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4/30)
  • 제3장 휴렐바드

    창가에 선 엘레나는 저택 입구에 세워진 사륜마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의 옆면엔 대공가를 상징하는 독수리의 문양이 수려한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제국의 황실조차 숨죽인다는 권세를 품은 독수리의 오만함이 물씬 풍겼다.

    “독수리의 목을 비틀려면 둥지로 가야겠지.”

    엘레나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금발과 은빛 자수가 인상적인 드레스가 더없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그러나 정작 엘레나를 기품이 넘쳐 나는 여인으로 보이게끔 한 건 분위기였다. 자애로운 눈빛에 담긴 고결함과 고고하게 든 턱과 사소한 몸짓에서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묻어 나왔다.

    똑똑.

    노크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리아브릭이 들어왔다.

    “마차가 당도했어요. 갈까요?”

    “예.”

    엘레나가 대꾸하며 방을 나섰다. 홀을 지나쳐 저택 밖으로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절도 있게 예의를 갖췄다. 엘레나는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턱짓으로 답례를 대신하고는 사륜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거친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네 바퀴가 지면을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다.

    “긴장하지 않고 잘 대처했어요. 기사라고는 하나, 공녀께 비하면 아랫사람이죠.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어요.”

    “다행이네요.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엘레나는 아직 베로니카 공녀 행세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눈치 보지 마세요, 엘레나. 아셨죠?”

    “네, 리브.”

    반사적으로 엘레나가 대꾸하자 리아브릭의 눈이 사나워졌다. 혹시나 싶어 놓은 덫에 엘레나가 걸려든 까닭이다.

    “또, 또. 분명 경고했을 텐데요. 어제부로 엘레나란 여자는 죽었다고. 당신이 누구인지 잊은 건가요?”

    “그, 그럴 리가요. 죄송해요, 다신 같은 실수 하지 않을게요.”

    “공녀란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세요. 항상 긴장하라 이 말이에요.”

    리아브릭은 혹여 그녀가 실수하지 않을까 긴장의 끈을 바싹 조였다. 그러면서도 죽은 베로니카를 모시던 하녀들을 모두 내쫓았으니 마음 편히 지내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적절한 당근과 채찍으로 엘레나를 통제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마저도 엘레나의 연기에 감쪽같이 속고 있단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열흘 후에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초대 가주가 되시는 로제르트 공작 전하의 탄신기념 연회가 마련되어 있어요. 그때까지는 완벽한 공녀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세요.”

    “네, 노력할게요.”

    충고를 가장한 리아브릭의 잔소리에 시달리는 사이 마차가 제국의 천 년 수도를 가로질러 대공가 저택에 다다랐다. 하루 종일 걸어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는 정원을 가로지르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이 보였다. 이윽고 그 앞에 도착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이 열로 쭉 기립해 서 있던 집사와 하인, 하녀들이 한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

    엘레나는 도도하게 턱을 들더니 게슴츠레한 눈길로 그들을 쫙 훑어봤다. 솜털이 쭈뼛 서게 하는 권위적 시선에 누구도 감히 머리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단순히 무게를 잡는 게 아니라, 은연중에 풍기는 존재감이 공기를 압도했다.

    “베로니카!”

    저택 안에서 프란체 대공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빠른 걸음걸이로 저택을 나온 그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반갑게 엘레나를 맞이했다. 그 가식적인 연기에 튀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치료가 쉽지 않았거늘, 이리 건강하게 돌아와 주니 더없이 기쁘구나.”

    “다 염려해 주신 덕분이에요.”

    엘레나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자 프란체 대공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게 어찌 내 덕이겠느냐? 가이아 여신께서 도운 덕이지. 자, 이러고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네, 아버님.”

    몇 년 만에 상봉하는 다정한 부녀지간을 연출한 엘레나와 프란체 대공이 응접실로 장소를 옮겼다. 리아브릭 역시 조용히 따라오더니 자리를 함께했다. 그윽하게 우려낸 동방의 차를 음미하며 세 사람은 그들만의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많이 변했구나. 제법 그 아이의 모습이 보여.”

    프란체 대공은 첫 만남과 달라진 엘레나의 분위기에 놀란 눈치였다. 단순히 얼굴을 닮아서가 아니라 태생부터 타고나는 귀족의 존귀함이 풍겨서였다.

    “아버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아직 멀었답니다.”

    “기특한지고. 다시 말하지만 너는 내 친딸이나 다름없다. 대공가는 너의 집이나 다름없으니, 맘껏 누리고 지내거라.”

    “그리하겠습니다, 아버님.”

    엘레나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대꾸하며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 불과 한 달 만에 천박함을 벗어던지고 귀족의 태를 내자 프란체 대공도 흡족해했다.

    “인사는 이쯤이면 됐다.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푹 쉬도록 해라.”

    “배려에 감사드려요.”

    엘레나가 소파에서 일어서자 리아브릭이 충고를 잊지 않았다.

    “저택 내부 구조 기억하죠? 방에 가 계세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리브.”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어 보인 엘레나가 예의를 갖추더니 응접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프란체 대공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역시, 자네는 날 실망시키는 일이 없군. 저 천한 게 그럴싸하게 귀족 흉내를 내고 있지 않나?”

    “겉보기만 그럴 뿐입니다. 근본이 없다 보니 조금만 대화해도 밑천이 다 드러나고 말 거예요.”

    리아브릭의 우려에 프란체 대공이 인상을 썼다.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곧 탄신기념일인데.”

    “지병을 핑계로 귀족들의 접촉을 최대한 차단할 생각이에요.”

    “그렇군.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프란체 대공은 나른하게 앉아서는 남 얘기 하듯이 대꾸했다. 한번 믿고 맡긴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을 만큼 리아브릭을 신뢰했다.

    “그보다 전하, 황궁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발정 난 강아지처럼 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나 보군. 자세히 얘기해 봐.”

    그간 쌓인 안건의 처리를 두고 심도 있는 대화가 오갔다. 대부분이 대공가의 행보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 시각. 엘레나가 응접실을 나서자 직속 하녀들이 일렬로 서서 머리를 숙였다. 눈을 내리깔고 확인해 보니 네 명 모두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제인, 미사, 루나린, 그리고…….’

    일일이 기억 속 이름을 읊조리던 엘레나의 시선이 맨 끝에 서 있는 주근깨 소녀에게 꽂혔다.

    ‘앤.’

    앤을 내려다보는 엘레나의 시선이 더없이 냉랭해졌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앤은 전생의 엘레나가 가장 마음을 준 하녀였다.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눈치가 빨라 입안의 혀처럼 굴어 늘 엘레나를 흡족하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날 배신할 줄은 몰랐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앤은 리아브릭이 심어놓은 간자였다. 황비 시절, 대공가의 사주를 받은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하던 찰나 엘레나는 분명히 보았다. 도와달라며 발악하는 그녀를 매정하게 외면하는 앤을. 그제야 앤이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짐작건대 그녀의 주변에 머무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리아브릭에게 보고한 것도 앤이었을 것이다.

    앤의 앞에 서자 그때의 뭐 같은 기분이 다시금 떠올랐다.

    ‘기대해. 너 역시 내가 느낀 절망을 똑같이 느끼게 해줄 테니까.’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경고를 날린 엘레나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 시선과 침묵이 부담스러웠던지 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앤이 말을 흐리며 입술을 닫았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엘레나의 시선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다. 앤은 숨을 죽였다. 눈치로 먹고사는 시녀들이다 보니 뭔가 잘못된 걸 느낀 것이다.

    “말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죄, 죄송합니다.”

    “또? 그리 학습 능력이 없어서야 시중을 들 수 있나 모르겠구나.”

    당황한 앤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엘레나는 그때 느꼈던 배신감을 생각하면 뺨을 때려도 기분이 풀릴 거 같지 않았다.

    ‘그만두자.’

    엘레나는 자꾸만 올라가는 손을 내렸다. 괜히 필요 이상의 행동을 해서 리아브릭의 의심을 살 필요는 없다. 선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선을 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지 결코 넘어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멈추면 돌아온 공녀가 아랫것들의 기강을 잡은 것쯤으로 여기고 넘어갈 것이다. 엘레나가 돌아서자 경직되어 있던 앤의 긴장이 살짝 풀리는 게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서 걷자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홀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이 층에 위치한 베로니카의 방 앞이었다.

    “뭘 멀뚱멀뚱 보고 서 있니? 문 안 열고.”

    차가운 말투에 흠칫 어깨를 떤 앤이 재빨리 뛰어나와 방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리석 문 사이로 걸어 들어온 엘레나가 눈에 익숙한 가구와 커튼, 카펫, 장식장, 그림 등을 훑어보았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 엄습했다.

    ‘베로니카가 쓰다 만 것들을 나보고 쓰라고?’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역겹고 소름이 끼쳤다. 지난 삶에선 뭣도 모르고 이것들을 좋다고 썼지만, 이젠 아니다. 엘레나가 몸을 돌리더니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서서 턱짓을 하자 바싹 긴장하고 있던 앤이 얼른 옷장 문을 열었다. 안에는 드레스가 빼곡히 걸려 있었다.

    “다 꺼내.”

    “네?”

    “꼭 두 번 말해야겠니? 싹 다 꺼내라고.”

