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9)

#10

공작은 지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 신학 수업을 한다며 번화가에 다녀온 레슬리가 갑자기 작은 식당에 가고 싶다고 조른 탓이었다.

무릎에 앉아 눈을 반짝이는 제 딸은 너무 귀여운데, 쉽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으니까. 어려울 것 같다고 말을 했지만, 레슬리는 쉽게 포기할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고 싶은데 안 될까요?”

레슬리가 제 두 손을 꼭 모으더니 시선을 맞추고 눈을 깜빡였다.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 공작은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로 제 무릎에 올라온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안 될까요?”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동시에 라일락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으음.”

셀바토르 공작은 딸의 첫 애교에 어딘가 좋으면서도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복잡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나는 웃음을 흘렸고 사이레인은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레슬리, 아까도 말했다시피 위험할 수도 있고…….”

그 말에 바로 레슬리의 작은 고개가 시무룩하게 밑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레슬리를 달래려던 공작의 입이 막혔다.

“온종일은 안 되면 그럼 몇 시간만이라도…….”

안 될까요? 다시 레슬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보고 와서 금방 신전으로 돌아갈게요!”

언제 레슬리가 이렇게 간절하게 외치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언제 공작이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었던가. 제나는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았다.

셀바토르 공작을 아주 어릴 적부터 모셔 온 제나는 자신의 아가씨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몇 년 만인지 세어 보다가 그만두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랜만이었으니까.

공작의 암녹색 눈동자가 제나에게 닿았다. 명백히 도와 달라는 그 간절한 눈빛에 제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더니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레슬리 아가씨.”

그러더니 무릎에 앉아 있던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몸을 한 번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면서 몸을 숙여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레슬리 아가씨.”

차분한 제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작은 살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공작님께서는 아가씨의 말을 들어주실 거예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공작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나는 생글생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로 가는 건 위험하니까, 곧 날짜와 호위를 정해서 갈 거랍니다. 그렇죠, 공작님?”

이제 사이레인은 웃음 때문에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셀바토르 공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었다.

결국, 항복한 듯 공작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오렴. 신레프 신전에 가기 며칠 전에 들르면 되겠지.”

“정말요?”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정말로 기쁜지 쪼르륵 다시 공작에게 달려간 레슬리는 공작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다시 암녹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가 이내 웃음으로 휘었다.

“레슬리, 아버지도, 아버지도!”

사이레인이 다급하게 외치자, 레슬리가 웃으며 사이레인의 볼에도 작게 뽀뽀했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윽고 다시 한 번 크게 감사하다고 외치더니 마델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나섰다.

“……제나.”

레슬리가 모습을 감추자 셀바토르 공작은 자신을 배신한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제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오늘 저는 레슬리 아가씨 편이랍니다. 뇌물을 받았거든요.”

“뇌물?”

그 말에 제나는 제 뒤에 놓았던 작은 상자를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예쁜 리본으로 포장된 상자 안에는 사탕과 초콜릿 그리고 비스킷과 값비싼 코코아 가루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아가씨가 기사들과 사용인들에게 준 선물이에요.”

제나는 특별히 집사라고 좀 더 큰 것을 받았다고 두 사람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오늘 번화가에 다녀온 김에 선물을 사셨다고 하더라고요. 쿠키와 사탕, 초콜릿을 잔뜩 사셔서 마델과 직접 포장하셨습니다.”

“나, 나는 못 받았는데…….”

제나의 말에 사이레인이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선물 상자를 바라보자, 제나는 혹여나 빼앗길까 제 선물 상자를 뒤로 숨기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과 사이레인 님, 큰 도련님 그리고 작은 도련님에게는 다른 선물을 준비한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요?”

제나가 웃자, 사이레인은 기대된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 내 따님의 편인 제나 집사님. 그래서 레슬리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지?”

공작이 조금은 비꼬는 기색으로 그리고 투덜거림을 담아 말하자 제나는 옅게 웃었다.

“엠로아 이작, 동부 출신으로 동생이 여러 명 있더군요. 그중 한 명이 레슬리 아가씨와 동갑입니다. 그래서 쉽게 아가씨에게 동정을 보인 것 같습니다. 고모가 작지만 건실한 상단을 하나 가지고 있어서 그 힘으로 스페라도 후작가의 하녀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급하게 조사한 거라 조금 부족하지만, 나중에 더 추가 사항을 올리겠습니다.”

제나는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레슬리가 엠로아의 이야기를 들고 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한 것치고는 상당히 양질의 정보였다.

“흐음.”

공작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갑자기 스페라도 후작가를 나왔다기에 무슨 배짱인가 했더니, 믿을 만한 구석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평민들에게 있어서 유명한 가문의 하인, 하녀로 들어가는 건 어찌 보면 아주 좋은 일거리를 얻는 거니까.

“아가씨가 말씀하신 대로 후작가를 나와 카페에서 일하다가 남편을 만났지만, 사별한 걸로 보입니다. 지금은 신레프 신전 골목에서 식당을 하고 있습니다. 스페라도 후작과 그 이후로 접촉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스페라도 후작과 만난 건 보이지 않는다라. 사이레인이 그 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허락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공작은 아직도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하나는, 스페라도 후작 뒤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궁지에 몰린 인간은 어떤 힘을 발휘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거기다 바쁜 일정으로 공작과 사이레인은 후보 시험 당일에만 갈 수 있다는 것.

베스라온은 아예 황실 호위로 신레프 신전까지는 가지 못했고, 루엔티 역시 마법사의 저택 일로 레슬리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직 란다의 꽃은 개화할 시기가 아닙니다. 움직임 역시 보이지 않았고요.”

그 걱정을 덜어 주듯 제나가 입을 열었고, 사이레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신전에 미리 통보하면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중 몇 명을 호위로 파견해 주겠지. 거기에 우리 기사들도 붙이자고. 그러고도 정 불안하면 내가 일정을 앞당겨서 가도록 하지.”

이어지는 사이레인의 말에 그제야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트에게 말해서 못해도 열 명은 붙이도록 하지.”

성기사단까지 합쳐지면 너무 호위가 과하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그래도 걱정되었다. 자신이 같이 가 주면 좋으련만.

셀바토르 공작령의 홍수 피해가 제대로 복구가 되지 않았다. 그 일 때문에 사이레인과 루엔티가 몇 번 공작령에 내려갔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한 번 직접 내려가 봐야 할 듯했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가 신전 시험 시기와 맞물려 버렸다.

“휴우.”

잠깐 한숨을 쉬며 어떤 놈을 호위로 뽑을지 고민하는데, 집무실 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레슬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아버지.”

배시시 웃으며 들어온 레슬리의 손에는 작은 선물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직접 포장을 한 것인지, 조금은 엉성해 보이는 리본이 달려 있었다.

“사실 선물을 사 왔는데 언제 드려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선물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공작의 선물은 조금 긴 상자였고, 사이레인 것은 작았다.

“고맙구나.”

“세상에, 이렇게 예쁜 망토 핀이라니…….”

바로 포장을 뜯어 버린 사이레인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망토 핀을 바라보았다. 꽃과 리본 그리고 토끼 인형이 작게 새겨진 망토 핀은 사이레인의 취향과는 너무도 먼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멋져 보였다.

망토를 입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사이레인은 아쉬움의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일단 자신의 옷에 망토 핀을 꽂았다.

“그, 아버지는 종종 망토를 입으시니까요. 제가 열심히 골라 봤어요!”

레슬리는 부끄러운지 뺨을 붉히다가 환하게 웃었다. 사이레인의 반응이 흡족스러웠는지, 이번엔 셀바토르 공작을 보고 눈을 반짝거렸다. 어서 선물을 풀어 보라는 의미였다.

“내 것은 깃펜이구나.”

긴 선물 상자에서 나온 것은 깃펜이었다. 긴 검은색 깃털에 황금색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깃펜을 공작은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는 늘 서류를 보시니까요!”

레슬리의 환한 대답에 공작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이유일 줄이야.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레슬리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잘 쓰마. 고맙다.”

레슬리가 만족한 얼굴로 인사를 하자, 작은 망토 핀을 소중히 들고 있던 사이레인이 몸을 일으켰다.

“레슬리, 아버지랑 손잡고 방까지 같이 갈까?”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레인이 손을 내밀자 곧 두꺼운 손에 작은 손이 얹어졌다.

잠시 복도를 걷다가 레슬리가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버지.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뭐든 말해 보렴.”

그 말에 레슬리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오래전부터 묵혀 왔던 물음이었다.

“처음에 제가 왔을 때, 어머니의 결정에 오라버니들은 반대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나요?’

레슬리의 눈빛에 그 물음이 섞여 들어갔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머뭇거리는 시선에 사이레인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나중에 베스라온과 루엔티를 연무장으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흔한 이야기란다.”

흔한 이야기?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사이레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바꿨다.

“평민, 고아, 그리고 전쟁.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누구나 다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되지.”

사이레인의 부모는 떠돌이 용병이라 들었다. 실력은 좋지만, 그 성격 때문에 한곳에 정착을 못 한다고 했었나. 아니면 실력조차 없어 그랬다고 했던가.

잘 모르겠다. 분명 아주 어릴 적에 부모에 대해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걸 기억할 정도로 평화로운 삶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어린 사이레인은 한 귀족이 후원하는 고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황은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후원금은 원장의 사치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사라졌고, 아이들에게는 참담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루 한 끼를 먹기 힘들었고, 조금만 잘못하면 손찌검이 돌아왔다.

“그런…….”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나는 타고난 체격과 힘이 있으니, 좀 크고 나서부터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지.”

사이레인이 자라 순식간에 작고 초라했던 원장의 키와 힘을 따라잡자, 겁에 질린 원장은 더는 손을 올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아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손을 내리쳤다.

“그래서 못 견디겠다 싶어서 그놈의 모가지를…… 큼, 큼! 아니, 한 대 때려 주고 친구들과 도망쳐 나왔지. 그렇게 용병 일을 시작했단다. 그 일 때문인지 고아원은 곧 문을 닫았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레슬리의 시선을 피하며 사이레인은 급하게 말을 바꿨다.

분명 한 대 때렸다는 건, 가볍게 꿀밤을 때린 건 아닐 거야. 레슬리는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레인은 다행히도 레슬리가 자신의 말실수를 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나는 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단다.”

그 기억은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억이니까. 거기까지 말하다가 사이레인은 멋쩍은 듯 제 뺨을 긁적거렸다.

“겨우 몇 년을 그러고 살았던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말하기가 좀 모호하지만.”

그러자 레슬리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사이레인과 시선을 맞추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대견한 아이였다. 그조차도 견디기 힘든 시간을 버텨 준 아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사이레인은 씩 웃더니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지나가던 하녀 둘이 두 사람에게 인사하자 레슬리는 사이레인의 어깨에서 작은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

“그리고 말이다. 나는 딸이 가지고 싶었거든. 솔직히 날 닮은 아들놈들보단 우리 아내님을 닮은 딸들이 더 예쁠 테니까.”

자신을 닮아 험악한 인상의 아들놈들보단 작고 귀여운 딸이 더 좋지 않은가?

같이 용병단에서 일하다 나간 동료가 자신의 딸을 보여 줬을 때, 사이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를 본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배시시 웃는 작은 얼굴에 말캉해 보이는 뺨이 사이레인은 너무도 신기했다. 보통의 아이는 그의 얼굴만 봐도 울었다.

사이레인만큼 험악한 인상의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이에게 사이레인은 그다지 무섭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사이레인에게는 아이가 저에게 다가오는 것이 처음이었다.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동생들도 종종 사이레인을 무서워했으니까. 그 아이가 웃으며 자신의 뺨을 매만졌을 때 반짝, 하고 사이레인의 눈에 별이 박혔다.

사이레인이 자신과 같이 딸 바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걸 확신한 동료는 매일같이 찾아오며 딸을 자랑했고, 그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며 사이레인의 눈 속에 박힌 별은 점점 더 커졌다.

딸이다. 그래, 딸이야. 사이레인은 무조건 첫째는 딸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아셀라를 만나고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사이레인은 좋은 꿈을 꾸었다.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꿈을 꾸고 분명 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라는 예쁜 이름도 준비했었는데…….

“태어난 건 베스라온 놈이었지.”

어딘가 속았다는 목소리에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두 번째도 좋은 꿈을 꾸었단다. 꽃밭에 서 있는 꿈이었지. 그래서 둘째도 기대가 컸는데…….”

루엔티였다. 저를 쏙 닮은 루엔티를 보고 사이레인은 복잡 미묘한 마음에 조금 슬퍼졌다.

딸이 가지고 싶었지만, 이 이상 아내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아셀라는 이 넓은 제국의 공작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아셀라는 공작저보다는 전쟁터에서 더 빛나는 사람이었다.

사이레인은 슬프지만 딸을 가지고 싶다는 희망을 버렸다.

그러다가 레슬리가 찾아온 것이었다. 작고 여린 아이. 그런데도 강한 아이. 그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많이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드디어, 사이레인의 꿈이 이뤄진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너를 거부할 수가 있겠니.”

사이레인은 웃으면서 레슬리의 뺨에 작게 뽀뽀했다. 수염 때문에 간지러운지 레슬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작 놈은 내가 반드시 조져 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대 콩 때려 주마. 어차피 지금 상태로 둬도 몰락하겠지만, 그건 속 시원한 방법이 아니지 않니. 그러니까 너는 그런 걱정 하지 말고, 여기서 잘 살 생각만 하렴.”

