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16/30)

제6장 L

학술원이 개강했다. 재학생들은 학부에 속한 전공과목과 교양과목을 수강하며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취득하고자 강의를 찾아 들었다. 본인에게 필요한 과목을 일부러 찾아 수강하는 재학생도 있었지만 전공과목만 수강하더라도 졸업에 지장이 없는 만큼 귀족 출신 대부분은 교양과목을 수강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평민 출신은 졸업 후 진로를 위한 경험을 쌓기 위해 교양과목에도 목을 맸다. 그런 맥락에서 접근하자면 엘레나 역시 전공인 교양사회 학부 수업만 수강하면 충분했다. 단, 이 년을 휴학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다.

리아브릭은 휴학으로 쌓지 못한 이 년 치의 학점까지 엘레나가 취득하길 바랐다. 학술원의 인맥과 졸업장도 중요하지만 이 년이나 시간을 허비하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오죽했으면 학장과 협의해 3학년 학점까지 취득한 엘레나를 조기 졸업시켜 버렸을까.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다. 지금의 엘레나는 전공수업을 제외하고 학점 이수를 위한 교양과목까지 강제로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저기 봐. 베로니카 공녀야.”

“와, 가까이서 보니 느낌이 다르긴 하다. 혈통이 달라서 그런가?”

“나 있지, 떨려서 눈도 못 마주치겠어.”

교양과목 ‘대륙사’ 강의에 엘레나가 등장하자 평민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귀족과 평민이 수강하는 강의가 다르다 보니 겹치는 경우가 워낙 드물어서였다. 그중에서도 제국의 4대 공작가의 수좌 격인 프리드리히 가문의 베로니카 공녀와 함께 강의를 듣는 건 최초나 다름없었다.

‘껍데기만 공녀일 뿐, 나 역시 저들과 다를 게 없는데.’

참 우스운 일이었다. 고작 베로니카 공녀란 신분과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 저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어버리다니. 따지고 보면 본래 그녀는 부유한 평민보다도 못한 몰락 귀족 출신이지 않나.

강의실 뒷문이 열렸다. 곧 강의가 시작이다 보니 미리 책을 펼치고 엄숙히 교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유독 시선이 집중됐다.

“와, 역시 아랫것들은 열정부터 남달라. 어떻게든 기어 올라오려고 발악을 하잖아?”

곱슬머리에 불량스러운 인상의 렌이 강의를 준비하던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치며 비아냥거렸다.

“레, 렌이잖아?”

“왜 하필.”

“나 어쩌지? 교양 학점 포기할까?”

렌을 보는 학생들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평민 학생들이 귀족과 접점이 없다지만 학술원 최고 망나니로 손꼽히는 렌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자칫 렌에게 시비가 걸리거나 밉보이기라도 하는 날엔 학술원 생활이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렌은 그만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 시달림을 견뎌내지 못하고 학술원을 떠난 학생이 작년에만 열 명 가까이 됐다.

엘레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렌의 등장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째서? 렌은 이 강의를 듣지 않았어.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고.’

혼란스러워하던 엘레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삶과 현실이 변했다는 걸. 그러지 않고서야 렌이 지금 이 대륙사 강의를 수강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닌데.’

비틀려 버린 렌과의 첫 만남이 이런 결과로 이어져 또 다른 가시밭길이 펼쳐질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렌이 히죽거리며 엘레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강의실 뒤편 엘레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내가 교수님하고 썩 친하질 않아서. 딴 데 빈자리가 많네?”

“네? 여, 여기 앉으세요.”

노골적인 협박에 겁을 집어먹은 남학생이 서책을 챙겨서 얼른 자리를 옮겼다. 빈자리에 앉은 렌이 비딱한 자세로 턱을 괴고 앉아 엘레나를 보았다.

“나 그 표정 아는데.”

“…….”

“막 반가울 때 짓는 표정 맞지?”

렌이 씨익 웃었다. 마치 엘레나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엘레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이거 우연 아니지?”

“우연이지. 계획적인 우연!”

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는 악질 그 자체였다. 이 반갑지 않은 재회에 엘레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녀가 대역인 걸 렌이 모르는 이상 엘레나가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계획적인 우연에 학생의 본분도 있길 바랄게.”

엘레나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툭 던지곤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대륙사 담당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오며 강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는 대화를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렌이 입맛을 다시며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엘레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대륙의 역사를 논하려면 가이아 교단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화와 역사, 그 관계에서 이룩한 문명의 발단을 되짚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강의 내내 렌의 시선은 한시도 엘레나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예 의자까지 돌려 앉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집요한 눈길에 엘레나가 질려 버릴 정도였다.

‘의식하지 말자.’

엘레나는 신경을 쓰지 않고자 꿋꿋하게 강의에 집중했다. 역사라는 건 오묘하고 깊어서 이미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들어도 흥미로웠다. 특히 굴곡 있는 삶을 살고 난 뒤여서인지 당시엔 보지 못했던 역사의 면면들이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교수가 교본을 덮고는 강의를 끝냈다. 교수가 나가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늑장이라도 부리다가 렌에게 시비라도 걸릴까 싶어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엘레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턱을 괸 채 빤히 그녀를 보고 있는 렌을 무시하고는 그대로 강의실을 나서고자 했다.

휙.

엘레나가 막 옆을 지나가는데 렌이 다리를 쭉 뻗었다.

“어? 어!”

균형을 잃고 넘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엘레나는 기지를 발휘해 재빨리 치맛자락을 들고 반대편 발을 앞으로 뻗어 지탱했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지난 삶에서 이런 일을 어지간히 겪은 까닭에 이골이 났다. 저 고약한 성격에 잠잠한 것 자체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오! 재빠른데?”

엘레나는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손에 쥐고 있던 대륙사 서적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엘레나가 그걸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줍지?”

“나 협박당하는 거야, 지금?”

“주우라고.”

렌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육촌끼리 아랫사람 부리듯 시키고 그래도 되는 거야?”

“하, 유치해서 상대하고 싶지도 않네.”

대화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든 엘레나가 허리를 굽혀 책을 집었다. 바닥의 먼지가 붙은 표지를 손으로 털고 책을 허리에 끼웠다.

“낯설다, 너.”

렌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질린다, 너.”

맞받아친 엘레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강의실을 나왔다.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는 따라오는 거 같진 않았다.

“내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거든?”

엘레나가 깜짝 놀라 옆을 쳐다봤다. 강의실을 나온 렌이 나란히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네 흉터, 반대편에 있지 않았나?”

“……!”

웬만한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던 엘레나였지만 저 말에는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난 분명 그렇게 기억하거든.”

렌이 집요하게 물고 넘어지자 책을 끼고 있던 엘레나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엘레나 역시 흉터가 있다는 얘기만 듣고 상처를 냈지 정확하게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엘레나가 대공가에 왔을 때는 이미 베로니카와 관련된 시녀들은 다 바뀐 뒤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엘레나 역시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렌에게 대역인 게 들통나면 엘레나가 계획한 구상에 차질이 갈 게 뻔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확실한 게 인간의 기억이라지?”

“처음 듣는 말인데.”

“그럼 그 잘난 기억력을 맹신하고 살든지.”

엘레나는 물러서지 않으며 배짱을 부렸다. 여기서 흔들리거나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끝이란 걸 알기에 세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착각했다?”

“응.”

단답으로 말을 끊은 엘레나가 더는 상종조차 하기 싫어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렌도 엘레나를 더는 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멈춰 섰다. 저 멀리 멀어지는 엘레나를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흐음, 우기니까…… 나도 헷갈리네?”

* * *

리아브릭의 집무실. 제국 전역에서 올라온 보고서와 서류가 수북이 쌓인 방 안은 잉크 냄새와 양피지의 눅눅한 향이 가득했다.

리아브릭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두 종류의 서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엘레나에게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시를 붙여놓은 앤이 비밀리에 보내온 것이다.

엘레나는 일상의 얘기와 기숙사 생활, 그리고 안부를 주로 다뤘다. 그에 반해서 앤은 기숙사에 도착한 시점부터 엘레나의 행적을 적었다. 어디를 가고, 뭘 먹으며, 누굴 만났는지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적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이상하게 거슬려.”

