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번에 새로 들인 붉은 벨벳 의자에 앉은 공작이 레슬리의 맞은편에 앉은 아이테라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이테라 공자.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공작님.”
“흐음.”
공작은 턱을 괴고 콘라드를 바라보았고 콘라드는 여유로운 척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이테라 공자가 나에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치다가 이번엔 레슬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엉망이 되어 버린 옷을 갈아입고 온 레슬리는 공작과 시선을 맞추자마자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속도 모르고.’
공작은 옅게 웃었다. 분명 칭찬해 달라는 거겠지. 하지만 거지꼴이 되어 콘라드, 그리고 레소와 돌아왔을 때는 조금 놀라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물론 그 일로 혼을 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약해 보여도 주변에 퍼지면 즉시 분쟁 지역으로 끌려갈 힘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다.
‘그간 내가 너무 과보호한 거지.’
그런 과보호로 막을 수 없던 몇 사건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메데이아는 이제 레슬리가 사라지거나 크게 다쳐 의식이 취소되는 사태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과보호라는 말로는 막을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들이 벌어지겠지.
“이야기해도 좋네, 아이테라 공자.”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콘라드는 한 번 입술을 깨물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대로 시선을 맞추며 말을 꺼냈다.
“저희 아버지가 황제 폐하를 배신했습니다.”
“……아이테라가?”
턱을 괴고 있던 공작의 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밑으로 떨어졌다.
“네.”
콘라드는 짧게 대답하며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핏줄이 보일 정도로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주최한 파티 때, 이피엘에게서 꽃을 받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황후가 마음에 드는 황족과 제 사람에게 꽃다발을 보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 보지는 않았겠지.”
콘라드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좋아했다. 특히 아버지를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랐던 그였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을 어린 나이에 입단한 이유 역시 자신의 의지와 아버지인 아이테라 대공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따르는 콘라드가 고작 꽃다발 하나를 받는 모습을 봤다고, 어찌 보면 아이테라 대공가의 가장 큰 적인 셀바토르 공작에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꽃다발 속에서 물약을 챙기시는 걸 목격했습니다.”
콘라드의 눈가가 떨렸다. 긴 속눈썹 밑에 자리한 황금색 눈동자는 자신이 말한 사실이 진실이 아니기를 강렬하게 바라는 눈이었다.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어머니께서는 몸이 안 좋으시죠.”
스웰라 대공비의 이야기는 공작도 잘 알고 있었다. 신생 가문이라 힘이 약한 대공가와 황실조차 두려워하는 공작가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대공가가 일방적으로 만든 그 거리감을 좁힌 것이 바로 스웰라 대공비였다.
햇살처럼 화사한 여자였다. 그녀는 늘 눈을 휘며 따스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 웃음과 화사함으로 그녀는 셀바토르 공작과 친해졌고, 그때부터 대공가와 공작가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콘라드와 루엔티가 친밀해지면서 그 친교가 두터워졌다. 그런 그녀가 4년 전부터 앓아눕기 시작했다. 공작 역시 루엔티의 편으로 갖은 희귀한 약초와 약을 들려 보냈었으니 대공비의 몸이 안 좋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간혹 저희 어머니가 몸이 좋아지실 때가 있었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된 걸 드시고, 잠깐이나마 산책도 하셨죠.”
콘라드는 조금 서글프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와 아버지가 황궁에 다녀온 때를 대조해 보았습니다. 저는 저택을 자주 비우는 편이라…… 동생의 일기를 빌렸죠.”
어릴 때부터 차근히 일기를 써 오던 프리트의 습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머니가 나아졌다고 기뻐하는 일기가, 뒤에는 아버지가 황실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가 가끔 나왔다.
아카데미로 가게 되면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적어졌지만, 편지가 올 때마다 편지가 써진 날짜와 도착 날짜, 그리고 간단한 내용까지 적어 둔 덕에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꽃다발과 물약을 받아 온 다음 날, 어머니의 병이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늘 먹던 환자식을 벗어나 고기를 조금 먹었고 좋아하던 드레스를 입고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양산을 쓰고 즐겁게 정원을 걸어 다녔다.
“그리고 오늘 에타이를 만났습니다.”
“수도에서 에타이를?”
공작이 레슬리를 바라보자 레슬리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쫓다 보니 이피엘을 만났고, 이피엘을 따라가다 보니 에타이들이 있었습니다.”
앞 이야기는 천천히 하겠다며 콘라드가 말을 이었다.
“이피엘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준 돈은 웬만한 영지를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이라고요. 그런데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는 그만한 자금이 없을 겁니다.”
메데이아의 공식적인 위치는 권력도 의욕도 없는 가녀린 태후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현금으로 그렇게 큰돈을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는 그 돈을 저희 아버지가 내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테라 대공님께서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슬리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네, 얼마 전…… 아니 이제 좀 날짜가 지났군요. 몇 달 전에 저희 무역선 두 척이 태풍으로 침몰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사와 재무 관리인이 피해액을 산정한 결과…….”
콘라드는 여기까지 말했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대공이 적이라고 외치는 셀바토르 공작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지,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콘라드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가 믿을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공작뿐이었다.
“저희 영지의 1년 예산이 나왔습니다.”
“하.”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일그러졌다. 레슬리는 놀라 몸을 작게 움츠렸다.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한 나라의 태후가 자신의 제국을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군.”
공작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아니, 제국과 에타이까지 꿀꺽할 셈인가?”
제국을 제 손아귀에 놓고 에타이까지 잡고 흔들 수만 있다면 꽤 좋을 것이다.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자신의 적이라.
공동의 적이란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은 법이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을 긴급 상황이라는 이름 아래 그 입을 막고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에피알테스.’
에피알테스로 강력한 황권을 만들고, 에타이로 내부의 적을 침묵하게 만든 후 제국을 먹는다라.
“생각보다 더 욕심이 많았어…….”
체할 텐데. 공작은 낮게 읊조렸다.
이트바나 같은 작은 나라에 만족 못 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지금의 르카디우스 제국조차 그녀의 성에 차지 않았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아렌도는 어찌할 생각이지.’
콘라드와 레슬리가 집무실로 올라오기 직전, 제나가 올린 한 장의 서류가 있었다. 예전에 사이레인과 이야기한, 유일했던 황녀의 죽음을 증언한 자들의 목록이었다. 그리고 그 서류를 받아 들자마자 공작은 왜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이해했다.
‘……이상 목록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증인들의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은 그저 실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증인들의 시신 상태였다. 증인들의 시신은 불태워져 숲속에 버려져 있었고, 토막 나 땅에 묻혀 있었으며, 심지어 다른 한 명은 강 밑에 수몰되어 있었다.
‘시신을 전부 수습해 확인하느라 보고가 늦어진 점에 대해…….’
공작은 보고서를 더 읽지 않았다. 그저 돈주머니를 조사자에게 더 건네주라고 말을 했을 뿐. 분명 조사비가 제법 들었을 게 뻔했다.
철저하게 숨기려는 의도가 다분한 상황. 그 상황은 공작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여실하게 알려 주었다.
‘아렌도가 메데이아의 아들이었군.’
이제 그녀가 아렌도를 지지하는 이유는 알아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왜 메데이아는 아렌도를 그런 눈으로 바라볼까.
자기 아들, 자신의 황제. 그런 아이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열정은 비슷할지 모르나 그 안에 숨어 있는 혈육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었다.
“…….”
공작이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침묵하자, 레슬리와 콘라드가 불안한 듯 시선을 마주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공작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내가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대의 아버지는 벌을 피하지 못해. 아이테라 대공가도 무너질 테지. 반역 사건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렌도를 황위에 올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까지는 봐줄 만해도, 그 과정에서 에피알테스를 노리고 에타이와 손을 잡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각오는 했겠지, 공자.”
그렇다면 그 여파는 당연히 콘라드에게도 미칠 것이다. 그는 더는 공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 것이다. 평생토록 아버지가 지은 죄를 대신 갚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콘라드가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콘라드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네. 공작님께 말씀드리는 그 순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고는 종을 울려 제나를 위로 올라오게 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제나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황실로 갈 거야. 채비하도록.”
공작은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 따윈 상관없다는 듯 제나가 가져온 코트를 받아 들었다.
“최대한 가족들에게는 피해가 안 가도록 노력해 보지.”
공작은 지나가며 콘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콘라드가 옅게 웃었고, 공작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
공작이 나가고 나자 콘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몸이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콘라드 경.”
레슬리는 조심스레 콘라드의 옆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제 아버지를 존경하고 믿고 있었는지는 레슬리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늘 맑게 웃으며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진 게 가장 걱정이라며, 자신이 잘하면 될 거라고 말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레슬리는 손을 뻗어 콘라드의 어깨를 다독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손을 내려 위로하듯 등을 쓰다듬었다.
“레슬리 양.”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빛 머리 사이로 젖은 황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아, 아버지는 왜 그러신 걸까요.”
콘라드가 울고 있었다. 목소리가 정처 없이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가가 안쓰러울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대공가면 황위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데…….”
왜, 아버지는. 왜 그런 선택을. 뒷말은 다시 울음에 잠겼다.
스웰라 대공비의 건강 때문이라기엔 꽃다발을 들고 간 그 눈이 걸렸다. 욕망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사실은 모른 척하고 싶었습니다. 파티 때 아버지가 그 꽃다발을 받아 든 순간, 내팽개치지 않고 그대로 들고 간 그 순간부터, 모른 척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순탄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자꾸만 스스로를 다그쳤다. 아버지가 제정신을 차리고 이제라도 메데이아와 손을 털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 아버지가 에타이에게까지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자 그게 부질없는 희망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흐, 흐윽.”
앞으로 자신의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아버지의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프리트는 아카데미를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입양처를 알아봐야 할지도 몰랐다. 아직 어리니 감정에 호소하면 받아 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와 자신은 뒷감당을 해야 할 것이다.
“저는, 옳은 선택을 한 거겠지요? 아버지를 버린 것이…… 옳, 옳은 선택…….”
“걱정 마세요, 콘라드 경.”
레슬리가 힘차게 외쳤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레슬리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가 있잖아요. 루엔티 오라버니도 있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꼭 잡고 외치자 콘라드가 울음을 멈추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눈꼬리에서 남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레슬리는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콘라드의 눈물을 훔쳐 주며 말을 이었다.
“저를 도와주셨지요.”
가문의 책을 확인하러 간 신전에서도, 재판에서도, 시험을 치러 간 시누스턴 신전에서도. 그리고 평소에도 늘 콘라드는 자신을 도왔다.
“그러니까 이번엔 제가 콘라드 경을 도울게요. 경이 옳다고 생각되는 길로 가세요.”
레슬리는 눈물진 눈으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
“무슨 일이야, 셀바토르?”
자다 일어난 듯 엉망이 된 피스토레가 셀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까지 잠에 푹 잠긴 게,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늦은 밤, 갑자기 숨겨진 길을 통해 찾아온 제 친구를 피스토레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네가 뒷길을 이용하다니 별일이군.”
싫다고 하지 않았었나. 상황 파악이 안 된 피스토레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도 참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었지. 숨겨진 길을 만드는 괴상한 취미 말이야. 할아버지는 자물쇠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는데 역시 부자지간은 닮는 모양이야.”
숨겨진 길을 만드는 선대 황제의 취미는 유명했다. 그는 산책로라고 우기며 만들었지만, 영락없는 뒷길이었다.
그는 그걸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고 자신 혼자만 사용했다. 특히, 피스토레나 신하들을 먼저 보내고 뒷길로 가로질러 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걸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 모든 뒷길이 그려진 지도를 피스토레에게 넘겼다.
덕분에 피스토레가 황제가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황궁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뒷길을 정리한 일이었다. 그중 몇 개는 살아남았고, 하나는 셀바토르 공작에게 주어졌다. 그 누구도 모르게 와야 할 일이 있을 때 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걸 받고 나서도 셀바토르 공작은 단 한 번도 그 길을 이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공작이 뒷길을 이용했다.
“그나마 이미 몇 개는 수풀로 막히거나 자연스럽게 없어져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아직도 뒷길을 정리하고 있을지도 몰라.”
