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17/30)
  • 제7장 루시아

    교양과목 ‘대륙사’ 강의 시간은 학술원 생활을 통틀어 엘레나에게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다.

    렌은 교수의 고리타분한 역사 강의는 듣는 둥 마는 둥 강의 내내 뚫어져라 엘레나만 쳐다봤다. 무시하면 그만이지 하고 넘겼지만 정도가 과하다 보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강의까지 3국 연합의 성립 배경에 대해 조사해 오세요.”

    강의가 끝나고 교수가 나간 뒤에도 엘레나만 보고 있는 렌의 눈길에서 집요한 고집이 느껴졌다.

    ‘신경 쓰지 마. 무시하면 그만이야.’

    예전이라면 정말 깔끔히 무시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루시아 행세를 하는 동안 렌을 만나면서 접점이 생겨 버렸고 그 때문에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상해.”

    엘레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빤히 보던 렌이 중얼거렸다.

    “강의 내내 나만 보는 네가? 아니면 그런 널 지적하는 내가?”

    “땡. 베로니카가 강의를 듣는 게 이상한 거지. 너 그러다 죽어. 갑자기 변했잖아.”

    엘레나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음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런 말장난을 하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껴졌다.

    쿵!

    갑자기 렌이 의자를 뒤로 밀며 거칠게 일어났다. 그 우악스럽고 위협적인 소리에 엘레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것 봐. 겁먹질 않아.”

    “겁먹을 이유가 없잖아?”

    렌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또 맞는 말만 골라 하고.”

    “됐다. 그만하자.”

    엘레나가 서둘러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그 앞을 렌이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엘레나가 눈을 흘겼다.

    “치우지?”

    “…….”

    “내 말 안 들려?”

    렌도 계속 막고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손을 치워 길을 열어주었다.

    “이럴 땐 영락없는 베로니칸데 말이지.”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관리했지만 엘레나는 그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없었다.

    ‘여전히 날 의심하고 있어.’

    귀 뒤의 흉터도 그렇고, 포기할 법도 하건만 렌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렌이 히죽 웃더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돌아섰다.

    “외투가 없으니 쌀쌀하네. 얘를 어디 가서 찾는다?”

    “……!”

    렌이 혼잣말처럼 남긴 말에 엘레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심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루시아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최악이야.”

    엘레나는 휘적휘적 걸어 강의실을 나간 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렌의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루시아로 자유롭게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이야 베로니카와 루시아를 연결 짓지 않겠지만 부딪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면 눈치 빠른 렌이 의심할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마주치지 않고 피하는 게 상책이야.”

    엘레나는 조심해야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기록실로 향했다. 렌의 관심과 의심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루시아로 변장을 마친 엘레나가 도서관을 나섰다. 언제 어디서 렌과 마주칠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피며 은밀하게 움직였다. 다행히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렌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학술원 서측 별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기에는 없겠지.”

    평민들이 주를 이루는 학부가 터를 잡기도 했거니와 렌이 속한 검술학부의 정 반대편에 위치한 만큼 여기서 마주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지하 복도의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라파엘의 화실에 도착했다.

    “선배님, 저 왔어요.”

    엘레나는 생기 넘치는 신입생을 연기하며 인사했다.

    “루시아 양?”

    이젤 너머에서 들려오는 라파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몰골도 어찌나 많이 상했는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사, 살아 있는 거 맞으시죠?”

    “아직까지는. 근데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네요.”

    모호하게 대꾸하는 라파엘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무슨 농담을 그리 살벌하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걱정스러워하는 엘레나의 시선이 화실 바닥으로 향했다. 구겨지거나 찢겨 버려진 캔버스에서 라파엘의 예술적 고뇌가 느껴졌다.

    ‘뜻대로 안 되나?’

    현재 라파엘의 그림은 답보 상태였다. 기법적인 부분은 엘레나의 도움을 받아 큰 성취를 보였으나, 아직 그림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은 막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엄살 한번 부렸네요. 애같이. 저보다 루시아 양이야말로 괜찮은 거죠?”

    “저요? 아, 네. 보다시피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세실리아를 통해 엘레나가 쓰러졌던 얘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얘기 듣고 걱정 많이 했는데.”

    “좀 어지러웠던 거예요. 쉬니까 금방 좋아졌어요.”

    엘레나가 다 나았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환히 웃었다.

    “저보다 선배님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거 아세요?”

    “그 정도는 아닌데. 세수라도 하고 있을걸 그랬네요. 덜 걱정되게.”

    라파엘이 쓰게 웃었다. 요 얼마간 몇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때때로 열정이나 노력보다 무심한 시간이 답을 주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시간이라…….”

    라파엘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가끔 보면 철학 교수보다 더 세상에 통달한 듯 얘기를 하는 소녀를 보고 있자면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왜 그리 빤히 보세요. 저 그럼 막 눈치 보는데.”

    렌에게 워낙 시달려서인지, 말없이 빤히 보고 있는 라파엘의 시선마저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엘레나였다.

    “아, 그만 습관적으로. 빤히 봐서 죄송합니다.”

    “너무 정중하게 사과하지 마세요. 부담돼요!”

    엘레나가 손사래를 치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자 라파엘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자 이 순간만큼은 머리를 쥐어짜던 고뇌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가 있었다.

    “그냥…… 루시아 양의 그림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제 그림이요?”

    생각지도 못한 일인지라 엘레나가 적잖이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올 게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아는 척을 해댔으니 그가 호기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아, 그냥 든 생각이에요. 스쳐 지나가는 그런 생각.”

    엘레나는 잠깐 고민했다. 슬럼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부족한 실력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번 그려볼게요.”

    라파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리한 부탁으로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해하면서도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 때문이라면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엘레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떠밀려 그리는 게 아님을 확실히 표현하고 싶었다.

    “제가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못 그려도 놀리시면 안 돼요. 아셨죠?”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

    그러나 막상 새하얀 캔버스를 마주하자 엘레나는 막막했다. 바다처럼 광활한 이 백지에 무얼 어디서부터 채워 넣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뭘 그리지?’

    당장 생각나는 건 모작이다. 라파엘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르네상스 시대의 부흥을 일으킨 여러 화가의 명작들을 그대로 베껴 그리며 공부한 적이 있었다. 반복 과정을 통해 숙달한 그림들이다 보니 지금 그린다 하더라도 그나마 나은 수준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 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엘레나는 혹시 방해가 될까 봐 멀찌감치에 앉아 독서 중인 라파엘을 힐끗 훔쳐봤다. 놓았던 붓을 다시 쥔 이유는 아직 작품에 혼을 담지 못하는 라파엘에게 도움을 주고자 함이었다.

    ‘모작은 모작일 뿐이야.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라파엘에게 놀라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깨달음을 줄 수는 없다. 그럴 거면 굳이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었다.

    ‘내 그림을 그려야 해.’

    결단을 내린 엘레나가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살아가며 겪은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흩날렸다. 그 조각들을 들춰보면 행복할 때, 기쁠 때, 슬플 때, 외로울 때, 비참할 때, 설렐 때…… 그녀가 살면서 겪어온 모든 감정이 스며 있었다.

    엘레나는 그 기억의 조각 중에서도 가장 뾰족하고 아픈 파편에 자꾸만 끌렸다. 그것만은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그쪽으로 기우는 마음이 감당되지 않았다.

    억지로 외면했고, 억지로 잊으려 했고, 억지로 위안했던. 그러다 우연히 마주치고 말았던 애증의 남자로 인해 기억의 조각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욱여넣으려고 해도 비집고 나오는 그것을 더 피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고 버거웠지만 엘레나는 용기를 냈다. 더는 숨지 않고 마주하기로.

    엘레나가 붓을 쥐었다. 팔레트에 유화물감을 옮겨 담더니 망설임 없이 붓을 들어서 캔버스에 찍었다. 지금 이 순간 엘레나에게 이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없었다. 스케치도 생략해 버린 채 내면에서 마주한 그것을 고스란히 옮기는 데 집중했다.

    기법? 분명히 배웠다. 그런데 잊었다.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기술적인 표현이 적절히 조화되어야만 하는데 그마저도 무시했다.

    ‘아.’

    엘레나는 그림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이 순간 그녀는 누구보다 고독했다. 오로지 캔버스와 붓, 유화물감, 그리고 그녀만이 존재했다.

    “…….”

    라파엘도 어느새 뒤로 와 그녀의 붓놀림을 지켜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무려 몇 시간을, 엘레나는 정말 순간처럼 짧게 느낄 정도로 집중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붓놀림이 잠잠해졌다.

    엘레나는 팔레트와 붓을 내려놓은 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뚝.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슬픔, 아픔보다도 더 사무치는 그리움의 눈물이다.

    ‘이안, 엄마야.’

    캔버스에 그려진 초상은 그녀와 시안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뿐인 아들 이안이었다. 화폭으로나마 죽은 이안을 마주하자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엄마가 미안해. 널 잊으려 해서 미안해…….’

    회귀한 엘레나는 태어나지도 않은 이안을 가슴에 묻었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며 합리화하고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세상 어디에도 자식을 잊는 부모는 없는데.

    그래, 엘레나는 억지로 외면했다. 이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안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던 남편 시안이 생각나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젠 아니다.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것이다. 외면하는 게 아니라, 간직할 것이다. 비록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가슴에 묻지 않고 오롯이 이안을 바라볼 것이다. 엄마니까.

    “루, 루시아 양.”

    엘레나가 갑자기 눈물을 쏟자 라파엘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감정이 격해져서 저도 모르게 추태를 보였네요.”

    감정의 늪에서 나온 엘레나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마주했다. 비록 초상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이안을 보고 아프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웃는 게 더 해맑은 아이인데, 제가 너무 못 그렸네요.”

    “…….”

    “구도나 채색도 엉망이고. 제 감정에만 취해서 그렸네요. 도움이 못 될 것 같은데 어쩌죠?”

    엘레나가 쓰게 웃었다. 라파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데 스스로를 마주하고 치유하는 그림을 그려 버렸으니 너무 미안했다.

    “아. 다시 보니까 너무 엉망이다. 저 부끄러워서 여기 더 못 있겠어요. 도망갈래요.”

    엘레나는 서둘러 앞치마와 토시를 벗어두고는 정말 도망치듯이 화실을 나갔다.

    “자, 잠시만요.”

    “다음에요. 저 선배님 얼굴 못 쳐다보겠어요.”

    라파엘이 쫓아가 잡아보려 했지만 엘레나는 그보다 빨리 복도로 뛰쳐나가 버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화실로 돌아온 라파엘은 엘레나가 그려놓고 간 이안의 초상과 마주했다.

    “…….”

    냉정하게 엘레나의 초상을 평가하자면 화실의 도제 수준이었다. 기본적인 감각과 실력은 있지만 고급 기법을 쓰지 못하니 그림의 표현이 한참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은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은 알 것 같아.”

    엘레나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그녀가 흘렸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은 한 인간이 가지고 살아온 혼의 일부를 담는 작업이었다.

    “뭐가 진짜 그림인지. 내게 뭐가 부족한지.”

    라파엘은 오랫동안 초상의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엘레나가 엉망이라며 자학하고 남기고 간 이 그림이야말로 라파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명화이자 지침서였다.

    * * *

    엘레나는 얼마간 화실을 찾지 못했다.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땐 언제고 졸작을 그렸다고 생각하니 민망했다. 또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우는 추태까지 보인 걸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기뻤어. 다시 볼 수 있어서.”

