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9)

#19

“우리 딸!”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늦은 밤 저택으로 돌아온 엘리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엘리는 품에 무언가를 소중히 안고서, 4년간 단 한 번도 발길을 하지 않았던 스페라도 후작가의 문을 두드렸다.

후작 부인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힐 뻔했지만, 엘리를 따라온 이피엘과 건장한 남자들을 보자마자 그대로 엘리를 안으며 눈물로 딸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딸을 안은 그녀의 라일락빛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다. 엘리 역시 그녀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녹음이 가득한 엘리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뺨을 타고 흘렀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그간 얼마나 어머니가 그리웠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아아, 어머니! 어머니!”

겉보기에는 감격스러운 모녀 상봉이었다. 하지만 엘리를 따라온 이피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후작 부인이 수도로 올라온 지 한참이 지났다. 보려 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지만, 엘리는 그간 후작 부인을 보기 거부했었다. 그래 놓고서는 지금 저런 모습이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이피엘은 노련한 시녀답게 웃음을 감추고 눈물을 흘렸다.

“아아! 내 사랑스러운 딸! 우리 아가, 엘리!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내가 옆에서 너를 지켜 줬어야 했는데……. 이 연약한 몸이…… 도와주질 않았지. 하지만 믿어 주렴, 엘리. 이 엄마는 마음만큼은 쭉 너와 함께 있었단다.”

아아, 그래. 이쪽도 만만치 않았지. 후작이 귀족 재판으로 무너지자마자 바로 남편과 엘리를 버리고 친정으로 도망간 사람이 후작 부인이었다. 도대체 이 가족이란.

결국, 이피엘은 작게 혀를 찼다. 도망간 셀바토르 공녀를 빼고는 정말 상종하고 싶지 않은 가족이었다. 물론, 그래서 더욱 적격이었고.

“애틋한 모녀지간이네요.”

이피엘은 이번에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었다. 해석은 알아서 하겠지.

“그렇죠, 우리 아가와 나는 완벽한 사이죠.”

“맞아요, 어머니.”

역시나 알아서 제 귀에 맞게 해석한 후작 부인과 엘리가 웃자, 이피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감동한 듯 눈물을 훌쩍였다. 두 사람 다 아름다운 미모라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그럴싸한 재회 장면이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남자의 발을 지그시 밟아 준 이피엘은 허리를 숙였다.

“태후 폐하께서는 당분간 엘리 양이 스페라도 후작가에 머무르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머나. 황실이 아니라 이 저택에 말인가요?”

후작 부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피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데이아의 편지를 부인에게 내밀었다.

“편지에 쓰여 있긴 하지만, 이번에 스페라도 아가씨께서는 최초의 사제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 어렵고 고된 시험을 두 개나 통과하셨으니까요.”

이피엘의 말에 엘리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신께서도 저를 어여쁘게 봐 주실 거랍니다. 어머니께도 자랑하고 싶은 걸 꾹 참았어요!”

엘리는 뿌듯하게 말을 보탰다. 그녀의 의기양양한 얼굴과 태도만 보면 그녀 혼자 제국을 구한 듯 보였다.

이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 끝에 의미가 모호한 미소가 걸렸다.

“그간 아가씨는 그 일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오셨고, 많이 지치셨지요. 그래서 태후 폐하께서는 지금 스페라도 아가씨께 필요한 것은 휴식이라 판단하셨습니다.”

이피엘의 말에 후작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제 딸을 꼭 끌어안았다. 얼굴이 반쪽이 됐다며 뺨을 쓸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다 안 좋은 일로 황실이 당분간 흉흉할 테니, 편안하고 안전하며, 사랑을 주는 가족들이 있는 저택에서 쉬는 것이 좋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요. 태후 폐하께서 우리 엘리를 아끼시는 게 눈에 보여 너무도 행복합니다.”

후작 부인은 편지를 꼭 쥐고 고맙다며 이피엘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의 노력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더없이 귀하신 분이니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피엘은 눈을 휘며 웃었다.

그녀의 주인인 메데이아에게 있어서 엘리는 더없이 귀한 것이었다. 아렌도의 약혼녀로서가 아니라 에피알테스의 걸쇠를 풀기 위한 제물이었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엘리는 제멋대로 이피엘의 말을 해석하며 환하게 웃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작은 성의와 함께 저택을 지킬 이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피엘이 손짓하자 건장한 남자들이 갖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부인께서도 한동안 수도를 떠나 계셨으니, 최근 드레스가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상자에는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눈을 빛내며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목걸이를 집어 드는 후작 부인의 귓가에 이피엘이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부군께도 안부 인사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다가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 덕분에 이피엘은 후작 부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이는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소중한 분이니, 저희가 부를 때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제가…… 그이와 함께 있어야 할까요? 아! 물론 싫다는 건 아니에요. 내 남편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이는 지금 쫓기는 몸이다 보니…….”

“글쎄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데리고 계셔야지요. 남편이시지 않습니까?”

이피엘의 말을 들으며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손톱을 세워 제 손등을 긁었다.

그녀의 눈에는 다이아몬드니, 화려한 드레스니 하는 것들이 더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게 중요하긴 했지만, 자신에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평판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그걸 위해 스페라도 후작과 결혼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깟 것들보다 더 많은 걸 셀바토르 공작이 해 주겠지.’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저택에서 셀바토르 공작을 만났던 때를 생각하며 웃었다. 그녀는 분명 골치 아픈 남편도 지저분한 소문들도 그리고 막대한 빚도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 줄 것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셀바토르 공작가의 자산이 얼마나 되었지? 수도를 전부 사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었지.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 후작 부인은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렇죠. 부디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만한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을 전해 주세요.”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말에 이피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손짓으로 사용인들을 불러 상자를 정리하게 시켰다.

한 하녀가 엘리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아가씨, 제가 방까지 짐을 옮겨다 드리겠습니다.”

엘리가 들고 있는 짐을 달라는 소리였다. 귀족가의 아가씨가 저런 짐을 들고 다니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니까.

그런데 엘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됐어! 이건 내가 들고 갈 테니까 말이야.”

거칠게 하녀의 손을 쳐 낸 엘리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가방을 소중히 안아 들었다.

“어머니, 그럼 제가 원래 쓰던 방으로 가면 될까요?”

“으응? 아아, 그 방은 지금 청소 상태가 흡족지 못하니 일단 내 방을 쓰렴. 예전부터 그 방을 사용하고 싶어 했지? 가장 커다란 창이 있는 동쪽 방 말이다.”

후작 부인이 예전부터 사용하던 방이었고, 엘리가 탐내던 방 중의 하나였다. 자신에게 그 방을 내어 준다는 말에 엘리가 화사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후작 부인 역시 엘리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층을 올라 이피엘이 보이지 않게 되자, 후작 부인은 슬그머니 엘리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가방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엘리, 내 사랑스러운 딸. 무겁지는 않니?”

“전혀요! 작은 상자인 데다가 안에 든 게 가벼워서 전혀 무겁지 않아요, 어머니.”

엘리는 보란 듯 가방을 흔들었다. 확실히 그녀 말대로 가벼워 보였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방 안에 상자가 있다더니,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건가?’

그러면 가방에 굳이 들고 다닐 이유가 없을 텐데. 잠시 엘리를 바라보다 후작 부인은 미소 지었다.

“그래, 가벼워 보이는구나. 하지만 나는 우리 딸 팔이 아플까 봐 걱정된단다. 하녀에게 맡기는 건 어떠니?”

예전에 엘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때의 행동과 말을 그대로 하며 엘리의 뺨을 쓸자, 엘리가 눈을 휘며 웃었다. 엘리는 지금 자신의 어머니를 의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건 정말, 정말 중요한 거라 제가 품에서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품에서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뭐가 들었길래 우리 딸이 그럴까. 황실에서만 내려온다는 귀한 보석일까?”

“후후, 어머니도! 겨우 보석 따위를 제가 이렇게 소중히 할 리가 없잖아요. 저는 이제 곧 아렌도 황자님과 결혼해 황후가 될 몸인데.”

엘리는 한껏 우쭐거리면서 제 품에 있는 가방을 조심스레 손으로 쓸었다.

“이건 저를 황후로 만들어 줄 귀한 물건이에요.”

엘리의 말에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제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을 뿐. 이미 셀바토르 공작가로 보낼 편지 내용은 완성되었으니까.

“자, 이 방이란다. 좀 더 꾸며야 할 테니, 축제가 끝나면 가구와 커튼을 보러 가자꾸나. 벽지도 새로 바르는 게 좋겠지.”

“좋아요! 황실에서 쓰는 것보단 못하겠지만, 그런 거라도 사야겠어요, 어머니.”

두 사람과 그녀들을 따라온 하녀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밑층에서 상자를 옮기며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만 남아 복도에 흘렀다.

“상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헝클어진 밀색 머리, 죽은 듯 흐리멍덩해진 푸른 눈,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황후로 만들 귀한 물건…….”

스페라도 후작의 눈에는 이성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사라졌던 걸지도 몰랐다.

복도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작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방 근처로 걸어갔다.

“못된 것들……. 감히 가주인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나를, 나를, 나를! 배신하고……!”

쿨럭! 마른기침이 복도에 쏟아져 내렸다. 버티기 힘든지 후작의 마른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후……. 후욱…….”

숨을 한 차례 들이켠 후작이 이를 보이며 히죽 웃었다. 누군가 봤으면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을 법한 오싹한 미소였다.

“남편을 배신한 아내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 두 딸에게는 벌이 필요하겠지.”

후작은 제 손에 들린 붉은 마법석을 보며 히죽 웃었다. 전 스페라도 후작이 비상용으로 숨겨 둔 마법석은 다행히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인과 엘리, 그리고 레슬리가 제 발밑에 무릎을 꿇고 울며 비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 훈육. 제대로 된 훈육이 필요하지. 조금 과격하더라도 가족을 가르쳐 제대로 이끄는 게 바로 가주의 몫이지.”

간신히 찾아낸 이 값비싼 마법석을 써서라도 어리석은 아내와 두 딸을 교육해 줘야 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페라도 후작은 손을 꽉 쥐었다.

거기에 엘리가 말하는 저 상자까지 합치면 분명 셋 다 제 밑에서 엉엉 울겠지. 지금 가장 콧대가 높아진 건 엘리였으니까.

“레슬리 그년은 천천히 하도록 하고…….”

후작은 웃으며 모퉁이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어두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은 알 수 없는 곳에 주저앉아 있었다.

상처투성이에 바짝 말라 뼈마디가 튀어나온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끝은 깨지고, 손은 거칠거칠했다.

레슬리는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됐더라. 분명 최고 사제님과 함께 끝까지 서 있던 걸 기억했다. 그런데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대로 기절한 걸까.

‘그럴 만했지.’

피범벅이 된 상황에서 신력을 가진 두 성기사를 공격하고 나니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에 가물가물한 와중에 사제들은 신경 쓰였던 두 사람이었다. 자신이 수습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었다.

그때 자신을 구하러 와 준 어머니는 얼마나 멋있었던가.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든 굳어 버린 다리를 움직여 그 상황을 무마할 수 있었다.

잠시 키득거리다 레슬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 걸까.

어?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어둠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눈 색을 닮은 라일락빛 리본을 매고 눈을 깜빡이더니 인사를 했다.

「안녕!」

“어어……?”

움직이는 건 알았다. 늘 자신의 발치에 숨어 있던 어둠이는 토끼 인형을 툭툭 건드리며 놀았으니까.

그런데 말까지 하다니?

「안녕!」

레슬리가 대답이 없자, 어둠이가 더 크게 대답하더니 손까지 흔들며 윙크까지 해 주었다.

