐네요.”

    “그래, 네 예상대로 됐지. 돼서 부럽다. 똥값에 산 땅을 금값, 아니, 다이아값을 받고 팔아치우다니. 아니, 이런 고급 정보는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야?”

    칼리프가 궁금한 것도 당연했다. 학술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도 않으면서 앞일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으니까.

    “비밀이에요.”

    “나도 네가 알려줄 거라고 기대 안 했다.”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투덜거리는 칼리프의 반응이 애같이 느껴져서다.

    “밖의 동향이나 더 얘기해 주세요. 궁금해요.”

    “이것 봐. 항상 손해 보는 건 나라니까. 별거 없어. 빈민가 땅 매입을 끝낸 대공가가 공식적으로 재개발하겠다고 발표했어.”

    엘레나가 예상했던 흐름이었다. 빈민가 토지 매입이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낙후된 건물들을 헐고 토지를 다지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대거 참여해 세부 설계안까지 짜둔 만큼 건축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나 갑자기 싸한 느낌이 왔어.”

    “뭐가요?”

    칼리프의 뜬금없는 말에 엘레나가 시선을 맞췄다.

    “잘 들어봐. 란돌하고 자주 만나다 보니 듣는 것도 많고 내가 건축에 대해서 따로 공부를 좀 하고 있거든?”

    “좋은 자세네요. 근데 그게 왜요?”

    “건축의 기틀은 목재지만 결국은 석재가 축을 이뤄. 고급 건물일수록 대리석이 많이 들어가지. 이 대리석이라는 게 종류도 많고 불순물 여부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야. 또 구하기도 힘들어.”

    엘레나는 묵묵하게 앉아 칼리프의 말을 경청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꽤 심도 있는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대공가는 노블레스 거리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귀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네.”

    “그럼 유명 건축가가 동원될 거고 당연히 고급 건물이 지어지겠지? 대리석으로 멋을 낸. 한두 채도 아니고 이걸로 다 짓는다고 치면 어마어마한 대리석이 필요할 거야.”

    “…….”

    “만약에 우리가 그 대리석을 미리 매입해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천연 대리석 채굴량에는 한계가 있고 대리석은 계속 필요하고…… 비싼 값에 되팔 수 있지 않을까?”

    칼리프는 노블레스 거리 개발에 관련된 정보를 기반으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엘레나를 통해 많은 걸 배우기도 했고, L을 통해 소개받은 시대의 거장들과 교류하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시장을 읽는 눈도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엘레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제법이네요, 선배.”

    “그지? 이렇게 하면 돈 벌 수 있는 거 맞지?”

    “네, 그게 사업이에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였다.

    ‘잘 성장하고 있네. 기쁘게.’

    칼리프의 성장을 보며 엘레나는 내심 흐뭇해했다. 아직은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이대로만 쭉 커준다면 미술상, 아트 중개사, 투자자를 겸한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것이다.

    “나 방금 느낌 왔어. 진짜 오싹하게.”

    “또요?”

    “너 천연 대리석 이미 매입했지?”

    “…….”

    엘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칼리프가 학을 뗐다.

    “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진짜 산 거야? 언제? 나한테는 그런 말 한마디도 없었잖아.”

    “우리 대화 주제를 바꿀까요?”

    “와, 배신감. 너 내가 말 안 했으면 끝까지 말 안 하려 했지? 그지?”

    칼리프의 볼이 실룩거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찔러본 건데 이미 천연 대리석 매입까지 손을 썼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칼리프는 자신도 이젠 성장해 앞서가는 엘레나에게 다가갔다고 느꼈건만, 엘레나는 이미 저 앞에서 뛰어가고 있었다.

    “얘기해 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요. 선배가 괜히 사업에 눈 돌리지 말고 아트 중개사 역할에 집중했으면 해서 그랬어요.”

    엘레나는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원 역사에서 칼리프는 미술 중개사로 그 명성을 떨쳤던 만큼 괜히 사업에 재능을 허비하지 않고 성장하길 기대했다. 지금까지는 엘레나의 바람대로 잘 해줬기에 내심 흐뭇했다. 문제는 외적으로 시장을 보는 식견과 시야가 넓어지면서 상재에도 눈을 떴다는 건데, 그건 엘레나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좋아. 네가 날 배려했다고 치고. 그럼 이거만 말해줘. 언제 산 거냐?”

    “빈민가 땅 매입할 때요. 다 같이.”

    칼리프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더니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에밀리오 님한테 전해준 그 서신에 이 얘기들이 다 적혀 있었다? 네가 보라고 했는데, 내가 안 봤던 그 서신에?”

    “네.”

    “…….”

    칼리프는 충격을 받은 듯 넋이 나가 보였다. 엘레나가 좋은 취지로 빈민가 땅을 사서 자선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동참했더라면 자신 역시 크게 한몫 챙겼을 것이다.

    “아…… 이래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하나 보다.”

    “제가 그래서 복을 많이 받잖아요.”

    “너 갈수록 얄미워지는 거 아냐?”

    엘레나는 피식 웃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칼리프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복 좀 나눠 줄까 하는데.”

    “정말? 큰 건 있어?”

    칼리프가 눈을 반짝반짝 뜨며 엘레나를 보았다.

    엘레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에게 신상명세서 한 장을 내밀었다. 메이를 통해 L의 이름으로 후원하던 시대적 거장 중 한 명이다.

    “디아스?”

    “란돌 님에 버금가는 천재 건축가예요.”

    “뭐?”

    칼리프는 귀를 의심하더니 신상명세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란돌의 천재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였기에 란돌에 버금가는 천재 건축가란 말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란돌 님이 새로운 공법이나 건축양식이 성당, 황궁, 살롱에 적합하다면 디아즈는 바실리카를 짓는 데 최적화된 건축양식을 지녔어요.”

    “바실리카면……상업적 용도의 다목적 거대 건축물을 말하는 거야?”

    “건축 공부하시더니 아시네요? 네, 맞아요. 극장이나 집회장, 밀집 상가 같은 거죠.”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 역사에서 디아즈는 세속적인 건축물을 주로 지었다. 그가 의뢰를 받아 지은 귀족 저택의 장엄함에 감탄한 리아브릭이 노블레스 거리의 메인 거리 건축을 맡긴 건 유명한 일화였다.

    ‘그야말로 웅장하고 장엄한 거대 건축물이었어. 황궁에 버금갈 만한.’

    디아즈의 건축물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거대 건축물은 건축 시일도 길고 공법도 난해하여 성당이나 황궁, 귀족 저택을 제외하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디아즈는 그런 편견을 깼다. 노블레스 거리의 메인 거리를 끼고 좌우로 길쭉한 장방형 다목적 거대 건축물을 지었다. 아치 형태의 기둥을 쭉 나열하고 창문을 강조한 팔라디오 건축양식을 활용해 황궁에 버금갈 만큼 웅장함과 장엄함을 살렸는데, 처음 그곳에 가면 그 규모에 압도당하여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노블레스 거리의 성공은 귀족들이 중요시하는 품격과 위엄을 두루 갖춘 디아즈의 거대 건축물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엘레나는 세기적인 건축가 디아즈를 리아브릭이 채가기 전에 데려올 계획이었다.