    긴장한 하녀들이 드레스를 서둘러 꺼내고는 그것을 방 중앙에 깔린 카펫 위에 쌓았다. 드레스만 스무 벌 가까이 되다 보니 허리까지 올 만큼 수북했다.

    “저 볼썽사나운 커튼도 떼렴. 색이 형편없는 저 그림도 치워 버리고.”

    하녀들은 무작정 시키는 대로 따랐다. 왜 이러나 의아함이 들기도 했지만 행여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감히 묻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이것들을 당장 태워 버려.”

    “하, 하지만…… 네, 따르겠습니다.”

    하녀 중 가장 연장자인 루나린이 뭐라 말을 하려다가 얼른 삼켰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 일하던 그녀는 사 개월 전쯤 대공가에 들어왔다. 경험상 변덕스러운 주인일수록 토를 달거나 말을 많이 할수록 화를 입는다.

    “앤, 집사에게 일러 내 드레스 제작을 맡은 양장사와 수도에서 손꼽히는 목수를 찾아 부르라고 해. 지금 당장.”

    “네? 네!”

    앤이 서둘러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앗! 죄, 죄송합니다.”

    싸늘한 엘레나의 지적에 앤이 사색이 됐다.

    “양장사에게는 이 말도 전하렴. 해 지기 전까지 숍에 있는 드레스 전부와 자수 커튼, 그리고 카펫도 싹 가지고 들어오라고.”

    “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앤이 후다닥 방을 나서자 엘레나도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이 층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워낙 대저택이다 보니 방만 해도 백 개가 넘었는데, 그중 테라스와 연결되어 후원이 한눈에 보이는 이 층 응접실은 엘레나가 좋아하던 곳이었다.

    엘레나는 테라스에 앉아 루나린이 내온 홍차와 쿠키를 음미했다.

    “앞으로 홍차는 얼그레이로 첫 찻물은 버리고 내오렴. 쿠키는 너무 달지 않고 촉촉하게 구우라고 해. 식감이 떨어지니까.”

    “네, 아가씨.”

    엘레나의 시선이 잘 가꾸어진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 핀 백합 말인데, 굉장히 눈에 거슬리는구나. 튤립이나 데이지 같은 생기 있는 꽃도 많은데 말이야.”

    “……아가씨께서 백합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잘못 알고 있던 건가요?”

    “한때는. 근데 취향이란 건 변하게 마련이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하니?”

    “아, 아니요. 시정하겠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 정원사에게 전달해 놓겠습니다.”

    “그러렴.”

    엘레나는 찻잔을 들어 그윽한 향을 만끽했다. 이래서 나이와 경험은 무시할 수가 없나 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루나린은 두 번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말뜻을 헤아려 움직였다.

    ‘그래 봤자 조만간 앤에게 치이겠지만.’

    앤은 나이도 어리고 눈치도 빠르다 보니 배우는 게 빨랐다. 또 고지식한 루나린과 달리 간사하고 아첨에 능해 엘레나의 마음에 쏙 들고 말았다. 황궁 입궐 당시 직속 시녀장으로 연장자인 루나린이 아니라 앤을 임명해 데려간 것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신뢰했을지 알 법했다.

    ‘조만간 수족이 되어줄 믿을 만한 시녀를 들여야겠어.’

    엘레나의 머릿속에는 복수를 계획한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둔 시녀가 한 명 있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고 하지.’

    딱 삼 년 뒤, 제국이 발칵 뒤집힐 사건이 발생한다. 일개 시녀가 감히 프란체 대공의 암살 시도를 한 것인데, 그 계획이 어찌나 치밀했는지 리아브릭조차 대처하지 못했다. 비록 암살은 실패했지만 암살을 계획하고 시도할 정도의 배짱이라면 곁에 둘 만하지 않을까.

    똑똑.

    응접실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루나린이 재빨리 반응해서 확인했다.

    “아가씨, 양장사 루센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허락이 떨어지자 양장사 루센이 데려온 조수와 하인들이 드레스와 자수 커튼, 카펫을 부지런히 응접실 안으로 옮겼다. 엘레나는 양장사 루센이 응접실 안에 숍을 고스란히 옮겨놓고 나서야 테라스를 나와 안으로 들어갔다.

    “공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집사한테 듣자 하니, 탄신연회 때 제가 입을 드레스를 맡았다면서요?”

    “예, 안 그래도 치수를 재고자 방문할 요량이었습니다.”

    “디자인 좀 보죠.”

    양장사 루센이 끄덕이며 조수에게 디자인 노트를 가져오라 일렀다. 디자인 노트를 건네받은 엘레나가 무심한 눈길로 훑어보았다. 무미건조한 반응에 양장사 루센이 절로 긴장했다.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라인은 괜찮은데 레이스가 촌스럽네요. 또 무늬랑 패턴도 너무 고전적이고.”

    “그, 그렇습니까? 혹시 원하는 스타일이 있으시면 적극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디자인을 바꾸면 탄신연회까지 제작하기 빠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 공녀의 주문이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제가 바라는 건 사교계의 별이라는 제 위치에 어울리는 단 한 벌의 드레스예요. 그 있잖아요,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별빛을 머금는 느낌이요.”

    “벼, 별빛이요?”

    반문하는 양장사 루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수용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인 요구였다.

    “조명을 받았을 때 더 화려해지고. 물방울 보석이 모여서 저 밤하늘의 오색 빛깔 은하수처럼 절 돋보이게 해주는 드레스.”

    “은하수, 은하수라.”

    “숨 막힐 정도로 영롱한 별빛을 잔뜩 머금은 드레스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네요.”

    “아! 어떤 느낌인지 대충 감이 오네요. 열정을 다해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을 잡은 듯 의지를 보이는 양장사 루센을 보며 엘레나는 말없이 웃었다.

    ‘너무 애쓰지 마요. 루비나 사파이어, 진주 등 고가의 보석을 주렁주렁 단 초고가의 드레스만 가져오면 되니까.’

    완성된 드레스는 엘레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칠 게 분명했다. 시일도 촉박하거니와 화려함만 좇은 드레스는 조화가 망가지게 마련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그 드레스를 입고 주목받고 싶지도 않고, 주목받을 생각도 없다. 엘레나는 작심한 계획을 떠올렸다. 대공가의 재물로 대공가를 집어삼킨다! 상상만으로도 전신이 짜릿해졌다. 지난 삶의 엘레나는 한정된 금액을 리아브릭의 통제 내에서 사용했다. 마치 용돈처럼. 미련하게도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받아들였다.

    왜? 그녀는 가짜 베로니카니까. 대역이니까.

    근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탄신연회를 기점으로 제국의 모든 귀족은 그녀를 베로니카 공녀로 받아들일 것이다. 사교계의 인정을 받는 이상 엘레나는 진짜나 다름없었다. 그걸 자각한 이상 얌전히 리아브릭의 통제에 따라서 돈을 받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엘레나는 대륙 최고의 사치녀로 거듭날 생각이었다. 마르지 않는 대공가의 재물이 마르고도 남을 만큼. 그리고 그렇게 사들인 드레스와 보석, 구두, 장신구를 따로 처분할 것이다. 특히 가치 하락이 적은 보석이 듬뿍 달린 드레스는 감가율이 낮았다.

    다시 말해 대공가의 재물로 사들인 사치품을 처분하는 즉시, 엘레나가 남몰래 운용 가능한 비자금이 된다는 의미다.

    “아, 깜빡하고 잊을 뻔했는데 드레스의 디자인을 바꾼 건 비밀로 하세요. 탄신연회 때 아버님뿐만 아니라 축하하러 와주신 귀족분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거든요.”

    “입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여벌의 드레스를 몇 벌 더 고르고 나서야 엘레나가 화제를 바꿨다.

    “드레스는 이쯤 하고, 자수 커튼을 볼까요?”

    “네, 북방에서 건너온 실크에 눈꽃을 형상화한 자수를 놓은 커튼들인데…….”

    설명을 충분히 들은 엘레나는 개중 마음에 드는 커튼과 카펫을 골라 방에 설치하라 일렀다. 용무를 마친 양장사 루센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목수 루틴이 방문했다.

    대리석과 고목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를 활용해 가구를 제작하는 목수 루틴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장인이었다. 엘레나의 취향이 반영된 침대와 협탁, 옷장, 장식장의 제작을 의뢰하고 나서야 목수 루틴은 돌아갔다.

    ‘리아브릭이 생각보다 늦네? 슬슬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엘레나가 테라스에 앉아 홍차를 즐기며 석양을 감상하던 때였다.

    “저, 아가씨. 리아브릭 자작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렴.”

    리아브릭의 공식적인 작위는 자작이다. 타국에 비해 여성의 인권이 높은 제국은 여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응접실에 들어온 리아브릭이 테라스에 앉아 있는 엘레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매섭게 떴다.

    “공녀 전하와 긴히 나눌 얘기가 있으니 넌 나가 있어라.”

    “네.”

    루나린이 물러나기 무섭게 리아브릭이 냉기를 풀풀 풍기며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리브, 왔어요? 여기 앉아요. 석양을 보며 마시는 홍차 맛이 일품이에요.”

    태평하기 짝이 없는 엘레나의 권유에 리아브릭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해졌다.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네? 뭐가요?”

    날이 선 물음에 엘레나가 살짝 당황해하며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분명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멋대로 드레스나 커튼을 태워 버리는 것도 모자라 양장사와 목수를 불러들였다고요? 제가 경고했죠. 무슨 일이든 저와 상의하고 허락을 구하라고요.”

