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9)

#12

“어서 오십시오, 셀바토르 공녀님.”

공작저에서 시누스턴 신전까지는 일주일이 걸렸는데, 레슬리에게 이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시누스턴까지 가는 길이 아름다웠던 탓도 있지만, 신전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레슬리의 마음이 복잡해졌던 탓이었다.

마차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긴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사제가 레슬리를 반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앞으로 셀바토르 공녀님을 담당할 신의 종, 재클렌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예요.”

레슬리의 인사에 재클렌은 미소로 화답하더니 레슬리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마델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닿아 있었다.

“편지에도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공녀님 외 다른 분들은 신전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별의 시간이었고, 마델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다녀올게.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어 줘.”

“네, 아가씨. 끝나고 나면 다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끝나자마자 제가 제일 먼저 마중 나올게요.”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내세요. 바로 튀어나오겠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아가씨.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마델과 반트, 레소가 차례대로 말을 꺼내며 레슬리를 다독였고, 하르트는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가씨는 잘 하실 겁니다. 셀바토르니까요.”

“맞아, 나는 셀바토르지.”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린 레슬리의 눈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자신은 셀바토르였다. 공작의 말을 빌리자면, 황제에게도 황족에게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가문. 그러니 시험 따위는 가뿐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요, 모두들.”

그 말을 끝으로 사제가 신전 안으로 안내하겠다며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제의 뒤를 따라 레슬리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옮겼다.

하나둘 시선이 떨어졌고, 하르트의 눈길이 신전으로 들어가는 레슬리의 모습에서 가장 늦게 떨어졌다. 혼자 레슬리를 두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지나가는 사제를 한 명 잡고 뭔가를 말한 후에야 하르트는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슬리가 잠시 몸을 돌려 그런 네 사람을 바라보자 재클렌 사제가 웃으며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사용인분이나 기사님들하고 친하신 모양입니다.”

“네, 같은 저택에서 사니까요. 다들 좋은 사람이라서 안 좋아하기가 힘들어요.”

모두가 자신이 용기 내어 만든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레슬리는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었다.

자신을 재클렌이라 소개한 사제는 레슬리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말을 꺼냈다.

“여기서 규칙을 다시 한 번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공녀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으니 자잘한 모든 일은 스스로 해 주셔야 합니다. 식사는 저희가 만들어는 드리나, 가져가는 것 그리고 드시고 난 후 식기를 씻는 것도 모두 공녀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옷 역시 저희가 지급해 드리는 옷이 있으니 그걸로 갈아입어 주십시오. 오후에는 잡다한 일을 하게 됩니다. 기도 시간은 하루 세 번입니다. 새벽 기도와 오후 기도 그리고 저녁 기도가 있지요. 빠지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사제는 몇 가지를 더 늘어놓았다. 기상 시간도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고, 일과가 전부 정해져 있다는 말도 있었다.

일과를 들으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더욱 힘든 일정이었다. 사제가 지금 줄줄이 늘어놓고 있는 일과는 가장 강도 높게 그리고 혹독하게 스스로를 단련시킨다는 루렌 사제들의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과연 이 시험을 귀하게 자란 귀족들이 이겨 낼 수 있을까.

‘이래서 포기할 수 있다는 거구나.’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순간에도 재클렌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같은 수험생끼리 불화가 일어나면 언제든 후보 자리에서 제명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포기하시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세 번째 모퉁이 방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명패에 제 이름이 쓰여 있으니 헷갈리시지 않을 겁니다.”

사제의 말에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라니, 그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아라벨라가 돼서 계약을 바꿀 거니까.

레슬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재클렌 사제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다면 지금 말해 주십시오, 공녀님.”

“무슨 일이 생기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사제님께 말씀드리면 되나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공녀님을 담당할 테니까요. 시험을 전체적으로 담당하는 분은 따로 있으니 그분께 말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더니 재클렌 사제는 막 지금 뭔가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호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개인 호위가 한 명이지만, 테센트루아 기사단 전체가 신전에 와 있으니까요. 그리고 특별히 공녀님의 호위에는 더욱 신경을 쓸 예정입니다.”

콘라드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질문을 더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기도실 앞에 서 있었다. 재클렌 사제는 방긋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아라벨라를 뵐 수 있을 것 같아 기쁩니다.”

제대로 된 아라벨라. 레슬리가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사제가 기도실의 문을 열었고, 이미 도착해 기도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이목이 레슬리에게 집중되었다.

기도실에는 못해도 서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시선이 날아와 레슬리에게 박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을 보며 레슬리는 침을 삼켰다. 그간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행사에 얼굴을 내민 적은 있지만, 혼자는 아녔다. 그래서 이렇게 이목이 쏠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시 칼날 같은 시선들에 주눅이 들었지만, 이내 레슬리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셀바토르야.’

이 제국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위치이자, 단 한 명뿐인 공녀. 그러니까 주눅 들 이유는 없었다. 레슬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그리고 작은 속닥임이 레슬리의 발걸음을 뒤따라갔다.

“어머나.”

“셀바토르 공녀님.”

“저번 사건으로 분명…….”

“제가 분명 여기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했었죠.”

“저번에 티 파티 초대장을 보냈는데…….”

“이번에야말로 친분을 다져야 해요.”

부러움과 시기, 질투, 한숨, 선망……. 여러 감정이 레슬리의 발밑을 맴돌았다. 하지만 다들 레슬리를 보며 수군거릴 뿐 그 누구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고, 이어지는 말에 레슬리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라펜드 자작가와 파레볼 백작가가…….”

아. 분명 며칠 전 마델과 떨며 들었던 가문이었다. 그렇구나.

청혼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몇 개의 가문을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만 하고 다가오지 못하는 게 이해가 갔다. 어쩐지 뒤에서 루엔티가 사람들을 노려보는 기분이 들어 레슬리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러던 중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엘리였다.

누군가의 눈에 들어올까 봐 가장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는 레슬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작게 뭔가를 중얼거렸다. 분명 자신을 향한 욕과 저주겠지.

‘스페라도 후작가가 망해서 아렌도 황자에게 몸을 의탁했다고 들었는데.’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엘리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4년 전 신레프 신전 지하 교도소에서였나. 신전 측에서는 엘리와 레슬리를 다른 방에서 시험을 보게 했으니까.

확실히 마음고생을 했는지, 황궁에서 4년을 지냈음에도 엘리의 얼굴은 그 지하 감옥에서 봤을 때와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 꼴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 낸 꼴이었으니까.

그때 레슬리의 시선을 따라 엘리를 발견한 한 남자가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에게 작게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이런, 과거의 영애 아니신가.”

비웃음이 섞인 한마디에 엘리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레슬리를 향했던 속살거림이 이제는 엘리에게 닿았고, 엘리는 레슬리처럼 그 속삭임을 이겨 내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며 손에 뼈마디가 두드러질 정도로 제 손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레슬리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녀가 끼어들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현 상태는 지금 엘리의 상태만큼이나 엉망이다. 가주인 스페라도 후작은 죄를 짓고 사라진 지 오래였고, 유일한 후계는 성인이 되었음에도 지은 죄가 있어 후작가가 아닌 황궁에 머물렀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데리엘 후작 부인은 모든 의무와 책임을 거부한 채 친정에서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으로 황실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스페라도 혈육 중 한 명인 테론을 후작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테론은 당연하게도 후작 자리를 거부했다. 수도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자신을 학대했던 사람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도 거부감이 든다고, 사이레인의 손을 잡고 간 레슬리에게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레슬리를 배웅 나온 테론은 웃으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내 직업과 내 아내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잃을 생각이 없단다. 지금 이대로도 나는 행복하단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놀러 오라는 말과 매번 보내 주는 선물이 고맙다는 말을 듣고 레슬리는 다시 수도로 올라왔었다.

‘그래, 후작가 따위보다 삼촌이 행복하다는 게 중요하지.’

레슬리는 삼촌을 만나러 서부 탄광 지역을 갔을 때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테론은 더러운 곳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곳은 따듯한 곳이었다.

그렇게 스페라도 후작의 자리는 비어 버렸다. 스페라도 후작 저택에는 노집사 한 명만이 남았고, 물론 그는 제대로 된 대리인이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었다.

분명 스페라도 후작가는 이대로 두면 몇 년 내에 사라질 것이다. 후작가가 사라지면 귀족 간의 미묘한 균열이 생기겠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레슬리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몰락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망하는 걸 바란 건 아닌데…….’

후작도, 후작 부인도, 그리고 엘리도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후작은 도망쳤고, 후작 부인은 자신도 피해자라며 친정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엘리의 벌은 뒤로 미뤄져 지금까지 형 집행을 끌고 있었다.

‘일단 후작부터 찾아서…….’

레슬리가 도망친 후작을 떠올리며 이를 가는데, 재클렌이 한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가 공녀님의 자리입니다. 기도 때 늘 이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재클렌 사제가 안내한 자리는 가장 앞줄, 상석이었다. 수도 신전이라면 황족들과 아이테라 대공가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가만 앉을 수 있는 자리.

레슬리가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니 다들 제 가문 위치에 맞는 자리를 안내받은 듯 보였다.

‘……황실과 신전에서도 인정한 엘리의 위치가 저기로구나.’

자신은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상석 그리고 엘리는 가장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구석 자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하네.’

분명 이런 상황에서 엘리가 소리를 안 지를 리가 없는데, 머리채를 잡으러 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레슬리가 엘리의 위로 올라가는 걸 그 무엇보다도 못 견뎌 하던 그녀지 않던가. 거기다 그간 황궁에서 살면서 쌓인 울분을, 자신을 보면 이성을 잃고 풀러 올 줄 알았는데.

‘4년 새 성격이 바뀌었나?’

그럴 리가 없다. 재판에서 진 상황에서도 다시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든 인간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레슬리는 아까 재클렌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후보끼리 싸우면 제명당할 수 있다는 말.

그제야 엘리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지 않은 게 이해가 되었다. 최초의 사제들 시험은 이제 엘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었으니까. 최대한 몸을 사리는 거겠지.

레슬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한 무리의 사제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후보 여러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가장 앞에 서 있던 사제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얼음과도 같은 옅은 눈동자로 웃는 여자.

‘실례하겠습니다. 어린 자매님.’

4년 전 귀족 재판에서 벌어졌던 일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저 사제가 자신의 손을 잡고 그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그때 느꼈던 고통이 다시 몸을 타고 올라왔다.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떨었다.

“여러분들을 보름간 모시게 될 미천한 신의 종, 데비엔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비엔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레슬리에게 닿아 있었다. 데비엔의 얇은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나, 나는 못 해! 더 견딜 수가 없어!”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더니 제 손에 들린 천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한 사제가 크게 한숨을 쉬더니 종이를 가져와 지금 달려간 남자의 이름을 찾아 선을 찌익 그었다.

“그레젠 가문의 케티턴, 닷샛날 포기.”

그 중얼거림을 들으며 다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지금 달려 나갈까,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들이었다. 벌써 세 번째 포기자였고, 유혹은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었다.

“최초의 사제들은, 그리고 아라벨라는 무척이나 고귀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최초의 사제님들이 했던 고행의 아주 일부를 여러분들이 겪으며…….”

사제는 후보들을 바라보며 격려하듯 말을 건넸지만 다들 그 이야기를 곱게 듣지 않았다.

“아라벨라가 얼마나 고귀하든 그게 내 알 게 뭐야.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처음엔 작게 울먹거리던 소녀는 갑자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들의 귓가에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피곤해.’

레슬리는 시선을 떨궜다. 사람들이 도망가고 울고 하는 이 난장판 속에서도 피로가 몰려와 눈이 저절로 끔뻑거렸다.

