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9)

#21

테펜텔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명령을 받은 한 무리의 에타이들이 셀바토르 저택으로 침입을 강행했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셀바토르 기사들과 경비대와 부딪쳤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거대한 저택에 울려 퍼졌다.

공작과 사이레인, 베스라온과 루엔티, 거기에 레슬리와 테펜텔을 비롯해 대부분의 기사가 자리를 비웠기에 지금이 기회였다. 저택을 보호하고 있던 마법석마저 다른 동료들로 처리한 에타이들 몇이 셀바토르 공작저의 담을 넘었다.

“나머지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우리는 명령을 수행한다.”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나머지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가장 중요한 일은 증인이 될 두 사람을 죽이는 것. 외양이 변했을 수도 있으나, 어린아이니 체구로 알아보면 될 거다.”

명령을 하달받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대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 들려온 소식으로는 에피알테스를 치료하는 물약이 이 집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제조자가 저택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야.”

“제조자를 납치하면 될까요?”

“그래, 우리 쪽에서 병과 치료제를 전부 독점하는 게 중요하니까. 제조자가 어떤 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한 명을 잡아 안내시키도록 하지.”

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세 무리로 흩어져 사용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셀바토르 저택은 텅 빈 듯 누구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에 아무도 없을 리가 없는데.

“……아무도 없는데.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여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주인들이 전부 자리를 비워서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전부 자리를 비우진 않았을 거야. 주방이나 빨래방 그리고 사용인들의 숙소를 찾아보자.”

반대편에 있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니라면 집사를 찾으면 된다. 으레 이런 귀족들은 집사를 두고 부렸으니, 그라면 저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을 테지.

“어, 저기!”

뒷담을 넘어 저택으로 들어온 에타이들은 점점 저택 안쪽으로 흘러들어 왔다. 중앙 계단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여자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고 있는 마델이었다.

“꺄악!”

빨래를 걷어 가는 길이었는지, 사용인들이 쓰는 이불을 들고 있던 마델이 작게 비명을 지르고는 후다닥 나머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잡아!”

놓칠 수 없었다. 에타이들은 마델이 올라간 계단 위에 전부 뛰어올랐고. 철커덩― 그 순간, 계단이 움직였다.

레슬리가 넘어져 눈물을 보인 후로 자동이 되어 버린 계단은 사실 한곳이 아니었다. 임무 때문에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베스라온을 신나 맞이하던 레슬리는 다른 계단에서도 넘어졌고, 베스라온의 지도하에 다음 날 바로 개조되었다. 두 번째 움직이는 계단의 탄생이었다.

처음에 만들었던 자동 계단과 조금 다른 점이라고는, 난간에 달린 천사 장식을 옆으로 밀어야 계단이 움직이는 구조라는 것이었다.

“히익, 이게 뭐야!”

움직이는 마법 계단을 처음 겪어 본 에타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난간 뒤에 숨어 있던 서올리가 다급하게 천사를 계속해서 옆으로 밀자, 계단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으아아!”

에타이들은 난간을 잡았지만, 그와 동시에 눈앞에 뭔가가 떨어졌다. 마델이 들고 있던 사용인들의 이불이었고, 시야가 가려짐과 동시에 세 사람은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이때다, 공격!”

숨어 있던 사용인들이 제각기 튀어나왔다. 주방 쪽에서 일하는 이들은 무쇠 프라이팬을 들고 나왔고, 마델은 이불 사이에 숨겨 놨던 빨랫방망이를, 그리고 서올리는 먼지떨이로 이불에 감긴 에타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참여한 마구간지기는 다급하게 가져온 말채찍으로 이불에 싸인 놈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점점 더워지는 여름을 맞아 바뀐 얇은 이불은 에타이들의 시야를 가리고 행동을 제한하기만 할 뿐, 아픔을 줄여 주지는 못했다. 신명 나게 무언가를 두드려 패는 소리와 함께 가냘픈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이 미친놈들이!”

간신히 이불을 걷어 낸 남자가 눈물을 글썽였다. 머리를 프라이팬과 빨래 방망이로 제대로 맞은 다른 두 사람은 기절한 듯 미동도 없었다.

“끼악! 도망쳐!”

이불이 걷히자마자 사용인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중 정확하게 마델을 노린 남자는 제 옆에 떨어진 무기를 집어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의 검 대신 잡힌 것은 한 나뭇가지였다.

갓 꺾어 왔는지 나뭇가지에 달린 이파리가 싱싱해 보였지만, 그뿐. 뭔가를 때리기엔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고개를 들자, 무기를 가져가고 대신 나뭇가지를 놓아둔 정원사 아들 빌이 눈을 찡긋하더니 그대로 도주했다.

“야, 너 이리 안 와!”

남자는 몸을 벌떡 일으켜 빌을 쫓았다. 일단 무기를 찾는 게 최우선이었다. 언제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리고 테펜텔이 돌아올지 모르니까. 기절한 두 명의 동료가 이불에 싸여 슬그머니 사라진 것도 모른 채 남자는 맹렬하게 빌을 따라 복도를 달렸다.

“지금 당장 내놔, 이 새끼야!”

“싫어, 이 새끼야! 누구보고 새끼래!”

빌은 킬킬 웃으며 복도를 뛰었다. 그러면서 열심히 남자를 약 올리는 걸 잊지 않았다.

“에타이들은 정원사 아들 하나 못 잡을 정도로 느려 터졌구나?”

빌의 놀림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남자는 이를 갈더니 모퉁이를 꺾어 사라진 빌을 찾아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주방 사용인들과 바타의 공격이었다.

모퉁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타는 장식장 위에서 뛰어내려 커다란 냄비로 남자의 머리를 찍었고, 다른 하인은 잘 길든 무쇠 프라이팬으로 복부를 쳤으며, 마지막으로 하녀는 밀대로 다리를 공격했다.

그간 기름을 먹여 길을 잘 들인 프라이팬과 최근에 바꾼 냄비, 그리고 질 좋은 목재로 만든 밀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터엉―!

텅 빈 것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고, 남자는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자가 기절한 걸 확인한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남자를 이불에 싸매 어디론가 끌고 사라졌다.

“이건 무슨 소리야.”

간신히 사용인 한 명을 잡은 에타이는 눈을 찡그렸다. 무언가 텅 빈 것이 깨지는 소리, 어째 낯설지 않은 소리였다. 마치 친구 놈 머리를 깨면 이런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하고…….

“그,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떨었다.

간신히 지나가던 하인 한 놈을 잡은 건 좋은데 어째 덜떨어진 놈 같아 보였다. 머리에 진흙이 묻어 있고 몸에도 덕지덕지 이상한 게 붙어 있는 게, 마구간지기 중에서도 가장 아랫놈 같았다.

“너, 제대로 안내는 하는 거겠지!”

검 손잡이로 허리를 찌르며 윽박지르자 하인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리로 가면 그 말씀 하신 아이들에게 갑니다. 제, 제발 죽이지만 말아 주십시오. 저에겐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은…… 없지만, 태산 같은 빚이 남아 있습니다. 번화가 근처에 집을 살 때 빌린 건데,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 같지만요. 이층집인데 벌써 바닥이 내려앉았거든요. 분명 부동산에서는…….”

“시끄러워!”

갑자기 신세타령하기 시작한 남자의 허리를 다시 손잡이로 내리쳤다. 히익, 놀란 소리를 내며 하인은 입을 다물고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냥 죽이면 안 돼?”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가 묻자 하인을 잡고 있던 에타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간신히 잡은 놈을 죽이라고? 안내는, 네가 할래?”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제대로 안내하겠습니다!”

“너무 시끄럽잖아! 들키겠다고!”

“맞습니다, 너무 시끄러워서 안내를 못 하겠어요!”

“아악! 너는 좀 닥쳐!”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치는 에타이의 허리께를 누군가가 쿡 찔렀다. 매서운 눈초리를 한 갈색 머리 여자였다.

“이놈 뭔가 수상해. 행동거지는 어수룩한데 은근 자세가 제대로 잡혀 있어. 거기다 방을 차례로 살펴보는데 갑자기 튀어나왔지. 마치 우리가 살펴보던 걸 막으려고 한 것처럼.”

가라앉은 여자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너 뭐야.”

“시, 시문입니다. 마구간지기고요.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돼 허드렛일을 주로 하지만……. 하여튼! 이쪽이 맞습니다!”

“거짓말을…….”

여자가 말을 멈췄다. 네 사람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작은 체구, 뒤집어쓴 이불 사이로 보이는 동그란 눈동자. 얼굴은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여자아이였다.

“저거다! 이 집에 여자아이는 공녀와 우리가 찾는 애새끼들뿐이야.”

그렇게 들었다. 이 집에 있을 만한 아이는 단 셋, 그 유명한 셀바토르 공녀와 자신들이 찾아 죽여야 하는 아이 두 명이라고. 지금 셀바토르 공녀는 저택을 나가 있다고 들었으니, 저 아이는 분명 자신들이 찾는 아이일 것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더니 아이는 그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

에타이 셋은 무섭게 여자아이를 쫓았다. 여자는 미련이 남은 얼굴로 복도에 주저앉은 하인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아이에게 집중했다.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아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못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를 쫓으며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망할 그 치료제인가 뭔가가 효과를 발휘한 거겠지. 어차피 오래 못 버텨!”

실제로 도망치는 아이와 에타이들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아이가 용케도 모퉁이를 돌고 계단을 오르며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잡히는 건 금방이리라. 여자는 눈을 찡그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아이에게 던졌다.

“악!”

다리에 끈이 감기며 아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죽여.”

셋이 동시에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잘게 떠는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분은 저희 아가씨 친구분이시라.”

버리고 온 하인의 목소리와 함께 가장 뒤에 서 있던 여자의 몸이 피로 적셔진 채 떨어졌다.

“너, 이 새끼!”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서 있는 하인에게 두 에타이가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창문이 깨지며 세 사람이 저택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정문을 지키던 셀바토르 기사단이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었다. 두 명의 에타이는 덧없이 쓰러져 창밖으로 던져졌다.

“괜찮으십니까?”

하인으로 변장했던 기사는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끝났다는 걸 소리로 알았는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얇은 천을 거뒀다. 하늘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 흉 없는 깨끗한 얼굴, 셀리스였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제가 도움이 되었나요?”

셀리스가 몸을 일으키며 묻자,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펜타니 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 혼자 저들을 여기까지 이끌고 올 수 없었을 겁니다.”

하필이면 저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에펜타니 백작 부인이 있는 방 근처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몇 개의 방만 지나면 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호로 남아 있던 기사가 미끼가 되어 떨어트리려고 하자 셀리스가 자발적으로 나섰다.