    “……이게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엘레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순진무구한 표정에 리아브릭이 치미는 짜증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그러면 허락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런 사소한 일쯤은 리브 허락이 없어도 재량껏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뭐라고요?”

    날이 선 반문에 엘레나가 울먹거렸다.

    “그렇잖아요. 리브는 항상 바쁘고 기껏해야 드레스나 가구 바꾸는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물어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그래도 물어봤어야죠. 자칫 의심받을 수 있단 생각은 안 했어요?”

    의심이라는 말에 엘레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 일로 제가 왜 의심을 받게 된다는 거예요? 전 도저히 모르겠어요. 리브, 제가 뭘 잘못한 거죠? 제발, 얘기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고칠게요, 네?”

    “…….”

    되레 질문을 받은 리아브릭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의심을 운운했지만 대공가에서 엘레나가 가짜라고 의심할 이들은 단언컨대 없었다. 베로니카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거나 그녀를 기억하는 자들을 모조리 내쳤기 때문이다. 엘레나의 행동은 변덕 정도로 비쳤을 것이다.

    “사교계의 소문만큼 무서운 건 없어요. 외부인 접촉은 그 불씨가 될 수 있죠.”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죄송해요. 앞으로 사소한 일이더라도 허락을 구할게요. 그러니 오늘 실수는 용서해 줘요, 리브.”

    간곡한 부탁에 리아브릭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주도권을 쥔 건 그녀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말렸단 생각이 들어 개운치 못했다.

    반대로 엘레나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교묘하게 리아브릭의 추궁을 피함과 동시에 꼬투리 잡을 게 생긴 까닭이었다.

    ‘허락을 받으라고?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기왕 따를 거면 아주 충실히 리아브릭의 말에 따를 생각이었다.

    ‘근데 그게 꼭 좋은 일은 아닐 거야.’

    리아브릭이 원하는 걸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 * *

    리아브릭은 늘 시간에 쫓겼다. 제국에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만큼 그녀의 업무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작게는 상단 거래 문제부터, 크게는 변방 귀족들의 사사로운 모임까지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리아브릭이 안경을 벗고는 침침해진 눈을 어루만졌다.

    ‘공국까지 다녀오느라 허비한 시간이 너무 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베로니카 공녀의 부재는 대공가의 후계자 구도에 큰 타격을 줄 만한 일이었다. 특히 방계에서 독립한 바스타슈 가문의 영식 렌은 나이는 어리지만 결코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지금이야 프란체 대공이 건재하니 숨을 죽이고 있지만, 베로니카 공녀의 부재가 장기화될 시 핏줄을 운운하며 대공가의 후계자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컸다. 그걸 사전에 방지하고자 손수 대륙의 반대편까지 가서 엘레나를 데려오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리아브릭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그로 인해 쌓여 있는 결재 서류와 처리할 안건들은 영민한 그녀라 할지라도 지치고 예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리아브릭이 인상을 썼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일러뒀는데.

    “저예요, 리브.”

    허락도 없이 문을 열더니 고개를 빠끔히 내민 것은 엘레나였다.

    “죄송해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다던데…… 불쑥 찾아와서.”

    “아니에요, 서 있지 말고 들어와요.”

    불쾌감을 꾹 참으며 말하자, 눈치를 살피던 엘레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사소한 거라도 물어보고 결정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실은 신을 만한 구두가 없어서 구두 장인을 만나 따로 주문해야 할 거 같거든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러세요.”

    리아브릭이 대수롭지 않게 수락하자 엘레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요?”

    “필요하다면서요. 집사에게 일러서 수도에서 손꼽는 장인으로 데려오라 하세요.”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리브.”

    엘레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듯 치마를 펄럭이며 집무실을 나갔다.

    리아브릭은 다시 시선을 처리해야 할 서류 더미로 돌렸다. 급작스런 방문에 흐름이 깨지긴 했지만, 아직 대역으로 미흡한 엘레나를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선 일일이 신경을 써야 안심이 됐다.

    그러고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보고서에 따르면 비앙카 자작이 황실과 비공식적 접촉을 했단 건데…….’

    골치 아픈 처리 사항을 두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엘레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리브.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이죠?”

    리아브릭이 치미는 짜증을 꾹 눌러 참으며 물었다.

    “치장하다 보니 마땅히 쓸 만한 목걸이나 귀걸이가 없더라고요.”

    “집사에게 일러서 수도의 보석상을 들이라고 하세요.”

    “정말 그래도 돼요?”

    엘레나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더 할 얘기가 남았나요?”

    “네? 아뇨.”

    “그럼 나가보세요.”

    엘레나가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두 번이나 방해를 받고 예민해진 리아브릭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꽤 깊게 몰입했던 사고가 끊겼던 터라 다시 생각을 이어가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똑똑.

    그러나 끝났을 거라 생각했던 엘레나의 방해는 이제 시작이었다.

    “자꾸 방해해서 미안한데 리브, 딴 게 아니고 보석 박힌 장신구는 다 비싸더라고요. 몇 개나 사도 돼요?”

    “필요한 만큼 사요.”

    리아브릭의 목소리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자꾸만 집중이 깨지는 터라 업무 처리 효율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레나가 알았다며 다신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곤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까 필요한 만큼 사라고 한 게 정확히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예요? 태어나서 필요한 만큼 사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알아서 사라고요. 갖고 싶은 만큼. 그런 것까지 일일이 얘기해 줘야 해요?”

    “그럴게요!”

    ‘이제 더는 방해하지 않겠지.’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레나는 엄마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아이처럼 쉼 없이 리아브릭을 찾아왔다.

    “시녀들이 그러는데 요새 천연 화장품이 유행이래요. 저도 그것들을 좀 사고 싶은데, 안 될까요?”

    정말이지 시시콜콜한 부탁부터.

    “바닐라 홍차가 그렇게 향이 좋다는데 저택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꼭 마셔보고 싶은데…….”

    개인적이다 못해 사소한 허락까지.

    ‘저년이 날 가지고 노는 건가?’

    리아브릭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기분 같아서는 뺨이라도 한 대 쳐올리고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열흘 뒤면 대공가의 영광을 연 탄신기념일이었다. 급한 불을 끄는 게 우선이지 감정을 못 이겨 엘레나의 얼굴에 생채기를 남기거나 사소한 분란을 만들어서는 곤란했다.

    리아브릭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탄신기념일만 지나면 주제 파악을 시켜야겠어.’

    다음 날, 동틀 무렵. 지지부진했던 일 처리를 마무리하고자 리아브릭은 일찌감치 집무실에 처박혔다. 그녀는 이 시간대를 좋아했다. 고요한 아침 녘이야말로 집중력을 극대화하기 가장 좋은 시간대였다. 두뇌 회전이 빨라지며 업무 처리에도 속도가 붙었다.

    똑똑.

    노이로제를 일으키는 저 노크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이, 일찍 눈이 떠져서 산책할까 했는데 불이 켜져 있더라고요. 인사라도 할까 해서 들렀는데, 또 방해한 거 아니죠?”

    “…….”

    평정심이 깨진 리아브릭의 표정이 만년설처럼 차가워졌다. 되돌아보면 이제까지 그녀의 인내심을 이렇게까지 건드린 인간은 없었다. 제국을 좌지우지한다는 프란체 대공조차도 그녀의 의사는 양보하고 존중해줬다.

    ‘저 하찮은 년이 감히.’

    리아브릭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안에 피 맛이 살짝 감돌았다.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을 겨우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엘레나가 주눅이 들어 시선을 어디에 둘지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미, 미안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나중에 다시라는 말에 끊길 뻔한 인내심을 겨우 붙잡은 리아브릭이 입술을 뗐다.

    “들어와요.”

    “그래도 돼요?”

    “차가 아직 식지 않았을 거예요. 이 서류만 처리하고 얘기하죠.”

    엘레나가 책상 건너편 소파에 착석했다. 탁자 위, 온기가 남아 있는 찻잔의 찻물을 음미하는 사이 리아브릭이 양피지에 뭔가를 적어 내밀었다.

    “이, 이게 뭐예요?”

    “저택 내에서 숙지해야 할 지침이에요.”

    엘레나의 시선이 양피지로 향했다. 거기엔 대공가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그 범위, 그리고 넘지 말아야 할 적정선이 어디까지인지 적혀 있었다.

    주요 조항을 뜯어보면 대충 이렇다.

    1. 상인, 양장사, 목수 등을 만나는 건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 단, 집사를 통해서 주선된 이만 만날 수 있다.

    2. 열흘간 쓸 수 있는 금액을 2만 프랑으로 제한한다.

    3. 매일 아침 스케줄을 보고하고, 허락이 있을 시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 단, 스케줄의 일과를 절대 어기지 않는다.

    4.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 조건에 한해서 자신을 찾는다. 그 외는 조항의 지침에 따라 행동한다. 

    조항 1은 그렇다 치고, 엘레나는 조항 2를 주목하며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공녀인데, 겨우 2만 프랑만 쓰라고?’

