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9)

#4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럼요.”

“정말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절대 말 안 할게요.”

침대에 앉아 레슬리는 자신 옆에 있는 마델을 바라보았다. 낮에 눈사람 쿠키가 침몰된 사건으로 눈물을 흘린 게 그렇게도 부끄러웠던지 레슬리는 아까부터 마델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가라앉을지는 몰랐단 말이야.”

작게 웅얼거리며 오늘 선물 받은 토끼 인형을 꼬옥 끌어안는 레슬리의 모습에 마델도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아 위에 막 올려놨을 땐 정말 예뻐 보였는데 순식간에 가라앉은 눈사람 쿠키의 꼴은 꽤 처참했다. 그것도 한쪽 눈만 간신히 떠 있던 상태라 베스라온마저 말을 잃어버렸고, 그것에 더 충격을 받은 레슬리는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결국 마델이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하고 나서야 레슬리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자, 어서 주무세요.”

마델의 재촉에 레슬리가 침대에 누웠고, 혹시 몰라 레슬리의 이마를 한 번 더 짚어 본 후에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와 덮어 주었다.

“오늘은 잠이 안 오신다고 창문 열고 찬바람 쐬시면 안 돼요. 아프실 수도 있잖아요.”

“응, 안 그럴게…….”

눕자마자 잠이 쏟아지는지 레슬리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잘 자라는 인사를 마친 마델이 문을 나서려는데, 레슬리가 작게 그녀를 불렀다.

“마델, 오늘 고마웠어.”

졸음에 자꾸 감기려는 눈을 휜 채로 웃는 레슬리를 보며, 마델은 뭔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갔다.

마델이 나가고 나서 눈을 감고 있던 레슬리는 잠시나마 졸음을 떨쳐 보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제 발치에 검은 토끼 인형을 가져다 댔다. 정확히는 어둠에게 인형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것 봐. 너를 닮았어. 둘 다 검정이잖아. 이 리본 색은 내 눈을 닮았고.”

처음 베스라온이 인형을 사 준다고 했을 때, 레슬리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검은색 토끼 인형을 골랐다. 가장 잘나간다는 하얀색 인형도 예뻤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도와준 어둠을 닮은 이 인형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리본 색은 완벽하게 자신의 눈 색이었다.

이 힘을 얻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이미 불 속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는 그런 자신의 희생을 밟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것이고, 후작 부부 역시 새로 태어난 어둠술사로 스페라도 가문의 새로운 전성기를 누렸겠지.

‘다행이야. 살아남아서.’

레슬리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작게 웃었다. 자신이 살아남았을 뿐인데, 스페라도 후작가는 점점 쓰러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을 밀쳐 낸 작은 손들과 어둠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러니까, 나는 용서하지 않아.’

나를 살려 준 너희를 위해서. 반드시 그 끝을 너희에게 선물할게.

그 마음을 알았는지 어둠이 크게 술렁거렸다. 잠시 그런 어둠에게 자랑하듯 토끼 인형을 흔들던 레슬리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로 다시 들어갔다.

포근한 침대 그리고 처음 받은 선물들. 레슬리는 토끼 인형을 끌어안았다.

“이제 나도 행복해질 수…….”

하암. 작은 하품 소리와 함께 레슬리의 뒷말은 잠에 잠겨 버렸다.

***

몇 시간 후면 새벽이 찾아올 늦은 밤. 최근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보초를 서는 경비원 외에는 전부 단잠에 빠져 있을 야심한 시각에, 셀바토르 공작가의 주방 한편에서는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것 봐. 코코아를 다섯 스푼을 넣어야 한다니까.”

“하지만 너무 걸쭉해서…….”

“마시멜로는 큰 것 세 개와 작은 것들을 섞어 넣는 게 가장 보기도 좋고 세워 두기도 좋아.”

“쿠키를 새로 구워야겠다. 벌써 다 써 가.”

“마시는 것도 고려해야지. 너무 진하게 타면 마시멜로까지 들어가서 맛이 이상하게 변한다니까.”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대여섯은 되는 사람들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피곤한지 다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는데, 집중한 듯 눈동자만은 맑았다.

누군가가 본다면 사악한 자들이 악마를 소환하는 줄 알 정도로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정작 주방을 가득 채운 건 다디단 코코아 냄새와 갓 구운 쿠키 냄새였다.

“이 정도면 오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실험해 보자.”

언제나 단정하게 올리고 있던 호박색 곱슬머리가 캡 밑으로 흘러내린 것도 모른 채 서올리가 진지한 얼굴로 의견을 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 익숙하게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잴 준비를 마쳤다.

“자, 올린다. 68번째 실험…….”

마델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쿠키를 집어 들었다. 셀바토르 가문의 요리사인 바타가 심혈을 기울여 구워 낸 쿠키는 모자를 쓴 귀여운 눈사람이 배를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 귀여운 쿠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이번엔 성공해라. 간절한 눈길을 받으며 마델은 조심스레 갓 타 낸 코코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드디어 마시멜로가 가득 올라간 코코아 위에 쿠키가 올라갔고 재빠르게 회중시계를 들고 있던 하인이 초를 새기 시작했다.

“1, 2, 3…….”

꿀꺽. 침을 넘기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정도로 모두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표정의 눈사람아, 뜨거운 코코아를 버텨 다오!

“23…… 24.”

초가 지나면 지날수록 모두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숫자 30을 넘어서야 눈사람이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고, 배가 반쯤 가라앉았을 때 회중시계를 높게 들어 올리며 하인이 환호했다.

“35초!”

주방에 남아 있던 모두 입을 틀어막고 환호했다. 누군가를 깨우지 않기 위한 소리 없는 환호가 길게 울려 퍼지고, 다들 코코아 잔을 눈물 글썽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드디어 마의 30초를 버텼다.

“이 정도면 아가씨가 충분히 자랑하고도 남는 시간이겠지.”

요리사인 바타가 눈물을 훔치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열심히 참여한 사람이라 그런지 감명도 가장 깊은 모양이었다.

“맞아요. 거기다 맛도 좋아요.”

막 눈사람이 침몰한 코코아를 마시며 한 하인이 생글생글 웃음을 터트렸다. 힘든 실험이었다. 비싼 코코아를 몇 통이나 소비했고, 마시멜로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거기다 밤이 늦었기에, 분명 내일은 종일 부족한 잠에 시달릴 게 뻔했다.

“하지만 이걸로 아가씨가 내일 웃으시겠죠!”

마델의 환한 목소리에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괴기한 실험은 마델의 작품이었다. 아가씨가 눈물을 떨군 걸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울었다는 것만 절망했다는 것으로 살짝 바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았다.

가장 먼저 지원한 건 요리사 바타였다. 바타는 부족한 쿠키를 지원할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었고 그 뒤로는 서올리가, 그리고 레슬리의 인사를 받은 마일이라는 하인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계속해서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할 일을 빠르게 정하고 움직였다. 바타는 몇 판이나 되는 쿠키를 구워 냈고, 서올리는 정확한 계량을 도왔으며, 마일은 들어갈 마시멜로 숫자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델은 그 실험을 지휘했다.

“내일 식사는 조금 담백한 걸로 해야겠어. 후식으로 달콤한 코코아와 쿠키가 올라갈 테니까.”

너무 쿠키가 많이 함몰되어 이상하게 맛이 변해 버린 코코아를 들고 바타가 말하자, 다들 내일 레슬리가 환하게 웃을 것을 상상했는지 실패한 코코아를 들고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1년 치 당을 하룻밤 만에 다 먹은 기분이 들지만 뭐 어떤가.

‘아가씨가 웃으신다는데!’

마델은 이미 물렸지만, 버릴 수 없는 비싼 코코아를 들이켜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리고 마델과 쿠키 집회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고대하던 아침이 밝아 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말끔하게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어제 사 온 옅은 노란빛의 실내복을 입은 레슬리는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난감한 사람과 마주쳤다. 긴 붉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루엔티는 레슬리를 보자마자 자동으로 눈을 찡그렸다.

“……안녕.”

하지만 인사를 무시하진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레슬리는 안심하고 가장 높은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레슬리를 위해 만들어진 듯 딱 맞는 이 의자는 셀바토르 공작과 사이레인이 말한 그날 저녁, 공작저에 배달 온 의자였다.

‘어서 커서 나도 다른 의자를 써야지.’

의자에 앉아 굳은 다짐을 하는데, 아침 훈련 뒤 씻고 온 것인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베스라온과 사이레인이 들어왔다.

“레슬리 양!”

어제 하루 제대로 못 봤을 뿐인데 사이레인은 마치 몇 달 동안 못 본 듯 요란스럽게 굴다가 곧 베스라온에게 저지당했다. 레슬리의 맞은편에 앉은 루엔티는 사이레인의 새로운 모습에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온 사람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좋은 아침, 레슬리 양.”

작게 인사하며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피곤한 듯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나 집사님도…….’

뭔가를 공작과 작게 이야기하는 제나도 어젯밤 늦게 잤는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델 역시 오늘 아침 보니 피곤해 보였는데, 셀바토르 공작가 전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괜스레 혼자만 잘 잔 것 같아 레슬리는 포크를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베스.”

식사가 한창 진행되는데, 셀바토르 공작이 우아한 동작으로 빵에 버터를 바르며 베스라온을 불렀다.

“어머니…….”

“너는 식사가 끝나면 나를 따라오렴.”

베스라온이 항의하듯 셀바토르 공작을 불렀지만, 공작은 가볍게 무시한 채 용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둘째 아들 루엔티에게 시선을 던졌다.

“루엔티, 너는 어제 나와 이야기한 대로 레슬리 양을 데리고 가고.”

“네.”

조금은 불만스럽다는 듯 루엔티는 짧게 대답하더니 다시 말을 시킬까, 몇 점 남지 않은 양고기를 볼 가득 욱여넣기 시작했다.

“저……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레슬리가 조심스레 셀바토르 공작을 보고 묻자 버터를 바른 빵 위에 사과잼을 올리던 공작이 생긋 미소 지었다.

“오늘부터 레슬리 양은 루엔티에게서 대략적인 이론을 배울 거야.”

“이론 말인가요?”

레슬리가 작게 중얼거리며 루엔티를 바라보자, 루엔티는 획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반항이 심한 둘째 아들이 언제까지 저런 태도를 보일까, 그런 의미가 내포된 웃음이었다.

“저래 봬도 꽤 유망한 마법사라 도움이 될 거란다. 그리고 어제 맞춘 옷이 도착하는 대로 나에게선 간단하게 검을 배울 거고. 체력이 없어도 너무 없어 보여서 걱정되니까.”

거기까지 말한 셀바토르 공작은 다시 레슬리에게 눈길을 던졌다.

“체력이 어느 정도 붙은 후엔 예법과 춤, 잡다한 것들을 전부 배울 거야. 잘 따라올 수 있겠지, 레슬리 양?”

공작의 물음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공작은 작게 웃음 지었다.

“그래.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우고 익히도록 해, 레슬리 양. 그건 반드시 레슬리 양의 힘이 될 테니까.”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다.’

그 말을 레슬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가정교사들 역시 그런 비슷한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물론 전혀 다른 의미였다. 그들은 엘리를 위해서 레슬리가 모든 걸 익히길 바랐다.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의 말은 오롯이 레슬리 본인을 위한 말이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 말을 생각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를 전부 비우고 말았다.

“잘 먹었습니다.”

후하. 레슬리는 뽈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셀바토르 공작가의 아침은 다른 저택의 저녁 못지않게 많은 음식이 올라오는 데다가, 너무 맛이 좋았다. 분명 레슬리 눈에는 같은 음식인 것 같은데, 늘 새로운 맛이라 식사 시간마다 머릿속에서 불꽃이 파파팍 터지는 걸 느꼈다.

거기다 주변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은 키와 덩치에 맞는 대식가였다. 셀바토르 공작마저도 아침 식사로 연어 스테이크를 두 접시나 먹었다. 그걸 보고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후작 부인은 늘 그녀와 엘리에게 ‘식사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이라고 가르쳐 왔으니까. 여자가 많이 먹으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엘리는 그 말을 자발적으로 따랐고, 레슬리는 강제적으로 그 말을 지켜 왔었다.

