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3/30)
  • 제1장 복수의 서막

    “엘레나!”

    나지막한 야산 중턱의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있던 엘레나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발장구를 멈췄다. 수면 위로 퍼지던 물결이 사그라지며 잔잔한 물 위로 엘레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수면에 비친 그녀는 어렸다. 앳된 얼굴과 채 빠지지 않은 볼살이 특히 도드라졌다. 소녀와 여인의 사이 어디쯤에서 만개하길 기다리는 봉오리의 싱그러움을 담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엘레나는 회귀했다. 베로니카 행세를 하며 황비까지 올랐던 그녀는 성인식을 앞둔 16살로 돌아왔다.

    처음엔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베로니카 행세를 하며 이룬 모든 것을 앗아간 배신. 복부를 관통한 쇠붙이의 시린 촉감. 이안을 안고 멀어지던 베로니카의 뒷모습.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그녀를 그 시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안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했다. 아이가 어미인 엘레나의 보살핌 없이 홀로 버텨낼 시간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혀왔다.

    왜 하필 오 년 전으로 돌아온 걸까? 차라리 일 년 전, 하다못해 석 달 전으로라도 되돌아갔다면 저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안을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처음 열흘간 그녀는 넋 놓은 사람처럼 지냈다. 현실과 지난 삶의 괴리감을 좁히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던 감정의 불길도 점점 식어갔다.

    그래, 세상 어디에도 이안은 없어. 대륙 전체를 뒤져도 만날 수가 없다고. 태어나지 않았으니, 존재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엘레나는 가슴 깊이 이안을 묻을 수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 이상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현재의 삶을 직시할 수 있었다. 앞으로 닥칠 미래를 바로 그녀, 엘레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음을 자각했다.

    “엘레나!”

    중년 남자의 부름이 다시 한번 크게 들렸다. 엘레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기 있었구나.”

    “아버지.”

    엘레나는 살짝 턱을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프레드릭 준남작은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외알 안경이 무척 잘 어울리는 신사였다. 한때는 수도에서 인정받는 행정관이었으나 조부의 사업 실패로 모든 가산을 잃고 변방까지 쫓겨 왔다. 현재는 영주인 클로드 자작 밑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며 받는 녹봉으로 연명하는 반쪽짜리 귀족이었다.

    “성인식을 치르지 않는다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이냐?”

    본론을 꺼내는 프레드릭 준남작의 화법은 어느 때보다 직설적이었다. 관저에서 공무를 봐야 할 시간에 이곳까지 딸을 찾으러온 그의 행동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와 대조적으로 엘레나는 몹시 차분했다.

    “아침에 말씀드렸던 대로예요. 굳이 그런 거창한 성인식, 저는 원치 않아요.”

    “하지만 엘레나, 이건 좋은 기회다. 비록 영주님의 후원을 받는 것이긴 하나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거다.”

    프레드릭 준남작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빠듯한 녹봉으론 엘레나의 사교계 데뷔는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런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주인 클로드 자작이 엘레나의 성인식을 위해 사교계 데뷔에 필요한 경비를 후원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안 그래도 자신의 무능함이 딸의 혼삿길을 막는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리던 프레드릭 준남작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염려해 주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사교계에 나서고 싶지 않아요.”

    “다 널 위한 거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것만으로도 네 남편감이 달라진다. 그건 알고 하는 말인 게냐?”

    “…….”

    엘레나의 눈빛이 깊어졌다. 늘 그랬지만 정직하고 외골수적인 아버지는 정론을 내세웠다. 언뜻 들으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교계에서 귀족다운 평판을 증명하고 미를 뽐낼 수만 있다면 귀족 영식들의 구애를 받을 수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말이냐?”

    프레드릭 준남작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말한 후원이요. 정말 순수한 후원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냐?”

    엘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고 쳐요. 그런데 후원금을 빌미로 늙은 귀족이나 상인의 첩으로 절 보내면요? 영주의 후원을 받은 제 입장에서 거절할 수 있을까요?”

    엘레나의 말에 프레드릭 준남작이 펄쩍 뛰었다.

    “첩이라니! 그럴 분이 아니다.”

    “그건 모르는 거예요.”

    ‘웃는 얼굴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게 인간이니까요.’

    그것을 엘레나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엘레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프레드릭 준남작은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다. 하나 마음 놓아라. 이 아비가 나서서 막아주마.”

    믿음직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엘레나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그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막지 못하실 거예요. 저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전부를 옭아맬 테니까요.”

    올가미. 철저하게 계획된 함정이다. 지난 삶에서 영주의 후원은 빚이 됐다. 그 빚은 족쇄가 됐으며, 결국 가족을 옴짝달싹 못 하게 칭칭 옭아맸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프레드릭 준남작은 벽에 대고 얘기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엘레나, 그분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악하지 않단다. 진정으로 널 도와주려는 것일 수도 있어.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싶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엘레나는 뒷말을 흐리며 지금은 꺼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이 올가미를 친 자가 영주가 아니면요?’

    클로드 자작은 허수아비다. 그는 이런 올가미를 칠 만큼 머리 회전이 좋지 못하다. 너무 단순해서 그 속이 훤히 읽히는 부류다.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제국의 사교계 정점에 섰던 엘레나의 눈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흉수는 따로 있다. 엘레나는 허수아비 뒤에 숨어서 웃고 있을 한 여자를 떠올렸다.

    ‘리아브릭.’

    제국 학술원을 역사상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으로 대공가를 움직이는 모략가다. 그녀는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이간질을 하는 기만술에 능했다. 근래 대공가의 위세가 황권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평가를 듣게 된 데에는 그녀의 역할이 컸다.

    ‘당신이 내게 그랬지. 화사한 꽃에 감춰진 가시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엘레나가 베로니카 행세를 하며 지내는 동안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특히 제국의 사교계는 약육강식 그 자체였다.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그곳에서는 대공가라는 배경도 절대적인 우위가 되지 못했다. 궁지에 몰려 도태될 뻔한 위험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런 엘레나를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가르친 게 리아브릭이다. 그 리아브릭이 지금 영지에 와 있었다. 베로니카와 닮은 엘레나를 대공가로 데려가기 위해서.

    ‘더 이상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야. 이제 판을 짜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리아브릭이 원하는 건 엘레나다. 베로니카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가는 엘레나를 데려가 대역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 변방까지 그녀를 데리러 오는 수고스러움을 자처하지 않았으리라.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이전 삶처럼 이용만 당하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프레드릭 준남작은 아쉬움을 떨치지 못했다.

    “정녕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후회할 일 없을 거예요.”

    엘레나의 대답은 확고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런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다. 더 이상 휘둘리는 건 질색이다. 대공가의 개입과 간섭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그녀의 인생을 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엘레나는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

    ‘이 판, 내가 엎어버리겠어.’

    엘레나의 눈이 시리도록 차게 빛났다.

    * * *

    요 며칠 프레드릭 준남작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는 다시 한번 엘레나를 설득했다.

    “얘야, 영주님께서 혹여나 있을 불미스러운 일이 걱정이라면 서면으로 약조할 수 있다더구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떻겠느냐?”

    “죄송해요, 아버지. 제 결정엔 변함이 없어요.”

