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9)

외전1.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꽃의 이름은>

발단의 시작은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그건 처음 보는 꽃이었다. 비록 셀바토르 공작저에 오고 나서 처음 맞는 봄이었지만, 그간 레슬리는 정원을 자주 드나들었고 정원에 핀 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명이나 되는 정원사들이 철저하게 계절에 따라 정원을 관리했고, 꽃들과 나무들은 자신의 자리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런 셀바토르 공작가 가장 구석진 곳에 들꽃이 핀 것이다.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피었을까. 하얗게 핀 꽃은 산책 나온 레슬리의 발걸음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마델. 이거 봐.”

레슬리가 마델의 이름을 부르며 치맛자락을 붙잡자, 그녀 역시 레슬리의 옆에 쪼그려 앉아 꽃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꽃이야.”

레슬리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꽃을 가리켰다. 레슬리의 손끝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아, 이 꽃. 숲속에서 피는 꽃이에요. 제 고향 집이 숲이랑 가까워서 저는 어릴 적부터 종종 봤었어요.”

“숲?”

“네. 넬리 숲에 다녀오신 기사님들에게 붙어서 씨앗이 따라왔나 봐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신기하다는 듯 작은 입을 벌렸다. 눈에 반짝반짝한 별이 떠오르는 걸 보니, 무언가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이 꽃 이름은 뭐야?”

“이름……. 이름이…….”

마델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져 보았다. 차마 저 반짝이는 눈동자를 배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억은 마음을 따라 주지 못했다.

“그……게.”

언제나 하얀 꽃, 저 꽃, 이 꽃, 엮어서 문에 걸어 놓으면 이쁜 꽃, 이렇게 불렀던지라 정확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아예 이름을 들었던 적이 없었다.

마델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반짝이던 눈동자가 점점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안 돼!’

안 된다. 절대 아가씨의 눈이 어두워지고 저 작은 어깨가 축 처지는 걸 볼 수 없었다. 아가씨의 좌절을 막는 것이 바로 셀바토르 공작저 사용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아가씨. 우리 직접 알아보러 갈까요?”

마델은 레슬리를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건 절대 자신이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가씨가 스스로 알아내면 교육에 좋고, 쉽게 잊지 않으실 테니까 이러는 거였다.

“그럼 책……? 책이면 식물도감을 읽으면 되려나?”

레슬리의 물음에 마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알 만한 분들에게 직접 물어보러 가는 거예요. 어때요?”

탐험 같을 거예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잽싸게 화분을 가져온 마델은 조심스레 꽃을 옮겨 심었다.

“이제 알아보러 갈까요?”

“마델.”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서올리였다.

“제나 집사님이 휴가 순서 때문에 말하고 싶은 게 있으니 지금 올라오라는데.”

제나의 말에 마델의 눈이 흔들렸다. 휴가, 그건 사용인에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특히 이번에는 고향 축제를 노리고 휴가를 신청해 놨던지라 순번에 대해서는 꼭 제나에게 할 말이 있었다.

“마델, 다녀와.”

마델의 흔들리는 동공을 본 레슬리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음,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물어볼게. 혼자 해도 괜찮아.”

“하지만…….”

“진짜 괜찮아.”

레슬리는 괜찮다는 듯 살짝 주먹을 쥐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마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델이 자리를 비우고, 화분을 든 레슬리는 꽃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예쁜 꽃. 마델의 말대로라면 숲에서부터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텐데.

‘어쩐지 나 같다.’

레슬리는 조심스레 꽃잎을 어루만졌다. 하얀 게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제법 닮아 보였다.

‘이름을 찾고 나면 내 방에서 키울까.’

넓은 방에서 뭐든 키워도 된다고 하셨으니 꽃 한 송이 정도는 무리가 없겠지. 예쁜 화분을 사 달라고 졸라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이름을 알려 줄 사람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오라버니.”

레슬리가 찾아낸 첫 번째 타자는 베스라온이었다. 쉽게 답을 줄 수 있는 정원사들이 눈치 빠르게 숨어 버린 탓에 연무장으로 가던 베스라온이 걸린 것이다. 레슬리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응?”

동생의 보챔에 베스라온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혹시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아세요?”

레슬리가 손에 들린 꽃을 내밀자 시선이 자연스레 꽃에 닿았다. 하얗고 어딘가 눈에 익은 꽃. 하지만 이름은 몰랐다.

“으음,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종종 숲길에서 봤지. 수도 외각 쪽에서도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베스라온이 미안하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알지 않으실까?”

아버지! 잠시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레슬리가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어린 동생이 귀여운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춘 베스라온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아시겠다.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용병단에서 오래 생활하셨으니까. 연무장에 계신다니 나와 함께 가자.”

“네, 좋아요!”

신난 레슬리는 웃으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동생의 작은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던 베스라온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꽃은 어디서 난 거니?”

“정원 한구석에 피어 있었어요. 처음 보는 꽃이라 신기해서요. 마델에게 물어봤는데 마델은 숲에서 봤다고만 말을 해 줘서요. 너무 예뻐서 제 방에서 키워도 될 것 같아요.”

레슬리는 신난 듯 웃으며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 냈다. 레슬리의 환한 모습에 베스라온은 작게 안도의 숨을 흘렸다.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면 스페라도 후작가의 그늘이 조금 더 사라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아버지!”

연무장에 도착한 레슬리가 발을 빠르게 놀려, 대련이란 이름으로 셀바토르 기사들을 괴롭히고 있는 사이레인에게 달려갔다.

“우리 딸!”

언제 자신이 누구를 괴롭혔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맞이했다. 방금까지 멱살을 잡혔던 기사가 투덜거리며 노려보았지만, 발 밟힘 한 번에 다시 눈물진 눈으로 미소를 가득 띠었다.

번쩍 안아 든 사이레인에게 레슬리는 조심스레 꽃을 내밀었다.

“아버지, 있잖아요. 이 꽃의 이름을 아세요?”

레슬리의 질문에 사이레인은 물론 뒤에 있던 셀바토르 기사들의 고개가 단체로 기울었다. 자연스레 연무장에 있던 모든 기사가 레슬리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 꽃은…….”

“어, 나 아는데……. 뭐였더라?”

“우리 고향에서는 흰둥이 꽃이라 불렀어요!”

“그건 아무리 들어도 진짜 이름이 아니잖아.”

“이거 말려서 장식해 두면 좋아요, 향이 오래가서.”

“막내딸이 종종 머리에 꽂고 돌아다니던데…….”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무시무시한 얼굴로 꽃을 바라보던 사이레인이 씩 웃었다.

“흠! 레슬리, 이 꽃은 말이다.”

뭔가 알겠다는 사이레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야영할 때 수프에 넣어 먹으면 좋아.”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답에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예쁜 꽃을 수프에 넣어 먹는다고?

“고기랑 소금만으로 수프를 끓이면 씹히는 게 없어서 심심하거든. 그때 이거저것 넣는데, 이 꽃도 주로 넣었지.”

젊었을 적이 생각났는지 사이레인은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고기 같은 경우도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조달해서 잡내가 심한데, 꽃을 넣으면 잡내가 좀 잡히더라고. 씹히는 것도 쏠쏠하고 말이야.”

레슬리가 화분을 꼭 끌어안고 뒷걸음질 치는 것도 모른 채 사이레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푹 끓이면 수프 색이 배서 좀 이상하게 변하는데 그것도 나름 괜찮았지. 마침 잘됐다! 오랜만에 이 아버지가 요리 솜씨를 발휘해 보마. 꽃을 이리……. 레슬리?”

사이레인이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레슬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우리 딸이 왜 사라졌지…….”

왜 레슬리가 사라졌는지 몰라 아쉬워하는 사이레인과 그런 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기사들, 그리고 고개를 젓는 베스라온만이 연무장에 남아 있었다.

***

사이레인의 흉흉한 마수에서 도망쳐 나온 레슬리는 화분을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아버지가 배고프다고 그러면 바타에게 말해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드려야지. 그러면 이 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아버지는 고기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에게 물어볼까.

‘루엔티 오라버니는 어떨까?’

오라버니는 아는 게 많으니 분명 이름도 알고 있겠지. 좋아, 서재로 가자!

레슬리는 당당하게 걷다가 이내 걸음을 멈추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꽃의 이름을 물어봤을 때 루엔티의 반응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꽃은 말이야. 먹으면 키가 자라는 꽃이야.”

그러면서 꽃을 먹이려고 하겠지. 장난 많은 둘째 오라버니는 요즘 들어 더욱 막내를 놀리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루엔티는 아니었다. 차라리 사이레인에게 다시 가지.

서재로 가던 발걸음을 옮겨 다시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이내 세 번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정원에서 차를 즐기고 있는 셀바토르 공작과 제나였다.

“어머니!”

공작의 뒷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셀바토르 공작이라면 꽃을 먹겠다고 하진 않을 테니까.

“레슬리?”

“어머나, 아가씨.”

차를 따라 주고 있던 제나와 공작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나가 환한 웃음과 함께 몸을 숙여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자, 레슬리는 조심스레 꽃을 내밀었다.

“그게요, 꽃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요. 정원에서 찾은 건데 이름을 몰라서요.”

“꽃?”

공작과 제나의 시선이 하얀 꽃에 닿았다.

“이런, 예전에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는군요. 죄송해요, 아가씨.”

제나의 대답에 시무룩하게 레슬리의 고개가 잠시 밑으로 떨어졌지만, 이내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공작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 딸이 귀여운지 공작은 웃음을 머금으며 예쁜 은발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레슬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을 해 주었다.

“그 꽃의 이름은 그란델이란다.”

“그란델.”

드디어 이름을 찾았다! 레슬리는 반짝이는 눈으로 하얀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란델이라니, 이름이 정말로 멋지지 않은가.

‘꽃은 예쁘게 생겼는데 이름은 멋지네.’

방에 두고 매일 물을 줘야지. 그란델이라고 이름도 불러 줄 거야!

“그리고 꽃말은 ‘내가 찾은 행복’이란다.”

이어지는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역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이름도 꽃말도 전부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환호에 젖은 레슬리가 공작의 뺨에 작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그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제나의 목소리가 흘렀지만, 레슬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레슬리의 머릿속에는 꽃들이 만개하고 있었으니까.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놔야지. 어둠이도 친구가 생겨 좋아할 거야!

“오, 레슬리.”

행복감에 들뜬 레슬리를 멈춘 건 다름 아닌 루엔티였다. 서재에 가려는 듯 책을 든 루엔티의 시선이 꽃에 닿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아이벤 꽃이네. 어디서 났어?”

“이건 그란델이에요, 오라버니.”

아이벤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레슬리는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고 루엔티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란델은 무슨. 그거 숲 쪽에 자주 피는 아이벤이잖아. 말린 가루를 종종 실험에 쓰거든. 그래서 내가 잘 알지. 꽃말도 아는걸. 평범, 길가의 행운.”

루엔티의 대답에 레슬리의 고개가 더욱 옆으로 기울었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 아셨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오라버니가 잘못 아셨어요. 이건 그란델이에요.”

레슬리의 환한 웃음에 루엔티는 눈을 깜빡였다. 루엔티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아이벤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만지던 재료가 아니던가. 스스로 말려서 가루를 내 써 본 적도 있었다.

‘확실치 못한 지식은 위험하지.’

어디서 그란델이라는 이름을 주워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루엔티는 레슬리의 오라버니로서 지식을 제대로 잡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게 바로 오라버니가 할 일이 아니던가. 이렇게 하다 보면 어린 동생도 제 둘째 오라버니를 더욱 존경하겠지.

‘형한테 질 수는 없지.’

루엔티는 덧니가 보이게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레슬리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니라니…….”

“어머니가 그란델이라고 말해 주셨어요. 꽃말도 내가 찾은 행복이래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보란 듯 꽃이 든 화분을 루엔티에게 내밀었다. 레슬리가 내민 꽃보다는 어머니, 그 한 단어가 루엔티를 굳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그란델이라고 하셨어?”

“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루엔티답지 않게 얼굴이 진지한 것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어머니가 잘못 아신 걸까. 레슬리는 슬그머니 시선만 올려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께 가서 다시 여쭤볼까요?”

“아, 아니!”

레슬리의 말에 루엔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미친 듯 흔들더니 재빠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잘못 봤네! 그란델, 그란델이 맞아! 꽃말도 내가 찾은 행복이야. 내가 잘못 봤네.”

거봐, 역시 루엔티 오라버니가 잘못 안 거야. 어쩐지 루엔티의 눈동자가 떨리는 느낌이었지만, 레슬리는 새로 맞이한 친구를 꼭 끌어안고 뿌듯하게 웃었다.

‘아이벤의 명칭을 바꿔야 해. 황궁, 황궁으로 가자.’라고 중얼거리는 루엔티를 지나쳐 레슬리는 달뜬 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둬야지. 물도 매일매일 직접 줄 거야! 매일 물만 마시면 질릴 테니까 가끔은 주스도 줘야지.

그란델은 어떤 주스를 좋아할까. 나처럼 사과 주스를 좋아하지 않을까. 코코아도 줘 볼까. 괴상한 생각을 하며 레슬리가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

그란델이 날아올랐다. 정확히는 턱을 보지 못한 레슬리의 발이 걸렸고, 손에 들려 있던 화분이 반동으로 하늘 위로 올라갔다. 레슬리는 하늘을 나는 그란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꽃이 하늘을 날기도 하는구나.

“레슬리, 위험해!”

대련이란 이름을 뒤집어쓴 괴롭힘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가던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간다, 레슬리이이이!”

거구에게 맞지 않게 두 사람은 날렵했다.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안아 들었고, 사이레인은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화분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아주 조금 늦었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꽃이 바닥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비틀거리던 사이레인이 꽃을 짓밟았다.

“힉!”

놀라 날렵하게 발을 뗐지만, 이미 꽃은 처참하게 짓뭉개져 있었다.

“레, 레슬리.”

당황한 사이레인이 베스라온의 품에 안겨 있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반짝이던 라일락색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잠시 꽃을 내려다보던 레슬리가 환하게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는 저를 도와주시려고 했던 거잖아요. 제가 실수해서 그런 거니까…….”

하지만 내용과 다르게 레슬리의 목소리는 정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레슬리의 머릿속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그란델과 나눴던 추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거란 걸 그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는 괜찮…….”

결국, 레슬리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

‘그란델이 죽었어…….’

이불 속에서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란델은 죽지 않았을 텐데.’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지금 레슬리의 머릿속에서도 그란델과의 추억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레슬리 추억 속의 그란델은 레슬리처럼 사과 주스를 좋아하고 아침의 햇빛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변해 있었다.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화분으로 옮겨 심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당초 레슬리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란델은 셀바토르 공작저 정원 한편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생각이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자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일로 울면 안 되는 건데, 자꾸만 눈은 레슬리의 의사를 배신했다.

결국 레슬리는 굳어 버린 사이레인과 자신을 달래 주는 베스라온을 뒤로하고, 방으로 달려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른 눈물을 멈추고 나가야지. 나가서 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레슬리가 눈물을 훔치며 필사적으로 멈추려 하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나긋나긋한 제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슬리 아가씨. 제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드, 들어와요!”

레슬리는 소매로 눈가를 마구 비비고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긴 했으나, 이미 레슬리의 꼴은 엉망이었다. 퉁퉁 부어 버린 눈과 훌쩍이는 코,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쓴 탓에 전부 엉켜 있는 머리.

레슬리의 모습을 본 제나는 작게 웃더니 뒤이어 마델이 들고 온 따스한 물로 수건을 적셔 직접 레슬리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까 많이 놀라셨지요?”

“으응, 아니에요.”

레슬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사이레인이 자신을 위해 해 준 일인데, 그것 가지고 우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 아니던가. 거기다 사이레인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아끼는 꽃이 그리 됐으니 당연히 눈물이 나죠. 저희 아들놈도 간혹 그러는걸요.”

제나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고, 레슬리의 눈이 제나에게 닿았다. 동그래진 시선이 정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식물을 키우는 게 취미인 놈이거든요. 손녀가 실수로 화분을 깨트리면 나이도 많은 놈이 구석에 박혀 훌쩍거린답니다. 무엇이든 애정을 줬던 게 떠나는 건 슬픈 일이에요. 나이가 많든 적든, 그것이 실수건 고의건 간에요.”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는 제나를 보고 레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에 차가움이 느껴졌다. 어느새 제나의 손에 수건 대신 얼음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우리 아가씨, 눈이 부으면 안 되는데.”

“맞아요.”

제나의 말에 잽싸게 얼음주머니도 챙겨 온 마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내일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답니다.”

“이미 제 초상화는 있는데.”

얼마 전 단독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던가. 사이레인의 욕심으로 그린 초상화다 보니 초상화는 벽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 초상화를 보고 고민하다가 자신의 집무실에 걸려 있던 거대한 세계지도를 내리고 그 자리에 레슬리의 초상화를 걸었다. 이래도 괜찮은 거냐고 마침 옆에 있던 사이레인에게 묻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도는 걸어 놔 봤자 그게 그거지만, 레슬리, 네 초상화는 걸어 두면 빛이 나지 않니!’

다시 그 말을 떠올리자 부끄러웠다. 이번에는 반대쪽 벽면에 걸 초상화를 그리는 걸까 생각하는데, 제나가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가족 초상화랍니다.”

가족 초상화! 레슬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저절로 스페라도 후작가에 걸려 있던 초상화가 떠올랐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엘리가 가운데에 앉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스페라도 후작 부인과 근엄하게 서 있는 스페라도 후작. 누가 보아도 완벽한 가족 초상화였다. 당연히 레슬리는 거기에 없었지만.

“그럼 아버지랑 어머니랑 오라버니들이랑 다 같이 그리는 건가요?”

“그럼요!”

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레슬리의 얼굴이 덩달아 환해졌다.

“그러니 눈이 붓지 않게 해야겠죠. 초상화에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그려지면 슬프잖아요.”

잠시 레슬리는 눈이 퉁퉁 부은 초상화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첫 가족 초상화인데 그렇게 그려지면 슬프겠다.

‘이러면 되는 건가?’

마델이 가져온 얼음주머니를 눈에 올리며 가라앉기를 바라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가 다 됐나 보군요.”

“우리 직접 가서 봐요, 아가씨!”

제나가 몸을 일으키고 마델 역시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준비일까. 레슬리는 그 손을 잡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조심, 조심!”

방을 나서자마자 밑층이 소란스럽다는 걸 느꼈다. 긴 복도를 지나고 몇 개의 방을 지나고, 주방을 지나 도착한 곳은 정원 한쪽이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레슬리는 마델의 손을 잡고 그녀와 제나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왜?”

“가 보시면 알 수 있어요!”

제나도 마델도 웃기만 할 뿐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 레슬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마자 레슬리의 입술은 쑥 들어갔다. 라일락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면서 웃음으로 이내 휘었다.

“와아아!”

꽃밭이었다. 분명 레슬리가 기억하기로는 이 부근은 잔디와 관목들로만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새하얀 꽃밭이 펼쳐졌다. 어떻게 단시간 내에 이렇게 많은 꽃을 심어 둔 걸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레슬리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이것 봐! 그란델이야.”

그것도 오늘 레슬리가 찾은 하얀 꽃들이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공작이 서 있었다.

“우리 딸, 마음에 드니?”

공작이 제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웃었다. 레슬리는 마델의 손을 놓고 바로 공작에게 달려가 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꽃들을 가져오고 심고 있었다. 아까의 소란스러움은 이 일 때문인 듯했다.

“전부 그란델이에요?”

“아니, 그란델이 주긴 하지만 그 외에도 숲에서 피는 꽃들을 몇 개 더 섞어 놨지.”

공작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하얀 꽃들 사이사이에 처음 보는 꽃들이 섞여 있었다.

“이름은 앞으로 같이 알아보자꾸나.”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그리고 또 내일도, 자신은 꽃의 이름을 찾는 모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슬리.”

꽃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사이레인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까 깨진 화분과 똑같은 화분이 들려 있었고, 거기에는 그란델이 피어 있었다. 레슬리가 이름을 찾아 헤매고, 사이레인이 실수로 밟아 버린 그 그란델이었다.

“아까 아버지가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많이 놀랐지?”

사이레인은 리본이 둘린 화분을 내밀었고, 화분을 받아 든 레슬리는 꽃을 살펴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은 밟혔던 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 어떻게 꽃이…….”

“아버지가 우리 딸을 위해서 못 할 게 뭐가 있겠니!”

그렇게 말하며 사이레인은 우쭐거렸다.

“사제를 불러왔단다.”

뒤에서 셀바토르 공작이 옅게 웃으며 레슬리에게 답을 알려 주었다. 레슬리가 방에 박혀 있는 동안 다들 레슬리를 달래 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울면 안 되는데 레슬리의 눈에 다시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아까처럼 놀라고 슬퍼서 나는 눈물은 아니었다.

“진짜 기뻐요!”

레슬리는 그란델을 꼭 끌어안았다. 내일을 위해 울면 안 되는데 어쩐지 눈물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숨바꼭질>

바다다. 레슬리는 어둠이를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깜빡였다. 베스라온이 말했던 별장으로 첫 소풍을 온 레슬리는 거대한 호수 앞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이건 바다가 분명했다. 이렇게 넓은데 바다가 아니라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여기는 호수랬는데.’

분명 베스라온은 호숫가에 있는 저택이라고 말해 주면서 뱃놀이를 할 수 있다고 넌지시 덧붙이지 않았던가.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얕은 곳도 있다고 했었지. 그러니 이건 호수가 맞을 텐데…….

‘이렇게 큰데 바다가 아니라고?’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바다는 책에서 엄청나게 넓다고 적혀 있었다.

슬그머니 손을 든 레슬리는 어둠이를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네모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조그마한 네모 속 호수의 모습은 책에 실려 있는 바다 삽화와 얼추 비슷해 보였다.

‘역시 이건 바다인 거야.’

바다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다면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큰 호수라는 걸 바로 알았겠지만, 레슬리는 바다는커녕 호수조차 본 적이 없었다. 책에서 알게 된 얕은 지식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전부였다.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놀릴 리는 없는데.’

레슬리의 고개가 다시 기울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베스라온이 아니던가. 다시 레슬리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큰데 바다가 아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큰 곳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연달아 레슬리의 고개가 이곳저곳으로 기울었다. 바다일까, 아닐까.

아, 맞다. 소금! 책에서 바다는 소금을 품고 있어서 물이 짜다고 적혀 있던 게 이제야 떠올랐다. 그래서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만든다고 했었지.

‘맛을 보면 되겠구나.’

레슬리는 조심스레 호숫가로 다가갔다. 바로 물 앞에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자, 물에 레슬리의 얼굴이 비쳤다. 은발을 예쁘게 땋아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 핀으로 장식하고, 구름보다 부드러운 옷감으로 지어진 원피스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이제 낯선 것이 아니었다.

레슬리는 어느새 물에 비친 자신에게 집중했다.

‘얼굴에 살이 올랐네. 머리는 윤기가 나고.’

그리고 행복한 얼굴이야. 괜스레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매만졌다. 후작가에서의 과거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많이 달라졌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잠시 뿌듯하게 물에 비친 자신을 내려다보다, 레슬리는 몸을 조금 뒤로 물리려고 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위험하니까. 그 전에 물만 조금 손으로 떠서…….