샛별이 뜨기 전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올리고, 감자 한 알, 멀건 수프나 죽으로 배를 채우며 모든 잡일을 했다.

신전을 청소하는 일과 의복을 세탁하는 일은 아주 가벼운 일에 속했다. 신전의 축사를 청소하며 오물을 직접 치워야 했고 매일매일 신학서를 필사하고 그 책을 피난민과 신전을 오는 평민들에게 나눠 줘야 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버틸 만했다. 우습게도 후작 부인과 르아가 레슬리에게 강요했던 생활과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몇 가지 일이 더해지고, 거기에 분쟁 지역에서 생겨난 피난민을 돌보는 것이 더해졌다. 아이, 노인 그리고 분쟁 지역에서 도망치며 다친 환자들로 가득 찬 천막에 다녀오는 날에는 레슬리조차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그 정도면 버틸 수 있는데.’

레슬리를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는 더 큰 장벽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데비엔이 레슬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피곤하신가 보군요, 셀바토르 공녀님. 이해합니다. 제 성력을 이겨 낼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몸이시니까요.”

마치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목소리는 은밀하게 파고들어 자꾸만 귀족 재판 때의 악몽을 일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머리를 작게 흔들어 그걸 털어 버리고는 몸을 휙 돌렸다.

어깨에 붙어 있던 데비엔의 손이 자리를 잃고 허공에 머물렀다. 그 상태로 데비엔과 시선을 맞춘 레슬리는 마치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 툭툭, 제 어깨를 털면서 말을 꺼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제 제대로 된 가족을 만나서 많이 나아졌거든요.”

그러면서 보란 듯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해요. 저는 그 전에도 성력으로 치료받은 적이 있었는데 왜 그때만 아팠을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서 레슬리는 데비엔을 바라보았다.

“혹시 신력도 변질되나요?”

“……깜찍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신력이 변질되는 것은 신을 모시는 그 마음이 변질되었다는 뜻. 다른 사제들은 몰라도 고위 사제의 경우에는 지위를 박탈당할 정도로 위태로운 말이었다.

“몰라서 그랬던 것을. 부디 어여쁘게 봐주세요.”

도발하기 위해 꺼낸 말이건만, 오히려 데비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엾다는 얼굴로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야지요. 그럼 부디 힘내 주시기 바랍니다.”

“……?”

데비엔의 미소를 보며 레슬리는 미간을 좁혔다. 저 미소는 지금 데비엔이 자신에게 보여 줄 만한 미소가 아니었다. 동정심과 여유로움이 섞인 미소였으니까.

하지만 레슬리가 의문을 풀기도 전에 데비엔은 몸을 돌려 다른 사제에게 가서 무언가를 말하더니 그대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풀지 못한 의문을 가진 채 레슬리는 자신 일에 집중해야 했다. 다음 일은 병자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쿨럭!”

한 노인이 기침하자 침과 피가 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름이 터져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노인을 보고 있던 후보 중 한 명은 얼굴을 대놓고 찡그렸다.

“몸을 천천히 닦아 주셔야 합니다. 이분은 몸을 가누기 힘드시니까요.”

사제의 재촉에 다시 손을 뻗었지만,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이 닿을까 꺼리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사제가 한숨과 함께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지금 후보들과 사제들은 분쟁 지역에서 도망친 피난민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끔찍한 모습에 첫날부터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사방에서 피가 튀었고, 병자들의 신음이 천막을 가득 메웠다. 거기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사람들의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서 늘 들어갈 때마다 다들 헛구역질을 하곤 하였다.

아이가 우는 소리, 배가 곯아 허덕이는 소리…….

귀족으로 태어나 먹는 것, 자는 것 그 무엇도 걱정해 본 적 없이 살던 후보들에게 이 모습들은 충격이었다. 그나마 신전 측에서는 쉬운 일들을 주었지만, 한평생 손에 걸레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남에게 헌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녔다.

“토할 것 같아.”

빗자루를 들고 있던 한 후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는데, 쌓여 있던 오물을 치우느라고 그런 듯 보였다.

한 천막에서는 수십의 피난민이 지냈고, 후보자들은 그 천막 안을 쓸고 닦으며 구호물자를 나르고 다친 사람에게 약을 배분했다. 간간이는 자신들의 식사도 거른 채 피난민들의 식사를 먼저 챙기기도 하였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런 노동을 매일 하다 보니 다들 정신이 조금씩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늘 한 후보가 자리를 박차고 도망 나간 것이다.

“이제 세 분이 가셨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이려나.”

사제는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말을 흘렸고 그 말은 후보들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사제의 말이 예언이라도 된 듯 일주일 내에 여섯 명이 넘는 포기자가 나왔다.

***

불만과 피로가 알게 모르게 쌓이고 있었다. 고귀한 푸른 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들은 여기에 있으면서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항의를 할라치면 사제들은 ‘이 일은 모두 최초의 사제님들이 겪었던 일입니다. 부디 헌신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불만을 무시했다. 쉴 시간이 없이 몰아치는 일과가 더욱 그들을 무너트렸다.

다들 어딘가에 불만을 표출하고 싶어 했고, 그 상태에서 엘리는 꽤 좋은 먹잇감이었다.

“저희 형이 최초의 사제들 출신인데, 듣자 하니 이번 시험이 과할 정도로 어려워졌다고 하더라고요!”

간신히 신전으로 되돌아온 후보들은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식사란 오늘도 무얼 넣어 끓인 것인지 모를 멀건 죽 한 그릇이었다. 물론 종일 굶었던 사람들에게는 그 죽 한 그릇조차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한 후보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척 크게 소리친 것이다.

“1차 시험에서 제 동생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 때문에 자격 미달인 게 아니냐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던데.”

남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멀건 죽을 먹는 엘리에게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그래서 신전 측에서는 이런 고강도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늘 보던 시험 방식을 단 한 사람 때문에 바꾼 거지요. 그 사람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지.”

남자가 한 번 입을 열면 열 때마다 남자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키득거렸고, 다른 이들의 시선은 더욱 차갑게 엘리에게 쏟아졌다.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결국 엘리는 죽을 다 먹지도 못한 채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더니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남자를 한 번, 그리고 다른 구석에서 앉아 있던 레슬리를 한 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나갔다. 엘리의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힌 것도 같았다.

“어머나.”

레슬리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근처에 모여 앉은 한 소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저거 봐요. 얼마나 뻔뻔한지.”

“맞아요. 재판에서 져 놓고, 또 살인하려다가 걸렸는데도 아주 뻔뻔하게 후보 자격으로 여기에 나섰네요.”

“저는 저분이 최초의 사제가 된다면 아버님 이름을 빌려서라도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이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사람들은 동시에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고는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셀바토르 공녀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절대 저런 자와 공녀님을 같이 있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마치 자신들이 레슬리 옆에 붙어 레슬리를 지켜 주겠다는 듯 들렸다.

“그러니 부디 아라벨라가 되거든 저희를 잊지 말아 주세요.”

한 여자가 두 손을 모으고 레슬리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 여자를 시작으로 다들 레슬리에게 말 한 마디를 더 걸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공녀님. 저는 공녀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제가 대신 그릇을 씻어 드릴 테니 편히 쉬시는 건 어떠신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하신다면 방문 앞에서 제가 보초를 서 드리지요. 그건 어떠십니까, 공녀님?”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보겠다는 얄팍한 수작들이지.’

필사적인 말과 행동에서, 4년 전 들었던 사이레인의 말이 떠올랐다. 첫 청혼서를 받았을 때, 무서워하는 레슬리를 위해 사이레인이 제 손에 들려 있던 도끼를 내던지고 한 말이었다.

하인들이 아무도 없는 공작저 뒤뜰에 떨어진 도끼를 들고 오자, 그 도끼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사이레인은 말을 이었다.

‘너무 대놓고 그러면 짜증 난단 말이지. 고기를 얻어먹으려는 승냥이 떼도 그렇게 오진 않아.’

‘왜 어머니나 아버지가 손님을 잘 안 받는지 알겠어.’

친해져서 셀바토르 공작가의 후광을 어떻게든 입고 싶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자, 입안에 들어 있던 죽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엘리가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었을 때, 그녀에게 붙었던 사람들이겠지.

“셀바토르 공녀님, 그러니까 저는…….”

“아뇨.”

레슬리가 아무 말도 없자, 한 여자가 레슬리를 다시 불렀다. 그녀의 말에 죽을 먹던 레슬리는 스푼을 내려 두고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제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사이레인은 레슬리에게 사람을 보는 눈을 기르라고 충고해 주었다. 하지만 그 충고를 되새길 것도 없이 이 사람들은 아녔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레슬리는 몸을 일으켜 그릇을 씻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서 일을 마친 후 식당을 나섰다.

속이 답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을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또 배신당하면…….’

엠로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려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다들 보고 싶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달려가서 품에 안기면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텐데.

레슬리는 코를 훌쩍였다. 아버지가 있었다면 용병이었을 적 겪었던 멋진 무용담을 들려주셨을 테고, 베스라온 오라버니가 있었다면 자신과 같이 정원을 거닐어 줬을 것이고, 루엔티 오라버니는 책을 읽어 줬을 것이다.

‘가족이 보고 싶어.’

레슬리가 뚝 하고 떨어진 눈물을 재빠르게 닦아 냈다. 누군가를 이렇게 그리워할 수 있는 거구나.

예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괜찮아. 내일 아침에 신전 앞에 마델이랑 경들이 계셔 주실 테니까.’

레슬리는 코를 훌쩍이며 자신을 토닥였다. 신전으로 올 때, 레슬리에게 하르트는 하나를 약속했다. 매일 아침 신전 문 앞에 서 있겠다는 약속이었고, 마델과 하르트, 레소와 반트는 매일 아침 신전 앞에 나타났다.

다행히도 레슬리가 배정받은 방은 신전 정문이 잘 보이는 자리라, 일어나면 레슬리는 사람들과 작게 손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어둠이도 있었다. 나갈 때 작게 ‘다녀올게.’ 인사하면 어둠이는 귀엽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괜찮아. 다시 한 번 자신을 다독이는데, 한 남자가 레슬리를 불렀다.

“공녀님.”

자신의 호위 기사로 지명받은 테센트루아의 성기사 렌티우스였다. 짧은 금발머리에 푸른 눈의 렌티우스는 테센트루아 기사단장이었는데, 4년 전 레슬리를 데리러 왔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아, 렌티우스 경. 저는 오늘 필사는 하지 않을 거예요.”

레슬리는 혹여나 운 것이 들통날까, 미리 자신의 뒤를 따라온 렌티우스에게 언질을 주었다. 늘 레슬리는 식사 후에 신학서를 보관하고 있는 서재에서 필사하다가 밤늦게 잠이 들었으니까.

그 말에 렌티우스라고 불린 성기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반가운 소리군요. 공녀님은 조금 쉬셔도 괜찮으니까요. 단연 후보 중에서 가장 열심히 하시고 계십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기사는 레슬리의 뒤를 따라 천천히 레슬리가 방까지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방문이 닫히기 전 렌티우스는 레슬리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공녀님. 내일모레부터는 셀바토르 공작님과 기사단장 하르트 경의 요청으로 공녀님의 호위가 한 명 더 늘어납니다.”

“제 호위가요?”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렌티우스는 다시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놀라시지 않게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렌티우스의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박였다. 누굴까, 누가 오기에 렌티우스 경이 그렇게 말하는 걸까. 궁금해서 다시 경에게 물어봤지만, 경은 이런 건 공녀님이 깜짝 놀라야 즐거운 거라며 답을 피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흘렀다.

‘하르트 경이랑 조금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

레슬리는 천막을 청소하는 손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콘라드 경이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레슬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콘라드는 다른 신전에 가게 되었노라고, 레슬리가 공작저를 출발하기 전에 편지를 보내왔었다. 미안하단 말로 시작된 그 편지가 왜 이리도 가슴 아프던지.

