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콘라드, 잠시 나와 봐.”
먼저 재판장을 벗어나 휴게실에서 셀바토르 공작을 기다리던 중, 루엔티가 콘라드를 복도로 이끌고 나왔다.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루엔티는 콘라드를 보며 말을 꺼냈다.
“아까 어떻게 한 거야?”
“무슨 일을 이야기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마법사님.”
루엔티는 잠시 머리를 뒤로 젖히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을 이야기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한 놈이 아닌데.
“모르는 척하지 말고! 아까 레슬리에게 어떻게 신력을 사용했냐 묻는 거잖아. 고위 사제의 신력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긴 들어 본 적이 없어! 조화를 이루는 신력이 반발이라니!”
그런 말은 어린아이라도 안 믿을 거라고! 루엔티의 성난 물음에 콘라드는 눈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실제로 있습니다.”
“뭐?”
“정말 실제로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타고난 몸이 너무 약해 강력한 신력을 받아 내지 못하는 분들이요.”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고?”
네.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콘라드는 다시 환한 눈웃음을 지었다.
“레슬리 양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요.”
콘라드의 대답에 루엔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역시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레슬리에게 신력을 쓰고 난 후 그 짧은 찰나 보였던 왼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루엔티는 저도 모르게 콘라드의 팔뚝을 억세게 잡았다. 아플 법도 한데 콘라드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루엔티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별것 아녔습니다. 그저 레슬리 양이 받을 고통을 저에게 돌린 것뿐이에요.”
“뭐?”
루엔티는 그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엔티가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본다는 듯 콘라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잠깐. 그거 보통 일이 아니잖아.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되면 레슬리가 고통을 입지 않는 대신 네가 몇 배로 더 큰 고통을 겪는다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대상이 고통을 겪지 않는 대신 신력을 사용한 사람이 더 큰 고통을 겪지요.”
신력을 이용해 남의 고통을 대신 받는 이 방법은 위험한 방법이었다. 몇 배로 돌아오는 고통에 정신을 놔 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 고통을 견디다가 대신 숨을 거두는 사제도 있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으로 레슬리를 도운 거야.”
갑자기 나타나 증언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힘까지 사용해서 레슬리를 돕질 않나. 거기다 거짓말까지 했다.
루엔티는 얼굴을 찡그렸다. 도무지 이 범생이 같던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는…….”
잠시 침묵하던 콘라드가 입을 여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엔티, 왜 밖에 나와 있는 거니?”
루엔티가 뒤를 돌자, 셀바토르 공작과 그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 레슬리가 보였다. 다시 울었는지 눈가가 부은 채로 레슬리는 자신과 콘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이만 돌아가야 해서요. 루엔티 마법사님께서 마중을 나와 주신 겁니다.”
콘라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제 팔을 억세게 붙들고 있던 루엔티의 손을 떼었다.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과 레슬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셀바토르 공작님 그리고 레슬리 양.”
그리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다. 만일 누군가가 콘라드의 망토 자락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콘라드는 바로 말을 타고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콘라드 경.”
혹시 제 손이 닿아 놀라지 않을까, 조심스레 망토 자락을 그러쥔 레슬리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콘라드를 보며 웃어 보였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콘라드는 곧 눈에 웃음을 머금었고, 잠시 덤덤해 보였던 금빛 눈동자가 작게 빛났다.
“인사를 들을 정도로 큰일은 아녔습니다.”
시선이 마주치며 다시 웃음을 머금는다. 역시 따스한 색이다. 레슬리는 잠시 서서 콘라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인사를 나누는데 뒤에서 루엔티가 레슬리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레슬리! 어서 이리 와. 아버지랑 형에게도 인사를 해 줘야지.”
레슬리가 다시 콘라드를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이젠 재촉까지 하며 레슬리를 불렀다. 레슬리는 영문은 모르겠지만 자꾸만 불러 대는 루엔티를 한 번, 그리고 콘라드를 한 번 바라보았다.
“아, 저…… 다음 신학 시간 때…….”
“예, 다음 신학 시간 때.”
뵙겠습니다. 그 말이 두 사람 입가에 맴돌았다. 레슬리는 살짝 눈을 접으며 웃더니 쪼르르 루엔티의 곁으로 달려갔다.
“저놈 신전을 몰래 빠져나와 바쁘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루엔티는 레슬리를 번쩍 들어 안았다. 루엔티가 안아 드는 과정에서 조금 비틀거리고, 또 공작이나 베스라온보다는 안정감이 덜했지만, 레슬리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벌써 안 보여.’
잠시 시선이 콘라드가 걸어간 방향을 향했다. 얼마나 빠르게 걸은 것인지, 벌써 콘라드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나왔다는 루엔티의 말이 진짜인 듯 보였다.
“들어가자, 레슬리.”
“네에.”
레슬리는 잠시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
“그래서 실패했다는 거니?”
메데이아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시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데비엔을 증인으로 붙여 주었는데도, 셀바토르 공작가의 하인을 둘이나 회유시켜 줬는데도 실패했단 말이지.”
메데이아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아주 찰나였고, 이피엘이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다시 메데이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구나. 스페라도 후작은 생각보다 더 멍청했구나. 가엾게도.”
그 말에 대답하는 이가 있었다. 아까 재판장을 빠져나온 데비엔 사제였다.
“설마 그걸 질 줄이야. 그래서, 공작님께서는 어떻게 제 증언을 뒤엎었나요?”
그 말에 이피엘이 비어 버린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대답했다.
“아이테라 공자께서 신력을 사용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데비엔이 뭔가를 생각하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더니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아……. 어떻게 했는지 알겠네요. 공자도 나도 거짓을 썼으니 이걸 걸고넘어질 수도 없고, 어쩐다.”
“거짓?”
“네, 태후 폐하. 제가 그 작은 아가씨에게 살짝 장난을 쳤거든요. 그나저나 많이 아팠을 텐데, 역시 테센트루아 성기사단답네요.”
어딘지 느긋해 보이는 데비엔의 말에 작게 폭 한숨을 쉰 메데이아 태후는 계속 꽃을 다듬었다. 오늘은 온실에 핀 꽃 중 가장 어여쁘게 핀 것들을 골라 황후와 아렌도 황자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아주 예쁘게 꾸며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약혼을 파기하라 황제 폐하에게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요? 약혼 정도면 파기하는 데 별 무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피엘의 말에 메데이아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의 말이 상당히 매혹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메데이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 아가씨 정도로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찾기 힘들 테지. 거기다 얼마 후면 후보 시험이 시작되니까. 지금 다른 사람을 찾기는 빠듯해.”
찰캉! 필요 없는 가지 부분을 잘라 내며 메데이아는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데비엔과 이피엘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셀바토르는 왜 갑자기 양녀를 들인 걸까?”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말이었지. 메데이아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게 왜 하필 스페라도가의 차녀였을까?”
찰캉!
“양녀를 들인 건 나와 비슷한 생각일 테고……. 흐음.”
양녀를 들인 것은 조금 의외긴 했지만, 이해는 되었다. 그래도 자신처럼 결혼을 이용할 줄 알았는데. 뭐 그런 거야 그녀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왜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였냐는 것이었다.
알아본다고 알아본 정보는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적었다. 레슬리는 스페라도 후작가를 나선 적도 없고 저택에서는 늘 맞고 굶었으니까. 한 장뿐인 보고서에는 스페라도 후작의 악질적인 행동들만 가득 쓰여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셀바토르에게 있어서는 귀찮은 재판까지 감행해 가며 그 차녀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메데이아가 눈을 반짝이며 뒤를 바라보자 이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깊게 알아보고 있습니다. 너무 늦지 않게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태후 폐하.”
그 말에 메데이아의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가늘어졌다.
“그래, 분명 즐거운 게 있을 테지.”
찰캉! 가위에 잘린 연분홍 꽃잎이 팔랑거리며 메데이아의 발밑에 흩어졌다.
