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후작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메데이아는 뒷문으로 빠져나오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미 신의 품으로 돌아간 남편이 취미로 만들어 메데이아에게만 알려 준 이 뒷길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메데이아의 편이었다. 그녀를 모시며 이피엘이 계속 말을 이었다.
“태후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물의 조건은 고귀한 피일 것, 그리고 오랫동안 천천히 뒤틀린 사람일 것 등 여러 조건이 있는데. 후작이…… 엘리 양보다 더 그 조건에 적합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에피알테스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봉인이 풀렸다?”
“……네, 태후 폐하.”
데비엔도 할 말이 없는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고개를 숙였다.
후작은 원치 않게 만들어진 제물이었다. 하필이면 더욱 에피알테스의 입맛에 맞았던 데다가 멍청하게도 엘리를 괴롭게 만들 생각으로 상자를 들고 도망친 바람에 두 번째 걸쇠가 더 빠르게 풀린 것이다.
정말 여러모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메데이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엘리는 쓰러지고 후작은 도망이라……. 후작마저 잡아먹혀 세 번째가 풀리면 안 돼.”
상황을 정리하듯 작게 중얼거리다 메데이아는 데비엔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현 상황은 어떻지?”
“저희 쪽 사람들과 셀바토르 기사단 그리고 렌티우스가 이끄는 성기사단이 붙었습니다.”
공작가의 기사단에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라. 생각보다 더 짜증 나는 상황에 이가 저절로 갈렸다. 자신이 보낸 이들과 에타이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그들에게 상대가 되진 않을 것이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던 성기사들은?”
“최고 사제가 손을 썼습니다. 신전에서는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배신자를 속출하는 일이었습니다.”
고작 얼마 전 배를 찔린 늙은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최고 사제는 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간신히 심어 놨던 이들이 걸러졌으며, 바로 손을 쓸 수 없으면 흩어 놓는 것으로 무력화를 시켰다. 에피알테스 사건이 일단락되면 그들마저도 목이 걸릴 것이다.
“겨우 시간 벌이용으로 데려온 건 아니었는데…….”
메데이아가 숲속에 숨겨진 통로로 들어가자마자 늘 그녀가 머물던 궁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에피알테스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피스토레가 바로 기사들을 보낸 것이었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용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토굴 안으로 들어온 이피엘은 그간 사용인들에게 정이 들었는지 힐끗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꼿꼿이 자세를 유지한 채 오로지 앞만 보았다.
“셀바토르 공작은?”
“아직 말이 들려온 건 없습니다. 지금 쓰레기장 쪽에 있는 건 공녀와 셀바토르 경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엠릭과 카크에게 말해서 어떻게든 후작을 데려오도록. 내가 아는 에피알테스를 다루는 방법은 두 번째 걸쇠가 풀렸을 때야. 세 번째까지 풀리면 나도 어찌할 수 없어.”
도대체 그놈의 스페라도 후작가가 뭐기에 이토록 에피알테스에게 적합한 제물이란 말인가. 너무 잘 맞아서 이렇게 부작용이 나타날 줄 알았다면 애당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테라 대공은 어쩌고 있지?”
“그게,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피엘의 대답에 메데이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네, 에피알테스를 찾기 위해 사람을 풀어 주고는 움직임이 없더니 사제들마저 불러들였습니다. 저는 이곳에 있어 그 일에 대해 대처를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현 상황으로는 뿌려 둔 꽃에도 연락이 없습니다.”
이피엘의 대답에 다시 메데이아는 걸음을 옮겼다.
“뻔하지, 분명 공작이 손을 쓴 거야.”
셀바토르 공작이라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데비엔과 이피엘의 말이 없어졌다.
어느새 토굴 끝이 보였다. 먼저 앞으로 나선 기사가 문을 열었다. 문을 감춰 두기 위해 쌓아 놨던 나뭇잎과 흙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기사 둘이 빠져나가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데비엔이 먼저, 그리고 중간에 메데이아, 맨 끝에 이피엘이 토굴을 빠져나왔다.
“태후 폐하, 이쪽입니다.”
이피엘이 짙게 그늘진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마차를 준비시켜 두었습니다. 일단 병력을 모아 둔 곳으로 가셔서…….”
“어디를 가시나 봅니다.”
태후 일행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던, 적막한 숲속에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사들은 재빠르게 검을 뽑아 들고 데비엔과 이피엘은 메데이아를 보호하듯 그녀 앞으로 나왔다.
“같이 차를 마실까 해서 왔는데. 여유롭게 차를 마실 상황은 아닌 듯하군요.”
녹음으로 가득한 숲속에 검은 옷을 입은 공작이 서 있었다.
메데이아는 그런 공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질적이다. 검은 머리, 늪지대가 생각나는 암녹색 눈동자, 망토마저 검은색인데 얼굴 절반을 덮은 가면만이 하얀색이라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그녀가 한 걸음 걷자, 태후의 기사들은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맨 처음 나와 주변을 파악한 기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리자, 공작이 옅게 웃었다.
“내가 네까짓 것들에게 걸릴 리가 없지.”
분명 충분히 떨어져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는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비켜라. 태후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으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기사 둘이 바로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어?”
유언치고는 허망한 말을 남긴 사람들이 쓰러졌다. 붉은색 기사단복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을 들고 공작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공작의 부츠에 밟힌 시체의 손이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셀바토르 공작! 저들은 황실 기사단! 황실 기사단을 해친 사람은 황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 지금 공작은 반역을 저지른 것이다!”
이피엘이 물러나지 않고 절박하게 외쳤다. 공작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배신한 놈들을 사람으로 쳐 줄 만큼 내가 너그럽지 못해서. 그리고 반역이라는 건 적법한 황태자를 무시하고 제 친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하고, 에피알테스를 이용하려 드는 자겠지.”
“알아챘군요, 공작.”
아렌도가 자기 아들이라는 그것까지 알아냈을 줄이야. 그렇다면 피스토레와 아르트엘도 알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피스토레가 주저하지 않고 기사들을 보낸 거였구나.’
마음 약한 황제의 역린은 가족이었고 자신은 그걸 건드렸으니. 그래도 귀족들이 날뛰는 걸 감당하지 못해 보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안일했던 모양이었다.
“예, 알아내느라고 조금 힘들었습니다. 태후 폐하.”
공작은 보란 듯 허리를 굽히며 영광이라는 듯 인사를 보냈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에 데비엔이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공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퍼엉!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불덩이가 순식간에 공작을 덮쳤다. 열기와 강력한 빛에 공작의 모습이 묻혔다.
“도망치십시오! 여기는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데비엔의 말에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마차를 숨겨 둔 쪽으로 피했다.
“이피엘, 잘 부탁합니다.”
“네, 데비엔 님.”
이피엘 역시 눈물을 삼키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데비엔은 정신을 공작에게 집중했다. 어떻게든 저 여자의 발목을 잡아야 했다. 데비엔과 함께 남은 기사 둘이 주춤거렸다.
“……!”
데비엔이 했던 것과 똑같은 불덩이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팔에 강한 화상을 입었다. 치료하기 위해 화상 입은 부위를 감싸 쥐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공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구덩이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내가 요즈음 검만 써서 다들 잊은 모양인데. 나는 마법도 쓸 수 있네, 사제.”
그렇게 말하며 공작이 손가락을 튕기자 순식간에 땅에서 튀어나온 뾰족한 얼음 가시가 데비엔의 목을 노렸다. 아슬아슬하게 가시를 피한 데비엔이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자가 치료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런, 한 번에 보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해라. 늙어서 그런가 종종 실수한단 말이지.”
“큭……. 뭐가 되었든 당신은 태후 폐하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아니지, 왜 그걸 아직도 모르지?”
공작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데비엔 고위 사제. 그걸 정하는 건 메데이아나 그대가 아니야. 바로 나지. 약하면 주제라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너무 당연한 걸 모른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공작의 말투에 데비엔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바로 손을 뻗어 두 번째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아까보다 몇 배로 더 큰 불덩이가 공작을 향해 날아왔고.
“왜 아직 안 가셨어요?”
나무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루엔티에 의해 사라졌다. 지금 뭐가 있었냐는 듯 루엔티가 제 손을 탁탁 털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방금 마차 네 대가 사라졌어요. 그중에 분명 메데이아가 타고 있을걸요.”
루엔티의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검은 검집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럼 수고하렴.”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공작은 몸을 돌려 다시 숲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를 가는 거야, 공작!”
데비엔이 다시 공격했지만, 그녀의 마법은 나오지 않았다. 가볍게 데비엔을 저지한 루엔티가 안경을 벗어 품속에 집어넣으며 데비엔을 노려보았다.
“너, 4년 전 귀족 재판 때 우리 막내를 아프게 했던 놈이지.”
데비엔의 손을 잡자마자 비명 지르며 쓰러지던 열두 살의 레슬리가 떠오르자 루엔티가 이를 갈았다.
“둘째 오라버니로서 우리 귀여운 막내의 복수를 해 주마.”
“미친놈.”
데비엔이 진심을 내뱉었다. 황가에 대한 반역이나 에피알테스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4년 전 여자애 하나를 아프게 한 걸 들먹이다니?
“우리 가문이 좀 미쳤지. 그런데 너도 레슬리가 코코아 위에 쿠키 올리는 걸 보고 이야기 좀 나누면 우리랑 똑같아질걸.”
나도 그거 보기 전까진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거든. 얼마나 귀엽다고. 알고 싶지 않은 사족까지 붙이며 루엔티가 씩 웃었다.
그게 공격의 시작이었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만들어진 날카로운 얼음 창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뭐 하는 겁니까! 마법사를 죽이세요!”
얼음 창을 막아 내며 데비엔이 기사 두 명을 재촉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둘은 이내 루엔티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공작은 무서웠지만, 아들은 상대할 만할 것이다. 특히 첫째 베스라온이 아닌,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제일 약하다던 둘째니 싸움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마법사는 무방비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
“하……. 짜증 나네.”
정확하게 기사들의 시선을 읽어 낸 루엔티가 주변에 떨어진 두꺼운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를 제대로 맞은 기사 하나가 쓰러졌다.
“야, 내가 이래 봬도 셀바토르거든? 약해도 너희한테 뒤처지진 않아. 왜 다들 마법사라 그러면 힘이 약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진심으로 짜증 나는 듯 다시 루엔티가 쓰러진 기사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다른 기사에게 던졌다.
“커헉!”
제대로 부딪쳤는지 제 동료를 받아 내지 못한 채 몇 바퀴를 구르다 바위에 들이받았다. 머리를 잘못 부딪쳤는지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방해꾼은 치웠고. 데비엔 고위 사제, 항복하지? 어차피 머리 쓰는 쪽이지 몸 쓰는 쪽은 아니잖아? 거기다 나이도 있는데, 무리하지 말라고.”
루엔티가 덧니가 보이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린것이 무서운 걸 모르기는.”
“아, 우리 저택에서 살다 보면 다들 그렇게 되더라고. 워낙 무서운 분이 계셔서.”
데비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루엔티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주로 머리를 쓰는 쪽이었지, 몸을 쓰는 쪽은 아니었다. 거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자신은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특이점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다.
그렇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이미 공작이 메데이아와 이피엘의 뒤를 쫓았지만, 루엔티라도 붙잡아 놔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잡고 시간을 끌어 메데이아가 무사히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방금 얼음 창도 순식간에 막히지 않았던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마법도 힘도 자신은 루엔티보다 아래였다.
잠시 고민하던 데비엔은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유일하게 루엔티를 뛰어넘는 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바로 4년 전, 레슬리를 재판장에서 고통으로 밀어 넣었듯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움직여 루엔티를 제압하는 것.
그건 데비엔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레슬리 때야 잠시였고 큰 고통이 필요 없었다지만, 루엔티를 제압할 정도라면 자신이 가진 힘을 전부 쏟아부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오랫동안 간신히 지켜 온 신력과 마력의 균형이 깨질지도 몰랐다.
‘……어차피 나는 죽는걸.’
데비엔은 쓰게 웃었다. 이대로 살아남는다 해도 반역자로 몰려 사형당하거나 신전의 배신자가 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겠지.
