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8/30)
  • 제9장 L의 살롱 (1)

    “루시아는 선천적인 지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한번 재발하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푹 쉬어야 합니다. 그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강의도 제치고, 기숙사에도 안 들어갔다?”

    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학술원엔 엄연한 교칙이 존재한다. 기숙사가 아닌 외부에 머물며 강의에 출석하는 건 금지 사항이었다.

    “예, 건강이 악화되면 외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학관에 고지하고 허락까지 받아뒀습니다.”

    “못 믿겠는데?”

    렌은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학관까지 가서 루시아에 대해 알아봤지만 이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마 형평성 문제 때문에 비밀로 했을 겁니다. 학술원 교칙에 어긋나니까요.”

    “와, 미치겠네. 학술원에서 쉬쉬해 주는 거다?”

    렌이 곱실거리는 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겼다. 원하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지 잔뜩 골이 나 보였다.

    “둘이 짰지?”

    “아시겠지만, 전 공자의 연락을 받고 어제저녁이 되어서야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또 부모 자식 간에 딱히 짜고 말할 게 있습니까?”

    엘레나는 얼빠진 얼굴로 에밀리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거짓말조차 진짜로 믿게 만드는 설득력이 있었다. 경직되어 있던 에밀리오의 표정이 엘레나를 보자 풀렸다.

    “가슴 졸이긴 했지만, 덕분에 딸을 보니 좋군요. 상단 일이 바빠 볼 기회가 없었는데.”

    “저도요. 그간 너무 무심하셨어요.”

    엘레나가 적절히 맞받아치며 사이좋은 부녀지간을 연출했다.

    “미안하구나. 그래도 이렇게 왔으니 용서해 주렴.”

    “피, 알았어요.”

    렌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엘레나와 에밀리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더니 의문을 표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엄마 닮았거든요, 제가.”

    엘레나가 웃으며 능청스럽게 맞받아쳤다. 그러자 에밀리오가 한마디 보탰다.

    “제 아내가 어디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습니다. 보시죠, 참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지 않습니까?”

    “확인할 방법도 없고 미치겠네.”

    엘레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본 에밀리오가 렌을 향해 비꼬듯이 물었다.

    “궁금한 게 남으셨나요? 루시아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 각별하시니,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선배 덕분에 아버지를 보게 됐으니 그 정도 보답은 해드리고 싶네요.”

    엘레나가 약을 올리듯 활짝 웃으며 에밀리오의 팔짱을 꼈다. 누가 보더라도 다정한 부녀지간의 모습이라 렌의 심사가 뒤틀렸다.

    “여기 음식이 맛은 있는데, 영 소화가 안 되네?”

    “가시게요?”

    문고리를 잡고 방을 나가려던 렌이 돌아봤다.

    “감동적인 부녀 상봉에 내가 낄 자리는 없어 보여서.”

    “덕분인 거 아시죠?”

    “내가 또 이렇게 남 좋은 일을 해줘요. 남긴 건 마저 먹고 가고. 남기면 벌받아.”

    렌이 손을 휙휙 젓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테라스를 통해 렌이 레스토랑을 나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엘레나가 긴장을 풀었다.

    “고마워요. 눈치를 주지 않으셨으면 꼼짝 없이 당할 뻔했어요.”

    엘레나는 이제야 감사함을 표했다. 갑작스러운 만남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다정한 부녀지간을 연기하는 일까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경황이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드리는 게 맞습니다.”

    에밀리오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더니 허리가 꺾이다시피 깊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은인께 이제야 감사의 말씀을 올리네요. 제 딸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발신인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에밀리오는 열병의 치료법을 보낸 인물이 엘레나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저인 줄 어떻게?”

    “서신에 이리 적으셨죠. 병이 호전되더라도 일여 년은  푹 쉬어야 한다고.”

    엘레나는 분명 그리 적었다. 완쾌한 루시아가 중도에 학술원에 복학해 버리면 루시아 행세에 지장이 가기 때문이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더군요. 초원 부족 말론 완치가 되면 재발률도 낮고, 한 달이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했습니다. 병의 치료법에 대해서 아는 분이 치료 기간을 몰랐을까? 그건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

    “개인적인 궁금함으로 서신의 첫 발신지가 학술원 근처란 사실까지 알아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자가 서신을 보냈더군요. 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고. 그때 확신했습니다. 서신을 보내 딸을 살려주신 은인을 만날 수 있겠구나.”

    엘레나는 내심 그의 영민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이런 몇 가지 정황을 분석하여 완벽에 가깝도록 추리를 해내다니. 과연 3국 연합을 넘나들며 대륙 남부의 제국까지 오가던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란 게 느껴졌다.

    “거기까지 알아보셨으니 저도 부정하지 않을게요. 네, 제가 보냈어요.”

    엘레나도 순순히 인정했다. 딸이 아님에도 부녀지간 행세를 해주며 엘레나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도록 도와줬다. 충분히 믿을 만한 자였다.

    “어렴풋이 학술원 학생이지 아닐까 짐작은 했습니다만 실제로 보니 더 놀랍군요. 늦었지만 꼭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제 딸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요. 오늘 일 너무 감사했어요.”

    엘레나 역시 고개를 숙이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에밀리오의 현명한 대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곤란한 일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하실래요? 여기 코스가 제법 괜찮거든요.”

    “영광입니다.”

    에밀리오는 깍듯한 태도로 수락했다. 새롭게 주문한 코스 요리가 나오고 천천히 그것들을 음미했다. 렌이 떠나서인지 아까 전 먹었던 것과 같은 요리임에도 그 풍미랑 식감이 확연히 달랐다.

    “한데, 한 번도 묻지 않으시네요.”

    “뭘 말씀입니까?”

    엘레나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제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왜 루시아를 사칭했는지요.”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에밀리오는 냅킨으로 입을 한번 닦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게 전부였던 딸을 구해주신 은인이십니다. 원하신다면 카스톨 상회를 드려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직시했다. 진정성 느껴지는 말투만큼이나 눈빛과 표정에서 그의 진심이 묻어 나왔다. 하긴, 지난 삶에서도 루시아를 치료하고자 전부를 내던진 남자였다.

    “마음만 받는 걸로 할게요. 오늘 일로 제게 진 빚은 충분히 갚으셨어요.”

    “아뇨, 갚지 못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에밀리오의 표정에서 뭔가 모를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몇 마디 더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실제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나이 차가 꽤 나는 두 사람이다. 그러나 실제 대화를 보면 엘레나는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했고, 에밀리오는 존대를 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은인을 살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상인 간 거래의 기본이 사람인 만큼 사람을 살피는 건 제겐 버릇과 같은 일입니다.”

    “오해하지 않아요.”

    “말투, 손짓, 식사법, 말 한마디…… 사소하지만 그 모든 걸 통해 사람을 판단합니다. 몸에 밴 행동은 의식으로 바꿀 수 없는 거죠. 또 분위기가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며,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는 거죠.”

    에밀리오가 물로 목을 축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황족이 아니신지요?”

    “…….”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그저 주제넘은 얘기로 넘겨주시죠.”

    침묵하긴 했지만 엘레나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목이 대단해.’

    흔히 상인으로 성공하느냐 못 하냐는 사람을 보는 안목에 달렸다고들 한다. 거래라는 게 결국 신용이 밑바탕이 되는 만큼 그 사람의 인성과 성품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에밀리오는 안목이 참 대단했다. 감추려고 했던 엘레나의 분위기와 기품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지난 삶의 그녀는 황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공녀는 대귀족의 반열이긴 하나 엄밀히 황족은 아니니까. 그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에밀리오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금세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제가 괜한 걸 물은 것 같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레나는 진짜 거상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삶에서는 루시아의 북방 열병 치료에 눈이 멀어 상회가 파산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제 역사가 바뀌었으니 과연 에밀리오와 카스톨 상회가 어디까지 성장할지가 기대됐다.

    스윽.

    에밀리오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제국 내 카스톨 상회 지부의 양도서입니다.”

    “……!”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지부는 해당 지역 카스톨 상회의 거점이다. 지부의 양도서라는 건 곧 해당 지역의 거래로 발생하는 수입을 엘레나에게 전부 준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마음만 받겠다고.”

    “……딸이 그러더랍니다. 아빠를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나 때문에 슬퍼할 아빠를 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에밀리오의 표정에 아련한 미소가 어렸다. 세상 전부나 다름없는 딸을 잃을 뻔했기에, 딸을 살려준 엘레나를 향한 고마움이 절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빠는 가서 그분을 도와주라고.”

    “…….”

    “오늘 뵙고 느꼈습니다. 범상치 않은 분이 분명하나…… 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신 분이라는 걸요. 그래서 드리고자 합니다.”

    엘레나는 어찌 대처해야 할지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간 그녀는 명확하고 확실한 걸 추구했다. 과거에 접점이 없던 사람은 제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접촉을 자제하거나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자칫 엘레나의 영향력을 벗어나 불안 요소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렵게 돌아가더라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을 곁에 둔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에밀리오는 그녀의 계획 속에 존재하지 않는 논외의 인물이다. 그의 애틋한 부정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지만 됨됨이와 인간성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루시아의 북방 열병 치료법을 알려주는 걸로 에밀리오와의 관계는 끝냈다. 학술원 내에서 루시아의 신원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렌이 끼어들면서 에밀리오와의 접점이 생기고 말았다. 그는 은인이라며 카스톨 상회의 지부 일부를 양도하겠다며 들고 왔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절하기에는 에밀리오가 언급한 카스톨 상회 지부가 주는 수입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말석이긴 하나 대륙 십 대 상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카스톨 상회의 지부가 지닌 상권과 영업망, 자산 운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절 곤란하게 하는군요.”

    “그 점 역시 사과드리겠습니다.”

    에밀리오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그러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엘레나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제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무엇을요?”

    “은인께서는 카스톨 상회의 지부를 양도받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망설이시는 것 같군요. 시일이 좀 소요되겠지만, 지부를 정리하여 제국 화폐인 금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편이 은인께서도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자, 잠깐만요.”

    엘레나가 적잖이 당황하며 말을 끊었다. 카스톨 상회의 지부 양도서를 내밀었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지부를 매각하여 금화로 마련해 준다고 하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더 경악스러운 건 저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심이라는 거다.

    “왜 이렇게 절 곤란하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엘레나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호의인 건 알겠으나 너무 과해 부담스러웠다.

    “저 역시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에밀리오가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제 것을 바치면서도 한 줌의 미련도 없다는 듯, 모든 걸 내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엘레나 역시 선택을 내려야 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저는 카스톨 상회의 지부도, 금화도 받을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은인…….”

    “그것들은 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에밀리오 님의 진심을 외면하는 것도 꼭 옳은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엘레나가 여지를 두자 에밀리오가 숨죽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중을 기하고자 수십 번을 더 생각한 끝에 엘라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동업하죠.”

    “지금 동업이라고 하셨습니까?”

    놀란 에밀리오가 재차 되물었다. 그로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다.

    “제가 지부를 맡더라도 에밀리오 님처럼 잘해낼 자신이 없어요. 전 얽매여 있고, 상재가 없으니까요. 언젠가 다른 상회에 영향력을 내어주고 파산하겠죠.”

    엘레나는 제 역량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난 삶의 기억을 토대로 여러 가지 기반을 다지고 있지만 그게 다였다. 상인은 그녀가 걷고자 하는 길이 아니거니와 카스톨 상회의 지부를 양도받는다 하더라도 타 상단들과 경쟁하여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금화는 얘기할 가치도 없어요. 마치 따님의 목숨을 걸고 돈을 흥정한 기분이에요. 여하에 따라선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어요.”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밀리오가 자신이 너무 과했음을 인지하고 재빨리 사과했다. 깊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했건만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임을 자각한 것이다. 엘레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뇨,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네요. 상인에게 돈은 곧 전부니까요.”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동업을 제안하신 이유도?”

    “지부든, 금화든 제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사람이죠.”

    “사람…….”

    에밀리오가 곰곰이 그 말을 곱씹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도 사람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해 왔지만, 엘레나가 저 말을 하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까 그러셨죠. 제게 에밀리오 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고. 실제로 그래요.”

    “은인.”

    “제 곁에 머물러 주세요. 그러면서 저를 도와주세요. 그럼 이거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이란 말에 에밀리오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엘레나를 응시했다. 그가 본 엘레나는 태생이 고귀하며 고고한 여인이었다. 변장으로 감추려고 해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기품과 품격이 그걸 증명했다. 그런 엘레나가 약속을 언급했다. 약속의 무게가 달랐다. 일개 상인들의 말만 앞서는 그런 약속이 아니라, 세상이 무너지고 두 쪽이 나더라도 지킬 약속이 될 것이다.

