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30)
  • 제2장 안가

    영지를 떠난 마차는 쉼 없이 내달렸다.

    “고되죠? 사일런스에 도착할 때까지 좀만 참아주세요.”

    “배려해 주신 덕에 전혀 힘들지 않아요.”

    엘레나는 은은한 웃음을 지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만큼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저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궁금해요?”

    “아, 아니에요. 굳이 안 알려주셔도 괜찮아요.”

    엘레네가 고개를 저으며 손끝으로 소파를 쓸었다. 최고급 가죽의 촉감에 놀라워하면서도 그 느낌이 좋은지 손을 떼지 않았다.

    “이 마차만 해도 제 방 침대보다 푹신하고 안락해요. 살면서 이런 고급스러운 마차도 처음 봐요.”

    “엘레나 양을 모셔 오려고 특별히 신경 쓴 마차니까요.”

    “그러니까요. 절 이리 후대해 주시는데 어느 가문인지, 그분이 누구인지가 중요할까 싶어요.”

    엘레나의 눈길은 꿈을 꾸듯 몽롱했다. 값비싼 물건들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처지나 앞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허영심 많고 욕망에 눈이 먼 엘레나를 보며 리아브릭은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참 한심한 여자지 않은가? 한껏 이용만 당하다 버려질 인형인 줄도 모른 채, 그저 사사로운 것들에 현혹되어 저리도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참 다루기 손쉬운 여자라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 정도였다.

    엘레나가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날 세상에서 가장 무지하고 한심한 여자로 보도록 해야 해.’

    오판(誤判). 리아브릭의 눈에 비친 엘레나가 한심하면 한심할수록 좋다. 기준에 미달할수록 자연스럽게 경계심은 낮아지고 무시하게 되게 마련이니까. 의도적으로 무지하고 속물적인 모습을 가장해 리아브릭의 방심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엘레나는 참고 또 인내할 것이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셨으니 그 얘긴 잠시 접어두고,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경청할게요.”

    “그분께서 여전히 따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 기억하시나요?”

    엘레나가 끄덕였다.

    “실은, 두 달이 넘도록 따님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계세요.”

    “네?”

    “그분께서 애착이 너무 강하신 나머지 놓아주시지 못하세요. 심지어 영애의 죽음을 아는 이도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로요.”

    “그, 그런…….”

    엘레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어울리도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지 않은 영애의 죽음. 애착을 넘어선 집착. 그리고 자신의 입지. 명확하지 않은 여러 조건이 상충하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표정에 담았다.

    “뭘 우려하는지 알아요. 단언컨대 엘레나 양에게 나쁜 일은 아닐 거예요.”

    엘레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리아브릭을 바라보았다. 리아브릭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수양딸이 아니라, 그분의 친딸로 살 기회를 얻는 것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

    엘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

    “치, 친딸이요?”

    “네. 그분의 진짜 친딸이자, 베로니카 공녀 그 자체가 되는 거죠.”

    “고, 공녀요? 지금 공녀라고 하셨어요?”

    리아브릭이 끄덕였다. 엘레나가 아무리 무지해도 공녀라고 불릴 정도면 최소 공작가 이상의 가문임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공녀가 된다고…….”

    엘레나는 고위 귀족으로 살아갈 생각에 기뻐하던 지난 삶의 어리석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친딸로 사는 것과 단순히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수양딸이 되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처음 이 사실을 접하고 자신도 고귀한 혈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어찌나 설레고 벅차던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가짜였지.’

    엘레나는 저들의 가증스러움에 치미는 분노를 삼켰다. 대신, 작년에 가족과 함께 보낸 생일을 떠올렸다. 그날의 행복을 떠올리자 엘레나의 만면에 희열이 눈꽃처럼 번졌다. 리아브릭을 속이기 위해. 엘레나는 끊임없이 감정을 통제하며 연기를 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베로니카 공녀께서는 매년 황태자 전하의 반려로 사교계의 입에 오르내린답니다.”

    “화, 황태자비요?”

    리아브릭은 감출 수 없이 타오르는 엘레나의 욕망에 부채질했다.

    “흔히들 꿈은 꾸는 것이라 말하죠. 하지만 엘레나 양이 마음먹으면 꿈은 곧 현실이 됩니다. 그게 제국 내에서 베로니카 공녀의 위치이며, 위상이죠.”

    “아…… 아.”

    엘레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듯 잇몸까지 드러내며 실실 웃었다. 더없이 속물적으로. 경박하기까지 한 이런 모습에 리아브릭이 자신을 얕잡아 보고 한심하게 여기길 바라며.

    “후후.”

    리아브릭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엘레나의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통해 갈증 어린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살짝 맛만 보게 해줬을 뿐인데, 이미 눈이 멀어버렸다. 이런 인간을 어찌 다뤄야 하는지를 리아브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오판인지도 모르고.

    “앗, 죄송해요. 제가 그만 무례를 저질렀네요.”

    엘레나가 뒤늦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 척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거뒀다. 무안함을 감추고자 에둘러 수습하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드네요. 제 무지함 때문에 영애들이 친딸이 아님을 의심하면 어쩌죠?”

