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9)

#18

“달려라! 속도를 높여!”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며 테펜텔은 눈을 감았다. 마차는 위험할 정도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테펜텔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 마차로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간신히 의식이 시작된 후에야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탈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다 버리고 말을 타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가 발목을 잡았다.

하나는 자신이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외국인이라는 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간신히 구한 슈에나 약초를 실을 공간이 필요하다는 거였으며, 마지막은 에펜타니 백작이었다.

“테펜텔 님.”

자신의 앞에 앉은 에펜타니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테펜텔이 셀바토르 공작에게 주었던 기록 해석본이 들려 있었다.

“이 기록대로 하면 슈에나를 가공해 원하시는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에펜타니 백작은 심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용케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이건 슈에나 약초를 몇 배로 압축해 놓고 거기에 치료 효과를 더한 것일 뿐입니다. 좋은 꿈을 꾸겠지만 그 외의 효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제대로 된 공식 조제법이 맞습니까? 이건 아무리 봐도 일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에펜타니 백작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비록 한미한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에펜타니 백작가는 약초학에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었기에 불확실한 제조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테펜텔은 그런 에펜타니 백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일기가 맞습니다. 그래도 나름 효과가 검증된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봤자 좋은 꿈…….”

에펜타니 백작이 기록을 한 장 넘기며 작게 투덜거렸고 테펜텔은 씩 웃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바로 그겁니다. 좋은 꿈. 에펜타니 백작, 왜 슈에나 약초가 귀한지 아십니까?”

급작스러운 질문에 에펜타니 백작이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슈에나 약초는 아롬벨에서 자라던 약초였지요. 하지만 몇 백 년 전 아롬벨에서는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저희 영지에만 남아 있는 약초라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후나 이런 게 다르다 보니 슈에나가 완전히 자리 잡지를 못했겠지요. 그래서 귀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원래 슈에나는 아롬벨에서 자라던 약초였다. 귀한 편이긴 했지만, 르카디우스 제국만큼 귀한 편은 아니었고 슈에나를 키워 여러 가지 약을 만들어 파는 마을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슈에나는 점점 자취를 감추었고, 한 상인이 판매를 목적으로 르카디우스 제국에 심어 놓은 것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슈에나는 여기에, 하지만 기록은 여기에.”

테펜텔은 웃으며 에펜타니 백작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기록을 가리켰다. 아주 오래전 한 작은 마을에서 살던 조제사가 적어 놓은 일기, 그게 열쇠가 되었다.

“기록과 약초가 전부 모였으니, 이제 악몽을 먹어 치우러 가 볼까요.”

악몽을 모아 욕심쟁이의 뱃속에 넣어 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펜텔은 마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속도라면 늦지 않게 수도에 도착하겠지.

자신을 기다릴 친구와 그녀의 딸에게 어서 좋은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다.

***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

레슬리는 자신의 풀 네임을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이젠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이 받은 이름과도 같았다. 성도, 중간에 들어가는 축복의 이름도, 중간에 한 번 바뀐 것인데도 위화감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레슬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사제에게 인사하는 김에 자신의 복장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검술을 배울 때처럼 긴 바지에 셔츠, 그리고 가벼운 조끼 차림이었다.

처음엔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아 어색했던 이 바지 차림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익숙함은 안정감이 되었고, 레슬리는 종종 이 옷을 입고 다녔다.

그건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레슬리가 셀바토르의 공녀로 나타났을 때, 그리고 소년들이나 입고 다닐 만한 바지 차림의 검술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다들 작게 소곤거렸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마저 적응했다. 처음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쑥덕거리던 이들은 시간이 조금 흐르자 잘 어울린다며 칭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시간이 더 흐르자 아무도 차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건 평범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눈앞에 있는 사제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슬리는 옅게 웃고 사제를 따라나섰다.

“이 옷으로 갈아입어 주시면 됩니다. 복잡한 복장이라, 자매님들과 하녀분들이 도움을 주실 겁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 명의 사제가 레슬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레슬리를 위해 마련된 방 안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축복의 날 때 열리는 의식은 매년 새로운 분위기를 선보였다. 한때는 축제처럼 밝고 화려했고, 또 다른 때는 더없이 경건했으며, 꽃과 음유시인의 음악으로 의식을 진행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맞춰 최초의 사제들 복장도 매번 달랐다.

이번에는 하늘하늘한 천으로 만들어진 하얀 복장이었다.

‘……찝찝해.’

레슬리는 커다란 거울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어딘가 익숙한 복장이었다. 그래, 마치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제물의 불에 들어갈 때 입었던 복장 같지 않은가.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쳤던 자신과 스페라도 후작가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익숙했던 옷 대신 후작가가 떠오르는 옷을 입게 되자 레슬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공녀님?”

허리끈을 매어 준 뒤 장식을 하녀에게서 건네받던 사제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너무 조이시는가요? 그렇다면 조금 헐렁하게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이 정도가 좋아요.”

괜히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레슬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제는 레슬리가 긴장해서 이러는 거라 생각했는지 말 몇 마디를 건넸다.

“마지막으로는 이겁니다. 대기실에서 착용해 주세요. 공녀님은 분명 이 덕을 보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제는 얼굴을 가리는 하얀 천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레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무언가 까끌까끌한 것은 여전히 남아, 옷을 다 갈아입고 대기실로 안내받을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레슬리가 가장 마지막이었는지, 옷을 갈아입고 안내된 방에는 같은 복장의 아이들이 있었다. 긴장감에 구석에 앉아 숨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와 쾌활하게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레슬리는 빠르게 방 안을 훑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콘라드 경은 안 보이네.’

분명 오늘은 마주칠 줄 알았는데. 왜인지 실망감이 몰려왔다.

아니, 아니지.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교제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지도 정하지 못했는데 벌써 마주치면 안 되지. 지금은 안심해야 할 때인 거야. 레슬리는 그렇게 자신을 토닥이며 걸음을 옮겼다. 콘라드가 없다면 자신의 다른 친구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셀리스 양은 어딨지?’

의식에 쓰이는 복장에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모든 것을 감추는 옷이었다. 신분도, 성별도, 얼굴도 알 수 없게 만들어진 옷. 최초의 사제들은 역병의 눈을 피하고자 그런 옷을 입고 가면까지 썼다고 했다.

이번 복장에는 가면이 포함되지 않기에 레슬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차근히 찾다 보면 셀리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셀리스를 찾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이는 엘리였다. 엘리는 자신의 머리가 망가지면 안 된다며, 홀로 후드를 벗은 상태로, 손거울을 바라보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응?’

그런데 엘리의 손가락에 하얀 천이 감겨 있었다. 어디를 다친 걸까. 실제로 엘리는 그 손가락을 보며 아픈지 눈을 찡그렸다가 이내 거울에 집중했다.

“의식에 방해되게 왜 저렇게 머리를 화려하게 했을까?”

“나는 저 사람 싫더라. 덕분에 시험도 그렇고 다 엉망이 됐잖아.”

“아직도 1황자님이랑 약혼 상태라는 게 믿기지 않아. 저 정도면 애초에 약혼은 파기되는 게 맞을 텐데.”

레슬리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 저절로 공감이 갔다.

그간 신경 줄이 굵어졌는지, 엘리는 분명 들릴 법한 이 대화를 가볍게 넘기며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이제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밀색 머리끝을 자연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그게 엘리가 기분이 아주 좋을 때 나오는 행동이라는 걸 레슬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그 두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축제 시작 전에 보았던 그 두 사람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지금 방 안에는 사제들과 경호를 위한 기사들, 그리고 방문하는 귀족들을 위한 하녀와 하인 몇 명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레슬리의 바로 옆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에 놀라 레슬리가 창가를 바라보자, 창이 조금 열리더니 그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닫혔다.

“아하하.”

창문 밖으로 들어온 물건을 보자마자, 레슬리가 환하게 웃었다.

익숙한 주머니였다. 자신이 신전에서 2차 시험을 치를 때도 받았던 주머니를 들어 열자, 안에는 작은 사탕과 과자들이 한가득 있었다.

이번엔 깨지지 않고 제대로 들어 있는 사탕과 과자들에, 이내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레슬리는 웃으며 안에 있는 작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제가 뒤에 있을 테니, 너무 긴장 마시길.

지금이라도 창문을 열면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손을 뻗는데, 대기실 안으로 익숙한 몇 사람이 들어왔다. 피스토레와 아르트엘 그리고 콘스텐.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은 메데이아였다.

“다들 여기 모여 있었군. 여기에 온 건 다름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긴장하지 말라 말하기 위해서네.”

의식 전에 최초의 사제들을 황족들이 찾아온 게 처음은 아니었는지, 사제들은 익숙해 보였다. 피스토레의 이야기가 끝나자 황족들은 가까이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볍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1황자님은 오시지 않았네.’

중요한 의식인 데다가 아직까지는 약혼녀인 엘리가 여기 있음에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황제 폐하가 막은 것이거나 본인의 의지겠지.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콘스텐이 걱정하던 일이 후계자의 일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한곳에 자리 잡은 레슬리는 피스토레와 그 옆에 서 있는 아르트엘 황후, 그리고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콘스텐, 마지막으로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아.’

처음부터 레슬리가 자신을 바라볼 것을 알았는지, 메데이아는 생긋 웃으며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레슬리에게 다가왔다.

“어떤 분이 저를 이렇게 열렬하게 바라보나 했는데, 셀바토르 공녀님이시군요.”

메데이아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으면서 천천히 독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공녀를 아주 높게 사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 의식을 완벽하게 치르도록 하세요, 셀바토르 공녀.”

잘하라 말하는 것도 아닌 잘 치르라는 명령조에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대로 메데이아의 눈은 생기를 머금고 화사하게 휘었다.

“그렇다면 내가 아주 큰 상을 줄 거랍니다. 그건 공녀조차 쉬이 가지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심지어는 셀바토르 공작도 주지 못할 거지요.”

“글쎄요.”

레슬리가 당당하게 시선을 맞추자 미소를 머금은 메데이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구해 주지 못할 것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제게 주어진 일이며, 의식은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주관하신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저는 태후께서 내리시는 상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이 길어지는 사이 어느새 나갈 시간이 되었다.

레슬리는 다시 한 번 옷차림을 정리하고는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의식은 말씀하신 대로 제가 잘 이끌어 가겠습니다. 그 누구의 방해에도 의식을 망치지 않겠어요. 그래요, 그 누구라도요.”

이 말은 자신을 회유하려는 메데이아와 지금 몰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엘리에게 해 주는 말이었다.

“오호.”

메데이아가 눈을 휘며 웃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따스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메데이아는 이내 화사하게 웃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공녀. 하지만 내 상을 거부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일 거예요.”

레슬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밖으로 나갔을 뿐이었다.

메데이아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 그녀의 딸답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의, 그리고 가문의 목을 조르는 목줄이 되었을 때 저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메데이아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작게 웃었다.

***

“셀바토르.”

잠시 아르트엘과 함께 최고 사제를 만나고 온 피스토레는 걸음을 멈추었다. 기나긴 신전 복도에서 셀바토르 공작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만난 것은 콘스텐을 황태자 자리에 올린 후 처음이었다.

