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9)

#8

환하게 천사처럼 웃으며 엘리는 말을 이었다. 엘리의 목소리는 정말 즐거운 듯 발랄하게 방에 울려 퍼졌다.

“레슬리 그것을 불에 넣어 태워 죽여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스페라도 후작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느리게 떴다가 감았다.

“아이참, 아버지도. 생각을 해 보세요. 왜 이런 사달이 났는지를요.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바로 레슬리 그년이 불 속에서 튀어나왔을 때부터지 않아요?”

엘리는 활짝 웃었다. 그래, 이 모든 건 다 레슬리가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살아난 탓이었다.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태어난 주제에 도망치고 자신의 얼굴에 먹칠 한 죗값은 반드시 받아 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 돌려놓자고요! 레슬리 그것을 그 제물의 불에 넣어 버리면 힘은 나에게 오고 레슬리 따위 죽어 버리니 얼마나 좋아요?”

골치 아픈 그것은 사라지고 힘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게 얼마나 좋은 소리인가.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였다.

“제가 제국의 유일한 어둠술사가 된다면 황제 폐하와 거래를 해 보겠어요.”

엘리는 완벽한 어둠술사가 되어 황실에 입궁하는 제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귀하디귀한 어둠술사였다. 자신은 분명 환영받으리라. 레슬리 그것이 무슨 이유로 어둠술사라고 스스로 밝히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는 기회였다.

엘리는 웃어 보였다. 어떤 사람도 녹일 수 있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우리 가문을 다시 일으켜 달라고 말이죠! 그러면 제가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겠어요. 그럼 분명 황제 폐하께서는 감동하시겠지요. 그 즉시 아렌도 황자님과 제 결혼을 진행해 주시고 우리 가문의 영광을 돌려주실 거예요. 아버지도 말씀하셨잖아요. 가문의 영광을, 가문의 봄을 돌려주는 건 저라고.”

처음 레슬리 그것이 불에서 빠져나와 살았을 때 6개월을 기다리려고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굳이 반년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반년 후 예정된 날은 엘리가 레슬리를 제물로 바치고 얻을 힘이 가장 큰 날이었다. 그때가 아니라면 흡수되는 힘이 적어지겠지만.

‘레슬리 그것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걸.’

엘리는 눈을 찡그렸다. 처음 레슬리가 자신에게 그 힘을 보여 줬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엘리는 절망했다. 레슬리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둠의 힘은 그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었다.

‘뭐 어때, 어차피 곧 내 힘이 될 텐데.’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자신에게 돌아와도 자신은 충분히 강해질 것이다. 거기다 대륙에서 단 한 명뿐인 어둠술사. 단 한 명. 그 단어의 울림이 어찌나 좋은지.

엘리는 몇 번이고 입안에서 그 말을 되새김질했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신,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엘리는 벌써 제가 레슬리를 삼킨 어둠술사가 된 것처럼 우쭐거렸다.

“그리고 집안이 일어서야 어머니도 친정에서 돌아오죠.”

“하지만 어떻게…….”

걸레 빤 물과 얼음물로는 후작의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없었는지, 후작의 말투는 어린아이처럼 어눌했다. 하지만 엘리가 말한 그 뜻만큼은 확실하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마차에 불을 지르셨지요?”

마차 사건. 그 사건을 말하자 스페라도 후작이 움찔거렸다. 그 망할 사건은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가에 머무르는 원인이 되었고, 귀족 재판에서 망신을 당하면서 지게 된 주원인이었다. 제가 베스라온에게 말해 레슬리를 구해 낸 탓에 아버지가 이렇게 된 거지만 엘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그때처럼 해요. 마차든, 방이든, 집이든. 그 아이가 어디 한정된 공간에 있을 때 그 불을 질러 버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에게는 그 아이가 힘을 못 쓰게 만들 방법이 있잖아요?”

분명 우리 가문이라면 그런 게 있을 텐데. 엘리의 말에 후작이 멍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있지……. 그래, 있어……. 그 사슬로 잡아다가 힘을 억누르게 하면…….”

후작의 머리가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 자신을 이렇게 망신시킨 둘째 딸은 차라리 죽어 마땅하다. 죽어서 사랑스러운 첫째에게 힘을 주는 게 맞지. 그러려고 만든 아이 아닌가. 제 아비가 중얼중얼하는 모습을 보며 엘리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됐다.

***

지금 레슬리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으악!”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을 보면서 레슬리는 두근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셀바토르 공작이 몸을 풀고 있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몸을 푸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버, 버텨! 끄악!”

“선배님! 껙!”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두 기사가 한 번에 쓰러졌다. 다른 기사 둘이 잽싸게 쓰러진 기사 둘을 끌고 연무장에서 나왔다.

“휴우.”

이제 연무장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셀바토르 공작은 언짢은 듯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공작가의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연습은 하는 건가?”

“보통 인간하고 셀바토르의 대련 아닙니까, 공작님. 거기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도 않으셨으면서.”

웃으며 셀바토르 공작에게 대꾸하는 사람은 바로 기사단장 하르트 로엔 베레비엔이었다. 그는 웃으며 제 뺨을 긁적거렸다.

“몸은 이만하면 풀리지 않으셨습니까?”

“조금 부족한데…….”

셀바토르 공작이 연습용 봉을 들고 몸을 쭉쭉 늘렸다. 그러더니 시선을 하르트에게 보내왔다.

“이런, 저는 봐주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훈련으로 내려오신 게 아니라 레슬리 아가씨를 가르쳐 주시러 오신 거 아닙니까.”

하르트가 몸을 빼며 뒤에 서 있는 레슬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셀바토르 공작의 시선이 레슬리에게 닿았다.

“이런, 왔구나. 훈련에 집중하느라고 온 줄 몰랐네. 레슬리.”

“네!”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의 부름에 그녀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섰다. 셀바토르 공작도, 레슬리도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마냥 좋아 레슬리는 웃음을 흘렸다. 마치 어머니처럼 강해질 수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곧 상상 속의 자신처럼 되지 않을까. 키는 베스라온 오라버니만 하고 힘도 세고, 어둠도 잘 다루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레슬리는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런 레슬리를 보며 공작과의 대련으로 엉망진창이 된 사람들이 작게 한숨을 흘렸다. 귀엽다. 그래, 너무도 귀여웠다.

기사단이 머무르는 숙소가 있는 연무장과 저택의 거리는 떨어져 있는 데다가 갖은 훈련과 경비, 사냥 등 다양한 이유로 저택을 오래 떠나 있던 사람도 있는 터라 다들 레슬리를 직접 본 적이 없어 궁금해했었다. 몽실몽실하고 하얗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들이 보기엔 그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셀바토르 공작은 아무래도 기강이 빠진 것 같다는 말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인사한 적이 없지. 셀바토르 기사단이란다.”

공작의 시선 끝에는 헤벌쭉한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는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인사는 처음이지요, 레슬리 아가씨. 셀바토르 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맡은 하르트 로엔 베레비엔입니다.”

어딘가 평온해 보이는 남자였다. 전혀 기사답지 않은 온화한 분위기였음에도 어쩐지 무서워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리다 제 옆에 선 셀바토르 공작의 옷깃을 꼭 잡았다. 그리고 용기 내 시선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르트 님.”

그 인사에 하르트의 갈빛 눈동자가 커지더니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에 신기하다는 듯 미소가 꽃 피워졌다.

“정말 안 무서워하시는군요.”

“나도 괜찮아했다니까.”

그러면서 셀바토르 공작은 제 가면을 톡톡 건드렸다. 그 말에 하르트는 공작을 한 번, 레슬리를 한 번 바라보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부디 하르트 경이라 불러 주십시오, 레슬리 아가씨. 모시게 될 공녀님께 존대를 들으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습니다.”

아, 이제 안 무섭다. 뭔가가 신기해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하르트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네, 하르트 경.”

하르트의 인사가 끝나자 뒤에 있던 십 수 명의 기사들이 앞다투어 인사했고 레슬리는 한 명 한 명에게 자랑스럽게 제 이름을 말했다. 답인사로 예쁜 이름이라는 말과 귀엽다는 말을 들었다. 셀바토르 공녀에게는 조금 무례할지 모르는 태도였으나, 듣는 본인이 개의치 않아 했기에 다들 넘어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인사가 전부 끝나고 난 후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준비가 되었냐는 눈빛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기 시작했다. 자신은 어떤 무기를 받게 될까? 처음이니까 진검을 주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아까 봤던 뭉툭해 보이는 철검일까, 아니면 훈련할 때 주로 보였던 훈련용 봉일까.

아니면 책에서 봤던 얇은 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신은 체력이 없으니까. 그래도 그 정도는 가볍게 다루지 않을까? 뭐가 됐든 주기만 하면 멋지게 휘두를 자신이 있었다. 그런 레슬리의 라일락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셀바토르 공작이 옅게 웃었다.

“가볍게 연무장 스무 바퀴만 돌아보자꾸나.”

기대하고 고대하던 훈련은 지옥으로 끝이 났다. 레슬리는 연무장 한 편에서 숨을 가쁘게 고르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몸에서 연기가 날 정도였다.

“열심히 하시더군요.”

하르트가 웃으며 레슬리에게 차가운 물을 건네주었다. 이 날씨에 차가운 물을 마시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서올리가 말해 줬지만, 레슬리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제야 뜨겁던 몸이 조금 식는 것 같았다.

“살 것 같아요.”

“훈련 중 물 한 잔은 달콤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하르트는 웃었다. 지금 그는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는 다르게 조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하르트가 셀바토르의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싸워 준 덕에 다섯 바퀴로 줄이긴 했지만, 그걸 다 돌 줄은 몰랐다.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내일은 분명 몸살이 나겠지.

그걸 고려해 하녀 몇에게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할 수 있게 준비시킨 상태였다. 물을 끓이고 커다란 욕조를 가득 채우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그동안 하르트는 레슬리하고 이야기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레슬리 아가씨.”

붉어진 뺨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맞춰 온다. 그 동그란 눈동자를 보다가 하르트는 제 물음을 던졌다.

“레슬리 아가씨는 공작님처럼 되고 싶으신 거지요?”

“네.”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는 물음을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정말 셀바토르 공작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이번에도 바로 대답이 나왔다. 레슬리는 다른 기사가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맑게 웃어 보였다.

“저는 꼭 어머니처럼 될 거예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하르트 기사단장은 신기하다는 듯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칼날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시선에도 레슬리가 눈을 피하지 않고 기사단장을 바라보자, 다시 하르트는 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레슬리 아가씨.”

“제가 어머니처럼 될 수 없을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맞습니다.”