사이레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다시 라일락색 눈동자가 사이레인을 보며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아버지가 모가지를 따는 걸 기대하고 있을게요!”

“…….”

맑고 환한 목소리에 사이레인은 몸을 떨었다. 자신은 아내님에게 죽었다.

***

“어머니께.”

레슬리는 마차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쓰고 있었다. 수도에서 신레프 신전까지 가는 길은 비교적 순탄한 길이었고, 셀바토르 공작가의 마차는 흔들거림이 거의 없었기에, 잉크병을 꺼내 두고 편지를 쓰는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께.

저는 지금 무사히 신레프 신전으로 가고 있어요.

아직 겨울이라 날씨가 좀 춥긴 하지만, 어머니께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어요. 제가 이르게 도착해서 아직 신전은 개방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편지 덕에 테센트루아 기사 몇 분을 미리 보내 주신다고 해요.

조금만 더 가면 엠로아의 식당에 도착해요. 약속대로 온종일 머물지 않고 몇 시간만 보고 정해 주신 숙소로 갈게요.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부디 공작령의 일이 잘 해결되기를 바랄게요. 보고 싶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올림.

“다 썼다!”

레슬리는 제 이름을 적어 놓고는 발을 동동거렸다. 즐겁고, 행복했다. 한때는 거들떠보기도 싫었던 제 이름을 적는 이 순간이 이리도 즐거워질 줄이야.

“다 쓰셨나요?”

맞은편에 앉아 레슬리가 실수로 잡아당겨 떨어진 장식을 보닛에 달고 있던 마델이 환하게 웃었다.

“응, 다 썼어. 이제 베스라온 오라버니랑 루엔티 오라버니에게 보낼 걸 써야지.”

레슬리는 신나서 가방 안에 집어넣었던 편지지를 두어 장 더 꺼냈다. 그 모습을 보며 마델은 흐뭇하게 웃었다.

레슬리가 공작저를 출발한 건 고작 어제 아침이었지만,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은 공작령으로 출발한 지 며칠이 지났다.

두 사람이 공작령으로 내려간 날부터 레슬리는 매일 꾸준히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제 두 오라버니와도 헤어졌으니, 두 사람에게도 편지를 보낼 생각인 듯했다.

“곧 마을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그때 편지를 부치죠, 아가씨.”

“알았어. 그런데, 마델. 신전에서도 편지를 쓸 수 있을까?”

“1차 후보 시험은 만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니 가능하실 거예요.”

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하루가 끝나기에 레슬리는 시험 이후에 바로 공작저로 갈 수가 없었다. 적어도 하룻밤은 신전이나 여관에서 머문 후에 출발해야했다.

“빨리 다들 보고 싶다.”

후보 시험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며칠 떨어졌다고 모두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컸다.

‘시험은 레슬리 양 정도 되면 쉽게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거기다 헤어지기 직전에 자신에게 콘라드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테센트루아 성기사가 그렇게 확신을 심어 주니 불안하던 마음이 한층 가라앉았다.

“금방 다들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마델이 마지막으로 꽃을 달더니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에게 보닛을 내밀었다.

“자! 다 됐어요! 아가씨, 씌워 드릴까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옆에 앉아 어서 씌워 달리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마델은 그런 레슬리가 귀여워 작게 웃다가 조심스레 보닛을 씌워 주었다.

“고마워, 마델.”

레슬리는 마델이 꺼내 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 그녀는 예뻐 보였다.

잠시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 제 얼굴을 바라보다가 마델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델, 아가랑 엠로아에게 줄 선물은?”

“여기 있답니다!”

마델은 거대한 선물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 선물 상자를 보며 레슬리는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좋아해 주겠지?’

제나와 마델, 서올리에 바타까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준 결과 괜찮아 보이는 선물을 고를 수 있었다. 마델과 잠시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는데, 누군가 마차 문을 노크했다.

“아가씨, 말씀하셨던 식당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빛냈다. 드디어, 원하던 곳에 도착했다.

레슬리는 빠르게 마차 창문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의 반트가 레슬리를 보자마자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테센트루아 기사들은 조금 더 있어야 도착을 할 텐데, 기다렸다가 합류하면 가시겠어요?”

“아니, 먼저 식당을 방문할게요.”

듣자 하니 자신 때문에 오늘 식당은 쉰다고 했다. 그러니 빨리 다녀와 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레슬리의 말에 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슬리가 다시 커튼을 치자, 마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아가씨, 혹 위험할 수 있으니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오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셀바토르 기사단이 일곱 분이나 와 준 데다가 엠로아의 식당은 일반 식당인걸.”

레슬리는 웃었다. 처음 공작님은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을 붙여 주려고 했지만, 공작과 사이레인도 공작령에 내려가야 하는 데다가 모든 기사가 저택을 전부 비울 수는 없어 일곱만 따라왔다.

“그러니까 문제없어.”

레슬리는 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조금 더 달리고 나서 서서히 멈춰 섰다. 수도의 번화가처럼 잘 깔린 돌길에 상점과 식당 그리고 여관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신전으로 가는 사람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지, 신전에 바칠 초와 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셀바토르?”

거대한 마차와 일곱이나 되는 기사들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문양을 알아본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왜 그 괴물들이…….”

웅성거림은 레슬리가 내려오자마자 사그라들었다. 서올리와 마델의 꾸준한 관리로 반짝반짝해진 은발을 늘어뜨리고, 연보라와 연분홍이 섞인 오묘한 라일락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는 소녀. 다들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누구지?”

“그 소문의…….”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꺼내고 나서야 다시 속닥거림이 커졌지만, 마델이 무섭게 노려보자 눈치를 보며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졌다.

“흥.”

이상한 사람들을 쫓아낸 마델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사이 레슬리는 엠로아를 발견했다.

“엠로아!”

자신들을 마중 나온 것인지, 조금은 가벼운 차림에 숄을 두른 엠로아가 레슬리를 향해 걸어왔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엠로아는 레슬리 앞에 서서 웃어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뭔가가 이상한 느낌에 레슬리는 엠로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엠로아, 혹시 많이 피곤해?”

혹여나 제가 오는 일로 무리를 한 건 아닐까 레슬리가 조심스레 바라보자, 제 눈가와 뺨을 한 번 쓸더니 엠로아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요즘 저희 아가가 밤중에 종종 깨서요…….”

부끄럽다는 듯 웃는 모습에 마델이 이해했다는 듯 레슬리의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는 잠시 뒷집에 맡겨 두었어요. 대청소를 하느라고요. 어서 가요, 아가씨.”

엠로아가 레슬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두 사람의 뒤를 마델과 일곱의 기사가 뒤따랐다.

“여기예요!”

마차가 세워진 대로변에서 한 구역 뒤로 들어가자, 엠로아의 식당이 나타났다.

“리아 식당…….”

레슬리는 간판에 써진 식당 이름을 읽어 보았다.

“저희 딸 아이 이름을 땄어요.”

엠로아는 웃으면서 어서 들어오라는 듯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기사 다섯은 가게 주변을 지키기 위해 남았고, 레슬리와 마델 그리고 두 명의 기사, 레소와 반트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예쁘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엠로아가 말한 대로 식당은 작긴 했으나, 작은 다락방도 있는 모양이었고 구석구석 엠로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요리를 만드는 곳인지, 안쪽에서는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벽에는 말린 허브가 걸려 있었고, 커다란 벽난로에서는 훈훈한 열기가 올라왔다.

철창에 막혀 안쪽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불 때문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약한 불은 괜찮지만 저렇게 사람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불은 싫었다.

레슬리는 일부러 벽난로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방을 내려 두고 본격적으로 식당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창문이 다 막혀 있네?”

레슬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마델이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한기가 들어오는 걸 방지해서 겨울에는 막아 두는 집도 많아요. 저희 공작저는 비싼 유리를 쓰기 때문에 저렇게 하지는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주로 창문을 막아 두지요.”

마델의 설명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특히 이 집은 아기가 있어서 그런가 좀 더 꼼꼼하게 막혀 있네요. 거기다 벽난로도 새것이고.”

마델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흘렸다.

“하긴 아무래도 아기가 어리면 어릴수록 감기가 걱정되죠.”

“네, 아가가 감기가 잘 걸리는 편이라 난방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그나저나, 어떤가요? 제 식당이에요. 몇 년을 일해서 간신히 땅을 사고 건물을 세웠어요. 인부를 고용할 돈을 아끼기 위해 저도 나무를 날랐다니까요.”

그 말에는 자부심이 들어 있었다. 엠로아는 레슬리와 마델을 보며 생긋 웃었다.

“아, 다들 배고프시죠? 제가 간단한 스튜를 끓여 놨어요.”

엠로아는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나무 그릇에 스튜를 가득 가져와 마델과 레슬리 앞에 내려놓았다.

“맛있겠다.”

레슬리는 제 앞에 놓여 있는 스튜를 보고 눈을 빛냈다. 고기와 채소가 잔뜩 들어간 스튜는 한 그릇만 먹어도 배가 든든하게 찰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저희 리아 식당의 명물 고기 스튜예요.”

레슬리의 말이 기쁜지, 엠로아는 웃으면서 서 있는 두 명의 기사에게도 스튜를 권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걸 반트는 단호하게 쳐 내면서 방긋 웃었다. 그러더니 레슬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와 마법석을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잠시 검사 좀 하겠습니다.”

그 소리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트와 마법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엔티에게 듣기로는 마법석은 여러 용도로 만들어져서 유용하게 사용된다고 들었다. 그중에는 독극물이 들어 있는지 검사할 수 있는 마법석도 있다고 들었다. 이상한 게 있으면 마법석이 다른 색으로 물든다고 했던가.

그런데 그런 마법석을 왜 지금 꺼내는 것인지 레슬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슬리에게 있어 그녀는 은인이었다. 그런 은인이 준 음식을 반트는 마치 독극물을 탄 음식처럼 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불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유일하게 떠오른 행복한 기억을 준 사람이 엠로아였다. 그런 엠로아가 자신을 해칠 리가 없는데!

엠로아 역시 반트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듯 작게 몸을 떨더니 일부러 괜찮다는 듯 방긋 웃었다.

“네, 네! 저는 괜찮아요. 그, 아가씨는 최근에 나쁜 일도 겪으셨고…….”

하지만 얼굴은 붉어지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반트 경!”

레슬리가 날카롭게 외치자 그릇에 마법석을 가져다 대던 반트의 손이 멈칫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레슬리가 공작저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를 낸 것도. 하지만 반트는 방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저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러면서 반트는 마법석을 레슬리의 그릇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 나서 마델의 앞에 있는 그릇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마법석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레슬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무서운 기세로 반트와 레소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 그릇들에서 이상한 게 전혀 발견되지 않으면 엠로아에게 사과해. 두 사람 다.”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둘 다 나가.”

“그건 좀…….”

반트가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레슬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반트와 레소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트와 레소가 슬쩍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상이 없다면 엠로아 씨에게 사과를 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좋아.”

레슬리는 제 치맛자락을 꽉 잡고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빛으로 물들었던 마법석은 그 빛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스튜가 가득 냄비와 다른 음식들에서도 마법석은 다른 색으로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네요.”

결국, 가게 전부를 검사한 반트와 레소는 마법석을 도로 품에 집어넣으면서 작게 안도의 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엠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엠로아는 정말 기사들에게 사과를 받을지 몰랐던지 팔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조심하는 게 당연한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레슬리가 더 화를 내기도 전에 엠로아가 외치자, 레슬리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가씨. 저희는 바로 앞에 있겠습니다.”

“응.”

레슬리는 반트와 레소의 인사에 일부러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나가면서 ‘결국 미움받고 말았네요.’ 하고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레슬리는 못 들은 척했다.

“미안해. 기분 나빴지?”

“아가씨, 정말 아니에요.”

“그래도…… 나 이거 얼른 먹을게!”

레슬리는 재빠르게 스튜 그릇을 향해 손을 뻗다가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떨어트렸다. 편지와 자잘한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이런.”

마델과 엠로아가 재빠르게 떨어진 물건들을 줍다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러다 마델이 편지를 집어 들고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편지는 오늘 보내도록 할까요? 신전과 마을은 거리가 있어서요. 오늘 보내고 신전에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편지를 보내시게요? 바로 옆집에서 편지를 보낼 수 있어요. 제가 다녀올까요?”

엠로아의 말에 마델이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가 만나러 오신 분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요! 이건 조금 이따가 제가 부치고 올게요. 아니면 기사님에게 부탁드려도 될 거예요.”

“그럼 스튜 좀 드시고 가세요. 식은 것보단 따듯한 게 좋으니까요.”

그 말에 레슬리와 마델은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엠로아는 무언가를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맛있다.”

검사를 하느라고 오래 기다렸지만, 이 겨울에 먹기 좋을 만큼 스튜는 따끈따끈했다. 따듯한 게 배 속에 들어가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러게요. 어떻게 이런 풍미를 낸 건지 모르겠어요. 이건 동부에서 나는 감자 같은데.”

마델은 신나서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요리에 관심이 있었는지 고기는 양 같다, 동부 감자는 좀 더 달콤하다는 등 자신이 알고 있는 대화를 풀어놓았다.

