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9)

#6

불길이 사람을 덮치고 있었다. 작은 세상이 전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꿈이야.’

그래, 이건 꿈이었다. 분명 자신은 루엔티와 함께 어둠을 다루는 법을 배우다 일찍 귀가한 베스라온과 함께 식사했다. 바타는 오늘도 레슬리에게 새로운 맛을 보여 주었고, 마델은 자신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해 주고 나갔다. 자신은 그 인사를 들으며 폭신한 침대에서 눈을 감았었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야.’

“꺄아아악!”

“살려 주세요……. 제발요. 제발요…….”

“아버지, 어머니!”

“혀, 혀엉…….”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요.”

수십 명의 아니 수백 명의 목소리가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울려 펴졌다. 작은 목소리, 큰 목소리, 가련한 목소리, 낮은 목소리. 같은 사람은 없는지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중에서도 공통점은 있었다. 들리는 목소리는 전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레슬리는 다시 밀려오는 공포와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셀바토르 공작에게 고한다!”

그러는 와중에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불길 속에서 무시무시한 형상이 일어났다. 그 형상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꺄악 작은 비명을 지르며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불꽃으로 만들어진 형상은 자신의 앞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시선이 닿는 곳은 불길에 가려져 있었다.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그대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제물을 훔쳐 간 죄!”

형상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워서, 레슬리는 다른 목소리들처럼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무서운 형상이 셀바토르 공작님의 이름을 부른 탓이었다.

“스페라도 가문의 앞날을 막은 죄! 그리고 제물이 제 용도로 쓰이지 못하게 막은 죄!”

도망가고 싶은데, 형상이 계속해서 외치는 말이 레슬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레슬리는 눈물을 떨구며 크게 소리쳤다.

“닥쳐! 공작님은 나를 보호해 주신 것뿐이야!”

하지만 레슬리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는지 형상은 계속해서 공작에게 이상한 죄목을 씌우고 있었다. 어느새 아이들이 목소리가 들려오던 곳에선 다른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을 사형대로!”

“감히 가문의 앞날을 막다니!”

동조하는 목소리들 한가운데서 레슬리 홀로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라고! 죄목을 쏟아 내는 형상의 얼굴은 책에서만 봤던 황제의 얼굴 같기도 했고 스페라도 후작 같기도 했으며, 레슬리가 멋대로 상상한 배심원의 얼굴 같기도 했다.

계속해서 바뀌는 형상은 곧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셀바토르 공작을 사형에 처한다!”

그리고 그대로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안 돼!”

외마디 비명과 함께 레슬리는 눈을 번쩍 떴다. 생각했던 대로 눈을 뜨니 불길 속이 아닌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 위였다.

레슬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거기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잠옷도 폭신한 침대의 시트도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또야.’

또 그 꿈을 꾸고 말았다.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땀이 식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셀바토르 공작님이 재판에서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이 어이없는 꿈은 귀족 재판이 기어이 열리고 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꾸기 시작한 것이었다.

벌써 몇 차례더라? 레슬리는 꿈의 파편조차 기억날까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루엔티가 귀족 재판에 대해 말해 줬을 때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기어코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과 함께 책을 보고 잘못 쌓은 지식이 얹혀,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이 악몽을 불러왔다.

꿈은 늘 같았다. 매번 레슬리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불길 속에 갇혀 있었다. 사방은 그 불 속에서 죽어 간 아이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고, 곧 레슬리가 상상한 재판관이 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작님을 사형에 처한다며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늘 그 장면에서 눈을 떴다.

“후우.”

레슬리는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몸 떨림이 가라앉으면 물 한 컵을 마시고 다시 눈을 감자. 늘 그랬듯이.

“괜찮아.”

레슬리는 소리 내 자신을 다독였다. 제 몸을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괜찮을 거야.”

어서 자자. 피곤해하는 티를 내면 모두가 걱정할 것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공작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서 자야 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차라리 모두에게 물어보자.

귀족 재판이 어떤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자신은 신경 안 쓰는 척, 관심 없는 척 슬그머니 물어봐야지.

혹여나 아침에 제가 운 흔적을 마델이 볼까 봐, 레슬리는 컵에 반쯤 남은 물을 소매에 묻혀 뺨을 한 번 문대고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레슬리는 다시 불길 속에 서 있었다.

***

‘다들 너무해.’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신학책을 신경질적으로 뒤척거렸다. 어느덧 레슬리가 악몽을 꾸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일주일은 레슬리가 귀족 재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인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공작저의 그 누구도 레슬리에게 귀족 재판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은 바빠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지 못했고, 사이레인은 아예 공작저를 비웠다. 베스라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책에서 본 설명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설명을 해 주며 괜찮을 거라 했고, 루엔티는 마법사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역시 요즈음 아예 거기서 살고 있었다.

덕분에 수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레슬리는 홀로 어둠을 움직이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틸레이얼 부인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녀는 그저 괜찮다는 듯 레슬리를 다독일 뿐이었다.

‘내가 장본인인데.’

짜증이 치솟아, 레슬리는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자신이 그 재판의 장본인이나 다름없는데 다들 자신에게 상황을 숨기고 있었다. 이유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짜증이 치밀었다.

거기다 계속된 악몽 탓인지, 아니면 어둠을 움직이는 훈련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몸이 무겁게 느껴져 짜증이 더했다.

‘공작님이 잘못되시면 어쩌지.’

악몽을 꾼다는 걸 솔직히 말하면 다들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시키는 건 싫은데.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에 레슬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레슬리 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레슬리는 황급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테센트루아 성기사단 제복을 차려입고, 그 위에 금실로 테센트루아 기사단의 문양이 박힌 망토를 입고 있는 콘라드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레슬리에게 선물로 줄 디저트 상자가 소중히 들려 있었다.

언제 오신 거지? 레슬리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콘라드 경.”

“죄송합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으시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허락도 없이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못 들은걸요.”

괜찮다고 말하는 레슬리의 말에 콘라드는 레슬리를 보며 살포시 웃더니 레슬리 앞에 자리 잡았다.

“신학 수업을 하기 전에 오늘은 먼저 차를 마셔 볼까요?”

그러더니 자신이 가져온 디저트 상자를 조심스레 레슬리의 앞에 내려다 놓았다. 그러고는 하녀에게 뜨거운 물과 다기를 내와 달라고 이야기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요.”

마델도 아침에 눈 밑이 어두워졌다고 걱정했었다. 레슬리는 괜스레 제 눈 밑을 만져 보았다.

“생각에 잠겨 계셨군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레슬리의 맞은편에 자리한 콘라드는 손수 차를 타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찻주전자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넣어 적당한 온도를 맞추고는, 물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차를 우려냈다. 능숙한 솜씨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콘라드는 자신이 가져온 찻잎을 꺼내 찻주전자에 넣더니 티코지를 덮고 차가 제대로 우러나길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맑은 웃음을 머금더니, 레슬리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달콤한 것은 기분을 훨씬 낫게 해 주지요.”

그러면서 자신이 사 온 디저트를 차와 함께 레슬리의 앞에 내려놓았다. 군더더기가 보이지 않은 움직임이라, 레슬리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익숙해 보이시네요.”

“어머니가 제가 우려낸 차를 좋아하셔서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살짝 휜 눈가가 붉어졌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슬리는 조심스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와.”

익숙한 맛 위로 꽃향기가 섞여 입안에 퍼져 나갔다. 레슬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한 모금 더 차를 마셔 보았다. 입안에 퍼지는 꽃향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

“꽃밭에 와 있는 것 같아요…….”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뭐지? 뭐기에 이렇게 좋은 향이 나는 걸까?

“좋아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이번에 어머니가 타국에서 사 온 차인데, 수선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요.”

차를 마시는 레슬리가 귀여운지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다시 휘었다. 그러고는 기다란 디저트가 놓인 접시를 레슬리에게 살짝 밀었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디저트! 레슬리는 자신 앞에 놓인 기다란 빵 모양의 디저트를 바라보았다. 길쭉하고 조금은 작은 디저트 위에 크림과 블루베리가 올라가 있었고 그 사이를 작은 꽃 몇 송이가 꾸미고 있었다. 이 디저트 역시 레슬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콘라드는 셀바토르 공작저로 자신을 가르치러 올 때마다 레슬리가 난생처음 보는 디저트를 사서 왔다.

처음엔 레슬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도 있었으나, 공작저를 방문하면 방문할수록 점점 레슬리의 입맛에 정확히 맞는 것들로 가져오고 있었다. 그래서 요즈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신학 수업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레슬리는 포크로 조심스레 기다란 디저트를 작게 잘라 입안에 넣었다.

‘역시 맛있어.’

바삭바삭한 빵 속에 달콤한 초콜릿 크림이 숨겨져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디저트 위에 올려져 있던 블루베리를 먹으니 상큼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거기다 혹시 몰라 주저하던 꽃조차 달콤한 것이, 설탕에 조린 꽃 같았다.

“에클레어라는 음식입니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레슬리가 볼을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며 콘라드는 웃음을 흘렸다.

“기분은 조금 나아지셨나요?”

두 번째 에클레어 조각을 먹으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까보다 나아졌다. 아침까지 괴롭히던 악몽도 조금은 가신 기분이었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콘라드 경.”

“뭘요. 혹시라도 아직 답답한 게 남아 있다면 저에게 이야기해 주세요. 남에게 털어놓는 것도 걱정을 줄이는 꽤 좋은 방법이니까요. 언제든 이야기 상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환하게 웃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웃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첫 만남 때도 눈이 웃는 걸 보고 따스한 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좋은 방법…….’

레슬리는 마지막 에클레어 조각을 꼴깍 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공작저의 사람들이 말해 주지 않는다면 공작저의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저, 콘라드 경.”

이름을 부르자 신학책을 꺼내 들던 콘라드가 말하라는 듯 시선을 맞췄다.

“혹시 귀족 재판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아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콘라드도 빠르게 왜 레슬리가 그에 관해 물어보는지 알아챘다. 그리고 잠시 주저했다. 아무래도 셀바토르와 스페라도 가문 사이의 일이고 모두가 레슬리에게 말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걸 자신이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기색이 얼굴에 서렸다.

평소의 레슬리라면 적당히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엔 레슬리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콘라드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레슬리는 귀족 재판이나 현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재판장에 설지도 몰랐다.

레슬리는 급하게 손을 내밀어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콘라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콘라드 경! 제발 알려 주세요. 저는 그 일의 당사자면서도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해요. 제발요.”

셀바토르 공작님이 밖의 소문을 알려 주고 난 후로, 그녀는 전혀 돌아가는 상황 따위 알지 못했다. 거기다 곧 열릴 귀족 재판에 대해서도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책의 세상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걸 베스라온이 알려 주지 않았던가.

레슬리는 간절한 눈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콘라드가 굳은 채 레슬리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콘라드 경?”

“아, 네, 네!”

언제나 여유 있어 보이던 황금색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여유로움은 사라지고 다른 감정으로 가득 찼다. 그와 동시에 하얗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아! 귀족 재판이었죠. 으앗!”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당황하더니 제 옆의 찻잔을 다른 손으로 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찻물이 조금 넘쳐 소맷자락에 튀었을 뿐이었지만, 콘라드가 당황했음을 여실히 알려 주었다.

“괜찮으세요?”

레슬리가 손을 뻗자 이번엔 콘라드가 몸을 뒤로 젖혔다. 콘라드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저어, 제가 불편하신가요?”

레슬리는 격한 콘라드의 거부 반응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매일 디저트도 사 오고 즐거운 이야기도 해 주셔서 나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착각이었을까. 자신 혼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콘라드 경이 불편해하실 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아니! 아닙니다, 레슬리 양. 레슬리 양의 잘못이 아닙니다.”

레슬리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기도 전에 콘라드가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부끄럽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올리기도 하고 붉어진 얼굴을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손부채질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후 조금은 붉은 기가 가신 콘라드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여성분에게 익숙지가 않아서요.”

“콘라드 경이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레슬리의 마음을 읽은 듯 콘라드가 제 소맷자락에 튄 찻물을 그제야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의 일원이지요. 그리고 저는 신에게 검을 바치기로 한 그때부터 신전 기사단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일곱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 레슬리는 그제야 콘라드의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은 보통의 기사들처럼 종자를 거치지 않는 대신 신전 기사단에 모여서 생활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전 기사단은 남녀가 나뉘어 생활했다. 그래서 기사 작위를 받고 신전을 나오기 전에는 몇 사제와 신도들을 제외하고 이성을 만나 볼 기회가 없었다.

“저는 기사 작위를 받고 아이테라 대공가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건 괜찮지만 그, 손을 잡거나 하는 것은……. 죄송합니다.”

콘라드는 다시 붉어진 얼굴로 무엇이 그리도 죄송한지 연신 고개를 숙였다. 흘러내리는 짙은 회색빛 머리 사이로 보이는 귀마저 붉어져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얼굴이 녹아 흘러내리지 않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레슬리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배려하지 못한 탓이에요. 죄송합니다, 콘라드 경.”

“아닙니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제가 더 죄송합니다.”

사과가 몇 번이나 오고 간 후에 두 사람은 차를 홀짝이며 멋쩍게 웃었다. 잠시 후 붉은 기가 가라앉은 콘라드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직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는 조금 붉어 있었지만.

“귀족 재판은 명예 사형이라고도 불립니다. 일단 그 장소에 서게 되는 것 자체가 불명예로 통하지요. 과거에는 재판에서 진 귀족들이 수치를 못 이겨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콘라드의 설명에 레슬리는 눈을 크게 떴다. 사형, 자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무서운 단어들에 바로 어제도 꾼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님은 그럴 분이 아니죠.”