‘저 사람들은 우리뿐만 아니라 두 사람을 찾고 있다면서요. 제가 더 눈길을 끌 수 있을 거예요.’

약간의 논쟁 끝에 결국 두 사람이 나서 미끼가 되었고, 미리 입을 맞춰 둔 장소로 손쉽게 에타이들을 끌고 갈 수 있었다.

“제가 도움이 되었군요.”

“네, 셀바토르 공작가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기사에 말에 셀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레슬리 양에게 제가 도움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렇게 말하며 셀리스는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게 물들이며 웃었다.

“우리는 친한 친구니까요.”

***

“…….”

무언가 텅 빈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장인 남자는 눈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에펜타니 백작 부인을 납치하러 간 다른 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 보였다.

“대장?”

“빨리 임무를 수행하고 도망친다.”

멍청한 놈들까지 챙겨 줄 여력은 없었다. 남자는 빠르게 에펜타니 백작 부인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약을 제조할 만한 곳은 어딜까.

“대장, 저기.”

뒤따라오던 한 사람이 고갯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복도 끝 햇빛을 지고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하녀인가?”

머리를 단발로 자른 여인이었다. 특이한 점은 지팡이를 들고, 마치 집사처럼 제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잡아.”

뭐가 되었든 간신히 만난 안내인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대장의 말에 뒤에 있던 남자가 뛰어나갔다.

“뭐, 뭐야!”

하지만 갑작스레 일어난 폭발에 그대로 계단 밑으로, 그리고 이어진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괴상한 비명이 한동안 일어나더니 큰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일었다. 그리고 침묵이 감돌았다.

다른 에타이가 두려운 눈으로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폭발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제나는 웃으며 제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이 앞은 루엔티 도련님의 실험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으레 제 실험실에는 무언가를 설치해 두지요.”

딱히 설치한 건 아니고 실패한 마법석들과 함께 만지면 위험한 물약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것뿐이었고, 제나는 그게 밖으로 나오도록 도운 것뿐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무뢰배들.”

제나의 입술은 언제나처럼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공작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다른 날에 방문해 주시길 바라지만…… 가실 것 같지는 않군요.”

“특이한 하녀, 우리를 백작가 두 손님에게 안내해라.”

대장은 검을 뽑아 들며 제나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에 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뢰배들을 손님들께 안내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들을 지킬 병력은 있고?”

“없습니다. 하지만 곧 린체 기사단원들께서 방문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내 검보다는 빠르지 않겠지.”

대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고, 그 말에 제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녀의 입술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다가오실 수는 있고요?”

“그럼.”

대장은 말이 끝나자마자 제 뒤에 있던 에타이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던졌다. 예측대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폭발을 제대로 맞은 에타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를 밟고 대장이 제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 순간 제나가 들고 있던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돌렸다.

파지직! 지팡이의 머리와 봉을 연결하는 보석이 마법석이었는지, 달려든 대장의 몸을 번개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 충격에 대장은 무릎을 꿇었다.

“커헉!”

제 앞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대장을 내려다보며 제나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아가씨께서 적이 많아서 말이죠.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답니다. 그때를 위해 루엔티 도련님이 제 생일 선물로 만들어 준 지팡이죠. 어때요, 멋지지 않나요?”

아차, 이제 아가씨가 아니고 공작님인데. 나이를 먹어서 종종 실수한다니까요. 말을 덧붙이며 제나가 웃었다. 그런데도 루엔티가 만들어 준 걸 정말 자랑하고 싶었다는 듯 홍조까지 띠며, 제나는 대장이 지팡이를 잘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젠장, 이 망할 하녀 주제에!”

대장이 몸을 일으켜 제나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제나가 조금 더 빨랐다. 지팡이로 머리를 맞은 대장이 다시 휘청거렸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셀바토르 공작저의 집사를 맡고 있는 제나 도란테스입니다.”

제나의 눈이 살짝 휘었다. 대장은 여유 있어 보이는 제나의 웃음을 보며 이를 갈았다. 벼락을 맞고 지팡이에 머리를 맞아 피가 흘렀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한 것이었다.

카앙! 제나가 다시 지팡이를 휘두르기 전에 대장은 검으로 제나의 지팡이를 쳐 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팡이가 복도 저 끝으로 날아갔다.

“이제 어찌할 거지, 집사님?”

흉흉한 눈으로 제나를 바라보며 비꼬듯 물었지만 제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한 발 옆으로 물러서며 말을 이었을 뿐.

“찾으시는 분은 아니지만, 저희 공작저의 손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공작님의 오래된 친구분이신 테펜텔 님이십니다.”

뭐? 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나의 소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창문이 요란스럽게 깨지며 테펜텔이 등장했다.

“으하하하!”

옆으로 물러난 제나는 피해가 없었다지만, 여전히 창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던 대장에게 유리 파편은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날아 들어온 테펜텔은 무어가 그리도 즐거운지 웃으며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테펜텔의 무기는 철퇴. 쇠사슬 끝에 달린 동그란 철퇴가 정확히 대장의 옆구리를 노렸고, 갑옷이 우그러들며 다시 대장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그다음은 다리, 다음은 복부. 망토 속에 가려진 얇은 판형 갑옷은 피해를 막아 주지 못했고, 결국 대장은 쓰러졌다.

“재밌었다!”

테펜텔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먼저 오기 위해 마법사에게 자신을 날려 달라 한 게 꽤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정말로 날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제나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날아온다고 했잖아?”

테펜텔은 신난다는 얼굴로 제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온다는 비유적 표현인 줄 알았지요.”

“그렇지만 내가 도착 안 했으면 위험했을걸. 그런데 다른 놈들은?”

테펜텔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밑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우리가 이겼다!”

계단 쪽으로 다가온 테펜텔과 제나가 밑을 바라보자, 셀바토르가의 사용인들이 이불로 꽁꽁 묶은 에타이들을 가운데에 두고 빙빙 돌며 승리의 춤을 추고 있었다. 빨랫방망이, 말채찍, 정원용 가위, 프라이팬에 밀대, 거기에 포크까지. 공작저의 있는 모든 물건이 모여 있는 듯 보였다.

제각기 자신의 무기를 들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는 셀바토르 공작저의 최고령자 자일로도 껴 있었다. 철판을 덧댄 의료 가방에 묻은 피가 그의 공로를 알렸다.

“제나 집사님, 저희가 이겼어요!”

제나와 테펜텔을 발견한 사용인들이 웃으며 두 손을 벌려 환호했다. 정말 기쁜지 다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신나 하는 자일로를 바라보며 테펜텔이 말을 흘렸다.

“자일로는 매일 퇴직한다 퇴직한다 하면서도 행동은 다르단 말이지.”

지금쯤이면 공작이 메데이아를 만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죽을 때까지 공작저를 벗어나지 못하실 거예요.”

자일로에게는 사형 선고 같은 말이었다.

***

머리끈이 끊어진 탓에 긴 머리카락이 거슬렸다. 실전에 참여한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색다르기도 하고. 셀바토르 공작은 머리를 쓸어 뒤로 넘기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다시 머리를 뒤로 넘기는데, 무언가가 허전했다. 공작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가면…….’

떨어졌나? 공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공작의 검을 맞고 숨을 거둔 사람들이 널려 있을 뿐, 그녀의 가면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성에 도착하자마자 메데이아가 준비한 놈들과 붙었는데 그때 떨어진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작은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밖에는 하르트가 있었다. 그라면 알아서 잘 챙겨 주겠지.

텅 비고 무너진 크렌베이츠 성 복도에 그녀만이 움직였다. 창문과 부서진 벽 사이로 들어온 저녁노을이 복도를 천천히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소란스러웠으나 이제 조용해졌다. 시끄럽게 소리를 내던 인간들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찰팍. 고인 피를 밟은 공작은 저도 모르게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찡그렸다. 고인 피 가운데에 꽃 한 송이가 자라 있었다. 어쩐지 꽃한테 미안해졌다. 이런 피를 먹고 자라도 괜찮은 걸까.

‘그러고 보니 이 꽃은 소풍 때 레슬리가 물어보던 꽃이었는데.’

열두 살 첫 소풍 때 자신에게 이 꽃에 관해 물어봤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그때는 이름을 말해 줬는데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꽃 덕분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레슬리에게 옮겨 갔다. 자신의 딸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후작은 죽었겠지. 사이레인이 도끼를 들고 나갔으니. 거기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쓰레기를 태운다며 셀바토르 저택에 있는 모든 기름과 장작도 가지고 갔고. 무엇에 쓸 거냐 물었더니 그저 ‘우리 여보야가 최고야!’를 외치며 해맑게 웃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처리는 내 몫이겠지?’

어쩐지 벌써 피곤해 공작은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여보야는 귀여워서 좋았지만, 종종 큰 사고를 치곤 했다.

뭐, 그래도 처리 못 할 정도는 아니니. 남편이 신난 걸로 만족해야지. 후작만 생각하면 야밤에 도끼날을 갈던 사이레인이 아니던가.

“아.”

신나는 사이레인과 이제 복수 따위에 집착하지 않을 레슬리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긴 황제의 복도를 지나 도착한 알현실.

본디 별장에는 만들지 않는 곳이었으나 이 성을 너무도 사랑했던 황제가 1년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렀기에 자연스레 황제를 뵙는 알현실을 만들었다.

메데이아는 태후니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던 그녀가 아니던가.

공작이 힘주어 문을 밀자, 거대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알현실 안으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쌍두 뱀이 해와 달을 삼키고 있는, 벽면을 가득 메운 르카디우스 인장과 황좌, 그리고 거기에 쓰러지듯 기대 숨을 고르고 있는 여자였다.

세월의 흐름과 지진으로 황좌는 더럽고 일부는 떨어져 나갔지만, 여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메데이아.”

공작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숨을 옅게 헐떡이던 메데이아가 고개를 들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거야?”

그녀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공작이 들고 있는 검을 훑었다. 에타이와 태후의 기사들을 베어 넘긴 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무서운 걸 들고?”

웃음을 머금고 공작을 바라보는 메데이아를 보며, 셀바토르는 말없이 눈을 찡그렸다. 메데이아는 지친 듯 안색이 좋지 않았고,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메데이아는 이트바나의 공주였다. 그리고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후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격한 운동을 해 봤을 리가 없었다.

특히 태후가 되어 스스로 뒷방을 자처하고 나서는 몸을 웅크리느라고 태후궁과 온실에서만 살던 여자였다. 그런 메데이아가 하루 만에 여러 일을 겪고 여기까지 도망쳤으니 당연히 그녀는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굉장히 지쳐 있을 터였다.

“메데이아.”