***
철썩―!
오싹한 소리와 함께 콘라드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고, 공작님.”
놀란 집사 그윈이 당황해 아이테라 대공을 말렸으나, 대공은 말없이 한 번 더 아들의 뺨을 내리쳤다. 끔찍한 소리가 다시 아이테라 대공가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네가 오늘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고 있느냐.”
그 후로도 몇 대를 더 때린 후에야 아이테라 대공은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자신의 첫째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윈은 안절부절못하며 콘라드와 아이테라 대공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덤덤해 보였다.
“전 그저 올바른 일을 한 겁니다.”
콘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아버지의 금빛 눈동자는 서늘하게 보였다.
아이테라 대공은 집무실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는 듯 제 눈가를 꾹 눌렀다.
“아니, 멍청한 짓을 한 거다. 콘라드. 우리는 황가의 피를 이은 가문이지. 그런 우리가 셀바토르 공작의 편을 들었다고 하면,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 우리를 볼지 생각도 안 하는 거냐.”
“이미 저는 루엔티 마법사님과 친분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와 사람들은 우정을 생각하겠지요. 거기다 셀바토르 공작가는 제국의 가장 고귀한 수호자. 그런 가문의 명성이 거짓으로 얼룩지는 걸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콘라드의 말에 다시 아이테라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콘라드, 그 재판을 누가 열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스페라도 후작 따위가 셀바토르 공작가를 상대로 귀족 재판을 열 수 있었을 거라 순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공은 몸을 뒤로 젖히며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네가 그 소문의 양녀를 가르친다는 것도 간신히 허락을 해 줬는데, 점점 날이 가면 갈수록 멍청한 짓을 하는구나. 나가 봐라.”
그 말이 끝이었다. 아버지의 손짓 한 번으로 집무실에서 쫓겨난 콘라드를 집사 그윈이 따라 나왔다.
“도련님.”
재빠르게 하녀를 시켜 수건을 가져오게 했는지, 그윈은 따듯한 물로 적신 수건을 콘라드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그윈.”
콘라드는 그 수건으로 제 입가를 닦아 내었다. 알싸한 게 피 맛이 난다 싶더니 정말로 입 안쪽이 터진 듯 하얀 수건에 붉은 기가 묻어 나왔다.
“공작님이 요즘 예민해서 저러시는 겁니다.”
그윈은 안절부절못하며 콘라드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아이테라 대공님을 모셔 왔지만, 오늘처럼 손찌검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회초리를 드는 집안도 있지만, 아이테라 대공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콘라드에게 손을 올린 것이다. 그래서 맞은 콘라드보다도 그윈이 더 놀란 듯 보였다.
“그렇지. 얼마 전 풍랑으로 무역선이 가라앉았으니.”
얼마 전 거센 풍랑으로 아이테라 대공의 무역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무역품을 잔뜩 실은 무역선이었기에 피해액이 만만치 않았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날카로워졌다는 걸 콘라드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요. 풍랑 때문입니다.”
“그렇지. 풍랑.”
어떻게든 자신을 달래려는 그윈을 보며 콘라드는 웃었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풍랑으로 무역선이 가라앉은 게 아이테라 대공이 저렇게 변한 주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무언가가 아이테라 대공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이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집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
“형!”
뒤에서 맑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남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제 동생이 서 있었다.
“콘라드 형!”
“프리트.”
제 형을 만난 게 즐거운지 쪼르르 달려와 폭 안기는 동생을 꼭 끌어안으며 콘라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왜 이리 늦게 온 거야? 형과 새 퍼즐을 맞추려고 했는데.”
“미안, 일이 있었어. 내일은 일찍 올 테니 꼭 같이 맞추자.”
그래, 꼭. 그렇게 대답하며 꺄르륵 웃던 프리트는 갑자기 제 형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누가 형을 때린 것 같아.”
“아…….”
콘라드는 잠시 제 얼굴을 쓸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야. 훈련 중에 다친 것뿐이야.”
그 말에 프리트는 손을 뻗어 콘라드의 뺨을 매만졌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아프잖아.”
“그래, 그럴게.”
열심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제 어린 동생이 너무도 귀여워 콘라드는 옅게 웃었다. 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도 속이 깊은 아이였다.
자신이 웃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시 프리트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걸 거야.’
울음을 그치게 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이유가, 도와주고 싶은 이유가, 프리트를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이야. 봐,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제법 닮았잖아.
“콘라드 형?”
“응? 불렀어?”
불렀냐니. 아까부터 계속 부르고 있었는데. 프리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따라 형이 멍해 보이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의 신학 수업을 맡게 된 이후로 이랬던 것 같은데.
‘아!’
프리트는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윈이 요즘 콘라드가 누군가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했었지. 만나 뵌 적이 없지만, 큰 도련님의 말에 따르면 좋은 분 같다며, 그윈이 그렇게 말했었다. 정답을 찾아낸 프리트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형!”
그나저나 내일 퍼즐 같이 안 맞춰 줘도 돼. 천천히 하자. 형 바쁜 일이 있다면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며 프리트는 밝게 웃어 보였다.
***
덜컹.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레슬리의 은발이 흔들거렸다. 지금 레슬리는 드디어 마차를 타고 재판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젠 여유롭게 길거리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반짝반짝한 세 시선 때문이었다.
“그만.”
셀바토르 공작이 제지하며 안고 있던 레슬리를 자신의 망토로 가렸다. 레슬리가 가려지자, 세 남자는 아쉬운 마음에 작게 한숨을 쉬거나 눈을 가늘게 떴다.
“레슬리가 너무 부끄러워하잖아.”
그 말에 옆에 앉은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가려 버린 자신의 아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무 귀여운걸. 이걸 어떻게 보지 않고 버틸 수가 있겠어!”
사이레인을 시작으로 맞은편에 앉은 베스라온과 루엔티도 연달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시 오라버니라고 불러 주면 안 되나.”
“그런데 왜 어머니 품에 있는 거야? 오늘 내가 가장 많이 활약했는데.”
루엔티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망토 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안 그래도 마차에 셀바토르 공작가의 일원이 전부 다 있는 데다가 망토까지 쓰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마치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굴속에서 얼굴만 쏙 내민 듯한 모습에 다들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다들 왜 이 마차에 껴 타는 거야. 마차가 한 대도 아닌데.”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이 말을 흘렸다. 텅 빈 마차 한 대와 베스라온이 타고 온 말이 뒤에서 터덜터덜 따라오고 있었다. 레슬리 혼자 탔다면 데구루루 굴러도 괜찮을 마차는 순식간에 거대한 남자들로 꽉꽉 차 버렸고, 덕분에 레슬리는 공작의 품에 안겨 가고 있었다.
“나도 레슬리랑 같이 마차를 타고 싶었는걸.”
아내의 말에 사이레인이 말을 이었다. 잠시 제 남편을 바라보다 공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딘가 포기한 듯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 가는 거예요?”
레슬리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아까부터 조금씩 보이는 창밖 풍경은 아무리 봐도 저택으로 가는 길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택에 가기 전 신전에 들를 생각이란다.”
레슬리의 은발을 만지작거리며 셀바토르 공작이 말을 이었다. 옆에 앉은 사이레인은 그런 아내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전이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 맞은편에 앉은 베스라온을 바라보자,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신전에 가서 일을 하나 처리할 거야.”
“아이테라 공자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것을. 어차피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나.”
사이레인의 말에 루엔티는 마차 벽면에 머리를 기대며 짧게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아이테라 대공가로 돌아갔어요. 아이테라 대공님께서 부르셔서.”
대답하면서 루엔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콘라드가 도와준 것이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과 친한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재판장에 신을 언급해 가면서 서로를 도울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왜? 레슬리가 귀여워서? 하긴 귀엽긴 하지. 그렇지. 저 정도 귀여움이면 도와줄 만하긴 해.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던 루엔티는 저도 모르게 끄덕이던 고갯짓을 멈추었다. 아니, 잠깐.
