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3/30)
  • 제5장 인연, 악연, 우연

    “모레 학술원으로 떠난다고?”

    프란체 대공이 포크와 나이프를 점잖게 내려놓았다. 대신 와인 잔을 쥐더니 빙그르르 몇 바퀴 돌리고 입가에 가져갔다.

    “네, 아버님.”

    엘레나가 다소곳이 대답했다. 그녀는 긴 식탁 상석에 앉은 프란체 대공을 기준으로 왼편에 앉아 있었다. 공식적인 저녁 식사 자리인 만큼 시녀와 요리사가 시중을 들다 보니 애틋한 부녀지간처럼 비쳐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 년 만의 복학이구나. 따라가기 버겁진 않겠고?”

    “쉬는 동안 리브에게 많이 배웠어요.”

    프란체 대공의 시선이 오른편에 앉은 리아브릭에게 향했다.

    “고생이 많았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엘레나는 대화를 경청하며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입안에 넣었다.

    ‘한동안 저 역겨운 얼굴들을 볼 일이 없겠네.’

    학술원은 황족, 귀족 등 신분의 구분 없이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프란체 대공이나 리아브릭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고 그곳에서 편히 지낼 생각은 없었다. 리아브릭의 감시가 소홀해지는 틈을 노려 대공가를 무너뜨릴 기반을 다질 계획이다.

    ‘조기 졸업을 감안하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일 년 남짓.’

    원칙적으로는 휴학한 이 년을 포함해 일 년을 더 다녀야 졸업할 수 있지만 엘레나는 예외였다.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란 이유로 학점이 부족해도 졸업장을 받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결국 복수의 성공 여부는 저 일 년 남짓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형식적인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엘레나와 리아브릭은 따로 티타임을 가졌다. 내일 떠나기 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안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아시겠지만 이 년을 쉰 만큼 남들보다 졸업 학점이 부족해요. 학장에게 따로 일러둘 테니 전공과 교양을 한 과목씩 더 수강하도록 하세요.”

    “알겠어요.”

    “매번 얘기하지만 늘 긴장하세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혹여 감당하기 곤란한 일이 생기면 혼자 처리하려고 들지 말고 제게 먼저 기별하시고요. 제 말 알아들었죠?”

    “그럼요. 리브, 너무 걱정 마세요. 저 잘해낼 수 있어요.”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를 보였다. 꽤 믿음직스러울 법도 하건만 엘레나를 보는 리아브릭이 얼굴에서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 로렌츠 경이라도 붙여두었다면 이리 신경이 쓰이진 않았을 텐데.’

    노련한 그가 붙어 있었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을 거다. 하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감시자로 붙여놓은 앤에게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는 게 최선의 조치였다.

    “시녀는 앤과 루나린을 데려가세요.”

    리아브릭의 말투는 명령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감시자 역할을 해줄 앤과 시녀 중 최고 연장자로 경험이 많은 루나린을 붙여두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판단에서다.

    “리브, 그 있잖아요. 앤은 괜찮은데…… 루나린 말고 메이를 데려가면 안 될까요?”

    “메이를요?”

    “마담 밑에서 일을 배워서 그런지 재주가 참 좋더라고요. 제 맘에 쏙 들게 수발도 잘 들고요.”

    리아브릭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마담과의 친교를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진 않단 생각이 들었다.

    ‘앤만 데려간다면 누굴 데려가든 상관없지.’

    어차피 루나린이 가든 메이가 가든 크게 상관없었다. 감시자인 앤만 붙여놓으면 주기적으로 엘레나의 행적을 보고받을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리아브릭이 선심 쓰듯 말했다.

    “공녀가 원하니…… 좋아요, 메이를 데려가세요.”

    “리브라면 이해해 줄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엘레나는 제 부탁을 들어준 것에 아이처럼 기뻐하는 시늉을 했다.

    ‘가능한 앤도 떼어놓고 싶지만, 앤까지 억지로 떼어놓으면 리아브릭의 의심만 부추길 거야.’

    앤을 대동하는 이상 일정 부분 행동에 제약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인내하고 감수해야 했다. 대신, 그로 인한 반사이익을 노릴 참이다.

    ‘안심은 곧 방심을 불러오지.’

    리아브릭은 엘레나가 앤을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통제하에 두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 믿음이 불러온 방심의 균열을 엘레나는 파고들 생각이었다. 학술원에서 조심해야 할 주의 사항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은 엘레나가 방으로 돌아왔다.

    “다들 들어오렴.”

    루나린, 제시, 앤 그리고 메이가 일렬로 섰다. 엘레나가 그들의 면면을 쭉 훑어보며 말했다.

    “앤과 메이는 나와 같이 학술원으로 갈 테니 그리 알고 채비해.”

    앤이 쾌재라도 부른 듯 앙다문 입술이 실룩거렸다. 메이는 복잡한 얼굴이었는데, 표정만으로는 그 심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반대로 선택을 받지 못한 루나린과 제시의 표정에서는 섭섭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할 주제가 아닌 만큼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다 나가봐. 메이는 잠시 남고.”

    세 시녀를 내보내자 방 안에는 엘레나와 메이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어색하면서도 무겁게 깔린 정적을 깬 건 엘레나였다.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니?”

    “…….”

    엘레나는 앞에 선 메이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날, 메이는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다. 상식과 편견을 깨는 엘레나의 제의에 뭐가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엘레나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며 물러가라고 했고, 메이는 방을 나오고 나서야 아비를 죽이려고 한 자를 그 딸이 놓아줬음을 실감했다. 그건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어느 자식이 부모를 죽이려는 자를 놓아주겠는가. 부모를 증오하는 게 아니라면.

    ‘증오.’

    메이는 지금까지 엘레나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오늘, 엘레나는 그간 내린 고민에 대한 답을 듣길 바랐다.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나 보네. 좋아, 함께 학술원으로 가게 됐으니 대답은 천천히 해. 기다릴 테니까.”

