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4/30)
  • 제8장 덫

    “학부 수업을 들은 적이 없다?”

    렌은 고고학부 전공 강의가 있는 인문학부 건물을 찾았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오는 고고학부 학생 몇 명을 붙잡고 심문했다.

    “출석부에 적힌 이름만 봤어요.”

    “저는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개강 날부터 안 보이더니, 요샌 출석도 안 불러요.”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루시아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 사실이지?”

    “그, 그럼요. 저희가 왜 거짓말을 해요.”

    렌의 살벌한 눈빛에 주눅이 든 학생들이 항변했다. 아무리 봐도 기가 팍 죽고 눈치만 슬슬 살피는 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얘 뭐지?”

    학관에 들러 루시아란 여학생이 어느 학부에 재학 중인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방 만날 줄 알았다.

    근데 이게 웬걸. 고고학부 강의실까지 찾아왔음에도 루시아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기는커녕 만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만큼 의문만 쌓여갔다.

    “저, 저희 가도 될까요?”

    생각에 잠긴 렌이 말이 없자 고고학부 남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가야지. 그럼. 가.”

    렌이 손을 휘휘 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하자 남학생들이 깍듯이 인사를 하곤 도망치듯 가버렸다.

    “기숙사로 가보는 게 빠르겠지?”

    학술원에 재학 중인 모든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했다. 아주 드물게 건강상이나 가문의 일로 외부에서 등, 하교하는 때도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극히 드문 일이었다.

    렌은 중앙 광장을 지나쳐 북동 측 여자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검술학부 강의가 있는 연병장 인근에 위치한 만큼 익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여자 기숙사가 밀집해 있는 곳까지 들어간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 저기 봐! 렌 선배님 아니야?”

    “여길 왜 왔지? 불안하게. 또 누구한테 시비를 걸려고 그러나?”

    “아, 저 자유로움에…… 반해 버릴 것 같아.”

    “네가 제대로 미쳤구나.”

    기숙사를 왕래하던 여학생들이 렌의 등장에 놀라며 수군거렸다. 한번 눈에 거슬리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렌은 여학생들에게도 기피 대상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며 렌을 좋아하는 여학생도 소수지만 있긴 했다.

    “죄송하지만 여기부터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경호를 위해 배치되어 있던 기사들이 렌의 앞을 막았다. 그들이 지키는 대문을 기점으로 여학생 기숙사 건물이 밀집된 만큼 철저하게 남학생의 진입을 통제했다. 렌도 딱히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지 막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는 여학생을 지목했다.

    “어이, 너.”

    “저, 저요?”

    “그래, 너. 이리 와봐.”

    렌이 손짓하자 여학생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지못해 다가왔다.

    “왜, 왜 그러세요?”

    자신이 렌에게 찍혔다고 착각했는지 톡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기숙사 안에 볼일이 있거든? 근데 쟤들이 못 들어가게 하네. 화나게.”

    렌은 면전에서 기사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지만 그들은 괜한 시비에 휘둘리기는 싫은 듯 무시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가 나 대신 누구 좀 찾아줘야겠어. 물론 거부는 안 돼.”

    “누, 누구요?”

    “루시아. 올해 고고학부에 입학한 신입생이야.”

    여학생은 렌이 읊어준 신상을 작게 중얼거리며 기억했다.

    “차, 찾아보고 알려드릴게요.”

    “아니, 있으면 데리고 나와. 안 나오면 들어간다고 해. 내가 참을성이 썩 많지 않거든.”

    렌이 히죽 웃자 여학생은 몸서리치며 도망치듯 기숙사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학생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 없대요.”

    렌의 눈썹이 꿈틀했다.

    “없어?”

    “룸메이트 말로는 한 번도 못 봤대요. 전야제 며칠 전에 자기보다 먼저 와서 짐을 풀어놓았다던데……. 그게 다래요. 그 뒤로 한 번도 안 들어왔대요.”

    “그래?”

    렌이 더없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숙사, 학부 어디에도 루시아를 본 학생이 없었다. 분명 학술원에 재학 중인데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궁금증이 커졌다.

    “얘 유령인가? 그래서 날 홀려서 관심을 끈 거고?”

    불쑥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렌이 피식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다. 어쨌거나 지루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학술원 생활 중 오늘처럼 신이 난 적이 없었다.

    “유령이면 좋겠네. 무서운 게 오싹오싹할 거 아냐?”

    렌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학생을 버려두고는 중앙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 흥미로운 후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고민했다.

    “나 숨바꼭질 좋아하는데. 얘는 어디 숨어 있으려나?”

    학생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중앙 광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루시아를 찾았지만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말은 이쪽 방면은 그녀의 동선이 아니란 의미다.

