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찾았어.”
사이레인은 자신의 아내에게 무언가가 써진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종이를 살펴본 셀바토르 공작은 만족스러운지 웃음을 머금고는 곧 그 종이를 집무실 서랍장 가장 안쪽에 넣었다.
“역시 여보밖에 없어. 생각보다도 더 빨리 찾았네.”
평소라면 칭찬에 우쭐거릴 사이레인이 이번엔 별말이 없었다. 그저 퉁퉁 부은 얼굴로 입만 삐죽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공작은 그 모습을 보더니 뭔가를 적어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도 아침 일로 삐져 있는 거야? 내가 잘 설명했잖아. 레슬리 양의 힘은 위험할지도 몰라.”
거기다 듣기로는 그 힘은 레슬리 양이 처음부터 타고난 힘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이들이 준 힘. 셀바토르 공작은 잠시 어제 레슬리와 이야기 나눴던 때를 떠올렸다.
‘그 아이들이 저를 살리고 힘을 준 건 복수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반드시…….’
순수해 보였던 눈동자에 분노가, 그리고 복수심이 섞여 떠오르기 시작했고, 제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뒷말은 목 뒤로 삼켰지만, 공작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래서 스페라도 후작가를 멸문시켜 버리고 싶다는 말이.
‘그래서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스페라도 후작가를 몰락시키고 싶다고 한 거구나.’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한숨 쉬었다. 스페라도 후작가를 레슬리가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예상보다 레슬리의 증오가 더 깊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충분했다.
‘1천 년 동안 이어진 산 제물이라.’
셀바토르 공작의 암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겉으로는 셀바토르 공작가를 괴물이라 부르면서 자신들이 더욱 괴물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제 혈육을 불 속에 처집어넣을 생각을 하다니. 충분히 레슬리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너무 붙잡히는 건 좋지 않아.’
생각에 잠겨 버린 공작은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펜을 멈췄다. 셀바토르 공작에게 가장 큰 힘은 경험이었다. 그녀는 분쟁 지역을 그리고 제국의 국경선을 순찰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이들의 몰락을 지켜봤다.
그중에는 복수만을 위해 살다 걷잡을 수 없는 제 불길에 되레 먹혀 사그라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 열두 살. 그런 아이가 공작조차 섬뜩하게 느껴질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 눈빛은 위험하다. 공작의 오랜 경험이 그렇게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아이테라 공자……. 거기다 요즘 아이테라 가문의 동향도 수상하잖아? 마음 같아서는 루엔티에게도 만남은 자제하라고 하고 싶을 정도라고.”
공작의 생각을 모르는 사이레인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본격적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소파가 사이레인의 무게에 삐꺽거렸다.
“아이들의 우정을 방해하면 안 되지. 그리고 겸사겸사 좋지 않아? 두 곳을 감시하는 거지.”
사이레인 덕분에 깊은 생각에서 걸어 나온 공작은 다시 살포시 웃으며 새 종이를 꺼냈다. 쓰던 문서는 깃펜에서 새어 나온 잉크로 검게 물들어 못 쓰게 돼 버렸으니까.
“여보야는 레슬리 양이 걱정도 안 돼? 위험할 수 있는 거잖아.”
사이레인은 다시 손을 움직이는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셀바토르 공작, 아니 그의 아내인 아셀라는 좋게 말하자면 냉철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괜히 괴물이라고 불리는 건 아녔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특징인 마력과 괴력을 둘 다 타고난 데다, 마검사에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과감하게 구분해 잘라 버리는 성격이 괴물이라는 소문을 부추겼다.
‘그 여자는 감정이라는 게 없어. 절대 전쟁터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 린체 기사단이 불쌍하다니까. 그런 걸 상관으로 모시게 돼서는.’
혼란의 시대 때 적이었던 자신의 용병단에서도 저런 말이 돌았다. 적을 동정하게 할 정도로 아셀라의 소문은 흉흉했었다. 아군도 평민도 그리고 어린아이도 잡아먹을 정도로 냉철한 마녀 같은 여자. 그게 바로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였다.
하지만 사이레인은 아셀라가 늘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냉철함은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르카디우스 제국의 단둘뿐인 공작이 되기 위한 훈련의 성과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사랑에 빠졌고 제 용병단을 해체하면서까지 결혼을 감행했었다.
그래도 이럴 때 정도는 조금 풀어져도 괜찮은데. 레슬리는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아니던가.
사이레인은 작게 투덜거렸다. 자신의 남편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이번엔 얼룩 없이 문서를 완성한 셀바토르 공작이 옅게 웃었다.
“글쎄……. 그렇게 나약한 아이가 아니라서 걱정은 되지 않네. 그리고 미안하지만, 여보야가 좀 더 수고해 줘야겠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데려오고 싶거든. 이번 재판에 중심이 될 사람이니까.”
지금 막 작성이 끝난 문서를 편지 봉투에 담은 후 사이레인에게 내밀었다. 문서를 받아 드는 사이레인의 얼굴에는 아직도 불만족스러움이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셀바토르 공작이 한마디 덧붙였다.
“역시 내 남편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 고마워, 여보.”
그 말에 조금은 밝은 기색이 사이레인의 얼굴에 감돌았다. 제 아내가 해 주는 칭찬이 썩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가 되었든, 사이레인은 자신의 용병단을 해체하고 적이었던 아셀라와 결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녀 한정으로는 너무도 약해졌다.
“그래도 여보. 나는 레슬리 양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간 아팠던 것보다 더 말이야.”
문서를 자신의 품 안에 넣으며 사이레인은 말을 이었고,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
지금 레슬리의 눈앞에는 형형색색의 디저트들이 향연을 이루고 있었다.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을 가득 채운 슈, 이름 모를 몽글몽글한 크림이 올라간 붉은빛을 띤 케이크, 버터 향이 진하게 풍기는 마들렌,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어여쁜 색의 마카롱과 진하고 달콤한 코코아까지.
한눈에 봐도 파티시에가 온 힘을 다해 만들어 냈음이 분명한 디저트들은 레슬리에게 어서 자신을 먹어 달라는 듯 반짝거렸다.
하지만 레슬리는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저 디저트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맛있겠다. 분명 달콤하겠지. 평소라면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며 벌써 입에 넣었을 디저트를 레슬리가 바라만 보는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달콤한 것을 좋아하신다 해서 유명한 가게에서 사 온 것인데…….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지금 눈앞에 앉아 웃고 있는 사람이 콘라드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입맛이 없을 뿐입니다. 아이테라 공자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레슬리는 눈을 살짝 내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황금색 눈을 피했다. 불편하다. 레슬리는 테이블 밑에서 손을 꽉 쥐었다. 아직은 공작가의 사람들이 아닌 사람은 불편했다.
자신의 우는 얼굴과 낡은 여름용 드레스를 봐서라든가, 제 이름조차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부끄러움에 콘라드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레슬리의 세계는 좁았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만나는 사람 역시 정해져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사람들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셀바토르 공작가는 자신을 귀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리고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는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게 레슬리를 당황하게 했다. 거기다 자신이 배운 예법은 아직 부끄러운 정도라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배운 예법은 엘리를 위한 것이었기에 그대로 행했다간 귀족 집안의 자녀가 시녀 같은 행동을 한다는 말을 듣기 딱 좋았고, 아직 자신의 예절 교사는 셀바토르 저택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내일 모레쯤에야 공작저에 도착할 것이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이번엔 셀바토르 공작님마저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 그게 더욱 레슬리의 입을 꿈쩍도 안 하게 했다. 만일 이 자리가 공작님의 이야기로 나온 자리가 아니었다면 레슬리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이어 가야 하는데.’
레슬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테라 공자가 몇 마디를 건넸지만 죄다 단답형으로 대화를 끊어 버렸다. 그게 무례한 짓이라는 것 정도는 레슬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자신 쪽에서 대화를 이어 나갈 차례였다.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거지.’
도대체 여태 자신은 공작가의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했었지? 사람들은 보통 이럴 때 어떤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거야? 아니, 아예 말하는 방법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차고 넘쳐 레슬리는 제 목에 걸린 보닛의 리본을 괜스레 다시 고쳐 매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레슬리는 고개를 들고 아이테라 공자를 바라보자 태양을 닮았다고 생각한 황금색 눈동자가 살짝 휘었다.
“오늘은 가벼운 인사 같은 거니까요.”
따사로운 웃음을 띤 콘라드가 커팅 나이프를 들어 케이크를 자르자, 설탕이 섞인 듯 달콤한 홍차 향이 옅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우아한 손놀림으로 잘라 낸 케이크 한 조각을 레슬리 앞에 내려놓았다.
자기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였는데도 소리가 나지 않아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신학과 신어를 저에게서 배우실 거라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조각을 더 잘라 이번엔 자신 앞에 내려놓았다. 역시 소리조차 나지 않는 우아한 손놀림이었다.
“그렇습니다.”
레슬리는 이게 대화를 이어 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도 목소리도 말투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행히도 콘라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레슬리를 보며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루엔티 마법사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이미 신어는 아카데미 고학년 수준을 넘으셨다 하시더군요. 천재라고 저에게 얼마나 자랑하시던지.”
“과, 과찬입니다.”
부끄러움에 목소리가 갈라져 급하게 레슬리는 목을 다듬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올해 열두 살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미 신학 이론서를 거의 다 읽으셨고, 신어는 아카데미 고학년 수준에 고어 역시 자유로이 해석할 수 있으시지요.”
연달아 이어지는 칭찬에 레슬리는 뺨을 붉히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콘라드가 눈을 휘며 웃음을 지었다.
“나히로키아의 철학서를 즐겨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자께서도 나히로키아를 읽으셨나요?”
나히로키아.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후작가의 가정교사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히로키아의 철학서를 읽은 사람이 이렇게 줄줄이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네. 저 역시 나히로키아로 루엔티 마법사님과 친분을 맺었거든요.”
그러더니 콘라드의 눈이 웃음을 머금고 가늘어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었다.
“루엔티 마법사님은 나히로키아의 열렬한 팬이라 그를 아는 사람에게는 경계를 금방 허무는 버릇이 있어요. 아무래도 나히로키아의 추종자는 찾기가 힘드니까요.”
레슬리는 콘라드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나히로키아의 이야기를 하며 루엔티 님과 친해졌었지.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콘라드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웃음이 진해졌다.
“하지만 또 본인은 아닌 척 말을 바꾸시지요. 문제는 얼굴에서 이미 다 나타난다는 겁니다.”
“아, 맞아요.”
자신이 나히로키아를 읽었다고 했을 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특이하다 툴툴거리며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그때 생각이 나자 레슬리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레슬리를 따라 콘라드도 작게 웃었다.
“나히로키아를 좋아하신다면 엠메리아의 역사서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읽어 보셨습니까?”
“아니, 읽어 본 적은 없습니다.”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들어 보는 사람이었다. 엠메리아, 그건 또 누구지?
“엠메리아의 역사서는 신전에서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잘 읽히지 않는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엠메리아는 평민 출신이기도 하고 여성이거든요.”
“평민 출신에 여성이라고요?”
“네, 역사서는 귀족 남성이 써 내려간 것이 주류를 이뤘으니까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엠메리아의 역사서는 다른 역사서들에 비교해 낮게 평가를 받았으나, 저는 즐겁게 읽었습니다.”
콘라드의 말에 레슬리의 눈이 점점 더 동그랗게 변함과 동시에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역사서를 즐겁게 읽었다라. 그런 게 가능하던가?
자신에게 있어서 역사서는 외우는 분야였다. 연대와 고위 귀족들이 가계도를 익혀서 가정교사에게 시험을 받는 그런 책이었다.
“엠메리아의 역사서에는 평민들 사이에서 퍼진 야사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서가 아니라 꼭 이야기집 같지요.”
