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9)

#13

“공작님.”

메데이아의 정원을 벗어나자, 마차 앞에서 불안한 듯 서서 제나가 셀바토르 공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셀바토르 공작은 거칠게 장갑을 벗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메데이아와의 대화가 썩 즐겁지 않았다.

‘친구. 친구라.’

그렇게 자신을 부를 만한 인간은 몇 없는데. 장갑을 제나에게 건네주며 공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보다 메데이아와 셀바토르 공작은 사적으로 말을 섞어 본 일이 없었다.

“후우.”

공작은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런 부류를 셀바토르 공작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낸 그 부하도 저런 사람이었으니까.

오래전에 입은 상처가 욱신거리는 듯해 공작은 가면을 손으로 쓸었다.

“……공작님?”

뭔가가 이상하다는 듯 제나가 묻자 공작은 고개를 젓고는 제나를 바라보았다.

“테펜텔에게서 답장은 왔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공작은 다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르카디우스 다음으로 기록이 잘 보존된 나라니까, 무언가 실마리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오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셀바토르 공작!”

메데이아에게 가는 길인지 피스토레 황제가 근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은 황제를 향해 눈을 흘겼다.

‘마차나 탈 것이지.’

그러면 대충 인사나 건네고 저택으로 갈 수 있는데. 정면으로 마주친 탓에 꼼짝없이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잠시 농땡이를 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황제는 환하게 웃으며 셀바토르 공작을 잡았다.

“오랜만이네, 공작.”

“네, 신년회 이후로 처음 뵙는 거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인가?”

“길을 잃었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을 내뱉은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네가 길을 잃어?’라고 묻는 듯한 눈빛에 공작이 말없이 황제를 바라보자 피스토레의 푸른 눈동자가 슬그머니 바닥으로 향했다. 그래도 제 위엄을 찾겠다는 듯 다시 황제는 고개를 들고 공작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으면 곧 2차 시험이 끝나겠군.”

“그렇지요. 이제 곧 있으면 시험이 끝날 겁니다.”

“그렇지. 아, 셀바토르 공작. 내가 그 이야길 했던가?”

피스토레 황제는 시종과 기사들이 충분히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 작게 말을 흘렸다.

“이번 시험 발표는 메데이아가 하게 될 거야. 원래는 아르트엘이 가려고 했는데, 메데이아가 자신이 가겠다고 하더군.”

아르트엘 레폰 르카디우스는 제1황자 아렌도와 제2황자 콘스텐의 어머니로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후였다.

“아르트엘 대신 메데이아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아르트엘이 요즘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몸에 무리가 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설득시켰다더군.”

메데이아 태후는 황제와 공작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순박하고 연약한 이로 비쳤으니, 아르트엘이 메데이아의 조언을 듣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피스토레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메데이아가 원하는 미래를 읽을 수가 없었다.

“피스토레.”

그런 황제에게 이번엔 셀바토르 공작이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오다 보니 황실 호수 중 하나에 란다의 꽃이 피어 있더군.”

“응?”

갑자기 튀어나오는 꽃 이야기에 피스토레 황제는 눈을 크게 떴다.

“구석에 작게 피어 있을 때는 별문제가 없지만,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

셀바토르는 피스토레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란다의 꽃이 호수를 집어삼키기 전에 슬슬 그걸 처리하도록 하자고.”

***

‘얼마나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하지?’

피곤함에 절은 몸을 간신히 일으킨 레슬리는 작게 하품했다.

신전의 침대는 얇은 이불을 하나 깐 것뿐이라 자고 일어나면 몸이 배기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택의 폭신한 침대와 자꾸 비교하게 되었다.

거기다 여기는 자신을 깨우러 와 주는 마델도, 지나가다 인사하는 셀바토르가의 사용인들도, 두 오라버니와 제나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 누구도 있지 않았다.

어제는 꿈속에서 셀바토르 공작저로 돌아갔다. 저택의 문을 열자 모두가 자신을 반겨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부터 눈물이 뚝뚝 흘렀다. 제 볼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 내며 레슬리는 훌쩍였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이틀 전 콘라드가 호위로 붙으면서 그리움이 조금 덜해지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건 아녔다.

레슬리는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듯한 책상에 올려져 있는 달력을 괜스레 뒤적였다.

‘며칠만 더 참으면 돼.’

작게 숨을 내쉰 레슬리는 허리까지 오는 제 은발을 하나로 묶고 새벽 기도를 갈 준비를 하였다. 자꾸만 하품이 새어 나왔다. 이러다간 새벽 기도 때 조는 게 아닐까?

레슬리는 차가운 물을 얼굴에 뿌리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그녀의 자리는 맨 앞자리니 그녀가 졸면 모두가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렌티우스 경, 콘라드 경.”

문을 열자마자, 깔끔한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제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분명 어제 저보다 늦게 방에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언제 일어난 걸까.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잘 주무셨나요?”

두 사람에 인사에 레슬리는 옅게 웃었다.

“네, 두 분 다 좋은 아침이에요.”

간단한 인사 후 레슬리는 기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렌티우스와 콘라드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 레슬리의 뒤를 따랐고, 레슬리는 연달아 작게 하품했다. 어제 꿈을 꾸고 나서 눈물을 흘린 탓인지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어떻게든 눈을 떠 보려고 눈가를 꾹꾹 누르는데,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앞에!”

아? 레슬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 사람과 부딪쳤다.

“꺄악!”

레슬리는 크게 휘청거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깨 쪽에 미약한 통증이 몰려왔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자신과 부딪친 한 소녀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못 봐서…… 죄송합니다, 공녀님.”

틸레이얼 부인을 떠올리게 하는 분홍 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녀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얼굴도 창백하게 질린 것이 자신이 대형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아요.”

레슬리는 옅게 웃었다. 아프긴 했지만,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었고 자신도 잘못한 게 있었다.

피곤했다지만 잠시 눈을 감고 걸었으니, 충분히 부딪칠 만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다시 한 번 괜찮다고 말하며 웃자, 소녀는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재빠르게 레슬리 옆을 지나갔다. 감사할 건 없는데. 자신도 그녀도 잘못했으니, 서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나저나 정말 틸레이얼 선생님과 닮았네.’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입매나 동그란 눈, 그리고 무엇보다 몽실몽실해 보이는 분홍 머리가 2년 전 틸레이얼 영토로 돌아간 선생님을 떠오르게 했다.

‘솜사탕 먹고 싶다.’

솜사탕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머리카락인 줄 알았던 흑역사가 떠올라 레슬리는 얼굴을 붉혔다. 왜 이놈의 부끄러운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진해지는지.

부끄러운 기억을 떨어트리려고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발을 동동 구르는데 콘라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레슬리 양, 괜찮으신가요?”

“그, 그럼요! 저는 괜찮아요. 어서 가죠!”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었다. 손과 발이 동시에 앞으로 나가는 레슬리를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걸 모르는 채.

그리고 지금 부딪친 소녀와 또 마주칠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채, 혼자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

“아.”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 새벽에 부딪힌 소녀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 사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이 건물을 청소할 예정입니다. 지금 같이 있는 두 분이서 행동해 주시면 됩니다!”

그 말에 다시 시선이 부딪쳤다. 레슬리의 짝이 된 소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하얗게 질렸다가 푸르게 변했다. 찰나의 순간에 얼굴색이 변하는 게 너무도 신기해 레슬리가 살짝 웃자, 소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아, 네, 네! 저 역시도 잘 부탁드려요, 공녀님.”

격한 인사 뒤에 다시 침묵이 돌았다. 레슬리는 살짝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역시 틸레이얼 부인이 떠올랐고 그 이유 하나로 조금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저, 이름이 어떻게 되나 여쭤 봐도 될까요?”

레슬리의 조심스러운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에펜타니 백작가의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예요.”

에펜타니. 레슬리는 기억을 차근히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에펜타니 가문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다. 지방의 가문일까. 틸레이얼 선생님도 수도에 거주하지 않는 귀족이니까.

“저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예요. 잘 부탁해요, 에펜타니 양.”

레슬리가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자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러고는 레슬리를 보며 수줍게 웃음 지었다.

‘어쩐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

하지만 막 믿을 수는 없지. 엠로아의 일도 있었으니까. 거기다 다른 사람들처럼 셀바토르 공작가의 명성을 노리고 저렇게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 쉽게 믿으면 안 돼.’

“자, 다들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건물은 추후 신자분들과 피난민분들을 위한 병동으로 쓰일 예정이니 꼼꼼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제의 재촉에 피곤한 후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레슬리와 셀리스는 걸레와 빗자루를 들고 두 사람이 담당하게 된 방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는 말이 정말인지, 방 안은 처참해 보였다. 가구도 낡아서 다 버려야 하는 것들이었고, 벽에 달린 등을 매달고 있는 줄은 너무 낡아 툭 하고 떨어질 듯 위태했다.

밤에 오면 무섭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레슬리는 큰 쓰레기들을 먼저 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셀바토르 공녀님.”

한참을 바닥을 쓸다가 셀리스가 옆에서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슈엘라 언니를 아시나요?”

그 물음에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슈엘라는 틸레이얼 선생님의 이름이었으니까.

“역시 틸레이얼 선생님과 친척이신가요?”

레슬리의 물음에 셀리스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척 언니예요. 분홍 머리가 많이 닮았다고 이야길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언니에게서 공녀님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공녀님이 친근하게 느껴져요.”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웃더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첫날부터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아까 부딪치고 오늘 이렇게 같이 일하게 돼서 너무 기뻐요.”

그 말에 레슬리는 셀리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셀리스가 좋게 보였다. 레슬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셀리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 공녀님이랑도 좀 친해지고 싶었어요. 사실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아, 역시. 레슬리는 작게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조금이라도 호감을 보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또 있었다. 레슬리가 친절하게 대해 주면 다들 어머니가 가진 권력이나 두 오라버니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번엔 오라버니들 쪽이려나. 레슬리는 볼을 붉히는 셀리스를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거 말씀이신가요? 두 오라버니에 대한 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아니, 저는 그 두 분에 대한 게 아니라…….”

부끄럽다는 듯 잠시 얼굴을 붉히던 셀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셀바토르 공작님이요. 저는 실제로 뵌 적이 없어서 그런데 정말 남자분들만큼 키가 크신가요?”

“어머니……요?”

셀바토르 공작의 이야기에 셀리스의 눈동자가 이젠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네! 사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역사서에서 그렇게 극찬하는 것인지 찾아보다가 완전히 반했어요!”

그러면서 셀리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셀바토르 공작에 대한 정보를 늘어놨다.

“정말 남들은 두 손으로 들기도 버겁다는 거대한 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시나요? 공녀님은 공작님께서 마법을 쓰시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시죠? 어떤가요? 얼마나 멋있나요! 한 번만 공작님을 뵙고 싶어요! 아아, 얼마나 멋질까…….”