    리아브릭은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의심 못 하도록 만들면 되죠.”

    “어떻게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기품 있고, 우아하며, 감히 넘볼 수 없는 권위로 사교계에 오롯이 설 수 있는 여왕이 될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 말에 가슴이 벅찼는지 엘레나가 가슴에 손을 얹더니 다짐하듯 대꾸했다.

    “저 노력할게요. 꼭 그리될게요.”

    엘레나는 벌써 황태자비라도 된 것처럼 설레 보였다. 리아브릭은 그녀가 망상의 늪에서 맘껏 허우적거리도록 내버려 뒀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엘레나도 바보 같은 연기를 그만두고 차창 밖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금세 그녀의 눈빛은 차분해져 있었다.

    ‘엄마, 아빠는 무사히 도망치셨을까?’

    불쑥 부모님 생각이 났다. 예정대로 나룻배를 타고 급류를 따라 빠져나왔으면 지금쯤 공국 북부를 지나쳐 로이에르 왕국의 국경에 닿았을 것이다. 북부 산악 지대의 지형이 험악해 통행증 검열이 드문 것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이동 중일 가능성이 컸다.

    ‘무사히 제국으로 가셔야 할 텐데…….’

    등잔 밑이 어두운 법. 부모님은 왕국을 거쳐 베실리아 제국으로 갈 것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리아브릭의 추적에서 벗어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새 신분, 새 이름, 새 가문으로.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오 년 뒤의 만남을 지키고자.

    ‘꼭 사셔야 해요.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어기시면…… 저 두 분 용서 안 할 거예요.’

    엘레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부모님을 원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제발.

    * * *

    독립 도시 사일런스. 대륙의 서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여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자치도시다. 총독이 통치하는 이곳은 수백 년간 전란을 겪지 않은 대륙 최고의 미항(美港)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푼 엘레나는 창문 밖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 경이롭지 않나요? 바다를 보고 있으면 경건해지는 기분이 들죠.”

    “…….”

    엘레나는 대답이 없었다. 의아한 마음에 리아브릭이 돌아보자 엘레나가 낮게 흐느끼고 있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엄마, 아빠 생각이 나버려서.”

    “엘레나 양.”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어요. 지금껏 받기만 하고, 그게 또 당연한 줄 알고…… 너무 후회돼요. 마지막 인사라도 잘 드리고 올걸…….”

    리아브릭이 다정한 손길로 엘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해 줬다.

    “꼭 잘 모셔주세요. 저 이제 믿을 사람 언니밖에 없어요.”

    언니라는 호칭에 리아브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니라는 호칭을 허락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심약해진 엘레나가 기대고 싶은 마음에 멋대로 부른 것이다.

    “리브라고 불러주세요. 제 애칭이에요.”

    엘레나가 빤히 쳐다봤다. 리아브릭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지금 엘레나가 그녀를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절 믿어요. 당장은 무리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안부 서신도 주고받을 수 있게 조치해 드릴게요.”

    “이 고마움을 어찌 전할지 모르겠어요, 리브.”

    리아브릭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레나도 거절하지 않고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다. 친자매라고 오해할 만큼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맞닿아 있는 두 여자의 뺨 너머로 마주칠 수 없는 눈빛에는 서로를 향한 상반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리아브릭은 한심한 엘레나를 비웃었다. 엘레나의 효심을 어떻게 이용할까 하는 악랄한 생각마저 품었다. 반대로 엘레나의 눈빛은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이성적이었다.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이면 날 의심하기 시작할 거야.’

    조만간 부모님의 도주 소식을 알게 될 거고 당연히 엘레나를 의심할 것이다. 오늘의 눈물, 언니라는 호칭은 그때를 대비한 혼선이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거짓인지. 정말 의지하는 것인지, 의지하는 척인지. 엘레나는 거기까지 계산했다. 어리숙하게만 보이는 언행 속에는 철저한 안배가 깔려 있으며 어느 하나 허투루 처리하는 일이 없었다.

    ‘이제부터야. 당신과 나의 싸움은.’

    지금 이 순간까지 엘레나는 리아브릭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 * *

    사일런스에 석양이 졌다.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태양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더니 사라졌다. 이내 그 빈자리를 메운 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사라졌다고요?”

    리아브릭은 귀를 의심했다. 혹시라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제가 들이닥쳤을 때 이미 집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수상함을 느끼고 흔적을 좇았으나 산 중턱에 이르러 발자국이 끊기는 바람에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습니다.”

    담벼락에 바싹 붙어 있던 로렌츠가 침통한 어조로 대꾸했다. 달빛마저 닿지 않을 그늘에 몸을 숨겨 가까이서 보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채기 어려웠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발자국이 끊기다니요?”

    “아무래도 산 중턱에 이르러 개천을 거슬러 올라간 거 같습니다.”

    리아브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개천을 거슬러요?”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그런 것 같습니다.”

    “허.”

    리아브릭은 기가 찼다. 부부가 도망친 사실도 믿기 힘든데, 마치 추적을 예상한 듯 흔적을 지워 버렸다.