“아, 안녕.”

레슬리가 주저앉은 채로 손을 흔들어 주자, 작게 키득거린 어둠이가 통통 뛰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레슬리의 무릎 위에서 시선을 맞췄다. 올라오기 힘든지 낑낑거리며 간신히 올라왔는데, 그때마다 레슬리의 낡은 옷이 바스락거렸다.

레슬리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어둠이가 동그란 눈을 똑같이 깜빡거렸다.

어떻게 움직이고 말하는 걸까. 거기에 윙크까지. 레슬리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어둠이가 동그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레슬리의 이마에 팔을 가져다 대었다.

「너는 잘하고 있어.」

“……?”

「정말이야, 우리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우리?”

「그래, 우리.」

거기까지 말한 어둠이가 다시 키득거리며 레슬리를 꼭 끌어안았다. 비록 토끼 인형의 모습이라 레슬리의 목에 매달린 꼴이 되었지만, 어쩐지 커다란 사람에게 안긴 것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레슬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이럴까. 레슬리는 급하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었다.

어둠이는 이해한다는 듯 짧은 팔을 움직여 레슬리의 목 뒤를 토닥였다. 아마도 등을 토닥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팔이 짧아 등까지 닿지 못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일이야. 그러니 네가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거기까지 말한 어둠이가 다시 몸을 떼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너는 너무 비정상적으로 거기에 몰두하고 있는걸. 우리는 네가 걱정돼, 레슬리.」

그 말을 듣자마자 모래를 씹은 듯 레슬리의 입안이 까끌까끌해졌다.

“하지만 나는…….”

천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아이가 그 불구덩이 속에 던져졌을까. 티끌보다도 더 작은 힘들이 모여 자신을 구해 낸 걸 보면 생각보다도 더 많을지 몰랐다. 그렇게 살아난 게 자신인데…….

「저리 가라, 부정적인 생각!」

어둠이가 다시 팔을 휘둘러 레슬리의 이마를 쳤다. 솜으로 가득한 팔이라 전혀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안이 벙벙해져 방금까지 몰려오던 부정적인 마음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힘들겠지만, 그것까지 몰아내야 해. 그게 마지막 관문이야. 져서는 안 돼. 알았지? 너를 사랑해 줄 가족을 간신히 만났잖아.」

레슬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둠이가 동그란 눈으로 윙크를 보내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비록 우리가 너를 아프게 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네 편이야.」

자신을 아프게 한다니 그건 무슨 소리일까. 묻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레슬리의 손끝과 발끝부터 환한 빛이 감싸고 있었다. 어디선가 느껴 본 듯한 따스한 빛을 보자마자 어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갈 시간이구나.」

레슬리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 내려온 어둠이가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귀가 손과 함께 흔들렸다.

「그럼 안녕! 여기는 자주 오면 안 돼!」

어둠이의 윙크와 인사를 끝으로 레슬리는 완전히 어둠에 먹혔다.

“……!”

레슬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뜨니 자신의 침대 위였다. 폭신한 베개와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살펴보았다. 적당히 살이 오르고 상처 없는 보기 좋은 하얀 손, 자신의 손이었다. 손톱도 잘 다듬어져 있었고, 매일 마델이 신경 써서 장미 크림을 발라 줘, 손이 보드라웠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손이었다.

방금 그건 꿈이었을까. 꿈이라면 왜 그런 꿈을 꿨을까.

“레슬리 양?”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신의 침대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레슬리가 놀라 눈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으읏…….”

그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이었다.

“조심하세요.”

편한 옷을 입은 콘라드가 레슬리가 천천히 침대 헤드에 기댈 수 있게 도왔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면 두통이 생길 수 있어요. 목이 마르시지요?”

쿠션을 깔아 편히 몸을 기대게 한 후 콘라드는 바로 물 한 컵을 따라 레슬리에게 건넸다.

레슬리는 물컵을 받아 들고 머뭇거리며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목이 마르긴 했지만, 그보단 왜 콘라드가 여기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혹시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레슬리의 생각을 읽은 듯 콘라드가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그…… 최고 사제님께서 끝을 보시겠다고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대답했다. 그러자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레슬리 양은 대기실까지 돌아오신 후 쓰러지셨습니다.”

“대기실까지요?”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광장에서부터 대기실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평소라면 모르지만, 정신을 잃은 자신이 거기까지 걸어갔단 말인가?

“레슬리 양은 최고 사제님을 부축까지 하며 움직였고,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진정되었습니다.”

콘라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최고 사제가 그렇게 말을 했다지만 최고 사제나 아라벨라가 쓰러졌더라면 불안은 바로 터져 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당당히 서서 제 역할을 끝까지 해냈고, 그 모습은 사람들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에 대기실에서 쓰러지셨고…….”

가벼운 발작이 일어났다. 발치에 고여 있던 어둠이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어둠이 불안정하다는 걸 눈치챈 루엔티가 빠르게 사람들이 대기실에 들어오는 걸 막지 않았더라면, 레슬리가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질지 몰랐다.

레슬리는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이 이불을 적시고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발작이라고? 갑자기 꿈속에서 어둠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록 우리가 너를 아프게 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네 편이야.’

그게 이 뜻이었을까?

“걱정 마십시오. 발작은 곧 가라앉았으니까요.”

콘라드는 물컵을 치우더니 자신의 손수건으로 레슬리의 손을 닦았다. 그러고는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며 화사하게 웃었다.

“거기다 저도 있으니까요.”

발작이 일어난 어둠을 진정시켜 준 게 콘라드의 신력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경이 여기 계신 거군요.”

레슬리는 콘라드가 셀바토르 공작저, 자신의 방에 있는 이유를 이해했다. 혹여나 몰라 따라온 거겠지.

“네, 그렇죠. 혹여나 다시 발작이 일어나지 않을까, 따라왔습니다.”

콘라드는 새 컵에 다시 물을 따라 레슬리에게 건네주었다. 물컵을 건네받으며 레슬리를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공작님은 회의를 다녀오셨고, 사이레인 님은 밤새 여기에 계셨습니다. 공작님이 오셔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지요.”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자신 얼굴에 티가 난 걸까?

“셀바토르 경은 수색을 나가셨고, 마법사님은 신전 측 사람들과 함께 에피알테스에 대해 논의 중입니다.”

아아, 그렇구나.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이레인이 밤새 여기에 있었다는 말은…….

“혹시 경도 밤새 여기 계셨던 건가요? 피곤하셨을 텐데…….”

“전혀요.”

레슬리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묻자, 콘라드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보고 싶었거든요, 슈야.”

“쿨, 쿨럭!”

갑작스러운 고백에 결국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물컵에 든 물이 출렁거리며 다시 이불을 적셨다.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괜찮으신가요?”

콘라드가 몸을 일으켜 레슬리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손길에 레슬리는 눈이 핑글 도는 게 느껴졌다.

“그, 왜…….”

엉망진창이 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콘라드가 눈을 휘며 웃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야 축제 때 뵙고 제대로 뵙질 못해서요. 답도…… 궁금하긴 해서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야기를 하자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콰앙! 그와 동시에 레슬리 방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안 돼!”

문밖에서 엿듣고 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사이레인이 포효했다. 커다란 방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고 방에 걸린 액자들이 흔들거렸다. 그의 뒤로 제나와 마델, 바타와 자일로가 슬금슬금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이레인이 다시 이를 갈며 크게 외쳤다.

“내 딸은 안 돼!”

레슬리는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소리가 어느 정도인지 오늘 체험할 수 있었다. 저절로 귀가 먹먹해지며 눈앞에 별이 반짝거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앞이 핑글거렸다.

후욱, 사이레인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콘라드를 노려보았다.

그래, 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책에서 곰들이 서로 싸울 때 저런 몸짓을 한다고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지.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 경.”

뜯어낸 문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 한구석으로 던지며 사이레인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폭신한 러그가 발소리를 감춰 주었는데도 어쩐지 쿵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절로 입안에 침이 말라 갔고, 그건 아직도 숨어 있는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사이레인 님.”

그런 사이레인의 앞에서 콘라드는 밝게 웃었다. 환한 미소가 서린 얼굴에 사이레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콘라드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콘라드는 잘 자라 보통의 남자들보다는 훨씬 큰 편이었지만, 사이레인의 앞에서는 작디작은 편이었다.

“말해 두지만 내 딸은 안 되네.”

으지직. 왜 의자를 들고 오나 했더니 이럴 용도였던 모양이었다. 사이레인의 손안에서 나무 의자 등받이 부분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맥없이 우그러들었다.

“내가 축제 날 경과 내 딸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지.”

사이레인 역시 자신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콘라드를 안쓰럽게 여겼다. 아버지의 배신을 알리러 온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이번 한 번만을 외치며 꾹 참았었다. 아니, 사실은 쫓아가려고 하다가 아내님에게 목덜미를 잡혀 못 간 거지만.

사이레인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둘이 내보내진 않았을 걸세.”

남은 의자가 사이레인의 손안에서 바스러졌다. 분명 아까까지는 정교한 문양까지 들어간 원목 의자였는데, 지금은 그저 나뭇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잠시 의자였던 나무 조각을 바라보다 콘라드가 옅게 웃었다. 문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제발을 외치며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실망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사이레인 님. 그렇지만 저는 레슬리 양이 좋습니다.”

환한 웃음, 그리고 폭탄.

아직도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입을 벌리고 경악을 뱉었고, 그건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이레인은 콘라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 그렇단 말이지…….”

두 사람 사이에 살기가 감돌았다.

마델은 재빠르게 사제에게 보낼 전보를 찾았고, 그나마 사이레인을 말릴 수 있는 제나는 문 뒤에서 튀어 나갔으며, 자일로는 부리나케 약 상자를 가져왔다. 다른 사용인들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듯, 하얀 천과 무언가를 씻어 낼 물이 가득 들은 양동이를 가져왔다.

사이레인의 앞발이 들리고 콘라드가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레슬리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마법의 단어와 함께.

“아, 아빠!”

“음……?”

사이레인의 손이 멈추었다. 번뜩이던 눈동자가 레슬리가 평소에 알던, 따스하고 귀여운 아버지의 눈으로 돌아왔다.

“우리 레슬리 지금 뭐라고…….”

“아빠.”

조금은 어색하게 사이레인을 부른 레슬리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대로 걸어가 사이레인의 품에 폭 안겼다.

“이건 제가 나중에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경은 저를 치료해 주신 분이잖아요. 혹여나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제발요, 아빠.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레슬리가 두 손을 꼭 모으고 시선을 살짝 올려 사이레인을 올려다보자 사이레인의 거대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아빠가 자꾸 소리 지르면 저 무섭단 말이에요…….”

“크, 크윽!”

커다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이자, 사이레인이 심장을 붙잡고 쓰러졌다.

쓰러진 사이레인에 콘라드와 사용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달려오던 제나는 사이레인을 말리려고 손을 뻗은 상태로 굳었고, 자일로는 약병이 굴러다니는 것도 모르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레슬리 홀로 당당히 서 있었다.

마법의 단어가 불러온 레슬리의 승리였다.

***

“푸하!”

테펜텔이 웃자 입안에 가득 들어 있던 쿠키 가루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는지 셀바토르 공작은 몸을 젖힌 상태였고, 제나 역시 가지고 있던 서류로 잽싸게 얼굴을 가렸다.

오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이레인만 얼굴을 구긴 채 테펜텔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쿠키 가루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으하하! 그래서 미래의 사윗감에게 져서 오셨어요?”

“그놈은 내 사위가 아니라니까!”

사이레인이 격하게 반항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테펜텔은 귀를 후비적거리더니 남은 쿠키를 마저 입안에 넣었다.