    “란돌에 맞먹는 천재라니…… 빨리 만나보고 싶다.”

    칼리프의 눈에 선망의 빛을 띤 기대가 어렸다. 엘레나는 저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트 중개사로 활동하던 그가 뛰어난 예술가를 발견했을 때 보이던 눈빛이었다.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사생활이 문란해서 그렇지.”

    “안 그래도 여기 그렇게 쓰여 있네. 여자 편력이 좀 화려하다고.”

    “제가 디아즈의 뒤를 봐준 것도 여자관계 정리였어요.”

    엘레나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참 옥에 티라고 할까. L의 이름으로 시대적 거장들을 후원하고 뒤를 돌봐주던 메이가 유일하게 못 하겠다고 하소연을 했던 인물이 바로 이 디아즈였다.

    생계가 어려우면 지원을 해주면 되고, 건강이 안 좋으면 의사를 불러와 치료를 시키면 그만이다. 근데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서 일으키는 분란은 중재하기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메이가 중간에서 질투와 배신감에 치를 떤 여자들을 어르고 달래서 중재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난잡했다.

    “하, 여자 문제는 진짜 애매한데. 이 친구는 감당하기 벅찰 거 같다는 느낌이 팍팍 온다.”

    “그러니 딴짓 못 하게 묶어놔야죠.”

    “어떻게? 좋은 방법 있어?”

    “아버지한테 살롱 주변 땅을 대규모로 매입해 달라고 했던 거 기억하죠?”

    빈민가 땅을 선매입 후 처분한 건 시작에 불과했다. 엘레나는 살롱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개발해 노블레스 거리를 견제하는 문화 중심지로 키울 계획이었다. 노블레스 거리를 넘어서는 새 시대의 문화 거점으로. 살롱의 건설이 그 전초전이었다면, 디아즈의 영입은 보이지 않는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노블레스 거리를 악화시키면서 살롱 일대를 단숨에 수도의 중심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이다.

    “너 설마…… 그 땅 위에?”

    “남자가 딴 데 한눈 안 팔려면 집중할 만한 게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 부지에 바실리카를 짓게 해요. 한 이 년 일만 죽어라 하면서 머리에서 여자란 단어가 지워지게.”

    “너 진짜 사악하다.”

    잠시나마 디아즈를 측은하게 여겼던 칼리프가 서둘러 떠났다. 여성 편력이 지저분하든 뭘 하든 아트 중개사로서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건축가 디아즈를 만날 생각에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도서관을 나선 엘레나는 서측 별관의 라파엘 화실로 방향을 잡았다. 역사적인 명화가 한 폭 완성되는 데 적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소요된다. 물감이 자연 건조되면 그 위에 덧칠하는 방식으로 유화를 그리다 보니 작업 시간 외적으로 기다림의 시간도 길었다.

    엘레나는 유화물감이 마르는 주기에 맞춰 화실을 찾았다. 어쩌다 보니 라파엘에게 그림 배우는 일은 뒷전으로 밀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역시 라파엘이 슬럼프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느낌이 좋아.’

    아직 섣부른 단정이기는 했지만 엘레나는 잘하면 라파엘이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엘레나의 초상을 그릴 때 보이는 엄청난 집중력과 그림에 대한 열정, 눈가 옆의 주름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관찰력까지. 지난 삶에서 봤던 시대의 거장 라파엘의 참모습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한껏 들뜬 기분을 안고 화실에 도착했다.

    “저 왔어요, 선배.”

    인사를 하며 안쪽으로 들어서는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받는 라파엘의 옆에서 이 불편한 위화감의 정체가 아는 척을 했다.

    “어서 와. 기다렸잖아.”

    “렌 선배.”

    순간 치미는 불쾌한 감정을 이기지 못한 엘레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번 일로 완벽하게 렌의 의심을 벗어났다고 여겼는데, 왜 또 나타났는지. 그것도 하필이면 엘레나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편히 있을 수 있는 화실에.

    “왜 서 있어? 아! 색다른 장소에서 보니 더 반가워서 그러냐?”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렌의 히죽히죽 웃는 면전에 대놓고 엘레나가 짜증 섞인 투로 물었다.

    “왜 있긴. 내가 어디 못 올 데 왔나?”

    “…….”

    “나 신경 쓰지 말라고. 보기와 달리 내가 좀 교양 있는 성품이라 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렌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뒷짐을 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실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런 건들건들한 모습이 여간 신경 쓰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예요?”

    “꽤 됐어요. 피곤하다고 의자에 기대어 한숨 자더니, 이제는 저러고 있네요.”

    엘레나가 없는 동안 라파엘은 알게 모르게 시달렸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하기야 학술원 최고의 망나니와 한 공간에 있는데 신경 쓰이지 않으면 거짓말이리라.

    “저 때문이에요.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요.”

    “저보다 루시아 양이 더 걱정이네요. 아무래도 친구 삼긴 좀 꺼려지는 분이니.”

    “친한 사이 아니에요. 무시하면 그만이고.”

    라파엘이 자신보다 더 엘레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렌의 악명이 워낙 자자하다 보니 엘레나가 시달릴 게 걱정되는 눈치였다.

    “너희 나 안 보여? 내 얘길 너무 대놓고 하는데?”

    “들으라고 한 얘기는 아닌데.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엘레나가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맞받아치자 렌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것 봐, 말만 존댓말이지 선배에 대한 존중이 없어요. 건방지게. 아니, 원래부터 그랬나?”

    “착각하셨네요. 저 예의 굉장히 바른 편인데.”

    “착각?”

    렌이 픽 비웃었다.

    “올해 들었던 얘기 중 제일 웃기네. 근데 뭐 어쩌겠어?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뭐라고요?”

    “모르는 척하면 속아주고.”

    렌이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시선을 그림으로 돌렸다.

    ‘뭐? 속아줘?’

    엘레나는 렌이 흘리듯이 한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뒷짐을 진 채 화실을 돌아다니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림이 죄다 침침한 게, 호러네. 호러.”

    “…….”

    “이봐, 인체 해부도. 쟤가 살인자일 수도 있다니까?”

    렌을 보고 있자니, 사람의 신경을 긁는 방법이 이렇게까지 창의적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참다못한 엘레나가 욱한 마음에 한 소리 하려고 하자 라파엘이 말렸다.

    “괜한 데 힘 빼지 말고 우린 하던 일이나 해요. 저러다 말겠죠.”

    “하지만.”

    “어차피 집중하면 신경도 안 쓰여요.”

    라파엘이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자 엘레나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라파엘과 이젤을 마주 보다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 다소곳이 앉았다.

    라파엘이 팔레트의 유화물감을 붓으로 찍고는 캔버스에 가져갔다. 그는 순식간에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더니 거침없이 붓을 움직였다.

    그러길 얼마가 지났을까. 뒤에 있던 렌이 의도적으로 책상 위에 있던 철제 받침대를 탁 쳐서 떨어뜨렸다.

    쨍!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화실을 크게 울렸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신경을 긁는 소리다 보니 온몸에 소름 끼치듯 잔상이 남았다.

    그러나 라파엘은 예외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엘레나와 캔버스를 번갈아 보며 바삐 붓을 움직였다. 참 놀라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오.”