    엘레나는 스푼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깟 문서가 무슨 효력이 있을까요.’

    영주가 계약을 어겼다고 가신이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어렵다. 영주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변방에서 부당함을 주장한다고 한들 조항이 효력을 발휘하기란 어렵다.

    “끙, 누굴 닮아 이리 완고한지…….”

    여지조차 주지 않는 딸의 단호한 태도에 프레드릭 준남작은 앓는 소리를 냈다.

    “여보, 강요만 하지 마시고 엘레나의 뜻을 존중해 주세요.”

    부인 체사나는 접시에 샐러드를 옮겨 담으며 엘레나의 편을 들었다. 젊은 시절 참 고왔던 그녀는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주름이 부쩍 늘었다. 시녀 한 명 없이 모든 집안일을 도맡으며 고생한 까닭이다.

    “아쉬워서 그러지…….”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세요. 우리 딸, 어디다 내놔도 손색없는 아이예요. 굳이 무리해서 사교계 데뷔를 시키지 않더라도 좋은 짝 만날 수 있어요.”

    체사나가 좋은 말로 프레드릭 준남작을 위로하며 한쪽 눈을 살짝 찡긋해 보였다. 엘레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엄마가 잘 알아듣게 얘기할게. 너무 마음 쓰지 말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체사나의 속마음이 들렸다. 엘레나도 옅은 미소로 고맙단 말을 대신했다.

    “그보다 엘레나, 빨래하다 보니 옷이 죄다 흙먼지로 엉망이더구나. 가시덩굴 같은 것에 걸려 뜯긴 데도 보이고.”

    “아까 로우스산에 다녀왔어요.”

    “또? 얘야, 앞으로 산에 오르는 건 자중하는 게 어떠니? 근래에 산짐승 출몰도 잦아졌고, 여자 혼자 산을 오르다 안 좋은 일이라도 겪을까 걱정이 돼서.”

    잠자코 있던 프레드릭 준남작까지 나서서 거들었다.

    “체사나의 말이 옳구나.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더는 갈 이유가 없기도 하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긴 엘레나가 의자를 빼고 일어섰다.

    “저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주무세요.”

    “그래, 잘 자렴.”

    방으로 돌아온 엘레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았다.

    스윽. 두툼한 교양서적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장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일기장으로 보이는 노트를 활짝 펼치자 생뚱맞게도 활자가 아닌 펜으로 그려진 엉성한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시간 내에 완성해서 다행이야.”

    그림은 어설프고 삐뚤삐뚤할지 몰라도 지도의 정교함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어떤 로우스산 지도보다 정확했다. 아무래도 십 년 전 지도가 시판될 때와는 산세나 지리가 미묘하게 바뀐 까닭이다.

    엘레나가 통에서 붉은 잉크 펜을 꺼내 집었다.

    슥. 스슥. 거침없이 로우스산 지도의 산세와 지리를 따라 굽이굽이 줄을 그었다. 산을 넘지 않고 산비탈을 따라 협곡으로 이어진 붉은 선은 로우스산 너머에 흐르는 이지스강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리아브릭도 이 루트는 절대 예상 못 해.”

    엘레나는 감히 단언했다. 완벽한 도주로라고.

    “엄마, 아빠. 이번 삶에선 제가 지켜드릴게요. 꼭이요.”

    엘레나의 눈동자가 깊은 후회로 침전되었다. 지난 삶, 대공가로 떠나면서 부모님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첩살이를 면할 수 있단 리아브릭의 말에 속아 제 살 궁리만 했다. 그렇게 이용만 당하다 버림받을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영지를 떠난 그날 밤, 부모님이 리아브릭의 손에 죽임을 당했단 사실을.

    엘레나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저들의 까만 속내를 알아버린 이상 부모님을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 *

    동이 틀 무렵. 엘레나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이 시각만 되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제1황비로서 황궁에서 지내며 몸에 익은 습관은 회귀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억지로 고쳐보려고 애를 써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았다.

    엘레나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단정한 모습이었다. 황비 시절 배어버린 몸가짐이다.

    엘레나가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방에서 나가자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체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벌써 일어났어? 더 자지 않고.”

    “일찍 눈이 떠졌어요. 저도 거들게요.”

    “그래줄래?”

    엘레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차림을 도왔다. 화로에서 노릇노릇 구운 빵을 꺼내 먹기 좋게 썰었고, 구수한 향이 일품인 브로콜리 수프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참 희한한 일이다. 지난 삶에선 귀찮게만 느껴졌던 집안일이 이제는 싫지 않았다. 이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버려서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엘레나가 노크하자 정복을 차려입은 프레드릭 준남작이 방을 나와 식탁에 앉았다. 밤새 체사나에게 잔소리를 들었는지 프레드릭 준남작도 더는 후원을 강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화롭고 일상적인 아침 식사 자리를 가질 수가 있었다.

    “여보, 밖이 좀 소란스럽지 않아요?”

    “마차라도 지나가나 보지.”

    체사나의 의문에도 프레드릭 준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수프를 떠먹었다. 가도(街道) 옆에 가옥이 위치한 까닭에 늘 겪는 일쯤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란스러움이 점점 커졌다.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엔 확실히 부산스러웠다.

    “내가 나가보지.”

    프레드릭 준남작이 스푼을 내려놓곤 식탁에서 일어섰다.

    똑똑.

    막 문고리를 잡고 열려는데 한 타이밍 빠르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준남작님, 저 그레이스입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영주인 클로드 자작의 사저(私邸)와 관련된 제반 관리와 살림을 담당하는 집사였다. 공저에서 근무하는 프레드릭 준남작과는 마주칠 일이 드문 사이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문을 열자 그레이스가 꾸벅 예의를 갖췄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일방적인 양해를 구한 그레이스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그러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짐꾼들이 고급 실크로 포장된 상자를 들고 들어와 쌓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뭔가?”

    “영주님이 보내신 선물입니다.”

    “선물?”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듯 프레드릭 준남작이 당혹스러워했다. 단순한 선물로 받기엔 수북하게 쌓이는 선물 꾸러미가 적지 않았다. 상자를 다 옮기자 그레이스 집사가 짐꾼들을 싹 물렸다.

    “이 선물들은 영주님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라니? 영문을 알아야 그 마음을 받아들일지 말지 할 거 아닌가.”

    그레이스 집사가 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봉투를 꺼냈다. 실크 천에 금색 실로 박음질해 놓은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프레드릭 준남작이 봉투를 건네받아 개봉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최고급 양피지에 쓰인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갔다.

    “당장 이거 갖고 돌아가게.”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 실린 분노는 컸다.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그가 감정을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러지 마시고…….”

    “돌아가라고 했네.”

    “죄송하지만, 꼭 전해 드리라고 하신 만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레이스의 불복에 겨우 억누르고 있던 프레드릭 준남작의 언성이 올라갔다.

    “지금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두 번 말 안 하겠네. 당장 갖고 돌아가게. 어서!”

    “여보, 도대체 뭔데 그래요?”

    늘 귀족다움을 잃지 않던 남편이 길길이 화내자 체사나가 불안해했다.