즉답이 돌아왔다. 하르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든 생각인데 정말로 사람이 좋아 보이는 따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말은 마음을 시리게 할 정도로 차가워, 그 간극에 레슬리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셀바토르는 괜히 셀바토르가 아닙니다. 인간은 범접하기 힘든 영역을 뛰어넘는 괴물들이죠. 아가씨는 그걸 따라 하다가 다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하르트는 제 가슴을 엄지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씩 웃어 보였다.

“특히 여기가요.”

읏챠. 레슬리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르트는 몸을 일으켜 뚜벅뚜벅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다들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하는데, 정작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는 소드마스터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왜인지 알고 계십니까?”

하르트가 목소리를 조금 더 높이자, 텅 빈 연무장이 하르트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드마스터를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말 그대로 괴물인 겁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하르트는 자신의 검을 빼 들고 가볍게 휘둘렀다. 분명 동작 자체는 가볍고 부드러워 보였는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살벌하게 들렸다.

“현 셀바토르 공작님,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님은 마검사입니다.”

‘마검사.’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읽은 적은 있으나, 실제로 들어 본 적은 없는 단어였다. 그만큼 마검사는 희귀했다. 마법과 검술, 그 두 가지를 조화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르트는 다시 자세를 잡더니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마법과 검을 같이 쓰는 거죠. 검을 휘두르기 위한 힘과 마법을 쓰기 위한 마력이 한 몸에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 인재는 희귀하지요. 심지어 이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도 말입니다. 다른 분들은 베스라온 님처럼 괴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루엔티 마법사님처럼 마력을 지니고 있지요. 단 한 가지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두 가지를 타고 태어나도 한쪽은 그다지 쓸모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지요.”

휭! 다시 날카로운 검이 차디찬 겨울의 바람을 갈라냈다. 그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레슬리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하르트의 검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공작님은 그 두 가지를 전부 타고 태어난 희귀한 마검사이며, 혼란의 시대를 종결시킨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하르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마저도 군더기가 없는 깔끔한 동작이라 레슬리는 괜스레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아가씨는 그런 분을 닮고 싶다고 한 거예요.”

하르트는 그런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저 반짝반짝해 보이는 라일락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어째서 공작저의 사용인들과 기사들까지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저렇게 해가 없어 보이는, 색조차 귀여운 아이라니. 저렇게 순진한 분이라니.

하르트는 성큼성큼 레슬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엔 눈높이를 맞춰 주지 않은 채 고개만 숙여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습니까, 아가씨?”

잠시 하르트의 눈을 바라보던 레슬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답을 찾은 듯한, 맑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네, 알겠어요. 하르트 경도 어머니가 좋은 거지요?”

하르트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이 들려와, 하르트의 고개가 다시 옆으로 기울었다. 그런 하르트를 보며 레슬리는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어머니가 너무 좋아요!”

레슬리의 웃음에 하르트는 같이 웃음을 터트리며 제 볼을 긁었다. 좋은 의미의 웃음은 아니라는 걸 그의 눈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랍니다, 아가씨.”

“하지만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어요.”

레슬리는 당황한 듯 보이는 하르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레슬리의 눈동자가 쏟아지는 겨울 햇빛에 반짝거렸다.

“아니면 혹여나 제가 너무 과한 목표를 세운 게 아닐까, 나중에 좌절하고 크게 마음을 다치는 게 아닐까, 하고 미리 염려해 주신 것 같아요. 미리 좌절해 본 선배로서요.”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아가씨를 위한 걱정뿐이 아닙니다.”

하르트는 의외라는 듯 대답하며 제 뺨을 긁적였다.

“셀바토르 공작님은 젊었을 적부터 동경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적군까지도요. 하지만 나중에 가면 거의 다 한 가지로 몰리더군요.”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가지로 치우친다라. 하르트의 말은 절대로 긍정적인 게 아니었으니,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적……인가요?”

“네, 동경이 극에 치우치고 자신이 그 그림자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가장 최악의 적이 되곤 하였죠.”

그렇게 말하며 하르트는 제 뺨을 톡톡 쳤다. 늘 공작이 가면으로 가리고 다니는 쪽이었다.

“그 뺨의 상처도 그런 사람에게 얻은 상처였습니다. 아마 뺨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더 깊으셨을 겁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렇군요.”

레슬리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르트 경. 저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게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맑은 레슬리의 웃음에 하르트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듯 작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무리하지 않게 할게요.”

레슬리는 아까 공작님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네던 하르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스무 바퀴라니요. 누누이 셀바토르의 기준으로 보통 사람을 다루지 말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덕분에 레슬리는 연무장을 다섯 바퀴만 돌아도 되었다. 시간제한 없이 천천히 뛰는 것이었는데도, 금방 지쳐 헐떡거리긴 했지만. 하르트는 제 뺨을 긁적거리기만 했다.

“너무 제 말을 좋게 해석하시는군요.”

“저에게는 꼭 그렇게 들려서요.”

그러면서 레슬리는 아직 짧은 다리를 동동 움직였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얻은 단 하나 좋은 것이 이것이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싫어하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여기는지, 그 감정이 나름 빠르게 파악되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하르트 경은 자신에게 모질게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이 섞여 있었지. 그 말을 들은 하르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가씨가 동경하고 있는 사람은 너무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요. 지금 말씀드리기엔 조금 이르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러더니 하르트는 다시 한 번 레슬리를 훑었다.

“아무리 봐도 쉽게 포기하실 것 같지 않은 분이라.”

레슬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다는 눈빛으로 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르트 경, 아까 검술은 왜 보여 주신 거예요?”

“아…….”

하르트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그냥 앉아서 대화하기가 좀 부끄러워서요. 그래도 제 검술 나름 멋있지 않았습니까? 셀바토르 공작가의 검술입니다.”

“멋있었어요.”

레슬리가 다시 하르트를 보며 꺄륵 웃자, 하르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푹 쉬더니 두 손을 들었다. 무언의 항복이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슬슬 땀이 식어서 추우실 겁니다.”

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막 연무장을 돌았을 때는 더워서 땀이 흘렀지만, 이야기하던 도중 열기는 점점 가라앉았고 슬슬 몸에 한기가 돌고 있었다. 땀이 식으면서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몸을 일으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는 레슬리를 하르트가 붙잡았다.

“아, 아가씨. 공작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제가 아가씨를 가르쳐 드릴 겁니다. 앞으로…… 그,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네, 저 역시 잘 부탁드려요, 하르트 경.”

레슬리가 인사를 하고 연무장을 벗어나자, 구석에 있던 몇 명의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우르르 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단장님!”

“뭐, 이놈들아!”

하르트의 목에 매달린 갈색 머리 기사가 간절하게 외쳤다. 그의 눈에는 다급함만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저러다 우시면 어쩌려고 그렇게 모질게 대하셨어요! 기사단은 이상한 놈들이라 생각하면 우리 손해잖아요!”

“맞아요!”

뒤에 서 있던, 금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기사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아가씨를 자주 뵐 수가 없잖아요. 안 그래도 아가씨가 검을 배우신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 공작님도, 아가씨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요!”

그 절박한 외침이 왜일까, 요정 같은 희귀한 무언가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듯 슬프게 들렸다.

“아가씨도 제대로 알아야지!”

하르트는 그렇게 달려드는 기사들이 귀찮은지 몸을 털었지만, 과연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들.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간의 고된 훈련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자 하르트는 한 명 한 명 제 몸에 매달린 기사들을 떼어 내며 말을 이었다.

“무작정 동경으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거기다 너희도 봤잖아! 그 몸, 이미 너무 혹사당했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먹고 몸 관리를 한다 해도 검을 잡긴 힘들 거다.”

결국, 제 목에 매달린 갈색 머리 기사까지 떼어 낸 하르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탁탁 털었다.

그 말에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이 울음을 삼켰다.

마른 몸이었다. 저 몸으로는 제대로 검을 잡기 힘들 거라는 걸 다른 기사들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가는 태생적으로 검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문이었다. 유전에, 그간 혹사당한 몸까지.

“그래도…… 끄흡.”

널브러진 기사 몇이 입을 주먹으로 막고 끅끅거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하르트에게 달려들지 않아 멀쩡히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한 발로 바닥을 톡톡 치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스페라도 가문의 기사들이 자주 모이는 술집이 있지 않나요?”

그 말에 바닥에 누워 있던 기사들이 한꺼번에 그녀에게 눈길을 보냈다. 지렁이가 시선을 보내면 저런 느낌일까. 그렇게 생각한 기사는 제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있으면 회식하는 날이죠? 바로크의 둘째가 태어난 기념으로 한잔하기로 했잖아요?”

부인이 당분간 금주를 하게 되었으니 자신도 금주를 해야 한다며 외치던 바로크가, 아이가 태어난 기념, 그리고 장기간의 육아 휴직 기념으로 셀바토르 기사단에서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는 날이었다.

“거기로 가자!”

갈색 머리 기사가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흥분한 채 크게 외쳤다.

“거기로 가서 시비를 거는 순간 그놈들 이빨을 털어 주자고!”

“기사복은 벗고 일반 복장으로 가자! 기사인 거 알면 시비를 안 걸어올 거 아니야!”

“꾀죄죄한 옷을 입고 가는 거야! 만만하게 보여야 해!”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가는 건 어떨까?”

그 말을 시작으로 누워 있던 기사들이 잉어가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키더니, ‘어떻게 하면 만만한 인상이 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르트는 적어도 저놈들이 제정신이 들 때까지라도 회식은 당분간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

“레슬리 아가씨.”

“우웅?”

따끈한 욕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졸음이 몽실몽실 밀려오기 시작한 레슬리가 서올리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작게 하품했다. 마델이 닦아 주는 수건이 부드러웠던 탓인지 아니면 오늘 고된 훈련을 했기 때문인지 점점 더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편지가 왔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서올리의 말에 레슬리는 눈을 번쩍 떴다. 정말 서올리의 손에는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편지?”

레슬리는 냉큼 손을 내밀었다. 삼촌이 보내 준, 눈물을 쏟게 만든 그 편지를 제외하고는 남에게서 받는 첫 편지였다.

스페라도 후작가에 있을 때 집사가 은쟁반으로 편지를 가져다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꽃잎을 말려서 만든 비싼 편지지에 은은한 향수까지 뿌린 편지. 그 편지를 받을 때마다 엘리는 어딘가 뿌듯한지 우쭐거리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 즐거워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래서 늘 궁금했었다. 저 작은 종이에 뭐가 적혀 있기에 늘 엘리는 저걸 받으면 즐거워하는지. 너무도 궁금해 버려진 엘리의 편지를, 쓰레기통을 뒤져 가며 읽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가 웃었던 것처럼 레슬리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편지는 레슬리를 위해 써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엘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눴구나 하고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늘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편지를 써 주기를, 그리고 그 편지를 읽으며 자신도 웃어 보기를, 늘 바라고 있었다.