    “곧 새 시대가 올 거예요. 세상이 뒤집히고 많은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대.”

    “새 시대…….”

    에밀리오가 나지막이 단어를 곱씹었다. 일개 상인이 입에 담고 이해하기엔 너무 큰 단어였다. 엘레나만이 그 단어의 무게를 온전히 헤아리고 감당할 수 있었다.

    “제가 감히 새 시대에 당신의 자리를 약속할게요.”

    “……!”

    엘레나가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더없이 도발적이고 무모하게 들릴 법한 약속이지만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 * *

    “내가 진짜 소름이 끼쳐서 닭살이 안 가시는 거 있지.”

    불과 며칠 만에 만난 칼리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그에 반해 대꾸하는 엘레나는 차분했다.

    “그래요?”

    “그렇다니까! 너희 아버님이 왜 사람들의 존중을 받는지 알겠더라. 난 사업 계획만 말씀드렸는데 내가 놓쳤던 맥을 탁탁 잡아내는 거 있지.”

    칼리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에밀리오에 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에밀리오와 손을 잡은 엘레나는 아직 연륜과 경험이 부족한 칼리프에게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결과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긍정적이었다. 칼리프의 열정과 재기 발랄함에 에밀리오의 노련미와 경험이 곁들여지자 생각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맞다, 근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야? 아버지 몰래 사업하는 거 들키면 혼난다고 했잖아.”

    “그거요? 들켰어요.”

    얼토당토않은 변명이었지만 칼리프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아, 그래서 아셨구나. 혼나진 않았고?”

    “오히려 칭찬해 주셨어요. 지원해 줄 테니까, 졸업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고요. 물론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는단 전제하에요.”

    “칭찬은 칭찬이고 학업은 학업이구나.”

    엘레나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칼리프가 그러려니 납득하고 받아들였다.

    “란돌 님은 만나봤어요?”

    “어? 어. 만났지. 나 걔 보고 자살 충동 느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살벌한 표현에 엘레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 세상에 천재가 왜 이렇게 많아? 너도 천잰데, 걔는 더 천재야. 진짜 자괴감 드는 거 있지.”

    “그럴 만해요.”

    엘레나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란돌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을 위대한 건축가였다. 예술계엔, 한 시대의 거장은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천재성을 반드시 타고나야만 한다는 말이다.

    엘레나는 칼리프와 란돌의 합작인 산타마리아 성당의 완성물을 보지 못했다. 완공되기 직전에 납치를 당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란돌이 설계했다고 알려진 도서관은 본 기억이 있었다. 비록 산타마리아 성당처럼 거대하진 않았지만 그의 독특한 공법인 늑재 궁륭을 이용한 돔 형태는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세상은 참 넓더라. 학술원은 우물 안이었어. 난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근데 걔가 보여준 공법과 설계 도면만 봤는데도 전율이 오더라.”

    “이해해요.”

    “걔가 L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더라. L이 있기에 자기가 건축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도 전해달래.”

    란돌은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아트 중개사로 첫발을 내디딘 칼리프의 첫 고객이 되었다.

    엘레나의 개입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진 만큼 원 역사보다 더 좋은 호흡과 결과를 보여줄 수 있길 기대했다.

    “저야말로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우리를 선택해 줘서. 결코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요.”

    “안 그래도 했지. 걔는 믿는대. 딴말 안 하더라. 진짜 천재들은 성격도 좋냐? 아, 너 빼고.”

    란돌에 대해 허울 없이 떠드는 칼리프를 보며 엘레나가 물었다.

    “말하는 거 보니, 꽤 친해졌나 봐요?”

    “술친구다.”

    “최고의 친구를 얻으셨네요.”

    엘레나는 다 안다는 듯 웃었다. 지난 삶에서도 술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 만큼 둘의 우정에는 술이 늘 껴 있었다. 마침 칼리프는 아카데미 졸업반인 4학년이라 성인으로 인정되는 나이였다. 그래서 란돌과 술을 마시며 우정을 쌓는 게 가능했다.

    “선배, 아버지 또 언제 보기로 했어요?”

    “내일. 왜?”

    “수도에 건물을 올릴 만한 노른자 땅 좀 있나 알아봐 달라고 하려고요.”

    “너 투기하려고?”

    칼리프의 눈에 탐욕이 넘실거렸다. 거의 종교 수준으로 엘레나의 판단과 선택을 신뢰하는 칼리프였기에, 땅 매매를 한다면 이 기회에 얹혀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투기라니요. 저 그쪽에 재주 없어요.”

    “그러면 왜 갑자기 땅을 알아보는 건데? 거기 땅값도 비싸잖아.”

    “거기 살롱을 지을 거예요.”

    “살롱? 그게 뭔데?”

    아직 이 시기는 살롱 문화가 자리 잡기 전이다 보니 칼리프는 살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남녀와 신분의 벽을 깬 토론장. 문화와 지성의 산실이자 사교의 장. 문인, 저술가, 예술가, 사상가의 발표장이자 전시장.”

    “……!”

    엘레나는 제국의 수도에 최초이자, 최대 그리고 최고의 살롱을 열 계획이었다. 살롱은 엘레나가 꿈꾸는 예술 문화의 집합체다. 문인, 예술가, 귀족, 과학자 등 저명한 인사들이 출입하여 대화와 토론을 나누는 공간이자,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며 공연을 즐기고 춤을 추는 무도회장 역할도 할 수 있다.

    살롱은 대륙을 쥐고 흔들 만한 문화적 파급력을 지닌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L은 살롱의 여주인으로 문화의 중심에 서게 될 거고.’

    엘레나의 파격적인 야망에 칼리프는 어안이 벙벙했다.

    “살롱이라니. 충격적이라 말이 안 나오네.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이게 끝이 아닌데. 아직 놀라긴 일러요.”

    “또 뭐가 있어?”

    “살롱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살롱을 상징하는 최초의 건축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요. 대성당의 크기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 건축양식으로 짓는 거죠.”

    칼리프가 놀라는 한편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대성당만 한 대형 건축물이야 그렇다 쳐. 새 건축양식을 가진 건축가를 어디서 구하는데?”

    “어디 있긴요? 선배 옆에 계시잖아요.”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어디…… 너 설마 란돌을 염두에 두고?”

    “네. 살롱의 설계부터 건축까지 전부 란돌에게 맡길 거예요.”

    칼리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만큼 엘레나의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지만 아직 대외적인 성과가 없는 란돌에게 선뜻 그만한 공사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기 때문이다.

    ‘엘레나의 말대로야. 란돌이 못 지을 거란 생각은 또 안 들어.’

    누구보다 란돌과 가까이 지내고 소통을 한 칼리프기에 막연하지만 그가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스스로 납득을 한 듯 보이자 엘레나가 미소 띠며 말했다.

    “란돌 님께 전해주세요. 세상에 당신이란 건축가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매너리즘을 깨고 당신만의 공법으로 세상을 놀래주라고요.”

    “꼭 전할게. 걔 기뻐하겠다.”

    덩달아 칼리프도 설렜다. 란돌은 언제고 꼭 자신만의 공법으로 건축물을 짓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빨리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아버지께 여력이 되시면 매입할 토지 인근 부지도 알아봐 달라고 해주세요.”

    “투기 안 한다며?”

    “투기 아니에요. 살롱과 연계할 만한 복합문화공간을 만들 생각이에요.”

    “뭐? 복합문화? 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거냐? 쫓아갈 수가 없어요.”

    근래 들어 칼리프는 엘레나에게 감탄을 넘어선 경탄을 느끼고 있었다. 획기적이고 허를 찌르는 발상은 그가 죽었다 깨어나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재기 넘쳤다.

    “왜 쫓아오려고 해요? 쫓아오지 마세요.”

    “뭐?”

    “저는 제가 잘하는 걸 하는 것뿐이에요. 선배는 선배가 잘하는 걸 하셔야죠.”

    “내가 잘하는 거…… 그러네.”

    칼리프는 픽 웃더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가 마주 보며 첨언했다.

    “살롱은 란돌 혼자 설계하고 짓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아트 중개사인 나도 함께하는 거다, 이 말이지?”

    “네, 선배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할 거예요.”

    “쉿! 더 말하면 잔소리다. 나도 알아. 내 역할이 얼마나 중요할지. 안 그래도 책임감 느끼며 살고 있다.”

    엘레나가 미소를 지었다. 늘 투덜대고 장난스러운 칼리프지만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늘 진지하고 전력으로 임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요. 아버지한테 전해주세요.”

    칼리프는 서신이 담긴 봉투를 건네받았다.

    “이건 또 뭐야? 나 봐도 돼?”

    “보셔도 상관은 없는데 별거 없어요. 수도 빈민가 쪽 땅을 몇 군데 매수할 건데, 그 주변을 지도에 체크해 둔 거예요.”

    “거길 왜 사? 아니, 어떻게 빈민가 땅을 살 생각을 할 수 있어? 거긴 사는 순간 끝장이야. 다시 팔 수도 없고 팔리지도 않아. 물귀신한테 물리는 거라고.”

    칼리프는 빈민가 땅을 사려고 하는 엘레나를 극구 만류했다. 빈민가는 수도 내의 거지나 빈민, 떠돌이, 부랑배들이 몰려 사는 만큼 수도 내에서 땅값이 제일 저렴했다.

    그렇다 보니 과거에도 몇몇 귀족 투자자가 빈민가의 땅을 헐값에 사서 개발을 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빈민들을 쫓아내 봤자 곧 다른 빈민들이 와서 자리를 메웠다. 돈을 들여 건물을 세워도 부랑배와 떠돌이들이 있으니 일반인들은 오길 꺼려 했다.

    “알아요.”

    “알면서도 빈민가 땅을 사겠다고? 너, 나한테만 슬쩍 얘기해 봐. 거기 금이라도 묻혀 있는 거야?”

    칼리프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혹시 뭐라도 있을까 싶어서다.

    “하, 수도에 금맥이 어디 있어요? 그냥 자선사업 하려고 사는 거예요.”

    “자선사업? 진심이야?”

    “네, 그럼 거짓말이게요? 돈 벌어서 뭐 해요. 어려운 사람도 돕고 살아야죠.”

    실망한 듯 입맛을 다신 칼리프가 서신을 품에 넣어버렸다. 관심이 갔다면 뜯어 봤겠지만 빈민가 땅을 매매하는 일에는 흥미가 없어 보였다. 투자하는 즉시 돈을 날릴 테니까. 엘레나는 차마 진실을 말할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선배. 솔직하게 얘기해 주지 못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제가 말하면 선배가 그 땅을 살 거 같거든요.’

    칼리프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란 게 때론 이성을 흐린다는 걸 엘레나는 잘 알고 있었다. 혹여라도 칼리프가 엘레나를 따라서 빈민층의 땅을 매매하게 되면 그 역시 표적이 될 수 있다.

    ‘은밀하게 준비해야 해, 대리인을 내세워 최대한 신속하게 매입하지 않으면 리아브릭이 눈치챌 거야.’

    조만간 수도에 엄청난 개발 열풍이 불 것이다. 대공가가 천문학적인 자금력을 들여 빈민가를 싹 밀어버리고, 그 땅에 귀족과 황족만 출입이 가능한 노블레스 거리를 만드는, 제국 건국 이래 수도에서 최고 규모의 개발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의 개발이지.’

    대공가가 이 노블레스 거리를 만드는 데 쏟아부은 돈이 무려 제국의 한 해 예산에 맞먹었다. 이런 천문학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대공가의 저력도 대단하지만 노블레스 거리의 성공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성공한 데는 리아브릭의 공이 컸다. 그녀는 황실이 무너지고 귀족 중심으로 제국이 돌아갈 걸 예견하고 귀족들을 위한 거리를 만들고자 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공가의 성공은 나의 불행이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어.’

    엘레나는 저들의 투자에 재를 뿌릴 계획이다. 야금야금 갉아먹다가 종국엔 철저하게 무너뜨릴 것이다. 만약 노블레스 거리 개발 사업이 성공하면 엘레나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대공가를 파멸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첫 공작(工作)이 바로 알 박기다. 리아브릭보다 한발 앞서서 차후 노블레스 거리 개발 시에 주요 거점이 될 만한 빈민가 땅을 사전에 매수해 두는 거다. 미래를 알고 있는 엘레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오차 범위는 있을 수 있지만 황비 시절 노블레스 거리를 자주 출입했던 만큼 대략적인 개발 지점은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조심해야 할 건 하나야. L의 소유로 매수하되 대리인을 세워서 꼬리가 밟히지 않는 것.’