어느새 이야기는 뒷길을 정리할 때 고생했던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래서 나도 고생 좀 했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지. 너도 공작 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는데…….”
“……피스토레.”
침묵하고 있던 셀바토르가 자신의 오랜 친구를 불렀다. 하지만 피스토레는 이미 불길한 소식을 가져왔다는 걸 알아챈 듯 음료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런 피스토레를 질책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족을 너무도 사랑해, 유일하게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감조차 거부하는 남자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였으니까.
무너지지 않을까. 괴로워하고, 울부짖고,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렇게 무너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이 제국의 황제였고, 자신은 그런 황제에게 충고를 올려야 하는 신하였다. 쓰러진다면 멱살을 잡고 끌어 일으켜야 했다. 그가 쓰러지면 제국이 위태로웠다.
“알고 있었지.”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뭘 말인가? 아, 음료. 음료를 내가 너에게 주지 않았구나. 배고프지 않아? 지금 당장 시종장을 불러서 간단한 다과를 가져오도록 하지.”
다시 피스토레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셀바토르는 무섭게 피스토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말을 돌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음성이었다.
“알고 있었지, 피스토레. 아니, 알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감을 잡고 있었겠지.”
“음료수가 맛이 이상한가.”
“네 동생이, 이 나라의 대공이 너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
“피스토레!”
“알고 있었어!”
쨍그랑! 음료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다고!”
손으로 괴롭다는 듯 제 얼굴을 감싸 쥐며 피스토레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고, 셀바토르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으며, 너무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감을 잡고 있었어! 감을 잡고 있었다고! 아렌도를 황위에 올리지 않겠다고 말한 날, 그 눈빛을 보면 누가 몰라!”
좌절한 듯 피스토레가 고개를 떨궜다. 제 동생이, 자신에게 불손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 확신했다.
그 시작은 4년 전부터이던가, 아니면 더 오래되었던가. 아주 어릴 적부터였던 것도 같다. 그 눈빛이 익숙할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피스토레.”
셀바토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남자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누가 나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지 알고 있나?”
“내, 내가 어떻게 아나! 사이레인이거나 제나겠지. 네 정보통은 그 두 사람이니까.”
“아니, 둘 다 아니네.”
그제야 피스토레가 눈물로 젖은 시선을 저의 오래된 친구에게 보냈다. 그녀는 지친 듯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이테라 공자가 이걸 나에게 알려 줬네. 네가 아끼는 콘라드 말이야.”
“뭐……?”
피스토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고 셀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닮아 있었다. 제 가족을 너무도 사랑해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점이. 하지만 콘라드는 괴로워하면서도 의심을 저버리지 않았고, 오늘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제 아버지를 고발했다.
“네 사랑스러운 조카가, 자신의 아버지를 나에게 고발했다는 소리일세.”
“그런…….”
“그리고 지금은 울고 있겠지.”
공작이 집무실을 나오고 난 뒤 상황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제 아버지를 고발한 콘라드는 무너질 듯 울고 있을 것이다. 공작의 집무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마음 편히 울고 가면 좋으련만.
“콘라드를 그렇게 밀어붙인 건 자네야, 피스토레.”
셀바토르는 이제 피스토레를 노려보며 말을 던졌다. 그가 확신했을 때 자신에게 이야기했더라면, 이제 갓 성인이 된 소년이 오늘 받았을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셀바토르의 말에 피스토레가 입을 꽉 다물었다. 입술을 세게 물었는지 피가 흘러나와 눈물과 뒤섞였다.
“그리고 아렌도가…….”
거기까지 말하다 셀바토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그의 오래된 친구의 눈빛이 이상했다.
‘말하면 안 되겠군.’
이 이상 말하면 안 된다. 지금 피스토레는 하룻밤 안에 두 소식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불러온 비극이라지만,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공작의 직감은 정확했다.
“말을 이어 주게, 셀바토르. 그래서 아렌도가? 설마 그 아이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괴로움 속에서 피스토레가 셀바토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차고 넘친 아픔이 뚝뚝 떨어졌다.
“……아렌도가 메데이아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질지도 모르네.”
결국 말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아이테라도 마찬가지겠지. 그녀는 지금 이 제국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어.”
“그래, 그렇겠지.”
피스토레의 눈이 매섭게 돌아갔다.
“메데이아……. 이제 어찌해야 할까, 셀바토르.”
그가 눈물과 함께 입에서 흐른 피를 훔쳤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식을 중지하는 거지.”
“그건 안 돼. 의식을 중지하면 신전에서 말이 나올 걸세.”
“그래,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분명 이야기가 돌겠지. 제국이 약해졌다는 소리가.”
몇 년마다 돌아오는 가장 중요한 축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중지되어 버린다면, 그건 황실에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불안감은 서서히 퍼질 것이고 소문은 불안감을 먹고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그게 거대한 나무를 뒤흔드는 가장 큰 태풍이 되리란 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에타이 같은 밖의 적은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작은 장점이 있다지만, 불안감은 그 반대였다.
셀바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가네. 내가 왔다는 게 그녀에게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공작은 그대로 자신의 코트를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몰랐는데 벌써 해가 뜨려고 하고 있었다.
“셀바토르.”
피스토레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려 줘서 고맙네.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작을 괴롭히면 안 되지.”
눈물진 얼굴로 섧게 웃은 피스토레가 몸을 일으켰다.
“혼란의 시대 때보다는 많이 컸으니까 말이야.”
마음의 정리가 끝난 듯 보였다. 공작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늙었겠지. 너나 나나.”
“……컸다고 해 주면 안 되나? 정신은 컸겠지.”
평소처럼 장난을 거는 피스토레의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려 준 후 셀바토르 공작은 문 앞에 섰다.
“잘 가게, 셀바토르.”
황제가 손까지 흔들며 그녀를 배웅했다. 문이 닫히고, 완전히 혼자가 된 피스토레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 이제 어쩐다.”
얼굴에 남은 눈물과 핏자국 외에는 간밤의 대화는 남지 않았다. 피스토레는 평소처럼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깼냐.”
루엔티가 엉망이 되어 버린 콘라드를 보며 혀를 찼다. 어젯밤 얼마나 울었는지 아직도 눈가가 붉었고 울다 지쳐 잠든 머리는 엉망이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란 놈이 울다 잠들기나 하고.”
콘라드가 부끄럽다는 듯 침묵하며 고개를 떨궜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과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도 남의 동생을 붙들고 펑펑 울다가 말이야.”
루엔티의 말에 시선을 피하던 콘라드가 작게 물었다.
“마법사님. 그런데 어제 저를 옮긴 건 어떤 분이신가요……?”
설마 레슬리 양이 옮긴 건 아니겠지요. 레슬리가 어둠으로 울다 지쳐 잠든 자신을 옮기는 모습이 너무도 잘 그려지는 게 문제였다.
“아, 그건…….”
하지만 루엔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침 훈련 후 샤워를 끝낸 듯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베스라온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이테라 공자, 일어났군. 개운하게 운 얼굴이야.”
“……공작님께서 집무실을 빌려주신 덕분에.”
콘라드가 고개를 숙였다. 베스라온이 옅게 웃으며 콘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렌티우스 경과 말을 맞춰 놨다. 너는 여기에 온 일이 없는 거야. 어제 수사 중에 그대로 렌티우스 경의 집에 들러 거기서 잠든 거다. 여기에 들렀다는 게 밝혀지면 곤란할 테지.”
아침 훈련이 아니라 새벽바람부터 콘라드 대신 말을 맞추고 온 듯했다. 아직 아이테라의 혐의는 진실이 되지 않았고 그는 콘라드의 아버지였으니까.
“감사합니다, 셀바토르 경.”
콘라드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베스라온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식사가 끝나면 뒷문을 열어 주마.”
그 말을 끝으로 베스라온은 복도를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밥 먹고 가래.”
루엔티가 어깨를 으쓱하며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욕실은 저쪽. 하녀들에게 뜨거운 물을 욕조 가득 받아 두라고 미리 말해 놨다. 차가운 음료도 미리 준비해 놨어.”
“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세심한 배려에 콘라드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술을 먹고 난 후 깨어나면 이런 감각인 걸까. 자신이 울다 지쳐 남의 저택에서 잠들 줄은 몰랐다.
루엔티는 부끄러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콘라드를 보며 고개를 젓다가 말 하나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식사는 레슬리도, 우리 아버지도 같이하는 거 알지?”
사이레인을 떠올린 콘라드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 어제 잠든 너를 옮긴 건 우리 아버지야.”
목욕 잘해. 좀 이따 보자고. 그렇게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루엔티는 자리를 비웠다.
***
메데이아는 거대한 풍경화 앞에 서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 걸려 있는 풍경화는 성과 그 주변을 그린 것이었다.
하얀 벽과 대비되는 붉은 지붕,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첨탑과 수많은 건물. 뒤로는 신록이 짙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요정이 나온다는 전설을 가진 아름다운 호수 근처에 세워진 성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국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열다섯 번째 황제가 지은 것이었다.
황제는 가장 아름다운 성을 가지고 싶어 했고, 전 대륙 각지에서 가장 유명한 장인들을 불러와 성을 짓게 했다. 그리고 완성된 게 저 크렌베이츠 성이었다. 수도와도 가까운 위치에 자연경관 역시 손에 꼽을 정도라, 많은 황족이 별장으로 이용했다.
아직도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뽑히는 성이었지만, 얼마 전 지진으로 성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지금은 수리 중에 있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그 아름다움을 홀린 듯 보고 있는 메데이아에게 이피엘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고 있단다.”
메데이아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메데이아는 황제의 부름에 따라 그에게 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이피엘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메데이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메데이아가 옅게 웃었다.
“아름다운 성이야.”
“네? 아, 네.”
이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시선을 풍경화로 돌렸다.
“얼마 전 지진으로 무너진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피엘의 말에 메데이아가 생긋 웃었다.
“그런 건 가리고 고치면 그만이니까.”
메데이아는 그제야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피엘은 잠시 풍경화를 바라보다 메데이아 뒤를 따랐다.
“오셨습니까.”
풍경화가 걸린 복도서부터 황제의 집무실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메데이아와 이피엘을 본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시종장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시라고 해라.”
시종장은 허리를 굽히며 메데이아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었다. 이피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고, 피스토레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그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어머님.”
“오랜만에 저를 불러 주셨군요.”
메데이아는 그런 피스토레를 보며 옅게 웃었다.
어머니라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어머니라 불리는 느낌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피스토레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늘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다.
“네,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앉으시지요. 차가 좋으신가요? 아니면 포도주?”
“……차로 부탁드리지요.”
피스토레는 그 말에 시종장을 불러 차를 가지고 오게 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여기까지 오시라 부탁드렸습니다.”
시녀가 조심스레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는 걸 보며 피스토레가 입을 열었다.
“그간 제가 어머니께 참 무심했었습니다.”
시종장이 차를 따르려는 걸 제지한 피스토레는 자신이 메데이아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황제가 직접 따라 주는 차는 호의를 나타냈다. 메데이아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저에게 말입니까? 저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서운한 게 없었는데.”
“잘못했지요. 그간 가장 작고 구석진 궁에 어머니를 모셔 두지 않았습니까.”
“가장 볕이 잘 들고, 선대 황제께서 제게 선물해 주신 온실이 가까워 좋은 곳입니다. 저에겐 가장 좋은 곳이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진작 더 좋은 궁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피스토레는 포근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과를 메데이아 쪽을 내밀었다. 메데이아는 말없이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늘 차와 곁들여 먹는 티 푸드가 화려한 접시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바로 궁을 바꿀 수는 없을 테니, 자리부터 바꿔 볼까요.”
자리라니, 무슨 말일까. 메데이아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황제의 뒷말을 기다렸다. 차조차 그녀가 가장 즐겨 마시는 차였다.
“축복의 날, 가장 중요한 의식 때 늘 뒤편에 앉아 계셨지요.”
황제와 황후, 두 황자가 가장 앞에, 그리고 그 뒤는 고위 귀족들이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귀족들이……. 메데이아의 자리는 가장 뒤편이었다.