“황제 폐하.”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만두지 그러나.”

어딘가 피스토레의 말은 날이 서 있었다. 날카로운 말투에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아렌도가 진짜 자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건가?”

피스토레가 자신에게 저럴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게 맞았는지, 피스토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말을 참고 있는 건지 훤하게 속이 보였다. 그 말을 내뱉어도 될 텐데.

피스토레 정도로 약한 이가 그 어떤 말을 내뱉어도 공작은 쉽게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내뱉고 울고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 나았다.

“믿지. 내 친구, 내 오랜 친구. 아버님이 나보다 더 신뢰하는 셀바토르 공작의 말인데 내가 어떻게 믿지 않겠나.”

“……내 사랑.”

비꼬는 말투에 아르트엘이 가볍게 그를 저지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피스토레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는 며칠 사이 심각하게 초췌해졌다.

“아르트엘, 나는 괜찮네. 말리지 않아도 좋아.”

피스토레를 저지하는 황후를 공작이 말리더니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피스토레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내뱉게. 그보다 중요한 건 아렌도의 추후 처분이니까. 너도 알다시피 아렌도는 뿌리 깊으니 어서 처리하지 않으면 분란이 클 거야. 그리고 신분상 제대로 된 후처리를 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야! 어디 굴러먹다 온 쓰레기가 아니라 내 아들이라고!”

피스토레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어딘가 울먹임이 가득한 음성에 공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성으로는 공작이 준 증거와 그간의 정황들로 아렌도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직도 그의 여린 마음은 그걸 인정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처분은 조금 미뤄도 될까.”

지친 듯, 울먹이는 듯, 그리고 분노하는 듯,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가 고개를 숙인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 번만, 한 번만 내가 더 확인하게 해 주게. 의식이 끝난 후에 확인을 해 볼 테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제발.”

어딘가 고장 나 버린 듯한 모습을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이래서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 유일한 버팀목이던 남자는 큰 구멍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믿고 의지했던 아이테라 대공의 배신과 혼란의 시대가 끝나고 얻은 첫아들, 아렌도가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피스토레를 망가트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면 안 된다.

“……그러도록 하게.”

“그래, 그럼 나는 자리로 돌아가지. 의식이 곧 시작되니…….”

“나 역시도 늦지 않게 돌아가겠네, 피스토레.”

그 말과 동시에 황제는 비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신전 복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광장에 도착해 수많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한 모습으로 걸을 것이다.

‘이래서 황제라는 자리는 올라갈 것이 못 된다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낮게 혀를 찼다.

밤낮으로 서류를 보고 나라 안팎의 모든 일을 처리한다. 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평민들의 말을 더 귀담아듣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실보다 가늘게 있는 타협점을 찾는다.

끝없이 정무에 시달리면서도, 이런 비극에 아픔을 내보이지 못한다. 그가 무너지면 르카디우스 제국 전체가 휘청거릴 게 분명했으니까.

“아셀라.”

피스토레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아르트엘이 셀바토르 공작의 손을 잡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아직 믿기지 않아서 그래.”

“충분히 이해해. 그리고 아르트엘,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해.”

공작의 위로에 아르트엘이 섧게 웃었다. 아렌도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건 피스토레뿐만이 아니었다.

“저렇게 마음 아파하니 내가 울 수가 없어서.”

씁쓸하게 걸어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르트엘이 말을 이었다.

“있지, 아셀라. 나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럼 그 황녀가 진짜 내 딸이었다는 거지?”

메데이아의 아이로 알려져 금방 숨을 거둔 유일한 황녀. 아르트엘은 그 황녀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

길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아르트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자마자 신의 품으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이름도 없다고 알고 있는데.”

이름부터 지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아르트엘은 다시 한 번 섧게 웃었다. 단 한 번도 불릴 일이 없이 가슴에만 평생 품고 있어야 할 이름, 죽은 아이를 위한 이름. 어떤 이름이 지어지든, 가슴을 무너트릴 정도로 슬픈 이름이었다.

***

의식은 신전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원래는 사람들의 교류와 토론을 위해 사용되던 신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같이 서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든 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걸 레슬리는 애써 무시했다.

‘긴장하지 말자.’

여태 잘해 오지 않았던가. 레슬리는 잠시 숨을 정리했다. 물론 쉽게 긴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 서 보는 것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이제 입에 담기도 싫은 스페라도 후작과의 재판장이었다.

그 기억이 너무할 정도로 도움이 안 되는지라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운 좋게 옆에 서게 된 셀리스가 손을 잡으며 같이 숨을 내쉬었다.

“기, 긴장되네요. 마치 셀바토르 공작님을 처음 만날 때 같아요.”

그 말은 기절하기 직전이란 소리가 아닌가. 레슬리가 놀라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후드를 걷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셀리스가 지금 어떤 표정일지 짐작이 갔다. 몇 번이나 봐 왔으니까.

물이라도 조금 마셔야 하는 게 아닐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레슬리는 광장과 최초의 사제들이 있는 공간을 나누는 천 사이로 셀바토르 공작을 발견했다.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는 어딘가 여유로워 보였다.

‘어머니다.’

공작의 옆에는 사이레인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루엔티가 앉아 눈을 찡그린 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스라온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태후 옆에 서 있었다. 마델과 하르트, 다른 사람들도 왔을까.

천 사이로 기웃거리다 공작과 시선이 맞았다. 정확하게 작은 틈새를 바라본 공작이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까 메데이아와 시선이 맞았을 때는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지금은 너무도 좋아서 레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모두 다 계시네.’

부모님에, 두 오라버니들에 콘라드 경까지 있었다. 품 안에 넣은 사탕 주머니를 꼭 쥐었다. 지금 사탕을 입에 넣으면 행복한 맛이 나겠지.

레슬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이상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의식도, 엘리도, 어딘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스페라도 후작도, 메데이아도. 그리고 심지어는 역병조차 겁나지 않았다.

여유가 생긴 레슬리는 옆에서 작게 헛구역질을 하는 셀리스를 토닥여 주며, 아직 대기하고 있던 한 하녀에게 물 한 컵을 부탁했다. 물을 마신 후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그녀가 레슬리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를 할 때쯤 갑자기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그럼, 이제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북소리가 신전 광장에 울려 퍼졌고 의식이 시작되었다. 이번 의식은 마치 극과 같은 느낌과 엄숙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하얀색과 검은색으로만 의식의 장소가 꾸며졌다. 괴로워하는 표정의 검은 가면을 쓴 사람들이 곳곳에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검은 가면 대신 하얀 가면을 쓴 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도망쳤고, 그 자리를 최초의 사제들이 메웠다.

얼굴도, 이름도, 신분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사제들이 지나갈 때마다 쓰러져 있던 환자들은, 사제들에게 뭔가를 건네준 뒤 환하게 웃는 가면으로 바꿔 썼다.

중간중간에 에피알테스를 의미하는 사람이 난입해 최초의 사제들을 잡아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제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마치 춤을 추듯, 에피알테스가 세상을 지배했을 때 상황이 재현되었다.

하얀 후드를 뒤집어쓴 레슬리는 쓰러진 사람이 건네주는 돌을 바구니에 넣으며 눈을 깜빡였다. 놀라울 정도로 순조로웠다. 고개를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공작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 레슬리는 에피알테스의 파편을 나타내는 돌을 건네받는 데 집중했다.

에피알테스가 최초의 사제들에 의해 거둬지고 봉인되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악몽이 가장 약해지던 순간을, 그리고 기어코 최초의 사제들이 악몽을 이기던 순간을 계속해서 재현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기록한 이 돌은 에피알테스를 봉인하는 또 다른 열쇠가 되었다.

어느새 광장을 가득 메웠던 환자들이 전부 일어났고, 돌은 사제들의 바구니에 전부 담겼다. 레슬리는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최고 사제에게 바구니를 가져다 드렸다.

“에피알테스가 이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가장 오래된 종인 저와 아라벨라는 에피알테스를 더욱더 깊은 잠으로 인도할 겁니다.”

마지막 연설이 시작되었고, 레슬리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연설이 끝나면 에피알테스가 있는 봉인의 문이 열린다. 광장 안에 서 있는 네 사람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

해리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둘이 머무는 곳은 좋은 저택이지만, 마음대로 외출을 못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밖은커녕 정원 산책도 허락되지 않아, 해리언과 밀튼이 하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앉아 창밖을 보는 일밖에 없었다.

분명 우리는 중요한 임무를 받고 온 건데. 의식 연습에 참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이렇게 앉아 마음만 졸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물어볼 사람조차 없어 물음을 삼켜야만 했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을 무시하며 정해진 일만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호위해 준다는 린체 기사단은 뭔가가 이상했다. 마치 기사단복만 입은 무뢰배들 같았다.

무언가를 물어보려 치면 겁을 주며 쫓아내기 일쑤였고, 뒤에서 킬킬거리며 자신들을 비웃었다. 한 번은 용기 내 소리치며 맞섰지만, 돌아온 것은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그렇게 당당하면 가십시오! 황실과 신전, 거기에 의식까지 얽힌 이 일을 내팽개쳤다는 비난을 감당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 피해 보상도 하셔야겠지요.’

황실, 신전, 의식. 셋 다 한미한 가문 출신인 해리언과 밀튼에게는 감당이 되지 않는 단어였다. 평소에는 당당하다는 평가를 많이 듣던 해리언마저 그런 분위기 속에서 기가 죽었고, 안 그래도 연약한 밀튼은 부모님이 그립다며 우는 날이 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둘이 받은 것은 그녀의 입을 열기에 충분했다.

“이게 뭐람.”

해리언은 제 손에 들린 사제복과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물약을 살펴보았다.

최초의 사제들이 받은 옷은 하얀색의 하늘하늘한 옷인데, 자신들이 받은 것은 사제복과 비슷해 보였다. 꼼꼼히 살펴보면 박음질이나 천의 질, 그리고 전체적인 모양이 평범한 사제복과는 달랐지만, 그건 꼼꼼히 살펴봤을 때 일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구분이 어려웠다. 누가 이걸 구분하려 들 것 같지도 않았으니 누구든 자신을 사제로 생각할 건 뻔했다.

거기다 이 물약은 뭐란 말인가. 괴상한 색의 물약이 불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출렁거렸다.

해리언은 제 옆의 밀튼을 바라보았다. 밀튼 역시 자신과 같은 옷과 물약을 들고 당황한 듯 서 있었다. 자신들은 최초의 사제를 돕는 특별한 일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사제복이라니.’

헤리언은 제 손에 쥔 옷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말해야 했다. 이 사제복은 무엇이고 물약은 무엇이며, 아니 그전에 왜 자신들은 나가지도 못하고 이 저택에만 있어야 하는지. 그 비밀스럽고도 조심스러운 일은 무엇인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물어야한다는 생각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뭐 하시나요?”

갑자기 누군가가 헤리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뼈마디가 튀어나온 하얀 손. 이 손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올리자, 얼음 같은 차가운 눈과 해리언의 눈이 마주쳤다.

“데비엔 사제님…….”

“의식 때 입으실 옷을 보니 감격스러우신가요? 하긴 며칠 남지 않았지요.”