    “알 필요 없어. 볼 필요도 없고.”

    양피지를 움켜쥔 프레드릭 준남작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뭐 하나! 갖고 안 돌아가고!”

    “죄송하지만 따를 수 없습니다. 마음은 두고, 몸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레이스!”

    버럭 소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 집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록 영지는 없다지만 프레드릭 준남작도 명색이 귀족이다. 일개 집사의 불복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엘레나가 양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봐도 될까요?”

    “볼 필요 없대도!”

    신경질적인 대꾸에도 불구하고 엘레나의 반응은 차분했다.

    “제 일이죠?”

    “뭐?”

    “제 얘기냐고 여쭸어요.”

    “……!”

    정곡을 찔린 프레드릭 준남작이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반응에 엘레나는 확신했다.

    “제 얘기 맞나 보네요.”

    “얘야.”

    “제가 알았으면 해요. 그래야만 하는 거잖아요.”

    엘레나는 구겨진 양피지를 프레드릭 준남작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빼냈다. 프레드릭 준남작은 처음엔 선뜻 주지 않고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엘레나가 말없이 쳐다보자 손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엘레나가 구겨진 양피지를 펴 읽어 내려갔다.

    피식. 마지막 문장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엘레나가 실소를 터뜨렸다. 이 양피지는 청혼서다. 상자 꾸러미는 청혼을 담보로 보낸 일종의 예물이다. 즉, 영주의 첩이 되라는 얘기다.

    ‘우스워.’

    예전의 엘레나였다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첩이라니. 세상을 다 잃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설마 했는데, 내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리아브릭. 바로 그녀일 터. 리아브릭은 엘레나가 절망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위로하는 척 다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덥석 잡을 테니까. 엘레나가 믿고 의지하게 만든 뒤, 간이든 쓸개든 모조리 뽑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용 가치가 다해서 쓸모가 없어지면 죽이겠지.

    ‘과거였다면 당신의 손을 잡았을 테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당신이 나한테 한 방식, 그대로 돌려줄게.’

    말이 없는 엘레나를 보며 프레드릭 준남작이 말했다.

    “엘레나, 넌 나서지 말거라. 이건 일방적이고 부당한 처사다. 내가 영주님을 뵙고 잘 말씀드리고 오마.”

    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영주님을 뵙고 청혼을 거절하고 오겠소.”

    “여보, 잘 좀 말씀드려 보세요. 이건 정말 아니잖아요.”

    담판을 지으려는 프레드릭 준남작을 체사나까지 나서서 거들 때였다. 엘레나의 뇌리에 경종이 울렸다.

    ‘아버지를 보내선 안 돼!’

    리아브릭의 올가미는 가족을 건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지난 삶에서도 후원을 빌미로 첩으로 시집가길 강요한 영주에게 항의하다가 감금을 당하지 않았던가.

    ‘내 선에서 매듭지어야 해.’

    엘레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뭐?”

    “에, 엘레나. 괜찮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제가 처리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일방적인 양해를 구한 엘레나가 휙 돌아섰다.

    “제 말씀 좀 전해주실래요?”

    엘레나가 불쑥 다가가 말을 걸자 엉거주춤 서 있던 집사 그레이스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뭐라고 전해 드릴지…….”

    엘레나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제국의 사교계를 홀렸던 그 눈웃음이었다.

    “보내주신 선물, 감사히 잘 받겠다고요.”

    “……!”

    “엘레나!”

    프레드릭 준남작과 체사나의 경악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공국의 풍습에서 청혼 선물을 받겠다는 건, 이 청혼을 받아들이겠단 뜻으로 간주된다. 경솔하기 짝이 없는 엘레나의 언행에 프레드릭 준남작이 윽박질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엘레나, 평생을 첩으로 살 참이더냐!”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엘레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근데 그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서글펐다.

    “제가 거절하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어요.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길 원치 않아요.”

    “너…….”

    엘레나의 솔직한 생각에 부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반쪽짜리 몰락 귀족일지언정 자긍심과 자부심만큼은 잃지 않고 살았기에 엘레나의 직설이 심장을 마구 후벼 팠다.

    “차라리 잘되었어요. 아버지도 사교계에서 좋은 남편감을 구하길 원하셨잖아요? 이 청혼 받아들일게요.”

    “…….”

    “죄송해요, 엄마, 아빠.”

    엘레나의 말속에 담긴 확고함은 타협의 여지조차 없었다. 통보에 가까웠다.

    “여, 여보.”

    프레드릭 준남작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굳이 첩이 될 이유도 없지 않느냐?”

    “괜찮아요.”

    “너 정말…….”

    엘레나는 고개까지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죄송해요.”

    “…….”

    부부의 입술은 굳게 닫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담담하게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고, 그걸 운명처럼 받아들이려는 엘레나의 선택이 자신들의 무력함에서 비롯한 일인 것 같아 괴로웠다. 마찬가지로 모진 말을 쏟아낸 엘레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제멋대로 굴어서 죄송해요. 딱 오늘만 그럴게요.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살 수 있어요.’

    눈치를 보던 그레이스 집사가 슬며시 몸을 뺐다.

    “저는 서둘러 이 기쁜 소식을 영주님께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집 안에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단란하고 평온했던 아침 식사가 거짓말인 것처럼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엘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다. 네가 뭐가 부족하다고…….”

    체사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늙은 영주의 첩이 되어 살아갈 엘레나의 삶이 딱하고 측은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울지 마세요.”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저 행복하게 살게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엘레나가 오히려 체사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열 마디 말보다 따스한 교감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기에.

    “그래도 이건 아니다, 아니라고.”

    밀려오는 무력함과 참담함에 프레드릭 준남작이 중얼거렸다. 그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 보였다.

    “지금이라도 영주님을 만나보마. 첩이라니.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아버지 탓이 아니에요. 제가 선택한 일인걸요.”

    “아직 늦지 않았다. 자식의 잘못된 선택은 부모인 우리가 나서서 바로잡으마.”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저를 진정 사랑하신다면 믿고 지켜봐 주세요.”

    “너…….”

    엘레나의 당부는 대못이 되어 프레드릭 준남작의 가슴에 푹푹 박혔다. 얼마나 믿음직하지 못한 부모였으면 모든 업을 떠안듯이 저리 굴까 싶어 억장이 무너졌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소.”

    “여보.”

    더는 엘레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던 프레드릭 준남작이 집을 나섰다.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마음도 무거웠다.

    “저 좀 쉴게요.”

    “그래.”

    체사나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어줄 수 없음을 알기에 방으로 돌아가는 엘레나를 아프게 볼 수밖에 없었다.

    쿵.

    방문을 걸어 잠근 엘레나는 문짝에 등을 기댔다.

    “두 분께 너무 큰 상처를 드리고 말았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막심한 후회가 밀려왔다.

    “돌아보지 말자. 앞만 보자.”

    약해지는 마음을 강하게 다잡은 엘레나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겨울철 외풍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커튼을 힘껏 걷었다. 드러난 벽면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메모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앞으로 오 년간의 미래! 이 메모지들은 미래에 발생할 굵직한 사건을 기입하여 배열한 연표였다. 감히 단언컨대 앞으로의 역사는 여기 적힌 대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달라진 엘레나가 있을 것이다. 엘레나가 맨 위에 붙어 있던 메모지 한 장을 떼어냈다.