리아브릭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술원이란 울타리에 가둬둔 이상 엘레나가 제멋대로 행동할 순 없었다. 학술원 내의 모든 눈이 엘레나를 향하고 있으니 무얼 하든 눈에 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깊숙한 곳에 틔운 불안감이란 싹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렌츠입니다.”

“들어오세요.”

방에 들어온 기사 로렌츠가 팔뚝을 명치에 대며 약식 인사를 올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였다.

“무슨 일이죠?”

웬만해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로렌츠이기에, 리아브릭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짐작하고 표정을 굳혔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서 위중하단 연락이 왔습니다.”

“어제 고비를 넘겼다고 했잖아요?”

“밤새 독이 혈관을 타고 장기로 침투해 재발했다고…….”

리아브릭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의문의 독에 중독된 베로니카 공녀가 깨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죽으면 정말 큰일이었다. 급한 불을 끄고자 엘레나를 데려와 그녀 행세를 시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역에 불과했다.

베로니카가 죽으면 프란체 대공의 대가 끊기거니와, 만약 일이 잘못되면 수백 년간 이어온 프리드리히 대공의 성세가 끝을 고할 수도 있었다. 그뿐이랴. 백년조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독립해서 신흥 귀족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선 바스타슈 가문도 약해진 대공가를 물어뜯고자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대공 전하께서는?”

“안가에서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피마저 차갑지 않나 의심이 들 정도로 냉혈한인 프란체 대공이지만 유일한 혈육인 베로니카 공녀만큼은 끔찍이 여겼다.

“해독제가 필요해요. 어떻게든.”

리아브릭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독이라니. 황실 위에 대공가란 말이 나오는 프리드리히 가문의 하나뿐인 공녀가 한낱 독에 중독이 되었다는 사실도 웃겼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공가의 권력으로도 해독제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어이가 없었다.

“무려 이 년이에요. 대륙을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해독제가 없다면, 정말 해독제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요.”

“자작님, 어찌 그런 말씀을!”

리아브릭의 불경한 발언에 로렌츠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가에 충성하는 가신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리아브릭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해독이 어렵다면 정말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몰라요.”

리아브릭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나름의 결론을 내려서였다.

“이독제독.”

독을 없애는 데 다른 독을 쓴다. 명의라 일컫는 소수의 의사가 내놓은 유일한 해독 방법이었다. 자칫 베로니카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위험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온갖 치료법을 동원해 독이 퍼지는 걸 막는 것도 한계였다. 더 손 놓고 있다가는 베로니카의 죽음을 방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렌츠 경, 안가로 가죠. 지금 당장.”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 * *

엘레나는 강의를 듣고 기숙사를 오가며 학생의 본분을 다했다. 때때로 중앙 도서관에 들러 서적을 빌리거나 자습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특별한 일이라곤 엘레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여학생들이 용기를 내서 말을 붙인 게 다다. 그마저도 엘레나가 선을 딱 그으며 어울리길 원치 않으니 아쉬워했다.

개중 몇몇 간이 부은 남학생이 이성적인 호감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엘레나의 냉랭한 태도에 지레 주눅이 들어 돌아갔다. 은연중에 엘레나의 몸에서 풍기는 황비 시절의 자태와 권위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시일이 지나자 주변을 맴돌던 재학생들은 엘레나와 가까워지길 포기했다.

“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하지? 꼭 다른 사람 같잖아.”

“그러니까. 악마보다 더 악마 같던 여자가 저리 얌전해지냐.”

“악마라니! 너 말조심해. 그러다가 혀 뽑혀.”

“우리끼린데 뭐 어때? 네가 고자질할 거야?”

이 년 전 학술원에 재학 중이던 베로니카 공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여학생들이 숙덕거렸다. 주기적으로 동급 여학생들을 모아놓고 훈계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영애를 골라 마녀사냥 하듯이 괴롭히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였다.

소문에 건강이 좋지 않아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던데. 그래서 사람이 변한 게 아니냐는 말들이 학술원 내에 떠돌 정도였다. 어쨌든 지금의 베로니카는 이 년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남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지도 않았으며 파벌을 모으지도 않았다. 학술원의 인맥과 파벌이 곧 사교계와 이어지는 만큼 공을 들이는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장녀 아벨라와 분명히 차별되는 행보였다. 

한껏 주목받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입에 오르내리던 베로니카란 이름이 잠잠해질 무렵, 숨죽이고 있던 엘레나가 움직였다.

“남을 속이려고 들지 말고, 남으로 하여금 스스로 속게끔 하라 했지.”

엘레나는 옛 격언을 읊으며 홍차를 마셨다. 젊은 청춘남녀들이 모여 있다 보니 학술원에는 가십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자극적인 가십의 홍수 속에서 베로니카에 대한 관심이 예전과 같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메이, 잠시 들어오렴.”

엘레나가 조용히 메이를 침실로 들였다.

“네가 해줄 일이 있구나.”

엘레나는 서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메이가 받아서 보자 생전 처음 보는 이름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카밀 데 하네.

란돌 레이브.

첸토니오.

릴 푸치니.

크리스티나 마리누스.

?

어림잡아 세어보아도 무려 서른 명에 육박했다.

“네가 길드에 좀 다녀와야겠구나.”

“길드요?”

“그래. 여기 적힌 자들이 지금 어찌 사는지, 무얼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또 뭐가 부족하고 필요한 게 뭔지. 가족 관계는 어떤지까지. 사소한 것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다 알아 오렴.”

길드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경호, 감시, 비행, 조사, 호송, 납치 등의 일을 대신 수행해 주는 사설 기관이다.

합법적인 의뢰뿐만 아니라 액수만 부합하면 불법적인 의뢰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절대 행적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해 줬으면 해. 너라면 그래 줄 수 있지?”

“……알겠습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메이는 엘레나의 말속에서 막연한 신뢰를 느꼈다.

마치 메이라면 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깔려 있달까.

“길드 쪽에는 최대한 빨리 결과물을 받고 싶다고 전해. 의뢰 비용 따위는 얼마가 되든 지불할 테니까.”

대역이긴 하나 명색이 베로니카 공녀의 신분이다. 한정적이지만 길드의 의뢰 비용 정도는 충분히 충당하고도 남을 여력이 있었다.

메이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간 김에 카스톨 상회에 이 서신도 보내고 오렴.”

“이번에도 발신인을 밝히지 않고요?”

“그럼. 너와 나를 제외한 세상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거란다.”

메이를 내보낸 엘레나가 어느새 식어버린 홍차를 마저 마시고는 일어났다. 엘레나는 흐트러진 교복의 옷매무시를 정돈하고는 방을 나섰다.

“앤, 기숙사에만 박혀 있으니 영 집중이 되지 않는구나. 도서관에 다녀올 테니 마저 정리해 두렴.”

“네, 아가씨. 조심히 다녀오세요.”

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엘레나를 배웅했다. 중앙 도서관에 도착한 엘레나는 곧장 기록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간 열람실을 자주 들락날락했기 때문인지 엘레나를 보고도 대다수 학생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기록실로 온 엘레나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곤 책장 안쪽에 숨겨뒀던 변장 용품들을 꺼내 왔다. 익숙지 않은 화장법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하는 거여서인지 의외로 속도가 붙었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던 부분들을 보완하자 좀 더 자연스러운 연출이 가능했다.

“명찰을 바꿔볼까?”

엘레나는 교복에 붙어 있던 베로니카라는 이름표를 떼고 루시아라고 적힌 명찰을 붙였다. 전야제는 드레스 차림이라 문제가 없었지만 교복을 입는 동안은 꼭 명찰을 착용해야 하는 게 학규였다.

변장을 끝내고 기록실을 나선 엘레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단발머리에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그녀의 이름은 고고학부 신입생 루시아였다.

중앙 도서관을 나선 엘레나는 기숙사 정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엘레나는 학부 건물이 아닌 동떨어져 있는 서측 별관으로 향했다.

학술원은 신분을 떠나서 재능 있는 재학생들에게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다. 별관에 예술학부 학생들이 작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개인마다 화실과 작업실까지 내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라파엘의 화실이 별관 지하 복도 맨 끝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았다. 워낙 구석이다 보니 인적도 드물고 눅눅한 냄새가 났다.