데비엔이 입만 움직여 웃었다. 웃지 않는 눈과 미소를 그리는 입술은 부조화스러워 보였고, 이상할 정도로 무서웠다.

“그……게 조금 이상해서요!”

데비엔의 눈을 피하며 해리언은 소리치듯 입을 열었다.

“저희는 왜 이런 옷을 받고 연습에도 참여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요, 그리고 이 물약은 무엇이지요? 데비엔 사제님. 이건 너무…… 너무 이상해요. 일반적이지 않아요!”

해리언의 외침에 옆에 서 있던 밀튼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비엔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하, 우리 어린 자매님께서 그게 궁금하셨군요. 미리 말하셨더라면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을 텐데. 이래서 어린 자매님들은……. 어쩔 수 없지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해 드릴게요.”

그간 은근슬쩍 입을 막았으면서, 데비엔은 교묘하게 해리언을 탓하며 비웃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린 해리언은 수도에 올라와 줄곧 이런 분위기에 눌린 탓인지, 제 탓이라 생각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특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요. 비밀스럽고도 신비한 일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데비엔은 신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았다. 화사한 햇빛에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거기에는 신과 최초의 사제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분의 일은 앞으로 역사서에 쓰일 정도로 고귀한 일이랍니다.”

데비엔의 목소리에 해리언은 눈을 깜빡였다. 여태껏 그녀에게서 느껴 왔던 한기가 마지막 말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태 그녀가 했던 다른 말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가 한 말만큼은 진실인 듯 보였다.

“그 누구도요?”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에 해리언이 간신히 반문했다. 그러자 데비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잠시 느껴졌던 진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거기서 신전과 황실은 제외해야겠지요.”

현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세력을 언급하며 데비엔은 가볍게 해리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리언의 어깨가 더욱 위축되었다.

“이제 충분하시겠지요?”

데비엔이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해리언은 가엽게 떨면서도 죽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충분한 답이 되지 않는데요……. 저는 왜 저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와 연습도 참여하지 못하는지…… 궁금해서…….”

“어머나, 아직도 이해를 못 하셨나요, 해리언 양?”

데비엔은 짐짓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허리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영지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해리언 양. 당신을 대신할 사람은 많으니까요.”

내려가라는 말에 해리언이 눈에 공포감이 서렸다. 그 눈을 바라보며 데비엔은 눈을 휘며 웃었다.

“내려갈 때는 당연히 이미 받은 돈은 황실과 신전에 반납하셔야 하는 거 아시죠? 아, 그리고 지금 사람을 바꾸면서 생기는 피해도 해리언 양께서 전부 내셔야 한답니다. 그리고 의식을 망친 가문이 어떤 피해를 입을지 직접 경험하시겠다면야, 저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데비엔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아, 아카데미 입학 취소도 있었지요.”

그건 여태까지 해리언과 밀튼이 계속 밀려드는 의문점에도 입을 열지 못한 이유였다.

본래는 최초의 사제가 되어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주는 거액의 돈. 해리언과 밀튼의 목적이기도 한 그 돈이 두 사람도 모르게 영지에 도착했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저택을 보수했단다. 이제 지붕에서 비가 샐 일은 없겠어. 거기다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는 일도 한결 수월해졌어. 고맙구나.’

‘테런과 네 아카데미 등록금을 한 번에 냈단다.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겠구나. 저번 태풍으로 피해를 본 것도 보내 준 돈으로 해결이 됐다.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두 사람이 자신의 가문에 거액의 돈이 도착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돈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택의 보수, 영지민에게 식량을 나눠 주는 일, 무너진 댐을 보수하는 일과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친 영지민에게 돌아가는 위로금 등, 돈은 필요한 곳으로 순식간에 흘러 사라졌다.

“그걸 해리언 아가씨께서 전부 반납하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한껏 웃음기를 머금은 말에 해리언과 밀튼은 고개를 저었다.

무리였다. 그 돈이 없어서 최초의 사제가 되는 일에 사활을 걸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데비엔이 미소 지었다. 이번엔 그녀의 눈이 살짝 휘며 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어 내었다.

“그럼 두 분. 더 이상 이의는 없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완전히 고개를 숙인 두 아이를 내려다보며 데비엔이 말하자, 작은 머리통이 순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흡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너무 걱정 마시길. 의식만 잘 치른다면 축하금이 더 내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데비엔은 인사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있는 방문이 닫히자, 문 앞에 서 있던 감시자에게 데비엔은 말을 던졌다.

“확실하게 보호하도록. 오늘 하루는 둘이 붙여 놓지 마. 방으로 데려다주면서 돈 이야길 한 번 더 꺼내고. 식사 시간도 따로 하도록 해. 철저하게 고립시켜. 알았어?”

가짜 린체 기사단복을 입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있다 보면 생각이 깊어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불안감이 더욱 발목을 잡겠지.”

돈은, 권력은 이래서 좋다.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문을 짓뭉개고 사람들의 입을 막는다.

저 한미한 가문의 두 자제도 돈이 아니었더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겠지. 불쌍하고 가여운 것들. 하지만 이름을 크게 남길 테니 그걸로 충분한 위로가 되겠지.

‘비록 자신들은 그걸 보지 못할 테지만.’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킨 이들이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지 않던가. 저 두 사람 역시 그러할 것이다.

기분이 좋은 듯 데비엔은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주인께 마지막 편지를 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깃펜을 든 데비엔은 양피지에 간단한 안부 인사로 편지 앞부분을 써 내려갔다.

[이쪽의 두 희생양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나이 대도 적당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부디 이피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세요.

약의 제조도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먹이기 시작한다면 신전에서도 변장이 통하겠지요. 추후 부작용이 심각하겠지만 어차피 죽을 테니 부작용은 신경 쓰지 않도록 합시다.

잠입 역시 무리가 없습니다. 확실히 꽃을 심는 것보다 씨앗을 섞어 뿌려 두는 게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자연스럽게 섞여 들킬 염려가 없어 만족스럽습니다.]

“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잠시 편지를 쓰다가 데비엔은 손을 멈췄다.

이제 곧이다. 며칠만 지나면 모두의 수십 년이 보상을 받는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다. 쉼 없이 달려왔다. 누구보다 그걸 자부할 수 있었다.

데비엔이 이트바나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을 때는, 이미 일족은 끝을 향해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결코 섞여서는 안 될 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다섯 살을 넘기기 전에 거의 다 숨을 거두었다.

간신히 어른이 된다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기 때문에 작은 병에도 쓰러지기 일쑤였고, 가지고 있는 힘은 몸만 갉아 먹을 뿐 쓸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타고난 힘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재앙과도 같았다.

그런 일족이 스스로를 ‘신에게 버려진 자들’이라고 부르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족이 끝을 향해 달려가는 도중에 데비엔이 태어났다. 그녀는 기적이라 불릴 만큼 힘이 강했고, 덕분에 약한 몸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죽어 가던 일족과 가족을 살리기는 무리였고, 자신도 일시적으로 살아났을 뿐이라는 건 데비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 강한 두 힘은 자신의 목을 조를 것이다.

동생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린 데비엔은 일족의 부흥이니 뭐니 거창한 목표보다는, 살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신전에 몸을 의탁했었다. 마법사의 저택은 르카디우스 제국에만 있었지만 신전은 어느 나라에나 있었으니까. 일단 신력을 제어하는 법을 배울 생각이었다.

신전의 생활은 고달팠다. 이유는 간단했다. 데비엔은 푸른 피가 아니었다.

신전의 고위 사제 대다수는 작위를 잇지 못하는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강한 신력을 가진 데비엔은 자연스레 그 사이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거기다 데비엔은 들키면 안 되는 비밀까지 있었기에, 더욱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밤에도 쉴 수는 없었다. 균형이 깨져 두 힘이 자신을 갉아먹지 않도록, 데비엔은 매일 밤마다 힘을 다루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그러기를 몇 년, 데비엔은 자신이 마법을 쓰던 걸 처음으로 들키고 말았다. 바로 메데이아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대신 내가 널 찾아오는 걸 막지 말아 줘.’

제 힘에 흥미를 보이던 메데이아는 늘 그녀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그러는 사이,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데비엔의 몸은 점차 약해져 갔다.

‘살 수 있지 않을까, 너도. 그리고 나도.’

마법사의 저택은 르카디우스 제국에 있다지. 그리고 나도 거기가 탐나. 작게 중얼거리더니 메데이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 거기로 가자. 우리는 거기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삶을 살아 보는 거야.

“……바보 같으시긴.”

데비엔은 옛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믿기지 않았던 계획은 차근히 진행돼 이제 마지막 걸음만을 남기고 있었다.

“부디, 우리의 제국이 더욱 빛나길 바랍니다. 메데이아 황제 폐하.”

태후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

어떻게 할 거야? 공작은 몸을 비스듬히 한 채, 턱을 괴었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한쪽 손으로는 가볍게 의자 팔걸이를 두드렸다.

셀바토르 공작의 생각은 다른 사람이 차지했지만, 시선은 제 어린 딸에게 닿아 있었다.

아직도 제 눈에는 작아 보이는 아이의 손에는 봉인석이 가득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발치에 놓여 있는 두어 개의 바구니는 얼핏 보기에도 무거워 보였다. 얼굴을 가린 하늘하늘한 천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졸린 목소리 때문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겠지. 라일락을 닮은 눈동자에서는 졸음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작은 입을 벌려 하품을 할지도 몰랐다. 레슬리는 자신을 닮아 잠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자신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놓고 졸았지만, 자신의 딸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졸음을 쫓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겠지.

이제 자장가보다 더 졸린 축사가 끝나면 기나긴 복도를 지나 에피알테스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갈 것이다. 어릴 적 자신이 그랬듯이.

‘에피알테스는…… 쉽게 깨어나지 못할 텐데.’

팔걸이를 두드리는 공작의 손길이 조금 더 빨라졌다.

아주 오랜 세월이었다. 악몽이 신이 보낸 사제들에게 봉인되고, 몇 개나 되는 나라들이 건국되고 바스러질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에피알테스를 이용하려는 이들은 계속해서 나왔고 그때마다 봉인은 되레 굳건해졌다.

에피알테스에 가려면 두 개의 커다란 문을 거쳐야 했다.

감시하는 불이 꺼지지 않아 이젠 스스로 빛나게 됐다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나긴 복도가 방문객을 맞이했다. 창문도 없는 검은 복도 역시 에피알테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설계된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벽돌 하나, 걸음 한 걸음, 작은 것에도 강력한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빠져나온다 해도 걸쇠는 어떻게 할 거지?’

암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봉인에 걸린 세 개의 걸쇠. 첫 번째 걸쇠가 풀리지 않는 한 아라벨라가 썼다는 브로치가 달린 상자는 움직이지 않을 텐데.

첫 번째가 풀려야 상자는 움직일 것이다. 그래 봤자 두개나 되는 문과 복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방을 빠져나오지는 못 할 테지만.

바람을 가진 언어가 기도가 되어 수천 년간 쌓여 만들어진 봉인이었다. 그간 에피알테스를 이용하려는 멍청이들이 매번 실패한 이유였다.