“이미 졌잖아! 제나, 그 사윗감 이름이 뭐랬지? 아이테라? 아하, 콘라드! 좋은 이름이야. 용병 왕 사이레인을 이긴 남자, 콘라드 아이테라에게 건배!”

새 쿠키를 집어 든 테펜텔은 마치 술잔을 부딪치듯 쿠키를 높게 들고는 입안에 쏙 넣었다.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 경입니다, 테펜텔 님.”

“그거나 이거나! 두 글자 빠진다고 사람에게 문제 생기는 건 아니잖아?”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도끼를 들고 올 듯 몸을 들썩거리는 사이레인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웃어 준 테펜텔은 말없이 앉아 있는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 셀바토르 공작님은 그 아이테라가 마음에 드시나?”

테펜텔의 말에 공작이 옅게 미소 지으며 테펜텔이 가져온 물약을 만지작거렸다.

“아이테라 경……. 좋은 아이지.”

손길에 따라 출렁이는 초록빛 약을 보는 공작의 눈가가 가늘어짐과 동시에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좋은 아이지.”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좋은 아이라고 말하며 웃은 것뿐인데 그 미소와 말이 어쩐지 오싹했다.

마구잡이로 웃던 테펜텔 역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명복을 빌었고, 사이레인만 반짝이는 눈으로 제 아내님을 바라보았다. 제나는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한 컵을 테펜텔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말이야. 생각보다 우리 셀바토르 공작님께서 가만히 계시네. 평소였다면 그 메데이아인가 뭔가 하는 태후부터 머리를 쳐 버렸을 텐데.”

쿠키를 다 먹은 테펜텔이 손에 묻은 쿠키 가루를 옷에 털더니 제 앞에 놓인 물약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적이 아니잖나. 겉으로는 아군이니까.”

“흐응, 일단 목부터 치고 너랑 피스토레가 수습하면 되지 않을까?”

테펜텔의 말에 공작이 낮게 웃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태후라고. 그렇게 덧붙이던 공작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뭐, 솔직히 지금이라도 네 말대로 하고 싶긴 한데.”

메데이아, 그 여자는 꽃이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호수 전체를 장악해 버린다는 란다의 꽃.

란다의 꽃은 오랫동안 호수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독과 날카로운 가시까지 갖추었다. 어설프게 꽃만 따 낸다면, 호수 곳곳에 퍼져 버린 뿌리는 순식간에 독을 풀고 가시로 호수를 죽일 것이다.

꽃이 가진 위험 정도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황실의 힘을 빌리면 그다지 큰 위협은 아니었다. 문제는 꽃이 악몽을 품어 버린 데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공작은 몸을 낮추고 기다렸다. 가시를 쳐 내고 독을 제거할 방법을 찾기까지.

“이제야 손에 넣었네.”

공작의 말에 테펜텔이 우쭐거리듯 미소 지었다.

“이 빚은 단단히 받아 낼 거야, 셀바토르.”

“기대해도 좋아, 내 친구. 네 상상보다 더 많은 걸 해 주지.”

테펜텔의 답에 같이 미소 지으며 공작은 손을 까딱거렸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제나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공작의 말을 기다렸다.

“데려온 아이들에게 먹여 보도록 해.”

“아이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에피알테스에게 당한 걸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있어.”

“벌써 당한 사람들이 있다고?”

테펜텔의 물음에 사이레인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 두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해리언 모티 티베리아, 밀튼 가트 도베리엄.”

종이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앳돼 보이는 소녀와 소년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티베리아 가문과 도베리엄 가문의 상황이, 그리고 가장 밑에는 두 사람의 현 상태가 적혀 있었다.

“두 사람 다 최초의 사제들 후보에 뽑혔고 1차 시험을 통과했지만, 2차에서 떨어졌지. 그때 메데이아의 눈에 든 모양이더군.”

사이레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는 이렇게 어린아이들로 장난을 치는 후작 놈이나 메데이아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찾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을 텐데, 메데이아가 흔적을 지워 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좀 걸렸어.”

“그쪽에도 쓸 만한 패가 있나 보지?”

테펜텔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두 장을 끌고 와 살펴보며 묻자,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피엘이라고, 그분이 이트바나서부터 데려온 아이입니다. 생각보다 능력이 뛰어나더군요.”

“흥, 꼭 이런 놈들이 인복이 있더라. 그래서 더 골치가 아파지지.”

테펜텔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꼭 메데이아 같은 놈들 주변에 괜찮은 인물이 많았다. 도대체 그런 사람의 어디에 끌리는 건지. 불량 식품에 끌리는 아이들의 마음인가?

잠시 헤아려 보려고 했지만, 곧 관두었다. 쓰레기들의 생각을 자신이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두 가문 다 상황이 최악이로군.’

상단 같은 건 없고 수확량에 의존한 수입, 거기에 계속된 흉작에 자연재해.

보통 가문 역시 버티기가 힘들 텐데 두 가문 다 자금을 얼마 보유하지 못한 곳이었다. 분명 크게 휘청거렸을 것이고, 그건 아직 어린 두 사람의 어깨에도 책임감을 올려 주었겠지.

그러던 상황에 최초의 사제 후보로 뽑혔다면…….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목숨을 걸었을 수도 있겠네.”

그런 상황에서 주어진 단 하나의 빛이 두 사람에게 얼마나 감미로웠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차 시험에 붙으며 그 희망은 더욱 비대해졌을 것이고, 희망이 부풀고 부풀어 가장 크게 차올랐을 때 펑 하고 터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타난 메데이아.

“……진짜 질 나쁘네. 일부러 떨어트렸을 가능성도 있겠어. 길들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말이야.”

테펜텔이 짜증 난다는 듯 짧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마지막에 적혀 있는 아이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일그러진 얼굴과 손과 발은 퉁퉁 부어 마치 나무토막 같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에피알테스에 걸린 애들은 저택에 들였다는 말이야?”

“그래.”

셀바토르 공작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에피알테스를 다루는 기록은 내게 없지만, 악몽이 퍼트리는 병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공작의 말에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나가 직접 모든 서류와 기록을 읽었는지 그녀의 눈에는 작게 눈 그늘이 져 있었다.

“에피알테스에 걸렸을 때의 증상과 두 분의 증상은 다릅니다. 에피알테스에 감염이 되면 얼굴에 열꽃이 핍니다. 그 뒤 낯빛이 어두워지며 눈과 입 그리고 코에서 피를 흘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자면 에피알테스의 잠복기는 길지 않았으며, 감염자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악몽에 씐 사람들은 신체에서 작은 열꽃이 피어나고, 며칠이 지나면 얼굴에 있는 모든 곳에서 피를 쏟기 시작하며, 피가 전부 빠져나가 죽기 전까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다. 누가 듣기에도 악몽 같은 설명이었으나, 제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두 분은 얼굴이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일그러진 것, 신체가 검게 변하고 부풀어 오른 것, 그리고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았을 때 에피알테스 증상과 엇갈립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말하던 제나가 한 손가락을 남겨 두고 생긋 웃었다.

“마지막으로 지금 두 분의 병은 전염성이 없습니다.”

“잉?”

테펜텔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확신할 수 있어.”

셀바토르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도 물약이 들려 있었다.

“전염성이 있었더라면, 분명 레슬리가 가장 먼저 전염됐을 테니까.”

높은 신력을 가지고 있는 최고 사제와 죽어 버린 두 성기사, 봉인의 방 근처에 죽어 있던 두 명의 사제 그리고 레슬리.

에피알테스가 완전히 깨어나 그 힘을 퍼트릴 정도였더라면 가장 먼저 레슬리가 에피알테스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 후 레슬리의 몸을 타고 흘러 밖으로까지 퍼졌겠지.

쩌저적―!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공작의 손안에 있던 유리병에 금이 가더니 이내 산산이 깨져 버렸다.

“여보!”

놀란 사이레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초록빛 물약에 붉은 피가 섞여 흘러내렸다.

“…….”

잠시 덤덤히 그걸 바라보고 있던 공작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나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아직도 토론 중인 사제들에게서도 전염병은 없다고 확정은 들었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두 사람의 병이 에피알테스에 관련된 건 분명하지. 약 효과를 실험해 보기엔 꽤 좋은 기회야, 테펜텔.”

제 손을 닦아 내며 공작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테펜텔이 작게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나는 에펜타니 백작과 함께 두 사람에게 가 보도록 하지. 가는 김에 뭐 자일로도 불러오고.”

테펜텔이 나가기도 전에, 사이레인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공작에게 다가왔다. 그의 험악한 얼굴은 안쓰러울 정도였고 번뜩이는 눈에서는 곧 눈물이 떨어질 듯 보였다

“여보, 괜찮아?”

“응, 크게 다친 건 아니야.”

공작이 괜찮다는 듯 제 남편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러게 왜 그랬어. 어린 나이도 아니고.”

남편의 잔소리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레슬리가 그 차가운 신전 바닥에 쓰려져 있던 걸 다시 떠올리니까…….”

자신이 갔을 때 레슬리는 그저 기절한 것뿐이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 데다가 두 성기사를 기절시키느라고 다른 곳도 아닌 그 복도에서 힘을 쓴 것, 그리고 피와 트라우마……. 여러 상황 때문에 순간적으로 탈진한 것이다. 그래서 공작이 안아 들자마자 바로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에피알테스에게 감염됐던 거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얀 의식복을 물들이던 게 최고 사제의 피가 아니라 레슬리의 피였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우리도 갈까. 자일로는 동쪽 별관으로 오라고 해 줘.”

두 사람을 데려다 놓은 별관에 가 볼 참인지 공작이 몸을 일으켜 먼저 문을 나섰다. 잠시 자신의 아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사이레인이 아직 남아 있는 제나를 보았다.

“제나, 저번에 맡긴 내 도끼는 어떻게 됐지?”

흉흉한 목소리, 번뜩이는 눈동자. 방금까지 쿠키 가루를 맞고 자신의 아내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나는 오랜만에 보는 사이레인의 모습에 생긋 미소 지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사이레인 님.”

***

의식을 마지막으로 4년간 준비했던 아라벨라 축제는 막을 내렸다. 거리에 남은 것이라곤 축제의 마지막 날을 너무 즐기다 길거리에 쓰러져 잠든 이들과 축제의 잔해, 그리고 드디어 문을 닫은 상점들이었다.

아라벨라 축제 내내 음악 소리와 불빛이 끊이지 않았던 데다가 어제는 화려한 불꽃까지 터졌던 탓에 거리는 더욱 비어 보였다.

“으차.”

한 남자가 축제 기간 내내 튀김 빵을 팔았던 가판대를 상점 안으로 들여놓으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거리가 텅 비었군.”

“축제가 끝났으니까요.”

그의 아내도 자잘한 물건을 상점 안에 들여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 되어 성문이 열리면 다른 곳에서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빠져나갈 테니 더욱 거리는 비겠네요.”

“그렇겠지.”

상인은 뭔가 아쉬운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텅 빈 거리를 바라보았다.

“쯧……. 뭔가 평소보다 더 비어 보이기는 하는군. 이틀 전 일 때문인가.”

수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은 상인은 아주 어릴 적부터 두 아이를 다 키워 낸 지금까지, 여러 번이나 아라벨라 축제를 즐겼다. 그렇지만 이번만큼 거리가 비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얼마 전 의식 사건이 컸겠지.

그도 가족들과 함께 의식을 구경하러 갔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여타 의식과 같았지만, 끝에 악독한 자가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를 공격했다. 그 불안감을 지우려는 듯 그날 밤의 불꽃과 다음 날 이뤄진 악단과 춤꾼들의 행진은 더욱 화려했다.