셀바토르 공작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셀리스가 두 손을 꼭 잡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레슬리는 놀라 눈을 깜빡이면서도 셀리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닐까, 자신을 속이려는 건 아닐까.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지만, 그 눈에는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셀바토르 공작님이 혼란의 시대 때 검 한 번으로 여섯이나 되는 적을 물리쳤나요? 한 번 사람들이 바라보면 굳어 버린다는데 그것도 정말인가요? 네, 네? 공녀님, 제발 대답해 주세요!”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는 레슬리 못지않은 셀바토르 공작의 아주 열렬한 추종자였고, 그건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게 같다는 건 그리고 그걸 좋아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건 순식간에 두 사람을 친근하게 만들었다. 루엔티와 레슬리가 그러했듯.

“어머니는요……!”

레슬리가 이야기할 때마다 셀리스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얼마나 멋지신지 몰라요! 그냥 서 계시기만 해도 명화 같아요!”

레슬리가 당당하게 외칠 때마다 작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명성을 크게 얻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런데 그 경들을 한 손으로 이기는 게 제 어머니세요!”

레슬리가 당당하게 뽐내자 셀리스가 가슴께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행동을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레슬리가 움직일 때마다 ‘내, 내 딸 귀여워!’를 외치며 쓰러지던 사이레인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사실 저는 이런 것도 있어요.”

셀리스는 제 품을 뒤지더니 펜던트 하나를 꺼냈다. 안쪽에 초상화를 넣을 수 있게 만들어진 펜던트에는 셀바토르 공작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어딘가 심하게 많이 늠름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렸다.

“제가 직접 그렸어요!”

뿌듯한 얼굴로 웃는 셀리스는 마치 나히로키아의 책을 자랑하던 루엔티의 표정을 닮아 있었다.

한참을 자랑하던 셀리스는 펜던트를 다시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작님의 초상화는 구하기가 어렵고, 실제로 뵌 분은 그보다 더 드물어서 역사서를 읽고 상상으로 그렸어요.”

아아, 그래서 젊을 적 모습에 과도하게 늠름하신 거구나.

레슬리는 다시 한 번, 몬스터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듯한 늠름한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마치 전설 속 영웅 같은 공작을 보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많이 닮았어요. 정말 잘 그리시네요.”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지만 공녀님이 그렇게 말해 주시니 자신감이 생기네요.”

“정말 잘 그리시는걸요. 복도에 어머니가 젊으셨을 적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그거랑 비슷했어요. 저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서요. 에펜타니 양이 부러워요.”

레슬리는 자수나 그림에 약했다. 그림은 자꾸만 덧칠하다 종이가 구멍 나기 일쑤였고, 자수는 간신히 손수건 귀퉁이에 이름과 가문의 문양을 넣을 정도였다.

귀족 여성의 기본적인 소양인 것들이었지만, 그건 자신에게 흠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의 모두가 그렇게 말해 줬으니까.

돌아가면 다시 그림을 연습해 볼까. 그런 레슬리의 생각을 정확히 읽었는지 셀리스는 레슬리에게 약속하듯 속삭였다.

“사실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에요. 방법이 있는데…….”

그러더니 주저하며 시선을 맞췄다.

“나중에 제가 알려…… 드려도 될까요? 물론! 공녀님께서 괜찮다고 하시면요!”

셀리스의 말에 레슬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친교를 하자는 뜻인데.

‘믿어도 되는 걸까.’

믿어도 괜찮을 사람인데, 엠로아의 사건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웃어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어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믿을 만하지 않을까. 레슬리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좋아요. 나중에 알려 주세요.”

조심스러운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부디 레슬리라 불러 주세요, 에펜타니 양.”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의 동그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레슬리가 혹여나 말을 바꿀까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도 셀리스……라고 불러 주세요! 레슬리 양…….”

“네, 셀리스 양.”

서로의 이름을 부르자 어쩐지 즐거워져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며 작게 웃었다.

청소하는 동안에도 조잘조잘 작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레슬리는 그게 너무도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셀리스는 제 나이 또래의 첫 동성 친구였다.

‘콘라드 경이 있긴 하지만 경은 남자인걸.’

거기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져서 레슬리는 조금 조심스럽게 콘라드를 대하고 있었다.

셀리스는 지금 에펜타니 가문과 그 영토에 관해 한참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펜타니 영토는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수도에서 영토까지 가는 길이 엉망이라며 덧붙였다.

“그래도 물이 좋아서 귀한 약초들이 많이 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저희 가문은 약초학에 능통하지요. 부끄럽지만 저도 약초를 다루는 데 조금 자신이 있어요. 그래서 크면 가문의 일을 물려받을까 생각 중이에요.”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셀리스를 보며 레슬리도 배시시 웃었다.

“훌륭한 가문이네요.”

“네에, 하지만 좀 한미한 가문이라…… 사실 그래서 후보 명단에 이름이 올랐을 때 조금 많이 놀랐어요. 증조할머님이 후보에 오른 후에는 전혀 없었거든요.”

증조할머니라니. 놀란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는데 셀리스는 단호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좀 많이 놀라고 걱정도 되긴 했지만, 이왕 뽑힌 거 열심히 해서 아라벨라는 아니더라고 최초의 사제들에 뽑히고 싶어요! 최초의 사제들에 뽑히면 황실에서 각 가문에 약간의 포상금을 내려 주기도 하고, 사람들이 관심을 주니까요!”

포상금을 받으면 영토로 오는 길을 정비하고 싶다고, 그러면 상인들도 더 많이 오면서 약초값이 오를 거라며 셀리스는 희망찬 얼굴로 외쳤다.

“셀리스 양은 꼭 될 거예요!”

그러자 청소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셀리스가 부끄럽다는 듯 빨간 뺨을 움직여 웃었다.

“네, 꼭 이루고 싶은 꿈이에요. 영토에 볼거리가 늘어나면 우리 영토에도 들러 주시겠어요, 레슬리 양? 그…… 친구로서 말이에요.”

그 말에 레슬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그럼요. 약속할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던 덕에, 두 사람이 맡은 구역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다 됐다!”

레슬리는 모아 둔 쓰레기를 작은 바구니에 담으며 마지막 정리를 하는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깨끗해졌네요.”

레슬리와 셀리스는 자신들이 이뤄 낸 업적을 보며 작게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이걸 언제 치우나 싶을 정도로 더러웠었는데, 이젠 바닥을 굴러다녀도 될 정도로 깨끗해졌다.

“그런데 침대나 다른 가구들은 무리더라도 등은 꼭 교체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셀리스는 불안한 눈으로 벽에 달린 등을 바라보았다. 워낙 오랫동안 쓰지 않던 곳이라 그런지 이곳저곳이 심하게 낡아 있었다.

“이거 자칫하다간 떨어져서 사람이 다치겠어요.”

셀리스의 말에 레슬리 역시 동의했다. 초만 올리는 형태의 등이 아니라 유리까지 끼워진 등이었기에, 맞으면 크게 다칠게 분명했다.

“담당 사제님께 말하면 될 거예요. 일단 쓰레기부터 치우도록 하죠.”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청소하면서 나온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일단 구석에 쌓아 두었다. 그걸 바라본 셀리스가 레슬리를 보며 말을 꺼냈다.

“제가 가지고 갈게요. 레슬리 양은 저쪽을 맡아 주시겠어요?”

셀리스는 쌓아 둔 쓰레기를 신전 측에서 나눠 준 곳에 담기 시작했고, 레슬리 역시 셀리스가 가리킨 방향에 있는 쓰레기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마지막 정리에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귓가에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레슬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미친 듯 흔들리는 등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일까. 하지만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오늘 날씨는 바람 한 점 없는 선선한 날씨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더는 그걸 따질 시간은 없었다. 흔들리는 등은 곧 떨어질 것이고, 등 밑에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는 셀리스가 있었으니까. 유일하게 등을 고정하고 있는 가는 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해 보였다.

“셀리스 양!”

레슬리의 목소리에 셀리스가 레슬리를 바라보기도 전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등이 정확히 셀리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챙그랑!

“꺄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리가 깨지고 놀란 셀리스가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요?”

“세, 세상에…….”

등이 셀리스를 덮치기 직전 레슬리가 먼저 움직여 셀리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급박한 상황에 너무 강하게 끌어당겼는지 둘 다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바로 셀리스의 발아래에, 처참하게 깨진 등이 굴러다녔다.

“저, 저는 괜찮은데, 레슬리 양은…….”

“저도 괜찮아요.”

놀란 듯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셀리스는 바로 옆에 떨어진 등을 한 번, 그리고 원래 등이 달려 있던 자리를 한 번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하자마자 등이 떨어졌네요. 다치진 않았나요?”

어딘가 참작해 보이는 레슬리와 다르게 셀리스는 많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덕분에 다치지 않았어요.”

혹여나 머리에 맞았을 자신을 상상했는지 셀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래도 셀리스 양, 너무 놀란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사제님께 다녀오세요.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그럼 죄송하지만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같이 가 주겠다는 레슬리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은 셀리스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무언가 이상했지.”

레슬리는 깨진 등을 발로 툭툭 쳤다. 그러다 누가 근처에 있을까 주변을 돌아보았다.

콘라드와 렌티우스 그리고 셀리스의 기사는 사제의 부름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하지만 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소리가 난다면 금방 이리로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창밖으로도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다 살핀 후에야 레슬리는 작게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리고 제 발밑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네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고마워.”

레슬리가 위험하다 소리치며 셀리스를 끌어당기는 순간, 발밑에서 올라온 어둠이 등을 쳐 낸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못 봤으니 괜찮겠지.

작게 속삭이듯 건네지는 감사 인사에 어둠이 발에서 기쁘다는 듯 일렁거렸다.

이제 강대한 어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레슬리에게 이런 등은 전혀 위험이 되지 않았다.

잠시 웃는 얼굴로 어둠을 내려다보던 레슬리는 이내 조심스레 파편을 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얼마 안 돼 콘라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레슬리 양.”

달려온 것인지 작게 숨을 헐떡거리던 콘라드가 동그래진 황금빛 눈동자를 레슬리에게 맞췄다.

“큰 소리가 나서 달려온 건데…….”

그러더니 레슬리가 줍고 있는 유리 조각과 등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레슬리를 살폈다.

“등이 떨어진 겁니까? 다치신 곳은요?”

다급해 보이는 콘라드의 모습에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경. 셀리스 양이 조금 놀라 사제님을 찾아가긴 했지만, 저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쉰 콘라드는 레슬리의 옆에 앉아 깨진 유리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파편에 손이라도 베이면 안 되니까요.”

“그래도 저도 도울게요.”

레슬리는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콘라드의 옆에 앉아 파편을 줍기 시작했다.

“크게 떨어진 것 같은데 두 분 다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레슬리는 조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 어둠에 관한 이야기는 셀바토르 공작저의 사람들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그 정보를 팔아넘길 곳도 없었다.

“네, 신께서 도우신 것 같아요.”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레슬리의 대답에, 유리 파편을 모아 둔 청소용 바구니를 들며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신께서 도우신 모양이에요. 레슬리 양.”

***

“흐음.”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고 있었다.