그러는 사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온 엠로아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색색의 천을 엮어 만든 팔찌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엠로아가 웃었다.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네, 엠로아 씨. 이거 정말 맛있네요. 동부 감자인가요?”

“맞아요. 이 근방에서 먹는 감자는 이런 맛이 안 나죠.”

“그런데 엠로아. 그럼 아가는 계속 뒷집에 있는 거야?”

아가를 위해 아기 옷도 가져왔는데. 보고 건네주면 좋겠다.

레슬리의 말에 엠로아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아…… 그렇지. 지금 내 아가가…….”

“엠로아 씨?”

하지만 그 표정은 찰나였다. 마델이 그녀를 부르자마자 그녀는 다시 방싯 웃었다.

“아. 사실은 저희 아가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아가씨는 몰라도 기사님들을 보면 울 것 같아요.”

조금 이따가 아가씨에게만 살짝 보여 드릴게요. 그렇게 약속하며 엠로아는 레슬리의 손목에 자신이 가져온 팔찌를 감았다.

레슬리는 제 팔을 들어 팔찌를 바라보았다. 천으로 만들어진 팔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게 뭐야?”

“선물이에요, 아가씨. 우리 고향에서는 이 팔찌를 선물하는 걸로 앞으로의 행운을 기원하거든요.”

그 말에 레슬리와 마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찌를 바라보았다. 다양한 색의 천을 일정하게 잘라서 엮어 만든 팔찌는 레슬리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왜 무거운 걸까?

“안에 딱딱한 걸 넣어서 모양을 고정해 봤는데, 혹시 무거우신가요?”

엠로아의 말에 레슬리는 납득했다. 아, 그래서 무거운 거구나. 레슬리는 괜찮다고 웃어 보이며 제 팔을 흔들어 보았다.

“사실 아가씨와 같이 하고 싶어서 이렇게 저도 차고 있어요.”

엠로아는 부끄럽다는 듯 제 소매를 걷어 보였다. 그러자 똑같은 모양의 팔찌가 보였다.

“세트네.”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리며 엠로아와 제 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엠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트예요. 제가 만들었어요, 아가씨.”

“부럽네요.”

마델이 눈을 빛내며 팔찌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서올리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가 나중에 몇 개 만들어서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면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릴까요?”

“어머나! 그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기꺼이요.”

그런 마델의 마음을 알았는지 엠로아가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러는 사이 레슬리는 제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무거워. 왜 이렇게 무거울까. 보석이 올라간 것도 아닌데, 돌덩이가 들은 것처럼 무거웠다. 안에 철 조각이라도 집어넣은 걸까?

‘벗고 싶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받은 선물인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벗고 싶으면 저에게 말해 주세요. 그거 매듭이 까다로워서 벗기가 힘들거든요.”

엠로아가 레슬리에게 말하자, 스튜를 먹고 있던 마델이 반응했다.

“많이 어려운가요? 저에게 알려 주세요.”

레슬리의 팔찌를 가장 많이 벗겨 줄 사람은 마델이었기에, 엠로아는 마델에게 매듭을 푸는 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묶고 푸는 건가요? 생각보다 어렵네요.”

“네에, 저희 지방에서 묶는 건데 어렵지요…….”

마델이 매듭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 엠로아는 불안한 얼굴로 레슬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슬리는 스튜를 먹느라고 엠로아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잠시 두 사람이 매듭을 풀고 다시 묶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스튜를 거의 다 먹은 레슬리는 자신이 잊어버린 물건을 떠올렸다.

‘맞다. 선물.’

가지고 나오지 않았었나? 주변을 둘러보자, 선물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레슬리가 가지고 있는 가방은 작은 가방이라 선물 상자가 들어갈 일이 없었다.

‘놓고 왔나 봐.’

아까 마델과 보고 어디다가 놨더라. 편지와 보닛 때문에 마델도 자신도 정신이 팔렸던 듯했다. 잠시 고민하던 레슬리는 아직도 매듭으로 열렬한 토론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마델, 있잖아. 내가 선물 상자를 두고 온 것 같아.”

레슬리의 말에 마델도 선물 상자를 찾아보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제가 다녀올게요. 마차 안쪽에 넣어 놔서 기사님들은 찾기 힘들 거예요.”

가는 김에 편지도 부치고요. 말을 잇던 마델은 미안하다는 듯 엠로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기사분을 한 분 부를게요. 아가씨를 절대 혼자 두지 말라고 하셔서요.”

“저는 괜찮아요. 편한 대로 해 주세요.”

마델은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며 가게를 나섰다. 밖에서 기사와 이야기를 하는지 문 바로 앞에서 두런두런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엠로아. 있지, 아까…….”

방금 있던 일을 다시 사과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엠로아를 부르는데,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엠로아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엠로아?”

그 뒷모습이 뭔가가 이상했다. 휘적휘적 걷는 발걸음은 꼭 술에 취한 사람 같기도 했고 무언가 절망에 빠진 사람 같기도 했다.

레슬리는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퍼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본능에 따라 레슬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발 아니길 빌며 다시 엠로아를 불러 보았다.

“엠……로아? 내 말 들려?”

하지만 문까지 걸어간 엠로아는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죄, 죄송해요, 아가씨.”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눈물과 죄악감으로 젖어 있었다. 레슬리의 눈동자가 절로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죄송해요.”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이 잠겼다.

그건 레슬리에게 있어서 공작저에 들어와 처음 맛본 배신이었다. 발밑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레슬리는 멍하니 엠로아를 바라보았다. 왜냐고 입을 열어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를 못 했다. 그러는 동안에 엠로아는 문을 잠그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죄송해요, 아가씨…….”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레슬리는 이를 갈았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왜 엠로아가 자신을 이곳에 가뒀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정말 그렇게 미안하다면 나를 내보내 줘.”

뒤로 물러나며 레슬리가 말하자, 엠로아가 슬픈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밖에는 셀바토르 기사들이 있어. 판자를 덧댔다고는 하지만, 나무문쯤은 금방 뚫고 들어올 거야.”

“그러겠지요.”

엠로아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쉽게 들어올 수는 없을 거예요.”

챙!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델의 비명과 기사들이 검을 부딪치는 소리.

레슬리가 놀라서 움찔하는 사이 엠로아가 달려와 레슬리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쏟아난 것인지, 잡힌 팔에서 고통이 몰려와 레슬리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놔…… 놔!”

“못 놔요. 죄송해요, 아가씨.”

그렇게 말하며 덜덜 떨더니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나, 남편이 제 아이를 팔아넘겼어요……. 그 망할 새끼가……. 나는, 내, 내 아가를 찾아야 해요. 우리 리아를…….”

‘분명 뒷집에…….’

아니, 그 전에 남편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벗어나야겠다. 레슬리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엠로아의 손을 덥석 물어 버렸다.

“아악!”

짧은 비명이 터지고 엠로아가 손을 놓친 순간 레슬리는 문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시 잡혀 버렸다. 엠로아는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레슬리의 허리를 꽉 안아 버렸다.

“놓으라고!”

레슬리가 팔다리를 휘두르며 엠로아에게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을 옥죄고 있는 팔의 힘은 강해졌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놓으라고 하잖아!”

레슬리의 손이 정확히 엠로아의 얼굴을 때렸지만, 작은 신음만 흘릴 뿐 그녀는 놓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아무리 밖에 수상한 자들이 급습했다고 하더라도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누구와 싸우든 엠로아가 자신을 붙들어 놓은 시간은 찰나일 것이다.

‘일단 벗어나야……!’

그 생각을 하는데, 천장 위쪽, 다락방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리고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벽난로에서 불이 세차게 타오르더니 기름을 먹고 식당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

레슬리는 그 불을 보고 굳어 버렸다.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어서 집어넣어! 이러다가 해가 진다면 네놈을 저 불구덩이에 집어넣겠다!’

그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제물을 삼키는 검은 불이었다. 검은 불은 빠르게 레슬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불은 천장에서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락방에도 검은 불이 타오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천장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졌다. 누군가가 불이 빠르게 번질 수 있도록 손을 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럴 사람은 이 세상에 단 세 사람뿐이었다.

“후작!”

레슬리는 분노에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자신을 이제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원래 목적대로 제물로 삼을 생각이었다. 아마 멀리서 이 사태를 보고 있겠지.

“당장 이리로 오라고! 죽여 버릴 거야!”

레슬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소리 질렀다. 이런 함정에 빠진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고 분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열기에 목소리가 저절로 갈라졌다.

“꺄악!”

다시 비명이 터졌다. 불길이 제 앞을 가려 버린 탓이었다. 건조한 겨울에 마를 대로 말라 버린 목조 건물은 순식간에 불길로 가득 찼다.

‘어서 도망가야…… 하는데.’

숨이 가빠 왔다. 무서워, 무서워. 무섭다고 싫어!

‘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도무지 저 불이 무서워 그럴 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정신 차려. 보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눈을 꽉 감고 가쁜 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내 아가…….”

자신을 꼭 끌어 앉은 채, 엠로아가 덜덜 몸을 떨고 있었다.

“미안해, 아가. 아가. 예쁜 내 딸……. 우리 리아…….”

내 딸. 사랑스러운 딸. 그 말에 왜 공작과 사이레인이 떠오르는지. 연달아 베스라온과 루엔티가 생각나는지. 그리고 왜 눈물이 다시 터져 나오는지.

“에, 엠로아. 나랑 같이 죽을 생각이야?”

눈물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나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아이야.’

불 따위 무섭지 않아. 나는 고귀한 수호자의 일원이니까. 레슬리는 눈물을 삼키며 엠로아를 다시 불렀다.

“엠로아!”

자신을 끌어안은 채 주저앉은 엠로아를 보니 정말 자신과 함께 불타 죽을 모양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걸 듣지 못했는지 엠로아는 덜덜 떨며 자신의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쿠웅! 천장이 무너지면서 입구가 막혀 버렸다.

“엠로아! 나랑 같이 죽을 거냐고!”

레슬리는 다시 팔을 휘둘러 굳어 버린 엠로아를 때렸다.

“이런다고 리아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좋아할 거예요!”

딸이라는 말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녀가 거칠게 레슬리를 몰아붙였다.

“제, 제 딸은 아파요, 아가씨. 너무너무 아파요. 그런 딸을 남편이 데려갔어요. 그 도박 빚에 미친 새끼가 제가 잠시 아파서 잠든 사이에……. 그런데 저, 저만 죽으면요. 아가씨랑 같이 죽으면요, 리아를 행복하게 살게 해 준대요. 아프지 않고 귀족처럼 살게 해 준대요. 지금 위태한 고모 상단도 살려 준다고 약속했어요.”

엠로아는 덜덜 떠는 상태로 레슬리를 바라보며 옷자락을 쥐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죽어 주세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가 눈물로 범벅인 된 눈가를 쓱 닦아 내고 고개를 저었다. 엠로아는 그런 레슬리를 초점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살 거야. 나는, 살고 싶어. 그래서 셀바토르 공작가로 갔고. 이제 나를 사랑해 주는 부모님과 가족을 만났어.”

눈물로 목소리가 흐려지지 않게 또박또박 말하며 레슬리는 엠로아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두 오라버니들을 떠올릴 때마다 더욱더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남을 거야. 내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이 슬퍼하실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가 거칠게 엠로아를 떨궈 냈다. 레슬리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쉽게 엠로아의 팔이 풀렸다.

‘나갈 곳이……!’

나갈 곳을 찾기란 힘들었다. 불길은 여기저기 퍼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 곳,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은 구석 창문을 발견한 레슬리는 그리로 뛰었다. 판자가 막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자신 있었다. 레슬리는 어둠을 일으켰다.

“……?”

하지만 일렁거리는 어둠은 판자에 닿기만 할 뿐, 판자를 부수고 레슬리에게 탈출로를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다, 다시.’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둠을 움직여 보았지만, 역시 일렁거리기만 할 뿐 어둠은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마치 힘을 잃어버린 듯했다.

‘왜?’

레슬리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절망하는 사이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아주 시커먼 불이.

처음 레슬리가 봤던 검은 불은 저렇게 시커멓지 않았다. 마치 그때 있던 작은 손들이 다 떠나 버린 듯 보이는 불은 살아 있는 것처럼 레슬리를 붙잡았다.

배고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속에 든 게 텅 비었다는 듯 검은 불은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레슬리의 드레스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싫어! 레슬리는 재빠르게 드레스 자락에 붙은 불을 꺼 보려고 했다. 하지만 불은 점점 더 레슬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물이 레슬리를 덮쳤다. 불이 꺼졌다.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는데, 엠로아가 다시 레슬리의 팔을 붙잡았다.

“도대체 언제쯤 포기할 거야!”

레슬리가 거칠게 밀어냈지만, 이번에도 엠로아는 레슬리를 질질 끌고 갔다.

“노, 놓으라고!”

물어도, 꼬집어도 그녀의 손은 억세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안쪽으로 레슬리를 끌고 온 엠로아는 한 손은 레슬리를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바닥에 깔린 카펫을 벗겨 냈다. 그러자 그 밑에서 입구가 나타났다. 엠로아는 그 문을 열며 레슬리를 불렀다.

“여기 들어가 계세요. 식료품을 저장하는 지하창고예요. 여기까지 불이 붙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면서 어서 내려가라는 듯 손짓했다.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다시 떨어졌다. 왜, 갑자기 자신을 살리는 걸까.