    엉망진창의 그림이었을지언정 엘레나가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안을 전부 담았다. 열 달간 배 속에서 품으며 기다림의 행복을. 출산 후, 제 품에 안겨서 울던 때 느꼈던 생소한 기쁨을. 이안이 태어난 후 어느 한순간조차도 엘레나에게 찬란하게 아름답지 않던 날이 없었다.

    그랬던 이안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 절망적인 자책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었다. 아니, 외면했다. 제 살길을 위한 합리화였다.

    “이안, 세상이 다 잊어도 엄마는 너를 기억할 거야.”

    그거면 됐다. 이안은 언제까지나 엘레나의 기억 속에서 살아갈 테니까.

    “그보다 이제 슬슬 외부에서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한데.”

    현실로 돌아온 엘레나는 지금까지 진행된 사항을 복기했다. 메이를 시켜 시대의 거장들에게 L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도 주기적인 도움을 준다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게 할 날도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러자면 메이 말고 전문적으로 외부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만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흠, 그자가 제일 쓸 만하긴 한데…….”

    공국을 떠나기 이전부터 엘레나는 고려해 놓은 자가 있었다. 마침 시기상으로도 학술원에 재학 중일 테니 포섭하기에도 적절했다.

    엘레나는 루시아로 변장해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렌이라는 위험 요소가 있었지만 대놓고 베로니카 공녀의 신분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마음을 얻어 진심으로 믿고 따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거래를 통해 이익을 공유하는 파트너가 더 신뢰가 갈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 만나러 가는 조력자는 후자였다.

    기록실에 들러 변장을 마친 엘레나는 돌다리도 두드려 본다는 심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도서관을 나섰다.

    “인문계열 학부였지, 아마?”

    지난 삶에서 엘레나는 그를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이안을 임신하고 순산을 기원하기 위해 가이아 교단 본산 교황청을 찾았을 때였다. 그곳에서 그는 시대가 낳은 건축가 란돌을 대신해, 교황이 의뢰한 성당 건설을 위한 예산 책정을 두고 조율을 하고 있었다.

    당시 엘레나는 그가 참 이해가 되질 않았다. 란돌이 직접 찾아와 교황과 예산을 책정하고 의뢰 보수를 수령하는 게 아니라 대리인을 보내서 일을 진행하는 게 의아했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찾아가 물어보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었다.

    “저는 중개사입니다. 예술가가 돈에 눈이 멀면 예술 못 합니다. 그걸 대신해 주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제 일입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전까지는 귀족의 후원을 받는 조건으로 작품 판매 대금을 나누는 게 일반적인 예술계의 형태였다. 또 그 중간에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구매하여 웃돈을 얹어 수집가나 귀족, 또는 황족들에게 판매하는 게 다였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중개사라고 했다.

    아트 중개사 칼리프.

    지금 돌아보면 그가 한 일은 시대를 앞서간 직업임이 분명했다.

    “그거야 나중 일이지. 지금은 반반한 얼굴로 가문 좀 괜찮은 여자나 꼬드겨 얹혀살 생각이나 하는 망나니고.”

    인문계열 학부가 몰린 학술원 북측은 여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학술원 졸업장이 전부인 평민이나 하급 귀족 출신 영애들이 선호하는 교육이나 관리계열 학부가 다수 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아둔하고 허영심이 많은 고위 귀족의 영애들을 위한 교양학부도 존재했다. 말 그대로 졸업장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학부로 유독 학업과는 거리가 먼 학과였다.

    엘레나는 여기 어딘가를 칼리프가 서성거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몰락 가문 출신의 칼리프는 가문의 남은 재산을 학술원의 학비로 충당하고 입학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이 배움을 토대로 졸업 후 살길을 모색하게 마련인데 칼리프는 다른 쪽에 뜻을 뒀다. 바로 혼인이다. 그는 대를 이을 적자가 없는 가문의 여식을 유혹해서 데릴사위로 들어앉는 것이야말로 일생일대의 성공으로 여겼다. 

    결국 칼리프는 원하는 바를 이뤘다. 외모가 볼품없어 학술원 내에서도 따돌림당하던 영애와 졸업 후 혼인했으며 끝끝내 데릴사위가 되었다.

    “딱 거기까지였지. 얼마 안 있어서 영지가 파산했으니까.”

    이 년 뒤, 지독한 가뭄이 들면서 칼리프의 처가는 명맥도 유지하지 못할 만큼 몰락하고 만다. 그의 꿈이 일장춘몽으로 끝난 것이다. 칼리프는 살기 위해 예술계에 발을 들였다. 달변가였던 그는 예술가들의 마음을 홀렸고, 수완을 발휘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점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엘레나가 칼리프를 눈여겨본 건 능력도 있지만 신용이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막대한 부를 손에 쥐었음에도 아내를 버리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해 줬다는 거.”

    칼리프는 용모가 떨어지고 가문마저 몰락한 아내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당연한 거지 뭐가 대단한 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유부남인 칼리프를 유혹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미모의 영애가 치근덕거렸다는 것과 제국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로지 아내만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 모습이 많은 호사가를 감동하게 했으며, 로맨티시스트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엘레나는 바로 그 칼리프가 아내에게 보인 순정을 높이 평가했다. 당연한 걸 지키지 않는 귀족과 사내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엘레나가 보고 판단한 바로 그는 사업 파트너로 함께하기에 최소한의 신용은 있는 남자였다.

    “사자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마주칠 줄이야.”

    인문계열 학부가 밀집된 학술원 북관 잔디밭에 누워 여인에게 치근덕대고 있는 낯이 익은 남자가 보였다. 영애들이 좋아할 법한 반반한 얼굴에 능글맞게 웃는 낯짝은 기억 속 칼리프가 맞았다.

    “꽃이 왜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여학생은 칼리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요?”

    “당신이란 꽃이 있어서입니다. 오늘 제 눈이 멀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예뻐요?”

    여학생은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몸을 비비 꼬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저 말이 싫지 않은 듯 재차 확인받으려고 들었다.

    “쉿.”

    칼리프가 검지를 들어 여학생의 입술을 막았다.

    “귀까지 먹어버리면 책임지실 겁니까?”

    “전 그냥…… 아! 말하면 안 되는데.”

    “…….”

    엘레나는 돈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한 편의 희극에 할 말을 잃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화법을 구사하는 칼리프나, 저 말을 듣고 정말 좋아하는 여학생이나 어처구니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해는 가지 않지만 엘레나는 저들을 존중하고자 했다. 연인의 사랑이란 원래 타인의 시선으로 납득 가능한 게 아니었으니까.

    잔디밭에 누워서 밀어를 속삭이며 장난을 치던 여학생이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제 강의 가야 해요.”

    “그만.”

    칼리프가 단호히 말을 끊었다.

    “우리 작별 인사 따위는 하지 맙시다. 내일 보더라도 항상 옆에 있었던 것처럼 만납시다.”

    “선배는 어쩜…… 제 마음을 이리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예요.”

    엘레나는 숨을 죽이고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더는 참고 못 들어줄 만큼 낯간지러웠지만 곧 마무리될 것 같아 버텼다. 아니나 다를까, 여학생은 잔디밭을 벗어나면서도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몇 번이고 돌아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잔디밭에 앉아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칼리프가 뒤를 돌아봤다.

    “언제까지 서 있을 겁니까? 저 만나러 온 거 아닙니까?”

    엘레나가 그곳에 있었던 걸 진즉에 인지하고 있었는지 칼리프가 피크닉 매트를 권했다.

    “아뇨. 서서 얘기해도 돼요.”

    조금 전까지 저기 여학생과 누워 있는 꼴을 봤더니 차마 앉기 거북했다. 칼리프는 그러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명찰 색깔을 보니 신입생 같은데…… 나한테 무슨 볼일일까? 혹시 고백?”

    “아뇨.”

    엘레나가 딱 잘라서 말을 끊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쪽으로는 손톱만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뭘까? 우리 상큼한 신입생이 이 오라버니에게 말을 건 이유가?”

    “거래하고 싶어서 왔어요.”

    “응? 거래?”

    칼리프가 눈을 연신 깜빡였다. 갓 입학한 신입생, 그것도 뿔테 안경이 잘 어울려 책을 좋아할 것 같은 여학생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네, 정확히는 선배님과 동업을 하고 싶어요.”

    “동업? 얘가 초면에 참 난감한 주제를 들고 왔네.”

    칼리프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그러더니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 나 알아?”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몰라도 미래의 칼리프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도 대략적으로 아는 만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나 개털이야. 허울 좋은 개살구라고. 그것까지 알고 있고?”

    끄덕.

    “그걸 알면서 넌 동업을 제안했어. 그게 무슨 의미일까?”

    칼리프는 피식 웃었다. 냉소적인 미소였다.

    “뻔해, 몸으로 때우는 일을 맡기겠단 심산이지. 위험하거나, 합법적이지 않은. 어때, 내 말이 틀려?”

    “…….”

    “대답 못 하는 거 봐. 그럼 그렇지. 일없다.”

    정황을 두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칼리프가 손을 휙휙 저으며 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털썩 피크닉 매트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엘레나는 그를 말없이 서서 내려다봤다.

    ‘자기 주제를 정확히 알고 있어. 그게 참 어려운 일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를 굉장히 과대평가한다. 그러나 칼리프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자기의 위치와 수준, 그릇을 정확히 알고 경계했다. 비록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엘레나는 칼리프가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주제 파악하고, 적당히 사업 감각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외부에서 엘레나가 진행하게 될 전반적인 사업을 맡기기에 더없는 적임자였다. 엘레나는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찝찝함을 참고 피크닉 매트에 앉았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혼자 추측하세요? 그것도 헛다리 짚으면서.”

    “그럼 뭔데?”

    칼리프는 비스듬히 돌아누운 채로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지만 엘레나는 개의치 않았다. 정말 중요한 건, 서로의 조건이 맞아떨어져 이 거래가 성사되는 것이다.

    “혹시 미술상에 관심 있어요?”

    “얘가 또 뭐래.”

    “제가 사업을 하나 벌일까 하는데, 혼자서는 버거워서요. 선배가 좀 도와줬으면 해요. 아! 위험하거나, 합법적이지 않은 일은 아니니 안심하시고요.”

    엘레나가 타이르듯 얘기하자 칼리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이용하려고 접근한 인상은 아닌 것 같은데. 망설이던 칼리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더니 엘레나를 향해 양쪽 다리를 오그리고 마주 앉았다.

    “이제 관심이 좀 생기세요?”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잖아.”

    엘레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모아놓은 돈이 좀 있어요. 아, 좀이라고 표현했지만 액수가 적진 않아요. 저희 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용돈을 많이 주시거든요.”

    “와, 재수 없는 얘길 아무렇지 않게 하네. 그래서?”

    “그걸 썩히기도 그렇고 투자를 해서 굴릴까 하거든요. 미술 사업으로.”

    칼리프는 이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아가씨의 계획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은 쉽네. 너 예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흐름은 알아요.”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너 미술상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엘레나가 대답 대신 빤히 쳐다보자 칼리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맥이야. 유명 화가나 조각가, 세공사의 콧대가 얼마나 높은데. 걔들 돈으로 안 움직여. 그게 다인 줄 아냐?”

    “또 뭐요?”