곧 레슬리는 고개를 저어 어이없는 그 말을 떨쳐 버렸다. 요즈음 레슬리는 배가 불러도, 자신이 닮고 싶은 공작님을 따라 한두 점 더 오물거렸다. 그러다 보니 늘 식사 시간이 끝나고 나면 배가 너무도 빵빵해져, 숨을 흘리는 것 외엔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레슬리 양. 좀 더 먹어야 하지 않을까?”

맞은편에 앉아 벌써 스테이크를 세 접시째 비우고 있는 사이레인이 조심스럽게 묻자, 옆에 앉아 있는 베스라온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베스라온 역시 두 번째 접시를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아침인걸요.”

레슬리가 옅게 웃자 사이레인이 안쓰럽게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거친 용병들 사이에서 살아왔던 사이레인의 눈에는 레슬리는 과장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톡 하고 손대면 픽! 하고 쓰러질 듯 보였다. 사람이 저렇게 작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덩치만 큰 두 아들놈 옆과 앞에 앉아서 그런지 더욱 작아 보였다.

그런 레슬리를 사이레인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잘 못 먹었다. 레슬리는 나름 열심히 먹는다고는 먹은 것인데, 사이레인 눈에는 콩알 같은 양만 먹었을 뿐이었다. 병아리도 저보단 많이 먹지 않을까.

내심 못마땅했던 사이레인은 중앙에 있던 거대한 칠면조 고기를 덜어 레슬리 앞에 내려놓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 제 손보다 더 커 보이는 칠면조의 다리를 보고 레슬리는 연보라빛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든지 잘 먹어야 하는 법이야. 안 그러면 루엔티보다도 크기 힘들 거야.”

졸지에 비교 대상이 된, 셀바토르 가문에서는 가장 작은 루엔티가 뭐라고 반항했지만, 가뿐하게 무시한 사이레인은 어서 먹으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 고갯짓에 레슬리는 꿀꺽 침을 삼키며 자신의 앞에 놓인 칠면조 다리를 노려보았다.

‘이걸 다 먹으면 정말 키가 클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배가 너무 부른데. 이걸 다 먹으면 배가 빵! 하고 터지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슬리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머뭇거림은 잠시였다.

좋아, 결심했어. 먹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포크를 든 레슬리를 가뿐하게 식사를 끝낸 셀바토르 공작이 나지막이 불렀다.

“레슬리 양. 무리해서 먹을 필요는 없어요. 여보도 그만. 배탈이라도 난다면 레슬리 양에겐 그게 더 안 좋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적게 먹는걸. 여보도 이 정도로 적게 먹진 않았잖아?”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사이레인이 반기를 들었다. 어떻게든 더 먹여 보겠다는 의지가 눈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 말에 생긋 웃으며 셀바토르 공작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양은 아직 작지. 그러니까 위장도 작을 거 아냐?”

그러더니 공작은 사이레인, 베스라온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루엔티를 시선으로 훑었다.

“비교하면 안 되지.”

그 말에 사이레인이 셀바토르 공작의 눈을 따라 베스라온과 제 옆에 불퉁하게 앉아 있는 루엔티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칠면조 뒤에 앉아 있는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아.”

뭔가를 깨달은 듯한 작은 소리가 터지자 제나가 레슬리 앞에 있는 칠면조 다리를 치웠다. 그리고 웃으면서 코코아 한 잔과 쿠키가 올려진 접시를 레슬리 앞에 내려놓았다.

“레슬리 아가씨는 지금도 많이 드셨어요. 더 드시면 배탈 납니다. 그리고 식사 후엔 디저트를 먹어야지요.”

디저트.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는 식후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단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나서서 찾지도 않았기에 셀바토르 공작가에선 디저트가 올라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제나는 식사가 끝난 다른 사람들 앞에도 쿠키와 코코아를 내려놓았다.

“코코아?”

셀바토르 공작마저도 자신의 집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듯한 코코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딸려 나온 쿠키는 눈사람이 예쁜 모자를 쓰고 배를 타는, 셀바토르 공작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모양의 쿠키였다.

이런 쿠키와 코코아를 자신의 집에서 본 지 얼마나 되었더라. 아니, 본 적이 있었던가? 베스라온을 제외한 셀바토르 공작가의 모든 일원이 고민에 빠져 있는데 옆에서 환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얼떨떨해하는 세 사람 사이에서 레슬리는 눈을 반짝거렸고, 베스라온은 뭔가를 잊고 싶은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식사를 돕기 위해 내려와 있던 마델이 레슬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한 번 쿠키를 띄워 보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어서.”

다시 눈사람 침몰의 악몽이 떠올라 머뭇거리는 레슬리를 마델이 토닥였다. 마델의 말에 용기를 얻은 레슬리는 손을 뻗어 쿠키를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코코아 위에 올라간 눈사람은 안정감 있게 마시멜로 사이에 안착했다.

마치 새하얀 눈 위에서 배를 탄 눈사람의 모습에 레슬리는 다시 이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얼굴을 그대로 고정했다.

첫 눈사람의 안타까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쯤 녹은 얼굴에 눈만 동동 떠 있던 처참한 모습. 그러니 차라리 내가 그 끝을 지켜봐 주는 게 맞는 게 아닐까?

“후후, 자랑하셔도 괜찮아요.”

마델은 그런 레슬리가 귀여운지 웃었고, 사정을 알고 있는 제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레슬리를 응원했다.

“저, 베스라온 님.”

결국 레슬리는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작게 자신의 옆에 앉은 베스라온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거…….”

녹지 않았을까? 레슬리는 고개를 돌려 제 컵 위에 놓인 쿠키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입을 작게 벌리고 눈을 깜빡였다.

녹지 않았다! 베스라온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돌려 줬기에 처음보다는 시간이 덜 걸리긴 했다. 쿠키는 뜨거운 코코아 위에서 용케도 처음 모습 그대로 녹지 않고, 심지어 허물어지지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걸 나에게 보여 주고 싶었구나.”

베스라온이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살포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흘렸다.

“예쁘다.”

그 말을 시작으로 제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정말 예쁘네요, 레슬리 아가씨. 꼭 눈 위에서 눈사람이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이렇게 예쁘게 코코아 위에 쿠키를 띄우는 사람은 전 처음 봤어요!”

짝, 짝. 그걸 마델이 이어서 말하더니 이젠 손뼉까지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격에 겨워 저도 모르게 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식사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 사이에 몰래 껴 있던 요리사 바타가 눈물을 훔치며 따라 치자, 마치 전염되듯 식당에 있는 사람이 한둘씩 손뼉을 쳤다.

하룻밤 만에 약 20잔의 코코아를 마시고 일시적으로 미각을 잃어버린 서올리가, 단 냄새도 잘 못 맡으면서 실험에 참여했던 마일이, 일찍 자러 갔단 누군가의 뒤를 이어 뒤늦게 실험에 참여했던 이벤이…….

모두가 자신의 노고가 저렇게 귀여운 자랑이 된 것을 보고 눈물을 훔치며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순식간에 식당은 눈물겨운 박수 소리로 가득 찼고, 집사인 제나 역시 웃으며 박수를 보내자, 옆에 앉아 있던 사이레인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거기다 공작 역시 작게 웃으며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베스라온은 처음부터 그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그러자 예기치 못한 호응에 신이 난 레슬리는 뺨을 붉히더니 코코아를 높게 번쩍 들어 올렸다. 푸른색 머그 컵 위에 올라간 쿠키는 창가를 타고 들어온 햇빛을 받아 더없이 늠름하게 빛났다.

“제가 올린 거예요!”

레슬리가 당당한 목소리로 자랑하자 여기저기서 찬사가 터져 나왔다.

“예뻐요, 아가씨.”

“정말 잘 올렸어, 레슬리 양.”

“우리 아가씨는 쿠키 올리기에 천재인가 봐요!”

“그럼! 우리 레슬리 양이 어떤 사람인데.”

박수 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루엔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버렸다. 며칠 새 다들 미쳐 버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

‘부끄러워.’

레슬리는 뺨을 붉혔다. 아까 식당에서는 신나서 자랑했지만, 식당을 나와 그 열기가 한 김 식은 지금은 그 행동이 부끄러웠다. 쿠키 하나를 띄워 두고 마치 영웅처럼 행동하다니.

‘하지만 다들 박수를 보내 줘서…….’

즐거웠다. 후작가에선 자신이 숨만 쉬어도 질타를 했지만, 여기선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따듯한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래서 자꾸 코코아에 쿠키를 띄우는 것 같은 어린아이나 할 법한 행동을 하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레슬리는 생각에서 벗어나 눈을 깜빡거렸다. 테이블 위에 한눈에 보기에도 두꺼워 보이는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오늘부터 내가 너를 가르칠 거야.”

그리고 그 책을 가져온 건 루엔티였다. 아직도 레슬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퉁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루엔티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코코아 쿠키 사건 이후 레슬리는 셀바토르 공작의 말을 따라 2층 서재로 루엔티를 따라왔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 정해진 시각에 이리로 오면 돼.”

“저는 뭘 배우게 되나요?”

레슬리는 루엔티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힐끗 루엔티가 가져온 책들을 살펴보았지만, 제목이 너무 중구난방이라 어떤 걸 배울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어와 신어, 역사학에 철학, 거기다 예법서까지 섞여 있었다.

“네가 힘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전부다.”

여기가 루엔티의 본거지인 듯 서랍장 속에서 익숙하게 제 안경을 꺼낸 루엔티는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 들었어.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다지.”

아, 공작님이 말씀해 주셨구나. 레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안경 너머로 바라보던 루엔티는 뭔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 쉬더니 책 몇 권을 레슬리 앞으로 던졌다.

“어둠은 알려진 게 너무도 없지. 스페라도 후작가의 특유한 힘이었으니까. 스페라도 가문은 약 1천 년의 시간 동안 자신들의 힘을 계속 감춰 왔어.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마력과 비슷하다는 것. 그러니 제어 방식 역시 엇비슷하겠지.”

다시 책 몇 권이 레슬리 앞에 날아왔다. 오늘 이걸 다 배우는 건가?

“고어는 읽을 수 있겠지? 신어는 기본일 테고.”

루엔티는 일부러 심술궂게 말을 내뱉었다.

사실 레슬리 나이 때의 아이들은 고어를 해석할지 몰랐다. 신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서야 고어와 신어의 철자를 배우고 해석 능력을 서서히 늘려 간다. 그게 일반적이었다.

“레이안톤의 《귀족 교양론》은 필수니까 당연히 알 거고.”

레슬리는 제 앞에 놓인 녹색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금박으로 새겨진 《귀족 교양론》이란 제목만 보면 예법서 중 하나일 것 같지만, 오히려 이건 정치학 쪽 책이었다.

“철학자 아벤돈의 이론도 읽어 봤을 테고.”

다시 두꺼운 책 하나가 날아왔다. 아벤돈의 이론을 정리해 둔 이 책은 너무도 어려워 아카데미 학생들이 꺼리는 책 중 1위였었다.

“아! 대륙의 역사서도 전부 줄줄 외우고 있을 테지.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쿵! 앞에 던져진 책들과는 차원이 다른 책 한 권이 레슬리 앞에 놓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 레슬리가 손을 쫙 편 것보다도 두꺼운 책을 보며 레슬리는 라일락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잘 따라올 수 있겠지?”

루엔티는 웃음을 흘리며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준 책이 기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보여 준 것들은 아카데미 고학년도 보기 힘든 책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루엔티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함께 공작령에 다녀오고 잠시 일 때문에 며칠을 밖에서 지내는 동안 집 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절대 셀바토르 공작가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은발에 라일락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무언가가.

거기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인간이었다. 그 가문이 우리 셀바토르 공작가의 발목을 잡기 위해 한 더러운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잊었다는 듯 그 아이에게 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용인들이, 그다음엔 제나 집사가. 거기에 언제나 칼 같았던 어머니에 당당하던 아버지. 심지어는.

‘형까지 휩쓸렸어!’

루엔티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베스라온은 루엔티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는 전혀 다른 분야였지만, 루엔티는 언제나 형을 보고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루엔티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열여덟 살이 된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냉철한 성격, 준수한 외모 그리고 뛰어난 실력까지. 루엔티가 봐 왔던 형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형이 아침 식사 때 어땠는가.

