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9)

에필로그

셀바토르 공작은 스페라도 후작저 앞에서 눈을 찡그렸다. 분명히 이 자리에는 고풍스럽지만 우아한 저택이 서 있었다. 비록 속은 문드러졌지만, 겉만은 공작도 인정할 만큼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는 폐가만이 남아 있었다.

어쩜 이리도 잘 불태웠는지, 커다란 저택은 간신히 뼈대만 유지하고 있었다. 이 크기의 저택을 이렇게 깔끔하게 불태우기는 정말 힘들었을 텐데. 정말 여러모로 유능한 남편이었다.

‘어쩐지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불길이 치솟더라니.’

그때는 너무 바빠 바로 신전으로 말을 몰았는데, 하르트를 보내서라도 확인을 해 봐야 했었나.

몰려오는 두통에 셀바토르 공작은 미간을 꾹 눌렀다. 스페라도 저택을 불태웠다는 게 나쁜 게 아니라, 하마터면 수도에 불길이 번질 뻔한 게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셀바토르 공작을 따라온 하르트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때 불길을 확인하러 가기만 했었더라도…….”

그때 하르트는 공작저로 말을 몰았다. 걱정과 이성에 따른 당연한 행동이었다. 공작저에 들어서서 이불에 꽁꽁 싸여 묶여 있는 에타이들을 보는 순간 걱정도 어이도 함께 사라졌지만.

“아니, 아니지. 설마 그때 그 불을 사이가 지른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사고로 난 건 줄 알았지. 공작의 말에 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바토르 공작님.”

어떻게 이걸 처리할까 고민에 빠진 공작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투실한 배를 내밀면서 남자는 연신 땀을 훔쳤다.

“아아, 라본 백작.”

그녀는 곧 그를 기억해 냈다. 4년 전 스페라도 후작과의 재판에서 판결을 내릴 때가 왔다고 외쳤던 백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다른 이들을 대표해서 말씀드립니다.”

라본은 안 그래도 작은 눈을 찡그리며 얼굴을 구겼다.

“부군을 제대로 타이르셔야겠습니다, 공작님.”

“제 남편을 말입니까?”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아둔한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쏟아 내었다.

“이런 아름다운 저택에 불을 지르다니요. 거기다 자칫 잘못하면 수도로 불길이 번질 뻔했습니다. 분명 용병 때의 더러운…… 아니, 사냥 버릇이 남아 그런 거겠지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금까지 공작도 생각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하지만 사이레인을 탓하는 건 그의 아내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다 무슨 버릇?

다른 사람들을 등에 업고 자신만만해진 라본 백작은 자신이 해도 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작.”

공작은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스산한 목소리에, ‘이러니 귀족 출신이 아닌 용병 출신’이라는 말을 쏟아 내던 라본 백작의 입이 막혔다.

“시끄럽습니다.”

“……예?”

공작의 말에 하르트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고, 라본 백작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곧 푸르게 변했다가 이내 붉게 물들었다.

“지금 저에게 시끄럽다고 하신 겁니까? 이건 아무리 대단하신 셀바토르 공작님이라 할지라도 너무 무례한 처사 아닙니까!”

“무례는 지금 그대가 저질렀지.”

차갑게 가라앉은 공작의 목소리에 라본 백작은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 백작은 내 남편을 모욕했네. 그건 무례가 아니라고 보는가, 백작?”

“아니, 그게, 저는 그냥 제대로 된 지적을 한 것뿐인데…….”

“저택을 불태운 것은 도망가려는 스페라도 후작을 잡기 위해 벌인 일이지. 나도, 그리고 황제 폐하도 허락한 일이야.”

그런 적은 없지만. 하르트는 마치 사전에 황제와 공작이 미리 허락했다는 듯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공작이 동시에 나오자 라본 백작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그 표정에 공작의 눈가가 더욱 가늘어졌다.

“감히 백작은 폐하와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닙니다! 제가 그건 몰랐군요. 알았다면 이렇게 오지 않았을 겁니다.”

라본 백작은 민첩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하르트도 놀라 눈을 크게 뜰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거기다 내 남편의 위치가 고작 백작 위보다 낮지는 않을 텐데.”

“…….”

“아무래도 라본 백작은 제대로 된 예의를 다시 배워야겠군. 귀족 출신으로서 말이야. 그리고 백작.”

공작은 옅게 웃으며 겁먹은 라본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백작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희게 질려 있었으나,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죽기 싫으면 내 남편에게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살기가 깃든 말 한마디에 라본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초라해진 라본의 뒷모습을 보며 하르트가 혀를 찼다.

불쌍한 백작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이레인이 아내 바보인 만큼 셀바토르 공작도 제 남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전히 사랑꾼이십니다.”

하르트의 말에 공작은 당연하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았으면 결혼도 하질 않았지.”

아니었다면 적군에 용병이었던 남자를 공작가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공작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거대한 폐허, 거대한 쓰레기. 이걸 어떻게 치운다지?

저택으로 돌아가면 남편을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

“맞았나?”

피스토레의 물음에 사이레인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바짝 엎드려서 빌었지!”

티끌 하나 없이 밝은 대답에 피스토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친구 놈이 안 맞은 걸 다행으로 여기자.

“하지만 레슬리 건은 맞았어…….”

사이레인이 순식간에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사이레인 정도 되는 덩치가 어깨를 늘어트리자 귀엽기는커녕 징그러워 보였다. 피스토레는 자신의 눈을 꾸욱 누르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눈을 씻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슬리 건이라니?”

아, 설마. 무언가를 알겠다는 듯 피스토레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네, 베스라온이 나한테 했던 그 말투를 레슬리 양에게도 전염시켰나?”

“…….”

사이레인이 시선을 피하는 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그건 좀 맞아야겠군.”