    “…….”

    “꼭 이거 하나만 새겨. 내가 가진 증오심도 결코 너에게 못지않다는 걸. 나가봐.”

    메이는 밖으로 나가라는 말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발을 딱 붙인 채 석상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불복하듯이 서 있던 메이의 입술이 열렸다.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공녀 전하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저를 곁에 두는지.”

    어렵게 뗀 메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엘레나는 어렵사리 말을 꺼낸 메이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미소를 지었다.

    “조급해할 필요 없단다. 그 또한 네 눈으로 보고 판단하면 되는 걸.”

    엘레나는 재촉하기보단 메이가 스스로 다가오길 기다렸다. 학술원으로 가게 되면 할 일이 많았다. 그러자면 본격적으로 엘레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메이가 적의 적은 동지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엘레나가 내민 손을 잡기를 기다렸다.

    끝내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못한 메이가 대답 대신 인사를 하곤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게 된 엘레나가 창틀에 걸터앉았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드니 만월의 달빛이 쏟아졌다.

    “저 달이 지면…….”

    엘레나가 손을 뻗더니 달빛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었다.

    “나의 아침이 오는 거야.”

    * * *

    대공가 본관 저택 앞. 프론티어 학술원으로 떠나는 엘레나를 배웅하고자 가솔들이 전부 모였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니. 마음이 편치 않구나.”

    프란체 대공은 엘레나를 살며시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의 얼굴은 학술원으로 향하는 딸에 대한 근심이 가득했다.

    “제 걱정은 마시고 건강 챙기고 계세요, 아버님.”

    엘레나 역시 아버지를 끔찍이 여기는 효녀로 분해 다정한 부녀지간을 연기했다. 그 관계가 어찌나 애틋해 보였는지 눈시울을 붉히는 시녀들도 있었다.

    “리브, 저 다녀올게요.”

    “한층 더 지적인 레이디로 거듭나길 기대하겠습니다, 공녀 전하.”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할게요.”

    작별을 고한 엘레나가 최고급 사륜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마부의 채찍질에 마차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그닥, 달그닥.

    서서히 가속이 붙기 시작한 마차가 빠른 속력으로 대공가를 빠져나왔다. 제국의 수도 외곽에 위치한 프론티어 학술원까지는 마차를 타고 두어 시간 남짓. 엘레나는 턱을 괴고 앉아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수도의 전경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인연이 깊은 사람들을 보게 되겠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간은 렌이다. 학술원 검술학부에 재학 중인데, 어떤 식으로든 엮일 가능성이 컸다. 베로니카를 괴롭히는 걸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인간이니까.

    또, 그 사람도 있다.

    ‘시안.’

    한때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황제이자 남편. 부부로 살았지만, 남보다 못한 관계였기에 될 수 있으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를 본다는 것 자체가 상처를 들추는 것이기에.

    ‘내 뜻대로 되지 않겠지.’

    학술원 생활을 하다 보면 우연이라도 마주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황족과 공작 작위 이상의 고위 귀족의 자제, 개국공신 후예들만 이용 가능한 단독 기숙사에 머물다 보면 우연이라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우연히 보더라도 모른 척할게요. 서로에게 상처 주는 건 이전 생으로 끝내요.’

    엘레나가 마음을 굳힐 때쯤, 마차가 프론티어 학술원 정문에 도착했다. 간단한 신원 확인을 마치고 마차는 학술원 내부로 들어섰다.

    엘레나는 창밖의 학술원 전경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시계탑과 조형물, 분수대와 검술학부 연병장을 지나치자 탁 트인 대로를 기준으로 담벼락이 쭉 이어졌다. 그 너머로 고딕 양식의 이 층 건물 지붕들이 보였는데 꼭 작은 별장들 같았다.

    “기숙사에 도착했습니다, 공녀 전하.”

    엘레나가 턱짓으로 밖을 가리키자 앤이 눈치 빠르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휴렐바드가 묵례를 취하고 물러났다.

    엘레나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독 기숙사 건물과 작은 물웅덩이, 월계수와의 조화가 꼭 잘 가꿔진 숲속의 정원 같았다.

    “뭣들 하고 있니? 짐을 옮기지 않고.”

    “예, 아가씨.”

    외관에 시선을 빼앗겼던 앤이 부랴부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메이 역시 양팔 걷어붙이고 도왔다. 휴렐바드는 기숙사 밖을 둘러보며 주변 환경을 파악했다. 엘레나는 일 층의 거실 겸 응접실에 서서 눈에 거슬리는 건 하나씩 지적했다.

    “커튼이 낡았네. 교체해. 이건 언제 적 그림이니? 떼어 버리렴.”

    베로니카 공녀의 흔적을 싹 다 지워 버린 엘레나는 대공가에서 가져온 액자와 커튼, 카펫으로 여백을 채웠다. 일 년은 지내야 할 거처다 보니 이 정도 수고스러움은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 정돈이 되자 엘레나는 이 층 침실로 올라갔다. 쭉 둘러보며 청소 상태를 확인한 엘레나가 만족스러워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며칠간 손님이 많이 찾아올 거야.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 특히 앤은 다과에 신경을 쓰렴. 선임인 네가 모범을 보여야 메이도 잘 따라 하지 않겠니?”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선임이란 단어에 앤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안 그래도 저보다 메이의 나이가 많아 곤란하던 앤이었다. 그런 와중에 엘레나가 나서서 서열을 정리해 주니 앤은 우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응은 엘레나가 유도한 바였다. 엘레나는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앤을 조련할 계획이었다. 바로 메이를 이용해서. 고약한 성격의 앤이면 분명 선임을 운운하며 메이를 부려먹을 게 뻔했다. 안 그래도 나이도 많고 대하기가 어려워 벼르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네가 메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숨죽이고 있지만 메이는 맹독을 품은 독사다. 그렇지 않다면 프란체 대공을 암살하려는 시도조차 못 했겠지.