    “내가 강의를 받는 북측 검술학부도 빼고, 인문학부랑 기숙사도 빼고 나면…… 중앙 도서관이랑 서측 예술학부랑 기술학부 쪽이 남네?”

    렌은 대략 루시아가 출몰할 만한 지역을 예측했다. 워낙 신출귀몰하다 보니 그곳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최후의 수단이 있으니까.

    “나는 피해도, 우리 전하는 안 피할 거 아냐?”

    렌과 황태자 시안은 같은 검술학부 소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재학 내내 얼굴을 보고 지낸 사이였다. 물론 친하지도 않거니와 대화를 나눈 적도 손에 꼽는다. 두 사람이 유일하게 서로를 의식하는 시간은 대련할 때뿐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네. 대련 때 그렇게 무참히 박살 나도 표정 하나 안 바뀌던 인간이…… 걔가 뭐라고 그런 표정을 짓지?”

    같은 학년인 두 사람은 1학년 때부터 수차례 대련을 가졌다. 결과는 11전 11승. 렌은 압도적인 격차로 전승을 이뤄냈으며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렌은 대놓고 이죽거렸지만 시안은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놀라운 평정심이었다. 

    근데 그런 시안이 루시아를 보호하며 제게 위협적으로 굴었다. 그깟 계집이 뭐라고 대련에서 지고도 욱하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그가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거야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고.”

    렌의 발상이 다른 쪽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그것도 어떻게 하면 좀 더 루시아를 곤란하게 만들어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방향이었다.

    “기왕 까발릴 거, 좀 더 판을 키워볼까?”

    그냥 루시아를 찾아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 학술원 재학 내내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없었던 만큼 렌은 이 시간을 충분히 만끽하고 싶었다.

    “우리끼리 또 보면 질리니 신선한 얼굴을 초대해 보자고.”

    렌은 벌써 기대가 됐다. 삼자대면했을 때 루시아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반응을 보이며 무슨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을지 너무 흥미진진했다.

    * * *

    “루시아?”

    “…….”

    “이보세요.”

    넋을 놓고 딴생각을 하고 있던 엘레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 부르셨어요?”

    “불렀지, 두 번이나. 도대체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사람 앞에 앉혀놓고 무안하게.”

    칼리프의 지적에 엘레나도 아차 싶었는지 곧장 사과했다.

    “죄송해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 돈 벌 궁리하고 있던 거야?”

    칼리프가 태도를 바꾸며 눈을 빛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가 입만 열면 재기 발랄한 사업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니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엘레나는 차마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낮게 한숨을 쉬며 삼켰다.

    ‘왜 사람을 이렇게 심란하게 만들어놓아서는.’

    그간 엘레나의 머릿속에서 시안이 했던 말이 떠나질 않았다. 쓰러지고, 울고, 괴롭힘당하고, 정말 그 앞에서 추태를 부린 건 인정한다.

    ‘신경이 쓰이면 쓰이는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건데?’

    도대체 무슨 저의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엘레나는 혼란스러웠다. 왜 신경 쓰이게 했냐고 질타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투라 더 분간이 가질 않았다. 더 화가 나는 건, 저 말 한마디에 흔들려 의미를 찾으려 했던 엘레나 자신이었다.

    ‘흘려듣자, 엘레나.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이미 겪었잖아?’

    지난 삶, 시안의 애정을 갈구하던 엘레나는 그가 던진 사소한 눈길,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해석하며 살았다. 그의 모질고 경멸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미워서가 아니라며 합리화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시안의 품에 안기고 이안을 품었을 때도 그리 믿었다.

    그랬는데 막 태어난 이안에게 경멸스러운 눈길을 보내며 자신의 한순간 실수가 제국을 나락으로 내몰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를 보며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미 한 차례 아픔을 겪고 상처를 받았던 만큼 엘레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또 딴생각해?”

    “아니거든요.”

    “솔직히 말해봐. 뭔가 떠오른 거지? 그지?”

    칼리프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추궁했다. 최근 미술상 일이 자리가 잡혀가자 칼리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오늘처럼 루시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정도로 칼리프의 머릿속엔 오로지 사업 생각뿐이었다. 최근에는 어떻게 하면 내실을 다지면서 사업의 규모를 키워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까지 더했다.

    “그래. 있어요. 있다고요.”

    “내 이럴 줄 알았어. 네 눈이 뭔가 기가 막힌 계획을 갖고 있는 눈이었다니까.”

    엘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자신의 눈빛 어디에서 그런 걸 느꼈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부질없는 것 같아 말았다. 칼리프의 짐작은 틀렸지만, 오늘 만남의 이유가 구체적인 다음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는 건 사실이었다.

    “아트 중개사.”

    엘레나가 툭 화두를 던졌다.

