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저기 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거기에는 큰 키의 여자가 있었다. 검은 제복과 짙은 초록빛 망토를 두른 여자의 머리는 제복만큼이나 검었고, 눈은 늪이 생각날 정도로 짙은 녹색이었다.
“……셀바토르 소 공작이다.”
“황궁에는 무슨 일이지? 분쟁 지역에 있던 거 아니었나?”
“몇 달 전에 돌아왔다고 들었어.”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바닥에 고였다.
“저번에 분쟁 지역에서 큰 공을 세웠다던데.”
“마검사라는 게 진짜일까?”
“셀바토르 가문에서도 특출 날 정도로 힘이 강하다며.”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정면을 바라보고 어디론가 향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다섯이 쓰러진다던데.”
“맨손으로 적의 팔을 부러트렸다는 소리도 들었지.”
발소리가 하얀 대리석이 깔린 황궁 복도를 가득 메웠다.
“역시 괴물…….”
그때, 셀바토르 소 공작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가 뒤를 바라보자,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헛기침하더니 이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던 암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한심하긴.’
작게 콧방귀를 뀌며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긴 머리는 예뻐서 좋긴 한데 이게 귀찮았다.
잠시 사람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아셀라.”
거기에는 황태자인 피스토레가 서 있었다. 환한 얼굴의 피스토레는 아셀라를 보자마자 씩 웃음을 머금었다.
“뭐야, 왜 거기서 멀뚱히 서 있는 거야?”
“……황태자 전하.”
셀바토르 소 공작의 말에 피스토레가 어색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제 팔을 문질렀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이름을 불러. 너에게서 황태자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지.”
피스토레는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셀라의 시선이 잠시 사람들이 서 있던 자리를 향했다가 도로 그에게 닿았다.
“그래.”
“그래, 그게 좋지. 아버지 앞에서만 조심하자고, 우리. 그런데 아셀라. 아버지가 왜 너랑 나랑 불렀는지 알고 있어?”
갑작스러운 부름이었다. 황제는 아셀라와 피스토레를 불렀지만, 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아셀라가 말없이 고개를 흔들자 피스토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일까…….”
피스토레는 아버지인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외관은 비슷했으나 성격이 정반대인 게 문제였다. 황제가 검의 성격이라면, 피스토레는 방패였다. 그것도 매우 유한 방패.
“저번에도 내 성격을 강인하게 만드시겠다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셨지.”
몬스터가 나오는 숲에 홀로 버려졌던 게 기억났는지, 피스토레가 몸을 떨었다.
“그냥 내가 이런 성격이라는 걸 이제 인정해 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뿐인 아들이라 내치지 못했다는 말을 앞에서 듣고 자란 피스토레는 황제의 앞에만 서면 기가 죽어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는 최대한 부딪치지 않고 피해 왔었는데, 갑자기 황제가 그를 부른 것이다.
“그래도 너랑 같이 불러서 다행이야, 아셀라. 아버님은 널 좋아하니까.”
이제 아버지에게 갈까. 섧게 웃은 피스토레가 움츠렸던 몸을 폈다. 등을 곧게 하고 목을 가볍게 움직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는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인 남자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알현실에 도착하자 시종장이 빠르게 황제에게 두 사람의 도착을 알렸다.
“들어와라.”
지극히 낮고도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알현실의 거대한 문을 지나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옥좌 위에 앉아 있는 황제였다.
“왔군.”
이제는 흰머리가 많아진 머리를 뒤로 넘긴 황제는 깊은 푸른 눈으로 아셀라와 피스토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셀바토르 소 공작.”
“예, 황제 폐하.”
“내가 린체의 기사단장이자 셀바토르 소 공작에게 내릴 명령이 있네.”
황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허리를 숙인 아셀라는 힐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피스토레를 무시하고 자신에게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황제 폐하.”
하지만 한두 번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기에 그녀도, 그리고 피스토레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다.
“황태자를 분쟁 지역에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네.”
“분쟁 지역 말씀이십니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분쟁 지역에 갔던 피스토레는 좋지 못한 결과를 냈었다.
그는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는 사무 처리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정책을 추진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거기다 그는 다른 이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성격과 적성, 어느 면에서도 피스토레는 완벽히 전쟁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아버…….”
“언제까지고 한 제국의 황제가 나약하게 덜덜 떨 수는 없지.”
피스토레의 말을 무참히 짓뭉갠 황제가 아셀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국의 가장 고결한 수호자인 셀바토르 소 공작에게 부탁을 하지.”
이젠 망연자실하며 피스토레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잠시였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가 분쟁 지역에서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네.”
황제의 손가락이 피스토레를 가리켰다.
“최전방에 저놈을 세우게.”
이번엔 아셀라마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피스토레는 검을 배우긴 했지만 출중한 실력은 아니었다. 분쟁 지역에 가기엔 위험한 실력인데 그것도 최전방이라니.
황제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툭툭 팔걸이를 치며 말을 이었다.
“죽지만 않게 두고, 그냥 제 운대로 있게 하도록. 팔이 잘리든 뭐가 잘리든 생명만 붙어 있으면 나는 상관없어.”
“아버지!”
결국 피스토레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면서 황제를 불렀다. 아셀라를 볼 때는 평온했던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멍청한 소리를 할 거면 그 입을 다물어라, 피스토레.”
단호한 말로 황제는 피스토레의 입을 막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황제는 황제 나름대로 피스토레를 아끼고 강하게 키우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황제의 말과 행동은 피스토레를 상처 입히고 있었다. 더욱 그를 작게 만들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황제가 피스토레를 더욱 위축시키기 전에 아셀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고귀한 명을 받아, 저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가 황태자 전하를 최전방에서 호위하겠습니다.”
아셀라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는 다시 옥좌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이제 가 봐도 좋아. 소 공작.”
피스토레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알현실 밖으로 쫓겨났다. 알현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피스토레는 숨을 헐떡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최전방이라니, 최전방이라니!
선황제 때부터 시작된 혼란의 시대는 이제 슬슬 끝을 맺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타오르던 불꽃이 가장 강렬하지 않던가.
마지막 요새만을 남겨 둔 에타이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그 덕에 분쟁 지역에서 죽은 이들의 시신이 매일 신전 앞뜰에 놓였고, 그들을 위한 기도 소리는 끊기지 않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몰려드는 공포심에 피스토레는 숨을 멈추었다. 분쟁 지역의 다른 곳이라면 가 본 적이 있었지만, 최전방은 아니었다. 그토록 위험한 곳을, 게다가 팔 하나 끊어져도 괜찮다고? 그게 아버지가 할 소리인가.
“……토레.”
피는 싫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죽어 가는 건 더욱 싫었다. 황제로서는 이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싫었다.
“……토레!”
하지만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영원히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피스토레!”
갑자기 제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피스토레가 황급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미간을 찡그린 아셀라가 있었다.
주변을 살핀 아셀라는 그대로 피스토레를 빈 방에 밀어 넣었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아셀라가 뚜벅뚜벅 그에게 다가갔다.
“겁먹지 마.”
암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피스토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됐어. 이번 일을 네가 해낸다면 황제도 더 너를 괴롭히지 않겠지.”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제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도 공작이 되기 전에 공을 하나 세워 두려 했는데 나쁘지 않고.”
공을 하나 세워 두려 했다고? 피스토레는 눈을 깜빡였다.
최근 들려오는 연승은 거의 다 아셀라의 활약이었다. 거기다 소 공작으로서의 일도 빠짐없이 하고 있으니, 피스토레로서 아셀라의 발언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피스토레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아셀라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황제는 오래 버티지 못해.”
누군가가 들었으면 경악할 불경한 말이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위해 그녀는 빈방으로 들어온 듯 보였다. 담담한 얼굴로 아셀라는 계속 덧붙였다.
“떨어져 있다 보면 곧 너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하겠지. 그때까지만 분쟁 지역에서 버티면 돼.”
“하지만 나는…… 무서워, 아셀라.”
아셀라는 피스토레의 말을 책망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무섭겠지. 너는 전쟁터에 맞지 않는 성격이야. 하지만 그건 넘어야 할 산이지.”
아셀라의 말에 피스토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해내면 아무리 황제라도 한발 물러설지 몰랐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지도 몰랐고. 그리고 아셀라의 말대로 황제는 서서히 끝이 보였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있을 테니까.”
무심한 듯 다정한 제 친구의 말에 피스토레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셀바토르가의 소 공작이었다. 그녀라면 안심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안심되었다.
“그래. 고마워, 아셀라.”
“뭘.”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가볍게 피스토레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오면 너는 황제, 나는 공작이다.”
*
“아셀라!”
누군가가 막 마차에 오르려던 소 공작을 불렀다. 목소리에 마치 꽃이 핀 듯 화사했다. 아셀라가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는 아르트엘이 서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구불거리는 머리를 반으로 묶고 짙푸른 드레스를 입은 아르트엘은 잡티 하나 없는 뽀얀 뺨을 물들이며 웃었다.
아르트엘은 어릴 적부터 하나뿐인 황후 후보로 황궁으로 들어왔고, 자연스레 피스토레와 아셀라랑 유년 시절을 보내, 그녀와도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아셀라, 내 친구!”
다시 한 번 아셀라를 부르며 아르트엘이 웃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맑은 목소리로 웃자, 사방에 꽃이 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름을 불린 당사자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아르트엘이 저리 환하게 웃을 때면 그 속은 겉보다 몇 배는 더 음흉한 속셈이 있었다.
아르트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환한 웃음에 넘어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끌려다녔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이미 어릴 적부터 몇 번이고 겪었으니까.