    “앤, 내려가서 마저 정리하렴.”

    “네! 공녀 전하.”

    힘 있게 대꾸한 앤이 침실을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잠잠해질 즈음, 엘레나가 서랍 보석함에서 에메랄드 브로치를 꺼냈다.

    “메이, 넌 따로 심부름 좀 다녀와야겠구나.”

    엘레나가 에메랄드 브로치를 내밀었다.

    “학관에 가서 고고학부 1학년에 루시아라는 학생이 재학 중인지 알아보렴. 만약 재학 중이라고 하면 찾아서 이걸 전해줘.”

    “네, 공녀 전하.”

    “한 가지 더 알아둘 거. 이 일을 절대 앤이 알아서는 안 돼. 지금도, 앞으로도 쭉. 내 말 알아들었지?”

    메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 의문이 살짝 어렸지만 묻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메이를 내보내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잠깐만 눈 좀 붙일까?”

    엘레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쌓인 피로감 때문인지 잠이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푹 자고 일어난 엘레나가 눈을 떴다. 서산 너머에 걸쳐 있던 노을이 지며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정신을 놓고 잔 게 얼마 만이지?”

    아무래도 리아브릭의 감시를 피해 대공가를 나오면서 긴장이 풀렸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낮에 이리 장시간을 곤히 자버리다니.

    똑똑.

    막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만지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메이예요.”

    “들어와.”

    방문을 열고 들어온 메이가 손수건으로 고이 싸두었던 브로치를 내밀었다.

    “분명히 재학 중이라곤 하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기숙사까지 찾아가 룸메이트분도 만났는데, 못 본 지 며칠 됐다고 하고.”

    “그래? 어쩔 수 없지. 수고했구나.”

    메이가 돌아서서 침실을 나가자 엘레나는 브로치를 도로 보석함에 넣었다.

    “루시아, 넌 어떤 애니?”

    엘레나는 한 번도 루시아를 본 적이 없었다. 전 삶에서 같은 교양과목을 수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아는 한 번도 출석한 적이 없어서 볼 기회가 없었다. 수강 신청을 하고 일 년 내내 강의를 빠진 건 개교 이래 루시아가 처음이란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개강 전에 증상이 나타난 건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루시아는 학술원에 남아 강의를 들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북부 열병. 북부 지방의 토착병으로 알려진 이 열병은 감기와 비슷하게 고열과 기침을 동반하며, 초기에 피부 각질이 벗겨지는 증상을 보인다. 대륙의 중심부와 남부를 아우르는 제국에선 흔히 보기 힘들지만 3국 동맹과 북부 토착민들 사이에서는 종종 목격되는 병이었다.

    북부 열병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일반 감기와 달리 어떤 약을 처방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죽하면 의사들이 최선의 치료가 예방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일까.

    루시아는 북부 열병 초기 증세를 보였고 휴학 처리를 할 여력도 없이 허겁지겁 치료를 위해 떠났다고 했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으면 휴학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 때문에 강의 출석부에 루시아란 이름이 기재되어 있음에도 한 번도 출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엘레나는 루시아와 더불어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을 떠올렸다. 대륙 10대 상단에 이름을 올린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막 황비에 올랐을 때였다. 북부와 제국을 오가며 상행을 하던 상단주 에밀리오가 딸 루시아를 치료하기 위해 막대한 금력을 쏟아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에밀리오는 우연히 동부 초원 부족 중에 열병에 걸렸다가 완치된 부족민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초원 부족을 찾아갔다. 딸을 살리고자 하는 부정에 감동받은 초원 부족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초원에 머물도록 허락해 준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에밀리오는 끝끝내 북부 열병의 치료제가 되어줄 약재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 약재는 라무네지아 꽃잎. 초원 부족이 북방 지역을 오가는데도 북부 열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를 찾던 그는 그들이 이 라무네지아 꽃잎을 주기적으로 섭취한 사실에 주목했다.

    겨울이 긴 북부는 라무네지아꽃이 필 수 없는 환경이었던 만큼 초원 부족처럼 라무네지아꽃을 식용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냈다. 그 과정에서 일생을 바쳐 일군 상회가 파산하고 전 재산을 탕진했지만 딸만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깟 재물 따위 어찌 소중한 딸의 생명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약효에 확신을 가진 그는 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한시라도 빨리 낫게 해주고픈 맘에 서둘러 루시아를 찾아갔다. 하지만 꼭 낫게 해준다는 아버지만 믿고 정말 긴 시간을 병마와 잘 싸워줬던 루시아가 딱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에밀리오는 절규했다. 루시아의 무덤 앞에서 몇 날 며칠을 오열하며 통곡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에밀리오는 의사들에게 그간 알아낸 북부 열병의 치료법을 적어 보냈다. 말미에는 자신의 딸처럼 북부 열병으로 죽는 이가 없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적어서. 그리고 며칠 뒤,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에밀리오도 숨을 거두고 만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랄까.

    엘레나는 비극이 싫었다. 저들 못지않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아, 넌 참 운이 좋은 아이야.”

    엘레나는 책상에 앉아 최고급 양피지를 꺼냈다. 만년필에 잉크를 찍어 일필휘지로 글자를 써 내려간 다음 그것을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네 목숨, 내가 구해줄게. 이름을 빌려 쓴 대가라고 생각해.”

    앞으로 일 년. 엘레나는 그녀의 이름과 신분으로 학술원을 활보할 예정이다.

    카스톨 상회의 외동딸. 책을 좋아하는 고고학부 여학생. 그녀의 이름은 루시아다.

    * * *

    프론티어 학술원은 학문을 연구하고 다양한 자질을 발전시켜 뛰어난 인재를 배출하는 데 목적을 둔 교육기관이다. 그러나 귀족 자제 중 전문적인 지식이나 학문을 배우고자 입학하는 경우는 극소수였다. 고위 귀족 자제일수록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통해 사교육을 받기 때문에 학술원의 교육에 그리 목을 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 자제들이 학술원의 문턱을 넘는 이유는 하나다.