의식부터 축사, 그리고 긴 복도와 방 안을 감싸는 벽돌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이 존재하는 데 이유가 있었고, 각각은 복잡하고도 섬세한 힘으로 에피알테스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에피알테스를 가지고 어떻게 도망칠까.’

깨어나자마자 에피알테스는 일단 자신을 들고 있는 사람부터 먹으려고 들 텐데. 역시 따로 접촉한 그 아이들을 이용하려는 걸까.

고민에 빠진 공작의 귓가에는 아직도 느리고 졸린 축사가 이어졌다.

“공작님.”

그때였다. 공작의 뒤쪽에서 몰래 제나가 나타난 것은. 공작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고, 공작의 옆에 앉아 있던 사이레인은 고개를 돌려 제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두 분을 놓쳤습니다.”

해리언과 밀튼. 레소에게서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길 들은 공작은 바로 사람을 붙여 두었다.

한미한 가문, 최초의 사제에서 떨어진 어린 두 아이, 그리고 가난한 영지.

공작은 그 두 사람을 메데이아가 선택한 운반책으로 생각했다.

굳이 귀족을 고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돈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이용하기 딱 좋은 위치가 아니던가. 거기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권위로 찍어 누른다면 적당히 이용하게 좋게 길들여지리라.

하지만 워낙 예민했던 에타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재빠르게 자취를 감춘 후였다. 혼란의 시대 때나 지금이나 잽싼 몸놀림 하나로 생을 부지해 가는 쥐새끼들다웠다.

‘어차피 의식 때 나타날 테지. 신전의 모든 통로를 의식이 시작하기 사흘 전부터 감시해.’

셀바토르 공작의 예상은 맞았다. 의식이 시작하기 전날 허름한 짐마차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두 작은 소녀와 소년이 내려 신전 안쪽으로 사라졌다.

제나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 중에서도 가장 몸을 잘 숨기는 이들을 선별해 붙여 두었다. 그중 한 명은 데비엔을 의식해 특별히 마법사로 골라 두었다.

그런데 두 사람을 놓쳤다니.

“아무래도 메데이아 측에서 미행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일부러 신전 측에 마법사가 있다고 말을 흘린 모양이더군요.”

“아아…….”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신전과 마법사의 저택은 사이가 안 좋았지.

“아무래도 신전 중앙에 마법사가 있는 걸 달갑지 않아 하는지라.”

“어리석은 것들.”

공작은 낮게 혀를 찼다. 사이가 안 좋더라도, 생명이 걸린 일에도 사이가 안 좋으면 어쩌자는 건가.

때로는 현실적인 이유로 신념을 굽혀야 할 때도 있건만 멍청한 것들은 그때를 잘 몰라보았다. 아니면 어느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아도 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든가.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것들이 자신보다 콧대는 더 높았다.

“어머니.”

루엔티가 나지막이 공작을 불렀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공작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지금 순간 비틀거린 것은, 잠시 졸음에 진 모양이었다.

얼굴을 가린 천이 살짝 흔들렸다. 누가 자신을 보았나 주변을 둘러본 것이겠지. 절로 웃음이 나오는 행동이었다.

“계속해, 제나.”

“그리고 테펜텔 님이 에펜타니 백작님과 함께 수도 검문소를 지나치셨다고 합니다. 1시간 전쯤에 올라온 보고이니 이미 약 제조에 들어가셨을 겁니다.”

생각보다 더 빡빡한 일정이었을 텐데 테펜텔은 잘 맞춰 주었다.

“약은 계획대로 잘 제조되고 있고…….”

“그런데 공작님.”

제나를 따라온 하르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에피알테스……를 겨우 저런 약으로 진정시킬 수 있을까요. 전설에도 나오는 역병이 아닙니까. 저는 지금이라도 의식을 멈추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어디로?”

공작이 천천히 눈길을 하르트에게 돌렸다.

“어디로 이 많은 인원을 대피시킬까? 거기다 그곳이 안전하단 보장은 어디에 있지?”

한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수도는 상상보다 훨씬 더 거대했고,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꾸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 수도 외곽에 사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줄을 세우는 데도 한 달이 걸리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 메데이아가 에피알테스를 정말로 퍼트릴지, 협박용으로 쓸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야. 여기서 대거 대피시킨다면 그녀를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지.”

이어지는 공작의 말에 하르트의 침묵이 더욱 깊어졌다.

“어차피 메데이아는 이 제국을 삼킬 셈이야.”

하르트가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자 공작은 다시 시선을 레슬리에게 돌렸다.

“그러니 메데이아 역시 이곳을 심하게 훼손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막상 입에 넣었는데, 역병으로 가득 찬 제국이면 자신도 탈이 나지 않겠는가.

“에피알테스는 약하다.”

긴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다가 갑자기 덜컥 눈을 뜬 상황이었다. 제힘을 바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혹여나 퍼지더라도 테펜텔이 가져와 준 정보와 약으로 막을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 말과 동시에 공작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레슬리가 얼굴을 가리는 천 틈새로 자신과 시선을 맞춘 까닭이었다.

“그리고 늘 지키는 게 많은 쪽이 불리한 법이지.”

공작의 예상대로 눈에는 졸음기가 서려 있었다. 공작이 손을 흔들어 주자, 졸음기 대신 웃음과 반가움이 눈 안에 가득 찼다. 귀여운 내 딸. 공작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사이레인은 레슬리가 이쪽을 바라보았을 때부터 크게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루엔티도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며 손을 흔들었다. 거기에 화답하듯 레슬리가 한껏 웃음을 머금었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너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 아르트엘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겹쳐져, 공작은 눈을 찡그려 그 모습을 지워 냈다.

***

‘어머니랑 눈 마주쳤다.’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졸음을 깨기 위해 살짝 고개를 흔들다가 셀바토르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거기다 사이레인은 힘내라는 듯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고, 루엔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이레인의 격한 응원에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레슬리는 뿌듯하게 웃었다. 자랑하고 싶은 가족이었다.

베스라온이 황족 쪽이 아니라 셀바토르 공작가 자리에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레슬리는 바구니를 들고 있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웃었다. 슬슬 축사의 끝이 보였다.

‘생각보다 바구니가 무겁네.’

연습할 때 이용했던 모형은 그다지 무거운 편이 아니었는데. 이래서 복도를 지나 에피알테스에 갈 때 사제가 두 명이나 동행하는구나. 연습 때는 조금 의아스러웠던 부분들이 이제야 한두 개씩 이해 가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광장 쪽을 내려다보았다. 최초의 사제가 축사를 시작하는 곳은 광장보다 조금 높은 곳이었기에, 최초의 사제들이 서 있는 광장을 내려다보기는 수월했다. 다들 자신처럼 하늘하늘한 천으로 얼굴을 가려 성별조차 짐작이 되지 않았다.

레슬리는 무의식적으로 엘리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대기실에서만 해도 한껏 치장된 제 머리를 뽐내던 엘리는 생각보다 더 조용히 축사를 듣고 있었다. 마치 엘리 같지 않은 조용함에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순간 내려가 저 천을 걷어 엘리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는지는 레슬리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엘리가 아닐 리가 없었다. 대기실에서 홀로 제 존재감을 뽐내는 엘리를 보지 않았던가.

레슬리는 애써 이상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얼굴을 가린 천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광장 위쪽에 마련된 특별석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왜 아까 옷을 갈아입을 때 사제가 레슬리에게 이 천이 도움이 될 거라 했는지 알 만했다. 최초의 사제들 가족들과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고위 귀족들, 지방에서 올라온 듯 처음 보는 이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테라 대공님이다.’

레슬리의 시선이 황금빛이 섞인 문양에 잠시 닿았다. 아이테라 대공가의 문양이었다.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덕분에 아이테라 대공가는 황실을 제외하고 황금빛 문양을 쓰는 첫 가문이 되었다.

‘여전히 무섭게 생기셨어.’

눈 색도, 머리카락 색도 분명 콘라드를 닮았는데, 경과는 다르게 아이테라 대공은 어딘가 무서워 보였다. 부족한 게 없는 분인데,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걸까. 왜 콘라드 경을 아프게 하는 걸까.

‘왜일까.’

어머니는 욕심 때문이라고 말해 주셨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테라 대공가는 황실 바로 밑에 있는 가문이었다. 그 올라가지 못하는 단 한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나는 걸까.

레슬리는 시선을 돌렸다. 그 옆에는 조금 아파 보이는 귀부인과 프리트가 앉아 있었다. 아이테라 대공비의 살짝 휘어진 눈매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은 콘라드와 똑같았다.

콘라드는 어머니를 닮은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대공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테센트루아 성기사가 있었다.

비록 투구를 써서 누군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공비의 따스한 눈빛에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콘라드 경이였다.

레슬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엔 제법 다급한 몸놀림에 티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선을 괜스레 바구니를 쥔 제 손에 고정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중에 어쩐지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최초의 사제들과 아라벨라를 보내 에피알테스를 봉인한 우리들의 신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축사를 마칩니다.”

수고했다는 듯 최고 사제가 레슬리를 보며 생긋 웃었다. 다정한 미소에 레슬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웅장하게 음악이 울려 퍼지고, 축사가 끝난 걸 기뻐하는 환호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뒤를 돌자, 대기하고 있던 사제 두 사람이 레슬리 발치에 놓인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두 명의 테센트루아 성기사가 그 뒤에 섰다.

거대한 문이 열리며 한눈에 보기에도 아득할 정도로 긴 복도가 시야에 가득 담겼다. 저 끝에 보이는 방이 에피알테스를 봉인하고 있는 방이었다.

맨 뒤에 선 테센트루아 기사 두 명이 복도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육중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순식간에 음악 소리도, 환호 소리도 없는 적막한 공간. 그 위에 레슬리는 서 있었다.

“아까 힘드셨지요?”

잡담 하나 없이 침묵으로 걸어야 할 듯 보였던 복도에서 최고 사제가 웃었다.

“아닙니다, 사제님.”

레슬리는 시야를 방해하는 천을 걷어 내며 대답했다. 지금은 벗어도 되는 거겠지. 최고 사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었다. 신성한 공간에서 저렇게 웃어도 되는 걸까?

“여기서는 조금 잡담을 하고 떠든다 해서 나무랄 사람이 없습니다, 공녀님. 연습 때와 다르게 완벽히 격리된 상태니까요.”

레슬리는 그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오는 두 사제와 기사들 사이로 보이는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연습 때는 문을 닫지 않지만, 의식 때는 다르니까요.”

“그렇군요.”

레슬리는 최고 사제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진 최고 사제는 모든 연습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긴 복도를 다른 고위 사제와 걷는 게 레슬리에겐 더 익숙할 정도였다.

늙은 사제가 환하게 웃었다. 어딘가 포근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공작저의 바타가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저런 느낌일까. 어쩐지 바타를 떠올리자 신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최고 사제도 친근하게 보였다.

여든은 되어 보일 법한 최고 사제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마치 매일 하는 산책처럼 익숙한 일인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셀바토르 공작님과 함께 이 복도를 걸었지요.”