“잠시 장난을 좀 친 건데, 재밌는 걸 봤네.”

마치 얼음과도 같은 눈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레슬리를 주시하던 데비엔의 입가가 미소를 머금었다.

“아하, 그래. 스페라도, 스페라도의 힘이구나.”

알겠다는 듯 데비엔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스페라도 가문의 힘은 유명했으니까.

조금 있으면 그분이 오실 텐데 마침 좋은 선물이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생각이 흘러흘러 엘리에게 닿았다.

‘스페라도 가문은 유달리 밀색 머리에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아이들을 아꼈지.’

워낙 목소리가 컸던 스페라도 후작이라 귀족들도, 그리고 사제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자랑은 황궁에서도, 심지어 기도를 올리기 위해 온 신전에서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엘리 양도 가지고 있으려나. 그러면 꽤나 즐거울 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데비엔은 고개를 내밀고 창밖을 살피는 레슬리를 피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투이나 약초 말씀이신가요?”

셀리스는 지금 제 앞에 있는 고위 사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간신히 방으로 들어가려는 셀리스를 담당 사제는 어느 방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갑자기 투이나 약초에 대해 듣게 되었다.

“네. 에펜타니 가문은 약 제조로 유명한 가문이니, 혹시 에펜타니 후보님은 알고 계실까 해서요.”

데비엔의 말에 셀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이나는 귀한 편이었지만, 에펜타니 영토에서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기에 어릴 적부터 자주 접해 오던 약초였다.

“잘 알고 있지만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건지…….”

셀리스는 뒷말을 흐렸다. 이 고위 사제는 어딘가가 무서웠다. 저 눈이 얼음같이 차가워서 그럴까.

“지금 피난민이 이 신전으로 더 몰리고 있답니다. 특히 요 며칠 새 부쩍 늘었지요.”

데비엔은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분쟁 지역에서는 늘 크고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 시누스턴 신전 근처에 있는 분쟁 지역에서는 몬스터까지 나타났고, 때문에 사람들은 몬스터를 피해 점점 시누스턴 신전으로 이동해 왔다. 거기다 며칠 전 일어난 큰 산사태로 다친 사람들이 대거 신전으로 이동해 왔고, 그건 셀리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피난민분들에게 제공할 약이 바닥을 보입니다. 어서 새 약을 지급해야 하는지라 약초를 거래하는 상단을 기다릴 수가 없어요.”

데비엔의 말에 알겠다는 듯 셀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에게 투이나 약초를 이야기를 하신 거군요.”

투이나 약초는 보통 풀과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한 독초와 똑같이 생겨서 실력이 부족한 몇몇 사람들은 독초를 약초라고 착각해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투이나 약초와 그 독초의 아주 미묘한 차이는 투이나 약초를 다뤄 본 자만이 알고 있었다.

데비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네,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이 근방에 투이나 약초가 자란다고 하더군요. 많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비를 넘길 정도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걸 채집해 주실 분이라……. 자칫하면 독초와 섞일 수 있으니까요. 그나마 그걸 구별할 수 있는 사제님들은 치료 때문에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에펜타니 후보님께 그걸 부탁드리고 싶어요.”

데비엔의 간곡한 말에도 셀리스의 고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셀리스는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듯 주저하더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숲에는 사나운 산짐승도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러자 데비엔은 환하게 웃으며 셀리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근방 숲에서 나오는 짐승들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과 시누스턴 기사단이 꾸준히 사냥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그 부분이 걱정되신다면 호위를 더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테센트루아 성기사님들은 이미 전부 호위를 맡고 계시다고…….”

조심스러운 셀리스의 말에 데비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하지만 시누스턴 영주님께서 기사단을 추가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니 호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그러고는 어딘가 따스한 웃음을 머금고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신전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에펜타니 후보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후보님도 피난민들을 보셔서 알겠지만, 그들에게 제때 약이 돌아가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그런…….”

“약초만 제대로 가지고 와 주신다면 그날은 다른 일정 없이 방에서 쉬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그렇게 해 드리지요.”

이어지는 데비엔의 말에 셀리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휴식. 그건 셀리스에게 너무도 간절한 단어였다.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는 말과 휴식이란 말에 결국 셀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며시 데비엔을 보며 말을 꺼냈다.

“저…… 그러면 혹시 다른 분을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셀리스를 바라보는 차가운 눈동자가 즐겁다는 듯 반짝거렸다.

“네, 원하시는 후보생이 있다면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에펜타니 후보님.”

***

‘가고 싶지 않았는데.’

짐수레 같은 마차에 몸을 실은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갑자기 야밤에 쳐들어온 셀리스는 눈을 빛내며 자신과 약초를 캐러 가자고 했다. 귀한 약초니까, 자신을 옆에서 돕기만 해 달라고 셀리스는 팔을 잡고 간절히 말했다.

‘보니까 숲 외곽 지역에 피어 있더라고요! 독초인 줄 알고 사람들이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건 제가 할 테니 레슬리 양도 같이 가요. 일이 끝나면 하루 푹 쉬게 해 주신다고 했어요!’

첫 동성 친구가 눈을 빛내며 부탁하는 데다가 휴식이라는 말, 그리고 담당 사제인 재클렌마저 간곡히 부탁하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거기다 이 숲은 비록 신전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과 시누스턴 영토의 기사들이 매일 순찰하는 곳이었다.

‘콘라드 경에 렌티우스 경도 같이 가 주시니까.’

레슬리가 옆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콘라드가 괜찮다는 듯 웃었다.

호위는 총 여섯 명이었다. 원래 레슬리와 셀리스를 호위하는 세 명의 테센트루아 성기사와 추가로 붙은 시누스턴 기사 세 명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레슬리와 셀리스를 돕기 위한 수습 사제 둘까지 따라와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레슬리 양.”

잠시 숲속 풍경을 바라보는데 셀리스가 슬그머니 레슬리의 옷자락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맞추자 어딘가 불안하고 걱정에 찬 얼굴로 애써 웃으며 저를 보고 있었다.

“같이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 불편하거나 그런 일 없이 저 혼자 다 할 테니까….”

셀리스는 내켜 하지 않는 레슬리의 기색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쉴 때 푹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오히려 오랜만에 신전을 나오니까 기분이 좋네요.”

레슬리가 환하게 웃자 셀리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다행이다. 저는 제가 억지로 레슬리 양을 끌고 온 줄 알고 너무 걱정했어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흘리는 셀리스를 보며 레슬리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약초랑 독초 구분법을 알려 드릴게요. 조금 어렵긴 하지만, 레슬리 양은 금방 구분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셀리스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마차가 멈춰 섰다.

“후보님들, 약초꾼에게 듣기로는 이 근방이라고 합니다.”

마차에서 두 사람이 내릴 수 있게 도운 수습 사제는 맑은 얼굴로 웃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보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며 셀리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번뜩이는 눈동자와 진지한 표정 때문에 평소 셀리스의 얼굴과 전혀 달라 보였다.

“아, 찾았어요! 세상에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근방에 투이나 약초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셀리스는 손쉽게 산비탈 근처에 나 있는 약초들을 찾아냈다. 상기된 얼굴로 셀리스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독초와 섞여 자랐군요. 그래서 다들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아요. 현명한 선택이에요.”

“이게 약초인가요?”

레슬리는 셀리스가 가리키는 풀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흔하게 볼 수 있는 풀 같아 보였다.

“네. 이게 바로 투이나 약초고요, 이건 케튼 독초예요. 그냥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여기랑 여기를 보면 미묘하게 달라요. 보세요. 미묘하게 투이나 약초가 더 날카로운 잎사귀를 가지고 있어요. 거기다 색도 투이나 약초가 조금 더 옅은 편이고…….”

신난 듯 셀리스는 약초와 독초를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슬리의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 여기와 저기가 다르다는데, 도대체 어디가 다른 걸까.

저택에서 베스라온과 하던 다른 그림 찾기를 떠올리며 눈을 찡그려 보았지만, 전혀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인 점은 콘라드와 렌티우스 역시 레슬리와 같은 표정이었고, 셀리스의 호위인 다른 테센트루아 성기사는 아예 넋을 놔 버린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이 약초를 캐서 저에게 주세요!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전부 뽑아서 저에게 주시면 제가 골라내도록 할게요.”

셀리스의 말에 일행들이 안도의 숨을 흘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레슬리는 슬쩍 산비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위험하겠는데.’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유속은 빨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다. 레슬리는 혹여나 위험할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이건 독초일까, 약초일까. 레슬리는 제 두 손에 들린 풀을 무섭게 바라보았다.

풀에 입이 달려 독초면 독초라고, 약초면 약초라고 스스로 말해 줬으면 좋겠다. 셀리스에게 물어볼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다른 사람들이 가져온 바구니에서 무서운 속도로 독초만을 골라내는 셀리스가 보였다. 그러면서 다 골라내면 옆에 핀 꽃으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셀리스 양에게 맡기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피니, 다들 진지한 얼굴로 땅에 쪼그리고 앉아 약초를 캐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맑은 하늘이 보였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뺨을 스치고 들어갔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은 따스했다.

여유롭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데비엔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거기다 이번 일은 완전히 생뚱맞은 일도 아니었다. 약이 다 떨어져 가는 건 사실이었다. 레슬리의 담당 사제인 재클렌이 피난민들에게 배급되는 약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레슬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날카롭게 생각했나 봐.’

독초인지 약초인지 모를 풀을 뜯으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제 마지막 날이 이틀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서서히 후보 가족들이 신전 주변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

“역시…….”

“역시?”

갑작스럽게 레슬리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라 고개를 들자 셀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레슬리 양, 그거 독초예요.”

결국 셀리스는 레슬리 옆에 앉아 약초를 골라내는 걸 도와주었다.

“레슬리 양.”

“네?”

“그…… 고마워요. 갑자기 가자고 해서 난감했을 텐데.”

아니라고 다시 말하기도 전에 셀리스가 꽃으로 만든 반지를 내밀었다. 하얗고 작은 꽃송이로 만든 꽃반지는 레슬리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번 만들어 봤어요.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꽃의 줄기를 반으로 갈라 어설프게나마 만든 반지는 레슬리의 손가락보다 조금 컸다. 하지만 레슬리의 눈에는 그게 너무도 예뻐 보였다.

“아니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레슬리가 환하게 웃자, 완전히 마음을 놓은 셀리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렌티우스가 씩 웃으며 콘라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콘라드는 웃으면서 잘못 뜯었던 잡풀들을 그대로 렌티우스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레슬리는 잠시 반지와 셀리스를 번갈아 보다 볼을 붉혔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종종 별장에 놀러 가 꽃다발을 만들며 논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꽃으로 뭔가를 만든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요! 제가 알려 드릴게요. 이 꽃이 반지를 만들기 좋아요. 몇 송이 더 있으면 팔찌도 되고, 화관도 만들 수 있어요. 목걸이도요!”