“레슬리 아가씨! 위험합니다!”

“히익!”

풍덩―! 하늘은 레슬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갑자기 들려온 거대한 외침에 놀라 레슬리는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아가씨가 물에 빠지셨다!”

“도, 도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레슬리를 물에 빠트린 셀바토르 기사들이 놀라 외치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전부 호숫가로 달려왔고, 그대로 호숫가로 뛰어들었다.

“후하.”

다행히도 레슬리가 빠진 곳은 발이 닿을 정도로 낮은 곳이었다. 애초에 베스라온이 알려 주었던, 안전하게 얕은 곳으로 갔으니까.

고개를 물 위로 빼꼼 내민 레슬리는 신기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수십 명이나 되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호수 가장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진풍경. 저절로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뒤늦게 공중에서 레슬리를 발견한 기사들이 눈빛으로 말했다.

‘아가씨,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응, 여기는 얕은 곳이라…….’

레슬리가 똑같이 눈빛으로 대답하자 기사들이 어딘가 슬프고도 다행이라는 미소를 지었다. 풍덩, 풍, 풍, 풍덩! 연이어 바보들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뱃놀이하고 싶었는데.”

레슬리가 의자 위에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레슬리의 머리를 말려 주고 있던 마델이 잠시 손을 멈췄다.

“그렇지만 오늘 물에 빠지셨잖아요. 뱃놀이는 내일 하도록 해요, 아가씨.”

“응…….”

레슬리가 물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로 드넓은 호숫가 전체에 울타리가 쳐졌고 당연히 뱃놀이는 중지되었다.

‘레슬리가 빠지지 않도록 호수에 전부 부유 마법을 걸어!’

‘안전이 최고란다, 레슬리.’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은 안전 최고를 외치기 시작했고.

‘레슬리, 이거 가지고 있어. 아니다, 너는 그냥 내 옆에만 있어라. 알겠지?’

루엔티는 어디서 났는지 몇 개나 되는 마법석을 목에 걸어 주었으며.

‘전부 연무장으로 집합.’

공작은 웃으며 기사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얼굴로 공작을 따라간 기사들을 떠올리니 어쩐지 미안해져, 레슬리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머니가 경들에게 심하게 하진 않겠지?”

레슬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다시 마델의 손이 멈추었다.

“그, 그렇겠지요!”

이미 연무장에서는 애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서올리가 잽싸게 몸을 움직여 아직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있지, 마델. 그럼 오후에는 뭘 해?”

오후에는 뱃놀이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레슬리가 물에 빠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자연스레 취소되었다.

레슬리와 놀아 줄 세 사람은 지금 호수 근처에 안전망과 함께 마법을 거느라고 바빴고, 마지막 한 사람은 기사들을 울리느라고 분주했다. 이대로라면 첫 소풍날이 어영부영 지나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서올리가 창문 고리를 걸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숨바꼭질은 어떠세요?”

“숨바꼭질? 그게 뭐야?”

“아이들이 주로 하는 놀이인데, 술래는 찾고 나머지 사람들은 숨는 거예요.”

서올리는 앉아 차근히 레슬리에게 방법을 알려 주었다. 마델 역시 레슬리의 눈이 빛나는 걸 보자 함께 들뜨기 시작했다.

***

“이거 재밌어! 정말 재밌어.”

막 세탁을 마친 하얀 천 사이에서 나타난 레슬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얀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재밌다니 다행이에요, 아가씨!”

마델과 서올리 그리고 저택에 있는 하녀들이 레슬리를 따라 웃음을 머금었다. 세탁 바구니 속에 숨어 버린 레슬리를 찾느라 별장 정원을 다 뒤졌지만 이렇게 즐거워하는 레슬리를 보니 힘든 건 전부 잊혔다.

“다음에도 내가 숨으면 안 돼?”

레슬리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첫 시작은 레슬리에게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레슬리가 숨고 하녀들이 찾는 것으로 했는데, 아무래도 숨는 데 재미를 들려 버린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레슬리는 작은 몸을 이용해 거대한 항아리나 빨래들 사이, 풀숲과 같은, 어른이 찾기 힘든 곳에 숨었고,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하녀들은 지쳐 거친 숨을 내몰았다. 그리고 모든 하녀의 체력이 바닥을 보일 때쯤.

“다들 뭘 하는 거지?”

네 사람과 셀바토르 기사단이 돌아왔다. 공작은 어딘가 시원한 얼굴이었고, 기사단은 기절한 동료들을 업고 있었으며, 베스라온과 사이레인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호수에 빠지게 되면 자연스레 몸이 뜨게 만드는 마법을 건 루엔티는 지쳐 나무 그늘 밑으로 쓰러졌다.

“숨바꼭질이요!”

“네…….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 허억, 습니다.”

홀로 신나 환하게 웃는 레슬리와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하녀들의 얼굴을 보고 사이레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우리도 참여해 볼까?”

사이레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레슬리와 하녀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잠시 졸음이 와서.”

셀바토르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정원 한쪽에 마련된, 라틴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작을 제외, 셀바토르 저택의 모든 사람이 레슬리를 찾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넷.”

정원 중앙에 심어진 거대한 나무 밑에서 사람들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숫자를 외치는 바람에 온 정원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본격적으로 잠을 자는 셀바토르 공작에게 천을 덮어 준 제나가 웃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안 되겠는지, 고개를 젓다가 잠시 귀마개를 찾아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열! 찾는다!”

순식간에 수십이나 되는 사람들이 정원으로 흩어졌다. 이미 레슬리와 몇 번 숨바꼭질을 한 하녀들은 노련하게 레슬리가 숨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고, 기사들은 레슬리가 올라가지 못할 높이의 나무 위나 말먹이 풀 근처를 찾는 등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사이레인과 베스라온도 열심히 수풀을 뒤지며 레슬리를 찾았고, 루엔티는 은근슬쩍 마법을 쓰려다가 들켜 퇴장당했다.

“후하, 이번엔 우리 아가씨 제대로 숨으셨는데?”

자칭 숨바꼭질의 달인인 마델이 턱에 맺힌 땀을 훔치며 말하자, 서올리가 캡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정말 못 찾겠네.”

다들 웃으며 레슬리는 숨기 천재라고 떠들었다. 사이레인 역시 ‘우리 딸은 쿠키도 잘 올리고~ 숨기도 잘하고~’ 하는 이상한 노래를 즉석에서 만들어 부르고 다녔다.

그러기를 한참. 레슬리는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떠들던 이들도 얼굴을 굳혔고, 늘어져 있던 사람들 역시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 숨으신 거지?”

레슬리가 숨은 지 30분이나 지났다. 모두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30분, 30분이라니! 30분이라면 레슬리가 간식을 다 먹고 주스를 한 컵 마신 후에 낮잠이 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가씨, 여기 맛있는 핫케이크가 있어요! 밥~ 간식~”

마음이 조급해진 마델은 주방에서 핫케이크를 들고 와 레슬리를 찾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구역을 나눠 레슬리를 찾았다.

“찾았나?”

“아니, 못 찾았습니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안 그래도 험악한 사이레인이 얼굴을 찡그리자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셀바토르 공작저에 막 들어온 신입 하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며 몸을 떨었다.

“안 되겠다, 루엔티 놈을 깨워라. 마법으로…….”

“아버지.”

베스라온이 나지막이 사이레인을 부르며 한 곳을 가리켰다.

“혹시 저곳도 찾아보셨습니까?”

베스라온의 손끝에는 라틴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제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공작이 있었다.

“응, 무슨 일이신가요?”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제나가 외알 안경을 들어 올리며 묻자, 사이레인이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혹여나 아내님을 깨울까 봐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공작의 곁에 다가갔다.

공작이 앉은 의자는 알을 반으로 자른 모양이었는데, 안에는 폭신한 이불과 쿠션이 있어 낮잠을 즐기기에 적합했다. 거기다 셀바토르가의 사람들, 특히 사이레인도 잠을 잘 수 있게 거대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공작이 누워도 자리에 여유가 있다는 것.

사이레인은 슬그머니 잠든 아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중앙에서 자는 셀바토르 공작이 옆으로 살짝 밀려 있었고, 하얀 이불이 뽈록 올라와 있었다.

“쉿!”

사이레인은 천천히 이불을 걷었고 레슬리를 찾았다. 레슬리는 공작의 품 안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우웅…….”

천이 걷히고 바람이 뺨에 닿자 레슬리가 몸을 웅크리며 공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 있었구나.”

베스라온이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디 갔나 걱정했더니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다.

“저희가 찾지 못하게 꼭꼭 숨으려다가 잠드신 것 같네요.”

“하긴 아까부터 몇 차례나 숨고 뛰고 하셨으니, 지칠 만도 하셨지.”

하녀들과 기사들이 잠에 빠진 레슬리를 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사이레인은.

“귀, 귀여워라…….”

혹여나 아내님과 따님이 깰까 봐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늘 원하던 행복한 모습에 절로 눈물이 흘렀다. 정말로 행복한 하루였다.

<뱃놀이>

“슈야.”

갑자기 들려온 제 애칭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뜨거운 여름의 햇빛 사이로 한 얼굴이 보였다.

“많이 더운가요?”

“아……. 조금요.”

“이런,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어디 근처에서 얼음이라도 얻어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콘라드 역시 턱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가벼운 셔츠 차림이었다. 이미 땀으로 젖은 베스트는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경, 경도 그냥 여기 앉으세요.”

레슬리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의 손끝을 잡았다. 레슬리가 앉아 있는 곳은 그나마 시원한 나무 그늘 밑이었고, 마델이 양산까지 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딨는지 모르는 근처 민가에서 얼음을 구해 오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민가에 귀한 여름 얼음이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마델, 너도 그냥 앉아. 팔 아프잖아.”

레슬리가 마델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마델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끝까지 거절할 텐데, 마델도 이 폭염 속에서 지친 모양이었다.

이렇게 더운 여름은 16년 만에 처음이었다. 레슬리는 폭염 속에 눈을 깜빡거렸다.

“덥다…….”

레슬리는 지친 얼굴로 제 옆에 앉은 콘라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콘라드가 안쓰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레슬리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제가 성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였으면 좋았을 텐데요.”

마델에게서 건네받은 부채를 흔들며 콘라드가 쓰게 웃었다.

“그럼 우리가 처음에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사라지는데요?”

레슬리가 살짝 시선을 올려 콘라드를 바라보자,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마법도 신력도 유지해 보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진지하게 하는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대화 사이에 마부가 끼어들었다. 마부의 얼굴 역시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수도로 사람을 보내 사람을 더 불러와야 할 듯싶습니다. 단단히 박혔습니다.”

“이런…….”

마부의 대답에 콘라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타국으로 친선 교류를 다녀온 루엔티를 마중 가기 위해 근처 마을로 향하던 중 봉변이 일어났다. 밤새 쏟아진 비에 길이 질척하게 젖어 버렸고, 마차 바퀴가 제대로 빠진 것이다.

안 그래도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본 마차답게 보통의 마차보다 두 배는 큰 마차는 사용인들이 전부 달려드는데도 쉽게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콘라드 경.”

레슬리는 살짝 고개를 들고 콘라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경이 수도로 돌아가면서 공작가에 기별을 넣어 주시면 안 될까요? 경은 돌아가셔야 하니까.”

콘라드는 레슬리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호위로 따라온 참이었다. 사실 호위보다는 데이트에 목적이 조금 더 크긴 했지만.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슈야를 홀로 남겨 둘 수는 없어요.”

콘라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슬리가 삐죽 입술을 내밀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아가씨.”

마부의 뒤로 한 하인이 다가왔다.

“근처 민가 사람들이 보수만 넉넉히 주면 마차를 빼내는 걸 도와준다고 합니다.”

희소식이었다. 커플을 피해 나무 그늘 끝자락에 앉아 있던 마델의 얼굴도 환해졌다. 마차 안에는 루엔티가 설치해 준 냉각 마법석이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마차가 움직이기만 하면 시원하게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알려 주기로는 이 근처에 작은 호수가 있다고 하니, 잠시 거기서 쉬고 계시는 건 어떠신가요?”

호수! 그 말에 레슬리의 눈이 반짝였다. 호수 근처는 바람이 불어 시원하겠지.

“갈래요, 슈야?”

레슬리가 눈을 빛내자 콘라드가 눈을 휘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레슬리는 콘라드의 단단한 손을 잡고 따라 일어섰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근처 민가에 사는 듯 보이는 소년이 눈을 빛내며 외치자 콘라드와 레슬리, 그리고 마델과 다른 하녀 한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사실 우리 마을 사람들만 아는 호수거든요. 그렇게 큰 편은 아니라…… 그런데 배도 있고 예뻐서 잠시 머물기는 좋아요.”

귀족을 본 게 처음인 듯 소년은 길을 안내하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렇…… 아!”

계속해서 쏟아지는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레슬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진흙을 밟아 발이 미끄러진 탓이었다. 앞서가던 콘라드가 빠르게 레슬리를 잡은 덕에 진흙 위에 넘어지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레슬리의 신발이 벗겨져 버렸다.

“괜찮아요, 슈야?”

다급하게 묻는 콘라드의 뒤로 하얗게 질린 소년이 보였다.

“응, 괜찮아요. 발이 미끄러진 것뿐이라.”

소년이 안심할 수 있게 레슬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신발이었다. 진흙 위에 떨어진 신발은 당장 신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델, 닦을 필요 없어.”

일단 급한 대로 제 치맛자락에 신발을 닦으려는 마델을 콘라드가 말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레슬리를 들어 안았다.

“……!”

놀란 레슬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종종 가족들이 자신을 번쩍 안아 들긴 했지만 그건 말대로 가족들이 셀바토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들보다 배는 큰 키와 덩치에 힘. 거기다 레슬리를 안으면서 어딘가 굉장히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했기에 레슬리 역시 가만히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코, 콘라드 경! 무거워요, 안 돼요!”

레슬리는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쳤다. 자신은 열여섯 살이나 되었는데!

“괜찮아요, 전혀 무겁지 않아요.”

콘라드는 그런 레슬리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정말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사이레인 님께서 내거신 조건 중 하나가 힘과 체력이라, 요즘 열심히 단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말간 얼굴로 웃었다.

“언제든 슈야가 힘들 때면 안아서 옮겨 줘야 한다 그래서요.”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소리를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이레인의 눈에는 자신이 열두 살 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그보다 더 작을지도.

“아, 슈야.”

부끄러움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데 뭔가 생각난 듯 콘라드가 레슬리를 불렀다. 눈을 뜬 레슬리와 콘라드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게…… 그, 최근에만 체력이 좋아진 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그래도 나름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시선을 피했다. 귀까지 붉게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네, 알겠어요. 최근 체력이 좋아진 콘라드 경.”

레슬리가 슬쩍 놀리며 웃자, 콘라드가 샐쭉하게 레슬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도착했네요!”

그렇게 숲길을 걸어오자 호수가 보였다. 마델이 환하게 웃으며 먼저 호수로 다가갔다.

커다란 연못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작은 호수라 불러야 할까. 조금 애매한 크기의 호수에는 소년의 말대로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조심스레 레슬리를 호숫가에 내려놓은 후 콘라드는 소년에게 동전 몇 개를 쥐여 주었다. 화색을 띤 소년은 콘라드에게 뭔가를 말하더니 이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왔던 길로 달려갔다.

“슈야, 배를 타도 된다는데 타 볼래요?”

콘라드가 레슬리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다녀오세요, 아가씨. 그동안 저는 신발 진흙을 최대한 없애 볼게요.”

마델은 그렇게 말하며 진흙투성이가 된 레슬리의 신발을 들어 보였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를 준비하고 온 콘라드가 가볍게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조심스레 작은 배에 레슬리를 앉히고 발에는 제 손수건을 깔더니 자연스레 노를 저어 호수 한가운데로 향했다.

‘시원하다.’

드레스와 같은 무늬로 장식된 하늘빛 양산을 꼭 쥐고,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게 식어 더없이 시원했다.

“풍경이 예쁘네요.”

생각보다 한여름의 숲은 아름다웠다. 짙은 녹음과 함께 화창한 햇살이 수면 위로 아름답게 흩어졌다.

‘봄에 있었던 일이 꿈같아.’

에피알테스와 후작, 의식……. 그 모든 일이 이젠 꿈과 같았다. 레슬리가 손을 뻗자 손가락 끝에 차가운 물이 닿았다.

“예전에 가족끼리 호숫가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 호수도 매우 아름다웠는데……. 비록 호수에 빠지긴 했지만요.”

“호수에 빠졌다고요?”

“네. 그게, 호수가 바다인 줄 알고 물을 마셔 보려다가 그만…….”

레슬리의 대답에 콘라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얄미워 호수 물을 뿌렸지만 그래도 즐거운 듯 입가에 머금은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다시 한 번 콘라드에게 물을 뿌리다, 호숫가에 있는 마델과 눈이 마주쳐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마델이 환하게 웃으며 이제 깨끗해진 레슬리의 신발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그걸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델 귀여워.’

최근 애인이 생겼다는데, 당연히 내가 봐야겠지? 서올리랑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맞춰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생긋 웃었다.

“여기서 잠시 쉴까요?”

작은 호수라 그런지 금방 가운데에 닿았다. 콘라드가 노를 놓자, 레슬리가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콘라드의 얼굴에 남은 땀을 닦아 주었다. 콘라드는 말없이 웃으며 레슬리에게 얼굴을 맡겼고, 레슬리의 몸이 콘라드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고 보니, 슈야. 제가 요즘 고민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가 감았던 눈을 떴다.

“슈야는 왜 나를 애칭으로 불러 주지 않을까.”

레슬리의 바로 앞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살짝 휘었다.

“……하는 고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손수건을 쥔 레슬리의 손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레슬리의 얼굴이 한 박자 늦게 붉어졌다. 툭, 하고 손수건이 떨어졌다.

“그, 게.”

“아직도 부끄러운가요? 우리는 연인인데.”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다시 손에 입을 맞췄다.

이번엔 빠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손에 입술을 붙인 채 콘라드가 웃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라드.”

결국, 레슬리가 졌다.

다른 손으로는 양산을 들고 있어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레슬리가 작게 콘라드를 불렀다. 하지만 콘라드는 부족하다는 듯 웃기만 할 뿐, 붙들린 손을 놓아주지는 않았다.

부끄러움에 물든 라일락색 눈동자가 잠시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지만 입에 잘 붙질 않아서…….”

“그럼 다른 애칭을 만들어 볼까요? 뭐라고 불려도 저는 상관없는데.”

어딘가 즐거움이 듬뿍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아까 호숫가로 올 때 콘라드를 놀린 복수가 분명했다.

“나도 이제 꼬박꼬박 라드라 부를게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여기서 몇 번 연습해 보죠!”

레슬리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까짓 거 입에 붙으면 되는 거지! 거기다 콘라드의 말대로 자신들은 연인이 아닌가.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기 위해 레슬리는 콘라드의 황금색 눈을 바라보며 애칭을 불렀다.

“라드.”

“네.”

“라드.”

“네, 슈야.”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웃음을 머금어 간지럽다.

“바다에 가죠.”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바다에 가서 바닷물을 한 번 마셔 보세요. 분명 예전에 마신 호수 물과 비교가 될 겁니다.”

괜히 놀렸다, 정말. 레슬리가 입을 삐죽 내밀자 콘라드의 눈이 휘었다.

“바다도, 호수도. 이 제국 어디든 아니, 제국을 넘어 다른 대륙까지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세요.”

청명한 푸른 하늘 밑에서 햇빛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빛났다.

“내가 데려다줄게요, 슈야. 나랑 같이 가요.”

잠시 그 따스한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같이요.”

언제나 함께. 레슬리와 콘라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사냥 대회>

시작은 셀바토르 공작저로 배달 온 한 통의 편지였다.

“……사냥 대회?”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사냥 대회라니. 아무래도 어머니께 가야 할 편지가 잘못해서 자신에게 온 듯 보였다. 그간 레슬리에게 보내진 초대장은 작은 다과회라든가, 갤러리 전시회라든가, 자선 파티 같은 것이었으니까.

‘누가 보낸 걸까?’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에 찍혀 있는 인장은 레슬리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카벨리온 가문이구나.”

“어머니!”

뒤에서 나타난 공작이 레슬리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공작은 말을 이었다.

“이맘때쯤이면 늘 오는 초대장이지. 늘 사이가 가곤 했는데. 어떠니, 이번엔 대신 참석해 볼래?”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런 일에 자신이 간다는 뜻은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가를 대표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되나요?”

“그럼. 안 될 게 뭐가 있겠니.”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작게 레슬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카벨리온가의 숲은 아름답지. 너무 깊게만 들어가지 않으면 위험하지도 않고. 괜찮은 곳이야.”

“그렇구나.”

레슬리는 이제 제 것이 된 초대장을 들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들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했는데 괜찮을까요?”

“카벨리온 백작은 그런 걸 신경 쓸 위인이 아니란다. 그리고 네가 가고 싶다는데 누가 막겠니.”

황제가 말린다면 다시 멱살도 잡아 주지.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가씨, 다 와 가나 봐요. 저기 성이 보여요!”

마차 맞은편에 앉은 마델이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땅을 밟겠네.”

레슬리가 지친 얼굴로 말하자 마델도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리온 영토는 수도에서 마차로 2주를 넘게 달려야 하는 곳이었고, 그간 레슬리와 마델은 마차에 갇혀 있어야 했다.

처음이야 소풍 가는 기분으로 신났지만, 2주를 넘게 마차에 앉아 있다 보니 자연스레 레슬리와 마델의 말수는 적어졌다. 셀바토르 공작저의 마차가 아무리 크고 고급으로만 만들어졌다 해도 하루의 대부분을 가만히 앉아 있는 건 고역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르트 경이랑 레소 경보다는 낫지만…….’

레슬리가 손을 뻗어 창문 커튼을 걷자, 흐트러짐 없이 말을 몰고 있는 레소와 하르트가 보였다. 레소는 눈 밑이 조금 거뭇해진 것 외에는 여행의 피로감을 보이지 않았고, 하르트는 아예 저택에서 지내던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

‘역시 체력의 차이일까?’

나도 돌아가면 더 열심히 단련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레슬리가 창문 커튼을 닫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아가씨, 카벨리온 성에 도착했습니다.”

달콤한 레소의 말이 들리자마자 레슬리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서 땅을 밟고 좀 걷고 싶었다.

“어?”

마차 문이 열리자 레소도 하르트도 아닌 낯익은 사람이 레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드?”

레슬리와 마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슬리가 마차에서 내려올 수 있게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콘라드였다. 이름이 불리고 눈이 마주치자 황금빛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놀랐나요?”

“조금요.”

레슬리가 자연스럽게 콘라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자, 혹여나 그녀가 비틀거릴까 콘라드가 살짝 힘을 줘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저런, 조금 더 놀라 주길 바랐는데.”

어쩐지 장난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그는 잡은 손을 그대로 이끌어 레슬리의 팔을 제 팔 위에 올리게 하더니 자연스레 레슬리를 에스코트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아직 임무 중인 거로 알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카벨리온 사냥 대회에 콘라드는 참석하지 못했다. 아직 그에게는 아이테라 가문의 의무와 함께 테센트루아 성기사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내 주지 않았던가.