아까까지 손을 잡고 부끄러워하던 어린 소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콘라드는 입가에 다시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분의 명예는 더럽히려 해도 더럽힐 수 없는 것. 그리고 공작님에게 ‘진다.’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요.”

확신을 가진 목소리였다. 레슬리는 잠시 콘라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콘라드 경은 공작님을 믿으시는군요.”

“네.”

즉답이 돌아왔다. 콘라드는 조금 앞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양은 공작님을 믿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믿어요. 하지만 다들 나에게 아무 이야길 해 주질 않아요.”

괜스레 심통이나 레슬리는 눈을 찡그렸다. 자신이 장본인인데 아무도, 그래,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혹시 레슬리 양, 다른 분들에게 먼저 여쭤 볼 때 어떻게 물으셨는지요?”

“그냥…… 귀족 재판에 대해 궁금하다고 했어요.”

걱정하지 않도록 최대한 불안감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은 평소와 비슷한 척 그렇게 물어보았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은 다들 한결같았다.

‘괜찮아요, 레슬리 아가씨. 아무 일도 아니랍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모든 일의 원흉인 자신을 너무도 아껴 주었다. 답답했던 마음을 털어놔서일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마, 만약 제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어느새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걱정을, 죄책감을 소리 내 말하는 순간부터 떨어졌던 것 같았다. 울먹임에 목소리가 잠기고 레슬리는 코를 훌쩍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이나 다들 이렇게, 이, 이렇게 곤란하지 않았을 텐데……. 모두에게 너무 미, 미안해요. 그래서 악몽도 꾸고……. 흐, 흐윽.”

말끝은 울음소리였다. 울음보가 터지고 만 레슬리는 큰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어쩌지. 자신 때문에 공작저의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우는 레슬리 곁으로 다가온 콘라드는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그건 레슬리 양의 잘못이 아니에요. 분명 공작저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렇겠지. 이 공작저에는 스쳐 지나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레슬리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모두가 레슬리가 상처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따스함에 눈물이 왈칵 더 터져 나왔다.

레슬리는 몸을 더 웅크리며 크게 눈물을 흘렸다. 이번엔 콘라드도 말이 없었다. 그저 레슬리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다독여 줄 뿐이었다. 잠시 손이 멈칫했지만, 콘라드는 부드럽게 레슬리의 여윈 등을 쓸었다.

한참 후 레슬리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해, 레슬리를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레슬리에게 콘라드는 말없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두 번째였다.

“감사합니다.”

잠긴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넨 레슬리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데, 콘라드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레슬리 양. 혹시 불안하다고 말해 보셨나요? 아니면 악몽을 꾸고 있다는 말은요?”

그 대답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입 밖으로 불안하다는 말을, 악몽을 꾸고 있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번 말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솔직하게 악몽을 꿀 정도로 불안하다고. 그래서 알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 보세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다들 말하지 않으면 얼마나 그 걱정이 깊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콘라드는 옅게 웃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이야기하고, 울고, 화내고 그렇게 감정을 보여 보세요. 아직 레슬리 양은 어리시니까요.”

그 말에 레슬리는 샐쭉하게 눈을 뜨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저는 어리지 않아요. 열두 살이나 된걸요. 그러니까…….”

멋대로 남을 걱정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려는데 콘라드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마침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에 황금빛 눈동자가 더없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아직 열두 살이라면 더 크게 울어도 괜찮은 나이입니다. 성인이 되면 더 울지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열심히 울어 놔야지요. 게다가 공작님이 보기엔 레슬리 양은 아직 어린아이인걸요.”

“……콘라드 경도 그럴걸요.”

“네, 저도 그분 앞에선 한없이 어린아이일 겁니다.”

너무 쉽게 인정하자 레슬리는 김이 빠져 작게 웃음을 흘렸다.

“셀바토르 공작님을 만나면 이번엔 물어보세요. 바쁘신 분이지만 레슬리 양이 솔직히 지금 상태를 말하면 분명 말해 주실 겁니다.”

그래, 오늘 공작님이 돌아오시면 물어보자. 악몽을 꾼다고, 너무도 무서운 꿈을 꾼다고 솔직히 말하고 조금이라도 알려 달라고 해 보자.

“감사합니다, 콘라드 경.”

레슬리는 콘라드가 준 손수건을 잡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레슬리의 얼굴에 조금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더니 곧 레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손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손이요?”

괜찮나? 아까도 부끄러워서 어찌할 줄 몰라 하셨으면서. 레슬리의 머뭇거림에 콘라드가 웃으며 말을 이였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콘라드의 뺨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레슬리는 그가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콘라드가 내민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콘라드가 손에 조금 힘을 주고 잡는 순간 황금색 빛이 팔을 타고 퍼졌다. 전에도 겪어 본 적이 있는 힘, 신력이었다. 황금색 빛이 서서히 레슬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워.’

조금 전까지 울어서 쉬어 버린 목소리도, 띵하고 울리던 머리도, 그리고 근래 들어 자꾸만 무거워지던 몸도 순식간에 나아졌다. 황금빛 신력이 전부 레슬리에게 흡수되자 콘라드는 잡고 있던 레슬리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생긋 웃어 보였다.

“악몽을 꾸신다기에. 몸이 조금 가벼워지면 잘 주무시지 않을까 해서요.”

확실히, 이렇게 좋은 몸 상태로는 악몽을 꾸고 싶어도 못 꿀 것 같았다. 신기함에 신력이 가장 먼저 퍼졌던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레슬리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손수건도 그렇고, 늘 경께는 신세만 지네요. 어떻게 이 호의에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레슬리는 아직 제 왼손에 들려 있는 콘라드의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손수건은 조금 처참해 보였다. 나중에 새 손수건으로 돌려 드려야지.

“그렇다면 레슬리 양. 나중에 저를 한 번 도와주시겠습니까?”

괜찮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콘라드가 레슬리에게 예상과는 다른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러는 편이 레슬리에게는 더 좋았기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무슨 일이든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릴게요.”

고어를 해석해 달라는 요청이면 좋겠다. 고어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레슬리를 바라보며 콘라드는 작게 웃었다. 태양을 닮은 따사로운 눈동자가 살짝 휘고 뺨은 조금 더 붉어졌다.

***

“아가씨이…….”

마델이 곤란하다는 듯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슬리는 되레 마델을 피해 얼굴을 홱 하고 돌렸다.

“졸리시잖아요. 내일 아침 일찍 공작님을 만나면 된다니까요?”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못 만났는걸. 오늘은 꼭 만나고 말 거야.”

레슬리는 절대 자러 가지 않겠다는 듯 검은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시위에 들어갔다. 레슬리의 강경한 모습에 집무실에 모여 있던 제나와 마델이 곤란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아가씨, 공작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에게 말해 주세요. 제가 반드시 전해 드리겠습니다.”

결국 제나까지 나서 레슬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강경하게 다시 고개를 흔들고는 소파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몸을 웅크렸다.

“오늘 공작님은 새벽 별이 뜰 때나 돌아오실 겁니다. 늦게 자면 몸에 좋지 않아요.”

“내일 제가 꼭 일찍 깨워 드릴게요! 그러면 공작님과 이야기하실 수 있어요.”

“아가씨, 어서 주무셔야지요. 지금 주무시면 이 바타가 내일 아침 아가씨께서 가장 좋아하는 오믈렛이랑 팬케이크를 아침으로 올려 드릴게요.”

“아가씨, 제가 잠드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 드릴게요. 아, 자장가는 어떠신가요?”

주방에서 바타와 서올리까지 방으로 올라와 레슬리를 달래기 시작했다. 갖은 회유가 쏟아졌지만, 그때마다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콘라드에게서 용기를 받은 오늘이 아니라면 자신은 또 사람들이 걱정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입을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셀바토르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별 밑에서 돌아온다던 셀바토르 공작은 예상보다 이르게 공작저로 돌아왔다.

레슬리의 예상대로 공작은 침실로 오지 않고, 바로 집무실로 올라온 것이었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는지, 셀바토르 공작의 어깨에는 눈송이가 묻어 있었다.

“공작님!”

레슬리는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달려 셀바토르 공작에게 안겼다. 잠시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곧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레슬리를 안아 올렸다.

“눈을 맞아서 차가울 텐데.”

“괜찮아요.”

레슬리는 놓치면 침대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셀바토르 공작의 품에 매달렸다. 그러자 작게 공작이 웃은 것도 같았다. 자연스럽게 망토를 서올리에게 건네주며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레슬리가 처음에 앉아 있던 소파 위에 레슬리를 내려놓더니 자신은 옆에 앉았다. 제나를 보며 손짓하자 제나가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이끌고 방을 나갔다.

“그럼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레슬리 양?”

공작의 물음에 레슬리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얼굴이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와도 같았지만, 품 안에 꼬옥 안고 있는 토끼 인형이 아직은 작은 아이임을 알려 주었다.

“공작님, 지금 진행되고 있는 귀족 재판에 대해 알려 주세요. 책에서나 볼 법한 의미도 말고 저를 달래 주기 위해 그냥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안 돼요. 재판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제가 도와 드릴 건 없는지. 스페라도 후작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고 계시면 전부 이야기해 주세요!”

마치 몇 번이나 연습한 듯 속사포로 말을 내뱉고 레슬리는 작게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혀는 안 깨물었을까. 셀바토르 공작은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재판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정이 다 돼 가는 이 시간까지 기다린 건가?”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다시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일락색 눈동자에는 졸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일 이야기했어도 괜찮을 텐데.”

그런 레슬리가 귀여워 셀바토르 공작은 손을 뻗어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슬리가 저택에 막 왔을 때보다 훨씬 보드라워진 머릿결의 감촉이 마음에 들어 공작은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다들 이야기해 주지 않는걸요. 베스라온 님도 그렇고 루엔티 님도 그렇고……. 저는 이 일의 당사자니까 알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비록 공작님이 민폐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처음엔 당당하던 말끝이 걱정으로 흐려져 있었다.

“민폐라니 그럴 리가. 그저 베스라온이나 루엔티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을 제대로 안 해 준 이유는 이 일을 크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네?”

명예 사형이라 불리는 귀족 재판을 크게 보고 있지 않다니. 레슬리가 눈을 깜빡이는데 공작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스페라도 후작은 네가 이 저택에 왔을 때부터 재판을 열겠다고 난동을 부렸지. 덕분에 우리 쪽은 준비할 시간이 길었단다.”

어리석은 스페라도 후작. 셀바토르 공작은 입술을 뒤틀며 웃어 보였다.

“재판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어. 그리고 나는 너를 증인석에 세우지 않을 생각이란다.”

당한 본인이 말하는 것만큼 큰 증거는 없으니 레슬리를 증인석에 세우면 확실히 승소한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걸까. 셀바토르 공작은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에게 제가 당한 끔찍한 짓을 전부 말하라고 하다니, 다시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닐까.

그 고민에 대한 답은 레슬리에게서 제물 이야기를 듣던 밤에 얻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복수심을 내비치던 레슬리를 보고 공작은 레슬리를 증인석에 세우지 않기로 했다.

“어째서요? 당한 건 저예요!”

“굳이 네가 스페라도 후작을 마주하지 않고서도 재판에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단호하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의 눈동자에 잠시 당황이 섞이더니 이내 단호한 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만약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너에게 증언을 부탁하마.”

레슬리의 말을 한 번에 끊어 낸 공작은 생긋 웃으며 다시 레슬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토닥이기 시작했다.

“계속 같은 말을 들어서 질렸겠지만, 걱정할 게 없단다. 우리는 그 재판에서 지지 않을 거니까. 네가 나에게 부탁했었지. 스페라도 후작가를 몰락시켜 달라고.”

공작은 흐트러진 예쁜 은발 머리를 손수 뒤로 넘겨 주며 웃었다. 어딘지 즐겁고 기대감에 차 있는 얼굴이었다.

“이건 그 몰락의 시작이 될 거란다.”

그리고 숨어 있는 란다의 뿌리를 찾는 첫걸음이 되겠지. 아직 영문을 모르는 레슬리를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

아침은 늘 부산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히 한층 더 부산스러운 셀바토르 공작저의 아침이었다. 오늘이 스페라도 후작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첫 귀족 재판 날이었다.

“아가씨, 오늘은 제가 정말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마델은 빗을 손에 쥐고 레슬리를 보며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머리 한 올 한 올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미리 선별해 둔 듯한 여러 벌의 드레스를 꺼내 신중히 한 벌을 고르고, 옷과 세트인 듯한 리본으로 머리를 땋아 올리기도 하고 풀어서 옆으로 넘기기도 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풍성하게 땋기로 한 듯 레슬리의 은발을 땋기 시작했는데, 그 손길이 얼마나 꼼꼼하던지, 이대로라면 마델의 역작이 탄생할 것 같았다.

거기다 서올리까지 참여해 레슬리를 꾸미는 데 동참했다. 둘은 작은 장신구 하나, 부츠의 끈 하나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움직였다.

“됐다!”

마델은 살짝 눈물을 글썽이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예상대로 마델의 역작이 탄생했다. 긴 은발 머리는 남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리본과 함께 땋아 옆으로 넘기고, 옷은 제복의 느낌이 나는 단정한 드레스였다.