“그래도 두 분 다 많이 다치지 않으신 것 같아 다행이더라고요.”

비록 피가 묻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멀쩡했고, 그 뒤에 바로 황제가 수색령을 내렸다. 강경한 대처에 사람들은 마음을 놓았다.

“누군지 몰라도 의식을 망치고 제국을 노리다니, 반드시 벌을 받을 거예요.”

아내의 말에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르카디우스 제국을 노린단 말인가. 제국은 오랫동안 존재했고, 많은 역경을 이겨 냈다. 그리고 적어도 상인이 기억하기로는, 황제가 자신들을 괴롭힌 적도 없었다.

“그렇겠지.”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어수선한 상점 주변을 정리하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응?”

그런데 이번엔 아내가 손을 멈추고는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텅 빈 거리를 휘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돌아가는…… 사람인가?”

저절로 시선이 가는 남자였다.

남자의 옷차림이 낡거나 더럽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남자의 걸음걸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꺄악!”

다가오는 폼이 위험하다 싶었더니, 결국 남자는 다른 상점에서 쌓아 둔 상자들과 부딪쳤다. 큰 소리를 내며 상자들이 무너졌고, 남자의 몸도 크게 휘청거리다 바닥으로 쓰러졌다. 남자가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이 길거리에 쏟아졌다.

“저, 저기. 괜찮나요?”

한동안 남자가 미동이 없자, 상인과 아내는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다가갔다. 하필이면 주변엔 술주정뱅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다친 거면 지금 경비대를 불러올 테니 같이 신전으로 가요. 방금 지나갔으니 분명 아직 이 근처에…….”

“신경 쓰지 마!”

남자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망토가 벗겨지면서,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 아래에 밀색 머리가 드러났다.

“나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알았어?”

일어나라고 내민 상인의 손을 거칠게 쳐 내며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이보쇼. 우리는 그쪽을 걱정해서 그런 건데 말이 심하지 않소.”

상인이 짜증을 내자, 가방에서 나온 붉은 돌과 사슬, 그리고 낡은 나무 상자를 다시 주섬주섬 집어넣던 남자가 고개를 홱 돌려 상인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천것이 나에게 말을 붙이는 거냐.”

“뭐? 천것?”

남자의 말에 상인이 팔을 걷고 남자에게 다가가자 상인의 아내가 남편을 말렸다.

“여보.”

고개를 저으며 아내는 작게 속삭였다.

“눈 못 봤어요? 저런 눈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사람 찌르고 도망갈 눈이라니까.”

아내의 말에 상인은 소중하게 나무 상자를 끌어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시 푹 눌러쓴 망토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오싹할 정도로 광기를 띠고 있었다.

상인이 아내의 말에 수긍해 뒤로 물러나자,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킬킬거렸다.

“거 보라고.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엄청난 사람인데!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이 르카디우스 제국이 건국됐을 때부터 황제를 모셔 온…… 아주아주 중요한 가문이라고. 그리고 난 그 가문의 하나뿐인 가주…….”

사실 상인은 스페라도 후작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 번화가에서 장사를 한 사람이었고, 후작은 종종 거리에 들르고는 하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길거리에 주저앉아 오래된 나무 상자를 끌어안고 중얼거리는 남자가 그 후작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상인의 기억 속 스페라도 후작의 모습은 더없이 세련되고 깔끔한, 말 그대로 귀족적인 남자였으니까.

그래서 스페라도 후작가가 자랑하는 밀색 머리를 봤음에도, 푸른 눈을 보았음에도, 상인과 아내는 정신 나간 부랑자라며 고개를 저었다.

“가요, 여보. 아무래도 미친놈 같아.”

아내는 상인의 등을 떠밀었다. 상인 역시 잠시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자신의 가게로 돌아갔다.

“두고 보라고…….”

스페라도 후작은 엘리가 잠자는 동안 훔쳐 낸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엘리를 황후로 만들 정도면 아주 귀한 물건이겠지.

잠에서 깨어난 엘리가 이게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아내와 함께 얼마나 괴로워할까. 그리고 제 아내는 그런 엘리를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눈물범벅이 된 엘리와 후작 부인의 얼굴을 생각하자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입술 끝을 올려 후작은 이죽이죽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고요했고, 후작은 정신이 나가 있었으며, 상인과 아내는 혀를 차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누구도 후작의 품에 안겨 있는 나무 상자의 두 번째 걸쇠가 풀리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

“아아악!”

최근 얼마 동안 저택이 조용해서, 그리고 어제 엘리가 돌아와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건 아주 완벽한 착각이었다.

단 몇 시간 만에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엘리가 소중히 들고 자던 상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구냐고!”

엘리는 커다란 침대 위에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녹음이 가득한 눈동자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방 안의 꼴은 처참했다. 모든 옷과 소지품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베개에 이불까지 갈가리 찢겨 있었다.

“안 돼, 나는 이제 물러날 곳이 없다고…….”

엘리의 절망이 문 밑으로 새어 나왔지만, 그 누구도 엘리를 다독여 주지 못했다. 밖도 방 안과 다름이 없었다.

“밤에 누가 들어오는지 보지 못했나? 아무도 보지 못했냔 말이다!”

엘리의 경호로 따라온 에타이가 매섭게 사용인들을 다그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용인들은 몸을 잘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멍청한 것들이, 도둑이 드는지도 모르고 잠을 처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윽박지르듯 사용인들을 거칠게 흔들었다.

“마님께서는 밤중에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걸 금지하셨습니다. 그, 그래서 저희는 그 말에 따라 자정의 종이 울리면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하인이 외치자 에타이의 시선이 계단 위에 서 있는 후작 부인에게 향했다. 그녀의 뒤에는 한 명의 하녀가 겁을 먹은 듯 잘게 떨고 있었다.

“……부인, 이 말이 사실입니까?”

예를 차린다고 차렸지만 시선은 불손했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불량한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요. 내가 그렇게 일렀답니다. 그분께서 저에게 맡긴 손님 때문에요.”

후작 부인의 말에 에타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사용인들을 놔주었다.

그녀가 자정의 종이 울리면 경비를 위한 몇 인물을 빼고 전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이유는 스페라도 후작 때문이었다.

그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늘 정해진 층에서만 움직였고, 그런 그가 마음대로 움직일 때는 자정에서 샛별이 뜰 때까지였다.

“그렇군요. 쳇. 야! 밖의 놈들을 족치러 가자! 경비를 선다고 얼쩡거린 놈들은 뭔가를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에타이들은 투덜거리며 밖으로 몰려나갔고, 남은 사용인들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다독이면서 제 일터로 흩어졌다.

계단 위에서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후작 부인에게 하녀가 속살거렸다. 바로 전에까지 에타이를 보며 덜덜 떨었던 사람이었다.

“주인님께서 에피알테스의 행방을 궁금해하셨습니다.”

에피알테스에 관련된 자료를 셀바토르 공작가로 보낸 그녀였다. 후작 부인이 완전히 셀바토르 공작에게 넘어온 후로 그녀가 후작 부인의 전속 하녀가 되었다.

부인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하녀는 말없이 한 발짝 뒤에서 후작 부인을 따랐다.

“그이가 없어요. 아무래도 그이가 가져간 모양이에요.”

“그분께서는 무엇인지 알고 가져가신 걸까요?”

하녀의 물음에 부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뜻은 부정이었다.

“아마 엘리가 귀중하다고 하니 눈이 뒤집힌 거겠지요. 아아, 싫어요. 자기 자식을 잡아먹고 살아남으려 하다니. 끔찍해, 소름 끼쳐요. 어떻게 저런 걸 남편이라고 난 여태 살아온 걸까? 속은 거야. 속은 거라고. 결혼 전에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단 말이야.”

후작 부인은 말끝을 흐렸다. 처음은 하녀에게 말한 것이었지만, 중간부터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주인님께서는 안정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죠, 안정된 삶.”

후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말도, 돈도 없어지지 않았어요. 멀리 갈 생각은 아니었겠지요. 정체를 들킬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성 밖으로도 못 나갈 거고…….”

머리를 굴린 후작 부인이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래! 비밀 저택, 그게 있어요. 성 밖에 선선대 스페라도 후작이 몰래 만들어 놓은 저택이 하나 있어요! 교묘하게 숨어 있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 힘들 거예요.”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후작이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비밀이었다. 다음 날 슬며시 집사를 떠봤지만 그 역시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아는 사람은 후작 한 명뿐인가요?”

하녀가 다급히 묻자 부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주인께 연락을 드리러 가겠습니다.”

“부디 내 안부도 전해 줘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하녀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빨래터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 우리 아가에게 사 주는 새 드레스니 조심해서 세탁하도록 해.”

“네, 마님.”

복도에서 작게 소곤거린 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엘리를 위한 드레스 때문이듯 보이게 대화를 마친 하녀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꺄악! 아가씨, 진정하세요!”

엘리가 이젠 복도까지 나와서 패악을 부리는지 거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펴졌다.

“쯧.”

소음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듯 후작 부인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제 방으로 들어오고 바로 방의 문을 잠그자 비명이 옅어졌다.

부인은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비적비적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은 이제 곧 이 지옥을 빠져나갈 것이다.

***

“어둠아.”

레슬리는 침대에 엎드려 토끼 인형을 불러 보았다. 레슬리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침대 밑에 있던 어둠이 슬그머니 인형의 고개를 건드렸다. 그러자 마치 토끼 인형이 살아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이상한 꿈을 꿨는데. 네가 말하는 꿈이었어. 그리고 나를 안아 주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줬어.”

레슬리의 물음에 어둠이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자신은 모른다는 듯. 하지만 꿈에서처럼 말을 한다든가, 폴짝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든가, 눈을 깜빡거리는 행동은 없었다.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싸움하듯 어둠이를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면 잠시라도 눈을 깜빡이지 않을까. 한참을 노려보았지만, 인형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 다른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역시 꿈이었나?”

레슬리는 인형을 높게 치켜들며 몸을 빙글 돌렸고, 허공에 매달린 인형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흐음.”

레슬리는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낡은 옷과 여윈 손, 상처투성이였던 몸, 그리고 익숙한 장소.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레슬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이가 움직이고 말도 하고 윙크도 한 게 아직도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루 기절해 있었으면 됐어.’

레슬리는 폭신한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아무도 없네?”

언제나 많은 사용인으로 복작이던 복도가 텅 비어 있었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다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어머니나 아버지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니면 두 오라버니나 제나라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야 해.’

레슬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콘라드는 방을 나서기 전 레슬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두 배반자를 빠르게 상대하느라고 몸이 상한 겁니다. 아무래도 배신자라고는 했지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좀 더 누워 있을 것을, 잠자리에 들 것을 그리고 쉴 것을 거듭 부탁하고 방을 나섰으나, 레슬리는 이번만큼은 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레슬리는 빠르게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어머니는 집무실에 계셨으니까 그리로 가면 만날 거라는 작은 믿음이 있었다. 계시지 않더라도 가는 길에 분명 누군가를 마주칠 테고 그러면 붙잡고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확실한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집무실로 가기도 전 레슬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살짝 열린 방문에서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방이 무슨 용도였지……?’

레슬리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한참 동안 기억을 뒤지고 나서야 이 방이 손님을 위한 방이라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워낙 손님을 받지 않는 저택이다 보니 레슬리마저 방의 용도를 잊어버린 것이다.