    “미술품을 누구한테 팔 건데? 귀족들이나 수집가들은 아무나 만나주지 않아. 친분이 있거나 전부터 거래하던 미술상이 아니면 대부분 상대조차 안 해줘.”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던 칼리프가 점차 격앙되었다. 그도 예술계와 그쪽 일에 나름 관심이 있었던지라 이 무지하기 짝이 없는 여학생의 사업 계획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하아, 내가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쪽 방면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 사기당하기 딱이다, 너.”

    “이래 봬도 나름 비전과 계획도 있어요.”

    “네 머릿속에만? 얘야, 현실은 다르단다. 나도 머릿속에 억만금을 벌고도 남을 아이디어가 넘쳐.”

    칼리프는 알아듣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엘레나를 보며 더 이상의 조언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정 하고 싶으면 혼자 해. 그럼 문제없잖아.”

    “저도 사정이 있어서요. 아버지랑 약속한 게 있어서 졸업장은 무조건 따야 해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엘레나는 그럴싸한 핑계를 가져다 붙여서 둘러댔다. 칼리프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데, 졸업장은 나도 필요해서. 너 혼자 하는 걸로 하자.”

    “제 얘기를 들어보시면 마음이 바뀌실 텐데요. 보기보다 제가 인맥이 좀 탄탄하거든요.”

    “아, 그러세요?”

    칼리프는 비아냥거리며 비웃었다.

    “듣고 나면 놀라실 텐데요.”

    “아! 너무 형편없어서? 후배님, 미술상은요. 저기 까마득히 높은 곳에 계신 귀족분들, 다시 말해서 돈이 썩어날 만큼 많아서 주체가 안 되는 분들과 안면이 있어야 시작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요. 그런 분을 제가 잘 알아요.”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반응이 여전히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칼리프도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러세요? 얼마나 대단한 분을 아시는지 심히 궁금하네요. 어떻게 4대 공작가에 인맥이 좀 있으시나 봐요? 하인? 아니면 마부? 아! 잘 쳐줘서 집사?”

    “상상력이 좋으시네요. 근데 겨우 4대 공작가로 되겠어요?”

    “야!”

    참다못한 칼리프가 윽박질렀다. 대화하면 할수록 자꾸 엘레나에게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아 기분이 팍 상했다.

    “적당히 해. 이게 받아주니까 끝을 모르네.”

    “진심인데요? 기왕 첫 고객이라면 대공가 정도는 되어줘야 빨리 자리를 잡지 않겠어요?”

    “뭐? 대, 대공가?”

    칼리프는 엘레나가 입에 담기에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가문을 언급하자 말을 더듬었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와 제가 좀 많이 각별한 사이거든요.”

    “그 말 사실이야? 거짓말이면…….”

    “공녀 전하께선 꼭 저를 통해 소개를 받은 미술상하고만 거래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칼리프는 저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고 머뭇거렸다. 베로니카 공녀가 복학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눈앞의 이 신입생과 각별한 사이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저 얘길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공녀 전하께 선물로 받은 건데, 이걸 보면 좀 믿으시려나.”

    “……!”

    칼리프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엘레나가 꺼내서 보여준 회중시계의 덮개에 대공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세공되어 있었다. 한눈에도 장인의 피땀 어린 손길이 닿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세공에 격조가 느껴졌다.

    “이제 거래할 생각이 좀 들어요?”

    칼리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인생에 찾아오는 세 번의 기회 중 한 번이 오늘 찾아온 것 같다고.

    * * *

    엘레나는 주기적으로 칼리프와 만나 모의했다. 본격적으로 미술상으로 뛰어들기 위해서 체계적으로 구상하고 구체화한 뒤 진행해야 할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만남은 도서관 내의 자습실을 이용했다. 최대한 외부 출입을 삼가서 렌의 눈에 띄는 횟수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네 말은 중견급 화가의 작품을 싸게 사서 그걸 베로니카 공녀한테 비싸게 팔자 이거야?”

    “이제 정확하게 이해하셨네요.”

    “정말 그래도 돼? 그거 사기 아니야?”

    칼리프가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아뇨. 사기는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을 가치가 있는 것처럼 속여 파는 게 사기죠.”

    “그게 그거잖아.”

    “달라요. 아직 예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해 가치가 떨어진다 뿐이지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아니잖아요.”

    칼리프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묘하게 설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예술의 가치란 결국 입찰 가격으로 결정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 공녀가 수집한 작품이란 소문만 돌아도 그 화가는 인생이 바뀔 거예요.”

    “그건 그렇지.”

    “그 화가의 명성이 올라가면 덩달아 작품의 가치도 상승하죠. 결국 비싸게 주고 산 것 같지만 그림의 가치는 더 오를 테니, 공녀 전하께서도 손해 보는 게 없다 이 말이에요.”

    “……그게 그거 같은데 묘하게 설득된단 말이야.”

    엘레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칼리프가 예술계의 모순에 대해서 알지 못할 뿐이다.

    ‘참 우스운 일이지. 똑같은 화풍으로 같은 초상을 그려도 누구는 거장 소리를 듣는 반면 누군 일생을 길거리 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니까.’

    그림 실력이 비슷하다는 전제하에 명성을 얻는 화가와 얻지 못하는 화가가 나뉘는 이유는 자신을 알릴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감히 현 예술계는 썩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썩 뛰어나지 않은 화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미술 평론가가 그림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사가 고평가하면 가치가 천정부지 올라간다. 화룡점정으로 감정사가 수집가나 고위 귀족에게 비싸게 그림을 넘기는 순간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명성을 얻게 된다. 반대로 얘기하면 화풍이 독특하고 그림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미술 평론가나 감정사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한낱 의미 없는 그림으로 폄하당해 묻히고 만다.

    ‘다 떠나서 그림을 비싸게 주고 구입해야 대공가의 돈을 빼돌릴 수 있어.’

    엘레나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게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리아브릭이 정해준 한도 내의 용돈 개념을 벗어나 복수의 기반이 되어줄 거액을 마련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 명목에서 예술품 구매는 굉장히 명분이 좋다. 예술품은 잔존 가치가 뛰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격이 높아지게 마련이었다. 그리되면 엘레나가 한도 이상의 돈을 지출해 예술품을 구매하더라도 리아브릭이 묵인할 가능성이 컸다.

    ‘그 그림들의 가치가 머지않아 폭락하겠지만.’

    곧 시대가 변한다. 구태의연하고 썩어빠진 예술계의 흔하고 개성이 없는 그림들은 라파엘을 필두로 한 천부적 거장들의 등장으로 가치가 폭락한다.

    엘레나는 거기까지 내다봤다. 당장 예술품을 구매해 대공가의 돈을 빼돌리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향후 웃돈을 얹어주고 산 예술품들의 가치가 폭락해 똥값이 되는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파멸의 대상인 대공가가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걸 결코 원치 않았다.

    “앞으로 선배가 해줄 일이 많을 거예요.”

    “하, 좀만 참으면 졸업인데…… 어째 졸업장은 물 건너간 거 같다?”

    칼리프가 엄살을 떨자 엘레나가 미소로 핍박했다.

    “인생을 바꿀 기회인데, 그깟 졸업장이 대수겠어요?”

    “그거야 잘 풀렸을 때 일이고. 하나만 더 물어보자.”

    팔짱을 낀 칼리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L이 대체 누구냐? 너야?”

    “그게 왜 궁금하세요?”

    “생각해 봐. 공동 사업을 하는데 네 이름은 없이 L이란 서명만 들어가잖아. 나야 말만 공동 사업이지 투자금이 없으니 성과금 수준이고, 넌 다르잖아.”

    칼리프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초 계획을 수립하고 투자를 한 건 루시아다. 근데 사업을 준비하며 전반적인 서류 작업을 하다 보니 루시아란 이름이 쏙 빠진 채 L이란 서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제 가명이에요. 아버지한테 들키면 안 돼서.”

    “어쩐지.”

    비약한 변명이었지만 칼리프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첫 만남부터 엘레나가 아버지와 관계를 언급하며 약을 쳐뒀던 덕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더 얘길 나누고 싶어도 고명하신 화가분들과 선약이 있어서.”

    “어련히 잘하실 거라 믿고, 잔소리는 안 할게요.”

    “할 말 있음 그냥 해. 그게 더 부담되거든?”

    엘레나는 지난 삶에서 본 칼리프의 수완과 안목을 믿었다. 아직은 열정에 비해 노련미가 부족했지만 그건 경험이 쌓이면 충족이 될 문제였다. 타고난 성품과 인성, 자질은 그대로니까.

    ‘억지로 둑을 만들어 물길을 바꿀 필요는 없어.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가도록 두면 돼.’

    엘레나가 할 일은 그저 시대의 흐름을 좀 더 빨리 읽고 포착해서 방향을 정해주는 것뿐이다. 지금이야 사업의 초기 단계이니 관여하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칼리프에게 위임할 요량이었다. 워낙 감이 좋은 수완가이니 엘레나가 관여하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칼리프를 보낸 엘레나는 이 층의 열람실을 찾았다. 제국 황실이 자랑하는 학술원의 중앙 도서관답게 고서 외에도 타국에서 발간된 서적도 많았다. 수천 권, 아니, 만 권이 넘는 서적 중에서도 엘레나는 고대사를 눈여겨봤다. 정확히는 대륙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신성 펠리시아 제국.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륙의 전역을 지배했던 고대 최대의 제국이다. 그렇다 한들 천오백 년도 더 전의 국가인지라 역사를 다루고 연구하는 고고학자가 아닌 이상 잘 알지 못했다. 더구나 멸망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황궁이 불에 타며 역사적 기록물마저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그나마 제국 황실이 자랑하는 학술원 중앙 도서관이 있기에 일부 자료와 타국에서 편찬한 서적들이나마 보유할 수 있었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고 했어.”

    엘레나는 고심 끝에 서적을 몇 권 골랐다.

    <신성 제국의 공화정>, <신성 펠리시아 제국사>, <신성 제국의 시민>. 셀 수 없이 많은 고대 국가 중에서도 엘레나가 신성 펠리시아 제국을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새 시대에서 과거가 보여.”

    조만간 닥칠 새 시대는 단순히 예술적인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학문과 철학, 계몽사상 등 그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특히 특권층의 부패와 부조리에 불만을 품은 평민이나 지식인들의 문화 운동은 역모로 몰려 많은 참극이 벌어질 만큼 투쟁적이었다.

    “나라고 해서 시대의 흐름은 바꿀 수 없어. 다만, 흐름에 편승해 내 걸로 만들 뿐이지.”

    엘레나는 새 시대를 이용하는 데서 그치고 싶지 않았다. 주도적으로 새 시대를 열고 이끌어 나가는 인물이 되고자 했다. 

    신여성. 그간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예술, 철학, 수학, 과학, 지리 등의 분야에서 그들 못지않은 지식과 학식을 쌓아 당당히 서고 싶었다. 엘레나가 지니게 될 문화적 파급력과 영향력이야말로 대공가를 고립시켜 파멸시키는 절대적 힘이 될 거라 믿었다.

    엘레나는 백과사전보다 더 두툼한 다섯 권을 끌어안고는 열람실 구석에 놓인 책상으로 가져갔다. 편히 앉아서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공간이었다. 낑낑거리며 겨우 책을 옮긴 엘레나가 의자를 빼서 앉으려고 할 때였다.

    “구면이군.”