    “뒤늦게 젖은 모래를 찾아 추적했으나 협곡 나루터에서 흔적이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도망쳤다?”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추적하려고 했으나 물살이 너무 빨라 무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보고하는 내내 로렌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까닭이다.

    “경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제 불찰이죠.”

    리아브릭은 어처구니가 없는 이 상황을 되돌아봤다.

    ‘도망을 쳤다고? 심지어 흔적조차 없이?’

    백번 양보해서 도망칠 수도 있다.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있다고 여기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수 있는 게 부모니까. 근데 그 도주 방식이 너무 치밀했다. 숙련된 기사가 추적이 불가능할 만큼 최적화된 경로로 움직였다. 이것도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위험을 예상하고 도망쳤단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아.’

    의심스러운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아 결론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상하긴 했어. 딸과 기약 없는 작별을 하는데 부모가 나와보지도 않다니.’

    그 정도로 딸을 아끼는 자들이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도 기약 없는 엘레나를 보내면서 배웅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가정은 두 가지야.’

    부부가 엘레나를 혼자 내보낸 것 자체가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는 것. 이건 도망의 주체가 부부가 된다.

    ‘다른 가정은 부부가 도망친 걸 알면서도 내 앞에서 모르는 척 굴었다는 거.’

    리아브릭은 사일러스에 도착해서 눈물을 흘리던 엘레나를 떠올렸다. 언니밖에 없다며 부모님을 잘 모셔달라고 애원했다. 공범이라면 이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

    ‘만약, 정말 만약에…… 그 눈물이 날 속이고자 연기를 한 거라면?’

    리아브릭은 고개를 세게 저으며 생각의 뿌리를 쳐냈다. 망상이다. 엘레나는 리아브릭을 속일 수 있을 만큼 영악하지도, 영특함을 갖추지도 못했다. 또 반쪽짜리 귀족으로 살아온 까닭에 열등감이 심해 속이 훤히 보이는 여자였다.

    “추적은 포기합니다.”

    “명을 거둬주십시오. 기필코 제가 대륙을 뒤져서라도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뒤처리를…….”

    로렌츠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자 불복했지만 리아브릭은 허락지 않았다.

    “후환을 남기는 건 꺼림칙하나 당장 문제가 될 소지는 없어요. 물러나세요.”

    “……알겠습니다.”

    “며칠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배편에 오르세요. 괜히 엘레나 양과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로렌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떠나는 발걸음 소리조차 듣지 못했거늘,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리아브릭이 턱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개운치가 않아.”

    분명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니 답답했다. 근 몇 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거슬림이다.

    “확인해 봐야겠어. 날 진짜 속인 건지, 아니면 내가 과민 반응을 보인 건지.”

    * * *

    동이 트기 전. 엘레나와 리아브릭을 태운 마차가 사일런스의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내달렸다.

    “엘레나 양, 새벽에 부모님에 대한 소식을 받았어요.”

    “정말요? 뭐라고 하세요? 무사히 빠져나오셨대요?”

    부모님의 소식이란 말에 엘레나는 효심 지극한 딸이 되었다. 그 모습이 연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절절했다.

    “무사히 영지를 빠져나오셨대요.”

    “천만다행이다. 고마워요, 리브. 신경 써줘서.”

    리아브릭이 눈매를 좁히며 운을 뗐다.

    “한데 도중에 무리하셨는지 어머님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하네요.”

    “네? 어, 엄마가 왜요? 많이 아프신가요? 어디가 아픈 거래요? 저 때문이에요. 상심이 크셔서, 그래서 몸이…….”

    엘레나는 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경황없이 떠들어대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뚝뚝. 푹 숙이고 있는 고개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져 로드를 적셨다.

    “엄마, 엄마…… 아흑, 엄마.”

    엘레나는 그리움과 걱정에 목 놓아 서럽게 울었다. 마치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

    리아브릭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부부를 도피시키는 데 엘레나가 개입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거라 기대하고 일부러 거짓 정보를 줬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부부가 도망쳤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못 하는 듯했다.

    ‘전혀 모르는 눈치야.’

    리아브릭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울지 마세요. 치료사가 말하길 일시적인 열병이니 쉬면 금방 낫는다고 했대요.”

    “꼭 나으셔야 해요. 아니면 제국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그럼요.”

    엘레나는 그제야 겨우 감정을 추스르더니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지금쯤이면 두 분 모두 마리아나 군도에 도착하셨겠네요.”

    “마, 마리아나 군도면 그 지상 낙원이라는?”

    “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섬으로 불리죠.”

    리아브릭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마리아나 군도는 구전동화나 소설을 통해 지상낙원으로 언급되나 실상은 많이 달랐다. 해적이 들끓고 파도가 세서 어업조차 쉽지 않은 오지였다.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엘레나는 모르는 척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거기라면 저도 안심이에요. 이제라도 고생 안 하시고 편히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실 거예요.”

    천진난만하게 안도하는 엘레나를 보고 있자니, 리아브릭은 자신이 품고 있던 의심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저 애의 수준인데, 나 혼자만 너무 민감하게 구는 거 아닐까?’