피스토레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고 어리던 베스라온이 눈을 반짝이며 ‘조져 버리겠습니다!’를 힘차게 외치던 그날을. 그 뒤로 어린 베스라온이 말수가 얼마나 줄었던가.

한 남자는 고개를 젓고 한 남자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는 동안, 뒤에서는 테펜텔이 술병 하나를 들고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슨 술 가져왔는데 먹을 사람? 사이레인이 다 마시고 두 병밖에 안 남았어!”

“나, 나! 내가 먹어도 되나요? 테펜텔 님?”

어느새 벽에서 굴러 나와 슬그머니 옛 친구들의 사이에 낀 아르트엘이 눈을 빛내며 손을 들자, 테펜텔이 웃으며 커다란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피스토레의 아내면 내 친구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아, 아르……? 뭐 하여튼! 말 놓고 편하게 마셔!”

아르트엘이에요. 다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황후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안 돼, 내 사랑! 그건 독주나 다름없어! 테펜텔이 주는 대로 먹으면 숨진다고!”

뒤늦게 피스토레가 외쳤지만, 이미 아르트엘의 손에 들린 술잔은 텅 비어 있었다.

“캬! 이거 진짜 맛있다!”

“그치? 마셔, 더 마셔!”

계속해서 술을 따라 주는 테펜텔과 헤실헤실 웃으며 술을 한 번에 들이켜는 아르트엘, 놀라 말리는 피스토레와 ‘여보야에게 맞았어.’ 하고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는 사이레인. 그 모습들을 보며 공작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난장판이군.”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풍경이었다.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분명 새 가문의 이야기와 스페라도 저택의 처분 문제를 말하려고 모인 것인데 순식간에 술판이 벌어졌다.

“좋지 않나요?”

공작의 뒤에 서 있던 제나는 생긋 웃었다. 오랜만에 추억에 잠기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테펜텔이 당당하게 그녀를 가리키자, 제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나가 말이야! 지팡이로 에타이들을 처때리고 있었다니까?”

테펜텔은 제나를 따라 하듯 술병을 휘둘렀고, 아르트엘이 손뼉을 치며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포기한 듯 피스토레는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역시 집사도 셀바토르.”

테펜텔을 보며 박수를 보내던 아르트엘이 눈을 빛내며 제나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반짝이고 한없이 순수한 눈을 보며 제나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멋져라! 나도 그 지팡이술 가르쳐 주면 안 되나요?”

지팡이술이라니. 그냥 지팡이로 쥐어 팬 것뿐인데. 그렇게 말하는 대신 제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 폐하, 제가 나이가 많아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날아온다 하시더니 정말로 날아온 테펜텔 님의 방법을 배우시는 건 어떨까요?”

화살이 다시 테펜텔에게 날아갔다.

“정말로 날았나요, 테펜텔 님?”

“그럼! 주변에 마법사 놈이 있길래 붙잡고 날려 달라 그랬지. 아무리 생각해도 걷는 것보단 나는 게 빠를 것 같아서!”

테펜텔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가만히 있던 셀바토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다 벽에 부딪치면 어쩔 뻔했나?”

운 좋게 창문으로 들어왔지, 조금만 비껴 갔어도 단단한 벽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테펜텔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힘차게 외쳤다.

“벽을 부수면 되는 거지!”

벽 따윈 문제없어! 그러는 테펜텔을 보며 아르트엘은 환호했고,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술에 취해 연신 환호하는 아르트엘,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술을 들이켜는 피스토레와 사이레인, 비록 술에 강해 홀로 취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망한 테펜텔.

‘오늘 이야기를 나누긴 망했군.’

공작은 몸을 젖혀 등받이에 기댔다.

어쩌면 처음부터 오늘은 글렀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스토레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더라면 테펜텔과 사이레인이 눈을 빛내며 따라오는 걸 막았어야 했다. 거기다 슬슬 자신도 술기운이 돌고 있었다.

술기운을 깨기 위해 테라스로 나오자,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황궁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메데이아가 머무르던 궁 역시 눈에 들어왔다.

메데이아가 지내던 궁과 온실을 전부 부수고 다른 걸 짓는다고 했던가. 술기운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데, 그녀의 뒤를 따라온 아르트엘이 웃으며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마치 공작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뺨이 달아오른 아르트엘은 생긋 웃었다.

“궁을 하나 지을 거야. 이름도 지어 놨어. 에스텔 궁이야.”

“에스텔?”

공작의 물음에 아르트엘은 그저 옅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충분한 답이 되었다. 신의 곁으로 간 황녀의 이름이었다.

“그냥 지어 두기만 하면 아무도 불러 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르트엘은 바람에 흩날리는 제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레슬리 양의 일을 본보기로 삼아 소외된 아이들을 구하는 일을 에스텔 궁에서 할 거야. 무조건 아이들은 부모 밑에 있어야 한다는 법도 고칠 거고. 이미 피스토레와 말을 끝내 놨어.”

“좋은 생각이네.”

공작도 옅게 웃었고, 그녀를 따라 미소를 한껏 머금은 아르트엘이 말을 이었다.

“아렌도 말이야, 떠나기 전에 만났거든. 손을 잡고,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러겠대.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편지도 쓰겠다고. 그러고 갔어.”

다행이지? 그렇게 말하며 아르트엘은 팔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억눌러 놨던 숨을 터트리듯 크게 숨을 쉬었다.

“하, 애 키우기 정말 힘들다. 그치, 아셀라?”

“그러게. 힘들긴 해.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는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셀바토르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취한 피스토레와 사이레인이 책상 위로 올라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테펜텔은 열렬히 환호하며 술병을 들이켜고 있었고.

“……남편 키우는 게 더 힘든 것 같기도 하고.”

“맞아.”

공작과 아르트엘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