    프리드리히가의 초대 가주 로제르트 공작의 탄신연회.

    리아브릭이 서둘러 엘레나를 데려가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 중요한 행사가 불과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이날이었지. 내가 처음으로 베로니카 행세를 하고 세상에 섰던 날이.”

    몇 년간 베로니카가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두고 하인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했다느니, 그 때문에 공작가가 베로니카를 잡아들이기 위해 기사단을 풀었다느니, 나쁜 소문이 수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야심가인 프란체 대공으로선 향후 베로니카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평판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소문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베로니카 공녀의 건재함을 귀족 사회에 보이는 것이었다.

    “기대해. 그땐 뭣도 모르고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지만…… 이젠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판의 주도권을 쥔 건 엘레나다. 심지어 언제든지 판을 엎어버릴 수도 있는 조커도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번엔 당신들 차례야.”

    엘레나는 증오의 대상들을 떠올렸다.

    프란체 대공. 리아브릭. 베로니카 공녀.

    저 세 사람이 합작하고 모의하여 엘레나를 철저하게 기만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런 죄 없는 프레드릭 준남작과 체사나마저 살해했으며, 아들인 황태자 이안마저도 죽이려고 들었다. 그때와 같은 삶을 답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철저하게 당한 만큼 돌려주리라. 엘레나는 저들의 전부를 앗아갈 계획이었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게 많은 법. 몰락 정도론 성이 차지 않는다. 살아갈 의지마저 잃어버릴 만큼 철저하게 망가뜨릴 참이다.

    엘레나는 빈 유리잔에 성냥불을 피웠다. 작게 피어난 불씨 위에 방금 떼어낸 메모지를 떨어뜨렸다. 일순 불길이 확 일어나며 그것을 집어삼켰다. 엘레나는 다시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론티어 아카데미 입학.

    리처드 황제 승하.

    프란체 대공의 암살 시도 사건.

    황태자빈 선출식.

    ?

    한 장, 한 장 미래가 적힌 메모지를 떼어내 태우기를 반복했다.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겨둔 이상 메모지의 가치는 다했다. 굳이 흔적을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최후의 한 장이 마지막 불꽃과 함께 타들어갔다.

    그것이 재로 변하는 것으로 앞으로 일어날 미래는 온전히 엘레나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당신들…… 다 부숴 버리겠어.”

    * * *

    “엘레나.”

    체사나는 초저녁이 다 되어서야 방에서 나온 딸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 어떤 말도 위로나 격려가 되지 못할 걸 알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굴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먹어야지? 너 좋아하는 스테이크 어때? 엄마가 지금 가서…….”

    “엄마,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정말 괜찮아요.”

    엘레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침에 짐꾼들이 쌓아놓은 그대로 청혼 선물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 같이 이거나 뜯어봐요. 뭘 보냈는지 궁금해요.”

    “하지만 그, 그걸 뜯으면…….”

    체사나는 혹시나 예물을 뜯으면 결혼을 되돌릴 방법이 아예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미련 두지 마세요. 무르기엔 늦었어요.”

    담담히 단념시킨 엘레나가 실크로 잘 포장된 선물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처음 개봉한 상자에서 꺼낸 건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였다. 벨 라인(Bell line) 디자인이었는데, 재질도 별로였고 마감도 형편없었다. 그나마 장신구는 쓸 만했다.

    전통 방식으로 제작한 까닭에 타국에서는 특산품으로 분류되어 꽤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것들이었다.

    “엄마, 잠시 이리 와보세요.”

    “왜 그러니?”

    엘레나가 손을 쭉 뻗어 체사나의 목덜미에 방금 발견한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은빛 진주가 풍기는 영롱함이 가늘고 긴 그녀의 목에 잘 어울렸다.

    “잘 어울린다. 이건 엄마 쓰세요.”

    “뭐? 됐다. 난 필요 없으니 너 하렴.”

    체사나는 정색했다. 첩살이를 막지 못한 것도 미안해 죽겠는데 무슨 염치로 이걸 받는단 말인가.

    “저 키우시는 내내 변변한 목걸이 하나 없으셨잖아요. 제가 꼭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어떻게 이걸 받아…….”

    “어서요. 자꾸 거절하시면 저 서운해져요.”

    엘레나는 체사나가 원치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렸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가 떠나면 돈이 필요하실 거예요. 그때를 생각해서 꼭 지니고 계세요.’

    엘레나는 지금이 아니라 오로지 앞일만 생각했다. 지금이야 자식 팔아 받은 재물 같아서 진저리가 나겠지만 때가 되면 이 목걸이가 요긴한 생활비가 될 것이다.

    “그보다 아버지가 늦네요.”

    “그러게. 안 그래도 밤눈이 어두운 사람인데…….”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창문 밖을 보며 엘레나의 수심도 깊어졌다.

    ‘별일 없으셔야 할 텐데.’

    끼이익. 때마침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나 왔소.”

    “여보!”

    반쯤 열린 문 너머로 프레드릭 준남작을 확인하고 나서야 엘레나가 안도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시장하죠? 어서 앉아요. 수프 다시 데울게요.”

    “잠시만 기다리시오, 부인. 손님을 모시고 왔소.”

    “손님이요?”

    막 부엌으로 향하던 체사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곳에 정착한 이후로 한 번도 누군가를 집에 초대한 적이 없던 그다. 하물며 낮에 그 사달을 겪고 뜬금없이 손님이라니. 프레드릭 준남작의 돌발 행동에 꽤 당황스러웠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프레드릭 준남작은 윗사람을 대하듯 깍듯하게 의자까지 빼주며 자리를 권했다. 손님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넉넉한 후드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왜소하고 가녀린 어깨선과 후드 아래로 비치는 새하얀 피부로 그녀가 성인 여성이지 않을까 유추할 수 있었다.

    “……!”

    엘레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아무렇지 않은 척 굴려고 했지만 위화감을 동반한 익숙함에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 그리고 불분명함은 점차 확신으로 물들어갔다.

    “얘야, 사람이 꼭 죽으란 법은 없더구나.”

    엘레나가 말없이 쳐다보자 프레드릭 준남작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곧 내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소개하마. 이분은…….”

    “말씀 중에 죄송한데, 직접 소개할 수 있게 양보해 줄 수 있나요? 아무래도 그게 예의 같아서요.”

    불쑥 말을 자르며 양해를 구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이슬보다 더 맑은 느낌은 경계심을 허무는 마력을 지녔다. 프레드릭 준남작은 흔쾌히 응했다.

    “아, 그게 편하시다면 저야 괜찮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닿았다. 후드에 가려져 눈동자가 잘 보이진 않지만 상대를 속속들이 파고드는 눈길이었다.

    가녀린 손목이 푹 눌린 후드를 머리 뒤로 넘겼다. 그러자 아름다우면서도 이지적인 미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고혹적인 시선을 엘레나에게 고정했다.

    “처음 뵙네요, 리아브릭 드 플랑드르라고 해요. 베실리아 제국의 귀족이죠.”

