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굴을 빠져나와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는 사이레인의 얼굴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어두웠다. 굳게 닫힌 입과 어딘가 딱딱해 보이는 표정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여실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주홍빛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얼굴을 굳히고 있어?”
그런 사이레인에게 다가온 아셀라도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푹 젖어 있었다. 아까 밑에서 올라올 때, 구멍을 찾고 올라오다가 다 같이 호수에 한 번 빠진 덕분이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테펜텔과 피스토레는 이미 밝고 따듯한 햇빛 아래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사이레인은 아셀라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뭐지? 아셀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해할 것 같은 놈이 이렇게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좀 더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이야. 말해 봐, 응?”
가져온 담요를 어깨에 둘러 주며 묻자 사이레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피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다시 시선을 올려 아셀라와 눈을 맞춘다. 풀 죽은 듯한 그 시선에 어릴 적 봤던 강아지가 떠올랐다. 한 노부인이 키웠던 작은 강아지는 잘못한 게 있으면 이런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곤 했었다.
사이레인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 저놈, 아니 저분은 너보다 높은 분인 거지?”
사이레인은 피스토레를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그렇지.”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셀라는 피스토레가 정말로 자신보다 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황족이었으니 일단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맞았다.
아셀라의 대답에 사이레인의 청록색 눈이 동그래지더니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때문에.”
굳게 닫혔던 입술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여나 말을 못 들을까, 아셀라는 허리를 숙여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나 때문에 네게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아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개를 숙인 사이레인은 그런 아셀라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대장 같은 거잖아. 귀족들은 자기들에게 무례하게 대하면 매우 화내던데. 나는 괜찮지만…….”
사이레인의 말을 듣자 하니, 자신이 황태자인 피스토레를 못 알아보고 무례를 저지른 탓에 사이레인과 레너드 용병단을 데려온 아셀라에게까지 불이익이 갈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뭘 걱정하나 했더니!
아셀라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입가를 꾹 눌렀다.
자신과 피스토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사이레인의 무례를 나무라지 못할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황제나 다른 고위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무례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설사 대놓고 아셀라가 무례를 저질러도 누가 그녀에게 뭐라 하겠는가. 뒤로 수작은 부릴 수는 있지만, 황제도 인상만 찌푸리고 말 것이다.
거기다 피스토레는 실수로 사이레인이 저지른 무례를 벌할 정도로 속 좁은 놈도 아니었다. 동굴 밑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실수로 저지른 일인데.
무언가를 결심한 듯 사이레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가서 말할게. 벌은 내 편에서 끝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너는 걱정하지 마.”
사이레인에게는 굉장히 미안했지만, 아셀라는 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하하하!”
맑은 웃음이 터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주변에 있던 린체 기사단은 전부 눈을 크게 뜨고 웃음을 터트린 아셀라를 보며 입을 뻥긋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던 테펜텔과 피스토레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센 경. 동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니 이제 들어가지.”
피스토레는 놀란 듯 입을 벙긋거리는 레센을 토닥였다.
“네, 네? 아, 예. 어, 단장님이 웃으시네요. 어? 어어……. 저렇게 웃으실 줄 아는 분이었나……?”
레센은 현 상황이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지 고개를 수십 번은 젓더니 간신히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입구에는 아셀라와 사이레인만이 남아 있었다.
“하…….”
아셀라는 아파 오는 배를 꾹 누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폐가 아플 정도로 웃어 본 건 처음이었다.
신기해라. 정말로 많이 웃으면 폐가 아프구나. 제나에게 들었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살아온 환경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이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셀라에게는 이렇게 소리 내 크게 웃어 본 것 자체가 드물었다. 아니, 웃는 일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사이레인을 만나고서는 매일 웃음이 터졌다.
“다 웃었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자 불퉁한 얼굴의 사이레인이 아셀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응.”
얼굴을 보자 간신히 멈춘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지금 사이레인이 숨만 쉬어도 자신은 다시 웃음을 터트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숨 쉬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 아셀라는 웃지 않기 위해 다시 제 입가를 꾹꾹 눌렀다.
“너는 사람이 걱정해 주는데…….”
다시 불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걱정이라는 게 아셀라를 웃게 한 원인 중 하나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까부터 귀여운 짓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녀에게 감기 걸린다며 준비해 온 제 윗옷을 주는 것하며, 피스토레가 자신에게 벌을 내릴까 전전긍긍 울상인 모습하며.
아셀라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어머니도, 제나도 자신을 이렇게 걱정하지 않는다. 남이 자신을 걱정했더라면 짜증이 일었겠지만, 지금은 웃음만 나왔다.
“내가 처벌받을까 걱정했어?”
“당연하지!”
사이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아무리 내가 무식해도 귀족보다는 황족이 더 위라는 건 알고 있다고. 거기다…….”
갑자기 사이레인이 말을 멈추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여태까지 사이레인이 만났던 귀족들은 오만했다. 조금의 무례도 용서치 않던 이들.
그자들보다 더 귀한 피라는 황족들은 얼마나 더 깐깐할까. 아무리 아셀라가 높은 사람이라 해도 처벌을 피해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놀라 고개를 들자, 아셀라가 미소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히 나를 벌할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어찌 보면 오만의 정점인 말이었다. 하지만 아셀라가 말하니 그건 사실이 되었다. 그걸 느낀 사이레인은 그저 말없이 그녀와 마주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너도.”
입 끝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긴 속눈썹 밑에 자리한 진녹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반짝거렸다.
사이레인은 햇빛을 등에 지고 빛나는 여자를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사이레인.”
웃음을 머금고 있는 여자의 입술 사이로 나온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제 뺨을 쓰다듬는 손길 역시 더없이 부드러웠지.
“정착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랬지. 그래서 에타이 놈들을 배신했지.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셀라가 말을 이었다.
“혹시 귀족이 될 생각은 없어?”
사실 사이레인은 귀족은 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거치적거려도 찢어질 실크로 된 옷을 걸치고, 높은 놈들 앞에서도 생글생글 웃다가도 약한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는 놈들. 그게 사이레인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귀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셀라의 제안이 꽤나 달콤하게 들렸다. 귀족이 된다면 옆에 머무르기에 훨씬 편할 테니까.
“귀족 말단 자리라도 주게?”
사이레인이 웃으며 묻자 아셀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말단 가지고 만족할 수 있겠어?”
그리고 이내 믿기지 않은 말을 꺼냈다.
“셀바토르의 성을 주지.”
셀바토르. 그 단어에 사이레인의 얼굴에 머물렀던 웃음이 지워졌다. 귀족들은 ‘결혼하자!’라는 단순한 말 대신 자신의 성을 준다는 말로 청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사이레인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이건. 설마.
놀라 눈을 크게 뜬 모습마저 귀엽다는 듯 아셀라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어느새 숨결이 얽힐 정도로 가까워졌던지라 사이레인에게 그 웃음소리는 조금 크게 들렸다.
“나에게 와.”
저번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의미가 확연하게 달랐다. 설마, 설마.