“취향 참 고약하다니까.”

이런 폐쇄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고정관념을 타파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는지 참 신비할 따름이다.

“계세요?”

비스듬히 열려 있는 나무 문을 마저 열며 엘레나가 인기척을 냈다. 슬며시 들여다본 작업실은 복도와 달리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방 안은 눅눅하다 못해 스산했다. 널브러진 화구는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며 책장에는 문학, 철학, 과학 등 일관성 없는 서책들이 뒤섞여 꽂혀 있었다. 또 벽면에 걸린 신체 해부도는 괴기함을 더했다.

“아무도 없어요?”

재차 엘레나가 묻는데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방해되니까 꺼지…… 다, 당신은 그때 전야제?”

책상을 침대 삼아 누워 있다가 일어난 라파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엘레나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또 뵙네요. 고고학부 신입생 루시아라고 합니다, 선배님.”

“당황스럽군요. 여길 어떻게 아시고. 아니, 일단 인사 먼저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주면 좋고요.”

싱긋 웃는 엘레나를 보며 잠이 확 달아난 라파엘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꽤 시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야제의 일이 지금까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후배인데.”

“아니요. 제가 평민이다 보니, 학술원 내에선 존대가 더 편하더라고요.”

엘레나는 저 말이 뭔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학술원은 학년의 선후배 서열보다, 신분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평민 출신이 선배라는 이유로 귀족 출신 후배를 나무랄 순 없으니까. 그런 까닭에 평민 출신들은 학년에 상관없이 대부분 존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각 좀 해보셨어요? 제가 했던 얘기들에 대해서.”

“…….”

라파엘은 입을 다물었다. 고집스러운 침묵이 이어졌지만 엘레나는 그가 대답하기를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끝끝내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여길 너무 일찍 왔나 보네요. 좀 더 고민해 보세요, 선배님.”

엘레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한시라도 빨리 라파엘을 포섭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었다.

‘기다려 줄게요. 스스로 껍질을 부수고 나올 때까지.’

엘레나가 처음 만났을 당시의 라파엘은 시대의 거장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라파엘은 미완성이었다. 그림을 대하는 진정성이 부족했다.

“실수…… 인정합니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엘레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전야제가 끝나고 지금까지 고민했습니다. 나는 뭘 그리고 있었던 건지, 뭘 그리고 싶은 건지.”

엘레나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답은 찾으셨어요?”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답답하고 미치겠고 막 그러네요.”

깊게 잠긴 라파엘의 눈동자에서 그간의 고충이 엿보였다. 돌아보면, 이 고민의 시작은 전야제 훨씬 이전부터였다. 예술학부에 진학하면서 고민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다. 닫혀 있던 귀가 열리며 접하는 게 많아지자 끊임없이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내가 옳게 그리고 있는 걸까? 왜 남의 입맛에 맞게 그리려고 했지? 그림에 난 무얼 담고 싶은 거지?’

라파엘은 불신에 빠졌고 지금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 의문을 던져준 엘레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염치없지만,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라파엘이 지그시 자신을 보고 있는 엘레나와 눈을 맞췄다. 안경알 너머의 깊은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제 그림을…… 비록 한 점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미완성뿐이지만, 그것들을 봐줄 수 있을까요?”

정중하다 못해 간절함이 느껴지는 부탁. 말없이 라파엘을 보고 있던 엘레나의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 * *

3국 연합은 대륙 북부에 위치한 국가다. 다이안 왕국. 크로벤 왕국. 벨칸 왕국. 세 국가가 대륙의 패권을 쥔 제국과 왕국에 대항하고자 문물을 개방하고 화폐를 통일했다. 각각 철과 목재, 밀이라는 특산물을 보유한 세 국가는 긴밀하게 협력하며 국력을 향상시키는 건 물론이거니와 척박한 북부 지역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이기 위해 상인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장려했다.

그 결과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연합 전선을 구축해 백 년이 넘게 존속한 3국 연합은 지금에 이르러 대륙의 확고한 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런 3국 연합의 장려 정책 덕에 카스톨 상회는 벨칸 왕국의 수도를 근거지로 하여 대륙 십 대 상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어떤가? 설마 그 병은 아니겠지?”

의사는 침대에 누워 고열에 시달리는 루시아를 꼼꼼하게 살폈다. 학술원에 입학한다며 들떠 있던 생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가엾기만 했다.

“……송구하오나 북부 열병이 맞는 듯합니다.”

의사의 진단에 다리가 풀렸는지 에밀리오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열병에 시달리는 루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

“세상에 불치병 따윈 없다. 이 아비가 어떻게든 고쳐주마.”

딸의 머리맡에 앉아 다짐한 그날 이후, 에밀리오는 카스톨 상회의 자금력과 인맥, 영향력을 총동원해 의사들을 불러들여 치료약을 찾고자 발악했다. 그러기를 보름이 지났을 무렵, 에밀리오는 실의에 빠졌다. 국가도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돈으로도 할 수 없다는 게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는데 딸마저 보내고 나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정신이 온통 루시아에게 쏠려 있다 보니 상단 일에 소홀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집무실에는 상단주의 직권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 서류가 수북하게 쌓였다. 상단의 업무도 마비됐다. 그런 때에 긴급으로 분류된 한 통의 서신이 그의 앞으로 도착했다.

발신인 미상. 평소라면 무시해 버렸을 그 서신을 읽게 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서신을 읽은 에밀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당장 라무네지아꽃을 구해! 값을 부르는 대로 줘도 되니까, 한시라도 빨리!”

* * *

루시아로 변장한 엘레나는 주기적으로 라파엘의 화실을 찾았다. 그곳에서 미완성인 그림을 걸어두고 품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너진 신앙’이라는 제 초기작이에요.”

‘무너진 신앙’은 미완성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밭에 앉은 농부와 멀찌감치에 그려진 성당이 은유적으로 농부가 느끼는 절망을 표현했다.

“어떻게 보셨는지?”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엘레나의 생각을 물었다.

“여기요.”

엘레나가 그림 속 남루한 성당을 지목했다.

“원근법이 눈에 띄어요.”

“……!”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지만 라파엘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가장 공들여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을 엘레나가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공기원근법이었지, 아마?’

라파엘의 그림이 시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자 많은 화가가 그의 기법을 분석하고 규정했다. 공기원근법은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공기의 작용을 간과하셔서 그래요.”

“공기의 작용?”

“물체가 멀어짐에 따라 빛깔이 푸름을 더하며 채도가 감소하죠. 물체 윤곽이 희미해지는 현상에 바탕을 둬야 하는데 그걸 놓쳤어요.”

비록 그림을 그리는 소질은 부족했지만 엘레나의 이론 수준은 높았다.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자 여성에게 그림을 보는 안목과 식견이 요구되면서 꼭 갖춰야 할 소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

엘레나의 감평에 좋든 싫든 반응이라도 할 만하건만 라파엘은 침묵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엘레나도 신경이 쓰였다.

‘내가 너무 추상적으로 얘기했나?’

안타깝지만 엘레나에게는 이게 최선의 도움이었다. 이론에는 빠삭했지만 직접 예시까지 들어주며 설명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했다.

“죄송한데 혼자 있을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네? 그래요.”

뭔가 느낀 바가 있는지 라파엘은 이젤 앞에 앉아 고뇌에 잠겼다. 잠시 멀뚱멀뚱 서 있던 엘레나는 방해가 될까 조용히 화실을 빠져나왔다.

“쫓겨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닷새 뒤. 라파엘에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줬다고 여긴 엘레나가 다시 화실을 찾았다. 나무 문을 여는데 안쪽에서 라파엘이 뛰쳐나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던지 엘레나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깜짝이야. 저 기다렸어요?”

“목 빠지게요.”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젤에 걸린 한 폭의 그림을 보여줬다.

“루시아 양의 조언을 듣고 그려봤는데 좀 나아졌나요?”

“……!”

그림을 본 엘레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두운 숲에 오두막 한 채가 그려져 있었는데 앞쪽 숲과 뒤쪽 오두막의 원근법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었다.