그건 그녀가 원한 자리였다. 그녀가 연약하고 힘이 없다는 편견이 가장 씌워지기 좋은 자리. 덕분에 스페라도 후작 같은 멍청이가 걸려들지 않았던가. 황제 역시 메데이아가 그 자리를 선호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앞으로 부르지 않았고, 그건 관습처럼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그 관습이 깨졌다.
“이제부터 제 옆에 자리를 준비할 테니 거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이번 의식부터 그렇게 앉지요.”
“…….”
순간 찻잔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찻잔에 파문이 생겼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직접 목을 치겠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이제부터는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뜻일까. 무엇이 되었든 달갑지 않은 소리였다. 거기다 이번 의식은…….
“그리고 이번 의식부터 어머님의 경호 역시 다른 이로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피스토레는 메데이아에게 달갑지 않은 웃음을 머금었다.
“린체의 기사단장, 베스라온 라엔 셀바토르 경입니다.”
메데이아는 갑자기 변해 버린 피스토레를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의 찻잔에 일어난 파문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덥다.”
레슬리는 머리를 높게 올려 묵었다. 목덜미가 드러나며 봄바람이 목을 스쳤다. 조금 시원해지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봄날치고는 햇볕이 뜨겁네요, 아가씨.”
“그렇지. 양산을 써도 별 소용이 없네.”
마델의 말에 대답하며 레슬리는 제 목을 매만졌다.
“주방에 가서 차가운 음료를 좀 얻어 올까요?”
옆에서 양산을 쓰고 같이 걷던 마델이 레슬리에게 묻자, 레슬리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까.”
“그럼 제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서 음료를 준비해 놓을게요. 아가씨는 조금 더 걷다 오실 거죠?”
정원의 산책로가 별로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델은 음료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저택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레슬리는 잠시 정원 산책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햇볕은 따스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녹음의 계절을 맞이한 정원의 꽃과 나무는 아름다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평온한 나날이었다. 자신에게 인사하는 정원사와 정원사의 아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레슬리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콘라드 경이 울었어.’
남자가 우는 건 처음 보았다. 세상이 무너질 듯 울던 그 모습이 어릴 적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양산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늘 학대당하던 자신도 아버지가 그리고 가족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랑받으며 크고 제 아버지를 좋아하던 콘라드가 받았을 충격은 너무도 쉽게 이해가 갔다.
‘괜찮으실까.’
콘라드는 사이레인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식사 후, 자신을 데리러 올 렌티우스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레슬리와 함께 산책을 했다.
“레슬리 양.”
봄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콘라드가 얼굴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어제 어깨를 빌려주셨지요.”
부끄러워하면서도 인사를 잊지 않는 콘라드의 모습에 레슬리가 작게 웃었다.
“뭘요. 늘 경께서 해 주시던 일인걸요.”
“분명 제가 조금 더 도움을 드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레슬리 양이 저를 더 돕고 있네요.”
콘라드는 가볍게 발을 떼어 성큼 앞서더니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밑을 보자, 정원사가 물을 주다가 실수한 듯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이대로 계속 걸었다가는 신발을 망치고 원피스 자락을 적실 뻔했다.
레슬리는 잠시 콘라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면 콘라드는 얼굴을 붉힐까, 붉히지 않을까.
레슬리는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그러자 콘라드가 손을 꽉 쥐고, 레슬리가 젖지 않고 무사히 물웅덩이를 건너올 수 있게 도왔다. 얼굴은 붉어지지 않았다.
“레슬리 양?”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는 레슬리를 보며 콘라드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이제…… 얼굴이 붉어지시지는 않네요, 경.”
어딘가 서운했다. 그간 뭔가 콘라드와 자신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느낌이었는데.
“잘됐어요.”
레슬리는 일부러 밝게 웃었다. 잘된 일이지. 그래, 잘된 일이야. 이제 콘라드는 사교계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춤을 출 것이다. 손을 잡아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으니까.
“음, 정말 잘됐어요.”
레슬리는 일부러 몸을 빙글 돌려 나뭇잎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콘라드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웃은 거야?’
뒤를 돌아보니 콘라드가 정말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레슬리가 놀라 멍하니 콘라드를 바라보자, 콘라드가 다시 눈을 휘며 웃었다. 밝은 햇살을 받은 황금색 눈동자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실은 여성분과 접촉해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은 지 조금 되었습니다.”
콘라드는 전혀 죄책감 없는 얼굴로 제 죄를 고백했다. 레슬리의 눈동자가 더욱 동그래졌다.
“저랑 닿으면 붉어지셨는데.”
“아, 그건 레슬리 양이 좋아서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레슬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콘라드가 맑게 웃었다.
“레슬리 양.”
이번엔 콘라드가 손을 뻗어 먼저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아라벨라 축제 때, 춤을 추는 걸 알고 계시는가요?”
지금 말을 돌린 건가?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즐거워 보여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춤을 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최근에 약혼한 서올리가 들떠서 다 말해 주었으니까. 마델은 그 옆에서 자신은 버려졌다며 슬프게 울었었지.
“그때 저랑 춤을 춰 주시겠어요? 아니, 하루를 저에게 빌려주세요.”
저의 하루도 내어 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가 잡은 레슬리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경외를 담은 정중한 요청. 레슬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안 될까요?”
어서 대답해 달라는 듯 시선을 맞추며 콘라드가 묻자, 레슬리는 고장 난 인형처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는 그런 레슬리를 보며 옅게 웃었다.
“이번엔 레슬리 양의 얼굴이 붉어지셨네요.”
“으악!”
레슬리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생각만 하면 자꾸 이렇게 되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야지.’
그래, 봄날 햇빛이 이상하게 더워서 그래. 마델이 가져다준 차가운 음료를 마셔야지. 레슬리는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를 파닥거렸다.
***
깔끔한 정복 차림의 콘스텐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보고 싶어 불렀단다.”
피스토레는 옅게 웃으며 제 둘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고 싶어서 불렀다는 말은 신뢰성이 없었다. 바로 피스토레의 옆에 서서 말없이 콘스텐을 내려다보는 공작 때문이었다.
“셀바토르 공작님.”
콘스텐은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위치상으로나 혈통으로나 콘스텐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일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현 황제의 친우였고,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킨 전쟁 영웅이었다. 그래서 콘스텐은 늘 셀바토르 공작에게 깍듯이 예를 다했다.
“파티 때 뵙고 처음 뵙습니다.”
“그렇죠. 파티 때 뵈었죠, 황자님.”
공작이 옅게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님까지 계신데……. 분명 중요한 일로 저를 부르셨겠지요.”
콘스텐이 웃으며 재촉하자, 피스토레는 그를 가까이 불렀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콘스텐은 조심히 다가갔다.
“네 것이다.”
그는 마치 아이에게 사탕을 쥐여 주듯 무심하게 아들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중요한 문서 같아 보였다. 금줄로 묶인 문서의 가운데는 황실을 나타내는 두 마리의 뱀이 간소화된 왁스 실로 봉인되어 있었다.
“……이건?”
콘스텐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건.
“열어 봐라. 네 것이다.”
피스토레의 말에 공작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콘스텐은 그걸 열지 않았다. 오히려 피스토레에게 그걸 도로 내밀었다.
“아버지, 저는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닙니다. 저보다는 형님이 더 잘 어울리겠지요.”
고개를 숙인 콘스텐에게서 어딘가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아렌도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고, 만일 자신이 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지게 될 책임에 대한 무서움이기도 했다.
“형님은 분명 르카디우스 제국을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만들 겁니다. 더욱 넓은 영토를 가지고, 더욱 강한 힘을 거느리겠지요.”
“그건 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피스토레는 손을 뻗어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제 아들의 뺨을 매만졌다. 콘스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들아. 너는 자비로운 황제가 될 것이다.”
“아버지.”
콘스텐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이미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길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지. 그리고 현 상태에서 완벽히 머무를 정도로 욕심이 없는 편도 아니야.”
“형님은 저보다 지금 가진 것을 더 확장할 겁니다. 좋은 의미로요.”
“그건 평민들에게도 좋은 의미가 아닐 거다.”
느리게 피스토레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황제만이 앉을 수 있다는 황좌는, 붉은 벨벳과 황금 그리고 갖은 보석으로 만들어져,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지금 필요한 건 이 평화지, 혼란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너에게 이 의자를 물려주고 싶구나.”
뱀 모양으로 장식된 팔걸이를 매만지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문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결심한 듯 콘스텐은 제 손에 들린 문서를 꽉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런 아들을 보며 옅게 웃었다.
“지금 이 엄숙한 상황의 증인은 그대가 되어 주게, 셀바토르 공작.”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셀바토르 공작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피스토레는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눈으로 그런 제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콘스텐 황태자를 잘 부탁하네. 대를 이어서도 미래의 황제를 보살펴 주게.”
“제 아들들이 황태자를 보살필 겁니다.”
공작의 대답에 완전히 황제는 마음을 놓은 듯 보였다. 그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콘스텐. 이 일은 축복의 날 때 모두에게 밝혀질 것이다.”
“네. 황제 폐하.”
콘스텐은 깊게 인사를 하고 제 궁으로 돌아갔다. 잠시 제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피스토레가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아렌도가 일을 벌이겠지.”
“당연하지.”
언제 황제에게 말을 높였냐는 듯 셀바토르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잘 봐줘. 나는 이제 늙어서 힘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며 피스토레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게 언제 이렇게 됐을까.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던 손은 어느새 이렇게 되어 버렸다. 힘은 나날이 약해지고, 같은 일을 해도 더욱 지쳐만 갔다.
“운동 부족일세.”
그런 황제를 내려다보며 셀바토르 공작이 웃었다.
“…….”
순식간에 상념에 젖어 들던 황제가 현실로 돌아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 친구를 바라보았다.
“맨날 앉아서 서류만 처리하지 말고 훈련장 좀 뛰게. 나는 종종 뛰는데.”
“모든 인간을 너와 같은 체력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셀바토르.”
“아무리 그래도 너는 너무 운동 부족이야.”
“…….”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황제인 자신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퍼붓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잔소리를 하는 인간은 몇 명 없으니 영광으로 알라고.”
공작은 몸을 돌려 벽 쪽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잠시 피스토레는 그 몇 명에 누가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눈을 찡그렸다.
“거기에 테펜텔은 포함되나? 아니, 그런데 어디를 가는 거야, 셀바토르?”
가볍게 황제의 질문을 무시한 셀바토르는 벽에 달린 촛대를 움직였다. 정해진 순서대로 촛대를 움직이자 무거운 돌이 움직이는 소리를 내며 비밀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굴러 나왔다.
“뭐 하는 거야.”
벽에 기대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반 바퀴 구른 여인은 셀바토르를 보며 웃었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아셀라?”
“모를 리가.”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여자가 일어날 수 있게 도왔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드레스 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었다.
“역시 아셀라야. 사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면서 여자는 셀바토르의 손을 잡고 즐겁다는 듯 웃었다. 여자가 웃자, 주변에 꽃이 피듯 화사해졌다. 공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내쉬었고, 방에서 놀란 건 오직 황제뿐이었다.
“아르트엘, 내 사랑. 왜 거기서 굴러 나오나?”
갑자기 숨겨진 통로에서 황후가 데굴데굴 굴러 나오자,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황제의 푸른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참, 궁금해서.”
아르트엘은 웃으면서 뺨을 붉혔다.
“누가 될지 궁금하잖아. 차기 황제. 아렌도가 될지, 콘스텐이 될지.”
아르트엘은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콘스텐이 될지 알았어. 역시 뛰어난 내 감이야.”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은 아르트엘은 어딘가 우쭐대는 표정이었다.
“아니, 내가 다 말해 줬는데…….”
피스토레가 억울하다는 듯 말을 잇자, 조용히 하라는 듯 아르트엘이 자신의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래, 내 사랑. 그대의 감은 언제나 정확하지.”
피스토레가 졌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아르트엘은 화사한 웃음을 머금더니 피스토레에게 다가갔다.
“내 사랑. 아무리 아렌도가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고 해도 나쁘게 대하면 안 돼. 그 아이도 내 아들인걸.”
여태 고생한 황제의 뺨에 작게 키스한 아르트엘이 옅게 웃었다.