    감정을 뒤흔드는 목소리에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

    목소리의 주인과 시선을 마주한 엘레나의 전신이 얼어버렸다. 황태자 시안.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그가 꼿꼿한 자세로 책장을 넘기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를 뵈옵니다.”

    엘레나는 순간적으로 무너질 뻔한 정신의 고삐를 쥐었다. 한 번 겪어서인지 첫 만남보다 공황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빨랐다.

    “몸은 다 나았나?”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는 엘레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부부였을 적에도 들어본 적 없는 안부를 이제야 들어보네요.’

    돌아보면 참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부였지만 남보다 못한 관계로 살았다. 둘 모두가 억겁이라 느낄 만큼 긴 고통의 시간이었다.

    “다행이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안의 무표정에서 엘레나는 저 걱정이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느꼈다. 그렇기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된 것 같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엘레나는 더 이상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식인 이안은 용기를 내서 마주하고 기억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지만, 시안은 그렇지 못했다. 애증조차 남지 않은 통증 그 자체였으니까. 세상의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불치의 통증 말이다.

    “그대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전공인가?”

    시안이 다시 말을 걸자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빼던 엘레나가 다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고고학부에 재학 중입니다, 전하.”

    “신성 제국의 서적들이라…… 왜 그것들을 골랐는지 물어도 될까?”

    계속되는 질문이 엘레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이전 삶에서 부부로 지냈을 때조차 몇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눈 적이 손에 꼽혔다. 장차 보위를 이을 태자를 낳은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매정하게 무시했다. 그랬던 그가 엘레나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전하. 큰 의미는 없사옵니다.”

    “정녕 그게 다인가?”

    어째서인지 시안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과거 성세를 누렸던 신성 제국 시민들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그렇군.”

    원하는 대답을 들은 까닭인지 시안은 그 부분에 대해서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젠 괜찮겠지 싶어 엘레나가 물러나며 힐끗 시안이 읽고 있는 서적을 훑어보았다.

    [때때로 지배자는 아랫사람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두려운 지도자는 쉽게 배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군주론.’

    엘레나는 한 구절을 읽었을 뿐임에도 시안이 읽고 있는 서적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절대 권력의 군주. 전하께서 늘 꿈꾸시던 이상적인 모습이시지.’

    현 제국에서 황실의 권위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대공가를 구심점으로 4대 공작가의 권세가 황실의 권위를 찍어 누를 만큼 막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안은 강력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 황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황제만이 권력을 쥘 수 있는 과거의 제국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엘레나가 황비로 재임해 있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공가라는 벽이 너무도 높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 입김이 어느 정도인지 당시 5대 가문이 뜻을 모아 선대 황제마저 폐위시키고 시안의 아버지이자, 현 황제인 리처드 황제를 직접 추대할 정도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5대 가문의 수장이었던 프리드리히 공작가는 대공가로 격상했다. 제국은 전통적으로 황실의 힘이 강했던 국가였건만, 귀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치욕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아쉬운 건, 현 제국의 통치자 리처드 황제는 귀족들을 견제할 만한 그릇이 못 됐다. 결국 그 기대와 황실의 부흥이란 무게는 오로지 시안의 몫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시안이 얼마나 큰 부담감을 짊어지고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시기에 이안이 태어났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이안이 태어난 그날, 한순간의 실수가 제국을 나락으로 몰아넣었다며 모질게 스스로를 원망하던 모습을. 그토록 배척하고자 했던 대공가 출신의 엘레나를 통해 후사를 봤으니 그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꾸 지난 삶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엘레나는 억지로 생각을 떨쳤다. 지금 그녀가 봐야 할 건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기에.

    ‘……전하, 군주론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저서예요.’

    시대는 태동하고 변한다. 엘레나가 신성 펠리시아 제국사를 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곧 들이닥칠 새 시대에 부합하는 깨친 철학을 지니지 못한다면 도태되고 말 것이다.

    “하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안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책장을 넘겼다. 이기적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저런 모습이 오히려 더 익숙한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엘레나가 책을 들고 일어설 때였다.

    “그것들을 보고자 가져온 것이지 않나?”

    “네?”

    엘레나가 반문하자 시안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굳이 자리를 옮겨 볼 필요가 있나 싶군. 더는 말을 걸지 않을 터이니 거기 앉아 보거라.”

    “…….”

    엘레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시안 딴에는 무거운 서책을 다시 낑낑거리며 다른 책상으로 옮기는 게 안타까워서 한 말이겠지만, 저 말 자체가 엘레나에겐 부담이었다.

    “저보다 전하께 더 방해될까 싶어…… 앉을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뭐라 핑계를 댈까 하다가 엘레나는 수긍하며 의자를 빼고 마주 앉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학술원 생활을 하다 보면 앞으로도 수차례 마주칠 것이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불편하더라도 감수하고 버텨낼 요량이었다.

    정적 속에서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꽤 긴 시간이 흐르도록 어느 한쪽도 서로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뜬 건 엘레나였다. 독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예를 갖추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열람실을 나섰다.

    “…….”

    엘레나가 열람실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우수에 찬 그의 시선이 조금 전까지 엘레나가 앉아 있던 빈 의자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안은 얼마간 빈자리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 * *

    라파엘의 눈길이 엘레나가 그려두고 간 이안의 초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깊은 상념이 담긴 눈길은 단순히 그것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발악이었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

    늘 그랬듯 한 손에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온 세실리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라파엘을 보았다.

    “그러게. 아직도 이러고 있네.”

    고민에 지친 라파엘을 보는 세실리아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너무 고민하는 거 아니야? 그림이란 건 그리면서 발전하는 거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라파엘이 이젤에 걸린 이안의 초상을 빤히 쳐다봤다. 구도나 균형감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명암의 표현도 썩 훌륭하지 못했다. 얼핏 보면 괜찮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한없이 부족한 습작 수준의 그림이었다.

    분명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그림인데,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듯 눈을 떼지 못하겠다. 저 그림에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행복한 기운에 매료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뭐야, 그 자신감 없는 태도는.”

    “좀 지쳐서 그래.”

    “차라리 좀 쉬는 건 어때? 휴식도 노력의 일부라고 하잖아.”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갈 길이 너무 머네.”

    “넌 교수들 앞에서는 안 그러면서 항상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더라. 내가 보기에, 네 그림은 지금 예술계에 데뷔해도 극찬을 받고도 남을 수준이야.”

    세실리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간 라파엘은 엘레나의 조언을 받아 일취월장했다. 공기원근법만 하더라도 예술계를 뒤집을 만큼 혁신적인 기법으로 미술계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동의하지 않았다.

    “초상에는 살아생전 그 사람의 삶이 담겨.”

    “루시아 양이 그린 초상에는 그게 담겨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응.”

    세실리아가 고개를 돌려 이젤에 걸린 이안의 초상을 응시했다. 제법 그림에 대한 식견과 안목이 있는 그녀였지만 라파엘이 무얼 말하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라파엘. 난 정말 모르겠어.”

    세실리아는 그저 느낀 대로 솔직하게 얘기했다. 엘레나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림 자체를 놓고 비교했을 때 표현이나 기법, 채색의 수준 자체가 라파엘이 압도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될 법도 하건만 라파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왜 안 올까?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왔었는데.”

    “루시아 양?”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의 엘레나를 떠올렸다.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운 걸까?”

    “걔가 울었어?”

    “응. 아프게 울더라.”

    “…….”

    세실리아는 물끄러미 라파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눈길이었지만 라파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네가 그러니까 나도 걱정된다. 내가 만나고 올까?”

    “그러지 마. 부담 주고 싶지 않아.”

    “그게 왜 부담이야? 걱정되니까 그러는 거지.”

    라파엘은 정말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듯 세실리아를 만류했다.

    “좀 더 기다려 보려고. 내가 그러고 싶어.”

    “…….”

    세실리아는 문득 라파엘에게 묻고 싶었다. 너는 한 번이라도 나를 기다려 본 적이 있냐고. 그러나 그 말이 부담이 될 수 있기에 가슴속으로 삼키며 평소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러자! 우리가 아는 루시아 양이면 곧 훌훌 털고 올 거야. 그러니까 너도 힘내서 기다리라고.”

    “그래. 너밖에 없다.”

    어깨를 툭 치는 세실리아를 보며 라파엘이 따라 웃었다. 며칠 만에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었건만 세실리아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래서 억지로 더 환하게 웃었다. 늘 그래 왔으니까.

    * * *

    “천천히 모세요. 빨리 안 가도 되니까 조심조심. 제 말 알아들으셨죠?”

    마부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칼리프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차 안에 고가의 그림 십여 점이 실려 있었다. 엘레나에게 받은 금액을 전부 투자해서 구매한 그림들로, 혹여 마차에 충격을 받아 손상이 갈까 노심초사했다.

    “아, 떨려. 얘는 왜 자기 혼자 쏙 빠져서 날 긴장하게 하는 거야.”

    칼리프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연신 다리를 떨어댔다.

    오늘은 미술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날이다. 그간 준비했던 모든 것을 결과로 평가받는 날이기도 했다. 워낙 꼼꼼히 신경 쓴 만큼 나름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다만, 문제는 지금 만나러 갈 수집가가 일반 귀족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첫 고객이 베로니카 공녀라니…… 기쁘긴 한데, 너무 센 거 아냐?”

    칼리프가 떠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베로니카 공녀가 누군가. 제국을 쥐락펴락하는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적녀다. 여성에게 작위 세습이 가능한 제국의 현행법상 유력한 차기 후계자라고 봐도 무관했다. 그런 베로니카 공녀와 미술상으로서 거래를 틀 수 있다는 건 단숨에 기성 미술상들의 견제를 뚫고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사실 칼리프는 루시아와 함께 베로니카 공녀를 뵐 거라 예상했다. 루시아와 친분이 돈독하다고 하니 그편이 거래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라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만남에서 루시아는 딱 잘라 같이 갈 수 없다고 얘기해 그를 당혹하게 했다.

    “못 가는 이유요? 우선 아버지한테 걸리면 혼나요. 전 말 잘 듣는 딸 행세 중이라서요. 그리고 이런 일일수록 공과 사를 구분해야죠. 저는 소개만, 선배는 거래만, 공녀 전하는 구입만. 이게 제일 깔끔하고 뒤탈 없는 거래예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다 떠넘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친분으로 인해 상호 간 거래에서 지켜야 할 선이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나만 너무 고생하는 거 같은데…….”

    중견급 화가를 섭외하여 그림 중개를 위임받는 것부터 시작해 자잘한 인부의 고용까지 칼리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몸이 두 개라고 해도 부족할 만큼 일복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칼리프를 굴리는 건 엘레나가 어느 정도 의도했던 바였다. 엘레나는 지난 삶에서 가업을 물려받은 귀족 자제들이 그것들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망하는 경우를 부지기수로 봤었다.

    그렇기에 바닥에서부터 직접 구르며 일을 배워야 나중에 아랫사람을 부리더라도 내실 있게 운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직접 움직일 수 없다는 게 이유긴 했지만 엘레나가 너무하다 싶을 만큼 칼리프에게 일을 몰아준 데는 그만한 안배가 깔려 있었다.

    “아, 잡생각은 그만. 오늘 실수만 하지 말자.”

    칼리프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학술원 동측에 위치한 단독 기숙사에 다다랐다. 제국의 건국 이래 손꼽히는 몇몇 가문과 황족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라더니 확실히 칼리프가 머물던 기숙사와는 격이 달랐다.