    악연의 재회다.

    * * *

    한눈에 그녀를 알아본 엘레나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참 놀라운 일이다. 증오와 복수심에 피가 뜨거워질 거란 예상과 달리 오히려 머릿속이 맑고 선명해졌다.

    지금의 엘레나에게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은 완벽하게 그녀를 지배하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라고. 때가 오면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으라고.

    “엘레나예요.”

    엘레나는 어색한 미소 뒤에 섬뜩한 발톱을 숨겼다. 제국 사교계의 정점에 올랐던 그녀였기에 가면을 쓰고 본심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알다마다요. 엘레나 양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엘레나 양을 아주 잘 알고 있답니다.”

    “저를 잘 안다고요?”

    리아브릭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천사의 그것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포근한 미소였다.

    ‘가증스러운 여자.’

    엘레나는 순간적으로 치미는 구역질에 속이 뒤틀릴 뻔했다. 저 미소에 속았다. 저 호의가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복부에 검이 꽂혀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진실을 알기에 더는 속지 않는다. 그저 속아주는 척할 뿐이다.

    “사실이란다, 엘레나.”

    “아버지?”

    “널 만나고자 그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찾아오셨다는구나.”

    프레드릭 준남작은 그녀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사전에 리아브릭과 접촉하여 어느 정도 대화에 진척이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여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분께서 우리 엘레나를 구원해 준다고 약속했소. 첩이 되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오.”

    “뭐, 뭐라고요?”

    남편의 밑도 끝도 없는 대답에 체사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엘레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구원이요? 저를?”

    “얘야, 넌 첩이 될 필요가 없다.”

    프레드릭 준남작의 눈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이분께서 널 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는구나.”

    “……!”

    엘레나는 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눈길로 리아브릭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응이 오길 기다리고 있던 리아브릭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받았다.

    “사정을 설명하기 전에, 엘레나 양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믿으시겠어요?”

    “……믿기 힘들 거 같아요.”

    리아브릭은 미소를 유지한 채로 펜던트를 꺼냈다. 단숨에 시선을 끈 건 뚜껑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이었다. 한 쌍의 금빛 독수리 음각 위로 새겨진 X 형태의 검과 창은 놀라울 만큼 화려했다.

    프리드리히 대공가. 엘레나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리아브릭이 펜던트 옆쪽 버튼을 누르자 뚜껑이 열렸다.

    “세, 세상에, 얘야.”

    체사나는 몇 번이고 눈을 크게 깜빡이며 초상화와 엘레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거 너 아니니?”

    “…….”

    펜던트 속에 그려진 여인은 엘레나를 모델로 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녀와 닮아 있었다.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흡사했다. 굳이 차이점을 들자면 적금발의 엘레나와 달리 초상 속의 여자는 찬란하다시피 수려한 금발을 지녔다는 정도랄까.

    “제가 모시던 아가씨예요. 살아생전에 제국의 어느 영애보다도 고아하셨고, 고결하셨으며, 고귀하신 분이셨지요.”

    “살아생전이면…….”

    “석 달 전, 가이아 여신의 품에 잠드셨습니다.”

    가이아 교단은 베실리아 제국의 국교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는 종교로, 사후에 가이아 여신이 창조한 천국에서 잠이 든다고 믿는다.

    “여신의 축복이 깃들길.”

    엘레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시름에 빠진 표정과 눈길은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연기였건만, 제국 사교계에서 닳고 닳은 그녀였기에 이런 연기조차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와 다름없었다.

    “애도에 감사해요. 아가씨도 가이아 여신의 곁에서 평안을 찾았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저…… 남은 자들이 그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야 함에 힘이 들 뿐이죠.”

    “가까운 사이셨군요.”

    “네,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였죠. 그래도 조금씩 가슴에 묻고자 애쓰는 중이에요. 진짜 걱정은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석 달이 넘도록 외동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세요.”

    체사나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끄덕였다.

    “그게 부모죠. 만일 우리 엘레나가 잘못됐다면 저희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아내의 말에 프레드릭 준남작은 생각조차 싫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을 잃은 아픔이란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고통과도 비견할 수 없으니까.

    “세상에 가지지 못한 게 없고, 갖고자 해서 못 가질 게 없는 분께서 통곡하셨습니다. 딱 한 번만 딸을 만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셨죠.”

    “안타깝지만 그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이란 거 알아요.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란 불가능하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대륙의 반대편에서 아가씨를 봤다는 상인의 얘기를 들었을 때도 믿지 못했으니까요.”

    리아브릭의 눈빛이 엘레나에게 고정됐다. 돌고 돌던 이야기가 드디어 본질에 다다르는 순간이었다.

    “엘레나 양, 그분의 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

    충격적인 제안에 놀란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체사나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프레드릭 준남작만 사전에 들은 얘기가 있는 듯 동요가 없었다. 엘레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며 되물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갑작스러운 거 알아요.”

    리아브릭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엘레나로 하여금 선택을 종용하도록 노련하게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드리는 건, 엘레나 양이 첩이 되어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는 마음도 있어서예요.”

    “첩…….”

    엘레나가 낮게 읊조렸다. 무겁게 짓누르는 단어에 표정도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귀족의 정부나 첩의 끝이 얼마나 비참한지 저는 수없이 봤어요. 엘레나 양이 그 사람들과 같은 전철을 밟길 원치 않아요.”

    “…….”

    엘레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복잡한 표정에 갈등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분을 따라가거라.”

    “여, 여보?”

    엘레나가 고개를 들어 프레드릭 준남작을 응시했다. 아버지의 표정에는 이미 딸을 위한 단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저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우리 같은 몰락 귀족은 감히 입에조차 담을 수 없는 고귀한 가문이지. 지금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

    “가거라. 가서 새 삶을 살 거라, 엘레나.”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해하던 체사나도 프레드릭 준남작의 적극적인 태도에 생각을 바꿨다.

    “그래, 얘야. 아버지 뜻대로 하렴.”

    “엄마.”

    체사나는 행여 눈물이라도 보이면 엘레나가 가지 않을까 이를 악물며 담담한 척 굴었다.

    ‘엄마, 아빠.’

    엘레나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식을 지켜줄 수 없기에 떠나라 말하는 두 분의 진심에 가슴이 미어졌다.

    “……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바꿀 수 없을 거라면 포기하자고. 그래야 겨우 버틸 수 있었으니까.”

    “엘레나.”

    조심스럽게 내비친 엘레나의 속마음에 부부의 억장이 한 번 더 무너졌다. 최근 부쩍 성숙해진 이유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 까닭이라 생각되니 너무 측은하고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따라갈게요.”

    엘레나의 눈에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할 수도 있단 희망이 서렸다.

    “그분의 딸이 되면 전 어떻게 살게 되나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삶이죠. 다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세상이 엘레나 양을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는 거. 뭐든지 이룰 수 있고, 뭐든지 가질 수 있죠.”

    “뭐든지?”

    “뭐든지요.”

    엘레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 몇 벌씩 최고급 드레스를 맞춰 입을 수 있고, 북방의 진귀한 보석으로 매일 장신구를 만들어 착용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무도회, 티타임, 연회…… 지금과 너무도 다른 삶이라 일일이 열거하기 힘드네요. 이거 하나만 장담하죠. 뭘 상상하시든 그 이상일 거예요.”