“와아.”
이야기집. 그 말에 레슬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거기다 야샤가 잔뜩 실려 있다니. 옛날의 레슬리였다면 가정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관심도 주지 않았을 야사였지만, 이미 루엔티 덕분에 즐거운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기대감과 호기심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책을 구하기는 힘드실 테니 제가 수업 시간마다 가져와 즐거운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 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콘라드가 레슬리를 따라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때마침 들어온 햇빛에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야기를 하면 분명 구해 주시겠군요. 다들 뛰어나시고 좋으신 분이니까요.”
“맞아요! 다들 너무 친절하시고, 좋은 분이에요.”
그 말에 레슬리는 흥분해 크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콘라드가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왜 그런 분들이 괴물이라 불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요! 사이레인 님도 무서워 보이지만 정말 좋으신 분이고, 베스라온 님도 무뚝뚝해 보이지만 진짜 친절하세요!”
그래, 다들 좋은 분인데! 레슬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셀바토르 공작님을 어머니라 부르는 데 실패해 다시 호칭을 원래대로 했지만, 다들 이해해 주었다. 모두가 자신을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또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려고 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 레슬리는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루엔티 님은 아는 것도 많으시고, 또 셀바토르 공작님이 얼마나 멋지신데요! 가면을 쓴 것도 정말 멋지세요! 다들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말하는데…….”
흥분해 조잘조잘 말을 터트리던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거지? 그런 레슬리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짓던 콘라드가 자신의 앞에 놓인 얼그레이 케이크를 작게 잘라 제 입안에 넣었다.
“맛있네요. 한 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그 말에 조심스레 포크를 들고 얼그레이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폭신한 크림의 느낌이 나더니 뒤이어 달콤한 홍차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살짝은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은 레슬리가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었다.
“맛있어요…….”
“다행입니다.”
콘라드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보는 사람마저도 절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소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사실, 레슬리 양이 드시지 않으시기에 잘못 가져온 건가 내심 걱정이 많았습니다.”
“레슬리라니…….”
평민이면 모를까 귀족들 사이에서는 친한 사이가 아니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주로 가문의 이름 뒤에 작위나 호칭을 붙여 불렀다.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을 부르는 상황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후에 이어지는 친근함의 표시이거나 첫째와 둘째가 같은 자리에 있을 때 둘을 구분하기 위해 둘째의 이름을 부르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 레슬리의 언니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콘라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세 번째 만남이라고는 하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바람같이 지나간 사이가 아니던가.
“성을 말해 주시지 않으셔서.”
“아.”
레슬리의 표정을 읽어 낸 콘라드가 방긋 웃으며 이번엔 레슬리의 앞에 색색의 마카롱을 내려놓았다. 크림이 잔뜩 들어간 마카롱을 내려다보며 레슬리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레슬리 스페라도’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테라 공자 정도 되는 사람이면 금방 자신의 성을 알아낼 테지만 그래도. 목구멍이 까끌까끌해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레슬리는 마음을 정했다.
“레슬리 양이라고 불러 주세요.”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 영애는 엘리의 대명사였다. 아름답고 우아한 첫째 엘리는 제 이름보다 스페라도 후작 영애라는 말을 더 듣고 살았다. 그게 그녀에게도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레슬리도 스페라도 영애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자신보다 엘리를 더 먼저 떠올렸다.
그 때문에 성을 말해 콘라드에게서 스페라도 양이라는 말을 들으면 엘리가 떠올라 되레 기분이 나빠질 게 분명했다. 차라리 친분은 없지만, 이름을 불리는 게 훨씬 나았다.
“그렇다면 부디 저도 콘라드라 불러 주세요, 레슬리 양.”
콘라드가 아직도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며 레슬리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
“다녀오셨습니까?”
아이테라 공작저로 들어서자 반듯하게 머리를 넘긴 집사가 콘라드를 반겼다.
“응, 레슬리 양을 만나고 왔어.”
“소문의 공녀님 말이군요.”
다른 하인이나 하녀가 해도 괜찮을 일이건만 집사는 손수 콘라드의 코트와 모자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스페라도 가문과 셀바토르 가문 사이의 분란을 모르는 이가 없었고 그 원인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라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아이.
“어떤 분이셨나요?”
“레슬리 양?”
콘라드의 황금빛 눈이 동그래지더니 곧 웃음으로 휘었다. 그 레슬리 양과의 만남이 진심으로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즐거운 분이었어. 셀바토르 공작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
작고 하얗고 해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검고 커다란 공작가 사람들 사이에서 서 있을 레슬리를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터졌다.
검은 괴물들 사이에 토끼 한 마리가 섞여 있다면 딱 비슷한 모양새일 것이다. 거기다 오늘 레슬리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집에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그쪽에서도 레슬리가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지.
“좋으신 분 같군요.”
콘라드의 대답에 집사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콘라드가 좋아하니 그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맞아. 그런데 무언가 사정이 있는 분 같더라고.”
신전에서 첫 만남을 콘라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신전, 그것도 귀족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가문의 책이 보관된 복도에서 어울리지 않게 낡은 드레스를 입고 눈물을 흘리던 아이. 라일락색 눈동자에서 방울져 떨어지던 눈물이 보석처럼 귀해 보였다.
제 호의에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굳어 버렸던 작은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려야 못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비록 내색은 안 했지만, 어딘가 반가워 한 걸음 다가갔었다.
하지만 자신을 기억해 주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린 데다, 베스라온이 경계하기에 모르는 척 뒤로 물러났었다. 어차피 기회는 또 올 테니까. 귀족들의 세계는 너무도 좁고 편협한 것이니까.
그리고 콘라드의 생각은 적중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신학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해 온 것이었다.
비록 아이테라 대공, 콘라드의 아버지는 그 일에 반대했지만 이미 흥미를 느낀 콘라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가르쳐 보는 것은 제 신앙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그렇게 간신히 마주한 노력에 보답이라도 해 주듯 오늘은 살짝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처음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호의에 당황해하는 모습. 두 번째 만남 땐 부끄러워하는 모습. 그리고 세 번째인 오늘은 옅게나마 웃는 모습.
“다음엔 어떤 얼굴을 보여 줄까.”
콘라드는 작게 웃음 지었다.
“네?”
콘라드의 작은 중얼거림이 자신에게 한 것인 줄 안 그윈이 하녀에게 코트를 건네며 묻자 콘라드는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그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콘라드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
“네, 도련님.”
“엠메리아의 역사서를 구해 주고, 차를 진하게 타서 내 방으로 올려 줘.”
그윈의 옅은 하늘빛 눈동자가 커졌다. 예전에 다 읽어서 다른 이에게 선물로 준 책을 왜 구해 달라는 걸까?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곧 그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구해 달라고 했다면 구하는 게 자기 일이었지, 이유를 캐묻는 게 집사의 의무는 아니니까.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를 파는 가게 명단을 알아봐 줄래?”
“디저트 말입니까?”
이번에 그윈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 평소 단것에 입을 대지 않는 콘라드였기에 궁금증이 더해졌다.
“응, 될 수 있으면 아주 달콤한 쪽으로 잘 만드는 가게를 추천해 줘. 오늘 추천해 준 곳도 좋았지만, 더 많은 곳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빈손으로 남의 집에 가는 건 실례니까.”
그리고 친해지고 싶어서. 그윈의 대답에 콘라드는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콘라드 경, 부탁이 하나 있어요.”
가벼운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려 몸을 일으키는데 작은 손이 자신을 잡았다.
“수업 장소는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계속해도 괜찮을까요?”
머뭇거리면서도 레슬리는 간절한 눈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셀바토르 공작가가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배움은 고용의 형태가 아니라 부탁의 형태였다. 그러니 콘라드 쪽에서 장소를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콘라드는 레슬리를 가르칠 장소로 셀바토르 공작가가 아니라 번화가의 카페나 아이테라 대공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신전이라든가.
레슬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뒤에서 박히는 흉흉한 청록빛 눈동자를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혼란의 시대 때 셀바토르 공작과 몇 차례나 검을 맞대고도 살아남은 남자다웠다. 등 뒤로 칼날이 꽂히는 듯했으니까. 그래서 이곳은 피하자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저는…….”
콘라드는 입을 작게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라일락색 눈동자가 간절히 자신을 바라보는데 왠지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레슬리 양이 원하신다면 기꺼이요.”
***
“스페라도!”
누군가 스페라도 후작의 이름을 크게 불렀고 황실 정원을 걷던 스페라도 후작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 라본.”
같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라본 백작이 저 멀리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간신히 재킷으로 가리고 있는 그의 뱃살과 턱살이 출렁거렸다.
“허, 헉……. 오랜만이네! 자네.”
고작 그 거리를 뛰었을 뿐인데 라본 백작의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라본 백작은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그런 라본 백작을 스페라도 후작은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뭔가를 얻고 싶을 때만 나타나는 인간이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꼴이 썩 보기 좋아서 그리고 평판을 위해 내치지 않던 인간이었는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러 가는 길목에서 마주치니 괜스레 짜증이 치솟았다.
“요즘 저택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편지를 보내도 도통 답이 없고 말이야.”
라본 백작은 주룩 흘러내리는 뺨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팔은 괜찮은가?”
“괜찮고말고. 내 팔보단 자네 얼굴의 안부를 물어야겠어. 시뻘건 게 곧 터질 것 같군.”
비아냥거렸지만, 라본 백작은 그저 넉살 좋은 웃음을 띠고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살집에 묻힌 눈은 슬그머니 스페라도 후작을 훑고 있었다. 라본 백작의 눈이 조금은 핼쑥해진 스페라도 후작의 얼굴을 훑었다가 부러졌던 팔에 닿았다.
“이야기는 들었네. 셀바토르 공작이 자네 팔을 부러트렸다면서? 일부러 신력으로 치료하지 못하게 마법까지 걸어 놨다고 들었네.”
마력과 신력은 반발하니까 말이야. 덕분에 고생 좀 했겠군. 말을 덧붙이며 히죽, 라본 백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을 보고 스페라도 후작은 제 눈을 의심했다. 지금 이놈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건가?
“이야, 그렇게 보면 셀바토르 공작도 참 대단해. 안 그런가? 자네가 데려간 스페라도 기사들을 전부 때려눕혔다는 말을 들었네. 그 나이에, 응? 안 그런가?”
이어지는 라본 백작의 비아냥에 스페라도 후작은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스페라도 가문의 기사들은 린체 기사단 못지않게 강하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하긴, 소문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지. 그리고 셀바토르 공작이 보통 인물인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러면서 라본 백작은 지난 일 따위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살집이 가득한 제 손을 휘저었다. 날 선 스페라도 후작의 말에 라본 백작은 눈을 크게 뜨더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니! 당연히 나는 자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우리 아닌가!”
“전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네만.”
그 말에 리본 백작은 환하게 웃으며 토실한 손으로 스페라도 후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예전의 그가 라본 백작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뭐야, 왜 이리 쪼잔해졌나! 늘 화통하던 스페라도 후작이 말이야. 늘 하던 대로 살게, 응? 몸은 건강한 것 같으니 나는 이제 물러남세. 늘 조심하라고, 스페라도.”
그 말을 끝으로 웃음소리와 함께 라본 백작은 몸을 돌려 정원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즐거운 듯 거대한 몸을 흔들며 걸어가는 라본 백작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스페라도 후작은 화가 치밀었다.
분명 오늘 저녁 모임에서 가장 맛있게 씹히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에게 팔이 부러진 자신을 저 라본 백작이 나서서 비웃을 게 뻔했다.
“저 돼지 새끼가!”