    엘레나는 일관되게 수준 이하의 모습만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엘레나를 의심하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리아브릭을 보며 엘레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리아브릭이 날 의심하고 있어. 그건 곧 엄마, 아빠가 무사히 도망치셨단 뜻이야.’

    엘레나는 내심 리아브릭의 의심이 기꺼웠다. 부모님은 무사히 추적을 따돌리고 도망간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다면 리아브릭이 엘레나를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선착장 뒤편, 창고 부두에 이르러 그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차를 몰던 중년 기사의 안내를 받아 부둣가 끝자락에 묶여 있던 나룻배에 올랐다.

    물안개를 헤치며 육지에서 한참 멀어졌다. 나룻배는 거대하고 화려한 범선의 후미에 닿았다.

    “올라갈까요?”

    리아브릭을 필두로 엘레나, 그리고 중년 기사가 사다리를 타고 배에 올랐다. 아직 출항 전인지 갑판에 선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휑하다 못해 으슥했다.

    리아브릭은 갑판을 지나쳐 선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촛불이 일렁거리는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선실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췄다.

    끼익.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자 꽤 고급스러운 가구가 비치된 넓은 선실이 보였다. 한눈에도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사용할 법한 고급 선실이었다.

    들어오기가 무섭게 리아브릭이 선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앞으로 열흘간, 저와 여기서 지내실 거예요.”

    엘레나가 억지로 웃었다. 속이 뒤틀리는 걸 겨우 참으면서.

    * * *

    “이 시간부로 선실을 나가는 건 금지예요.”

    일방적인 통보다.

    “식사는 하루 세 번, 외부에서 조달받을 거예요.”

    반박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화장실은 선실 안쪽에 있는 곳을 사용하시면 돼요.”

    엘레나를 대하는 리아브릭의 태도가 변했다. 살갑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권위적으로 엘레나를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리아브릭은 남아도는 시간을 활용해 제국의 기본적인 문화와 역사를 가르쳤다.

    ‘뻔히 다 아는 얘기.’

    엘레나는 적당히 트집이 잡히지 않을 선에서 진도를 맞췄다. 너무 영민하면 리아브릭이 의심할 것이다. 반대로 너무 아둔하게 굴면 트집을 잡아 모욕을 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항해를 한 지 9일째. 범선도 제국의 해역에 들어섰다.

    “귀족의 본분이 뭐라고 했죠?”

    “노블리스 오블리제요.”

    “그 말을 본받아 엘레나 양은 앞으로 귀족의 우러름을 받는 귀족이 되셔야 해요. 프리드리히 대공가의 적통 공녀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의무고요.”

    “자, 잠깐만요. 대공가라고요?”

    엘레나가 말까지 더듬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말이 사실인지를 도저히 가늠하지 못한 듯 당황했다.

    “베로니카 공녀께서는 제국 4대 가문의 수장이신 프란체 대공님의 유일한 혈육이세요. 또 엘레나 양의 새 신분이기도 하죠.”

    “마, 맙소사.”

    놀라워하는 것도 잠시, 엘레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대, 대공가라니…… 제 상상 이상이에요.”

    아닌 척하려고 해도 찢어질 듯 자꾸만 올라가는 엘레나의 입꼬리를 보며 리아브릭은 확신했다. 욕망에 눈이 먼 속물이라고.

    “오늘은 이쯤 하고 채비하세요.”

    “지, 지금요?”

    “하선할 겁니다.”

    엘레나는 거의 열흘 만에 선실을 나설 수 있었다. 그간 리아브릭과 지내며 선실에서 쌓인 울분을 바닷바람에 실어 보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범선에 승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넘어 사다리를 타고 나룻배로 옮겨 탔다. 세 시간 남짓 노를 젓자 해안가 기슭에 다다랐다. 질퍽한 모래를 밟고 백사장 밖으로 나와 수풀에 가려져 있던 사륜마차에 탔다.

    “리브,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안가(安家)요.”

    “안가?”

    “아주 은밀한 곳이죠. 대공가에서도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리아브릭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다. 엘레나도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의무적인 질문이었을 뿐, 종착지를 이미 아는 그녀가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마차는 정말이지 쉼 없이 내달렸다. 가도조차 정비되지 않은 산길임에도, 달빛 한 점 없는 어둠 탓에 사위의 분간이 어려움에도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안가로 짐작되는 저택에 다다랐다. 사방이 숲이어서 길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찾아오지 못할 만큼 은밀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척에 다다른 저택 외관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날 파멸로 몰아넣은 원흉이 저곳에 있어.’

    애써 차분하려고 노력해도 엘레나의 심장이 이성을 잃은 듯 격정적으로 뛰었다. 그자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자를 앞에 두고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오만 가지 생각과 조절되지 않는 감정이 엘레나의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때마침 마차가 멈췄다. 리아브릭을 따라 내리자 단정한 차림의 하녀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제인이라고, 앞으로 수발을 들 아이예요. 귀가 먹어 말을 하지 못하니, 필요한 게 있으면 수첩에 적어서 보여주면 될 거예요.”