작게 한숨 쉬며 이번에 새로 보급된 모포를 까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레슬리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봐요, 아가씨.”

기운이 빠져 작게 들리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아파 보이는 얼굴의 한 아주머니가 레슬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있잖아요, 아가씨. 내가 얼핏 듣기로는 아가씨가 그 셀바토르 공작가의 딸이라는데, 진짜인가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피난민들과 환자들에게 레슬리나 다른 후보들의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사제 후보들로 전해졌을 뿐이다. 듣기로는 로렌의 사제들뿐만 아니라 사제 후보들도 피난민을 돌본다고 하였다.

하지만 피난민들도 귀와 눈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이 평범한 후보가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직접 가문의 이름을 언급당할 정도는 아닐 텐데.’

설마 귀족 재판으로 퍼진 소문에 내 모습이 섞여 있었던 걸까. 레슬리는 괜스레 제 은발 머리를 매만졌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은발은 상당히 드문 것이었으니까. 이 은발로 알아본 거라면 할 말이 없었다.

레슬리가 대답 없이 놀란 듯 여자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뒤에서 슬금슬금 다른 사람들이 나와 여자와 함께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바라듯 눈을 빛내는 사람들. 마치 식당에서 말도 없이 제 옆에 앉아 눈을 빛내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래서 아가씨, 아가씨가 셀바토르 공작님의 공녀신가요?”

레슬리가 침묵하자, 여자는 레슬리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슬그머니 답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던 렌티우스가 나서려고 했지만, 레슬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레슬리가 알려 주지 않아도, 흘려진 사람들의 말을 주워듣다 보면 레슬리가 셀바토르가의 공녀라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맞아요. 내가 셀바토르 공작가의 공녀예요.”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펴지면서 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세상에, 맞구나! 아가씨가 정말 그 셀바토르 공녀님이시군요.”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도 눈을 빛내며 작게 환호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뭐지?’

레슬리는 그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귀족의 자제들처럼 셀바토르의 명성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자 몰려오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레슬리의 물음에 몰려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노파가 레슬리의 손을 꼭 잡고 환하게 웃었다.

“네, 있습니다. 공녀님, 부디 셀바토르 공작님에게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노파의 말에, 몰려든 몇몇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요?”

“어머니라.”

그 단어가 신기하다는 듯 아직 레슬리의 손을 잡은 노파는 이가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웃음은 아녔다. 그저 신기하다는 듯, 세월이 빠르다는 듯 많은 의미를 담은 웃음이었다.

“그분이 이젠 그렇게 불리는군요. 네에,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셀바토르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천천히 레슬리가 궁금해하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비투펠 지역의 사람들입니다. 에타이가 공격했던 지역 중 하나지요.”

비투펠. 레슬리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빡거렸다. 역사서에도 실려 있는 지역의 이름으로 에타이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공격한 지역이기도 했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풍요로웠지만, 그 영주인 비투펠 백작의 기사단이 강한 편이 아니라 에타이의 주 공격 대상이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멋있었지.’

레슬리는 뺨을 붉혔다. 그런 에타이가 비투펠 지역 쪽에 시선도 못 돌리게 된 이유는 현 셀바토르 공작,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때문이었다.

린체의 기사단장이었던 그녀가 비투펠 지역에서 몇 번이나 에타이를 토벌했고, 마지막 토벌에서 에타이의 부두목을 잡아 직접 목을 베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걸 역사서에서 읽고 몇 번이나 환호를 질렀던지. 그길로 집무실로 들어가 서류를 보던 셀바토르 공작에게 역사서를 보여 주며 눈을 빛냈었다. 그러고는 마침 옆에 있었던 사이레인에게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공작의 활약상에 대해 들었다.

사이레인은 마치 셀바토르 공작의 업적이 자신의 업적인 것처럼 당당하게 자랑했고, 그때마다 레슬리는 손뼉을 치며 환호를 보냈다.

격한 레슬리와 사이레인의 반응에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셀바토르 공작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제나는 그런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웃었다. 때마침 집무실로 들어온 베스라온과 루엔티는 상황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아, 설마.’

“그때, 비투펠 생존자분들인가요?”

레슬리의 말에 노파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공녀님. 저희는 그때 공작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입니다.”

노파는 웃으며 레슬리의 손을 꽉 잡더니 눈물이 맺힌 얼굴로 웃었다.

“전 그때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지요. 뒤에서 에타이 놈들이 검을 휘두를 때, 꼼짝없이 죽는구나 했었습니다. 때마침 셀바토르 공작님이 나타나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저놈과 저는 그때 죽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노파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뒤로 던졌다. 시선 끝에는 이제 얼굴에 주름이 지기 시작하는 남자와 작은 아이들이 있었다. 남자는 레슬리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멋쩍은 듯 웃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모자를 살려 주시고 공작님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뜨셨습니다. 그래서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디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공녀님.”

“저 역시도 공작님 덕분에 산 목숨입니다.”

맨 처음 레슬리를 붙잡았던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그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갈 뻔한 것을 공작님이 구해 주셨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와 제 동생 역시…….”

“그때 우리 가족이 셀바토르 공작님 덕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해 눈을 깜빡거렸다.

뒤에 서 있던 렌티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인 하르트가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아 달라고 했다는 부탁을 사제가 전해 주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막으면 안 되는 거겠지.

“아.”

레슬리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돌아가면 어머니께 꼭 말씀드릴게요. 여러분이 감사해한다고…….”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레슬리는 코를 훌쩍거렸다.

괴물이라 불리는 어머니였다. 가면 밑에는 비늘이 돋아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지만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레슬리의 말에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다.

잠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레슬리는 한 가지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기는 비투펠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 왜…….”

레슬리의 말에 가장 먼저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던 아주머니가 조금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공녀님.”

뒤에서 렌티우스가 조금 난처한 듯 작게 속삭였다.

“비투펠 백작은 에타이가 사라지자마자 영토를 다시 세우겠다며 무리한 세금을 거뒀습니다. 저분들은 그때 이곳으로 이주해 온 분들이에요.”

다행히도 시누스턴 자작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주민을 잘 받아 주었고, 그들이 정착할 수 있게 도왔다. 하지만 다시 이곳마저 분쟁 지역의 여파가 퍼졌고, 간신히 뿌리를 내린 이주민들은 피난민이 되었다.

“그런…….”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간신히 일어선 자들에게 세금을 무리하게 걷었다고? 그리고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그 세금이 정말 영토를 바로 세운 데 쓰인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누가 괴물인 거야.’

잠시 입술을 깨물다 레슬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머니께 반드시 제가 감사 인사를 전해 드릴게요.”

그리고 이들을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는 레슬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훈훈한 것이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뭐 하는 짓거리들이람.’

엘리는 제가 맡은 환자의 상처를 천으로 힘줘 닦으며 눈을 찡그렸다. 환자가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손에 들어간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가증스럽긴.’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지금 저건 연극을 하는 거야. 모든 사람이 보라는 듯이. 엘리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레슬리는 사람들을 보느라고 모르고 있었지만, 몇몇 후보들은 레슬리를 보며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울컥, 짜증이 밀려 들어와 엘리는 이를 갈았다.

4년 만에 마주친 레슬리는 아름다워졌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늘 맞아 구부정했던 자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사랑을 듬뿍 받은 덕분에 신전에서 지급한 투박한 원피스를 입고 있어도 빛이 났다. 자신과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엘리는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트리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저 모습은 오래 못 가지.’

메데이아가 엘리를 거둬들인 후로 엘리는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레슬리가 ‘계약’으로 공작저에 들어갔다는 것 같은, 엘리에게 있어선 아주 기분 좋은 소식들을 말이다. 계약에는 무릇 끝이 있기 마련 아닌가?

“너는 고귀한 피지.”

메데이아는 정성스럽게 엘리의 밀색 머리를 빗겨 주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아름다워. 왜 스페라도 후작이 늘 황궁에서 네 자랑을 하고 다녔는지, 나는 너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단다. 여신이 와도 너에겐 부족할 거야.”

“정말 그럴까요?”

엘리는 메데이아를 보며 부끄럽다는 듯 웃어 보였고, 메데이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나는 차별은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단다. 너같이 아름답고 똑똑한 아이와 다른 아이를 어떻게 비교하겠니. 특히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다니는 그 아이랑 말이다.”

전부 엘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메데이아는 그 뒤로도 손수 엘리의 머리에 꽃을 달아 주며 계속해서 엘리의 마음을 충족시켜 줬다. 거기다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과 계약 관계라는 것도.

“만일 네가 셀바토르 공작을 방해하고 그 아이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트린다면.”

꽃이 떨어지지 않게 리본으로 고정해 주며 메데이아는 웃었다. 그녀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황후, 아이테라 대공비와 셀바토르 공작을 제외하고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은 네가 될 거란다. 아니, 아니지. 너는 아렌도 황자와 결혼할 테니 세 번째로 고귀한 여인이구나.”

그 말에 엘리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저를 내버려 두고 바람피운 아렌도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는 황태자에 가장 가까운 남자였다. 그와 결혼한다면 자신은 이 넓디넓은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세 번째로 귀한 자리였고, 만일 아렌도가 황제가 된다면…….

“황후!”

엘리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황후, 황후. 매일 파티를 벌이고, 매일 새 드레스를 사고, 그렇게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어도 아무도 자신에게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몸에 전율이 돋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황후가 될 거란다. 이렇게 모진 시련이 너에게 주어지는 것도 신께서 너를 마지막 시험에 들게 하시는 거야. 마치 전설 속 영웅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메데이아는 그런 엘리를 보며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살거렸다.

“그러니 아렌도를 황제로 만들 수 있게, 이 어머니를 도와주렴. 내 딸아.”

그때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엘리는 아주 흡족해졌다. 저 가증스러운 레슬리를 관대하게 넘겨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난 황후가 될 몸이야. 저건 이제 바닥으로 떨어질 거고.’

그때 아렌도 황자에게 말해서 저것을 자신의 시녀로 두게 하자. 저것의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거야. 고귀한 셀바토르 공작가의 공녀가 아닌, 평생 자신 옆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시녀로.

실수했을 때 어떻게 벌을 줄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채찍을 휘두를까.

그런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엘리의 팔목을 잡았다. 상상에서 억지로 끌려 나온 엘리는 다시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며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를 바라보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 엘리…….”

초췌하고 더럽고 병색이 얼굴에 완연한 남자는, 라즈튼으로 가는 길목에서 사라졌다던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더러워, 징그러워. 엘리는 자신이 보급품에서 몰래 가져온 빵과 수프를 허겁지겁 먹는 스페라도 후작을,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갑자기 제 팔을 잡아서 얼마나 놀랐던가. 천만다행으로 자신을 감시하는 담당 사제 두 명이 데비엔 고위 사제에게 불려가 자리를 비웠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큰일이 벌어질 뻔했다.

‘하마터면 최초의 사제 후보 자리를 박탈당할 뻔했잖아!’

내게는 이제 이것밖에 없는데! 엘리는 화난 눈으로 후작을 쏘아보았다.

그래도 천성이 착하고 자비로운 자신은, 배가 고프다고 제 손을 덥석 잡는 아버지를 모른 척할 수 없어, 천막 밖 구석진 곳으로 끌고 나와 보급품을 가져다주었다. 나름 넉넉히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전엔 저런 분이 아니었는데.’

우아하고 기품 있게 식사를 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늘 최고급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았고, 식후에는 값비싼 와인을 곁들여 먹지 않았었나? 그런데 저 흉한 꼴은 뭐야. 거지도 저렇게 먹지는 않겠어.