“둘 다 사랑하는 내 아들인걸.”
피스토레는 그런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에 작게 키스했다.
“내 사랑과 나의 아들이지. 걱정 마. 아렌도는 비록 황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원하는 삶을 살 거야.”
당신과 나의 아들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피스토레는 아르트엘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 훈훈한 광경 속에서 셀바토르 공작은 숨을 흘렸다. 저 평화를 자신이 깨트릴 때가 되었다. 이런 일은 미뤄 두었다간 곪고 곪다가 가장 중요할 때 터져 버리니까.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다른 일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직도 피스토레가 갓 태어난 아렌도를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바보같이 웃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질끈 감은 공작은 그 환영을 털어냈다.
“피스토레, 아르트엘.”
셀바토르 공작이 한 쌍의 커플을 불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들의 오래된 친구에게 닿았다.
“……아렌도는 두 사람의 친자식이 아니네.”
***
“문제는 없었냐?”
거대한 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삐딱하게 앉아 있는 렌티우스가 지금 막 들어오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는 걸 아이테라 대공이 알았을 것이다.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렌티우스는 맞은편에 앉은 콘라드를 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잘됐다니. 다행인 거지.”
렌티우스는 일부러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웃음 밑에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럼 에타이 이야길 해 볼까. 확실히 그놈이 맞았냐?”
“선배 술주정을 한 번 들었으면 실수했겠는데, 이미 세 자릿수를 넘게 들어서요.”
콘라드는 손가락으로 오른쪽 눈 쪽을 이마서부터 뺨까지 쭉 그었다.
“이런 상처가 있는, 타는 듯한 붉은 머리. 흔치 않잖아요. 거기다 나이 역시 선배님이 말한 거랑 비슷해요. 셀바토르 공작님과 사이레인 님과 비슷한 나이 대였습니다.”
“끄응.”
콘라드의 대답에 렌티우스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가 말한 곳은 조사해 보셨습니까?”
콘라드의 물음에 렌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 빈 지 오래더군.”
콘라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사람을 보냈다.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들로.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 여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였다. 심지어는 누군가가 머물렀던 작은 흔적조차 찾지를 못했다.
“제가 들킨 걸까요?”
“아니, 그건 아닐 거다. 그놈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 거기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자리를 뜨지.”
골치 아프단 말이지. 렌티우스는 책상에 다리를 올려 둔 채로 얼굴을 구겼다.
“……린체 기사단장과 이야길 나눴다.”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라온이 그에게 자신을 부탁하면서 다른 이야기도 나눈 듯 보였다.
“그놈들이 의식을 노린다고 말해 줬지. 그래서 최고 사제님께 말씀드려 축제를 중단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그래 봤자 그놈들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돌파할 거다.”
어렸을 적, 스승을 따라간 분쟁 지역에서 렌티우스는 그놈들을 똑똑히 봤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제 옆에 있는 동료를 죽여서라도 목적을 위해 달려가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피한답시고 축제를 영원히 중단할 수도 없었다. 그래 봤자 다른 방법으로 원하는 걸 얻으려고 하겠지.
“그래서 셀바토르 경과 즐거운 이야길 나눴지.”
렌티우스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웃어 보였다.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왕 피할 수 없는 거, 즐겁게 가자고.”
***
‘오늘로 끝이구나.’
사제들의 배웅을 받으며 신전에서 나온 레슬리는 신전 입구로 가는 길에 잠시 서 있었다. 오늘로 의식의 연습은 끝이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축제를 기다리고, 진짜 축복의 날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긴장되네.”
레슬리는 괜스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의식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최초의 사제들은 세계를 나타내는 신전 앞마당을 한 바퀴 돈다.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최초의 사제가 지나갈 때 에피알테스를 나타내는 검은 돌을 사제들에게 주고, 사람들은 일어나 병이 나았음을 기뻐한다.
그렇게 모아 온 에피알테스를 아라벨라와 최고 사제가 받아 들고 육중한 문을 연다. 진짜 에피알테스가 있는 문. 그 안에 돌을 쌓아 둔 뒤, 봉인석으로 진짜를 다시 봉인하고 에피알테스가 봉인되었음을 알린다. 그게 전부였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고, 길지 않았다. 그저 의식을 치르고 에피알테스를 다시 봉인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의의가 큰 듯했다.
‘의식이 간단한 것은 안정감 때문일까?’
방심일지도 모르지. 레슬리는 잘 정돈된 길에 놓인 돌멩이를 괜스레 툭 쳤다. 왜 이리로 굴러왔는지 모를 돌멩이는 레슬리의 신발에 치어 화단으로 다시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니지, 힘든 부분도 있었다. 문을 열 때, 그리고 봉인했음을 알렸을 때 총 두 번의 기나긴 축사가 이어지는데, 레슬리와 다른 사람들은 그게 너무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최고 사제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라 그런지 목소리만 들어도 노곤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다른 아이들이면 몰라도 레슬리는 아라벨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섰기에 절대로 졸면 안 되었다. 레슬리는 졸음을 참기 위해 혀를 깨물기까지 했다.
“졸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최고 사제님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잠을 못 자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텐데. 모두 순식간에 잠에 들 거야.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덤불로 만들어진 울타리 밑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놀란 레슬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저 사이레인의 가르침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알았지, 레슬리? 선방이야. 먼저 치는 게 가장 중요하단다.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먼저 얻어맞으면 눈에 별이 반짝반짝하거든.’
사이레인은 생존 방법이라며 제나와 공작이 알면 놀랄 가르침을 레슬리에게 알려 주었는데, 그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자, 잠깐! 접니다! 셀바토르 공녀님, 저예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파티장에서 만났던 콘스텐이었다. 레슬리의 주먹은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다.
“죄송합니다!”
레슬리는 다급하게 손을 거뒀다. 콘스텐은 살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제가 갑자기 튀어나온 거니까요.”
콘스텐은 붉어져서 떨어질 것 같은 레슬리를 달래며, 자신의 곱슬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냈다.
“사실 콘라드 녀석을 보려고 왔는데 못 들어오게 하더라고요.”
의식을 연습하는 동안은 허락받은 이들 외에는 들어올 수 없었고 몇 안 되는 손님 중에는 황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이름을 파니 렌티우스 경이 들여는 보내 주셨는데, 여기까지 들키지 않으려면 덤불 밑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지요.”
레슬리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덤불 밑을 기어 숨어들어 왔단 말인가? 황족이?
파티장에서도 정원 관목 밑에서 불쑥 솟아났던 그를 떠올리니 이해가 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황족인데. 레슬리는 공작과 사이레인이 들려주던 과거의 피스토레와 자신이 만났던 아르트엘 황후를 잠시 떠올렸다. 순식간에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셀바토르 공녀님이 저 멀리서 보이시더군요. 바지 차림이셔서 그런가 저 멀리서도 잘 보이시길래요.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기어 나왔다가 레슬리의 주먹에 맞을 뻔한 제2황자는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레슬리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필이면 황족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은 분명 괜찮다고 해 주겠지만, 레슬리에겐 괜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럼 공녀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네. 콘라드를 찾을 수 있게 같이 다녀 주시겠습니까?”
콘스텐은 씩 웃어 보였다.
“공녀님은 아라벨라시니, 같이 있으면 허락받은 사람처럼 보이겠지요.”
나름의 묘수를 떠올린 콘스텐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로 황족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이 없는 일이 될 수 있다면 반가운 일이었다.
“콘라드 경은 아마 기도실에 계실 거예요.”
콘라드를 몇 번 찾은 경험으로, 레슬리는 그가 호위에 포함되지 않는 날은 기도실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콘스텐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몰래 숨어든 사람이라 볼 수 없는 뻔뻔한 모습에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제 장점이죠. 감이 좋고 뻔뻔하고. 감은 아버님, 대담함은 어머님을 닮았어요.”
콘스텐이 다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머리를 털자, 곱슬머리 밑에 박혀 있던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콘라드 경은 왜 보러 오신 건가요?”
같이 옆에서 걸음을 옮기던 레슬리가 묻자 콘스텐이 볼을 긁적였다.
“고민이 좀 있어서요. 비밀스러운 일을 누군가와 의논하고 싶은데 셀바토르 공녀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나라를 조금 오래 떠나 있었죠. 덕분에 친구가 콘라드 한 명뿐이네요.”
콘스텐은 사제가 되려 했고, 어렸을 적 신성국으로 향했다. 그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이며, 형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아렌도는 콘스텐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그보다는 욕심이 더 강했다. 만일 콘스텐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친동생이라도 목숨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사제가 되어 성을 버리면, 그는 더 이상 황족이 아니라 신의 종이 될 수 있었고, 콘스텐은 그저 아렌도가 아끼는 동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올려 주었다.
마지막 남은 나뭇잎을 털어 내며 콘스텐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공녀님, 제가 공녀님의 지혜를 빌려도 될까요?”
“그럼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콘스텐이 환하게 웃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공녀님이라면 예상치 못한 거대한 일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슬리는 잠시 제 발끝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건 피할 수 있는 일인가요?”
“아니요.”
바로 답이 되돌아왔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 거죠?”
“그렇지요.”
콘스텐의 대답에 이번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목숨이 위험한 일인가요?”
“네.”
이번에도 즉답이었다. 짧고 간결한 대답.
레슬리는 머릿속으로 콘스텐의 대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해야 하며, 목숨이 위태로운 자리라.
‘후계에 관련된 일인가?’
갑자기 돌아온 황자와 관련된 일은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목숨에 관련된 것은 아무래도 아렌도겠지. 어릴 적부터 황위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음,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래요.”
“도움, 말씀입니까?”
“네.”
레슬리는 사르르 웃었다.
“저도 어려울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들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이유가 크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간절함을 보고 다들 도움을 주었다. 그 도움이 없었더라면 분명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하지만 저는 이곳을 오래도록 떠나 있었죠. 저를 아무 이유 없이 도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릴 적부터 기반을 충실히 다진 아렌도와 다르게 콘스텐은 기반이라고 불릴 것이 없었다.
“음, 그렇지만 일단 콘라드 경이 있잖아요. 콘라드 경은 무엇이든 잘하세요. 같이 있기만 해도 든든한걸요.”
어딘가 불안한 감정을 머금은 콘스텐의 눈동자를 보며 레슬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도 있고요.”
“……공녀님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답이 조금 늦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느새 기도실에 다 와 가고 있었다.
“네. 황자님은 콘라드 경의 친구니까, 저도 도와 드릴게요. 친구의 친구는 친구잖아요.”
콘스텐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죠.”
대답은 레슬리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콘라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가로챘다.
“그래서, 두 분은 여기서 무슨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물음은 두 명에게 향했지만, 시선은 콘스텐에게만 닿아 있었다. 어쩐지 웃는 얼굴이 오싹해 보여 콘스텐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웃는 얼굴이 더 흉흉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콘스텐은 재빠르게 두 손을 올리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그렇군요. 그럼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황자님?”
“그, 그냥 너랑 이야기해 볼까 해서…….”
“아하.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서 경비를 뚫고 신전 안까지 무단 침입해 오셨군요.”
“…….”
“지금 당장 경비들을 불러도 괜찮겠지요?”
콘스텐이 무시무시한 웃는 얼굴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 그래도 내가 조언해 준 거로 덕 좀 봤잖아. 그리고 계획도 같이 세워 줬고…….”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최후의 반항을 해 보았지만, 어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방으로 들어가 계세요. 이야기는 레슬리 양을 모셔다 드린 후에 하겠습니다.”
콘라드가 작게 한숨 쉬자, 콘스텐은 고개를 미친 듯 끄덕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가실까요.”
콘라드는 평소처럼 웃으며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슬리가 팔 위에 손을 올리자, 천천히 신전 입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황자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레슬리는 콘라드에게 여태 황자와 나눴던 대화를 말해 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황태자에 관련된 것 같죠?”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아. 죄송합니다. 레슬리 양이 생각보다…….”
흠! 작게 헛기침을 한 콘라드는 방금의 실수를 덮으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눈치가 빠르셔서요.”
왠지 뒷말에 다른 쪽은 아니라는 말이 붙은 것 같아 레슬리는 콘라드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말이 뒤에 더 남은…….”