‘아니, 이게 아니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코아에 쿠키를 올린 레슬리를 찬양하던 사람들을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던 루엔티였다. 그런데 자신도 이렇게 변했을 줄이야.
마차에 제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면 레슬리가 비슷한 행동을 했을 때 박수를 보내고 있을 저 자신이 너무 잘 그려졌던 탓이었다.
“으아.”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제 둘째 아들놈을 바라보다 사이레인은 시선을 돌려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딱히 둘째 아들놈이 저러든 말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레슬리 양, 아니 레슬리.”
호칭을 한번 고쳐 부르더니, 저 혼자 뿌듯해하는 사이레인이었다.
잠시 뿌듯함을 만끽하던 사이레인은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 레슬리에게 전해 주었다. 가문의 인장도 편지 봉투도 없이 여러 장의 종이에 써서 줄로 묶은 편지를 받아 든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누가 보낸 편지일까. 요리조리 살피는데 사이레인이 말을 이었다.
“네 삼촌인 테론이 보낸 거란다.”
삼촌!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스페라도 후작 따위를 상대하다가 정작 중요한 삼촌인 테론을 만나지 못했다. 사이레인이 붙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는 이 수도가 무섭다며 급히 떠났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대신 이 편지를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저와 똑같은 길을 걸을 뻔한, 사랑스러운 조카인 레슬리를 위해서.
“읽어 봐도 되나요?”
“그럼, 얼마든지. 그렇지만 일단 나중에 읽어야 할 것 같구나.”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주변을 살피자 마차가 신전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날은 완전히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달빛과 별빛을 받은 신전은 미약하게나마 빛나고 있었다. 그 빛만으로는 주변을 밝히기엔 부족해 여기저기에 횃불이 놓여 있었다.
신전이 빛나는 모습을 처음 본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전이 빛나는 걸 처음 보나?”
레슬리의 시선을 따라간 사이레인이 눈을 깜빡였다. 레슬리는 신전이 빛나 신기했고, 사이레인은 그런 작은 거에도 신기해하는 레슬리가 귀여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레슬리가 숨만 쉬어도 그 모습을 귀엽게 여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슬리를 귀엽게 여기는 사이레인을 셀바토르 공작이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런 세 사람을 베스라온이 재촉했다. 신전을 설득시켜 무리하게 잡은 일정이었고 스페라도 후작이 재판을 질질 끄는 바람에 베스라온조차 조금은 지쳐 있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루엔티와 레슬리는 더하겠지. 그러니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 가자.”
첫째 아들의 재촉을 받은 셀바토르 공작이 발걸음을 옮기자 작게 하품하던 레슬리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졸음이 쏟아져 걸음이 비틀거렸다. 긴장이 완전히 풀린 탓이었다. 사실 아까 마차에서도 잠깐잠깐 졸았던 레슬리였다.
셀바토르 공작은 팔을 뻗어 레슬리를 안아 들더니 등을 다시 토닥여 주었다.
“이런, 졸립구나. 조금만 버티렴. 오래 걸리진 않으니까.”
네에. 그 말이 입을 통해 나갔던가. 말이 아니라 작은 하품이 되어 나갔던 것 같기도 했다.
신전의 긴 계단을 오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제 한 명이 나와 다섯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준비는 이미 다 해 놓았습니다, 공작님. 이리, 이리로 오십시오.”
사제의 안내에 따라 들어간 방은 평범한 기도실이 아니었다. 레슬리는 공작의 품에 안겨 비몽사몽인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좋게 말해 아무것도 없고, 나쁘게 말해 휑해 보이는 동그란 방 가운데에 세 명의 사제가 서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달빛을 받아 옅게 빛나서, 그 자리에 있으면 마치 달빛 속에 떠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신전 외관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돌일까. 아니면 신력을 이용한 빛일까. 레슬리가 멍하니 생각하는데 셀바토르 공작이 조심스럽게 레슬리를 바닥으로 내려 주고는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가 보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세 분의 사제 앞에 서자, 가운데에 있던 사제님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아, 안녕하세요.”
공녀라니. 어딘가 심장 한편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들어 본 것이 처음이라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몰랐다.
“귀여우신 분이네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작게 웃은 사제는 레슬리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을 얹은 사제가 여성분이기도 하고 신력을 쓸까 무서워, 레슬리는 잠시 움찔거렸다.
하지만 손을 머리에 얹은 후 사제는 긴 기도문을 천천히 읊어 주었다. 그 기도문에 반응하듯,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더욱 강해졌다.
기도문을 전부 읊자 뒤에 서 있던 사제가 가져온 잔을 레슬리에게 건네주었다.
“마셔 보시겠어요?”
레슬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에 든 음료를 전부 마셨다. 차가운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졸음에 자꾸만 감기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이건 뭘까? 레슬리가 살짝 입맛을 다시자 기도문을 읊었던 사제가 잔을 다시 뒤에 있는 사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신께서 축복하신 아가씨의 이름은 ‘슈야’랍니다.”
아. 드디어 레슬리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그리고 이 의식이 어떤 걸 위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슈야.”
소리 내 제 축복의 이름을 말해 보았다. 왜인지 더 크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네, 슈야. 마음에 드시나요? 공녀님.”
“엄청요!”
레슬리는 크게 외쳤다가 다시 눈을 반짝거렸다.
“저, 사제님 다 끝난 건가요?”
“그럼요. 가서 크게 말해 주세요. 축복의 의식은 전부 마쳤으니, 앞으로 신께서 공녀님의 길을 밝혀 주실 거랍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졸음 따위 깨 버린 지 오래였다. 셀바토르 공작의 품에 폭 안긴 레슬리는 작게 웃으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슈야래요!”
레슬리는 활짝 웃으며 제 이름을 소개했다. 슈야, 슈야. 몇 번을 불러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셀바토르 공작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야. 예쁜 이름이구나.”
“네!”
활기차게 대답한 레슬리는 조금 뒤로 물러나 틸레이얼 자작 부인께 배운 대로 한 발을 뒤로, 그리고 치맛자락을 잡은 채 살짝 무릎을 굽혔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레슬리는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꾹 참은 채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니까.
***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입니다.”
레슬리는 다시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틸레이얼 자작 부인과 제나, 마델, 서올리에 바타까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예쁜 이름이에요.”
“맞아요, 몽실몽실해 보이는 느낌이 레슬리 아가씨에게 딱 맞아요!”
“어쩜 우리 아가씨는 쿠키 올리기도 잘하시고 이름도 귀엽고…….”
“우, 우리 레슬리 아가씨 정말, 정말 잘됐어. 크흡.”
레슬리가 어떤 사정인지 나름 알고 있는 모두는 레슬리의 인사를 받으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바타는 이미 눈물을 한바탕 쏟고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 한 명이 웃으며 그를 달래 주었다.
“잘된 일이지. 그렇지만 밤이 깊었으니 인사는 여기까지 할까.”
모인 사용인들이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셀바토르 공작이 나서 중재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아쉽다는 듯 흩어졌는데, 다들 눈물 한 방울씩 눈에 달고 가는 건 덤이었다.
“레슬리, 졸리지 않니?”
“으음, 조금요? 그런데 지금은 기뻐서 그런가? 잠이 안 와요.”
그래도 자야지. 밤이 깊었단다. 그렇게 덧붙이며 셀바토르 공작은 손수 레슬리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방문 앞에서 꼭 잡고 있던 손을 놓자 레슬리가 아쉬운 듯 잠시 제 손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고 공작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인사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머니라고 한 번 더 불러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셀바토르 공작은 낮게 웃으며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너도 잘 자렴. 레슬리.”
방 안으로 들어온 레슬리는 마델이 준비해 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피곤했는데, 침대에 눕고 나니 이상하게 졸음이 오지 않았다.
‘신기해.’
자신은 이제 스페라도가 아니게 되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그 끔찍한 저택과 가족들을 벗어나 셀바토르가 되었다. 거기다 축복의 이름까지.