유일하게 살길은 지금 자신이 루엔티를 막아 메데이아가 무사히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에도 일이 잘 풀려 아렌도가 황제가 된다면, 그녀도 살 수 있으리라. 물론 그건 너무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는 걸 데비엔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실소로 마음을 굳힌 데비엔이 루엔티의 발밑을 무너트렸다. 루엔티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자, 그 틈을 타 데비엔이 루엔티에게 달려들었다.
“그분께 보내 줄 순 없어, 셀바토르!”
그렇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은 듯, 루엔티는 가볍게 혀를 찼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마음은 불쌍하게도 훤히 보이는 법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빤히 보여서 안쓰러울 정도네. 자, 어디 원하는 대로 해 봐.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
루엔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데비엔의 손을 낚아챘다. 무슨 꿍꿍이일까. 하지만 데비엔은 이내 의문을 머리에서 지운 채 마력과 신력을 있는 대로 움직였다. 이 정도라면 제아무리 셀바토르가의 체력일지라도 잠시나마 발을 묶어 둘 수 있을 것이다.
“아악!”
하지만 비명이 터진 건 데비엔의 입에서였다.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가 신력을, 그리고 동시에 루엔티가 제 마력을 데비엔에게 흘렸다. 그녀가 가진 힘보다 더 엄청난 양의 힘.
커다란 고통과 함께 데비엔이 간신히 유지해 오던 균형이 깨져 버렸다.
“미리 보호막을 쳤는데도 이거 아프네.”
루엔티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데비엔의 손을 놓자 그녀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바로 누군가가 데비엔을 짓눌렀다.
“데비엔 사제님.”
그녀를 포박한 콘라드가 무기질적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텅 빈 듯, 괴로운 일을 겪고 온 듯한 눈빛에 데비엔은 눈치챘다. 아이테라 대공을 막은 게 그라는 걸.
“아, 하하하. 아……버지를 팔아먹고 오셨……군요, 경. 그 기분이 어떤……가요? 저는 상상조차 큭, 못…… 하겠네요.”
고통으로 숨쉬기 힘들 정도면서도 데비엔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콘라드를 자극했다. 그녀가 아는 콘라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엄청났으니까, 조금의 틈을 보일지도 몰랐다. 보여만 준다면야 이미 죽을 몸이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러나 데비엔은 대답을 듣기는커녕 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콘라드가 말없이 더욱 강하게 신력을 흘려보냈고, 깨진 균형이 더욱 고통을 부추겼다.
“지금이라도 신께 사죄할 생각은 없습니까.”
콘라드의 물음에 데비엔은 낮게 웃었다. 고통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후회 따윈 보이지 않았다.
“나의 신은 한 분뿐이라.”
“……아쉽군요. 사제님.”
텅 빈 목소리를 끝으로 데비엔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황실 메데이아의 궁 뒤편에 있는 숲은 수도 외곽과 이어져 있었다. 메데이아는 그런 위치까지 고려해 자신의 궁을 골랐고, 그 선택은 메데이아에게 있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덜커덩! 숲을 빠져나온 마차 네 대가 수도 외곽을 향해 미친 듯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차를 피하느라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지만, 마차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차에 붙어 있는 호위들은 일부러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며 달렸는데, 공작과 셀바토르 기사들의 주의를 돌려 시간을 벌려는 속셈처럼 보였다.
“공작님! 마차들이 흩어집니다!”
셀바토르 공작을 따라온 하르트가 다급하게 외치자, 공작이 흩어지는 네 대의 마차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특색이 없는 여러 대의 마차 중 한 대에 메데이아가 타고 있을 것이다.
“저거다.”
그중 하나를 고른 공작이 주저 없이 말을 몰았다. 하르트와 몇 명의 셀바토르 기사가 그 뒤를 따르자 그녀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하르트는 나를 따라와. 반트, 에젠, 바로크, 레인델은 흩어진 마차를 뒤쫓도록. 피해가 생겨서는 안 되니까. 처리하고 나면 바로 쫓아와.”
“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넷이 바로 말 머리를 돌려 사라진 마차들을 쫓기 시작했다. 하르트는 잠시 흩어지는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공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공작님! 저 마차에 태후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차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차에 아무런 특색도 없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봤지만, 마부 역시 같은 복장에 큰 모자로 얼굴을 가려 확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체격까지 비슷했다.
“감.”
“……네?”
하르트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공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마차 바퀴.”
“바퀴 말입니까?”
“그래, 자세히 보면 저 마차 바퀴만 달라. 조금 더 신경을 쓴 티가 나.”
공작의 말에 하르트는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퀴를 노려봐도 알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 바퀴를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메데이아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겠지. 하지만 아랫사람들은 다르니까. 조금이라도 메데이아가 더 멀리 도망칠 수 있도록 직전에 좀 더 신경을 썼을 거다.”
메데이아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했고, 그건 그녀의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그녀를 찾는 단서가 되었다.
“가자, 살테 평원에서 잡도록 하지. 거기라면 민가의 피해는 없을 거다.”
“네, 공작님.”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말을 몰아 먼저 앞서 나갔다. 하르트가 그 뒤를 필사적으로 쫓았다.
어지러운 수도 외곽을 지나 마차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간혹 감시탑이나 커다란 나무들에 잠시 마차가 가려지긴 했지만, 마차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감시탑에 잠시 마차가 가려졌을 때, 갑자기 호위에 붙어 있던 이들이 말머리를 돌려 공작과 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들의 왕을 위하여!”
“아렌도 황제 폐하 만세!”
이뤄지지 않을 말, 그게 세 사람의 유언이 되었다.
무서운 속도로 공작과 하르트에게 달려들던 두 사람의 검을 가볍게 피한 공작과 하르트는 그대로 목을 내리쳤다. 마지막 한 사람은 두 사람의 검을 동시에 받아 내야 했고, 세 사람이 달려든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괜한 낭비를.”
하르트는 쓰러진 세 사람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상당한 실력자가 분명했다. 어디서는 쉽게 지지 않는 사람들이겠지.
저런 기사를 배출해 내려면 꽤 큰돈이 들었을 텐데. 그것도 한 명도 아니라 세 명이었다. 평범한 가족이 몇 년은 먹고살아도 될 돈이 들어갔겠지? 나름 기사단장이다 보니 자연스레 정확한 금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르트.”
공작이 그를 부르자, 대진 운이 없었던 세 사람의 명복을 빌던 하르트가 말을 몰았다. 다시 추격전이 이어졌다.
마차에는 속도를 빨리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공작과 하르트의 말로도 쉽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공작과 하르트는 서쪽에 있는 살테 숲이 나오기 직전 펼쳐진 평원에서 이내 마차를 따라잡았다. 공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을 빼 들더니 가볍게 휘둘렀다.
콰앙! 굉음이 울려 퍼지며 불덩이를 맞은 마차가 크게 휘청거렸다. 마차는 휘청거리기만 할 뿐 넘어지지 않았고, 금방 다시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흠, 역시 마법은 대비해 놨군. 보호 마법인가? 레슬리라도 있으면 어둠으로 먹어 치우게 할 텐데.”
다른 수가 있지. 작게 중얼거린 공작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 마차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땅을 일으켜 마차의 절반 정도 되는 벽을 만들어 냈고, 속력을 못 이긴 마차는 흙벽에 부딪쳤다.
“꺄악!”
흙벽은 무너졌지만 제 할 일을 다 했다. 앞으로 기울어진 마차는 그대로 전복되어 뒤집혔다. 마부석에 있던 남자는 그대로 튕겨 나갔고, 마차 안에서는 여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작과 하르트는 마차 근처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상당히 긴 거리를 뒤집힌 채 이동한 마차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부는 튕겨 나갔을 때 목이 꺾여 숨을 거둔 듯 보였다.
검을 든 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마차 쪽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안에서 마차 문을 잠갔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지만, 그건 아주 자그마한 반항일 뿐이었다. 검으로 아예 문을 뜯어낸 하르트가 안쪽에 있는 여자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망토를 뒤집어쓴 여자는 밖으로 나오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다 이내 흙길 위에 주저앉았다.
“이런.”
여자의 망토를 벗긴 하르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메데이아가 아닌 이피엘이었다. 이피엘이 메데이아의 옷과 망토를 입고 하늘색 가발을 쓴 채 하르트와 공작을 노려보았다.
“아까 호위들이 달려들 때 바꿔치기한 건가?”
공작이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이피엘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죽 웃음을 머금었다.
“무슨 상관이죠? 이미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가셨을 텐데. 거기가 어딘지 찾기나 하겠어요? 태후 폐하께서만 안전하시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이미 자신들이 이겼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알 것 같은데.”
그러나 공작의 말 한마디에 승리감에 차 있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피엘은 커다란 눈으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말에 오르며 공작은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저 멀리서 미끼였던 마차를 처리한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오래 보고 있었던 만큼, 나도 메데이아를 오래 보고 있었거든.”
반트에게 이피엘을 넘겨. 그녀는 중요한 역할이 주어질 테니까. 그렇게 덧붙이며 공작은 살텐의 숲을 바라보았다. 여러 갈림길을 가진 숲.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메데이아가 간 길을 정확히 집어냈다.
“가자, 크렌베이츠 성으로.”
메데이아가 늘 보고 있던 풍경화에 그려진 그 성이었다.
***
르카디우스 제국의 수도는 다른 나라에 비교해 상당히 큰 편이었다. 원래 수도였던 안쪽과 제국이 넓어지면서 사람들이 모여 생긴 밖이 있었다. 그 후로 성벽이 세워지며 수도는 제한되었지만, 자연스레 경계가 나뉘게 되었다.
경계 안쪽은 황궁과 귀족들이 머무는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저택들은 조금 더 깔끔했고, 돌로 깔린 길이 있었으며,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자리했다.
경계의 밖에는 평민가가 자리했다. 평민가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살았고, 번화가는 두 거리에 걸쳐서 길게 형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민가 가장 바깥쪽, 성벽 부근에는 떠돌이와 가난한 자들, 범죄자들이 모여 빈민가를 만들어 냈다.
레슬리가 일전에 신전으로 가다 이피엘을 보고 빠진 곳도 빈민가였다. 북쪽 성벽 밑에 자리한 쓰레기장 옆의 빈민가. 그 넓은 곳을 레슬리는 계속해서 뛰었다.
“거기 서!”
어지럽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어지러웠다. 그간 열심히 연무장을 돌아서 이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벌써 지쳐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앞서 달리는 후작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잘 달리던 사람이었던가.
‘자기 목숨이 달려 있으니 살고 보려는 거겠지!’
레슬리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까 쓰레기장에서 두 개의 기사단과 에타이 그리고 태후의 사람들이 붙으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후작이 아직도 안고 있는 상자에서 ‘무언가’가 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쓰레기장에 있던 사람들 중 스페라도 후작 부인과 엘리를 제외한 나머지의 얼굴에서는 열꽃이 피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수도에서 병이 돈다면 가장 먼저 병이 퍼지는 곳이 이곳, 빈민가가 아니던가.
레슬리는 이를 갈았다. 후작은 엘리가 쓰러지고 후작 부인의 얼굴에 뭔가가 피어난 걸 봤음에도 상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검들이 부딪쳐 목숨이 위태로운 그 소란 속에서 잽싸게 상자를 들고 도망쳤다.
그렇겠지. 저게 없다면 후작은 그 무엇도 거래할 것이 없어진다. 스페라도 가문은 무너졌으며, 재산은 사라졌고, 엘리는 저렇게 돼 버렸다. 저게 마지막 거래 물품이었다.
후작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레슬리가 가장 먼저 반응해 후작을 쫓고, 뒤이어 셀바토르 기사 몇 명이 붙었으나, 에타이와 태후가 보낸 사람들의 방해를 받은 듯 보였다. 실제로 지금 후작을 쫓고 있는 이는 레슬리뿐이었다.
‘사람이 없는 쪽으로 몰아야 해!’
레슬리는 낡은 판잣집 사이로 사라지려는 후작의 길목을 어둠으로 막았다. 후작이 얼굴을 구기더니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몇 번을 막고 나니 레슬리의 계획대로 되었다. 후작 역시 자신이 토끼 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후반에는 걸음이 느려졌다.
“히익, 힉…….”
성벽으로 몰린 후작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성벽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은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지금 레슬리에게 겁을 먹었다.
“다가오지 마라!”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레슬리는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천천히 후작에게 다가갔다.