‘예쁘다.’

그렇게 다정히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쿠키 올리기의 천재라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같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쿠키 올리기의 천재라니. 도대체 그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천재는 또 뭐란 말인가. 루엔티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 눈가를 꾸욱 눌렀다.

‘다들 미친 게 틀림없어.’

형은 그 분위기에 휩쓸린 거고. 그리고 그 원인은 자신의 눈앞에 앉아 책을 바라보는 저 아이가 분명했다.

어떻게 어머니와 아버지, 형과 사용인들까지 저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엔티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저.”

한참을 책을 바라보던 레슬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못 하겠다고 말하려나.’

루엔티는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어와 신어는 중급까지 해석할 수 있어요. 말씀하신 철학자 아벤돈의 이론은 너무 어려워서 중간까지밖에 못 읽었지만, 철학자 나히로키아의 이론은 전부 읽었어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륙의 역사서는 네 번째 제국의 탄생까지 외우고 있어요. 그래도! 레이안톤의 《귀족 교양론》은 전부 읽었는데…….”

부족한 건가? 레슬리는 말끝을 흐리며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 보이는 암녹색 눈동자가 동그래진 채 루엔티는 다시 굳어 있었다.

‘부족한가 봐.’

레슬리는 두 손을 꽉 쥐었다. 후작가의 가정교사들이 옳았던 걸까? 그들은 늘 레슬리에게 부족하다고 말했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레슬리 아가씨.”

찰싹! 가느다란 회초리로 레슬리의 등을 때리며 가정교사가 눈을 찡그렸다.

“아가씨의 무지는 곧 엘리 아가씨의 무지가 됩니다. 그리고 그건 스페라도 가문의 치욕이 되지요. 엘리 아가씨는 곧 아렌도 황자님과 결혼해 황실로 들어갈 텐데, 그때 아가씨가 제대로 보좌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다시 회초리가 레슬리의 등을 세차게 내리쳤지만, 신음 한 번 내지 못한 채 그저 레슬리는 몸을 웅크렸다. 앓는 소리를 내면 몇 대를 더 맞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틀리는 건 너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가씨의 무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거니까요.”

다행히도 이번엔 회초리가 날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벌이 내려왔다.

“그러니 오늘 내로 이 책을 전부 필사하며 외우십시오. 적어도 필사를 세 번 이상 마치지 않으면 식사는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가정교사는 방을 나섰고, 레슬리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물로 채우며 계속해서 책을 필사했던 기억이 있었다.

후우. 레슬리는 다시 루엔티의 안색과 그리고 그의 손을 살폈다. 버릇이었다. 뭔가가 부족하다고 한 가정교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것으로 레슬리를 꼭 한 번씩 내리쳤으니까. 그건 회초리가 되기도 했고, 책이 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두꺼운 나뭇가지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 레슬리가 있는 곳은 스페라도 저택이 아니었다. 루엔티도 자신을 때린 가정교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레슬리는 힐끔 루엔티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도 오랫동안 그런 환경에 노출된 작은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버릇을 내보였다.

“야.”

작게 들려온 목소리에 레슬리는 눈에 띄게 놀라 고개를 떨궜다.

“너, 철학자 나히로키아의 이론을 읽었다고?”

아? 그 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들자 눈을 반짝이는 루엔티가 보였다.

“네, 네…….”

“너 열두 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정말 그 책을 읽었어?”

거듭되는 물음에 레슬리는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지?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이야기해 볼 수 있어?”

“어……. 그리하여 신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었으니. 늙거나 어리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병들었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럼에 상관없이 인간은 완벽해질 가능성을 가진다.”

“인간은 완벽해질 가능성을 가진다!”

거의 동시에 루엔티는 마지막을 맞췄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정말 읽었어! 철학자 나히로키아는 다른 철학자들에 비교해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라 잘 읽지 않던데.”

그랬던가? 레슬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가정교사들도 나히로키아보다는 다른 철학자의 책을 읽으라고 던져 줬었다.

하지만 그 책들보다는 나히로키아의 책이 레슬리에겐 더 즐거웠다. 그래서 몰래 가장 밑 칸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놨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이 자신뿐이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었다.

“하지만 저는 가장 좋았어요. 특히 마력과 신력에 대한 고찰이…….”

레슬리가 나히로키아의 이론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하자 루엔티의 눈이 더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토론하듯 이야기를 나눈 후 루엔티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미소였다.

“동지를 만날 줄이야. 진짜 기쁜데?”

기분이 좋아진 듯 자신의 꽁지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루엔티는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기다 고어와 신어는 중급 능력에 역사서는 네 번째 제국까지라.”

“부족한 건 아니지요?”

살짝 물어본 레슬리의 물음에 루엔티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정말 천재라 봐도 무방하지.”

“천재요?”

“그래, 천재. 아카데미 졸업생들도 고어와 신어는 초급 수준인 경우도 많아. 필요한 책도 다 읽지 못하고 지식을 부실하게 쌓고 졸업하지. 자신들은 귀족이니까 이런 건 상관없다면서 말이야.”

아, 그래. 스페라도 후작 역시 고어와 신어를 해석할 일이 생기면 뒤로 한발 빼곤 하였다. 그리고 늘 가정교사나 그녀에게 시켰다.

“그렇구나…….”

나는 모자라지 않았구나. 부족하지 않았어. 루엔티는 그런 레슬리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덧니를 보이며 씩 웃어 보였다.

“이거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는데.”

철학자 나히로키아. 세기의 천재이자 세기의 괴짜. 철학자 중에서도 유일한 평민 출신인 이 철학자는 살아생전 괴기한 행동들과 이해하기 힘든 주장 그리고 천재인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쓴 이론서 등, 여러 이유로 아카데미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철학자 1위, 마법사들이 웃으며 피하는 철학자 1위를 늘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루엔티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

‘셀바토르, 나히로키아의 이론도 좋지만 좀 더 대중적인 아벤돈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나히로키아? 태어날 때부터 미쳐 있다는 말이 돌 정도의 인간인데 솔직히 제대로 사고할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이라도 그의 이름 앞에서 철학자라는 단어를 제외해야 한다고 봐.’

보통 루엔티가 마법사들의 저택에서 나히로키아의 말을 꺼내면 대부분의 반응은 얼떨떨해하거나 웃으며 피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서 루엔티는 늘 목말라 있었다. 자신과 나히로키아의 이론을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나타나 주길 쭉 기다려 왔다. 콘라드 하나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루엔티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고어도, 신어도 아는 아이. 고작 열두 살인 걸 생각하면 정말 천재라고 불려도 괜찮을 아이.

‘어떤 것이든 잘 따라오겠지? 일단 이론은 충분하지, 아니 완벽해. 나히로키아를 알잖아. 좋아, 그럼 먼저 힘의 제어법부터…….’

순식간에 1년 동안의 계획을 세우다가 루엔티는 뭔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에 앉아 있는 저 아이는 하얗고 몽실몽실하게 생겼지만, 스페라도 가문의 인간이었고 셀바토르 공작가의 모든 사람을 단숨에 홀린 아이였다.

루엔티는 눈을 질끈 감고 아침 식사 때의 일을 떠올렸다. 코코아에 쿠키를 띄우고 마치 나라를 구한 용사처럼 위풍당당하게 자랑하는 아이와 그런 아이에게 박수를 보내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을.

아버지는 제쳐 두자. 워낙 딸을 원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서워 보이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완전히 바뀌는 아버지 모습을 알기에 아버지는 일단 잊기로 했다.

그래,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은 홀로 남은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런 그조차 그냥 넘어가 버리면 괴물 공작가라 불리는 셀바토르 공작가의 체면이 서지 않았다.

‘나까지 넘어가면 안 돼.’

셀바토르가의 지성. 그게 자신을 부르던 말이 아니던가. 거기다 지금은 마지막 보루였다. 자신까지 넘어가면 저 아이에게 셀바토르가가 전부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루엔티는 격한 고갯짓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보통은 아벤돈의 이론으로 공부할 텐데 특이하긴 하네.”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일부러 루엔티는 관심 없는 척 말을 던졌다. 그 말에 레슬리는 볼을 붉히며 살포시 웃었다.

“그렇지만 저는 나히로키아의 이론서가 더 마음에 들었어요. 처음엔 좀 이해하기 힘들긴 했지만, 한번 이해하고 나면 다른 철학서보다 더 좋아서…….”

“그치!”

루엔티는 격하게 반응했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넘어가면 안 된다고! 그런 루엔티를 바라보던 레슬리가 슬그머니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나히로키아가 평민이라는 점 때문에 평가절하된 점도 아쉬워요. 분명 귀족이었다면 아벤돈 못지않게 중요 철학서로 뽑혔을 텐데…….”

“내 말이!”

쾅! 다시 무의식적으로 동의했다가 루엔티는 아예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가 얼얼했지만,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루엔티의 머리 위로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평소에 나히로키아에 대해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쓸쓸했는데, 루엔티 님을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그 말에 뭔가에 홀린 듯 루엔티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레슬리가 반짝반짝하며 웃고 있었다.

“저를 가르쳐 주시는 걸 포함해서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루엔티 님.”

그리고 내미는 작은 손. 루엔티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혹독하게 가르칠 거야.”

루엔티는 그 손을 잡으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긴 머리 사이로 드러난 귓가는 레슬리의 볼보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네, 잘 부탁드릴게요.”

레슬리가 다시 웃으며 인사하자 안경을 추겨 올리며 루엔티는 괜스레 헛기침을 몇 번 흘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이론은 충분한 것 같으니까. 실전해 볼까.”

실전. 그 말에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실전이라면, 어둠을 쓰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일단 어떤 힘인지는 내가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까.”

그러더니 루엔티는 몸을 숙여 테이블 밑에 미리 준비해 놓은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눈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에게 들었어. 거래를 할 때 이 공작저를 전부 어둠으로 삼켰다지.”

그랬었지. 그 덕에 셀바토르 공작님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고, 덕분에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한번 해 볼 수 있겠어? 이 방만 어둠으로 삼켜 봐.”

루엔티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서재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아침 식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커다란 창문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리도, 빛도 아무것도 없는 어둠.

루엔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오직 보이는 거라곤 자신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 방향도 분간되지 않을 정도의 어둠 속에서 소녀의 은발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후아.”

어둠이 걷히자마자 루엔티는 웃음을 띤 얼굴로 숨을 내뱉었다. 어둠에 정신이 팔려 모르고 있었는데, 저 속에서 자신은 숨을 쉬는 법도 잊어버렸던 듯했다.

“듣기는 했는데. 와…….”

이게 약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스페라도 가문이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인가.

저런 멍청이들이 자랑하는 어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어둠술사가 약 1백여 년간 나오지 않는 그 기간까지도 저 유세를 떨고 있는지 루엔티는 진심으로 갈증을 느끼던 차였다. 그리고 마주한 힘은 순식간에 그 갈증을 채웠다.

후. 다시 숨을 가다듬은 루엔티가 밝게 웃었다.

“이 정도의 힘이면 그래, 어머니가 넘어가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겠지. 대단하다.”

그러면서 베스라온이 그러던 것처럼 가볍게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 레슬리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기쁘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이렇게 크게 움직여 본 거 외에 작은 움직임은 해 본 적 있어?”

“작은 움직임이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 레슬리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차라리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르겠다.”

루엔티는 아까 올려 둔 상자 뚜껑을 열고 원형 모양의 나무 조각을 꺼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들을 한쪽으로 밀어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그 나무 조각을 하나하나 일렬로 세우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행동에 그저 가만히 앉아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내가 어둠에 무지해도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너는 더더욱 힘을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해.”

“힘을 다루는 법이요.”

“그래, 어떤 힘이든 역류 현상이 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루엔티는 일렬로 세워 둔 나뭇조각을 가리켰다.

“좋아. 일단 이것만 어둠으로 먹어 볼래?”

손가락으로 세 번째에 있는 나무 조각을 톡 하고 건드렸다. 레슬리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발치에 고여 있던 어둠이 움직였고.

“아…….”

세 번째 조각을 포함한 여섯 개의 나무 조각이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레슬리는 당황해 눈을 깜빡거렸다.