‘꿈……은 아니겠지?’
셀바토르 저택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매일 이게 꿈이 아닌지 의심했었다. 요즈음 들어서야 멈췄던 의심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만큼 재판에서 이겨 완벽한 셀바토르가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
제 이름을 이불 속에서 말해 보고는 팔다리를 파닥파닥했다. 부를 때마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몇 번을 더 부르고 몇 번을 더 파닥거린 후에야 멈추었다.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오늘 하루를 꼬박 새울 것 같았다. 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책상 위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삼촌인 테론이 보낸 편지였다. 새 이름을 받은 것에 정신이 팔려 편지를 잊어버렸다.
레슬리는 물을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슬리 양에게.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레슬리에게 눈물을 불러왔다.
테론의 어릴 적과 그가 어떻게 전 스페라도 후작에게 당했는지 적혀 있었는데, 그건 지금의 스페라도 후작이 레슬리에게 했던 것과 똑같았다. 거기다 테론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레슬리에게 몇 가지 조언을 남겨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집 지하에는 와인 창고가 있단다. 약 6백여 년 전에 만든 것인데 전혀 쓰지 않고 방치되고 있지. 햇빛도 바람도 들지 않아서 아버지나 형님은 거기에 나와 둘째 형님을 가두곤 했단다. 거기는 정말 악몽 같은 곳이지.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네가 그곳에 갇히게 된다면 13번째 오크통 뒤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단다. 거기로는 바람이 들어와서 조금 버틸 만할 거야. 그리고 다락방엔 말이다.
그는 정말 혹여나 레슬리가 다시 스페라도 후작가로 돌아가 체벌을 당할까 걱정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해 둔 듯 보였다. 레슬리는 차오르는 눈물을 끅끅 삼키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앞으로 사용할지 모르는 정보와 -솔직히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 정보를 사용한다는 건 네가 스페라도 후작가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뜻이니까- 널 위한 증언뿐이더구나.
내 조카야. 사실 나는 너를 존경한단다. 나는 늘 저택에서 맞고 체벌을 당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어서 그 저택을, 그리고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아마 마차 사고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채찍질당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너는 스페라도 후작가를 벗어났더구나. 그것도 네 의지로. 처음에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나에게 증인을 부탁하였을 때, 나는 거절하려고 했단다. 나는 정말로 수도가 무서웠고 형님인 스페라도 후작은 그것보다 더 무서웠단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걸 알면 나를 분명 괴롭히러 올 테니까. 너도 알겠지만, 후작은 정말 끈질기지 않니.
하지만 네가 스스로 스페라도 후작가를 벗어나 셀바토르 공작가로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 증언을 결심했단다. 어리디어린 네가 살겠다고 하는데, 내가 너를 구해 주지는 못할망정 다시 후작가로 밀어 넣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증언을 하지 않으면 너는 분명 형님이 친부라는 이유로 스페라도 후작가로 끌려 들어갈 가능성이 컸으니 말이다. 그래서 미약하게나마 용기를 내 보았단다. 부디 이 용기가 씩씩한 너에게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
레슬리, 내 조카야. 스페라도의 그림자를 벗어나 셀바토르라는 좋은 안식처를 찾았구나. 나는 진심으로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단다.
편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결국, 눈물이 넘쳐흘러 레슬리는 편지를 품에 안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삼촌인 테론이 얼마나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었는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나랑 같은 사람이 또 있었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고통을, 괴로움을 겪은 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있는 힘껏 자신을 응원해 주며 행복하게 살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마치 불 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작은 손들처럼.
“행복해질게요…….”
레슬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반드시 행복하게…… 살게요. 고마워요, 삼촌. 정말로 고마워요.”
***
“아가씨, 어제 잘 못 주무셨나요?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마델이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거울로 시선을 맞췄다. 그 말에 레슬리는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마델의 말대로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다. 어제 테론 삼촌의 편지를 읽고 울다 지쳐 잠든 탓이겠지.
“아……. 두근거려서 잘 못 잤어.”
레슬리의 대답이 꽤 신빙성이 있었는지, 곧 마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제는 좋은 날이었지요. 아가씨가 재판에서 이기시고, 성도 셀바토르로 바뀌고……. 어제 제나 집사님이 아가씨의 이름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책에 올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직접 확인하셨대요.”
“그렇구나. 내 이름이 공작가의 책에…….”
신전 중요 서고에 보관되어 있을 셀바토르 공작가의 책에 제 이름이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려 줘서 정말 고마워, 마델.”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마델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늘 동그란 눈이 살짝 접히며 눈웃음을 만들어 내자 마델은 순간 레슬리를 꼬옥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에 휩쓸렸다.
“뭐, 뭘요!”
고개를 격하게 휘젓는 것으로 간신히 충동을 털어 낸 마델은 일부러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리고 바타 요리사님이 아가씨가 재판에서 이긴 거랑 셀바토르 가문에 들어오신 축하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아침을 차려 주신다고 했어요. 저도 어제 만든 걸 도왔는데, 정말 맛있어 보였어요.”
“바타 아저씨 요리는 평소에도 다 맛있는데.”
레슬리의 말에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맞추며 마델이 방긋 웃었다.
“그 말, 바타 주방장님께 말해 주면 기뻐서 엉엉 우실지도 몰라요.”
“어제도 우시던걸.”
맞아. 어제도 아가씨 인사를 받고 우셨죠. 두 사람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그 후로도 작은 잡담이 오고 갔고, 그러는 사이 레슬리는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복장과 비슷해 보이는 푸른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리본을 단 레슬리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어 거울 앞에서 핑글핑글 돌아보았다. 평소보다 더 힘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마델이 다시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더니 방긋 웃었다.
“아, 오늘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레슬리 아가씨.”
“좋은 일? 어제보다 더 좋은 일이야?”
“으음……. 어제보다는 아니지만 정말 좋은 일이에요. 덕분에 제가 요 며칠 고생 좀 했다니까요!”
분명 오늘 엄청 놀라실 거예요.
자신만만해하는 마델을 뒤로하고 식당으로 온 레슬리는 입을 크게 벌렸다. 이게 마델이 말한 놀랄 만한 일인 것 같았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식탁은 만찬 테이블처럼 긴 편이었는데, 오늘은 그 긴 테이블에 전부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레슬리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식탁을 꾸몄다는 게 사실이라는 듯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음식은 대부분이 레슬리가 즐겨 먹던 것들이었다.
안에 버섯과 치즈를 잔뜩 넣은 폭신한 오믈렛에 화덕에서 오랜 시간 동안 구워 기름기를 뺀 오리 구이, 갖은 채소에 토마토소스를 넣고 만든 라타투이와 레슬리가 한 입에 먹게 편하게 조각내 구워진 스테이크, 그리고 조개가 잔뜩 들어간 클램 차우더…….
끝도 없이 펼쳐진 음식의 향연을 보며 레슬리는 입을 크게 벌렸다. 저걸 다 먹을 수 있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다 먹으라고 만든 양일까?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며 굳었지만, 미리 도착한 공작과 사이레인, 베스라온과 루엔티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오히려 고기가 별로 없어 배가 많이 차지 않을 것 같다고 사이레인이 말하는 게 들렸다.
“오, 레슬리!”
슈를 산처럼 쌓아 두고 설탕으로 굳힌 크로캉부슈 때문에 식당에 들어온 레슬리가 보이지 않았던지, 조금 늦게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불렀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리 오렴.”
“사이레인…….”
레슬리는 자신을 부르는 사이레인의 목소리에 쪼르르 발을 움직이려다 멈춰 섰다. 네 사람이 은근한 기대에 찬 얼굴로 레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슬리는 다시 자세를 잡고 입안이 그리고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말을 꺼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
듣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말하는 레슬리도 절로 웃음꽃이 피어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다들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엔티 역시 제외는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반항하지 말고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낫다고 결론 내렸으니까.