    제인과 눈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리아브릭을 따라 저택에 발을 들였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시선을 끄는 메인 홀 우측의 복도를 쭉 가로지르자 대리석으로 치장된 응접실이 나타났다.

    “이 너머에 그분께서 계십니다.”

    “그분이요?”

    “엘레나 양이 당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수도에서 한달음에 달려오셨죠.”

    리아브릭은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얹더니 있는 힘껏 대리석 문을 열어젖혔다.

    덩달아 엘레나의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처음 리아브릭을 마주했을 때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격렬한 감정의 폭풍이 내면에서 휘몰아쳤다.

    “……!”

    저 멀리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의 그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반듯했으며 귀족의 표본이라고 할 만큼 품격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엘레나는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죽어가는 엘레나를 보며 이죽거리던 그의 비웃음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너, 너는…… 정녕…….”

    그는 엘레나를 보며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입술. 기적을 눈앞에서 목도한 성자처럼 희열과 절망을 넘나드는 그의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가관이었다. 심지어 저것이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연기라는 걸 알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내 딸…… 정녕 네가 살아 돌아온 것이냐?”

    엘레나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인간. 바로 프란체 대공이 엘레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엘레나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작게 말아 쥔 주먹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며 조롱하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단 생각이 휘몰아쳤다.

    ‘참아야 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돼.’

    엘레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억눌렀다. 이 울분을 풀고자 저 인간을 죽이는 건 하책이다. 엘레나가 바라는 건, 프란체 대공뿐만 아니라 리아브릭, 그리고 베로니카의 완전한 파멸이다. 그날까지 분노를 삭이고 저들의 충실한 개처럼 꼬리를 흔들 것이다.

    “진정 그런 것이냐, 베로니카?”

    프란체 대공은 그리 물으며 엘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저는…….”

    그의 앞에 선 엘레나는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프란체 대공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흠칫.

    엘레나는 그의 손등이 볼에 닿자 몸을 움츠렸다. 소름이 끼쳐서다. 꼭 얼굴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불쾌감이 밀려왔다.

    프란체 대공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엘레나가 잠시 놀란 것이겠거니 치부하며 손등으로 볼을 쓸어내렸다.

    “너의 이 온기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고맙구나, 죽은 내 딸을 다시 만났다고 여기게 해줘서.”

    저 가증스러운 프란체 대공의 연기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어쩜 살아 있는 베로니카를 두고 저리도 뻔뻔히 굴 수 있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바깥일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안을 돌보지 못했다. 아내도, 딸도 잃고 말았지. 소중한 이들을 잃고 나니 권력도 재물도 부질없더구나.”

    엘레나는 진심이라곤 티끌만큼도 섞이지 않은 그의 고해성사를 묵묵히 듣고만 서 있었다.

    “얘야.”

    나지막한 부름에 엘레나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 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

    프란체 대공은 흔들리는 엘레나의 눈동자를 보며 다정하게 얘기했다.

    “베로니카를 대신해서 그 애로 살아다오. 너를 통해서 그 아이의 못다 한 삶을 지켜볼 수 있다면 더는 여한이 없을 듯하구나. 그리해 줄 수 있겠느냐?”

    “그, 그럼요! 저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엘레나는 노골적으로 공녀의 자리를 탐했다.

    ‘출세에 눈이 먼 여자처럼 보여야 해. 그래야 날 얕잡아 볼 거야.’

    프란체 대공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서렸다. 하찮은 계집애가 대공가의 고귀한 공녀 행세를 할 생각에 들떠 있다니 태생의 고귀함을 중시하는 그에겐 얼마나 역겨울까.

    “실은 처음 뵀을 때부터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저요, 꼭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될게요. 아버지.”

    엘레나가 힘을 줘서 아버지란 말을 덧붙이자 프란체 대공의 얼굴이 아주 잠깐 일그러졌다. 프란체 대공은 뼛속까지 귀족의 긍지와 자부심, 권위로 똘똘 뭉친 남자였다. 그는 고귀한 가문에 제 딸의 빈자리를 노골적으로 탐내는 천박한 여자를 들이는 것만으로도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웠다.

    “시간이 늦었구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을 터이니 올라가 쉬어라.”

    엘레나가 꾸벅 인사하자 리아브릭이 자신을 따라오라며 턱짓했다. 시녀 제인까지 대동하여 이 층 맨 구석에 위치한 방문을 열자 최고급 원목 가구로 꾸며진 침실이 있었다.

    “쉬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이 아이를 시키도록 하고요.”

    “네. 잘 자요, 리브.”

    리아브릭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레나도 손을 휙휙 저으며 제인 역시 물러가라고 했다. 딱히 시킬 일도 없거니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었다.

    쿵.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홀로 남게 된 엘레나가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일그러진 프란체 대공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간의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간 기분이었다.

    지난 삶에서 엘레나는 프란체 대공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미흡한 엘레나를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볼 때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엘레나의 손에 쥐어진 것도 저들 못지않았다. 단지 어리석어서 그것들을 적절하게 잘 다루지 못했을 뿐이다.

