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5/30)
  • 제4장 가면

    “리브, 어때요? 잘 어울려요?”

    엘레나는 내일 탄신기념일 연회에서 입게 될 드레스를 미리 착용하고는 한껏 자랑을 했다. 리아브릭이 마지못해 대꾸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군요.”

    “양장사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예뻐서 만족스러워요.”

    엘레나의 요구대로 양장사 루센은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드레스를 가져왔다. 말이 은하수지 어깨부터 치맛자락까지 최고급 보석을 듬뿍 박은 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화려하면서도 조잡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녀, 이 드레스는 다음 연회에 입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리브?”

    “탄신기념일 연회는 프리드리히 가문을 연 초대 가주님을 기리는 경건한 행사예요. 아쉽지만 이번 연회에 입기에 이 드레스는 너무 화려해요.”

    리아브릭이 찬물을 끼얹자 엘레나는 울 것만 같았다.

    “어떻게 안 될까요, 리브? 이 드레스가 꼭 입고 싶은데…….”

    “제 말대로 하세요.”

    리아브릭은 더 이상은 그 얘길 꺼내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장롱에서 심플하지만 우아함이 느껴지는 드레스 한 벌을 꺼냈다.

    “양장사 루센이 초기에 제작한 드레스예요. 사이즈도 맞을 테니 이걸로 입으세요.”

    “…….”

    “공녀, 대답 안 하시나요?”

    리아브릭의 눈빛이 변했다.

    “네? 네. 그 드레스도 마음에 들어요. 그걸로 입을게요.”

    엘레나는 마지못해 그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남는 듯 드레스를 번갈아 보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애초에 입으려고 맞춘 드레스도 아니니까.’

    드레스에 장식된 보석을 떼어 처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굳이 이걸 연회에 입을 필요는 없었다. 리아브릭의 눈을 피해 운용할 종잣돈을 마련하면 그걸로 족했다.

    시녀 앤과 루나린을 방으로 들여 드레스를 바꿔 입었다. 또 단아한 스타일에 맞춰 구두와 장식도 모두 교체했다.

    “이제야 공녀께 어울리는 옷을 찾은 것 같네요. 장담컨대 내일 연회의 주인공은 공녀가 될 거예요.”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칭찬을 하며 리아브릭은 내일 연회에서 명심해야 할 사안들을 짚어주었다.

    첫째로 최대한 말을 아낄 것.

    둘째로 독자적인 행동을 금할 것.

    셋째로 절대 렌과 마주치지 않을 것. 부득이 마주친다면 피할 것.

    앞선 두 가지야 흘려들었다. 지금의 엘레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엘레나는 마지막으로 언급한 렌 바스타슈를 주목했다. 리아브릭이 굳이 충고하지 않더라도 그의 위험성은 잘 알고 있었다. 렌은 예측이 불가능한 남자다. 길들지 않는 하이에나 같은 남자랄까. 가짜라는 게 들통나는 순간 썩은 고기 한 점마저 빼앗고자 달려들 것이다.

    ‘딴 건 몰라도 개자식은 조심해야 해.’

    자칫 엘레나의 복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늘 가슴에 새기세요. 사소한 실수가 지금 누리는 전부를 잃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그럼 내일을 위해 일찍 쉬세요, 공녀.”

    리아브릭은 방을 나서기 직전까지 긴장을 불어넣었다.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엘레나는 다과를 내오라고 일렀다.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는데 정원 너머로 쉴 새 없이 저택으로 들어오는 마차가 보였다.

    “벌써 내일이구나.”

    엘레나가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으로 첫 데뷔를 한 날이다.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연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휴렐바드 경은 저기 마차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당혹할 법도 하건만, 휴렐바드는 얼음의 기사라는 위명에 걸맞게 표정 관리에 능숙했다.

    “제국에 귀족들이 참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게요, 참 쓸데없이 많죠.”

    휴렐바드가 말없이 엘레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낀 엘레나가 돌아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나요?”

    “죄송합니다.”

    질책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휴렐바드가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하면 계속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네?”

    “벌이랍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레이디의 변덕에 휴렐바드는 곤혹스러웠다. 엘레나는 홍차를 마시며 그런 반응을 즐겼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휴렐바드가 진심 어린 속마음을 꺼냈다.

    “……공녀 전하는 참 속을 알 수 없는 분 같습니다.”

    어떨 때는 속물적이고, 허영심 많고, 철없는 그 나이대의 귀족 영애를 보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때로 거역할 수 없는 권위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고귀함을 내보이기도 한다.

    “그거 칭찬인가요? 아니면 음흉하다는 욕인가요?”

    “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헤아릴 수 없는 분인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혹여라도 오해를 살까 둘러대는 휴렐바드를 보며 엘레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지은 적 없는 청아한 미소였다.

    “그럼 계속 노력해야겠네요. 속내를 훤히 읽을 수 있는 레이디라니, 매력 없다.”

    “…….”

    또다. 휴렐바드는 이해하기보다 그냥 그러려니 납득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에게 엘레나가 불쑥 누군가의 이름을 던졌다.

    “렌 바스타슈, 이 이름 들어본 적 있나요?”

    “대공가에서 독립한 방계, 바스타슈 가문의 후계자로 기억합니다.”

    엘레나가 끄덕였다.

    “완전 양아치예요.”

    “지금 뭐라……”

    “예의범절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남자죠. 아주 무례하고 상스러운.”

    양아치.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또 있을까.

    휴렐바드는 더없이 귀족다운 고고함을 보여주던 엘레나의 입에서 나온 저속한 단어에 말을 잃었다.

    “내일 저를 찾아올 거예요. 약속도 없이.”

    “……공녀 전하를 말씀입니까?”

    “경,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명심하세요. 그가 어떤 무례를 범하더라도 맞서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휴렐바드가 뜸을 들이다 되물었다.

    “명령입니까?”

    “네.”

    엘레나의 짧고 단호한 대답에 휴렐바드는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기사 된 도리가 아닌 듯싶어 입을 다물었다.

    “따르겠습니다.”

    순종적으로 그리하겠단 대답에 엘레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당신을 좀 더 숨겨놓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길.’

    인정하기 싫지만 렌은 강하다. 괜히 제국을 지탱하는 세 자루의 검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다. 그런 렌과 굳이 분란을 만들어 휴렐바드의 존재를 들킬 필요는 없다.

    “경,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휴렐바드가 턱을 내리며 눈을 맞췄다. 엘레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매혹적인 눈웃음이었다.

    “경은 저의 유일한 자랑거리랍니다.”

    “……!”

    주어가 빠진 칭찬에 휴렐바드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짐작하기로는 외모 때문인 것 같은데 기사의 의무를 떠나 외모로만 인정받는 것 같아 씁쓸했다. 혼자만의 오해인 줄도 모르고.

    * * *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프리드리히 가문은 연중행사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중에서 초대 가주이자 베실리아 제국의 개국공신 로제르트 공작의 탄신기념일은 가문 내 가장 성대한 행사로 취급받았다. 제국의 문을 연 영웅의 일원으로서의 공적과 가문의 성세를 이끈 공로를 칭송하며 대대손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자 함이다.

    안 그래도 가문 최대 행사이거늘, 올해는 그 규모가 더욱 성대했다.

    베로니카 공녀. 이 년 가까이 두문불출하며 악소문이 파다하게 깔린 그녀가 대공가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수도 전역에 퍼졌기 때문이다.

    제국 권력의 핵심이자 4대 가문의 수좌 프란체 대공의 슬하에는 외동딸 베로니카 공녀뿐이다. 여자도 작위의 상속이 가능한 만큼 베로니카 공녀는 명실공히 대공가의 후계자였다. 그런 그녀가 초대 가주 탄신기념일을 기해 사교계에 복귀한다고 하니 귀족들이 온 신경을 쓰는 것도 당연했다.

    공식적인 연회는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부터 몰려든 귀족들로 저택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다. 지금도 신원을 확인받고 저택 내로 들어오기 위해 대기 중인 귀족들의 마차 행렬이 수도의 가도를 따라 쭉 이어지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귀족들이 축하의 의미로 진상한 진귀한 선물이 수북하게 쌓이고 있었다. 진귀한 예술품이나 보석, 바다 건너 동양에서 건너온 최상품의 차, 북부의 실크 등 종류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선물들만 처분해도 웬만한 영지 하나쯤은 일시금으로 매입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시각. 한 귀족가 영식이 대공가 저택을 제집처럼 활보하고 있었다. 격식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셔츠 차림, 그것도 단추를 끝까지 채우지 않아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정리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반곱슬 머리에 남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 불어대는 휘파람까지. 분명 귀족인 것 같은데 귀족 같지 않은 모습이 더없이 반항적으로 보여 시선을 끌었다.

    “누구지?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귀족이겠지?”

    “그러지 않을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귀족치고 좀 불량스러워 보여.”

    “좀 삐딱하긴 하다.”

    귀족들을 맞이하는 별관이 아닌 본관을 자유롭게 누비는 사내를 보며 시녀들이 삼삼오오 떠들 때였다.

    시녀들을 지나쳐 걷던 사내가 갑자기 돌아섰다. 그가 눈에 힘을 주고 위협적으로 다가가자 시녀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이,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뭘 그리 대놓고들 수군거려? 기분 나쁘게.”

    “죄, 죄송합니다.”

    시녀들이 당황하며 사죄를 하곤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스윽.

    사내가 조용히 발을 뻗었다. 허둥지둥 앞서서 도망치던 시녀의 발이 걸리며 시녀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넘어졌다.

    “누가 가래? 험담을 들었더니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어요, 내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시녀들은 제 무릎이 까진 것도 모르고 거듭 사정했다. 괜히 귀족의 눈에 밉보여 쫓겨나거나 해코지를 당한 시녀를 수없이 봐왔기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용서해 줄까?”

    “제발, 자비를…….”

    “따라 해봐. 백부님은 개새끼다.”

    “네? 배, 백부님은 개새끼다.”

    시녀들은 이것저것 따지고 잴 상황이 아니었다. 용서를 해준다고 하니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읊었다. 사내가 흡족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훌륭해. 역시 요새 아랫것들은 배움이 참 빨라요. 가.”

    “감사합니다!”

    시녀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단 사실에 안도하며 서둘러 자리를 뜰 때였다.

    “아! 너희, 내 백부님이 누군지 모르지?”

    “네?”

    시녀들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돌아봤다. 사내가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시녀들은 충분히 알아들을 크기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내 백부가 이 저택의 주인이야. 다시 말해 너희 주인을 욕한 거다 이거지. 그것도 개새끼라고. 뒷감당 되겠냐?”

    “……!”

    시녀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시녀들의 주인이라면 프란체 대공 한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또 보자고.”

    죽을 것같이 괴로워하는 시녀들의 반응을 즐기던 사내는 휘적휘적 손을 저으며 복도를 거닐었다. 마치 제집처럼 저택의 구조를 꿰고 있는 사내가 최고급 대리석으로 치장된 문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사내가 철통같이 입구를 지키는 기사를 본체만체하며 문고리를 잡으려 들 때였다.

    “실례지만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신분을 먼저 밝혀주십시오.”

    기사 휴렐바드가 사내의 앞을 막으며 정중하게 요구했다. 당연히 거쳐야 할 통례건만, 사내는 절차를 지킬 의향이 없어 보였다.

    “나? 적어도 네가 함부로 말을 걸어선 안 되는 분이지.”

    “다시 여쭙겠습니다. 신분을 먼저…….”