    2만 프랑이면 품종 좋은 말 열 필을 살 수 있는 액수고, 평민의 몇 년 치 생활비에 해당한다. 엘레나가 구매한 자수 커튼과 카펫, 그리고 구두의 가치를 합치면 대략 2만 프랑이 될 것이다. 열흘간 쓸 사치비로만 보면 웬만한 귀족들은 엄두도 못 낼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귀족의 기준이고, 여긴 대공가였다. 모든 귀족의 우상이자, 수장 대공!

    대공가의 부와 재물은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엘레나가 재물을 소비하는 속도보다 쌓이는 부와 재물이 더 많은 곳이 바로 대공가다.

    ‘대략 얼마였더라? 황비가 되기 직전에 내가 품위 유지로 열흘간 쓰던 비용이 얼추 10만 프랑에 육박했던 것 같은데.’

    황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상황에서 품위 유지비로 쓰던 재물이 대략 저 정도다. 그때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뭐, 어때. 어차피 무시하면 그만인 걸.’

    무의미한 제약이다. 한도를 그어놓았다고 한들, 베로니카 공녀의 신분으로 대공가 앞으로 달아놓으면 지불할 수밖에 없다. 사교계에 베로니카 공녀를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파렴치한 빚쟁이로 전락시킬 수는 없지 않나? 만일 그런다면 베로니카 공녀의 평판은 곤두박질칠 거고 동시에 대공가의 위신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베로니카 공녀의 명예가 곧 대공가의 체신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도가 얼마든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엘레나는 세 번째 조항을 주목했다. 스케줄 보고. 이전 삶에서도 엘레나는 일거수일투족을 리아브릭에게 선 보고 후 허락을 받고 움직였다. 베로니카 행세가 어설픈 엘레나를 컨트롤하고 감시하기 위함이다.

    ‘이 조항을 잘 이용해야 해.’

    리아브릭이 제시한 룰을 깨서는 안 된다. 괜한 적대감과 경계심만 키울 뿐이다. 철저히 룰 안에서 놀아야 한다. 단지 그 룰을 엘레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면 그만이다.

    “다 외웠어요?”

    “네.”

    리아브릭이 양피지를 촛불에 가져가 태웠다. 까만 재가 흩날렸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개인행동은 삼가세요.”

    “저야말로 지침을 정해주니 오히려 편해졌어요. 뭘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알겠거든요.”

    모처럼 리아브릭의 맘에 쏙 드는 말이었다. 더도 말고 시키는 것만 잘하는 인형, 지금의 엘레나에게 바라는 모습이었다.

    “오늘 스케줄이요. 온 김에 허락받고 갈게요. 괜히 또 리브를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해요.”

    ‘진작 이럴걸.’

    리아브릭은 처음부터 제약을 두고 통제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엘레나가 테이블 위 펜을 쥐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내민 양피지에는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스케줄이 적혀 있었다.

    “오전에는 장신구 상인과 만나기로 되어 있고, 오후에는 후원 산책이 다네요?”

    “후원이 너무 넓어서 다 둘러보려면 온종일 걸릴 거 같더라고요.”

    리아브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슬릴 것도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보였다.

    “허락할게요.”

    “저 있잖아요, 리브.”

    엘레나가 머뭇거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더 할 말이 남았나요?”

    “예전에 얘기했던 기사 선임이요. 언제쯤…….”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정말요? 아, 벌써 심장이 두근거려요. 그럼 제 기사님은 언제 만날 수 있나요?”

    엘레나는 철없는 소녀처럼 들뜬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요. 공녀께 어울릴 만한 기사를 물색해 뒀거든요.”

    “저에게 어울릴 만한 분이라면?”

    “대공가 내에서도 장래가 유망한 기사예요. 검술이 뛰어나고, 기사도를 숭배하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공녀를 곁에서 모시고 싶어 해요.”

    “아, 아름다운 공녀요? 그분이 직접 그런 말을 하셨어요?”

    “네.”

    엘레나는 꿈을 꾸듯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쯤 넘어온 듯 반응을 보이자 리아브릭이 쐐기를 박았다.

    “대공가에 뛰어난 기사가 많다지만, 개중 공녀께 어울리는 기사는 이분뿐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답니다.”

    “그분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로렌츠 경이에요.”

    “어쩜, 이름마저 너무 근사해요. 하루라도 빨리 만나 뵙고 싶어요.”

    리아브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것 없죠. 오후에 차라도 한잔 마시도록 해요.”

    “저, 정말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리브, 이따 봐요.”

    용무를 마친 엘레나는 들뜬 기색으로 돌아섰다.

    ‘로렌츠가 내게 어울리는 기사라고? 날 감시하기 위함이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줍어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로렌츠를 미사여구로 포장해 엘레나의 옆에 붙여놓으려는 수작질이 너무 뻔히 보여 불쾌감마저 느꼈다.

    ‘기대해. 당신이 상상도 못 하는 최고의 기사를 선임할 테니까.’

    엘레나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오후가 되자 엘레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저택을 나섰다.

    “햇살이 따사로운 게 오래도록 걷고 싶네.”

    직속 시녀들을 대동한 엘레나는 찬찬히 후원을 거닐었다. 후원은 앞선 정원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원이 인위적으로 잘 가꾸어진 느낌이라면, 후원은 호수를 중심으로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황궁의 후원을 보고 굉장히 실망했었지.’

    황궁의 후원이 형편없다는 게 아니다. 대공가의 후원이 너무 훌륭했을 뿐이다.

    엘레나는 고즈넉한 호수의 풍경과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맑은 하늘을 운치 삼아 하염없이 거닐었다. 후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엘레나의 발걸음엔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다. 느티나무 숲 너머의 연병장. 후원 외곽에 위치한 그곳은 검술을 주로 수련하는 주 연병장과 별개로 기사의 기초 체력과 근력의 증진을 위해 조성된 일종의 체력 단련장이었다.

    “이얍! 으얍!”

    느티나무 숲 모퉁이를 돌아 나오자 기사단의 기합 소리가 메아리쳐 들렸다. 우거진 수풀을 가로지르자 탁 트인 단련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 공녀 전하가 아니십니까?”

    지척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당황하며 머리를 숙였다. 다른 기사들도 뜬금없는 공녀의 방문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2기사단 단장 제임스가 인사 올립니다. 공녀 전하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는지?”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기사가 엘레나의 방문 의도에 대해 물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산책을 하다 보니 이곳으로 오게 됐네요. 혹여 제가 방해한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예정에 없는 방문인지라…….”

    엘레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저는 조용히 차나 한잔 마시고 돌아갈게요.”

    “티, 티타임을 여기서 가지신단 말입니까?”

    엘레나는 작은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풍성하게 우거진 느티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그러자 직속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천을 펴고 가져온 차와 쿠키를 가지런히 세팅했다. 우아하게 앉은 엘레나가 홍차를 음미하며 힐끗 네 시녀의 표정을 살폈다.

    “와.”

    “어, 어쩜…….”

    네 시녀 모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상의를 탈의한 채 매끈한 근육을 뽐내며 단련하는 기사들의 육체미는 한창 이성에 눈을 뜬 그녀들을 설레게 했다.

    “앤, 참 보기 좋지 않니?”

    “네? 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엘레나가 홍차를 음미하며 대꾸했다.

    “앙큼하게도 시치미를 떼는구나. 네 얼굴에 띤 홍조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 그건…….”

    앤이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설마 이리도 노골적으로 엘레나가 물어올 거라곤 몰랐던 까닭이다.

    “우리끼리 내숭을 부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니?”

    찻잔을 내려놓은 엘레나가 기사들의 요모조모를 뜯어보았다.

    “눈이 호강하는구나. 저기, 나무를 든 기사가 보이니? 몸도 몸이지만 참 바람직하게 생긴 것 같은데. 쟤는 또 어떻고. 하나같이 훈훈하게 생겼구나.”

    “그, 그러게요. 다들 잘생겼네요.”

    “그지? 그럼 앤, 이번엔 네가 말해보렴. 이 중 누가 제일 괜찮아 보이니?”

    앤이 망설이다가 한 기사를 지목했다.

    “구, 구석에 계신 분이요. 꼭 몸이 조각 같아요.”

    “나쁘지 않구나. 사내 보는 눈이 제법 괜찮아.”

    시녀도 여자다. 귀족 영애들이 황태자나 4대 공작가 영식과 자신의 사랑에 로망을 가지듯이 시녀들도 기사들을 보며 이뤄지지 않을 상상을 하게 마련이었다.

    ‘눈가림은 이 정도면 충분하고.’

    저깟 사내들의 몸뚱이가 좋든 말든 엘레나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그저 앤을 끌어들여 기사들의 몸이나 훔쳐보는 속물적인 여자로 보이고자 던진 말에 불과했다.

    ‘분명 2기사단 소속이 맞을 텐데…….’

    엘레나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얼음의 기사 휴렐바드.’

    지금으로부터 삼 년 뒤, 휴렐바드는 최연소의 나이로 제2기사단 단장에 오르며 자타가 공인하는 제국 최고의 기사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빼어난 검술 실력이야 말할 것 없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외모를 지녀 세간에서는 얼음의 기사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로부터 불과 이 년 만에 휴렐바드는 제국을 수호하는 세 검 중 하나로 불린다.

    일검, 제국 황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국검 바리사다.

    이검, 얼음의 기사 휴렐바드.

    삼검, 황야의 늑대 렌.

    일검이 실존하는 검인 걸 감안하면 휴렐바드는 렌과 더불어 제국의 최고 검사라고 봐도 무관하다. 그런 그를 얻고자 엘레나는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왜 안 보이는 거지?’