“아아, 음색 좀 봐. 정말 친절한 목소리네. 여태 늘 거리감을 두고 있었으면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그리고 마음도 없는 메데이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작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았다.

“가면을 벗었네. 정말 그 화상은 못 없애는 거야? 난 예전의 얼굴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 도도한 소공작님.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너랑 춤추고 싶어 했었지.”

“…….”

공작은 대꾸 없이 메데이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뚝, 하고 검 끝에 맺혀 있던 피 한 방울이 하얀 메데이아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지?”

공작의 물음에 메데이아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무슨 짓? 벌인 게 너무 많아 뭘 말하는지 모르겠네, 아셀라.”

“전부 다. 아렌도부터 해서 전부 다 말이야.”

“아렌도가 처음은 아닌데!”

메데이아는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텅 빈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뭐, 거기서부터 말하기를 원하신다면 말해 드려야지. 당연히 내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어.”

메데이아의 대답에 공작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를 바꾼 장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색달랐다.

“다들 그러지 않나? 자기 아들을 황제로. 황제의 여자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해. 황제가 여자였던 경우는 제외해도 말이야. 그리고 아렌도도 꽤 나쁘지 않은 황제감이었잖아? 피스토레가 조금 더 진취적이기만 했어도, 아렌도는 차기 황제였어.”

“하지만 너는 아렌도를 완벽한 황제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지.”

공작의 말에 메데이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맞아.”

그래서 특수한 꽃을 보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중독성이 있는 꽃. 하루 만에 저버리는 꽃인 데다가 비슷한 꽃들이 많아 쉽게 들키지 않을 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잘 알아냈네.”

일부러 들키지 않게 황후에게도, 그리고 종종 다른 사람에게도 꽃을 보냈다. 온실에서 꽃을 키우는 뒷방 태후처럼 꾸몄던지라 그건 이상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 걸까.

“솔직히 찍었어.”

천연덕스러운 셀바토르의 말에 메데이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라면 네 위에 뭔가가 있는 걸 싫어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게 정작 네 아들이라도 말이야.”

공작의 말에 메데이아는 환하게 웃었다. 창백했던 안색에 조금 활기가 돌아왔다.

“역시 나를 봐 주고 있었구나? 착한 아셀라. 그래, 내 아들이니 내 밑에 있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거기까지 말한 메데이아가 웃음을 멈추었다. 차갑게 변한 얼굴로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가장 위에 있고 싶었어.”

아렌도를 황제로 만들고 자신은 그 위에 앉을 생각이었다. 이피엘과 데비엔은 메데이아가 황제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그보다 더 위로 가고 싶었다.

이트바나에서는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건 법이었고 관습이었으며 깨트릴 수 없는 미래였다. 그렇다면 그 위는? 왕보다 황제보다 더 위는? 그 위는 자신도 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거대한 법률책을 보던 메데이아는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다. 에피알테스 전설도, 르카디우스 제국도 휘두를 만한 계획을 세우고 차근히 하나하나 실현하기 시작했었다.

물론 바로 그 위에 앉을 수는 없겠지.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넘어간 메데이아는 간신히 아렌도를 임신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이미 르카디우스 제국에는 피스토레라는 황태자가 있었다. 나약한 성격이었지만, 적통인 황태자. 지금 아이를 낳아 황제에게 보여 준다 해도 황제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그는 자연사할 것이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다른 수를 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시간은 너무도 부족했으니까. 다행히도 아르트엘이 비슷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했다. 메데이아는 데비엔과 이피엘을 이용해 두 사람을 바꿔치기했다.

“샛길을 이용했지. 너도 알지? 내 남편의 취미는 황실에 샛길을 만드는 거였어.”

황제가 뒤로 물러나고 피스토레가 대부분의 샛길을 처리했지만, 그녀만이 아는 길이 있었다. 타국에서 온 어린 황후를 위해 황제는 기꺼이 작은 샛길을 메데이아에게 내주었다.

그 길에서 홀로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고 싶다는 말에, 모든 것을 알려 준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 샛길만큼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 길은 오롯이 메데이아만이 아는 길이 되었고, 황녀와 아렌도를 바꿔치기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황녀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정말 몸이 약해서 금방 죽더군. 뭐, 살릴 노력을 안 하긴 했지만.”

그 대답에 검을 쥐고 있는 공작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르트엘이 울었어.”

하지만 공작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피스토레는 아르트엘과 나를 거부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고.”

“그래서?”

“너는 최악이라는 거야, 메데이아.”

“어머나!”

메데이아는 되레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스토레, 그는 황위에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마음씨 좋은 선생에 어울리지.”

정이 넘치는 따사로운 선생님이 되어야 할 자가 황제가 되었다. 그런 그보다는 자신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제 앞에서 차가운 얼굴로 제 목에 무시무시한 검을 들이대고 있는 여자나. 메데이아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메데이아의 대답에 셀바토르는 눈을 찡그렸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메데이아가 작게 웃었다.

“아이테라 대공을 배신하게 한 것도 너였고.”

“피스토레가 어떻게 하면 더 완벽히 무너지는지, 잘 안 것뿐이야. 상대가 확실하게 무너져야 나에게 이롭지 않겠어?”

네가 나라도 똑같이 했을 거면서.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메데이아는 고개를 들고 공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테라 대공도 나 못지않게 욕심이 많았어. 내가 정권을 잡고 나면 나를 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 했을 거야. 아아, 욕심 많은 아이테라.”

그렇게 말하며 메데이아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를 질질 끌고 가 광장에 매달 거야, 아셀라?”

반역자의 우두머리는 꼬박 열흘을 광장에 매달아 둔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가슴에 맺혔던 악의를 풀고 나면 그제야 목을 잘랐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물도 음식도 넘기지 못하는지라, 열흘을 버티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니면 황궁에 끌고 가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

황족이 일으킨 반역이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 황궁에서 은밀하게 처리할 가능성도 컸다.

‘뭐가 되었든, 돌아가기만 한다면.’

메데이아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았다. 자신은 황족,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가면 또 다른 수가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다른 수를…….

“아니.”

우둑. 대답과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메데이아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울컥, 피가 입을 타고 흘렀다. 공작은 시선을 마주한 채, 메데이아의 심장을 검으로 꿰뚫었다.

“나는 너를 믿어. 분명 너는 뒤에 무언가를 더 숨겨 놨겠지. 피스토레도 그렇게 말했고.”

나를 믿는다고? 메데이아는 그렇게 물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 대신 피거품이 뚝뚝 떨어져 그녀의 옷을 적셨다.

셀바토르 공작은 오랫동안 메데이아를 봐 왔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녀는 뒤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을 거라는 걸. 그리고 셀바토르와 함께 그녀를 지켜봤던 피스토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위기는 적을수록 좋다. 비록 태후였던 메데이아를 재판에 세우지 않고 죽인다는 건 약간의 위험이 있었지만, 피스토레와 셀바토르는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너를 대신할 인간은 이미 잡아 뒀어. 이피엘, 너는 그녀를 아꼈지.”

공작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메데이아의 심장을 뚫은 검이 점점 더 깊게 들어왔고 이제 검은 황좌까지 파고들었다.

“그녀가 나머지 일을 모두 말해 줄 거야.”

셀바토르 공작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죽어 가는 메데이아는 그런 공작을 제 두 눈 가득 담았다. 분노도 후회도 괴로움도 그리고 아쉬움도, 많은 감정이 헤이즐넛색 눈동자에 공작의 모습과 함께 서려 있었다.

“잘 가, 메데이아.”

그 말과 동시에 공작은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았고,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허억, 마지막 숨소리와 함께 메데이아의 생명이 끊겼다.

“공작님.”

뒤늦게 알현실로 들어온 하르트가 셀바토르 공작을 불렀다.

“가면을 떨어트리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르트는 손에 들린 가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메데이아에게 닿아 있었다.

“엄청난 여자네요.”

하르트에 말에 천천히 황좌에서 내려온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저렇게 죽는다면 자리에서 굴러떨어질 텐데, 그걸 막기 위해서인지 메데이아의 두 손은 황좌의 손걸이를 꽉 잡고 있었다. 메데이아는 눈도 감지 않은 채 황좌에서 숨을 거두었다.

“……수도로 돌아간다.”

셀바토르 공작은 피가 묻은 제 가면을 쓰며 굴곡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나 가는군.”

저택에 돌아가면 꼼짝 말고 쉬어야지. 나도 이제 늙었어.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하르트와 함께 알현실을 벗어났다.

***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아렌도는 움직일 때마다 자신을 쫓아오는 시선들을 느꼈으나,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렌도 황자님…….”

그를 발견한 시종장의 눈이 커다래졌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 탓이었다. 흐르는 땀과 거친 숨, 그리고 달려오느라고 흐트러진 옷. 평소 귀족적인 모습으로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던 아렌도답지 않았다.

“아버……. 아니, 황제 폐하께서는 안에 계신가?”

하지만 아렌도는 자신의 모습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시종장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놀란 시종장이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됩니다! 아직 안에 다른 분들이……!”

시종장이 정신을 차리고 아렌도를 말리기도 전에 거칠게 문을 열고 아렌도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아렌도에게 박혔다.

“무슨 일이냐.”

가운데에 앉아 있던 피스토레가 퀭한 눈으로 아렌도를 바라보았다. 단 몇 시간 내에 피스토레는 몇 년은 더 늙은 듯, 지치고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황제 폐하.”

고위 귀족들의 눈을 의식한 건지, 아렌도가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말을 꺼냈다.

“긴급한 일이라 이렇게 무례를 저지른 점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족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결정을 묻는 듯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모두 잡아들이게. 그걸로 내 말은 끝이야.”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피스토레가 손을 저었다. 다들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몇몇은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상당수가 잡혀 들어갔습니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겁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반역자들을 천천히 잡아들이라?”

“아직 죄가 확증되지 않았으니 조심스레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하, 조심스레.”

피스토레가 말을 꺼낸 남자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남작은 지금 꺼낸 발언이 반역자들을 감싸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한 것인가? 이 사태를 만든 이들을 천천히 잡아들이라니.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는 걸로 들리는군.”

“저, 저는 그저 충심에 드린 말입니다.”

남작은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 있던 누구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충심이라. 진정한 충심을 가진 자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겠지. 오히려 더 빨리 병든 부분을 도려내라!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남작의 어깨에 손을 얹은 피스토레의 눈이 주변에 얼어붙어 있는 귀족들을 훑었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저는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희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가장 먼저 황제의 눈이 닿은 백작이 푸른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급히 다른 이들도 앞다투어 그녀의 의견에 동참했다. 그 모습에 남작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 잡아들인 이들은 확실하게 조사를 하도록.”

“예, 황제 폐하.”