    “기대해. 당신들이 내게 쥐여 준 이 이름과 신분으로 어떻게 당신들의 숨통을 움켜쥐는지.”

    * * *

    베로니카 공녀의 평판이 진창에 처박혔음에도 불구하고 대공가로 직행하지 않고 안가로 엘레나를 데려온 이유는 교육 때문이었다. 베로니카 공녀로 행세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쌓기 위해서.

    오전에는 귀족 영애의 몸가짐, 식사 예절, 말투, 걸음걸이, 인사법 등을 주로 배웠다.

    오후에는 제국어를 시작으로 역사, 문학, 문화 같은 제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배우는 데 주안점을 뒀다. 공식적인 수업은 저녁 식사 이전에 끝났다.

    “쉴 생각 마세요. 오늘 배운 걸 복습하고 숙지하세요. 너무 많다고요? 그럼 잠을 줄이시더라도 외워 오세요.”

    엘레나는 늦은 시간까지 서재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본인의 의지로 서재에 박혀 있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미래를 안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걸 다 활용할 만한 능력도 지식도 없어.”

    엘레나는 이 시간을 활용해 부족한 지식을 채웠다.

    <명화의 역사>

    <예술과 철학>

    <상인이 지배하는 대륙>

    <움직이는 화폐의 가치>

    <분장의 연금술>

    ?

    엘레나가 선별한 서적들은 주로 예술과 상업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곧 제국의 예술계에 변동이 올 거야.”

    엘레나는 제국 전역에 불어닥칠 르네상스에 주목했다. 사상, 문학, 미술, 건축, 자연과학, 음악 등 문화 혁신이 일어나는 부흥기를 잘 활용한다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시대는 내게 기회야.”

    시대적 변화는 그만한 진통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엘레나는 그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했다. 그것이 복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공가는 쉽게 무너질 만큼 한미한 가문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수백 년간 제국 최고의 가문이 되지 못했겠지.

    “시대의 흐름을 이용해 안과 밖에서 대공가를 흔들어야 해.”

    우선 베로니카 공녀 행세를 하며 대공가 내부를 분열시킬 생각이다. 자금줄을 끊어버리고 공적이 될 수 있는 치부를 찾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밖에서 압박을 가할 계획이다. L이라는 제삼의 이름을 가진 여성으로 시대를 주도하고 제국의 지식인과 귀족이 우러러보는 이가 될 계획이다.

    세간의 존경과 평판, 명분을 기반으로 그간 대공가가 저지른 악행을 밝혀 지탄과 압박으로 고립시킬 것이다. 오직 베로니카 공녀 행세를 하며 대공가 일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 엘레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엘레나는 자신 있었다. 수백 번에 가까운 검증 작업을 거쳐 계획을 완성했으며 그 세분한 강령이 이미 엘레나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벌써 기대가 됐다.

    안가에 머물 시간은 고작해야 3주. 하루라도 빨리 대공가로 건너가 이 복수의 밑그림을 완성하고 싶은 흥분에 찼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3주가 지났다.

    * * *

    높디높은 천장의 샹들리에가 눈에 띄는 식당은 적막했다. 긴 식탁의 끝에 앉아 있는 리아브릭과 엘레나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에 쏙 넣었다. 음식물 씹는 소리조차 없었으며 턱은 일정 간격 이상으로 벌리지 않았다. 저마다 용도가 다른 네 개의 포크를 번갈아 사용하며 요리를 집어 먹었다.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식사 예절이었다.

    “이제 제법 귀족티가 나는군요.”

    리아브릭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엘레나의 식사 예절을 평했다.

    “리브가 성심성의껏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에요.”

    “타인의 칭찬에 칭찬과 긍정으로 응대하라는 화법도 잘 구사했어요.”

    처음만 하더라도 리아브릭의 지적이 끊이질 않았지만 엘레나는 이제 억지로 거슬리는 점을 찾지 않는 이상 흠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귀족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래요? 리브가 그리 말해주니 기뻐요.”

    리아브릭은 우아하게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는 엘레나를 빤히 쳐다봤다. 예법이란 의식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야만 그 진가가 나온다. 귀족가 영애들이 어려서부터 몸가짐을 바로 하고 끝없이 선생님을 붙여서 예법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불과 삼 주 만에……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제 것으로 만들어 버렸어. 꼭 거짓말처럼.’

    원래 귀족이었다고 하나 평민과 다름없이 살던 몰락 귀족이었다. 기초적인 예법조차 어설펐던 걸 감안하면 지금의 엘레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예법을 잘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육체적인 선(線)이 돋보이도록 예법을 구사했다. 그것도 너무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저런 우아함은 사교계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저 정도면 제국의 예법에 정통했다고 봐야 한다.

    ‘예법에 비해서 머리가 썩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안타깝게도 엘레나는 영특하지 못했다. 리아브릭의 요구 학습 수준에 겨우 합격선을 맞추는 게 다였다.