쾅! 스페라도 후작은 옆에 있던 나무를 내리쳤고 이미 라본 백작이 사라진 곳을 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명백히 자신을 낮잡아보고 있다. 늘 아래라고 생각되었던 인간까지 비아냥거리자 스페라도 후작은 밀려오는 분노에 숨을 잘게 떨었다.
‘겨우 그깟 년들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레슬리와 셀바토르 공작에 무지막지한 분노가 쏟아졌다. 몇 세대 전에는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었던 좋은 시대가 있었는데. 아내는 남편에게, 딸은 아버지에게 소유되던 때였는데. 지금이 그때였다면!
쾅! 스페라도 후작은 다시 크게 나무를 내려쳤다. 왜 하필 그런 좋은 시대가 지나가 버린 걸까. 그 시대에 자신이 있었다면 말을 듣지 않는 제 둘째 딸을 데려오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아내가 남편에게 귀속되면 셀바토르 공작은 그냥 셀바토르 공작 부인이 된다. 거기다 셀바토르 공작의 남편은 다른 나라 출신의 천한 용병이 아니던가. 뿌리부터 르카디우스의 귀한 귀족 출신인 자신을 이기지는 못했으리라.
분명 용병 출신답게 제 밑에서 설설 기는 것밖에 할 수 없겠지. 그리고 남편이 그리하니 아무리 자존심 높은 그녀라도 그녀의 남편과 함께 고개를 조아릴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이 제 밑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상상하니 바닥에 처박혔던 기분이 꽤 나아져, 스페라도 후작은 옷깃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렇지. 고작 여자 따위가 뭘 할 수 있다고.’
아직 ‘아이 보호법’이 남아 있었다. 이 법을 만든 이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보호하려는 마음이었겠지만,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이 낳은 아이는 부모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법으로 멋대로 이해했다.
‘일단 데려오기만 한다면 그때는…….’
이번엔 제대로 버릇을 고쳐 줘야지.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다시는 이 아비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교육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페라도 후작은 웃었고 조금 흐트러진 제 행커치프를 다듬었다.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될 수 있으면 깔끔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낫겠지.
창문으로 자신의 옷차림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한 스페라도 후작은 걸음을 뗐고 계속 정원 안 은밀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시녀가 서 있었다.
“트라 베쉬 스페라도 후작님. 메데이아 태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인사였다. 연한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는 그를 보며 방긋 웃음 지었다.
“오오, 그래.”
스페라도 후작은 환하게 웃으며 시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정원이라 부르기에는 나무가 점점 더 많아지고, 사람의 모습을 찾기 힘든 곳까지 오자 작은 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는 온실의 문을 열고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다시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은 정중하게 온실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온실 문은 후작이 들어가자마자 닫혔다. 몇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차와 약간의 다과가 놓여 있는 화려한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는 한 여인이 먼저 앉아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
하늘이 생각나는 하늘색 머리를 틀어 올리고 붉은 루비로 장식한 채 앉아 있는 여자는 스페라도 후작과 비슷한 나이거나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
스페라도 후작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얇은 레이스 장갑을 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밝은 헤이즐넛빛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살포시 휘었다. 젊었을 적 선황을 한 번에 사로잡은 그녀의 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오랜만입니다, 스페라도 후작. 몸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태후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이지요.”
그녀의 맞은편에 스페라도 후작이 자리 잡자, 뒤편에 서 있던 시녀가 우아한 손길로 차를 따라 주었다.
“드셔 보세요. 리온의 나라에서 가지고 온 찻잎인데, 독특한 맛이 나 요즘 내가 즐겨 마시는 차랍니다.”
스페라도 후작은 향을 한 번 맡더니 차를 조금 들이켜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몬 차로군요. 제가 알기로는 이 차는 리온의 왕족들도 쉽게 마시지 못하는 최상품이라 들었습니다.”
“어머.”
메데이아 태후는 그런 스페라도 후작을 보며 미소를 흘렸다.
“스페라도 후작께서는 이 차를 알고 계시는군요?”
“예, 어릴 적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차는 여신께서 마시는 차로 인간들은 쉬이 입을 댈 수 없다고요. 특별한 날 아주 조금만 마신다고 하던데, 태후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후작은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메데이아 태후를 바라보았다. 리온 왕국의 차를 통해 은근슬쩍 그녀를 여신과 동급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런 칭찬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메데이아 태후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흘렸다.
“후작은 늘 저를 즐겁게 해 주시는군요.”
“제 말주변이 부족해 더 즐겁게 해 드리지 못한 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마치 입안의 혀처럼 구는 스페라도 후작을 메데이아 태후는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았다.
“늘 저를 이렇게 즐겁게 해 주시는데 저는 후작에게 해 드리는 것이 없어 어쩐다…….”
혼잣말하듯 작게 흘리는 말을 스페라도 후작이 들었다. 됐다. 후작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스페라도 후작이 무리해서까지 메데이아 태후를 만난 이유가 있었으니까.
“존경하는 태후 폐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 이야기를 조금 들어 주시겠습니까? 요즘 퍼지고 있는, 저에 관한 부끄러운 소문을 태후께서도 들으셨겠지요. 저의 불쌍한 둘째 딸 아이 말입니다.”
일부러 얼굴을 굳힌 스페라도 후작은 간절한 눈으로 메데이아 태후를 바라보았고 태후는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셀바토르 공작이 스페라도 후작의 차녀를 납치해 갔다는 그 이야기 말이군요.”
“정확히 들으셨군요……. 제 차녀는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택을 벗어난 적도 없지요. 그런 아이가 셀바토르 공작, 그 무시무시한 사람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니…….”
일부러 스페라도 후작은 몸을 떨었고 흐윽, 작은 울먹임에 말끝이 먹혔다. 그런 스페라도 후작을 메데이아 태후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메데이아의 입에서 그가 원하던 말이 나왔다.
“후작, 내가 도울 게 있다면 말하세요.”
“그렇다면 간청하건대, 귀족 재판을 열어 주십시오!”
“귀족 재판 말입니까?”
“예, 저는 저 무지막지한 셀바토르 공작을 귀족 재판에 세워, 그 죄목을 낱낱이 밝히고 싶습니다.”
귀족 재판. 오직 황제의 명으로만 열리는 이 재판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다. 귀족 재판에서 죄가 인정될 경우 심하면 귀족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으니까.
명예를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재판에서 작위를 잃고 허탈감과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몇몇 이들은 귀족 재판을 은밀하게 ‘명예적 사형’이라고도 불렀다.
셀바토르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 재판에서 죄가 인정돼도 작위를 뺏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 고귀하고도 드높은 명예는 더럽혀지고 땅에 떨어져 그 빛을 잃으리라. 스페라도 후작은 이 점을 노리고 귀족 재판을 열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
스페라도 후작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푹 숙였다. 황제에게 재판을 열어 달라고 하면 황제는 머뭇거릴 것이다. 그는 최대한의 분쟁을 피하고 싶어 할 테니까. 하지만 젊디젊은 이 태후라면 어떨까?
메데이아 시엔 르카디우스.
선황제의 황후였던 그녀는 아주 작은 나라인 이트바나 왕국 출신의 공주였고, 본디 그녀가 태어났을 때 처음 받은 이름은 아펠로니아 이트바나였다.
이트바나 왕국은 바닷가에 있는 아주 작은 왕국으로, 르카디우스 제국에 복속되길 거부하고 끝까지 반항해, 선황제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다른 제국과 새로운 교역로를 가지고 싶은 르카디우스 제국과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는 이트바나 왕국은 맹렬히 부딪쳤다.
그러던 어느 날 이트바나의 공주였던 아펠로니아가 스스로 나라의 심장이라 불리는 보석을 들고 나타났다. 이트바나 왕만이 가질 수 있는 심장을, 그리고 나라를 르카디우스 황제에게 바친 그녀는 선황제에게서 두 가지를 약속받았다.
하나는 이트바나 왕국 국민을 죽이지 않고 제국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퍼지자마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귀족들은 반발했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귀족들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이들이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주변국들을 통치해 온 르카디우스 제국에는 제국민과 제국민이 아닌 이들의 차별이 만연했다.
그런데 가장 고귀한 핏줄인 르카디우스가 황제가 타국의 핏줄과 섞인다니? 이건 귀족들로서도 제국민들의 입장에서도 말이 안 되는 결혼이었다.
게다가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때는 선황제가 쉰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아펠로니아는 고작 스무 살을 넘긴 때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피스토레 자일스 르카디우스가 20대 초반이었던 나이를 생각하면, 르카디우스 선황제는 제 아들보다도 어린 여자를 아내로 맞은 것이었다.
반대는 들불처럼 퍼져 나갔지만, 단호한 선황제의 명으로 아펠로니아는 죽은 첫 번째 황후의 뒤를 이어 르카디우스 제국의 두 번째 황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황후가 되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하게 르카디우스 제국인으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맨 먼저 아펠로니아가 한 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트바나의 모든 옷과 따라온 제 시녀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녀의 주변과 옷들은 르카디우스 사람들과 드레스들로 채워졌다.
자신의 모든 행실을, 그리고 말투마저 르카디우스 황실식으로 바꾸었고, 제 이름마저 ‘메데이아’라는 르카디우스식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과 사상까지 바꿔 타국민을 앞장서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메데이아는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제국인으로 거듭났다.
처음엔 그녀를 반대하던 귀족들도 그녀가 변하는 모습에 흠을 잡을 수 없었는지 점점 목소리가 약해졌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 시한부라는 것도 귀족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한몫했다. 메데이아가 황후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르카디우스 선황제가 병에 걸린 것이다.
멸망한 타국에서 와 연줄이라고는 없는 여자. 거기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편과 이미 황태자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남자의 아들. 차디찬 황실에서 메데이아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한 번의 유산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르카디우스 귀족들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피스토레가 황제의 왕관을 머리에 올리던 그 달에 메데이아는 황실 가장 안쪽 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유약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장 호화스러웠던 궁을 내주었다. 그때 메데이아는 고작 스물 중반을 갓 넘긴 때였다.
‘기구한 팔자를 가진 여자다.’
한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달콤한 권력을 맛보고 바로 떨어진 여자. 거기다 아직 나이까지 젊었다. 이대로 황궁 한구석에서 썩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권력욕도 뭣도 없는 여자라 이용하여도 뒤탈이 없을 것이다. 현 황제 피스토레는 죽은 제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한 메데이아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으니까.
스페라도 후작은 웃으면서 메데이아 태후를 바라보았다.
“만일 저를 도와 귀족 재판이 열리도록 해 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
자신의 첫째 딸 엘리는 이미 제1황자 아렌도와 약혼한 사이였다. 엘리는 아렌도 황자의 약혼녀로서 그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렌도 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날, 분명 스페라도 후작은 황실에 어느 정도 입김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쯤 되면 황제에게 그리고 자신의 사위가 될 황태자에게 저 황실 구석에서 죽어 가는 젊은 태후를 볕이 좋은 궁으로 옮겨 달라 속살거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저의 사랑스러운 첫째 딸 엘리가 아렌도 황자님과 약혼을 했으니까요. 분명 추후 저는 태후 폐하를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라는 듯 스페라도 후작은 일부러 제 딸의 이야기를 꺼내며 미소 지었다. 후작의 대답에 메데이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딱 그녀의 이미지를 그대로 나타내는,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미소였다.
“후작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지는 몰랐어요.”
이번엔 메데이아 태후는 손수 차를 스페라도 후작에게 따라 주며 호의를 표시했다. 태후가 따라 준 차를 공손히 받으며 후작은 말을 흘렸다.
“전 태양의 황후였던 분이니, 당연히 제가 신경 쓰는 것이 맞습니다. 오히려 이제야 태후 폐하를 찾아뵈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후후, 그래요. 겨우 황제 폐하께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뿐이니 제가 못 해 줄 것도 없지요.”