“슈야의 편지를 받고 보니, 카벨리온 성이 바로 근방이더라고요.”

콘라드가 레슬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서 레슬리가 보고 싶어서 일 못 하겠다고, 선배님에게 으름장을 좀 놔 봤습니다. 요즈음 임무 때문에 우리 자주 보지도 못했잖아요.”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푸훗, 레슬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최근에 콘라드는 임무 때문에 아예 수도를 벗어나 있어서 편지를 주고받는 것조차 수월하지 않았다.

“그래서 렌티우스 경이 보내 주신 거예요?”

“돌아오면 몇 배로 더 일하라는 약속을 받아 내고요. 고리대금업자나 다름없다니까요. 고작 며칠 일찍 보내 주고서는.”

콘라드가 레슬리의 버릇을 닮아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젓자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뭐, 그래서 조금 일찍 카벨리온 성에 도착해 슈야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다시 콘라드의 눈이 레슬리에게 닿았다. 어쩐지 칭찬해 달라는 눈이라 레슬리는 웃으며 콘라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보고 싶었는데, 좋아라.”

그 말에 화답하듯 콘라드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콘라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성으로 들어가자, 카벨리온 백작 부부가 레슬리를 맞이했다.

“셀바토르 공녀님,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벨리온 백작은 사이레인 또래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는데 어딘가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특이한 것은 백작 부인 쪽이었는데, 붉은 머리를 틀어 올린 백작 부인의 왼팔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의수.’

미리 들었기에 레슬리는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에게 카벨리온 가문에 대해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백작 부부 모두 제국 영웅 출신이며 혼란의 시대 때 부인 쪽은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하지만 자연스럽게 백작 부인을 향해 허리를 숙인 콘라드를 보고 레슬리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가벼운 인사였다. 콘라드는 임시로나마 아이테라 대공가를 이끄는 가주였고, 그녀는 백작 부인이었다. 그렇지만 백작 부인도 백작도 콘라드도 놀라지 않았다.

“후배님을 뵙습니다.”

간략하게 그리 말했을 뿐.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출신이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공녀님.”

레슬리의 물음에 카벨리온 백작 부인은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몸이 이리되어 창을 놓았지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출신으로 신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저는 린체 기사단 출신이지요. 셀바토르 공작님의 밑에 있었습니다.”

백작이 웃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슬리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건 어머니에게 듣지 못했던 정보였다.

“셀바토르 단장님의 신세를 많이 졌지요.”

“지금도 많이 지고 있긴 하지요.”

백작 부인은 웃으며 제 팔을 보여 주었다. 조금 부자연스럽지만 그래도 멀리서 보기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팔이었다.

“이것도 루엔티 마법사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최고급품이거든요. 덕분에 불편함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확실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레슬리가 놀라 눈을 깜빡이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 그리고 저희 아이들입니다. 샤온과 베온이랍니다.”

‘쌍둥이!’

이것도 공작이 미리 말을 해 준 것이었지만 레슬리는 완전히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쌍둥이였으니까. 그것도 성별만 다르고 나머지는 완벽히 똑같은 쌍둥이는.

백작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백작 부인의 푸른 눈을 닮은 쌍둥이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샤온 드아 카벨리온이에요.”

“저는 베온 엘 카벨리온입니다, 공녀님.”

레슬리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을 보며 눈만 깜빡이는 레슬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똑같이 생긴 아이들, 목소리로 구분하면 되려나?

“셀바토르 공작님의 대리인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빠르게 정신을 수습한 레슬리가 인사를 건넸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예법에 샤온과 베온의 눈이 반짝거렸다.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냥 대회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슬리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샤온과 베온이 입을 맞춰 힘차게 말을 꺼냈다.

“사냥 기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냥 기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쩌지, 목소리마저 비슷하게 들린다.

***

샤온과 베온은 레슬리와 동갑이었고, 레슬리로서는 처음 겪는 엄청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녀님, 저랑 같이 정원을 산책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아니, 공녀님은 나랑 같이 우리 성 서재를 구경하러 가실 거야. 그렇죠, 공녀님?”

안타깝게도 레슬리의 친구라고는 옛 친구이자 현 연인인 콘라드와 절친인 셀리스뿐이었고, 두 사람 다 샤온과 베온 같은 활달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즉, 레슬리로는 이런 친화력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쌍둥이 사이에 낀 레슬리는 눈이 핑글핑글 도는 걸 느꼈다. 일단 왼편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그러니까 카벨리온 양……?”

“카벨리온 양은 저쪽이랍니다. 저는 베온 엘 카벨리온입니다.”

찍었는데 틀렸나 보다. 다시 눈이 핑글 돌았다. 샤온과 베온은 어깨에 닿는 정도로 머리 길이도 비슷했고 옷도 똑같은 훈련복을 입고 있어 구분이 어려웠다.

“제가 샤온, 카벨리온 양이지요.”

오른쪽에 있던 아이가 웃으며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샤온 쪽 목소리가 조금 더 얇았다.

“그리고 제가 베온, 카벨리온 군입니다.”

다시 왼편에 있던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구분을 잘 못 해서 결례를 저질렀어요.”

“괜찮습니다. 공녀님.”

샤온이 밝게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작정하면 부모님조차 저희를 구분하지 못하시거든요. 하물며 오늘 저희를 처음 본 공녀님은 더욱 헷갈리시겠지요.”

“맞습니다. 카벨리온 양, 카벨리온 군이라고 부르면 더욱 헷갈리시니 부디 이름을 불러 주세요.”

초면에 이름을 부르다니, 괜찮을까. 잠시 고민하던 레슬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헷갈리는 것보다는 본인들도 허락한 이름 부르기가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저도 셀바토르 공녀보다는 레슬리라 불러 주세요.”

“좋아요, 레슬리 양!”

베온이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같이 정원 구경을 하러 가시겠어요? 마침 정원에 심어 둔 꽃들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잠시만.”

갑자기 세 사람의 대화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저도 대화에 끼고 싶은데요.”

어쩐지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날이 서 있는 기색의 콘라드였다. 샤온과 베온이 갑자기 끼어든 콘라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벨리온 님, 저도 정원 구경을 하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자연스럽게 레슬리와 베온 사이에 끼어들었다.

“듣자 하니 카벨리온 백작저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지요. 거기다 꽃들이 아름답게 피었다니 기대가 됩니다. 정원사의 실력이 뛰어나다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어……. 그 정도로 엄청나지는 않습니다만.”

베온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레슬리의 시야가 완전히 콘라드에 의해 가려졌다.

“그렇지만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사실 며칠 카벨리온 성에 머무르면서 정원이 너무도 궁금했거든요.”

“그러시다면 그때 구경을 하셔도 괜찮으셨을 텐데…….”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손님이 먼저 구경한다고 하면 조금 무례하게 보일까 걱정을 했습니다.”

콘라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베온을 바라보았다. 레슬리와 샤온은 콘라드의 뒤에서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일부러 나랑 베온을 갈라 둔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닌 거지?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잠시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콘라드는 베온을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고, 자연스레 레슬리와 샤온은 숲 산책을 하게 되었다. 샤온이 자연스럽게 앞장을 섰고 레슬리는 뒤를 따라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후후, 그건 질투예요. 레슬리 양.”

숲의 향기를 한껏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거렸다. 혹여나 양산을 놓칠까 봐 레슬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질투요?”

샤온이 손을 내밀었고 레슬리는 그 손을 잡고 살짝 경사진 언덕을 올랐다.

“맞아요! 베온이 자꾸 친한 척을 하니까 아이테라 경이 질투를 하는 거예요.”

‘라드가 질투라…….’

샤온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으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질투, 질투라니. 그건 또 새로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시지 않았는걸요.”

레슬리에게 친한 척을 했던 남자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셀바토르가의 영광을 보고, 레슬리 자체를 보고,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을까 하여 몰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콘라드는 레슬리 앞으로 나서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밀어낼 뿐이었지.

‘아까처럼 다급해 보이지는 않았는걸. 그게 질투였던 걸까?’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우는 걸 보며 샤온이 작게 웃었다.

“혹시 그때는 셀바토르 경이나 마법사님이 늘 옆에 계시지 않았나요?”

샤온의 말에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 보니 샤온의 말대로 레슬리가 참석한 몇 안 되는 공식적인 자리에 늘 어머니나 아버지 아니면 오라버니들이 같이 가곤 했다. 레슬리의 표정을 보고 답을 알겠다는 듯 샤온의 입이 곡선을 그렸다.

“그래서 그래요! 자신이 없더라도 지켜 줄 만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잖아요?”

샤온의 푸른 눈이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는 듯 반짝거렸다.

“실례지만, 가족분들 없이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이시지요?”

레슬리는 작게 대답했다. 샤온이 말이 맞았으니까. 가문을 대표해 레슬리 혼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공식적인 곳에는 가족들과 함께 나섰다.

이 사냥 대회도 셀바토르 공작저와 인연이 있는 카벨리온가에서 주최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레슬리는 홀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레슬리 양이 홀로 나온 데다가 친한 척하는 베온도 있잖아요.”

나도 있지만, 아이테라 경에게는 나는 안 보일걸요! 샤온은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며 폴짝 뛰어 작은 웅덩이를 건넜다. 그녀의 셔츠 자락이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렸다.

“친한 척하는 베온.”

“맞아요. 그리고 베온은 아직 약혼녀가 없어요. 아무래도 아이테라 경의 입장으로는 레슬리 양이랑 최대한 떨어트리고 싶을 거예요.”

레슬리가 드레스 자락을 적시지 않고 무사히 웅덩이를 건널 수 있게 손을 잡아 준 샤온이 시선을 맞췄다.

“부러워라! 질투는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니까요.”

샤온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꽃이 물을 머금고 활짝 피듯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이테라 경은 확실히 레슬리 양을 사랑하는군요.”

사랑. 그 단어에 뺨이 달아올랐다. 그간 콘라드를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오늘 처음 본 샤온이 단언하니 어쩐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심장 한편이 간질거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레슬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너무 아이테라 경을 질투하게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죠. 베온은 제가 막을게요.”

주먹을 불끈 쥔 샤온이 믿으라는 듯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레슬리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숲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평평한 돌 때문에 앉아서 경치를 구경하기는 더없이 좋아 보였다.

가장 아름다울 때를 맞아 카벨리온 숲은 녹음으로 빛나고 있었고, 새들의 지저귐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무것도 가려지는 것 없이 탁 트인 장소.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나중에 레슬리 양은 아이테라 경과 여길 와서 데이트를 즐기세요.”

“너무 예뻐요.”

“제 비밀기지예요. 베온도 모르는 곳이랍니다.”

“이렇게 좋은 곳을 알려 줘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사과의 뜻이니까요.”

베온에 관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레슬리가 샤온을 바라보자 혀를 살짝 내밀고 잠시 뭔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하던 샤온이 멋쩍은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베온 일도 그렇고, 저희가 너무 친한 척을 하긴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샤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슬리 양도 아시다시피 우리 카벨리온 성은 다른 성들과 조금 떨어져 있잖아요? 솔직히 다른 사람들과 교류가 힘들어요. 가볍게 안부 인사만 하러 가도 몇 날 며칠을 가야 하니까요.”

확실히, 영토에 있는 커다란 숲 때문에 카벨리온 성에서 다른 영토까지 가려면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았다.

“저랑 베온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걸 정말로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곤…… 부모님이랑 말도 잘 안 통하는 집사와 사용인들 몇…….”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을 때마다 샤온이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마을도 멀어!”

억울하다는 듯 샤온이 크게 외쳤다. 쩌렁쩌렁한 샤온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숲속에 숨어 있던 새 몇 마리가 날아오를 뿐 숲은 잠잠했다.

“손님이 올 때라고는 사냥 대회랑 마을 축제 때뿐인데, 마을 축제는 늘 보던 얼굴이고!”

아하. 레슬리는 슬슬 왜 샤온과 베온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샤온과 베온은 그저 새로 온 손님이 좋고 좋았던 모양이었다.

‘강아지 같네.’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강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작고 복슬복슬한 강아지는 레슬리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꼬리를 흔들었었다. 사람이 반가워 빛나는 눈과 환한 얼굴.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며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그래서…….”

크게 외치고 나자 속이 좀 풀렸는지 샤온이 슬그머니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양을 봤을 때 조금 흥분했어요. 처음 뵙는 분인 데다가 저희 나이 또래는 정말 귀하거든요. 거기다 레슬리 양은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아, 저 책도 읽었어요!”

레슬리와 에피알테스의 이야기는 이미 이야기꾼들의 입을 통해 제국 구석구석으로 퍼진 지 오래였다. 루엔티가 더욱 정확한 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책까지 써 왔을 때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지. 아무래도 그 불질러 버려야 했던 책을 샤온과 베온이 읽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러셨군요.”

왜 이제야 처음 보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셀리스를 볼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나중에 몰래 서재에 잠입해서 책은 불태워 버려야지.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는 듯 샤온이 안도의 숨을 쉬며 자연스레 레슬리에게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왔던 길로 성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레슬리 양. 혹시나 아이테라 경과 무슨 일이 있다면 저에게 말해 주세요. 도울 수 있으면 도와 드릴게요.”

어딘가 결연한 얼굴의 샤온을 보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즐거웠다. 샤온은 레슬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았고 오랜만에 또래와의 대화에 레슬리 역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 샤온.”

성에 도착할 때쯤, 두 사람은 숲에 다녀온 듯 보이는 콘라드와 베온과 마주쳤다. 말에서 내려온 베온에게 샤온이 가까이 다가갔다.

“베온, 숲에 다녀오는 거야?”

“응, 어머니께서 미리 확인을 해 보라고 해서. 아이테라 경과 같이 다녀왔어.”

투레질하는 말의 목을 두드리며 베온이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말에서 내려온 콘라드도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콘라드가 웃으면서 베온을 데려간 후로 처음이라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아! 맞아! 나도 참, 잊어버리고 있었네!”

갑자기 샤온이 눈을 크게 뜨더니 콘라드의 옆에 있던 베온의 팔을 확 잡았다.

“아버지께서 저희를 찾으셨던 걸 잊어버렸어요. 저희는 먼저 성으로 가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으셨어? 나는 그런 말은 못 들…….”

어리둥절해하며 베온이 말을 잇다가 무시무시한 샤온의 시선에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럼 두 분은 천천히 산책을 즐기다 오세요.”

환하게 웃으며 샤온은 레슬리를 향해 눈을 깜빡거리더니 기가 죽은 베온을 데리고 잽싸게 돌아갔고 잠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티가 나지 않는가. 콘라드도 뭔가를 알아챈 듯 미소 지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흐음. 두 분이 갑자기 자리를 비운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요. 분명 베온 님은 아무 일정도 없다고 하셨는데.”

“있죠. 라드.”

레슬리가 천천히 양산을 잡고 걸음을 옮기자, 콘라드가 따라 움직였다. 양산 밑에서 은발이 춤추듯 나풀거렸다.

“질투했어요?”

“네.”

바로 돌아온 대답에 레슬리가 경쾌하게 웃자, 콘라드가 샐쭉한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할 수밖에 없었죠. 베온 님이 그렇게 붙는데 밀어내지도 않으시고, 만난 지 하루 만에 이름도 부르게 하시고. 베온 님은 슈야 또래잖아요.”

“그렇지만 라드도 하루 만에 제 이름을 불렀잖아요.”

“그건 특수한 경우니까요.”

아직도 질투 섞인 말에 레슬리가 손을 뻗어 콘라드의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질투하지 말아요. 나한텐 라드뿐인걸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황금색 눈이 행복감으로 휘고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이번 사냥 대회 때, 다른 남성분들의 것은 말고 제 사냥감만 받아 주신다면 믿겠습니다.”

카벨리온 사냥 대회에서는 자신이 잡아 온 사냥감을 선물함으로써 호감과 우정을 나타낸다고, 샤온이 말해 준 걸 떠올린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러자 콘라드가 레슬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대로 시선을 마주했다.

“약속했습니다, 슈야.”

***

“그리하여!”

카벨리온 백작이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은 사냥복에 무기를 쥐고 있었고,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들은 편한 복장으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우리 카벨리온가의 유구한 전통인 사냥 대회를 별 탈 없이 열게 되어 신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콘라드와 레슬리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콘라드는 그저 말없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레슬리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콘라드의 미간에는 작게 주름이 잡혀 있었고, 레슬리의 입술은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쌍둥이는 콘라드와 레슬리의 사이에 껴서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

백작의 목소리는 더없이 높아졌고 사람들 역시 환호하며 연설에 보답했지만, 쌍둥이의 안색은 더욱 안 좋아졌다. 둘은 힐끔힐끔 시선을 교환했다.

‘어떻게 할까.’

‘……글쎄, 어쩌지?’

베온은 콘라드를, 그리고 샤온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레슬리와 콘라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단단히 삐진 모양이었다.

‘망했다.’

이 사태의 원흉이 된 쌍둥이는 울고 싶어졌다.

***

사냥 대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카벨리온 성에 도착한 레슬리는 손님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걸 보면서 즐겁게 지냈다.

샤온은 자신이 읽던 로맨스 책을 레슬리에게 추천했고, 레슬리는 마델과 서올리가 몰래 숨겨 놓고 보던 책들을 추천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레슬리를 따라온 마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레슬리는 모른 척 웃었다.

정원을 가꾸는 게 취미라는 베온은 레슬리와 콘라드에게 여러 가지 꽃과 나무들을 알려 주었다. 다른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고, 말을 타고 숲을 돌아보기도 했으며, 서재에서 자신의 책을 찾기도 했다.

가장 즐거운 것은 콘라드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비록 레슬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다른 손님들 때문에 많이 방해받긴 했지만, 임무로 수도를 자주 비웠던 옛날에 비하면 얼굴을 많이 보게 되어 즐거웠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흘렀고 사냥 대회를 이틀 앞둔 날, 사건이 일어났다.

‘찾았다.’

레슬리는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레슬리의 신화』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찾았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으니 찾기 힘들지. 레슬리는 슬그머니 책을 꺼내 들었다.

읽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레슬리만큼 저 책을 잘 아는 사람은 마치 책을 성서처럼 읽던 사이레인과 베스라온, 루엔티뿐이었으니까.

“레슬리 양!”

갑자기 튀어나온 샤온의 목소리를 듣고 레슬리는 재빠르게 책장에 돌려 두었다. 샤온이 레슬리를 찾는 듯 커다란 책장 사이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슬리 양! 어딨어요?”

“저 여깄어요.”

레슬리는 손을 흔들면서도 시선은 책에 고정했다. 반드시 불태우고 말리라. 저런 건 여기에 존재하면 안 되는 사악한 책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거대한 책장 사이에 있던 레슬리를 찾아낸 샤온이 환하게 웃었고, 그녀를 본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순식간에 책은 레슬리의 머리 밖으로 밀려났다. 책장 사이에 있는 레슬리를 찾아낸 사람이 베온이었던 탓이었다.

‘분명 샤온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당황한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자 샤온이 환하게 웃었다.

“저 샤온 맞아요, 레슬리 양!”

샤온은 지금 베온이 평소에 자주 입던 것과 똑같은 바지를 입고, 푸른 셔츠에 마치 베온처럼 오른쪽 팔만 걷어 올린 상태였다. 크라바트로 목을 가린 데다가 조금 커다란 재킷이 완벽하게 실루엣을 가려 주자 어디로 보나 베온이었다.

“어때요? 베온 같아 보이나요?”

샤온이 들뜬 목소리로 묻자 레슬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온인 줄 알았어요.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을 거예요.”

구분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목소리뿐이었다. 처음에는 똑같이 들렸는데 자세히 들으면 억양에서 차이가 났고 레슬리는 그걸로 쌍둥이를 구분하고 있었다.

쌍둥이가 이래서 쌍둥이구나, 새삼 신기해 레슬리가 샤온을 바라보자, 샤온이 웃더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아, 레슬리 양.”

“……!”

레슬리는 놀라 샤온을 바라보았다. 베온의 목소리였다. 귀 기울여 자세히 듣는다면 샤온의 목소리와 말투를 알아챌 수 있었지만, 그냥 듣기로는 베온의 억양과 똑같이 들렸다.

보란 듯 샤온은 베온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 터벅터벅 서재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완벽한 베온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사실 우리 가족의 전통 같은 거예요. 어릴 적에 부모님이 장난으로 하셨는데 다들 반응이 좋아서 여태까지 하고 있어요.”

밑으로 내려가는 소매를 다시 걷어 올리며 샤온이 말을 이었다.

“카벨리온 성에 와 주시는 분들은 대부분은 깜짝 놀라세요. 몇 번을 봐도 계속 놀라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다 보니 저도 베온도 재미가 붙어서 서로의 습관까지 따라 하고, 배우들을 불러다 연기도 지도받았어요.”

“연기까지요?”

도대체 얼마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연기까지 배운 걸까? 레슬리가 눈을 빛내며 샤온을 바라보았다.

“후후, 이래 봬도 연기는 베온보다 제가 훨씬 나아요. 보실래요?”

어제 똑같은 취미인 승마로 베온에게 진 게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샤온은 그대로 레슬리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레슬리를 올려다보았다.

“레슬리 양,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샤온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레슬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 대사는 어제 같이 읽던 로맨스 소설에서 나오던 대사가 아니던가. 좋아하는 장면이라더니, 그걸 전부 외운 모양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연인이 있으시지요. 하지만 아직 반지를 나누지 않으셨으니, 부디 저를 한 번 더 생각해 봐 주십시오.”

레슬리의 반응에 신이 난 샤온이 더욱 열렬하게 대사를 외쳤고 레슬리는 웃지 않기 위해 입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부탁입니다. 오늘 저녁에 저와 만나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리고 사냥 대회 때 그의 것이 아닌, 제 전리품을 받아 주십시오. 나의 여신이시여.”

애절한 눈빛. 조금은 느끼해 보였지만 샤온의 말대로 꽤 괜찮은 연기였다.

레슬리는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연기를 보여 줬으니 자신도 같이 맞춰 줘야지.

“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레슬리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시선을 서로 마주한 두 소녀가 침묵 끝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연기가 뛰어나서 놀랐어요.”

“레슬리 양도 연기에 소질이 있으신데요? 수도로 돌아가시면 한번 배워 보세요. 생각보다 즐겁답니다.”

그럴까.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사냥 대회 때 아이테라 경에게 드릴 건 준비되었나요?”

샤온의 물음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벨리온 영토 사람들은 사냥을 나갈 때 안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매듭 장식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어, 어제부터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처음 해 보는 것이라 몇 번 실패했지만, 이번에 만들고 있는 건 느낌이 좋았다.

“샤온 양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샤온 양.”

“레슬리 양의 솜씨가 좋은 거죠. 비밀로 하다가 당일에 선물하신다고 하셨죠? 제가 매듭 장식을 꾸밀 만한 색실을 가져올게요. 조금 이따 저녁 식사 후에 같이 만드는 건 어떠신가요?”

“좋아요.”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 샤온의 눈에 살짝 열린 서재 문이 들어왔다.