무릎까지 오는 긴 남색 재킷 안에는 레이스와 프릴로 멋을 준 셔츠를 입었다. 잿빛의 치마는 생각보다 긴 남색 재킷에 잘 어울렸고, 어딘지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해 레슬리는 거울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장신구를 최소화했지만,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어여쁜 레슬리를 보며 마델과 서올리는 활짝 웃었다.

“예쁘네요, 아가씨!”

“맞아요. 아마 오늘 재판장에서 아가씨가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정말로 환한 웃음이, 마델과 서올리가 자신들의 역작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웃는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레슬리에게 찬사를 쏟아부었다.

“마델이랑 서올리가 예쁘게 꾸며 준 덕분인걸.”

레슬리는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예쁘게 꾸며진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꾸며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도 아니고 어디 티 파티에 가는 것도 아닌데.

“저희가 열심히 한 게 아니라 아가씨가 예뻐서 빛이 나는 거예요.”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마델은 작은 모자를 내밀었다.

옷과 한 세트인 듯한 모자는 남성들의 중절모를 작게 만들어 꽃과 리본으로 장식한 모자였는데, 크기가 작아서 모자가 아니라 머리 장신구 같아 보였다. 그걸 조심스레 레슬리에게 씌워 주며 마델은 옅게 웃었다.

“오늘 중요한 곳에 가시잖아요. 저희는 하녀라 같이 가지는 못하고, 또 아가씨를 도와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이런 거라도 해 드리고 싶었어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옷을 쫙 차려입는 것도 좋거든요. 전투 복장이라고 해야 하나. 마음을 빵, 하고 잡아 줘요.”

서올리가 허리를 숙여 조금 느슨하게 매인 신발 끈을 다시 꽉 묶어 주며 웃었다.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저희는 여기서 아가씨가 꼭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을게요.”

“마델, 서올리…….”

레슬리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꼭 내가 바라는 결과를 가져올게.”

“네, 아가씨.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그 이상한 사람에게 한 방 먹이고 오세요!”

세 사람은 잠시 주먹을 불끈 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즐거워져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자, 그럼 이제 갈까요?”

“응!”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레슬리는 두 사람과 함께 방을 빠져나와 저택 입구 쪽으로 향했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왔어?”

저택 입구에는 루엔티가 레슬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올리의 말이 맞았던 듯 다들 평소와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루엔티는 공작저에서는 늘 편해 보이는 튜닉을 걸치고 다녔는데, 오늘은 푸른 망토를 걸치고 안에는 망토보다는 좀 더 짙은 빛의 마법사 정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머리까지 깔끔히 넘겨, 레슬리는 루엔티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어머니는 먼저 출발하셨어.”

“사이레인 님과 베스라온 님은요?”

“아버지를 마중 가야 해서 어머니가 먼저 출발하신 거야. 형은 이미 황궁에 가 있어. 나름 황실 기사단장이니까 재판장에 경비에도 신경을 써야 하거든.”

레슬리를 마차까지 착실히 에스코트하며 루엔티는 말을 이었다.

“이제 재판장에 들어가면 변론은 내가 맡을 거야. 너는 일단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가 필요할 때만 나오면 돼. 뭐, 나올 일 따위 없겠지만.”

“루엔티 님이요?”

“그래, 마차 발판 조심해. 넘어진다.”

읏챠. 손을 잡아 주며 레슬리가 쉽게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후 루엔티는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고 마차가 부드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셀바토르 공작가의 기사단이 그 주변을 호위했다.

거대한 검은 마차와 그 주변을 호위하는 네 명의 기사. 위압감이 절로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레슬리는 곧 떨쳐 내고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왜 루엔티 님이 변론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와 형은 무뚝뚝해서 말하는 거에 맞지 않아. 그렇다고 어머니가 나서기엔 좀 이르지. 어머니는 공작가의 가주시니까.”

어머니는 최종 보스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당하면 어머니가 나오실 거야. 그렇게 레슬리는 잘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덧붙이며 루엔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재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황실에 도착했다. 기사 중 한 명이 황실에 도착했음을 알렸고, 마차가 멈추는 사이 레슬리는 창문을 통해 황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레슬리에게 있어서 황실은 꿈같은 곳이었다. 역사서에 나와 있는 황실은 마치 신이 살 법한 곳으로 묘사돼 있었고, 그건 레슬리의 상상을 키워 주는 첫걸음이었다. 아렌도 황자와의 약혼이 확실시되어 엘리의 황실 출입이 한창 빈번해졌을 때, 하녀들이 황궁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숨어서 몰래 엿들은 적도 있다.

온종일 걸어도 끝이 없는 아름다운 궁전이 몇 개나 늘어서 있고 물을 뿜는 커다란 분수, 그리고 마법으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꽃의 정원, 별빛이 내리는 천장. 레슬리에게 황실은 별세계 같았다.

복도에서 일하던 하녀들의 말을 엿들은 그날, 레슬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상상되는 황궁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 한 번만 그런 아름다운 곳에 가 볼 수 있다면 너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이 단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날 레슬리는 난생처음으로 엘리를 따라 황실에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영문도 모르고 기뻐서 눈물까지 흘렸었다.

만일 아렌도 황자가 엘리의 동생이 있다는 말에 ‘아, 그래. 한 번 만나고 싶군.’이라고 아무런 감정 없는 말을 내뱉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이 레슬리가 시녀로 적합한지 실험해 보려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뤄지지 않았을 꿈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리고 그 기대와 꿈은 순식간에 악몽이 되어 버렸다. 아렌도 황자를 만나, 그리고 꿈같은 곳에 왔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레슬리가 차를 황자에게 엎지른 것이다.

다행히도 찻물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아렌도 황자도 다치지 않았다. 황자 역시 딱히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레슬리는 그다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와 스페라도 후작은 크게 분노했었다.

‘이 정신 나간 것이! 아둔하고 미련한 것이! 네가 감히 누구에게 무례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거야!’

그날이 레슬리가 태어나 가장 많이 맞은 날이었다. 엘리는 어디 너도 당해 보라며 뜨거운 차가 든 찻잔을 레슬리에게 던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엘리가 잘못 던진 탓에 차는 다른 곳에 쏟아졌지만, 엘리는 레슬리가 자신의 벌을 피했다며 하인들을 시켜 레슬리를 매질하게 시켰었다.

그 뒤로 레슬리는 너무 많이 맞은 탓에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렸었다. 침대를 내려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지만, 그 누구도 레슬리가 있던 작은 다락방을 찾아와 그녀를 간호해 주지 않았다.

그저 르아만이 ‘혼날 만한 일을 하셨죠! 아가씨는 더 아프셔야 해요. 엘리 아가씨가 아팠던 마음만큼만 더 아프세요!’ 그렇게 말하며 한 번 찾아왔다가 도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정말 며칠 후에야 다시 찾아와 레슬리에게 약을 던져 주었다.

‘충분히 반성하셨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악몽이었지.’

레슬리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황궁을 보자 그때 일이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크게 앓았으면서 자신은 멍청하게도 사랑받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나 정말 바보 같았네.’

아마도 제물이 되어 불길 속에 던져지지 않았더라면 그 멍청한 상태 그대로 스페라도 후작가에 머물러 있었겠지. 맞아도 좋다고, 무시당해도 괜찮다고, 자신을 사랑만 해 달라고 매달리면서.

“얼굴이 굳었네. 긴장했어?”

레슬리가 마차 발판을 밟고 내려오기 편하게 먼저 내려 손을 내밀던 루엔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

루엔티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제 손에 얹은 레슬리의 손을 꽉 잡아 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살짝 입술 사이로 덧니가 보였다.

아마 지금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자리가 아니라면, 레슬리의 머리가 예쁘게 땋아져 꾸며졌고 그 위에 작은 모자가 놓여 있지 않았더라면, 루엔티는 괜찮다며 은빛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 줬을지도 모른다.

공작님도, 사이레인 님도, 베스라온 님도 그리고 루엔티 님도 다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에 레슬리는 방긋 웃었다.

“아니에요. 전혀 긴장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루엔티의 손을 잡고 폴짝 뛰어내렸다. 레슬리의 발이 악몽 같았던 황궁에 닿았지만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그래, 마델과 서올리가 이야기해 준 대로 오늘 자신은 원하는 것을 받아 갈 것이다.

“루엔티, 레슬리.”

“형!”

“베스라온 님.”

잠시 레슬리가 속으로 의지를 다지는데 누군가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는 베스라온이었다. 갑옷을 입은 모습도 편안한 복장도 본 적이 있었지만, 린체 기사단 정복을 입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건 오랜만에 보네, 형.”

그건 루엔티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 베스라온을 바라보았다.

“이건 답답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베스라온의 미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정말로 싫은지 목소리에도 투덜거림이 조금 섞여 있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베스라온의 제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짙은 남색의 제복은 마치 밤하늘을 잘라서 만든 것처럼 보였고, 검은색의 망토에는 은빛으로 세밀한 수가 놓여 있었다. 단추도, 망토를 고정하는 망토 핀도 은색이었는데 그건 마치 별과 같은 색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레슬리에겐 정말 예뻐 보이는 제복이었다.

“그렇지만 잘 어울려요.”

레슬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베스라온의 암녹색 눈동자가 잠시 동그래지더니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베스라온을 따라온, 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 베스라온이 웃는 모습을 보고 놀란 듯 입을 뻐끔거렸다.

“너도 오늘 예쁘구나.”

“마델과 서올리가 꾸며 주었어요. 중요한 날에는 제대로 차려입어야 한대요. 음, 그래야 마음을 빡 하고 잡을 수 있다고 해 줬어요.”

“뭐, 맞는 말이지. 그래서 나도 오늘 이거 입은 거고.”

루엔티도 답답하다는 듯 저의 푸른 망토를 펄럭거렸다. 마법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옷인지, 루엔티의 푸른 망토는 펄럭일 때마다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이런 답답한 복장을 좋아하는 건 콘라드뿐일걸. 그놈은 늘 제복을 입는 걸 좋아하니까.”

“루엔티, 아이테라 공자에게 말이 심하다. 여긴 황궁이니 입을 조심하도록.”

베스라온의 충고에 루엔티는 ‘네이.’ 대답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레슬리도 같이 입을 내밀어 보았다. 이유는 없지만 왜인지 따라 해 보고 싶었다.

“레슬리, 너는 왜 그러는 거야.”

그 모습이 퍽 귀여웠는지 베스라온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즐거움이 짙어졌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머리에 얹어진 작은 모자를 보고 멈칫했다. 다들 비슷하다니까. 레슬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꺄륵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형.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안에 계신다. 나도 한 번 더 경비를 확인한 후에 재판장으로 갈 테니, 먼저 가 있도록 해.”

좀 이따가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베스라온은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뒤를 베스라온을 따라온 기사 둘이 따랐다.

베스라온을 뒤따라 걷기 전 두 사람 중 한 명과 레슬리는 눈이 마주쳤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던 데다가 그분이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어 줬기 때문이었다.

“가자, 레슬리.”

누구일까? 기억을 되짚기도 전에 루엔티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레슬리는 재판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엔티가 걸음을 멈추더니 어린 여동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슬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너는 연약하고 이런 거 신경 쓸 것 같아서 미리 말해 두는 거야.”

그리고 몸을 낮춰 레슬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긴 마법사의 망토가 바닥에 닿았다. 더러워질지도 모르는데 루엔티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레슬리의 라일락색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너를 바라볼 거야. 그리고 수군거리겠지. 하지만 그런 건 일절 신경 쓰지 마. 정 안 되겠다면 어머니나 아버지 옆에 붙어 있어. 그러면 누구든 입을 다물겠지.”

피스토레 황제 폐하조차 어머니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레슬리가 어머니나 아버지 옆에 있는데도 혀를 조심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그 나름대로 박수를 받을 만한 사람이리라.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멍청한 용기는 제 주인을 죽이겠지.

“신경 쓰지 마, 알겠지? 만일 너 혼자 있을 때 무례한 말을 지껄이는 인간이 있으면 얼굴을 기억해 놔.”

거기까지 말한 루엔티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얀 덧니가 눈에 들어왔다.

“반드시 그 인간들이 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해 준다. 내가.”

그 자신만만함에 레슬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자꾸만 레슬리를 웃게 만들어 줬다. 여기서 이렇게 웃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리던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말할게요.”

“전부 기억해 놨다가 말만 해. 알았지?”

“네에.”

활기차게 대답하며 다시 루엔티의 손을 잡자 루엔티가 다시 덧니가 보일 정도로 웃었다. 그리고 재판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재판장.’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재판장을 훑었다. 원형으로 된 재판장 가운데에 위치한 발언대가 가장 먼저 레슬리의 눈에 들어왔다. 저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이 재판장 어디에 있든 잘 보일 것이다. 그다음으로 황제가 앉을 법한 화려한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발언대를 가운데에 두고 재판장의 양옆에는 푸른색과 암녹색 천이 깔린 자리가 있었다. 푸른색은 스페라도 가문을 그리고 암녹색은 셀바토르 가문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리고 여기…… 꼭 책에서 봤던 결투장 같아.’

콜로세움이라고 했던가.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사람을 밀어 두고 죽고 죽일 때까지 싸우게 하는 경기가 있다고. 그 경기장을 닮았다고 레슬리는 생각했다. 원형인 것도, 승자와 패자가 나오는 것도 똑같지 않은가.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싸움을 보며 분명 즐거워할 것이다.

조금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데, 누군가가 레슬리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사이레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청록색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레슬리 양!”

그리고 암녹색 천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셀바토르 공작이 손을 흔들었다. 사이레인 님도 공작님도 평소와는 다르게 다들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사이레인 님!”