귀족 재판은 황제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영원히 귀족 재판을 열 수 없었다. 스페라도 후작은 이미 황제에게 귀족 재판을 열어 달라고 긴 서신을 보낸 후였고, 소문을 퍼트려 황제의 귀에도 사정이 들리도록 한 뒤였다.
메데이아는 ‘겨우’라고 말했지만, 태후까지 황제에게 언질을 준다면 황제는 귀족 재판을 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 황제가 그녀를 싫어하든 아니든 일단 메데이아는 선황제의 황후였고, 어엿한 황족이었으니까.
“거기다 어차피 우리는 사돈이 될 사이 아닌가요? 사돈이 곤란해지는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지요. 제가 폐하께 말을 올려 보겠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메데이아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작은 환하게 웃으며 일부러 보란 듯이 눈물을 뚝 흘리며 몸을 떨었다. 그런 후작을 바라보며 메데이아 태후는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감사합니다, 메데이아 태후 폐하. 덕분에 저는 제 귀한 딸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마땅히 도와야 할 사람을 도왔을 뿐이랍니다, 스페라도 후작.”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스페라도 후작은 한참 후에야 자리를 떴고 메데이아 태후는 스페라도 후작이 떠난 후에도 잠시 작은 온실에 머물렀다. 그녀의 헤이즐넛색 눈동자는 계절에 맞지 않게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후님, 스페라도 후작님을 모셔다 드리고 왔습니다.”
시녀 한 명이 웃으며 스페라도 후작이 황궁을 나갔음을 알렸다. 스페라도 후작을 안내해 온, 옅은 갈색 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였다.
“그래, 즐겁게 가시던?”
“예.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셨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렇게 웃으며 메데이아 태후는 손을 뻗어 탐스럽게 핀 장미 한 송이를 어루만졌다. 다른 장미 나무보다 유독 붉은 이 장미는 화려했고 향조차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이 역시도 어느 나라의 진상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나라에서 가장 귀한 꽃의 묘목을 바친 거겠지.
“멍청한 사람.”
순식간에 태후의 손아귀에서 아름답고 귀한 꽃이 으스러졌다.
“셀바토르 공작을 방해하라고 정보를 흘렸더니, 되레 제 딸을 빼앗길 줄이야. 이렇게까지 멍청한 인간인 줄은 몰랐어.”
방금까지 화려함을 뽐내던 장미였는데, 태후의 손짓 한 번에 화려함을 잃어버렸다. 풍성했던 꽃잎은 떨어져 나갔고 순식간에 초라해졌다.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후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하얀 레이스 장갑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태후는 아직도 얼굴에는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꽃잎을 털어 냈다. 꽃잎이 마치 피처럼 온실 바닥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지요.”
“그렇지. 적당한 인물이었어.”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자신이 셀바토르 공작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믿는 남자. 놀라울 정도로 이기적이며 가문만 생각하는 남자의 시야는 좁았다.
“사돈이 될 사람이었으니, 조금 도와줄까 해서 정보를 줬더니.”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제 둘째 딸을 빼앗겨 버렸다. 거기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술한 방식으로 딸을 되찾으려고 했다니. 한숨과 함께 저절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이쯤 되니 아렌도의 약혼녀를 잘못 구해 준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후 폐하. 약혼 정도는 쉽게 파기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메데이아는 붉게 물들어 버린 제 레이스 장갑을 벗어 다른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가져다 버리렴. 못 쓰게 되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피엘. 내일 아침은 오랜만에 우리 황제 폐하와 식사를 하고 싶다고 전해 주렴.”
내일 바로 귀족 재판에 대해 언급을 해야지. 메데이아보다 더 나이가 많은 그녀의 양아들은 메데이아를 싫어했다. 하지만 메데이아를 내치지도, 또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비록 그녀의 궁은 황실 구석진 곳에 자리했지만, 넉넉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의 품위 유지비가 나왔고 기념일마다 각 왕국에서 보내온 희귀한 선물들을 나눠 주었다.
피스토레 황제는 메데이아가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머니로서의 예를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 가서 귀족 재판을 열어 달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 퍼진 소문을 듣기도 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 하나를 해결 못 해 나를 찾아오다니.’
휴, 메데이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니 스페라도 후작에 대한 기대감은 바닥을 치고, 오히려 제 살길을 찾아 셀바토르 공작을 찾아간 스페라도가의 차녀에 더 호기심이 갔다.
“이피엘.”
메데이아의 부름에 하녀와 함께 테이블 위를 치우고 있던 시녀가 눈을 맞췄다.
“소문의 셀바토르 공녀의 이름을 알고 있니?”
“네, 레슬리 스페라도입니다.”
흐응. 태후의 헤이즐넛색 눈동자가 휘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에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름도 귀여워라. 레슬리, 레슬리라.”
호랑가시나무 정원을 뜻하는 단어가 레슬리였었지.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터졌다. 호랑가시나무의 꽃말이 뒤이어 떠오른 탓이었다. 메데이아의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 호랑가시나무의 꽃말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었다.
“태후 폐하?”
테이블 위에 찻잔과 남은 다과를 치우던 이피엘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메데이아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방긋 웃었다. 비록 메데이아는 스페라도 차녀를 만나 본 적도, 이 사건 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지만, 제 첫째 딸밖에 모르는 스페라도 후작이 차녀를 어떻게 대했을지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축복의 이름도 지어 주지 않은 딸. 분명 귀족답지 않은 가엾은 삶을 살고 있었겠지. 그런 아이에게 레슬리라는 이름을 지어 주다니. 참 후작도 너무하지 않은가?
“만나 보고 싶어라.”
메데이아는 옅게 웃었다. 셀바토르 공작이 고른 아이니 분명 보통 아이는 아닐 것이다. 공작의 안목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니까. 앞으로의 일에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공녀님.”
한 여자가 밝게 레슬리를 보며 인사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몽실몽실한 분홍 머리가 흔들거렸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치맛자락을 잡고 우아하게 인사하는 틸레이얼 자작 부인의 인사를 받은 레슬리도 그녀를 따라 허리를 꾸벅 굽혔다.
“슈엘라 아폰 틸레이얼입니다. 앞으로 공녀님의 예절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어요.”
“레슬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레슬리의 인사를 받은 틸레이얼 부인의 하늘색 눈동자가 동그래졌고 그녀의 입술이 앞으로 쏙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혼나려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과 축복의 이름과 가문의 성을 전부 말하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지금 레슬리는 자신의 이름만 간단히 소개했고 그건 상대방에게 큰 무례로 비칠 수 있었다.
“안 됩니다, 공녀님.”
아, 역시. 레슬리는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에 따라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초리가 날아오지도 않았고, 날 선 비난이 들려오지도 않았다.
“레슬리 공녀님, 저를 봐 주세요.”
오히려 따스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레슬리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허리를 굽히고 자신을 바라보는 틸레이얼 부인과 시선을 맞추자 부인이 씩 웃어 보였다. 마치 그 모습이 나른해 보이는 고양이 같았다.
“저에게 허리를 굽히시면 안 됩니다. 저는 여기에 공녀님의 가정교사로 온 사람이고 공녀님은 이 제국에서 유일한 공녀이시니까요.”
그러면서 틸레이얼 부인은 레슬리의 행동을 따라 허리를 꾸벅 굽혀 보였다.
“이 행동은 신분이 낮은 이가 신분이 높은 이에게 하는 인사법입니다. 주로 평민이 귀족이나 젠트리 계층에게 이렇게 인사하지요.”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늘 스페라도 가문의 가정교사에게 저런 식으로 인사를 했었다.
‘우리는 지식을 아가씨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아가씨가 예를 표하는 게 맞아요. 앞으로 가정교사들이 방에 들어오면 이렇게 인사하십시오. 알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더 숙이라고 덧붙이던 가정교사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들이 레슬리를 자신보다 아래로 아니, 아예 귀족 취급을 해 주지 않던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곧 놀라움은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거기서 나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았던걸.’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생각해 보면 가정교사들이 자신을 가장 잘 대해 준 게 아니던가. 그나마 사람 취급은 해 준 거니까. 자신이 여기서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다시 깨달은 레슬리는 방긋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틸레이얼 자작 부인.”
틸레이얼 부인 역시 레슬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은 제국 유일의 공녀이십니다. 이 말은 즉 메데이아 시엔 르카디우스 태후 폐하와 아르트엘 레폰 르카디우스 황후 폐하, 아셀라 벤칸 셀바토르 공작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웰라 디 아이테라 대공 부인 다음으로 여성 중 가장 높은 분이 공녀님이라는 소리입니다.”
휴우. 긴 이름을 말하다 조금 숨이 가팔라졌는지, 잠시 호흡을 정리한 틸레이얼 자작 부인이 말을 이어 나갔다.
“레슬리 공녀님 위로는 단 네 분밖에 없다는 걸 기억해 두세요. 태후 폐하, 황후 폐하, 셀바토르 공작님 그리고 아이테라 대공 부인이십니다.”
“그렇군요.”
레슬리는 다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틸레이얼 자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 취급을 못 받던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은 또 르카디우스 제국에서 다섯 번째로 지위가 높은 여성이라고 하니 그 틈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아, 저를 따라 해 보시겠어요?”
그러더니 왼쪽 발은 오른쪽 발 바로 뒤로, 그리고 두 손은 치마의 끝자락을 가볍게 들며 우아한 모습으로, 틸레이얼 부인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마치 예절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자세였고, 레슬리는 어설프게나마 그 자세를 따라 했다. 틸레이얼 부인처럼 우아하게 왼발을 뒤로하지 못해 잠시 기우뚱했지만, 곧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이건 공녀님보다 높으신 분이나 나이가 많은 분께 존경을 담아 인사를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틸레이얼 부인은 레슬리의 자세 몇 곳을 고쳐 주었다. 레슬리가 그 자세를 곧잘 고치자 부인은 흡족한 듯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레슬리는 그대로 몇 번 무릎만 살짝 굽혀 인사를 연습해 보았다.
“솔직히 이 방법대로 인사할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공녀의 위로 높은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황족이 있지 않나요? 틸레이얼 자작 부인.”
“부디 틸레이얼 선생님이나 슈엘라 선생님이라 불러 주세요.”
자신의 호칭을 정정해 주며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아주 좋은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자신을 보라는 듯 자세를 잡았다.
“황족과 마주할 때는 이것보다 더 허리와 무릎을 숙여야 합니다. 더 깊은 경외를 담아서요.”
그리고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번에도 흠 하나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자세였다.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자세였기에 레슬리는 처음부터 완벽히 그 자세를 따라 할 수 있었다.
“아주 완벽한데요?”
틸레이얼 부인이 웃으며 손뼉까지 치자 레슬리는 뺨을 붉혔다. 고작 인사로 이렇게까지 칭찬이라니. 칭찬이 몸에 밴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들어도 들어도 좋은 것이 칭찬이라 레슬리는 감사의 뜻으로 배운 대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틸레이얼 부인을 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감사의 뜻으로요, 슈엘라 선생님.”
“어머나.”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정말로 감동한 듯 제 입을 막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이렇게 귀엽고 착실한 공녀님인 줄 알았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더 일찍 올 걸 그랬어요!”
레슬리가 귀엽고 기특해 죽겠다는 듯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두 팔을 동동 휘둘렀다. 그때마다 몽실몽실해 보이는 그녀의 분홍 머리가 흔들거렸다.
“맞아! 사실은 제가 공녀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귀한 걸 가져왔답니다. 지금 드려야겠어요!”
귀한 것? 귀한 것이라니. 그게 뭘까? 레슬리는 호기심에 눈을 깜빡였다.
