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늘이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아침 식사를 끝내자 마델이 ‘오늘은 대기도 날이에요, 아가씨. 잊지 않으셨죠?’라고 말하며 옷을 꺼내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콘라드와 주고받던 편지에도 쓰여 있었고 어제도 셀바토르 공작이 말해 줬었지만, 레슬리는 오늘이 대기도 날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신전에 도착한 레슬리는 장갑을 들고 있는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새벽부터 깨어 있었더니 이제야 피곤이 몰려들었다. 살짝 하품하자 다른 손을 잡고 같이 걷던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하아암.”
“이런, 졸립구나.”
“조금요. 음, 그래도 기도하면서 졸진 않을게요. 걱정 마세요.”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계단을 폴짝 뛰어오르며 대답했다. 폴짝 뛰어 계단을 오른 탓에 보닛에 달린 커다란 보랏빛 리본이 춤추듯 흔들렸다. 베스라온보다 몇 계단 위에 서니 시선이 비슷해진 착각이 들어 레슬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소풍 이야기 말이다.”
레슬리가 두어 번 뛰어서 오른 계단을 한걸음에 올라온 베스라온이 레슬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온 키 차이에 레슬리가 삐죽 입술을 내밀자, 귀엽다는 듯 베스라온이 미소를 머금었다. 레슬리가 다시 뛰어 계단을 올라갈 수 있게 손을 잡아 주면서 베스라온은 말을 이었다.
“티로스 별장은 어떻겠니.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티로스 별장이 하나 있어. 호숫가 근처라 조용하고도 지내기 좋았던 별장으로 기억하지.”
베스라온은 다시 한걸음에 레슬리가 올라간 계단을 따라잡으려다가 일부러 한 칸 밑으로 올라왔다.
“좋아요. 그곳으로 갈게요.”
이번엔 레슬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지 않았다. 베스라온은 그 모습이 귀여워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했다. 레슬리의 머리에는 커다란 보닛이 씌워져 있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그곳은 겨울에 가도 괜찮을까요?”
으음, 레슬리의 물음에 베스라온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번엔 같이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괜찮더구나.”
“그럼 봄은요?”
“봄은…… 더 아름답지. 주변이 숲인 데다가 들꽃이 군락을 이뤄서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레슬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베스라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저는 봄에 갈래요. 어머니랑 아버지께도 제가 그렇게 말씀드릴게요, 오라버니.”
폴짝. 레슬리는 다시 계단을 뛰어올랐다. 신전 계단을 많이 오른 터라 넘어지면 위험할 테지만, 든든한 손이 자신을 잡고 있어 줘서 무서움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오늘 아침에 하르트 경이 좋은 말을 해 주셨어요. 덕분에 이제 괜찮아졌어요.”
“정말로 괜찮겠어?”
“그럼요!”
어느새 계단을 전부 오른 레슬리가 베스라온을 보며 어딘가 시원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잘 정돈된 은발을 흐트러트렸다. 차디찬 겨울바람에 새하얀 은발이 나부꼈다.
“저는 오라버니의 여동생이자 셀바토르가의 막내잖아요.”
“그래.”
베스라온이 미소로 대답하며 나머지 계단을 오르려다가 살짝 휘청거렸다. 누가 흘린 것인지, 동그란 구슬 장식을 밟아 버린 탓이었다. 놀란 듯 레슬리가 베스라온의 손을 꽉 잡았다.
“오라버니! 제, 제가 잡았어요. 걱정 마세요!”
마치 베스라온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장갑도 떨어트리고는 두 손으로 베스라온의 큰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런 레슬리를 보고 베스라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구슬 장식 때문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이 정도로 꼴사납게 구를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를 필사적으로 도와주려는 여동생이 귀여워서, 너무도 귀여워서 베스라온은 그 작은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래, 고마워.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다.”
“조심히 올라오세요.”
“그래, 그래.”
베스라온은 레슬리의 손을 잡고 나머지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앞서 걷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흘린 게 베스라온의 눈에 들어왔으나, 뭐 어떤가. 자신의 여동생이 이렇게도 귀여운데.
“오라버니, 혹시 오늘 콘라드 경도 만날 수 있을까요?”
“만날 수 있을 거야. 아이테라 공자는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소속이니까. 성기사단은 대기도 때 경비를 서곤 하지.”
신전에 들어온 레슬리는 소곤거리며 베스라온에게 물었다.
이제 아까처럼 폴짝폴짝 뛸 수는 없었다. 계단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신전에 들어오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스페라도 후작가에 있을 때, 후작은 마음이 내키면 대기도에도 참여하곤 하였다. 그때도 사람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기도실까지 갈 수 있을까?’
저절로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레슬리는 그 걱정은 쓸모없다는 걸 깨달았다. 앞서 있는 셀바토르 공작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인파가 반으로 나뉘었으니까. 다들 그녀에게 인사를 나누고 싶어 은근한 시선을 보냈지만, 공작의 기세에 눌린 듯 쉽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공작님!”
저 멀리서 사제 몇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웃으며 셀바토르 공작을 반겼다. 맨 앞에 서 있는 사제는 방문록을 공작에게 내밀면서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대기도 때가 아니라 평소 기도 날에도 나와 주시면 좋을 텐데요.”
“영 귀찮아서. 그리고 기도라는 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깃펜으로 제 이름을 적어 내며 셀바토르 공작은 말을 이었다. 기도가 귀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이 이젠 조금은 지겹고도 귀찮았다.
“그래도 신전에서 기도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 겨울 대기도는 이걸로 끝인걸요. 봄의 중순이나 되어야 대기도가 열릴 겁니다.”
“근래에 들은 말 중 가장 즐거운 소식이야.”
서명을 마친 공작이 뒤를 돌아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
잠시 베스라온과 손장난을 치던 레슬리가 공작의 말을 듣자마자 쪼르르 움직여 공작의 옆에 섰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 딸, 레슬리네.”
공작이 다정하게 레슬리의 어깨를 다독이며 사제에게 레슬리를 소개했다. 왜 자신을 사제에게 소개하는 걸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레슬리는 틸레리얼 자작 부인에게 배운 대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방금 소개받은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신의 길을 가는 분을 뵙습니다.”
“충실한 신의 종이,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공녀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끝내자 여기저기에서 작은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곤거림과 함께 레슬리는 왜 셀바토르 공작이 자신에게 인사를 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공작은 자신을 이 모든 사람에게 소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저 사람들 머릿속에는 재판장에서 떨며 울던 레슬리 스페라도가 아니라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가 자리 잡을 것이 분명했다.
“자, 인사도 마쳤겠다. 들어갈까.”
이번엔 셀바토르 공작의 손을 잡은 채 레슬리는 긴 기도실로 들어갔다. 기도실 가운데에 있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아름다운 색을 입은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귀족들은 기도실 정중앙 붉은 카펫이 깔린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들을 따라온 하녀, 하인 그리고 마부들은 벽 쪽에 자리 잡았다.
레슬리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저기에 섞여 있었다. 졸지도 않았는데, 졸지 말라며 허벅지를 꼬집는 르아와 저를 무시하는 하녀들 사이에서 레슬리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제발, 제가 실수하지 않게 해 주세요.’
가정교사의 물음에도 척척 대답하고, 가족들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세요. 특히, 아버지에게 밉보이지 않게 해 주세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에게 감자와 수프 말고도 고기를 좀 주기를, 그리고 아버지가 아니, 가족 모두가 자신을 더는 때리지 말고 사랑해 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정말 온 힘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기도가 끝나 모두가 자리를 뜰 때까지 레슬리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을 향해 빌었다. 신께서 도와주신다면 자신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제발, 나를 사랑해 주세요.’
참다못한 르아가 레슬리를 잡아당길 때까지 레슬리의 기도는 이어졌다.
잠시 벽 쪽 자리를 바라보다가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스테인드글라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 그녀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앞쪽에 있었기에 그 누구도 레슬리의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앞에는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 단둘뿐이었고 베스라온과 루엔티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가 이렇게 예뻤구나.’
스페라도 후작은 대기도에 참여하게 되면 혹여나 레슬리가 눈에 띌까 봐 하녀들로 주변을 채운 데다가 가장 뒤편에서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간은 사람들에게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기도가 끝났을 때는 빛이 이렇게 화사하게 들어오지 않아 이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잠시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던 레슬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제가 말한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 주셔서요. 감사합니다. 새 가족을 만나 사랑받게 해 주셔서요.
‘이제 저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난생처음으로 올리는, 따스한 기도였다.
***
기도가 끝나고 칼같이 돌아가려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을 신전을 가득 메운 귀족들과 사제들이 막았다. 다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셀바토르 공작과의 만남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특히 다들 레슬리를 보며 눈을 번뜩였는데, 드물게도 빠르게 눈치를 챈 사이레인이 레슬리의 등을 살짝 떠밀어 준 덕분에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레슬리는 홀로 신전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벌써 눈을 다 치웠네.’
신전에 올 때까지만 해도 몸을 감싸는 바람이 너무도 추웠는데, 기도를 끝내고 나니 제법 햇볕이 따스했다.
‘콘라드 경은 어디 있지?’
레슬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베스라온에게 듣기로 분명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은 대기도 때 경비를 선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진실이라는 걸 보여 주듯 정원 중간마다 낯익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경비를 서듯 걸어 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 주변에 콘라드가 있지 않을까, 레슬리는 기대에 젖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쯤에 있을 것 같은데…….
만나면 무슨 이야길 먼저 할까. 레슬리는 기대감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먼저 편지로 이미 수도 없이 말했지만, 재판을 도와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자신의 풀 네임을 말해 줘야지.
“셀바토르 공녀님?”
잠시 즐거운 기분에 젖어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소녀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신처럼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고 싶지 않아 정원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보였다.
그 무리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를 불렀다. 그녀의 푸른 눈은 레슬리를 보고 반짝이고 있었지만,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정말 셀바토르 공녀님이 맞네요. 공녀님, 저를 기억 못 하시나요?”
모를 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레아 케본 파텔로트, 엘리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기억을 못 할 리가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서 있는 세레아를 바라보았다. 엘리의 친한 친구이자, 유일하게 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 한 번이지만, 시선이 마주친 적이 있었으니까.
엘리의 생일 파티는 언제나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넓은 정원을 전부 개방함과 동시에 유명한 극단과 악사들을 저택으로 초대했고, 성대하게 마법석으로 불을 밝히며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했다.
하녀 중 한 명이 엘리의 생일 파티는 마치 작은 축제 같다고 말했던 것을 레슬리는 떠올렸다. 그만큼 화려했고, 내로라하는 모든 귀족이 참여했으며, 모두가 즐겁던 하루였으니까.
주인공인 엘리는 물론이고, 모든 귀족 앞에서 제 부를 과시하는 스페라도 후작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후작 부인까지. 심지어 르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금일봉을 받을 수 있다며 엘리의 생일을 좋아했다. 당연하게도 그 무리에서 레슬리는 제외되었다.
모든 정원을 개방하는 날이라, 다락방의 유일한 창이 있던 정원 뒤편까지 손님이 드나들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혹시라도 누군가가 레슬리를 볼까 봐 레슬리에게 절대로 창문을 열지 말라고 말했었다. 레슬리는 착실하게 그걸 지켰다. 하지만 단 한 번, 후작의 말을 어긴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레슬리는 심하게 굶주렸었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며칠 전부터 제대로 음식을 주지 않았던 탓이었다. 왜 그랬더라.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나 작은 이유로 자신을 굶겼던 후작 부인이라 그때도 작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나마 물만은 자유롭게 마실 수 있었기에, 레슬리는 긴 고민 끝에 창문을 열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물을 들이켤 생각이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래, 거기까지는.
하지만 창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맛있는 냄새에 레슬리의 작은 몸이 앞으로 저절로 기울었다. 정원에서 고기를 굽는지 맛있는 냄새가 코에 닿았기 때문이다.