    “아트 중개사라…… 어감은 좋네. 입에 쫙쫙 붙고. 뭔가 있어 보여. 그래서 뭐 하는 건데, 그게?”

    칼리프는 이 생소한 단어에 눈을 깜빡이며 호기심을 보였다.

    ‘뭐긴요, 당신이 시대에 발맞춰 만든 직업이죠. 또 했던 일이고.’

    우스우면서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최초의 아트 중개사였던 칼리프에게 마치 엘레나가 고안해 낸 직업인 것처럼 얘기를 해주는 게 마치 그의 업적을 뺏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미안해요. 늑장을 부릴 수가 없어서. 대신 약속할게요. 제가 본 미래의 당신보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지난 삶의 아트 중개사 칼리프를 뛰어넘는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것만이 엘레나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자 약속이었다.

    “말 그대로예요. 단지, 앞에 붙는 아트라는 단어에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예술가도 포함되어 있어요.”

    “작품이 아니라 예술가까지? 이유가 있나?”

    “아트 중개사란 예술가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전문인을 뜻하는 말이에요. 이제까지 없던 신 직업이자, 문화의 부흥을 이끌 선구자죠.”

    “……!”

    칼리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촉이 온 것이다. 동시에 엘레나가 던진 화두에 착안하여 떠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잠깐만. 나 느낌 왔어. 정리할 시간을 줘.”

    칼리프는 양해를 구하고는 혼자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엘레나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꽤 긴 시간을 홀로 그러고 있던 칼리프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너 천재냐?”

    “이제 아셨어요?”

    “재수 없…… 아, 이게 아니고.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냐? 진짜 인정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

    칼리프가 연신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트 중개사의 등장은 현 예술계에 뿌리내린 고전적 형태를 깨고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근간이 되어줄지도 몰라서다.

    “느낌이 좋아. 매매를 대행해 주는 미술상의 한정적 위치를 벗어나 예술가를 관리, 경영하다니. 심지어 이름도 쫙쫙 붙어요. 아트 중개사, 아트 중개사.”

    그 뒤로 칼리프는 떠오르는 발상들을 가감 없이 떠들었다. 아트 중개사가 앞으로 할 일과 나아가야 할 길은 물론, 미술상과 별개로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더 나아가 예술가의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예술에 대한 안목과 식견, 지식을 필수적으로 쌓아야 함을 강조했다.

    “하세요. 하시면 되잖아요.”

    “뭘? 누가 하는데? 설마 나?”

    “여기 선배 말고 누가 있어요. 이제 쉴 시간 없으시겠다. 부족한 안목과 식견, 지식을 쌓으려면. 그죠?”

    “…….”

    신이 나서 떠들던 칼리프가 더는 말하지 못하고 붕어처럼 뻥긋거렸다. 막상 아트 중개사의 역할을 규정하고 해야 할 일에 대한 기준을 세우자 갖춰야 할 소양이 생각보다 많고 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힘내시고요. 훌륭한 아트 중개사로 첫발을 내딛길 바라며 한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

    “누구? 네가 소개하는 사람이면 범상치 않겠지?”

    엘레나가 입만 열었다 하면 칼리프는 눈을 빛내고 기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지 좀 말라고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었다.

    “란돌 레이브. 제가 아는 최고의 건축가예요.”

    엘레나가 비밀리에 후원하던 시대적 거장 중 란돌을 제일 먼저 소개했다. 즉흥적인 게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주선이었다.

    ‘당신의 첫 고객이자, 세상에 둘도 없는 술친구였지.’

    건축가 란돌의 천부적 재능을 발견한 칼리프는 그가 건축에 매진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해 가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란돌은 아트 중개사로 첫발을 내디딘 칼리프의 첫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기질과 성향도 잘 맞았던 그들은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엘레나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두 사람이 협력하며 더욱 성장하기를 바랐다.

    “L의 소개로 왔다고 하면 만나줄 거예요. 그다음은 선배가 알아서 하세요.”

    “잠깐만, 진짜 소개만 해주고 끝? 뭔가 더 던져줘야지. 너무 무책임하잖아.”

    “저도 아는 게 없어요.”

    “거짓말.”

    “진짜예요. 이제부터는 선배 하기 나름이에요. 재능은 확실해요. 아트 중개사로서 그분을 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만드냐 마느냐는 선배의 역량에 달렸어요.”

    엘레나는 의도적으로 칼리프에게 부담감을 심어줬다. 그건 나중을 위한 안배였다.

    ‘나에게 너무 의지하게 둬서는 안 돼.’