고개를 숙인 귀족들이 방을 빠져나가고 제자리에 앉은 피스토레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힘들구나.”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스토레가 중얼거렸다. 메데이아에게 기사들을 보낸 후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들이 있으면 잡아들였다. 절차도 방법도 그리고 인륜도 다 무시한 행위로, 귀족들이 앞다투어 황제를 찾아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메데이아는 피스토레의 어머니 위치였으니까.

“다들 이래라저래라 말은 많으면서…….”

심지어 에피알테스가 퍼졌다는 걸 알자마자 짐을 싸 들고 도망간 귀족들도 있었다. 황제가 황궁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공작이 치료약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목숨이 아까워 빠르게 도망친 자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자들이 불러온 혼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차라리 저자들을 빠르게 잡아들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물을 배정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다. 남작은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귀족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란 무릇 먼저 나서 위험을 맞이하고 굳건히 버텨야 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그래, 무슨 일이냐. 도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달려온 거냐.”

잠시 길게 숨을 내쉰 피스토레가 아렌도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얼굴, 평소 아들 같지 않은 모습에 자연스레 머리가 옆으로 기울었다.

“황제 폐하, 아니 아버지.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말이지?”

쾅! 피스토레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아렌도가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냐는 말입니다.”

울먹이는 듯, 그리고 괴로운 듯, 그러면서도 진실이 아니길 바라는 목소리로 아렌도가 힘겹게 피스토레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렌도를 바라보는 피스토레의 눈이 커다래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피스토레는 제 아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원했다. 누구의 피를 이었든 상관없었다. 아렌도를 품에 안고 무너질 뻔했던 자신이 몸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간 키워 온 아들을 도무지 심장에서 빼낼 수가 없었으니까. 아렌도도 콘스텐도 그리고 작디작은 황녀도, 모두 그의 자식이었다.

“이피엘, 태후의 수석 시녀였던 자를 만났습니다.”

주먹을 쥔 아렌도의 손이 떨렸다.

메데이아가 도망쳤다는 소식에 아렌도도 몸을 움직였다. 어서, 어서 메데이아와의 끈을 정리하기 위해서 빠르게 그리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종종 메데이아를 찾아가긴 했으나 다행히도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없었다. 그러니 그저 할머님을 찾아뵈는 효심 깊은 손자로 보이면 될 것이다.

정 안 되면 엘리에게 뒤집어씌우면 되겠지. 멍청한 약혼녀는 메데이아에게 이쁨받는다는 걸 감추지 않았으니까. 그녀와 사이가 좋아지고 싶어서 엘리의 말을 따랐다고,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하면 자신의 위치가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아렌도는 엘리가 갇혀 있다는 지하 감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피엘이었다. 린체 기사단에 의해 끌려오던 그녀는 아렌도를 발견하자마자 무서운 힘으로 기사들을 뿌리치고는 필사적으로 아렌도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아렌도는 당연히 이피엘의 팔을 걷어차고 몸을 돌렸다.

“당신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까요.”

메데이아를 살려 달라는 외침을 무시한 아렌도에게 퍼부어진 말이었다.

“당신의 뿌리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지?”

결국 가까이 다가온 아렌도를 보며 엉망이 된 이피엘이 히죽 웃었다. 기사들을 뒤로 물리자 이피엘이 작게 진실을 속삭였다.

“……당신을 낳아 주신 분은 메데이아 태후 폐하란 소리입니다. 제가 직접 황녀와 당신을 바꿔치기했거든요.”

“왜 저에게!”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피스토레에게 쏟아져 내렸다.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 때문에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잠시 억누른 말끝은 그저 울먹임뿐이었다. 피스토레는 이를 깨물다 손을 뻗어 아들의 손을 쥐었다.

“그건 전혀 중요치 않으니까.”

그리고 제 소매로 아렌도의 손을 닦아 내었다. 혹여나 상처에 옷깃이 닿아 아플까 조심스러운 손길에 아렌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는 내 아들이다. 그건 달라지지 않아. 누가 너를 낳았든, 그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피스토레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자신의 탓이다. 자신이 셀바토르에게서 진실을 듣고도 바로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단 며칠이었지만, 아렌도를 피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셀바토르라면 어땠을까. 그녀라면 충격을 받긴 했어도 제 아들의 눈길을 피하는 그런 추레한 부모가 되진 않았을 텐데.

“너를 황태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저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네가 추구하는 것이 달라…….”

피스토레의 몸이 허물어졌다. 피 묻은 아들의 손바닥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흐느끼는 피스토레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런 아버지를 내려다보는 아렌도는 한참이나 서로 말이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렌도가 울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아렌도의 입안에 남았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중요한 회의를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고개를 숙인 아렌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하…….”

아렌도가 나가자마자 그대로 피스토레는 무너졌다. 상처받은 얼굴, 보고 싶지 않던 무너진 아들의 얼굴.

“으아아아!”

피로 붉게 물들었던 소맷자락이 이번엔 눈물로 물들었다.

문 밖에서 비명 같은 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서 있던 아렌도는 발을 옮겼다.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정신이 한없이 밑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귓가가 피스토레의 울음으로 막혀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형님?”

그 울음 속에서도 들리는 한 마디에, 정처 없이 비틀거리며 걷던 아렌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콘스텐.”

담담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동생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표정이 동생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목소리는 또 얼마나 떨리고 있을지 아렌도는 장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적이 될 동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형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 때문에 많은 걸 포기했던 동생, 한없이 다정하고 연약했던 동생.

닮았구나.

“너는 아버지와 닮았구나.”

웃음이 비적비적 새어 나왔다. 동생의 눈이 조금 더 동그래졌다.

“네가 있었던 신성국은 어떤 곳이냐?”

“……조용한 곳입니다. 수학을 하기 괜찮지요. 생각하기도 좋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심심하실 겁니다.”

“그러냐.”

아렌도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이 진실을 접해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좋았을까.

지금 물러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렌도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였고, 콘스텐의 옆에 붙어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으로는, 끝없이 추락하는 이 몸뚱이로 황궁에 서 있기는 무리였다.

“그런 곳이라면 잠시 가 볼까.”

푸른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앞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껏 부모님을 존경했다고, 사랑했었다고. 앞으로 자신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분명히 이 일로 앞으로 울고 괴로워할 두 분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아, 말했더라면 분명 좋아하셨을 텐데.

“……미리 말할 것을.”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렌도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었다.

“형님!”

그런 아렌도의 팔을 다시 콘스텐이 붙잡았다. 콘스텐이 다급히 할 말을 찾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 식당이 하나 있습니다. 형님이 좋아할 만한 식당……인데. 형님은 유독 해산물 좋아하셔서 기억을 해 뒀는데, 향신료 냄새도 강하지 않고.”

푸핫, 작게 웃음이 터졌다. 아까보다는 아주 조금 밝은 웃음이었다.

신성국은 바닷가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해산물 맛집을 찾기는 어려웠을 텐데. 도대체 이놈은 왜 자기 생명을 위태하게 했던 저에게도 이렇게 마음을 썼던 걸까.

“그래, 편지를 기대하마.”

쉽게 물러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진실을 받아들일 때가 오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리라. 아렌도는 웃으며 황실 복도를 걸어 나갔다.

***

콘라드는 멍하니 촛불에 의지해 에피알테스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브로치가 달린 낡고 작은 상자. 듣기만 했을 뿐 본 적은 없는 물건이었다.

에피알테스를 봉인할 때 따라 들어가는 성기사들은 연륜을 갖춘 사람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적어도 테센트루아 성기사로 10년 이상을 있었고 신에 대한 믿음을 지켜 왔던 사람들이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를 호위할 수 있는 영광을 받았다.

그간의 의식에서 콘라드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경험을 갖추지 못해 호위의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의식은 달랐다. 그가 믿음을 의지한 후 10년이 넘고 처음 맞는 의식이었고, 레슬리가 아라벨라로 발탁된 의식이었다.

만일 자신이 호위로 가면 어떨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좋을 듯했다. 잠시 레슬리를 호위하던 자신을 상상하던 콘라드는 남몰래 신께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신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고 콘라드는 호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 대신 들어가게 된 사람은 콘라드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자신과 같은 숙소에서 묵고 같은 훈련을 받으며 같은 임무를 맡던 이들, 형제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걱정하지 마. 큰일이 일어나겠냐.’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있다고 말을 해 줘야 이놈이 안심하지.’

호위가 정해지고 그렇게 말했었지. 사람 좋은 얼굴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 갔었다. 마치 안심해도 좋다는 듯이.

심지어 광장 호위를 맡았던 콘라드가 잠시 아라벨라와 최초 사제들이 있었던 대기실 쪽으로 가 선물을 전해 줄 수 있었던 것도 두 사람 덕분이었다.

그래서 직전까지 믿고 있었다. 의식이 시작하는 그 직전까지, 콘라드는 그들을 믿었었다.

“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콘라드는 손을 들어 흘러내리는 걸 닦았다. 손에 붉은 액체가 묻어 나왔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콘라드는 시들어 버린 꽃들 사이 놓여 있는 에피알테스를 바라보았다.

걸쇠가 두 개나 풀려 있는 상자는 오랫동안 가두어졌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신전과 방이 가지고 있는 봉인의 힘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상자의 힘은 사라졌으니까.

지금도 상자 사이에서 아주 옅게 무언가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에피알테스가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콘라드는 지금 봉인의 방 안에 홀로 들어와 있었다. 아까 옅게 퍼졌던 흔적과는 다르게 이제는 진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력으로 완전히 막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봉인의 방이 가지고 있는 힘에 강력한 신력을 더한다면, 이 방에서 에피알테스가 빠져나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콘라드는 홀로 봉인의 방에 들어와 에피알테스를 마주 보고 있었다.

보통의 사제라면 신력으로 누설을 막기는 하겠지만 감염되어 순식간에 신의 곁으로 떠날 것이 분명했다. 힘을 버틸 만한 체력과 강인한 신력을 둘 다 가진 이는 지금 그뿐이었다. 나머지 성기사들은 아직 빈민가에 남아 있었다.

급하게 신전에서 사제들을 보냈으니 이제 슬슬 돌아오겠지.

사제들의 계산대로라면 콘라드는 돌아온 성기사 중 한 명과 교대해 봉인의 방을 걸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콘라드는 스스로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이테라 경, 괜찮으십니까?”

닫힌 봉인의 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신력으로 봉인의 방을 감싸고 있는 사제 중 한 명인 듯했다.

“버티지 못하겠다 싶으시면 언제든지 나오십시오. 거기서 죽는다면 개죽음이나 다름없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콘라드는 덤덤하게 대답하며 다시 손을 들어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 냈다. 어느새 소맷자락까지 흠뻑 피가 묻어 나왔다.