침을 삼키며 그 냄새를 정신없이 맡고 있는데, 갑자기 시선이 밑에 닿았다. 누군가가 경악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는 섬뜩할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급하게 창문을 닫고 방으로 숨었지만, 그 여자의 얼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마지막에 자신에게 보여 줬던 그 미소는 주로 자신을 때리기 전 사람들이 주로 보여 주던 표정이었으니까.
그리고 파티가 끝나자마자 엘리는 레슬리를 불렀다. 엘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레슬리는 한 하녀에게 발길질을 당했다. 한참을 그렇게 하녀들에게 발길질을 당한 후 쓰러져 있는 레슬리를 향해 엘리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지금 네가 제정신이야? 네 더러운 꼴을 누구에게 보인 거야! 그나마 세레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소문이 퍼졌을 거라고!’
한참을 그렇게 소리 지르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엘리는 부채를 레슬리에게 내던졌다.
‘짜증 나. 너 때문에 새 아르롱의 드레스를 세레아에게 넘기게 되었잖아! 들어가, 네 방에서 나오지 마!’
그게 그날 들었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대로 레슬리는 기절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도 엘리는 번번이 하녀들을 데려와 레슬리를 매질했다. 세레아가 계속해서 엘리의 보석과 드레스들을 노린 탓이었다.
그래서 우습게도 레슬리는 세레아가 가져간 장신구와 드레스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하녀들이 매질하면서 엘리는 제가 빼앗겨 버린 것들을 소리쳤고, 맞으면서 들었던 것은 생각보다 잘 잊히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왜, 지금 여기에.
레슬리는 웃으며 다가오는 세레아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이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공녀님.”
세레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레슬리의 팔짱을 꼈다. 레슬리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몸을 빙글 돌려 자신이 이끌고 온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뽐내듯 목에 힘을 주고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사실은 저를 기억해 주실 줄 알았어요. 우리가 보통 인연이던가요?”
무슨 인연이냐고 대꾸하려는데 세레아는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가 레슬리는 작게 눈을 찡그렸다. 그런 모습이 친해 보였던지, 세레아를 따라온 몇몇 사람들이 부럽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요즈음 가장 화제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는 늘 숨어 있었고, 셀바토르 공작가는 아예 손님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소문만 무성하다가 재판 때 모습을 한 번 보였고, 그 이후로 레슬리에 대한 궁금증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 레슬리를 안다고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모두의 궁금증은 부러움으로 변질하여 그 한 사람에게 쏟아졌다. 레슬리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세레아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 짙게 깔렸다.
“두 분은 어떻게 아시는 사인가요?”
한 푸른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부럽다는 듯 묻자, 세레아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제가 셀바토르 공녀님을 도와 드린 적이 있거든요. 그렇죠, 공녀님?”
그 말에 레슬리의 라일락빛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자신을 도왔다니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파텔로트 영애께서 셀바토르 공녀님을요?”
“네에, 어쩌다 그리된 거지만요. 부끄럽네요. 하지만 이렇게 인연이 닿게 되어 너무 좋아요.”
순진한 소녀들은 세레아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한껏 그 눈빛을 즐기다 세레아는 고개를 휙 돌려 다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의 그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저곳에서 쉴 예정인데, 셀바토르 공녀님도 같이 쉬어요. 아버님과 어머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저희와 어울려 주세요. 당연히 그래 주실 거죠, 공녀님?”
그리고 레슬리의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레슬리의 손목을 꽉 잡더니 막무가내로 끌어당기며 벤치를 향해 걸었다. 생각보다 무지막지한 힘에 레슬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공녀님, 제가 공녀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세요? 저는 공녀님의 유일한 친구잖아요.”
친구? 레슬리는 그 말에 입술을 잘근 물었다. 스페라도 후작가 다락방 속에서만 지내던 자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친구라는 게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이런 사람이 친구라면, 자신은 친구 따위 필요 없었다.
“가서 이야기를 해 봐요. 셀바토르 공작님은 어떤 분이세요? 베스라온 님과 루엔티 님의 이야기도요. 야얏!”
레슬리는 손톱을 세워 세레아의 팔목을 잡았다. 작은 고통을 느낀 세레아가 걸음을 멈추고 팔을 조금 느슨하게 한 순간, 레슬리는 팔을 뒤틀어 빼냈다.
“나는 안 가요.”
간신히 손을 빼내고 나니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안 가신다고요? 왜 그러세요, 공녀님.”
가야죠. 세레아는 이상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마치 지금 네가 감히 내 말을 거부하냐는 듯한 말투에 레슬리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세레아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후작 부부와 엘리 그리고 르아에게 단련된 탓일까, 세레아 정도는 너무도 가볍게 보였다.
“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저는 당신과 친구도 아니고요.”
“……제가 공녀님을 도와 드린 걸 잊어버리셨나 봐요.”
마치 자신이 아직도 레슬리의 우위에 있다는 듯한 말투와 행동에 레슬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학대를 방관해 주고, 황자에게 비밀로 해 준 것으로 드레스와 보석을 그렇게 뜯어 가 놓고선, 이젠 가짜 친구 노릇을 하면서 레슬리를 손에 넣고 휘두르려고 하고 있었다. 후작가에서 학대당했다는 비밀 아닌 비밀 하나를 손에 쥐고서.
엘리가 하던 행동과 똑같았다. 여태 엘리에게 휘둘리는 레슬리를 봤으니, 자신의 손에도 레슬리가 쉽게 휘둘려 줄 거라 단단히 착각한 듯 보였다. 레슬리는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 손을 탁탁 털며 대꾸했다.
“보통은 제 이야기를 퍼트리지 않았다는 걸 두고 도와줬다고 하지 않죠.”
레슬리의 덤덤한 눈동자가 세레아의 얼굴에 닿았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엘리와 성질이 비슷해 보였다. 하긴 그러니까 그런 착각을 하는 거겠지.
세레아는 그 말에 작게 하, 한숨을 픽 내쉬더니 곧 고개를 치켜들었다. 세레아의 푸른 눈이 자신들을 뒤따라오는 몇몇 레이디들에게 닿았다.
“그걸 지금 말해도 되는 건가요, 셀바토르 공녀님?”
거기까지 말한 세레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레슬리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제가 공녀님의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게 저를 도와주세요, 공녀님.”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자아, 어서 약속해 주세요. 뒤에 듣는 귀가 많답니다?”
세레아가 억지로 레슬리를 끌고 와서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소녀들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조금 뒤에 멈춰 있었다.
하. 레슬리는 짧게 숨을 내뱉고선 세레아를 바라보았다. 당연 자신의 제안에 따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세레아의 얼굴에는 승리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걸로 나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할까.’
레슬리는 차가운 눈으로 세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뭐 어때서요. 이미 재판에서 제 이야기는 다 밝혀졌는데. 오히려 영애가 날 팔아넘겼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 나지 않을까요?”
“……팔아넘겼다니요. 말이 너무 지나치세요, 공녀님.”
“그게 팔아넘긴 거죠, 파텔로트 영애.”
레슬리가 한 발 가까이 세레아에게 다가가자, 세레아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 자신이 물러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두 발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아르롱의 드레스 몇 벌과 보석을 받고 내 일에 대해 침묵했잖아요. 안 그런가요, 파텔로트 영애?”
“스페라도 후작님의 명예를 떨어트리지 않으려는 조치였을 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공녀님께서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세레아는 뭔가를 중얼중얼 늘어 두려다가 입을 닫았다. 싸늘한 시선에, 그리고 냉랭한 말투에 저절로 입이 닫혔다. 세레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정말로 제가 학대당하는 걸 몰랐다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때 자신의 꼴이 어땠는데, 얼마나 처참한 짓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도 자신이 스페라도 후작에게 학대당하는 걸 알지 못했다고?
레슬리는 그런 세레아를 보며 입꼬리를 뒤틀어 웃음을 머금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그리했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했다. 그리고 공작처럼 몸을 바르게 하고 상대방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도도 없었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세레아가 레슬리의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저보다 세 살이나 어리고, 몸짓도 또래보다 훨씬 작은데 이상하게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세레아는 저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 두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은 스페라도 후작가보다 세력이 약한……걸요. 그렇다고 제가 스페라도 후작가로 들어가 공녀님을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받을 수 있는걸 받아 두자 싶어서…….”
“그래서 도와주지는 못하니, 드레스와 각종 보석을 받고 제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무셨군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 그러니까.”
짜증이 일어 세레아는 제 손등을 박박 긁었다. 왜 내가 이러고 있지? 그런 생각이 들어 고개를 번쩍 드니, 냉랭한 시선과 마주쳤다. 왜인지 자연스럽게 다시 고개가 숙여졌다.
“목걸이 예쁘네요.”
“네?”
그런데 갑자기 레슬리가 세레아의 목걸이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세레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자신의 목걸이를 칭찬하는 걸까.
“백금에 루비를 박아 넣은 게 정말 예뻐요. 어디서 구하셨나요, 영애?”
“아, 이 목걸이는…….”
세레아는 바로 대답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세레아의 표정을 보고 레슬리가 다시 웃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를 팔아넘겨서 받은 거라고 답하지는 않으시군요.”
엘리에게 레슬리의 일을 비밀로 해 주는 대신 받은 물건 중 하나였다. 레슬리는 손을 뻗어 목걸이를 움켜잡았다. 순식간에 세레아의 몸이 레슬리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걸 차고 저를 만나러 왔다는 뜻은 내가, 그리고 우리 셀바토르 공작가가 만만치 않게 우스워 보인다는 뜻인가요, 영애?”
“아, 아니, 아니에요!”
세레아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돼 버린 걸까.
세레아는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레슬리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침만 꼴깍 삼키며 냄새만 맡는 아이는 온몸으로 자신이 최하층이라는 걸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아이는 가문에서 숨기고 싶어 하는 수치였다.
그 점을 빠르게 떠올린 세레아는 파티를 즐기고 있는 엘리에게 다가가 레슬리의 이야기를 흘렸다. 불쌍해 보이고 가련해 보이는 아이를 봤다고 말이다. 그리고 단 한마디를 더 흘렸다.
‘이걸 황자님도 아실지 몰라아……?’
약혼자의 이름이 들먹여지자, 그제야 엘리의 얼굴에 있던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엘리는 눈물을 머금으며 황자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하더니 세레아가 원하던 아르롱의 드레스와 보석들을 쥐여 주었다.
그런 드레스와 보석들을 받고 나니, 마음이 풍족해져서 세레아는 레슬리에 대해 말을 아주 잘해 줬다. 밥을 내리 굶은 듯 연약해 보이고, 그 머리카락은 마치 노인처럼 보이는 불쌍한 아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레슬리는 좀 덜 맞았을 수도 있고, 안 맞았을 수도 있다. 자신은 드레스를 받고, 저 아이는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덜 맞고, 엘리는 비밀이 지켜져서 좋고. 세레아가 생각하기로는 모두가 만족하는 좋은 거래였다.
그 뒤로 자신은 만져 보지 못할 드레스 몇 벌과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더 받아 낼 수 있었고, 드레스와 보석의 값으로 자신은 충실히 그 약속을 지켰다.
그 후로 엘리는 세레아에게 레슬리의 험담을 마음 놓고 했는데, 대부분이 느리고 아둔하며 쓸모없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는 뭔가 중요한 걸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세레아는 거기까지 파헤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레슬리의 첫인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에 기뻐하며 엘리의 험담에 즐겁게 어울려 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가 셀바토르 공작가에 입양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믿기지 않는 소문은 귀족 재판으로 진실이라는 걸 보여 줬고, 재판의 결과를 듣자마자 세레아는 몰락해 가는 엘리와 거리를 뒀다.
그러던 중 신전 정원에서 혼자 거니는 레슬리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세레아는 웃으며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일부러 자신이 레슬리를 안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 다른 영애들까지 끌고 레슬리의 뒤를 쫓았다.
자신은 과거에 레슬리를 도와줬으니, 유일한 공녀의 첫 번째 친구 자리는 제가 가져도 될 것이다. 황제조차 초대받기 힘들다는 셀바토르 공작저에 매일같이 초대받고, 유명한 셀바토르 경과 천재라는 루엔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레슬리에게 다가갔건만……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셀바토르 공작가를 우습게 여기는 것도 아니면서,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가요?”
