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9)

#11

철퍽. 비가 내려 진흙길로 변해 버린 흙길을 한 무리의 기사들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진흙이 튀었다.

“대장! 성문이 보입니다!”

선두로 달리던 한 기사가 외치자 피곤으로 물들어 있던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렘펠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환호를 외쳤다.

정찰 임무를 받고 다른 지방으로 내려갔다 온 것까지는 좋은데, 하필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나 전부 젖어 버렸다. 비는 빠르게 체온을 빼앗았고, 질척거리는 길은 말과 기사들을 지치게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르카디우스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일단 도착하면 쉬죠. 저는 목욕하고 싶어요. 벌써 며칠을 못 씻었더니 온몸에서 냄새가 나요. 비를 맞아서 그런지 더 고약해요.”

한 기사가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는 우리 딸이 보고 싶습니다. 저번에도 저보고 누구냐고 물었단 말이에요. 또 제 딸이 얼굴을 잊어버리면 울 거예요…….”

“저는 잘래요. 자고 싶어요! 자게 해 주세요. 제발요…….”

모두의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한 기사가 자신의 옆에 달리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입, 너도 이야기해 봐.”

“말해도 됩니까?”

갓 린체의 기사단에 배속된 남자는 주저주저하더니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저는 밥이랑 잠 둘 다 하겠습니다. 아, 목욕도요. 식사는 제대로 된 걸 하고 싶어요. 토마토 스튜도 괜찮은데 그것보다는 통통한 소시지를 불에다가 바로 구워서 술 한잔 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베이컨도 바싹하게 굽고…….”

신입의 말에 모두 따듯한 식사를 떠올렸는지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기사들이 한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들 2주를 넘는 임무와 빗길로 휴식이 간절했다.

“오늘은 쉬고 멀끔하게 내일부터 일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에 모포를 둘러쓴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 돼.”

베스라온의 말에 모두가 좌절했다. 심지어 신입은 눈물을 삼키려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의 눈에 서러움이 깃들었다. 베스라온의 옆을 달리던 렘펠이 외쳤다.

“아, 아니, 왜요? 우리는 이 빗길을 사흘을 넘게 달려왔습니다, 대장. 휴식이 필요하다고요.”

“이 일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 황제 폐하께 보고를 올리는 게 먼저야. 휴식은 그 뒤다.”

“대장! 우리 몰골로는 황실 안쪽에 들어가기도 전에 내쫓길 게 분명합니다.”

마지막 말에 베스라온을 제외한 전원이 긍정했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빗속을 달려 모두 엉망이었다. 수도의 거지가 이것보다 깔끔할 것이다. 분명 황실에 발을 내딛자마자 쫓겨나겠지.

“일단 들어가서 자고 씻고 먹고! 그러고 갑시다. 네?”

하지만 바로 베스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보고가 먼저다.”

그러자 렘펠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다른 기사가 가볍게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우우. 갑자기 왜?”

렘펠이 주먹으로 찔린 옆구리를 매만지며 눈물진 얼굴로 동료를 바라보았다.

“저기 봐.”

그러자 그가 턱짓으로 성문 쪽을 가리켰다. 렘펠은 눈을 찡그리다가 이내 환하게 웃더니 다시 베스라온을 보며 능글맞게 웃음을 흘렸다.

“대장, 정말로 바로 황궁으로 가실 건가요?”

“그래. 피곤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항은…….”

말을 잇던 베스라온도 성문 앞에 서 있는 마차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얀 마차에 라일락색으로 셀바토르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정말로 안 쉬실 건가요? 예?”

렘펠의 능글맞음이 더해졌다. 이젠 명백히 베스라온을 놀리고 있었다.

평소에 이랬다면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연무장 바닥을 구르겠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마차에 타고 있는 저분이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그걸 알았는지, 베스라온은 렘펠을 노려보기만 할 뿐 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서 있는 정문까지 점점 가까워졌고,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도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여쁜 은발을 정성스럽게 땋아 올리고, 푸른 리본으로 장식한 소녀의 얼굴은 기사들을 보자마자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베스라온 오라버니!”

기사들은 속력을 줄여 레슬리 근처에서 말을 멈췄다. 레슬리는 말에서 내려 자신 가까이 온 베스라온의 품에 덥석 안겼다.

“오라버니! 보고 싶었어요.”

“이런, 옷이 더러운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베스라온은 늘 하던 대로 레슬리를 들어 안았다.

“괜찮아요. 드레스는 나중에 세탁하면 되지만, 오라버니는 2주 동안 못 봤는걸요. 어서 보고 싶어서 마델이랑 같이 마중 나왔어요. 같이 저택으로 돌아가요, 오라버니.”

레슬리가 마차 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마델이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이런…….”

베스라온은 레슬리의 말에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곤란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렘펠이 옆 동료에게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레슬리에게 확실히 닿을 만한 크기로 속삭였다.

“이런, 우리는 황실에 바로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니?”

“맞아, 맞아! 바로 황제 폐하께 보고를 올려야 하니까. 이번 사항은 아주 중대한 사항이라 우리는 쉴 수 없어.”

마치 책을 읽듯 옆에 있는 기사와 대화를 나누자 베스라온이 바로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레슬리가 그 말을 들은 후였다.

“지금 바로 황실로 가셔야 해요?”

라일락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충격으로 물들었다. 베스라온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레슬리의 어깨가 이미 축 처진 뒤였다.

“하긴 오라버니는 매우 바쁘시니까…….”

축 처진 목소리의 레슬리는 쓸쓸한 얼굴로 베스라온 품에서 내려왔다. 그게 충격이었는지, 베스라온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쓸쓸하지만, 괜찮아요. 그럼 저는 먼저 저택으로…….”

“아니!”

꽉 다문 잇새로 숨을 크게 흘리더니 베스라온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 일찍 기사단으로 출근하도록.”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말이 베스라온의 입에서 떨어졌다. 모두 기뻐서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고 그건 레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슬리가 기뻐하며 베스라온의 팔에 매달리자, 다시 베스라온이 저의 귀여운 여동생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놈들을 연무장 바닥에 굴리는 건 며칠 후가 되어도 괜찮겠지.

베스라온이 무슨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다른 기사들은 동경과 찬양의 눈빛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덕분에 오늘은 저택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우리 여신님이야.”

한 기사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입에는 훈훈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깐깐하고 무뚝뚝한 성격의 베스라온은 하나뿐인 제 여동생 앞에서는 허물어졌다. 조금 강경하게 나가다가도 레슬리가 눈을 반짝이면서 두 손을 꼬옥 모으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린체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황실의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레슬리의 도움을 받았다.

베스라온이 종종 보통 사람의 기준을 잊고 자신의 기준에 맞춰 모두를 굴리거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아 모두가 강제 야근을 하게 될 때마다 레슬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베스라온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황실에서는 은밀하게 레슬리를 여신님이라고 부르며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선두는 말할 것도 없이 린체의 기사단이었다.

‘오늘도 여신님의 은총을 받아 살아갑니다.’

한 기사가 두 손을 모으고 훌쩍거렸다. 다른 기사들이 그러든 말든 베스라온은 레슬리의 손을 잡고 마차로 걸어갔고, 고개만 살짝 돌린 레슬리가 다른 기사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긴 은빛 속눈썹 밑에서 라일락색 눈을 빛내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일부러야……!”

자칭 레슬리 여신님의 첫 번째 신자인 렘펠이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일부러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여기까지 와 주신 거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레슬리를 찬양하는 가운데, 신입은 레슬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신님…….”

신입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다녀왔습니다.”

혹여나 베스라온이 도망갈까 봐 레슬리가 손을 꼭 잡고 위풍당당하게 저택으로 돌아오자, 맨 먼저 두 사람을 맞이한 사람은 제나였다.

“임무를 수행해서 돌아오셨군요.”

제나가 손을 내밀자, 짝 소리가 나게 제나와 손바닥을 마주친 레슬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집사의 계략이었나.”

베스라온이 비로 엉망이 된 겉옷을 벗어 하인에게 건네주며 말하자, 저 위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내 계획이었단다.”

청동빛 로브를 걸친 공작이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황실로 갈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오라고 하면 바쁘다고 거절할 테고. 덕분에 레슬리가 성문 밖까지 나갔구나.”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베스라온은 제 옆에 서 있는 레슬리를 내려다보더니, 일부러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가 보고 싶어서 마중 나온 게 아니라 어머니의 명령 때문이었구나. 레슬리.”

아까의 작은 복수였다. 그 표정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온 힘을 다해 아니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말씀도 있었지만, 제가 정말정말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서 간 거예요. 진짜예요! 믿어 주세요.”

레슬리가 당황해하는 모습에 다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막내딸은 놀리는 맛이 있었다.

“그래,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단다.”

베스라온이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자, 그제야 레슬리가 안도의 숨을 흘렸다.

“우리 예쁜 딸.”

두 사람 가까이 걸어온 공작이 허리를 굽혀 레슬리의 뺨에 작게 키스하자, 간지럽다는 듯 레슬리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 엄마가 네 첫째 오라버니와 할 말이 있단다. 잠시 네 오라버니를 좀 빌려주렴?”

“네, 어머니.”

아쉽다는 듯 눈을 깜빡인 레슬리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직 중앙 계단 쪽에 서 있는 셀바토르 공작과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두런두런 흩뿌리는 말소리를 놓치지 않고 주워 담았다.

‘후작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쉽게 잡힐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레슬리의 라일락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도망갔다고 한 후작은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남자다. 잡히면 이번엔 푸른 피라 해도 죽을 게 확실했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숨을 죽이고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하지만 4년이 지났는데도 후작의 머리카락 하나 찾기 힘들 줄 몰랐다.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가씨?”