자작 부인은 하인에게 자신의 가죽 가방을 가져와 달라고 했고, 곧 하인이 가져온 여행 가방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철제로 된 상자에는 구름 같은 것과 푸른 리본이 그려져 있었다.
“슈엘라 선생님, 이게 뭔가요?”
“솜사탕이랍니다.”
솜사탕? 사탕의 한 종류인가 봐. 레슬리는 웃으며 상자 뚜껑을 열었다. 저번에 사이레인이 사 준 사탕을 한 번 먹은 적이 있었다. 동그랗고 예쁜 색의 사탕은 참 달콤했었지.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며 상자 안을 바라본 레슬리는 그대로 잠시 굳어 버렸다. 상자 속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의 앞에 앉은 틸레이얼 자작 부인을 한 번. 다시 상자 속을 한 번 다시 부인을 한 번. 그렇게 몇 차례나 상자 속의 솜사탕이라는 것과 틸레이얼 자작 부인을 바라보고 나서야 레슬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어, 선생님. 이건 선생님의 머리카락인가요……?”
자신의 물음에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예절 선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웃음이었다. 차를 내오던 하녀가 그녀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굳을 정도였으니까.
“그, 그게 솜사탕이랍니다, 레슬리 공녀님.”
하아. 눈물을 훔쳐 내며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어서 먹어 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래도 용기가 나지 않아 레슬리는 잠시 주저하며 상자 안에 든 솜사탕을 바라보았다.
몽실몽실하고 분홍빛을 띠는 것이 정말 레슬리의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 하필이면 틸레이얼 자작 부인이 지금 머리에 매고 있는 리본도 상자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하늘색이라, 레슬리는 다시 솜사탕과 부인의 머리카락을 연달아 바라봐야 했다.
하지만 틸레이얼 부인이 자신에게 이상한 걸 먹일 리는 없었다. 레슬리는 눈을 꽉 감고 솜사탕을 떼어 제 입속에 집어넣었다.
“……!”
허무한 맛이다. 분명 입속에 넣었는데 강한 달콤한 맛이 지나가더니 솜사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중독된 듯 레슬리는 다시 솜사탕을 떼어 입안에 넣었다. 다시 솜사탕은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신기하지요?”
“네, 신기해요.”
어떻게 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거지? 레슬리는 다시 상자 속 솜사탕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가볍고 사르르 녹는 걸까? 알 수가 없어 레슬리는 그 핑계로 솜사탕을 한 입 더 떼어 먹었다.
“선생님, 이건 구름으로 만든 건가요?”
그럴지도 몰라! 상자에도 구름 모양으로 그려져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정답이 아니었는지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설탕을 녹여 만든 거랍니다. 이 르카디우스 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간식거리지요.”
그렇구나. 선생님의 머리카락도 구름도 아니었어. 괜스레 아까 선생님의 머리카락인지 물어봤던 게 부끄러워져 레슬리는 뺨을 붉혔다. 그때, 응접실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례합니다, 슈엘라 님. 셀바토르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노크 후에 들어온 제나가 공작의 부름을 전했고, 틸레이얼 자작 부인은 몸을 일으켰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공녀님.”
그러고는 제나와 함께 응접실을 나갔다.
레슬리는 잠시 앉아 있다가 솜사탕 상자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부끄러워.’
레슬리는 손안에 솜사탕 상자를 들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니. 자꾸만 엉뚱한 질문을 한 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델.”
방에 들어서자 신식 난로에 마력을 보충하고 있는 마델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막 보충을 시작한 것인지 마법석이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슬리 아가씨! 어서 오세요. 오늘 예절 첫 수업이셨지요?”
마델이 주근깨가 박힌 뺨을 움직이며 웃었고, 레슬리는 쪼르르 그녀 옆으로 가 털썩 앉았다. 눈앞에 있는 난로는 불 없이 난방하는 신식 난로라 가까이에 가도 무섭지 않았다.
“응, 오늘 첫 수업이었어. 선생님도 좋은 분이셨고.”
“바닥에 앉으면 추워요, 아가씨.”
“카펫도 깔려 있는걸.”
거기다 내 방은 늘 따듯해서 좋아. 레슬리는 웃으며 상자 뚜껑을 열더니 그대로 마델에게 내밀었다. 마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 모습이 즐거워 레슬리는 키득거렸다.
“이것 봐, 마델. 솜사탕이래.”
“솜사탕이요? 저는 이런 걸 처음 봐요, 아가씨. 포근해 보이는 게 꼭 솜 같네요.”
“난 구름 같다고 생각했어.”
틸레이얼 자작 부인의 머리카락 같다고 생각한 건 말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솜사탕을 떼어 마델의 입가로 가져갔다.
“먹어 봐. 달콤해.”
지금 마델의 손은 마력을 충전하느라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레슬리는 직접 솜사탕을 마델의 입가로 가져다준 것이었다.
“세상에, 아가씨…….”
마델의 옅은 노란색 눈동자가 감동한 듯 레슬리를 한 번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솜사탕을 입에 물었다.
“음! 너무 맛있어요. 순식간에 녹아 버리네요. 이런 간식은 처음이에요.”
“그치, 나도 그랬어.”
레슬리는 웃으며 상자 안을 바라보았다. 공작님과 사이레인 님, 베스라온 님과 루엔티 님도 주고 제나랑 서올리도 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아까 자신이 너무 먹은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하는데 마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이런 말 하기 좀 부끄러운데요. 사실 아까 분홍 머리의 손님을 뵈었거든요. 그런데 이 솜사탕이라는 거 처음 봤을 때 그 손님 머리카락 같았어요.”
다행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서. 레슬리는 마델을 보며 방긋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런데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걸까.’
갑자기 든 생각에 레슬리는 필기하던 손을 멈췄다. 셀바토르 공작님이 자신에게 재판 이야기를 해 준 지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마치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듯 레슬리의 주변은 조용했다.
‘스페라도 후작이라면 분명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텐데.’
여태 스페라도 후작을 봐 왔던 레슬리였다. 어떻게든 사랑받기 위해, 어떻게든 한 대라도 더 맞지 않기 위해 늘 레슬리는 후작 부부와 엘리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그래서 더더욱 스페라도 후작이 이렇게 조용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 스페라도 후작은 바짝 독이 올라 있는 상태일 게 분명하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문의 명예가, 자신의 안위가 흙발로 더럽혀졌으니까. 거기다 자신을 찾기 위해 셀바토르 공작가에 왔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팔만 부러져 돌아갔다. 레슬리는 아주 예전에, 종이에 베인 상처로 난리를 치던 스페라도 후작을 떠올렸다.
“레슬리 양?”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퍼뜩 레슬리는 고개를 들었다. 맞아, 지금은 수업 중이었지!
“벌써 지친 거야?”
붉은색에 가까운 주홍의 머리를 뒤로 반듯하게 넘긴 루엔티가 자신의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레슬리는 잠시 루엔티의 암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잠시 궁금한 게 있어서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말해 봐.”
루엔티는 퉁명하게 쏘아붙이면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요즈음 루엔티는 레슬리에게 심통을 부렸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레슬리가 다시 루엔티를 ‘루엔티 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였다.
레슬리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사이레인을 아버지라 불렀었다.
처음에 레슬리는 스페라도 후작 때문에 아버지를 부르기가 가장 힘들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장 큰 복병은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다.
되레 다른 사람들을 다시 처음처럼 꼬박꼬박 ‘님’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고, 그 일로 루엔티는 단단히 삐져 버렸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뭐야, 레슬리 양?”
거기다 살짝 비꼼까지 섞어 레슬리를 레슬리 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책을 꼭 쥐고 입을 내밀었다.
“레슬리 양이라고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평소처럼 레슬리라 불러 주세요.”
“너도 나를 루엔티 님이라고 부르잖아? 나는 나를 루엔티 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이름만 막 부를 정도로 예의 없는 놈이 아니거든.”
“말은 그냥 막 하면서…….”
작게 레슬리가 반항해 보았지만, 루엔티가 쏘아본 눈빛이 무서워 레슬리는 잽싸게 책을 들어 루엔티의 시선을 막아 냈다.
“내가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루엔티 오라버니라고 부르라니까. 그럼 나도 ‘예쁜 막내야~’ 하고 불러 줄게.”
“하지만…….”
레슬리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는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공작님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셀바토르 공작님이라고 부르면 공작님이 슬퍼할 것 같아서요…….”
사실은 그 후에 제 방에 돌아와 마델과 함께 몇 번이고 연습해 보았다. 하지만 목 부분 어디엔가 돌이 들어 있는지, 어머니라고 부르려 할 때마다 목이 콱 하고 막혀 왔다. 마델이 힘내라며 응원도 해 주고 자신의 손도 잡아 주었지만, 결국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을 어머니라 부르는 데 실패했다.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레슬리는 울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혹여나 이 일로 셀바토르 공작님이 자신을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 아니던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루엔티가 제 머리를 미친 듯이 긁적거리더니 작게 한숨 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머니에 대한 동경이 너무 깊어서 그래.”
“동경이요?”
“그래, 동경. 어머니가 너를 그 쓰레기 가문에서 구해 주었지. 거기다 멍청한 후작을 내쫓아 주고 너를 보호해 줬지. 그리고 지금은 너에게 셀바토르의 성을 주기 위해 움직이고 계셔.”
그랬었지. 자신을 구해 준 것도, 처음으로 보호해 준 것도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에 왔을 때야 자신은 제물이 될 거란 공포에서 안전해졌으니까.
“거기다 형에게 들어 보니까 너, 어머니만큼 크고 싶다고 했다며? 그것도 다 동경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거야.”
후. 서재 바닥에 앉아 있던 루엔티는 몸을 일으켜 레슬리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레슬리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어 주었다.
“만일 네가 어머니를 싫어했다면 그만큼 키가 크고 싶다는 말을 했을까? 그리고 그만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저는 공작님이 싫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만일이라고.”
루엔티는 제 말에 토를 다는 레슬리가 귀여운지 쓰다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대입해서 생각해 봐.”
싫어하는 사람이라. 자연스레 스페라도 후작이 떠올랐다.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에 대입하자 키 이야기는커녕 그 사람을 입에도 담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아예 생각에서 밀어 내고 싶었고,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동경하고 또 너무 좋아하니까 쉽게 부를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이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계시지. 그러니 어머니가 너를 오해할 일 따윈 없어.”
마델이 아침에 예쁘게 매어 준 리본이 쓰다듬는 손길에 헝클어지며 다 풀려 버렸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럴까요?”
“당연하지. 어머니는 속 좁은 분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좀 멋대로 굴어도 돼. 적어도 이 공작저에서는 아무도 너를 미워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루엔티는 책상에 걸터앉아 레슬리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어 주었다. 이번엔 섬세한 손길이었다.
“고맙습니다, 루엔티 님.”
다행이다. 레슬리는 작게 웃었다. 셀바토르 공작님이라면 모든 다 알고 이해해 주실 거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쪽으로는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루엔티가 그 불안한 마음을 몇 마디로 잠재워 준 것이다.
그걸 용케 알아챈 루엔티가 눈을 반짝이며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루엔티 오라버니라고 다시 불러 줘. 응?”
어머니도 괜찮아하시니까, 응? 어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루엔티를 보며 조금은 서글프게 웃음꽃을 피웠다.
“셀바토르 공작님은 신경 쓰지 않아 하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슬퍼요.”
남들은 다 받는 것을 자신만 못 받는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레슬리는 잘 알고 있었다. 철저한 비교 대상인 엘리가 있지 않았던가.
후작 부부는 엘리를 ‘사랑스러운 딸, 엘리’라고 달콤하게 이름을 불러 주면서 자신은 이름조차 불러 주지 않았다. 버러지, 쓸모없는 것 그리고 어떨 때는 저것이라고 자신을 불렀다.