매일 울고 쓸모가 없어서 매일 맞는다던 아이는 차갑고도 시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랑하려고 데려온 소녀들은 이제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더 비참한 것은 저 라일락색 시선에 자신이 자꾸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영애께서는 제 학대에 침묵으로 가담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세레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스페라도 후작과 공범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스페라도 후작가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그런 스페라도 후작과 공범이 되면 분명 같은 벌을 받아 같은 금액의 배상금을 물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가문은 그 배상금의 일부도 갚지 못하고 파산을 해야 할 게 뻔했다.
거기다 공녀의 학대를 침묵한 죄로 추후 또 어떤 벌이 떨어질지 몰랐다. 그건 분명 끔찍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레아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공녀님!”
결국 세레아는 레슬리를 보며 빌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던 눈은 눈물로 가득 차 버렸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망언했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세레아는 그런 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허둥지둥 제 목걸이를 움켜잡았다.
“이, 이것도 돌려 드릴 테니까, 저택에 돌아가면 드레스와 보석 장신구를 전부 돌려 드릴게요. 그러니까…….”
“나는 그런 더러운 물건은 필요 없어요.”
레슬리는 날카롭게 세레아의 말을 끊어 냈다. 자신의 학대를 방관하고 그걸 빌미로 드레스와 보석을 뜯어냈으며, 지금 레슬리의 상황이 좋아지자 엘리 대신 자신을 휘두르려고 다가온 세레아였다. 레슬리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파텔로트 영애.”
레슬리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쓰러울 정도로 세레아가 몸을 떨었으나 동정심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부디 앞으로는 상대를 가늠하세요, 파텔로트 영애.”
레슬리의 몸이 조금씩 세레아 쪽으로 다가갔다.
“과연 이 상대가 자신의 발밑에 들어올 상대인가, 아닌가. 그렇게 고민해 보고 삼킬 생각을 하세요. 아니면 지금처럼 제가 파텔로트 영애를 먹어 치울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흐트러진 제 은발을 정리해 귀 뒤로 넘기며 다시 세레아를 바라보았다. 세레아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해졌다.
레슬리의 입가가 움직여 아주 작은 미소를 그려 냈다. 그 미소에 세레아는 완벽하게 겁에 질린 듯 얕은 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신전으로 돌아가자마자 어머니께 말씀을 드릴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휙 몸을 돌려, 왔던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그 울음소리는 레슬리의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와서야 레슬리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콩닥거리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레아를 뿌리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으나, 엘리와 만난 이후 셀바토르의 이름을 올린 건 처음이라 두근거렸다.
만약 아침에 하르트에게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무언가를 하나 더 떨쳐 낸 느낌이라 괜스레 입술을 매만지며 웃었다. 지금 자신이 달려가서 이 일을 이야기하면 다들 어떻게 반응해 줄까.
‘화내 주겠지?’
어머니도,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화를 내는 광경이 눈에 선해 레슬리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화내 주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는 몰랐다.
“레슬리 양.”
즐거운 기분에 젖어 아무 곳으로나 발걸음을 옮기는데,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콘라드가 웃으면서 레슬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레슬리를 바라보는 콘라드의 황금빛 눈이 살포시 휘었다.
“그 안쪽은 사제님들만을 위한 공간입니다.”
레슬리가 서 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작은 울타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경계로 두 곳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그러고 보니 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신전 안쪽에 있다고 했었지. 레슬리는 슬그머니 발을 돌려 콘라드 쪽으로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콘라드 경.”
“그저 알려 드린 것뿐인걸요.”
웃으면서 콘라드는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이렇게 안쪽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경을 만나러 왔어요.”
레슬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콘라드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저를요?”
“네에, 오랫동안 못 만났잖아요.”
그 말에 날짜를 가늠해 보려는 듯 콘라드의 눈이 잠시 가늘게 변했다.
“그렇지요. 벌써 2주 넘게 못 만났었군요. 죄송합니다, 레슬리 양. 선생의 입장으로 부족한 면을 보이게 돼서요.”
“아니에요. 동생분께서 아프다고 하셨으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그 말을 끝으로 레슬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제 이름을 말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갑자기 제 이름을 외칠 수도 없고, 어떻게 운을 떼야 좋을까.
작은 머리로 끙끙거리며 고민하는데 콘라드가 신전 쪽을 바라보며 먼저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레슬리 양. 슬슬 신전으로 돌아가셔야 할 겁니다. 마차들이 하나둘씩 출발하기 시작했거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분명 자신의 등을 밀어 주며 사이레인은 오래 걸릴 테니 느긋하게 구경하다 오라고 말해 줬다. 그래서 시간이 넉넉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까 그 쓸데없는 사건 때문에 시간을 다 버린 것 같아.’
비록 남는 시간이긴 했지만, 그 시간도 세레아에게 쏟았던 게 아까워 레슬리는 작게 투덜거렸다. 거기다 콘라드를 만나고 나니, 경에게 자신의 이름을 자랑할 시간까지 빼앗긴 것 같았다. 레슬리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가실까요? 제가 신전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슬리 양.”
콘라드가 안내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레슬리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두 사람은 천천히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동생분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네, 레슬리 양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이제 건강해졌습니다. 가벼운 감기였거든요.”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콘라드의 말을 듣던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콘라드는 신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자신의 동생을 치료해 주지 않은 걸까?
“자연 치유로 나을 수 있는 수준이라면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신력에 너무 의지하면 좋지 않으니까요.”
콘라드는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흘렸다. 콘라드를 바라보는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떻게…….”
“너무 궁금해하시는 얼굴이기에.”
아. 레슬리는 괜스레 제 뺨을 쓸어 보았다. 그 모습을 보는 콘라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프리트는 좀 앓아도 괜찮았습니다. 유모 몰래 셔벗을 몇 번이나 가져다 먹은 모양이더군요.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도 말이죠.”
“셔벗을 몇 번이나요?”
레슬리는 공작저에서 단 한 번 먹었던 레몬 셔벗을 떠올렸다. 여러 과일이 들어가 새콤달콤하고 맛있긴 했지만, 먹고 나니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이 날씨에 몇 번이나 먹었다니.
“예, 워낙 차가운 걸 좋아해서요. 덕분에 겨울에는 몇 번씩 앓아눕고는 합니다. 말리면 주방에 숨어들어 가 먹더군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레슬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레슬리를 바라보던 콘라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셔벗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예전에 루엔티 님도 셔벗을 너무 드셔서 배탈이 심하게 난 적이 있었지요. 제가 치료해 드린 적이 있어서 기억이 납니다.”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렸다. 루엔티 오라버니가 그런 적이 있단 말이야? 자신은 모르는 가족의 이야기라 저도 모르게 몸이 콘라드 쪽으로 기울었다.
“몇 년 전이었을 겁니다. 그때 루엔티 님이 다른 마법사님과 신전에 들리신 적이 있습니다.”
레슬리는 이어지는 콘라드의 말을 경청하며 눈을 깜빡였다. 루엔티가 앓은 적이 있다니. 분명 사람이니 아픈 적이 있겠지만,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아 레슬리는 점점 콘라드의 말에 빠져들었다.
“셔벗을 손님용으로 잔뜩 만들어 두었거든요. 그런데…….”
말을 이어 가던 콘라드가 갑자기 입을 멈추었다. 왜 그런 걸까.
그런데 그제야 붉어진 콘라드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도. 시선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 레슬리 양, 너무 가까워서…….”
콘라드가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정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레슬리는 재빠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덩달아 레슬리의 얼굴도 붉어졌다. 바람은 차가운데, 바람이 닿는 뺨은 점점 달아올랐다.
“그…… 갈까요.”
“네, 네에.”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레슬리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앞으로 천천히 걸었고, 콘라드는 부끄러운지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신전 정원 입구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이만.”
콘라드가 먼저 허리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레슬리 역시 잠시 불안한 듯 시선을 돌리더니 무릎을 살짝 굽혔다. 하지만 입가는 바싹바싹 마르고 있었다.
결국, 레슬리는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돌아가는 콘라드를 크게 불렀다.
“콘라드 경!”
콘라드가 걸음을 멈추었고, 그 앞으로 뛰어간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슈야예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그게 제 이름이에요!”
어쩐지 많이 늦어 버린 레슬리의 소개에 콘라드의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동그래졌다가 이내 맑은 웃음을 머금고 휘었다.
“드디어 말해 주시는군요. 사실 말해 주시지 않는 건가 해서 조금 슬펐습니다.”
“말을 안 할 리가요. 콘라드 경은 재판에서 절 도와주시기도 하셨고, 제 친구잖아요!”
그래, 콘라드와 자신은 친구가 아니던가. 레슬리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도와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며 친근한 존재. 그게 레슬리가 생각하던 친구였다.
레슬리는 저 혼자 콘라드가 친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죠. 친구.”
아까의 맑은 미소와는 다른 어색한 미소와 함께 콘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
대기도를 다녀온 이후로는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레슬리는 공작저에서 틸레리얼 부인에게서 귀족적인 예절을 배웠고, 루엔티는 레슬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들을 알려 줌과 동시에 지식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하르트는 레슬리의 부족한 체력을 채워 주었고, 요리사인 바타는 반드시 레슬리를 살찌우겠다는 일념하에 매일 새롭고 입이 즐거운 음식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래서 공작저에서 레슬리는 아라벨라가 되는 일과 잘 먹고 잘 자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요즘은.
‘공부하는 게 즐거워.’
레슬리는 막 해독한 고어를 다시 읽으며 웃었다. 후작가에서는 몇 시간을 붙잡고 있어도 어려웠던 것이 요즘은 가뿐히 해석되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는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었다. 그때는 즐거운 것도, 이걸 자신이 왜 배워야 하는 것도 모른 채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간혹 나히로키아의 책같이 재밌는 책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일부였다. 나머지 지식들은 밤새 울면서 외우고 또 외워야 했다. 그럼에도 칭찬은커녕, 부족하다는 말만 들었으니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울면서 했던 공부도, 이젠 여유를 가지고 보니 꽤 즐거운 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고어를 해석하는 것도, 신어를 읽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직 역사서를 달달 외우는 건 싫지만.’
그래도 콘라드가 수업 중간중간에 들려주는 야사들 덕분에 조금씩 외우기가 편해졌다. 완벽한 줄만 알았던 황제들의 작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절로 외워진 것이다. 거기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신학의 구절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잠시 웃다가 레슬리는 책을 덮었다.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중에 선생님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스페라도 후작가의 가정교사들처럼 매질하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루엔티 오라버니처럼, 그리고 콘라드 경처럼 하나하나 차근히 알려 주는 선생님.
‘괜찮을 것 같아.’
레슬리는 괜스레 읽고 있던 신학서의 표지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이 공작저를 나가면 자신도 먹고살 방도가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가장 되고 싶은 건 ‘진짜’였다.
“아가씨,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어요.”
마델의 목소리에 레슬리는 손에 쥐고 있던 신학서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몸을 빙글 돌렸다.
“응, 지금 갈게.”
“오늘은 바타 요리사님이 아가씨를 위해서 특제 요리를 준비했대요.”
마델이 서재 문을 닫으며 레슬리를 보고 방긋 웃었다.
“정말?”
“네, 아가씨 저번에 잘 드시던 새고기 요리 기억나시죠? 그걸 무슨 나라의 특별한 요리법으로 구웠다던데, 냄새가 정말 좋더라고요.”
바타의 특별 요리라는 말을 듣고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렸다. 이제 굶지도 않는데도 먹을 것만 보면 저절로 배가 꼬륵거렸다. 거기다 그 바타의 특별 요리라니, 분명 맛있겠지.
저번에 먹었던 새고기를 떠올리며 레슬리는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레슬리가 귀여운지, 마델 역시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디저트도 준비해 두었어요. 이번엔 수플레 팬케이크랑 아가씨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잔뜩 넣은 머핀이랑…….”