    인맥.

    학술원은 제국 사교계의 압축판이자 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부모의 작위를 이어 제국을 움직이는 귀족이 될 것이다. 즉, 학술원은 서로에게 필요한 끈끈한 인맥을 다지기 위한 사교의 장. 장차 제국을 움직일 인재들이 모여 친분을 쌓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학술원의 가치는 측정이 불가능했다.

    그런 학술원에 베로니카 공녀가 이 년 만에 복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공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를 보았다는 증언이 이어지며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은 스스로를 축복받은 세대라고 불렀다.

    황위를 이을 황태자 시안.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 베로니카 공녀.

    4대 가문, 라인하르트 공작가의 장녀 아벨라.

    신흥 귀족의 필두 바스타슈 가문의 영식 렌.

    장차 제국을 이끌 인재들과 한 시기에 학술원을 다니게 된 것만으로도 권력의 중심에 다가갈 기회의 장이 열린 셈이었다. 저 네 사람과 친분을 쌓을 수 있다면 가문의 성세가 달라지리라. 별 볼 일 없는 가문 출신의 재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홍차 맛이 너무 좋아요.”

    “공녀 전하는 어쩜 손짓 하나도 이리 우아하신지.”

    “그뿐이겠어요? 차까지 대접해 주시고 너무 친절하세요. 종종 인사드려도 될까요?”

    엘레나는 옅게 웃으며 말없이 홍차를 마셨다.

    ‘귀찮아.’

    기숙사에 온 당일을 제외하고 벌써 이틀째 재학생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지금도 기숙사 밖이 인사만 드리고 가겠다는 재학생들로 북적일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지.’

    이 영양가 없는 티타임을 계속 갖는 이유는 리아브릭의 당부 때문이었다. 사교계 내 베로니카 공녀의 파벌이 전부 와해됐으니 재학생들과 친분을 쌓아둬야 한다며 그 필요성을 못 박았다. 귀찮긴 했지만 엘레나의 행적은 앤을 통해서 리아브릭에게 고스란히 보고된다. 학술원에 온 지 하루도 안 돼서 리아브릭의 당부를 어겨 눈 밖에 날 필요는 없었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받아주자.’

    엘레나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시간을 가져요.”

    “제가 블렌딩한 홍차를 가져올게요!”

    엘레나와 친분을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에 어느 영애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제가 시간을 내서 초대할게요.”

    엘레나는 두 번 다시 이들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다. 초대 약속도 부르기 전에는 먼저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돌려 한 셈이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티타임을 가졌다.

    엘레나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이쯤 하고 다 돌려보내렴. 홍차를 너무 마셨더니 속이 느글거려.”

    “네, 아가씨.”

    메이와 앤이 공손히 대답하며 찻잔과 접시를 정리했다. 이 층 침실로 올라가던 엘레나가 뭔가 떠오른 듯 계단에 멈춰 섰다.

    “메이는 따로 심부름시킬 게 있으니 잠시 올라오고.”

    엘레나가 메이를 지목하자 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앤이 표독스럽게 메이를 흘겼다. 개인적인 일을 그녀가 아니라 메이를 시킨 게 여간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앤, 그거 정리하면 카펫도 좀 털어 오렴. 쿠키 부스러기가 영 눈에 거슬려.”

    “호, 혼자요?”

    카펫의 무게가 꽤 나가는지라 여자 혼자 털기엔 아무래도 버거웠다. 엘레나가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다.

    “혼자가 아니면? 나보고 도우란 얘기니?”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작은 말실수로 엘레나의 눈 밖에 나 크게 벌을 받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앤을 내버려 둔 엘레나가 메이를 대동해 침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서랍에 넣어뒀던 책 사이에서 한 통의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 서신을 카스톨 상회의 상단주 에밀리오에게 보내줘. 용도는 긴급. 꼭 기억해야 할 건 내가 보냈다는 사실을 그쪽에서 알아서는 안 돼.”

    메이는 서신을 건네받았다. 그녀의 시선이 봉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보낸 사람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궁금하니?”

    “제가 어찌.”

    “읽어봐도 상관없어. 딱히 감출 이유도 없고. 나야 카스톨 상회에 그 서신이 잘 전달되면 그걸로 족하거든.”

    “……!”

    툭 던진 말에 메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엘레나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동요하는 게 빤히 보였다.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작은 양피지를 내밀었다.

    “거기 적힌 목록을 사 오렴. 하나도 빼놓으면 안 돼.”

    슬쩍 양피지에 적힌 목록을 훑어본 메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발, 도수가 없는 안경, 색조 화장품 등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물품이 다수 기재되어 있었다. 그중에도 가장 의아한 건 학술원 명찰이었다.

    ‘루시아?’

    엊그제 엘레나가 브로치를 가져다주라고 했던 여학생의 이름이 아닌가. 대체 왜 엘레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적힌 명찰이 필요한 것일까. 도통 그녀의 머리로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게 다 뭘까? 왜 이런 걸 사 오라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겠지.”

    “…….”

    “그건 네가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고. 그것들을 사면 포장을 잘해서 휴렐바드 경에게 맡겨두렴. 다만 앤에게 뭘 샀는지 알려줘서는 절대 안 돼. 그 물건들을 들켜서도 안되고. 알겠니?”

    “네, 공녀 전하.”

    일단 알았다곤 했지만, 어째서 앤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하는 걸까? 일개 하녀인데. 의문은 늘어났지만 그 답은 좀처럼 찾지 못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메이는 공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넌 영민한 아이니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가보렴. 아, 앤에게 핑곗거리가 필요할 테니 쿠키라도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가면서 앤에게 잠깐 올라오라고 해.”

    메이는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리곤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창가에 서서 보니 얼마 있지 않아 메이가 서둘러 기숙사를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당나귀에게 당근을 줘볼까?”