사람들을 조종하는 밝은 웃음을 한껏 머금은 아르트엘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아셀라는 못 들은 척, 아르트엘을 발견하지 못한 척 빠르게 마차에 올라타려고 했지만, 늦었다. 뛰듯이 다가온 아르트엘이 아셀라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셀라, 약속 시각보다 이르게 와 줬구나! 내가 심심할까 봐 일찍 와 준 거지? 아아, 정말 기뻐!”
약속?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생글생글 웃으며 올려다보는 아르트엘에,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 그녀에게는 입궁하라는 황제의 명만 있었을 뿐, 그 어떤 약속도 없었다. 그래서 볼일을 마치고 나면 저택에서 늘어져라 잠을 잘까 했었는데, 아무래도 아셀라 본인도 모르는 약속이 있던 모양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해 놨어. 아, 럼. 럼을 마실래? 안 그래도 좋은 술을 선물 받았거든. 너라면 분명 좋아할 거야. 해가 떠 있긴 하지만 낮술이 최고지!”
아르트엘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눈을 찡긋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묘하게 크고 활달한 게…….
‘아, 역시.’
아셀라는 저편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는 이 상황을 이해했다. 메데이아, 이 나라의 젊은 황후가 멀찍이 서서 그녀와 아르트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젊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어리다는 말이 더 맞으려나. 실제로 황제와 메데이아의 나이 차는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그녀는 자기 아들인 피스토레보다 어렸고, 아셀라보다도 연하였다. 거기다 그녀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나라 심장을 제국에 바친 왕녀, 메데이아. 그 대가로 그녀가 받아 낸 건 황후 자리와 함께 넘어온 국민들의 안전이었다.
콧대가 높은 르카디우스 귀족들은 그녀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르트엘도 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타 귀족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지만.
어느새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메데이아가 운을 뗐다.
“이런. 셀바토르 소 공작과 선약이 있으셨군요.”
그렇게 말하는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아쉬움을 담고 아르트엘과 아셀라를 향했다.
“네, 황후 폐하. 그래서 너무도 아쉽지만 티타임은 다음에 가져야 할 듯싶습니다.”
“그래요.”
그사이에 떨어진 아르트엘이 메데이아를 향해 정중히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메데이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웃더니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아셀라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메데이아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셀바토르 소 공작의 연승 소식은 황궁에서도 잘 듣고 있습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작은 공일 뿐입니다, 황후 폐하.”
“부끄럽다니요! 소 공작의 공이 부끄러울 정도면 수도의 그 누구도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겁니다.”
메데이아가 부채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며 말하자, 아르트엘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아셀라의 공이 자신의 공이라는 듯 무척이나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아셀라가 다시 허리를 숙이자 메데이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언제 한번 내 온실에 놀러 오세요, 소 공작. 새로 꾸민 온실이 작긴 하지만 매우 아름답습니다. 분명 소 공작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꽃 같은 여자다. 메데이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다. 미모 하나만으로 황제를 홀렸다는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 진실로 바뀔 만큼 메데이아는 아름다웠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는 멀리서도 그녀가 미인이라는 걸 여실하게 말해 줬다. 그런 메데이아가 한껏 미소를 지으면 사방에서 꽃이 피는 듯했다.
물론 아르트엘 역시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르트엘이 작은 들꽃 같은 느낌이라면 메데이아는 그것보단 더 위험한 느낌이었다. 그래, 흡사 흠뻑 독을 품은 꽃과도 같은 느낌.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아셀라는 옅게 미소 지으며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초대에 응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
그녀의 거절에 메데이아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뒤이은 아셀라의 말에 메데이아뿐만 아니라 아르트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방금 황제 폐하께서 최전방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
쿵!
“가지 마!”
얼마나 세게 테이블을 내리쳤는지, 그릇 위에 예쁘게 놓인 술안주들이 크게 흔들거렸다.
“안 돼, 나는 반대야. 반대라고!”
아르트엘은 자신의 남편과 친구가 최전방으로 간다는 말에 세차게 고개를 지었다.
“아니, 너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보내! 그리고 내 사랑은 왜? 내 사랑은 왜 보내는 거야? 피스토레는 나가자마자 칼 맞을 거야, 그럴 거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크게 외치던 아르트엘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으아아앙, 내 사랑 죽는다!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지.”
아르트엘의 말에 술을 마시던 아셀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피스토레보다는 아르트엘이 분쟁 지역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 차라리 아르트엘에게 검을 가르쳐 볼까? 검 실력은 피스토레보다 떨어지겠지만, 성격상으로는 그보다 나을 게 분명했다.
“아셀라…….”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아르트엘이 슬금슬금 손을 뻗더니 소 공작의 손을 잡았다.
“우, 우리 남편 잘 부탁해…….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울먹이는 아르트엘의 말에 아셀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 마.”
아셀라의 덤덤한 대답에 감명받은 듯 아르트엘의 눈이 눈물로 반짝거렸다.
“사랑해, 아셀라!”
“치워.”
소 공작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르트엘을 냉정히 밀어내자 그녀가 입을 빼죽 내밀었다.
“매정한 아셀라……. 내 사랑을 내팽개치다니.”
“뭘.”
언제나 그랬는데, 새삼 충격을 받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소 공작은 찻잔에 담긴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확실히 아르트엘이 자랑할 만한 술이었다.
매정한 소 공작을 샐쭉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르트엘은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황제 폐하께 불려 간다고 얼굴이 죽상이긴 했는데 그런 말을 들었을지는 몰랐어.”
“나도 솔직히 놀랐어. 설마 최전방에 세우라고 하실 줄이야.”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이긴 했다. 황제는 많이 늙었고 자신의 기대에 못 따라오는 피스토레를 못마땅해했으니까. 최근엔 초조함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를 알현했을 때, 분쟁 지역 이야기는 나올 것을 가늠했다.
하지만 최전방은 다른 이야기였다. 거기다 요즘은 끝이 보이는 가장 위험한 시기.
“피스토레도 심란한 게 눈에 보이더군.”
지금쯤 그는 자신의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연신 한숨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눈에 훤하게 그려졌는지 아르트엘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시무룩해 보이는 게, 피스토레가 걱정되어도 단단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르트엘.”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부르자 시선이 바로 닿는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까지 깜빡였다.
“그렇게 피스토레가 좋아?”
언제나 보지만, 조금은 신기한 일이었다. 아르트엘은 아주 어릴 적부터 황궁에서 피스토레와 함께 자랐으니까. 그렇게 오래 보면 마음이 변치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응.”
언제나 말을 늘리는 그녀답지 않은 단답형이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아셀라가 옅게 웃었다. 역시나 신기한 일이었다.
“음…….”
소 공작이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아르트엘은 말해 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을 정리했다.
“뭐, 어릴 적부터 봐 와서 좀 싫은 것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아르트엘은 씩 웃었다.
“그래도 좋긴 좋네.”
“신기하네.”
셀바토르 공작 부부의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서로를 사랑했고 충분히 존중했다. 하지만 아르트엘과 피스토레처럼 서로를 ‘내 사랑’이라는 간질간질한 칭호로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지내 온 세월을 생각하면 셀바토르 공작 부부 못지않은 세월일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셀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르트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직 아셀라는 결혼 생각이 없는 거지?”
“그렇지.”
흐응, 작게 콧소리를 내며 아르트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혼서랑 함께 초상화가 산처럼 쌓여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괜찮은 사람이 없었어?”
“글쎄, 잘 안 봐서 모르겠네.”
거의 매일, 셀바토르 공작저로는 전 제국에서 몰려온 구혼서가 쌓여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초상화도 그 옆에 놓였다. 후작가의 누구, 백작가의 누구……. 심지어는 다른 왕국의 왕자도 있었다.
하지만 본인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 누구에게도 흥미가 가지 않았다. 섬세하게 그려진 초상화는 반송되었다.
“나는 네가 더 신기해. 이상형은 있지, 아셀라?”
아르트엘의 물음에 아셀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듯 찻잔을 톡톡 건드리자, 술에 파문이 생겨났다.
“있지.”
“뭔데?”
“일단 나보다 힘이 세거나 비슷한 정도의…….”
비록 현실성은 없지만, 아르트엘은 간신히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셀바토르 가문은 대대로 기사 가문이었으니까. 그래, 힘을 중요시할 수도 있지.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귀여운 남자.”
환한 웃음과 함께 튀어나온 말에 아르트엘 역시 그녀를 따라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내 친구의 이상형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겠구나. 만일 그녀가 이상형을 찾는다면 그건 기적이었다.
*
“아.”
아르트엘과 헤어져 공작저로 돌아오니, 가장 먼저 그녀를 반긴 사람은 소 공작의 하나뿐인 하녀, 제나였다. 짙은 갈색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제나는 아셀라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아가씨, 술을 드셨군요.”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그녀가 술 냄새를 풍기면서 들어오는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별로 안 마셨는데.”
술잔에 마신 것도 아니고 찻잔에 가볍게 마시지 않았던가. 메데이아에게 보여 주기 식으로 정원에서 마셔서 그런 거지만.
아셀라의 대답에 제나는 말없이 그녀의 군복을 받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어쩐지 양심이 찔리는 미소라 아셀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셀라는 공작 부부보다도, 어릴 적부터 자신을 모셔 온 이 하녀를 이기는 걸 더 힘들어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아가씨라 부를 거야?”
황제를 만나기 위해 입은 군복은 군복이라고도 하기 힘들 정도로 이래저래 장식이 많았다. 커프스를 풀며 아셀라가 생긋 웃었다.
“후계자가 되었으니 소 공작님이라 해야지.”
“저에겐 언제까지나 아가씨인걸요.”