“의식 연습은 잘 끝나셨나요?”
묻기도 전에 콘라드가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바꾸었고, 레슬리는 찜찜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더 뭔가가 있었는데.
“네, 잘 끝났어요. 중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떨리긴 해요.”
“중요하긴 합니다. 에피알테스를 봉인하고, 계속해서 봉인 위에 봉인을 더해 힘을 약하게 하는 거니까요.”
축제의 주기가 긴 것도 봉인석의 힘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며 콘라드는 말을 덧붙였다.
“힘이 약해졌을까요?”
“아마도요. 최초의 사제들 후손이 계속해서 에피알테스가 봉인당했을 때를 재현하며 봉인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에피알테스라도 봉인당하기 전 위력을 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힘은 무섭죠.”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힘이 약해져 있을 수도 있는구나.
생각해 보면 아주 긴 시간이었다. 에피알테스가 봉인당하고 신조차 지루해하며 몸을 뒤틀고 산과 강이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간 쌓인 봉인의 힘은 쉽게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구나.”
어쩐지 마음 한편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기다리는 신전 입구까지 걸어왔다. 레슬리가 마차에 오르기 쉽게 손을 잡아 주며 콘라드가 웃었다.
“레슬리 양. 축제 때 제가 모시러 저택으로 가겠습니다.”
잠시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가 기다려졌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
콘라드는 시선을 내렸다. 그저 서 있기만 했는데 날카로운 수십 쌍의 시선이 날아와 콘라드에게 꽂혔다. 하녀, 하인, 정원사에 주방 사용인, 정원사.
마구간 관리인, 영토 관리인, 셀바토르 기사들은 대놓고 콘라드의 뒤에 있는 문을 막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 있는 모두가 제 할 일은 내버려 둔 채, 중앙에 서 있는 콘라드를 노려보러 온 듯했다. 몇몇은 아예 빨랫방망이와 부엌칼을 들고 와 지켜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라 콘라드는 변장용으로 가져온 빵모자를 꽉 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콘스텐과 렌티우스가 조언해 준 걸 실천하기에는 오늘이 가장 좋을 때였다. 아무리 봐도 레슬리는 그쪽으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니까.
“야.”
그런 콘라드에게 당당하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루엔티였다. 밤을 새웠는지, 짙은 눈 그늘의 루엔티가 무섭게 콘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우리 동생이랑 데이트한다며.”
“……축제를 같이 돌아보는 것뿐입니다, 마법사님.”
콘라드는 시선을 흘려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그게 그거 아니야?”
루엔티가 위협하듯 콘라드에게 바짝 다가가자,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한 발짝 물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붙일걸…….”
루엔티가 이를 갈았다.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정도의 체력과 신력을 같이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면서요? 그런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콘라드는 지지 않겠다는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미약한 반항이 어이가 없는지 루엔티가 헛웃음을 흘리다가 어딘가 살기가 깃들어 있는 환한 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었다.
“잘 들어. 우리 동생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나면…….”
천천히 제 목을 손가락으로 긋는 모습이 어찌나 무섭던지. 마법사인데 마법은 쓰지 않고 둔기로 때릴 것 같은 모습에 콘라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겠지.”
“……!”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느새 소리도 없이 나타난 베스라온이 콘라드의 어깨를 으스러트릴 듯 꽉 쥐었다. 순간 무시무시한 악력에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입술을 물고 버틸 수 있었다.
“……셀바토르 경. 안녕하십니까.”
“아이테라 경께서도 안녕하시겠지.”
베스라온답지 않게 웃으면서 말을 하는데, 어깨를 쥐고 있는 악력은 도무지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내일도, 모레도, 영원토록 안녕해야지.”
언제나 무뚝뚝하던 베스라온이 웃었다. 그리고 루엔티 역시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콘라드는 그 사이에 껴서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그리고 콘라드를 구원한 건 레슬리였다. 은발을 풍성하게 하나로 땋아 내리고 꽃 모양으로 세공된 핀으로 머리 중간중간을 꾸민 레슬리는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축제 때 주로 입는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레슬리는 한 손에는 망토를 들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꽃으로 장식된 은빛 머리가 흔들거렸다.
“레슬리.”
레슬리가 도착하자마자 베스라온과 루엔티가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아까까지 한 사람을 협박하던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은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경하고 이야기를 하고 계셨어요?”
“그래, 우리 귀여운 막내를 잘 부탁한다고 이야길 하고 있었지.”
베스라온은 저의 어린 여동생이 귀여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레슬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갑은 챙겼니? 루엔티가 준 마법석은?”
그러더니 이젠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 주기 시작했다. 레슬리가 웃으면서 제 목에 걸린 마법석과 작은 주머니를 보여 주었다.
“혹시 산 물건이 무겁거나 그러면…….”
“주변 셀바토르 상가에 맡길게요.”
“그래. 혹시 이상한 놈이 접근하면?”
“얼굴에 선공격을 날려요!”
레슬리는 주먹을 꼭 쥐고 환하게 웃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과 그에 대비되는 레슬리의 환한 웃음에 주변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신께 맹세코 베스라온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단 한 명이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사이레인 님!’
모두의 경악을 모른 채, 레슬리는 환한 웃음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인중이랑 다리 사이를 노리면 된다고 하셨어요!”
이번엔 모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망했다. 이미 손을 쓰기엔 늦어 버렸다. 이젠 모두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인물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 안 그래도 레슬리가 사이레인의 말투를 닮을까 고민하는 그녀가 말투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닮아 버린 것을 알면…….
“레슬리, 일단 그 주먹은 풀고…….”
“이런, 뭐 하니?”
루엔티가 레슬리를 말리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에서 천천히 셀바토르 공작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머니!”
베스라온의 옆에 서 있던 레슬리가 이번에 셀바토르 공작에게 다가갔다.
“저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오렴.”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공작의 뺨에 작게 뽀뽀했다. 공작은 옅게 웃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용인들은 물론 루엔티, 베스라온까지 얼어붙었다. 콘라드는 다른 의미로 이미 얼어붙어 있은 지 오래였다.
“아이테라 경.”
“네, 공작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공작을 보며 콘라드가 환하게 웃었다. 언제나 웃고 있던 입가가 미소를 기억해 내 억지로 웃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미소에 금이 가 있었다.
그런 콘라드를 내려다보던 공작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를 꺼냈다.
“경이라면 잘 알 거라고 생각하네.”
협박도, 무엇도 없는 간단한 말. 그 말이 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무서웠다. 하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웃음조차 레슬리를 바라보았을 때는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레슬리, 갈 거면 어서 가는 게 좋겠구나.”
“아직 아버지께 인사를…….”
쾅! 레슬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중한 것이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저택 전체에 울렸다. 홀로 놀라지 않은 공작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새 자물쇠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구나.”
자물쇠. 그 말에 4년 전 일이 레슬리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4년 전 청첩장을 처음 받던 날, 그날 사이레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저, 저 가 볼게요!”
레슬리는 허겁지겁 망토를 챙겨 들고는 콘라드를 이끌었다.
“아직 사이레인 님을 뵙지 못했는데요, 레슬리 양.”
“마주치면 죽어요!”
레슬리는 다급하게 외쳤다. 마주치면 안 된다. 포악한 곰과 사람이 마주치면 사람은 죽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레슬리의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콰앙! 다시 한 번 더 굉음이 울려 퍼지고, 위험을 감지한 콘라드가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레슬리는 재빠르게 외쳤고 다행히도 사이레인이 새 자물쇠를 전부 부숴 버리기 전에 마차를 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죽을 뻔했네요.”
콘라드의 말에 마차를 보낸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콘라드는 정말로 위험했다.
“운 좋게 살아난 목숨, 유용하게 사용해야겠어요.”
식은땀을 훔쳐 낸 콘라드는 레슬리의 반쯤 풀린 망토 끈을 다시 묶어 주었다. 그리고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요?”
에스코트하겠다든가 악수하자는 뜻은 아니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레슬리는 조심스레 콘라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두었다. 콘라드는 웃으며 레슬리의 손을 꽉 잡았다. 어딘가 뺨이 조금 불그스름했다.
“이리로.”
거리에 들어서기 전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상가 지붕 사이사이에는 색색의 끈들이 달려 화려하게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고, 집마다 손수 수를 놓은 천들과 꽃들로 꾸며져 있었다. 어느 집은 자수보다 조각이 더 자신 있었는지 황소와 말의 조각을 내걸기도 했다.
거기다 거리 곳곳에는 음유시인과 악단, 광대들에 이야기꾼들까지 나와 제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늘 보던 분수대도 평소와는 다르게 꽃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햇빛은 힘차게 솟는 분수대의 물을 만나 아름답게 퍼졌다.
‘신기해.’
레슬리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별천지 같았다. 축제 자체는 4년마다 돌아온다지만, 의식이 있는 때는 더욱 그 규모가 컸고, 더욱 화려했다. 이렇게 화려한 축제는 레슬리에게 처음이었다. 여덟 살 때 맞이했던 축제는 멀찍이서 그 빛만 보고 끝났으니까.
꿈으로만 보던 곳에 자신이 와 있다는 생각에, 레슬리는 흥분으로 숨이 조금 빨라졌다.
“레슬리 양.”
콘라드가 웃으면서 레슬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갈색의 넓적한, 처음 보는 음식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에 넣었다. 콘라드는 자신에게 이상한 걸 먹이지 않았으니까.
“달다.”
레슬리는 눈을 빤짝거렸다. 색과는 다르게 그 말은 달콤했고, 어딘가 특이한 맛이 났다.
“설탕을 녹여 만든 과자예요.”
콘라드는 상인에게서 하나 더 사더니 제 입에 넣었다.
“평소에도 종종 팔긴 하는데, 확실히 축제 때 먹는 게 더 맛있더라고요.”
“이걸 평소에도 파나요?”
“큰길에서는 잘 팔지 않습니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주택가 골목이나 아카데미 앞에서 팔지요.”
그렇구나. 레슬리는 눈을 반짝였다. 레슬리가 주로 걷는 곳은 수도 큰길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야 집이 밀집해 있는 곳이라, 거기까지 레슬리가 갈 일은 없었다.
“하나 더 드시겠어요, 레슬리 양?”
콘라드가 하나를 더 사자, 상인이 호쾌하게 웃으며 두 개를 더 건넸다.
“아가씨 이름이 레슬리이신가? 우리 공녀님 이름하고 똑같네. 기념으로 하나 더 드리지.”
“……감사합니다.”
레슬리는 얼떨결에 두 개를 받아 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다시 콘라드의 손을 잡고 걸었다.
“이름을 바로 알아들을 줄은 몰랐어요.”
레슬리는 콘라드의 등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특이한 은발만 감추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콘라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여전히 뒤를 돈 상태였다.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애칭으로 부르는 건 어떠신가요, 레슬리 양?”
“애칭이요?”
애칭이라니. 저택에서 종종 ‘귀여운 막내’나 ‘사랑스러운 우리 딸’로 불리긴 하는데.
“네, 그러니까 음…… 슈야라든가.”
아, 축복의 이름. 그걸로 부르자는 말이구나.
“그냥 레슬리라고 부르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애칭이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어쩐지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레슬리는 콘라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콘라드 경.”
“전 그냥 콘라드라고 불러 주세요. 아니, 라드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릴 적 어머니께서 종종 불러 주시던 애칭인데…… 다른 뜻은 아니라! 그저, 들키면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어려우니까요.”
콘라드가 그제야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모자 밑의 얼굴은 떨어질 듯 붉어져 있었다. 손으로 다급히 가려 봤지만, 이미 레슬리가 본 이후였다.
“그, 그리고 저는 축복의 이름이 아페잖아요? 아페. 뭔가 따로 부르긴 이상해요.”
콘라드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렇죠. 아페…….”
테펜텔이 들었다면 ‘아페? 아파!’를 외치며 연신 웃었을 이름이었다. 머랭 쿠키를 먹고 ‘머랭이 뭐래?’를 외치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테펜텔 특유의 이상한 개그에도 붉어진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레슬리는 다른 손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콘라드도 다른 손으로 연신 얼굴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럴……까요.”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기로 했다. 어쩐지 얼굴이 더욱 붉어져 레슬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갈까요, 슈야.”