    엘레나는 리아브릭의 집요함을 잘 알았다. 엘레나가 선수를 쳐서 땅을 매매한 사실을 알면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L을 찾으려고 들 것이다. L은 서류와 서명으로만 존재하는 인물. 당장은 엘레나인 게 들킬 리 없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대리인을 내세워 매매를 체결해 리아브릭의 추적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빈민가 땅을 매수한 다음이야 쉽지. 리아브릭에게 되팔면 그만이니까.’

    이미 엘레나의 머릿속에 완벽한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대공가의 계획을 역이용해 대공가의 돈을 갈취한다. 엘레나가 구상한 대공가의 파멸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남은 건 엘레나가 서신에 적어둔 대로 에밀리오가 대리인을 내세워 빈민가 땅을 매매하는 일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그라면 실수가 없을 것이니 크게 걱정은 없었다.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해요. 아, 아버지랑 한 약속도 있고 한동안 학업에 집중할 거예요. 찾지 마세요.”

    “그래라. 나도 나대로 네가 준 일감으로 정신없을 거 같아. 수고해.”

    대화를 일단락 짓고 칼리프가 자습실을 나가고자 문고리를 잡으려던 때였다.

    똑똑.

    “……!”

    갑자기 들리는 노크 소리에 엘레나와 칼리프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자습실 겸 토론실은 신청만 하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기에 타인의 방문을 받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렌이?’

    반사적으로 그런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사 층 기록실에 들러 변장을 한 뒤에 바로 이 층 자습실로 내려왔다. 동선이 워낙 짧다 보니 렌에게 발각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내가 나가볼게.”

    문 앞에 서 있던 칼리프가 문고리를 돌리며 잡아당겼다.

    “누구신지…… 헉!”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선 남학생을 본 칼리프가 헛숨을 삼켰다.

    “저, 전하?”

    “……!”

    학술원에 다니는 재학생 중 시안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화들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칼리프의 반응에 루시아 역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역시 그대였군.”

    놀란 두 사람과 달리 시안의 반응은 차분했다. 예의 무표정한 눈길로 번갈아 보는 거 외엔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전하께서 여길 어떻게?”

    “우연히 그대가 이 층에 있는 걸 봤지. 안부라도 물을까 싶어 열람실을 뒤져봐도 없더군. 그래서 와봤는데, 여기 있군.”

    칼리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곰곰이 되씹어봐도 시안이 루시아에게 관심을 갖고 먼저 찾아왔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아서다. 시안을 등지고 엘레나를 본 칼리프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추궁했다.

    ‘너 황태자 전하와 아는 사이였어? 왜 진작 말 안 했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엘레나가 그를 무시하며 시선을 시안에게 돌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는지요?”

    “…….”

    시안은 대답 대신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침묵이 길어지고 어색해지자 시안이 요지와 상관없는 말을 툭 내뱉었다.

    “그대들을 초대하지. 저녁 식사에.”

    “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칼리프와 엘레나가 반사적으로 반문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세 사람의 이른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엘레나와 칼리프는 황실 직계만이 사용 가능한 단독 기숙사에 방문했다. 엘레나가 기거하는 단독 기숙사와 규모면에서는 비슷했지만 제국을 이끌 황태자가 머문다고 보기엔 빈약하고, 낙후된 느낌마저 강하게 들었다. 고가의 그림이나 장식 등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고 가구들은 낡아 보이기까지 했다.

    ‘여길 이제야 와보네.’

    엘레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엘레나와 시안의 기숙사는 대로를 끼고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면 생활이 노출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지난 삶 엘레나의 관심사는 학술원 시절부터 시안에게게만 쏠려 있었다. 시안이 무얼 먹고, 어찌 자며,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그녀의 세상이었고 전부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었지. 막연한 동경에서 시작한 관심이 호감이 되고, 부질없는 애착과 사랑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 것이.

    “별건 없지만 들도록. 맛은 나쁘지 않을 거야.”

    상석에 앉은 시안을 기준으로 식탁을 사이에 두고 칼리프와 엘레나가 마주 앉았다. 주방에서 하녀가 요리를 내왔다. 수프와 샐러드, 스테이크였는데 평소 엘레나가 먹던 식단과 비교하면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그건 칼리프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가 초대한 식사라기에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고기의 품질이 좋지 않았다.

    “들지.”

    시안이 먼저 고기를 썰어 먹자 칼리프와 엘레나도 나이프와 포크를 쥐었다. 칼리프는 먹기 좋게 잘라 오물거리면서 고기를 씹었다. 역시나. 먹을 만하긴 했지만 딱히 그 육질이나, 육즙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이 정도로 안 좋았던가? 황실의 재정 상황이.’

    황비 시절의 엘레나는 개인적으로 대공가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품위 유지에 들어가는 사치 비용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황실의 재정에 관심도 없었고 늘 넉넉한 줄 알았다. 한데, 이곳에 와서 느낀 황실의 재정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였다.

    “입에 맞고?”

    “그럼요! 너무 맛있어요.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게 익힌 게 육즙이 입안 가득 퍼질 때마다 너무 황홀합니다.”

    칼리프는 실망한 게 들킬까 과장까지 곁들이며 칭찬했다. 시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엘레나에게 돌렸다.

    “그대는 어떠한가?”

    질문을 받은 엘레나가 포크를 내려놓고는 입안에 있던 음식물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 냅킨을 들어 입을 두드려 닦고는 대답했다.

    “빼어나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르나 입이 즐거운 요리인 건 분명합니다.”

    “그렇군.”

    시안은 더 이상 맛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엘레나의 식사 모습에 주목했다. 육질이 좋지 않은 스테이크를 먹는 와중에 씹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으며, 여덟 개가 넘는 포크와 나이프를 용도에 맞춰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그대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군.”

    “저요?”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시안은 특유의 무심한 눈길로 엘레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때때로 꽃사슴처럼 나약해 보이더니.”

    “…….”

    “때때로 황족보다 더 기품 있게 행동해.”

    엘레나는 아차 싶었다. 은연중에 배어 나온 예법이 그만 시안의 흥미를 끌었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스스로의 경솔함을 질책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칼리프라고 했던가?”

    “네, 전하.”

    “올해 졸업반이라지. 그래,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해 봤는가?”

    시안의 질문에 칼리프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네, 좋은 인연을 만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습니다. 논문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일에 푹 빠져 제때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적성에 맞는 일이라. 그게 뭔지 궁금하군.”

    “미술상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칼리프를 엘레나가 노려봤다. 굳이 안 해도 될 얘기를 해서 시안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행동이 못마땅했다. 그런 눈치를 모를 리 없건만 칼리프는 무시하고 떠들었다.

    “실은 여기 있는 루시아 양이 제게 권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식견과 안목이 워낙 탁월하신 후배님이신지라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엘레나는 쓸데없는 말을 자꾸 늘어놓는 칼리프를 죽일 듯이 째려봤다.

    ‘제발, 그 입 좀.’

    그러나 이미 시안의 관심은 엘레나에게 쏠려 버리고 말았다.

    “그대가 미술에 감각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식견과 안목까지 두루 갖춘 건 몰랐군.”

    “전하, 칼리프 선배가 자신을 낮추고자 한 말입니다. 귀담아듣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레나는 재빨리 칼리프를 추켜세우며 자신은 빠지려 했다. 그러면서 칼리프를 향해 더 이상 허튼소리를 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은 매서운 눈길을 쐈다.

    “겸손하기까지 하군. 더더욱 그대가 쌓은 학식의 깊이에 관심이 가.”

    아. 자꾸만 일이 꼬여감을 느낀 엘레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안이 이미 관심을 보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확인하려 들지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떤가? 기왕 이리된 거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봄이.”

    아니나 다를까, 엘레나의 예상이 적중했다. 웬만하면 한시도 시안과 엮이고 싶지 않은 엘레나이기에 이 상황이 불편했다.

    “전하, 저는…….”

    엘레나가 거절의 뜻을 밝히려는 순간, 칼리프가 끼어들었다.

    “전하께서 권하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루시아, 너도 괜찮지? 우리 오늘 한가하잖아.”

    “이…… 이.”

    불쑥 말을 자른 것도 모자라 제멋대로 수락해 버리는 태도에 분노한 엘레나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분명 눈치를 줬음에도 도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지. 도통 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더 열이 뻗쳤다.

    결국 세 사람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저만치 앞서가는 시안을 뒤따라 걸으며 엘레나가 칼리프의 허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감정을 실어서인지 꽤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컥.”

    엘레나는 통증에 인상을 쓰는 칼리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오늘 대체 왜 이래요? 식사 끝났으면 조용히 가면 되지. 뭔 이야기를 또 해요!”

    “전하께서 원하시잖아. 그리고 눈치 못 챘어?”

    엘레나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며 경고성 말을 날렸다.

    “뭔 눈치요? 부탁드릴 테니, 적당히 좀 하세요. 더 이상은 저도 못 참아요.”

    “얘 좀 보게. 넌 이게 나 좋으라고 하는 짓 같니?”

    “그럼 저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엘레나의 추궁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응접실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와, 책 봐. 족히 몇천 권은 되겠어.”

    칼리프는 응접실 벽면을 가득 메운 서책들을 보며 감탄했다. 족히 천 권은 넘어 보였는데, 여기가 서재가 아닌 응접실인 걸 감안하면 시안이 얼마나 책을 끼고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널찍한 소파에 세 사람이 여유를 두고 앉았다. 그러자 시안이 엘레나를 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대를 보니 생각이 나서 그런데.”

    “네?”

    “혹시 그때처럼 차를 한 잔 우려줄 수 있겠나?”

    “……차요?”

    시안의 부탁에 엘레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차를 우려달라니. 그녀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다. 시안 역시 이런 말을 꺼낸 것이 쑥스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 향과 깊은 맛이 쉽게 잊히지 않아서.”

    “…….”

    “어려운 부탁인가?”

    재차 시안이 묻자 순간적으로 반쯤 넋을 놓았던 엘레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닙니다. 찻잎과 다기, 더운물을 준비해 주시면…….”

    “여봐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안이 그것들을 내오라고 했다. 사전에 언질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진작 구비해 놓은 것인지 시종들이 눈 깜짝할 새 그것들을 가져왔다.

    “더 필요한 게 있나?”

    “아뇨, 이거면 족합니다.”

    엘레나는 밀봉된 함을 열어 찻잎을 제일 먼저 확인했다.

    ‘중품(中品)의 찻잎.’

    하품과 비교하면 낫지만, 귀족들이 주로 애용하는 상품의 찻잎과 비교하면 그 향과 맛이 한참 떨어졌다.

    ‘품질을 따지지 말자. 차는 정성이야.’

    엘레나는 찻잎을 꼼꼼하게 살폈다. 잎의 건조함이나 발효의 정도를 파악하면 중품의 찻잎이라도 충분히 그 맛을 끌어낼 수 있었다. 더운물의 온도도 적절한 게 준비는 완벽했다. 게다가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차의 깊은 맛과 그윽한 향은 곧 차를 우려내는 사람의 손길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수십, 아니, 수백 번이 넘도록 마음으로 차를 우려내던 엘레나의 다도는 완벽에 가까웠다.

    조르륵.

    엘레나가 빈 찻잔에 찻물을 채워 권했다.

    “과연.”

    첫 모금을 맛본 시안이 탄성을 내질렀다.

    “같은 찻잎으로도 그대는 이런 깊은 맛과 향을 내는군.”

    시안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후각과 미각을 동원해 엘레나가 우려낸 차를 깊이 음미하는 데 주력했다.

    “와, 왜 사람들이 다도, 다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엘레나가 우린 차를 얻어 마시게 된 칼리프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다도가 귀족들의 보여주기 식 허례허식이란 생각을 취소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차를 즐기는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엘레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오늘 이 차가 마지막이 되길 바랄게요.’

    더 이상의 악연을 바라지 않기에.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엘레나는 슬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영애에게 묻고 싶은 게 참 많군.”

    “제게요?”

    시안이 대놓고 엘레나를 지목하며 물었다.

    “영애의 아버지는 대륙에 손꼽히는 상회의 상단주라고 했지.”

    “네.”

    “어떤가? 그대가 보기에 현 제국 내 화폐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느껴지나?”