그때 받았던 상처를 셀바토르 공작님이 조금이라도 받는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레슬리의 슬픈 목소리에 루엔티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눈빛이 무시무시해지고 입에서는 무언가 처음 듣는 단어들이 쏟아져 내렸다. 예전에 사이레인 님에게서 들은 ‘모가지’와 ‘조져 버려’가 작게 들린 것도 같았다.
“알았어.”
루엔티가 고개를 돌려 다시 레슬리를 바라보았을 때 그런 무시무시한 흔적은 루엔티의 얼굴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언제쯤 불러 주게? 나뿐만 아니라 형도, 아버지도 은근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다리를 움직여 책상을 통통 치며 루엔티가 투덜거렸다.
“음, 제가 셀바토르의 이름을 받는 날, 꼭 불러 드릴게요.”
그 대답과 함께 레슬리는 자신만만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거 다시 해 보고 싶었어.
마델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것을 아이들끼리 혹은 어른과 아이들끼리 하는 것이라고 말해 줬었다. 아니면 비공식적인 상황에서 하는 거라고 했었지.
성실한 학생인 레슬리는 배운 것을 써먹어 보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도 그걸 써 볼 곳이 없었다. 그런 레슬리를 달래듯 마델이 몇 번 손가락을 걸어 주었지만 그래도 레슬리는 약속으로 손가락을 걸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온 것이다! 그나마 공작저에서는 그나마 자신의 또래가 루엔티니까 손가락을 걸어도 괜찮겠지. 부담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레슬리를 보더니 루엔티는 픽 웃고 순순히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그래. 네가 셀바토르의 이름을 이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수호자가 되는 날, 전부 불러 줘야 해.”
가장 고귀한 수호자. 그건 셀바토르 공작가를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었다.
가장 많이 침략을 방어하고, 가장 많이 적을 죽인 괴물 공작가는 가장 고귀한 수호자라는 칭호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셀바토르 공작에게 인사를 할 때 가장 고귀한 수호자라는 말을 붙여 건네고는 했다. 그때 외에는 잘 불리지 않았지만.
“네, 꼭 불러 드릴게요.”
레슬리의 말에 루엔티는 책상에서 내려오더니 나른한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듯 몸을 쭉 늘렸다.
“그럼 힘내서 재판을 이길 준비를 해야겠는걸.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시려나.”
재판! 그 말에 레슬리는 루엔티의 옷자락을 잡았다. 놀라 조금은 동그래진 암녹색 눈동자가 레슬리에게 닿았다.
“루엔티 님. 재판, 재판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리고 사이레인 님이 공작저를 비운 게 재판하고 관련이 있는 건가요?”
“재판 말이야? 아직 진행된 건 없어. 하지만 곧 열리겠지. 스페라도 후작이 어떻게든 재판을 열고 이기려고 물밑 작업을 하는 것 같더라.”
그 말을 하며 루엔티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어머니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황궁에 가신 것도, 아버지가 엊그제부터 공작저를 비우신 것도 재판 준비 때문일 거야.”
아마도 어머니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입궁하신 것이 뻔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귀찮다며 황궁을 잘 가시지 않던 분이었으니까. 특히 형인 베스라온이 린체의 기사단이 되면서 형을 통해 황궁 일거리를 처리하고 가져오게 하였다.
‘가면 다들 날 너무 귀찮게 한단 말이지. 황제도 그렇고 다른 귀족들도 그렇고 말이야.’
작게 한숨 쉬며 읊조리던 어머니가 생각나 루엔티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공작님이랑 사이레인 님이 자리를 비운 게 재판 때문이군요.”
하지만 웃는 루엔티와 다르게 레슬리는 밀려드는 걱정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밑 작업이라니.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단어였다. 뜻이 ‘은밀하게 일을 진행한다.’ 그런 의미였지.
어쩐지 스페라도 후작과 어울리는 단어라 레슬리는 더욱 불안해졌다. 다른 귀족들에게 뇌물을 뿌리고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 하는 게 아닐까. 갑자기 역사서에서 읽은 한 귀족 이야기가 떠올랐다.
뇌물을 받은 귀족들이 청렴한 귀족을 쫓아내 억울하게 죽었다는, 레슬리에겐 너무도 슬픈 이야기였다. 설마 공작님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레슬리는 두 손을 꼬옥 쥐었다. 그런데 이어진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는 어벙한 표정으로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지금쯤 어머니가 황제의 멱살을 잡고 있지 않을까?”
“화, 황제 폐하의 멱살을요?”
눈이 핑글 돌았다. 책에서만 황제를 접한 레슬리는 착실히 책의 가르침에 따라 황제를 여태 하늘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책에 그려진 황제도 하늘을 지고 있는 모습으로 신격화되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공작님에게 멱살이 잡혀 있다고?
물론 황제 역시 인간이니 죽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멱살이 잡혀 있는 모습이라니.
레슬리는 단 한 번, 스페라도 기사가 한 하인의 멱살을 잡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하인이 기사를 꼬드겨 사기 도박장에 데려간 탓이었다. 그때 멱살잡힌 하인은 두 다리를 바동바동하며 애처롭게 살려 달라 울부짖고 있었다.
자연스레 스페라도 기사를 공작님으로, 그리고 거짓말쟁이 하인은 황제로 상상했다가 생각을 멈췄다. 아무래도 더 생각하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상상만으로도 황족 모독죄가 성립하는 건 아니겠지?
“저, 정말 잡은 건 아니죠?”
아닐 거야. 설마. 레슬리도 황족 모독죄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즉결 처분이 가능한 법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황제를 모독할 시에는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 목이 위태로웠다. 은유적인 목이 아니라 실제 목이. 그러니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레슬리의 필사적인 외침에도 루엔티는 한 번 눈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옛날에 잡았다던데?”
그게 언제였더라. 절망하는 레슬리를 못 본 루엔티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본 건 아니고 아버지가 보셨다는데, 부모님이 젊었을 적 혼란의 시대 때 말이야. 황제도 참전했었거든. 그런데 황제가 여러모로 어머니를 귀찮게 했나 봐. 안 그래도 눈앞의 적들에게 온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어머니가-”
거기까지 말한 루엔티는 콱 하고 제 멱살을 잡아 보였다.
“저지르고 마신 거지.”
아아, 잡으셨구나. 황제 폐하는 잡히셨고.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아까보다 선명하게 눈꺼풀 안쪽에 황제의 멱살을 잡는 젊은 셀바토르 공작이 그려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어머니가 황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을 다들 ‘어머니가 황제의 멱살을 잡고 있다.’라고 하더라고. 관용구로 굳어져 버린 거지.”
“그 다들이라는 건 설마 사이레인 님과 루엔티 님이에요?”
“형도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라 황실의 검이라 불리는 린체의 기사단장마저 그런 말을 하다니.
“아, 레슬리. 혹시 몰라서 이야기하는데 이건 밖에 나가서 쓰면 안 돼. 황족 모독죄로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이어지는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는 ‘네에.’ 하고 크게 대답했다. 모가지나 조져 버린다는 말처럼 튀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야지. 레슬리는 제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제 여동생이 귀여운지 머리를 쓰다듬은 루엔티는 씩 웃어 보였다.
결국 마델이 묶어 준 리본이 풀어져 레슬리는 제 손목에 리본을 감았다. 나중에 다시 묶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럼 이제 세계사는 그만하고 실전을 해 볼까.”
그러더니 루엔티는 책상 위의 책을 밑으로 떨어트려 버리고 나무 조각 여섯 개를 차례로 책상 위에 세워 두고는 가운데에 있는 나무 조각을 가리켰다.
“해 볼 수 있겠어?”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열심히 연습했었다. 그리고 확실히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정확도가 높아졌다. 자신이 보기에도 실력이 늘었다.
파삭! 괴기한 소리를 내며 나무 조각 하나가 산산이 조각났다. 연달아 나무 조각들이 안에서 폭발하듯 부서져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고 소리가 멈추었을 땐,
“와. 이번엔 한 번에 성공했네.”
루엔티가 가리킨 단 하나의 나무 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나무 파편이 튀면서 상처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책상 위에 당당히 서 있는 나무 조각을 보며 루엔티는 덧니가 보일 정도로 웃었다.
“제나가 서재에서 나무 조각이 매일 한 상자씩 나온다고 하던데. 정말 열심히 연습했구나.”
“네! 저 열심히 했어요.”
레슬리는 두 주먹을 쥐고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제가 보기에도 썩 흡족한 결과물이었기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조금은 우쭐거리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 그래. 잘했어.”
루엔티가 웃으며 레슬리를 칭찬하더니 이번엔 책상 밑에서 다른 상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상자에서 꺼낸 것은 유리 세공품이었다. 아니, 세공품이라 하기에는 그저 유리 막대를 세워 놓은 단순한 모양이었는데, 너무도 얇아 스치기만 해도 깨질 듯 보였다. 실제로 루엔티는 그 유리 세공품을 세우다가 두어 개를 깨트려 버렸다.
이번에도 여섯 개가 책상 위에 올라갔다. 그것도 이번엔 일렬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막 세워 놓아, 자칫 잘못하다간 연쇄적으로 깨질지도 몰랐다.
아까 나무 조각은 파편이 튀어도 상처만 좀 날 뿐이었는데, 이번 유리 세공품은 파편이 튀면 더 깊게 상처가 나면서 깨질 게 분명했다. 즉, 나무 조각보다 더 조심히 그리고 섬세하게 어둠을 움직여야 했다.
“그럼 이제 중급 편을 시작해 볼까?”
루엔티는 굳어 있는 레슬리를 보며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레슬리가 끙끙거리고 있는 사이, 셀바토르 공작은 거대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한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마부 역시 자신이 모는 마차가 느려지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옆을 바라보았다. 주인의 호통이 날아올 수도 있던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마차를 타고 있는 주인 역시 창문을 열고 마부와 같은 곳을 바라보느라고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엔 마차 한 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마차는 마치 집이 움직이는 것 같았고, 그 마차를 끌고 있는 네 마리의 흑마 역시 보통 말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였다. 얼마나 말들이 거대한지 말들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리는 듯한 착각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다.
검은 마차에 새겨진 암녹색 문양. 모두 그 문양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마차다.”
“괴물…….”
“얼굴 반쪽이 비늘로…….”
“하지만 최근에…….”
그 모습을 본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한숨 쉬며 암녹색 커튼을 내렸다. 그러고는 피곤하다는 듯 의자에 기대고 자신의 앞에 앉은 제나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외출을 잘 못 하겠다니까. 너무 눈에 띄잖아, 이 마차.”
몇 대 전의 셀바토르 공작이 특별 주문한 이 마차는 움직일 때마다 모든 이목을 끌고 있었다. 대대로 장신인 셀바토르 공작가 사람들의 크기에 맞춘 거라지만 커도 너무 컸다.
“하지만 일반 마차는 작아서 불편해하시잖아요?”
제나는 서류를 확인하며 그런 셀바토르 공작을 달래듯 방긋 웃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키가 180센티미터를 넘는 데다가 힐을 즐겨 신는 탓에 일반 마차는 그녀에게 좁게 느껴졌다.
“일반 마차보다 조금 더 큰 마차로 제작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한 반 정도만 더 크게 해서 말이야. 이어지는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제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이레인 님과 큰 도련님은 타지 못하실걸요. 두 분은 공작님보다 훨씬 크니까요.”
사이레인은 셀바토르 공작보다 머리 하나를 더 얹고 있는 정도였고 첫째 베스 역시 그녀보다 한 뼘 더 키가 컸다. 거기다 사이레인은 남들보다 키도 덩치도 컸기에 조금 더 크게 만드는 정도로는 편한 이동은 힘들 듯 보였다.