‘들어올 때 닫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샤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잊어버렸다.

“…….”

콘라드는 눈을 깜빡였다. 방금 자신이 뭘 본 걸까.

레슬리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일은 사냥 대회가 아니던가. 그래서 하인들에게 물어 레슬리가 서재로 간 걸 알아낸 것까지는 좋은데…….

‘왜 베온 님과 같이 있는 거지?’

처음엔 샤온인 줄 알았다. 레슬리는 샤온과 친해진 뒤로 늘 같이 다녔으니까. 하지만 살짝 다른 모습과 조금 낮은 목소리, 그리고 걸음걸이. 그 어딜 봐도 베온이었다.

무릎을 꿇고 간절한 얼굴로 레슬리를 올려다보는 베온과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가를 떠는 레슬리의 모습은 마치 소설 속에서나 보던 장면과도 같았다.

‘내가 잘못 봤겠지.’

손으로 얼굴을 쓸고 마음을 추스른 후 콘라드는 다시 한 번 서재 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베온과 레슬리가 웃으면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슬리의 붉어진 뺨과 즐거운 듯 반짝이는 눈이 가슴에 박혔다. 아무리 서재 안을 바라보아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들은 말이 다시 귓가에 메아리쳤다.

‘네, 좋아요.’

아니, 아닐 거야. 콘라드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카벨리온 성 복도를 걸었다. 아닐 게 분명했다.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슈야는 마음이 약한 편이었으니까. 남들이 이상한 부탁을 하더라도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 그런 거겠지.’

정처 없이 걷던 콘라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거겠지.

콘라드는 애써 자신을 이해시켰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자꾸만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기에 저런 행동과 좋다는 말을 했을까. 거기다 분명 ‘연인은 있지만, 반지는 나누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콘라드는 말없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레슬리가 데뷔탕트를 치르면 약혼식을 하자고 입을 맞췄기 때문에 아직 두 사람은 반지를 나누지 않았다. 너무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

거기다 베온은 첫날부터 레슬리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좋게 생각하고 싶은데 자꾸만 머리가 나쁜 쪽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하하!”

한숨을 쉬며 간신히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콘라드의 귀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정원을 내려다보자, 몇 남자들과 한 명의 여성이 즐거운 듯 정원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보였다.

남자들을 바라보는 콘라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일주일 동안 카벨리온 성에는 수많은 손님이 도착했는데 그중에서도 콘라드는 저 세 남자를 확실하게 기억했다. 저들이 도착하자마자 백작이자 성주인 카벨리온 백작 부부의 인사를 대강 넘기면서 레슬리를 찾은 탓이었다.

‘셀바토르 공녀께서 손님으로 머물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꼭 뵙고 싶던 분을 이렇게 뵐 줄이야!’

마음에 안 들어. 콘라드가 고개를 쳐들며 남자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 누구의 연인을 넘보는 건지. 콘라드는 이번 사냥 대회에서 확실히 저들을 눌러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남자들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여성에게까지 시선이 닿았다.

샤온이었다. 평소에 즐겨 입던 푸른 드레스에 머리에는 화사한 꽃 장식을 한 샤온은 웃으면서 부채를 팔랑이고 있었다.

사실은 샤온인 척하는 베온이었지만, 콘라드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이젠 카벨리온 백작 부부마저 속아 넘어갈 정도로 두 사람의 연기는 물이 오른 상태였다.

“아직 셀바토르 공녀님은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으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는 거지요!”

한 남자가 외친 말에 머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려 콘라드는 다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때문에 베온이 연인이 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며 남자의 머리를 부채로 후려치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

서재를 빠져나온 레슬리의 눈에 정원 벤치에 앉아 있는 콘라드가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콘라드에게 다가가던 레슬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어딘가 그늘진 얼굴은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여실하게 알리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레슬리는 조심스레 콘라드에게 걸어갔다.

“라드.”

바로 옆에서 나지막이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꽤 놀란 듯 보이는 것이 레슬리가 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콘라드는 주변 기척에 민감한 편이었다. 그래서 깜짝 놀래 주려다가도 몇 번이고 실패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자신이 놀랄 때도 많았고, 콘라드의 계획대로 품에 안겨 부끄러운 상황이 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레슬리가 콘라드를 바라보자 황금빛 눈동자가 레슬리를 훑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아닙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실하게 맞다고 대답하는 콘라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설마 갑자기 아이테라 저택에서 무슨 연락이라도 온 걸까? 아니면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에서?

‘안 되겠다.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머리로는 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콘라드와 이야기를 하기로 한 레슬리는 콘라드의 옆에 앉았고, 동시에 콘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명백히 자신을 피하는 행동에 레슬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이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아, 베온 님이 저에게 부탁하신 일이 생각나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저녁 식사 때 뵐게요, 슈야.”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콘라드는 뒤를 돌아 성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하, 작게 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방금 콘라드의 행동은 명백히 자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아이테라 가문의 일이었더라면 자신과 상담을 했겠지. 아이테라 대공비나 프리트와 관련된 일이라도 콘라드는 늘 레슬리에게 말을 해 주었다. 그에 대해 레슬리가 의견을 내면 작은 것이라도 귀담아듣고 고맙다고 말해 주지 않았던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일이었더라도 걱정은 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언질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그게 여태 레슬리가 알던 콘라드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콘라드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자신을 피했다. 처음 보는 행동과 모습에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레슬리는 무섭게 콘라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모습.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 걸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걸리는 일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떤 사냥감을 잡아 오면 좋겠냐고 자신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묻지 않았던가.

‘답답해!’

레슬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콘라드가 자신을 피하는 이 상황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대체 왜 피하는 건지 이유를 알고, 자신의 잘못이라면 고치고 싶었다.

“라드!”

저벅저벅 걸어 콘라드의 팔을 잡자 콘라드이 시선이 다시 레슬리에게 닿았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줘요. 답답해.”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옆을 보더니 다시 밑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찰나의 침묵이었지만, 레슬리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기다려야 할 때라는 걸 알아 레슬리는 꾹 참고 콘라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슈야.”

한참 만에 콘라드가 레슬리를 불렀다.

“그럼 오늘 저녁 식사 후에 저와 만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

콘라드의 답은 레슬리가 기다리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순간 머리를 멍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저녁 식사 후라니. 이미 샤온과 약속된 시간이 아니던가. 거기다 콘라드에게 비밀로 주려는 매듭 장식을 만들기 위한 약속이었다.

이걸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말한다면 어디까지 말해야 매듭 장식을 들키지 않을까.

‘그냥 샤온 양에게 말해서 내일 매듭 장식을 만들고 오늘은 라드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그렇게 결심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레슬리에게나 그렇지 콘라드에게는 아니었다. 방금 콘라드의 침묵에 레슬리의 기다림이 길었듯 콘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슬리가 고개를 들자 섧게 웃고 있는 콘라드가 보였다.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에 레슬리는 굳어 버렸다. 애써 미소를 머금은 콘라드가 자신의 팔을 잡은 레슬리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 내었다.

“바쁘시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콘라드는 빠르게 성 쪽으로 돌아갔다. 레슬리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고 레슬리의 짜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짜증 나. 폭신한 오리털이 가득 든 베개를 끌어안은 레슬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벨리온 성에 도착하고 나서 늘 기분이 좋았는데 어제부터 레슬리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자신의 연인인 콘라드 때문이었다.

갑자기 어제부터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하던 연인은 저녁 식사에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하인에게 물으니 카벨리온 백작과 따로 식사했다고 들었다.

내일 아침에 들으면 되겠지.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레슬리는 샤온과 함께 매듭 장식을 완성했다.

의미를 담은 색색의 끈을 엮어 만든 장식을 레슬리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일 이걸 주면서 말해 보자. 샤온에게 듣기로는 사냥 대회 아침에 주는 게 전통이라지만 하루 일찍 준다고 문제는 없겠지.

‘좋아. 그렇게 해야지.’

레슬리는 장식을 쥐고 옅게 웃었다. 분명 내일이면 이 소리 없는 전쟁은 끝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된 오늘 아침 식사 때도 콘라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듣기로는 또 백작과 아침을 먹었다던데. 도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레슬리는 백작의 방에서 나오는 콘라드를 기다렸지만, 잠시 샤온이 말을 건 사이에 콘라드는 방을 빠져나와 사라졌다.

레슬리가 기다렸던 점심 만찬에서도 콘라드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는 계속해서 레슬리를 피해 다녔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콘라드가 레슬리를 피해 다닌 지 만 하루가 되는 시간이었다.

고작 하루였다. 그런데도 레슬리의 기분은 점점 최악을 찍고 있었다. 피해 다니는 이유라도 알고 싶은데 본인을 만날 수조차 없다니.

‘괜히 왔어.’

그냥 공작저에 있을걸. 그럼 오라버니들과 놀고, 어머니랑 책을 읽고, 아버지랑 체력 단련을 했을 텐데. 여기 오지 말 걸 그랬어.

화가 난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베개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돌아갈까,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셀바토르 공작가를 대표해 이곳에 온 거지, 콘라드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좋아, 그럼 나도 무시할 거야.’

레슬리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성큼성큼 서랍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아까까지 레슬리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매듭 장식이 놓여 있었다.

안전을 바라는 노란 천과 승리를 바라는 붉은 천 그리고 연인을 위하는 분홍 천을 알록달록하게 엮어 만들었다. 그리고 끝에는 어제 샤온이 가져온 색실로 자신의 이름과 콘라드의 이름을 수놓았다.

처음 만드는 것이라 조금은 삐뚤빼뚤한 매듭 장식을 바라보던 레슬리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연인인데.

망설임이 성큼 다가와 레슬리는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할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콘라드를 찾아볼까. 어차피 내일이 사냥 대회인데.

레슬리가 고민에 빠진 그때, 마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저 아이테라 님을 뵈었어요.”

레슬리가 계속해서 콘라드를 찾아다니는 걸 안 마델이 내일 레슬리가 입을 옷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라드를 봤어?”

레슬리의 얼굴이 활짝 피며 다시 매듭 장식을 꼭 쥐었다.

“네, 네. 정원에서 다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데요?”

“다른 분?”

“네, 멀리서 본 거라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성에 오신 손님이 아닐까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빠르게 테라스 쪽으로 다가갔다. 카벨리온 백작 부부는 레슬리에게 가장 좋은 방을 내어 주었는데, 이 방 테라스에서는 베온이 그렇게 자랑하던 정원과 카벨리온 성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었다.

‘있다!’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레슬리의 눈에 콘라드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누구지?’

한 여자가 있었다. 양산을 쓰고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 누군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콘라드의 얼굴은 아주 잘 보였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만나려고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그걸 다 무시하고 저렇게 밝게 웃고 있다니. 거기다 다른 여자와 있다는 게 더욱 짜증을 불러왔다.

“세상에…….”

레슬리를 따라 테라스로 나온 마델의 입이 벌어졌고 자연스레 마델과 레슬리는 양산을 쓴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양산이 교묘하게 얼굴을 가렸지만, 상당한 미인처럼 보였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긴 푸른 머리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샤온과 카벨리온 부인은 아니지?”

레슬리의 말에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온은 갈색 머리였고, 카벨리온 부인은 붉은 머리였다. 두 사람이라면 그나마 이해를 할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둘 다 아니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손님 중 한 명이겠지. 요 며칠 사이 사냥 대회를 위해 많은 이들이 카벨리온 성에 도착했기에 레슬리는 모든 손님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저렇게 청아한 느낌의 푸른 머리 여성이라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데.

마델과 함께 빠르게 기억을 뒤지는데 콘라드가 고개를 올려 정확히 레슬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힉!”

레슬리와 마델은 재빨리 몸을 숙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들켰나?”

“아니, 아닌 것 같아요.”

빼꼼 고개를 내민 마델이 말을 이었다.

“다시 성 쪽으로 오시네요. 이제 보이지 않아요. 성으로 들어오셨나 봐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터벅터벅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기운이 빠져 침대에 누우려는데 아직 자신이 매듭 장식을 손에 쥐고 있는 걸 깨달았다.

매듭 장식이 마치 콘라드라도 되는 양 무섭게 장식을 노려보던 레슬리는 그대로 장식을 서랍장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일부러 서랍장을 소리 나게 쾅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나도 무시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레슬리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썼고 콘라드와 레슬리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두 사람의 사이가 미묘하게 틀어짐에 따라 덩달아 불편해지는 사람이 둘 있었다. 카벨리온 성의 쌍둥이, 샤온과 베온이었다.

“왜 저러시는 거지?”

베온과 샤온이 진지한 얼굴로 서로에게 물었다.

이 일은 두 사람에게도 큰 문제였다.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인 데다가 부모님 대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가문이었고, 콘라드 역시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그래도 황족의 피를 잇고 있었다.

레슬리와 콘라드 둘 다 가볍게 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오기 전 부모님이 단단히 쌍둥이에게 일러두지 않았던가.

그런 두 사람의 사이가 갈라지자, 부모님의 특명을 들은 쌍둥이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거기다 이제 친구도 되었는데, 친구가 저렇게 싸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모르겠어. 샤온, 레슬리 양에게 실수한 거 있어?”

베온의 말에 샤온이 고개를 젓고는 베온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겠는데. 베온은 아이테라 경에게 실수한 거 있어?”

“아니, 없어.”

베온이 고개를 젓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슬리 양과 아이테라 경의 사이를 회복시켜야 해.”

샤온의 말에 베온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적어도 수도로 두 분이 올라가시기 전까지는 원래 상태로 돌려놔야지.”

사이가 나빠진 두 사람이 그대로 수도로 올라가면, 사람들은 분명 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저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이유를 캐다 보면 자연스럽게 카벨리온 백작가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분명 소문이 조금씩 과장되겠지.

그렇게 과장된 소문을 믿은 사람들은 카벨리온 백작저를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고, 아무도 특산품을 사 주지 않아 가세가 기울 게 분명했다. 특산품이 팔리지 않으니 살기 힘들어진 마을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성으로 찾아오고…….

“히이익!”

“히이익!”

두 사람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부모님과 자신들은 성에서 쫓겨나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아, 안 돼!”

베온의 절규에 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성에서 나갈 수 없다. 자신이 모아 온 환상소설과 로맨스 소설이 몇 권이나 되던가.

베온을 보아하니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아이작, 렐리아, 베러…….”

알 수 없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하얗게 질린 베온을 본 샤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베온이 읊는 이름들은 정원에 심어 둔 꽃과 나무들의 이름이었다.

어찌 보면 이상한데 공감이 가는 모습. 샤온 역시 책장 가득 모아 놓은 책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한정본, 초판본, 거기다 작가 사인본까지. 시세의 몇 배를 주고 산 책들이 책장 가득 꽂혀 있다.

“나는 우리 애들을 두고 갈 수 없어!”

“나도 그래. 내가 어떻게 우리 아가들을 모았는데!”

서로 자신의 아이들을 버릴 수 없다며 발버둥 치던 두 사람은 이 위기를 빠져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았다.

“일단 왜 아이테라 경이 레슬리 양을 피하는지부터 알아보자.”

샤온의 말에 베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가 먼저 피하기 시작한 거니, 자신들의 시작 역시 거기서부터겠지.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자신들이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그래서 지금이었다. 두 사람은 힐끔힐끔 레슬리와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단단히 화가 나서 콘라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있었고, 콘라드 역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레슬리와 콘라드의 모습을 보고 다른 손님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려올수록 쌍둥이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큭……. 왜 안 믿어 주는 거지.”

샤온이 자신의 손수건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하필 샤온과 레슬리가 장난치던 그 모습을 콘라드가 봤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말했다. 그건 자신이었다고. 베온이 아니라 자신이 베온처럼 분장한 것이고, 로맨스 소설에 나온 대사를 따라 했을 뿐이라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심지어 책을 가져와 대사와 장면들을 콘라드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콘라드는 그저 섧게 웃을 뿐 레슬리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쌍둥이는 레슬리에게도 말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콘라드가 자신을 피해 다니던 일과, 모르는 미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일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레슬리의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쌍둥이의 고개도 같이 밑으로 떨어졌다.

레슬리는 괜스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남는 건 짜증뿐이었다. 자신을 피해 다니는 콘라드도 싫었고 자신을 자꾸만 귀찮게 하는 다른 손님들도 싫었다.

하지만 가장 싫은 건 이 상황에서도 매듭 장식을 들고 나온 자신이었다.

“셀바토르 공녀님.”

레슬리 나이 또래로 보이는 세 명의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안색이…….”

“맞아요! 아프시다면 저희에게 말씀해 주세요.”

둘 다 이번 기회에 셀바토르 공작가와 친해지겠다는 욕심이 너무 잘 보였다. 그중에서도 자신을 벨라라고 소개한 소녀는 눈에서 빛이 나올 정도로 레슬리와 샤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이런 대회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을 뿐이에요.”

레슬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시군요. 하긴 저도 이런 곳은 오랜만이라 조금 긴장되네요. 카벨리온 숲에서는 몬스터도 나온다지요?”

“저희까지 위험할까요?”

한 소녀의 말에 다른 소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을 흘렸다.

“숲의 입구는 저희 카벨리온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안전하게 지키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위험한 동물이나 몬스터는 숲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기 때문에 만나기도 쉽지 않답니다.”

두 소녀의 말에 샤온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숲의 입구가 보이는 들판에서 참가자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레슬리는 사냥 대회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승마와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사냥에 취미가 없어 참석하지 않기로 했고, 콘라드는 베온과 함께 사냥 대회에 참석했다. 샤온은 처음에는 참석하려 했지만 레슬리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참석을 취소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샤온의 말에 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으로’를 다섯 번이나 반복한 백작의 축사가 끝났다.

“레슬리 양.”

샤온이 레슬리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매듭 장식…… 안 드리실 건가요? 지금이 아니면 드리기 힘드실 거예요.”

그 말에 레슬리는 슬그머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축사가 끝나고 사냥 대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바쁘게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사이 몇몇은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매듭 장식을 건네주고 있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연인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매듭 장식을 건네는 게 눈에 보였다.

남자 역시 비밀로 하고 있었는지 여자의 눈이 커지더니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에 다들 얼굴을 붉혔다.

레슬리는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매듭 장식을 꺼내 바라보았다.

‘줄까……?’

시선을 조금 옮기자 콘라드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도 어떻게 이리 한눈에 들어오는지.

콘라드는 말의 콧등을 쓸며 베온과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가요, 레슬리 양. 우리 같이 가서 전해 줘요.”

레슬리가 콘라드를 바라보며 머뭇거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샤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레슬리 양, 어서요.”

계속되는 샤온의 재촉에 레슬리가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고 콘라드와 베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어?”

콘라드의 옆에 분명 정원에서 보았던 여자가 서 있었다. 교묘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독특한 푸른 머리카락과 하얀 양산 덕분에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콘라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이내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매듭 장식이었다. 분홍색과 푸른색 그리고 노란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매듭 장식은 레슬리가 만든 것보다 더 화려했다.

설마 아니겠지. 샤온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콘라드는 웃으면서 매듭 장식을 받아 들더니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샤온의 눈은 커다래졌고, 레슬리의 눈은 가늘어졌다.

“레, 레슬리 양…….”

어두웠다. 레슬리의 얼굴은 아주 어두웠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돌아갈래요.”

이번에 샤온은 레슬리가 뒤돌아 테이블로 돌아가는 걸 막지 못했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콘라드와 베온은 말을 타고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망했다.”

샤온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

“아이테라 경.”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콘라드를 베온이 부르자, 이내 황금색 눈이 베온을 향했다.

“그 몇 가지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경?”

“예,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지.”

콘라드가 웃음을 머금었지만, 베온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물어야 할 게 한둘이 아녔으며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베온은 입을 꾹 닫고 눈을 껌뻑였다.

아까 그 푸른 머리의 사람에 관해 물어봐야 할까, 아니면 콘라드가 받은 매듭 장식에 관해 물어봐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버지에게 들은 걸 물어봐야 할까.

베온이 눈을 껌뻑이면 껌뻑일수록 콘라드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 찼다.

“그…… 아까 그분은……? 푸른 머리의 분 말입니다.”

결국,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한 베온이 입을 열었다.

“테벤 경 말씀입니까?”

이름이 테벤이구나. 남자 같은 이름이다. 베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온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콘라드가 알겠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갑작스러운 웃음에 베온은 당황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웃다 간신히 진정된 콘라드가 베온을 바라보았다. 베온을 이해한다는 눈빛에 그의 눈가가 더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콘라드의 말에 가늘어졌던 베온의 눈은 순식간에 동그랗게 복구되었다.

“카벨리온 님. 테벤 경은 남자십니다.”

“……네? 그분이 남자라고요?”

베온이 그렇게 놀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베온은 정면에서 그의 얼굴을 봤음에도 전혀 남자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성인 남자치고는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던 데다가 얼굴 또한 상당한 미형이었다. 거기다 손에 들고 있는 양산과 긴 머리카락은 베온이 자연스럽게 그를 여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정말로 남자분이시라고요?”

베온이 묻자 콘라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들 착각하시죠. 얼굴도 그렇고 다른 경들에 비교해 체구도 큰 편은 아니시니까요. 하지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이십니다.”

“그, 그럼 양산은 왜……?”

남자라고 양산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테벤이 들고 있는 건 여성용이었다. 프릴과 레이스, 거기다 천으로 만든 장미 장식까지. 화려한 양산이 생각을 한쪽으로 기울게 도와주었다.

“테벤 경의 동생분이 손수 만든 양산이라 자랑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사실 어제 정원에서 콘라드는 계속 테벤에게 붙잡혀 있었다. 동생 사랑을 손수 실천하는 테벤은 어쩌다 마주친 콘라드를 잡고 계속해서 자신의 양산을 자랑했다.

양산에 달린 레이스 하나하나를 설명하다가 얘기는 동생 자랑으로 자연스레 흘렀다. 이렇게 뛰어난 양산을 자신에게 선물한 동생은 또 얼마나 천사인 거냐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쳐 봤자 좋을 건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테벤은 콘라드의 선배였으니까. 미소를 유지하며 ‘정말 대단하네요.’, ‘멋진 동생분입니다.’를 연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쭤볼 것도 있었어요. 테벤 경의 취미는 곰 사냥이라.”

콘라드의 대답에 베온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나의 의문이 풀렸지만, 아직도 남은 의문은 많았다.

“그럼 아까 테벤 경이 주신 매듭 장식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경?”

매듭 장식은 기원과 줄 사람에 따라 색이 바뀌었다. 안전을 원하면 노란색을, 승리는 붉은색을, 행운은 푸른색을 그리고 연인에게는 분홍색을 엮어 주었다. 그리고 아까 콘라드가 안주머니에 넣은 매듭 장식에는 분명 분홍색 천이 섞여 있었다.

“그거는…….”

대답하려던 콘라드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콘라드와 베온이 타고 있는 말들이 겁을 먹은 듯 앞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목을 두드리며 달래 보아도 투레질만 할 뿐,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앞에 있나 보군요.”

콘라드가 말에서 내리자, 베온 역시 따라 말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말이 도망가지 않도록 한곳에 묶어 두었다.

“여기는…….”