“겨, 결혼…….”
사이레인은 붉어진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아하, 아셀라가 알겠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맞아, 결혼하자.”
뺨에 올라온 손길이 뜨겁다.
“지금처럼 조그마한 실수에 안절부절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 줄게.”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레인이 저지른 일은 조그마한 실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셀라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 조그마한 실수처럼 느껴졌다.
“공작 부군의 자리를 너에게 줄게. 사이.”
갑작스러운 청혼에 사이레인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마치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표정만 보자면 허락인지 아닌지 알기가 어려웠지만 이미 붉어진 얼굴과 귀가, 그리고 여태까지 해 온 행동들이 여실하게 답을 알려 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고백하려고 했는데.”
변명 같지만 사실이 아니던가. 다시 깃털처럼 가볍고도 밝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랬어?”
“그래.”
조금 억울해진 사이레인이 고개를 들자 다시 시선이 맞았다. 숨이 얽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 아셀라의 뺨에 손을 올린 사이레인이 그대로 입을 부드럽게 맞췄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번졌다.
“뭐.”
조금은 샐쭉해 보이는 얼굴에 다시 웃음이 퍼져 나갔다.
“아니, 우리 남편 키스 잘하네, 싶어서.”
“나는 못하는 거 없어.”
“그렇구나.”
그렇다니까. 사이레인은 대답 대신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 입술 위로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아셀라.”
동굴로 들어온 아셀라와 사이레인을 맞이한 건 피스토레였다. 사이레인은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제 용병들 쪽으로 갔기에 실제로 피스토레에게 온 건 아셀라뿐이긴 했지만.
두 사람만 남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준 결과가 궁금해 아셀라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친구의 밝은 표정이 답을 먼저 해 주었다. 피스토레는 흐뭇한 얼굴로 원래 하려던 질문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연인이 되기로 한 거야?”
그 물음에 아셀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명백한 긍정의 대답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피스토레가 말을 이어 갔다.
“좋아. 나도 너를 도울게. 너 역시도 내가 아르트엘에게 고백할 때 도와줬으니까.”
그러고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며 자신이 아까부터 생각한 방법을 꺼내 들었다.
“일단 작위를 내리지. 에타이들을 전멸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하면 적어도 자작 위 정도는 내릴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네 연인으로도 어느 정도 구색이 맞겠지. 대신 에타이들을 정말 쓸어야 할 테니, 작전을 좀 더 꼼꼼히 짜자고. 한 놈이라도 놓치면 애매해지니까.”
피스토레가 한참을 궁리하고 아셀라에게 꺼내 든 방법은 괜찮은 방법이었고, 어찌 보면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셀라였다.
“작위를 주지 않아도 괜찮아. 사이는 문제없어.”
“어?”
단호한 대답에 피스토레의 푸른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리고 연인이 아니라 남편. 결혼할 거야, 나.”
아셀라는 드물게 하얀 이를 보이며 웃었고 피스토레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중요한 부분을 건너뛴 듯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깐. 잠시만, 아셀라. 내 친구.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바로 결혼하겠다고?”
피스토레의 물음에 아셀라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건 아니지. 처음 만나고 나서 몇 달이 흘렀는데.”
“설사 그렇다 해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몇 번 안 되잖아!”
그 몇 달을 전부 붙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작 몇 번을 만났을 뿐인데. 연인도 아닌 결혼이라니. 아셀라의 행동이 빠르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결혼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
“어차피 나는 결혼 따위 생각이 없었어.”
아셀라는 웃음을 머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결혼은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한테는 물어본 적이 없지만, 어머니를 이기지 못하니 같은 의견이겠지.
아주 만약 자신이 결혼하게 된다면 아마도 가문에 가장 큰 이득이 가는 결혼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한 결혼은 보통의 귀족들이 모두 그러듯 삭막할 것이다.
하지만 사이레인과 하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 귀엽지 않은가.
“하지만 완벽한 이상형이 나타났으니 생각을 바꿔야지.”
아셀라의 대답에 피스토레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그녀를 말리는 걸 멈췄다.
“내 남편이 될 건데 작위가 뭐가 필요해. 결혼식 때 와서 주례나 서. 아니지, 주례는 최고 사제가 서는 게 모양새가 좋으려나. 그럼 넌 축의금이나 크게 내.”
아셀라의 말에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는 듯 피스토레가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 잠시만.”
연인도 아닌 결혼까지 생각하면서 작위가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셀라는 셀바토르 공작이 될 몸이었다. 황제 다음으로 여겨지는 권력가, 아니 일부는 황제 위로 생각할지도 몰랐다.
단 몇 명밖에 없는 고위 귀족. 그런 고위 귀족이 약혼이나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아무 작위도 없는 사이레인과 네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어.”
작위가 있다 해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무리해서라도 백작 위라도 주려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의 걸림돌이라도 없애 주기 위해서.
그러나 아셀라는 단호했다.
“아니, 정말 필요 없어. 그리고 황제는 사이에게 작위가 없든 있든 결혼을 바로 허락할 거고.”
마치 미래를 보고 온 듯 확신에 가득 찬 말에 피스토레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과연 아버지가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아니’였다.
아셀라가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을 강행하려고 하면 황제는 허락을 빌미로 무언가를 가져오려고 수작을 부릴 게 자명했다. 그러면 셀바토르 공작가가 반발을 할 테고, 그렇게 황실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이가 소문처럼 골이 깊어지면…….
최악의 상황이 너무도 쉽게 떠올라 피스토레는 고개를 내저었다. 망했다. 망했어.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피스토레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아셀라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가면 네가 황제잖아.”
아. 그제야 피스토레는 이곳으로 올 때 아셀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돌아오면 너는 황제, 나는 공작이다.’
“뭐야, 허락 안 해 줄 생각이었어. 황제 폐하?”
웃음이 듬뿍 묻어나는 아셀라의 말에 피스토레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이내 밝은 웃음을 지었다.
“해 줘야지.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해 줘야지.”
내가 해 줘야지. 피스토레는 그렇게 말하며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돌아가자마자 아셀라는 결혼 허가서를 낼 테니 분명 이게 자신이 황제로서 할 첫 번째 일이라는 감이 왔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황제 폐하.”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가 묻어난 목소리로 아셀라가 허리를 숙이자, 피스토레는 위엄이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 멍청한 것들아.”
엠릭의 거친 말투에 끌려온 한 평민이 고개를 숙였다.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그의 몸은 공포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약초 채집량이 이 정도뿐인 거지.”
그렇게 말하며 엠릭은 평민들이 간신히 채집해 온 약초가 든 바구니를 집어 던졌다. 노린 것인지 바구니는 정확히 남자의 얼굴에 맞았지만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맞은 남자 대신 뒤에 서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이어 갔다.
“벌써 몇 년째 같은 곳에서만 약초를 채집하니 더 이상 약초가 자라지 않아요. 조금 더 나가야……. 악!”
여자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엠릭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대로 여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탓이었다.