    휴렐바드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기습적으로 쇄도한 사내의 주먹에 안면을 가격당한 그의 고개가 휙 돌아가 버렸다. 뺨이 시뻘겋게 부어오른 휴렐바드를 보며 사내가 히죽 비웃었다.

    “그러니까 왜 사서 매를 벌어?”

    사내가 문고리를 쥐고는 막 문을 열려던 때였다.

    “다시 여쭙니다. 신분을 밝혀주시죠.”

    휴렐바드는 사내가 절대 문을 열 수 없도록 막아섰다.

    “이봐, 별것도 아닌 일에 왜 목숨을 걸고 그래? 짜증 나게.”

    사내가 눈썹까지 흘러내린 머리를 이마 위로 넘겼다.

    “다시 여쭙니다. 신분을 밝히십…….”

    휴렐바드의 말보다 빠르게 사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전에 쳤던 반대쪽 뺨을 향해 휘두르는 동작은 군더더기가 없이 기민했다.

    퍽! 둔탁한 타격음이 살벌하게 퍼졌다.

    “호오.”

    그러나 놀랍게도 사내의 주먹은 휴렐바드의 안면에 닿지 못했다. 휴렐바드의 오른손이 사내의 주먹을 꽉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사내의 주먹과 그걸 잡은 휴렐바드의 손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우열을 겨뤘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사내의 눈빛에서 길들지 않는 야수성이 흘렀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날 때려눕혀. 그럼 알려줄게.”

    “…….”

    “왜, 별로야? 아! 아까 한 대 맞아서 그러냐? 그럼 공평하게 나도 한 대 맞고 시작하자. 어때?”

    사내는 순간을 즐기듯 시비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이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큰 행사일인 것도 잊은 듯 휴렐바드를 어떻게 망가뜨릴지만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경, 물러나세요.”

    잘 벼린 칼처럼 곤두선 긴장을 한순간에 풀어버린 건 부드럽지만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실린 목소리였다. 굳게 닫혀 있던 대리석 문이 활짝 열리며 엘레나가 걸어 나왔다. 단정하지만 기품 있게 올린 머리와 단출하지만 품위 있어 보이는 드레스 차림은 격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여전히 무례하네요, 렌 오라버니.”

    엘레나의 말에 가시가 돋았다.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시선에서 독기가 느껴졌다. 사내의 이름을 들은 휴렐바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레나에게 언질을 받았던지라 막연하게 이자가 렌 바스타슈일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은 자를 안으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비롯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이야,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나네. 이게 몇 년 만이지? 이 오라버니 생각은 많이 했고?”

    “어떻게 안 하겠어요? 만날 때마다 이런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차갑게 대꾸하며 엘레나가 눈짓했다. 휴렐바드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는 힘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며 이런 사태를 만든 것에 사죄를 청했다.

    “죄송합니다, 신원만 확인한다는 것이 그만…….”

    “알아요. 렌 오라버니가 무례하게 굴었겠죠.”

    최대한 렌과 엮이지 않길 바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엘레나는 렌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며 말했다.

    “여기 계속 서서 얘기할까요, 안에서 얘기할까요?”

    “그걸 말이라고. 앉자고, 우리.”

    돌아선 엘레나를 따라서 렌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문 앞을 지키는 휴렐바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을 긁었다.

    “네 레이디께서 화가 많이 났네? 그러게, 진작 일 좀 잘하지 그랬어.”

    “…….”

    도발에도 불구하고 휴렐바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무시했다. 그런 평정심에 렌은 ‘호오’ 하고 작게 감탄사를 흘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엘레나와 렌이 마주 보며 소파에 앉았다.

    “좀 다정하게 쳐다보지 그래? 육촌끼리.”

    “더 다정하게 보면 오해받을 텐데? 육촌끼리.”

    엘레나의 화법이 변했다. 존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반말로 맞받아쳤다.

    “어쭈, 말도 놓네?”

    “못 놓을 이유가 없잖아?”

    날이 선 대화가 심상치 않게 오갔다. 육촌이라는 굴레로 묶여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

    ‘기죽을 필요 없어. 난 공식적으로 베로니카 공녀야. 그리고 개자식의 습성도 훤히 꿰고 있잖아?’

    양아치는 상대가 자기보다 약자라고 인식한 순간 피를 말려 죽일 때까지 괴롭힌다. 그게 절대 변하지 않는 양아치의 습성이다. 엘레나는 누구보다 렌을 잘 알고 있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시달렸으니까.’

    렌은 엘레나가 대역임을 눈치챈 순간부터 집요하게 괴롭혔다. 대공가의 주요 정보나 계획을 말하지 않으면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더 이상 너에게 휘둘리지 않아. 이제부터 내가 널 이용하겠어.’

    렌은 분명 대공가에 적의를 품고 있었다. 백년조약으로 인해 대공가의 종처럼 지낼 수밖에 없는 바스타슈 가문의 후계자로서는 당연히 가지는 묵은 감정이었다. 엘레나는 그 적의를 교묘하게 이용할 참이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렌은 유용한 패가 될 것이다.

    “이야, 박수!”

    렌이 손뼉을 쳤다.

    “이봐, 육촌 누이가 이렇게 잘 컸는데 내가 어떻게 축하를 안 해.”

    “용건만 말하지?”

    “우리 얼굴 맞대고 앉은 지 삼 분은 됐냐?”

    “그 삼 분도 참기 힘드네?”

    엘레나는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렌은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엘레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훑었다. 소름이 끼치는 눈길이었다.

    “많이 아팠다고 들었는데, 꽤 멀쩡하다?”

    “다 나았으니까.”

    엘레나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렌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탄신기념일 시기에 맞춰서 완치가 됐다? 꼭 퍼즐 맞추기처럼.”

    “별걸 다 시비네.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대?”

    렌의 말투에서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느끼긴 했지만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일이 신경을 쓰다간 제 페이스를 잃고 휘둘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관심이 없게 생겼어? 너나, 밖에 있는 저 친구나.”

    “……!”

    턱짓으로 문밖의 휴렐바드를 가리키자 엘레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잘생겨서 뽑았다더니. 육촌 누이의 취향을 이제야 알아버렸어요, 내가.”

    “알았으면, 뭐라도 보태주게?”

    “암, 보태줘야지. 쟤, 내가 찍었거든.”

    “뭐?”

    렌이 피가 몰린 듯 빨갛게 부은 손을 보였다.

    “아직도 얼얼해.”

    “그래서?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나 봐?”

    “이봐, 이봐. 시치미 뚝 떼는 거.”

    렌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얼핏 나른하면서도 권태로워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맹수의 집요함이 느껴졌다.

    “말장난은 그쯤 하는 게 어때? 알겠지만, 이 오라버니가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잖아.”

    “……!”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렌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흘렸다. 엘레나는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다 못해 숨이 턱 막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버텨야 해.’

    이를 악문 엘레나의 바로 앞에 선 렌이 손을 뻗어 엘레나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사랑하는 누이를 영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너 되게 낯선 거 아냐?”

    “언제 우리가 웃으며 대화할 사이였던가.”

    “큭, 그건 또 반박을 못 하겠네.”

    “이 손 치우지?”

    경고성과 달리 엘레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싫다면?”

    렌이 이죽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엘레나의 눈높이 바로 앞까지. 서로의 숨소리마저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맞닿았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엘레나는 꾹 눌러 참았다. 렌이 제아무리 망나니고 양아치더라도 엘레나를 함부로 어쩔 수는 없다. 고작 해봐야 이런 협박이 다다.

    스윽.

    렌의 손길이 턱을 지나 볼을 스쳤다. 소파의 등받이에 닿은 손은 방향을 돌려 엘레나의 목덜미를 뱀처럼 감았다.

    “……손 치우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렌은 더 가깝게 엘레나에게 밀착했다. 엘레나의 뺨에 닿을 듯 얼굴을 가져가더니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줘 강하게 끌어안았다. 엘레나는 원치 않게 렌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형상이 됐다. 반대로 렌의 고개는 엘레나의 뺨을 지나쳐 귓바퀴 뒤쪽을 향해 있었다.

    “……!”

    귀 뒤를 본 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찰나의 머뭇거림에 엘레나는 확신했다.

    ‘역시, 상처를 미리 만들어두길 잘했어.’

    엘레나는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 이미 예상했다. 안가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일부러 귀 뒤에 상처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걸로 가짜라는 의심은 피할 수 있게 됐어.’

    엘레나가 바라던 결과를 이뤘다고 봐도 무방하다. 렌의 의심을 배제하는 것만으로도 복수의 완성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볼 수 있었다. 대역이 아니라 진짜 베로니카 공녀라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된 이상 렌의 이상행동에도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치우란 말 안 들려!”

    엘레나가 거칠게 밀어내자 렌도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예상과 어긋난 까닭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있었지만 렌은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어수룩한 사내가 아니었다. 엘레나가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선은 지키지?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오, 무서운데?”

    렌이 으쓱하며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갑자기 얼굴을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깝게 들이밀었다. 순간적으로 이렇게 다가올 줄 몰랐던 엘레나가 저도 모르게 놀라 헛숨을 삼켰다.

    “너무 자극하지 말라고. 확 선을 넘어버리기 전에.”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엘레나도 지지 않고 노려봤다. 대역이란 걸 들키지 않는 이상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눈싸움에서 렌이 먼저 몸을 빼며 물러났다.

    “그러네? 내가 그 생각을 안 해봤네.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겠다.”

    “기왕 할 거면 나가서 할래?”

    엘레나가 가느다란 검지로 문 쪽을 가리키자 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가라는데 가드려야지.”

    렌은 과장되게 인사를 하더니 돌아섰다.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문이 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닫혔다.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렌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

    엘레나의 작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온몸의 기운이 쫙 빠지고 삭신이 쑤셨다.

    “개자식.”

    엘레나는 백번도 더 내뱉고 싶던 말을 육성으로 뱉었다. 비록 면전에서 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지르고 나니 후련했다.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큰 바위 하나를 치운 기분이랄까.

    “고비는 넘겼어. 이제 앞일만 생각하자.”

    그 시각. 렌은 계단을 내려와 연회장이 있는 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상해. 생각할수록 이상하단 말이지.”

    본관의 내부 구조를 꿰고 있는 듯 렌의 발길은 사고(思考)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분명 독에 중독되었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렌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깊었다.

    “대체 무슨 수로 깨어났지?”

    그 독은 한번 중독되면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겨우 독성이 퍼지지 않게 막을 수는 있지만 그게 한계였다. 독성을 멈추자면 온종일 잠을 자야만 했다. 살아 있되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해독제를 찾은 건가?”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베로니카가 너무도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렌이 시뻘겋게 부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잘생기기만 한 건 아니다 이거지?”

    렌이 불시에 날린 일격임에도 불구하고 휴렐바드는 그걸 받아냈다. 또 렌의 주먹을 힘으로 억누르는 모습까지 보였다. 일개 기사 나부랭이의 실력이 아니었다. 정확한 실력은 검을 맞대기 전까지 알 수 없겠지만 강자임이 틀림없었다.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렌이 히죽 웃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 * *

    대공가의 별관을 단순한 별관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제국 황실 주관 행사가 열리는 사루비아 별궁보다 더 크고 위용이 넘친다. 그런 별관에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많은 귀족이 들어찼다.

    내부 홀만으로는 턱없이 공간이 부족한 터라 유리 가벽을 터서 외부 분수대를 연회장으로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다. 새삼 황실 위에 대공가란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했다.

    엘레나는 이 층 대기실 창가에 서서 축하차 방문한 귀족들을 내려다봤다. 황태자비로 황궁에 머물며 적지 않은 국가 행사를 치렀건만 지금 대공가에서 펼쳐지는 것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연회는 보지 못했다. 대공가의 위세가 황실보다 위에 있다는 게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프란체 대공.”