    렌도 제법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라파엘의 뒤로 와서 섰다. 그가 팔짱을 끼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작업 중인 엘레나의 초상을 빤히 보더니 지적했다.

    “이거 추상화 아냐? 쟤 하나도 안 닮았는데.”

    라파엘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 붓을 바삐 움직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눈빛이 너무 선하네. 쟤 안경 벗으면 되게 날카롭게 생겼다?”

    “그런가요?”

    무덤덤하게 받아치던 라파엘이 반문하며 슬쩍 몸을 돌렸다. 그러자 라파엘의 손에 들려 있던 팔레트가 순간 균형을 잃으며 렌 쪽으로 쏟아졌다.

    렌이 놀라울 만큼 기민한 동작으로 몸을 틀었지만 그만 흘러내리며 튀어버린 유화물감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이건 뭐지?”

    렌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교복에 빗방울처럼 튄 물감을 쳐다봤다. 하필이면 밝은 물감이 튀어서 지저분하고 보기 흉했다.

    “아까워서 어쩌죠?”

    “너 이 교복이 얼마짜리인 줄 아냐?”

    렌의 으름장에 라파엘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교복 말고, 물감이요.”

    “뭐?”

    “이 물감이 캔버스에 묻었다면 무언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이 됐을 텐데. 당신 옷에 묻어 겨우 얼룩밖에 되지 않으니 아깝네요.”

    쾅!

    렌이 위협적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깜짝 놀란 엘레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안쪽 나무가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나한테 시비 거는 거, 감당되겠냐?”

    “예술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실수지 고의는 아니었고요.”

    협박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은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변명했다. 그 태연함에 오히려 화를 내는 렌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 얘는 또 뭐지?”

    “…….”

    “뭐 이런 신선한 방법으로 내 속을 뒤집어?”

    라파엘의 대처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는지 렌이 자꾸 피식거렸다. 이런 상황마저도 그는 즐기고 있었다.

    “하, 정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엘레나가 이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싶어서 나서려고 할 때였다.

    “뭘 또 너까지 나서려고 해? 안 그래도 열 받는데. 그냥 앉아 있지?”

    “선배.”

    “째려보는 거, 무서워. 악당은 이래서 힘들다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련다.”

    렌이 휘적휘적 걸으며 화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더니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고.”

    이윽고 복도에서 렌이 부르는 걸로 짐작되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잠잠해질 즈음 엘레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선배, 너무 위험했어요. 저 인간은 상대할수록 손해예요. 그냥 무시해요.”

    “저자, 왜 루시아 양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죠?”

    라파엘은 되레 엘레나를 걱정했다.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제가 맘에 안 드나 봐요. 원래 그런 인간이잖아요.”

    “원래 그런 인간. 그렇긴 하군요.”

    라파엘과 렌은 동년배로 올해 졸업반이었다. 비록 학부는 달랐지만 학술원 생활을 하다 보면 렌에 대한 소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을 수 있었다. 렌이 꼬투리를 잡아 재학생들을 괴롭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목격했다.

    “저대로 둬도 정말 괜찮겠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의가 느껴지는 게 루시아 양을 해코지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라파엘은 은연중에 렌이 풍기던 적의를 읽고 엘레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렌에게 잘못 찍혀 학술원을 그만둔 학생이 적지 않기에 염려가 됐다.

    “뭐 어쩌겠어요.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고. 씩씩하게 맞서면 되지 않겠어요?”

    엘레나가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괜히 저 때문에 라파엘에게 피해를 준 것 같다는 미안함에 더 환하게.

    * * *

    엘레나는 약속된 주기보다 빨리 화실을 방문하고자 기록실을 나섰다. 지난번 방문 때 불청객 렌이 훼방을 놓은 까닭에 라파엘의 집중력이 떨어져 생각보다 작업의 진척이 느려졌다.

    ‘개자식. 내가 널 너무 얕봤어. 설마 화실까지 찾아와서 진상을 부릴 줄이야.’

    엘레나는 그때의 일만 떠올리면 라파엘을 볼 면목이 없었다. 라파엘의 작업 효율이 떨어진 데는 렌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화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슬럼프를 이겨내고 시대적 거장으로 성장할지도 모르는 과도기다. 최근 들어 슬럼프 극복의 기미를 보였는데 렌이 껴들며 초를 치고 말았다. 엘레나는 렌의 훼방과 방해가 자신에게서 비롯된 만큼 너무 미안했다.

    ‘진짜 어쩌지? 나야 그렇다 쳐도 선배의 그림에 방해가 되면 안 되는데.’

    도서관을 나선 엘레나가 별관 지척에 이르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 낯익은 여학생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벨라 파벌에 속해 미첼과 함께 엘레나를 핍박하던 사나운 인상의 여학생들이었다.

    “또 보네?”

    “오늘은 인사 좀 하려나 했는데. 역시 되바라진 건 맞아야 고쳐진다는 게 맞나 봐.”

    “하아.”

    엘레나는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걸 느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또야?’

    지난 삶에서는 베로니카로만 지내다 보니 이런 어쭙잖은 시비를 걸어온 동기나 선배들이 전무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대공가에 찍히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근데 루시아는 아니었다.

    엘레나가 별반 반응이 없자 덩치 큰 여학생이 무시당했다고 느꼈는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고개에 힘 좀 빼지?”

    “또 무시하네? 허! 넌 우리 얘기가 말 같지 않니?”

    엘레나는 마지못해 고개만 까닥 숙였다. 형식적인 예의랄까. 사이좋게 지내기 그른 이상 괜히 저자세로 나가봐야 저들의 기만 살려주는 꼴이었다.

    “안녕하시고요. 저 지금 바쁜데, 용건만 간단히 해주면 안 될까요?”

    “얘, 얘 지금 뭐라고 하니?”

    “네가 아주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렌 선배가 흑기사 해줄까 봐 그거 믿고 날뛰는 거니?”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엘레나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살다 살다 그 개자식이 흑기사란 소릴 다 들어보네.’

    남이 보기에는 괴롭힘을 당하던 엘레나를 타이밍 좋게 구해 갔으니 그래 보일 수도 있겠다. 막상 당사자가 돼서 그 뒷일까지 경험해 봐야 저런 말을 안 할 텐데.

    “흑기사 탐나면 제가 소개시켜 드려요? 양보 가능한데.”

    “뭐? 뭐가 어째?”

    “얘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진심으로 렌을 넘길 수만 있다면 넘기고 싶은 엘레나였다.

    “진짜 너는 교육이 필요해. 선배를 아주 개똥으로 알잖아.”

    “표현이 저속하시네요. 교양 없게.”

    “교, 교양? 하! 너 정말 안 되겠다. 따라와. 우리 좀 보자.”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엘레나는 따박따박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답을 했다. 사실 저들이 시키는 대로 예예 하다가, 안 그러겠다고 빌고 한두 대 맞아주고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그걸로 끝낼 리가 없지.’

    사교계의 수많은 영애를 발아래 꿇리고 정점으로 군림하던 엘레나였다. 그렇기에 영애들의 심리가 어떤지 훤히 꿰고 있었다. 장담하는데 엘레나가 한 번이라도 고개를 숙이는 순간 괴롭힘은 도를 넘어서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해질 것이다. 한번 발밑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찍어 누르려는 게 저들의 습성이니까.