“그 핑계로 도망가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엠릭 형님을 귀찮게 하려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남자는 쓰러진 여자의 긴 머리를 잡으며 휘둘렀고, 모습을 보며 엠릭은 즐겁다는 듯 낮게 웃었다.
“익……. 너!”
여자는 거칠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은 남자의 팔을 쳐 냈다.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 너! 어떻게 네놈이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어!”
여자가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엠릭을 형님이라 부르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 남자는 에타이가 아니었다. 요새로 스스로 걸어온 평민 중 한 명이었지.
“못 할 게 뭐가 있어!”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다시 팔을 치켜들었고, 여자는 곧 느껴질 고통을 대비하듯 눈을 꽉 감았다.
“그만.”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를 저지한 엠릭이 여자에게 다가와 그녀의 턱을 붙들었다.
“약초를 구분할 줄 아는 자는 귀하게 대해야지.”
엠릭의 말이 맞았다. 에타이나 요새에 머무르는 평민 중에서 약초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게 여태까지 여자가 엠릭에게 말대답하고도 살아남은 이유였다.
“뭐, 언제까지일까.”
여자의 눈이 분노로 떨리는 걸 본 엠릭은 그제야 그녀의 턱을 놓더니 나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같이 막사로 들어왔던 평민들이 쓰러진 여자를 부축해 나가자 엠릭은 자신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약초도, 식량도 부족하다. 용병들이 꾸준히 사냥을 해 오고는 있지만 이제 그것마저도 힘들 것이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엠릭의 옆에 선 남자가 얼굴을 굳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평민들 앞에서는 그들이 부족하다는 듯 윽박질렀던 남자도 현 상황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굶길까.’
그냥 굶겨 버릴까. 어차피 방패막이로 쓰다가 버릴 것들인데. 지금부터 양을 줄이고 서서히 굶겨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엠릭은 불쑥 떠오른 해결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죽을 놈들 입에 들어갈 식량도 아깝다. 앞으로 들어오는 식량은 전부 자신 쪽으로 돌리는 거다. 저들은 죽을 것이고 자신들은 살 테니까.
“좋은 방법이야…….”
엠릭은 히죽거리며 턱을 쓸었다. 좋아, 일단 공용 창고에 있는 식량을 개인 창고로 옮기자. 얼마 안 되긴 하지만 조그마한 티끌도 모으다 보면 커지지 않던가.
“이봐, 당장 공용 창고로 가서…….”
“엠릭.”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명령을 내리던 엠릭의 시선이 문 쪽에 닿았다. 어느새 타스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엠릭이 벌떡 일어나 타스를 맞이했다.
“형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오늘 약초 채집한 걸 보고하는 날이 아니더냐?”
“아아.”
엠릭은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약초량이 줄어들면서 타스가 직접 확인하러 온 모양이었다. 엠릭은 여자가 말한 말을 그대로 타스에게 옮겼다.
“그렇군.”
타스 역시 고민에 빠진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량도 다 떨어져 가니 용병들의 말을 들어야겠구나.”
“용병들 말입니까?”
“그래, 강가에서 고기를 잡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더라. 더 사냥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레너드 용병들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만약 사냥하던 이가 엠릭이었더라면 그 역시 비슷하게 말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사이레인의 주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발심이 불쑥 차올랐다.
“굳이 강까지 안 가도 되는 거 아니오. 뭐 거기까지 보낸다고. 요 근방까지만 보내면 될 텐데.”
“어쩔 수 없지. 식량도, 약초도 움직일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자신들이 뒷배에게 갈 때까지는 필요하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엠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볼일이 끝나고도 타스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가 있단다.”
“무엇이오?”
엠릭의 말에 타스가 미소를 지었다. 언뜻 보기엔 자비롭지만, 밑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깔린 미소였다.
“아주, 아주 중요한 일을 너에게 맡길 거야.”
너밖에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이지. 타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엠릭을 보며 낮게 웃었다.
*
동굴에 다녀오고 나서 시간은 차근히 흘러갔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진영에서도 에타이 쪽에서도. 어서 모든 걸 털어 버리고 새 시작을 하고 싶어서 시간이 어서 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휴우.”
남들이 전부 잠든 시각, 홀로 깨어 있는 피스토레는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긴장으로 몸이 굳는 걸 느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이 대거 죽어 나갈 총공격도, 그리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마지막 기회도.
‘아니지, 이제 아버지 인정은 필요 없어.’
피스토레는 차가워진 손끝을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자신은 이제 아버지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 이제는 그 눈빛에 주눅 들 일도, 자신을 내치는 그 손길에 매달릴 일도 없을 것이다.
오래된 친우의 말대로, 자신은 돌아가면 황제가 될 테니까.
어차피 그 외에는 황위에 오를 사람도 없다. 귀족들 역시 그걸 알고 있으니 반발을 해도 심한 반발을 하지 않겠지. 자신과 형제처럼 자라 온 아이테라 대공 역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문제없어.’
그런데도 어깨가 절로 축 처졌다. 입안이 바싹 마르며 초조해짐을 피스토레는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이번이 마지막 인정을 받을 기회.
그 생각이 며칠 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처음 총공격 날짜가 정해졌음을 들었을 때부터 그랬다.
아직도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아야 할 것 같았다. 훌륭한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었다.
“휴우우…….”
마지막 기회를 놓칠까 무섭다. 어릴 적부터 학습된 생각은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다.
피스토레의 가장 첫 번째 기억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울던 자신이었다. 그때가 다섯 살이었나. 피스토레는 제 손가락 사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찡그렸다.
보통은 그렇게 어릴 적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피스토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제 날것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피스토레에게 쏟아부었던 때였으니까.
맞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황제답게 손을 올리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아니면 피스토레를 굶기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표정으로 제 옷자락을 잡는 어린 아들을 경멸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피스토레가 반드시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
그렇게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피스토레는 스스로를 낮잡아 보며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간신히 그 늪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빠져나오려면 멀었다. 지금도 이러고 있지 않은가.
피스토레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있는 힘껏 누르는 바람에 붉어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제가 사랑스러운 아내가 떠올랐다.
“너 자신을 비난하지 마.”
실수를 저지른 날이었다.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모든 귀족과 사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피스토레는 붉은 포도주를 엎지르고 말았다.
작은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황제의 눈빛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말없이 자신을 자책하게 했다.
자신을 향하던 경멸이,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장 정점에 다다랐을 때라 피스토레는 그 눈빛에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고 그런 그를 따라온 건 아르트엘이었다.
“실수였잖아. 모두 실수하는걸.”
제 눈물을 닦아 주며 아르트엘은 피스토레를 다독였다.
“하지만 나는…… 나는 몇 번이나…….”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피스토레가 울자 아르트엘은 부드럽게 그의 뺨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괜찮아. 실수는 만회하면 되는 거고.”
그리고 더없이 아름답게 웃으며 다른 말을 쏟아 냈다.
“너는 그 소심한 성격만 고치면 되는 거고.”
꼭 고쳐! 그렇게 말하는 아르트엘 덕분에 순간 피스토레의 눈물이 멈추었다.