    엘레나는 홀의 주인이자 이 연회장의 주최자인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봤다. 그의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은 귀족이 모여들어 아부와 아첨을 이어가며 인연을 쌓고자 발악을 하고 있었다.

    “기다려. 언젠가 당신을 끄집어 내릴 테니까.”

    끼익.

    대기실 문이 열리며 리아브릭이 들어왔다.

    “시간 됐네요. 곧 축하사니 내려가죠.”

    “리브, 저 떨려요.”

    엘레나가 몸을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제가 뒤에 서 있을 거예요. 곤란한 일이 있으면 나설 테니까, 긴장 푸세요.”

    “네, 리브만 믿을게요.”

    “이제 내려가죠.”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리아브릭이 방 밖으로 신호를 줬다. 앤과 루나린이 재빨리 들어와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거울을 보며 마지막 채비를 마친 엘레나가 대기실 밖을 나와 홀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다. 모퉁이에 위치한 사각지대다 보니 홀에서는 위층의 엘레나가 보이지 않았다.

    홀에서 교향곡을 연주하던 지휘자에게 시녀가 다가가 뭐라고 떠들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를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곡을 바꿔서 다시 힘차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곡은 <찬란한 밤>. 여왕의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찬양하는 곡으로 바이올린과 첼로의 선율이 돋보였다.

    “베로니카 공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장내의 진행을 맡은 집사의 힘 있는 외침에 연회장의 사람들이 숨죽이며 이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또각또각.

    대기하고 있던 엘레나가 모퉁이를 돌아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도도하게 살짝 든 턱, 특유의 권위적인 눈빛과 대공가의 상징적 금발.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는 드레스마저 돋보이게 만드는 우아한 걸음걸이는 일견에 귀족들의 시선을 빼앗아 버렸다.

    누구도 그녀가 대역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도 닮았으니까. 심지어 황비의 위까지 올랐던 엘레나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베로니카 본인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의 품격이 느껴졌다.

    짝, 짝짝.

    연주 외에는 적막으로 가득한 홀 안에 귀족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대부분 대공가에 줄을 댄 귀족이다 보니 베로니카 공녀의 귀환을 반겼다.

    그간 베로니카 공녀의 두문불출을 두고 악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일개 소문에 흔들릴 대공가가 아니었지만, 베로니카의 부재가 길어지다 보니 프란체 대공의 후계를 두고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방계에서 독립한 바스타슈 가문은 작위의 세습이 가능한 만큼 권력 구조에 변동을 가져올 가능성도 컸다. 오늘 엘레나의 건재함은 그런 우려를 일시에 불식시킬 것이다.

    “왔느냐?”

    프란체 대공이 마지막 계단 앞으로 다가와 에스코트했다.

    “네, 아버님.”

    엘레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옅게 웃었다. 제법 그럴듯한 엘레나의 연기에 프란체 대공도 흡족했다. 부녀가 연회장의 귀족들을 바라보며 단상에 나란히 섰다. 대공의 손에는 시녀들에게 건네받은 칵테일 잔이 쥐어져 있었다.

    프란체 대공은 따뜻한 시선으로 엘레나를 보며 좌중에 말했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지금의 프리드리히 가문을 있게 해주신 기념일에 저뿐만 아니라 소중한 제 여식도 함께 감사의 뜻을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귀족들이 박수를 보냈다. 프란체 대공이 칵테일이 든 잔을 들어 보였다.

    “또 여기 모이신 귀족분들의 덕이 있어 선조이신 로제르트 공작께서 일구신 지금의 프리드리히 가문을 더욱 번성케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 함께 잔을 들어 추모합시다. 로제르트 공작을 위하여!”

    “위하여!”

    귀족들이 일제히 칵테일 잔을 높이 들어 보이며 후창했다. 그러며 잔을 비우는 것으로 축하사는 끝을 고했다. 그것은 곧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니 적당히 있다 들어가거라.”

    프란체 대공은 딸을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귀족들에게 보여줌과 동시에 건강을 핑계로 베로니카 행세가 서툰 엘레나가 일찍 연회장에서 빠질 수 있도록 핑곗거리를 남겼다.

    “네, 아버님.”

    엘레나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순종적인 딸을 연기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사전에 얘기된 전개이기에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제부터 내 시간이야.’

    엘레나는 공국을 떠나기 전부터 단 일 분의 시간도 허투루 쓴 적이 없었다. 특히 대공가로 온 직후부터는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엘레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려 대공가가 주관하는 연회다. 탄신기념일 연회는 제국 내의 난다 긴다 하는 귀족이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모이는 날이었다. 정략적인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귀족들이 친분을 쌓거나 자식의 혼인 상대를 물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엘레나는 이 점을 십분 활용할 참이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엘레나가 힐끗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리아브릭이 찰거머리처럼 찰싹 등 뒤에 붙어 있었다. 여차하면 나서서 그녀를 통제하고자 함이다.

    ‘먼저 리아브릭을 떼어놓아야 일이 수월할 텐데.’

    엘레나는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괜히 성급하게 굴다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공녀 전하께 인사 올려요. 세레나 윌리엄스라고 해요.”

    “저 데이지인데, 공녀 전하께서 저를 기억하시려나요?”

    “못 보던 새에 어떻게 이리 아름다워지실 수 있죠?”

    눈 깜짝할 사이에 엘레나의 주변을 귀족 영애와 영식들이 겹겹이 에워쌌다. 하나같이 엘레나에게 말을 붙이고 호감을 쌓고 싶어 혈안이 된 족속들이었다. 엘레나가 미소로 대응했다.

    “윌리엄스 백작 슬하에 어여쁜 영애가 있음을 익히 들었어요. 직접 보니 더 아름답네요.”

    “아, 절 알고 계시다니.”

    엘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데이지를 어찌 잊겠어요?”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럼요.”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란 명성을 가졌던 엘레나는 그에 걸맞게 다수를 침착히 상대했다.

    ‘리아브릭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만.’

    그러면서도 엘레나는 너무 노련하게만 보이지 않게 종종 어수룩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그랬었나요?”

    “어? 혹시 그때의 말씀을 기억 못 하시는지?”

    “그…… 그게…….”

    엘레나가 당황한 티를 내자 묵묵히 뒤를 지키고 있던 리아브릭이 나섰다.

    “공녀 전하께서는 그 얘기를 잊은 듯하네요. 자꾸 같은 얘길 꺼내는 건 무례 같습니다만.”

    “죄, 죄송해요. 저는 그저…….”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 담소를 나누려던 영애는 리아브릭의 기세에 눌려 찍소리도 못 하고 물러났다.

    그러던 와중, 엘레나를 감싸고 있던 무리가 바닷물이 열리듯 갈라졌다. 그 너머에서 단발머리의 여성을 필두로 한 무리가 엘레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벨라.’

    대공가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4대 가문으로 일컫는 라인하르트 가문의 장녀다. 정치적 감각과 식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비인 크롬 공작을 닮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교계에 굉장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었다.

    지난 이 년간 베로니카가 부재한 틈을 타, 그녀를 따르던 영애들을 모조리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향후 엘레나와 사교계 주도권을 놓고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황태자비 선임 최종심에 올라 경쟁을 하기도 했다. 여러 의미로 앙숙이랄까.

    “언니, 이게 얼마 만이에요?”

    아벨라는 너무나 친근하게 아는 척을 해왔다. 가식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반가워하는 표정에서 어린 나이지만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노련함이 느껴졌다.

    ‘그래봐야 아직 어린애 수준이지만.’

    엘레나는 아벨라의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다.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파벌을 구축했지만, 엘레나에게는 무참히 짓밟혔던 아벨라였다. 하니, 지금의 아벨라는 엘레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벨라, 이게 얼마 만이야?”

    엘레나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피붙이를 만난 듯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그러니까요. 제가 얼마나 언니를 걱정했는지 모를 거예요.”

    “내가 왜 모르겠어? 아벨라가 아팠다면 나 역시 그랬을 거야.”

    엘레나는 노련하게 맞받아쳤다. 네가 진심으로 그럴 리가 없을 테니, 같은 상황이라면 나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돌려 한 것이다.

    “이제 자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고말고.”

    “잘됐네요! 언니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은 영애가 많아요.”

    아벨라가 슬그머니 몸을 틀며 뒤에 따르는 무리를 자랑하듯 보였다. 개중에는 베로니카를 잘 따른다던 영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치해.’

    엘레나는 아벨라의 애들 같은 자랑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벌써 기대되네.”

    “저도요. 그러면 언니, 학술원도 다시 나오시는 거예요?”

    엘레나는 잠시 말을 아꼈다.

    프론티어 학술원. 명실상부 대륙 최고, 최대 규모의 아카데미다. 제국의 귀족 자제나 군소 왕국의 왕족 혹은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졸업하길 희망하는 곳으로 그 역사가 길고 교육 수준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

    제국을 이끄는 인맥의 장이 완성되는 곳이기도 하며, 타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학술원의 졸업을 엘리트 코스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 명성이 어찌나 확고하고 드높은지 로이에르 왕국의 룬 아카데미가 감히 미치지 못했다.

    ‘리아브릭, 슬슬 나서야지?’

    엘레나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며 리아브릭에게 대답을 미뤘다.

    “공녀 전하께서는 학술원에 복학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리아브릭이 대신 대답하자 아벨라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웃었다.

    “정말요? 저 기뻐요. 그럼 언니, 우리 학술원에서 자주 볼 수 있겠어요.”

    “그러게?”

    별반 의미 없는 대화에 엘레나가 형식적으로 대답할 때였다.

    “앗! 뭐예요!”

    아벨라가 이끄는 무리의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당연하게도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고만고만한 영애들의 머리 위로 반곱슬 머리의 사내가 이죽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 바스타슈 영식?”

    “못생긴 얼굴 좀 치워줄래?”

    렌은 시비조로 비아냥거리더니 영애를 거의 밀치다시피 하며 다가왔다. 무례를 참지 못한 영애가 표독스럽게 노려봤지만 렌의 살벌한 미소에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삭였다.

    “무슨 얘길 나 빼놓고 그리들 재미있게 해? 서운하게.”

    렌이 끼어들자 아벨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망나니와 엮여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언니, 저 이만 가볼게요.”

    아벨라는 서둘러 물러났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격이랄까. 리아브릭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굳히며 긴장하는 게 보였다. 모략가인 그녀가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부류가 렌 같은 유형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인간은 없다. 자칫 엘레나가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면 대역으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리아브릭은 그런 최악의 사태를 막고자 했다.

    “뭐야, 나 미움받은 거야?”

    렌이 훌쩍 가버리는 아벨라를 보며 상처받은 시늉을 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누이마저 오라버니한테 매정하게 굴진 않겠지?”

    ‘아무렴.’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엘레나의 대답에는 부정이 아닌 긍정의 대답이 실려 있었다.

    ‘네가 오길 기다렸지.’

    놀랍게도 엘레나는 불쑥 난입한 렌을 반가워했다. 아까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던 때가 거짓말인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니 너도 쓸모 있을 때가 있더라고.’

    엘레나의 시선이 힐끗 리아브릭에게 향했다. 엘레나는 렌을 이용해서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리아브릭을 떼놓을 계획이었다.

    “……외면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네요.”

    “그지. 우리가 좀 돈독한 육촌 간이어야지.”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렌은 신이 나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깊이 생각을 해봤거든? 어떻게 하면 확 선을 넘어버릴 수 있을까.”