    지난 삶의 칼리프는 데릴사위로 들어앉은 가문이 망한 뒤 맨몸으로 예술계에 뛰어들었다. 바닥부터 시작해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은 끝에야 시대를 대표하는 아트 중개사가 될 수 있었다. 그 시기가 엘레나로 인해 앞당겨진 만큼 부작용도 컸다. 스스로 성공을 해야 한다는 의지나 자립심이 떨어지고 엘레나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엘레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내 역할은 방향을 잡아주는 것뿐.’

    엘레나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줄 뿐, 모든 일은 그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할 생각이다. 그에 따른 책임도 마찬가지고. 그래야만 본인이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아트 중개사로 거듭날 거라 믿었다.

    “결국 나 하기에 달렸다 이거지?”

    “성공도 실패도 선배에게 달렸어요.”

    “까짓것 부딪쳐 보자고. 네가 판 깔아줬는데, 수저로 못 떠먹으면 접어야지.”

    칼리프는 자신만만하게 란돌의 신상명세서를 받아 떠났다. 적잖이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아트 중개사의 매력에 푹 빠진 듯 보였다.

    “나도 이제 가볼까?”

    자습실을 나선 엘레나는 중앙 도서관을 나서서 길 쪽으로 걸음을 뗐다. 그간 시안의 일로 머리가 복잡하기도 했거니와 렌이 날을 세우고 있을 것을 염려해서 루시아로서의 활동을 자제했었다. 또 시험 기간이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인적이 드물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의 이 길이 더 낯설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엘레나는 별다른 일 없이 학술원 서측 별관 쪽으로 내려왔다. 평소처럼 별관 내 지하 화실로 향하는데, 서너 명의 여학생 무리가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거기 서봐.”

    엘레나가 시선을 들어 그들을 스윽 훑었다. 평민 출신이 많은 서관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재질의 교복이었다. 또 치장에 신경을 많이 쓴 걸로 보아 귀족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중에서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여학생이 낯이 익었다.

    ‘이름이 미첼이었나? 아벨라 옆에 기생해서 남을 험담하고 모함하던 여자였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들이 우연이 아니라 목적을 갖고 시비를 건 거라면 번거로운 일에 휘말린 게 분명했다.

    “저요?”

    “그래, 너.”

    미첼은 뒤에 빠져 있었고 사나운 인상의 영애들이 팔짱을 끼고 나섰다.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뭐? 볼일? 얘 맹랑한 거 봐. 넌 선배가 불렀으면 인사를 먼저 하는 게 순서 아니니?”

    좀 더 상황을 주시하고자 엘레나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얘 인사하는 거 봤니? 목에 힘 들어가서 부러지는 줄 알았어.”

    “요새 신입생 싸가지 없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 와, 얘는 장난 아니네.”

    정상적인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트집을 잡고 늘어지는 걸 보며 엘레나는 확신했다.

    ‘시비를 걸고 있어.’

    엘레나는 그들이 시비를 걸 만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렵지 않게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벨라, 네 눈에 내가 거슬렸나 보구나.’

    이제야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아벨라는 오래전부터 시안을 짝사랑했다. 황비 선발식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시안을 흠모했다. 그런 아벨라의 눈에 시안과 붙어 다니는 엘레나가 곱게 보였을 리가 만무했다. 더구나 시안과 함께 있을 때마다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 터졌다.

    첫 만남부터 쓰러져서 시안의 품에 안겼고, 도서관으로 갈 때는 렌의 시비로부터 지켜주고. 아벨라에게는 엘레나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고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파벌을 끌고 와 해코지를 해서 엘레나를 시안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생각까지 했겠지.

    ‘이래서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엘레나는 한숨이 나왔다. 돌아보면 이 모든 일을 초래한 건 엘레나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너 지금 한숨 쉰 거니?”

    “진짜 안 되겠다. 너 따라와.”

    무리 중 덩치가 큰 여학생 둘이 엘레나의 양옆에 딱 붙더니 끌고 가다시피 별관 뒤쪽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인적이 드물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이르자 더 고압적인 표정과 말투로 압박했다.

    “네가 미쳤구나? 전하가 몇 번 말 붙여주고 그러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

    “또 싸가지 없게 말대꾸해야지? 어?”

    덩치가 큰 여학생이 엘레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협을 가했다. 옆에 있는 여학생들도 침을 뱉거나 노려보며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어이가 없네. 내가 베로니카인 걸 알면 눈조차 똑바로 보지 못할 것들이 감히 날 해코지하려고 해?’

    엘레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기가 찼다. 누가 감히 베로니카 공녀에게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살아남길 바라겠는가. 루시아가 제국의 귀족도 아니고 타국 출신 상인의 딸이기에 이런 해코지가 가능한 것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얘들 습성이야 뻔하지. 약하게 굴수록 더 악질처럼 구는 거.’