……위로하러 와 준 게 아니었나?
“생각해 봐. 포도주를 쏟았을 때 아셀라라면 어떻게 행동했겠어? 아니면 나라면.”
쉽게 상상이 갔다. 아셀라는 쏟아진 포도주를 보다가 그저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당당하게 제 말을 이어 갔겠지. 실수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람들 역시 그걸 기억하지 못하리라.
아르트엘의 경우도 비슷할 게 분명했다. 그저 웃으면서 ‘실수.’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묻은 포도주를 털어 냈을 것이다. 그녀의 아름답고도 환한 웃음이 아르트엘의 작은 실수를 덮었을 게 분명했다.
“인정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하며 아르트엘은 피스토레를 꼭 끌어안았다. 그 온기에 어쩐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인정해 줄게. 넌 멋진 사람이야, 피스토레.”
아르트엘의 말에 피스토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트엘의 웃음소리가 조금 짙어졌다.
“나는 네가 훌륭한 황제가 되리라고 믿어. 너는 그럴 자질이 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무조건 아버지를 따라가던 걸음을 멈추었던 게. 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하던 자신을 스스로 질타하지 않게 됐던 게. 자신이 아버지와 다르다는 걸 인정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게.
그리고 친구처럼 자라 오던 아르트엘에게 반했던 게.
피스토레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긴장하면 유독 차가워진 손을 매만져 주던 것도 아르트엘이었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황위에 올라 아버지와는 다른 황제가 될 것이다.
피곤한 길일 게 분명했다. 역대 황제들이 걸어왔던 길과 다른 길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자신이 갈 길이었다.
피스토레는 몸을 일으켰다. 마음은 가라앉았어도 긴장이 전부 풀린 건 아니었다. 총공격은 피스토레가 여태 겪어 본 적 없었던 큰 전쟁이 될 것이다. 거기다 그는 에타이들의 요새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역할 아니던가.
‘적어도 아셀라나 테펜텔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되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검을 한 번 더 휘둘러 볼 생각으로 피스토페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크레시벨과 마주쳤다.
“크레시벨 경…….”
피스토레는 머쓱하게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제 입으로 크레시벨을 빼자고 건의해서 그런가, 크레시벨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처음처럼 그를 편히 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그를 은근슬쩍 피해 다니기도 했었다.
“안녕하십니까, 황태자 전하.”
크레시벨의 옆에 있는 남자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바로 피스토레의 대역을 맡은 기사였다.
“어디 밤 산책 하러 가십니까?”
대역을 맡아 준 기사 덕분에 불편함이 가신 피스토레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총공격 전에 검을 휘둘러 보려고 하네.”
“이 야밤에 말씀이신가요?”
크레시벨이 눈을 크게 뜨며 말하다가 이내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황태자 전하는 뭐든 열심히 하시는군요. 단장님께 들은 그대로입니다.”
“아셀라가?”
피스토레의 눈이 커졌다. 아셀라가 평소에 린체 기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네.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을 모두 지워 버릴 정도로 노력하시는 분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크레시벨의 눈이 빛났다. 그의 눈에서는 전혀 부정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저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크레시벨의 맑은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꼭 아부 같잖냐!”
“어, 그런가요? 그렇지만 진심인걸요. 정말입니다, 황태자 전하. 저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걸요.”
크레시벨의 말에 기사는 씩 웃으며 마구잡이로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어찌나 손길이 거친지 피스토레가 놀라 슬그머니 뒤로 한 발자국 떨어질 정도였다.
“하긴 요놈도 야밤에 자주 홀로 훈련을 하지요. 그래서 실력이 많이 늘었냐?”
“아악! 아픕니다, 경!”
울먹이는 크레시벨의 눈은 더없이 순수해 보였고, 더없이 맑아 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피스토레는 그런 크레시벨을 보며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여겼던 제 마음을 털어 냈다.
그래, 아셀라의 말대로 이 착한 기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돌아갈 것이다. 거기다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아무리 만류해도 아셀라가 뽑았겠지.
어쩐지 여태까지 크레시벨을 피해 다닌 게 미안해져 피스토레는 크레시벨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아부라고 생각하지 않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기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 다 날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 주었지. 이 충성심은 절대 잊지 않을 거네. 수도로 올라가면 받을 선물을 기대하게.”
그 말에 피스토레의 대역을 맡은 기사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위험이라니요. 황태자 전하의 대역을 맡을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는 들뜸이 한껏 묻어 나왔다. 그리고 그건 크레시벨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와 같이 환한 얼굴로, 옆에 서 있는 기사와 비슷한 말을 꺼냈다. 그리고.
“잠시만요, 황태자 전하.”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임시 연무장으로 향하는 피스토레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크레시벨이었다.
“하나만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뭐지?”
잠시만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크레시벨은 한참이나 입을 달싹였다.
“그게…… 혹시 이번 임무에서 제가 제외된 게.”
그 말에 피스토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궁금했구나.
“……단장님의 결정이신가요?”
어? 갑자기 튀어나온 단장이라는 단어에 피스토레의 푸른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의아함은 들지 않았다. 무릇 이런 상황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건 그녀였으니까. 그녀의 결정이라면 엘로스 역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지 않던가.
그래도 아셀라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는 싫어 피스토레는 변명 아닌 변명을 꺼냈다.
“어, 음, 그게…… 내가 말하긴 했네.”
“하지만 결정 권한은 단장님이 가지고 계시지요.”
어쩐지 풀이 죽은 목소리에 피스토레는 아셀라가 한 말을 그대로 꺼내 두었다. 성격이나 검술이 상황과 맞지 않아 그런 것이다, 나중에 새로운 기회를 주기로 자신과 약속했다…….
그 말을 다 들은 크레시벨은 조금 밝아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좋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연무장까지 동행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네. 테펜텔이 오기로 해서 말이야.”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태자 전하. 중요한 일이 코앞이니까요!”
“그래, 그대도 조심하게.”
크레시벨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목소리도, 얼굴도 밝아졌기에 피스토레는 알아채지 못했다. 반짝이던 크레시벨의 눈이 무언가 진득한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창고 같은 방에는 작은 촛불 하나와 달빛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이레인의 말에 용병들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숀, 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주력해.”
사이레인의 말에 문 쪽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 너는 문을 봉쇄한 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따라가. 에타이 놈들이 헛짓거리 하려고 하면 그대로 목을 날려 버려.”
“나만 믿으라고, 대장. 나 그런 거 잘하잖아?”
리스는 이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사이레인은 어떻게 에타이들 목을 날릴 것인지 고민하는 리스를 보며 테펜텔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봐, 대가리를 빡!”
그렇게 말하며 리스가 팔을 휘두르자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어어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하지만 자신들이 에타이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딘가 다들 즐거워 보였다.
“이렇게 휘두르며 조져 버리는 거지!”
“맞아, 대가리를 깨 버려.”
“엠릭 새끼는 내가 조질 거야. 다들 손대지 마. 알았어? 손대는 놈들은 밥을 굶길 줄 알아!”