그 뒤로는 잠시 자리 배정으로 작은 소란이 일어났었다. 세 남자는 레슬리와 같이 먹고 싶어 했고 싸움을 보다 못한 공작이 레슬리를 제 옆과 사이레인의 사이에 앉히는 것으로 소란은 끝났다.
“베스 형 옆에선 몇 번이나 먹었으면서…….”
루엔티가 입에 포크를 물고 중얼거리자, 클램 차우더를 먹던 레슬리가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내일은 루엔티 오라버니 옆에 앉을게요.”
“정말?”
레슬리의 말에 루엔티는 눈을 빛내며 제 어린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네, 꼭이요.”
“좋아, 좋아.”
레슬리가 스푼을 물고 배시시 웃으며 답하자 그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루엔티는 제 앞에 놓인 오리고기와 빵을 뜯어 수프에 적셔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무심한 척, 자신의 앞에 있던 팬케이크를 레슬리 쪽으로 밀었다.
“먹어. 너 이거 좋아하잖아.”
아마도 제가 처음 레슬리에게 화냈을 때 팬케이크를 먹고 있었던 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마침 레슬리에게 내민 것은 그때와 똑같은 팬케이크였다.
“나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러면서 다시 빵을 뜯어 수프에 적셔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루엔티가 귀여웠는지 옆에 앉아 있던 베스라온이 커다란 손으로 루엔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놀란 듯 루엔티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아니, 그냥 귀여워서.”
베스라온의 무심한 말투로 머리를 계속 쓰다듬자 루엔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래도 쓰다듬어 주는 게 싫지는 않은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손길을 쳐 내지 않았다.
사이레인이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둘째 아들놈의 귀여운 모습이었다.
강한 힘과 마력이 셀바토르 공작가의 특성이라지만, 공작가의 사람들은 주로 괴력을 타고났다. 하지만 루엔티는 그 힘을 가지지 못했다. 웬만한 남성보다는 강했으나 셀바토르 공작가의 피를 이은 것치고는 약했다.
대신 강한 마력을 타고났는데, 그럼에도 저 혼자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에 빠진 적도 있었던 루엔티였다.
타고난 성격에 열등감이 더해져 저 혼자 까칠까칠했던 루엔티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양보하거나 신경을 써 주는 모습에 사이레인은 루엔티가 드디어 인간이 되었다며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 광경을 훈훈하게 보고 있던 셀바토르 공작은 자신의 옆에 앉은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우아하게 거대한 돼지 구이를 잘라 레슬리에게 먹여 주며 용건을 꺼냈다.
“레슬리, 오늘은 조금 바쁠 거란다. 너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도,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많거든.”
자랑하고 싶은 것과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 레슬리는 궁금함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안에 고기를 먹느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레슬리에게는 다행히도,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 후 제나가 자신을 데리고 공작저 4층으로 올라왔고 환하게 웃으며 레슬리가 경악할 만한 말을 했다.
“이 방들이 전부 아가씨의 방이랍니다.”
재판에 가기 전,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의 방을 따로 마련해 준다고, 하나가 아니라 일단 가볍게 네 개의 방을 준다고 했었다. 그리고 레슬리는 지금 자신을 위해 주어진 방문들 앞에 서 있었다.
“레슬리 아가씨?”
제나가 놀라 입을 벌리고 굳어 버린 레슬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혹시 4층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3층을 따로 꾸미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당장이라도 내려가 3층 방을 꾸미려고 하는 제나의 손을 꼭 붙들면서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너무 과한 것 같아서…….”
“전혀 과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제나는 레슬리의 손을 잡고 방을 하나하나 구경시켜 주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가씨 전용 서재입니다. 여기서 틸레이얼 자작 부인과 예절 수업을 진행하기도 할 거예요. 물론 다른 수업도 여기서 진행됩니다.”
레슬리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벽면을 가득 메우는 수많은 책은 대부분이 레슬리의 취향이었다. 레슬리는 책 한 권을 빼 들고는 눈을 깜빡였다. 이것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동화책 중 하나였다.
“책을 고르는 건 루엔티 님이 도와주셨답니다.”
그런 레슬리의 생각을 읽었는지 뒤에서 제나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레슬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괜스레 책 표면을 쓸어 보았다. 자신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 사소한 관심이 행복해 레슬리는 책을 꼭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다음 방은…….”
옷 방이었다. 레슬리가 일단 가볍게 받은 네 개의 방 중 가장 작은 방이었는데, 제나는 그게 마뜩잖은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뭐, 부족하다 싶으면 나중에 바꾸면 되는 거니까요.”
4층에 어떤 방이 적합한지 미리 알아봐야겠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제나를 보며 레슬리는 한 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방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엘리의 옷 방도 여기엔 비할 바가 못 될 거야.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널찍한 방에는 옷을 걸 수 있는 공간과 신발 그리고 장신구를 보관하는 가구들로 가득했다. 거기다 황금을 녹여 세공한 듯한 여러 개의 전신 거울이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지금은 옷이 별로 없지만, 곧 이 방도 부족하게 될 거예요.”
제나의 말대로 옷 방에는 몇 벌의 드레스와 몇 벌의 코트 그리고 셔츠와 바지만 걸려 있었다. 전부 저번에 베스라온과 함께 나갔을 때 사 온 옷들이었다.
“아, 이 옷.”
레슬리는 몇 벌 없는 옷 중에서 셔츠와 바지를 매만졌다.
‘베스라온 오라버니가 어머니가 직접 나를 가르쳐 주신다고 했는데.’
사실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르쳐 준다니. 어머니가 검을 쓴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모두 한눈에 반할 정도로 멋있을 것이다. 괜히 셀바토르 공작가가 가장 고귀한 수호자라고 불리겠는가.
레슬리는 동화책에서 보았던 용사에 셀바토르 공작을 대입해 보았다.
역시 눈물이 날 정도로 멋있었다.
한참을 상상하다가 이번엔 슬그머니 자신을 대입해 보았다. 상상 속에서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만큼 키가 훌쩍 컸고 날카로운 눈매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적들이 ‘으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정말 멋지다고 말해 주시겠지?’
그래, 그 정도로 멋있게 검을 휘두르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두 오라버니도 자신을 향해 박수를 보내 줄지도 모른다.
레슬리는 셔츠와 바지를 꼭 잡고 눈을 반짝였다. 당장 오늘이라도 달려가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후후, 다음 방으로 가 보시겠어요?”
꼭 부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나의 손을 잡고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옷 방과 연결된 다음 방은 침실이었다.
침실은 여태 레슬리가 쓰던 방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가구가 새것이었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 가구들이 전부 레슬리 키와 몸에 맞춰진 맞춤 가구라는 점이었다.
“한번 앉아 보시겠어요? 장인들이 만든 거긴 한데 급하게 만든 거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제나가 의자를 빼 주며 레슬리를 부르자 레슬리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아 보았다. 딱 맞는다. 여태 쓰던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은 레슬리에게 커서 쓰기가 조금 불편했는데, 이 책상과 의자는 조금의 불편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비싸지는 않았느냐고 제나에게 물어보려다가 레슬리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이제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지금 자신이 할 일은 이 책상과 의자를 부지런히 쓰는 일일 것이다.
‘좋아, 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
침대도 새것이니까 잠도 더 열심히 자야지. 이상한 각오를 다지며 레슬리는 제나와 함께 옆방으로 넘어갔다.
“이 방은 별을 구경하는 방입니다.”
“별을 구경하는 방이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방에는 아직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지만, 레슬리는 보자마자 이 방이 마음에 들었다. 벽면 한 편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고 거기에 발코니까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저기서 밤하늘을 구경한다면, 별 무리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제나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방의 용도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 방은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것들로 꾸미고, 원하는 용도로 사용하시면 될 것 같아요.”
“원하는 용도…….”
레슬리는 빈방을 바라보다가 제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레슬리의 목소리에는 머뭇거림이 섞여 있었다.