    “싫어도 가야 할걸? 널 보고 싶어 하는 게 좀 위에 계신 분이거든.”

    사사건건 엘레나와 부딪쳤던 덩치 큰 여학생이 손짓하자 별관 안에서 대여섯 명의 여학생이 몰려나와 엘레나의 주변을 에워쌌다. 강제로 팔짱을 껴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앞과 뒤를 막아 시야마저 차단하더니 끌고 가다시피 엘레나를 데려갔다.

    처음엔 반항할까 고심했지만 관뒀다. 숫자가 너무 많아 힘으로 뿌리치기도 버거워 보였거니와 생각도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이런 수준의 영애들과 부딪쳐 봐야 시간 낭비였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아벨라 하고 결판을 보는 편이 낫겠어.’

    아벨라를 생각하니 엘레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덩치 큰 여학생은 아벨라를 무슨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대단한 영애처럼 포장했지만, 베로니카와 비하면 한 수, 아니, 두 수는 접어줘도 모자랄 아랫사람이다. 그게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후계자이자, 엘레나가 행세 중인 베로니카 공녀의 위치였다.

    ‘……베로니카였다면 애초에 이런 시비에 걸리지도 않았겠지.’

    그렇다 한들 엘레나는 딱히 주눅 들 이유가 없었다. 루시아가 신분에서 밀리긴 하지만 이곳은 학술원이었다. 교칙이 우선시되는 만큼 권력을 이용한 핍박은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아벨라 파벌의 여학생들을 모아서 엘레나를 해코지하는 게 다다.

    “데려왔어요, 영애.”

    별관 옆, 우거진 나무들 너머의 공터에 아벨라가 보였다. 그녀는 우아하게 팔짱을 낀 채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뒤로 전에 엘레나를 핍박했던 미첼도 함께 있었다. 엘레나를 강제로 끌고 온 여학생들이 아벨라의 앞에 던지다시피 밀며 팔짱을 풀었다. 엘레나는 흐트러진 교복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정면을 응시했다.

    “너니?”

    “저를 보고 싶어 하셨다면서요, 아벨라 영애?”

    “얘 당돌한 거 봐.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따박따박 말대답까지 하고.”

    아벨라가 삐딱하게 툭 말을 던지더니 팔짱을 끼고 엘레나를 중심으로 돌며 위아래로 훑었다. 오만한 눈길 속에는 엘레나를 향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참 못났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매력은 없고. 생기다 말았네.”

    아벨라의 노골적인 비하에 여학생들이 입을 가리고는 뭐가 좋은지 킥킥거리며 비웃었다. 그러나 정작 모욕을 당한 엘레나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딱히 놀라거나 충격도 받지 않았다. 아벨라의 저속한 어휘와 수준은 익히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간계에 능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넌 그 혀 때문에 크게 곤욕을 치렀을 거야.’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까닭에 아벨라는 저보다 직위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취급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행세를 하던 엘레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사근사근했던 것과 지금 루시아 변장을 한 엘레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법한 대목이다.

    그러한 기준은 파벌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영애들을 대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족을 자처하던 미첼만 하더라도 매정하게 버림받지 않았던가.

    그런 교활한 성격의 그녀는 아비인 크롬 공작에게 물려받은 간계를 앞세워 엘레나와 사교계를 양분하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황비 선임식 최종심에까지 올라 경합할 정도였다.

    “전하와 저녁 식사를 했다며? 전하께서는 참 성품도 좋으시지. 얼마나 없어 보였으면 동정심에 그러시겠어.”

    아벨라가 모욕적인 비하를 하면 뒤에서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동조하며 깔깔거렸다. 사교계에서 많이 하는 기죽이기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하찮은 방법에 기가 꺾일 엘레나가 아니다.

    “그러게요. 제가 얼마나 딱해 보였는지 정식으로 저녁 식사 초대를 해주시던데요. 속도 깊으시지.”

    “얘 착각하는 거 봐. 그거 동정이라니까?”

    “왜 그러세요? 전하께 한 번도 정식으로 식사 초대 못 받아본 사람처럼.”

    “……!”

    엘레나의 비아냥거림에 순간 아벨라의 얼굴이 악마처럼 일그러졌다. 베로니카 앞에서라면 참고 넘겼을 테지만 상대가 일개 상인의 딸인 루시아다 보니 꽤나 모욕적으로 들렸다.

    “네가 렌 선배를 믿고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아뇨, 잘 보이는데요.”

    “뭐?”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그 선배가 딱히 믿을 만한 분은 아니라서요.”

    아벨라의 표정이 시뻘게졌다. 동시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들의 입이 경악으로 떡 벌어졌다.

    아벨라가 누군가. 제국의 4대 가문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장녀다. 그런 그녀의 신경을 이토록 긁은 여자는 태어난 이래 엘레나가 처음이었다.

    “이, 이! 감히 천한 평민 년 주제에!”

    엘레나의 말대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벨라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미 분노에 이성까지 마비가 된 듯 뒤를 생각하지 않고 엘레나의 뺨을 내려쳤다.

    탁!

    그러나 아벨라의 손바닥은 엘레나의 뺨에 닿지 못했다. 허공에서 있는 힘껏 후려치는 순간 엘레나가 손을 뻗어 손목을 딱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너 이거 안 놔?”

    아벨라가 부들부들 손을 떨며 경고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주눅이 들 엘레나가 아니다.

    “선배라면 맞을 거 뻔히 알면서도 놓겠어요?”

    “너 진짜.”

    “선배야말로 처신을 좀 잘하는 게 어때요?”

    “감히 나를 훈계해? 네 주제에?”

    아벨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엘레나가 어금니를 꽉 물고 힘을 줘 움직이지 못하게 강제했다. 그러자 넋 놓고 보고 있던 여학생들이 더는 엘레나의 만행을 못 봐주겠다는 듯 나서려 했다.

    “저, 저게!”

    “감히 영애께 무슨 무례한 짓을!”

    아벨라를 수족처럼 따르는 몇몇 여학생이 점수를 딸 기회로 여겼는지 막 발을 뗄 때였다.

    “대화 중인 거 안 보여요?”

    엘레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봤다.

    멈칫.

    더없이 무심한 눈길에 여학생들은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감정적인 영애들에게 무감정한 엘레나의 눈길은 낯설고 감당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 엘레나는 다시 시선을 아벨라에게 돌렸다.

    “이러니까 전하께서 선배를 보지 않는 거예요.”

    “뭐?”

    “차라리 이럴 시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세요. 왜 전하께서 선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지.”

    아벨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전하께서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선배가 축복받고 태어났다는 가문을 탓하세요.”

    엘레나는 꼭 시안의 애정을 갈구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얘기하듯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인성을 떠나서 시안을 사모하는 아벨라의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아벨라가 귀담아들을 일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과거의 엘레나와 같은 실수를 그녀가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서.

    “네, 네년이 진정 죽고 싶어서 돌았구나!”

    분을 이기지 못한 아벨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거칠게 몸을 움직이며 엘레나에게 압박당하고 있던 손목을 떼어냈다.