그녀의 군복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며 제나가 말을 이었다. 제나가 움직일 때마다 이번에 새로 바뀐 하녀복이 나풀거렸다. 좋은 옷감으로 하녀복을 새로 지어 지급했다는 게 사실인 듯, 캡과 앞치마 모두 깔끔하고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내가 공작이 된 후로도 아가씨라고 부르겠네.”
“어머, 그때쯤이면 공작님이라 불러 드려야지요.”
“실수할지도 몰라, 제나.”
“제가 실수를 할 리가요. 아가씨. 저 세탁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제나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아셀라의 군복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일부러 아가씨라고 또박또박 불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는 소 공작님이라 부르는 걸 알기에 아셀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내 그녀도 방을 나섰다. 오늘 황제에게 들은 명령을 아버지나 어머니께 전달해야 했으니까.
“공작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가볍게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그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집무실에는 공작 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과 집사인 빌헬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짙은 푸른 소파에 앉아 있던 공작 부인이 자신의 딸을 맞이했다.
“아셀라.”
옅은 갈색 머리와 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셀바토르 공작 부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딸을 불렀다.
머리색과 눈 색만 보자면 공작 부인과 아셀라는 닮은 게 없었다. 그러나 생김새는, 누구든 모녀지간이라는 걸 확신할 정도로 닮은꼴이었다.
“황궁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네, 집사가 말했나요?”
아셀라의 시선이 어머니 너머에 서 있는 노집사에게 닿았다. 선대 셀바토르 공작, 그러니까 아셀라의 할아버지 때부터 쭉 공작가를 모셔 온 집사는 아셀라를 보자마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빌헬름이 말해 줬지.”
가볍게 수긍하며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폭탄을 던졌다.
“이번엔 그 늙은이가 뭐라 하던?”
부인이 지금 말하는 그 늙은이는 뒤에 있는 집사 빌헬름이나 다른 이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공작 부인은 마음에 안 드는지 부채를 소리 나게 접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다, 됐다. 어차피 또 황태자가 나약해서 뭐가 어쩌니 저쩌니 했겠지. 쯧, 제 아들 성격 하나를 아직도 이해를 못 하다니. 죽을 때가 된 늙은이가 아집만 남아서……. 신의 곁으로 가서나 인정하려나.”
위험한 발언들이 연이어 쏟아졌지만, 아셀라도 집사 빌헬름도,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던 공작마저도 담담한 얼굴이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까.
분명 아셀라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은 셀바토르의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이럴 때면 혹여나 그녀의 선대에 셀바토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너도 늙은이의 웅얼거림 따위 신경 쓰지 마라. 고생했다.”
부인은 어서 가라는 듯 부채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셀라가 거대한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공작을 보자, 그 역시도 말없이 침묵할 뿐이었다. 지금 볼일이 끝났으면 어머니의 말대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볼일은 끝이 아니었다. 아셀라는 옅게 웃으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최전방으로 가라는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그녀의 말에 공작 부인과 공작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아셀라는 분쟁 지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황태자 전하랑 같이요.”
아셀라의 말에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늙은 황제가 미친 게 분명하구나!”
“여, 여보!”
다급히 공작이 부인을 말렸다. 그런데도 한 번 거칠어진 말은 끝날 줄을 몰랐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애를 또 싸움터로 밀어 넣으면서 이번엔 혹까지 붙여? 그것도 이 위험한 시기에?”
뚜뚝. 얇은 나무와 푸른 레이스로 만들어진 최고급 부채가 위태로운 소리를 냈고, 붉은 루즈가 뭉개졌다.
“일이 있어서 잠시 올라온걸요. 어차피 금방 내려가야 했어요.”
“그래도 혹이 생겼잖니!”
안 되겠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킨 공작 부인이 집사를 돌아보았다.
“빌헬름.”
“네, 마님.”
“마차를 준비해. 황제에게 간다.”
당장 가서 멱살이라도 잡겠다는 기세였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여보, 진정해.”
흰머리가 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공작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아내를 다독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와 짙은 수염이 무서울 법했지만,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는 눈과 목소리만큼은 다정했다.
“어차피 죽을 인간에게 당신이 손쓸 필요는 없어.”
내용은 다정하지 못했지만.
저렇게 의식 밑바닥에 황제조차 깔보는 경향이 있으니, 황족들과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도 사라지지 않지. 아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피스토레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도 그 소문은 없어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셀바토르의 콧대가 꺾이지 않는 이상 쭉 그렇겠지.
“어머니, 잠시 아버지랑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아셀라의 말에 조금 진정한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빌헬름을 데리고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자 공작은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다시 집무실 책상에 앉아 나른한 얼굴로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일이냐.”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는 눈이었다. 아까 부인을 바라보던 눈빛과 너무도 비교되었지만, 아셀라는 가볍게 무시했다. 자신 역시 이쪽이 편했으니까.
셀바토르 공작을 마주 보는 의자에 털썩 앉은 아셀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이번에 혼란의 시대를 끝낼 생각입니다.”
아셀라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이 웃음을 머금었다.
“아라벨라가 되었을 때, 최고 사제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들었다. 그게 몇 년 전 일이지?”
오래전에 내뱉은 말을 아직도 지키지 못했다는 비아냥이 섞인 말이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해야지요.”
“그래, 그러거라.”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공작은 집무실 책상 끝 쪽에 놓인 술을 컵에 따랐다. 짙은 호박빛 술이 크리스털로 만든 잔에 담겼다.
술이 담긴 잔을 입가에 대기도 전에 공작은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뒤이은 소 공작의 말 때문이었다.
“돌아오면 공작 위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
소리 나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공작이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그 자리가 탐납니다. 공작님 역시 쉬실 때가 됐지요. 노후는 편안하게, 따듯한 곳에서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공작 작위를 물려주는 건 전적으로 현 셀바토르 공작의 몫이었다. 아셀라로서는 그저 공작의 말을 기다려야 할 일이었지만, 그녀의 성격상 줄곧 기다리는 건 맞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혼란의 시대를 끝내고 오면 딱 좋을 때가 아닌가요? 전쟁 영웅, 꽤 괜찮은 수식도 붙을 테니까요.”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아셀라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슬슬 작위 양도를 고려하지 않으셨습니까.”
딸의 말에 공작은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보통 작위를 가진 이가 죽음으로써 후계자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경우가 빈번했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그건 사양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일이라니, 너무 가혹한 소리가 아닌가.
그나저나 아직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자신의 딸은 어떻게 안 걸까?
이내 의문은 풀렸다. 아셀라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답을 내 준 까닭이었다.
“공작님 성격이나 제 성격이나 비슷하니까요.”
“허어.”
“어머니 생신을 기념해 이번에 섬을 하나 구매하셨지요. 한 번도 가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슬슬 방문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공작님?”
아셀라는 그런 공작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러니 그 자리, 제가 돌아올 때까지만 앉아 계신 거로 하지요.”
그녀의 손은 정확히 공작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볼일을 다 끝냈다는 듯 그대로 나가 버리는 제 딸의 뒷모습을 보며 공작은 웃었다.
“하?”
할 말을 잃은 듯한 웃음이었다.
“아가씨.”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건 빌헬름이었다. 노집사는 힘겨운 웃음을 지으며 이 저택에 하나뿐인 아가씨를 맞이했다.
“어머니는?”
“다행히도 황궁으로 가시진 않으셨습니다. 다만 번화가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마차를 준비 중입니다.”
다행이네. 아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험담 정도는 가벼운 거지. 아무리 그래도 황제는 황제가 아니던가. 아셀라의 생각에 동의하듯 빌헬름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쿨럭!”
말을 이으려다가 집사가 크게 기침했고 몸이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괜찮아? 자일로를 불러올까?”
“괜찮습니다, 아가씨.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빌헬름은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매번 이 늙은이가 가면 자일로도 불편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집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이 자리를 물려주고 좀 쉬어야 하는데. 제 눈에 차는 사람이 없군요.”
선대 셀바토르 공작 때 빌헬름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셀바토르 공작가의 집사 자리를 물려받았고, 지금까지 공작저에서 집사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젊었던 청년은 어느새 나이를 먹고 노년이 되었고, 후계를 찾고 있었다.
“자식 놈들은 이 일에 관심이 없고…….”
푸념을 늘어놓는 빌헬름을 보던 아셀라의 시선이 어디론가 움직였다.
“흐음.”
그 시선 끝에는, 세탁실을 들렀는지 새 이불보를 끌어안고 있는 제나가 있었다.
“빌헬름, 여자가 집사 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없지?”
“누가 이 집안에서 일하면서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답니까? 스페라도…… 크흠! 그건 아주 뒤처진 자들이나 가질 생각이지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아셀라가 턱 끝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제나를 발견한 빌헬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호, 생각이 있답니까?”
“비록 말은 안 했지만 행동으로는 아주 여실하게 보여 줬지.”
아셀라의 대답에 그의 미소가 짙어졌고 빌헬름 역시 자신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마침 후계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놓은 게 있는데 딱 맞겠군요.”
제나 고생길, 그 첫 번째 막이 올랐다.
*
‘스페라도 후작이로군.’
군복을 차려입고 황궁에 온 아셀라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서는 밀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남자와 통통한 남자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요새 부쩍, 최전방에 가는 일로 황궁 출입이 잦아졌다. 피스토레와 함께 맞춰 볼 말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도 마주치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저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아셀라는 2년 전쯤 후작 위에 오른 저 남자를 곱게 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내팽개치고 분쟁 지역에 시선도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귀족은 괜히 귀족이 아니다. 유사시에는 검을 들고 최전방에 서야 하건만. 특히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은 더더욱 앞장서야 했다. 가문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힘으로 르카디우스 제국을 건설했고, 그 힘으로 백성들을 보호하며 귀족이라는 위치를 지켜 왔으니까.