“작품명은 ‘검은 집’. 그때 지적했던 공기원근법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애썼어요. 좀 나아졌나요?”

“……이건 좀 나아진 수준이 아니잖아요.”

“역시. 윤곽의 선을 놓친 걸 지적하신 거군요. 좀 더 채색에 신경을 쓸 걸 그랬네요.”

라파엘은 실망은커녕 미흡했던 점을 상기하고는 자기반성을 했다.

“아니, 제 말은요.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원근법을 완벽히 다루는 수준이라고요.”

엘레나는 거의 항변하다시피 했다.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라파엘이 고안한 기법이긴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습득해 버릴 줄은 몰랐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의 천재성은 엘레나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라파엘은 공기원근법을 시작으로 정체 중이던 자신의 기법들을 완성해 내기 시작했다.

“여기요, 빛과 그림자를 활용해 명암을 살린다면 좀 더 입체감이 생길 수 있어요.”

엘레나는 제 능력이 닿는 대로 부족한 부분을 가감 없이 지적했다. 미래에 규정될 미술 이론을 토대로 보완법을 일러주었다. 그때마다 라파엘은 깊은 고뇌에 잠겼고, 엘레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화실을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찾아갔다.

“전에 조언해 주신대로 다각도로 입체감을 표현하려고 애썼는데 괜찮나요?”

“…….”

그의 천재성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불과 며칠 만에 명암의 표현 방식을 완벽하게 정립한 것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미술계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라파엘의 천재성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술적인 완성도가 급격히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라파엘의 그림에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빠져 있었다. 분명히 흠잡을 게 없을 만큼 잘 그린 그림이었다. 농부의 고단함, 절망하는 여자의 심리, 자연의 고독 등 자기가 느낀 바를 표현하려고 애쓴 것도 보였다.

‘영혼이 느껴지지 않아.’

껍데기는 있으나 알맹이가 없다. 작가적 의도는 있으나, 표현의 깊이가 얕았다. 평론가들이 제 잘난 맛에 떠들던 그 말이 엘레나에게 정말 와닿았다. 아직 십 대 후반의 청년이기 때문일까? 종교와 도덕, 감정, 자연의 위대함, 문화적 관점 등을 고려하여 반영하기에는 아직 내면의 깊이가 부족한 기분이다.

“여전히 그림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나요?”

“네, 죄송해요.”

엘레나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라파엘도 수긍한다는 듯 끄덕였다.

“저야말로 면목이 없네요. 시간을 쪼개서 지도해 주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정작 중요한 그림의 혼을 담지 못하고 있음에도 라파엘은 담담했다. 아니, 애써 그렇게 보이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엘레나는 그가 얼마나 답답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성장에는 진통이 늘 따르는 법이에요.”

엘레나의 위로에 라파엘이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이럴 때마다 참 난처하네요. 분명 나보다 어린데 성숙한 어른처럼 느껴지니.”

“그거 겉늙어 보인다는 말이죠, 선배님?”

엘레나는 정말 학술원에 입학한 신입생처럼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엘레나에게 있어 라파엘은 유일하게 전생에서 악감정을 가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또 라파엘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면 편안함을 느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만큼은 긴장을 풀고 잠시나마 심신의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제가 선배인 게 이렇게 어색하긴 또 처음이네요. 그래서 말을 못 놓나 봅니다.”

“변명이 너무 거창하세요. 저 불편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잠시 농담을 주고받으며 고뇌를 내려놓을 때였다.

또각또각.

문 너머 복도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잘 들리지 않던 작은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뚝 멎었다.

“라파엘, 안에 있어?”

화실 밖에서 들려온 가녀린 여학생의 목소리에 놀란 엘레나가 누구냐는 듯 라파엘을 쳐다봤다.

“제 친구예요. 쟤는 또 기별 없이 왔네. 어. 들어와.”

라파엘이 목소리를 키워 인기척을 내자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 비집고 들어왔다.

“정리 좀 하고 지내라니까…… 어? 손님이 와 있네?”

라파엘의 친구면 선배다.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날 때였다.

“……!”

눈앞의 여자를 마주한 순간 엘레나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놀람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울 만큼 충격적인 재회였다.

“어. 이쪽은 루시아 양이라고. 내 조언자 겸 멘토.”

“멘토? 교수한테도 들이받는 네가 그렇게 얘기할 정도면 엄청 대단한 분인가 보네?”

여학생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엘레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세실리아예요.”

엘레나는 그녀의 생기 넘치는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저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야. 왜…….’

갖은 핍박과 시기에도 선의를 잃지 않던 고고한 여인. 누구보다 국모의 자리가 잘 어울리던 연적.

‘왜 황후 당신이 여기 있는 건데.’

악연이라면 악연. 그 매듭과 고리가 이렇게 이어질 거라고는 엘레나는 꿈에서도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이런 우연을 가장한 재회일 줄은 더더욱.

“이 손 계속 안 잡아주면 저 좀 민망한데.”

“아, 죄송해요. 전 루시아예요.”

세릴리아가 난처하게 웃자 엘레나가 악수했다.

“신입생이에요?”

“네.”

“신입생이라니.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네요. 나도 루시아 양처럼 풋풋할 때가 있었는데. 부러워요.”

세실리아는 특유의 생기 넘치는 밝은 에너지를 토대로 자칫 어색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를 유연하게 리드했다.

‘늘 그랬어. 귀족임에도 허물없는 그 태도가 당신 곁에 사람이 머물게 했지. 심지어 폐하마저도.’

지나간 일을 떠올리자 엘레나는 가슴이 아렸다. 미치도록 갈구했던 그의 애정을 온전히 가져간 눈앞의 세실리아가 여전히 미웠다. 부질없는 일이었다며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불쑥 이는 그때의 감정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욕심이 과해, 세실리아.”

“피. 우리 사랑스러운 신입생께서는 왜 저런 진상이랑 어울리고 있으셨어요? 쟤 완전 괴짜인데.”

“다 들려.”

세실리아는 픽 웃었다.

“들으라고 한 소리야. 근데 진짜 무슨 사이?”

“말했잖아. 내 조언자 겸 멘토라고.”

“정말?”

휙 고개를 돌려 엘레나를 보는 세실리아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어. 안목, 식견, 기법의 이론까지 많이 지도받고 있어.”

“와! 너 같은 천재를 가르칠 정도면 더 뛰어난 천재란 얘기잖아? 대단하다.”

세실리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거짓 없이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건 그녀의 천성이었다.

‘나는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착한 사람.’

저런 천성 때문일지 모르겠으나 세실리아는 사교계에서 도태됐다. 허물과 격 없이 사람을 대하는 천성이 사교계의 영애들에게는 남자를 홀리려는 여우 짓으로 폄하당했다.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며 사교계를 주름잡던 엘레나와는 반대되는 행보였다.

“두 분은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세요?”

“우리요?”

세실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라파엘을 보며 옅게 웃었다.

“제가 첫눈에 반했어요.”

“……반했다고요?”

“네. 아, 혹시 오해한 거 아니죠? 제가 반한 건 라파엘의 그림이었어요. 너무 잘 그려서. 그래서 제가 일방적으로 친구 하자고 졸랐거든요.”

세실리아는 귀족이다. 라파엘은 몰락 귀족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신분은 평민이었다. 신분 차이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세실리아는 격 없이 친구로서 노크했고 라파엘도 그에 응했다.

‘잊고 있었어. 졸업 후에 라파엘이 빌렘 백작가의 후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걸.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인연이 있었을 줄이야.’

빌렘 백작가는 세실리아의 가문이다. 비록 성세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전통과 뼈대 있는 제국의 명문이었다. 아마 이때의 인연이 도화선이 되어 라파엘이 백작가의 후원을 받게 된 듯싶다.

엘레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세실리아와 라파엘 사이에는 끈끈한 관계와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역시 엘레나에게는 악재였다. 지난 삶처럼 그녀가 후원자가 돼서는 안 되니까.

엘레나의 복수를 위해 라파엘은 필수적인 존재였다. 시대를 초월할 그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라파엘이 빌렘 백작가가 아니라 엘레나의 후원을 받도록 만들어야 한다.