콘라드는 아직도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레슬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계획은 성공했다.
“안 된다니까!”
콘스텐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나뿐인 제 친구가 이렇게 숙맥이라니!
프리트가 괜히 걱정된다며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은 놨어? 이름은 불러 봤냐고!”
“레슬리 양이라고 처음부터 불렀어.”
“양이라는 호칭을 빼고 불러 본 적은 있어? 그리고 듣자 하니, 절대 말 못 할 특수한 사정으로 성이 아니라 이름부터 부르게 된 거라며.”
“…….”
콘라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침묵에 콘스텐은 고개를 숙였다.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 다음으로 가장 먼저 만나기를 잘했다. 아니,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더 일찍 돌아왔어야 했다.
“왜 아이테라 가문의 장남이 약혼도, 소문도 없이 조용한가 했더니…….”
하아.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콘스텐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피하는 제 친구를 바라보았다.
아이테라 대공가의 장남에, 최연소 테센트루아 성기사에. 거기에 저 정도 얼굴이면 사교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왜 저놈이 이렇게 삽질을 하고 있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답이 나왔다. 저 조심스러운 성격 탓이었다.
“몇 년이랬지? 처음 만나고 몇 년이나 흘렀다고 했었지?”
“4년.”
“그러니까 4년 동안 이룬 업적이 친구. 그냥 친구.”
“……유일한 친구.”
“신전에서 새 친구를 사귀셨다며. 그럼 이제 유일한 친구는 아니네.”
콘라드는 괜스레 제 소매 깃을 만지작거렸다.
“심지어 마음 자각도 프리트보다 늦었다며, 동생보다 못한 놈아.”
친구 대신 좌절하던 콘스텐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아직도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친구를 노려보았다.
“이대로는 안 돼. 평생 친구만 할 거야?”
“상처가 많은 분이라.”
그렇게 말하면서 콘라드는 눈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인 분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는데.
“상처가 많아도 지금은 많이 치유되셨다며. 거기다 열여섯 살이 되었으니 약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오가겠지.”
콘라드는 그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날 때부터 약혼자가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보통은 열 살이 되었을 때부터 약혼 이야기가 오갔다.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가가 아닌 다른 평범한 가문에 몸을 의탁했더라면 이미 다른 사람과 약혼식을 올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어두워진 콘라드의 얼굴을 보며 콘스텐이 마지막 말을 흘렸다.
“최악의 경우, 아렌도 형님에게 빼앗길 수도 있어. 형님은 현 약혼녀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 상태고, 형님 눈에 찰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니까.”
“그건 싫어.”
콘라드가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을 보며 콘스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싫어. 형님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
“아니. 그게 아니야.”
콘라드는 마치 불쾌한 것을 떠올렸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냥 그분이 다른 사람 옆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까…….”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아렌도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한 사람은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뿐이었다.
그 모습에 콘스텐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조금만 밀어주면 되겠는데?’
4년 동안 삽질이나 했으니, 갑자기 고백하라거나 그런 건 무리겠지.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차근히 하면 괜찮을 것이다.
“일단 이제 곧 축제잖아. 그 축제를 이용하는 거지.”
그것도 화려하기로 유명한 아라벨라 축제, 연인들이 가장 많이 생겨난다는 그 축제가 코앞이었다.
“아라벨라 축제를 이용해 보자.”
콘스텐은 제 친구를 보며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얼핏 듣기로 장대한 이 계획의 목적은 ‘손잡기와 애칭으로 부르기’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콘라드는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레슬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콘스텐의 조언대로 위험하다며 손을 잡고 슬그머니 애칭을 부르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그 뒤의 계획은 자신이 레슬리를 이끄는 것이었다.
레슬리가 좋아할 만한 소품을 파는 가게들과 구경하기 좋은 명당, 그리고 축제 때만 파는 특별한 간식거리들의 위치를 전부 외워 두지 않았던가. 막힘없는 부드러운 동선을 만드는 데 대공가의 하인들과 황실 사람들, 거기에 테센트루아 성기사들도 아낌없이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었다. 손을 잡고 부끄러워하던 레슬리가 먹고 싶은 곳이 있다며 되레 콘라드를 이끌기 시작했다.
“콘라드 경, 아니 라드.”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레슬리가 조금 머쓱하게 웃으면서 콘라드를 불렀다. 다른 손에는 뿔 모양으로 말린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갓 튀겨 낸 작은 빵들이 들어 있었다. 그걸 콘라드에게 내밀었다.
“음, 먹어 봐요. 지금 막 만든 거라 따듯할 거예요.”
작은 튀김 빵은 지나가다 본 적은 있지만, 콘라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단것이 아니었으니까.
콘라드는 조심스레 빵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레슬리의 말대로 갓 튀겨 낸 빵은 따듯하고 고소했다.
“……맛있다.”
달지 않고 고소한 튀김 빵은 생각보다 더 콘라드의 입맛에 잘 맞았다. 그의 대답에 레슬리가 그럴 줄 알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라드. 다음은 이쪽!”
한 손에 남은 빵을 든 채, 레슬리에게 끌려간 곳은 레소가 극찬한 꼬치집이었다. 다행히 축제 전에 가게를 전부 고친 듯 성황리에 꼬치를 팔고 있었는데, 맛있는 양념 냄새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게 앞에 도착한 콘라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줄이 너무 긴데.’
대충 훑어보기에도 꼬치를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었다. 거기다 레슬리가 주문하겠다고 한 꼬치는 이 가게 최고 인기 꼬치라 한참을 기다려도 받기 힘들어 보여, 콘라드는 눈을 찡그렸다.
목숨을 걸고 얻어 낸 귀한 시간을 고작 꼬치 따위를 기다리는 데 쓸 수는 없었다. 다른 곳을 먼저 가자고 하자.
그렇게 말하려는데, 레슬리가 빠르게 주문을 끝냈다.
“자, 여기!”
분명 기다려야 할 텐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인아주머니는 눈을 찡긋하며 레슬리에게 꼬치를 건네주었다.
“마침 만들어 놓은 게 있었대요. 운이 좋네요.”
어딘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레슬리가 콘라드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그 속이 보여 콘라드는 작게 웃었다. 살짝 매콤한 소스가 듬뿍 발라진 꼬치는 신기할 정도로 콘라드의 입맛에 맞았다.
그 이후로도 레슬리는 이곳저곳을 콘라드의 손을 잡고 돌아다녔다.
하얗고 노란, 색색의 새가 수놓아진 태피스트리를 파는 집부터, 손수 만든 나무 기념품을 파는 가게, 심지어는 대장간과 무기점까지 다녀왔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곳이 아닌데, 왜 여기를 오자고 했을까.
그 물음은 축제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단검을 보고 사라졌다. 결국 대장간을 나왔을 때, 콘라드의 손에는 단검과 검 장식 그리고 숫돌이 들려 있었다.
“좋은 단검이네요.”
다른 것들은 사람을 통해 신전으로 보내고 단검만 남긴 콘라드는 다시 살펴보았다. 기념으로 만들었다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단검이었다.
“아라벨라 축제 때 이런 단검을 파는지는 몰랐습니다. 늘 신전에서 경비를 서서 놓친 모양입니다.”
아라벨라 축제는 신전과 관련된 큰 축제다 보니 그날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과 사제들에게 있어서 쉴 수 없는 날이었다. 콘라드 역시 늘 신전의 경비를 섰기에 이런 중요한 정보를 여태까지 놓친 게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레슬리는 그런 콘라드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올해부터 만들기 시작했대요.”
“그런데 슈야.”
단검을 제 품속에 집어넣은 콘라드가 짙은 회색빛 머리카락 사이로 시선을 맞췄다.
“평소에는 무기에 관심이 없으셨는데, 이 정보는 누가 알려 주신 건가요?”
콘라드의 물음에 레슬리는 티 나게 시선을 돌렸다.
“그……그게, 음! 하르트! 하르트 경이 말해 줬어요. 하르트 경은 단검을 좋아해서 방에 가면 단검이 잔뜩 있어요! 수십 개는 넘게 있거든요. 저택에서 가장 유명한 수집가라.”
“그렇군요.”
필사적으로 말하는 레슬리를 보며 콘라드는 웃었다. 콘라드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레슬리는 안도의 숨을 흘리더니 다시 손을 잡았다.
“자, 가요. 또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어요, 라드!”
순식간에 단검 수집가가 되어 버린 하르트 경에게 위로를 건네며, 콘라드는 다시 레슬리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 뒤로도 레슬리는 콘라드의 손을 잡고 몇 곳의 가게를 더 돌았다.
막힘없는 걸음과 기다림 없이 물건을 받는 모습을 보고, 콘라드는 며칠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 잠시만요.”
그리고 그런 레슬리의 계획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갑자기 나타난 유명한 음유시인을 보러 몰려들면서 길이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레슬리는 필사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면서도 콘라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콘라드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놓치지 않게 손을 꼭 잡아요.”
어느새 망토가 벗겨져 제 하늘하늘한 은빛 머리가 드러난 것도 모르고 레슬리가 굳센 눈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아…….”
자신이 앞에 서겠노라고, 편하게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말을 하려다가 콘라드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를 방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네, 슈야.”
대신 레슬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레슬리는 그 웃음에 화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도착했다.”
간신히 인파를 빠져나온 레슬리가 숨을 흘렸다. 레슬리와 콘라드의 시선 끝에는 남루한 천막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콘라드도 잘 아는 곳이었다.
“점……술가인가요?”
점술가라니. 좋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신을 믿는 자신과 저들은 가까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몇몇 점술가를 찾아간 이들의 말을 듣기로는, 입에 칼을 들고 말을 뱉어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곤 한다고 들었다.
안 되겠다. 콘라드는 돌아가자고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네! 태어났을 때 생긴 자신의 별을 읽어 앞날을 봐 준대요.”
정말 가고 싶었는지, 레슬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하다가 콘라드의 얼굴을 보고 말을 흐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을 때 꼭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혹시 싫으시다면…….”
시선만 올려 슬그머니 자신의 눈치를 보는 레슬리를 보고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견이다. 그래, 여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점술가의 모습은 죄다 편견이었다. 점술가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이들일 게 분명했다. 저 표정이 모든 것을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저는 좋습니다. 들어가실까요?”
콘라드가 수초 만에 평생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꿨다는 걸 모르는 레슬리는 빠른 발걸음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둑했고, 작은 불빛만이 켜져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별자리가 수놓아진 거대한 천과 한 할머니가 있었다.
“뭐가 궁금해서 왔나요?”
“그게요.”
몇 번이고 질문을 정리해 왔던 것인지, 작은 입에서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주된 질문은 아라벨라에 관한 것이었다.
“아가씨는 으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점술가는 테이블을 가득 메운 별자리 지도 한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길 봐 봐요. 작은 별이지요? 이게 아가씨의 별이에요. 솔직히 좋은 별은 아니네요. 작은 데다가 주변 별들이 아가씨의 별을 잡아먹으려고 해서 여태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 말에 레슬리는 물론 아직도 의구심을 품고 있던 콘라드도 놀랐다.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가씨가 말한 그 ‘중요한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고난을 겪어 온 아가씨가 못할 리가 없어요. 어디 과거를 좀 더 들여다볼까요.”
점술가는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더니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가씨,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사자들의 도움을 받은 거죠? 한둘이 아니네요. 도대체 이게 몇 명이지? 못해도 수십…… 아니, 수백…….”
수를 세면 셀수록 점술가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가씨 앞날을 더 봐 줄 수가 없어요. 죽은 자들이 아가씨의 앞날을 가리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아가씨가 그걸 놔줄 생각이 없네요.”
“제가…… 말인가요?”
레슬리의 물음에 점술가가 눈을 찡그렸다.
“이제 보니 죽은 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아가씨 문제네요. 아가씨가 그들의 뜻을 곡해하고 멋대로 붙잡고 있어요. 물론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하면 그들에게도, 아가씨에게도 좋을 거야. 하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하다간 아가씨가 그들과 어울리게 될 거예요.”
죽은 자들과 어울린다니. 그건 레슬리가 죽는다는 소리가 아닌가.