첫 번째 편지는 가슴이 아려 오게 했지만, 두 번째는 어떨지 몰라 레슬리는 눈을 반짝 떴다.

‘그런데 누구지?’

서올리에게서 조심스레 편지를 건네받으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서올리가 뭐라고 말해 주기도 전에 빠르게 편지 봉투를 살펴 가문의 인장을 찾아보았다.

크림색에 푸른색이 입혀진 편지는 여태 레슬리가 본 편지 중에서 가장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 편지 한가운데에 찍혀 있는 인장.

‘아이테라 대공가다!’

콘라드 경이야. 레슬리가 반짝거리는 얼굴로 손을 내밀자 서올리가 페이퍼 나이프도 레슬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조심하셔야 해요.”

서올리는 걱정이 되는지 작은 잔소리를 붙였지만, 레슬리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가 받던 편지처럼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고, 페이퍼 나이프를 써서 열어야 하는 편지는 처음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찌이익― 페이퍼 나이프에 편지 봉투가 뜯기고, 레슬리는 천천히 반쯤 접혀 있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상쾌한 향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콘라드 경 냄새다.’

평소 콘라드가 곁에 있을 때 풍기는 냄새였다. 비 온 후 부는 바람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좀 더 명확한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레슬리는 잠시 단어를 고민하다가 편지를 펼쳤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편지 봉투와 똑같은 크림색의 편지지 가장 윗부분에는 유려한 글씨로 ‘레슬리 양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그 부분만 읽었는데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엘리에게’가 아니었다.

“아.”

하지만 첫인상과는 다르게 편지의 내용은 조금 서글픈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다음 신학 수업은 뒤로 미루고 싶다는 편지였다.

‘이름…… 제대로 말해 주지도 못했는데.’

성을 받고 나서 첫 만남이라 기대했었다. 이번엔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줘야지. 레슬리 스페라도가 아니라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라고, 그렇게 인사해야지. 그렇게 기대했었는데.

순식간에 기대감이 무너져 내렸다.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가에 있을 때부터 기대하고 있던 편지가 이런 내용이라 실망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레슬리의 우울한 표정을 보고 대강의 내용을 짐작했는지 마델과 서올리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마델이 방긋 웃음을 머금었다.

“아가씨, 답장을 쓰지 않으실래요?”

아직 편지를 꼭 쥐고 있는 레슬리가 그 말에 고개를 들고 마델과 시선을 맞췄다.

“편지?”

“네! 지금 마음을 적어서 아이테라 공작님에게 보내도록 해요.”

“지금의 마음을…….”

레슬리는 다시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마델이 슬그머니 다시 레슬리에게 물었다.

“어떤 마음이 드세요?”

“수업이 취소돼서 조금은 서운해…….”

레슬리의 대답에 마델과 서올리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슬리의 얼굴이 어두워지니 제안은 했는데,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몰랐었다.

“그러면 그걸 써서 보내 볼까요?”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올리는 재빠르게 제나에게서 셀바토르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지를 받아 왔다.

“다음엔 번화가에 나가서 예쁜 편지지를 사 봐요. 압화된 꽃이 들어간 것도 있고, 처음부터 향을 입힌 편지지도 있어요. 색도 다양해서 아가씨의 눈 색을 닮은 라일락색 편지지도 많아요.”

“정말?”

“그럼요.”

레슬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올리는 손을 쉬지 않고 편지지와 잉크, 그리고 깃펜을 레슬리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깃펜을 쥔 레슬리는 편지지를 내려다보며 굳어 버렸다.

“아가씨?”

마델이 뭔가 이상해 레슬리를 부르자, 레슬리가 시선을 맞추며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 잘 알 수 없어서.”

하고 싶은 말과 알리고 싶은 마음은 넘쳐 나는데, 그걸 막상 쓰려니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차라리 철학서를 외워 전부 쓰는 게 낫겠어.”

레슬리는 빈 편지지를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철학서를 전부 외우는 건 자신 있으니까. 고작 요만한 편지지 따위 금방 가득 차 버릴 것이다.

레슬리가 고민에 빠지자, 마델과 서올리도 같이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들도 편지는 많이 주고받았지만 이번 상대는 귀족이었다.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고민하던 마델이 슬그머니 제 의견을 흘렸다.

“일단 날씨 이야기를 써 보는 게 어떨까요?”

날씨라.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연무장을 돌 때, 조금씩 떨어지던 눈송이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눈……이 많이 오고 있어요.”

레슬리가 조심스레 적어 내리자, 서올리가 응원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업이 취소돼서 아쉽다는 말을 적어 주세요.”

“응,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레슬리는 천천히 편지를 채워 나갔다.

마델과 서올리가 제나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비워도 레슬리는 계속 편지를 써 내려갔다. 너무 고심하다 몇 번은 깃펜에서 잉크가 줄줄 새 버려 새로 쓰기도 하고, 몇 번은 문장을 틀려 다시 쓰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 썼다.”

휴, 작게 숨을 내쉬며 레슬리는 방긋 웃었다. 실패해 구겨 버린 편지지가 주변에 한가득이라서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곧 설렁줄을 당겨 편지를 봉할 것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서올리가 실링왁스를 가지러 간 사이 레슬리는 다시 한 번 더 편지를 읽어 내렸다. 틀린 단어는 없는지, 이상한 내용은 아닌지.

그렇게 몇 번을 읽어 내리는데, 편지의 맨 밑에 남은 여백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잠시 그 여백을 바라보다 레슬리는 다시 깃펜을 들었다.

다음에 오시면, 제 이름을 전부 말해 드릴게요.

-레슬리가.

***

“도련님.”

마침 복도를 지나고 있던 콘라드는 그윈의 목소리에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윈이 은쟁반 위에 놓인 한 통의 편지를 콘라드에게 내밀었다.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그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온 편지일까. 신전인가? 궁금함이 담긴 손길로 콘라드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편지에 찍힌 셀바토르 공작가의 인장을 보는 순간부터 궁금증에 손길이 빨라졌다.

‘정말 레슬리 양이네.’

프리트가 열이 오르는 바람에 이번 수업은 쉬겠다고 편지를 보낸 게 어제였는데.

비록 프리트는 가도 괜찮다고 떠밀었지만, 콘라드는 수업을 취소하기로 했다. 지금 어머니는 친정의 일로 자리를 비웠고, 아버지는 침몰당한 무역선으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자신마저 가 버리면 프리트는 내심 상처를 받을 게 뻔했다.

그윈과 하녀들이 있다며 다시 프리트가 콘라드를 떠밀었지만 콘라드는 아직 어린 동생이 나을 때까지 저택에 있기로 했다. 그래서 어제 셀바토르 공작에게 편지를 보내는 김에 레슬리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설마 답장을 받을 줄이야.’

어떤 내용일까. 콘라드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어보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에 그윈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지만, 제 작은 주인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콘라드 경.

편지의 첫머리를 읽는데, 또박또박하고 어딘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편지 곳곳에 잉크가 번진 자국이 있는 걸로 봐서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쓴 듯했다.

콘라드는 한 장짜리 편지를 단숨에 읽어 내렸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말과 이런 날에는 코코아를 마셔야 한다는 말, 그리고 수업을 쉬게 되어 아쉽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추신처럼 적혀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에 오면 제 이름을 전부 말해 드릴게요.”

콘라드는 괜스레 그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 읽어 보았다. 그래, 이름을 이제 떳떳하게 말해 주시겠구나. 이제 레슬리는 축복의 이름도 가지고 있었고 스페라도가의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저번처럼 부끄러워하며 이름만 말하지 않겠구나.

자랑스럽게, 그러면서 조금은 우쭐거리며 제 이름을 소개할 레슬리가 너무도 손쉽게 그려져 콘라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콘라드의 아버지, 아이테라 대공이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어디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지, 반듯한 외출복 차림의 아이테라 대공은 자신의 첫째 아들을 무덤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콘라드가 손에 들고 있는 편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건 누구에게서 온 편지지?”

“신전입니다.”

콘라드는 황금색 눈동자에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슬슬 사제님들이 옛 분쟁 지역으로 봉사를 나갈 시기라, 호위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아버지가 고개만 끄덕인다면 바로 보여 주겠다는 듯 콘라드가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테라 대공은 그저 말없이 몸을 돌려 그윈을 바라보았다.

“그윈, 마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 중요한 손님을 만나느라고 늦을 거다.”

아들에게는 답이 없었으면서 그윈에게는 늦을 거란 언질까지 준 아이테라 대공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쩌다 보니 아이테라 대공과 콘라드의 사이에 낀 그윈은 안절부절못하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도, 도련님…….”

“괜찮아, 그윈.”

콘라드는 눈이 내리는 차디찬 날씨에 땀을 절절 흘리는 그윈을 바라보며 웃었다.

“알고 있어. 이건 다 풍랑 때문이잖아.”

그래, 이건 다 풍랑 때문이었다. 무역선을 가라앉힌 그 풍랑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주위에서 불기 시작한 풍랑.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철산과도 같았던 아버지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을 콘라드는 어렴풋이 알아챘다.

***

아이테라 대공의 저택을 빠져나온 마차는 한참을 달리고 달려 한 허름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아이테라 대공은 동전 몇 개를 마부에게 건네주었다.

“추우니 적당한 곳에 가 있게.”

그 말에 마부는 동전을 받아 들면서 넙죽 고개를 숙였다.

‘오늘 친구분을 만나시는 건가?’

마부가 마차를 몬 이 저택은 귀족들의 사교장으로 자주 이용되는 저택이었다. 수도 몇 곳에는 이런 저택이 있었는데, 그중 한 저택에 아이테라 대공이 들른 것이었다.

‘뭐가 되었든 난 좋지.’

이 정도 동전이라면 근처 찻집에 들어가 점원과 노닥거려도 되었고, 아니면 술집에서 가볍게 술 한 잔과 식사를 즐겨도 남는 금액이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동전을 받아 든 마부가 적당한 찻집을 찾아 떠나자 아이테라 대공은 발을 옮겨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시가 냄새가 저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실 이 저택은 아이테라 대공이 방문을 꺼리는 저택 중 한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다들 도박과 사채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냄새가 지독한 시가가 유행이었으니까. 거기다 이곳은 스페라도 후작이 빈번히 드나들던 저택이기도 했다.

눈살을 찌푸린 아이테라 대공이 시가를 피워 대며 천박한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를 재빠르게 지나치려는데, 대공을 알아본 한 사람이 크게 대공을 불렀다.

“아이테라 대공님!”