“집사님, 그런데 저는 이 방을 어떤 용도로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집사님이 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레슬리 아가씨.”
제나는 무릎을 꿇고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방의 용도는 천천히 아가씨가 찾아보도록 해요. 어떤 가구를 넣을 건지, 벽지를 새로 바른다면 어떤 벽지가 좋은지 그런 건 같이 고민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이 방의 용도만큼은 아가씨가 떠올려 주셨으면 해요.”
제나는 옅게 웃으며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그 말에 레슬리는 다시 텅 빈 방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이 넓은 방을 꾸밀 수 있을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제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 볼게요.”
“좋아요. 아가씨.”
읏차. 조금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제나는 레슬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
“자, 그러면 어떻게 꾸며 볼지 코코아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코코아. 레슬리는 얼굴을 붉혔다. 수많은 디저트들을 먹어 봤지만, 아직도 코코아가 제일 맛있었다. 거기에 눈사람 쿠키를 곁들이면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의 코코아 꿈은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레슬리 아가씨, 셀바토르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한 하녀가 전해 온 말 때문이었다.
“으음…….”
셀바토르 공작은 눈앞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서류 가장 윗부분에는 선명하게 엘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약혼자의 이름으로 아렌도 황자가 적혀 있었다.
‘내칠 줄 알았더니.’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그래, 이 정도 망신을 당하게 했으면 스페라도를 내칠 줄 알았다. 쯧, 란다 꽃의 마음을 셀바토르는 알 수가 없었다. 이용하기 편해서인가.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찡그리며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정말 실행할 생각인가?”
굳이 왜. 이미 꽃은…….
“아니지. 이해할 필요 따윈 없어.”
셀바토르 공작은 눈을 찡그렸다. 르카디우스의 가장 고귀한 수호자. 그게 자신이었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어머니,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귀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레슬리를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미소 지었다.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지도 않을 것이다.
“왔구나. 앉아서 이야기할까.”
셀바토르 공작은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레슬리를 반기면서 소파에 레슬리를 앉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알아챈 제나가 잽싸게 차와 코코아 한 잔을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놓았다.
‘어쩐지 첫날이 생각난다.’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마시멜로가 가득 올라간 코코아를 두 손에 꼭 쥐며 눈을 깜빡였다. 한참 오래전의 일 같았는데 생각하고 보니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몸이 얼 정도로 겨울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느새 푸른 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코코아는 맛있다.’
마델은 추운 날 먹어야 코코아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레슬리는 이런 맛있는 걸 겨울에만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코코아를 마셨다.
셀바토르 공작은 그런 레슬리가 귀여운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코코아를 제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닦아 주는 감각이 간지러워 레슬리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를 여기에 부른 이유는 말이다, 레슬리. 이제 네가 셀바토르가 되었으니 할 일을 말해 주기 위해서란다.”
레슬리의 웃음이 멈추었다.
아, 맞다.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밑으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잊고 있었다. 자신은 여기에 ‘계약’으로 들어온 거라는 걸. 열여덟 살이 되어 성인이 되면 나가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한 걸 여태 잊고 있었다.
공작은 손수건을 접어 옆으로 치우느라고 레슬리가 굳어 있는 걸 알지 못했다.
“네, 뭘 하면 될까요.”
레슬리는 답답한 속을 감추며 방긋 웃어 보였다. 혹여나 제 마음을 들킬까 재빠르게 고개를 내려 코코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코코아 안에 남은 마시멜로를 세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뭐든 잘할 자신이 있어요. 공부도 잘하고요. 눈치도 빨라요. 혹시 의심스러우면 루엔티 오라버니가 잘 말해 주실 거예요.”
오라버니. 갑자기 이 말이 왜 이리 까끌까끌하게 느껴지는 걸까. 분명 아침 식사 때만 해도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 이 말은 레슬리의 심장을 간지럽히면서 강한 충족감을 주었는데.
‘계약은 바꿀 수 없는 건가?’
잘 모르겠다. 레슬리는 이젠 분홍색 마시멜로만 골라 세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면 책을 찾아보자. 루엔티 오라버니에게 물어보면 분명 눈치챌 테니까 책을 찾아봐야겠다. 그럼 어떤 책을 봐야 하는 거지.
“레슬리.”
“네!”
이름을 부르자 레슬리는 바로 고개를 들며 시선을 맞춰 왔다. 얼굴에는 분명 미소가 올라와 있으나, 마음에는 다른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에 잠시 침묵하던 셀바토르 공작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축복의 날에 네가 신전에 들어가 줬으면 하는 거란다. 내 딸로서 말이야.”
“축복의 날이요.”
셀바토르 공작이 말한 축복의 날이란 신께서 인간을 한 번 구원한 날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르카디우스 제국이 탄생하기도 전, 온 세계에 악독한 전염병이 돌았다. 하루마다 시체의 산이 새로 쌓였고, 강은 죽은 사람들로 막혀 버릴 정도로 강력한 병이었다. 간신히 병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독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매일 싸움과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보다 못한 신이 직접 인간들의 세계에 내려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돌림병을 작은 상자에 담았다. 그렇게 돌림병은 상자에 갇혔지만, 아직 병의 여파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잠시 고민한 신은 열 명의 여성과 열 명의 남성을 뽑아 자신의 힘을 나눠 주었고, 그 힘으로 사람들을 치료할 것을 명령했다. 스무 명의 사람들은 전 세계로 퍼져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의 힘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이 처음 세계에 내려온 날을 축복의 날이라 불렀다. 그리고 신이 내려온 것을, 자신들을 살려 준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축제를 벌였으며, 8년 주기로 신전 안쪽까지 개방하며 더 크게 축제를 벌였다.
이 8년에서 의미가 있었다. 최초의 사제 스무 명이 세계를 한 바퀴 돌아 같은 장소에 다시 모이는 데 걸린 시간이 8년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레슬리가 알고 있는 축복의 날이었다.
그런데 나의 딸로서 신전에 가 달라는 것은 무슨 말인 걸까. 레슬리가 의문을 품은 걸 깨달았는지 공작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축복의 날에 신전에서는 귀족 집안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열 명씩을 뽑아 최초의 사제의 역할을 맡긴단다. 주로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고르지.”
아, 그 말에 기억이 났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엘리가 소리 지르며 속상해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나 여왕처럼 가지고 싶은 것만 가지던 엘리가 가지지 못한 최초의 것이었다.
‘왜 하필 이럴 때 다쳐서는……!’
그때 엘리는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리를 심하게 다친 상태였다. 억울한 듯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엘리를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다독였었다.
‘기껏 후보도 통과했는데. 신력으로 치료해도 뼈가 부러져 오래 걸린다 하고……. 저 너무 억울해요, 어머니.’
‘이번 한 번만 있는 게 아니지 않니. 나중이 있단다. 너는 이렇게 아름답고 총명한 아이니 분명 8년 후에는 네가 가장 먼저 뽑힐 거야.’
‘정말로 그럴까요?’
‘그럼! 황녀도, 공녀도 없지. 그러니 네가 가장 고귀한 푸른 피이지 않니? 멍청한 것들은 분명 네 기세에 눌려 바닥을 길 거란다.’
‘그렇지만 8년이나 기다려야 하잖아요? 너무 오래 걸려요. 난 당장 되고 싶단 말이에요!’
‘이런, 우리 딸. 속상하겠구나. 그래도 어찌 보면 이건 기회란다. 다음번 아라벨라의 자리는 여성을 위한 것이니까. 아라벨라의 이름을 가지고 가장 아름답게 빛나렴. 사랑하는 내 딸아.’
한참을 그렇게 스페라도 후작 부인에게 위로받고도 엘리는 부족했는지 레슬리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날이 처음으로 레슬리를 도구를 이용해 때린 날이었다.
‘맞아, 그랬었지.’