“어머니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최고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슬리와 그의 뒤로, 두 명의 사제와 두 명의 테센트루아 성기사가 따랐다.

“네, 저는 아직 최고 사제는 아니었고, 지금 뒤에 따라오는 형제님들처럼 바구니를 옮기는 것을 도와 드리는 정도였지만 말입니다.”

최고 사제와 레슬리의 시선이 닿자, 중년 사제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몸이 작게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의식을 시작할 때 자신처럼 많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때는 제 스승님이 이 자리를 공작님과 걷고 있었지요.”

중년 사제를 잠시 의아한 눈으로 보던 레슬리는 이내 최고 사제의 말에 귀를 빼앗겼다.

“스승님이 아직 소공작이시던 셀바토르 공작님께 자신이나 신전에 대해 궁금한 게 없는지 물으셨습니다.”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인데 묘하게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최고 사제는 신전의 모든 중요한 일을 주도하는 데다가 그 경험과 지식은 헤아릴 수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황제도 종종 최고 사제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다고 들었다. 오죽했으면 늘 투덕거리던 마법사의 저택 사람들도 최고 사제가 나서면 일단 뒤로 한발 물러나 주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물으셨을까.

“공작님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는지, 최고 사제의 눈이 먼 곳을 응시했다.

“좀 놀라신 스승님께서는 혼란의 시대가 끝나는 것도 궁금하지 않은지 여쭤봤고, 공작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자신이 끝낼 테니 궁금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지요.”

역시 어머니야! 레슬리는 몰려오는 전율에 바구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솔직히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을 그렇게 생각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공작님을 다시 뵙고 싶어서 난생처음 귀족 저택으로 가는 일에 지원도 했었습니다.”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최고 사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최고 사제가 된 후에는 셀바토르 경을 만났지요. 지금 린체 기사단장이신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 경 말입니다.”

베스라온 오라버니도 아라벨라가 된 적이 있단 말인가? 레슬리는 너무 놀라 최고 사제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대로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은 아라벨라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무얼 하든 보통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분들이니까요. 아, 루엔티 마법사님은 제외시겠군요. 그분은 아라벨라가 되기 전에 이미 마법사의 저택에 이름을 올리셔서.”

이야기가 샜다는 듯 손을 가볍게 내저은 최고 사제가 말을 이었다.

“저는 스승님이 그러하셨듯, 셀바토르 경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반응이 돌아왔지요.”

“오라버니도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고 하시며 묻지 않으셨습니다.”

레슬리는 그 말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그렇고 다들 어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문제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놀랐을 텐데, 셀바토르 경이라…… 쿨럭!”

갑자기 최고 사제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사제님! 괜찮으신가요?”

레슬리가 당황해 소리치자, 간신히 기침을 멈춘 최고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신의 곁으로 갈 때가 돼서 그런지 몸 이곳저곳이 고장 났습니다. 신력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요.”

웃으면서 사제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곧은 자세 그 어디에도 세월이나 병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녀님. 늙긴 했지만 이 복도를 다 지나기 전에 죽지는 않을 겁니다.”

나름 농담을 한다고 한 것 같은데 레슬리에게는 무서운 말이었다. 레슬리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자, 최고 사제가 농담이라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여섯 사람은 에피알테스가 봉인된 방 앞에 도착했다. 들어올 때의 문 역시 거대해 보였지만, 그와는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육중한 문에 레슬리가 고개를 들어 문 가장 윗부분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이 사이레인 위에 목말을 타고, 다시 다른 사이레인이 목말을 타고…… 그렇게 몇 명의 사이레인이 목말을 타야 저 문 윗부분에 손이 닿지 않을까.

아까 축사로 인해 풀렸던 긴장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최고 사제는 문 위에 손을 얹은 채 나지막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신어 같았는데, 신어에 자신 있는 레슬리조차 한 마디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말이었다.

사제의 기도문이 끝나자마자, 마법이 걸린 듯 육중한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 안은 어둠을 삼키기라도 한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둠 속을 최고 사제가 가리켰다.

“자, 공녀님. 아라벨라로서 이 봉인석을 제단 옆 꽃들 사이에 놓아 주시면 됩니다.”

꽃들이라니. 이렇게 햇빛조차 닿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꽃이 핀단 말인가?

최고 사제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늘 자신을 따라다녀 주는 어둠이 아니었더라면 몰려드는 공포에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들 정도로 짙은 어둠이었다.

레슬리가 안쪽으로, 조금 더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신기해!”

감탄은 레슬리에게서 흘러나온 게 아니었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와 준 두 명의 사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 목소리에 최고 사제가 이상하다는 듯 뒤를 돌았지만, 레슬리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커다란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다. 스페라도 후작저의 정원을 그대로 옮겨 둔 것처럼 거대한 곳에 은빛으로 빛나는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색색의 마법석들과 그 위에 피어나 빛을 내는 꽃들로 인해, 방 안을 가득 메운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슬리의 발밑에 숨어 여기까지 따라온 어둠이는 이 빛이 싫은지 작게 움직였다.

“길이 있네.”

레슬리는 제 앞을 바라보았다. 봉인석은 아무런 규칙 없이 쌓인 듯 보였으나, 작게 길을 만들고 있었다.

꽃과 봉인석들 사이를 조금 더 걷자, 나무로 만든 제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제단과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콘라드의 말대로 아라벨라의 브로치가 달린 상자에는 세 개의 걸쇠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걸쇠에 브로치를 제외하면 작은 나무 상자는 그냥 오래된 평범한 상자였다. 시장이나 번화가에 가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게 분명할 정도로 투박하고도 평범한 상자.

‘이게 에피알테스.’

신화에도 나오는 전염병. 그게 이렇게 작고 초라한 상자에 들어 있다니. 그리고 이 물건이 자신과 셀바토르 공작의 인연을 만들었다니.

어쩐지 신기해,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움츠렸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연습 때 들었던 사제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간혹 호기심에 에피알테스에 손을 대는 아라벨라께서 나오시는데,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신화에도 나오는 전설적인 전염병이 아닙니까.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나면 안 되니 사람을 죽이는 호기심은 넣어 두십시오!’

사람을 죽이는 호기심. 그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레슬리는 봉인석을 꽃들 사이에 놓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봉인석을 내려놓자, 꽃들이 내는 빛이 한층 강해졌다.

봉인석의 크기가 큰 덕에 레슬리가 들고 온 바구니는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렇게 봉인석을 다 내려놓았을 때쯤엔 쏟아지는 강렬한 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됐다.’

레슬리는 한참이나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런 식으로 두 개의 바구니를 더 비우면 되었다. 레슬리는 웃으며 다시 꽃들 사이를 걸어 밖으로 나왔다.

찰팍.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그렇게 생각한 레슬리의 귓가에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물웅덩이를 밟은 듯한 소리. 레슬리의 시선이 저절로 웅덩이를 만든 사람에게 닿았다.

“이게 무슨…….”

봉인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마주한 것은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쓰러진 최고 사제와 공포에 떨고 있는 두 사제, 그리고 피 묻은 검을 든 채 웃고 있는 두 성기사였다. 레슬리가 밟은 것은 최고 사제의 몸에서 나온 피였다.

“사제님!”

손안에 든 바구니도 내팽개친 레슬리가 최고 사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레슬리의 하늘하늘한 하얀색 옷이 밑에서부터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신을 나타내는 고귀한 하얀색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사제님, 정신 차려 보세요.”

레슬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최고 사제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늙은 사제는 미약한 신음만 흘릴 뿐 눈을 뜨지 못했다.

“지금 그분이 걱정되십니까, 셀바토르 공녀님?”

성기사가 웃으면서 레슬리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아직도 검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거죠.”

레슬리는 무섭게 두 성기사를 노려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기도회 때, 종종 신전에 콘라드를 찾으러 왔을 때, 웃으며 자신을 맞이해 준 사람들이었다.

그뿐이었던가. 기도를 올리러 신전을 방문했을 때도 제일 먼저 맞이해 주었지. 단정한 얼굴로 신도 레슬리의 신앙심에 감동할 거라 말하며 렌티우스와 장난을 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두 사람이 호위를 맡게 되었다고 대기실에서 자신에게 말했을 때, 사실 레슬리는 반가웠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나았으니까.

따라 들어오는 두 사제 역시 오가면서 얼굴을 알음알음 익힌 사람들이라 더욱 마음을 놓았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라니.

배신감이 목을 조르는 듯 레슬리는 옅게 숨을 헐떡였다.

“아, 저희는 아예 태생이 에타이입니다. 처음부터 공녀님이 믿을 만한 놈들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에타이 중에서도 신력과 체력을 동시에 타고난 놈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공녀님.”

두 명의 사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성기사가 말하자, 레슬리의 목에 검을 겨눈 기사가 환한 얼굴로 웃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저들은 불순한 목적으로 들어와, 그렇게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던 것이었다.

레슬리는 옅게 숨을 정리하면서도 생각을 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당장 저 두 분을 풀어 주세요.”

레슬리는 사제 둘을 가리켰다. 지금 다급한 건 최고 사제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이었다. 방금까지도 병에 괴로워하시던 분이 아니던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음, 저 둘을요?”

잠시 구석에 붙어 가련하게 떠는 사제 두 명을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를 믿을지 안 믿을지는 공녀님 몫이지만, 지금 공녀님 목적에 저 두 사람은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인데. 이런, 기껏 쌓아 놨던 신뢰가 사라졌나 봅니다.”

그의 대답을 무시하며 레슬리는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자신에게 검을 겨눈 기사 쪽으로 걸어갔다. 피를 한껏 머금은 의복이 바닥에 끌리며 선명한 핏자국을 그려 냈다.

“……위험합니다, 공녀님.”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성기사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하지만 그 경고는 레슬리에게는 우스운 것이었다.

“나 역시 경고하죠. 저들을 놔줘.”

레슬리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기사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뭐지? 사내는 눈을 찡그렸다.

대장은 최대한 공녀는 살려 두라고 했다. 끝을 봐야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던가. 나중에 황실에 팔려 갈 귀한 몸이라고 했던가.

‘특별한 사항은 없었는데.’

거기다 평소 모습 역시 바보처럼 잘 웃기나 하는, 영락없이 그저 그런 여자애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리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걸까.

작게 이를 간 기사는 이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결국, 레슬리의 하얀 목에 긴 상처가 생겼다.

“내 경고를 거부한 걸로 봐도 되겠지.”

라일락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을 바라보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을 때,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아차렸다.

“큭! 나를 도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

“의식의 날에 마지막으로 약을 드시면 됩니다. 그 뒤 전해 드린 물건을 사제복 안에 넣었다가, 넘겨받은 봉인석 사이에 숨겨 두세요.”

잠시 해리언과 밀튼에게 약을 건네주러 온 데비엔이 두 사람을 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약병을 태연하게 건네주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데비엔이 사제복을 가져다줄 때부터 먹기 시작한 이 약은 먹으면 먹을수록 몸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종종 베개 위에 자신의 머리색이 아닌, 짙푸른 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기도 했다. 마치 며칠이라는 시간을 들여 자신 위에 다른 이의 껍데기를 씌워 두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밀튼의 눈에 발치의 바구니가 들어왔다. 평범해 보이는 바구니 안에는 기겁할 만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때가 기회였어.’