‘포기해야겠네.’
일반 마차에 구겨 탄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을 상상하던 셀바토르 공작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셀바토르 공작에게 서류를 건네며 제나는 방긋 웃었다.
“루엔티 도련님과 레슬리 아가씨라면 일반 마차로도 분명 문제는 없겠지만요.”
“아하하-”
제나의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루엔티는 일반 남자들과 비슷한 키였고 레슬리는 보통의 아이보다 작았다. 이 마차에 레슬리가 탄다면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자 괜스레 즐거워져 셀바토르 공작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레슬리 양을 위해 마차를 하나 살까. 머리카락 색을 따라서 하얗고 예쁜 거로.”
“그거 괜찮겠네요. 공작저로 들어가면 공방에 주문을 넣어야겠어요. 예쁜 라일락색으로 마차에 이름을 새겨 두는 것도 좋겠어요. 레슬리 셀바토르……. 축복의 이름이 없으니 좀 허전하긴 하군요.”
“신전에 기별을 넣어야겠어. 조만간 축복을 받으러 가겠다고 말이야.”
귀족의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귀족들은 신전에 엄청난 금액을 기부했다. 그러면 신전에서는 아이를 축복하는 의미로 미들 네임을 내려 주었고, 그들이 바친 기부금으로 필요한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그래서 미들 네임의 다른 이름은 ‘축복의 이름’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자신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는 일이라 모든 귀족은 축복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급 귀족이라도, 돈이 없어 파산 직전의 귀족이라도, 그리고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귀족이라도 모두 자신의 고유한 축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레슬리는 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쁜 이름을 받으면 좋겠네요.”
“예쁜 이름을 받겠지.”
마음도 예쁜 아이니까. 셀바토르 공작은 제나가 내민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재판은 귀찮게 굴러갈 겁니다.”
제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평소처럼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란다의 꽃은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 뿌리는 호수 전체를 감싸고 있는 꽃이니까요.”
란다라는 작은 꽃은 호수에 피는 식물이었다. 관상용으로 다른 나라에서 들여와 인기를 끌던 란다는 겉보기엔 몇 송이를 뜯어내고 작은 뿌리를 캐면 없어질 듯 보이는 유약한 식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그 꽃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한 번 꽃이 피면 그 뿌리를 무서울 정도로 퍼트려 호수 전체를 장악하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서류를 반쯤 접어 옆으로 치웠다. 베스라온이 올린 서류에는 아주 간단한 사실만이 나열되어 있었다.
“란다의 꽃이 피지 않게 호수를 관리해야겠어. 혹여나 씨앗이 섞여 있나 골라내고 말이야. 한번 점검하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좋은 생각입니다. 혹시 모르니 공작령에 있는 호수도 점검해 보겠습니다.”
제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는?”
“어제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지금 중간 지점까지 가신 모양이더군요.”
“역시 우리 여보야.”
남들이었다면 이제 고작 3분의 1 지점을 지나고 있을 터였다. 셀바토르 공작은 옅게 웃었다. 이 속도대로라면 사이레인은 가장 적당한 때에 그를 데려와 주리라.
“아, 그리고 공작님. 공작령에서 새로운 서류가 올라왔습니다. 이번에 홍수로 다리가 무너졌다는군요.”
고작 셀바토르 공작저에서 황실로 가는 길지 않은 거리건만, 일이 끊이지 않았다. 셀바토르 공작은 새로운 서류를 받아 들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
“셀바토르 공작 각하.”
시종은 고개를 숙이며 침을 삼켰다. 진짜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몇 달 전부터 황궁에서 일하게 된 그는 오늘에서야 소문의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남자보다 더 큰 키에 검은 머리를 늘어트린 여자. 거기에 얼굴의 반은 하얀 가면으로 덮여 있었다.
‘마검사라는 건 정말일까.’
그가 저잣거리에서 들었던 대부분의 소문이 맞는 듯 보였다. 설마, 정말 가면 밑에 비늘이 돋아 있는 것까지 진실은 아니겠지. 시종장은 신기해하면서도 얼굴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온 제나를 바라보았고, 제나는 알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공작님.”
“그래. 다녀오지.”
셀바토르 공작은 짙은 녹색 망토를 추스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고 걸음을 떼자 잽싸게 시종은 앞서서 그녀를 안내했다. 잠시 황궁 복도를 걷던 시종은 고동빛 문 앞에서 멈춰 섰고 공작이 왔음을 알리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서 오게, 셀바토르 공작.”
문이 열리고 공작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긴 소파에 먼저 앉아 있는 남자는 셀바토르 공작과 비슷한 연배처럼 보였다. 아렌도 황자와 닮은 푸른 눈을 한 남자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늘의 주인을 뵙습니다, 피스토레 자일스 르카디우스 황제 폐하.”
공작이 들어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자 귀찮다는 듯 황제는 손을 저었다.
“어서 앉게. 우리가 언제 그런 예를 차릴 사이던가.”
“그렇다면.”
공작은 긴 인사를 중간에 잘라 버리고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시녀 한 명과 하녀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테이블 위에 달지 않은 다과와 차를 내려놓았다.
시녀가 차를 우려서 따르는 것을 바라보며 셀바토르 공작이 먼저 운을 뗐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일 아니네. 그저 안부가 궁금했던 거지.”
“안부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공작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테이블 위에 차와 다과가 전부 차려지자 시녀와 하녀들은 고개를 숙이고는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황제가 피곤하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쉼과 동시에 표정을 풀었다.
“무슨 생각이야?”
거기다 말투까지 바뀌었다. 하지만 공작은 익숙하다는 듯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황궁의 다른 것들은 하나도 부럽지 않지만, 이 차는 조금 부러웠다. 무슨 차일까. 어느 나라에서 올라온 진상품일까. 뭐가 됐든 제나에게 말하면 구해다 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황제의 말을 흘렸다. 여유 있는 모습에 황제는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하듯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 말이야. 도대체 왜 갑자기 양녀를 들이겠다고 한 거야? 아니, 양녀를 들이는 건 좋아. 그런데 왜 하필 그 스페라도 가문의 차녀냐고.”
피스토레 황제는 이제 간절한 눈으로 여유 있게 차를 마시는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유 있게 차를 마실 때가 아니라니까, 셀바토르. 여기저기서 귀족 재판을 열어 달라고 난리 치고 있어. 가장 적극적인 건 스페라도 후작이고!”
거기까지 말한 피스토레 황제는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흘렸다.
“엊그제는 아렌도가 나에게 부탁하더군. 제 약혼녀의 누명을 풀어 달라고 말이야. 거기다 어제는 메데이아 태후까지 나섰어.”
자세히 보니 푸른 눈 아래가 푹 꺼져 있었다. 어지간히 스페라도 후작에게 시달린 모양이었다. 거기다 메데이아 태후까지 나섰다니. 피스토레 황제의 성격상 이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는 메데이아를 무시하지 못했다. 연약하고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태후는 보기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이 재판도,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의 뒤에도 메데이아 태후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피스토레 황제는 제 친구를 설득시키고자 했다. 셀바토르 정도 되는 사람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건 원치 않으니까.
“귀족 재판에 나서게 되는 건 불명예지. 특히 너희 셀바토르 가문은 그간 흠이 없었던 가문인 만큼 다들 개떼처럼 몰려들 거야. 최대한 막아 보고는 있지만, 한계야. 한계라고. 스페라도 후작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야.”
후우, 작게 숨을 고른 황제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스페라도 후작가의 차녀는 돌려주고 합의점을 찾아봐. 귀족 재판이라니. 그것도 아픈 아이를 납치? 감금? 셀바토르, 이번엔 네가 물러나. 소문의 질이 너무 안 좋아.”
“소문 말인가?”
“그래, 너는 늘 공작저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손님을 잘 받는 편도 아니니 모르겠지만, 스페라도 후작이 너무 악질적으로 소문을 퍼트리고 있어. 너는 소문 속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 취급이라고!”
그 말에 셀바토르 공작은 옅게 웃음을 흘렸다. 괴물이라니, 어이가 없는 소문이었다.
“이미 난 ‘괴물 공작가’의 공작 아닌가. 소문은 내게 타격을 입히지 못해.”
“셀바토르.”
황제가 다시 셀바토르 공작을 불렀지만, 공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냥 그들 요청대로 귀족 재판을 열어 주게.”
“타격을 입을지도 몰라. 모두가 고고한 셀바토르 공작가가 어떻게 더러워질지 기대하고 있다고.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 더 날뛰는 자가 나올지도 몰라.”
“신경 안 써.”
후유, 작게 한숨을 내쉰 황제가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메데이아 태후가 뒤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위험해, 셀바토르.”
“알고 있네.”
거기까지 말한 셀바토르 공작은 달칵, 소리 나게 찻잔을 두고 피스토레 황제를 바라보았다.
“르카디우스. 잊어버린 모양인데 소문도, 귀족 재판도 우리 셀바토르 가문에 조금의 흠도 내지 못해.”
모든 가문이 고유의 힘을 잃고 가엾은 사냥감이 되어 가고 있을 때, 오히려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포식자로 남아 있는 가문이 셀바토르 가문이었다.
열등감에 휩싸인 사냥감들이 아무리 포식자를 헐뜯고 자신과 같은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 얇은 목을 물어뜯어 주면 다들 조용해질 테니까.
“그리고 아무리 그녀라고 할지라도 나를 쉽게 이기진 못할 거야. 차라리 지금 한번 움직여 주는 게 더 경고의 의미로 맞지.”
“으으……. 그게 사실이라 더 짜증 나.”
황제는 이젠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있었다. 마치 루엔티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조용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좋아. 그러면 귀족 재판을 열겠어. 스페라도 후작에게 반론할 준비는 되어 있나?”
“그럼.”
셀바토르 공작은 잘 정리된 서류들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여기에 오기 직전까지 마차에서 제나와 함께 확인했던 서류들이었다. 서류를 읽어 내리는 황제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거기에 쓰여 있는 대로 스페라도 후작은 후작의 차녀, 레슬리 양을 학대했네.”
공작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잔이 넓은 편이라 찻물이 조금 식었지만, 향과 맛을 즐기기엔 무리가 없었다.
“밥을 굶기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매질과 정서적 학대 역시 포함되어 있어. 그리고 스페라도 후작은 레슬리 양이 불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자마자 레슬리 양의 마차에 불을 질렀더군.”
베스라온은 말솜씨가 있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베스라온의 어설픈 설명으로도 그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산길, 미리 기름을 먹여 둔 마차와 나오지 못하게 문을 막아 버린 나무,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스페라도 가문의 하인들.
“일부러 나오지 못하게 문까지 막아 가면서 말이야.”
“……!”
놀란 듯 황제의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손안에 든 서류를 잊어버린 채 피스토레 황제는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자신의 딸이 아니던가?”
“그러게 말이야.”
제물 이야기를 쓰진 않았다. 그 일은 너무 충격적이라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 더욱 덤덤하게 느껴질지도 몰랐으니까.
거기다 한 번에 목을 물어뜯으려고 하면 사냥감은 살기 위해 더욱 거세게 반발한다. 특히, 스페라도 후작 같은 인간은 더욱 그러했고. 그런 인간의 가장 올바른 사냥법은 서서히 피를 말려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당한 증거가 없어.’
레슬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제물이 될 뻔한 장소를 다 말했다. 절벽 위에 놓인 다리, 그리고 그 가운데 놓여 있는 정자와 그 안을 가득 메우던 불꽃들.
하지만 아쉽게도 레슬리는 불길 속으로 끌려갈 때까지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고 있지 않았다.