혹여나 자기 몫을 뺏길까 리스가 주변에 있는 용병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저러라고 부대장 자리를 준 게 아닌데. 사이레인은 고개를 젓다가 다시 들려오는 조진다는 단어에 아셀라를 떠올렸다.
자신이 저 말을 올렸을 때 눈이 동그래졌었다. 마치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는 얼굴에 급하게 말을 바꿨었는데.
‘귀여웠지?’
평소에는 귀족 나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림에나 나올 듯 우아한 모습이었는데, 눈을 크게 뜨니 또 귀여워 보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입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앞으로는 적어도 조진다는 말은 쓰지 말아야지.’
자신의 아내님에게 흠집이 나면 안 되는 거니까! 여보야는 검도 잘 쓰고 힘도 센 데다가 부하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은 모양이었다.
사이레인도 레너드 용병단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어 내는 건 힘든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속으로는 아셀라를 욕하는 인간이 있겠지만 대부분이 좋아하니…….
‘죽일까.’
사이레인은 흉흉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아니, 우리 아내님 같은 대장을 만났으면 그 행운에 감사해하면서 땅을 기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감히 불만을 느끼고 욕을 해?
머릿속으로 얼굴도 모르고, 사실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부하 놈들을 패는 동안, 이야기를 마친 레너드 용병들은 사이레인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 대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갑자기 뭘 생각하듯 얼굴을 붉히더니 이제는 누군가를 씹어 죽일 듯 이를 박박 갈고 있었으니까.
“대장 말이야.”
리스가 옆에 있는 남자를 툭 치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무슨 죽을병에라도 걸렸어? 뭐 저렇게 헤벌쭉한 표정을 짓다가 돈 떼먹고 튄 놈을 마주친 표정을 짓고 있대?”
“아, 그게…….”
사이레인을 따라 동굴로 갔던 한 용병이 리스에게 말을 전했다. 용병의 이야기를 들은 리스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사이레인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대장 결혼해!?”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경악에 찬 목소리에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떠들던 용병들의 시선이 사이레인 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눈에는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
귀청 떨어지는 리스의 목소리에 현실로 끌려 나온 사이레인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엑. 얼굴 붉히지 마, 대장. 토할 것 같아.”
“말도 안 돼. 대장이 결혼이라고? 어떤 여자랑?”
“야, 그래도 사이레인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설마 르카디우스 제국 측 여자야? 그래서 그렇게 그쪽에 붙자고 한 거야?”
“어떤 여자야, 사이레인. 우리에게도 안 보여 주고 결혼할 생각은 아니었지?”
말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사이레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용병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아내님을 소개해 주면 다 놀라서 까무러칠 게 분명하니까!
“잠깐. 다들 조용히 해 봐.”
그런 분위기 속에 목소리를 낮춘 리스가 모두를 침묵시켰다.
“사이레인.”
그러고는 용병들 사이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 그의 앞에 서더니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르카디우스 제국 측 사람이라면 귀족 아니야? 그쪽은 무슨 유명한 황실 기사단이 왔잖아.”
대부분의 기사단은 귀족들로 이뤄졌다. 평민들을 받는 기사단도 있었지만, 황실 기사단쯤 되는 곳은 귀족들로만 이뤄져 있을 게 분명했다. 그걸 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이레인, 설마 귀족이랑 결혼해?”
“응.”
굳은 얼굴로 묻는 리스에게 사이레인은 해맑은 얼굴로, 그리고 우쭐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내님은 공작이야.”
높은 사람이지! 사이레인의 대답을 끝으로 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장의 해맑은 얼굴에 놀라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이레인과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공작이라는 말에 놀라야 하는지, 방 안에 있던 모든 용병들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잠깐, 사이레인.”
간신히 먼저 정신을 차린 리스가 앉아 있는 사이레인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귀족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그것도 르카디우스 제국인과?”
“못 할 게 뭐가 있지?”
“못 할 거 많지!”
답답한 듯 리스는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르카디우스 제국인들처럼 콧대가 높은 사람들을 본 적 있어? 거기에 귀족, 그중에서도 공작이라고?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 것 같아?”
리스의 말에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이 너무 뛰어나면 한쪽이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몰라도 그 거대한 차이는 야금야금 다른 한쪽의 자존심을 깎아 먹고 붕괴시킬 게 분명했다.
드높은 신분의 사람과 낮은 신분의 사람이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는 동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지, 현실을 사는 용병들에게는 이뤄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이레인, 오랜 친구로서 하는 이야기야. 이건 위험해. 귀족들의 생활이 어떤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고 말했었잖아.”
그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일지도 몰라. 공작이라면 셀바토르 공작이겠지. 르카디우스 제국을 휘어잡는다는 그 괴물들! 그런 놈들이 정말로 너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
“…….”
리스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눈치였다. 여자를 만나 본 적 없는 순진한 대장이 홀린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사이레인이 무섭게 노려보자 쑥 들어갔지만.
리스는 무겁게 한숨 쉬며 대장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 다시 생각해 봐.”
진심이 담긴 충고였다. 그 말에 사이레인은 대답 없이 모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말릴 만한 일이었으니까. 갑자기 레너드 용병단의 누군가가 ‘나 귀족이랑 결혼할 거야!’라고 외쳤다면 자신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게 뻔했다.
실제로 귀족과 진실한 사랑을 한다고, 결혼한다며 웃던 평민들이 하루아침에 좌절하며 울던 일이 한두 번이던가. 귀족 중에서는 그렇게 평민들이 희망을 품고 무너지는 걸 즐기는 변태 같은 놈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셀라는 아니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던 사이레인은 그저 웃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셀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지금 내가 뭐라 해도 너희는 믿지 않겠지.”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좀 만나게 해 볼걸. 사이레인은 턱을 매만지며 눈을 찡그렸다.
생각해 보니 레너드 용병단의 대다수가 아는 아셀라는 전쟁터에서 마주친 여자였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에타이들의 목을 날리던 여자. 그래, 그런 모습만 봤으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다.
“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분명 엉뚱한 생각과 걱정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셀라는 그런 여자니까. 결정을 내린 사이레인은 모두를 둘러보았다.
의구심이 서린 얼굴, 순진한 대장이 코 꿰인 게 아닌가 걱정하는 얼굴,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얼굴. 저 얼굴들도 그녀를 만나고 나면 순식간에 바뀔 것이다.
“다들 로인이랑 다른 환자들 잘 챙겨. 이번 일이 성공하면 우리 아내님을 소개해 주지.”
사이레인은 그때를 상상하며 입꼬리를 올리면서 환하게 웃었다.
*
나팔 소리가 유달리 무겁게 들렸다. 르카디우스 황실의 깃발과 린체 기사단의 깃발 그리고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깃발이 잿빛 하늘을 수놓듯 흔들거렸다.