술과 담배 때문에 시뻘건 얼굴의 남자는, 라본 백작이었다. 그는 휘적휘적한 걸음걸이로 아이테라 대공에게 다가왔다. 옷에 술을 엎질렀는지, 그가 걸을 때마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풍겨 왔다.

“아이테라 대공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와중에 발음만은 또박또박했고, 행동 역시 흐트러짐이 없었다. 잠시 손을 내미는 라본 백작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아이테라 대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라본 백작도 오랜만이군. 최근 재판장에서 활약했다지.”

“아하하하!”

그 말에 라본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저 멀리 앉아 있던 사람들마저 놀라 그를 바라볼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그렇죠. 제가 이번 귀족 재판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라본은 뭐가 그리도 웃긴지 몇 번이나 주저앉으며 폭소했고, 아이테라 대공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술이 과한 것 같소, 백작.”

“아니, 아니, 아닙니다.”

그 말에 라본은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면서 웃더니 아이테라 대공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떤 역할을 한지 아십니까. 셀바토르 공작님에겐 죄송하지만, 제가 막을 내리는 역할을 좀 했습니다. 네, 네. 그렇고말고요.”

라본은 토할 것 같은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아이테라 대공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스페라도 후작님이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얼마나 좋던…… 아니, 아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재판 이후 술독에 빠져 계신다고 하던데, 친우 된 도리로 같이 술독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필요 없는 말까지 줄줄이 쏟아 내는 라본 백작을 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는 왜 이딴 곳을 만남의 장소로 잡아서 자신을 이리도 곤란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스페라도 후작이 요즘 묘한 일을 하더군요. 제 하인이 편지를 가지러 갔었는데, 정원을 파헤치고 이상한 정자를 짓기 시작했다더라고요……. 그 정자가 또 이상하대요. 히끅.”

슬슬 목소리에도 취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아이테라 대공은 짜증이 난 눈길로 라본 백작을 바라보았으나 그를 쉽게 내치지는 못했다. 어엿한 귀족이기도 하고, 지금 이 저택에는 아직도 십 수 명의 사람들 이 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내친다면 좋지 못한 소문이 돌 것이다.

“지금 정원을 꾸밀 때가 아닌데 말입니다. 스페라도 후작의 그 여유로움은 참 좋아요, 좋아.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대공님은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친우의 초대를 받았지. 이튼 백작 말이네. 새 오페라가 극장에 올라설 때니까.”

“아하! 이튼 백작님! 언제 저도 모임에 한번 끼워 주십시오. 저도 오페라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이테라 대공님……. 우웩!”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라본 백작이 크게 헛구역질을 하였다. 천만다행인지 그는 토하지는 않았지만 털퍼덕, 바닥 위에 쓰러졌다. 그와 같이 온 일행처럼 보이는 몇 명이 라본 백작을 끌고 휴게실로 간 후에야 아이테라 대공은 라본 백작과 떨어질 수 있었다.

라본 백작이 설치던 방을 지나, 긴 복도로 들어서기 전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라본이 잡고 흔든 장갑은 대공에게 있어 이미 쓰지 못할 물건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복도 가장 끝 방, 푸른색의 문 앞에 서자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이테라 대공을 맞이했다.

“그분은 이미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던 시가 냄새가 사라졌다. 대신 은은한 향냄새와 가림막이 쳐진 공간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다시는 이런 만남을 가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단호한 대답에 가림막 뒤에 숨은 사람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가요.”

“거절하겠습니다. 계속 편지를 보내오시기에 그걸 막으러 온 것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더니 아이테라 대공은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그게 그녀의 눈에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세라도 고쳐 잡는 것처럼 보여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이 자리에 나왔으니 제가 곤란할 편지는 그만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황가에 분란을 가져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분란이라니요. 말이 이상해요, 아이테라 대공. 그저 늘 일어나는 권력 싸움이에요.”

여자는 미소 지으며 천천히 말을 흘렸다.

“슬슬 피스토레 황제 폐하는 황태자를 정할 때가 되었고, 나는 내가 미는 자가 황제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늘 일어나는 그렇고 그런 싸움인데.”

여자의 말은 진실이었다. 피스토레 황제는 오랫동안 제1황자 아렌도와 제2황자 콘스텐 사이에서 황태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었고, 이미 1황자와 2황자의 사이에서는 은밀한 기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니 여자의 말은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어찌 보면 그저 평범한 권력 싸움이었지만, 아이테라 대공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 뒤에 뭔가를 더 숨기고 있으니까요. 위험한 냄새가 납니다. 대화는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하죠.”

아이테라 대공은 가림막 뒤에 있는 여자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더는 할 말이 없었으니까. 여기까지 들어 준 것만 해도 상대방의 지위를 인정하고 최대한 인내를 발휘한 결과였다. 자신은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먼저 대화를 끝마친 아이테라 대공은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상대방이 한마디만 꺼내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위에 사람이 있는 게 거치적거리지 않습니까, 대공.”

그 말에 아이테라 대공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림막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지금 발언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입니다. 알고 계신 겁니까?”

“모를 리가요. 그래서 자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야기를 더 들어 볼 건가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이 방을 빠져나가 피스토레 황제 밑에 무릎을 꿇고 사는, 그런 삶을 영위할 건가요.”

대공은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남자니까.

가림막 뒤의 여자는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피스토레 황제의 할아버지인, 선선대 황제에게는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둘 중 한 명만이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둘이 얼마나 사이가 좋았든, 좋지 않았든 간에.

두 명은 황제의 자리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였고, 오랜 싸움 끝에 어이없는 실수로 동생은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쌍둥이 동생임에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선선대 황제는 그에게 대공의 자리를 내렸고, 그는 새 성을 하사받아 초대 아이테라 대공이 되었다. 그게 현 아이테라 대공의 아버지였다.

“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나, 그래도 자신의 머리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대공!”

아이테라 대공은 진심으로 황가를 모시고 있는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실수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아 왔고, 그의 피는 계속해서 그에게 속살거렸을 것이다. 저건 네 자리라고.

왕족, 그리고 황족 들은 그 피의 탓인지, 자신이 언제나 그 정점에 서 있어야 했다. 그 성격은 이제 막 핏줄이 갈라져 나온 방계에도 해당하였다. 그러니 자신의 제안은 달콤하다 못해 중독적일 것이다.

아이테라 대공은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 침묵은 곧 긍정이 되어 그녀에게 들려왔다. 소리 내 웃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은 여자는 대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일 저를 돕는다면, 아이테라 대공가를 황권의 밑에서 독립시켜 드리지요. 대공국을 세워 드리겠다는 소리입니다.”

그곳에서 너는 왕이 되리라. 비록 르카디우스 제국의 황제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좁디좁은 우리 안에서는 누구도 대공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제가 그딴 제안에 흔들릴 거라 생각했습니까. 생각보다 더 어리석은 분이었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이테라 대공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모르고 지나갈 만큼 미세하였으나, 여자는 빠르게 그걸 간파하였다.

“어쩔 수 없군요.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봅니다.”

지금은 저 고지식한 아이테라 대공에게 숨을 돌릴 시간을 줄 때였다. 그리고 다른 미끼도 던져 볼 때였다.

“그러고 보니 대공비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안녕할 리가. 스웰라 대공비는 지금 케아리엔 백작 영토에 내려가 있었다. 그녀의 친정이자 곡창지대로 유명한 케아리엔 영토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그걸 수습하기 위해 사제들을 데리고 내려간 것이었다. 아내를 걱정해 계속 편지를 보냈지만 요즈음 들어서 답장하는 기간이 점점 눈에 띄게 길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불안함을 느끼는데, 그녀가 아이테라 공작의 불안함을 파고든 것이다.

“내가 본디 버려야 할 것들을 거의 다 버리긴 했지만, 필요한 것은 가지고 있었지요. 그중 하나가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자는 가림막 뒤에서 환하게 웃었다. 비록 아이테라 대공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는 못해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동맹이 된다면 나는 더 쉽게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아이테라 대공.”

아이테라 대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

사각거리는 소리가 온 방에 울려 퍼졌다. 늦은 밤이었지만, 레슬리 방의 등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5대 르카디우스 황제는 열다섯 권의 일기를 기록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외워지지 않는 역사서의 부분을 몇 번이나 쓰고, 읽고, 생각하다가 레슬리는 깃펜을 내려놓았다. 역사는 다 좋은데 자잘하게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그 점이 시간을 자꾸 잡아먹게 했다.

“휴우우.”

자신이 왜 다섯 번째 황제가 쓴 열다섯 개의 일기 제목을 전부 외워야 하는 걸까. 자신이 5대 황제였다면, 남이 내 일기를 보고 외우는 게 싫었을 텐데.

잠시 머리가 지끈거려 레슬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아니야.’

아라벨라의 후보 시험. 레슬리는 거기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몰랐다.

‘실망하게 해 드려서는 안 돼.’

그리고 그게 지금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가에 있을 수 있는 이유였고 이걸 잘하면 계약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었다.

‘계약은 신중히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합의가 없으면 그 내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도장을 찍으면 무를 수 없다는 걸 늘 명심하세요!’

레슬리는 계약 때문에 찾아 읽어 본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가 없으면 바꿀 수 없다는 말은 합의가 되면 내용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번 일을 잘해서, 다시 이야기해 보자.’

이번엔 계약 공녀가 아니라 진짜로 받아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해 보자. 그리고 일단 그러려면 여기 있는 열다섯 권의 책을 전부 외워야 했다.

“첫 번째 책은 《도나서》라고 불렸고……. 주로 이 책은 전술을 기록한 것이 높은 평가를…….”

툭.

열심히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는데, 갑자기 책상 위에 붉은 피가 뚝 하고 떨어졌다. 무리했는지,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책에 안 묻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슬리는 책상 밑에서 못 쓰는 천 뭉치를 꺼내 책상에 묻은 피를 닦고서 익숙하게 코를 막았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도 종종 코피를 터트렸던지라, 덤덤하게 다시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주 코피가 쏟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나는 코가 약한 편인 것 같아.’

그게 코피를 보고 든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내 레슬리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책을 바라보았다. 집중, 집중하자. 열다섯 개나 되는 책을 전부 외워야 오늘 잘 수 있을 것이다.

‘좋아. 해 보자. 나는 할 수 있어.’

“그리고 두 번째 책은 《관로》라 불렸는데…….”

오래도록 레슬리의 방에는 책을 읽어 내리는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레슬리?”

사이레인에게 있어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은 아침이었다.

