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9)

#16

콘라드는 숨을 크게 내쉬며 바로 벤치에 머리를 기댔다.

‘스페라도 후작…….’

4년 전까지만 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테라 대공가에는 깍듯이 예의를 지켰으니까. 그래서 악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스페라도 후작과 후작 부인은 어린 프리트가 실수를 저질러 값비싼 드레스를 망쳤을 때 웃으며 넘어가 준 데다가 늘 신전에 엄청난 기부금을 쏟고 있었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완벽해 보였는데.

하지만 레슬리와 엮이고 나서부터는 그의 새로운 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스페라도 후작은 왜 자신의 친딸을 저렇게 죽이려고 하는 걸까. 그리고 후작 부인과 엘리는 왜 스페라도 후작을 따랐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콘라드는 애써 물음을 삼켜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다. 이런 일은 본인의 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때 듣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오늘 레슬리가 고백해 준 어둠에 대해서도, 곤란해하는 레슬리를 재촉할 생각은 아니었다. 중간에 늑대 사건이 있었다 해도. 몇 년이 되더라도 스스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콘라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 쉬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신경 쓴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조금 상처긴 한데.’

머리끝을 매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기뻤다.

‘강력한 신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대요. 그리고…… 루엔티 오라버니가 그런 사람은 콘라드 경뿐이라고 말해 주셨어요.’

아까 들었던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어느새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털어 버리자.’

자신도 프리트가 아파서 루엔티와 프리트를 붙여 놔야 했다면 비슷한 방법을 썼겠지. 아마 결과는 달라졌겠지만. 루엔티의 성격상 자기를 이용했다는 걸 알면 와서 멱살을 잡을 것이다.

‘이 빚은 반드시 받아 내야지.’

물론 레슬리가 아니라 루엔티에게. 뭘 해 달라고 할까. 마법사의 저택에서 가장 비싼 마법석을 무제한 제공해 달라고 할까.

마음을 다잡은 콘라드는 어느새 텅 비어 버린 정원을 조용히 가로질렀다. 파티장 쪽에서 시작된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콘라드가 들키지 않은 것은 그 덕분이었다.

‘……아버지?’

아이테라 대공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파티장을 벗어나 점점 정원 안쪽으로 향하는 아이테라 대공을 보며 콘라드는 눈을 찡그렸다.

어디를 저렇게 바쁘게 가시는 걸까. 파티장을 한 번, 그리고 짙은 녹음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테라 대공을 한 번 바라보던 콘라드는 조용히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그저 파티장으로 같이 들어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풍랑으로 갈라진 사이는 아직도 틈이 보였고, 콘라드는 그 틈을 막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버…….”

아버지를 부르려던 콘라드는 말을 멈추었다. 아이테라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늘 밑에서 나온 여자는 콘라드의 눈에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꽃다발을 안고 있는 여자는, 늘 메데이아의 주변에 있던 시녀였다.

‘이피엘이라고 했던가.’

몇 번 만나지는 않았지만, 늘 메데이아를 만나러 갈 때면 그녀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콘라드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주변 관목 밑으로 몸을 낮추며 면밀하게 두 사람을 살폈다.

“오셨습니까. 주변은 잘 살펴보고 오셨는지요?”

이피엘의 말에 아이테라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물론이네. 파티장에서부터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어. 혹시 몰라 경비도 세워 두었지.”

콘라드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관목 밑으로 아예 몸을 숨겼다. 잘 보이고 싶어 고르고 골랐던 옷이 흙으로 더럽혀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완전히 몸을 숨긴 후에야 콘라드의 눈에 두 사람과 주변이 들어왔다. 이피엘의 뒤로도 몇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은 사람들이 없는 정원에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운 좋게, 어찌 보면 운 나쁘게 이 상황과 마주친 듯했다.

“그렇습니까.”

대공의 말에 이피엘은 자신이 안고 있던 꽃다발을 말없이 내밀었다. 색색의 꽃들이 들어 있는 꽃다발을 아이테라 대공이 받아 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피엘은 고개를 숙이더니 바로 그 자리를 떴다.

아이테라 대공은 잠시 자신이 안고 있는 꽃다발을 바라보다가 그 사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숲의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조그마한 물통 같아 보였다.

아니, 그건 물약이었다. 시중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물약 통.

그걸 제 품속에 집어넣은 아이테라 대공은 파티장 쪽으로 움직이다가 하필 콘라드가 몸을 숨긴 관목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 면밀하게 주변을 살핀다면 들킬 상황이었다. 하지만 콘라드는 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대공은 미간을 좁히고 눈가를 일그러트린 채 화려한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 그의 얼굴에 수만 가지의 감정이 지나갔다. 그중에는 후회도, 절망도 그리고 죄책감도 있었으나 마지막에 남은 것은 욕망이었다.

대공은 다시 꽃다발을 안아 들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가 파티장에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콘라드는 관목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대공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메데이아와 아이테라 대공. 기묘한 조합이었다. 도대체 아이테라 대공이 남의 이목을 신경 써 가면서 메데이아의 시녀를 만나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꽃다발과 물약.’

콘라드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레슬리가 정원으로 나가 콘라드에게 비밀을 이야기할 때, 셀바토르 공작은 파티장 안에서 작게 숨을 흘리고 있었다.

‘끈질겨.’

저절로 눈가가 찡그려지고 짜증이 샘솟았다. 만일 어딘가를 나갔다 온 아렌도가 메데이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때맞추어 아이테라 대공이 파티장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셀바토르 공작은 아직도 그녀에게 붙잡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파티장 구석으로 몸을 피했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계속 그녀를 따라붙었다. 메데이아가 축사를 읊고 본격적으로 음악이 울려 퍼지고 나서야, 간신히 사람들은 파티를 즐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밖을 나오고 싶지 않다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레슬리의 일만 아니었다면 이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공작저를 나오는 일 따위 없었을 텐데. 그나마 에펜타니 백작과 이야기를 제대로 마친 게 다행이었다.

공작이 구해야 할 약초 이름을 꺼내자마자 에펜타니 백작은 다른 약초를 추천했다. 공작이 말한 약초는 구하기도 힘든 데다가 효과도 약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이내 충분한 양을 약속드리기는 어렵지만 약초꾼을 풀겠다고 답을 해 주었다.

‘테펜텔을 보내야지.’

테펜텔은 셀바토르 공작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바타가 우는소리를 할 정도로 빠르게 식량 창고를 거덜 내고 있었고, 하르트가 좌절할 정도로 연병장을 험하게 쓰고 있었다.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술 창고였다. 대대로 귀한 술들을 보관한 창고는 순식간에 거덜 나, 제나가 저도 모르게 서류를 찢어 버릴 정도였다.

그런 객식구가 드디어 밥값을 할 때가 되었다.

“여보야, 괜찮아?”

사이레인은 그런 아내님의 안색을 살피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를 가져온 참이었다. 약한 도수의 샴페인이 잔 속에서 흔들거렸다.

“베스, 레슬리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셀바토르 공작은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정원으로 나가더군요. 하르트가 뒤따랐으니, 걱정은 없을 겁니다.”

아직도 메데이아가 불러일으킨 짜증이 식지 않은 공작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인지, 제나는 하녀들에게 일러 공작의 머리에 간단한 장신구도 하지 않게 했다.

“나도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싶네.”

여기보다는 정원이 좀 더 숨 쉬기가 편할 것이다. 레슬리도 그런 생각으로 정원으로 나간 것이겠지.

“여보도 잠시 나갔다 와도 되지 않을까? 여기는 내가 대신 자리하고 있으면 되는 거니까. 나에게 뭐라 하는 놈들은 없겠지. 저놈도 남아 있을 거고.”

사이레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아내님을 달랬다. 메데이아에게 걸려 있을 때 도와주지 못한 게 죄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아니야,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그런 사이레인을 보며 괜찮다는 듯 옅게 웃었다. 자신이 메데이아에게 붙잡혀 있을 때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은 다른 귀족들에게 잡혀 있었다. 레슬리는 그사이 엘리와 대치하다가 정원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웃고 나서야 조금 마음을 놓은 사이레인은 천연덕스럽게 장난까지 걸었다.

“우리 여보야는 예전부터 이상한 놈들에게 인기가 좋았지.”

혼란의 시대 때 그놈도 있었다. 질투심과 경외심이 섞여 괴상한 짓을 한 놈. 그놈 때문에 얼굴의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였지. 손수 머리가 바닥으로 내려올 수 있게 도와줬음에도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 놈이었다.

사이레인이 콧김을 내뿜으며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또 이상한 놈이 나타나면 내가 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거야! 그러니 여보야는 나만 믿어!”

어딘가 자신만만한 사이레인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레인의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자신만만한 성격이 좋았다. 적이었을 때, 아군에게 큰 피해를 준 이는 사이레인이었다. 그래서 다들 사이레인의 이름만 들으면 치를 떨었지만 그녀만은 저 성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차피 피해는 고스란히 돌려주기도 했고.

“그런데 누구를 기다린다는 거야?”

머리가 식은 사이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슬리의 버릇이었다. 늘 집에 있을 때는 막내딸과 붙어 있더니, 레슬리의 버릇이 고대로 사이레인에게 옮겨 온 듯 보였다.

사이레인의 거친 버릇들은 레슬리에게 옮겨 가면 안 될 텐데.

특히, 입담 같은 건 절대 옮으면 안 됐다. 그 귀여운 얼굴로 ‘후작의 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거예요!’라고 외치면 가슴이 아플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후에 입조심을 하라고 다시 말해 줘야지. 은근히 사이레인은 레슬리 앞에서도 그런 말을 썼으니까.

설마 벌써 옮은 건 아니겠지.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면서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는 나올 것 같은 사람.”

다른 파티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겠지만, 이 자리는 나올 가능성이 컸다. 여기에는 그녀가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이 있었으니까.

“이제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 지금까지 오지 않는 걸 보면 참석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베스라온이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파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다. 이미 파티에 올 만한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무리를 만들어 자신들끼리 떠들고 있었고, 후보생들과 다른 사람들 역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메데이아가 연설 같지 않은 짧은 연설을 한 후에는 그저 평범한 파티처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파트너와 춤을 출 뿐, 아무것도 특별한 건 없었다. 보통 파티를 주최한 이가 뭔가를 더 말하거나 제안하기도 했지만, 메데이아는 그저 구석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위치를 아는 거죠.”

“황족이라 해도, 힘없는 태후잖아요?”

몇몇 귀족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말하고 빠져 준 게 좋다며 자신들 멋대로 그녀를 평가하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움직일 사람도 아니었다.

‘왜 이런 파티를 연 걸까.’

최초의 사제들에 뽑힌 이들을 축하하고, 떨어진 이들을 위로한다는 명분 자체는 걸릴 게 없었으나, 문제는 그 속에 숨겨진 메데이아의 속셈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공작의 눈에 사냥감이 들어왔다. 누군가의 눈에 띌까 벽 쪽으로 붙어 움직이는 그녀는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공작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누군가와 이야기하던 베스라온이 그녀를 불렀으나, 공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가더니 누군가와 가볍게 부딪쳤다. 조용히 파티장으로 들어와서는 사람을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들고 있는 부채를 떨어트렸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손수 그녀가 떨어트린 부채를 주워 건네주며 생긋 웃었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

그녀의 라일락빛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고 그 얼굴을 보면서 공작은 레슬리를 떠올렸다.

레슬리도 놀라면 눈이 동그래지면서 입을 작게 벌렸었다. 지금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짓고 있는 것과 똑같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레슬리는 표정을 갈무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면, 그녀는 금방 끝난다는 점이었다.

“괜찮……습니다.”