    엘레나가 초조함에 타들어가는 목을 축이고자 홍차를 마셨다.

    “저, 저기 좀 보세요. 무슨 얼굴이 저리 하얗죠?”

    앤이 지목한 곳에 시선이 닿은 시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한마디씩 보탰다.

    “……!”

    엘레나가 짧게 숨을 삼켰다. 햇빛을 받아도 그을리지 않는 하얀 피부와 짙은 녹음 같은 머리 색은 조금 앳되어 보이긴 했지만 기억 속 휴렐바드와 정확히 일치했다.

    “기사님께 이런 얘기는 실례겠지만 정말 예쁘게 생기셨네요. 여자인 제가 질투 날 정도로요.”

    “정말로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없이 잘 어울리시는 분 같아요.”

    앤의 솔직한 감상에 미사도 눈을 떼지 못하며 수긍했다. 엘레나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실제로 휴렐바드는 곱상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외모를 가졌다.

    엘레나가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무 그늘을 벗어나더니 연병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기사들은 갑작스레 난입한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당혹스러워했다.

    엘레나는 가까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련 중이던 이름 모를 기사에게 다가갔다.

    “고, 공녀 전하.”

    당황한 기사가 얼른 예의를 갖췄다.

    “멀리서 보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엘레나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기사가 슬며시 고개를 들 때였다.

    “헉.”

    기사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엘레나가 대공가의 문양이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 기사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얼얼한 표정으로 넋이 나가 서 있는 기사를 보며 엘레나가 말했다.

    “그대들의 열정이 있기에 오늘날의 대공가의 성세가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답니다.”

    기사는 감격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사소하지만 엘레나의 손길이, 저 말의 진심이 전해져 가슴을 복받치게 했다.

    엘레나는 몇몇 기사의 이마나 턱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그 발길이 휴렐바드 앞에 이르렀다.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얼음의 기사님.’

    반가운 마음에 악수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대신,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매혹적인 미소로 전할 수 없는 반가움을 대신했다.

    “……!”

    눈길이 마주친 휴렐바드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엘레나의 그윽한 시선 너머로 보이는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눈동자,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 그리고 눈웃음. 휴렐바드는 고혹적인 미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정신이 쏙 빠진 모습이랄까.

    ‘아직 어리구나.’

    완숙미가 느껴지던 지난 삶에 비해 세 살이 어려서일까? 휴렐바드는 어딘지 모르게 미숙했다. 성숙하지 못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사교계를 홀렸던 엘레나의 미소는 치명적이었다.

    “…….”

    휴렐바드는 활화산이 터지듯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밀려드는 불길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이성을 밀어내고 거칠게 뛰는 심장 고동과 혼미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겉으로 무너지지 않게 어금니를 꽉 깨무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찰나의 흐트러짐은 있을지언정 평정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엘레나는 잠시나마 곤혹스러워하는 휴렐바드의 반응을 즐겼다. 남들은 알지 못하는 얼음의 기사의 일부를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눈도장은 여기까지만.’

    아쉽지만 엘레나는 눈웃음으로 여운을 남기며 돌아섰다. 지나친 관심은 독을 부르게 마련이다. 온전히 제 사람으로 만들기 전까지 리아브릭의 의심을 살 만한 짓은 자제하는 게 좋았다.

    “우연한 발길이었지만, 오늘 그대들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강하고, 명예롭고, 충성스러운 기사분이 많구나. 해서, 저 결심했어요.”

    엘레나는 가녀린 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리고 벅찬 표정을 진정시키듯 심호흡을 하더니 기사단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늦었지만, 진즉에 했어야 할 직속 기사 선임을 수일 내로 마무리 지을까 해요. 그것도 제대로 된 선임식을 거쳐서요.”

    “드, 드디어!”

    기사들의 만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베로니카 공녀가 누군가? 장차 대공가를 이어받을지도 모를 적통 후계자다. 그런 베로니카의 직속 기사가 된다는 건 매우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이기에 기사라면 누구나 탐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간 몸이 좋지 않았기에…… 개개인이 얼마나 훌륭한 기사인지 제대로 알 기회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어요.”

    기사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몇 년간 병마와 싸우고 돌아온 공녀가 가여우면서도 저리 말해주는 마음씨가 너무 예뻤다.

    “이제라도 알아보려고요. 그러니 선임식에 한 분도 빠짐없이 와주세요. 그래야 제 눈으로 보고 판단한 뒤, 그 자리에서 기사분을 선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 직접 말씀입니까?”

    “네, 제가 직접요.”

    엘레나의 단호한 대답에 단장 제임스가 적잖이 당황했다. 그만큼 엘레나의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직속 기사 선임 같은 중대한 사안은 절차에 따라 처리된다. 선임식만 하더라도 그저 형식적인 행사일 뿐, 직속 기사는 사전에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느 분이 저의 기사가 되실지, 벌써 설레네요.”

    옅게 웃는 엘레나의 시선이 휴렐바드에게 닿아 있었다. 마치 너를 지목한다는 듯이.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휴렐바드의 포커페이스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 * *

    엘레나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 리아브릭은 그간 밀린 업무를 놀라운 속도로 처리했다.

    “반나절이면 끝낼 일을 이틀이나 끌다니. 예정대로라면 벌써 탄신기념일 사항을 점검해야 하는데.”

    대공가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초대 가주 로제르트 공작의 탄신기념일 연회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천년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현 제국 최고 귀족 가문의 시조를 추모하는 연회다 보니 일일이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똑똑.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리아브릭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로렌츠입니다.”

    “들어오세요.”

    리아브릭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간 엘레나에게 시달린 탓에 자신도 모르게 예민해졌던 모양이었다.

    “앉으세요.”

    소파에 앉자 리아브릭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로렌츠 경이 공녀의 직속 기사가 되어주세요.”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로렌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하겠다고 했다. 엘레나가 대역이라는 걸 알면서도 주군으로 모신다는 건 긍지 높은 기사인 그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엘레나의 부모를 놓쳤던 일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큰 탓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표면적으로는 공녀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거예요. 그러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때로는 통제를 해야 할지도 몰라요.”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의외군요. 로렌츠 경이 부탁을 다 하다니. 말씀하세요.”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서 제자리로 돌아오시는 그날…… 더럽혀진 제 명예를 직접 씻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가짜 공녀를 섬겼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그랬다. 대공가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나 명령이라고 해도 기사로서는 꽤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로렌츠는 언젠가 가짜 공녀를 제 손으로 죽이길 바랐다.

    리아브릭은 미소를 지었다.

    “약속하죠.”

    “기사 로렌츠 명 받들겠습니다.”

    엘레나의 죽음을 얘기하면서도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도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엘레나는 그저 인형일 뿐. 인형극이 끝나면 활활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인 장작 인형 따위에 허비할 감정은 없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공녀와 오늘 저녁 식사를 같이 들죠. 선임식은 이틀 안에 약식으로 조용히 진행할 거고요.”

    대공가의 온 신경이 탄신기념 연회에 쏠려 있었다. 거창하게 선임식을 치를 여력도 없거니와 굳이 베로니카 행세가 익숙지 않은 엘레나를 공식 석상에 세울 필요도 없었다.

    “하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로렌츠가 소파에서 막 일어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집무실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무례라는 걸 알지만 워낙 다급한 일인지라…….”

    “벨로우 경이 아닌가? 들어오게.”

    선임인 로렌츠의 허락에 기사 벨로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지, 지금 연병장에 공녀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뭐라고요?”

    리아브릭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연병장이라니? 엘레나가 또 예정에 없는 돌발 행동을 저지른 게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예정에도 없는 방문을 하시더니, 며칠 안에 대대적인 기사 선임식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기어코…….”

    “심지어 선임식 자리에서 직접 보시고 선출하신다고 대공가 내 기사들의 소집령도 내리셨습니다. 전례에 없는 일인데, 괜찮은 겁니까?”

    리아브릭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하나같이 리아브릭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과 정반대의 짓거리를 엘레나가 벌였다. 꼭 그녀를 엿 먹이려는 듯이.

    더 큰 문제는 엘레나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단원들 앞에서 떠벌린 것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다시 바꾸는 건 좋지 않다.

    기사단원들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건 둘째 치고 베로니카 공녀의 명망이나 평판에 심각한 타격이 갈 가능성이 컸다. 안 그래도 장기간 부재로 각종 구설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리아브릭의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입조심하라고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이 사달을 만들어?’

    리아브릭은 근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한 인간을 향한 순수한 분노를 느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진즉에 통제 수단을 마련해 둬야 했는데.’

    실책이다. 최소한의 고삐를 잡아뒀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벨로우 경, 공녀 전하를 이리 모셔오세요. 지금 당장이요!”

    “아, 알겠습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리아브릭의 명령에 벨로우가 허겁지겁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 * *

    숨이 막힐 정도로 싸늘한 정적이 엘레나와 리아브릭 사이를 메웠다. 집무실로 엘레나를 불러 앉힌 리아브릭은 어림잡아 삼십 분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예전의 엘레나였다면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을 게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엘레나에게 이런 식의 압박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리아브릭이 뭐라고 할지도 대충 예상이 갔거니와 그에 대한 합당한 대처법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엘레나는 이 시간이 지루하기까지 했다. 결국 의미 없는 시간 낭비에 질색한 엘레나가 잔뜩 미안한 얼굴로 침묵을 깼다.