    “궁금하네요. 해봐요.”

    엘레나는 능청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런 반응이 더없이 재밌는지 렌의 이죽거림이 더욱 진해졌다. 그 미소에서 불안감을 느낀 것일까. 렌이 돌발 행동을 취하기 전에 리아브릭이 먼저 움직였다.

    “실례지만 잠시…….”

    “네가 낄 자린 아니지. 가족 간의 일인데.”

    렌은 살벌한 경고를 날리기가 무섭게 엘레나의 손을 낚아챘다. 레이디를 향한 존중 따위는 결여된 아주 무식하고 우악스러운 행동이었다.

    “한 곡 추자.”

    “뭐, 뭐라고요?”

    엘레나는 당황한 척 굴며 리아브릭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순식간에 벌어진 렌의 돌발 행동을 막기엔 이미 늦었다. 엘레나는 마지못해 렌에게 이끌려 가듯 홀 중앙까지 나왔다. 강제성이 반, 자의가 반 섞인 행동이었다.

    렌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귀족들이 적잖이 분노했다.

    “저, 저게 뭐 하는!”

    “바스타슈 영식은 정말이지 글렀군.”

    “공녀께 저러고도 살길 바라는 걸까요?”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렌을 비난했다. 그러나 면전에 나서서 렌을 꾸짖거나 말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독립했다곤 하나 바스타슈 가문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프리드리히 대공가였다. 핏줄로 이어진 두 가문의 관계다 보니 나서기 쉽지 않았다.

    홀 중앙부에 다다른 렌이 손을 놓아주었다. 엘레나가 노려보자 히죽 웃은 렌이 과장된 손짓으로 춤을 신청했다.

    “여기까지 나왔는데 계속 서 있으면 섭섭하지. 한 곡 추자.”

    “…….”

    “물론 거절은 안 돼.”

    엘레나는 장난기를 잃지 않는 렌을 지그시 응시했다. 같은 상황이지만 지난 삶과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대역이라는 걸 들킨지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젠 상황이 변했다. 엘레나는 끌려 나온 것처럼 보였지만 자발적으로 걸어 나왔다. 렌에게도 또 리아브릭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판을 리드했다.

    “싫다면?”

    “강제로 추게 해야지.”

    “뭐?”

    렌은 잠시 자유롭게 놓아주었던 엘레나의 손을 재빨리 낚아챘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몇 번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파.’

    엘레나는 밀려드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렌은 한 손으로 엘레나의 손을 꽉 쥐고, 다른 한 손은 엘레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싼 뒤 왈츠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꼭 실에 걸린 인형처럼 엘레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그림이 되어버렸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지?”

    엘레나는 가깝게 느껴지는 렌의 숨소리에 진저리 치며 물었다.

    “네가 베로니카니까.”

    “그게 이유라고?”

    “더 근사한 이유가 필요해?”

    “…….”

    엘레나는 렌 특유의 이죽거리는 미소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베로니카를 향한 순수한 증오.’

    백년조약으로 인해 바스타슈 가문은 대공가를 위한 마부로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제국의 검이라 불릴 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렌으로서는 족쇄나 다름없는 대공가의 가문을 이을 베로니카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꼬락서니하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렌은 귀를 의심했다. 평민도 아니고 고귀한 베로니카의 입에서 나오기에 너무 천박한 단어였다.

    “한심해서 투정도 더 못 받아주겠네.”

    “이야. 얘가 또 내 성질을 긁네.”

    “불만이면 물어.”

    엘레나는 의도적으로 렌이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도발했다. 반응은 바로 왔다. 렌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그걸 말해줬다. 심리적인 영향인지, 렌의 동작이 무뎌지고 박자가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내가 물면 너랑 백부는 죽어.”

    “그러니까 물어. 자신 있으면 물어보라니까?”

    엘레나는 도발로 렌의 심리를 계속 흔들며 음악에 뒤처지고 있는 박자를 맞추기 위해 스텝을 밟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참 간사해서 엘레나가 박자에 맞추며 호응하고 있음에도 렌은 분노에 잠식되어 그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는 사교춤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을 만큼 능숙했다. 리아브릭이 보고 있는 까닭에 제 실력을 다 발휘할 순 없지만, 상대의 흐름을 빼앗아오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물며 정신이 딴 데 팔린 파트너라면.

    그렇게 렌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엘레나에게 페이스를 넘겨주고 있었다.

    “네가 돌았구나?”

    “돈 건 너고. 네가 왜 못 무는지 내가 말해줘?”

    엘레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스텝에 집중했다. 조금씩 빼앗아온 춤의 균형은 어느새 동등한 파트너의 입장이 되어 합을 맞추고 있었다.

    “넌 뼛속까지 마부거든.”

    “……!”

    엘레나는 도발을 넘어서 렌에게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악마같이 살벌한 표정을 짓는 렌의 눈동자에 살기가 서렸다.

    “네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헉!”

    순간적으로 스텝이 꼬이는 걸 느낀 렌이 숨을 삼켰다.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해서 겨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미 X자로 엉켜 버린 다리는 언제 넘어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위태로웠다.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엘레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의 렌을 체중을 실어서 있는 힘껏 밀었다.

    “어? 어!”

    균형을 잃은 렌이 비틀거렸다. 악착같이 버텨보려 했지만 엘레나가 재빨리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며 하체의 균형마저 무너뜨리자 더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렌은 홀 한가운데서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저기 봐요. 바스타슈 영식이 넘어졌어요.”

    “풉, 무례함에 비해 춤 실력은 별로인가 본데요?”

    “아, 속이 다 시원하네.”

    평소 렌의 언행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귀족들은 대놓고 비웃으며 힐난했다. 춤과 예법을 중요시하는 귀족에게 연회 중에 저지른 실수는 두고두고 비웃음을 살 빌미가 됐다.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당한 게 많다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했다. 엘레나는 넘어져 있는 렌을 내려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에 대한 존중이 없는 네게 딱 어울리는 모습이야.”

    “크…… 크큭.”

    어처구니가 없어 엘레나를 올려다보던 렌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가 않네.”

    한 방 먹고 제대로 망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렌은 웃음 띤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일어났다.

    “또 보자고.”

    렌은 휙휙 손을 젓더니 엘레나에게서 점차 멀어졌다. 그러다 앞길을 막는 영애에게 ‘비켜’라고 날려주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엘레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리며 리아브릭을 찾았다. 홀 정 가운데를 기점으로 정확히 왼편, 아벨라 무리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 안심한 엘레나가 서둘러 누군가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 저쪽에 서 있는 걸 봤는데…… 아! 저기 있다.’

    엘레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운이 따랐는지 엘레나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홀 오른편 끝자락에 그녀가 서 있었다.

    ‘마담 드 플랑로즈.’

    그녀의 이름을 되뇌자 수식어처럼 따라오는 말들도 떠올랐다.

    우아함의 극치. 

    레이디 중의 레이디.

    귀족의 표본.

    놀랍게도 이 수식어가 모두 마담 드 플랑로즈 한 사람에게 붙었다. 아첨과 아부를 경멸하며 정직하고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그녀는 사교계의 존중을 받는 절개의 상징이다. 파벌을 만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애와 귀부인이 존경하며 따르는 그녀는 명실상부한 사교계의 어른이었다.

    ‘당신에게 받을 게 있어.’

    엘레나는 렌을 이용해서 리아브릭을 떼어내고 겨우 얻어낸 자유와 시간을 마담 드 플랑로즈에게 쏟아부을 계획이었다.

    엘레나가 몸을 틀더니 리아브릭이 있는 곳과 반대편 측면으로 걸어 나왔다.

    “……!”

    당연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올 거라 생각하고 있던 리아브릭이 당황했다.

    ‘혼자 둬서는 안 돼.’

    리아브릭이 다급해졌다. 조금 전 렌의 사태는 그녀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나서기가 애매했다. 또 렌이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위인이던가. 기사들을 불러들이자니 사태를 너무 키우는 것 같아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과 달리 별다른 사고 없이 넘어간 것 같아 내심 마음을 놓던 터였다. 물론 자세한 얘긴 엘레나에게 묻고 대처를 해야겠지만.

    그런데 그만 엘레나를 놓치고 말았다. 리아브릭은 다급하게 엘레나를 쫓고자 했으나 녹록지가 않았다. 우선 홀의 크기가 너무 커서 반대편까지 너무 멀었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 중앙 홀을 가로지르면 모르겠지만 그건 무리였다. 결국 원을 그리듯 돌아서 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한 가지 장애물이 더 남아 있었다.

    “리아브릭 자작, 그간 잘 지냈는가?”

    “레이디,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대공가의 실세 리아브릭에게 줄을 대려고 발악하는 어중이떠중이 귀족들이다.

    그 시각. 엘레나가 중앙 홀에서 내려오길 기다리던 영애들이 득달같이 접근했다.

    반대편에 주로 수도 귀족과 자제들이 있던 것과 달리 이쪽은 지방 출신 영애와 영식들이 주를 이뤘다. 어떻게든 중앙 정계에 끈을 대고자 하는 지방 귀족에게 베로니카 공녀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잡아야 할 동아줄이었다.

    “공녀 전하, 제 속이 다 시원했어요.”

    “어쩌면 미모만큼이나 춤도 잘 추시는지 모르겠어요.”

    “장차 사교계를 이끌어 가실 분은 공녀 전하가 분명해요.”

    저마다 아첨과 아부를 일삼으며 엘레나의 눈에 들고자 발악했다. 엘레나를 위해 바닥이라도 길 수 있을 만큼 비굴했다.

    ‘한때는 나도 이런 아첨과 아부를 즐겼지.’

    저들에게 있어 베로니카 공녀는 아득히 먼, 손이 닿지도 않을 정상에 있는 귀족이다. 감히 같은 귀족이라는 범주에도 묶을 수 없는 존재를 바라보는 동경 너머에는 질투와 부러움, 시기도 있었다.

    지난 삶의 엘레나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저들의 시선을 만끽했다. 심지어 저들의 질투와 시기마저도 한낱 유흥으로 여겼다. 베로니카 공녀는 그런 위치에 있는 여자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사교계가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엘레나는 철없던 그 시절을 후회했다. 그런 허상과 허영심에 취하지 않았다면 그리 비참하게 이용만 당하고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작 깨달았다면…… 이안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련만.’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안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와 울컥하게 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예고도 징조도 없이 떠오르는 자식이란, 납덩어리보다 무거운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했다. 자식을 잊는 부모는 없다는 소설의 한 구절이 더없이 와닿았다.

    ‘그만.’

    엘레나는 겨우 복받치는 감정을 추슬렀다. 조금만 늦었어도 촉촉해진 눈가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을 것이다.

    ‘앞만 보자. 앞만.’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앞길을 막는 이 어중이떠중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엘레나는 알랑방귀를 뀌는 영애들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그게…… 헛!”

    열정적으로 아첨하던 영애는 입만 뻥긋거릴 뿐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엘레나의 은근한 미소를 마주하자 함부로 말을 걸 자신이 없어졌다. 감히 거역하지 못할 미소. 그건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영애들도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또각또각.

    엘레나가 흠잡을 것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아가자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영애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비켜섰다. 그렇게 나아간 엘레나의 발길은 한 귀부인의 앞에 다다라서야 멈췄다.

    “언젠가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인 것 같네요. 반가워요, 마담 드 플랑로즈.”

    엘레나는 아주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예법의 표본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완벽한 인사였다.

    “저 역시 인사를 나눌 날을 기다렸답니다, 공녀 전하.”