디저트만으로도 배가 차는 게 아닐까, 레슬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마델이 레슬리를 위해 문을 열어 주었고, 레슬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춰 섰다.
‘뭐지?’
어쩐지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했다. 레슬리는 식탁에 앉은 공작가의 사람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사이레인은 보이지 않았고, 베스라온과 루엔티는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사를 도와주러 온 다른 하녀들 역시 무언가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평소라면 그런 행동을 나무랄 제나 역시 뭔가 석연치 않아 보이는 얼굴로 공작에게 물을 따라 주고 있었다.
오직 그 속에서 셀바토르 공작만이 도도하게 제 손에 들린 편지 한 통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편지 한 통은 공작의 앞에 놓여 있었다.
웬 편지일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바쁜 공작이라지만, 식당까지 일거리를 가지고 들어온 적은 없었다.
“왔니, 레슬리?”
가장 먼저 레슬리를 발견한 셀바토르 공작이 웃자, 레슬리는 슬그머니 안쪽으로 들어가며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네에…….”
사이레인은 어디 간 걸까. 라일락색 눈동자가 커다란 식당 여기저기를 훑었지만, 사이레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 때도 같이 식사를 했는데.
‘낮에 외출을 하셨나?’
그럴 리가. 사이레인은 단 몇 시간만이라도 공작저를 떠나게 되면 레슬리를 찾아와 인사를 하고 외출을 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산더미 같은 선물을 가져왔었다.
조심스레 베스라온과 루엔티의 맞은편에 레슬리가 앉자, 셀바토르 공작은 제 손에 들려 있던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받으렴. 너에게 온 거란다.”
편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줄 사람은 몇 없는데. 레슬리는 손을 뻗어 꽃향기가 나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고급 편지와 봉투를 쓴 건지, 촛불을 반사하는 편지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편지 봉투에는 유려한 글씨체로 ‘로데론’이라고 적혀 있었다.
‘로데론이면…… 찻잎 무역으로 유명한 로데론 백작가 아니야?’
가문의 이름을 알고는 있으나, 실제로 만난 적은 없는 가문이었다. 그런 백작가에서 자신에게 왜 편지를 보낸 걸까. 뜯어도 되는 거겠지.
레슬리가 조심스레 겉봉을 찢는데 제나가 따라 준 물을 마시며 셀바토르 공작이 말을 이었다.
“너에게 온 청혼서란다.”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청혼서? 청혼서라니. 너무 충격이라 제 손에서 편지가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저, 저에게요?”
레슬리가 묻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어 갔다.
“로데론가의 장남이 너에게 보내온 청혼서란다. 아직 네가 어리니 약혼을 해 두고 데뷔탕트를 치르면 결혼을 하자더구나.”
“그런…….”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동그랗게 변한 눈동자는 좀처럼 원래 크기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양옆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는 반대예요!”
결국 루엔티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키며 식탁을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펴져 레슬리가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아직 레슬리는 열두 살밖에 안 됐다구요! 거기다 그놈, 올해 스물다섯 살인 놈이잖아! 레슬리가 데뷔탕트를 치르는 열여덟 살이 되면 그놈은 서른한 살이라고요. 미친놈 아니야? 모가지를 분질러 버려야 해!”
루엔티의 과격한 발언에 뒤에서 하녀들이 ‘맞아요, 맞아! 조져 버려요!’ 하고 작게 응원하는 말이 들렸다. 어느새 다들 사이레인의 말투에 물든 것 같았다.
“분명 그 새끼, 우리 공작가가 가지고 있는 항구를 저렴하게 이용하려고 우리 막내에게 수작부리는 거예요, 어머니!”
우드득. 갑자기 기괴한 소리가 나서 레슬리가 고개를 돌리자, 베스라온의 손에 쥐어진 금속 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들고 있었다. 저게 저렇게 우그러들 수 있는 잔이던가,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다가 톡톡 건드려 보았다.
“……로데론.”
베스라온이 나지막하게 부르자 어딘가 뒷목이 오싹해져 레슬리는 몸을 작게 떨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
어디선가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곰이 뛰어오는 듯 바닥이 흔들거려, 레슬리는 놀라서 재빠르게 셀바토르 공작에게 달려가 안겼다.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가 가장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공작은 웃으며 레슬리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런, 자물쇠로는 안 되나.”
자물쇠? 레슬리가 놀라 셀바토르 공작을 올려다보는데 굉음과 함께 식당 문이 열렸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련한 식당 문은 사이레인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어딘가 부러진 듯 크게 덜컹거렸다.
“힉!”
하지만 레슬리가 제대로 겁을 먹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이레인의 손에는 도끼가 한 자루 들려 있었는데, 흉흉할 정도로 크고 날카로워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나무를 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이는 도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라고? 그 로레인인지 로데론인지 거시기인지가 어디서 산다고?”
청록색 눈을 번뜩이며 도끼 자루를 쥔 사이레인이 웃었다. 아니, 저게 웃는 건가? 레슬리는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공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가 알아요! 같이 갑시다!”
루엔티가 손을 들며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지금 당장이라도 로데론으로 쳐들어가겠다는 듯 흉흉한 기세였다.
“일단 내가 가서 정문을 박살내마. 루엔티, 너는 그놈 얼굴을 알고 있으니 들어가 그놈을 끌고 나오너라. 그리고 베스라온, 너는 다른 기사들을 막도록 하고. 모가지는 내가 치마.”
사이레인이 나름 침착하게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들어 보면 작전이랄 것도 없이 그냥 쳐들어가서 장남을 끌고 나오는 것이었다.
열두 살짜리에게 청혼을 하는 양심을 팔아먹은 놈을 반드시 봐야겠다며, 마델과 다른 하녀들까지 따라갈 기세였다. 마델은 어느새 가져온 것인지 빨래를 할 때 쓰는 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그만.”
그 사태를 느긋이 보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이 나지막이 모두를 말렸다.
“여보!”
“어머니…….”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이 바로 공작을 바라보았고, 루엔티는 그냥 가겠다는 듯 식당 문을 나서려다가 제나에게 붙잡혔다.
“레슬리가 겁을 먹었잖니.”
그러면서 공작은 제 품에 안긴 레슬리를 보여 주었다.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는 레슬리를 보자마자 사이레인은 도끼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고, 베스라온 역시 어느새 꺼내 든 검을 밑으로 떨어트림과 동시에 발로 차서 복도로 내보냈으며, 루엔티는 홀로 뚱한 얼굴로 로데론 백작저가 있을 만한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결혼은 진행시키지 않을 거란다.”
그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는 듯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불만이 남은 루엔티만이 입술을 빼죽 내밀고 있었다.
“이걸 레슬리에게 보여 준 이유는, 앞으로 레슬리는 계속해서 청혼을 받을 테니까. 그래서 보여 준 거란다.”
“저……에게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은 고작 열두 살이고, 아직 사교계는커녕 작은 티 파티에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알고 있는 귀족이라고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과 틸레이얼 자작부인, 그리고 콘라드가 유일했다.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어 보겠다는 얄팍한 수작들이지.”
사이레인이 팔짱을 끼고 짜증 난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러는 사이 음식이 하나둘씩 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은 레슬리를 내려 주지 않았고, 레슬리 역시 그게 좋아 계속 무릎에 앉아 있었다.
“너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테고, 청혼도 많이 받겠지.”
셀바토르 공작은 덤덤하게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레슬리의 입에 넣어 주었다. 레슬리는 아기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듯 그 스테이크를 오물거렸다.
“그때마다 이런 귀여운 반응을 보이면 안 되니까.”
공작은 웃으며 이제는 완전히 살이 오른 레슬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귀엽다니. 레슬리는 갑자기 뺨이 붉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부채로 팔랑팔랑 달궈진 뺨을 식히는데, 셀바토르 공작은 스테이크를 한 입 더 먹여 주며 말을 이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걸 승낙으로 아는 멍청한 놈들도 많으니까 말이야.”
“그렇단다, 레슬리. 거기다 착한 척, 자기는 상냥한 척 너를 꼬시는 인간도 나올 게 분명해!”
사이레인이 소리치자, 베스라온도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사이레인의 말에 동의했다.
“이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지만, 미친놈도 많단다.”
“그래, 이상한 별별 놈들이 너무 많지. 예를 들면 스물다섯 살이면서 열두 살인 아이에게 청혼하는 놈 같은 것들.”
루엔티가 제 앞에 놓인 작은 새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잘 모를 테니, 이상한 놈들이 있으면 발길질을 해 버려.”
베스라온이 진지하게 말하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에게 청혼하는 놈이 있다면 우리에게 말해 주렴, 레슬리. 이 아버지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주마.”
사이레인은 새고기를 통째로 뜯어먹으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왜일까. 청혼한 사람을 찾아가겠다는 말로 들려 레슬리는 이번엔 좀처럼 고개를 쉽게 끄덕일 수 없었다.
그사이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가 좋아하는 새고기를 먹여 주었다. 무슨 소스를 뿌린 것인지, 저번에 먹었던 것보다 레슬리의 입맛에 더 맞았다.
“음, 그러면요…….”
잠시 새고기를 오물오물하다가 꿀꺽 삼킨 레슬리가 세 남자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가 좋은 사람인 거예요?”
그 물음에 베스라온과 루엔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사이레인은 고민 없이 당당하게 외쳤다.
“이 아버지보다 힘이 세야지!”
그 말에 힌트를 얻었는지, 베스라온과 루엔티 역시 연달아 말을 이었다.
“나보다 키는 커야지.”
“그리고 나보단 똑똑해야지. 그래야 너랑 이야기가 통할 테니까.”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괜찮은 남자’란 사이레인보다 힘이 세고, 베스라온보다 키가 크고, 루엔티보다 똑똑한 남자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아무리 이성에 대해 무지한 레슬리라도 저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았다.
‘나 결혼할 수 있을까.’
다들 결혼해야 행복해진다던데…….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직 공작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레슬리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 셀바토르 공작은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의 은발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말이다, 레슬리.”
자신보다 강한 사람? 힘이 센 사람? 아니면 권력을 가진 남자를 말할까? 식당에 있는 모두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고, 곧 공작은 웃음을 머금으며 답을 해 주었다.
“귀여우면 끝이란다.”
***
“여보…….”
사이레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제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하지만 공작의 시선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홍수 피해 복구 사업이 늦어져 일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레슬리를 자신이 가르친다고 큰소리를 쳐 놓고는 제대로 가르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른 처리하고 레슬리랑 놀아 줘야겠다는 일념으로 서류를 보는데, 저녁 식사 이후로 사이레인은 공작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나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여보야…….”
공작이 시선조차 주지 않자 사이레인의 간절한 목소리가 짙어졌다. 그제야 공작의 시선이 긴 소파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있는 사이레인에게 닿았다.
“여보는 내가 귀여워서 나랑 결혼한 거야?”
사이레인의 물음에 잠시 셀바토르 공작은 침묵했다. 거의 2미터에 가까운 키에, 남들의 두 배는 되는 덩치를 가진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눈물을 글썽인 채 자신을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침묵은 찰나였고,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남편은 멋져서 데리고 살지.”
“정말?”
“그럼. 혼란의 시대 때 여보가 얼마나 멋있고 강했는데.”
강했지. 자신과 검을 몇 번이나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남자였으니까.
“그렇지. 내가 좀 세긴 하지. 여보야랑 검을 맞대고도 상처 하나 남은 사람은 드물잖아?”
사이레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턱에서 뺨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상흔을 남긴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는 만족스러웠다. 제 아내가 남겨 준 상처라니! 그리고 그 아내님은 얼마나 강한지!
마치 제 털을 자랑하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치켜세우는 남자를 보고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사이레인은 제 일을 하러 집무실을 발랄한 발걸음으로 나갔고, 공작은 계속 서류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제나를 불러 진하게 차를 타 오라고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설렁줄을 잡아당기려는데 문이 열리며 누군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두 번째 손님은 레슬리였다. 크림색 잠옷에 양 갈래 머리를 한 레슬리가 작게 하품하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공작은 바로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왔니?”