“너, 너는 내 딸인데! 자식은 응당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레슬리는 이를 갈았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숨을 거두었고 엘리는 에피알테스의 제물이 되어 쓰러졌다. 소중한 가족이라고 했으면서 스페라도 후작에게는 그 둘보다는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에피알테스가 더 소중해 보였다.
그래, 이런 인간이었지. 그 상황에서도 에피알테스를 잽싸게 챙겨 도망치는.
“당신의 사랑은 죽음이야? 아내도, 딸도 당신의 욕구를 위해 죽으면 돼? 더럽고 역겨워.”
어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봐주지 않을 것이다.
후작은 에피알테스를 끌어안고 겁에 질린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목소리에 눈물을 떨구고 손짓 한 번에 바닥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제 옷깃을 잡는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그리고 자신은 더 그 아이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너도 커 보면 알 거다. 어려서 아직 모르겠지만 커서 어른이 되면 내 입장을 이해할 거라고! 전부 우리 가문을 위해서였다. 영원히 빛날 우리 스페라도 가문을 위해서!”
멈춰 달라는 듯 한쪽 손을 뻗은 상태로 후작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다른 한 손은 빠르게 제 품을 뒤졌다.
“어른은 응당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어른은 응당 살려 달라는 아이의 목소리를 무시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하셨어!”
남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도망치자, 레슬리는 더 참지 않았다. 바로 어둠으로 후작을 덮쳤다.
“크아악!”
후작이 뻗고 있던 팔 하나가 그대로 어둠에 먹혔다. 후작은 비명을 내질렀고 품에서 꺼낸 단검으로 제 팔을 잘라 내었다. 비명과 함께 에피알테스가 땅을 굴렀다.
“히, 히익……. 히이이. 히힛…….”
피가 사방으로 퍼지고, 고통에 이성을 놓은 것인지 후작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아까의 단검을 내던졌다.
어둠을 피했으니 저런 건 이제 필요 없었다. 자신은 더 강력한 게 있으니까.
“어딜 도망가려……!”
레슬리는 순식간에 자신에게 달려오는 후작을 보고 당황했다. 팔을 끊어 내는 거야 놀랍긴 했으나 당황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는 삶에 대한 집착이 무서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게 달려올 줄 몰랐다.
거리를 좁힌 후작이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검은 사슬, 엠로아에게 주고 남은 사슬이 날아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가린 팔목에 감겼다. 바로 그 사슬을 털어 냈으나 어둠은 크게 출렁거렸고, 그사이 후작은 마지막 무기를 꺼내 들었다.
“죽어라, 이 괴물!”
붉은 마법석이 빛났고, 거대한 폭발이 레슬리를 휘감았다.
***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자신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레슬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였더라.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바라 왔던 것이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걸 잊어 먹다니.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될 걸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자신이 바라던 일과 함께 무언가 소중한 게 사라져 버린 기분. 따스한 것,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충족받는 그 느낌을 뭐라고 하더라.
아무리 떠올리려고 노력해 봐도 헛수고였다. 기억은 물론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울지 마.」
그때 누군가가 레슬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따스한 체온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안으면 분명 폭신할 토끼 인형이었다.
「오지 말라니까 금방 왔네.」
그랬던가? 레슬리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토끼 인형을 바라보았다.
「이왕 온 김에 인사하고 가. 다들 너에게 할 말이 있대.」
“나……에게?”
「그래, 가자.」
토끼 인형은 인형답지 않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레슬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몸을 일으킨 레슬리는 비틀거리며 인형을 따라갔다. 아프다. 다리가 너무도 아팠다.
“자, 잠깐만. 나 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다쳤어?」
“으, 응. 엘리 언니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서 회초리를 맞았거든…….”
아팠지. 무슨 일에 화가 나 있던 건지는 몰라도 후작 부인은 가혹하게 레슬리를 매질했다. 종아리에 핏방울이 맺히고 나서야, 그제야 화가 풀렸다는 듯 매질을 그만두었다.
그 뒤로 약도 바르지 못한 채 끙끙 앓았었다. 르아는 레슬리가 바보라서 받은 벌이니 알아서 나으라고 했던가.
「정말로 다쳤어?」
토끼 인형은 걸음을 멈춘 채,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목에 매고 있는 리본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다쳤어. 나, 나는 거짓말은 안 해. 거짓말하면 또 거울이 가득한 방으로 갈 테니까. 나는 절대…….”
레슬리는 다시 눈물을 떨어트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면 늘 거울이 가득한 방으로 끌려간다. 어쩐지 거기는 오싹해 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웃어 주면 그나마 있을 만했으나, 요즈음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레슬리, 네 다리를 한번 봐 봐.」
토끼 인형의 말에 레슬리는 슬쩍 낡은 치마를 들어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어?”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다리였다. 거기다 먹은 것도 없었는데 살이 붙어 보기 좋아 보였다.
「괜찮지? 가자!」
토끼 인형은 레슬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주변은 사방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으나 어쩐지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주 온 듯 익숙한 곳이었다.
「다 와 가!」
토끼 인형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레슬리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리고 어린 목소리들. 멀지 않은 곳에 많은 아이가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레슬리의 예상이 맞았다. 작은 아이 조금 큰 아이……. 다양한 나이 대의 아이들이 모여 무언가를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공통점이란 성인에 가까워 보이는 아이는 없다는 것이며 모두 은발이라는 점이었다.
「어?」
「네가 여기 오면 어떻게 해.」
레슬리를 발견한 아이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레슬리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몸을 웅크리자, 토끼 인형이 한숨을 쉬더니 작은 팔을 휘둘렀다.
「이 아이는 잠시 온 거야, 잠시!」
「다행이다!」
인형의 말에 아이들이 전부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있지.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레슬리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솜사탕은 무슨 맛이야?」
「맞아, 나도 그거 궁금했어!」
아이에 물음에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솜사탕은…… 달콤해. 사탕처럼 달콤한데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아 없어져. 코코아에 찍어 먹으면 절대 안 돼. 순식간에 녹거든.”
레슬리가 더듬더듬 대답하자, 아이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짝거림이 과도해 곧 눈에서 떨어질 듯 보였다.
「사탕! 난 먹어 본 적 있어! 진짜 맛있는 거야!」
「부럽다. 난 그거 먹어 본 적 없는데.」
「난 형이 먹다 던진 거 주워 먹어 본 적 있다.」
「난 과자 먹어 본 적 있는데. 버터가 들어간 거랬어.」
「그런데 코코아는 뭐야?」
한 아이의 자랑에서 다른 아이의 자랑으로, 하나의 물음에서 다른 물음으로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참 동안 레슬리는 아이들의 자랑과 부러움, 물음을 들으며 왜 자신이 솜사탕이란 것에 대해 알고 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솜사탕. 분홍색이고, 몽실몽실해 보이고, 머리카락은 아니고……. 어디서 언제 자신이 그렇게 신기한 걸 먹어 봤더라? 답을 떠올리기도 전에 다른 질문이 레슬리에게 들어왔다.
「있지. 부모님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아. 레슬리의 눈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커다래졌다. 다른 아이가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나를 때리지 않는 오라버니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도 말해 주면 안 돼?」
「나는 형인데. 난 남자인걸.」
「조용히 해야 답을 해 주지. 그리고 형님이나 오라버니나 비슷한 거야.」
작은 아이를 레슬리 또래의 소년이 토닥거렸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이끄는 대장인 듯했다. 그 소년의 말에 모두 입을 멈췄으니까.
소년의 눈이 레슬리에게로 향했다. 왼쪽 눈에 있는 눈물점 때문일까,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눈물 대신 자상함과 인내심을 품고 있었다.
「중요한 건 가족에게 사랑받는다는 거니까.」
소년의 말에 레슬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기억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자신은 이 답을 아이들에게 꼭 해 줘야 했다.
“사……랑받는다는 건…….”
눈물이 흐르고, 자연스레 목이 막혔다.
“가슴이 따스하고……. 흑. 가만히 있어도 막 웃음이 나서…….”
그런데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었구나. 너희들이었어. 나를 불 속에서 구해 주고, 자신들이 모아 온 힘을 주고, 여태껏 어둠 속에서 어둠이를 움직여 줬던 아이들이.
“정말로, 행복한 느낌이야.”
레슬리는 굵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환하게 웃었다.
어설픈 답이었다. 행복도 사랑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이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그럼 지금 행복해?」
부모에 대한 사랑을 물었던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에게 안겼다. 레슬리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받았어야 하는 건데…….”
사실 이 중에 있는 그 누구도 제물 따위가 되어서는 안 됐다. 사랑받고 평범하게 커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다.
「울지 마. 우리는 네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레슬리의 눈물을 닦아 주며 아이가 웃었다. 어느새 레슬리의 옆에 온 토끼 인형도 눈물을 닦아 주려 팔을 들고 폴짝폴짝 뛰었다. 레슬리는 무언가를 다짐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복수해 줄게! 후작을 죽이고, 스페라도 가문을 무너트릴 거야! 그러면 너희도 좀 편안해질 게 분명해.”
같은 꼴로 만들어 주겠어. 엘리도 후작 부인도 후작도! 전부 불구덩이 넣어서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겪게 만들 거야. 레슬리는 이를 갈았다.
「레슬리.」
작은 손이 진정하라는 듯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괜찮아.」
대장 같아 보이는 소년은 옅게 웃었다.
「우리는 네가 복수를 하라고 너를 도와준 게 아니야. 주변 사람들도 다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불씨를 스스로 삼키고 있으면 안 돼. 그건 속부터 너를 태울걸.」
소년의 미소는 인자해 보였다. 그는 언제부터 이 어둠 속에 있었을까?
「그러니 그는 신경 쓰지 마.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집중해. 알겠지? 나중에 우리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더 정확한 답을 해 줘.」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떨어졌다. 소년의 얼굴을 보며 레슬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은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행복해지는 데 집중할게. 그건 울먹임 속에 묻혔다.
「그래. 잘했어, 레슬리.」
소년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이젠 우리는 가야 해. 그래서 말인데…… 어둠이는 우리가 가져가도 될까?」
“어둠이를?”
「응. 우리는 이제 떠나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여기에 있어서 밝은 곳으로 안내해 줄 길잡이가 필요해. 그냥 가면 다들 길을 잃어 미아가 되고 말 거야.」
레슬리는 그 물음에 자신의 옆에 있는 토끼 인형을 바라보았다.
첫 선물, 첫 인형. 셀바토르 공작저에 갓 도착했을 때 베스라온에게서 선물 받은 인형은 얼마나 소중했던가.
선물 받고 나서는 잠잘 때도 식사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가지고 다녔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주어진 인형은 너무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
헤어져야 하나? 싫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레슬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어린아이 같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으로 하고 싶었다. 어둠이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인형이었으니까, 인형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으니까.
레슬리는 어둠이의 라일락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이었던가?
그렇지만, 그렇지만……. 계속 생각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과, 어린아이 같아도 괜찮으니 가지 말라 잡고 싶은 마음이 뒤엉켰다.
쉽게 보내 주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 레슬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레슬리.」
긴 속눈썹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니, 어둠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어둠이는 레슬리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인형일 뿐인데 어쩐지 온기가 느껴졌다.
그렇구나. 너는 더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는 게 맞겠구나.
“응……. 나는 이제 괜……찮을 거야.”
입술을 꽉 문 채, 레슬리는 눈물을 뚝뚝 떨궜다. 고개가 간신히 움직였다. 그러고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꽉 누른 채 간신히, 웃어 보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어둠아.”
레슬리는 그렇게 말하며 어둠이를 마지막으로 꼭 끌어안았다. 어둠이 역시 짧은 팔로 레슬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소년의 말대로라면 바로 떠나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어둠이와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았다.
“잘 가, 어둠아.”
「잘 있어, 레슬리.」
인사를 마친 어둠이가 폴짝 레슬리의 품에서 내려오더니 아이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자, 다들 갈 준비를 하자! 나 어둠이가 이끌 거야!」
그 모습이 재밌는지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어둠이 주변에 앉아 어둠이를 구경했다.
「저 아이들에게도 너에게도 미안한 게 많았는데……. 드디어 갈 수 있게 됐네.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소년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거야. 그러니 우리 잘 버텨 보자.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우리가 잘 버텨 보자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물어보기도 전에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소년도 어둠이 근처로 걸어갔다.