비록 지금은 가문들 특유의 힘이 약해졌다지만 다들 스스로, 안 된다면 자식들을 분쟁 지역 끝자락에라도 보내 나름 면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가문들은 사람을 사서 보내는 데 그쳤다. 아셀라의 기준으로는 부끄럽고도 창피한 행위였다. 자신들은 조금이라도 다치기 싫다는 뜻이 아닌가.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은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이상하게 목소리가 높았고, 이유를 모를 정도로 자신을 싫어했다.
왜일까. 잠시 이유를 가늠해 보려다 아셀라는 이내 그만두었다. 자신이 여자라서 마음에 안 들거나, 아니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마력이 마음에 안 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셀바토르 공작가의 권위가 마음에 안 들어서겠지. 즉, 열등감이었다.
아셀라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자신보다 힘도, 배짱도, 머리도, 권력도, 그 무엇도 없는 남자.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세고 목소리는 높이고 싶은 남자.
‘귀찮은 놈.’
아셀라는 그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저런 놈들은 상대해 주다 보면 끝이 없었다. 그냥 쳐 내는 게 답이었지.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셀라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바라보는 시간도 아까웠고 저 남자를 생각하는 기력도 너무도 아까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셀라는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번엔 저쪽에서 그녀를 발견한 탓이었다.
“셀바토르 소 공작님!”
스페라도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던 한 통통한 남자가 재빠르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짧은 거리인데도 숨이 차는지 헉헉거리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라본가의 그마누 타엘 라본입니다.”
“아아, 라본가의 소 백작이로군요.”
얼마 전, 라본 백작이 후계자를 정했다더니 이 남자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훔치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그렇습니다. 추후 백작이 되어 황실에 정식으로 출입하게 된다면 잘 부탁드립니다, 소 공작님. 셀바토르 소 공작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뵐 수 있을 줄이야! 소문보다 더 강인하시고 아름다우시군요.”
“과찬입니다.”
미래를 위한 포석을 깔아 두겠다는 듯 라본 소 백작은 연신 그녀를 칭송하는 말을 늘어 두었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아셀라는 적당히 받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하게, 라본. 소 공작께서 곤란해하지 않나.”
어쩐지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고 그 밑에는 열등감이 깔려 있기도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셀바토르 소 공작님.”
“스페라도 후작.”
아직 정식으로 공작 위를 받은 것도 아닌데, 아셀라가 덤덤하게 자신의 인사를 받자 스페라도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까지 가는 게 열 받은 모양이었다.
“……역시 셀바토르는 나이가 어려도 셀바토르인 모양입니다.”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은 여자이면서 나이도 어린 게 콧대가 높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겠지. 숨겨진 말이 너무도 잘 들려 아셀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예, 그렇지요. 셀바토르가 언제 셀바토르가 아닌 적이 있었답니까?”
한 발 앞으로 다가가자 흠칫 몸을 떨더니 뒤로 한 발 물러난다. 스페라도 후작은 슬프게도 그녀보다 작은 편이었다. 체구 역시 그러했고.
“스페라도 후작은…….”
그녀의 시선이 스페라도 후작을 훑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스페라도답군요.”
아셀라의 말 한마디에 소 공작을 올려다보던 후작은 잠시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러고는 뜻을 이해했다. 그게 겉으로 보였다. 순식간에 스페라도 후작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으니까.
“셀바토르 소 공작! 어떻게 그런 말을……!”
“그저 후작 방식대로 인사를 드린 것뿐입니다.”
그러고는 잘 모르겠다는 듯 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후작께서는 스페라도답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신 겁니까? 본인의 가문을 말한 것뿐인데.”
“……!”
스페라도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이내 셀바토르 소 공작을 무섭게 노려보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어쩌다 보니 홀로 남은 라본 소 백작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께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저런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소 공작님.”
“네,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그럼 저도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길 기대하지요.”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라본 소 백작도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 혼자서 소 공작을 상대하긴 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두 인영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응? 아셀라, 안 오고 뭘 하고 있었나?”
그때 피스토레가 복도 모퉁이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그녀를 불렀다.
그래, 차라리 저놈이 낫지. 황족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편견이 없는 놈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네.”
‘어차피 스페라도 후작과 이제 마주칠 일은 거의 없겠지.’
전쟁터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남자라 그런지 자신을 향해 날을 세워도 공격 역시 우스웠다. 적당히 피해 주면 될 일. 앞으로 저 열등감 덩어리와 엮일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셀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피스토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소 공작.”
피스토레를 만나고 공작저로 돌아가려는 아셀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을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만나는 날인 것 같았다. 스페라도 후작에 라본 소 백작, 그리고 이렇게 메데이아마저 만났으니 말이다.
“메데이아 황후 폐하.”
아셀라가 허리를 숙이자 어리고 아름다운 황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피스토레…… 아니, 황태자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요?”
메데이아는 자연스레 황태자를 입에 담았지만,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피스토레는 메데이아의 아들뻘이지만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아르트엘이 메데이아를 어색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보다 더 어린 황후. 어떻게 지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고 했던가.
‘그것뿐만이 아니라, 묘하게 느낌이 안 좋아. 뭔가 싸늘한 느낌이야. 그래, 마치 뱀 같은…….’
그렇게도 말했었지. 아르트엘은 겉보기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집안의 여식처럼 보이지만, 그녀도 아무 능력 없이 황태자비가 된 게 아니었다.
“예,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뵙고 최전방으로 갈 일정을 논의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언제쯤 가나요?”
“글쎄요, 확정된 것은 없으나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 것 같습니다. 못해도 이번 달 안으로는 출발할 예정입니다.”
“저런……. 이번 달 안으로라니, 생각보다 일정이 빠르군요.”
“위급 사항과 관련된 일이니까요.”
아셀라를 바라보는 메데이아의 눈에 아쉬움이 서렸다.
“그렇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소 공작이 분쟁 지역을 오래 비울 수는 없는 거지요. 하아, 그래도 아쉽네요. 소 공작과는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이죠.”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셀바토르 소 공작은 옅게 웃었다.
“곧 혼란의 시대가 끝이 날 테니 평화 속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지요.”
이번 일이 잘 끝나면 사실상 혼란의 시대는 종결이 된다. 추후 처리해야 할 것이 남지만 그래도 전쟁터로 나아갔던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전보다 더욱 여유로워질 게 분명했다.
“그래요, 조금 있으면 평화…….”
평화라는 말을 되새기며 메데이아가 눈을 깜빡였다. 투명한 유리창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헤이즐넛색 눈동자에 잠시 담겼다가 흩어졌다.
“평화의 시대가 오지요.”
메데이아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말을 끝맺음했다. 하지만 묘하게, 그녀가 피스토레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처럼 위화감이 들었다.
아셀라는 그 위화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그저 입가에 서린 옅은 웃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후후, 기대되네요. 소 공작이 가져올 평화라.”
“그리고 평화의 시대를 황태자 전하께서 통치하시겠지요.”
슬쩍 떠보듯 이어지는 말에 메데이아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눈가를 접으며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자신은 아셀라의 말에 조금도 의구심이 없다는 듯, 그렇게 아셀라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평화의 시대를 황태자가 다스릴 겁니다. 혜안을 갖추고 사람들을 배려하는 분이니 분명 시대에 어울리는 황제가 되겠지요.”
“네, 분명 그러실 겁니다.”
아셀라도, 메데이아도 뭔가를 숨긴 채 웃음을 유지했다.
“황후 폐하.”
메데이아의 한 발 뒤에 물러서 있던 시녀는 조심스레 메데이아를 불렀다.
“무슨 일이니, 이피엘.”
이피엘이라 불린 아직 앳돼 보이는 시녀는 아셀라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슬슬 약속한 시각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아!”
이피엘의 말에 메데이아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미안하다는 얼굴로 소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소 공작. 즐거운 대화였는데 이렇게 끝을 내니 아쉽군요.”
“아닙니다, 황후 폐하.”
“그럼 부디 다치지 말고 돌아오길 빕니다.”
셀바토르 소 공작. 그렇게 말한 메데이아가 아셀라의 옆을 지나쳐 갔다.
아셀라는 잠시 메데이아와 이피엘이라 불린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들보다 어린 황후. 나라의 심장을 들고 온 공주,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시녀.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남았으나 지금은 섣불리 캐 볼 때가 아니었다.
아셀라는 몸을 돌려 황궁 안쪽으로 향한 메데이아의 반대로 걸어 황궁을 나섰다.
*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셀바토르 소 공작과 피스토레와 함께 최전방으로 갈 기사들이 뽑혔고, 그에 따른 절차들이 진행되었다.
“아가씨, 대장간에서 검을 보내왔습니다.”
제나는 기다란 검을 품에 안아 간신히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제나 혼자서는 들기 힘들어 하인들까지 같이 동원돼, 소 공작이 사용하는 방까지 옮겨야 했다.
“그래?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네.”
안락한 의자에 몸을 묻고 책을 보던 그녀는 제나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가볍게 검을 빼 들었다. 마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듯한 움직임에 제나가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그곳이 실력이 좋아.”
아셀라는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을 확인하며 방긋 웃었다. 이 정도면 합격, 마음에 든다. 다시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그녀는 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다른 준비들은?”
“차근히 다 끝나고 있습니다. 황궁에서도 곧 날짜를 알려 주겠다고 하더군요.”
사실은 아셀라 혼자였다면 이미 분쟁 지역으로 떠났을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황태자인 피스토레가 같이 움직였고, 황실 측에서는 이걸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화려한 환송식과 행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거 딱 질색인데.”
아셀라의 암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귀찮다. 신전도 대기도회 때가 아니면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공작이 되면 대기도회만 참석해야지.’
그러면 1년에 몇 번 가지 않아도 문제가 없으리라.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아셀라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온 편지입니다.”