오랜만에 보는 사이레인이 반가워 레슬리가 환하게 웃자, 사이레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레슬리를 꼭 끌어안았다.

“세상에 인형이 걸어오는 줄 알았네! 이렇게 예쁜 레슬리 양이라니!”

케, 켁! 사이레인은 정말 살짝 끌어안은 거였지만, 레슬리에게 있어선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레슬리가 버둥거리자 공작이 사이레인을 말리듯 어깨를 잡았고, 루엔티는 그 틈을 타 레슬리를 번쩍 들어 대피시켰다.

“레슬리 숨 막혀요!”

“당신 힘을 생각해야지, 여보.”

두 사람의 잔소리에 사이레인은 아쉬운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마치 레슬리에게서 검은 토끼 인형을 빼앗은 모습 같았다. 사이레인은 작게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그래, 그래. 회포는 나중에 풀자고.”

공작이 토닥이며 사이레인은 원래 자리로 데리고 돌아갔고 루엔티는 그대로 사이레인을 경계하며 레슬리를 자리에 앉혔다. 그 모습을 목격한 귀족 몇 명이 경악스러워하는 얼굴로 작게 저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루엔티가 바라보자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스페라도 후작가 쪽은 아직 안 온 건가?”

푸른 천 위에 놓인 의자에는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흐음. 작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리던 루엔티가 옆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잠시 증인 좀 보고 올게요.”

그렇게 말한 후 루엔티는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루엔티의 걸음이 예상치 못한 사람 때문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셀바토르 영식.”

아름다운 밀색 머리를 늘어트리고 제 눈 색과 비슷한 에메랄드와 진주로 이뤄진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 여자였다. 긴 속눈썹 밑에서 머리에 달고 있는 에메랄드보다 더 어여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아름다운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루엔티는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를 아십니까?”

루엔티의 물음에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입니다.”

“아하.”

이게 그 여자구나? 루엔티는 덤덤하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우리 귀여운 막내를 그렇게 괴롭힌 인간이란 말이지?

“자기소개조차 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여.”

루엔티의 짧은 대답에 잠시 엘리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별문제 없다는 듯 엘리는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저도 길게 말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셀바토르 영식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저에게?”

일부러 루엔티는 짧게 톡 쏘듯 대답했다. 이번엔 살짝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지금이라도 재판을 포기하고 제 동생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셀바토르 영식. 저희 가문이나 셀바토르 공작가나 이런 불상사에 휩쓸리기엔 그 명예가 아까운 가문들 아닙니까.”

“싫습니다.”

“저와 저희 부모님은 사랑하는 제 동생을 찾고 싶을 뿐이에요!”

“사랑? 스페라도 가문에서는 사랑이란 단어와 화풀이 대상이 같은 뜻인가 봅니다.”

루엔티는 입가를 뒤틀며 웃어 보였다. 엘리는 저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인간은 처음이라는 듯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다시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망신을 당하실 겁니다. 우리에겐 강력한 증인이 있거든요, 셀바토르 영식.”

“본인의 미래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정확할 겁니다, 스페라도 영애.”

거기까지 말한 루엔티가 엘리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엘리는 당황한 듯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 상태로 루엔티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셀바토르가 망해 가는 가문과 같은 선에 놓이게 된 거지? 부디 주제를 잘 파악하길 바라, 스페라도.”

그리고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엘리를 스쳐 지나갔다. 뒤에서 뭔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귀를 한 번 후비적거리고는 루엔티는 성큼성큼 증인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

잠시 나갔다 오겠다던 루엔티는 한참 후에 느긋이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뒤를 따라온 베스라온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다 온 건가?’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재판장이 상상보다 커서 이곳을 다 채울 만큼 사람이 올까 싶었는데 무리 없이 모든 좌석에 사람들이 앉았다. 빈 곳은 오직 한 곳, 황제의 자리였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다 레슬리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람들에게 닿았다. 오랜만에 보는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람들이었다. 누구 하나 자신이 후작가를 떠날 때와 다름없이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니 되레 더 나아 보였다.

마치 자신들은 떳떳하다는 그 얼굴에 레슬리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는데, 엘리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레슬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분명 속으로는 자신을 저주하고 있겠지.

레슬리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같이 노려보았다. 그러자 엘리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레슬리 역시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피해자인 자신의 앞에서 가해자가 너무도 당당했다. 당당하다 못해 자신들이 진짜 피해자라는 얼굴로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니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은 황제의 등장과 함께 깨졌다.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난 황제는 책보다는 조금은 왜소했고 더 늙어 보였다. 책은 젊었을 적을 그렸던 걸까. 처음 본 황제였지만, 이미 두어 번 본 아렌도와 비슷한 얼굴이라 조금은 익숙하게 보였다.

“아, 되었네.”

황제 폐하의 외침을 알린 남자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지만, 황제는 가볍게 손을 저어 제지했다. 그리고 털썩 자리에 앉아 나른한 얼굴로 재판장 전체를 훑더니, 스페라도 후작과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재판을 포기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네. 셀바토르 공작, 스페라도 후작.”

그 황제의 말에 스페라도 후작이 발작적으로 외치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황제 폐하! 저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저의 사랑스러운 딸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이 재판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이 작게 웃더니 황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동감입니다, 황제 폐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뭐든 하는 법이지요.”

“그 아이는 내 딸입니다, 셀바토르 공작!”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스페라도 후작.”

스페라도 후작이 다시 뭔가를 소리치려고 했지만 황제가 몸을 일으키면서 그걸 막았다.

“그만!”

몸이 찌릿찌릿하다고 느낄 정도의 외침이었다. 후작도 선 채로 굳어 버렸고,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황제는 다시 크게 외쳤다. 아까까지 보여 주던 나른한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두 사람 다 정식 발언권을 줄 테니 그때 이야기를 하도록. 시종장!”

“네!”

황제가 털썩 앉으며 말하자,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나와 크게 외쳤다. 후흡,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남자는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지금부터 트라 베쉬 스페라도 후작이 신청한 귀족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트라 베쉬 스페라도! 두 분은 신과 각 가문의 명예를 걸고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종장의 말에 스페라도 후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크게 외쳤다.

“나, 트라 베쉬 스페라도는 신과 스페라도 후작가의 명예를 걸고 진실만을 이 재판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는 신과 셀바토르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진실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조용조용한 셀바토르 공작의 목소리가 이었다.

“두 사람 다 진실을 맹세하셨습니다! 피스토레 자일스 르카디우스 황제 폐하의 치세 아래 첫 귀족 재판을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재판을 신청한 스페라도 후작이 첫 발언권을 갖습니다!”

스페라도 후작은 천천히 계단을 타고 내려와 발언대 앞에 섰다.

“저는!”

스페라도 후작이 입을 떼자 작은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재판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앞에서 스페라도 후작은 연기를 시작했다.

레슬리가 보기엔 어떤 극장 배우들보다도 명연기 같았다. 어떤 배우도 저 후안무치한 후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레슬리가 극장에서 연극을 본 적은 없었지만.

“저는 얼마 전 사랑하는 제 딸을 셀바토르 공작에게 빼앗겼습니다.”

목소리가 거짓된 슬픔으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작은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였고 저는 제 딸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 사고에서 셀바토르 공작은 제 딸 레슬리 스페라도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공작저로 데려갔지요.”

그의 말에 앉아 있던 귀족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며 서로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여기까지는 셀바토르 공작님이 호의를 베푼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공작은 일부러 제 딸을 데려간 겁니다. 그리고 아프고 여린 딸을 데려가 저를 협박했습니다!”

웅성거림은 사람들의 경악을 먹고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레슬리는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이런 단순한 거짓말에 속는다는 건가?

그러는 와중에 스페라도 후작은 계속 발언을 이어 갔다. 절절한 목소리, 애절한 표정이 웅성거림을 부추겼다. 거기다 그간 와전되어 있던 공작가의 무시무시한 소문들이, 그리고 후작이 평소에 보여 줬던 엘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웅성임을 부추겼다.

“제 딸은 태어날 적부터 몸이 약해 저택을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약한 제 딸을 납치한 셀바토르 공작은 저희 가문의 힘인 어둠의 비법을 알려 주지 않으면 레슬리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거짓이야! 레슬리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옆에 앉은 셀바토르 공작이 레슬리의 손을 잡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외쳤을지도 몰랐다.

“저는 부디 저의 사랑스러운 딸을 되돌려 달라고, 아픈 제 딸보다는 저를 인질로 삼으라고…… 눈물로 애원했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딸의 어여쁜 머리카락을 잘라 제게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편지입니다!”

스페라도 후작은 편지와 은빛 머리카락 묶음을 번쩍 들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흔들었다. 은발은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도 드문 편이었기에 모두가 저 머리카락을 레슬리의 것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레슬리가 경악에 질려 있는데 사이레인이 작게 셀바토르 공작에게 중얼거렸다.

“협박한다고 하면 그냥 모가지를 잘라 보내면 되는 거 아니야? 왜 머리카락을 보내는 거야?”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제 손으로 목을 가렸고 사이레인은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로 셀바토르 공작에게 이마를 한 대 찰싹 맞았다. 다시 사이레인의 어깨가 밑으로 축 처졌다.

“보십시오! 이 간악한 편지에 찍힌 셀바토르 가문의 인장을!”

헤에, 꽤 비슷한데? 루엔티가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로 후작이 보인 인장은 정말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필적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고, 머리카락 역시 진짜 따님의 머리카락이란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한 귀족의 외침에 스페라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셀바토르 공작의 신전 기록부를 가져왔습니다! 신적 기록부는 무조건 본인이 서명하게 되어 있지요. 두 필적이 똑같다는 것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감정사의 소견서도 있습니다.”

그 말에 시종장이 내려와 편지, 신전 기록부 그리고 소견서를 가져와 피스토레 황제에게 내밀었다. 모든 증거의 진위는 황제가 가리고 있었으니까. 편지를 잠시 살펴본 황제는 손을 들어 시종장을 물렸다.

“편지도 필적도 위조하려 하면 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더 확실한 증거를 원하네, 후작. 이딴 말장난이 아니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피스토레는 이 편지를 셀바토르 공작이 쓰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그녀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단어들이 들어가 있던 데다가 필체도 조금 달랐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바로 기각시켰다가는 스페라도 후작이 입에 거품을 물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고, 후작이 준비한 증거를 전부 완벽히 끝을 내는 게 좋을 거라 판단해 재판을 진행시켰다.

후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은발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하인의 손에 넘겨졌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괜찮다. 아직 증거가 많이 있으니까. 거기다 그분이 만들어 준 증거까지 있다. 스페라도 후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은 매서운 눈으로 셀바토르 공작을 노려보았다. 아마 저 눈에 서린 증오만은 거짓 속에서 홀로 진실이리라.

“아까 저는 제 딸이 작은 화재 사고를 겪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협박 편지를 몇 통이나 받은 후,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화재 사고는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누군가가 일으킨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그 화재를 일으킨 범인이 셀바토르 공작이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증인을 들어오게 해라!”

스페라도 후작의 말에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허.”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한탄을 내뱉었다. 얼마 전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일을 그만둔 사내였다.

‘휴, 얼마 전 로그엔이 귀향한다고 저택을 나갔는데, 손이 점점 부족해지는군요.’

스페라도 후작의 끄나풀처럼 보이던 남자의 마지막을 지하실에서 지켜봤을 때, 제나가 투덜거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이런. 생각보다 뿌리가 깊었어.”

셀바토르 공작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자신의 감도 점점 죽어 가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나이가 무섭다는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오게, 로그엔.”

스페라도 후작에게 로그엔이라고 불린 남자는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저는 약 30여 년을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일해 온 사람입니다. 여, 여기 제가 일해 온 증거들이 있습니다. 계약서랑 은행의 저축 기록과…….”

로그엔은 품속에서 뭔가 잡다한 것들을 꺼내 발언대 위에 올려 두기 시작했다.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된 증거들을 가져온 모양이었지만, 귀족들은 그 어설픔에 눈을 찡그렸다.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알았네. 먼저 증언을 하게.”

스페라도 후작은 간신히 웃는 얼굴로 로그엔을 돌려세웠다. 하지만 로그엔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다.

“저는 오랫동안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일해 왔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그만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작님의 너무 부정한 명령……을 거절했다가 그만…….”

셀바토르 공작 쪽은 바라보지도 못한 채 파들파들 떨며 증언을 하는 로그엔의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공작님은 반드시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며, 스페라도 후작가의 마차가 잠시 멈춰 섰을 때 기름을 붓도록 저와 다른 하인들에게 지시하였습니다.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거부했고…… 곧 저택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힐끔. 잠시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본 로그엔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빠르게 증언을 이어 나갔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차가 불타고, 아이가 구해졌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바로 저 레슬리 님이었습니다. 저는 저분이 걱정되어 다른 하인에게 안부를 알아봐 달라고 했고, 그 하인은 루……엔티 님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고 도와 달라고 귀띔했습니다.”

루엔티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저 미친놈이 뭐라고 한 거야?

“그, 그래서 다시 연락을 취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 하인의 부고가 들려왔습니다. 그 하인의 이름은 파론, 파론 아덴이었습니다. 그리고 파론의 장례식을 거행한 신관님이 말해 주더군요. 파론의 입에 치아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재판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치아가 전부 없다니. 그게 고문인지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좋을 대로 생각하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과연 괴물들.”

이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베스라온은 험한 말을 내뱉었다. 그의 암녹색 눈동자가 무서운 기세로 스페라도 후작을 향했다. 후작은 그 눈빛에 움찔거리더니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 멈춰 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물러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자신도 베스라온을 노려보았다.