레슬리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묘하게 소년의 인상이, 그리고 마지막 말이 레슬리의 기억에 남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스페라도 후작이 자신의 팔까지 포기해 가며 레슬리에게 다가왔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어진 커다란 폭발.
아마도 마법석이었겠지. 마력도 없는 후작이 폭발을 일으킨다면 그것뿐이니까.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피하거나 어둠을 움직일 겨를 따윈 없었다.
“아…….”
그리고 지금 레슬리의 눈앞에서, 검은 토끼 인형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있었다. 어둠이었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어둠이가 레슬리의 앞에서 폭발을 막고 흩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곱게 묶여 있던 라일락색 리본이 땅으로 떨어졌다.
“뭐, 뭐야. 이건!”
당황한 후작이 아픔도 잊고 고함을 질렀다. 폭발은, 겨우 인형 하나 따위가 막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폭발은 인형에게 막혔고, 레슬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다.
“이익……. 이이익!”
스페라도 후작은 팔을 뻗어 레슬리의 목을 쥐려고 했다. 그가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없는데, 이성을 상실한 탓에 그런 계산조차 되지 않는 듯했다.
“아악!”
하지만 하나 남은 팔이 레슬리의 목에 닿기도 전에 후작은 바닥을 굴렀다.
그의 팔에는 단검이 하나 꽂혀 있었는데, 단검에는 셀바토르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레슬리, 뒤로 물러나 있으렴.”
최대한 상냥하지만, 그 뒤에 깔린 난폭함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스물다섯 살의 귀족 청년이 열두 살의 레슬리에게 청혼서를 보냈을 때 봤던 커다란 도끼에는 이미 피가 흠뻑 묻어 있었다.
사이레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져 길을 이었다.
“이 아버지는 쓰레기와 도끼로 이야길 좀 해야겠다.”
사이레인이 이제야 준비운동이 끝났다는 듯 스페라도 후작을 노려보며 웃었고 바로 공격이 시작됐다. 커다란 도끼가 후작의 목을 노렸다. 후작은 이제 상자고 뭐고 내동댕이친 채 사이레인의 도끼를 피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자, 잠깐! 셀바……토르! 나와 이야기를!”
“이야기는 무슨!”
가지 않겠다는 레슬리를 기어코 보낸 사이레인은 무섭게 도끼를 내리찍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애꿎은 나무 하나가 그대로 토막 났다.
“진정 나를 죽일 셈인가!”
스페라도 후작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아이의 친부야. 레슬리 스페라도의 친부라고! 내가 없으면 레슬리는 완벽히 네 딸이 될 수…….”
“아직도 개소리를! 우리 딸은 네놈 같은 부모를 둔 적이 없다, 스페라도!”
분노로 눈이 붉어진 사이레인은 도끼를 잽싸게 피한 후작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후작이 흙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다.
“끄……으으으.”
후작은 축축해진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소맷자락에 피가 붉게 배어 나왔다. 사이레인의 주먹에 코뼈가 무너지고 이가 빠지면서 피가 흐른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 상자 덕분인가?’
후작은 사이레인 뒤쪽에 있는 낡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저걸 들고 도망친 이후로는 뭔가 기분이 묘했다. 마치 철없었던 시절, 기분을 좋게 해 준다는 약을 먹은 것처럼.
‘예전에 황실이 가지고 있는 보물 중에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 주는 보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보물을 마지막 시험으로 태후가 엘리에게 맡겨 놨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후작은 빠진 이를 드러내며 히히 웃었다.
실제로는 엘리 대신 제물이 되어 버린 후작을 천천히 집어삼키기 위해 에피알테스의 힘이 작용한 것이지만, 후작은 이 기분이 무엇 때문에 파생이 된 것이든 전혀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4년 전부터 미쳐 있었으니까.
아니, 태어났을 때부터 미쳐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는 광기가 흘렀으니까. 자신의 아이들을 차례로 불 속에 집어넣어 권력을 유지하던 이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거기에 에피알테스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더해졌을 뿐.
“허, 웃어?”
하지만 그의 웃음은 사이레인을 도발했다. 비적비적 몸을 일으키려는 후작의 다리를, 사이레인이 도끼 끝으로 무섭게 내리쳤다.
“……!”
고통은 없었으나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다리가 반대 방향으로 꺾였으니까.
후작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때마다 다친 다리가 괴상한 모습으로 뒤틀렸다.
“내…… 내 다리가 어떻게 된 거야.”
후작은 제 다리를 잡고 덜덜 떨었다.
“너는 쉽게 죽이지 않을 테니 기대해라, 후작.”
못해도 레슬리가 아파서 울었던 나날만큼 후작도 아프게 해 줘야 공평한 게 아닌가.
흙바닥 위를 벌레처럼 기고 있는 후작에게 다시 사이레인이 다가가 그의 멱살을 틀어잡고는 한 손으로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멱살을 잡힌 채 공중에 두 다리가 떠 버린 후작은 괴로운 듯 컥컥 소리를 내었다.
잠시 공중에서 두 아버지의 시선이 마주쳤다.
죽는다. 후작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4년 전에도 느껴 본 적 없던 공포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재판이니, 귀족의 명예니 그런 걸 따지지 않고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릴 것이다. 천하디천한 용병 출신이 아니던가.
자신은 살아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다른 이가 다 죽어도 자신만은 살아서 모든 걸 누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후작이 눈알을 굴리자, 눈치를 챈 사이레인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후작이 조금 더 빨랐다. 이를 드러낸 후작은 사이레인의 팔목을 물어뜯었다.
“……이 미친놈이!”
고통을 느끼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이레인이 후작을 놓치자마자 후작은 웃으면서 침을 흘렸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아…….”
마치 광견병에 걸린 개 같군. 그렇게 생각하며 사이레인은 자신의 팔을 매만졌다. 얼마나 세게 물어뜯었는지, 피가 흘러 옷을 적시고 땅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원래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더더욱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사이레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후작은 상자만을 바라보았다. 저거를 가져가야 하는데. 아니, 지금은 먼저 살아남아야 하는데.
정신이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했다. 후작의 귀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들이 한꺼번에 떠드는 목소리는 작아서 그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후작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레슬리 고것이 영악하게도 사람이 없는 쪽으로 자신을 몰았다.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텐데. 있으면 좋겠다. 있어라.
‘있다.’
골목 사이 작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큰 소리가 나자 부모 몰래 구경을 왔지만, 잔혹한 장면에 얼어붙은 듯한 아이. 그 아이를 후작과 사이레인이 동시에 발견했다.
“엄마아!”
한 다리로 달린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후작은 빠르게 움직였다. 한쪽 팔과 한 다리를 움직여 마치 거미처럼 달려드는 후작을 보고 아이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거나 잘라!”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후작은 아이를 집어 던졌다. 사이레인이 도끼를 뒤로하고 아이를 받아 내는 그 순간, 그대로 후작은 사라졌다.
“쫓아가겠습니다.”
셀바토르 기사가 외치자, 사이레인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어디로 갔을지 아니까. 어차피 토끼몰이일 뿐이지.”
토끼몰이? 기사가 반문하기도 전에, 사이레인은 자신의 품 안에서 놀라 굳어 버린 아이를 조심스레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아이가 기사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그는 제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눈을 찡그렸다.
“중요한 건 저건데.”
흙바닥을 굴러다니는 에피알테스.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서 계속 야생의 감이 경보를 보내 주고 있었다. 저것은 위험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 상자를 마주했어도 감은 경보를 보냈겠지.
잠시 고민하던 사이레인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 늦더라도 사제를 불러야겠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사이레인 님.”
눈물로 젖은 얼굴, 피가 묻어 붉게 변한 성기사복을 입은 콘라드가 사이레인에게 다가갔다. 늘 깊은 신앙심과 아버지를 향한 존경으로 반짝거리던 눈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곁에 있던 루엔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볼일을 보시길. 그렇게 나지막이 말하며 콘라드는 에피알테스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집어도 되는 건가, 아이테라 경?”
사이레인의 물음에 콘라드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제 망토를 벗어 에피알테스를 감싸 안았다.
“누군가는 옮겨야 하는 거니까요. 신력과 체력이 뛰어난 제가 가장 적당합니다. 그런데 토끼몰이라니. 어떻게 하실 셈입니까?”
애써 말을 돌리는 콘라드를 바라보며 사이레인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불을 지를 거다.”
스페라도 후작가가 불타고 있었다.
거대한 저택이 불길에 휩싸이고 무너져 가는 모습을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덜덜 떨며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곰 같은 사내가 모든 사람들을 정원으로 내몰았고, 마지막 한 사람이 나오는 순간 불길이 일었다.
“잘 탄다!”
사이레인은 거대한 불길에 먹히는 스페라도 후작가를 보며 씩 웃었다. 미리 셀바토르 기사들 몇과 사용인들로 저택에 기름과 석탄, 그리고 마른 나무들을 가득 쌓아 둔 보람이 있었다.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쓸데없이 큰 정원이 있어서 다른 곳까지 피해를 줄 것 같지 않았다. 불똥이 조금 튀고 있었지만, 저 정도야 뭐.
사이레인은 활활 타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 크게 웃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불타는 저택을 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 안에 사람은 없다지만, 보기 끔찍한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막 여행에서 돌아온 후작저의 집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 저택이 어떤 저택이던가.
“스페라도 후작가는 1천 년 전, 초대 르카디우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건물입니다! 이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도 몇 안 되게 남아 있는 고대 벤테이움 양식을 그대로 유지한 저택, 말 그대로 예술 작품인 저택이란 말입니다!”
“알아. 셀바토르 공작저도 그러니까.”
사이레인은 셀바토르 기사 한 명이 건네준 수통의 물을 벌컥 들이켜며 대답했다.
“아시면서도 그러는 거라니! 우리 스페라도 후작가와 척을 지는 거로 알겠습니다!”
집사는 몸을 떨었다. 감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셀바토르건 뭐건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지금 눈앞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이 남자는 귀족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운 좋게 아내를 잘 만나 성과 축복의 이름을 받은 남자. 그런 인간이 이 아름다운 저택을 부서트리려고 하다니.
집사는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 마디에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좋지.”
“네?”
“그거 마음에 든단 말이다.”
사이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통을 주인에게 넘기더니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쿵! 사이레인의 옆에 있던 동상이 반 토막이 나 바닥을 굴렀다.
스페라도 후작 동상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자, 다들 기겁한 얼굴로 바닥을 구르는 후작의 목을 바라보았다.
“이 저택에 기사 놈들은 없나!”
사이레인이 크게 외쳤다.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이게 인간이 낼 수 있는 목소리란 말인가.
셀바토르 기사들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귀를 막고 있었다.
“내가 너희 주인의 동상을 부수고 저택을 망가트리는데 나서는 놈이 아무도 없어!”
까득, 이를 간 사이레인이 저택이 울릴 정도로 울부짖었다.
“나와라, 트라 베쉬 스페라도! 내 딸의 원수를 갚겠다!”
그 고함에 집사와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덜덜 떨었다.
스페라도가에 기사가 어디겠는가. 4년 동안 주인은 사라져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스페라도 기사단복을 입고 거리만 걸어도 시비를 거는 괴상한 거지들이 많았다. 이상할 정도로 강한 거지들에게 연패를 당한 스페라도 기사들은 좌절감에 빠져 스스로 기사단복을 벗어던지기도 했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사이레인이 불타고 있는 저택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용인들을 훑었다. 어차피 스페라도 후작, 그 쥐새끼는 이리 올 테지.
“오늘 나는 우리 딸에게 상처를 입혔던 걸 전부 부숴 버리고 갈 거다. 그게 아버지인 내가 할 일이다. 반박하고 싶은 자는 지금 나와라.”
이렇게 목을 잘라 줄 테니.
후작의 조각상 목을 발로 차며 사이레인이 읊조리자, 모두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입을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친 사이레인은 정원 한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다시 물을 들이켰다.
수통을 건네준 기사가 머뭇거리면서 사이레인에게 말을 걸었다.
“사이레인 님. 정말 저택을 태워도 괜찮을까요. 방화는 중범죄 아닙니까.”
“쓰레기를 조금 거하게 태우는데 문제가 될 리가.”