제나는 익숙하게 은쟁반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그녀에게 온 편지들이 놓여 있었고, 뒤편에 따라 들어온 하인들은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구혼서야?”
사실 일반 편지는 몰라도 초상화까지 딸려온 구혼서 정도는 집사가 가져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나가 가져온 것이었다.
“네, 집사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지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듯 제나는 눈을 찡그렸다. 눈치 빠른 제나. 아셀라는 몸을 일으켰다.
“빌헬름도 늙었으니까. 늘 하던 대로 구혼서는 폐기하고 초상화는 돌려보내.”
“보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놈이 그놈이지.”
아무리 초상화를 보고 구혼서를 뜯어봐도 자신의 이상형에 맞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셀라는 자연스럽게 방을 나서면서 미간을 좁혔다.
아셀라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성격은 냉랭한 편이었다. 그러니 남편 정도는 좀 귀여워도 괜찮지 않을까? 유일한 문제는 부모님인데…….
“결혼하고 싶니?”
정원에서 같이 티타임을 즐기던 공작 부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최전방으로 가기 전 어머니와의 마지막 티타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아셀라는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고 싶으면 하렴.”
그게 끝이었다. 공작 부인은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자연스럽게 차로 입을 축였다.
“얼굴이 진지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쓸데없는 일로 고민 중이었구나.”
“아르트엘의 말을 듣다 보니 그런가 해서요.”
“뭐, 굳이.”
공작 부인의 긴 갈색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너라면 굳이 결혼하지 않고서도 이 공작저를 이끌 수 있겠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머지는 네 선택이란다, 아셀라. 결혼이 전부 나쁜 건 아니지만, 모두 좋다고 할 수는 없으니.”
갑자기 공작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부인은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시선을 따라가자 거기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셀바토르 공작이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발견한 공작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네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남자가 있다면 하렴. 아니면 말고.”
너무도 가벼운 말투였다. 말을 끝낸 공작 부인은 셀바토르 공작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음을 머금더니 이내 다정하게 공작의 손을 잡았다.
흐음. 자신이 잘못 알았다. 아르트엘과 피스토레 부부만큼이나 자신의 부모님도 애정이 깊었다. ‘내 사랑’이라는 조금은 낯부끄러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결혼이라.’
황태자 부부와 공작 부부를 떠올린 아셀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머릿속에서 그 단어를 지워 버렸다. 최전방에서 인연을 만날 것도 아니니까.
잠시 몸을 쭉 늘린 그녀는 마지막으로 떠날 채비를 확인하기 위해 방으로 올라갔다.
*
“그럼 다시 한 번 더 현 상황을 알려 줄게.”
피스토레의 앞에 거대한 지도가 펼쳐졌다. 검은 제복에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가 문양이 그려진 붉은 망토를 입고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피스토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부터 성문까지 기나긴 행렬 가장 앞에 서 있을 때까지만 해도 두려움 따윈 없어 보였던 그는 수도를 나오고 자신을 보는 눈이 사라지자 다시 평소처럼 온순하고도 걱정이 많은 얼굴로 돌아왔다.
“좋아, 준비됐어.”
이미 한 번 황궁에서 알려 준 것이었지만, 최전방에 도착하기 전에 더 들으면 좋은 거지. 아셀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피스토레를 따라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장식들을 벗어 던졌다.
“일단 우리가 갈 곳은 여기야.”
그녀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지도는 크게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사이에는 회색으로 칠해진 지역들이 있었다. 거기가 바로 분쟁 지역이었다. 지도상 어두운 부분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위험하다는 걸 피스토레도 잘 알고 있었다.
아셀라가 가리킨 곳은 어두운 지역에 가장 근접한 곳. 피스토레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남은 에타이들과 우리들이 붙고 있는 곳이야.”
아셀라의 손가락이 가리킨 지도에는 붉은색 깃발과 하얀색 깃발이 검은 깃발과 대치하고 있었다.
“붉은색은 우리, 하얀색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그리고 검은색은 에타이들, 맞지?”
“맞아.”
고개를 끄덕인 아셀라가 설명을 이었다.
“남은 에타이들과 전면전을 하는 상황이지. 수적으로는 우리가 우세하지만…… 지형적으로는 불리해.”
싸우고 있는 곳은 하필 라니스 숲 근처였다. 피스토레 역시 들어 본 적이 있는 숲이었다. 미로라 불릴 정도로 우거진 숲은 에타이들의 완벽한 은신처가 되어 주고 있었다.
“저번보다도 더 짜증 나는 곳에 자리를 잡았지. 쯧.”
가볍게 혀를 찬 아셀라가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거기다 이 미친놈들은 평민들을 방패로 삼고 있었다. 감언이설로 홀린 이들도 있었고 납치하듯 데려온 이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요새를 발견한다 해도 공격은 조심스러워야 했다. 눈이 돌아 버린 놈들이 인질들을 죽이면 안 되니까.
“너는 나랑 같이 본거지를 찾아내는 데 집중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검은색 깃발 뒤를 가리켰다.
“숲 어딘가에 녀석들의 본거지가 있는데 어딘지 알아내질 못했어.”
라니스 숲은 산맥에서부터 강까지 너무 널리 분포해 있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꼬리가 잡히면 에타이들이 다시 빠르게 숲으로 숨기에 적절한 지형이었다.
숲에서 태어난 쥐새끼들도 아니고. 아셀라는 이를 갈았다.
그녀 역시 라니스 숲에 자리 잡은 에타이들을 소탕하는 데 번번이 물을 먹은 탓이었다. 잡힐 만하면 몇몇을 내어 주고 도망친다. 몇몇을 무시하고 도망치면 순식간에 땅으로 기어들어 가거나 절벽 밑에서 사라진다.
‘숲을 아주 잘 아는 놈들이 있는 거지. 그놈들을 반드시 잡아야 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맨 첫 번째, 숲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놈들을 잡는다. 두 번째, 라니스 숲 어딘가에 있을 거점을 찾는다.”
콰득! 단검이 지도를 뚫고 책상까지 뚫었다. 책상 밑에서 칼날이 촛불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에타이의 머리를 죽인다.”
라니스라고 써진 부분이 통째로 뚫려 사라졌다. 열 받은 듯한 아셀라의 목소리에 피스토레는 그저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미 대다수 곁가지는 제거되었지만, 아직 몇 놈이 살아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단검을 다시 빼 들고는 검집에 넣은 아셀라는 지도 위에 세 장의 초상화를 던졌다.
“이놈은 엠릭, 남은 머리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놈이지.”
가장 왼쪽에 있는 초상화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얼굴이긴 했지만, 어쩐지 인상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이쪽은 포르. 부두목 같은 놈이야.”
피스토레의 시선이 맨 오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한 중년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조금 다부진 체격인 걸 제외하면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수도에서 길을 걷다 보면 마주칠 법한 그런 인상인데 에타이들의 부두목이라니 어쩐지 신기해, 피스토레는 초상화를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놈.”
아셀라는 중앙에 있는 초상화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말쑥한 얼굴의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남자. 하지만 눈빛만큼은 어딘가 섬뜩해 보였다.
초상화를 바라보는 피스토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셀라의 목소리가 아까처럼 낮아졌다.
“타스 벨린이다.”
“타스 벨린?”
그녀는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남은 머리 중 하나야. 저번 싸움 때 제 아들놈을 내던지고 도망가 살았지.”
아슬아슬했던 순간, 그 자리에 그녀도 있었다.
린체 기사단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같이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던 전쟁이었다. 에타이들이 가지고 있던 철벽의 요새를 협동해서 무너트렸다.
그 싸움에서 대부분 중요 인물들을 잡을 수 있었지만, 저놈은 놓치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테센트루아 성기사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을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소년이 날아오자 당황한 성기사는 검을 멈추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대로 그는 사라졌고 현재 라니스 숲에서 발견되었다.
“제 아들을 방패 삼아 던졌다고?”
아이를 좋아하는 피스토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고개를 끄덕인 아셀라는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래, 이번엔 던질 아들도 아이들도 없으니 잡을 수 있겠지.”
철벽의 요새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거기에 에타이들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가는 라니스 숲의 기지는 그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엔 반드시 머리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놈만 죽으면 다른 놈들은 알아서 흩어질 거야. 유일하게 남은 머리니까.”
“흐음.”
잠시 뚫어져라 타스 벨린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피스토레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놈만 잡으면 혼란의 시대는…….”
아셀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끝이지.”
“남은 잔당 처리가 있으니 완벽히 끝은 아니더라도 종결이나 다름없지.”
툭, 툭. 아셀라의 긴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의 시선은 저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죽으려 하지 않을 거야.”
저번엔 자기 아들을 던진 뒤 남은 에타이들과 그 가족들을 제물 삼아 제 목숨을 구했다. 이번엔 던질 만한 놈이 없었다. 타스 벨린의 뒤에 낭떠러지만 남아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이 긴 싸움의 끝이 온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으니, 분명 무슨 수를 썼겠지.
‘이번엔 타국에서 군사를 빌려 오진 못할 거야.’
예전에 에타이들이 썼던 방법이었다. 그걸 저지한 건 바로 아셀라의 아버지인 현 셀바토르 공작이었고, 황제는 무섭게 타국을 압박했다.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른 나라에서는 더 그들의 꼬임에 넘어가 군사를 내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떤 수를 쓰든 이번엔 놓칠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이 분쟁은 여기서 끝내야만 했다.