셀리스의 말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꽃으로 팔찌에 목걸이에, 화관까지 만들 수 있다고? 레슬리는 잠시 제 꽃반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배워 놓으면 공작저로 돌아가 모두에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레슬리는 꽃반지를 낀 공작과 꽃목걸이를 하는 사이레인, 그리고 팔찌를 낀 베스라온과 화관을 쓴 루엔티를 연이어 상상해 보았다.

‘잘 어울리겠다.’

분명 어머니는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이고 아버지는 감동받아 우실 거야. 늘 그러니까. 베스라온 오라버니도 잘 쓰겠다고 말하며 아껴 줄 것이다. 그리고 루엔티 오라버니도 투덜거리면서 써 주겠지.

모두를 상상하면서 레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셀리스 양, 혹시 만드는 법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셀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휴식을 취할 시간이라, 두 사람은 주변 들꽃을 엮어 반지와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렇게 해서…….”

반지는 쉽게 만들었는데, 팔찌는 생각보다 어려워 레슬리는 자꾸만 실패하고 말았다.

꽃을 따라 조금씩 자리를 옮기다 보니 어느새 나무가 우거진 곳까지 오게 되었다.

셀리스와 레슬리의 모습을 본 한 시누스턴 기사가 약초에서 눈을 떼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외쳤다.

“후보님들, 너무 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붙으시면 안 됩니다. 산짐승이 숨어 있을 수 있어요. 특히 분쟁 지역에 산사태가 나서 이쪽으로 이동해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말에 셀리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산짐승이래요.”

셀리스가 겁을 먹은 듯 주변을 돌아보았고, 레슬리 역시 조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레슬리가 여태 만난 산짐승은 토끼와 사슴 같은 무해한 동물이 다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와는 다르게 풍경이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나무가 우거진 곳 초입이건만 셀리스는 불안한 듯 레슬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레슬리 양, 일단 우리 들판 쪽으로 돌아가서……. 꺄악!”

그때 무언가가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무언가 작은 형체가 갑자기 풀숲에서 뛰어나오자, 놀란 셀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겁을 잔뜩 집어먹은 말이 흥분해 달리는 것처럼 레슬리의 손을 잡고 한참을 달리던 셀리스는 돌부리에 걸려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리고 그건 영문도 모르고 셀리스에게 끌려가던 레슬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놀란 렌티우스가 달려오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긴 했지만, 셀리스와 레슬리는 무릎이 조금 까진 것 외에는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아까 그 산짐승은 뭐였나요?”

아직도 놀라 제정신을 못 차리는 셀리스를 토닥이며 레슬리가 묻자, 콘라드가 멋쩍은 얼굴로 자신의 손에 들린 토끼를 보여 주었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 갈색 토끼가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토끼를 보자마자 레슬리와 셀리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토끼 한 마리에 이렇게 겁을 먹을 줄이야.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놀라서……. 어릴 적에 늑대를 만난 적이 있거든요.”

아직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셀리스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일으키고, 레슬리는 손을 뻗어 셀리스가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강에 빠져 흠뻑 젖어 버린 몸이 덜덜 떨렸다. 몸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레슬리는 제 팔을 세게 문질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기를 없앨 수는 없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안색이 나쁠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갑자기, 정말 말 그대로 땅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셀리스와 레슬리는 산비탈을 굴러 강에 빠져 버렸다.

유속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강이었다. 비명도, 도와 달라는 외침도 그리고 공포도, 무정한 강은 그대로 삼켜 버렸다. 숨을 쉬고 싶어 입을 벌리면 차가운 강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레슬리는 고통 속에서 한참을 버둥거렸다.

그때 셀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산비탈을 구를 때 기절한 듯 축 처져 있는 셀리스는 이리저리 부딪히며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안 돼!’

레슬리는 간신히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는 데 성공했다. 점점 창백해지는 셀리스를 보며 레슬리는 그녀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빠, 빠져나가야 해.’

이대로 있다간 자신도 분명 정신을 놓을 게 분명했다. 어서, 움직여 줘. 어서! 그리고 그 간절함에 화답하듯 어둠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고, 레슬리와 셀리스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레슬리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고, 둘은 곧 차가운 강물 속에 박혔다.

다시 폐부에 차가운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쿨럭!”

레슬리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강기슭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그나마 강 한가운데가 아니라 강기슭과 가까운 곳에 떨어진 덕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도움을 받아 기절한 셀리스까지 강에서 이끌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기침이 연달아 터졌다. 폐가 찢어져 나갈 것 같은데도 계속 터지는 기침에 레슬리는 배를 움켜쥐고 자갈 위에 누웠다.

그러기를 한참. 기침이 멈추고 레슬리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미리 베스라온 오라버니에게서 수영을 배워 두길 잘했다. 루엔티 오라버니랑 어둠이를 다루는 걸 훈련해 두길 잘했어.

실제로 어둠은 물속에서 평소보다는 느린 움직임을 보였다. 조금 더 지체했더라면 익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몸을 떨었다.

“세, 셀리스 양.”

자신의 옆에는 셀리스가 누워 있었고, 산기슭에서 굴러떨어질 때 다친 듯한 상처가 온몸에 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심각해 보이는 건 그녀의 얼굴이었다. 하얗게, 그리고 푸르게 질린 얼굴은 셀리스가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처럼 보였다.

“셀리스 양, 정신 차려 봐요.”

레슬리는 덜덜 떠는 손으로 셀리스를 흔들었다. 하지만 셀리스의 꼭 닫힌 눈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변하고, 몸은 차가워질 뿐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도움을…….”

누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숲 안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울림. 레슬리가 고개를 돌리자, 으슥한 곳에서 늑대가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오고 있었다. 짙은 회색의 늑대는 제 영역을 침범한 레슬리와 셀리스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고 있었다.

레슬리는 작게 숨을 헐떡였다. 강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나오니, 이젠 기다렸다는 듯 늑대가 나타났다.

비록 레슬리는 이번에 늑대를 처음 보았지만, 저 늑대가 보통 늑대보다 크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다섯 마리의 늑대가 숲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금방이라도 작은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리는 늑대들은 레슬리가 겁먹은 걸 아는지, 쉽사리 덤비지 않았다.

‘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 그랬지.’

사이레인이, 그리고 베스라온이 위험한 상황에서의 행동을 많이 이야기해 주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레슬리는 강가에 있는 돌을 집어 던졌다. 여유롭게 피한 늑대들이 점점 한 발짝씩 포위망을 좁혀 왔다. 레슬리가 계속해서 작은 돌을 집어 던졌지만, 마치 그런 레슬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늑대들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레슬리가 굳어 있는 사이 늑대 한 마리가 천천히 빙 돌아 레슬리의 뒤로 다가왔고.

“안 돼!”

기절한 셀리스의 옷자락을 물고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빠르게 셀리스가 숲의 그림자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셀리스!”

레슬리가 셀리스의 팔목을 잡자, 남은 네 마리의 늑대가 무섭게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더니 전부 레슬리에게 덤벼들었다.

팔을 물리고 고통이 찾아왔다. 몸 여기저기가 날카로운 발톱에 긁혔다. 그런 와중에도 레슬리는 셀리스의 팔을 놓지 않았다.

기절해 반항이 없는 셀리스를 끌고 가고, 그런 셀리스에게 정신을 판 레슬리를 손쉽게 사냥할 생각인 듯했다. 자연의 이치로는 맞는 일이었다.

“깨깽!”

하지만 그건 동물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통할 법칙이었고, 레슬리는 예외였다. 그녀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가오던 늑대 중 한 마리가 공중에 들렸다가 처참하게 바닥으로 내쳐졌다. 뼈가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 늑대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어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몸을 부풀리더니 아직도 레슬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두 마리를 먹어 치웠다. 어둠에 먹힌 두 마리의 늑대들이 울부짖었으나 그 소리마저 어둠에 먹혔다.

레슬리는 이 광경이 실감 나지 않았다. 늑대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죽었다. 너무도 현실감 없는 풍경에 오히려 머리가 식기 시작했다.

“크르릉.”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 있었다. 다른 늑대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늑대는 대장인 듯 신중하게 레슬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물이…….’

젖은 앞머리에서 떨어진 물 한 방울이 둥근 이마를 타고 떨어져 레슬리의 눈동자를 가린 순간, 늑대는 순식간에 레슬리 앞에 도달했다. 강철조차 뜯을 정도로 거대한 이빨이 레슬리의 머리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늑대는 제 부하들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 우드득.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어둠에 몸이 꿰뚫렸고, 엄청난 양의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피는 고스란히 레슬리의 위로 흩뿌려졌다.

차가운 몸 위로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레슬리는 잠시 피범벅이 된 제 몸을 한 번, 그리고 쓰러진 거대한 늑대를 한 번 바라보다가 숲의 그림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놔.”

아직 셀리스의 옷자락을 물고 있는 늑대가 공포로 얼어붙었다.

“셀리스를 놔.”

레슬리가 한 발 다가가자, 늑대가 멀리 물러섰다. 착 가라앉은 귀가, 그리고 다리 사이로 들어간 꼬리가, 거대한 늑대가 작은 소녀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끄으응.”

레슬리가 한 발 더 다가가자 늑대는 그대로 셀리스를 놓고 빠르게 숲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레슬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마리의 늑대 사체와 피로 엉망인 광경. 레슬리는 혹여나 셀리스가 깨어나 늑대들의 사체를 볼까, 셀리스를 끌고 강 위쪽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걷다가 늑대들의 사체가 있는 장소에서 먼 곳, 그리고 안전해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셀리스를 조심스럽게 눕혀 놓고는 레슬리는 그대로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레슬리가 강물에 들어가자마자, 푸른 강물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물을 끼얹고 손을 연달아 씻어 보았지만, 주변을 가득 메운 붉은 피는 점점 더 짙어졌다.

눈물이, 터져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아니야, 이게 맞았어.”

만약 늑대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셀리스는 늑대 무리의 한 끼 식사가 되었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죽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생명이 으스러져 버린 느낌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체온이 피와 함께 강물을 타고 사라져 가는 데도, 레슬리는 계속 강에 손을 담갔다.

“피는…… 차가운 물에 빨면 순식간에 빠지는데…….”

왜 이렇게 핏빛이 옅어지지 않을까. 왜 계속해서 피가 흐르는 것 같을까. 레슬리의 작은 몸이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왜 나는…….”

남들은 평생에 한 번 겪을 만한 이런 일이 왜 내게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걸까. 나름 조심한다고 해도, 어느새 또 휘말렸다. 막아 보려 해도 언제나 같은 결말이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도 항상 함께 휩쓸렸다.

엠로아의 사건이 떠오르며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흐윽.”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려고 했으나 물밀듯 아픈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질식할 것 같다. 레슬리는 숨을 헐떡였다.

“아, 찾았네요.”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슬리는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레슬리가 떠내려 왔을 법한 강기슭 위쪽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움직이기 편하게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여자는 강물 속에서 굳어 있는 레슬리를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은가요?”

그리고 레슬리를 훑었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안 괜찮아 보이지만요. 아, 여기 에펜타니 후보님도 계시는군요.”