    “뭘 가만히들 보고 있어! 당장 이년을 뭉개. 내가 책임질 거니까, 다시는 저 건방진 입을 함부로 못 놀리게 부수라고!”

    약이 바싹 오른 아벨라가 윽박지르자 엘레나의 기세에 눌려 머뭇거리던 여학생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엘레나는 겁을 먹기는커녕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여학생들을 쳐다봤다.

    “이거 퇴학감인 거 아시죠?”

    “뭐?”

    “아벨라 영애는 늘 선배들만 내세우고 나서질 않죠. 왜 그럴까요?”

    엘레나가 던지는 의문에 여학생들의 눈에 혼란이 깃들었다.

    “딱하시네요. 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충성한다고 아벨라 영애가 뒷일을 책임질 것 같아요?”

    “…….”

    “지금까지 행실을 봤으면 아실 텐데요. 이 일로 선배들이 퇴학을 당해도 그녀가 지켜줄 거 같아요? 아뇨, 외면하고 버릴 거예요. 애초에 책임 따위 질 생각도 없을 테니까.”

    엘레나는 저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아벨라를 향한 불안과 불신에 불을 지폈다. 여기 모인 대다수는 공작가라는 배경에 혹해 아벨라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만하고 남을 함부로 여기는 성정인지라 인망이 없었다.

    지난 삶에서도 엘레나는 아벨라의 이런 약점을 파고들어 그녀의 파벌에 분란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추종자들을 회유했다. 그때는 치밀한 계획하에 일을 진행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언변으로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차이였다.

    “잘 생각해 보면 분명히 있을걸요? 그녀를 따르다가 잘못을 다 뒤집어쓰고 학술원에서 쫓겨난 선배가요.”

    “……!”

    엘레나가 불씨를 던지자 정말 그랬던 적이 있었던지, 여학생들이 더는 다가오지 않고 머뭇거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아벨라도 그런 이상 낌새를 눈치챘는지 더 위압적이면서도 고압적으로 재촉했다.

    “너희 뭐 하는 거야? 나 아벨라야. 내 뒤에 라인하르트 공작가가 있고, 나한테만 잘 보여도 너희 가문의 성세가 바뀐다는 걸 잊었어!”

    “믿지 마세요. 그녀가 어떤지 이미 겪었잖아요.”

    엘레나는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런 때일수록 흥분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상대로 하여금 더 신뢰를 느끼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퇴학? 학술원 졸업장 따위 무슨 의미가 있는데? 내가 책임져. 내 신뢰가 더 값어치 있다는 걸 너희도 잘 알잖아.”

    “그래, 맞아. 아벨라 영애가 언제 틀린 말 했어?”

    사사건건 엘레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덩치의 여학생이 동조하고 나섰다. 정말 학술원 졸업장보다 아벨라의 신뢰가 더 자신과 가문에 득이라고 판단했는지 흔들리는 다른 여학생들마저 독려했다.

    그 모습에 엘레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저번 만남 때 미첼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저 덩치의 여학생은 버림받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아벨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난 영애를 믿어.”

    “나도.”

    몇몇 여학생이 동조하고 나서서 엘레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망설이던 여학생들도 마지못해 움직이며 엘레나를 에워쌌다.

    “건방진 년. 너는 정신을 좀 차려야 해.”

    “이거 놓지?”

    엘레나가 거칠게 저항했지만 덩치 큰 여학생과 몇몇이 어깨를 누르며 팔짱을 끼자 몸을 트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꿇려.”

    완벽히 주도권을 찾았다고 느낀 아벨라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여학생들은 그 말에 따라 엘레나의 무릎을 굽히더니 어깨를 짓눌렀다. 무릎이 땅에 닿자 아벨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안경도 벗겨.”

    엘레나가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억지로 벗기자 아벨라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걸어오더니 엘레나의 턱을 쥐었다.

    “날 모욕한 대가가 뭔지 평생 잊지 못하게 해주지.”

    아벨라가 다시 흰 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조금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엘레나에게 막혔지만 단단히 포박당한 지금 그녀의 손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한 대로는 안 끝낼 거야. 오랫동안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거고. 기왕이면 흉터도 남겨줄까 해.”

    벼르고 있던 아벨라가 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손을 힘껏 내려쳤다. 엘레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최악에 가까운 상황까지 내몰렸지만 더 독기가 오른 듯 눈을 부릅뜨고 아벨라를 노려봤다.

    ‘하, 몸까지 쓰고 싶진 않았는데.’

    비록 덩치는 작았지만 엘레나는 또래의 영애들에 비해 억셌다. 곱게 자란 영애들과 달리 평민과 다름없이 성장한 엘레나는 힘을 쓸 일이 많았다. 엘레나가 옥죄고 있는 팔을 뿌리치려던 때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에 아벨라의 손바닥이 엘레나의 뺨에 닿기 직전 멈췄다.

    “도대체 누가?”

    아벨라는 두 번이나 손찌검이 무산된 데 짜증을 느끼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상황의 엘레나가 턱을 들어 아벨라의 표정을 살폈다. 못 볼 거라도 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만 뻥긋거리는 모습이 꼭 금붕어 같았다.

    “저, 전하.”

    “……!”

    아벨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덩달아 엘레나의 표정도 굳었다. 워낙 경황이 없던 중이라 목소리만으로는 개입한 사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하가 오셨다고? 여기에?’

    차라리 렌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보니 엘레나를 미행하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시안은 예상 밖이었다. 이 타이밍에 등장한 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당황한 건 아벨라뿐이 아닌 듯 여학생들도 고개를 푹 숙였다. 삽시간에 정숙해진 주변은 좀 전까지 엘레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상황과 대조적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체격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벨라가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예를 갖췄다. 엘레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 시안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하얗게 질린 아벨라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사모하는 남자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키고 난처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벨라 영애, 이게 무슨 짓이지?”

    “전하, 그것이…….”

    “다시 묻겠다. 뭘 하고 있는지 설명해라.”

    ‘아.’

    시안의 싸늘한 목소리가 엘레나의 가슴을 울렸다. 그래도 한때나마 부부로 살았기에 지금 그가 화가 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벨라는 난처함에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변명했다.

    “……신입생이 선후배 간의 존중을 저버리고 하극상을 저지르기에 벌을 주고 있었습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건 영애들의 일이니 전하께 물러나기를 청하옵니다.”

    아벨라는 세 치 혀를 교묘하게 놀렸다. 엘레나를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로 매도하는 것과 동시에 학술원에서 사교계로 이어지는 영애들의 일로 몰아가 시안이 낄 일이 아니라며 선을 그은 것이다.

    “…….”

    시안이 아벨라와 엘레나를 번갈아 보았다. 덩치 있는 여학생의 팔뚝에 가려 시안이 보이지 않는 엘레나와 달리 시야가 높은 시안은 엘레나를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애는 말을 참 잘하는군.”

    “그저 있는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이니 오해가 없으시길.”

    “오해라.”

    시안이 짧게 말을 읊조리더니 이내 생각을 밝혔다.

    “그 말을 내게 믿으라는 건가?”

    “저, 전하.”