“저, 저는 세 번째만 노리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그래, 알아.”

당황해 소리치는 레슬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루엔티가 다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이 조절이 안 되는 거야. 원래 너처럼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작은 것을 공격하기 힘들어하지.”

“그런…….”

레슬리는 그 말에 고개를 떨궜다. 자신은 후작과 엘리를 공격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후작의 눈을 잠시 가리고 엘리의 손을 막았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런 걸까. 왜?

“사람은 누구나 의외의 상황에서 놀랄 만한 힘을 일으키지.”

레슬리의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루엔티가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건 어쩌다 일어난 기적일 뿐. 다시 그러면 안 돼. 그건 네 실력이 아니니까.”

마치 레슬리가 한 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레슬리는 입술을 꼬옥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시 한 번 해 볼까?”

“네!”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에 가득 찬 대답과는 다르게 레슬리는 실패했다. 아무리 집중해서 하나의 조각만을 노려도 계속해서 그 주변의 나뭇조각들이 같이 깨져 나갔다.

파직! 두 번째 시도에도 여섯 개의 나뭇조각이 전부 바스러졌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하면 할수록 뭔가가 엇나간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심장이 마구 뛰는 것과 동시에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힘을 쓰면 쓸 때마다 자꾸만 숨이 벅차올라 숨소리가 어느새 거칠어지기 시작했지만, 레슬리는 그것도 모른 채 나무토막에 집중했다.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그런 레슬리의 눈을 루엔티의 손바닥이 가렸다.

“너는 잘했어.”

그 말에 레슬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루엔티는 말을 막았다.

“봐. 처음엔 여섯 개를 전부 부서트렸지만 지금은 고작 네 개야.”

루엔티는 보라는 듯 턱짓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루엔티의 말대로 여섯 개의 나무 조각 중 두 개는 보란 듯이 꼿꼿이 서 있었다.

“네 개나 부숴 버린걸요…….”

“고작 네 개지.”

루엔티가 레슬리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검은 안경 뒤로 보이는 암녹색 눈동자는 단호하게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레슬리, 잘 들어. 이건 마법사의 저택에 들어온 1, 2년 차도 잘 못하는 거야.”

애당초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갓 저택에 들어온 마법사들에게 스승들은 차근히 마력을 모으고 움직이는 것부터 가르쳤다.

그러고 나면 작은 빛을 불러오거나 숨겨진 물건을 찾는 등, 지극히 일상적인 마법을 시작했다. 공격 마법은 그런 마법을 일정 수준까지 터득한 후 배울 수 있었다.

첫발자국은 나무토막을 밀어 쓰러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몇의 천재를 제외하고는 이 나무토막 훈련을 벗어나는 데 1년을 넘게 써야만 했다.

그렇지만 레슬리는 처음부터 숨 쉬듯 자연스럽게 어둠을 움직이고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단 하루 만에 그 수를 줄였다.

“알았지? 너는 정말 잘한 거야. 정말이야. 천재인 내가 보증해.”

루엔티는 하얀 덧니가 드러날 정도로 웃으며 레슬리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믿기진 않겠지만, 그 나름대로 있는 힘껏 레슬리를 격려하는 말과 행동이었다.

“거기다 지금 네 문제는 다른 게 아니야.”

그러면서 루엔티는 레슬리의 팔을 들어 올렸다. 연록색 드레스의 소매를 걷자 아직 앙상한 팔이 드러났다.

“체력이 문제지. 아마 좀 더 잘 먹고, 잘 자고, 그러고 나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거기까지 말한 루엔티가 다시 덧니를 보이며 웃었다.

“천재인 나만 믿으라고.”

자신만만한 말 이후로는 짧은 이론 수업이 이어졌다. 사실 말이 이론 수업이었지, 나히로키아의 철학서를 이해한 레슬리에게는 이론 수업이 필요 없다고 단언한 루엔티는 레슬리는 모르고 있던 세상의 상식과 역사서에는 쓰이지 않은 야사들을 들려주었다.

여태 소설을 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레슬리에게 그 이야기는 별세계였다. 역사서로 알고 있던 딱딱한 이야기는 루엔티가 알고 있는 야사와 섞여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오늘도 레슬리는 루엔티와 함께 이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주로 어릴 적부터 마법사의 저택 태피스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루엔티는 하녀에게 받아 온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전까지는 자신을 마법사라고 칭하면 안 돼. 아, 저택 태피스트리에 올라와 있는 이름을 지운 후에도 마찬가지야. 마법사의 저택에 머물러 있을 때만 마법사라 칭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렇구나. 그럼 루엔티 님도 아직 저택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그래. 맞아.”

루엔티는 어서 레슬리도 먹으라는 듯 레슬리의 손에 햄과 고기가 잔뜩 들은 샌드위치를 건네주었다.

“나같이 귀족은 저택 태피스트리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 다른 마법사들보다는 조금 자유롭지. 아무래도 작위도 받고 해야 하잖아? 뭐, 그렇다고 일반 마법사가 고리타분하게 저택에만 있고 그러는 건 아니야. 거기는 요람 같은 곳이니까.”

“그렇구나……. 그럼 저 하나만 더 질문해도 돼요?”

벌써 몇 번째 질문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루엔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샌드위치 한 입 먹으면.”

그 말에 부리나케 레슬리는 옆으로 치워 놨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가 목이 막혀 콜록거렸다. 너무 급하게 먹으려던 것도 있고, 한 입 문 샌드위치에는 채소가 없이 햄과 고기만 가득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내 거랑 바뀐 모양이다.”

루엔티는 접시에서 다른 샌드위치와 음료를 꺼내 레슬리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엔 채소와 고기가 적당히 들은 일반 샌드위치였다. 급하게 오렌지 주스를 들이켜더니 곧 레슬리는 새로 받은 샌드위치도 덥석 물고는 두 볼을 움직여 오물오물했다.

“후하……. 두 입 먹었어요! 이제 질문해도 되나요?”

레슬리는 다시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던지. 저기서 별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어 루엔티는 그 모습을 보면서 픽 웃었다.

“그래, 천천히 다 물어봐.”

루엔티답지 않게 제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쳐 주었다. 그런데 바로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레슬리는 아까의 기세를 잊어버리기라도 한듯 한참을 머뭇거렸다.

“황실과 셀바토르 공작가가 사이가 안 좋은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요?”

그거였나. 루엔티는 세 번째 샌드위치를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야. 유명한 이야긴데 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루엔티의 말에 레슬리는 조금은 쓰게 웃었다.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모르고 살았다. 그저 가정교사들이 하라는 대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모든 책을 달달 외우기만 했을 뿐이었다.

황실과 셀바토르 공작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테라 대공과도 거리감이 있었다. 아이테라 공작가는 황족의 피를 잇고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역사서를 읽고 귀족들의 계보를 읽어 내려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스페라도 가문의 가정교사들은 그런 물음은 하찮은 거라고 오히려 레슬리를 면박을 주었었다.

“황실은 우리가 고까운 거야. 우리 가문은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으니까.”

긴 바게트를 반으로 자르고 각종 소스를 바른 후 햄과 고기만을 잔뜩 넣은 세 번째 샌드위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겨우 그 이유예요……?”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거기다 그 대답은 역사서에서 레슬리조차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실망한 듯한 레슬리의 표정을 본 루엔티가 살짝 입술을 올려 웃었다.

“위에 있는 것들은 제 위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두드러기가 나는 법이거든. 황실은 조금이라도 우위라고 생각되는 우리 셀바토르 가문이 싫은 거야.”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네 번째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황가의 인장은 알아?”

“네, 두 개의 뱀이에요. 한 마리는 해를, 다른 한 마리는 달을 입에 물고 있어요.”

레슬리는 대부분의 가문 인장과 가주의 얼굴을 외우고 있었다. 혹여라도 엘리가 파티장에 갔을 때 그 사람이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해 망신을 당하면 안 되니까. 아주 한미한 가문은 몰랐지만, 적어도 수도와 위력이 강한 지방 귀족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루엔티는 샌드위치와 같이 들어 있던 버터 쿠키를 잘했다는 듯 입에 물려 주더니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해와 달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는.”

자연스럽게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루엔티가 가리킨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재의 천장은 화려한 명화로 꾸며져 있었는데, 한쪽엔 해가 다른 한쪽엔 달이 그려져 있었다.

“하늘을 뜻하지. 그리고 그걸 물고 있다는 뜻은 자신들이 하늘임을 뜻하는 거야.”

마지막 꼬투리만 남은 네 번째 샌드위치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루엔티는 중얼거렸다.

“자신들이 하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오만한 게 황가인데 우리 같은 가문이 거슬리다 못해 짜증 나겠지. 거기다 우리 성격도 만만치 않거든. 너도 어머니를 뵈었으니 알잖아? 어머니 같은 분이 누구에게 쉽게 고개를 숙일 분이 아니지.”

셀바토르 공작가는 르카디우스 제국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제국이 세워질 당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거기다 유일하게 힘을 잃지 않고 점점 강해지는 존재였다. 만약 셀바토르 공작가가 괴물 공작가라 불리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더라면, 황실에서는 위험한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슬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설마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일부러 괴물 공작가라고 소문을 퍼트린 건가요?”

딸꾹. 놀라다 못해 딸꾹질이 터져 버리자 레슬리는 잽싸게 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동그래진 눈은 가리지 못했다. 루엔티가 푸핫, 웃음을 터트리더니 진정하라는 듯 제 음료수를 내밀었다. 아까 레슬리의 음료는 고기만 들어 짠 샌드위치와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맞아. 10대 셀바토르 공작의 작품이야. 뭐, 우리 가문의 특유 성격과 괴력이 한몫하긴 했지. 너도 봤잖아. 다들 한 무뚝뚝한 거. 그러니 괴물이니 뭐니 불려도 상관은 없지. 되레 황실의 관심이 줄어 다들 좋아했다고 해.”

“아니에요…….”

레슬리는 음료수를 들이켜다 말고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다들 무뚝뚝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다들 너무 착하시고…… 자상하세요. 무뚝뚝하지 않아요.”

“그건 너한테만 그런 거지.”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루엔티는 제 손을 뒤로했다. 맨손으로 샌드위치를 네 개나 집어먹어서 그런지 온 손이 빵 부스러기로 엉망이 돼 있었다.

“고작 황실에서 그런 이유로 셀바토르 공작가를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레슬리는 한껏 볼을 부풀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셀바토르 공작가는 제국을 위해 분쟁 지역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많은 공을 세운 가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지. 너도 콘라드를 여기서 봤잖아? 그놈은 내 친구라고.”

“친구시군요.”

그러고 보니 베스라온 님이 말해 주셨지. 교과서적인 답과 현실은 다르다고.

“그래, 자그마치 제국이 세워진 지 1천 년이 흘렀는데 그간 모든 황족과 모든 셀바토르 공작들이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루엔티가 다섯 번째 샌드위치를 집어 들며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짙은 고동색의 나무문이 열리고 한 하녀가 서재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작은 도련님. 공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어머니가?”

샌드위치를 입에 넣기 직전에 멈춘 루엔티는 눈을 깜빡였다.

“네, 두 분 다 찾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지? 알았어. 곧 가겠다고 말씀드려 줘.”

“알겠습니다.”

하녀가 나가자 샌드위치를 도로 내려놓은 루엔티는 바닥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제 바지에 손을 툭툭 털었다.

“가자.”

“네, 루엔티 님.”

점심 식사도 샌드위치로 대신해야 할 만큼 즐거웠던 수업이 끝이 났다. 아쉬움에 몸을 일으키는데 루엔티가 빤히 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루엔티 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아, 그게…….”

루엔티는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 하는 레슬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뺨이 붉어졌고 레슬리는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너는 어차피 우리 가문에 들어올 거잖아.”

“네, 맞아요……. 그렇지만 아직 저는 셀바토르의 성도 받지 못했고…….”

“어머님이 정했으니 너는 셀바토르 성을 받아 유일한 공녀가 될 거야.”

아이테라 공작가 역시 아들 둘만 있을 뿐 딸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레슬리가 순조롭게 셀바토르의 성을 받으면 제국의 유일한 공녀가 된다.