데비엔은 강가에 누워 있는 셀리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셀리스 양에게 다가가지 마!”

레슬리의 외침과 동시에 셀리스의 뒤에 놓여 있던 거대한 바위가 깨져 나갔다. 데비엔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그녀는 다시 차가워진 눈동자를 휘며 아직도 강에 들어가 있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저 에펜타니 후보님을 치료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공녀님도 몸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나오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레슬리는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았다. 저 여자는 위험한 여자였다. 재판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던가.

레슬리는 급하게 강가로 걸어 올라갔다. 하지만 레슬리가 셀리스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데비엔이 빠르게 셀리스에게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발치에서 뻗어 나가 정확히 데비엔의 목을 노렸다. 데비엔은 예상했다는 듯 옅게 웃었다.

어둠은 정확히 그녀의 목에 닿기 전에 멈춰 섰다.

“아직 사람은 못 죽이시는군요, 공녀님?”

레슬리는 그 말에 흠칫 굳어 버렸고, 어둠은 서서히 레슬리 쪽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경험했는지 알고 있는 듯한 말투.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데비엔은 말을 이었다.

“그런 건 경험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진심으로 해 드리는 충고예요. 썩 좋은 기분이 아닐 테니까요.”

데비엔은 레슬리가 다시 어둠을 움직이기 전에 손을 뻗어 셀리스의 이마를 짚었다. 황금빛으로 시야가 물들고, 순식간에 셀리스의 안색이 훨씬 나아졌다. 푸르게 변하던 안색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고, 뺨에는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레슬리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자, 데비엔은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래 봬도 고위 사제랍니다. 공녀님은…… 제게 치료받는 건 원치 않으시겠죠?”

그러고는 천천히 레슬리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왕 충고를 해 드린 김에 하나 더 해 드릴까요.”

아직도 레슬리의 발밑에서 어둠이 일렁거리는 것을 상관하지 않는 듯 천천히 레슬리에게 걸어왔다.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데비엔이 살포시 웃었다.

“셀바토르 공작을 너무 믿지 마시길.”

“뭐……?”

“그녀는 잔혹한 여자니까요. 그녀가 혼란의 시대 때 얼마나 많은 이를 희생시키고 죽였는지 알고 계십니까.”

데비엔의 주름진 입가에 걸린 미소는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그리고 화나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누가 죽든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이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당신이 죽는 것도 감안할 분이죠.”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야!”

레슬리는 감정에 받쳐 소리 질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상냥하시고 강하신 분이야! 재판에서 증거를 조작하는 당신 따위가 감히 그런 말을 할 분이 아니라고!”

그 울부짖음에 데비엔은 하얀 이를 보이며 웃더니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증거 조작은 아이테라 공자도 했지요.”

데비엔은 손을 뻗어 레슬리의 뺨을 매만졌다. 마치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쓰다듬는 듯 조심스럽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저는 그저 공녀님을 생각해 하나의 충고를 하는 겁니다. 진심으로 말이죠.”

“진심…….”

“네, 사실 공녀께서는 모르고 있지 않으셨나요? 왜 셀바토르 공작이 그대를 아라벨라로 만들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 뒤를 공작님이 말씀해 주신 적 있으신가요?”

“…….”

“없나 보군요.”

그 말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발밑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불쾌하고, 거부하고 싶은 감각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 느낌은 레슬리가 한 번 겪었던 감각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와 엠로아…….’

사랑받고 싶었던 가족이 자신을 불구덩이에 넣었을 때, 그리고 그런 어두운 과거에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느꼈던 감각. 배신이었다. 그런 레슬리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데비엔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렇게 흔들면 될 일이었다. 친가족에게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그나마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이 소녀는 이제 배신당할까 봐 제 몸을 움츠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 아주 작은 틈을 헤집어 놓으면 아무리 견고한 관계라도 조금이나마 흔들릴 것이고, 그 흔들림은 자신의 주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리라.

“가엾은 공녀님. 쓰레기들을 피해 도망친 곳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괴물의 소굴이라니. 그간 달콤한 꿈은 꾸셨나요?”

데비엔은 레슬리가 무너져 내리리라 생각했다. 무언가를 처음 죽여 괴로워하는 이때 아픈 기억을 헤집어 놓으면 누구라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울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다 흔들릴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가 조금 이상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레슬리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덤덤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당신의 말 따위는 믿지 않아요.”

배신. 그건 레슬리에게 있어 큰 상처 중 하나였다. 행동거지는 조심스러워졌으며, 선뜻 남의 호의를 쉽게 믿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배신에서 레슬리가 하나 확실하게 배운 것이 있었다. 바로 셀바토르 공작저의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엠로아의 사건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스페라도 후작이었지만, 셀바토르 공작저의 사람들을 믿지 않은 자신 때문에 초기에 가볍게 끝날 일이 커졌다.

“나는 다시는 셀바토르 공작저의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어요.”

만약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저의 사람들을 믿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적어도 나를 호위한 레소 경과 반트 경이 아버지에게 혼나지는 않았겠지.’

그걸 생각하며 레슬리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레슬리는 고개를 들고 아직도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데비엔과 시선을 맞췄다.

“나는 한 번의 실수를 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들의 장단에 맞춰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오히려 데비엔이 지금 나타난 것이 레슬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적어도 셀리스는 데리고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 덕분에 아까까지 머리를 덮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데비엔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이내 휘며 반짝였다.

“생각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시군요.”

“셀바토르 공작님은 내 어머니니까.”

레슬리의 단호한 대답에 데비엔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어머니라. 그렇죠, 그분은 공녀님의 어머니시죠.”

자신이 졌다는 듯 두 손을 살짝 올린 데비엔이 쓰러져 있는 셀리스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충고는 진심이었답니다. 부디 마음속에 새겨 주시길.”

“거짓말쟁이에, 후작의 끄나풀인 당신의 말 따위 믿지 않아. 나는, 나를 구해 준 내 어머니와 내 가족들을 믿어.”

레슬리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데비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간절하게 믿고 싶으면 믿으세요, 공녀님. 당신의 최후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네요. 만약 제 말의 증거가 필요하다면 그녀의 오랜 친구가 보낸 편지를 찾아 읽어 보세요. 당신이라면 공작저 집무실 출입 정도는 손쉽겠지요.”

그러고는 레슬리가 걸어왔던 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가늘어졌다.

“금방 공녀님이 믿을 만한 분이 올 겁니다. 그분께 에펜타니 후보님의 상태를 다시 봐 달라고 하세요.”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다는 듯 데비엔은 숲속으로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저는 스페라도 후작 따위의 밑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오해를 받든 상관은 없지만 그건 좀 불쾌하군요.”

그는 너무 멍청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데비엔은 손을 살랑 흔들고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데비엔 말의 일부는 진실이었다. 그녀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발소리가 들려왔고 레슬리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닿았으니까.

“레슬리 양!”

곧 콘라드가 레슬리를 찾아냈다. 어떻게 움직인 것인지, 상처투성이에 늘 깔끔하던 하얀 제복은 핏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레슬리에게 다가오는 콘라드의 손에는 빛나는 마법석이 들려 있었다.

“콘라드 경.”

레슬리는 제 옆으로 다가오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데비엔도 그렇고 콘라드까지, 이렇게 자신을 이리 빨리 찾아낸 걸까.

레슬리의 상태를 훑어보는 콘라드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산기슭을 구를 때 생긴 상처와 늑대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퀸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다가온 콘라드는 레슬리의 손을 잡고 마치 기도하듯 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이 손을 타고 흘러 레슬리의 몸을 감싸 안았다.

멍도,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었다. 거기다 물에 빠져 버둥거리고, 급작스럽게 어둠을 움직이느라고 피로해졌던 몸이 한결 가벼워짐과 동시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신력을 너무 쓰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아까 셀리스를 치료할 때 데비엔이 쏟았던 것보다 더 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콘라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들고 웃어 보이더니 빠르게 제 망토를 벗어 레슬리의 몸에 걸쳐 주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산사태가 일어나 산짐승들이 날뛰면서 이리로 오는 바람에 너무 늦어 버렸어요.”

콘라드의 몸에 묻은 피는 전부 짐승의 피였나 보다. 그나저나, 산사태라고?

“산사태……였나요?”

레슬리의 상태를 황급히 살피던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쟁 지역에서 연이어 벌어진 산사태가 이 근방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 무너질 줄이야…….”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숲이 분쟁 지역과 가깝다고는 하지만,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거기다 데비엔도 왔다 가지 않았던가.

그런 레슬리의 눈빛을 읽었는지 콘라드가 말을 덧붙였다.

“수습 사제님들과 시누스턴 기사님 몇 분이 신전으로 급히 가셨으니, 곧 자세한 조사를 위해 사람이 파견될 겁니다.”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산사태든, 아니면 지금 나타난 데비엔이나 언제나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었던 엘리의 장난이든, 곧 밝혀질 것이다.

‘엘리는 그간 저지른 짓이 있으니까.’

또 모르지. 어딘가 불을 준비해 놓고 자신을 거기에 떨어트리려 했던 걸지도. 거기다 데비엔과 엘리는 같은 편이 아니던가.

레슬리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콘라드의 손을 잡았다.

“콘라드 경, 에펜타니 양을 봐 주실 수 있나요?”

데비엔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확인이 필요했다.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를 살펴본 콘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신력으로 치료가 된 것 같군요. 누가 다녀갔습니까?”

“데비엔 사제가 왔다 갔어요.”

레슬리는 덮고 있는 망토를 꼭 쥐며 눈을 찡그렸다.

“저는 그래서 그녀가 제 발밑을 무너트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콘라드가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콘라드 경, 경은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이렇게 빨리 찾아냈나요……?”

레슬리의 물음에 콘라드는 제 옷 속에서 아직도 빛을 내고 있는 마법석을 꺼내 레슬리에게 보여 주었다.

“루엔티 님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저에게 맡긴 것입니다. 위급 상황 시 레슬리 양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지요.”

“오라버니가 주셨군요.”

그러더니 원래 있던 자리라는 듯 손수건에 마법석을 감싸고는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마법석을 감싼 손수건은 아주 오래전 레슬리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레슬리 양, 사실은 저는 다른 곳을 먼저 들렀다 왔습니다. 그래서 조금 늦어 버렸지요.”

마법석이 처음 가리킨 곳으로 렌티우스와 달려왔을 때, 두 사람은 굳어 버렸다.

두 명의 소녀를 찾기 위해 갔는데, 발견한 것은 거대한 늑대 시체와 숲의 그림자까지 끌려갔던 흔적뿐이었다. 죽은 것은 두 마리. 하지만 콘라드는 땅 위에 흩어진 발자국으로 다섯 마리의 늑대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렌티우스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도대체…… 뭐가 이놈들을 공격한 거지?”

흔적은 다섯, 도망간 수는 하나. 하지만 두 마리는 없고, 두 마리는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한 마리는 거인이 집어 던진 것처럼 척추가 끊어져 있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무언가에 관통당했다.