그간 에타이들이 식량과 돈을 수급하겠다고 작은 마을들을 수탈해 간 걸 떠올리자 자연스레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싸울 만한 젊은이들이 일하러 간 때만을 노려 마을을 급습한 에타이들은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마을에 남아 있던 약자들을 전부 죽이고 떠났다. 심지어는 마을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저들 생각으로는 꼬리가 잡히지 않기 위해 완벽히 목격자를 처리한 거였지만 참혹한 광경은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스스로 제 목을 죈 것이다.
마지막으로 갔던 마을이 떠올랐다. 잿더미로 변해 버린 작은 마을의 잔해 속에서 발견한 건 불길을 피하지 못한 작은 아이의 시신이었다. 그녀의 분노가 옮은 듯 피스토레 역시 이를 갈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놈을 죽이는데 전력을…….”
“아셀라!”
갑자기 문이 쾅 하고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조금은 작은 키였지만, 상당히 다부진 체격의 젊은 여자는 환하게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오려다가 피스토레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피스토레 역시 불청객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까무잡잡한 피부며 르카디우스 사람들보다 더 짙은 이목구비가 낯선 탓이었다.
“아아, 아롬벨의 사람이로군.”
하지만 이내 최전방에 아롬벨에서 온 용병이 있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아롬벨의 사람들은 호전적이고 쾌활하며 무기를 잘 다뤘기에 다툼이 있을 때 용병으로 가장 많이 오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누구……?”
쾌활하게 셀바토르 소 공작의 이름을 외치며 들어온 여자는 아직도 피스토레를 보고 굳어 있었다.
“아아, 우리 황태자.”
가벼운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내용이었다.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의자에 앉아 있는 피스토레에게 다가갔다.
“만나 봬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롬벨에서 온 테펜텔 덴입니다. 바덴 영주인 베그리언 덴의 두 번째 딸이지요.”
정중한 인사였다. 피스토레는 자세를 고쳐 잡고는 의젓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태자, 피스토레네.”
간단히 인사하며 피스토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롬벨과 르카디우스는 기후가 달라 적응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대가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 것을요.”
테펜텔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최전방에서 철퇴를 휘두르는 아롬벨의 용병이 있다던데, 그녀가 소문의 용병인 듯 보였다.
“그런데…… 셀바토르 소 공작과는 무슨 사이인가?”
피스토레가 느긋하게 앉아 있는 셀바토르 소 공작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허락해 준 사람은 몇 명 없는데. 대뜸 아셀라의 이름을 외치며 등장할 줄이야.
피스토레의 물음에 테펜텔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활기차게 외쳤다.
“친구죠!”
“일개 동료지.”
틀렸다는 듯 끼어든 말에 피스토레와 테펜텔의 시선이 아셀라에게 닿았다.
“……우리 친구 아니었어?”
단호한 그녀의 말에 상처받은 듯 테펜텔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니야, 우리는 친구야!”
하지만 이내 회복했다.
“우리는 같이 몇 번이나 사선을 넘은 친구잖아!”
“그게 동료지.”
“친구!”
“동료.”
피스토레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라도 테펜텔을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처음 친구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 완전히 밟아 놨겠지.
“보기 좋은 광경이야.”
아셀라에게 자신과 아르트엘 외에 다른 친구가 있을지는 몰랐다. 저절로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
“에타이 쪽에 용병단이 붙었어.”
한 손에는 닭다리를, 다른 한 손에는 술을 들고 테펜텔이 말을 이었다.
“에타이 놈들, 타국에서 지원을 못 받을 것 같았는지 이번엔 용병들을 고용했더군.”
말을 이으며 테펜텔은 크게 닭고기를 찢어 입에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셀바토르 소 공작과 피스토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만, 덴. 아니아니, 덴 경?”
“아롬벨에는 전사가 있지만, 기사는 없지요. 경이라는 호칭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냥 테펜텔이라 불러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테펜텔이 피스토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 테펜텔.”
성도 아니고 호칭도 없이 이름을 냉큼 부르는 건 피스토레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아셀라도 자신의 이름을 쉽게 허락했나?
“에타이들의 의뢰를 받아 주는 용병단이 아직도 남아 있단 말인가?”
일단 호칭은 추후에 정리하고 피스토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현실을 맞추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에타이들이 몸집을 불리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용병을 고용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든가, 용병들을 깔보는 태도를 보였다. 그게 몇 번 지속되자 그 어떤 용병단도 에타이들의 의뢰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에타이들의 의뢰를 받은 용병단이 나타나다니?
“게다가 지금은 전세가 기울었지. 아무리 봐도 그들이 망할 텐데.”
용병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들 르카디우스 제국 측에 붙고 싶어 했지, 에타이들에게 붙고 싶어 하는 놈들은 없었다. 망해서 죽으면 돈을 받지 못하니까.
거기다 잘못하면 엮여서 죄인이 될 가능성도 컸다. 용병들로서는 에타이들은 반드시 피해야 할 놈들이었다.
피스토레의 질문에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테펜텔이 입가를 쓱 문지르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한 젊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아까 색까지 입혀진 초상화랑은 다르게 흑백으로만 그려진 남자는 험악해 보였고, 매서워 보였다.
“사이레인이야.”
“사이레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들을 법한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쪽 이름인 거지.
“그래.”
나머지 술을 전부 들이켠 테펜텔이 술잔을 치우면서 말을 이었다.
“활동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실력이 좋아서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지.”
“흐응.”
실력이 좋은가? 아셀라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른 용병들이 버린 일까지 전부 하더라고. 얼마 전에 조사를 해 봤는데.”
테펜텔이 품 안에서 종이 몇 장을 더 꺼내 식탁 위에 펼쳐 두었다. 가장 첫 번째 종이에 ‘레너드 용병단’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레너드?”
“네, 저들은 레너드 용병단입니다. 보니까 초기 용병단 사람들이 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더군요. 해당 고아원은 아주 오래전 문을 닫은 걸 확인했습니다.”
“고아원이 문을 닫게 되면서 그곳에 아이들을 모아 용병단을 꾸렸다?”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고아원이 문을 닫아 그곳 출신 아이들이 손을 잡고 무언가를 하는 것까지는 종종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용병단이라니.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이레인, 이자가 아이들을 통솔했어. 아주 어릴 적부터 뒷골목에서 이름을 떨쳤더군. 나올 때 원장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둔 거 보니 한 성격 하는 모양이야.”
다시 피스토레와 아셀라의 시선이 사이레인이라 불린 남자가 그려진 초상화로 향했다.
“힘이 웬만한 성인들보다 더 강해서 아무도 건들지 못했나 봐.”
타고난 강인한 힘, 그리고 그대로 용병단을 만들 정도의 통솔력. 어쩐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셀라는 시선을 아예 초상화에 고정했다.
“너는 만나 본 적 있어?”
시선은 초상화에 고정한 채, 테펜텔에게 질문을 던지자 테펜텔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대답을 피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눈을 찡그리는 게 좋은 소식은 아닌 듯 보였다.
“졌어.”
긴 한숨 소리 끝에 나온 대답은 아셀라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테펜텔은 그녀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인간 중 한 명이었다. 힘도, 실력도, 통찰력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테펜텔은 그런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자신만큼은 아니었지만, 쉽게 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졌다니?
“아! 방심해서 진 거야! 다음엔 절대, 절대로 안 져! 안 진다고!”
자신이 진 게 분한지 테펜텔은 술을 새로 따르더니 그대로 들이켰다.
“크하!”
단숨에 한 잔을 그대로 들이켜고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얼굴을 구기고 있는 테펜텔이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놈, 산만 한 덩치에 거대한 도끼를 쓰는데 엄청나게 빨라. 거기다 용병이라 그런지 완전 짜증 나는 공격을 써서.”
“빠르기만 해?”
“……힘에서도 밀렸어.”
고개를 미친 듯 저은 테펜텔은 술로 구겨진 자존심을 펼 생각인지 연신 술을 따랐다.
“아마 만나면 너도 고생할 거야, 아셀라.”
술이 가득 든 술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테펜텔은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힘만으로 따지자면 너랑 싸우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테펜텔은 왼쪽 어깨를 매만졌다. 아셀라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테펜텔은 늘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손목까지 가리는 긴 팔을 입고 있었다. 살짝 놀려 줄까 하다가 모른 척해 주었다. 나름 피스토레를 처음 만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래도 놀랍긴 하군. 테펜텔에게 상처를 입힐 줄이야.’
사이레인이라는 그 남자에게 흥미가 동했다. 아셀라의 입술이 완전히 호선을 그렸다.
이렇게 그녀의 호기심이 동하면 상대가 불쌍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피스토레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아셀라도 자신도, 그리고 아르트엘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황궁에는 꽤 뛰어난 기사가 한 명 있었다. 오랜 경험이 있던 기사는 아직 미숙했던 아셀라를 이겼고, 그때 그녀는 지금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기사는 어떻게 되었더라?
‘자식들이 결혼해서 황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석 달도 안 돼서 황궁을 떠났다. 아셀라에게 밤낮으로 시달린 탓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아셀라가 그녀를 이길 수 있게 되어 도망칠 수 있는 거였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평생 황궁을 떠나지 못했으리라.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한 아셀라를 보며 피스토레는 고개를 저었다. 신이여, 불쌍한 사람이 한 명 더 갈 예정입니다.
‘아, 불쌍하지는 않나?’
잠시 생각에 잠긴 피스토레를 무시하고 아셀라가 손을 뻗어 테펜텔의 술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그대로 전부 들이켰다.
“야, 마시고 싶으면 네가 따라 마셔!”
술을 뺏긴 테펜텔이 날뛰었지만 아셀라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초상화에 고정되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눈 밑에 그늘이 있는 남자, 똑똑히 기억했다.
“레너드?”
레너드는 사자란 뜻이 아니던가. 사자는 무슨.
“꼭 곰 새끼처럼 생겼네.”