눈물을 쓱 훔치더니 엠로아가 말을 이었다.

“저도 부모니까요. 제 아이를 살리고는 싶지만…….”

엠로아는 눈물과 함께 침을 삼키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귀한 아이를 죽여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러고는 억세게 다시 레슬리의 팔을 잡고 밑으로 내려가게 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내려가지 않고 버텼다.

“믿을 수 없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레슬리를 죽이려고 했다가 갑자기 변한 게 믿기지 않았다. 저 밑에는 또 다른 검은 불이 있는 게 아닐까.

“……그, 아가씨.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제, 제 딸을 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뭐……?”

갑자기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아가씨의 말을 듣고 생각했어요. 이건 잘못된 방법이에요.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와 버렸고 이게 가장 나은 방법이에요. 그런데 제 딸…… 제 가엾은 딸이 너무 걸려요……. 그러니 제발……. 제 딸만 살려 주세요, 아가씨.”

눈물에 헐떡거리며 엠로아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약한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 남편에게서, 그리고 후작에게서 계속 협박 편지를 받고 정신이 나가 버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변명은 통하지 않겠지.

‘벌을 받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내 딸은 어쩌지? 과연 후작이 그 약속을 지킬까? 유일한 리아의 보호자가 된 남편은 후작처럼 내 딸을 때리고 굶기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레슬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엠로아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최악의 짓을 저질렀는지도.

이 일을 수습하는 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레슬리를 살리고 제가 죽는 방법이었다.

“제, 제가 몸을 꼭 웅크리고 죽을게요. 그럼 아마 제가 아가씨를 붙잡고 죽었다고 오해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어서, 어서…….”

하지만 아직도 엠로아는 자신이 제일 무서웠다. 혹여나 다시 자신의 마음이 바뀔까. 그래서 다시 레슬리를 해치게 되진 않을까. 조금만 정신을 놓는다면 다시 레슬리를 껴안고 불 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엠로아는 재촉하듯 레슬리의 등을 떠밀었다.

다행히도 그런 엠로아의 마음을 알았는지, 레슬리는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꼭 리아를 구해 줄게.”

“……정말요?”

고개를 끄덕이자 눈물이 같이 바닥에 떨어졌다. 뜨거운 열기 탓에 바닥에 닿자마자 눈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로.”

그 말에 고맙다는 듯 엠로아가 웃었다. 다시 그녀가 가라고 레슬리의 등을 떠미는 순간 천장이 두 사람 위로 무너져 내렸다. 레슬리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 버렸고, 엠로아가 레슬리와 지하실 입구를 보호하듯 몸을 일으켰다.

“아악!”

검은 불이 붙은 판자가 엠로아의 등에 떨어졌다. 외마디 비명이 레슬리의 귀를 덮었다.

“아흐흑.”

고통으로 생겨난 눈물이 레슬리의 뺨에 떨어졌다.

“어서 열고 가세요!”

엠로아는 레슬리를 독촉했다. 눈물에 젖은 그 목소리에 다시 레슬리는 몸을 움직였다.

분명 엠로아가 열어 줬는데, 입구가 닫혀 있었다. 아까 천장에서 물건이 떨어지면서 닫혀 버린 듯 보였다.

레슬리는 뜨거움도 잊어버리고 창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천장에 붙은 불이 더욱 세게 타올랐다. 검은 불은 마치 레슬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듯 보였다.

처음보다 더 검은색으로, 그리고 악질적으로 변해 버린 것 같은 불은 슬금슬금 레슬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레슬리가 이를 악물고 문을 연 순간 정확히 레슬리를 노리고 불덩이가 천장에서 떨어졌고.

“이런, 우리 딸. 괜찮니?”

이 자리에는 있을 리가 없는 셀바토르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꿈일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다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자 공작이 웃으며 손을 마주 뻗어 레슬리의 작은 손을 잡아 주었다.

만져진다. 레슬리는 그게 너무도 신기했다. 공작령에 있어야 할 분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연기를 너무 마셨나 보구나.”

공작은 바닥에 쓰러진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그러면서 여유 있게 얼굴을 닦아 주기까지 했다.

“어머니, 여기는 위, 위험…….”

“내가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겠니.”

등을 토닥이며 말하자 정말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런가? 나는 이제 안전하구나.’

레슬리는 품 안에 안겨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어쩐지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무너지는 식당 안, 불길 속인데도 무섭지가 않았다. 아까보다 더욱 평온해졌다.

“나갈까.”

레슬리가 안정된 걸 확인하자마자 공작이 걸음을 옮겼다. 불길이 다시 치솟았지만, 공작은 자신이 가져온 검으로 가볍게 불길을 갈라 길을 내었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 잔해들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 역시도 털끝만큼의 피해도 주지 못했다. 공작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레슬리는 공작의 품에 안겨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설을 보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레슬리, 졸려도 눈을 뜨고 있으렴. 지금 자면 안 된단다.”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시선이 공작 너머에 닿았다. 불타오르는 천장의 잔재들 밑에 엠로아가 쓰러져 있었다. 레슬리는 공작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 어머니! 엠로아를 살려 주세요!”

“너를 속인 사람을 말이니?”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딸아, 증인이 필요하다면 일단 여기서 나가 남편이라는 놈을 잡으면 되고,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근방에 숨어 있는 스페라도 후작을 잡으면 될 일이란다.”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엠로아는 저를 살려 주려고 했단 말이에요.”

레슬리가 간절한 얼굴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자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다시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는 엠로아를 바라보았다.

“휴.”

작게 한숨 쉰 공작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더니 한 팔로 엠로아의 손을 잡고 불타는 잔해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러더니 기절한 엠로아를 끌고 벽 쪽으로 다가갔고, 그대로 발로 벽을 부숴 버렸다.

쿠웅―!

아무리 나무로 만든 집이라지만, 화재로 약해져 있다지만, 발길질 몇 번에 벽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밖이 보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뺨에 닿자 그나마 남아 있던 모든 긴장이 어이없이 풀려 버렸다.

‘눈을…… 떠야 하는데…….’

어머니가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지? 너무 졸려. 레슬리는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마델과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오늘이지.’

콘라드는 제복을 차려 입으며 달력을 확인했다. 레슬리가 도착한다고 편지로 말한 날이 오늘이었다. 무슨 식당에 들른다고 했던가. 예전의 은인을 우연히 만나 식당에 초대받게 되었다고 기뻐서 편지를 보낸 걸 기억하고 있었다.

‘추신: 사실 엠로아의 식당에 가고 싶다고 어머니랑 아버지를 졸랐어요. 부끄러우니까 비밀이에요.’

뒤에 고백하듯 덧붙인 추신을 읽으며 웃음을 터트렸었지. 레슬리가 며칠 이르게 도착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지원해서 호위로 오는 것까지는 간단했다.

‘조금 찔리는걸.’

콘라드는 제 뺨을 긁적거리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편법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들 귀족 영애 한둘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니. 이건 레슬리 양을 위해서야.’

레슬리는 낯을 많이 가리니까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보다 얼굴을 아는 자신이 가는 걸 더 기뻐할 것이다. 거기다 이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긴장을 풀어 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렇고말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콘라드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많이 찔리네.’

결국, 짧게나마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나서야 콘라드는 검과 망토를 챙겨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이미 나갈 준비가 된 말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몇 명의 기사는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그 화제의 셀바토르 공녀라며?”

테센트루아 성기사 중 한 명이 씩 웃으며 콘라드에게 말을 걸었다.

“아는 사이지?”

“조금요.”

콘라드가 웃자, 그 기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보통 아는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 그러니까 재판장에서 증인도 해 주지.”

“루엔티 마법사님으로 인연이 있을 뿐이에요.”

사뿐히 말에 올라탄 콘라드는 고비를 쥐고 그 기사를 보며 웃었다.

“슬슬 가지 않으면 우리 늦지 않을까요?”

“말 돌리긴.”

하지만 콘라드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다섯 명의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은 말을 몰아 신전을 빠져나갔다. 호위는 콘라드와 콘라드에게 말을 건 두 기사가 맡게 될 것이었지만, 레슬리가 있는 곳이 바로 신전 코앞이라 다섯이나 출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맨 앞에서 달리던 기사가 눈을 깜빡였다.

“어? 잠시 멈춰!”

그 말과 함께 다섯의 기사가 전부 멈추었다. 시원하게 달리다 급작스레 멈추자 말들이 마음에 안 드는지 푸르륵거렸다. 콘라드가 달래 주려 목덜미를 두드리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기사들에게 매달리듯 달려들었다. 맨 앞에 있던 기사는 그 남자를 보고 급하게 말을 멈춘 듯 보였다.

“기사님들, 도와주십시오!”

남자가 간절하게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그 식당에…… 식당에 불이 나고 이상한 사람들이 막 사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불길도 시커먼 것이…… 위험해요!”

차가운 겨울 날씨임에도 남자의 얼굴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도움을 구하기 위해 급하게 신전으로 뛰어오던 것이 분명했다.

“식당 말입니까? 어느 식당인지 정확히 말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콘라드가 묻자 남자는 땀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아 식당입니다. 대로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데……. 거기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싸우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상한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남자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콘라드가 말을 몰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콘라드!”

아슬아슬하게 남자를 스쳐 지나가고 뒤에서 기사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미 콘라드는 상점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상점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엄청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연기가 치솟는 곳,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아비규환이었다. 보기에도 소름 끼치는 검은 불이 작은 식당 하나를 삼키고 있었다. 하필이면 마른바람이 불어 옆 목조 건물로 불이 옮겨 붙고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쿵! 바람에 ‘리아 식당’이라고 써진 간판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사방으로 파편과 불똥이 튀었지만, 도망가는 사람들의 비명과 검을 맞대고 싸우는 기사들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죽여! 보내선 안 돼!”

외침이 귀를 따갑게 찔렀다. 셀바토르 기사들과 복면을 쓴 사람들이 검을 맞대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콘라드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 공자님.”

그런데 누군가가 콘라드의 발목을 잡았다. 마델이었다. 공격을 당한 건지, 마델의 하녀복은 한눈에 보기에도 처참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어깨 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 안에 우…… 가씨…… 불 무서워하시는, 는데 공자…… 우리…… 구, 구해 주세…….”

마델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콘라드의 발을 잡았다. 콘라드는 바로 허리를 숙여 마델의 상처에 손을 뻗었다. 황금색 빛이 마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네, 네!”

마델은 신력이 몸에 흡수되자마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하게 외쳤다.

“저 안에 우리 아가씨가 있어요. 문은 안 열리고 이상한 놈들이 공격해 오고……. 아가씨 불 무서워하시는데 제발 우리 아가씨 좀…….”

숨도 안 쉬고 빠르게 말을 하다 마델은 콜록거렸고 콘라드는 그런 마델을 토닥이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신력으로 상처를 치료했으나 당분간은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레슬리 양은 제가 구할 테니 걱정 마시길.”

거기까지 말한 콘라드는 검은 불로 휩싸인 식당으로 뛰어갔다. 멀리서도 그랬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기분 나쁜 느낌이 강해졌다. 저절로 거부감이 들었다.

‘도대체 이 불은 뭐지?’

마수인가? 잠시 검은 불을 바라보아 콘라드는 이를 깨물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일단 들어가서 레슬리 양부터…….’

거치적거리는 망토를 벗고 불 안으로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가 콘라드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상체를 뒤로 젖혀 피하고 검을 뽑자, 다시 공격이 콘라드의 위로 떨어졌다.

캉! 칼이 돌이 깔릴 바닥을 치며 매섭게 울었다.

“이 무슨……!”

셀바토르 기사들과 싸우고 있던 복면 중 한 명이었다. 콘라드가 검을 빼 들자, 복면을 쓴 남자의 공격은 더욱 거칠게 쏟아졌다.

절대 식당 안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듯, 검을 휘두른 남자는 자신의 검을 막고 있는 콘라드를 향해 다른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은 뺨을 스치며 긴 자상을 만들어 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콘라드가 남자를 떨어트려 내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남자는 검에 베이면서까지 콘라드를 막았다. 다시 거칠게 검이 내려쳐지고, 콘라드는 몸을 굴려 검을 피했다. 기껏 가까워졌던 식당에서 더 멀어져 버렸다.

시간 끌기다. 콘라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죽이려 하기보다는, 못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

얼마나 되었지? 불이 저렇게 타오른 지, 레슬리가 저 안에 갇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분명 울고 있을 텐데.

나머지 기사들이 도착만 하면 승기는 확실히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콘라드는 검을 꽉 쥐었다. 남자는 자신을 보내 줄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남자부터 처리하고 들어가는 게 맞았지만…….

‘너무 많아.’

주변엔 십 수 명이나 되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를 베어 내도 또 다른 하나가 달라붙을 것이다.

‘그냥 한 번 검을 맞고…….’

자신은 신력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자신과 대치하고 있던 복면을 쓴 남자가 피를 울컥 토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가슴팍에는 단검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아이테라 공자.”

사이레인이 남자의 가슴에 꽂힌 것과 똑같은 단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엔 도끼를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매서운 눈으로 콘라드를 내려다보았다.