“네에…….”
꽤 졸린지 작은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저렇게 잠이 많으면서 여태 샛별이 떴을 때까지 공부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공작은 잠시 제 딸을 귀엽게 바라보다가 아까 식당에서 잊혔던 편지를 내밀었다. 레슬리는 감긴 눈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신전에서 온 거란다. 아라벨라 후보 시험을 치는 날짜가 정해졌어.”
그 말에 눈이 번뜩 떠졌다. 이미 공작이 먼저 읽었는지 편지는 개봉되어 있었다.
‘최초의 사제들’의 후보를 뽑는 시험이 겨울 마지막 날에 치러집니다. 장소는 ‘신레프 신전’에서 치러지니…….
“신레프 신전이요?”
시험이 겨울 마지막 날에 치러지는 건 알고 있었는데, 신레프 신전에서 치러지는지는 몰랐다. 수도 신전에서 할 줄 알았는데.
“신레프 신전은 마차를 타고 하루는 가야 하지 않나요?”
“그래. 맞아.”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타고 반나절, 마차를 타고는 하루가 걸리는 거리지. 거기서 시험이 치러질 거야. 과목은…… 간단한 수학과 신학 그리고 신어와 상식이란다.”
신어와 신학, 수학 그리고 상식. 레슬리는 그걸 중점적으로 훑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단다, 레슬리. 너라면 가뿐히 통과할 테니까.”
레슬리는 다른 사람도 아니라 공작이 그렇게 말해 준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자존감마저 보충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머니,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말에 공작은 시선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처음에는 최초의 사제를 뽑을 때, 평민과 귀족들을 섞어서 뽑다가 점점 고귀한 피 위주로 뽑게 되었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그냥 고귀한 피로 뽑으면 되는 건데 왜 시험을 보는 건가요……?”
그 말대로라면 시험 없이 그냥 줄을 세워서 자르는 게 편할 텐데. 레슬리의 물음에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옛날에는 그렇게 최초의 사제를 선발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주 멍청한 애가 하나 섞여 들어갔지. 로텐 황제 때였나, 축성을 읊던 아이가 로텐 황제를 보고 ‘암그렘펠 황제 폐하! 부디 이 제국을 번영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외쳤거든.”
히끅!
레슬리는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황제의 이름을 틀린 것도 놀라운데, 하필 그 대상이 로텐 황제라 더욱 그러했다.
자신의 친동생인 암그렘펠이 형인 로텐을 제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로텐은 암그렘펠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다른 친척들과 형제들마저 다 죽이고 나서 황좌에 올랐다.
그런데 그런 황제에게 암그렘펠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아니 그 전에 현 황제였잖아? 그런데 그걸 몰랐다고?’
“사람들은 때로 정말 멍청한 짓을 잘 벌이곤 한단다.”
이번에도 공작이 제 머릿속을 읽었는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간단한 수준의 시험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과열이 돼서 지금 이 지경이 된 거지.”
그제야 레슬리는 왜 고귀한 피를 뽑는다면서도 시험을 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다시 피어났다. 엘리는 어떻게 시험을 통과한 걸까.
엘리의 무지에 대해선 레슬리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엘리는 두 줄이 넘어가는 신어는 해석하지 못했고, 초대 황제와 현 황제 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엄청난 기부금을 내고 황실의 추천을 받으면 1차 시험을 통과시켜 주곤 했었지.”
레슬리는 들려오는 공작의 대답에 놀라 제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제 얼굴 어딘가에 질문이 쓰여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스페라도 영애는 이번엔 그렇게 통과하기가 힘들 거야. 황실의 추천은 물론이고 기부금을 낼 상황이 아니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아직도 제 얼굴을 더듬고 있는 레슬리를 보며 옅게 웃었다.
“이제 궁금한 건 다 풀렸니? 레슬리.”
그 말에 레슬리는 쭈뼛거리며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물어볼 게 남은 모양이었다. 잠시 그렇게 손을 꼬물거리다 레슬리는 슬그머니 제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저, 어머니. 어머니는 정말 아버지가 귀여워서 결혼하신 거예요?”
“그렇단다.”
사이레인이 물어봤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즉답이 돌아왔고, 웃으면서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에 고민에 빠진 듯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렇지만 곧 사이레인을 떠올리고 이해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공작이 이번엔 레슬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나에게 결혼을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었지.”
‘저는 그저 성인이 돼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어봐도 되니? 레슬리.”
갑자기 궁금해졌다. 여태 레슬리의 행동으로 봐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에 목숨을 거는 것 같진 않았다. 아예 결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왜 그 이야기를 꺼냈던 걸까.
“그게……. 다들 해야 한다고 해서요.”
레슬리는 작게 대답했다. 엘리도, 르아도 그리고 다른 하인들과 하녀들마저도 일정 나이가 되면 전부 결혼 이야기를 했었다. 마치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조건처럼 결혼을 이야기했고, 그래서 레슬리 역시 자연스레 반드시 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의 답을 듣더니 웃음을 흘렸다.
“굳이 할 필요는 없단다.”
“네?”
처음 들어 보는 의견에 레슬리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럴 사람이 없는데도 주변 이야기에 휩쓸려 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결혼할 필요가 없다니?
“어머님은 그럼 아버지를 못 만났다면 결혼을 하지 않으셨을 건가요?”
“그래.”
이번에도 바로 답이 돌아왔다. 셀바토르 공작은 생긋 미소 지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거든.”
그녀는 외동이었다. 그래서 굳이 경쟁할 상대도 없었고, 이미 셀바토르 공작가는 권력 유지를 위해 결혼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으니 아셀라에게 있어서 결혼은 필수가 아니었다. 저보다 약한 남자들은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멍청한 남자들은 아예 보기조차 싫었다.
부모님이 결혼하라고 성화를 냈으면 한 번쯤 고려를 해 볼 만도 했건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딸의 결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고 싶으면 하렴.’
그게 유일하게 들었던, 결혼에 관한 말이었다. 그러다 결국 혼란의 시대 때 사이레인을 만나 결혼하긴 했지만, 만약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아직도 미혼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레슬리에게 반드시 결혼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한 사람들 중 결혼한 사람이 모두 행복해 보였니?”
공작의 물음에 레슬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다.
반드시 예쁜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외치고, 결국 그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했던 스페라도 후작가의 한 하인은 오히려 결혼 후 안색이 더욱 나빠지기 시작했다. 서로 성격이 상극이라고 했던가. 르아가 레슬리의 다락방에서 뒷담을 하던 게 떠올라 레슬리는 공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공작이 낮게 웃었다. 그러고는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레슬리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예쁜 라일락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그러니 그런 자잘한 일은 잊어버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살렴, 내 딸아.”
***
요즈음 르아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너무 바뀌어 버린 스페라도 후작가의 분위기와 자신에게 쏟아진 과도한 일감 탓이었다.
레슬리 고년이 낳아 주고 키워 준 은혜를 홀라당 잊어버리고 셀바토르 공작에게 달려가 거짓말을 해 버린 탓에 이런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 거기에 셀바토르 공작인지 뭔지 조신하지 못한 여자는 레슬리의 거짓말에 넘어가 일을 더 부추겼다.
그 결과, 스페라도 후작은 술과 약에 찌들었고, 후작 부인은 친정으로 가 버렸으며, 엘리는 이제 제 성격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마구잡이로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거기다 밀려들어 오는 빚 독촉은 덤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가 스페라도 후작가로 들어왔는데, 그 편지는 전부 빚 독촉을 할 때 주로 쓰이는 붉은색 봉투에 담겨져 왔다. 은 쟁반 위에 가득 쌓이는 편지를 보며 노 집사는 한숨을 흘렸다.
그렇게 스페라도 후작가의 재정이 흔들흔들하고, 주인마저 제정신이 아니게 되자, 후작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휴우…….”
르아는 아침부터 계속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허리를 펴자마자, 짜르르한 감각이 몰려왔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두드리며 르아는 아직도 한참 남은 빨래 더미를 바라보았다.
대다수가 엘리의 값비싼 드레스라 막 빨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혼자 저걸 다 세탁하려면 해가 저물 때까지 손을 쉬지 말아야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엘리와 레슬리의 유모가 되고 나서는 르아는 늦게까지 잘 수 있었고, 이런 중노동은 제외되었다. 그런데 이 사달이 나 손이 줄어 버리자, 르아까지 잡일을 맡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전부 뒤엎고 뛰쳐나가 방에서 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흐윽.”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고, 르아는 신경질적으로 제 손에 들려 있던 푸른 드레스를 내팽개쳤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해!”
자신은 유모인데. 아이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되는 위치인데. 왜 자신이 말단 하녀나 할 법한 걸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르아는 세탁실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몸을 두들겨 패도 이런 일은 더 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휴식이 간절했다.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치는데, 몇 명의 하녀와 하인들이 세탁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한 앳돼 보이는 하녀의 손에는 세탁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르아의 얼굴을 보고 잠시 우물쭈물하던 하녀는 슬그머니 제 손에 들린 세탁 바구니를 내밀었다.
“저…… 유모님. 이거 엘리 아가씨가 오전에 입은 거라고 당장 세탁하시래요.”
세탁 바구니에는 한 벌의 연둣빛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그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르아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오후에도 두 번 더 갈아입으신다고…….”
“미쳤어!”
르아는 버럭 소리 질렀다. 엘리 그것은 아직도 제가 대단한 후작가의 영애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르아마저 일하게 된 이 판국에 아직도 옷을 하루에 대여섯 번을 갈아입지.
르아가 꽥하고 소리 지르자, 아직 어린 하녀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워, 워. 유모님. 그러지 마세요.”
보다 못한 한 하인이 르아를 말렸지만 르아는 거칠게 하인의 팔을 쳐 냈다.
“워, 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진짜 나를 위한다면 이 빨래나 도우라고!”
“그건 안 돼요, 유모님. 우리도 할 일이 잔뜩인걸요. 도대체 후작님이나 아가씨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한 걸 정원에 짓고 계시잖아요. 다 거기 가 봐야 해요.”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는 뭐에 미쳤는지 안 그래도 부족한 손을 자꾸만 이상한 정자를 세우는 데 쓰고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정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자는 뭔가를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유리창이 끼워져 있는 형태였다. 텅 빈 안쪽을 보며 저기에 짐승을 집어넣는 게 아니냐고 모두 수군거렸다.
“적어도 유모님은 나가서 정원의 돌을 나르지는 않잖아요.”
하인이 르아를 진정시키는 동안 바구니를 건네준 하녀는 재빠르게 사람들 사이에 숨었다.
“맞아요, 전 유모님이 부러워요.”
한 하녀가 주의를 돌리려는 듯 르아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부럽다고? 지금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요. 레슬리 아가씨 말이에요.”
르아가 다시 거칠어질까, 하녀는 두 손을 내저으며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유모님은 레슬리 아가씨랑 이 저택에서 가장 친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여길 벗어나 셀바토르 공작가로 갈 수 있으실 거 아니에요?”
아. 그 말에 르아는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다른 하인이 하녀의 말을 이어받았다.
“제가 거기서 일하는 애 한 명을 건너 건너 아는데, 거기 정말 최고래요. 월급도 여기에 3배고 가족까지 챙겨 준대요. 거기다 늘 좋은 음식을 주고 아프면 주치의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요.”
그 말에 르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 하인을 바라보았다.
“진짜야? 진짜 그렇게 해 주는 가문이 있다고?”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있나.”
하녀의 물음에 하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굳이 내가 여기에 머무를 이유가 없잖아?’
그 뒤로 하인들과 하녀들이 더 뭔가를 떠들었지만, 르아는 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예전처럼 스페라도 후작가에 충성을 할 생각이 없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미쳐서 르아에게 윽박지르고 물건을 던지기까지 했고, 그나마 자신과 가장 마음이 맞던 부인은 나가 버렸으니까.
‘그리고 이제 엘리, 고년 싹퉁머리를 못 버티겠어.’