사이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저택이라고? 아니, 그의 눈에는 커다란 쓰레기를 쌓아 올린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늘 다락방에서 지내서요. 이렇게 넓은 방은 처음이에요.’
청소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아 더럽고, 냄새나는 그곳에서 지냈다고 했었지.
사이레인은 오늘 스페라도 후작의 목을 반드시 치고 끔찍한 기억이 남아 있는 저택까지 깔끔히 지워 줄 참이었다. 아예 스페라도 후작가라는 존재를 귀족 책과 지도에서 지우고 말리라.
“거기다 후작 놈, 분명 이리로 올 거야.”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레슬리를 뒤로 물리고 싸웠던 그때, 사이레인은 후작의 다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걸로 도망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후작은 남은 한쪽 팔과 다리로 누구보다도 빠르게 도망쳤다. 고통 따위는 모르는 듯한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고유 능력이 도주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후작이 말입니까?”
“그래, 그런 놈들은 제 목숨이 중요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게 하나 있다.”
입으로는 가족과 사랑이 중요하다 외쳐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 풋내 나는 용병 시절 때부터 그런 인간을 얼마나 봐 왔던가.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사이레인은 오히려 귀족들의 민낯을 잘 알았다. 밑에서 보는 것과 평등한 위치에서 보는 건 전혀 다르니까.
“바로 더러운 우월감이지.”
그리고 오랫동안 후작이 자부심으로 여겨 왔던 우월감과 모든 것들이 오늘 후작을 죽이는 열쇠가 될 것이다.
스페라도 후작 같은 인간에게 모든 걸 빼앗고 그냥 살라고 몸뚱이만 던져 준다면 그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었다. 후작 같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게 있었다.
바로 나는 저 아랫것들이랑은 다르다는 그 감각. 명예, 영광, 우월감……. 다양하게 불리는 그 감각, 거기에 중독된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악했다. 그리고 그런 인간 중 하나가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후작은 이미 대부분을 잃었다. 재산, 권력, 명예. 이제 그 인간에게 남은 건 허울뿐인 명성과 저 저택뿐이야.”
방금 집사가 말한 대로 어쩌고저쩌고 양식으로 만들고 초대 황제가 내려 줬다는 저 낡은 저택이 후작의 최후 보루였다. 게다가 여보야에게 듣기로는 후작은 저택에 굉장한 자부심을 보였다고 했다. 그런 저택을 태운다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게 분명했다. 정상인은 이해 못 할 괴상한 사고를 하는 인간이니까.
“그렇군요.”
기사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사이레인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거기다 우리 여보야가 있는데 무슨 문제야!”
황제인 피스토레와 친구라는 걸 들먹여도 되었지만, 그에겐 친구보다는 아내님이었다.
우리 멋진 여보야의 말 한마디에 안 되던 일이 있던가? 절대 없었다. 황제조차 한발 접고 들어가는 게 그의 아내님이 아니던가.
‘내가 결혼은 잘했지.’
사이레인은 턱을 치켜들고 우쭐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셀바토르 기사는 익숙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러던 그녀의 눈이 어딘가에 닿았다.
“사이레인 님.”
기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사이레인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쫓아가자, 풀숲에서 몸을 반쯤 내민 스페라도 후작이 있었다. 경악으로 물든 얼굴, 떨리는 몸. 후작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아니리라. 지금 그는 그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고, 거기서 오는 정신적 괴로움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아, 안 돼.”
아무리 정원 구석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사이레인과 셀바토르 기사들이 눈에 안 띌 리가 없건만, 지금 후작의 눈에는 불타는 저택만이 보이는 듯했다.
“이게 어떤 저택인데……! 우리 영광스러운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인데!”
거기다 자신이 이 저택을 우아하게 꾸미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후작은 덜덜 떨면서 한 발 한 발 저택 쪽으로 다가갔다.
사용인들은 다 어디 갔지? 집사는? 아내는! 두 딸은! 저 불 속에서 귀한 가보들을 꺼내 와야 할 인간들이 어디 갔냔 말이야! 후작이 울부짖었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챙캉―! 무언가가 연달아 깨지는 소리가 났고, 후작의 얼굴이 더욱 파리해졌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모아 왔던 값비싼 자기들이 깨지는 소리이리라.
일반 유리가 깨지는 소리일지도 모르는데 제멋대로 생각한 후작은 비틀거리며 조금 더 저택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잘 걸렸다.”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도끼 끝으로 후작을 불길 가득 찬 저택 안으로 집어넣었다.
바로 몸을 뒤틀었지만, 늦었다. 그의 몸뚱이는 속절없이 뜨겁게 달궈진 대리석 바닥을 굴렀다. 그가 얻은 것이라곤 자신을 밀어 넣은 게 사이레인이라는 사실뿐이었다.
“크아아악!”
등의 고통도 잊은 채 바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문이 잠긴 뒤였다. 정원과 이어진 창문에서는 계속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후작은 다급한 마음에 남은 한쪽 팔로 문고리를 잡았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까부터 불길에 달궈진 문고리는 순식간에 화상을 입힐 정도로 뜨거웠다.
“뜨, 뜨거워! 아무나 문을 열어, 열라고! 젠장!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문지기는 뭘 하는 거야!”
세게 문을 두들겼지만 굳게 닫힌 정문은 열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애원하다 못해 손톱을 세워 문을 긁었다. 그의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흘렀다.
쿵! 바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을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저택이 조금씩 붕괴하기 시작했다.
“히익, 살려, 살려 줘. 사람 살려!”
다시 무언가가 연달아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후작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불이 붙은 기둥이 그의 쪽으로 쓰러졌다. 그 기둥을 간신히 피한 후작은 숨을 헐떡였다.
뜨거웠다. 숨을 쉴 때마다 기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어 괴롭다. 너무도 아프고 괴로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자신은 스페라도인데, 스페라도 후작인데!
스페라도 가문이 어떤 가문이었던가. 어둠의 힘을 타고나 르카디우스 제국이 건국될 때부터 있었던 아주 고귀한 가문이었다. 그런 고귀한 피를 타고난 자신이 아랫것들이나 겪을 만한 이런 고통을 겪다니?
스페라도 후작의 눈에서 억울함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후작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저택이 크게 삐걱거렸고 무언가가 무너지며 큰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작이 몸을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가장 위층으로 가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물이 있는 욕실? 어디,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지하실.」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지하실이 있었다. 예전에 와인 창고로 이용되었고, 후작이 동생들을 자주 집어넣고 놀았던 지하실.
‘분명 내 기억이 맞다면 선대 중 한 사람이 와인에 미쳐서 여러 마법을 걸어 놨었다고 했지.’
여러 재난에 귀중한 와인이 소실되지 않도록 다양한 보안 마법도 걸려 있으니 혹시 위험한 상황이 생기거든 그리로 대피하라고도 덧붙였던 것 같았다. 그중에는 분명 지진과 화재도 있었다. 저택이 완전히 무너지고 불에 타 없어지더라도, 지하실은 안전하리라.
그 지하실은 오랫동안 이용하지 않은 데다가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몇몇 사용인들을 제외하고는 그 존재를 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후작이 레슬리를 위해 지하실에 튼튼한 창살을 달았을 때가 마지막으로 언급된 때였으니까.
그는 허겁지겁 몸을 옮겼다. 다행히도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됐다…….”
바로 위층은 저택을 잡아 삼키는 거대한 불로 눈이 멀 정도로 환하고 뜨거웠지만, 지하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어둡고 습했다. 오직 문 쪽에 작은 등불 하나가 달려 있을 뿐이었다.
후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달린 등불에 불을 붙였다. 습기를 먹은 성냥 탓에 불이 잘 붙지 않았지만, 간신히 작은 빛이 생겼다. 그 빛의 끝에 스페라도 후작은 앉아 몸을 웅크렸다.
‘불만 멈추고 여기서 나가면 반드시 재판을 걸겠어.’
후작은 이를 갈았다. 아내를 이용해 셀바토르 공작가에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살았던가? 분명 쓰러지는 걸 봤는데.
‘살았겠지. 그 주변에 성기사가 몇 명이었는데.’
다쳤으면 그걸 빌미로 배상금을 더 불러도 좋으리라. 아내와 딸이 쓰러지던 그 자리에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도 있었으니까. 테센트루아 성기사들이 증인을 해 주겠지. 그럼 그렇고말고. 거액의 배상금을 받으면 그걸로 가문을 재건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의 귀에 지나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였다. 쇠사슬? 아니, 그것보단 조금 더 무거운 것, 쇠창살. 그래, 그게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번엔 짧은 소리가 이어졌다.
달칵. 무언가가 잠기는 소리였다.
놀란 후작은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등불에 비치는 건 어느새 닫힌 쇠창살이었다. 레슬리를 데려오면 단단히 훈육하기 위해 달아 둔 쇠창살이 저절로 닫히더니 잠겼다.
덜컹! 덜컹, 덜컹! 후작은 달려가 쇠창살을 흔들었으나,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안에서 절대 열 수 없게 하라고 직접 후작의 지시를 받았던 대장장이는 충실히 그 명을 따랐다.
“아니 이게 왜 잠긴 거지.”
후작이 어떻게든 문을 열어 보려고 발악하고 있던 그때, 뒤쪽에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후작은 놀라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위층의 불길이 그를 따라온 듯 뜨거움을 느꼈으나, 지하실 안쪽은 어두웠다.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있었다.
“저건…….”
불이면서도 시커먼 빛을 머금어 불 같지 않은 것. 그리고 그의 눈에 무척이나 익숙한 것.
제물의 불이었다. 4년 전 엠로아를 미끼로 써 레슬리를 죽이려 했다 실패한 이후 사라진 제물의 불이 지하실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왜, 저게 여기에. 후작은 몸을 떨었다. 나가야, 나가야 한다. 하지만 굳게 닫힌 쇠창살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악!”
후작은 다시 비명을 터트렸다. 눈 깜박할 새 저 안쪽에서 후작이 있는 곳까지 다가온 제물의 불이 후작을 덮쳤다.
뜨겁다. 아까 저택 위층에 있을 때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괴로웠다.
후작은 몸을 뒤틀었다. 살고 싶어 마구잡이로 내달렸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불로 가득 차 괴로움만 더 가중될 뿐이었다. 불길이 미치지 않은 곳을 찾아 후작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만약 그가 13번째 오크통 뒤 작은 구멍을 알았다면 조금 더 삶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라도 후작은 그걸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동생 테론은 그에게 그런 걸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죽고 싶지 않아.’
결국 바닥에 쓰러진 후작은 바닥을 긁었다.
“살고…… 싶어…….”
처절한 외침이었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고, 듣더라도 도와주지 않을 외침이 공허하게 퍼졌다.
“제발……. 누가 나를…….”
후작은 쇠창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사이레인과 대치했을 때 들렸던 아이들의 목소리. 잠깐, 그건 인질로 썼던 빈민가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건가?
「너.」
후작의 눈이 커졌다. 선명하게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못해도 수십에서 백은 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득 찼다.
「우리와 같이 가자.」
뭐?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미친 듯 후작을 불길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작고 작은 아이들의 손이 후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불길 속으로 끌어들였다.
“안 돼, 나는 아……!”
후작의 몸뚱이와 비명마저 집어삼킨 제물의 불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꺼졌다. 작은 잿더미만이 남았지만 이내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다.
***
베스라온은 린체의 기사단과 경비대,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까지 데려와 수도를 방어하고 있었다. 쓰레기장을 벗어난 에타이들은 평민가를 넘어 번화가까지 퍼졌고, 이제 일어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협했다.
“아악!”
베스라온은 한 저택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에타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베스라온은 체구에 맞게 거대한 검을 썼는데, 남들은 두 팔로 휘두르기 버거운 것을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움직임은 마치 목검을 사용하듯 가볍고 부드러웠으나 위력은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람이 둘로 나뉘었다.
“이쪽은 전부 진압되었습니다!”
셀바토르 공작을 따라간 하르트를 대신해, 지금 베스라온은 셀바토르 기사들과 린체 기사 몇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저택과 저택 사이를 잊지 말고 확인하도록. 지붕 위도.”
비록 베스라온은 혼란의 시대가 끝난 후에 태어나 실제로 큰 분란을 겪어 본 적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공작과 사이레인이 가르친 것이 있어 행동과 명령에는 거침이 없었다.