“셀바토르 경.”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인장이 새겨진 은빛 갑옷에 하얀색과 황금색으로 어우러진 망토를 걸친 엘로스와 바티네가 아셀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쪽 팔에는 투구를 끼고 긴 머리는 하나로 단정히 묶은 상태였다. 허리춤에 걸린 검은 검집이 눈에 띄었다.
“엘로스 경.”
그에 비해 아셀라의 차림은 단출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녹색과 갈색 그리고 검은색이 뒤섞인 망토를 쓰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장 무거운 것이라면 그녀의 검 정도였다.
엘로스는 그녀의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셀바토르 경. 오늘로써 이 기나긴 전쟁을 끝내야지요.”
전쟁, 말 그대로 기나긴 전쟁이었다. 처음 르카디우스 제국에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모여 세력을 만들고 또 그것이 이어져 오다 극단적으로 변질된 게 에타이들이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놈들.
르카디우스 제국 측에서는 방향을 바꾸었고 그렇게 쳐 내고 쳐 낸 끝에 에타이의 핵심이라 불릴 사람은 단 한 명만 남았다.
타스. 그 인간만 잡으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가느다란 첫 시작을 되짚어 보자면 족히 1천여 년, 실질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건 약 1백여 년. 못해도 한 세기를 끌어온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그게 오늘 결과에 따라 끝을 볼 수 있으리라.
“최대한 제가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이곳에 셀바토르 경의 깃발도 황태자 전하의 깃발도 있으니, 에타이 놈들은 속겠지요. 레센 경도 저희를 도울 테니 저들을 속이기는 더욱 쉬울 겁니다.”
엘로스의 말 그대로 깃발들 사이에는 피스토레의 깃발과 진녹색 천 위에 은사로 셀바토르 문양이 수놓아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반드시 해 보이겠습니다.”
아셀라는 잠시 자신의 깃발을 바라보다 엘로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 발 뒤에 서 있던 바티네와 레센이 옅게 웃었다. 몇 번이나 전장에 서 있던 이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 신께서 저희를 도우실 겁니다.”
그 말에 아셀라는 작게 웃었다. 이 위태한 순간에 자신을 돕는 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신일까, 아니면 여태까지 쌓아 온 자신의 실력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번에 합류하는 피스토레, 테펜텔 그리고 사이레인이 자신을 도울까.
“그렇겠지요.”
그건 끝에 가 봐야 알 일이었다. 아셀라는 웃으며 제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
고함이 들린다. 드넓고도 오래된 숲이 소란스러워졌다. 불길이 치솟고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 가는 소리가 숲을 가득 메웠다. 요란스러움에, 그리고 심상치 않음에 이미 동물들은 제 터전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피스토레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이제 고함 따위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도 누군가가 죽어 가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메아리쳤다.
자신이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장 위험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자신인데.
“야, 정신 차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피스토레를 바라보며 테펜텔이 얼굴을 찡그렸다.
“네 소심한 성격이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만드는지 아는데, 지금 네 할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상상보다 더 많은 놈이 죽을 거다.”
피스토레를 향하는 테펜텔의 목소리는 짜증이 섞여 날카로웠다. 아무리 넉살이 좋은 그녀라도 지금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민감했고, 그가 거슬리는 눈치였다.
피스토레는 땀으로 젖은 손으로 꽉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래, 지금은 불안을 가라앉히고 할 일에 집중할 때였다.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 보이지도 않는 기사들과 에타이들의 총공격전을 상상하기보다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술과 웃음으로 친해진 테펜텔, 황궁에서도 종종 마주쳤던 두 명의 린체 기사와 마주칠 때마다 선하게 웃던 성기사 둘. 그리고 자신의 가장 오래된 친우.
피스토레까지 포함해 7인의 사람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테펜텔 말이 맞았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느니 그 시간에 한 발짝이라도 더 빠르게 움직여 타스를 잡는 게 정답이었다.
피스토레가 정신을 잡는 걸 확인한 아셀라는 시선을 다시 앞쪽으로 돌렸다.
마지막으로 사이레인과 연락을 취한 건 사흘 전이었다. 총공격 날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쓸데없는 의심을 피하고자 연락 횟수를 줄인 결과였다.
‘약초와 물고기를 핑계로 믿을 만한 평민들에게 동굴 위치를 알림. 그날, 평민들 이쪽으로 도주 가능.’
짧은 쪽지를 떠올린 아셀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투박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사이레인의 글씨체는 상당한 명필이었다.
악필로 유명한 테펜텔은 제 손을 한 번, 쪽지를 한 번 번갈아 몇 번을 내려다보더니 전쟁이 끝나면 서체 연습을 하겠노라고 조용히 선포했다. 큰 충격을 받은 듯 테펜텔의 얼굴은 조금 우울해 보였다.
언제나 활기찬 테펜텔을 단박에 우울하게 만들 사람도 자신의 남편뿐이라 생각하며 아셀라는 웃었다.
‘레이셀에게서도 연락이 왔으니 문제는 없어.’
아셀라는 미리 심어 둔 레이셀에게서 온 마지막 연락을 떠올렸다. 에타이들은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에타이들은 요새를 비운다는 연락이었다. 이런 일에 몇 번이나 투입된 노련한 레이셀이니 믿을 만한 정보였다. 그래, 문제는 없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입술이 말라 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승리감일까, 긴장한 것일까, 불안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에서 시작된 감정일까.
‘됐어.’
아셀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어떤 과정을 겪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은 승리할 것이다. 에타이들은 전멸할 것이고, 르카디우스 측은 오랜 전쟁의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피스토레는 황제가 되고 자신은 공작이 된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아셀라는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타이들의 요새에 도착합니다.”
앞서 안내하던 기사의 말에 흐르던 긴장감이 한층 짙어졌다.
계획은 이러했다. 총공격전으로 비어 버린 요새를 급습, 타스를 비롯해 우두머리들을 잡는다.
그사이 레너드 용병단의 반절이 평민들을 대피시키고, 반은 르카디우스 측과 만나 요새에 남은 이들을 진압하고 타스를 잡는다는, 간단해 보이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위해서 에타이들과의 총공격전을 일으켜야 했다.
자잘한 분쟁과 미끼가 된 피스토레는 에타이들을 착실하게 총공격전으로 끌어냈다.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여기였네.”
테펜텔이 한 거대한 동굴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대강의 위치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람은 가까이 가지도 못할 정도로 험난한 산, 그 안에 요새가 숨어 있었다.
“아씨, 누가 저기 안이 텅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고.”
산이 아니었다. 절벽이 마치 산처럼 모여 있었을 뿐이라,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제일 먼저 이 장소를 발견한 에타이들은 절벽에 구멍을 내었고 그 안에 요새를 건설했다.
“다 불 질러 버리고 싶네. 그냥 타 죽게.”
테펜텔의 말에 아셀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도 이딴 곳에 있을 줄이야.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저기에는 포로처럼 끌려온 평민들도 많이 껴 있지 않은가.
“좋아, 가자.”
그 말에 멈춰 있던 발이 다시 움직였다. 요새 안으로 잠입하는 것은 쉬웠다. 이미 레너드 용병단이 손을 쓴 덕분이었다.