레슬리를 뒤따라가던 마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슬리는 언제 후작을 떠올렸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마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기다리다 보면 그는 잡힐 테니까. 그러면 그때는 반드시 내 손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후작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오라버니와 어머니는 무슨 이야길 하시는 걸까.’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인장이 새겨진 편지지에 답장을 쓰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검은 토끼 인형이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답장을 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몸을 조금 기울이자, 은발이 앞으로 쏟아졌다.

“아가씨, 머리를 묶어 드릴까요?”

레슬리가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꽃병에 꽃을 갈던 마델이 물었다.

“으음……. 아니야, 금방 다 쓸 것 같아.”

거절 편지를 쓰고 나면 낮잠을 자야지. 레슬리가 고개를 젓자, 마델의 시선이 작은 원형 테이블 밑의 푸른 상자에 닿았다.

“시간이 좀 걸리실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푸른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상자라지만, 그 안에는 색색의 편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직도 저만큼이나 남았었나. 아까부터 답장을 쓰고 있었는데, 전혀 줄지 않았다. 레슬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용을 정해 놓고 똑같이 쓰면 실례겠지?”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거절 편지를 돌려 보진 않을 테니까요.”

리본과 빗을 가져와 레슬리의 머리를 매만지며 마델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많은 편지를 받으시다니, 역시 우리 아가씨예요.”

“거절이 귀찮기만 한걸.”

4년 전, 공작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백작가의 장남을 선두로 줄줄이 청혼서와 초대 편지가 셀바토르 공작가로 날아왔다. 덕분에 레슬리는 예전부터 바라 왔던 편지를 잔뜩 쓸 수 있었다.

“티 파티, 시 낭독회, 피아노 연주회, 신어와 고어 해독 클럽…….”

레슬리는 답장한 편지를 하나하나 반대편에 있는 크림색 상자에 집어넣었다.

“이건 또 청혼서…….”

어머니께 보여 드려야겠다. 다른 초대는 그래도 레슬리의 선에서 거절할 수 있는 데 비해 청혼서는 가문 간의 일이라, 셀바토르 공작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레슬리는 그걸 세 번째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 안에는 이미 다섯 통이 넘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마델이 슬쩍 상자 안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청혼서가 부쩍 늘었네요.”

“아마 아직 보지 못한 거에 더 몇 통 섞여 있을 거야.”

레슬리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전엔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

레슬리는 아무 편지나 집어 들고 페이퍼 나이프로 잡아 개봉하며 투덜거렸다. 그 말에 레슬리의 머리를 매만지며 마델이 옅게 웃었다.

“당연하지요. 이렇게 아름다워지셨는걸요. 우리 아가씨 머리카락은 별빛 같고, 눈은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운걸요.”

그렇게 말하자, 레슬리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말해 주는 건 마델과 공작저의 사람들뿐이야.”

레슬리는 종종 마델이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말이라 딱히 그녀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니에요!”

드물게 마델이 큰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은발이 별빛을 닮아 아름답다며 뽐내듯 손질했다. 덕분에 레슬리는 부끄러움에 편지를 쓰던 손을 멈춰야 했다.

하지만 마델의 말은 반쯤 사실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 갇혀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졌으니까. 매일 관리를 받은 것도 있지만, 잘 먹고 잘 자고 주변에서 사랑받은 것이 레슬리의 외관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예전엔 웃으려고 해도 잘 움직이지 않았던 입은 이제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 냈고, 눈에는 눈물보다는 반짝거림을 머금고 있는 날이 많았다.

‘공작저에 와서는 눈물을 흘린 날이 거의 없었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저에 와서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일을 제외하고는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다. 아니, 흘리면 안 됐다. 한 번 계단에서 넘어져 운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계단이 사라졌었다.

‘아, 그거? 없앴어. 위험하잖아? 새 계단은 마법으로 움직이게 해 봤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될 거야.’

루엔티는 자신의 마법을 연습하느라고 그랬다지만, 레슬리가 보기엔 절대 그 이유가 아니었다.

‘인기가 좋아서 다행이라지만.’

자동으로 움직이는 계단은 사용인들에게 대인기를 끌었다. 아예 줄을 서서 이용할 정도였으니까.

다시 슬그머니 거울을 바라보았다가 레슬리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아쉬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크지 않았는걸.’

루엔티 오라버니도 스무 살을 넘고 나서도 훌쩍 컸는데!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같이 막내 연합을 이루던, 그 시절의 루엔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비록 베스라온보다는 못하지만 어느새 셀바토르 공작을 따라잡을 만큼 컸고, 레슬리는 홀로 ‘귀여운’ 막내로 남겨졌다.

‘귀엽다는 말보다는 멋있다는 말이 듣고 싶어.’

아직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레슬리의 키는 또래보다도 작은 편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먹어도 체구도 자라지 않아서 바타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자신의 요리가 부족하다고 말이다. 그날 하루 레슬리는 마델과 울먹거리는 바타를 달래 주며 보냈었다.

‘매일 우유도 마셨는데, 어머니의 반도 안 된다는 건 너무하잖아.’

이상은 어머니와 같은 키인데 현실은 그 반도 안 되어 보였다. 실제로는 반보다야 컸지만, 레슬리는 마뜩지 않았다. 열두 살의 자신은 열여섯쯤 되면 그래도 어깨까지는 크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있었는데, 희망과 실제의 차이란 너무도 슬픈 것이었다. 이래서 언제쯤 어머니처럼 멋지게 검을 차고 휘두르는 꿈을 이룰 것인지.

“휴우우.”

레슬리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쯤은 참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실 거예요.”

레슬리의 옆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 옆으로 넘기면서 마델이 웃었다. 아마도 마델은 레슬리가 편지를 거절하는 일로 한숨을 쉬었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오히려 그 말에 레슬리는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다, 이것들이 있었지.

“다들 유명한 가문의 자제들인걸요.”

“하지만…….”

레슬리는 손에 잡히는 한 장의 편지를 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셀바토르 공녀님.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대기도회 때 셀바토르 공녀님을 뵈었었어요.

저는 셀바토르 공녀님 뒤의 뒤에 그리고 왼쪽으로 한 번, 다시 거기서 한 번 더 뒤에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었거든요.

기도 중에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 부디 저를 기억해 주시고 이 편지를 반겨 주시길 바라고 있답니다.

‘이런 걸 어떻게 기억하라는 거야.’

아직 레슬리는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고, 가문 간의 교류도 없었다. 그나마 참여하는 거라고는 신년 축제와 대기도회 정도였다. 종종 황실을 드나들었으나, 늘 린체의 기사단에만 머물러서 기사단 외에 레슬리와 친분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런 레슬리에게 초대 편지를 보내려면 작은 만남이라도 필요했기에, 다들 이런 식으로 레슬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대기도회에서 지금처럼 기억도 나지 않는 뒤뒤옆뒤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는 건 양호했다. 자신도 레슬리가 들르는 가게를 다닌다고 그걸 친분으로 삼아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번화가에 간 것을 빌미로 청혼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다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 쉰다면서 초대장이나 청혼서를 보낼지도 모르겠어.’

레슬리의 한숨이 깊어졌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녔다.

편지가 들어 있던 편지 봉투를 집어 뒤집자, 회델리아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회델리아 영애는 레슬리도 알고 있는 엘리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엘리 따윈 기억도 하지 못한다는 듯 자신에게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레슬리는 다시 상자 속에서 편지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청혼서였다.

‘거기다 이 남자는 엘리에게 청혼했던 사람이잖아.’

분명 엘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다. 엘리는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많은 가문과 교류하며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는데, 지금 편지를 보내온 사람은 그중 한 명이었다. 그것도 엘리의 눈짓 한 번, 웃음 한 번에 가슴을 움켜잡던 이였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시작된 편지는 안쓰러울 정도로 구구절절이었다. 만일 자신이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사악한 엘리 따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갇혀 있을 레슬리를 구해 내겠다며 다짐을 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부디 저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이렇게 비참하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락방에 갇혀 구박을 당하던 ‘레슬리 스페라도’를 구하고 싶은 게 아니라 ‘미래의 셀바토르 공녀’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뻔뻔해라. 레슬리는 편지를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둘 다 엘리와 친분을 나눌 때는 그녀에게 심장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가의 명성에 기대 떨어지는 것들을 주워 먹었으면서. 이제 빌붙을 사람은 레슬리라는 소리였다.

저 편지에는 답장도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편지를 상자에서 집어 드는데, 누군가가 노크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레슬리!”

이젠 어깨를 넘을 정도로 길어진 머리를 하나로 묶은 루엔티가 성큼성큼 레슬리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라버니.”

후회하고 있다는 가식적인 편지들로 일그러졌던 레슬리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일은 다 끝나신 거예요?”

레슬리의 물음에 루엔티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어 보였다.

“그래, 드디어 자유다!”

루엔티는 정말로 기쁜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소리쳤다.

최근 마법사의 저택을 대표하는 ‘10인의 마법사’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린 루엔티는 셀바토르 저택에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로 바빴다. 거기다 본격적으로 셀바토르 공작령의 일을 손대면서 셀바토르 저택보다는 마법사의 저택과 공작령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레슬리로서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런 레슬리의 표정을 알아챈 루엔티가 씩 웃음을 머금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당분간은 저택에서 쉴 생각이니까. 마법사의 저택도, 공작령도 가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면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던 루엔티의 눈에 편지 다발이 들어왔다.

“편지를 쓰고 있었어?”

“네, 티 파티 초대장이랑, 청혼서들이에요. 너무 많아서 조금 힘들어요.”

“흐음. 청혼서는 이쪽?”

정확히 청혼서가 들어 있는 상자를 고른 루엔티가 빠른 속도로 여섯 장의 청혼서의 봉투를 읽어 내려갔다.

“아라바른 자작가, 레판 백작가…….”

전부 읽었다는 듯 루엔티가 방긋 웃었다.

“폐기 처분.”

그 말과 동시에 손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여섯 장이나 되는 편지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휘날렸다. 비록 불을 무서워하는 레슬리를 위해 몸을 돌리고 했다지만, 편지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건 놀라운 모습이었다.