    질문을 받은 엘레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시안의 질문이 포괄적이기도 했지만 굉장히 전문적인 학식을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전 상재에 소질이 없어 많은 걸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제 의견을 물으셨으니 소신껏 얘기해 보겠습니다.”

    “경청하지.”

    “현 제국 화폐의 흐름은 권력과 밀접합니다. 대공가와 4대 가문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수익이 발생하는 일이면 뭐든 독점하죠.”

    제국의 건국 이래 지금처럼 귀족들이 이렇게 기득권을 쥐고 활개 친 역사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제국은 대대로 황가의 것이었으나, 점차 귀족의 권세가 커지며 그 권위를 잃어갔다. 허수아비 황제. 황제마저 바꾸는, 황제 위에 있는 귀족들. 그것이 현 제국 황실의 현실이었다.

    “그대가 정확하게 보았군.”

    “화폐의 흐름뿐만 아니라 그 구실마저 귀족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제국은 변해야 한다.”

    시안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간절함이 담긴 눈빛에서 그가 대공가와 4대 가문의 간섭과 견제에서 벗어나 강력한 황권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엘레나는 그런 시안이 너무 측은했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면 명군이 될 자질이 다분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황제가 설 자리가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엘레나가 그만 나서고 말았다.

    “유능한 사람을 얻으세요.”

    “사람이라.”

    시안은 가만히 그 말을 곱씹더니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영애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건가?”

    “아뇨.”

    엘레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저는 전하께서 생각하는 것만큼 출중한 사람이 아니에요.”

    “참으로 겸손하군.”

    칼리프는 입만 뻥긋거릴 뿐 좀처럼 대화에 끼질 못했다. 수준 높은 대화가 오간 것도 있지만 너무 민감한 주제다 보니 나서기가 그랬다. 그에 반해 엘레나는 일말의 감정 동요도 없이 무서울 정도로 차분함을 유지했다.

    “나 역시 영애와 생각이 같았다. 그러나 유능한 자들은 대부분 귀족 자제이지. 그들은 결코 황실의 편에 서려고 하지 않아.”

    “…….”

    시안의 답답함도 이해가 갔다. 학술원만 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 대부분이 귀족 자제다. 드물게 평민 출신도 있지만 대다수가 출세에 목을 매다 보니 황실보다는 귀족에 기대는 쪽이 많았다.

    ‘의지는 있으시나, 방법이 틀리셨어.’

    엘레나는 똑똑히 봤다. 황권 강화를 꿈꾸며 개혁을 시도하던 시안이 실패하는 모습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전하께서 새 시대의 흐름을 적절히 읽을 수만 있다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곧 새 시대가 온다. 그 시류를 읽고 편승할 수 있다면 시안은 원하던 바를 이룰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엘레나는 섣불리 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우연히 도서관 열람실에서 마주쳤을 때 시안은 군주론을 끼고 있었다. 여전히 강력한 전제 황권을 꿈꾸고 있다면 새 시대와 시안이 그리는 미래가 상충하기 때문이다.

    ‘너무 앞서가지 말자. 판단은 전하가 알아서 하시겠지.’

    엘레나는 조금이나마 시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한때나마 부부로 살았던 시안을 향한 애증이 남아서다. 그래, 그뿐이었다.

    “감히 전하께 충고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충고라. 모질게 듣지.”

    시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레나가 또박또박 힘을 주며 말했다.

    “제국에는 과거 명군이라 추앙받던 황제가 셀 수 없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세운 업적이 있기에 지금의 제국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계속하라.”

    “그분들의 치적이 높게 평가받는 건 당시 시대상에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고, 시대의 변화를 읽고 적절히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엘레나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칼리프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혹시라도 시안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서였다.

    “시대가 태동하고 있습니다.”

    엘레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귀족들은 썩고 부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그들을 누를 권위와 힘이 없습니다.”

    “…….”

    무표정하던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레나가 황태자 시안의 면전에서 대놓고 제국 황실의 무능력함을 지적한 것이다.

    “루, 루시아! 말 가려서 해.”

    까무러치게 놀란 칼리프가 끼어들어 말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고 할지언정, 황실을 깎아내리는 건 황실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여기서 그만둘 거였으면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이 변할 겁니다.”

    시안은 자칫 불편하고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임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중간에 낀 칼리프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시대의 변화는 결코 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시작합니다.”

    “아래라.”

    “평민.”

    “……!”

    웬만해서는 감정의 변화가 없는 시안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제국이 건국된 이래, 개혁의 주체는 황실과 귀족이었다. 피라미드 형태의 신분제도에서 절대적 다수인 평민들은 그저 다스려야 할 대상일 뿐 개혁 주체로는 고려 대상에 끼지도 못했다. 그랬던 평민들을 엘레나가 지목했다. 시대의 변화는 위에서부터 아니라, 아래서부터라고 얘기했다. 시안에게는 그 얘기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귀족이냐, 황실이냐. 평민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귀족들은 부패했으며, 황실은 권위를 잃고 귀족의 횡포를 막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

    “수탈당하는 평민들은 그 둘을 다르게 보지 않습니다. 핍박하는 쪽이나 말리지 못하는 쪽이나 그저 똑같을 뿐이죠.”

    칼리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엘레나가 하는 말의 수위가 너무 높아 시안의 화를 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계속. 계속 얘기하라.”

    놀라운 건 시안의 인내력이었다. 면전에서 황실의 무능력함을 지적받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나의 주장을 계속 경청할 뜻을 보였다.

    “황실에게 귀족은 적입니다. 황실에게 평민은 적입니까?”

    “아니다.”

    “그럼 황실은 누구에게 기대야 할까요? 민중입니다.”

    “기댄다, 황실이…….”

    시안은 담담하게 엘레나가 한 말을 곱씹었다. 황실은 민중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지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신분이 존재하는 만큼 평민들은 그냥 그런 존재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지금 엘레나의 말은 그러한 상식을 모조리 깨고 있었다.

    “제왕적 황제가 군림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엘레나는 목소리에 힘을 줘 또박또박 얘기했다. 길고 긴 주장의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

    “황제는 민중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서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

    “그것만이 변하는 시대를 맞아 전하께서 원하는 바를 이루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엘레나의 마지막 주장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가 직접 보고 경험한 미래였기에 단호하고 흔들림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됐어. 남은 선택은 전하의 몫이야.’

    엘레나도 안다. 지금 떠든 말들이 가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릴 거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이 진심 어린 조언이 꼭 그에게 닿기를 바라는 건 한때나마 품었던 애정과 미안함 때문이다.

    “루, 루시아.”

    시안이 침묵하자 칼리프가 불안한 듯 엘레나를 나지막이 불렀다. 침묵이 이어질수록 긴장한 칼리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엘레나는 초연하게 기다렸다. 긴 적막은 곧 시안의 고민을 뜻했다. 고민이 끝났을 때 그가 무슨 선택을 하든 존중함으로써 그에게 가진 애증에 끝을 고할 참이었다.

    “그대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시안의 첫 마디는 감탄이었다. 전혀 다른 시야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학식에 대한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건가. 그대가 그때 본 신성 제국 책들의 의미가?”

    “……!”

    엘레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시안이 그때 본 서책들을 기억하고 엘레나가 한 말의 요지를 정확하게 꿰뚫어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정말 내 말을 귀담아들으셨다고?’

    역정을 내기는커녕 엘레나의 얘기를 곱씹는 시안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신분제의 정점이자 황태자인 그가 받아들이기에 다소 파격적이고 무리라고 여길 만한 주장이었다.

    또한 이전 삶에서 엘레나가 악을 쓰며 애원해도 한마디조차 들어주지 않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차라리 예전처럼 무시했다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시안이 자꾸만 엘레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니 그를 대함에 있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오늘 이야기는 참으로 뜻깊었군. 내 머릿속의 안개가 싹 가신 기분이야.”

    시안이 토론을 파하자 가장 기뻐한 건 칼리프였다. 아무런 탈 없이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영애.”

    시안이 나지막이 엘레나를 불렀다.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종종 나와 이런 시간을 보내줄 수 있겠나?”

    “……네, 전하.”

    엘레나는 마지못해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걸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시안의 앞에서 딱 잘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엘레나와 칼리프가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져 사위가 캄캄했다. 엘레나는 긴장이 풀리자마자 피로가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쉬고 싶어.’

    바로 대로 건너편에 기숙사가 보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건만 엘레나는 갈 수가 없었다. 도서관 기록실에 들러 변장을 지워야 베로니카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 진짜 간이 얼마나 부은 거냐? 전하 앞에서 뭐? 황실이 어쩌고 어째?”

    칼리프가 나란히 걸으며 엘레나를 타박했다. 그가 보기에 오늘 엘레나의 발언은 위험수위를 한참 넘어섰다.

    “그마저도 귀담아듣지 않으신다면 그 정도 그릇인 거죠.”

    “뭐?”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더 타박하려던 칼리프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 보자.”

    중앙 도서관 앞에서 작별을 고한 칼리프가 멀어졌다. 끄덕임으로 인사를 대신한 엘레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사 층 기록실로 향했다.

    “…….”

    평소라면 도서관 내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움직였겠지만, 엘레나는 토론으로 너무 피곤한 나머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하필 오늘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의 등 뒤에 닿아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엘레나는 기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복도 끝 계단 모퉁이에서 한 남자가 기척을 숨기고 지켜보고 있었다.

    “얘 대체 뭐지?”

    남자의 정체는 렌이었다.

    * * *

    렌은 삼자대면 이후로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아와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의 관계에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서다.

    특유의 집요함으로 루시아의 행적을 좇던 렌은 우연히 칼리프와 헤어지고 도서관으로 들어온 루시아를 발견하고 조용히 뒤를 밟았다. 그러다 결국 기록실로 들어가는 루시아를 보고야 말았다.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저길 갈까?”

    렌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비록 공부와는 거리가 멀지만 타고난 머리가 좋았다. 누군가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의심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영민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영민하다고 자부하던 머리도 이번 일만큼은 추측이 어려웠다.

    프리드리히 가문의 기록실. 딱히 뭐 특별할 것도 없고 의미도 없는 옛것들을 보관하는 곳. 말이 기록실이지 재학생 누구도 찾지 않을 만큼 방치된 곳이었다. 그런 곳에 왜 간 것인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끼익.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실 문이 열렸다. 렌은 재빨리 모퉁이를 돌아 오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층계참에 몸을 숨겼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소리의 주인이 계단의 모퉁이를 돌았다.

    “……!”

    웬만한 일로는 놀라는 일이 없는 렌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베로니카?’

    놀랍게도 모퉁이를 돌아서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여학생의 정체는 베로니카였다. 렌은 베로니카가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난 뒤에야 인기척을 내며 층계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이 맥락 없는 연결 고리는?”

    렌이 루시아에게 관심을 가진 건 순전히 흥밋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중간에 시안이 끼어들며 빈정을 상하게 하긴 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루시아를 파면 팔수록 수수께끼처럼 나오는 의문에 흥미가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오늘 본 건 그간의 흥미를 단숨에 뛰어넘는 수준의 큰 충격을 주었다.

    “베로니카랑 관련이 있으시다?”

    자문하듯이 중얼거리던 렌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신이 나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다. 베로니카와 연관이 있음이 증명된 이 순간부터 루시아는 단순히 흥밋거리가 아니다. 끝까지 파고들어서 밝혀내야 할 먹잇감이다.

    “얘는 언제 나오려나.”

    렌은 이죽거리며 루시아가 기록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꽤 오래도록. 초저녁이 지나 야심한 시각이 될 때까지. 늦은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아는 나오지 않았다.

    “느낌이 싸한데?”

    렌은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이상함을 느끼고는 층계참을 내려와 기록실로 갔다. 노크할 만큼 정중한 성격이 아니기에 문고리를 잡고 확 열었다.

    “아무도 없어?”

    기록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은커녕 적잖은 시간을 비운 듯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렌은 거칠게 머리를 흩뜨렸다.

    “뭐야, 얘는 대체 언제 나온 거지? 나왔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이곳 기록실이 있는 사 층 복도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렌이 있던 계단이 유일했다.

    “내가 못 본 건가?”

    다른 말로 해석하면 렌이 놓쳤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도 그거대로 말이 되지 않았다. 렌은 입학 이래 검술학부 수석을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괴물이었다. 일 학년 때 가문의 기사들도 한 수 접어줄 만큼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런 우월한 재능과 천재성이 없었다면 휴렐바드와 더불어 최고의 검사로 칭송받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유령?”

    그런 렌을 피해서 증발하듯이 루시아가 사라졌다. 인기척이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아니면 나보다 세다고?”