    갑작스러운 엘레나의 인사에 당황한 내색도 없이 마담 드 플랑로즈는 품위 넘치는 언행으로 인사를 받았다.

    “어머.”

    겨우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감히 따를 수 없는 기품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저 배워서 따라 하는 예법이 아니라 귀족으로 갖춰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춘 동작들은 예법의 귀감으로 삼고 싶을 만큼 고절했다.

    “어쩌면 그리 손짓까지 우아한지…… 마담의 명성은 과연 허언이 아닌 것 같아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공녀 전하야말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기품이 넘치십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요. 마음 같아선 마담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엘레나는 존중이 담긴 정중한 예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말이 진심임을 보였다. 그 동작을 매의 눈으로 관찰하던 마담 드 플랑로즈가 놀라워했다. 시선의 처리부터 목선에서 이어져 내려온 팔짓, 손가락의 굽어짐, 허리의 굽음과 드레스에 잡히는 주름까지 일련의 동작이 표본으로 삼고 싶을 만큼 완벽했다.

    “공녀 전하의 부탁을 어찌 제가 외면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가르칠 게 없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찌 예법만이 귀족의 덕목이겠어요? 저는 마담께 귀족의 절개와 정조에 대해서 배우고 토론을 하고 싶답니다.”

    엘레나는 슬그머니 절개와 정조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얘기했다. 아주 미세한 강조였지만 예법이 목소리의 톤과 강약, 그리고 발음을 중시하는 걸 아는 마담 드 플랑로즈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절개와 정조라니. 공녀께서는 품행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역시 단정하십니다.”

    “저는 마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걸요. 마담이야말로 절개와 정조를 귀족의 잣대로 여기시는 분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공녀 전하께서 제 얼굴에 이리 금칠을 해주니 과분합니다.”

    엘레나가 계속해서 절개와 정조를 걸고넘어지자 마담 드 플랑로즈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마담이라 불릴 만큼 사교계의 거물인 그녀다 보니 감정을 감추는 게 능숙했지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충동을 모두 숨기지는 못했다.

    ‘왜 그리 불안해하죠? 절개와 정조의 상징이라 불리시는 분이.’

    엘레나는 치미는 웃음을 참고자 부단히 애썼다. 마담 드 플랑로즈와 그녀의 남편 론도 백작의 혼인 이야기는 제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다.

    서부 초원 부족과의 전쟁에 출전했던 론도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담 드 플랑로즈는 가이아 교단을 찾아 재혼하지 않고 평생 남편의 죽음을 추모하리라 맹세했다. 재혼에 관대한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정조 관념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론도 백작이 불구가 되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는 양쪽 다리를 잃었으며 진료를 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성불구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담 드 플랑로즈는 무사히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여전히 부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레이디 중의 레이디라고 칭송을 받게 된 데는 그만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황실에서조차 그런 그녀의 정조와 절개를 칭찬하며 마담이란 칭호를 직접 내렸을까.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정조와 절개의 상징이라는 그녀가 남몰래 만나는 남자가 있을 줄은. 마담 드 플랑로즈의 스캔들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뒤 제국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귀족의 표본이자 우아함의 극치라고 일컬어지던 마담 드 플랑로즈가 일개 마부와 수십 년째 간통하고 있단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것도 한 시녀에 의해서.

    지금도 그렇지만 귀족 간에 시녀나 하인을 주고받는 건 흔한 일이다. 개중에서도 마담 드 플랑로즈가 손수 가르친 아랫것들은 품행이 단정하고 주인을 깊이 헤아릴 줄 알아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녀의 시녀를 선물로 받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 굉장히 뜻깊었다.

    지금으로부터 이 년 뒤, 마담 드 플랑로즈는 프란체 대공의 생신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가장 아끼던 시녀를 보내주었다.

    시녀의 이름은 메이.

    엘레나는 기억 속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짧은 단발이 무척 잘 어울렸던 메이는 시녀라기에는 이질적인 귀티와 분위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귀족의 생리에 밝고 시녀답지 않은 매력이 있는 아이였던지라 금세 프란체 대공의 직속 시녀가 되어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그래, 여기까지 별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다. 문제는 그런 그녀가 프란체 대공을 암살하려고 하면서 발생했다. 계획적으로 마담 드 플랑로즈에게 접근해 신뢰를 쌓고 그걸 빌미로 대공가에 들어와 프란체 대공을 죽이고자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복수심이란 참으로 경이로워. 세상 물정 모르는 일개 귀족 영애가 가족의 복수를 위해 하녀로 살길 자처하다니.’

    후에 암살이 실패하고 고문을 당해 밝히길 메이는 황실을 따르던 칼 자작의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칼 자작은 황권의 강화를 울부짖으며 프란체 대공과 대립하다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진 귀족이었다.

    가문이 멸문당하는 와중에 기적적으로 도망친 메이는 상인 길드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밑바닥 삶을 살다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마담 드 플랑로즈의 시녀를 거쳐 종국엔 대공가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프란체 대공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으며 침실에 이르렀으나 결국 암살은 실패하고 만다.

    ‘거기까지 간 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해. 하지만 실패했지.’

    과정은 중요치 않다. 세상은 오로지 결과로 말한다.

    ‘메이가 날 도우면 그 결과가 바뀌지 않을까?’

    엘레나는 시녀 메이를 곁에 두길 원했다. 리아브릭의 감시와 베로니카 공녀라는 대외적인 신분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만큼 엘레나를 대신해서 손발이 되어줄 수족이 필요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메이는 적임자다. 길드에서 지낸 전력이 있는 만큼 엘레나가 겪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대공가를 파멸로 내몰기 위해서라도 안팎의 연계는 반드시 필요했다. 단숨에 바위를 깨긴 힘들어도, 작은 균열을 내고 안과 밖에서 집요하게 노린다면 그 균열이 시발점이 되어 바위는 쩌저적 갈라지게 되어 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한다지.’

    엘레나가 굳이 메이를 슬하에 두고 싶어 하는 이유였다. 엘레나는 오로지 복수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메이에게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마치 거울을 마주 보는 기분이랄까.

    또 딱하기도 했다. 행복하게 살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한 채 복수만을 위해 사는 삶과 그마저 실패하고만 인생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런 이유로 메이를 하루라도 빨리 데려와 곁에 둘 생각이었다.

    “마담과 이리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그간 이런 기회가 없었음이 너무 야속하네요.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 같은데…….”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공녀 전하.”

    마담 드 플랑로즈는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불편했다. 그건 엘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여자 따위 관심 밖이다. 간통을 저질렀든지 말든지, 같잖은 정의감을 발휘해서 응징하거나 핍박하는 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저 원 역사보다 시기를 앞당겨 메이를 곁에 두고 싶을 뿐이었다.

    “어! 어? 마담,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엘레나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왜 그러시는지?”

    “잠시면 돼요.”

    엘레나는 일방적인 양해를 구하고는 소매에서 대공가의 인장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냈다.

    스윽.

    몸을 당겨 그녀와 거리를 좁힌 엘레나가 손을 뻗었다. 마담 드 플랑로즈의 어깨 부위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시늉을 하며 슬쩍 상체를 숙였다. 손 한 뼘 정도를 두고 얼굴을 맞댄 엘레나가 그녀만 알아들을 수 있는 크기로 작게 얘기했다.

    “사람들 참 순수하지 않아요? 마부랑 놀아나는 여자를 마담이라 치켜세워 주질 않나. 그죠?”

    “……!”

    마담 드 플랑로즈의 얼굴이 백지장보다도 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절대 들키지 말았어야 할 치부를 들킨 데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철벽같은 이성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간통을 저지를 땐 몰랐던 공포감이 엄습했다. 순간의 쾌락 때문에 그간 쌓아온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좌절과 절망감에 몸서리쳐졌다.

    엘레나는 그런 반응을 지켜보며 악마처럼 속삭였다.

    “이런, 왜 그리 놀라시나요? 혹시 영원한 비밀일 줄 아셨나요?”

    “고, 공녀.”

    고고하고 절대 꺾이지 않는 귀족다움은 개나 준 지 오래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자신을 지탱해 온 자존심이나 자부심, 신념마저 잃은 채 그저 살고자 비굴함을 택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죄다 썩었어.’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하고 칭송을 받을 땐 언제고, 살겠다고 발악하는 마담 드 플랑로즈를 보니 경멸이 밀려왔다. 기분 같아서는 이 역겨운 여자를 더 괴롭혀 죄의식을 갖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왜 그리 떠세요? 누가 보면 제가 협박한 줄 알잖아요? 저 그런 여자 아닌데.”

    “…….”

    “조만간 시간 내서 대공가에 들르세요. 나누고 싶은 말이 아주 많답니다.”

    “뭐, 뭐든 원하면.”

    마담 드 플랑로즈는 지척에 있는 엘레나만이 볼 수 있을 만큼 작게, 제발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말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을 담아 고갯짓을 했다. 엘레나는 픽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어깨에 뭐가 묻었기에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해요. 예의가 아닌데.”

    “아, 아닙니다. 다 남을 배, 배려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그러신 겁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얼굴을 한 주제에 귀족다움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퍽 우스웠다.

    “오늘 마담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뜻깊었어요. 또 이런 기회가 있겠죠?”

    엘레나가 고아한 미소를 머금으며 마담 드 플랑로즈를 바라봤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렇고말고요.”

    “그 시간이 벌써 기다려지네요. 아! 이거 받으세요.”

    엘레나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정중히 건넸다. 마담 드 플랑로즈가 공황 상태나 다름없는 정신으로 그것을 받았다.

    “다음 만남을 약조하는 증표랍니다. 제가 손수 수를 놓았으니, 보시고 어떤지 얘기해 주세요.”

    “그, 그러겠습니다.”

    “하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찬란한 밤이 되시기를.”

    엘레나는 우아한 인사로 작별을 고하며 물러났다. 남의 이목도 있다 보니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였거니와 마담 드 플랑로즈의 상태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좋지 못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알아들었겠지.’

    인간은 위기에 강하다. 마담 드 플랑로즈 같은 부류는 진창에 빠지더라도 제 것을 지키고 살아남고자 무슨 짓이든 저지르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아마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엘레나가 준 손수건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고는 제 살길을 찾고자 시키는 대로 하겠지.

    ‘저기 리아브릭이 오는군.’

    마침 이쪽으로 정신없이 오는 리아브릭이 보였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는데 신경을 많이 썼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리브, 왔어요?”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는 얼굴로 대했다.

    “공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요. 좀 놀라긴 했는데, 리브를 보니 진정이 되네요.”

    “그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리아브릭의 입술이 옴짝달싹했다. 아마 렌의 일을 두고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은 까닭에 그녀는 묻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더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엘레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리아브릭은 대화를 멈추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기회만 엿보고 있던 귀족들이 어떻게든 말 한마디라도 붙여보겠다며 엘레나에게 접근해 아부와 아첨을 이어갔다.

    “어쩜, 안 그래도 미모가 과하신데 하루가 다르게 더 예뻐지셔서 놀라워요.”

    “고마워요.”

    무려 이 년 만에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베로니카 공녀. 그녀의 복귀는 성공적이었다.

    * * *

    “너무 황홀해서 말이 나오질 않는 밤이에요, 리브.”

    별관을 나서서 본관으로 돌아가던 엘레나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쉽지 않은 일을 잘 해내셨습니다.”

    뒤를 따르던 리아브릭은 의외로 순순히 엘레나의 말에 동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가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베로니카 공녀의 대역으로서 잘해줬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놀랄 만한 성과임은 분명했다.

    ‘렌 공자와 있던 일만 빼면.’