“안 될 거야? 셀바토르의 성이 싫어?”

“아니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레슬리는 루엔티와 눈을 마주쳤다.

“될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되고 싶어요. 뒷말은 차마 말하지도 못했는데, 알아들었다는 듯 루엔티가 안경을 벗으며 웃었다.

“그래, 넌 우리 집의 막내가 되겠지. 그러니 조금 이르게 호칭을 바꿔도 되지 않을까. 루엔티 님은 좀 딱딱하잖아.”

그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늘 대답 없는 외침이었다. 간절히 불러도 아무도 그 호칭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라버니.”

두 손을 꼭 모은 레슬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루엔티 오라버니.”

“그래, 우리 귀여운 막내야.”

루엔티가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그러더니 번쩍 레슬리를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비록 베스라온이 옮겨 줄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불안정했지만, 그래도 레슬리는 배시시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막내, 그 말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마치 진짜 가족 같지 않은가. 조금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자, 어머니에게 가 보자. 왜 부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긴장한 듯 루엔티가 어머니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서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지 하녀가 뒤를 따라왔다.

“아까 콘라드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루엔티가 라일락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려서 콘라드를 이 저택에 불러올 거야. 콘라드가 성기사인 건 이미 알고 있지?”

“네, 네에.”

계단을 올라가느라 덜컹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레슬리가 대답했다.

“신력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동시에 날뛰는 것을 잠재우는 힘을 가지고 있어.”

날뛰는 것을 잠재우는 힘? 처음 듣는 소리였다. 사제님들은 주로 신력으로 사람을 치유하지 않던가?

“최근에는 쓸 일이 없어 모르는 사람도 많을 거야. 각 가문의 힘들이 약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나마 남은 우리 가문은 괴력과 마력이 가문의 특색이니 굳이 신력을 쓸 필요는 없었고.”

그렇구나.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는 가문의 특색 힘, 그게 날뛸 때 주로 신력으로 눌렀구나.

“저를 위해 부르는 거예요?”

“정답.”

루엔티는 레슬리가 정말 마음에 드는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똑똑하고 나히로키아를 아는 우리 막내.”

만약 두 손 중 한 손이라도 자유로웠으면 아까처럼 마구 헝클어트리듯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그러면 제 힘을 말해야 할 텐데…….”

“그래서 어머니께 먼저 이야길 해 보려고. 숨기는 게 좋을지, 아니면 밝히고 도움을 받는 게 좋을지.”

루엔티는 앞을 바라보며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암녹색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어둠이 날뛰지 않는다면 그게 가장 좋지만, 혹시 모를 보험은 필요하니까.”

“어둠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친한 친구가 공격당한 기분에 레슬리가 투덜거리자 루엔티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의 힘이 날뛴다면 네 몸은 단 몇 분도 버틸 수 없어. 최악을 늘 가정하고 움직여야 해.”

루엔티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서재의 문과 비슷한 황금색 문고리를 잡고 루엔티가 휴, 작게 숨을 정리했다. 이마에 작게 땀이 맺힌 게 보였다.

“일단 어머니께 가 보자고.”

***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습한 지하실에 담담한 셀바토르 공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스한 공작가의 저택과는 다르게 지하실 벽면에는 얼음꽃이 피어 있어서,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런 지하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셀바토르 공작은 한 남자 앞에서 멈춰 섰다.

의자에 묶여 있는 남자의 눈은 마치 죽은 물고기와도 같았고, 뺨은 퉁퉁 부어 있었다. 비록 이 며칠 계속되는 조사에 남자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지만, 공작이 그를 알아보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분명 동관을 담당하던 하인 중 한 명이었지.”

셀바토르 공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그녀의 뒤를 따라온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가 스페라도 후작가에 정보를 흘린 자입니다. 입막음을 당했는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도통 말을 하지 않더군요.”

“아이니다……!”

베스라온의 말에 남자는 미친 듯 고개를 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초점이 잡히지 않던 눈동자에 간절함이 깃들어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저능 그런…… 따윈…….”

이가 부러지고 입안이 부어 남자의 발음은 어눌했지만 이런 상황에 놓인 자들이 할 말이란 뻔한 것이었다.

“그대가 한 짓이 아니라고?”

셀바토르 공작의 암녹색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남자는 절망적인 눈으로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할 말이 그것뿐인가?”

“…….”

남자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셀바토르 공작은 어떻게 보일까. 상상조차 하기 싫어서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온 셀바토르가의 기사는 눈을 찡그렸다.

“진실을 말하면-”

남자를 내려다보던 셀바토르 공작이 미소를 머금었다. 어딘가 자애로워 보이는 미소였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 미소와는 정반대되는 말이었다.

“고통 없이 신의 품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마.”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눈을 한 번 크게 뜨더니 서서히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희망을 버린 눈이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입만 달싹이며 흐느낌만 내뱉더니 결국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저능…… 그져 공작가의 잡다한 일을 스페라도 후작에게…….”

스페라도 후작. 그 단어를 말하자마자 울컥 피가 남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피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차디찬 지하실의 돌바닥까지 적셨다.

“아, 아아……?”

자신의 온몸을 적신 피를 보고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느리게 눈을 껌뻑거리더니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건 남자의 유언이 되었다.

생명을 잃은 남자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남자를 묶고 있던 줄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큰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흐음.”

누가 보기에도 처참한 꼴이었으나, 공작과 베스라온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되레 베스라온은 사인을 찾아내기 위해 남자의 몸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폈다.

고통 없이 죽은 듯 남자의 얼굴은 그저 멍해 보였다. 순식간에 치사량의 피를 토하고 죽은 것이다.

셀바토르 공작은 잠시 눈을 찡그리더니 자신의 뒤에 있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가 다가와 죽은 남자의 입을 벌리자, 치아가 있어야 할 자리가 모조리 비어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입안에 있어야 할 치아는 피와 함께 지하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저주일까.”

“특정 단어를 말하면 바로 죽도록 매개체를 심어 놓은 걸지도요.”

공작과 베스라온의 덤덤한 대화를 들으며 뒤로 물러난 기사는 안타깝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게 오랫동안 보아 온 자에게 지금 그가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동정이었다.

“매개체라……. 그거 골치 아픈데.”

별것이 아니라는 말투로 공작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런 공작의 뒤에서 서 있던 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고갯짓에 따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매개체보다는 독이 아닐까요?”

“독?”

“예. 잠시만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촛불을 들고 있던 제나가 기사에게 촛불을 건네더니 죽어 버린 남자의 앞에 섰다. 집사로서 오랫동안 보아 온 사람이건만,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동정도 연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나는 그저 진지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중독이 되어 있는 상태였군요.”

옷깃을 젖히자, 옷 밑에 감춰진 피부는 한눈에 보기에도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방을 쓰던 이셀이 파론이 아프다고 말했었지. 그래서 공작저에 머무르는 의사에게 따로 언질을 주었건만, 지금 죽어 버린 이 파론이라는 남자는 의사를 찾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독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고 그런 것이 분명했다.

“제나.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지?”

“파론 아텐, 서부 출신으로 나이는 스물일곱 살. 저희 공작저에선 약 4년을 일했습니다. 가족은 없고 일 처리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허영심이 강하고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요.”

“눈치가 없다.”

“예,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을 쉽게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제나의 말에 베스라온과 셀바토르 공작의 입술이 뒤틀려 올라갔다. 누가 모자지간 아니랄까 봐. 제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생긋 웃었다.

“능력은 없지만 신분 상승을 하고 싶어 했으니 유혹에 약했을 것이고,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했으니 쉽게 선을 넘었을 겁니다. 그리고 눈치가 없으니…….”

“이미 버려진 걸 뒤늦게 깨달았군요.”

그의 말에 제나는 악의 없는 환한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와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긍정적인 성격을 추가해야겠네요.”

그런 제나와 남자를 내려다보던 공작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휴, 얼마 전 로그엔이 귀향한다고 저택을 나갔는데, 손이 점점 부족해지는군요.”

제나가 한탄하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 외에는 파론이 죽어 아쉬운 일이 없다는 말투였다.

“베스.”

“……네, 어머니.”

침묵 뒤 대답을 하는 것이 베스라온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었다. 그리고 그 반항은 당연하게도 공작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자의 뒤에 있는 사람을 알아낼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베스라온의 대답을 듣고 셀바토르 공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겨울이라 그런지 여기도 춥구나. 어서 위로 올라가자. 아, 제나.”

그녀의 부름에 제나가 생긋 웃으며 시선을 맞춰 왔다.

“엔티와 레슬리 양을 내 집무실로 오라고 일러 주렴.”

거기까지 말한 셀바토르 공작은 먼저 걸음을 옮겼고, 뒤를 이어 제나와 베스라온 역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베스라온 도련님.”

아직 촛불을 들고 있던 기사가 베스라온의 뒤에서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곧 셀바토르 공작과 똑 닮은 시선이 말하라는 듯 기사에게 닿았다.

“저 남자의 뒤에 있던 사람은 스페라도 후작이 아닙니까?”

“스페라도 후작 따위가 우리 공작저에 저런 걸 심어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분명 더 큰 게 있어.”

기사의 물음에 무뚝뚝하게 답하며 베스라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실은 이미 누구인지 공작의 눈에도, 그리고 베스라온의 눈에도 윤곽이 보이는 상태였다.

***

“부르셨어요, 어머니?”

루엔티는 지금 넓은 공작저의 집무실에 서 있었다. 레슬리와 같이 부르더니 정작 집무실에 들어온 것은 저 혼자뿐이었다. 레슬리는 잠시 다른 방에서 마델과 코코아를 마시며 차례를 기다렸다.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겁을 상실한 루엔티라도 어머니는 무서웠기에 내심 레슬리와 같이 들어오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그래, 레슬리 양은 좀 어떻지?”

시선은 서류에 고정하고 손은 계속 깃펜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며 공작이 묻자, 루엔티는 ‘으음…….’ 하며 생각을 정리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똑똑해요. 천재라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천재라 봐도 무방하다?”

그 대답에 셀바토르 공작의 암녹색 시선이 서류에서 떨어져 루엔티에게 닿았다.

“네, 저 나이에 아카데미 고학년 수준이니까요. 신어도 고어도 잘 해독하고 있어요. 신학은 부족하지만, 조금만 가르치면 금방 이해할 거예요.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천재가 맞아요.”

루엔티는 삐쭉 튀어나온 제 꽁지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론적인 것을 제외하면 아는 것이 부족하고 예의범절에 대해 이상하게 배웠더군요. 하녀나 할 법한 행동들을 몸에 익히고 있어요. 상식 역시 바닥을 치고 있고요. 어디 동굴 속에서 여태 갇혀 산 것처럼, 남들은 아는 걸 몰라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감이 부족해요.”

자신의 물음에 잘 모르는 듯 말을 흐릴 때마다 아이는 움찔거렸다. 거기다 나무 조각을 깨트리는 일에는 완벽히 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을 보였다. 그리고 좋은 대답이었는데도 힐끔힐끔 자신의 눈치를 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억압받았다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흐음.”

어머니의 암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루엔티는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정말 그 아이가 스스로 후작저를 나와 어머니께 거래를 요청한 게 맞나요?”

“그래. 믿기지 않지?”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린 셀바토르 공작이 서명을 넣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주 당돌했지.”

계절에 맞지 않은 얇은 겉옷, 추위에 덜덜 떨던 작고 마른 몸, 귀족 집안의 영애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낡은 드레스에 푸석푸석하던 머리카락. 그런 낡고 초췌한 것들 가운데에서 옅은 분홍빛과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인 라일락색 눈동자만은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너도 레슬리 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니?”

“뭐……. 조금은요.”

루엔티는 괜스레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작게 대답했다. 그런 제 둘째 아들이 귀여워 셀바토르 공작이 작게 웃음을 머금었다.

“마음에 들었겠지. 레슬리 양은 나히로키아에 대해 읽었으니까.”

“그걸 알고 계셨어요?”

아까보다 한 단계 높아진 루엔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퍽 당황한 모양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에 갔을 때,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 양이 저택 안내를 해 주었지. 거기엔 서재도 있었단다.”