르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런 판국에도 계속해서 드레스를 갈아입다니. 그게 제정신으로 할 일인가. 거기다 레슬리는 자신을 이 저택에서 가장 좋아했다. 그러니 가면 자신을 받아 주는 게 당연했다.
‘그래, 내가 여태까지 저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비록 레슬리가 이 저택을 나서기 직전에 조금 자신과 티격태격했지만, 그 정도는 가벼운 일이 아니던가.
‘그럼 당연하고말고.’
레슬리의 유모가 르아였다. 당연히 레슬리는 그걸 기억하고 자신을 잘 대접해 줄 게 뻔했다. 분명 스페라도 후작가 못지않은 대우를 해 주겠지.
‘볕이 잘 드는 커다란 개인용 방을 줄지도 몰라.’
지금도 개인용 방을 사용하고 있지만, 작아서 불편했다. 더 큰 가구에, 더 큰 침대를 두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셀바토르 공작가는 코딱지만 한 스페라도 후작가보다 훨씬 큰 모양이었다. 그리고 분명 레슬리 정도 되는 성격이라면 자신에게 하녀를 붙여 줄지도 몰랐다.
그 상상에 르아는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 우리 레슬리 아가씨야. 스페라도 후작가에 계실 때 좀 더 잘해 줄걸.’
먹을 것도 마님 몰래 좀 가져다주고 그럴 걸 그랬다. 자기 간식도 좀 주고.
단 걸 좋아했는데,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했던 레슬리가 생각나 르아는 눈을 찌푸렸다.
잠시 르아가 자신의 옛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데, 다른 하인 한 명이 세탁실로 들어왔다.
“도대체 여기서 다들 뭐 하는 거야! 지금 위에선 손이 부족해서 난린데, 여기서 다들 농땡이를 피우고 있어!”
고참인 하인이 빽 하고 소리 지르자 아직도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던 다른 하녀와 하인들이 제 일을 찾아 우르르 세탁실을 벗어났다.
잠시 도망치듯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 하인은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는 르아를 불렀다.
“유모님.”
“왜.”
제 상상을 방해받은 르아가 인상을 쓰며 하인을 째려보자 멋쩍은 듯 웃으며 하인은 위를 가리켰다.
“스페라도 후작님께서 유모님을 부르십니다.”
“왜, 왜?”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용건을 마친 하인은 르아를 내버려 두고 위로 올라갔다. 혼자 남은 르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물었다. 왜 부르는 걸까. 방금까지 스페라도 후작가를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불안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올라가면 또 술병이 날아올게 분명해 르아는 바로 후작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왔어?”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 옆에 앉아 자신을 맞이하는 엘리를 보고 눈을 찡그렸다. 그새 새 드레스를 꺼내 입은 모양이었다. 해가 지고 나면 저 드레스는 분명 세탁실로 직행하겠지.
“앉지. 할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약과 술에 절어 있던 스페라도 후작은 어느새 나름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 남은 약 기운에 안색은 파리했지만, 적어도 술 냄새는 나지 않았고,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의자를 권하는 스페라도 후작을 보다가 르아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스페라도 후작이 자신에게 앉으라고 권해 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꿍꿍이인 걸까.’
르아가 눈을 흘기며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르아를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 르아. 네가 우리 후작가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거기가 갑자기 저에 관해 물어보기에 르아는 눈가를 움찔거렸다. 분명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의 말에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어 르아는 자신이 이 후작가에서 일한 날짜를 대강 추려 보았다.
‘그러니까 남편이랑 이혼하고…… 레슬리가 세 살일 때쯤에 들어왔으니까…….’
“9년 정도 되었지요.”
르아의 대답에 이번엔 엘리가 르아에게 물었다.
“그럼 레슬리 그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맡아서 키웠어?”
레슬리 그것이라니. 르아는 대놓고 입을 삐쭉거렸다. 그러고는 픽 토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9년이에요. 저는 레슬리 아가씨가 세 살, 그리고 엘리 아가씨가 여섯 살일 때부터 봐 왔으니까요.”
“9년이라.”
르아의 대답에 엘리와 스페라도 후작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르아, 너 말고도 레슬리와 친했던 사람이 있어? 한 명이라도 더 있을 거 아니야. 그년이 정을 줬던 사람.”
엘리의 물음에 르아는 속으로 삐죽댔다. 레슬리를 조금이라도 동정하는 티를 보이면 별의별 트집을 잡아 괴롭히던 게 엘리였다. 그런데 레슬리와 친했던 사람을 찾는다니. 너무도 웃긴 일이었다.
“없지요. 제가 가장 레슬리 아가씨와 가까웠어요.”
“한 명쯤은 더 있을 거 아냐. 잘 생각해 보라고! 여태까지 우리 저택을 나갔다 들어온 사람이 몇인데 왜 그런 것도 기억을 못 해?”
엘리는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하자 눈을 찡그리며 소리 질렀다. 그 목소리에 귀가 따가워 틀어막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앞에 앉아 있는 스페라도 후작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자, 잠시만요.”
르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레슬리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누가 있더라.
“아!”
르아는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레슬리가 정을 줬을 법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이름이 엠레였던가? 하여튼 엠으로 시작하는 하녀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저택에 들어오고 얼마 안 돼 레슬리에게 빵과 버터 그리고 잼을 준 거로 쫓겨났어요.”
르아는 그 하녀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녀가 나가고 난 후에 레슬리가 두어 번 그녀의 행방을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물어보니 짜증이 나서 너 때문에 쫓겨났다고 콕 찍어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레슬리는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그래?”
르아의 대답에 스페라도 후작과 엘리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턱을 긁으면서 말꼬리를 흐리던 스페라도 후작은 르아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가 봐도 좋아.”
엘리마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에 르아는 슬그머니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갑자기 레슬리와 친한 사람은 왜 찾는 걸까. 고민에 빠져 걷는데, 창밖 너머로 몇 남지 않은 하인들과 기사들이 정자를 설치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스페라도 후작의 자랑이던 정원은 흙과 모래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왜 정원을 다 파헤치며 정자는 왜 옮기려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르아는 이건 자신에게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안 그래도 마지막에 헤어질 때 안 좋게 헤어져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르아는 신나 콧노래를 부르며 세탁실로 걸음을 옮겼다.
***
‘아.’
레슬리는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거렸다. 잠에서 깨 버렸다.
어제 일찍 잔 데다가 오늘은 오랜만에 콘라드와 신학 수업을 하는 날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콘라드의 동생이 아파 잠시 쉰 이후로 꾸준히 이어져 오던 신학 수업은 다시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최초의 사제들, 그러니까 아라벨라의 후보를 뽑는 1차 시험이 가까워짐에 따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마저 분주해진 탓이었다.
‘분명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에서 후보들을 보호해 준다고 했었어.’
그러면 신레프 신전에 가면 콘라드가 자신을 경호해 주는 걸까. 잠시 레슬리는 콘라드가 셀바토르 공작처럼 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로 신학 선생으로 만나서 그런지, 콘라드가 검을 쓰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거기다 콘라드의 선한 인상은 더욱 그 상상을 방해했다.
‘아니,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창 쪽으로 걸어간 레슬리는 창문을 열고 번화가 쪽을 바라보았다. 오늘 수업 장소는 공작저가 아니라 번화가였다.
번화가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저번에 베스라온과 마델, 셋이서 나간 이후로 한 번 더 번화가를 방문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오늘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지.’
바타는 뭐든 다 잘 만들었지만, 슬프게도 디저트에는 약한 편이었다.
‘여태 나왔던 디저트도 맛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것도 먹어 보고 싶어.’
레슬리는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바타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레슬리는 누워서 오늘 먹을 디저트에 대해 상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왕 일찍 눈이 떠진 김에 연무장에 갈 생각이었다. 강제 휴식령은 얼마 전에 풀렸고 그 뒤로부터 레슬리는 종종 연무장에 들렀다.
레슬리는 재빨리 옷 방으로 넘어가 검은 바지와 하얀 셔츠 그리고 그 위에 입을 만한 조끼를 꺼내 들었다. 양 갈래로 땋아 놨던 머리를 풀자 동그랗게 잘 말린 은발이 쏟아졌다. 그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후에 옷을 갈아입고는 그대로 연무장으로 달렸다.
종아리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어서 그런가, 대리석으로 이뤄진 복도에 울려 퍼지는 제 발걸음 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크하하하!”
그렇게 연무장을 향해 뛰는데 엄청난 웃음소리가 저택을 가득 메웠다.
‘아버지도 와 계신가 보다.’
레슬리는 작게 웃으며 더 빨리 발을 놀렸다.
사이레인이나 베스라온이 아침 훈련에 참여하는 건 드물었다. 사이레인은 셀바토르 공작의 보좌로 바빴고, 베스라온은 황실 기사단인 린체 기사단 소속이었으니까. 혹여나 사이레인이 가 버릴까, 레슬리는 연무장으로 속도를 높였다.
“안녕하세요!”
“레슬리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레슬리가 들어오자마자 몸을 풀던 기사들은 전부 멈추고 레슬리에게 인사를 보냈다.
“레슬리! 우리 예쁜 딸!”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곰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던 사이레인이 자신의 딸을 반겼다. 이미 훈련용 봉을 들고 있는 사이레인의 근처에는 기사 몇이 쓰러져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베스라온이 레슬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레슬리, 잘 잤니?”
“그런데 왜 벌써 일어난 거니. 혹시 악몽이라도 꾼 거야?”
사이레인이 훈련용 봉을 들고 걱정스럽게 묻자 레슬리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악몽도 사이레인이 저 봉으로 퇴치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악몽으로 깬 것은 아니었기에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면서 사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번화가에 가는 날이라서요.”
“그게 오늘이었나?”
레슬리는 신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레슬리의 옆에 서 있던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 이제 살도 좀 붙고 키도 조금 큰 것 같구나.”
“정말요?”
레슬리는 눈을 반짝였다. 키가 컸다니. 그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아직도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만큼 크고 싶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키가 클 기색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투덜거렸었는데.
레슬리는 기뻐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는 앞으로 더 클걸요. 얼른 더 커서 베스라온 오라버니도 내려다볼 거예요!”
신나서 레슬리는 손을 동동 휘둘렀다. 베스라온과 다른 기사들은 그 모습이 귀여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 언제쯤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하고 있으마.”
베스라온이 즐거운 목소리로 레슬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금방 클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오라버니.”
“그럼 그동안 나는 더 클 텐데?”
레슬리의 뾰로통한 목소리에 베스라온의 즐거움이 더 짙어졌다.
“네가 크는 동안 나도 크지 않을까? 레슬리.”
그 말에 레슬리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베스라온은 20대라 더 키가 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으레 그쯤 되면 성장이 멈추고는 하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베스라온은 셀바토르가의 피를 이은 사람이었다.
레슬리는 슬그머니 머릿속으로 공작을 한 번 떠올렸다가, 사이레인을 한 번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하르트와 이야기를 끝마치고 온 사이레인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레슬리는 사이레인의 앞에 서서 팔을 벌렸고, 사이레인은 자연스럽게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그런데도 눈높이는 비슷해지지 않았고 베스라온의 입술 끝에 걸려 있는 미소만 짙어졌다.
입술을 삐죽 내민 레슬리와 제 첫째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사이레인이 눈치를 채고 환하게 웃었다.
“으챠!”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나무도, 사람도 심지어 베스라온조차 레슬리의 시야를 방해하지 못했다. 과장을 좀 더 보탠다면 공작저 너머 큰 길까지 보일 정도였다.
레슬리는 지금 목마를 타고 있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위에 올라간 거라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사이레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떨, 떨어지면 어쩌지? 쉽게 떨어질 것 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위험합니다!”
몇몇 기사들이 놀라 사이레인을 말렸지만 사이레인은 오히려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떠니, 레슬리! 뭐 거치적거리는 것도 없이 시원하지?”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야가 바뀜으로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특히 레슬리의 마음에 든 것은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베스라온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레슬리는 뭔가 우쭐해져 미소를 흘렸다.