    “워워워.”

    마부가 고삐를 당기며 마차를 세웠다. 목적지에 다다른 칼리프가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공가의 인장이 새겨진 갑주를 걸친 기사 휴렐바드가 신분 확인을 요구했다.

    “미술상 칼리프 데 헤아라고 합니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 미술품 중개를 해드리고자 방문했습니다. 이건 신분증명서입니다.”

    휴렐바드는 그가 내민 신분증명서에 위증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공녀 전하께 정중히 모시란 말씀이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칼리프는 네 명의 인부에게 조심스럽게 그림들을 들게 한 뒤, 휴렐바드를 따라 들어갔다. 작은 정원까지 갖춰진 기숙사의 내부 전경에 감탄하면서 건물에 들어서자 메이가 인사했다.

    “이쪽 응접실에서 준비를 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 안쪽으로 갖고 오세요.”

    엘레나가 앉게 될 소파의 건너편에 이젤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소개할 그림을 걸었다. 극적인 소개를 위해 천을 덮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준비 다 마쳤습니다. 공녀 전하께 아뢰어주세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메이가 이 층으로 올라가고 얼마 있지 않아 계단을 밟는 구두 굽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칼리프는 바싹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년 전쯤 멀찌감치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독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더구나 같은 학술원 학생의 신분이 아니라 미술상과 공녀의 신분으로 만나는 것인 만큼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 공녀가 계단을 내려왔다. 교복 차림이 아니라 바다처럼 푸른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예, 예뻐.’

    칼리프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우월하다 못해 살 떨리는 미모다. 크게 멋을 부리지 않았음에도 담백한 치장이 사내라면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자애로운 아름다움이다. 아니, 미모라는 단어로 그녀를 표현하기엔 어딘지 부족했다.

    ‘……분위기가 완전 미쳤어.’

    베로니카 공녀의 고아한 기품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우러러보게끔 만드는 권위였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랄까. 배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에서 흐르는 태생적 고귀함에 경건함마저 생겼다.

    ‘감히 나 따위가 쳐다볼 여자가 아니야.’

    학술원에 재학하면서 적잖은 귀족 출신 영애를 볼 기회가 있었다. 개중에는 4대 공작가인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장녀 아벨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와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지.’

    아벨라는 그저 운이 좋아 공작가의 장녀로 태어나 대접을 받고 살 뿐, 대귀족이라면 태생적으로 지녀야 할 고결한 자태나 품위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응접실 가운데 놓인 소파에 이르자 엘레나가 옅은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어서 와요.”

    엘레나의 미소가 그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칼리프는 긴장을 누그러뜨리며 소개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칼리프라고 합니다, 공녀 전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올해 졸업을 앞두신 선배님이시라고.”

    “네? 네. 그렇긴 한데 이 일에 푹 빠져서 학업과는 담을 쌓은지라…… 제대로 졸업이나 할지 미지수입니다.”

    엘레나가 학술원이라는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꺼내 자연스럽게 대화를 리드하자 칼리프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죠. 졸업장은 한낱 종이 쪼가리일 뿐이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녀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힘이 나네요.”

    칼리프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것 같자 엘레나가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림을 볼까요?”

    “네.”

    엘레나가 소파에 앉자 칼리프가 천을 씌워놓은 이젤 옆에 섰다. 그가 주먹을 입에 대고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천을 벗겼다.

    “이 그림의 제목은 ‘젊은 여인의 초상’입니다.”

    엘레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앤이 내온 홍차를 한 모금 음미하며 그림에 시선을 뒀다.

    ‘여인의 미덕, 정숙.’

    흑발의 여인이 수풀 사이에 앉아 한 손을 들어 가슴 부위를 천으로 덮고 있었다. 시선은 정면에서 살짝 비켜 관람자와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 여성의 관능미를 뽐내면서도 그것을 감추며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 시선 처리에 엘레나는 이 작품이 담고자 하는 의의를 단숨에 파악했다.

    “이 그림은 화가 조르지오의 작품으로 세속적 사랑에 물든 현 시대상을 반영하여…….”

    “설명은 그쯤 하죠.”

    “네?”

    “사죠.”

    앞뒤 맥락 없이 엘레나가 툭 던지듯 말하자 칼리프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작품을 사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칼리프는 작품을 판매했다는 기쁨보다도 얼떨떨함이 더 컸다. 설마 이런 식으로 작품이 매매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그럼 다음 작품을…….”

    “아뇨. 순서를 바꾸죠.”

    “예?”

    “한 점씩 보려니 답답하네요.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가져오신 그림 쭉 진열해 주세요.”

    “저, 전부 말씀입니까?”

    엘레나는 느긋하게 홍차를 마시며 끄덕였다.

    “앤, 메이.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가서 거들렴.”

    “네, 아가씨.”

    칼리프는 시녀와 인부들을 동원해 그림들을 전부 꺼내 왔다. 이젤이 부족하여 진열할 수 없는 작품은 인부와 시녀들을 시켜 직접 들고 있게 만들었다.

    “이제 좀 볼만하네요.”

    “하면, 차례대로 작품 소개와 설명을…….”

    “아뇨. 됐어요.”

    엘레나가 말을 딱 잘랐다.

    “그림 외적인 주관이나 작의는 감상에 방해가 된답니다. 저는 이대로 이 그림들을 보고 감상하고 싶네요.”

    “아, 네.”

    할 말을 잃은 칼리프가 입을 닫자 엘레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그림들을 감상했다. 그녀는 중간에 쿠키와 홍차까지 맛보며 그림을 즐기는 여유를 보였다.

    “그림이 다 괜찮네요.”

    “감사합니다. 특별히 엄선한 그림들입니다.”

    엘레나의 반응에 칼리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엘레나의 다음 말에 환해진 얼굴은 경악으로 변했다.

    “다 사죠.”

    “예? 아, 아홉 점 전부 다 말씀입니까?”

    “네.”

    엘레나는 마지막 찻물을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가져온 작품 전부 판매에 성공했으면서도 칼리프는 실감이 나지 않는지 반쯤 넋이 나가 보였다.

    “혀,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이게 다 훌륭한 그림을 가져오신 칼리프 선배의 안목 덕분이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로니카 공녀가 금칠을 해주자 칼리프도 기분이 좋아졌다. 또 미술상으로 처음 발을 내디딘 거래에서 성공을 거뒀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라고. 감사의 의미로 총 지불 대금에서 일부를 할인해 드릴까 하는데…….”

    “아뇨, 그러지 마세요.”

    “네?”

    “저, 예술 작품 두고 가격 흥정 안 합니다. 그건 예술에 대한 모욕이죠.”

    ‘……미치게 멋지다.’

    칼리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툭툭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더 눈부시고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예쁜 귀족 영애들은 많이 봤지만, 그걸 다 초월할 만큼 멋있게 느껴진 여자는 베로니카 공녀가 처음이다.

    “작품 대금의 일부분은 지금 지급하고 나머지는 차용증을 써드릴 테니 대공가에 청구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시간 끌 거 없이 바로 양도 계약서 작성하죠.”

    엘레나는 단숨에 작품 매입 금액의 지불 방식까지 결정하더니 일사천리로 양도 계약서를 작성하고 차용증을 발급했다. 얼빠진 얼굴로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야 칼리프는 실감이 났다.

    “감사합니다, 공녀 전하.”

    칼리프는 기쁨에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고자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게 뭐 있나요? 가치가 있는 작품을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사는 것뿐인데.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을 소개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공녀 전하의 마음에 드실 만한 명화들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림을 양도한 칼리프는 깍듯이 작별 인사를 올린 뒤 인부들을 대동하고 기숙사를 나섰다. 첫 거래를 성공리에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차에 오르던 칼리프가 고개를 돌려 엘레나가 머무는 단독 기숙사를 올려다봤다.

    “역시, 공녀는 공녀구나. 일반 귀족 나부랭이하고 격이 다르네.”

    어정쩡한 귀족일수록 생색을 내고 아는 척을 많이 한다. 몰락 귀족 출신인 칼리프는 그런 같잖은 귀족을 어려서부터 많이 봐왔다.

    그러나 엘레나는 달랐다. 지금까지도 충격적인 게 계약서에 서명하는 그 순간까지 매입 금액을 묻지 않았다. 물론 양도 계약서와 차용증에 명시가 되어 있지만, 그녀는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다.

    “대공가의 재력을 끌어모으면 제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가 보네.”

    그리 중얼거리는 칼리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첫 고객이자, 주 고객이 되어줄 베로니카 공녀가 아닌가. 대공가 재산이 많다는 건 앞으로 그가 거래를 지속할수록 취하게 될 이득이 커진다는 의미였다.

    칼리프는 성공적인 첫 거래를 루시아에게 어떻게 자랑할까 고민했다.

    “아, 루시아한테 뭐라고 생색내지? 걔도 이 얘기 들으면 깜짝 놀랄 텐데.”

    그 시각. 이 층 침실 창가에 선 엘레나는 마차를 끌고 멀어지는 칼리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첫발을 뗐네.”

    리아브릭의 눈을 피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데 많은 공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얻은 인재들이 슬슬 제 역할을 하며 움직였다. 아직 미흡한 부분도 있었지만 오늘 이 미술품 거래는 첫 번째 성공작이라 할 만했다.

    “앤, 밖에 있니?”

    엘레나의 부름에 손님들을 보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던 앤이 올라왔다.

    “찾으셨어요, 아가씨?”

    “그림들은 잘 포장했고?”

    “충격이 가지 않도록 세 겹씩 쌌어요.”

    특별히 신경을 쓴 듯 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수고했구나. ‘젊은 여인의 초상’만 아래층에 걸어두고 나머지는 다 대공가로 보내렴.”

    “예, 아가씨.”

    “이건 리아브릭에게 보낼 서신. 동봉하렴.”

    앤은 서신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서 일 층으로 내려갔다. 홀로 남게 된 엘레나가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 평화롭기 짝이 없는 학술원 전경이 보였다.

    “내가 예술품 수집을 한다면 리아브릭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안 봐도 훤하다. 감히 너 따위가 하는 표정으로 비웃을 것이다. 리아브릭을 처음 만난 이후로 줄곧 허영심 많고 이기적인 영애를 연기해 왔으니까.

    “예쁘게 봐줬으면 좋겠네.”

    엘레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원래 못난 아이가 한 번 말을 잘 들으면 곱절은 더 예쁘고 기쁜 법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조금씩 귀족다운 태를 내며 공녀라는 격에 어울리는 취미를 가진 것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최소 허튼짓을 하며 평판을 깎아먹진 않을 테니까.

    “앞으로 대공가 이름이 달릴 차용증이 좀 많아져야지.”

    차용증을 써서 빚을 만드는 건 엘레나지만, 그 빚을 갚는 건 리아브릭의 몫이었다.

    * * *

    엘레나는 정말 오랜만에 루시아로 변장했다. 그간 찾지 못했던 라파엘의 화실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하……. 왜 그림을 그린다고 해가지고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형편없는 그림을 그린 것도 부끄러웠지만, 라파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으니 그보다 더한 추태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왕래를 끊을 수도 없는 노릇. 창피함을 머금고 오긴 했는데 막상 라파엘을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안녕하세요?”