“도움을 요청하지. 이 주변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이 근방에 숨은 스페라도 새끼를 좀 찾아 주겠소? 나보다는 공자가 이곳 지리에 더 밝을 테니까.”

콘라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에 레슬리 양이 있습니다.”

“우리 딸은 걱정 안 해도 돼.”

사이레인은 자신과 콘라드에게 달려드는 복면을 쓴 사람의 가슴에 다시 단검을 던져 박아 주며, 매서운 눈길로 복면을 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도끼를 쥔 사이레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아내님이 가셨거든.”

***

도망가야 해. 그 생각이 스페라도 후작의 머리를 뒤덮었다.

잘못되었다. 뭔가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르아인가 뭔가 하는 여자에게서 레슬리가 정을 줬을 법한 사람을 찾아내는 힌트를 발견했다. 걸릴 것이다. 그 아이에게 있어선 아마도 단 한 번뿐인 좋은 기억일 테니까.

그 여자의 뒤를 파 보니, 남편은 도박과 약 중독으로 실종 상태가 오래되어 죽은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기댈 만한 고모의 상단은 너무도 약해져 있었고, 하나뿐인 딸은 병약해 너무도 이용하기 좋은 상태였다.

엠로아에 대해 확인하자마자, 후작과 엘리는 고민에 빠졌다. 그 둘에게 있어선 이 일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일이었다.

‘식당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 식당으로 꾀어서 제물의 불을 지르죠.’

엘리가 화사하게 후작을 보며 웃었다. 마침 겨울이니 나무는 잘 탈 거라며 신께서 자신들을 도운다며 더욱 밝게 웃었다.

그 즉시 제물의 불을 옮기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검은 불은 따로 꺼내 옮기면, 이틀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그라들었다. 장작이나 석탄, 종이, 어느 것을 넣어 봐도 이틀이면 힘을 잃었다.

검은 불이 있는 정자는 스페라도 후작가와 거리가 있는 편이라 이틀을 버티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후작은 고민 끝에, 절벽에 있는 정자를 스페라도 후작가의 정원으로 옮겨 오기로 했던 것이다. 정자를 옮기다 몇이 죽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대업을 위해 죽은 거니 저들도 기뻐하겠지.

정원을 파헤치고 정자를 옮기자, 신레프 신전까지의 거리도 말을 타고 반나절을 가면 되는 수준이 되었다.

제물의 불 문제가 끝나자, 후작은 엠로아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후작은 그 정도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회유가 아닌 다른 수를 썼다.

빚쟁이들을 피해 거지 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남편을 찾아, 돈과 약으로 아이를 훔쳐 오게 시켰다. 그리고 딸을 찾아 헤매는 여자를 데려와 아이의 건강과 고모의 상단을 걸고 레슬리를 꾀어내게 했다. 아이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자마자, 바로 답신이 돌아왔다.

‘하겠습니다.’

오만불손할 정도로 짧은 편지였지만 만족스러웠다. 그 편지를 받은 날 후작은 오랜만에 뿌듯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거기다 레슬리, 그것이 혹여나 어둠의 힘을 쓸까, 사슬을 부숴 팔찌 속에 숨겨 놨다. 엘리에게 시험해 보니 엘리 역시 힘을 쓰지 못하는 걸 보고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이제 다시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 비록 좌절된 일이 있었지만, 모든 영웅이 그렇듯 좌절 끝에 자신은 높게 날아오르리라.

‘이 치욕은…… 나에게 치욕을 준 것들은 전부 잊지 않을 거다!’

라본 백작을 선두로 재판에서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 그리고 자신에게 주제를 잊고 빚 독촉을 한 놈들.

‘무엇보다 셀바토르 공작!’

레슬리는 불에 넣어 죽일 테니, 셀바토르 공작 하나만 남았다. 어떻게 그 목을 조를까, 즐거운 고민을 뒤로한 스페라도 후작은 레슬리의 힘을 받을 엘리와 신레프 신전 근처로 향했다.

사랑스러운 딸 엘리는 어여쁜 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후작 역시 화답하듯 웃어 보였다. 그렇게 둘은 레슬리가 함정으로 빠져드는 걸 지켜보았다.

처음엔 생각보다 많은 셀바토르 기사들이 와 걱정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간 둘이 도로 밖으로 나와 숨을 돌렸다. 그들은 철통같이 밖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미 제물의 불은 식당 다락방에 마련된 뒤였다.

후작이 손짓만 하면 화살이 날아가 불이 든 램프를 깨트릴 것이고, 주변의 마른 가지들과 종이들에 기름을 먹여 놨으니 순식간에 불은 옮겨 붙을 것이다. 모든 건 전부 자신을 위해 잘될 것이다.

그랬는데, 그래야 했는데.

“왜!”

스페라도 후작은 도망치고 있었다. 상점가를 벗어나 점점 인적이 드문 길로 달리고 있었다.

“후, 후작님. 제발 같이……!”

하인들이 넘어지고 자신을 따라온 기사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리고 콘라드가 무서운 기세로 후작과 엘리를 쫓고 있었다.

다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후작은 제 옆에 달리던 하인을 방패로 삼았다. 아주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해 온 하인이었다.

“크악!”

하인의 피가 흩뿌려지며 스페라도 후작의 눈에 들어갔다.

“아악!”

후작은 그대로 나뒹굴었다. 온몸이 먼지와 흙으로 더럽혀졌다.

“에, 엘리. 아버지 좀 부축해 다오…….”

후작은 간절한 눈빛으로 엘리를 바라보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차디찬 시선이었다.

“엘리? 사랑하는 내 딸, 어서 이 아비를…….”

다시 앞에 서 있는 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로브를 뒤집어쓴 엘리는 스페라도 후작을 한 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엘리!”

배신이다. 이건 배신이었다. 자신이 저를 위해 해 준 게 얼만데, 얼마나 많은 부와 명예 그리고 아름다움을 주었는데! 이 일도 엘리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엘리는 지금 후작의 손을 잡으면 자신도 잡힌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버지가 잡히는 건 너무도 슬픈 일이지만, 자신마저 잡히면 더 큰일이 아니던가. 엘리는 그대로 후작을 무시하고 도망쳤다.

“엘리! 어떻게 네가 나에게!”

후작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망치기 위해 다시 발을 떼었다. 후작의 목소리 따윈 들리지 않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숲이다. 거기까지 가면 자신을 찾지 못하겠지. 숲은 질척하고 더러운 벌레들이 많아 잘 들어오지 않으니까. 순진한 엘리는 그렇게 믿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후작의 바람대로 엘리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꺄아악!”

어느새 두 사람을 따라잡은 콘라드가 엘리 앞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차갑게 식은 황금빛 눈동자에, 손에 들린 검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얀 제복 역시 그을음과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잔혹한 모습에 놀란 엘리는 엉덩방아를 찧더니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덜덜 떨며 울기 시작했다.

“아, 아이테라 공자.”

콘라드를 본 후작이 웃으며 콘라드를 불렀다.

“일단 그 무시무시한 걸 내려놓고 이야기하지. 응? 내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공자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후작은 흘깃 자신의 옆쪽을 바라보았다. 건물들 사이로 작은 틈이 보였다. 후작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틈이었다.

“공자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엔 아픈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나.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 공자가 눈을 한 번 감아 주면 다시는 이런 일을…….”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스페라도 후작은 슬금슬금 그 틈새로 몸을 움직였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크악!”

몸을 움직이던 스페라도 후작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콘라드가 제 검을 스페라도 후작 옆에 꽂은 탓이었다.

뺨이 스쳤을 뿐이지만, 마치 제 팔이 잘리기라도 한 듯 후작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걸 보는 콘라드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팔이 잘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움직이지 마십시오, 스페라도 후작님.”

오싹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눈동자가 후작에게 닿자 후작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 역시 움직이지 마십시오.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뒷말이 다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효과적이었다. 숲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던 엘리가 두려움에 그대로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흐, 흐으윽. 억울해요. 저는 억울해요, 아이테라 공자. 저는 아무것도 몰랐단 말이에요.”

그러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걸 가볍게 무시한 콘라드는 아직 제 발밑에 엎드려 있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스페라도 후작님.”

나지막이 부르자 스페라도 후작이 고개를 들어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그 모습을 보고 콘라드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닮았다. 너무도 우습게도 레슬리와 후작은 닮은 면이 있었다. 입매라든가, 눈을 크게 떴을 때의 표정이라든가. 작은 면에서 두 사람이 친부모와 친자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렇게 닮았는데, 부모의 눈으로 보기엔 어땠을까. 그런데 그렇게 자신과 닮은 작고 여린 아이를 왜.

“후작님.”

콘라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흘렸다. 그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빛 덕분에 후작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어둠으로 차 있었다. 하지만 황금빛 눈동자는 번뜩임을 잃지 않고 후작을 응시했다.

“짐승도 제 새끼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뭐, 뭐?”

이런 상황에서도 제 욕을 하는 걸 알았는지,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콘라드는 흙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다시 내리박았다.

“아아악!”

이번엔 아까보다 더 애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콘라드의 검이 정확히 스페라도 후작의 손을 꿰뚫었다. 그 모습을 보며 콘라드는 이를 갈았다.

“한마디로 당신은 짐승보다도 못하다는 거야, 후작.”

***

사방이 불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아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꿈이었다. 레슬리는 몸을 웅크리고는 귀를 막았다.

‘괜찮아.’

자신이 불안할 때마다 꾸는 꿈이니까.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을 다독이며 레슬리는 천천히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이렇게 숫자를 세다 보면 잠에서 깨곤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꿈은 더욱 끈질겼다. 비명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슬리는 더욱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비명이 더욱 커졌다. 불안한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불이 더욱 번져 가기 시작했다. 불길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레슬리를 향해 왔다.

‘괜찮아…….’

말끝이 흐려지고 있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레슬리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오히려 불안감은, 비명은 더욱 커져만 갔다. 불길이 점점 가까워졌다.

뜨거워.

왜, 나는 레소 경과 반트 경의 말을 듣지 않았지. 왜, 엠로아를 의심하지 못하고 그녀를 믿었을까. 왜, 나는 이렇게도 멍청하고 어리석을까.

불길은 이제 레슬리의 발끝에 있었다. 아주 조금만 더 움직인다면 레슬리를 먹어 치울 것이었지만, 레슬리는 반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괜찮단다.’

그런데 누군가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겠니.’

그런가? 그렇구나. 나는 안전하구나.

“아가씨!”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마델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맨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눈물로 엉망이 된 마델의 얼굴이 뒤이어 레슬리의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이…….”

“마……델.”

“일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델을 부르는데 쇳소리가 들려왔다. 말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목이 찢어지게 아파졌다. 자신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하얀 천장과 신전임을 알리는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구나. 나는 그 불을 벗어났구나. 안도에 빠진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마델이 주는 따듯한 물을 마시며 레슬리는 슬그머니 셀바토르 공작을 찾았다.

“……어머니는?”

“공작님은 지금 다른 분들과 스페라도 후작의 처벌을 논의하고 계세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마델은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지금 황제 폐하도 이리 와 계세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 폐하가?”

“그렇다니까요. 듣기로는 종종 후보 시험을 참관하셨다는데, 마침 이번에도 후보 시험을 참관하러 오셨대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마델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들 벼르고 계세요. 벌을 받는 동안 이렇게 움직일 거라고 다들 생각을 못 했대요. 스페라도 후작가는 그래도 3대 후작가 중 하나이자 대표적인 명문가잖아요. 그래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다들 자숙할 거라 예상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렇구나.”

레슬리는 컵 안을 내려다보는 척하며 슬쩍 마델을 보았다.

“있지, 마델. 아까 다치지는 않았어?”

분명 마델의 비명을 들었는데. 레슬리의 말에 마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도 안 다쳤어요. 이거 보세요!”

그러면서 팔을 번쩍 들었다가 갑자기 몰려든 통증에 어깨를 쥐고 천천히 팔을 내렸다. 신력으로 치료했다지만, 아직 한동안은 조심해야 하는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본 레슬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 때문이다.

알고 있었다. 후작이 움직일 거라는 걸 예상하였다. 레슬리는 그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후작의 모든 면을 봐 왔으니까.

‘그런데 내가 방심해서…….’

모두 그녀를 지켜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는데, 오히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했다. 그리고 위험에 스스로 들어갔다. 아무리 속았다지만, 미안하고 미안해 눈물이 차올랐다.

“있지, 마델. 나 때문에 다치게 해서 미안해.”

레슬리는 마델의 소맷자락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미안해.”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다치다니. 레슬리는 컵을 꽉 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자 마델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레슬리가 놀라 마델을 바라보자 마델은 밝게 웃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나쁜 건 스페라도 후작, 그놈이잖아요? 아가씨는 피해자니까 자책할 필요 따위 없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레슬리를 꼭 안고 등을 토닥여 줬다.

“저는 제가 조금 다친 그것보다 아가씨가 마음 아파하면, 그게 더 괴로워요.”

따듯한 말에 레슬리는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거기다 아이테라 공자님께서 치료해 주셔서 사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어요.”

“콘라드 경이 왔었어……?”

마델은 제 품에서 그제야 레슬리를 떼어 놓으며 환하게 웃었다.

“네! 아이테라 공자님이 아가씨 호위시래요. 인사하러 가실래요, 아가씨? 그래요! 일단 식사부터 하고 공자님에게 인사 가도록 해요. 제가 식사를 가져올게요.”