레슬리가 좋아한다는 걸 알았는지 사이레인은 갑자기 연무장을 돌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리 돌던지 레슬리는 잠시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뺨에 닿는 겨울바람이 너무도 시원했고, 다들 놀라는 표정이 재밌었다. 거기에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라 저절로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맑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셀바토르 공작저를 가득 메웠다.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서재에서 밤을 새우던 루엔티가 놀라 뛰쳐나올 정도였다.
“뭐가 이렇게 시끄…….”
안경을 쓴 채 숄을 대충 두르고 뛰쳐나온 루엔티가 레슬리를 보면서 눈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큰 사이레인 위에 레슬리가 올라가 있자 정말로 거대해 보였다.
“루엔티 오라버니!”
레슬리는 환하게 루엔티를 보며 웃었다. 뭐가 저리 즐거울까.
“이거 보세요. 베스라온 오라버니도 제가 내려다볼 수 있어요!”
그 뒤로는 베스라온이 목말을 태워 주겠다고 손을 내밀었고, 루엔티 역시 레슬리를 태워 줄 수 있다며 다가왔다. 그러다가 어영부영 훈련 시간이 지나 버렸고, 번화가에 갈 시간이 되었다.
두 명의 셀바토르 기사가 레슬리의 호위로 따라왔는데, 그중 한 명은 자신이 원하던 레소 경이였고, 다른 한 명은 옅은 갈색 머리의 반트 경이였다. 오랜만의 번화가 외출에, 아침부터 즐거운 기분에, 맛있는 아침.
거기다 아침부터 아버지와 오라버니들과 즐겁게 놀아 레슬리는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래,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다.
“아, 아가씨.”
그러니까, 끔찍했던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줬던 사람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것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
“마델, 이것 봐!”
레슬리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있을 콘라드와의 수업을 위해 번화가로 나온 건 좋은데, 마음이 들뜨는 바람에 조금 일찍 나왔다.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낼까 고민하다가 레슬리는 산책하기로 했다. 저번에 베스라온, 마델과 왔을 때 번화가를 많이 둘러보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다.
오늘은 그 아쉬움을 채울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 레슬리는 번화가를 뛰듯 산책하고 있었다. 한 가게 유리창 앞에 붙다시피 가까이 간 레슬리가 뭔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르골이네요.”
레슬리의 옆에 자리한 마델이 레슬리의 시선이 닿아 있는 오르골을 바라보았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상자에 춤추는 작은 인형이 올라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오르골은 레슬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르골.”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레슬리의 눈이 홀린 듯 오르골에 고정되었다. 좋은 원목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오르골 안에는 춤추는 무희의 조각이 있었다.
“그럼 저기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야?”
“네! 분명 이렇게 춤추면서 음악이 흘러나올 거예요. 따라란-”
그 물음에 마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아한 자세로 빙글빙글 돌았다. 마델의 그 모습에 레슬리도, 호위로 따라 나온 레소와 반트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 사 갈까요?”
충분히 돌았다고 생각한 마델이 빙글 도는 걸 멈추었다. 그게 조금 아쉬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나중에. 일주일 정도 자고 일어나도 가지고 싶으면 그때 살래.”
바로 고개를 끄덕일 거란 마델의 예상과는 다르게 단호히 결정을 내린 레슬리가 몸을 돌려 다른 가게로 향했다.
두 번째로 레슬리 시선이 닿은 곳은 작은 가게였다. 그 작은 가게는 특이하게 손수건과 작은 장신구들만 파는 가게였다. 레슬리는 잠시 창을 통해 가게 안을 들여다보다가 냉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마델의 또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레슬리를 맞이했다. 가볍게 주인에게 인사한 레슬리는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레슬리가 살면서 봤던 손수건보다 더 많은 손수건이 가게에 진열되어 있었다.
“이 상품은 어떠신가요? 이번에 서방의 나라에서 들여온 제품인데, 마담과 레이디들 사이에서 인기랍니다.”
레슬리가 자신이 쓸 손수건을 찾고 있다고 착각한 남자는 웃으면서 이국적인 그림이 수놓여 있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마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수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말고, 남자분이 쓸 걸 추천받고 싶어요.”
레슬리의 말에 마델과 두 기사가 서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레슬리가 손수건을 선물할 남자라니.
“사이레인 님과 큰 도련님, 그리고 작은 도련님이 아닐까요?”
반트가 작게 속닥이자, 그제야 두 사람은 이해가 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용이신가 보군요. 혹시 원하시는 색이나 자수가 있으신가요?”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제가 받은 두 개의 손수건을 떠올렸다. 성기사단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인지. 콘라드에게서 받은 손수건은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색이었다.
“음, 푸른색이나 하얀색이 있나요?”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더니 주인은 몇 가지 제품을 가져와 늘어놓았다. 전부 섬세한 수가 놓인 것들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텅 비어 있었다. 레슬리가 시선을 그 손수건에 고정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자 주인은 말을 꺼냈다.
“아, 이건 레이디들께서 수를 직접 놓거나 원하는 문양의 수를 저희 가게에 맡겨 주실 때 고르시는 손수건입니다.”
“그렇군요…….”
레슬리는 그 손수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것들도 예뻤지만, 저 손수건에 아이테라 대공 가문의 문양을 넣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걸로 살까요, 아가씨?”
마델이 묻자 이번엔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 손수건은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레슬리의 손에 쥐여졌다.
“자, 그럼 나머지 두 개를 골라 볼까요?”
마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수건을 선물할 때는 여러 개를 선물해야 하는 걸까?
“큰 도련님과 사이레인 님 것을 골라 보죠!”
마델의 환한 웃음에 레슬리는 왜 마델이 두 개를 더 고르자고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거 하나만 살 거야.”
레슬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닐 것 같지 않을걸.”
그건 베스라온과 루엔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망토 핀으로 사고 베스라온 오라버니는…… 검에 다는 장신구가 좋겠다. 루엔티 오라버니는 안경 끈…….”
레슬리는 재빠르게 제 손가락을 접어 가며 평소에 사 드리고 싶었던 물건을 나열했다.
사이레인은 종종 망토를 입는 모습을 보였으니 망토 핀을, 베스라온은 제복 장신구가 전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니 검에 다는 장신구를, 그리고 안경을 자주 쓰는 루엔티는 안경 끈이 좋겠다.
“그리고…… 어머니는 깃펜! 매일 서류를 보시니까.”
선물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테론 삼촌에게도 선물을 보내고 싶었다. 책에서 읽기로는 광부는 무척이나 힘든 직업이라 했으니, 맛있는 음식을 가득 보내 주면 되지 않을까?
마델과 서올리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다. 바타에게도! 매일 맛있는 음식을 주니 작은 선물을 사 가면 좋지 않을까.
‘공작저에 있는 모두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셀바토르 기사단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레슬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재산을 전부 써 버리는 건 아닐까?
레슬리의 고민을 알아챈 것인지, 마델이 웃으면서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일단은 돌아갔다가 다음에 다시 올까요? 이제 곧 아이테라 경께서 도착하실 거예요.”
“저도 같이 와서 골라 드릴게요. 아니면 수업 끝나고 나서 고르실까요?”
레소와 반트도 마델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보탰다. 레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 가게를 나선 레슬리는 자신이 가져온 작은 가방에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틸레이얼 자작 부인에게 수놓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해야지.’
연습해 보다가 잘 놓게 되면 어머니랑 아버지에게도 선물하자. 오라버니들에게 줘도 괜찮을 거야. 레슬리는 괜스레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가방 속을 바라보았다.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손수건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가씨!”
옆에서 걷던 마델이 재빠르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레슬리는 앞에 걷던 사람과 부딪친 뒤였다. 레슬리의 시선은 가방 속 손수건에, 그리고 부딪힌 상대의 시야는 로브에 가려진 탓이었다.
레슬리와 상대는 휘청거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둘 다 넘어지진 않았다. 대신 상대의 손에 들려 있던 과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마델이 놀라 레슬리를 부축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뒤를 따라오던 두 명의 기사는 앞으로 나와 레슬리를 보호했다.
“아, 아! 죄송합니다!”
흔히 보이는 로브를 입은 여자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귀족과 부딪치게 되어 겁을 먹은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대로 두면 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구할 기세라 레슬리는 천천히 그 앞에 가서 섰다.
“괜찮아요. 저기…… 그쪽은 다치지 않았나요?”
그 모습에 반트와 레소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네, 네! 저는 괜찮은데, 아가씨께서…….”
“나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그만 사과해도 괜찮아요.”
레슬리는 바닥에 떨어진 사과 하나를 주워 주며 방긋 웃었다. 거기다 자신도 손수건에 정신이 팔려 실수하지 않았던가.
그와 별개로 사람이 덜덜 떠는 모습을 보는 건 레슬리에게 즐겁지 못한 일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으니까.
‘엘리와 후작은 다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레슬리가 사과를 내밀며 웃자, 여자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사과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사과를 건네며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단숨에 레슬리를 알아보았다.
“레, 레슬리 아가씨?”
나를 아는 사람일까?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재판 사건으로 자신의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다지만, 얼굴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소문은 초상화를 가지고 돌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알아봤을까.
레슬리와 마델이 수상쩍다는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저예요. 엠로아. 기억 못 하시나요? 그…… 아가씨에게 흰 빵을 드렸었는데.”
흰 빵. 그제야 레슬리는 앞에 있는 여자를 기억해 냈다.
‘아침 식사입니다.’
처음 보던 하녀는 웃으면서 레슬리 앞에 식사를 내려놓았고, 레슬리는 식사를 보고 굳어 버렸다.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흰 빵과 세 종류의 잼 그리고 작은 버터까지. 난생처음 받아 보는 풍족한 식사였다.
그간 레슬리의 식사로 올라왔던 빵은 사용인들도 먹기 싫어할 정도로 거칠하고 딱딱한 검은 빵이었다. 그걸 레슬리는 물에 불려 조금씩 뜯어 먹곤 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혀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처음 먹어 본 빵과 잼들, 그리고 버터. 그건 불 속에서도 행복했던 단 하나의 기억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랬던 레슬리가 처음 여자의 얼굴을 보고도 기억을 못 했던 이유는, 정말 미안하게도 레슬리는 그때 흰 빵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가 그날 저녁 해고당하는 바람에 그 뒤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탓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반가운 마음에 알은척을 해 버렸네요. 기억 못 하시면…….”
“아니야!”
레슬리는 엠로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억하고 있어!”
못 할 리가. 못 할 리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쫓겨난 사람을 어떻게 기억을 못 할 리가 있겠는가.
“기억……하고 있어.”
레슬리는 잠시 입을 오물거리다가 엠로아를 바라보았다. 라일락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있지. 그때…… 나 때문에 쫓겨나게 해서 미안했어.”
레슬리가 시선을 맞추며 눈물진 뺨을 움직여 웃어 보았다.
“그리고 맛있는 빵을 줘서…… 정말 고마웠어.”
드디어,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본인에게 꺼낼 수 있었다.
레슬리가 울자 당황한 반트와 레소는 잽싸게 레슬리와 엠로아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종 달콤한 것과 따듯한 음료를 시키고 두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마델과 반트는 약속 장소가 바뀌었으니 콘라드를 데려오겠다며 카페를 나섰고 레소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그 덕분에 레슬리는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엠로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엠로아는 경쾌하게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 때문에 직장을 잃은 거잖아? 그것도 귀족가의 저택에서 쫓겨났으면 심각한 상황이잖아.”
이제 레슬리는 여러 사람의 대화로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가의 저택에 사용인으로 들어오기 얼마나 힘든지도, 갑자기 해고되어 엠로아가 다음 일자리를 찾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 르아에게 듣기로는 해고 사유가 레슬리에게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엠로아는 레슬리를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아가씨에게 빵을 드린 일로 저택을 나가게 돼서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솔직히 쫓겨나서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쫓겨나서 잘됐다고?”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엠로아는 제 복슬복슬해 보이는 붉은 머리를 매만졌다.