    ‘뭐, 이 정도로 따라와 준 것만 해도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고작 한 달이다. 허울뿐인 몰락 귀족으로 평민과 다름없이 살아온 엘레나를 진짜 귀족으로 탈바꿈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엘레나는 제법 귀족다워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 먹었으면 올라가죠.”

    리아브릭을 따라 중앙 홀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왔다. 고급 카펫을 따라 쭉 걸어 서재 앞에 다다랐는데 어째서인지 그곳을 그냥 지나쳐 걸었다.

    “서재를 지나쳤는데요?”

    “오늘은 응접실로 갈 거예요.”

    뒤따라 걷던 엘레나는 저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아, 귀족들의 초상화와 신상명세서를 암기하는 날이 오늘이었구나.’

    사교계와 제국 정계에 영향력이 있는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고 얼굴을 외우고 그들의 신상을 파악한다는 건 그들과 마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뜻이다.

    기억하기론 이틀간 신상을 암기하고 대공가로 떠났다.

    응접실에 도착해 소파에 앉자 리아브릭이 수북이 쌓여 있는 초상화와 신상명세서에 손을 얹었다. 그 두께가 한 뼘이 넘을 만큼 많았다.

    “제국 사교계에서 활동 중인 황족과 수도 귀족들 명단이에요.”

    “이, 이렇게나 많아요?”

    “이 명단도 거르고 걸러서 추린 거예요.”

    리아브릭의 말은 사실이다. 황실이 공식적으로 작위를 내린 귀족의 수만 하더라도 공국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했다.

    “모조리 다 외우세요. 여기 적힌 이름과 얼굴부터 가문, 가족 관계, 편력까지 싹 다. 언제 마주치더라도 오래 떨어져 지낸 친구나 가족처럼 느끼게요. 할 수 있죠?”

    “네, 해볼게요.”

    리아브릭이 서류 더미 맨 위에 놓여 있던 콧수염 난 중년 남자의 초상화와 신상명세서를 가져와 설명을 덧붙였다.

    “이 남자는 휘트 공작이에요. 제국 4대 가문 중 한 곳인 버킹엄 공작가의 가주죠. 대공 각하와도 매우 절친한 사이로 어려서부터 베로니카 공녀를 친딸처럼 아끼셨던 분입니다. 제 말 알아들으셨나요?”

    “네, 머리에 새겨 넣고 있어요.”

    “아뇨, 지금 전혀 못 알아듣고 있어요.”

    리아브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잘 들으세요. 베로니카 공녀와 가까이 지내셨던 사람일수록 경계 대상입니다. 엘레나 양이 대역인 게 들통날 수 있으니 이 사람과 마주치면 정신 바짝 차리세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긴장하고 조심할게요.”

    경각심을 갖는 엘레나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리아브릭도 더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수백 명에 육박하는 명단의 초상을 일일이 기억하고 신상명세서를 외우는 일은 매우 지루하고 헷갈리는 일이었다. 부수적으로 리아브릭이 첨언까지 하면 엘레나가 암기해야 할 부분은 더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모르는 얼굴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야.’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다가 황비의 위까지 오른 엘레나였다. 명단에 적힌 황족이나 귀족들과 모임을 하고 얼굴을 마주하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리아브릭이 손을 뻗어 다음 초상과 신상명세서를 테이블 위에 깔았다.

    “……!”

    또 뻔한 귀족이 나올 거라 방심하고 있던 엘레나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클라디오스 데 시안. 장차 제국의 황위를 이으실 황태자 전하십니다.”

    엘레나의 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눈길에는 형용할 수 없는 애환이 담겨 있었다. 한때, 그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단 한 번의 온기조차 나누어 주지 않은 남자. 그리고 아이가 들어섰다는 말에 더없이 모질게 자신을 원망하던 남자. 황실의 대를 이을 후손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절망하며 자책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 한순간의 실수가 결국 천 년 제국을 나락으로 내몰고 마는구나.”

    출산 직후, 그의 한탄을 듣자마자 엘레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쏟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피붙이인데!

    황비인 자신에게 애정이 없는 건 알았지만 제 자식을 출산한 여인에게 어찌 저런 잔인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이후, 엘레나는 시안을 멀리했다. 더는 황제의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고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으니까.

    ‘왜 그리 어리석었는지. 처음부터 그와 나는 부부로 살 수 없는 사이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그를 갈구하고, 집착하고, 원망하다니.’

    회귀한 이후에서야 그가 왜 그녀를 밀어내고 증오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황권을 강화하려는 황제. 황비까지 배출하며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대공. 정치적으로 뜻이 다른 이 두 사람은 공존이 불가능한 대립적인 관계였다. 심지어 야망에 눈이 먼 프란체 대공과 리아브릭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황비인 나를 황후로 만들고자, 황후를 독살했지.’

    혹여 황후가 적통 황태자를 낳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저지른 만행이었다.

    당시 엘레나는 그것이 대공가의 소행인지조차 몰랐다. 황후의 죽음에 분노하여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황제의 속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했다.

    모든 건 회귀한 이후, 좀 더 냉정하게 일련의 사건을 돌아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엘레나를 그리도 증오하고 원망했는지. 진실에 다가서고 나서야 애증으로 범벅이 된 그날의 감정을 곱게 접어 갈무리할 수 있었다.