    나무 문을 열며 엘레나가 화실에 들어섰다. 이젤에 캔버스를 걸어두고 앉아 있던 라파엘이 고개를 들며 시선이 딱 마주쳤다.

    “…….”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정적이 깔렸다. 내심 지난 일을 마음에 두고 있던 엘레나는 괜히 더 어색함을 느꼈다.

    “그림 그리고 계셨어요? 제가 방해했네요.”

    “아뇨. 그보다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네요, 루시아 양.”

    얼핏 들으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담담한 인사였지만 유독 오늘따라 라파엘의 목소리에 진한 반가움이 배어 있었다.

    “저도요, 선배님. 그때 그러고 가버려서 죄송해요.”

    “걱정 많이 했어요.”

    엘레나는 부끄럽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라파엘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건 너무 미안했다.

    “제 딴에는 도움이 된다고…… 어? 어! 저걸 왜 저기 걸어두셨어요!”

    엘레나는 벽면에 떡하니 걸려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는 당황했다. 의미를 떠나서 그림 자체만 본다면 졸작이나 다름없기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기가 제일 잘 보이니까요.”

    “다, 당장 내릴게요.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그림이 절대 아니에요.”

    당황한 엘레나가 그림을 내리려 할 때였다. 라파엘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엘레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둬주세요.”

    “서, 선배?”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가 지금껏 그린 모든 그림이 가짜처럼 느껴져서요. 눈에서 떼지 않고 있어요.”

    라파엘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런 모습에 엘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간절하기까지 한 그의 진심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서다.

    “그러니 조금만 더 저기 두게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라파엘이 저렇게까지 나오니 엘레나도 더는 그림을 떼겠다고 우길 수가 없었다.

    “도움이 된다고 하시니, 그럴게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저기요, 이 손 이제 놓아주셔도 될 것 같은데…….”

    엘레나가 난처해하며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라파엘이 아차 싶었는지 손을 놓았다.

    “저도 모르게 결례를 저질렀네요. 죄송해요.”

    “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는 있지만 엘레나는 적잖이 놀랐었다. 그러나 계속 당황한 티를 내면 라파엘이 더 미안해할 거라는 생각에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전환했다.

    “그림은 잘 그려지세요?”

    “아니요.”

    라파엘이 쓰게 웃었다. 그간의 고뇌가 묻어 있는 미소였다.

    엘레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딴에는 도움이 되고자 졸작이나마 그림을 그려서 보여준 것인데, 그게 오히려 라파엘의 발목을 잡은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어쩌지? 이러다 슬럼프를 이겨내지 못하면…….’

    엘레나의 수심도 깊어졌다. 예술이 주는 부담감과 무게를 이기지 못한 예술가들이 슬럼프를 겪으며 망가지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시대의 거장이라 일컫는 라파엘이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측은했다.

    ‘내가 도움을 줄 방법이 없을까?’

    엘레나는 라파엘의 슬럼프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 같아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해서 역효과를 내지 않는 선에서 라파엘에게 도움이 될 법한 방법을 궁리했다.

    ‘아! 그거!’

    문득 뇌리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방법이라면 좋은 효과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선배님.”

    엘레나의 나지막한 호명에 라파엘이 시선을 맞췄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엘레나가 설핏설핏 웃는데 그럴 때마다 살랑거리는 단발머리가 그녀를 더없이 귀엽게 만들었다.

    “…….”

    라파엘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빤히 엘레나를 쳐다봤다. 지금 엘레나의 미소 위에 그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울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것이 라파엘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 그림 배우고 싶어요. 기초부터 차근차근.”

    “지금 저한테 배우겠다는 건가요?”

    엘레나가 웃으며 끄덕였다.

    “여기 선배님 말고 누가 있어요?”

    “그건 그런데. 너무 뜻밖인지라…….”

    생각지 못한 제안에 라파엘은 어쩔 줄을 몰랐다. 뭐랄까, 첫 만남 때도 그랬지만 엘레나는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리하게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니에요. 종종 시간 날 때, 선배가 그림을 그리다 막히고 그럴 때 봐주시는 정도면 돼요.”

    가르치며 배운다는 말이 있다. 남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의 부족함 또한 보이게 되는데, 그를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발전한다는 말이다. 엘레나는 미흡한 자신을 통해서 라파엘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싶었다.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부탁을 드렸나요?”

    “그럴 리가요.”

    라파엘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실은 저도 아쉬웠어요. 루시아 양의 재능이면 저보다 더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앗, 금칠이 너무 심해요.”

    “금칠 아니고 내 솔직한 생각이에요.”

    라파엘이 너무 고평가해 주는 것 같아 엘레나는 살짝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라파엘의 그림이 진일보할 수 있다면 이 정도 기대 어린 부담감 따위 충분히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그럼 허락한 거죠? 나중에 귀찮다고 물리면 안 돼요.”

    “루시아 양이야말로 단단히 각오하세요. 내가 좀 엄한 편이라서.”

    “저도 뭐, 썩 만만한 제자는 아닐 거예요. 그럼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악수해요, 우리.”

    엘레나가 가녀리고 흰 손을 앞으로 쭉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지난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네요.’

    인연이란 게 참 묘했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이어지게 될 줄은 엘레나도 몰랐다. 그 인연이 악연이 아니기에 더더욱 기뻤다.

    라파엘은 이런 상황이 어색한지 멋쩍게 웃다가 옷에 손을 닦고는 마주 잡았다. 그러면서 내심 새로운 관계의 형성에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와 단순한 선후배를 떠나 좀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엘레나가 의지를 보이며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부터 수업 괜찮을까요, 선생님?”

    “안 될 거 없죠.”

    라파엘도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또 한 번 맺게 된 사제 간의 첫 수업을 하려 할 때였다.

    “여기가 맞는 건가.”

    낯선 목소리에 엘레나와 라파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

    순간 놀란 엘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황태자 시안이었다.

    “영애는 또 보는군.”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당황은 그저 지나가는 감정일 뿐, 엘레나의 몸은 본능적으로 절도 있는 예법으로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황궁에서나 볼 법한 예법에 눈길을 주던 시안이 시선을 돌렸다.

    “라파엘이라 했던가?”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라파엘은 이미 시안과 안면이 있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여기가 그대의 화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실리아를 만나러 왔는데, 그녀는 여기 오지 않았나 보군.”

    시안은 화실 안을 둘러보며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세실리아 때문임을 밝혔다. 짐작하기로 시안은 어째서인지 그녀를 찾고 있었고, 세실리아는 그를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후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네요.’

    이미 다 지난 일이라 여겼건만, 엘레나는 새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엘레나가 죽을 만큼 간절하게 갈구해도 받지 못한 걸, 그녀는 과하리만치 받는 게 느껴졌다. 그것도 너무 당연하게.

    “저도 세실리아를 보지 못한 지 며칠 됐습니다.”

    “그런가.”

    시안은 별반 감정을 보이지 않는 특유의 무표정함으로 화실 안 이곳저곳에 걸려 있는 라파엘의 그림, 연구 중인 인체 비례도, 해부도 등 다양한 것을 감상하듯이 꼼꼼히 살펴보았다.

    “세실리아는 그대가 시대를 대표할 화가가 될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 듯싶군. 부족한 나의 안목으로도 그대의 천재성이 느껴질 정도니.”

    장차 황제에 오를 시안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은 고개를 숙여 보일 뿐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그림에 만족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황태자의 칭찬이라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엘레나는 시안을 보며 내심 그가 빨리 화실을 떠나길 바랐다. 첫 만남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시안을 마주하는 건 엘레나 입장에서 불편했다.

    살롱이라도 온 듯 화실의 작품들을 감상하던 시안의 발길이 한 작품에서 멈췄다.

    “이 그림도 그대가 그렸나?”

    “……!”

    엘레나의 숨이 멎을 뻔했다. 시안이 지목한 그림은 엘레나가 그린 이안의 초상이었다. 이 화실 안에는 명작의 반열에 충분히 오르고도 남을 만한 라파엘의 그림이 열 점 이상은 걸려 있었다. 한데 시안이 그것들을 다 제쳐두고 하필이면 이안의 초상을 지목했으니 엘레나는 당혹스러웠다.

    “아닙니다. 여기 있는 루시아 양이 그린 그림입니다.”

    “그대가?”

    시안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며 엘레나를 스윽 보더니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폐하께서 왜 그 그림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서 시안이 이안의 초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살아생전 이안을 멸시 어린 눈길로 보던 시안의 눈빛이 자꾸 겹쳐 그녀를 힘들게 했다.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엘레나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시안은 좀처럼 이안의 초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왜? 어째서? 하필, 이안의 초상에 저리 큰 관심을 두는 것인지. 엘레나는 그저 빨리 그가 관심을 거두고 여길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참 알 수 없군.”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시안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이 천사 같은 아이의 웃는 얼굴이…… 왜 이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지 모르겠어.”

    “……!”

    엘레나가 울컥했다. 조금 전 시안의 말이 귓속에서 왕왕 맴돌며 떠나질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서. 이 모든 순간이 거짓말 같아서. 이안이 누구인지 시안은 모르는데. 알 리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초상을 보는 시안의 눈길에서 느껴지는 애틋함에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늦었지만,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버지의 온기 어린 눈길을 이안이 받을 수 있음에.

    “그대와 무슨 관계지?”

    “……남동생입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

    엘레나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말을 삼켰다.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할 진실이란 걸 알기에. 이안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남동생을 빌려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시안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의 초상을 다시 눈에 담았다.

    “부디, 잘 성장하길 바라지.”

    엘레나는 이제 와 저런 말을 하는 시안이 야속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봐주지 않았으면서. 그땐 왜 그리 모질었냐고. 차마 쏟아낼 수 없는 많은 말이 목 끝에 걸렸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마시지.’

    세상 어디에도 이안은 없는데. 아버지인 당신의 기억 속에도 없는데. 유일하게 엘레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데. 어째서 조금만 더 일찍 이안을 돌아봐 주지 않았는지. 이제 와서 저런 따뜻한 말을 하는 그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엘레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모든 걸 놓아버린 엘레나의 눈가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봇물이 터지듯 쏟아졌다. 하염없이. 엘레나의 눈물에 라파엘과 시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특히 그녀의 눈물을 처음 본 시안이 느끼는 당혹감은 매우 컸다.

    “그대는 왜 우는 거지?”

    “…….”

    “내가 실수를 한 것인가?”

    시안은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또렷이 이유라도 알았다면 위로든 뭐든 할 텐데 우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으니 더 막막했다.

    “아니요.”

    엘레나는 억지로 웃었다. 좀처럼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래도 웃었다.

    “고마워서요. 전하의 그 축언이 너무 고마워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동양에서는 천륜이라고 했다. 일면식조차 없음에도 이안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준 게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엘레나의 기억 속에만 살아 있는 이안이지만 이 일로 희미하게나마 웃을 수 있길 바라기에.

    “잘 클 거예요. 전하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행복하게. 누구보다 씩씩하게.”

    “…….”

    엘레나가 기쁘면서도 아프게 웃었다. 조금 늦었지만, 아니, 많이 늦었지만. 시안의 저 진심 어린 말이 꼭 이안에게 닿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 * *

    “하, 정말이지.”