요 며칠 사이 레슬리 옆에 앉기 경쟁에서 연달아 밀려난 사이레인은 어제 바타를 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하소연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고,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던 바타도 불안한 눈빛으로 오븐을 힐끗힐끗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넘게 바타를 잡고 하소연을 한 결과, 사이레인은 레슬리가 좋아한다는 과일 젤리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오늘 아침 레슬리 앞에서 과일 젤리를 보여 주자, 레슬리는 눈동자를 빛내며 자연스레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귀여워.’

두 뺨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제나가 뒤에서 식사 전에 간식부터 주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으나, 사이레인은 그 잔소리를 귀에서 밀어냈다.

한번 볼을 콕 찔러 보면 안 될까. 귀찮게 생각하려나. 그런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그건 제 앞에 앉아 있는 베스라온도, 그리고 루엔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맛있어요.”

레슬리는 네 사람을 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눈에 가득한 웃음이, 터질 듯한 볼이 너무너무 귀여워 사이레인은 제 식사도 잊어버린 채 몸을 떨었다.

“크흐흐흐.”

역시, 4층을 전부 레슬리를 위한 방으로 꾸며야 했다. 정 방을 쓸 용도가 없으면 방 몇 개를 이어 붙여 커다란 놀이터를 만들어 주면 되겠지. 쓸데없이 큰 정원 한 곳을 레슬리를 위한 정원으로 꾸며도 되겠다. 그리고 온실과 방 안에는 뭘 채워 넣지?

‘여자아이들은 뭘 좋아하더라?’

꽃과 달콤한 것, 인형, 보석……. 아니, 보석은 남녀 공통으로 좋아했지. 뭐, 어때 일단 넣고 보자. 또 뭘 좋아하더라? 사이레인의 시선이 아직 졸린 듯 눈을 감고 스튜를 먹고 있는 자신의 아내에게 닿았다.

검! 그래, 검이다. 아셀라는 검과 새로운 무기라면 늘 눈을 반짝 빛냈다. 아셀라가 그러니 분명 레슬리도 그렇겠지.

만족스럽게 답을 내린 사이레인은 다음 외출 때, 검을 사다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사이 아셀라가 밀려오는 졸음에 비틀거리자, 사이레인은 잽싸게 아내님을 받아 냈다.

요즘 일이 많아져서 그런가. 어디서 기력 회복에 좋은 약초라도 구해다가 먹여야겠다. 사이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레슬리에게 선물할 검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 어리니 작고 예쁘면서 날이 제대로 선 검이 좋겠지. 단검류도 괜찮겠다. 오랜 용병 생활로 검을 골라내는 건 자신이 있었다.

대장간에 가는 김에 제 도끼도 한번 상태를 확인해 봐야겠다. 꾸준히 관리는 해 주었지만, 사용한 지 오래되어 조금은 불안했다.

혹여나 스페라도 후작이 분쟁 지역에 발을 내디디면 깔끔하게 잘라 줘야 할 게 아닌가. 그때 날이 무뎌져 있다면, 자신도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도 슬플 것이다.

‘그래,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분쟁 지역에 발을 내딛겠지.’

그때를 노리고 있자. 숨을 참고 기다리는 건 자신의 특기였다.

“어? 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루엔티가 크게 소리 질렀다. 놀란 사이레인이 루엔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레슬리가 멍하니 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코에서 쉴 새 없이 핏물이 뚝뚝 떨어져 크림색 원피스를 적시고 있었다.

“꺅! 아가씨!”

뒤에 서 있던 마델과 다른 하녀들이 재빠르게 천을 가져와 레슬리의 얼굴을 닦았고, 졸음에 빠져 있던 공작도 일어나 레슬리의 상태를 살폈다. 그건 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이레인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레슬리는 혼자 담담했다.

오늘 또 코피가 터질 걸 알고 있었다. 한번 코피가 나면 며칠 동안 계속해서 피가 흘렀으니까.

이 상황에서 레슬리가 그저 안타까웠던 것은 자신의 어여쁜 크림색 원피스였다.

‘밝은색은 피를 빼도 흔적이 남던데…….’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코피가 났을 때 레슬리는 저 혼자 옷에 묻은 피를 빨아야 했다. 처음에는 하녀들에게 부탁해 봤지만 그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을 대충 묻혀 와 ‘빨았어요.’ 하고 다시 레슬리에게 던져 주었다.

레슬리는 몇 번의 실패 후, 피는 따듯한 물보다는 찬물에 잘 빠진다는 걸 알아냈고, 밝은색은 빨리 피를 빼도 그 흔적이 남아 보기 싫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처음 입은 크림색 원피스에 핏자국이 남은 것이다.

그냥 검은 옷을 입을걸. 오늘따라 이 원피스가 눈에 밟혀 입었는데, 잘못된 선택이 되어 버렸다.

속상한 마음에 레슬리는 컵에 든 물을 손에 묻혀 벅벅 원피스 자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셀바토르 공작이 레슬리의 손을 잡았다.

“레슬리, 이건 네가 할 필요가 없는 일이란다. 제나!”

“하지만 빨리 빼지 않으면 자국이 남을 거예요.”

레슬리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원피스는 급한 게 아니란다. 지금 급한 건 네 건강이지.”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손수 레슬리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혹여나 청록빛 로브에 피가 묻을까 레슬리가 몸을 뒤로 젖히는데, 공작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피를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제나, 자일로를 데려와야겠어.”

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레인이 거칠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어깨에는 사람이 들려 있었는데, 이상한 신음을 낸 채 들린 사람은 셀바토르 공작저의 주치의이자 저택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자일로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다 잡혀 온 건지, 얼굴에 치즈가 붙어 있는 자일로는 허어억 소리를 내며 몸을 떨고 있었다.

아까 피를 보자마자 어딜 가는 건가 했더니, 자일로를 데리러 다녀온 모양이었다.

“레슬리! 자일로를 데려왔단다!”

그러면서 자일로를 큰 소리 나게 레슬리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슬슬 제나와 함께 은퇴를 고민하던 자일로는 갑자기 닥쳐온 충격에 무릎을 잡고 잠시 몸을 떨었다.

“그래서…… 아가씨가 코피를 쏟으셨다고요?”

아직 천 뭉치로 코를 막고 있는 레슬리를 요리조리 살펴본 자일로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로입니다.”

“과로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니, 누군가가 자신에게 처음 해 주는 말이었다.

“네, 과로. 최근 몇 시에 주무셨습니까, 아가씨?”

자일로의 물음에 레슬리는 대강 셈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샛별이 뜨기 전에는 잤어요.”

그 말을 듣고 다들 신음을 삼켰다. 샛별이라니. 한밤중을 훌쩍 넘긴 때였다. 거기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해가 뜨기 시작한다.

모두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레슬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자면 괜찮아요. 그보다 더 늦게 자면 다음 날 피곤하긴 한데……. 그 전에 자면 그래도 움직일 만해서…….”

아, 이건 아닌가? 레슬리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아니구나.

“마델.”

레슬리의 변명은 오히려 다른 효과를 가지고 왔다. 나지막이 마델의 이름을 부른 루엔티는 마델을 보며 씩 웃었다.

“당분간 레슬리 방에 양초와 모든 등을 빼 버려.”

“네, 알겠습니다, 루엔티 님.”

“서재 문도 일정 시간 외에는 잠가 두도록.”

“방에 있는 양피지와 잉크도 전부 가져와. 아니, 책상을 빼 버리지.”

거기에 베스라온에 사이레인까지 합세했다. 사이레인은 당장이라도 레슬리 방에 있는 책상을 부숴 버릴 기세였다.

졸지에 등불도, 공부할 수 있는 책도 빼앗겨 버린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리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베스라온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저, 저는 공부를 어떻게 해요?”

그리고 그 절박한 외침의 답은 너무도 간결한 것이었다.

“하지 마.”

“안 해도 돼.”

“그런 건 필요 없단다.”

동시에 대답한 세 남자를 바라보던 셀바토르 공작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레슬리, 그런 건 너에게 중요하지 않단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작은 웃으며 제나를 바라보았다. 그 웃음에 제나와 몇 사용인들이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말대로 서재에 자물쇠를 잠그고 레슬리 방에 있는 작은 책상과 양피지를 가지러 가는 모양이었다.

“안 돼요!”

이번에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에게 매달렸다. 공작의 팔을 꼭 껴안고 안 된다는 듯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방에 있는 책상하고 양피지, 잉크는 가져가지 말아 주세요…….”

말끝을 흐리며 레슬리는 고개를 살짝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편지를 써야 한단 말이에요…….”

안 그래도 레슬리는 요즘 편지를 주고받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상대는 삼촌인 테론과 콘라드였다. 매일매일 편지를 보내는 레슬리가 귀찮을 만도 하건만, 두 사람은 그런 내색 없이 꾸준히 답장을 해 주고 있었다.

특히 콘라드는 레슬리가 좋아할 법한 이야기를 가득 담아 보냈고, 그건 레슬리의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편지?”

공작이 묻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테론 삼촌과 콘라드 경이랑 편지를 주고받고 있어요.”

“안 돼!”

레슬리의 대답과 함께 사이레인이 괴성을 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곰이 꿀단지를 빼앗긴 듯 날뛰는 모습에 제나가 놀라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안 돼! 테론은 되지만, 콘라드는 안 돼! 책상도 부숴 버려! 내, 내 딸은 안 돼!”

베스라온은 자기는 말릴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고, 루엔티는 잽싸게 자신이 먹던 그릇을 들고 대피했다.

“안 되긴.”

그런 사이레인을 제압한 건 가주, 셀바토르였다. 가볍게 사이레인의 이마를 찰싹 때리자, 곧 곰은 순순한 개처럼 변했다.

“여보야…….”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남편을 제쳐 두고 셀바토르 공작은 손을 내저었다.

“일단 그 방에 있는 테이블과 편지지는 내버려 두고 전부 치우렴. 그리고 레슬리, 넌 오늘 강제 휴식이란다.”

강제 휴식.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너무 놀라 공작과 사이레인에게 ‘정말요?’ 하고 묻자, 둘 다 웃으면서 ‘정말.’ 이렇게 답을 해 주었다. 두 사람은 물론 베스라온과 루엔티 역시 강경해 보였다.

결국 강제 휴식을 받은 레슬리는 멍하니 정원에 앉아 베스라온이 선물해 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정원 의자에 앉아 있게 되었다.

‘뭘 해야 하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펴보지 않아도 되고, 공부도, 매 맞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

처음에 이 시간을 받자마자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10분을 넘게 복도에 서 있었다.

책이라도 읽을까 했더니 자신의 서재는 물론 다른 서재의 입장도 금지당했고, 체력 단련이라도 해 볼까 했더니 하르트가 웃으며 레슬리를 쫓아냈다. 마델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다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레슬리는 정원 의자에 앉아 다리를 동동 굴렸다. 예쁜 정원이었지만, 벌써 1시간째 보고 있다 보니 슬슬 질리고 있었다.