베온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야기를 나누며 오다 보니 어느새 숲 가장 안쪽까지 들어와 버렸다.

이 앞은 위험했다. 마을 사람들도 기사들도 이곳까지 오지는 않는데. 여기서부터는 그놈의 영역이 아니던가. 베온은 침을 삼켰다.

작년에 마을 덮친 곰 한 마리가 있었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다지만 많은 사람이 다쳤고 밭이 망가졌으며, 키우던 가축들이 잡아먹혔다.

백작과 백작 부인은 그놈을 잡기 위해 기사들을 보내기도 하고 본인들이 직접 움직이기도 했지만, 잡지 못했다. 오히려 그놈은 사람들을 놀리듯 경계의 틈을 파고들어 마을에 내려왔다.

더 나가는 건 위험합니다. 돌아가죠.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콘라드가 환하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갈까요, 카벨리온 님. 부디 제 뒤를 천천히 따라오세요.”

***

“늦네요.”

벨라의 말에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들 사냥감을 가지고 와 자랑하듯 뽐냈고, 연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콘라드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돌아오는 사람들 역시 줄어들었다.

“거의 다 나온 것 같은데…….”

샤온마저 불안한 눈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콘라드를 뒤따라간 베온 역시 소식이 없었다. 밤의 숲은 위험하다. 모험해 본 적 없는 레슬리조차 그걸 알고 있으니 콘라드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안 나오지?

콘라드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도 잊은 레슬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숲의 입구를 바라봤고,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사제님을!”

카벨리온 기사들과 사냥 대회에 참가한 손님이었다. 크게 다쳤는지 남자의 다리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늑대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다친 손님의 말에 카벨리온 백작 부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냥 대회라 해도 손님들이 다치면 안 되니 카벨리온 기사단이 먼저 숲 안쪽의 위험한 동물들과 몬스터들을 처리했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숲을 정찰하며 확인했다. 콘라드와 베온이 숲을 자주 다녀왔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 후에 사냥 대회를 열어 많은 사람이 인기척을 내어 주면, 적어도 위험한 동물들은 숲 안쪽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숲에서 생계를 이어 가는 마을 사람들이 안전하게 숲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냥 대회는 미래의 안전을 위한 일이었다.

“조금 이르지만, 사냥 대회를 중지하고 수색을 내보내도록 합시다.”

카벨리온 백작 부인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고 재빠르게 몇 명의 기사를 보냈다. 부상자가 나온 이상 계속해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사냥 대회를 중지한다는 말에 레슬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직 콘라드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부인.”

자신도 수색대로 가려는지, 말에 안장을 올리던 백작 부인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안 됩니다. 공녀님.”

백작 부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밤의 숲은 위험합니다. 거기다 공녀님은 손님이시지요. 그것도 셀바토르 공작님이 가장 아끼는 분이십니다. 그런 공녀님이 조금이라도 다치시는 걸 볼 수 없습니다. 이건 주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라드가…… 아이테라 경이 아직 숲 안에 있는 것으로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를요.”

예전처럼 강한 힘은 아니더라도 레슬리와 주변 사람을 지킬 정도는 되었다. 그 사실을 아는 백작 부인이 레슬리의 말에 고민하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제가 이런 일로 다치셨다고 뭐라 하지 않으실 거예요. 오히려 나서지 않았다고 책망하실지도 몰라요. 부인께서도 어머니의 성격을 아시잖아요.”

레슬리의 말에 부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항복이었다.

“좋습니다, 셀바토르 공녀님. 대신 밤의 숲은 길을 잃기 쉬우니 제 근처에서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부인.”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부인은 한 남자를 부르더니 레슬리에게 말 한 마리를 내어 주도록 했다. 남자는 이내 순해 보이는 말을 레슬리에게 내어 주었다. 순해 보이는 갈색 말은 레슬리가 다가오자 눈을 깜빡거렸다.

“잘 부탁할게.”

승마는 셀바토르 공작저에서도 그리고 테론 삼촌을 만나러 가면서도 종종 해 보았지만, 밤의 승마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초행인 숲길이니 말이 자신을 잘 이끌어 줘야 했다.

레슬리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말이 작게 울었다. 예쁜 말이다. 공작저에서도 이렇게 예쁜 말은 본 적이 없었다.

공작과 사이레인, 베스라온과 루엔티가 타야 했기에 셀바토르 공작저에 있는 말들은 다른 말들보다 몇 배나 컸고, 레슬리의 눈에는 무서워 보였다.

교감하듯 잠시 말의 깊은 눈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비명이 울렸다.

“꺄아악! 느, 늑대다!”

“으악!”

잘못 몰린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에 자극받은 것인지, 늑대 세 마리가 숲에서 튀어나왔다. 이미 극도로 흥분한 늑대들은 근처에 있던 말의 목을 물어뜯었다. 목덜미를 물린 말은 그대로 쓰러졌고 발을 몇 번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순식간에 상황은 난장판이 되었다.

피 맛을 본 늑대들은 더욱 거칠게 날뛰었고 말들은 겁을 먹고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늑대 중 한 마리가 도망치는 남자를 향해 활공했다.

깨깽! 도망가는 남자를 덮치던 늑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벨리온 백작 부인이 던진 창이 명중한 것이었다.

“다음!”

부인이 다시 손을 내밀자, 하녀가 바로 새 창을 쥐여 줬고 부인은 그걸 바로 던졌다. 창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밤바람을 갈라 정확히 다른 늑대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영악한 늑대는 재빠르게 몸을 피했고, 동료의 죽음과 자신을 향한 공격에 더욱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사람을 향해 덤벼들었다. 레슬리였다.

‘이런……!’

히이잉! 문제는 레슬리의 바로 앞에 있던 말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말이 날뛰기 시작했고, 흥분한 말을 말릴 틈도 없이 이빨을 드러낸 늑대가 레슬리를 공격했다.

어쩌지. 순간 머리가 굳었다. 흥분한 말은 자신을 앞발로 내리찍기 일보 직전이었고, 늑대는 자신을 물어 죽일 듯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늑대는 어둠으로 처리하면 되지만, 말은? 말도 같이 공격해야 하나.

조금 전까지 순하게 눈을 깜빡이던 말의 모습이 레슬리의 발목을 잡았다. 늑대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던 어둠도 망설임에 흔들거렸고 몸이 붕 떠올랐다.

“슈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어느새 콘라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콘라드가 자신의 검을 버리듯 떨어트리고 조심스레 레슬리의 얼굴을 쓸었다.

뺨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어디 다쳤어요?”

“아니, 아니에요.”

레슬리는 콘라드의 어깨를 잡고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냐는 물음에 거듭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행이라는 듯 콘라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다치신 줄 알았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레슬리가 시선을 마주치며 웃자, 콘라드의 얼굴이 한결 더 밝아졌다.

“그런데 상황이…….”

레슬리는 콘라드의 품에 안겨 주변을 돌아보았다. 숲에서 튀어나온 세 마리의 늑대 중 한 마리는 백작 부인의 손에,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레슬리의 어둠에 공격당해 죽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검에 베인 듯 보였다.

레슬리는 쉽게 누가 늑대를 제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콘라드였다.

늑대의 사체 옆에는 아직도 놀란 듯 투레질을 하는 말이 서 있었다. 기사처럼 보이는 남자 둘이 말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다행이다.’

안 죽었구나. 레슬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려 달라고 하자. 언제까지 품에 안겨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슈야, 숲으로 들어오려고 했나요?”

위험이 사라졌음에도 콘라드는 내려 줄 생각이 없이 자연스럽게 레슬리를 품에 안고 움직였다.

“늑대가 나타나서 다친 분이 계세요. 그런데 라드는 돌아오지 않고.”

레슬리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콘라드가 웃었다. 품에 안겨 있다 보니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제가 피해 다녀서 저에게 화나신 줄 알았는데.”

“알고 있었어요?”

놀라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모를 리가요. 슈야는 무언가를 숨기는데 소질이 없으니까요.”

알면서도 그랬단 말이지? 잠시 걱정에 잊혔던 분노가 슬금슬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봤던 사람과 품속에 가지고 있을 매듭 장식,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왜 자신을 피해 다녔는지도.

“라드.”

하지만 레슬리가 입을 떼기도 전에 환호성이 들려왔다. 놀라서 앞을 바라보자, 보통 곰의 몇 배는 돼 보이는 크기의 곰이 쓰러져 있었다.

“세상에, 아이테라 경. 이놈을 잡으셨습니까?”

놀란 백작의 말의 레슬리가 콘라드를 바라보자 그가 옅게 웃었다. 떠오르는 달빛을 받은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선물이에요, 슈야.”

***

사냥 대회가 끝나고 파티가 열렸다. 보아하니 사냥 대회는 부차적인 것이고 이게 본질인 듯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완연했지만, 레슬리의 기분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콘라드와 레슬리의 주변이 전부 사람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셀바토르 공녀님. 저는 그라니아 자작입니다. 뵙고 싶었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카발리아 백작입니다. 꼭 공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셀바토르 공작님께 정말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주 좋은 사업이지요.”

이 파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레슬리에게 말을 붙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 파티에 참석한 인원 중 절반이 달려왔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콘라드에게 붙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이 이상 사업을 늘일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레슬리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 레슬리를 보다 못한 샤온이 앞으로 나섰다.

“공녀님께서는 아까 늑대 때문에 많이 놀라 안정이 필요하시답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 걸 보세요.”

“하지만…….”

부채를 흔들며 웃자,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성의 주인 카벨리온이 하는 말을 무시할 수 없지만, 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는 얼굴이었다.

‘레슬리 양, 커튼 뒤로 가세요.’

그런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며 샤온이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레슬리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커튼 뒤로 숨었다. 샤온의 희생 덕에 레슬리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테라 경, 대단하세요. 저희는 저놈을 잡을 사람이 존재할지 몰랐습니다. 저희가 저놈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커튼 뒤로 이동해 콘라드에게 다가간 레슬리는 콘라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시선이 닿음과 동시에 그가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유연하게 웃으며 콘라드는 자리를 피했다. 사람들이 잡으려고 했지만, 콘라드의 맑은 웃음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슈야,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레슬리를 따라 커튼 뒤로 온 콘라드가 물었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쉿, 따라와요.”

레슬리는 그대로 콘라드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법도 한데 콘라드는 말없이 레슬리의 뒤를 따라왔다.

“여긴?”

레슬리가 콘라드를 데리고 간 곳은 샤온이 레슬리에게만 가르쳐 준 비밀 장소였다.

레슬리는 익숙하게 덤불 속을 뒤져, 깔고 앉을 천을 꺼냈다. 천을 펼친 레슬리는 그 위에 가지고 온 등불을 놓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콘라드는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레슬리의 옆에 앉았다.

“마법인가요?”

즐거움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은…… 아니고. 라드랑 여기에 오고 싶어서 미리 가져다 놨어요.”

샤온이 이곳을 알려 주고 나서 레슬리는 종종 길을 외울 겸 왔다 갔다 하며 몇 가지 물건을 가져다 놓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천이었다.

“추우면 말해요, 라드! 제가 두꺼운 것도 가져다 놨어요.”

덤불에서 뭔가를 꺼낼 기색으로 레슬리가 몸을 일으키자, 콘라드가 웃으면서 레슬리의 팔을 잡고 다시 앉혔다.

“춥지 않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재킷을 벗어 자연스레 레슬리에게 걸쳐 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나를 이리로 데려온 거죠?”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콘라드의 얼굴에 레슬리는 속에 담아 놨던 말을 마구 쏘아붙였다.

“샤온 양의 말을 듣고도 시큰둥했던 이유가 궁금해요. 정원에서 같이 있던 양산 쓴 그 여성분은 누구예요? 그리고 아까 매듭 장식은 왜 받은 거고요!”

마음에 담겼던 말이 하나둘 흘러 나갔다. 레슬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번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를 피한 이유는요?”

콘라드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진정하라는 듯 레슬리의 머리를 정리해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사실은 부끄러웠어요.”

콘라드는 붉어진 얼굴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오해는 옛적에 풀렸어요. 슈야가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의 고백을 받을 리가 없잖아요.”

쌍둥이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콘라드는 스스로 오해를 풀었다. 그는 레슬리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었고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이번 기회에 공녀님이랑 친분을 맺어야 해. 연인이 있다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언제 헤어질지도 모르는 게 연인인데.’

그리고 남들에게 무언가를 보여 줄 필요성도 느꼈다.

“그래서 백작님께 가장 악명이 높은 주인을 물었죠.”

“그럼 아까 잡아 온 곰이……?”

“예, 마을을 덮쳐 사상자를 낸 놈입니다. 백작님께서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으셨더라고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아까 콘라드가 잡아 온 곰 크기를 생각하면 그럴 만한 놈이었다.

“혼자 잡고는 싶은데 사냥을 해 본 적은 없는지라…… 테벤 경께 지혜를 빌렸지요. 그분이 슈야가 본 양산을 쓰신 분입니다. 참고로 남자분이세요.”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소개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웃었다.

“양산은 테벤 경의 동생분께서 만들어 준 거라 계속 쓰고 계시더라고요. 베스라온 님과 루엔티 님 못지않게 동생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베스라온과 루엔티로 예시를 들자 이해가 갔다. 두 오라버니도 레슬리가 양산을 만들어 주면 하루 종일 마탑에서나 황실에서나 쓰고 다닐 게 분명했으니까.

“……그럼 매듭 장식은 어떻게 된 거예요?”

콘라드는 말없이 자신의 품 안에서 매듭 장식을 꺼내 레슬리에게 쥐여 주었다.

“슈야 거예요. 카벨리온 님께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만들어 봤습니다.”

콘라드의 말에 매듭 장식의 끝 부분을 보자 자신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매듭 장식은 훌륭한데 수는 조금 삐뚤빼뚤했다.

“자수는 조금 어렵더라고요.”

쑥스럽다는 듯 콘라드가 말하면서 매듭 장식을 쥐고 있는 레슬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미안해요, 슈야.”

레슬리가 고개를 들자 콘라드가 섧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남들이 슈야에게 치근거리는 게 싫어서 무언가 확실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순간이었다지만 믿지 못하고 흔들린 게 부끄러웠다. 그런 상태에서 남들이 레슬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싫었다. 자꾸만 올라오는 모순된 감정에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레슬리를 피했다.

“순간 슈야를 믿지 못하고 흔들린 것도 미안하고.”

콘라드가 조심스레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진심이 어린 사과였다. 사과하기 위해 그런 곰까지 잡은 거였다.

레슬리는 잠시 콘라드를 바라보다가 제 주머니에 넣어 놨던 매듭 장식을 콘라드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품에 기댔다.

“……다음부터는.”

콘라드가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그냥 나를 피하지 말고 미안하다고 해 줘요. 그게 더 좋아요, 나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의 얼굴이 밝아지며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화해의 선물이 곰이라니, 이건 받아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레슬리는 콘라드의 품에서 작게 웃었다.

<마델 이야기>

그 일의 시작은 작은 발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어?”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따라온 하르트와 레소도 레슬리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레소가 의외의 발견을 했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웃었다.

세 사람의 시선 끝에는 그들도 아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마델이었다.

쉬는 날을 맞아 번화가로 놀러 간다고 며칠 전부터 들떠 있던 마델의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사이가 아닌 듯 보였다.

“최근 애인이 생겼다더니 정말이었군요.”

“그러게.”

레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레슬리는 마델을 바라보았다. 마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번 만나 볼까 생각도 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레슬리가 여태 보아 왔던 마델은 늘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지급된 하녀복을 입고 있거나, 셀바토르 공작저의 문양이 새겨진 외투를 입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머리에는 커다란 깃이 달린 넓은 챙 모자를 쓰고 요즈음 유행인 옷을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마델은 더없이 예뻐 보였다.

“마델 예쁘다.”

그렇게 레슬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은 비단 마델이 입고 있는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델의 얼굴에 넘쳐 나는 행복감 때문이었다.

“정말요. 더없이 행복해 보이네요.”

“한창 좋을 때로군요. 자, 갈까요 아가씨. 계속 바라보는 건 무례한 일이니까요.”

“응.”

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레슬리는 간신히 마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잠시 몇 걸음 걷다가 레슬리는 발을 멈추었다. 자꾸만 아까 행복해하던 마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마델은 결혼하는 걸까?’

아까 봤던 그 남자랑? 눈이 가늘어졌다.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지낸 지 4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몇몇 사용인들은 결혼 후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몇 달 전에도 하인 한 명이 결혼하고 일을 그만두지 않았던가.

‘아내 고향으로 가서 사업을 도울 생각입니다. 수입이 좋아서요.’

그렇게 말하고 아예 수도를 떠났지. 비록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과 이별하는 건 슬픈 일이었다. 마델도 그렇게 되려나.

“아가씨, 잘 지내세요. 저는 가 볼게요.”

마델이 그렇게 말하며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거기다 수도를 떠나 버리면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어려울 테니까.

좋아! 마델이 결혼해도 저택에 머물고 싶게 만들면 되겠지!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돈이려나. 그리고 디저트? 마델은 자신 못지않게 단 걸 좋아하니까.

그럼 제나에게 말해서 마델의 급료를 올려 달라고 하자. 그다음에 내가 마델에게 코코아랑 케이크를 선물해 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완벽한 계획이었다. 레슬리는 몸을 빙글 돌려 제 뒤를 따라오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레소 경, 하르트 경! 우리 들어가기 전에 케이크 집을 들렀다 가요.”

먹을 거랑 돈으로 마델의 행복치를 올려 주겠어!

***

“아니, 저는 이걸 먹을 수 없어요…….”

입으로는 거절하지만, 마델의 눈과 행동은 달랐다. 눈은 이미 케이크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고 손은 포크를 들고 있었다.

“마음껏 먹어도 돼. 내가 마델을 위해 직접 사 온 거니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레슬리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슬리의 말에 조금 눈치를 보던 마델은 이내 포크로 가장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를 크게 잘라 한입에 넣었다.

“으음! 역시 치즈 케이크가 제일 맛있어요.”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뿌듯해졌다. 예전에 마델이 먹고 싶다며 중얼거린 걸 기억해 두길 잘했다. 레슬리는 자신을 칭찬하며 차를 음미했다.

“그런데 아가씨, 이 케이크 사시기 힘들지 않으셨나요?”

두 번째 케이크를 먹으며 마델이 넌지시 물었다.

지금 마델이 먹고 있는 케이크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크집의 한정 치즈 케이크였다. 하루에 단 10개만 파는 것을 레슬리가 전부 사서 마델 앞에 늘어 둔 것이다. 물론 치즈 케이크만 먹으면 질리니 다른 케이크들과 쿠키, 초콜릿 등이 옆에 곁들여졌다.

“마델.”

레슬리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자신만만하게 마델을 바라보았다.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겠니.”

레슬리의 머릿속에서 가장 멋진 여자인 어머니를 따라 머리를 쓸어 올리자, 마델이 감동한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나머지는 서올리랑 다른 애들이랑 나눠 먹어. 그러기 위해서 많이 산 거니까.”

레슬리의 말에 마델은 입에 포크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델 혼자만 레슬리에게 얻어먹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용인들이 알면 마델에게 불이익이 갈 수 있으니 세심하게 몇 개를 더 사 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자연스레 세 번째 케이크를 집어 들며 마델이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요즘 너무 살맛 나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근에 제나 집사님이 급료도 올려 주셨거든요. 거기다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고……. 아, 행복해.”

“흐응, 그래? 잘됐다.”

급료 인상도 레슬리의 작품이었으나 모르는 척, 레슬리는 환하게 웃고는 슬쩍 눈치를 보며 네 번째 케이크를 집어 들고 있는 마델에게 질문을 던졌다.

“있지, 마델.”

이번엔 딸기 케이크를 입안 가득 머금고 있는 마델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중에라도, 아아주 나중에라도 저택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거지? 그! 얼마 전에 한스가 결혼해서 나갔잖아. 그것 때문에.”

레슬리가 다급하게 붙인 뒷말은 듣지도 않은 채, 마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그리고 빠르게 입안에 남아 있던 네 번째 케이크를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절대, 절대로 저택을 나가지 않을 거예요. 급료도 좋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좋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마델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주근깨가 송송 박혀 있는 뺨이 위로 올라가며 환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거기다 저는 레슬리 아가씨도 정말로 좋은걸요.”

진심 어린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렇구나.”

그러면서 슬그머니 자신의 몫으로 놔둔 케이크를 마델 쪽으로 내밀었다. 레슬리도 마델이 너무너무 좋았으니까.

‘그랬는데.’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슬리가 길가에서 데이트하던 마델을 발견하고 고작 한 달여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사이 마델이 이상해졌다. 언제나 행복감에 차 있던 마델이 며칠 전부터 눈에 띄게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고 다니더니, 오늘은 아예 정신이 나갔다.

아까부터 레슬리의 시선은 방을 청소하러 들어온 마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델은 그것도 모른 채 생각에 빠져 있는 듯 눈이 흐리멍덩해 보였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창문을 닦던 손은 멈춘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뭔가…….”

이제는 작게 중얼거리는 마델을 보며 레슬리의 고개가 점점 옆으로 기울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레슬리가 알기로는 마델은 연인도 있고 급료도 있고 식사도 잘 나올 텐데.

‘왜지?’

급료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요즈음 너무 케이크만 먹여서 그런 걸까. 아무리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레슬리는 1시간째 한 창문틀을 닦고 있는 마델을 작게 불렀다.

“마델.”

“으악! 네, 네? 네! 아가씨!”

놀랐는지 걸레를 떨어트릴 뻔한 마델이 눈을 크게 뜨며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괴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슬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무슨 일 있어?”

그렇게 티가 나게 행동하고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지 레슬리의 추궁에 마델의 눈이 레슬리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요? 저는 모르겠어요. 아무 일도 없는데.”

“……정말?”

레슬리의 추궁에 마델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요! 제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아가씨도 옆에 있는데. 아, 청소! 청소해야지. 이러다 집사님에게 혼날라.”

그냥 온몸으로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마델의 뒷모습에 다시 레슬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

모두가 잠자리에 든 야심한 시각, 불이 꺼진 주방에서 집회가 열렸다.

작은 촛불과 약간의 다과, 새로 들어온 찻잎과 특별 손님을 위한 코코아가 긴 식사용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서올리와 몇 명의 하녀들이 앉아 있었다. 전부 마델과 친한 하녀들로, 그들은 최근 그녀의 뒤처리에 지쳐 있었다.

레슬리는 푸념을 늘어 두는 하녀들 사이에 앉아 눈을 또르르 굴렸다.

“어제는 주방 일을 돕다가 그릇을 깨 먹었다니까요! 그게 얼마짜린데. 아마 찻잔 하나가 우리 두 달 치 급료일 거예요.”

“내가 알기론 이제 깎일 급료도 없을걸.”

벨의 말에 서올리가 캡을 벗으며 눈을 찡그렸다.

“엊그제는 식료품을 나르다가 달걀 두 바구니를 그대로 떨어트렸거든요.”

“급료가 올랐다고 좋아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군.”

하녀들의 말에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마델의 상태는 더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레슬리의 물음에 하녀들이 나름의 추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녀들 모두 정신없는 축제 때나 볼 법한 행렬처럼 이어지는 마델의 실수를 수습하는 데 지쳐 가고 있었다.