에타이와 태후의 기사들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베스라온은 일단 모든 사람을 대피시켰고, 포위망을 만들듯 기사들과 경비대를 넓게 배치해 에타이의 도주를 막았다.
그리고 일부러 한곳의 경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에타이와 태후의 기사들은 경비가 느슨한 곳으로 도망쳤지만, 마주한 것은 이미 사람들이 전부 대피해 인질도 없고 숨을 곳도 마땅치 않은 장소였다.
베스라온의 빠른 판단 덕분에,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이었는데도, 빈민가와 평민가의 피해는 저택 몇 채가 부서지고 몇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그쳤다.
‘손이 부족하군.’
베스라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에타이와 태후에게 매수된 기사들의 수가 많았다.
셀바토르 기사들이 전부 와 주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공작과 루엔티가 메데이아를 잡기 위해 몇을 데려간 데다가 사이레인마저 할 일이 있다며 두엇을 빼 가, 손이 지극히 부족한 참이었다.
경비대가 달려와 주었지만, 아무래도 실질적인 전투는 셀바토르 기사단 쪽에서 맡게 되었고 경비대는 포위망과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데 주력했다.
베스라온은 달려드는 태후의 기사를 베어 넘기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 외에도 뭔가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 그게 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 근방은 전부 정리되었습니다!”
“피해는?”
“경비대원 둘이 사망했으며, 헤스렐이 상처를 입었으나 심각한 정도는 아닙니다.”
셀바토르 기사의 보고를 들으며 베스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다. 이제 다른 쪽으로 도망친 에타이와 태후의 기사들을 찾으러 가야 할 때였다.
“시신은 경비대로 보내 주고 추후 보상을 충분히 해 주도록. 유가족들이 힘들지 않게. 그리고 나머지는 25번 구역으로 움직여서 나머지 놈들을…….”
그렇게 말하다가 베스라온의 시선이 저택과 저택 사이에 자리 잡은 으슥한 골목에 닿았다.
자신이 저곳을 살펴봤던가? 다른 사람들은?
베스라온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저기에 무언가가 있다.
“혹시 빠져나간 놈들을 처리하고 있도록.”
마저 지시를 내린 베스라온은 몸을 돌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특별히 이상한 건 없는데.’
생각보다 골목이 길다는 것, 그리고 지붕에 가려져 햇빛이 덜 든다는 것 외에는 이상할 게 없었다. 그저 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골목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이 들까.
마치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이 어린 베스라온에게 검을 가르쳐 준다 하고 갑자기 등 뒤에서 기습했을 때 느꼈던 기분과 똑같았다.
베스라온은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슬슬 골목의 끝이 보이는 참이었다.
골목 끝에 있는 공터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속눈썹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순간 베스라온이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지붕 위에서 베스라온을 노리고 뛰어내렸다.
콰앙!
“오호!”
정확히 베스라온의 머리를 노리고 뛰어내린 건데, 카크의 검은 땅에 꽂혀 흙먼지만 흩날렸다.
“덩치보다 굉장히…….”
잽싸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크의 얼굴이 발로 차여 짓뭉개졌다.
“크헉!”
괴상한 소리를 낸 카크의 몸이 흙바닥을 두어 바퀴 굴러 저 멀리 날아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야, 이 잔인한 놈아! 적어도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게 예의 아니냐!”
베스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달려와 그대로 카크의 목을 노렸을 뿐.
카크는 다시 흙바닥을 굴러 간신히 베스라온의 검을 피했다.
“미, 미친 셀바토르…….”
카크는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만 늦었더라면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셀바토르라는 걸 알고 있었군.”
드디어 베스라온이 입을 열었다.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암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를 이리로 부른 거겠지? 부른 사람은…… 당신인가?”
베스라온이 갑자기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어이쿠.”
그의 뒤에서 몰래 접근하던 엠릭은 웃으며 베스라온의 검을 피했다. 계산된 듯 아슬아슬하게 검의 궤도를 피하는 모습에 베스라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아셀라, 그 마녀와 배신자의 첫 번째 자식인가?”
엠릭의 얼굴은 마치 친구의 자식을 봤다는 듯 환했지만, 말은 그렇지 못했다.
마녀와 배신자. 그건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내 부모님을 그딴 말로 모욕하지 마라, 에타이.”
“사실 아닌가? 공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이레인은 우리를 배신하고 공작에게 붙었으니, 배신자지. 그 덕에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데.”
방금까지 활기를 띠고 있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과거의 일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엠릭은 이를 보이며 웃었다. 광기와 화의에 물든 오싹한 웃음이었다.
“자식이 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잘 자랐을지는 몰랐어! 둘이 굉장히 너를 자랑스러워하겠군. 아주 딱 좋아.”
엠릭이 자신의 도끼를 쥐어 들었다. 사이레인이 쓰는 것과 비슷한 양날 도끼는 한눈에 봐도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끼였다.
“네 목을 셀바토르 공작저로 보내야겠다. 내가 왔다는 걸 두 사람에게 알려야지.”
그렇게 말한 엠릭이 바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무슨 힘이……!’
검으로 도끼를 막아 낸 베스라온이 이를 갈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제외하고 이렇게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셀바토르 가문의 특징은 마력과 힘. 순수한 힘으로는 엠릭은 베스라온을 이길 수 없었다. 베스라온이 도끼를 막은 검에 힘을 줘 휘두르자, 엠릭은 도끼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사이레인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강하구나.”
엠릭은 부들거리는 제 손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어미보단 약해.”
그 말을 시작으로 엠릭은 무섭게 베스라온을 몰아붙였다. 커다란 도끼와 검이 쉴 새 없이 부딪쳤다.
몰리는 쪽은 베스라온이었다. 엠릭은 베스라온을 몰아붙이며 웃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의 검술을 그대로 배웠구나! 내가 네 어미와 몇 번을 부딪쳤는지 알고 있나? 공작을 이기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혼란의 시대 때, 엠릭은 셀바토르 공작과 마주해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빈번히 졌고, 부하들의 목숨을 희생해 살아남았다.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나서는 붙을 일이 없었지만, 엠릭은 셀바토르 공작의 검술을 매일 떠올리며 기억했다.
언젠가 다시 붙을 때를 위해, 자신이 그녀의 목을 칠 그날을 위해.
“그에 비교해 너는 내 도끼는 처음이겠지!”
경험. 그게 베스라온과 엠릭의 차이였다.
엠릭은 공작의 검을 기억했고 그 검을 이기기 위해 여태껏 대비해 온 남자였다. 거기에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쌓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베스라온은 혼란의 시대처럼 큰 사태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큭!”
게다가 엠릭은 혼자가 아니었다. 뒤늦게 땅에 박힌 제 검을 뽑아 들은 카크가 매섭게 베스라온의 등 뒤를 노렸다.
“이 예의 없는 자식아! 그냥 목을 내미는 게 어때? 안 아프게 떨어트려 줄게!”
베스라온의 바로 옆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지르며 카크는 베스라온이 엠릭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도왔다. 카크가 베스라온을 교란하면 바로 엠릭의 공격이 무섭게 쳐들어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습해 온 듯, 틈 없이 베스라온을 밀어붙였다. 쇠와 쇠가 강렬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그런 공격 속에 가장 먼저 쓰러진 건 카크였다.
베스라온은 침착하게 공격 상대를 바꾸었다. 비록 엠릭과 카크에 비해 실전 경험은 부족했으나, 그간 그 역시 쌓아 올린 것이 있었다.
‘귀찮은 게 날아다니면 집중하기 힘들지. 그때는 주변부터 치우렴.’
공작과 사이레인이 그렇게 말해 주고, 대련으로 익힐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던가.
베스라온은 엠릭의 도끼를 피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저 엠릭의 공격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카크의 공격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면 카크의 공격은 자연스레 뒤에서 왼쪽으로 들어왔다.
베스라온은 재빠르게 몸을 돌려 검을 찔러 넣었다.
“……!”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비명을 지를 목에는 이미 검이 박혀 있었으니까. 카크의 입에서 피거품이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이내 옆으로 쓰러졌다.
“드디어.”
엠릭이 히죽 웃었다. 카크를 죽일 때 생긴 약간의 틈을 엠릭은 놓치지 않았다. 베스라온의 다리에 엠릭의 도끼가 닿았고, 도끼는 다리를 깊게 베었다.
크윽, 베스라온의 얼굴이 고통으로 하얗게 변했다. 붉은 피가 바지를 적시다 못해 땅으로 떨어져 흙 위에 고였다.
“……이러려고 데려온 자였군.”
베스라온이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교란하기 위해 데려온 자인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미끼로 쓸 모양이었나 보다.
엠릭은 도끼에 묻은 베스라온의 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뭐, 그렇지. 그리고 내가 준비한 미끼는 하나가 아니야.”
엠릭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에타이 몇 사람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네 부하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렸지.”
엠릭은 교활하게 에타이 몇 사람을 빼돌렸다 불러들임으로써 수색을 피했다. 그리고 그 몇 사람을 감추기 위해 다른 에타이와 태후의 기사들을 희생시켰다.
‘아까의 꺼림칙함은 이것 때문이었나.’
베스라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엠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오호, 그렇게 인상을 쓰니 꼭 그대 어미가 궁지에 몰린 것 같아 기분이 짜릿한데. 언제나 도도한 얼굴로 사람을 자존심을 그렇게 짓밟았는데 말이야.”
엠릭의 기억 속 셀바토르 공작은 언제나 차가운 얼굴이었다. 자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 내려다보던 암녹색 눈을 떠올리며 그는 웃었다.
지금 그녀의 자식이 자신 앞에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똑같은 암녹색 눈동자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결과인가.
“개소릴.”
베스라온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엠릭은 다시 도끼를 쥐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공작의 목을 칠 기회가 올 줄 알았지. 그 기회를 이 나라의 태후가 준 건 좀 의외였지만.”
엠릭이 다시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걸 신호로 에타이들이 달려들었고.
“베스라온 오라버니!”
맑은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쓰러졌다.
“레……슬리?”
베스라온이 멍하게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얼굴은 눈물범벅이고 옷은 불에 그슬린 듯한 레슬리가 코를 훌쩍이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제가 도울게요!”
엠릭은 레슬리를 보더니 놀랍다는 듯 말을 흘렸다.
“그렇지, 애새끼가 한 명이 더 있었지. 고귀하고 우아한 아라벨라.”
그러면서 엠릭은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레슬리에게 인사를 보냈다. 명백한 조롱에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라버니를 다치게 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면서…… 뻔뻔한 인간.”
레슬리가 매섭게 엠릭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엠릭의 뒤에는 피를 쏟아 하얗게 질린 베스라온이 있었다.
베스라온은 의식이 있던 날부터 계속해서 후작을 찾아 수도를 돌아다닌 데다가 오늘 새벽부터는 에타이를 상대했었다. 저 남자는 베스라온이 약해진 때를 노린 게 분명했다.
“이 악당.”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레슬리가 귀여워 보이는지 엠릭이 여유 있는 웃음을 머금었다.
“사이레인 그놈이 예뻐할 만해. 그놈은 늘 딸을 가지고 싶어 했으니까 말이야.”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엠릭은 제 도끼를 다시 고쳐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에타이들에게 그의 시선이 닿았다.
“나름 검 좀 잘 휘두르는 놈들로 데려왔는데 순식간에 끝났군. 이게 그토록 유명한 어둠이란 힘인가?”
엠릭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는 어느새 가라앉은 눈으로 레슬리를 훑어보고 있었다.
오싹한 시선에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아예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레슬리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엠릭이 레슬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생각보다 더 강한 통증에 저절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레슬리!”
놀란 베스라온이 고통도 잊고 달려왔지만,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새로 나타난 남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강해도 신체적인 능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빛을 보기 힘들고.”
누군가를 가르쳐 주듯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행동은 그러지 못했다. 또다시 매섭게 주먹이 내리꽂혔다. 간신히 엠릭의 주먹을 피했지만,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자마자 이번엔 눈앞에서 불길이 터져 나왔다.
“아흑!”
레슬리는 다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꼬마 아가씨. 나는 네가 불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아. 이제 많이 나아졌다 해도.”
그렇게 말하며 엠릭은 제 가슴을 쿡 찔렀다.