“알뜰하게도 써먹었군.”

셀바토르 공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정보를 빼내고, 필요 없으면 죽이고, 그 죽음은 발목을 잡을 덫으로 만든다. 역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시다시피! 루엔티 아돌 셀바토르는 마법사 저택에서도 유명한 마법사입니다. 그가 제 딸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요! 그래서 제 딸이 저곳을 집처럼 여기고 있는 겁니다!”

“아니야!”

결국 레슬리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수군거림이 멈추고 수십 쌍의 눈동자가 레슬리를 향했다.

“아니야! 거짓말을 하는 건 당신이잖아, 스페라도 후작! 언제나 나를 때리고 굶기고, 나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했으면서! 다락방에 몇 날 며칠을 가둬 두었잖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보고 반은 가엽다고 생각했으며, 반은 얼마나 마법이 잘 먹혔기에 저렇게 납치범의 편을 드는 거냐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축복의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았잖아!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 주지 않았으면서 사랑스러운 딸이라니. 전부 거짓말이야!”

레슬리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왜 다들 믿어 주지 않는 거야? 왜 다들 셀바토르 공작님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잖아!

“셀바토르 공작.”

“레슬리.”

피스토레 황제와 셀바토르 공작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피스토레 황제는 한숨을 쉬며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고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토닥이며 다시 앉혔다.

“베, 베스라온 님…….”

“괜찮아. 쉬이. 괜찮아.”

순식간에 살기를 지운 베스라온은 레슬리를 토닥거렸다. 레슬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저 눈동자들이 너무도 싫고도 무서웠다.

‘공작을 사형대로!’

꿈의 한 장면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스페라도 후작이 계속해서 막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보십시오!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제 딸이 저렇게 맹목적으로 셀바토르 공작에게 매달리는지! 그리고 학대라고요? 제가 저 아이를 굶겼다고요? 그게 만일 사실이라면 제 손목을 자르겠습니다! 이걸 봐 주십시오!”

당당하게 말하며 스페라도 후작이 꺼낸 것은 특정 영상을 담을 수 있는 마법석이였다. 그 마법석이 빛을 발하자 꺄르르 웃는 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와 레슬리였다.

아니, 레슬리를 닮은 다른 아이였다. 레슬리는 절대로 엘리와 함께 저렇게 웃어 본 적이 없으니까. 같이 소풍을 간 적도, 어머니와 저렇게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어 본 적도 절대 없었다. 제 생명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행복하게 놀던 제 딸이 더는 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스페라도 후작이라 부르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제 사랑하는 딸이……!”

거기까지 말한 스페라도 후작은 더 견딜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가엾은 아비의 모습에 몇몇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었다.

“스페라도 후작님, 그런데 축복의 이름은 어떻게 된 겁니까?”

한 귀족이 손을 들고 발언하자 후작은 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순전히 제 아내를 위해서입니다. 첫째 엘리를 낳고 난 후 제 아내는 유산했습니다. 축복의 이름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던 제 아내는 이윽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얼마 안 돼 다시 좋은 소식이 들려왔지만…… 레슬리는 몸이 약했지요.”

그 말에 가만히 앉아 있던 스페라도 후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거짓이다. 거짓이야. 엘리를 낳을 때 죽을 뻔한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둘째를 원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레슬리를 낳자는 후작의 말을 2년을 넘게 거부했을까. 그런데 유산이라니.

엘리는 잠시 당황한 듯 눈을 떴지만, 곧 빠르게 상황 파악 하고 제 어머니를 달래는 가련한 딸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 아내는 아이가 건강해지면 축복의 이름을 받아 오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안 그래, 여보?”

매서운 푸른 시선이 데리엘에게 꽂혔다.

“……그, 그렇습니다. 제가 유산한 탓에, 제가 무서워…… 축복의 이름을 후에…….”

순식간에 더럽혀진 자신의 명예에 데리엘은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지만, 엘리 덕분에 그 모습은 유산한 자신의 아이를 그리워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비쳤다.

그 덕분에 재판장의 귀족들은 거의 다 스페라도 후작의 편으로 넘어간 듯 보였다. 다들 셀바토르 공작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스페라도 후작.”

그 수군거림을 끊어 내며 루엔티가 몸을 일으켰다. 루엔티는 분노에 가득 찬 눈동자로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여태 한 발언들을 전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하! 신께 맹세했고 가문의 명예를 걸었소! 그런데 내가 거짓을 말하다니? 그게 말이 될 소린가! 셀바토르 영식 아니, 내 딸에게 마법을 건 이 괴물아!”

스페라도 후작은 그 눈빛에 밀려나지 않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루엔티가 다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 순간, 피스토레 황제가 그걸 제지하였다.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기대 있던 황제가 자세를 고쳐 앉더니 후작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의 얼굴에 섞여 있던 짜증과 지루함은 사라지고 매서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 지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했네. 후작의 말이 거짓이라면 마법사의 저택과 척을 지게 될 걸세.”

“저는 결백합니다, 황제 폐하! 제 발언에 조금의 거짓이 섞여 있다면 저는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제 딸아이의 몸을 검사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흐음. 황제는 몸을 다시 젖혔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사들로 확인을 하는 건가?”

“아닙니다. 루엔티 아돌 셀바토르는 마법사의 저택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자. 마법사의 저택이 전부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스페라도 후작의 말에 마법사로 보이는 몇이 일어서 발언을 하려고 했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계속해 보게, 후작.”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마치 무대 위에 선 연극배우처럼 인사한 스페라도 후작은 말을 이었다.

“신력은 마력에 반발하지요. 그런고로 고위 사제이신 데비엔 님께서 그 진실을 가려 주실 겁니다.”

그 소개와 함께 한 여성이 재판장 안으로 들어왔다. 여성은 재판장에 오자마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늘의 주인을 비천한 신의 종이 뵙습니다. 데비엔입니다.”

스페라도 후작의 소개와 함께 들어온 여성은 고위 사제만이 입을 수 있는 푸른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여자는 고위 사제치고는 젊은 편이었다. 고위 사제들은 대다수가 머리가 허옇게 바뀐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4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고위 사제다.”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신전에 단 몇 명뿐인 고위 사제의 등장으로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곤거렸다.

“인사는 되었소. 빠르게 진행합시다. 신의 종이여.”

그 말에 데비엔은 옅게 웃었다. 어쩐지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럼 제가 어떤 분을 확인하면 되는 겁니까?”

“저 은발의 아이입니다. 사제님.”

스페라도 후작이 가리킨 레슬리에게 천천히 사제가 다가갔지만, 레슬리는 그게 싫어 몸을 뒤로 젖혔다.

“시, 싫어요. 싫어.”

분명 스페라도 후작은 저 사제님에게 무슨 짓을 해 놨을 것이다. 자신을 스페라도 후작가로 끌고 가기 위해서. 그래서 레슬리는 저도 모르게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레슬리가 마법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한다는 믿음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쉬이, 괜찮단다.”

하지만 사제의 확인을 피할 수도 없었기에, 베스라온이 레슬리를 토닥였다. 레슬리는 결국 덜덜 떨면서 발언대 근처에서 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린 자매님.”

그렇게 말하며 웃는 데비엔의 눈동자는 마치 얼음과도 같은 옅은 색이었다. 사제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레슬리의 손을 잡았고, 황금색 빛이 레슬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꺄악!”

레슬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엄청난 고통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비록 마력과 신력이 반발하는 것을 느껴 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그 때문에 일어난 고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레슬리!”

놀란 루엔티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몰려드는 고통에 레슬리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턱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데비엔 사제는 말을 이었다.

“이런, 몸에 굉장히 강한 마력이 잔류하고 있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강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제 딸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물어보고 싶군요, 셀바토르 공작!”

제 승리를 확신한 스페라도 후작은 이젠 삿대질까지 해 가며 공작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아직도 사제에게 손이 잡힌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레슬리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여러분! 제 딸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여러분이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어떤 일을 당했다고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이미 귀족들의 머릿속에선 모든 일이 그들의 상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빙글 몸을 돌려 피스토레 황제를 바라보았다.

“부디 황제 폐하, 저 간악한 셀바토르 공작을…….”

“스페라도 후작.”

황제는 이제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 셀바토르 공작 쪽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네. 지엄한 제국의 법으로 두 편의 이야기를 전부 들어 본 후에 죄가 확정되니 후작은 입을 조심하도록.”

“……실례했습니다. 황제 폐하.”

욕을 들은 건 셀바토르 공작인데 사과는 피스토레 황제가 들었다. 하아. 작게 한숨 쉰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뒤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시종장이 앞으로 한 발 나서 크게 외쳤다.

“재판법에 따라 잠시 휴정합니다! 그리고 현 재판의 중심이 된 레슬리 스페라도 양은 현 상황에 따라 독방에서 쉬게 됩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레슬리는 뭐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고통이 제대로 가시지 않아,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저런, 가엽게도.”

그렇게 말하며 데비엔 사제는 시종장에게 그녀를 넘겼고, 그대로 레슬리는 재판장 안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문이 굳게 닫힌 뒤 레슬리는 움직이지 않는 발을 옮겨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레슬리는 그대로 문 앞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다시 꿈이 떠오른다. 방에 깔린 고급스러운 카펫이 하필 붉은색이라 마치 불길 같았다.

레슬리는 울며 몸을 웅크렸다. 분명 밖에는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누구도 울음소리에 반응해 주지 않았다. 외롭고, 괴로웠다. 마치 스페라도 후작가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시, 싫어. 싫어……. 공작님…….”

레슬리는 울며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 위를 장식하던 작은 모자가 바닥을 굴렀지만, 그걸 주울 정신은 없었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레슬리는 작은 기대에 벌떡 일어났다. 설마, 공작님일까? 하지만 작은 소란 끝에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콘라드였다. 언제나 깔끔하던 복장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급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붉게 얼어 있었다.

“레슬리 양. 괜찮으십니까?”

“코, 콘라드 경. 어떻게 여기에…….”

“저는 공식적으로는 일단 셀바토르 공작가와 아무 연관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콘라드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구르고 있던 모자를 주워 들었다.

“제가 레슬리 양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작게 이야기하며 맑게 웃었다. 하지만 뺨이 얼어 버린 탓인지 웃음이 조금 어색해 보였다. 그러더니 황금색 눈동자로 레슬리를 훑었다.

“너무 눈물을 흘리신 듯 보입니다. 레슬리 양, 일단 물을…….”

“콘라드 경!”

레슬리는 콘라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애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에게 신력을 한 번 써 주세요. 제발요!”

“신……력을 말입니까?”

“네, 루엔티 님이 저에게 이상한 마법을 걸었다고 누명을 쓰셨어요. 제, 제가 무슨 잔류 마력이 있다고 이상한 사제님이 그러셨어요. 신력을 쓰니까 몸이 이상해져서…….”

“데비엔 고위 사제님 말씀하시는군요. 안 그래도 요 앞에서 그분을 뵈었는데…….”

콘라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사용해 드리면 될까요?”

“네, 네!”

그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이어진 손을 통해 콘라드의 황금빛 신력이 레슬리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슬리는 크게 휘청거렸다. 아까보단 덜하지만 엄청난 고통이 몸을 훑고 지나갔고 순간 머리가 핑글 돌았다.

“레슬리 양!”

레슬리의 모자를 던지듯 떨어트리고선, 콘라드는 레슬리의 작은 몸이 바닥 위에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두 번째라 그런지 아니면 아까보다 강한 성력이 아니어서인지, 레슬리는 금방 정신을 되찾았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몸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으로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저는…… 역시 쓸모가 없어요. 아니 존재 자체가 민폐인 거예요.”

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궁지에 몰리자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자연스레 혀를 타고 흘러나왔다. 후작, 후작 부인, 엘리 그리고 르아가 늘 자신에게 해 주던 말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해,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왜, 나는 이렇게 그거 하나 잡기가 힘든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를 지키질 못할까.

“레슬리 양.”

콘라드는 레슬리가 조심스레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도우면서 같이 옆에 앉아 시선을 맞췄다. 레슬리는 저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를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이 웃는다. 따스한 눈이 맑게 웃는다. 레슬리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재판은 셀바토르 공작가가 이길 겁니다.”

“고위 사제의 증언을 뒤엎을 수 있을까요……. 거기다 제 몸도 이 꼴인데.”

자신의 몸 자체가 스페라도 후작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고 있었다. 거기다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고위 신관의 발언을 누가 뒤엎을 수 있을까. 하지만 콘라드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웃음이었다.

“저 역시 증언할 겁니다. 저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비록 중간에 새로운 증인이 끼어드는 건 재판법에 어긋나지만, 가문의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할 겁니다.”

레슬리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귀족 재판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다들 피하던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슬리 양. 재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멈칫하던 손이 조심스레 레슬리의 이마에 닿았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천천히 정리하더니 다시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고는 조심스레 은빛 머리카락 위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레슬리 양, 제가 앞으로 그대를 돕겠습니다.”

***

약간의 휴식 후 재판은 다시 진행되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원래 앉아 있던 셀바토르 가문석에 앉을 수가 없었다. 레슬리는 홀로 황제의 옆에 있었다.

‘이름은 몇 번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

제 옆에 불안하게 앉아 있는 어린 소녀를 힐끔 내려다보며 피스토레 황제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첫째 아들 아렌도에게 차를 엎었던 아이였다. 워낙 아이가 어렸고 아렌도도 다치지 않았기에 원만하게 넘어갔던 일이라 기억을 떠올리는 데 조금 늦었다.