“집안일이 아닐까요? 누가 아프다든가?”

“일을 좀 쉬고 싶은 걸까요. 왜, 다들 고비가 한 번쯤 오지 않아?”

여러 추측에도 그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모두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힐 때쯤, 침묵하고 있던 서올리가 고민을 끝낸 듯 입을 열었다.

“남자예요. 애인이요.”

남자라면 저번에 보았던 마델의 연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레슬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봤던 마델을 떠올렸다.

“연인이라면 나도 저번에 봤어. 행복해 보이던데?”

“아, 아가씨도 보셨군요. 맞아요, 그 연인. 그게…….”

서올리가 눈을 찡그리며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한참을 고민하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그 남자, 바람을 피우는 것 같더라고요.”

“뭐어어!”

서올리의 한마디에 6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고, 레슬리는 놀라 코코아를 놓치고 말았다. 쿵! 묵직한 코코아 머그잔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바람, 바람이라니?

***

오랜만에 쉬는 날을 맞아 외출을 나온 마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등 뒤에서 시선이 자꾸만 느껴졌다.

멈춰 서면 사라지고, 걷다 보면 다시 느껴지는 시선에 마델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뒤에는 신문을 파는 소년과 길거리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연습하는 이들, 그리고 거지 떼들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상해.’

마델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마델이 완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자, 신문 파는 소년으로 변장했던 레슬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안 들켰네.”

“네,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우리의 위장이 완벽한 덕분입니다.”

레슬리의 말에 돼지 가면을 벗으면서 서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로 분장한 셀바토르 공작저의 기사들 역시 뿌듯해하며 미소 지었다.

“좋아, 다시 오늘의 목표를 말해 줄게.”

머리를 묶어 올려 빵 모자 안에 넣고, 체크무늬 베스트와 같은 무늬의 바지를 입은 레슬리는 완벽히 소년 같아 보였다. 레슬리가 길거리에서 주운 신문을 꽉 쥐며 말하자,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마델의 애인이야. 마델이 오늘 애인을 만난다고 했으니, 그 뒤를 따라가서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는 확실한 증거를 모아다 보여 주자.”

레슬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델은 애인이 바람을 피우는 걸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지금 만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불안해하면서도 그와 헤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델에게 듣자 하니 그 남자 절대로 자기는 바람 같은 걸 피지 않는다면서 마델을 안심시키고 있다나 봐요.”

“그래도 낌새가 있을 텐데.”

한 하녀의 말에 서올리가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델이 수도에 막 올라왔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래요. 그때부터 좋아했는데 얼마 전부터 마침내 사귀기 시작한 거라, 쉽게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마델이 수도에 막 올라왔을 때부터 시작된, 오랜 짝사랑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귀고 난 지 얼마 안 돼서 바람을 피우다니. 서올리의 말을 들은 모두가 화난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쁜 놈이로군요. 그런 놈들은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머리에 재를 덕지덕지 바른 셀바토르 공작저의 기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손짓이 섬뜩한지 몇몇이 고개를 숙였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마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거야.”

마델에게 들키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서올리와 다른 하녀들은 가면극을 하는 배우 분장을 했고, 셀바토르 공작저의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거지 분장을 했다.

여러 번 해 본 듯 익숙하게 몸과 머리카락에 재와 진흙을 바르는 모습에 레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예전에 그럴 만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며 기사들이 웃었다.

다른 이들도 아니라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거지 분장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얼굴에 재를 바르던 레소에게 물어보았지만,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기사들이 싸울 때 거지 분장을 하던가?’

어떤 상황일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거지로 분장하고 있다가 적이 방심하면 뒤에서 찌르는 것? 잠시 레슬리의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하지만 이내 현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거지들이 된 기사들이 아니라 마델이었다.

“좋아, 들키지 않게 가자!”

“좋습니다!”

너무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는 바람에 마델이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신문을 파는 레슬리, 가면을 뒤집어쓴 서올리와 하녀들, 그리고 애절하게 동전을 바라는 셀바토르 공작저의 기사들만이 있었다.

“이상해.”

의심을 떨치지 못한 마델이 결국 몸을 돌려 서올리에게 다가갔다. 마델의 눈이 의구심을 품고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지금 ‘돼지 가족 이야기’를 연극할 때가 아닌데, 왜 ‘노릇노릇한 첫째’ 가면을 쓰고 있지? ‘바삭바삭한 둘째’도 아니고.”

길거리에 있던 것을 아무것이나 사서 쓴 것인데 하필 마델이 잘 아는 연극이었나 보다. 당황한 서올리가 주춤하며 자신의 가면을 붙잡았다.

“묘하게 이상하단 말이지.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질 않나 쑥덕거림이 느껴지질 않나.”

이런 걸 눈치챌 마델이 아닌데. 다들 놀라 입을 벙긋거렸다.

의구심을 한껏 품은 마델이 서서히 서올리의 가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노릇노릇한 첫째의 귀를 움켜잡았다.

“너 누구…….”

“자기!”

갑자기 골목에서 걸어 나온 한 남자가 마델을 불렀다.

마델은 빠르게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고,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브린.”

“자기, 뭐 하고 있었어? 돼지 귀는 왜 잡고 있고.”

애인이었다. 애인을 본 적이 있던 레소와 레슬리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빠르게 브린이라 불린 저 남자가 마델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당히 자상해 보이는 남자였다. 외모는 반듯했고, 입고 있는 옷은 꽤 좋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푸른 눈을 빛내며 마델에게 다가왔다.

“아니, 그게 뭔가 이 여자가 이상해서…….”

“그런 소소한 건 신경 쓰지 마.”

브린은 이를 보이며 웃더니 자연스럽게 마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보다 자기, 어서 가자. 예약해 둔 오페라가 곧 시작된다고.”

“하지만…….”

“오페라에 늦으면 자기가 책임질 거야?”

이어지는 남자의 타박에 마델이 눈을 찡그렸고, 남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고개는 옆으로 기울었다. 마델은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 레슬리를 따라 오페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확실히 제 취향이 아니었다며 이야기한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페라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야, 어서 가자고.”

그러면서 브린은 마델의 팔을 잡고 한 곳으로 이끌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자기, 오페라 보자고 해서 삐졌구나? 미안. 하지만 이건 꼭 보고 싶은 거였는걸. 오페라가 끝나고 나면 자기가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먹자고.”

그러면서 다정히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마델이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면서 브린을 따라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에 따라붙은 시선들을 전혀 모른 채.

오페라가 끝나고 나서는 평범한 데이트였다. 두 사람은 밥을 먹고 공원을 거닐면서 새에게 빵가루를 뿌려 주기도 했다.

“억지로 오페라를 고른 것 빼고는 나빠 보이지 않네요.”

행인에게서 동전 몇 닢을 받은 기사가 작게 속삭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브린은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요즘 걱정이 있어.”

브린이 그 소리를 하기 전까지는.

“걱정?”

빵을 찢어 새들에게 던져 주던 마델이 놀란 얼굴로 브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마델을 바라보았다. 힘겨워 보이는 그의 얼굴에 마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무슨 일인데. 말해 봐. 우린 연인이잖아.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어.”

마델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입을 연다는 듯 브린이 운을 뗐다.

“얼마 전에 시작된 사업이 잘 안 되고 있어. 그것 때문에 그래.”

“세상에, 분명 잘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

“뭐 쉽게 되는 일이 있나…….”

말꼬리를 흐리며 브린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말을 흘렸다.

“아아, 셀바토르 공작저 같은 곳에서 우리 물건을 사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레슬리와 서올리는 뛰쳐나가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만류당했고, 분이 식지 않은 레슬리는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선공격이 최고인데, 마델이 그걸 모르다니!

“내가 한번…… 제나 집사님께 물어봐 볼게.”

“정말?”

브린은 언제 어두웠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마델을 끌어안았다. 마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옅게 웃었다. 주근깨가 박힌 마델의 뺨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정말, 정말로 고마워. 자기! 자기 덕분에 내 사업은 살아날 거야.”

“뭘…… 그냥 여쭤볼 뿐인데.”

“그래도 그게 어디야.”

브린은 마델을 보며 환하게 웃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돈도 빌려주고…… 이렇게 말도 전해 주고. 조금만 기다려, 사업이 제대로 자리 잡으면 우리 결혼하자.”

누가 봐도 믿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마델은 눈물을 글썽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델의 뺨에 키스한 브린은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봐야겠어.”

“벌써?”

“미안, 자기. 중요한 일이 있거든. 공작저에 물품을 납부하게 됐으니 얼른 가 봐야지! 사업 계획도 짜고, 가게에 들러서 미리 언질도 주고. 그래야 직원들이 놀라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브린은 마델이 잡기도 전에 자리를 떴고, 화가 끝까지 난 레슬리는 재빠르게 브린을 쫓아갔다.

“수상해.”

레슬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을 하러 간다던 브린은 가게나 사무실이 있는 상점가가 아닌, 주택가로 들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는 걸까요? 하지만, 분명 가게로 간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저 브린이란 남자가 사는 곳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근방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브린은 마델의 도움이 기쁜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작은 골목을 몇 개나 지나 도착한 곳은 노란색의 아담한 주택이었다.

“브린 씨,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도 안녕하신가요?”

마침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익숙하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근 주민이 그를 안다는 건 그가 지금 서 있는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것. 모퉁이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민 모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익숙하게 나무문을 두드린 브린은 재빠르게 제 옷차림을 정돈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완연해 있었다. 브린이 문을 두드린 지 얼마 안 돼 문이 열렸고.

“내 사랑, 브린!”

집 안에서 뛰어나온 한 여자가 그의 품에 안겼다. 여자가 사랑스러운지 브린의 눈에는 달콤함이 뚝뚝 흘렀다.

레슬리와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브린의 품에 안겨 행복한 듯 미소 짓고 있는 여자는 아까 오페라에서 단역을 맡았던 여자였다.

“오늘 사업 이야기, 잘 하고 왔어?”

“그럼! 아까 봤지? 아까 오페라를 같이 보러 간 여자가 사업 협력자야. 자기가 보고 싶어 해서 데려왔어. 어때, 나 잘했지?”

나는 이렇게 떳떳하다고. 브린은 그렇게 말하며 여자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자기가 보듯 바람 따윈 피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굳이 마델이 싫어하는 오페라를 보러 간 이유가 저거였던 모양이었다. 혈압이 끝까지 오른 서올리가 휘청거렸다.

“우리 자기가 최고지. 그럼, 알지. 그런데 그 여자 나랑 비슷한 나이 또래 같던데, 어떤 일을 하는 거야?”

“아아, 셀바토르 공작가랑 나를 이어 줄 다리? 사실 이름도 가물가물하네. 처음 만났을 때 셀바토르 공작가의 겉옷을 입고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마델이 고백할 때 셀바토르 공작가의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고백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진짜 첫 만남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까부터 마델의 이름 대신 ‘자기’라고 불렀구나. 레슬리는 입술을 깨물며 남자를 무섭게 노려봤다.

“뭐야, 사업 협력자라면서 이름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브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안 되겠다. 레슬리가 성큼 모퉁이에서 뛰어나갔다.

“야, 이…….”

“야, 이 바람둥이야!”

뭐지, 내 속마음이 내 입보다 빠르게 말한 건가? 레슬리가 놀라 뒤를 바라보자, 언제 쫓아왔는지 마델이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어? 어떻게 여기에……? 설마 내 뒤를 밟은 거야?!”

잠시 당황해하던 브린은 역으로 마델에게 화를 냈고 그대로 뺨을 처맞았다.

“그래. 쫓았다, 이 새끼야. 내가 쫓아오는 게 싫었으면 이런 걸 두고 가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마델은 남자의 얼굴에 장갑 한 짝을 그대로 던졌다.

“청혼해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나?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어!”

“잠시만요, 청혼이라니요?”

한쪽에서 폭탄이 터지자, 이쪽에서도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브린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는 놀란 듯 주저앉은 브린과 마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늘 저는 이 새끼에게서 청혼받았어요, 결혼하자고 했다고요!”

마델의 말에 여자의 경멸 어린 시선이 브린에게 향했다. 브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마델이 때린 뺨을 다시 처맞았다.

여자는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더니 창문을 열고 무언가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브린의 물건들이었다. 거리 곳곳에 브린의 물건들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외친 여자는 쿵 소리가 나게 창문을 닫았다. 잠시 얼빠진 듯 여자가 있던 창을 바라보던 브린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마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너 때문에 내가……!”

브린은 마델을 향해 손을 올렸고,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맞았다.

“마델 괴롭히지 마, 이 나쁜 놈아!”

레슬리였다. 사이레인이 알려 준 선공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가씨!”

“너.”

레슬리는 급하게 달려오느라 반쯤 벗겨진 모자를 그냥 벗어 던졌다. 마델이 아가씨라 부른 것과 모자 밑에서 흘러나온 은발에 브린은 레슬리가 누군지 알아챈 듯했다.

“돈 갚고 다신 마델의 앞에 나타나지 마. 다시 마델 앞에 나타나서 괴롭히면…….”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겁을 먹은 듯 브린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셀바토르가 왜 셀바토르인지 보여 주겠어.”

공작저의 이름까지 나오자 브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급하게 도망쳤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델이 그대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마델…….”

숨어 있던 모두가 나와 마델을 달래기 시작했다.

“사,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사귀게 된 게 너무 좋아서…….”

마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레슬리가 마델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자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마델, 걱정 마. 우리가 더 괜찮은 남자 소개해 줄게!”

“그래, 저딴 놈은 강물에 떠내려 버리고 좋은 남자 만나자.”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마델에게 하녀들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무서운 기세로 소개해 줄 남자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아.”

하지만 마델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연애 따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레슬리 아가씨를 모시는 일에 집중할 거야. 나에겐 레슬리 아가씨뿐이라고!”

마델의 말에 크게 감동한 레슬리가 마델을 꼭 끌어안았다.

“걱정 마, 마델. 내가 평생 책임질게! 매일매일 맛있는 디저트도 주고, 임금도 올려 줄게! 내가 마델 인생 하나 못 책임지겠어!”

“아가씨!”

평생 고용이 보장되는 훈훈한 광경이었다.

<성인식>

“오실 때가 되었는데.”

마델이 최대한 멀리 보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입이 점점 튀어 나가고 있었다.

“마델.”

레슬리는 작게 키득거리며 마델을 불렀다.

“금방 오시겠지. 들어와 있어. 마차가 오면 소리가 들리니 그때 나와도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가 마차 문을 열었다. 하얀 마차에 라일락색으로 셀바토르 가문의 인장이 그려진 마차는 레슬리가 열두 살 적 처음 선물 받은 마차였다.

부모님과 두 오라버니는 이제 오래되었다고 새 마차를 선물해 준다고 했지만, 레슬리는 그래도 이게 마음에 들어 자주 타고 다녔다.

“그래요, 마델. 들어가 있어요. 내가 밖에 나와 있으니 오는 마차를 놓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제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기른 레소가 마델을 보며 웃었다. 레슬리와 레소가 둘 다 그러자 마델이 뺨을 긁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로 들어와 레슬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서 오셨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레슬리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자, 마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요한 손님, 셀바토르 공작저의 손님이 아니라 레슬리의 손님이었다. 매일 이날만을 기다리던 레슬리가 못 참고 성문 밖까지 마중을 나올 손님이었다.

베스라온과 루엔티가 같이 나와 주겠다고 했지만, 레슬리는 거절했다. 하녀와 기사들을 못해도 셋 이상 데려가라는 말에도 괜찮다고 웃었다.

셀바토르 공작저는 지금 레슬리의 일로 너무도 바빴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레슬리가 하녀들과 기사들을 데려가는 건 좋아 보이지 않으니까.

거기다 베스라온 역시 셀바토르 공작의 후계자가 되면서 해야 할 일이 배로 늘어 있었다. 루엔티 역시 어쩌다 보니 마법사의 저택과 신전의 중계자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저택에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늘고 있었고. 그러니 이 정도는 자신이 홀로 해도 되는 일이었다.

‘이제 나도 곧 성인인걸.’

레슬리는 뺨을 붉히며 웃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슬리의 성인식이었다. 열여덟 살의 생일이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마델이 마차 창밖을 가리켰다.

“아가씨! 저기, 저거 저희 마차 같은데요?”

마델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그 끝에 저 멀리서 오는 마차가 보였다. 레슬리의 눈이 덩달아 가늘어졌다.

“맞는 것 같아. 그렇죠, 레소 경!”

“네, 맞습니다.”

레소 역시 고개를 끄덕이자 레슬리는 환하게 웃더니 재빠르게 마차에서 내렸다.

드디어 만난다. 심장이 작게 뛰기 시작했다.

보통의 마차보다 더 큰 갈색 마차에는 레슬리의 하얀 마차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공작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가씨, 레소 님. 마델도 나왔구나.”

레슬리의 마차를 알아본 셀바토르 공작저의 마부는 하얀 마차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맨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레슬리는 기다리다 못해 냉큼 뛰어 마차에서 내린 남자에게 폭 안겼다.

“삼촌!”

테론이었다. 그가 수도로 올라온 이유는 당연히 하나뿐인 조카, 레슬리의 성인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테론이 주름진 얼굴로 옅게 웃었다. 그리고 탄광 일로 거칠거칠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슬리.”

“어서 오세요, 삼촌.”

레슬리가 테론을 꼭 끌어안고 화사하게 웃었다.

“옷이 더러워질 텐데…….”

가장 깔끔한 옷을 입었지만, 광부의 옷이었다. 옷의 군데군데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혹여나 더러운 게 레슬리의 최고급 드레스에 묻을까, 테론이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괜찮아요, 삼촌. 삼촌이잖아요.”

한껏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레슬리가 고개를 젓자 테론 역시 기쁜 듯 미소를 머금었다.

“레슬리 아가씨.”

테론의 뒤를 이어 한 여자가 내렸다. 마차 전복 사고로 죽어 가던 테론을 살리고 그와 결혼한 비안카였다.

“아이참, 또 아가씨라 부르시네요. 부디 레슬리라 불러 주세요.”

레슬리가 환하게 웃으며 비안카의 손을 잡자 비안카의 푸른 눈이 동그래지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떻게……. 저는 평민이고 아가씨는 단 하나뿐인 공작가의 공녀님이신걸요.”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비안카 숙모는 테론 삼촌을 구해 주셨고 테론 삼촌은 저를 구해 주셨으니 결과적으로 숙모님이 저를 구해 주신 거나 다름없어요.”

비안카는 동정심에 죽어 가던 테론을 데려와, 얼마 안 되던 저금까지 깨 가며 테론을 치료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테론이 전부 나을 때까지 그를 돌봐 주었고 그가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서서히 사랑에 물들어 갔다. 비안카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 덕분에 테론은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받았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하고 자신의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만약 비안카가 죽어 가던 사람을 무시하거나 그냥 경비대에 알리는 수준으로 끝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끝은…… 조금 씁쓸해졌겠지.

“그러니까 부디 레슬리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우리는 친척이잖아요. 가족이나 다름없는걸요.”

레슬리의 말에 비안카가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좋아요. 그럼 다음부터 또 아가씨라 부르지 않는 거죠?”

사실 이건 테론이 몇 번 수도에 올라올 때마다 일어나는 작은 실랑이였다. 이름을 부르라고 해도 다시 수도에 올 때쯤이면 아가씨라 부르고 있었다.

“네, 아가씨…… 아니, 아니. 레슬리.”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한지 비안카의 말끝에 작은 웃음이 붙었다.

“네, 숙모!”

레슬리가 환하게 웃으며 이번엔 비안카 품에 안기자, 비안카가 잠시 어색한 듯 손을 휘휘 젓더니 이내 레슬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사이 마차에서 마지막 손님이 내렸다. 테론과 비안카의 딸인 줄리아였다.

“오랜만이야, 언니!”

마차에서 폴짝 줄리아가 뛰어내리자 그녀의 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세상에, 줄리아. 많이 컸네.”

레슬리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줄리아를 꼭 안아 들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줄리아는 레슬리 품에서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녹음이 가득한 눈동자가 햇빛을 머금고 더없이 반짝거렸다.

잠시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레슬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촌을 꼭 끌어안았다. 레슬리의 은색 머리카락이 줄리아의 뺨을 간지럽혔는지, 줄리아가 입을 꼭 다물고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자, 이제 공작저로 가실까요?”

훈훈한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레소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길 한가운데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언니 마차는 커서 너무 좋아!”

성문에서부터 공작저까지는 레슬리의 하얀 마차를 타겠다고 우긴 줄리아가 짧은 다리를 동동거렸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자신이 들고 온 인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마차는 크고 하얀색이라 이뻐서 너무 좋아. 그래서 내가 저번에 루카에게 자랑했는데 루카가 그런 게 어딨느냐고 막 그래 가지고. 그런데 그때 벌레 허물이 있어서.”

짧은 거리 동안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졌다. 아직은 끊어 말하기가 힘든지 줄리아의 말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계속해서 주제가 튀었다가 도로 돌아왔다.

“그렇구나.”

‘그 루카라는 애가 하얀 마차가 어디 있느냐고 줄리아에게 뭐라 한 건가?’

줄리아의 말에 끝없이 호응하던 레슬리가 슬쩍 눈빛으로 마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신히 알아들을 만하면 벌레 허물 이야기나 강가에서 본 물고기 이야기가 튀어나와 정확히 알기가 힘들었다.

레슬리의 눈빛을 정확하게 알아챈 마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레슬리의 개인 하녀다웠다.

‘네, 그런 이야기예요.’

‘그렇구나.’

“언니, 내 이야기 듣고 있어?”

레슬리와 마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챈 줄리아가 자신의 인형에서 시선을 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럼!”

“네! 듣고 있답니다.”

레슬리와 마델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를 이해시키기 위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래서 내가 루카에게 말했거든.”

다시 줄리아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마부가 공작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마차가 멈춰 서자 가장 먼저 뛰어내린 것은 줄리아였다.

“세상에 줄리아! 위험하니 마차는 멈춘 후에 내리라고 하지 않았니!”

줄리아가 내리자마자 비안카의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그 위를 줄리아의 맑은 웃음이 덮었다. 레슬리가 고개를 저었다.

레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공작저 문 앞에 서 있던 제나가 환하게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테론 님, 비안카 님, 줄리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언니이! 나 여기!”

줄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레슬리와 마델은 죽어 가고 있었다.

“엄, 엄청 빠르네.”

레슬리가 땀을 훔치며 말하자 마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 사람은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레슬리가 열두 살 적, 첫 소풍날에 배운 놀이. 그런데 이게 이렇게 힘든 놀이였나?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원래 이렇게 힘들지 않은데…….”

레슬리의 마음을 읽은 듯 마델이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본디 숨바꼭질은 숨은 사람을 찾으면 끝나는 놀이였지만, 잡히고 싶지 않은 줄리아 덕분에 놀이는 많이 변질되어 있었다.

찾으면 도망간다. 쪼그마한 것이 사력을 다해 도망가니 잡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마델과 연계해 줄리아를 안아 올리면 크게 웃고는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언니, 또 하자!’

‘어떻게 저렇게 활기차지.’