“집착하지 말아요. 내가 해 줄 말은 그것뿐이야. 이제 그만 가 줘요.”
순식간에 지친 듯 점술가는 손을 내저었다. 심지어 두 사람과 더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버렸다.
“무례한……!”
결국 콘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지금 그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지만, 충분히 위협적일 텐데도 점술가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저는 괜찮으니 가요, 라드.”
레슬리가 그런 콘라드의 팔을 붙잡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레슬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슈야.”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오자마자, 콘라드가 애칭을 부르며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다. 눈빛에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런 자들이 주로 하는 짓이죠.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행운을 불러오는 물건을 팔아먹는 것. 그게 저들의 속셈이에요.”
사람들의 사이를 빠져나오느라고 헝클어진 은빛 머리를 정리해 주며, 콘라드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슈야는, 아니 레슬리 양은 절대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셀바토르 공작가분들도 있고, 저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레슬리는 쉽게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뭐가 그리도 슬픈 것인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 게…….”
안절부절못하던 콘라드가 저택으로 가는 마차를 불러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레슬리가 말을 꺼냈다.
“저에게 나쁜 소리를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계획이…….”
계획이 어그러졌다.
“저분은 원래 좋은 소리만 해 주신다고 했거든요. 최대한 나쁜 말은 피해서……. 그래서 콘라드 경을 모시고 간 건데…….”
좋아하는 음식과 늘 관심을 가지던 물건들. 그리고 끝은 행복한 앞날 예지로 끝내면 어떨까. 그게 레슬리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질문을 해 버리는 바람에 끝이 망가지고 말았다.
“역시 저를 위해 해 주신 거로군요.”
인기인 꼬치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올 때부터, 갑자기 장인이 있는 대장간에서 축제 기념으로 판다며 질 좋은 단검을 내놨을 때부터, 그리고 레슬리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지켜 주겠다는 듯 앞장섰을 때부터. 콘라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소매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 주며 묻자, 레슬리가 대답하기 부끄러운지 자신이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으로 말을 돌려 버렸다.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콘라드의 손에 쥐여진 것은 수가 놓인 끈이었다. 조금은 어설프게 수가 놓인 리본 끝에는 작은 별 모양 유리 세공품이 달려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작게 빛이 나는 것이 마법이 걸려 있는 듯 보였다.
“제가 수를 놓은 거예요. 테펜텔 님이 알려 준 문양인데, 사람을 위로하는 기원이 담긴 자수라고 말해 주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콘라드와 시선을 맞췄다.
“콘라드 경은 지금 위로가 필요한 때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해서…….”
아. 역시 그렇구나.
콘라드는 오늘 왜 레슬리가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그녀의 목소리로 들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배려는, 위로는,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 준다는 건 콘라드에게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더없이 높은 위치의 귀족으로서, 어릴 적부터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에 입단한 이로서, 그리고 아이테라 대공가의 장남으로서 배려도, 위로도 모두 자신이 주어야 하는 것이었지 받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레슬리에게 이렇게 따스한 걸 받게 되었을까.
그것도 분명 처음엔 자기가 지켜 주고 배려해 줘야 할 분이었는데.
“콘……라드 경?”
자신이 울자, 놀라 눈물이 멈춘 레슬리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레슬리 양.”
콘라드는 눈물로 붉어진 눈가를 접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상냥하신 분,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분.
“저랑 정식으로 교제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음속에 담아 놨던 말이 조금 이르게 터져 버렸다.
***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떻게 됐는지 묻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레슬리는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와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교제, 교제라니. 잘못 들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교제라는 뜻을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콘라드와 헤어지고 저택에 돌아오는 내내 그 단어만 생각했더니, 콘라드가 말한 교제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 교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밤늦게까지 도서관은 출입 금지였으나, 이제 책 몇 권을 빌리는 것 정도는 허락되었다. 그리고 어제 빌려 둔 책 중에는 정말 다행히도 사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제, 교재 말고 교제…….’
사전을 뒤척이던 레슬리의 손이 멈추었다.
[교제 : 사람 간의 사귐. 주로 남녀 간의 사귐을 나타낼 때 쓴다.]
“으아아!”
레슬리는 문장을 읽자마자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잉크병이 떨어질 뻔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뜻이 정확하게 맞았다.
정식 교제란 뜻은 추후 약혼…… 그리고 결혼을 전제로 하자는 뜻이겠지.
‘급작스럽다는 것을 잘 압니다.’
콘라드는 웃어 보였다. 긴 속눈썹 밑에 눈물로 젖은 황금빛 눈동자가 더없이 반짝거렸다.
‘받아 주시기 힘드시다는 것도 압니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지금 저희 가문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콘라드는 이해한다는 듯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레슬리는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놀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레슬리 양.’
아닌데.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가문의 일로 고민하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슬리가 약혼자를 고를 때, 가문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가문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버지인 사이레인은 용병단 출신이었고, 자신 역시 잠시나마 스페라도 후작가의 일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신께 맹세코 아이테라 가문의 몰락은 레슬리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한참을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있다가 레슬리가 몸을 일으켰다.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까부터 레슬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머리맡에 앉아 있는 어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이 있는 거야, 난.”
그렇게 어둠이에게 대답해 주며 레슬리는 누웠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이런 일은 후회 없을 정도로 고민하고 답을 내려야 하는 게 맞았다.
‘어머니가 지금 계시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고민을 들어 줄 만한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지금 제나와 함께 외출한 상태였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사이레인이었다.
레슬리는 잠시 사이레인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상상을 했다가 이내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상상 속 사이레인은 레슬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트롤의 몸도 한 번에 동강 낼 만한 거대한 도끼를 들고 오더니 레슬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 아이테라 공자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상상 속이라지만 콘라드가 위험하지 않도록 레슬리는 재빠르게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어쩐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축제의 가면을 쓴 사람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갔다. 얼핏 보기에는 키가 다른 사람들보다 크다는 것 외에는 이상할 게 없는 여자였다. 최초의 사제들이 역병의 눈을 피하고자 썼다는 가면을 쓰고, 평범한 복장으로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여자.
하지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본능에 따라 길을 내주었다.
복잡한 거리임에도 갈라지는 사람들을 보며 공작은 작게 혀를 찼다.
“나름 티 안 나게 섞였다고 생각했는데.”
공작의 작은 중얼거림에 그녀의 뒤를 따르던 제나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파랑새 모양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정말 아무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가씨?”
오랜만에 저택이 아닌 곳에서 들어 보는 아가씨 소리에 공작이 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작님이라고 부르면 큰일 날 테니까요.”
“이미 알아챈 것 같지만.”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공작이 말했다.
“거의 본능일 겁니다. 셀바토르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으니까요. 이런, 부인께서는 이미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제나가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집이 있었다. 다른 집들처럼 화려한 수가 놓인 천과 각종 장식물로 꾸며진 집. 그 앞에는 작은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알아. 일부러 느긋하게 나온걸.”
제나의 말에도 공작의 걸음은 여유로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안달이 나는 것은 저쪽일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판을 자신의 쪽으로 이끌기가 수월해질 것이다.
공작과 제나가 집 앞에 서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굴에 가면을 쓴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런 온기도 없는 집 안에 공작과 제나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도착해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그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두 손을 꽉 쥐었다.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오는구나.’
저 여자가 자신을 이리로 부른 이유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파티장에서 공작의 쪽지를 받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다. 처음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저, 풍족하고 안락한 삶이었으니까.
하지만 요 근래, 점점 미쳐 가는 남편의 횡포를 참지 못해 연락을 했고,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사흘 후 저녁, 베하르튼 2번 거리 391번가.’
아주 짧은 답장이었다. 그 답장에 따라 사흘 후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작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남편에게는 빠질 수 없는 모임에 초대되었다고 둘러대었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작지만 아담한 저택이었다. 평범한 2층짜리 저택은 깔끔하지만, 마치 전시되듯 놓인 가구들과 장식들은 아무런 유행도 타지 않는 기본적인 물건들이었다.
‘오싹해.’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괜스레 제 팔뚝을 매만졌다. 어디 귀신이라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집 어디에도 주인의 손길은 묻어 있지 않았다. 사람이 살면 생기는 자연스러운 온기 따위 기대할 수 없는 집, 모방한 듯한 집. 그래서 더더욱 주인을 닮은 집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자신의 앞에도 사람인 척하는 괴물이 앉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저를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불안한 듯 제 손을 꼭 쥐었다가 펴며 자신의 앞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장신에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는, 그저 앉아만 있을 뿐인데도 위압감이 흘러나와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번에도 생각한 거지만…….’
무서운 사람이야.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혹여나 시선이 마주칠까 봐 방 안을 구경하는 척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후작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이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이유를 아무리 예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집히는 게 하나 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혼날 일이 있는 어린아이처럼, 어서 이 대화가 끝나기를 바랐다.
요즈음 이상해져 버린 남편이랑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여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리 뭐라 해도 셀바토르 공작과 자신은 차나 마시며 노닥거릴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
하지만 공작은 묵묵히 차를 마실 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흐르고 흘러, 결국 후작 부인이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제가 없으면 저택이 돌아가질 않아서 말이죠.”
“돌아간다라……. 스페라도 저택으로 말입니까?”
후작 부인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이 드디어 입을 뗐다.
“당연하지요, 저는 이래 봬도 스페라도 후작가의 안주인인걸요.”
“4년을 넘게 저택을 버려 두고 말이죠.”
셀바토르 공작은 어서 먹어 보라는 듯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앞으로 다과를 밀었다. 후작 부인은 그런 공작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4년간 저택을 비운 이유는 제가 몸이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공작께서도 아시지만 제가 슬픈 사건을 겪은지라,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지요.”
“그렇군요.”
시선이 맞았다. 공작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잠시 친정에 내려가 몸을 요양하고 온 것뿐이에요. 그러니 공작께서 저를 비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달칵. 후작 부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찻잔을 내려놓은 셀바토르 공작이 나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어딘지 배부른 사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라 후작 부인은 잠시 마음을 놓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배부르다고 사자가 사자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죠, 안 좋은 일. 그런데 그중 하나는 진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후작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삐진 제 딸이 떠올라 공작은 작게 미소 지었다.
“하나 제안을 하죠, 부인.”
“……무엇을 말인가요?”
“제가 원하는 것에 답해 준다면, 편안한 삶을 약속드리지요.”
셀바토르 공작의 제안에 후작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편한 삶이요?”
“네, 편안한 삶.”
어떤 삶이라고 이야기해 주지도 않았는데, 셀바토르 공작이 차를 마시는 동안 후작 부인은 편안한 삶에 대해 상상하고 자기 멋대로 희망을 품었다.
“……어떤 건가요? 나는 남편은 팔 수 없어요. 그리고 알다시피 4년간 떠나 있어서 현 상황도 모르고요. 애당초 남편은 저에게 일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후작 부인이 두 손을 꼭 쥐고 시선을 피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답해 주실 수 있는 물음입니다. 걱정 마시길.”
“무엇이죠?”
“왜 레슬리를…….”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건만,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는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태 공작과 눈도 못 마주치던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여, 역시 나에게 그 말을 하려고 부른 거군요? 내가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그렇다고 나를 욕하고 비난하려는 거지요?”
날카롭게 외친 후작 부인은 제 귀를 막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고요! 그 아이가 제물이 되어 불에 내던져지기 전까지는 열심히 가르쳤지요! 내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비싼 가정교사를 붙였는지 아세요?”
후작 부인은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라일락색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모습이 레슬리가 울 때와 똑 닮아 있어, 셀바토르 공작은 순간 움찔거렸다. 저도 모르게 늘 하던 대로 눈물을 닦아 주려고 손을 뻗으려고 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부인의 말은 그녀가 겉모습만 레슬리와 닮은 사람일 뿐,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건 내 탓이 아니에요. 그이가…… 스페라도 후작가의 집안 자체가 그랬던 거지,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나도 피해자라고요! 공작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엘리는 저를 만나 주지도 않고…….”
후작 부인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한다는 말이 딱 맞는 듯 보였다.