“네, 처음에 거기 들어가고 기겁했거든요. 고모께서 추천장을 받아 주셔서 들어간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저택에 비교해 봉급도 좀 적고…… 그 유모라는 분? 그분은 어찌나 깐깐하고 재수 없던지. 고작 반달도 일하지 않았는데 일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엠로아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험담을 늘어 두었다.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후작님도 좋은 분은 아니었어요. 손버릇도 나쁘고. 하녀를 때리다니, 질색이에요. 그 엘리 아가씨라는 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신고식을 한다기에 뭘 하려나 봤더니만…….”
휴우우. 작게 한숨 쉬면서 쫑알쫑알 이야기하려다가 엠로아는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 아침을 가져다주는 게 신고식이었구나.’
레슬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가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침을 던져 주다시피 주고 사라지더라니. 잠시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엠로아가 말을 이었다.
“……검은 빵이라니, 그거 물로 불리지 않으면 이빨 깨지는 음식이잖아요. 그래서 옆에 있던 흰 빵하고 바꿔치기했죠.”
그렇게 말하더니 엠로아는 어딘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까 아가씨가 저에게 사과하셨는데……. 아니에요, 사과할 사람은 저인걸요. 아가씨가 그렇게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저는…….”
활발했던 목소리가 점차 내려앉더니 말끝이 흐려졌다. 그 흐려진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스페라도 저택을 나가면서 자신에 관한 협박을 들었겠지. 거기다 엠로아는 평민이었다. 평민이 귀족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까.
“괜찮아. 무사한 것만 해도 다행인걸. 그래 봬도 후작이잖아.”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고 있던 레소는 눈을 찡그렸다.
‘술집에 가야지.’
스페라도 후작이 저 정도로 레슬리를 학대하고 내버려 뒀다는 걸, 그 가문의 기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하르트는 나중에 가자고 했지만, 오늘 다시 다른 기사들을 꾀어, 스페라도가 기사들이 자주 온다는 술집을 며칠 내로 방문해야겠다.
엠로아는 일부러 더욱 환하게 웃어 보이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 저 그래도 나쁘진 않았어요! 거기를 나온 후에 일하던 가게에서 지금 남편을 만났거든요. 벌써 아기도 있는걸요? 만약 나오지 않았으면 남편도, 아기도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잘됐다……!”
레슬리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자신 때문에 잘못됐으면 어쩌지 마음을 졸이던 게 이제야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도 잘 지내고 있어. 소문을 들었겠지만, 셀바토르 가문으로 들어갔거든.”
레슬리도 뺨을 붉히며 웃었다. 레슬리의 예상대로 소문을 들었는지, 엠로아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는 잘 지내시나요?”
“응, 아주 잘 지내. 다들 친절해서 너무 좋아.”
잘됐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안도했다.
잠시 웃던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하고 아기가 있다던 엠로아는 지금 홀로 있었다.
“그럼, 지금 아가랑 남편이랑 나온 거야?”
레슬리의 말에 갑자기 엠로아는 섧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끝을 흐렸다.
“남편은 불행한 사고로…….”
물으면 안 될 것을 물었구나. 레슬리는 놀라 제 입을 막고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 미안해. 내가…….”
“아니에요! 사실 오래전 일이라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한걸요.”
밝은 목소리로 말한 엠로아는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아가는 잠시 맡겨 두었어요. 얼마나 착하고 예쁜 아이인지. 보기만 해도 힘이 나요.”
레슬리의 표정이 조금 나아지자, 밝은 분위기를 이끌어 가려는 듯 엠로아는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저 지금은 좀 작긴 한데 가게도 운영하고 있어요. 단골손님도 꽤 많고요.”
가게라니. 빈말이 아니라 제대로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레슬리는 웃었다.
“어떤 가게인데?”
“식당이에요. 작긴 한데 신전 근처에 자리를 잘 잡아서 먹고살 만해요. 신전 방문객들이 자주 와 주시거든요.”
“신전…… 수도 신전 근처면 이 근방이잖아.”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돌아보자, 재빠르게 엠로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신레프 신전 근처에 자리 잡았어요. 수도에는 잠시 일 때문에 올라온 거고요.”
신레프 신전. 그 신전은 얼마 후 자신도 가게 되는 곳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레슬리는 엠로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 가게에 들러도 될까? 아가도 보고 싶어.”
“아가씨께서요?”
놀란 듯 엠로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 아가씨께서 오시기엔 좀 작고 누추할 텐데요. 음식도 입에 안 맞을지 모르는데……. 제가 직접 하는 음식인 데다가 저희 고향 음식이라 수도 분들에게는 안 맞을지도…….”
“아니야. 알잖아, 내가 어떤 방에서 자라 왔는지. 안 될까, 응?”
레슬리는 조금 곤란해 보이는 엠로아를 보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갈 때 선물을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이번엔 자신이 엠로아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 주고 싶었으니까.
식당을 하는 사람에게 가져가면 좋을 것을 제나에게 물어봐야지. 제나는 뭐든 잘 아니까, 이번에도 척척 대답해 줄 거야.
“으음…….”
곤란하다는 듯 엠로아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가씨. 대신 아가씨는 위험한 일도 겪고 하셨으니까. 공작님에게 허락받으시고 꼭, 꼭 몸을 지켜 주실 사람과 같이 오셔야 해요.”
꼭이요. 엠로아는 어딘가 조금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로, 그리고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레슬리에게 거듭 당부했다.
“아,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 뒤로 더 이야기를 나누던 엠로아가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너무 흐른 듯 보였다. 아쉽지만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가던 사람을 잡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레소 경에게 말해서 데려다 달라고 할까?”
“아니에요! 평민인 제가 기사님의 호위를 받으면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멈출 거예요. 그리고 이 근처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엠로아는 몸을 일으켰다. 레슬리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환하게 웃었다.
“식당 꼭 놀러 갈게.”
“네, 아가씨. 호위, 꼭 데려오셔야 해요?”
왜 호위를 자꾸 강조하는 걸까. 의구심이 들기도 전에 엠로아는 자리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델과 반트가 콘라드를 데리고 카페로 들어왔다.
콘라드가 맞은편에 앉자마자 레슬리는 환하게 웃으며 여태 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래서 가시기로 하셨나요?”
콘라드의 물음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공작님에게 말씀드리고 가려고요.”
“흐음. 신레프 신전이라.”
뭔가를 생각하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도 콘라드는 차를 따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작은 집게로 각설탕을 집었다. 정확히 네 개를 넣은 후 레슬리의 앞에 놓아 주었다. 늘 레슬리가 차에 넣던 숫자를 기억한 모양이었다.
“저도 얼마 후면 가는 곳이군요.”
“혹시 그건 호위 때문인가요?”
레슬리는 각설탕을 잔뜩 집어넣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다시 한 모금 더 차를 들이켜는데 불현듯 다른 사람들 생각이 떠올랐다. 공작님이나 다른 사람들은 늘 각설탕을 넣지도 않고 진하게 우린 차를 마시던데.
‘무슨 맛인 걸까?’
콘라드 경도 차에 설탕을 넣어 드시지는 않지. 잠시 콘라드를 바라보는데, 콘라드가 시선을 맞춘 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레슬리 양은 최초의 사제들의 후보 자격으로 가시는 거지요?”
“네, 콘라드 경, 저 그거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든 물어보세요, 레슬리 양.”
“최초의 사제가 되면 어떤 일을 하나요?”
아직 레슬리는 정확히 최초의 사제와 아라벨라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 말에 콘라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지만 금방 평소와 같은 웃음으로 가려졌다.
“축복의 날 최초의 사제로 뽑힌 분들은 식을 진행하는 동안 대사제의 보조를 돕게 됩니다.”
콘라드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라벨라는 축제의 마지막 날에 수도 신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평소에는 절대 열리지 않는 곳입니다만, 그날 단 하루 대사제와 아라벨라를 위해 문이 열립니다.”
거기까지는 레슬리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전혀 모르던, 처음 듣는 정보였다.
“신전 가장 안쪽에는 ‘에피알테스’가 있습니다. 신께서 직접 봉인하셨다고 전해지는 전염병이죠.”
그 말에 레슬리는 힉 하고 작게 딸꾹질을 했다. 정말 그런 게 신전에 봉인되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게 귀여웠는지 작게 웃은 콘라드가 신학을 설명하고 있던 종이 위에 어설픈 솜씨로 브로치를 하나 그려 냈다.
“그리고 에피알테스가 있는 방에는 아라벨라께서 사용하셨다고 하는 브로치가 달린 상자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그 상자가 에피알테스를 봉인하고 있는 거죠.”
안 그래도 동그랗던 레슬린의 눈동자가 더욱 동그래졌다. 신까지 내려와 수습한 전염병이 수도 신전 안쪽에 놓여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콘라드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매번 축복의 날 때 의식을 치르는 이유가 에피알테스의 봉인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축제를 벌이는 이유도 비슷하지요.”
“신기해요.”
그럼 8년마다 계속 에피알테스의 봉인이 덧씌워지는 걸까. 신께서 전염병을 봉인시켰다는 이야기는 전설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까마득히 오래되었으니, 이제 와 에피알테스가 풀려날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지?
‘그런데 얼마나 강했으면 이름이 따로 붙은 걸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전염병에 이름을 붙이다니.
루엔티는 역사 수업 때, 아주 악독한 병에는 그때를 기억하기 위한 특별한 이름이 붙는다고 말해 주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이 생기기도 전에 서부 미힐 지역에서 퍼졌던 전염병은 1백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나무와 땅 그리고 물마저 썩어 들어가게 만들어, 미힐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지방 이름을 딴 것도 아니고 원래 악몽의 이름이었다니. 소름 끼쳐.’
하긴,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신께서 내려와 수습하지 않으셨겠지. 레슬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음,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드릴까요?”
그런 레슬리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콘라드가 이야기를 하나 더 꺼내 주었다.
“이 소문 역시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라벨라 님께서 썼던 브로치에는 에피알테스를 봉인하는 힘뿐만 아니라, 다른 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콘라드는 자신이 그렸던 브로치를 톡톡 펜으로 두드렸다.
“다른 힘이요?”
“무슨 힘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거짓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기록을 찾으면 또 모르죠.”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의 사제들과 아라벨라의 기록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으니까요.”
최초의 사제들과 아라벨라는 신의 명령을 받들어 전 세계를 돌아다녔기에, 그들의 기록 역시 온갖 나라에 퍼져 있었다. 그나마 르카디우스 제국이 많은 나라를 복속시키면서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한 기록은 아녔다. 이곳저곳에 부족한 부분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분명 다른 나라에는 아라벨라의 브로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얻을 수는 없겠죠.”
콘라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르카디우스 제국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기록이 많이 손실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몇 나라들은 르카디우스 제국에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혼란의 시대를 일으킨 가장 큰 이유였다.
한층 그 기세가 꺾인 지금도 분쟁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소모전이 펼쳐지고는 하였다. 그런 나라들이 자신들에게 소중한 기록을 쉽게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잠시 레슬리는 씁쓸하게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는 콘라드를 보다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콘라드 경, 저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마력과 신력은 반발하는 법이잖아요. 그러면 어머니나 루엔티 오라버니같이 마력을 가지신 분들은 신력을 어떻게 이용하시는 거죠?”
못 하는 건 아녔다. 분명 공작은 가면 밑의 흉터를 보여 주면서 사제를 너무 늦게 만났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레슬리의 질문에 콘라드는 천천히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마력의 소유자, 그러니까 마법사나 마검사 같은 분들은 신력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데 별 무리가 없습니다. 루엔티 님은 불쾌감이 좀 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만,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라면 신력과 마력이 반발해, 신력이 그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신력과 마력 그리고 반발.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자신은 재판장에서 고위 사제의 신력에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건 휴게실에서 콘라드의 신력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재판장에서, 그리고 축복의 이름을 받기 위해 들른 신전에서는 별 무리가 없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그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고는 했지만.’
신전을 쉽게 건들 수는 없을 텐데. 레슬리는 복잡한 마음에 눈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