“너 아침 안 먹었지?”

“응.”

“그럴 줄 알고 샌드위치 사 왔어. 넉넉하게 사 왔으니까 루시아 양도 같이 먹어요.”

세실리아는 화실에 박혀 있느라 끼니를 자주 거르는 라파엘의 생활 습관마저 꿰고 있었다. 엘레나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두 사람이 가깝다는 얘기다.

“어서 앉아요.”

“사양 말고 같이 먹어요. 세실리아가 음식으로 속 좁게 굴지 않거든요.”

“너 또 칭찬인지 비난인지 구분 안 되게 말할래?”

“…….”

엘레나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끼기 힘든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내색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입생 특유의 쾌활하고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샌드위치를 집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잘 얻어먹겠습니다, 선배님.”

그날, 엘레나는 온종일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

* * *

세상을 부리는 건 돈이라는 말이 있다. 길드에 웃돈을 얹어주자 그들은 열정적으로 정보를 취합했다. 리스트에 적힌 사람들의 인간관계까지 추가로 알아봐 주는 고생도 자처했다. 엘레나는 기록실 책상에 놓인 두툼한 신상명세서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정보의 질이 좋구나.”

“길드 쪽에서 특별히 신경 썼다면서 앞으로도 쭉 거래를 이어가고 싶단 말을 했어요.”

길드 입장에서 볼 때 뒷조사는 꽤 수지가 맞는 의뢰였다. 불법적인 일이다 보니 의뢰 비용도 높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경호나 호위, 토벌과 비교해 인적 손실이 적었다.

“내 신분은 당연히 숨겼을 테고?”

“이번 의뢰로 공녀 전하께서 언급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처럼 엘레나는 모든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맥락에서 대공가에 잠입해 몇 년간 타인의 눈을 속인 메이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적임자였다.

“그럼 한번 봐볼까? 기록실 문 잠그렴.”

잠금장치를 걸자 엘레나는 두툼하게 쌓인 신상명세서로 시선을 옮겼다. 한 글자도 허투루 보지 않고 빠짐없이 탐독했다. 직접 움직일 수 없는 엘레나로서는 여기 적힌 활자에 의지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란돌. 르네상스 시대가 낳은 희대의 건축가.’

보석 세공과 조각으로 알려진 예술가지만 몇 년 뒤 건축가로 변신해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산타마리아 성당을 짓는다. 복잡하고 장식적인 건축이 아니라 수학적 비례와 조화를 중시하며 명료하면서도 질서적 조화를 건축물에 담은 최초의 건축가이기도 하다.

‘건축가로는 이름을 떨쳤지만 그건 몇 년 뒤의 일. 지금은 조각을 하며 먹고사는 가난한 가장일 뿐이구나.’

신상명세서에 적힌 바로는 어렸을 적 소꿉친구였던 아내와 사고를 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고 한다. 자식까지 있는 마당에 생계를 내팽개칠 수도 없으니 조각을 하며 근근이 먹고살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희대의 건축가. 엘레나는 그에게 손을 뻗을 요량이었다.

‘그에게 가족과 건축가라는 꿈,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해주자.’

신상명세서를 기반으로 현재 란돌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메모한 뒤 넘겼다. 다음은 크리스티나 마무리스였다.

‘혁명적 디자이너.’

제국의 의상은 그녀의 등장 전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역사적 획을 그은 디자이너다. 실크라는 한정적인 원단을 벗어나서 새로운 염료 기술을 도입해 새틴, 타프라, 쉬폰 등의 원단을 수입, 생산해 도입했다. 또한 몸에 맞지 않게 크고 부하게 입는 고전적 귀족 의상을 과감히 버리고 밀착된 의상으로 인간이 타고난 육체미를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엘레나 역시 그녀가 디자인한 머메이드 드레스를 즐겨 입었을 정도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사채 빚이라…… 사업 실패의 후유증이 꽤 컸나 보네.’

너무 앞서가면 배척받는 법이다. 그녀는 성공을 자신하며 빚을 내서 숍을 차렸지만, 대중적인 소재와 스타일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귀족들에게 외면당하고 망했다. 장래의 남편감을 만나 빚을 탕감한 뒤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다시 도전하지 않았다면 혁명적 디자이너 크리스티나도 없었을 것이다.

‘빚을 갚아주면 되겠어.’

엘레나는 신상명세서에 적힌 사람을 단 한 명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이들 모두 각 분야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취급을 받는다고? 그럴 수밖에. 과학은 생소한 학문이니까.’

카밀은 천문에 뜻을 두었다가 별과 달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욕심에 망원경을 발명한다. 빛의 굴절을 이용한 망원경은 과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 외에도 현미경을 개발한다.

‘허, 이런 아들을 두고 성직자가 되라고 하다니. 부모의 설득이 필요하겠어.’

천문이나 과학보단 신앙이 더 가까운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첸토니오는 귀를 먹지 않게 해야 해.’

고작 열여섯 살의 나이로 교향곡 ‘천상의 아리아’를 작곡한 이 천재 음악가는 이른 나이인 스무 살에 청력을 상실한다. 고질병을 방치하다가 그만 귀가 먹고 만 것이다. 엘레나는 첸토니오의 귀를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이 외에도 의사, 화가, 기술자, 철학자 등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의 거장에게 필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체크했다. 엘레나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거장들에게 목을 매는 이유는 저들의 마음을 사려는 욕심에서였다.

‘사람이 곧 보배야.’

단순히 저들을 후원하여 완성한 예술품을 거래하는 건 하책이다. 투자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겠지만 그게 다다. 엘레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문화적 파급력!

엘레나는 말 그대로 시대를 주도하고, 나아가 지배하고 싶었다.

“메이, 받으렴.”

엘레나가 건넨 양피지에는 일목요연하게 인물별로 당장 필요한 것들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거기 적힌 대로 도와주도록 해.”

“이 사람들을 다요?”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먹고사는 게 팍팍하거나, 빚에 시달리거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네가 그들에게 필요한 걸 챙겨 줘. 돈이 궁하면 주고, 몸이 아프면 의사를 데려와 주고. 그래 줄 수 있지?”

메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길드의 의뢰야 맡기면 그만이었다지만 지금 엘레나의 말은 메이가 처한 상황에 맞게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길 바라고 있었다.

“왜? 너라면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데.”

엘레나의 미소에는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도대체 그녀에게서 뭘 봤기에 믿고 맡기는 건지, 메이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네, 해볼게요.”

“그래. 다 숙지하면 얘기하렴. 하루 이틀에 처리할 사안들도 아니니, 앤을 속일 만한 알리바이도 미리 짜둬야겠구나.”

“알리바이요?”

메이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엘레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꺅!”

기숙사 이 층 침실에서 엘레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일 층에서 빨래를 정리하던 앤과 경비를 서고 있던 휴렐바드가 사색이 되어서 이 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거의 동시에 이 층으로 올라온 앤과 휴렐바드가 마주한 건 시뻘겋게 부은 손목을 부여잡고는 인상을 쓰고 있는 엘레나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그 앞에는 메이가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사죄를 하고 있었다. 카펫 위에 쏟아진 찻잔. 쏟아진 찻물에서 피어오르는 김. 엘레나가 수건으로 손목을 감싸는 걸로 보아 메이가 실수로 뜨거운 물을 쏟은 것 같았다.

“죄송? 죄송하면 다야?”

“정말 죄송해요. 한 번만 용서를…….”

메이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짝. 엘레나의 손등이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리며 메이의 뺨을 올려친 것이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고개가 휙 돌아간 메이가 이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울먹거렸다.

“아, 아가씨.”

앤과 휴렐바드는 감히 나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앤은 그녀의 분노가 얼마나 두려운지 몸소 체험해 봤기에 숨을 죽였고, 휴렐바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라고!”

“아가씨, 한 번만 용서를…….”

“나가란 내 말이 안 들려?! 나가라고!”

엘레나가 잡아먹을 듯 사납게 쏘아붙이자 메이가 울먹이며 침실을 나섰다.

“경고하는데, 내 눈에 띄지 마.”