후작 부인은 부채를 받지도 않고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귓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녀가 떨어트린 부채 사이에 자연스럽게 뭔가를 끼워 넣으며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말해 주었다.

“스페라도 영애를 보러 오신 모양이로군요. 지금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갔으니 금방 볼 수 있을 겁니다.”

“……!”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후작 부인은 고개를 돌려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에게 있어서 엘리는 과거에 잃어버린 영광이며, 끊어 내지 못한 것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이었다. 보석처럼 귀하게 키웠던 아이, 스페라도 후작처럼 자신에게 안락한 삶과 명예로움을 가져다줄 아이.

그 아이가 최초의 사제가 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후작 부인은 그런 엘리를 보려고 슬그머니 파티장으로 온 것이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면서 제 손에 들린 깃털 부채를 내밀었다.

잠시 부채를 한 번, 셀바토르 공작을 한 번 바라본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덜덜 떠는 손으로 부채를 받았다. 하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녀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할…… 이야기는 이것뿐인가요?”

위태로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이야기라니요?”

셀바토르 공작이 모른 척 잡아떼자,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어머니가 아니라고 나를 책망하러 온 게 아니었나요? 나에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요!”

“쉬이.”

셀바토르 공작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웃었다.

“여기서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으실 텐데요?”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얼른 입을 다물고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빠르고 경쾌한 템포의 음악이 홀에 울려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기에 그녀의 소리는 사람들의 귓가에 닿지 못했다.

“할 이야기는.”

공작은 부채를 잡은 후작 부인의 손을 잡아 그녀가 단단히 부채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제야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부채의 풍성한 깃털 사이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셀바토르 공작은 다시 몸을 돌려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에게 향한 뒤였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에 안심한 그녀는 자신의 부채를 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이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도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

파티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4년 만에 돌아오는 거대한 축제에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라벨라 축제를 보기 위해 타국에서도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오는 상황이라, 사업을 하는 귀족들은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찾아온 특수기를 미리 즐기고 있었다.

모두가 흥분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단 한 사람의 기분만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한 남자가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기고 파티장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듯한 옷은 관리를 잘해 깔끔해 보였지만, 입고 있는 사람이 문제였다. 마음고생과 육체적 고통으로 말라 버린 남자는 여윈 손을 덜덜 떨었다.

***

사람이 어두운 곳에서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끝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법이었다. 그 말은 그대로 후작에게 적용되었다.

후작은 지난 4년간은 셀바토르 공작의 눈을 피해 살기 위해 도망치느라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작 위를 되찾자는 엘리의 말에 그의 아내에게 돌아오고 의식주가 해결되자, 후작은 다시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트라, 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거란다.’

전 스페라도 후작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가득 찬 작은 다락방에서는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우습게도 예전에 레슬리가 썼던 다락방이 스페라도 후작이 가장 찾는 방이 되었다. 황궁에서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왔고, 다락방은 누구의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게 숨겨져 있던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파견은 후작 부인이 스페라도 후작과 접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여태 밀려 있던 막대한 벌금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나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닌데…….”

후작은 끊임없이 과거의 영광을 곱씹었다.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말에 복종할 줄 알았고, 딸은 아비인 자신을 사랑하며 존경했다. 주변에서는 칭송이 자자했고, 효율적으로 영지를 운영했으니 영주민들 역시 자신을 소리 높여 찬양했으리라.

그런 나날이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 멍청한 여자 때문에…….”

레슬리, 셀바토르 공작. 후작의 몸이 분노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모도 있는 여자아이를 대뜸 제 딸로 삼을 리가 없었다.

‘고아원에서 애나 데려올 것이지!’

후작은 제 손가락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입안이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 찼다.

어떻게 레슬리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셀바토르 공작을 선택한 거지? 자신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 주었는데! 엘리에게서 드레스를 뺏어다 주지도 않았던가!

‘아니지, 엘리 그것도 나를 배신했지.’

아직도 4년 전 일이 눈에 선명했다. 보석처럼 귀하게 키웠던 아이는 제 한 몸 살고자 아비인 자신을 버리고 거짓을 입에 담았다. 내가 엘리를 때렸다고? 자신처럼 손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한 자비로운 사람이?

“웃기는 일이야!”

후작의 생각이 점점 병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의심의 꼬리는 퍼지고 퍼져, 주인도 없는 빈 저택을 4년 넘게 지키고 있던 집사에게도 닿았고, 자신의 아내에게도 닿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메데이아 태후였다.

“후우.”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후작은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자, 황실 사람은 돌아간 듯 저택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아니, 저택의 한곳만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뭐지?”

아직 황실 사람이 남아 있는 걸까. 스페라도 후작은 조심스레 응접실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자신의 개인 서재에서 나오는 한 하녀를 붙들었다. 청소하고 나오는 것인지 걸레와 대야를 들고 있던 하녀가 후작을 보고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후작님.”

“아직 황실 사람이 가지 않았느냐?”

후작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낯이 익다 싶었더니, 서재에 있을 때 자신에게 황실 사람이 왔다고 알려 준 하녀였다.

“황실 사람이요?”

후작의 물음에 하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오늘은 아무도 방문하시지 않았습니다. 후작님.”

“뭐?”

분명 아내는 오늘 황실 사람들이 온다며 그를 다락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니.

“그럼 아내는 지금 뭘 하고 있지?”

그 말에 하녀는 눈을 굴렸다. 그제야 지금 상황을 파악한 듯 보였다.

“말해!”

“악!”

우그러트리듯 하녀의 어깨를 움켜쥐자, 하녀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들고 있던 걸레와 대야를 떨어트렸다.

“그게, 오늘 황실 파티장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황실 파티장?”

“네, 네! 엘리 아가씨께서 최초의 사제가 되셨습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파티를 여셨고…….”

하녀는 횡설수설했지만, 후작은 필요한 정보를 모두 들었다. 자신을 배신한 엘리가 최초의 사제라는 귀한 자리에 올랐고, 아내는 그 자리에 참석할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자신을 노리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배신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후작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재판 이후 아내는 혼자 살겠다고 제 곁을 떠나, 자신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 배고픈 저에게 음식을 챙겨 줬던 엘리 역시, 자신도 학대당해 억울하다고 눈물을 글썽였던 적이 있었고.

그 둘은 언제든 자신을 팔아먹을 수 있었다.

아내를 따라 그 자리에 갈까. 안 그래도 메데이아마저 그를 만나 주지 않고 있어, 초조한 요즈음이었다.

사슬 이야기를 보낸 후에는 간단한 편지조차 오지 않았다. 황실 사람들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당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더욱더 후작의 의구심이 짙어졌다.

왜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걸까. 이미 연락할 다른 수단을 취했기 때문이 아닐까.

‘젠장!’

엘리와 자신의 아내, 거기에 메데이아까지. 세 명의 여자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후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보다 아래였던 것들이 이젠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

위험을 감당할 필요가 느껴졌다. 후작은 아내를 쫓아 파티장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거칠게 손을 놓자, 크게 휘청거리던 하녀의 품에서 종이 몇 장이 떨어졌다. 부족한 음식 재료 목록을 적어 놓은 듯 보이는 종이를 짓밟고 후작은 몸을 돌렸다. 그는 아내에게 따라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곧장 마차로 다가갔다.

“후작님……?”

늙은 마부는 오래전부터 후작을 모셨던 자였다. 레슬리를 공작저로 데려다줬던 마부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자신의 옆에 털썩 앉는 후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저…… 여긴 왜……?”

“닥치고 말이나 몰도록 해.”

아내는 마차 내부는 신경을 써도 마부는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후작의 예상대로 마부가 그를 제 조수라고 말하자 후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황실에 들어갈 때 경비병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긴 했으나 스페라도 후작가의 인장과 부인의 얼굴을 보고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본 광경들.

메데이아는 자신을 대신할 만한 아이테라 대공을 찾았으며, 제 아내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여자와 내통하는 듯 보였다. 아니, 내통하는 게 확실했다.

“어째서 이런…….”

그런 상황에서 엘리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새 드레스로 갈아입은 엘리는 오늘만큼은 어두운 얼굴을 벗어던지고 예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아렌도의 옆에 서 있었다.

‘왜 나만…….’

왜 자신만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자신은 저 아름다운 곳에 있지 못하고 여기에 홀로 있는 걸까.

자신이 여태 해 왔던 모든 일은 전부, 전부 가문을 그리고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는데, 가족들은 자신을 버리고 저 안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후작은 시선을 뒤틀어 모든 상황을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왜곡했다. 가문을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했지만, 결국 버림받은 비참한 자신. 절망으로 물든 푸른 눈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두고 보자.”

모두 용서할 수 없었다.

“전부. 전부……!”

스페라도 후작은 입술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내가 저들에게 지옥을 보여 주고 말리라.

***

가벼워진 마음으로 파티장으로 돌아온 레슬리가 슬그머니 베스라온의 옆에 서자,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던 베스라온이 제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레슬리. 어디를 다녀온 거니?”

정원에 다녀왔다는 걸 알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자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원에 다녀왔어요. 약속대로 하르트 경이랑 꼭꼭 붙어 있었고요.”

그 말에 베스라온은 미소 지으며 ‘잘했다.’라고 말해 주었다.

“공녀님!”

누군가가 익숙한 목소리로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를 위해 귀족 재판 때 증언대에 선 펠론 경이였다.

“안녕하세요, 펠론 경.”

레슬리가 시선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자 그는 오랜만에 공녀님을 본다며 넉살 좋게 웃었다.

“안 그래도 지금 베스라온 대장님께 아가씨 칭찬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를요?”

“네, 아라벨라가 되셨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시던지.”

그녀가 못 말리겠다는 듯 눈을 흘기자 베스라온이 다시 무덤덤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고 보십시오. 내일쯤 되면 황실 개미들조차 아가씨의 자랑을 듣게 될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랑을 한 걸까. 예전의 말수가 적고 중후했던 베스라온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실제로 그의 옛날 모습만 기억하는 몇몇 지방 귀족들이 놀라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슬리가 슬쩍 시선을 올리자 베스라온이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그게 뭐 어떠냐는 얼굴에 레슬리가 반사적으로 입을 빼죽 내밀자, 따라서 베스라온도 입술을 내밀었다.

어쩐지 오기가 생겨 두 손으로 제 뺨을 꾹 눌러 붕어를 흉내 내니, 베스라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겼다.’

레슬리가 우쭐거리자 그마저도 귀여워 보였는지 베스라온과 하르트 그리고 펠론이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럽습니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요. 저는 동생이랑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거든요. 머리가 좀 컸다고 얼마나 대들던지. 저번에는 제 말을 훔쳐 타서 수도를 전부 돌고 오더라고요. 덕분에 그날은 마차를 타고 출근했죠.”

“세상에…….”

“뭐, 하루 정도는 괜찮았어요. 문제는 그게 며칠을 갔다는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공녀님, 케이크는 드셔 보셨습니까? 과연 황실 파티예요. 내로라하는 케이크에 과자들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이야기는 순식간에 확확 바뀌었다. 레슬리는 홀린 듯 펠론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그사이 베스라온은 하르트에게서 정원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전해 들었다. 하르트의 이야기를 듣는 베스라온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어머니가 고른 사람이니 믿어도 되겠지만.’

어딘가 불안했다. 베스라온은 레슬리의 힘에 대해 셀바토르 공작저의 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그걸 위해 조금은 병적으로, 레슬리가 힘을 쓸 만한 상황을 제거했었다.

혹시라도 연약한 레슬리가 그 힘을 쓰다가 폭주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그리고 과도한 복수심에 먹히지 않기 위해.