“여기 각인된 건 완벽히 사라지진 않거든. 그렇지?”
어떤가, 꼬마 아가씨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온 마법석인데. 마음에는 들었나?
엠릭이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흘렸다. 마침 잘됐다는 음험한 웃음 끝에 말소리가 같이 붙어 나왔다.
“저놈이랑 너를 고스란히 보내 주면 셀바토르가는 물론 제국도 뒤흔들 수 있겠지. 아라벨라의 목이니 황제도 질겁하려나.”
셀바토르 공작도, 사이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집안을 이을 장남과 귀하게 키운 막내딸의 목이 같은 상자에 들어 있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엠릭은 셀바토르 공작이 무너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쩐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곧 실제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네 목은 유용하게 이용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초석이 되는 거야.”
이 거대한 나라를 뒤흔들 하나의 초석. 그렇게 말하며 엠릭은 도끼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나를 고용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야지. 안 그런가, 아라벨라?”
아까부터 엠릭과 불꽃에 시달린 레슬리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엠릭은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레슬리의 약점인 약한 체력을 노리고 불길로 눈을 멀게 했다.
아무리 엄청난 힘이라도 틈이 보이면 끝이었다. 레슬리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고는 있었지만, 도끼가 내리꽂히는 게 먼저일 것이다. 위험하다.
“레슬리, 위험해!”
베스라온이 에타이들을 제치고 달려 나왔다. 무리했는지 다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흘러나와 흙과 뒤엉켰다. 걸음마다 흐른 피로 붉은 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베스라온이 제 피를 뿌리며 달려오는 것보다는 엠릭이 손이 빨랐다. 그리고.
“어허…….”
엠릭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확히 도끼는 레슬리의 목을 노렸고 베스라온보다 빨랐지만, 중요한 도끼날이 사라져 버렸다. 레슬리의 목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왜 불이 효과가…….”
사고를 잇기도 전에 머리가 굳었다. 어둠이 머리서부터 그를 집어삼켰고,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엠릭이 사라졌다.
레슬리가 얼굴에 묻은 피를 쓱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바로 전에까지 힘들어하던 모습은 거짓이었다는 듯 눈에는 빛이 돌았다.
“맨날 이놈이나 저놈이나 불, 불…….”
조금 전에도 당했던 것이었다. 후작이 비슷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과거까지 합하면 몇 번이나.
확실히 엠릭의 말대로 불에 아직 몸이 굳는 건 있었지만, 연속적으로 당하다 보니 그래도 불꽃은 익숙해졌다. 어찌 보면 후작이 레슬리를 도운 셈이었다.
“괴, 괴물이다!”
강한 사람이, 끈질기던 인간이 눈앞에서 잡아먹히자, 살아남은 몇 놈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럿이 베스라온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웠는데, 저런 괴물이라니.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에타이들은 빠르게 제 살길을 찾아 골목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골목 반대편으로 나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어둠은 도망치던 이들을 집어삼켰다.
전부를 먹어 치운 후 레슬리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직 쓸 수 있네.’
어둠의 힘은 아직 자신에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 안에 있던 아이들의 느낌은 많이 사라져 기묘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벌써 몇 명은 길을 떠나간 걸까. 앞으로 하나둘 더 떠나겠지.
생각해 보면 어둠이가 그 아이들을 대표해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외롭지 않게, 그리고 그 가문을 빠져나가 공작저로 가 당돌한 거래를 요청할 수 있게, 잃어버린 자존감과 용기를 대신해 주었다.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역시 힘들긴 했지만 보내 주는 게 맞았다.
아이들은 작은 토끼 인형을 따라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가겠지. 길을 떠나 제대로 도착한 아이들은 더는 어렸을 때의 자신처럼 외롭지 않을 것이고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가 그 역할을 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아이들이 다 떠나고 난 후에도 나는 이 힘을 쓸 수 있을까?’
어둠은 아이들이 나에게 준 힘인데. 잠시 제 손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달려 나갔다. 베스라온이 자신에게 오고 있었다.
“오라버니, 피가 나요.”
베스라온의 곁에 다가간 레슬리가 그의 상처를 보고 울먹였다. 제 손으로 막아 보려 했지만, 레슬리의 손에 비교해 상처는 너무도 깊었다.
“괜찮아. 사제에게 보이면 금방 나을 거야. 너는 다친 곳은 없어? 아까 그 새끼가 너를 때렸는데.”
오히려 동생을 토닥이며 베스라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동생을 살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레슬리가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베스라온이 긴장이 풀렸다는 듯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리고 서툰 거짓말로 울먹이는 제 동생을 달래기 시작했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로 다친 건 다쳤다고 하지도 않아. 거기다 사제가 오면 한 번에 나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정말요?”
“정말.”
어설픈 행동에 잠시 말의 진실성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루엔티라면 몰라도 베스라온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레슬리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베스라온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레슬리가 다시 의심에 빠질까, 베스라온은 아직도 울상인 레슬리의 머리를 토닥였다.
“고마워, 레슬리. 네가 나를 구했어.”
베스라온의 인사에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 얼굴이 붉어지고 안색이 조금 나아진 걸 놓칠 베스라온이 아니었다.
“레슬리가 두 번이나 나를 구해 줬네.”
그런 동생이 귀여웠다. 잠시 놀리고 있는 것도 괜찮겠지.
늦는 자신을 찾으러 곧 기사 몇 명이 이리로 올 것이다. 그때까지, 잠시만 쉬고 있자.
“두 번이요?”
“예전 신전 계단에서 비틀거린 나를 도와줬잖아.”
레슬리가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가 흘렸을, 장식용 구슬을 밟고 비틀거린 베스라온의 손을 잡고 낑낑거리던 게 조금 늦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오라버니도 저를 구해 줬잖아요.”
“마차에서?”
“네.”
레슬리가 뺨을 붉히며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분명 후작을 따라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골목으로 걸어가며 조금 늦은 질문을 던지자, 레슬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후작을 상대하셨는데 그가 도망을 쳤어요.”
“후작이 아버지를 따돌리고 도망을 쳤다고?”
믿기지 않는 듯 베스라온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스페라도 후작의 능력이 사실 도주였던 건 아닐까.
“네, 그래서 그만 놓쳐 버렸어요.”
레슬리의 대답에 상황이 그려졌다.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보냈지만, 걱정되는 마음과 복수심에 주변을 배회하던 레슬리는 후작을 쫓아갔겠지. 그러다가 자신도 후작을 놓쳐서 주변에서 후작을 찾던 사이 에타이와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도대체 사이레인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은? 두 사람 다 어디로 가서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레슬리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해 주듯, 저 멀리서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다.
“저기로구나.”
그렇게 말한 레슬리와 베스라온은 연기를 따라 걸었고, 이내 한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베스라온도 레슬리도 잘 아는 곳이었다.
자욱한 연기로 가득한 하늘, 흩날리는 불꽃 그리고 폐허가 된 스페라도 저택. 레슬리는 그 앞에 서서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이게…….”
레슬리를 따라온 베스라온마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사 몇 명과 셀바토르가의 사용인들을 데려간다더니, 그게 장작을 나르기 위함이었나?
“레슬리!”
그나마 온전한 정원에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사이레인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사이레인이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후작이 죽었단다.”
후작이 죽었다고? 그 말이 묘하게 헛돌았다.
“후작이요?”
죽었다고? 늘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 같은 그가? 어쩐지 정신이 멍해졌다.
후작과 죽음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레슬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후작가로 다가갔다. 뒤에서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이 위험하다고 소리쳤지만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동시에 추악한 장소로 기억되던 스페라도 후작가는 불길에 무너지고 있었다. 전부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온전한 부분은 그을음에 더러워져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뽐내지 못하리라.
“……정말로 죽었어?”
레슬리는 말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자신이 살던 다락방을 눈으로 찾았다.
“정말로?”
다락방이 있던 자리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후작도 저렇게 된 걸까?
“거짓말.”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을 거야. 그 작자는 언제나 죽은 척하면서 숨어 다시 자신을 노리지 않았던가. 확인해야 해.
그 생각이 들자마자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불길로 휩싸인 저택으로 내달렸다.
“위험해!”
뒤따라온 베스라온에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놔, 놔주세요! 확인해야 해요. 죽었는지, 정말로 죽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해요, 오라버니!”
레슬리는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거칠게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 주먹과 발에 맞아 아플 텐데도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놔주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저택과 떨어진 곳에서 레슬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레슬리.”
베스라온이 무릎을 꿇고 옅게 숨을 헐떡이는 제 어린 동생을 바라보았다.
“내가 들어가마. 내가 들어가서 후작이 죽었는지 확인하고 올게.”
“네?”
레슬리의 눈에 초점이 돌아옴과 동시에 거세게 고개를 저었고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베스라온이 옅게 웃었다.
“안 돼요. 위험해요, 오라버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저 안은 위험하지. 나는 안 그래도 위험한 곳에 불을 무서워하는 동생을 저 안에 보낼 생각이 없단다. 네가 후작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해. 그러니 내가…….”
“둘 다 여기 있거라!”
갑자기 뛰어나온 사이레인이 레슬리와 베스라온의 머리를 팍하고 쓰다듬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긴 아버지에게 맡겨라.”
콧김을 내뿜으며 사이레인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거칠 것이 없는 걸음걸이로 불길에 휩싸인 저택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위험해요!”
레슬리와 베스라온이 동시에 사이레인을 말렸다.
“하지만 너도 궁금하잖니. 거기다 나도 목을 못 쳐서 아쉽고…….”
사이레인이 자신의 팔을 꽉 잡은 레슬리를 보며 말하자 레슬리가 고개를 저었다.
“죽었을 거예요. 저런 불길 속에서 살아남았을 리가 없어요.”
「맞아, 그는 죽었어.」
어?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가 데려갔거든. 들려?」
아까보다 희미해진 소년의 목소리 뒤로 무언가가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 스페라도 후작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죽었어?”
「그래.」
“정말로?”
「정말로, 트라 베쉬 스페라도는 죽었어. 그러니 레슬리.」
쿵. 소년의 대답과 동시에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스페라도 저택이 무너졌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사이레인이 급하게 레슬리를 안아 제 몸으로 가렸다.
“정말로…….”
안전한 곳에서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흘렀다. 커다란 눈동자 가득 무너지는 스페라도 저택이 담겼다.
“죽었구나.”
스페라도 후작과 후작 부인이 죽었다. 엘리는 사경을 헤매고 있으며, 유일한 스페라도 후작가의 피를 이은 자신도, 테론도 후작 위 따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스페라도 저택마저 무너져 내렸다. 스페라도의 이름은 귀족 책에서 곧 사라지겠지.
명예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그리고 물리적으로나, 완벽한 끝이었다.
하아. 레슬리는 깊게 숨을 토해 냈다. 어쩐지 숨이 아니라 늘 가슴 한쪽에서 오랫동안 묵었던 마음 같았다. 시야가 맑아짐과 동시에 어쩐지 몸이 가벼워졌다.
‘내가 후작을 직접 죽였더라면.’
지금처럼 가벼운 마음이 들었을까. 대답은 ‘아니’였다. 오히려 지금 저택과 후작을 태우고 있는 불씨가 따라와 자신까지도 먹어 치웠을지도 모른다.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저택마저 짜증 날 정도로 끈질기군.”
사이레인이 인상을 쓰며 무너지는 저택을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제 딸을 바라보았다.
“레슬리, 다치지는 않았니?”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일을 하러 가자. 너는 왜 우리가 남아 있는지 이제 알잖아.」
방금보다 더 희미해진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오라버니. 에피알테스는 지금 어디 있어요?”
그래, 남아 있는 아이들과 같이 마지막 일을 할 시간이었다.
***
“젠장! 방어해, 무너지면 안 돼!”
레슬리가 난리 통을 틈타 스페라도 후작을 쫓아갔을 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은 에타이가 아닌 다른 것을 상대하고 있었다.
“왜 이게 벌써…….”
렌티우스는 미간을 좁혔고,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떨어졌다. 더워서, 에타이와의 격한 싸움 때문에 흐르는 땀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의 눈앞을 가득 메운 잿빛 안개 때문이었다.