흠칫.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에 메이가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풀이 죽은 얼굴로 일 층으로 내려가더니 얼마 있지 않아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뭘 쳐다보고 있어? 찬물에 수건 적셔 와!”

“네? 네, 아가씨!”

이 층 침실 창문을 통해 메이가 나가는 걸 멍하니 보고 있던 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경도 그만 내려가 보세요.”

휴렐바드는 기사인 자신이 나설 상황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지 묵례를 하고 물러섰다.

“여기 있어요!”

엘레나는 앤이 가져온 차가운 수건으로 손목을 감쌌다. 찻물이 워낙 뜨거워서 아직도 후끈거렸다. 앤은 톡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 같은 엘레나에게 트집이라도 잡힐까 연고와 붕대까지 대령하며 눈 밖에 나지 않게 노력했다.

“마담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찻물을 쏟는 실수를 할 수가 있니?”

“그, 그러게요.”

“네게 시킬 걸 그랬어. 너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엘레나의 칭찬에 앤이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표정 관리를 하고 있지만 메이가 쫓겨난 모습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이러다 강의에 늦겠어.”

“어서 다녀오세요, 아가씨.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네가 내 시중을 들고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손목에 연고를 바른 엘레나가 기숙사를 나섰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앤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찻물에 젖은 카펫을 낑낑거리며 갖고 내려와 말리는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엘레나는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강의를 핑계 대고 나왔지만 오늘은 공강(空講)이었다. 교수가 학회 발표로 부재해서 강의도 뒤로 밀린 것이다.

“메이에게 미안하네. 연기라곤 하지만 너무 세게 때리고 말았어.”

좀 전의 사건은 앤을 속이기 위해 엘레나와 메이가 짜고 친 연극이었다. 최대한 현실감 있게 연기하고자 엘레나는 진심으로 뺨을 때렸다. 그 덕에 앤을 속일 수 있었지만 내심 미안했다.

엘레나는 기록실로 이동해 루시아로 변장했다. 화장법에 익숙해지니 변장에 걸리는 시간도 많이 단축됐다.

“세실리아, 당신을…… 난 어떻게 대해야 할까?”

거울을 보며 엘레나는 툭 의문을 던졌다. 한때 연적으로 그녀를 증오했다. 그러나 회귀를 겪으며 격렬했던 지난 감정이 희석되었다. 애초에 그녀와 황태자 시안의 관계에 끼어든 불청객은 다름 아닌 엘레나였으니까.

그래, 엘레나는 세실리아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시안이 황제에 오르고 일 년이 지났을 무렵, 황비였던 엘레나를 황후에 올리고자 리아브릭과 프란체 대공이 세실리아를 독살했다.

비록 엘레나가 직접적인 개입을 한 건 아니지만, 그때 당시 황후 자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터라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나, 나나 그 끔찍한 미래를 반복할 필요는 없어.”

엘레나는 잘못되고 어긋난 악연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결심하며 기록실을 나섰다. 아직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라파엘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세실리아와 부딪치는 게 부담스러워 라파엘을 피한다면 엘레나의 복수에 큰 차질이 가고 만다.

엘레나는 학술원 서측 별관으로 걸음을 뗐다. 항상 느끼지만 이곳을 올 때마다 생기가 느껴졌다. 격식과 가식이 넘쳐 나는 귀족들과 달리 평민이 주를 이루는 이곳은 선의의 경쟁 속에 진정성 있는 교류와 교감이 오가는 게 보였다. 그게 더 정감이 가기도 했고.

“루시아 양!”

이젠 베로니카 공녀보다 더 자연스러워진 호칭에 엘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정말이지 지독한 우연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필 오늘, 이 시간에, 세실리아와 마주칠 리가 없다.

“이렇게 또 보네요? 라파엘 보러 가던 중이었어요?”

“네, 마침 공강이라서 겸사겸사요. 선배님도요?”

“뭐…… 라파엘을 보러 가는 건 맞긴 한데, 이유가 다르네요. 전 누군가를 피해 도망가는 거거든요.”

장난스럽게 웃는 세실리아를 보며 엘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해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제게는 참 어려운 사람.”

아리송한 말을 남긴 세실리아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어서 가요, 우리. 오늘도 제가 쿠키를 잔뜩 싸 가지고 왔어요.”

“이 후배가 쿠키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다정하게 별관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뚝. 참새처럼 재잘재잘 떠들던 세실리아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러세요?”

엘레나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엘레나는 열 걸음 앞에 흑발의 사내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오뚝한 코에 빨려 들어갈 듯한 눈동자. 새카만 머리를 지닌 사내에겐 교복으로 감출 수 없는 기품과 태생적인 고귀함이 흘렀다. 그저 말없이 서 있을 뿐인데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는 한번 시선을 두면 도저히 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황태자 전하.”

세실리아의 작은 입술을 통해 사내의 정체가 밝혀졌다.

클라디오스 데 시안. 대륙의 패권을 쥔 베실리아 제국의 황태자가 바로 눈앞의 이 남자였다.

“그대는 여전히 날 피하는군.”

그와 마주하자마자 빳빳하게 굳어버린 엘레나의 귀에 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음성은 고막을 타고 들어와 심장을 진동시켰다. 온 세상에 그와 엘레나만이 남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간 잘 묻어두었다고 여겼던 감정들이 시안을 보자마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를 향한 원망과 죄책감, 후회로 물든 복합적인 감정들이 치밀어 이성과 감정의 잣대를 깨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피하는 걸 부정조차 하지 않고.”

“전하께서는 늘 저를 곤란하게 만드시니까요.”

분명 대화를 주고받는 건 세실리아와 시안이었지만, 엘레나의 귀에는 시안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그가 엘레나에게 남긴 상흔이 덧나듯, 상처를 줬던 말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단 한순간도 그대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대는 나의 실수이며, 나의 불명예고, 또한 나의 불행이다.”

심장을 후벼 파던 그의 아픈 말들이 가시가 되어 다시금 엘레나를 마구 찔렀다. 그 통증에 절로 헛숨이 들이켜지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엘레나에게 있어 시안은…… 아픔이고, 상처였으며,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씁쓸한 흉터였다.

“그 역시 사과하도록 하지. 그러니 시간을 내줬으면 하는군.”

“……전하께서는 제게 또 강요하시는군요. 어? 루시아 양?”

씁쓸한 미소를 짓던 세실리아가 옆에 서 있던 엘레나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예요?”

“…….”

엘레나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혼미해지다시피 한 정신을 놓치지 않고 가까스로 잡고 있었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어지러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이대로 더 있다간 좋지 못할 꼴을 보일 것 같았다. 마음은 돌아가 쉬려 했지만 몸이 따르질 않았다.

휘청.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러면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더는 두 발로 서 있을 재간이 없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듯 쓰러졌다.

“루시아 양!”

놀란 세실리아의 외침이 들렸다. 머리와 시야가 핑 돌았다. 정신적인 공황에 그만 몸이 버텨내질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새하얗게 변해 버린 시야의 초점이 점차 돌아왔다. 눈동자를 힘없이 깜빡거릴 때마다 쏟아지던 빛이 점차 형체를 갖춰갔다. 웬만한 영애보다 더 고운 피부 결이었다. 코도 높았다. 또 우수에 찬 눈동자는 쭉 보고 싶을 만큼 깊고, 꼭 칠흑처럼 까맸다.

“……!”

까맣다는 사실에 엘레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의 감각도 돌아오며 자신의 등과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것이 누군가의 팔임을 자각했다.

‘폐, 폐하.’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엘레나를 반사적으로 부축한 건 황태자 시안이었다.

“……놔주세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던 엘레나의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안의 눈빛과 부딪쳤다.

아, 저 무심한 눈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어떤 연고와 치료로도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아 지금까지 고통에 시달렸다.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조차. 이 통증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를 기억에서 한 올 한 올 지워 버리고 싶다.

“어서 놔달라고요.”

엘레나의 재촉에 시안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감추려고 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빛이 왜 저리도 애달프고 아파 보이는 건지.

“괜찮은 거예요? 의사한테 가야겠어요!”

세실리아는 걱정이 됐는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시안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일어선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쉬면 나을 거예요.”

“그러기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쉬고 싶어요.”