그때 생각에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얻은 힌트로 퍼즐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황녀와 공녀가 없고, 가장 고귀한 피, 그리고 지금 어머니가 말해 주신 귀족 자제들로 이루어진 스무 명의 아이들.
“최초의 사제 역할을 맡기는 스무 명의 아이들을 푸른 피가 짙은 아이들부터 해서 맡기는군요.”
레슬리의 추리가 정확했는지 공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장 비싼 피부터 차례로 아이들을 뽑아 가지. 예전에는 평민 귀족 구분할 것 없이 뽑았다던데 요즘은 다르다더구나.”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진행했다.
“마지막에 신전을 개방한 게 4년 전이었지. 그러니까 4년 후, 네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신전으로 가 주렴. 너는 지금 유일한 공녀니 당연히 최초의 사제로 네가 뽑힐 거야.”
그러면서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은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거기에 가서 뭘 하면 되나요?”
예전 식사 시간 때 공작은 레슬리가 셀바토르가 되면 알려 준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이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레슬리 슈야 셀바토르니까.
‘잘하자.’
레슬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래, 잘해야 했다. 잘해서 계약을 고쳐서 진짜가 되고 싶었다.
공작은 레슬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신전에 들어가 아라벨라의 자리를 차지해 줬으면 한단다.”
“아라벨라의 자리요.”
아라벨라. 그 이름은 레슬리도 알고 있었다. 최초의 사제의 선구자인 그 사제는 신을 직접 만나 힘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열아홉 명은 아라벨라를 통해 신력을 받았다.
“아라벨라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려지지 않았지. 덕분에 최초의 사제 자리에는 여자와 남자가 열씩 섞여 들어가지만, 아라벨라는 매번 다른 성별이 뽑힌단다. 남자가 뽑혔다면 그다음은 여자가 뽑히는 식이지. 그리고 이미 너는 짐작했겠지만, 4년 후에 열릴 아라벨라의 자리는 여성의 몫이야. 저번에는 남성이 아라벨라가 되었거든. 일단 겨울의 끝자락 때 후보를 추리는 시험이 시작된단다. 신어와 고어 그리고 신학. 거기에 기초 학문. 가벼운 것들을 보고 1차 후보를 뽑는단다.”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신 있는 분야였다. 반드시 자신은 아라벨라가 되어야 했다. 그러면 진짜 셀바토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네, 알겠어요. 저 아라벨라가 되어 보일게요!”
레슬리가 밝게 대답하자,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셀바토르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대신 미소를 머금고는 레슬리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잘 부탁하마. 레슬리.”
***
“……아라벨라가 되라고요?”
엘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청빛의 눈동자가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저 시선을 받고 있자니 저절로 숨이 가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르카디우스의 제1황자 아렌도 페레 르카디우스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자신의 약혼녀를 바라보았다. 엘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그 모습은 아렌도의 동정심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짜증을 불러왔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의 아버지에게 단단히 분노하였지.”
아렌도는 손가락 깍지를 끼며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 말 한마디에 엘리는 제 입술을 질끈 물었다. 창백했던 얼굴이 그때의 수치로 붉게 물들었고 아렌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엘리를 약혼녀로 선택한 이유는 황제이신 아버지의 추천도 있었지만, 엘리가 가진 귀족적인 자신감과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꼼꼼한 관리의 비중이 더욱 컸다.
저 외모면 적어도 공식 행사에서 아렌도를 부끄럽게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귀족 특유의 드높은 자신감은 황실의 권위를 바닥으로 내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 선택한 약혼녀였건만, 그 아비는 친딸과 제 친동생을 폭행한 놈이었고 재판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때려도 굶겨도 상관없으니 들키지나 말 것을.’
어느 집안이나 털면 찬장에 먼지가 풍겼다. 비밀이 없는 가문은 없었다. 그러니 그걸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다들 묵인해 줬을 텐데.
거기다 더 짜증 나는 것은 그가 아버지를 설득시켜 연 귀족 재판에서 그걸 다 들켜 버리는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유산 이야기에 집안의 병력까지. 그 찰나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취해 말하면 안 될 것을 말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아렌도에게 있어 엘리는 스페라도 가문의 명예와 귀족적인 자존감도 다 잃어버린, 그저 예쁘기만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직 약혼을 파기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 엘리가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아주 조금이지만 엘리에게 측은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그가 엘리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약혼을 파기해야겠지.”
“파기라니요!”
엘리는 놀라 크게 외쳤다가 스스로 제 입을 막았다. 제가 이렇게 크게 소리 지른 것에 놀란 탓도 있었으나 지금 그녀가 황자의 앞이라는 게 더 중요했다.
“듣기로 예전에 한 번 후보 자리에 오른 적이 있었다면서? 그렇다면 이번에도 쉽게 통과가 되겠지.”
이어지는 아렌도의 말에 엘리는 작게 이를 갈았다.
그때는 거액의 기부금과 황실의 추천으로 통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후작가는 자신을 도와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고, 황실이 자신을 추천해 줄 리도 만무했다. 즉, 이번 시험은 오롯이 엘리의 힘으로 통과해야만 했다.
‘내가 추천을 받았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다니.’
엘리는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웃어 보였다.
“아렌도 황자님. 저에게는 아렌도 님밖에 없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요즘 어떤 일을 겪었는지…….”
거기까지 말한 엘리는 슬픈 듯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차오르더니 곧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될 법도 하지만, 엘리는 그런 것마저 계산해 안쓰럽고 가녀린 소녀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그런 저를 정말 내치실 건가요……?”
그렇게 말하며 아렌도를 바라보는 엘리는 마치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진주 같은 눈물이 떨어졌고 눈물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더욱 반짝였다. 거기다 붉어진 뺨과 눈가는 너무도 안쓰러워 보여 아렌도의 뒤에 서 있던 시종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만약 그가 예술 쪽에 실력이 있었더라면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해서 저 아름다움을 고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엘리를 바라보는 아렌도의 눈빛은 차가웠고 그건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엘리는 그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아렌도 황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듯이 나도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서로 그게 마음에 들어 약혼을 한 게 아닌가? 묻지. 내가 만일 황태자에 유력한 황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대가 나를 약혼자로 선택했을까?”
“물론이에요! 저는 황자님을 사랑해서 만난 거니까요. 황자님이 무엇이 되든 저는 황자님만을 사랑했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내 사랑.”
그 말에 아렌도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네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곡을 찔린 엘리는 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어쨌든 이게 마지막 기회네. 적어도 겨울 끝자락 때 열리는 후보 자격 시험 정도는 통과해 보이길. 내 사랑하는 약혼녀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
그 말을 끝으로 엘리는 넓디넓은 황궁 정원에 홀로 남겨졌다. 한참을 홀로 앉아 있던 엘리는 마차가 준비됐다는 시종의 말을 듣고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시종은 어서 가라는 말을 둘러말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엘리는 아렌도 앞에서 숨겨 놓았던 분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악!”
쨍그랑! 엘리는 제 손에 잡힌 책을 집어 던졌다. 날아간 책은 섬세한 솜씨로 춤추는 여자아이를 세공한 유리 공예품에 맞았다. 하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제 봉급의 몇 십 배는 되는 유리 세공품을 아니, 유리 파편을 바라보았다.
“짜증 나!”
엘리는 미친 듯이 제 머리를 쥐어뜯더니 다시 제 손에 걸리는 모든 걸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하녀 몇은 간신히 피했으나, 아직 어린 하녀 한 명은 책 모서리에 머리를 맞고 말았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하녀가 쓰러지자, 엘리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언제나 아름답고 보석 같았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제 분노와 광기만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엘리의 몸이 작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너, 지금 비명 질렀어?”
“아, 아니요! 아닙니다, 아가씨. 책 소리가 잘못 난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엘리는 이제 손톱을 세우고 하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녀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잡이로 하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레슬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먹으로 때리고 얼굴을 할퀴었다. 이따금 발길질로 등이나 다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너, 너 때문에 내가!”