    ‘폐하, 두 번 다시 당신의 옆자리에 제가 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서로에게 상처와 증오만 남긴 악연의 끈이다. 같은 실수를 답습하느니 끈을 잘라내는 게 옳다고 믿었다.

    “제 말 듣고 있나요?”

    리아브릭의 신경질적인 다그침에 엘레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둘러댔다.

    “아, 죄송해요. 황태자 전하의 존안을 뵈니 그만 넋을 잃고 말았어요. 어쩜 이리도 잘생기셨는지, 실물은 더 훤칠하시겠죠?”

    “머지않아 뵐 일이 있을 테니, 그때 직접 보세요.”

    “저, 정말요? 아, 설레라. 그날이 벌써 기다려지네요.”

    리아브릭은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엘레나를 한심스럽게 흘겨보며 신상명세서를 내밀었다.

    “그러려면 황태자 전하에 대해 잘 알고 계셔야겠죠? 여기 적힌 내용 한 글자도 빠짐없이 숙지하세요.”

    엘레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연이라고 하나 몇 년을 부부로 지낸 두 사람이다. 시안이야 정적의 딸인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겠지만, 일방적으로 그의 애정을 갈구하던 엘레나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한때나마 함께했던 미련인 것일까.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두툼하게 쌓여 있던 초상화와 신상명세서도 몇 장 남지 않았다.

    “마지막 장이네요.”

    지금껏 마지못해 열의 있는 척 수업을 듣고 있던 엘레나가 한 장 남은 초상화의 얼굴을 쳐다봤다.

    ‘넌…….’

    여심을 흔들고도 남을 번지르르하게 생긴 면상에 호감이 갈 법도 하건만 엘레나의 속 깊은 곳에 쌓여 있던 울분이 치밀었다.

    ‘개자식?’

    렌 바스타슈. 이름보다 개자식이 더 잘 어울리는 이 인간은 무가로 명성이 자자한 바스타슈 자작가의 후계자이자, 사사로이는 베로니카와 육촌이 된다. 족보로 따지자면 베로니카 공녀의 작은 할아버지 되는 사람의 손자였다.

    친족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바스타슈 가문은 머슴이다. 조부 때 프리드리히 대공가로부터 독립하는 조건으로 대공가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기로 백년조약을 맺은 머슴 가문 말이다. 물론 지금도 그 조약의 효력은 유효해서 대공가에 절대복종하고 있다. 그래서 만만하게 여긴 게 화근이었다.

    렌은 틈만 보이면 제 주인도 물어뜯어 죽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머슴이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면 렌은 첫 만남부터 날 가짜라고 의심하고 있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렌은 마주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엘레나를 가짜 베로니카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어렸을 때 보았다고 해도 그 횟수가 많지는 않았을 텐데?’

    엘레나는 렌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혹시 놓친 것이 있나 되짚어봤다.

    ‘분명 처음엔 날 가짜라고 의심하지 않았어.’

    불분명한 의심이 확신으로 굳은 데는 엘레나가 놓친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만 알 수 있다면…….

    ‘혹시 그때?’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귀 뒤를 어루만졌다. 솜털과 매끈한 피부가 손끝에 전해졌다. 진짜 베로니카에게 있어야 할 흉터가 그녀에게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베로니카는 머리를 올려 묶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들었어. 귀 뒤의 흉터가 드러날까 봐 그랬던 거야. 확실해.’

    귀족 영애에게 있어서 흉터는 치부나 다름없었다. 귀 뒤쪽이면 잘 티가 나지 않을 텐데도 민감하게 굴며 감추는 것도 이해가 간다.

    어쩐지. 엘레나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리아브릭만 없었다면 맘 놓고 웃었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더는 그 개자식한테 휘둘리지 않아. 흉터야 만들면 그만이잖아.’

    렌은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할 인간이다. 그러자면 엘레나가 대역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단초를 줘서는 곤란했다. 자를 거면 확실히 자르고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렌 바스타슈. 대공가에서 독립한 가문의 후계자로, 공녀와는 육촌 관계의 친족이죠.”

    “친족이면 가까운 사이였겠네요?”

    “아뇨, 실제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가까이하지 마세요.”

    리아브릭 역시 렌을 경계했다. 백년조약으로 묶어두기에 그는 야망이 크고 위험한 남자인 까닭이었다. 첨언과 렌의 위험성에 대한 충고로 모든 인물 파악이 끝났다.

    “내일까지 전부 외우세요. 사소한 헷갈림도 있어서는 곤란해요. 인간관계에서 사소한 실수는 돌이킬 수 없거든요.”

    “해, 해볼게요.”

    자신은 없지만 열정을 보이는 엘레나를 보며 리아브릭이 말을 덧붙였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아요. 이제부터는 모든 게 실전이니까, 되돌릴 수도 없죠.”

    “실전이라면 설마…….”

    짐작 가는 게 있는지 긴장하는 엘레나를 보며 리아브릭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틀 후, 여길 떠나 대공가로 갈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