아셀라는 그대로 초상화를 챙겨 들고는 식당을 나섰다.
*
“하필 셀바토르, 그 괴물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이야.”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얼굴을 굳혔다. 차라리 르카디우스 제국의 다른 가문들이 떼로 덤비는 게 나았다.
셀바토르 소 공작, 그 미친 것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던가. 하나뿐인 아들마저 그녀에게 제물로 바쳤어야 했다. 자신과 아들이 헤어진 건 전부 그 괴물 탓이었다.
“한 달 정도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더 이르게 돌아왔군.”
타스의 말에 몇몇이 동요했다. 셀바토르의 이름은 숲속에 숨겨진 마지막 요새에서도 유명했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은 그녀의 이름만 들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덜덜 떨었으니까. 공포에 기절하는 놈들도 있지 않았던가.
“이번에 중요한 보고를 위해 수도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얇은 목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엠릭이었다.
“왜 벌써 나왔지?”
“다들 동요하지 말라고! 어차피 다 예상된 일이었잖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확실히 좀 일찍 돌아오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야. 괴물이 아무리 강해 봤자, 우리의 요새는 안내인이 없으면 찾을 수 없어.”
절벽과 우거진 숲에 가려진 요새였다. 숲에 익숙한 자들도 이곳을 찾아오는 걸 힘들어할 정도였다. 거기다 오래된 숲은 마법사들의 탐색을 방해하는 힘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형이 어쩌고, 요새 밑에 묻힌 대량의 마법석 원료들이 어쩌고 하던데 그건 에타이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저들이 자신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게 가장 중요했지.
“우리에겐 방패들도 있지.”
여차하면 자신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줄 방패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 치고 빠지기를 하면 돼.”
숲으로 적들을 끌어들인다. 우거져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숲을 한껏 헤매게 만든 후 낙오되는 이들부터 한 명, 한 명 뒤에서 죽이면 되었다. 밤이 되면 어둠을 틈타, 숲 입구 근처에서 경계를 서는 이들을 숲으로 끌어들여 숨을 끊어 두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서서히 피를 빼 죽이면 간단한 일이야.”
포르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자신만만한 그녀의 말에 동요되었던 다른 에타이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다 우리는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타스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다른 쪽으로 말을 틀었다. 들려주고 싶지 않은 귀가 있었다.
“괴물이 온 건 확실히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괴물을 사냥하면 보상이 떨어지지.”
“보상?”
“이번에 그녀가 동행한 인간이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태자다.”
타스의 말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일순 숨을 멈췄다.
“황태자?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자는 거의 한 명이었지. 다른 황녀도 황자도 없어. 유일한 후계자 아니야?”
“잡자, 잡아서 황제에게 거래를 거는 거야.”
“대신할 인간은 없다. 얼마나 귀중한 인간인가! 그 르카디우스 황제조차 무릎 꿇릴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괴물을 이기면 기울어진 형세가 단박에 뒤집힐 수 있었다.
“왜 황태자가 여기까지 기어온 건진 몰라도 그자를 잡으면 우리의 승리다!”
타스의 말에 다들 피스토레를 이미 잡았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보물이 굴러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괴물을 처리해 줄 이는 따로 있었으니까.
“사이레인.”
타스가 나지막이 한 남자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키에 다부진 몸, 사이레인이라 불린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짙은 주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밝은 청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뭐지.”
“괴물은 네가 맡도록 해.”
타스는 가볍게 가장 큰 위험을 그에게 넘겼다.
“힘으로는 붙어 볼 만할 거다. 괴물에 대한 자료는 곧 넘겨주지.”
셀바토르 소 공작이 마검사라는 이야기는 쏙 뺀 채 타스가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빼든 말든 그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 오만한 남자는 자신이 질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런 건 추가금이 붙는다.”
오직 돈만을 보고 움직였으니까.
“괴물의 목을 가져오면야 얼마든지 추가금을 내 주지. 금액은 흡족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타스는 뒤를 돌아 선반에서 말려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사이레인에게 던졌다.
가볍게 종이를 공중에서 받아 낸 사이레인이 말려 있는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긴 검은 머리에 짙은 녹색의 눈을 가진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게 바로 셀바토르 소 공작이다.”
자신의 목표란 뜻이었다. 잠시 차가운 표정의 여자가 그려진 초상화를 바라보던 사이레인은 이내 그걸 품속에 넣었다. 목표가 되었으니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착수금 절반은 미리 내놔. 나머지 절반은 돌아와서 받도록 하지.”
돈만 준다면 자신은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게 괴물의 목을 잘라오는 일이라도, 목표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다.
사이레인은 그대로 방을 나섰고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자들이 천천히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
“셀바토르 경.”
라니스 숲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그녀를 맞이한 건 한 남자였다. 짙은 갈색 머리를 한 선량해 보이는 남자는 아셀라를 보자마자 이를 보이며 웃었다.
“셀바토르 경께서 돌아오시다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피스토레도 아는 사람이었다. 은빛 갑주 위에는 신을 나타내는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데다가 과거에 몇 번이고 그를 본 적이 있었으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 단장, 엘로스 오신 루카벨로였다.
“경이 있으니 자리를 비울 수 있었습니다.”
“하하, 뭘요. 그저 신의 검으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걸요.”
엘로스의 눈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동료에게 보내는 신뢰를 담은 웃음이었다.
“황태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피스토레를 발견한 그는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한 점 흔들림 없는 눈으로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셀바토르 경과 테펜텔 경께 들으셨겠지만, 여기서는 극진한 대접은 어려울 것입니다.”
말 안 해 줬는데……. 잠시 피스토레는 눈을 껌뻑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 말을 꺼내 봤자 위태로운 건 자신이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같이 커 온 아셀라,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만나 고작 며칠을 같이 있었지만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테펜텔. 그 사이에서 약자인 피스토레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습니다.”
“역시, 경들께서 미리 말을 해 주셨군요.”
피스토레의 말을 한 치의 의구심도 없이 믿은 엘로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은 없지만, 불편함이 없게 최대한 좋은 곳에 막사를 준비했습니다.”
엘로스가 피스토레를 안내하겠다는 듯 천천히 발을 뗐다.
자연스레 피스토레와 아셀라, 테펜텔은 엘로스의 뒤를 따라 천막들 사이를 걸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과 린체 기사단 깃발이 휘날리는 사이를 걷자 시선이 집중됐다. 좋은 시선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을 듣지 않았던가. 함구령이 내려져 몇 명만 알고 있는 소문일지라도 엘로스의 귀에도 닿았다.
그랬던 피스토레가 최전방에 나타났다. 기사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피스토레가 에타이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황궁에 있으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피스토레였다. 하지만 최전방에서는…….
‘심약하고도 나약한 미래의 황제.’
어쩐지 황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와 귀족들의 시선 같아 피스토레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굽혔다. 어릴 적 황궁 복도에서 우연히 들었던 귀족들의 속삭임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깨를 펴.”
순간 그 위에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한 발 뒤에서 따라오던 아셀라가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한 채, 작게 속삭였다.
“실수는 만회하면 돼. 누구나 다 실수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가 보였던 행동은 전쟁터에 처음 나오는 놈들이라면 다들 보이는 행동이야.”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누구나 다 보이는 행동이라고. 기절은 고상한 축에 속한다고 했었나.
“그리고 이번엔 처음부터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테펜텔도 있고.”
아셀라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번 기회에 만회하면 돼.”
“잘 할 수 있을까……. 너도 알지만 내 검 실력은 좀 슬프잖아.”
“괜찮아.”
아셀라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어쩐지 안심이 되기 시작해 피스토레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잠깐이었다.
“너는 다른 용도로 이용할 거니까. 검술은 기대도 안 했어.”
“다른 용도? 잠깐, 아셀라. 그게 뭔데?”
“네가 뛰어난 거.”
“어……. 어?”
“너도 잘 알잖아.”
도대체 내가 뛰어난 게 뭐지. 지식인가? 하지만 전쟁터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전술을 알고는 있었지만, 뒤에 셀바토르 소 공작이 있지 않은가. 그녀는 전술도 경험도 뛰어난 여자였다. 어떤 능력으로 저번의 실수를 만회시킨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피스토레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엘로스는 한 천막에 도착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천막보다 크고 좋아 보이는 천막은 피스토레를 위한 것이었다.
“아, 단장님! 오셨습니까.”
천막 앞을 지키고 있던 검은 머리의 기사가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크레시벨 경.”
아셀라가 이름을 부르자, 크레시벨의 입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렸다. 크레시벨이라 불린 남자는 마치 강아지 같은 온순한 인상이었다. 눈도 동그랗고 해맑아 보이는 것이 사람의 호감을 끌어냈다.
“여기입니다. 오늘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꾸며 놨습니다.”
아이처럼 밝은 목소리도 한몫하는 듯했다. 황궁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안은 꽤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먹거리나 잠자리를 가리는 건 아니었기에, 피스토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크레시벨은 밝은 목소리로 피스토레에게 이곳저곳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크레시벨.”
“오! 왔냐.”
워낙 밝은 이미지여서 그런가, 어딜 가든 크레시벨은 환영받았다.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져 피스토레는 줄곧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저렇게 밝은 성격이었더라면 아버지는 자신을 조금 더 좋게 봐주지 않았을까?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크레시벨 경.”
“예, 황태자 전하.”
“경은 린체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두 곳에서도 환영받는군.”
“아, 네!”
우렁차게 대답하며 크레시벨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다들 집의 막둥이를 닮았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몇몇 분들은 외동에 다른 분들은 자기가 막내인데 이상하죠?”
어쩐지 인기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린체 기사단에서도 아직 막내급이긴 하니 뭐 불만은 없습니다. 이렇게 황태자 전하를 모실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고요.”