‘잠을 잘까?’

그런데 낮잠을 자는 건 시간이 좀 아까운데. 그렇다고 이렇게 정원만 보고 있는 것도 아깝고…….

“레슬리.”

그런데 저 멀리서 구원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갑주와 망토를 차려입은 그에게 자동으로 쪼르르 달려가 덥석 안겼다. 익숙한 듯이 레슬리를 안아 든 베스라온이 차디찬 바람에 나부끼는 은발을 쓰다듬었다.

“추운데 나와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정원을?”

그 말에 베스라온의 암녹색 시선이 정원을 훑었다. 눈이 쌓이는 겨울의 정원은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긴 했지만, 계속해서 보고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구나.”

베스라온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사실이었으니까.

그러자 베스라온의 눈가가 뭔가를 생각하듯 가늘어졌다.

“흠……. 그럼 황궁에 가 볼래? 정확히는 린체 기사단에 가서 구경할래, 레슬리?”

“린체 기사단이요?”

“그래, 지금 갔다가 중요한 것만 처리하고 나올 거야. 그사이 황실과 기사단을 구경하고, 갈 때 같이 집에 가자꾸나. 가면서 코코아도 사 줄게.”

코코아. 그 말에 레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마델과 베스라온과 먹었던 케이크도 맛있었는데. 그때 생각을 하니 눈사람 쿠키 때문에 조금 부끄럽기도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래, 그럼 가자. 마침 잘되었어! 너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거든. 다들 널 보고 싶어 해서.”

베스라온은 성큼성큼 레슬리를 안아 든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레슬리의 무게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루엔티가 한번 안아서 이동시켜 준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그때보다 더욱 안정적이었다.

‘미안해요. 루엔티 오라버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면 루엔티가 화를 낼 것 같아 레슬리는 조심스레 속으로 사과했다. 루엔티는 마법사니까 자기 생각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레슬리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토끼 인형으로 제 머리를 가렸다. 이러면 못 읽지 않을까?

“어떤 분이 저를 보고 싶어 하나요……?”

하지만 궁금증은 두려움을 이겨 냈다. 토끼 인형 귀 사이로 슬그머니 시선을 맞추며 묻자 베스라온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저번에 너를 마차에서 구해 줄 때 같이 있던 놈들이야. 그중 한 명은 재판에 증인으로 서기도 했고.”

그제야 레슬리는 자신의 재판 때 증인으로 섰던 기사 한 명을 떠올렸다. 맞다, 린체의 기사단이라고 했었지.

마차로 향하던 중 레슬리는 급하게 베스라온의 망토 깃을 잡았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저, 베스라온 오라버니. 가기 전에 맛있는 거 사 가도 될까요?”

***

“아, 베스라온 단장님.”

베스라온이 린체 기사단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미리 와 있던 기사 몇이 그를 반겼다. 다들 답답한 갑주를 벗어던지고 편한 복장으로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이것만 좀 봐 주시면…….”

서류를 들고 베스라온에게 다가가려 했던 한 기사가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쩍다는 눈길로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베스라온 손에 주렁주렁 들려 있는 케이크와 디저트가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안녕하세요.”

뒤에서 쏙 튀어나온 하얀 물체 때문이었다. 베스라온의 몸에 완벽히 가려져 있던 소녀를 보자마자 기사 몇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맹렬하게 레슬리를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세상에!”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팽개치고 베스라온의 발치 밑에 모여든 기사들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작아!”

“귀여워.”

그러더니 마치 귀여운 길고양이를 보듯 손을 내밀기도 했다. 베스라온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밟아 버리겠다는 듯 발을 들자 손은 잽싸게 사라졌다.

“다들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알고 있겠지만, 내 동생 레슬리다.”

베스라온이 가볍게 소개하고 레슬리를 향해 턱짓하자 레슬리는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틸레이얼 자작 부인에게서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손에 들고 있는 토끼 인형 때문에 조금 모양새가 망가졌지만.

그래도 어떤가.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였다.

“방금 소개받은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저를 마차에서 구해 주시고, 증언까지 서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각해 보면 린체의 기사단은 레슬리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레슬리의 정중한 인사를 받자 증인으로 섰던 남자가 이런 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도움이 필요한 분께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맞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셀바토르 공녀님.”

다른 기사들 역시 왁자지껄하게 레슬리를 감싸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의 반은 스페라도 후작에 대한 욕이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레슬리가 귀여워 죽는 이야기였다.

대놓고 칭찬을 듣자 다시 부끄러워져 레슬리는 재빠르게 선물로 사 온 디저트들을 내밀었다.

“저, 이거 감사의 뜻으로 사 온 거예요.”

“단장님이 무슨 바람으로 이런 걸 가져오신 건가 했더니 공녀님 덕분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단장님이 이거 들고 올 때 다른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잠시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한 기사들을 무시하고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 호위를 붙여 줄 테니, 잠시 황궁 구경을 하고 오렴. 갔다 오면 직접 기사단을 내가 소개해 주마.”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베스라온이 말했다. 레슬리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론.”

“넵!”

베스라온의 말에 한 기사가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물고 벌떡 일어났다.

레슬리를 위해 증언대에 선 남자였다.

“보고 사항은 다 끝났겠지? 레슬리를 잠시 부탁하지. 근처 정원이라도 좀 안내해 줘. 도서관도 괜찮고.”

“넹, 알겡승니당.”

케이크 한 조각을 우물우물하며 잽싸게 망토를 집어 든 펠론이 레슬리 근처까지 왔을 때는, 입에 물려 있던 커다란 케이크 조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법인가? 레슬리가 놀라 펠론을 바라보는데 펠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가실까요. 셀바토르 공녀님.”

펠론은 익숙하게 레슬리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했다. 겨울인데도 꽃이 피어 있는 정원과 황금으로 만든 동상이 양옆으로 쭉 늘어진 복도, 햇빛에 따라 색이 바뀌는 창문 그리고 얼지 않고 가동되고 있는 엄청나게 큰 분수. 모든 것이 레슬리에겐 신기해 보였다.

“역대 황제 폐하의 초상화가 있는 복도입니다.”

길고 긴 복도 하나가 초상화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 그리고 그 밑에는 자식들의 초상화가 작게 걸려 있었다.

레슬리는 한 명 한 명을 꼼꼼히 보다가 역사서에서 본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고 새삼 다시 놀라워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 몇 명이 레슬리를 알아보고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펠론이 막아서서 레슬리는 알지 못했다. 그저 초대 황제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분이 초대 황제 폐하군요.”

레슬리는 가장 큰 초상화 앞에 멈춰 섰다. 르카디우스 황실을 의미하는 황금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액자 속의 남자는 더없이 늠름하고도 노련해 보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초대 셀바토르 공작님이지요.”

그 옆에는 초대 황제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역대 다른 황제들보다는 조금 큰 크기의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셀바토르 공작가를 의미하는 암녹색 액자에 끼워져 있었다.

‘어머니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검은 머리라 그럴까. 레슬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본격적으로 초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얼굴형은…… 베스라온 오라버니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레슬리의 뒤에 서 있던 펠론을 불렀다.

“펠론 경. 잠시만…….”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다른 기사 한 명이 펠론을 레슬리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시야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고 펠론이 뛴다면 10초도 걸리지 않을 거리라, 레슬리는 다시 초상화에 집중했다.

‘머리카락 색이 닮았어. 눈매도 어머니와 비슷한 것 같아.’

잠시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의 그림자가 빛을 가렸다. 자연스레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자신 옆에 선 사람을 바라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엘리와 르아였다.

레슬리는 그 둘을 보자마자 속으로 감탄사를 보냈다. 어쩜 인간의 얼굴이 저리도 두꺼울까. 재판이 끝난 지 고작 2주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고개를 들고 황실을 활보하다니.

“휴.”

저절로 숨이 입을 타고 퍼졌다. 그리고 몸을 벌떡 일으켜 펠론 경 쪽으로 가려고 했다.

“지금 도망치는 거야?”

그 말 한마디가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텐데.

레슬리는 고개를 휙 돌려 엘리를 바라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놀랍네. 용케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너무 놀라워. 내가 아는 너라면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엘리가 입꼬리를 뒤틀어 웃어 보였다. 어딘가 패를 숨긴 듯한 얼굴에 레슬리는 눈가를 움찔거렸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미쳤니?”

“응, 내가 보기엔 너 미친 것 같네. 더 할 말 없어.”

다시 몸을 돌리자, 엘리가 거칠게 레슬리의 팔목을 낚아챘다.

“야, 너…….”

“무례를 저지르지 마세요, 스페라도 영애.”

일부러 레슬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목소리를 키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물론, 멀리서 이야기하던 펠론과 다른 기사의 시선도 세 사람에게 닿았다.

“……지금 공녀가 됐다고 유세를 부리나 본데.”

“유세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겁니다. 제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요? 나는 이제 이 제국의 유일한 공녀라고.”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거칠게 엘리의 팔을 쳐 냈다. 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레슬리는 덤덤하게 냉담한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셀바토르 공작가로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으세요. 무례하게 이렇게 사람을 불러 세우지 말고. 그리고 스페라도 영애는 제대로 인사를 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모양이에요. 가장 기초적인 예법서에도 나와 있는 예절인데.”

그제야 레슬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평소의 웃음이 아니라 명백한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 엘리의 지식은 레슬리였으니까. 엘리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와 같은 상태였다.

지나가던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펠론과 기사 한 명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까득. 작게 이를 간 엘리는 고개를 되레 치켜세우더니 레슬리에게 속삭였다.

“네가 언제까지 그 가짜 공녀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셀바토르 공작의 보호 아래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잊지 말렴.”

갑자기 엘리는 레슬리를 보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때마침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마치 성자처럼 엘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레슬리에게 속삭이는 말은 너무도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아무리 네가 셀바토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포장을 해도, 네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스페라도 가문의 것. 네가 그렇게 외치던 살인마들의 피란 말이야. 그 피를 언제까지 네가 숨길 수 있을까?”

후후. 다시 작은 웃음을 흘리며 이번엔 엘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언제까지라 생각하시나요, 셀바토르 공녀님?”

왜 ‘셀바토르 공녀님’이라는 말이 레슬리 귀에는 가짜라고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너희들과 같은 족속이라고?”

“아니야?”

엘리는 다시 비꼬는 웃음을 머금더니, 레슬리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맞잖아.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네 몸속에 흐르는 피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피지. 고귀한 셀바토르 공작가의 피가 아니라. 안 그러니, 레슬리?”