    리아브릭은 엘레나가 사들인 그림을 진열해 놓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술원에 들어가 잠잠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싶더니 기어코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예술품 수집이라니. 차라리 사치를 부렸다면 그러려니 하겠다. 자기 주제에 가당키나 한 취미인가. 제가 뭘 안다고 그 큰 금액을 지불하고 이런 그림들을 사들이는 건가 싶었다. 특히 자필로 써서 보내온 서신은 더 가관이었다.

    ‘뭐? 머지않아 가치가 크게 오를 그림들이니 믿고 대금을 지불해 달라고?’

    엘레나의 자신감에 찬 필체와 문장을 보고 있자면 기가 찼다. 최근 들어 예술 작품에 푹 빠졌으며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치유를 받는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또 예술적 안목이 풍부한 영애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서적들을 통해 지식을 쌓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차용증까지 동봉하곤 그 대금 지불을 자신에게 부탁한다는 말까지 쓰여 있었다.

    문제는 차용증에 적힌 금액이다. 대공가의 재력은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이 정도 금액쯤이야 지불할 능력이 차고 넘쳤다. 다만, 이런 식의 지출이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되는 걸 리아브릭은 경계했다. 앞으로도 쭉 엘레나가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으로 활동하는 이상 그녀의 서명이 갖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술원이란 폐쇄된 공간에서만 지내다 보니 딱히 통제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면 통제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엘레나를 구속하고 통제할 계획을 짜둬야 한다.

    ‘그뿐이 아니야. 제국의 귀족들도 통제의 대상이야. 황제라 하더라도 예외 없이.’

    남들이 들으면 미친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그녀는 자신 있었다. 이미 프란체 대공을 대신해 전권을 쥔 리아브릭이 그와 관련된 일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어떻죠?”

    리아브릭이 따로 초빙하여 감정을 맡긴 미술 감정사들이 하던 걸 멈추고는 보고했다.

    “다 출중한 그림들입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라 그렇지, 화풍이나 기법, 표현은 지적할 게 없습니다.”

    “좀 비싸게 매입한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빠르면 오 년, 늦어도 십 년이면 매입가 이상의 가치 상승은 있을 거라 판단됩니다.”

    “그래요?”

    리아브릭은 예상외로 그림의 가치가 높은 것에 놀란 눈치였다. 지금껏 겪어본 엘레나의 안목과 수준을 고려하면 그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네, 첫 구매이신데도 이 정도면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서는 남보다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갖추셨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과연 공녀 전하란 생각이 듭니다. 어린 나이에도 이 정도 소양이라니요.”

    “허허, 다음엔 또 어떤 작품들을 구매할지 기대가 될 정도입니다.”

    리아브릭은 순간 새어 나올 뻔한 비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엘레나가 매입한 저 그림들이 감정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흔히 가이아 여신은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하나의 재주를 준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같은 경우가 아닌가 싶다.

    “알겠어요. 또 매입하면 그때 부르죠.”

    미술 감정사들을 돌려보낸 리아브릭은 시녀들을 시켜 그림들을 전부 수집 창고에 옮겨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림은 와인과 같아서 시간이 지나 숙성이 될수록 가치가 오른다. 다시 세상에 등장했을 때 이 그림들의 가치는 지금의 두 배, 아니, 세 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좀 더 지켜봐도 괜찮겠어.”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제법 있다고 하니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볼 참이었다. 정말 재능이 있다면 베로니카 공녀의 평판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다. 반대로 그저 운이 따른 거라면 예술품 매매를 금지해 버리면 그만이다.

    결단을 내린 리아브릭은 소매에 보관 중이던 열쇠를 꺼내 잠겨 있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비밀리에 엘레나를 감시하던 앤이 주기적으로 보낸 서신이 가득했다. 엘레나가 보낸 서신을 함께 넣어둔 리아브릭이 서랍을 다시 잠갔다.

    “잊지 말렴.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리아브릭은 한순간도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쭉.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 * *

    엘레나는 주기적으로 라파엘의 화실을 찾았다. 그림을 배운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라파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함이었다. 렌에게 찍힌 게 걱정되긴 했지만 언제까지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복수를 위한 단계적 준비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서측 별관으로 통하는 길을 찾은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중앙 광장에 대로가 놓이면서 잘 이용하지 않게 된 길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엘레나는 도서관을 기점으로 남측으로 다시 내려왔다가 서측으로 넘어가는 이 길을 애용했다. 중앙 광장 쪽을 지나치다 렌과 마주치는 걸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몇 차례의 왕래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렌을 보지 못했다. 몸을 사리며 조심스럽게 다닌 것도 있지만 버려진 옛길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없다 보니 마주칠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측 별관에 들어선 엘레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화실을 찾았다.

    “선배, 저 왔어요.”

    엘레나가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음에도 화실은 조용했다. 의아한 기분이 들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가셨지? 이 시간은 강의가 없는 걸로 아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엘레나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당장 급할 게 없으니까.

    “찻물이나 끓이며 기다려야겠다.”

    엘레나는 바구니에 담아 온 다도 세트를 꺼냈다. 흰 자기에 장미와 금빛 테두리가 장식된 이 찻잔은 엘레나가 가장 애용하며 아끼는 것이었다. 마침 오늘 대공가에서 좋은 품질의 홍차 잎이 들어온지라 그것들을 라파엘과 함께 즐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챙겨 왔다. 그러면서도 앤이 의심할까 영애들과 티타임이 있다고 둘러대고는 메이를 대동해 나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쯤 메이는 학술원 밖에서 미래의 거장들의 안위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엘레나는 화실 한쪽에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작은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물을 담아 온 은주전자를 그 위에 올려두었다. 화력이 약하다 보니 끓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

    엘레나는 슬럼프를 이겨낸 라파엘이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대성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라파엘의 성장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았다.

    “선배가 졸업 후에 꼭 나와 함께했으면 좋겠어.”

    엘레나는 시대의 변화를 대비해 많은 걸 준비하고 있었다. 이전 삶에서 칼리프가 해온 아트 중개사를 좀 더 심층적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예술가는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중개사는 판매와 경영에만 매진한다. 그리고 문화를 주도할 공간을 만든다. 그것이 엘레나가 품고 있는 웅대한 계획이었고 라파엘은 중심축이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저벅저벅.

    물이 언제 끊나 은주전자를 보고 있던 엘레나가 발소리에 돌아봤다.

    “선배, 왔어요?”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던 엘레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라파엘이 아니라 시안이 특유의 무표정한 표정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를 뵙습니다.”

    적잖이 당황했지만 엘레나는 평소처럼 티를 내지 않고 예를 갖췄다.

    “그대는 이곳에 자주 오나 보군.”

    “라파엘 선배께 그림을 배우고 있어서요.”

    “그림을?”

    “네.”

    엘레나는 이런 대화가 불편했다. 부부로 지냈을 적에도 서로의 안부와 일상을 거의 묻지 않았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이 어색함을 끝내고자 엘레나가 짐작 가는 용건을 꺼냈다.

    “세실리아 선배는 여기 안 오셨어요.”

    “세실리아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다.”

    “네? 그럼 여긴 왜…….”

    엘레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지 말을 흐렸다. 세실리아를 보러 온 게 아니라면, 습하고 누추한 이 지하 화실까지 고귀한 황태자가 직접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를 보러 온 것이다.”

    “저를요?”

    엘레나가 바보처럼 반문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했다.

    ‘뭘 기대한 거지.’

    그 앞에서 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지난 삶에서 그가 했던 모든 말에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 떠올라 한심스러웠다. 그래서 시안의 관심이 달갑지가 않았다.

    “왜 저를 보러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시안이 말없이 엘레나를 응시했다. 우수에 찬 그의 눈길은 그때나 지금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유라. 오늘은 네가 우려주는 홍차를 마시고 싶어 온 걸로 하지.”

    “……홍차요?”

    시안의 시선이 엘레나를 지나쳐 다도 세트에 꽂혔다. 설마하니 저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해 엘레나가 말을 잃었다. 과거 시안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즉흥적인 대답인 까닭이다.

    “물이 끓는군.”

    “네? 앗!”

    놀란 엘레나가 반사적으로 은주전자를 잡으려다가 손끝에 전해지는 열기에 깜짝 놀라 손을 뺐다. 어찌나 뜨거운지 손이 얼얼했다.

    “괜찮은 건가?”

    “다행히 덴 것 같진 않아요.”

    “내가 하지.”

    시안이 책상 위에 있던 캔버스로 은주전자를 돌돌 감아 화로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제 제가 할게요. 차를 한 잔 달라고 하셨죠?”

    생전 한 번도 안 해본 실수에 민망해진 엘레나가 얼른 은주전자를 넘겨받아 끓는 물을 다관에 옮겨 담았다. 오늘 가져온 홍차 잎에 가장 적절한 온도로 식히는 한편 그 온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 남이 되고 나서야 차를 끓여 드리다니.’

    지난 삶 황제였던 시안은 차를 즐겨 마셨다. 개중에서도 바다 건너에서 진상받은 동방 대륙 홍차의 깊은 맛과 향을 선호했다. 황비가 된 엘레나는 그런 시안에게 차를 끓여주고자 다도를 익혔었다. 다도는 마음가짐이라는 말에 허례허식적인 예법이 아니라 시안을 향한 진심을 담고자 애썼다.

    그런 엘레나가 손수 우린 차를 맛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극찬했다. 오죽하면 사교계 어린 영애들이 보고 배워야 할 표본이란 말까지 심심찮게 들을 정도였다.

    하나, 그럼 무엇 하나? 정작 시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말을 섞는 것조차 경멸스러워하는데 다도가 가당키나 했을까. 그런데 부부의 연이 끊기고 철저히 남이 된 지금에 와서 첫 차를 우려주다니. 이보다 더한 모순과 부조화가 또 있을까 싶었다.

    “다도는 정식으로 배운 건가?”

    “레이디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니까요.”

    시안은 묵묵히 의자에 앉아 엘레나가 차를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사소한 예열 과정부터 물을 따르는 높낮이, 흩어지도록 뿌리는 찻잎, 첫 물을 버리는 과정 등 완벽에 가까웠다.

    “여기 있습니다.”

    엘레나가 맑으면서도 깊은 향을 가진 찻물을 잔에 담아 내밀었다. 찻잔을 우아하게 쥔 시안이 먼저 향으로 차를 즐기고, 찻물로 홍차의 진한 깊이를 음미했다. 식긴 했지만 여전히 뜨거운 찻물임에도 불구하고 소리 내어 마시지 않았다.

    “…….”

    이게 뭐라고. 엘레나는 조금은 긴장한 눈으로 시안의 반응을 살폈다.

    “놀랍군.”

    두 모금 정도 홍차를 맛본 시안의 입이 열리며 나온 첫마디는 감탄이었다.

    “입에 맞으신가요.”

    “아까 다도가 기본적인 소양이라 했나?”

    “네? 네, 그랬습니다.”

    “참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군. 일찍이 황궁에서도 맛본 적 없는 깊은 맛이야.”

    “……!”

    시안은 한 모금씩 홍차를 맛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그것이 겉치레가 아닌 걸 증명하듯이 금세 빈 찻잔을 내밀기까지 했다.

    “한 잔 더 줄 수 있겠나?”

    엘레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빈 찻잔에 찻물을 채워주었다. 시안은 다도의 예법에 따라 우아하고 절도 있는 자세로 홍차를 연신 음미했다. 정말 엘레나가 우린 차가 입에 맞지 않았다면 저럴 수 없을 거였다. 그만큼 홍차를 즐긴다는 게 눈에 보였다.