    엘레나의 혼잣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앤이었다.

    “찾으셨다고…….”

    “이리 와보렴.”

    주눅이 든 앤을 보며 엘레나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앤은 부드러워진 엘레나의 말투에 당혹스러워하며 쭈뼛쭈뼛 가까이 다가갔다. 엘레나는 낑낑거리며 카펫을 옮기느라 흐트러진 앤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앤, 알고 있니? 내가 얼마나 널 믿고 의지하는지.”

    “저, 저를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앤은 엘레나의 다정한 손길과 말투에 당황하면서도 제 주인이 이런 온정을 베푼다는 사실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전 진짜 몰랐어요. 공녀 전하께선 절 미워하시는 줄로만…….”

    “내가 널? 그럴 리가. 메이는 일은 잘할지 몰라도 정이 가질 않는단다. 그러니 너는 내가 늘 끼고 있고, 메이는 심부름이나 시켜 내보내는 거 아니겠어?”

    주근깨 가득한 앤의 광대가 올라가며 미소가 번졌다. 앤이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곁에 둔다는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간 것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엘레나가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서랍 속에서 보석함을 꺼냈다. 그리고 개중 화려하지만 세공이 조잡해 제값을 받기 힘든 루비 반지를 집었다.

    “손을 줘보렴.”

    “아, 아가씨?”

    “어서.”

    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엘레나는 잡일을 하며 울퉁불퉁해진 앤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원래 네 것이었던 것처럼 잘 어울리는구나. 받아, 네 거란다.”

    “네? 어떻게 제가 이런 걸…….”

    입으로는 마다하지만 앤의 탐욕스러운 눈은 루비 반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엘레나는 천사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넌 받을 자격이 있어. 매일매일 몸이 부서져라 수발을 들잖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앤은 감동한 듯 울먹거리며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하녀의 녹봉으로는 평생 껴보지도 못할 고가의 반지를 받았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메이에게는 비밀로 하는 거 잊지 말고.”

    “아무렴요! 저 이거 평생 간직할게요. 잘 때마다 공녀 전하한테 백 번, 아니, 천 번씩 감사하고 잘게요.”

    엘레나는 연신 반지를 매만지며 황홀함에 취해 있던 앤을 내보냈다. 앤은 나가는 순간까지도 꿈을 꾸는 게 아닌지 몽롱했다. 앤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저 약속은 며칠도 못 지켜질 게 뻔했다. 앤의 성격상 은근슬쩍 자랑하며 자신이 이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걸 과시하려고 들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관심도 없었다. 메이 역시 앤의 자랑에 딱히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테니까.

    “리브, 당신이 그랬지?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일수록 다루기 쉽다고.”

    욕심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한동안 메이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켜도 엘레나가 믿고 의지하는 시녀는 자신이라는 착각에 앤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앤에게 엘레나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거면 루비 반지는 그 가치를 다한 셈이다.

    * * *

    전야제. 개강 전날 밤 학술원이 주관하는 축제다. 행사의 취지는 한 해 동안 학업에 정진해야 할 신입생과 재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데 있다. 이날만큼은 외부의 노점도 들어오고 학술원 내부에서 공연도 진행하다 보니 볼거리나 즐길 거리도 꽤 많았다.

    귀족 출신 재학생들은 전야제를 싸구려 행사라고 비하했다. 하지만 체통이나 권위에 신경 쓰지 않고 서민의 삶을 간접 경험할 기회다 보니 함께 어울리는 귀족 출신 재학생도 적지 않았다.

    반대로 후원을 받거나 기부로 입학한 평민 출신 학생들은 전야제를 무척 반겼다. 학술원 3대 축제로 예술제, 검술제, 그리고 학술제가 꼽힌다. 하지만 재학 내내 성과의 압박에 시달리는 평민 출신 재학생들에겐 3대 축제가 결과물을 보여야 하는 시험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평민 학생들에게 진짜 축제는 전야제뿐이었다.

    “아가씨, 전야제가 열렸다던데 안 가보세요?”

    온종일 침실에 박혀 두문불출하는 엘레나를 보며 앤이 물었다. 예전이라면 앤이 엘레나에게 먼저 말을 붙인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루비 반지를 받은 뒤부터는 신뢰를 받는다고 느꼈는지 종종 이리 묻곤 했다.

    “축제라고 해서 꼭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잖니?”

    “그래도…….”

    “내 격에 맞지 않아. 저속한 수준의 놀음에 흥미도 없고.”

    엘레나는 그리 말하며 앤을 슬쩍 살폈다. 축 처진 어깨와 표정에서 전야제에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혼자라도 다녀오지 그러니?”

    “네? 아, 아니에요.”

    엘레나는 천사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전야제 야시장에 참 볼거리가 많다고 하던데. 오늘 못 보면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

    “저, 정말 다녀와도 돼요?”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메이를 시키마. 느긋하게 즐기다 오렴.”

    생각지도 못한 허락이 떨어지자 앤은 들뜬 기색으로 서둘러 인사를 하곤 침실을 뛰쳐나갔다. 한동안 아래층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 아래로 앤이 뛰쳐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메이!”

    앤이 기숙사를 나가는 걸 확인한 엘레나가 메이를 불러 지시했다.

    “휴렐바드 경에게 맡겨두었던 거 가져오렴.”

    메이가 포장지에 싸인 가방을 들고 오자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시 외출을 하자꾸나.”

    엘레나는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고 메이를 대동해 기숙사를 나섰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기숙사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휴렐바드가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나서려고 하자, 엘레나가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다.

    “굳이 경까지 함께 가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번거로워요.”

    “오늘은 축제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이 많습니다. 홀로 움직이시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전야제는 축제다. 재학생이 아닌 수도 인근의 시민들도 오늘만큼은 자유롭게 학술원에 출입할 수 있다. 그렇다 한들 황실이 보증한 학술원 행사에서 사고를 칠 만큼 간이 큰 인간은 드물었다.