데비엔과 메데이아가 알아 버린 이 상황에서는 콘라드 역시 상황을 알고 더 적극적으로 레슬리를 도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어쩐지 속이 좋지 않았다.

‘답답하군.’

베스라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런 베스라온의 턱 쪽에 무언가가 닿았다.

“……?”

베스라온이 시선을 내리자, 레슬리가 케이크 한 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오라버니.”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진 자신을 달래기 위해 레슬리가 내민 듯 보였다. 베스라온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맛있네.”

케이크를 먹자 레슬리는 웃으며 접시에 있는 다른 케이크를 내밀었다. 나름 베스라온의 입맛에 맞춘 것인지, 레슬리가 좋아하는 다디단 케이크가 아닌 꽤 담백한 맛의 케이크였다.

“자, 오라버니.”

레슬리는 이번에 붉은 케이크를 내밀었다. 한 입 크기로 만들어진 케이크 위에는 작은 베리가 올라가 있었다. 베스라온은 아무런 의심 없이 케이크를 입에 넣었고.

“……!”

급격히 몰려오는 신맛에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이내 거대한 몸을 조금씩 허물어뜨렸다. 놀라 베스라온을 바라보는 펠론과 하르트에게 레슬리는 방긋 웃었다.

“오라버니는 신 걸 잘 못 드시거든요.”

아침의 복수였다.

***

“메데이아 태후 폐하.”

모두가 파티를 즐기는 가운데, 어린 소년과 소녀 두 명이 메데이아에게 다가왔다. 아쉽게도 최초의 사제가 되지 못한 후보생들이었다.

“결정했나요?”

두 사람을 보며 메데이아는 생긋 웃었다. 잠시 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는 태후 폐하께서 제안해 주신 걸 따르고자 합니다.”

원하는 답에 메데이아는 옅게 웃었다.

이번에는 시험 방식이 크게 바뀌면서 고귀한 피대로 후보를 뽑지 않았다. 덕분에 셀리스처럼 한미한 가문의 자제들도 꽤 뽑혔고, 그중에는 꽤 절박한 사람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지금 메데이아의 앞에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녀와 금빛 머리의 소년이 그런 상황이었다.

나름 깔끔한 옷이라고 입은 옷은 조금 낡아 있었고, 유행에 뒤처져 있었다. 귀족이라고 모두 부유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중에는 당장 먹을 식사 한 끼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이들도 많았다.

“저, 그런데…… 위험한 것은 아니지요?”

소녀가 주저하며 묻자 메데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고위 사제께서도 미리 말했듯 그저 일손을 도와주기만 하면 된답니다. 이번엔 꽤 크게 축제가 벌어질 예정이라 도움이 필요해요.”

고위 사제.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검은 머리에 얼음 같은 푸른 눈을 한 고위 사제가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안심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전에서 몇 없는 고위 사제에, 태후였으니까.

메데이아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장식으로 달아 두었던 꽃 두 송이를 뽑아냈다. 그리고 그 꽃을 두 사람의 가슴에 손수 달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라벨라를 돕는 일입니다. 이번 축제만 잘 끝나면 내 이름으로 그대들을 다음 최초의 사제들로 추천서를 넣겠어요. 물론 이번 일에 대해서도 충분한 보상을 내릴 예정입니다.”

보상과 다음 최초의 사제 추천.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누구도 아닌 황족의 추천이었다. 예전처럼 완벽하게 최초의 사제를 확답받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알려 주도록 하겠어요.”

밝아진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메데이아은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부디 그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두 사람 모두.”

***

공작의 망토를 도롱이처럼 둘둘 둘러서 덮고 있는 레슬리가 눈을 깜빡였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오늘은 꽤 즐거운 날이었다. 예쁘게 꾸미고 셀리스와 케이크를 먹었으며, 베스라온에게는 신 베리를 먹여 복수에 성공했다.

오직 걸리는 거라고는 콘라드에게 비밀을 털어 둔 것이었다.

‘콘라드 경 괜찮으신 거겠지?’

레슬리가 들어오고 나서 한참 만에 돌아온 콘라드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거기다 옷가지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레슬리가 콘라드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걸자 콘라드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날 때까지 어두워진 얼굴은 끝끝내 나아지지 않았다.

‘역시 내가 싫어지신 걸까?’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콘라드는 괜찮다고 말해 줬지만 그가 누군가. 괜찮지 않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해 줄 사람이었다.

첫 친구였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다락방을 벗어나 처음으로 사귄, 비슷한 나이 대의 친구였다. 그런 친구에게 미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다음에 맛있는 거랑 해서 다시 사과하자.’

잘못했으면 더 잘해 주면 되는 거겠지.

레슬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태 콘라드와 먹었던 음식 중에서 콘라드가 뭘 더 잘 먹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시폰 케이크, 마카롱, 에클레어, 코코아……. 많은 음식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마땅해 보이는 건 없었다.

손 편지와 함께 사과해 볼까.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다시 한 번 수마가 밀려들어 왔다.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난 탓이었다.

“하암.”

작게 하품한 레슬리의 머리는 몰려드는 졸음에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레슬리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머리 장신구를 빼 주던 공작이 손을 멈췄다.

“많이 졸리니?”

“네에…….”

“그럴 만도 하지. 오늘은 흔치 않은 일들을 해치웠으니까.”

파티에 나간 것뿐인데, 마치 전쟁터에 나간 듯한 셀바토르 공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옅게 웃었다.

“좀 자렴. 마차가 멈추면 깨워 줄 테니까.”

레슬리는 대답하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그 상태로 잠들어 버렸다. 그런 레슬리가 편히 눈을 붙일 수 있게 공작은 자신의 어깨를 내어 줬다.

“많이 피곤했나 보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도 피곤한지 눈 그늘이 짙게 져 있었다.

“여보도 피곤하지 않았어?”

마지막 남은 보석 핀을 빼내며 공작이 묻자, 사이레인이 볼을 긁적였다.

“조금? 그래도 여보야가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평민에 용병 생활을 해 왔던 사이레인에게 있어서 저런 자리는 자신 못지않게 괴로운 자리였을 것이다.

거기다 오늘은 아셀라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에겐 파티가 아닌 정보전이었다. 공작과 사이레인은 목적 중 하나였던 에펜타니 백작을 만나고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였다면 루엔티가 했을 일인데, 아직도 그는 시누스턴 신전에 남아 있었으니까.

“피스토레 녀석은 얼굴도 못 봤군.”

사이레인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을 흘렸다. 그나마 베스라온이 기사단의 일로 황실에 남은 덕에 마차 안은 여유로웠다. 하지만 사이레인이 기지개를 켤 정도로 큰 편은 아니라 그는 곧 마차 지붕에 팔을 부딪치고는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메데이아가 있으니까 굳이 나올 필요는 없었지.”

“테펜텔 녀석에게 자랑 좀 하려고 했는데. 테펜텔은 피스토레를 만날 수 있으려나.”

사이레인의 물음에 공작이 눈을 찡그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축제가 끝난 후에는 만날 수 있겠어. 피스토레도 일이 많고 테펜텔도 곧 수도를 떠나니까.”

“테펜텔이? 벌써 돌아간대? 아니, 뭐 벌써 가려고 한대. 조금 더 있지. 아직 못 마셔 본 술도 잔뜩이구먼.”

매번 투덕거리던 것과 다르게 사이레인이 급하게 물었다.

“아니, 일 좀 시키려고. 에펜타니 영토로 보낼 참이야.”

공작의 대답에 마음을 놓은 듯 사이레인은 ‘그래, 이제 밥값 좀 해야지. 바타가 어제 울더라니까.’ 하고는 마차 벽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웃으며 제 아내와 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여보야랑 춤도 추고 싶었는데.”

“호수에서 췄던 것처럼?”

사이레인이 회상에 잠긴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때가 좋았지.”

호숫가를 홀로 삼고, 달빛을 샹들리에 삼아 괴물이라 불리던 소공작과 어리숙한 용병이 췄던 춤은 아직도 사이레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잠시 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공작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바빠서 안 됐지만, 한번 공작저에서 파티를 열자고.”

“우리 집에서?”

공작저에서 열렸던 마지막 파티는 아셀라가 공작 위를 받을 때 열린 작은 파티였다.

“그래, 그간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런 건 열어 봤자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레슬리의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매일같이는 아니더라도 가끔 열어서 몇몇 손님만 초대하면 괜찮은 파티가 될 것 같았다. 바타도 제 솜씨를 자랑할 수 있어 좋아할 것이고, 쓰지도 않는 홀을 매일 쓸고 닦던 하녀들도 기뻐할 것이다. 손님을 몇 명 초대하지 않을 테니 제나는 한 명 한 명의 취향에 맞춰 꼼꼼하게 파티를 준비하겠지.

“저택에서 레슬리 데뷔탕트를 치러도 괜찮겠어.”

사이레인은 자신 몰래 한다고 준비하는 ‘레슬리 거리’에 정말 축제를 열어도 괜찮을 것이다.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아이니까 불꽃놀이도 좋아하겠지.

에펜타니 백작에게 듣자 하니 에펜타니 영지에서는 축제가 있으면 등을 날린다고 들었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에펜타니 영지의 장인들을 불러다 수도를 가득 메울 정도로 등을 날려 봐야지.

틸레이얼 부인에게서 솜사탕을 대량으로 가져와 색색의 솜사탕을 쥐여 주면 좋아서 눈물을 글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든 다 해 줄 수 있다는 게 기쁘네.”

레슬리의 은빛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리는 제 아내님을 보며 사이레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공작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사이.”

“응?”

“내 동상은 안 돼. 거리는 더더욱 안 되고. 레슬리 걸로만 채워.”

“…….”

‘레슬리 거리’ 뒤에 두 아들놈과 상의 후 ‘멋진 아셀라 거리’를 만들려던 사이레인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 자신의 남편을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래저래, 귀여운 남편이었다.

***

루엔티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루엔티는 레슬리와 셀리스가 추락했던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발밑에는 땅이 무너져 내리면서 만든 가파른 절벽이 있었고, 그 절벽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떨어졌단 말이지.’

갑자기 발밑이 붕괴하고, 물에 빠지고, 거기에 거대 늑대까지.

무서운 게 많은 아이인데. 귀신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커튼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만 봐도 작게 비명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오던 아이였다.

“아오.”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더 열 받는 것은 제 동생을 떨어트린 게 사고나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었다.

분명하게 남은 마법의 흔적. 알 수 없는 마법사가 레슬리를 노리고 정확히 이리로 두 사람을 몬 후에 발밑을 무너트린 것이다.

두고 보라지. 이딴 일을 벌인 놈들은 곱게 안 죽일 테니까. 마침 심증이 가는 놈이 있었다.

루엔티는 작게 혀를 차며 안경을 벗고는 제 미간을 꾹 눌렀다.

“셀바토르.”

누군가 그를 불러 뒤를 돌아보니, 마법사의 저택에서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알빈이었다.

짙은 녹색 머리에 검은 눈의 알빈은 서글서글한 성격 덕에 루엔티의 성격을 잘 받아 내는 편이라 늘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전담하고는 했다. 하지만 사람 좋은 알빈 역시 이번 일에서만큼은 루엔티를 피하고 싶었다.

루엔티가 짜증을 꾹꾹 눌러 담은 표정으로 알빈을 바라보았다.

“왔냐. 늙은이들이 뭐래?”

“늙은이라니, 그래도 10인의 마법사이신데.”

알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흘렸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지금 전달받은 상황을 이 난폭한 놈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피해가 그나마 적을지 마구잡이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런 알빈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루엔티가 다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안 그래도 사이레인을 닮아 무서워 보이는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알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야, 알빈.”