머리를 다 땋아 리본을 매 주던 마델과 편지를 쓰던 레슬리는 놀라 눈만 깜빡거렸다.

“어머니께 보여 드리지도 못했는데.”

“아, 괜찮아. 내가 봤잖아? 다음엔 그냥 이름만 적어 두고 태워 버려. 알았지? 굳이 일일이 답장을 쓰기에는 네 시간과 글자가 아까워.”

루엔티의 환한 미소에 어쩐지 무서워져 레슬리는 마델의 손을 꼭 잡았다.

‘설마, 그간 답이 없었던 게…….’

아무리 청혼서에 거절을 했더라도 셀바토르 공작가와 인연을 맺을 기회를 쉽게 놓칠 사람들이 아녔다. 실제로도 티 파티나 낭독회 같은 경우에는 거절해도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며 다시 편지들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데 묘하게 청혼서에는 편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가씨, 사실 제가 소문을 들었는데, 아라펜드 가문이 하던 사업이 망했다고 들었거든요.”

아라펜드. 분명 몇 달 전 레슬리에게 청혼서를 보내왔던 가문이었다.

“그냥 망한 것도 아니라 완전 쫄딱! 망해서 야반도주했다고 하더라고요.”

히끅, 작게 딸꾹질이 터졌다. 설마 지금 자신에게 청혼서를 보냈다고 한 가문을 망하게 만든 건가?

“그리고 파레볼 가문 역시 수도의 저택을 팔고 파레볼 영토로 내려간다고 하던데…….”

파레볼 가문 역시 몇 달 전에 레슬리에게 청혼서를 보냈던 가문이었다. 설마, 설마. 서로가 맞잡은 손이 작게 떨렸다.

“설마 싶은데…… 두 가문 다 루엔티 도련님이…….”

“레슬리.”

갑자기 루엔티가 레슬리를 부르자, 놀란 마델이 히익 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루엔티는 아직 제 손에 묻어 있는 재 가루를 탁탁 털어 내며 씩 웃었다.

“이런 거 신경 쓰지 마. 다음부터는 내가 말한 대로 하고, 알았지? 그나저나 형이 돌아왔다며. 제나가 알려 주던데.”

명백히 말을 돌리는 루엔티를 보며 레슬리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다음부터는 그냥 혼자 거절 편지를 보내야겠다. 그들도 가문이 망하는 것보다야 거절 편지 한 통이 낫겠지.

“지금 막 돌아오셨어요. 어머니랑 이야기하러 집무실로 들어가셨어요.”

“황제 폐하에게 안 들르고 바로? 신기하네.”

루엔티는 대답하며 이번엔 초대장들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설마 저것도 다 외우려는 건 아니겠지.

“제가 오라버니를 마중 나갔다 왔거든요.”

말을 잇다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루엔티라면 아까 자신의 물음에 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오라버니, 베스라온 오라버니는 무슨 일을 하고 온 걸까요?”

그 말에 루엔티는 레슬리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제 머리를 매만졌다.

“에타이의 움직임을 확인해 보고 온 거겠지. 분명.”

에타이. 그 단어를 들은 레슬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르카디우스 제국에는 여러 번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부스러기처럼 남은 그 잔당들이 모이고 모여 에타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에타이는 오랜 시간 동안 변질하고 변질하여 이젠 저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이유도 잊어버린 채 맹렬하게 제국의 멸망만을 바라고 있었다.

제국 내부에서 생겨나고 자란 에타이는 늘 황실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골칫덩어리였다. 셀바토르 공작이 검을 들었을 때, 유일하게 해결하지 못한 일이 에타이에 관한 일이었을 정도였으니까.

루엔티는 편지 하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눈을 찡그렸다.

“요즘 힘을 기른 모양이더라. 마법사의 저택도 그 일로 난리가 났으니까. 도대체 뭐가 에타이를 키우고 있는 건지.”

‘나도 에타이를 만나게 될까.’

셀바토르 공작에 이어 베스라온까지 에타이의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엔티도 마법사의 저택을 통해 에타이와 연관이 되어 있었으니, 레슬리도 그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에타이를 상대하며 셀바토르의 이름을 드높이는 자신을 상상하자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 어머니만큼 키는 못 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안 돼. 너까지 그놈들을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전에 형과 내 선에서 다 해결될 거니까.”

레슬리의 표정만 보고도 레슬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기가 막히게 읽어 낸 루엔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에 레슬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셀바토르 공작가의 일원이에요, 오라버니.”

“키부터 크고 이야기합시다, 막냇동생님.”

키 이야기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레슬리가 루엔티를 노려보자 루엔티가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

“그러니까 누가 남들 다 클 때 혼자 크지 말래?”

삐진 여동생이 자신을 방에서 쫓아내기 전에, 루엔티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툭 상자 안으로 내던졌다. 가득 쌓인 편지 위에 한 통의 편지가 더해졌고, 암녹색 시선이 거기에 닿았다.

“저렇게 많은 편지에 답하느라고 죽어 가는 너에게 미안하지만, 나도 전해 줄 편지가 한 통 있어.”

그러더니 제 품에서 하얀 편지를 꺼내 레슬리에게 내밀었다. 투박한 종이에 써진 편지에는 신전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최초의 사제들 2차 시험에 관한 편지야. 읽어 봐 봐.”

그 말에 레슬리는 다급하게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개봉하고는 읽어 내려갔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께.

최초의 사제를 뽑는 2차 시험이 정해졌습니다.

2차 시험은 북서부 시누스턴 신전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며 기간은 약 열흘입니다.

사용인을 데리고 올 수 없으며, 의복 역시 신전에서 제공합니다.

시험 중에는 포기할 수 있습니다.

‘포기가 가능하다고?’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사용인을 데리고 올 수 없다는 말과 의복을 지급한다는 말, 그리고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이어진 편지 뒷부분에 그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2차 시험을 통과하신 분들은 시험 후 열리는 아라벨라 축제에 ‘최초의 사제’와 ‘아라벨라’로서 참가하게 됩니다.

아라벨라 축제 마지막 날인 ‘축복의 날’ 의식이 거행되니…….

“아라벨라 축제가 열리는구나…….”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레슬리의 눈동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라벨라의 축제는 최초의 사제들을 뽑는 시험이 있는 해에만 열리는 축제로,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가장 커다란 축제 중 하나였다. 얼마나 크고 화려했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4년은 아라벨라 축제를 준비하기엔 짧은 시간이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거기다 번화가에서 떨어진 스페라도 후작가 다락방에서도 아라벨라 축제의 불꽃을 볼 수 있어서 레슬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꼭 가 보고 싶었던 축제이기도 했다.

“꼭 가고 싶었는데 드디어…….”

4년 전, 열두 살의 봄은 스페라도 후작가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열여섯 살의 봄은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보내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마음껏 축제의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거기다 자신은 최초의 사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예전엔 엘리조차 이루지 못했던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하나 더 이뤄 냈다는 사실에 레슬리는 눈물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기뻐?”

“네, 정말 기뻐요.”

레슬리가 편지를 꼭 쥐며 웃었는데, 붉어진 눈가가 안쓰러워 보였다.

루엔티는 이를 까득 갈았다. 4년이었다.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세월이었다. 4년을 공작저에서 지냈는데도, 스페라도 후작가의 흔적이 남았다. 잊고 있다가도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상흔이 떠올랐다.

‘겨우 축제인데.’

어떤 아이가 이런 축제 하나로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좋아한단 말인가. 아무리 아라벨라 축제가 4년 단위로 열리는 축제라지만, 이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수도에 없을 거라는 말이 돌 정도로 큰 축제였다. 막말로 수도 어느 거리를 걷기만 해도 축제가 열려 있었으니까.

짜증이 치솟아 루엔티는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런 건 전설 속 아라벨라, 본인이 살아 돌아와도 완벽하게 치료하지 못하겠지.

‘공작령에서 1년 내내 축제를 열게 할까.’

루엔티는 재빠르게 1년 내내 축제를 여는 방법을 짜냈다. 괴로운 기억을 덮을 정도로 즐겁게 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다 좋은데, 공작령은 멀잖아?’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공작령은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드니, 수도의 거리 하나를 전부 매입해서 아라벨라 축제 때처럼 꾸며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매일 그 거리를 보면서 즐거워하겠지?

눈을 반짝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레슬리를 떠올리자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수도 번화가 거리를 매입하려면 얼마의 금액이 들까, 루엔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식사 시간에 보자.”

지금쯤이면 베스라온과 셀바토르 공작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것이다. 루엔티는 두 사람에게 수도 거리 매입 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잠시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마델이 손을 뻗어 레슬리의 눈가를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마델.”

“네?”

마델을 바라보는 레슬리의 눈가가 다시 접혔다.

“2차 시험 통과하고 아라벨라 축제 때 같이 놀러 가자. 의식은 마지막 날 치러지니까 다른 날에는 축제를 즐겨도 괜찮다고 적혀 있어.”

“저랑요?”

“응, 마델은 나랑 가장 친하잖아.”

가족이랑도 놀러 가야지. 그리고 마델과 서올리랑 같이 가도 좋겠다. 제나의 손을 잡고도 갈 수 있겠지. 하르트 경이랑 레소 경이랑 반트 경 그리고 다른 기사들이랑도…….

레슬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같이 갈 사람들을 떠올렸다.

예전이었다면 아라벨라 축제를 구경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텐데. 거기에 같이 구경할 사람들도 생겼다. 그 사실이 너무도 즐거웠다.

‘아라벨라의 축제는 긴 편이니까.’

콘라드 경에게도 말해 봐야겠다. 모두와 함께 가도 충분해.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다시 웃었다.

“그래요, 아가씨. 같이 가요.”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에 고여 버린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입을 꽉 다물었다.