    “전야제는 관심 없어요. 바람도 쐴 겸 중앙 도서관에서 책 좀 읽다가 오려고요.”

    “하나…….”

    “경이 따라오면 불편할 거 같아요.”

    엘레나가 단호하게 굴자 휴렐바드도 더는 나서지 못하고 물러났다.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학술원은 개설 이래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치안을 자랑했다. 휴렐바드는 경비대와 배치된 수도 기사단을 믿기로 했다.

    기숙사를 나선 엘레나는 가로수 길을 지나 중앙 도서관으로 향했다. 전야제 때문인지 가는 동안 마주친 재학생은 다섯 손가락을 넘기지 않았다. 그나마 중앙 도서관에는 축제와 상관없이 학업에 매진하는 하위 귀족 자제나 평민 출신의 재학생들이 있었지만 그 역시도 소수였다.

    엘레나는 열람실을 지나쳐 계단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 모퉁이를 돌아 사 층까지 올라가니 고요하리만치 적막한 복도가 이어졌다.

    메이는 의아했다. 엘레나가 도서관을 방문한 이유를 짐작하지 못해서다.

    이 층까지는 도서관의 분위기가 났다면 삼 층은 꼭 황궁을 옮겨놓은 것처럼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엘레나는 복도 중간에 위치한 대리석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지런히 진열된 책장과 소파, 그리고 오동나무로 제작된 목제 책상이 놓여 있었다. 매우 오래된 물건인 듯 책상의 나무 색은 바래 있었고, 소파의 천은 해어져 있었다.

    “이곳은 기록실이란다. 학술원이 개설될 때 황실에서 우리 가문에 하사한 공간이지. 이 책상들은 아버님을 비롯해 증조부, 고조부, 어쩌면 그보다 더 윗분들도 쓰던 역사적 산물들이야.”

    자부심이 생길 법도 하건만 엘레나의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이전 삶이었다면 이런 대단한 가문의 딸로 살게 된 제 모습에 벅찼겠지만, 지금 엘레나의 가슴속엔 증오만이 남아 있었다.

    엘레나는 반대쪽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엔 역대 프리드리히 가문 조상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개중에는 프란체 대공의 젊을 적 초상화도 있었다.

    “참 꼴 보기 싫은 얼굴들이구나. 그렇지 않니?”

    “…….”

    메이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가 아비인 프란체 대공을 증오한다고 밝히긴 했지만 무작정 동조할 순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까. 메이의 그런 반응에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메이, 가져온 걸 여기 펼쳐보렴.”

    메이가 재빨리 포장지를 뜯어 심부름을 나가 사온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쭉 나열했다. 가발, 속눈썹, 색조 화장품 등 종류도 다양했고 가짓수만 해도 무려 서른 가지에 달했다. 엘레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만져보며 물었다.

    “내가 뭘 할지 짐작이 가니?”

    “……잘 모르겠어요.”

    “모르면 곤란한데. 지금부터 네가 도와야 하거든.”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메이가 눈을 깜빡였다.

    * * *

    <분장의 연금술>.

    안가에 머무는 동안 엘레나가 가장 관심 있게 보았던 책이다. 주로 연극이나 오페라, 뮤지컬 등에 올라가는 배우들의 의상, 화장, 분장에 대한 비법이 기재되어 있었다. 실용적인 분장 기술도 중요했지만 엘레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를 떠올렸다.

    인상이 변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분위기가 바뀌면 사람이 변한다.

    타인의 시선에 비치던 베로니카 공녀는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을 지울 수 있다면 완벽한 분장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눈 끝을 좀 처지게 그려줘.”

    사람의 인상은 눈매에서 달라진다.

    “턱선에 음영을 줘. 그림자를 지게 해.”

    턱선을 죽이면 인상이 부드러워진다.

    “이 화장법을 잘 기억해 둬. 알겠니?”

    “네.”

    메이는 대답을 하면서도 왜 저런 화장을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화장은 엘레나가 천성적으로 지닌 고귀한 이목구비를 감추고 오히려 평범한 인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이 정도면 나름 나쁘지 않구나. 이제 가발 쓰는 걸 도와줄래?”

    사전에 흐트러지지 않도록 엘레나의 금발을 단단하게 말아 올린 메이가 단발머리 가발을 집어서 머리 위에 얹었다. 머리카락에 안쪽 핀을 잠가 단단히 고정하자 본연의 금발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메이, 목걸이와 귀걸이를 빼줘.”

    엘레나의 새하얗고 긴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자체로도 사슴처럼 길고 아름다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심심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안경.”

    메이가 검정 뿔테 안경을 집어서 건넸다.

    소품이야말로 분장의 완성. 안경은 한때 중년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외알 안경을 거쳐 최근에는 시력 교정을 위한 실용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요새는 남녀노소, 신분을 떠나 많은 이가 착용하는 물건이었다. 안경까지 쓴 엘레나가 물었다.

    “어때? 감쪽같지?”

    메이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거울을 응시하는 엘레나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누가 이런 날 보고 베로니카 공녀라고 생각할까?”

    인상이 변한 수준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엘레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을 순해 보이게 만드는 처진 눈매. 날카로움을 죽인 둥그스름한 턱선. 단정하면서도 얌전한 일자 앞머리와 단발. 학구적으로 보이는 검정 뿔테 안경. 엘레나를 낳고 키워준 프레드릭 준남작이나 체사나가 보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 자신했다.

    “……공녀 전하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요. 꼭 다른 사람 같아요.”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구나.”

    흡족해하는 엘레나를 말없이 보던 메이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왜 이런 변장을 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속여야 하니까.”

    “누구를 속인다는 말씀이신지?”

    메이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답답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한둘이 아니지. 대공가 안에는 보이지 않는 적이 많거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달라져 버린 외모 때문인지 메이는 엘레나가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전야제에 다녀와야겠구나.”