    리아브릭이 같은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막지 못했고, 두 눈을 뜨고 보고 있었음에도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궁금증은 완벽을 추구하는 리아브릭을 미치도록 괴롭혔다. 당장에라도 엘레나를 추궁해 그때의 얘기를 듣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피곤하시겠지만, 잠시 얘기를 나누고 가시죠.”

    “그럴까요?”

    본관에 위치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시녀에게 내오라고 한 홍차와 쿠키가 오기도 전에 리아브릭이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물었다.

    “렌 공자는 위험한 남자예요. 또 적대적이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아! 연회 직전에 제 방으로 찾아왔었어요.”

    “뭐라고요?”

    리아브릭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노골적으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만큼 렌의 돌발 행동이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허락도 없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안부를 물었어요.”

    “그리고요? 저한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얘기하세요.”

    “얘기할 것도 없어요. 애초에 그건 대화가 아니었으니까. 일방적으로 제 안부를 물어보고는 뚫어져라 보다가 갔어요.”

    “그게 다예요?”

    “네. 진짜 이게 다예요.”

    리아브릭의 눈빛이 깊어졌다. 렌이 보인 일련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고자 함이다.

    “홀에서 했던 얘기도 해봐요.”

    “그땐 너무 무섭기도 하고 경황이 없어서…… 아! 제가 싫다고 했어요.”

    “싫다?”

    엘레나가 끄덕였다.

    “네, 제가 왜 이러는 거냐고 물으니 싫어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리브, 그 말을 하는 그분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혔어요.”

    “힘든 거 알아요. 그래도 잘해줬어요, 공녀.”

    리아브릭이 엘레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진정성이 없는 위로였다. 그녀의 정신은 렌이 이런 일을 왜 벌였느냐를 파악하는 데 다 쏠려 있었다.

    ‘대역인 걸 눈치챈 건가?’

    리아브릭은 화두를 던졌다. 피가 섞인 사이라고는 하나 이 년간 두 사람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성장기의 이 년이란 많은 육체적, 정신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기간이다. 육촌지간이라 하더라도 서로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가 좀 어눌하고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대역으로 의심할 리는 없었다.

    리아브릭은 고개를 들어 엘레나를 응시했다.

    완벽한 대역. 외모로만 보면 누가 보더라도 베로니카 공녀와 다를 게 없었다. 예법을 그럴싸하게 구사하고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하니 전에 없던 귀티도 제법 흘렀다.

    ‘너무 앞서가지 말자.’

    억측은 자제하더라도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긴장의 끈을 놓기에 렌은 너무 위험한 남자였다.

    “춤을 추다 렌 공자가 넘어진 걸 봤어요. 그건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건 제가 밀었어요.”

    엘레나의 말에 리아브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밀어요?”

    “손목을 너무 세게 잡아서 아프고 무서워서 머릿속에 온통 뿌리칠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홧김에 있는 힘껏 밀었어요. 그게 다예요.”

    리아브릭은 엘레나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렌은 사교춤을 추지 못하는 엘레나를 억지로 잡고서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체격이 좋다. 또 천부적인 검술 실력을 타고나 제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대주였다. 그는 한낱 여자가 힘으로 민다고 해서 쉽게 넘어질 만큼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리브가 못 믿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정말이에요.”

    리아브릭은 답답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데, 엘레나가 저렇게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야.’

    문제는 놓친 게 뭔지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렌 공자는 위험해요. 피할 수 있다면 피해요. 어쩔 수 없이 마주쳤다면 그래도 피하세요.”

    “네, 조심하고 또 조심할게요.”

    엘레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하는 간절함이 보여서인지 리아브릭도 더는 같은 얘길 하지 않았다.

    “얼핏 보니 마담 드 플랑로즈와 담소를 나눈 것 같던데.”

    “아, 우연히 뵙게 되어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엘레나는 거짓 없이 털어놓았다. 딱히 감출 이유가 없었다. 엘레나와 마담 드 플랑로즈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예법에 관한 대화를 나눈 게 다였다.

    “뭔가를 주고받는 것 같던데?”

    ‘그 와중에 그걸 본 건가.’

    어지간히도 엘레나를 혼자 둔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적지 않은 귀족들의 말 상대를 해주면서도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은 걸 보니. 엘레나는 속마음을 감추고 태연하게 말했다.

    “아, 마담께서 예법에 대해 칭찬을 해주셔서 너무 기쁜 나머지 고마움을 표하려고 손수건을 드렸어요.”

    그러다 리아브릭의 표정을 살피는 척하며 엘레나가 일부러 몸을 움츠렸다.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요?”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나요.”

    “……그게 잘…… 혹시 손수건을 줘서?”

    “아뇨.”

    리아브릭이 차가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공녀의 예법은 아직 미숙해요. 많이 좋아졌다곤 하나 마담 드 플랑로즈가 보기에는 걸음마 수준이죠. 그런 마담과 엮이면 대역임이 들통날 수 있단 생각은 안 해봤나요?”

    엘레나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렇지만 제 예법을 분명 칭찬했어요.”

    “상대의 부족함을 칭찬하라. 그 역시 예법의 일환이죠.”

    “…….”

    리아브릭은 오로지 자신의 잣대를 엘레나에게 적용해서 지적했다.

    “리브의 말을 들으니 제가 부주의했던 것 같아요. 너무 들뜬 나머지. 앞으론 조심할게요.”

    엘레나는 잘못을 시정하겠다며 저자세로 사죄했다. 용무를 마친 리아브릭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경고를 했다.

    “공녀, 늘 상기하세요. 지금 당신의 처지가 어떤지,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또 그곳으로 돌아갈 것인지 여기 남을 것인지. 이 모든 게 공녀 하기에 달렸어요.”

    “리브…….”

    “제 말 무슨 의미인지 아셨죠?”

    일방적으로 할 말을 마친 리아브릭이 응접실을 나섰다.

    쿵.

    홀로 남은 엘레나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리아브릭의 눈을 피해 움직이려니 알게 모르게 몸이 긴장했는지 굳어 있었다.

    “그래도 몹시 만족스러운 하루였어.”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성취감에 엘레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도 복수를 위해 한발 나아갔으니까.

    * * *

    로제르트 공작의 탄신기념일 연회는 무려 닷새간 성대하게 치러졌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행사의 연회도 나흘을 넘지 않는 걸 감안하면 프리드리히 공작가의 위세가 얼마나 높은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엘레나는 닷새 중 홀수일인 삼 일만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위급 귀족들이 연회 첫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참가하지 않는 걸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리아브릭은 대외적으로 베로니카 공녀가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그래야 대공가의 후계자를 놓고 나오는 잡음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어서였다.

    이유는 또 있다. 엘레나에게 사교계의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함이다. 고위 귀족들보다는 그들의 자제나 지방 귀족들이 주로 연회에 참가하는 만큼 중요성이 덜하다 보니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은 만큼 리아브릭도 시간을 빼서 엘레나의 곁을 지켰다.

    연회가 끝나고 난 뒤, 그날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도록 했다. 사소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좀 더 완벽한 베로니카 공녀가 되는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엘레나도 독자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리아브릭의 뜻에 따라 순종적으로 굴었다. 원하는 것을 얻은 이상 괜히 튀는 행동을 해서 리아브릭의 눈 밖에 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한 해 대공가의 가장 큰 행사가 끝이 났다. 저택은 예전으로 돌아가 다시 한산해졌으며 아랫것들은 뒷정리에 열을 올렸다. 리아브릭 역시 그간 처리하지 못한 대공가 내의 크고 작은 사안을 처리하고자 집무실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러며 엘레나에게 고생했으니 며칠간 푹 쉬라고 했다.

    ‘쉬라고 해서 쉬면 되겠어?’

    엘레나는 제국 내의 유명 보석상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저마다 정교하게 세공된 각종 장신구를 가지고 왔는데 하나같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진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물건이었다.

    엘레나는 그것 중 모조품으로 만들기 용이한 것들을 추려서 구매했다. 개중에서도 가장 선호한 것은 다이아였다. 사파이어나 루비, 에메랄드와 달리 색이 없다 보니 유리를 가공해 모조품으로 만들기 쉬웠다. 특히 불순물과 정교함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여타의 보석과 달리 다이아는 그 크기가 클수록 가격이 천정부지 올라갔다. 또 제국 귀족들이 순백의 투명함을 좋아하는 이상 시세의 변동도 적었다.

    ‘리아브릭의 눈을 피해 이걸 처분할 루트가 필요해. 모조품을 만들 공예 장인도 필요하고.’

    엘레나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공가에 있는 동안은 아무래도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리아브릭의 눈을 피하기도 어렵거니와 독자적인 행동이 불가능했다.

    ‘학술원에 들어가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엘레나의 학술원 복학은 리아브릭도 인정했을 만큼 예정된 수순이었다. 제국의 수도 인근에 위치한 프론티어 학술원은 재학생 한 명도 예외 없이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했다. 수도 귀족의 자제라 하더라도 그걸 어길 시 퇴학 조치를 취할 만큼 엄격했다.

    학술원 생활은 엘레나에게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학술원이란 그늘에서 제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보니 리아브릭의 감시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렌츠는 떼어냈고. 이제 앤만 남았는데…….’

    앤은 처음부터 리아브릭이 감시자 역할로 붙여놓은 시녀였다. 정체를 몰랐다면 모를까, 리아브릭의 수족이란 걸 안 이상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내 쪽에서 역이용하면 그만이잖아?’

    앤을 그냥 쳐내는 건 하책이다. 엘레나는 그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이상을 더 내다봤다.

    ‘리아브릭은 앤을 나한테 붙여놓은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있을 게 분명해.’

    굳이 앤을 쳐내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앤을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엘레나가 누릴 이점이 많았다. 리아브릭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방심을 이끌 수 있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보석상을 돌려보낸 엘레나가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공녀 전하.”

    그간 호위하는 내내 한 번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던 휴렐바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엘레나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그를 돌아봤다.

    “별일이네요. 경이 먼저 말을 다 걸다니.”

    “…….”

    “말씀하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휴렐바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경황이 없어 지체됐지만 이제라도 저의 실수에 대해 처분을 바랍니다.”

    “처분이라.”

    엘레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었다. 은은한 홍차의 향을 코로 음미하고 혀로 맛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떠한 처분을 원하는데요?”

    “어찌 감히 스스로 그것을 결정하겠습니까. 어떤 처분이든 따르겠습니다.”

    휴렐바드는 진심이었다. 당시 렌이 신원을 밝히지 않는 까닭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결과적으로 렌과 충돌을 하지 말라는 엘레나의 명령은 수행하지 못한 셈이 됐다. 기사로 선임이 되고 처음으로 부여받은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했으니 너무도 불명예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도 처분을 바란다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네요. 벗으세요.”

    “……!”

    휴렐바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당혹스럽다 못해 얼이 나간 표정은 냉철함의 대명사라 일컬어지는 얼음의 기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벗으란 말 못 들었어요?”

    “대, 대체 무엇을…….”

    당황한 휴렐바드가 어쩔 줄을 모르고 말을 흐렸다. 그 반응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엘레나가 말했다.

    “뭘 기대한 거죠? 설마 상의라도 벗으라고 할까 봐 그래요?”

    “어찌 감히 제가.”

    “경, 그러면 하의를 얘기했을까 봐 그런 거예요?”

    “…….”

    사정없이 흔들리는 휴렐바드의 동공을 보고 있던 엘레나가 픽 웃었다. 휴렐바드는 영문도 모른 채 엘레나만 빤히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는 눈짓으로 휴렐바드의 손을 가리켰다.