“아가씨, 계속 답장을 쓰실 거면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가져다 드릴까요? 설탕을 듬뿍 넣어서 가져올게요.”

“응, 얼음도 넣어 줘.”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델은 금방 가져오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아까 루엔티가 태워 버린 재 가루 때문에, 그리고 눈에 맺혀 버린 눈물 때문에 마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안 돼, 넘어진다! 마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어어……?”

마델은 넘어질 걸 각오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팔다리를 넓게 벌린 괴상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넘어지지 않게 제 발을 받쳐 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마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발밑에는 재만 남아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뭔가가 잡아 주는 기분이었는데…….’

“괜찮아, 마델?”

뒤에서 들려온 레슬리의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린 마델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워서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네, 네! 저 주방에 다녀올게요. 잠시만요! 간식도 가지고 올게요!”

급하게 대답한 마델은 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레슬리는 방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무언가에게 말을 걸었다.

“고마워.”

레슬리의 하얀 발밑에서 어둠이 일렁거렸다.

“마델은 조금 덜렁거려서 마음에 놓이지 않는단 말이야. 저번에도 한 번 넘어졌고 말이야.”

레슬리의 키득거림에 어둠이 그렇다는 듯 다시 테이블 위로 슬그머니 올라오더니 토끼 인형을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토끼 인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레슬리가 웃으며 어둠에게 말을 걸었다.

“축제 즐겁겠다. 그치?”

다시 토끼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놀러 가자. 맛있는 것도 먹고…….”

분명 즐거울 거야. 첫 축제인걸. 행복한 상상을 하며 레슬리는 다시 답장을 쓰는 것에 집중했다. 마델이 가져다준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답장을 쓰고, 콘라드 경에게 같이 축제에 놀러 가자고 편지를 쓰자.

레슬리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웃음을 지었다.

***

“편지예요.”

불퉁한 표정의 시녀는 엘리의 앞에 편지를 한 통 던지듯 내려놓았다. 생기를 잃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편지에 닿았다.

“누가? 나에게?”

“그걸 제가 어찌 아나요? 편지가 왔으니, 편지가 왔다고 했지. 글도 읽을 줄 아는 분이 왜 이러실까.”

시녀는 엘리를 깔보듯 툭툭 말을 던졌다. 거기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명백히 엘리를 깔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쭉 내밀고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투박한 것이 신전에서 온 것 같네요. 뭐, 내용까지 읽어 드려야 하나요?”

한마디를 할까. 아니면 손을 올릴까. 엘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이는 쪽을 택했다. 사실, 과거의 엘리라면 몰랐을까 지금의 그녀에게는 선택의 권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엘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니야. 내가 읽어 보도록 할게.”

“겨우 그게 다인가요?”

시녀의 말에 엘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져다줘서 고마워.”

결국, 그 소리가 엘리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 말에 시녀가 입술을 틀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네에, 네에. 나처럼 착한 사람이 없다니까? 죄인에게 편지도 가져다주고. 아, 오늘 식사는 보리죽이에요. 알아서 가져다 드세요. 나는 이만 쉬러 갈 테니까.”

까다로운 죄인을 모시는 건 피곤하다니까. 말을 덧붙이며 시녀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방을 나갔다. 아마도 낮잠을 자러 갔겠지.

그 말은 아직 해가 중순인데도 시녀는 멋대로 일을 쉰다는 말이었다. 채찍질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엘리로서는 시녀에게 벌 줄 수 없었다. 시녀가 벌을 받으면 내일부터 그녀는 엘리에게 밥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엘리는 여태 과일 한 조각을 자르는 일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요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엘리는 두 손을 꽉 쥐고 시녀의 발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지자마자 제 옆에 있는 베개를 거세게 집어 던졌다. 베게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문에 맞아 툭 하고 떨어졌다. 엘리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고 봐. 내, 내가…… 원래의 위치를 되찾기만 하면 네년 따위…….”

흐느낌이 강해졌지만, 누구도 그녀를 토닥여 주지 않았다.

예전 같았더라면 엘리가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부터 스페라도 후작가가 뒤집혔을 텐데. 아버지부터 어머니, 르아와 수많은 하녀와 하인들이 달려와 보석 같은 눈물을 멈추라고 자신을 달래 주었을 텐데. 자신이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다며, 사랑스러운 딸이라고 말해 줬을 텐데. 지금 그녀의 옆은 휑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눈물을 흘리며 엘리는 몸을 웅크렸다. 엘리의 방은 봄에도 한기가 들 정도로 외지고 추운 곳이었다.

처음 이곳을 배정받았을 때, 엘리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그녀에게 이렇게 작고 추운 곳에서 지내라는 건가?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지금 아가씨는 처형대에 목이 걸려도 이상할 거 없는 죄인이에요. 그런데 방을 고른다고요? 꿈 깨세요.’

이어지는 시녀의 말에,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엘리의 생각은 깨져 나갔다. 비록 엘리에게 손을 올리는 이는 없었으나, 그것만 빼고는 평민과 같은 삶이었다. 그게 치욕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웠다.

‘태후 폐하만 만나면…… 그분만 만나면 될 거야.’

엘리는 자신을 다독거렸다. 자신의 손을 잡아 준 태후는 엘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굳게 믿었다. 메데이아만 만난다면 자신을 깔보는 저 시녀를 반드시 벌할 것이라며.

하지만 4년 동안 엘리는 메데이아를 찾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고, 우연한 만남을 노렸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메데이아는 자신을 잊어버린 듯 그 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았다.

그러기를 4년이었다. 메데이아를 만나려는 엘리의 노력은 뭉개지고 삶은 바닥으로 떨어져, 드높았던 자존심이 짓뭉개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엘리는 이제 하루의 절반은 과거의 영광을 곱씹고, 나머지 절반은 눈물과 한탄으로 시간을 보냈다. 거기다 더욱더 엘리를 힘들게 한 것은…….

“아하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창문을 타고 들어와 엘리 방을 가득 메웠다.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엘리는 몸을 움직여 창문을 열어 보았다. 햇볕이 따사롭게 비추는 정원 한가운데 아름다운 티 파티가 펼쳐져 있었다.

봄에 어울리게 갖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새하얀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꽃잎과 과일을 말린 것을 우린 값비싼 차와 그 차에 어울리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그 테이블에 한 쌍의 연인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그래, 지금 저 남자가 자신의 약혼자인 아렌도 황자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풍경일 텐데.

엘리는 창가에 올리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약해진 손톱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까 뺨을 타고 흘렀던 눈물과는 다르게 분노가 섞인 눈물이었다.

“어떻게…… 내가 있는데…….”

엘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아렌도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렌도의 얼굴에 방금까지 떠올라 있던 환한 미소가 지워지고, 냉담한 시선이 돌아왔다.

“위에 무엇이 있나요?”

아렌도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아렌도의 표정을 바라보다 푸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렌도가 뺨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그러고는 예전에는 엘리에게만 보여 주던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위에 눈길을 끄는 흉한 것이 있기에.”

“어머나, 흉한 것이라니.”

여자가 놀라 눈을 깜빡이자 아렌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니 보지 마시기를. 흉한 것을 눈에 담은 이는 저 하나로 충분하니까요.”

아렌도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렸다. 엘리는 더 그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있는데!”

차라리 약혼녀의 위치를 잃었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을 텐데.

엘리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귀를 긁는 듯한 외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동시에 분노가 터져 올랐다. 자신의 잘못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엘리였기에,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너 따위 때문에 내가 이런 비루한 곳에서, 이런 거지 같은 곳에서!”

엘리의 분노는 남부에서 사라졌다는 아버지도, 친정에서 제 연락을 무시하고 있는 어머니도 그리고 제 앞에서 한눈을 팔고 있는 아렌도도 아닌 레슬리에게 향했다. 그 아이가 가장 약하고 만만했었으니까.

그렇게 엘리의 뒤틀린 원망은 점점 이상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오직 그녀를 이 방으로 배정한 단 한 사람 외에는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두고 봐. 두고 보라고. 내가 반드시……. 내가 반드시……!”

흐윽. 말끝은 다시 울음이었다. 엘리는 그렇게 한참을 차디찬 방에서 홀로 울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달칵 열리며 한 여자가 들어왔다.

“아니, 이게 무슨…….”

다정한 눈동자가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엘리에게 닿았다. 4년간 엘리를 방치했던 메데이아였다. 갑자기 나타난 메데이아는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놀람으로 그리고 죄책감으로 순식간에 물들었다.

“세상에, 이 꼴이 뭐니. 어떻게 스페라도 후작가의 영애를 이런 방에 배치해 두었지?”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상황을 알 수 없어 엘리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엘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메데이아는 다시 놀라 작게 신음을 흘렸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보석이…… 이렇게 야위고 가냘파지다니…….”

마치 명화가 손상됐다는 듯한 말이었다. 메데이아는 천천히 엘리에게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메데이아가 입고 있는 부드러운 드레스의 감촉에, 엘리는 눈을 깜빡였다.

엘리는 상황을 알 수 없었다. 4년이었다. 4년간 자신은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서 왜 이러는 걸까.

“미안해요. 미안해, 스페라도 영애. 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메데이아는 엘리를 꼭 끌어안으면서 거듭 사과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나는 내가 힘을 못 쓰니 스페라도 영애에게 가까이 가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나 같은 사람과 어울려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영애를 멀리했던 건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영애.”

그러면서 메데이아는 제 품에 안겨 있는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산금을 넉넉히 책정하고 스페라도 영애가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해 주라고 했었어요. 폐하께 부탁드렸지요. 그런데 어째서 이런……. 데뷔탕트도 제대로 챙겨 주라고 몇 번을 일렀거늘…….”

“저, 정말인가요? 그런데 저는 왜 이런 곳에 있게 된 건가요?”