‘여기는 저희 가문의 서재예요. 아버지 개인 서재는 안내해 드리기가 어렵지만, 여기는 괜찮을 거예요. 부끄럽지만 제가 책을 읽는 걸 좋아해서, 장서량은 다른 가문에 비해 많은 편이랍니다.’

엘리는 부끄럽다는 듯, 한 서재로 공작을 안내했었다. 하지만 엘리의 말과는 다르게 서재 그 어디에도 읽은 흔적 따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보여 주기 위해 만든 서재 모형 같아 보였다.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그 책 중에서 단 한 권, 손때 묻은 책 한 권을 발견했었다.

가장 밑 칸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던 책은 분명 나히로키아에 대한 책이었다. 그리고 후작가에서 그런 책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을 만한 사람은 레슬리 혼자였다. 아마 그녀가 나히로키아의 철학서를 읽은 걸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을 피해 안전하다고 생각한 서재에 꼭꼭 숨겨 둔 거겠지.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숨기듯 말이다.

“알고 계셨으면 미리 언질을 주시지……!”

“미리 언질을 주는 것보다 숨기면 더 즐거운 것들이 있지 않니.”

들려오는 대답에 루엔티는 어디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놀리고 싶어 했고, 거기에 정확하게 걸려들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루엔티는 손으로나마 엉망이 된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직접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낫겠지.”

덤덤하게 마지막 서류를 처리한 공작은 깃펜을 꽂아 두고 루엔티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둘째 아들은 얼굴이 붉게 타오른 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귀여운 모습인지.

부끄러움을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젓던 루엔티는 숨을 고르고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휴……. 일단. 예절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해요. 시녀나 할 법한 행동이 아니라 진짜 귀족 집안의 예절과 행동을 가르칠 사람으로요. 체력도 키워 놔야겠어요. 좀 더 잘 먹이고요. 팔이며 다리며 넘어지면 부러질 것같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루엔티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다가 말을 흘렸다.

“레슬리에게 콘라드를 붙여 주고 싶어요.”

“아이테라 공자?”

갑작스럽게 나온 아이테라 공자의 이름에 셀바토르 공작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루엔티는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어둠의 힘을 봤어요. 엄청난 힘이더군요. 왜 어머니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셨는지 바로 이해가 갔어요.”

거기까지 말한 그는 눈을 찡그리며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머니, 그런 힘이 폭주할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둠은 거대한 저택 하나를 삼킬 정도로 강한데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너무도 약하고 여렸다. 아이에게는 분명 어둠을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야 해요. 레슬리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 일을 시키려면 콘라드와 미리 친분을 쌓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루엔티의 말에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손가락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겠구나……. 신력은 상처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다른 힘을 진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 거기다 레슬리가 가진 힘의 크기로 봤을 때, 콘라드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어둠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울 거예요.”

마력은 안 된다. 마력은 다른 힘과 섞이는 걸 거부했다. 그래서 만일 지금 루엔티가 말한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셀바토르 공작가에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공작이나 루엔티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거기다 레슬리의 힘을 봤을 때 일반 신관이나 성기사가 폭주하는 어둠에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그 힘에 먹힐 가능성이 컸다.

레슬리의 어둠에 먹히지 않을 정도로 순도 높은 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주 접촉할 수 있는 자. 그게 바로 콘라드 아페 아이테라였다. 루엔티와 적당한 친분이 있고 공작 역시 아이테라 대공 부인과 아는 사이니 만남에 별 무리는 없었다.

셀바토르 공작은 모든 생각을 정리한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을 제외한 과목은 루엔티 네가 가르치렴. 그러는 게 너에게도 그리고 레슬리 양에게도 편하겠지.”

“네, 어머니.”

“그리고 예절을 가르칠 사람을 불러야겠구나. 그리고 간단한 검술은 내가 가르치도록 하고, 내가 바쁠 때는 하르트가 대신하도록 해야지.”

“신학은 어떻게 할까요?”

루엔티의 물음에 셀바토르 공작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신학을 아이테라 공자에게 맡기자꾸나. 사제를 신학 선생으로 부르는 일은 흔한 일이니까.”

“과연 콘라드가 한다고 할까요?”

신학 수업을 사제에게 맡기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성기사에게, 그것도 대공의 공자에게 신학 선생을 부탁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셀바토르 공작은 그런 일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올려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테라 대공가 쪽에서 거부할 이유도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반갑게 여기겠지. 지금 내가 하는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불안하긴 하지만, 어머니가 그렇다고 하니 저는 믿을게요.”

루엔티의 대답에 셀바토르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움직여 주렴. 아, 가는 길에 레슬리 양에게 들어오라고 전해 주겠니?”

“네, 어머니.”

루엔티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이 작게 열리더니 그 틈으로 레슬리가 들어왔다. 레슬리는 공작을 바라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조금은 긴장한 듯 보이는 작은 아이를 보며 공작은 웃음을 흘렸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앉으렴. 차를 마시겠니? 아니면 코코아가 좋으려나.”

공작의 권유에 따라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은 레슬리가 입을 오물거리다 작게 ‘코코아요.’ 하고 대답했다. 얼마 전의 일이 떠오른 것인지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작은 웃으며 설렁줄을 당겨 하녀에게 코코아와 진하게 탄 차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자, 그럼 레슬리 양. 이야기해 볼까?”

진하게 우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공작이 입을 뗐다. 입가에 묻은 코코아를 급히 소매로 닦아 내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라도 후작이 나에게 재판을 걸 모양이더구나.”

이어진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레슬리의 라일락색 눈동자가 당황과 죄스러운 감정으로 물들었다.

“왜, 왜 스페라도 후작이 공작님에게 재판을 건다고 하는 건가요?”

도무지 레슬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벌을 받아야 하는 쪽은 스페라도 후작인데.

레슬리의 물음에 공작은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자신의 딸을 납치, 감금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런!”

레슬리는 몸을 작게 떨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스페라도 후작가의 고유 힘인 어둠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너를 인질로 잡고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단다. 아픈 너에게 약도 주지 않고 심지어 굶기까지 하며 너를 괴롭히고 있다고, 자신은 딸을 구하기 위해서 이 공작저로 왔지만 팔이 부러지는 엄청난 중상을 입었다고 소문을 내고 있단다.”

“거짓말이에요!”

툭, 하고 레슬리의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작은 몸에 밀려든 분노가 눈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저를 죽이려고 한 사람은 스페라도 후작이고 그런 저를 보호해 준 분은 공작님이에요! 공작님은 저를 아프게 한 적이 없다고요!”

거기다 엄청난 중상이라니. 고작 팔이 부러진 걸로 중상이라 외치고 다니는 건가, 그 남자는? 자신을 창끝으로 찔러 불 속에 넣은 남자. 그러고선 나에게 뭐라고 했었지?

‘네가 그 불길 속에 한 번 들어갔다 왔다고 태도가 건방져졌구나. 다시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참이냐?’

별것 아니라는 일처럼 말하던 스페라도 후작의 목소리가 떠올라 레슬리는 까득 이를 갈았다.

‘자기 아픔만…… 크게 생각하고 있어.’

남의 아픔은 아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작은 아픔은 아주 크게 보고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니 팔이 부러진 일로 중상이니 곧 죽을 것 같으니 그런 말을 하지.

‘죽을 것 같다.’라는 말을 셀바토르 공작님께 들은 건 아니지만, 분명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공작님, 부탁이 있어요.”

“말해 보렴.”

“저를 재판장의 증인으로 데려가 주세요.”

레슬리는 푸른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제가 가서 그동안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저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전부 말하겠어요!”

그런 레슬리를 보며 셀바토르 공작은 옅게 웃었다. 아마도 손이 닿는 거리였다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지도 몰랐다.

“좋은 생각이구나. 하지만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겠지. 다들 네 말보단 스페라도 후작의 말을 믿을지도 몰라.”

아까부터 쏟아져 내리는 어이없는 말들에 레슬리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그 괴롭힘을 당한 장본인인걸요! 제가 그 장본인인데 왜 스페라도 후작의 말을 믿겠어요.”

“너를 부족한 아이로 만들고 있거든.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상상 속에서 사는 아이로. 혹여라도 네 말을 믿을까 미리 그런 소문을 퍼트려 놨더구나.”

거기까지 말한 공작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아이는 보호자의 밑에 있어야 한다. 이 법을 알고 있지?”

셀바토르 공작의 말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카디우스 제국의 모든 아이는 성년이 될 때까지 보호자의 밑에 있어야만 했다. 귀족 집안의 아이가 보호자의 밑에서 벗어날 때는 수도 외곽 정찰병들까지 움직일 정도였다.

아주 오래전, 아이가 귀했을 때 생긴 이 법은 오직 귀족 집안의 아이들에게만 적용되어 남아 있었다. 덕분에 레슬리 자신도 자신을 입양해 줄 가문을 찾아 셀바토르 공작가로 오지 않았던가.

“설사 스페라도 후작이 너를 학대했다는 걸 인정한다 해도 너는 그 법에 따라 스페라도 후작가로 가야 한단다. 명실상부하게 스페라도 후작이 네 친부모니까. 뭐, 그리고 한참 후에야 의회에서는 너를 맡아 줄 다른 보호자를 찾겠지.”

한참 후에. 이 단어가 왜 이리도 날카롭게 귀에 박히던지. 학대를 당한 아이를, 이렇게 억압받다 못해 제물이 되어 살기 위해 도망친 아이를 다시 그 끔찍한 저택으로 밀어 넣는다고?

그사이 자신이 어떤 꼴을 당할지 어떻게 알고?

스페라도 후작가에 머무르는 시간이 단 며칠이 되어도 아니, 몇 시간이라도 그동안 자신이 무사하란 법은 없었다. 이젠 자신을 구슬려 입맛대로 움직이게 하는 건 포기하고 도로 제물로 삼을지도 모르지.

자신을 집어삼키던 불길이 떠올라 레슬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저는……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스페라도 후작과 부인, 그리고 엘리가 주는 호의는 자신에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아니!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설픈 호의를 집어던지고 어떤 짓을 레슬리에게 할지 몰랐다.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 자신에게는 어둠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레슬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괜찮아.”

덜덜 떨리던 머리 위에 따스한 손이 닿았다. 그 손이 다독거리듯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옆자리로 온 셀바토르 공작은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보였다.

“나는 너에게 우리 셀바토르의 성을 주기로 약속했지. 그런 내가 스페라도 후작가에서 널 끌고 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까?”

아니요. 레슬리는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이곳에서 자랄 생각만 하면 된단다. 당분간 네가 해야 할 가장 큰 걱정은 새로 꾸며지는 네 방에 어떤 침대와 가구를 넣을지야.”

“새 방이요?”

자신은 이미 엄청나게 크고 좋은 방을 받았는데, 새 방이라니?

“사이가 아, 사이레인, 내 남편 말이다. 사이는 늘 딸을 원했거든. 그래서 딸을 낳으면 늘 저택 한 층을 통째로 딸을 위한 곳으로 꾸밀 거라고 말하고 다녔단다.”

“저택 한 층…….”

이렇게 큰 공작저의 저택 한 층을 통으로 꾸민다니. 얼마나 대단할지 감조차 오지 않아 레슬리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서 3층과 4층, 둘 중 어느 곳이 마음에 드니?”

이어지는 셀바토르 공작의 질문에 레슬리의 눈이 굴러갈 듯 동그래졌다. 자신에게 지금 이 공작저의 한 층을 주겠다는 건가?

“너, 너무 많아요!”

레슬리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쓰고 있는 방도 너무 넓어서 꿈같은데, 공작저의 한 층을 그대로 쓰면 분명 자신은 길 잃은 미아의 꼴이 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래서 일단 가볍게 네 개의 방 정도로 줄 생각이야.”

히끅. 급작스럽게 터져 나온 딸꾹질에 레슬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일단 가볍게 네 개의 방이라니. 그 말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레슬리가 귀여운지 셀바토르 공작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래, 그러니 네가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지. 방은 어디가 좋은지, 가구들은 어떤 가구가 좋은지, 내일 아침에는 코코아에 어떤 쿠키를 올릴지 그런 것들 말이다.”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라,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로 붉어졌다가 밀려드는 무력감과 공포로 창백해졌다 했던 레슬리의 얼굴이, 이번엔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다, 다음에는 그냥 마실 거예요.”