    생각을 키워 나가던 렌이 허황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픽 웃었다.

    “뭐 어때, 내가 신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는데.”

    루시아를 놓쳤지만 렌은 조급하기는커녕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꼬리를 찾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손에 잡히는 순간 몸통을 찾는 건 한순간이다. 볼일을 마친 렌이 기록실을 나가려는데 한쪽 벽면에 걸린 프리드리히 가문의 역대 가주들의 초상이 눈에 띄었다.

    “꼴 보기 싫은 면상들이네. 이봐, 당신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지랄 맞게 사는지 알아?”

    렌이 이죽거리며 드러낸 감정은 살기와 증오였다. 대공가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도 대공가를 위한 일방적 희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독립을 조건으로 백년조약을 맺어 희생을 의무화해 버린 것이다.

    “조부 때 맺은 조약을 내가 지킬 의무는 없잖아? 백 년? 개나 주라고 해.”

    초상을 노려보는 렌의 표정이 더없이 살벌해졌다.

    “내 식대로 다 망가뜨릴 거니까.”

    * * *

    기말고사가 끝났다. 학부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성적이 공시됨으로써 학술원 1학기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찍 종강한 학부의 학생은 방학을 기해 모처럼 가문으로 돌아갔다. 한 달 넘게 방학이 주어지는 만큼 지방 영지라도 충분히 다녀올 만한 시간적 여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재학생이 학술원을 떠나는 건 아니다. 평민 출신 재학생은 상당수가 기숙사에 남았다. 학술원의 성적이 곧 졸업 후의 삶을 결정짓는 만큼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엘레나도 기숙사에 남았다. 귀족 출신 재학생들이 가문으로 돌아간 걸 감안하면 굉장히 의외였다. 엘레나가 학술원에 남게 된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리아브릭의 의지였다.

    베로니카는 건강상의 이유로 이 년간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졸업이 지연되어 버렸다. 리아브릭은 계절학기를 통해 엘레나가 그간 따지 못한 학점을 쌓기를 바랐다. 재학 기간에 상관없이 할당 학점을 채우거나, 성적이 우수하면 조기 졸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술원에 남게 된 엘레나는 계절학기를 수강했다. 전공뿐만 아니라 교양과목도 포함되어 있는지라 본 학기보다 더 빡빡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엘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직 학술원에서 할 일이 많았다. 대공가로 들어가 리아브릭의 감시를 받는 것보다 이편이 더 운신이 자유로웠다.

    “그런 것치고 내가 딱히 할 일이 없긴 하네.”

    엘레나가 구상했던 것보다 짜놓은 판이 잘 굴러갔다. L의 이름으로 후원한 시대적 거장들을 하나둘 칼리프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란돌과 교감하며 아트 중개사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자각한 칼리프는 미래의 거장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예술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미 L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여기던 거장들은 그런 아트 중개사의 역할에 큰 매력을 느꼈고, 망설임 없이 칼리프의 손을 잡았다.

    엘레나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였다. 최초이자, 최고의 아트 중개사였던 그는 거장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잘 알지도 못했던 재단, 건축, 문학 등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잠잘 시간도 없을 만큼 혹사하면서 칼리프는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노력과 열의도 중요하지만, 칼리프 선배의 성장에는 에밀리오 님의 역할이 컸어.”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는 수도와 3국 연합을 오가며 상행에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닿을 때면 어린 칼리프를 만나 그간 쌓은 연륜과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해 줬다. 칼리프의 성장은 거장들의 작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문학가 바르가스의 작품 <인어>는 엘레나의 지원과 칼리프의 도움으로 무려 이 년이나 빨리 문학계에 발표됐다. <인어>는 인간과 반인반어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로 인간의 욕망과 쾌락에 대한 욕구를 담아내며 문학계에 혁명에 가까운 파란을 일으켰다.

    그뿐이랴. 카스톨 상회의 상권과 유통망을 이용하여 서적을 판매하자 예상외로 많은 수입이 발생했다. 또 번역 작업을 통해 발 빠르게 로이에르 왕국과 3국 연합과 같은 외국에도 판매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니 많은 유명 문학가와 대문호가 제 발로 찾아왔다. 제국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타국에까지 자기의 작품을 판매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살롱도 순조롭게 지어지고 있고.”

    에밀리오는 황궁의 정문에서 수도를 가로지르는 대로의 노른자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워낙 매물이 귀하고 매매가 없는 구간이다 보니 매입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무리 없이 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 땅 위로 건축가 란돌이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살롱의 터를 다지고 있었다.

    란돌은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공법을 활용한 돔 형태의 지붕을 구현할 예정이었다. 뾰족하고 높은 첨탑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고딕 양식과 차별되면서도 조화롭고 균형 있는 건축미를 살려 더 우아한 건물을 짓고자 노력 중이었다. 이미 칼리프가 가져온 설계도면을 본 엘레나는 그 격조 높은 멋과 품격 있는 웅장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도의 중심지가 바뀔 거야.”

    성공에 확신을 가진 엘레나는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섰다. 에밀리오에게 추가로 살롱 부지를 매입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주변 건물들도 시가보다 높은 가격을 주더라도 매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살롱을 중심으로 거리 일대를 바꾸려면 그만한 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란돌은 초기보다 두 배 이상으로 넓어진 부지에 걸맞게 설계도면을 수정했다. 그렇게 완성될 살롱의 설계도는 대성당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갈 만큼 큰 건축물의 형태를 띠었다.

    살롱 내부 시설도 과거에 본 적 없는 구조를 가질 예정이다. 토론의 장이 열릴 수 있는 응접실은 물론이며 거장의 작품 전시회, 오페라 극장, 작은 무도회도 가능한 홀마저 따로 구획할 생각이었다. 엘레나가 바라는 살롱 문화의 중심지가 될 요소를 모두 갖춰놓은 셈이다.

    증축이 확정되자 공사 기간도 늘어났다. 칼리프는 당장 착공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 년은 족히 걸릴 대공사라고 했다. 이 년이란 시간은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예상 시기보다 훨씬 빨리 완공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란돌이 진짜 천재로 추앙받던 이유는 경이로운 건축 속도도 한몫했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엘레나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란돌은 현행 건축물의 평균 완공 기간을 절반 가까이 줄여놓을 수 있는 효율적인 공법을 구사할 줄 알았다.

    칼리프는 아트 중개사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베로니카 공녀와 갖는 미술품 매매는 본인이 직접 챙겼다. 최근 들어서는 미술상으로서 칼리프의 이름이 조금씩 미술계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매매 대행을 맡기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이 제 발로 찾아올 정도였다. 자칫 욕심을 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칼리프는 딱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예술품 매매를 대행했다. 욕심내지 않고 체하지 않을 만큼만. 초기에 엘레나가 부탁한 선을 지켰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라파엘 선배가 걱정이네.”

    기록실에 들러 변장을 하고 중앙 도서관을 나서는 엘레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엘레나가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대공가를 파멸시킬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도통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워낙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으니 언제고 이겨낼 거란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를 가르칠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서 붓을 놓다시피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 시대의 지평을 연 거장 라파엘의 그림이 갖는 문화적 파괴력은 다른 어느 예술 작품보다도 가치가 드높았다. 고작 한 점의 그림이 갖는 영향력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실제로 그랬다.

    라파엘이 창안하고 적용한 다양한 기법과 인물을 표현하는 해석 능력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그림의 상식을 뒤바꿔 놓았다. 그 한 점이 그림의 척도가 됐으며, 지금까지 명화라고 여겨지던 그림의 가치가 뚝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 그림 한 점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더욱 컸다. 지식인들은 지금까지 묵인하던 사회의 통념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한 영향은 신분제의 가장 밑 평민에게까지 퍼지게 된다. 왜 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수탈을 당하면서도 찍소리도 못 하던 평민들의 불만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돌아보면 믿기질 않아. 그림 한 점이 불러온 효과가 그 정도였다니.”

    만일 누군가 이런 얘길 했다면 엘레나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을 것이다. 고작 그림 한 점이 무슨.

    근데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서측 별관에 도착한 엘레나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화실을 찾았다.

    “저 왔어요.”

    흰 캔버스를 바라보며 앉아 있던 라파엘이 반갑게 맞이했다.

    “왔어요?”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계세요? 가뜩이나 지하실이라 빛도 잘 안 드는데. 내가 켜야겠다.”

    라파엘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 엘레나는 알까. 저 잔소리를 시작으로 엘레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가 하루 중에서 유일하게 웃는 시간이라는 걸.

    “이제 좀 환하네요. 어? 선배 머리 자르셨어요? 수염도 정리했네.”

    “너무 방치한 것 같아서요. 깔끔하게 다 쳤는데, 어울리나요?”

    라파엘이 멋쩍게 묻자 엘레나가 끄덕였다.

    “훤칠한데요. 여학생들이 좀 따르겠어요.”

    “빈말이라도 듣기는 좋네요.”

    “진짠데.”

    “또 들어도 지겹지 않네요. 역시 인간은 칭찬에 약한 동물인가 봐요.”

    라파엘은 겸손하게 받아들였지만, 엘레나의 칭찬은 한 치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사실이었다. 지금이야 화실에 처박혀 있느라 관리를 못 해서 그렇지 외모 자체만 놓고 보면 빠지는 데가 없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종종 쓰는 외알 안경은 지적인 인상까지 더했다. 거기다 궁정 화가 시절에도 느꼈었지만 그의 예술가 특유의 자유로우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분위기는 여심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저번에 못 그렸던 그림을 계속 그려볼까요?”

    “네, 선생님.”

    캔버스 앞에 앉은 엘레나가 팔레트에 유화물감을 풀고 붓으로 콕콕 찍었다.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고자 모작을 하면서 표현 능력을 키우는 중이었다.

    “잘 그렸어요.”

    “안 그래도 칭찬 기다렸어요.”

    자기가 그려놓고도 발전한 모습에 엘레나도 내심 흡족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만족을 모르는 사내였다.

    “여기는 좀 아쉬워요. 색을 입힐 때 손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는 바람에 물감이 뭉쳤어요. 가볍지만 붓에 밀리지 않을 힘으로 찍어 밀어야 해요.”

    “어려워요.”

    “예시를 보여줄게요.”

    라파엘이 붓에 물감을 묻혀 자신의 캔버스에 시범을 보여줬다. 좀 전의 칭찬이 무색할 만큼 엘레나와 확연히 비교되는 색감과 표현이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루시아 양도 두어 번 따라 하다 보면 금방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궁정 화가 시절에도 그랬지만 라파엘은 태생부터 천재성을 타고난 까닭에 남을 가르칠 때도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즉, 본인이 그림의 기본이나 화법을 재능에 힘입어 쉽게 습득한 만큼 당연히 남도 쉽게 배울 거라고 착각하곤 했다. 그 때문에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어찌나 난감했던지.

    “어려워요. 좀 쉽게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엘레나가 투정을 부리자 라파엘이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라파엘은 조용히 엘레나의 등 뒤로 오더니 손을 뻗어 엘레나가 붓을 쥔 손등을 꼬옥 감쌌다.

    “제가 시범을 보일 테니 이 감각을 손끝으로 기억해 주세요. 여기서 힘을 주고 획을 그으면 됩니다.”

    “아! 느낌 알 거 같아요.”

    “그래요? 그 느낌 기억하시면서 붓 끝을…….”

    순간 라파엘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레나의 이해를 돕고자 쉽게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만 하던 라파엘이 그녀와 엄청나게 밀착해 있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

    붓을 놀리며 엘레나가 들썩이자 라파엘이 헛숨을 삼켰다. 코끝이 엘레나의 목덜미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자 은은한 향과 살 내음이 진하게 풍겼다.

    ‘아무 생각도 안 들어.’

    한번 의식하자 손등으로 전해지는 체온도, 속삭이는 듯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도, 그 밖에 엘레나의 모든 게 라파엘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시간마저 더디게 만들었다.

    “아까보다 확실히 나아진 거 같아요.”

    엘레나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얘기하자 라파엘이 다시금 흠칫 몸을 굳혔다.

    “아, 아. 네. 제가 보기에도 많이 조, 좋아졌네요.”

    “그죠? 느낌 제대로 왔어요!”

    “……!”

    신이 난 엘레나가 떠들수록 라파엘에게 그녀의 숨결이 닿았다. 엘레나로서는 제 것이 되어가는 표현법이 기뻐서 그런 것이겠지만 라파엘은 그 모든 게 의식이 돼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이제 혼자 연습하셔도 될 거 같네요.”