엘리는 다급히 물었다. 예산금이라니, 부족함이 없는 삶이라니! 자신은 여태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따듯한 침대와 목욕물 그리고 제 입맛에 맞는 식사와 제 말에 고분고분한 하녀였다. 누군가가 그걸 되찾아 준다면, 엘리는 제 심장이라도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의 말에 안쓰럽다는 듯, 메데이아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제 품에 안겨 있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스페라도 영애에게 자주 못 온다는 사실을 알고 중간에 착복한 인간이 있는 모양이에요.”

“착복…….”

엘리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거칠게 소리 질렀다.

“저를 돌봐주는 시녀예요! 오늘도 저를 돌보지 않고 낮잠을 자러 갔어요! 거기다 식사는 보리죽 같은 걸 주지 않나. 제 옷을 보세요! 이렇게 늘 낡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태후 폐하.”

“세상에!”

그 말을 듣자마자 메데이아는 자신을 따라온 기사를 보면서 외쳤다.

“지금 당장 그 발칙한 것을 잡아 오도록! 내가 친히 그 죄를 묻겠다!”

메데이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을 나간 기사들은 시녀를 끌고 돌아왔다.

“이, 이게 무슨 일인지…….”

정말로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시녀의 눈은 졸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내 메데이아를 보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태후 폐하, 왜 저를……?”

“닥쳐라!”

메데이아는 엘리를 제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고함쳤다. 가녀린 몸 어디서 그런 힘이 있는 건지, 힘이 있는 목소리가 엘리의 방을 가득 채웠다.

“감히 스페라도 영애를 잘 돌보라는 내 명령을 무시하고 영애를 무시해?”

“네?”

시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메데이아의 눈치를 보며 시녀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태후 폐하께서 시키…… 아악!”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 중 한 명이 그녀의 등을 짓밟았다. 기침이 터지며 시녀는 말을 멈췄다.

“보아하니 내가 그간 영애에게 내렸던 드레스와 보석들도 네가 다 중간에서 가로챈 것이 분명하구나!”

“저에게 보석과 드레스를 주셨나요?”

엘리가 메데이아의 품에 그녀를 바라보자 메데이아의 표정에는 다시 동정과 연민이 서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엘리의 뺨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나는 늘 영애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늘 드레스와 갖은 보석들을 영애에게 내렸지요. 특히 작년은 영애의 데뷔탕트가 있는 해였으니, 내가 신경을 더 썼었는데 이런 일이…….”

“세상에나.”

엘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럼 지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저 시녀가 자신의 보석과 드레스를 가로챘다는 말인가?

“범인은 저것이로군요!”

엘리는 당당하게 아직도 기사의 발밑에서 움찔거리는 시녀를 내려다보았다. 시녀가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엘리의 웃음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저것에게 엄벌을 주세요, 메데이아 태후 폐하!”

“그래, 그래야지요.”

“아으……. 저는 억울…… 악!”

메데이아는 자상한 어머니처럼 엘리의 뺨을 쓸었고, 시녀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다시 기사의 발에 짓밟혔다.

“저 도둑을 어떻게 벌을 줄지 직접 정해 보겠어요, 스페라도 영애?”

메데이아의 말에 엘리의 눈이 빛났다. 그러고 보니, 저 보랏빛 눈동자는 묘하게 레슬리를 떠오르게 했다.

“네. 제가 정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어요, 태후 폐하.”

엘리의 말에 시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었다. 꼭 예전의 레슬리와 같은 눈이었다.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았다. 자신이 스페라도 후작가의 보석으로, 그리고 레슬리는 다락방에서 쓸모없는 아이로 지내던 그때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엘리는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외쳤다.

“저것을 온종일 매질해 주세요. 매질 후에는 음식과 물을 창살 밖에 놓고 바라만 보게 해 주시고, 그렇게 일주일을 내리 굶겨 주세요.”

엘리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시녀의 안색은 물론 기사들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 갔다.

“그렇게 저 도둑을 죽여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이겠어요, 태후 폐하.”

“세상에.”

메데이아는 그런 엘리를 보며 사랑스럽다는 웃음을 머금고는 그녀의 푸석푸석한 밀색 머리에 작게 키스했다.

“이렇게 영특한 영애라니. 좋아요, 내가 그리해 주겠어요. 나만 믿으세요, 스페라도 영애.”

“태후 폐하…….”

엘리는 감동했다는 듯 메데이아를 바라보았다.

“부디 엘리 양이라고 불러 주세요.”

“어머나. 딸이 생긴 기분이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와중에 메데이아가 손짓하자, 기사 둘은 시녀를 이끌고 나왔다. 이 방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걸 깨달은 시녀가 몸부림을 쳤지만, 두 사람의 힘을 이겨 내지 못했다.

시녀가 악을 지를까, 그녀의 입에는 천 조각이 매어졌다. 시녀는 그저 눈물만 흘릴 수 있게 되었다. 시녀를 끌고 나온 기사 둘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저걸 믿어?”

“그러니까 말이야.”

4년간 한 번도 메데이아가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작년에는 중요한 데뷔탕트라고 했으면서도 메데이아는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던가.

일부러 내버려 두지 않는 이상은 4년을 엘리가 이렇게 지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간단한 걸 엘리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시녀의 방에는 엘리에게 주어졌다는 드레스와 보석 따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기사는 시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분명 이 시녀도 메데이아의 명을 받아 엘리를 그렇게 대했을 것이 분명했다.

“미안합니다.”

기사는 작게 사과했지만, 지하 감옥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가는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

메데이아가 자신의 궁으로 돌아오자, 그녀의 시녀인 이피엘이 반갑게 제 주인을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스페라도 영애는 어땠나요? 길들이기 좋게, 그 성격이 많이 죽어 있던가요?”

메데이아의 겉옷을 받기 위해 이피엘이 손을 내밀었지만, 메데이아는 제 겉옷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태후 폐하?”

“버리렴. 더러운 것이 묻어서 더는 쓸 수가 없으니.”

“그럼 불에 태우겠습니다.”

이피엘이 허리를 숙여 옷을 주우려고 하자, 메데이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네 손에 불결한 게 묻으면 안 되니, 다른 사람보고 불태우라고 하렴.”

그 말에 이피엘의 눈동자가 겉옷에 나 있는 얼룩을 발견했다. 보나 마나 완벽한 연극을 위해 엘리를 끌어안았던 것이 분명했다.

“네, 알겠습니다. 태후 폐하.”

메데이아는 의자에 앉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입을 씻을 만한 걸 가져오렴. 냄새 나는 머리에 입을 맞췄더니, 입술이 더러워졌구나. 아, 아까 그 성질머리가 잘 죽었는지 물어봤었지?”

메데이아는 턱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돼 있더구나. 4년을 내버려 둔 보람이 있었어.”

“다행이네요.”

이피엘은 빠르게 메데이아 앞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내려놓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아렌도 황자와 약혼도 유지되고 있으니, 아라벨라가 되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아무리 멍청해도 황실의 지지가 있고 나름 황자의 약혼녀니 두 번째 시험은 통과하겠지. 그리고 그녀는 최초의 사제로 뽑힐 것이다.

거기까지 메데이아가 해 줬으면, 그다음은 엘리의 몫이었다. 최초의 사제 중 단 한 명만이 아라벨라가 될 수 있었으니, 아마 그녀는 살기 위해, 그리고 간신히 얻은 새 보호자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칠 것이 분명했다.

흔히들 그런 일에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하지 않던가. 모르지, 기적처럼 엘리가 아라벨라가 될지도.

“어머나, 그 셀바토르 영애가 있잖니. 아마 엘리 양은 무리일 게 분명하단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메데이아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 이피엘의 눈동자가 다시 동그래졌다.

“네? 그럼 태후 폐하께서는 엘리 양에게 아무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으신가요?”

“기대는 걸고 있지. 하지만 그건 아라벨라가 될 정도로 총명하지 못하잖니?”

“그럼…… 왜 아라벨라 자리로 그녀를 추천하신 건가요?”

이피엘의 물음에 메데이아는 제 손에 들린 와인을 돌렸다. 와인 잔에 동그란 파문이 일어났다.

“이용하기 편해서?”

적절한 가문의 위치, 어리석은 보호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총명하지 못한 딸. 그 콧대를 눌러 주고 눈앞에 제 것을 찾아 줄 수 있다는 듯 먹이를 흔드니 바로 넘어오는 단순한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아라벨라가 누가 되든 상관없단다. 셀바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왜, 그녀는 완벽주의자잖니.”

메데이아는 다시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즐겨 마시는 이 와인은 유독 다른 와인보다 붉게 보여 마치 피 같아 보였다.

“신전의 가장 안쪽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에피알테스를 가져와 주기만 하면 나는 아라벨라 따위 그 누가 되도 상관없단다.”

“에피알테스…….”

잠시 메데이아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이피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후 폐하, 그런데 에피알테스는 악몽의 이름을 가로챌 정도로 강력한 전염병인데, 과연 손을 대는 사람이 무사할까요? 저는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그런 자신의 시녀가 귀엽다는 듯 메데이아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피엘도 참. 무사할 리가 없잖니? 신학서에 따르면 신께서 직접 내려와 봉인했을 정도로 강력한 전염병인데.”

“그럼 엘리 양은…….”

“죽지 않을까?”

그 에피알테스에 손을 대고 그걸 메데이아가 원하는 곳까지 옮겨 오면 당연히 운반인은 숨을 거둘 것이다.

그래도 그녀에겐 행복한 삶이겠지. 귀하디귀한 아렌도의 약혼녀로 숨을 거둘 수 있게,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 줄 테니까.

그 전까지도 말만 잘 듣는다면 까탈스러운 고양이처럼 굴어도 예뻐해 줄 생각이 있었다. 외모도 그 정도면 그럭저럭 쓸 만하지 않던가. 데리고 다니기에 부끄러움은 없을 외모였으니까.

‘그래, 에피알테스만 손에 넣으면.’

메데이아는 와인 잔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강력한 무기의 에피알테스는 분명 아렌도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울 것이다.