“으, 으응?”

“말해.”

루엔티는 그런 알빈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했다. 아니, 그 전에 마법사의 저택에서 무슨 대답이 올지 알고 있는 듯했다. 알빈은 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번 일은……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답이 왔어.”

마법사의 저택은 루엔티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하필 신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어찌 보면 황실보다 더욱 손대기 어려운 곳.

거기다 마법사의 저택에 등록된 마법사가 아닌 자가 나타났다.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 귀족들의 비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비난을 죽이기 위해, 마법사의 저택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안전하게 돌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루엔티는 이를 갈았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일단 와서 기다리면 어떻게든 알아는 봐 준다고…….”

알빈은 말을 이어 하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암녹색 눈동자를 도무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알빈.”

루엔티는 마법사의 저택의 선택을 이해했다. 하지만 용납할 수는 없었다.

금방이라도 날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한 루엔티를 보며 알빈은 눈을 깜빡였다.

“가서 도움 필요 없다고 말해. 나는 단독으로 조사하고 범인을 잡을 테니까.”

“……!”

알빈의 눈동자가 커다래지더니 루엔티의 팔을 꽉 잡았다.

“미쳤냐! 저택의 결정에 거스르면 제명이야! 마법사의 위치를 잃는다고!”

안 된다고 연거푸 외치며 고개를 저은 알빈은 말을 이었다.

“너는 10인의 마법사고 셀바토르니 제명까지는 아니겠지만, 더는 공녀님의 일로 마법사의 저택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거야.”

“필요 없어.”

루엔티는 안경을 도로 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 범인을 찾아서 그놈을 이 절벽에서 떨어트린 후에 거대 늑대 앞에 놓아두는 거야. 아, 팔다리는 묶어서 말이야.”

계속 이어지는 루엔티의 말에 알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난 마법사의 방식이 아니라 셀바토르의 방식대로 움직인다. 마법사의 저택은 끼어들지 말라고 해.”

루엔티는 잡힌 팔을 빼내고는 신전으로 몸을 돌렸다. 범인의 윤곽도 잡았겠다, 바로 공작저로 돌아가 추격을 시작할 참이었다.

“맞다. 알빈.”

신전으로 향하던 걸음을 일순 멈춘 루엔티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서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알빈과 시선을 맞췄다.

“나 휴가 낸다.”

“……?”

알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0인의 마법사가 휴가를 낸다니, 선례가 없는 말이었다.

“그동안 네가 나 대신 10인의 마법사석에 앉아 있어. 겸사겸사 내 일도 좀 처리해 주고.”

“야, 이 미친놈아!”

금방 돌아올게. 루엔티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루엔티의 머릿속에 얼음 같은 눈동자를 가진, 고위 사제 데비엔이 떠오르고 있었다.

***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펜텔을 바라보았다.

“정말 가시는 거예요? 축제라도 보고 가시면 좋을 텐데…….”

제 짐을 꾸리던 테펜텔은 레슬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희 어머니가 다녀오라는데 어쩌겠니. 가야지.”

그 말에 레슬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테펜텔은 그런 레슬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축제가 시작하기 전에는 올 거야.”

“정말요?”

레슬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테펜텔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축제에 같이 참여해요, 테펜텔 님. 제가 길은 잘 모르는데 그래도 안내해 드릴게요.”

길은 모르지만 길을 안내해 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웃음보가 터진 테펜텔은 레슬리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딸도 이만큼 귀엽고 날 생각해 줬으면 좋겠네.”

장녀인 테펜텔의 딸은 베스라온과 비슷한 성격이었다. 문제는 세 아들놈들도 다 덤덤한 성격이라는 데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테펜텔은 레슬리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녀도 예전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용인들처럼 만년 귀여움 부족이었다.

꼭 끌어안은 채로 뺨을 비비자 레슬리가 테펜텔의 품 안에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오늘은 예전 이야길 다 해 주마.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종종 테펜텔은 레슬리와 놀아 준답시고 사이레인과 공작의 옛이야기를 해 주었다. 며칠 전에도 그 이야길 해 줬는데, 공작과 다녀올 곳을 이야기하고 짐을 정리하느라고 뒷이야기를 못 해 줬다.

“어머니가 칼 한 번 휘두르는 거로 오크를 전부 제압했다는 이야기까지 해 주셨어요!”

레슬리의 이야기에 테펜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 아셀라가 검을 들고 외쳤지. ‘여기 너희가 말하는 괴물이 왔다!’ 그러자 적들이 우왕좌왕하는데…….”

적들이 갑자기 나타난 공작 때문에 놀라 도망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재현해 주고 싶었던지, 테펜텔이 팔을 흔들었다. 순간 어깨 쪽의 큰 상처가 레슬리의 눈에 들어왔다.

아롬벨은 르카디우스 제국보다 훨씬 더운 나라라, 테펜텔은 공작저에서도 어깨선을 조금 넘는 길이의 소매 옷을 입고 다녔다. 그 때문에 지금처럼 팔을 격하게 움직이면 왼쪽 어깨에 상처가 드러나곤 했다.

상처투성이인 테펜텔의 몸에서도 꽤 심각해 보이는 상처에 레슬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테펜텔 님, 그 어깨랑 목의 상처는 혼란의 시대 때 입으신 건가요?”

레슬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테펜텔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다 혼란의 시대 때 얻은 상처들이지.”

테펜텔은 제 목에 난 상처를 매만졌다.

“이걸 입었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아셀라가 도와줘서 살았지. 이 상처를 낸 놈은…….”

테펜텔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레슬리는 테펜텔의 표정에서 상처를 입힌 사람의 최후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럼 이 상처는요?”

왼쪽 어깨에 난 상처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조금 더 상처가 깊었으면 팔을 잃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 상처를 입힌 놈은…… 저기 있네.”

테펜텔이 갑자기 문 쪽을 가리켰다. 덥다고 열어 둔 문밖으로 커다란 빵을 입에 문 사이레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두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사이레인은 영문도 모르고 멈춰서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레슬리의 눈동자 역시 커다래졌다.

“아, 아버지가 이 상처를 입히신 거예요?”

“그래, 얼마나 아팠던지. 팔을 못 쓰는 줄 알았다니까. 사제가 치료해 줬는데도 이런 흉터가 남았지.”

두 사람의 대화로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간 것인지 사이레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어디에도 다급하다거나 미안하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야, 그때는 서로 적이었으니까.”

테펜텔은 비록 사이레인이나 셀바토르 공작만큼 힘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정확도가 무서울 정도였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사이레인이 크게 다쳤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모르는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끼리 싸우는 건 안 돼요!”

적이어서 서로 검을 겨눴다는 걸 이해는 해도 완전히 인정한 건 아닌 듯 보였다. 잠시 그런 레슬리와 사이레인을 바라보던 테펜텔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고 그녀는 갑자기 제 왼쪽 어깨를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윽!”

“테펜텔 님!”

놀란 레슬리가 달려가자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땀을 흘리는 테펜텔이 입술을 깨물며 애써 웃어 보였다.

“괘, 괜찮아……. 간간이 이렇게 아프거든. 하지만 정말 괜찮단다.”

그러나 땀범벅이 된 얼굴과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레슬리의 눈이 좌우로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오래된 상처가 아플 수 있는 건가?’

잠깐 이성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내 혼란이 다시 찾아왔다. 자신도 엘리 때문에 입은 아주 작은 상처가 이따금 아프지 않았던가. 사제에게 치료받고 이젠 그 흔적조차 없어졌다지만, 테펜텔은 전혀 다를 것이다.

거기다 저 상처는 다른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인 사이레인이 입힌 상처였다. 자물쇠를 뜯고 방에서 튀어나오던 아버지가 떠올라 레슬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어디론가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뒤로 테펜텔의 웃음소리와 다급하게 레슬리를 부르는 사이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레슬리는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가씨?”

놀란 사용인들이 레슬리를 불렀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레슬리는 날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레슬리가 달려간 곳은 1층, 자일로의 방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주치의 자일로는 한 기사의 상처에 느긋하게 약을 바르다가 레슬리가 갑자기 문을 확 여는 바람에 놀라 괴상한 비명과 함께 약통을 쏟았다.

“흐어억!”

“끄악!”

그리고 그 뒤를 고통스러운 비명이 뒤따랐다. 하필이면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던지라 약은 기사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졌고, 기사는 다량의 붉은 약을 상처에 뒤집어쓰고 괴로움에 발버둥 쳤다.

“미, 미안해요, 경. 진짜 미안해요. 자일로 좀 데려갈게요.”

레슬리는 그런 기사에게 작게 사과하면서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자일로의 손을 덥석 잡고 이끌었다.

“자일로 어서, 어서.”

“아가씨, 제가 이제 예순이 넘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디 부탁드리니 조금만 천천히 가 주십시오.”

자일로는 무릎을 부여잡고 싶었다. 레슬리는 나름 속도를 늦췄지만, 그래도 마음이 다급했다.

“테펜텔 님이 아프시다고 해서요, 자일로.”

“……테펜텔 님이요?”

자일로는 오늘 아침에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대련을 한답시고 몇 명을 둘러메고 던져 버리던 테펜텔을 떠올렸다. 거기다 자일로는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덕에 테펜텔의 무용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테펜텔이 아프다니, 사이레인이 감기에 걸렸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응, 많이 아프시대.”

하지만 레슬리의 다급한 얼굴을 보니 안 갈 수도 없어 무릎을 붙잡으면서 끌려갔다. 반드시 올해 안에 은퇴하고 말겠다는 작고도 원대한 소망을 되새기며 자일로는 테펠텔과 사이레인이 있는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바닥을 구른 듯 보이는 테펜텔과 그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사이레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하.’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첫 번째로 연륜이 높은 자일로는 잽싸게 현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테펜텔 앞에 주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처입니까?”

아직도 웃음이 가시지 않는 테펜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여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듯 보였다.

“괜찮으실까?”

뒤에서 레슬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자일로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프셨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셀바토르가의 명의! 저 자일로가 있으니 아가씨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일로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레슬리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1층 자신의 방에 다시 다녀온 자일로는 웃으며 테펜텔에게 물약 통을 내밀었다. 물약 통을 받아 든 테펜텔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드십시오.”

테펜텔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편식 따윈 없고 어떤 약도 잘 먹는다고 자부하던 테펜텔이었지만, 도무지 이것만큼은 먹을 수가 없었다. 피하고 싶은 걸쭉한 보라색도 색이지만.

“냄새…….”

걸레에 우유를 붓고 축축한 곳에 한 달 동안 썩히면 이런 냄새가 날까. 이런 냄새가 어떻게 사람이 만든 약에서 나는 걸까, 저절로 고민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레슬리와 사이레인은 냄새를 피해 저 뒤로 도망친 지 오래였다.

“괜찮…….”

“드셔야 합니다!”

자일로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드셔야 어깨의 고통이 사라질 겁니다.”

“어서 드세요, 테펜텔 님!”

사이레인 뒤에서 코를 막은 레슬리마저 응원하자, 테펜텔은 절망적인 얼굴로 물약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사이레인이 웃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하하하…….”

테펜텔은 물약을 내던지고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레슬리가 너무도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리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테펜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저 눈동자를 배신할 수 없어 테펜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죽기야 하겠어?’

그래, 혼란의 시대 때 몇 번의 사선을 넘어온 자신이었다. 몸에 난 상처의 수는 그대로 그녀가 고비에서 살아남은 기록이었다. 용기를 낸 테펜텔은 물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테펜텔은 나흘 후 출발 직전까지, 아니 에펜타니 영토에 내려가서까지 입에서 물약 냄새가 나는 새로운 경험을 겪었다.