머쓱해진 레슬리는 눈을 굴리다가 슬그머니 몸을 기울여 문에 붙였다. 작게 흘러나오던 대화 소리가 조금 더 잘 들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베스라온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 베스라온의 목소리가 낮기는 했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그보다 한층 낮아진다는 걸, 늑대가 그르렁거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걸 레슬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베스라온의 목소리가 그런 목소리였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친아버지를 잡아서 사형대로 내모는 일인데, 네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사제 홀로 신전에 그렇게 많은 이들을 숨겼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 여기에는 아버지가 힘을 썼을 겁니다. 황가와 셀바토르 공작저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는 게 저희 아이테라 가문이니까요.”

“…….”

“거기다 할아버님도, 저도, 높은 신력을 가지고 있어 신전과 친분이 두텁습니다. 분명 이번에 메데이아 태후 폐하와 데비엔 고위 사제님을 도운 건 저희 아버지일 겁니다. 그러니 현혹된 사제님들도 제 말이라면 듣겠지요. 정확히는 아이테라 가문의 인장을 믿는 거겠지만요.”

콘라드의 목소리는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그러니 저도 가야 합니다, 경. 제발요. 아버지의 잘못을 제가 수습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보다 아버지의 생각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버지를 제가 막고 가문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겠습니다.”

“지금 아이테라 대공가에는 대공비와 경의 동생도 있어. 두 사람 앞에서 아버지를 붙잡을 셈인가?”

“네, 그러겠습니다. 아버지를 잡고 악몽을 수습하는 데 저를 써 주십시오, 경.”

“추후 가문의 처벌 때문이라면 경이 이렇게까지 희생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어머니와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지. 두 분은 분명 대공비와 경, 그리고 경의 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실 거다.”

“아니, 아닙니다.”

그 뒤는 옅은 침묵이었다. 비록 문 뒤에 숨어 엿듣고 있기에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지만, 레슬리는 쉽게 문 뒤의 상황을 그려 낼 수 있었다.

분명 베스라온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에 작게 주름을 잡고 있을 것이고, 콘라드는 얼굴을 찡그린 채 괴로워하고 있겠지.

“우리 가문의 일을 제가 처리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문에서 나온…… 반역자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제가 처리하게…… 해 주십시오.”

한 마디 한 마디가 괴로운 듯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부탁드립니다, 셀바토르 경.”

“하아.”

깊은 한숨이 베스라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알았다. 어머니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감사합니다.”

“경을 사지로 내몰지도 모르는데, 감사는 무슨.”

베스라온이 다시 한숨을 흘렸다.

“수도 외곽에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에 후작이 있을 거란 제보가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은 축제가 끝나 쓰레기를 성 밖으로 운반할 거다.”

이어지는 베스라온의 말에 굳은 건 레슬리였다.

대화에 집중해 밖에 레슬리가 있다는 걸 모르는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 측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후작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더군. 아예 누가 가져갔는지를 모르는 상태야. 그만큼 그들은 후작을 숨기고 방치했으니까.”

지금까지 대화를 종합하자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후작이 에피알테스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거기다 성 밖으로 나갈 준비까지 마친 듯 보였다.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후작을 통해 에피알테스를 빼낸 거지? 그리고 후작은 에피알테스를 가지고 메데이아를 배신한 건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남자다웠다. 늘 가문을 위해서라고 외쳤지만, 결국 그 위에는 자신만 혼자 오롯이 있었다.

‘더러워.’

레슬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차갑게 피가 식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저런 남자에게 복수심을 불태우지 말라는 거야.

꿈에서 어둠이와 나눴던 대화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레슬리에게 이 사실은 비밀이야. 레슬리는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어…….”

베스라온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레슬리는 달렸다. 폭신한 슬리퍼가 벗겨져 대리석 바닥을 맨발로 달리자 발소리가 울려 펴졌다. 햇빛을 한껏 머금은 은발이 빛을 뿌리며 공중에 흩날렸다.

“레슬리?”

뒤늦게 알아차린 베스라온이 방을 나왔지만, 레슬리는 멈추지 않고 달려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레슬리!”

“어머니!”

베스라온이 번쩍 레슬리를 안아 들기 전에 레슬리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문이 벌컥 열리고 집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시선이 베스라온과 레슬리에게 닿았다.

“무슨 일이니.”

집무실 안에는 피스토레와 셀바토르 공작만이 있었다. 황제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듯 보였으나, 레슬리는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후작을 만나야겠어요!”

“레슬리, 어머니는 중요한 이야기 중이시니, 오라버니가 이야기해 주마. 응?”

베스라온이 달랬으나 레슬리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셀바토르예요! 셀바토르는 제국의 고귀한 수호자죠. 저 역시 셀바토르 가문의 일원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겠어요, 어머니.”

레슬리는 간절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레슬리의 눈은 계약의 이야길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열두 살이었던 레슬리와 공작이 했던 계약을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아라벨라가 되는 것이 계약이긴 했지만, 공작이 바라던 것이 그 너머라는 걸 레슬리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너머를 이행할 때였다.

“부디 제가 진짜 셀바토르가 되게 해 주세요.”

그 누구도 레슬리에게 가짜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슬리 스스로가 걸리는 게 있었다. 마치 입안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까끌까끌한 것들. 복수와 계약이었다.

레슬리의 간절한 눈빛에 공작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셀바토르!”

피스토레마저 놀라 외쳤지만, 공작은 담담하게 제 무릎 위에 손을 올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그렇지만 일단 잠옷은 갈아입도록 하자꾸나.”

레슬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감사해요, 어머니!”

놀라 굳어 버린 베스라온의 손에서 빠져나온 레슬리는 공작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방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재고해 주십시오. 레슬리를 이런 일에 끼어들게 하다니요! 기사 둘을 공격하고 충격을 받은 여린 아이입니다.”

“네 기억 속 레슬리는 언제까지도 크지 않고 그대로인 모양이구나.”

공작은 덤덤하게 대꾸했고, 베스라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확실히 아직도 베스라온의 눈에는 레슬리가 공작저에 처음 도착했던 열두 살의 모습이었다. 작고 여리고 안쓰러운 어린아이, 행복해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는 제 동생.

베스라온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었는지 공작이 작게 웃었다.

“레슬리는 강하지. 그 힘이면 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을 거다.”

“…….”

“그리고 언제까지 저 아이 마음에 후작 따위를 품고 있게 할 수는 없지 않니.”

공작은 천천히 제 머리를 매만졌다.

오래전부터 후작 따위가 레슬리의 머릿속에 있는 게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행복해지라고 거듭 이야기해 주었지만, 레슬리는 불에 들어갔던 그때를 잊지 못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레슬리 말로는 천 년간 제물이 되었던 아이들을 그 불 속에서 만났다는데 쉽게 잊을 수는 없겠지.

“차라리 이번 기회에 털어 낼 수 있게 하는 게 낫겠어.”

그렇게 깊게 뿌리박힌 원한이라면 후작의 죽음을 보여 주는 게 낫겠지. 겸사겸사 계약이니 뭐니 하는 것도 털어 내고.

“……후작을 레슬리가 스스로 죽인다면, 레슬리는 완전히 행복해질 수 없을 겁니다, 어머니.”

“그러겠지.”

베스라온은 도무지 어머니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후작을 죽이고 레슬리는 그 끝을 보게만 하실 생각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기꺼이 후작의 목을 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가 그걸로 만족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제 손으로 친아버지를 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복잡한 베스라온의 생각에 공작이 옅은 미소와 함께 아리송한 말을 얹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믿는단다.”

아이들? 그걸 물을 시간은 없었다.

후작 부인의 밀고를 듣고 먼저 움직인 레소와 반트에게서, 후작을 발견했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

챙캉!

“……뭐가 사라졌다고?”

철제 가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잘못 자른 꽃들이 테이블 위를 수놓았다.

이피엘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에피알테스가……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후작이 가지고 도망친 듯 보입니다. 후작 부인의 말로는 다락방을 자물쇠로 잠가 두었다는데, 그걸 관리하던 하녀가 저택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후작께서 그런 대범한 짓을 하실 줄이야.”

메데이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비엔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그렇게 에피알테스와 엘리가 떨어지면 안 된다고 말했잖습니까, 이피엘!”

“죄송합니다!”

이피엘이 데비엔의 고함에 허리를 숙였다.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눈에서 결국 눈물이 툭 떨어졌다.

“데비엔, 그만해도 괜찮아요.”

메데이아는 옆에 놓인 새 가위를 집어 들며 데비엔을 말렸다.

“폐하. 지금 제물이 될 엘리와 에피알테스가 떨어지면 안 됩니다. 엘리가 악몽에게 먹혀야 두 번째 걸쇠가 풀리니까요. 못해도 일주일은 엘리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데비엔.”

메데이아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피엘의 잘못이 아닌걸요. 내가 후작을 너무 얕봤어요. 아무것도 못 하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에피알테스를 들고 도망칠 줄이야.”

메데이아는 스페라도 후작과 그의 아내에게는 꽤 괜찮은 역할을 남겨 두었다. 바로 모든 소란의 흑막이었다.

자신이 이긴다고 바로 황제와 공작을 쳐 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르카디우스 제국민들에게 있어서는 영웅과도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제국민들에게 보여 줄 그럴싸한 흑막이 한 명 필요했다. 그 역할에 스페라도 후작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고위 귀족에, 귀족 사이에서도 평민들 사이에서도 그의 평판은 좋지 못했다. 특히 4년 전 사건으로 스페라도 후작가의 평판은 바닥을 기었다. 다들 심심할 때마다 먹는 불량 식품처럼 그와 스페라도 후작가를 씹어 댔다.

그런 후작가가 이 흑막이라고 말하면 모두가 믿을 것이다. 그와 그녀는 자신의 자식을 불 속에 던져 자신의 영광으로 삼고자 했던 사람이니까.

“가만히만 있었다면 꽤 좋은 역을 줬을 텐데 왜 그랬을까.”

메데이아가 작게 중얼거리자 데비엔과 이피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4년간 구르고 망가진 후작이 이런 일을 벌일지 몰랐다.

“사지는 멀쩡해야 괜찮은 연극이 될 것 같아서 가만히 뒀는데, 역시 팔다리 정도는 뜯어냈어야 했나.”

자신의 연하늘색 머리를 뒤로 넘기며 메데이아는 눈을 깜빡였다.

“어쩔 수 없지요. 아무리 좋은 역할이라도 자신이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메데이아 태후 폐하.”

“찾으면 죽이세요.”

데비엔과 이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데이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목 정도만 남겨 놓으세요. 나중에 광장에 목이라도 걸어 두면 되겠지요. 이야기는 좀 수정해서 ‘격렬한 반항으로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정도가 어울리겠네.”

거기까지 말한 메데이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 쉬었다.

“아아, 아쉬워라. 셀바토르 공녀에게 아부도 해 볼 겸 불태워 죽이게 장작을 잔뜩 준비했는데…….”

미리 광장에 가져다 놓은 장작이 아깝다며 메데이아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빙빙 원을 그렸다.

“굳이 그 공녀에게 태후 폐하가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제 공녀가 태후 폐하께 잘 보여야지요.”

데비엔이 눈을 찡그리며 거칠게 말을 내뱉자 메데이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는 해야 나에게 호감을 느껴 줄 테니까요. 분명 셀바토르에게 나에 대해 나쁜 말을 잔뜩 들었을 텐데 이를 어쩌나…….”

“폐하…….”

“그리고 난 셀바토르랑도 친해지고 싶단 말이야. 자기 딸이 나랑 친해지면 희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로 아쉬운지 메데이아는 이제는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후작 부인만으로 그 아이가 만족할까?”

아니겠지. 원한이 깊은 아인데 고작 후작과 엘리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잖아.

그 후로도 메데이아는 한참이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서러웠냐는 듯 그녀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놓친 건 책임을 물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에피알테스와 후작을 찾아야 합니다.”