“커, 컥!”

한참을 허겁지겁 먹다가 목에 막힌 것인지 스페라도 후작은 제 가슴을 치며 컥컥거렸다. 그 모습에 엘리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여기요.”

가까이 가면 악취가 너무도 심해서 엘리는 최대한 떨어진 곳에서 팔만 쭉 뻗어 후작에게 물을 건넸다.

후작은 그 물을 급하게 들이켜다가 그것마저 사레가 들렸는지 물을 사방으로 뿜었다. 안 그래도 더럽던, 후작이 두르고 있던 모포는 빵가루가 섞인 물로 더욱 더러워졌다. 젖어서 그런지 후작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더욱 강해졌다.

“후우…….”

엘리가 다시 가져다준 물 한 컵을 한 번에 들이켜고 나서야 스페라도 후작은 살 것 같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엘리는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얼굴 안색은 죽어 가는 병자와도 같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고, 살은 쭉 빠져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 애지중지 길러오던 수염은 사라졌다.

‘저건 또 뭐람.’

엘리의 시선이 스페라도 후작의 한 손에 닿았다. 얼기설기 둘러진 낡은 붕대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얼핏 봐도 심각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방치된 듯 보였다.

“엘리.”

죽어 가는 목소리로, 스페라도 후작은 제 딸을 불렀고 엘리는 덤덤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넌 황궁에서 지냈다지.”

“네, 황궁에서 지냈죠.”

엘리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스페라도 후작의 푸른 눈에 노기가 깃들었다. 후작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엘리에게 다가갔다. 후작이 손을 뻗자 엘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 나는 그 라즈튼에 가지 않기 위해 그 남부에서 끔찍한 그 추, 추위를 견뎠는데 너는 그 따듯한 곳에서…… 크억!”

하지만 앙상하게 야윈 손은 엘리의 목에 닿지 못했다. 그 전에 후작은 크게 기침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가슴을 잡고 뒹구는 꼴이 병을 앓고 있는 듯 보였다. 간신히 도망치긴 했지만, 남부의 강렬한 추위는 스페라도 후작의 몸을 철저하게 망가트린 모양이었다.

혹여나 불결한 게 제 몸에 튈까 봐 엘리는 뒤로 몸을 젖혔다. 그리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냥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그래도 아버지라고 구석으로 데려와 밥을 먹이긴 했는데, 이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의 목을 조르려던 사람을 그냥 데리고 있을 수는 없고. 어쩌지?

손가락을 잘근 물다가 엘리는 환하게 웃었다. 메데이아가 해 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쓸 만한 사람은 미리 주워 두는 게 좋답니다.’

분명 꽃이 화사하게 핀 온실에서 자신의 머리를 빗겨 주며 메데이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어디에 어떤 사람이 쓰일지 모르니, 자세히 살피다 괜찮으면 손을 내밀고 주우라고.

‘그래. 거기다 아버지기도 하잖아?’

이곳에 버리고 가기도 마음에 걸렸다.

결정을 내린 엘리는 작게 미소 지었다. 어쩜 이렇게 나는 마음마저 고운지.

아직도 쓰려져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엘리는 몸을 숙여 말을 걸었다.

“아버지. 저도 어쩔 수 없었답니다. 저는 후보에 자격이 올라가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걸 아버지도 알잖아요.”

엘리는 혹여나 다시 후작이 손을 뻗어 제 목을 조를까 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실에서 저도 정말 비루하게 지냈어요. 우리 후작가에서 레슬리 그것이 지냈던 것보다 더욱 초라하게요! 그래서 아버지를 찾고 싶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엘리가 눈물을 훌쩍이며 후작을 바라보자, 후작의 눈에 조금 빛이 돌아왔다.

4년 전 신레프 신전에서 엘리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그 일은 후작의 머릿속 가장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쉬고, 먹고 잘 수 있는 따듯한 곳이었으니까.

몇 년을 길바닥에서 자고 생활한 후작의 몸은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일주일을 내리 굶다가 결국 쓰레기통을 뒤져 누군가 먹다 남긴 빵 쪼가리를 주워 먹을 때, 후작의 자존심은 깨져 사라졌다. 대신, 다른 것이 남았다.

스페라도 후작이 가지고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가 더 부추겼으며 이번 일로 더 짙어진 무언가, 아주 진득한 것이 심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그래도 이렇게 만났네요. 신이 아버지를 도우신 게 틀림없어요! 그런고로 제가 이제 아버지가 지낼 곳을 마련해 드릴게요.”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엘리는 웃었다.

“네가 나를?”

“네, 그럼요. 이래 봬도 아버지, 저는 얼마 전 메데이아 태후님의 온실에 출입하기 시작했어요. 그분이 저를 어여쁘게 봐 주신 거라고요. 얼마 전엔 저를 딸이라고 불렀다니까요.”

엘리는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 제 아름다움을 이제 조금씩 찾기 시작한 엘리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와 동시에 엘리는 다 안다는 듯 제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아셨죠? 태후께서 저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말이에요. 그러니 그분의 이름을 조금만 빌리면 아버지가 지낼 곳 정도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따듯한 밥과 잠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요. 거기서 몸을 회복하고 천천히 후작의 위치를 되찾아 봐요. 제가 황후가 되면 아버지를 도울게요.”

“후작의 자리를 말이냐?”

“맞아요, 그 멍청한 것들이 후작의 자리를 거부했어요. 저는 황실에 묶인 몸이고요. 그래서 지금 후작 위는 비어 있어요. 우리가 살던 그 아름다운 저택은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고요, 아버지.”

엘리는 작게 속살거렸다.

“거긴 원래 아버지 자리잖아요. 안 그래요?”

엘리의 그 모습을 보며 후작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과연 제 딸이었다. 분명 후에 다시 자신을 배신할 제 딸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엘리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꾸나.”

그리고 생존 본능이 강한 두 사람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이번에도 낳아 준 은혜를 모르는 저 레슬리에게, 그리고 괴물 셀바토르 공작에게 진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파멸할 거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누가 온다고요?”

오늘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던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레슬리의 물음에 담당 사제인 재클렌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마지막 날에 황족분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그분이 아라벨라를 선정하는 의식에 도움을 드릴 겁니다.”

“아라벨라를 선정하는 의식이 따로 있나요?”

아라벨라 축제의 마지막 날인 축복의 날 말고도 다른 의식이 있던가? 레슬리가 머릿속을 뒤지는데 재클렌이 웃으며 그 물음을 해소해 주었다.

“이미 선정된 아라벨라에게 그분이 브로치를 내려 주시는 겁니다. 신권과 황권이 조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지요.”

“그렇군요.”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치는 에피알테스를 봉인했다는 아라벨라의 브로치를 따서 만든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재클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오시는 건 어느 분이 오시나요?”

아렌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레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렌도는 약혼을 파기하지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도 그것이 궁금해서 직접 피스토레 황제에게 물었다고 했다.

‘아렌도가 스페라도 영애를 너무 사랑하더군.’

그것이 셀바토르 공작이 황제를 만나고 나서 한 말이었다. 약혼을 파기하는 게 당연한데, 지금 자신이 약혼녀를 내팽개치면 갈 곳도 없다며 아렌도가 황제를 막았다고 했다. 대신 황후가 아니라 황비에 올리겠다고 그렇게 약속했다고 했다.

아무리 아라벨라가 되고 그 피가 고귀한 푸른 피라 해도 제 친동생을 불에 넣어 죽이려 한 죄는 무거웠다. 그것도 벌이 내려지는 도중 다시 시도한 끔찍한 짓이라 피스토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했다.

하지만 아렌도는 황제를 저지했고, 제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던 피스토레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말았다.

‘그런 거에 비해 엘리는 조용하단 말이야.’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마치 제가 황후가 되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시험 첫날 만났을 때 더더욱 신기했었다.

‘너 때문에 황후가 되지 못했다고, 그렇게 달려들 줄 알았는데.’

아렌도 황자가 다른 여성들과 놀아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걸 보고 반포기한 걸까.

레슬리가 고민에 빠져 있는데, 재클렌이 레슬리의 말에 대답함으로써 레슬리가 엘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왔다.

“아직 정해지지 않으신 것 같더군요. 하지만 두 황자분은 아닌 듯 보였습니다.”

아니구나. 레슬리는 작게 숨을 흘리고는 이내 그 주제에 관해 관심을 떨쳐 버렸다. 하루 종일 익숙하지 않은 노동에 시달린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 잠을 자기 위해 사제에게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천천히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자신의 뒤를 따라와야 할 렌티우스가 걸음을 멈추고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공녀님,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요?”

이미 밖은 어둠과 별빛 그리고 흐릿한 달빛만 남아 있는 상태였고 신전의 특성상 마을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신전을 나가 봤자 밤의 숲에서 길을 잃을 뿐이었다.

“어제 말씀드렸던 호위가 지금 도착한다고 전보가 와서요. 마중이라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맞다. 호위가 온다고 했었지. 누가 될까, 잠시 고민하다 레슬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세요. 저는 그럼 곧장 방으로 갈게요.”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공녀님, 일단 그럼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신전 안이고, 내 방은 바로 저 모퉁이만 돌면 되니까. 그리고 다른 사제님에게 같이 가 달라고 할게요.”

“아, 그럼 안심이지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렌티우스는 몸을 돌려 신전 밖으로 향했다.

사방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었으나, 신전에는 드문드문 켜 둔 등불이 있어 정문만큼은 환하게 빛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정문으로 대여섯 명의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도착했다.

조금은 차가워진 밤바람에 짙은 회색빛 머리가 흩날렸다.

“왔냐!”

샛별도 뜨지 않은, 하루 중 가장 어두울 때에 말을 탄 사람들이 신전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사람들을 렌티우스가 웃으며 맞이했다.

“순찰은?”

렌티우스의 말에 한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 분쟁 지역 경계까지 돌고 왔지만, 이상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보고 사항을 말하는 그는 하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잘됐구먼.”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될 수 있으면 많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신전에 머무르기로 했고, 수도에 있는 신전에선 추가 병력을 보낼 예정이었다. 거기다 다른 신전에 머무르던 테센트루아 기사가 시누스턴 신전으로 오게 되었다.

“으아, 그냥 신전을 바로 오게 해 주지 왜 순찰을 하게 합니까.”

“이왕 말 타고 오는 길에 보고 오라 한 거지. 근처잖아?”

피곤하다는 듯한 기사가 투덜거리자 렌티우스는 호쾌하게 웃어 던지고는, 바람에 반쯤 벗겨진 로브를 홀로 다시 뒤집어쓰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말에서 내리자 렌티우스는 살며시 가까이 다가가더니 이내 음험한 미소를 흘렸다.

“나에게 감사하거라. 내가 그 공녀님을 직접 맡았고, 너를 이리로 불러 줬으니까.”

그 말에 남자는 작게 웃음 지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어딘가 부끄러운 듯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들뜸이 그대로 묻어난 목소리였다.

“거봐. 이렇게 좋아하면서. 뭐, 루엔티 님으로 인연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렌티우스는 그런 남자가 귀여운지 목에 팔을 걸고 웃었다. 어두운 후드 밑에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호위는 너로 해 놨으니까 가서 옆에 좀 있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마음 못 붙이고 있는 게 안쓰럽더라. 다른 후보들은 슬금슬금 눈치 보며 쉬던데 홀로 너무 무리하고 말이야.”

“……그럴 일이 있었지요.”

그 말에 렌티우스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4년 전 신레프 신전에 있던 남자였다. 셀바토르 공녀를 호위하기 위해 말을 몰아 ‘리아 식당’으로 향했던 렌티우스는 그 끔찍한 광경을 전부 목격했다. 그리고 신전에서 모든 사건의 이유를 전부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제 친딸을 죽이려고 불을 지른 거라고?”