“아이테라 경! 대신할 사람은 많습니다, 부디 어머님과 동생분을 생각하십시오!”

걱정하는 사제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는 듯 콘라드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예.”

사제의 걱정에 대답하며 콘라드는 에피알테스를 바라보았다.

피를 닦는 것도 어느새 귀찮아졌다. 코에서 흐르는 피가 턱에 괴었다가 뚝, 뚝,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빛을 잃은 꽃들이 붉게 물들어 갔다.

서 있을 힘도 없어 콘라드는 에피알테스가 보이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피곤하다.’

어쩐지 점점 의식이 흐려졌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대로 있다간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이 갔다. 하지만 어서 빠져나가야겠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겠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에피알테스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사제를 사칭해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던 무리들을 토벌하러 갔었을 때였다. 이미 거짓된 무리들은 그간 사람들에게 뜯어낸 돈으로 꽤나 번듯한 요새를 만들었고, 몇 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전투를 벌였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만큼 멍하지는 않았는데.’

콘라드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시야가 옅게 흐려졌다.

배신, 배신, 거짓.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랐던 아버지의 배신과 형제처럼 생각했던 이들의 배신, 거기에 쓰러지는 어머니와 울며 제 옷자락을 잡던 동생 그리고 비처럼 쏟아지던 저주.

‘내가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키웠거늘……. 이 저주받을 놈. 신께 버림받을 놈! 친아버지를 배신하고도 네가 신께 버림받지 않을 것 같더냐!’

제 아들의 손에 잡혀 온 아이테라 대공은 감옥을 떠나던 콘라드의 뒤에 저주를 퍼부었다. 그 저주가 귀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하아…….”

피곤하다. 너무도 피곤했다. 평소 임무 때보다도 적게 움직인 것 같은데, 유달리 눈이 감겨 왔다.

‘자고 싶다.’

그냥 어디든 누워서 자고 싶었다. 긍지 높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일원으로 그런 일은 용납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조금 누워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아주 잠시만 눈을 감아도 괜찮지 않을까. 제 피로 붉게 물들어 가는 꽃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치솟았다. 시야가 아까보다 흐려지고, 마치 물속에 잠긴 듯 귀가 먹먹해졌다.

창도 없어 어두운 방 안은 잠깐 눈을 감아도 아무도 모를 거라 속삭이는 듯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촛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래, 아주 잠시만…….

“셀바토르 공녀님!”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흐려지던 시야가 대번에 밝아졌다. 콘라드는 몸을 조금 돌려 굳게 닫힌 봉인의 문을 바라보았다.

“아,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공녀님!”

방금 전까지 자신을 필사적으로 부르던 사제는 이제 온 힘을 다해 누군가를 말리고 있었다.

“여기 들어가시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 으헉! 문이!”

경악과 경악, 그리고 쏟아지듯 밝은 빛을 이고 등장한 사람은 레슬리였다.

“콘라드 경!”

비록 빛을 등지고 있었지만, 레슬리의 동그란 눈동자를 보기에는 충분했다.

“레슬리, 꼭 들어가야 할까? 이 아버지는 너무 걱정이 되는데…… 저놈은 왜 죽어 가냐.”

말리는 사제를 한 손에 들고 있는 사이레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레슬리를 말리다가 이내 콘라드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아, 사이레…….”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콘라드는 크게 비틀거렸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니 머리가 핑글 돌면서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괜찮아요?”

달려온 레슬리가 콘라드의 팔을 잡고 넘어지지 않도록 지지해 주었다. 어설프게 품에 안긴 꼴이 되고, 잠시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엉켰다.

“아……. 제가 추한 꼴을…….”

콘라드는 다급하게 제 얼굴을 문지르며 몸을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소매에도 피가 잔뜩 묻어 오히려 더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다리는 의지를 배반했다.

“경, 앉으세요.”

얼굴이 붉어진 콘라드를 조심스레 앉힌 레슬리가 몸을 돌려 아직도 문을 막고 있는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듯 일그러져 있었다.

“레슬리, 이 아버지는 걱정이 된다. 응?”

그런 사이레인에게 다가간 레슬리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고 웃으며 울먹이는 사이레인과 시선을 맞췄다.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사제들도 이렇게 많고, 성기사들도 있는데. 네가 굳이 안 해도 될 거야.”

“아니, 제가 해야 해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레슬리는 눈을 휘며 웃었다.

“처음부터 약속되었던 일인걸요. 그리고 저밖에 할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레슬리의 말에 결국 사이레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치지 마라. 위험하면 바로 나오고. 알았지?”

거듭, 거듭 약속을 받아 낸 사이레인이 봉인의 문을 닫았다. 본래는 쉽게 움직이는 문이 아니었으나, 힘을 잃은 봉인의 문은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에게만큼은 가볍게 움직였다. 에피알테스가 사라져 그 힘을 잃은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레슬리 양.”

“얼굴이 엉망이에요.”

레슬리는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정성스레 콘라드의 얼굴을 닦았다.

“레슬리 양!”

콘라드가 레슬리의 팔을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건지,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당장 나가세요. 사이레인 님 말대로,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레슬리 양의 힘을 알지만 무모한 짓입니다.”

“그 위험한 곳에 왜 콘라드 경은 혼자 계셨어요?”

레슬리가 시선을 맞추며 묻자 콘라드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이었다.

“에피알테스의 봉인을 찾아낼 때까지 잠시 봉인석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밖에 계신 사제님께 듣자 하니 그건 홀로 하지 않으셔도 됐다면서요.”

갑자기 조용해졌나 싶었는데, 그걸 설명하기 위함이었나. 콘라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말없이 얼굴의 피를 닦아 낸 레슬리가 손수건을 접어 옆에 놓았다.

“홀로 에피알테스를 견뎌 낼 생각을 하신 콘라드 경이야말로 무모해요.”

“그건 제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그렇다기보다는 아이테라 대공의 잘못을 대신 갚을 생각이었죠.”

레슬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샐쭉한 얼굴로 콘라드를 노려보자, 황금색 눈동자가 놀라듯 동그래졌다. 그런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에 따스한 온기가 더해졌다.

“그러니까, 같이해요.”

레슬리는 부끄럽다는 듯 살짝 눈을 굴리더니 이내 다시 시선을 맞췄다.

“……스페라도 후작도 반란에 참여했죠. 엘리도, 후작 부인도. 스페라도 후작가 전체가 반란에 참여했다고 보는 게 좋겠네요.”

다들 메데이아와 끈이 닿아 있었다. 엘리는 가장 최측근이었고, 후작과 후작 부인도 그녀와 끈이 닿아 있었다. 심지어 후작 부인은 메데이아와 셀바토르 공작 사이에서 줄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후에 공작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긴 했어도 메데이아와 후작 부인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잘못을 레슬리 양이 대신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콘라드가 자상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레슬리를 달래자, 그녀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콘라드 경도 마찬가지잖아요. 경도 아이테라 대공의 잘못을 대신 갚을 필요는 없어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린 걸까.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눈치채고 보니 기묘한 부분이 닮아 버렸다.

“그리고 에피알테스를 상대하는 건 저밖에 할 수 없거든요.”

레슬리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콘라드가 말리기도 전에 에피알테스로 다가가 상자를 손에 쥐었다.

“콘라드 경, 아니 라드.”

몸을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잘 부탁할게. 그리고 그…… 저번의 대답은 이 일이 끝나고 해 줄게.”

그 말과 동시에 어둠이 에피알테스와 레슬리를 집어삼켰다.

에피알테스. 신께서 봉인하셨다는 전염병. 그리고 스페라도 가문에서 내려오는 어둠의 힘.

‘삼킬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빛조차 먹어 치우는 힘이라면, 전염병도 삼킬 수 있지 않을까. 금방 바보 같은 소리라며 이내 털어 버렸지만, 지금 잊어버렸던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레슬리는 제 손에 들린 에피알테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상자를 든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

사실은 무서웠다. 지금이라도 제 손에 들린 상자를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안전한 곳에서 있고 싶었다.

지금 밖에서 눈물짓고 있는 사이레인과 곧 돌아올 셀바토르 공작의 품에 안겨 있으면 그 누가 자신을 비난할까. 드높은 셀바토르 공작저의 담을 넘어 비난을, 자신의 울음에 돌을 던질 사람도 없을 텐데.

심지어 지금 벌이는 짓은 검증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저 자그마한 가능성만이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밖에서는 사제들과 마법사들 거기에 귀족들까지 모여 에피알테스를 다시 봉인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루엔티 역시 거기로 가 있겠지.

레슬리는 에피알테스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루엔티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제들과 마법사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둘째 오라버니라면 분명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레슬리는 괜스레 세 번째 걸쇠를 만지작거렸다. 상자만큼이나 오래되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보이는 마지막 걸쇠는 금방이라도 풀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과연 이 작은 걸쇠 하나가 봉인의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텨 줄까? 봉인을 풀려고 했던 메데이아, 이피엘 거기에 데비엔까지. 그 누구도 이렇게 빨리 에피알테스의 봉인이 풀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러니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예전에는 어둠의 힘이 복수만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천 년 동안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차곡차곡 모아 온 힘,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살려 준 목숨.

‘하지만 이제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겠어.’

레슬리는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아마 한 가지 일을 더 부탁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레슬리는 걸쇠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쇠를 위로 들어 올렸다. 달칵.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걸쇠가 열렸고 그와 동시에 상자 안에서 에피알테스가 서서히 퍼져 나왔다.

상자에서 빠져나온 에피테스는 상자를 쥐고 있는 손부터 검게 물들였다. 아까 보았던 에피알테스의 흔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고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걸,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싫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갉아 먹는 느낌, 무언가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먹는 감각이 흘렀다.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꽉 감은 눈에서 눈물이 아닌 다른 것이 떨어졌다.

독을 먹으면 이런 느낌일까, 산 채로 죽어 가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해리언과 밀튼, 자신보다 더 작던 그 아이들도 이 고통을 겪었을까.

속이 불타는 듯한 고통이었다. 불 속에 들어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도 이렇게 공포스럽지는 않았는데.

상자를 든 손이 정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둠 역시 괴로운 듯 몸을 비트는 게 느껴졌다. 작았다가 커졌다가, 뒤로 물러나기까지 하면서 에피알테스를 거부하는 게 보였다.

저 속에 있는 아이들도 자신과 같을까. 레슬리의 작은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상자를 든 손에 눈물과 핏물이 떨어졌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를 꽉 깨무는 것과 동시에 레슬리는 에피알테스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감싸 안았다. 에피알테스가 더욱 빠르게 자신의 몸에 역병을 퍼트리는 게 느껴졌다.