“그래? 아쉬워라.”

레슬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셀바토르 공작은 정말 아쉽다는 듯 대답했다. 이야기를 돌리고 싶은지 레슬리가 셀바토르 공작의 암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공작님. 그럼 정말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나요?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알려 주세요.”

스페라도 후작이 셀바토르 공작에게 이렇게 시비를 거는 이유에는 자신도 있었으니까. 레슬리는 제 손을 꼭 쥐고 반짝이는 눈으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거라……. 하나 있지.”

있구나! 공작의 대답에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레슬리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트라 베쉬 스페라도 후작이 왜 너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게 여태 스페라도 후작가의 둘째와 셋째들이 유달리 일찍 죽은 이유와 연관이 있는지. 네가 아는 걸 전부 말해 주렴, 레슬리 양.”

***

챙캉!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스페라도 후작가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뒤로 날카로운 비명이 한가득 쏟아졌다.

“후, 후작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 꺄악!”

애처로운 비명이 몇 차례나 쏟아지고 나서야 굳게 닫힌 서재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하녀가 도망치듯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헝클어진 머리, 붉어진 뺨, 터져서 피가 흐르는 입술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안쓰러운 얼굴. 자신의 몰골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하녀는 또 억센 손아귀가 제 머리채를 잡을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복도에 서 있는 한 천사 같은 소녀와 마주쳤다.

“엘리 아가씨!”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를 발견하자 하녀는 퉁퉁 부어 버린 입술을 움직여 안도의 미소를 그려 냈다. 살았다. 살았어. 분명 아가씨라면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다. 단 한 사람한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상냥하신 분이 아니던가?

“후작님이 저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토닥여 주시겠지. 그렇게 기대하며 하녀는 엘리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 기대는 하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비켜.”

“네……?”

차갑게 가라앉은 눈. 마치 그 쓸모없는 둘째를 보는 듯한 엘리의 눈에 하녀의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다시 엘리를 부르기도 전에 하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볼썽사납게 뒷걸음질 치며 휘청이던 하녀는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흑.”

어딘가를 세게 부딪쳤는지 하녀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지만, 엘리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제가 밀어 버린 하녀 옆을 지나쳤다.

엘리의 뒤를 따르던 전속 하녀가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지나쳤다. 그 시선에는 매달릴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동정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녀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 말없이 엘리를 뒤따랐다. 그런 시선을 보냈다는 걸 알면 엘리가 또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우는 하녀를 무시하고 들어간 서재는 더욱 난장판이었다.

책상에 놓여 있던 잉크병은 값비싼 밝은 연회색 카펫을 얼룩덜룩하게 물들여 놓고 있었고, 깨진 술병은 위험하게 흩어져 있었다. 값비싼 책들은 찢어지거나 구겨져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반쯤 미쳐 버린 스페라도 후작이었다.

“엘리.”

언제나 단정하게 넘기고 있는 밀색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푸른 눈은 이지를 잃고 광기에 물들어져 있었다. 부러진 왼팔. 저게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만든 원인 중 하나겠지.

엘리는 들킬세라 왼팔에서 시선을 거뒀다. 요즘 극도로 예민해진 아버지는 자신의 왼팔을 보기만 해도 주먹을 휘둘렀다. 분명 아까 하녀도 그런 이유로 맞았던 거겠지.

“엘리, 엘리! 오! 나의 사랑스러운 딸!”

엘리를 발견하자마자 후작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얼마나 술을 마신 것인지 후작이 움직일 때마다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린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는 후작의 손에 엘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까 봐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 내 어여쁜 딸! 그래, 내 딸. 너라면 알지. 너라면 나를 이해하겠지!”

나만큼이나 부와 명예를 중시하는 너라면.

그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 엘리를 붙잡고 있는 스페라도 후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아버지. 이해해요.”

결국 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인정을 하고 나서야 후작은 흡족하게 웃으며 손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아직도 손은 엘리의 어깨를 잡은 상태였다.

“네가 나를 도와야겠다.”

“제가 아버지를요?”

“그래, 그래! 네가 아렌도 황자님에게 가서 나를 도와 달라고 해야겠다!”

후작의 말에 엘리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그에게 고정한 채 굳어 버렸다. 지금 이 아버지가 나에게 뭐라고 한 거야?

유일한 구원 줄이던 황실과 스페라도 후작가의 약혼도 슬금슬금 나쁜 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스페라도 후작이 셀바토르 공작가에 용병과 길드원을 고용해 난리 치다 손수 팔이 꺾여 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잃었다고 다들 수군거렸다. 거기다 속 시원한 후작의 해명도 없었기에 점점 소문은 다른 귀족들의 입맛에 맞춰 변질되어 갔다.

스페라도 후작은 점점 밑으로, 셀바토르 공작은 점점 위로, 격차가 점차 더 큰 속도를 내며 벌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엘리는 사람을 피해 아랫것들이나 일어나는 시간에 드레스를 사러 번화가에 가야 했었다. 그게 얼마나 부끄럽고 치욕적이던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런 추잡한 소문들은 황실에서 가장 꺼리는 건데……!’

엘리는 이를 까득 갈았다. 안 그래도 현재 자신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약혼자인 제1황자 아렌도였다. 이미 그 소문을 들었겠지만, 더 듣지 못하게 신경 쓰며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아렌도의 말 한 마디에 약혼이 깨질 수 있었으니까.

약혼이 깨지는 일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지금 자신을 버티게 하는 건 아렌도의 약혼녀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발로 아렌도에게 가서 먼저 이 추잡스러운 소문에 대해 입을 열라고.

“미쳤…….”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으려다가 엘리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아버지의 눈을 보건대 도움을 거절했다간 레슬리가 여태 갇혀 있던 그 다락방에 제가 갇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아이의 입단속을 하기 위해 들어갔던 작은 방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고, 초라했으며 더러웠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거기다 이성을 잃은 아버지에게 맞을지도 모르지. 레슬리도 종종 회초리나 허리띠로 맞곤 하지 않았던가? 그런 엘리의 머뭇거림을 알아챘는지, 후작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엘리의 에메랄드를 닮은 눈이 고통에 찡그려졌다.

“알았어요……! 제가 아렌도 님에게 말해 볼게요.”

결국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의 고개가 움직이자 그제야 스페라도 후작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놔주었다.

그래, 이렇게 말해야 자신의 착한 딸이 아니던가. 스페라도 후작은 자신에게 반항하던 레슬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착하고 예쁜 딸, 엘리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헝클어진 밀색 머리를 손수 뒤로 넘겨 주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토닥였다.

“그래, 가문이 살아야 너도 사는 거 아니겠니. 생각해 보렴. 만약 우리 가문이 망해서 네가 더는 ‘엘리 데아른 스페라도’가 아닌 평민처럼 그냥 ‘엘리’가 된다면 누가 널 상대하겠어. 안 그러니?”

후작의 말에 엘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한창 저 작은 머릿속에서는 ‘스페라도’라는 성도, 귀족들만 쓸 수 있는 축복의 이름도 사라지고 오직 ‘엘리’라는 이름만 가진 자신이 어떻게 될지 열심히 상상하고 있겠지. 평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의 사람은 성조차 가지지 못했다. 한마디로 최악 중의 최악.

“황자는 너를 이 이상 만나 주지 않을 게 뻔하지. 아니, 되레 자신을 모욕했다며 내칠지도 몰라. 거기다 여태 너와 같이 다니던 영애들은 어떻게 너를 대할까?”

이제 엘리는 창백하게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지금 이 위치를 잃는다는 건 죽는 것보다 더 잔혹한 짓이었다. 언제나 자신은 누구보다 우위에 그리고 누구보다 빛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엘리였다. 후작이 그리고 후작 부인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그리고 그 삶과 대비되는 존재로 있었던 게 레슬리였다. 가장 빛나는 위치 그리고 가장 낮은 위치. 화려하고 부유한 삶과 죽을 듯 절망스럽고 궁핍한 삶.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와 누구에게나 미움받던 아이.

“반드시 아렌도 님이 아버지께 도움을 드리도록 말해 보겠어요.”

엘리는 덜덜 떠는 목소리로 스페라도 후작을 보면서 답했다.

“그래.”

후작은 웃으며 그제야 엘리를 서재에서 내보내 주었다. 겁에 질린 듯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나가는 제 딸의 뒷모습을 보다가 후작은 긴 소파에 몸을 뉘었다.

아까 술병을 던지다 젖었는지 종아리 부분이 축축했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학대의 증거는 재빠르게 없애고 있었다. 레슬리 그것을 저택 밖으로 내놓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후작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증거를 전부 없애고, 혹여나 말이 나온다면 아비가 딸을 가르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매를 들었다고 하면 되지.

“후후, 그래. 그래…….”

후작은 흡족하게 웃음을 흘렸다. 제1황자가 도움을 준다면 자신은 재판에서 이길 수 있겠지. 거기다 다른 집안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는 아이들이 한둘씩을 있을 터이니 다들 슬그머니 넘어가길 원할 것이다.

“이번엔 제아무리 셀바토르가라고 해도 나를 이길 수는 없어.”

재판은 이미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셀바토르 공작은 자신의 딸을 납치하고 정당하게 딸을 찾으러 간 자신의 팔을 부러트린 미친 공작으로 불릴 것이다. 괴물 공작가에 딱 맞는 결말이 아닌가?

후작은 음습하게 웃으며 소파 밑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상자에는 검고 오래돼 보이는 사슬이 들어 있었다. 그 사슬을 집어 들자 자르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사슬이 후작의 손에 따라 들어 올려졌다.

“일단 데려오기만 하면…….”

후작의 눈이 다시 광기에 번뜩였다. 스페라도 가문이 존재하는 1천 년경의 시간 동안 어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전부 가문의 뜻대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약간의 벌을 주기 위한 사슬. 레슬리가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준 수첩에는 이 사슬에 대해 적혀 있었다.

[오늘도 ……가 난리를 부렸다. 자신의 동생을 실험 삼아 불에 넣어 제힘을 키운 것에 대해 반감을 품는 듯했다. 저택이 반쯤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어, 할 수 없이 사슬을 만들었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둠을 통제할 수 있는 사슬. 이걸 몸에 감아 두면 어둠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 후…….]

그 문장을 보자마자 스페라도 후작은 미친 듯 저택의 모든 곳을 뒤져 사슬을 찾았다.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가 끼고 낡은 사슬이지만, 그때 후작의 눈에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빛나는 것이었다.

“그래, 돌아오기만 하면.”

스페라도 후작은 사슬을 손에 쥐었다. 잘그락, 사슬이 다시 작은 소리를 내었다. 제 손에서 벗어나려는 못난 딸이 돌아오기만 하면 후작은 이번에 제대로 교육을 할 생각이었다.

불을 무서워했었지.

그리고 여태 레슬리를 돌봐 온 여자에게 듣기로는, 사람과 이야기를 못 나누면 그것도 싫어한다고 했었다. 그런 그 애를 위해 아주 딱인 장소가 하나 있다.

저택 밑에 있는 오래된 와인 창고. 음습하고 빛조차 들지 않는 와인 창고는 스페라도 후작이 좋아하는 장소 중 한 곳이었다. 한 달쯤 그곳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들 고분고분해졌으니까.

이제 곧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변한 아내도, 점점 자신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첫째 딸도, 그리고 곧 제정신으로 돌아올 둘째도. 다시 행복하게 저를 보며 웃을 것이고 돌아온 어둠의 힘에 가문의 영광이 찾아올 것이다.

꼴 보기 싫었던 셀바토르 공작가의 몰락은 덤이었다. 그 모든 것을 상상하며 후작은 만족스럽게 폭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엘리의 도움도 얻었겠다, 오늘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으리라.

***

하암. 레슬리는 오늘은 늦게 눈을 떴다. 어제 하루가 유독 피곤했던 탓이었다.

어제 셀바토르 공작의 집무실로 불려간 레슬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눈물을 한 번 흘리고는 전부 이야기했다.

엘리가 어둠의 힘을 자각했고, 가문의 비법을 따라 자신은 엘리의 힘을 위한 제물이 되어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것. 그리고 그 불 속에서 자신을 밀어내던 작은 손들과 얻게 된 어둠의 힘.