“네, 그것도 그 공녀님이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사람의 아이를 납치해 협박했더군요.”

“미친 거 아냐!”

어느 친부모가, 친자매가 자신의 어린 딸을 그렇게 죽이려 든단 말인가. 렌티우스는 경악에 질렸다.

그도 레슬리보다 조금 더 어린 딸이 두 명이나 있었다. 자신은 그 딸이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데.

“스페라도 후작은 미친놈이었구먼. 아니 그냥 미친놈도 아니라.”

잠시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렌티우스는 발작하듯 소리 질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이목이 렌티우스에게 집중되었다.

“희대의 미친놈이다아아!”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렌티우스가 소리를 질렀다. 중후한 목소리가 조용한 식사 시간을 깨트렸다.

평소라면 다들 시끄럽다고 핀잔을 주었을 텐데,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사람들은 이번에는 렌티우스에게 공감했다.

그때부터 테센트루아 기사단장 렌티우스와 몇몇 성기사는 레슬리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고, 그 덕에 지금 콘라드는 레슬리의 호위로 신전에 올 수 있었다.

“잘 왔다, 잘 왔어.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일단 오늘은 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가자고!”

어깨동무하며 웃는 렌티우스를 보며 콘라드는 나지막이 웃었다.

***

이건, 뭘까. 환상일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샛별이 뜨기 전에 간신히 눈을 뜬 레슬리는 하품하며 세숫물을 가져오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아니, 아직도 꿈속일지도.

어제 꿈에서 가족들과 마델, 서올리, 바타에 이어 콘라드까지 줄줄이 나오는 꿈을 꿨었다. 그 꿈이 아직도 이어지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꿈의 파편이 따라와 이런 걸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레슬리 양.”

한껏 자신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레슬리를 바라본 후에야 콘라드는 웃음을 머금었다. 콘라드가 입을 열고 인사하자, 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정말 콘라드 경이에요?”

“네, 콘라드입니다.”

레슬리의 볼이 붉어지더니 이내 환한 미소로 자신을 반겼다. 아까까지는 졸음으로 가득 차 있던 라일락빛 눈동자에서 반짝거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을 불편해하는 레슬리가 아는 사람을 만나 반기는 것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콘라드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오늘부터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의 호위를 맡게 된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입니다.”

정중한 기사의 인사였다.

생각해 보니 늘 선생과 친구로서 만났지, 이렇게 호위를 맡아 만난 적은 없었다. 신기한 마음에 레슬리는 웃음을 흘렸다.

정중하게 자신에게 인사하는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도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저 역시도 잘 부탁드려요, 콘라드 경.”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뒤쪽에서 바라보던 렌티우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 은발의 공녀님도 홀로 있는 모습에 걱정되었고, 콘라드 역시 근래에 안 좋은 일들이 많아 걱정되었는데. 둘 다 웃는 모습을 보니 다행인 듯싶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시험 종료를 며칠 남긴 지금이 아니라 조금 더 일찍 부를걸.

‘소중한 분이야.’

이 신전에 오기 전 하르트가 자신을 불러내 술을 먹이면서 한 말이었다. 오랜만에 친구 놈이 불러 웬일로 술을 사 주려나 싶었더니 청탁이었다.

렌티우스는 샐쭉한 눈으로 하르트를 바라보았지만, 하르트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으면서 렌티우스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를 슬그머니 그쪽으로 내밀었다.

‘우리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나는 신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

그런 친구 놈의 모습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잠시 저 둘 사이에 끼어도 되는 것일까 고민했지만 렌티우스는 환하게 웃으며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이제 갑시다. 늦으면 안 되니까요.”

렌티우스의 재촉하에 레슬리는 늘 하던 대로 보급품을 받아 피난민의 천막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 어제 너무 소문을 퍼트리지 말아 달라 했더니, 정말로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한 것인지 어제 몰려든 사람들이 있는 천막 외에는 아무도 레슬리가 셀바토르라는 걸 모르는 듯 보였다.

사실 이제는 알아도 상관없긴 했다. 시험은 이제 고작 나흘 정도가 남았을 뿐이었다. 거기다 이미 포기자가 상당해 얼추 최초의 사제들 수 정도의 후보자들만 남아 있었다.

문제는 이제 아라벨라가 되는 것.

재클렌에게 듣기로 아라벨라가 되려면 그간의 사제들 평가와 지켜보던 성기사들의 평가, 그리고 시련을 버텨 낸 태도 등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각 후보들의 추천이었다. 각 후보는 아라벨라가 될 만한 다른 후보들을 추천해야 한다며 오늘 아침 재클렌이 말을 전했다.

‘재클렌 사제님이 오늘 말한 거라면 분명 다른 후보들도 이제 추천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래, 오늘 아침.

레슬리는 주변을 살폈다. 확연하게 몇몇 후보들의 행동이 바뀌어 있었다.

“제가 하도록 하지요. 이리 주세요, 이런 건 제가 하는 게 어울립니다.”

“아니에요! 제가 돕겠습니다. 어제까지는 손목이 시큰거려 돕지 못했으나 오늘은 아주 상태가 좋습니다.”

후보들이 가장 꺼렸던, 환자를 병간호하는 일도 서로 하고, 서로 돕겠다며 일을 가져오고 있었다.

‘저번부터나 저렇게 하지.’

레슬리는 한숨을 쉬며 피가 묻은 옷가지와 이불들을 모아둔 곳으로 향했다. 오늘 레슬리의 담당은 이 산더미 같은 빨래를 강가에서 빨아 오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할 일이 이어졌지만, 가장 큰 일은 이거였다.

피. 첫날, 이 피가 묻은 옷가지들을 뜨거운 물에 넣어 버린 후보생이 있었다. 그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는 간단했다. 피가 고인 물에 자신의 손을 담그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차가운 물보다는 뜨거운 물에서 피와 오물이 잘 빠질 거라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 피가 묻은 옷은 뜨거운 물에 빨면 안 되었으니까.

레슬리는 지금 수북이 쌓여 있는 빨래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유일하게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우물가에서 빨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어제 빨래 당번이 포기하고 저택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하기 싫다는 이유로 미뤄 둔 것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배로 양이 늘어 있었다.

그때, 콘라드가 뒤에서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 흐름이 빠르지 않은 강이 있습니다. 수영하기에도, 그리고 빨래를 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곳입니다. 그곳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도 괜찮나요?”

레슬리가 슬며시 물었다.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후보의 일을 도와주지 못하게 돼 있었다. 물건을 나르는 정도의 일은 괜찮다고 했지만, 강을 안내해 주는 것도 괜찮으려나?

레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콘라드가 낮게 웃으며 눈을 휘었다.

“이 정도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저 빨래하기 좋은 곳을 안내해 드리는 건데요.”

그 말에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콘라드는 빨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기 시작했다. 분명 빨래가 가득 담겨 무거울 텐데도 콘라드의 모습을 보면 마치 바구니 안에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신기하게 쳐다보던 레슬리가 마지막 하나를 들려고 하자 가볍게 만류하더니 이내 전부 자신이 들어 버렸다.

“무거워요, 콘라드 경.”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다지 무겁지 않은걸요.”

놀란 레슬리가 만류해 보았지만, 그저 생긋 웃더니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레슬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렌티우스와 함께 콘라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익숙해 보이시네.’

레슬리는 자연스럽게 숨겨진 샛길을 찾아 걷는 콘라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 여기에 와 보신 적이 있던 걸까.

“보통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수습이 되면 이 신전에서 모여 생활을 합니다.”

그런 레슬리의 생각을 기가 막히게 읽은 것인지, 레슬리의 뒤를 따라오던 렌티우스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지금 후보분들께서 겪는 것과 비슷한 생활을 하지요. 샛별이 뜨기 전 일어나 새벽 기도를 올리고, 그 뒤에 아침 훈련을 합니다.”

아침 훈련? 레슬리는 입을 벌리고 렌티우스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지금 이렇게 힘든데 거기에 아침 훈련이 포함되는 걸까?

“아침 훈련 후에는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사제분들과 함께 피난민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 후에는 다시 훈련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필사와 기도를 올리지요.”

후보들도 상당히 빡빡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수습 기사들은 더 힘든 생활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 기사단은 신의 검. 그래서 지위와 피를 막론하고 능력이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지요. 그래서 더욱 강한 수습 기간을 거치곤 합니다. 고위 사제가 되기 위한 루렌의 사제들 못지않은 시련을 거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며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신의 검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고위 사제들이 거치는 혹독한 훈련 일부를, 굶어 본 적도, 제 손으로 빨래를 해 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쥐여 준 거였으니까.

분명 다른 귀족들은 전에 열렸던 시험을 생각하고 이 자리에 왔을 것이고 그건 엘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험 내용은 크게 바뀌었고, 포기자가 속출했다.

‘아, 설마.’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 엘리가 못 해도 최초의 사제들에 들어갈 수 있게 이렇게 한 걸까?

엘리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 할게 뻔했다. 그러니 일부러 강한 시험으로 포기자를 속출시키면…….

‘마지막 20번째에 엘리가 들어갈 수도 있겠어.’

실제로 대대로 최초의 사제나 아라벨라를 배출했던 집안의 자제들이 도망가고 없었다. 집에서 내려오는 시험 정보만 믿고 왔다가 생각보다 더 심한 시험에 도망간 이들이었다.

그렇게 반드시 최초의 사제가 될 거라 생각했던 강력한 후보들이 줄지어 이탈하면서, 수준 미달이던 엘리에게까지 기회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엘리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엘리는 레슬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레슬리가 눈을 찡그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렌티우스는 슬그머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역시도 이곳에서 수습 기간을 보냈기에 강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햇빛에 빛나는 강이 나무 사이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저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겠습니다.”

강이 조금 더 가까워지자, 렌티우스는 걸음을 멈춰 섰다. 그 모습에 콘라드가 당황한 듯 렌티우스를 바라보았지만, 레슬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선배님…….”

콘라드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렌티우스는 씩 웃더니 그대로 풀숲으로 사라졌다. 레슬리가 콘라드를 바라보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빨래를 돕게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선배는 꽤 빨래를 잘하시거든요. 저번에 제가 도와 드린 걸 핑계로 시키려고 했더니…….”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콘라드는 미소 지었다.

“여전히 감은 좋으시군.”

쳇. 작게 말꼬리가 따라붙었다. 어쩐지 아쉬워하는 얼굴의 콘라드를 보고 레슬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콘라드는 적당한 위치에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옆에 작은 주머니도 내려 두었다. 레슬리는 그런 콘라드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콘라드 경이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보는걸요.”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려진 미소가 완성되었다.

“매일 이렇게 사람 좋은 미소만 흘리시고.”

그 말에 콘라드가 조금은 샐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도 화내고 울기도 합니다.”

“그렇구나.”

레슬리는 다시 웃으며 옷가지를 강물에 담갔다. 그런데 콘라드 역시 빨래를 도우려는 듯 제복 재킷과 망토를 벗고는 강으로 들어왔다. 레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저를 도와주셔도 되는 건가요?”

안 될 텐데.

레슬리는 아까 말한 렌티우스의 이야기도 콘라드의 농담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다 강도 찾아 주고 빨래 바구니도 들어 주지 않았던가.

이미 과분하게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콘라드가 방금 벗은 하얀 제복 재킷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 선배가 채근하는 바람에 어제 분쟁 지역을 밤새 정찰하고 바로 신전으로 달려왔더니 제복이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확실히, 늘 깔끔하게 입고 다니던 콘라드의 제복에는 흙과 먼지가 묻어 있었다. 하얀 제복이라 그런지 뚜렷하게 눈에 얼룩이 들어왔다.