그 말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레슬리는 마델을 바라보았다.

“레소 경이랑 반트 경에게 들른 후에 밥 먹을래…….”

“그럼 제가 레소 경과 반트 경을 제가 이리 불러올게요.”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러 가는데 두 사람을 부르다니, 말이 안 되었다.

“그냥 내가 갈게.”

레슬리의 말에 결국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로 옷장에서 레슬리의 코트를 꺼내 주고 천에 따듯한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레슬리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마델의 손을 잡고 걸었다. 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델이 그런 레슬리를 지탱해 주듯 레슬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은 방을 나서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분명 리아 식당에 들어갈 때는 낮이었는데,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델,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레슬리의 물음에 마델은 조심스레 답해 주었다.

“이틀 정도 잠들어 계셨어요.”

그렇구나.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사흘 정도를 잠들어 있던 것에 비교해서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간 체력 훈련을 한 게 효과를 보는 걸까? 더욱 열심히 연무장을 돌아야겠다.

얼마 걷지 않아 두 사람은 신전 뒤의 정원으로 나왔다. 지금쯤이면 기사들은 전부 휴식에 들어가 각자의 방에서 쉬고 있을 텐데. 왜 신전 뒤편으로 온 걸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아, 저기 계신다. 여러분!”

시력이 좋은 마델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레슬리는 정원 한편에 기사들을 위한 훈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이 난 듯 서 있는 사이레인과 벌을 받는 듯한 셀바토르 기사들의 모습도.

“아가씨, 뛰시면 안 돼요!”

마델이 소리쳤지만, 비틀거리면서도 레슬리는 사이레인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레슬리는 다행히도 넘어지지 않고 사이레인에게 도착해 그의 팔을 잡았고, 사이레인이 놀라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레슬리? 일어났니?”

“혼내시면 안 돼요!”

레슬리는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전부 나가라고 했어요. 레소 경이랑 반트 경이랑……. 제가 잘못한 거예요. 모두를 혼내지 마세요.”

그 말에 사이레인이 눈을 찡그렸다.

“일단…… 몸이 안 좋으니 나중에 말하자꾸나.”

그러더니 모두를 일어나게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벌을 받고 있었던 건지, 모두의 얼굴에선 땀이 뚝뚝 떨어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들 미안해요.”

사이레인의 품에서 내려온 레슬리는 모두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경악한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슬리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반트 경이랑 레소 경, 그리고 여러분은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걸 불쾌하게 여기고 나가라 해서 미안해요.”

그 말에 맨 앞에 서 있던 반트와 레소가 당황한 얼굴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레소가 슬그머니 사이레인의 눈치를 보며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방긋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저희는 밖에 있어도 괜찮겠다는 저희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밖을 지키고 당연히 안쪽도 주시하고 있었다. 마델이 나오면서 편지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사방에서 복면을 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모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식당을 불꽃이 먹어 치우고, 복면을 쓴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발목을 잡으며 시간을 끌기 위한다는 걸 알자마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신들은 나가면 안 되는 거였다.

“저희는 어찌 보면 자만했습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가 되었고 그 명성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착각했어요.”

그 자리에 베스라온이, 그리고 기사단장인 하르트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순식간에 레슬리는 안전해졌을 것이고, 이렇게 배신의 아픔을 가지지도 않아도 되었을 텐데.

“오히려 저희가 아가씨를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레소는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나머지 여섯의 기사들도 따라서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건데, 제가 전부 나가라고 해서…….”

“아가씨의 화는 정당했습니다. 친구분을 저희가 의심했으니까요.”

아직도 고개를 숙인 채 레소는 말을 이었다.

“자신의 친구가 의심받았다고 생각하면 저 역시 화를 냈을 겁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들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만.”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안아 들면서 모두를 일으켰다.

“우리 딸도 잘못했다고 말하니 이 일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일곱의 기사들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하지만 레슬리는 아직도 입을 꼬옥 다문 채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사이레인은 마델과 시선을 한 번 맞추더니 성큼성큼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레슬리를 다독였다.

“레슬리, 이 일은 너에게 있어서 큰 경험이 될 거란다.”

레슬리는 사이레인과 눈을 맞췄다. 레슬리의 눈동자는 지금 사이레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뒤통수를 맞아 본단다. 아니, 아니. 배신을 당해 보지.”

“배신이요…….”

자신은 이미 한 번 배신을 당했는데. 스페라도 후작과 후작 부인 엘리에게서 이미 그 경험을 얻었는데.

“저는 이미 얻었어요, 그 경험…….”

두 번은 얻고 싶지 않았는데, 왜 엠로아를 걸러 내지 못했던 걸까.

“스페라도 후작이나 그 엘리? 그런 경우와는 다른 거란다. 그 엠로아라는 여자는 네 빛나는 추억 일부였지.”

“맞아요.”

스페라도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리는 레슬리가 매달린 거였지만, 엠로아의 경우는 처음 레슬리가 느껴 본 따스함이었다.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기억이었어요.”

흰 빵과 세 가지 종류의 잼 그리고 버터. 그게 그렇게 반짝거리는 추억이 될 줄 레슬리도 모르고 있었다.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슬리를 보며 사이레인은 웃음을 지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반짝이는 추억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곤 한단다.”

그건 자신도 그랬고, 아셀라도 당한 일이었다. 덕분에 자신은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아셀라는 얼굴에 화상을 얻었다.

“그래, 누구나 다 그런단다. 이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다, 레슬리.”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사이레인이 눈을 찡긋거리며 씩 웃었다.

“두 번은 안 당하는 거지.”

“두 번이요.”

사이레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사람들을 다 의심하라는 건 아니란다. 그랬다가는 정말 좋은 사람도 내쳐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니까. 다만, 사람 보는 눈을 기르는 거지. 그건 경험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어. 만나고 헤어지고……. 그러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단다. 그건 정말 어려운 경험이지.”

그렇구나. 사이레인의 말에 레슬리도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따라오던 마델도 공감이 가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델도 그런 경험이 있는 거야?”

“그럼요!”

마델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제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저는 정말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에 제 소문이 안 좋게 퍼지는 거예요!”

안 물어보면 큰일 날 뻔했다. 레슬리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열렬하게 마델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보니까 걔가 제 험담을 퍼트리고 있었어요! 왜 험담을 했냐고 물어보니까 ‘새 친구를 사귀는 데는 험담만큼 좋은 게 없잖아? 왜 이래, 친구끼리. 좀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러는 거예요! 와, 제가 그때 너무너무 열 받아서 그 자리에서 걔랑 절교했어요. 그리고 저는 절대 처음부터 남 험담하는 사람과 사귀지 않아요!”

“그, 그렇구나.”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사이레인은 조심스레 레슬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주변을 살피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 보는 눈을 키우면 된단다.”

사이레인은 레슬리를 쓰다듬으면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일단 먹고, 쉬고, 자자꾸나. 알았지?”

신전에서 내어 준 식사는 따듯한 국물이 있는 스튜 같은 음식이었다. 다른 음식도 많았지만 앓다 일어난 레슬리는 스튜를 골랐고, 고기와 채소 그리고 버섯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조심스레 먹었다.

“따듯하고 맛있어…….”

이틀을 누워 있어서 그랬는지,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배 속에서 더 달라는 듯 꼬르륵거렸다.

“천천히 드세요, 아가씨.”

“응, 응.”

마델은 그런 레슬리가 체할까 물을 앞에 떠다 주었다. 대답은 열심히 하면서도 레슬리는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였다.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고기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고 국물을 한 모금 조심스레 마셨다.

“하아.”

저절로 뺨이 붉어지며 만족스러운 숨이 터져나왔다. 차가웠던 몸에 따스한 국물이 들어가니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너무 뜨겁진 않으세요?”

“날씨가 추워서 이 정도가 좋아.”

레슬리는 배시시 웃으며 제 앞에 앉아 있는 마델을 바라보았다.

“마델도 어서 먹어. 식으면 안 되잖아.”

그러자 마델은 제 앞에 놓인, 레슬리의 음식과 똑같은 음식을 바라보았다. 분명 마델도 배가 고플 텐데 보기만 할 뿐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지금 마델과 레슬리는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이레인은 스페라도 후작의 처벌이 정해졌는지 보러 갔고, 레슬리와 마델만 식당으로 왔다.

마델은 레슬리가 다 먹고 잠들고 나면 다시 식당으로 올 생각이었지만, 배는 주인을 배신했다. 꼬르륵! 우렁차게 울려 퍼진 소리를 레슬리도 들어 버린 것이다.

레슬리는 같이 먹자고 했으나, 마델은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녀가 고용인과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같이 먹고 싶은데…….’

레슬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울먹하자 마델은 손을 들었다. 제나 집사님에게만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자신을 토닥이며 음식을 받아 온 것까지는 좋은데, 쉽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먹어 봐. 정말 맛있어.”

레슬리가 계속 재촉하자 그제야 마델도 제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을 조심스레 떠서 먹어 보았다.

“맛있네요!”

“그치.”

마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전 음식이라서 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또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레슬리와 함께 마델도 덩달아 빠르게 손을 놀렸다.

“고기도 잔뜩 들어 있고……. 버터에 한 번 볶은 걸까요? 그런 것 같은 맛은 아닌데 풍미가 살아 있네요.”

“글쎄, 어떻게 한 걸까. 이거 바타에게 말해 주면 이대로 해 주지 않을까?”

레슬리는 이 음식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이틀을 굶고 나서 먹은 음식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직접 드셔 보지 않는 이상 보통은 무리일 거예요. 그런데 바타 요리사님은 보통이 아니시니까…….”

마델이 당근을 씹으며 말을 이었다. 잠시 두 사람은 바타에게 어떻게 이 맛을 전해 줄지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기에 그릇은 이내 텅 비어 버렸다.

“다 먹었다.”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텅 빈 그릇을 바라보았다.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다 먹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레슬리와 마델은 식당을 나와 천천히 신전 복도를 걸었다. 마을과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공작저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사람이 많이 없는 고요한 신전이었다.

잠시 달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델.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내가 위험에 처한 걸 알고 바로 오신 거야?”

마치 자신을 구원해 주는 영웅처럼 나타난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안 것일까. 거기다 공작령에 계신 게 아니었나. 배가 부르고 나자 뒤늦게 의문들이 떠올랐다.

“그게, 제나 집사장님이 엠로아의 남편과 스페라도 후작의 끄나풀이 만난 걸 알아채셨대요.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가 쪽에서도 밀고자가 나왔거든요. 덕분에 공작님과 사이레인 님이 늦지 않게 도착하신 거예요.”

“밀고자?”

레슬리는 마델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밀고자? 밀고자라니. 누가 스페라도 후작을 밀고했을까. 레슬리는 머리를 굴려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떠올라 금방 그만두었다.

“그래서 밀고자란 사람은 누구야?”

레슬리의 물음에 마델은 환하게 웃으면 예상치 못한 답을 꺼냈다.

“르아라는 분이었어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누구? 누구라고?

“레슬리 아가씨의 유모였다는데, 목숨을 걸고 셀바토르가로 왔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아가씨가 자신을 가장 아끼셨다고 그러시던데요. 그래서 공작님이 어떤 자리를 줄지 고민하고 계세요.”

“……그 여자 지금 여기에 있어?”

“셀바토르 공작저에 계신다고 들었어요.”

돌아가면 쫓아내자. 레슬리는 이를 아득 물었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팔아 셀바토르 공작가에 빌붙을 생각을 하는 건지. 르아가 여태까지 한 짓을 떠올리면 분노로 몸이 저절로 떨릴 정도였다.

어머니께 말해서, 진실을 전부 말해서 어머니의 판단에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도중 한 가지 의문이 더 떠올랐다.

“마델, 그럼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는 어디에 있어?”

이번엔 마델도 즉시 대답해 주지 못했다. 입을 다문 채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델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레슬리는 대답을 재촉했다.

“마델, 어서. 응?”

“그…… 지하 감옥에 계신다고는 들었는데…….”

“그렇구나. 지하 감옥.”

레슬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지하 감옥.

“나 거기 가 보고 싶어, 마델.”

“아, 안 돼요! 아가씨,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완전 끔찍해요. 아가씨가 보시면 놀라서 잠도 못 자실 거예요.”

마델은 조금 횡설수설하며 열심히 레슬리를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쥐와 벌레, 그리고 습한 공기에 울부짖는 죄수들의 이야기까지. 하지만 레슬리 역시 완강했다.

“나는 더 끔찍한 일도 많이 겪었는걸. 꼭, 나는 두 사람의 끝을 보고 싶어서 그래.”

이 이상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누군가가 두 사람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슬리 양, 아쉽게도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는 지금 지하 감옥에 없습니다.”

“콘라드 경.”

복도 저편에서 콘라드가 걸어왔다. 편한 복장에 머리를 손질하지 않은 콘라드는 처음 본 것이라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지하 감옥에 엘리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와 트라 베쉬 스페라도는 황제의 앞에 있습니다.”

왜 둘이 황제 앞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레슬리는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최후의 변론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로 중죄가 확정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변론이죠.”

최후의 변론은 사이레인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가실 분이니, 헛소리 한 번쯤은 들어 드립니다, 하는 의미로 주는 변론의 시간이란다.’