문지기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땅으로 쓰러졌고, 르카디우스 측이 들어오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 평민과 레너드 용병들이 달려들어 입구를 단단히 봉쇄했다.
평민들은 레너드 용병단이 낸 다른 입구로 탈출할 것이다. 에타이들은 모르는 입구였다.
라니스 숲은 누군가가 숨고 사라지기엔 완벽한 장소였다. 워낙 숲은 넓고 오래되었으며 다른 나라의 국경선까지 뻗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타스를 놓치게 된다면 골치가 아파질 게 분명했기에 무엇보다 도주로를 막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문을 막은 여자가 턱짓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넓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는데, 다른 집들은 허술하고 오래된 데에 비해 홀로 하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거기다 마치 요새를 관찰하듯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집. 그곳이 타스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대장은 평민들이 중간까지 가는 것만 보고 합류한다고 했어.”
리스의 말에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언제 불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목조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문을 막고 선 리스는 나지막이 제 옆에 있는 남자에게 속삭였다.
“저 검은 머리 여자가 대장이랑 결혼한다는 그 괴…… 셀바토르인가?”
리스의 시선은 어느새 사라진 아셀라가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맞아. 저 여자가 셀바토르 소 공작이야.”
들려오는 대답에 리스는 눈을 찡그리더니 무언가를 가늠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목소리를 낮춰 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리스의 말에 남자는 귀를 기울였다. 가장 열렬하게 반대하던 리스였으니 이번에도 반대를 외치려나?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척 봐도 우리 대장 잘 살 것 같다. 그치?”
“……?”
남자는 이상한 눈으로 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대답을 종용했다.
“안 그래?”
잠시 말없이 남자는 리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남자의 격한 동의에 그녀는 소리 없이 입술만 끌어 올리며 웃었다.
“잘 살 것 같네. 대장.”
그렇게 말하며 리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꾹 쥐었다.
*
“사이레인.”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던 사이레인은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그들이 빠져나온 요새가 있었다.
이제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이 간신히 보이는 곳까지 왔건만, 사이레인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쯤이면 분명 요새에 아셀라가 들어왔을 것이다.
‘어서 가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 박차고 요새로 달려가기엔 이쪽도 불안했다. 동굴로 이동하고 있는 평민들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사이레인은 일부러 후미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자, 조금 더 힘을 내라고!”
용병들은 불안해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평민들을 응원하듯 목소리를 높이며 그들을 동굴까지 호위하고 있었다.
“이봐, 정말 우리는 안전한 거겠지?”
노모를 부축하며 걷던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말에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평민들은 동조하듯 용병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걱정은 타당한 것이었다. 평민들과 친하게 지내던 용병들과 평민 중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그들을 설득시켰지만, 불안을 완전히 없애기에는 부족했다. 고작 몇 달의 시간으로는 지울 수 없는, 고통받던 십 몇 년의 세월이 새겨진 이도 있었으니까.
그들의 걱정을 이해한 용병은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라고. 이래 봬도 우리는 한 이름 하는 놈들이잖아?”
하지만 불신의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 속에는 지금이라도 요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갈등이 섞여 있었다.
“에타이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는 있겠어? 그놈들 한둘이 아니잖아. 너희는 몇 사람 되지도 않고.”
“맞아, 불안하다고…….”
“도주하다가 죽은 놈이 몇인데. 나, 나랑 우리 딸은 그렇게 될 수 없어.”
결국 여기저기에서 불안이 섞인 말이 터져 나왔다. 용병들이 막아 보려 애를 썼지만, 불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너희는 에타이를 이길 수 없다고! 괜히, 괜히 따라왔어!”
한 남자가 크게 외치자, 희망을 품고 가던 사람들마저 휩쓸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르카디우스 측에서 나서기로 했다.”
사이레인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 쪽으로 발을 내디디며 낮게 말하자 사람들이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다른 사람들도 웅성거림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차피 요새 안에 있어도 죽어. 타스 놈은 우리를 방패 삼아 도망치려고 했으니까. 요새에 남아 있어도 죽는다면 차라리 희망에 목숨을 걸어 보지 그래?”
사이레인이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들은 사이레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떨궜다. 비난을 퍼부었던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이레인이 입술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 새끼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다 이겨.”
“……그래?”
남자가 미심쩍어하면서도 수긍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숲속에서 비웃음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앞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퍼져 나왔다.
“사이레인! 엠, 엠릭이야! 에타이들이 여기에 있어!”
에타이가 여기에 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앞쪽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숲속에 잠복해 있던 에타이들이 칼을 휘둘렀고 먼저 걸어가던 사람들이 몸을 돌려 요새 쪽으로 달렸다.
“커, 커헉…….”
아이를 안고 있는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용병 한 명이 입에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하하하!”
쓰러지기 직전까지 길을 막는 용병이 웃긴 것인지, 아니면 도망치지 못할 외길에서 죽어라 도망치는 평민들이 우스운 것인지 엠릭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렇게 소리치며 엠릭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도망치던 남자가 등에 검을 맞고 쓰러졌다.
비명이 더욱 커지고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키려고 앞으로 나서는 이와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려고 멈춘 사람, 그런 사람을 밀치고 도망가는 이, 온갖 사람이 한곳에 섞여 있었다.
“내가 정말 너희가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걸 모를 줄 알았냐고!”
엠릭은 몰려드는 즐거움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빠져나오길 잘했다. 엠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하하!”
그간 거슬렸던 용병 놈들을 차례로 쓰러트리는 맛이 쏠쏠했다. 자신을 보고 울고 도망치는 평민들은 덤이었다.
처음 계획은 엠릭이 요새에 남고 에타이들 몇이 잠복해 있다가, 마치 사냥을 하듯 평민들과 레너드 용병단을 다시 요새 쪽으로 모는 것이었다. 하지만 엠릭은 형님의 말을 어기고 슬그머니 몰이꾼에 참여했다.
요새에 갈 것도 없이 여기서 다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요새에서 배신자들을 처리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타스가 자신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게 계획을 짠 것도 모르고 엠릭은 자신에게 맞서는 용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그가 휘두르는 검은 곧 거대한 도끼에 막혔다. 나무가 아닌 다른 것을 베어 넘기는 데 쓰이는 도끼의 주인은 사이레인이었다.
“왔구나!”
엠릭은 즐거움에 소리쳤다. 검과 도끼를 마주하고 근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의 동료를 잃은 사이레인의 청녹색 눈이 오싹할 정도로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있어!’
엠릭은 그 눈을 보면서도 이를 드러냈다. 그래, 이건 자신의 승리를 위한 싸움이다. 근처에 있는 에타이들이 몇이던가.
정 안 되면 팔만 뻗으면 된다. 사방에 널린 게 비명을 지르는 방패다. 분명 저 어설픈 용병은 방패와 함께 자신을 베어 넘기지 못하리라. 자신이 충분히 즐긴 후에 거대한 곰 새끼는 힘을 빼 죽일 계획이었다.