    리아브릭은 그맘때의 영애들이 가질 만한 환상을 의도적으로 끄집어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유년기를 보낸 엘레나가 이런 귀족 영애의 삶을 늘 동경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상상 그 이상…….”

    잠시 말을 흐리던 엘레나가 조심스러움을 가장해 내심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말을 꺼냈다.

    “혹시 그럼 기사와 맹세의 서약을 맺을 수도 있나요?”

    “맹세의 서약이요?”

    리아브릭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사교계 영애들 사이에서 고결한 기사의 존재는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자 사랑을 나누는 대상이었다. 명성 높은 기사를 대동하여 모임에 나서는 경우도 잦았고, 영애들의 감정싸움이 기사들의 결투로 이어져 우월을 따지기도 했다.

    “엘레나 양이 뭘 원하는지 알 거 같네요. 문학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고결한 기사를 곁에 두고 싶은 거군요. 맞나요?”

    “네, 맞아요.”

    기대 어린 엘레나의 눈길을 마주하며 리아브릭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를 수호하는 고결한 기사의 선임은 응당 엘레나 양의 권리랍니다.”

    “저, 정말요?”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이런 부탁도 들어줄 줄은 몰랐다는 듯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식탁 아래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고 봐. 기사 선임을 내게 일임한다는 약속이 어떻게 당신의 발목을 잡는지.’

    리아브릭이 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확답을 받아놓은 이유는 나중을 위해서다. 바로 명분을 갖기 위해서.

    “정말이고말고요. 가문 최고의 기사가 엘레나 양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저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아요.”

    엘레나는 밀려드는 희열에 벅찬 표정을 지었다. 리아브릭의 눈에 속물적으로 비칠 웃음이지만, 엘레나는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저들의 것으로 하여금 저들을 무너뜨리는 것이야말로 엘레나가 바라던 일이었다.

    “한데 제가 떠나고 나면 부모님은 어찌 되나요? 영주가 해코지할까 걱정이 되는데…….”

    상식적인 선에서 엘레나의 걱정은 지당했다. 파혼을 당하고 자존심이 상한 영주가 앙갚음할 가능성은 지극히 높았다.

    “저 때문에 해코지를 당하신다면…… 전 떠날 수 없어요.”

    잠자코 듣고 있던 프레드릭 준남작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괜한 걱정이다. 뒷일은 아비가 다 알아서 하마.”

    “우린 괜찮아. 네 앞가림만 신경 쓰렴.”

    엘레나는 두 분의 말을 무시했다. 오직 리아브릭에게만 시선을 둔 채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제시해 주길 바랐다. 리아브릭이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이미 따로 모실 곳을 마련해 두었답니다.”

    “정말요? 하,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엘레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어디까지나 연기였지만 퍽 진정성이 느껴지는 모습은 효심이 지극한 딸로 비쳤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기꺼웠던 것인지 리아브릭이 품에서 묵직하게 보이는 고급 실크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체사나가 얼떨결에 건네받은 주머니를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 이건 금화잖아요?”

    “저희가 부족함 없이 모시겠지만, 두 분을 걱정하는 엘레나 양을 생각해서 드리는 겁니다. 조그만 성의라고 생각하고 넣어두세요.”

    리아브릭이 싱긋 웃었다. 마치 당신의 가족까지 이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어필하는 듯한 미소였다.

    얼떨떨해하던 엘레나는 가볍게 묵례하며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또 미소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데, 입은 웃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리아브릭은 가족을 신경 써주는 척 안심을 시키고, 등을 돌리는 순간 칼을 박을 여자다.

    “아니에요. 저희가 무슨 염치로 이걸 받겠어요. 도로 가져가세요.”

    “이거 못 받습니다. 아니, 안 받을 겁니다.”

    부부는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말고 엘레나 양을 위해서 받아주심이 어떠신지요.”

    “제발요.”

    엘레나가 간절한 눈길로 애원하자 프레드릭 준남작이 마지못해 받았다.

    “……받도록 하마.”

    그제야 엘레나도 안도하며 한시름 덜었다. 공국을 떠나 사셔야 할 부모님께는 더없이 필요한 종잣돈이 될 것이다.

    대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리아브릭이 소매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네요.”

    “떠난다고요? 지금?”

    당혹해하는 엘레나의 반문에 리아브릭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곧 동이 트면 영주가 움직일 거예요. 혼인을 수락했으니 질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죠. 오늘 밤 떠나야 해요. 그래야만 국경을 벗어나 추적을 피할 수 있어요.”

    “너무 갑작스러워요.”

    리아브릭을 마주한 순간 오늘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렇다 한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하물며 준비할 시간도 없이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할까.

    “하루만, 딱 하루만 우리 딸하고 보내면 안 될까요? 하다못해 동이 틀 때까지만이라도…….”

    체사나 역시 작별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절박한 심정을 담아 애원했다.

    “부인.”

    “알아요, 아는데…… 보낼 자신이 없는 걸 어째요.”

    ‘엄마.’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레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회귀한 이후,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자 했다. 식사 준비도 돕고, 산책도 가고, 또 차도 마시며 단란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럼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자꾸만 미련이 남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부인. 오늘 밤에 떠나야만 합니다.”

    리아브릭은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영주가 움직이면 곤란하다고 핑계를 댔지만 실상은 대공가 사정이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도 근거 없는 소문에 베로니카의 평판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 보니 리아브릭에게도 엘레나의 형편을 봐줄 여력이 없었다.

    “너를 어떻게 보내니. 어떻게 보내.”

    아직 어리기만 한 엘레나를 떠나보낼 생각에 체사나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엄마…….”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안타까워하는 체사나를 보니 하루라도 더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흔들리지 말자. 이미 각오했던 일이잖아?’

    하지만 엘레나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단속했다. 감정을 앞세워 억지를 부려서 리아브릭의 눈 밖에 나서는 곤란하다. 자칫 의심을 살 가능성도 있다. 당장은 못 이기는 척 따라주는 게 차라리 낫다.

    “……갈게요, 대신.”

    그냥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엘레나는 재빨리 뒷말을 붙였다.

    “딱 세 시간만 가족과 보내게 해주세요. 아니, 두 시간이라도 좋아요. 부탁드려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시간을 가늠하던 리아브릭이 마지못해 수락했다.

    “두 시간 드릴게요. 그 이상은 곤란해요.”

    “고마워요. 그거면 충분해요.”

    타협점을 찾기가 무섭게 리아브릭은 떠날 채비를 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온전히 세 가족만 남게 되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약 없는 작별을 앞두고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 아가가 언제 이렇게 커서…… 울보에 항상 애 같았는데.”

    겨우 말문을 뗀 체사나가 엘레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붉어진 눈시울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위태로웠다. 애써 근엄한 척 구는 프레드릭 준남작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네 앞가림만 신경 써라. 알겠느냐?”

    “엄마, 아빠.”

    엘레나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울컥함에 이를 악물었다. 약해지면 안 된다. 흔들려서도 곤란하다. 지금 주어진 시간은 골든 타임이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두 분이 사실 기회를 영영 잃고 만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엘레나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스몄다.