차라리 해리언이 용기를 내 처음으로 이상하다고 말했던 그때 이야기를 해야 했었다. 못 하겠다고, 이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지만…….

“아, 그리고.”

데비엔이 어린 두 사람의 어깨를 꽉 쥐며 환하게 웃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여러분의 가문에 축하금과 함께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돈과 선물이 제대로 여러분의 가문에 도착하지 못할까 봐…….”

어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법도 한데 두 아이는 떨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뒷말이 이미 예상이 된 탓이었다.

“꽤 훌륭한 기사들을 같이 보냈답니다. 기쁘시지요?”

“…….”

아무리 나이가 어린 해리언과 밀튼이라지만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데비엔이 이야기한 훌륭한 기사는, 계속해서 짐을 지키는 기사일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이 일에서 도망치면 가족을 해칠 악당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해리언은 제 손에 쥐어진 약을 들고 떨었다. 밀튼 역시 이내 눈치를 챈 듯 눈물을 떨궜다.

“가슴 아프게 울지 마세요. 두 분 모두.”

그 말에 오히려 더 울음이 터졌다. 해리언은 최대한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켰지만, 아직 그녀보다 어린 밀튼에게는 무리였다.

“더럽게.”

데비엔은 경멸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바로 손을 뗐다. 그리고 뒤를 돌아, 대기하고 있던 하녀와 하인들을 향해 외쳤다.

“이분들이 혹여나 의식의 날 때 다치면 안 되니,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집 밖은 위험하다고들 하니…….”

데비엔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오늘부터 방에서만 편히 머물도록 도와 드려. 식사도 산책도, 방이 크니 답답하지는 않으시겠지.”

“네, 알겠습니다. 데비엔 님.”

“그런!”

두 사람은 질겁했다. 그나마 이 저택에서 위안이 되는 것이라고는 서로뿐이었는데. 지금 서로를 만나는 것조차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해리언이 당황해 외치든 말든 데비엔은 말을 이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데. 다치시면 안 되죠. 최대한 건강하게, 그리고 최대한 아름답게 있어 주세요.”

거기까지 말한 데비엔이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 웃음에는 단 두 가지의 감정만이 섞여 있었다. 환호와 기대감이었다.

데비엔의 감정들을 읽어 낸 해리언과 밀튼은 고개를 떨궜다.

처음부터 자신들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메데이아 태후의 이름과 고위 사제의 이름, 그리고 막대한 돈에 속아 그릇된 선택을 해 버렸다. 두 발목이 보이지 않은 끈에 칭칭 묶인 기분이 들었다.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니, 빠져나가더라도 위험했다. 이미 데비엔은 막대한 자금과 가족의 안전으로 두 사람에게 완벽한 족쇄를 채우지 않았던가.

절망하는 해리언을 바라보며 데비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럼 두 분 다 힘내시길. 모르잖아요? 혹시 이 일이 완벽히 끝나면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영지로 내려갈 수 있을지도요.”

“…….”

“아, 그리고 제가 정말 두 분을 아껴서 드리는 말인데…….”

잠시 말꼬리를 흐린 데비엔이 입술을 휘며 듬뿍 웃음을 머금었다.

“셀바토르 공녀를 조심하세요. 그녀는 대단히 위험하답니다. 만일 그녀가 여러분에게 위협을 가하거든…….”

데비엔은 두 사람 귀에 대고 작게 무언가를 속살거렸다. 그녀의 말을 들은 밀튼과 해리언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라고 말하세요. 여러모로 준비된 여러분들이라면 그 말 한마디로 그녀의 심장을 파헤칠 수 있을 거랍니다.”

검은 불과 함께 말이죠. 알 수 없는 말을 속살거린 데비엔는 이내 웃음소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

레슬리는 착잡한 얼굴로 쓰러진 두 명의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텅 빈 동공은 그들이 숨을 거뒀다고 생각하게 할 법했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거대 늑대처럼 어둠으로 집어삼킨 게 아니라 머릿속을 잠시 뒤흔들어 준 것뿐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제정신을 차릴 것이다.

‘울렁거려…….’

레슬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거듭 각오를 한 덕분인지, 사람을 공격했다는 죄책감은 생각보다 적었다. 하지만 어둠으로 두 성기사를 삼킬 때, 생각보다 더 반항이 컸다.

하필이면 가장 반대되는 힘. 그게 레슬리를 어지럽게 만들었고, 마치 공중에서 떨어진 듯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시간 따위 없었다. 레슬리는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현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말자, 겁먹지도 말고. 어머니나 아버지, 두 오라버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보자.

생각보다 답은 빠르게 나왔다.

“두 분.”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벽에 붙어 떨고 있는 두 명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두 성기사가 사제들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저들은 믿을 만한 거겠지.

“최고 사제님의 치료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어서 의식을 마칠 테니 의식이 끝나자마자 사람을 데리고 와 주세요.”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 밖과 안을 차단하는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부상자를 치료하고 의식을 서둘러 끝마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두 사제는 덜덜 떨기만 할 뿐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제님……?”

레슬리가 의아함과 조바심에 손을 뻗자, 남자 사제가 몸을 더욱 움츠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히, 히익! 살려 주세요!”

모습보다 꽤나 어린 목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살려 달라는 말이 날카롭게 귀에 막혔다.

레슬리는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아까 어둠을 사용했을 때 저들도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겁을 먹은 듯 보였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고개가 절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울렁거림이 조금 거세졌고,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그럼 어서 부탁할게요.”

일부러 시선을 그쪽으로 두지도 않고 레슬리는 근처에 떨어져 있는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어서 의식을 마칠 생각이었다.

“안 돼!”

이번에도 절박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번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무언가가 이상했다. 한 명이면 몰라도 둘 다 모습과는 다른, 이렇게 어린 목소리라니?

레슬리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 사제가 레슬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남자 사제의 팔이 잡혀 있었다.

“……!”

레슬리가 여자 사제를 저지하기도 전에 그녀가 팔을 뻗어 바구니를 낚아챘다. 하지만 두 바구니와 함께 남자까지 이끌 수는 없었는지, 곧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있던 봉인석들이 하얀 대리석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봉인석 사이에 숨겨져 있던, 붉은 피가 들어 있는 작은 병들도 봉인석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안 돼.”

해리언은 약 효과가 떨어져 점점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밀튼이 더 크게 울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레슬리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허겁지겁 병을 모아 들었다.

“이봐요!”

레슬리는 당황했다. 갑자기 중년 여성과 남성으로 보였던 사제들이 순식간에 소년과 소녀가 되었다. 누구인지 확인해 보기도 전에 소녀는 병을 들고 봉인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점차 변하는 머리카락 색과 어딘가 익숙한 뒷모습. 자연스레 축제 전의 번화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유명한 꼬치구이집이 쓰러진 그날, 거리에서 보았던 뒷모습이었다.

“당신!”

메데이아의 밑에 있던 아이들이 분명했다.

왜 저들이 여기에 있을까, 왜 마법약으로 모습을 숨겼을까. 진짜 사제님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레슬리는 먼저 손을 뻗었다. 그중에서도 저 소녀를 방 안으로 들여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쿠웅! 어둠을 움직여 해리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해리언이 당황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거대한 문을 대신한 어둠 안으로 들어갈 용기 따위는 있지 않았다. 아니, 그냥 어둠인데도 들어갈 수 없게 실체를 가진 듯 보였다.

“못 들어가요.”

레슬리의 말에 천천히 해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눈물과 죄책감, 괴로움과 도와 달라는 외침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다.

“……죄송해요, 공녀님.”

데비엔이 하라고 한 그 말을, 해리언은 공포를, 진심을, 그리고 미안함과 도와 달라는 마음을 담아 흘렸다. 그건 정확히, 거의 다 아물어 가는 레슬리의 상처에 꽂혔다.

‘죄송해요, 아가씨.’

들어 본 적 있는 말, 어디선가 겪어 본 듯한 상황.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남긴 열두 살 때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처음으로 먹어 본 하얀 빵과 잼들 그리고 버터, 처음으로 가졌던 행복한 기억 그리고 배신. 울먹이는 엠로아와 레슬리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검은 불.

작은 음식점을 가득 메웠던 검은 불길이 그때처럼 갑자기 레슬리를 덮쳤다.

“싫어!”

환각이었지만, 레슬리는 몸을 웅크렸다.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이젠 사방이 일렁거렸다.

불길 때문인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첫 배신과 아직도 무서운 불길이, 4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 쫓아와 레슬리를 덮쳤다.

그 끝에는 끔찍했던 스페라도 후작가의 생활까지 달려 있었다. 아프고 괴롭고 끔찍했으며,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치던 12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 나은 기억이었지만, 아주 잠시 레슬리의 이지를 흐리기엔 충분했다. 굳건히 문을 막고 있던 어둠이 휘청거렸다.

“……!”

그사이 해리언과 밀튼은 울면서 에피알테스가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리언과 밀튼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품에 들려 있던 병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아아…….”

해리언과 밀튼의 작은 몸이 빛을 내는 꽃들 사이로 사라졌고, 꽃들이 한 송이, 한 송이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시야가 점점 붉게 물들었다. 환상과 실제가 뒤섞여 눈을 가렸다. 여섯 사람이 이 복도에 들어왔는데 지금 홀로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알려야 하는데.’

밖에 알려야 했다. 이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다리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존재하지 않은 불길이 작은 발을 붙잡았다.

레슬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부터 풍겨 오는 피비린내에 머리가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발에 엉겨 붙은 피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불길과 함께 레슬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쪽.」

그때 무언가가 레슬리의 옷자락을 나가는 문 쪽으로 이끌었다.

어둠이었다. 아니, 어둠에서 나온 작은 손들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지금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 있어야 할 토끼 인형의 팔 같았다.

“아…….”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손들이 조금 더 힘을 줘 앞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두 발자국을 내딛자,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세 번째 발자국은 레슬리의 의지로 걸었다. 그 뒤는 간단했다.

레슬리는 문 쪽으로 달리듯 걸었다. 걸을 때마다 옷자락에 묻은 핏방울이 떨어지며, 꽃잎이 흩어지듯 뿌려졌다. 온화한 최고 사제와 잡담을 하며 걸었던 복도를 순식간에 지나쳐, 처음에 지났던 거대한 문에 손을 올렸다.

봉인석이 전부 에피알테스 근처에 뿌려지자, 의식이 끝났다고 여겨졌는지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 일단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미 밖에서는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리가 없었으니까.

레슬리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는 모두가 있었다. 더 무섭지 않았다.

달칵.

기나긴 복도 반대편에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첫 번째 걸쇠가 열리는 소리였다.

***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를 흐리는 일이다.’

기록의 첫 문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자신이 직접 태워 버린 기록을 메데이아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기도를 흐린다라. 메데이아는 오랜 조사 끝에 각 신전에서 매일 올리는 기도가 봉인을 굳건히 하는 거라는 걸 알아냈다. 그래서 데비엔과 손을 잡았다. 데비엔은 메데이아의 생각보다 더욱 잘 움직여 주었다.