메데이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황제와 셀바토르는 아직 엘리가 에피알테스를 가져간 걸 알지 못하지만, 필사적으로 찾고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와 에타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성기사들과 사제들도 전부 풀어 두고요. 아이테라 대공에게도 편지를 보내세요. 공국을 세우고 싶으면 대공가의 하인들과 사병들을 전부 풀라고요.”

“알겠습니다.”

“네, 메데이아 태후 폐하.”

두 사람이 나가고 메데이아는 불퉁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축 늘어트렸다. 아직도 그녀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라.”

꽤 괜찮은 연극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계획한 연극에 구멍이 난 게 못내 아쉬워 메데이아는 한숨을 흘렸다.

***

번화가에 있는 상점가에서는 매일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나왔고, 각 가문의 상단마다, 한 거리에 있는 상점마다 쓰레기를 모아 두는 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를 성 밖으로 운반했는데, 이 일이 계속되자 엄중했던 검사는 점점 느슨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아예 검문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게 오늘이지.’

정기적으로 배출하는 날이 오늘은 아니었지만, 축제 뒤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쏟아졌기에 일정은 앞당겨졌다. 그러니 오늘 저 철문이 열릴 것이다.

스페라도 후작은 쓰레기장 한곳에 마련된 관리자의 집에서 몸을 웅크렸다. 여기저기에서 지독한 쓰레기 냄새가 몰려와 코가 마비될 정도였다. 사실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이미 한 차례 토악질을 끝냈다.

“쯧, 저리 가!”

먹을 것을 찾아 들어온 쥐 한 마리를 본 후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손짓으로 쥐를 내쫓았다.

“더러워, 더러워 죽겠군.”

후작은 마법석과 상자가 든 가방을 끌어안았다. 더러워서 어서 이곳을 뜨고 싶었지만, 이 길이 자신이 수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

과거의 자신 역시 미래의 자신이 쓰레기 더미 속에 몸을 숨긴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것이다. 후작은 낮게 웃었다. 과거의 자신이 믿든 아니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나가는 게 중요했다. 수도는 넓은 편이었지만 사람이 많아 금방 들킬 게 분명했다. 그래서 후작은 수도를 떠나는 걸 첫 목표로 삼았다.

수도를 떠난다면 다들 자신을 찾기 힘들 것이다. 4년간 후작이 배운 것은 사람들 시선을 피해 숨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면 엘리와 아내는 기겁하겠지.

‘이게 엘리 고것을 황후로 만들 물건이라고 했으니까.’

후작은 가방 안의 낡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도, 아렌도도 미쳤지. 엘리 따위를 아직도 약혼녀라고 데리고 다닐 줄이야. 아비를 배신한 딸년은 남편도 배신할 텐데.

후작은 혀를 차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아니야.’

엘리는 황후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스페라도 후작으로 돌아갔을 때, 지지 기반이 되어 줄 테니까.

4년간 주인이 돌보지 못한 스페라도 후작가는 가세가 심각하게 기울었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가문의 부흥을 가져오려면 든든한 지지 기반이 필요했다.

그래, 엘리는 자신이 자랑스러워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수고스러운 일도 해 주는 거지.’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약간의 벌을 주는 것이다. 자신은 퍽 자애로운 아버지니까.

그런 정신으로는 전쟁터보다 더 위험하다는 황실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안 그래도 엘리는 4년 전 사건으로 황실에서 입장이 좋지 않을 텐데, 거기에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입장이 더 난처해질 것이다.

황실에서는 찾지 못하면 약혼을 파기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배상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물건을 가진 자신이 며칠 수도를 떠나 몸을 숨기면, 엘리나 아내나 자연스레 몸이 달아오르겠지.

그렇게 둘이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서 정신이 무너지려고 할 때 다시 수도로 돌아올 것이다. 마치 그들을 구원할 신처럼.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을 찬양하게 되겠지.

물건을 가지고 적당히 흥정하면 황실에서는 원래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걸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겹게만 느껴졌던 쓰레기 냄새가 어쩐지 견딜 만해졌다.

‘문이 열리면 말을 찾아오자.’

수도에 숨어 있다간 쉽게 걸릴 테니 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숨겨야지.

상인들이 자주 다니는 드로렘 마을이 괜찮을 것이다. 거기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여행자 한둘이 없어져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나저나…… 두 사람과 황제에게 어떻게 사과를 시킨다? 아니지, 사과를 할 거면 메데이아가 나와서 사과를 해야지. 자신을 이렇게 처박아 둔 것은 그녀가 아니던가.

달칵.

어느새 상자를 인질로 메데이아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당당하고 귀족적인 자신을 상상하는데, 그의 품 안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후작은 가방 속에 손을 넣어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눈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걸쇠 하나가 문제 있어 보이더니, 결국 열리고 말았다.

후작은 중간에 있는 두 번째 걸쇠를 잠가 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걸쇠를 걸어도 잠기지 않았다. 걸쇠가 고장 난 듯 보였다.

‘그런데 이게 중요한 물건이라고?’

후작은 상자를 흔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낡고 낡은 나무 상자, 이게 뭔지 스페라도 후작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아라벨라나 최초의 사제 시험에 합격한 적이 없었으니까. 가문의 힘과 돈을 쏟아부었지만, 그래도 후작은 번번이 시험에서 미끄러졌다.

“열어 볼까.”

후작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고 하나 남아 있는 마지막 걸쇠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낡아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걸쇠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약간의 틈이 생겼다.

“끄으응. 이게…….”

후작이 다시 힘을 줘 걸쇠를 뒤틀어 보려 할 때, 갑자기 밖에서 요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후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후작이 시선을 돌린 사이, 나무상자 사이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

“아, 콘스텐.”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동생이 반가운지 아렌도의 찢어진 눈가가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그런 아렌도를 바라보는 콘스텐의 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잠시였다. 콘스텐 역시 아렌도가 반갑다는 듯 활짝 웃었다.

“형님. 도서관에 가는 길이십니까?”

“아니, 잠시 어머니께 들렀다 오는 길이다. 어제 의식 때의 일로 너무 놀란 모양이시더구나.”

“아아……. 어머니가 좀 놀라셨지요. 형님이 계셨더라면 어머니가 그렇게 크게 놀라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콘스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도는 의식 때 함께하지 못했다. 본래는 황실의 일원이 전부 함께해야 했지만, 황실에 사소한 문제가 생겼고 그걸 처리하기 위해 아렌도는 황실에 남았다. 전부 황제의 승인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렇지. 어머니는 나를 많이 의지하시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아렌도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콘스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무엇입니까, 형님?”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아렌도는 천천히 콘스텐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작게 속삭였다.

“그래, 나를 밀어내고 황태자 자리에 오른 기분은 어떠냐?”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듣고 콘스텐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들키고 말았구나.

“아버지께서 주변 입단속을 꽤 잘 시켜 두신지라……. 알아내는 데 고생 좀 했지.”

그 말에 놀란 듯 굳어 버린 콘스텐과는 다르게 아렌도는 여전히 입가에 서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손을 뻗어 콘스텐의 옷깃을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좋았다. 너는 눈치가 빠르고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지. 그래서 나는 너를 진심으로 아낄 수 있었다. 나도 아버지의 자식이라 그런지 가족이 퍽 애틋하게 느껴졌으니까.”

아렌도의 말에 콘스텐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돼 버렸구나.”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른 것은 몇몇만 아는 비밀이었다.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을 비밀이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이르게 아렌도는 눈치를 챘다.

콘스텐의 물음에 아렌도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예전부터 낌새가 있었고 나에게 귀띔해 주는 사람도 있단다. 이 황궁에서 너보다 더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

“그리고 확신한 건 어제였다.”

빈번히 일어나는 작은 일이었다. 그런 사소한 일은 굳이 제1황자인 자신이 남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아렌도는 일부러 피스토레에게 자신이 남겠다고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라며,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는 피스토레를 보고 아렌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아버지가 자신을 황태자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아버지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라.”

피스토레의 깊은 죄책감은 아렌도가 약혼녀가 나오는 중요한 의식에 빠져도 허락을 도왔을 것이다. 자신의 첫째 아들을 보고 싶지 않아 했을 테니까. 거기다 의식 뒤에는 피스토레와 콘스텐 그리고 몇 사람만이 은밀하게 알고 있던 중요한 발표가 있지 않았던가.

조금 의아한 것이라고는 아무리 마음이 약하다지만 오랫동안 황제로 군림했던 아버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와, 왜 지금에 와서야 자신에게 이렇게 극명한 거부감을 보이는지였다.

그렇지만 아렌도는 그걸 진지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황태자가 자신이 아니라 이제 막 귀국한 제 동생이 되었다는 것이니까.

“처음엔 믿기지 않았단다. 네가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제왕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이 제국을 떠나 사정을 모르는 너보단 그간 아버님을 도와 나라를 보살핀 내가 더 적격일 텐데. 아버님은 왜 너를 선택하셨을까.”

거기까지 말한 아렌도가 시선을 맞췄다. 푸른 눈이 맑게 빛났다. 옷깃을 다 정리한 아렌도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뭐가 되었든, 나도 아버님과 어머님의 아들이니 자격은 충분하지. 곧 그 자리를 가지러 가마. 일단 발표식을 막은 걸로 만족해 볼까.”

아렌도의 말에 콘스텐의 눈이 커졌다.

발표식, 그걸 아렌도가 알고 있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막았다는 말이 콘스텐의 머리를 찔러 왔다.

“설마, 형님이…….”

“쉿.”

아렌도는 콘스텐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그런 무서운 일에 가담했을 리가 없지.”

그 말을 입에 담는 아렌도의 웃음이 깨지고 푸른 눈에 미묘한 감정이 담겼다.

‘당황하고 계셔?’

콘스텐은 놀라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분명 어떤 형태로든 이 일에 가담한 것 같은데,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는 걸까.

눈을 다시 떴을 때 아렌도는 다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농담이다. 그저 운이 좋았다는 농담.”

마치 방금까지 눈에 머물렀던 망설임을 지우려는 듯, 그가 조금 더 목청을 높여 웃었다. 그런 아렌도의 손목을 콘스텐이 잡아챘다.

“……지금 결정했습니다. 형님, 저는 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콘스텐의 눈동자는 결연하게 빛났다.

사실 아직도 콘스텐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하필 자신일까, 자신은 과연 제국이 원하는 황제가 될 수 있을까. 맹목적으로 황제 자리를 탐내는 아렌도도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이 넓디넓은 제국 위에 서는 황제가 될 수 있을지가 두려웠다.

하지만 오늘 아렌도의 도발은 오히려 콘스텐이 깨닫게 만들었다.

자신의 형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황제 위에 오르기 위해 이토록 위험한 일을 벌이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런 아렌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

“나랑 맞서겠다는 거냐.”

“예, 저는 아버님과 셀바토르 공작님께서 저를 선택해 주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손목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 저를 선택하신 분들을, 그리고 도움을 주겠다고 한 분들을 믿겠습니다.”

유일한 친구인 콘라드와 신전으로 숨어들었다가 우연히 만났던 레슬리를 떠올렸다.

굳은 결심을 마친 듯한 콘스텐의 눈을 바라보면서도, 아렌도는 뱀의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

“여, 여보. 여기에 있어요?”

가련한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쓰레기 더미 사이에 울려 퍼졌다. 하인을 대동하지도 않은 채 그녀는 엘리와 함께 천천히 걸었다.

눈에 띄지 않는 칙칙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장신구도 하지 않은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망토로 얼굴을 가린 엘리와 함께 쓰레기들 사이를 살폈다.

“나예요, 여보. 당신이 너무도 걱정돼요. 얼굴을 보여 주면 안 되나요?”