움직이기 쉽게 바지로 갈아입고 왔는데도 줄리아의 움직임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작은 몸을 이용해 줄리아는 덤불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레슬리를 따라 바지로 갈아입은 마델이 말을 꺼냈다.

“옛날 생각?”

“네, 아가씨에게 처음 이 놀이를 가르쳐 드렸던 날이요.”

아아, 그날.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는 줄리아처럼 이렇게 고생…….”

“그때도 이만큼 힘들었는데. 줄리아 아가씨를 보니 자연스럽게 아가씨 생각도 나네요.”

레슬리가 생긋 웃으며 말하기도 전에 마델이 고개를 흔들며 레슬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덤불 밑으로 기어가시는 것도 그렇고 나무 위로 올라가 웃는 것도 그렇고. 계속 ‘한 번 더’를 외치시는 것도 똑같아요.”

……내가 그랬단 말이야?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사실 어릴 적이라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마냥 즐거웠던 기억뿐이었다.

마델은 힘들었던 기억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라는 듯 아련하고 아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엔 30분을 넘게 사라지셔서 전부 찾았었지요. 결국 주무시던 공작님 품에서 발견되셨고요.”

아, 이건 기억난다. 사이레인, 베스라온 그리고 루엔티까지 합세한 놀이에서 지고 싶지 않아 온 힘을 다해 숨을 곳을 골랐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곳은 다 한 번씩 숨었던 곳이었고, 거기에 또 숨는다면 분명 마델에게 들킬 게 뻔해 보였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졸음이 몰려왔다. 어쩌지, 어디 숨지. 졸린 눈을 비비며 숨을 곳을 찾던 레슬리는 정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을 발견했다.

잠시 제나가 귀마개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사이 레슬리는 공작의 품에 파고들었고, 그대로 잠들었다.

“햇빛이 따듯해서 졸립더라고…….”

어쩐지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델이 그런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 레슬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거기다 마델이 너무 잘 찾으니까 내가 숨을 곳이 없어서 어머니 품에 숨은 거 아니야.”

기억의 파편이 하나 떠오르자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 나름대로 숨고 숨어도 결국 마델이 웃으면서 자신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어머, 당연하죠! 이래 봬도 저는 우리 마을에서 숨바꼭질의 천재, 숨바꼭질의 달인 마델이라 불렸어요!”

마델이 당당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이 정말 숨바꼭질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저런 건 존중해 줘야 할 영역이야. 자신도 쿠키 올리기의 천재가 아니던가.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내자, 마델이 더욱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좋아, 숨바꼭질의 천재 마델! 가자!”

이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도대체 몇 시간째 이 놀이를 하는 건지. 들어가 쉬지 않으면 분명 몸살이 날지도 몰랐다.

“이 놀이는 이 판으로 끝입니다!”

레슬리가 단호한 얼굴로 외치자, 마델 역시 레슬리와 함께 진지한 표정으로 넓고 넓은 셀바토르 공작저의 정원을 뒤지기 시작했다.

“후하.”

간신히 방으로 돌아온 레슬리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숨을 내쉬었다. 오늘 얼마나 정원을 헤집고 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 판이라고 외치며 간신히 줄리아를 잡고 나자 줄리아는 환하게 웃었다.

‘언니, 그럼 이번에 우리 술래잡기하자!’

어린아이들의 체력이란. 다행히도 술래잡기는 일찍 끝났다. 줄리아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 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줄리아는 그릇에 머리를 박고 졸기 시작했다.

‘귀여웠어.’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공작저에 오면 맛있는 음식이 많아서 좋다며 눈을 반짝거리다가 순식간에 머리를 박더니 그대로 잠에 빠졌다. 결국 테론이 줄리아를 안아 들고 식당을 빠져나가야 했다.

발이 퉁퉁 부었는지 신발을 신고 있기도 힘들어 레슬리는 신발을 벗었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었는데도 발이 이렇게 아픈 걸 보니 오늘 많이 걷기는 걸은 모양이었다.

살 것 같다. 휴. 숨을 길게 내쉬며 레슬리는 긴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눈을 깜빡였다.

‘내일도…… 놀아 줘야겠지?’

줄리아는 계속해서 놀려고 할 테니까. 도대체 그 조그마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끝없이 샘솟는 걸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모든 아이가 저런 걸까? 그래서 두 아이의 아빠인 에론 경이 그렇게 힘들어한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레슬리, 들어가도 될까?”

테론이었다. 레슬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바르게 앉았다.

“네, 네! 들어오세요, 삼촌.”

레슬리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테론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세요, 삼촌?”

“다름이 아니라.”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테론이 옅게 웃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종종 이렇게 테론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면 레슬리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테론은 아무리 봐도 스페라도 후작과 닮아 있었으니까.

머리카락 색만 밀색으로 바꾼다면 지금 당장 스페라도 후작이 죽음에서 돌아왔다 믿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타고난 외양뿐이었다. 오랜 시간 탄광에서 일하면서 생긴 흔적들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비안카와 살며 생긴 웃음, 그리고 그 웃음이 만들어 낸 주름은 스페라도 후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테론은 테이블 끝에 있는 의자를 빼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고생이 많았지?”

“아니에요. 줄리아 덕분에 재밌었는걸요.”

“정말?”

“……조금 활동적이긴 했어요.”

“조금은 무슨. 다른 광부들도 줄리아는 감당을 못 해서 죽는 소리를 하는데.”

테론의 말에 레슬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무시한 광부의 체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아이와 함께 온종일 놀았던 거구나. 내일 마델은 좀 쉬게 해 줘야겠다.

“그래도 줄리아는 너무 귀여워서,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거기서 대화가 끊겼다. 테론은 멋쩍은 듯 다시 목덜미를 쓸었고, 레슬리는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줄리아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탄광 일…… 이야기를 해 볼까?’

사실 테론이 올라오기 전에 이미 어머니를 졸라 약속을 받아 둔 게 있었다. 그래, 이걸 지금 말해야겠다.

“저, 삼촌.”

“레슬리.”

레슬리가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테론 역시 입을 열었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삼촌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 아니. 레슬리 네가 먼저 이야기하렴.”

그 후로 레슬리와 테론은 먼저 이야기하라며 말을 주고받았고,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고 생각한 레슬리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삼촌, 탄광 일 말인데요. 힘드시진 않으세요?”

“탄광 일? 당연히 힘들지.”

웃으면서 말하는 테론의 얼굴에서는 진심이 보였다. 그의 손은 거칠거칠했고, 어딘가 늘 피곤해 보였고 그건 테론의 아내인 비안카도 마찬가지였다. 땅을 파고 돌을 쪼개 석탄을 캐는 탄광의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 수도로 올라올 생각은 없으세요?”

이게 레슬리의 본론이었다.

레슬리는 서부 지역으로 테론을 보러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을 보았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탄광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레슬리가 보기에도 너무도 힘들어 보였고 위험해 보였다. 거기다 테론은 이제 나이도 많았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테론이 레슬리의 성인식에 참석하러 온다고 했을 때,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을 찾아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머니, 삼촌이 수도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저번에도 거절했지 않니?’

레슬리의 부탁에 셀바토르 공작이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생각은 예전에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얘기를 흘렸을 때 테론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비록 탄광 일이 힘들지만, 내가 고른 일이라 나는 괜찮단다. 그리고 벌써 어린 조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구나.’

그렇게 말하며 테론은 레슬리를 보고 웃었다. 그때는 테론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은 정말로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진 눈이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레슬리는 이번에야말로 삼촌을 편안하게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삼촌이 조카 덕 좀 볼 수 있는 거지.

‘거기다 줄리아 일도 있는걸. 그러니까 이번엔 반드시 설득할 거야.’

“아니, 삼촌. 저는 삼촌이 이제 수도에서 편안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레슬리의 단호한 말에 테론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조카에게 매달려 산다는 생각은 마세요. 이건 당연한 거예요. 삼촌은 저를 구해 주셨고, 저는 셀바토르 공녀잖아요. 그 합당한 대가를 이젠 받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삼촌.”

“하지만…….”

“그리고 줄리아를 생각해 주세요.”

이어지는 레슬리의 말에 테론이 입을 다물었다. 줄리아는 테론과 비안카의 늦둥이였다. 건강하고 밝고 예쁜 아이.

문제는 줄리아가 밀색 머리와 에메랄드색의 눈이라는 것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대표적인 색이라, 처음 줄리아를 안아 든 테론은 그대로 굳어 버리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혹여나 나중에 줄리아가 어둠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레슬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혹여나, 정말로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으로 줄리아가 어둠의 힘을 가진다면 줄리아는 공포에 휩싸일 게 분명했다. 어둠은 강력해서 겉보기에는 좋은 힘이 아니었으니까. 분명 줄리아를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제가 줄리아를 돕겠어요.”

그건 레슬리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레슬리의 주변에는 콘라드도 있었고, 루엔티도 있었으며 셀바토르 공작도 있었다. 레슬리의 단호한 눈에 테론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안카와 상의해 보마.”

테론만의 일이었다면 이번에도 그는 레슬리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테론은 자기 일과 자신이 살아오던 마을을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줄리아가 얽히자 상황이 달라졌다.

“잘 부탁하마, 레슬리.”

“맡겨 두세요, 삼촌!”

레슬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런 레슬리를 테론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신기해, 어떻게 레슬리 너 같은 아이가 형님의 딸로 태어났을까.”

테론은 아직도 자신이 처음 레슬리를 봤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잘 먹지도 못해 조그마한 체구의 작은 소녀는 재판장에서 떨고 있었다. 이 재판이 끝나면 스페라도 후작의 손에 의해 후작가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그리고 옛날 일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이렇게 컸을까.”

자신과 같은 아픔을 나눈 조카. 테론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가득한 손길에 레슬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괴로운 시간을 잘 버텨 주어서,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가를 무너트려 줘서 정말로 고맙구나, 레슬리.”

그렇게 말하는 테론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꼭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었단다.”

자신은 해내지 못한 일을 어리고 어리던 조카가 해냈다.

“잘 자라 줘서 이 삼촌은 기쁘구나.”

테론의 말에 레슬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다. 레슬리의 라일락색 눈동자에도 눈물이 고였다.

“우리 과거에 너무 힘들었잖아요. 이제 행복하게 살아요, 삼촌.”

“그래, 그러자.”

레슬리와 테론은 서로를 바라보며 붉어진 눈으로 웃었다.

***

분주한 아침이 밝았다. 마델과 서올리는 며칠 전부터 단단히 기합이 들어간 상태였고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택에 있는 모두가 정신이 없을 하루였다. 늘 침착하던 제나 역시 오늘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미간에는 주름까지 잡혀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겪는 일이라 그런지 석 달 전부터 차근히 준비했는데도 당일이 되니 정신이 없었다.

“이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어질어질하네요.”

제나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자신이 도와줄 게 없나 살펴보다 그냥 같이 우왕좌왕만 한 자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식이라니. 아마 공작님의 성인식 이후로 처음이지요? 소 공작님과 루엔티 님은 제대로 된 성인식이 아니었으니까.”

성인식. 오늘은 레슬리의 성인식 날이었다. 베스라온과 루엔티가 있었다지만, 둘은 성인식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베스라온의 경우는 하필이면 그때 사건이 터져 수도를 비우느라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루엔티는 귀찮다며 깔짝거리다가 크게 하품을 하고는 중간에 사라졌다. 모두가 두 사람을 찾았지만, 두 사람은 저를 찾는 이들에게도 성인식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나마 셀바토르 공작의 경우는 가장 정상적으로 성인식을 치렀는데, 선대 셀바토르 공작 부부의 덕분이었다. 굉장히 무덤덤하고 깔끔한 성인식이라 준비할 것이 거의 없긴 했지만.

그래서 제나에게는 이번이 거의 처음 겪는 성인식이나 다름없었고, 제나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렵다. 제나는 고개를 숙이고 싶어졌다. 하녀에서 집사가 된 이후로 하녀의 일도 집사의 일도 능숙하게 잘 해낸다고 생각했는데.

본래 이런 일은 저택을 관리하는 안사람과 하녀장, 집사가 주도해서 할 일이지만, 셀바토르 공작저에는 하녀장이 없었다. 그리고 저택의 관리를 해야 할 사람은…….

“으하하하!”

밖에서 신나게 기사들을 날리고 있었다.

잠시 해맑은 사이레인의 웃음소리를 듣던 제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사이레인에게 안살림을 맡기면 순식간에 엉망이 될 것이다.

다시 밝은 웃음소리가 저택을 가득 메웠다. 기사들과의 수련이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젊었을 적 처음 본 사이레인은 좀 과묵했는데 어느새 저렇게 바뀐 걸까.

처음 만났던 사이레인을 떠올리며 제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자신의 아가씨 역시 많이 변했으니까.

‘그래도 하녀장이라도 미리 뽑아 둘 걸 그랬나.’

제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눈을 찡그렸다. 셀바토르 공작저는 크기에 비해 사람을 많이 두지 않았다. 최소한의 사용인들로 저택을 꾸렸고 그나마 손을 늘린 건 레슬리가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

그렇다고 아주 많이 늘어난 것이 아니었고, 여태까지 중요한 일은 제나가 다 맡아서 할 정도였다. 일은 많았지만, 제나는 그걸 전부 해낼 만큼 유능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제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이건 자신이 너무 유능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저택 관리를 이만큼이나 꼼꼼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녀장이 할 일까지 가볍게 해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도와줄 사람이 분명 있었을 텐데.

셀바토르 공작저의 사람들이 나름 신경을 쓰고는 있다지만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모두 ‘최고의 것으로’라고 말하며 돈을 줄 뿐이었지, 재단사를 데려오고 보석상을 고르고 성인식 때 할 머리 모양을 고를 수 있게 책자를 제작하는 일은 거의 다 제나의 손에서 이뤄졌으니까.

좌절하는 제나를 보며 자일로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이 저택을 탈출해서 휴양지나 갔어야 한다니까.”

가장 최고령자인 자일로의 말을 들으며 제나는 쓰게 웃었다. 자일로나 제나나 이 저택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은 유능한 사람은 웃으면서 죽을 때까지 부려먹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의자에 앉아 있던 제나가 결연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성인식을 끝내고 봅시다.”

가장 중요한 건 레슬리의 성인식이었다. 레슬리에게 걸맞게 최고로, 남들은 차마 우러러보지도 못할 만큼 완벽하게 끝내야 했다.

제나의 얼굴을 보며 자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공작저의 주치의인 자일로는 할 일이 없었지만, 그 역시 제나를 따라 결연한 얼굴로 과자를 씹었다.

바쁜 사람은 제나뿐만이 아니었다. 레슬리의 치장을 맡은 마델과 서올리가 가장 바빴고, 하녀 서넛도 레슬리에게 붙었다. 머리카락 한 올마저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빛내는 하녀들 사이에서 레슬리 홀로 나른했다.

“하아암.”

크게 하품이 새어 나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한 하녀가 손수건으로 재빠르게 훔쳐 냈다. 레슬리는 졸음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레슬리라고 긴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그 긴장을 아주 오래전부터 했을 뿐. 두 달 전부터 서서히 시작된 긴장은 며칠 전에 정점을 찍었고 당일이 되자 푸스스 꺼져 버렸다.

‘졸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밀려오던 긴장감에 계속해서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그 덕에 오늘 너무 잠이 쏟아져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거기다 일어나자마자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마사지까지 받은 상태였다. 졸리지 않은 사람도 졸릴 만한 상황이었다.

거울 앞에서 레슬리가 계속 고개를 떨구자, 레슬리의 긴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던 마델이 물었다.

“아가씨, 차를 진하게 타 올까요?”

마델의 물음에 레슬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먹고 정신을 차려야지. 이러다가 성인식에서도 졸게 생겼다. 요즘 잠을 깨게 해 주는 커피라는 게 유행한다던데 그건 너무 써서 먹기가 힘들었다.

루엔티가 먹던 것을 호기심에 한 입 머금었다가 그대로 뱉지 않았던가. 루엔티는 그런 레슬리를 보고 아직도 우리 막내는 어리다면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도대체 루엔티 오라버니는 그런 걸 어떻게 먹는 거지?’

차라리 각설탕을 하나 넣은 진한 차가 낫지. 셀리스도, 그리고 편지로 이야기를 나누는 틸레이얼 선생님도 커피는 써서 싫다고 했다. 매일 밤을 새우는 탓에 루엔티의 입맛이 이상하게 변해 버린 게 분명했다.

레슬리는 히죽거리며 자신을 놀리던 루엔티의 얼굴이 다시 떠올라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사이 한 하인이 진하게 우린 차를 가져왔다.

“맛있다.”

잠이 좀 깨는 것 같다. 진하게 우린 차는 씁쓸했지만 마시다 보니 각설탕의 달콤한 맛도 느껴졌다.

이제 각설탕 하나만으로도 제법 진한 차를 잘 마실 수 있게 됐다. 레슬리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차를 홀짝거렸다. 이제 슬슬 코코아에서 졸업할 때가 되었지. 오늘로 성인이 되니까. 열여덟 살, 성인식 날이 아니던가.

‘성인식.’

레슬리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둥근 스툴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이제 일상적인 것이었다. 마치 뒤에 줄줄이 달린 가족 초상화처럼.

열두 살 적 모습부터 시작해서 열세 살, 열네 살, 열다섯 살……. 그렇게 열여덟 살의 레슬리와 가족 초상화가 줄을 이어 걸려 있었다.

레슬리는 웃으면서 남은 차를 마셨다. 진한 차 한 잔에 어설프게나마 잠에서 깨어났다. 레슬리가 잠에서 깨자 본격적으로 하녀들이 움직였다. 그래 봤자 레슬리는 둥근 스툴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전부였지만.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에 머리 모양까지. 몇 달 전부터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정해진 것들이었기에 이번에는 열렬한 토론 없이 하녀들은 손을 놀렸다. 그 진지한 눈빛과 섬세한 손길에 레슬리마저 긴장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피곤하시죠? 이제 이것만 하면 끝나요.”

단 두어 시간 만에 얼굴이 퀭해진 마델이 웃으면서 작은 상자를 꺼내 왔다.

그 안에는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 들어 있었다. 사파이어를 얇게 깎고 백금으로 나비 틀을 잡은 머리핀. 여태까지 공작저에 머물면서 엄청난 보석들을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이 하나뿐인 자신의 딸을 위해, 세 개의 대륙을 건너고 몇 개의 바다를 지나 있는 한 작은 나라에서 주문한 것이었다. 드워프들의 마지막 후손들이 살고 있다 했던가. 황제조차 쉽게 가질 수 없는 물건이라 들었다.

마델이 조심스레 나비 모양 핀을 꺼내 레슬리의 반짝이는 은발 위에 고정했다. 햇빛을 받은 머리핀이 부서지는 햇빛과 함께 찬란하게 빛났다. 레슬리가 몸을 일으켜 걸으니 섬세한 세공 덕분인지 마치 살아 있는 나비처럼 날개가 움직이기까지 했다.

“마법으로 가공을 했다는데 정말인가 봐요.”

“너무 신기해요. 진짜 살아 있는 나비 같네요.”

하녀들이 놀라며 두어 마디를 건넸다. 확실히, 아름다운 핀이었다. 나비 핀이 칭찬받는데 어쩐지 자신이 칭찬을 받는 기분이 들어 레슬리는 한껏 우쭐거렸다.

“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제일 이뻐요!”

“맞아요, 우리 아가씨가 제국 최고예요.”

“아냐, 세계 최고야.”

“그 누구도 아가씨의 미모에 비교할 바가 아닐 거예요!”

마델의 힘찬 말에 다른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평소였다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텐데,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거울 속 자신은 정말로 아름다웠으니까.

성인식을 위한 새하얀 드레스와 반은 섬세하게 땋고 반은 그대로 흘러내리게 두어 허리까지 오는 은발. 얇은 체인에 걸린 별 장식은 걸을 때마다 찰랑거렸다. 요 며칠 관리를 받은 덕에 피부는 부드러웠고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레슬리는 거울을 보며 웃었다. 마델과 서올리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아름다웠다고 찬양을 하는 중이었지만, 이건 엄연히 모두가 몇 달을 고생해서 내 준 결과였다. 아니, 몇 년 전부터인가. 열두 살 때의 자신은 이러지 않았으니까.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울면 모두가 정성을 들여 꾸며 준 게 엉망이 될 것이다. 그래서 레슬리는 우는 대신 웃는 것을 선택했다.

“모두 예쁘게 꾸며 줘서 고마워.”

레슬리는 자신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하녀들에게, 조금을 붉어진 눈가로 환하게 웃었다. 진심이었다.

방으로 내려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사이레인이었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셀바토르 공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망토에, 어깨에는 털 장식과 함께 검은 정장을 입은 사이레인은 굉장히 중후해 보였다. 입을 열기 전까지는.

“레슬리!”

사이레인이 환하게 웃자, 레슬리 역시 덩달아 웃었다. 그런 레슬리를 바라보던 사이레인의 눈가가 점점 붉어지더니 곧 눈물이 맺혔다.

“우, 우리 예쁜 딸이 언제 이렇게 커서…….”

성인식을 준비하면서도 사이레인은 레슬리가 성인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당일이 되고, 꾸며진 집 안과 레슬리의 모습에 그제야 실감이 나는 듯 보였다.

레슬리는 그런 사이레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훌쩍 큰 아버지는 어릴 적도 그랬지만, 여전히 올려다보기 조금 힘들었다.

“아버지, 오늘도 너무 멋있어요.”

레슬리의 말에 사이레인이 코를 훌쩍였다.

“그래, 오늘 이 아버지가 힘 좀 줬지.”

그렇게 말하며 사이레인은 좋은 날을 망칠 수 없다는 듯 애써 웃었다.

“홀로 가자꾸나. 이미 준비가 다 끝나고 손님들도 거기에 있으니까.”

사이레인이 손을 내밀자 레슬리는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레슬리의 성인식은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열렸다.

당연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의 성인식이었으니까.

오랜만에 맞이한 성인식에, 손님을 받지 않기로 유명한 공작저의 문이 활짝 열렸고, 거리에서는 음식을 나눠 주기까지 했다. 셀바토르 공작과 친분을 다지고 싶은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공작저로 몰려들었다.

레슬리는 커튼마저 주름을 잡아 예쁘게 매어 둔 창문 너머로, 줄줄이 공작저로 들어오는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낯선 문양이 새겨진 마차들 사이에는 익숙한 마차들도 있었다.

‘셀리스네.’

레슬리는 방긋 웃었다. 에펜타니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공작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에펜타니 가문은 ‘행복한 꿈’으로 셀바토르 공작에게서 엄청난 투자금을 받았고 그걸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모르던 가문은 약초학으로 유명한, 어엿한 중앙 귀족이 되어 있었다.

수도에 저택을 사 두긴 했지만, 셀리스는 에펜타니 영토에서만 나는 약초 때문에 영토에서 머물렀는데, 레슬리의 성인식을 위해 수도로 올라온 듯 보였다.

몇 달 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에 레슬리는 조금씩 신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는요?”

“홀에서 먼저 손님들을 맞이하고 계신단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가주니까. 베스랑 엔티도 같이 있지.”