다시 황제의 눈이 레슬리에게 닿았다.

‘작아.’

몇 살이나 된 거지. 스페라도 양과 나이 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 잘 먹기로 유명한 셀바토르 인간들이 몰려 있는 공작저에 머물렀음에도 아이의 팔다리는 가늘었다. 피스토레 황제는 작게 혀를 찼다.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들이 주로 이런 모습을 하지.’

아렌도와 스페라도 양과의 약혼을 고려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황제는 손을 들었다.

“시작하라!”

황제의 말에 시종장이 다시 앞에 나서 크게 소리쳤다.

“재판을 다시 시작합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발언자는 루엔티 아돌 셀바토르입니다! 발언하십시오!”

그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루엔티가 벌떡 몸을 일으켜 발언대로 내려갔다. 누가 보기에도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무서워 보이는 루엔티의 얼굴이 한층 더 흉흉했다.

그리고 그건 사이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스페라도 후작의 목을 치고 싶은지 청록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분쟁 지역……. 분쟁 지역에 한 발이라도 나오기만 하면 모가지를 도끼로…….’를 저주라도 걸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베스라온 역시 화를 숨기지 않고 스페라도 후작가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직 평화로운 이는 셀바토르 공작 혼자였다. 그녀는 망토에 달린 풍성한 털을 쓰다듬으며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루엔티 아돌 셀바토르, 발언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발언이 아니라 반격으로 들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재판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스페라도 후작은 마차 화재가 있었고 그걸 우리가 일으켰다고 주장했지요. 일단 그것부터 반박해 보이죠.”

크게 숨을 내뱉은 루엔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유를 보내려던 몇몇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신전으로 가던 마차가 불이 났습니다. 그 마차는 당연히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출발한 마차였고, 스페라도 후작의 마차였습니다. 그 마차에 기름을 먹여 불을 질렀다고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마차는 빗물을 흡수하지 못하게 특별한 처리가 되어 있습니다.”

루엔티는 제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정리했다. 하지만 특유의 오만한 눈빛은 감춰지지 않았다.

“이 말은 기름을 아주 오랫동안 먹이지 않는 이상 마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쓸릴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기름을 붓는다고 그 기름이 마차에 금방 흡수되지 않잖아?”

루엔티에게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고작 몇 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달리는 마차에 무슨 수로 기름을 먹을 때까지 붓는다는 거지요? 실로 머리를 쓰지 않은 멍청한 발언입니다.”

“무례하오! 셀바토르 영식! 모르지, 그대가 마법으로 했을지도!”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이 모욕당하자 벌떡 일어나 반박하려 했다. 그러자 다시 황제가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스페라도 후작! 아직 셀바토르 가문이 발언 중이지. 그리고 셀바토르 영식도 언행을 주의하도록.”

휴우, 이놈의 재판은 곱게 굴러가질 않는군. 피스토레 황제는 중얼거리며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발언에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 앞에서도 어쩌면 무례해 보이는 태도로 루엔티가 중얼거렸다. 사이레인이 루엔티를 바라보며 ‘저놈의 성질머리는 어디서 나온 거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다시 발언을 시작합니다. 마차에는 스페라도 후작이 불을 지른 것입니다. 자신의 딸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서요.”

루엔티는 발언에 다시 사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한 영식이 몸을 일으키더니 루엔티를 향해 발언했다.

“자신의 딸을 위험에 빠지게 한 이유가 뭡니까?”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의 딸을 불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사람의 머리는 교양 있는 자들이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그리고 제 발언의 증인을 이 자리에 불러왔습니다!”

언행에 주의하랬더니 루엔티는 스페라도 후작을 돌려 까고는 황제가 다시 주의를 시킬 틈도 없이 증인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재판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둘 다 남자였는데, 한 명은 베스라온과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추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추레한 옷차림을 한 남자의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썩은 내가 풍겼다.

“이자의 이름은 피튼 위드페.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일해 온 하인이며, 마차가 불탈 때 거기에 있던 남자입니다. 피튼, 그대가 후작가에서 겪은 일을 전부 발언하게.”

피튼은 루엔티가 있던 발언대에 서서 얼굴을 들었다. 레슬리는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마차가 불탈 때 자신과 눈이 마주쳤던 스페라도 후작가의 하인이었다.

그런데 살려 달라는 제 눈빛을 무시하고 나무 뒤로 숨어 버렸던 남자의 얼굴이 이상했다. 눈 밑이 퀭해지고 살도 많이 빠져 지금이라도 쓰러져 숨을 거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죽음의 기색을 띠고 있는 얼굴에서 눈빛만은 번뜩였다. 마치 광기에 붙잡힌 인간 같아 보였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병원에서 홀로 죽어 가고 있죠. 그 이유는 바로 이 손 때문입니다.”

피튼은 제 손을 높게 들더니 붕대를 풀어 버렸다. 사람들은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고 몇은 보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피튼의 손이 너무도 처참했던 탓이었다.

제대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팔은 그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여실히 알려 주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레슬리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 홀로 마차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가는 길목에서 불을 지르라고 했죠. 아가씨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봉쇄한 후에요. 스페라도 후작은 절대 최후의 최후까지 아가씨를 구해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언가를 확인해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그 자리에 베스라온 님과 린체의 기사단이 나타났고 후작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그 후 저는 돌아가 심한 체벌을 받았습니다.”

피튼은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이상한 액 같은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팔은 그때 다친 팔입니다. 후작은 제가 팔을 심각하게 다치자, 더 일할 수가 없다며 저를 저택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손을 치료할 병원비나 사제님께 드릴 돈을 마련하지 못해 홀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레슬리는 그제야 왜 저 하인이 이 자리에 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코 홀로 죽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피튼을 뒤로 물리며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린체의 기사단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린체의 기사단 소속인 펠론 헨티 레아렘입니다. 저는 베스라온 단장님과 마차에서 레슬리 양을 구했습니다. 이 남자의 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도끼를 든 스페라도 후작가의 하인들은 숲속에 숨어 있었고, 그들은 불타는 마차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귀족의 증언에 판세가 조금씩 셀바토르 공작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고위 사제의 증언에 더 술렁임이 컸듯이 평민보다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의 발언이 더 큰 영향을 불러왔다. 그 모습을 보며 루엔티는 작게 혀를 찼다.

루엔티의 발언 시간이라는 걸 잊은 스페라도 후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피튼을 삿대질했다.

“거짓입니다! 저놈은 물건을 훔치려다 걸린 놈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손목을 잘라야겠지만, 제가 마음이 여려 몇 대 때린 후 저택에서 쫓아낸 자입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웃기지 마! 스페라도 후작!”

스페라도 후작의 말에 피튼은 외쳤다. 절박함이 섞인 목소리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는 계속해서 외쳤다.

“하라는 것을 다 했어! 더러운 짓도, 역겨운 짓도 당신이 시키면 다 했지! 그런데 고작 그거 하나 실수했다며 나를 버려? 여러분! 이자는 레슬리 아가씨를 걸핏하면 굶기고 때리고 다락방에 가둬 놓고 괴롭혔습니다! 거기다 사람을 때리는 데 재미를 들려 매일 매질을 하곤 했습니다!”

“거, 거짓입니다! 제가 그런 천박한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거기다 겨우 하인과 기사 하나를 증인으로 세우다니, 부실하기 짝이 없군요.”

거기까지 외친 스페라도 후작은 이번에 베스라온을 보며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레아렘 가문이라면 들어 본 적도 없는 영세한 가문 같은데, 모르지요! 기사단장의 협박에 넘어간 걸지도!”

마치 스페라도 후작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루엔티가 크게 외쳤다.

“간단하게 가도록 하죠. 마찬가지로 하인 한 명과 고위 사제를 증인으로 세운 분이 할 말은 아니지만, 부족하다니 확실한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루엔티는 하인에게서 새 모양으로 세공된 보석을 받아 높게 들어 올렸다.

“얼마 전 마법사의 저택과 신전에서 공동으로 계획해 발명한 영상석입니다. 일반 마법석과는 다르게 영상을 기록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마법석입니다. 신전 주변을 돌아다니며 길목을 기록하게 되어 있지요. 알다시피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외진 길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전 단 하루, 시범적으로 이걸 가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루엔티는 덧니가 보일 정도로 씩 웃었다.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때 이 영상석에 찍힌 걸 보시죠.”

루엔티가 마력을 주입하자마자,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새가 눈을 뜨고 삐― 하고 울더니 곧 무언가를 허공에 비추었다. 새의 시각으로 찍힌 곳은 신전으로 가는 숲의 길목이었다.

그 작은 길목을 마차가 덜컹거리며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이상함을 느낀 새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마부가 마차를 허겁지겁 벗어나는 모습이 선명하게 기록되었다.

마부가 마차를 벗어남과 동시에 도끼를 들고 있는 남자들이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남자들은 마치 훈련이라도 한 듯 주저 없이 마차 문을 막았고,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작은 마차가 불길에 휩쓸렸다. 재판장에 있던 사람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창문으로 작은 은발의 여자아이가 소리 지르며 문을 두들기는 모습이 보였지만, 숲속에 숨은 남자 중 그 누구도 아이를 돕지 않았다.

아이가 창문에서 사라지자, 몇 사람은 끔찍한 상상에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때 새의 시야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린체의 기사단이다.”

누군가가 앞장서 있는 베스라온을 알아보고 작게 중얼거렸다. 마치 기다리던 영웅이 등장한 듯한 목소리였다.

베스라온과 기사들은 마차 문을 가로막고 있던 통나무를 치우더니, 으지직 소리가 들렸다. 베스라온은 맨손으로 마차 문을 뜯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절한 아이를 꺼냈다.

“다행이다.”

한 부인은 손을 모으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하지만 후작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그 후에 마치 악역처럼 숨어 있던 하인들이 나와 베스라온에게 손을 뻗었고, 그대로 목을 잡혔다. 몇 번 팔다리를 바둥거리던 남자는 베스라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리나케 도망쳤다.

거기까지 보여 준 루엔티는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 섞긴 눈동자가 후작을 찌르듯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 후작?”

“새파랗게 어린놈이…….”

분노로 몸을 덜덜 떠는 후작이 주먹을 쥐는 것을 보고, 엘리를 따라온 하녀는 몸을 슬그머니 뒤로 피했다. 하녀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황제는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 영상석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나! 이미 마법사의 저택은 그대 손아귀에 있는 모양이던데!”

하지만 후작의 눈은 아직도 제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루엔티에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루엔티는 그 말이 가소롭다는 듯 다시 웃었다.

“이 영상석은 신전과 함께 제작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후작? 즉, 이 영상석을 의심하는 건 신전을 의심하는 일이지.”

그 말에 후작은 뒤로 몸을 젖혔다. 하필 신전이 걸려 있을 줄이야. 신전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골치가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자신의 강력한 증인도 사제가 아니던가. 하지만 루엔티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사의 저택이 내 손아귀에 있다고? 마법사의 저택은 이 제국이 설립된 이후로 언제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곳, 10인의 마법사가 돌아가며 관리하는 곳이지. 스페라도 후작은 이 발언을 10인의 마법사 앞에서 할 수 있는가?”

몇몇이 루엔티의 말에 동의하며 아우성쳤다. 아까 발언하려다가 막힌 마법사들 같았다. 후작이 몸을 떨며 자리에 앉자 루엔티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스페라도 후작이 왜 레슬리 양을 마차에 넣고 불을 질렀는지 조금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습니다.”

루엔티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부러 말을 느긋하게, 천천히 하며 웃어 보였다. 마치 이야기꾼이 오래된 이야기로 아이들의 흥미를 끌려는 것처럼.

잔혹한 영상으로 팽팽해졌던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그 분위기 속에서 루엔티는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건 바로 스페라도 후작의 타고난 성품이지요.”

그러더니 스페라도 후작이 뭐라 외치는 것을 가뿐히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재판장을 가득 메운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긍지 높고 선한 성품을 타고난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이 세상에는 남을 때리고 채찍질하며 제 분을 푸는 사람도 있습니다.”

루엔티의 말에 몇몇 사람이 작게 기침했다. 지금 여기서 목소리를 낸다면 자신이 손찌검한다는 것이 들통날 게 뻔했기에 침묵을 지켰다.

“처음엔 동물, 그다음은 사용인. 그렇게 차례로 손을 올려버릇하다가 극에 달하면 제 가족을 빛도 없는 지하 창고에 가두거나, 제 딸이 타고 있는 마차에 불을 지를 수도 있는 법이지요.”

마치 스페라도 후작처럼 말이죠. 그 뒷말은 아직 루엔티의 입속에 있었으나 모두가 그 말을 들었고 따가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 앞에서 후작 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두 손을 꼭 쥐고 있었고, 엘리는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후작은 당당하게 앉아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삼류 극장에서나 할 말을 하고 있군, 셀바토르 영식. 그 말에 증거는 댈 수 있는가? 응? 발언에 책임지라고 했었지? 내가 그 말을 다시 되돌려 줄 차례인 것 같군.”

후작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셀바토르라고는 하지만 갓 성인이 된 놈. 아직은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엔티는 입꼬리를 올려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하인, 기사를 증인으로 세웠다고 말입니다.”

기사도 엄연한 귀족인데 그걸 모르고 말이죠.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루엔티는 씩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후작의 요청에 따라 ‘높은 귀족’이며 ‘드높은 명예’를 가진 스페라도 가문의 사람을 증인으로 제 발언에 책임을 져 보지요.”