후작 부인은 레슬리가 그 집에서 괴로워할 때 잘 대해 주었던 것 하나를 크게 부풀려 자신을 지킬 방패로 삼으며 다른 비난들은 모조리 후작과 스페라도 후작가에 넘기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내 딸에게 무슨 일을 해 줬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부인.”
일부러 내 딸이라는 단어를 써 가며 공작은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진심을 들을 수 있을까 작은 기대를 했건만, 기대는 무너졌다. 아니, 진심은 들었다. 그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을 뿐.
레슬리의 이름을 꺼내거나 내 딸이라는 단어를 써도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받을 비난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 무엇을 바라시는 거죠?”
“그저 아주 조그마한 용기. 그게 필요할 뿐입니다.”
“용기…….”
“당신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용기 말입니다, 부인.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스페라도 후작가로 갔던 그 어린 소녀의 용기가 말입니다.”
“제가 좀 자기희생 정신이 강하긴 하죠. 용기도 있고.”
후작 부인은 뺨을 붉히며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없어요. 당신은 제 적이 아니던가요? 그리고 저는 이미 따르는 분이 있답니다.”
말은 아니라 하며 부정하지만, 후작 부인의 눈은 이미 그녀가 어느 정도 넘어왔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공작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시는 분은 당신이 선택한 분인가요? 스페라도 후작 부인. 아니, 데리엘.”
갑자기 이름을 불린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놀란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에게 안락한 삶을 준 게 맞나요? 내가 보기엔 오히려 뒤흔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입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꽉 잡은 손이, 긴 속눈썹 밑에서 떨리는 눈동자가 공작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저런. 간신히 친정으로 돌아가 숨을 돌리고 있는 당신을 다시 후작에게 보낸 사람이 삶을 흔든 게 아니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 그가 돌아오고 더 지옥 같아지지 않았나요.”
일부러 느긋하게 말을 흘렸다.
“데리엘. 당신은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간신히 입 끝에서 나오던 거절의 말이 사라졌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일어서 있는 공작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단 간절함과 희망이 더 컸다.
라일락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공작은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나를 선택하세요, 부인. 나는 당신이 원하는 삶을 줄 테니까요.”
메데이아가 자신의 저택에 쥐를 풀어놨던 걸 잊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다.
***
“레슬리가 이상하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 갑작스러운 회의가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열렸다.
주최자는 사이레인. 참석자는 베스라온과 루엔티, 바타와 자일로, 마델과 서올리, 하르트와 셀바토르 기사단이었다. 거기다 오늘은 특별 참석자, 제나까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야밤에 급작스럽게 불려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제나는 커다란 숄을 몸에 두른 채, 작게 졸고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을 가득 메운 이들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사이레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였다. 술과 고성이 오가야 할 험악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레슬리의 교리에 따라, 사람들의 앞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따듯한 코코아와 각설탕을 네 개나 넣은 차 그리고 상징인 눈사람 쿠키가 놓여 있었다.
“역시 축제를 가족끼리 구경하지 못한 게 문제였나?”
속상한 마음에 코코아를 한 번에 들이켠 사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그리고 가족과 함께 축제를 즐기고 싶다던 레슬리의 작은 소원은 얼마 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름 가면을 바꿔 쓰고, 옷을 평범하게 갈아입고 가발까지 쓰는 변장을 감행했지만,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풍기는 분위기는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한눈에 보기에도 장신인 네 명에 작은 아이가 같이 있으니 정체는 더욱 빠르게 발각되었고,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은 벽에 붙다시피 하며 자리를 내주었고, 상인들을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악단과 음유시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심각하게 떨던 상인이 레슬리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다 떨어트리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상인이 바로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자신의 죄를 빌기 시작했을 때, 짧디짧은 축제 구경은 끝이 났다.
“그래, 그거야! 그게 틀림없어!”
자신 혼자 답을 낸 사이레인이 크게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고 큰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린 걸 보니 테이블에 금이 간 게 틀림없었다.
“어, 어쩌지? 하지만 난 그렇게 일찍 들킬지는 몰랐는데. 나름 변장한다고 했잖아. 다들.”
안절부절못하던 사이레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역시 곰 가죽을 벗겨다 뒤집어썼어야 했나?”
“그러면 사냥당했겠죠.”
축제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서재에서 연구하다가 끌려 나온 루엔티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내가 변장 마법을 쓰겠다고 했잖아요. 그편이 나았을 텐데.”
최근에 바꾼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루엔티가 말하자 옆에 앉은 베스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지금 마법으로 신체 일부라도 가리는 자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감옥행이다.”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 늘 경계를 삼엄하게 섰던 아라벨라 축제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강화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황족들과 타국 손님들의 경호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상은 피스토레가 메데이아에게 보내는 경고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삼엄한 경비에 상인들과 구경꾼들, 심지어는 일반 경비병들에게서도 매일 매분 불만이 터져 나왔고, 그걸 조율하는 건 전부 베스라온의 몫이었다. 덕분에 웬만해서는 피곤한 티를 내지 않던 베스라온은 요새 가만히 앉아 조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러면 어떨까요?”
다른 셀바토르 기사들과 의견을 나누던 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축제 대신 소풍을 가시는 겁니다. 아라벨라 축제가 끝나고 나면 분명 다들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요. 큰 산을 넘은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하르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요즈음 저택의 모든 이들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휴식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제 생각에는 미식의 도시인 타샤레아는 어떨까 싶습니다. 날이 따듯하고 바닷가가 가까워 해수욕하기 좋지요. 공작님은 생선 요리를 좋아하시고, 아가씨는 아직 바다를 본 적이 없으시니 분명 두 분 다 좋아하실 겁니다.”
“우리 아내님도 좋아할까?”
레슬리는 물론 셀바토르 공작까지 좋아할 거란 말에 사이레인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요. 좋아하실 테지요. 그러니 기사단도 전부 이동해서 휴가를 즐기도록 하지요.”
하르트가 슬쩍 본심을 끼워 넣었고, 그의 옆에서 졸음에 눈을 깜빡이던 자일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샤레아 도시 좋지요. 따듯하고 평화롭고……. 제가 은퇴하면 살려고 한 도시입니다. 이왕 거기 간 김에 제 사직서 좀 공작님이 받아 주셨으면……. 큼, 큼!”
하르트에게 옮았는지 속마음이 튀어나온 자일로는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자일로의 맞은편에 앉은 제나가 그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는 축제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왁자지껄한 와중에 홀로 얼굴을 굳히고 있던 마델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이…… 악!”
아이테라 공자의 이름을 말하려던 마델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
“‘아이참, 아무리 생각해도 사이레인 님 말이 맞아요.’를 말하려던 것 같아요.”
생글생글 웃는 서올리가 아직도 눈물이 가득한 마델을 대신해 사이레인의 답에 대답했다.
“왜, 아니, 나는…… 흡!”
환한 웃음을 머금은 서올리에게 연타로 옆구리를 맞은 마델은 몸을 작게 떨었다. 마델이 결국 허물어지듯 테이블 위로 쓰러지자 서올리가 웃으면서 ‘아이참, 여기서 졸면 어떡해. 많이 피곤했구나, 내 친구?’ 하면서 마델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미 눈치를 챈 제나와 자일로가 즉각 수습에 나섰다. 그건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앞은 아닌 것 같았는데…….”
사이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나가 환하게 웃었다.
“맞을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그렇게 대답하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젊은것들이란!”
제나와 자일로의 말에 사이레인의 고개가 더욱 옆으로 꺾였다.
“사이레인 님. 아마도 아가씨는 아라벨라 자리에 중압감을 느끼고 계실 겁니다. 평소에도 그 일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으니까요. 그러니 더더욱 일이 끝난 후에는 휴식이 필요할 겁니다.”
레슬리는 종종 의식에 관해 이야기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걸 기억한 사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 이상한 물건을 비싸게 팔아넘기려는 상인처럼 제나가 미소 지었다.
“그러니 더더욱 일이 끝난 후에는 휴식이 필요하시겠지요. 공작님도 슬슬 새로운 요리를 접하실 때가 되었고, 아가씨도 수영을 꽤 즐기시니 타샤레아는 괜찮은 선택지가 될 겁니다.”
제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타샤레아 도시에 대해 늘어 두기 시작했다. 아무리 들어도 자신의 아내님과 딸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자, 사이레인은 이내 마델의 이상한 대답을 지워 버렸다.
하지만 속아 넘어가지 않은 베스라온과 루엔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테라 공자…….”
베스라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축제가 끝나면 조지러 가자, 형.”
루엔티가 거칠게 안경을 벗으며 말하자 베스라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레슬리가 우울해하던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낼 것이다.
“그래, 이 축제의 끝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자일로는 왜 지금 베스라온이 낮게 중얼거리는 그 말이 축제가 아니라 콘라드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 있었다. 자일로는 느긋하게 자신의 몫으로 나온 차를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끝이 오는구나.”
***
“이제 곧이로구나.”
메데이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밤하늘을 수많은 별들이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이피엘. 별이 참 예쁘지 않니?”
갑작스러운 말에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이피엘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별이 가득한 게 정말 예쁘네요.”
“그렇지. 특히 축제 기간에는 더욱 별이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아. 기분 탓일까.”
메데이아의 시선은 하늘을 떠날지 몰랐다.
“우리 이트바나에서는 축제 기간은 물론 평소에도 별이 빛나지 않았는데. 그들도 작은 나라에는 빛을 비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자연스레 이트바나가 생각났다. 좋게 말하자면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고집과 아집으로 이루어져 있던 나라. 뿌리 깊게 박힌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뽑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메데이아는 그 나라가 싫었다. 왜 자신이 선택하지도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길이 정해지는 걸까. 자신은 자신이 정한 길을 걸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데, 왜.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해 주는 이가 없었던 나라였다.
비록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작게 자신의 나라를 중얼거렸다.
“태후 폐하…….”
이피엘은 메데이아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흐렸다. 갑자기 왜 별 이야길 하시는 걸까 했더니, 이트바나가 생각났던 걸까. 괜스레 눈물이 나 눈가를 훔쳤다.
이런. 메데이아는 살포시 웃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이피엘의 얼굴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고른 시녀 이피엘은 눈치도 빠르고 일 처리도 꼼꼼한데, 단 하나 단점을 뽑자면 너무도 감정적이었다.
“이피엘.”
다시 나지막이 시녀의 이름을 부르자, 눈가를 훔치던 이피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너와 데비엔에게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을 약속했었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시면서 말해 주셨지요.”
이피엘의 대답을 들으며 메데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트바나에서 딸의 쓰임새란 늘 정해져 있는 것이었고, 몇몇은 그 일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피엘은 거부의 대가로 위험에 처했었다.
그런 그녀를 구해 준 건 메데이아였고 그 손을 잡은 뒤로 이피엘은 늘 그녀의 충실한 시녀였다.
“하지만 우리가 살기에 이트바나는 너무 작지 않니.”
고칠 것도 많고. 메데이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계획대로 아렌도가 황위에 오르고 자신이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른다면, 잠들어 있던 나라는 다시 눈을 뜰 것이다. 드넓고 새로운 땅과 새로운 규율을 가지고. 메데이아를 괴롭게 했던 뿌리는 잔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 제국이면 충분할 거야.”
넓디넓은 제국. 태양과 달, 별조차 먼저 비추는 곳. 이 드넓은 대륙에서 가장 먼저 봄이 찾아오고 겨울이 먼저 물러가는 이 제국 정도면 자신도 배가 부르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메데이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제국을 다 집어삼킨다고 해도 자신은 영원히 배가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을 먹고 나면 또 뭘 노려볼까.
‘저 하늘을 집어삼킬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다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 것을 자신은 지금도 해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걸 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다음엔 또 뭘 집어삼켜야 할까.
르카디우스 제국의 인장에 있는 뱀이 마치 자신과 같아 메데이아는 작게 웃었다. 하늘을 끝도 없이 집어삼키는 모습, 마치 자신과 같지 않은가. 하늘을 조금 더 바라보던 메데이아가 아직도 눈물을 훌쩍이는 이피엘을 바라보았다.
“그만 들어갈까.”
메데아이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눈동자 속에 담겨 있던 별 잔상이 긴 속눈썹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중요한 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