‘1황자라고 전부 황태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동생들에게 밀려 역사서 뒤로 사라진 1황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메데이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확답이 필요했다. 가장 빛나는 자리를 아렌도에게 넘기겠다는 피스토레의 확답이 그녀에겐 절실했다. 그래서 아이테라 대공도 포섭하고 그녀 나름대로 움직였지만, 역시 가장 좋은 답은 에피알테스였다. 그것만 가져와서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최악이자 최고의 무기를 손에 넣는 거니까.

그러면 에피알테스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이 죽고 사라져도 아렌도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주겠지.

메데이아는 잠시 르카디우스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로 남을 아렌도를 상상해 보았다. 저절로 가슴에서부터 미소가 퍼져 나갔다. 메데이아는 눈을 감고 본격적으로 상상을 음미했다.

“그럼 셀바토르 공작은 그걸 알고 있을까요? 하는 행동을 보면 제 양딸을 제법 아끼던데.”

이피엘이 비어 버린 그녀의 와인 잔에 다시 와인을 따라 주며 물었다. 아직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이트바나 왕족이 아니니 모르고 있을 거야.”

에피알테스를 다루는 법과 그것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이트바나에만 있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모두 외운 메데이아는 이트바나를 빠져나오는 날, 기록을 전부 태워 버렸다. 혹시나 자신이 빠트린 부분이 있을까, 왕궁 도서관 건물 자체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미련 없이 르카디우스 제국으로 향했다.

그러니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단 한사람, 메데이아뿐이었다. 곧 한 사람이 더 늘겠지만.

이피엘의 대답에 메데이아는 텅 빈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방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알려 주려고.”

네 귀하디귀한 딸이 어떻게 될지 미리 알려 줘야지.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말이야.

“우리는 친구니까.”

너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렇게 아끼는 양녀를 선택할까, 아니면 제국을 위험에 빠트릴까. 어떤 선택이 되든 즐거울 것이다. 고귀한 수호자께서 괴로워하실 테니까. 메데이아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빛을 내며 휘었다.

***

셀바토르 공작은 자신의 앞에 놓인 편지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집무실 책상 한가운데에 놓인 편지는 아무런 특색도, 인장도 찍히지 않은 평범한 편지였다. 하지만 그 편지에 있는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에피알테스에 접촉한 인간이 얼마나 끔찍하게 죽어 가는지 그 과정이 세세하게 쓰여 있는 편지의 끝은 간단한 말로 장식되어 있었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의 편안한 죽음을 바랍니다.

-셀바토르의 오랜 벗으로부터.

“……망할 년이.”

결국 공작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제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공작을 제지했겠지만, 지금만큼은 제나 역시 거친 소리를 내뱉고 싶었다.

“일단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죠. 정말로 봉인된 에피알테스에 접촉만 해도 편지의 내용처럼…….”

제나는 자신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셀바토르 공작이 손을 내저음으로써 그녀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필요 없네. 분명 진짜겠지.”

이트바나에 에피알테스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었구나. 셀바토르는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내가 흔들리는 걸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자신이 흔들리고, 틈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암녹색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란다의 꽃은, 아니 메데이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나라를 판 것에 비하면 지금 얻은 권력은 부족하다는 걸까, 아니면 에피알테스를 손에 넣어 이 제국을 무너트리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렌도 황자를 황제로 내세우려고 했었지.’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하필 아렌도 황자일까.

미간을 짚으며 공작은 상체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피곤이 몰려들어 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제 딸의 목숨을 가지고 자신을 놀리고 있는 망할 것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해서 치솟았다.

‘원래대로라면 흔들릴 일도 없는데.’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래, 평소의 그녀라면 그다지 큰일은 아녔다. 자신의 손으로 신의 품으로 보낸 인간이 몇이던가.

제국과 작은 아이를 저울질해서 기우는 쪽을 선택하면 되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 저울에는 자신의 목숨이 올라간 적도 있었지만, 셀바토르의 선택은 늘 한결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 양딸이, 레슬리가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어머니, 이거 보세요. 꽃이 예뻐요!’

꽃을 작은 품 안에 가득 안고 웃던 레슬리를 떠올리자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원래 계획대로 조금 총명한 고아원의 아이를 데려와 셀바토르의 이름을 쥐여 줬더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가볍게 나는 너를 살리고, 너는 나를 돕고. 그런 계약관계로 남았더라면 좋았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공작의 시름이 깊어졌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공작님, 어떻게 할까요. 일단 레슬리 아가씨에게 알려서…….”

“아니, 안 돼.”

이제 겨우 제대로 웃게 되었는데, 이 일을 알면 앞으로 그 작은 얼굴에서 영영 미소를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일단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래, 분명 다른 방법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첫째 아들놈은 황실에서 일하니 황실 서고를 뒤지기에 좋았고, 둘째 놈은 얼마 전 10인의 마법사에 들었으니 마법사의 저택을 털어도 괜찮겠지.

‘정 안 되면 피스토레 멱살을 한 번 더 잡고 황실 비밀 서고를 찾아보고.’

1천 년간의 기록이 모여 있다고 전해지는 황실 비밀 서고는 보물의 밭 같은 존재였다. 가문의 거의 모든 비밀이 모여 있었지만, 황제도 쉽게 볼 수 없었다. 그 서고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황족과 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아이테라 대공에게 부탁해 볼까.’

그가 동의해 준다면 번거롭게 몇 명이나 되는 다른 귀족들의 동의를 받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일단 그에게도 부탁해 보자. 그도 레슬리 또래의 아이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분명 허락해 주겠지.

하지만 조금 걸리기는 했다. 그는 과거와 다르게 좀 변한 느낌이었다.

최근 아이테라 대공의 행보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공작의 암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스웰라 대공비가…… 최근 병을 앓고 있다고 했었나.’

셀바토르 공작은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4년 전부터 천천히 건강을 잃더니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듣기로는 사제 몇이 달라붙어도 치유가 안 되는 지독한 병이라고 했다.

‘신력으로도 모든 병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두 사람은 사이가 유독 좋았으니, 역시 그 일인 건가?

잠시 고민하던 공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고 해도, 대공이 변한 것은 오롯이 그 일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다시 두통이 밀려오는 게 느껴져 미간을 짚는데, 제나가 입을 열었다.

“르카디우스 제국뿐만 아니라 타국의 기록도 찾아보도록 하지요. 연락이 닿아 있는 사람들은 많으니까요. 아마 테펜텔 님 정도면 쉽게 알려 주시지 않을까요.”

“그래. 그녀에게 먼저 편지를 써야겠어. 제나, 내 편지지와 잉크를…….”

공작이 제나에게 편지지를 부탁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맑은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어머니, 저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왜 하필 지금. 공작은 복잡한 마음을 편지와 함께 집무실 책상 서랍에 구겨 넣었다.

“들어오렴.”

공작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레슬리가 문을 열고 쪼르륵 집무실로 들어왔다. 걸을 때마다 화사한 은발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머니.”

“그래, 우리 딸.”

반기며 손을 벌리자, 배시시 웃더니 그 품에 폭 안겼다. 딸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좋은지 매일 들려줘도 레슬리는 매번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니?”

제 품에 안긴 레슬리의 은발을 쓰다듬으며 묻자 레슬리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얼마 안 있으면 저, 2차 시험을 치르러 신전에 가게 되잖아요.”

“그렇지. 이제 2차 시험이 얼마 안 남았구나. 그게 걱정돼서 온 거니?”

“아뇨. 저택에서 열흘간 떨어져 있다는 게 슬프긴 하지만…… 걱정되지는 않아요. 저는 잘 통과해서 아라벨라가 될 거니까요.”

그러고는 얼굴을 붉히며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머니 딸이잖아요.”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가 이내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그렇지. 내 딸이지.”

셀바토르 공작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조심히, 아주 조심히 소중한 것을 매만지듯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요.”

공작이 한껏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레슬리는 드디어 자신이 집무실로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2차 시험이 끝난 후 아라벨라 축제가 열리잖아요.”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입을 다물고 라일락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기를 잠시, 다시 셀바토르 공작과 시선을 맞춘 레슬리가 슬그머니 공작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어머니랑 아버지랑 오라버니들과 같이 축제를 구경하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레슬리의 말에 공작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워낙 셀바토르 공작가 자체가, 그리고 현 공작인 자신이 손님도 받지 않고 외출도 자주 하는 편이 아닌 데다 요 근래에는 다들 바빠 말하는 게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럼 되고말고.”

“정말요?”

레슬리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그것만으로도 레슬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공작과 제나의 머리를 채우고 있던 고민이 한층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 최초의 사제들은 에피알테스를 피하고자 가면을 쓰고 돌아다녔다는 말도 있으니까. 가면을 쓰고 다녀도 그렇게 이목이 쏠리지 않으니 구경하기 나쁘지 않을 거란다.”

매년 이 시기마다 바빠, 결혼 후에는 제대로 축제에 참여해 본 적이 없지만, 가면을 바꾸고 옷도 평소에 입던 옷과 다른 옷을 입으면 자신이 껴도 위화감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가면이 가장 큰 위화감을 만들어 내니까. 그것만 눈에 안 띄면 되겠지.

공작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제나는 뒤에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이상한 곳에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가면을 써도 되나요? 가면을 써도 된다면, 저는 어머니랑 똑같은 가면이 쓰고 싶어요.”

자신이 똑같은 가면을 쓴 것을 상상했는지 다시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가면을 벗고 다른 가면을 쓸 생각이었던 공작은 눈을 깜빡였다.

“이 모양의 가면을 쓰고 싶니?”

“네! 그리고 옷도 어머니랑 똑같은 옷을 입고 싶어요. 암녹색 망토도 두르고 싶고……. 아, 허리춤에 검 매고 돌아다닐래요!”