***

‘이건가.’

베스라온은 지금 황실 서고 깊숙한 곳에서 책을 하나 찾고 있었다. 황제의 허락에, 린체 기사단장이라는 위치에, 셀바토르 공작가의 힘까지 이용해 간신히 문을 열게 한 서고에는 먼지로 가득한 책들이 수만 권 넘게 쌓여 있었다.

현 황제에 대한 기록이 있어 정해진 때가 아니면 문을 열지 않는다는 서고에는 너무 쓸데없는 사담이 많이 적힌 기록이 있었다. 만일 사담을 조금만 줄였다면 지금 이 서고에 있는 기록 중 3분의 1이 줄었을 거라고 확신하며, 베스라온은 손을 놀렸다.

마치 누군가가 일기를 써서 서고에 박아 둔 것 같은 책들 사이에서 베스라온은 하나의 문장을 찾아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몇몇 가문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뛰어난 힘을 가진 것이 셀바토르 가문이다. 괴물 같은 힘과 마력을 타고난 셀바토르가에서는 종종 마검사가 태어났고…….]

특별한 힘을 가진 가문의 기록. 베스라온은 한 장 더 넘겼다.

[스페라도 가문 역시 주목할 만한 가문이다. 어둠은 그만큼 무섭고, 강력하다. 소리 소문 없이 뭐든 먹어 치우는 힘. 실체가 없는 것조차 먹어 치울 수 있지 않을까.

어린아이들이 종종 죽어 나가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힘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사망하는 듯하다.]

‘……이때도 철저하게 더러운 짓을 숨기고 있었군.’

베스라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책을 넘기다 그만 읽고 있던 페이지를 찢어 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베스라온이 찢어진 장과 책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이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책에 붙어 있었더라면 안쪽 부분이라 몰랐을 곳에 작은 낙서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이것까지 적으면 분명 혼나겠지. 그렇지만 모든 특이한 힘에 대해 기록하고 싶은걸. 그러니 안쪽에 적는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어!]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는 기록가였던 모양이었다. 베스라온은 눈을 찡그리다가 이번엔 주저 없이 다음 장을 찢었다. 그러자 역시 안쪽에 숨어 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르카디우스 제국의 가문은 아니지만, 신력과 마력을 같이 가지고 태어나는 특이한 일족이 있다. 그런데 곧 멸족하지 않을까.

그 일족은 안타까울 정도로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다. 신력과 마력, 반발하는 두 힘을 같이 타고나기 때문이겠지.

길어 봤자 몇백 년을 간신히 버틸 것이다. 한 일족이 사라지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마력과 신력.”

베스라온의 머릿속에는 4년 전, 한 고위 사제의 손을 잡고 괴로워하던 제 여동생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음같이 차갑던, 그 한 쌍의 눈동자도.

***

몇 시나 됐을까. 잠에서 깨어난 레슬리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고 두어 번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커튼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어두운 방과 비교되어 너무도 밝아 보였다.

레슬리의 머리맡에서 셀리스가 선물해 준 향주머니가 흔들거렸다. 슈에나라는 약초를 말려 만든 향주머니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테펜텔 님은 저 약초를 가지러 가신 거였지.’

셀리스도 왜 굳이 셀바토르 공작이 그 약초를 원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하는 일이니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졸음이 가득한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자,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저 멀리서 기사들의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밥부터 먹을까.’

레슬리는 살짝 입맛을 다시며 설렁줄을 잡았다가 도로 놓았다. 줄을 당겨 마델을 부르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마델이라면 괜찮다고 말하며 바로 식사를 준비해 주겠지만, 레슬리는 마델과 같은 방을 쓰는 서올리가 은근히 잠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방으로 가자.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레슬리는 슬리퍼를 신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분명 바타와 주방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있겠지. 지금 가면 아마도 갓 구운 빵과 지금 바타가 만든 수프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저번에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 주방에서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오븐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빵을 조심스레 입에 넣었을 때, 얼마나 맛있었던가. 그때 생각을 하자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그렇게 음식을 먹으러 주방으로 온 건데, 예상치 못한 사람이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루엔티 오라버니!”

언제 돌아오신 거지? 음식 대신 루엔티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밤새 달려 저택에 온 건지 두 눈이 퀭해 보이는 루엔티 앞에는 접시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가씨, 식사하러 오신 겁니까?”

바타는 레슬리가 주방까지 와서 식사하는 건 오랜만이라며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자리까지 빼 주었다.

“오라버니, 언제 오신 거예요?”

“도착은 어젯밤에?”

바타가 빼 준 의자에 앉으며 레슬리가 묻자, 루엔티는 빵 하나를 입에 욱여넣으며 말을 이었다.

“장돼써. 할 망이…….”

루엔티는 빵 하나를 욱여넣은 상태에서 하나를 더 넣으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목소리를 내는 걸 멈추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빵 두 개를 꿀꺽 삼키더니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닦으며 바타를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위에 가서 먹을 거야. 간단하게 차려 줘.”

루엔티의 말에 바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주방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아침에 먹으러 올게요.”

“아닙니다, 아가씨. 이 시간에는 주무셔야지요.”

바타는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며 빠르게 손을 놀려 푸짐한 상을 차려 내었다. 식욕을 돋워 줄 샐러드와 바삭한 빵, 그리고 버터와 각종 잼에 지금 막 구워 냈는지 아직도 자글자글 기름이 튀는 소시지까지 놓여 있었다.

맛있겠다. 레슬리의 눈이 반짝이고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루엔티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빵을 입에 욱여넣더니 레슬리의 쟁반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간 곳은 루엔티의 개인 서재였다.

“일단 이건 나중에 먹자.”

분명 속이 안 좋아질 테니까. 루엔티는 덤덤하게 제가 들고 온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음식은 따듯할 때 먹어야 한다며, 레슬리에게 먹이는 걸 늘 우선순위로 하는 그답지 않았다. 무슨 일인 걸까.

“네, 오라버니.”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엔티는 레모네이드만 레슬리의 앞에 내려 두고 쟁반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리고 쟁반 대신 레슬리의 앞에 놓인 건 여러 장의 종이였다. 고어가 읽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 써진 종이를 레슬리는 습관적으로 읽어 내려가다가 굳어 버렸다.

“오라버니, 이게 뭐예요……?”

스페라도가의 실험 기록.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오늘의 실험은 익사. 과연 얼마나 되는 힘이 형제에게 갈까.]

[제물의 불은 아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커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죽은 아이는 ……스페라도. 생각보다 많은 힘을 제 형제에게 넘겨 줘, 기특해 이름을 적어 보았다.]

[쌍둥이의 경우, 각각 다른 수치의 힘을 전해 주었다. 쌍둥이라고 완벽히 똑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둘째와 셋째를 넣어 보았다. 확실히, 셋째가 효율이 높지 않다.]

[특이하게도 이번엔 둘째가 밀색 머리에 녹빛 눈을 타고났다. 이번엔 장녀를 불에 넣어 보았다. 첫째라 해서 다른 때와 특이한 점은 없었다.]

“우욱!”

레슬리는 몇 번 더 읽다가 그대로 헛구역질을 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괴로움에 머리가 핑 돌았다.

“괜찮아?”

루엔티는 덤덤하게 레슬리의 등을 두드려 주며 반쯤 남은 레모네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

“토하지 마. 더 읽어야 하니까.”

그러면서 루엔티는 뭔가를 찾듯 종이를 뒤적거렸다.

“……오라버니, 이게 뭐예요?”

여전히 눈물이 맺힌 레슬리가 루엔티에게 묻자, 루엔티는 여전히 기록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스페라도 후작가에 사람을 심어 두었어. 그리고 후작이 비밀 장소에 숨겨 놓은 수첩을 발견했다고 연락이 왔고……. 어젯밤 내가 저택으로 돌아오며 베껴 낸 기록을 받았지. 그리고 밤새 암호문을 해독한 거야.”

실수로 섞였다며 루엔티는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거기에는 식자재 주문 목록이 적혀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과 부딪친 하녀가 보내온 것이었다.

“그, 그런…….”

“레슬리 너는 다른 게 아니라 이걸 봐야 해.”

그러면서 루엔티는 레슬리의 앞에 세 장의 종이를 내려놓았다.

“오른쪽부터 읽어 봐.”

레슬리는 울렁거리는 속을 레모네이드로 달래며 맨 오른쪽 것을 읽어 보았다.

[은발의 아이가 10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밀색 머리의 아이가 받는 힘은 고작 8 정도. 2의 힘은 어디로 갔을까?]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레슬리는 간신히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할 수 없이 사슬을 만들었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둠을 통제할 수 있는 사슬. 이걸 몸에 감아 두면 어둠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 후…….]

사슬의 이야기는 이미 레슬리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크게 울렁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라니?’

레슬리가 인상을 찡그리자 맞은편에 있던 루엔티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 기록을 너에게 보여 주는 이유는 누구보다 이 당사자가 너라는 점 때문이야. 그리고 심어 놓은 자에게 듣기로는 이 기록은 이미 메데이아에게 넘어갔어.”

그 말은 태후 역시 레슬리의 힘을 다루는 사슬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후작은 사슬조차 태후에게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거.”

루엔티는 손가락으로 단 한 문장만 쓰여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나는 이자들의 실수가 은발의 아이가 사실은 힘의 적격자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은발 아이들이 원래 힘의 적격자였다구요?”

“그래. 아직까지는 가설이야. 하지만 나는 꽤 괜찮은 가설이라고 생각해.”

루엔티는 몇 장의 종이를 레슬리 앞으로 더 내밀며 물었다.

“후작은 어떤 사람이지?”

“네?”

“책을 자주 읽나? 읽으면 꼼꼼히 읽거나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편이야? 아니면 고어는 잘해?”

갑자기 후작은 왜 물어보는 걸까. 레슬리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후작은 고어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에요.”

간단한 문장 하나를 잡고 끙끙거리는 후작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는 고어 해독서에는 손도 대지 않았겠지. 물론 아카데미에서도 고어를 잘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책도 읽지 않는 편이었어요.”

그가 읽는 거라고는 간단한 서류 몇 장 그리고 새로운 사치품들이 가득 그려져 있는 카탈로그가 전부였다. 후작의 개인 서재에는 값비싼 책부터 구하기 힘든 고어까지 수많은 책이 있었지만, 후작은 그중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걸 레슬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그 서재에 손님을 초대해 읽지도 않는 책들을 자랑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손님이 책에 대해 질문이라도 하면 슬며시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려 버렸다.

루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를 읽어 보라는 듯 툭툭 두드렸다.

[왜 요즘은 제물이 될 은색 머리 아이들보다 밀색 머리 아이들이 더 많이 태어나는지 모르겠다. 밀색 머리 아이가 태어나면 그 뒤로 은색 머리 아이가 태어나는 게 아니었나?]

[몇 대를 이어 기록을 해 왔지만, 이제 더 이상 기록을 이어 갈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밀색 머리 아이도 태어나지 않고, 은색 머리 아이는 더더욱 태어나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가 뭘 놓친 걸까.]

[왜 멍청한 것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을까. 이 이상 어둠의 힘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아 가문이 망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의 눈을 가렸다.]

레슬리가 종이를 다 읽자, 루엔티는 슬그머니 한 장을 더 했다. 실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종이였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황실에는 초대 가문의 수장들 초상화가 걸린 곳이 있어.”

루엔티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레슬리는 4년 전, 베스라온과 린체 기사단에 놀러 갔을 때 봤던, 초상화로 가득했던 복도를 떠올렸다. 갑자기 엘리가 나타는 바람에 안쪽은 구경하지 못했었지. 그럼 그 안쪽에 초상화들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거기에는 초대 스페라도 후작의 초상화는 없지.”