엘레나의 간절한 눈길에 세실리아는 더는 강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는 아직 온전치 못한 몸과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는 여느 때처럼 완벽한 예법을 보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황태자 전하의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

엘레나를 보는 시안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됐다. 의식을 놓고 쓰러질 만큼 몸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엘레나가 보인 예법과 동작은 황실의 표본으로 삼아도 무방할 만큼 고절했다. 황족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범적인 자태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제가 기숙사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뇨, 정말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가게 해주세요, 제발요.”

세실리아에게 양해 아닌 양해를 구한 엘레나가 뒤돌아섰다. 추태는 여기까지. 어금니를 악물고 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했다. 마지막으로 돌아서는 모습까지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그것은 엘레나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었다.

“안 되겠어요. 저대로 보내자니 마음이 안 놓여요.”

세실리아는 아슬아슬 걸어가는 엘레나를 보고는 참지 못하고 다시 쫓아가려고 했다.

“그녀가 걱정되나.”

“또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요!”

시안은 무심한 눈길로 멀어지는 엘레나를 보며 담담히 만류했다.

“그녀에게는 그대의 걱정보다…… 모른 척 보내주는 존중이 더 필요한 것 같군.”

“전하께서는 또 제가 모를 소리를 하네요.”

세실리아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답답해했다. 시안은 우두커니 서서 엘레나가 손톱보다 작아질 만큼 멀어질 때까지 지켜봤다.

도대체 저 영애는 누구였을까? 소탈해 보이는 성품임이 분명한데, 이질적이게도 어째서 황실 어른들에게서나 볼 법한 규율과 절도가 묻어나는 걸까?

연신 의문이 들었지만 시안은 사소한 의문에 얽매일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잘 오지 않던 학술원 서측까지 직접 걸음을 옮긴 용무가 더 시급했다.

“못다 한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 세실리아.”

그 시각. 언제 쓰러질지도 모르는 몸을 이끌고 겨우 걸어가는 엘레나를 멀찌감치 감시하듯 훔쳐보는 여학생이 있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미첼. 한때, 베로니카 공녀의 파벌에 속해 있던 그녀는 지금 노선을 갈아타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장녀 아벨라를 따르고 있었다.

“뭐야, 또 파리가 꼬였잖아?”

그녀는 눈엣가시 같은 세실리아를 쫓아왔다가 엘레나를 목격했다. 아파서 쓰러진 척 굴었지만 시안의 관심을 끌려는 뻔한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른 아벨라 영애께 알려드려야지.”

미첼은 멀어지는 엘레나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과연 아벨라가 황태자 시안에게 꼬리를 친 저년을 어떻게 응징할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 * *

“…….”

겨우 자리를 벗어난 엘레나가 가로등에 의지해 기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지금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병자 같았다. 엘레나가 광장에 마련된 벤치로 힘겹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여전히 정신이 혼미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생이 오가는 광장이건만 이 순간 엘레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쉬고…….”

맥이 탁 풀리며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몸도 정신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처럼 그녀에게 휴식을 강요했다.

엘레나는 벤치에 앉은 채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머리는 깨어 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 그녀를 괴롭혔다.

“더는 폐하께 목매지 않을 거예요. 저 때문에 이안이 상처받는 모습을 전 볼 수가 없네요.”

엘레나는 악몽 속에서 발버둥 쳤다. 입술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은 안타까울 정도로 일그러졌고 이마와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아!”

엘레나가 짧은 단말마를 터뜨리며 잠에서 깼다. 악몽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호흡은 불안정하고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래도 좀 쉬었다고 아까보다는 몸이 한결 가벼웠다.

힘겹게 벤치에서 일어나던 엘레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불편하면서도 뒤통수가 싸한 느낌. 노골적인 누군가의 시선에 고개가 돌아갔다.

“……!”

엘레나는 눈을 의심했다. 기력이 없기에 망정이지 평소였다면 놀란 나머지 악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으리라. 그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있어?’

렌이 특유의 껄렁한 눈길로 벤치의 끝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아 엘레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에? 아니, 그보다 어쩌지?’

평소였다면 순발력 있게 대처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몸이 좋지 않아 영민하던 머리도 굳어버린 듯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너 뭐냐?”

렌이 말을 툭 던졌다.

“뭔데 여기서 넋을 놓고 자?”

“…….”

“내가 묻잖아. 너 뭐냐고.”

더는 렌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고 여긴 엘레나가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인사 말고 소개.”

“올해 입학한 신입생 루…….”

렌이 말을 딱 끊었다.

“루시아 맞지?”

“어, 어떻게 제 이름을?”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철저히 감춰야 할 신분의 이름을 렌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명찰은 폼인가 봐?”

“아!”

오른쪽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고 엘레나가 내심 안도했다.

‘침착하게 굴어, 엘레나.’

앞뒤 정황을 따져보더라도 조금 전에 우연히 만난 사이다. 렌이 아무리 대단한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엘레나에 대해 알아볼 시간은 없었다. 차분히 상황을 돌아보며 사리를 분별하자 흐트러졌던 엘레나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소개 계속하지? 이름 말고 딴 거부터.”

자꾸만 렌이 관심을 보이자 엘레나는 당돌하게 되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저도 그쪽 알아요. 검술학부 렌 선배님이시죠?”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

렌이 너무 세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건 엘레나 쪽이었다.

‘미치겠네. 막 받아칠 수도 없고.’

지금 엘레나는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었다. 일개 상단주의 딸인 루시아의 신분으로 제국 신흥 귀족을 이끌지도 모를 렌에게 세게 나가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답답하고 환장하겠지만 저자세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저에 대해 아셔도 재미없을 거예요. 워낙 별 볼 일 없어서.”

“너, 내 말이 우습냐?”

엘레나가 자꾸 말을 돌리자 렌이 목소리를 깔고 쳐다봤다. 길들여지지 않은 그 눈길이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아뇨.”

“근데 왜 자꾸 말을 돌려. 소개나 마저 하지?”

엘레나는 목이 탔다. 도무지 이 상황을 빠져나갈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굵직한 빗방울이 떨어져 엘레나의 콧잔등을 적셨다.

‘비?’

아까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의 개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어깨를 적셨다. 정말이지 시기적절할 때 쏟아지는 소나기가 엘레나는 너무 고마웠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제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금세 빗방울이 굵어졌다. 광장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학생들은 비를 피하고자 가까운 건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후배의 핑계에 속아주는 게 선배님의 배려 아니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엘레나는 밉보이지 않을 만큼 적당한 미소까지 섞어가며 작별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벗어나려고 했다.

‘다행이야 잡지 않아서. 위기는 모면한 거 같…… 어? 어!’

렌에게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안심한 게 화근이었다.

벤치에서 일어나 앞만 보고 걸음을 재촉하던 엘레나의 발이 그만 뭔가에 걸리고 말았다.

“앗!”

균형을 잃은 엘레나의 체중이 앞으로 실리며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으며 손바닥은 다 까졌고, 스타킹이 지면에 닿으며 찢어져 상처가 났다.

“가라는 얘기 안 했는데?”

지면에 엎어지다시피 한 엘레나가 고개를 드니, 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린 렌이 사악한 미소를 짓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 내가 아는 누구랑 닮았는데.”

“……!”

엘레나는 아차 싶은 생각에 순간 통제하지 못하고 표출한 분노를 재빨리 다스렸다.

“죄송해요. 선배님 허락도 없이 가려고 해서.”

“심지어 목소리도.”

눈매를 좁히는 렌을 보며 엘레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여기서 부정하는 건 더 수상할 수밖에 없다 보니 엘레나는 억지로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절 닮으신 분이요? 그럼 엄청 예쁘겠네요?”

엘레나는 둘러대면서 속없이 웃었다. 베로니카 행세를 하는 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경망스러운 웃음이다. 본래 베로니카와 정반대의 성격을 보여주지 않으면 렌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단 우려 때문이었다.

“…….”

엘레나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 초, 이 초…….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그 시간이 몇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행여 렌이 눈치를 챈 게 아닐까 싶어 걱정과 우려에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렌이 반응을 보였다.