“이 정도 크기의 늑대라면 적어도 기사 서넛이 같이 공격을 해야 할 텐데.”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레슬리와 셀리스의 흔적밖에 없었다. 렌티우스는 찢겨진 레슬리의 옷자락을 주워 들며 눈을 찡그렸다.

늑대의 사체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콘라드가 나지막이 렌티우스를 불렀다.

“선배님, 괜찮으시다면 돌아가서 사람을 불러와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부디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리고 콘라드는 어딘가 슬픈 눈으로 웃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은 입은 무거운 편이지요. 그 하르트 경도 친하게 지내는 분이니 믿을 만할 겁니다.”

레슬리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둠을 쓰는 건 셀바토르 공작가의 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혹시 모를 불이익을 고려해 셀바토르 공작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모두에게 함구령을 내렸고, 거기엔 레슬리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콘라드는 레슬리의 표정을 보고 조금 섧게 웃었다.

“저에게 뭔가를 감추고 계시는군요.”

늘 다정한 목소리였는데, 이번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게…….”

레슬리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콘라드가 먼저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숨길 만한 것이니 숨기신 것이겠지요. 일단 신전으로 돌아가…….”

“콘라드 경!”

콘라드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레슬리가 절박한 표정으로 콘라드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작게 말을 흘렸다.

“돌아가서, 돌아가서 다 말해 드릴게요.”

레슬리의 대답에 황금빛 눈동자가 동그래졌다가 곧 살짝 휘며 웃음을 머금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최초의 사제를 뽑는 2차 시험은 중지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후보들은 전부 귀족이었고, 그런 후보 중 두 명이 산사태로 큰 위험에 처했다. 후보들과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신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시험 중단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들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전에 머물러야 했다. 시험 종료일이 사흘 정도 남은 때에 벌어진 일이라 발표 날에 맞춰 신전으로 오는 후보의 가족들과 엇갈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직 최초의 사제들에 대한 발표가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려나.”

레슬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강에서 돌아온 지 하루가 넘었다. 그사이 콘라드는 조사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셀리스는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험이 중지됨과 동시에 신전에서 후보생들에게 제대로 된 방을 지급해 준 것과 신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했던 사용인과 호위들의 출입 역시 허락해 준 것이었다.

“아가씨!”

마델이 웃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델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포타주 수프와 샐러드 그리고 하얀 빵과 잼, 거기에 신전에서는 구할 수 없는 햄까지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신전 밖 마을 상점에서 마델이 따로 사 온 듯 보였다. 마델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정성스럽게 올리며 레슬리를 불렀다.

“어서 드셔야 몸 상태가 나아지실 거예요.”

이미 콘라드의 신력으로 몸은 다 나은 상태였지만, 마델은 레슬리가 걱정되는지 음식을 가득가득 받아 왔다. 레슬리가 먹기에 조금 많은 양이었지만 레슬리는 매끼 식사 때마다 접시를 전부 비웠다. 신전에 들어온 날, 마델이 레슬리를 보고 눈물을 터트린 탓이었다.

‘아, 아가씨. 제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소식을 들은 마델은 다급히 레슬리에게 달려왔고, 레슬리를 본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마델의 눈물을 처음 본 레슬리는 당황하며 마델을 토닥였다.

‘마델 울지 마. 응? 나는 괜찮으니까 울지 마.’

‘그, 그럼 제가 부탁하는 거 하나만 들어주세요. 아가씨이…….’

‘응, 응! 그럴게. 그러니까 울지 마, 마델.’

마델이 요구한 건 별것 아녔다. 충분히 잠을 자고, 가져온 음식을 전부 먹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 것. 단순하지만 어찌 보면 부탁이었고, 레슬리는 그걸 충실히 이행했다.

“맛있다.”

레슬리가 흰 빵을 따듯한 수프에 적셔 먹으며 미소를 흘리자 마델 역시 흡족한 듯 웃었다.

“그런데 공작님은 언제쯤 도착하실까요.”

간신히 전부 비운 접시를 즐겁게 치우며 마델이 고개를 기울였다. 셀바토르 공작 역시 다른 귀족들처럼 시험 종료일에 맞춰 신전으로 오는 중이었다.

“이제 곧 도착하시지 않을까.”

언제쯤 오시려나,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마시는데, 노크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공녀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재클렌이었다. 늘 단정하게 묶고 있던 갈색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짙은 눈 그늘이 져 있었다. 재클렌은 제 눈을 벅벅 문지르며 용건을 말했다.

“지금 최초의 사제와 아라벨라에 대한 발표가 열립니다. 부디 기도실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후보에게 마저 알리기 위해 재클렌이 방을 떠나자 레슬리는 바로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마델과 함께 복도로 나왔고 셀리스와 마주쳤다.

이제 완전히 나은 얼굴의 셀리스는 복도에 서 있었다. 레슬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슬리 양. 드디어 발표가 난다고 해요. 우리 가족은 오늘 도착한다고 했으니,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어요.”

집 이야기를 하는 셀리스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레슬리는 그런 셀리스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셀리스의 손수건은 여기 온 첫날 환자의 붕대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들었다. 나중에서야 붕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셀리스는 얼굴을 붉혔다.

레슬리의 손수건을 받아 든 셀리스는 눈물을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가, 감사해요.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네요. 레슬리 양도 그렇지요?”

“그럼요. 저도 가족이 어서 보고 싶어요.”

레슬리도 진심으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레슬리의 눈에도 조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잠시 둘은 눈물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레슬리 양, 조금 이따가 제가 우리 가족을 소개해 드릴게요. 저희 오라버니도 오면……. 좀 피하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요.”

오라버니의 이야기에 셀리스가 입을 쭉 내밀며 속닥거리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화답하듯 작게 속삭였다.

“저희 어머니도 소개해 드릴게요. 오늘 오신다고 했거든요.”

레슬리의 말에 셀리스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제, 제가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을 소개받아도 괜찮을까요?”

정말 놀란 듯 셀리스는 작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럼요! 셀리스 양은 제 친구니까요.”

그 말에 감동한 것인지, 아니면 우상 숭배를 하듯 좋아하는 셀바토르 공작을 실제로 만나게 돼서인지, 다시 셀리스의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레슬리가 다시 손수건으로 셀리스의 얼굴을 닦아 주자, 셀리스가 코를 훌쩍거렸다.

“맞다, 레슬리 양. 저는 조금 이따가 아라벨라의 자리에 레슬리 양을 추천할 생각이에요.”

“저를요?”

아라벨라가 되려면 추천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레슬리는 그 차이를 점수로 메꿀 생각이었다.

추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후보들의 태도는 순식간에 바뀌었고, 심지어 추천을 거래하자는 후보들도 나왔다.

솔직히, 추천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레슬리는 그 사이에 끼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은 아라벨라가 되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추천 제도가 있다는 말에 어제까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화를 내던 후보생은 환한 미소를 짓고, 대충 옷을 수선하던 후보생은 옷에 화려한 자수까지 놓아 주며, 피난민에게 죽을 먹여 주는 사람까지 생겨나자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확확 바뀌는 후보생들의 태도에 피난민들과 사제들 그리고 기사들은 물론 다른 후보들까지 눈을 찡그렸다. 추천을 얻으려다가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에 딱 좋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레슬리가 아무리 행동을 바꿔 보려고 해도 몸이 저절로 멈추었다. 이 방법은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레슬리는 원래의 태도를 고수하기로 했고, 대신 추천의 차이를 메꿀 방법을 찾아보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추천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그게 꼭 필요하다고 언급하지는 않았으니까.’

간신히 알아낸 것이 후보들의 행동에 매겨지는 점수였다. 재클렌은 점수로 후보 추천의 역전이 가능하다고 레슬리에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 점수를 얻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아, 레슬리는 더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갈 길을 정해 놨었는데.

놀라 눈을 깜빡이는 레슬리를 보며 셀리스는 눈물을 훔쳐 내며 작게 웃었다.

“그…… 저랑 친하게 지내 주셔서나 공작님을 소개해 주셔서 그런 건 아니에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셀리스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레슬리 양에게 말을 걸기 전부터 추천해 드리고 싶었어요. 늘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거기다 며칠 전에는 제 목숨을 구해 주셨잖아요.”

그리고 맑은 웃음을 흘렸다. 주근깨가 있는 뺨이 그리고 얇은 입술이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이 후보 중에는 레슬리 양만큼 아라벨라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

빠르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안에는 대다수 후보가 앉아 있었다. 기도실 안은 후보생과 사제 그리고 호위를 맡은 기사들만 출입할 수 있었기에 마델은 다른 후보들의 사용인들과 옆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레슬리는 제 자리로 걸어가며 기도실을 훑었다.

‘많이 기권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눈물을 터트리는 후보부터 계속 담당 사제에게 항의하는 후보 그리고 다 체념한 듯 앉아 있는 후보까지, 다양했다. 엘리 역시 그 사이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레슬리는 눈을 찌푸렸다. 데비엔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후작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 그건 진짜일까?

‘됐어. 어차피 2차 시험에 붙어서 최초의 사제가 되겠지.’

아렌도 황자의 힘이 있으니까. 분명 엘리는 그렇게 되겠지. 그렇지만 이제 엘리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을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레슬리를 포함한 모든 후보가 자리에 앉자, 피곤해 보이는 사제들 사이에 서 있던 데비엔이 앞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녀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고, 시험은 중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간 여러분이 보여 준 희생과 헌신으로 최초의 사제들을 뽑아 신께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아직은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후보들을 보며 생긋 웃은 데비엔은 말을 이어 갔다.

“지금부터 총 20분의 이름이 불릴 겁니다.”

데비엔의 말에 벽 쪽에 서 있던 재클렌이 명단을 가져와 크게 소리쳤다.

“먼저,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가장 먼저 레슬리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됐다. 레슬리는 작게 주먹을 쥐었다. 아라벨라로 가는 첫 관문은 통과했다.

“그리고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

몇몇의 이름이 불리고, 셀리스의 이름이 불렸다. 레슬리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뒤에 앉은 셀리스가 다시 눈물을 터트리는 게 보였다.

줄줄이 사람들의 이름이 불렸고 그때마다 후보들 사이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마지막으로는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엘리의 이름이 울려 퍼지자, 웅성거림이 기도실 전체를 뒤엎었다. 호위로 들어와 있는 성기사들조차 눈을 찡그리며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의가 있습니다!”

호명이 끝나자마자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엘리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저런 범죄자가 최초의 사제 자리에 오를 수가 있습니까!”

남자의 말에 동의하듯 호명되지 못한 이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거기다 제대로 시험이 이뤄지지도 않았습니다. 공정하게 평가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실 겁니까!”

웅성거림이 점점 강해졌다. 외치는 자들의 눈은 엘리가 떨어지면 자신들이 붙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재클렌이 난처한 얼굴로 데비엔을 바라보자, 옅은 미소를 머금은 데비엔이 소리 없이 걸어 이의를 제기한 남자 앞에 섰다.