    “혹시 제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가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낮게 깔린 리아브릭의 목소리에 냉기가 흘렀다. 엘레나가 슬쩍슬쩍 고개를 들어 리아브릭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전 후원을 산책했고 그러다 연병장에 다다라 기사단원을 만나 몇 마디 한 게 다예요.”

    “지금 몇 마디라고 했어요?”

    흠칫.

    곤두선 리아브릭의 반응에 엘레나가 어깨를 떨었다.

    “……리브가 제게 한 약속이 떠올랐어요. 고결한 기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말. 심장이 막 미친 듯이 뛰었어요. 이 중에 저의 기사가 있다는 사실에. 그래서 얘기했어요. 대공가에서 제일 고결한 분을 제 직속 기사로 선임하겠다고요. 이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요?”

    엘레나의 화술은 교묘했다. 약속을 들먹이며 리아브릭의 탓으로 돌렸다. 심지어 추궁당할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더 가관은 엘레나의 표정이다. 뭘 잘못한 건지 정말 모르겠다는 억울함마저 묻어나더니, 울먹거리는 시늉까지 했다.

    “이! 이…….”

    리아브릭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았다.

    “모르겠어요? 제가 화가 나는 건 공녀가 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선임식에 기사들을 소집한다느니 하는 말을 떠벌렸다는 거예요.”

    “그, 그게 잘못된 거였어요?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요, 리브. 전 몰랐어요. 문학 <롤랑의 노래>나 제국의 예식을 배울 때, 선임식에 동료 기사들이 모여 맹세의 증명을 해주는 걸로만 알고…….”

    엘레나는 본인에게 유리한 사료를 들어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 고작 그런 이유로.’

    참을 수 없는 화를 느끼면서도 리아브릭은 더는 추궁할 수가 없었다. 본래 엘레나는 허영심이 넘치는 여자였다. 특히 맹세의 서약은 공국을 떠나기 전부터 엘레나의 로망 중 하나였다. 그걸 알면서도 간과한 본인의 잘못도 분명 있었다.

    “미안해요, 리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제가 몰라서 그랬어요. 주의할게요.”

    엘레나가 저자세로 사과하자 리아브릭이 어금니를 물며 화를 삭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공녀의 입을 통해 대대적인 선임식을 예고했다. 수십 명이 넘는 기사가 그 말을 들었고, 지금쯤이면 대공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이제 와 말을 주워 담는 건 이 년 만에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베로니카에게 또 다른 추문을 낳을 빌미가 될 수 있다.

    리아브릭은 소기의 목적인 기사 로렌츠를 엘레나의 직속 기사로 선임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뒀다. 그 목적만 이룬다면 비공개 선임식이든, 공개 선임식이든 중요치 않다고 여겼다.

    “계속 이런 식이면 저도 더 두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리, 리브.”

    “당신이 왔던 곳으로 돌려보낼 수밖에요.”

    “……!”

    리아브릭의 눈에 엘레나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게 보였다.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협박이 제대로 먹혔단 생각을 가졌다. 그것이 착각인 줄도 모르고.

    ‘돌려보낸다고? 내가 없으면 곤란한 건 너희잖아?’

    엘레나의 완벽한 연기력이었다.

    “용서해 줘요, 리브. 저 다신 실수 안 할게요. 그러니 계속 여기 있게 해주세요.”

    “그 각오 잊지 마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엘레나가 싹싹 비는 것으로 이번 일은 마무리됐다. 냉랭한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음에도 엘레나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신 리아브릭이 그런 엘레나에게 물었다.

    “공녀, 아까 기사 한 분을 소개해 드린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럼요. 그것만 기다린걸요.”

    “아까 전부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엘레나가 깜짝 놀랐다.

    “지, 지금요? 저 산책하고 와서 꼴이 엉망인데…….”

    “개의치 마세요. 그런 공녀의 흐트러진 모습마저 동경하는 분이랍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리아브릭이 벽면의 책장에 진열된 책 한 권을 잡아당겼다.

    쿠우웅.

    책장 옆 그림이 진열되어 있던 벽면이 열리며 응접실과 통로로 이어진 비밀의 문이 열렸다. 엘레나는 토끼 눈을 뜨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영악한 여자.’

    리아브릭의 주도면밀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앞서 엘레나는 내정된 기사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선임식에서 손수 기사를 선택하겠다고 밝혔다. 그 와중에 기사 신분의 로렌츠와 사적인 만남을 갖는 건 내부적으로 선임 과정에 대한 불공정성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식한 것이다.

    ‘하나는 놓쳐도 둘은 놓치지 않는다는 거네.’

    아쉽지만 이 패는 못 쓰게 됐다. 대신 엘레나는 느슨해질 뻔한 마음의 고삐를 쥐어틀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저벅저벅.

    비밀의 문 너머로 은빛 갑주를 차려입은 로렌츠가 건너와 절도 있게 예의를 갖췄다.

    “기사 로렌츠, 공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고개를 드세요.”

    턱을 든 로렌츠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꽂혔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치며 서로 빤히 쳐다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우선 수줍은 소녀처럼 굴고.’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로렌츠의 얼굴을 훔쳐보며 부끄러워했다. 그러자 로렌츠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짧은 순간이지만 엘레나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꼈단 걸 알아챈 것이다.

    “리브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듣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시고, 훌륭한 기사님이신 것 같아요.”

    “영광입니다, 공녀 전하. 하면,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무례요?”

    호감을 읽은 로렌츠는 과감하게 엘레나에게 다가가 한쪽만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엘레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가증스러운…….’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러 로렌츠의 얼굴을 쳐낼 뻔했다. 이제 지난 삶이라고는 하나, 엘레나를 배신하고 그녀의 몸에 칼을 박아 죽인 흉수다. 증오스러운 면상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운데 손등에 입맞춤이라니.

    “그…… 저…….”

    엘레나가 당황한 척 말을 더듬었다. 또 홍조를 띤 듯 얼굴도 붉혔다. 엄밀히 따지면 순간 확 끓어오른 분노 때문이지만 묘하게 지금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다.

    “어떠신지?”

    “네? 어떠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리아브릭이 미소를 지으며 첨언했다.

    “단언컨대 대공가 내에 로렌츠 경만큼 뛰어난 기사는 없을 거예요.”

    “그, 그래 보여요. 살면서 로렌츠 경만큼 멋진 분은 처음 봬요.”

    엘레나가 수긍하며 힐끗 훔쳐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로렌츠 입가의 미소가 진해졌다. 안 그래도 번지르르하게 생긴 이목구비였거늘,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제가 그랬죠? 공녀께 더없이 잘 어울리는 기사분이실 거라고.”

    사실 로렌츠는 잘생긴 미남형 얼굴이었다. 실제 사교계에서 구애하는 영애도 꽤 있었으며, 리아브릭의 추천을 떠나 지난 삶에서 그를 직속 기사로 임명한 데는 수려한 외모가 크게 작용했었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분이죠. 이만한 분 대공가 내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녀를 동경하고 있어요.”

    엘레나는 픽 하고 터질 뻔한 비웃음을 겨우 참았다.

    ‘누가 보면 무도회에 참가한 영애가 기사를 소개받는 자리인 줄 알겠어.’

    지금 리아브릭의 역할은 주선자다. 어떻게든 엘레나가 로렌츠에게 호감을 느껴 직속 기사로 선임하도록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리 원하니, 저자에게 반한 척해주지.’

    여기서는 리아브릭이 바라는 인형처럼 굴어주면 그만이다.

    “공녀 전하를 곁에서 모시며 제 검을, 제 명예를, 제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로렌츠 경.”

    엘레나는 살짝 감동받은 연기를 했다.

    “그 마음 제게 전달됐어요. 리브, 진심으로 고마워요. 리브가 아니었으면 로렌츠 경 같은 분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꼭 꿈이 이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모처럼 리아브릭도 만족스러워했다. 로렌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엘레나를 보며 푹 빠졌다는 확신을 받았기 때문이다.

    * * *

    대공가의 하녀와 하인들은 몸이 두 개라도 빠듯할 만큼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다. 프리드리히 가문의 일 년 행사 중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는 초대 가주 탄신기념일만으로도 등골이 휘었는데, 예정에도 없던 기사 선임식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가는 대공가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더 이상 당신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아.’

    지난 삶의 엘레나는 수동적이었다. 리아브릭이 먹으라면 먹고, 입으라면 입었으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을 외워 귀족들에게 앵무새처럼 떠들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짜인 것이 드러나면 이 일을 공모한 리아브릭과 엘레나는 살 수 없다고 협박했다.

    결정적으로 엘레나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들 때마다 부모님을 죽이겠다며 협박했다. 하지만 그땐 부모님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그것도 모른 채 부모님을 죽인 원수의 말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소식을 알 수 없으나 엘레나는 부모님이 무사히 공국을 빠져나갔다고 믿었다. 대공가로 오기 전, 의도적으로 엘레나를 떠보던 말도 그랬고 신중하기 짝이 없는 리아브릭이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런 정황을 뒷받침했다. 리아브릭은 부모님의 신변을 담보로 엘레나를 통제하거나 구속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앤, 앞머리가 흐트러졌구나.”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엘레나의 한마디에 앤이 질겁하며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리했다.