최후의 변론에 관해 물어본 레슬리에게 그렇게 설명해 주고 제나에게 눈총을 받던 사이레인이었다.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최후의 변론이 주어지는 건 성을 박탈당하거나 감옥에 갇혀서 못 나오는 자들. 그리고…….’

사형수.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 레슬리 양은 들어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많은 일을 겪으셨으니까요.”

“그래도…….”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었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뺨에 난 기다란 자상. 신전은 불을 밝게 켜 두는 편이 아니라서 콘라드가 자신의 앞까지 오고 나서야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콘라드 경. 상처가 나셨어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는 제 뺨을 한 번 손으로 훑더니 씩 웃어 보였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심한 것도 아니니까요. 며칠 내로 나을 겁니다.”

“그래도 아파 보이는데…….”

잠시 레슬리는 입을 꾹 다물더니 마델에게 말해서 뭔가를 가져오게 시켰고, 이미 신전의 길을 다 익힌 것인지 빠르게 방에 다녀온 마델은 레슬리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뭐지?’

콘라드는 이젠 레슬리의 손에 들린 납작한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를 받아 든 순간부터 레슬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가 번화가에서 산 거예요. 그…… 자수가 엉성하게 놓여서 부끄럽지만…….”

레슬리가 준 상자를 받아본 콘라드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크림색 상자 안에는 푸른 손수건이 들어 있었는데, 손수건의 한쪽 면에는 아이테라 대공가의 문양과 콘라드의 이름이 자수로 놓여 있었다.

흐릿한 신전의 불빛 때문에 자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상자에서 손수건을 꺼내자, 레슬리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었다.

“아…….”

한눈에 보기에도 서툴러 보이는 솜씨였다. 그렇지만, 마음에 들었다. 푸른색의 손수건도, 제 눈을 닮은 황금색 실로 자수를 놓은 것도, 상자가 크림색인 것도, 지금 지나가는 바람도 달빛도 모든 것이 전부 다.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제, 제가!”

콘라드가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바라보고 있자, 레슬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수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해서요! 틸레이얼 자작 부인께서 수를 알려 주셨는데, 그래도 잘 놓는 거라고……. 아, 틸레이얼 자작 부인이 누구냐면 제게 예법을 알려 주시는 분인데 저는 선생님이라 부르거든요…….”

부끄러움에 아무 말이나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레슬리는 입을 멈추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흐릿한 촛불 아래에서 콘라드가 웃고 있었다.

“저는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레슬리 양.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콘라드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황제는 늘어진 채 눈을 깜빡거렸다.

“하아. 좀 업무에서 도망 나오고 싶어서 후보 시험을 들먹이고 온 건데,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후작 그리고 스페라도 영애.”

피스토레 황제의 푸른 눈이 제 앞에 밧줄로 묶여 있는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에게 닿았다.

“귀족 재판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셀바토르 공녀를 죽이려고 하다니…….”

피스토레 황제의 말에 스페라도 후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준비한 모든 변명은 이미 먹히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희망은 그분뿐이었다.

피스토레는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이네. 마지막 변론을 위한 시간을 줄 거야. 입을 놀릴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뿐. 어디 말해 보게, 두 사람 모두.”

그 말에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지막 변론이라니. 그건 곧 자신들의 고귀한 삶이 끝난다는 소리가 아닌가.

‘침묵하고 버텨야 해.’

스페라도 후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지막 변론은 넉넉하게 주어진다. 심지어 일주일까지도 시간이 주어지곤 했다.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말을 꺼내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나락이다.

후작은 바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궁지에 몰리자, 머리 한쪽에 박혀 있던 지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은 일로 한꺼번에 마지막 변론의 기회를 얻게 된다면, 서로가 침묵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다면 넉넉하게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시간을 끌면 분명 그분께서…….’

일단 엘리에게 눈치를 보내 침묵하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스페라도 후작이 생각하는 순간 날카로운 외침이 제 옆에서 터져 나왔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황제 폐하! 저는 그저 아버지에게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엘리의 외침에 스페라도 후작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억울하다?”

피스토레 황제의 말에 엘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

“레슬리, 제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했던 것처럼 저 역시 아버지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밥을 굶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늘 거친 옷을 입고 작은 다락방에서 몸을 구기며 자야 했지요.”

엘리는 자신이 레슬리라도 된 듯 스페라도 후작의 학대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감자 한 알, 멀건 수프 한 접시가 제 하루 식사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아버지, 아니 스페라도 후작은 저를 주먹으로 때렸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엘리의 증언은 생생함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가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저 먼발치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그걸 지켜보는 쪽이었다. 하지만 거짓에 진실을 섞자, 이야기가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제가 살던 다락방은 너무도 더러웠습니다. 청소는 2주에 한 번, 시트는 제대로 빨아 주지도 않았지요. 덕분에 피부병에 걸린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역시 레슬리의 이야기였다. 피부병에 걸려 붉어진 레슬리의 뺨을 부채로 치던 건 엘리였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이 그 피부병에 걸린 가련한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넘게 엘리는 레슬리가 되어 후작과 후작 부인의 모든 학대 사실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레슬리에게 했던 짓은 교묘하게 후작의 행동으로 만들었다. 엘리의 증언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후작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정말로 스페라도 후작가는 놀라운 집안이었다.

“레슬리가 귀족 재판으로 빠져나가자 모든 핍박은 저에게 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생이 행복해진 걸 진심으로 기꺼워하며 모든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페라도 후작은 반드시 레슬리를 죽여야 한다며 저를 이리로……. 흐으윽!”

더 지어낼 말이 없자 엘리는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거짓인 울음과 마지막 변론에 황제와 공작은 어이없는 눈길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

황제가 제 이름을 부르자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최후의 변론은 되돌릴 수 없네. 영애가 후작에게 학대당했다는 사실은 정말인 건가?”

“신께 맹세하겠습니다!”

엘리는 다시 눈물을 터트리며 울부짖었다.

“저는 아렌도 황자님의 약혼녀, 그리고 고귀한 푸른 피의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거짓을 말할 리가요! 부디 레슬리, 저의 사랑스러운 동생을 믿어 주셨듯 저를 믿어 주십시오, 피스토레 황제 폐하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님!”

“하!”

그 가증스러운 연기를 끝낸 것은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후작은 제 딸에게 제대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거품을 물고 엘리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꺄아악! 사, 살려 주세요!”

호위로 서 있던 기사 셋이 달려들어 후작을 뜯어말려야 할 만큼, 후작은 거칠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그게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의 최후의 변론이 되었다.

***

레슬리는 잠도 자지 않고 공작의 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마델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레슬리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도 레슬리의 행동을 이해하는지 말리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이 챙겨 왔다며 따듯한 코코아를 진하게 타 레슬리에게 가져다주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엘리는 어떻게 됐을까.’

마델도 보낸 레슬리는 창가에 앉아 따듯한 코코아 잔을 꼭 쥐었다. 최후의 변론 이야기가 나온 만큼,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는 이번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제 동생을, 그리고 자신의 딸을 학대한 벌이 제대로 내려지기도 전에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데다가 황제까지 와 있는 상황이니, 이번만큼은 즉결 처분이 내려질 가능성도 컸다.

“이제 드디어 끝일까.”

레슬리는 진득한 코코아 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일이 고귀한 푸른 피에, 제3대 후작가 그리고 르카디우스 제국이 건국될 때부터 황제를 모셔 온 스페라도 후작가의 끝이 될 수 있을까.

‘가문 자체는 없어지지 않을 거야.’

레슬리는 괜스레 티스푼으로 코코아를 저었다.

건국 이래로 황실, 셀바토르 공작가 그리고 세 후작가는 미묘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아이테라 대공 가문은 그 균형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런데 후작가가 하나 사라지면?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황실과 셀바토르 공작가가 후작가 하나 없어진 틈을 타 균형을 깨트리겠다며 앞장서 움직이진 않겠지만, 위태로워질 가능성은 컸다. 거기다 비어 있는 후작가를 노리고 다른 가문들이 어떤 짓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아마도 지금의 황제 폐하는 이 균형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 하실 거야.’

재판장에서 보고, 또 어머니에게서 들은 황제는 하나의 가문을 없애고 균형을 새로 만들 만큼 힘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후작은 이번엔 물러날 수 없는 커다란 죄를 지었다. 벌은 피할 수 없지만, 가문은 존속된다.

‘그러면 후작과 엘리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새 스페라도 후작을 뽑을 거야.’

레슬리는 코코아를 홀짝 마셨다. 마델이 가져다주었을 때는 뜨겁다고 생각될 정도였는데, 어느새 식어 있었다.

‘하지만 스페라도 후작가는 대대로 아이가 귀한 가문이지.’

둘째와 셋째의 죽음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가문이니까. 레슬리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후작의 자리에 오를 사람은 나랑…….’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테론 삼촌. 어쩌다 보니 단둘만 남았다. 제 핏줄을 죽이고 팔아넘긴 탓이었다. 레슬리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테론 삼촌도 그리고 자신도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차별받고 죽을 뻔했는데 전세가 역전되었다. 가문의 번영을 위한답시고 밀색 머리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만 우대했던 가문의 사람들은 그 손으로 가문의 목을 조르는 결과를 낳았다.

그게 뭔가 우스워 작게 웃다가 레슬리는 컵에 조금 남은 코코아를 전부 한 번에 마셨다. 진득한 달콤함이 밀려왔다.

‘테론 삼촌이 스페라도 후작이 되면 좋겠다.’

삼촌은 자상한 분이니 분명 스페라도 후작가를 바꿀지도 몰라. 하지만 하시려고 할까. 수도가 무섭다고 하셨는데.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으로 레슬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셀바토르 공작이 드디어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얼굴의 공작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는 제 딸을 보자마자 레슬리의 이름을 불렀다.

“레슬리?”

“어머니!”

레슬리는 의자에서 내려와 셀바토르 공작에게 다가갔다.

“결과가 궁금해서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네. 스페라도 후작은, 엘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소파에 앉으며 작은 한숨을 흘렸다. 덩달아 그 옆에 앉은 레슬리도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스페라도 후작은 성을 잃었단다. 평민으로 강등이지.”

“……!”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귀한 푸른 피니 사형까지는 아니었지만, 남부 라즈튼에 갇힐 거란다.”

라즈튼, 역사서에서 종종 등장하는 감옥 이름이었다. 바다보다 더 커다란 호수 한가운데에 있다고 했던가. 남부의 특성은 봄에도 동사자가 나올 정도의 엄청난 추위였는데, 그 추위에도 호수는 얼지 않는다고 했었다.

거기다 초대 르카디우스 황제가 마법사들에게 명령해, 마법사들은 죄수를 붙잡아 두는 마법을 감옥에 걸어 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죄수들은 남부의 추위에 얼어 죽으면서도 탈출을 꿈꾸지 못했고, 라즈튼은 악명 아닌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죽은 거나 다름없어.’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지금 셀바토르 공작은 오직 스페라도 후작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어머니, 엘리는요?”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찡그렸다.

“그 스페라도 영애는 수도에 남을 거란다.”

“네?”

레슬리는 놀라 아직 들고 있던 코코아 컵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엘리, 엘리가 왜?

“이미 아라벨라 후보 명단에 이름이 올랐으니까.”

어이없는 이유였다.

최초의 사제들을 뽑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 명단에 이미 엘리의 이름이 들어갔고, 그 일로 신전에서는 엘리의 처벌을 반대했다. 한 고위 사제는 황제의 앞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신께 그 이름이 모두 닿았습니다. 사고사나 병사 같은 일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후보 자격을 얻은 분의 시험을 막는 건 안 되는 일입니다. 부디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도 안 된다는 듯 레슬리가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이번 1차 후보 시험에서 붙으면 엘리의 벌은 4년 뒤로 미뤄지겠네요.”

1차 시험 뒤 마지막 2차 시험은 4년 후, 축제 전에 이뤄졌으니까.

“그렇겠지. 그래서 엘리의 벌은 일단 유예가 되었단다.”

셀바토르 공작은 미안하다는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이번엔 확실히 끝장내고 싶었는데…….”

“아니에요. 어차피 엘리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요.”

레슬리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후보 자격을 유지하지 못하면 바로 엘리에게 벌이 내려진다. 그리고 레슬리는 엘리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지가 레슬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레슬리는 웃으면서 공작의 품에 폭 안겼다. 그리고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머니, 그…… 르아랑 엠로아는 어떻게 됐나요?”

두 번째 궁금증을 풀 생각이었다. 설마 어머니가 르아를 셀바토르 공작저에 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내쫓아야 한다고 말할 참이었다.

레슬리의 말에 공작은 은발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흘렸다.

“그게 궁금했구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자신을 르아라고 말한 여자는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고서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후작이 사활을 걸어 숨긴 진실을 제나가 뒤늦게 발견하여 급하게 레슬리가 있는 신레프 신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셀바토르 기사들과 나타난 이 르아라는 여자가 스페라도 후작의 모든 계획을 털어놓았다.

후작과 엘리가 레슬리를 불에 태워 죽이려는 것,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을 막기 위해 수십이나 되는 사람들을 고용한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그 주변에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가 있을 겁니다. 반드시 불타 죽는 걸 봐야겠다고 이를 갈았거든요. 그 성격에 가장 목이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 인간들이니까요!”