후작과 엘리가 한 말을 한껏 비꼬며 루엔티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종에게 손짓했고, 한 남자가 재판장 안으로 들어왔다.

“……귀족이라더니?”

“광부의 모습인데요?”

그 남자의 모습을 보며 다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은 아무리 궁핍해져도 육체적 노동은 거부했다. 육체적인 노동은 평민의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굶을지언정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봤자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였다. 제 딴에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온 모양이었지만, 옷 이곳저곳에 흙가루가 묻어 있었고, 남자의 모자는 광산 지역에서 많이 보이는 광부의 모자였다.

“서부 출신일까요?”

“아무래도. 그 지역이 광산으로 유명하니까요. 억양을 들어보면 확실해지겠죠.”

사람들의 쑥덕거림을 들으며 남자는 발언대 앞에 섰다.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슬퍼 보이고,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눈빛은 스페라도 후작에게 있어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래, 어디선가 아주 오랫동안 보아 온 눈.

“저는.”

스페라도 후작이 머리를 쥐어 짜내는데,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서부 억양 따위는 섞여 있지 않았다. 부드럽고 노래하는 듯한 억양은 수도 귀족들이 쓰는 억양이었다.

“여보……?”

모자 밑에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스페라도 후작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데리엘 후작 부인과 엘리마저 놀라 후작과 단상 위의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건 황제의 옆에 앉아 있던 레슬리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로베튼 피룬 스페라도의 세 번째 아들, 테론 스페라도입니다.”

누가 봐도 형제지간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똑 닮은 얼굴이었다. 푸른 눈도, 전체적인 생김새도 비슷했다. 다른 것이라고는 남자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갈색 머리였다는 것.

귀족의 예법으로 인사를 한 남자의 등장에 다른 사람들 역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은 귀족 중에서는 그를 기억해 내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분명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둘째였지. 셋째는 인연을 끊고 집을 나갔다고 들었네.”

“아니, 그게 둘째였네. 셋째가 분명 병사로…….”

“저는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마차가 전복되어 전부 사망했다고 들었습니다.”

서로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전부 달랐다.

후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난간을 세게 쥐었다. 왜 하필 이런 자리에서 저놈이. 아니 그전에 죽지 않았던가?

‘저것들은 슬슬 적당히 팔아야지. 아둔한 것들이지만 피는 고귀한 피니 값비싸게 팔릴 거야. 그걸로 비용을 충당하자고.’

둘째가 성년이 되기 전, 아버지가 집사에게 했던 말을 들었었다. 비용은 분명 사치비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버지는 사치가 심한 분이었으니까.

‘이제 그나마 제 쓸모를 다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몇 달 후 두 동생은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어느 먼 나라로 팔려 가던 중 마차가 전복됐다는 소식이 그가 들은 두 동생의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돈을 돌려주게 된 아버지가 흥분해 고함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그랬는데…….

여태 아무 소식도 없다가 왜? 왜 하필 이 자리에서!

“여보, 저 사람은 뭐예요? 저 사람은 뭐냐고요!”

뒤에서 당황한 데리엘 후작 부인이 남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는 여태 후작에게 두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친가인 르게인 자작가에선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후작가에서 후작 부인으로 사는 동안에도 단 하나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도대체 당신은 나에게 뭘 속이고 있는 거예요!”

이 자리에 오지 말 걸 그랬다. 갑자기 치욕적인 거짓이 자신의 목을 옭아매었고, 알지도 못하는 스페라도 후작의 동생이 나타났다. 재산,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눠야 하는 건가? 데리엘은 남편의 옷자락을 더 세게 쥐었고.

“닥쳐!”

후작은 소리 지르며 아내의 팔을 거칠게 쳐 냈다. 후작 부인은 남편이 쳐 낸 자신의 손을 잡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의 동그란 라일락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스페라도 후작은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귀족들의 얼굴이 전부 놀람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작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최대한 자상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일단 제 아내를 달래 줘야 할 때였다.

“여보, 내 사랑.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데리엘, 내 말 좀…….”

“치워요!”

데리엘은 눈물을 흘리며 거칠게 제 남편의 손을 쳐 냈다. 그녀의 울먹임이 재판장을 가득 채웠다.

“나, 나를 얼마나 더 수치스럽게 만들 참이에요! 내가 얼마나…… 여태까지 내가 얼마나!”

그 말을 끝으로 데리엘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어머니…….”

엘리가 급하게 그녀를 말려 보았지만, 엘리마저 거부한 채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더 눈물을 쏟아 냈다.

“후작, 부인이 오랜 재판으로 지친 모양이군. 방에서 쉬게 하는 것이 어떤가?”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황제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선황 때 한 번 참석해 본 적이 있는 귀족 재판도 이렇게 엉망은 아니었는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래.”

점점 개판이 되어 가는군. 작게 덧붙인 피스토레 황제의 말과 작은 한숨을 놓치지 않은 스페라도 후작은 이를 까득 갈았다. 그러는 사이 시종장이 후작 부인을 휴게실로 안내했다.

“실례합니다, 황제 폐하. 이제 제 발언을 이어도 괜찮겠습니까?”

후작 부인이 나가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테론이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며 황제에게 여쭸다.

“그래, 이어 하시오.”

황제는 알겠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황제 역시 만만치 않게 지쳐 있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지금 상황을 보셨다시피, 트라 베쉬 스페라도 형님은 사람을 때리는 것을 즐기는 잔혹한 성정이었습니다.”

덤덤한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테론은 덜덜 떨던 제 손을 다른 손으로 꽉 붙들었다.

“발과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너무도 약한 것이었고,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 싶을 때는 말채찍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제 등에는 그때 맞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밥도, 물도 없이 작은 다락방에서 몇 날 며칠을 갇혀 있어야 했지요. 그리고 그건 아버지 로베튼, 전 스페라도 후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숨을 삼켰다. 자신이 당한 일과 똑같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아까 저 어린 아가씨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나요?”

“비슷하긴요. 똑같은 말을 했지.”

“거기다 두 사람 다 축복의 이름도 없어요.”

“아까 후작 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세요. 세상에나.”

그 모습을 둘러보다 테론은 말을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저는 마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자고 있는데 납치되듯 제 둘째 형과 마차를 탔을 뿐이었으니까요. 창문도, 문도 전부 막혀 있었기에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둘째 형과 떨기만 했습니다. 그때 제 형과 저는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요.”

테론의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마치 이야기꾼이 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달렸습니다. 하루에 세 번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는데, 내릴 때마다 풍경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고가 났고,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크게 다쳐 정신을 잃었지요.”

깍지를 끼고 있는 테론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러다 저는 지금의 제 아내 덕분에 살아났고, 그녀와 결혼해 서부 탄광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사는 것보단 낫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테론은 고개를 돌려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동질감이 섞여 있었다.

“사실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도는 제게 악몽과도 같은 곳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용기 내 이곳에 온 이유는 제 조카가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테론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 재판장에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그래요. 그래서…… 용기를 내 보았습니다.”

테론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 눈물을 훔쳐 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형님은 아니, 스페라도 후작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마 제 조카는 살기 위해 그 저택을 벗어나 셀바토르 공작가로 갔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저 가엾은 아이 삶을 잔인한 부친의 손에 다시 쥐여 주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테론은 다시 옅게 미소를 짓고 발언대에서 내려갔다.

“테로온!”

내려가는 테론의 등 뒤로 날카로운 스페라도 후작의 외침이 내리꽂혔다.

잠시 테론은 발걸음을 멈췄다. 어릴 적 기억이 테론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끔찍했던 저택에서는 저렇게 불렀을 때 바로 가지 않으면 채찍질을 당했었다. 등에 남아 있는 상처가 테론에게 돌아가라고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저 앞에 가서 빌라고 그렇게 속살거렸다.

하지만 테론은 고개를 돌려 레슬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괜찮다는 듯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재판장을 나가 버렸다.

스페라도 후작은 그런 그를 보고 뭔가를 외치려고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후작의 분노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스페라도 후작은 이번에도 거짓이라고 소리치려 하나 봐요.”

누군가가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게 속삭인 것이 재판장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하필 테론의 퇴장으로 조용해진 상태였기에 모두의 귀에 그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스페라도 후작이 말소리가 들린 방향을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다들 그의 시선을 피하며 키득거렸다. 그의 귀에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키득거림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이 이상 재판을 진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거기에 루엔티가 웃으며 쐐기를 박자 스페라도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 재판은 끝나지 않았소, 셀바토르 영식!”

그렇게 말하며 후작은 손가락으로 레슬리를 가리켰다.

“내 딸에게 걸린 마법은 어떻게 설명할 참인가? 응? 아까 자네도 봤겠지! 내 딸이 신력에 반응해 격렬한 거부를 보였지. 그걸 어떻게 설명할 거냔 말이야!”

그러면서 스페라도 후작은 입술을 뒤틀며 웃어 보였다.

그래, 아직 이 패가 남아 있었다. 이게 깨지지 않는 이상 셀바토르 공작가는 오늘 레슬리를 데려가지 못하리라. 레슬리의 친부는 누가 뭐라 해도 그였고 소유권 역시 그에게 있었다. 그걸 이유로 하루, 단 하루라도 스페라도 저택으로 데리고 간다면…….

루엔티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스페라도 후작은 소리 내 웃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일부러 의자에서 내려와 천천히 발언대 위에 서 있는 루엔티를 향해 다가갔다.

“거기다 그 사실은 고위 사제님께서 직접 증명해 주신 것이지. 그리고 아까 내 동생은!”

스페라도 후작은 일부러 목소리를 키웠다. 아까 자신을 향해 비웃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소리쳤다.

“유전병을 앓고 있소! 그 병 때문에, 내 동생은 가끔 의식을 잃고 사람을 공격하는 성향을 보였지. 그래서 내 아버지와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런 행동을 했던 거요. 그리고 동생이 가던 곳은 치료를 위한 요양소였소.”

스페라도 후작은 일단 내뱉고 보았다. 증거는 없지만, 이 자리를 벗어난 후 만들 생각이었다. 어차피 가족의 병력이라는 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너무도 눈물이 나는 이야기지만, 내 딸도 그런 증세를 보였지! 그래서 제정신을 차리게 하고 싶은 마음에 훈육이 조금 강하게 나갔을 뿐이야!”

후작의 당당한 모습에 몇몇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후작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스페라도 후작은 여유로운 얼굴로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그래,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실인 것을. 그래서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할 거지? 어떻게 고위 사제님의 증언을 반박할 셈인지 궁금하군, 셀바토르 영식.”

그리고 고개를 돌려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앉아만 있을 텐가, 셀바토르 공작?”

곧 망신을 당할 테니 도망가는 게 좋을 텐데? 그런 의미가 섞인 스페라도 후작의 눈을 보고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일어서면 그대가 곤란해질 텐데, 후작.”

“여전히 허세가 심하군. 뭐, 좋아. 그 여유가 얼마나 오래갈지 보자고.”

제 어머니에게 깐죽거리는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루엔티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고위 사제를 데려온 것인지, 그리고 왜 레슬리는 신력에 반응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에 침입자를 감지하는 마법석이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긴 했지만, 그게 레슬리에게 영향을 미칠 리는 만무했다. 만약 그 마법석이 영향을 미쳤던 거라면 공작저에 있는 모두는 사제만 만나면 언데드 몬스터처럼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다른 마법사로 증명을 한다고 하면.’

안 돼. 루엔티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까처럼 이상한 주장으로 스페라도 후작은 어떻게든 딴지를 걸고넘어질 게 분명했다.

‘오늘 내로 끝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친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레슬리는 오늘 스페라도 후작가로 끌려갈 테니까. 쉬는 시간 내내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왜 레슬리는 신력에 반응한 거지?

‘레슬리가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치료를 받은 전적도 없고.’

레슬리는 공작저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앓거나 다친 적이 없었기에 사제를 만난 적도 없었다. 어머니는 다른 수가 있다고 쉬는 시간에 말했지만, 루엔티는 초조했다.

‘젠장, 저딴 게 친부모라는 이유로 우위에 서다니.’

“안색이 안 좋은데, 셀바토르 영식?”

스페라도 후작이 루엔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고 루엔티의 얼굴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래서 어찌할 텐가? 응? 사제님의 증언을 깨트리려면 같은 고위 사제거나 아니면 적어도 테센트루아 성기사단이 증언을 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것도 푸른 피의 테센트루아 성기사여야지.”

그런 자가 몇이나 되겠냐마는. 그렇게 덧붙이며 스페라도 후작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피스토레 황제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재판이 시작된 지 이미 한참이 지났지요.”

후작의 말에 다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전의 햇빛을 받으며 시작된 재판은 어둠이 찾아오는 이 시각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재판이 길어져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끝이 나지 않으면 선황께서는 재판을 사흘 뒤에 다시 시작하시곤 하였습니다. 하여 저는 이 자리에서……!”

“실례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페라도 후작의 말을 막았다.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고, 피스토레 황제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이테라 공자가 여긴 어쩐 일이지?”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사람은 분명 콘라드였다. 아까 엉망이었던 꼴이 거짓이라는 듯 깔끔하게 테센트루아 제복을 갖춰 입은 콘라드가 발언대를 향해 걸어갔다.