이어지는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신 3대째 스페라도 후작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그의 머리색은 밀색이야. 그리고 그거 알아, 레슬리? 언어는 변하지. 그건 고어도 마찬가지야.”

레슬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어라고 크게 잡고 있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크게는 10가지로 나뉘는 게 고어였다.

르카디우스 제국이 막 생겨났을 때 쓰던 언어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쓰였던 언어…… 조금씩 다 차이가 났다.

“언어는 역사를 따라가고, 변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되지.”

루엔티는 한 장을 손으로 쿡 집었다. 대충 읽어 보니 이제 실험이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이게 첫 장이야. 그리고 여기 써진 걸 해석해 보면 대충 르카디우스 제국이 막 생겼을 때 쓰던 언어는 아니야. 2대 르카디우스 황제가 한 일 중 가장 찬양받는 업적을 기억하고 있지?”

“어, 언어 체계를 정비화…….”

그전까지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여러 가지 언어가 오고 갔고, 언어의 차이는 큰 불편함과 혼란을 가져왔다. 그걸 보고 있던 2대는 황좌에 오름과 동시에 황자 시절부터 준비해 오던 일을 시행했다. 언어를 하나로 정비하고 체계화시켰다.

“정답. 첫 장에는 2대 르카디우스 황제가 체계화한 고어의 특징이 보이고 있어.”

없어진 초대와 2대째의 스페라도 후작의 초상화, 그리고 2대 황제가 정비한 언어를 사용한 기록. 영특한 제 동생은 빠르게 사실을 알아챘다. 루엔티는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설마 초대가 은색 머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인가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루엔티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무언가가 세워지고 난 직후는 가장 불안하고 가장 위태하지. 실제로도 초대와 2대째의 피가 다른 가문들도 많아. 일단 생각나는 가문만 해도 라레로스가, 케이틀가 그리고 음, 또…… 하여튼 몇 가문이 더 있지.”

루엔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가문의 이름을 기억하고 신경을 쓰는 건 그의 성격에 맞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확신할 수는 없어. 원본을 암호화하고 또 그걸 해석한 거니까. 정확한 건 원본이 필요해.”

“그럼…….”

“이번엔 힘들겠지만, 원본을 가져오라고 했어. 그걸 분석해 보면 더 정확한 답이 나오겠지. 어쨌거나 레슬리.”

루엔티가 안경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뜬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힘의 정당한 후계는 너일지도 몰라. 그걸 염두에 두고 있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레슬리의 앞에 접시를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너도 짐작하다시피 네가 강에 떨어진 원인은 산사태 따위가 아니야. 그건 누군가가 개입한 일이지.”

자, 그럼 식사하자. 루엔티는 수저까지 완벽하게 레슬리 앞에 올려두고 잠시 눈을 찡그렸다. 음식들이 전부 식어 버렸다. 잠시 식은 수프와 딱딱해진 빵, 그리고 반쯤 녹아 버린 레모네이드를 바라보던 루엔티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바타에게 말해서 새걸 가져오는 게 낫겠다.”

그치?

***

머리가 복잡했다. 레슬리는 지금 가문의 인장도 없는 갈색 마차를 타고 거리로 꽃을 사러 가고 있었다. 어머니 방과 아버지의 방을 꾸밀 꽃을 사겠다는 건 사실상 핑계고, 답답함에 거리 구경을 나온 것이다. 하지만 되레 답답함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편한 자줏빛 원피스를 입은 레슬리의 눈가가 점점 가늘어졌다. 아침에 있었던 루엔티와의 대화에 속이 어지러워 어서 마차에서 내리고 싶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마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소 경.”

결국 마차 창문을 열어 호위로 따라 나온 레소를 불렀다. 단발이었던 머리를 길러 이제 하나로 묶고 다니는 레소가 말을 몰고 조금 더 마차 가까이 다가왔다.

“네, 아가씨.”

“오늘 무슨 일이 있어? 마차가 전혀 움직이질 않아서.”

“사고가 난 듯하더군요. 알아보고 올까요?”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몰아 먼저 앞으로 나가더니 금방 되돌아왔다. 레소가 난처한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축제 준비로 세워 둔 간이 상점이 쓰러지는 바람에 길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치우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네요.”

축제 때문에 늘어난 인파에 거대한 마차, 그리고 쓰러진 간이 상점들.

레슬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찡그리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판도 제대로 밟지 않고 그대로 폴짝 뛰어내리고는 마부를 바라보았다.

“상점가까지 그냥 걸어갈래.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어. 레소 경이 같이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걱정 말라고 전해 주고.”

그 말에 마부는 레소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레소는 바로 말에서 내리고는 마부에게 맡겼다.

마차와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어떻게 돌아갈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레슬리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축제 때문에 인파가 많아지고 있었다.

“저번보다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네요. 오늘 편한 복장을 하고 온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소는 주변을 경계하며 말을 꺼냈다. 셀바토르 기사단복은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레소는 다리에 붙는 검은 바지에 가죽으로 만든 조끼, 셔츠에 검을 맨 모습이었다.

레슬리 역시 드레스가 아니라 평범한 원피스에 작은 보닛으로 은발을 가린 상태였다. 그 위에 얇은 보랏빛 망토까지 입고 있었다. 중요한 의식이 코앞인데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된다며 제나가 레슬리를 붙잡고 입힌 것이었다.

두 사람이 평범한 복장을 고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라벨라가 되면서 높아진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의 인기도 한몫했지만, 공작가에서 레슬리에게 아낌없이 돈을 쓴 것도 컸다.

그 혜택은 가장 가까이 있는 상점가로 돌아갔다. 얼마 전엔 이상한 거리를 만든다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지 않았던가. 덕분에 저번 레슬리가 상점가를 구경나왔을 때, 몰려든 사람들로 한바탕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한 레슬리와 레소는 나름 평범한 복장으로 거리로 나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가문의 복장으로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게. 의식을 연습하러 나왔을 때보다 더 사람이 몰린 것 같아.”

레슬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총 두 번. 레슬리는 아라벨라가 되어 에피알테스를 봉인하는 의식을 시연했다. 실제로 에피알테스가 있는 방은 열리지 않았고, 그 앞에서만 이루어졌다.

양옆으로 선 최초의 사제들과 가운데에 있는 아라벨라, 검고 육중한 문과 화려하게 그려진 금빛 문양.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에피알테스.

메데이아가 노리는 것이자 공작이 막고 싶어 하는 것. 그 두 사람의 대리는 엘리와 그녀였다.

의식을 연습하는 레슬리의 눈은 계속 문에 닿아 있었다.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었다. 저 문을 여느니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게 더 빠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 의식을 떠올리다 보니, 이내 레소가 말한 쓰러진 간이 상점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어쩌다가 이렇게 쓰러진 것인지, 나무로 만든 간이 상점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나무 파편이 맞은편 골목 안까지 튀어 있었다. 사제도 와 있었고,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원에 상점의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까지 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왜 이렇게 된 거야? 누구 다쳤대?”

“낡아서 그랬나 봐. 누가 다친 건 아니래. 주변을 돌아다니던 사제가 혹시 몰라 왔나 봐.”

거기다 구경꾼들로 거리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이라는 걸 밝히기만 하면 인파가 반으로 나뉘겠지만, 괜히 소란을 일으켜 더 혼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레슬리는 그냥 사람들 틈 사이를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이거구나.”

한참 사람들 사이를 나아가다 보니 쓰러진 가게가 나타났고 레소가 쓰러진 가게를 살피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아, 저 여기 아는 곳이에요. 이 집 꼬치구이가 정말 맛있는데. 축제 때만 꼬치구이를 팔아서 저는 솔직히 축제보다 여기 꼬치구이를 더 기다렸는데.”

정말 좋아하는지 레소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레소를 바라보는 레슬리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에,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를 사람. 그 두 명이 레슬리처럼 인파에 섞여 이번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왜 저분들이 여기에?’

레슬리가 잠시 눈을 깜박이는 사이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시야가 가려졌다. 다시 시야가 트였을 때,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서서 쓰러진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잘못 본 걸까.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하거든요. 말해 줘야겠네.”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해?”

레슬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다시 레소의 말에 집중했다.

“네, 큰 도련님도 은근 좋아하세요. 사이레인 님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는?”

“공작님은…… 잘 모르겠네요.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드시는 분이라.”

아닌데. 어머니는 은근히 차가운 음식이나 마른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기도 좋아했지만 해산물도 그 못지않게 좋아했고, 수프는 칠리 수프를 가장 좋아하셨으며 후식으로는 입을 상큼하게 해 주는 걸 좋아하셨다. 레소는 같이 밥을 먹지 않으니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레슬리가 웃자, 레소는 아가씨 기분이 나아져서 다행이라며 같이 웃었다.

“꼬치구이 집은 문제없지 않을까?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니까.”

“그렇겠지요? 기대하던 곳인데, 이번에 문을 열지 못하면 슬플 거예요.”

레소가 조금 과장된 표정으로 눈물을 닦는 척했다. 그 모습에 다시 레슬리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맛있어?”

“저 가게 꼬치구이를 한 번 먹으면 다른 가게 걸 먹질 못해요. 꿈에서도 나올 정도라니까요.”

“정말?”

“네, 바타 님도 한번 드셔 보시고 정말 놀라신 듯했어요.”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바타가 그렇게 놀란 걸까. 궁금하다며 말을 잇는 레슬리의 눈에 또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고, 그녀는 곧 걸음을 멈추었다. 역시 아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아가씨?”

레슬리가 뚫어져라 한곳을 바라보자, 레소 역시 자연스레 레슬리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아는 분이신가요?”

금빛 머리의 소년과 보닛을 써 잘 보이지는 않지만 다갈색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가게가 쓰러진 걸 구경 나온 듯 끝자락에 서서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응, 안다기보다는…… 안면이 있어. 시누스턴 신전에서 같이 시험을 치른 분들이야.”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신 걸까. 분명 후보 시험에서는 탈락하셨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두 사람을 기억한 이유는 레슬리가 발견한 게 있기 때문이다.

시누스턴 신전에서 후보가 정해진 그날 밤, 두 사람이 신전 벽에 붙어 눈물을 흘리는 걸 목격했었다. 달래 줘야 할지, 괜찮냐고 손수건을 내밀며 물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었다.

“축제를 구경하시려고 남으신 게 아닐까요?”

레소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탈락해서 빈정 상해 영지로 돌아가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남아서 구경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가.”

몇몇 분이 최초의 사제가 되지 못한 것에 축제도 포기하고 영지로 돌아갔다는 소리를 들어서, 자연적으로 두 사람도 돌아갔겠거니 생각했었다. 하긴, 축제를 보기 위해서 남은 걸 수도 있겠지.

레슬리가 납득하는 사이, 두 사람은 구경을 포기한 듯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다 구경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밀려, 둘은 오히려 레슬리와 가까워졌다.

레슬리는 입고 있는 망토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 후보에서 떨어져 구슬프게 울던 두 사람에게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잘 몰랐다.

“역시 수도는 사람이 많네요.”

바로 레슬리 근처까지 떠밀려 온 소녀가 풀린 리본 끈을 꼭 쥐고 말을 이었다.

“이래서 사제님이 될 수 있으면 신전에 있으라고 한 걸까.”

소녀와 마찬가지로 간신히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금발의 소년도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조금 더 레슬리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인파가 몰려 있던 탓에,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의 복장이 눈에 띄지 않는 덕에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듯 보였다.