그러더니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는 주인인 스페라도 후작을 배신했습니다. 이 르아는 더는 스페라도 후작가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다아 레슬리 아가씨 때문이지요.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안정된 생활과 봉급을 포기한 겁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받아 달라?”

사이레인의 말에 르아는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네! 황실보다도 아름답다고 소문난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그런 소문 따위 돌지 않는데도 르아는 입에 꿀을 바른 듯 술술 거짓된 칭찬을 늘어 두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웃음을 흘렸다.

“르아는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중간 크기의 방을 받았습니다. 웬만한 손님용 방만큼 되었죠. 거기다 늘 식사로 후작과 엘리가 먹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질이 좋은 고기가 늘 이 르아의 식탁에 올라왔어요. 봉급으로는 일주일에 동전을…….”

웬만한 가정교사보다 더 좋은 조건이었다. 너무도 속이 훤히 보이는 거짓이라 사이레인조차 헛웃음을 흘렸다.

“스페라도 후작이 인재를 못 알아보았군. 겨우 그런 대접을 그대에게 해 주다니.”

공작의 말에 르아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후작이 이상했습니다. 이래 봬도 이 르아는 아이들을 아주 잘 돌보거든요. 완벽하게 말대꾸도 안 하고 착한 아이로 레슬리 아가씨를 키워 왔으니까요.”

“그렇군. 하지만 이를 어쩐다. 얼마 전에 사용인을 새로 뽑아 자리가 없거든. 막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자 르아의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느긋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공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별장에 자리가 하나 있네. 내가 아끼는 별장인데 관리인이 그만둬서 손이 부족해. 거기는 어떤가? 내가 내려가는 때만 신경을 써 주고, 나머지 때에는 그 별장을 자유롭게 이용해도 괜찮네.”

“귀족 집안의 별장을 말입니까……?”

르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별장이라고는 하나, 셀바토르 공작가의 별장이었다. 얼마나 크고 아름다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거기다 그 별장을 마음대로 이용하라니. 자신은 방 두 개만 얻어도 성공이라 생각했는데……. 르아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그래, 어떤가? 당연히 봉급도 지금 말한 거의 2배를 지급해 주겠네. 내 딸을 살려 주었으니, 뭘 못 할까.”

공작의 말에 르아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사람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구나 신기함이 들 정도로 밝은 웃음이었다.

“네! 당연히 이 르아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도에 미련 따위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의 결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왜, 어머니는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여전히 공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지금 히텐의 별장에 있단다.”

“히텐이요?”

“몇 대 전 셀바토르 공작이 구매한 건데. 악취미적인 별장이지. 남부에 있고, 라즈튼과 가까워 죄수들의 울음소리가 늘 울려 퍼지거든. 마침 그 저택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그 여자를 보냈지. 그녀 외에는 아무도 저택에 없으니, 귀신과 같이 사는 기분일 거야. 거기다 혼자니 저택을 빠져나올 수도 없어.”

레슬리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거의 유배나 다름없었다. 특히 남부는 추위가 엄청나고 죄수들이 많아 외출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다. 르아는 추위를 많이 타고 무서운 걸 싫어했으니, 지금쯤 돌아가고 싶다고 울고 있겠지.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엠로아는 귀족 영애를 다치게 한 죄로 사형이 선고됐단다.”

사형. 그 말에 레슬리는 입을 벙긋거렸다. 사형이라니. 레슬리가 안 된다고 말하기도 전에 공작이 먼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스페라도 후작이 한 짓과 도중에라도 마음을 바꿔서 너를 지키려고 한 것을 고려해, 이 나라에서의 추방으로 바뀌었단다.”

“추방…….”

그것 역시 끔찍한 벌이었지만, 사형보다는 나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아이가 나으면 옆 나라 시히카로 갈 예정이야. 작지만 따듯하고 좋은 나라지.”

시히카는 르카디우스의 동맹국 중 하나였다. 거기에 가면 귀족을 죽이려고 했다는 눈총을 받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레슬리의 인사에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딸은 너무 착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도 이렇게 쉽게 용서를 하니, 어쩌면 좋을까.”

공작의 투덜거림에 레슬리는 작게 웃다가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저, 어머니. 구해 주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불 속에서 어머니가 나타났을 때, 정말정말 멋있었어요.”

“그랬니?”

공작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느끼며 레슬리는 방싯 웃었다. 부끄러우니, 꿈에도 나타난 건 비밀로 해야지.

“그리고 어머니,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그…… 오늘은 같이 자도 될까요? 악몽을 꿀까 무서워서…….”

레슬리의 귀여운 부탁에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되고말고.”

“그런데 아버지는 어쩌죠. 침대가 작아서 다 못 잘 것 같아요.”

레슬리의 걱정에 다시 공작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도 귀여운 부탁에 너무도 귀여운 걱정이었다.

“그건 걱정 말렴. 사이는 오늘 다른 방으로 보내 버리면 되니까.”

어쩐지 사이레인이 불쌍해지는 밤이었다.

***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후 최초의 사제를 뽑는 첫 시험이 시작되었다.

당연하지만, 엘리는 홀로 다른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그녀의 뒷모습에 비웃음이 날아와 꽂혔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분명 내 꼴을 비웃는 거야.’

관리하지 못해 푸석해진 제 밀색 머리를, 홀쭉해진 뺨을 그리고 더러운 드레스를 비웃는 거라고 엘리는 확신했다. 그리고 드높았던 자신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자, 자신의 위치를 탐내하던 다른 귀족들이 와서 헐뜯는 거라고. 엘리는 언제나 아름다웠고,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있었으니까.

엘리는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저절로 방금 전까지 갇혀 있던 지하 감옥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찾아온 두 손님도.

“추, 추워.”

지하 감옥에 갇힌 엘리는 몸을 웅크렸다. 그렇다고 해도 지하 감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전부 막지는 못했다. 거기다 하나의 촛불도 주지 않아 어둠 속에서 엘리는 떨고 있었다. 절로 이가 떨리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춥고 어두워……. 난로는 없어? 폭신한 깃털을 비단에 넣어서 만든 내 이불은? 최고급 모피로 만든 내 털 망토는 어디 있냔 말이야!”

끝은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엘리는 철창을 잡고 계속 울부짖었다.

“추워, 춥다고! 내 것들을 되돌려 줘!”

하지만 이 넓은 지하 감옥에는 그 울부짖음에 대답을 해 줄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서로의 목소리도 닿지 않게 다른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고, 경비는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되돌려 줘. 내 걸 되돌려 줘…….”

엘리는 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간신히 살아남을 기회를 얻었지만, 자신은 이 감옥에서 나서지 못했다. 거기다 자신은 1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만 믿고 신학도, 고어도 공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통과를 한단 말인가. 그리고 통과한다 해도 4년 동안 어떻게 버틸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엘리는 바닥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 약혼 파기는 당연했고, 스페라도 후작은 제 성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자신을 지켜 줄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울고 있네.”

눈물을 뚝뚝 떨구느라고 엘리는 누군가가 왔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레슬리가 홀로 등불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너, 너!”

엘리는 레슬리에게 달려들었지만, 철창에 막혀 버렸고 머리채를 잡기 위해 내민 손은 레슬리에게 닿지 않았다. 엘리는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울부짖음은 금세 뚝 멈춰 버렸다. 레슬리는 천천히 엘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더러워. 냄새도 나고,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 손톱은 다 깨져 있네.”

그 말에 엘리는 제 머리와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레슬리의 말 그대로였다. 드레스에는 갖은 오물이 묻어 확실히 더럽고 냄새가 났다. 그러다 다시 레슬리에게 시선이 닿았다.

정성을 들여 관리한 덕에 빛나는 은발, 살이 올라 보기 좋아진 뺨. 라일락색 눈에는 반짝거림이 들어 있었다. 거기다 드레스는 엘리도 가져 보지 못한 최고급품이었다. 마치 어느 날 자신이 꿨던 꿈의 모습과 똑같아서 엘리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순식간에 얼굴이 물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고작 이런 게 부끄러워? 친동생을 죽이려고 했던 것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를 학대했던 것보다, 황제에게 거짓을 고한 것보다, 그런 게 너에겐 더 부끄러워?”

“닥쳐!”

엘리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에겐 아직 기회가 있어! 나가 봐, 나가서 내가 아라벨라가 되면 모든 죄가 사라질 거야!”

“아무도 그걸 약속하지 않았는데?”

레슬리의 말에 엘리는 입을 다물었다. 아라벨라가 된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녔다. 황제도 사제도 그건 말해 주지 않았다. 레슬리는 덤덤하게 바닥에 주저앉은 엘리를 바라보았다.

“뭐, 열심히 해 봐. 네 무지로 1차 통과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나의 지식은 너의 지식이 아닌걸.”

그리고 몸을 돌려 감옥을 빠져나갔다.

‘레슬리, 레슬리, 그 짜증 나는 것!’

다 그년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내가 손가락질을 받고, 이런 시험을 치르고……!

방으로 안내되고 자리에 앉은 엘리는 분노로 덜덜 떨었다. 자신만 다른 방으로 안내받고, 마치 죄인처럼 경비들의 삼엄한 시선을 받으며 시험을 봐야 했으니까.

‘예전이었다면 이런 것 치르지 않아도 충분했을 텐데.’

막 받은 시험 종이를 내려다보며 엘리는 눈을 찡그렸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 당연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지식수준을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거기다 통과한다고 해도 어떻게 살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문은 없어졌고, 저택의 모든 물건은 빚을 진 은행과 다른 귀족들이 가지고 가 버렸다. 그 소식을 마지막 의리를 지킨 가신에게 들을 수 있었다.

‘저도 이걸로 스페라도 후작가와의 인연을 끊고자 합니다.’

그 소식을 전해 준 한 자작은 그렇게 말하더니 엘리를 향해 작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시길. 3대 후작가의 영애였던, 엘리 양.’

혹여나 그녀가 자신에게 붙을까 재빠르게 쳐 낸 자작의 등을 보며 엘리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간 너무 울었기에 눈물이 나지 않아 멍하니 돌바닥만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왜긴 왜야.’

다 그 괴물들과 레슬리 탓이지. 엘리는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피가 줄줄 흘렀지만, 더욱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두고 봐.’

절대로 잊지 않아.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너를, 어머니를 친정에 가게 만든 너를, 그리고 나를 이 꼴로 만든…… 레슬리!

그 지하 감옥에서 엘리는 이를 갈며 레슬리에 대한 증오를 키웠다.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었다.

선잠이 들 뻔하다가도 창살 밖에 레슬리가 서서 자신을 비웃는 꿈을 꾸고 비명 지르며 깨기를 반복했다.

서서히 엘리는 미쳐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가 미치며 정신을 잃어 가는 만큼 레슬리에 대한 증오는 커져 갔다.

이젠 증오만이 남아 엘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분노로 몸을 떨기만 할 뿐 시험 문제에는 손도 못 대고 있는데, 이상한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고어도 신어도 아닌 제국어라서 엘리가 읽을 수가 있는 유일한 문제였다.

‘뭐지 이거?’

마지막 종이에 작게 시험 질문이 아닌 다른 것이 쓰여 있었다.

그분께서 당신을 원하십니다. 엘리 양.

잠시 그 문장을 뚫어지라 바라보다가 엘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눈이 맞은 한 사제가 살포시 웃었는데, 그녀의 눈은 얼음과도 같은 색이었다.

아, 재판장에서 봤던 그 고위 사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엘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장 밑에 작게 답을 적어 내려갔다. 자신은 기회를 얻었다.

뭐든 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은 역시 그분의 뜻대로 돌아갈 것이다.

***

“통과했다고?”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공작은 편지를 받고 눈을 찡그렸다.

시험을 치르고 나서 일주일이 흘렀다. 편지에는 당연하게도 레슬리의 통과 사실이 적혀 있었고, 놀랍게도 엘리의 통과 사실 역시 적혀 있었다.

“그 무슨…….”

“아마도 란다의 꽃이 수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페라도 후작도 사라졌으니, 제 밑에 두고 제대로 이용할 생각이지요.”

제나의 말에 공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거지 같은 소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이 라즈튼으로 가는 길목에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제나는 이제 공작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싹거리는 감각에 몸을 작게 떨면서도 말을 이었다.

“호송 도중 일어난 지진으로 후작이 타고 있던 마차가 강에 빠졌다고 합니다. 나중에 마차를 다시 발견했는데…….”

“도망쳤군.”

하필 그때 지진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거기서 살아나다니.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다행히도 후작이 사라진 곳은 차디찬 남부의 땅이었다. 봄에도 동사자가 나온다는 그곳. 거기서 후작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후작의 행방을 추격할 추격대를 뽑지. 그리고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 두도록. 경비를 늘리고, 루엔티에게 말해서 저택 주변에 방어용 마법석을 깔아 두도록 해. 돈은 얼마가 들어도 괜찮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공작님.”

“황실보다 더 안전하게 이 공작저를 꾸며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자, 맑은 웃음소리가 집무실로 흘러들어 왔다. 레슬리가 사이레인의 목마를 타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걱정 따위는 말끔하게 날려 버리는 맑은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나와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봄이네요.”

“그래, 봄이 왔어.”

어느새 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 후 경비가 늘고 몇몇 기사들이 레슬리의 호위로 뽑혔고 다행히도 공작과 제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레슬리는 공작저에서 열여섯 살의 봄을 맞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