거기까지 말한 엘리는 낮게 웃었다. 분명 목소리도 성별도 다른데 어딘가 스페라도 후작이 생각나는 목소리라 레슬리는 몸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디 두고 보자고. 언제까지 네가 고귀한 척, 하나뿐인 공녀인 척,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는지 말이야. 아, 뻔뻔한 우리 가문의 피라서 계속할 수도 있겠구나!”

엘리는 막 깨달았다는 듯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더니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누구나 녹여 내는, 매력적인 미소를 녹여 눈과 입술에 머금었다.

“그럼 다음에 곧 보자, 내 사랑하는 동생 레슬리. 이 언니는 너의 첫 번째 연극을 뒤에서 응원하고 있을게.”

작게 손 키스까지 날린 엘리는 굳어 버린 레슬리 옆을 웃음소리와 함께 지나갔다. 그 뒤를 쫓아가던 르아의 시선이 레슬리에게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발을 옮겨 엘리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 자리에 남겨진 레슬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어떤 말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일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었는데, 엘리의 입에서 들으니 충격으로 다가왔다.

“공녀님.”

펠론이 나지막이 레슬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만 베스라온 단장님에게 돌아가도록 하죠.”

***

“……지금 뭐라고 했니?”

막 볼일을 보고 돌아온 셀바토르 공작이 맨 처음 마주한 사람은 얼굴을 굳힌 채 자신을 맞이하는 베스라온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하필 잠시 회의를 하는 동안 스페라도 영애를 만날 줄이야. 베스라온은 얼굴을 구기며 미간을 좁혔다.

“설마 이렇게 빨리 회복해 황궁을 돌아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재판이 끝난 지 겨우 2주를 넘긴 시점이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명예 사형이라 불리는 귀족 재판에서 지고, 또 셀바토르 공작가가 요구한 엄청난 금액의 보상금 때문에 제정신을 차리기 힘든 시기였다. 거기다 제 동생과 친딸을 학대한 죄로 곧 내려질 벌도 있었다.

대부분 귀족이라면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저택에 박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스페라도 후작가는 더 빨리 일어섰고, 뻔뻔하게 다시 황궁 출입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레슬리와 마주쳤다.

“……듣기로는 당당하게 도발까지 한 모양이더군요.”

“저런.”

제나에게 털 망토를 건네며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겨우 스페라도 후작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스페라도 후작가가 다시 일어설 줄이야.

“그래서 레슬리는?”

공작의 물음에 제나가 속상하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답했다.

“돌아오시자마자 그냥 방에서 책을 읽으시더군요. 일단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셨습니다만…….”

그건 다행이군. 셀바토르 공작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벌써부터 후작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내가 배상금을 너무 적게 불렀나?”

스페라도 영토에서 얻을 수 있는 3년 치 금액을 불렀는데. 셀바토르 공작은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사실은 말이 3년이지 후작은 그보다 더 오래 고통받을 것이 뻔했다.

평소 스페라도 후작은 제 명예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며 황실만큼 호화스러운 삶을 살았었는데, 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진 빚이 엄청났다.

은행서부터 다른 귀족들, 그리고 몇 남지 않은 가신들에게까지 부끄러움 없이 손을 벌렸고, 그들은 풍족한 스페라도 영토와 명예를 보고 막대한 돈을 빌려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페라도 후작은 셀바토르 공작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 은행과 다른 귀족들은 미친 듯이 독촉 편지를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가신들 역시 은근히 눈치를 줬겠지.

그리고 그건 전부 셀바토르 공작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그렇게 여태 축적한 거대한 빚과 배상금으로, 당분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휘청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정신을 차렸군.”

이유를 찾아보려는 듯 암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제나.”

“지켜보시는 쪽은 아직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는 상환 기간을 뒤로 늦춰 달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무역선이 항구에 도착하면 그 물건을 팔아 보상금을 내겠다고 하더군요.”

무역선이라니? 셀바토르 공작과 베스라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주 수입원은 영토에서 나는 세금과 곡물, 그리고 땔감용 나무였다. 무역은 그의 주 수입이 아니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 있어서 무역은 오히려 계속 자금을 까먹고 있는 분야였다. 그런 상태의 무역선이 도착해 봤자, 배상금과 그 엄청난 빚들을 갚을 정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제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은행과 돈을 빌려준 다른 귀족들 역시 무역선을 핑계로 해서 후에 돈을 갚겠다고 한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무역선이 도착하는 날짜가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봄의 초입에 도착한다고 적혀 있었어요.”

“봄의 초입이라…….”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고개를 들어 창가를 바라보았다. 겨울은 지나가기 전 마지막 힘을 내어 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저 추위가 조금 꺾이고 나면 곧 봄이 올 것이다.

“무슨 생각인 거지, 스페라도 후작은?”

“글쎄요…….”

그 말에 제나는 말을 흐렸다. 그녀조차 스페라도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봄의 초입이라면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요구한 상납 기간보다 조금 뒤였다. 굳이 미루기도 애매한 기간을 스페라도 후작은 편지까지 보내 가며 뒤로 미룬 것이다.

“하지만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그동안 쌓아 놨던 사치품들을 팔기 시작한 것 같더군요. 스페라도 저택이 요 근래 번잡스럽다고 했습니다.”

“흐음. 제나, 베스.”

생각의 정리가 끝난 공작이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누군가가 졸음에 잠긴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제 몸보다 거대한 숄을 두른 레슬리가 인형을 끌어안고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자다가 일어난 것인지 라일락색 눈동자가 졸음으로 가득했다.

“오셨어요?”

하암. 작게 하품한 레슬리는 숄 자락을 바닥에 끌면서 자연스럽게 셀바토르 공작 앞에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자고 있는데 왜 일어났니.”

공작이 물 흐르듯 레슬리를 안아 들고는 어서 자라는 듯 등을 두드려 주자, 다시 레슬리가 작게 하품했다.

“마차 소리가 들려서요. 어머니가 오시는구나 했어요…….”

졸음에 이어지는 말끝이 흐려졌다. 레슬리는 잠이 쏟아져 셀바토르 공작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이런. 셀바토르 공작은 다시 제나에게서 받아 든 털 망토를 레슬리에게 덮어 주며 작게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을 구기고 있던 베스라온도, 제나도 어느새 다시 웃고 있었다.

“졸리면 가서 자야지.”

그 말에 레슬리가 뭔가를 웅얼거렸다. 아마도 공작의 말에 저 나름대로 대답을 한 모양인데, 졸음에 먹혀 잘 들리지 않은 듯했다. 거기다 털 망토를 덮어 주니 순식간에 잠든 듯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본 제나가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레슬리를 맡기고 방으로 올라가라는 의미였다. 그 손짓에 고개를 흔든 공작은 레슬리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머니……. 저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 말에 공작의 걸음이 멈추었다. 뒤따라오던 제나도, 그리고 베스라온도 눈을 크게 뜨더니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부탁이라니, 레슬리의 입에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소풍을 가고 싶어요.”

“……소풍?”

“네, 아니면 공작령에 들러 보고 싶어요……. 책에서 봤는데요. 음,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기억으로 덮으라고…… 써져 있었어요.”

아, 그래서 방에 들어가 책을 보기 시작했구나. 공작은 웃으며 미끄러지는 레슬리를 다시 추켜 안았다. 그러자 레슬리는 한 팔을 공작의 목에 두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이 필요해요. 저, 소풍 꼭…… 가 보고 싶었거든요. 도시락……이라는 것도 꼭 먹어 보고 싶었어요…….”

소풍과 도시락, 그게 레슬리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엘리는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도발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는 그 얄팍한 수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차라리 끌려가 줄까 잠시 생각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스페라도 후작가는 큰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고 제나가 말해 주었으니 최대한 피하는 것이 맞는 듯했다. 그러니 즐거운 일로 이 심란하고도 짜증 나는 마음을 덮어 두자.

‘그래도 좀 충격이었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자신이 스페라도 후작의 피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엘리의 입에서 들으니 새삼 충격으로 다가왔다.

“졸리면 일단 자고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졸음에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느슨해진 손에서 툭 하고 끌어안고 있던 토끼 인형이 떨어졌다.

“소풍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오늘은 자렴.”

그 검은 토끼 인형을 주워 주며 베스라온이 말을 이었다. 공작의 어깨 너머로 베스라온과 눈이 마주친 레슬리는 옅게 웃어 보였다.

“오라버니…… 저는 괜찮아요.”

아까 해야 했던 말인데. 마차에서 해야 했던 말인데, 그때는 기분이 너무 참담해서 말하지 못했었다.

베스라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야 입을 뗐다.

조금 생뚱맞은 때였는지 베스라온의 암녹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아니, 아니다. 내가 너를 잘 신경 써 주지 못한 탓이지.”

하지만 곧 베스라온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공작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는 레슬리의 손에 토끼 인형을 들려 주었다.

“다음에 황궁에 가게 된다면, 내가 직접 소개해 주마.”

레슬리는 헤실헤실 웃었다. 엘리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황실은 분명 좋은 곳 같았으니까.

어느새 레슬리의 방 앞에 도착한 공작이 문을 열었다. 책상은 정말로 치워 버렸는지 캐노피가 달린 커다란 침대와 소파, 그리고 창문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테이블 위에는 아까 레슬리가 보던 책과 편지지 몇 장 그리고 잉크병과 깃펜이 놓여 있었다. 푸른 책의 제목은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그 책을 보며 공작은 웃음을 흘리다가 조심스레 침대에 레슬리를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어 주며 머리를 토닥였다.

“일단 자거라. 내일은 신전에 가야 하니까. 아침을 먹으며 느긋하게 이야기해 보자꾸나.”

레슬리는 두어 번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셀바토르 공작을 불렀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듯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공작이 레슬리의 작은 웅얼거림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레슬리가 몸을 살짝 일으켜 공작의 뺨에 작게 뽀뽀했다. 그리고 부끄러운지 순식간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불 속에서 부끄러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공작은 환하게 웃었다.

“잘 자렴, 귀여운 내 딸아.”

***

침대에 누워 있던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엘리가 나오는 꿈을 꾸는 바람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몸을 일으키자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이 데굴 굴러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몇 시지?’

토끼 인형을 주울 겸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걷어 보니 이미 샛별이 뜬 지 오래였다. 조금 더 있으면 일출이 시작될 것이다.

잠은 못 자더라도 마델이 깨우러 올 때까지 조금 더 누워 있을까. 레슬리는 토끼 인형의 팔을 잡으며 작게 하품했다.

어제는 소풍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지. 침대에 누워 인형을 꼭 끌어안고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커다란 침대는 레슬리가 아무리 굴러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구르다 레슬리는 토끼 인형을 보며 말을 걸었다.