이트바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제는 르카디우스 제국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사제들이 섞이고 혼란스러울 때 메데이아는 데비엔의 뒤를 살짝 밀어주었고, 그녀는 손쉽게 고위 사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시간을 들였다. 막 들어온 어린 사제들을 데비엔의 편으로 물들였다. 겉보기엔 선한 인품, 높은 신력 그리고 고위 사제인 데비엔.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은 그녀에게 쉽게 넘어갔고 서서히 기도의 본질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년,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데비엔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물들였다. 본질은 더욱더 빠르게 흐려져 갔다.

‘그래 봤자 큰 틈은 못 냈지만.’

자신이 공들인 시간은 그간 기도가 이어졌던 시간에 비하자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바닷물에 설탕물 한 컵을 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아주 작은 틈을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가장 기본적인 준비가 끝났다. 메데이아는 옅게 웃었다. 드디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제물은 작은 것이다. 바로 큰 것을 삼킬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니 작은 동물이 적당하다. 혹시 바로 동물을 먹이게 하기 힘들면 피를 빼서 뿌려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작은 병들을 준비했다. 거기에는 붉은색 액체가 가득 담겨 희생양의 손에 쥐어졌다.

‘두 번째는 어린 것이다. 성별이 다양하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두 명을 뽑았다.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한미한 가문, 돈이 없어 절박한 아이들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동전 몇 닢에 쉽게 옆을 내주었다.

자신들이 무슨 역을 맞게 될지도 모른 채, 열심히 하겠다며 외치던 두 아이의 얼굴과 이름을 메데이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름의 양심을 지켜서 두 사람의 이름을 역사서에 크게 기록해 줄 생각이었다. 스스로 몸을 던진 용감한 이들로 기록해 꽤 멋진 미담도 만들어 줄 계획이었다.

그럼 분명 그들의 가문에도 도움이 되겠지. 가문을 살리고자 최초의 사제가 되려 했으니 그들도 기꺼워할 것이다.

‘세 번째는 강력한 신력을 가진 건강한 사람들이다. 반대되는 힘을 먹고 에피알테스는 조금 더 빠르게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명의 사제와 성기사로 들어가 있던 두 사람을 준비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따르던 두 사제도, 에타이 출신의 두 성기사도 에피알테스를 깨우는 첫 식사가 되었다. 해리언하고 밀튼에게 얼굴과 신분을 빌려줬던 사제는 이미 그 근처에 쓰려져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키워 온 가장 고급스러운 패를 여기서 버린다는 건 꽤 아까웠지만, 패는 한둘이 아니니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두 성기사는 나중에, 나중에 커다란 영지로 그 값을 치르기로 에타이들과 거래를 했다. 그렇게 넷을 준비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문제는 네 번째였다.

‘네 번째는 고귀한 푸른 피, 특별한 힘을 가지면 더욱 좋다. 거기에 최대한 성격은 비틀어지고 복수심과 이기심에 시야가 가려진 사람이 적당하다. 네 번째의 피를 에피알테스에게 뿌려 주면 에피알테스는 그 피를 더 먹기 위해 네 번째가 있는 곳으로 스스로 움직일 것이다.’

척 보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네 번째를 위해, 메데이아는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했다.

처음부터 제물이 될 아이를 고르고 골랐다. 다행히도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은 가문마다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다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렇게 힘을 가지고 있던 가문들 사이에서 고르다 보니, 스페라도 가문의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가 눈에 들어왔다. 메데이아는 첫눈에 겉보기엔 상냥하고 순수한 소녀의 본심을 알아보았다. 자신도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더 깊게 조사하니 스페라도 가문부터가 심한 악취를 풍기는 가문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랑받는 딸이라니. 너무도 완벽한 아이이지 않은가.

메데이아는 그 즉시 아렌도와의 약혼을 추진했다. 질투심도 많고, 타고난 성격이 전형적인 스페라도 가문의 성격이니, 버려두고 내버려 둬 적당히 마음을 더 뒤틀 생각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의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보는 법이니 그 기간은 길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거기다 가장 골치였던 봉인의 방과 기나긴 복도를 지나치는 방법까지 알아내었다. 메데이아의 계획은 더욱 완벽해진 듯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가볍게 넘겼던 스페라도 가문의 두 번째 아이였다. 그 작은 아이 때문에 메데이아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들이 흔들렸다. 아이는 작은 걸음마다 강한 태풍을 몰고 다녔다.

‘하지만 이내 내 뜻대로 되었지.’

덕분에 엘리는 더욱 완벽하게 뒤틀렸고, 그렇게 에피알테스를 깨울 마지막 제물이 되었다. 엘리의 피에 이끌려 이동할 테니까.

물론 에피알테스는 바로 그녀를 먹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며칠. 나흘 정도면 충분히 에피알테스가 엘리를 먹고 눈을 뜰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가 상자를 가지고 잠시만 숨어 있는다면 그녀의 오랜 계획은 완성될 터다.

늘 언제 나올까 기대하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의 움직임도 레슬리를 보며 약간의 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보호하려 할 게 뻔했으니 건드리기 힘든 공작이 아니라 레슬리를 건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공작은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내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게 고아원에서 데려오지.’

원래 계획대로 적당히 쓰고 치울 만한 아이를 데려오지. 거대한 돈과 보장된 삶을 살게 해 주면 그런 역할도 괜찮다고 외칠 아이들이 이 드넓은 제국에서 한둘이 아닐 텐데. 마음만 약해서는 살려 달라 외치는 아이의 외침을 무시하지 못하다니.

‘바보 같은 셀바토르.’

메데이아는 옅게 웃었다. 그래도 그녀와 놀게 되어 즐거웠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수를 둘까 생각하는 일은 꽤 신나는 일이었다. 과거에 먼발치에서 소문만 간신히 듣던 이와 싸운다는 건 꽤 인정받는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메데이아는 셀바토르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벌어질 일에 어떻게 반응할까.

드디어 자신이 고대하던 일이 벌어진다는 생각에 그만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왕 웃은 거 손도 흔들어 주자.

공작의 쭉 뻗은 눈매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 옆에 앉은 사이레인이 무섭게 메데이아를 노려보았다.

‘곰 같은 남자.’

메데이아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사이레인이 싫었다. 셀바토르는 더 좋은 남자를 고를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용병을 데려와 덜컥 결혼식을 올렸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없는 듯 보였다. 자신처럼 쓸모 있는 남자를 고르지.

“이상하게 늦는군요.”

옆에 앉은 아르트엘이 고개를 비스듬히 하며 걱정스럽게 말을 흘렸다.

“이제 슬슬 문이 열려야 할 텐데.”

“그러게, 묘하게 이번엔 좀 여유롭군.”

피스토레가 아르트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악사들은 티를 내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씩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건 아직도 광장에 있는 최초의 사제들과 다른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당황하는 꼴들을 구경한 메데이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셀바토르 경.”

메데이아의 바로 옆에는 베스라온이 서 있었다. 지루한 축사가 울려 퍼지는 기간에도, 동생이 문 안으로 들어가던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는 베스라온을 흔들어 볼 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셀바토르 공녀님께서 들어갔는데, 너무 걸리네요. 저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경은 동생이 얼마나 걱정될까요.”

메데이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으며 베스라온을 흔들 만한 말을 건넸다. 베스라온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아까 공작과 똑같은 모습에 다시 즐거워졌다.

하지만 베스라온의 대답은 메데이아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걱정되지 않습니다.”

“흐응. 셀바토르 경은 어린 동생이 걱정되지 않는군요.”

메데이아의 말에도 베스라온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걱정해야 할 만큼 약한 아이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 동생은 아라벨라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현명하게 움직일 겁니다.”

강한 신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메데이아는 작게 웃었다. 그의 대답에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라…….”

나도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메데이아는 발끝을 까딱거렸다. 둘 다 오랫동안 준비했다면 누가 이기게 될까.

“최고 사제님과 아라벨라께서 나오십니다!”

문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확인한 한 사제가 화색을 띠고 크게 외쳤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고 말았다.

조금 늦어진 탓에 걱정이 서렸던 관중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의식이 끝난 후에 축제를 즐기러 가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그런데 문이 열리다가 멈추었다.

“……?”

피스토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안 좋은 느낌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피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여보!”

“어머니!”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셀바토르 공작은 자신을 부르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제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공작의 손은 허리춤에 매여 있는 자신의 검을 잡고 있었다.

“공작님!”

“셀바토르 공작!”

피스토레와 다른 귀족들도 놀라 외쳤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의 신경은 온통 저 안에 있을 자신의 딸에게 쏠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메데이아는 웃었다. 거봐, 마음이 여리다니까. 친자식도 아닌 아이를 위해 저렇게 나서다니. 필요하다면 자기 자식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메데이아는 문 쪽으로 다가가는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작게 숨을 흘렸다.

“고, 공작님. 안 됩니다. 아직 의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사제가 마지막으로 공작을 말렸다.

“의식이 끝났으니 문이 열리는 것이겠고, 문제가 생겼으니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 게 아닌가. 아니면 그대는 저 붉은빛과 문이 열리다 만 이유를 설명할 수 있나?”

“그렇진 않지만 그래도 저희 신전 측에서 조사를 하겠습니다.”

사제의 말에 공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래서 명예뿐인 놈들이란. 급한 것과 급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저 안에는 내 딸이 있네.”

그렇게 말하며 공작은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이 문이 어떤 문인데!”

사제가 셀바토르 공작의 팔에 매달렸다. 신앙심이 깊은 그는 어떻게 해서든 공작이 이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제의 생각과는 다르게 공작의 움직임에는 무리가 없었다. 공작은 가볍게 그를 들어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동작에 당황한 사제는 공작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나는 우리 딸을 다시 아프게 할 생각이 없거든.”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이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한껏 머금은 검과 신성력으로 보호되고 있는 문이 부딪쳤다. 순간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안 돼! 500년이나 된 문이란 말입니다! 국보급, 아니 성물급이라고요!”

눈이 멀 것 같은 빛 속에서도 고함치는 사제의 목소리에 공작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500년 정도면 슬슬 새 문을 갈아 낄 때가 되지 않았는가.

다시 강렬한 빛이 쏟아지고 문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생각보다 더 작게 뚫린 모습에 가볍게 혀를 차며 공작은 안으로 들어갔고 바로 문 앞에 쓰러진 자신의 딸을 안아 들었다.

“레슬리.”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안쓰럽게 매만졌다.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자, 레슬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머니……. 죄송해요.”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레슬리가 말을 이었다.

“에피알테스가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긴 복도 안쪽에 있는 방에는 이미 져 버린 꽃들과 쓰러진 사람들만이 있을 뿐,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에피알테스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자신의 어린 딸을 품에 안은 셀바토르 공작의 시선이 복도 안쪽을 향했다. 공작의 눈길은 쓰러진 최고 사제와 두 명의 성기사를 지나 에피알테스가 봉인되어 있어야 할 방에 닿았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빛나는 꽃들로 가득해야 했는데, 봉인의 방은 어두웠다.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피알테스가 사라졌다는 걸 밖에 있는 자들이 알면 수도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그리고 메데이아가 노리는 것도 그것이겠지. 그런 소란을 틈타 에타이들이 손쉽게 스며들 테니까.