엘리는 이성을 잃은 듯 하녀를 때렸다. 하녀가 울며 웅크릴수록 더욱 강하게 주먹질을 하거나 발길질을 했다. 짜증이 어떻게 할지 모를 정도로 강하게 샘솟았고 엘리는 착실히 그 뒤틀린 감정을 따라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이 다 그년 때문이야. 하녀의 갈색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얼굴을 들게 한 후 뺨을 때리며 엘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은 다 레슬리, 그 아이 때문이라고.
레슬리 그것이 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강대한 어둠의 힘을 가지고 황태자와 결혼해 황태자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 권력으로 아라벨라건 뭐건 될 수 있었을 텐데! 거기다 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간 것도, 지금 아버지가 패닉에 빠져 자신의 방파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것도! 그리고 내가 이딴 시험을 쳐야 하는 것도!
“다, 다! 너 때문이라고!”
짜악! 엘리는 다시 한 번 강하게 하녀의 뺨을 쳤다.
신어도, 고어도 너무도 어려워 해석할 수가 없었다. 아라벨라의 후보 시험에는 신어와 고어를 해석하는 것이 필수로 들어 있었기에 자신은 떨어질 게 너무도 분명했다. 거기다 신학, 신학은 어찌나 외울 것이 많던지.
엘리는 한번 신학 책을 펴 봤다가 그대로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 책은 그대로 날아가 늙은 정원사의 머리를 맞췄다. 정원사가 비명을 질렀지만 엘리는 가뿐히 무시했다.
대외적으로 엘리는 신어도, 고어도 그리고 신학과 철학마저 완벽한 이미지였지만, 그 이미지는 전부 레슬리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녀가 해석하고 그녀가 핵심을 짚어 주고, 토론에서는 레슬리의 생각을 마치 제 것처럼 말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그간 레슬리에게 미룬 탓이었지만, 엘리는 다시 그 모든 잘못을 레슬리에게 돌리고 눈앞에 있는 하녀를 자신의 화풀이로 때렸다.
“하아. 하아…….”
엘리는 한참을 때리고서야 하녀를 놔주었다. 하녀는 기절한 듯 미동도 없었고, 눈치를 보던 다른 하녀들이 잽싸게 그녀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어쩌지.”
나름 속을 풀었는데 다시 울컥울컥 고여 있던 분노가 차올랐다. 엘리는 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더 때릴 것도, 방에 남은 던질 것도 없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 저택에서 가장 오래 일한 노집사였다. 엘리는 노크도 없이 들어온 집사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혹시 아르롱에서 드레스를 구매하셨습니까?”
집사는 엘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에 엘리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 전에 새 디자인 드레스가 나왔다고 해서 그때 바로 예약했지. 그런데 그게 왜?”
“지금 저희 저택의 재정이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지 아십니까!”
집사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절망만이 깃들어 있었다.
요 며칠 내 날아오는 독촉장들은 집사를 너무도 지치게 했다. 그걸 처리해야 할 주인은 술독에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안주인은 제 명예가 더럽혀졌다며 친가로 떠났다. 그리고 하나 남은 아가씨는 이러고 있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요구한 피해보상금은 스페라도 영토에서 3년 동안 걷는 세금을 다 합쳐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드레스를 취소해 주십시오, 아가씨.”
“안 돼!”
엘리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절대,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 드레스를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알아? 이번에 열리는 회델레아 영애의 티 파티 때 그 드레스를 입고 가겠다고 이미 다 이야기를 해 놓았단 말이야! 거기다 이미 주문할 때 대금의 반을 줬는데, 그 반을 줄 돈이 없다는 거야?”
“없습니다.”
집사는 이제 정말로 울고 싶었다. 오랫동안 이 저택을 관리했지만, 이렇게 최악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엘리 아가씨. 쓰지 않는 보석이라도 주십시오. 그거라도 팔아서 남은 잔금을 치르고 식료품을 사야 합니다. 거기다 황실에서 어떤 벌이 내려올지 모르니, 그것도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정도인 건가. 엘리는 충격을 받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자신의 보석을 팔아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할 정도란 말이야? 거기다 벌이라니……. 그깟 아이를 좀 때렸다고 자신에게 벌을 준단 말인가. 엘리는 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안에 옅은 피 맛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안 된다면 셀바토르 공작을 찾아가야 합니다. 찾아가서 부디 보상금을 할부로 내든가 아니면 미뤄 달라고…….”
“미쳤어?”
엘리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언제나 바람 같고 언제나 포근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천 갈래 길로 찢어진 지 오래였다.
“그, 그 괴물 집에 가면…… 그게 있잖아!”
그래, 그 괴물들의 소굴로 들어가면 레슬리가 있었다. 엘리는 잠시 자신이 그 괴물들과 레슬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상상을 했다. 구질구질하게 돈을 나중에 주겠다고 애걸복걸하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레슬리는 방긋 웃음 지었다.
‘가엾어라.’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들을 것 같아……?”
노리고 있는 거겠지? 자신이 보상금 때문에 제 발치에 엎드려 우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거겠지?
엘리는 제 귀를 틀어막고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귀를 막고 있는데 자신을 깔보는 레슬리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절대로 그렇겐 안 해, 두고 봐.”
그렇게 웅얼거리던 엘리는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아, 아가씨!”
집사가 그녀를 불렀지만, 무시한 채 엘리는 복도를 달렸다. 당황한 사용인들이 뒤로 물러나고 심지어 비키다가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엘리는 걸음을 옮겨 서재에 도착했다.
“아버지!”
서재의 문을 벌컥 열자,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강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발을 내디딜 틈도 없이 온 서재의 바닥이 술병 천지였다.
술병을 밟지 않게 조심하며 소파로 다가가자 긴 소파 위에 널브러진 스페라도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옷차림만은 깔끔하게 입던 남자는 크라바트도 커프스도 전부 내팽개친 채 술병만 손에 들고 있었다.
푸른 눈에 초점이 안 맞는 걸 보니 약과 술을 도가 넘게 한 모양이었다. 잠시 그 꼴을 짜증 난다는 듯 바라본 엘리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얼음이 담겨 있던 통을 집어 들었다.
쏴아아―! 술을 차게 보관하기 위해 얼음이 담겨 있던 통에는 이미 얼음은 녹아 없어지고 차디찬 물만 남아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물벼락 덕분에 아주 잠깐이지만 후작의 정신이 돌아왔다.
“뭐, 뭐냐.”
후작은 놀라 제 앞에 있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후작의 눈에서 초점이 다시 사라지기 전에 엘리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누워만 계실 건가요? 이대로 다 셀바토르 공작가에 빼앗길 거냐고요!”
엘리의 말에 스페라도 후작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도로 입을 다물었다. 물세례를 한 번 맞았다고 완벽히 이성이 돌아오기엔 그가 약과 술을 너무 한 탓이었다.
지나가는 하녀를 잡아 두 번째 양동이를 들고 온 엘리는 다시 후작에게 물을 쏟아부었다. 걸레를 빨던 물이라 그런지 후작은 이번에 오랫동안 정신을 잡고 있었다. 역하게 올라오는 냄새와 계속되는 헛구역질이 그걸 도왔다.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 어려움을 이겨 낼 방법이 있다니까요?”
그 말에 드디어 후작의 눈에 제대로 초점이 맞춰졌다. 후작은 몸을 벌떡 일으켜 엘리의 어깨를 으스러트리듯 잡았다.
“그, 그게 뭐냐. 응? 그게 뭐야. 아렌도 황자님에게 돈이라도 융통해 보려는 거냐?”
“미치셨어요? 아렌도 황자님께 그런 소릴 꺼냈다간 약혼은 그 자리에서 파기되고 말 거예요!”
크게 소리를 지른 엘리는 잠시 씩씩거리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제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가 간절히도 원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레슬리를 불에 넣어 죽이는 거예요.”
-다음 권에서 계속
괴물 공작가의 계약 공녀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