레슬리는 쫑알거리며 제 소망을 늘어놓았다. 평소에 셀바토르 공작이 하는 그대로 입고 돌아다니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너무 다른 사람들 눈에 띌 것 같구나.”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어깨가 갑자기 축 처졌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러더니 힐끔 시선을 올려 공작과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재빠르게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그냥 드레스를 입을게요. 아쉽지만 망토랑 검도 포기하고…….”

다시 힐끔 시선을 맞추더니 시선을 떨궜다.

“평범한 드레스랑 망토랑 해서 그냥 입어도 저는 괜찮아요.”

공작과 제나가 대답이 없자, 제 머리끝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공작을 한 번, 도와 달라는 듯 제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과 제나는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4년간 가장 늘어난 것이 이런 애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평소와 같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쓴다면 바로 티가 날 테니, 다른 가면과 옷으로 맞춰 입을까?”

그 말에 단박에 레슬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면은…… 제작하도록 하지. 검은색으로 해서.”

공작이 이것저것을 말할 때마다 레슬리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어머니와 같은 옷을 입고 축제에 나간다는 게 벌써 꽤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제나는 뒤에서 따스해 보이는 모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레슬리는 자신과도 축제에 가고 싶다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제나.”

한참을 축제에 대해 떠들고서야 만족한 레슬리가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셀바토르 공작이 제나를 바라보았다.

“레슬리를 방까지 데려다줘. 그리고 올 때…….”

“진하게 우린 차 한 잔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햄 샌드위치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제나가 방긋 웃자, 공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야식은 안 됩니다. 어제도 늦게까지 일하셨으니까요.”

“그거 말고도…….”

“사이레인 님이 돌아오려면 일주일 정도 걸릴 듯싶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부디 건강을 생각하셔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나의 말에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잔소리는. 알았어.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하지.”

못 이기겠다는 듯 공작이 손을 들자, 그제야 제나도 생긋 웃어 보였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차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작님.”

레슬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눈을 깜빡이다가 제나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레슬리는 하녀에게 샌드위치 이야기를 하는 제나를 보며 물음을 던졌다.

“제나.”

“네, 아가씨. 말씀하세요.”

“제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어머니와 지냈던 거야?”

급작스럽게 든 의문은 아녔다. 제나는 늘 셀바토르 공작 옆에 있었고,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모든 일을 처리하곤 하였으니까.

그럴 때면 마치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신기했었다. 그리고 제나가 얼마나 오랫동안 셀바토르 공작저에 있었는지 궁금해지곤 했었다.

레슬리의 물음에 제나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레슬리가 경악할 만한 답을 내놨다.

“40년을 조금 넘었을 거예요.”

“40년이나…….”

“네, 아가씨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제가 공작저에 들어왔으니까요. 제가 아가씨를 거의 키우다시피 했죠.”

아가씨. 레슬리는 그게 자신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쉽게 공작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제나는 늘 공작에게 깍듯이 ‘공작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거기다 저는 처음부터 집사로 들어온 게 아니라, 하녀로 들어왔었답니다.”

비밀을 말해 주듯 한쪽 눈을 깜빡이며 제나가 말을 잇자 레슬리의 눈동자가 더욱 동그래졌다.

“제나, 하녀 출신이었어?”

“네, 아셀라 아가씨 전담 하녀로 들어왔었지요. 그래요, 분명 들어올 때는 전담 하녀로 들어왔는데, 집사가 되어 버렸네요.”

“그렇구나. 그런데 왜 집사를 선택했어? 하녀에서 집사가 된 사람은 거의 없잖아.”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생생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제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뭐든 될 수 있지 않을까. 해 봐, 내가 밀어줄게.’

앳된 얼굴의 아셀라가 피 묻은 린체 기사단 제복을 벗으며 말했다.

‘최대한 내 옆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거로 생각해 봐. 나는 네가 마음에 드니까.’

그리고 멍한 얼굴의 제나를 보고 씩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내 옆에 있는 게 마음에 들잖아?’

끄응, 제나는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집사를 해 보라며 툭 던지듯 추천했었지. 좋은 머리에 꼼꼼한 성격도 잘 살릴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좋은 직업이 아니냐고, 그 무엇보다도 제 옆에 계속 있을 수 있다며 꼬드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에 코가 꿰었다. 자신이 집사 일에 관심을 보이고, 전 집사가 인계자 없이 슬슬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다 계산하고 던진 말이 분명했다.

여자는 집사가 된 관례가 없다는 말에 웃으며 ‘네가 처음이 되면 되겠네.’ 하고 집사 일을 배울 수 있게 했으니까.

아가씨와 전 집사님이 짜고 일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제나가 받았던 교육의 상태나 질은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들이었으니까.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난 후였다.

‘아니, 내가 일부러 늦게 깨달은 걸지도.’

아가씨와 있으면 즐거운 건 사실이었고.

“제나?”

레슬리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나가 웃음을 머금었다.

“아가씨가 좋아서요. 좋아서 이 공작저에 남았네요.”

그 말에 레슬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붉혔다.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맞아, 나도 어머니가 좋아. 그래서 그런데.”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레슬리는 제나의 귀에 속삭였다.

“어머니가 차랑 곁들여 드시는 걸 좋아하는 음식이 뭐가 있어? 나는 몇 개밖에 몰라서……. 몇 개만 더 알려 주면 안 돼? 내가 나중에 차랑 같이 직접 드리고 싶어.”

셀바토르 공작을 놀라게 해 주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레슬리를 보며 제나는 옅게 웃었다.

“네, 2차 시험이 끝나고 나면, 제가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아가씨.”

아가씨가 가져오면 분명 깜짝 놀라며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제나와 레슬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작게 웃었다.

***

아라벨라 축제. 최초의 사제들이 세계를 돌아 다시 만났을 때 시작된 작은 축제는, 르카디우스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열리는 유서 깊은 축제였다.

처음엔 스무 명이 넘는 최초의 사제들 이름을 전부 따서 축제명을 지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며 가장 대표급이었던 아라벨라가 축제의 이름을 대신했다.

본디 8년에 한 번 열리는 아라벨라 축제는,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만 4년 주기로 열렸다. 최초의 사제들 후보를 뽑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첫 시험에 통과한 후보들은 아라벨라 축제에서 지위를 막론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영광스러운 자리.”

레슬리는 제 머리의 리본을 고쳐 매며 눈을 깜빡였다. 서올리가 예쁘게 땋아서 묶어 준 리본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엉망진창으로 풀려 버리고 말았다.

‘대충 묶어도 되겠지?’

레슬리는 그냥 자신이 할 수 있는 두 가지 머리 중 하나인 반묶음으로 머리를 다시 묶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최초의 사제들과 아라벨라가 되면 그 자리에 오르게 되는 거군요.”

레슬리의 물음에 그녀 대신 양산을 들고 있던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2차 시험을 통과한 스무 명의 후보분들은 그 최초의 사제 자리에 올라 마지막 날 의식을 거행합니다.”

그 말에 레슬리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2차 시험. 편지지에는 신전으로 오라는 말만 적혀져 있었지.

“사실 2차 시험에 대한 통보를 받긴 했는데, 뭐가 나올지 모르겠어요. 보름 동안 도대체 뭘 하는 걸까요.”

레슬리의 투덜거림에 콘라드는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에는 저번 시험보다 많이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최초의 사제님들이 보여 줬던 ‘헌신’을 볼 거라는 거지요.”

“헌신이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헌신이라니. 그런 걸로 시험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에 조금은 진지해진 얼굴로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최초의 사제님들은 세계를 돌면서 사람들을 구원했지요. 그래서 이론적인 시험으로 이뤄졌던 1차와는 다르게 2차는 헌신을 봅니다.”

레슬리는 콘라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헌신이라면…… 점수처럼 눈에 보이는 게 아닌데, 그걸로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1차 시험처럼 확실하게 수치화하기는 쉽지 않지만, 최초의 사제님들을 뽑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콘라드는 레슬리를 바라보며 조금 서글프게 웃음을 지었다.

“이번 2차 시험은 굉장히 힘들게 나올 거라고 들었거든요. 분명 포기자가 나올 겁니다.”

그리고 콘라드는 미안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레슬리에게 2차 시험에 대한 정보를 전부 주지 못해 그런 듯 보여 레슬리는 괜찮다는 듯 웃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얼마나 심각하기에 아라벨라와 최초의 사제들이 되는 시험을 포기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편지에도 포기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지. 도대체 무슨 시험을 치르게 되는 걸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레슬리의 뺨에 봄바람이 닿았다가 흩어졌다.

“봄바람이 따듯하네요.”

하얀 레이스에 푸른 리본이 달린 양산을 든 채, 콘라드가 맑게 웃었다. 지금 두 사람은 수도 외곽을 천천히 산책하고 있었다.

레슬리가 콘라드에게 신학을 배우지 않은 지 올해로 2년째가 되었다. 처음 셀바토르 공작가로 올 때만 해도 다른 과목에 비해 부족했던 신학은 어느새 사제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2차 후보 시험에는 이론적인 시험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상 콘라드에게 가르침을 받을 명분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종종 만나 산책을 하거나 식사를 하며 친분을 이어 오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레슬리가 하나뿐인 제 친구와 계속 놀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이유는 마지막 수업 날 콘라드가 얼굴을 붉히며 레슬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부끄럽지만, 레슬리 양.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도움만 받았던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레슬리는 조금 흥분했다.

“뭐든 말씀해 보세요, 콘라드 경!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게요.”

적극적인 레슬리의 태도에 콘라드는 부끄럽다는 듯 눈가를 붉혔다. 레슬리의 말에도 한참을 입만 달싹이던 콘라드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간신히 말을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그…… 여성분에게 닿으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 말입니다. 성기사단에만 있으면 괜찮다지만, 이제 저도 사교계 활동을 하게 될 테니…….”

횡설수설하는 콘라드를 보며 레슬리는 감을 잡았다. 즉, 여성에게 닿아도 괜찮을 수 있게 그나마 괜찮은 자신이 도와 달라는 뜻 아닌가?