밀려오는 고통에 레슬리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사실 뭔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어느새 목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버티자, 버텨 보자. 밖에는 콘라드가 있었다. 그리고 두터운 문을 넘어가면 울고 있는 사이레인과 걱정하는 베스라온이 있었다.

신전을 나가면 방법을 찾기 위해 아수라장에 서 있을 루엔티와 이쪽으로 오고 있을 셀바토르 공작도 있었다. 저택으로 가면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있었다. 살려 달라고 외치던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지키고 도와줬던 이들, 이번에는 자신이 그들을 도와줄 차례였다.

‘제발!’

어둠이 더욱 강하게 에피알테스를 집어삼켰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것이 계속 흘러 넘어왔다. 전부 삼키지 못한 피는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작은 몸이 한없이 바닥으로 기울었다. 눈물과 섞인 핏물이 꽃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나가게 된다면.’

레슬리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콘라드에게 대답을 해 줘야지. 울고 있는 아버지를 달래 주고 다행이라 말하는 큰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들어가는 거야.

저택에 가면 다들 울면서 나를 반겨 주겠지. 맛있는 음식과 따듯한 저택, 포근한 잠자리. 뒤늦게 돌아온 작은 오라버니는 분명 한참 동안 잔소리를 퍼붓겠지만, 뒤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겠지.

어머니는 어떨까. 레슬리는 역병으로 검게 물든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잘했다고 해 주실까, 아니면 작게 한숨을 쉬실까. 그래도 끝에는 꼭 안아 주실 거다.

‘낮잠을 자야지.’

잠이 많은 어머니와 함께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잠을 자야지. 첫 번째 소풍 때 그랬던 것처럼 한가롭게 잠을 자야지.

어느 순간부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한 레슬리는 에피알테스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기를 한참, 레슬리는 작게 숨을 헐떡였다.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에피알테스는 더욱 강해졌지만, 어둠은 고통에 약해졌다. 아이들이 떠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금 자신이 죽어 가서 그런 걸까.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제발 아주 조금이라도 더 이 전염병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속으로 빌었다. 부디 조금 더 자신이 이 역병을 약하게 만들게 해 달라고, 그래서 신력으로 봉인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에피알테스를 껴안은 채 흐드러진 꽃들 사이 쓰러진 레슬리는 온 힘을 다해 빌었다. 하지만 희망에도 무색하게 고통은 더욱 강해졌고, 어둠은 한없이 약해졌다.

마치 눈 안쪽에 안개가 낀 듯 시야가 흐릿해졌다. 에피알테스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아까까지만 해도 헐떡이던 숨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손끝부터 추위가 몰려옴과 동시에 레슬리는 옛날 불구덩이 속에서 느꼈던 죽음이 다시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을 떠밀어 줄 손 따윈 없었으니 기적은 없을 거였다.

“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소리를 내지 못했던 목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지? 레슬리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힘겹긴 하지만 굳었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따듯하다. 차가워졌던 손끝에 온기가 돌아왔다.

‘콘라드 경이구나.’

레슬리는 옅게 웃었다. 다른 사제들에게도 몇 번 신력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이상하게 콘라드의 신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따스하게 느껴졌다.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레슬리는 작게 주먹 쥐며 미소를 머금었다.

힘을 내 보자. 밖에 있는 아버지가 이번엔 신전 문을 부수는 참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지.

레슬리는 아직도 흘러나오는 에피알테스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약해져 가던 어둠이 다시 세차게 움직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본래 신력은 모든 걸 진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유하고 날뛰는 것을 진정시키고 안정시키는 힘.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신력이 어둠을 돕는 느낌이었다. 진정해야 할 어둠이 더욱 강해지고, 에피알테스가 약해진 게 느껴졌다. 마지막 기회였다.

레슬리는 어둠으로 자신과 에피알테스를 감싸기 전 콘라드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지쳐 쓰러지려고 했던 몸, 그리고 배신으로 공허해진 눈.

지금 자신에게 닿고 있는 신력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레슬리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힘을 내었다. 아픔을 조금이라도 외면해 보고자 눈을 꽉 감았다.

아까보다 더욱 약해진 에피알테스를 어둠이 삼키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걸 몇 번이나 외쳤을까. 누군가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기 없는 손은 어딘가 익숙한 것이었다. 수고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은 무언가는 천천히 레슬리 품에 있는 에피알테스를 집어 들었다. 자신의 몸에 비교해 상자가 컸는지 기우뚱하긴 했지만, 이내 다시 균형을 잡았다.

「이건 우리가 가져갈게.」

꽃들 사이 쓰러져 있는 레슬리와 조금 떨어져 있는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늦지 않게 우리가 가져갈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슬그머니 눈을 떠 봤지만,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잘 있어, 레슬리.」

얼굴이 보고 싶어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간신히 본 것은 실루엣과 환하게 웃고 있는 눈이었다. 빛에 가려져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간신히 보이는 눈만큼은 그가 진심을 웃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 소년의 품에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상자가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토끼 인형이 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레슬리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고통은 사라지고, 얼굴에 피어났던 열꽃이 하나둘 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직도 제 품에는 에피알테스를 봉인했던 상자가 있는데.

레슬리는 슬그머니 상자를 들어 뚜껑을 열어 보았다. 달칵 소리를 내며 낡은 상자는 순순히 제 속을 보여 주었다. 상자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피알테스는커녕 먼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자의 맨바닥을 쓸어 보았다. 조금은 거친 나뭇결이 에피알테스의 끝을 알렸다. 그리고 아이들이 더 이곳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레슬리에게 알려 주었다.

끝난 거로구나. 레슬리는 작게 숨을 흘리며 웃었다. 어쩐지 눈물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와 눈물진 눈으로 웃어 보였다. 흐드러진 꽃들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레슬리 양.”

과도하게 신력을 써 엉망이 된 콘라드가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눈물과 안도로 얼룩진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괜찮…….”

“콘라드 경.”

레슬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다시 쓰러졌다. 아직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그건 콘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둠이 사라지며 나타난 레슬리가 살아 있다는 걸 알자, 안도감에 콘라드가 바로 옆에 쓰러졌다. 꽃잎이 팔랑거리며 흩날렸다.

“무리하셨어요, 콘라드 경.”

어쩌다 보니 나란히 누운 레슬리가 콘라드를 바라보자, 콘라드의 입술이 따라 호선을 그렸다.

“레슬리 양이야말로. 갑자기 어둠으로 뒤덮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건 죄송해요. 그렇지만 다들 직접 보면 반대할 것 같아서…….”

레슬리가 어색하게 웃자, 콘라드가 삐졌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대했을 겁니다.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어요, 이건.”

“……경도 무모했잖아요.”

“저는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일원인걸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이거든요? 가장 고귀한 수호자라고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지지 않고 투덕거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꽃들 사이에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에피알테스는요?”

“사라졌어요. 그리고 아이들도…….”

레슬리가 섧게 웃자, 콘라드가 조심스레 레슬리의 뺨을 쓸었다.

“모두가 레슬리 양의 공적을 칭송할 거예요.”

“모두……보다는 가족들이 기뻐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경도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고, 상체를 일으킨 콘라드가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보며 레슬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일, 일단 밖으로 나가죠. 상처를 치료도 해야 하고, 사이레인 님도 걱정하실 거고…….”

다급하게 몸을 마저 일으키던 콘라드가 휘청거리며 아직 쓰러져 있는 레슬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레슬리가 팔을 뻗어 콘라드의 손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경.”

레슬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직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제가 경을 많이 좋아해요.”

그렇게 말하는 라일락색 눈동자가 옅은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볼이 붉어지면서도 웃음을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음, 그러니까 저번의 답은 ‘좋아요.’예요.”

그렇게 대답하며 레슬리는 저번의 콘라드를 흉내 내며 작게 손등에 입을 맞췄다.

“……!”

저러다 쓰러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콘라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황금색 눈동자가 핑글핑글 도는 게 보여 레슬리가 다시 크게 웃었다. 남자는 귀여운 게 최고라는 셀바토르 공작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레슬리가 봉인의 방으로 들어가고, 사이레인은 눈물을 흘리다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힐끔,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다리는 왜 그러냐.”

옆에 쓰러지듯 앉은 베스라온이 한쪽 눈을 쭉 그으며 대답했다.

“이상한 놈에게 당했습니다. 붉은 머리에 눈에 상처가 있던 놈이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 놈 같았습니다.”

“쯧! 그 새끼한테 당했어? 이름이……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있던 놈은 끈질기다 못해 귀찮은 놈이었다. 기억을 더듬듯 한참을 끙끙거리던 사이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에……엠넥?”

불발이었다. 뭔가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잠시 인상을 찡그린 사이레인은 곧 그 일을 뒤로 넘겼다. 그저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더욱 험악하게 얼굴을 찡그리고는 입가를 문지르다 간신히 한마디를 흘렸다.

“……다치지 마라.”

간신히 이야기를 꺼낸 사이레인을 보며 베스라온이 작게 웃었다.

“걱정해 주실지는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걱정 좀 해 주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더니 사이레인은 멋쩍은 듯 큰 소리가 나게 베스라온의 등을 쳤다. 괴력에 베스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기껏 듬직하게 낳아 줬더니만. 우리 여보야랑 내 힘이면 어디서 다칠 일도 없을 텐데.”

“낳아 주시긴 어머니가 낳아 주셨지요.”

“이놈이.”

“솔직히 베스라는 애칭을 붙인 것도 아버지 아니셨습니까. 아버지가 어릴 적에 여장 시도만 안 했어도 어머니랑 제나 집사까지 베스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요.”

“꿈에선 딸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테펜텔이 말해 줬어. 저 바다 건너에서는 어릴 적 여장을 시켜서 키우면 튼실해진다더라. 나는 그냥 너를 듬직하게 키우고 싶었어.”

“……처음부터 듬직하게 낳아 주셨다면서요. 방금이랑 말이 엇갈리시잖아요.”

그렇게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두 남자는 봉인의 방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사제가 다가와 베스라온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다쳤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신전과는 어울리지 않은 새카만 제복과 피가 묻은 검, 언제 온 것인지 셀바토르 공작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보야!”

“어머니?”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을 보며 공작은 제 머리를 뒤로 넘겼다.

“혹시 머리를 묶을 만한 끈이 있니? 이거 귀찮아서…….”

“이거라도 줄까, 여보?”

사이레인이 잽싸게 낡은 가죽끈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공작은 옅게 웃더니 능숙하게 머리를 묶었다.

“메데이아는 어떻게 됐어? 잡아다가 피스토레에게 넘기고 바로 신전으로 온 거야?”

사이레인의 말에 공작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죽었어.”