    아벨라의 목소리가 당황해서 올라갔다. 엘레나를 억압하고 있던 여학생들도 그런 시안의 반응에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아는 루시아 영애는 그런 여인이 아니다. 예법을 깊이 이해하고 때론 귀족의 모범으로 삼고 싶을 만큼 귀족답지. 또 옳은 것이라 여기면 그것이 무엇이든 직설적으로 직언하는 솔직한 여인이다.”

    ‘아.’

    시안의 저 말을 듣는 순간 엘레나는 울컥 감정이 치밀 뻔했다. 어렴풋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억지로 외면했다. 지난 삶의 상처가 너무 깊기에 모른 척했다. 그런데 시안은 진심으로 엘레나를 대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저, 전하께서는 지금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라인하르트 영애.”

    시안은 그녀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성으로 불렀다. 그 거리감이 아벨라에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

    “진정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하?”

    아벨라는 애처롭게 시안의 부정을 바랐다. 그녀를 따르는 파벌 앞에서 시안의 말 한마디에 체면과 자존심이 달라질 수 있었다. 또 엘레나보다 자신을 더 아끼고 위하길 바라는 알량한 바람도 섞여 있었다.

    “이미 내 뜻은 밝힌 걸로 아는데.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나?”

    “정녕…….”

    “물러나라. 그리고 다신 루시아 영애를 건드리지 마라.”

    파고들 여지를 주지 않는 시안의 경고에 아벨라의 입술이 떨렸다. 생전 처음 겪는 모욕과 망신에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벨라는 묵례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곤 돌아서서 가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여학생들은 난처하게 눈치를 보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서라.”

    “저, 저요?”

    개중 시안의 지목을 받은 여학생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벨라에게 기생해 뭐라도 받아먹고자 하는 하급 귀족 출신의 그녀에게 황태자 시안은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그것. 그건 영애의 것이 아닐 텐데?”

    시안이 눈길이 닿은 여학생의 손에는 뿔테 안경이 쥐어져 있었다.

    “여, 여기요.”

    안경을 시안에게 건넨 여학생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시안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향했다. 너무 빤한 시선에 무안함이 들 때쯤 시안이 말했다.

    “괜찮은가?”

    평소처럼 시안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 속에 담긴 걱정과 우려를 읽을 수 있었다.

    “전하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다행이군. 그대의 것이다.”

    “……!”

    시안은 손에 쥐고 있던 안경을 손수 엘레나의 얼굴에 씌워주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상냥한 손길로. 그 낯선 모습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질적인 감정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엘레나는 외면했다.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엘레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시안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엘레나로서도 꽤 곤혹스럽고 난감했으리라.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네?”

    “그날 화실에서의 대화를 다 들은 건가?”

    엘레나가 대처할 시간도 없이 시안이 지난 일을 꺼내며 훅 들어왔다.

    ‘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망설이던 엘레나는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엘레나는 처음부터 다 엿들었음을 고백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레나를 구해주고 진심 어린 걱정을 하는 그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렇군. 근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묻는다니요, 뭘?”

    대화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엘레나가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뭐라 반응을 보이던 시안이 금세 누그러졌다.

    ‘왜 저러시지?’

    한 번도 그의 평정이 깨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엘레나로서는 너무도 생소한 반응이었다. 시안은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화실에 가고 싶었으나 갈 수가 없었다. 그대 때문에.”

    “저 때문에요?”

    엘레나는 도통 시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대화를 엿들은 무례를 범한 건 엘레나였다. 눈치를 봐도 엘레나가 봐야 했고, 잘잘못을 따지면 엘레나가 잘못한 게 맞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 시안의 이런 행동이나 말이 엘레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대가 쭉 마음에 걸렸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지금 왜 이러시는지요.”

    “…….”

    시안이 대답 대신 엘레나와 눈을 맞췄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길은 복잡해 보였다.

    “그대가 모른다 하니 서운하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전하.”

    “참 많은 생각을 하였는데, 지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군.”

    엘레나의 착각이었을까. 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미비하게 올라갔다고 느낀 것은.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구나. 속도 없이.”

    “……!”

    엘레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 *

    화실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종종 팔레트의 유화물감을 붓에 묻혀 캔버스에 찍을 때마다 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숨소리가 다였다. 원칙적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화실 안의 풍경이었다.

    모델로서 자세가 무너지지 않게 신경을 쓰는 엘레나.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아내고자 노력하는 라파엘.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불청객 렌이 화실을 찾아와서 시비를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봐, 화가 친구. 이게 어딜 봐서 쟤야. 하나도 안 닮았잖아. 너무 미화한 거 아니야.”

    ‘개자식.’

    엘레나가 속으로 화를 삭이며 코로 숨을 뱉었다. 정말 렌을 보고 있자면 사람의 속을 뒤집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창의적으로 시비를 건다.

    “초상화의 기본은 현실 반영인데, 이래서 화가로 먹고살겠어?”

    “…….”

    “쟤 민낯 봤어? 어휴. 한숨 나오게 생겼다니까?”

    렌은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들며 엘레나를 자극했다. 뭔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이죽거리며 시비를 거는데 그게 엘레나의 피를 거꾸로 솟게 했다.

    “지금 모습 그대로도 예쁘다고 생각합니다만.”

    “화가 친구가 눈이 낮구나?”

    “그렇다고 치죠.”

    경이로운 건 라파엘의 집중력이다. 렌이 화실을 찾아 훼방을 놓는 횟수가 늘어나자 아예 무시하며 그림에 집중하는 방법을 터득해 버렸다. 최근 들어서는 고도의 집중을 유지하면서 렌의 시비에 대꾸해 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인간의 잠재력이 이렇게 무서워. 화가 친구, 나한테 감사해야 해. 대화하면서 그림까지 그릴 수 있게 해줬잖아. 안 그래?”

    “루시아 양, 한번 와서 볼래요?”

    라파엘이 렌의 말을 무시하며 엘레나를 향해 말했다.

    “지금요?”

    “네, 생각보다 진척이 돼서 보여드리고 싶네요.”

    최근 엘레나는 초상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혹여 자신이 보여달라고 하면 라파엘이 부담감을 느낄까 싶어서다. 궁금해도 꾹 참았는데 라파엘이 먼저 와 보길 바랐다. 나름 부담감을 내려놓은 게 아닌가 싶어 엘레나도 흔쾌히 보러 갔다.

    “그럼 볼게요. 이거 은근히 기대되네.”

    엘레나가 이젤을 끼고 돌아 라파엘의 뒤에 섰다. 라파엘 너머의 캔버스에 그려진 초상화를 일견한 엘레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직은 미완성이니 감안하고 봐주세요.”

    엘레나는 뿔테 안경을 올려 쓰고는 찬찬히 그림을 감상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내가 이렇게 싱그러웠나?’

    초상을 통해 본 엘레나의 모습은 정숙하면서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살짝 띤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편안함을 준달까. 분명한 건 베로니카 행세를 할 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인상이 초상에 담겨 있었다.

    “어떠세요?”

    “저답지 않아서 놀라고 있었어요.”

    “사기라니까? 이건 쟤가 아니야.”