    라파엘은 부자연스럽게 몸을 뗐다. 더 이러고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얼굴도 터질 것처럼 새빨갰다.

    “왜 그러세요?”

    “그냥 좀 더워서요. 아, 좀이 아니고 많이 덥네요.”

    라파엘이 손부채를 만들어 부쳤다. 이렇게라도 진정시키고 수줍음을 감추고자 함이다.

    “많이 더우세요? 전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열나는 거 아니에요?”

    “네?”

    “지금 얼굴이 너무 빨개서요.”

    엘레나가 걱정스럽게 일어나더니 라파엘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라파엘이 어쩔 줄을 몰랐다.

    “열은 없는데.”

    “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계속 반복 연습을 해야 해요. 그래야 몸이 기억합니다.”

    라파엘은 이런 당혹스러움을 들킬까 엘레나의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네. 괜찮다고 하시니 마저 연습할게요.”

    엘레나는 발전하는 자신의 그림에 재미가 붙었는지 아까 전 감각을 떠올리며 붓 칠을 반복 숙달했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는지 표현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러는 사이 라파엘 역시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하, 시도 때도 없이 이러다니.’

    라파엘의 가슴 깊숙한 곳에 엘레나를 향한 감정의 새싹이 돋은 지는 꽤 됐다. 그렇다고 그 마음을 표현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방적인 감정을 엘레나가 부담으로 느낄까 봐서다.

    본의 아닌 접촉에 당혹스러워한 것을 엘레나가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다. 혹여라도 들키면 어쩌나. 그럼 어떻게 하지. 짧은 순간에 수많은 걱정이 교차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엘레나는 그런 감정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선배, 봐봐요. 확연히 좋아졌죠? 어쩌지, 나 그림에 재능이 있나 봐.”

    “…….”

    엘레나가 신이 나서 떠드는 모습을 보던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엘레나의 모습이 지금껏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때 묻지 않은 아이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새하얗게 빛이 났다.

    엘레나는 이제껏 라파엘이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고,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어떤 언어로도, 그 어떤 단어로도. 라파엘은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천사.”

    “네?”

    라파엘의 중얼거림을 들은 엘레나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라파엘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엘레나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피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어. 낯간지럽게 천사라니!’

    지금껏 보지 못했던 라파엘의 모습에 엘레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 엘레나를 빤히 쳐다보던 라파엘이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저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길래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요. 거절하기 힘들게.”

    “루시아 양의 초상을 그려보고 싶어요.”

    “……!”

    라파엘의 조심스럽지만 간절한 부탁에 도리어 당황한 건 엘레나 쪽이었다. 초상 모델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제안인지라 똑바로 들은 게 맞나 의심이 돼서 되묻기까지 했다.

    “지금 저보고 모델이 되어달라고 하신 거예요?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제대로 들으신 게 맞아요. 좀 갑작스러웠나요?”

    “갑자기 모델이라니…….”

    엘레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화가로부터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는 건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화폭에 담을 만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의미였으니까. 누구나 기분 좋을 제안임에 분명했지만 엘레나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지금 엘레나는 루시아로 변장 중이었다. 일자 앞머리에 짧은 단발, 검정 뿔테 안경까지 쓰고 있는 모습은 도서관 구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부 벌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엘레나가 타고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베로니카 공녀일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모습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초라했다. 도대체 무슨 매력을 보았기에 모델을 부탁한 건지 엘레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씀은 고마운데, 잘 납득이 안 가요. 왜 제게 모델을 제안하신 거예요? 저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이유라면 있어요. 웃지 않으신다면 말씀드릴게요.”

    라파엘이 진지하게 대꾸하자 엘레나가 설마 하는 생각에 말을 더듬었다.

    “혹시 그…… 천…… 그거는 아니죠?”

    엘레나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단어를 우물거렸다. 천사라니. 성스러운 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천사와 비교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럽고 낯간지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천사라. 그리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제가 느낀 감정을 단편적으로 빗댄 단어에 불과해요.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거든요.”

    “그럼 아니란 거죠? 하, 다행이다.”

    엘레나가 내심 안도할 때였다.

    “빛이요. 순백의 빛.”

    “……천사 할 걸 그랬어.”

    천사와 다를 바가 없는, 아니, 그보다 더 낯부끄러운 말에 엘레나는 민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엘레나가 난처해한다고 느낀 것인지 라파엘이 재차 말을 보탰다.

    “처음이에요. 사람에게 빛이 난다는 걸 처음 알게 됐고 그 빛을 제 그림에 담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긴 것도요.”

    그림을 향한 간절함과 열의를 보이는 라파엘의 모습에 엘레나의 눈이 뜨였다.

    ‘어쩌면 슬럼프를 탈출할 계기가 될지도?’

    라파엘이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것은 외면을 그리는 데 치중한 나머지 내면을 담지 못해 괴리감이 생기면서부터다. 어떤 그림으로 결과가 이어지든 간에 지금이 라파엘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빛이라. 호기심이 생기긴 하네요.”

    긍정적인 엘레나의 말 흐림에 라파엘의 눈에 한껏 기대감이 서렸다.

    “할게요. 시대를 대표하는 초상의 모델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기회를 마다하면 되겠어요?”

    “감사해요.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는데 정말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네요.”

    엘레나의 수락에 라파엘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라파엘을 보고 있는 엘레나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엘레나는 진심으로 라파엘이 슬럼프를 이겨내길 바랐다.

    “단! 제가 부탁을 들어줬으니, 선배도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슨 부탁이든 목숨 걸고 들어드릴게요.”

    라파엘은 무슨 부탁이든 들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엘레나가 간직하고 있는 저 빛을 그림에 담고자 하는 뜨거운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배가 그려봐야 아는 거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요. 초상이 가을이 오기 전에 완성된다면 예술제에 전시해 주세요.”

    “학술원 예술제에요?”

    “아! 오해하진 마세요. 급히 그리라는 게 아니라 시기적으로 맞으면 예술제에 출품했으면 하는 바람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라파엘은 잠시 망설였다. 학술원 미술학부에 재학 중이지만 그는 학점 취득에 필요한 과제만 제출할 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그림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그림이 미흡하고 부족하다고 여겨 공개하기 부끄럽다고 느꼈다. 엘레나는 그런 라파엘이 껍데기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길 기대했다.

    “알겠어요. 시기적으로 맞는다면 루시아 양의 말대로 출품하도록 할게요.”

    “거래 끝! 기왕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 작업 어때요? 느낌 잊으면 곤란하니까. 저쪽에 가서 앉을까요? 포즈는 다소곳하게? 아니면 요염?”

    엘레나의 열정에 라파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이번 그림은 느낌이 좋다고. 왠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진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다.

    * * *

    리아브릭의 집무실 안. 상석에 앉은 리아브릭을 필두로 좌우에 점잖게 생긴 네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서른 초반으로 짐작되는 이들은 리아브릭의 수족으로 대공가를 지탱하는 핵심 인사였다. 학술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건 물론이거니와 대공가의 후원을 받아 교육을 받은 만큼 충성심도 깊었다. 그런 이유로 무려 열 살이나 어린 리아브릭의 명령을 받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불만을 내비치지 않고 충실하게 따랐다.

    “L이란 자가 빈민촌 요지의 땅을 매입했다고요?”

    리아브릭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지자(知者)들이 돌아가며 차례로 보고했다.

    “네. 정확히는 열네 곳으로 파악됩니다.”

    “두 달 전쯤 매입 절차를 마무리 짓고 황실이 발행하는 토지증명서까지 발급받아 갔다고 합니다.”

    “빈민촌 부지 매입가가 높아진 이유도 그자 때문인 걸로 파악됐습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L이 매입한 부지는 노블레스 거리의 중심지입니다.”

    수족들은 자신들이 조사한 바를 있는 그대로 취합해 전달했다.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조치를 취하고, 대처하는 건 리아브릭의 몫이었다.

    “결론만 놓고 보자면 우리가 빈민촌을 개발할 거라는 걸 L이라는 자가 알고 선수를 쳤다는 건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쪽으로 생각이 갈 수밖에 없다. L이 매매한 부지의 위치도 그랬으며, 시기적으로도 그랬다. 또 황실에서 발행하는 토지증명서까지 받아 간 걸로 보아 외압이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땅을 빼앗기는 일까지 사전에 차단하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수족 중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정보가 유출된 것 같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죄송합니다.”

    리아브릭이 날을 세워 얘기하자 수족들이 동시에 머리를 숙였다.

    “유출 경로는 파악했나요?”

    “죄송합니다.”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럼 L의 소재 파악은?”

    “……죄송합니다.”

    “당신들 자꾸 일 이따위로 처리할 거야?”

    리아브릭의 서늘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웬만한 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기에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살폈다.

    “분명 경고했을 텐데요. 이번 사업은 우리 대공가로서도 리스크가 큰 만큼 보안에 유의하라고. 제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렸나요?”

    수족들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닙니다. 유의하고 또 유의했습니다만…… 그래서 저희도 난감합니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나 정보가 샌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저희 역시 미칠 지경입니다. 빈민촌 파악도 직접 할 만큼 만전을 기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리아브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그들을 번갈아가며 몸속을 낱낱이 파헤치듯 노려봤다.

    “그 말은 곧 여기 있는 다섯 명 중 한 명이 L이란 가명으로 땅을 매입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자, 자작님!”

    자신이 한 말이 화살이 되어 돌아오자 네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다.

    “제발, 의심을 거둬주십시오.”

    “시, 시간을 주시면 어디서 정보가 유출됐는지 밝혀내겠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네 명은 리아브릭에게 머리까지 조아리며 애원했다. 그들은 리아브릭의 한마디에 달려 있을 만큼 파리 목숨이었다. 프란체 대공이 리아브릭에게 그만큼 강한 실권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우리가 입은 피해 액수가 얼마인지 알아요?”

    “…….”

    “당신들 목숨이 그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기면 착각이에요.”

    리아브릭의 말투는 점잖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살벌한 협박이었다. 저들 네 명의 목숨을 합쳐도 돈보다 못하다는 얘기와 다름없었으니까. 피해 액수를 채워놓지 못한다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빈민가 땅의 매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협박을 하든, 빼앗든 알아서 하세요.”

    “하, 하지만 그러면 뒷말이…….”

    “그걸 안 나오게 하는 게 당신 일이잖아.”

    리아브릭이 싸늘하게 반말로 경고했다.

    콧수염을 기른 수족은 저 말이 가진 위험성을 감지했다. 혹여 뒷말이 나온다면 그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테니 책임지고 일을 처리하란 뜻이다.

    “아, 알겠습니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L도 찾아내세요. 뭐 하는 자인지,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하나도 빠짐없이요.”

    “안 그래도 수소문 중입니다. 땅을 판 자들로부터 용모를 이미 파악해서…….”

    “그런 거까지 제가 보고받아야 하나요?”

    “…….”

    리아브릭의 눈길에 수족들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가 원하는 건 그 땅의 소유권을 우리 대공가가 가져오는 겁니다. 방법 따위는 관심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결과죠.”

    “아, 알겠습니다.”

    리아브릭이 손을 휙휙 저으며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음에 리아브릭도 답답했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 앞에 섰다.

    “저자들은 아니야. 돈 몇 푼에 눈이 멀어서 정보를 흘릴 만큼 충성심이 낮지도 않고 배짱도 없어.”

    리아브릭이 방금까지 책임을 전가하며 수족들을 압박하긴 했지만 실제론 그들의 대공가를 향한 충성심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그들은 십 년 넘게 대공가의 일을 도맡아 할 만큼 일 처리도 완벽한 축에 들었다. 

    그런데도 정보가 샜다. 마치 빈민가 재개발 사업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새로 신설될 노블레스 거리의 핵심 위치를 골라서 땅을 매매한 걸 보며 확신했다.

    “내부를 단속해야겠어.”

    리아브릭의 눈이 매서워졌다. 엘레나가 대공가로 오면서 베로니카 공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싹 내치며 물갈이했다.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불순한 자들이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리아브릭은 조용히 기사 로렌츠를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경께 은밀히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로렌츠가 절도 있게 서서 말을 기다렸다.

    “저들의 뒤를 밟아주세요. 혹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거나,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제게 바로 알려주시고요.”

    “배신자가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아뇨.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경.”

    로렌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다시 홀로 남게 된 리아브릭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정원에 닿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다른 누군가로 가득 차 있었다.

    “L. 당신 도대체 누구야?”

    * * *

    중앙 도서관. 루시아로 변장한 엘레나는 칼리프에게 핀잔을 듣고 있었다.