    “지금 끼고 있는 장갑 달라는 거예요.”

    “이 장갑을 말씀입니까?”

    “네, 그거요. 혹시 주기 싫으셔서 자꾸 모른 척하시는 건 아니죠?”

    엘레나의 장난기 어린 발언에 휴렐바드는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엘레나가 건네받은 검정 면장갑은 전투용보다는 의전용에 가까워 보였다. 주로 검 손잡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용도로 많이들 착용한다고 들었다.

    엘레나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서랍에서 자수함을 꺼내 왔다. 뚜껑을 열어 바늘과 실을 꺼내고는 장갑을 뒤집어 안쪽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가늘고 얇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면 위에 오색의 실이 내려앉았다. 손놀림이 어찌나 정교한지 휴렐바드는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면장갑 안쪽 면에 금빛과 은빛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글자가 수놓아졌다.

    “받아요.”

    엘레나가 건네는 장갑을 돌려받은 휴렐바드가 그것을 내려다봤다.

    ‘L.’

    제국의 황실에서 주로 쓰는 글자였다. 그 뜻이 난해하고 어려워 국가 행사나 의식에서나 주로 쓰일 뿐, 귀족들조차 거의 쓰지 않았다. 휴렐바드 역시 글자를 읽을 순 있으나 그 뜻은 전혀 알지 못했다.

    “늘 손등에 새기고 다니세요.”

    “……혹시 이 글자가 저의 부족함을 꾸짖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까?”

    휴렐바드가 진지한 얼굴로 글자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앞서 엘레나가 처분을 내린다고 했으니 이 글자에도 질책하는 의미가 있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아뇨.”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제 처분이랍니다.”

    “도통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그것까지 함께 고민하세요. 거기까지가 제가 내리는 처분이에요.”

    “…….”

    휴렐바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닷속처럼 좀처럼 제 주인의 속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답답해하는 휴렐바드를 보며 엘레나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이거만 기억하세요. 첫 만남부터 지금껏 전 경에게 늘 진실했다는 걸.”

    “정말이지 공녀 전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까지도 엘레나의 저의를 알지 못한 휴렐바드는 물러서며 예의를 갖췄다.

    “기사 휴렐바드, 공녀 전하의 처분을 받아 늘 이 글자를 마음에 품고 다닐 것을 맹세합니다.”

    엘레나는 말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L.

    황실 식구만이 쓰고 읽을 수 있는 고대 제국어로 그 의미는 빛. 독음으로 읽게 될 경우 엘레나의 이니셜을 의미했다.

    “경의 그 맹세를 결코 잊지 마시길.”

    * * *

    나흘이 흘렀다. 마담 드 플랑로즈의 공식적 방문 요청이 왔다. 형식적인 사유는 탄신기념일 연회에서 받은 손수건의 답례였다.

    마담의 방문 요청에 리아브릭은 고심했다. 여러모로 미흡한 게 많은 엘레나인지라 예법과 예절, 교양에 밝은 마담 드 플랑로즈와 접촉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절하자니 그 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현 베로니카 공녀는 이 년 만에 사교계에 재등장했다. 건재함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악소문은 여전히 돌고 있으며, 호사가들은 끊임없이 지난 그녀의 행적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담 드 플랑로즈의 방문이 주는 의미는 컸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초대해 교류하고 싶어 했지만, 마담 드 플랑로즈는 아무나와 만나지 않았다. 귀족적인 사리사욕이나 득실을 좇는 집단과는 애초에 선을 그었다. 그건 대공가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귀족적 기준에 미달된다는 생각이 든다면 마담 드 플랑로즈는 대공가라 할지라도 절대 교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담 드 플랑로즈가 베로니카 공녀를 만나고자 대공가를 찾는다고 한다. 아직 공녀로서의 위상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베로니카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명망 높은 마담 드 플랑로즈와 교류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간 잃어버린 평판과 위신, 그리고 신망이 따라오기 때문이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설마하니 엘레나가 이런 거물을 물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엘레나의 귀족적이지 못한 언행을 아직 미흡하지만 귀엽게 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담 드 플랑로즈가 답례라고 해도 이런 호의를 보일 리가 만무하니까.

    리아브릭은 방문 요청 서신을 고이 접어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고급 양피지를 꺼내 일필휘지로 펜글씨를 써 내려갔다. 마담 드 플랑로즈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인사말과 방문 가능한 날짜를 명시했다. 마지막으로 대공가의 인장을 찍는 것으로 답신의 작성이 끝났다.

    그로부터 나흘 뒤. 마담 드 플랑로즈가 정식으로 대공가를 방문했다.

    “마담 드 플랑로즈가 공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저택 앞, 도도하게 허리를 편 채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햇살을 양산으로 가리고 있던 마담 드 플랑로즈가 우아한 자태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마담.”

    엘레나는 정중하지만 과하지 않은 예법으로 답례 인사를 했다.

    “리아브릭 자작께서도 나오셨군요.”

    리아브릭이 예를 갖췄다.

    “마담께서 오시는데 직접 나와야지요.”

    “과분하리만치 반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기 서 계시지 말고 안으로 드시죠. 동양에서 온 차를 마련해 뒀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결례를 범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저택 내부에 마련된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디는 걸으며 경망스럽게 담소하지 않는다는 예법을 따르는지 마담 드 플랑로즈는 주변을 둘러볼 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엘레나에게 시선이 닿자 눈이 흔들렸다.

    ‘지금처럼 쭉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마담이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엘레나의 속뜻을 알아챈 마담 드 플랑로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용의가 보였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리아브릭이 대화를 주도했으며 엘레나와 마담 드 플랑로즈가 맞장구를 치는 식이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답니다. 선뜻 손수건을 주시다니. 공녀 전하께서 지니신 순수하고 순결한 마음가짐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마담께서 좋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이 순간 엘레나는 권위 높은 공녀가 아닌 칭찬을 받아 어쩔 줄 모르는 소녀처럼 굴었다. 리아브릭은 저런 엘레나의 어수룩함에 마음을 연 마담 드 플랑로즈의 수준을 비웃었다. 세간의 평과 달리 대역인 엘레나에게 혹할 만큼 그녀의 안목이 형편없다고 치부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엘레나가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리아브릭을 슬쩍 응시했다.

    ‘슬슬 훼방꾼을 내보내 볼까?’

    결정을 내리기가 무섭게 엘레나는 행동으로 돌입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던 손에 힘을 풀어버렸다. 지지대를 잃은 찻잔이 기울어지며 찻물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앗!”

    엘레나가 어쩔 줄을 몰랐다. 흘러내린 찻물이 그만 리아브릭에게 쏟아져 치마의 밑자락이 흥건히 젖고 만 것이다.

    “미, 미안해요, 리브.”

    당황한 엘레나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았다. 그러나 이미 물기가 스며들 대로 스며들어 버린지라 별 의미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손길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비쳤다.

    “괜찮습니다, 공녀 전하. 갈아입으면 되니 개의치 마세요.”

    리아브릭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노련하게 다스리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마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공녀 전하와 담소를 나누고 있을게요.”

    양해를 구한 리아브릭이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계획대로 리아브릭을 쫓아내고 응접실에 단둘만이 남게 되자 엘레나의 표정과 태도가 변했다. 어리숙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고 더없이 레이디다운 자태로 마담을 대했다.

    “어찌 지내셨나요, 마담?”

    마담 드 플랑로즈는 긴장했다. 이미 안부는 담소를 나누는 내내 충분히 물었다. 그런데도 다시 이 얘길 꺼낸다는 건, 본론을 나누자는 의미로 비쳤다.

    “……잘 지냈답니다.”

    “그거 의외네요. 전 못 지냈을 줄 알았는데.”

    “못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외람되지만 저는 추문에 흔들릴 만큼 가벼운 여자가 아니랍니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시치미를 뚝 떼는 것과 동시에 슬그머니 엘레나를 떠보며 반응을 살폈다.

    ‘레이디 중의 레이디가 아니라 늙은 여우라고 불러야겠는데?’

    엘레나는 마담 드 플랑로즈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마부와 간통한 사실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또 증거는 가지고 있는지 알아본 뒤 대처하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순순히 따랐다면 모를까, 엘레나는 똬리를 틀고 고개를 치켜든 마담 드 플랑로즈를 그냥 넘어갈 만큼 너그러운 여자가 아니었다.

    “암요, 누가 감히 마담을 가벼운 여자로 여기겠어요? 저는 그저 주워들은 얘길 혼자 떠드는 것뿐이에요.”

    “…….”

    “현숙하기로 소문난 부인이 마부와 간통을 했는데, 주로 사랑을 나눈 장소가 마구간이라니.”

    마담 드 플랑로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고 했지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입술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그뿐이겠어요? 참으로 대담도 하지. 불구가 된 남편을 약으로 재워두고는 방으로 마부를 불러들였대요. 바로 옆에 남편이 자고 있는데.”

    “그, 그만.”

    마담 드 플랑로즈의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간통을 저지를 땐 몰랐으나, 제가 한 짓을 타인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수치심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그러나요, 마담? 아직 더 할 얘기가 많답니다.”

    “제발, 그만하면 됐습니다.”

    마담 드 플랑로즈는 절망했다. 엘레나는 마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상세히 그간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가문 내에 사람을 심어두었으며, 증거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뭐,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얘긴 묻어주세요.”

    “어머, 왜 이러세요? 전 마담을 질책할 생각이 전혀 없답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녀 전하.”

    마담 드 플랑로즈는 고개까지 숙이며 애원했다. 엘레나도 더는 그녀의 간통에 대해 떠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 얘기해 봐야 제 입만 더러워질 뿐이다.

    “듣자 하니 마담께서 영민한 시녀를 두고 계시다던데.”

    “시, 시녀라면 누구를 말씀하는 것인지?”

    “이름이 아마 메이였나?”

    “아! 제 직속 시녀 중에 메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재작년쯤 들였는데, 눈치도 빠르고 품행도 단정해 정이 가는 아이죠. 한데, 메이는 왜?”

    엘레나가 싱긋 웃었다.

    “그 아이를 제게 주세요.”

    “메이를요?”

    마담 드 플랑로즈는 저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간통 사실을 안 이상 엘레나는 그녀의 목줄을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근데 고작 시녀를 보내달라니. 마담 드 플랑로즈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요구 조건이 너무 약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 아이를 보내 드리면 저의 배덕함을 모른 체해주겠단 건가요?”

    마담 드 플랑로즈는 늙은 여우처럼 재차 그 사실을 확인받으려 들었다.

    엘레나가 미소를 머금었다.

    “대공가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죠, 마담.”

    “정말 약속해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얼마든지요. 원한다면 서면으로 남겨 드릴까요? 명백한 증거를 또 남기는 셈이라 전 추천드리고 싶지 않지만요. 원한다면 써드리고요.”

    마담 드 플랑로즈는 모든 두뇌를 가동해 고민했다. 사교계에서는 레이디 중의 레이디처럼 행세하면서 뒤로는 음란한 간통을 서슴지 않던 여자인 만큼 선택도 빨랐다.

    “아닙니다. 공녀 전하의 약속을 믿겠습니다.”

    “현명하신 판단이에요.”

    거래를 성사한 엘레나가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리아브릭에겐 손수건의 답례로 제게 그 아이를 보냈다고 얘기하면 될 거예요.”

    “네, 공녀 전하.”

    “앞으로도 가까이 지내도록 해요, 마담.”

    “…….”

    엘레나가 관계 지속의 여지를 남기자 마담 드 플랑로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애꿎은 차만 들이켰다. 이윽고 리아브릭이 깔끔한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고 응접실로 돌아왔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리아브릭은 양해를 구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 없는 사이에 얘기 좀 나누셨나요?”