    “리아브릭이 돌아오기 전에 여길 떠나세요.”

    다짜고짜 떠나라는 말에 부부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떠나다니? 어디로 말이니?”

    “우리는 그녀에게 처지를 의탁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이제 와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구나.”

    밑도 끝도 없이 엘레나가 말을 바꾸자 부부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한 만큼 엘레나는 조바심을 버리고 준비한 대로 차분히 설득했다.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한낱 몰락 귀족을 후원하겠다고 나선 영주도 이상했지만, 후원을 거절하자마자 첩으로 앉히려는 건 더 이해가 가지 않죠. 더 기가 막힌 건 궁지에 몰린 제 앞에 리아브릭이 나타났어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네 말은…….”

    “이게 다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부부가 기함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의심하기 시작하니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레나의 추측을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에도 무리가 따랐다.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며, 왜 엘레나에게 저런 식으로 접근했는지도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단순한 의문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자 말했다.

    “확실한 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프리드리히 대공가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거예요.”

    “너, 너…… 대공가라는 걸 어떻게?”

    프레드릭 준남작은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앞서 엘레나가 떠나야 할 제국의 대가문이 대공가라고 언급한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문장을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어요.”

    “……!”

    “잠시만 기다리세요. 두 분께 드릴 게 있어요.”

    엘레나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돌아섰다. 그러곤 방을 다녀왔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밀봉된 봉투가 들려 있었다.

    “궁금하신 게 많은 거 알아요. 묻고 싶은 것도 많겠죠. 이 안에 전부 적어뒀어요. 왜 떠나야만 하는지, 영지를 떠나 어디로 가야 할지, 또 어떻게 두 분이 살길을 모색할지도요.”

    “언제 이런 걸…….”

    부부는 난감하다 못해 곤혹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엘레나는 마치 이런 일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전에 준비해 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뒷문을 나가시면 곧장 오솔길을 따라 로우스산으로 가세요. 중턱에 있는 느티나무 우측으로 오십 발자국 앞에 개천이 흐를 거예요. 개천을 따라서 산비탈을 가로지르면 로냘프강이 보여요.”

    “너, 너…….”

    “하류의 나루터에 나룻배 한 척이 있을 거예요. 그걸 타고 물살을 따라 국경을 넘으세요.”

    나룻배까지 준비해 뒀다는 말에 부부는 경악했다. 동시에 확신했다. 엘레나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사전에 준비를 해뒀다는 걸.

    도대체 어떻게 알고서? 아니, 그걸 떠나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고 보면 엘레나는 사랑스러운 아이일지언정 똑똑하거나 현명한 아이는 아니었다.

    한데 두 달 전부터 엘레나가 갑자기 변했다. 말투나 행동이 성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깊어졌다. 또 무의식적으로 툭 튀어나오는 학식이나 지식은 부부가 이해하기에 고절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엘레나가 달라졌다는 걸.

    ‘아비로서 난 실격이야. 딸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했다니.’

    프레드릭 준남작은 자신의 기준으로 엘레나를 판단하고 재단하려던 걸 후회했다. 지척의 나무만 보이는 사람이 숲을 보는 사람을 이해하려 한 격이니 엘레나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떠나마.”

    프리드릭 준남작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여보!”

    “단, 너도 같이 가자꾸나.”

    엘레나가 턱을 들어 눈을 맞췄다. 딸을 걱정하는 프레드릭 준남작의 우려를 알면서도 함께할 수 없음에 먹먹했다.

    “저는 못 가요. 아니, 갈 수 없어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서! 널 해코지할 줄 어찌 알아? 같이 가자.”

    체사나까지 나서서 함께 가길 설득했으나 엘레나는 단호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를 필요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저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 아빠는 달라요. 분명 살려두지 않겠죠. 만약 살려둔다면 인질이 되실 거예요. 절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

    엘레나의 섬뜩한 표현에 부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통제, 인질, 억압.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한 설명 없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성질의 단어들이었다. 엘레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남아야 해요. 저들을 따라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복수. 수면 아래로 겨우 가라앉힌 증오심이 다시 고개를 들면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을 이용하고 처참하게 죽인 저들을 파멸로 내몰리라.

    “어쩌려고 그래, 어쩌려고.”

    “제 걱정 마세요.”

    “엘레나…….”

    부부는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사지에 자식을 내버려 둔 채 자신들만 도망치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엘레나는 제국에서 할 일이 있다고 했지만, 함께 떠나지 못함이 꼭 자신들 탓인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지체할 겨를이 없어요. 저들이 곧 올 거예요.”

    “엘레나, 이거 하나만 물으마.”

    딸을 응시하는 프레드릭 준남작의 눈동자에는 깊은 미안함이 맺혀 있었다.

    “우리가 널 위험에 빠뜨린 것이냐?”

    “아뇨.”

    엘레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저 불안한 눈길 너머에 품고 있을 심정이 뭔지 알기에.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한여름의 소나기처럼요.”

    예고도 없이 마른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뿌리는 빗줄기를 무슨 수로 피한단 말인가. 온몸이 홀딱 젖고, 속살까지 축축해지기 전에 비를 피할 곳을 찾기만 해도 다행일 뿐이다. 프레드릭 준남작이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네 뜻대로 하마.”

    결국 부부는 제 살을 도려내는 기분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가벼운 옷가지와 금화, 그리고 봉투가 다였다. 작별을 목전에 두고 부부가 뒷문 앞에 섰다. 저 문을 열고 어두워진 사위에 몸을 실으면 진짜 헤어짐이다.

    “이리 오렴.”

    체사나가 반쯤 흐느끼는 목소리로 엘레나를 꼭 안았다. 포개진 모녀를 프레드릭 준남작이 양팔을 벌려 감쌌다. 입김이 닿을 만큼 밀착한 서로의 체온이 이 순간 위로가 되어주었다.

    “우리 엘레나, 세상에 하나뿐인 내 딸.”

    엘레나는 숨을 죽였다. 흐느낌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올까 이를 꽉 물었다.

    엘레나, 엘레나, 엘레나.

    저 이름을 귀가 아닌 가슴으로 간직하리라. 곧 세상에서 지워질 이름, 어쩌면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녀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자 가슴에 새기고 또 아로새겼다.

    “가마.”

    짧고 담담한 인사말 속에는 상상도 못 할 부정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몸조심하고. 꼭 다시 만나는 거야, 알겠지?”

    뒷문을 열고 나서는 체사나를 보며 엘레나는 말없이 슬픔에 채색된 미소를 지었다.

    “부인, 어서 갑시다.”

    체사나는 프레드릭 준남작에게 억지로 이끌리듯 산비탈을 따라 멀어져 갔다. 점차 멀어지는 와중에도 시선은 엘레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부디 무사하셔야 해요, 꼭요.”

    엘레나는 점점 멀어지는 부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몸가짐을 바로 했다. 양손을 포개 아랫배에 얹은 다음 허리를 숙이며 정중하고 또 경건하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또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 바람이 하늘에 닿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수풀을 헤치는 부스럭거림이 잦아들 때쯤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야음에 파묻힌 두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이별이란 단어가 가슴에 닿았다.