    “루나린, 구두.”

    엘레나가 유리 물방울이 장식된 구두에 발을 얹으며 허리를 세웠다. 물결처럼 구불구불한 적금발이 등 뒤로 떨어지며 엘레나의 전신이 거울에 잡혔다. 목선과 어깨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오프 숄더 드레스에 눈매를 살리는 화장으로 마치 한 송이 장미 같았다.

    “너, 너무 아름다우세요.”

    “그러니?”

    기립해 있던 앤의 순수한 감탄에 엘레나가 무성의하게 되물었다.

    “아, 리브가 밖에서 기다린다고?”

    “네, 오신 지 꽤 되셨습니다.”

    “치장하느라 깜빡 잊었구나. 다들 나가고 들어오라고 하렴.”

    엘레나는 치장을 핑계로 자신을 찾아온 리아브릭을 한참 동안 복도에 서서 기다리게 했다.

    “리브,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좋은 날이다 보니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너무 지체했어요.”

    썰물처럼 시녀들이 빠져나가고 들어온 리아브릭을 보며 엘레나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이런 기분일까.

    “준비는 다 끝났나요?”

    “네. 리브, 저 어때요? 예뻐 보이나요? 그분 눈에도 예뻐 보였으면 좋겠는데…….”

    리아브릭의 눈에 비친 엘레나는 연모하는 기사의 마음에 들고자 마음 졸이는 영애 같았다. 베로니카 공녀의 지위에 맞는 위엄을 잃지 말라고 그리 말해도 엘레나는 이렇듯 한심스러운 소녀티를 벗지 못했다.

    그래서 더 다루기 쉬운 걸지도 모르겠다. 저런 욕망과 허영심이 있으니 로렌츠에게 반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않은가.

    “분명요. 제가 보증하죠.”

    “고마워요. 저 너무 설레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꼭 꿈을 꾸는 기분이에요.”

    “어제는 어떠셨어요?”

    엘레나는 지난 나흘간 로렌츠와 티타임을 가졌다. 로렌츠에게 푹 반해 버린 척 완벽한 연기를 보이기 위한 투자였다.

    “황홀한 시간이었어요. 고작 차 한 잔을 마신 게 다인데……. 말없이 제 곁에 서 계신 그 시간이 너무도 좋은 거 있죠.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로렌츠 경은 운이 좋은 기사네요. 공녀의 선택을 받은 셈이니.”

    “그렇게 되는 건가요?”

    슬쩍 띄워주니 엘레나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오늘 로렌츠 경과 꼭 맹세의 서약을 하세요. 명예로운 기사의 동경을 외면하는 악녀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아, 악녀라니요! 저는 절대 그분의 진심을 배신할 수 없어요.”

    엘레나는 악녀라는 표현에 질색하며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모습이 퍽 믿음직스러웠는지 리아브릭도 더는 그 얘길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체됐네요. 가시죠, 공녀.”

    리아브릭이 한 발 뒤로 물러서 앞을 권하자 엘레나가 발을 뗐다.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아갈 때마다 그 뒤를 리아브릭과 시녀들이 공손히 따랐다.

    엘레나를 필두로 쭉 이어지는 행렬은 중앙 연병장에 이르렀다. 대공가의 공식 사열식이 이루어지는 중앙 연병장에는 백여 명의 기사가 열과 행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은빛 갑주를 걸치고 가슴에 대공가의 문양을 새긴 기사단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위엄이 넘쳐 보였다.

    “공녀, 올라가세요.”

    리아브릭이 단상을 권하자 엘레나가 치맛자락을 살짝 집어 들고는 계단을 올랐다.

    “경고하는데 돌발 행동은 허락지 않아요. 외운 대로만 행동하세요.”

    반협박에 가까운 충고를 곱씹으며 엘레나는 성인 남성 어깨높이의 단상에 올랐다.

    “베로니카 공녀 전하께 인사!”

    외부 파견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한 제1기사단장을 대신해 제2기사단장 제임스가 단상 바로 밑에서 기사단원들을 통솔했다.

    찰칵, 딱!

    기사단원들은 일제히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검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햇빛이 검신에 스며들 때 손잡이를 명치까지 잡아당겼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성된 일련의 동작은 주군을 향한 영원한 충성과 복종을 약속하는 기사의 예법이다. 엘레나도 가슴에 손을 모으고 가볍게 예의를 갖추는 걸로 인사에 대한 답례를 했다.

    ‘아홉 번째 줄, 좌측에서 세 번째.’

    기사들의 면면을 살피던 엘레나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혹시나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려에 불과했다. 그는 이곳에 있다. 바로 이 중앙 연병장에.

    단상을 내려온 엘레나가 도열해 있는 기사단원들에게 걸어갔다. 그 바로 뒤를 리아브릭과 제2기사단장 제임스가 따라붙었다. 엘레나의 발길이 서 있는 기사의 앞에 멈춰 서자 제임스가 소개했다.

    “하멜 경입니다. 제1기사단 내의 강자이며, 속검의 명수입니다. 늘 전장의 선두에 서길 바라는 용기를 지닌 기사입니다.”

    “과연, 더없이 용맹해 보여요.”

    엘레나는 찬찬히 거닐며 관심이 가는 기사단원의 앞에서 서고 소개받기를 반복했다. 기왕 대대적인 선임식을 치르기로 한 이상 기사단원에게 관심을 갖는 공녀의 이미지를 심어주라는 얘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엘레나의 구두가 로렌츠의 앞에 섰다.

    “이분은?”

    “로렌츠 경입니다. 기사단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이자, 수려한 용모 덕에 백사자라고 불리는 기사죠.”

    지금껏 잠자코 있던 리아브릭도 한마디 거들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눈여겨보고 계시는 기사예요.”

    “아버님이요?”

    엘레나는 로렌츠의 앞을 서성거렸다. 그것은 곧 관심의 표현이었다. 로렌츠의 기사단 내 실력으로 볼 때 선임이 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망설이던 엘레나가 발길을 돌려 지나쳐 버렸다.

    “……!”

    가장 당황한 건 당연히 선택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로렌츠였다. 그답지 않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당혹스러움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한 반응은 리아브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 너…… 또 무슨 짓을?’

    리아브릭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사전에 합의된 대로라면 고심하던 엘레나가 로렌츠를 지목하고 그 자리에서 맹세의 서약을 받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랬던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봉착했다. 엘레나는 지금껏 눈길도 주지 않던 다른 기사단원들에게 관심을 주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리아브릭은 밀려드는 초조함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대대적인 기사 선임식이다. 한번 선임이 되면 어떠한 상황에도 무를 수 없었다. 심지어 보는 눈도 많았다. 선임식에 참가한 기사단원이 전부 증인인 셈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꿋꿋이 기사단원 사이를 오갔다.

    뚝.

    서지 않을 것 같던 엘레나의 발길이 드디어 멈췄다.

    “이분을 소개해 주실래요?”

    엘레나의 관심에 리아브릭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별 보여준 게 없는 신입 기사다 보니 파악할 기회가 없었다.

    “제2기사단 소속의 휴렐바드 경입니다. 불과 열흘 전에 기사 선임을 받은 신입 기사죠.”

    엘레나가 턱을 들어 휴렐바드를 응시했다. 첫 만남의 인상이 짙게 남아 있어서일까? 엘레나의 노골적인 시선에 휴렐바드의 검신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좀 더 얘기해 주실래요?”

    “그게…… 동부 전선 출신이라 말을 매우 잘 탑니다. 그 외에는 딱히…….”

    제임스는 제2기사단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휴렐바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보였다. 또 아무리 휴렐바드가 신입이라지만 다른 기사들을 소개할 때와 비교해 애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공녀 전하, 휴렐바드 경은 평민 출신으로 견습 기사를 거치지 않아 아직 기사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소양, 검술 실력이 한참 부족합니다. 하여, 직속 기사로 선임하기엔 미흡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요?”

    엘레나는 아쉬운 얼굴로 휴렐바드를 올려다봤다. 그는 면전에서 제임스에게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래서 얼음의 기사라고 하는구나.’

    휴렐바드가 대공가의 검이 되어 제국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는 건 올해 말 북부 반란군 토벌부터다. 검술 실력이 불과 한두 달 사이에 느는 게 아닌 걸 가정하면 휴렐바드는 이미 강자다.

    ‘아마 재능을 숨기고 있겠지. 괜히 눈에 띄어봐야 귀족 출신 기사들에게 견제만 받을 테니까.’

    그 말은 대공가 누구도 휴렐바드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엘레나는 참을 수 없는 벅참을 느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휴렐바드의 재능을 세상에 선보이고 그로 인해 완성되어 갈 복수를 상상하니 희열이 밀려왔다.

    “…….”

    엘레나가 눈동자를 굴려 리아브릭을 힐끗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내리깔고 갈등하는 기색을 보이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저 결정했어요.”

    조심스럽지만 강한 고집이 실린 목소리에 제임스와 리아브릭이 주목했다.

    “휴렐바드 경, 검을 내리세요.”

    “……!”

    “고, 공녀 전하.”

    당황한 제임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옆에 선 리아브릭이 악귀 같은 얼굴로 엘레나를 노려봤다.