    “레이디의 몸가짐과 예법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여기 계신 마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쩜 그렇게 주옥같은지 오늘 이 대화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엘레나는 밀담 따위 처음부터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수한 귀족 영애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에 마담 드 플랑로즈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엘레나를 거스를 수도 없는 처지다 보니 내색할 수 없었다.

    “공녀 전하, 제가 이리 방문한 이유는 손수건의 답례를 하고자 함입니다.”

    “답례를 바라고 드린 게 아니에요.”

    엘레나가 손사래까지 치면서 만류했지만 마담 드 플랑로즈는 묵묵히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제 수발을 든 지는 이 년쯤 된 아이입니다. 행실이 바르며 말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아이죠. 가진바 재주도 뛰어난 아이입니다. 공녀 전하의 품위와 격에 감히 어울릴 거라 사료됩니다.”

    “마, 마담. 마담의 시녀를 제게 주신다는 말씀이세요? 정말요?”

    엘레나는 감격에 찬 듯 입을 손으로 가렸다.

    “네, 부족하게나마 공녀 전하께서 주신 마음의 답례입니다. 받아주시겠어요?”

    “그야 당연히…….”

    흔쾌히 대답하려던 엘레나는 말끝을 흐리며 리아브릭의 눈치를 살폈다. 독대였다면 모를까, 리아브릭이 동석한 이상 그녀의 판단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리아브릭이 이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당신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담 드 플랑로즈의 선물이다. 귀족 사회에서 시녀를 주고받는 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친분과 돈독함의 상징이자, 증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아브릭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엘레나가 대역이란 사실이 우려되었다. 선물 받은 시녀는 예의상 직속 시녀로 두다 보니, 혹시 그 부분에서 비밀이 새어 나갈까 신경이 쓰였다. 머뭇거림이 길어지자 마담 드 플랑로즈가 재차 의중을 물었다.

    “저, 공녀 전하?”

    “그게…….”

    고심하던 리아브릭이 결정을 내렸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거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답례가 처음이다 보니 공녀 전하께서 선뜻 결정을 못 내리나 보네요. 어서 받으세요, 공녀 전하. 마담께서 무안해하십니다.”

    “네? 네! 마담, 저 기쁜 마음으로 받을게요. 오늘의 감동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엘레나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가식적으로 꾸며낸 미소가 아닌, 진심 어린 미소였다.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드러낸다 한들 상관없기에.

    “공녀 전하께서 이리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네요. 종종 기별하며 찾아뵙겠습니다. 가까이 지내도록 해요.”

    “그래 주시면 저야 영광이죠. 기다릴게요, 마담.”

    엘레나와 마담 드 플랑로즈가 정겹게 손을 마주 잡았다.

    * * *

    론도 백작가. 불구가 된 론도 백작을 대신하여 백작가의 대소사는 마담 드 플랑로즈가 처리했다. 그녀의 일 처리는 사교계의 평판만큼이나 공명정대한지라 아랫것들부터 귀족들까지 누구도 흠을 잡지 못했다.

    “찾으셨습니까, 부인.”

    막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마담 드 플랑로즈는 시녀 메이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가까이 와보거라.”

    “네, 부인.”

    마담 드 플랑로즈는 공손하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메이를 쳐다봤다. 늘 햇빛을 받으며 잡일을 하는 시녀답지 않게 그녀의 피부는 주근깨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귀를 살짝 덮은 단발머리는 더없이 깔끔했으며, 수평을 이룬 어깨선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지?”

    “올해로 이 년째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구나. 그러고 보면 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몸가짐이 바른 아이였지.”

    “과찬입니다, 부인.”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마담 드 플랑로즈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들뜨거나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개 시녀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종종 보여주는 평정심은 마담 드 플랑로즈도 놀랄 때가 있었다.

    “널 보고 있으면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

    “귀족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부인.”

    메이는 자신에게 과분한 칭찬을 들었다는 듯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런 메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담 드 플랑로즈가 말했다.

    “내가 그만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귀족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지. 고개를 들어 날 보거라.”

    메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마담 드 플랑로즈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눈은 마주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응시했다. 정말이지 시녀의 본보기로 삼고 싶을 만큼 완벽한 시선 처리였다. 내심 이런 아이를 대공가에 보낸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제 살길이 먼저라는 생각에 포기했다.

    “넌 어느 가문이든 능히 시녀장이 될 재목이다. 그런 너에게 어울리는 가문을 추천해 주고 싶구나.”

    “부인?”

    마담 드 플랑로즈가 담담히 말했다.

    “난 네가 대공가로 갔으면 하는구나.”

    “……!”

    메이의 눈동자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마담 드 플랑로즈도 이토록 동요하는 메이를 본 건 처음이었다.

    “베로니카 공녀께 네 얘기를 하니 몹시 마음에 들어 하시더구나. 생활 여건이나 미래를 생각할 때 대공가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

    “너, 너무 갑작스러운지라…….”

    “인생의 중요한 선택은 늘 갑작스러운 법이지. 대공가로 가겠느냐?”

    메이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분명한 건 이 머뭇거림이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작은 희열이 그녀의 눈에 담겨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네, 부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메이가 작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잘 생각했다. 후회 없는 결정이 될 것이다.”

    마담 드 플랑로즈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가 원하는 걸 얻는 완벽한 거래였다. 그리고 이 완벽한 거래를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엘레나였다.

    * * *

    프리드리히 대공가에 마담 드 플랑로즈가 보낸 마차가 들어섰다. 일개 시녀를 보내는 일이건만, 마담 드 플랑로즈는 마차에 태워서 보내는 정성과 수고스러움을 마다치 않았다. 대외적으로 베로니카 공녀와 돈독한 관계임을 과시하고자 함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메이가 저택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황궁보다 더 화려하다는 대공가의 저택은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웅장했다.

    “네가 메이니?”

    저택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앤이 삐딱한 자세로 아는 척을 했다. 메이는 말없이 앤을 쳐다봤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데 초면에 반말이라니. 그녀가 처음부터 탐탁지 않거나, 시녀들 간 서열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기선제압을 하려는 게 느껴졌다.

    “네.”

    메이가 대답하자 앤이 팔짱을 끼곤 못마땅한 표정으로 메이를 위아래로 쭉 훑었다. 주근깨 범벅인 자신보다 피부가 곱고 예쁘장하게 생긴 메이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서류는 다 챙겨 왔지?”

    “네.”

    “따라와.”

    앤이 신입 시녀를 어떻게 골탕 먹일지 고민하며 데려간 곳은 리아브릭의 집무실이었다.

    “가져온 걸 줘보렴.”

    메이는 챙겨 온 신분증과 신상명세서, 그리고 마담 드 플랑로즈가 써준 추천서를 리아브릭에게 건넸다. 리아브릭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수상한 점이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바닥에 떨어진 공녀의 평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외부에서 온 시녀를 엘레나의 곁에 두는 게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베로니카 공녀의 사교계 위상을 끌어올리고자 감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신원에도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자 리아브릭이 계약서를 내밀었고, 메이는 순순히 서명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넌 공녀 전하의 직속 시녀다. 여기 있는 앤에게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고 배우도록 하고.”

    “네, 성심성의껏 공녀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공녀 전하께 가서 인사드리도록.”

    메이가 꾸벅 인사를 하곤 집무실을 나섰다. 앤이 앞서 걸으며 저택 내부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건성이었다. 어느 정도 견제나 텃세를 예상했던 만큼 메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저택 내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니까.

    본관 이 층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대리석 문 앞에 이르러 앤이 걸음을 멈췄다. 아직 앳된 기색이 있지만 수려한 외모의 기사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걸 보아 이곳이 베로니카 공녀의 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녀 전하, 새로 온 시녀를 데려왔어요.”

    “들여보내렴.”

    방문 너머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격 급한 앤이 재촉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공녀 전하께서 기다리잖아.”

    메이는 손잡이를 천천히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둘러봐도 마담 드 플랑로즈가 머물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방이었다. 엘레나는 창가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었다.

    “이리 오렴.”

    엘레나의 부름에 메이가 다가갔다. 일정한 보폭. 무너지지 않는 어깨선. 일개 시녀의 몸가짐이라고 보기엔 놀라울 만큼 완벽한 걸음걸이로 엘레나의 앞에 섰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메이라고 합니다.”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 각도, 공손하게 포갠 손 모양까지 웬만한 귀족 영애 못지않았다.

    “마담께서 네 칭찬을 하시더구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엘레나는 겸손함을 보이는 메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 가녀린 몸뚱이로 갖은 고초와 역경을 이겨내고 프란체 대공을 암살하려고 한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궁금하지 않니? 어찌하여 네가 대공가로 오게 됐는지.”

    “부인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그런 걸로 압니다.”

    메이의 대답은 형식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에서 마담 드 플랑로즈의 시녀들은 유명하다. 마담의 교육을 받은 만큼 시녀로서의 몸가짐이나, 자세가 올바르기 때문이다.

    메이는 자신이 대공가에 오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대공가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마담 드 플랑로즈의 시녀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시녀를 보내야 했을 테니까.

    “아니. 내가 마담에게 청을 했단다. 널 보내달라고.”

    “……!”

    메이의 동공에 파문이 일었다. 본능적으로 엘레나가 던진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껴서였다. 하지만 그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엘레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묻지 않는구나. 내가 왜 너를 보내달라고 했는지. 너에 대하여 어찌 알고 있었는지.”

    “그야 공녀 전하께서 그만한 생각이 있으시니…….”

    엘레나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누구나 가슴속에 칼 한 자루를 숨기고 산다지.”

    “아둔하여 그 말을 다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과연. 마담 드 플랑로즈가 데리고 있던 시녀답게 교양 있는 말로 자신을 낮추며 엘레나를 치켜세워 준다. 그러며 저자세로 배움을 바란다. 이러니 많은 귀족이 마담 드 플랑로즈의 시녀들을 탐내는 게 아닐까.

    “헤아리지 못한다라……. 그렇다면 네 가슴속에 있는 그 칼은 누구를 겨누고 있는지 내가 맞춰볼까?”

    “무슨 말씀이신지…….”

    메이는 끝까지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 굴었다. 그러나 그 시치미도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막히고 말았다.

    “대공가.”

    “……!”

    메이의 심장이 폭발하듯 미친 듯이 뛰었다. 온몸의 신경이 잘 벼린 칼처럼 곤두섰다. 두루뭉술한 저 말들이 모두 메이를 겨냥한 가시처럼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메이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엘레나는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여유롭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그에 반해 메이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쩌지?’

    어떻게 엘레나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대공가로 온 불순한 저의를 알고 있는 이상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살길 바라는 게 웃기잖아?’

    메이는 쓰게 웃었다. 이제 겨우 대공가까지 왔는데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처지가 너무 비감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공녀라도……!’

    모든 걸 놓아버리려던 메이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 비록 복수는 실패했지만 프란체 대공이 부모를 죽였던 것처럼 자신 역시 그의 피붙이라도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

    “그게 네 선택이니?”

    멈칫.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툭 던진 엘레나의 말에 메이의 행동이 이어지지 못했다.

    “꿩 대신 닭을 잡으려고 그 고생을 한 건 아니잖아?”

    “…….”

    “차라리 날 이용하는 건 어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부모를 죽이려는데 그 자식을 이용하라니? 궤변의 답은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담겨 있었다.

    “세상엔 부모를 증오하는 자식도 있는 법이거든.”

    “……!”

    엘레나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메이는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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