    “그 차림으로요?”

    “말하지 않았니? 적이 많다고. 베로니카라는 이름도, 신분도, 내겐 다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란다.”

    엘레나는 의미 모를 말을 남기고는 밖으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았다.

    “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정말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학술원의 치안이 좋다지만 전야제는 평민들까지 어울려 노는 축제였다.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될까 염려스러웠다.

    “학술원의 치안은 꽤 훌륭하지. 또 이런 날 누가 공녀로 보겠니? 걱정 말고 쉬고 있으렴.”

    작별을 고한 엘레나가 뒤돌아서 기록실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사서와 마주쳤지만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중앙 도서관에 유력 가문의 기록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견학 차원에서 보러 오는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사서와 어깨를 스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이상하네. 공녀 전하랑 시녀 말고는 올라간 사람이 없었는데…….”

    점점 멀어지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사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말이었지만 엘레나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사서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기뻐했다.

    “변장은 나름 성공적이네.”

    중앙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경비나 사서들은 사전에 고위 귀족 자제의 초상화를 받아서 이름과 얼굴을 필수적으로 숙지해 둔다. 즉, 베로니카의 생김새를 알고 있으면서도 엘레나를 보고 동일 인물이라고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 만에 누려보는 자유지?”

    엘레나는 잠시나마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리아브릭의 감시와 억압, 규제를 벗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도 편안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 또한 본연의 모습이 아닌, 루시아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서다.

    “착각하지 말자. 이건 자유가 아니야. 진짜 자유는 복수가 끝나야만 누릴 수 있어.”

    엘레나는 잠시 들떴던 감정을 추스르며 전야제 축제가 한창인 광장으로 발을 뗐다. 멀리서 볼 때도 밝았지만 광장 지척에 도착하고 보니 대낮처럼 환했다.

    전야제의 백미는 야시장이라는 말이 있다. 야시장을 직접 둘러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개수의 천막이 늘어서 각종 먹거리와 즐길 거리로 가득한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리는 인파를 뚫고 나아가던 엘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하필 앤이 저 앞에 서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제법 괜찮게 생긴 남자와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어색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전야제에서 막 만난 사이 같았다.

    ‘어쩌지?’

    워낙 사람이 많아서 몸을 빼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돌아가기가 여의치 않았다.

    ‘피하지 말자. 앤을 속일 수 없으면 언제고 들통이 나고 말 거야.’

    정면 승부를 택한 엘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앤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호호, 너무 재미있으시다.”

    입을 가리고 웃던 앤의 시선이 앞서 걸어오던 엘레나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

    채 일 초도 마주치지 않고 앤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외간 남자 앞에서 내숭을 떠느라 바쁜지 엘레나에겐 관심도 없어 보였다.

    휙.

    그렇게 앤을 지나친 엘레나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앤이 알아보지 못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서두르자.”

    엘레나는 서쪽 광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먹거리와 놀이가 주를 이루는 대로를 벗어나면 서쪽 광장이 나왔다. 그곳에는 이색적인 노점이 많았다.

    개중에는 예술학부 재학생들이 용돈 벌이라도 하고자 나와 재주를 파는 곳도 있었다.

    예술학부는 귀족의 차남이나 재주가 뛰어나 후원을 받아 입학한 평민, 장학생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이런 부수입을 필요로 하는 자가 많았다. 주 고객은 귀족 출신 재학생, 또는 여유가 있는 부유한 중산층이었다.

    유명한 화가의 초상화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싸 귀족이라도 한 점 이상 소유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실력은 있으나 아직 명성을 쌓지 못한 예술학부의 재학생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초상화를 의뢰하곤 했다.

    엘레나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애타게 한 남자를 찾았다. 이젤에 걸려 있는 도화지 너머로 예술학부 재학생들의 얼굴을 일일이 찾아보는 번거로움도 감수했다. 그 결과 엘레나는 학수고대 찾고 있던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보네.”

    멀찌감치에 서서 남자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은 회한에 젖었다. 정돈되지 않은 주황 머리, 유행이 지난 구닥다리 외알 안경에 설핏 보면 화가 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경직된 표정까지……. 아직 앳된 모습이었지만 엘레나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고객의 초상화를 그리느라 열을 올리는 다른 예술학부 학생들과 달리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는 인상 때문인지 유독 그의 앞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안다. 그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를.

    “좀 웃으시라니까. 그러니까 고독이 잘 어울린단 얘길 듣는 거예요, 라파엘 선생님.”

    황비 시절, 궁정 화가로 임명된 그는 엘레나의 그림 선생님으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갓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어린 화가가 황실이 인정하고 공인한 궁정 화가로 임명된 건 반향을 일으킬 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누구도 라파엘의 궁정 화가 선임에 반박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세간에 쏟아지던 그의 평가를 떠올렸다.

    수백 년간 이어온 그림의 맥을 바꾼 화가. 르네상스 시대를 연 선구자. 그 외에도 라파엘을 가리키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황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의 폭정이 심해지는 제국 땅에서 라파엘은 문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황제 폐하에게 눈이 팔려서…… 눈앞의 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몰랐지.’

    돌이켜 보면 엘레나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시안의 애정을 갈구했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예술적인 조예가 깊은 시안에게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부질없는 집착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물러나서 보니 한낱 그림 선생님쯤으로 여기던 이 남자가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제가 첫 손님인가요?”

    “아마도요. 저를 보고 편하게 앉으세요.”

    엘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라파엘을 볼 수 있도록 정면이 아닌, 사선으로 비스듬히 꺾어 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넉넉잡아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

    다른 화가가 들었다면 사기꾼이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것이다. 초상화는 족히 네 시간 이상은 공을 들여야 봐줄 만한 수준으로 완성할 수 있다는 게 정론이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토를 달지 않았다. 라파엘의 천부적인 그림 솜씨를 잘 알기도 했거니와 너무 빨리 그린다는 세간의 지적에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댁보다 빨리 그리지만, 이 그림엔 내 평생의 노력이 담겨 있소.”