    “울기는…… 이제 시작인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 엘레나가 눈가를 훔쳤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소매를 내렸을 때, 그녀의 눈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몰락 귀족의 딸 엘레나는 더 이상 세상에 없었다. 고고한 눈길로 만인을 내리깔아 보며 제국의 사교계를 쥐락펴락하던 철혈의 여자만이 남았을 뿐이다.

    뒷문을 닫은 엘레나가 열쇠로 걸어 잠갔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단정하게 했다. 구겨진 치맛자락과 옷소매를 정갈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몸가짐을 가다듬는 행위는 감정에 휘둘리던 내면을 단속하기 위함이다.

    엘레나는 텅 빈 집 안을 눈에 담았다.

    걸음을 떼며 손끝으로 식탁을 쓸었다. 손길은 추억으로 얼룩진 그녀의 침실을 거쳐, 단란한 가족의 웃음과 행복이 가득했던 거실로 이어졌다. 잠시나마 지난날을 추억하는 엘레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홀로 고독한 길을 걸어갈 그녀에게 가족과 함께한 시간만큼 힘이 되고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원동력은 없었으니까.

    약속된 시간이 되자 리아브릭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엘레나 양,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에요.”

    “금방 나갈게요.”

    찬찬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엘레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두어 번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깊숙한 곳에 눌러두었던 이별의 감정을 끄집어냈다. 지난 삶에서 부모님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떠올리자 감정이 복받쳤다. 엘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현관으로 향했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엘레나가 나왔다. 살짝 충혈된 눈에 흐느낌을 감추고자 손으로 입을 가린 모습은 가련하다 못해 안쓰럽게까지 느껴졌다.

    “……가요.”

    “부모님은요?”

    “억지로 떼어놓고 저만 나왔어요. 더 있다가는 떠날 자신이 없을 거 같아서…… 마음 변하기 전에 떠났으면 해요.”

    엘레나의 마지막 말은 애원에 가까웠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그녀의 부탁에 리아브릭이 작게 끄덕였다.

    “경.”

    그녀의 호명에 뒤에 시립해 있던 사내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음에도 감출 수 없는 단단한 체격과 허리춤에 찬 검 한 자루가 그의 신분이 기사임을 유추케 했다.

    “우리가 떠나면 두 분을 모시도록 하세요. 엘레나 양이 심려하지 않도록 정중하고 깍듯하게요.”

    “그리하겠습니다.”

    ‘……!’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엘레나가 숨을 삼켰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힐끗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참을 수 없는 증오심과 분이 들끓었다.

    ‘날 데리러 온 수행 기사가 로렌츠 경, 당신이었을 줄이야.’

    한때는 충심으로 그녀를 지키던 맹세의 기사. 한때는 황비가 된 후에도 곁을 지켜준 명예의 기사. 그러나 베로니카가 살아 돌아오자 가차 없이 엘레나의 복부에 검을 박아 넣은 배신의 기사.

    그가 엘레나 앞에서 맹세했던 충성은 거짓이었고, 서약은 위선이었으며, 울부짖던 명예로움은 가식에 불과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엘레나의 숨통을 제 손으로 거두며 그가 남긴 말을.

    “한순간도 당신을 저의 레이디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진짜 저의 레이디가 돌아오셨으니, 당신을 제 손으로 죽여 진짜 황비께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아!’

    살을 짓이기는 쇠붙이의 고통보다 그가 품고 있던 진심이 더 잔혹하게 심장을 파헤쳤다. 그때 느꼈던 배신감과 상실감은 신뢰의 깊이만큼이나 컸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지어 지금 보니 부모님을 죽인 흉수로도 유력했다. 자연히 엘레나의 증오심도 배가되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 고작해야 체스 말에 불과한 자야.’

    엘레나는 자칫 그를 향한 묵은 감정이 일을 그르칠까 경계했다. 언젠가 자신을 능멸한 대가를 치르게 할 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대공가의 전복(顚覆)을 노리는 입장에서 사소한 감정에 휘둘려서는 큰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영지 외곽에 마차를 대기시켜 뒀어요. 거기까진 은밀히 움직여야 할 거예요.”

    엘레나는 앞서서 걷는 리아브릭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듯 엘레나가 슬쩍 돌아보자 로렌츠가 묵례했다. 제 딴에는 기사의 미덕을 보여주고자 한 행동이겠지만, 곧 부모님께 흉수를 뻗칠 거라는 걸 아는 엘레나의 눈에는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두르죠. 이러다 늦겠어요.”

    “네.”

    엘레나는 시선을 거두고 리아브릭과 멀어진 거리를 좁히고자 걸음을 재촉했다. 어두운 느티나무 숲을 가로지르자 영지 남부로 빠져나가는 가도에 다다랐다. 구석진 수풀에 다가서자 호화스러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바로 출발하세요.”

    마차에 오르자마자 마부가 채찍을 내려쳤다.

    히이잉,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찢자 멈춰 있던 바퀴가 굴러갔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며 엘레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달빛을 머금은 풍경에 엘레나의 시선이 깊어졌다. 그때도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밤이었다. 변한 건 엘레나의 마음가짐뿐인데, 세상이 달리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아브릭이 안심하라는 듯 손을 포갰다.

    “엘레나 양이 그분의 딸이 되기로 결심한 이상 그분들도 소홀히 대할 수 없어요. 제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엘레나가 한시름 던 미소를 띠며 리아브릭의 손을 더 꼭 쥐었다. 당신을 믿고 있다는 신뢰의 표현. 백 마디 말보다도 더 진심이 느껴지는 행동에 리아브릭은 그녀가 자신의 통제 아래 들어왔음을 확신했다.

    “고맙다, 감사하다 이런 말씀하지 마세요. 우린 이제 자매나 마찬가지인걸요?”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실소를 엘레나가 꾹 참았다. 자매라니. 이 가식적인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퍽 기대가 됐다.

    * * *

    로렌츠는 걸터앉아 있던 울타리에서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마차까지의 거리와 여성의 보폭, 걸음걸이를 고려했을 때 지금쯤이면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사라진 로렌츠는 임무를 상기했다.

    “엘레나의 친부모를 죽여라.”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싹은 미리 잘라야 한다. 그것이 대공가를 위한 길이라는 리아브릭의 말에 망설임 없이 그리하겠다고 했다. 대공가의 영광을 위하여. 그 가치야말로 그가 기사로서 숨 쉬고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긍지였다.

    로렌츠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검날이 소름 끼치도록 예리하게 빛났다. 곧 이 새하얀 검신을 붉게 물들이리라.

    끼이익.

    문턱을 넘은 로렌츠의 표정이 굳었다.

    “……!”

    내부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조급하게 방을 뒤졌다. 당연히 있어야 할 프레드릭 준남작과 체사나의 모습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허, 도망을 쳤어?”

    로렌츠는 기가 찼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 안에 있었는데, 감쪽같이 도주했다.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들의 신변에 닥칠 위협을 어떻게 알고서 몸을 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추적한다.”

    로렌츠는 안광을 번뜩이며 어둠에 묻힌 발자국을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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