    엘레나의 솔직한 발언에 뒤에 있던 렌이 거들었다.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말했죠. 빛을 봤다고. 전 그게 오묘한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정숙하지만 편안하고, 기품 넘치지만 해맑고. 그 신비함을 다 담고자 했어요.”

    “그만. 얼굴이 화끈거려서 못 듣겠어요.”

    엘레나가 손사래를 치자 라파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캔버스로 시선을 돌렸다.

    “진정성이란 거, 조금은 담긴 것 같지 않아요?”

    “네, 느껴져요. 너무 잘.”

    엘레나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확신했다. 라파엘이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지난 삶에서 라파엘의 명화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적인 친근감, 신비로운 따스함이 고스란히 초상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축하해요, 선배. 슬럼프 탈출한 걸.”

    “루시아 양 덕이에요. 덕분에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약속이요?”

    “예술제 출품이요. 마무리 작업 끝내면 얼추 맞을 것 같아요.”

    엘레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내심 바라고 있긴 했지만 정말 라파엘의 작품을 예술제에 출품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심장이 뛰었다.

    엘레나는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혁신이라고. 예술계가 발칵 뒤집힐 거라고. 단순한 초상으로 보이지만 라파엘은 한 폭의 그림으로 구시대적인 틀과 획일화된 기법을 활용한 표현의 한계를 깼다. 외형을 화폭에 담으려는 초상의 한계를 깨고 모델의 삶과 인생마저 담으려 했다.

    ‘무려 이 년이야. 원 역사보다 이 년을 빨리 앞당겨 세상에 등장하는 거야.’

    라파엘을 선두 주자로 L의 후원을 받던 시대의 거장들이 합류할 예정이다. 란돌이 건축 중인 살롱이 완성되는 순간 건축계가 술렁거릴 것이다. 디아즈의 바실리카는 어떻고, 혁명적 디자이너 크리스티나의 의복은 또 어떤가. 천재 작곡가 첸토니아의 음악이 공개되고, 새 시대의 태풍이라 불렸던 연설가 겸 사상가 릴 푸치니의 등장은 숨죽이고 있던 민중들이 들고일어나게 할 것이다. 곧 있으면 열린다, 새 시대가.

    “와, 빛이래. 빛. 나 지금 닭살 돋은 거 아냐? 너희 이거 차도살인이야. 귀를 더럽혀서 날 죽이려고 했잖아.”

    “…….”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도 렌은 한결같이 굴며 초를 쳤다. 한번 개자식은 영원한 개자식이란 말이 절로 입안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이 열리며 예상치 못한 얼굴이 방문했다. 시안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엘레나와 라파엘이 일어나 공손하게 맞았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긴 했지만 종종 화실을 찾았었던 만큼 크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대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화실 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 렌을 발견한 시안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저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는데요. 그러는 전하야말로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신지?”

    “괴롭히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시안은 대놓고 렌에게 날을 세웠다.

    “워워. 진정하시고요. 우리 화해해서 요새 친하게 지내는 중이라고요. 안 그래요, 후배님?”

    “…….”

    “이 상황에서 네가 무시하면 내가 좀 그렇지.”

    엘레나가 대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렌은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자 시안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대는 괜찮은 것이냐?”

    “저요? 네, 뭐. 괜찮은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시안의 질문에 엘레나가 적잖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렇군.”

    오간 대화는 짧았지만, 시안이 엘레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감한 자는 화실 안에 없었다.

    “뭐지. 나만 지금 기분 별로였나?”

    “…….”

    묘한 위화감에 렌은 노골적으로 이죽거렸고, 라파엘은 입을 다물고 말을 아꼈다. 반응은 달랐지만 뭔가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가장 곤란한 건 중간에 낀 엘레나였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시안의 진심 어린 마음에 엘레나는 고마움과 동시에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큰 혼란을 느꼈다. 엘레나는 눈앞의 시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쳐다봤다. 회귀하고 학술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난 삶의 시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과거의 흉터가 욱신거리며 가시로 푹푹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안을 마주하고 대하는 게 아프지 않았다. 아까도 그랬다. 우연처럼 나타나 아벨라로부터 구해줬을 때 너무 고마웠고 반가웠다.

    엘레나의 사고가 깊어질 즈음, 한 뼘 정도 열려 있던 나무 문이 열리더니 세실리아가 활기차게 들어왔다.

    “나 왔어. 오늘도 화실에 처박혀 그림에 매진하고 있을 너희를 위해 샌드위치를 잔뜩 싸 왔…… 어? 어! 저, 전하께서 계셨네요?”

    시안에게 인사를 올린 세실리아가 화실 구석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렌을 발견하고는 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술학부 렌 선배님?”

    “그게 내 이름이긴 하지. 통성명해서 영광이야, 세실리아 영애.”

    렌은 이미 세실리아를 오가며 봤었는지 히죽 웃으며 친한 척 굴었다. 세실리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저번 일로 시안을 대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학술원 최고의 망나니 렌까지 있으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야, 이 눅눅한 지하실에 있는 멤버들이 뭐 이리 화려해?”

    새 얼굴의 등장에 신이 난 렌이 손가락으로 한 명씩 지목했다.

    “장차 제국을 이끄실 우리 전하. 크! 아주 훌륭하신 분이지.”

    렌이 시안을 소개하며 과장되게 박수를 쳤다. 시안은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는지 무시했다.

    “명문 귀족 빌렘 백작가의 외동딸 세실리아. 아! 차기 유력 황태자비라는 말까지 붙여줘야겠지?”

    세실리아가 뭐라 항변하려 했으나 이어지는 렌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학술원에서 나름 천재 소리를 듣는 여기 화가 친구.”

    렌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고정됐다.

    “나를 홀리고, 우리 전하를 홀리신 비밀 많은 여학생 루시아.”

    저속한 표현에 엘레나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홀리다니. 오해의 소지가 많은 렌의 단어 선택에 짜증이 치밀었다.

    “마지막으로 나 렌 바스타슈. 소름 끼치는데? 이 멤버면 뭘 해도 되겠어. 우리 박수 치자고, 박수.”

    혼자만 잔뜩 신이 난 렌이 손뼉을 부딪치며 박수를 쳤다. 호응을 원한다는 듯 눈짓까지 보냈지만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못마땅한 눈길로 렌을 쳐다봤다.

    “이리 즐길 줄 몰라서야 원. 이러니 나만 꼭 악당 같잖아.”

    앓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이런 일로 기가 죽을 렌은 아니었다.

    ‘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건데.’

    엘레나는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기서 라파엘을 제외하면 죄다 학술원 재학 내내 만나지 않길 바랐던 인물들이었다. 이전 삶의 악연이 너무 짙었기에 서로를 위해 만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근데 웬걸.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연이든 악연이든 이전 삶보다 더 촘촘하고 진한 관계로 엮여 이 비좁은 지하실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

    렌이 입을 다물자 지하실에 침묵이 깔렸다. 엮일 대로 엮여 버린 터라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기에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시안과 렌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세실리아는 황태자비 선임 관련 일로 알게 모르게 시안과 어색했다. 라파엘은 신분 차 때문에 대하기 어려웠으며, 렌은 누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과거의 인연을 떼어놓고 보면 이들 사이에서 그나마 엘레나의 관계가 가장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아, 렌은 제외하고.