“소풍은 어디로 가게 될까? 음, 나는 동화책에서 보던 숲이나 호수를 가 보고 싶은데, 너는 어때?”

당연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침대에 올라오지 못한 어둠이 대답하듯 일렁거렸다. 레슬리는 반 바퀴 굴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인형은 품에 꼭 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 어둠을 보며 레슬리는 말을 이었다.

“엘리는 나를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어둠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둠이. 레슬리가 고민 끝에 제 힘에게 지어 준 이름이었다. 레슬리의 말에 동의하듯 다시 어둠이 일렁거렸다.

“조심해야 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스페라도 후작과 후작 부인, 엘리는 끈질기니까. 세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친딸을 학대하다가 불 속에 던져 넣은 일 따위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겠지.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잠시 다락방에서 겪었던 괴로운 나날이 떠올랐다. 그러자 어둠이 위로하듯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위로해 주는 거야? 나는 괜찮아.”

그 말에 반응하듯 더욱 세차게 어둠은 일렁거렸다.

“정말 괜찮아.”

다시 웃으면서 어둠을 생각해 산 토끼 인형을 보란 듯 꼬옥 끌어안자, 그제야 어둠은 조금 잠잠해졌다. 어쩐지 다독임을 받는 기분이라 레슬리는 다시 옅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일출이 시작되었다. 새벽 별빛으로 물들었던 은발은 일몰에 붉게 물들었다.

잠시 그 일출을 바라보고 있다가 레슬리는 옷장을 열어 두꺼운 숄을 꺼냈다. 잠을 자기엔 이미 틀린 것 같아, 아침 식사 전까지 서재에서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일단 역사서를 다시 읽어 보자. 신학서를 읽고 모르는 부분에 별을 그려 놔야지. 콘라드 경에게 바로 물어볼 수 있게 정리를 해 놓고 그다음은…….

방문을 나서려다가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얼마 전 제나가 서재 문에 자물쇠를 잠그던 것이 떠올랐다. 레슬리가 제 서재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식사 후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였다.

“으음…….”

어쩌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슬리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닿았다. 어제 레슬리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안 제나가 허락해 준 한 권의 책과 콘라드와 테론 삼촌에게 보낼 편지가 놓여 있었다. 앉아서 책을 읽을까, 아니면 편지를 더 쓸까.

잠시 고민하던 레슬리는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 나갔다. 차라리 복도를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난로가 있던 방에서 복도로 나가자마자 서늘한 새벽 공기가 뺨에 닿아 레슬리는 목을 움츠렸다. 바람결에 열린 것인지, 하녀가 실수로 열린 것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지, 복도에 나 있는 창문 중 하나가 조금 열려 있었다. 손을 뻗어 창문을 닫으려는데.

“아.”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베스라온과 다른 기사들이 연무장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침 훈련인 걸까?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레슬리는 크게 베스라온을 불렀다.

“오라버니!”

목소리가 작았는지, 그 누구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레슬리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 다시 크게 베스라온을 불렀다.

“베스라온 오라버니……!”

“레슬리.”

이번엔 바로 베스라온이 고개를 들고 수많은 창문 중 하나에서 레슬리를 찾아내었다. 레슬리가 손을 흔들자 베스라온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뒤에 있는 기사들 역시 폴짝 뛰며 레슬리에게 격렬하게 팔을 흔들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레슬리가 크게 소리치자, 곧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환영합니다, 아가씨!”

자신을 반겨 주는 베스라온과 기사단을 보며 레슬리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 다리를 움직여 재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달려가 베스라온의 앞에 서자 베스라온은 어린 여동생을 보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추워 보이는데.”

“어, 음. 생각보다 숄이 따듯해요. 안에는 털도 달려 있고…….”

레슬리가 숄 안쪽을 보여 주자 고개를 끄덕인 베스라온이 숄을 다시 걸쳐 주었다. 혹여나 작은 몸이 추위에 노출될까 너무 꽁꽁 싸맨 탓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숄 사이로 간신히 손을 내민 레슬리는 베스라온과 손을 잡고 걸어 연무장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흩어져 몸을 풀기 시작했고, 그건 베스라온도 마찬가지였다. 레슬리도 저 무리에 끼고 싶었으나, 아직 강제 휴식령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레슬리는 연무장 구석에 있는 긴 벤치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저절로 새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제 입을 통해 빠져나가는 입김이 새삼스레 신기해 레슬리는 다시 입김을 불었다.

“아가씨. 추우십니까?”

한 기사가 다가와 묻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조금 추웠기에 지나다니는 하녀에게 덮을 만한 것을 가져와 달라고 할 참이었다.

“조금요.”

“그렇다면 아가씨, 이걸 두르고 계시겠습니까?”

레슬리의 대답에 그녀는 웃으면서 제 기사단 망토를 내밀었다.

셀바토르 공작의 눈이 떠오르는 암녹색 망토를 레슬리는 웃으며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경. 잘 덮고 있을게요.”

“부디 레소라고 불러 주세요.”

웃으며 자신의 소개를 하는 여자의 금발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레소 경. 감사합니다.”

레슬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서 흘깃흘깃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던 기사들이 우르르 레슬리에게 다가왔다. 모두 망토를 들고 있었는데, 그새 방에 갔다 온 것인지 개인 담요를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제 망토도 받아 주십시오.”

“제 것도 있답니다!”

“제건 망토가 아니라 털 담요랍니다. 따듯해요!”

망토가 한 겹, 두 겹 레슬리의 몸 위에 쌓였고 순식간에 레슬리의 작은 몸이 망토와 담요에 묻혀 버렸다.

“이, 이건 너무 무거워요…….”

레슬리는 간신히 고개만 내밀고 손을 바동거렸다. 그러자 저쪽에서 몸을 풀고 있던 베스라온이 다가와 담요와 망토 더미 안에서 레슬리를 번쩍 안아 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쌓여 있던 망토와 담요 속에서 간신히 탈출한 레슬리는 후하, 하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은 베스라온은 다시 정성스레 레슬리 위에 숄을 걸쳐 주었다. 그리고 이번엔 기사들이 가져온 담요와 망토를 적절하게 덮어 주자,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베스라온은 지나가는 하녀를 불러 코코아를 진하게 타 오라고 시켰다. 레슬리가 하녀에게서 마시멜로가 잔뜩 들어간 코코아를 받았을 때는, 모든 기사가 연무장에서 체력 단련을 시작한 때였다.

“그런데 아가씨.”

코코아를 홀짝이는데, 늦게 도착한 하르트가 레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뭔가를 처리하고 온 듯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하르트는 레슬리의 옆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왜 안 주무시는 겁니까?”

“그냥 좀 답답해서요.”

“아가씨 나이 때 잠이 안 올 정도로 답답하면 안 될 텐데요.”

레슬리는 그 말에 코코아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르트 경, 경은 싫은 사람이 자꾸 떠오르면 어떻게 하나요?”

잊어 보려고 하는데 자꾸만 눈에 보이고, 제 머릿속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레슬리는 미간을 찡그렸다. 좋게 생각해 보려는데 자꾸 찌꺼기처럼 달라붙는다.

레슬리의 말에 하르트는 왜 레슬리가 답답해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스페라도 후작가의 인간들 말인가요?”

“맞아요. 잊어 보려고 하는데 자꾸만 떠올라서 짜증 나요. 속이 좀 답답하기도 하고……. 거기다 저는.”

“그럴 땐 말입니다, 아가씨.”

하르트는 팔을 쭉 뻗고 몸을 풀며 말을 이었다.

“셀바토르가의 마음을 배우고 행동하십시오.”

셀바토르가의 마음? 당황한 듯,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가 양옆으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음……. 이걸 인간인 제가 뭐라고 정의하긴 어려운데 말이죠.”

끄응, 하르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몸도 멈춘 채, 고민에 빠진 하르트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잠시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고, 다시 열었다가 앓는 소리와 함께 도로 다물기를 몇 차례, 하르트는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간단히 말해서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소리입니다.”

“원하는 대로…….”

“예, 생각해 보십시오. 공작님이나 다른 분들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모습을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공작님이 황제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려다가 실패했다. 상상 속에서도 셀바토르 공작은 멋졌고, 빛났으며, 황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하르트는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루엔티 도련님은 마법사의 저택에서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 놈의 얼굴을 가볍게 만져 주었고, 셀바토르 공작님은 황제 폐하의 멱살을 잡았지요.”

자신이 무슨 장면을 떠올린 것인지 하르트는 아는 걸까? 레슬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루엔티 오라버니도 비슷한 일을 한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그 스페라도 후작에게 각목을 좀 휘둘러 머리를 가볍게 만져 줘도, 뭐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만일 누가 뭐라 하거든 이렇게 하십시오.”

하르트는 몸을 빙글 돌려 레슬리를 바라보더니 제 손을 허리에 짚고 당당하게 외쳤다.

“‘나는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야!’라고 외치면 다들 입 다물고 갈 겁니다.”

제 목소리를 흉내 낸 듯한 하르트의 목소리에 레슬리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하르트는 씩 웃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아가씨는 이미 우리 셀바토르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과거가 어떻든 간에요.”

과거. 그 말에 레슬리는 하트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과거에는 피도 포함된 걸까.

“하르트 경, 제가 셀바토르의 피가 아니라 다른 피여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잠시 하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그는 어제 공작저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레슬리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었다. 하지만 피라는 이야기에 레슬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칫 무거운 이야기가 될 텐데, 하르트는 거침없이 대답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아가씨, 사실 저는 제국인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라진 이트바나 왕국의 출신입니다.”

제국인이 아니었어? 레슬리는 놀라 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니 조금 이국적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제국인과 제국인이 아닌 자들의 차별이 심했기에 다들 그 사실을 숨기고 다녔으니까.

하아. 하르트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흘렀다가 흩어졌다.

“저는 셀바토르 공작님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공작님의 도움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지요. 아가씨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방인의 피가 꺼림칙하십니까?”

그 말에 레슬리는 코코아를 꼬옥 쥐고 고개를 저었다.

늘 스페라도 후작가의 가정교사들은 제국인이 아닌 이방인은 더러운 피를 가지고 있으며, 게으르고 범죄만을 저지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하르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가정교사들이 주입하듯 흘려 넣은 상식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였다.

“아, 예시가 조금 엉성하긴 한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피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욱 중요하죠. 제 말을…… 이해하셨습니까?”

하르트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마음 한편에 닿았다.

“네, 이해했어요. 고마워요, 하르트 경.”

레슬리가 웃자, 하르트는 멋쩍은 듯 제 목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걱정이 조금 가라앉았으면 어서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공녀님. 오늘은 대기도 날이니까요. 기도하다가 졸면 안 되지 않습니까.”

“대기도 날이요?”

그게, 오늘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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