일단은 절벽과 정자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풀어 장소를 찾고는 있지만, 쉽게 찾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1천 년간 자신들의 둘째와 셋째 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도 없었다. 신전에 보관 중인 가문의 책에는 전부 병사나 실족사 같은 죽음으로 적혀 있다고 레슬리는 덧붙였었다.
‘거기다…….’
이제 떠볼까. 셀바토르 공작은 아직도 놀라서 눈을 끔뻑거리는 피스토레 황제를 바라보았다.
유약한 남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황제라는 자리로 인해 변한 남자이기도 했다.
피스토레의 타고난 성품은 황제라기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유약한 마음의 사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처음에 피스토레는 힘겨워했다. 자리에 맞지 않은 결정을 내리다가 공작에게 멱살을 잡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츰 그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타고난 성품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처음과는 많이 변해 버렸다. 그러니까 그는 제국의 이익이 된다면 ‘제물’ 일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을 수도 있었다.
‘만일 황제가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다면 제물 이야기를 증거로 내놔도 쓸모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컸다.
레슬리 양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 어둠술사는 약 1백여 년 전에 탄생했었다. 셀바토르 공작조차 어둠술사의 이야기는 건너 듣고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확인해 봐야 했다. 자신의 오래된 친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그래,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왜 스페라도 후작이 자신의 차녀를 불로 태워 죽이려고 했는지.”
불로 태워 죽이려고 했다는 말에 황제는 징그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작게 ‘미쳤어.’라고 내뱉은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르카디우스, 자네는 짐작 가는 게 있나? 스페라도 후작이 왜 저런 일을 했는지 말이야.”
“내가 어떻게 아나!”
발작하듯 답이 돌아왔다. 황제는 미친 듯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마치 망했다는 얼굴로 좌절하는 황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런 놈인 줄 알았다면 아렌도와 약혼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 일의 증거는 있나? 그…… 끔찍한 사건 말이야.”
서류를 전부 살펴본 피스토레 황제가 그녀에게 다시 서류를 돌려주며 묻자, 셀바토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와 린체의 기사들 몇이 그걸 보았다고 했지.”
“린체의 기사단인가……. 확실히 린체의 기사단이 증언하면 다들 신뢰가 가겠지. 황실 기사단이니까. 하지만 베스라온은 안 돼. 자네 아들이라 분명 말이 나올 거야.”
“증인석에는 다른 린체의 기사들을 세울 생각이야. 그리고 루엔티도 뭔가를 알아보고 있는 모양이더군.”
흐음. 황제는 몸을 젖혀 편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학대라고 해 봤자 증거도 부족하고, 저쪽에서 훈육을 위해 그랬다고 말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그…… 마차 사건은 너무 끔찍해서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는 사람도 없을 거고.”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모든 아이는 부모 밑에 있어야 하는 법이고 부모들은 아이를 제대로 키울 의무가 있으니까. 그 의무를 이야기한다면 너도 어쩔 수가 없어.”
“그게 아이들이 학대를 당해도 괜찮다는 법은 아닐 텐데.”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그 넓은 저택 어느 곳에서도 둘째 아이가 살았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발견한 것이 서재에서 본 책 한 권, 그게 전부였다.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은 선을 넘었어. 아이를 완전히 물건 취급을 하더군.”
그래, 사람이 아니라 그저 아이의 형상을 한 물건 취급이었다. 그 말에 황제는 피곤한 눈으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후, 셀바토르 공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에 한번 손을 봐야겠군.”
“이렇게 악용할지 누가 알았겠나. 법을 만든 이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을 거네.”
“여태 모르고 있던 곰팡이가 발견된 거겠지.”
으으, 법 개정이라니. 분명 귀족들이 귀찮게 굴 텐데.
“우리도 나이를 먹었는데 좀 편하게 살면 안 될까, 셀바토르 공작?”
“한 제국의 황제가 편하게 살면 안 되지. 무덤에 가서나 편히 쉬게.”
너무해. 상처받은 듯 잠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황제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호기심이 완연한 얼굴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오늘 셀바토르 공작이 봐 왔던 황제의 모습 중 가장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셀바토르. 그 아이는 왜 양녀로 들였나? 갑자기 웬 양녀인지 나한테만 이야기해 주면 안 되는가?”
쉰의 나이를 넘은 황제답지 않게 몸까지 들썩거리는 걸 보니 꽤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자네가 양녀를 원하면 제국의 모든 여성이 달려들 텐데. 그중에 몇은 베스라온과 루엔티를 노리고 달려들겠지만.”
아비규환이겠다. 피스토레 황제는 잠시 상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쟁터보다 더 위험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셀바토르 공작저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이기 위해 사람들이 펼쳤던 첩보 작전들을 생각하면 왜 셀바토르가 손님을 받는 데 인색해졌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는데, 아예 양녀를 찾는다고 하면…….
무시무시한 광경에 황제가 인상을 찡그리는데, 셀바토르가 책상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레슬리 양은…….”
“이름이 레슬리인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 잠시 셀바토르가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레슬리 양은 말이야, 귀여워.”
“어?”
“그래, 정말 귀여워. 그리고 잘 웃고 먹는 것도 잘 먹고. 거기다 나이 대에 맞지 않게 얼마나 현명한지. 저번에 봤을 때 솔직히 놀랐다니까.”
잠시의 침묵이 자랑할 걸 정리하기 위한 최소의 시간이었는지, 셀바토르 공작은 줄줄이 자랑을 늘어 두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황제가 조금은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마음에 들었군. 네가 누군가를 이렇게 칭찬하는 걸 들은 건 사이레인 이후로 처음이야.”
“그랬나?”
“그래, 오랜만에 이런 모습을 보다니 신기하네.”
흐음. 잠시 멍해졌던 황제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셀바토르, 그 정도로 좋은 딸이면 우리 황실과 약혼은 어떤가. 황궁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레슬리 양을 올려 주지!”
“필요 없네.”
단호하게 황제의 말을 쳐 내자 황제가 아쉽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잠깐, 고민도 안 하는 거야? 황태자비 자리인데?”
그 질문에 셀바토르 공작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황제를 보며 웃어 보였다.
“나는 황녀가 있었다면 당장 베스나 엔티와 결혼시켰을 텐데.”
“결혼은 우리 애들 마음이지 네 마음이 아니지. 그러니 거절하지.”
역시 철벽과도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황제는 짐짓 상처를 입은 듯 제 가슴팍을 감싸 쥐었다.
“냉정한 셀바토르……. 황실의 약혼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쳐 내다니.”
“그래서 우리 사이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끝으로 셀바토르 공작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피스토레 황제가 놀란 듯 덩달아 자세를 바로잡고 공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벌써 가게? 오랜만에 왔는데 좀 더 머물다 가지. 내가 자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특별히 신경 써서 올리라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 서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
공작의 말에 황제는 괴롭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며 끙끙거렸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셀바토르 그녀가 있다면 공작을 핑계로 그나마 조금 쉬었을 텐데, 그게 실패했으니 다시 피스토레는 시종장과 여러 귀족에게 시달리며 가득 쌓여 있는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니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도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그럼 재판 날짜가 나오면 알려 주게, 피스토레.”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도 만만치 않았기에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바쁘게 황궁을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 후, 황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스페라도 후작가와 셀바토르 공작가로 전달되었다.
“됐다!”
스페라도 후작은 아직 황실 시종장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환호에 차 크게 소리 질렀다가 곧 그를 떠올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황제 폐하의 은혜에 더없이 감사드리네. 이걸로 난 내 딸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어.”
“부디 따님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종장은 안쓰러운 눈으로 스페라도 후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라도 후작이 자신은 딸을 잃어버렸다고 대대적으로 퍼트리는 것에 비교해 셀바토르 공작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거기다 평소 엘리를 사랑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해 어느새 스페라도 후작은 정말로 사랑하는 아픈 딸을 어이없이 빼앗긴 슬픈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지하실에 철장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하지만 속은 완연히 달랐다.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한 둘째 딸에게 단단히 벌 줄 생각이었다.
가혹한 벌을 주기 위해 그간 안 쓰던 와인 창고를 개조해 튼튼한 철장을 달아 놓았다. 거기에 힘을 억제하는 사슬을 몸에 감고, 빛도 없이 한 달 정도 내버려 둔다면, 아무리 포악한 둘째라도 고분고분히 자신의 말을 잘 따를 것이다.
후작이 옛날에 그의 동생들에게 실험했듯이 말이다. 스페라도 후작의 두 동생도 약간의 반항 끝에 아주 흡족할 정도로 자신의 말을 잘 듣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자신에게 반항한다면 불구덩이에 다시 넣어도 되겠지. 죽으면 안 되니, 그렇게 된다면 자비롭게 신관을 대동시킬 작정이었다.
‘못난 딸에게 두 번이나 기회를 주다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 아버지란 말인가!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의 넓은 마음에 감탄했고 저절로 눈가가 시큰거렸다.
“분명 그리될 걸세. 나도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
후작은 정말로 딸을 찾게 되어 기쁜 아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시종은 그의 눈물을 멋대로 오해하고 따님을 반드시 되찾으라고 한 번 더 응원을 보내 주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흘렸다.
“……귀족 재판이라니.”
데리엘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손끝을 물어뜯었다. 간신히 아물고 있던 상처가 터졌는지 하얀 장갑 끝이 붉게 물들었다.
“어쩜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에 휩쓸릴 수가 있지? 저이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여는 거야?”
스페라도 후작 부인의 라일락색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휩싸여 있었다. 귀족 재판이라니. 그 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나에겐 둘째만 낳으면 아무런 일 없이 평온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해 놓고선! 싫어, 싫어. 이런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왜 저이는 연약한 나를 신경 써 주지 않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던 스페라도 후작 부인은 갑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에 근처에 있던 모든 하녀와 하인들이 후작 부인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든 말든 아직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시종과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 나.’
까득. 엘리는 제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예쁘게 다듬어진 손톱이 깨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왜 자꾸 그 쓸모없는 것을 이리로 들여오려고 하는 거야.’
저를 위한 제물로 불길 속에 다시 던져 줄 것도 아니면서. 엘리는 초조해짐을 느꼈다. 분명 이대로 있다가는 꿈처럼 되어 버릴 것이다. 그건 분명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건 그녀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레슬리가 쓸모없는 아이로 바닥을 기는 한, 자신이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고 아렌도 황자의 약혼녀인 이상은 그 애정이 변하지 않을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엘리는 작은 폭군처럼 행동하고 모든 사치를 누리며 살았었다. 그런데 레슬리가 돌아온다면 분명 그 애정에 문제가 생기리라.
‘그렇다고 재판에서 지는 것도 안 돼.’
분명 큰 타격이 올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도 영애들이 자신을 보면서 수군거리는 걸 들을 때마다 그녀들에게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그런데 재판에서 진다니. 그러면 얼마나 신나라 할까.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달려와 잘근잘근 물어뜯겠지. 동정과 비웃음을 뒤섞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황자도 문제였다. 아렌도 황자와 약혼을 한 사이지만, 엘리는 아렌도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나 그녀나, 적당하게 이 관계를 이용할 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신을 내치지도 않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되면 아렌도 황자는 자신을 내치고 그 옆에 다른 여자를 세울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레슬리, 그년은 셀바토르가에 남게 되는 거잖아?’
르카디우스의 유일한 공녀가 되어 평탄한 삶을 살겠지? 아아. 싫어! 그 아이는 언제나 나보다 밑이어야 하는데, 그러려고 태어난 아이인데!
결국 엘리도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스페라도 후작 부인을 부축하고 가던 하녀 몇이 놀란 듯 작은 소리를 내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나보다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나보다 더 행복해질 거라면, 레슬리는 제가 태어난 이유를 다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필요 없어진 거니까.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맞잖아?
“그러니까 네가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리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