“혹여나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요. 우리도 아라벨라님과 의식을 도와야 하잖아요.”

‘응?’

레슬리는 혹여나 망토가 벗겨질까, 망토 자락을 꽉 잡고 있다가 눈을 깜빡였다.

아라벨라? 그건 자신인데, 왜 여기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 그리고 의식을 돕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혹시 의식에 저 두 분들도 나오나요?”

레소가 작게 묻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연습을 두 번 했을 뿐이지만, 저 둘은 본 적이 없었다.

레소와 레슬리는 거의 동시에 두 사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왁자지껄한 소음 사이에서 두 명의 대화가 작게 들려왔다.

“이번 일이 잘돼서 다음 번 최초의 사제로 추천이 된다면, 분명 우리 가문에도 빛이 돌아올 거예요.”

소년은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헝클어진 다갈색 머리를 매만지며, 소녀가 대화를 이었다.

“아라벨라가 되셔야지요! 다음 아라벨라는 남성, 맞죠?”

“하지만 제가 아라벨라까지 될 수 있을지…….”

“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분도 아니라 태후 폐하의 추천이잖아요. 거기다 듣기로는 태후 폐하가 아렌도 황자님을 그렇게 아낀대요. 그러니 황자님이 황제가 되시면 분명 황태후 폐하의 힘이 더 강해지실 거예요.”

자신들은 괜찮은 줄을 잡은 거라며 소녀가 외쳤다. 아무리 황후가 아렌도를 아꼈어도 황위에 오른 그가 메데이아를 내팽개칠지도 모르는데, 소년과 소녀는 계속 희망을 이야기하며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레소, 따라가자!”

레슬리가 레소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라벨라 이야기와 의식 이야기까지 나온 것만 해도 수상한데, 메데이아까지 나왔다. 이건 확인이 필요했다.

“레소.”

하지만 레소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곤란한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레슬리는 레소의 손을 잡은 채,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항상 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기만 했다. 그러니 이번엔 우리가 뒤통수를 쳐 줘도 괜찮지 않을까.

“위험하지 않은 곳까지만. 어차피 여기는 수도잖아.”

무엇보다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위력을 떨치는 건 셀바토르 공작가였다.

공작가가 운영하는 사업과 가게들, 마법사의 저택에서 나오는 물품들을 파는 가게들, 거기다 얼마 전 선물이라고 받은 레슬리 소유의 디저트집까지.

한 거리에 있는 모든 가게와 집들이 공작저의 소유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그 덕에 레슬리는 한두 명의 호위만 데리고도 수도의 거리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렇지만…….”

레소가 말끝을 흐렸다. 레슬리가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에게는 레슬리는 한없이 약하고 보호해야 할 존재였다. 그리고 레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레슬리의 안전이었다.

레소의 마음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닌가. 답답한 마음에 레슬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올려다보았다.

“가자, 응? 매번 저쪽 뜻대로 흔들리는 것 같아 싫단 말이야.”

“으음…….”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레소가 같이 있는데 내가 뭐가 두렵겠어. 안 그래? 레소는 우리 셀바토르 공작가 기사단에서 최강이잖아!”

레슬리가 열렬하게 레소를 치켜세우자, 레소가 머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홀라당 넘어가는 반트 놈이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소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레슬리가 두 사람을 눈으로 쫓는 사이, 레소는 몸을 돌려 지나가는 한 상인을 잡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문양은 셀바로트 공작가가 운영하는 가게 문양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 제나 집사님께 란다 꽃의 뿌리를 쫓는다고 전보를 보내.”

슬쩍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 패를 보여 주며 말하자, 상인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갈까요, 아가씨?”

레소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레슬리는 뛰었다. 작은 몸을 요리조리 움직여 인파를 벗어났다. 뒤에서 레소가 작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레소는 기사단에서 가장 달리기가 빠른 사람이니 금방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이미 골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찾았다!’

다행인지 금방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주변을 구경하며 대화를 나누느라고 걸음이 늦춰진 모양이었다.

“아가씨.”

인파를 벗어나자마자 레슬리의 생각대로 순식간에 잡혔다. 레소는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레소를 보며 작게 웃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최초의 사제가 돼서 황실에서 보상금을 받아도, 절대 제 동생 결혼 자금으로 쓰지는 않겠어요.”

다갈색 머리의 소녀가 야무지게 외쳤다.

“저는 장사를 해 볼 거예요. 반드시 우리 영지를 가장 부유한 곳으로…….”

“두 분.”

들뜬 소년과 소녀의 대화를 자른 건 차가운 목소리였다.

“도대체 밖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

“이, 이피엘 님.”

망토를 쓴 여자는 메데이아의 수석시녀 이피엘이었다. 골목 안쪽에서 나타난 이피엘은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수도는 위험하니 돌아다니실 때는 반드시 호위를 데리고 다니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피엘에게 두 사람은 기가 눌린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호위라는 분들은 조금 이상해요. 어느 가문의 기사님이신지도 모르겠고, 황실 기사단인 린체의 기사단은 더더욱 아니고…….”

소녀가 작은 반항을 해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이피엘의 시선 한 번에 소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고, 이어지는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 지금 의식을 돕기 싫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영지로 내려가시지요. 거기까지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두 분.”

이피엘은 어서 가라는 듯 골목 끝을 가리켰다. 그러자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방으로 돌아가시길. 그리고 제가 말할 때 외에는 외출은 금지입니다.”

아무리 메데이아의 시녀라지만, 그녀가 두 사람을 이렇게 억압할 수는 없었다.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 만한 상황이었지만, 어린 두 사람은 이피엘에게 기가 눌린 듯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가는 걸 확인한 이피엘은 레슬리와 레소가 숨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위험……!’

레소는 레슬리를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잡았다.

다행히도 레소가 검을 쓸 일은 없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우락부락한 남자가 이피엘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너!”

뒤이어 거친 목소리가 텅 빈 골목에 울려 퍼졌다. 이피엘은 갑자기 팔을 잡혀 놀란 듯했지만, 이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찡그렸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그녀가 아는 사람인 듯했다. 하지만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이피엘은 거칠게 팔을 빼내며 용건을 종용했다.

“무슨 용건인지 어서 이야기해.”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이미 이야기는 다 끝났을 텐데. 그러니 할 말 따윈 없어.”

이피엘은 반쯤 벗겨진 망토를 다시 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일을 못 하는 사람과는 더더욱.”

소녀와 소년이 호위를 따돌렸다더니, 그 호위가 저 남자였던 모양이었다. 일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남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더니 이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저딴 일은 내 일이 아니야! 저딴 애새끼들을 나에게 맡겨 놔? 나는 유모가 아니란 말이야.”

남자는 이피엘의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이피엘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가 전혀 무섭지 않다는 듯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고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이피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경악이 물든 건 바로 이어진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는! 대업을 위해서 너희 따위와 손을 잡은 거라고! 분명히 이 거대한 뿌리를 뒤흔들기 위해서 뭐든 하겠다고 했지만, 거기에 애새끼들을……!”

이피엘은 다급히 남자의 입을 막더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피엘의 얼굴에서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보자 남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오호, 이 말이 퍼질까 무서운 거로군. 하긴, 너나 네 주인이나 지은 죄가 크지.”

“그분을 모욕하지 마.”

이피엘은 낮게 읊조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혹여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아까처럼 목소리를 높이진 못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안에 들어가서 해.”

이피엘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남자는 기분 나쁘게 이죽거리기만 할 뿐 그녀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아니, 나는 여기서 하고 싶은데?”

“미쳤어?”

“뭐, 이 정도야. 우리에겐 늘 위험이 뒤따랐단 말씀. 우리가 어떤 역경을 헤쳐 왔는지 네가 알기나 해?”

“여기서 그딴 말을 너희도 하면 위험할 텐데?”

“뭐 어때! 아니면 오늘 밤 다 같이 술 한잔 하기로 했는데 거기서 같이 이야기할…….”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피엘은 손을 들어 그대로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이것이……!”

“들어가서 하든가. 아니면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든가.”

남자는 분한 듯 씩씩거리면서도 앞장서 걷는 이피엘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레슬리는 밖으로 나왔다.

‘우리라고 했었지.’

이피엘과 수상한 남자 그리고 어딘가 이상한 두 소년과 소녀. 레슬리는 네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이 가게가 통째로 무너지는 큰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두 사람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두 사람을 찾기 위해 이피엘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불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없었더라면 남자까지 이피엘을 따라 나오지 않았겠지.

우연과 우연이 겹친 일이었다. 레슬리는 그대로 두 사람을 따라 걸었다. 뒤에서 작게 한숨 쉰 레소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피엘과 남자는 소녀와 소년이 향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레슬리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피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도에 골목이 이렇게 많았던가.

두 사람은 길을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돌았던 곳을 한 번 더 돌고, 일부러 쓸데없이 다른 골목을 갔다가 다시 걷고…….

그렇게 복잡한 길을 들키지 않고 조심히 따라가려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중간마다 뒤를 돌아 레소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지만, 그것도 골목을 몇 개 지나고 나니 잊어버렸다.

어느새 주변 풍경이 바뀐 것도 모른 채, 이피엘의 뒷모습에 집중했다. 이피엘은 모퉁이를 계속해서 돌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듯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았고, 레슬리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감췄다.

몇 번은 숨을 곳이 없어 어둠의 도움을 받았다. 레슬리가 몸을 웅크리고 그 위를 어둠이 덮으면 그저 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구석만이 남았다.

이피엘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다가, 옆에서 계속 소리치는 남자 때문에 중간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골목에서도, 사람이 단 한 명도 있지 않은 골목에서도 세 사람은 빠르게 움직였다.

‘어디 갔지?’

그렇게 몇 개의 골목과 길을 지나쳤을까. 레슬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모퉁이가 유달리도 많은 골목에서 이피엘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피엘은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레소는 왜 따라오지 않는 걸까. 가쁜 숨을 내쉬던 레슬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늘 걷던 중앙 거리와는 다른 거리는, 조금 지저분하고 낡은 집들이 모여 있었다. 간판을 보니 싸구려 술집과 여관들이 모여 있었다.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통행인이라고는 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있었을 법한 주정뱅이 한 명이 전부였다. 이런 거리는 밤부터 활기를 띠니 낮에 가 봤자 쓸모가 없다고, 스페라도 후작가의 한 하인이 말한 걸 기억해 냈다.

수도 외곽 쪽이겠구나. 저번에 갔던 곳은 걷기 좋은 곳이었는데…… 그렇다면 여긴 수도 북쪽일까. 북쪽 지역에는 제대로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들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돌아보던 레슬리는 이내 이피엘과 남자를 발견했다. 아직도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 덕분이었다.

재빨리 몸을 숨기고 레슬리는 이피엘을 바라보았다. 오는 데 급급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피엘은 면밀하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가 목적지구나.’

역설적으로 이피엘의 조심스러움은 지금 이곳이 목적지라는 걸, 레슬리에게 여실하게 알려 주었다. 그렇게 조심하며 움직이던 이피엘은 이내 길가에 있는 한 여관으로 걸어갔다.

“아…….”

오래된 여관이었다. 과연 이런 여관에 손님이 들까 궁금증이 들 정도로 낡은 여관은 언제 쓰러져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낡은 간판은 이미 반쯤 떨어져 통행인들을 위태하게 만들었다. 유일하게 쓸 만한 것은 영업이 끝났다는 걸 알려 주는 나무 간판이었다.

여관 가까이 간 레슬리는 집들 사이 작은 통로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얇디얇은 여관 벽에 귀를 대었다. 문을 닫았다는 표시와 다르게 여관 안쪽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몇 명이나 될까. 하나, 둘, 셋…….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는 듯했다. 돌아가 볼까. 아니면 레소가 올 때까지 기다려 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야 할까.