    사교계의 정점으로 오르며 곁에 두어야 할 영애와 걸러야 할 영애들을 구분하고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너 입에 재갈을 물었니? 꼬박꼬박 말대꾸할 땐 언제고 조용하네? 왜, 무서워?”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어이가 없네요.”

    “뭐? 이게 상실했나? 웃어?”

    “안 웃기면 이상한 상황이잖아요? 저 하나 겁주려고 우르르 몰려와서 협박질이라니. 너무 유치하네.”

    “뭐?!”

    엘레나가 대놓고 비아냥거리자 여학생들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조금 전 엘레나의 어깨를 툭툭 밀치던 여학생은 모욕적이라 느꼈는지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네년이 아주 겁을 상실했구나?”

    “그쪽은 낄 자리가 아니니 빠지시죠. 미첼 선배, 우리 얘기 좀 할까요?”

    엘레나가 대놓고 이름까지 호명하며 지목하자 미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무심한 눈길로 미첼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의식하라는 듯이 노골적으로.

    “얘 진짜 웃기네? 네가 뭔데 선배한테 얘기하고 말고를 해. 어?”

    “기다려 보렴.”

    잠자코 있던 미첼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러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는데, 뱀처럼 사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건방진 후배가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그러고 살지 마세요.”

    “뭐?”

    여유 있던 미첼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기껏해야 자존심 죽이고 애원할 줄 알았는데 신경을 건드렸다.

    “이런다고 아벨라가 당신을 귀히 여길 거 같아요? 그거 착각인데.”

    “네가 뭘 안다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여.”

    미첼이 인상을 쓰고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조금만 더 화를 돋우면 뺨이라도 후려칠 기세였다. 그러나 엘레나는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 무심한 눈길에 미첼은 위축되는 걸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선배의 결말은 알죠. 아주 비참할 거라는 걸.”

    “……!”

    지금 엘레나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교계 파벌 싸움에서 엘레나에게 밀리자 아벨라는 흠이 많은 미첼에게 그간의 악행을 전부 뒤집어씌워서 퇴출시켰다. 실컷 이용만 하다가 쓸모가 다하니 처분한 것이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엘레나는 우매한 머리로 아벨라의 수족처럼 굴다가 가문까지 망하게 만든 미첼이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선배, 이 계집이 단단히 미쳤어요. 제까짓 게 감히 아벨라 영애를 언급해?”

    “진짜 제대로 교육시켜야겠어요.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엘레나는 옆에서 난리 치는 여학생들을 무시하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지금이라도 잘 생각하고 처신하세요. 그녀가 정말로 선배를 귀히 여기는지.”

    “너 대체…….”

    미첼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엘레나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였다.

    “이년이 진짜! 네가 아무래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

    “뭐 해?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참다못한 여학생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누가 봐도 엘레나를 후려치려는 준비 동작이었다.

    ‘손찌검이라니. 수준 낮아서 정말.’

    학술원 내에서의 폭력 행위는 가문 간의 다툼으로도 이어져 있는 만큼 엄하게 다스려졌다. 그러나 그 피해 학생이 평민이라면 다르다. 학술원 교칙에 따라 징계를 받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수위가 약할 수밖에 없다. 엘레나는 격이 떨어져 상대하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뺨을 맞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거기까지 하지?”

    멈칫.

    낯선 목소리에 몸을 틀어서 피하려던 엘레나를 비롯해 손찌검을 하려던 여학생까지 동작을 멈췄다. 미첼 역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 렌 선배?”

    “선배님이 왜 여기에?”

    미첼을 비롯한 여학생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벨라마저 상종하지 않는 인간이 렌이었다. 그런 렌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훼방을 놓고 있었다. 렌이 벽에 등을 기댄 채 턱짓을 했다.

    “걔 내 거야.”

    “네?”

    “못 알아들어? 내가 찍은 애라고.”

    “……!”

    어감은 달랐지만 결국 엘레나에게 손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들린 것이다.

    “선배님, 금방이면 끝나니 조금만 시간을…….”

    뺨을 치려던 여학생이 용기를 내서 렌에게 양해를 구했다.

    “너 지금 내가 너희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아? 그리 알아들었으면 곤란한데.”

    “그, 그런.”

    “꺼져. 3초 준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렌의 위협에 여학생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괜히 나서서 렌에게 찍혔다가는 자신의 학술원 생활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선배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시간 없다. 3, 2…….”

    미첼이 대표로 인사하고는 무리를 이끌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미첼은 그러면서 엘레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생각이 많아 보였다. 불청객들을 다 쫓아낸 렌이 손을 털더니 엘레나에게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너 적이 많다?”

    “…….”

    엘레나는 참 난감했다. 차라리 쟤들을 상대하는 게 낫지, 하필이면 외길에서 렌을 만났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

    “야, 내가 너 구해준 거야.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나서지 말고 그냥 계시지 그러셨어요.”