    엘레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빨라서 좋네요. 가격은?”

    “정해진 액수는 없고. 그림을 보시고 지불하면 돼요.”

    라파엘이 밑그림을 위해 연필을 손에 들었다. 그의 시선이 이젤과 엘레나를 오갈 때마다 순백의 캔버스에 무수한 선이 그려졌다.

    엘레나는 미동도 없이 라파엘을 빤히 보았다.

    ‘이 사람을 얻어야 해.’

    전야제를 찾은 진짜 이유. 바로 라파엘을 그녀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지금이야 별 볼 일 없는 재학생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삼 년 뒤, 그가 그린 <천사의 타락>이 발표되며 제국의 예술계가 요동을 치게 된다.

    당연하게도 라파엘이 그린 그림은 천문학적인 금액에 거래되었고, 명화로 인정받던 그림들은 시대에 뒤처졌다면서 그 가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엘레나는 변화하는 미래를 사전에 대비할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서 라파엘과 계약을 맺어 그의 작품을 독점적으로 발표하고 매각할 권리를 갖고 싶었다.

    “완성됐습니다.”

    약속했던 두 시간이 지날 무렵 라파엘이 채색을 입히던 붓을 내려놓았다.

    “한번 보시겠어요?”

    “네, 보고 싶어요.”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나 라파엘의 등 뒤로 다가갔다. 캔버스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는 엘레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가 아는 그의 화풍이 아닌데?’

    화려한 색채도 그랬지만 과장되다시피 살린 여성스러운 느낌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구시대적 화풍의 특징인 미화가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이건 의뢰인의 비위를 맞춰 그린 그림이야.’

    그 자존심 강한 라파엘이 이런 그림을 그릴 거라곤 엘레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라파엘에게 초상화 의뢰를 맡긴 영애라면 열에 열은 만족했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감추고 장점은 살려 극대화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아뇨.”

    하나 엘레나는 일반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는지 담담하던 라파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까?”

    “제가 바란 건 이런 그림이 아니에요.”

    “…….”

    “이 초상화는 거짓말이에요.”

    엘레나가 캔버스에 담긴 자신의 초상을 지목했다.

    “저 안에 그려진 여자도, 또 이걸 그린 당신의 화풍도요.”

    “……!”

    엘레나가 화풍을 지적하자 무표정하던 라파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화풍은 화가 고유의 것이다. 그걸 걸고넘어졌으니 유쾌할 리가 없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나요?”

    “…….”

    “제가 보고 싶었던 건, 당신의 진짜 그림이었어요.”

    멈칫. 라파엘은 저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남에게 맞추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제가 담겨 있는 그림. 근데 제가 너무 과한 걸 바랐나 보네요.”

    신랄하기 짝이 없는 평가를 남긴 엘레나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이런 모습을 기대한 게 아닌데.’

    엘레나는 엘레나대로 속이 상했다. 기억 속 라파엘은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예술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사내였다. 작가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담기지 않은 그림은 아무리 잘 그려도 그림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황비 시절, 외형만 담으려던 엘레나를 매번 꾸짖을 정도로 자기만의 미학의 확고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내심 이곳으로 오는 내내 라파엘이 그려주는 초상화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차 있었다. 궁중 화가 시절보다야 못할 수도 있지만, 라파엘의 화폭은 보는 것만으로도 복수에 지친 심신에 진정제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보게 된 그의 그림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실력이 부족할 수도 있어. 아직 어리니까.’

    엘레나가 정말 화가 난 건 라파엘이 황궁에서 제게 했던 말과 달리 너무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남에게 잘 보여 팔기 위한 그림이라니. 이건 아니야. 심지어 남들 다 쓰는 화풍을 흉내 내고 있었어.’

    엘레나도 길거리 초상을 그리며 내면이나, 혼이 실린 만큼 좋은 그림을 그려주길 바라지 않았다. 대신, 조금이나마 진정성 있는 그림을 그려주길 바랐다.

    근데 라파엘이 가장 경멸을 하던 진심이 담기지 않는 그림을 지금 그가 그리고 있었다. 너무 실망스럽게.

    ‘오늘은 돌아가자.’

    복수를 위해 라파엘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라파엘은 멀어지는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다 라파엘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달려가 엘레나의 팔목을 잡았다.

    “앗!”

    엘레나가 당황하며 돌아보자 라파엘이 사납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이거 놔요.”

    “도대체 뭐기에 내 그림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건데?”

    엘레나는 팔목을 잡힌 채로 지지 않고 라파엘을 노려봤다.

    “말했잖아요. 적어도 당신의 진짜 화풍인지 아닌지, 진심으로 그린 것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다고.”

    “내 그림을 본 적도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안다고. 무슨 기준으로?”

    라파엘은 적잖이 흥분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하고 대중적인 화풍으로 의뢰자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넣어 그린 게 사실이었다. 그래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아직 미숙한 본인의 기법이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니, 못 그렸다. 아직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정체성을 완전히 세우지 못해서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런 라파엘의 그림이 가짜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마치 라파엘의 진짜 그림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하니까. 불편하니까. 억지스러우니까.”

    “……!”

    “대답이 됐죠? 놔요.”

    엘레나는 힘을 줘 거칠게 라파엘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어루만지며 눈을 흘기고 돌아섰다. 뒤늦게 자신이 흥분해 실수를 한 걸 깨달은 라파엘이 재빨리 말을 붙였다.

    “이거 하나만. 이름이 뭡니까? 좀 전의 일은 제가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그게 궁금해요? 그럼 그거까지 고민해 봐요.”

    감정이 상한 엘레나는 대답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떠났다.

    라파엘은 멀어지는 엘레나를 보면서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한 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엘레나가 남긴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아서였다. 한참을 굳은 채로 서 있던 라파엘의 입이 열린 건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난 뭘 그리고 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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