“흐음.”
안내가 끝나고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거기에는 아셀라와 테펜텔, 그리고 엘로스가 커다란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테이블 위를 꽉 채울 정도로 큰 지도는 여기 오기 전 피스토레가 봤던 지도보다 더욱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피스토레를 따라온 크레시벨은 천막 밖에서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이내 문을 꼼꼼하게 닫았다.
“크레시벨 경은 참여하지 않는 건가?”
“아직 저놈은 이런 데에 올 능력이 없지.”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아셀라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녀의 시선은 온통 지도에 쏠려 있었다. 린체 기사단과 테센트루 성기사단이 있는 위치, 그리고 라니스 숲의 수색 경로가 상세하게 적힌 지도를 내려다보며 아셀라는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점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동쪽 수색이 빠르게 진행되었군요.”
아셀라의 말에 엘로스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네, 다행히도 숲을 잘 아는 약초 채집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라니스 숲은 오래된 숲인 만큼 주변에 숲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분쟁을 피해 자리를 비웠는데, 아직 남아 있던 몇이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은 알지 못하더군요. 여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라니스 숲에서 쓸 만한 약초는 주로 동쪽에서 자라났다. 더 들어가면 비싼 값에 팔리는 약초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안쪽을 알지 못했다. 숲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몬스터나 흉포한 동물들을 마주칠 수 있었으니까.
실력이 좋고 오랫동안 일한 채집가들 역시 여기까지가 한계였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진척이었다.
“동쪽은 수색에서 완전히 제외해도 되겠군요.”
아셀라는 웃으면서 동쪽에 수색 완료를 뜻하는 푸른 깃발을 꽂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꽤 괜찮은 수확을 얻었다. 지도에는 몇 개의 푸른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좋아, 그럼 작전 회의를 할까.”
“좋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린체 기사단장인 아셀라와 부기사단장인 레센, 그리고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단장인 엘로스와 부단장인 바티네, 마지막으로 피스토레였다.
테펜텔은 용병이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해서 그런지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녀는 현명하게, 필요할 때 외에는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잠시 테이블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피스토레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면서도 제가 필요하다 싶을 때 슬그머니 끼어들어 의견을 던졌다.
“숲에서 에타이들을 끌어내자고요?”
“그래.”
바티네가 알 수 없는 얼굴로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저번에도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단장님, 그놈들은 숲에서 나오지 않을 겁니다. 숲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오면 자신들이 죽는다는 걸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 에타이들은 숲을 나오려 하지 않겠죠.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셀라의 눈이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우리에겐 이제 이놈이 있으니까요.”
불경스러운 시선이 닿은 곳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열심히 낑낑거리며 외우고 있는 피스토레였다.
“어……. 나?”
쏟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든 피스토레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황태자 전하를 말입니까?”
“네.”
아셀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아직도 미소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분명 저쪽은 황태자가 왔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일부러 감추지 않았으니까. 수도에서는 거창한 행렬도 했고, 테펜텔을 불러 중간까지 마중을 나오게 했다. 거기다 지금도 피스토레의 천막 위에는 황가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저쪽은 열세에 몰려 있고, 이게 마지막이지.”
아셀라의 손가락이 천막 한쪽을 가리켰다. 라니스 숲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와중에 판을 뒤집을 만한 패가 나타났어.”
이번엔 손가락이 반대쪽에 있는 피스토레를 가리켰다.
“위험을 감당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겠지.”
그러니까, 아셀라의 말은.
“……황태자를 미끼로 삼아 에타이들을 불러내자고?”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테펜텔이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래.”
“…….”
당당한 대답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야, 야…….”
피스토레가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라는 눈으로 아셀라를 바라보자, 다시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위험한 일을 시킬 생각은 아니야.”
“미끼는 필연적으로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엘로스가 걱정스레 대꾸하자 그녀는 테이블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초상화였다. 피스토레가 성인이 되던 날 전국에 배포된 그의 초상화. 고급스러운 녹색 배경에 그려진 피스토레는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당하고도 우람하게 그려져 있었다.
“세월의 흐름은 아닌 것 같고.”
테펜텔이 빠르게 초상화와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동일인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미묘하게 달랐다. 차라리 듬직한 형과 아픈 동생 정도로 보는 게 나을 정도였다.
“황제의 입김이 좀 닿았지.”
어깨를 으쓱하며 아셀라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대충 머리색과 눈 색이 비슷한 놈을 골라 대역을 세우도록 합시다. 저놈 복장을 입히고 황가의 깃발 아래에 두면 에타이들은 속아 넘어갈 테지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피스토레의 모습은 이 초상화니까. 피스토레가 나약하다는 진실을 아는 놈들이라도 멀찍이서 진짜와 가짜를 대번에 구분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 살아 있는 에타이들 중에서는 피스토레를 직접 본 놈은 없었다.
그렇게 말을 이으며 아셀라는 웃었다.
“실제로 황태자는 여기에 있으니 들판으로 기어 나오겠지.”
들판, 아니 숲의 입구까지만 끌어내도 성공이다.
“그럼 진짜 황태자 전하는 여기에 안전하게 계시면 되겠군요.”
바티네가 안도하듯 말하자, 아셀라는 그저 미소를 머금더니 손을 뻗어 에타이들의 깃발을 숲의 입구까지 한 번에 쓸었다.
“그리고 나는 숲을 수색할 겁니다.”
“숲을요? 아, 설마.”
무언가를 짐작한 듯 엘로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셀라는 웃음을 머금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제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마법사의 저택에서 가져온 수색 마법석입니다.”
상자 안에는 작은 마법석이 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아셀라가 수도까지 올라간 이유 중 하나였다.
빈번이 라니스 숲 요새 수색에 물을 먹은 마법사들은, 독이 오를 대로 올라 탐지 마법을 강화했고, 고위 마법사들 몇이 밤과 낮,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갈아 탐색 마법석을 만들었다.
연이은 야근과 계속된 야근 그리고 또 이어진 야근으로 마법사들은 지쳐 쓰러졌지만, 그래도 결과물이 꽤 그럴싸했다.
“몇 번 쓰지는 못합니다. 거기다 정확한 방향까지 알려 주진 못해요.”
“그런…….”
“급작스럽게 만든 거니까요. 하지만.”
아셀라가 라니스 숲이 그려진 지도 위에 마법석을 올리고 마력을 쏟아붓자 작은 돌멩이가 빛나기 시작했고, 마치 물에 젖듯 지도 위로 빛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지역을 잡아 주는 정도는 됩니다.”
라니스 숲 남서부 지역이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서부 지역.”
바티네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만 되어도 수색 지역이 확 줄어든다.
그런데도 현실적인 문제는 남아 있었다. 이들은 조금만 냄새가 풍겨도 도망가는 녀석들이 아닌가. 그런 녀석들을 잡으려면 빠르게 그리고 한 번에 덮쳐야 했다.
“나와 테펜텔, 그리고 수색에 능한 자들을 뽑아 당장 내일부터 수색을 시작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엘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바티네가 말을 이었다.
“크레시벨 경만으로는 황태자 전하의 호위가 불안하니 몇을 더 뽑는 것도 좋겠군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갑자기 대화에 피스토레가 끼어들었다. 그는 눈치를 보는 것도 없이 바로 본론을 쏟아 냈다.
“나도 수색에 참여하고 싶네.”
주위가 조용해졌다. 바티네와 엘로스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고, 테펜텔의 눈은 가늘어졌으며 레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셀라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 수색에 내가 도움이 될 거야.”
피스토레의 푸른 눈은 마법석에 반응해 빛나고 있는 남서부 지역에 고정되어 있었다.
“분명해.”
그의 단언에 모두 슬그머니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종국에는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말에 자신들이 나서기는 애매하니, 친분이 있고 최종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말려 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셀라의 대답은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정말로 할 수 있겠어?”
아셀라의 물음에 피스토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로?”
“그래.”
이어지는 단언에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를 수색대에 포함시키도록 하지요.”
“예?”
마법석을 거둬 상자에 도로 넣은 아셀라는 자신의 부기사단장에게 상자를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
“루카벨로 기사단장님과 바티네 경은 적당한 대역을 골라 가짜를 만들어 전면전에 참여해 주십시오. 눈길을 끌기 위함이니 적당히 싸우다 퇴각해 주시고요.”
이번에 시선은 자신의 부기사단장인 레센에게 닿았다.
“레센 경은 슬그머니 소문을 퍼트려 주시길 바랍니다. 황태자는 의욕에 넘쳐 선봉에 서고 싶어 한다고 말이죠. 소문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으면 나랑 불화가 있다고도 퍼트리는 것도 좋겠군요.”
“단장님이 있으면 아무래도 에타이 놈들이 경계를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테펜텔.”
“수색대라고? 알았어. 저런 숲은 그나마 내가 가장 익숙하지.”
테펜텔이 위로 손을 쭉 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롬벨은 평야가 많은 르카디우스 제국과 달리 우거진 숲이 많았다.
상황이 하나둘씩 정리되었지만, 아직 남은 의문이 있었다. 결국 엘로스가 입을 열었다.
“셀바토르 경. 황태자 전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수색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피스토레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말했다. 그나마 이 자리에서 아셀라와 비슷한 위치에 황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 그뿐이었으니까. 거기다 그의 성격상 이런 일을 지나칠 사람도 아니었다.
“모두가 불안하다는 건 압니다.”
아셀라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분명 황태자 전하는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겁니다. 부디 나를 믿고 따라와 주세요.”
그녀의 말에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감돌던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아셀라가 여태 이뤄 온 업적들이,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진행하도록 하죠.”
엘로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셀라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뭐, 추후에는 황태자 전하를 믿게 될 겁니다.”
확신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는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