    “뭐라?”

    “저런 애들은 저 혼자서도 치울 수 있거든요.”

    허세가 아니다. 렌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엘레나는 저들을 치울 자신이 있었다.

    “얘가 날 또 당황하게 만드네.”

    “선배한테 당한 게 좀 많아서요. 일 보세요.”

    지난번 일로 악감정이 쌓인 엘레나가 까칠하게 굴며 돌아설 때였다.

    “가라고 안 했는데?”

    렌은 히죽거리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미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한 터라 엘레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회복하기 힘들 만큼 사이가 틀어졌으니 가식 없이 받아쳤다.

    “하실 말씀 있으면 마저 하세요. 우연은 아닌 거 같고 저 기다리신 것 같은데.”

    “오, 예리하기까지.”

    렌이 엘레나와 눈을 맞췄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툭 던졌다.

    “너 유령이냐?”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학부 강의는 들은 적도 없어, 기숙사에도 없어. 학술원을 다니긴 하는데, 흔적조차 없네?”

    “……!”

    엘레나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심했다. 렌이 어디까지 지독할 수 있는 놈인지 잊고 있었다. 저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루시아에 대한 뒷조사를 끝냈다는 의미다.

    “너 뭐냐, 대체?”

    “……유령이요.”

    “야, 변명이라도 하라고 기회를 주잖아, 지금. 너 루시아 아니지?”

    엘레나는 이 위기를 쉽사리 모면하기 어려워졌다는 걸 직감했다. 학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렌은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했다. 감이 좋다고 해야 할까. 이미 그녀가 루시아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침착해. 루시아가 아니라고 해서, 내가 베로니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거야.’

    의심은 어디나 의심일 뿐이다. 만약 루시아가 아니라는 확증이 있었다면 저런 식으로 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럴 땐 정면 돌파가 답이다. 우기는 것.

    “고작 물어본다는 게 그거예요?”

    “세게 나오네?”

    엘레나는 교복 치마에서 학생증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럴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만든 위조 학생증이었다.

    “뭘 알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이거면 돼요?”

    “보고.”

    렌은 학생증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픽 웃었다.

    “이거야 위조하면 그만이고.”

    “사람 참 못 믿는 성격이네요.”

    “이럴 땐 확실한 걸 좋아한다고 봐야지.”

    마지막까지도 의심을 거두지 않는 렌을 보며 엘레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열정으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지 그러셨어요?”

    “안 그래도 노력 중이지.”

    렌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엘레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흘 후에 식사 한 끼 어때?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튀면 내가 섭섭하지. 안 그래?”

    “먹다 체하라고요?”

    “그래 주면 더 좋고.”

    엘레나는 도통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분명 적의가 있는데 그것을 호의로 가장하니 더 이상했다.

    ‘무슨 꿍꿍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분명한 건 렌은 여전히 엘레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저 식사 자리 역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한 자리일 것이다.

    “대답이 없으니 승낙한 걸로 알게. 아! 안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 성격 알지?”

    “이렇게 매너 없는 초대라니. 어디까지 매너가 없을지 기대되긴 하네요.”

    엘레나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녀가 그럴수록 렌은 톡톡 튀는 엘레나의 반응에 흥미를 느끼며 신나 했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이러니 내가 관심을 끊을 수가 있나.”

    렌이 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꼭 새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뭘 먹을지 벌써 설레네. 그날 보자고.”

    엘레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렌을 노려봤다.

    * * *

    나흘 뒤. 엘레나는 렌의 식사 초대에 응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렌의 성격상 단순한 식사 자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루시아의 진의 여부를 묻는 걸로 보아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가야 한다니.”

    처음부터 엘레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렌의 보복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가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 와서 루시아란 신분을 버릴 수도 없고.”

    렌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반대로 많은 걸 잃게 된다. 특히 루시아로 행세하며 쌓은 인맥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칼리프만 하더라도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엘레나의 조언이 없다면 성장은 정체될 거고 오랫동안 강물에만 머물며 바다로 가지 못할 것이다.

    라파엘은 더 심각했다. 여전히 슬럼프에서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새 시대의 포문을 연 라파엘의 존재는 엘레나가 설계하는 미래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다. 그 두 사람에게 미치는 루시아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지금 신분을 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엘레나는 렌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분명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겠지만 그 역시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기숙사를 나선 엘레나는 중앙 도서관 기록실에 들러 루시아로 변장했다. 그 뒤 약속 시간에 맞춰 중앙 광장으로 나갔다. 처음 만났던 벤치로 가자 이미 렌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 봐라. 외식하기 딱 좋은 날이네?”