잠시 공작의 눈이 뭔가를 회상하듯 깊게 잠겼다. 하지만 아주 완벽히 잠시였을 뿐 이내 제빛을 되찾았다.

“……살려 둬 봤자 후환이 더 컸지. 피스토레도 그렇게 말했고. 레슬리는?”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사이레인이 초조한 얼굴로 봉인의 방을 바라보았다. 창문도 뭣도 없는 긴 복도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어느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잘하겠지, 누구 딸인데.”

“그럼! 내 딸인데!”

공작의 말에 맞다는 듯 사이레인이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남편을 토닥이면서도 셀바토르 공작의 시선은 봉인의 방을 떠나지 못했다.

“아, 역시 다들 여기 있었구나.”

수척해진 얼굴로 뒤늦게 나타난 루엔티까지 가족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잠시 후, 드디어 굳건히 닫혔던 방문이 열렸다.

“어머니! 아버지!”

기다리던 레슬리가 앞서서 걸어 나왔다. 얼굴에는 얼룩덜룩하게 남은 열꽃과 피가 묻은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환한 웃음이 그걸 지웠다.

레슬리의 상태를 보아하니 먼저 봉인의 방에 들어가 에피알테스를 억누르고 있던 콘라드의 상태도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성기사복은 처음부터 그런 색이었다는 듯 붉은색과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데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콘라드의 상태를 쉽게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레슬…….”

맨 먼저 다가가던 사이레인이 굳었다. 뒤이어 베스라온의 눈썹 끝이 올라갔고, 루엔티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레슬리가 콘라드의 손을 꽉 잡고 있던 탓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을 받은 콘라드는 흠칫 몸을 작게 떨었으나, 놓지 않겠다는 듯 오히려 레슬리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라버니.”

하지만 콘라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은 쉽게 풀렸다. 먼저 손을 푼 레슬리가 제 가족 품에 안긴 탓이었다. 슬며시 고개를 든 콘라드는 방금까지 잡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리다 다시 귀까지 붉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의 품에 먼저 안긴 레슬리를 보며 잠시 굳어 있던 사이레인이 울부짖었다.

“레슬리, 왜 얼굴이 핏자국이 남아 있는 거야. 아니, 이건 또 뭐고!”

투박한 손가락이 열꽃의 흔적을 매만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레슬리.”

“야, 너 설마…….”

걱정스러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레슬리는 그저 웃었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중에, 집에 가서 알려 드릴게요.”

그러면서 부끄럽다는 듯 제 어머니의 품에 볼을 비비며 레슬리가 웃었다. 그래, 그러렴. 작게 공작이 말하며 헝클어진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잘 먹었니?”

뒤이어진 말에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늘어졌다.

“아이들은 잘 떠났고?”

공작의 물음에 레슬리가 이내 다시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섭섭하진 않니?”

“……조금은요. 그래도 이겨 내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어둠은 남아 있어요.”

레슬리는 눈물진 눈을 접으며 옅게 웃었다.

“예전처럼 귀엽게 움직여 주지는 않겠지만요.”

말 그대로 힘일 뿐인 어둠이, 레슬리를 걱정하듯, 지켜 주듯 움직였던 이유는 명확했다. 어둠 속에 남아 있는 아이들의 바람. 레슬리가 자신들처럼 죽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랐던 아이들의 바람이었다. 아이들이 이제 떠났으니 어둠은 강력하지만 단순한 힘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레슬리가 고개를 들고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아이들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본 적이 있었단다.”

악몽을 꾸는 듯 작게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는 딸의 방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은 토끼 인형이었다. 레슬리가 늘 가지고 다니던 검은 토끼 인형이 괜찮다는 듯 이마를 토닥이고 있었다.

평소 레슬리가 어둠으로 인형을 움직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움직이는 걸까.

어허?

신기한 마음에 팔짱을 끼고 토끼 인형을 바라보자, 인형이 씩 웃으며 비밀로 해 달라는 듯 입가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비록 표정이 변한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웃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형은 제자리로 돌아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침대 곁을 떠나는 작은 발소리들이 들렸다.

“그랬었지.”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얼굴을 공작의 품에 파묻었다. 그런 딸을 토닥이던 공작의 눈이 세 사람에게 둘러싸인 콘라드에게 닿았다. 위협당하듯 사이레인과 베스라온, 루엔티 사이에 서 있는 콘라드를 보던 공작이 옅게 웃었다.

“그런데 아이테라 경과 손은 왜 잡고 나왔을까, 우리 딸이.”

모르겠다는 능청스러운 물음에 공작의 옷가지를 꼭 쥔 레슬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슬리가 공작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작게 속삭였다.

“콘라드 경이요, 저에게 축제 때 고백했거든요.”

“오호.”

고개를 슬며시 든 레슬리가 시선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눈가가 붉게 물든 게 레슬리도 부끄럽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몸을 기울인 공작의 귓가에 나머지 말을 속삭였다.

“그래서 제가 좋다고 대답했어요.”

최대한 작게 말했지만, 레슬리의 대답은 표정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같이 레슬리를 기다리던 사제들의 시선까지 꽂히자 콘라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세 마리의 곰에 둘러싸여 조금 창백해졌던 얼굴이 눈가부터 시작해 다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네, 에. 그러니까……. 고백……했고 답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은 다시 붉어진 얼굴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저런.”

공작이 작게 혀를 찼다. 콘라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그래서 레슬리의 선택을 바꾸고 싶다든가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저 소년의 명복을 빌 뿐이었다.

아니, 조금 마음에 안 드나?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사윗감이긴 했지만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누굴 가져다 붙여도 성이 차지 않았다. 레슬리의 약혼자로 황태자조차 걷어찼던 그녀가 아니던가.

“으음…….”

레슬리의 대답에 사이레인의 얼굴이 수초마다 새롭게 변하고 있는 데다가 공작마저 눈이 웃지 않자, 레슬리가 슬그머니 잡고 있던 옷깃을 잡아당기며 눈을 살짝 위로 뜨더니 눈가를 접고는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그러셨잖아요. 남자는 귀여운 게 최고라고.”

레슬리의 대답에 공작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게 웃던 공작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긴 하구나.”

우리 딸, 보는 눈도 높지.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제 품에 안긴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콘라드 경,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대련을 해 보지 않았군. 당연히 나를 이길 정도는 되겠지.”

“야, 너 역사서 다 외워 봐. 신학서는 당연히 외울 테고 고어는 좀 아냐? 마법서는?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수재시니 너무 당연한 것들을 물었나, 내가?”

“둘 다 그러는 거 아니다.”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시작한 두 아들을 말리며 사이레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알 수 없는 그 미소에 콘라드가 긴장한 듯 침을 삼켰고, 베스라온과 루엔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반갑네, 아이테라 경.”

사이레인이 콘라드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단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각오는 했겠지. 앞으로의 생활이 아주 즐거울 걸세.”

얼어붙은 콘라드와 환한 미소의 사이레인, 어딘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베스라온과 루엔티를 보며 셀바토르 공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다 끝났으니 피스토레를 보러 갈까.”

“황제 폐하를요?”

“그래, 보고할 것도 있고…….”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공작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후작은 어떻게 됐지? 사로잡았나, 아니면 죽였나?”

주범이 아니던가.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어머니, 후작은요! 아버지가 조져 버리셨어요!”

챙그랑!

레슬리의 밝고 화사한 미소와 반대로 공작은 놀라 검을 떨어트리고 말았고, 사이레인은 굳어 버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여보야의 시선에 그는 몸을 움츠렸다. 베스라온은 고개를 저으며 루엔티는 콘라드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건 자신들이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사이. 나 좀 볼까.”

4년간 사이레인이 필사적으로 지켜 왔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

메데이아는 황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묻혔다. 반역자라면 본보기로 시체를 광장에 매달아 두었어야 했으나, 황제의 어머니라는 점으로 그건 면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며 사람들이 떠들었으나, 황제와 황후는 침묵을 지켰기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숨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피엘과 데비엔을 시작으로 메데이아와 관련이 있는 자들은 끝을 맞이했다. 몇몇 귀족들은 나름 자비심을 가지고 있던 황제에게 은근한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피스토레는 친동생처럼 여겼던 아이테라 대공과 자신도 연관이 있었다고 진실을 고백한 아렌도까지 처벌함으로써, 그 기대를 짓뭉갰다. 아이테라 대공은 스페라도 후작이 보내졌던 라즈튼으로, 그리고 아렌도는 황위를 포기하고 신성국으로 보내졌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형님!’

그렇게 울부짖던 아이테라 대공이 끌려가고, 아렌도는 덤덤히 피스토레와 아르트엘을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아렌도를 르카디우스 제국 황실에서 본 마지막 날이었다.

황실 밖의 상황도 빠르게 정리되었다. 희미한 에피알테스의 흔적에 병을 얻은 이들은 에펜타니 백작 부부와 셀리스가 만든 약으로 치유되었다. 그 흔적이 더 강해지기 전에 레슬리가 어둠으로 에피알테스를 집어삼켜, 전염병은 더 번지지 않았다.

약간의 혼란이 일어나긴 했으나 가라앉았고, 수도는 이내 안정됐다.

그리고 며칠 후 황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소소한 연회라더니…….”

셀리스의 눈이 동그래지고, 작은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벌써 두 번째로 황실을 방문한 것이건만 저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큰일이 있었으니까, 황실이 굳건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지.”

에펜타니 백작 부인도 긴장한 듯 딸의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우, 우리도! 이제 이런 곳에도 익숙해져야지!”

에펜타니 백작이 보기만 해도 듬직해 보이는 배를 내밀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번 일로 에펜타니 백작가도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말이다. 셀바토르 공작께서도 수도에 우리가 머물 만한 저택을 마련해 주시면서 뒤를 봐주신다고 했으니, 우리도 이제 어엿한 중앙 귀족이야.”

셀바토르 공작이 에펜타니 백작가를 위해 해 준 것은 두 가지였다. 중앙 귀족이 될 수 있게 발판이 되어 준 것, 그리고 막대한 양의 돈과 함께 셀바토르 공작저의 상단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낙후되었던 영토를 한 번에 일으킬 만한 돈이 들어오고, 행복한 꿈을 제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연스레 에펜타니 백작가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콧수염을 매만지며 괜스레 자신의 목에 매달린 작은 리본을 계속 고쳐 매는 에펜타니 백작을 보며 에펜타니 영식이 눈을 찡그렸다.

“아버지, 그만 만지세요. 중앙 귀족은커녕 잡상인처럼 수상해 보인다고요.”

잠시 말리는 아들과 아직 불안한 아버지 사이에 작은 다툼이 생겼다. 그걸 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셀리스의 손을 누군가가 뒤에서 덥석 잡았다. 힉, 작은 비명과 함께 뒤를 돌아본 셀리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레슬리.”