“고아 새끼가 힘만 좋아서.”
엠릭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고 사이레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힘에 밀린 엠릭이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엠릭은 두어 번 도끼를 막고 또 두어 번은 피하며, 사이레인을 조롱하는 데 집중했다.
“느린 곰 새끼!”
안타깝게도 좁은 길목인 데다가 주변에는 평민들과 레너드 용병단이 있었기에 사이레인은 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휘둘렀다가 반경이 큰 공격에 누가 휘말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이레인은 최대한 엠릭에게 집중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몇 번 더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는 사이 평민들을 저 멀찍이 도망갔고, 그들이 무사히 도망치자 레너드 용병들은 본격적으로 에타들과의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인질은 사라졌고 자신을 도울 에타이들은 레너드 용병들에게 막혀 있었다.
“젠장.”
“어딜!”
엠릭이 사이레인을 피해 다시 평민들을 잡으려 하자 사이레인이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애꿎은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베어져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도망만 잘 다니는 쥐새끼 같으니라고…….”
사이레인을 이를 갈며 엠릭을 노려보았다.
실제로 어느 순간부터 엠릭은 공격보다는 도망에 치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도끼와 검을 부딪치는 것도 피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엠릭의 팔이 부들거렸던 탓이었다.
짜증이 울컥 올라와 그는 속으로 벅벅 이를 갈았다. 괴물 같은 곰 새끼.
하지만 떨리는 손은 정직했고 엠릭은 겨우 몇 합 만에 자신이 도망쳐야 할 때를 알았다. 더 붙으면 자신이 위험했다.
‘어차피 뒤가 남아 있어.’
엠릭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씩 웃었다. 지금 사냥도 즐겁지만, 뒤에도 즐거운 계획이 남아 있었으니 한발 물러나도 나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사이레인을 보고 기분 나쁘게 웃은 엠릭이 큰 목소리로 그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르카디우스 놈들이 너를 귀족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냐? 그 말을 믿어? 너는 버려질 거야. 네 부모가 그랬듯 이용하고 나면 너를 버릴 거라고!”
네 부모가 그러했듯. 그 말에 주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사이레인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됐다. 엠릭은 속으로 킬킬거렸다. 꼭 저렇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놈들은 마음 깊숙이 상처 하나를 달고 살았다. 숨기고 숨기던 그 약한 부분을 푹 하고 찌르면 아무리 강인한 놈들이라도 순식간에 쓰러졌다.
그건 자신의 눈앞에 있는 놈도 마찬가지이리라. 지금 말 한마디에 얼굴이 창백해지지 않았던가.
“너 따위 고아에 떠돌이 용병을 다른 나라도 아닌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이 진심으로 대해 줄 거라 믿은 건 아니겠지, 사이레인?”
사이레인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 엠릭의 공격이 들어왔다. 확실히 아까에 비교해서 약해진 힘에 엠릭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불쌍해서 그래, 불쌍해서! 우리가 그래도 나름 얼굴을 맞대고 산 사이잖아? 안타까운 마음에 충고를 해 주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며 엠릭은 빠르게 사이레인을 몰아붙였고 그는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럴 때마다 엠릭은 공격하며 깊숙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완전히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엠릭은 가까이에서 검을 크게 치켜들었다.
“사이레인, 너는 버려…….”
“시끄러워.”
어? 엠릭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아까만 해도 흔들리는 듯했던 그의 눈이 차분해져 있었다. 그리고.
“아아악!”
엠릭은 검을 떨어트리고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이레인이 품에서 꺼내 든 단검으로 그의 얼굴을 그은 탓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졌고, 엠릭은 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눈,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친한 척 이름이나 부르고 말이야. 기분 더러워서, 원.”
사이레인은 단검을 쥔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엠릭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이레인의 얼굴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다. 버려졌다느니, 부모라느니. 그런 말은 이미 사이레인에게 있어서 아무런 아픔을 주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바닥을 구르는 저놈은 자신이 어떤 바닥에서 구르고 온 건지 모르는 멍청이가 분명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그 따위로 시비를 걸었지.
하지만 엠릭의 멍청한 머리 덕에 요리조리 피하던 놈을 가까이 오게 했으니, 사이레인은 나쁘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 여기서 뒤질 줄 알아라.”
시선이 잠시 위를 향했다가 다시 엠릭에게 닿았다. 사이레인은 한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엠릭의 얼굴을 그은 단검을 쥐고 일부러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엠릭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물들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듯한 공포에 엠릭은 아픔도 잊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타이 놈들 전부 생존 본능이 뛰어났지만 저놈은 그중에서도 특출 난 놈이라고 생각하며 사이레인은 성큼성큼 그의 뒤를 쫓았다.
“히, 히익! 다가오지 마!”
어느새 엠릭은 절벽이 보이는 곳까지 도망쳐 있었다. 그는 절박하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걸 들어줄 사이레인이 아니었다. 들어줄 이유도 없었고.
“잘 가라, 쓰레기 놈아.”
사이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자신의 몸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내려앉자 엠릭의 얼굴이 공포로 짙게 물들었다. 이젠 그의 얼굴에서 색을 가진 건 흘러나오는 피뿐인 것 같았다.
“다, 다가오지……. 아아아!”
사이레인의 눈이 커다래졌고, 놀란 건 엠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필 그가 주저앉아 덜덜 떨던 곳 바로 뒤가 비탈이었고 기다란 비탈길은 그대로 절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쯧.”
사이레인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비명을 들으며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자신의 손으로 확실히 끝을 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사이레인이 몸을 돌리는 그 순간까지 무언가가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이레인은 피가 점점 떨어진 길을 지나 요새 쪽으로 뛰어왔고, 아직도 싸우고 있는 에타이들을 몇 처리하자 금방 주변은 정리되었다.
“후우, 대장. 대장은 괜찮아?”
“나는 문제없어. 내 피도 아니고. 다친 사람들에게는 물약을 꺼내 먹게 해.”
사이레인은 제 팔에 묻은 엠릭의 피를 짜증 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상황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카벨은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아. 너희들도 움직이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동굴로 갈 준비가 끝나 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민들 사이에서는 사망자가 없었고 다친 이도 수가 적었다. 아까 엠릭의 칼에 등을 맞은 사람이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이었는데, 물약으로 치료가 가능해 보였다.
“좋아, 일단 모두 동굴 쪽으로…….”
“어, 저기 봐!”
상황을 전부 파악한 사이레인이 다시 지시를 내리는데 누군가가 한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요새 쪽이었다.
“무너진다!”
사이레인의 고개가 바로 돌아갔다. 간신히 보이는 요새의 가장 높은 건물, 그게 연기와 함께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에 질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거…… 타스 놈이 살던 건물 아니야?”
아셀라가 숨어 들어간 곳, 타스의 저택이 무너지고 있었다. 왜, 저기가. 왜……?
사이레인은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크게 헐떡였다. 허물어지는 저택, 치솟는 연기.
“아셀라!”
사람들을 헤치며 뛰어가는 사이레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