    하늘은 높고 햇살은 따스했다. 하지만 엘레나의 심정은 폭우가 쏟아질 듯 어둡고 흐렸다.

    “어서 가죠.”

    “뭘 그리 서둘러? 난 기다리는 시간도 설레는데.”

    렌이 히죽 웃었다. 그 미소 너머에 깃든 음흉함에 엘레나는 불안이 이는 걸 막지 못했다.

    “그러자고, 그럼.”

    앞서 걷는 렌을 따라 중앙 광장을 벗어났다. 그러자 대로를 기준으로 좌우에 각종 상점과 식당가가 펼쳐졌다. 학술원 내에서 기숙하는 학생들을 배려하여 만들어놓은 거리였다.

    “어디까지 가요?”

    “여기 물려. 밖에서 먹자고.”

    엘레나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나가서 먹자고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지금 했잖아. 가자고, 가.”

    렌이 돌아오더니 엘레나의 뒤에서 어깨를 짚었다. 힘을 줘 앞으로 쭉 밀었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질질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하, 꿈자리가 사납더니……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겠어.’

    사지인 걸 알면서도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엘레나의 처지였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문주를 지나쳐 학술원을 나왔다. 통금 시간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학술원 근방 상권의 이용이 가능했기에 제약은 없었다. 다만 명부에 이름을 적어둬야 출입이 허락됐다.

    거리는 활기 넘쳤다. 지난 삶, 학술원이 답답하다며 뻔질나게 외출했던 거리였던지라 낯설지는 않았다. 렌이 예약했다는 레스토랑도 과거 엘레나가 방문한 적이 있던 곳이다. 가재나 랍스터 위주의 해산물 요리를 취급하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기억한다.

    “오셨습니까? 이 층 테라스에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종업원은 단번에 렌을 알아보더니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 층에 올라가자 거리와 학술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망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방 형태여서 조용히 식사가 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앉아.”

    렌은 의자까지 빼주며 과잉 친절을 보였다. 그의 고약한 성미를 알기에 엘레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손 떼줄래요? 선배의 호의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찔리는 게 있는지 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났다. 렌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엘레나가 의자에 착석했다. 렌도 앞자리에 마주 앉았다. 이윽고 종업원이 코스 요리의 애피타이저 격인 샐러드와 빵, 그리고 수프를 내왔다.

    “먹자.”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엘레나는 건성으로 수프를 한 번 떠먹고는 대뜸 물었다. 이런 불편한 식사 자리 원치도 않았거니와 먹더라도 체할 것 같았다.

    “먹고. 여기 음식이 먹을 만해.”

    “얘기 먼저 하고요.”

    “그러지 말지? 난 지금 기분이 좋고, 배도 고프거든.”

    렌은 무슨 꿍꿍이인지 식사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정말 식사 한 끼를 위해 자기를 부른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안 먹냐?”

    “입맛이 없어서요.”

    “서운하네. 나름 신경 쓴 메뉴인데.”

    엘레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요지가 따로 있는데 이런 식으로 얘기를 빙빙 돌리는 행태에 짜증이 치밀었다.

    “다 드신 것 같으니 할 얘기 하세요.”

    렌이 냅킨으로 입 부분을 쓱 닦았다.

    “좀 먹지?”

    “입맛 없다고요.”

    “입맛이 없는 걸까, 나랑 같이 먹는 게 싫은 걸까?”

    “둘 다요.”

    엘레나는 정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꾸했다.

    “와, 상처받았어.”

    렌이 너스레를 떨었다. 엘레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속에 본심 어린 감정이 미미하게 실려 있었다.

    “네가 이러니까 내가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어요.”

    장난스러운 표정을 싹 지운 렌이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러자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이 들어왔다.

    “필요하신 거라도?”

    “그분 모셔와.”

    ‘그분?’

    엘레나의 귀가 뜨였다. 동시에 불안감도 커졌다. 아무래도 루시아로 변장하고 지내는 만큼 외부의 인물을 만나는 건 좋지 않았다. 렌이 그런 엘레나의 반응을 보며 즐겼다.

    “뭘 그리 떨어?”

    “기대돼서 그러는데요?”

    엘레나도 맞받아치긴 했지만 초조함에 물을 마시며 목을 적셨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며 낯선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지?’

    기억을 뒤져봐도 안면이 없는 얼굴이었다. 사십 대 초중반으로 짐작되는 중년 남자였는데 인상이 굉장히 점잖으면서도 유순했다. 또한 유순한 인상에 비해 눈빛은 중심이 잡혀 있는 게 강단이 느껴졌다. 나름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의상은 그가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오셨어요?”

    렌이 의미 모를 미소를 띠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 서더니 엘레나와 중년 남자를 번갈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인사 안 해?”

    “…….”