무섭고, 더러웠다. 후작 부인의 떨리는 목소리는 연기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이런 곳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어머니가 단단히 당부했었는데. 못 사는 것들은 그런 이유가 있다고 했었나. 이런 빈민가에 태어난 것 자체가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가까이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지.

사방에 진동하는 썩은 내의 쓰레기들을 뒤지며 사는 빈민가의 사람들은 후작 부인의 등장에 쓰레기 더미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때마다 악취가 더욱 강하게 풍겨 왔다. 발치에 고여 있는 물조차 탁하고 더러웠다.

후작 부인은 혹여나 제 옷자락이 젖을까 거칠게 끌어 올렸다. 아무리 저렴한 옷이라지만, 이런 곳의 물이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데에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녀가 여태 봐 왔던 후작은 귀족다운 사람이었다.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지은 옷만 입고 최고의 음식만 먹었다. 귀에 들리는 음악조차 황실 악단이 연주하는 정도가 아니면 듣지 않았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타고난 성향까지 변하지 않았으리라.

후작이 4년간 어떤 생활을 했고,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모르는 그녀는 과거의 후작만을 기억하고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이건 헛수고라고.

혹시 몰라 셀바토르가에 연락을 남겼지만, 회의적이었다. 그냥 어디 적당한 곳, 아무 곳에나 숨어 있다가 비밀 저택으로 가겠지. 쓰레기 속에 파묻혀 성문을 나서는 인간은 아니리라.

‘더러워.’

후작이 여기 없는데도 자신이 이런 곳을 돌아다녀야 한다 생각하니 절로 억울함이 차올랐다. 왜 자신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저절로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흘렀다. 이게 다 스페라도 후작과 붉은 머리의 남자 때문이었다.

“어디 있는지 알겠습니다.”

느지막하게 스페라도 후작가의 저택으로 들어온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위험에 처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위험으로부터 도망가는 일이지요. 될 수 있으면 멀리 가려고 할 테니, 후작은 수도를 벗어나려고 하겠지요. 하지만 지금 성문은 막혀 있고 열리더라도 빠져나가지는 못할 테니, 자연스레 쥐구멍을 찾아갈 겁니다.”

“그건 저희도 나름 파악을…….”

“쥐구멍을 아는 사람 중에 저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있을 것 같습니까.”

남자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자연스레 주름이 깊어지며 눈에 난 상처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 얼굴에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제 손을 매만졌다. 비록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혼란의 시대 때 전쟁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그를 알았다. 전쟁터의 이야기는 매일 사람들의 입에 올랐으니까.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소문은 주로 두 가지였다. 매일같이 연승을 올리는 셀바토르 공작과 한 용병에 관한 가십과 그런 공작마저 골치를 앓고 있다는 붉은 머리 남자에 관한 소문이었다.

소문의 남자는 분명……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일 것이다. 눈에 난 상처와 붉은 머리, 그리고 공작에 대한 적의. 세 가지가 합쳐진 게 그리 흔한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럼 부인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네, 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바로 앞에서 웃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너무 놀라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소문의 남자는 상냥하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후작이 있을 만한 곳을 이미 알아냈습니다만, 닮은 것 속에 숨어 있는 후작을 쉽게 골라낼 수가 없더군요. 그렇다고 사람을 써서 꺼내면……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턱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간절한 목소리라면 후작 역시 나오지 않겠습니까.”

엘리와 함께 숨어 있는 후작을 끌어낼 미끼가 되란 말인가.

“그, 그런…… 그는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시선이 무서워서, 너무도 무서워서. 결국 후작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부인.”

남자는 몸을 뒤로 물리다가 뭔가를 잊어버렸었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엠릭이라고 합니다. 당분간 제 동생들과 함께 이 저택에서 신세를 질 테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인.”

그리고 남자의 뒤로 험악하게 생긴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엠릭은 의식을 위해 수도에 숨어 있는 동안 은밀하게 빈민가를 장악했다. 짧은 기간이라 완벽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상자를 들고 미친 듯 행동한 남자 한 명을 찾기엔 충분했다.

“아버지, 저예요!”

아직도 주저하는 스페라도 후작 부인과는 달리 엘리는 적극적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집고 다녔다. 쓰레기를 주워다 파는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슬그머니 쓰레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저라고요!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잠시만 나와 주세요!”

엘리는 혹여나 자신의 얼굴을 가린 망토가 벗겨질까 꽉 쥔 상태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여보! 신경을 잘 못 써 줘서 나도 미안해요. 내가 더 당신을 신경 썼어야 하는데!”

두 사람은 이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외쳐 대기 시작했고.

“…….”

후작이 슬그머니 몸을 드러냈다. 주변을 연신 힐끗거리는 게, 누가 따라왔나 불안해하면서도 두 사람이 제 자존감을 높여 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제 발밑에서 빌어야 제 명예와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설사 제 아내와 딸이라도 발밑에 무릎 꿇고 운다면 기회를 놓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마법석도 있었으니, 여차하면 두 사람 앞에서 마법석을 사용하고 혼란한 틈을 타 다시 도망가면 되는 것이었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나타난 후작을 보며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앞으로 달려가 옷자락을 붙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썩은 물이 두 사람의 옷을 더럽혔지만, 엘리도 후작 부인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두 사람의 시선은 후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연신 사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후작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후작 역시 알고 있었다. 이건 빈말일 뿐이란 걸, 두 사람은 자신이 가져온 상자에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않은가.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여보, 그래요. 내가 미안해요.”

자신의 더러운 차림도 상관치 않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제 아내와 딸의 모습을 보며 후작은 계속해서 웃음을 흘렸다. 그런 후작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너도 나에게 사과하러 온 거냐?”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은빛 머리, 그리고 아내를 닮은 눈동자. 적당한 곳에 쓰여 이미 사라졌어야 할 아이가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나는 4년 동안 미뤄 놨던 걸 드디어 끝내러 온 거야, 후작.”

레슬리는 제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대답했다.

시간을 끌어야 해. 그 생각으로 레슬리는 후작을 노려보았다.

하필 베스라온은 지금 다른 곳을 확인하고 있다. 레슬리가 후작을 발견하자마자 자신을 따라온 기사 한 명을 보냈지만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베스라온이 도착하기도 전에 후작 부인과 엘리가 먼저 후작을 찾아냈고, 레소는 그들 주변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고 속삭였다. 그래서 레슬리는 앞으로 나섰다.

베스라온이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말 그대로 4년 동안 미뤄 둔 일을 끝내기 위해.

“아가씨, 베스라온 도련님께서 곧 도착하신답니다.”

쓰레기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레소의 속삭임을 들으며 레슬리는 한 발 앞으로 더 나섰다.

“그간 하지 못했던 일을 끝내러 왔다고?”

후작의 입은 괴기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너는 이게 탐나지 않는 거냐?”

“……!”

레슬리와 엘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에피알테스가 봉인된 낡은 상자였다.

역시! 이놈이 내 소중한 상자를 가져간 거였어! 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아버지란 이 작자는 딸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에 자신에게 좀 잘해 준 게 있었지만, 그래 봤자 뭐하는가. 중요한 것은 현재인데.

저걸 왜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을 괴롭히기 위함인가? 왜? 자신이 황후가 되는 게 스페라도 후작이 망친 가문을 되살리는 유일한 길인데.

‘멍청하긴! 그러다가 내가 태후의 눈 밖으로 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자신이 하는 일은 전부 가문을 위한 일인데, 멍청한 아비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버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둔했다.

엘리는 눈을 굴리며 기회를 노렸다. 지금 손을 뻗어 봤자 후작은 빠르게 도망가리라.

레슬리는 엘리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걸쇠가 풀려 있어.’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하나만 풀려 있었는데, 지금 상자는 두 개의 걸쇠가 풀려 있었다.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레슬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셀바토르 저택에서는 렌티우스 경과 고위 사제들, 거기에 루엔티와 마법사의 저택에서 나온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했었다. 에피알테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고, 레슬리가 기절했을 때부터 눈을 뜨고 공작을 찾아갔을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단 하나 낸 결론이 있다면, 그건 에피알테스는 쉽게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트바나에 있던 기록은 전부 소실되었고 기억하는 자조차 없다고 말했지만, 이트바나에서 온 사제는 단 하나만은 확신했다.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필요하다는 것.

최초의 사제들이 모아 온 에피알테스는 일주일간 상자에 담겼고, 때문에 풀리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째 걸쇠가 풀려 있다. 레슬리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게 느껴졌다.

“응? 너는 필요하지 않은 거냐 묻는 거란다, 레슬리.”

후작 부인은 당황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고, 엘리는 에피알테스를 들고 있는 후작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와서 사과하거라.”

후작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와서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한다면, 한 번쯤은 이걸 너에게 주는 걸 생각해 보마.”

“아버지! 그건 제 거라고요!”

엘리가 참지 못하고 외쳤지만, 후작은 엘리의 말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 사과만 한다면 여태 있던 일도 너그럽게 생각해 보마. 이 얼마나 자비로운 아버지냐!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지.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용서해 주지도 않았을 거다!”

말끝은 후작 부인과 엘리, 그리고 레슬리에게 전부 향했다. 엘리는 분노로 몸을 떨었고, 후작 부인마저 얼굴을 찡그렸으며, 레슬리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레슬리는 천천히 후작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그런 말을 지껄일 줄 몰랐어, 후작.”

“뭐, 그딴 말? 아무래도 조신하지 못한 여자 집에서 머물더니 거친 말투를 옮아 왔구나, 레슬리.”

레슬리는 작게 조소했다.

“내 어머니를 욕하지 마, 후작.”

어머니란 말에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레슬리는 한쪽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습관이었다.

“네 어미는 지금 옆에 있는 이 여자인데? 그리고 네 아버지는 나지.”

후작은 비웃으며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아픈지 부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부인은 가련한 눈으로 연신 주변을 살폈다. 마치 도와줄 누군가를 찾는 듯 보였다.

“나를 태어나게 해 줬다고 전부 부모는 아니야.”

레슬리의 싸늘한 눈이 두 사람과 엘리를 훑었다.

얼마 전 꿨던 꿈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은 얼마나 사랑에 목말라 했던가. 너무도 바보 같았다. 그리고 그 세계는 얼마나 좁았던가.

“나의 어머니는 셀바토르 공작이고 나의 아버지는 사이레인이야. 내게 언니는 없고 오라버니 두 분이 있어.”

스페라도 후작가는 자신에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갈증만을 주었고, 그걸 채워 준 것은 셀바토르 공작가였다.

“네가 그 여자에게 단단히 홀렸구나! 레슬리, 이 아둔한 것아!”

“너희가 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레슬리는 후작을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너희가 줬다는 그 엄청난 사랑,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

그 말과 동시에 사방으로 어둠이 터져지듯 퍼져 나갔다.

쿠웅! 늘 조용하게 움직이던 어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레슬리의 분노에 감화된 듯 거칠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서 있던 바로 옆 지반이 내려앉았다.

“꺄아악!”

가장 먼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 건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었다. 스페라도 가문에 있었으면서 유일하게 어둠을 경험하지 못한 그녀는 울면서 땅에 엎드려 바닥을 기었다.

“이, 이게 뭐야!”

밝은 크림색의 옷이 더러움으로 흔적을 남겼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레슬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후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 정도의 힘을…….”

후작은 서서히 주변을 감싸듯 먹어 치우는 어둠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나. 후작가의 서재에 있는 어둠에 대한 기록 중 그 누구도 이토록 강한 힘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인 것은 엘리였다. 그녀는 이미 레슬리의 힘에 눌린 적이 있어서 당황하지 않았다.