“평가는 공정하게 이뤄졌습니다.”

어딘가 사람을 억누르는 듯한 분위기에 남자는 다시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담당 사제들뿐만 아니라, 호위로 따라붙은 기사분들 그리고 피난민들에, 신전에 기도하러 온 신도들까지 평가에 참여해 주셨지요.”

데비엔의 말에 후보 몇몇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간 사제들만이 평가하는 줄 알았더니만 숨겨진 평가자가 더 있었다.

“그분들은 자신 나름대로 후보생 여러분들의 행동을 평가하고 최초의 사제가 되실 분을 추천했습니다.”

이어지는 데비엔의 말에 레슬리는 작게 입을 벌렸다.

“지금 이 말로, 떨어지신 분들은 자신이 왜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더니 데비엔은 남자의 어깨의 손을 올리더니 조금씩 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부디 신의 결정에 따라 주시길.”

어깨를 누르는 힘이 강한 힘은 아닐 텐데도 남자는 얼굴을 굳힌 채 순순히 자리에 앉았고, 후보들 한가운데에서 데비엔이 생긋 웃었다.

“시간을 잡아먹었군요. 그다음은 여러분에게서 아라벨라의 추천을 받겠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분을 추천해 주시면 됩니다. 이 추천은 다른 추천보다 높은 점수가 매겨집니다.”

하지만 데비엔의 말에 쉽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슬그머니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누군가를 추천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라벨라가 되면 어쩌지, 그런 눈치였다.

떨어진 이들은 자신이 되지도 못할 것, 아무도 추천하지 않겠다는 심보로 팔짱을 끼고 데비엔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요!”

그런데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새벽에 한 번,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눈물을 펑펑 쏟아 얼굴과 눈가가 붉어질 대로 붉어진 셀리스였다.

“저, 저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을 추천합니다! 공녀님은 다른 분보다 더 열심히 시험을 치르셨어요. 아라벨라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 말씀이시군요.”

데비엔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 다른 분 중에는 셀바토르 공녀님을 추천하실 분이 없나요?”

잠시 다시 침묵이 흐르는데, 누군가가 구석진 자리에서 손을 들었다.

“저 역시도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을 추천합니다. 공녀님은 보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충분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레슬리는 그 추천을 들으며 경악했다. 추천의 내용이 이상한 게 아녔다. 그저 자신을 추천한 사람이 이상했을 뿐.

밀색 머리를 땋아 단정하게 정리한 엘리가 웃으며 레슬리를 추천하고 있었다.

“공녀님이야말로 아라벨라 자리에 어울리는 분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엘리의 말에 한순간에 기도실이 놀람과 경악 그리고 침묵으로 물들었다. 추천을 마친 엘리는 다른 사람이 놀라든 말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 머리를 매만지며 작게 말을 흘렸다.

“이미 아라벨라는 결정된 것 같네.”

작지만, 엘리가 만든 침묵으로 남들이 듣기엔 충분한 목소리. 후보들의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저도 셀바토르 공녀님을 추천합니다. 공녀님은 그간 모든 일을 앞서 하셨으니 아라벨라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갑자기 침묵을 깬 건, 엘리 근처에 앉아 있던 한 후보생이었다.

레슬리가 당황해 후보생을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과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사람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잘 부탁한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 표정에 레슬리는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두 개의 추천을 받았고 엘리의 말대로 거의 아라벨라에 확정되었다. 그러니 나머지 후보들은 지금에서라도 자신을 추천함으로 얻을 수 있는 걸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라벨라는 드높은 명예를 가진 자리였으니까, 옆에 붙어 있는 걸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자신은 셀바토르였다.

연이은 추천이 거대한 기도실을 가득 메웠다.

“저 역시도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을 아라벨라 자리에 추천합니다!”

“셀바토르 공녀님 외에는 아라벨라가 될 만한 분이 없다고 오래전부터…….”

“진정하세요, 여러분.”

휘몰아치는 추천을 가라앉힌 것은 데비엔이었다. 아직 후보들 가운데에 앉아 있던 그녀가 웃자, 너도나도 손을 들고 있던 후보들은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제자리에 앉았다.

“이제 아라벨라는 정해진 것 같으니…….”

“브로치를 건네면 되겠군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목소리에 데비엔이 입을 다물었다.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 아닌, 사제들이 다니는 통로 쪽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고 데비엔은 못 말리겠다는 듯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지?”

레슬리의 옆에 서 있던 재클렌이 통로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그건 레슬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레슬리의 애를 태웠다. 어디서 들었더라.

“제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요?”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연하늘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한 중년 여성이었다. 헤이즐넛색 눈동자를 빛내며 웃는 여성은 레슬리도 아는 사람이었다. 고작 몇 번 마주친 사람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메데이아 태후 폐하.”

데비엔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기도실에 모여 있던 사람 전부 그녀에게 예를 취했고 그건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레슬리보다 지위가 높은 단 네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편하게들 있어도 좋아요.”

메데이아는 놀란 후보들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그러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후보들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여기에 황후 대신 여러분들에게 브로치를 달아 주러 왔습니다.”

브로치. 최초의 사제들과 아라벨라가 된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사제들이 쓰던 물건의 모양을 따서 만든 것을 징표로 내려 주었다. 이번엔 아라벨라가 썼다고 전해지는 브로치인 모양이었다.

메데이아의 말에 한 사제가 붉은 벨벳에 싸인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지고 자색 보석이 박혀 있는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브로치에는 푸른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단 하나에는 황금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 브로치를 메데이아가 집어 들자 어느새 옆에 온 재클렌이 레슬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나가 보세요, 공녀님.”

재클렌의 재촉에 레슬리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어가 메데이아의 앞에 섰다.

‘좀 불편하단 말이야.’

신년회 때만 보는 사이였지만, 이상하게 레슬리는 메데이아가 불편했다. 황제 폐하는 오히려 편안했었는데.

‘후작과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일까.’

후작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메데이아가 태후 폐하가 아니라 데비엔 고위 사제인데. 그런 레슬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데이아는 생긋 웃으며 레슬리의 가슴 쪽에 천천히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원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 것을 축하하면서 정식으로 브로치를 달아 줘야 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렇게 주게 되네요. 용서하세요, 공녀.”

메데이아의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모두가 태후 폐하의 심정을 이해할 겁니다.”

“그렇군요. 몸은 좀 괜찮은가요?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들었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슬리는 메데이아의 계속된 물음에 땀을 흘렸다. 그녀는 레슬리에게 너무도 관심이 많았고, 거기다 공작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어머니께 말씀드려 행사에 종종 나와 주세요. 나는 공작님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머니를요?”

“그렇답니다. 우리는 비슷한 동년배니까요. 관심이 갈 수밖에요.”

그러더니 자신이 가지고 온 연보랏빛 꽃 한 송이를 브로치 사이에 끼워 달아 주었다. 풍성한 겹꽃 때문에 브로치가 조금 가려졌지만, 메데이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레슬리가 몸을 돌려 모두를 바라보게 하고는 목소리를 키웠다.

“최초의 사제들이 된 여러분,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분들. 모두가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시험에 고생했습니다. 거기다 시험의 끝은 어설펐지요.”

레슬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메데이아는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곳에 남아 있는 모두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을 축복하기 위해, 그리고 사죄의 마음을 담아 황궁에서 작은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그리고 강조하듯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이 일은 황제 폐하도 승낙한 일이랍니다.”

메데이아의 말에 후보생 전원의 얼굴에 환호가 깃들었다.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태후 혼자의 초대라면 갈지 말지 고민이 되겠지만, 황제마저 허락한 자리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후보생들이 즐거워하며 작게 떠드는 걸 보며 메데이아는 아직 제 손에 잡혀 있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꼭 와 주시길 바랍니다.”

레슬리를 바라보는 메데이아의 눈동자가 옅게 휘었다.

***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신전을 향해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말을 꺼낸 사람은 사이레인이었다. 사이레인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제 머리를 연신 넘기면서 이를 갈았다.

“도대체 신전 새끼들은 어떻게 행동하기에 남의 귀한 딸을 데려가서……. 뭐, 산사태?”

신전의 편지는, 공작이 읽을 틈도 없이 사이레인의 손에서 산산이 찢어졌다. 사이레인은 도끼만 제 손에 들려 있다면 이딴 시험을 고안해 낸 놈의 목을 지금 즉시 쳐 버리겠다는 듯 몸을 덜덜 떨었다.

“여보.”

그러다 사이레인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보, 레슬리에게 아라벨라를 포기하게 하면 안 돼?”

“…….”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답 없이 그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이레인은 다시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대답이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히 들었다.

‘안 돼.’

사이레인은 자신의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을 거라는 것도. 옳지 않다면 아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우리 딸인데…….’

그 아이를 귀하게 키우고 싶었다. 조금의 위험도 없이 귀하게 키우다가 원하는 일을 고르면 그 길로 보내 주고 싶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은 앞길에 사이레인은 다시 한숨을 크게 흘렸다.

“사이.”

나지막이 부르는 제 애칭에 사이레인이 고개를 들자, 공작이 섧게 웃고 있었다.

“지금 막 결정했어.”

사이레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자 공작은 버릇대로 제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레슬리에게 전부 말할 거야.”

원래 셀바토르 공작은 한 명의 아이를 입양해, 아라벨라를 만든 후 메데이아의 속셈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메데이아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몰랐다. 그랬더라면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었더라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도와주고 적당한 부모를 찾아 주었겠지.

그저 메데이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아라벨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만, 그것만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꽃이 일부러 말을 흘린 것 같지만.’

작게 한숨 쉰 공작이 제 남편을 보며 말을 이었다.

“레슬리에게 다 말해서, 그 아이가 하고 싶지 않다면 포기할 수 있게 도와줄 거야.”

싫다고 하면, 무섭다고 하면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공작은 다시 섧게 웃었다.

그런 자신의 아내를 보며 사이레인은 놀란 듯 말을 흘렸다.

“그…… 에피인가 뭔가 하는 전염병은 어쩌게?”

“무슨 수가 생기겠지. 목숨값을 치르고 자원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의식에 집어넣든가. 그것도 아니면 아직 테펜텔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았으니 그걸 기대해 봐도 되겠지.”

그것도 아니면 루엔티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같이 오지 못한 루엔티는 벌써 스무 날이 넘게 마법사의 저택에 틀어박혀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이트바나 외에는 에피알테스에 관해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긴 나라가 없었다.

“여보.”

사이레인은 몸을 움직여 셀바토르 공작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딘가 지쳐 보이는 제 아내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나도 있잖아. 내가 얼마나 강한지 여보야도 알지? 정 안 되면 내가 신전 문을 뚫을게.”

기억나지. 셀바토르 공작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의 시대 때 마주친 제 남편은 얼마나 강했던가. 테펜텔 역시 사이레인에게 지고 말았다는 소식에 흥미를 느꼈으니까. 얼마나 강한지 모를 리가 없지.

“든든하네.”

“그치? 내가 좀 강하잖아. 여보야만큼은 아니지만.”