“그래서 레슬리 양이 조금 도움을 주실 수 없는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도와 드려야지요!”

이어지는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고어를 해독해 주는 일을 예상했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가 조금 슬프긴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친구와 계속 만날 수 있는 거니까.

“제가 꼭 도와 드릴게요. 꼭이요!”

자기 일처럼 눈을 빛내는 레슬리를 보며 콘라드는 조금은 당황한 듯, 그리고 많이 기쁜 듯 웃음을 머금었다.

“네,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슬리 양.”

그렇게 두 사람은 신학 수업 대신 번화가의 거리에서 디저트와 차를 마신다든가, 아니면 신전의 정원을 거닌다든가 하며 만남을 지속했다.

만남 자체는 유익한 것이었다. 콘라드는 아는 것이 많았고, 레슬리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무슨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 콘라드와의 만남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거기다 디저트는 덤이고. 나만큼 단 걸 좋아하신다니까.’

콘라드가 알고 있는 디저트 가게 목록은 레슬리에게 있어서 보물 지도 같았다. 늘 콘라드와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돌아다니는 바람에 레슬리는 아직도 콘라드가 단것을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음엔 어떤 가게를 가게 될까. 조금은 즐겁게 콘라드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콘라드 경, 경도 최초의 사제들 후보 자리에 오르신 적이 있나요?”

예전부터 든 의문을 슬그머니 묻자, 콘라드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저는 최초의 사제들 후보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테센트루아 기사단에 소속이 되었거든요.”

“성기사단에 소속되면 후보에는 오를 수가 없는 거군요.”

“네, 테센트루아에 소속된 몸이니까요. 저희는 축제 때나 아니면 시험 때 후보분들을 호위하는 데 집중합니다.”

다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리본을 다 묶은 레슬리가 이제 자신의 양산을 달라고 손을 뻗었지만, 웃음으로 대신한 콘라드가 계속 그녀의 양산을 들어 주었다.

레슬리는 그걸 보며 뺨을 부풀렸다. 4년 새 콘라드도 훌쩍 커 버린 탓에 쉽게 양산을 뺏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따라잡을 만한 키 차이였는데, 순식간에…….

‘루엔티 오라버니랑 비슷하려나?’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가늠해 보았다. 저번에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봤을 땐 엇비슷해 보였는데. 누가 더 크려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레슬리는 승자를 정했다. 역시 루엔티 오라버니겠지.

‘그러고 보니, 4년이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처음 콘라드를 만났을 때는 자신은 열두 살, 콘라드는 열다섯 살이었다.

‘아직도 신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생생한데.’

신전에서 넘어지는 자신을 부축해 주고 손수건을 준 콘라드를 만난 지 4년이 흘렀다. 4년 새 자신은 이름이 바뀌었고, 새 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따스한 눈동자로 미소를 머금던 소년은 올해 열아홉 살이 되었다.

작년 콘라드의 성인식 때 축하 편지를 보낸 것을 떠올리며 레슬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부럽다. 루엔티 오라버니나 콘라드 경이나 둘 다 4년 새 키가 엄청 큰 거네.’

자신은 벌써 키가 멈춘 것 같아 불안한데. 왜 안 자라는 걸까. 휴우우.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슬리 양, 혹시 피곤하신가요?”

“아, 아니에요.”

키가 작아서 고민이라는 말을 할 수 없어 레슬리는 제 생각을 얼버무렸다.

“그냥, 축제 때 콘라드 경이 저를 호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레슬리는 생긋 웃으며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비록 갑자기 나온 말이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도 레슬리는 낯선 사람이 조금 힘들었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떤 주제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자꾸만 다물게 된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엠로아의 사건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믿기 힘들어졌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었다.

지나칠 정도의 초대장이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어쩌다 번화가나 신전에서 레슬리는 낯선 사람에게 붙들려 걸음을 멈춰야 할 때도 많았고, 무례할 정도로 레슬리에게 접촉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종일 호위를 이유로 자신에게 붙어 있다면 그 하루를 버티기가 너무 힘들 게 뻔했다. 아마 그날 하루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 같겠지.

“제가 말입니까?”

그 말에 레슬리를 마차로 이끌려던 콘라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콘라드 경이 해 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은 싫은걸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는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쑥스러움과 미소를 머금고 살짝 휘었다.

“네,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화답하듯 맑게 웃었다. 아직도 콘라드 경은 이 정도로 가까이 있어도 얼굴이 잘 붉어지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

“다, 다녀오거라.”

사이레인은 코를 훌쩍이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작저에 있는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다녀올게요.”

레슬리는 그런 가족들과 공작저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레슬리의 뒤에는 마델이 서 있었는데, 그녀의 손에는 가죽으로 만든 여행용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에는 거대한 마차 한 대와 하르트, 레소, 반트가 셀바토르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서 있었다.

“도대체 왜 사용인에 호위도 신전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건지.”

“내 말이.”

밤을 새운 듯 보이는 루엔티가 베스라온의 말을 받아쳤다.

지금 레슬리를 따라가는 마델은 신전까지는 들어가지 못했고 신전 밖에서 레슬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즉, 레슬리는 홀로 신전에 머물러야 했다.

그 일에 대해 사이레인이 몇 번 신전 쪽으로 편지를 보냈으나, 신전 쪽에서는 신의 시험이란 이유로 요청을 거절했다. 도끼를 들고 편지를 쓴 놈 모가지를 따 버리겠다며 날뛰는 사이레인을 레슬리와 제나가 진정시킨 적도 있었다.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와. 알겠지? 뒷일은 이 오라버니들이 처리해 줄 테니까.”

“아라벨라 따위 될 필요 없어.”

루엔티가 레슬리 모자의 리본 끈을 다시 묶어 주며 말을 꺼내자, 베스라온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레슬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라벨라 따위라니. 황족들도 탐내는 자리인데. 아마 아라벨라를 이렇게 말하는 건 셀바토르 공작가밖에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이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이레인은 뭔가 이상한 기색을 느끼고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면 나서서 레슬리를 안아 준다거나 토닥여 줄 공작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무언가를 고민하듯 제 입술을 깨문 채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여보?”

이상하다는 듯 사이레인이 셀바토르 공작을 부르자, 그제야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잘 다녀오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리고 평소처럼 허리를 굽혀 레슬리를 꼭 안아 주었다. 볼에 작게 뽀뽀하자, 그게 너무도 좋아 레슬리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어머니. 저 다녀올게요.”

공작과 인사가 끝나고 나자 레슬리는 제나와 바타, 서올리, 아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 명, 한 명 인사를 하고 나서야 마차에 올랐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아가씨.”

하르트의 말과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그러자 레슬리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더니 크게 소리쳤다.

“저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팔까지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숙녀가 할 만한 행동은 아녔다. 분명 틸레이얼 선생님이 봤다면 기겁을 했겠지.

하지만 레슬리에게 있어서 보름이나 홀로 저택을 떠나 있는 건 상당히 큰 모험이라 용기가 필요했다. 거기다 이동 시간을 합치면 약 3주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사람들이 레슬리에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런데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은 어두운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두 분 다 내가 떠나는 게 싫으신 걸까.’

나도 싫은데. 공작저에 남아 있고 싶어. 사람들이 점차 멀어지자 레슬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조금 더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아가씨, 위험해요.”

그런 레슬리를 마델이 말리자, 그제야 레슬리는 몸을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동그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마델, 나 보름…… 넘게 혼자 신전에 잘 있을 수 있을까.”

번화가를 갈 때도, 티로스 별장에 갈 때도, 가족 중 누군가 한 명은 레슬리와 동행을 해 주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마델과 서올리가 레슬리의 곁을 지켜 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보름 넘게 신전에 홀로 있어야만 했다.

공작저를 떠나, 그렇게 긴 시간을 홀로 있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험보다도 그게 더 버티기가 힘들어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

마델이 눈을 깜빡이더니 옆에 앉아 레슬리를 꼭 안아 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저희는 신전 바로 앞의 여관에서 아가씨 시험이 끝나길 기다릴 거예요. 아까 루엔티 도련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버티기 힘드시다면 그만두셔도 된대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델은 신전과 가장 가까운 여관에 방을 잡았고, 하르트와 다른 기사들은 전날 레슬리를 찾아와 약속해 주었다.

‘매일 아침, 신전 입구에 있겠습니다.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신전 입구에 있으면 저희가 보일 테지요.’

무서워하지 않도록, 그리고 위험하지 않도록 그렇게 해 주겠다며 하르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약속이 떠올라 레슬리는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어둠이도 데려왔으니까요. 그리고 공작님과 사이레인 님, 큰 도련님과 작은 도련님이 써 준 편지도 있으니까…….”

레슬리가 토끼 인형을 어둠이라고 부르는 걸 본 마델과 서올리 그리고 다른 사용인들도 토끼 인형을 어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어둠이는 마델의 말 그대로 레슬리의 여행용 가방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렇지. 어둠이도 있지.”

마델은 가방 속 토끼 인형을 말한 것인데, 레슬리는 다른 어둠이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 거기다 가족들이 저를 걱정해 써 준 편지도 있었다. 그제야 레슬리는 눈물을 훔치며 밝게 웃었다. 마델이 조금 흐트러진 레슬리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환하게 웃었다.

“신전 근처에 맛집이 많대요. 아벤이 그 근처 출신이라 맛있는 집들을 알려 줬어요. 아가씨, 메추리구이 좋아하시죠? 시험이 끝나면 먹으러 가요. 제가 코코아도 챙겨 왔거든요. 코코아도 먹고…….”

끝없이 이어지는 마델이 조잘거림을 들으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 밖에는 셀바토르 기사단 제복을 입은 하르트와 레소, 반트가 천천히 마차를 호위하며 말을 몰고 있었다.

그래, 완전한 혼자는 아니야. 조금, 용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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