첨벙! 콘라드는 그대로 제 제복을 강물에 담갔다. 그리고 예의 그 미소를 흘렸다.

“그러니 제 제복을 세탁하는 김에 다른 옷 세탁을 조금 도와주는 건 괜찮을 겁니다.”

억지였다. 하지만 어쩐지 즐거운 억지라 레슬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신전에 와서 오랜만에 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군요.”

“네, 그렇지요.”

제 제복은 세탁하는 듯 마는 듯하더니, 콘라드는 본격적으로 피와 고름이 묻은 환자들의 옷가지를 익숙하게 빨기 시작했다. 레슬리 역시 옆에 자리를 잡고 모포를 빨기 시작했다.

‘차가워.’

아무리 봄이 되었다지만, 강물은 순식간에 손이 얼 정도로 차가웠다. 레슬리는 말없이 손에 든 모포를 빨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슬그머니 레슬리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콘라드 경.”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황금빛 시선이 닿았다.

“콘라드 경은 어쩌다 루엔티 오라버니와 친해진 거예요?”

전에 철학자 나히로키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친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이 궁금했다. 성기사와 마법사. 어찌 보면 이질적인 존재니까.

신전과 마법사의 저택은 사이가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니었다. 신력과 마력이 서로 반발하는 것을 이유로 처음에는 강하게 부딪쳤다지만 이제는 적도 아군도 아닌 미지근한 상태로 남아 버렸다. 계속해서 머리를 잡고 싸울 수는 없는 거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서먹함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서로는 잘 맞지 않는 듯 보였다.

“신전과 마법사의 저택 토론회에서 만났습니다. 뭐, 몇 번 만나지 않고 금방 무산되었지만요.”

“토론회요?”

“네, 그나마 서로의 지식은 인정하고 있으니 그 지식을 섞음으로써 친밀함을 높여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콘라드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 막 집어 든 옷가지를 강물에 넣었다.

“망했죠.”

어딘가 시원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어린 사람이 껴 있으면 그나마 분위기가 좋아질 거라고 저는 늘 강제 참석이었거든요. 그리고 아마 루엔티 님도 비슷할 겁니다.”

오라버니가 남의 말을 듣는단 말이야?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레슬리가 아는 루엔티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무법자였다. 어떨 때는 10인의 마법사의 말도 듣지 않아 마법사의 저택에서 온 마법사가 곤란한 얼굴로 루엔티 앞에서 우는 것도 목격했었다. 다리를 붙들며 울었지만, 루엔티는 당당하게 그를 무시하고 레슬리를 보고 방긋 웃었었다.

‘간식 먹으러 가자, 레슬리.’

‘아, 안 돼! 제발, 셀바토르. 10인의 마법사님들의 말은 들어야지! 아니면 너도 나도 끝이라고!’

처절한 외침에 귀찮다는 듯 다리를 털어 낸 루엔티는 짜증이 섞인 얼굴로 그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그것보단 내 동생과 노는 게 더 중요해.’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에게 왔었지. 그때 생각에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단, 어머니인 셀바토르 공작의 앞이라면 어느 상황에서나 제외였다. 루엔티 오라버니도 어머니는 무서워하니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며 계속해 보라는 듯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팔을 걷고 옷가지에서 물을 짜낸 콘라드가 바구니 속에 방금 빤 옷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만 해도 10인의 마법사 중 절반 이상이 나서면 루엔티 님도 말은 들었습니다.”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어서 문제였지만. 그렇게 콘라드는 덧붙였다.

“그렇게 억지로 끌려 나가 몇 번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동질감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미약하게 생긴 동질감으로 말 몇 마디를 섞다 보니 서로 나히로키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콘라드는 솔직히 나히로키아를 언급하는 루엔티를 보고 놀랐었다. 그의 주변에서도 나히로키아를 배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철학자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자마자 루엔티의 암녹색 눈동자가 안경 너머에서 빛났다.

‘너, 좋은 녀석이구나? 아니! 똑똑한 녀석이야! 그래, 멍청한 것들은 나히로키아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경악하고 큰일 날 만한 소리를 마구잡이로 내뱉더니 다시 루엔티의 시선이 콘라드에게 박혔다. 그가 정말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때만 보인다는 덧니가 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드러났다.

‘너, 나랑 친하게 지내자.’

“아하하하-”

결국 레슬리는 강물에 주저앉을 정도로 크게 폭소를 터트렸다. 자신 때도 그러더니만, 루엔티는 생각보다 쉬운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닐 겁니다. 나히로키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르카디우스 제국에 못해도 몇 백 명은 있을 테니까요.”

콘라드는 끝난 빨래를 다시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으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결국 그분과 친해지려면 그분과 동등하게 토론할 만한 지식과 능력은 기본인 겁니다. 물론 나히로키아도 말이죠.”

“맞아요. 오라버니는 늘 그래요.”

레슬리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콘라드의 바구니에 눈길이 닿았다. 자신은 이제 겨우 몇 개를 세탁했는데, 콘라드의 빨래 바구니는 이미 세탁을 마친 옷가지와 모포들로 가득했다.

“벌써 저만큼을 다 하신 거예요?”

“이래 봬도 테센트루아 수습 기간을 버틴 몸입니다.”

그러면서 콘라드는 씩 웃음을 머금었다.

“요리도 제법 잘할 수 있습니다. 늘 야영 때 제가 식사 당번을 맡았거든요. 제대로 된 음식이라기보단 야영식에 가깝지만요.”

“저도 핫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이 있어요.”

예전에 바타, 마델, 서올리와 함께 만들어 보았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녹이고 밀가루와 설탕, 달걀을 섞은 반죽을 조심스레 흘려 놓으면 치이익 좋은 소리를 내며 맛있는 냄새가 풍겼었지.

거기에 마델이 가져온 달콤한 메이플 시럽과 바타가 만들어 둔 과일 설탕 조림을 올리고, 서올리가 가져온 꽃으로 장식해 맛있게 넷이서 나눠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비록 조금 밀가루 맛이 나긴 했지만, 행복한 맛이었다.

그 후로도 종종 열심히 만들어 가족들에게도 제나에게도 그리고 기사단에도 나눠 줬었다. 다들 맛있게 먹어 줬었지.

‘아버지는…… 조금 곤란했지만.’

첫 핫케이크를 받은 사이레인은 그걸 먹지 않고 방에 그대로 모셔 둔 것이다. 마치 성물처럼 가장 좋은 자리에 모셔 놨던 핫케이크는 따듯한 봄날의 햇빛을 받아 빠르게 부패하였고, 결국 공작의 손에 의해 버려졌다.

다시 슬픈 곰이 울부짖었던 그때를 생각하며 레슬리는 키득거렸다.

“다 끝났습니다.”

그러는 사이 콘라드가 마지막 빨래에서 물기를 쭉 짜내더니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감사해요, 콘라드 경.”

레슬리가 혼자 했더라면 오전 내내 해도 못 끝낼 정도의 양이었는데, 순식간에 빨래가 사라져 버렸다.

‘마법사 같아.’

빨래의 마법사. 이건 아닌가. 청결함의 마법사……? 뭔가 성기사단에 이상한 칭호를 붙이는 것 같아 레슬리가 속으로 미안해할 때, 콘라드가 제 검은 망토를 바닥에 펼쳤다.

“경, 그러면 망토가 더러워질 텐데요.”

“강이 바로 앞에 있으니 빨면 되지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슬리 양도 앉으세요. 빨리 끝냈으니 쉴 시간이 충분할 겁니다.”

콘라드가 웃음을 머금었다. 레슬리는 선뜻 앉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쉬어도 되는 걸까. 잠시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요즈음 계속 자지도 먹지도 쉬지도 못했던지라 슬그머니 망토 위에 앉았다.

‘미안해요.’

가서 더 열심히 일할게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을 꼭 모았다.

잠시 양심을 팔아 만든 휴식은 달콤했다. 따듯한 봄 햇살 밑에 앉으니 젖었던 옷자락이 마르면서 노곤함이 몰려들어 왔다.

하암. 레슬리는 작게 하품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콘라드는 자신과 조금 떨어진 망토 끝에서 앉아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햇빛을 만끽하듯 눈을 감은 채 콘라드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라도 쉬지 않으면 죽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몰래몰래 쉬는 것 정도는 다들 용인해 줍니다.”

사실 레슬리만 몰랐을 뿐, 엘리조차 이런 식으로 제 휴식 시간을 챙기고 있었다.

“마침 선배님이 망도 봐 주시니 잠시 쉬다 가도록 할까요.”

그러더니 아까 빨래 바구니 옆에 놓아둔 작은 주머니를 가져와 레슬리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레슬리는 콘라드가 준 작은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색색의 사탕과 비스킷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상자에 넣어온 게 아니어서인지 비스킷은 깨졌고 사탕에는 비스킷 가루가 묻어 있었다.

“아…….”

콘라드가 부끄러운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수줍게 웃었다.

“이 근처에서는 단 걸 팔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사 오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솔직히, 반가웠다. 달콤한 디저트와 차 그리고 사탕과 초콜릿. 어린아이 입맛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좋았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이걸 자신에게 주는지 알 수가 없어 콘라드를 바라보자, 콘라드가 조금은 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레슬리 양은 단것을 좋아하시니까요.”

레슬리는 주머니 속 사탕과 비스킷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왜인지 깨지고 뭉개진 색색의 비스킷과 사탕들이 수도의 가장 비싼 디저트 가게 사탕들보다 더 예쁘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콘라드 경.”

레슬리는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콘라드를 한 번, 주머니 속을 한 번 보았다가 조심스레 사탕 하나를 입에 물었다.

가장 먼저 레슬리가 느낀 맛은 시나몬이었다. 아마도 부서진 비스킷이겠지.

뒤이어 쏟아지는 사탕의 달콤함에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이었다. 신전에서는 이런 음식을 주지 않으니까. 다른 후보들은 몰래몰래 음식을 숨겨 놓고 먹었지만, 레슬리는 그걸 알지 못했다.

잠시 단맛을 즐기다가 레슬리는 자신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콘라드에게 사탕 하나를 내밀었고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콘라드 경도 단 걸 좋아하시니까요.”

입속에 들어 있는 동그란 사탕 때문에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그러면서 콘라드가 거부하기 전에 닿지 않게 조심히 콘라드의 손에 사탕 하나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눈 색을 닮은 노란 레몬 사탕을 잠시 바라보던 콘라드가 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콘라드가 준 걸 나눠 준 것뿐인데 되레 감사 인사를 들은 게 멋쩍어 레슬리는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강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콘라드 역시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다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몬 사탕 때문인지 한쪽 볼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분이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분이요?”

“스페라도 영애 말입니다. 이제 그 성으로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불러 드리고 싶지는 않아서요.”

엘리를 언급하는 콘라드의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눈이 찡그려졌다. 어지간히도 엘리가 싫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조용히 있더라고요. 저는 절 보자마자 저에게 손가락질할 줄 알았는데.”

손가락질은 레슬리가 예상한 엘리의 행동 중에서 가장 얌전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리는 노려보기만 할 뿐 레슬리의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입안에 든 사탕을 굴리며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 때문에 볼록 튀어나온 콘라드의 볼을 보다가 레슬리가 말을 이었다.

“저…… 혹시 후작의 이야기는 들려온 게 있나요?”

“아쉽지만, 저번에 분쟁 지역으로 스스로 들어간 이후로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콘라드는 정말 미안한지 말끝을 흐렸다. 예전에 답답한 심정에 콘라드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레슬리를 돕겠다고 말했었고 그 뒤로 이렇게 자신이 나름 추적하며 그 소식을 레슬리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경 혼자서 해 주시는걸요.”