    그 역시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원 역사에서 이들은 접점이 없었다. 시안과 세실리아가 부부의 연을 맺긴 하나 그뿐, 최소한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일은 결코 없었다.

    ‘나 때문이야. 나로 인해 다 틀어졌어.’

    엘레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접점이 없는 이 멤버들이 비좁은 지하실에 모이게 된 것은 이전 삶에 없던 루시아란 존재가 개입했기 때문이란 걸.

    엘레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엘레나로 인해 어긋나 버려 이곳에 모이게 된 자들이었다. 책임감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어색함을 지우고 모임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선배, 아까 샌드위치 싸 오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어. 또 굶고 있을까 봐 싸 왔어.”

    “잘됐다. 나 배고팠는데.”

    엘레나가 웃으며 세실리아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넉넉하게 싸 왔는지 개수도 사람 수에 딱 맞았다.

    “뭘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요?”

    “…….”

    “선배가 고생해서 싸 왔잖아요. 서로 노려보고만 있지 말고 다 같이 샌드위치나 먹죠.”

    엘레나의 제안에 어색하게 앉아 있던 라파엘이 샌드위치를 집었다. 가만히 있긴 민망했던 세실리아는 준비해 온 차를 꺼내 빈 잔에 따랐다.

    “독 탄 건 아니지?”

    렌이 설렁설렁 다가와 눈대중으로 샌드위치를 뒤적거렸다.

    “먹지 마요.”

    “오, 큰 거. 잘 먹을 게.”

    렌도 샌드위치를 하나 집더니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시안만이 끼지 못하고 멀찌감치 어색하게 서 있었다.

    “전하도 드세요.”

    “그러지.”

    엘레나의 권유에 시안이 마지못해 다가와 그녀가 건네는 샌드위치를 받아 깨물었다.

    “드시면서 가이아 여신께 기도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쏠렸다. 엘레나가 속에 꾹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서로 좀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요. 제발.”

    실타래처럼 엉킨 인연을 풀 수도 없고. 깔끔하게 잘라내 버리고 싶은 게 엘레나의 지금 심정이었다.

    * * *

    엘레나는 화실을 나와 학술원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인적이 드문 옛길을 이용해 도서관으로 갔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원치 않은 두 남자 때문이었다.

    “배웅은 이제 됐으니 두 분도 볼일을 보심이 어떠세요?”

    중앙 광장 인근에 멈춰 선 엘레나가 정중하지만 은연중에 가달라는 뉘앙스를 담아 얘기했다.

    “내가 학술원 입학 이래 꾸준히 할 일이 없어서.”

    렌이 건성건성 대꾸하자 시안도 질세라 말했다.

    “그대를 혼자 보내는 게 편치 않다.”

    렌이 붙어 있으니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엘레나에게는 부담스러운 호의였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잖아.’

    엘레나는 배웅을 핑계로 화실부터 자신을 따라온 두 남자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학술원은 한창때인 영식과 영애들이 다니다 보니 가십에 예민하고 소문이 빨리 돌았다. 뭐만 터지면 입방아를 찧기 일쑤였다. 지금도 봐라. 엘레나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아벨라와 있던 일이 퍼진 것도 모자라 학술원 최고의 망나니 렌과 황태자 시안이 동행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하. 이제 조용히 지내긴 정말 틀렸어.’

    바람과 달리 이젠 학술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루시아의 얼굴이 팔리고 말았다. 이 정도면 어디를 가든 학생들이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엘레나로서는 최악이었다. 루시아로 위장한 것도 최소한의 신분을 갖춘 채 은밀하게 복수를 준비하고자 함이다. 근데 이렇게 이목을 끌어버리면 앞으로의 계획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렌과 시안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우리 전하는 자상도 하시지. 신입생 배웅까지 다 해주시고.”

    “그대 때문이란 생각은 들지 않나?”

    렌의 비아냥거림에 시안도 되받아쳤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엘레나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두 분 때문에 제가 너무 곤란해서 그런데 혼자 가면 안 될까요?”

    “불편해도 네가 참아.”

    “이러니 그대를 혼자 보내지 못하겠다.”

    설득도 통하지 않으니 엘레나는 참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더구나 기록실에 들러 변장을 풀어야 하는 입장에서 이 둘을 떼어놓을 방법이 보이지 않아 더 막막했다.

    “우리 전하는 왜 이렇게 얘를 감싸고도실까?”

    “…….”

    “설마 얘한테 꽂히셨어요?”

    렌이 실실 웃으며 시안을 떠봤다. 오로지 이 둘을 떨어뜨려 놓을 궁리를 하며 걷던 엘레나의 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시안의 대답에 신경이 쓰여 집중되질 않았다.

    “그대는 여전히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군.”

    “오, 긍정도 부정도 않으시겠다.”

    “…….”

    “전하께서 그러시면 얘가 오해할 텐데?”

    렌이 노골적으로 엘레나를 걸고넘어졌다. 엘레나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넘어가려고 하자 실실 쪼개며 웃더니 시안과 시선을 맞췄다.

    “나 얘 비밀 아는데.”

    “그대의 말에는 신뢰가 없지.”

    시안은 선을 그으며 귀담아들을 생각이 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혔다.

    “전하, 얘 좋아하지 마세요.”

    “…….”

    “전하는 얘 못 지켜요. 아니, 감당 못 해요.”

    렌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정작 어깨를 흠칫 떨며 반응한 건 엘레나였다. 어디까지나 말의 뉘앙스로 판단한 거지만 렌의 말속엔 뼈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화실에 왔을 때부터 의미 없이 던지는 렌의 말속에는 엘레나의 정체를 알고 은연중에 비꼬는 듯한 말들이 섞여 있었다. 그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의구심이 들 만한 말도 많았다.

    ‘설마 내가 베로니카라는 걸 알아챈 건 아니겠지?’

    불현듯 불안이 피어났지만 엘레나는 곧장 부정했다.

    ‘내가 베로니카인 걸 알았다면 그걸 모른 체할 인간이 아니야.’

    나름의 결론을 내렸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대놓고 렌에게 확인을 해볼 수도 없기 때문에 답답함은 배가 되었다.

    “…….”

    어째서인지 시안은 렌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 시안의 반응에 렌이 히죽 웃었다.

    “오, 대답 못 해. 내가 이겼어. 이제 가야지.”

    렌은 시안의 말문을 막은 것으로 이겼다고 느꼈는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휘적휘적 반대편으로 걸음을 뗐다.

    “우리 전하 표정이 무섭다. 네가 위로 좀 해드리고. 그럼 난 간다.”

    마지막까지 시안을 자극하며 심기를 불편케 만든 렌이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엘레나가 바라던 대로 렌은 떨어져 나갔지만 그 때문에 분위기는 엉망이 됐다. 특히 돌아봤을 때 마주한 시안의 표정에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부부로 산 동안에도 보지 못했던 무서운 표정을 시안이 짓고 있었다.

    “저, 전하.”

    엘레나가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시안이 노기를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나는구나. 저자의 말에 아무런 부정도 할 수 없는 내가.”

    그 말을 남긴 시안이 돌아서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엘레나는 멀어지는 시안의 뒷모습을 보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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