오늘의 주인공인 레슬리였다.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을 눈 색과 같은 라일락과 사파이어로 장식하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슬리는 셀리스를 보면서 살포시 웃었다.

“놀랐어?”

“완전 놀랐어!”

셀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저택에 침입한 에타이 이야기를 나누다 완전히 말을 놓게 된 두 소녀는 손을 꼭 잡고 작게 키득거렸다.

“드레스 정말 예쁘다. 드레스 자락에 수놓아진 꽃잎들이 진짜 같아.”

셀리스가 레슬리의 드레스를 바라보며 볼을 붉혔다.

“너도 예쁜걸. 아르롱에서 맞춘 드레스, 맞지?”

“맞아, 어머니가 사 주셨어. 그것도 다섯 벌이나 사 주신 거 있지! 앞으로 계속 사 줄 거래. 너무 행복해.”

셀리스가 흥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작게 동동거렸다.

“아! 그런데 지금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야? 공작님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셀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슬리가 겸연쩍은 얼굴로 볼을 긁었다.

“사실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 어머니를 놓쳤거든.”

“으음…….”

두 소녀의 눈이 난감한 듯 주변을 훑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다지만, 셀바토르 공작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시선을 모으지 않았던가.

“잠시 어디 가신 거 아닐까?”

“역시?”

레슬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머니가 없으면 아버지나 오라버니들에게 가 봐야겠다. 마침 저편에 서 있는 베스라온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럼 오라버니께 가 볼게. 조금 이따 봐, 셀리스!”

레슬리가 작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떼기 전 셀리스가 질문 하나를 던졌다.

“레슬리, 첫 춤 상대는 정했어?”

“응!”

레슬리는 춤출 상대방을 떠올렸는지, 볼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이테라 경이겠지.’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 에펜타니 영지까지도 소문이 돌던 사람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 거기다 대공가의 장남이란 위치까지.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던 사람. 그래서 사실 셀리스도 콘라드에 대한 환상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레슬리랑 너무 잘 어울리고, 셀바토르 공작님이 너무 멋져서…….’

자신도 이런 분홍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면 좋을 텐데. 나중에 염색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셀리스는 자신의 오라버니와 눈이 맞았다. 오늘 자신의 파트너, 춤 상대.

“웩.”

“우에에엑.”

시선이 맞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혀를 쑥 내밀었다.

‘아?’

베스라온을 향해 다가가던 레슬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레슬리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갓 성인이 된 듯한 소녀의 머리는 길고 구불치는 금발이었다.

‘……엘리인 줄 알았어.’

키도 엘리와 비슷한 데다가 하필 햇빛이 소녀의 머리에 장난을 치는 바람에, 엘리의 머리카락 색과 비슷해 보였다. 잠시 소녀를 바라보던 레슬리는 이내 발걸음을 떼었다.

에피알테스의 제물로 선정되었던 엘리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제대로 살아난 것도 아니었다.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웠던 얼굴의 절반이 흉하게 일그러졌으니까.

일그러진 얼굴에 충격을 받은 엘리에게 계속해서 비보가 쏟아졌다. 스페라도 후작과 후작 부인이 숨을 거두었으며, 메데이아는 엘리 자체를 예뻐한 것이 아니라, 제물로서 예뻐했다는 진실이. 그 사실을 듣자마자 엘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너는 라즈튼으로 가게 될 거야.’

그 전에 제물의 여파로 숨을 거둘지도 몰랐지만. 레슬리는 덤덤하게 자신의 언니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일그러진 제 얼굴 반쪽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와 자연스레 비교되었다.

‘……내가 열두 살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네가 조금이라도 느끼게 돼서 다행이야.’

춥디추운 그곳에서 반성하고 후회해. 레슬리의 말을 끝으로 엘리의 비명이 다시 내려앉았다.

“…….”

레슬리는 눈을 잠시 찡그리다 다시 베스라온을 향해 걸었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듯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등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베스라온의 이야기 상대가 먼저 레슬리를 발견했다.

“슈…… 레슬리 양.”

“콘라드.”

콘라드를 발견한 레슬리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베스라온이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마침 잘됐다. 레슬리, 어머니가 찾으셔. 아이테라 경, 그대도 따라오도록.”

애칭을 부르려다 잽싸게 말을 바꾼 콘라드를 한 번 노려보고 베스라온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안내된 곳은 홀 안쪽에 마련된 개인 휴게실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야기를 나누던 피스토레와 아르트엘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이 앉아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집어치우고. 두 사람 다 이리 와서 앉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피스토레가 허리를 숙이려는 두 사람을 말리면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긴 이야기를 끝낸 듯 조금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베스라온은 자리를 떠나고 레슬리와 콘라드가 머뭇거리다 자리에 앉자, 아르트엘이 방긋 웃으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셀바토르 공녀와 아이테라 경을 부른 이유는 새 가문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새 가문을 말씀입니까?”

콘라드가 놀란 듯 묻자, 피스토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3대 후작가 중 하나인 스페라도 후작가가 완전히 몰락했지. 그리고 아이테라 대공가도 민심을 잃었어.”

피스토레의 말이 맞다는 듯 셀바토르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귀족인 두 가문이 한꺼번에 몰락을 했고, 큰 공백이 생겼네.”

“그런 거라면 다른 가문들이 그 공백을 메울 겁니다. 3대 후작가에는 스페라도 후작가만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레슬리의 말에 피스토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두 가문 다 수도에 계속 머물러 있기엔 힘들지.”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그렌벤 후작가와 상인들이 모두 모인다는 교역로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모테리우스 후작가. 두 후작들은 쉽게 자신의 영토를 비울 수 없었다.

“공백은 생겼고 그 위에 올릴 가문조차 마땅하지 않아.”

심지어 이번 메데이아의 사태로 생각보다 많은 귀족이 지위와 목숨을 잃었다. 그 구멍을 메꾸기 위해 당분간 피스토레도, 콘스텐도 상당히 많이 바쁠 예정이었고, 지금도 바빴다.

“그래서 새 가문을 만들기로 공작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두 사람이 맡아 줬으면 좋겠어. 스페라도 후작가의 아이였던 공녀와 황실의 피를 이은 콘라드가 새 작위를 받는다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

“후후, 누가 그러겠어요.”

아르트엘이 입가를 가리며 맑게 웃었다. 내가 조져 버릴 건데.

그 말이 들린 것 같아 레슬리는 황후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피스토레 역시 그 말을 들었는지 잠시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다가 애써 시선을 돌렸다.

“크, 크흠! 어차피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피스토레가 먼저 손을 털고 방을 나서자, 셀바토르 공작과 아르트엘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며 그 뒤를 따랐다.

“슈야.”

둘이 남게 되자 콘라드가 웃음을 머금으며 레슬리를 불렀다.

“우리가 약혼식을 올리고 혹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약혼식. 그 이야기에 레슬리가 부끄러워 괜스레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바로 약혼식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지만, 콘라드는 데뷔탕트 후로 약혼식을 미루었다. 미룬 이유로는 현재 아이테라 가문이 위태로운 것과.

‘아직은 가족들과 같이 계시고 싶지요?’

누군가의 약혼녀라거나 무언가라는 위치 없이, 그저 온전히 한 명의 사랑받는 딸로 가족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레슬리의 마음을 이해해 준 것이었다. 약혼식을 치르게 된다면 레슬리 역시 잡다한 일이 생길 테니까.

조금 흐트러진 은발을 손으로 정리해 주며 콘라드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아니라 슈야가 가주가 되는 건 어떤가요?”

“제가요?”

그래도 되는 걸까?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자,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콘라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신전에서 자라 와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편입니다. 하지만 슈야는 다르지요. 공부도 열심히 하셨고, 배우고자 하는 의욕도 강하시죠. 거기다 응용력도 좋으니 저보다는 슈야가 가주에 적합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그리고 슈야는 셀바토르 공작님을 존경하잖아요.”

콘라드가 레슬리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그분처럼 되고 싶으시죠?”

콘라드의 물음에 레슬리는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어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는 가주가 되는 것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슈야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뒤에서 지지해 드릴게요. 어떤가요?”

손을 잡은 채 몸을 레슬리 쪽으로 기울인 콘라드가 묻자 레슬리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음, 좋아요. 그리고 이건…….”

콘라드의 뺨에 레슬리가 작게 입을 맞췄다. 아주 완벽히 잠시였지만, 콘라드는 눈을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고맙고 미안해서…….”

부끄러운 듯 레슬리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한참이나 둘은 얼굴을 서로 붉힌 채 말이 없었다.

“그! 두 번째 춤, 저랑 같이 춰 주세요!”

침묵을 먼저 깬 건 레슬리였다. 몸을 벌떡 일으킨 레슬리가 문을 박차고 나가자, 홀로 남은 콘라드는 목을 매만지며 그제야 숨을 쉬며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

콘라드에게 두 번째 춤을 부탁한 레슬리는 빠르게 달려와 셀바토르 공작을 찾았다.

“레슬리, 무슨 일이니?”

아르트엘과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직 홀에 들어가지 않은 공작의 손을 레슬리는 덥석 잡았다. 그리고 공작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저랑 첫 번째 춤을 춰 주시면 안 돼요?”

“나랑 말이니?”

“공녀, 첫 춤은 연인과 함께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놀란 듯 웃음을 머금은 공작이 다시 묻고, 아르트엘마저 부채를 팔랑였지만,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여자끼리 춤을 추면 안 된다는 법은 없고, 거기다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랑은 종종 춤을 추잖아요. 그러면 어머니랑도 춤을 출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레슬리의 말에 공작의 눈가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자. 첫 춤은 딸과 춰 볼까.”

공작의 허락에 레슬리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트엘이 부채를 접으며 눈을 빛냈다.

“부럽다! 나도 우리 아들이랑 추고 싶어!”

“찾아와.”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레슬리의 손을 잡고 홀로 들어갔다. 때마침, 악단이 첫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만약 사이가 삐지면-”

“아빠는 제가 처리할게요.”

레슬리가 공작을 보며 자신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공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아빠라.”

“전부 감사드려요. 저를 입양해 주신 것도, 키워 주신 것도.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려 했을 때 말려 주신 거랑…….”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랑해 주신 것도요. 엄마.”

아무래도 콘라드에게 미안하다고 다시 말해야 할 듯했다. 첫 번째 춤은 어머니와, 두 번째는 지금 손수건을 잡고 우는 아버지와, 세 번째는 첫 번째 오라버니와, 네 번째는 질투심 많은 둘째 오라버니와 춰야 할 듯싶었으니까.

레슬리는 행복함에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괴물 공작가의 계약 공녀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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