    “뭐야, 설마 너 이분이 누군지 모르는 거야?”

    엘레나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렌의 눈빛이 변했다. 설마 하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이었다. 엘레나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누구지? 모르겠어. 본 적이 있었나? 기억에 없는데.’

    뭔가 함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를 줄은 몰랐다. 엘레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렌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그는 마치 딱 걸렸다는 듯 곤란해하는 엘레나의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떠보는 건가? 아니면 실제 루시아가 아는 사람일까?’

    렌이 내민 패에 엘레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간 루시아로 변장하고 행세해 왔지만 지난 삶에도 그녀와 특별히 접점은 없었다. 정말 저 중년 남자가 루시아를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렌이 떠보기 위해 섭외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이대로라면 다 들통나고 말아.’

    엘레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렌에게 루시아 행세를 했다는 걸 들키는 순간부터 시달릴 게 뻔했다. 지난 삶, 대역이란 걸 들키고 렌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아직까지 이가 갈렸다. 그것만은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마땅한 대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중년 남자를 안다고 하자니, 그다음이 막막했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무슨 말을 이어간단 말인가. 몇 마디만 나눠도 금세 남남인 걸 들키고 말 것이다. 물론 렌이 생면부지의 남자를 섭외해 엘레나를 떠보는 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엘레나 입장에서는 외통수였다.

    “잘 지냈느냐?”

    “……!”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중년 남자가 엘레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그것도 더없이 다정한 어투로.

    “그리 교복을 입고 있으니 제법 숙녀티가 나는구나.”

    “…….”

    “하늘에 있을 네 엄마가 봤다면 참 흐뭇해했을 텐데. 우리 딸 잘 컸다고.”

    ‘엄마? 딸?’

    순간적으로 엘레나의 눈이 번쩍 뜨이며 정신이 들었다. 꽉 막힌 듯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다정한 말투, 그 이면에 깔린 쓸쓸한 사연, 따스한 눈길…… 여러 정황을 바탕으로 이 남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카스톨 상회 상단주 에밀리오.’

    그리고.

    ‘루시아의 친아버지.’

    엘레나는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동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열병을 앓고 있을 루시아의 치료로 경황이 없을 그가 눈앞에 서 있는 것도 놀라운데, 일면식도 없는 엘레나 앞에서 관계를 언급하며 제 정체를 흘렸다.

    ‘왜 날 돕는 거지?’

    불쑥 의문이 들었지만 엘레나는 생각을 멈췄다.

    ‘생각하지 말자.’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을 모면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엘레나는 판단했다.

    “아, 아버지.”

    엘레나의 입에서 작지만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아버지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그래, 내 딸. 아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에밀리오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엘레나를 와락 안았다. 얼떨떨해하는 엘레나의 귀에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자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

    에밀리오가 곧 포옹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따스한 그의 눈길은 정말 딸의 안위를 걱정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엘레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기별도 없이.”

    “네게 급한 일이 생겼다 하여 상단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왔단다.”

    “저한테요?”

    에밀리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렌을 쳐다보았다. 렌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본인이 원한 그림은 이게 아닌 듯 못마땅한 티가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와 에밀리오는 보기 좋은 부녀지간을 연출하는 데 집중했다.

    “저 잘 지내고 있는데…….”

    “그래 보이는구나. 그저 네 신변에 관한 얘기인지라 앞뒤 안 보고 달려왔거늘.”

    “…….”

    엘레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대략적인 상황이 파악됐다. 렌이 루시아의 정체를 까발리기 위해 저 북방에 있는 에밀리오까지 이곳에 불러들인 것이다.

    “허, 어이가 없네. 둘이 친 부녀간이시다?”

    렌은 직접 목격을 하고도 믿을 수 없는지 이죽거렸다. 감동적인 부녀 상봉이라기엔 뭔가 느낌이 싸했는데, 콕 꼬집어 지적하기엔 애매했다.

    “공자,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꼭 와야만 하는 촌극을 다투는 일이란 게 대체 뭔지요.”

    에밀리오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러나 말속에 담긴 뉘앙스는 추궁에 가까웠다.

    “댁의 따님이 강의를 한 번도 안 들어오더라고.”

    “그리고요.”

    “기숙사에도 짐은 풀었는데 본 사람이 없다네? 그러니 내가 걱정이 되지, 안 되겠어?”

    능청을 떨었지만 렌의 눈빛은 예리하게 빛났다. 의심을 거두지 않는 눈빛이다.

    “고작 그 이유로 절 부르신 겁니까?”

    “고작이라고? 저게?”

    렌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학술원 생활을 받아들이는 에밀리오의 태도가 납득이 되지 않아서다.

    “네, 딱히 이상할 게 없는 일입니다만?”

    “……!”

    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일이 너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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