사이레인의 말에 레슬리는 사이레인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저를 데리러 홀에서 와 주신 거예요?”

레슬리의 물음에 사이레인이 다시 코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우리 딸을 데려다주겠니.”

다정한 말이다. 저절로 웃음이 흘렀다.

손을 꼭 잡고 걷다 보니 어느새 홀에 도착해 있었다. 하인이 문을 열어 주기 전, 레슬리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빠.”

레슬리의 그 말에 사이레인의 울음이 터졌다. 문을 열던 하인이 당황해 멈추었고, 그사이 사이레인은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럼에도 울었다는 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열까요……?”

하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사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레슬리는 천천히 홀 안으로 들어갔다.

와. 들어가자마자 저절로 탄성이 흐를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레슬리를 향해 시선과 함께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자 조금은 긴장되어 레슬리가 숨을 작게 들이켰다.

‘괜찮아, 아버지가 옆에 있으니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사람들이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길을 내주었다.

홀 중앙에는 네 사람이 레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제인 피스토레와 황후인 아르트엘, 레슬리와 함께 의식을 진행했던 최고 사제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인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왔군.”

공작의 옆에 서 있던 피스토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지금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제들이 입는 정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언제나 벽 안에서 굴러다니던 아르트엘 역시 오늘만큼은 황후로서의 품격을 지키고 있었다.

피스토레와 아르트엘, 콘스텐 모두 성인식에 참석하기에는 과한 복장이었다. 황실에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 입을 만큼 격식을 갖춘 복장이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은 레슬리의 성인식이자, 새 성을 하사받는 날이었으니까.

레슬리는 사이레인의 손을 놓고 홀로 걸어 세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연습한 대로 레슬리가 피스토레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자, 목을 한 번 가다듬은 피스토레가 레슬리의 이름을 불렀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피스토레의 목소리는 진중하고도 무거웠다.

“그대는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와 사이레인 델파 셀바토르의 딸로서 셀바토르가의 명예와 의무를 지고 자랐으며.”

이어지는 피스토레의 말에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으레 이런 성인식의 축복 때는 ‘태어나 자라고’로 연설이 이어지건만, 지금은 오직 ‘자랐다’라는 말밖에 없었다.

이것이 스페라도 후작가가 레슬리에게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영향일 것이다. 고작 축복을 조금 바꾸는 것,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본인의 일을 결정하고 또한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피스토레가 레슬리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그대는 이제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아닌, 어엿한 한 명의 사람으로서 이곳에 설지어다.”

축복을 내리며 피스토레가 웃었다. 그는 오늘만큼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환의에 찬 웃음으로 레슬리를 축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아르트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웃으면서 손짓하자, 네 사람 뒤에 있던 제나가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상자 안에는 인장이 하나 들어 있었다. 아르트엘이 손을 뻗어 고급스러운 붉은 벨벳 위에 놓여 있던 황금 인장을 들어 올렸다.

“또한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그대는 이 제국을 수호했고 에피알테스의 손아귀에서 모두를 구해 내었으니.”

피스토레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르트엘이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레슬리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리고 손수 레슬리의 드레스에 황금색 인장을 달아 주었다. 새와 꽃이 어우러진 인장, 처음 보는 가문의 인장이었다.

“그대에게 ‘세이아나’라는 새 성과 함께 공작 위를 내린다.”

세이아나. 신어로 ‘증명된 신의 영광’이라는 뜻이었다. 신의 영광이라니, 한 가문에게 내려지기엔 너무도 거창한 뜻이 아닌가. 거기다 신어라니.

“이는 저희 신전에서도 같이 의견을 모은 바, 세이아나 공작님께는 영원한 신의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뒤쪽에 서 있던 최고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레슬리에게 축복을 내렸다. 르카디우스 황실과 신전, 두 곳의 축복을 받은 성이었다. 유례없는 상황이었다.

최고 사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어느새 셀바토르 공작의 옆에 선 사이레인의 울음소리도 같이 홀을 가득 메웠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레슬리는 허리를 숙이며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틸레이얼 부인에게 배운 그대로 완벽한 예법이었다. 피스토레와 아르트엘이 마치 자신의 딸을 보듯 너그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이에게 공작 위라는 높은 작위를 내린 것은 르카디우스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는 일이었지만.”

피스토레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대견함과 끝없는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그대가 한 일도 르카디우스 제국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니 문제는 없지.”

사실 처음 언급된 작위는 후작 위였다. 하지만 레슬리와 약혼자인 콘라드가 대공가의 자제인 점과 함께 르카디우스 제국과 모든 이들을 구했다는 점을 고려해, 공작 위를 받게 되었다. 잡음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귀족들 중 그 누구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레슬리는 아이테라 대공가, 셀바토르 공작가의 뒤를 이어 세 번째 공작이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리 듣긴 했지만, 레슬리는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공작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거울이 없어도 얼굴이 붉어져 있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새 성을 받은 것도 성인이 된 것도, 공작 위에 오른 것도 좋지만.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나가야 하는 걸까?’

이 집에서 나는 이제 나가야 하는 걸까. 모두를 여기에 두고? 그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자신의 어머니인 셀바토르 공작과, 아버지인 사이레인, 두 오라버니인 베스라온과 루엔티. 거기다 마델과 서올리, 제나, 바타……. 셀바토르 공작가의 모든 사용인들과 기사들까지.

그 많은 사람들과 헤어질 거라 생각하니 들뜬 기분이 가라앉고 마음이 먹먹해졌다. 레슬리는 모두가 너무 좋았으니까.

“흠, 하지만!”

그런 레슬리의 머리 위로 피스토레의 목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그대는 이제 갓 성인이 되었고, 하나의 가문을 이끌기엔 경험이 부족하다고 판단된 바.”

이건 듣지 못한 말이었는데. 의아함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피스토레와 황제의 옆에 서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셀바토르 공작은 걱정 말라는 듯 웃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에 머물면서 공작에게서 후계자 교육을 받을 것을 권하네.”

레슬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한마디로 아직은 셀바토르의 성을 가지고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는 소리였다.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에 레슬리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아까보다 훨씬 더 진심이 담긴 레슬리의 인사에 주변에서 귀엽다는 듯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 즐거운 날이다!”

축복이 끝나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테펜텔이 크게 외쳤다.

“음악을 연주해!”

테펜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단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작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졌고, 춤을 출 사람은 중앙으로 그리고 대화를 나눌 사람들은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레슬리는 가장 좋은 자리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했다.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부디 정식으로 작위를 받으신다면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은 공녀님께 드리기 위해 제가 저 먼 대륙에서 가져온 부채입니다.”

자신을 벨트라 백작이라 소개한 여자는 웃으면서 자신이 가져온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화려한 검은색 깃털 부채가 들어 있었다. 레슬리의 취향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값이 나가 보이는 물건이었다.

“제 성인식에 와 주셔서, 그리고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레슬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이젠 이름도 외우기 힘든 백작의 인사를 받았다. 마델이 재빠르게 백작에게서 선물을 받아 뒤에다가 놓았다. 이미 거기에는 위태로울 정도로 갖은 선물이 쌓여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공작이 된 게 아니었으니, 더 높은 위치로 레슬리가 올라가기 전에 눈도장을 찍어 두려는 듯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지?’

인사를 받으면서 주변을 힐끗 둘러보니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거대한 홀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워낙 셀바토르 공작저가 손님을 받지 않아 베일에 싸인 가문이라, 문이 열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레슬리는 분명히 이 홀에 있을 콘라드와 셀리스, 그리고 아까 음악을 외친 테펜텔은 물론 제 가족들조차 찾기 힘들었다.

재빠르게 시선으로 찾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레슬리에게 몰려들었다. 한 명과 인사를 끝내면 어느새 세 명이 더 와 있었다. 이러다간 레슬리는 성인식 내내 인사만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야.”

그때 삐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슬리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루엔티가 목소리만큼 삐딱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젠 많이 자란 머리를 하나로 묶어 어깨에 걸친 루엔티가 다가오자 절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루엔티 셀바토르 마법사다.”

“위험해. 잘못 건들면 문다고 들었어.”

최근 수도에 퍼진 루엔티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얼마 전, 루엔티는 마법사 저택의 일부를 날려 버리는 일을 저질렀다. 주제를 모르던 마법사 한 명 때문이었다.

루엔티의 실력이 명성에 비해 부족하다고 대놓고 루엔티의 앞에서 비판을 이어 가던 그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지 루엔티에게 대결 신청까지 했다. 그리고 이어진 참극.

살려 달라고 도망치는 마법사를 끝까지 쫓아 루엔티는 완벽하게 작살내 놨고, 그 와중에 저택 일부가 손실되었다. 마법사의 저택은 상당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슬프게도 루엔티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귀중한 자료가 날아간 마법사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그걸 수습한 건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그때 미간에 잡힌 주름은 아직도 공작에게 남아 있었다. 사이레인은 화끈하다며 좋아했다가 뒤이어 등을 맞았다.

“다들 저리로 좀 가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저택을 날려 버린 장본인, 루엔티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마치 레슬리가 여기로 처음 들어올 때 모습과 비슷했지만, 표정은 사뭇 달랐다. 레슬리 앞에 도착하자마자 루엔티가 덧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우리 예쁜 동생, 오라버니랑 춤출까?”

“네, 좋아요. 오라버니!”

레슬리는 루엔티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마침 새 연주가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교계에는 많이 나가지 않아, 루엔티는 조금 어색하게 레슬리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레슬리.”

그래도 발을 밟는다든가 스텝이 틀려 넘어질 뻔한 상황 없이 춤은 부드럽게 흘러갔다. 음악이 중반쯤에 다다랐을 때 루엔티가 제 동생을 불렀다.

“나중에 정식으로 작위를 받아서 세이아나 공작이 된다 하더라도.”

거기까지 말한 루엔티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고개를 돌렸다. 주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붉어져 있었다.

“너는 내 동생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레슬리는 루엔티를 보며 눈을 깜빡이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저 말이 하고 싶어서 자신에게 춤을 신청한 듯 보였다.

“만약 저택을 나가더라도 매일매일 마법사의 저택에 놀러 갈 거예요.”

“정말?”

레슬리의 대답에 루엔티의 시선이 다시 레슬리에게 닿았다. 부끄러움에 가늘어져 있던 눈이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정말요. 저는 오라버니랑 나히로키아에 대해 토론해야 하잖아요?”

나히로키아, 루엔티와 레슬리를 친해지게 만들어 줬던 철학자. 그의 이름이 나오자 루엔티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쿠키 올리기의 천재 내 귀여운 동생.”

솔직히 난 그때 다들 미친 줄 알았다니까? 루엔티의 말에 이번엔 레슬리가 입을 샐쭉하게 내밀었다. 그마저도 귀여운 듯, 춤이 끝날 때까지 루엔티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다음 순서는 베스라온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의 정식 후계자가 된 베스라온은 후계 일이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인지 눈에는 눈 그늘이 져 있었다.

하지만 샹들리에 밑에서 춤을 추는 베스라온은 피곤한 기색 따윈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오히려 빛이 나는 듯했다. 사방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굽을 높은 걸 신길 잘했다.’

레슬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높은 굽이 아니었다면 베스라온과 춤을 추는 건 힘들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사실 지금도 조금은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들긴 했다.

‘앗.’

레슬리가 비틀거렸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굽 탓이었다. 그러자 베스라온이 자연스럽게 춤을 추면서 레슬리를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레슬리의 발을 제 발등 위에 올려 주었다. 덕분에 한결 춤추기가 편해졌다.

레슬리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언제나 베스라온은 이렇게 말없이 배려를 해 주었다.

춤을 추는 동안 베스라온은 별말이 없었다. 음악이 끝날 때쯤 레슬리를 보며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만약 아이테라 경이 너를 울리거든 나에게 말하렴.”

“오라버니께요?”

혼내 준다는 걸까. 레슬리가 베스라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내가 확실하게 조져 주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베스라온이 환하게 웃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슬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게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할 말이던가.

“네, 오라버니. 꼭 그럴게요.”

“그래.”

대답과 동시에 음악이 끝났고, 두 사람 주변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을 막은 베스라온이 손짓하며 레슬리를 먼저 보냈다. 두 오라버니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레슬리는 슬며시 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 사이사이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셀리스.”

“레슬리!”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셀리스가 레슬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내년에 성인식을 치르는 셀리스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자라 있었다. 에펜타니 부인을 따라 머리를 우아하게 올린 셀리스가 레슬리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나보다 한발 먼저 성인이 된 거 축하해, 레슬리!”

그러더니 셀리스가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였다.

“사실 아까 축하를 해 주고 싶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밀려났어.”

셀리스가 그때의 생각이 났는지 입을 삐죽하고 내밀었다. 레슬리는 소파에 앉아 있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뒤에서 상당한 고전을 한 듯 보였다.

“오늘 자고 갈 거지?”

레슬리가 웃음을 한껏 머금으며 묻자, 셀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공작님이 이미 방을 내주셨어.”

공작님이라고 말할 때 볼이 살짝 붉어졌다. 누가 뭐라 해도 셀리스는 아직도 셀바토르 공작의 팬이었으니까.

“그러면 우리 밤새 실컷 떠들자.”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다 머리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조금 이따 봐.”

셀리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레슬리가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다음에 만난 사람은 틸레이얼 부인이었다. 이번에 둘째를 낳은 그녀는 아이를 안고 에펜타니 백작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레슬리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이자, 틸레이얼 부인 역시 우아하게 화답했다.

“완벽한 예법이시네요, 공녀님.”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라.”

레슬리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틸레이얼 부인이 작게 웃었다.

“새 성과 함께 작위를 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하지만 전 그 무엇보다도 공녀님이 무사히 성인이 된 게 정말로 기쁘네요.”

그녀의 푸른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그녀를 데려왔을 때는 막 레슬리가 공작가에 입양된 상태였던지라, 그때의 레슬리를 보고 무언가를 느꼈던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슬리의 상태는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공작에게서 약간의 언질을 받았겠지.

“감사합니다. 어머니랑 아버지 그리고 두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아니요, 공녀님.”

틸레이얼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이건 전부 공녀님이 이루신 일이에요. 공녀님의 의지가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해 준 거니까요.”

틸레이얼 부인의 자상한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가 너무 공녀님을 붙잡고 있었네요. 오늘 가장 인기 있는 분인데.”

“그럼 실례할게요, 선생님. 나중에 봬요.”

“네, 나중에 뵐게요. 공녀님.”

선생님과 인사를 끝낸 레슬리는 다시 움직였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여기저기에서 잠시 잡히긴 했지만, 다행히도 다들 레슬리를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았다.

“오, 새 공작께서 여기 계시는군.”

레슬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람은 피스토레와 아르트엘, 그리고 콘스텐이었다. 세 사람은 레슬리를 보더니 어서 오라는 듯 자연스레 미소를 머금었다.

“황제 폐하.”

“작위를 내리는 일도 끝났으니, 그냥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의 친구로서 대해 주게.”

편하게 부모의 친구로 대해 달라는 말에 잠시 레슬리는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토레의 옆에 있던 콘스텐이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 양. 성인이 되신 것, 작위를 받으신 것 둘 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콘스텐은 미래의 황제였고 레슬리는 미래의 공작이었다. 이제 앞으로 두 사람은 제국을 이끌 이들이었다.

“레슬리!”

콘스텐과 레슬리의 사이에 갑자기 테펜텔이 끼어들었다. 파티를 충분히 즐기고 있었는지, 그녀의 손에는 술과 음식이 들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갖춰진 술이 아닌, 자신이 가져온 술처럼 보였다.

‘누구지?’

테펜텔의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단번에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심각할 정도로 테펜텔과 똑 닮아 있었으니까.

“레슬리, 여기는 내 둘째 딸 바인이란다.”

“안녕하세요, 셀바토르 공녀님.”

바인이라 소개받은 여자는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테펜텔과 똑같은 눈동자가 반짝 빛나는 바인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인이라고 해요. 공녀님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저랑 말인가요?”

“네, 저는 상업 쪽에 관심이 있거든요.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아롬벨의 수공예품을 수출하고 싶은데, 셀바토르가의 상단은 최고의 선택이니까요.”

겉은 테펜텔이었는데 속은 다른 사람이었다. 레슬리가 놀라 눈을 깜빡이는데 뒤에서 피스토레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인은 겉만 너를 닮아서 다행이야.”

“그렇지, 바인은 제 아빠를 닮았어.”

테펜텔 역시 자신을 안 닮아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상단은 제가 아닌 어머니께 말씀드려야 할 거예요.”

레슬리의 대답에 바인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물론 말씀드려야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 새 공작님께도 잘 보이려고 하는 중인 거예요. 공녀님 정도면 순식간에 가문을 부흥시키시겠지요. 그러니 앞으로 우리 상호 간의 교류를 통해…….”

“바인.”

테펜텔이 자신의 딸을 부르자, 무언가를 길게 말하던 바인이 입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자마자 테펜텔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럴 때는 장황한 말보다 그냥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렴.”

테펜텔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바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슬그머니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니까 제 말은 친구도…… 좋지요?”

어딘가 어색한 목소리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럼요. 상단이니 새 공작이니 아직 그런 건 조금 곤란하지만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바인. 그것도 어머니의 친구이신 테펜텔 님의 따님이시라면 더더욱 환영이에요.”

레슬리의 화사한 대답에 바인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뒤에서 테펜텔이 ‘쟤는 친구 사귀는 게 영 서툴러서 걱정이야.’ 하며 말을 흘리다가 딸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받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사귀게 된 친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도 셀리스와 콘라드, 그리고 카벨리온가의 두 쌍둥이를 겪으며 성장한 레슬리가 자연스레 먼저 운을 뗐다.

“바인, 파티는 좀 즐겼나요?”

“음, 아직 적응 중이에요. 사람 구경도 조금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아는 파티랑은 조금 달라서.”

“바인이 아는 파티랑요?”

“네, 우리는 왁자지껄하게 놀거든요. 여기는 굉장히 고상하네요. 책에서 보던 그대로예요.”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파티라, 그게 어떤 파티일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바인의 말에 레슬리는 어떤 느낌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굉장히 좋아하시지요.”

테펜텔의 성격과 비슷한 느낌이구나.

“르카디우스 제국의 축제도 즐겨 보세요. 대화를 나누거나 춤을 추는 것도 좋아요.”

“춤이라…….”

바인의 말에 레슬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인에게 어울리는 첫 동반자를 구할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었다.

‘오라버니들은 안 되고…….’

자연스럽게 베스라온과 루엔티를 뒤로 했다. 두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라드도 안 되고, 하르트 경은 음……. 아니야. 될 수 있으면 바인 또래의 사람이 좋겠는데. 아!’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레슬리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콘스텐이었다. 황태자가 된 콘스텐은 피스토레의 옆에 서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인, 저기 저분은 어떤가요?”

레슬리가 손으로 콘스텐을 가리켰다. 황태자를 추천해 주는 게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피스토레와 테펜텔은 친구니 괜찮을 듯 보였다.

“으음…….”

콘스텐을 발견한 바인의 눈매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지만, 어째 피부도 허연 게 약해 보여서 제 취향은 아니네요.”

바인이 작게 속삭였지만, 이내 다시 콘스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런가? 호감은 가네요. 레슬리, 춤은 어떻게 신청하면 되나요?”

레슬리에게서 춤 신청의 이야기를 들은 바인은 바로 콘스텐에게 다가갔다. 레슬리는 또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제 사람들을 거의 다 만난 듯 보였다. 테론 삼촌도 줄리아도, 첫 파티에 조금은 어색한 듯 서 있었지만,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 덕분에 이내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어딨지?’

아까부터 찾고 있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러는 사이 음악이 바뀌었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곡으로 레슬리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추고 싶은 곡이기도 했다.

“슈야.”

누군가가 레슬리의 팔을 잡았다. 콘라드였다. 오늘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복이 아닌 검은 정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상태였다. 이제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한 콘라드.

“제 약혼녀께 춤을 신청하고 싶은데요.”

콘라드는 눈을 휘며 레슬리의 손끝에 작게 키스했다.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전에는 손끝만 닿아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지던 그였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걸까.

“네, 좋아요.”

레슬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콘라드가 자연스레 허리를 팔을 감고 홀 중앙으로 걸었다. 이미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와 함께 시선들이 두 사람에게 모였다.

“라드.”

콘라드의 손을 꼭 잡은 레슬리가 웃었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면서도, 레슬리가 웃으니 그녀를 따라 콘라드의 입술이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시선이 따갑지 않으신가요?”

사람들 사이에는 셀바토르 공작과 베스라온, 루엔티 그리고 사이레인도 섞여 있었다. 거기다 셀바토르 사용인들과 기사들까지. 레슬리의 장난기 섞인 웃음에 콘라드가 작게 끙, 소리를 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요? 하지만 이젠 버틸 만합니다.”

춤에 맞춰 가볍게 레슬리를 들어 빙글 돌리면서 콘라드가 말을 이었다.

“이런 것도 버티지 못한다면 슈야 옆에 있지 못하잖아요.”

엉겁결에 조금 더 거리가 좁혀졌다. 레슬리는 바로 코앞에서 콘라드가 눈을 휘며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소를 머금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쩐지 부끄러워 레슬리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에서 콘라드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콘라드의 품에 안긴 채 레슬리가 입을 열었다.

“아까 루엔티 오라버니와 첫 춤을 춰서 기분 나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요.”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레슬리가 고개를 들어 콘라드를 바라보자, 그의 미소에는 거짓이 없었다.

“앞으로는 제가 슈야의 첫 번째가 될 테니까요.”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행복한 미래를 보는 듯 반짝이며 빛났다.

“앞으로는 춤을 추는 것도, 새로 열린 연극을 보는 것도, 낯선 곳에 가는 것도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는 것도.”

콘라드의 한쪽 손이 레슬리의 뺨을 쓸었다. 그 손길에는, 그리고 레슬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랑스러움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앞으로는 전부 저랑 처음으로 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레슬리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성인식 첫 춤쯤은 셀바토르 마법사님에게 넘겨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한 것도 있으니까요.”

그 감사한 일이란 자신와 콘라드를 처음 만나게 해 준 일이구나. 그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성인이 된 거 축하해요, 슈야.”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달콤하게 들림과 동시에 음악이 끝났다. 콘라드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다음 곡이 연주되는데도 레슬리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옆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들이 주변을 수놓았다.

“슈…….”

콘라드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때 레슬리가 까치발을 들어 그대로 입을 맞췄다.

“……!”

춤추는 사람들에게 묻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지만, 홀 중앙이었다.

콘라드의 눈이 커다래졌지만, 이내 그도 눈을 감았다. 입술이 머무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성인이잖아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책임질 수 있대요.”

레슬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부끄러움에 목까지 붉어져 있었고, 말은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나름 태연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런 레슬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콘라드가 다시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이번엔 레슬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네요.”

살짝 입술을 떼고 콘라드가 말을 하자 간질거려 레슬리는 눈을 꼭 감았다.

“슈야.”

하지만 너무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다시 눈을 뜨자, 콘라드의 웃는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정말로 사랑해요.”

“음…….”

콘라드와 손을 맞잡은 채, 레슬리는 눈을 잠시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저도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맞췄다. 차오르는 행복감에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자신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