레슬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콘라드가 혼자 추적을 하는지라 들려오는 소식은 변변치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위해 노력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에 레슬리는 기뻤다.

“콘라드 경이 이렇게 애써 주시는 것만 해도 정말 기뻐요!”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레슬리의 말에 위안을 받은 듯, 콘라드가 눈을 휘며 얼굴을 붉혔다.

때마침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제 은발을 귀 뒤로 넘기며, 레슬리는 말없이 강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후작 부인은 뭘 하는 걸까.’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후작 부인의 생각도 떠올랐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지금 친정 르게인 자작가의 영토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생각보다 그 저택에서 안 나오고 오래 버티고 있단 말이지.’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친정인 르게인 자작가는 유복하지 못한 가문이었다. 가지고 있는 땅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작은 데다가 특산품은 가을 한철에나 잡을 수 있는 물고기였다. 그 외에는 평범하게 밀과 약간의 과실로 수확을 얻는 작고 평범한 영토. 그리고 르게인 자작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토만큼 평범한 사람이었다.

‘역사 수업을 할 때 본 적이 있어.’

후작 부인이 데뷔탕트를 치르기 몇 년 전에 큰 가뭄이 덮쳤고, 특히 르게인 자작가가 있는 북서부가 가장 큰 피해를 보았었다.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였으니 아주 지독한 가뭄이었겠지.

강이 마르니 그나마 가장 큰 수익을 내던 물고기의 어획량이 점점 떨어졌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가뭄이 바로 해소되긴 했지만 줄어든 물고기가 갑자기 불어나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럴 때 치러진 스페라도 후작가와의 약혼과 결혼. 그렇게 르게인 자작가는 자연스럽게 스페라도 후작가의 재력에 기대게 되었고, 스페라도 후작가는 수도와 가까운 르게인 자작가의 영토를 잘 활용해 먹었다.

‘그래서 스페라도 후작가가 쓰러지면 재산을 회수하러 분명 영토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후작 부인에게도 벌이 주어졌다고는 하지만 후작에 비교해 미미한 벌이었다. 그녀가 받은 벌은 약간의 벌금과 근신 정도였으니까.

명예를 중요시하던 때라면 그것마저 큰 벌이겠지만, 후작 부인은 이제 깎일 명예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귀족 재판에서 황제가 내린 벌은 스페라도 후작에게 몰려 있었고, 오히려 후작 부인은 재판에서 안쓰러운 사람으로 비쳤었다.

‘운이 좋았지.’

그 상황으로 봐서 적당히 시간이 흐르면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스페라도 후작가의 남은 재산을 가지러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요구한 배상금과 그간의 빚이 있지만, 그건 저택을 팔고 영토를 팔면 해결될 일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영토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아주 비옥한 영토였으니까.

그러면 남는 건 거의 다 후작 부인의 것이 될 텐데.

‘왜?’

까득, 소리를 내며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이 반으로 갈라졌다.

“레슬리 양?”

그 목소리에 레슬리는 지금 콘라드와 같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생각에 너무 몰두해 버린 듯싶었다.

생각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도 외곽을 산책할 때도 이랬었는데.

레슬리는 뺨을 붉히다가 잠시 눈을 또르륵 굴리고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콘라드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레슬리의 말에도 콘라드의 안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마 엘리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안 되겠습니다.”

갑자기 콘라드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담당 사제에게 가서 그분에 대해 따져야겠어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을 같은 시험장에 둘 수 있는지.”

아직 어린 느낌이 나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 당장 피난민의 숙소로 돌아가려는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는 조심스레 옷자락을 잡아 만류했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콘라드 경. 이미 저희 가문에서 수차례 항의한걸요. 거기다 황제 폐하께서도 어찌 못 하신 일이니까요.”

황권과 신권은 나뉘어 있다. 평소에 신전에서는 죄인의 처분이나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나서야 하는 때를 지나치는 적은 없었다. 특히 최초의 사제들을 뽑는 일의 경우에는 강한 목소리를 내었고, 그럴 때면 황실도 한발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번 엘리의 일이 아주 좋은 예시가 되었다. 살인미수의 범죄자임에도, 이미 그 이름이 신에게 닿았다는 이유로 엘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 역사서에서도 이렇게 황권과 신권이 부딪치는 바람에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몇 있었다.

거기다 이번 엘리의 일은 이미 신전에서 용인하고 황제의 승인을 받은 일이었다. 그걸 콘라드가 뒤집기에는 무리였다.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는 작게 한숨 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아직도 마뜩잖은지 미간에 깊게 자리한 주름은 가실 줄을 몰랐다.

“거기다 신전 측에서도 엘리를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레슬리의 말대로 엘리는 이미 신전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엘리에게는 처음부터 두 명의 담당 사제가 붙었는데, 혼자 있을 수 없도록 늘 누군가를 동행시켰다. 거기다 그녀는 유명 인사였기에, 어딜 가든 시선 세례가 쏟아졌다. 덕분에 원하든 원치 않든 엘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레슬리의 귀에 들려왔다.

레슬리의 말에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여나 무슨 일이 있다면 저에게 말해 주세요.”

“네, 꼭 말씀드릴게요.”

레슬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콘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갈까요? 천막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제 티가 날 겁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달콤한 휴식은 입안의 사탕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입을 삐죽 내민 채 레슬리가 몸을 일으키자, 올 때와 똑같이 세탁 바구니를 전부 든 콘라드가 천천히 레슬리의 앞을 걸었다.

“조심하세요. 샛길이라 돌멩이나 나무뿌리가 많으니까요.”

조심하라고 앞에 선 거구나. 레슬리가 감사하다는 의미로 웃자, 콘라드가 조금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아, 콘라드.”

숲길을 벗어나자마자, 주변을 살핀다던 렌티우스랑 마주할 수 있었다.

‘뭐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하필 렌티우스 쪽에서 해가 비추고 있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얼핏 보인 렌티우스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다.

“셀바토르 공녀님, 죄송하지만 잠시 이놈이랑 이야길 해도 될까요?”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 똑같은 밝은 미소로 다가온 렌티우스가 콘라드를 가리켰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빨래 바구니를 원래 자리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콘라드를 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선배님!”

콘라드가 소리쳤지만, 렌티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저긴 사람 보는 눈도 많은데 도와 드리면 안 되지.”

“하지만…….”

콘라드가 불퉁한 얼굴로 렌티우스를 바라보자,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흑발에 가까운 짙은 회색빛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렸다.

마치 막냇동생에게 하는 행동에 콘라드가 안간힘을 쓰고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기사단장인 렌티우스는 오히려 크게 웃으며 콘라드의 목에 두르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런 렌티우스의 팔을 콘라드가 다급히 두드렸다.

항복을 외치려나 했는데, 오히려 감사 인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를 이리로 불러 주셔서요.”

콘라드가 말쑥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가 내려오자 더 어려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렌티우스는 씩 웃었다.

“알면 나에게 잘 하도록 해라!”

그리고 다시 목에 팔을 걸어 마구잡이로 콘라드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확실히 셀바토르 공녀를 자신이 호위하겠다고 해서 위에서 잔소리 좀 듣고, 이놈을 여기로 부른다고 고생 좀 했지만, 그래도 그는 콘라드에게 약했다.

갓 일곱 살이었을 때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수습으로 들어온 콘라드의 직속 선배가 되어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친 게 그였다. 그렇게 10년을 붙어 있다 보니 렌티우스는 종종 콘라드를 제 막냇동생처럼 생각하곤 했다.

렌티우스는 제가 헝클어뜨린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는 듯 쓰다듬어 주었고, 콘라드는 짧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한참을 그러다가 렌티우스는 제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콘라드에게 내밀었다.

“아이테라 대공가에서 편지가 왔더군. 동생분이 보낸 것 같던데.”

“프리트가요?”

콘라드는 그 말에 편지를 받아 봉투를 살폈다. 렌티우스의 말대로 프리트 카른 아이테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왜? 분명 얼마 전 저택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읽어 봐도 됩니까?”

원래 임무 중에는 편지를 받을 수 없었다. 안의 내용이 정신을 흩트릴 수 있었기에 휴식 시간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나 편지를 읽어 볼 수 있었다.

“그래, 뜯어 봐라. 뭔가 급박해 보이는 편지라 건네주는 거야.”

렌티우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콘라드는 편지를 뜯었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형, 어머니가 많이 안 좋으셔.

편지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콘라드는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렌티우스의 물음에 콘라드는 고개를 젓고는 편지를 접어 제 품속에 집어넣으며 힘없는 미소를 흘렸다.

“어머니에 관한 거예요.”

“아, 아아…….”

렌티우스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4년 전부터 아이테라 대공비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신력으로도 차도가 없다고 했었지.”

“네, 덕분에 루엔티 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무슨 병인지 알려지지도 않은 병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스웰라 대공비의 건강을 갉아 갔다. 고위 사제들까지 달려와 그녀에게 신력을 쏟아부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신력 역시 만능은 아니었으니까.

콘라드가 루엔티를 통해 얻은 약들로 잠시 차도를 보이다가도 대공비는 다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아이테라 대공 역시 서서히 이상해져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직 어린 프리트는 불안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긴 했지만, 저택에 돌아올 때마다 형인 콘라드가 없으면 불안감을 보이며 그를 찾곤 했다. 오늘 편지도 그런 편지였다.

아카데미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아니지, 내가 먼저 챙겨야 했는데.’

어머니의 상태를 알리며 언제 돌아오냐고 묻는 편지를 떠올리며 콘라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형이 보고 싶어. 시험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서워서 말을 걸기도 힘들어.

콘라드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런 콘라드를 보며 렌티우스는 안타깝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 버티기 어려워 보이면 친척 집에 당분간 있게 하는 건 어때?”

지금 프리트를 불안하게 하는 건 흉흉한 집안 분위기니까. 그 말에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근처에 이모님이 계시거든요.”

이모님 댁은 아이테라 대공비가 쓰러지기 전과 똑같은, 따스한 분위기였다. 거기서라면 프리트도 불안해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겠지. 몸이 두 개였으면 좋으련만. 콘라드는 작게 숨을 흘렸다.

콘라드의 말에 렌티우스는 다시 말없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장난처럼 보이지만, 나름 렌티우스가 위로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괜찮아. 다 잘될 거다!”

그러면서 억세게 제 머리를 흩트렸다. 간신히 정리한 잿빛 머리가 다시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기를 한참, 렌티우스의 팔에서 빠져나온 콘라드가 옅게 웃었다.

“네, 전부 잘될 겁니다.”

***

왜 이리 소란스러운 거지? 이피엘은 눈을 찡그리고 정원 한편을 바라보았다. 메데이아의 온실이 있는 정원은 황궁에서도 구석진 곳이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실수라도 들르기 어려운 곳.

그런데 그 정원 한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여기는 늘 조용해야 하는데.

잦은 두통으로 고생하는 제 주인을 떠올리며 이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멈췄던 걸음을 옮겨 다시 온실로 향했다. 정원에는 경비가 서 있으니, 알아서 정리해 주겠지.

하지만 그건 이피엘의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걸 알려 주듯 여기저기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안 됩니다. 이곳은 메데이아 태후 폐하의 개인 정원입니다!”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누가 감히 초대도 없이 태후 폐하의 정원에 온 거야?’

이피엘의 눈동자가 당황함으로 물들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이곳은 제 주인이 아끼는 곳으로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자신이 가서 직접 쫓아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버려 두렴. 이피엘.”

“태, 태후 폐하?”

온실에 있어야 할 제 주인이 꽃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친구가 찾아오는구나.”

메데이아는 기쁘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른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친구……요?”

이피엘의 질문에 대답하듯 한 여자가 나타났다. 웬만한 남자들도 대적하지 못할 정도로 큰 키에 위압감이 넘치는 여자.