“……아이테라 공자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스페라도 후작이 날을 세우자 콘라드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황금색 눈동자는 전혀 웃음을 머금고 있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을 지킨다면, 신께서 저에게 실망하실 것이 분명하여 진실을 밝히러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피스토레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분이시여, 귀족 재판에서는 미리 신청한 증인 외에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셀바토르 공작님과 루엔티 마법사님의 명예를 위해 나서는 것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흐응. 황제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아이테라 대공가는 황가의 핏줄을 잇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당돌하게 행동하는 자신의 조카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턱을 괴고 웃음을 머금은 채 제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이테라 공자를 어여쁘게 여기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하지만 재판은 공정해야 하는 법. 뒤에 있는 스페라도 후작이 허락한다면 발언권을 주도록 하겠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후작?”

콘라드는 그 말에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안 됩니다! 신성한 재판장에서 미리 허가받지 않은 증인은 발언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만 단호한 거절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콘라드는 물러서지 않고 하나의 제안을 던졌다.

“그렇다면 레슬리 영애에게 신력을 사용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어떠십니까?”

“신력을 말입니까, 공자?”

도대체 왜? 스페라도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왜 갑자기 나타나서 신력을 사용해 주겠다고 하는 거지.

‘그 아가씨는 당분간 신력이 닿기만 해도 아플 겁니다. 그렇게 조절을 해 놨으니까요. 그러니 당분간 후작님은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크게 다치면 신력으로 치료가 어려우니까요.’

분명 그 데비엔 고위 사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음 같은 눈으로 후작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어떤 짓을 벌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조화를 이루는 신력이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러니 신력을 사용할 정도로 레슬리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사뿐히 경고하고는, 곧 자리를 떴다. 아마도 그녀를 소개해 준 그분께 갔겠지.

자신에게 있어서 콘라드가 신력을 사용하는 건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면밀하게 콘라드를 살폈다. 갑자기 나타나 신력을 사용하겠다고 한 콘라드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기다 콘라드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었다.

‘설마 저것이 다른 사제에게 치료를 받는 모습을 본 건가? 그래서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아니면 이 아이가 마법이 걸려 있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든가.

하지만 뭐가 되었든 신력을 사용한다는 건 자신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안 그래도 자신은 루엔티에 비해 증거도, 증인도 부족했다. 하늘을 나는 영상석이라니, 그런 걸 신전에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자신이 어떻게 예상한단 말인가.

거기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의 등장으로 상당히 위태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가의 혈통을 잇고 있는 아이테라 대공의 아들이, 그리고 최연소 테센루트아 성기사단의 일원인 사람이 다시 레슬리에게 신력을 써 준다면…….

스페라도 후작은 긍정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웃어 보였다. 거기다 마침 재판을 뒤로 미루자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이놈을 이용해 시간을 벌면 더 수월해지라라.

“좋습니다! 다른 가문도 아니고 아이테라 대공 가문의 콘라드 경께서 이리 부탁을 하는데 제가 들어 드려야지요. 단! 신력만을 사용해 주십시오. 다른 짓은 부디 삼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이테라 공자.”

그렇게 말하며 스페라도 후작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 후작을 향해 가볍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콘라드는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슬리 양.”

레슬리는 그 손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아까 휴게실에서도 사용해 본 신력이 아닌가. 결과는 고통이었다. 후작에게 강력한 증거만 안겨다 주는 강력한 고통. 레슬리가 머뭇거리자, 콘라드는 괜찮다는 듯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믿으라는 듯 살포시 웃어 보였다.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휘었다.

그 눈동자가 아까 들었던 그 말을 다시 속삭이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 머뭇거리던 레슬리는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 콘라드의 앞에 섰다.

“제가 레슬리 양을 돕겠다고 했지요?”

그렇게 작게 속삭이듯 말하며 콘라드는 레슬리의 손을 잡으면서 맑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저를 믿어 보세요. 이래 봬도 셀바토르 공작님께서 신학 선생으로 선택한 저니까요. 저를 믿기 힘드시다면 공작님의 혜안을 믿어 보세요.”

레슬리가 불안을 떨치기 전에는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이야기하자 레슬리는 잠시 콘라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어 볼게요. 음, 공작님도 믿지만, 콘라드 경도 믿어요.”

“감사합니다, 레슬리 양.”

그렇게 말하는 콘라드의 황금색 눈동자가 빛나며 금빛 힘을 레슬리에게 건네주었다. 맞잡은 손으로 황금빛 힘이 퍼지는 것을 느끼며 레슬리는 두 눈을 꼭 감고 밀려들어 올 고통에 대비했다.

“눈을 뜨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고통 대신 찾아온 것은 어딘가 웃음기가 서려 있는 따스한 목소리였다. 레슬리가 눈을 뜨자 황금빛으로 덮인 제 몸이 보였다.

“와아.”

처음 신력으로 치료를 받았을 때처럼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몸을 바라보았다. 너무 울어서 욱신거렸던 몸이, 눈물로 짓눌렸던 눈가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스페라도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푸른 눈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뭐야, 이건…….”

“아주 간혹, 고위 사제님의 신력을 버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콘라드는 레슬리의 손을 놔주며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콘라드의 왼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거기다 콘라드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고통을 견디는 사람처럼.

“콘라…….”

레슬리가 콘라드를 부르려고 하자 콘라드가 시선을 맞추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떨리는 제 왼팔을 망토로 가렸다.

“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고위 사제님의 신력은 다른 사제님의 신력보다 몇 배는 강한 탓에 몸이 약하게 태어난 소수의 분들은 강한 고위 사제님들의 신력을 받아 내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자 콘라드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도 몰랐던 사실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 신전의 서고에서 공부하던 중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수가 워낙 적어 한 줄 정도의 기록밖에 남아 있지 않아 아마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콘라드는 다시 뒤를 돌아 레슬리를 보며 웃었다. 망토 밖으로 나온 왼팔은 떨리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 희귀한 경우니까요. 아마 레슬리 양은 그런 분이었을 겁니다. 부친이신 스페라도 후작께서도 몸이 약하다고 하셨으니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지요. 혹시나 이 일에 대해 의심을 품으신 분이 있다면 지금 즉시 신전 서고를 열람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혹시 모를 스페라도 후작의 말을 끊어 버리면서 다시 콘라드는 맑게 웃었다.

“이제 제 발언을 끝내겠습니다. 발언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페라도 후작님. 부디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콘라드의 말을 끝으로 황제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군.”

그 말을 끝으로 피스토레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시선들을 무시한 채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트라 베쉬 스페라도 후작은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공작이 자신의 딸인 레슬리 스페라도 양을 납치했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보기엔 레슬리 스페라도 양은 살기 위해 셀바토르 공작가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재판장을 가득 메운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 말에 다른 이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스페라도 후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중에는 분명 스페라도 후작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그가 바람잡이로 돈을 쥐여 준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스페라도 후작의 눈길을 피하면서 속닥거렸다.

“아무도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

오히려 그렇게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본 백작이었다. 백작은 히죽거리는 얼굴로 스페라도 후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스페라도 후작님께서 준비한 증거와 모든 증인의 발언들이 깨졌는데, 이 이상 이의를 제기할 게 무어가 있을까요! 거기다 후작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제 어둠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재판이 끝날 시간이지요.”

그렇게 외치는 라본 백작의 눈에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늘 자신을 무시했던 스페라도 후작을 향한 작은 복수였다.

“그렇지. 그렇다면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의 손을 드는 것으로 재판을 끝내겠네. 모두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더니 피스토레 황제는 성큼성큼 걸어 재판장을 나갔다. 재판장을 나서는 사람들 역시 얼어붙은 듯 서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스페라도 후작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나갔다. 작은 키득거림은 덤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재판에서 졌다. 그건 이제 레슬리를 영영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뜻이었고, 또 셀바토르 공작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 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여태 동생과 레슬리를 학대한 일이 드러나 그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 자명해졌다.

“아, 안 돼…….”

스페라도 후작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피해가 얼마나 클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는 분명 만만찮은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다. 그걸 다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얼마 남지도 않은 영토를 전부 팔아야 하나? 그러면, 그러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스페라도 후작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후작 저택에 쌓여 있는 사치품을 팔아넘기고 도박과 술을 끊는다면 그럭저럭 살 수 있으련만, 후작은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박도 못 하고 사치도 할 수 없는 삶이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끝없는 절망에 후작의 몸이 저절로 허물어졌다. 하지만 재판장에 남아 있는 그 누구도 그를 부축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엘리마저도.

“스페라도 후작.”

절망에 빠진 그를 누군가가 나지막이 불렀다. 스페라도 후작이 고개를 들자 레슬리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레슬리는 잠시 라일락색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죠. 나는 그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하며 레슬리는 차가운 눈으로 후작을 내려다보았고, 후작은 절망적인 눈으로 레슬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오늘까지야. 오늘까지만 당신이 내 아버지인 척, 나를 사랑하는 척할 수 있었다는 소리야.”

거기까지 말한 레슬리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인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레슬리는 울지 않고 꾹 참아 내었다.

이젠 울 때가 아니었다.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은 이 제국의 여성 중 다섯 번째로 높은 신분이라고, 그리고 단 한 명뿐인 공녀라고.

공작가의 모든 사람은 자신을 한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자신이 셀바토르가 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니 이젠 자신이 고개를 들 때였다.

“나는 이제 레슬리 스페라도 따위가 아니야. 레슬리 셀바토르, 셀바토르가의 유일한 공녀야.”

감히 당신들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레슬리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분노로 추하게 망가져 있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너는 내 딸이라고! 내 것이라고!”

레슬리의 말에 후작은 무언가를 미친 듯 중얼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잡으려고 했다. 그 모습은 마치 광기에 물든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고, 마지막 구원 줄을 잡으려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만.”

누군가가 가볍게 스페라도 후작을 제압했다. 레슬리가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셀바토르 공작이 레슬리를 보호하듯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한 손으로 스페라도 후작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하필이면 셀바토르 공작 때문에 부러진 적이 있는 팔이었다.

그때가 생각났는지 하얗게 질린 스페라도 후작은 몸을 뒤틀어 팔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 공작의 손가락 하나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

놀라서 엘리가 외쳤지만,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작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일어서면 후회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후작. 경고했으면 잘 알아들었어야지.”

“끄으으으…….”

이제 후작은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는 아픈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의 아버지는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바로 사제를 불러 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으니까.

커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아무리 남을 때리고 상처를 입혀도 약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자신이 아주 작은 상처라도 입는 날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사제를 불렀다.

그런 스페라도 후작의 팔을 셀바토르 공작이 부러트린 것이다. 그 일은 스페라도 후작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셀바토르 공작은 부러트릴 생각 없이 그저 잡고 있는 거였지만, 스페라도 후작은 기절 직전이었다.

“아버지를 놔주세요! 소리 지르겠어요, 셀바토르 공작님!”

보다 못한 엘리가 다급히 외쳤다. 종일 망신만 당하다가 그 끝을 기절로 맺을 수는 없었다. 아주 밑바닥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명예라도 챙겨야 했다.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

그 외침에 셀바토르 공작은 시선을 내려 엘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자마자 엘리는 마치 불에 닿은 듯 흠칫거리더니 몸을 움츠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대도 있었지.”

마치 사냥 직전의 짐승이 제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멍청한 동물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어와 목을 뜯어 버릴 것 같은 셀바토르 공작의 눈빛에 엘리의 숨이 가빠졌다.

“나는…… 나는 아렌도 황자님의 약혼녀예요!”

아무도 물어본 이가 없었는데, 엘리는 다급하게 먼저 외쳤다. 마치 그것 외에는 이제 기댈 것이 없다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누가 뭐라고 했나?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없어, 스페라도 영애. 다만 나는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야.”

그러더니 그제야 스페라도 후작의 팔을 놔주었다. 괴상한 신음과 함께 스페라도 후작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레슬리 양, 아니 레슬리는 이제 내 딸이 되었으니, 나는 앞으로 그 누구든 내 딸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네.”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제 품에 안겨 있는 레슬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부디 그 사실을 아버지와 함께 마음에 새겨 두게, 스페라도 영애.”

그 말을 끝으로 셀바토르 공작은 몸을 돌려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셀바토르 공작이 문을 나서자마자 레슬리는 공작의 목에 매달렸다.

재판 내내 참아 왔던 죄송스러운 마음이 그리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 공작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이렇게 치욕스러운 재판을 그것도 저런 인간하고 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레슬리는 차마 다 사과하지 못하고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간신히 콘라드가 진정시켜 주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공작은 퍽 난처한 얼굴로 옅게 웃으며 레슬리의 등을 다독였다.

“이런. 울지 말렴.”

“하, 하지만 죄송해서…….”

끅끅거리면서도 레슬리는 죄송하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공작은 제 품에 꼭 안겨 있는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다.

“레슬리, 너는 몰랐을 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말이야. 원래 부모는 뭐든 하는 법이란다. 이런 재판쯤은 널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 따듯한 말에 오히려 더 울음이 터져 버렸다.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평생 듣지 못할 줄 알았던 말이었다.

그런 레슬리의 등을 토닥여 주며 셀바토르 공작은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어서 자라 주기를 바라는 거란다. 너는 너무 작아서 때론 걱정이 되거든. 그리고 휴게실로 가면 사이와 엔티, 베스에게 제대로 호칭을 붙여서 불러 주렴. 저번에 한 번 불러 주고 말았더니 다들 단단히 실망했거든.”

다시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와 시선을 맞췄다. 레슬리는 코를 훌쩍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따스한 암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제대로 불러 주렴. 사실 꽤 기대하고 있었거든.”

그 말에 레슬리는 잠시 코를 훌쩍이고는 제 얼굴을 정리하기 위해 눈물로 엉망이 된 눈가와 뺨을 소매로 문질러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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