‘일단 지금 상황을 넘겨야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셀바토르 공작이 미간을 좁히는데, 제 품에 안겨 있는 레슬리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어머니 망토를 빌려주세요…….”

말하는 게 힘든지, 레슬리는 잠시 침을 삼키며 눈을 찡그렸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에피알테스가 사라졌다는 걸 모두가 알면 큰 혼란이 일어날 거예요.”

혼란을 틈타 메데이아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며 레슬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크게 비틀거리긴 했지만, 공작의 손을 잡고 이내 제 다리로 균형을 잡았다.

레슬리는 자신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피가 묻은 의식복만 아니라면 현 상황을 잘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 듯 보였다.

“어머니는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어머니가 말하면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점점 약해지는 목소리였지만 레슬리는 흔들림 없이 제 의견을 말했다.

셀바토르다운 모습이지 않은가. 레슬리의 모습에 옅게 미소 지은 공작은 말없이 자신의 망토 핀을 풀었다. 하지만 레슬리에게 망토를 건네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망토는 사제님께서 더 필요하신 듯하군요.”

손을 뻗은 곳에는 레슬리보다 더 하얗게 질린 최고 사제가 서 있었다. 언제 눈을 뜬 것인지, 소리 없이 두 사람에게 다가온 최고 사제의 손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신력으로는 치료가 힘들 텐데……. 생각보다 빨리 피가 멈추는군요.”

공작이 망토를 건네며 말하자 최고 사제는 힘겹게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누군가가 저희를 노리고 있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도를 준비해 놓았지요. 이것도 나름 준비해 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제복 밑에 감춰진, 쇠사슬로 만들어진 방어구를 보여 주었다.

“신전에서 내려오는 건데 검도 잘 막아 내고, 자연 치유력을 높여 주지요. 그래도…… 배신을 막아 내지는 못했지만요.”

늙은 사제는 고개를 돌려 쓰러진 두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후회와 참혹함이 서려 있었다.

“에타이 이야기를 들어서 준비해 뒀었습니다. 두 사람을 직전에 바꾼 것도 나름의 획책이었습니다만…… 씁쓸하군요. 설마 내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습니다.”

“저도 낯이 익은 사람입니다.”

공작의 말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제가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늙어서 눈이 침침해졌나 봅니다. 허허. 이런 걸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사제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의 주름진 눈가는 젖어 있었다.

“신께서 잘못된 자식에게는 벌을 주시겠지요.”

공작의 말에 사제는 눈물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신께서 그리해 주시겠지요. 공녀께는 죄송하지만, 이 망토는 제가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최고 사제는 망토를 받아 들었다. 짙은 암녹색 망토가 피로 물든 사제복을 가려 주었다.

“공녀님, 이 늙은이를 위해 손을 빌려줄 수 있을까요?”

레슬리는 최고 사제가 자신을 지탱할 수 있도록 팔을 걸치고는 그 옆에 섰고 잠시 힘을 달라는 듯 공작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섰다.

“나오신다!”

공작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자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가 나오자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경악했다. 공작의 망토를 입고 나오는 최고 사제와 피투성이가 된 아라벨라의 모습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 망쳐졌다는 수군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호기심과 경악, 공포가 사람들 사이에 퍼졌고, 심지어 사제들과 성기사들까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흉흉한 분위기가 조금씩 사람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메데이아는 옅게 웃음 지었다.

잠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다 최고 사제가 허리를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느새 그는 레슬리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습격이 있었습니다.”

나지막한 최고 사제의 목소리는 더 졸리지도, 나른하지도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힘이 담겨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불손한 자가 의식 도중 저와 아라벨라를 습격했습니다.”

웅성거림이 다시 커졌다.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는 사람, 겁에 질려 품에 안기는 아이, 벌써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달려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축복의 날 의식은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날을 위해 거의 8년에 걸쳐 아라벨라와 최초의 사제들을 선발했고, 의식을 준비했다. 그런 의식 도중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가 습격당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자 최고 사제가 느긋하게 웃었다. 어딘가 여유가 넘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늙은이 하나도 이겨 내지 못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내일쯤 신의 곁으로 갈 이 늙은이를 말입니다.”

최고 사제가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조금은 농담을 삼아 말을 잇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렇게 아라벨라도 무사하고, 에피알테스의 봉인 역시 흔들림이 없습니다.”

최고 사제가 레슬리를 바라보자 레슬리 역시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욱 진정했고, 그건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스토레는 이를 갈았다.

‘메데이아, 결국!’

다른 이들도 아닌 제국의 태후인 그녀가 이런 일을 벌였다.

‘나를 노리는 줄 알았는데 제국을 무너트릴 생각이었나?’

자신을 노려보는 피스토레의 얼굴을 보고 메데이아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옅은 홍조가 서려 있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끝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단 한 번이긴 했지만, 비슷한 선례가 있었다. 제국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타국인이 의식 도중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를 습격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습격을 주도했던 나라의 멸망이었다.

“저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고, 우리는 다시 그 끝을 새겨 줄 준비가 끝났습니다.”

늙은 사제는 다시 온화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따스함보다는 어딘가 서늘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축제를 계속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축제의 끝은 그들이 신께 돌아가는 뒷모습으로 장식될 테니까요.”

피가 묻은 듯 보이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듯 보이는 사제와 아라벨라, 그리고 제대로 잠든 에피알테스. 거기에 최고 사제의 연설이 더해지며 사람들의 소란은 가라앉았다. 평소처럼 최초 사제들이 천천히 빠져나가자 사람들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있는 황제, 황후, 공작, 레슬리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건 일시적으로 불안을 눌러둔 것이었다. 그 잠시 사이에 에피알테스를 찾고 범인을 잡지 않는다면 제국은 곧 혼돈에 휩싸일 것이다.

레슬리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찡그렸다.

***

“최고 사제님께서 의식 중 습격을 당하셨다니요!”

격노한 음성이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여태 스페라도 후작가에 밀려 있다가 최근 간신히 빛을 보고 있는 모테리우스 후작의 목소리였다. 모테리우스 후작이 소리칠 때마다 눈가가 움찔거렸다.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런 의식 도중 이런 참극이 벌어지다니, 이건 국가적 재앙입니다!”

그 소리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스토레는 의자에 앉아 깊게 한숨을 흘렸고, 셀바토르 공작은 침묵했으며, 아이테라 대공은 자신의 안경을 달싹였을 뿐이었다. 다른 귀족의 가주들은 얼굴을 굳힌 채 서로의 눈치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모두가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의식 도중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를 습격할 거라는 걸 누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행히도 정신을 차린 최고 사제가 그 상황을 무마했으나 평화는 길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아라벨라와 최고 사제는 연설이 끝나자마자 쓰러졌다. 황제는 의식이 끝나자마자 즉시 회의를 소집했고, 지금 이 상황이 되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말없이 커다란 회의 테이블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간혹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했는데, 그 행동이 공작의 기분이 안 좋을 때 나오는 습관이라는 걸 아는 이들은 침을 삼키며 침묵했다.

“거기다 주변에서 두 사제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단 셀바토르 공녀께서 붙잡은 두 사람을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신전에서 사제들의 얼굴을 훔쳤는지도, 의식에 참여했는지도 전부 다요!”

쾅! 후작은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분노로 몸을 잘게 떨었다. 비록 두 성기사는 어둠이 아닌 다른 이유로 숨을 거두었지만, 사제의 거죽을 뒤집어쓴 해리언과 밀튼은 살아 있었다. 살아는 있었다.

“아직 그들은 깨어나지 못한 겁니까?”

모테리우스 후작은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붉은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는 황실의 방패라 불리는 페리시울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었다. 베스라온이 황족을 지킬 때, 황궁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작게 한숨 쉬었다.

“네, 그렇습니다. 거기다 두 사람 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져 신원을 파악하기 힘듭니다. 도대체 뭐에 그렇게 당한 것인지…….”

“그렇다면 신전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에서는 렌티우스 경이 바로 조사에 나섰습니다. 배신한 두 사람의 흔적을 통해 최근 접촉한 모든 사람을 찾아내고 있다더군요.”

그 뒤로 그녀는 뭔가를 더 말했지만, 공작과 황제의 귀에 들린 것은 사제로 속인 두 사람의 상태였다. 마치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얼굴과 부풀어 오른 신체는 그들의 신원은커녕 나이대도 알 수가 없게 만들었다. 살아는 있었지만,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병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증세. 공작은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걸 들은 사람은 없었다.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한 채로 시간만 잡아먹었고, 그대로 끝을 맺었다. 오랜 회의로 지친 고위 귀족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밖에서는 축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며 불꽃놀이가 검은 밤하늘에 퍼지고 있었지만, 회의장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럼 일단 저도 가 보겠습니다, 황제 폐하. 조금의 단서라도 발견이 된다면 바로 황궁으로 달려오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셀바토르 공작, 황제와 함께 남아 있던 아이테라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동생.”

지친 얼굴의 피스토레가 시선만 들어 아이테라 대공을 불렀다.

“네, 형님.”

“동생은 이 사태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또 최고 사제와 아라벨라를 노린 범인은 누구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아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테라 대공이 대답을 내놓았다. 그의 황금빛 시선은 흔들림 없이 피스토레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 중에도 계속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사태의 배후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형님. 이만한 일을 벌이려면 굉장한 힘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인물이…….”

황금빛 시선이 안경 너머로 회의장에 남은 사람을 훑었다. 당연히 그의 형인 피스토레 황제는 아니었다.

“몇 없긴 하지요.”

공작이 시선을 맞추자 아이테라 대공은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웃으며 다시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현명한 동생도 이번 일은 무리인 건가.”

깊게 숨을 내쉬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 봐도 좋다는 허락에 아이테라 대공은 고개를 한 번 숙인 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충분히 발소리가 멀어지자, 피스토레가 홀로 남은 공작을 나지막이 불렀다.

“셀바토르.”

“이미 베스에게 말해 우리 쪽에서 붙여 놓은 감시자들을 확인하라고 했지만…….”

공작이 말을 흐리자 피스토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고 미리 붙여 둔 감시자들의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땅 깊은 곳이나 물속에 누워 있겠지.

“두 사람 모두?”

그 물음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피알테스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에피알테스가 들어 있는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떻게 그 복도를 통과했지? 에피알테스를 봉인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신이 봉인하고, 전설이 되어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자리 잡힐 때까지 에피알테스가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마치 자석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휴, 의식이 끝난 후에 콘스텐을 황태자로 소개하려 했는데 그것마저 무산이 되어 버렸어. 책봉식은 뒤로 미뤄야겠지…….”

피스토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이를 갈았다. 그의 눈가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문 쪽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제나였다. 아무리 셀바토르 공작가의 집사며 황제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지만, 그녀가 들어올 만한 자리가 아님에도 제나의 걸음걸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 폐하. 제가 이렇게 무례를 저지른 이유는.”

전혀 무례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과연 셀바토르 공작가의 집사답다며 피스토레가 익숙하게 말을 흘렸다.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제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단발이 살짝 흔들렸다.

“에피알테스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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