    “너 빈민가 땅 자선사업용이라며!”

    “그랬죠. 그게 왜요?”

    “왜? 왜? 지금 왜라는 말이 나와? 대공가에서 널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어. 네가 산 그 땅을 다시 매입하겠다고.”

    엘레나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귀띔을 해주지 않아 서운해하는 칼리프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공가가 본격적으로 빈민가 개발에 뛰어들었군요.”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너 왜 나만 쏙 따돌려?”

    “죄송해요.”

    엘레나는 짧게 사과했다. 하지만 딱히 미안해하는 감정은 없었다.

    “이것 봐, 심지어 사과에 성의도 없어.”

    “대공가의 동향에 대해 더 얘기해 주세요.”

    칼리프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돌아가는 상황을 얘기했다.

    “아까 말한 게 다야. 그쪽은 네가 L인 걸 모르니까. 그때 땅을 매입했던 대리인의 몽타주까지 만들어서 뒤지고 있어.”

    엘레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 말은 곧 리아브릭이 L을 찾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제 시작이네. 당신과 나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리아브릭과 맞닥뜨리면 흥분될 거라 생각했는데, 엘레나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머리와 심장이 오히려 더 차갑게 식으며 냉정해졌다.

    “땅 매매를 했던 대리인 얘기는 들었어요?”

    “에밀리오 님이 옛날 옛적에 국경을 넘어서 공국에 도착했다고 너한테 알려주래. 그래야 안심할 거라고. 지금쯤 돈 펑펑 쓰면서 놀고먹고 있을 거래.”

    “아버지가 그랬다면 걱정할 필욘 없겠네요.”

    리아브릭의 집요함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엘레나는 땅을 매매할 때 내세운 대리인을 타국으로 망명시켰다. 제국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공국으로 보내 대공가라 할지라도 절대 찾지 못하게 함이다.

    “너 근데 베로니카 공녀 전하랑 가까운 사이잖아.”

    “그 얘기가 왜 지금 나와요?”

    이 타이밍에 나올 주제가 아닌지라 엘레나가 의아해 반문했다.

    “아니, 대공가에서 L을 보면 이를 가는데, 재수 없게 네가 L이라는 게 알려져 봐. 공녀 전하랑 너, 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잖아.”

    “난 또 뭐라고.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베로니카 공녀는 큰 고객이라서 없으면 좀 곤란하거든. 네가 쭉 잘 지내줬으면 좋겠어.”

    칼리프가 볼을 긁적였다. 자기가 말을 해놓고도 좀 속물적으로 보인 것 같아 멋쩍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런 칼리프를 오히려 대견하게 여겼다. 베로니카라는 고객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했다. 아트 중개사든, 미술상이든 성공을 위해 꼭 필요한 자세였다.

    “그보다 이쯤에서 대공가랑 협상해야 하지 않아? 뜸을 들일 땐 들이더라도 흥정은 해야 비싸게 팔 수 있잖아.”

    “협상은 없어요.”

    대공가랑 접촉하여 빈민가에 사둔 부지의 가격을 흥정해야 한다는 칼리프와 달리 엘레나는 아직 이르다고 판단했다.

    “협상이 없다니? 흥정을 안 하겠다는 소리야?”

    “네.”

    엘레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무슨 속셈이야? 협상도 안 하겠다, 흥정도 안 하겠다. 매매할 생각은 있어?”

    “팔긴 팔 거예요. 제가 팔고 싶을 때. 제가 원하는 가격에요.”

    처음부터 엘레나는 빈민가에 매입한 토지를 두고 리아브릭과 흥정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나야 헐값에 산 그 땅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야.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안 그래, 리아브릭?’

    지금 리아브릭이 추진하고 있는 노블레스 거리에 대공가가 거는 기대가 컸다. 제국은 귀족 연합체라고 봐도 무관할 만큼 귀족들의 국가였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을 위한 곳이 노블레스 거리다.

    귀족이 아닌 자는 출입할 수 없고, 귀족이 바라는 최고급 사치품 숍이 일대를 이루고, 귀족이 애용하는 오페라 극장이 들어서고, 귀족이 열망하는 명인의 작품을 맘껏 살 수 있고. 그 외에도 귀족을 위한 특권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노블레스 거리에 밀집됐다. 최고급 대리석으로 고풍스럽고 우아하게 지어진 거리는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이런 입소문이 퍼져 대륙 전역에서 노블레스 거리를 방문하는 귀족이 늘어났다. 벌어들이는 수입도 천정부지 늘어났다. 귀족들은 차별받길 원했고, 그 차별이란 부분을 충족시켜 주는 노블레스 거리에서 돈을 물 쓰듯 쓰며 허영심을 채웠다.

    불과 일 년. 대공가가 휘청거릴 만큼 쏟아부었던 투자금을 회수하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반년이고, 나머지 반년 만에 투자금의 배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심지어 헐값에 매수한 빈민가의 땅값은 무려 백 배가 넘게 올랐다.

    건물에 입점할 공간은 한정적인데 상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노블레스 거리에 상점을 열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점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는 헐값에 매입한 땅의 가치를 지금에 두지 않았다. 노블레스 거리가 완성될 몇 년 뒤를 고려하여 그 가격에만 매매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노블레스 거리를 무너뜨려야겠지.’

    대공가가 노블레스 거리로 천문학적인 부를 벌어들일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엘레나가 막을 거니까. 칼리프는 그런 엘레나의 속내를 모르기에 협상에 나서서 흥정하지 않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난 도통 네 생각을 모르겠다.”

    “굳이 골치 아프게 왜 알려고 하세요? 때가 되면 절로 아실 텐데. 제 뜻은 확고하니 대공가와 접촉은 보류해 주세요.”

    “알았다. 그리 조치하마.”

    밀담을 끝낸 칼리프와 엘레나는 시간 차를 두고 도서관을 나섰다. 칼리프는 아트 중개사를 겸하고 있는 만큼 학술원 밖에서 할 일이 많았다. 요새 들어서는 아예 졸업장은 포기한 듯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고 자주 학술원 밖에서 자고 들어왔다.

    엘레나의 발길은 서측 별관으로 향했다. 라파엘이 그리는 초상의 모델이 되어주기로 약속한 만큼 주기적으로 화실을 방문했다.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어쩌다 보니 칼리프와 밀담이 일찍 마무리된 까닭에 평소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누가 와 있나?”

    복도 끝, 화실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엘레나가 문 앞에 멈춰 섰다. 비스듬히 열린 나무 문 사이로 대화를 나누는 남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대는 여전히 답을 주지 않는군.”

    “……!”

    문을 열려던 엘레나의 동작이 멈췄다. 나무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황태자 시안이었다.

    ‘전하께서 왜 여기에?’

    그때처럼 자신을 보러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화실 안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저는 답을 드렸어요. 전하께서 제 대답을 외면하셨을 뿐이죠.”

    ‘황후.’

    이 잔잔한 목소리는 세실리아였다. 화실 안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가는 대화의 수위나 주제로 보아 라파엘은 자리를 피해준 걸로 보였다.

    “그것이 그대의 대답인가?”

    “네.”

    엘레나가 엿듣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돌아서려던 때였다.

    “정녕 그대는 황태자비의 위마저 마다하는 것인가?”

    “……!”

    시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황태자비라는 단어에 놀라는 것도 잠시, 엘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난 삶에서도, 지금도 전하께서는 황후만을 바라시는구나.’

    시안은 중립 귀족인 린든 백작의 여식인 세실리아와 혼인하길 바랐다. 4대 가문의 여식을 황후로 들인다면 그들이 황실의 외척이 되어 황실의 적이 될 테니까. 정치적으로 볼 때, 세실리아는 둘도 없는 황태자빗감에 틀림없다. 

    다 아는 사실이건만 알게 모르게 엘레나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은 그렇지 못했다. 황비로 있으면서도 온정 어린 눈길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던 엘레나였기에 세실리아에게 애절하게 구는 시안이 밉고 야속했다.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마다하고 싶어요. 그러나 의미가 없겠죠. 제 의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으니.”

    착잡하게 말을 잇던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제국의 여성 인권이 높은 편이라고는 하나 아직까지 귀족의 여식은 정략적인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녀의 아버지 파울 백작과 시안이 합의한다면 그녀의 의지는 철저히 묵살될 것이다.

    “그대는 그리도 황태자비가 되기 싫나?”

    “그거 아세요?”

    되레 되묻는 세실리아의 목소리에 서글픔이 담겼다.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황태자비 자리만 권하셨다는 걸.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저를 원하지 않으셨어요.”

    “…….”

    “저는 그런 인형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점점 말을 흐리는 세실리아의 목소리에 엘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인형이라고?’

    정략적인 혼인이긴 했지만 시안은 세실리아를 끔찍이 아꼈다. 엘레나에게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애정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저 말을 헤아리면 세실리아 역시 엘레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뜻이 아닌가. 아니, 자진해서 황비가 된 엘레나에 비하면 더 비참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몰랐군. 내가 그대를 그리도 고달프게 만들었는지.”

    시안은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곱씹었다.

    “약조하지. 오늘부로 더는 그대에게 황태자비의 위를 권하지 않겠다.”

    “저, 전하.”

    “린든 백작을 통한 정략결혼도 철회하지. 황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

    엘레나는 귀를 의심했다.

    ‘왜? 어째서? 전하께 그녀는 꼭 필요한 존재인데…….’

    귀족파를 견제하려는 시안에게 린든 백작가의 여식 세실리아는 더없이 적합한 황태자빗감이다. 대공가의 베로니카 공녀나 4대 가문의 일원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여식 아벨라 영애를 황태자비로 앉히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략결혼은 필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안이 물러났다. 황실의 명예까지 운운하며 약속한 이상 뱉은 말을 무를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누가 설명 좀 해줘. 왜 미래가 뒤틀려 버린 거냐고.’

    그 영민하던 엘레나의 사고도 이 순간만큼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황태자로 태어난 시안에게 대의와 황실은 항상 우선순위였다. 그런 그가 원 역사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계기가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그게 뭔지 도통 알지 못하니 불안하기까지 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엘레나의 심장박동이 진정되지 않았다. 원 역사에 위배되는 변수는 그녀가 유일했으니까.

    “……진심이신 거죠? 정말 그 말을 믿어도 되나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 역시 시안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래.”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감사해요.”

    세실리아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떠들었다. 그 이후로 화실 안에서 더 이상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끼익.

    짧은 침묵을 깬 건 비스듬히 열려 있던 나무판자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대는?”

    “……!”

    시안과 정면으로 마주친 엘레나가 자책했다. 남의 대화를 엿들은 것도 모자라 그걸 딱 걸렸다는 사실이 민망하고 창피했다.

    “죄, 죄송합…….”

    다급히 고개를 숙이는 터라 엘레나는 시안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엘레나보다 당혹감에 물들어 난처해하는 모습을. 치부를 들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태도는 엘레나가 전생과 현생을 합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시안은 지금 이대로 엘레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지 그대로 지나쳐서 가버렸다.

    “아.”

    순간 엘레나는 심장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무시하듯 가버리는 시안의 모습에서 옛 모습이 겹쳐 보였다. 흉터로 남아 있던 그때의 기억이 가시가 되어 다시 찌르는 듯했다.

    ‘아파하지 마. 내가 실수한 거잖아.’

    알고 있다. 분명 엿들은 건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걸. 용서받기 힘든 잘못이라는 것도. 근데 그걸 떠나서 시안의 저런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간 우연한 만남들 때문에 시안의 살가운 태도에 익숙해져서 잠시 상처를 잊고 있었다. 

    그와 자신은 악연인데.

    “…….”

    엘레나는 멀어지는 시안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 * *

    엘레나는 무릎에 양손을 포개고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동상처럼 굳어 있는 그녀를 보며 건너편의 라파엘이 캔버스 위로 바삐 붓을 놀렸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네?”

    구도가 망가지지 않도록 입조차 뻥긋하지 않았던 엘레나가 반문했다.

    “평소와 좀 다른 것 같아서요. 생각도 많아 보이고.”

    “…….”

    “제게 말하면 안 되는 일인가요?”

    라파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엘레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안과의 악연은 이전 삶부터 이어져 온 만큼 단순히 정의하거나 설명을 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좀 곤란한 일이라서……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림에 차질이 간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걱정돼서.”

    엘레나가 억지로 웃었다.

    “걱정 감사해요. 근데 이러다 말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이제 집중해서 다시 가죠.”