‘마지막 방법은 아니야.’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택으로 돌아가고 어머니께 말을 하고 바로 기사단을 끌고 온다 해도 이피엘은 발을 뺀 뒤일 것이다.

레소와 같이 들어가는 것도 마뜩잖았다. 레소가 있다면 어둠을 제대로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혼자 들어가야 할까.’

긴장으로 입안이 바싹 말라 레슬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가 보자. 결심한 그때, 갑자기 레슬리의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레슬리를 끌고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입이 막혔고, 팔목이 붙들렸다. 어둠이 움직였다. 하지만 제 입을 틀어막은 사람에게 닿기도 전에 어둠이 멈췄다.

“……위험합니다.”

시선을 위로 돌리자, 뛰어왔는지 땀범벅이 된 콘라드가 시선을 맞췄다. 엉겁결에 콘라드의 품에 안긴 레슬리는 콘라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평소에 늘 입고 다니던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제복이 아니라 평범한 셔츠와 조끼, 거기에 갈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빵모자를 쓴 콘라드는 영락없이 평범한 소년처럼 보였다.

“주변에서 수상한 자들이 있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슬리 양과 레소 경이 어디론가 가시는 게 보이기에…….”

콘라드는 웃으며 레슬리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하지만 팔목을 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레소 경이 찾고 있습니다.”

“레소 경이요?”

“네, 갈림길에서 레슬리 양을 놓치는 바람에 저와 경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왔지요. 감이 좋으신 분이니 곧 이리로 오실 겁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갈림길을 여러 번 지나쳤다. 그때 레소가 레슬리를 놓친 모양이었다.

“레소 경은 저보다 다리가 빠른데 왜…….”

“이상한 놈들이 방해하는 바람에요. 아마도 검을 차고 있어서 경비대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콘라드는 레슬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근방에는 노숙자나 부랑자, 그리고 제대로 된 용병패가 없는 용병들이 모여 있어서 경비대의 움직임에 민감하거든요.”

레슬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마주치는 시선이 무서워졌다.

“거기다 약을 탄 술을 파는 주점에 도박장까지 모여 있는 거리입니다. 여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노예 경매장까지 숨어 있지요.”

노예 경매장. 레슬리가 작게 숨을 멈췄다. 노예라니, 그 제도가 폐지된 지가 언제인데!

하지만 위험하게 들리는 건 그 단어뿐만이 아니었다. 어쩐지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거리에 레슬리 양은 뛰어 들어온 거고요.”

콘라드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친 채 미소 지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화……나셨군요.”

레슬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따스해 보이는 시선이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 보이시나요?”

콘라드는 오히려 레슬리에게 묻더니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화가 났습니다.”

“…….”

“왜 레슬리 양은 이 위험한 곳에 왔을까. 공작저에서 제대로 된 호위도 데려오지 않고, 뒤에 레소 경이 뒤처진 것도 모르고. 홀로 뛰어서 이 위험한 거리에, 위험한 사람을 쫓아서 왔을까.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화가 나네요.”

콘라드가 느리게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잡은 팔목을 놔주었다. 붉게 물든 제 팔목을 바라보다가, 레슬리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걱정은…… 감사해요, 경.”

레슬리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걱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여기저기에서 노리고 있었고, 실제로도 여러 번 위협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저는 더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어요.”

사실, 어떻게 보면 레슬리가 가만히 있어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공작저 가장 깊은 곳에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오라버니와 함께 웃으면서 지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강한 어머니가 있었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오라버니들이 있었다. 그저 제 역할인 아라벨라가 되어 에피알테스를 처리하고, 그 뒤는, 그리고 다른 일들은 전부 어머니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지만 레슬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의 적이 스페라도 후작이라면, 어머니의 적이자 황제 폐하의 적은 메데이아잖아요.”

어머니가 자신을 도와주었듯, 자신도 어머니를 도와주고 싶었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가장 고결한 수호자이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 가문의 일원이니까.

“조금 위험해지더라도 제가 할 일을 하고 또 돕고 싶어요.”

레슬리는 콘라드를 보며 옅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 경이나 어머니나…… 다른 분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조심 또 조심할게요. 그렇지만 저도 믿어 주세요. 저 이래 봬도 꽤 강해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는 잠시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콘라드가 말을 꺼내려는데, 골목 안쪽이 시끄러워졌다.

“조금 이따가 말해 주세요, 경.”

레슬리가 속살거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여관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부족하다고!”

아까 그 남자와 이피엘이 다투고 있었다.

여관 안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남자 혼자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홀로 소리 지르는 남자의 모습은 악귀 같았다.

“이 정도의 돈으로는 부족해. 돈을 더 가져와! 그렇지 않으면 네 윗대가리가 원하는 건 얻지 못할걸!”

남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이피엘을 내려다보았다.

‘윗대가리…….’

사이레인의 평소 언어 습관 덕분에 레슬리는 윗대가리가 윗사람을 낮게 부르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메데이아로군요.”

콘라드가 작게 속삭이자,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피엘의 윗사람은 그녀밖에 없으니까.

“이미 돈은 충분히 줬어.”

이피엘은 자신을 협박하는 남자 따위 무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제 망토 자락을 정리했다.

“그분께서 준 돈이면 못 할 것이 없었을 텐데. 아, 네놈이 도박장에서 이기는 건 무리였으려나.”

“뭐? 뭐?”

“네놈이 도박장에서 이기려면 황실을 털어도 부족하니까. 안 그래?”

정곡을 찔렸는지, 남자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이년이……!”

“그만, 카크.”

뒤이어 나온 사람은 조금 마른 체격의 남자였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오른쪽 눈가에서 볼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가 나 있는 중년 남자는 성큼 다가와 카크라는 남자를 가볍게 제압했다.

“형님!”

체격 차로 볼 때는 지금 건물에서 나온 남자가 카크를 이길 수 없어 보였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카크는 아픈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감히 남자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힘으로나 위치로나 남자를 이길 수 없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저 혼자 당하기는 억울한지, 카크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형님도 억울하지 않습니까! 기껏 수도에 숨어들었는데, 애새끼들 경호나 맡고 있고…….”

카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팔이 자유롭게 된 이피엘이 그대로 자신을 때리려던 카크의 뺨을 내리쳤다.

“이년…….”

“아까부터 여자의 팔을 잘못 잡으면 이렇게 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어.”

이피엘은 싸늘한 눈으로 웃었다.

“그만 소란 피우고 들어가라, 카크.”

“하지만 형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게 먼저…….”

카크는 변명을 늘어 두려다가 붉은 머리 남자의 눈빛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죠, 뭐.”

그러고는 터덜터덜 건물 안으로 돌아갔고, 제 분을 못 이기는지 물건을 던지는 소리와 악에 받친 고함이 연달아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작게 한숨 쉰 남자는 다시 이티엘을 바라보았다.

“저놈은 들어갔으니, 그쪽도 위험한 물건은 치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붉은 머리 남자가 덤덤하게 이피엘을 바라보았다. 이피엘은 지금 뺨을 내리친 반대쪽 손으로는 단검을 쥐고 있었다. 이피엘이 말을 높이기 시작했고 남자는 매서운 눈으로 이피엘을 바라보았다.

“호신용 물품일 뿐입니다.”

“카크는 조금 다혈질적이라 종종 저러고는 합니다. 하지만 자금과 지원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지요. 좀 더 신경을 써 줘야겠습니다, 이피엘.”

“지원은 충분합니다. 이번 것도 적은 양은 아니었을 텐데요? 웬만한 영토를 1년 동안 운영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요.”

이번에도 이피엘은 물러나지 않고 제 뜻을 전했다.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부족합니다. 천년 묵은 뱀의 머리를 잘라야 하는데, 그 정도 지원으로는 턱도 없지요.”

천년 묵은 뱀. 레슬리는 그 말이 황실을 뜻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황실의 문장은 두 마리의 뱀이었으니까.

“콘라드…….”

레슬리가 콘라드를 바라보자, 콘라드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에타이.”

“네?”

“에타이입니다. 저 붉은 머리의 남자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반역자들, 충심이 변질하여 황실을 무너트리려는 자들. 그들을 에타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중에서 타는 듯한 붉은 머리, 오른쪽 눈에 상처를 입은 사내가 있다고, 그놈들 때문에 죽은 사람을 셀 수도 없다며 렌티우스가 투덜거리던 걸 콘라드는 들었다.

“셀바토르 공작님이 혼란의 시대 때 상대한 놈들이 저들이었지요. 저희 선배님도 그때 참전하셨습니다.”

렌티우스는 술을 건하게 마신 날이면 간혹 제 후배들을 불러 놓고 술주정을 하곤 했다. 그중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이야기가 바로 붉은 머리의 에타이였다.

붉은 머리는 흔한 편이지만 그놈처럼 불타는 듯한 머리는 본 적이 없다며, 렌티우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놈을 끝내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해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며 그렇게 말을 덧붙였었지.

콘라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놈들이 수도 안쪽까지 와 있는 거지.”

중얼거리던 콘라드는 이내 답을 찾은 듯 보였다. 사실 답은 눈앞에 있지 않던가.

“……누가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남자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디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나.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두 사람의 대화에 레슬리와 콘라드는 눈을 찡그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거기다 아직도 카크라는 남자가 요란을 피우고 있는지 여관 안쪽에서 물건 깨지는 소리가 더 컸다. 그런데도 이 소리를 들었을까.

남자의 반응에 이피엘 역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쥐새끼일까.”

어딘가 들뜬 목소리로 남자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고 그건 콘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슬리 양.”

시선은 레슬리에게 주지 않은 채, 무섭게 앞을 응시하며 콘라드가 작게 말했다.

“제가 신호를 하면 뛰세요. 반대편의 골목으로 뛰는 겁니다.”

스르릉. 섬뜩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은빛의 검날이 끌려 나왔다. 분명 연무장에서는 저렇게 차가운 소리는 아니었는데. 레슬리는 놀라 작게 굳었다. 하지만 콘라드는 지금 조금씩 다가오는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셨죠?”

겨우 그 한 마디만 더 꺼냈을 뿐. 하지만 그 뒤에는 자신은 어떻게 하겠다, 이런 소리는 없었다.

‘놓고 도망가라는 소리인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경.”

검을 반쯤 뽑은 콘라드의 손에 제 손을 올리자 그제야 시선이 레슬리에게 닿았다.

“같이 뛰어요.”

레슬리는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꺄아악!”

이피엘의 비명이 터졌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나무 간판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직 여관 앞에 있던 이피엘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간판은 처참하게 깨졌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슬리랑 콘라드도 몸을 움츠렸다.

두 사람이 있는 골목에서 놀란 쥐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찌이익―! 여관에서 나온 쓰레기를 먹고 있었던 듯 볼 주머니가 빵빵한 쥐 떼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 이게 뭐야!”

한 마리가 길가에 늘어져 있던 주정뱅이의 위에 올라가자 주정뱅이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으악, 쥐다!”

간판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여관에서 나온 한 남자가 놀라 소리쳤고 놀라 넘어진 이피엘을 일으켜 주며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읊조렸다.

“……간판을 치워야겠군. 그리고 쥐도 처리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여관에서 우르르 나온 남자들이 간판 파편을 치우기 시작했다.

“괜찮나?”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러든 말든 이피엘의 상태를 살폈다. 이피엘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도 놀란 듯 작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큰길까지 바래다주도록 하지.”

남자의 서늘한 시선이 어딘가에 닿았다.

“아직 쥐새끼가 숨어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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