피식. 렌이 웃었다. 악의가 없는 실소를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엘레나가 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렌이 갑자기 교복 외투를 벗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워낙 기발한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데 이골이 난 렌이다 보니 엘레나는 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 경계했다. 렌이 내던지듯 엘레나의 머리 위로 외투를 덮어줬다. 마치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아내는 우비처럼.

“비가 차다.”

“…….”

엘레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난해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왜 이러는지 렌의 저의를 알 수가 없어 더 불안했다.

“이제 좀 가지?”

“……가도 돼요?”

“어.”

렌이 손짓까지 하며 가라고 재촉했다. 엘레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뺐다. 더는 시비를 걸 생각이 없었는지 렌은 팔짱을 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가볼게요. 이만.”

진짜 작별을 고하고 서둘러 도망치려 했다.

“너 나한테 빚진 거다.”

빚을 운운하며 불안하게 만드는 렌을 돌아보자 그가 악마처럼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마치 새로운 장난감에 기뻐하는 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엘레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이보다 더 나쁜 날이 있을 수 있을까?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엘레나는 비를 피할 정신도 없이 단숨에 도서관 기록실로 향했다.

단단히 기록실 문 잠금장치를 걸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문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엘레나는 들고 있던 렌의 외투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어쩌다 이렇게 엉켜 버린 거지…….”

우연히 시안을 만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때 좀 더 현명하고 침착하게 대처를 했다면 렌의 관심을 끄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더 원망스러운 건 누굴 탓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전부 엘레나의 사소한 실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금의 사태를 초래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엘레나. 후회하면 어쩔 건데?”

엘레나는 생각의 전환을 가졌다. 이미 엉켜 버린 실타래를 푸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도 없다. 한번 꼬인 실타래는 다시 풀어도 예전처럼 곧고 빳빳하지 못하다.

“엉키면 엉킨 대로 가자. 굳이 풀 필요도 없고.”

이 정도로 좌절할 거였으면 애초에 복수를 결심하지도 않았다. 지난 삶의 악연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며 엘레나를 흔들었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마음을 더 단단하고 굳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 엘레나는 변장을 풀고 베로니카 공녀로 돌아왔다. 아까 넘어지면서 찢어진 스타킹과 흙탕물에 더럽혀진 교복이 의심을 살 수도 있지만 앤에게는 빗길에 넘어졌다고 둘러댈 참이었다.

“진짜 처치 곤란은 이건데.”

렌의 교복 외투를 보는 엘레나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버리고 싶었지만 렌이 또 언제 돌려달라고 할지 모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일단 보관해 두자.”

옷걸이에 외투를 걸어 옷장에 걸던 엘레나의 시선이 외투 왼쪽 가슴에 달린 렌의 명찰로 향했다.

찌익.

일말의 고민도 없이 명찰을 떼어버린 엘레나가 작은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래도 아까 당한 울분이 풀리지 않는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제야 기분이 좀 풀렸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기록실을 나왔다. 아직 비에 젖은 옷이 마르지 않아 으슬으슬했는데 막상 도서관을 나와 보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햇빛이 쨍쨍했다.

기숙사로 돌아온 엘레나의 몰골을 본 앤이 깜짝 놀랐다.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니, 다리는 또 왜 다치신 거고요!”

찢어진 스타킹 너머 무릎의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맺혀 있었다. 여인에게 몸의 흉터는 수치로 여겨지는 시기다 보니 앤이 허겁지겁 비상약을 가져왔다.

“비가 오는데 그만 넘어졌지 뭐니.”

혹여 엘레나가 아프지 않을까 앤은 조심조심 소독약을 뿌리고 연고를 발랐다. 그런 앤을 내려다보던 엘레나가 이 자리에 없는 메이를 언급했다.

“이게 다 메이 때문이야. 걔 때문에 하루 일진이 사나운 거 같구나.”

“그러니까요. 걔가 그렇게 부주의해요.”

앤이 은근슬쩍 맞장구를 치며 메이를 매도했다. 그러면서 엘레나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내려가서 따뜻한 물 받아놓을게요. 목욕하시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실 거예요.”

“역시, 날 헤아려 주는 건 앤밖에 없네. 그럼 부탁할게.”

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침실을 나가 물을 데웠다. 머지않아 앤이 준비가 다 됐다며 엘레나의 수발을 들며 욕실로 모셨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몸이 한결 나아졌다. 마지막으로 앤이 내온 홍차를 마시자 오늘 누적된 피로가 가셨다. 그러나 지난 삶부터 쌓인 감정의 통증마저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런 만남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지난날을 회상하며 엘레나가 아프게 웃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메말라 가던 지난날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보니 시안이 먼저 세실리아를 찾고 있었다. 다 지난 일인데도 그게 미치도록 부러웠다. 저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만 빠지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야. 나 하나만.”

스스로를 악역으로 내몰자 엘레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야 시안과 마주치더라도 의연하게 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겨우 심신의 안식을 찾은 엘레나가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사위가 깜깜해져 있었다. 엘레나가 꼴 보기 싫다며 쫓아낸 메이가 기숙사로 돌아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당장 올라가서 아가씨께 싹싹 비세요!”

아래층에서 앤이 훈계하는 소리가 이 층 침실까지 다 들렸다. 엘레나의 신뢰를 등에 업고 메이를 쥐 잡듯이 잡는 꼴이 퍽 웃겼다.

똑똑.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 메이예요. 들어갈게요.”

메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더니 앤이 밖에서 엿듣고 있지 않을까 슬쩍 계단 아래를 확인하고서는 안으로 들어왔다.

“갔던 일은?”

“여기요.”

메이가 보고 사항이 빼곡히 적힌 양피지를 건넸다. 양피지를 받아 든 엘레나가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윽박질렀다.

“나가라는 말 안 들려? 당장 나가!”

사전에 약속한 연기다. 엘레나는 일부러 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러면서 낮에 뺨을 때렸던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안타까운 손길로 메이의 볼을 어루만져 주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매섭게 쏘아붙이던 엘레나가 이쯤 하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가 예의를 갖추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메이는 침실을 나서자마자 상처받은 얼굴로 일 층으로 내려갔다.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모습에 앤도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고 메이는 그대로 시녀들이 기거하는 방에 틀어박혔다.

엘레나는 보고 사항이 적힌 양피지로 시선을 옮겼다. 메이에게 직접 보고를 받으면 좋겠지만, 그녀가 학술원을 나가서 일을 수행해야 하는 만큼 의심받지 않고 내보낼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명분은 바로 엘레나의 분노였다.

“역시 메이야.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일 처리가 깔끔해.”

오늘 하루 메이가 찾아가서 도움을 준 자가 대략 열 명 안팎이었다. 갑작스런 호의에 의심을 보내던 이들은 도움을 받자마자 얼떨떨함을 지우지 못했다고 한다. 몇몇은 기적이 일어난 거라며 눈물을 보이며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고.

“그래, 빚을 한 번에 탕감해 주기보다는 서서히 갚아주는 게 맞지. 그래야 더 고마움을 느낄 테니까.”

메이는 엘레나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신경 써서 조치했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수완이야말로 메이에게 기대했던 대목이었다.

“L.”

엘레나는 제국 고대어로 자신의 이니셜을 상징하는 단어를 낮게 읊조렸다. 조만간 두각을 드러낼 시대의 거장들은 모두 L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받은 호의는 곧 고마움이 된다. 그 고마움이 커지면 인간이라면 외면하지 못할 은혜가 된다.

엘레나는 저들에게 빚을 지우는 게 아니라, 은혜를 베풀 계획이다. 그것만이 억만금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시대의 거장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원치 않으셔도 있는 힘껏 도울게요. L이 기지개를 켤 때…… 당신들이 제 날개가 되어줄 수 있도록요.”

다음 날도 어김없이 기숙사에서 메이는 쫓겨났다. 꼴도 보기 싫으니 눈에 띄지 말라고 엘레나가 소리친 까닭이다. 무려 나흘간 기숙사에 발을 붙이지 못했던 메이가 밤에 돌아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엘레나가 마지못해 용서했다. 메이는 연신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리고는 다시 수발을 들었다. 이게 앤이 보고 겪은 나흘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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