그 여자의 주변에는 그녀를 막지도 못하고 대응하지도 못해, 쩔쩔매는 경비들과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부는 그녀의 위압감에 눌린 것인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이피엘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를 처음 보는 건 아니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리고 화가 난 그녀를 본 건 처음이었다. 하얀 가면 밑에서 보이는, 차갑고 무기질적인 암녹색 눈동자는 늪지대를 떠오르게 해, 이피엘은 작게 몸을 떨었다.

“어머나.”

그런데 메데이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방긋 웃더니 이피엘의 앞에 섰다. 메데이아가 그녀를 가리자, 이피엘은 살 것 같아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웃음을 머금은 메데이아는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공작.”

그러자 셀바토르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미소라, 분위기는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가 만족스럽게 웃는 것 같았다.

“이런.”

셀바토르 공작은 느긋하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아무도 막는 자가 없어 여기까지 흘러오고 말았군요.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메데이아 태후 폐하.”

그러더니 가볍게 예를 취했다. 황족에게 하는 인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인사였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황제조차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라 강요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군요.”

메데이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경비를 부실하게 세운 내 탓이지요. 그래도 이왕 이렇게 온 것, 내 온실에서 차를 즐기지 않겠나요?”

그러면서 자신이 들고 있는 꽃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마침 꽃들이 참 아름답게 피었답니다.”

연보랏빛을 띠는 꽃은 메데이아의 말 그대로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그걸 소중한 듯 매만지며 메데이아는 다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공작. 바쁜 건 알지만 부디 날 위해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그럼요. 기꺼이 내 드려야지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피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제 주인과 저 여자를 같은 곳에 두어도 되는 걸까.

“태후 폐…….”

“이피엘.”

이피엘이 메데이아를 말리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셀바토르 공작께서 좋아하는 차와 다과를 가지고 온실로 오렴.”

이 이상 말하지 말라는 메데이아의 표정에 이피엘은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태후 폐하. 저, 그럼 호위는…….”

“괜찮단다. 제국의 가장 고귀한 수호자가 여기 계시는데, 그 누가 나를 해칠 수가 있겠니.”

그러면서 메데이아는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안 그러니, 이피엘?”

시선은 이피엘을 향했지만, 말의 내용은 명백히 셀바토르 공작을 향해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입술이 뒤틀려 올라갔다.

“태후 폐하의 말씀이 옳으시지. 내가 있으니 편하게 자리를 비워도 좋네.”

공작마저 그렇게 말하자, 이피엘은 불안해하면서 자리를 떴다. 경비마저 제자리로 돌아가고, 넓고 한적한 정원에는 메데이아와 셀바토르 단둘이 남았다. 잠시 제 품 안의 연보랏빛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메데이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왜 여기 온 건가요, 셀바토르 공작? 공작도 알고 있겠지만, 이 정원은 내가 아끼는 정원이라 초대장이 없으면 오지 못하는 곳이랍니다.”

“이유, 이유라…….”

잠시 셀바토르 공작은 손가락으로 제 팔을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은 초대장을 받아서 왔습니다, 태후 폐하.”

보는 순간 불태워 버리고 싶었던 편지를 초대장이라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메데이아는 놀랍다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머나, 초대장이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셀바토르 공작.”

그러더니 셀바토르 공작에게 미소를 흘렸다. 선황마저도 홀린 그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위험했다. 그러고는 마치 그 초대장의 내용을 상상하려는 듯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을 움직이게 한 초대장인 걸 보니, 분명 귀중한 말이 쓰여 있었겠지요? 제 경험상 그런 편지에는 거짓이 쓰여 있지 않으니 믿는 게 좋을 거예요.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게 말이죠.”

네 양딸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미리 상기해 두라는 말은 입안에서 사라졌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똑똑히 그 말을 들었다. 도발적인 메데이아의 말에 암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좀 더 흔들려 줘도 좋으련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메데이아는 꽃잎을 매만지며 미련을 떨쳐 버렸다. 한껏 독이 오른 이 여자의 앞에서 틈을 보였다간 머리부터 산 채로 씹어 먹힌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자, 얼굴의 절반을 덮는 하얀 가면이 잘 보였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말이 쓰여 있어서 말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적혀 있더군요. 저 말고도 다른 이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듯싶어서 말입니다.”

엘리의 죽음에 메데이아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였다. 메데이아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지만 공작. 생각보다 공작이 생각하는 그 ‘다른 이’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답니다.”

엘리가 에피알테스를 옮기다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선언에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고 메데이아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 어떤가요. 누군가가 거둔 목숨의 값은 거둔 사람에게 있는데. 안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공작?”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메데이아의 발언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그리고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면 더더욱 그 목숨값이 귀하지는 않겠지요.”

메데이아는 생긋 웃었다. 이번 그녀의 말에는 스페라도 후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었던 시절이 그립다 외치면서 필요하면 여자인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러 오는 남자. 메데이아는 처음부터 그 남자가 싫었다. 그리고 제가 잘난 줄 알고 실력도 쌓지 않은 채로 콧대를 들고 다니는 엘리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명성과 비옥한 땅은 마음에 들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제 입맛대로 이용하기 편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 탐이 났다.

그래서 처음엔 적당히 결혼시킨 후 스페라도 후작이 여태 벌였던 일을 폭로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황궁에서 엘리의 입지는 줄고, 후작은 막대한 벌금을 물게 될 테니까. 여태 쌓여 있던 빚을 갚기 위해 영토를 매각할 게 분명했고, 그녀는 그 영토를 값싸게 사 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완벽한 계획에 스페라도 후작가의 차녀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그런 존재감을 숨기고 있었는지, 셀바토르 공작가를 전부 사로잡은 그녀는 메데이아가 계획한 것을 차근히 망치기 시작했다.

일이 망가질까 후작을 지원했더니 후작은 귀족 재판에서 져 버렸고, 오히려 일은 예상치 못하게 메데이아가 원하는 쪽으로 풀려 갔다.

메데이아는 덕분에 레슬리가 밉게 보이지 않았다. 되레 예뻐 보였지. 그러니 셀바토르 공작에 대한 우정과 그 양녀에 대한 약간의 호감으로 에피알테스의 정보를 흘려 준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감정이 셀바토르 공작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도운 건 사실이었다.

웃음을 머금은 메데이아를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다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렌도 황자님이 약혼할 때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조언을 해 주셨다고 하더군요. 스페라도 양을 약혼녀로 고르라고 말입니다.”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한 말이었고, 메데이아는 그것마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지 않았다. 셀바토르의 말에 메데이아는 부끄럽다는 듯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맞아요, 그 정도로 아렌도에게 잘 어울리는 영애는 없을 테니까요. 공작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 물음에 셀바토르 공작은 답이 없었다. 잘 어울린다는 건 황자의 약혼녀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메데이아는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자신을 노려보는 여자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고귀한 여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메데이아가 태어난 이트바나는 슬프게도 여성의 몸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는 나라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딸을 위해 유구한 전통을 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동이었던 메데이아는 누군가와 결혼해 남편에게 이트바나의 왕위를 건네줘야 했다. 그 남편은 왕족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음에도 진짜 왕족인 그녀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었다.

싫었다.

메데이아는 어릴 적부터 그걸 끔찍하게 여겼다. 왕족은 자신인데, 왜 왕위는 자신의 것이 아닐까.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왕위보다 더욱 위로. 누구든 나를 내려다보지 못할 그런 자리로. 그런데 그런 자리가 있을까?

그런 메데이아가 결혼할 나이에, 르카디우스 제국과의 마찰이 일어났고 이트바나는 급속도로 허물어져 갔다. 겉보기에는 아직도 버틸 만해 보였으나, 오래된 전쟁으로 안은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매일 매시간 싸움이 일어났고 아버지는 점점 쇠약해지다가 결국 어머니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나란히 놓인 부모님의 관을 보며 메데이아는 직감했다. 이제 자신은 저 천박한 승자들의 손에 트로피처럼 쥐어져 이 곪아 버린 나라의 여왕이 되리라.

그날 밤. 메데이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떠났다. 제 나라를 떠나 낯선 제국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선대 황제와 혼인하게 되는 날, 처음 셀바토르 공작을 보았다. 검은 린체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전 셀바토르 공작 옆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아셀라를 보자마자 메데이아는 옅게 웃었다.

동질감. 그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상을 그리고 자신의 방법을 긍정해 줄 사람이었으며, 메데이아가 꿈꾸던 완벽한 모습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도 그녀가 싫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앞에서는 자신이 비틀려 보였으니까. 분명 그녀가 더 높은데, 이상하게 셀바토르 공작이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불쾌했다.

잠시 메데이아를 바라보던 셀바토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제가 엉뚱한 초대장을 받고 태후 폐하를 귀찮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어머, 아니에요. 와 줘서 나는 기쁘답니다.”

셀바토르 공작은 잠시 능청스럽게 웃는 메데이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태후 폐하. 왜 그 초대장이 저에게 왔는지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혹시 지혜를 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꼭 공작에게 알려 주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메데이아는 기품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셀바토르 공작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초대장을 보낸 사람은 아마도 공작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초대장을 보낸 거지요.”

메데이아의 말에 공작은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태후 폐하. 나는 누군가가 나를 보며 뭐라고 부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친구든, 뭐든 좋을 대로 부르라고 내버려 두는 편이지요.”

그건 사실이었다. 제 주제를 알지 못하고 날뛰는 것들은 감히 공작의 이름을 멋대로 부른 죄를 톡톡히 치렀으니까. 그래서 호칭 따윈 셀바토르 공작에게 중요한 게 아녔다.

가면 밑에서 암녹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내 딸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런, 초대장을 보낸 이에게 경고하러 오셨군요. 꽤 셀바토르 공녀님을 사랑하시나 봅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어머니니까요. 위협이 될 만한 거라면 뭐든 치워 줄 생각입니다.”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메데이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걸 잘 아는데 사랑, 사랑이라.

메데이아가 웃든 말든 셀바토르 공작이 한 걸음 내딛자마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초대장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아렌도 황자를 아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한마디를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습니다, 태후 폐하.”

이제 셀바토르는 메데이아를 향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바로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메데이아는 저도 모르게 꽃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저절로 몸이 떨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잘게 떨리는 눈가가 그녀의 현 감정을 대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셀바토르 공작이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나를 적으로 두지 마세요. 이 제국에서 나를 이길 자는 없으니까.”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내용은 듣는 이를 소름 끼치게 하기 충분했다.

자칫하면 반역으로 몰아갈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한 셀바토르 공작은 더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갔다.

“저런 무례한……!”

발작하듯 터져 나오는 말은 메데이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트레이에 차를 가져온 이피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피엘의 얼굴은 마치 자신이 모욕당한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무례한 자를 그대로 두실 건가요?”

“그대로 둬야지.”

하지만 이피엘과 다르게 메데이아는 덤덤했다. 오히려 그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게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저건 반역이나 다름없는 말입니다. 다른 이도 아니라 황족에게 협박이라니요.”

“이미 황제의 멱살을 잡고 다니는 사람에게 반역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는 하니.”

그러면서 메데이아는 아직도 들고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아쉬웠다. 선물로 주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이피엘.”

아직도 분한지 얼굴을 찡그린 채 거친 숨을 내뱉는 이피엘을 다독이며 메데이아는 미소 지었다.

“슬슬 가 보도록 하자꾸나.”

못 준 선물은 본인에게 주면 되니까. 분명 좋아하겠지.

저번 신년 축제에서 봤을 때는 아름다운 은발을 꽃으로 장식했는데 그게 꽤 잘 어울렸었다. 그때 생각을 하며 메데이아는 옅게 웃으며 자신의 온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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