후작이 당황해 자연스레 뒷걸음질하는 동안 엘리는 잽싸게 에피알테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 가방끈이 걸렸다.

“어디서! 저리 꺼져!”

“악!”

후작은 엘리를 거칠게 밀어냈다. 복부를 맞은 듯 엘리는 배를 감싼 채 뒤로 밀려났다. 그렇지만 눈만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후작과 엘리 두 사람의 눈빛은 어느새 닮아 있었다. 이내 엘리는 다시 달려들었다. 망토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가리고 있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녹음이 가득한 눈, 풍요로움을 떠올리게 하는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스페라도 후작가의 보물이라 불리며 칭송받던 엘리는 사라졌다.

엘리의 얼굴 절반은 일그러진 채 검게 변해 있었다. 한쪽 눈은 빛을 잃고 탁하게 변했으며, 거무죽죽한 빛은 마치 사자의 얼굴 같았다.

“내 것이라고!”

“아악!”

더 얼굴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엘리는 후작의 팔을 물어뜯었다. 후작은 비명을 지르며 에피알테스를 떨어트렸다. 레슬리가 어둠을 일으켜 에피알테스를 잡기도 전에, 엘리는 집념으로 먼저 낡은 상자를 낚아챘다.

“아, 하하하! 되찾았다!”

스페라도 후작에게서 떨어진 엘리는 낡은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흐릿해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엘리가 괴기한 웃음을 흘리는 사이 레슬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머릿속에서 몇 개의 단어가 저절로 연결되고 있었다. 지금 저택 별관에서 치료받는 두 사람과 비슷한 엘리의 상태. 그리고 떠올리기도 무서운 한 단어, 제물.

‘설마.’

누군가가 들었으면 비현실적이라고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고 비웃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겪지 않았던가. 세상에는 제 자식을 불구덩이에 던져서라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미친 사람도 있다.

그사이 엘리에게 다시 달려든 스페라도 후작과 작은 몸싸움이 일어났지만 엘리는 상자를 지켜 냈다. 엘리가 목소리를 높이며 웃었다.

“이건 제 거라고요! 아하……하…….”

레슬리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엘리의 웃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엘……리야?”

레슬리에게는 엘리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왜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저런 얼굴을 하는지, 후작이 왜 상자를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치려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엘리의 몸이 급속도로 허물어져 바닥으로 쓰려졌다는 것과 쓰러질 때 그녀의 모습이 공작가에 있는, 제물이 되었던 아이들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자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옅은 안개는 바로 근처에 있던 후작 부인을 덮쳤다.

“……!”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무언가가 그녀를 훑고 지나갔고 상자는 무엇을 뱉었냐는 듯 도로 닫혔다. 하지만 아직 두 개의 걸쇠는 풀린 채였다.

스페라도 후작은 잽싸게 몸을 날려 그걸 집어 들었다. 어느새 도착한 베스라온이 움직이려 했으나, 바로 에타이에게 저지되었다.

“제가 갈게요, 오라버니!”

그렇게 외친 레슬리는 베스라온이 말리기도 전에 후작을 쫓아갔다. 레슬리가 후작을 쫓아갔을 때, 안개가 덮친 후작 부인의 얼굴에는 하나둘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간지럽다고!”

후작 부인은 손톱을 세워 제 얼굴을 긁기 시작했다. 에피알테스에 먹힌 후작 부인은 주저앉은 채로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울부짖었다. 자신이 무언가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여보! 여보!”

그녀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보, 도와줘요. 사제를, 의사를 불러 줘요! 제발!”

“저리 가! 이 괴물들!”

도와 달리는 듯, 살려 달라는 듯 필사적으로 두 손을 내밀었지만, 후작은 거칠게 그녀를 밀어냈다. 후작의 얼굴에는 그간 같이 살아왔던 자신의 아내에 대한 감정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혐오. 남은 감정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아내를 밀어낸 후작은 바로 몸을 움직였다.

“상자를 회수하고 후작을 잡아!”

“공녀를 보호하며 신전의 물건을 되찾아라!”

쓰레기 더미 사이에 숨어 있던 이들이 검을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햇빛을 받은 검날이 차갑게 빛났다.

후작 부인과 엘리를 미끼로 삼았던 에타이와 태후의 심복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곳곳에 숨어 있었던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무섭게 충돌했다. 사방으로 고함과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펴졌다.

‘후작은 어딨지?’

레슬리는 그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가며 후작을 찾았다.

놓칠 수 없었다. 4년간 미뤄 왔던 일을 반드시 해낼 생각이었다. 비록 어머니가, 아버지가 그리고 두 오라버니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도와줘, 살려 줘!”

후작 부인은 눈물과 피, 그리고 열꽃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

“제발 나를 살려 달란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않을 걸 그랬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친정에서 나오지 않을 걸 그랬다. 아니, 레슬리에게 잘해 줬어야 했다. 사랑해 주고 보듬어 줬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자신은 죽지 않아도 될 텐데. 그랬더라면 셀바토르 공작이 직접 와서 자신을 살려 주지 않았을까? 제 딸에게 잘해 줬으니까 말이다.

아니지, 그 전에 레슬리가 공작가로 가지 않아서 이런 사태가 터지지 않았을 텐데.

아니, 엘리가 저걸 들고 왔으니 아렌도와 엘리를 약혼시킨 것부터가 문제 아니었을까? 약혼식으로 엘리가 태후의 눈에 들었을 테니까. 그래! 그게 문제였던 게 분명했다. 약혼!

그러니까 이건 약혼을 결정한 스페라도 후작과 태후의 말에 빠져 저딴 걸 들고 온 엘리의 탓이었다. 자신은, 아주 조금도 잘못이 없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단 말이야! 살려 줘, 나는 무고하다고!”

싫다. 싫어. 괴상한 집안과 혼인해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이렇게 자신은 변해 버린 건데. 아무도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지 않았다.

“레슬리, 이 엄마를……!”

결국 레슬리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하던 후작 부인의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다. 거대한 검이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

“이런. 너무 시끄럽지 않습니까, 후작 부인.”

나지막한 목소리. 비록 눈이 멀었지만, 후작 부인은 누군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최근에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왜…… 나를…….”

“마녀에게 슬쩍 정보를 흘리고 있는 걸 모를 줄 알았습니까.”

엠릭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뒤틀었다. 다시 붉은 피가 한 움큼 바닥에 쏟아졌다.

“잘 가시오, 부인.”

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라일락색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

그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와인을 한 잔 따라 대공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지금 평민가 쪽에 무뢰배들이 나타났다 합니다.”

“어머나. 무뢰배들이라니?”

수도에서 무뢰배들이 날뛰다니. 수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지금 빈민가와 쓰레기장 쪽에서 칼부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마법도 쓰는 모양이라, 지금 셀바토르 기사단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진압에 나섰다고 합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마저 참여했다는 소리에 놀란 스웰라 대공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요?”

스웰라 대공비 옆에 앉아 있던 프리트 역시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형님도 거기 가 있는 거 아니에요?”

“의식 때부터 계속 저택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분명 그러겠지.”

돌아오지 않은 장남이 걱정되는 마음에, 스웰라 대공비는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이테라 대공을 바라보았다.

“여보, 우리도 기사들을 보내요. 콘라드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요.”

“안 된다면 하인이라도 보내 형님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아버지. 어제 보낸 하인들이 돌아오면 다시 몇 명을 꾸려 보내면 되겠죠.”

대공비와 프리트가 걱정된다는 듯 간절히 외쳤지만, 아이테라 대공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꾹 누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보, 내 말 듣고 있나요?”

스웰라 대공비가 조심스럽게 재촉하자 그제야 아이테라 대공은 고개를 들었다.

“무뢰배들이라.”

단 한 마디였지만, 스웰라 대공비와 프리트는 대공이 현재 심각한 상황에 몰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표정과 안경 너머의 황금색 눈 그리고 목소리가 절실하게 알려 주었다.

“그윈, 혹시 들려온 다른 소식은 없나? 무뢰배들이 전염병을 퍼트리고 있다거나?”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문이 열리며 콘라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프리트가 환하게 웃으며 제 형을 맞이하러 갔다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콘라드의 뒤를 따라 몇 명의 린체 기사단이 들어왔고, 형의 얼굴이 이상했다.

“형?”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제복을 차려입은 콘라드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에 허리에는 검까지 차고 있었다. 저택 안에서도 종종 제복을 차려입는 콘라드였지만, 검을 차고 돌아다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상자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빈민가에 퍼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노인, 병자들 순으로 하나둘씩 열꽃이 피고 있다더군요. 빈민가와 평민가가 조금 떨어졌다지만,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

“아버지.”

절박함이 콘라드의 목소리와 눈에 깃들었다. 대공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에 눈이 멀어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도대체 태후께서 뭘 약속했길래 에피알테스를 훔치게 도왔습니까?”

에피알테스. 그 말 한 마디에 스웰라 대공비는 결국 잔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값비싼 러그 위로 붉은 와인이 퍼지기 시작했다.

“콘라드! 어떻게 네가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할 수가 있니!”

“형,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께서 그럴 리가 없잖아.”

스르릉. 대공비와 프리트가 뭐라고 외치던 콘라드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아이테라 대공의 목을 노렸다.

“카리우 곤 아이테라, 의식을 방해함으로써 에피알테스를 훔쳐 냈으며 메데이아를 도와 르카디우스 제국에 위험을 불러온 죄로 그대를 구속한다.”

“……뭐?”

아이테라 대공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설마 자기 아들이 자기를 반역죄로 잡아갈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콘라드, 네가 감히 아버지인 나를 반역죄로 몰아가겠다는 거냐? 이 일로 아이테라 가문이 어찌 될 줄 알고!”

“죄인을 처벌하는 데 사사로운 감정을 둘 생각은 없다.”

아까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게 전부였다. 눈물은 그친 지 오래였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그대에 대한 처분을 내리셨다. 고귀하신 분께서 배신을 몰랐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콘라드에 말에 뒤에 서 있던 린체 기사가 품 안에서 접혀 있던 종이를 꺼내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아이테라 대공의 이름과 함께 그가 저지른 죄목들과 하늘과 태양을 삼키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황실의 인장. 그 인장을 본 스웰라 대공비는 그대로 기절했다.

“끌고 가.”

콘라드의 말에 린체 기사단이 발버둥 치는 아이테라 대공을 거칠게 잡았다. 대공은 격하게 반항했으나, 기사들을 이기기는 무리였다. 곧 그의 입에는 천이 씌워졌으며 그는 그대로 끌려 방을 나갔다.

순식간에 아름답게 꾸며져 있던 방이 엉망이 되었다. 대공비는 기절했으며 러그는 붉게 물들었고, 가구들은 쓰러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콘라드는 늘 가족 모임 때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바라보았다. 아이테라 가문의 인장이 박힌 의자는 초라하게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그윈.”

콘라드가 아이테라 대공가의 집사를 바라보았다. 멈춰 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절로 흐려졌다.

“어제 수색에 나섰던 사람들을 전부 불러들여. 이 이상 수치를 만들지 마.”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윈은 더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대공이 없어진 지금은 그가 이 가문의 가주었으니까.

눈치 빠른 집사 덕분에 콘라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대공비 옆에 앉아 있는 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잘 부탁하마.”

부탁을 끝으로 콘라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형! 지금 어디 가려는 거야!”

프리트는 울먹이며 제 형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릴 적부터 이렇게 매달리면, 자상한 제 형은 자신의 옆에 남아 있어 주곤 했다.

“죄인이 벌인 일의 뒷수습을 하고 올게, 프리트.”

하지만 이번에는 형은 남아 주지 않았다. 그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프리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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