사이레인은 제 아내를 보며 씩 웃었다.

“그래.”

셀바토르 공작도 제대로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더니 방법을 찾는 듯 다시 팔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사이레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누스턴 신전의 끝머리가 보이고 있었다.

***

“마델, 어서.”

동그란 스툴 위에 앉은 레슬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마델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아가씨. 다 되어 가요.”

마델은 레슬리의 은빛 머리를 세심하게 땋아 리본으로 꾸미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방 안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레소가 창밖을 보다 입을 열었다.

“아, 이제 들어와도 되는 시간인가 봅니다. 마차가 하나씩 들어오네요.”

레소의 말에 레슬리의 발 움직임이 격해졌다.

“마델, 아직이야?”

“잠시만요……. 다 됐어요!”

마델이 레슬리의 몸에서 손을 떼자마자 레슬리는 튕기듯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브로치요! 아라벨라의 브로치! 이걸 잊으시면 안 되죠.”

마델은 정성스럽게 레슬리의 가슴팍에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레슬리는 신전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 신전 입구로 달리자, 이미 신전 입구는 가족들을 만난 후보들로 가득했다. 레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는 셀바토르 공작을 찾아냈다. 고작 스무 날 정도를 못 봤을 뿐인데 벌써 눈물이 나려고 하고 있었다.

“어머니!”

걸음을 늦춰 조용히 공작에게 다가간 레슬리가 장난치듯, 그리고 조금은 즐겁게 셀바토르 공작에게 안겼다.

“왔구나.”

공작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오랜만에 제 품으로 돌아온 레슬리를 꼭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레슬리는 어리광 부리듯 그 품에 안겨 볼을 비비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공작과 이야기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제는 레슬리에게도 낯이 익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몇몇 사제들이 서 있었다.

‘재정을…… 담당하시던 분이었나.’

늘 어지럽게 늘어진 양피지를 펼쳐 두고 끙끙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아쉽지만 공작의 품에서 빠져나온 레슬리는 살짝 무릎을 굽혔다.

“아…… 죄송해요. 말씀을 나누는 중인지 모르고 제가 실례를 했네요.”

“아닙니다, 공녀님. 이야기는 이미 끝난 것을요.”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사제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뒤에 서 있던 사제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작님, 기부 건은 어떻게 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기부가 여기서 끊기면 피난민들이나 분쟁 지역을 도우러 사제들을 보내기가 힘들어집니다.”

기부금?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떨어지고 싶지 않은 레슬리가 공작의 옆에 붙어 눈을 깜빡였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런 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낮게 말을 흘렸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차갑게 가라앉은 암녹색 눈동자가 레슬리에게서 떨어져 사제에게 닿자, 사제는 두 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 아니, 그건 절대 아닙니다, 공작님.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말씀을 올리는 거지요.”

어딘가 비굴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수도에 있는 중앙 신전을 포함, 분쟁 지역 근처에 있는 신전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부금을 받은 곳에는 시누스턴 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귀족들과 기도를 올리러 온 평민들이 내는 기부금도 있지만, 셀바토르 공작가가 내는 기부금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게 걱정되어 사제는 공작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뛰쳐나온 것이었다.

공작은 레슬리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 요구는 무시당했고, 내 딸은 위험에 처했지. 시험에 공정한 것은 좋지만 후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건 다른 의미이지 않은가?”

“그, 그렇지요.”

사제는 이제 연신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기부금은 그대로 달라?”

“……그 일에 대해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공녀님의 안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른 이들도 아니라 테센트루아 기사단장님과 성기사님이 호위를 맡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거기다가 시누스턴 기사님들도 호위로 따라가셨지요.”

“헛소리를!”

뒤쪽에서 하르트와 이야기를 하던 사이레인이 그 말을 용케 듣고 앞으로 나섰다. 잔뜩 열 받은 것인지, 청록색 눈동자가 번뜩이며 가련해 보이는 사제를 잡아먹을 듯 응시했다.

힉. 작게 소리를 내며 사제가 숨을 삼켰고, 그건 뒤에 서 있던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슬금슬금 한 발씩 뒤로 물러나다 보니 한 사제 홀로 사이레인에게 맞서게 되었다. 안 그래도 거대한 사이레인의 몸이 연약해 보이는 사제에 비교되어 더욱 커 보였다.

“신전에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가 강에 빠트리는 것인가!”

사이레인의 낮은 목소리가 신전 정문을 가득 메웠다.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이레인을 보고 슬금슬금 뒤로 몸을 물렸다. 한 아이가 신전에 곰이 나타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사이레인 님, 부디 진정을…….”

“진정을 원하면 이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게 했어야지!”

이젠 사제는 기절할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이.”

보다 못한 공작이 앞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남편을 말리자, 사이레인은 아직 제 할 말을 다 못 했다는 듯 사제를 무섭게 응시하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일단 기부금 건은 생각을 더 해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공작님. 부디 너그럽게 생각해 주시길 빌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사이레인이 투덜거렸지만, 공작이 한 번 바라보자 입을 삐죽 내밀더니 공작의 뒤로 물러나 아예 하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제들이 신전으로 돌아가자마자 레슬리는 다시 공작의 품에 쏙 안겼다.

“네가 오기 전에 이야기를 끝내려고 했는데 늦어 버렸구나.”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토닥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레슬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물진 눈으로 웃어 보였다.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단다.”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어쩐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옅게 웃었다. 공작의 눈이 레슬리의 가슴 쪽에 달린 브로치에 닿았다.

“아라벨라가 됐구나.”

“네!”

레슬리는 공작이 잘 볼 수 있게 한 발자국 떨어져 제 브로치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어머니께 말해서 같은 방을 써야지. 종일 이야기하고 밤새 이야기해도 하고 싶은 말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우리 딸이야. 이 아버지는 네가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단다.”

아까까지 사제를 무섭게 노려보던 청록색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윽고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귀족들이 놀라 작은 숨을 흘리는 게 느껴졌다.

하르트가 슬그머니 사이레인에게 제 손수건을 내밀었고 순식간에 손수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정말 잘했구나.”

공작은 웃으면서 레슬리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네가 자랑스럽단다, 내 딸아.”

그래, 이 말이 듣고 싶었다. 레슬리는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다시 흐르는 것을 손수 훔쳐 준 공작이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이제 집으로 가자꾸나. 너무 오래 떠나 있었어. 제나는 물론이고 네 두 오라버니도 시름시름 앓고 있단다. 몇 날 며칠을 여기 오고 싶다고 얼마나 조르던지. 일이 있어서 늦게 출발했으니 가는 길목에서 마주칠 수 있겠군. 아니, 확실히 마주칠 거야.”

기뻐라. 레슬리는 그렇게 대답하며 옅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이레인이 안타까운 듯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제 팔을 벌렸다.

“레, 레슬리. 아버지에게도 와 주렴.”

레슬리가 웃으며 팔을 벌리자, 사이레인은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눈물 흔적이 남은 얼굴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예쁜 딸! 도대체 며칠이나 이 귀여운 얼굴을 못 봤던 건지.”

사이레인은 레슬리의 뺨에 제 얼굴을 부비며 울먹거렸다. 수염 때문에 조금 따가웠지만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많이 힘들었지? 어서 가자꾸나. 작은 파티를 열 거야.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하고 나왔거든.”

사이레인은 그 뒤로도 얼마나 준비했는지 크게 떠들면서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레슬리의 짐을 챙겨 나온 마델과 레소, 반트가 그 뒤를 따랐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킬 준비를 하자, 레슬리는 다급히 사이레인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무슨 일이니?”

사이레인이 발걸음을 멈추자 레슬리는 사방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안아 들고 있는 탓에 신전 입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기는 편했다.

“저, 친구를 사귀었어요. 그래서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친구? 설마 남자는 아니지, 레슬리?”

“아니에요.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 양이에요. 자수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아, 저기 있다. 셀리스 양!”

레슬리가 크게 소리치자, 자신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던 셀리스가 고개를 돌려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레슬리 양.”

사이레인은 레슬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가까이 다가온 셀리스와 시선을 맞추고는 씩 웃었다. 레슬리의 친구란 말에 잘 보이려고 나름 환하고 무해한 웃음을 지은 사이레인이었다. 거기다 지금 그는 레슬리가 사귄 새 친구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안녕, 나는 레슬리의 아버지란다.”

하지만 셀리스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덜덜 떨면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에펜타니 백작가의 장녀 셀리스 튜더 에펜타니예요…….”

간신히 자기소개 하는 목소리마저 가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공작의 남편인 만큼 예를 취해야 했지만, 셀리스는 그것도 잊어버린 듯 굳어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열광적인 팬인 그녀는 이미 사이레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종종 지식과 실제의 경험은 큰 차이가 나곤 했다.

특히 사이레인의 얼굴이 그러했다. 번뜩이는 청록색 눈동자, 우락부락한 덩치에 2미터에 가까운 키. 거기에 얼굴엔 상처까지.

더해서 사이레인이 오늘 입은 옷은 마치 사신 같은 검은 옷이었다. 모든 게 다 더해지고 나니 확실히, 무서워 보일 만했다.

‘나도 처음엔 아버지를 무서워했었지.’

놀라서 베스라온의 뒤로 숨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안 되겠다, 내가 나서야지. 레슬리가 셀리스에게 다가갔다.

“셀리스 양. 우리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 아니에요.”

손을 꼭 잡고 셀리스를 다독였다.

“아버지는요, 음…….”

뭐라고 해야 셀리스가 진정할까. 레슬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멋지신 분? 이건 어머니랑 겹치니까 다른 말은 없을까. 조져 버린다? 이건 쓰면 안 되는 말이잖아. 셀리스 양까지 물들일 수는 없어. 아니면 강한 분? 용병이지만 혼란의 시대 때 열심히 활약한 전쟁 영웅?

한참을 고민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단어에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셀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귀여운 분이세요!”

그 말에 셀리스의 눈동자마저 양옆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귀, 귀여운 분이요?”

“네에, 아버지는 귀여운 분이에요!”

셀리스의 눈동자가 다시 사이레인을 향했다. 반트, 레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셀리스와 레슬리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사이레인이 씩 하고 웃어 보였다.

“그렇군……요.”

셀리스는 다시 눈을 바닥으로 내리며 대답했다. 아직도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레슬리는 당황해 눈을 또르륵 굴렸다. 왜 이 말에도 여전히 무서워하는 걸까. 아버지는 귀여운 분인데.

‘일단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겠다.’

그때 레슬리의 시선에 공작이 들어왔다. 됐다! 이거야! 레슬리는 시선을 밑으로 내린 셀리스를 잡고 셀바토르 공작의 앞에 섰다.

“셀리스 양, 이분은 저희 어머니세요! 어머니, 제 친구 셀리스 양이에요.”

“세, 셀바토르 공작님……. 실물……. 시, 실물…….”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셀리스의 팔을 잡은 손이 무거워졌을 뿐.

“……?”

레슬리가 고개를 돌리자,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기절한 셀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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