    ‘거짓말이지?’

    엘레나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삶에서 시안의 관심을 끌고자 미친 듯이 발악했다. 그러나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 지난 삶이 거짓말처럼 시안은 엘레나가 우려낸 홍차를 마시며 극찬했다. 엘레나가 얼빠진 채로 계속 멍하니 있자 시안이 물었다.

    “그대는 마시지 않는가?”

    “아! 이제 마시려고요.”

    엘레나는 찻잔에 찻물을 따르고는 홀짝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찻잔과 최고급 홍차로 우려낸 찻물임에도 불구하고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면 된 거야. 이걸로 한 톨의 미련도 남지 않게 됐어.’

    엘레나는 신이 있다면 감사드리고 싶었다. 이렇게나마 손수 내린 차를 시안에게 대접함으로써 미약하게나마 잔재하던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 후련한 마음이 든 엘레나가 턱을 들었다. 이제껏 똑바로 보지 못했던 시안의 눈을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부디, 황후와 행복하시길.’

    악연이라곤 하나 그를 사랑했던 시간은 무엇과 비교해도 소중했기에 이제라도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었다.

    다관에 담긴 찻물이 식을 새도 없이 금세 동이 났다. 애초에 홍차 잎을 많이 가져온 게 아니다 보니 더 차를 내리기도 무리였다.

    ‘언제까지 여기 계실 참이지?’

    찻물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시안은 돌아가지 않았다. 마땅히 대화를 지속할 만한 주제도 없는지라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그런 불편함은 그녀만의 전유물인지 시안은 뒷짐 지고는 여유롭게 화실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선배님이 많이 늦으시네요.”

    “그래 보이는군.”

    “…….”

    엘레나는 다시 찾아온 정적에 입을 다물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대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더는 못 있겠어.’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보긴 힘들 것 같고…… 다음에 다시 와야겠어요.”

    엘레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어색함을 탈피하고 싶어서 서둘러 다도 세트를 바구니에 가지런히 정리해 넣으며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전하,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시안이 벽면에 걸려 있는 라파엘의 화폭을 보며 되물었다.

    “……도서관이요. 잠시 들를 일이 있어서.”

    변장도 변장이지만, 다도 세트를 들고나오느라 메이를 대동해서 나왔다. 지금쯤 학술원 밖에서 일을 보고 있을 테니 귀가 시간을 맞춰서 같이 기숙사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래야 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잘됐군. 마침 도서관으로 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도록 하지.”

    “저, 전하께서 같이요?”

    엘레나가 반문했다. 지금까지 뉘앙스조차 비치지 않다가 갑자기 같이 가자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대를 두 번째 본 것도 도서관으로 기억하는데.”

    시안이 무감각한 눈길과 말투로 엘레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자꾸만 시안이 상식 밖으로 구는 탓에 곤란한 까닭이다.

    “계속 서 있을 건가?”

    “그게…….”

    엘레나는 말을 흐렸다. 웬만하면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 불편하기도 하고, 될 수 있으면 루시아로 변장하고 지내는 동안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대로 밖에 나가면 주목받을 거야.’

    시안은 장차 황제가 되어 제국을 이끌어 나갈 황태자였다. 당연하지만 그가 한마디라도 대화를 나누는 여자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는 그걸 원치 않았다. 렌만으로도 버거운데 다른 사람들의 눈 밖에 나면 루시아 행세를 하기 힘들어질 수 있었다.

    “왜 그러지? 할 말이라도 있나?”

    “…….”

    “아니라면 가지.”

    시안의 재촉에 엘레나는 뭐라 항변할 틈도 없이 따라서 화실을 나섰다. 별관을 나선 두 사람이 나란히 걷자 남녀 가리지 않고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저기 봐, 황태자 전하야.”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처음 보는데? 촌스러워서 진짜…… 저 안경 뭐니?”

    “아, 급 떨어져 보여. 아무리 학술원 안이라지만 저런 애는 좀 걸러야지.”

    엘레나가 우려했던 사태는 금세 현실이 됐다. 그저 호기심에서 그치는 남학생들과 달리, 여학생들은 자신이 시안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황후가 될 수 없다면 그게 누가 됐든 깎아내리는 데 열을 올렸다.

    ‘황후도 재학 시절 심하게 시달렸다고 했지. 저래서였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여학생들의 눈초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지 않나. 자신이 베로니카 공녀임을 밝히면 눈조차 제대로 못 마주칠 자들이 지금은 만만히 보며 잡아먹으려고 들다니.

    ‘쟤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렌이야. 제발 마주치지 않아야 할 텐데.’

    그간 지금은 애용하지 않는 길로 서측 별관을 왕래한 덕에 렌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가는 대로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고 붐비는 길이다. 렌과 마주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대의 홍차는 맛이 참 깊더군.”

    “칭찬 감사합니다.”

    시안은 도서관을 향해 걷는 와중에도 엘레나가 우린 홍차의 깊은 맛이 가시지 않은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전하.”

    “다음에 또 그대의 홍차를 마실 수 있을까.”

    “……!”

    엘레나는 다음을 얘기하는 시안을 빤히 볼 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시안이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엘레나의 기억 속 모습과 엇갈려 혼란스러웠다. 결국 도서관에 다다를 때까지 엘레나는 시안의 부탁에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럼 전하, 저는 이만…….”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동행을 마무리 짓고 싶은 엘레나가 작별을 고하려 할 때였다.

    “이건 또 무슨 조합이래?”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엘레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바람을 담아 고개를 돌리는데, 그곳에 최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렌이었다.

    “우리 신입생이 재주가 좋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전하를 꽉 물다니.”

    렌이 이죽거리는 얼굴로 시안과 엘레나를 번갈아 보며 비아냥거렸다. 장차 황위를 이을 시안 앞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 미친놈은 그런 걸 따지지 않는 듯 보였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자 엘레나의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렌 선배님. 또 뵙네요.”

    “너 뭐냐.”

    “네?”

    “뭔데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

    “아, 아무래도 좀 그렇죠? 학술원이 좀 넓어서…….”

    진땀을 빼며 둘러댄 엘레나는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렌이 그녀를 찾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쩌지?’

    렌만으로도 버거운데 옆에 시안까지 함께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슬기롭게 넘겨야 하는데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안의 말문이 트였다.

    “그대는 내가 보이지 않나 보군.”

    “저런. 어찌 지체 높은 전하를 제가 못 봤겠습니까? 그저 학부 강의 때 봤으니 또 인사드리기 모호하여 생략했을 뿐입니다.”

    “생략이라. 그걸 그대가 판단할 문제라 여기나 보는군.”

    평소처럼 무표정 그대로였지만 시안의 말투에 묘하게 날이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팽팽한 시선을 주고받던 렌이 피식 웃으며 한 수 접었다.

    “오늘따라 유독 까칠하시군요. 제가 그만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옆에 끼고 계신 분을 겨우 찾았더니 그만 기뻐서 눈에 뵈는 게 없어서요.”

    “아는 사이인가?”

    시안이 고개를 돌려 묻자 엘레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모르는 사이는 아니에요.”

    “딱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란 말로 들리는군.”

    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안이 제멋대로 엘레나와 자신의 관계를 규정하는 게 거슬렸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하지요.”

    “영애에게 무슨 볼일이지?”

    “지극히 개인적인 볼일입니다. 쟤가 저한테 빚을 좀 졌거든요.”

    “빚?”

    시안의 시선이 다시 엘레나에게 닿았다. 빚이 무언지 묻는 눈빛이었는데, 짚이는 게 있다면 그나마 비를 맞지 말라고 덮어준 교복 외투였다.

    ‘진짜 제대로 돈 거 아냐?’

    그게 맞다면 엘레나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도 모자라 빗속에 세워둬 홀딱 젖게 만들고 나서야 비 맞지 말라며 씌워준 겉옷이 무슨 호의란 말인가. 억지도 저런 억지가 없었다. 시안은 스윽 엘레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런 거 없는 거 같군.”

    “……!”

    엘레나가 놀라서 빤히 시안을 쳐다봤다. 마치 변호를 하듯이 렌을 상대해 주는 모습이 너무 낯설고 얼떨떨했다.

    “이야. 세상이 이래요. 신세를 진 사람은 있는데, 갚을 사람은 없어.”

    렌이 주어를 쏙 빼놓고는 비아냥거렸다. 황권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더라 하더라도 시안은 황위를 이을 황태자다. 그런 시안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꼴 수 있는 건 뒷일은 생각지 않는 렌이 정말 미친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러나라.”

    “아,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전하, 분명히 말씀드렸지만 쟤와 저 사이에 청산할 일이 남았다고요.”

    “두 번 말하는 거 같군. 물러나라.”

    시안이 특유의 무감각한 눈길로 렌에게 경고했다. 세 번째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따지고 보면 이건 엘레나와 렌의 은원 관계였다. 제삼자인 시안은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렌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며 엘레나를 위하니 고마우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 예. 전하께서 물러나라 하시니 그러겠습니다.”

    팽팽하게 이어지던 기 싸움에서 먼저 꼬리를 내린 건 렌이었다. 그가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황태자를 상대로 들이박을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다.

    “근데 말입니다, 전하. 그거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거든요.”

    “날 가르치려고 드는 건가?”

    “그럴 리가요. 다만, 전하께서 자꾸 지키려 하니까…… 쟤를 더 괴롭히고 싶어지잖아요.”

    엘레나 입장에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직 할 일이 많은 루시아 신분에 제동이 걸려 버린 격이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최선을 다하시듯, 저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렌이 빤히 엘레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 미소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흉포했다.

    “신입생, 또 보자고. 그땐 셋 말고 단둘이 말이야.”

    멀어지는 렌을 보는 엘레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전까지야 최대한 눈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해서 조용히 넘어가는 걸 상책으로 여겼다. 똥 밟은 셈 치고 조금 고생하면 루시아로 활동하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젠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되돌리기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뒤였다. 엘레나도 더는 저자세로 굴 생각이 없었다. 학술원 안에서만큼은 렌도 교칙에 따라야만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괜찮나?”

    걱정스럽게 안위를 묻는 시안을 응시했다. 지금 렌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시안이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녀를 도와주는지 모르겠다.

    ‘날 걱정해서? 하지만 폐하는 그런 남자가 아닌걸.’

    시안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인간이 아니었다. 황위를 이을 황태자이기에 막중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늘 감정을 죽이고 차갑고 이성적으로 살길 강요받았다. 그래서 지난 삶, 그의 경멸 어린 눈빛에 더 가슴앓이했는지도 몰랐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분명한 건 오늘만큼은 엘레나가 그의 신세를 졌다는 거다.

    “이제 좀 편안해 보이는군.”

    “……티 많이 났어요? 사실 대하기 좀 어려운 선배라서요.”

    엘레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는 다정하게 홍차를 나눠 마시더니, 이젠 제법 친해진 선후배처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대는 참으로 이상하군.”

    “제가요?”

    시안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노골적이다 못해 뚫어질 듯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첫 만남에서 쓰러지고.”

    “그건…….”

    “화실에서는 울었지.”

    “…….”

    “오늘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엘레나는 민망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상한 수준이 아니라, 저렇게 일목요연하게 듣고 보니 추태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누굴 탓해. 나라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겠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엘레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안은 엘레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신경이 쓰인다면 내가 이상한 건가?”

    “……!”

    엘레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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