후작이 들고 간 상자에서 흘러나온 이 연기는 빠르게 쓰레기장을 덮쳤다. 에타이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은 물론이고, 셀바토르 기사단과 테센트루아 성기사들을 덮쳤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목이 조금 따갑고 눈물이 나는 정도에 멈췄다. 하지만 연기는 쓰레기장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빈민가 사람들에게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병자들의 상태는 어떻지?”
렌티우스는 시선조차 뒤로 하지 않고 외쳤다. 그와 다른 성기사들의 오감은 에피알테스의 흔적에 집중되어 있었다.
“얼굴에 열꽃이 피긴 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습니다!”
“신전에서의 대답은 왔나?”
“아, 네, 넵! 그게, 그러니까…….”
오늘 첫 임무를 맡아 나온 신입은 허둥지둥하며 신전에서 온 종이를 읽어 내렸다.
“사제님들은 곧 도착할 예정이고, 또…… 무언가의 충격으로 에피알테스가 빠져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봉인이 완벽히 풀려야 에피알테스가 전부 빠져나오는 데다가 빠져나온 후에도 당분간은 큰 힘을 쓸 수 없다는 토론 결과, 지금 나온 것은 에, 그러니까. 네! 흔적으로 파악되어…….”
“그만하면 됐어. 환자의 상태에 신경 쓰도록.”
그 뒤로도 뭔가를 더 중얼거리려는 신입의 말을 날카롭게 잘라 냈다.
한마디로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에피알테스의 옅은 흔적’이란 뜻이었다. 그 덕에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열꽃이 피지 않았고, 신력으로 막을 수 있었다. 이미 전염된 사람들 역시 조금은 신력으로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위험하다.’
불안전하고 약하다지만, 에피알테스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이야 신력으로 막을 수 있다지만, 모르지. 후작이 가지고 도망가 버린 상자가 더 열리면 어떤 힘을 가지게 될지.
렌티우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절대 이 쓰레기장을 빠져나가게 하면 안 된다. 환자들 역시 같은 장소로 모아 피해를 막아야 한다. 그 생각이 렌티우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렌티우스 경! 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한곳에 모아 놨습니다.”
레소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외쳤다. 투구는 벗은 지 오래였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일단 그럼 환자들과 아직 건강한 이들을…….”
“당연히 구분해 놨습니다. 근처에 마음씨 좋은 상인의 집 하나를 빌렸어요, 흔쾌히 빌려주더군요!”
레소가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정말로 그 상인이 흔쾌히 빌려줬을까에 대해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렌티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씨 착하고 상냥한 상인은 신의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경! 마법사의 저택이 움직였습니다. 덕분에 환자들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레소의 말에 렌티우스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마법사의 저택은 꼬장꼬장한 늙은이 10명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한 이런 일에 뛰어들지 않았다.
“저택이?”
“늦어 죄송합니다.”
레소의 뒤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예전에 범인을 찾겠다며 날뛰던 루엔티를 말리러 왔던 알빈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알빈은 렌티우스를 바라보았다.
“10인의 마법사 결정에 따라, 렌티우스 경을 도울 알빈이라고 합니다.”
“오호, 고지식한 분들은 더 느긋이 참여할 줄 알았더니?”
알빈의 소개에 렌티우스가 히죽 웃자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매우 급한 사태가 아닙니까. 그리고 이번에 젊은 피가 유입돼서요. 그분께서 난리를 좀 치셨죠. 거기다 셀바토르 경께서도 직접 와서 도움을 요청하셨으니, 안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젊은 피란 루엔티를 말하는 것이겠지. 렌티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분께서 고생 좀 하셨겠군.”
“워낙 개차반인 놈, 아니 분이시라. 다른 분들이 고생했죠.”
저도 모르게 본심을 흘린 알빈은 웃으며 빠르게 단어를 바꿨다. 하지만 이미 렌티우스는 알빈의 말을 들은 뒤였고 그는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욕해도 되나? 알면 큰일 날 텐데.”
“지금 다른 사냥을 하러 가서 이 자리에 없는데 뭐 어떻습니까.”
베온은 생글생글 웃으며 렌티우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신력으로 막혀 있는 잿빛 안개에 닿았다.
“저건…… 아무래도 저희가 도와 드리기 힘들 것 같군요.”
“환자를 접촉하지 않고 옮기는 데만 신경 써 주길. 그리고 후작을 찾아내는 일에도. 그가 가지고 있는 상자는 반드시 찾아야 하네.”
렌티우스의 말에 알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들이 저 위험한 안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저희와 셀바토르 기사단이 합세했고, 후작의 뒤를 쫓으며 에타이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셀바토르 경은?”
렌티우스가 이번엔 레소를 보며 묻자 그녀가 빠르게 대답했다.
“경께서는 지금 평민가로 숨어 들어가려는 에타이들을 상대 중입니다. 덕분에 지금 에타이들 숫자가 빠르게 줄고 있죠. 린체 기사단 역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라, 조금만 버티면 될 겁니다.”
레소의 말에 렌티우스가 웃음을 머금었다. 베스라온이 끼면 에타이는 순식간이다.
“좋아.”
어찌어찌 상황이 정리되어 가고 있는 듯 보였다. 셀바토르 기사단에 마법사들 거기에 린체 기사단까지 참여하면 후작을 찾고 에타이를 진압하는 건 무리가 없겠지.
‘걸리는 건 그 녀석이긴 한데.’
붉은 머리, 눈에 난 상처. 엠릭이라고 했던가. 렌티우스는 눈을 찡그렸다.
자신의 스승과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자. 들리는 말에는 셀바토르 공작의 손아귀에서도 빠져나갔다지.
‘세월이 아무리 흘렀다지만, 그런 놈들은 쉽게 약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여태 에타이의 잔당들이 잡히지 않게 통솔해 온 자였고, 막아 낸 자였다. 그건 엠릭이 얕볼 수 없는 자라는 걸 여실하게 알려 주었다.
거기다 에피알테스. 이미 감염된 자가 나왔다. 아무리 힘이 약하다지만, 쉽게 고칠 수 없을 텐데.
“최고 사제님도 상처를 입으셨고.”
렌티우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분이 아니라면 저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듣자 하니 고위 사제 한 명도 사라졌다는 것 같은데. 렌티우스는 얼음 같은 눈을 한 고위 사제를 떠올리며 눈을 찡그렸다.
오랫동안 테센트루아 기사단장으로 있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니, 역사상 처음이겠지.
과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인가.
‘여차하면 내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에서도 기사단장직을 맞고 있는 그가 스스로의 목숨을 신께 바친다면, 순간 강력한 신력을 낼 수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신력 정도면 이 흔적도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왔다!”
렌티우스가 두려움 없이 신의 품으로 갈 결심을 다지는데, 갑자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르카디우스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독특한 억양. 테펜텔이었다.
렌티우스는 물론 에피알테스의 흔적을 막아내고 있는 성기사들과 쓰레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거기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햇빛을 등에 업은 여자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레소와 다른 셀바로트르 기사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반응으로 역광으로 잘 보이지 않는 저 여자가 공작가와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본래 영웅은 가장 늦게 도착하는 법이란다, 레소!”
여자가 있던 곳은 상당히 높게 쌓여 있던 쓰레기 더미 위였는데, 그녀는 무섭지 않다는 듯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뛰어내렸다. 다부진 몸과 다르게 그녀의 착지는 무척이나 가벼웠고 익숙해 보였다.
그제야 렌티우스와 다른 이들은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와 다른 생김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렌티우스는 셀바토르 공작저에 특이한 손님이 묵고 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분명 공작의 오래된 친구라고 했었지.
테펜텔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씩 웃었다. 그녀의 뒤로 에펜타니 백작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귀찮다고 백작도, 다른 호위도 떼어 놓고 온 게 분명해 보이는 테펜텔을 보며 레소는 머리를 저었다.
“너희들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 주러, 내가 왔노라.”
레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이상한 말을 내뱉으며 테펜텔은 자신의 품 안에서 약병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녹빛의 물약, 에펜타니 백작 부부가 짧은 시간 동안 영혼을 불태워 만든 약. 일명 ‘행복한 꿈’이었다.
“이걸 이렇게…….”
테펜텔은 웃으며 뽁! 소리가 나게 마개를 뽑더니 신입 성기사가 데리고 있던 환자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십…… 억!”
테펜텔이 타국인이라서보다는 괴상한 행동에 겁을 먹은 신입 성기사가 그녀를 만류했지만, 가볍게 복부를 차이고 입을 다물었다.
“넣어 주면~”
조심스레 녹빛 물약을 쓰러진 환자에게 먹였다. 무슨 맛인지, 환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약물과 똑같은 짙은 녹빛으로 변했다. 기절해 있는 환자는 무의식중에서도 물약을 거부하려고 애썼지만, 테펜텔의 웃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결국, 한 병을 다 먹고 나서야 테펜텔은 환자에게서 떨어졌다.
“……더 안 좋아 보이는데요.”
복부를 감싸 쥔 채 신입이 테펜텔을 바라보자, 테펜텔이 눈짓으로 환자를 가리켰다.
“엉?”
신입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건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테펜텔과 셀바토르 기사단만 웃으며 우쭐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웨어에엑. 더, 더럽게 맛없어. 도대체 나에게……. 웨엑!”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일어나 녹빛 토를 하고 있었다. 토하기 위해서 사경을 깨부수고 억지로 일어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뭐, 뭘 그리들 보십니까?”
환자의 얼굴에 피어났던 열꽃이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렌티우스가 당황해 테펜텔을 바라보자, 뒤에 서 있던 에펜타니 백작이 다급히 외쳤다. 이번 설명만큼은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다급한 몸부림이었다.
“저희 에펜타니가가 만든 약입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지원해 주셨지요! 보다시피 이 수상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물약으로 치유될 겁니다.”
에펜타니 백작의 눈은 반짝거렸다. 만일 이게 잘돼 백작가의 공로가 확실해진다면, 에펜타니 가문은 더는 한미한 가문이 아니게 되리라.
“약의 이름은 ‘행복한 꿈’입니다! 부디 이 ‘행복한 꿈’을 이용하시거나 복용하실 때, 저희 에펜타니! 에! 펜! 타! 니! 백작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꼬, 꼭 기억하겠습니다, 에펜타니.”
백작의 기세에 눌린 렌티우스와 성기사들이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테펜텔은 약과 에펜타니 백작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당황한 렌티우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제물이 되었던 아이들에게도 효과가 있었어. 사제인 척했던 두 아이는 이미 다 나아서 공작가에 있지. 뭐, 흉은 좀 남았지만.”
“약의 양은 충분합니까?”
“아니.”
테펜텔은 고개를 저었다.
“약초 자체가 희귀한 데다가 손이 많이 가서 말이지. 지금 에펜타니 백작가의 사람들이 죽어라 만들고는 있기는 해. 효과를 봤으니 백작도 돌아가 다시 만들겠지.”
테펜텔은 힐끗 에펜타니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홍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공작저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양은 넉넉하지 않을 거야. 아슬아슬하게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일 테지.”
“사태를 더 키울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렌티우스의 말에 테펜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세 번째 걸쇠가 풀리지 않는 것. 악몽이 본격적으로 풀리면 저 약으로도 어쩔 수 없어.”
“반드시, 신께 맹세하니 이 일은 더 번지지 않을 겁니다.”
“믿어 보지. 신의 충실한 종들.”
씩 웃은 테펜텔은 몸을 돌려 에펜타니 백작의 뒤를 따랐다. 당연히 남아 사태 해결에 힘을 보탤 줄 알았던 그녀가 떠날 모습을 보이자 당황한 성기사 한 명이 외쳤다.
“어, 어디 가십니까? 남아 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셀바토르 저택으로 갈 거야. 증인도 있고, 약 만드는 사람도 있으니. 내가 에타이거나 그 태후라면 저택부터 노릴 거거든.”
“그렇다면 처음부터 거기 계시지 왜……!”
성기사의 물음에 테펜텔이 몸을 돌려 씩 웃어 보였다.
“약효는 확인해야 했으니까. 나도 이 일에 책임이 꽤 있어서 말이지. 그리고 난 저택이 크게 걱정되진 않아서 말이야.”
왜냐고?
“셀바토르는 저택과 사용인들마저 셀바토르니까.”
분명 즐거울 거야, 그렇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펜텔은 몸을 돌려 그대로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