    라파엘은 애써 괜찮은 척 구는 그녀를 보며 더는 위로의 말도 쉬이 건네지 못했다. 주제넘어 보일까 봐. 그러나 고민이 많아 보이는 엘레나를 쭉 보고 있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 계셔 보세요.”

    뭔가 떠올랐는지 라파엘이 화실 안쪽의 사물함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목각 인형 한 쌍을 들고나와 이젤 옆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제게 주신 선물을 본떠서 만든 겁니다. 저희 고향에서는 이 목각 인형을 보고 있으면 행복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엘레나의 시선이 목각 인형으로 향했다. 토끼를 본떠서 만든 모형이었는데 만세를 하다 그만 큰 귀가 젖혀 넘어지려는 자세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쟤들 저러다 넘어지겠어요.”

    “근데 넘어지지 않는 게 포인트죠. 귀로 넘어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거든요.”

    “풉. 뭐예요, 그게.”

    엘레나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시안의 일로 심란했었는데 라파엘 덕분에 잠시나마 잊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어이없어서 웃는 거죠.”

    라파엘 역시 아까보다 나아진 엘레나를 보며 내심 안심했다.

    “고마워요, 선배. 신경 써줘서.”

    “지금 그 미소 유지하세요. 이제 좀 제대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부려먹지, 또.”

    엘레나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곤 처음보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라파엘은 그녀를 처음 모델로 그리고 싶었을 때 본 빛이 밝아진 걸 느끼며 그것들을 화폭에 담고자 분주히 붓을 놀렸다. 슬럼프에 빠진 이후,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모습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라파엘은 초상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기법이니, 내면이니, 표현이니, 신체적 구조니 뭐니 하는 그림의 이론이나 부수적인 모든 걸 머리에서 지웠다.

    그림이란 예술의 영역임에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은 여전했으나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의식하지 않고 엘레나란 본연의 인간을 담고자 노력했다. 분명한 건 라파엘은 슬럼프를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와 틀을 깨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깨야. 앉아만 있는데도 힘들어 죽겠네.”

    화실을 나와 도서관으로 향하던 엘레나가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불과 몇 시간이지만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유화가 마르는 시간이 있어 일정 주기로 모델을 하는 게 아니었다면 몸살이 났을지도 모른다.

    중앙 도서관에 도착한 엘레나는 곧장 기록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변장을 지우고 베로니카로 돌아간 엘레나가 기록실을 나섰다.

    그리고 적막한 복도를 가로질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모델만 하더라도 매우 지치는 일인데, 시안의 일까지 겪은 까닭인지 심적으로도 매우 고되었다.

    “이봐, 딱 걸렸어.”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후, 오 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 너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렌이었다.

    “분명 들어갈 땐 루시아였는데, 나올 땐 베로니카란 말이지?”

    제대로 꼬리를 밟았다고 느낀 렌이 휘적휘적 걸어 기록실로 갔다.

    “없네? 없어? 어디에 꼭꼭 숨어 있기에 없을까?”

    렌은 신이 났는지 휘파람을 부르며 뒤지기 시작했다. 역대 프리드리히 가문 가주들이 사용했다는 낡은 오동나무 책상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닫아봤다. 그 외에도 수납이 가능한 모든 공간을 싹 다 뒤졌다. 분명 증거가 나올 법도 한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렌의 시선이 기록실 구석에 비치된 장롱으로 쏠렸다.

    “오, 완전 수상해.”

    마지막 기대를 품고 렌이 장롱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왜 여기만 잠겨 있지? 더 수상하게.”

    렌은 미친놈처럼 히죽히죽 웃더니 가슴팍에 붙어 있던 명찰을 뗐다. 그다음 명찰 뒤쪽에 교복 교정용으로 꽂혀 있는 옷핀을 뽑았다. 옷핀을 길게 쭉 편 렌이 열쇠 구멍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옷핀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잠금장치의 끝자락에 딱 걸렸다.

    “옳거니.”

    렌이 그곳을 옷핀으로 톡톡 치며 잠겨 있는 톱니바퀴를 돌렸다.

    딸깍.

    기분 좋아지는 소리가 잠금장치가 해제됐음을 알렸다.

    “뭐가 들어 있으려나?”

    렌이 꼭 보물섬의 보물 상자라도 찾은 듯 양손을 비비더니 힘껏 장롱문을 열어젖혔다.

    “이야! 첫 번째 보물 발견.”

    장롱 안, 옷걸이에 눈에 익은 교복 외투가 걸려 있었다. 과거에 비 맞지 말라며 루시아에게 씌워줬던 그 외투였다.

    “두 번째 보물은 어디 있을까요?”

    렌은 기대에 찬 눈으로 장롱 아래에 부착된 서랍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 떡하니 있는 그것들을 보며 렌이 히죽 웃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뭐? 카스톨 상회 상단주가 아버지라고? 어디서 약을 팔아. 그럼 백부는 새아버지냐?”

    서랍 안에는 엘레나가 루시아로 변장할 때 애용하는 가발과 뿔테 안경, 변장 도구, 명찰 등이 담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사용 용도가 명확하게 짐작되는 만큼 렌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육촌 누이가 조용하게 지낸다 했더니, 이런 앙큼한 짓을 벌이고 다닐 줄은 몰랐네. 어쩐지. 나한테 꼬박꼬박 말대꾸할 때부터 느낌 오더라.”

    렌은 베로니카와 루시아가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기록실을 오가는 모습까지 본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근데 얘는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니지? 심심해서?”

    렌은 자신에게 해당할 법한 이유를 찾아 붙이다가 픽 웃었다.

    “이건 아닌 거 같고. 대체 뭘까?”

    하나의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또 다른 수수께끼에 직면했다. 베로니카는 프란체 대공의 외동딸이자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갖고자 해서 가질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없고, 발아래 두고자 해서 발아래 둘 수 없는 게 없는 신분이다. 그런 그녀가 왜 변장까지 해가며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렌이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고심했다. 과거를 복기하며 혹시나 놓친 부분이 있나 점검했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게 넘긴 몇몇 상황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했다.

    “내 직감으론 상단주 에밀리오랑 베로니카는 그날 처음 본 게 맞아. 근데 베로니카의 정체를 숨겨주려고 했단 말이지. 꼭 지켜주려는 것처럼.”

    렌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나 선명하게 잡히는 건 없었다. 아직 정황도, 증거도 부족하여 뜬구름 잡는 기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분석하던 렌이 뭔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도서관에서 베로니카랑 같이 있던 놈. 그 자식을 파보자. 분명 뭔가 나올 거야.”

    렌이 칼리프를 지목했다. 타고난 촉이 그 둘이 그냥 알고 지내는 선후배 사이임은 아닐 거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슬금슬금 육촌 누이 옆에 얼쩡거려 볼까? 완전 빡치는 얼굴도 좀 보게.”

    렌은 당장 이 비밀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엘레나가 변장하는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벌써 이걸 밝히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저 옆에서 속을 긁으며 정황이 아닌 물증을 잡아낼 참이었다.

    그러자면 엘레나가 왜 변장을 하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러다 딱 내게 걸리면 훅 가는 거지.”

    그때가 되면 렌은 손에 쥐고 있던 눈 뭉치를 산비탈 아래로 굴릴 것이다. 그게 굴러서, 굴러서 눈덩이가 되었을 때 있는 힘껏 엘레나를 쾅 하고 박아버릴 거다.

    “아, 뭐 이렇게 신나는 거야.”

    렌이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사악하게 웃었다. 비밀을 많이 알수록 눈덩이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질 테니까. 그때 쾅 박아버려서 날아가는 엘레나를 상상만 해도 벌써 희열이 밀려왔다.

    * * *

    리아브릭은 굳은 얼굴로 집무실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 앞에는 네 명이 서 있었는데 면목이 없는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L이 누군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요?”

    “죄, 죄송합니다.”

    “시간을 그렇게 줬는데도? 무능한 걸까요, 아니면 찾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걸까요.”

    “…….”

    수족들은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며 머리를 숙였다. 십 년 넘도록 대공가의 일을 도맡아 처리했건만 이번처럼 스스로가 무기력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꼭 유령에 홀린 기분이랄까. 수도 어디에서도 L의 존재와 관련된 흔적이나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왜 말이 없죠?”

    “…….”

    “L을 못 찾았으니 그에 대한 대책 하나쯤은 마련하셨을 거 아니에요? 아니면 그조차도 마련 못 한 건가요?”

    리아브릭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그들을 추궁했다. 계책의 실패는 또 다른 계책의 시작이다. 올가미처럼 촘촘하고 겹겹이 엮어놓은 계책이 상호작용으로 보완될 때 비로소 완벽해진다. 리아브릭은 계책을 짤 때 늘 그래 왔고 저들에게도 같은 걸 요구하고 있었다.

    “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

    “하.”

    리아브릭이 짧게 한숨을 내쉬자 네 명은 긴장했다. 어떻게든 대공가에 몸을 담고 싶어 하는 지자(知者)는 무수히 많았다.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더없이 완벽한 배경이 이곳 대공가인 까닭이다. 심지어 지금도 학술원에는 대공가의 후원을 받아 공부 중인 천재 내지 수재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중 몇몇은 올해 졸업을 하게 된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천재와 수재들을 감안하면 네 명의 수족은 오래 버티긴 했다. 무려 십 년이나 대공가의 대소사를 처리하며 능력을 발휘했으니까.

    “그때 그러셨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

    “약속대로 기회를 줬고 당신들은 그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리아브릭은 몇 년간 얼굴을 맞댄 수족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말투로 얘기했다.

    “물러나실 때가 된 것 같네요.”

    “자, 자작님!”

    수족들이 일제히 엎드려 머리를 카펫에 박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리아브릭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나가세요.”

    “…….”

    단호한 리아브릭의 말에 수족들은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그들은 주섬주섬 일어서더니 리아브릭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축 처진 어깨로 몸을 돌려 패잔병처럼 집무실을 떠났다. 대공가를 움직이는 지자로 대소사를 총괄했던 그들로서는 쓸쓸한 퇴장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집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깔끔한 차림새의 청년 두 명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전에 리아브릭과 약속이라도 된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틸이 인사드립니다.”

    “루미너스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적인 외모에 안경이 잘 어울리는 루미너스와 짧은 머리에 사내다운 인상을 풍기는 아틸은 대공가의 후원을 받아 학술원을 졸업한 인재였다. 그간 리아브릭의 명령을 받아 외지를 전전하며 경험과 연륜을 쌓던 그들은 내쳐진 수족들을 대신하여 리아브릭을 돕고자 대공가로 돌아왔다.

    “어서 와.”

    리아브릭의 인사에 두 청년은 한 번 더 묵례했다.

    “전임자들을 이대로 그냥 보내실 겁니까?”

    “저자들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청년들은 수족들의 처분을 얘기했다. 마치 사람의 목숨을 나무통 자르듯이 얘기하는 모습이 냉정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했다.

    “이미 조치해 뒀어.”

    리아브릭은 로렌츠에게 밀명을 내려뒀다. 저들이 대공가를 떠나는 즉시 죽이라고.

    “그보다 알아본 건 어떻게 됐지?”

    “빈민가 토지 매입은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몇몇이 단합하여 보상금 상향을 요구했지만 황실 쪽 관료를 포섭해 무허가 건물로 조작해 보상금 없이 내쫓았습니다.”

    “다소 뒷말이 나올 여지는 있지만 본보기가 필요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빈민촌 부지의 매입이 훨씬 수월하게 마무리됐습니다.”

    리아브릭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다는 건 좋다. 뒤를 따지거나 재지 않고 결단력 있게 행동으로 옮기니까.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전의 네 명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을 사렸다.

    “L의 행적은?”

    “죄송하지만, 아직 꼬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짧은 머리 청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조급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 추정이라면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곧 연락이 온다?”

    리아브릭이 눈매를 좁히며 쳐다봤다.

    “빈민가 토지 매입이 끝났으니 곧 첫 삽을 떠야 할 것 아닙니까? 그때쯤에 매입한 토지의 매매를 제안할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증거는 없으나 정황상 정보는 유출된 게 확실합니다. 노블레스 거리의 핵심 요지를 사전에 매입한 걸 보면 돈을 노린 걸로 보입니다. 첫 삽을 뜰 때가 가장 높은 가격을 받을 때죠.”

    옆에 서 있던 짧은 머리 청년도 생각을 보탰다.

    “우선은 기다리시죠. L은 우리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조바심을 내기보단 L의 반응을 보고 움직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지.”

    리아브릭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청년의 추측이 정확하게 그녀의 생각과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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