    연병장에 모인 기사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등한 기사로 인정하지 않던 휴렐바드가 파격적으로 선임이 된 것에 납득이 안 가는 눈치였다. 개중 로렌츠가 받은 충격은 다른 기사들의 배 이상으로 컸다. 지난 며칠간 엘레나가 자신에게 보여준 호의에 선임을 확신했던 터라 버림받았다는 비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레나는 아예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휴렐바드 경, 검의 주인이 정해졌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에요?”

    미소 띤 엘레나의 말에 휴렐바드가 뒤늦게 검을 배꼽 아래로 내려 검 끝이 지면을 향하도록 고쳐 잡았다.

    맹세의 서약. 주종 관계를 맺고 그것을 인정받는 선임 과정을 거치면 모든 의식이 끝을 맺는다.

    “공녀 전하, 무례하게도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제임스 경.”

    제임스는 용기를 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지금 이곳엔 휴렐바드 경보다 더 연륜과 실력을 갖춘 훌륭한 기사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고, 공녀 전하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휴렐바드의 어떤 점을 보고 선택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목을 운운하며 돌려 말했지만 결국 왜 휴렐바드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으니 설명해 달라는 얘기다. 선택받지 못한 기사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요. 말해주고말고요.”

    “그게 뭔지?”

    제임스의 되물음에 모든 이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엘레나가 말했다.

    “잘생겨서요.”

    “지, 지금 뭐라고?”

    “다시 묻다니 짓궂네요. 못 들으셨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제임스가 당황한 나머지 반문했지만 이곳에 모인 이 중 엘레나의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 대답이 너무 충격적이기에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고작 잘생겨서라니. 저런 천박하고 교양 없는 말을 입에…….’

    리아브릭은 공녀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엘레나의 언사에 치를 떨었다. 저란 상스러운 한마디가 베로니카 공녀의 품위와 품격, 평판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알기나 하는 건지.

    지금도 보라. 다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기사들의 표정엔 감출 수 없는 실망이 보였다. 기사의 덕목은 뒷전으로 밀린 채 고작 외모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에 일부는 수치스러움까지 느꼈다.

    그중에는 휴렐바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레나의 선택을 받았을 때도 기쁘기보다 의아함이 더 컸었다. 한데 그 이유가 고작 잘생겨서라니. 마냥 기뻐하기에는 불쾌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까지 저를 민망하게 세워둘 참이죠, 휴렐바드 경?”

    “……!”

    엘레나가 첫 만남에서 휴렐바드를 홀렸던 고혹적인 미소를 다시 지었다. 그 묘하고도 이상한 분위기에 홀린 듯 휴렐바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대공가의 기사 휴렐바드가 레이디 베로니카 폰 프리드리히 공녀께 서약합니다. 저의 목숨을 이 검에 담아 맹세합니다.”

    휴렐바드가 가로로 눕힌 검을 양 손바닥으로 받쳐 진상하듯 올렸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엘레나가 소매에서 대공가의 인장이 수놓인 손수건을 꺼내 검날 위에 얹었다. 손수건은 레이디가 맹세의 서약을 맺을 시 주는 증표였다.

    “제임스 경.”

    엘레나의 나지막한 부름에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던 제임스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콧잔등에 손잡이를 가져다 댔다.

    “……기사 제임스 데 로브레스가 증명합니다.”

    서약의 증명. 맹세의 서약을 기사들이 보증함으로써 증명하는 의식이다. 제임스를 필두로 선택받지 못한 기사들이 마지못해 동참했다.

    “기사 윌리엄 핀이 증명합니다.”

    “기사 페드로 폰 게라스가 증명합니다.”

    기사들의 표정에서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불쾌감이 엿보였다. 근본을 알 수 없는 한낱 평민 출신의 휴렐바드를 위해 들러리나 서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존심이 중요하다 한들 베로니카 공녀의 선택에 반박할 수는 없는 일.

    연병장에 모인 기사 전부가 서약을 증명함으로써 의식은 끝을 맺었다. 휴렐바드가 일어서 손수건이 구겨지지 않게 갑주에 넣었다.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증표를 보관함으로써 항시 맹세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다.

    엘레나가 슬쩍 리아브릭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화가 나면 사람이 차분해진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시리도록 차가운 그녀의 표정 너머로 업화와 같은 불길이 느껴졌다.

    ‘어쩌겠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엘레나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시늉을 했다. 일을 저질러 놓고 눈치를 보는 한심한 여자로 남음으로써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맺었다.

    “잘 부탁해요, 나의 기사.”

    머지않은 미래에 제국을 지탱할 세 자루의 검 중 한 자루가 엘레나의 손에 들어왔다.

    * * *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엘레나는 그곳에 여유롭게 앉아 티타임을 만끽했다. 첫 찻물을 버린 얼그레이 홍차도 그윽했고, 난간 너머 정원사가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워 백합 대신 심은 튤립도 볼수록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것들을 다 합쳐도 당신을 얻은 기쁨에 비할까요?’

    찻잔을 입에 가져가 음미하는 엘레나의 시선이 기립해서 대기 중인 휴렐바드에게 닿았다. 야외 수련이 많은 기사의 피부가 그을리는 걸 감안하면, 휴렐바드의 피부는 참 깨끗했다. 기사보다는 귀족 영식에 가까운 외모였다. 또 차분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차가운 분위기가 자꾸만 시선이 가게 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너무 노골적인 시선에 불편을 느꼈는지 휴렐바드가 물었다.

    “차라리 묻었으면 좋겠네요. 나의 기사님과 몇 마디 말이라도 더 나눠보게.”

    엘레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홍차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휴렐바드는 어째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주십시오.”

    “아뇨, 차차 알아가죠. 급할 게 뭐 있나요?”

    “…….”

    휴렐바드는 이 속을 알 수 없는 레이디를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첫 만남의 고혹적인 미소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신분을 떠나서 고작 열여섯의 귀족 영애가 지을 만한 미소가 아니었다. 휴렐바드의 넋을 반쯤 빼놓지 않았던가.

    선임식에서는 잘생겼다는 이유로 휴렐바드를 직속 기사로 선택했다. 베로니카 공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기 힘들 만큼 저속한 이유에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테라스에서 본 레이디는 함부로 바라볼 수조차 없을 만큼 품위 있는 여인이었다. 휴렐바드는 휙휙 뒤바뀌는 그녀의 인상에 거듭해 놀라고 있었다. 우아한 손짓, 오만하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눈길, 장난스럽지만 선을 넘지 않는 화법…….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고고한 품격이 느껴졌다.

    “경, 이만 나가 있으세요.”

    엘레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곧 손님이 오실 거예요. 굳이 있을 이유가 없답니다.”

    “손님 말씀입니까?”

    휴렐바드가 반문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리아브릭이에요, 공녀.”

    “제 말이 맞죠?”

    엘레나는 싱긋 웃으며 나가 있으라고 눈짓을 했다.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떨어진 상황에 놀라면서도 휴렐바드는 사전에 약속이 있었던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물러났다.

    방을 나가는 휴렐바드와 엇갈려 들어온 리아브릭이 빠르게 훑었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힌 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라스에 앉아 우아하게 티타임을 갖던 엘레나는 자취를 감추었다.

    “미, 미안해요. 리브. 내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줘요.”

    리아브릭 바로 앞까지 온 엘레나가 양손을 모으더니 싹싹 빌었다. 구차하고 비굴하게.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린 엘레나는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고자 안간힘을 썼다.

    “저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 순간 휴렐바드 경을 보는데 숨이 막히더라고요. 이 기사를 곁에 두고 싶단 욕심에 그만. 미안해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

    리아브릭은 굳게 닫힌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으로 엘레나를 고문이라도 하듯 가시 박힌 눈길로 쳐다보고 서 있었다.

    “저, 정말 잘못했어요.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을게요.”

    엘레나는 죄인을 자처하며 굽실거렸다. 공국을 떠나기 전, 엘레나가 원하는 기사를 선임할 권리를 준다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굳이 영악하게 비치기보다는 리아브릭에게 순종하는 약자의 모습으로 남길 바라서다.

    “죄라니요. 괜찮으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그죠, 정말 죽을죄를…… 예? 리브, 지금 뭐라고?”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리아브릭이 손을 뻗어 삐져나온 엘레나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공녀는 잘못한 거 없어요. 기사 선임은 공녀의 권리잖아요?”

    “하, 하지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공녀를 존중한답니다.”

    존중? 엘레나는 픽 새어 나올 뻔한 웃음을 참았다. 마땅히 엘레나를 다그칠 건수가 없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보니 저리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고마워요, 리브. 다시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을게요.”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야 마리아나 군도에 계신 부모님도 안심하시지 않겠어요?”

    “……!”

    리아브릭은 노골적으로 부부를 들먹이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렇게 나와야 당신답지, 리아브릭.’

    언젠가 나올 협박이었다. 엘레나를 통제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 부모의 목숨이니까. 지난 삶, 저 협박에 굴복하여 어찌나 많이 시달렸던가.

    ‘그 협박 이젠 안 먹혀.’

    협박은 안 먹히지만 먹히는 척은 해줘야겠지.

    “저는…… 그, 그러니까…….”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며 불안하게 시선을 어디로 둘 줄 모르는 엘레나의 모습에 리아브릭의 미소가 진해졌다. 약발이 제대로 먹혔다고 본 것이다.

    “다 잊고 탄신기념일 준비에 전념하도록 하세요. 아셨죠,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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