“그 아이들이 저를 살리고 힘을 준 건 복수 때문일 거예요.”

레슬리는 제 손을 꽉 잡으며 말을 이었다. 손을 계속 잡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불 속에서 느꼈던 공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스페라도 후작 때문에 다시 샘솟기 시작한 분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러니까 저는 반드시…….”

씹어 삼킨 뒷말이 들리기라도 한 듯 셀바토르 공작은 팔을 뻗어 레슬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그리도 간절한 눈을 하고 있던 거였어.”

간절한 눈이라니. 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렴. 네가 원하는 바를 내가 들어줄 테니까.”

그렇게 레슬리를 위로해 주며 공작은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 아이들이 복수를 위해서 널 살린 건지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자꾸나.”

‘복수가 아니면 뭐란 말이야.’

레슬리는 다시 작게 하품하며 눈가를 비볐다. 밤새 생각해도 그 아이들이 자신을 살려 준 건 복수밖에 없었다.

불타 죽었을 아이들. 얼마나 뜨겁고 괴로웠을까. 아주 잠시 불에 닿았던 자신도 고통에 괴로워 몸부림을 쳤었다. 지금은 없어졌어도, 팔에도 끔찍한 상처가 남았었다. 그 상처 하나만 남았던 게 천운일 정도로 불 속은 무섭고 괴로웠다. 잠시 침대 끝에 앉아 발을 동동거리던 레슬리는 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셀바토르 공작님이 이번엔 잘못 아신 거야.’

그래, 종종 어른들도 실수하지 않던가? 예를 들자면 지금 세숫물을 가져오다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걸려 넘어지는 저 마델처럼…….

“마, 마델!”

레슬리가 놀라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따듯한 물이 들어 있던 세숫대야는 포물선을 그리며 레슬리의 방을 날았고, 마델은 정말 다행히도 폭신한 러그 위에 안착했다.

“아코코.”

“괜찮아, 마델?”

레슬리는 조심스레 마델 앞에 가서 손을 뻗었다.

“저는 괜찮은데…….”

레슬리의 방 안을 살펴보는 마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쏟아진 물은 레슬리의 침대 여기저기를 얼룩덜룩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날아간 세숫대야는 어디에 잘못 맞았는지 처참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아가씨.”

마델은 일어나지도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수해서 그만 아가씨를 다치게 할 뻔한 데다가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마델을 보며 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스페라도 가문의 하녀였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저 세숫대야를 일부러 던졌다 해도 믿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델이 정말로 실수로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

이번엔 내민 손이 어색하지 않게 레슬리는 마델의 손을 꼭 잡았다.

“실수였잖아. 누구나 다 실수하는걸.”

“아가씨…….”

감동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마델을 보며 레슬리는 생긋 웃었다.

그래, 다들 실수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실수를 한다.

‘그러니까 이번엔 셀바토르 공작님이 실수로 잘못 생각하신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레슬리는 제 생각을 굳힐 수 있게 도와준 마델이 일어날 수 있게 손을 잡아 주었다. 마델은 피곤하면 좀 더 주무신 뒤에 식사를 방으로 올리겠다고 했지만, 침대도 젖었고 같이 식사하는 그 시간이 즐거워 레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이미 식당 복도가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냄새를 맡은 레슬리가 빠르게 발을 움직여 식당으로 향했다. 레슬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식사를 하고 있던 네 명의 시선이 레슬리에게 닿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슬그머니 인사하자, 문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루엔티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레슬리, 오늘은 푹 잘 것 같더니. 피곤하면 가서 좀 더 자도 괜찮아.”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저런 말이었으리라.

“아니에요. 피곤하지 않아요.”

레슬리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루엔티의 옆에 자리 잡았다. 늘 앉던 베스라온의 옆자리에는 이미 사이레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스라온이 옅게 웃었고, 사이레인도 입에 가득 고기를 물고 끄덕였다.

“둘이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다.”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냐?”

레슬리가 자신보다 루엔티와 더 빠르게 친해진 게 조금은 질투가 난다는 듯, 거대한 고기를 꿀꺽 씹어 삼킨 사이레인이 작게 투덜거렸다.

“우리는 나히로키아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야길 나눴거든요.”

루엔티가 입꼬리를 올리며 일부러 레슬리의 의자를 빼 주는 등 친분을 과시해 보이자 사이레인의 눈가가 더 가늘어졌다. 루엔티는 그런 상황이 즐거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 레슬리를 바라보던 얼굴과는 전혀 딴판인,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레슬리가 식탁에 앉자 하녀 둘이 빠르게 레슬리 앞에 식사를 내려놓았다.

“마침 잘됐구나.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며 졸음에 잠긴 목소리로 셀바토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네 예절을 가르칠 가정교사와 신학을 가르칠 분을 구했단다.”

바로 어제 나온 말이건만, 제나는 즉시 레슬리를 가르칠 만한 예절 가정교사를 구했다. 셀바토르 공작이 원하는 조건 그대로.

“슈엘라 아폰 틸레이얼 양이 예절을 담당해 주시기로 했지. 그 외에도 필요한 게 있다면 가정교사를 구해 볼 생각이란다.”

셀바토르 공작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며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교사들이 들어오는구나. 이번엔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며 레슬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예쁜 노란빛의 수프를 한 입 삼켰다.

사이레인이 납득한 듯 거대한 빵 덩어리를 크게 물어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틸레이얼 자작 부인이로군. 좋은 사람이지.”

‘사이레인 님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무서운 사람은 아니겠다.’

다행이야,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서. 레슬리는 방긋 웃으며 수프를 다시 오물거렸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입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옆에 있는 루엔티나 앞에 앉은 베스라온의 앞에는 이 수프가 없는 걸 보아 아마 레슬리를 위해 바타가 특별히 만든 모양이었다.

레슬리가 흡족한 기분으로 수프를 한 번 더 크게 떠서 먹으려 하는 순간,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학은 아이테라 공자에게 부탁할 참이야.”

“쿨럭!”

버터와 딸기 잼을 올린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이어진 뒷말에, 이미 알고 있던 루엔티를 제외한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이 놀란 눈으로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레슬리는 은수저에서 수프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굳어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여 침묵을 깬 사람은 사이레인이었다.

“여보, 나는 반대야! 신학이라면 사제 중에서 여성분들을 불러 가르치면 되지. 왜 하필 아이테라 공자야!”

으직. 작은 소리를 내며 커다란 손에 쥐여 있던 포크가 우그러들었다.

“거기다 그놈은 레슬리 양도 모르잖아. 절대 안 돼!”

다급하고도 매우 급하고도 절실한 감정이 섞인 상태로 결사반대를 외치는 사이레인은 마치 레슬리와 아이테라 공자와의 결혼 이야기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뜩잖아하는 건 옆에 앉아 있는 베스라온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아버지의 말대로 다른 분을 구해 보도록 하죠. 대공의 아들에게 신학 교사를 부탁한다니, 아이테라 대공 쪽에서도 꺼림칙하다고 할 겁니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레슬리의 생각이지요.”

베스라온은 레슬리가 아이테라 공자를 꺼림칙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만났을 때, 레슬리는 고개를 돌리고 제대로 된 소개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여유 있는 손동작으로 다시 주먹만 한 빵 위에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이미 아이테라 공자와 레슬리는 서로 아는 사이지. 안 그러니, 베스?”

“……맞습니다.”

베스라온의 대답에 옆에 있던 사이레인이 끄응 하고 앓은 소리를 냈다.

“레슬리 양.”

“네, 네에.”

“베스의 이야길 들어 보니 가장 중요한 본인의 의지를 내가 잊어버렸더군. 그래, 레슬리 양은 신학 선생으로 아이테라 공자가 어떻지?”

셀바토르 공작은 이제 빵 위에 하얀 치즈를 얹고 있었다.

“저는…….”

레슬리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거북한 사람, 그게 아이테라 공자였다. 하지만 이미 루엔티한테 들은 것도 있고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어 레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괜찮아요.”

레슬리의 대답에 사이레인이 크게 눈을 떴다가 곧 입을 열었다. 다시 곰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 아니. 레슬리 양, 싫으면…… 읍!”

달콤한 딸기 잼 위에 짭조름한 치즈를 얹은 주먹만 한 빵이 사이레인의 입을 막았다. 덕분에 사이레인은 앓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빵을 우물거렸다.

“가장 중요한 본인의 의사도 됐군. 두 사람에게는 내가 따로 언질을 주지.”

“알겠습니다, 어머니.”

어쩔 수 없이 빵을 우물거리는 사이레인과 베스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자신들이 반대해도 가주의 결정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니까. 거기다 레슬리마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 마당에 더는 반대할 수가 없어, 베스라온은 눈을 찡그린 채 얌전히 식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나머지 과목은 엔티가 가르쳐 줄 거란다.”

공작은 빵 위에 두꺼운 베이컨을 올리더니 그대로 사이레인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이미 처음에 넣어 준 거대한 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루엔티 오라버니가요?”

다행이다! 레슬리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절 교사와 예기치 못한 신학 교사가 정해지는 바람에 다른 과목도 새 가정교사가 올 줄 알았다. 스페라도 가문에서 만났던 가정교사들이 올까, 아니면 그 같은 사람들이 올까 걱정했던 레슬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었다.

“장깡!”

입에 남은 빵을 꿀꺽 삼킨 사이레인이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루엔티 오라버니라니?”

“제가 오라버니라고 부르라 했어요.”

루엔티는 덧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보란 듯 레슬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곧 가족이 될 텐데, 루엔티 님은 좀 서먹해 보이잖아요. 마치 남 같고.”

나는 ‘오라버니’인데, 누구는 아직도 ‘님’ 자 붙여 불리는구나. 그런 의도에 장난기가 섞인 행동이었다.

“레슬리 양…….”

사이레인의 청녹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거칠고 커다란 두 손을 모으고 레슬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꼭 인형 가게에서 봤던 귀여운 곰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슬프게도 얼굴은 전혀 달랐지만.

사이레인이 왜 자신을 저리도 간절히 부르며 바라보는지 레슬리는 잘 알고 있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버지라니. 아직 자신은 셀바토르의 성조차 받지 못했는데, 사이레인을 아버지라 불러도 되는 걸까. 거기다……. 레슬리는 슬그머니 셀바토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사이레인 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공작님도 어머니라 불러야겠지?’

루엔티 오라버니와 베스라온 님이 공작님을 어머니라 부르듯, 자신도 그래야 할 것이다. 저렇게 엄청난 분을 어머니라 불러야 한다니! 레슬리는 머리가 핑 돌면서 호흡이 가빠 오는 걸 느꼈다. 루엔티가 나히로키아를 만나면 이런 심정이 될까?

“잠깐. 갑자기 그러면 레슬리가 부담스러워합니다, 아버지.”

레슬리의 상태를 알아차린 베스라온이 사이레인을 저지했다.

“일단 저와 루엔티를 부르게 하고 차차 익숙해지면 다들 호칭으로 부르게 하죠.”

사심이 가득 담긴 만류였다. 자세히 보니 사이레인만큼은 아니지만, 베스라온의 암녹색 눈동자도 작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대도. 너는 어차피 우리 공작가의 일원이 될 거잖아?”

아직도 주저하는 레슬리 옆에 앉은 루엔티가 씩 웃으며 레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레슬리는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베, 베스라온 오라버니…….”

뒤에는 용기가 부족해 조금 말끝이 흐려져 버렸지만, 베스라온의 암녹색 눈동자가 살짝 휘었다. 드물게도 그가 환하게 웃은 것이다.

“그래, 레슬리.”

“나, 나도 한 번만 불러 주렴, 레슬리 양.”

사이레인이 다급히 외치며 자신을 가리키자 베스라온의 대답에 용기를 얻은 레슬리가 이번엔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사이레인을 불렀다.

“아버지.”

그 단어 하나에 사이레인은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굵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레슬리 양…….”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단 한 명, 셀바토르 공작이었다.

기대에 찬 공작의 암녹색 눈동자가 라일락색 눈동자와 마주치고.

“어, 어, 어어…….”

다시 숨이 가빠진 레슬리는 식사 시간이 끝나도록 ‘어, 어…….’만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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